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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200년 가까이 완전히 잊혔졌던 화가입니다. 그러다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들과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 당시 시대상황,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림으로 그리는 장르화에 주목하면서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재조명받기 시작합니다.  페르메이르를 빼놓고 17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을 얘기할 수 없지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더 많이 알려져 있고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Johannes Vermeer,1632-1675)의 시간을 따라가 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0BlJIV_29U

 

 

 

 

페르메르만큼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려운 거장도 드뭅니다. 제대로 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죠. 출생 신고서나 상속 관련 기록들 딱딱한 공문서가 전부입니다.1632년 네덜란드 중서부의 도시 델프트의 서민 가정 출신입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막바지에 치달았을 때 태어났죠.

 

 

유럽이 종교개혁 이후 신. 구교와의 종교를 내세운 힘겨루기로  어수선했습니다. 대부분의 북유럽지역이 개신교를 받아들였고 네덜란드 역시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투쟁을 벌여왔습니다. 1648(16살) 네덜란드가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합니다. 중개무역을 통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던 상권이 북유럽의 네덜란드로 부가 이동하기 시작하고요.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 문화적으로 상당히 성공한 시기인  '황금시대'가 시작됩니다.

 

 

1653년 21살 때 델프트의 화가 길드에 가입하면서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같은해 '운명의 여인'카타리나 포르네스와 만나 결혼하고요.  돈 많은  가톨릭 집안의 딸과 가진 게 하나도 없는 개신교 집안 아들이 만나 살림을 시작합니다. 이 결혼을 반대했던 장모님도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위 페르메르를 아낍니다. 후에 장모님이 든든한 후원자로 나서지요. 장모집 2층 작은 방 하나를 화실로 꾸며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갑니다. 

 

 

 

페르메르와 카타리나는 결혼 후 22년동안 아이를 15명이나 낳았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평균적인 가정에서 아이를 3-4명 낳았던 걸 생각해 보면 정말 엄청난 다산이지요. 페르메르는 아내와 아이들을 정말로 사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페르메르가 남긴 작품은 35점 안팎입니다. 동시대에 살았던 렘브란트의 작품에 비하면 너무 적지요. 살아남은 11명의 자녀를 부양하느라 그림도 그리지만 수입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부업으로 여관도 운영하고 그 여관 벽에 그림도 걸어 미술상 역할도 하면서 생계유지에 허덕입니다. 작품 수가 적은 이유도 본업, 부업, 그리고 육아까지 겸했던  충분하지 못한  작업시간도 한몫했을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등 다른 화가들이 신화나 종교를 소재로 자주 그림을 그렸던 것과 대조적으로 그의 작품 주제 대부분은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베르메르는 실제 생활과 자기 작품을 철저히 분리했습니다. 베르메르의 집은 항상 엉망이었고 엄청나게 시끄러웠습니다. 애가 열 명이 넘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가 죽은 뒤 집을 찾아온 빚쟁이들은 "요람, 침대, 의자가 집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베르메르의 그림에 나오는 집들은 모두 완벽하게 정리돼 있고, 조용합니다. 그림을 사 갈 만한 부유한 고객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서일 테지요. 아니면 어지러운 마음을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 안에서 승화한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성 프라세디스 Saint Praxedic>,1655/wikipedia

 

 

 

 

페르메이르가 이탈리아 화가의 그림을 따라 그린 작품입니다. 20-30대의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스승이 누구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고요. 추측만 할 뿐이죠. 원래는 작품에 십자가를 더해 변화를 꾀했는데, 엑스레이 연구에 의하면 완성 후에 덧그렸을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이는 그림의 종교적 이미지 효과를 더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인물에 보다 강렬한 물리적 존재감을 부여하기 위해 원작보다 훨씬 고밀도로 색채를 강조했고요. 배경인 하늘에는 울트라 마린 물감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돈은 없지만 작품에 들어가는 재료는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파란색과 노란색이 자주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파란색은 청금석을 갈아 만든 울트라 마린이라는 안료를 사용합니다. 울트라 마린(바다를 건너왔다)이 안료는 엄청나게 구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청금석은 수입물품으로 아프가니스탄 이 있는 중동 지역에서 들어온 물건이라 금보다 더 비쌌다고 해요. 그래서 페르메이르는 이 안료를 구하기 위해 가족들에게 빚을 지게 할 정도로 말이죠.

 

 

2014년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서 약 620만 파운드(약 125억 원)에 낙찰된 바 있습니다. 이 작품은 폴란드의 유명 컬렉터인 바바라 피아세카 존슨 소장품으로 1969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중산층 가정의 일상생활 모습을 주로 다룬 페르메이르 작품으로는 상당히 드문 종교화입니다. 그의 알려진 작품들 가운데 가장 초기작에 해당하고요. 화가가 1653년 결혼과 동시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작품은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미 안료, 색채 등에 이해도가 높았음을 보여줍니다.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 /한국경제

 

 

 

베르메르의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입니다. 왼쪽으로 열린 창문이 보입니다. 열린 창문에  반투명으로 반사된 소녀의 얼굴이 보이고요. 이 정도면 페르메이르의 관찰력에 엄지 척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창을 통해 들어온 아늑한 빛이 소녀의 이마, 머리, 둥근 어깨를 거쳐 편지를 읽고 있는 손에 잠시 머무르는 것 같습니다. 황록색 커튼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 들고요. 벽에 큐피드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애편지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림 원본 위에 누군가 덧칠한 부분이 발견되었고 전문가들의 의견수렴을 통해  2017년 독일 드레스덴 복원팀에 의해 세상에 빛을 본 큐피드의 모습입니다. 직물이 놓인 곳, 벽 쪽은 다소 어둡게 처리했습니다. 소녀가 서있는 곳은 빛을 통해 환한 모습으로 표현해 놓았고요. 충분히 넓지 않은 공간을 빛의 레이어를 두며 깊이감을 더 했습니다. 

 

 

 

 

 

 

<The Milkmaid>,1657-1658/wikipedia

 

 

페르메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일인데도 고요함과 숭고함이 느껴집니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어디선가 쪼르륵 우유 따르는 소리가 들려올 듯하고요. 일상적인 순간을 어찌 그리 잘 잡아냈는지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마치 중요한 아침 의식을 치르듯 흘러나오는 우유의 흰 빛과 따르는 손등에 떨어진 빛이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집중한 하녀의 얼굴과 옷의 색채 표현은 물론이고 왼쪽 벽은 회색으로, 오른쪽 벽은 흰색으로 칠한 명암 표현도 절묘합니다. 오른쪽 벽에 드문드문 뚫린 못자국 보이시나요. 바닥에 있는 데울 때 썼을 법한 작은 이동식 난로도 보이고요. 

 

 

 

 

엄청나게 비쌌던 청금석 갈아 만든 블루색을 하녀의 앞치마에 아낌없이 썼습니다. 1672년 프랑스가 네덜란드 공화국을 침략해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이면서 (프랑스-네덜란드전쟁) 심각한 경기 침체가 네덜란드를 강타한 뒤였습니다. 제일 먼저 미술 시장이 얼어붙어 그림을 팔 길이 막혔을 때도 페르메르는 고집합니다. 당시 유명화가들조차 붓을 꺾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며 힘들었을 때도 말이죠. 전형적인 장인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재료만큼은 아끼지 않았습니다. 

 

 

 

 

<델프트 풍경>,1660-1661/ARTPAGE

 

 

아침의 햇빛이 비치는 강변 풍경이 마치 사진처럼 묘사돼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페르메르가 세례 받았던 교회 건물도 보입니다. 그림과 달리 당시 이곳은 아침부터 들락거리는 배와 상인들로 매우 붐비고 시끄러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림에는 전혀 이런 사실이 드러나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베르메르는 고요를 사랑하고 갈망했었나 봅니다.

 

 

프랑스 위대한 문학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 그림을 매우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 그림을 본 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봤다"라고 전했습니다. 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인물은 그림 속 이 부분을 보며 숨을 거둡니다. 어두운 건물들 가운데 햇빛을 받아 홀로 빛나는 작은 노란색 벽면을 묘사한 부분 말입니다. 오른쪽 부분에 있으니 한 번 찾아보세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Meisje met de parel>,1665/나무위키

 

 

 

북부의 모나리자로 불립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버금가는 신비로움으로 인해 문학, 미술, 영화 등 여러 분야에 끝없는 영감을 제공하는 작품이고요. 페르메이르의 대표작 중 한 점입니다. 소설, 영화, 끊임없는 과학적 연구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많은 이들이 이 그림에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실존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 매혹적인 눈망울과 오묘한 표정 등 신비로움과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어찌나 호기심을 유발하는지, 이 작품을 주제로 여러 소설이 쓰였을 정도입니다. 미국 유명 배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되었고요. 영국의 인기 낙서화가 뱅크시도 이 작품을 모티브로 벽화를 그렸습니다.

 

 

 

 

작품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과학적 분석도 꾸준히 이뤄져 왔습니다. 특히, 최근의 한 연구는 엑스레이, 디지털 현미경, 물감 표본 분석 같은 다양한 기술을 동원, 안료의 성분과 생산지는 물론, 세월에 의해 지워진 부분들까지 모두 밝혀냈습니다. 심지어 화가가 어떤 순서로 그림을 그렸는지 알아내는 정도에 이르렀고요. 흥미로운 사실은 원래 바탕이 검은색이 아니라 녹색 커튼이었다는 점과 속눈썹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일부 미술사학자들이 손눈썹이 없는 점을 들어 실제 인물이 아니라 이상적인 인물을 그린 것이라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터번을 두른 이 소녀가 누구인지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파란색의  터번을 두른 소녀의 복장은  당시 네덜란드의 옷이 아닙니다. 터번은 아랍 쪽과 터키에서 자주 입던 옷이죠. 이를 통해 그 당시 네덜란드가 중계무역으로 많이 번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장르화의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당시 옷차림으로 변화하는  생활양식을 읽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가  43세에 죽었을 때  그의 스타일과 천재성을 상징하는 색채와 빛의 특정 효과, 안료의 정확한 혼합과 탁월한 배경 처리 기술은 그 누구에게도 전수되지 못해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회화의 기술 ,알레고리  The Art of Painting>,1666-1668/wikipedia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의 특징을 잘 소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바로 카메라로 찍은 듯한 완벽한 거리 감과 빛, 그리고 구도입니다. 사실 그는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기술을 통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일종의 원시적인 카메라로, 당시에는 혁신적인 첨단 장치였습니다. 이렇게 구도를 잡은 다음에도 그림을 굉장히 많이 고쳤습니다. 엑스레이 분석에 따르면 페르메르는 등장인물의 위치와 실내 인테리어 등을 자주 큰 폭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덕분에 페르메르의 그림에서는 원근법과 명암, 구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나무위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알레고리 작품입니다. 알레고리란 그림에 나오는 이미지에 하나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모델은 머리에 월계수 화관을 쓰고, 왼손에는 트럼펫을 , 오른쪽에는 책을 든 채 눈을 아래로 깔고 있습니다.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이 눈길을 끌고요. 월계관은 승리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 트럼펫은 명성을 뜻합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은 헤르도투스 또는 투키디데스의 책으로 , 역사를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모델은 화가의 승리를 가져다줄 '역사의 여신'즉 클리오(Clio)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물론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많습니다.) 가난에 굴하지 않고 베르메르는 믿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가 기어이 자신을 승리자로 만들어 영예롭게 할 것임을 말입니다. <2023년 암스테르담 페르메르 전시회>에 엄청난 인원이 몰리며 표가 매진된 사례를 보면 페르메르가 그린 월계수의 의미처럼 승리를 한 듯도 싶습니다. 

 

 

 

 중앙 오른쪽에 등을 돌린 채 작업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페르메이르 자신이죠. 당시의 최신 유행에 따라 상의는 절개된 의상을 걸쳤습니다. 하의는 붉은색 내의를 받쳐 입었고요. 화가 주변에는 유화물감이나 팔레트 등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도구가 없습니다. 이는 그림이 화가의 상상 속 장면을 그렸다는 걸 알려주는 장치입니다. 사실 베르메르는 이렇게 비싼 옷을 입고 좋은 작업실에서 일할만큼 돈이 많지 않았습니다. 작품 분위기는 고요하지만, 자식을 10명 넘게 뒀던 페르메르의 집에는 아기 울음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거든요. 15명의 아이중 11자녀가 살아남았어요. 그 녀석들 먹여 살리느라 아버지 페르메르는 스트레스가 가득입니다. 그래도 그림 속 페르메이르는 자신을 멋을 좀 아는 신사로 연출해 놓았습니다. 

 

 

 

 

 

 

왼쪽에 늘어진 커튼, 그 아래쪽 의자 등에 어두운 색깔을 자연스럽게 모델로 이끄는 르푸수아(repoussoir) 기법을 썼습니다. 커튼으로 살짝 가려진 탁자 위에는 석고 마스크, 옷감 한 무더기, 책 하나, 가죽 조각들이 놓여 있습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적절히 활용하여 각각의 질감을 확실히 살리고 있습니다. 화가와 모델은 아주 선명한 반면에 이 사물들은 흐릿합니다. 어둠-창가 쪽으로부터 오는 빛-벽면의 어두움 이렇게 레이어를 주며 공간의 깊이감을 더합니다. 공간이 좁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바닥에는  대리석 타일이 깔려 있고, 줄무늬 천장이 그림 위쪽을 살짝 가로지르는 가운데, 황금색으로 빛나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습니다. 샹들리에는 아마도 화가의 고매한 예술 정신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상징성을 띠고 있는 작품입니다. 한 미술평론가는 "자연주의적 기법, 밝게 빛나는 공간, 복잡하지만 완벽하게 짜인 구성이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흠 없이 통합되어 있다"라고 격찬합니다. 처음에는 작업실을 방문하는 고객들한테 보여줄 작품으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화가가 가장 사랑했던 작품이 되었으며. 페르메이르는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이 작품을 평생 팔지 않았습니다. 

 

 

 

히틀러가 다른 그림들보다 유독 이 그림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독일 국민 예술전의 도록으로 이 작품을 사용했죠.  결국 패망에 가까워 지자 히틀러는 자신이 뺏은 미술품 500만 점을 여러 장소에 나눠 숨기라고 지시합니다. 그것을 모뉴먼츠 맨이라는 특수부대가 찾아서 돌아옵니다. 이를 통해 페르메이르는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A Young Woman Seated at the Virginals>,1670-1672/wikipedia

 

 

푸른 벨벳 의자에 앉은 젊은 여인이 버지널이라는 당대 유행하던 건반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하얀 공단 드레스 위에 노란 숄을 두른 그녀는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고요. 머리에는 빨강과 하얀색 리본 장식을 둘렀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당대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인물과 악기는 어김없이 왼쪽 벽을 향해 배치돼 있고요. 손바닥만 한 작은 작업실에서 그리다 보니 구성이 한정되어 보입니다. 제한된 구성이기는 해도 섬세하게 통일된 빛으로 인해 주변 장식 하나 없이도 공간과 깊이에 대한 분위기와 깊은 인상을 창조해 냈습니다.

 

 

 

 

이 작품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을 1904년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이아몬드 광산 재벌로 20세기 최고 컬렉터 중 한 사람인 알프레드 베이트가 자신의 소장품 책자를 발간하는 작업을 했지요. 그는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 미술관에 기증하기도 했는데, '버지널 앞에 앉은 젊은 여인'은 자신이 개인 소장했던 작품입니다. 그가 타계하면서 이 작품은 동생에게 넘겨졌고, 이후 동생이 자신의 아들에게 유산으로 남겼죠. 이 아들이 1960년 런던 화상에게 판매 의뢰한 것을 브뤼셀의 한 화상이 구매, 40년 넘게 소장했습니다. 화상이 2002년에 죽으면서 그의 유가족에 의해 경매에 나오게 된 작품입니다.

 

 

발견 이래 오랫동안 모작으로 여겨졌던 작품이기도 하고요. 안료 성분 분석 등 급격히 발전한 과학적 연구에 힘입어 진품으로 판명되는 행운을 얻은 작품입니다.  2004년 경매에서 소품임에도 불구하고 350억 원이라는 높은 가격에 낙찰됩니다.

 

 

 

 

<천문학자>,/ARTSBEE

 

 

 

책생 위에 놓인 물건은 지구본이 아니라 별자리를 표시한 천구본입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천구본을 거쳐 천문학자의 얼굴을 비추고 있습니다. 지식의 빛이 천구본을 통해 천문학자의 통찰로 들어오는 순간을 표현한 작품이지요. 앞에 놓인 직물천을 통해 보는 이들과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관람객 사이의 거리 다시 그림과 그림 안의 인물과의 거리 이런 식으로 말이죠. 사적인 공간을 더 강조하면서 깊이감을 준 연출법입니다.  왼쪽 창문을 통해 실내를 비쳐주는 감싸 안은 빛이 천구본의 둥근 부분, 책, 학자의 얼굴, 손등으로 부드럽게 떨어집니다. 뭔가를 찾아낸 듯 몰입하는 모습이 사뭇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  The allegory of faith>, 1670/그림닷컴

 

 

 

 

페르메르가 말년에 그린  <믿음의 알레고리>라는 작품입니다. 이전의 주제가 주로 중산층의 실내 모습을  그렸다면  말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완전히 다른 형태 그림입니다.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오른쪽에 않아 있는 여인입니다. 여인은 믿음을 의인화한 모습으로 믿음을 상징하는 흰색과 진리를 뜻하는 푸른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믿음의 증거 자세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있고요. 또한 그녀는 인간 세상의 욕망을 상징하는 지구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진리가 지상의 모든 세속적 욕망을 없애고, 진리가 재배할 것을 나타냅니다. 여인의 발 앞에는 인간의 원죄를 상징하는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나뒹굴고  있습니다. 악(뱀)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과 승리를 말합니다. 바로 뱀을 내리친 돌은 교회의 초석인 그리스도를 상징하고요. 악을 물리치고 세워질 하느님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이룩된 하느님의 세계는 여인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고 있는 천장 유리구 속에 담겨 있습니다. 작고 투명한 유리구는 세상 모든 것을을 비추고 담을 수 있기 때문이죠. 페르메르가 1675년 갑작스럽게 사망하기까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재정적으로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세속적인 가치와 신앙 사이에서 묵상을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 

 

 

 

프랑스와의 전쟁 동안
그는 자기 작품을 판매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지 못해 슬펐고요.
그는 좌절감에 빠져
갑자기 하루 이틀 만에
건강을 잃고 죽어버렸습니다.
빚 좀 깎아 주세요.

 

 

 

 

작품이 시장에 많이 나와서 활발하게 거래되어야 명성이 쌓이는데, 그리기만 하면 사던 사람이 바로 구입해 가는 바람에 인지도가 쌓일 틈이 없었습니다. 당시 경제 위기로 네덜란드를 떠나거나 파산하는 화가들이 많았습니다. 당장 미술시장부터 얼어붙으니까요.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니 선택지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생활고, 스트레스,  격무에 시달렸습니다. 네덜란드 황금 시기에 태어 난 43살의 천재 화가는 가장의 임무에 충실하려다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렸습니다. 그의 아내도 오래 살 지 못했고요. 남은 11명의 아이들은 어떻게 자랐는지 , 본인들이 페르메르라는 화가의 아이들로 잘 커 갔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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