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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는 이중천재

알마 말러(Alma Mahler)

'빈 아틀리에'출신

제1차 세계대전 종군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교편생활

바로크적 풍경화

1938 런던 망명

 

초기 환상화 <바람의 신부>

초상화<포렐 박사상>

편력시대 풍경화<몬타나>

풍자적인 작품 <테레모피레>

표현주의의 시인. 희곡작가

 

2. 생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미술은 미술가 개인의 창작물이기 앞서 미술가가 속해 있는 시대의 산물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독일의 표현주의 사조를 꺼내려면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나폴레옹 전쟁(1797-1815)'이란 이름으로 유럽을 휩쓸 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하나의 통일된 독일이 아닌 신성로마제국이란 이름하에 묶여있던 독일은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절망감을 뼈져리게 느껴야 했습니다. 이로인해 하나의 통일 된 국가를 원하는  민족의식이 싹트게 되었고요. 특히 독일의  문학, 미술, 그리고 음악 분야에서 낭만주의란 이름으로 가속도가 붙습니다. 이렇게 힘을 키운 독일이 1870년 드디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일 제국의 탄생을 선포하게 됩니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 전쟁의 여파로 전후의 삶이 많이 바뀌었지요. 당시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해외 식민지 사업에도 늦은 상태였습니다. 산업 혁명에도 말할 것 없이 뒤처졌지요.  그래서 독일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아래 산업화와 군사력 강화만이 자신의 나라가 살 길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당연히 이것을 모를 리 없는 다른 주변 유럽 국가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됩니다. 주변국가들과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이념적 갈등과 빈부의 격차는 일상 곳곳에 불안감이 짙게 스며들어 있었지요. 이런 긴장의 중심인  독일 땅에서 일어난 것이 표현주의 미술입니다.  개별적으로 오스트리아 출신 오스카 코코 슈카와 에곤 실레가 이 운동에 동참하지요.

 

 

 

 

2023.07.27 - [지식&교양] - 50-22. 표현주의, 에곤 실레(Egon Schiele,26)

 

50-22. 표현주의 , 에곤 실레(Egon Schiele,26)

1. 들어가기 본능적 욕망(누드화) 28세 사망 스페인 독감 불안한 영혼의 아이콘 구스타프 클림트와 친구 성과 죽음 1980, 'Excess and Punishment' 독일 제작 영화 1980년 Arts Council of Great Britain(대영예술진

sun-n5y2.tistory.com

 

 

 

정치적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시민사회가 만들어집니다.  경제적으로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산과 소비, 노동과 자본의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었고요.  대도시의 발달과 노동 환경의 변화는 수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예술측면에 주어진 과제들 또한 만만치 않았지요.  당시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급속한 변화와 정치적 갈등, 무력 충돌의 공포를 옴 몸으로 느끼고 있었지요. 게다가 프랑스에서 일어난 인상주의를 비롯해 큐비즘 등과 같은 현대 미술의 여러 혁신적 실험들을 수용해야 했고요. 그것만으로 부족해 자기화해야 한다는 예술적 과제도 또한 함께 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1886-1980)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한 화가입니다. 그는 세 살 때  아버지가 파산하여 행상을 하였고 다섯 살때 형이 죽는 등 가정사로 힘든 시기를 보냅니다. 18살 때 장학금을 받아 빈 미술공예학교에 진학을 합니다. 조교와 '빈 공방'의 일을 하며 미술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지요. 그곳에서 소묘나 석판화 등을 배웠지만 공예학교라 장식미술이 중심이었습니다. 코코슈카는 인체나 인물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그는 자신이 조교로 있는 야간부 학생들을 위해 모델을 불러 학교 방침과  다른 인체 스케치를 같이 공부하면서 독학으로 유화를 그리기도 합니다. 

 

 

 

코코슈카는 1908년 두 가지 사건을 겪으며  화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하나는 클림트 등 '빈 분리파'가 주도하는 '제1차 쿤스트쇼'에 참여하게 된 것이지요. 당시 빈 분리파는 자신들의 전시를 하며 신진작가와 응용미술 등에 문호를 개방합니다. 코코슈카의 재능을 알아본 스승 카를 오토 체슈카는 자신에게 주어진 전시장의 일부를 코코슈카에게 내줍니다. 여기에 코코슈카는 자신의 직접 쓴 희곡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의 삽화들, 자신이 쓰고 삽화를 그린 동화책, <피에타> 포스터 그리고 실내 장식을 위한 소품들을 전시하게 됩니다. 

 

 

 

Pieata, 1908, Poster created for the openair theater of the Kunstschau, depicting Murder, Hope of Women, Stubby Planner

 

 

 

코코슈카가 빈의 전람회에서 쓴 연극 홍보를 위한 <피에타>라는 포스터입니다.  어떠신가요? 그림의 첫 느낌이 , 여성의 강력한 힘이 느껴지시나요? 자극적인 작품이라  눈에 뜨이기는 했지만 그의 전시실은 '공포의 방'이라 불리며 참혹한 평가를 받습니다. 그의 전위적인 작품에 비평가들마저 등을 돌리고요.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빈 미술공예학교에 재학 당시 '빈 분리파'의 수장이었던 구스타프 클림트에 의해 발탁되어 촉망받는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로 부상합니다.  그는 1909년 그를 지지한 근대 건축의 선구자인  아돌프 로스(Adolf Loss,1870-1933)의  주선으로 독일 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한 헤르바르트 발덴(Herwarth Walden)을 만나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코코슈카는 발덴이 발행하는 표현주의 저널 <슈트름(Sturm, 폭풍)>의 그래픽 화가로도 잠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self-portrait of a 'Degenerate Artist, Oska  Kokoschka, Wikioo.org

 

 

그는 당시 아돌프 로스가 소개해 주는  빈의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코코슈카가 그려주는 초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코코슈카는 영혼까지 꿰뚫어 묘사하는 심리적 초상화에 매우 뛰어난 화가였기 때문이지요. 아름답고 우아한 초상화를 기대했 던 고객들이라면  엄청 실망했겠지요.  그런 면에서 오스카 코코슈카는 고객들이 원하는  외향에 치중하는 초상화를 그리기보다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내면을 중시하는 초상화 그리기를 더 선호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적인 묘사를 배제하고 통념적인 요소를 멀리한 채 왜곡된 형상을 구현하는 자신만의 표현양식을 구축해 낸 화가인 셈이지요. 예를 들면 불규칙하고 굴곡이 심한 선, 차갑고 어두운 색채, 그리고 강하고 거친 붓 터치가 그만의  독특한 표현주의 특징입니다.

 

 

 

작가로도 활약한 코코슈카는 인도주의 철학을 표현한 희곡을 몇 번 썼고, 특히 사회의 도덕적 위기와 정치적 불의 를 비판한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 (1907)라는 작품으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학생들을 가르치던 입장이라 코코슈카의 희곡이 사회적 물의를 빚자 학교로부터 해직을 당합니다.

 

 

 

 

이 시기 코코슈카 인생의 가장 유명한 여인 하나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밀 신들러(Emil Schindler)의 딸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에게서 미술수업을 받았고,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Alexander von Zenmlinsky)로부터 작곡을 배웠다고 합니다. 실제 그림도 그리고 가곡집을 내기도 했다고 하니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인재네요.

 

 

 

 

그때 나는 나와 알마의 이인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운명에 거슬러 나를 광란하게 만드는 것은
질투만은 아니었다.
나는 임박해 오는 비운의 숙명을 예감했다.
멜랑콜리가 우리의 엑스터시 위에,
도취와 사랑 위에
자신의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아폴로의 칠현금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코슈카의 자서전 <내 삶>중에서-





<바람의 신부(The Bride of the wind>, 1914, 오스카 코코슈카,스위스 바젤 미술관

 

 

 

 

천재화가 오스카 코코슈카가 사랑했던 여인 알마 말러(Alma Mahler)와의 사랑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당시 작곡가 겸  지휘자로 알려진 천재음악가 구스타프 말러가  그녀의 첫 번째 남편입니다. 20대의 그녀가 40대 노총각이었던 말러와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결혼생활은 말러가 51살에 사망하면서 끝이 납니다. 미망인이었던 그녀는   19세기말 20초 활동했 던  예술가들과의  숱한 염문설이 나기도 합니다. 바우하우스를 창설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도 했으며, 시인이며 소설가였 던 프란츠 베르펠과  세 번째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20대의 젊은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가 미망인이었던 30대의 알마 말러를 만난 것은 두 번째 남편과 재혼하기 전으로 보입니다. 떠오르는 신인 화가  대접을 받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급속도로  연인관계로 발전했지만  연상의 여인 알마 말러는 거칠고 불안한 성격의 젊은 화가 코코슈카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인기 많은 미망인을   연인으로 붙잡아 두기에  젊은 코코슈카의 불안감 또한 컷을 테지요. 그림을 통해 코코슈카가 느꼈을 불안감이 충분히 전달됩니다.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잠을 자고 있는 여인에 비해, 잠 못 이루고 불안해하는 한 남자의 시선에서 그 둘의 앞날이 보이는 듯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작품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녀는 오스카가 그린  ' 바람의 신부(Bridge of the Wind)'의 동일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시대의 예술가, 건축가, 시인, 작곡가 등  뭇남성들에게 뮤즈였으며 '비엔나의 아름다운 꽃'이라 불리울정도로 탁월한 미모와 재능의 소유자였습니다.

 

 

 

 

 

코코슈카의 일련의 작업 과정을 지켜본 표현주의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Georg Trakl, 1887-1914)이  <바람의 여인>이란 제목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독일어 여성 명사'Wkndsbraut'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돌풍을 뜻하기도 하고, 정령이나 정신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리고 야성적이고 격정적인 본성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시인트라클은  세 번째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시인 트라클 역시 4살 손아래 누이동생을 사랑했는데 근친상간의 죄의식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다 27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친구 시인이기도 합니다.  트라클은 코코슈카와 알마의 불완전하고 좌초된 사랑에서 자신과 누이동생과의 비극적 운명을 읽어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누이동생 그레테 역시 우울증에 시달리다 오빠의 사망 소식에 자살하고 맙니다.  <바람의 여인>이든 <바람의 신부>이든 자유로운 영혼을 붙잡기도 어렵고 소유하기는 더 어려웠을 한 예술가의 고민 끝에 나온 작품이 줄타기 사랑을 하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거친 붓 터치와 차고 어두운 색채로 화폭에 담아냅니다. 어두운 밤 거친 폭풍우가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여인은 지친 듯 남자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네요. 남자는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절대로 이 여인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여인의 한쪽 손을 힘주어 잡고 있습니다. 코코슈카의 불안한 마음과 애절한 사랑이 그대로 감지되는 듯합니다. 코코슈카는 일곱 살 연상이었던 알마와 완전한 결합을 원하며 2년 6개월 동안 4백 여통의 연서를 쓰며 구애를 하였지만 알마는 끝내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 않습니다.  알마를 불같이 사랑했던 코코슈카는 알마와 똑같은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 유명 디자이너 옷을 입히기도 하고 오페라 구경을 할 때도 좌석을 구해 데리고 다녔다고 하니 이 정도면 집착의 수준까지 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상해 보세요. 사람 같은 인형을 옆에 놓고 살았으니 집착이 지나쳐 오싹한 느낌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변분들이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다행히 더 이상 자신의 곁에 알마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녀의 대한 마음을 접습니다.

 

 

 

 

 

 

이 작품으로 코코슈카는 알마 말러에게 실연은 당했지만 국제적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절망에 빠졌던 코코슈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기병에 자원입대합니다. 실연당한 마음을 달래려 지원한 군대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해  몸과 마음이 부서진 채 요양을 해야 했지요. 부상에서 회복한 그는 드레스덴 아카데미 교수가 되어 후학을 지도하게 됩니다. 1931년 나치가 집권하게 되고 대부분의 표현주의 예술가 그룹처럼 코코슈카 역시  퇴폐적인 예술가로 찍혀 전시는 물론 작품 활동까지 제한당합니다. 독재정권의 탄압이 계속되자 그는 프라하로 이주했다가 영국으로 망명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 던 1941년  올다 팔코프스카라는 여인과  결혼합니다.  이 시기 코코스카는 주요 도시의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리거나 나치에 항거하는 정치적 이념이 담긴 포스트를 제작하며 작품 활동을 계속해 이어 나갑니다.

 

 

 

 

 

<The Red Egg>, 1940-1941, National Gallery in Prague, Arthive

 

 

 

 

90년이 넘는 세월을 살다 간 코코슈카는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며 전쟁과 정치에 대한 의식을 형성합니다. 말년까지 끊임없이 전쟁의 비인간적인 면과 잔학행위를 고발하는 우의화를 그리면서 말입니다.

 

 

 

 

 

3. 나가기

코코슈카는 처음에 클림트와 빈 분리파의 영향을 받은 장식적인 화풍으로 출발하지만  비극, 죽음, 성 등의 주제를 깊게 다루기 시작합니다. 후기로 갈수록  그는 내면의 시선까지 담아내는 것 같은 풍경화와 인물화도 그려냅니다. 강한 빛의 사용과 붓터치가 무척 인상적이지요. 사라질 듯 여러 색채를 사용한 코코슈카의 그림에서는 연인과의 사랑과 삶의 무상함, 전쟁에의 비판 등 다양한 주제의식이 드러납니다. 이제 오스트리아를 떠올릴 때  코코슈카, 클림트, 그리고 에곤 실레라는 만능 천재 예술가 3인방을  '표현주의'라는 이름으로 함께 기억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출처: 위키 피디아, 구글아트 앤 컬처, 위키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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