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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경마는 1226년부터 열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영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입니다. 영국 상류계층은 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경주마를 갖기 위해 끊임없이 개량종 만들기를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1806년 스포팅 매거진에 잉글리쉬 서러브레드(Thoroughbred) 종이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혈통이 순수하다는 의미입니다. 가능한 한 속력이 있는 말을 작출 하는 것에 주목적을 두고 사육되어 온 종으로 순수혈통이라는 것이 선발 시 지침이 된다고 합니다. 서러브레드는 영국에서 토종 암말과 아랍 또는 북아프리카의 수말을 교배해서 개량한 말로 가장 빨리 달리는 품종입니다. 

 

 

 

 

경마의 바탕에는 누구의  말이 가장 빠른가에 대한 호기심과 가장 빠른 말을 가진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경쟁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돈을 거는 도박이 결합하면서 영국의 황실과 귀족들은 미친 듯이 경마에, 또 경주마 양성에 몰두하게 됩니다. 

 

 

 

 

 

 

George Stubbs<Whistle Jacket>,1762,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wikipedia

 

 

 

 

단순한 동물화가가 아닌 탁월한 말 화가를 소개합니다.  조지 스터브스(George Stubbs 1724-1806)는 그의 대표작 <휘슬 재킷Whistle jacket>으로 유명하지요. 작품은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걸려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액자를 박차고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말의 기세, 말의 움직임과 근육 하나하나까지 그의 피나는 노력이 깃들어 있는 특별한 작품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부와 명예를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립니다. 그것도 일부 허락된 사람들에게만 말이죠. 사람도 평생 자기 초상화 한 점을 갖기 함들던 시절에 실물 크기의 초상화를 보유한 말이 되었네요. 당시 <휘슬 재킷>의 주인은 영국 총리를 역임했던 정치인이자 당대 최고의 부자이며, 정치를 빼고는 경마에만 열중했던 로킹엄 후작이었습니다.

 

 

 

 

로킹엄 후작 찰스 왓슨 웬트워스 Charles Watson-Wentworth, 1730-1782/wikipedia

 

 

 

 

 

로킹엄 후작 초상화 <휘슬재킷Whistle jacket>은 유럽에서도 손꼽히게 큰 그의 저택 마당에 풀어 키우던 200여 마리의 말 중 하나입니다.  현재 경주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러브레드(Thoroughbred) 종의 조상인 고돌핀 아리비안(Godolphin Arabian)의 손자이고요. 중동 지방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라비안 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름 또한 마지막 주인의 성인 고돌핀 와 아라비안종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휘실재킷Whistle jacket>은 1762년부터 시작된 그의 초기 말 초상화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은 사람 없이 말만 등장하는 그림 중에서도 좋은 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후작의 소유물인 말을 훌륭히 묘사했기 때문이죠. <휘슬재킷 Whistle jacket>은 화려한 족보에 비해 경주마로서나 종마로서 기록이 특출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토록 기념비적인 초상화의 주인공이 된 건,  그의 우아한 외모와 자유분방하고도 고귀한 성격 덕분입니다.

 

 

 

 

 

말의 탄탄한 몸통을 비롯해 갈기와 꼬리의 푸슬거리는 느낌까지 가감 없이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올라탔거나 옆에 서 있었더라면 말의 온전한 모습을 보기 힘들었을 겁니다. 실제로 스텁스의 말 그림들은 말을 탄 사람들보다, 옆에 서 있거나 아예 안장이 없는 말의 모습이 많습니다.

 

 

하나 더 특이한 점은 <휘슬재킷Whistle jacket>에는 배경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는 원래 자연 풍경을 즐겨 그렸고 하늘과 들판을 그리는 데 익숙한 화가였습니다. 그의 그림들에는 수많은 자연 풍경이 많았죠. 이 경우 스텁스는 아마 배경을 그리는 것 자체가 휘슬재킷(Whistle jacket)을 방해할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휘슬재킷Whistle Jacket>은 꽤 활발한 성격의  말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리기도 쉽지 않았겠죠. 스텁스(Stubbs)도 '놀라울 정도로 다루기 힘들다'란 말을 했을 정도니까요.  그리는 동안 한 소년이 말을 앞뒤로 다니게 하면서 다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스텁스가 그림을 그리고 있자 휘슬재킷(Whistle jacket)은 소년을 끌고 가 그림에 얼굴을 들이박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덕분에 스텁스와 소년은 휘슬재킷이 이 그림을 망치고 다른 말들까지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느라 고군분투했다고 합니다.

 

 

 

 

 

뒤 발목에 하얀 띠를 두른 ,<휘슬 재킷 Whistle jacket>은 기름진 갈색 몸통에 부드러운 크림색 갈기를 날리며, 앞발을 들어 우리를 쳐다봅니다. 주인도, 마구도, 안장도 없이, 온 세상에 홀로 남은 듯 무한한 배경에 선 <휘슬재킷>은 아름답고 자유롭고 고고합니다.  스텁스는 이전까지 왕과 귀족의 권세를 드높이기 위한 받침대처럼 존재했던 흔한 말 그림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한 마리의 말, <휘슬재킷 Whistle jacket>을 보여줍니다.

 

 

 

 

<Racehorses Exercising at Goodwood >, 1759-60, Goodwood House/w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mqQbSg5gPmA

 

 

 

 

 

 

 

 

<암말과 망아지 Mares and Foals> ,1762/wikipedia

 

 

 

조지 스텁스가  1762년에 그린 <암말과 망아지>또한 영국 귀족계급의 취향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림에 나오는 말은 경주에서 우승한 말이거나 성공적인 경주마의 어미로 이름난 말들이 대부분입니다. 당연히 그의 고객은 모두 부와 지위가 높은 귀족들로 동시에 말의 주인이기도 했습니다.

 

 

 

말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림의 모델이 모두 암말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서는 씨수말 같은 덩치가 큰 근육질의 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배가 처져 있어 새끼를 낳는 번식마인 것처럼 보이고요.  말의 습성 때문인데 야생일 경우 씨수말 한 마리가 여러 마리의 암말을 거느리는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기르는 말이라면 100% 암말들인 거죠. 씨수말을 암말과 함께 방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임신기간이 아니면 씨수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요. 또한 씨수말을 포함한 암말과  새끼말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죠.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 말고도 동물을  그린 화가는 많았습니다. 그런대 왜 그의 말 그림을 최고라는 할까요?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사냥과 경마에 대한 영국인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말 그림에 있어서는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려냈지요.

 

 

 

그는 살아있는 말을 관찰하길 좋아했습니다. 그의 열정은 말의 해부학까지 파고들어 해부학 책까지 출판할 정도였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말들은 마치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있는 것 같은 아우라를 보여줍니다. 일류 모델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말이죠. 배경이 없는 과감한 구성과 각 말들이 취하고 있는 아름다운 포즈, 리듬감 있는 배열까지 뛰어납니다. 이런 구도에서는 무엇보다 말이 돋보이게 됩니다. 

 

 

 

 

윤기 흐르는 털과 아름답게 골진 근육, 근육 위로 퍼진 핏줄 선까지 섬세하게 전달됩니다. 이쯤되면 궁금해집니다. 화가는 도대체  움직이는 말들을 그것도 여러 마리를 동시에 어떻게 그릴 수 있었던 걸까? 말들을 모아 이런 포즈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 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화가는 여러 곳에서 각각 관찰하여 그린 말 드로잉과 스케치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화면에 조립하듯 하나로 구성하여 자연스러운 장면으로 만들어 냅니다.

 

 

 

 

아마도  말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겁니다.  화가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하기도 힘들었을 테니까요.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는 비즈니스 마인드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말의 주인의 눈에 비치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을 그려주었기 때문이죠.  포샵을 주인 눈에 쏙 들게 해 준 겁니다.  그러다 보니 귀족들이 너도나도 스텁스를 찾고 말 그림을 의뢰합니다. 덕분에  말 그림으로   화가로서의 명성과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Hound Coursing a Stag>,1762, Philadelphia Museum of Art/wikipedia

 

 

 

 

 

 

 

<Cheetah and Stag with Two Indians>,1765, Manchester Art Gallery / wikipedia

 

 

 

 

 

<Painting of a Kangaroo>,1772/wikipedia

 

 

 

 

영국 리버풀 지도/신발끈 여행사

 

 

영국 화가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 1724-1806)는 영국 리버풀 출신으로 가업을 특이하게 계승한 화가입니다. 10대까지 가죽 직공이던 아버지를 따라 무두질을 했지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동물 해부에 몰두한 결과 최고의 동물 전문 화가가 되고요.  그의 그림 덕분에 영국인들이 처음으로 캥거루를 보게 됩니다.  이 그림을 본 18세기 영국인들은 문화적 충격을 받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캥거루를 이때 처음 보았기 때문이죠. 

 

 

 

 

가죽공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스텁스의 삶의 전반적인 정보는 거의 전적으로 동료 예술가이자 절친인 오자스 험프리의 기록에 의존합니다. 험프리의 비공식적 회고록은 스텁스가 험프리와 나눈 사적인 대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스텁스는 청소년기까지 아버지 일을 도왔는데,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을에서 지나다니는 동물들을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했거든요. 어느날 스텁스는 아버지에게 화가가 되고 싶다는 얘길 꺼냅니다. 아버지는 처음엔 반대했는데 , 결국 적절한 멘토 선생을 찾는 조건으로 나중에는 아들이 하는 일을 묵인했다고 합니다. 스텁스는 영국 랭커셔에 사는 판화가 햄릿 윈스탠리에게 자문을 구하게 됩니다. 

 

 

 

딩고 /handmaker

 

 

 

<딩고>는 남작인 조지프 뱅크스가 1770년 제임스 쿡 중위가 호주에서 딩고들을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의뢰한 그림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런던 국립해양박물관이 기부금을 받아 그림을 매입했다고 합니다. 

 

 

처음  견습 생활부터 시작했던 스텁스는 이후 예술가로서의 독학을 시작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해부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많은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에 대한 관심을 해부학으로 돌렸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관찰을 많이 했습니다. 기술을 배우면서 수많은 스케치를 했고요.

 

 

 

 

<조지 스터브스의 해부학적 작품들 The Anatomical Works of George Stubbs>1766/round Table Books

 

 

 

영국 요크셔/위키백과

 

 

스텁스는  1744년 전문가 밑에서 해부학을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영국 요크로 이사를 합니다. 그는 1753년까지 요크에서 초상화 전문 화가로 일하면서 요크 카운티 병원의 외과의사에게 인체 해부학을 배웠습니다. 그는 이 병원에서 인체 해부학에 참관해 아주 정확한 드로잉들을 그립니다. 이 드로잉들은 존 버튼 박사의 <완벽한 새로운 조산제도에 관한 소고>(1751)의 도판으로 실려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책을 낸 것뿐만이 아닌 의대생들에게 개인 해부학 수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식견이 높았다고 합니다. 

 

 

 

 

1755년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납니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이탈리아  고전주의에 마음이 흔들리는데 스텁스는  자연주의의 신봉자로 그대로 남게 됩니다. 험프리는 스텁스가 이탈리아로 간 이유는 '자연은 그리스인이든 로마인이든 예술이든 그 무엇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였다고 회고합니다. 스텁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남긴 예술보다 자연이 우월하다는 개인적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스텁스는 1756년 링컨셔의 외딴 농가를 빌려 1년 반 동안 말을 체계적으로 해부하고 이를 스케치하기 시작합니다. 가까운 무두질 공장에서 말의 시체들을 입수하여 피를 뺀 후, 혈관에 밀랍을 채워 넣었습니다. 그런 후에 말을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도록 자세를 취한 후, 해부를 해 가며 각 단계별로 상세하게 스케치했습니다.

 

 

 

 

 

<말의 해부학 The Anotomy of the horse>,1766, George Stubbs/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런던지도/위키백과

 

 

그는  런던으로 영구 이주한 뒤 예술가들과 학자들에게 중요 참고서가 된, 1766년에 출간된 <말의 해부학 The Anatomy of the Horse>을 위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스텁스의 판화가 실린 이 책은 예술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정확한 해부학적 연구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760년대 들어 스텁스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는 작은 것에서 커다란 크기까지 모든 스케일로 작업을 하기 시작합니다.  경주, 사냥, 사격 등의 모습을 포함한 말과 야생 동물,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당시 스포츠였던 승마는 부유층들의 취미였기 때문에 활기찬 모습의 말은 주인들의 체면을 올려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Mares and Foals in a Landscape>1769/Fine Art America

 

 

 

후원자들은 스텁스의 그림이 다른 화가들의 작품보다 더 정확하며 사실적이라 느꼈습니다.  1759년 제 3대 리치먼드 공작으로부터 커다란 그림 세 점을 의뢰받은 이후 스텁스는 화가로서도 재정적인 안정감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그의 그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경주나 사냥을 위해 비싼 옷을 입고 말과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을 먼저 그리고 배경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먼저 각 말들을 그리고 칠한 다음 빈 배경 안에 세세하게 묘사합니다. 그다음에 영국의 배경을 채워 넣어 말과 어우러질 수 있게 합니다.

 

 

 

 

<A Lion Attacking a Horse>1762-63/Yale Center for British Art-Yale University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 운동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18세기 후반 등장한 낭만주의 는 감정과 자연의 회귀를 강조합니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분노나 두려움, 경외심 등의 감정을 동물에게 투영한 작품을 제작했고 스텁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파리 대학의 장 클레이 미술사학교수는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동물들의 에너지, 공포가 낭만주의 와도 연결되며 그의 시리즈가 늘어날수록 그 공포는 전체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평합니다. 

 

 

 

 

<A Lion Attacking a Horse>,1765, National Gallery of Victoria/wikipedia

 

 

 

  1763년 , 그는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것에 대한 수십 개의 작업을 진행합니다. 30년 동안 그는 약 17개의 이미지로 사자와 말을 그리고 재해석합니다. 학자들은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그의 그림을 두고 특이성, 독창성이 두드러진 18세기 영국 미술의 뛰어난 유산 중 하나라 평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스텁스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모로코에 들렀다가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것을 목격한 것에서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이 주제를 다룬 골동품이나 조각상등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Turf,with Jockey Up, at Newmarket, 1765/Art UK

 

 

 

 

 

 

 

<John and Sophia Musters Out Riding at Colwick Hall>,1777/Fine Art Prints on Demand

 

 

 

 

 

<Bulls Fighting>,1786, Yale Center for British Art /Album online

 

 

 

1770-1780년대 들어  예술성과 현실성 등이 높이 평가된 스텁스의 작품을 토대로 한 판화가 점점 더 많이 복제되며 널리 유통되었습니다. 그의 말 그림들은 대부분 온화하면서 따뜻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두 마리의 황소가 머리를 맞대고 싸우는 장면이나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보면 그가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잔인함과 공격성 또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특히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그림들은 아주 본능적입니다.  그가 좋아하는 이미지였고요. 말년에 그는 역사적인 사건도 그림으로 다뤘지만 동물 주제에 비해서는 인기가 덜했다고 합니다.

 

 

 

 

 

 

<Horse in the Shade of a Wood>,1780, Tate Britain /National Gallery/wikipedia

 

 

 

 

 

 

 

 

 

<A Couple of Foxhounds>,1792, Tate Britaiin/wikipedia

 

 

 

 

<soldiers of the 10th Light Dragoons>,1793, Royal Collection Trust/wikipedia

 

 

 

 

 

 

 

 

 

 

<Wedgwood Family>, Art UK/wikipedia

 

 

 

조지 스텁브스(George Stubbs)는 웨지우드 가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의 외가이자 처가였던 웨지우드(Wedgwood) 가문은 명품 도자기 '웨지우드'를 생산하는 집안입니다. 오른쪽 나무 아래에 앉은 두 사람은 다윈의 외할아버지인 조시아 웨지우드 1세입니다. 여인은 외할머니인 세라이고요. 말은 탄 여자가 다윈의 어머니인 수잔나(15세)입니다. 어머니 수잔나는 다윈이 8살이던 해인 1817년 7월 15일 세상을 떠납니다. 

 

 

 

 

<Reapers>,1785,Tate Britain/wikipedia

 

 

 

스텁스의 작품은 인기가 많았습니다.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도 있었고요. 하지만 그는 그가 미술계에서 그토록 얻고자 애썼던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활동적인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부유한 후원자들의 인기를 얻었고, 그의 그림의 대부분은 개인 소장품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성 안에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들이 20세기가 넘어서야 세상에 공개되자 그는 더 큰 주목과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가 그린 이국적인 동물 그림들 입니다. 

 

 

<Rhinoceros>,1780-1791, Hunterian Art Gallery/wikipedia

 

 

 

<Zebra>,1763, Yale Center for British Art/wikipedia

 

 

 

 

 

 

<The Monkey>,1799, Walker Art Gallery /wikipedia

 

 

 

 

 

<Hambletonian, Rubbing Down>,1800, National Trust, Mount Stewart/wikipedia

 

 

 

 

특이한 건 그는 '스포츠 화가'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로열 아카데미 정회원 자격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입니다.  영국 로열 아카데미는 1768년에 설립된 유명한 미술 학교이자 전시관입니다. 이 기관은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단체 중 하나로, 매년 여름 전시회를 개최하지요. 로열 아카데미는 회원 제도를 운영합니다. 회원들은 영국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요. 이 기관은 영국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상관없었습니다. 그는 웨일스 왕자를 포함한 많은 귀족 후원자들의 의뢰를 받아 나이가 들어서까지 일했으니까요. 81세의 나이에 런던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M8BmsrC18g

 

 

 

 

다른  화가들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지만 화가 벤자민 마샬이 그의 전통을 이어 많은 사냥과 경주 작품을 남겼다고 합니다. 미술계의 눈으로 봤을 때 그는 그저 단순한 말 화가로 치부되었습니다.  예술가로서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었고요.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이제야 비로소  한 예술가가 이뤄낸  특별한 업적에 경의를 표했다는 점이죠.  편견을 없애고 바라보면  스텁스(Stubbs) 역시 18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 중 하나로 자리 잡아도 손색이 없을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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