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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바느질하는 노동자

<No.5>, <No.22>

샤넬 보이백

영화 <Coco Before Chanel>,2009

나치 스파이 활동과 말년

 

2. 생애

 

 

파리의 올랑쥴리 미술관에 전시 중인 초상화가 하나 있다. 당시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이 그린 것으로 극작가 장콕도, 화가 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현할 정도로 사교계의 거물이 된 한 여인이 그 주인공이다.

바로 코코 샤넬(Coco Chanel)이다.

 

 

 

 

영화 <Coco Before Chanel>,2009

 

 

 

 

2009년에 개봉된 <Coco Before Chanel>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Coco Chanel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소녀 Gabrielle Chanel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고아원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재능을 발견한 Gabrielle은 노래와 춤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중 우연한 사건으로 부유한 상류층과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과 돈, 그리고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끊임없는 갈등과 시련을 겪으며, 그녀는 자신만의 패션 스타일을 발전시키며 Chanel 브랜드의 성공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흔히 접하는 샤넬의 이미지는 진주 목걸이와 고급스러움,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가 다소 냉소적인 그녀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예비 신부님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예물 목록에도 자주 등장하는 브랜드이고요. 요즘 재테크의 수단으로 많이 쓰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녀의 삶과 철학을 알고 물건을 사고 소유하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남서부의 오벨뉴 지방의 소뮈르에서 태어납니다. 12세에 모친이 사망하는 바람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바람둥이 아버지에게 버려져 보육원과 수도원을 전전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너무 일찍 '돈이 최고다.'라는 사회의 룰을 알아버리게 됩니다. 수도원을 도망쳐 친구와 함께 도시로 올라와 살기 시작하고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코코"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지요. 시골 마을인 물랑에서 바느질하는 노동자로 고아원을 나온 샤넬은 당시 그녀를 후원한 한 장교를 만나게 됩니다. 가수를 지망하면서 카바레에서 노래를 잠시 부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카바레(Cabaret: 무도장)하면 워낙 한국 미디어 매체를 통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어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시 카바레는 음악, 노래, 춤, 암송 또는 드라마를 특징으로 하는 연극 엔터테인먼트의 한 형태였다고 하네요. 공연장이 펍, 카지노, 호텔, 레스토랑 또는 공연 무대가 있는 나이트클럽 같은 장소로 보면 쉬울 것 같네요. 종종 식사하거나 술을 마시는 청중은 일반적으로 춤을 추지 않고 테이블에 안지만 사회자나 배우들에 의해 종종 성인 청중을 대상으로 지하적인 성격을 띤 쇼를 보여주었다고 해요. 미국에서 스트립쇼, 풍자극, 또는 피아니스트와 함께하는 솔로 보컬리스트뿐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장소가 당시 카바레 문화였나 봅니다.

 

 

 

 

에티엔 발상의 후원으로 마르젤브 거리 160번지에 모자가게를 개업합니다. 아이러니하게 첫 모자의 손님으로  발상의 여러 여자친구중 한 사람이  써서 큰 히트를 칩니다. 이후 발상과 헤어지고 난 후 그의 소개로 보이카펠을 만나 평생 연인으로 지냅니다. 그이 이름을 따서 만든 '샤넬 보이백'이 있고요. 샤넬의 개업자금은 카펠의 후원을 받았고 그녀가 만든 모자가 잘 팔리자 샤넬은 복장 사업을 시작합니다.  보이카펠은 큰 상선 운영을 하는 부잣집 도련님 그리고 다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이카펠이 다이애나 쿠퍼와의 정식결혼을 발표하자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차 사고로 그를 잃을 때까지 그와의 관계를 지속한 걸 보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인가 봅니다. 그를 잃고 미치도록 일에 몰두한 걸 보면 말이죠.

 

 

 

 

 

 

 

1913년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샤넬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인 1915년 <메종 드 꾸뛰르>를 오픈합니다. 컬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세기의 연인이 된 먼로의 향수, 한국경제

 

 

 

능력있고 매력적인 그녀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 공작, 영국왕이 되는 에드워드 8세까지 그녀를 곁에 두고 싶어 했으니 말입니다. 이후로 파블로비치 대공으로부터 에르네스트 조향사를 소개받은 것이 샤넬 인생의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상류층 여성은 장미나 바이올렛 등 한 가지 꽃향기가 나는 향수를 즐겨 사용했다고 합니다. 샤넬은 이런 인공적인 향기를 싫어해 전형적인 향수의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향수의 룰을 깨고 80개가 넘는 다양한 향류를 섞은 향수를 제조하는 데 성공합니다. 샤넬에게 여러 개의 향수 샘플을 가져와 테스트를 했는데 샤넬이 이 중 다섯 번째 샘플을 골랐다고 해서 넘버 5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넘버 5는 우아한 꽃 비누 향이 나는 향수로 이름이 나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여 대성공을 거둡니다.

 

 

 

상류층이 많이 다니는  프랑스 파리의 샤넬 매장에 넘버5 향수를 뿌리고, 그의 상류층 친구들에게 향수를 건네는 등 자연스럽게 향기를 접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씁니다. 대중보다 자신의 VIP 고객을 대상으로 영업을 고집합니다. 입소문을 타고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하면서 "잠자리에 들기 전 샤넬 넘버 5 향수 몇 방울만 몸에 걸친다"라고 말한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가수 마릴린 먼로의 언급으로 넘버 5는 향수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녀는  20세기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이기도 하고요. 케네디 대통령과의 불륜설도 있었고, 헐리우드 섹스 심볼(Sex Symbol)로 불리기도 했지요.  화려한 이미지의 페르소나를 지녔지만 동시에 불운한 자기파멸적 사생활로 동정을 함께 얻기도 합니다. 또한, 젊은 나이에 의문을 남기며 사망하면서 많은 뒷 이야기를 낳았고요. 금발의 미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고 앤디 워홀의 실크 스크린 작품으로 여러 개가 복제되어 전시되기도 했지요.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만난 샤넬은 공작의 보석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주얼리를 발표합니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하지요. 기업가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하고 양장 전문점도 오픈합니다.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해 노동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 충격으로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 사업을 접기로 해 15년간 패션계를 떠나게 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1940년에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패전국 프랑스에선 친독계열의 비시 괴뢰정부가 들어섭니다. 당시 프랑스인들 중에는 독일군에 대항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애인관계로 지내며 그의 비호아래 자신의 사업체를 지켜냅니다. 나치의 스파이 노릇도 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비판과 함께 고국을 탈출해 애인과 함께 수년간 스위스의 로잔에서 망명생활을 보내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치에 혼을 팔아넘긴 매국노'라는 혐오감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1954년 스위스 망명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방도므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릿츠 호텔에 거주하면서 패션계로의 복귀를 꾀합니다. 당시 샤넬에 대한 혐오감이 팽배해 있던  유럽에서 '매국노'라는 경멸과 나치독일에 대한 혐오감으로 10 연년 간 샤넬의 입지를 약해진 상태였지요. 하지만 미국에서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맞물려 그녀의 패션이 인기를 끌며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955년 샤넬은 울 소재의 새로운 샤넬 슈트를 발표했는데 미국에서 ' 과거 50여년간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 디자이너'라 하여 모드 오스카 상을 수여하기도 합니다. 거주하던 파리의 릿츠 호텔에서 컬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88세로 사망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유해는 조국 프랑스를 배신한 행위로 프랑스 고급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고 망명생활을 했던 스위스의 로잔에 매장됩니다. 개인적으로 한 인물의 평가는 입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돈이면 모두 해결돼.'라는 사회적 현실을 일찍 깨달아 버렸기에 오롯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누군가를 찾아 욕망의 사다리를 올랐던 그녀를 <위대한 유산>의 작가 피츠 제럴드라면 어떻게 표현했을 까요? 사랑하는 조국의 품에 묻히지 못하고 이방의 땅에 묻힌 그녀를 보며 씁쓸한 생각을 감출 수 없네요.

 

 

 

I hope you live a life that
you're proud of.
If you find that you are not,
I hope you have the strength to start over.
(나는 네가 자랑스러운 삶을 살길 바란다.
자기가 자랑스럽지 못하다면,
다시 시작할 힘이 있기를 바라는 거다.)

-피츠 제럴드(F.Scott Fitzgerald)의 명언 중-

 

3. 나가기

 

 

 

그녀는 20세기 초에 전통적인 패션 규범을 깨고 여성들에게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제공하는 스타일을 창조했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패션은 불편하고 구조적인 제약이 많았지만, 코코 샤넬은 캐주얼하고 유연한 디자인을 선보여 이를 극복했지요. 여성들에게 아름답고 실용적인 옷을 제공하여 영원한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또한 복잡한 장신구와 장식보다는 심플하고 세련된 악세사리를 강조해 실용적이면서도 우아한 스타일을 강조하지요. 그녀의 대표적인 브랜드 로고로 쓰인 "CC"의 이니셜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아이콘적인 심벌로 여겨지며, 그녀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패션을 단순히 옷 입는 것으로 볼 수 없게 하였고, 자신의 개성과 스타일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의 패션을 강조하여 여성들에게 자신감과 독립심을 심어주었고요. 그녀의 브랜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그녀의 감각이 여전히 살아 스며들고 있지요. 그녀의 울퉁불퉁한 인생사를 나무라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부디 그녀가 옷에 대해 가졌던 진심을 제대로 알고, 입고, 메고, 뿌리고 그리고 걸쳐야 진정한 "CC"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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