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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한 말입니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현장에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다시 한번 언급해 유명해진 말이기도 하지요. 영국 풍경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의 작품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올려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윌리엄 터너와 함께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 화가들 가운데 가장 뚜렷한 흔적을 남긴 화가 입니다. 그는 특히 영국의 전원을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인 풍경화라는 그릇에 담아낸 것으로 유명하지요. 지금이야 그의 작품들이 높은 평가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52세의 늦은  나이로 왕립미술원 정회원이 되기까지컨스터블은 영국 기성 화단에서 중요 인물로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동시대에 활동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4.23-1851.2.19)에 비해 각광받지 못했지요. 오늘날 컨스터블은 터너와 더불어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를 대표하는 두 거장으로 일컬어집니다. 똑같이 낭만주의 풍경화가로 분류되지만  터너와 조금 다른면이 있습니다. 윌리엄  터너가 자신의 마음에 비친 풍경을 드라마틱하게 과장하거나 비틀어서 표현했다면, 컨스터블은 작품 속에 자기의 내적 감정을 담으면서도 풍경화가 토대로 삼고 있는 자연주의 (사실주의)에 보다 충실한 느낌입니다. 자연에 대한 평온하고 시적인 성찰이 담긴 그의 그림은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적 통찰에 비교되기도 하고요. '위대한 자연주의자'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영국 서퍽주/wikipedia

 

 

 

 

영국 토박이입니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문 토박이들은 그 지역의 특징과 풍물에 대해서 잘 알고 이해 하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들은 외지인들이 잘 찾아내기 힘든 그 지역만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잘 알고 있고요.  또, 그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컨스터블이 바로 그런 화가입니다. 

 

 

존 컨스터블은 영국 남동부지역인 서퍽(Suffolk)의 이스트 버골트(East Bergholt) 출신입니다.  플랫포드 제분소(Flatford Mill)와 에섹스(Essex)에 데덤 제분소(Dedham Mill)를 소유한 부유한 옥수수 상인 골딩(Golding)과 앤 니 와츠(Ann nee Watts)의 둘째 아들이고요.  그가 태어난 영국 남동부 지역은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특징입니다. 1년 365일 동안 같은 날씨를 찾기 힘들다고 해요. 덕분에  다양한 날씨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그의 가족들은 컨스터블이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기를 희망했습니다. 컨스터블은 7년 동안 아버지를 도와 옥수수 사업에서 종사했습니다. 그의 나이23세가 되던 해인 1799년,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니다 싶었나 봐요.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그는  왕립 아카데미 부설학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실물 그리기를 공부했습니다. 고전 작품에 익숙해져 갔고, 훈련을 마친 후  그레이트 말로 사관학교(Great Malow Military School)의 미술 교사 자리를 제안받지만 거절합니다. 안정이 보장된 자리 대신 전문 풍경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Boat-Building near Flatford mill,1815/wikipedia

 

 

 

 

부유한 제분업자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저급한 '화가로 실패한 인생을 살까봐 반대를 했습니다. 여느 아버지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업을 물려받는 대신, 아버지 소유의 방앗간, 옥수수 농장, 선박 건조장 풍경을 담아냈습니다. 당시 그림은 기록적인 역할도 담당하기 때문에 그의 그림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19세기 영국 작은 마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터너와는 달리 방앗간, 댐, 버드나무, 오래된 썩은 판자, 끈적끈적한 기둥, 벽돌 세공에서 물이 새는 소리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거친 자연과 폐허에서 낭만을 찾던 유행에서 동떨어졌어도 주눅 들지 않았고요.이런 유행을 허세라고 여겼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서른아홉 살 이전에는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명성과 재정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어도 컨스터블에겐 사랑하는 영국의 풍경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의 작품 <플랫포드 밀 근처에서의 배 만들기 (Boat-building near Flatford Mill),1815>입니다. 컨스터블은 보통 야외에서 스케치를 한 다음 그 스케치를 토대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후대의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전적으로 야외에서 작업이 시작되고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처음부터 완성까지 야외에서 그려진 그림이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영향을 받은 , 인상파로 치면 '외광파'에 속하는 수련 연작의 '모네'처럼말이죠.

 

 

첫인상은 오늘날 자동차 정비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수리하기 쉽도록 근처 강둑에 설치를 해놓았네요. 배의 보이지 않는 아랫부분을 보아야 하니 땅을 최대한 깊이 파 놓은 것 같습니다. 뭔가를 손질하느라 골몰한 남성이 앉아 있습니다. 사람의 사이즈가 작아 보이는 걸 보면 배의 크기가 무척 큰 가 봅니다. 주변에 널브러진 연장들 , 불에 올려놓은 커다란 팟에 연기가 나는 걸 보니 맛있는 점심이 끓고 있나 봅니다. 근처 다른 일로 바쁜 남성 한 분도 보이네요. 오른쪽으로 자세히 보니 아빠 따라온 듯한 여자아이도 보이고 웅크린 모습의 보터콜리처럼 보이는 개도 보이네요. 

 

 

 

 

 

 

 

 

 

 

 

오늘날의 큰 악습은 진실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하려는 시도인 예술적 기교이다.

-존 컨스터블-

 

 

 

 

 

 

당시 풍경화를 그리던 화가들 대부분이 장엄하고 웅장한 풍경을 찾아서 광범한 지역을 여행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그런 유행과  달리 컨스터블은 한 번도 영국 밖으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 컨스터블에게 그러한 풍경은 별로 호소력을 갖지 못했고요.  오히려 그의 고향인 서퍽의 스투어 계곡(Stour Valley)의 평온하고 정감 있는 풍경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영국의 곡창지대라고 불리는 이곳은 1년 내내 같은 날씨를 찾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날씨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빛이나 바람이 시시각각 변하는 효과와 이슬 맺힌 아침 풍경 등의 풍부한 소재들을 관찰하기에 용이했고요. 이런 주변환경으로 인해 컨스터블이 풍경화를 계속 그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 일 것 같습니다. 

 

 

그는 고향 서퍽 지방의 풍경을 집중적으로 화폭에 옮기면서, 야외에서 유화물감으로 스케치를 하거나, 광선과 대기의 효과를 보다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 다양한 색채들을 실험했습니다. 덕분에 객관적이고 정확한 관찰을 할 수 있었고 가능한 자신이 본 진실하고 객관적인 풍경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시골의 전경과 그곳 사람들을 생생하게 담아내면서도 그림 속에 담긴 농경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동정하거나 의미짓지 않고 그저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구름>,1822/Google Arts & Culture

 

 

 

 

나는 스투어 강 둑에 놓여 있는 모든 것들을
나의 조심성 없었던 소년 시절과 결부짓는다.
그 장면들은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찰한 자연을 세밀한 드로잉과 수채화로 연습하던 그가 평생을 이토록 영국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낸 이유는 고향에 대한 큰 애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토박이답게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몸에 깊이 스며든 농촌을 아름답게 표현하며 세상에 알리려 합니다. 항상  집 근처 야외에서 작업을 한 것에서 고향에 대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구름과 대기와 빛에 변화하는 자연을 직접 탐구하며 소박한 시골 정경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 존 컨스터블은 풍경화 장르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유럽 전역의 미술에 영향을 끼쳐서 풍경화의 혁명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정작 영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요. 

 

 

이 구름 그림은 '밝음'과 '어둠'의 불연속적인 변화를 포착한 작품입니다. 흰색이 점점 변해 회색이 되고, 그 위로 깊은 푸른빛 음영이 덧씌워집니다. 컨스터블은 1821년에서 1822년 사이 직접 야외로 나가 하늘의 구름이 보여주는 변화무쌍하고 미묘한 변화를 그린 수백 점의 유화 스케치를 제작했습니다. 컨스터블은 나중에 이 작업을 '하늘 관찰하기(Skying)'라고 이름 붙이지요. 그림 뒷면에 계절적인 차이. 그림을 그린 시각, 바람의 방향, 그 밖의 날씨 조건 등 을 메모해 놓았는데, 기상 현상에 대한 그의 과학적인 관심의 소산이었습니다. 그가 지금 태어났다면 기상관측하는 아나운서 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그 무엇도 컨스터블에게 자연보다 더 인상적일 수는 없었으며, 그의 구름 연구 (Cloud Studies)는 자연이 가장 단순한 형태를 가지고 우리에게 얼마나 크고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썼습니다.  컨스터블은 그림이란 감정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맥락에서 컨스터블의 구름 연구는 이런 생각이 확실히 드러난 그림이지요. 풍경을 그릴 때 그는 정서적이고 시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관찰도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컨스터블의 아내 마리아 빅넬(Maria Bicknell, Mrs John Constable),1816/wikipedia

 

 

 

<Golding Constable's Flower Garden>/ArtHistory Reference

 

 

컨스터블의 아내 마리아 빅넬입니다. 아름답지요. 컨스터블은 1809년 그녀가 12살이었을 때 처음 만났던 마리아 빅넬(Maria Bicknell)에게 청혼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할아버지는 컨스터블 가문이 사회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해서,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합니다. 마리아에게 상속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말이죠. 한정된 수입으로 아내와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던 이 커플은 비밀 서신을 계속 주고받습니다.

 

 

 

1816년 컨스터블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있게 됩니다. 컨스터블의 아버지 존 시니어(John Senior)는 자녀들을 위한 재산을 남겼습니다. 세 자매와 형, 둘째 컨스터블 , 그리고 막내가 그들입니다. 형은 토지 관리인으로 막내 동생 아브람(Abram)은 가족 전체의 이익을 위해 계속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컨스터블이 부유해진 것은 아니지만, 결혼에 필요한 재정적 안정을 가져오게 됩니다.

 

 

드디어 이 커플은 런던 필즈(Fields)의 세인트 마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둘러본 뒤 도싯주의 오스밍턴(Osmington)에 있는 피셔 주교를 찾아가 그의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을 보냈고요. 존 피셔(John Fisher) 주교는 Essex 지역 제분소가 있던 랭함교회 목사(Langham Church)로 있을 때 첫 인연이 있었던 분이시죠. 컨스터블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한 명이기도 하고요. 이 여행에서 잉글랜드 남서부 해안 도시 브라이튼(Brighton)과 웨이머스(Weymouth)의 바다를 스케치하게 됩니다. 이 여행은 컨스터블이 더 자유로운 붓놀림을 채택하고, 특히 하늘과 바다에 대한 표현에 보다 큰 감정적 강렬함을 선보이는 실험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The Cottage in a Corngield>1817/Art UK

 

 

 

https://smarthistory.org/john-constable-view-on-the-stour-near-dedham/

 

» John Constable, View on the Stour near Dedham

John Constable, View on the Stour near Dedham, 1822, oil on canvas, 51 x 74″ (The Huntington Library, Art Collections, and Botanical Gardens, San Marino, CA) Smarthistory images for teaching and learning: [flickr_tags user_id=”82032880@N00″ tags=”s

smarthistory.org

 

 

 

 

<흰색 말>,1918-1819/ARTLECTURE

 

 

 

 

 

1819년 아카데미 전시회부터 컨스터블은 야심 찬 시도를 선보입니다. 그림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늘려 캔버스의 가로길이가 6피트(182.88cm)나 되는 대형 연작 제작에 착수한 거죠. 이른바 6피트 캔버스(six-footers) 그림들로 스투어 강(River Stour) 주변의 풍경과 농민들의 일상을 그려냅니다.

 

 

 

당시로서 6피트라는 사이즈는 아주 드문 사이즈였습니다. 이런 큰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40세가 다 되었을 즈음이고요. 이 시기는 그의 작품 활동에 큰 전환점이 됩니다. 일단 크게 그려진 그림이니 눈에 확 들어오겠지요. 실제로 자신의 작품이 왕립 아카데미에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조금 더 눈에 띄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그 자신의 풍경화가 좀 더 고전적인 회화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방법으로 그림의 크기를 키웠고요. 나폴레옹 시대 신고전주의 그림들이 모두 큼직했거든요.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을 상상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시리즈로 제작된 6피트 사이즈의 그림들은 모두 스트르 강 인근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로 작업한 대형 캔버스 작품이 바로 <스투어 가의 풍경>이라는 제목이 붙기도 했던 <흰색 말>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존 컨스터블이 화가가 된 이래에 가장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 호평에 힘을 입어 로열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하고요. 이 작품 덕에  컨스터블의 오랜 소원이 이루어졌네요.

 

 

 

 

슈트를 강 남쪽 둑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좌측 아래에 있는 배에는 백마가 타고 있는 걸로 보아 말을 실어 나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 같습니다. 겁 많은 말을 옮기려니 힘이 좀 들겠습니다. 오른쪽 좀 떨어진 곳에 강물을 마시고 있는 소들이 보입니다.  수문과 초막을 비롯해 뒤쪽으로는 마을의 모습이 보이고요. 하늘 전반에 뭉게뭉게 떠있는 짙은 구름들과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의 표현이 생생합니다. 자연을 관찰하고 발견해서 얻은 색조를 기준으로 색을 사용했습니다. 물빛의 반짝거림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순수한 흰색으로 하이라이트를 올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고요.

 

 

 

 

화가들에게는 보통 평생 한 작품
또는 둘, 어쩌면 세 작품 정도 특별히
애착을 갖게 되는 작품이 있게 마련인데
내 경우에는 이 그림이 그렇다네

- 존 피셔에게 보내는 편지 중-

 

 

 

 

 

 

 

<흰색 말>은 존 컨스터블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을 존 피셔(주교님 조카)라는 친구가 구매하게 되는데 이 사람은 컨스터블의 초창기 활동에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입니다. 전해지는 설에 의하면 컨스터블이 이 작품으로 얻게 되었던 호평들과 작품을 팔아서 생긴 100기니 덕분에   화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후에  그림을 사갔던 존 피셔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자 그를 돕기 위해 다시 그림을 사 갔다고 합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이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나는 작업을 할 때, 6피트의 캔버스
앞에 서지 않은 나를 상상할 수 없네
-존 컨스터블-

 

 

 

 

 

 

<스트랫퍼드의 종이공장,1820/브릿지 경제

 

 

 

이 당시 풍경화는 신화 속 이야기나 역사적인 사건을 담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존 컨스터블이 영향을 받았던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의 <성 우르술라의 출항>도 종교적 테마를 담고 있습니다. 성인들의 일생을 담은 13세기 책 <황금전설> 속 일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거든요. 컨스터블은 이런 대가들의 작품을 공부하다가, 그림을 보고 그리는 것은'간접적 진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죠. 그러면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풍경으로 눈을 돌립니다. 신화 속, 책 속 저 먼 곳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땅 영국의 자연을 그리기 시작한 거죠.

 

 

컨스터블의 작품 <스티랫퍼드의 종이공장>은 그가 태어난 지역 공장의 풍경을 소박하게 담고 있습니다. 컨스터블은 자신이 나고 자란 서포크 지역을 소재로 많은 풍경화를 그렸죠. 그런데 그가 작업을 했던 무렵은 프랑스에서 바르비종 예술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세월을 낚고 있는 듯한 할아버지의 여유 있는 낚시질, 뭔가 입질을 했는지 골똘한 두 아이의 모습, 나룻배에 여인을 태우려는 듯한 모습 등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자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모습입니다. 

 

 

 

 

 

 

 

<건초수레(The Hay Wain)>,1821/wikipedia

 

 

 

 

 

컨스터블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건초수레'입니다. 영국 BBC방송에서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1위 풍경이라고 해요. 그것도 해마다  상위권 순위를 놓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산업혁명이 일찍 시작되어 영국의 농촌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렸어요. 이제 가고 싶어도 돌아갈 그림 속 풍경을 가진 영국 농촌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이유인 것 같아요. 

 

 

로열 아카데미 전시 당시 원래 제목이 '풍경, 정오(Noon)였어요. 영국의 여름 시골 풍경을 그린 이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는 조용하고 충만함입니다.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주변의 배경에 완전히 녹아들어 일체감을 주고요. 개인적으로 구름의 움직임을 참 잘 잡아낸 그림 같아요.

 

 

 

배경은 영국의 서포크 지방 스투어 강변의 한 평범한 농가 마을 데덤입니다. 그가 나서 자란 곳이죠. 무성하게 우거진 초록빛 배경에 대기와 빛이 변화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원경에서는 농부들이 목초지에서 건초를 베어내고 있습니다. 전경 얕은 물가를 지나가는 마차가 바로 목초지로 향하는 길이고요. 마차 위 소년은 스패니얼 종으로 보이는 강아지를 부르고 있고요. 조각배를 탄 낚시꾼이 일어서서 습지를 낚싯대로  드리우고 있네요. 왼쪽 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지붕과 굴뚝, 그리고 마차 마구의 붉은색이 초록과 보색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컨스터블이 활동하 던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입니다. 경제적으로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였지만 사회전체적으로 보수적이었죠. 그래서 라파엘 이전 시대로 , 즉 200년 뒤로 후퇴하는 그림스타일이 유행을 하게 되었어요. 라파엘 전파라고 합니다. 이런 그림들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역사도, 신화도 아닌 시골 풍경이 당시 영국인들의 눈에는 촌스럽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컨스터블은 영국에서 평생 단 20점의 그림만을 팔라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오히려 프랑스에서 단 몇 년 만에 20점도 넘는 그림을 팔았는데도 말이죠.

 

 

<건초 수레>는 후일 영국계 프랑스인 딜러가 구매해 1824년 파리 살롱에 전시했습니다. 당시로선 이례적인 크기 (130*185cm)의 풍경화였죠. 영국 왕립 아카데미 전시에서 첫선을 보였으나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는 영국의 시골 풍경이라 생각했던 거죠. 

 

 

 

 샤를 10세 프랑스 국왕이 주는 금메달을 수상하며 그림의 값어치가 상승하게 됩니다.

한 비평가는  이 작품을 보고 "이슬이 바닥에 구르는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농촌의 이런 사실적인 세부 묘사와 색채 처리는 밀레의 바르비종파에 영향을 줍니다. 또한 붓질의 자유스러움, 표현의 생동감, 특히 자연에 나가 직접 유화로 스케치하는 방법은 프랑스의 젊은 미술학도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광선과 바람의 효과, 이슬이 맺힌 아침 풍경 등 과학적 관찰에 의한 자연의 신선함을 현장에서 포착하려는 태도로 인해 그는 인상주의의 직접적인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터너와 함께 그의 풍경화는 보불전쟁(1870-1871년 프로이세-프랑스 간 전쟁)을 피해 영국에 머무르던 모네, 피사로, 시슬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프랑스 인상주의의 탄생을 도왔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이때부터 세계 미술사의 주도권을 완전히 쥐게 됩니다. 19세기 초 영국의 풍경화는 프랑스보다 훨씬 발전한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죠.

 

 

 

 

 

 

 

 

 

 

 

나는 풍경 위에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그 일반적인 효과뿐 아니라
특정한 어떤 날, 어떤 시간, 그리고 햇빛, 어둠 등을 기록한다.
또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
영원불변하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부터 포착되는
짧은 일순간을 표현하고자 한다.
-<명화의 재발견>-





헤이들리 성(Hedleigh Castle,1829/wikipedia



 

 

 

1828년 3월 장인어른이 돌아가셨고, 막대한 재산을 아내가 물려받아 재정적인 걱정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 일은 알 수가 없죠. 같은 해 11월 컨스터블의 아내 마리아 빅넬이 41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합니다. 당시 아내는 7번째 아이의 출산으로 쇠약해진 상태였고 , 일곱 명의 자녀를  고스란히 남기고 사망합니다. 컨스터블은 아내의 사망 이후 그 큰 슬픔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했고요. 이따금씩 간헐적으로 그는 우울증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의 마음 상태는 마치 헤이들리 캐슬 같은 그림 속의 폭풍이 곧 몰아칠 것 같은 하늘 같았고요. 그림 속  거친 붓터치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무지개가 있는 햄스테드 히스&nbsp; Hampsteas Heath with a Rainbow,1836/wikipedia

 

 

 

1830년대에 오면 컨스터블의 그림은 더욱더 표현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컨스터블은 진중한 자연주의 (사실주의)적 묘사를 목표로 하는 그림으로부터 벗어나 점차 빛과 대기의 움직임의 순간을 직접 포착하거나, 구름이 떼 지어 흘러가는 하늘, 녹음 짙은 숲, 강물이나 개울 등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컨스터블은 특히 이런 표현적 효과를 강하게 발휘할 수 있는 매체인 수채화를 이전보다 훨씬 더 자주 사용했습니다. 과장을 싫어하고 조용했던 그가 본 주변 풍경들입니다.

 

 

컨스터블이 죽기 1년 전 작품입니다. 가까이 어린 말  두 마리의 움직임, 하늘 위를 낮게 날고 있는 새들의 무리, 목을 축이러 내려온 소들 모두 일상을 살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비 온 뒤에 지상으로 내려앉은 무지개의 모습, 시시각각 변화하는 어디 하나 닮은 구석 없어 보이는 구름에 진심으었 던 집돌이 화가 컨스터블, 그가 그려낸  일상 속 풍경이 하늘 한 번 올려다볼 일 없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멈추고, 하늘 한 번 올라다 봐!'하고 넌지시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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