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독일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독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
독일 미술의 아버지
서양 최초의 국제적인 미술가 ,
서양미술 최초의 적극적인 자기 PR가,
현란한 아이디어맨 이자 환상적인 상상가,
혁신가 (innovator)
독일 르네상스 화가 중 가장 위대한 한 명인 알프레히트 뒤러(Albrecht Duer 1471-1528)를 소개합니다. 뒤러는 제단화, 종교화, 초상화, 자화상, 판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례론과 원근법에 관한 저서를 출판했던 다재다능한 화가였지요. 르네상스의 물결이 피렌체, 베네치아를 넘어 북유럽에 상륙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르네상스를 개척한 화가이고요.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수학적, 논리적인 원근법과 표현을 북유럽의 특유의 섬세한 표현을 결합하여 이탈리아와는 다른 르네상스 미술을 보여줍니다.
그가 28때 그린 <자화상 >(1498)입니다.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소장이지요. 오늘날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뒤러의 자화상 회화 작품입니다. 곱슬한 금발머리, 연극배우 뺨칠 정도의 외모, '나 , 요즘 잘 나가.' 하며 한껏 멋을 낸 뒤러, 디테일 강한 옷차림과 비싼 장갑까지 끼고 존재감 확실히 드러냅니다. 원근법을 살린 배경 묘사가 작품에 멋을 더합니다.
뒤러는 스스로를 이탈리아 여행과 인문적 학식을 겸비한 신사로서 묘사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일개 손재주나 부리는 공방쟁이가 아니라 신이 내려준 창조력과 사고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예술가임을 소리높여 외치고 싶어 했지요. 혹시 보이시나요? 관람객을 향해 직시하는 눈길, 한껏 등을 곧추세운 가장 잘 나가던 때의 뒤러의 자신감찬 모습말입니다.
독일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는 판화를 미술의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사용한 첫 번째화가입니다. 간접예술인 판화는 '판'을 매개물로 하여 종이 등의 평면에 이미지를 찍어 낸 그림을 말합니다. 이런 판화는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소수 엘리트들이 많이 향유하던 문화 예술이었습니다. 그런 판화를 뒤러가 일반인들도 누릴 수 있게 예술의 대중화에 힘씁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원인도 그의 판화 작품 덕입니다. 그는 빽빽한 선을 사용하여 판화에서 유화 못지 않은 세밀한 질감과 색조를 묘사해 냅니다.
2014년, 알브레히트 뒤러 (1471-1528)가 그린 걸작 판화작품 중 하나인 <멜랑콜리아 I>(1514년)을 완성한지 500주년이 되는 해였지요. 뒤러의 <멜랑콜리아 I>은 <기사, 죽음, 악마>와 <서재에 앉아있는 성 제롬>과 더불어 1513-14년에 완성한 대형 판화 3부작 중 한 작품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3대 미덕으로 꼽히던 도덕적, 신학적, 지적 학구주의를 상징하는 작품이지요.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란 이 세 가지 미덕을 갖춘 교양과 소양 있는 자로서 그가 창의적 결과물을 창조하기까지는 영혼적 고뇌와 정신적 우울증이라는 창조의 고통도 감내해야 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멜랑콜리아 Melancholia I>판화는 뒤러의 대표적인 동판화 중 하나로 수수께끼와도 같은 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으로 나타내 풍자하는 특성을 담은 그림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확 잡아당기는 것은 화면 우측 절반을 차지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왜 그렇게 어두운 표정일까? 그녀의 정서를 이해하기 위해 이쪽저쪽 시선을 옮겨보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화면 하단 1/3에는 대패, 톱, 자, 망치, 못 등 목수들이 사용할 만한 도구들이 보입니다.
양? 개?한 마리가 몸을 움츠리고 누워 있네요. 그 주변으로 기하학적 다면체와 공이 보입니다. 자세히 보니 여인의 손에 컴퍼스가 쥐어져 있네요. 몸에는 열쇠와 돈 주머니도 달려있고요. 그리고 그녀의 오른편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통통이 아기 천사도 보입니다. 박쥐 같은 모양에 꼬리가 달린 이상한 괴물...특이하게도 날개에 배너광고처럼 어떤 글자를 보여주고 있네요.
"Mellncolia I"
그는 많은 작품들 속에 수수께기 같은 장치들을 숨겨 놓은 별난 화가입니다. 여인의 표정이 '멜랑콜릭"해 보입니다. 먼저 아래편에 놓인 목공 도구들은 실용적 기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인이 든 컴퍼스와 입체적 도형들은 기하학을 의미하고요. 종, 모래시계, 지거나 혹은 뜨는 해는 모두 시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추측해 봅니다.
'실용적 기술과 수학적 지식을 모두 동원해 보았다. 하지만 이미 해가 지고, 혹은 먼동이 트고 있다. '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아직 문제는 해결이 안되고, 그러니 주인공의 표정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멜랑콜리아는 중세 의학에서 인간의 체질을 다혈질 (sanguine),점액질(phlegmatic), 담즙질(choleeric) 그리고 우울질 (melancholy)의 네 가지로 나눈 것에서 기원합니다. 이렇게 우울질이 15세기 후반부터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멜랑콜리아는 사람을 판단할 때 부정적으로 여겼습니다. 우울질이 많은 사람은 성격이 욕심이 많고 감정적이며 혼자 사색하는 걸 좋아하고 창조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한마디로 뒤러 이전의 멜랑콜리를 표현하자면 게으르고 나태한 이미지의 대표였다고 합니다. 그런 이미지를 뒤러가 동판화를 통해 완전히 뒤집었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중세의 나태함의 부정적인 이미지 '멜랑콜리아'는 르네상스 시대의 뒤러에 이르러 "지적인 성찰, 지성, 사색, 철학"으로 표현됩니다. 고뇌하는 천재의 좌절과 우울로 천재들만이 갖는 어떤 특별한 감성(열정)으로 격상시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작품은 이상과 좌절을 그린 뒤러 자신의 정신적 자화상이라 보는 시선이 지배적입니다.
흔히들'르네상스'하면 이탈리아 미술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떠올리지요. 반면,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라는 이름은 어딘지 낯설게 느껴지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특히 알프스 산맥 이북 지방에 자리해 있는 북부 유럽권에서는 더 그렇죠. 이들에게 뒤러는 미술의 역사에서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늘 함께 하는 화가로서 그들의 머리와 가슴에 깊이 자리 잡은 화가입니다.
뒤러가 태어나고 활동한 뉘른베르크(Nurnbreg)입니다. 이곳은 유럽 한가운데에 자리한 당시 신성로마제국 최대 도시인 쾰른 다음가는 규모의 도시로, 인문주의를 비롯한 학문, 인쇄, 항해와 천문 도구 개발을 중심으로 한 과학 기술과 무역이 발달한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ynFG723JOI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버지 (Albtecht Du"rer the Elder)는 1455년 헝거리에서 독일 뉘른베르크로 이민 온 유명한 금세공 장인이자 Nuremgerg Goldsmiths' Guild의 마스터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요. 슬하 18명의 자녀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화가 뒤러는 어려서부터 금세공 공방에서 목판과 금속판 세공 기술을 배웠습니다. 목금속 판화가 뒤러가 최고로 자랑하는 장르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이 어린 시절부터 쌓은 공방 수련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화가가 되고 싶어 했던 그는 15살이 되던 1486년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lgemut)의 작업장에 도제로 4년을 보냅니다. 그곳에서 제단화를 비롯한 종교화와 책의 삽화, 목판화 등을 배웠고요. 도제수업을 마친 그는 견문을 넓히려고 19살이 되던 1490년 부터 4년간, 독일, 네덜란드, 북부 프랑스, 수위스를 여행합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접하고 학식을 쌓은 선진적인 사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미술면에서는 북이탈리아에서 만난 만테냐 (Andrea Mategna)와 벨리니(Giovanni Bellini)로부터 영향을 받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를 이상적인 미술가의 전형으로 본받았습니다.
독어권 문화를 포함한 북유럽에서 자화상이라는 미술쟝르는 유난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50년 전에 살았던 화가 제도공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가 자화상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그가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을까 알 길이 없었을 겁니다. 공방 기술자에서 창조적인 개인으로서 의식적 자각을 자화상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되는 뒤러의 자화상이 탄생하기 훨씬 전부터 중세 교회 조각가들과 장인들은 건축물이나 작품 한 구석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그들의 얼굴을 새겨 넣는 관행을 즐겼습니다. 뒤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미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은필 소묘로 <13세의 자화상>(1484)을 그려 그 빼어난 손재주를 드러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mex3sbaLxMk
<13살의 자화상 Self-Portrait at the Age of 13>(1484) 작품은 연필 이전의 은첨필로 (Silver point)로 한 소묘입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1484년 <13살의 자화상 >에서 보이는 알프레히트 뒤러의 아이 같은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남자다운 목, 강한 코, 왠지 길어 보이는 검지 손가락. 소년에서 성인으로 옮겨가는 뒤러의 모습입니다.
현재 적어도 12개의 자화상이 전해지는데, 1493년 작품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 그리고 1498년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외 다른 자신의 작품들 속에도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판화 작품에는 넣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1515년 과슈로 그린 자신의 자화상을 라파엘로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엉겅퀴를 들고 있는 자화상 (Portrait of the Artist Holding a Thistle)은 캔버스에 붙인 양피지에 그린 유화로 1493년 제작되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의 자화상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북유럽 작가의 자화상 중 최초의 작가 자화상입니다. 서양 회화사 최초의 독립적인 자화상이기도 하고요.
1420년경 이후로는 북유럽에서 3/4 각도로 비스듬한 측면의 포즈로 그리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후기 중세와 르네상스 초기 예술은 더욱 어려운 3/4 각도를 개발하였고, 작가들은 이 포즈를 사용하는 기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뒤러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심리적으로 복잡해 보입니다. 다소 우울하고 내성적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15세기 동안, 엉겅퀴는 부부간에 있어 남자의 충실성에 대한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종교적으로 엉겅퀴 가시는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암시를 함축하고 있고요.
자화상은 어두운 톤을 배경으로 초상화의 전통적인 자세인 측면으로 3/4 각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포즈는 약간 어색해 보이는데, 이는 끊임없이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 보며 그려야 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뒤러의 세련된 옷차림이 유난히 눈에 들어옵니다. 붉은 털실 방울이 달린 모자와 우아한 푸른빛이 도는 회색 조끼, 목부분에 수놓아진 흰색 슈미즈(Chemise)와 멋스럽게 어울립니다. 작가의 손에 들려있는 식물과 날짜는 작품이 약혼 초상화(Brautportrat)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식물 학자에 의하면 손에 들린 식물은 에란 지움 아메치스(eryngium amethystinum)라 불리는데, 부부간에 있어 남자의 신의와 정절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자화상이 만들어 진 1493년은 뒤러가 22살로,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일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 마이클 울프무트의 도제 수습을 마치고, 1494년 벽돌 제조업자의 딸인 아그네스 프레이(Agnes Frey)와 결혼합니다. 아내 아그네스 프라이( Agnes Frey)와 결혼한 해인 1494년, 뒤러는 새 신부를 놔두고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릅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1494-95년 , 1505-07년 두 번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릅니다.
1495년 뒤러는 베니스를 떠났고 그곳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유명한 예술가인 안드레아 만테냐를 만났습니다. 뒤러는 만테냐의 그림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의 유화 기법을 연구했습니다.
뒤러는 또 다른 베네치아 예술가인 지오반니 벨리니의 Giovanni Belin의 예술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와 함께 여러 프로젝트에서 작업했습니다. 베니스에 있는 동안 뒤러는 유화 뿐만 아니라 수많은 목판화와 동판화를 제작했습니다. 뒤러는 1495년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후 계속해서 고품질의 예술 작품을 제작하여 유럽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알브레히트 뒤러가 1496년에 제작한 작센의 프리드리히 3세의 초상화는 당시 중요한 후원자의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작센의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3세는 뛰어난 예술 애호가로, 뒤러의 여러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판화 기법으로 제작되었으며, 뒤러의 정교한 기술과 세밀한 묘사력을 보여줍니다. 당시 26세였던 뒤러는 이미 유럽에서 인정받는 예술가로 자리잡고 있었고, 이 작품을 통해 그의 뛰어난 재능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의 초상화는 뒤러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그의 예술적 성장과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 시기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키고 있었습니다. 뒤러의 정밀한 관찰력과 인물의 특징을 포착하는 능력을 잘 보여주며, 당시 독일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시기 뒤러의 작품들은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1494년 가을 베니스로 떠나는 여행 중에 만들어진 것과 1495년 봄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숲속의 연못>은 후자에 속하며, 이탈리아 그림의 영향을 받은 뒤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풍경화에 대한 관심과 예술적 진화를 보여준 작품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서양 미술사에서 최초로 정확한 풍경을 묘사한 수채화로 평가받습니다.
구아슈: 수용성 아라비아고무를 교착제로 사용하여 만든 불투명한 수채물감입니다. 구아슈의 특징은 수채화와 달리 불투명한 효과를 냅니다. 수채화와 병용해 두껍게 발라 마티에르 효과 등 다양한 표현이 가능합니다. 선명하지만 유화와 달리 광택이 없고 부드러운 효과를 냅니다. 종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질 재료에도 사용 가능합니다. 구아슈는 중세 삽화장식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회화 전반에 걸쳐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SE46jKL9VY
알브레히트 뒤러의 3대 목판화와 4대 동판화가 있습니다.
3대 목판화는 각각 < 성모 마리아의 생애>, <대 수난>, <요한 묵시록>
4대 동판화는 <아담과 하와>, <기마병>, <서재의 성 예로니모>, <멜랑콜리아 I>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생애>는 성모 마리아의 탄생부터 영면의 과정을 묘사한 20점의 목판화 연작입니다. <대수난>은 예수가 고통받는 모습을 담은 2점의 연작이며, <요한 묵시록> 15점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천국의 도래 등을 표현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뱀의 형상을 한 마귀로부터 선악과를 받아 들면서 원죄를 짓기 직전의 성경 구절을 옮겼습니다. 헤로니모 성인이 작업하는 모습을 담은 <서재의 성 예로니모> 동판화입니다.
대다수 작품이 성경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 만큼 그리스도교인에게는 더욱 친숙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경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마리아의 약혼>을 보면 건축 양식이나 예복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뒤러의 고향인 뉘른베르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하단에 작게 그려진 악마를 상징하는 용은 성경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성장해 <요한 묵시록>에서는 거대한 용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뒤러 이전에도 글의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삽화와 판화는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뒤러는 그의 의로인의 요청을 넘어 자신의 생각을 녹여냄으로써 삽화를 판화라는 하나의 예술 장르로 승화한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스스로 장인이 아니라 아티스트로 도약함과 동시에 문자의 보조 역할을 하던 이미지를 개별적인 의미 전달 매체로 끌어올린 셈이지요. 이러한 자의식을 반영하듯 수많은 자화상을 남긴 뒤러는 그를 상징하는 이니셜 'AD'를 작품마다 다양한 형태로 각인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1498)는 목판화 작품으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유명한 연작 중 하나입니다. 야콥 헬러(Jakob Heller)의 의뢰로 그의 개인 예배당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요한계시록 6장에 묘사된 네 명의 기사를 표현하고 있으며, 각 기사는 재앙, 전쟁, 기근, 죽음을 상징합니다. 뒤러는 이 성경 구절을 극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로 해석했습니다. 화면에는 네 명의 기사가 말을 타고 질주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로, 세계의 멸망을 예고합니다.
뒤러의 섬세하고 정교한 판화 기술이 이 작품에서 잘 드러나며, 복잡한 구도와 세밀한 표현이 특징입니다. 이 작품은 27세의 젊은 뒤러를 독일과 유럽에서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는 뒤러의 예술적 재능과 깊은 종교적 통찰력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판화는 판목이나 동판 한 장으로 똑같은 작품을 무한수로 대량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때문에 일반 고객을 상대로 한 대량 판매가 가능하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재 디자인 하거나 책으로 묶어 출판할 수 있습니다. 아예 판목과 동판 자체를 내다 팔 수도 있고요. 웬만한 대작 회화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러 명의 조수를 부려가며 반복 수정 작업을 거쳐야 했던 화가들과는 다르게 뒤러는 그 솜씨 좋은 손으로 펜, 끌, 조각 탈을 놀려서 스케치하고, 목금속판 파고, 인쇄에 이르는 제작 전 과정을 손수 혼자서 해냅니다.
뒤러는 대량 인쇄 매체로서의 판화를 재발견했던 것이죠. 지금도 그의 판화작품마다 일일이 새겨져 있는 AD모노그램(화가의 이름 알파벳 첫 글자인 A와 D를 따서 만든 결합문자로)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유 상표 (trademark)나 로고 (logo)와 그 개념이 통합니다. 그는 자신의 판화 판매 촉진을 위해서 자기 PR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AD모노그램이 무단복제로 남용될 것을 우려해 법정에 저작권 보호를 요청하기도 한 저작권법의 선구자이기도 하고요.
전쟁, 화재, 소실 등을 거친 오랜 역사 끝에 오늘날 과연 뒤러가 생전 제작했던 회화며 드로잉, 판화 작품들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될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근 400점 의 회화 및 드로잉, 판화작마다 AD 모노그램이 새겨져 있다는 점과 , 생전 화가가 자신의 수중에 있던 작품들을 철저히 수집 관리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뒤러는 분명 자신의 천재성과 작품이 후대에 전해질 영향력을 의식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의 드로잉 인쇄본과 복사본들은 훗날 매너리즘,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이 선배 대가 뒤러의 놀라운 기법과 구도를 배우고 본뜨는 데 사용한 표본으로써 그 구실을 톡톡이 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4CxSaDT31c
스물여덟 살의 자화상 (Selr-Portrait at Twenty-Eight), 패널에 유화, 뮌헨 알 테 피나코텍(Alte Pinakothek in Munich).
1500년 자신의 29번째 생일 직전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작가의 3개의 자화상 중 이 작품이 가장 개인적이고, 상징적이며 복합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초기 표현과 매우 유사하여 가장 주목할 만합니다. 종교화에서의 관습과 균형성, 검은 톤, 그리고 작가가 관람객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강복처럼 축복을 주는 모습이 연상되는 가슴 한가운데까지 손을 들어 올리는 자세가 독특합니다.
이전의 자화상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뒤러의 얼굴은 이마를 중심으로 하여 정확히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얼굴은 단호함과 인간미 없는 위엄을 지니고 있어 보입니다. 빛나는 이마는 뛰어난 지성을 , 눈은 화가의 관찰력을, 손은 훌륭한 솜씨를 지녀야 진정한 화가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뒤러 자신이 바로 그런 화가라는 말이죠. 자칫 잘못하면 자만심 가득한 젊음 이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그는 평생 자신의 삶으로 자신이 르네상스형 지식인임을 보여주고 살았습니다.
작가가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관람객과 대면하는 방식은 이전의 자화상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또한 종래의 배경 처리 방식과 다르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톤의 배경은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뒤러 자신을 내보이려는 듯 보입니다.
뒤러 좌우 배경에 쓰여 있는 명문의 배치는 마치 공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초상화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검은 배경에 맞추어 갈색 톤의 전체적으로 어두침침한 분위기는 작가의 이전 두 자화상에서 보이는 붓터치와 톤의 가벼움 보다 훨씬 더 내향적인 복잡성에 대한 표현을 강조시키고 있습니다.
미술사가 마르셀 브리튼 (Marcel Brion)은 이 작품에서, 뒤러의 스타일이 앵그르(Ingres) 같은 고전주의 양식이라 말합니다. 구성에 대한 기하학적 분석은 상대적으로 단단한 대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몇 하이라트 표시는 화면 중간까지 이르는 수직 축에 아주 가깝게 정렬되어 있고요. 얼굴이 정중앙으로부터 약 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고, 시선은 약간 왼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가닥 흘러내린 머리가 좌우 대칭의 균형을 깨고 있습니다. 1500년에 정면 포즈는 세속적인 초상화에서는 예외적이었다고 합니다. 1500년과 그 이후로 , 정면을 응시하는 포즈는 중세 종교예술의 이미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연관 지어졌습니다.
또한 이 시기 뒤러는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부유한 뉘른베르크(Nurnberg) 귀족가문들의 초상화가로 일하게 됩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Fredrick III of Saxony, 1463-1525)과 같은 지방 영주들로부터 작품을 의료 받았고요. 또한, 독일의 가장 뛰어난 학자, 인문주의자들과 교우하게 됩니다. 자신의 동판화 및 목판화들의 판매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특히 목판화 연작 "묵시록(Apocalypse)"은 유럽 전역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면서 뒤러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초상화는 작가의 삶에 전환점을 축하하고, 황금시대로 접어들었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중세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세비야의 이시도르 (Isidore of Seville, 560-636)는 28세가 젊음을 통과하였으나 아직 퇴보하지 않았으며, 힘, 지성, 도덕적 엄정함, 신체적 아름다움이 정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명예와 영광을 위해 공적인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나이라고 언급한 바 있고요. 죽음이 늘 가까이 있던 중세시대 '28세'는 그렇게 실력과 경험이 버무려진 원숙한 나이로 무게감 있는 나이였나 봅니다.
작품의 라틴어 명문에는
"나 , 뉘른베르크의 알부레히트 뒤러는
28세의 나이에
영원히 변하지 않을 색으로
나 자신을 묘사하였다."
고 쓰여 있습니다.
뒤러는 이 자화상을 통해 명백하게 성안 (the Holy face)으로 불리는 특정한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자신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 이론에 근거한 시각으로 보면, 북유럽에서 화가들이 아직까지 장인의 지위에 머물러 있던 1490년대에 뒤러는 이탈리아에서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함으로써 '창조자'혹은 '예술가'로서의 화가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여 뒤러는 이 작품에서 그는 진실되고 신성한 신의 초상인 '성안'의 권위 및 신비한 힘의 속성을 자신의 이미지에 전이시킴으로써 이 개념의 극대화를 가져왔다 해석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kOC4Tm5u9U
말년으로 치닫던 해인 1522년 , 누드의 모습 <누드 자화상>(1450-55)으로 등장한 화가는 '멜랑콜리'또는 만성적인 우울증(Melancholid)에 시달리는 자신의 건강상태를 호소하기 위해서 의사에게 보낸 설명 그림입니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이 자리가 아프답니다. "
이 드로잉에서 뒤러는 한 손가락을 복부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은 비장이 위치해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비장이 담즙을 지나치게 분비하면 우울증으로 나타난다고 했던 고대 의학 이론에 정통해 있던 뒤러는 이렇게 자가진단을 내렸습니다. 1528년 57세의 나이로 환각증세와 악몽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뜰 때까지 뒤러는 자신이 앓던 우울증세를 천재성 때문이라고 여기면서 고통받는 예수의 도상을 빌린 자화상 소묘를 지속해 그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세계가 신학(중세)에서 과학(근대)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순한 토끼 그림이 아니라, 세계관의 변화를 드러내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지요. 동시에 '모방-앎-즐거움의 공식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관념적 신의 세계를 표현한 중세를 지나 세계에 대한 인문주의 (인간의 정신, 창조력을 찬미하는 낙관주의적 인간관)적 탐구가 진행되는 르네상스와 근대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들토끼>는 변화하는 세계관을 반영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뒤러가 르네상스 화가라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뒤러는 관념 속 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중세 미술에서 탈피하여 직접 자신의 눈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옮겼습니다. 즉 관념이 아닌 '관찰과 탐구'라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로 사물에 접근한 것입니다. 토끼가 정말 사진처럼 리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살아서 움직일 것처럼, 금방이라도 코끝을 찡긋할 것처럼 말입니다.
뒤러는 가볍게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수채화로 토끼의 털을 표현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토끼의 몸 위에 털을 켜켜이 쌓아 올리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각 부위별 털의 질감을 살렸습니다. 토끼의 털이 이처럼 다채롭다는 것을 우리는 화가의 작품을 통해서 새삼 깨닫게 됩니다.
화가는 자신 앞에 한 마리의 개별적 토끼를 그렸지만 그 개별성을 통해 토끼에 대한 보편적 앎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별성에서 보편적 앎을 깨달으면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더욱 압권은 토끼의 눈을 들여다보면 창문이 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뒤러는 살아있는 토끼를 생포해서 작업실에 가져와서 그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자세히 , 눈동자에 비춘 창문의 빛 마저 관찰하여 그림으로 옮겼습니다. '관찰과 탐구'에 근거한 모방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뒤러는 <들토끼> 그림을 통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식물도감을 보고 있는 착각이 들정도로 세밀한 작품 < 매발톱꽃>입니다. 매발톱꽃의 이름은 동서양 모두 같은 의미를 지녔습니다. 꽃의 뒤쪽에 붙은 '꽃불'이라 불리는 꿀주머니가 마치 매의 발톱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 비유했고, 켈트족은 꿈과 환상의 세계와 연결하는 문이라 믿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실의에 빠졌을 때 매발톱꽃의 꽃잎을 두 손에 문질러 바르면 용기가 생겨난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입니다. 이 때문에 '성모의 장갑'이란 별칭도 얻었고요. 인디언들 사이에선 매발톱꽃에 숨겨져 있는 넥타르 성분 때문인지, 뱀과 인삼 등을 섞어 사랑의 묘약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 약초를 먹으면 사자의 힘이 솟아났다고 하네요. 영국에서는 '사자의 허부' 이탈리아에서는 은밀한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 중국에서는 바람둥이 꽃이라는 의미로 '매춘화'라고도 불리고요.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그의 예술적 시야를 크게 넓혔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여행에서 뒤러는 "전혀 예감하지 못했던 색채가 지닌 힘"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뒤러는 베네치아를 여행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진 문화에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의 원근법, 해부학, 인체 비례등을 배웠고, 이를 통해 그의 예술적 기법이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뒤러가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고 북유럽적, 독일적인 미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506년 베네치아에서 머물던 뒤러가 절친한 친구 피르크하이머 (Willibald Pirckeimer)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태양 아래에서 떵떵거리고 있다네. 내 나라는 나를 기생충 취급을 하지만 여기서 나는 거장 취급을 받고 있다고"
라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공방 장인 취급을 받아오던 뒤러가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남다른 천재성을 지닌 창조자로 특권적인 계층이 된 것 같은 사회적 대접을 받았으니 그가 느꼈을 뿌듯한 기분은 능히 짐작이 됩니다.
빌리발트 피르크하이머(Willibald Pirckheimer 1470-1530))의 모습입니다. 알프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1471-1528)의 친구이자 뉘른베르크 출신의 유명한 인문주의자로 뒤러의 많은 작품을 구입하고 그의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뒤러에게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했습니다. 종교와 인문학에 통달한 피르크하이머와의 대화를 통해 뒤러는 '묵시록'등의 목판화 연작을 탄생시켰습니다. 뒤러와 황제 사이의 관계를 중재하는 역학도 했습니다. 법률가 집안 출신인 피르크하이머의 도움으로 금세공사의 아들이었던 뒤러가 중세 미술의 거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원과 교류를 통해 피르크하이머는 뒤러의 예술적 발전과 사회적 지위 향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베네치아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Venetian Woman)은 독일 작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느릅나무로 만들어진 패널 위에 유화로 그려진 반신상 크기의 작은 패널화입니다. 작가의 두 번째 이탈리아 방문 때 만들어진 다른 여러 상류 사회의 초상화들과 함께 제작되었습니다.
젊은 여인이 끈이 달린 슈미즈(Chemise)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르고, 뒷머리는 작은 캡에 감싸여 있습니다. 이 작품의 조화로움과 우아함은 여인의 창백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피부와 불그스름한 금발 머리에서부터 그녀의 검은색 보석과 진주가 어우러진 목걸이와 부유층이 선호하는 패턴의 드레스까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혼합되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검은 배경에 의해 더욱 강조되고 있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NbA5s4waMQ
뒤러가 1506년에 그린 <장미 화관의 축제 Feast of the Rosary>는 독일 작가 특유의 세부 묘사에 이탈리아적인 인체 묘사가 어우러진 알브레히트 뒤러의 수작입니다. 아기 천사들이 받쳐 들고 있는 초록색 장막 아래에 성모님께서 푸른 옷을 입고 옥좌에 좌정하고 계십니다. 작은 구름을 탄 아기 천사들은 성모님의 머리 위에서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천상 모후의 관을 들고 있고요. 의자에 앉아계신 성모님의 무릎에는 아기 예수님이 비스듬한 자세로 기대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자세와 통통한 살점의 표현, 그리고 성모님의 옷 주름을 통해 드러나는 인체의 굴곡에서 뒤러의 르네상스적 회화의 특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작품 중심에는 성모님의 좌우로 무릎 꿇고 있는 이들은 율리오 2세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황제입니다. 성모님은 황제의 머리에 장미 화관을 씌워주시고, 아기 예수님은 이와 똑같은 장미 화관을 교황의 머리에 씌워주려 합니다. 교황 발치에는 세속 권력을 상징하는 황제의 왕관이 있는데, 교황과 황제는 화려한 관을 내려놓고 예수님과 성모님으로부터 장미 화관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1500년 당시 유럽의 최고 권력인 교황과 황제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성모님 왼편에 서 있는 성 도미니코는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행렬용 십자가를 들고 있는 추기경에게 장미 화관을 씌워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 당시 도미니코 수도회가 교회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동정 성모에게 묵주를 받는 성 도미니코는 묵주기도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황과 황제의 뒤편에 각각 좌우 대칭으로 자리 잡은 사람들은 베네치오 로사리오 형제회 설립자와 이 그림의 후원자들로, 시선이 모두 성모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뒤편에 있는 몇몇은 시선을 딴 데로 두고 있어요. 오른쪽 나무 아래 명문을 들고 서 있는 금발 머리 남자가 바로 뒤러 자신입니다.
그 명문에는 "독일인 알브레히트 뒤러가 5개월 만에 그렸음. 1506년. 서명"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멀리 배경으로 보이는 푸른 바위산의 풍경도 이탈리아에서 배운 원근법입니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이 작품을 더욱 자연스러워 보이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뒤편의 후원자들 위로도 아기 천사들이 장미 화관을 들고 내려와 사람들의 머리에 장미 화관을 씌우고 있습니다. 작품 중앙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 밑에는 류트를 연주하고 있는 천사도 보이네요. 이 장면은 조반니 벨리니가 1505년에 베네치아 산 즈카르야 성당에 그린 벽화와 비슷합니다. 뒤러는 장미 화관을 쓰고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바치려는 여러 인물을 통해 봉헌과 구원의 축제 분위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늘 머리와 가슴속에 기억하고 있는 <기도하는 손> 작품입니다. 1508년경에 제작된 유명한 펜과 잉크 드로잉입니다. 스케치는 팔이나 어깨 등 다른 신체부위가 일체 제거된 채 한데 모은 두 손만이 공중에 떠 있는 특유의 이미지 때문에 보는 이에게 유난히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정식 명칭은 "사도의 손에 대한 연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알베르티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뒤러가 자체 제작한 청색 종이에 흰색 하이라이트와 검은 잉크를 사용하여 그렸습니다. 원래는 프랑크푸르크에 설치된 헬러 제단화의 중앙 패널을 위한 스케치로 여겨졌지만 , 최근에는 완성된 그림의 정교한 기록물로 보는 견해가 더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손'은 서양에서 가장 널리 재현되는 기도의 이미지가 되었으며, 포스터, 커피잔, 휴대폰 등 다양한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1871년 비엔나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인정받았으며 , 뒤러의 18명의 형제 중 한 명의 손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묘사하고 있으며, 뒤러의 섬세한 기법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 종교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뒤러의 작품들은 종교 개혁 시기의 영향을 받아, 성스러운 인물들을 더욱 현실적이고 인간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성모와 아기 예수의 모습이 평범한 모자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어 , 당시의 예술적 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접근을 보여줍니다.
이 시기는 뒤러가 예술가로서 원숙기에 접어든 때입니다. 그의 섬세한 기법과 세밀한 묘사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이 작품에서도 그의 뛰어난 기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이 북유럽으로 확산되던 때입니다. 뒤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켰고, 이 작품에서 그 융합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제작 시기는 예술적, 종교적, 사회적 변화의 교차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Knight, Death and the Devil)는 1513년에 제작된 동판화입니다. 이 작품은 뒤러의 세 가지 주요 판화 중 하나로,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가 등장합니다. 기사가 중세의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있으며, 그의 옆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과 악마가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인생의 여정과 도덕적 결의를 상징하며, 죽음과 악마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중세적 미신 세계와 뒤러의 상상력이 결합된 판타지적 요소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적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기사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의지와 결단력, 그리고 삶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인간 정신의 강인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당시 독일 사회의 종교적, 철학적 사고를 반영하며, 삶과 죽음, 선과 악의 대비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코뿔소(Rhinoceros)' 작품은 그의 가장 유명한 목판화 중 하나입니다. 1515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뒤로 가 직접 코뿔소를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들어낸 놀라운 예술 작품입니다.
뒤러는 포르투갈에서 인도로 보내진 코뿔소에 대한 스케치와 설명을 바탕으로 이 목판화를 제작했습니다. 그의 상상력과 뛰어난 관찰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다른 유럽인들에게 신비로운 동물인 코뿔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뒤러는 코뿔소의 피부를 마치 갑옷처럼 표현했고, 등에 비늘 같은 무늬를 더했습니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는 뒤러의 뛰어난 기술과 자연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줍니다. "코뿔소" 목판화는 뒤러의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인들의 이국적인 동물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알부레히트 뒤러의 <막시밀리안 1세 초상화>(1519) 작품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를 묘사한 것으로 뒤러의 뛰어난 세부 묘사와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현재 빈예술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크기는 61.5*74cm이며,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5세기부터 왕실 초상화가 국가와 통치자의 상징으로 중요해졌고, 막시밀리안 1세는 이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초상화를 통해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의 지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력을 영속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활용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초상화를 여러 점 제작하고 배포함으로써 황제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고 권위를 세우려는 목적이 지요. 이처럼 막시밀리안 1세의 초상화는 단순한 개인의 모습을 넘어 정치적, 상징적 의미를 지닌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알브레히트 뒤러가 제작한 대규모 목판화로, 1518년경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목판화는 크기가 357*295cm로,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목판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총 192개의 판목으로 제작되었으며, 이는 당시 목판화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막시 밀리안 1세 황제는 뒤러에게 자주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이 개선문 목판화도 그중 하나입니다. 황제는 판화의 정치적 선전 가능성을 인식하고 이를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이 작품은 황제의 재임 기간 마지막 해에 의뢰되었고, 뒤러는 1518년에 준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대규모 목판화는 황제의 통치 업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그의 권력과 위엄을 과시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뒤러의 뛰어난 예술적 기량과 황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총천연색으로 인쇄된 이 대작은 뒤러의 대표적인 판화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네 명의 사도 The Four Apostles>는 그의 마지막 대작으로, 1526년에 완성된 패널화입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유럽에서 중요한 사회적, 종교적 변화, 특히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시기에 살았습니다. 이 작품은 뒤러의 예술적 성숙도와 르네상스 정신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실물보다 큰 크기로 묘사된 네 명의 사도들을 그렸습니다. 뒤러의 뛰어난 기술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그의 화가로서의 능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뒤러의 종교적 신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뒤러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표현했습니다. 뒤러는 이 작품을 자신의 고향인 뉘른베르크 시의회에 기증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예술적 유산을 남기고자 했음을 시사합니다.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이 작품은 성경 구절과 함께 제작되어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체 비례와 해부학적 정확성을 중시한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뒤러의 마지막 대작으로 그의 예술적 여정의 정점을 나타냅니다.
이 작품은 뒤러가 북유럽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독일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yNqLrb0LRE&t=3s
알브레히트 뒤러의 <화가 어머니의 초상>은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입니다. 이 초상화는 뒤러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개월 전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작품에서는 어머니의 병약한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 동시에 강인함과 책임감 있는 인간의 모습도 함께 드러납니다. 뒤러는 이 작품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했으며, 인간의 연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포착해 냈습니다.
이 초상화는 뒤러의 예술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표현력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이 작품은 뒤러의 가족에 대한 애정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반영하고 있어, 단순한 초상화를 넘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뉘른베르크에서의 마지막 몇 년 동안 Albrecht Durer는 측정과 비율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면서 뛰어난 예술 작품을 계속 제작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작업장에서 수습생을 훈련시켰습니다. 불행하게도 뒤러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1528년 4월 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1622년 그의 명예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진 뉘른베르크의 성 요한 교회 묘지에 묻혔습니다. 뉘른베르크는 이제 그의 삶과 작품이 함께하는 박물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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