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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자국으로 가득한 혼돈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할까요? 누군가는 문득 우주를 떠올리며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고통만을 느낄 수도 있지요. 또는 '그림에서 꼭 무언가를 느껴야만 하는가?'라는 경지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소용돌이치는 내면을 떠안고 살았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1.28-1956.8.11)의 혼돈의 시간을 따라가 봅니다.
예술가들을 향한 2차 대전의 파괴력은 1차 대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했습니다. 나치는 상상력마저 학살하려 했으니까요. 예술가들은 핍박을 받습니다. 전쟁 중 많은 예술가들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떠납니다. 우리들이 잘 알 고 있는 뒤샹, 샤갈, 칸딘스키, 달리 등 유럽을 한때 주름잡던 예술가들은 미국행 배에 오릅니다. 이들 무리를 이끌고 도움을 준 큰 손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페기 구겐하임( Marguerite Peggy Guggenheim ,1898.8.26-1979.12.23)입니다. 미국인 페기는 부유한 가문의 상속녀였습니다. 그녀는 일찍이 유럽으로 건너가 화가들과 교류합니다. 미술 컬렉터로 명성도 쌓고요. 전쟁 중 페기는 쉰들러 리스트 작전처럼 예술가들이 미국 피난길에 오르는 걸 돕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페기는 뉴욕에 '금세기 미술관'을 오픈합니다. 그곳에서 자신과 함께 이 땅을 밟은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현대미술 중심지는 자연스럽게 파리에서 뉴욕으로 교체됩니다. 하지만 미국이 현대미술 랜드마크가 된 건 유럽 예술가가 뉴욕으로 건너와 활동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페기와 그의 동료들은 한 젊은 미국인 화가를 발굴하고 그에게 기회를 줍니다. 이 화가는 세상이 상상하지 못한 실험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미술계를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피카소와 맞먹는 슈퍼스타가 됐습니다. 전 세계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 젊은 예술가를 주목했습니다. 당연히 미국 예술의 위상은 눈부시게 치솟습니다.
폴록의 스승인 토마스 벤튼의 작품입니다. 미국 지역주의 화가였던 벤턴은 멕시코 벽화의 영향을 받아 거대한 화면으로 작품을 구성합니다. 잭슨 폴락은 그에게서 큰 화면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능숙하고 재빠른 붓터치를 배웠습니다.
잭슨 폴록의 예술적 자양분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그는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살던 와이오밍은 허허롭고 광활한 지역이지요. 미국의 주중에서 가장 인구수도 적고요. 그 대신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품고 있을 만큼 경이로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4명의 형제들과 함께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에서 자랐습니다. 자녀 4명 중 잭슨을 포함한 3명이 예술가가 되었어요. 폴록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측량을 나가면서 네이티브 아메리칸(인디언) 문화를 접하게 됩니다. 또한 멕시코의 벽화가 두 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습니다.
대공황 동안 프랭클린 디 루즈벨트 대통령은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예술공공사업'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폴록과 동생 샌포드는 직업을 얻게 됩니다. 이 계획을 통해 폴록,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 1883-1949), 빌럼 데 쿠닝( Willem de Kooning, 1904-1997) ,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와 같은 세대의 아티스트가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폴록은 1929년 뉴욕에 가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 시기 멕시코에서 벽화 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당시 멕시코 혁명이라는 열기로 뜨거웠고요. 벽화 운동도 혁명의 일부였거든요. 멕시코 벽화 운동을 이끈 화가는 프리다 칼로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 였습니다. 그는 민중봉기 등을 주제로 삼아 거대한 벽화를 그렸습니다. 디에고와 함께 벽화 운동을 이끈 화가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1896-1974)입니다. 시케이로스는 1930년대에 뉴욕으로 건너와 벽화작업을 이어갑니다. 폴록은 시케이로스의 조수가 됐고요. 시케이로스는 깡통에 물감을 담아 캔버스에 쏟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창조했습니다. 폴록은 생경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케이로스에게 큰 영감을 받게 됩니다. 훗날 그가 캔버스에 물감을 휘갈기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 건 우연이 아닌 거지요.
폴록이 자양분으로 삼은 장르는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폴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에게 화두였던 무의식에 집착합니다. 캔버스 위를 걸으며 직관과 충동적 에너지로 이미지를 만들어낸 폴록의 작업 방식은 초현실주의 화법과 닮아있습니다. 와이오밍 출신답게 폴록은 인디언에게도 관심을 가집니다. 형형색색으로 염색한 모래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창조한 서부 인디언의 미술은 폴록의 인상에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멕시코,유럽, 인디언 예술을 골고루 받아들여 융합한 폴록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이 여정을 출발토록 만든 마지막 연료는 자기 자신이었죠. 폴록이라는 인간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도 어려워할 만큼 산만했습니다. 알코올 중독, 우울증, 강박증에 시달렸고요. 폭력성도 짙어 툭하면 싸움을 벌입니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잠들고, 아무 데나 소변을 갈기는 난봉꾼이었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오래 받았지만, 부글부글 끓는 폴록의 내면세계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자기 파괴적인 에너지는 그의 삶을 진창으로 끌어내립니다. 하지만, 캔버스 위에서만큼은 이 에너지가 창조 원동력으로 작동합니다. 이 우주에 오직 나 혼자만 있다고 여기는 인간처럼, 광기에 가까운 몰입속에서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두 인물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열띈 토론을 하는 장면입니다. 미로, 피카소, 마티스의 영향이 보입니다. 몬드리안의 눈에 띈 이 작품으로 , 페기 구겐하임에게 "여태 본 작가 중 가장 흥미롭다."라고 말한 작품입니다. 우리 눈에 여전히 난해한 그림인데 말입니다.
오른쪽에 남자의 형상이 직선적으로 길게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으로는 붉은 여성의 곡선으로 드러나고요.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선이 자동기술법의 호안 미로를 연상시키는 작품입니다.
1943년에 제작된 <원을 자르는 달의 여인>은 폴록의 트레이드 마크로 알려진 '트레핑 기법'으로 제작한 전면 회화(올 오버 페인팅)의 바로 직전 단계의 작품입니다. 1940년에 제작된 <미친 달 -여인>과 1942년 그린 <달의 여인>과 함께 1943년 금세기화랑에서 열린 폴록의 첫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입니다.
<벽화>는 페기 구겐하임이 집의 장식을 위해 주문한 거대한 사이즈의 작품입니다. 몇 달을 빈 캔버스를 바라만 보던 폴락이 하룻밤 사이에 광기의 모습으로 해치웠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그림입니다. 초기 폴락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주며 추상표현주의의 문을 연 중요한 작품입니다. 주제와 배경이 없이 올오보페인팅(all-over paint)으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만큼이나 극적이고 표현적입니다. <벽화> 작업 이후 폴락은 페기 구겐하임이 운영하는 <금세기화랑>에서 1943년 개인전을 갖습니다. 페기 구겐하임은 거대한 크기의 이 작품을 1951년 아이오와 대학 미술관에 기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WAbVpkV0jQ
<암늑대>는 미술관에서 팔린 첫 작품으로 이 시기의 대표작입니다. <암늑대>는 로마 건국신화의 쌍둥이에게 젖을 먹여 키운 신성한 존재로 무의식 속에 내재된 신화적인 이미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두 마리의 소가 하나의 붉은 화살에 꽂혀 있습니다. 금세기화랑의 개인전에 출품된 이 작품을 '현대미술관'초대관장이던 알프레드 바가 구입했고, 알프레드 바는 폴락의 작품에 "액션 페인팅"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유럽 예술가를 미국으로 데려오고, 1942년 뉴욕에 <금세기 미술관>을 연 페기 구겐하임은 미술계 큰 손이 됩니다. 페기의 비서가 주목할 만한 젊은 화가가 있다고 귀띔합니다. 잭슨 폴록이었죠. 페기는 약속을 잡고 폴록 작업실을 찾아갑니다. 바깥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버린 플록은 약속 시간을 한참 넘겨 작업실로 옵니다. "애송이 주제에 나를 바람맞히다니!" 페기는 폴록에게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는 폴록 그림에서도 큰 매력을 못 느꼈거든요. 폴록 작품은 아직 추상표현주의로 나아가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피카소가 개척한 입체주의 화풍 영향을 받은 티가 역력했거든요.
하지만 뒤샹은 의견이 달랐습니다. 화장실에 있는 남자 소변기를 작품으로 내고 제목을 <샘>이라 표현한 바로 그 뒤샹 맞습니다. 뒤샹은 폴록의 그림을 보고 "나쁘지 않군"이라고 말했거든요. 페기가 유럽에 머무는 동안 그에게 예술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알려준 인물이 뒤샹입니다. 그런 뒤샹이 폴록에게 뭔가를 발견하자 페기도 태도를 바꾸고 이 젊은 예술가를 후원하기로 합니다. 페기는 폴록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한적한 곳에 집을 얻어줍니다. 매달 일정한 생활비까지 지원하고요.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폴록을 최대한 어르고 구슬리며 예술에 집중하도록 돕습니다. 페기는 1943년 <금세기 미술관>에서 폴록 개인 전시회를 열어줍니다. 폴록이 뉴욕 미술계에 공식 데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페기의 후광 덕분에 폴록은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지만, 이 전시회에서 폴록은 그림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합니다.
"빌어먹을 피카소! 그놈이 다 해 처먹었어."
데뷔전에서 실망한 폴록은 별안간 피카소를 향해 불만을 쏟아냅니다. 물론 폴록은 피카소를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지요. 실컷 저주합니다. 피카소는 죽을 때까지 회화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실험을 했거든요. 천재 중의 천재였고 그리고 거장이 됐습니다. 폴록은 자신이 발버둥 쳐봐야 피카소 손바닥 안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페기라는 든든한 후원자까지 등에 업었지만 폴록의 불안감은 커져갑니다.
그러다 사건이 발생합니다. 1947년 어는 날 폴록은 이젤에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충동을 느꼈고, 캔버스를 작업실 바닥에 눕히게 됩니다. 폴록은 캔버스에 물감을 들이 부었습니다. 그렇게 현대미술의 신화가 탄생합니다.
잭슨 폴록의 행운의 여신 으로 아내가 되는 유태계 화가 '리 크레이스 너'입니다. 그녀는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러시아계 유대인 화가로, 폴락을 만나고 그의 재능을 알아봅니다. 그녀는 자신의 화가로서의 야망도 접고 오로지 폴록의 뒷바라지에만 헌신합니다. 당시 크래 이스너의 스승 한스 호프만이 칭찬했을 만큼 그녀 역시 뛰어난 화가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4살 아래 폴락에게서 천재성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에 열중하기보다 폴락의 작업을 지원하면서 '미시즈 폴락'으로 머무는데 만족합니다. 1946년 11월 폴락은 리 크래스너와 결혼하고 롱 아일랜드 이스트 햄프턴의 작은 농가로 이사를 합니다. 그의 작품이 대부분 사이즈가 크기 때문에 창고같은 커다란 작업실이 필수였던 거죠.
1947년부터 폴락의 이전 작품과는 조금 다른 표현들, 가늘고 굵은 세분화된 선들을 교차시킨 표현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뿌리는 기법, 혹은 액션 페인팅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전의 작품들과 다른 점은 작품의 전체성에 있습니다. 기법이 그림을 창작하는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모든것이 됩니다.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할 때는 무작위적인 표시에 불과하던 기법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의도된 다양한 움직임으로 처음 생겨나는 시점에서만 우연성을 띨 뿐, 최종적으로는 작가의 고심 어린 결정이 반영되게 됩니다.
폴락은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동부와 서부를 자주 오갔습니다. 그때 보았던 서부의 인디언들이 그린 모래 그림에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주로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막대기로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깡통에 물감을 넣고 휘두르며 물감을 흘리며 작품을 합니다. 아이들이 장난쳐 놓은 듯한 이 그림이 스트레스 확 풀리는 느낌을 받는 건 왠지 모르겠네요.
잭슨 폴락의 작품들은 미리 구상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 대부분 제목에 숫자를 붙여서 구분합니다. <넘버 19>는 다른 작품에 비해 크기가 매우 작지만 매우 뛰어난 조형성을 가진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특별히 강조한 부분이 없이 물감을 흘리고 끼얹고 서로 엇갈린 화면의 밀도가 깊고 탄탄합니다.
추상표현주의 VS액션 페인팅 , 폴록이 그림을 그린 방식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거대한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캔버스 위를 종횡무진하며 말 그대로 물감을 뿌렸습니다. 당연히 결과물은 혼돈이죠. 무엇을 그린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거든요. 어린아이가 낙서를 한 듯합니다.
미술계는 폴록의 그림을 '추상표현주의 '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폴록이전에도 추상화를 그리던 화가들은 있었습니다. 칸딘스키가 대표적이지요. 칸딘스키는 회화가 어떤 대상을 재현해야 한다는 의무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구체적인 피사체 대신 원, 면, 선처럼 순수한 도형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은 칸딘스키 그림에서도 최소한 사각형, 삼각형, 원통이라는 도형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폴록의 그림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그는 도형이라는 회화 기초 언어마저 거부하고 물감을 덕지덕지 뿌립니다. 관객들은 폴록의 추상화 앞에서 직관적으로 압도됩니다. 그림 크기가 벽화 수준으로 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감 흔적이 전부인 그림 내용에는 혼란을 느꼈습니다.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평론가들이 나설 차례입니다.
폴록을 스타로 만든 일등 공신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16-1994.5.7)입니다. 그는 뉴욕에서 활동한 비평가 중 가장 영향력이 센 거물이었습니다. 그린버그 머릿속엔 '회화는 회화만의 순수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이상향이 있었습니다. 폴록을 만나기 전까지 그린버그에겐 피카소가 영웅이었거든요. 피카소는 원근법이라는 족쇄를 파괴한 혁명가였기 때문이죠. 원근법은 회화가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기법입니다.
파카소는 생각합니다. "왜 그림이 세상을 그대로 담아야 하지? 세상은 3차원이고 캔버스는 2차원인데 말이야." 그리고 원근법을 버렸습니다. 우리 현실 세계에서 한 사람을 볼 때 좌, 우, 앞모습을 동시에 볼 수 없지만, 피카소 그림에선 볼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여러 방향에서 본 사람의 모습을 한 화면에 그렸습니다. 조각난 파편을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인 모양새로 말이죠. 세상은 이런 기법을 입체주의 (큐비즘)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피카소 그림엔 어쨌든 피사체가 등장하고 배경도 있습니다. 피카소 그림에서도 어느 정도 3차원적인 공간감이 느껴지고요. 그러나 폴록 그림엔 피사체도 배경도 없습니다. 완벽한 평면입니다. 그린버그는 폴록 그림처럼 물감 배열로만 이뤄진 순수한 2차원 세계가 회화의 본질이라 여겼습니다. 그린버그는 폴록과 그의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예술의 미래라고 선언합니다.
그린버그와 이름이 비슷한 또 다른 스타 평론가 로젠버그도 폴록에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는 그린버그와 달리 폴록의 그림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 대신 작품을 만들어내는 폴록의 '행위'에 중점을 둡니다. 화가의 고민, 에너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 등 예술가의 운동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봤습니다. 작품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 어떤 흔적일 뿐이라고 주장하고요. 독특한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 낸 폴록의 작업은 로젠버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으로 폴록을 이해하려 했고, 누구의 이론을 적용하든 폴록은 그에게 혁명가로 비쳤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온 힘을 다해 폴록을 영웅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2차 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미국은 유럽 강대국을 제치고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합니다. 하지만 예술에서는 여전히 삼류 취급을 받고 있어 죠. 문화 패권마저 쥐고 싶었던 미국은 이 땅에서 나고 자란 토종 스타 예술가가 필요했습니다. 당연히 잭슨 폴록이 최적 후보였지요. 1949년 미국 유명 잡지 '라이프'는 8월호에서 대중적으론 무명에 가까웠던 잭슨 폴록을 집중 조명합니다. 그는 생존하는 미국인 화가 중 가장 위대한가?라는 제목의 기사로 폴록을 소개하고 치켜세웁니다. 미국 전역에 잭슨 폴록이라는 이름이 퍼졌습니다. 미국 정부도 전시회 개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폴록의 비상을 도왔습니다. 추상표현주의는 유럽 예술을 한물간 유물로 만들 만큼 위세가 커졌습니다. 폴록 뒤를 이어 '추상표현주의 ' '액션 페인팅'타이틀을 단 예술가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단기간에 명성을 얻어버린 탓인지 폴록 자신조차도 어리둥절해했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미국이 전략적으로 육성한 화가라고 폄하하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이젤이 아닌 바닥에 캔버스를 두고 마치 춤을 추는 듯 움직이며 작품을 완성시키는 '액션 페인팅'과 그 과정 속에서 페인트를 튀기도 붓는 '드리핑 기법'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파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인트를 튀기고 뿌리는 방법 자체는 미술계에서 자주 쓰이던 기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뉴욕 현대미술과 큐레이터 윌리엄 루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제는 뿌리거나 쏟기, 흘리기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기법을 가지고 폴록이 무엇을 했느냐입니다.
폴록은 액션 페인팅을 통해 작품 자체가 아닌,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중시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그 자체의 순수한 의미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는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무의식을 중요시하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캔버스 위에서 한 손에는 페인트를, 다른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역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동안 그는 순수한 창조를 위한 무의식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무의식이 나를 표현하게 한다.
폴록의 예술 신념은 완고했고, 관념적인 예술의 틀을 부수었던 그는 자신만의 추상회화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액션페인팅'과 '드리핑 기법'의 개념을 완성시켜 다른 추상표현주의 작가들로부터 창의적인 접근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바닥에 놓은 캔버스에 페인트를 뿌려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 기존의 이젤에 세워지는 서양 전통의 기법에 비해 그림 전체를 다양한 각도에서 그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올 오버 페인팅"과 "액션 페인팅"이라고도 불리며 전신을 사용하여 페인트를 두드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그림 속에 있을 때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내가 어떤 행위를 저질렀는가를 알게 되는 것은,
그림과 친숙해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한 뒤에야 가능해진다.
그림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니기 때문에
나는 그림을 고치거나 이미지를 부수는 일에 대해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런 식으로 그림이 완성되기를 허용할 뿐이다.
나 자신과 그림의 접촉이 끊어지는 경우는
결과가 엉망진창으로 나타날 때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림과 나 사이애 서로 주고받는
완벽한 조화 관계가 성립되며,
이때 그 그림은 괜찮은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일지 중에서 (잭슨 폴락)-
https://www.youtube.com/watch?v=8PQfMd3Vv-g
회색, 갈색, 흰색 및 노란색 페인트가 어지럽게 뿌려져 있는 이 작품은 2011년 4월까지 역사상 가장 비싼 그림이었던 폴록의 <NO.5>입니다. 2006년 경매에서 데이비드 마르테네즈에게 약 1억 6540만 달러에 팔리게 되면서 당시 최고 기록을 세웠지만 2017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둥이가 약 4억 5030만 달러를 기록하면서 자리를 양보하게 됩니다.
<NO.5> 작품은 1949년 예술가 알폰소 A. 오소리오가 1500달러에 이 작품을 구매하자 그의 파트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것에 돈을 썼느냐"라고 반응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흔히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대표하는 예시로 폴록의 작품이 쓰이는 것처럼 당시에도 그의 예술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비평가들은 그를 조롱했습니다. 반면, 오소리오처럼 폴록의 창조성을 칭송하던 사람도 존재했죠. 이렇게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갈색, 검은색, 흰색, 회색의 역동적인 물감 표현이 극에 달한 폴록의 <가을 아침>입니다.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그림으로 행위의 순수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폴록의 가치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칠한 모든 선과 점들은 어떠한 형태라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불규칙합니다. 그는 나무 작대기나 붓을 이용해 페인트를 떨어뜨리거나 통째로 부어 어떠한 질서도 없이, 무의식적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작품을 완성합니다. 가로 266.7cm 세로 525.8cm로 폴록의 작품 중 가장 크기가 큰 작품이기도 합니다.
폴록의 명성을 굳혀준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길게 늘어진 희고 검은 선들과 짧고 선명한 방울들, 활처럼 휜 선과 흩뿌려진 선들, 에너멜 물감의 두꺼운 질감의 반점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폴락의 친구이면서 예술 비평가인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라벤더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지만'그림이 뿜어내는 분위기를 반영하기 위해 <라벤더 안개>라는 제목을 제안했습니다. 이 그림은 하얀색과 파란색 노란색, 회색, 적갈색, 장밋빛 분홍색 및 검은색 물감의 변주로 구성되었습니다.
1947-1951년 잭슨 폴락의 작품은 절정을 이루었고 그 이후 그의 그림페인팅은 초기 작품처럼 형상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물감을 뿌리는 대신 부어서 물감의 얼룩이 흐르게 한 작품으로 뿌리기와 조금 다른 폴락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 보는 단계로 보이는 작품입니다. 1951-1954년 ,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작품에 대한 격렬한 고뇌를 하던 시기입니다.
폴록은 한순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됐습니다. 하지만 피폐한 삶은 그대로였습니다. 폴록의 초상화를 사려는 컬렉터가 줄을 섰습니다. 폴록은 한 군데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닥에 내려놓은 캔버스를 다시 이젤에 올려놓고 새로운 장르의 그림을 그리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폴록에게 기대한 건 추상화뿐이었습니다. 한때 피카소를 넘어서지 못하리란 공포에 시달렸던 폴록은 이번엔 자신이 쌓은 벽에 부딪힙니다. 자신의 모든 작품이 새로워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던 폴락은 점점 술에 의지하게 되고 무절제한 생활로 정신분열로 심해집니다.
유채색보다는 무채색의 대비가 눈에 돋보이는 이 작품은 폴록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 몇 년 전에 그린 작품입니다. 알코올 중독으로 피폐해진 그는 1950년대부터 색을 피하고자 했으며 이는 폴록의 심리상태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그는 자신의 화풍이자 싱징이었던 드리핑 기법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그동안의 작품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스타일을 보입니다. <심연>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그림의 중심에 위치한 검은 구멍이 우리를 깊은 내면으로 끌어당기는 듯합니다. 이는 폴록 자신이 처한 슬픔을 드러내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그의 인생의 변화가 작품에까지 비추어졌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랫동안 그림을 못 그릴 정도로 절망에서 허우적거리고 술을 퍼마셨습니다. 폭력성, 우울증, 강박증이 다시 심해집니다. 1956년 8월 폴록은 술에 취한 채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힘껏 밟으며 나무로 돌진합니다. 시속 120km로 길가의 자작나무를 들이박고 즉사합니다. 그렇게 폴록은 44세 나이로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의 사후 아내 리 크리스 너는 장례를 치르고 잭슨 폴락의 작품을 모두 박물관에 기증합니다. <폴과 크리스 너> 재단을 만들어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고요. 미국은 '천재 예술가의 요절'이란 서사를 적절히 이용했고, 폴록을 아예 신화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날 폴록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화가로 꼽힙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3Uj_HAAvbk
추상표현주의는 유럽 중심의 미술이 미국으로 옮겨지던 1940-1950년대에 일어난 가장 미국적인 미술 양식입니다. 잭슨 폴락의 사망은 곧 추상표현주의의 몰락을 의미했고, 추상표현주의의 자리에는 구체적인 형상을 앞세운 '팝 아트(POP ART)가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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