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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대저택에서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잔잔한 일상에 묻혀 사는 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화가들은 귀족들의 사치와 풍요로움을 화폭에 담아내는데 주력했습니다.

 

 

당시 왕이 살 던 베르사이유궁전은 파리에서 한 참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왕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귀족들이나 관리들은 궁전까지 왕복을 하려니 힘이 들고요. 그래서 파리를 포기하고 왕이 거쳐하는 베르사유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왕의 궁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름답고 우아하게 실내장식을 하고픈 안 주인들의 염원에 따라 여성스럽고 섬세하고 우아하고 장식적인 양식의 로코코 (Rococo) 미술이  유행을 하게 됩니다. 

 

 

샤르댕은  18세기 로코코 양식이 유행하던 시절 소재 면에서 다른 화가들과 엄격히 다른 세계를 추구했습니다. 귀족들의 호사스러움에 휩쓸려 다녔던 당대의 화가들과 달리 그는 시민계급을 대표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평범함을 모티브로 합니다. 가령 평소 사용하던 사물들 냄비, 주전자 등의 소박한 주방도구와 생선, 달걀 등 음식 재료를 늘어놓고 정물화를 그리는 식으로 말이죠. 

 

 

샤르댕이 활동하던 시절 막강한 권위를 가진 프랑스 아카데미는 그림의 주제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규칙을 정했습니다.  그림에도 서열이 있었다는 말이죠. 역사화, 초상화, 장르화(,풍속화,풍경화), 정물화 등으로 말입니다.

 

역사화는 신, 성자, 영웅의 서사등을 펼쳐 보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특별함과 도덕적 위대함을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죠. 이런 역사화를 잘 그리려면 실기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종교사, 고전, 신화 등과 관련된 지적 소양도 동시에 갖춰야 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역사화는 최상급 대우를 받았죠.

 

 

초상화는  왕과 귀족의 위세를 주로 기록했습니다. 인간의 형상을 묘사했기 때문에 상위 등급을 받습니다. 반면 세속적 주제인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풍속화와 인간의 지배를 받는 자연이 주제인 풍경화는 하위 등급으로 분류됐습니다. 장르화라고 불립니다. 

 

일상의 사물, 과일, 꽃 등 움직이지 않는 (죽은)대상이 주제인 정물화는 최하위 등급이었고요.

 

당시 모든 화가가 역사화가로 성공하는 꿈을 꿨습니다. 역사화가로 명성을 얻으면 작품 주문이 많이 들어오고 그림도 비싸게 팔 수 있었거든요. 화가들에게 역사화는 출세의 지름길인 동시에 경쟁이 치열한 곳이었습니다.

 

샤르댕은 다른 화가들과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움직이는 것을 그리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기질에도 맞지 않았고요. '화가는 모든 것을 자기 머릿속에서 찾아 구상을 해야 한다.'라는 역사화의 대의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이젤 앞에 놓아두고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정물화를 그리는 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갑니다. 돈벌이와 정 반대의 노선을 걸어간 거죠.

 

 

 

Saint-Germain-des-Pres/O'Bon Paris

 

 

 

 

 

https://www.youtube.com/watch?v=Y9sD-S2tNro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1699-1779)은 가구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지구인 생 제르멩 데 프레 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정규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단아 였습니다. 18세기 프랑스 화단은 에로틱한 누드화, 정원의 밀회, 귀족들의 침실 등 유혹적인 장면을 표현한 그림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던 시절입니다. 그렇다고 프랑스 화단에서 왕따였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는 당시 제 3계급(1급: 왕, 귀족/ 2급:성직자)으로 치부당했던 검소한 생활을 하 던 시민들의 모습을 자신의 화폭 위에 재현해 냅니다. 로코코의 화려함보다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려 진 풍속화와 정물화로 말입니다. 

 

 

 

 

 

<The Ray>,1725-26/wikipedia

 

 

 

그것은 인간의 표현과
묘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그것의 놀라운 얼굴 묘사는
정확히
똑같은 그 생선의 살, 피부, 피이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비평가 ,드니 디드로(Dennis Diderot)

 

 

 

 

< The Ray(La Raie),1725-26>

 

이 작품의 중심에 내장이 제거된 가오리 (홍어(skate)로도 알려짐)가 매달려 있습니다. 그 상처와 반투명 살은 내부 구조를 드러내고요. 흰색 표면과 배를 갈라 드러난 연분홍색의 내장이 생선 장수 눈에는 '고놈, 참 실하다.'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식가라면 막걸리 한 사발에 홍어 삼합을 떠 올릴지도 모르고요. 제 눈에 벽에 저 자세로 걸려 있으니, 눈과 입처럼 보이면서 핼러윈 파티에 뒤집어쓴 유령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이 그림 앞에 선 다른 이들도 가오리의 멍한 유령 같은 눈빛이  경악스러웠나 봅니다. 굴 몇 개와 생선 두 마리도 보입니다. 비린 생선 냄새를 맡고 용케 찾아들어 온 고양이 녀석이 귀와 꼬리를 바짝 세우는 걸 보니 '너 , 오늘 딱걸렸어.'하는 앙칼진 표정입니다.  왼쪽에서 쏟아지는 빛 덕분에 부엌에 있는 모두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작품은 실제 오브제들을 이와 같은 구도로 배열해 놓고 그린 것이 아닙니다. 샤르댕이 구도를 먼저 스케치한 후 그 구도에 맞는 사물들을 상상하여 배열한 후 그린 '구성 연습을 위한 거짓 정물'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한 특징입니다.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의 리셉션을 위해 제작된 작품입니다. 그의 후기 작품 <찬장,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The Buffet,1728)>과 함께 제시된 작품 이지요.  <The Ray>로 인해 샤르댕이 '동물과 과일에 재능이 있는 화가'로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첫 걸작으로 간주하는 작품이고요. 이 작품으로 인해 25살의 샤르댕은 프랑스 최고로 권위 있었던 예술 기관으로부터 정식으로 아카데미 회원자격이 주어집니다. 정물화라는 가장 인정받지 못한 분야에서 종종 단순한 '기술'로 무시받 던 분야에서 공식적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죠. 

 

 

 

 

 

각각의 구성 요소들이 주는 실제와 흡사한 현실감은 이후 화가들에게 있어 하나의 전형적인 '정물'의 규칙처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샤르댕이 그 림 속 가오리를 그리는 사실적인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죠. 흩어진 굴 껍데기를 가볍게 밟으면서 등을 아치형으로 구부리고 털을 곤두세운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왼쪽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물고기 모양의 생명 없는 수척함이 뚜렷이 부각되고요. 생사를 막론하고 집결된 대상들은 모두 왼쪽에 모여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주방 기구들이 모여 있고요.

 

 

 

이 작품은 아카데미가 소장하고 있다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루부르 박물관에 소장되게 됩니다. 미술계에 세잔, 마티스, 마네 등에게 영향을 줍니다. 마티스는 샤르댕에게 '사물의 감정을 그릴 줄 아는 화가'라며 치켜세우기도 합니다.  이 그림을 보고 간 문학계에 드니 디드로, 마르셀 프루스트 등에 영향을 끼칩니다.

 

 

 

17세기의 이름없는 네덜란드 화가들처럼  샤르댕 또한 반사광선의 처리를 연구하였습니다. 따뜻하고 밝은 색의 바탕칠과 인물의 머리 부분을 두드러지게 하는 기술적 방법을 베르메르의 그림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림물감을 충분히 이용하여 연속해서 칠하고 그 위에 불투명한 색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스컴블(scumble) 효과를 주는 등 매우 깊이 있는 색조를 만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또한 정취가 부족한 네덜란드 회화의 사실주의에  세부적인 유사함과는 구별되는 프랑스적 특징인 간결함과 직접성을 더하기도 하지요. 

 

 

 

 

 

 

<Lady Sealing a Letter>,1732/Canvas Replicas

 

 

샤르댕은 1731년 마르게리트 생타르와 혼인합니다. 2년 뒤 최초의 인물화인 <편지를 봉하고 있는 부인>을 발표했고요. 그때부터 샤르댕은 정물화나 <식사전의 기도>와 같은 가정생활을 다룬 실내화와 <팽이를 들고 있는 아이>와 같이 일이나 놀이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 남녀를 다룬 반인물화를 번갈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같은 주제를 자주 되풀이 해서 그렸습니다. 같은 유형의 작품들을 여러 점 남겼고요. 1735년 그의 아내가 죽은 뒤 작성된 재산목록은 그들이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무렵에는 이미 샤르댕이 화가로서 유명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Woman Drawing Water from an Urn>,1733/Meister Drucke

 

 

 

구리 물통이 인상적입니다. 오늘날 똑같은 모양새로 여름철에 자주 사용하는  가벼운 플라스틱 재질의 물통 생각이 났습니다. 물이나 청량 음료 등을  만들어 다수의 모임에 들고 가기도 하거든요. 덕분에 18세기 프랑스 어느 중산층 가정의  세간살이를 엿볼 수 있어 좋습니다. 어느 시대나 가사노동과 육아로 고단했을 여성들의 삶을 생각하게 되고요. 

 

 

 

<The Washerwoman>,1733/Artvee

 

 

 

<빨래하는 여인>과 같은 장면들은 샤르댕이 나중에 장르화인 풍속화로 전향하면서 그려진 작품입니다. 샤르댕은 정물화 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수익성 차원에서 좀 더 윗단계인 장르화에 도전합니다. 그리고 있 던 정물 속에 움직임이 있는 사람을 그려 넣어 소재를 확대하기 시작합니다.그 당시에는 성공한 화가들에게 필수적인 기술로 여겨졌습니다. 이 그림들은 난이도와 정교함 때문에 더 놓이 평가되었죠.

 

 

 

빨래를 널기 시작하는 뒷 모습의 여인이 보입니다. 약간 산만해진 순간에 옆으로 눈을 돌린, 한 여성의 발그레한 볼도 인상적이고요. 빨래로 가득 찬 큰 통에 손을 담근 채 무엇이 그녀의 시선을 잡았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한참 호기심 많을 나이의 아이를 흥미로운 놀잇거리 하나 들려 서로의 시간을 한 공간에 묶어 놓습니다. 놀거리가 마땅찮으니 거품놀이면 어떻습니까? 하루종일 엄마 옆에 붙어 있을 수 있는걸요. 준비된 낮은 의자에 걸터앉아 진지하게 거품놀이를 시작해 봅니다.   단순한 이 놀이가 뭐라고 대롱 끝에 불어지는 풍선 모양의 거품은 빛을 받아 온갖 색으로 물들기도 하고 가볍게 떠 하늘로 오르기도 하며 꿈이라도 실어 볼까 싶으면 이내 터트려져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녀석도 은근 이 공간의 터줏대감인가 봅니다. 배경처럼 한 자리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죠. 당시 쥐들이 많아 가정집에서 많이 키웠던 모양입니다. 살아있는 조연 역할 톡톡히 하는 것 같습니다. 

 

 

 

 

 

<Soap Bubbles>,1733-1734/wikipedia

 

 

 

 

샤르댕의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바니타스 정물화만큼 상징과 알레고리를 내세워 지나치게 의미를 전달하려  애쓰거나 교훈을 주고자 설교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있는 사물과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해 자연스럽게 보여줄 뿐이죠.

 

 

 

비눗방울 놀이를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소년이 두터운 벽돌 난간에 기대어 긴 대롱으로 비누 거품을 불고 있습니다. 오른 팔꿈치 옆에는 비눗물이 든 작은 유리컵이 놓여 있고요. 소년의 머리는 가지런히 묶여 뒤로 넘겨져 있습니다. 대롱을 쥔 오른손과 이마에는 밝은 빛이 부서져 어둡게 칠해진 벽돌 난간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림의 오른편에는 모자를 쓴 작은 꼬마가 비누 거품이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까치발을 하고 있나 봅니다. 오히려 비누방울 놀이는 이 아이에게 더 어울릴 것 같은 데 말입니다. 갈색을 띤 재킷의 옷주름, 하얀 셔츠의 색조는 조화롭고 풍요롭게 채색되어 있습니다. 그림 속 인물과 정물들은 의도된 균형감으로 잘 배치되어 정교한 구성미를 느끼게 하고요.

 

 

 

구성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순수함, 덧없음, 그리고 찰나의 젊음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샤르댕은 이 작품에서 인물을 사각형 모양의 돌로 만든 창문에  배치하였습니다. 창문 난간 밖을 향해 걸친 팔과 머리는 큰 삼각형을 이루고 있고요. 키 작은 어린 소년의 모자에서 또 다른 작은 삼각형이 반복됩니다. 구성의 초점은 전체 캔버스에 덮여있는 따뜻한 갈색 색조의 바탕 위에 방금 만들어진 동그란 형태의 투명하게 반짝이는 비누 거품으로 수렴됩니다.

 

 

 

이 작품은 샤르댕이 서른 중반에 그린 작품입니다. 갓 결혼하여 딸 마그리트-아그네스와 아들 장-페에르가 태어난 후였죠. 겨우 걸음마를 떼며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아버지가 된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며 붓질을 했을까요? 이 작품 속 인물은 그림을 그릴 당시의 실제 모델이라기 보다 작가의 내면세계에 그 자신과 아들의 초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들 장-피에르는 자라서 아버지에 이어 화가가 됩니다. 그는 당시 화가 지망생들이 동경하던 아카데미의 로마상을 획득하고 이탈리아 유학까지 떠났으나, 결국 베니스의 운하에서 익사한 채 발견되지요. 샤르댕이 죽기 7년 전에 벌어진 일입니다. 죽음과 삶의 허무를 엄숙하고 절제된 필치로 그려내던 화가의  아들은 베니스의 밝은 햇빛 아래 그림 속 반짝이는 비누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The Governess>,1738/ArtUK

 

 

배드민턴 라켓과 셔틀곡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가정 교사인 듯한 그녀는 밖에 나갈 때 쓸 모자를 털려다 아이에게 한 소리 하나 봅니다. " 학교 가야 하는 데 , 너 언제까지 저런 것들 가지고 놀거니? "뭐 이런 식의 훈계를 듣는 모양입니다. 불만스럽지만 다소곳이 눈을 깔고 듣고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옆에 놓인 반짇고리가 한 깔끔 , 한 성질 하실 것 같아요. 

 

 

 

 

샤르댕은  단순한 색채와 부드러운 조명으로 고요한 집안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그의 작은 화면 속에 두 개로 갈라진 상반된 세계들이 존재합니다. 열린 문 너머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바깥세상과 가정교사가 굳겐하게 지키고 있는 가정의 질서, 장난감들이 주는 쾌락의 세계와 맞은편에 놓인 반짇고리가 상징하는 성실한 노동의 가치, 그리고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아이와 교양을 갖춘 중산층 출신의 가정교사가 그들입니다. 샤르댕은 위대한 업적만을 그리던 이전의 미술에서 도외시했던 것들, 즉 가정과 여성, 중산층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어린아이들을 온전한 사회의 일꾼으로 만들어 내보내는 것이 바로 이들이었으니까요. 양육과 훈육을 책임진 '가정의 여성'이 '어머니'가 아니라 점이 특이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까지 상류층 자녀의 양육은 유모와 가정교사의 몫이었습니다. 과거의 많은 위인들이 모두 '아줌마'들 손에서 자란 셈이죠. 

 

 

 

 

<The Little Schoolmistress>,1735-36/Art.U.K

 

 

 

 

놀고 싶은데 볼그레한 볼을 가진 포동한 아이가 고사리 손으로 무엇인가 가리키고 있습니다. 문제는 가리키는 글자가 도대체 생각이 나지 않네요. '어제 그렇게 ~가르쳐 줬는데 그것도 몰라 '하는 불호령이 깐깐한 그녀에게서 떨어질 것 같습니다. 웅얼거리는 아이가 그녀 역시 답답한 모양이고요. 전체적인 분위기가 화기애애하지 않은 걸 보면 말이죠. 머리에 쓴 장식이 참 독특합니다. 

 

 

 

샤르댕은 가벼운 붓터치와 우아한 색채로 정물화와 장르화를 많이 제작했습니다. 샤르댕 그림의 원류는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시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시대 네덜란드 회화는 독특한 시각적 명확성을 지니고 있었죠. 크기가 작고 불필요한 내용이 없었거든요.이 작품 역시 십 대로 추정되는 한 소녀가 아이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많은 샤르댕의 그림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엄숙한 침묵입니다. 배경이 되고 있는 장식이 없는 평범한 실내는 프랑스의 중산계급 시민의 검소한 가정생활을 보여줍니다. 어떤 배경도 두 주인공 사이의 관계에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샤르댕의 작품들의 단순함은  18세기 동시대 화가 프랑수아 부셰가 전형적으로 묘사한 로코코 양식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살롱에서 샤르댕의 장르화 그림이 점점 인기가 많아지는 걸 막을 수 없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과 왕족들의 수집품들에 들어가는 것 또한 막지 못했고요. 그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의 작품들 중 많은 작품이 판화로 복제되었습니다. 

 

 

 

 

 

<Girl with a Racquet>,1737/wikipedia

 

 

 

 

 

샤르뎅의 일상을 담은 작품 중에  <셔틀콕을 들고 있는 소녀>입니다. 이 작품은 살롱전에 출품하여 엄청난 영광을 안겨주었습니다. 뺨에 홍조를 띤 소녀가 배드민턴 라켓과 셔틀콕을 쥐고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모습입니다. 부드럽게 퍼져 있는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쓰고 있는 레이스 모자와 밤색의 드레스 위에 입은 하얀 앞치마는 소녀가 하녀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한 소녀의 푸른색의 드레스 리본에는 가위와 바늘쌈이 매달려 있어 배드민턴 라켓과 셔틀콕은 운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부드럽게 퍼져 있는 드레스와 나무 의자, 라켓과 소녀는 단순한 녹색의 배경과 대비되면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가위와 셔틀콕 등 세부 묘사가 뛰어난 작품입니다.

 

 

 

<Boy with a Spinning-Top>,1738/wikipedia

 

 

 

<시장으로부터의 귀가(The Return from the Market)>,1739/wikipedia

 

 

 

이 그림은 1739년 살롱전에 전시된 것으로 특히, 구성이 돋보입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구리 물통 때문에 소녀가 그림 앞으로 더 바짝 다가와 있는 듯 느껴집니다. 생각에 잠긴 소녀는 단조로운 현실의 일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듯 넋이 나간 표정을 을 짓고 있습니다.

 

시장 봐서 부엌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입니다. 살짝 바랜 푸른색 앞치마 차림의 그녀는 한 손에 고깃 덩어리 다른 한 손에 커다란 빵을 들고 탁자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문을 열고 또 다른 손님을 맞는 어린 가정부에게 쏠려 있고요. 빵, 포도주병, 접시, 도기그릇, 왼쪽의 구리 물통들까지 샤르댕이 부엌 정물화를 통해 자주 그리던 것들입니다. 정물화에 대한 샤르댕의 자신감이 잘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특히 빵과 포도주병 그리고 바닥의 그릇은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로 그림의 균형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샤르댕이 치밀한 계산하에 물건을 배치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소한 풍경에 아름다움을 불어넣는 샤르댕의 장르화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판화로도 제작돼 많은 사람들에게 팔렸습니다. 

 

 

 

 

<Saying Grace(La Benedicite)>,1740/wikipedia

 

 

프랑스 중산층 어느 가정집에서나 벌어지고 있을 법한 장면입니다. 식탁보의 청결함이 만져질 듯 합니다. 식기의 부딪힘이 들릴 듯하고요. 기도를 마치고 식탁에 앉은  큰 아이는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 음식을 식기 전에  빨리 먹고 싶습니다. 엄마의 시선은 어린 동생에게 가 있고요. 북을 가지고 놀랐 던 아이는  더 놀고 싶은 데 '얼른 기도 안 하고 뭐 하니?' 하는 엄마의 시선이 따갑습니다. 엄마는 가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마 감사기도를 할 때까지 동시에 다른 일을 하면서 시선을 뗄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저 음식이 식기 전에 얼른 기도를 마쳐야 할 텐데 말입니다. 샤르댕의 그림은 이렇듯 무겁지 않은 주제로 관람자가 더 편안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합니다. 

 

 

 

18세기 특유의 가족의 부드러움을 가미시킨 그의 작품은 교훈적인 무거움이나 과도한 감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가라앉은 색 구성과 조용한 조명에 의해 더 강조됩니다. 샤르댕은 그의 그림들의 다양한 요소들의 배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구성은 세밀하고, 세 인물의 삼각형 구조에서 만들어진 안정성 또한 그 장면의 고요함을 더합니다. 

 

 

그는<Saying Grace>의 여러 버전을 그렸는데 그중 세 작품은 1740, 1746년, 1761년에 살롱에 전시되었습니다. 1740년 완성된 원본은 왕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 그림은 루이 15세 사망 후 10년간 잊혔고요. 그러다 1845년 재발견됩니다. 1869년 성공한 의사이자 예술품 애호가였던 루이 라 카즈(Louis La Caze)의 위대한 기증품을 통해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게 됩니다. 1761년 살롱에 전시되었던 수평 구성 버전은 현재 분실된 상태입니다.

 

 

 

 

 

 

<The Hard-working Mother>,1740/wikipedia

 

 

 

<Basket of Wild Strawberries(Le Panier de fraises des bois)>,1761/wikipedia

 

 

 

 

 

그는 이 부차적인 장르를 최고,
가장 놀라운 예술 상태로 끌어 올렸다.
아주 흔한 물체를
간단히 다루어
렌더링의 마력을 통해
아름답게 변모시키는
재료 그림의 증진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론가 에드몽(Edmond)와 쥘 드 콩쿠르(Jules de Goncourt) 형제-

 

 

 

 

 

 

 

 

 

 

 

소복하게 쌓아 올린 과일 바구니를 잡채로 대체해 놓으면 얼마나 먹임 직스러울까를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음식을 저렇게 쌓아 놓으면 먹음직스럽거든요. 보기도 좋고요.

 

 

<산딸기 바구니>는 그의 후기 정물화 시대의 모범입니다. 화가는 일상적이고 가정적인 물건들의 단순함에 여전히 집중합니다. 이제는 기하학적인 구성에 좀 더 정교한 눈으로 접근하고요. 부드러운 딸기 피라미드는 배경의 부드럽게 완화시킨 갈색과 대조적으로 빛, 짙은 빨강, 그리고 드문드문 섞인 녹색을 잡아내며 캔버스 중앙에 번쩍입니다. 한쌍의 카네이션의 밝은 흰색은 딸기의 붉은색을 훨씬 더 극명하게  드러내고요. 이러한 색깔의 파열 덕분에  그림이 활기차졌습니다.

 

 

 

샤르댕의 후기 정물화의 물체들은 우연히 배열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카운터의 수평은 유리잔의 물, 고리버들 바구니의 가장자리, 그리고 오른쪽의 작은 과일 그룹에 의해 형성되는 두 번째 평행 평면에 의해 강화됩니다. 중앙을 약간 벗어난 카네이션을 테이블 가장자리에 의도적으로 위태로운 위치에 배치했네요. 시각적으로 물리적으로 살짝 혼란을 일으 킵니다. 또한 딸기의 삼각구도는 유리잔이나 복숭아로 형성된 더 큰 피라미드의 정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것의 배가된 기하학적 구도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0년의 연습 끝에, 샤르댕은 형식적인 요소들로 자유롭게 연출할 수 있을 만큼 정물화의 장르를 완벽하게 마스터했습니다. 유리잔의 번쩍거리는 물과 활짝 핀 꽃의 부드러운 꽃잎들이 그의 전문성을 더욱 입증하는 놀라운 자연주의로 표현됩니다. 

 

 

 

<self-portrait with Spectacles>,1771/Drouot.com

 

 

 

파스텔 화랑으로 가서
그가 70대에 그린 샤르댕의 자화상을 보시오.
그의 코 끝에
미끄러져 내린 두 개의 새 렌즈 사이에
끼어 있는 대형 안경 위에
둔감한 눈동자를 가진 그의 피곤한 눈이 있다.
눈은 마치 많이 보고, 많이 웃고, 많이 사랑한 것처럼 보이고,
부드럽고 자랑스러운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응, 나는 늙었어!
나이가 들면서
둔탁해진 흐릿한 달콤함 뒤에는 아직도 빛이 난다.
-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bst)-





샤르댕의 인생 후반기에 그린 자화상들 중 하나입니다. 날카로운 갈색 눈을 가지고 우리를 향해 한 마디 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외모의 솔직한 묘사가 눈에 들어오고요. 그의 코에 섬세하게 자리 잡은 안경, 화려하고 기하학적 무늬의 스카프, 복잡하게 얽힌 파란색과 흰색 모자!!! 패션니스타가 따로 없네요.  고집스럽지만 당당한 노 화가의 모습이 근사합니다. 

 

 

 

 샤르댕의 시력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그가 항상 일했던 납 성분이 함유된 유화 물감으로 인해 악화되어 갑니다.  경력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는   파스텔로 눈을 돌립니다. 파스텔은 그에게 최대한 다양한 색상과 질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1771년 살롱에 다른 여러 작품들과 함께 전시된 이 파스텔 작품의 등장은 그의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후기 파스텔 초상화들은 놀라울 정도로 친밀하고 작품 속 모델들의 심리적인 깊이를 전달합니다. 그의 얼굴에 있는 음색의 병렬 배치로 인해 그는 조각적이고 거의 실물처럼 보입니다. 샤르댕은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예술계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다음 세기가 되어서야 프랑스 예술계의 대열에 오를 수 있었고요.  

 

 

 

 

 

말년에는 파스텔 초상화를 그렸고, 1775년 살롱에 파스텔로 그린 2점의 자화상과 아내의 초상화 루브르 박물관)를 출품했습니다. 샤르댕은 자기 작품의 복제 판화로 생전에 명성을 누렸고요.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 샤르댕의 작품은 견고한 추상성을 가진 구도 때문에 높이 평가받기 시작합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하나의 사조를 형성하기도 했고요. 그는 정물화에서는 적어도 세잔의 출현 이전에 최고의  가장 위대한 순수화가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입체주의에서부터 추상표현주의까지 많은 현대의 예술운동은 그에게서 영감을 얻기 때문이죠.

 

 

 

 

약 200여 점 정도의 작품만을 남긴 샤르댕은 꽤 오랜 시간 동안 꼼꼼히 제작하던 작업방식 탓인지 다작의 화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에는 아카데미 회원으로 오십여 년 간 활동하며, 만 여든의 나이로 루브르 근처에서 세상을 떠난 화가가 그린 삶의 흔적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샤르댕의 작품에는 18세기 미술이 가진 많은 것이 없었습니다. 도덕적 교훈주의, 관능적인 유혹, 로코코의 낭만적인 환상, 내러티브와 이념, 상징과 알레고리, 그리고 화려한 기교를 과시하는 스택터클이 없었습니다. 서민과 중산층의 묵묵한 일상을 조용하고 소박하게 담은 화가였죠. 또 순진하다는 느낌이 들정도로 소박하고 진지하게 눈에 보이는 것에 충실한 화가였습니다. 화면을 구조적으로 단순화시키고 대상으로서의 사물과 정경 그 자체가 전하는 순수하고 단단한 진실을 담고자 애썼던 화가입니다. 그런 덕분에 화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의 그림은 그의 시대를 벗어나 계몽주의를 너머 근대의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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