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여성 화가입니다. 미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독자적인 기념미술관을 가진 최초의 여성화가이기도 하고요. '매혹적'이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그림들을 그린 화가입니다. 특히 꽃의 한 부분을 과감하게 확대하여 화면 가득 채운 화가입니다. 당시 남성 화가들이 잘 쓰지 않았던 분홍빛 계열과 같은 색채를 수채화처럼 부드럽고 오묘하게 표현한 시리즈로 유명합니다. 늘 주변부에 머물렀지만 한 세기가 지나도 시들지 않는 매력으로 다가오는 화가입니다. 힌트를 너무 많이 드렸나 봅니다.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e, 1887-1986)의 시간으로 떠나봅니다.
조지아 오키프의 1965년 작품 <구름 위의 하늘> 연작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입니다. 그녀가 비행기 안에서 내려단 본 구름의 모습들 입니다. 상상이 가시죠? 가로 7미터, 세로 2.5미터의 이 작품은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큽니다. 이 작품의 제작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고스트 랜치(Ghoast Ranch)의 차고를 제2의 작업실로 개조했습니다. 매일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이곳에서 열정적으로 작업했지요. 차고에 난방시설을 갖추지 않아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했거든요.
이 작품은 타원형의 작은 구름들이 끝없이 펼쳐진 하얀 물방울 카펫처럼 먼 수평선을 향해 펼쳐져 있습니다. 마치 대기의 무한한 차원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고요. 이러한 구름의 구성 방식은 '안마당 연작'에서 주제로 삼았던 공간적 관계를 도입한 것입니다. 무한성과 보편성에 대한 강렬한 도전을 암시합니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e, 1887-1986)는 미국을 대표하는 추상 표현주의 화가입니다. 강렬한 색채의 추상적인 꽃 그림과 미국 남서부의 풍경을 미니멀리즘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대표적이죠. 그녀의 추상화된 꽃 그림들은 에로틱하면서 도발적인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강렬한 색채와 과장된 크기가 때론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1910년부터 1970년대까지 뉴욕과 텍사스 그리고 뉴 멕시코를 오가며 활동한 화가입니다. 그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재들에 애정을 쏟아부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싯구가 생각날 정도로 말입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관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대상들의 소소하고 작은 모습들에 애정을 기울입니다. 관찰한 사물의 핵심은 그녀의 붓끝에서 도발적인 색을 입고 강렬한 에너지를 뿜으며 거대한 크기로 피어납니다.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크기로 추상화해 냄으로써 보는 이의 시선을 자석처럼 끌어당깁니다. 길가의 꽃들과 뉴 멕시코의 사막과 돌산의 마른 풍경을 섬세하게 훑어내려 갑니다. 오키프의 대상의 본질을 담아내려던 그녀의 의지에 박수를 보낼정도로 말이죠.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e, 1887-1986) 는 삶에 대한 깊은 애착을 꽃으로 표현한 여인이라고 정의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녀가 그린 꽃과 뉴 멕시코의 풍경들은 그녀 자신의 본성이자 자연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삶은 예술과 완전한 통합을 이룬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녀의 초기 몇 년은 마치 흙에 대한 무한 애정을 가진 정원사 같습니다. 뉴욕주의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조지 호수의 스티글리츠 저택에 기거하던 시절, 그녀는 정원을 가꾸는 일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꽃의 접사와 나무와 나뭇잎들을 그리지요. 스무 점이 넘는 칸나와 페투니아, 양귀비 ,칼라, 릴리 등 을 줌인하여 관찰하고 그렸습니다. 이후 남서부의 사막 한 가운데로 거쳐를 옮긴 이후에도 생명의 원초적 본질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정원을 일구고, 계속해서 꽃을 그려나갑니다.
난 완전히 새로워지는 중이야.
내가 이제껏 했던 모든 것을 집어던졌어.
그것들 중 어떤 것도 또 다시 집어 들지 않을 거야.
영훤히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오랫동안 그렇게 될 거야.'
-1915년 친구 애니타 폴리처에게 보낸 편지 중-
평범하게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곳에 살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말하고 싶다고 모두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바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 1887-1986-
https://www.youtube.com/watch?v=rEhy-aNN9XA
1887년 미국 위스콘신(Wisconsin)의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뉴욕과 텍사스 등을 오가며 그림을 그렸고요. 열 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고 배우기 시작했으니 생의 초기 10년과 시력을 상실했던 말기의 15년을 제외하고는 일평생 그림을 그렸던 화가입니다. 시카고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던 그녀는, 피카소가 아비뇽의 여인들을 그리던 그 해에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맨해튼에서 그림을 공부하며 꽃과 정물들을 주로 그리며 동료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하고, 상업 미술과 미술 선생님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그림을 잠시 중단하기도 합니다. 한때, 노스 캘로라이나와 텍사스에서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아서 웨슬리 도브를 만나게 됩니다. 그에게 배우면서 선과 색채와 색감의 잘 어우러진 조합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그림이라던 그의 추상미술에 대한 개념에 공감하며 그림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 같은 그녀의 초기 20년간 형성된 시각은 이후의 작품세계를 관장하며 객체의 본질적인 핵심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유럽의 미술이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를 선두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을 무렵, 신대륙 미국의 미술은 여전히 전통적인 미술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다. 소수의 예술가들만이 새롭게 전위미술을 개척하고 있었죠. 대도시의 풍경을 현실적으로 묘사한 '에이트 그룹(The Eight)'과 추상과 재현의 경계를 오가며 형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정밀주의'화가들은 미술의 현대적 해석을 시도하며 전위적인 흐름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e, 1887-1986))는 당시 남성들의 독무대였던 미국 화단에서 어떠한 사조와도 연관되지 않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했습니다. 미국 미술에서 차지하는 뚜렷한 그녀의 위치와 명성은, 작품뿐만 아니라 뉴멕시코 사막에서 독립적이고 전설적인 삶을 개척한 여성으로서 그녀의 개성이 돋보입니다. 그녀는 미국 모더니즘의 초창기부터 추상적 경향의 1950-1960년대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미술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녀의 대표적인 그림의 주제는 꽃과 식물의 기관, 동물의 뼈, 조개껍데기, 산 등 자연물이 주류를 이룹니다. 특히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확대된 꽃은 어떠한 배경처리도 없이 거대한 캔버스에 커다랗게 그려져 관람자를 압도시킵니다. 색채의 표면적인 힘과 감춰진 관능성으로 충만한 작품에는 자연에 대한 그녀의 내적인 친근함과 깊이감이 느껴지는 신비스러운 추상성이 돋보입니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e, 1887-1986)는 20세기 초 뉴욕 아방가르드 예술계를 이끌었던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glitz: 1864-1946)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생활이 작품보다 먼저 도마에 오르기 일쑤입니다.알프레드 스피글리츠는 본인 역시 '미국 근대 사진의 개척자'로 불리는 선구적인 사진가이면서 뉴욕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갤러리스트이자 잡지 발행인, 컬렉터였습니다. 스티글리츠는 수세기 동안 미술가들을 지배해 온 "미술은 이러해야 한다."는 제약 아래서 꿈틀거리며 균열을 일으키던 모더니스트들을 옹호하고 적극적으로 소개했습니다.
1916년 뉴욕, 오키프가 미국 서부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틈틈이 그린 그림을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glitz) . 그는 단번에 오키프의 예술성에 감탄하고 자신이 운영하던 '291 화랑'에 전시하게 됩니다. 스티그리츠는 아직 한 번도 전시해보지 못한 무명으 오키프의 목탄 소묘 몇 점에서 그녀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뉴욕291번 가에 있던 '291 화랑'은 당시 아카데미 미술계가 인정하지 않았던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콘스탄틴 브랑쿠시, 폴 세잔,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들을 미국에 처음 소개한 진보적인 화랑입니다.
스티글리츠는 이 일을 계기로 그녀와 가까워지고 결국 둘은 동거하게 됩니다. 문제는 당시 스티글리츠가 미국 '근대 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향력 있는 작가인데다 유부남이라는 점이 둘 사이에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그녀는 스티글리츠의 어린 정부, 모델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습니다. 나중에는 스티글리츠의 두 번째 아내가 되지만요. 젊은 오키프는 세간의 곱지않은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작품을 그려나갔습니다.
정원을 가꾸는 일과
과일을 수확하는 일을
특히 관심이 있다.
- Lake George 에서-
마치 푸른색 첼로를 옆으로 눕혀놓은 것으로도 보이는 1922년 작 <조지아 호수>입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편안함이 몰려드는 작품이지요.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와 함께하는 동안 그녀의 모든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고자 했습니다. 누드를 포함한 그녀의 사진을 2년 동안 수백 장 찍어 1921년 '앤더슨 갤러리'에서 오키프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키프는 미술가로서가 아니라 스티글리츠의 모델이자 뮤즈로서 조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미술교사였던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사진과 함께 단번에 미술계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사진작가였던 스티글리츠가 찍은 사진에는 오키프의 신체 부위를 극적으로 확대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단호하고 굳건한 얼굴의 오키프의 모습도 있고, 은밀하고 관능적인 모습도 담고 있었고요. 이로인해 세간의 얼룩진 평판은 덤으로 따라왔습니다. 사랑 받는 연인으로서 그가 스티글리츠에게 내밀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텐데 말입니다. 또한 예술가의 동반자로서 스티글리츠의 작품 세계에 공감하고 동참한 것일 뿐이죠. 하지만 세간에 발표된 그 사진들이 오키프의 이미지를 한정 짓게 됩니다. 나아가 그의 작품들까지 단정지어버린 것은 예술가 오키프에겐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오키프는 가십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가벼운 '평가는 더욱 참을 수 없었습니다. 영향력이 컸던 탓에 오키프에게 스티글리츠는 독이 되기도 하고, 실이 되기도 했지요. 어쨌든 , 오키프는 이에 직접 나서서 해명하기 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작품 세계를 그려나갔습니다. 특히 1917년 콜로라도 여행에서 처음으로 뉴멕시코 고원의 사막과 깊은 계곡을 본 그녀는 강렬한 영감을 받고 뉴욕과 뉴멕시코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특이한 형태의 바위나 강렬한 햇빛에 새하얗게 육탈된 동물의 뼈 등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36인치의 거대한 캔버스에서 개화한 <Red Canna>입니다. 그녀가 24세 연상의 사진작가 스티글리츠와 오랜 연애 끝에 법적으로 결혼을 하게 된 1924년에 그려졌습니다. 세간의 따가운 눈총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니 , 사랑의 주체인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마음껏 표현한 거지요. 그림의 초보자도 이 꽃은 만개한 사랑을 느끼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캔버스에 투영된 것은 칸나의 본질인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오키프 자신의 본질이기도 하고요. 꽃으로 표현된 그녀의 자아상은 그녀의 절대 지지자이자 남편이었던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glitz, 1864-1946)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여인으로서의 개화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예술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 시작한 화가로서의 화려한 개화이기도 했지요.
그녀가 미국의 미술계에 존재를 알리게 된 것은 1916년. 28살에 그린 나팔꽃을 닮은 보랏빛 페투니아와 코스모스를 그린 그림이 52세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glitz, 1864-1946)의 눈에 들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스티글리츠는 당시의 뉴욕 예술계를 이끌어가며 사진예술을 순수예술의 한가운데로 등단시킨 작가입니다. 그는 또한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갤러리 '291' 을 통해 유럽의 피카소, 몬드리안, 마티스, 브라크의 미술을 소개하며 현대 예술의 본거지를 파리로부터 뉴욕으로 이끌어온 개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렌즈를 3-4분간 장시간 빛에 노출시켜 사진을 그림처럼 보이도록 찍은 뉴욕의 거리 사진들은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세련된 사진입니다.
첫 만남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방대한 양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깊이를 더해 가고 다양하게 변모해 갑니다. 1923년 연초 스티글리츠는 앤더슨 갤러리에서 오키프의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습니다. 100여 점의 드로잉과 회화작품을 아우르는 최초의 대규모 전시회였지요. 오키프는 2년 전에 열렸던 스티글리츠의 전시회를 통해 관습과 속박에서 벗어난 여성 미술 가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비평가들도 그와 같은 시각으로 오키프의 작품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전시회는 많은 관람객들로 성황을 이루었으며, 이로써 1924년에는 오키프의 회화 51점과 스티글리츠의 사진 61점이 앤더슨 갤러리에서 동시에 전시됐습니다.
스티글리츠의 사진 작품 대부분은 오키프를 찍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스티글리츠는 원치 않은 결혼으로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오키프와 12월 11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애인에서 결국 남편으로 법적 지위를 바꾸어가며 정신적인 지지자로서 긴 세월을 함게 하게 됩니다. 이시기는 오키프 역시 창조력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오늘날 미국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우뚝 서게 만든, 거대한 크기의 꽃과 도시 풍경 그림들을 제작했습니다.
오키프의 예술은 언제나 자신의 환경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 그녀의 작품은 스티글리츠의 여름 별장이 있는 조지 호수(Lake George)주변의 풍경과 꽃, 그리고 뉴욕을 그린 그림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오키프는 1918년부터 꽃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확대된 꽃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스티글리츠와 결혼한 후 1924년부터였습니다. 꽃은 오키프에게 가장 친근한 주제로서 그녀의 전 작품을 통해 대표적 특징이 되었습니다. 1918년부터 1932년까지 오키프는 200여 점 이상의 꽃 그림을 그렸습니다. 장미. 페튜니아, 양귀비, 동백꽃, 해바라기, 금낭화, 수선화 같은 흔한 꽃들 뿐만 아니라 검은 붓꽃이나 이국적인 난과 같이 희귀한 꽃들도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꽃을 보고 여러 가지를 연상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꽃을 보지 않아요.
제대로
꽃은 너무 작고 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소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본 것을 그리겠다.
내가 느끼는 꽃을 그리겠지만
꽃을 크게 그려서
사람들이 놀라서 한참 동안 꽃을 바라보게 하겠다고
-책 <조지아 오키프> , 리사 민츠 메싱어, 임미정 옮김, 시공아트-
무엇보다 그녀가 실물보다 크게 그렸던 꽃 중의 하나는 칼라(Calla)였습니다. 대중들에게 이것은 곧 그녀의 '엠블럼'이 되었고요. 1928년에 제작한 <분홍 바탕의 두 송이 칼라 Two Calla Lillay On Pink>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납니다. 대체로 오키프의 꽃 그림은 캔버스 전체가 단지 한두 송이의 꽃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꽃들은 매우 클로즈업되어 그려져 있고요. 그 결과 잎과 줄기의 외곽선은 종종 잘린 채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확대를 통해 꽃들은 자연 상태로부터 벗어나 특별하고 확장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접사를 통한 확대는 꽃송이 각각의 구조를 상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오키프는 동시에 꽃 그림에서 형태의 단순화에 신경을 썼습니다.
이렇듯 , 칼라(Calla)가 그녀가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가 된 것은 바로 구조적으로 단순함의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키프는 꽃을 그릴 때 꽃의 고유색을 사용했으며 동시에 붉은 양귀비, 검은 붓꽃과 같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단색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색을 가장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여겼습니다.
남편이 된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손을 찍기를 즐겼습니다. 그녀의 손을 찍은 앨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glitz, 1864-1946)의 사진은 2006년 소더비에서 147만 2000달러(약 15억)로 사진 경매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1920년대 내내 오키프를 사로잡았던 두 번째 주제는 뉴욕입니다. 단순화되고 기하학적으로 축약된 형태, 명쾌한 선과 부르럽고 매끈한 표면 등이 돋보이는 오키프의 그림들은 미국식 사실주의와 정밀주의 와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가들과 사진가들은 객관성, 단일 초점, 정확성을 특징으로 하는 정밀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했으며, 그 소재는 자주 중복되었습니다. 오키프는 자신의 작품에 이러한 요소들을 시각적 표현으로 도입했습니다. 1925년 초 그녀는 마천루에서 바라본 형태에 매료되어 <달이 뜬 뉴욕>이라는 첫 번째 도시 풍경을 그렸습니다. 점차 작품에 도시 풍경이 늘어나게 되었지요.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솟은 빌딩이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과 함께 구조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해 가을 오키프와 스티글리츠는 셸턴 호텔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28층, 나중에는 30층에 있는 방 두 개짜리 객실을 빌렸습니다. 호텔 객실에서 바라보는 장대한 광경은 오키프에게 뉴욕을 화폭에 담도록 새로운 관심을 부여했습니다. 오키프는 1925년부터 1930년까지 뉴욕이라는 도시와 뉴욕의 건축물을 분위기 있고 환영적이며 감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으로 표현했습니다. 스티글리츠가 사진에서 열정적으로 시도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다른 시간대와 다른 날씨에 따른 도시의 분위기를 사진의 시점을 도입해 표현했습니다.
오키프는 도시를 그린 작품에서 빛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흑점이 있는 셸턴 The Selton with Sunsports>에서는 눈부신 태양의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면은 희뿌연 구름 사이로 흩뿌려진 태양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화면 상단의 호텔 정면을 비추는 환한 빛과 화면에 불규칙하게 산재해 있는 '태양의 흑점'에 의해 햇빛의 반짝이는 인상은 더욱 강조됩니다. 부분적인 투명함은 화면에 분위기를 보다 분명하게 더해주고요. 불규칙적인 위치와 반투명한 성향 때문에 태양의 흑점은 마치 카메라로 태양을 찍을 때 생기는 것과 같은 희뿌연 효과, 즉 렌즈에 반사된 빛이 필름에 나타나는 현상을 만들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7EMVU2eRnM
오키프는 사진에서 태양의 중심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커다란 광배효과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키프에게 낮과 밤은 각각 나름대로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키프가 느끼는 도시 분위기의 주관적 성격은 인공 불빛에 감싸인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밤을 그린 작품에서 정점에 달합니다. 밝게 빛나는 창문, 높이 솟은 뾰족한 탑을 비추는 조명, 깜빡 거리는 자동차 전조등, 전광판의 광고, 교통신호와 네온사인등으로 맨하튼은 마치 빛의 도시 같습니다.
오키프의 회화는 빛의 반사와 같은 사진적 시점과 독창적인 회화적 요소를 이용하여 낭만적인 감정으로 거대 도시 뉴욕이라는 도시의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와 매력을 시각화했습니다.
한편 스티글리츠와 함께 한 뉴욕에서의 삶도 양면서이 있었습니다. 스티글리츠를 통해 만나게 된 뉴욕의 예술가 그룹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배웠지만, 동시에 오키프는 이 도시에서 극심한 고독감과 우울감을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1927년 조지아 오키프는 남편 스티글리츠와 도로시 노먼(Dorothy Norman: American Photographer,Writer, 1905-1997)과의 불륜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두 차례의 흉부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곁을 떠나 그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며 예술가로서의 자기 개발과 주장에 더욱 몰두하게 됩니다. 몇 년 후 그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파괴를 향한 그의 힘은 창조력만큼이나 강렬했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법,
나는 그 둘을 모두 경험했고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야 했을 때
비로소
그를 넘어 설 수 있었다.
근경과 원경을 병치하는 것은 이미 1928년 의 <분홍 그릇과 녹색 잎>같은 작품에 등장했던 '사진적인'방식이다. 이러한 인상적인 그림에서 오키프는 사진의 시각적 기법에 근거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1987년 오키프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회가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에서 열렸습니다. 타계하기 전 오키프의 유화 한 점이 187만 달러라는 최고의 가격에 팔렸고요. 2001년 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붉은 아네모네와 칼라 Calla Lilies with Red Anemone> 가 620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이 가격은 경매 사상 어떤 여성 화가의 작품도 받을 수 없었던 기록적인 가격이었습니다. ( 이 기록은 2014년 깨집니다.)
1929년부터 오키프와 스티글리츠는 서서히 각자의 길을 향해 멀어지게 됩니다. 1929년부터 1949년까지 오키프는 매년 뉴욕을 떠나 뉴멕시코를 비롯한 미국 서부를 여행하며 6개월씩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랑하지만 자신을 외롭게 하는 사람들과, 화려하지만 억압적인 시선으로 가득한 도시를 떠나 광활한 자연 아래 홀로 서 있을 때의 고독과 환희가 동시에 느껴지는 그림들을 많이 그리게 됩니다. 부드럽고 환상적인 꽃을 그려내는 오키프도 좋지만, 거친 바위와 동물의 뼈를 강렬하게 그린 작품에선 경외감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Qq2xOs2BYU&t=2s
https://www.youtube.com/watch?v=ZglmaMXTVSI
1927년 여름, 오키프는 부유한 문필가이자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즐겼던 예술 옹호자 메이블 다지 루한 (Mabel Dodge Luhan: 1879-1962)의 초대를 받아 뉴멕시코 타오스(Taos)에 머무르며 새로운 풍경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 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곳은 드라마틱하고 높이 솟은 사막의 풍경과 강렬한 햇빛에 이끌려 19세기 중반부터 문필가와 화가 들이 이주한 곳이기도 합니다. 고독과 조용함을 오랫동안 소망해왔던 그녀는 예술가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 1931년 타오스 서부의 리오그란데 알칼데라는 작은 마을에 오두막 한 채를 빌려 해마다 여름 동안 이곳에서 지내곤 했습니다. 그녀는 건너편에 위치한 블랙 메사로 이루어진 붉은 모래언덕의 형태에 매료되어 몇 년 동안 작품을 제작하게 됩니다.
오키프는 사막에서 발견한 소와 야생동물의 뼈를 모았습니다. 이러한 동물의 뼈는 사막 풍경의 자연적인 구성요소로서 그녀에게 조개, 돌, 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1930년대 작품에서는 고립된 동물의 뼈가 뉴멕시코의 풍경적 요소와 결합되어 장대한 사막 풍경으로 구현되는 등 주제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키프의 주요 모티프 가운데 하나로서 등장하는 동물의 뼈에 대한 평론가들은 죽음과 부활을 연관지었습니다. 그러나 오키프의 눈에는 햇볓에 바짝 마른 뼈가 강렬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 어느 것과도 아름다움에 비견되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뉴멕시코의 스페인계 사람들은 장례식에 동물의 뼈와 조화를 사용한다고 합니다.오키프는 동물의 뼈와 조화를 화면에 병치하여 초현실적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주제에 대한 장식적인 관심을 표현할 때 예상 밖의 물체를 병치함으로써 놀라운 의외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오키프의 작품 <여름날 Summer Days>입니다. 화면의 위쪽으로 향해 있는 사슴의 머리뼈는 사막의 산맥 위에 높이 떠 있습니다. 머리뼈는 정면에 그려져서 관람자의 시선을 정면으로 끌어들입니다. 야생화는 사막의 반짝이는 빛무리로부터 올라오고 있습니다. 비록 전경의 하늘은 화창한 여름날 하늘이지만 산 너머로 폭풍이 몰려듭니다. 이는 뉴멕시코(New Mexico)의 특징을 이루는 , 서로 다른 날씨대가 공존하는 모습을 그리려 한 것입니다. 각 구성요소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데, 각기 자신만의 시점을 가지고 있어서 관람자의 눈에는 분리된 실체로 인식됩니다. 각각의 세부가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구성요소는 새로운 그림의 출발점 역할을 합니다.
오키프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대상의 객관적인 아름다움 자체에 관심을 둡니다. 각각의 대상에 대한 명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여름날 Summer Days>은 풍경화보다는 정물화에 가깝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한편 전쟁 등 여러 사정으로 '291 갤러리' 를 닫고, 인티메이트 갤러리(Intimate Gallery)를 새로 운영하던 남편 스티글리츠도 1929년 무렵 새로운 장소에 '아메리칸 플레이스(An american Place)'라는 이름으로 갤러리를 다시 열게 됩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갤러리는 '미국'의 현대미술, 사진작가들을 집중적으로 알리고 홍보하는 곳이었습니다. 앞선 두 갤러리에서 유럽의 미술을 소개하여 모국의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던 것처럼 이번에 '아메리칸 플레이스'를 세우고 죽을때까지 그곳에서 헌신합니다. '미국의 예술가'를 위한 토양을 만들겠다는 평생의 신념을 가지고 말입니다.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From the Faraway, Nearby>에 대한 작품의 영감은 1929년 알게 된 사진가 앤설 애덤스(Ansel Adams: 1902-1984)와 함께 1937년 콜로라도를 여행할 때 얻은 것입니다. 이 작품은 애덤스가 사막을 표현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그는 스티글리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광경을 사진 같은 언어로 묘사한 바 있습니다.
"하늘과 대지는 너무나 광활하며, 세부는 너무나 정교하고 섬세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 있든 거대함과 미세함 사이의 세계에서 고립되고 맙니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우리들의 위, 아래로 사라지며 시계는 오래전에 멈추었습니다. "
오키프는 광대함과 미세한 사이를 통해 뉴멕시코(New Mexico) 사막의 낭만적인 본질을 놀라운 방식으로 포착했습니다. 이는 확대시점을 망원 시점과 결합한 것으로서 자신이 살고 있던 '광활함과 경이로움의 세계'를 표현하는 적절한 형식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z5O153kr4c
1916년부터 텍사스와 뉴 멕시코를 왕래하며 그림의 모티프를 얻곤 했었던 그녀는 62세가 되던 1949년, 스티글리츠가 작고한 시점으로부터 3년이 지난해에 뉴 멕시코 사막위의 민둥산으로 완전히 은둔하게 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햇살이 춤추는 땅'이라고 부르는 해발 2135m 산타페의 고원지대의 은둔하며 그곳을 영혼의 안식처로 삼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치 사막의 수도자가 된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남편과 사별 후 그린 뉴 멕시코의 메마른 고산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한 참을 앉아 있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GCgYLem3Vc
1940년대의 그림은 화면 전체를 가득 매운 단일 형태가 특징적입니다. 양식적인 변화가 일어난 거지요. 이는 주변 풍경에 대한 태도가 새로워졌음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단순함과 명료함을 강조하는 이러한 성향은 햇빛에 바랜 사막의 동물의 뼈를 그린 그림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1944년 작 <골반뼈 II>에서는 뼈의 구멍과 갈라진 틈새를 통해 파란 하늘이 보입니다. 오키프는 뉴멕시코 하늘의 강렬한 파란색을 사랑했습니다. 파란색은 그 후 그녀의 작품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1943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동물의 골반 뼈는 그 이후 더욱 확대되어 극도의 접사시점으로 그린 뼈는 그림 중앙에 있는 타원형 구멍이 추상화를 연상케 합니다.
오키프는 1940년 고스트 랜치(Ghost Ranch)에 약간의 토지와 집 한 채를 구입합니다. 오키프는 오늘날 '오키프의 세계'로 알려져 있는 에스파뇰라부터 아비키우까지를 캔버스에 담아냈습니다. 검정색 포드 자동차를 몰고 뉴멕시코의 먼 지역까지 탐방 한 거죠. 그 차는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넓었다고 해요. 갑작스러운 소나기뿐 아니라 여름 태양의 열기로부터도 보호해 주었고요.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들은 1944년의 연작 '검은 대지(Black Place)'입니다.
그림의 장소는 고스트 랜치에서 150마일 떨어진 회색 언덕이 흰 모래로 덮인 곳입니다. 꽃 그림과 마찬가지로 언덕이 캔버스 전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전경의 확대, 주변으로 부터의 분리, 명확한 지평선의 제거를 통해 자연에서 발췌된 모습은 관람자로 하여금 보다 큰 전체를 완성하게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오키프는 뉴멕시코 풍경의 광대함과 웅장함을 한 화면 안에 포착하는 데 성공합니다. 둥근 언덕의 표면은 촘촘하고 균일한 붓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키프는 밝은 사막의 빛으로 풍경의 미묘한 차이점을 부각시킵니다. 특히 언덕의 형태에 초점을 맞추어 각각의 윤과과 표면을 드러냈습니다. 금방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위치에 말입니다. 그녀는 지면의 도랑과 움푹 파인 곳을 인체의 윤곽과 접힘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1946년 5월,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오키프의 회고전이 열렸습니다. 근대미술관에서 여성작가의 회고전이 개최된 것은 그그때가 처음이었죠. 그해 7월, 82세의 남편 스티글리츠는 심각한 심장마비 증세를 보였습니다. 뉴멕시코에서 여름을 보내던 오키프는 즉시 돌아와 그의 임종까지 (7월13일)며칠을 함께 했습니다.
그후 오키프는 거의 3년 동안을 뉴욕에서 보내면서 스티글리츠의 부동산을 처분하고, 그가 남긴 작품 컬렉션을 분류하여 미국 협회와 여러 미술관에 보내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당연히 그림은 그리지 못했고, 가끔 뉴멕시코에 들러 1945년에 매입한 낡은 벽돌집을 수리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집은 고스트 랜치에서 수 마일 떨어진 동네인 아비키우에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XSHq_QywTw
그림을 통해 보게 된 사막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아도비로 지은 그녀의 거주지는 일체의 군더더기와 장식이 배제된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으로 구성된 미니멀리즘의 건축입니다. 그녀의 침실과 작업실을 들여다보면 고요와 적막 속에서 영혼에 쌓인 먼지를 씻어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뉴 멕시코의 먼지 풀풀 날리는 사막 한가운데로 삶의 거처를 옮겨온 그녀는 돌산이 빚어내는 색채의 조합을 사랑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사막 한가운데 자신의 정원을 만들어 내고 가꾸었습니다. 사막의 한 가운데 물길을 트고 자신의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일은 구도의 길에 다름이 아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주어 세상 한가운데 우뚝 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사랑하는 남편이 세상을 하직하고 났을 때 ,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선택은 사막으로 은둔하여 지칠 때가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고 가꾸며 아침저녁으로 그곳을 거니는 일이었던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조지아 오키프의 도발적인 꽃 그림들보다 그녀가 그린 텍사스, 그리고 옆 동네 뉴 멕시코의 미니멀리즘적인 풍경이 마음 깊이 더 와 닿습니다.
오키프는 특히 신선한 야채를 키울 수 있는 정원에 매료되었습니다. 수리를 모두 마친 1949년 뉴 멕시코로 영구히 이주하게 됩니다. 여름은 고스트 랜치에서 , 겨울은 아비키우에서 보내는 방식으로 말이죠. 오키프는 고스트 랜치의 집보다 더욱 신경을 써서 아비키우 집의 내부를 디자인 했습니다. 필요에 따라 단순하면서도 널찍한 공간으로 장식된 각 방은 오키프의 미적 취향을 보여줍니다. 가장 중요한 공간인 작업실에는 커다란 창문을 설치해서 주변 절경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수많은 고전음반을 수집하기도 했고, 알레산더 콜더, 아서 도브, 우타가와 히로시게 같은 작가의 작품을 자신의 그림들과 함께 간소하게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지은 집의 평범함과 명쾌함은 오키프가 매우 소중하게여긴 기능적 미학과 단순성을 보여줍니다. 벽돌집은 미국 원주민 문화의 상징이자 뉴멕시코 풍경의 특징을 이룬 요소로서 그림에 도입했습니다. 오키프는 안뜰 벽에 나 어두운 문에 매료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1960년대까지 작품의 주요 모티프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기도 하지요. 다양한 시점, 계절의 변화에 따른 모습을 다루면서도 영속적인 형태로 주제를 훌륭히 포착해 나갑니다.
그림 속의 사다리는 날개라도 달린 듯 검은 능선을 벗어나 달을 향해 올라가는 중입니다. 땅에 놓인 평범한 사다리가 아니라 우주공간을 향해 날아가는 로켓 사다리입니다. 분리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하늘사다리가 되었네요. 조지아 오키프가 71세가 되는 1958년, 미국의 뉴 멕시코 주 아비키우(Abiquiu)에 있는 자신의 낡은 벽돌집에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다리는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집의 마당 건물 외벽에 기대 놓은 실제 사디리이고요. 아마도 오키프는 하늘사다리를 타고 우주와 소통하고 싶었나 봅니다. 예로부터 사다리는 정신적, 도덕적인 차원에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자기 완성일 수도 깨달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요.
그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패더널 산을 배경으로 하나의 사다리가 밤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마치 달빛의 주술에 사로 잡힌 것 같은 환상적인 소재의 배치가 화면에 초현실적인 모습을 불어 넣고 있습니다. 실제의 모습 또한 사다리는 마당 외벽에 기대어져 패더널 산을 배경으로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뉴멕시코 인디언의 삶에서 사다리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지붕에서 일출과 오후의 석양을 바라보며 자연종교의 핵심을 이루는 우주적 힘과 직접적으로 소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다리는 이러한 지붕과 땅을 연결하는 존재로 여겨지고요. 오키프는 원주민들의 환경에서 사다리를 분리해 땅 위로 들어올림으로써 자연과 우주의 연결을 상징할 뿐 아니라 뉴 멕시코 초기 거주민들의 우주적 의식과 맏닿아 있는 보편적 상징을 화면에 부여하고 있습니다.
오키프는 1951년부터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합니다. 1953년 66세 나이에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하며, 프랑스와 스페인을 방문하게 됩니다. 1956년 페루와 안데스에서 보낸 3개우러 동안 잉카 문명지를 방문했습니다. 72세 노 예술가는 1959년에는 3개월에 걸쳐 인도, 동남아시아, 파키스탄, 중동과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1년 후에는 일본, 대만, 홍콩, 캄보디아, 필리핀 그리고 태평양 군도를 여행했습니다.
오랫동안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며 내려단 본 풍경은 오키프에게 새로운 회화 주제를 제공했습니다. 메마른 사막지역을 흐르는 강이 그러한 예에 해당합니다. 이 새로운 연작들은 빠른 필치의 스케치와 단색조의 목탄 드로잉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빨강과 분홍, 파랑과 녹색, 파랑, 검정, 회색 등 색의 다양한 조합을 선보이며 유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연작에서도 오키프는 이전 작품들처럼 현실과 유리된 환상적 표현을 전개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BT3maaWy-Q
오키프의 1960년대 작품들은 매사추세츠의 우스터 미술관과 텍사스 포트워스의 에이먼 카터 미술관에서 열린 두 번의 회고전에 전시되었습니다. 특히 1970년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은 대중적 인지도의 측면에서 큰 획을 그었습니다. 전시회의 대성공과 전국적인 인지도를 통해 오키프는 미국 미술계의 우상으로 화고히 자리 잡게 됩니다. 비평가들 또한 그녀를 미국 현대미술, 즉 추상표현주의와 색면회화의 중요한 선구자로 평가합니다. 이제 오키프는 새로운 페미니스트 세대의 우상이자 현대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의 화신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연이은 수상으로 그녀의 업적에대한 대중적인 인지도도 화고해졌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Nf73Q9GI7bc
1977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시민 훈장인 자유메달을 받게 됩니다. 같은 해 11월 그녀를 소재로 한 페리 밀러 아다토의 다큐멘터리 영화 <예술가의 초상>이 오키프의 90번째 생일을 맞아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개봉합니다. 영화에서 오키프는 주위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예술가이자 사막 풍경과 일체다 된 모습으로 명료하게 그려졌습니다. 그리고 1985년 4월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예술 훈장을 받았습니다.
오키프가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기 직전에 그린 작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1971년부터 오키프의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세계가 점차 희미해져 갔지만, 단순한 형태와 그림자를 알아볼 수 는 있었죠. 이전보다 다른 사람의 도움에 더 의지하게 된 오키프에게 1973년 26살의 젊은 조각가 존 부르스(후안)Bruce (Juan )Hamilton,1946- ) 가 그녀의 삶 안으로 들어옵니다.
오키프는 그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죠. 해밀턴은 오키프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도록 격려했습니다. 오키프는 새로운 재료인 점토로 작업하기 시작했고요. 오키프는 해밀턴의 배려에 힘입어. 1975년 수채화와 유화를 그릴 때 약한 시력으로도 색채와 형태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오키프에게 조언을 구했던 많은 젊은 미술가들 가운데서 해밀턴만이 그녀의 폭넓은 경험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그후 몇 년간 해밀턴은 유일한 조교로서 전시회 준비와 자서전 출판을 도왔을 뿐 아니라 여러 번의 여행에도 동행했습니다. 34살의 해밀턴은 오키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몰락에 낙담하여 1980년 안나 마리 프로호로프 어스카인이라는 여인과 결혼합니다. 그러나 오키프는 해밀턴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키프로서는 해밀턴의 인생에 여자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1986년 3월 6일 사망하기 전까지 자신과 해밀턴이 결혼할 것이라 믿고 있는 오키프는 1979년 8월 8일 작성한 유언장에 해밀턴이 ' 솔 이솜브라(현재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를 포함해서 그녀의 부동산과 미술관에 기부하기로 약속한 대부분의 그림을 유산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새로운 조항이 첨부되었습니다.
해밀턴은 오키프 소유의 엄청난 몫을 유산으로 상속받았습니다. 오키프 사망 후 유족 대표인 의붓 딸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오키프의 유산 중 부동산과 재산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옴으로써 희대의 스캔들 사건이 되었습니다. 86살에 오키프가 만난 26살의 청년 존 부르스 해밀턴은 그녀가 숨지기 전까지 사실상 10년이 넘도록 오키프의 남자였다는 궁극적인 판결 때문입니다. 1987년 7월 뉴멕시코 법정은 오키프의 유언장을 근거로 해밀턴이 정식 상속자 중 한 사람이라 판결과 함께 그에게 오키프의 유산 중 7,800만 달러(850억원)을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오키프는 장례식도 치르지 말고 추모식도 거행하지 말라고 생전에 당부했습니다. 해밀턴은 그녀의 시신을 화장한 유골을 담은 작은 단지를 들고 차를 몰아 아비키우의 북부 지역 메사의 기슭에 닿았습니다. 그는 페더널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유골을 뿌렸습니다. 오키프의 유골은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고스트 랜치를 향해 한줌의 재가 되어 흩어졌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N8bCaPBooY
1997년 7월 18일 뉴 멕시코 산타페의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이 개관하던 날, 섭씨 40도의 무더위 속에서 2,000여 명의 관객들이 세 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첫 주 동안에 1만 5,000명 이상의 관람객이 다녀가고요. 그녀가 남긴 초월적인 시각방식의 작품들은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소개하며 극사실주의와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 미국의 현대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7tclGaHf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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