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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 '아는 것이 힘이다.'를 주장한 그 철학자 맞나?
아닙니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 철학자의 배다른 형인 니컬러스 베이컨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시각적 충격'은 서양 미술계에 강력한 무기죠. 피카소는 "회화는 아파트를 장식하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림은 나의 적에 대한 공격이자 방어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림이 나의 창조력을 알지 못하는 사회를 공격해서 충격을 주고, 나의 개성을 방어해 주는 성곽이 된다는 뜻이죠.
19세기말 사실주의적 구상화가 해체됩니다. 그런데 사실주의 해체는 하나의 길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전격적인 추상을 택하지 않고 구상이 추상의로 부서져 나가는 과정을 탐험하는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헌 집을 불도저로 완전히 밀어 버리고 새집을 짓는 게 아니라 헌 집을 뜯어 내면서 거친 철근과 벽면을 드러내는 건축 기법과 유사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이렇게 구상을 '뜯어내고 들이대는 '화법을 선도하고 정착시킨 화가입니다. 사실주의적인 그림속의 부드럽고 예쁜 인간 이미지를 세게 후려치는 느낌입니다. 남겨진 살점과 뼈를 재구성한 그의 그림은 마치 의학책에서 악성 종양의 끔찍하고 징그러운 모습을 볼 때와 비슷한 시각적 충격을 불러일으킵니다.
괴상망측한 느낌이 들어 순간 멈칫합니다. 눈을 가리다가도 손가락을 살짝 벌려 훔쳐보듯 보고 싶어 집니다. 두 충돌하는 감각이 한쪽이 너무 세다보니 일방적으로 기우는 느낌입니다.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가 베이컨의 작품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얘기할 정도로 베이컨은 20세기 내내 현대미술에 넓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슬픔을 마주하지요. 두들겨 맞고 모욕당하면서 일그러지고 왜곡됩니다. 고통이 각인되는 곳은 결국 육체입니다. 그래서 베이컨이 그린 뒤틀린 육체 안에는 연약한 인간의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속절없는 고통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
사람들이 베이컨 그림 앞에 서면 압도됩니다. 이유는 끔찍한 이미지가 뿜어내는 어두운 에너지 때문이지요. 하지만 단지 기괴한 이미지를 그렸기 때문에 베이컨이 위대한 화가 칭호를 얻었다고 볼 순 없습니다. 베이컨은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 "라는 말도 남겼고요. 베이컨은 살을 가지고 태아난 점에서 인간과 동물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의 또 다른 이름은 고기라고 생각한 거죠. 고기는 언제든지 정육점에 내걸린 신세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베이컨은 동물이든 인간이든 이 세상에서 육체를 지니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비참함을 견디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베이컨의 그림은 기이하게 뒤틀려있습니다. 고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인간이 산산조각나 있는 모습으로 말이죠. 그가 그려낸 불길한 이미지를 들여다보면 수위 높은 공포 영화를 보는 기분입니다.
"나도 내 작품을 다 이해하는 건 아니다."
라고 말한 베이컨은 관람객들에게 자유로운 해석을 주문합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엔 해석의 여지가 많지 않아 보입니다. 고통과 공포 이외의 감정을 느끼기 어려워서 말이죠. 거실에 걸어두고 싶지 않은 베이컨 그림은 소수 마니아들에게만 인기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는 생전에 스타 화가 대우를 받았습니다. 죽어서는 몸값이 더 치솟았고요. 오늘날 베이컨은 손가락에 꼽히는 비싼 작가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베이컨의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습작, 1969>이 1500억 원에 낙찰 됐습니다. 2012년 1350억 원에 팔렸던 뭉크의 <절규, 1893>를 제치고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깼습니다.
피카소의 영향을 받은 <Crucifixion>으로 그는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후 작품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잠시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다시 재기합니다. 베이컨의 주제는 당연히 고깃덩어리 입니다. 렘브란트의 전승을 기억한 것이죠. 베이컨은 인간과 동물의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인간의 존재감이 총알 하 나 만도 못한 살육의 시대를 경험했으니까요. 그것을 처절하게 경험한 베이컨은 인간이 정육점에 매달린 고기와 다를 바 없구나 싶었던 거죠. 베이컨은 삶을 지배하는 것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보았습니다.
독학으로 미술을 배웠습니다. 피카소가 에로스(삶의 본능)가 강한 작가라면 베이컨은 타나토스(죽음의 본능)가 강한 작가입니다. 그럼에도 베이컨은 매우 명랑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절망감을 미술사가들은 '명랑한 절망감'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베이컨 그림에 담긴 에너지는 여러 영역으로 뻗어 나갑니다. 영화계에도 베이컨처럼 악몽 같은 작품을 만들어온 감독들이 있습니다. 린치는 일찍이 베이컨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영화에 반영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습니다. 1980년작 <엘리펀트 맨>에는 희소병에 걸려 기형적인 얼굴을 가진 남자가 등장합니다. 뒤틀린 얼굴을 한 그는 베이컨의 작품에서 막 튀어나온 듯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 2010>에도 베이컨 그림이 의미심장하게 등장합니다. '분열'이라는 에너지로 가득한 이 영화는 큰 틀에서 뒤틀린 감독 역할에 충실한 작품이죠. <트레인스포팅, 1996>을 제작할 때도 베이컨 그림의 음울한 색채를 반영했다고 합니다.
베이컨이 화단에 공식적으로 진출한 작품입니다. 실제로 이전 10여 년간 작업한 작품들을 대부분 없애고 10여 점의 작품만 남겨 놓았다고 합니다. 이 작품이 화가로서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 작품은 캔버스 3개로 구성된 3부작입니다. '삼면화'는 오랫동안 그려진 종교화의 방식입니다. 베이컨은 이 삼면화를 통해 다양한 자아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알 수 없는 시공간 속에서 폭력을 당하는 일그러진 육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언뜻보면 외계인처럼 보일 만큼 끔찍한 형체들과 강렬한 오렌지색은 관람자를 한눈에 사로잡고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시체에서 그 영감을 얻었습니다. 수천만 명의 죽음, 핵폭탄 투하, 홀로코스트 등으로 세계가 뿌리째 흔들리는 시대에서 살았습니다. 이때부터 베이컨은 공포와 비명, 분노, 타락 등의 악몽 같은 이미지들을 강렬하고 그로테스크(grotesque)하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세 개의 화폭에 담아낸 슬픔, 공포, 분노의 감정 표현들은 인간이 지닌 가장 본능적인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을 그림으로써 미술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습니다. 그는 아주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스스로 공부하며 영역을 넓혔습니다. 위 작품은 종교화의 형식을 따왔을 뿐 아니라 여러 요소를 모티프로 하여 이목을 주목시킵니다. 또 의학 서적을 읽으며 기괴한 이미지의 확장과 섬세함에 집중하기도 했습니다.
위 그림에서 화가 러스킨 스피어(Ruskin Spear, 1911-1990)는 그림자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히치콕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혼미한 기운을 덧씌워 놓았습니다. 악명 높은 화가 베이컨은 75세의 나이에 스피어를 위해 무려 25점 이상의 초상화 포즈를 취해주었다고 합니다. 베이컨을 그린 다른 화가들과 달리 스피어는 베이컨 특유의 양식을 고스란히 본뜨거나, 화가로서 자신의 장기를 내비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빨간색 배경을 배치함으로써, 광적이고 흠결 많은 생으로 유명한 화가의 명성을 농담조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빨간색 배경에는 폭력에 대한 암시 역시 담겨 있고요. 스피어가 베이컨을 허름한 카디건 차림의 인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색채 선택과 물감 사용은 이 그림을 비밀스럽고도 인상적인 초상화로 만들고 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육군성에서 일하던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 이사를 자주 다녀야 했습니다. 천식을 앓아 건강하지 못했다고요.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까지 겹쳐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16세 때 아버지에게 동성애적 성향을 들켜 집에서 쫓겨난 후 런던에서 올라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그를 삼촌이 살고 있는 베를린으로 보냈으나 그곳에서도 방탕한 생활을 하다 파리로 떠나게 됩니다. 그는 작품만큼이나 강렬한 삶을 산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화가로서의 엄청난 성공과 함께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 알코올 중독과 약물 남용 등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20살. 런던으로 돌아와 가구 제작을 하면서 회화 기법을 배우고, 틈틈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잦은 기침과 천식 때문에 혼자 그림을 그리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열심히 초현실주의자 그림이나 피카소를 흉내 내어 그렸습니다. 습작기 10년 동안 대부분 그림들은 버리거나 사라졌고 겨우 10작품 남아있습니다.
에드바르 뭉크<절규>작품 속 인물은 입을 벌린 채 고함을 지르고 있습니다. 베이컨이 표현하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인간의 모습 또한 다른지 않았나 봅니다. 베이컨 작품 속 인간의 부정적인 내면 심리 표현에 영향을 미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ZmRJxTrmh4
베이컨은 런던에 정착합니다. 이 시기에 베이컨에게 큰 영향을 끼친 두 개의 콘텐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뭉크의 '절규'였고 또 하나는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 1925>이었습니다. 베이컨은 뭉크 그림에 절절히 배어 있는 고통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가 <전함 포템킨>에서 본 것도 결국 고통이었고요. 이 작품엔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면으로 추앙받는 신이 있습니다. '오데사 계단 신'으로 불리는 장면인데, 영화 몽타주 기법 교과서로 평가받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계단에서 학살당하는 가운데 아기를 태운 유모차가 위태롭게 계단 위를 데구루루 굴러가는 장면입니다. 이 신에서 총에 맞은 여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컷이 등장합니다. 베이컨은 입을 벌린 채 고통스러워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정육점에 들어가서 고깃덩어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살피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다른 생명을 잡아먹고 사는 삶에 깃든
모든 공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 공포의 미학을 거론하다.
검은색 정장차림으로 남성의 얼굴은 검정 우산에 가리워져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붉은 색감의 배경은 마치 정육점 같아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이 그림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그려진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이 지닌 잔인한 내면의 심리를 베이컨은 직접적으로 끄집어냅니다.
베이컨의 도살장에 대한 관심은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었습니다. 미술사학자 '던 에이도스'에 따르면 베이컨은 '조르쥬 바타이 으'가 발간한 예술 비평 잡지 '다큐멘트(Documents)'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여기엔 파리 근교의 도살장 사진들이 여러 점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미술사학자 '던 에이도스'는 베이컨이 자신의 친구이자 '바타이 으'의 동료로서 도큐망 발간에 참여한 바 있는 '미셸 레리스로'부터 잡지 '다큐멘트'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접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베이컨의 작업실에서 발견된 자료들 중에는 잡지 '다큐멘트'를 비롯하여 다른 잡지 등에서 오려낸 도살장 사진들 뿐만 아니라 '렘부란트(Rembrandt Harmensz 1606-1669)'와 러시아계 프랑스 화가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의 화집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손때 묻은 화집의 상태로 보나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베이컨의 언급들로 미루어 볼 때 베이컨이 두 거장의 회화를 참조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베이컨의 회화에 나타나는 이중적 성향은 기존의 재현적이고 상투적인 이미지를 과감히 벗어납니다. 베이컨이 만들어 낸 새로운 이미지는 전통의 부정을 통해 창조됩니다.
베이컨의 그림은 강열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그의 그림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으니까요. 그림에서 움직임을 제안할 뿐만 아니라 그림과 사진을 보다 일관성 있는 조합으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갑니다. 베이컨의 성공은 그의 두드러진 조형적 접근에 달려있습니다. 그림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아주 전통적인 것이었습니다. 옛 거장들은 그에게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줍니다. 특히 베이컨이 자신의 유명한 시리즈인 "소리치는 교황들"의 기초로 사용했던 디에고 벨라즈케즈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림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때, 베이컨은 자신이 그린 그림이 "국립 갤러리나 혹은 쓰레기통 둘 중 한 곳에는 들어갈 만하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우상파괴자로 벨라스케스의 교황 그림을 수도 없이 재해석하고 해체시킵니다.
내 그림들은 인간 본성이 그림을 통해 관통되듯,
인간의 현존과 지나간 사건들에 대한 기억의 흔적을 남기듯,
달팽이 한 마리가 점액을 남기며 지나가는 듯 보였으면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
벨라스케스의 원본 그림과 비교해 보면 베이컨의 그림은 확실히 기괴함이 느껴집니다. 위엄있고 권위 있어야 할 교황님의 초상이 고함 소리 쩌렁쩌렁 울리며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해 내니 말입니다. 1946년부터 베이컨은 두상 연작을 제작합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두상 IV'는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에서 소재를 얻은 그림입니다. 후일 유럽인을 충격에 빠뜨려 명성을 드높일 '밸라 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노 10세의 초상화 연구'의 서두가 되는 그림이고요.
그 형상은 마치 폭력이 가해진 신체처럼 찢기고 일그러져 있습니다. 만져질 듯 이 생생한 살의 느낌과 선명한 색채는 관객들의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눈길을 사로 잡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왜곡된 형상이 대상과 기묘한 닮음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통적인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재현과는 거리가 먼 닮음이지요. 베이컨의 이러한 회화적 특징은 한때 그를 전통적인 구상 회화의 명맥을 잇는 화가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또는 실존주의 맥락에서 2차 대전 후의 시대적인 아픔과 존재의 고뇌를 드러낸 화가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베이컨은 이와 같은 분석들을 모두 거부합니다. 어떤 범주에도 속하기를 꺼려하고요. 이러한 이유로 베이컨에 대한 미술사적인 연구는 주로 전기적인 관점에서 또는 베이컨 본인과의 대담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베이컨은 살아 있는 모델과 일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절친의 초상을 그릴 때마저 사진을 보면서 그렸습니다. 또한 새로운 작업에 들어갈 때면 먼저 책이나 잡지에서 사진을 찾아보고는 했습니다. 베이컨의 가장 유명한 연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교황 초상화 연작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스페인 바로크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1650년작 <이노센트 10세 교황 초상화>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실제 작품이 아니라 예술 서적에 나온 인쇄본을 참조로 한 것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좋아한 화가 렘브란트, 피카소, 고흐, 벨라스케스, 푸생 그의 그림에 이 다섯 화가의 그림을 밑그림 한 작품이 많습니다. 베이컨이 초기에 좋아했던 작가 중 고흐와 푸생의 작품입니다. 베이컨은 실제로 침대 곁에 항상 반 고흐 관련 책을 몇 권 두고 자고는 했답니다. 그는 고흐를 '영웅'이라고 일컫고 '사물의 현실에 대한 엄청난 통찰력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높게 평가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또한 영감을 준 화가는 바로 16세기 프랑스 미술을 처음으로 세계화시킨 '니콜라스 푸생'(1594-1665)입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1628)
베이컨의 미술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동성애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자기 애인과의 성교를 그린 <Two Figures,1953>은 당시 유럽에서 매우 충격적인 그림이었습니다. 베이컨의 친구였던 화가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Freud)가 이 그림을 사서 오래 소장하였지만 베이컨이 살아 있을 때는 공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 남자의 얼굴은 뭉그려져 있습니다. 시체같이 창백한 몸뚱이는 두들겨 맞은 멍이 묻어있는 듯 붓칠이 되어있고요. 둘의 성교는 마치 서로 죽일 듯이 몸싸움을 하고 용트림을 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동물적 야만성과 인간의 성적 욕구가 엉키면서 인체 묘사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섹스를 하며 느낀 몸의 감각을 동작과 표정을 통해 직접 드러내 더 충격적이고요. 베이컨은 이 성행위를 그것도 동성애를 누구나 볼 수 있게 무대에 올려놓았습니다. 교접하는 순간 쾌락과 고통을 오가는 불분명하고 유동적인 감각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서양 미술계에서는 '본능적(visceral)' 탐험이라며 칭찬을 했다고 하네요. 은밀해야 할 사적인 영역을 그림이라는 도구를 통해 드러내는 것 또한 큰 용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크 나이트 ,2008> 팀 버튼 감독 <배트맨 1989> 미술관에 쳐들어가서 드가, 렘브란트, 르누아르 그림을 훼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다 조커는 한 그림 앞에 멈춰서 부하들에게 말합니다.
"이건 마음에 들어. 내버려 둬."
핏물 가득한 고깃덩이 사이에 한 남자가 고통스럽게 앉아 있는 그림입니다. 조커가 살려준 그림은 프린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고기와 남자 형상 , 1954>입니다.
막살았던 남자 베이컨은 1940년대 이후 수십 년간 그림에만 몰두합니다. 1960년대에 거장으로 대우받지요. 1971년 파리에서 대규모 회고전도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회고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하지만 베이컨의 삶만큼은 10대 때 집에서 쫓겨난 직후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병적으로 육체적 관계에 집착했습니다. 명성에 비해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었고요. 돈이 생길 때마다 술과 도박으로 탕진했기 때문이죠. 스튜디오는 푸줏간을 방불케 할 만큼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영국 왕가에서 주는 훈장도 모두 거절할 정도로 반골 기질도 강했습니다. 스타 화가가 된 이후에도 뒷골목을 드나들며 알코올 중독자, 도박꾼, 부랑자들과 어울렸습니다. 빛보다는 어둠에 속한 삶을 유지했고, 그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이컨이 1959년에 그린 '머리 초상'도 렘브란트 노년의 자화상에서 영향받은 작품입니다. 꿈틀거리듯 유동적인 물감 터치와 과감하게 쓸고 문지른 흔적은 화면 중심부에 자리 잡은 검고 깊은 눈에 시선이 고정됩니다. 마치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입니다. 재현 회화에 존재하지 않는 직접적이고 신체적인 감각을 일깨우면서 말이죠. 흰 물감 덩어리와 휩쓸린 이목구비에서도 느껴집니다. 이와 같은 비재현적인 선과 색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프랑스의 철학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시뮬라크르 개념의 잠재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말하듯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이지 않으면서도 실재적이고, 추상적이지 않으면서도 관념적인 것이다. 이는 베이컨 회화에서 우연의 흔적들이 지닌 사실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질 루이 르네 들뢰즈(Gilles Louis Rene Deleuze 1925.1.18-1995. 11. 4):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이다. 철학, 문학, 영화, 예술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저작들을 썼다.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 와 정신분열증(1972)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2>(1980)
이건희 컬렉션 중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방안에 있는 인물>(1962)입니다. 창문도 없고 문도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답답하고 불안합니다.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베이컨 본인의 경험까지 더해져 있는 작품입니다. 그는 주로 나체의 남성을 자주 그렸습니다. 이를 통해 현대인의 각박한 삶을 표현하려 했지요.
베이컨은 세계의 화면을 연결해 그리는 삼면화(Trypeic )를 즐겨 그렸습니다. <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1963>의 중앙에는 침대 위에 누드가 보입니다. 그 누두는 얼굴이 짓이겨져 있고 신체 부분들이 잘려 있습니다. 흉측하게 파괴되어 있고 피가 주변에 튀어 있고요. 이렇게 파괴된 인체는 동물의 시체와 별다름이 없어 보입니다. 오른쪽 십자가형의 골조에는 마치 도살장에 매달린 동물의 사체처럼 껍질 벗겨진 인간의 시체가 매달려 있습니다. 왼쪽 화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남자가 어둡고 불쾌한 실루엣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평론가들은 "우리는 잠재적 사체다.(We are potential carcass)"라고 한 베이컨의 말을 인용하며,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을 빗대어 인간의 운명적 죽음을 표현했다고 평합니다.
베이컨은 인터뷰(interviews with Francis Bacon/데이비드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회화가 지닌 이중성에 대해 공공연히 언급함으로써 이들 평가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최근까지 미술사와 비평적 연구들에서 이와 같은 베이컨 회화의 이중적 특성에 관해 기존의 지적 이상의 발전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베이컨이 수많은 전통 화가들의 작품과 사진 일러스트 등의 이미지를 참조하여 작업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나마 그가 참조한 이미지는 베이컨만의 방식을 통해 변형되고 재창조되어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참조에서 더 나아가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베이컨은 기존의 이미지를 변형시키기 위해 그 이미지들 위에 즉각적인 붓 터치와 물감 표현, 비구상적인 표시들로 구상성을 지워나갔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베이컨의 작품에서 이미지의 구상성과 추상성이 혼재하는 양상을 가져옵니다. 이처럼 서로 대립하는 듯이 보이는 요소가 공존하는 형식적인 특징은 내적인 면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이를테면 그의 초기 회화를 대표하는 십자가 책형 이미지는 죽음과 함께 삶의 느낌을 동시에 전해줍니다. 베이컨 자신의 사도마조히즘(SM)적인 성경험을 묘사한 이미지에서는 고통과 쾌락의 감각을 함께 드러내고요.
인체의 이미지를 '뜯어내어' 재구성하는 베이컨의 화법은 얼굴을 그릴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베이컨의 연인이었던 조지 다이어의 초상화는 이목구비에 산 (acid)을 부어 반쯤 뭉그러뜨린 후 붓으로 얼굴을 재구성한 느낌을 줍니다. 멍들고 긁힌 피부의 생채기를 솔질로 표현한 듯하고요. 얼굴 곳곳에 핏자국 같은 빨강이 퍼져 있고, 입술 바로 위가 찢어져 꿰맨 자국이 보입니다. 베이컨과 다이어와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애증과 갈등, 폭력으로 얼룩졌지요. 베이컨은 연인과 벌어진 잔혹한 '상처'들을 캔버스에 그려냈습니다.
베이컨의 연인 중 널리 알려진 인물은 조지 다이어입니다. 둘은 1960년대 중반에 만났습니다. 60년대 영국에서도 동성애가 불법이던 시절이었지요. 조지 다이어는 베이컨 집에 든 좀도둑이었습니다. 둘은 어쩌다 보니 연인 관계로 발전했죠. 베이컨은 조지 다이어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조지 다이어는 베이컨 못지않게 자기 파괴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베이컨이 다른 남자에게 한눈을 팔면 서슴없이 자해하며 관심을 받으려 했습니다. 결국 사건이 터졌습니다. 베이컨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던 조지 다이어는 우울증, 강박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1971년 자살합니다. 파리에서 베이컨 회고전이 열리기 직전이었지요.
갑작스러운 연인의 죽음에 베이컨은 충격을 받습니다. 조지 다이어가 죽고 나서도 그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 드리운 작품을 연달아 그렸습니다. 이때부터 베이컨은 인물화에 집중했습니다. 배경조차 그리지 않았고요. 오직 고통과 불안에 떠는 인간 자체에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훗날 새로운 연인을 만나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지요. 베이컨 그림은 뒤로 갈수록 따뜻하고 밝은 색채를 얻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뒤틀린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습니다.
베이컨의 초상화입니다. 일반적인 초상화와 많이 다릅니다. 일그러지고 뒤틀려있어 원래 누구의 얼굴을 그린 것인지 짐작하기 힘듭니다. 흡사 피카소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릅니다. 정지 상태와 운동 상태가 뒤섞인듯하고 대상을 왜곡시키며 순간을 포착한 듯 보이는 이런 화법은 베이컨 그림의 특징입니다. 베이컨은 초상화를 그리며 얼굴을 '해체'시킵니다. 항상 자신의 그림에서 '형상을 해체'시킵니다. 베이컨은 "새로운 감각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자화상의 경우 그 밑바탕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찌그러진 모습으로 형상화했다고 설명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과 동시대 작가인 루시안 프로이트(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는 몸을 그리는 화가인데 서로 절친이었습니다. 베이컨이 그린 프로이트 모습입니다. <루시안 프로이트 습작 3부작>은 20세기 거장이 화가이자 모델로서 서로의 대화를 상징하는 서사시적 걸작입니다.
프란시스 베이컨과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인 루시안 프로이드는 친구이자 라이벌이었습니다. 노란색을 배경으로 한 습작은 베이컨의 노련한 붓질로 의자에 않은 프로이드의 모습을 역동적인 앵글로 포착했습니다. 프로이드의 발, 무릎과 손의 움직임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한 느낌을 줍니다. 무엇보다 이전 그림에 비해 덜 기괴하고 안정된 분위기가 편안한 마음으로 보게 됩니다.
이 습작 세 점은 1970년 이탈리아 토리노의 갤러리에서 처음 전시된 후 15년간 흩어져 있었습니다. 오른쪽 그림을 소장한 로마의 콜렉터가 3부작을 모두 구입하기 위해 20여 년을 소요했습니다. 그는 1980년대 초 파리의 딜러로부터 중간 그림을 구입한 후 80년대 말 일본의 콜렉터로부터 오른쪽 그림을 사서 3부작을 소장하게 됐습니다. 2013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한화로 약 1800억 원에 낙찰됩니다.
철학자 들뢰즈는 베이컨을 최고의 작가로 칭송했습니다. 1960년대 전성기 색채와 구도 등 모든 면에서 베이컨 특유의 신경계에 직접 호소하는 작가 (들뢰즈)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더 유명해졌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vJ_-kvzo6I
그는 자신의 화가로서의 삶의 시작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 흥미로운 주제를 찾기 위함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평범치 않게 다가옴으로써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것이 주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독특한 표현 방법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표현 방법은 데포르메 (데포르마시용)을 이용하여 왜곡, 변형하고 그로테스크함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방식이 무엇보다 베이컨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베이컨이 탐지한 힘>
1. 격리의 힘: 아플라 속에 들어 있으며 윤곽 주위에서 둥글게 감싸질 때, 그리고 아플라를 형상 주위에 감돌게 할 때 보인다.
2. 변형의 힘: 형상의 신체와 머리에 침범하여 머리가 얼굴을 뒤흔들거나 신체가 그 유기적 조직을 뒤흔들 때마다 드러난다.
3. 흩뜨리는 힘: 상이 지워져 아프라에 합쳐질 때 나타나다.
4. 놀랄 만한 에너지로 두 신체를 결합한다.
5. 결합과 분리의 힘 (영원한 시간의 힘): 삼면화에서 나옴, 순수한 빛에 의하여 나타난다.
<삼면화에 존재할 세 개의 리듬>
1. 적극적 리듬: 증가적인 변화와 팽창
2. 수동적 리듬: 감소적 변화나 제거
3. 증인적 리듬: 그림에 참여 (삼면화의 판들은 관찰자들 이거나 기도하는 자들 혹은 후견인을 내포한다. 삼면화를 움직임과 등가물로 만들고 음악의 한 부분으로 만든다. 삼면화란 기본 3박자의 분배가 될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들뢰즈가 말하는 '기관 없는 신체(뭉개버린 신체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조차 나뉘지 않은 감각 덩어리)를 그린 화가인지 모릅니다. 베이컨은 육체를 그릴 때 머리로 그리지 않고 바로 촉각으로 그립니다. (우리의 두뇌를 통과하지 않고 바로 신경을 건드린다. )그래서 푸줏간 고깃덩어리로 보이는 거죠. 우리의 본능적인 감각을 건드리면서 말입니다.
1976년 제작된 <트립틱 Triptych>은 3개의 대형 패널 그림 (각각 패널 78*58인치, 198*147.5)으로 색채가 짙고 추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베이컨은 왼쪽 패널에서 시작해서 이어나가면서 일하는, 늘 하던 기술을 사용합니다. 이 작품은 그리스의 고전적인 우상화와 신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몇 가지 해석이 주장하는 것처럼 프로베테우스를 언급하고 있고요. 이 작품은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2008년 소더비 뉴욕에서 8천6백2십8만 천 달러 ($86,281,000)에 사들였습니다.
1984년 그려진 <존 에드워즈의 초상화를 위한 세 가지 습작>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런던 동쪽 끝에서 온 술집 매니저인 존 에드워즈입니다. 그는 베이컨을 10년 전에 만났고 계속해서 그 예술가의 가장 가깝고 신뢰받는 친구들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세 개의 패널 전체에 걸쳐 베이컨은 그의 독특한 활기와 화가 특유의 인상적인 방식으로 흰색 셔츠와 회색 바지의 소박한 옷을 입은 에드워즈의 유연한 자태를 그려냅니다. 이 작품은 크리스티 뉴욕에서 8천80만 5,000 달러($80,805,000)에 팔렸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rnQyp7fpJQ
1992년 4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머무는 동안 베이컨은 천식과 이로 인한 폐렴으로 급히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6일 후인 4월 8일 , 그곳에서 사망합니다. 그의 나이 81 세였고, 사인은 천식으로 인한 심장 마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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