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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시립 현대미술관(MAM)에서 화가 니콜라 드 스탈 의 작품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가 2024년 1월에 열렸습니다. 그의 작품이 20년 만에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죠. 미술계에서 그의 예술적 이정표를 되짚어보고자 하는 기대와 호기심으로 개최된 전시회이기도 하지요. 그의 작품을 다양한 시각에서 다시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니까요.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입니다.  서정 추상의  한 경향인 '앵포르멜 미술'을 추구했지요. 전 후 유럽 추상 미술을 대표하는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 (1914-1955)의 삶을 살펴봅니다.

 

 

 

단순하고도 섬세한 붓질로 물감의 특질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놀랍게도 빛과 거리감이 살아 있도록 풍경을 환기시킨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중

 

 

 

 

 

<Le Grand Concert>,1955,Nicolas De Stael / Arthur.io

 

 

 

방금 연주를 끝낸 걸 까요? 그랜드 피아노와 덩치 큰 콘트라 베이스만이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니콜라  드 스탈( Nicolas de Stael)의 작품 <콘서트 le Grand Concert>입니다. 가로 6m, 세로 3.5m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가끔 손 끝에 상처가 나  핏방울 맺히는 모습만 봐도 사람은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하물며 온통 핏빛으로 물들인 캔버스를 보며 관객들은 압도당합니다.  당시 그의 격정적인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실제 작품 앞에 서 본 관객들은 왠지 모를 뭉클한 전율이 짜릿하게 전해진 다고 합니다. 실제로  저 그림 앞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는 관객들도 계시고요.

 

 

 

"나는  나를 위해 필요하다."

-니콜라 드 스탈-

 

 

 

인생이라는 콘서트의 마지막을 암시한 작품이었나 봅니다.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은 이 그림을 완성하고 앙티브의 자신의 화실 11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였죠. 

 

 

 

싱트페테르부르크/Steemit

 

 

 

 

니콜라 드 스탈 (Nicilas de Stael) , 그는 1913년 생트 -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ourg)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장교 출신으로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의 소장이자 부사령관이었습니다. 호화로운 표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혁명이 일어납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많은 백인 러시아인들처럼 그의 가족도 강제 추방되어 폴란드에 정착합니다. 그러나 그가 6살이 되던 1919년 부모가 사망하면서 그는 고아가 됩니다. 1922년 그의 대모로부터 말리나(Marina)와 올가(Olga) 두 자매와 함께 브뤼셀의 프리세로(Fricero)가문에 맡겨집니다. 다행히 그의 양부모 역시 부유하고 교양이 있는 사람들로 그들 남매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며 사랑을 주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혁명:  차르 정권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을 수립한 혁명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골동품 그림과 회화를 공부했습니다.   학업을 마친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 모로코 등 넓은 세상을 여행합니다.

 

 

 

'내겐  그림과 여행밖에 없어'

 

 

 

 

알제리에서 만난 여인 자닌(Jeannine)과  1941년 예술의 본고장인  프랑스로 이사하여 화가로서의 기반을 닦기 시작합니다. 

 

 

 

Nicilas de Stael,Composition,1947/Artprice.com

 

 

 

그의 초기 작품입니다.  이 시기 그의 그림들은 자주 어둡고 우울한 색상을 띱니다.  아마도 그가 겪어 낸    유년의 암울하고 냉혹한 환경 탓인 것 같습니다. 어두운 톤이 지배하는 작품에서 새로운 언어의 추상화를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구상적인 형태를 보이다가 또다시 비-구상으로 넘어가기를 반복하기도 하고요.

 

 

 

 

 

<Portrait of Jeannine>, 1941-42/pinterest

 

 

 

Nice/Delta News Hub

 

 

Nicolas de Stael/ The World of Mara, Marietta

 

 

 

 

<자닌 Jeannine의 초상;(1941-42) >.  고생만 하다 먼저 간 첫 번째 아내 자닌 기유 ( Jeannie Guillou)의 초상화입니다.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이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제대하고, 니스에서 살 때 그린 우울한 초상입니다. 이때만 해도 존재감 없는 스탈의 그림은 16세기 엘 그레코 (El Greco)를 흉내 내고 있었죠. 아내의 초상에는 전쟁의 암울함과 궁핍이 보입니다. 지독한 가난과 고통 속에 밑도 끝도 없이 희망 없는 그림을 그리던 무명시절, 아내 자닌(Jeannie)은 나치가 점령해 있던 파리에서 딸을 낳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내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1946년 2월에 영양실조로 사망하게 됩니다.  시기는 어려웠고 성공은 너무 멀리 있던 상태였죠.  스탈은 1945년 파리에서 처음 그룹전과 개인전을 가졌지만 당시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습니다. 그러다  파리를 떠나게 됩니다. 

 

 

 

 

 

 

나의 삶은 불확실한 바다 위에서 계속되는 여행이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단단한 내 배를 만들기 위한 이유다.
-니콜라 드 스탈-

 

 

 

 

 

 

<De la danse>,1946-1947/Flickr

 

 

 

 

 

아내도 잃고 아이들은 셋 딸린 가난에 찌들어 지내던 그에게 두 번째 아내인 프랑수아즈 샤푸통과의 만남은 많은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 후 프랑수아즈와  결혼을 하고  다시금 재개를 꿈꾸며 창작 활동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스탈의 마음가짐과 새 아내 프랑수아즈의 노력으로 이후 니콜라의 작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가게 됩니다. 많은 아트딜러들이 그에게 찾아와 작품을 의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드 스탈은 서서히 선과 색을 이용하여 '구상회화'의 틀을 깨는 작업을 진행하였고 완전 추상으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겪습니다.

 

 

 

 

 

<Composition>,1949/Flickr

 

 

 

 

첫 번째 추상회화 '구성 Composition'으로서의 화풍을 굳혀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B-cGdQcfTI

 

 

 

 

 

 

좌충우돌하며 자신만의 미술의 갈 길을 찾던 스탈의 그림이 바뀝니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미술 방식을 찾기 시작한 것은 떡칠하기, 임파스토(impasto)방식의 그림이 시작되었죠. 유화물감을 팔레트 나이프나 또는 손가락으로 두껍게 반죽처럼 칠해 강한 질감을 표현하는 거친 방식입니다. 이 표현기법은 형태가 무시된 비정형의 앵포르멜(informel) 추상 미술의 표현 방식입니다.  그렇게 그에게 '서정 추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앵포르멜이란? 

 

독일 표현주의와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 '피에트 몬드리안으로 대표되는 차가운 추상에 대응하여 서정적 측면을 강조, 색채에 중점을 두며 보다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호소력을 갖는 표현주의적 추상예술을 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S5n3P_UZE8

 

 

 

 

 

 

 

 

 

 

 

Les Musiciens by Nicolas de Stael ,1952/Poster/Redbubble

 

 

 

 

니콜라 드 스탈은 세잔, 마티스, 반 고흐, 브라크 그리고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등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약 15년 동안 무려 1120점이라는 다작을 남겼으니까요. 작품을 많이 제작했던 만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없이 파괴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는 평소  그가 존경했던 브라크 (Georges Braque)처럼 라벨이나 유행을 완강히 거절합니다. 그림에서 유행 같은 흐름이나 추세를 싫어했지요. 자신을 둘러싼 사물에 대한 생생한 감수성을 개인적이고도 자유롭게 작품으로 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는 종이에 먹, 캔버스 위에 유화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또 찾습니다. 

 

 

 

 

<Bord de Mer>, 1952/ MutralArt

 

 

 

 

 

 

 

1950년에서 1955년은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 그가 남다른 화가라고 인정받게 된 결정적인 시기들로 10년을 좌충우돌 방황하던 스탈에게 작품이 활화산처럼 용솟음치기 시작하던 시기입니다. 이 기간 5년 동안 제작된 작품들은 죽은 후에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1950년 앙티브 해 새로운 미술 형식인 '서정적 추상'을 추구합니다.  그만의 굵고 과감한 에너지와 캔버스를 터트릴 듯 과감한 터치들로 자신의 내적 심리상태와 감정을 표현합니다. 계획적인 구성을 거부하고 주관적인 표현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Footballeurs>,1952/Artnet/스위스, 마르티니, 피에르 지아나다 미술재단 미술관

 

 

 

 

1952년 파리를 떠나기 전에 제작된 축구 선수들(Les Footballeurs)은 약 15 작품의 연작 시리즈가 있습니다.  판지와 캔버스에 그린 이 그림은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의 임파스토(Impasto) 방식을 강한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의 출발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작품입니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아직은 '서정적 추상'이라고는 하기에는 조금 거칠어 보입니다. 

 

 

 

 

 

 

 

<Mediterranean, Le Lavandou>,1952/Barbara Isherwood, Art Education&Writing

 

 

 

지중해 , 라방 두 <Le Lavandou>은 그가 막 완성했던 축구 선수들 <Les Footballeurs>에서의 떡칠하기, 임파스토 (impasto) 방식을 서정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풍경 주제는 그가 죽음을 맞는 4년 뒤까지 그의 표현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설명이 없는 인물이 지평선 주위에 가끔 얼쩡거리기도 하지만, 사물과 풍경을 설명하는 장치 없이 감정이나 정서가 캔버스를 채우고 있습니다. 

 

 

 

 

남프랑스의 지중해 해안 마을 라방두 (Le Lavandou)에서 그의 미술이 얌전한 임파스토(impasto) 방식이 아니라 주걱까지 사용해서 문지르고 깎아내고 회 칠하듯이 캔버스를 밀어붙입니다.

 

 

 

 

<젠트리Gentilly, 퐁트네Fontenay 풍경>,1952/MutualArt

 

 

 

 

 

<풍경Landscape>,1952/Tate Modern

 

 

<옹플뢰르Honfleur풍경>,1952, 2017년 크리스티에서 경매, 개인소장품/MutualArt

 

 

 

 

타고난 색감각과  천재적인 화면 구성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죠. 이 시기에 작업했던 그의 작품은 대중들에게 아주 큰 환영을 받게 됩니다.   당시 뉴욕은 물론  워싱턴 필립스 컬렉션에서도 앞다퉈 그의 작품 구매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간의 노력 끝에 그의 작품들이 주목받는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성공한 화가가 되면 너도나도 백만 불짜리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타는 것이 상징처럼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미 작품 한 점에 백만 불을 호가하고 있었지만 롤스로이스는 타지 못했습니다. 

 

 

 

 

 

 

콤포지션(구성)Composition,1952/False Start

 

 

 

 

https://www.youtube.com/watch?v=q2Kq2ukJ-LQ

 

 

 

 

 

 

 

1953년 그가 파리에서 남프랑스 지중해의 메네르브(Menerbes)의 해안가 르 카스틀레(Le Castelet)의 17세기의 큰 건물을 구입해 이사했을 때 이제는 재정적으로 굶주린 사람은 아니었죠. 더 이상 돈이 부족하지 않았고, 한 가족의 아버지이며 홀아비였던 그는 재혼했고 새 아내와 세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를 발견 한 수집가들은 유럽이 아니라 멀리 미국에서 찾아왔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미국 최고의 화랑인 뉴욕의 뇌들러 갤러리(Knoedler Gallery)가 그중 하나입니다. 분명히 모든 것이 잘되고 있었습니다. 

 

 

 

 

 

 

<그리냥 성 Grigana>,1953/ Art of Darkness/Daily Art Blog

 

 

 

 

1953년 그의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특히 1951년-53년 작품들, 그것들에서는 주저하거나 흔들림 없는 확고한 신념과 가치관이 보다 뚜렷하게 표현되어 나타납니다. 

 

 

 

 

 

화가는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항상 그의 눈앞에 감동의 원동력이 있어야 한다.
-니콜라 드 스탈-

 

 

 

 

 

 

 

 

<정오 풍경 Paysage du midi>, 1953, 2011년 크리스티에서 경매/ Artnet

 

 

 

 

 

나는 끊임없는 안갯속에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른다....
결정적으로 메스꺼움을 갖게 하는
이 긴 하루의 풍경에서
그럼에도 나는 움직였다.
-니콜라 드 스탈-

 

 

 

 

 

 

 

그는 직접 야외 풍경을 보고 그리기 위해 작업실 밖을 나갔습니다. 그만큼 그의 시각적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죠. 240점이라는 풍경화로 고스란히 남았으니까요. 대부분 작거나 중간 크기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지방과 각각의 장소들에서 그리는 방식과 서로 다른 독특한 인상이 생성되어 있습니다. 

 

 

 

 

 

피에졸레 Fiesole,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 1953/ Redbubble(poster)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도/Freepik

 

 

 

나는 모든 바다를 수영하면서 몇몇 크로키 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니콜라 드 스탈-

 

 

 

 

 

 

 

Agrigente:focus sur un chef-d'oeuvre/Connaissance des Arts

 

 

 

 

 

시칠리아 이탈리아 섬 지도/123RF

 

 

 

 

 

 

 

 

우리는 절대 보이는 대로 또는 보아 믿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
우리는 천 개의 진동에서 받은 충격을 그린다.
-니콜라 드 스탈-

 

 

 

 

 

Nicolas De Stael/Du9, I'autre bande dessinee

 

 

 

Offset de Nicolas De Stael, Dessins sur Amorosart

 

 

 

1953년 8월 그는 가족들과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여행하게 됩니다. 시칠리아 여행하는 동안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아그리젠토와 시라쿠사의 고대 유적을 방문하여 펠트펜으로 스케치를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프로방스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그의 그림은 시칠리아의 영향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는 몇 달 동안 강렬한 빛으로 눈부신 섬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1953년 시칠리아 여행은 그의 색채를 급진화시켰습니다.  멀리서 봐도 노랑과 주황의 밝고 빛나는 색채가 눈에 띄게 다름을 느낍니다. 

 

 

 

 

 

 

<아그리젠토 Agrigente>,1953/Connaissance des Arts

 

 

 

 

 

눈 내린 마르세유Marseille under the Sonw, 1954/ www.pinterest.jp

 

 

 

 

 

억세고 치열했던 그의 미술들은 1954년'눈 내린 마르세유 Marseille under the Snow>에서부터 그 치열함이 얌전해집니다. 소란스러운 색들은 음이 소거되어 5가지 색상을 사용합니다. 옅은 회색에서 부드러운 파란색, 왼쪽 전경의 정사각형에서 눈에 띄는 진한 검은색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것은 드 스탈(de Stael)의 화가 경력의 마지막 단계를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드러운 그림의 시작인 거죠.  눈이나 마을을 정확히 식별할 수는 없지만 색상 팔레트와 구조적 배열이 고요한 침잠의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살만한 세상, 그것이 1954년의 그의 미술 작품들에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Nicolas de Stael , Views of Menerbes,1954, Abstract art landscape/Pinterest

 

 

 

오렌지 바탕의 배 , 정물화 Nature morte, poires, fond vert et orange>, 1954/ Redbubbie

 

 

 

와인잔이 있는 정물Nature morte au verre, 1954/Artnet

 

 

 

1954년 봄 전시회에서는 세계적인 현대미술 아트 딜러 폴 로젠버그(Paul Rosenberg)가 그에게 앞으로 추가로 15 작품을 더 그려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전시회는 상업적으로나 비판적으로 성공적이었습니다. 1954년 4월에는 네 번째 아이인 귀스타브(Gustave)도 태어났습니다. 파리에서 쟈크 뒤부르그 (Jacques Dubourg)의 갤러리에서도 성공적인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그의 정물과 풍경 그림들에 '서정 추상'이라는 닉네임이 붙여졌습니다.

 

 

 

 

 

 

 

 

 

 

 

 

Antibes/Tide Forecast

 

 

 

 

1954년 가을, 그는 가족과 함께 앙티브(Antibes)로 이사했습니다. 1954년 9월, 앙티브로 이사를 하여 바다를 마주한 작업장에서 수많은 정물화와 풍경화를 제작했습니다.  1955년 6월과 7월에 예정된 앙티브의 전시회를 위해서였지요. 그 누구도 그가 자살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그림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성공이 시작되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심약한 그는 피로와 불면증 및 우울증으로 고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사회적 이슈가 되는 악플로 인한 연예인들의 자살 사례들처럼 그 또한 여러 찬사와 인기와 함께 냉혹한 비평들이 그의 내면을 요동치게 합니다.  부모님의 죽음, 첫 번째 아내의 죽음으로 유달리 섬세하고 유약한 성격을 가졌던 그는 비평가들과 예술평론가들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일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림으로 불태우며 자신의 가진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1955년 3월 16일, 그를 억척스럽게 비난하던 미술 평론가 더글러스 쿠퍼 (Douglas Cooper)와의 실망스러운 만남으로 그는 자살하고 맙니다. 그는 앙티브에 있는 11층 스튜디오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맞이합니다.  보상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 유작이 되어버린 <콘서트>를 끝으로 영원히 붓과 이별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41세. 한창 꽃 피울 나이에 소진한 불꽃이 되어 버립니다.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은 몽루즈 묘지 (Montrouge Cemetery)에 묻혀 있습니다.

 

 

 

1955년

그의 인생 마지막 해의 작품들입니다. 

 

 

 

 

 

<Seagulls>,1955/Pinterest

 

 

 

 

일몰의 바다 풍경chemin de fer au bord de la Mer Soleil Couchant,1955/Soho Art

 

 

 

 

 

 

 

 

https://www.youtube.com/watch?v=jbjQzQCOoU0

 

 

 

 

 

 

 

누워있는 푸른 누드(Nu couche bleu), 1955

 

 

누어 있는 푸른 누드 Nu couche bleu, 1955/Passion Estampes

 

 

 

 

 

누워있는 푸른 누드 (Nu couche bleu>는 그의 누드 시리즈의 마지막이며 연작 중에 가장 큰 그림입니다.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남프랑스의 라네 (Lagnes), 메네르브(Menerbes)및 앙티브(Antibes)에서 오렌지와 블루 등 네 가지 버전을 그렸고 이 작품'푸른 누드'작품은 2011년 12월 6일 화요일 파리의 경매에서 700만 유로(한화 100억)가 넘는 가격에 미국 국적의 수집가에게 낙찰되었습니다. 

 

 

 

 

12년 동안 스탈은 작품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새로운 길을 탐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대의 유행을 따르지 않은 그의 작품은 의도적으로 추상과 구상의 구별을 뒤집고, 더욱 조밀하고 간결한 예술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는 바다를 마주하든, 축구 경기를 바라보든, 탁자 위에 놓인 과일 조각을 바라보든 세상의 광경과 그 다양한 빛에 매료됩니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이 관객에게도 전달되지요.  그의 작품은 공간과 색채를 탐구하며 추상과 구상적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과 색채였지요. 그의 작품을 왜 '서정 추상 Lyrical Abstraction'이라 부르는지  좀 알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3BJTPqrx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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