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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인생에서 두 가지의 크나큰 특권을 누렸다.
그건 바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와 오드리 헵번이다.




존 갈리아노(Janh Galliano),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리카르도 티시, 매튜 윌리엄스(Matthew Williams) 등의 디자이너들이 차례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역임한 곳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힌트가 되었을까요? 프랑스 최고의 미술대학으로 손꼽히며 순수 미술 분야에서 세계 최상위권 대학으로 평가받는 파리 보자르 대학 출신입니다. 키가 190cm, 미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외모도 귀공자스타일의 금수저 엄친아입니다.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는 1927년 프랑스 북서부 도시 보베(Beauvais)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술적이고 상류 부르주아적인 가풍 속에서 자란 지방시는 2세 때 아버지가 인플루엔자로 세상을 떠난 게 됩니다. 그 후 그는 어머니, 형 장 클로드, 외조부모와 함께 파리 북쪽의 보베에 정착하게 되지요. 당시 지방시의 외조부는 예술가로 시작해 직물 공장을 책임지던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도 남다른 패션 감각을 지닌 분이셨고  이런 영향으로 그는 8세 때 이미 어머니의 패션 잡지를 즐겨 보았다고 하네요. <보그> 등 잡지 속 드레스를 그리거나 만들어 인형에게 입히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그려진 그림 가위질 하며 오리기도 힘들던데 말이죠. 10세 때인 1937년 파리만국박람회 패션관에 방문한 뒤 고급 맞춤복에 매료됩니다. 가족들은 법학을 공부한 그가 고위 전문직 종사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공증인 사무실 대신 오트 쿠튀르(Haute curturie, 고급 의상점)을 선택합니다.






지방시가 처음 일한 곳은 디자이너 자크 파트(Jacques Fath)의 의상실입니다. 그 이전 남성복으로 유명한 크로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obal Balenciaga)를 찾아가지만 "감각은 마음에 들지만 경력이 없어서 일할 수 없다."며 거절을 당하지요. 이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자크 파트, 스키아 파렐리(Schiaparelli) 아래서 일하며 크리스천 디올(Christian Dior)과 피에르 발망(Pierre Balmain)을 만나 영향을 주고받게 되지요. 다양한 브랜드에서 경력을 쌓은 뒤 마침내 25세의 자신의 브랜드 GIVENCY를 설립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선망의 대상이던 발렌시아가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주변인들에게 조언하고, 가르쳐주기를 좋아하는 발렌시아가와  좋은 만남을 이어가게 됩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지방시는 발렌시아가를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다고 합니다.  얼마나 좋아했으면 미국에서의 만남 이후 GIVENCY 살롱을 발렌시아가의 살롱 맞은편으로 옮겼다고 하네요. 대단하죠! 발렌시아가 역시 지방시를 가족처럼 받아주었다고 합니다. 실력 출중한 잘 생긴 청년이 자신을 멘토처럼 여기고 저렇게 정성을 보이는데 이쁘지 않을 턱이 없지요. 고수가 고수를 알아보듯이 서로를 알아본 모양입니다. 발렌시아가 역시  자신의 스케치까지 지방시에게 공유할 정도로 말이죠. 그런 그들 사이에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었어요.  1968년 발렌시아가가 자신의 살롱 문을 닫을 때 단골 고객들에게 지방시의 고객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는 점이죠. 당시 디자이너들끼리 경쟁이 심하고 훨씬 폐쇄적이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지방시와 발렌시아가가 보여준 우정은 신선하고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당신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나를 꿈꾸게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6살의 이브 생 로랑이 지방시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입니다. 이 편지를 받고 지방시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자신이 젊은 시절 발렌시아가를 따르고 존경했던 그 마음을 지방시 역시 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방시가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ent)을 만나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며 발렌시아가에게 자신이 받았던 변함없는 유산을 그에게도 전달해 줍니다.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개인적으로 <로마의 휴일>을 통해 그녀를 만났습니다. 스페니쉬 계단에서 젤라토 먹던 그녀를 흉내 내려 엄청 난 인파들이 그곳을 방문하기도 했지요. 몇 년 전 큰 아이와 함께 그 장소를 방문해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 장면을 따라 해 보며 '지옥의 문' 앞에 손도 넣어보는 시늉을 해보기도 하면서 말이죠. 당시 섹시 심벌로 유명한 마릴런 먼로(Marilyn Monroe)와 엘리자벹스 테일러 등의 화려한 이미지의 스타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런  할리우드에 키 크고 마른 이미지의 스스럼없이 자전거를 타고  검소한 생활 습관을 보여주는 기존 배우와는 전혀 다른 오드리 헵번이 나타납니다. 유명세를 타기 전이라  오드리 헵번을 알아보는 디자이너들은 거의 없어서 의상 협찬받기가 어려운 사정이었지요. 지방시 역시 오드리 헵번을 당시 유명 배우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으로 착각하고 그녀가 찾아왔을 때 실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이 지난 시즌 드레스라도 보여주기를 요구하고 요모조모 옷 고르는 센스를 지켜보던 지방시는 생각을 달리하고 옷을 보여줬고 그중 하나를 오드리 헵번이 고르며 <사브리나>에 입고 나와 히트를 시키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오드리 헵번은 영화를 계약할 때마다 자신이 지방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이런 고집 덕분에 지방시는 최초의 영화 의상 협찬 브랜드로 역사에 남게 되었지요. 

 

 

 

 

 

Hubert de Givenchy

 

 

우아함의 비밀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

 

 

지방시는 당시 식사도 굶으며 코르셋을 차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 모래시계 같은 몸매를 과시하던 시대적 배경에 반기를 듭니다. 그는 몸이 옷 모양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옷이 몸의 개성을 따라야 한다는 철학 아래 디자인을 선보이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은 비비안 리가 흑인 하녀에게 코르셋을 잡아당기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보기만 해도 숨이 콱 막혀 그 시대에 안 태어 난 걸 다행으로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지방시는 그런 여성의 허리를 해방시켜 준 디자이너로 기억됩니다.

 

 

 

 

 

사랑받는 배우였지만 개인사는 평탄하지 못했던 오드리 헵번 곁에 항상 조언하고 응원을 해준 이가 지방시입니다.  두 번의 결혼, 아프리카 봉사, 그리고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당시 LA 병원에 있던 그녀를 영국 그녀의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전용기에 각종 의료 장비를 달고 의료진과 함께  특수 작전을 펼친 이도 지방시였고요.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순간에도 지방시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오열했고, 장례식 때는 그녀의 관을 직접 운구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우정이 어떤 빛깔이었든 남녀 간의 사랑 이상의 숭고함이 느껴집니다. 

 

 

 

 

그는 프랑스 문화의 위대한 후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프렌치 테이스트의 외교관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물과 장소에 매우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죠.

 

 

 

 

 그의 사망 이후 그의 컬렉션은 파리의 한 공연 예술 극장에서 경매에 붙여지는 데  1110억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판매액을 기록합니다. 사후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며 그는 프랑스 문화에 커다란 유산을  남깁니다.  위베르 드 지방시의 패션 철학은 여러 디자이너들의 손을 거치며 지금도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습니다. 재해석된 리본 디테일 드레스로, 짙은 스모키 화장과 레더 아이템들로, 도발적이고 섹슈얼한 표현으로, 미국 특유의 스트릿 문화와 지방시 고유의 우아함을 믹스매치한 방식으로, 과거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모습으로 지금도 여전히 진화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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