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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

36세 요절

유대인

잔 에뷔테른

콘스탄틴 브랑쿠시

2. 생애

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시집 <산호림> 한성도서, 1938-

 

 

'사슴과 5월과 고독의 시인'으로 불리는 노천명의 대표적 작품이다. 현실에 타협하지 못하고 결혼도 않고 고독과 빈궁으로 일생을 마친 시인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가늘고 긴 얼굴, 가녀린 목, 아몬드 형태의 눈으로 인체를 그리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Clemente Modigliani, 1884,7,12-1920,1,24)의 작품을 보면 떠오르는 시다.

 

 

 

 

 

1884년 이탈리아 왕국 토스카나주 리보르노에 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해변에 위치한 이 지역은 르네상스가 태동하는데 큰 기여를 한 메디치 가문에 의해 이상적인 휴양도시로 계획된 곳이다. 그의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의 혈통을 어어받은 마르세유의 명문가 출신으로 높은 지성과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직접 시를 번역하거나 서평을 써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다행히 모딜리아니의 출생으로 인해 집이 망하는 걸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델리아니 출생 당시, 그의 아버지는 사업실패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집안 행정관이 그이 물건을 압수하기 위해 집에 들어갔을 때 모딜리아니의 어머니는 출산 중인 상황이었다. 유대법에 '임신한 여자나 갓 태어난 아기 엄마의 침대는  뺏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있어 값비싼 물건을 어머니 곁에 두어 재산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늑막염, 폐결핵, 폐렴등 병치레가 잦아 그는 정규교육을 받기 힘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인 아들을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이탈리아 최고의 미술선생인 풍경화가  굴리엘모 미켈리(Guglielmo Micheli)의 아틀리에에 데리고 가 미술공부를 시키게 된다. 하지만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진행되어 공부를 중단하고 이탈리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요양을 해야 했다.  이후 1902년  피렌체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조반니 파토리 (Giovanni Fattori)에게  회화를 배웠다. 당시 피렌체에는 상징주의 미학이 유행했고, 모딜리아니는 이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이듬해 베네치아로 가서 1905년까지 학업을 계속 이어간다.

 

 

 

 

22세 모딜리아니는 1906년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인 파리의 몽마르크르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인체소묘와 유화를 공부하는 한편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 앙리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폴 세잔(Paul Cezanne) 등에 영향을 받았다.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사는 몽마르트르 지역 작은 스튜디오에서 1년 동안 생활하며 말쑥했던 외모는 홈리스처럼 초라해졌고 생활이 어려워져 알코올과 마약에 손을 데게 된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고 하루에 100여 장의 그림을 그릴 정도로 엄청난 작업을 소화해 낸다.

 

 

 

 

<The Cellist>, 1909, 표현주의 스타일 초상화

 

 

세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비 정상적으로 길게 그려진 첼로 연주자의 팔은 훗날 모딜리아니의 회화 스타일의 특징 중 하나가 되는 '길쭉하게 그리는' 스타일의 시작을 암시한다. 그림의  모델인 첼로 연주자는 '팔귀에르'작업실을 가지고 있던 당시 그곳에 살았던 가난한 첼로 연주자라고 한다. 첼로와 혼연 일체가 된 첼리스트의 모습이 사뭇 인상적이다. 

 

 

 

 

<여자의 머리>, 1912, 석회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20세기 당시 예술계가 아방가르드로 변화하는 시기에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화풍을 정립하고 싶어 했다. 이에 반해 모딜리아니는 많은 예술가와 친분을 두텁게 쌓으며 영향을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카테고리에 소속되길 거부한다. 그는 어릴 때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독서량이 풍부한 화가 중 한 명인데 특히 니체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아  반항과 무질서를 통해 진정한 창조력을 발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 덕택으로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르누아르, 피카소 , 고갱 , 세잔, 마티스 등과 같은 예술사조에 한 획을 그은 화가들을 만났음에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특한 그만의 작품세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피카소 같은 화가에 가려  그의 그림은 고작 $2-4, 드로잉은 4센트에 팔리는 생계형 화가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유독 화가들 중 위조작품이 많은 화가가 모딜리아니이다.  생계유지를 위해 아무에게나 팔다 보니 그의 사후 어떤 작품이 진품인지  알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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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여인상 기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iani),1913

 

 

 

1909년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로 이사하여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와 교류하며 조각에 매료됩니다. 친구이자 이웃인 브랑쿠시에게 영향을 받아 1909부터 1914년까지 약 5년 정도 조각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이국적인 환경에서 살아온 그의 배경 때문에 그가 아프리카를 포함한 부족미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생산하게 된다. 그는 1914년까지  30 여점에 이르는 특유의 길쭉한 석조 두상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여러 질환으로 인해 허약했던 그의 몸은 조각에서 나오는 돌먼지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조각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조각작품 역시 당시 예술계에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렇지만 조각 작업 이후에 오히려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명확해졌다.  모딜리아니가 조각작업을 함으로써 형태를 단순하하고, 가능한 한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물체의 정수를  보여주는 데 조각 활동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조각작업의 영향으로 그의 화풍은 단순하고 비정상적이지만 개성적인 작품이 탄생하게 됐다.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in a large hat>, 1918

 

 

 

<누워있는 누드>,1917-1918

 

 

 

 

시인 겸 화상인 폴란드 화상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권유를 받아들여 회화로 복구한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을 조망하는 순수한 형상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재료, 소재)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은 초상화와 누드화가 주를 이루었으며,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여성상은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했다. 

 

 

 

 

1917년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모딜리아니는 프랑스에서 활약한 우크라이나계 조각가 하나 오를 로프의 소개로 19살의 화가 지망생 잔 에 뷰테린(Jeanne Hebuterne)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잔은 로마 가톨릭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젊은 미술학도였지만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모딜리아니를 돌본다.  그의 작품은 동료 미술가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미술 시장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늘 변두리에 있었다. 같은 해 12월 모딜리아니는 베르트 베이유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통행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내건 두 장의 누드화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바로 철거되고 전시회도 일찍 문을 닫게 된다.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가 이렇게 어이없게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1918년 모딜리아니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열정과 헌신만은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 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잔의 초상이 주를 이루는데 단순미가 더욱 강조되는 가운데 전에 없던 서정미를 엿볼 수 있다. 모딜리아니는 잠시 남프랑스 니스에서 요양하면서 병세가 호전되었으며 , 이곳에서  딸 잔 모딜리아니(Jeanne Modigliani)가 태어난다. 1919, 5월 파리로 돌아와 다시 예술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하며 잔느 에뷔테른의 초상화 15점을 남긴다.

 

 

 

 

'이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파리 페르 라세즈 묘비명-

 

 

 

 

1920년 파리로 돌아왔지만 모딜리아니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핵 수막염'으로 의사조차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침대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의 나이 36세 , 결국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난다.  그의 사망 후  장례식 문제로 충돌하고 격분한 잔느는 다음날 부모의 아파트 5층에서 투신 자살하고 만다.  당시 8개월의 뱃속아이는 세상을 보지 못한 채 함께 세상을 떠나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고, 10년 뒤 잔의 가족들은 잔을 모딜리아니 곁에 묻어주게 된다. 

 

 

"꿈을 이루는 것은 의무다."

 

 

 

 

누구보다 성공한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가난과 질병으로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다행히 그녀의 첫째 아이 잔(Jeanne Modigliani,1918-1984)은  훗날 성장해 미술사가로서 그녀의 아버지의 작품을 토대로 한 <모딜리아니:인간과 미신>이라는 전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3. 나가기

 

모딜리아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이며, 예술사조에서 여러 대가들의 형식을 이을 수 있는 가교역할을 하는 중요한 화가임은 틀림없다. 그가 병마와 가난에 싸우며 불우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말이다.  얼마 전 그의 작품은 2018년 소더비 옥션에서 역대 최고가를 경신한 기록을 세우며 현대의 예술계에서도 가장 높은 작업적 평가를 받고 있다.  입체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사조가 유행하던 시절 어느 노선도 따르지 않았고 미술사에서 어느 쪽으로 분류될 수 없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완성했던 모딜리아니! 알코올과 마약, 가난과 병마에 시달려도 순수하고 깊은 감성을 끌어낸 그의 생전 누리지 못한 호사를 영감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주고 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구글 아트 앤 컬처. 위키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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