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1988년작)을 보신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중년 영화감독 살바토레 토토 앞으로 고향에서 한 통의 전화가 옵니다. 알프레도라는 남자가 죽었고, 내일이 장례식이라는 소식이죠. 알고 보니 이 토토라는 남자는 30년간 고향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토토는 회상에 잠기고, 고향에서 알프레도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립니다. 알프레도는 마을의 유일한 오락거리인 영화관의 영사실에서 일했습니다. 가난했던 토토에게 영화관은 유일한 놀이터였지요.
토토가 실연의 아픔으로 힘들 때, 알프레도는 이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말합니다.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이 마을엔 미래가 없고 ,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마을을 떠나라 합니다. 그리하여 말썽꾸러기 소년은 알프레도의 조언대로 고향을 떠나 성공한 영화감독이 되었고. 알프레도가 죽고 나서야 마을로 돌아옵니다.
다시 온 고향에서 토토는 알프레도의 장례식을 마치고 , 그가 자신에게 남긴 물건을 받습니다. 그건 알프레도와 토토가 함께 영사실에 있던 시절, 검열당해 상영되지 못한 무수히 많은 '키스 ' 장면이었습니다. 토토는 그 필름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수없이 많은 키스 장면이 편집된 그 영상을 보며 토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습니다. 선정적이라고 거부당했던 그 장면들을 보면서, 왜 그렇게 흐뭇한 표정을 지었던 걸까요. 아마도 두고 온 시절을 향한 그리움과 함께 했던 공동체를 향한 그리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미술계에서 <키스>하면 클림트 의 작품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림 속 남녀가 절벽 위에서 열정적으로 포옹하고 있는 작품말입니다. 이들의 옷이 독특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지요. 오스트리아 상징주의의 대표작으로, 클림트의 '황금시기'에 그려졌습니다. 금박을 사용하여 화려함과 부유함을 강조했고요. 낭만적 사랑의 황홀함을 묘사했던 작품이지요. 많은 종류의 굿즈로 만들어져 우리들 일상 안으로 들어온 작품이기도 하지요.
그런 클림트보다 훨씬 정열적이고 낭만적인 키스를 그린 이탈리아 화가가 있습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1791-1882)입니다.
첫번째 <키스 II bacio> 버전입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1791-1882)는 총 5가지 버전의 키스 작품을 그렸다고 합니다 (유채 4, 수채 1). 연인들이 작별할 때 나누는 '키스(Kiss)'는 육체는 떨어져 있지만, 영혼만은 항상 곁에 있을 것이라는 하나의 징표 같은 것이죠. 그래서인지 보고만 있어도 찌리릿 할 정도로 은밀하고 강렬한 모습입니다.
19세기 중엽 이탈리아는 나폴레옹 체제 이후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인해 자유주의와 해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지요. 세 차례에 걸친 독립전쟁과 프랑스&오스트리아 간의 외교교섭으로 인해 이탈리아는 드디어 독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랑스혁명( 1789-1799)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으로, 절대왕정과 신분제의 모순을 타파하고자 일어났습니다. 주요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과 불평등한 세금 제도, 그리고 계몽사상과 미국 독립 전쟁의 영향이었습니다. 이 혁명은 루이 16세의 처형과 공화정 수립, 나폴레옹의 등장을 통해 급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에 큰 여향을 미쳤습니다.
이탈리아 통일(1815-1870)을 위한 세 차례의 독립 전쟁
1.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1848-1849):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오스트리아에 맞서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해방하려 했으나, 오스트리아의 군사 개입으로 실패했습니다.
2.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1859): 사르데냐-피에몬테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여 롬바르디아를 획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3.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1866):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중에 이탈리아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워 베네치아를 통합했습니다.
이탈리아 통일은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촉진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이탈리아의 통일이 독일 통일에 대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이탈리아가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유럽 내 세력 균형이 재편되었습니다.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프랑스와 사르테냐-피에몬테 왕국의 동맹은 유럽 외교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이는 나폴레옹 3세의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 프란치스코는 당시 독립 전쟁에 참가한 이탈리아 병사와 프랑스인 여성이 나눈 뜨거운 키스 장면을 작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실제 인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국적과 복장, 키스 행위는 나름의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병사가 입고 있는 초록색과 빨간색은 이탈리아를 나타냅니다. 여인이 입고 있는 푸른색과 하얀색은 프랑스를 상징하고요.
브레라 미술관( Pinacoteca di Brera)의 간판으로 통하는 작품 <키스>는 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 동맹관계를 의미합니다. 가로 88cm, 세로 119cm 크기의 아담한 작품입니다. <키스>는 전장에 나서는 의용군 청년이 연인과 입맞춤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표정은 알 수 없지만, 키스로 연결된 남녀의 불타는 사랑이 그림 밖으로 번질 듯한 구도입니다다. 프란체스코의 부모님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연인 혹은 부부와 같은 관계로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XE64VzKjnY
밀라노에 가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브레라 미술관입니다. <키스>는 브레라의 2층 마지막 갤러리 제38호실에 전시돼 있습니다. 1층부터 하나씩 살피면서 관람할 경우 제일 마지막으로 만나는 명화가 '키스' 작품입니다. 38호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의 중심 테마는 통일입니다. 다시 말해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에 관련된 그림들이 브레라 뮤지엄의 마지막 전시화 들인 거죠. 따라서 38호 갤러리는 보통 '통일 갤러리'라고도 불립니다.
이탈리아 반도 내 통일을 달성한 것은 1871년입니다. 통일 운동이 1820년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반세기에 걸쳐진 결과물인 셈이죠. 이탈리아인은 19세기 이룩된 통일을 '리솔지멘토(Risorgimento)'라 부릅니다. '재기, 부활'이란 의미이고요. 대제국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건한 것이란 의미가 함축돼 있습니다.
통일 갤러리 주인공은 역시 하예즈의 명화 <키스>입니다. 이탈리아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그림인 동시에, '리솔지멘토(Risorgimento)' 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나눠집니다.
이탈리아 통일을 도와준 프랑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의 키스가 첫 번째입니다. 리솔지멘토(Risorgimento)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 합스부르크가 의 억압정치에서 시작됐습니다. 나폴레옹 사후의 유럽질서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베니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국토의 상당수가 오스트리아 수중에 넘어갑니다. 원흉인 합스부르크가를 타도하는 과정에서 이탈이아와 프랑스가 힘을 합칩니다. 중세 봉건제를 타도하자는 나폴레옹의 혁명이념이 이탈리아 지식인의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거지요.
두 번째 해석은 전장으로 떠나는 통일 의용군의 마지막 인사로서의 <키스>입니다. 붉은색은 리솔지멘토(Risorgimento)를 주도한 가리발디(Garibaldi) 의용군의 상징입니다. 이탈리아 곳곳에 존재한 중세체제를 타도하는 과정에서 가리발디 의용군이 무력으로 타도했습니다. 명화 <키스>는 붉은 바지 청년이 의용군으로 떠나기 직전의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최후의 순간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장면입니다. 숭고하고도 고결한 목적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청년. 그를 지지하고 아끼는 여성과의 애틋하고도 순결한 시간이 화폭에 담겨 있습니다. 청년이 계단에 왼쪽 다리를 올린 것은 이별의 키스가 끝나는 순간 곧바로 떠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입니다. 사랑과 애국심이 동시에 발현된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작품 < 키스 II bacio> 였습니다.
가리발디(Garibaldi) 의용군은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주세페 가리발디가 조직한 부대입니다. 1859년에는 알프스 의용대를 조직했으며, 1860년에는 "붉은 셔츠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부대를 결성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 부대는 가리발디의 지도 아래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여러 전투에 참여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syBHOw5gg0
https://www.youtube.com/watch?v=0nxtgbNZufU
https://www.youtube.com/watch?v=q4zyEOkMveY
1791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1791-1882)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이모의 손에 길러졌다고 합니다. 미술에 재능이 있어 밀라노와 로마에서 미술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는 복원가가 되기 위한 도제 생활을 하기도 했고, 프란체스코 마지오토의 제자가 되어 3년 동안 그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밀라노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테오도로 마테이니에게 그림을 배웠습니다.
프란체스코 아예즈는 1809년 베네치아 아카데미 대회에서 우승하여 로마의 산 루카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는 1814년 그의 나이 24세 때까지 로마에 머물렀습니다. 이후 프랑스 장군 요아킴 뮈라의 의뢰로 작품을 그리는 등 활약하다가 1850년 밀라노의 브레라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생의 후반 약 30여 년간을 브레라 아카데미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하예즈의 작품은 주로 성서와 역사, 인물을 주제로 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당대의 유명 인사들을 그린 초상화로 커다란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전의 바로크와 로코코의 웅장하고 화려한 기법을 거부하고 단순함과 명료함 등 신고전주의적 요소를 따랐습니다. 또한 그가 표현한 전체적인 색채의 분위기와 이미지들은 개인적인 감성과 인간과 자연이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짙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크: 17세기에서 18세기 초반까지 유럽에서 유행한 예술양식으로, 미술, 건축, 음악, 문학 등을 포함합니다. 이 양식은 포르투갈어로 '찌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perola barroca'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바로크 양식은 역동적이고 현란한 장식, 과장된 표현이 특징입니다.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하고 부분들의 조화를 통해 균형을 강조합니다.
로코코 양식: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로코코 양식은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이 특징입니다. 곡선과 비대칭성을 강조하며, 밝은 색상과 관능적인 주제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로코코는 실내 장식에 중점을 두었고, 귀족적인 쾌락과 우아함을 표현했습니다.
신고전주의: 로코코 이후 등장한 신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재해석한 양식으로, 엄격한 대칭성과 간결함을 중시했습니다. 이 양식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성적이고 질서 있는 미를 추구했습니다.
계몽주의: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철학적, 문화적 운동으로 이성과 과학을 통해 사회의 무지와 미신을 타파하고 현실을 개혁하자는 사상입니다. 계모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권위와 종교적 독단에 반대하며,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강조했습니다. 이 운동은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진보를 추구하며,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하예즈는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의 이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화가였습니다. 그의 그림은 기법보다는 주제에서 더욱 낭만주의적이며, 극도로 세밀한 묘사와 인물의 미세한 감정변화까지 포착해내는 정교함으로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1809년 베네치아 아카데미 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화가로서 확고한 입지를 잡게 됩니다. 이후 다양한 나라에서 작품 의뢰가 들어왔고요. 당시 신고전주의의 영향으로 주로 성서, 역사, 소설 속 인물들이 작품의 주제로 조명받는 시대였습니다. 프란체스코 또한 이전 시대에 유행한 바로크, 로코코의 화려한 화풍을 거부하고 단순하고 명료한 신고전주의 화풍을 따랐습니다.
<라오쿤>은 낭만주의 스타일의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서 라오쿤이라는 사제의 이야기를 묘사한 신화적 작품입니다. 유화로 캔버스에 그려졌으며 , 크기는 246*175cm입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팔라초 브레라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라오쿤은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의 신관으로, 아폴론을 섬겼습니다. 그는 토로이 전쟁 중 그리스군의 목마를 성 안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으나, 이로 인해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해신 포세이돈이 보낸 두 마리의 큰 바다뱀에 의해 라오쿤과 드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트로이 목마의 함정을 경고한 라오쿤의 비극적인 운명을 보여줍니다.
프란체스코의 가장 대표적인 초기 작품은 <리날도와 아르미다 Rinaldo and Arimida>(1813)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배경입니다. 십자군 전쟁 영웅 리날도와 그의 연인 아르미다 그리고 동시에 아르미다로 변신한 적장의 여 마법사에 관한 그림입니다.
1099년 예루살렘을 포위한 십자군의 사령관 고프레도는 명장 리날도에게 예루살렘 함락에 성공하면 그가 사랑하는 자신의 딸 아르미나와의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미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허락을 못 받았던 리날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습니다.
여 마법사 아르미다가 리날도의 연인 아르미나로 변신해 유혹하는 장면입니다. 리날도는 아르미나를 생각하며 그리운 마음을 키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처럼 위협적인 아르미다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리날도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마터면 이루어질 수 없을 뻔한 사랑을 애틋하고 정열적으로 그린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표현이 낭만적이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로코로 시대 프랑수아 부셰(Francois Boucher, 1703-1770)의 작품 < Rinaldo and Armida>(1734) 과 비교해 보세요. 다른 점도 찾아보시고요.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1791-1882)의 작품 <알키노오스의 궁정에 있는 오디세우스 Oaysseus at the Court of Alcinous>(1814-1816)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장면의 본질을 포착하는 여러 주요 요소를 특징으로 합니다.
이 그림은 오디세우스가 알키노오스 왕의 궁정에서 열린 연회 중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에서의 자신의 업적을 노래하는 곡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강조되어 감정적 강도가 두드러집니다. 배경은 알키노오스 왕과 아레테 왕비가 있는 왕궁을 포함하며, 환대, 정체성, 영웅의 여정을 주제로 합니다.
오디세우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영웅입니다. 지혜와 꾀로 유명하지요.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트로이 목마 전략을 고안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호메로스의 서서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으로, 전쟁 후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을 그린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그는 육체적인 힘보다는 지혜와 인내를 중시하며, 여러 신화 속 사건에서 냉정하고 전략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호메로스: 고대 그리스의 시인입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라는 두 편의 서사시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고대 그리스 문학의 기초를 이루며, 호메로스는 역사적으로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됩니다. 그의 서사시는 이오니아 방언으로 쓰였으며, 호메로스가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그의 작품은 서양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후 10년 뒤 베네치아와 로마, 밀라노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은 프란체스코 하예즈는 이탈리아 설화을 바탕으로 탄생한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키스 한 장면으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1823년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창문을 사이에 두고 키스를 나누는 모습과 달리 그림 속에서는 창문을 통해 줄리엣의 방으로 들어온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키스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둘은 원수 관계에 있는 가문 자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었죠. 그 때문인지 애틋한 감정이 둘 사이를 흐릅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4세기 이탈리아 베로나입니다. 이 시기는 로마의 변혁기였으며, 두 가문 간의 갈등 속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두 주인공의 금지된 사랑과 그로 인한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사랑의 순순성과 가족 간의 갈등을 탐구합니다. 또한, 두 연인의 죽음이 적대적인 두 가문 간의 화해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보여주고요. 운명과 죽음, 사랑의 순결성, 그리고 가족 간의 갈등을 주요 테마로 삼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8nidgnpNdM
https://www.youtube.com/watch?v=r50AhS3gspY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 1616):잉글랜드의 극작가이자 시인으로 , 영어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햄릿>, <오셀로>,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등 수많은 희곡과 소네트를 남겼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시대를 초월한 주제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공연되고 있습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작품 <Self-Portrait in a Group of Friends>(1824-27)는 19세기 밀라노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유럽 초상화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자화상이 아니라 문화적 선언으로 여겨지며, 낭만주의 시대의 밀라노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예즈는 이 작품에서 자신을 중심에 두고 네 명의 친구들고 함께 그렸습니다. 이들은 화가 조반니 밀리아라, 펠라지오 팔라지, 주세페 몰테니, 그리고 작가 토마소 그로시로, 모두 낭만주의 스타일의 대표자들입니다.
이 작품은 키프로스의 여왕 카테리나 코르나로가 왕위에서 물러나는 역사적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121*151cm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졌습니다. 현재 이탈리아 베르가모의 아카데미아 카라라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카테리나 코르나로(Caterina Cornaro)는 1454년 베네치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키프로스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1468년 , 키프로스의 제임스 2세와 결혼하여 베네치아와의 동맹을 강화했습니다. 제임스 2세는 1473년에 사망하였고 , Caterina는 아들 제임스 3세의 섭정으로 통치하다가 아들의 사망 후 여왕으로 즉위했습니다. 1489년 베네치아의 압력으로 퇴위하고 아솔로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아소로에서 여생을 보내며 예술과 문학의 중심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궁정은 르네상스 후기의 예술과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화가 젠틸레 벨리니와 시인 안드레아 나바게로 등이 그녀의 궁전을 방문했습니다. 특히 시인 페에트로 벰보는 아소로를 배경으로 한 플라토닉 사랑에 관한 대화집 <Gli Asolani>를 집필했습니다. Caterina는 아소로에서 20년 이상을 보내며 예술적 , 문학적 활동을 후원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그녀가 1510년 사망할때까지 아소로를 문화적 허브로 만들었고, 그녀의 궁정은 예술과 문학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야곱과 에사우의 만남 "(1844)은 창세기의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사우가 화해하는 성경 이야기를 묘사한 유화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는 야곱이 에사우의 장자권을 속임수로 뺏앗은 후, 두 형제간의 갈등과 그로 인한 후손 국가들 간의 분쟁을 다룹니다. 작품은 이러한 역사적이고 감정적인 재회를 강조하며, 야곱이 에사우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이루는 순간을 표현합니다.
이 그림은 208cm*300cm의 큰 크기로 유명합니다. 하예즈는 19세기 중반 밀라노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역사화와 초상화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야곱의 속임수로 인해 소원해졌던 형제들이 마침내 재회하는 극적이고 감정적인 순간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프란체스코 하예츠의 작품 < 비밀 고발 Accusa Sereta>(1847-1848) 입니다. 낭만주의 스타일의 장르 회화로,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졌습니다. 그의 복수 삼부작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의 크기는 높이 153cm , 너비 120cm입니다.
이 작품은 마리아라는 여성이 배신한 연인을 정치적으로 고발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익명으로 연인을 비난하는 편지를 게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당시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_6A8c02ZT4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작품 <어린 시절의 안토니에타 네그로니 프라티 모로시니 백작 부인의 초상 Portrait of Countess Antonietta Negroni Prati Morosini as a Child>은 1858년에 제작된 유화입니다. 이 작품은 하예즈의 낭만주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지요. 그녀의 아버지인 알렉산드로 네그로니 프라티 모로시니 백작의 의뢰로 만들어졌습니다. 약 133.5cm*110cm 크기로 , 하예즈의 후기 초상화 중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u7LZtNFtko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1867년 작품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서기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포위와 파괴를 묘사합니다. 이 작품은 성전의 파괴와 그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혼란과 황폐함을 포착합니다. 유화로 제작된 이 역사적 작품은 82*183cm크기로 , 역동적인 구성과 감정적 강렬함으로 유명합니다. 하예즈의 작품은 당시의 투쟁과 혼란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억압과 갈등이라는 더 넓은 주제를 반영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두 차례 파괴되었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왕에 의해 건축되었으나, 바벨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습니다. 두 번째 성전은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 유대인들이 귀환하여 재건하였고, 헤로데 대왕에 의해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도 로마 제국의 티투수 장군에 의해 서기 70년에 파괴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로마 전쟁의 일환으로,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발생하였으며, 성전의 파괴는 유대교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유대교 사회에 여려 가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성전이 파괴되면서 유대교는 성전 중심의 제사 의식에서 벗어나 회당과 율법 연구에 집중하며 유대교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했고, 이는 오늘날 랍비 유대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또한 성전 파괴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를 가속화시켰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종교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오달리스크>(1867)는 오리엔탈리즘 스타일의 장르 회화입니다. 이 유화 작품은 82*68cm크기로, 이탈리아 밀라노의 팔라초 브레라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하렘의 여성 시종인 오달리스크를 묘사하며, 19세기 유럽 미술에서 인기 있는 주제였습니다. 작품은 하예즈의 낭만주의 스타일의 특징인 풍부한 색감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하렘: 역사적으로 이슬람 문화권에서 왕이나 귀족의 여성 가족들이 거주하는 구역을 의미합니다. 하렘은 일반적으로 외부인, 특히 남성의 출입이 제한되었으며, 여성들만의 생활공간으로 기능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왕의 부인, 첩, 자녀,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시녀들이 생활했습니다. 하렘은 단순한 거주 공간을 넘어 정치적, 사회적 역할도 수행했으며, 왕실의 권력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HljIFz-QIE
'피옴보 계단에 선 마리노 팔리에로 최후의 순간 The Final Moments of Doge Marino Faliero on the del Piombo" Staircase)'이란 긴 타이틀의 유화이지요. 왕정 쿠데타를 시도한 베니스 총독 팔리에로의 마지막을 그렸습니다. 10점 가운데 가장 큰 가로 192cm, 세로 238cm 에 달하는 대형 작품입니다.
팔리에로(Paliero)는 유럽 중세사에 등장하는 비극의 주인공 중 한 명입니다. 1354년 공화국 베니스의 대표자인 도지 (Doge, 행정 최고 지도자)에 오른 인물이 입니다. 도지에 오르자마자, 공화국 체제를 왕국으로 바꾸려는 쿠데타를 벌이려다 적발됩니다. 체포된 뒤 시민법정에서 최악의 형벌에 처해집니다. 공개 참수와 사지 절단으로 말이죠. 관련된 10명도 전부 비슷한 형벌에 처해진 뒤 베니스 시민 모두에게 공개됩니다. 공화정에 반대할 경우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지를 보여준, 이탈리아 정치의 기본정신이 팔리에로 그림에 나타나 있습니다.
피옴보 계단에서 내려오는 팔리에로는 검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공개 참수 형벌이 내려진 직후의 모습일 듯하고요. 도끼를 들고 있는 참수 집행자가 그림 하단에 들어서 있습니다. 붉은 옷을 입은 베니스 인들이 차가운 시선과 더불어, 어두운 표정의 팔리에로 얼굴이 인상 깊습니다. 19세기 이탈리아 리솔지멘토(Risorgimento)는 폭정과 압제에 대한 반발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외부의 개입과 함께 이탈리아 전체가 조각난 채 경제, 종교, 정신적 수탈이 어어졌습니다. 하나로 합쳐, 공화정에 기초한 하나의 원칙에 의해 국민 한 명 한 명이 모두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자는 것이 리솔지멘토(Risorgimento)의 근본이념입니다. 반대자는 팔리에르와 같은 운명에 처해질 뿐이라는 강력한 결의가 하예즈 그림 속에 각인돼 있습니다.
리솔지먼트(Risorgimento):19세기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위한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의미합니다. 이 운동은 이탈리아 반도에 여러 독립된 국가와 외세의 지배를 끝내고, 하나의 통일된 이탈리아 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리솔지먼토'는 이탈리아어로 "부흥" 또는 "부활"을 의미하며, 이탈리아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부상을 상징합니다.
제55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대통령)인 마리노 팔리에로가 베네치아 시민들 앞에 섰습니다.
"참수형을 시행하고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라."
그리스 미래의 전통인 기억 말살형(damnatio memoriae)에 처해진 팔리에로의 초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색 캔버스가 있습니다.
팔리에로는 청년기부터 베네치아 정치에 깊숙이 참여한 인물입니다. 베네치아의 입법, 사법, 행정의 요직을 두루 거친 후 도제의 자리에 오른 노련한 정치가 였지요. 하지만 참수와 함께 기억말살형( dammatio memoriae)에 처해집니다. 80세 먹은 노인이 새삼스럽게 왕정을 수립해 절대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고 합니다. 고령에다 최고 행정 수장이라는 점, 공화국에 대한 오랜 봉사와 공헌을 고려해 형을 경감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기억 말살형'이 내려집니다. 팔리에로는 목이 잘린 후 사지를 찢기는 형벌에 처해졌습니다. 그 누구도 공화정과 법치를 깰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인 것이죠. 지금도 역대 베네치아 도제(대통령)의 사진이 놓인 벽 면에 제55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였던 마리노 팔리에로의 자리만 초상이 없습니다. 다만 검은색 캔버스가 그의 초상을 대신할 뿐이죠. 안타깝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 그 자리에 있는 한 그의 이름은 대대손손 잊힌 이름인 채로 역사에서 지워져 버렸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3KVXsBskMw
2024.08.03 - [지식&교양] - 51-32.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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