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가 '비범한 두뇌'와 '강한 탐구심'을 지닌 화가라고 평가한 르네상스 시대 화가가 있습니다. 생전의 유명세를 생각한다면 불가사의할 정도로 생애나 작업 방식 등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도상학적 의미를 품고 있어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는데,이 때문에 그는 서양 미술사에서 '성스러운 괴물'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그가 만약 21세기에 태어났다면 패션계에 몸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이탈리아 출신 '보티첼리'의 삶으로 들어가 봅니다. 산드로 보티첼리 ( Sandro Botticelli, 1445-1510)는 종교적 주제와 고전 신화를 자주 묘사한 아름답고 복잡한 그림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1486), <프리마베라Primavera>(1482), <동방 박사의 숭배 Adoration of the Magi>(1476)가 있습니다.
보티첼리는 당시의 인본주의 사상과 고전 예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우아한 자태와 유려한 선, 섬세한 색채가 특징입니다. 평면에 깊이와 거리의 환상을 만드는 기술인 선형 원근법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보는 사람의 시선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이는 복잡하고 상세한 구성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신화적인 그림과 함께 많은 종교 예술 작품을 창작했습니다. 종종 그의 그림에서 성탄절과 십자가 처형과 같은 성경의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가 그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유명한 걸작 중 하나인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1486)을 알아봅니다. 이 작품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비너스가 바다에서 태어나는 장면을 보여주며, 보티첼리의 기법과 미적 매력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작품은 비너스가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나 키프로스 해안에 도착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녀는 조개 껍데기 위에 서 있으며, 순결한 진주처럼 그려졌습니다. 바람의 신 제피르와 아우라가 그녀를 감싸고 있습니다. 플로라로 여겨지는 젊은 여성이 꽃으로 장식된 망토를 비너스에게 건네주려합니다. 장면은 풍부한 색채와 세부 사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찬미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연상시키고요.
보티첼리는 이 그림을 캔버스에 그린 점에서 당시 혁신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나무 패널을 사용했습니다. 특유의 템페라 기법을 통해 인물들이 투명한 모습을 갖도록 했지요. 공기 같은 질감을 만들어낸 것이 특징입니다. 비너스의 포즈는 고전적인 조각에서 영감을 받아 '비너스 푸디카( Venus Pudica)' 유형으로 , 몸을 살짝 가리며 겸손함을 표현합니다.
비너스 푸디카(Venus Pudica)는 "부끄러운 비너스"라는 뜻으로, 이는 그녀가 자신의 신체를 가리려는 소위"겸손한"태도를 나타냅니다. 이 자세는 종종 양손으로 한 부분을 가리면서도 동시에 다른 부분이 드러나도록 하여 시각적으로 관객의 눈을 끌게 합니다. 비너스 푸디카의 원형은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입니다. 미술사에서 비너스 푸디카는 르네상스 시대에 대표적인 예술작품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주제적으로 이 그림은 오비드(Ovid)의 <변신 이야기Metamprphoses>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접근은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특히 메디치 가문에서 유행했습니다. 비너스를 감싸고 있는 바람 신 제피르와 님프의 부드러운 포옹은 신과 지상의 아름다움 사이의 섬세한 균형을 강조합니다.
이 그림은 로렌조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메디치( Lorenzo di Pierfrancesco de Medici)에 의해 의뢰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과 르네상스 시대 고전적 이상을 기념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제작되었고요.보티첼리의 작품은 특정 시대의 미적 가치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의 부흥으로서 메디치 가문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메타포 역할을 합니다.
이 작품은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단순히 결혼식 장식 그림이라는 설부터 마르게리타 데 메디치의 출생을 계기로 정세가 복잡했던 피렌체에 여명이 밝아 오리라는 것을 표현했다는 설, 신플라톤주의적 관점에서 비너스를 우주의 조화에 대한 완벽한 인격화로 보고 '비너스의 탄생=인간성의 회복'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설 등 다양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6PBfbkMzFU&t=1s
<포티튜드 Fortitude>는 보티첼리가 Lorenzo de Medici의 별장을 위해 만든 일련의 우화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녀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녀의 의상은 빨강과 파랑의 화려한 드레스로 구성되어 있어, 힘과 우아함을 동시에 전달합니다. 그녀가 쥐고 있는 지팡이는 인내와 안정성을 상징하며, 공손한 시선은 그녀의 강한 내면을 강조합니다. 복잡한 건축 요소와 장식된 왕좌가 그녀의 고귀함을 더욱 부각시키며, 미덕의 엄숙함을 강화합니다.
보티첼리는 복잡한 색채와 정교한 디테일을 통해 인간 형상과 주변 환경의 복잡성을 포착한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초기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관심을 드러내며, 전통적인 기독교 상징과 고대 인간 형태의 아름다움이 결합된 예술적 표현을 나타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O0ZFMJYCY8
https://www.youtube.com/watch?v=GNQK8XTPub4
보티첼리(Botticelli)는 '작은 술통"을 의미합니다. 작은 술통처럼 뚱뚱했던 형의 별명에서 따온 별칭이라고합니다. (한편으로는 그가 어린 시절 수업받던 금세공사 장인의 별명이었다고도 하고요).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라고도 알려진 그의 본명은 알렉산드로 디 마리아노 디 반니 필리페피로, 1444년 혹은 이듬해 제혁업자인 마리아노 필리페피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피렌체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에는 둘째 형 안토니오와 함께 금세공사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18세 무렵 프라 필리포 리피( Fra Filippo Lippi, 1406-1469)의 공방에 들어가 화가 수업을 받았습니다. 당시 직업 화가들이 10세 무렵 도제로 들어가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늦은 나이였지요. 스승이었 던 프라 필리포 리피( Fra Filippo Lippi)의 작품입니다.
프라 필리포 리피( Fra Filippo Lippi, 1406-1469)는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 화가로, 카르멜 성직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은 인상적인 자연주의와 사치로운 표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리피는 플로렌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이모에게서 자랐습니다. 그는 8세에 인근 카르멜 수도원으로 보내져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420년 카르멜 수도회에 입회하고요. 그의 초기 예술적 영감은 마사초의 작품에서 받았습니다.
리피의 초기 르네상스의 주요 화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은 주로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었으며, <마돈나와 아기 예수>같은 작품이 유명합니다. 그의 스타일은 마사치오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점차 독특한 명확한 표현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조로 표현되며, 도나첼로와 자코포 델라 쿠아르치아의 석조 작품의 이질감을 따르는 특징이 있습니다.
리피(Lippi)는 1469년 스포레토에서 사망합니다. 그곳의 대성당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인 <처녀 마리아의 생애>에 관한 프레스코화 작업 도중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는 5년간 리피에게 물감 배합, 회화 기법, 금박 장식과 같은 교육을 받았고, 리피의 공방에서 비중 있는 도제로 활동했습니다. 초기 그의 그림에서는 과도한 장식성, 선원근법을 사용한 정밀한 공간 배치, 힘찬 선, 아름답고 세밀한 세부 묘사가 돋보입니다. 이는 금세공 도제 수업을 받으면서 습득한 섬세한 표현력에 더해 스승이었던 리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또한 Filippo Brunelleschi(1377-1446), Donatello(1386-1466), Masaccio(1401-1428)와 같은 당시 다른 피렌체 예술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 사람의 작품도 차례차례 구경하고 가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Q8F_yPwqzA
Filippo Brunelleschi(1377-1446 )는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조각가, 금세공사로서 , 초기 르네상스 건축의 아버지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업적은 건축, 조각, 기계공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습니다. 그는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설계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요. 고대 로마의 판테온과 비교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돔 중 하나입니다. 그는 이 돔이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하는 데 중요한 기술을 도입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피렌체 대성당 돔, 산 로렌초 성당, 파치 예배당 등이 있습니다. 작품의 특징으로는 균형 잡힌 비례, 고전적 형태의 재해석, 기하학적 명확성이 있습니다. 르네상스 건축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원근법의 발전에도 기여하여 미술과 건축에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qbiEvxk8GI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는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입니다. 그는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주로 피렌체에서 작업했으며, 표현의 깊이와 사실적인 묘사로 유명합니다. 그는 고딕 조각의 전통을 극복하고 자연을 관찰하여 르네상스 조각의 세계를 열었습니다. 또한, 그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위치를 탐구하는 예술을 창조하며 그 시대의 미학을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다비드상>,< 성 조르조 상>, <파치 가의 성모상>, <세례자 요한 상> 등이 있습니다.
Masaccio(1401- 1428 )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원근법과 자연주의적 묘사 기법을 도입하여 르네상스 미술의 방향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422년 피렌체의 화가 조합에 가입했고,미술에 있어 원근법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도입한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사실적이고 감정이 잘 표현된 인물들이 등장하며, 특히 강한 자연주의적 요소가 돋보입니다. Giotto 와 Donatello의 영향을 받으며, 고딕 양식의 복잡한 장식에서 벗어나 보다 자연스럽고 단순한 형태를 추구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 < 성 삼위일체>,<브란카치 기도소의 프레스코들>, <추방 The Expulsion from the Garden of Eden)이 있습니다. 그는 26살의 짧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그의 작품은 후속 세대의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르네상스 미술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Botticelli의 훈련에는 그의 예술적 스타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전 문학 연구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특히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작품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의 그림 중 많은 부분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푸불라우스 오비디우스 나소 (Publius Ovidius Naso)는 기원전 43년 3월 20일 태어나 기원후 17년 또는 18년경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치 주의 술모에서 부유한 기사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로마로 유학하여 수사학과 웅변술을 배웠고, 법조계 진출이 아버지의 소원이었으나 , 사교를 즐기며 시인으로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장르의 시를 지었으며, 특히 그의 대작인 <변신 이야기>( Metamprphoses)로 유명합니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 및 로마 신화의 변신 이야기를 연결하여 서술한 것으로,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또한 사랑의 기술 ( Ars Amatoria)라는 연애시를 발표했는데, 이로 인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불만을 샀고, 결과적으로 로마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유배 생활로 불행한 말년을 보냈고, 흑해 연안에서 사망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보티첼리의 예술적 훈련은 피렌체 예술과 문화의 전통에 기반을 두었고, 그는 계속해서 그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만든 매우 개별적인 스타일을 개발했습니다.
보티첼리는 1467년경 도제 수업을 마친 후 늦어도 1470년 피렌체에 자신의 공방을 차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1470년에 독립적인 화가로 상업회의소에 걸릴 <용기>를 그렸기 때문이지요. < 용기>와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그린 <베툴리아로 돌아가는 유디트>, <죽은 홀로페르네스의 발견> 등으로 급격하게 명성을 얻었습니다.
도제 수업을 마칠 무렵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와 <성모자와 천사>에서 스승 리피의 영향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구도의 부자연스러움에서 초보 화가의 약점이 보이지만, 여체의 아름다운 곡선과 우아한 자세 등 그의 대표적인 특징도 엿보입니다.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는 예술적 기법과 심오한 상징성을 함께 담고 있는 명작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배경에는 고대 건축물과 폐허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새로운 계약이 성립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은총 시대의 대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보티첼리는 다양한 인물 표현을 통해 생동감을 불어넣었으며, 인물들은 각각 독특한 특징을 지닌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인물의 표정과 자세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고 있지요. 그림 속 첫 번째 동방박사는 고인이 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인 코시모 데 메디치로, 그는 노인의 모습으로 아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흰 천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있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 동방박사는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로, 그는 빨간 망토를 입고 아버지에게 예물을 봉헌하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세 번째 동방박사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로 , 그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예물을 담은 성배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을 과스파레 델 라마의 의뢰로 제작하였으며, 당시에 피렌체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은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그들의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예술과 문화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 보티첼리의 작품 또한 이러한 후원 속에서 탄생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ofuY0v7ewck
보티첼리는 곧 피렌체 예술가들의 최대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스 철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플라톤 학회를 만들고자 한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의 연회에 참가하며 플라톤 철학을 미술로 표현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런 한편 수많은 초상화와 제단화를 그렸으며, 그중에는 대 코시모에게 주문 받은 그림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 코시모 의 마상 창 시합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나뭇가지로 장식된 방패를 든 팔라스>나 <수태고지>(1475)같은 작품들은 전하지 않습니다.
로렌초 일 마니피코( Lorenzo il Magnifico)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로렌조 데 메디치( Lorenzo de Medici, 1449-1492))는 뛰어난 정치적 능력과 예술적 감각을 가진 인물로,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이탈리아의 정치가이자 피렌체 공화국의 사실상의 통치자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열렬한 후원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로렌조는 1469년 20세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피렌체의 통치권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 피렌체는 경제적으로 번영했고, 예술과 문화가 융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독재적 통치를 하였으며,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는 제한되었습니다. 로렌조는 미켈란젤로, 보티첼리와 같은 뛰어난 예술가들을 후원하였으며, 르네상스 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인본주의 발전을 지지하여, 많은 고전 작품을 수집하고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통해 이탈리아 내의 강대국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고, 나폴리 국왕과의 통상 조약 체결로 신뢰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 피렌체 황금기의 종말로 이어지며, 르네상스도 쇠퇴합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힘과 영향력을 대내외적으로 강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9WIReSXpks
메디치 가와의 긴밀한 관계는 1478년 로렌초 일 마니피코와 동생 줄리아노가 암살 습격을 받은 데 연루된 파치가 인물들의 처형 모습을 그린 프레스코화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수많은 주문자들이 그림을 그렸다 해도 메디치 가의 공식 화가로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가 피렌체에서 가장 명망 높은 화가 중 한 사람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시기에 보티첼리는 스승 리피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해 나갔으며, 도상학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데 매달렸습니다.
교황 식스토 4세는 1471년부터 1484까지 재위한 로마 가톨릭 교황으로, 델라 로베레 가문의 부흥을 위해 친족들을 중용하며 족벌주의를 강화했습니다. 그는 스페인에 이단심문소를 설치했습니다. 어린 시절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교육을 받았고, 이후 프란치스코회 총장이 되었던 이력이 있던 그는 프란치스코회 특전을 확대하는 등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메디치 가문과의 갈등으로 피렌체를 교황령에 포함시키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교황청의 재정은 악화되었으며, 후임 교황에게 막대한 빚을 남겼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sGlRBaVX9U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명성은 피렌체 밖에서도 자자했습니다. 독립 초기부터 다른 지역의 고객들에게 그림 의뢰를 받았던 그는 1481년 교황 식스토 4세의 의뢰로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를 그리기 위해 로마로 갔습니다. 식스토 4세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셀리, 피에트로 페루지노 등에게도 예배당의 벽화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불후의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미켈란젤로의 벽화와 제단화 때문이지요. 이때 그린 보티첼리의 벽화 중 제단 벽화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게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교황 식스토 4세가 부른 르네상스 시대 세 화가의 작품도 살펴봅니다.
도미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1448-1494)는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로, 주로 피렌체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리얼리즘적인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인물의 표정과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미켈란젤로와 바스티아노 마이 나르디 등 여러 유명한 화가들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주요 작품 <동방박사의 경배>(1488)작품은 자신의 자화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1480)은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그린 작품으로, 유다의 배신을 다소 현실감 있게 표현한 예술적 접근이 인상적입니다. '성모전' 연작은 당시 귀인의 생활을 반영하는 장면으로, 배경의 프리즈와 네모 기등에서 도나텔로의 영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금박을 사용하지 않은 최초의 화가 중 하나로, 이를 통해 더욱 현실적인 재료감과 색감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기를란다요의 작품은 당시 플랑드르의 사실주의적 요소와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요소가 결합된 형태를 띄고 있어,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중요한 예시로 평가받습니다.
코시모 로셀리(Cosimo Rosselli,1439-1507 )는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주요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특히 성경과 종교적 주제를 다룬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화풍은 보통 강렬한 색채와 세심한 인물 묘사로 특징지어 집니다. 그는 고전적인 형식을 따르면서도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기독교 신화와 이야기를 표현하며, 세밀한 배경과 인물의 감정 표현이 돋보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산상설교와 나병환자를 고치심>(1481)입니다. 종교적 주제를 통해 로셀리의 고유한 스타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작품은 <갈대 바다를 건넘>(1481)이 있습니다.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i, 1446-1523)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 주로 움브리아 지방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조화의 혁명가"라 불리며,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조화로움과 정서를 특징으로 합니다. 그는 1481년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벽화를 제작한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입니다.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라는 칭송을 받았고, 제자 라파엘로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피에타>(1495)제작되었으며, 관상과 정감이 드러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루지노의 작품은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끈 것으로 평가받으며, 그는 평온과 고요한 감정을 통해 자연과 인물의 조화를 잘 표현했습니다. 그의 그림에서는 각 인물의 신체와 배경의 경관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그의 주요 작품에는 <교회의 열쇠를 받는 성 베드로>, < 피에타>, < 하느님 아버지와 두 성인>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르네상스의 예술적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후배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듬해 피렌체로 돌아온 보티첼리는 로렌초 데 메디치를 비롯해 친밀한 후원자들을 위해 새로운 유형의 그림을 개발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들이 오늘날 보티첼리 명성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들로, 장차 르네상스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한 <봄>과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작품입니다.
<봄 Primavera>은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조카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의 침실 곁방에서 발견된 것으로, 로렌초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그림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르메스, 비너스를 수행하는 삼미신, 비너스, 다산의 여신 플로라, 서풍 제피로스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서로 연관성이 없는 이들을 한 화면에 배치하고 있다는 데서 이들이 각기 어떤 서사를 가지고 무엇을 암시하는지에 대해 학자들 간에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만 보티첼리가 단순히 그리스 신화의 서사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신플라톤주의적 입장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도상학적 아이콘으로 표현해 낸 작품이며, 그가 자신만의 시와 철학을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적 회화의 전형인 사실주의와 일관된 서사를 완전히 무시한 데다, 원근법조차 무시한 독특한 화풍을 지닙니다. 그럼에도 유려한 선과 우아한 에로티시즘으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를 중심으로 발전한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사상으로, 주로 플라톤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여 신념적인 요소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다양한 사상가들이 이 도시에서 활동하며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프로클로스( Proklus)등 의 철학자는 신플라톤주의 를 체계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인간 영혼의 궁극적인 행복과 구원을 중심에 두면서 세상이 아닌 초월적인 세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사상은 르네상스의 부활을 특징짓는 요소 중 하나로, 역사적으로 많은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절대자와 인간 사이의 간격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영혼의 상승을 강조합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인간 영혼의 행복을 정서적이기보다 지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보고, 현세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에 중점을 둡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의 사상으로의 회귀를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통해 철학과 종교 간의 경계를 허물고 통합하려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FtMgt0nqgU
보티첼리의 스타일은 당시 피렌체에서 유행했던 국제 고딕 양식의 영향을 여전히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원근법의 사용과 고전 고대 연구에 대한 강조와 같은 새로운 르네상스 양식의 요소를 통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주목할만한 작품은 섬세하고 천상의 인물을 창조하는 보티첼리의 능력을 보여주는 "마돈나와 천사와 함께 있는 아이"입니다. 이 그림은 부드럽고 흐르는 선과 미묘한 색상을 사용하여 그의 멘토인 Fra Filippo Lippi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중심에 성모 마리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두 명의 천사가 그녀의 머리를 관으로 씌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요. 마리아는 오른손으로 글을 쓰고 있고, 실제로 그녀가 쓰고 있는 것은 루카복음의 마리아 찬가인 ' Magnificat' 입니다. 마리아는 깊은 파란색 로브로 우아하게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신성한 은총을 상징하고요. 그녀의 시선은 아래를 바라보며, 아기 예수는 그녀에게 손을 뻗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왼손에 쥐고있는 석류는 고통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회화 주변에 각각 다른 표정과 자세를 가진 천사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풍부한 서사와 감정을 제공합니다. 배경은 평화로운 풍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 이것은 르네상스 회화의 전형적인 요소로 화폭에 깊이와 맥락을 더합니다.
'마그니피카트 Magnificat'는 루카복음 1장 46절에서 55절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자벳스에게 방문할 때 하느님께 찬양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 여성의 문해력에 대한 복잡한 담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를 작가로 묘사한 점에서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지닙니다. 보티첼리는 전통적으로 독서를 하는 마리아를 묘사하는 대신, 그녀를 글을 쓰는 모습으로 그려 제기된 질문들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술적 기교와 초기 르네상스 예술의 풍부한 상징성을 동시에 지닌 명작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gPOr0Y2fI
보티첼리는 고전 신화에 매료되어 종종 그의 그림에 신화적 인물을 묘사했습니다. 그는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이야기에 끌렸으며 그의 그림에는 종종 비너스, 마르스, 아폴로와 같은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작품의 제작 시기가 르네상스 중엽에 해당하며, 이 시기의 미술은 인간 중심주의와 고대 로마 및 그리스 문화에 대한 재조명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보티첼리는 인문주의적 요소와 고전 문헌의 영향으로 인해 이 작품을 통해 사랑과 전쟁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로마 신화에서 사랑의 여신 비너스(Venus)와 전쟁의 신 마르스(Mars)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비너스는 침착하고 고상한 모습으로 마르스를 바라보고 있으며, 마르스는 잠에 빠진 듯한 상태로 그림의 중앙에 누워 있습니다. 주위에는 장난기 가득한 아기 사티로스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비너스는 전통적으로 사랑과 미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그녀의 시선은 사랑의 힘과 따뜻함을 나타냅니다. 반대로 마르스는 전쟁과 폭력을 상징하며, 깊은 잠에 빠지는 모습은 사랑의 힘이 전쟁보다 우월하다는 주제를 암시합니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사랑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배경은 무화과와 월계수를 포함한 숲으로, 이는 비너스와 결혼을 상징하는 요소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한 , 혼란스러운 구름 위에서 잠자는 마르스 머리 주위로 벌레가 모여 있는 장면은 사랑의 존재가 전쟁에서 가져오는 고통과 상처를 의미합니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에서 고유의 색채 사용과 유려한 선을 통해 인물들의 특징을 섬세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비너스의 의상과 마르스의 노출된 신체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에서 영감을 받아 이상적인 인체를 강조합니다. 비너스의 우아함과 마르스의 강인함, 그리고 주위 천사들의 유희적인 모습 사이의 대조를 통해 더욱 흥미로운 구성으로 제시됩니다.
이와 같이 < Venus and Mars>는 보티첼리의 미술적 기법과 철학적 주제를 함께 반영한 걸작으로, 르네상스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NkHq6QXX30
<Nastagio degli Onesti>는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가 1483년에 제작한 연작 그림 중 하나로, 이탈리아의 유명한 문학 작품인 조반니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의 '데카메론'에서 영감을 받아 그려졌습니다. 이 연작은 네 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 Museo del Prado)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1350-1353)은 중세 이탈리아 문학의 중요한 작품중 하나로, 100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사랑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로 유명하며, 에로틱한 요소와 비극적인 상황이 잘 결합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중세 시대의 삶에 관한 중요한 역사적 문서로서,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열흘'을 의미하는 제목처럼, 이야기가 열흘 동안 진행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은 피렌체에서 발생한 흑사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한 외딴 별장으로 피신한 일곱 명의 여성과 세 명의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한 가지씩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각 이야기들은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운명, 인간의 의지력, 비극적인 사랑, 속임수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카치오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당시 사회의 성 역할과 갈등을 풍자하였으며, 인간의 본성과 욕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었습니다. '데카메론'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제프리 초서 등 여러 후대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단순한 이야기 모음이 아닌 서로 연결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하나의 큰 이야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Nastagio degli Onesti)라는 귀족이 사랑을 승리하기 위해 괴로운 운명을 겪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나스타조가 사랑하는 여성이 자신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인 후, 그녀의 고백이 절실해지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갑니다. 나스타조는 저주받은 영혼의 고통을 목격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이루어나가고자 합니다.
< Nastagio degli Onesti>의 첫 번째 패널에서는 나스타조가 숲속에서 아름다운 여성을 구하려고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여성은 기사의 공격을 받고 있으며, 나스타조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행동합니다.
두 번째 패널에서는 나스타조가 그녀의 불행한 과거를 이해하게 되고, 기사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세 번째 패널은 나스타조가 자신의 사랑과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여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때 다시 한번 저주받은 여성의 고통이 제현됩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패널에서는 나스타조의 사랑하는 여성이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결혼을 약속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결말은 꿈꾸던 사랑의 성취를 상징합니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랑의 힘과 고통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나스타조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여러 장애를 극복하며, 그것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깊은 댓가를 요구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 연작은 인간의 감정, 특히 사랑과 갈망을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티첼리는 선명한 색채, 섬세한 인물 묘사와 드라마틱한 구성을 사용하여 나스타조의 심리적 갈등과 주변 상황의 복잡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적 요소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Ks7i8eqM8
1492년 ,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죽으면서 피렌체는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또한 15세기 말이라는 세기말적 상황에서 대중은 종말론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도미니코회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대중의 허영을 지탄하고 갱생을 촉구하며 시뇨리아 광장에서 사치품을 불태우는 '허영의 화영식'을 열었습니다. 이때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의 신봉자가 되어 자신의 '허영'많은 그림을 불 속에 집어넣었으며, 이후의 그림에서 이교도적인 색채를 지우고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했습니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의 그리스도교 수도회입니다. 1206년 스페인의 성 도미니코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성 도미니코가 알비파 이단의 확산으로 인해 교회가 위기를 느끼고, 복음을 전파할 필요성을 절감하며 창설한 수도회입니다. 이 수도회는 청빈을 중시하며 탁발 수도사로서의 생활을 이어왔고, 엄격한 생활과 학문 연구, 설교 및 교육에 힘써온 결과 중세 유럽에서 중요한 수도회로 자리잡았습니다. 고난과 가난에 처한 이들을 돕고, 인권 옹호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철학과 신학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1452-1498)는 이탈리아의 도미니코 수도사, 설교가 및 종교개혁가입니다. 그는 피렌체에서 개혁과 민주정을 추진하며, 당시 교회의 부도덕성을 비난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사보나롤라는 페라라(FERRAR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인문주의 , 철학, 의학 등을 공부하다가 1475년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는 1482년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에서 학식과 금욕 생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략 후 메디치 가문의 통치가 무너지면서, 사보나롤라는 중간계급의 지지를 받아 피렌체의 정치적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신정 정치적 민주정치를 도입하려고 하였으며, 교황과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의 예언적 주장과 설교를 지속했습니다.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1470년 5월 30일에 태어나 1483년부터 1498년까지 프랑스의 왕으로 통치했던 귀족입니다. 그는 발루아 가문의 일원으로 , 프랑스 역사상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하나로 여겨집니다. 샤를 8세의 통치 기간은 1483년부터 1498년까지입니다. 13살의 나이에 즉위한 그는 초기에는 누나인 안 드 보주에 의해 섭정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샤를 8세는 이탈리아 원정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나폴리 왕국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침공하였고, 이를 통해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도모했스빈다. 그의 원정은 1494년 시작되어 1495년 나폴리를 점령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결국 다수의 적들과의 동맹이 형성되어 어려움을 겪었고, 1495년 포르노보 전투에서 패배하고 프랑스로 퇴각하게 됩니다. 1498년 의식을 잃고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tLou92CsEM
사보나롤라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의 대립으로 인해 1498년에 유죄 판결을 받은 후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의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선구자 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가로 여겨지며,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교회의 부패와 정치적 부당함에 대한 정직한 비판자로서, 그의 설교가 실질적으로 큰 변화를 이끌어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는 본명 로드리고 란조르 보르자 이 보르자이며, 르네상스 시대의 저명한 교황이나 그의 정치적 능력과 논란 많은 개인사가 특징입니다. 1431년 아라곤 연합 왕국의 발렌시아 하티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당시 교황으로서 많은 외교적 업적을 세웠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뛰어난 정치가 및 외교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고, 그의 후임자들에 의해 뛰어난 지성을 가진 교황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족벌주의와 호색으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1492년 부터 1503년까지 교황으로 재위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bBsslVx-qg
이 때문인지 역동적인 리듬감과 유려한 곡선, 우아하면서도 에로티시즘이 함축되어 있던 종래의 그림과 달리 말년에 그림들은 구도가 단순하고 응집되어 있으며, 곡선이나 옷 주름 등의 표현이 매우 소박하고 절제되어 있습니다. 이런 화풍의 변화는 <그리스도의 변용,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성 히에로니무스의 마지막 영성체> 등에서 뚜럿이 드러납니다.
이 그림은 그리스의 고대 화가 아펠레스(Apolles)에 관한 전설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아펠레스는 자신의 동료에게 모욕적인 누명을 쓰였고, 이를 통해 보티첼리는 고발과 증거의 진실성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전통적인 이야기의 배경에서 보티 첼리는 비난과 오해가 가져오는 고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오른쪽에는 왕좌에 앉아 있는 왕이 등장하며, 그의 손에는 부주의하게 선택된 판결을 상징하는 함축적인 제스처가 드러나 있습니다. 왕의 머리에는 당나귀 귀가 그려져 있어, 아폴로 신의 저주를 암시합니다. 그는 두 명의 인물, 즉 '무지( Ignorance)'와 '의심( Suspicion)'의 상담을 받으며 판결을 내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비난 (Calumny)'은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녀는 자신의 무고한 희생자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녀의 왼손에는 불타는 횃불이 들려있어, 그녀의 비방이 불과 같이 언제든지 타오를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증오( Rancour)'와 '사기( Fraud)' 가 이 여성의 곁에서 그녀를 꾸미는 모습은 비난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를 나타냅니다. 가장 뒤편에는 '진실(Truth)'을 나타내는 누드 여성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녀는 모든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모습으로, 진실이 어떻게 그들의 비극적 상황에 무관심할 수 있는지를 암시합니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에서 뛰어난 색채 사용과 섬세한 선묘를 통해 인물들의 감정과 상황을 효과적으로 나타냈습니다. 컴포지션은 동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각 인물의 표정과 자세는 그들의 내면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배경은 고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반영하며, 풍부한 기하학적 패턴과 조화로운 구성이 돋보입니다.
이 작품은 보티첼리가 죽기 전 제작한 마지막 작품들 중 하나로 보이며, 그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보티첼리의 이 그림은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인간 감정의 복잡성과 고통을 다룬 뛰어난 예술성으로 여겨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ZJmlv1HWuE
이 작품은 보티첼리의 경력 중, 도미니카 수도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의 영향을 받은 시기에 제작되었습니다. 작품은 피렌체의 상태에 대한 강력한 진술로 여겨지며, 그 시대의 정치적 및 종교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작품에서는 주요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발치에는 회개하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십자가를 끌어 안은채 예수를 바라보고 있고요. 그녀의 곁에는 정의의 천사가 있으며, 이는 피렌체의 상징인 작은 사자를 처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작품의 배경에는 폭풍 구름이 있으며, 불과 무기들이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장면은 사보나롤라의 강력한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보티첼리의 화풍은 이러한 주제를 통해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이 작품은 보티첼리의 독특한 예술 세계와 그가 지닌 사상적 배경을 반영한 작품으로, 피렌체 르네상스 시대의 복잡한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iuI_T_ehqM
이 그림은 초기 피렌체 시대의 보티첼리 후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신비한 환경에서 천사와 다른 인물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담한 색상과 특이한 이미지를 사용한 것이 눈에 띕니다. 전반적으로 이 그림들은 보티첼리가 예술가로서 초기에 전통적인 고딕 기법과 떠오르는 르네상스 스타일을 모두 실험하면서 발전한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주제로 하여 기독교 신비주의와 종말론적인 요소를 결합하고 있습니다. 중심에는 아기 예수와 마리아가 있습니다. 아기는 성모 마리아에게 의지하고 있으며, 그녀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아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머리 위에는 천사들이 날고 있고요. 이 장면은 신성한 축복의 순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배경은 신화적 요소가 가미된 정원으로, 이곳에서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곳에는 여러 천사들이 있으며, 그들의 의상은 각각 화려한 색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천사들은 다양한 상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루지아의 예언자들처럼 보입니다. 특히, 중심의 천사들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둘러싸며, 그들의 구속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림의 좌측에는 세 명의 왕이 그려져 있으며, 그들은 예수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비즈니스 복장을 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왕은 각각 동방에서 온 것으로 , 그들의 방문은 그리스도의 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른쪽에는 목자들이 예수를 경배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그들의 단순함과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비록 이 장면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하나, 보티첼리는 신의 귀환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전조로 이들을 연결지었습니다. 그림의 중앙에서는 아기 예수 주변에 여러 악마와 비정상적인 존재들이 함께 등장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이 궁극적으로 사탄의 지배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건임을 암시합니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을 통해 신의 구원과 세상의 구원을 강조하려고 했으며, 이는 당시 기독교 세계의 갈등과 불안함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비록 기독교적 주제를 다루긴 하지만, 복잡한 상징성과 깊은 인문주의적 요소들이 섬세하게 조화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원하시면 아래쪽 동영상 있으니 참고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evg2-C9f0iQ
그의 생애 동안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보티첼리의 명성은 그가 죽은 후 쇠퇴했고 그의 작품이 재발견되어 다시 한 번 찬사를 받은 것은 19세기가 되어서였습니다. 오늘날 그는 이탈리아 르세상스의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집니다.
말년에 이르러 보티첼리의 창조력은 급격히 쇠약해졌습니다. 질병 때문에 똑바로 설 수도 없어 목발을 짚고 다닐 만큼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림조차 그릴 수 없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 1452-1519)나 미켈란 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 1475-1564)와 같은 젊은 화가에게 밀려 잊혔고, 65세의 나이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세요.
https://www.dailymotion.com/video/x7nm118
https://www.youtube.com/watch?v=-sZwjie1OWs
'지식&교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51-46.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93) (38) | 2024.11.22 |
---|---|
51-45.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92) (8) | 2024.11.19 |
51-43.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90) (26) | 2024.11.05 |
51-42. 호안 미로( Joan Miro', 89) (40) | 2024.10.23 |
51-41. 파울 클레( Paul Klee, 88) (42) | 2024.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