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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초상화의 대가로 이름을 알렸던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 그는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미국 국적의 초상화가입니다. 윈슬로 호머, 토마스 이킨스와 함께 3대 거장으로 소재되지요. 또 19세기 미국의 인상주의 10인 화가 중 한 명으로 소개됩니다. 

 

 

 

그는 피렌체 태생의 미국화가입니다.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전통적인 형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활동을 하던 뒤랑 밑에서 다양한 기교와 강한 명암법을 배웠습니다. 스케치 없이 바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들도 배웠고요. 여행을 하며 벨라스케즈(Diego Velazquez)와 할스(Frans Hals) 같은 대가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주로 파리, 런던, 뉴욕의 상류사회 인물들을 묘사한 초상화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엠버그리스의 연기>/알라딘 모바일 서재

 

 

엠버그리스(용연향)는 향유 고래에게서 나오는 향수를 만드는 재료입니다. 향로를 피우고 온몸을  두꺼운 베일로 감싼 채 이마 앞으로 차양을 만들고 향을 스미게 하는 중입니다. 여인의 모습이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신비롭게 보입니다. 이 작품은 두 번째 살롱전시에 큰 호평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사전트는 1879-80년 사이 북아프리카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본 건물과 다른 지역의 의상과 장신구들을 결합해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제의 의식 같은 분위기를 그려냈습니다. 하얀색 농담만으로 말이죠.

 


 

 

 

<로시나 Rosina>,1878/DailyArt Magazine

 

 

 

 

1878년 카프리섬을 여행하던 사전트는 카프리 섬의 풍경과 원주민들에게 매료됩니다. 특히 열 일곱 살의 섬 소녀 로시나에 말이죠. 로시나는 그리스 혈통으로 어딘지 신비스러우면서도 열정적이고 교태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로시나가 춤추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순백의 풍성한 블라우스와  하얀 이가 살짝 드러난 입술, 여자가 봐도 매력적입니다. 마치 경쾌하고 톤 높은 웃음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리는 듯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처럼요. 

 

 

 

 

  

 


 

 

20대 초반의 서전트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돌며 그곳 거장들의 작품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베니스에서 광선과 그림자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고요. 그곳  건축물은 물론 그림자 속의 뒷골목과 그곳 사람들을 실험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역시 벨라스케스에 매료되었고, 베니스의 전문 사진 작가 카를로 나야 (Carlo Naya 1816-1882)등이 추구했던 씰루엣과 가위로 잘라낸 듯한 장면 포착 방식의 화면 구성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베니스의 거리>/작가들의 온라인 아트마켓

 

 

1882년 , 존 싱어 사전트(Jonh Singer Sargent)는  베니스, 피렌체, 시에나 그리고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30살이 된 벨리스케스가 고향 스페인을 떠나 이탈리아 지역에 2년간 머무르며 대가들의 작품에 푹 빠져든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선배화가 벨라스케스의 여행 동선과 거의 겹칩니다. 사전트 역시 벨라스케스 처럼  고전 작품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당시 벨라스케스는  단색의 그림까지도 찾아볼 수 있었던 환경 속에서 흙빛으로 이루어진 진한 톤의 그림들에 매료됩니다. 아울러 그 속에서 순간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동세와 표정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고요. 거장들의 작품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베니스에서 광선과 그림자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그곳 건축은 물론 그림자 속의 뒷골목과 그곳 사람들을 실험적으로 묘사했고요.

 

 

 

 

사전트의 초기 작품입니다. 그리 튀지 않은 몸짓이지만 그녀가 걸친 숄과 밝은 빛 스커트에서 보이는 움직임으로 보아, 실제 그녀는 빠르게 두 남자 앞을 지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교차한 두 손 , 두 남자의 주의를 피하는 듯하면서도 그들로부터의 관심은 기대하는 듯한 몸짓입니다.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한 남자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갑니다. 사전트는 후기 인상파의 방식으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인이 입은 드레스, 건물 벽면에 그려진 넓은 붓터치와 함께 마치 사진을 잘라낸 듯한 (Cropping) 구성 등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사전트는 거리가 보여주는 건축적 측면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대신 인물들의 구성과 그것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에 집중하게 합니다.

 

 

 


 

 

 

 

<달리 보이트의 딸들 The Daughters of Edward Darley Boit>,1882/wikipedia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Las Mennias,1656>/wikipedia

 

 

 

초기 작품으로 사전트에 대한 옛 거장들의 영향을 잘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는 <시녀들  Las Mennias,1656>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사용한 매우 변칙적인 스퀘어 형식은 물론, 스페인 예술가가 인물의 성격을 포착하기 위해 포즈를 취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인물들을 표현했습니다. 각 피사체마다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전통적인 그룹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구성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소녀들은 무미건조한 패션으로 보이는 어렴풋하고 깔끔하게 꾸며진 방 주위에 흩어져 있습니다. 두 개의 거대한 청백자 화병을 포함하여 배치된 가구들에 의해 왜소해 보입니다.  네 명의 소녀 중 세명은 보는이를   응시합니다. 네 번째 소녀는 흑백 앙상블을 매치한 체 여동생을 마주 보고 있고요. 마루에 앉은 막내딸 (4살) 줄리아의 편안한 자세는 자신의 뒤에 뻣뻣하게 서 있는 언니들의 자세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커다란 인형을 앞에 두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여 좋고요. 가장 나이 많은 14살의 플로렌스와 12살의 제인은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부분적으로 그늘에 가려져 있습니다.  사전트의 묘사는 개인들이 어떻게 매너와 예절의 '벽'뒤에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숨기는 경향이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당시 젊은 상류층 여성들이 길러졌던 제한적이고 억압적인 환경을 잘 드러낸 작품입니다. 

 

 

 

 

<El Jaleo>,1882/wikipedia

 

 

 

스페인 집시 댄서가 플라맹고를 추는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특히 댄서의 격정적인 포즈, 일렁이는 조명과 그림자의 표현, 펄럭이는 검은 상의와 조명이 비친 흰색 치마의 강한 대비가 매력적입니다. 왼쪽 마루 바닥 쪽에서 빛을 받아 벽에 기댄 기타 연주자들과 댄서가 자신의 감정에 몰입하다 절정을 향해 치닫는 느낌이 듭니다. 마치  실제로 공연 장면이 눈앞에 일어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사전트의 이 작품이 제일 맘에 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xLjePthwR8o

 

 

 


 

 

 

 

 

<자신의 집에 있는 닥터 포치&nbsp; Dr. Pozzi at Home>,1881/wikipedia

 

 

 

 

 

 

목과 손목에 하얀 린넨 레이스가 장식된 묵직한 트위드 재질의 붉은색 긴 실내복이 고급스럽습니다. 가운의 긴 옷자락 아래 양단슬리퍼를 신은 발이 살짝 보입니다. 이 당당하고 잘 생긴 남성이 벨 에포크 시대 사교계의 인기 남이었던 의사 '사무엘 장 포치'입니다.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를 비롯해 여인들과 스캔들이 많았다고 해요. 유명한 <마담 X의 초상>의 모델인 마담 고트로의 연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실내복의 끈에 살짝 걸친 왼손과 자연스럽게 심장 가까이 올려져 있는 긴 손가락의 섬세함이 눈길을 끕니다. 

 

 

 

<Portrait of Madame X>,1884/wikipedia

 

 

 

 

사전트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 작품입니다.  프랑스 은행가인 피에르 고트로(Pierre Gautreau)와 결혼한 버지니 아멜리 아베뇨 고트로(Virginie Amelie Avegno Gautreau)라는 이름의 미국인 국외 거주자이고 마담 X로 알려진 젊은 사교계의 명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파리 최고의 초상화가를 꿈 꾼 사전트는 더 큰 야망을 위해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그 무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같은 미국인으로 부유한 프랑스 은행가의 아내였던 사교계 최고의 미인 버지니 고트로(Virginie Gautreau)에게 접근하여 초상화를 그리자고 설득합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고트로 부인의 초상화라면 살롱에서 큰 화젯거리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고트로 부인 역시 사전트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여 모델이 되기로 합니다.

 

 

 

사전트는 대담하게 초상화 속 그녀의 어깨를 드러냅니다. 지금이야  헐리 웃  유명 배우들이 더 심한 모습을 하고 레드카펫을 밟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지만, 19세기 프랑스는 신체를 많이 드러낼수록 밤일하는 직업여성으로 오해받기 쉬웠습니다.  당당하게 드러낸 어깨, 매끈한 피부를 노출시키고 , 따뜻하고 부드럽게 완화시킨 브라운 톤을 배경으로  그녀의 두드러진 존재감을 생생하게 강조합니다. 다소 노출이 심한 코르셋을 입은 그녀가 자세를 취하고, 보석으로 장식된 얇은 끈 이 달린 검정 새틴 드레스는 그녀의 놀라운 자태를 뽐내기 충분합니다. 그녀의 적갈색 머리카락과 화장한 얼굴색이 어우러져 현대적이고  귀족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을 세운 듯합니다.

 

 

 

이 초상화를 그린 것은 사전트와 고트로 모두에게 도전이었습니다. 화가는 준비과정에서 몇 달 동안 고트로에 대한 30개 이상의 포즈를 그렸고 그림을 완성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결국 그는 여러 번 구도를 변경한 끝에 그녀의 특징적인 옆모습을 강조하는 자세를 그리기로 결정합니다.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포즈를 사용한 거죠.

 

 

1884년 파리 살롱에 열린 전시회에 이 초상화가 걸렸고 그로 말미암아 사전트는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비록 그림의 모델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경악했고요. 그들은 가슴이 깊게 파인 검은색이브닝드레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지나치게 흰 살결로 인해 죽음을 연상시키는 피부색에 혐오감을 느꼈고요. 부자연스럽게 비틀어진 오른팔에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고트로 부인의 가족은 사전트에게 그림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전트는 살롱이 끝날 때까지 그림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1916년 후반에 "내가 그린 그림 중에 그것이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하면서 성공으로 간주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 사전트의 말처럼 그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숲 가장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Painting by the Edge of a Wood, 1885>/pinterest

 

 

 

 

사전트의 수채화 작업은 일반적으로 그의 경력 후반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가 사회 엘리트들의 최고의 초상화 화가로 자리매김할 때, 일 찍이 다양한 매체와 스타일을 실험한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전트는 파리의 에콜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학창 시절에 클로드 모네(Clude Monet)를 만났고 그 후 몇 년 동안 그들의 우정은 이어집니다.

 

 

1880년대 사전트는 파리 외곽 지베르니(Giverny)에 있는 모네의 집을 수없이 방문했습니다. 그의 친구가 직접 야외에서 자연을 그리는 이 이미지에서, 사전트는 모네의 외광파 화풍의 기술로 그림을 그립니다. 모네의 두 번째 아내 앨리스(Alice)가 뒤에서 끈기 있게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고요. 비록 모네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 이미지는 이젤에서 언급되듯 하늘과 함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지만, 사전트 자신의 이미지는 잔디와 나무 위에서 반짝이는 햇살은 물론 오히려 두 인물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23.03.15 - [지식&교양] -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4)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4)

그네를 타고 있는 나를 향해 3-4명의 남자 아이들이 '수련장(참고서 이름)' 이라며 놀린 기억이 있다. 별로 나쁜 별명은 아닌데 숫기없던 내가 그때 했던 행동은 그저 가만히 땅을 내려다 보는 것

sun-n5y2.tistory.com

 

 

 

 

<Carnation , Lily,Lily,Rose>,1885-1886/wikipedia

 

 

 

 

매우 두려울 정도로 어려운 소재다. 
이 아름다운 색채를 그대로 재현할 수가 없다...
물감은 이 풍경을 묘사해 내기에 충분히 밝지 않아
영롱한 느낌들이 10여분 후 사라져 가는 느낌이다.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중에서-


파리에서 10년간 미술공부를 하며 젊고 유망한 화가로 주목받고 있었던 그는 1884년 <마담 X>가 살롱전에 공개되면서 그 선정성으로 인해 큰 물의 를 일으키게 됩니다.  결국 쏟아지는 비난 속에 파리를 떠났고 활동무대를 영국 런던으로 옮깁니다. 사전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초상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초상화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을 시도하였습니다.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인상파적 기법과 색채로 영국과 미국의 인상주의 화풍 확립에 크게 이바지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가 인상주의 방식으로 야외에서 그린 몇 안 되는 인물 작품 중 하나입니다. 색감이 너무 예쁜 작품이지요. 1885년 여름 그는 미국 예술가 에드윈 오스틴 아비(Edwin Austin Abbey)와 함께 팡번(Pangbourne)에서 템즈 강으로 뱃놀이를 갔다 다이빙을 하던 중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인근의 브로드웨이 빌리지의 코츠월드(Cotswolds)로 옮겨져 치료를 받게 됩니다. 그곳은 영국과 미국의 젊은 작가들이 여름 휴양지로 보내는 예술인 마을이었습니다. 요양을 하면서 그곳의 평화로운 정경과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그는 같은 해 9월부터 우스터셔(Wowcestershire) 브로드웨이에 있는 프란시스 데이비스 밀레(Francis Davis Millet)의 집에 머물면서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밀레의 다섯 살 난 딸 캐서린(Katharine)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일러스트 작가 프레데릭 바나드(Frederick Barnard)의 딸인 폴리(Polly)와 도로시 바나드(Dorothy Barnard)로 대체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전트가 찾고 있던 정확한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11살의 돌리는 왼쪽에 있고, 7살의 폴리는 오른쪽에 있습니다. 여름의 어슴푸레한 저녁 무렵 두 명의 소녀가 정원에서 등불을 밝히는 모습을 화폭에 담고자 한 사전트는 그림에 착수하면서 그 시간이 고작 몇 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혹해합니다. 그는 첫 해에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이듬해 여름 같은 장소로 와 작품을 계속 진행합니다.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라는 다소 시적인 제목은 당시 유행하였던 노래 가사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꽃과 소녀, 등불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이 작품은 빛이 사라져 가는 무렵의 어스름과 그때의 주변의 색채, 분위기 등을 탁월하게 재현하여 작품의 제목만큼이나 시적인 풍경을 선사합니다.  그 짧은 순간을 화폭 위에 영원히 정지시켜 놓아 보는 이에게 깊은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작품은 1887년 로열 아카데미 전에 전시되어 큰 호응을 얻었으며, 사전트를 일약 영국 화단의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자벨라 스튜어트 가드너의 초상&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Isabella Stewart Gardner>,1888/wikipedia

 

 

 

 

가드너 부인의 초상화는 사전트가 1888년 1월 보스턴을 방문하는 동안 제작되었습니다. <Madame X, (1884)>를 둘러싼 소란이 잠잠해지자, 사전트는 영국에서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곧 인기를 얻습니다. 사전트는 미국인들로부터도 초상화 주문을 받았는데, 그중에서 보스턴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설립했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의 주문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사벨라(Isabella)는 사촌이 구입한 플라멩코 댄서를 묘사한 <엘 할레오(El Jaleo)>를 보고 1882년 사전트를 알게 되었으며, 1888년 자신의 초상화를 주문합니다. 그는 이 초상화에 대해 $3000의 돈을 받았고요.  이 초상화는 보스턴의 세인트 보톨프 클럽(St. Botolph Club)에서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마담 X>에 비하여 이사벨라의 초상화는 품위를 지킨 그림이었거든요. 하지만 이 그림이 보스턴에서 전시되었을 때, 이사벨라의 깊게 파인 옷은 물의 를 일으켰고 그녀의 남편은 이 그림을 다시는 전시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간청했습니다. 실제로 그 초상화는 가드너 부인이 죽을 때까지 비공개로 남아 있던 고딕 방에 놓여 있게 됩니다.

 

 

 

 

 독특한 배경이 이 그림의 가장 인상적인 요소이긴 합니다. 대칭적이며 동시에 정면을 향하고 있는 모델의 자세도 사전트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결합이고요. 그림의 배경은 가드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15세기의 벨벳 문직 작품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전트는 문양을 확대하여 이사벨라의 머리 주위에 후광이 둘러진 것 같은 효과를 창출해 냅니다. 결과적으로 이 그림은 성상의 분위기를 띠게 되었지요. 소설가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비잔틴 성모 마리아'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이사벨라와 사전트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사벨라는 사전트의 초상화를 22점이나 구입했으며 영향력 있는 고객을 소개해 주었지요. 1920년 이사벨라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사전트는 오랜 우정에 대한 찬사로 애정 어린 초상화를 그려 이사벨라의 호의에 보답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YOdl9jjfMo

 

 

 


칼 메이어 부인과 그녀의 자녀들 Mrs.Carl Meyer and Her Children,1896/The Jewish Museum

 

 

 

 

 사전트의 명성을 얻게 된 상류층 초상화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아델 메이어(Adele Meyer), 아들 프랭크(Frank), 딸 엘시(Elsie)의 모습입니다. 메이어 준 남작은 영국의 은행가 겸 다이아몬드 광산업자로,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과 드 비어스 그룸(De Beers gruop)과의 인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메이어(Meyer)와 같은 부유한 부호들은 가장 돋보이고 매력 넘치는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방법을 찾습니다.  예술가의 흠잡을 데 없는 재능을 사용하여 엘리트 사회 내에서 그들의 부와 지위를 전달하기 위해 사전트 같은 성공한 예술가들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는 방법으로 말이죠.

 

 

 

가족의 복장과 이미지 안에 포함된 가구는 18세기 영국의 화려함을 자아냅니다. 정교하게 무늬를 새긴 금색 소파가 부티 납니다.   메이어 부인의 가운의 무지갯빛 장미 비단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사전트는 런던 상류층의 호화로운 일원으로서 그녀의 명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호화로운 사치품들로 메이어를 에워쌌습니다.

 

 

 

사전트가 돋보이게 하는 세부사항들, 즉 소재들은  마치  반 다이크(Van Dyck)와 같은 가장 성공적인 올드 마스터 초상화가들이 사용한 방법에서 빌려온 듯합니다. 소파 뒤에서 어깨 위로만 드러내며 시야에서 주로 가려진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앞과 중앙에 메이어 부인이 배치되어 있는 것은 세 사람 사이의 가족적인 관계를 암시합니다. 메이어 부인에게는 아이들보다 주변환경의 매력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의 매력을 부각하는 것이 분명히 더 중요했을 테니까요. 

 

 


 

 

<베두인족 Bedouins>,1905-1906/kor.animalia-life.club

 

 

 

1905년 9월부터 1906년 1월까지 사전트는 예루살렘(Jerusalem), 시리아(Syria), 베이루트(Beirut)를 방문하면서 당시 오스만 레반트(Ottoman Lebant)로 알려진 곳을 두루 여행합니다. 그는  그 지역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고, 이러한 관심을 레반트(Levant)의 고고학과 게트루드 벨(Gertrude Bell)에 의해 깊어졌습니다.

 

 

사전트는 말을 타고 여행을 했으며, 요르단 계곡의 천막 생활을 하는 아랍 유목민 베두인족 캠프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후에 보스턴 공공도서관(Boston Public Library)의 그의 광범위한 벽화 사이클인 <종교의 승리(Triumph of Religion(1895-1916)>의 영감으로 그 여행의 경험을   참고하기도 했지요. 비록  그  남성들의 복장뿐만 아니라 주변환경에 대한 처리에서도 인상적인 방식이 두드러집니다. 유명한 그의 초상화들과 같은 사실주의적  뉘앙스와 디테일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강렬한 인디고 블루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남성들의 이국적인 눈빛도 한 몫하고요. 따뜻한 갈색, 후크시아 톤의 팔레트로 따뜻한 색 표현을 했습니다.  남자들의 머리 스카프는 하얀 구아슈 하이라이트로 장식되어 사막의 한낮의 타는 듯한 열기를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Gassed,1919/wikipedia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대 피터 부뤼헬/리포르 만다

 

 

 

1918년부터 사전트는 영국 정보부에 고용되어 군인들의 전시 경험, 영미 협력 정신을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준비하기 위해 사전트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최전방에 있는 군인들을 방했고요. 높이 7.5m, 길이 20피트 이상의 이 그림은 아주 큰 사이즈로 독일의 독가스 공격의 여파를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색 팔레트는 칙칙한 카키, 그린, 베이지색이 지배적입니다. 사전트의 다른 많은 작품들과 극명하게  대비되고요. 전경에 한 무리, 배경에 한 무리로 보이는 두 무리의 부상자 군단이 가스의 영향으로 시야가 흐려져 서로의 어깨를 잡고 의료지원 텐트를 향해 행진합니다. 수많은 시체들이 길가에 널려 있고요. 한 줄로 늘어선 부상자들은 대 피터 부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이 그린 프랑드르 르네상스 그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The Blind Leading the Blind,1568>를 떠올리게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시에서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생화학 무기를 사용합니다. 독가스는 노출된 피부에, 그리고 흡입하면 폐에 큰 물집이 생기죠.  노출 후 약 24시간이 지나야 효과가 나타나고, 반드시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고통스럽습니다. 느리고 힘겨운 행군 중인 남자들 사이의 동지애를  느낄지 모르지만, 결국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발 앞에 있는 죽은 남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될지 참담한 기분입니다. 

 

 

 

이 그림은 E.M. 포스터(Edward Mprgan Fprster)와 버지니아 울프(Virgomoa Woolf>와 같은 저명한 작가들과 사회 비평가들에 의해 공격받기도 하고 환영받기도 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야(Goya), 피카소(Picasso)등 다른 위인들을 포함한 전쟁의 잔혹함에 헌신한 많은 걸작들 중 하나입니다.

 

 


 

<Nude Study of Thomas E. McKeller>,1917-1920/wekipedia

 

 

 

남자의 누드가 참 낯섭니다. 고대 그리스 조각 작품이 아닌 일상에서 보는 남성의 몸이라 더 그런가 봅니다. 아마 남성들도 여성의 누드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비슷한 느낌 아닐까 싶습니다. 포즈가 난감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서 말이죠. 후반기에 사전트는 많은 남성 누드를 그렸습니다. 이 작품들 대부분은 그의 생전에 전시되지 않았습니다.

 

 

 

작품들 중에 보스턴 호텔의 엘리베이터 기사인 맥켈라(McKellar)의 여러 연구가 있습니다. 맥컬리의 강인하고 근육질의 몸매가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깃털로 덮인 날개와 빛나는 푸른 백색의 빛으로 보이는 것과 함께 그의 뒤에 석벽에 대한 화가의 묘사는 그가 인간과 신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 그림은 1986년 보스턴 미술관에 의해 구입되기 전까지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전트는 남성 나체, 특히 맥컬러에 대한 연구는 최근 사람들에게 그의 매력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학문적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화가의 탐구는 그를 제리코(Gericault)나 앵그르(ingres) 같은 초기 현대 거장과 연결시킵니다. 이들 작품에서 언급된 기술은 그들이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사교계의 상류층을 사로잡기 위해 헌신한 경력 내에 숨겨야 할 필요성을 느낀 그의 관심사였죠. 사전트의 성적 선호도는 여전히 불분명합니다. 사전트가 내성적이고 냉담한 독신남이라는 주류적 이미지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면이기도 하고요.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는 모델의 내면을 예리하게 파악해 내고 부각하며 세련되고 우아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미국 국적의 사전트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영어 외외도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요. 미국과 영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 미국과 유럽의 장점 만을 받아들여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화가로 보입니다. 평생 900점가량의 오일 페인팅과 2000점 이상의 수채화를 그렸고 수 없이 많은 스케치와 드로잉을 남겼습니다.

 

 

1922년  뉴욕 그랜드 센트럴 내 아트 갤러리를 오픈하며, 그랜드센트럴 미술학교도 창립했습니다. 1924년 이 갤러리에서 사전트의 회고전을 열었죠. 이듬해 1925년 4월 14일 영국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합니다.  사생활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유럽에서 거주하며 미국은 작품 활동 때에만 방문합니다. 그의 작품 중 유명 작품들은 대부분 미국 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미국인 화가 빅 3으로 소개되는 이유일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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