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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네덜란드출신

<Piet & Mondrian> : 영화감독 라스 크라우메(Lars Kraume)의 단편영화

대기만성   

더스테일(De Stijl, 양식) 그룹, 잡지창간

신조형주의 

차가운 추상(수직, 수평, 삼원색, 무채색)

제2의 전성기(New York)

재즈

 

2. 생애

 

 

 

자주 이용하던 은행이 합병을 하며 기존 카드대신 새로운 카드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기존의 회색톤으로 다소 밋밋하고 딱딱한 인상을 주던 평범한 카드였다. '새 카드라고 뭐 다르겠어.'라는 내 생각과 다르게 몬드리안의 작품이 손에 쥘 수 있는 카드사이즈로 변형이 되어 내게 들어왔다. 빨강,파랑, 노랑의 삼원색과 검정 선 그리고 흰색 배경이 은행 로고와 함께  박혀 있었다. 단지 카드디자인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익숙한  예술작품 하나가 새롭게 시작하는 은행의 신뢰도를 무한대로 올려놓는  순간이었다. 누구의 센스였을까? 아마 예술을 좀 아는 이의 기분 좋은 배려로 고객들의  은행 이용 횟수가 늘지 않았을 까싶다.

 

 

 

 

 

나는 최대한의 자각으로 일반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평평한 표면에 선과 색상 조합을 구성합니다.
나는 사물의 기초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것을 추상화하고 싶습니다.






 

<코스튬 내셔녈>,2011, 가을, 겨울 컬렉션

 

 

 

 

 

1966년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에 의해 몬드리안룩(Mondrian look)이 유행한 적이 있다. 패션은 돌고 돌아 2011년 <코스튬 내셔널>이 발표한 가을, 겨울 컬렉션에 몬드리안의 작품을 연상하게 하는 간결하고 세련된 룩이 새롭게 해석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몬드리안은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프랑스와  영국을 거쳐 미국 뉴욕으로 망명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68세의 몬드리안에게  뉴욕이란 도시는 보수적이고 경직된 유럽사회와 확연히 비교될 정도로 활기찬 젊음의 도시였다. 마치 그가 생전에 추구하던 유토피아를  가장 잘 표현한 도시 같았다. 게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에 걸쳐 미국에서 대중화된 재즈음악을 좋아해 고령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할렘에서 흑인들의 생생한 재즈연주를 즐겨 듣고 음반을 사 모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첫 시작은   차분한 칼러로 풍경을 묘사한 자연주의적인 스타일에서 시작한다. 1872년 네덜란드에서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면서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해 어려서부터 그림을 접할 기회가 비교적 쉬웠다. 19세기말, 네덜란드는 헤이그 파의 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의 삼촌인 헤이그파 화가 프리츠 몬드리안(Fritz Mondrian)의 영향을 받으면서 주제나 제목, 빛과 공간 처리와 같은 구체적 방법에 이르기까지 헤이그파적 경향을 띈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암스테르담 미술아카데미를 다니며 20대에 그린 초기 작품들은  차분한  색조의 풍경화와 정물화로 지극히 평범한 수준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경력을 시작했고 주변 가까이 보이는 들판, 풍차, 강물 등 자연의 모습을 반복해서 담으며 네덜란드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화풍을 시도했다.  

 

 

 

 

 

Mill in sunlight, 1908

 

 

 

 

 

1905년에서 1910년 사이 몬드리안은 다양한 스타일의 회화를 시도해 보고 화풍의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터치가 강한 점묘주의와 생생한 색감의 야수파에 영향을 받아 해 질 녘 풍경 속에 드러난 풍차는 마치 불길에 휩싸여 흘러내리는 것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당시 이 작품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중앙에 수직, 수평선을 교차시켜 형식상의 구조를 드러냈고 색채의 단순한 대조를 통해 긴장감을 증대시키려 한 몬드리안의 의도를 잘 표현한  구성 작품 중 하나다. 몬드리안이  풍경의 여러 요소 중에서 형태의 기본 틀을 단순화시키고 풍차, 나무, 들판,  꽃이 중심이 되기 시작한 것은  상징주의를 접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야수주의의 영향으로  화려한 원색의 색감을 과감히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나의 회화에서 최초의 요소는 색채였다.
나는 자연색채(natural color)를 버리고
순수 색채(pure color)를 택했다.
나는 자연 색채를 캔버스에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회화가 본질적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다.

 

 

 

 

1911년 암스테르담에서 첫 번째 '현대예술그룹'전시회가 열립니다. 이 전시에서 몬드리안은 조르주 브라크와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아 파리로 갈 결심을 하고 두 화가의 입체주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파리로 이주하고 자연의 영적 본질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물리적 영역을 결합시키고자 꽃, 나무, 인간의 형태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고요.

 

 

 

 

몬드리안은 파리에서 접한 입체주의에서 영감을 얻어  덜 빛나는 색채로 되돌아갑니다. 회색과 갈색 계열의 색조를 바탕으로 선 자체가 점점 더 중요해졌지요. 추상화 탐구를 계속 이어갔는데, 나무 묘사의 변형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러한 이미지  변형의 경험을 통해 몬드리안은 형상과 완전히 멀어질 수 있게 됩니다. 

 

 

 

 

 

Blossoming apple tree, Wikimedia Commons,1912, Kunstmuseum DenHaag, The Hague,The Netherlands, wikimedia commons

 

 

 

 

몬드리안은  네덜란드에서도 같은 이념을 공유한 전위 예술가들과 함께  그룹을 만들어 '더 스틸(De Stijl)' 저널을 출판하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의 필수 요소를 기반으로 삶의 모든 측면을 재구성하기 위해 전통을 파괴하려는 그룹의 야심에 공식적으로 동조합니다.

 

 

 

1920년대 초반 몬드리안은 이론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회화 표현 방식을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로 천명하고 검은색과 흰색의 직선 배열과 파랑, 빨강, 노랑의 3 원색으로 구성된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추상화를 예술가로서 추구했던 절대적 진실과 미에 접근하는 과정으로 보았지요. 그의  다양한 화풍은 이미지의 본질과 통일성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에 그 근원을 둡니다. 

 

 

 

Composition with red, yellow and blue, 1935-1942

 

 

 

 

몬드리안은 우주의 근원과 진실을 표현하고자  형태를 더 단순화하고 기하학적인 수평과 수직의 선만을 남깁니다. 그에게 수직선의 의미는  생기를 표현하는 것이고,  수평선은 평온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네요. 색상은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과 흰색의 배경 그리고 검은색 선만을 사용하여  정제된 자신만의 추상화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미술의 3대 기본 요소인 선, 면, 그리고 색만으로 말이지요. 1930년 이후 검은 수직선과 수평선이 화면 전체에 꽉 찬 작품을 제작했고 이후로는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해지자 검은 선이 많이 보이는 연작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계산이 아닌 자각으로 구성된 수평선과 수직선을 통해
강한 직관에 이끌려
조화와 리듬을 가져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Victory Boogie Woogie, 1942-1944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듯한 제목의 위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은 몬드리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수직선과 수평선, 그리고 색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회화 세계를 구축한 몬드리안은 다시 고향인 네덜란드나 오랜 시간 활동한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1944년 미국에서 폐렴으로 72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3. 나가기

 

몬드리안은 19세기말 풍경화가에서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중심에 서 있던 작가입니다. 더불어 20세기 미술뿐만 아니라 디자인, 건축, 패션, 대중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이기도 하고요. 초기 그림과 말년의 그림을 비교하면 전혀 새로운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전 생애의 작품들이 일관성 있게 구상에서 추상으로 진화했음을 알 수 있지요. 살아생전 사실주의 그림 팔아 근근이 먹고살던 그였지만 결코 한 단계에 머물지 않고 회화의 변화무쌍한 가능성을 실현시킨 독보적인 화가입니다. 20세기 현대 사회에서 가장 폭넓게 활용되고 실생활에 변화를 가져온 화가 이기도 하고요. 이제 네덜란드 하면 렘브란트, 고흐 말고 몬드리안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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