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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기운이 무르익어 갈 무렵, 이탈리아는 여러 공국으로 분열된 상태였습니다. 각 지역의 통치자들은 혈통 대신 군사력이나 부를 이용해 왕위에 올랐습니다.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굳히는 일이 늘 화두였지요. 이것을 위해 결혼 동맹을 맺거나 외교적 제휴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확실한 방법은 명성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과 가문의 이미지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대 실력자의 수준은 그가 얼마나 유능한 미술가들을 고용하느냐에 달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 빈치와 벨리니 (Bellini)그리고 알베르티(Alberti) 같은 거장들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토양에서였습니다.

 

 

 

파도바 출신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를 소개합니다.   북이탈리아 만토바 공국 후작인 곤차가 (Gonzaga)의 궁정화가로 두칼레 궁의 천장 프레스코화 같은 많은 걸작을 남긴 화가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의 인물이나 사물에까지 원근을 적용하는 단축법을 혁신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 우첼로 (Uccello)나 엘 그레코 (El Greco)의 그림에서도 원근법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대담한 단축법의 시행은  만테냐가 처음이었습니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의 작품은 지금도 파도바의 오베타리 예배당을 가면 볼 수 있습니다. 만테냐는  원근법으로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그의 양식과 기법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 ,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 1452-1519),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1471-1528)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차용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천재성은 일찍부터 돋보여, 어린 시절부터 유명 화가의 제자로 들어가 일을 배울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의가 컸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 만테냐는 전통에 따라 그림을 작업했습니다. 회화 말고도 그는 다수의 동판화들을 만들었는데, 특히 동판화의 일종으로 부식 과정 없이 판면에 철침으로 직접 그림을 새기는 '드라이 포인트'기법을 개발해 여러 색조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만테나는 이탈리아 최초의 인그레이빙 (금속판에 끌로 직접 선을 새겨 인쇄하는 기법) 작가이기도 하고요.  원근법을 포함한 다양한 그의 기법은 몇 세기를 걸쳐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만테냐는 고전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파도바의 프란 체스코 스쿼치오네와 함께 작업을 통해 회화의 표현력이 탁월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특히 공간감을 다루는데 당대 최고였습니다. 

 

 

 

<Agony in the Garden>,1455-56/Egg tempera/wikipedia

 

 

 

<겟사마네의 기도 Agogy in the Garden>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북부 이탈리아 파도바 화파의 천재화가 만테냐(Andera Mantegna ,1431-1506)가 그린 종교화 중 가장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이 작품은 만테냐가 만토바공의 궁전화가 가 된 1456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목판에 템파라로 그린 약 25호 (80*63cm) 크기의 그림입니다.  그림의 소장자가 17세기 초부터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미술계의 3D 아시죠? (Death, Divorce, Debt) 1894년 노스브르크 백작에게서 현재의 런던 국립 회화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작품 내용은 신약성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올리브 동산의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제자들을 산기슭에 남겨두고 홀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 제자들이 골아 떨어져 있는 모습, 그들을 쫓는 무리들과 예루살렘 성, 그리고 하느님의 사자 어린 천사들을 압축법을 사용한 화면에 담고 있습니다.

 

 

 

세상 죄를 한 몸에 짊어진 하느님의 어린양,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인간으로서 그 고뇌와 슬픔을 억누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이 잔을 "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며 당신의 마지막 기도를 피땀이 흘리도록 바치시는 장면이고요. 한시도 깨어있지 못하고  깊은 잠에 골아 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칭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베드로와 야곱 그리고 요한이었는데도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자 어린 천사들이 십자가를 들고 하늘로부터  나타난 모습입니다.  이를 우러러 바라보며 기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맑은 표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룬 순간을 느끼게 합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검은색 의복과 오른쪽 나무의 죽은 가지에 앉은 한 마리의 새 (까마귀)의 존재도 이 장면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나봅니다. 중경에 위치한 예루살렘성의 건물들의 밝은 표현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층 강하게 부각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유다와 한 무리의 로마 병사들이 쫓아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Padova/아미코 이탈리아

 

 

 

<Picture Bearers(first Canvas)>,1450/wikipedia

 

 

 

<The Vase Bearers(fourth Canvas)>,1450/wikipedia

 

 

<Portrait of Cardinal Ludovico Trevisan>,1459-1460, Tempera on Panel, Gemaldegalerie, Berlin/wikipedia

 

 

 

 

 

<Death of the Virgin>,1462-1464,tempera &gold on panel, Museo del Prado,Madrid /wikipedia

 

 

 

그림을 살펴보면, 침대 주변에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한 무리가 삼삼오오 모여있습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온 것이죠. 그들의 손에는 성모에게 경의를 표현하는 물건들이 들려 있습니다. (시리오스라 부르는 촛불, 종려나무 가지, 책과 향). 이 둘 중 가롯 유다는 죽어서 없지만  이후에 뽑힌 마티아 사도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11명인 이유는 도마 복음서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도마가 인도로 선교여행을 갔기 때문에 이 장소에 없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배경이 등장합니다. '만투아의 호수'입니다. 특히 저 호수에는 <산 조리지오 (San giorgio)라고 불리는 다리가 서 있었는데, 사실적인 배경을 그림 속에 넣은 화가가 바로 만테냐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만 투아의 궁전이라는 사실이 의외이기는 합니다. 만테냐가 자신이 머물던 주변 풍경을 배경으로 선택한 거죠. 이 그림 속에 인물의 표현력이 자세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탈리아에 있던 모자이크를 모티브로 그린 그림입니다.  그 모자이크는 안드레아 델 카피뇨가 그렸던 구성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실내와 실외의 대조를 구성하면서 마치 내가 실제로 그 장소에 서 있는 느낌이 들도록 그린 그림입니다. 

 

 

곤자가의 루이 3세는 1458년 만투아의 두크성 예배당을 위해  이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이후 많은 변화와 소유의 변동 속에서 작품이 손상이 생겼다고 합니다. 1990-1991년 프라도 미술관에서 어두운 광칠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춘 복원 작업을 거쳤습니다. 

 

 

 

 

이 그림은 전형적인 베네치아 스타일로 평소에 사용하던 스타일처럼 차가운 색상으로 임종의 상황을 피부로 느끼게 그렸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조경을 보면 처남인 조반니 벨리니의 영향력이 풍기고 있기도 합니다. 안드레아 만테냐는 베네치아의 화가 집안인 야코포 벨리니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만테냐의 그림에 대한 실력은 엄청나게 진보하는 계기를 낳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u-0kAn4u6w

 

 

 

 

 

 

 

 

 

 

<Madonna with Sleeping Child>, 1465-1470,glue-tempera on canvas, Gemaldegalerie, Berlin/wikipedia

 

 

 

 

 

 

 

 

 

 

 

<신혼의 방 천장화 Camera degli Sposi>,1474, 이탈리아 만토바의 공작궁전/ Artchive

 

 

 

그는 만토바의 영주였던 루도비코 곤차가의 주문을 받아 <신혼의 방>이라고 불리는 궁전 침실을 그림으로 장식했습니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완벽하게 구사한 만테냐는 천장에 창을 그리고 그 주위를 풍성한 과일 묶음과 동그란 구멍이 뚫린 난간으로 둘러쌌습니다. 진짜처럼 보이지만 전부 그림입니다. 난간 위에는 공작새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수풀이 무성한 화분을 나무 막대 하나로 위태롭게  받쳐 놓아서 누군가 건드리면 아래 누운 이의 얼굴로 떨어질 것 같습니다.

 

 

옛적의 '신혼 첫날밤' 치르는 광경처럼 그 옆에서는 웃음을 띤  동네 여인들과 날개를 단 통통한 사내아이들이 침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여인네들 눈초리가 사뭇 날카롭습니다. '어디 한 번 보자.' 하는 식으로 우습기도 하고요. 화가의 유머코드가 심겨 있는 것 같아 재치 있다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신화의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이 아기들은 큐피드처럼 세속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난간 구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가 빠지지 않아 울고 있거나 사과를 아래로 던질 듯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천진한 아기들의 장난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다분히 성적인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금단의 열매였던 사과는 육체적 쾌락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터번을 두른 노예 같은 검은 얼굴도 보입니다. 

 

 

 

 

<Camera degli Sposi > view of the northern and western walls/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GN0P5RkQAow

 

 

 

The "Meeting Scene", 1474/wikipedia

 

 

 

 

 

 

 

 

 

 

<청동 다비드상> , 도나텔로 (Donatodi Niccolo di Betto bardi , 1386-1466)/wikipedia

 

 

 안드레아 만테냐는 도나텔로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렸으며 조각풍의 혁신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통을 따랐으며 무엇보다도 원근법에 능숙하여 최고의 궁정화가로서 동판화와 드로잉을 그렸습니다. 북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 하게 됩니다. 

 

 

 

 

 

<The Lamentation over the Dead Christ>,1480, Tempera on Canvas/wikipedia

 

 

 

 

 

 

 

 

<Lamentation on Dead Christ>/Silvia Minguzzi

 

 

 

 

거장  파올로 우체로 Paolo Uccello는 원근법과 단축법을 사용하여 사물을 입체적이면서 사실적으로 그리고자 애썼습니다. 단축법이란 단일의 사물이나 인물에 적용하는 원근법으로 대상의 형태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축소시키는 회화 작법을 말하는데 이러한 기법이 만테냐에게 영향을 미쳐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냈습니다.  대리석 위에 놓여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은 매우 비정상적인 비례의 그림입니다. 인체의 비례가 보통의 그림과는 다르게 화가가 발끝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로 인해 하체가 무척 짧게 보입니다.

 

 

 

상체는 조각같이 단단한 모습입니다.  손으로 만져 낸 듯 그린 몸에는 살 밑에 있는 단단한 골격이 드러나 있습니다. 얼굴의 미간에 있는  깊은 주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의 흔적을 적나라하게 부각시켰습니다. 또한 시신을 덮은 세마포의 주름은 마치 물결치는 듯한 로마풍의 조각을 연상시킵니다. 이로 인해   발과 손등의 못 자국 상흔 역시 도드라지게  보입니다.  만테냐가 진정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은 이 상처들과 심연의 슬픔을 안은 그리스도의 얼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1480)는 콜럼버스가 대서양 항해(1432)를 시작하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 빈치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꿈꿀 정도로 탐험과 혁명의 기운이 높았던 시절에 그려진 그림이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구도의 이 그림은 크고 두툼한 두 발에서 시점이 출발해 단연 단축시킨 몸통을 거쳐 발의 크기와 거의 비슷한 머리가 화면 뒤를 지탱하며 끝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끝을 소실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도로써 원근의 효과를 내려는 화가의 의도가 분명히 포착됩니다. 

 

 

 

 

언뜻 보면 마치 일꾼과도 같은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오히려 격조 높은 인간의 진실과 겸허함이 느껴집니다.  로마 후기의 목자상도, 비잔틴 교회제단 위에 그려진 제왕의 위엄을 갖춘 예수상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뤼네달트(Grunewald)의 "이젠하임 제단화"에서 보이는 것 같은 뒤틀린 고통의 형상도 아니고요.  이 절망과 같은 죽음의 그림은 도리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숭고함과 장엄한 죽음의 승리까지 느끼게 합니다. 

 

 

 

그것은 차라리 인간의 나약함에서 강한 믿음을 발견하려는 만테냐의 신앙 고백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만테냐 역시 르네상스 시대의 다른 화가들 처럼, 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진실한 속성에서 신의 숨결을 들으려 한 것 같습니다. 죽음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이라는 역설을 이 그림으로  다시 상기시키면서 말이죠. "... 한 알의 밀이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마태복음 12:24)

 

 

 

 

 

https://www.youtube.com/watch?v=8e20mMzj5Ug&t=270s

 

 

 

 

 

 

 

 

 

<동방박사들의 경배>,1461, 목판에 템페라 , 우피치 미술관,피렌체/wikipedia

 

 

 

 

이 그림은 만토바의 산 조르죠 성의 두칼레 성당 장식을 위해 루두비코 2세 곤차가가 주문한 세 폭 제단화 (왼쪽 패널:예수님 승천, 오른쪽 패널:할례)의 중앙 패널 부분으로 , <동방 박사들의 경배> 장면입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그린 주제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이 드러나게 되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만테나의 이 그림에서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비뿐만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의 신비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성모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십니다.  케루빔으로 둘러싸인 성모자가 있는 곳은 마구간이 아니라 동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동굴은 탄생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무덤의 공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성모님 위에 동방박사들의 여정을 인도한 자연계의 표징인 하늘의 별에서 빛줄기가 칼처럼 날카롭게 수직으로 동굴을 향해 내려져 있습니다. 뾰족한 칼은 어머니 성모마리아가 아들의 죽음으로  겪어야 할 고통을 상징합니다.  동굴 왼쪽 바위에는 무화과나무가 묘사돼 있고, 동굴 위에는 말라버린 나무에 새순이 자란 가지가 있습니다. 세 사람은 무화과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었다고 믿어 왔기에, 이 나무는 그리스도 수난의 상징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라버린 나무는 죽음을 , 새순이 자란 가지는 탄생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음 후에 다시 태어나 부활한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성화에서 세 명의 동방박사는 노년, 장년, 청년의 모습으로 각기 다른 연령층으로 표현됩니다. 각기 다른 연령층은 인간의 삶의 세 단계를 의 미하고, 다른 인종의 표현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온 인류의 기쁨임을 상징합니다. 동방박사들의 뒤로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이나 성모자 왼쪽에 소와 나귀 (이스라엘 백성과 이교도를 의미)에서도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인간세계뿐만이 아니라 자연세계를 비롯한 전우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으로 말합니다.

 

 

 

세 명의 동방박사는 모두 화화로운 궁정 예복을 입고 있습니다. 가장 나이 많은 박사는 꿇어 엎드려 있고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박사는 한 손에 예물을 들고 허리를 깊숙이 숙여 예수님께 경배하고 있습니다. 젊은 흑인 박사는 예물을 손에 들고 무릎을 꿇고 있고요. 동방박사들은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황금은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왕이신, 임금의 상징입니다. 유향은 가장 거룩한 제사에서 태우는 값비싼 향료료, 한 분이신 하느님을 의 미하고요. 몰약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뜻하는 예물로써, 참사랑이 심을 상징합니다. 박사들이 가진 예물을 아기 예수님께 드릴 때 그들은 바로 자기 자신들을 선물로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별을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동방박사에 대한 보답으로 하느님께서는 그 별빛보다 더 강력한 빛으로 그들의 마음을 비추십니다. 초라한 마구간(동굴) 구유에 태어난 아기였을 지라도 그들은 그 아기가 바로 세상의 구원자이자 자신의 구원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성 세바스티아노(St. Sebastian)>, 1478-1480, Tempera on liner/Obelisk Art History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노 St. Sebastian)> 작품입니다. 프랑스 남부 나르본(Narbonne)태생인 성 세바스티아(Sebastianus)는 283년경에 로마에서 군인이 되었고, 성 마르첼리아누스(Marcellianus 6월 18일 와 성 마르쿠스(Marcus,6월 18일) 부제를 격려하며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키도록 했던 열렬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는데, 그들 중에는 재판장, 그의 아내 성녀 조아 (Zoa, 7월 5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성녀 조아는 벙어리였으나 그의 기도로 완쾌되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간수 클라우디우스, 로마의 집정관 크로마티우스와 그의 아들 티부르티우스 등이 있습니다.

 

 

그는 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친위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황제는 그가 그리스도인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신자임이 드러난 것은 막시미아누스 황제로 그리스도교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그는 즉시 처형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나 성 카스룰루스(Castulus, 3월 26일)의 미망인인 성녀 이레네(Irene)가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가서 보니 아직 살아있음을 보고 극진히 간호하여 회복시킵니다.  그 후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황제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의 잔인성을 고발하자 황제는 화가 나서 그를 몽둥이로 때려죽이도록 한 다음 로마의 하수구인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에 던져 버리게 합니다. 그의 죽음과 용기는 신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요.

 

 

 

아피아(APPia) 가도,로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나무위키

 

 

 

한편 순교한 후에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로마에 사는 루치나(Lucina)라는 부인의 꿈에 나타나 하수구에서 자신의 시신을 찾아서 지금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당이 있는 자리 근처의 지하 묘지에 매장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의 시신은 루치나 부인에 의해 아피아(Appia) 가도에 있는 지하묘지에 묻혔고요.  그는 군인, 운동선수, 그리고 궁술가의 수호성인이자 전염병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전염병의 수호성인이 된 것은 680년 로마에 페스트가 발병했을 때 로마인들이 페스트가 멈추기를 기원하며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유해를 모시고 장엄한 행렬을 거행하자 그 뒤로 페스트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또 1575년에 밀라노 (Milano), 1599년에는 리스본(Lisbon)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보호를 기원하는 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점차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전염병 희생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자 , 이 사람이오" Ecce Homo>, 1500, tempera on canvas, wikipedia

 

 

 

만테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통에 따라 작업했고, 특히 고대 로마의 조각들의 형태를 인물에 반영했으며 , 환영적인 원근법을 능숙하게 사용했습니다.

 

 

<요한 복음서 제19장 1절-5절>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빌라도가 다시 나와 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수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하고 말하였다. 

 

 

만테냐가 1500년경에 그린 <자, 이 사람이오.>은 그의 말기 작품입니다.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던  때 그려진 작품이지요. 라틴어로 '에체 호모'(Ecce Homo)라 하고, 이 도상의 예수님의 수난을 말하는 전통적인 도상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에체 호모(Ecce Homo)' 유형의 그림들은 대개 예수의 머리나 상체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있거나, 종종 목둘레를 줄로 묶기도 하고, 손목을 결박하고, 채찍 자국이 있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경우 예수는 대체로 자신을 처형한 사람들을 연민의 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재현되곤 했습니다. 

 

 

 

만테냐는 선명한 색채, 뚜렷한 형태, 뛰어난 공간 구성에 대한 이해를 이용하여 이 유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예수의 옆에 있는 사악한 얼굴들은 모두 다섯인데, 이들은 그림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있고 예수의 살을 할퀸 터번을 쓴 늙은 여인의 표정과 손가락이 돋보입니다. 예수와 뒤의 처형자들이 삼각형 구도를 이루게 그림으로써, 만테냐는 그들 중 세 사람을 어두운 그림자 속에 묻게 하여 처형자들을 더욱 사악하게 보이게 했습니다. 예수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냈고요.

 

 

 

오른쪽 수석 사제의 이마에 쓰인 글자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고발한 내용입니다. 또 상단 양쪽에 모서리에 펼쳐진 종이에는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요한 19,6)하고 외쳤던 그 외침이 양쪽으로 적혀있습니다. 그 외침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졌기에 예수님의 배경에 검은 십자가의 형태가 형성되었습니다. 예수의 초점을 잃고 살짝 입을 벌린 슬픈 표정과 주변 처형자들의 매서운 시선이 현저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O8M3Aiat90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는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동시대는 물론 후대의 화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만토바에서 1506년 사망합니다. 만테냐가 르네상스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며, 특히 그의 영향은 처남이었던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와 독일의 거장 알브레흐트 뒤러(Albrecht Durer , 1471-1528)의 그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2024.05.15 - [지식&교양] - 51-15.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 66)

 

51-15.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 66)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는 베네치아 화풍의 기초를 세우고 완성한 화가입니다. 지암벨리노라는 별명으로 알려죠 있고요. 조반니 벨리니의 영향력은 조르조네(Giorgione 1478-1510)와 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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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는 베네치아 화풍의 기초를 세우고 완성한 화가입니다. 지암벨리노라는 별명으로 알려죠 있고요. 조반니 벨리니의 영향력은 조르조네(Giorgione 1478-1510)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76)에게  미치게 됩니다. 특히 가볍고 천천히 마르는 유채의 기법을 사용하여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감을 그림자를 통해 도드라지게 그려 완성한 화가로 유명합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내부와 북유럽(플랑드르 지역:벨기에 , 네덜란드)으로부터의 외부 영향에 개방적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베니스항을 통해 새롭게 이탈리아로 들어 온 유화 물감의 예술적 가능성을 시험하려는 의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강건한 기독교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인간상의 뉘앙스를  전하기 위해 그림을 사용하기로 결심합니다. 벨리니 작품 속 인물들은  인간적이면서도 신성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의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우화에 새로운 인간적 유연함을 가져다주듯이 말이죠. 벨리니의 오일 실험은 그의 작품의 전반적인 우아함을 더합니다. 그는 유화를 통해 가장 미묘한 색채 배열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을 완성했습니다. 그의 정교한 그림은 다른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줍니다.  많은 동시대 사람들 과는 달리 벨리니는  자연경관에 큰 존경을 표합니다. 자연계는 전형적으로 그려진 서사에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고안되었지요.  벨리니는 의상과 피부색을 섬세하게 표현해 낸 것 외에도 빛과 색채에 뛰어납니다. 

 

 

 

 

<Portrait of Doge Leonardo Loredan,1501-02, National Gallery,London/wikipedia

 

 

 

머리에 두른 관이 참 독특합니다. 근엄한 얼굴에 걸친 옷의 섬세한 문양과 장식 또한 실사 사진을 보는 듯 정교하고요. 당시 베네치아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초상화입니다. 벨리니의 <레오나르도 로레단 총독 The Doge Leonardo Lorodan> 초상화는 레오나르도 로레단 총독 통치  첫 해에 완성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옥외의 푸른 배경 앞에 놓인 받침대 뒤에 앉아 있는 완전한 예복 차림의 총독의 3/4 흉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베네치아 초상화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 전반에 대한  중요성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15세기 예술에 대한 공식적인 접근 방식의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실물 같은 초상화를 제작하는 예술가들이 슬슬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16세기 전반기에 그 수요가  엄청나게 급증하게 됩니다. 

 

 

 

 

 

 

베니스의 무역 연계는 벨리니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스튜디오들이 특히 네덜란드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로 진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초상화는 네덜란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첫번째 증거는 일반적인 이탈리아의 프로필과는 대조적으로 모델이 3/4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총독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갈색의 받침대 뒤에 그를 배치한 점이고요. 그가 관람자와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묘사했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템페라보다는 기름으로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이 매체를 통해 벨리니는 총독의 피부를 아주 부드럽고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정교함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벨리니가 그린 이 초상화는 베네치아를 통치하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지만, 위엄과 인간미를 동시에 지닌 현명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베니스의 푸른 하늘빛을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짙게 칠함으로써 인물의 사실적 묘사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총독의 눈동자의 평온함과 회피된 초점은 "베니스에서 가장 고요한 공화국"을 완벽하게 의인화하고, 빛이 비치는 오른쪽은 엄숙하고, 그늘진 왼쪽은 자애로워 보입니다. 금실로 짠 비단 망토를 입고 뿔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는 총독은 의상의 조화로 인해 절제되고 균형 잡힌 품성이 더욱 강조됩니다. 옷감의 광택은 벨리니가 일부러 물감을 거칠게 하여 표현했으며, 그의 화려한 예복은 전혀 사치스럽게 보이지 않고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nOKNSqNEcg&t=1s

 

 

 

 

 

 

 

 

 

 

 

베니스/디트NEWS24

 

 

 

벨리니는 베니스의 예술가 가문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야코보 벨리니(Jacopo Bellini)는 유명 화가였으며 그의 형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역시 화가였습니다. 매부인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는 르네상스 시대의 으뜸가는 화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반니 벨리니는 1400년대 북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아주 중요한 화가로 자리매김 합니다. 티치아노(Tiziano)나 틴토레토(Tintoretto)같은 베니스 화가들에게뿐 아니라 북 이탈리아 전 지역에 걸친 수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회화적 기술과 예술성은 이탈리아 후기 고딕 예술로부터 르네상스 문예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가교 역할을 합니다. 

 

 

 

<Agony in the Garden>,1459-1465, National Gallery,London/wikipedia

 

 

 

<감람산의 그리스도 The Agony in the Garden>는 유다의 배신으로 로마 군인들에게 포로가 되기 전 겟세마네 (Gethsemane)동산에서 그리스도가 기도하는 종교적 주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버전에서 그리스도는 바위 봉우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깨어있지 못하고 모두 잠에 골아떨어졌습니다. 유다와 로마 병사들이 오고 있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죠. 무릎 꿇은 예수님 위의 구름 속에는  천사가 보입니다. 다가올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컵과 성반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전경의 인물들 너머, 저 멀리 ,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로마 병사들과 유다의 모습이 보입니다. 

 

 

 

벨리니는 만토바(Mantua)보다 더 멀리 여행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야코포의 여행 덕분에 피렌체에서 유행하고 있던 원근법과 드로잉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학문은 벨리니에게 영감을 주어 그의 주위의 자연세계를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사실주의와 종교적 헌신으로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벨리니는  만테냐의 예루살렘 첨탑을 당시 베니스 주변 시골에서 발견된 정착촌으로 묘사합니다. 시골의 한산함은 군인들의 행렬을 더 먼 곳으로 배치함으로써 저 멀리 모여드는 폭풍 구름처럼 고요함은 임박한 운명의 강력한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그림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점은 벨리니가 감질나는 분홍빛 새벽빛을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강과 바위를 포착하고 넓은 계곡으로 물밀듯이 밀려들면서 떠오르는 태양의 핑크빛 온기는 주제의 긴장감과  상관없이 아름답습니다.  그 빛은 파랑에 골드를 첨가하여 한층 강화된 찬란함으로 예수의 예복 뒷면에 파문처럼 번집니다. 벨리니는 이런 식으로 빛과 색깔을 계속 활용함으로써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달인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UxGYgS1DyU

 

 

 

 

 벨리니는   르네상스 시대의 중요한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았을 뿐 아니라 파도바(Padova)에서 만테냐의 작품들을 접할 기회를 가집니다. 벨리니의 화풍은 부친인 야코보의 영향 아래 시작되었으며 베니스와 피렌체 회화를 결합한 형태입니다.

그의  부친은 한 때 피렌체에 거주하며, 그곳의 중요한 화가인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에게서 원근법의 새로운 기술들을 배우게 됩니다. 이 기술을 통해 아들 조반니는 드넓은 초원의 독창적인 풍경화를 개발하게 되지요. 수세기에 걸쳐 북부 유럽과 베니스 화파의 근본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San Girolamo nel deserto>,1455/wikipedia

 

 

 

 

벨리니에게 있어 가장 깊은 예술적 교류는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와 이루어집니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가 조반니 벨리니 동생 니코로시아(Nicolosia Bellini)와 결혼을 하면서 가족이 됩니다. 풍경과 인물 등 다양한 구도적 변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고요. 만테냐는 열정을 다해 벨리니에게 고전주의 형식 및 그레코-로만 양식의 고전미를 가르칩니다.  또한 만테냐의 고장인 파도바에서 피렌체의 위대한 조각가이자 고아출신의 화가인 도나텔로(Donatello)의 예술 세계와 만나게 됩니다. 벨리니는   피렌체의 르네상스 예술의 장대함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한편으로 만테냐에게서 고전주의 를 다른 한편으로는 도나텔로에게서 피렌체 예술의 합리성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벨리니의 화풍에는 피렌체와 베니스의 융합적 르네상스가 표현됩니다. 

 

 

 

 

 

 

피에타 Pieta(Dead Christ Supported by the Madonna and Saint John),1460/wikipedia

 

 

 

 

 

 

벨리니가 여기서 잉태한 슬픔은 오직 넘치는 인간성 속에서만 신성한 것이다. 
-미술사학자 로저 프라이(Roger Fry)-

 

 

 

 

<피에타 Pieta>는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 그림 아래쪽 가운데에 서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피에타'는 '연민','자비'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지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벨리니의 작품 역시 마리아와 요한이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칼에  찔린 상처와 십자가에 못 박힌 상처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세 인물은 중앙 전경에 위치하며, 그들 뒤에  가려진 농촌 풍경이 긴장감을 풀어줍니다. 이 그림은 벨리니가 만테냐와 파두안 학파의 양식적 관행에서 벗어난 것이어서 의미가 큽니다. 그것은 화가 자신의 독특한, 보다 조용하고 친밀한 스타일을 탐구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 의상의 뻣뻣한 직물은 훨씬 더 부드럽고, 더 광범위하고, 주름 잡힌 것으로 대체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주변적인 변화가 이미지에 더해져 어머니와 하나뿐인 아들 사이의 감정의 친밀감을 뒷받침합니다. 이것은 벨리니 작품의 한 단면으로서 앞으로 그의 그림에서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되어 갑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고전적인 주제와 구성을 개인적인 해석으로 주입하는 그의 능력입니다. 마리아와 비교했을 때 다소 건장한 모습의 요한은 예수의 시신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시울은 달아올라 있고 목 근육도 부풀어 올라 역시 개인적인 슬픔에 젖어 무언가를 외치고 있는 듯합니다. 마리아의 슬픔이 내면의 슬픔이라면 요한의 슬픔은 밖으로 울부짖는 절규입니다. 열렬한 한 제자의 상실감을 넘어  단순하고 보편적이며 고통스러운 어머니의 상실감이 전해집니다. 선과 윤곽에 대한 강조에서 벗어나 더 많은 모델링 된 평면과 명암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팔에 죽음의 무게를 더하고 그의 피부에 부드러움을 주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구세주의 피 The Blood of the Redeemer>,1465,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wikipedia

 

 

벨리니의 초기 작품 <구세주의 피The Blood of the Redeemer>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뒤에, 그의 피가 세계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고뇌의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들고 있고요. 천사는 미사에서 사용되는 것과 비슷한 성배로 옆구리의 상처에서 그의 피를 받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풍스럽고 이교도적인 의식을 묘사한 난간 양각들의 표현이 독특합니다. 1978년 세척을 통해 석고를 칠한 바탕, 즉 지면의 텅 빈 부분들은 원래 붉은색과 푸른색의 천사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나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많은 금색으로 구름처럼 그려졌고요. 왜 천사들이 제거되었는지, 언제 제거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St.Francis in Ecstasy>,1480/wikipedia

 

 

 

 

 

 

 

벨리니가 <법열에 빠진 성 프란체스코 St. Francis in Ecstasy>를 통해 선보인 감각적인 스타일과 화려한 색감, 명암은 베네치아화파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1475년 작품을 그리기 사작하여 1480년경에 완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작품은 뉴욕 프릭 컬렉션( New York Frick Collection)에 소장되어 있으며 헨리 클레이 프릭의 거실 (Henry Clay Frick's living room)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일부가 잘려나가기는 했지만 현재 보존 상태는 우수하다고 합니다. 벨리니의 걸작이며, 프릭 컬렉션(The Frick Collection)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르네상스 그림일지도 모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Saint Francis of Assisi)는 이탈리아 가톨릭교회의 탁발 수사입니다.  그는 수도사로 프란체스코 수도회(the Franciscan Order)의 설립자이기도 하지요. 현  프란체스코 교황님이 닮고자 하는 삶의 모델이시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표적인 종교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작품 속 성인은 15세기에 널리 알려진 성 프란체스코의 일대기에서 볼 수 있는 전설과는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도상학적인 모티브를 따르지도  않았고요.

 

 

 

화가는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가 홀로 돌이 많은 그의 소박한 은신처에서 영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듯한 황금빛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아마도 1224년 이 성인이 알베르나 산 (Mount Alverna)에 도피중일 때인 것으로 보입니다. 법열에 빠진 성 프란체스코는 모세처럼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벗고 맨발로 서 있습니다.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그의 얼굴은 하늘을 보고 있고요. 태양의 찬송을 부르고 있거나 그리스도의 성흔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화면 위쪽  위의 구름 속에서부터 나오는 초 자연적인 빛을 통해 신격화된 모습입니다.

 

 

 

 

그림에서  주목할 부분은 배경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왼쪽 상단에서 발원하는 달빛에  암석물의 벽을 밝히고, 오른쪽 전경에 성자와 그의 작업공간을 가리는 벽에 붙은 나뭇가지 뒤로 깊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이런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왼쪽 상단의 월계수는 마치 초자연적인 힘을 향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빛을 내면서 휘어진 모습입니다. 성인의 왼편에는 겸손과 인내이면서 동시에 나태함, 완고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되는 당나귀가 서 있습니다. 오른쪽 구석의 앞에는 전원생활을 연출하는 소박한 독서 테이블 위에 성자의 기도서가 있고요.

 

 

 

동굴은  프란체스코와 제롬 (Jerome)을 연관시킵니다. 왼편의 개울은 모세와 그의 위대한 샘을 상징하는 데 중앙의 메마른 나무는 모세가 호렙 산에서 발견한 불이 피어오르나 타지는 않는 나무, 불타는 수풀(Burning bush)을 의미합니다. 멀리 뒤편으로는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천상의 예루살렘이 나타납니다. 그 경치는 동물, 새, 사람, 식물, 캐슬, 두 개골과 샌들과 같은 물체, 심지어 종과 줄까지 세세하게 관찰된 세부사항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왼쪽  하단의 일부 나뭇가지에 걸린 종이 조각은 그 화가의 자랑할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성은 성 프란체스코가 창세기 (the book of Genesis)에 언급된 세상의 창조에 대해 명상하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D8KxM1Ia9c

 

 

 

 

 

 

 

<Madonna and Child with St. John the Baptist>,1480/wikipedia

 

 

 

 

 

당시 예술가들은 여행이 쉽거나 단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새로운기법을 배우며 서로 간에 관계를 맺기 위해 더 많이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 (Antonello da Messina)는 베니스를 방문하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거슬러 올랐다고 합니다.

 

 

조반니 벨리니는 플랑드르 화파의 화가들과 연분이 돈독했던 안토넬로를 만나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며 새로운 회화적 기법을 연마하게 됩니다 . 그는 부드러운 사실주의를 사용한 화풍을 발전시키며 조르조네(Giorgione), 티치아노(Tiziano), 그리고 틴토레토(Tintoretto)와 같은 훌륭한 베니스 화가들에게 길을 열어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BU3SwIANyQ

 

 

 

 

 

 

 

1480년 그의 형이 콘스탄티노플로 떠난 해로부터 벨리니의 경력은 성공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1483년 정식 월급을 받는 베니스 공화국의 공식화가로 지명됩니다. 1487년에는 예술적 성숙도가 드러나는 매우 중요한 작품 < 산 지오베의 제단 La Pala di San Giobbe>을 그리게 됩니다. 여기에 비잔틴식 모자이크 영상을 배경으로 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의 영향이 보입니다.

 

 

 

 

 

 

Gentile Bellini& Giovanni Bellini ,<St. Mark Preaching in Alexandria>, 1504-1507, Pinacoteca di Brera, Milan/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rudav6yjqNc&t=1s

 

 

 

 

 

 

 

<성 조베 제단화 San Giobbe Altarpiece>,1487, 이탈리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wikipedia

 

 

 

 

 

안토넬로 다 메시나 Antonello da Messina<Saint Sebastian>,1477-1479/wikipedia

 

 

 

 

 

 

 

 

벨리니의 작품을 보며  우리는 베니스와 비잔티움 사이의 깊은 관련성을  기억하게 됩니다.산 마르코 대성당 (Basilica di San Marci)은 베니스와 비잔티움 사이의 깊은 문화 예술적 관계를 보여주는 극명한 본보기입니다. 제단의 예를 들어 그림에 나타난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o)성인은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의 대표작 중 하나로 메시나의 인용을 언급할 수 있으며, 또한 세바스티아누스 성인은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양측으로부터 존경받는 성인입니다.

 

 

 

벨리니의 <성 조베 제단화 St Giobbe Altarpiece>입니다.   베니스의 성 조베 교회 (Church of St Giobbe)를 위해 그 려졌고요. 성인들과 천상이 모여 논의하는 성모 마리아라는 일반적인 종교적 주제를 그린 작품입니다. 관람객 입장에서 왼쪽으로 성 프란체스코 (St Francis), 성요한 (St John), 성 욥(St Job), 오른쪽 안쪽으로부터  성 도미니크 (St Dominic), 성 세바스찬 (St Sebastian, 화살), 성 루이(St Louis)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모마리아의 왕좌 아래에는 악기를 든 세 명의 천사가 앉아 있습니다. 이 그림은 베네치아 교회의 건축 속에 설정된 <성모자상; 성스러운 대화>의 최초의 예였습니다. 이전에, 신성한 집단은 천상의 환경 안에서 설정되었다면 벨리니는 그들을 바로 지상으로 데려옵니다. 성 조베 교회 안에 있는 원래 자리에는 성모 마리아와 그리스도와 모든 신자들이 예배자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는 암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림의 공간 안에 있는 것과 비슷한 기둥들로 둘러싸여 있었을 겁니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위대한 교회인 산마르코 대성당 (St Marks Basilica)의 실내를 연상케합니다. 친숙한 그림의 건축 양식이 이런 효과를 더 했을 겁니다.  둥근 지붕의 금과 성모 마리아 뒤의 벽에 늘어선 대리석은 모두 바실리카 성당의 매우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성경 장면에 대한 이러한 건축적 배경의 사용은 많은 미래의 종교 화가들, 특히 프라 바르톨로메오(Fra Bartolomeo)의 1512년 < 성 카타리나의 신비한 결혼 Mystio Marriage of St Catherine>에 영향을 주었고, 현재 플로렌스의 아카데미아 캘러리에 있습니다.  이 사진 속의 황금빛의 따뜻함은 아마도 벽에 걸린 방대한 양의 금에 의해 생성되는 산마르코 성당의 신성하고 신비로운 빛에서 영감을 받은 것일 겁니다. 이 그림이 주목할 만한 이유 중 하나는 단연 그 분위기를 꼽습니다. 이때쯤 벨리니는 점점 더 기름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는 기름을 사용하여 얇은 층 위에 다시 얇은 층을 쌓아 올려, 그 장면에 가득 찬 빛의  풍부함과 깊이를 부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xCTyVQMVbs

 

 

 

 

 

 

 

 

 

 

<Madonna with Child, infant St.John and St. Joseph>,1490 St. John on the small tree mirroring the enigmatic child in the Holy Allegory/wikipedia

 

 

 

 

 

조반니 벨리니는 항상 동방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리고 북유럽 예술 간의 교접접을 보이는 방식과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벨리니의 작품 중에는 많은 양의 성모화가 존재합니다. 그가 새로운 성모상의 도상을 위해 목판이나 그림 위에 스케치한 대부분의 밑그림들은 흔히 알려진 성화 표현법에 기초하여 표현되었습니다. 즉 성모는 성인들이나 그림의 기증자 혹은 투자가들로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습니다. 

 

 

 

벨리니  작품의 중요한 요소는 바로 종교성입니다. 이는 그가 비잔티움 세계와 연관된 1400년대 베니스의 문화적 여건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 아래 르네상스의 기독교관을 지닌 위대한 화가이며, 또한 풍경에 몰두 한 성스러운 관념의 전달자이기도 합니다. 이를 표현하고자  그는 신성함이 아닌 고전성으로 풍경 안에 녹아 들은 종교관과 고전 세계의 기법을 사용하며 전통적 그레코-로만 양식의 신들의 향연 (Festino degli dei)'을 내놓기도 합니다.

 

 

 

 

<축복을 내리고 있는 그리스도 Christ Blessing>,1500, Kimbell Art Museum Texas /wikipedia

 

 

 

 

벨리니의 <축복을 내리고 있는 그리스도 Christ Blessing>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 미스터리인  인간이면서  신성한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지상으로 보내졌을 때의 화신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축복을 하는 오른손을 들고, 왼손으로 부활의 기치(죽음에 대한 승리를 나타내는 적십자가 그려진 백기)의 밝고 붉은 지팡이를 쥐고 있습니다.  머리 위와 옆면에서 금빛 광선이 뿜어져 나와 그의 신성을 알립니다. 기독교적 연민의 메시지는 손과 가슴에 살짝 비치는 고통의 상처로 전해지는 반면, 그의 치켜든 팔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부활의 실체를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먼 풍경 속의 다양한 모티브가 부활의 주제를 암시하고요. 패널의 왼쪽에는 외로운 새 한 마리가 있는 말라죽은 나무가 보입니다.  낡은 구약을 상징합니다. 토끼 한 쌍은 재생을 의미하고요. 양 떼를 보살피는 목동은 그리스도 자신이 선한 목자임을 상기시킵니다. 

 

 

 

 

<산 자카리아 제단화 San Zaccaia Altarpiece>, 1505, 이탈리아 베니스 산 차카리아 교회/smarthistory

 

 

 

 

 

옛 날에 성모상은 성자들의 전통적 이미지로 엄격하게 측면 배치되곤 했다. 
벨리니는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고 단순 대칭적인 배열로 생명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산 자카리아 제단화 San Zaccaria Altarpiece>는 다시 한번 판자에 유화로 그린  한 예로서 벨리니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 작품을 세계 최고의 그림이라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일반적인 종교적 주제인 <성모자상;성스러운 대화>를 묘사하고 있고요. 다른 많은 예들과 마찬가지로, 그림의 중심에 성모 마리아와 차일드 아기 예수가 전통적인 피라미드 구조로 배치되어 있고, 성자들의 모습이 양옆에 나란히 그려져 있습니다.

 

 

이 경우 성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성 베드로 (St Peter), 성 캐서린(St Catherine), 성 루시 (St Lucy),  성 제롬(St Jerome)입니다. 이 성인 그룹은 성스러운 건축물 안에 위치하고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둥근 반형 지붕 아래 왕좌에 앉아 있습니다. 그의 경력 말년기에 만들어진 이 그림은 벨리니의 인간적인 모습과 관점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모든 것을 보여 줍니다. 그가 색채를 이용해 어떻게 작품 구성을 함께 결합시키는지에 대한 예이기도 하고요. 성자들의 예복의 대조적이고 보안적인 배열은 단순히 구조적인 것보다 더 깊은 조화를 만들어 냅니다. 성자들의 얼굴의 침착함과 평온함, 성 캐서린의  미소와 그의 책에 몰두하는 성 제롬은 성자들에게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는 , 그리고 초기 <성 조베 제단화 St Giobbe Altarpiece>에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선사합니다.

 

 

베니스의 산자카리아 교회의 측면 제단 위에 놓인  이 그림과 그 원근 화법의 건축 양식은 성 조베 제단화의 예와 같이 단순히 교회 내부 공간의 확장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그러나 탁 트인 평원의 주변 경관 덕분에 이 사례는 유명한 전작보다 더 큰 빛과 공간감을 줍니다. 

 

 

 

 

 

 

<시메온의 노래 Sacra Conversation( Nunc Dimittis)>,1505-1510, Museo Thyssen-Bornemisza,Madrid/wikipedia

 

 

 

 

주님 ,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시메온의 노래-

 

 

 

 

 

 

 

 

 

라틴어로' NUNC DIMITTIS'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거룩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고 경건하게 살았으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에게 아기 예수가 나타났고 이 아기를 안고 "눈크 디미티스 (NUNC DIMITTIS)"로 알려진 시메온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과부가 된 안나라는 여인과 함께 시메온은 "죽기 전에"하느님의 영광을 보겠노라는 예언을 듣고 매일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다리다 예수를 만난 후 예언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모든 화가들이 공통으로 그리는 이 그림은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고 그 오른편에 예언자 시메온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왼편에 젊은 여인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상징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의식에 의하면, 산모가 남자 아이를 낳으면 40일이 지나서 예루살렘에 와서 정결한 예식을 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합니다. 이때 만난 장면인데, 자세히 보면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안는 장면입니다. 보통은 아기의 두 어깨 사이에 손을 넣어서 아기를 안습니다. 하지만, 시메온은 두 손을 내밀어 마치 귀한 물건을 받듯이 하고 있습니다.  조반니 벨리니 외 수많은 화가들이 이 부분을 공통적으로 그립니다. 그 이유는 시메온의 겸손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시메온의 예언-

 

 

 

 

 

 

 

<거울 앞에 벌거벗은 젊은 여자 Naked Young Woman in Front of a Mirror>,1515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wikipedia

 

 

 

 그의 모든 예술적 기법들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작품은 현재 비엔나의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 Museum)에 소장된 <거울 앞의 벌거벗은 여인>입니다. 이는 노년기인 1515년에 탄생하며 종교적인 주제와는 별개로,  방안의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나체의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의 형상은 그레코-로만 양식의 고전적 여성상을 떠오르게 하고요. 그녀의 어깨 뒤에 걸린 거울에는 풍성한 머리칼을 덮은 망건이 비치며 마치 조각상에 견줄 만큼 유일한 완벽성을 보입니다.

 

 

 

 

거울이 걸린 벽면은 검은색으로, 보다 선명하게 형태의 특징들을 살리는 메시나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전형적 영향이 인용되었습니다. 왼쪽 뒷면의 창문을 통해 플랑드르 지방과 거의 흡사한 풍경과 창틀 위의 투명한 꽃병이 보이는데, 이는 머지않아 '정물화'라 불리게 될 새로운 화풍의 출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과일, 꽃 혹은 일상의 생명이 없는 사물을 주제로 대부분 그릇이나 물병 혹은 꽃병들을 표현한 1600년대 회화의 화풍을 말합니다.

 

 

 

또한 젊은 여인은 값비싼 옷감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녀의  뒤에는 거울이 걸려 있는 짙은 녹색의 벽면이 있고요. 벨리니는 주요 모티브와 풍경에서 같은 색상을 사용함으로써 두 영역을 이어주며 , 그림의 기본 무드는 온화하고 통일적입니다. 젊은 여자가 오른 손에는 또 다른 거울을 들고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거울은 한쪽은 허영(Vanitas)의 상징이고 다른  한 손에는 비너스의 속성 정숙함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벨리니는 두 거울의 장치를 사용하여 관찰자가 그림에서만 가능한 관점인 하나의 관점에서 여성 머리의 두 가지 관점을 볼 수 있게 합니다. 게다가, 그는 비록 물리적인 거리는 매우 작지만, 보는 사람의 시야에서 여성의 행동의  독립성을 강화합니다. 오른쪽의 작은 종이쪽지에 적힌 그의 서명에서 벨리니는 풀리니우스 (Pliny)에 의해 공식 표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림의 아름다움과 창조력이라는 작품의 기본 테마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입니다.

 

 

 

이  작품에서 여인의 모습은 성모들을 표현한 타 작품들과는 달리 관능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르네상스로부터 바로크에 이르는 아니, 모든 서양 예술사의 유산으로 남을 상징과 인용, 그리고 기법이 집합되어 있습니다. 성모와 같은 성스러운 형상이 젊은 여성의 명백한 아리따움을 통해 세속적이 아닌 거룩함으로 변화됩니다. 그 반대로 세속적인 젊은 여인의 육감적이며 관능적인 모습이 종교적으로 격상되어 거룩한 형상으로 뒤바뀌고요. 이러한 것들은 오로지 서로 다른 문화적 공간을 거슬러 계속적인 변화를 시도한 광대한 예술성의 뛰어난 화가 조반니 벨리니 만이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노화가의 비범함이죠.

 

 

 

신들의 축제 The Feast of the Gods(1524& 1529[Additions made by Dosso Dossi and Tirian], 미국 워싱턴 DC 국립 미술관/wikipedia

 

 

 

 

<신들의 축제 The Feast of the Gods>는 벨리니가 생의 막바지에 그린 소수의 세속적인 그림들  중  가장 훌륭한 예입니다. 가로로 된 배치에서 로마의 프리즈(방이나 건물의 윗부분에 그림이나 조각으로 띠 모양의 장식을 한 것)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구성입니다. 박카스 (Bacchus), 헤르메스(Hermes), 주피터(Jupiter), 판 (Pan), 냅튠( Neptune), 아폴로(Apollo)등 17명의 인물이 숲에서 잔치를 벌이는 오비디우스(Ovid)의 한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그것은 페라라 공작이 그의 학문을 위해 의뢰했고 따라서 그 주제는 좀 더 사적인 것으로 허용되었습니다. 많은 여신들과 요정들이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고 그림 오른쪽의 초록색 옷을 입은 프리아포스 (Priapus)가 잠든 로티스(Lotis)의 치마를 들어 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림에는 여러 가지 성적 상징들이 가득 있으며 중앙에 있는 부부, 복숭아색 옷을 입은 여인,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손을 얹은 옆에 있는 남자가 공작 내외의 초상화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벨리니가 죽은후, 화가 도소 도시 (Dosso Dossi)는 공작의 지시에 따라 그림을 수정합니다. 주된 변화는 원래 벨리니가  그린 인물들은 그대로 둔 채 풍경을 다시 작업한 티치아노(Titian)에 의해서 마무리되지요. 이 그림은 유명했던 벨리니 특유의 강렬한 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젊은 박카스의 푸른색 가운은 특히 유명하고요. 비록 이 형상들이 신들이지만, 그들을 거의 신들처럼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볼 때 이것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의 자연주의 적인 장면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벨리니의 이런 종류의 그림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필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간주되는 신화적 인물들을 인간화한 것으로도 귀결될 수도 있습니다.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회화의 특징은 "색조"와 "고전적인 자연주의 "와 "기독교의 영성"을 융합한 스타일입니다. 이런 영향력이 티치아노(Tiziano), 조르조네(Giorgione), 피옴보(Piombo)의 작품에서 더욱 크게 드러나고요. 조반니 벨리니는 당시 북유럽의 미학을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접목해서 더욱 활성화시키고자 늘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1425-1479)의 플랑드르 유화의 전달을 통해 조반니 벨리니는 풍부하고 화려한 자연과의 색채감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네치아라는 수상도시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가 지닌 장점을 충분히 활용한 화가라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 동 서양을 아우르는  문화 집합체처럼 융성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꽃 피웠던 베네치아 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 낸 화가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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