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서양 미술사에서 약 1400년에서 1600년에 이르는 시기 전체를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거의 200여 년을 지속한 르네상스는 다시 초기, 전성기, 그리고 후기로 구분이 되지요. 각각의 단계가 나타나는 시기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크게 알프스 산맥을 중심으로 지역적인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알프스 이남 이탈리아에서는 1400년경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고 그 후 백 년 늦게 시작된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는 약 1500년에서 시작하여 1550년까지 지속됩니다. 대표적인 미술가로 알브레히트 뒤러(Albrect Durer, 1471-1528)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 형제가 있습니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는 플랑드르의 네덜란드 화가입니다. 후베르트 반 에이크의 동생으로 15세기 북유럽에서 중요한 화가중 한 사람이고요. 11세기 이후 모직물업으로 도시가 번성했고 벨기에가 독립하여 분리될 때까지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영어 이름 '플랜더스(Flanders)'는 저지대 또는 '물이 범람하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얀 반 에이크는 15세기 초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사의 선구자로, 그의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기술과 특징이 나타납니다. "유화의 아버지" 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유화 기법의 혁신을 가져온 화가입니다. 강도와 유연성이 뛰어난 유화 기법을 개발하여 얇고 투명한 덧칠과 미세한 정밀묘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인물과 사물을 매우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고요. 중세미술과 달리 인물을 이상화하지 않고 개성을 가진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일상적인 사물에 종교적 상징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관찰과 사생에 근거한 사실적인 풍경 묘사 기법을 사용했고요. 수학적 정확성보다는 경험과 직관에 의한 원근법을 구사했습니다. 수면에 비치는 광선 등 빛의 효과를 효과적으로 포착했습니다. 이러한 기술과 특징들로 인해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는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후베르트 반 에이크는 얀 반 에이크의 형입니다. 동생 람베르트(Lambert van Eyck)와 누이 마르케레테(Margaretha van Eyck)도 화가라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가문 출신입니다. 그는 '성스러운 팔'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뛰어난 기술을 가진 화가였습니다.
그림 속 인물은 붉은 터번 (실제로는 chaperon이라는 모자)을 쓰고 있습니다. 어두운 배경 앞에 3/4 측면으로 앉아 있는 자세로 말입니다. 인물의 얼굴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주름진 피부와 약간 충혈된 눈이 특징적입니다. 특히 관람자를 직접 응시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인상적입니다.
이 작품은 종종 반 에이크의 자화상으로 여겨집니다. 그 근거로는 화면 상단에 새겨진"AIs Ich Can"(내가 할 수 있는 대로)이라는 문구와 인물의 직접적인 시선 때문이지요. 반 에이크의 뛰어난 기술이 돋보이는 이 초상화는 인물의 피부 질감과 터번의 주름을 섬세하게 표현하여 사실적인 느낌을 줍니다. 붉은 터번은 인물의 창백한 피부 및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어 작품에 생동감을 더하고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의 "붉은 터번을 쓴 남자" 작품에서 터번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터번은 당시 사회적 지위와 학식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특히 학자들이 착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붉은색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반적으로 붉은색은 권위, 부, 또는 고귀함을 상징했습니다. 무도회 장면에서 귀족들이 붉은 터번을 착용한 것으로 묘사되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지요. 이 작품이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자화상으로 여겨지는 점을 고려하면, 붉은 터번은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예술적 권위를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터번의 정교한 주름과 질감은 반 에이크의 뛰어난 기술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는 화가의 능력을 강조하고 현실감 있는 묘사를 통해 관람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얀 반 에이크는 당시의 유화 기법을 집대성하여 회화의 새로운 표현 곧 대상을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그릴 수 있는 길을 연 화가입니다. 그는 유화를 통해 선명한 색채, 빛과 음영의 놀라운 조화, 그리고 꼼꼼한 세부 묘사를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형 후베르트와 함께 1425-35년경에 그린 <무덤가의 세 마리아>는 유화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마르코복음 < 16장 1-8절>이 그 배경입니다.
이 그림은 무덤을 찾은 세 마리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마리아 살로메가 그들이지요. 여자들은 저마다 향유 병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샀기 때문이죠. 터번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무릎을 꿇고 천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여자는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예수님이 묻혔던 석관은 중앙에 있고 , 여자들은 왼쪽에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들쭉날쭉한 바위 언덕 아래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고요. 무덤 정중앙 관뚜껑 위에는 하얗고 긴 겉옷을 입은 천사가 왕홀을 손에 쥐고 여자들에게 손짓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섬세하게 묘사된 천사의 날개가 인상적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천사와 관뚜껑이 대각선을 이루고 있듯이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무장한 세 명의 군사도 대각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배경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비슷한 15세기 중세 성벽 도시가 그려져 있습니다. 당시 살고 있는 곳으로 묘사해야 더 실감 나게 공감할 수 있을 테니까요. 도시 위의 하늘에는 네덜란드 회화에서 가장 초기에 묘사된 새 떼가 지나가네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성 프란치스코의 성흔"(Saint Francis of Assisi Receiving the Stigmata)작품은 1430-1432년경에 제작된 소형 유화입니다. 작품의 크기가 작은 것 (12.7*14.6cm)으로 보아 휴대용 개인 소장품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소유자가 예루살렘 순례 여행 중에 휴대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 작품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40일간의 금식 중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상처(성흔)를 받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날개를 가진 천사(세라핌)의 모습으로 공중에 떠 있습니다. 반 에이크는 미세한 세부 묘사 기법을 사용하여 아주 선명하면서도 멀리 있는 듯한 이미지를 창조해 냈습니다. 전설 속 바위투성이 풍경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멀리 네덜란드 도시의 모습을 포함시켜 이 기적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작품은 반 에이크(1390-1441)의 뛰어난 세부 묘사 능력과 풍경화 기법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자연주의적 풍경화보다 50년 이상 앞선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푸른 샤프롱을 쓴 남자의 초상"(Portrait of a Man with a Blue Chaperon)은 1430년경에 제작된 소형 유화 작품입니다. 아주 작은 크기로 , 액자 포함 22.5*16.6cm입니다. 나무 패널에 그려진 유화이고요. 전형적인 반 에이크의 세속 초상화 스타일로, 약간 과장된 크기의 머리, 어둡고 평평한 배경, 인물의 얼굴 세부 묘사가 섬세합니다.
정체불명의 남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푸른색 샤프롱(중세 시대의 모자 종류)를 쓰고 있고요. 남자의 오른손에 들고 있는 반지는 과거에는 그의 작업이 보석상이나 금세공인일 것이라고 해석되었지만, 최근에는 약혼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현재 루마니아 사비우의 브루켄탈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반 에이크의 뛰어난 세부 묘사 능력과 유화 기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초상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제단화는 가톨릭 교회에서 '제대화'라 불립니다. 교회 동쪽 중심 제단 뒤에 수직으로 서 있는 패널화로, 미사 때 모든 신자가 볼 수 있었지요. 설교가 청각이라면, 제단화는 시각적 교화 수단이었습니다. 라틴어 성경을 읽지 못했던 당시 대다수 신도에게 효과적이었죠. 그러나 미술사에서는 내용 못지않게 외형이 중요했습니다.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는데, 가장 단순한 것이 한 폭으로 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형식의 '팔라(Pala)'입니다. 두 폭 제단화로는 작가 미상의 <월턴 두 폭 제단화>가 유명하고요. 개폐가 가능한 세 폭 제단화 (트립 티콘 Trypticon)가 가장 일반적이었습니다. 날개형은 마인 프랑크에서 활동한 그뤼네발트가 완성했습니다. 통상 다섯 개 이상의 패널로 구성된 것이 다폭 제단화입니다.
플랑드르 지역은 습지로, 이탈리아처럼 프레스코화가 유행하기 어려웠습니다. 화판, 즉 패널화(Panel)가 유행했지요. 제대화는 습기가 많은 북유럽 고유의 양식으로 그곳 미술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세에는 일상 생활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내세가 중요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것이 점차 제단화에서 벗어나 15세기부터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합니다. 풍경화와 정물화는 17세기에 와서 네덜란드로에서 유행하게 되고요. 1648년 프랑스 왕립 미술원에 역사화(성경, 신화, 역사)->초상화->풍경화-> 정물화->풍속화 순으로 공식화합니다.
형 후베흐트 반 에이크 (Hubert van Eyck, 1370 ?-1426)가 시작하여 동생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 1395?-1441)가 완성한 <헨트 Ghent 제단화 , 1432>입니다. 일명 <어린양의 경배> 또는 <신비의 어린양>으로 불리는 참나무 12폭 작품입니다. 5세기 초 플랑드르 지역 헨트(겐트) 시 성 바봉 (Saint Bavo) 성당의 가족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시장 요스 베이트(Joos Vijd)가 반 예이크 형제에게 주문하여 제작했습니다.
겐트 제단화 (Ghent Altarpiece)는 1432년에 완성된 얀 반 에이크의 대표작으로, 초기 네덜란드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입니다. 대형 다폭 제단화로, 여러 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열고 닫을 수 있지요. 중앙 패널에는 '신비의 어린양 경뱨배'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전체적으로 열린 화면의 그림은 도상학적 의미가 매우 복잡합니다. 화면 (365*515cm)은 천상과 지상 2단으로 나뉩니다. 하단 다섯 폭이 <어린 양의<어린양의 경배>입니다. 양은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었으나 중세 시대 미술에서는 통상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상단이 복잡하네요. 왼편부터 열두 폭을 순서대로 서술하면, 아담-노래하는 천사들-마리아-하느님-세례자 요한- 연주하는 천사들-이브 순입니다. 중앙 인물을 예수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바로 아래 <어린양의 경배> 위쪽 반원의 성령(비둘기)과 연결할 때 아무래도 하느님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습니다.
닫혔을 때는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단에는 봉헌자 요스 베이트- 세례자 요한 - 사도 요한 -이사별 보루트, 가운데는 수태고지하는 가브리엘 천사와 성모 마리아, 상단은 선지자 즈카르야-이교도 무녀 에리트 레이와 쿠마이-선지자 미가 등 한 폭, 한 폭이 마치 개인 초상화처럼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뒤쪽 배경을 이루는 풍경은 사실주의의 느낌이 물씬 풍기며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 전쟁과 수난을 겪었지만 대부분 원형이 보존되어 있어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가 있습니다. 섬세한 세부 묘사, 풍부한 상징성, 혁신적인 기법으로 인해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VhwinCiELI
유화가 개발되기전까지 템페라 기법(달걀노른자를 물감에 섞어 바름)이나 프레스코(회벽 위에 수성 물감이 스미게 함)를 사용하였지만, 광택이나 물감이 스미는 문제가 있어 정교한 묘사가 어려웠습니다. 얀 반 에이크는 기름에 물감을 섞어 바르는 유화기법을 개발하였습니다. 기름이 마르는 시간 동안 몇 겹을 덧칠할 수 있고 보다 더 정밀하고 섬세한 표현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hRFw208o8
템페라(Tempera): 안료와 매체의 혼합. 안료를 녹이는 용매로는 주로 계란이 이용되었습니다. 계란이나 아교질, 벌꿀, 무화과나무의 수액 등을 용매로 사용해서 색채가루인 안료와 섞어 물감을 만들고 이것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화가들은 광물이나 식물에서 색채를 직접 마련하였습니다. 색채가 있는 광물을 맷돌에 갈아서 색채 가루인 안료를 만들고 이것을 용매와 섞어서 물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때 사용된 용매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주로 계란이 사용되었습니다.
템페라 화법은 건조가 빠르고, 또 엷고 투명한 물감의 층이 광택을 띠어 덧칠하면 붓자국이 시각적인 혼합효과를 냅니다.또 일단 건조된 뒤에는 변질되지 않고, 갈라지거나 떨어지지도 않으며, 온도나 습도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 빛을 거의 굴절시키지 않아 유화보다 맑고 생생한 색을 낼 수 있어 벽화 등에 아주 적합한 기법입니다. 그러나 붓의 움직임이 원활하지 못하므로 색조가 딱딱해지는 흠이 있고 , 수채화나 유화같이 자연스러운 효과와 명암, 톤의 미묘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Leal Souvenir"(층실한 기억)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가 1432년에 그린 초상화입니다. 이 작품은 오크 패널에 유화로 그려진 33.3*13.09cm 크기의 소품으로, 현재 런던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충실한 기억"이라는 뜻으로 남자의 초상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초상화는 중세 유럽 예술에서 세속적인 인물 묘사의 중요한 예시로 여겨집니다. 반 에이크의 뛰어난 관찰력과 세밀한 묘사 기술이 잘 나타나 있으며, 15세기 초 북유럽 르네상스 시대를 배경으로 그려졌습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가 활동하던 플랑드르 지역은 당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으며,부유한 상인과 귀족들이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충실한 기억>과 같은 세속적 초상화의 제작을 촉진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사실적으로 정교한 묘사 기법이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얀 반 에이크는 이러한 기술적 진보를 활용하여 인물의 특징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개인의 정체성과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충실한 기억>은 이러한 예술적, 사회적 변화의 맥락에서 탄생한 작품으로, 중세의 전통과 르세상스의 새로운 경향이 공존하는 과도기적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OuO99BljB4
유화(Oil Painting)
서양미술의 대표적 형태 중 하나로, 기름으로 갠 물감(안료)을 사용하여 그리는 서양화의 한 기법입니다. 유화 기법의 특징은 다른 기법과 비교해서 색조, 색의 농담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동시에 선전 표현도 가능하고 광택, 반광택, 무광택의 효과, 혹은 불투명, 반투명, 투명의 묘법도 자유자재로 구사 할 수 있으며 두꺼운 칠, 얇은 칠, 혹은 기복의 변화가 있는 화면 등 재질감의 표현이 가능합니다. 또한 제작 중의 색과 건조 후의 색의 변화도 없는 등의 장점을 가집니다.
프레스코 Fresco
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라는 뜻입니다. 덜 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한 벽화, 그림물감이 표면으로 배어들어 벽이 마르면 그림은 완전히 벽의 일부가 되어 물에 용해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수명도 벽의 수명만큼 지속되지요. 프레스코는 석고가 마르기 전에 재빨리 그림을 그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림의 수정도 거의 불가능해 정확하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합니다. 또 사용할 수 있는 안료의 색깔도 제한되어 있고요 (15-16세기 화가들은 프레스코에는 천연 안료만이 적합한 것으로 보았다. ). 벽이 마를수록 색깔도 옅어지며, 색의 농담을 이용한 효과도 얻을 수 없습니다. 습기가 차면 석고가 부서지므로 그림도 함께 떨어져 나가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건조한 지방에서는 가장 영구적이며, 그 결과 베니스를 제외한 이탈리아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며 북유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KCW8LIukfE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는 최초의 유화 작품이라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기록상으로론 있었지만 이 기법을 널리 전파시킨 계기는 이 작품이 처음입니다. 그가 색채 가루를 최초로 기름에 섞어서 사용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세심한 고찰, 정교한 세부 묘사가 가능했습니다.
조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와 조반니 체나미(Giovanna Cenani)의 결혼식을 그렸습니다.
최초의 유화 작품이고요. 그 이전에도 기록상 있었지만 유화기법을 예술적인 수준으로 올리고 널리 전파시킨 계기는 이 작품이 처음입니다. 사실적이고 경험주의적 예술을 추구했던 플랑드르 문화권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최초의 전신 초상화이고요.
배경의 사물들이 주인공의 높은 경제적 수준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그림에 포함되었습니다. 여자가 착용한 목걸이 팔찌 등 장신구와, 정교하게 만들어진 황동 샹들리에, 침대 밑에 깔린 바닥의 작은 오리엔탈 카펫이 그러합니다.
신부의 헤드드레스의 용도는 머리카락을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결혼 전의 처녀들은 머리카락을 드러내고 다닐 수 있었지만 결혼한 여자들은 외출 시 머리카락을 보여선 안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림 속의 신부가 헤드드레스를 쓰고 있는 것은 이제 결혼을 한 여인으로서 남편의 뜻에 종속됨을 의미합니다.
두꺼운 커튼으로 가리는 높은 침대는 15세기에 실용적인 목적이 아닌 부유함의 과시 수단으로서 가정집 내에서 가장 중요한 방에 설치되었습니다. 가격이 비싸 부유층만이 구입이 가능했던 오렌지나 남녀의 의상에 나타나는 모피 등도 이 예비부부의 재정적 여유로움을 보여줍니다. 창문밖으로 보이는 체리열매는 부부의 사랑을 상징하고, 오렌지는 인간의 타락 이전 에덴동산에서의 순수와 결백을 상징합니다. 또한 네덜란드에서는 오렌지가 매우 비싼 수입과일이었으므로 이들이 매우 부유한 계층임을 나타냅니다.
신 앞에서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선서를 하는 모양새, 아르놀피니의 엄숙한 표정과 위쪽을 향해 들어 올린 오른손은 그가 이러한 맹세의 의식을 행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신랑이 외부로 향하고 있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의 전통적인 역할을 나타냅니다. 신부의 그림자가 침대에 드리워져 있는 것은 여자의 역할을 상징하고요. 마치 임신한 것처럼 불러있는 여자의 배는 당시에 유행하던 복식 중 하나라고 합니다. 천장의 샹들리에에 단 하나의 양초가 켜져 있습니다. 이것은 신의 통찰력과 지혜, 혹은 신선한 결혼의 맹세를 의미합니다. 샹들리에는 금속의 표면 질감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강아지는 본래 주인에게 충실한 본성을 지닌 동물입니다. 따라서 부부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충실한 애정을 말해줍니다. 강아지 털을 아주 세밀히 묘사하였습니다.
맹세를 상징하는 남자의 손, 여자의 손위치는 손종과 겸손을 상징합니다. 로마 후기부터 전해지는 전통적인 방식의 결혼식에서 는 남녀가 서로의 오른손을 잡고 예식을 치르는 반면 아르놀피니는 왼손으로 신부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르놀피니의 약혼식을 재현한 그림이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약혼식은 가까운 장래에 두 남녀가 결혼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기본적인 의미 외에도, 양가가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친척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재정적, 사회적 이득을 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해관계에 기반한 일종의 계약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결혼식의 장면으로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결혼식에서 중요한 의식 중 하나인 남녀가 서로 손을 잡는 행위 때문입니다.
침대 위에 붙어있는 나무장식은 임산부의 수호 성녀 마가레트( 라틴어로 진주) 상으로 임신을 원하는 부부의 바람이 담겨있습니다. 벗어놓은 신발은 성경 구절에 기초한 것으로 구약성격에 출애굽기 편에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대목이 나옵니다. 신발은 매우 세속적인 물건으로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경건한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기독교적 유리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들이 신발을 벗고 결혼 서약에 임하는 것도 마찬가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경의 벽면에 걸린 거울 안에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뒷모습 외에도 결혼식의 증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합니다. 특히 그중 한 인물이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며, 이 결혼을 성립을 기록하고 증언하기 위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거울의 테두리 장식도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10장 면의 예수 수난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예수의 수난은 곧 교회와의 결합이며 종종 결혼으로써 비유되기도 합니다. 10이라는 숫자는 예수 자신 혹은 기독교적인 문맥 내에서 '완전함'의 상징성을 가집니다. 화면 왼쪽 묵주와 오른쪽 위 먼지떨이 솔은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결혼 선물로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의미입니다.
얀 반 에이크는 최초로 작품에 사인을 한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거울 윗부분 벽에 이름과 날짜가 다음과 같이 라틴어로 기입되어 있습니다.
"Jahnnes de dyck fuit hic.1434"
(얀 반 에이크 이곳에 있었다. 1434)
https://www.youtube.com/watch?v=9ODhKqFaugQ&t=3s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dml "보드앵 드 라노이의 초상화(Portrait of Baudouin de Lannoy)는 1435년경에 그려진 소형 유화 초상화입니다. 이 작품은 필립 선한 공(Philip the Good)의 궁정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플랑드르의 정치가이자 영국 헨리 5세 궁정의 대사였던 보두앵 드 라노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상화에서 보두앵은 공식적인 자세롤 표현되어 있으며, 황금양털 기사단의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의복은 갈색 자주색 브로케이드 벨벳으로 만들어졌으며, 큰 모피 모자를 쓰고 있어 그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냅니다.
반에이크는 모델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현실과 약간의 차이를 두었습니다. 특히 인물의 머리가 몸에 비해 비율이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가는 초상화를 미화하지 않고 실제 모습 그대로를 표현했습니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대법관 롤랭과 성모(The Madonna of Chancellor Rolin)"는 1435년경에 제작된 초기 네덜란드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입니다. 이 유화 작품은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림은 세 주요 인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중앙에 왕관을 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왼쪽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니콜라 롤랭 대 법관입니다. 성모 마리아 위에는 천사가 떠 있어 그녀에게 왕관을 씌우고 있습니다. 배경은 상세하고 풍부합니다. 인물들은 화려한 로지아(loggia)에 위치해 있으며 , 그 뒤로 도시와 강이 보이는 광활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 도시는 롤랭의 고향인 오튕(Autun)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림에는 상징적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둥 밖의 작은 정원에는 마리아의 덕목을 상징하는 다양한 꽃들이 묘사되어 있고, 공작새와 까치는 선과 악의 대비를 나타냅니다. 이 작품은 반 에이크의 뛰어난 기술과 세부 묘사 능력을 보여주며, 당시의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권력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니콜라 롤랭 대법관의 여러 의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롤랭의 종교적 열망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나타냅니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어, 자신의 신앙심과 겸손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롤랭의 정치적 지위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가 성모 마리아와 같은 공간에 동등한 크기로 묘사된 것은 그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암시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롤랭의 개인적인 봉헌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종교 작품을 성인이나 성모에게 봉헌하는 관행에 따라, 롤랭은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신앙과 헌신을 표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그림은 롤랭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기도의 표현이 기도 합니다. 그림 속 세부 묘사와 상징들은 롤랭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ahur-E9gjY
얀 반 에이크의 '성녀 바바라'(Saint Barbara)는 1437년에 제작된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41.2*27.5cm 크기의 오크 패널에 그려진 소형 드로잉으로, 작가의 서명과 연도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성녀 바바라는 책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그 뒤로 건설 중인 고딕 대성당이 보입니다. 바바라는 전형적인 반 에이크 초상화 스타일의 좁은 어깨를 가지고 있으며, 후플랑드(houppelande)라는 넓은 소매의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배경에는 건설 현장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건축가, 감독관, 석재를 운반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는 후대 피터 브뤼겔의 작품을 예견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 작품의 특이점은 완성된 그림인지, 미완성 드로잉인지, 혹은 계획된 유화의 밑그림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것입니다. 붓터치, 철필, 은점, 잉크, 유화, 흑생 안료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으며, 청색과 울트라마린 안료는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드레스덴 삼연화(Dresden Triptych)는 1437년에 제작된 소형 제단화입니다. 이 작품은 중앙 패널과 양쪽의 이중 날개로 구성된 총 5개의 개별 패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앙 패널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묘사되어 있으며, 왼쪽 날개에는 대천사 미카엘과 기부자, 오른쪽 날개에는 성 카타리나가 그려져 있습니다.
얀 반 에이크의 유일한 현종하는 삼연화 제단화입니다. 작가의 서명, 날짜, 개인 모토인 "ALC IXH XAN" (내가 할 수 있는 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래의 프레임이 보존되어 있으며, 프레임에는 라틴어 명문과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크기가 매우 작은 휴대용 제단화로 추정됩니다.
이 작품은 얀 반 에이크의 공간 처리 능력의 발전을 보여줍니다. 15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성모 마리아 초상화의 도상학적 요소를 확립했습니다. 현재 드레스덴의 겜엘데갤러리 알테 마이스터(Gemaldegalerie Alte Meister)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MgbOq5T_RQ
얀 반 에이크의 "마르가리타 반 에이크의 초상"은 1439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현재 브뤼헤의 그뢰닝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초상화는 화가의 아내인 마르가리타를 그린 것으로, 그녀가 34세 경일 때 제작되었습니다.
작품의 크기는 25.8* 32.6cm로 비교적 작은 편입니다. 얀 반 에이크는 이 초상화에서 그의 특징적인 사실주의적 표현과 세밀한 묘사 기법을 보여줍니다. 그의 유화 기법 사용은 색채의 풍부함과 질감의 표현을 가능하게 했으며 , 이는 당시 북유럽 미술에 혁신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초상화는 18세기 초까지 브뤼헤의 화가 조합 예배당에 전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작품이 단순히 개인적인 초상화를 넘어 공적인 가치를 인정받았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가 사망한 후 브뤼헤 시 당국이 유명 화가의 미망인인 마르가리타를 특별히 대우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당시 얀 반 에이크의 명성과 그의 가족에 대한 존경을 보여줍니다. 얀 반 에이크의 세심한 관찰력과 정교한 세부 묘사는 이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며, 마르가리타의 개성과 당시의 복식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0vwQJqgoRc
얀 반 에이크의 '교회 안의 성모(Madonna in the Chirch)는 1438-1440년경에 제작된 소형 유화 패널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 내부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국의 여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보석이 박힌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크기가 주변 건축물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어, 이는 비잔틴 성모 도상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성당 내부로 들어오는 빛의 표현이 매우 뛰어나며, 이는 마리아의 순결함과 신의 존재를 상징합니다. 성당 후면의 조각에는 마리아의 생애 장면들이 새겨져 있고, 벽감에는 유사한 자세의 마리아와 아기 예수 조각상이 있어 마치 그 조각이 살아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 작품은 반 에이크의 뛰어난 빛의 표현과 세밀한 묘사력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 베를린의 겜엘데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의 성모'작품이 고딕 양식의 성당 내부를 배경으로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딕 성당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배경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신성함을 강조합니다. 고딕 건축의 특징인 높이 솟은 첨탑과 천장은 하늘을 향한 영적 상승을 상징합니다. 이는 마리아의 영적 고양을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고딕 성당의 큰 창문들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신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이는 마리아의 순결함과 신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됩니다.
작품이 제작된 15세기는 고딕 양식이 유럽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적, 문화적 맥락을 반영합니다. 고딕 건축은 중세 기독교 세계관을 구현하는 메타포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이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그녀의 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얀 반 에이크는 성모 마리아의 신성함과 중요성을 시각적으로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kUdm-GiSVc&t=4s
무엇이든 한 분야의 선구자가 되는 건 용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얀 반 에이크처럼 말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템페라(달걀 노른자) 기법의 불편함을 해결하고자 많은 이들이 꺼리는 '유화(아마씨유)'를 선택했습니다. 시간적으로 빨리 마르는 템페라의 기법보다 인내심이 필요한 유화의 기법이 얀 반 에이크에게 더 맞는 방법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눈으로 본 것을 가장 현실에 가깝게 그리려고 노력한 화가였으니까요. 섬세한 그의 손길 덕분에 그는 그의 그림에 새로운 가치를 불어넣을 수 있었고 미술사에 영향력 있는 화가로 남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새긴 문장 하나가 계속 맴돕니다.
I DO AS I CAN
반응형
'지식&교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51-28. 장 뒤뷔페(Jean Debuffet, 76) (2) | 2024.07.17 |
---|---|
51-30. 캉갈 ( Kangal ,49) (0) | 2024.07.16 |
51-28.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76) (8) | 2024.07.07 |
51-27. 퍼그( Pug, 48) (0) | 2024.06.30 |
51-26. 아메리칸 핏불 테리어(Ameican Pit Bull Terrier, 47) (0) | 2024.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