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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는 과거의 예술가들과는 달리
인간 정신의 갖가지 미덕,
즉 우아 근면 아름다움 겸손을
그리고
모든 부도덕과 결점을 상쇄할만한
착한 품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바사리-

 

 

화가들과 조각가는 물론 귀족과 교황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성격 좋은 예술가가 있습니다. 37세라는 나이로 요절하지 않았다면 예술가 출신으로 '추기경'의 자리에 오른 라파엘로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중세와는 달리 인간의 개성과 존엄성이 인정받았기 때문에 개개인의 창조성을 부각시키는 근대적 자아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이 때문에 자기 고백적이거나 자아 분석적인 모습보다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직함을 드러내기 위한 자화상이 늘어났지요.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화폭 속 군상 가운데 등장시키는 입회 자화상이나 화폭 속의 의식이나 행사에 직접 참가시키는 참여 자화상 역시 이러한 목적을 띠고 있습니다. 

 

 

 

<Portrait of Bindo Altoviti>1515/google Arts& Culture

 

 

탐스러운 금발과 초록빛 눈, 신비로운 표정을 지닌 남자.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의 라파엘로의 작품 <빈도 알토비티의 초상(Portrait of Bindo Altoviti)>입니다. 한 때는 라파엘로의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던 작품입니다. 덕분에 그림값이 치솟다가 여러 사람의 손을 탔고, 다시 그의 제자가 그린 그림이라고는이야기가 돌며 값어치가 고꾸라 졌습니다. 그러다 제작기법 조사 등을 통해 라파엘로 그림이 맞다는 판명이 나며 그림의 가치가 다시 치솟은 우여곡절 초상화입니다.

 

 

라파엘로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1514년경에 그린 피렌체의 젊은 은행가 빈도 알토비티의 초상화로 밝혀집니다. 라파엘로 전기에 따르면 빈도 알토비티는 당시 부와 권력을 거머쥔 피렌체 상류층이었습니다. 라파엘로는 자신이 상상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가장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매력적인 청년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자신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로 아꼈다고 합니다.

 

 

 

<self-portrait>,1504-1506/wikipedia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가 아니라도 인물화를 그리다 보면 자신과 비슷한 점을 그림에 투사하게 됩니다. 그림을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 인 것처럼 말입니다. 라파엘로의 자화상은 23세의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암법을 배운 뒤 그린 것입니다. 온화하고 청순한 외모와 부드러운 눈길은 라파엘로의 청년기 작품에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입니다. 

 

 

 

다빈치스러운 구도, 명암법이 잘 활용된 작품입니다. 미켈란젤로와같은 무게감을 가진 인물적 표현도 잘 썼던 화가이지요. 베네치아 미술의 빛과 색채 효과, 플랑드르의 세부적 묘사, 그리고 단단한 윤곽선을 통해 조화, 균형, 절제를 내건 '르네상스'를 천재적인 능력으로 그려낸 화가입니다. 그림 속 라파엘로는  무늬가 없는 어두운 톤의 옷과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낮은 채도의 배경은 라파엘로의 흰 얼굴을 더욱 부드럽고 환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단조로운 색조의 배경과 단일한 검은색의 채색은 꾸밈없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 방법이지요. 작품은 전반적으로 차분한 색조인데도 인물의 표정과 인품까지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라파엘로의 자화상은 순수하게 자신의 모습에만 열중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 이 자화상만큼 인간미를 이상적으로 표현한 작품도 드물지요.

 

 

 

라파엘로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승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1450-1523)의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드립니다. 피렌체에 화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제로라는 천재들의 양식을 흡수했고요. 그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교황의 요구도 다 들어주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다양한 것을 받아들였는데 라파엘로의 그림이 전혀 산만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그림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우아하고 조화롭습니다. 

 

 

 

<Portrait of Baldassare Castiglione>,1515/wikipedia

 

 

 

고귀하면서 질서 있는 느낌이 드는 초상화입니다.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루브르 미술관 소장 작품이고요. 포즈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스러운 느낌도 듭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발다사레 가스틸리 오네(Baldassare Castiglione)라는 궁정인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군주가 사는 성 안에서 정치가, 예술가, 문학가 등 다양한 역할을 겸비한 사람이지요.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외교관이자 문인이었습니다.

 

 

커다란 베레모를 써 단정한 인상을 줍니다. 턱수염의로 온화한 학자 느낌도 받습니다. 흰색 블라우스와 깃 높은 검은색 상의 그리고 회색 모피를 두른 모습이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입니다. 격식이 있으면서도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고요. 곧고 온화한 외유내강의 선비를 보는 듯합니다. 특히 , 깊은 생각이 깃든 푸른 눈이 관람자들을 향해 뭐라 얘기하는 듯도 합니다. 

그는 이상적인 궁정인의 처신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궁정인>은  유럽 상류사회의 필독서로 인기가 많았고요.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시대 가장 이상적 인간의 모습을 이 초상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통 초상화는 그리는 화가의 개성이 들어가기 쉽습니다. 라파엘로의 초상화는 거슬리지 않고 매끄럽게 다가옵니다.  자신의 개성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의 천재성은 우리로 하여금 화가보다 인물이 돋보이고 주인공에게 집중할 수 있게 합니다. 

 

 


 

 

우르비노/위키피디아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된 한 국가가 아니라 여러 공국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라파엘로는 이탈리아 우르비노 출신이고요. 그곳은 시골이었지만 움브리아 예술이 꽃피던 곳으로 르네상스 문화의 선구적 역할을 한 곳입니다.  교황으로부터 공작 작위를 받은 페데리코 3세 가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이고요. 자신의 궁전에서 시인, 화가들이 맘껏 실력을 뽐낼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두 천사와 그리스도>,Giovanni Santi/예술가의 그림에 대한 설명

 

 

라파엘로의 아버지 지오반니 산치오(Giovanni Santi)는 화가로서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북 이탈리아 화풍과 저 멀리 플랑드르(네덜란드) 화풍까지 섭렵하여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말입니다. 당시 페테리코 궁전에서 화가보다는 시인을 더 높이 평가하자 시단에 뛰어들어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라파엘로는 당시에 예술을 주도하는 피렌체와는 좀 떨어진 우르비노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긍정화가인 조반니는 라파엘로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치고, 당시 우르비노 궁정에서 유행하던 인문주의 철학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인문주의 철학을 통해 라파엘로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화적 유산과 르네상스 시대의 새로운 사상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조반니는 라파엘로가 12세 때인 1494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후 라파엘로는 사제인 숙부 밑에서 자랍니다.

 

 

 

라파엘로가   그 지역 최고 화가였던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agino 1446-1523)의 수습생으로  언제 보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1500년에 페루지노가 맡아 그린 페루자 어음교환소의 벽화에 라파엘로가 일부 참여했다는 증거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17살 이전으로 추측) 

 

 

 



라파엘로의 첫번째 스승,<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초상화>/world History Encyclopedia

 

 

 

 

라파엘로의 첫번째 스승님 피에트로 페루 지니(Pietro Peragino 1446-1523)입니다. 페루지 노는 라파엘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 역시 이탈리아에서 유화를 도입한 최초의 화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당시 움브리아에는 민감하고도 우아한 빛의 색을 강조한 화파가 활동했습니다. 화파의 창시자는 피에트로 반누치(Pietro Vannucci)로 1448-1450년경 치타 델라 피에베에서 태어났으며 페루지 노라 불렸습니다. 그는 피렌체의 베로키오(Verrocchio)를 사사하며 보티첼리(Botticelli)와 레오나르도(Leonardo)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또한 조토(Giotto)와 함께 근대 유럽회화를 바꾼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에거서 원근법과 공간감을 익힙니다. 

 

 

부유한 집안의 페루지노는 1467년 피렌체로 옮긴 후 뛰어난 기술로 두각을 나타냅니다. 당시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 등 부유한 자본가들로 상업적 대도시였습니다. 페루지노가 몸담았던 베로키오의 공방은 최고의 학교이자 도장이었고요. 이곳에서 당대의 재능 있는 인물로 레오나르도를 비롯하여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를 만나 교류하게 됩니다.

 

 

1400년대 중반은 르네상스와 피렌체의 문화적 유산과 더불어 예술 및 경제 활동의 보고이자 교류의 장으로 정의됩니다. 당시 피렌체의 회화 교육은 무엇보다 교회나 풍경, 환경 등 실물의 복제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이는 모든 회화적 기술을 습득하는 기본 활동이었습니다. 종종 시체를 직접 연구하고 광범위하게 해부학적 조사를 했는데, 당시 피렌체 파는 화질과 윤곽선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페루지 노는 9년간의 연구 끝에 1472년 수습 과정을 마쳤고, 정식 화가가 되어 자율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스승 페루지노의 특징은 형식미와 확고하고 우아한 소묘, 밝은 색감과 풍부한 명암의 분배 그리고 숙달된 원근법입니다. 르네상스 기의 다른 화가들에 의해 발전되어 나갈 모든 특성을 두루 갖춘 셈이죠. 페루지아 스타일로 고전주의의 형식적 간결함에 도달했고요. 깨끗한 구성감과 명화 같고 우아한 빛으로 가득한 색감은 균형 잡힌 공간미로 표현되었습니다.

 

 

1483년 메디치가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피렌체 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야심찬 계획을 시도합니다. 메디치가의 여름 별장 중 하나를 단장하기로 한 거죠. 여기에 보티첼리, 필리포 리피, 도메니코 기를 란다이오 그리고 스승 페르지오가 함께 합니다. 이후 페르지노는 엄청난 유명세와 인기를 누리며 피렌체와 페루자 두 곳에서 공방을 유지하고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고정된 조력자와 일하기보다는 현지에서 직접 조력자를 고용하는 것은 선호했습니다. 이 시기가 바로 화가로서 가장 높이 평가되었던 때입니다. 수많은 화가들을 비롯하여 유명화가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고전주의 로의 귀환을 시도하게 됩니다. 당대의 왕자들, 통치 가들, 귀족들은 그의 작품을 갈망하였고 작품들은 다음 세기를 위한 열매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공방에 한 젊은이가  그의 화풍을 배우고자 당도하였는데 그가 바로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였습니다. 라파엘로는 페루 지니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로부터 조화와 침묵, 부드럽고 미묘한 색감, 세심한 원근법, 섬세한 우아함과 달콤한 우울함으로 가득 찬  인물상  그리고 이상적 균형을 배웠습니다. 페루지 노는 진정한 르네상스 시대의 조화와 고전성의 대가였습니다. 라파엘로는 페루지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점차 모범으로 삼을 만한 다른 모델을 찾아 페루자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H_Guv2Mk1E0

 

 

 

 

 

다른 제자들 중에 라파엘로처럼 스승이 가르치는 것들을 쉽게 흡수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미술사가 뵐플린-

 

 

 

 

스승Perugino (오)and 견습생 Raphael(왼)<The Marriage of the Virgin>/pinacotecabrera.org

 

 

 

 

 

라파엘로는 특히 원근법을 강조하는 것과 인물을 묘사하는 방법, 인물과 건축물 사이의 관계 등에서 페루 지니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러면서도 인물을 배치할 때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등 자신만의 형식을 개발합니다.

 

 

라파엘로가 스무 살 무렵에 그린 <마리아의 결혼>작품입니다. 같은 제목을 가진 페루 지니의 작품과 전체적인 구성이 비슷합니다. 간결하고 우아한 선들, 감성이 풍부한 얼굴, 고요하고 순수한 분위기 등 페루 지니의 독보적인 표현법이 라파엘로의 그림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멀리 보이는 건축물과 깊이감이 잘 표현된 공간은 스승과 제자가 고전 건축은 물론 원근법에도 통달했음을 보여줍니다.

 

 

 

스승 페루지노의  결혼반지를 끼워주는 이 소박한 장면을 재치 있게 연출합니다. 요셉과 더불어 몇몇 구혼자들은 나뭇가지를 들고 마리아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마리아는 요셉을 선택했고요. 화가는 요셉의 나뭇가지에만 꽃과 나뭇잎을 그려 넣어 그가 마리아의 특별한 베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선택받지 못한 청년들 중 한 명이  실망감에 나뭇가지를 꺾고 있고요. '에이, 꽃도 못 피는 나뭇가지 부러뜨려 버릴 테다.' 하며 말입니다. 라파엘로는 소소하지만 재미있는 이런 인물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이런 변화로 고요한 화면에 생기와  잔잔한 활력이 더해집니다.

 

 

 

이 밖에도  라파엘로는 스승의 장점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몇몇 변화를 주어 좀더 흥미로운 화면을 만들어냅니다. 우선 그는 후방에 보이는 건축물의 크기와 모양을 변화시킵니다. 좀 더 작아지고 원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그려진 건축물은 더욱 이상적인 형태가 되었고, 넓은 하늘을 열어주어 보다 여유로운 배경이 생겨났습니다. 

 

 

 

라파엘로는  성모와 요셉의 위치도 바꾸었습니다.  주례를 보는 사제의 상체를 약간 옆으로 기울여 그렸습니다. 사제의 고개가 기울어지면서 사제와 마리아의 머리 사이에 공간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마리아의 얼굴이 더 돋보이게 되었습니다. 한편 마리아가 왼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마리아의 오른팔이 전면에 오게 되어 반지를 기다리는 손에 더욱 시선이 모아집니다. 또한 그림의 주제를 상기시키는 성모의 결혼반지가 화면의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라파엘로는 이렇게 작은 변화들로 스승을 뛰어넘는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피렌체/디트뉴스

 

 

 

 

피렌체시기입니다.

라파엘로 작품의 특징은 '우아한' 인물들과 '부드러운'색채의 화면 구성입니다. 라파엘로가 초기 피렌체(1504-1508)시기부터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화법으로 발전시킨 중요한 특징이지요. 당시 피렌체는 도시위원회와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지난 1500년대 초반 피렌체에서는 다빈치를 비롯한 미켈란젤로, 프라 바르톨로메오 등이 새롭게 재건된 시청사 건물과 현재 우피치 미술관으로 불리는 메디치궁 장식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라파엘로는 대가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모든 화가의 고전주의 화법을 빠르게 받아들였습니다. 

 

 

 

 

 

<The Virgin and Child with Saint John the Baptist>/1507-1508/wikipedia

 

 

 

<성안나와 성 모자>,레오나르도 다 빈치, 1510/wikipedia

 

 

 

 

1507년 라파엘로가 피렌체 시기에 제작한 작품입니다. 특히 다빈치의 영향력이 두드러집니다.  이 작품은 다빈치의 미완성된 스케치 (1500-1505년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와 유사한 주제를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라파엘로는 다빈치의  <모나리자>(1506)에서 봤던 스푸마토 기법 등에 영감을 받아 배경을 자연스럽게 표현했습니다. 라파엘로의 성모자 상은 안정된 삼각형 구도의 인물들에서 선명하고 '조형적인 견고함'으로 형태를 드러냅니다. 그는 우아하면서도 친근한 모습의 성모자를 투명하고 옅은 푸른색 배경의 조화로운 화면과 함께 조형적으로 자연스럽게 완성합니다. 라파엘로는 다빈치가 그 의 미완성 스케치를 통해 지난 1510년 밀라노에서 <성안나와 성모자>를 완성한 것보다 앞서서 배경을 스푸마토 형식으로 성모상을 완성했습니다. 

 

 

 

1504년 피렌체 시청은 피렌체가 배출한 위대한 예술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에게 각각 한 쪽 벽을 맡겨 벽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벽화배틀이 시작된 거죠. 라파엘로는 이 사건을 놓치지 않았고, 곧바로 피렌체로 향합니다.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이야기를 듣고 피렌체로 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라파엘로는 다 빈치와 미켈란 젤로의 화풍을 흡수하게 됩니다. 레오나르도는 화가일 뿐만 아니라 고학자 겸 기술자,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화가로서의 이름도 높지만 본인은 자신의 전공을 조각이라고 생각했고요.  다 빈치의 피라미드형 구도나 인물의 배치, 인물의 자세, 명암법은 라파엘로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선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 해 보기도 하고요. 하지만 라파엘로는 선배 화가들의기법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을 항상 잊지 않았습니다. 선의 율동성이나 인물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고요함, 외모의 맑고 깨끗함등은 라파엘로만의 특징이라고 평가받습니다.

 

 

 


 

르네상스 문학과 예술 북유럽의 르네상스/&nbsp; contents.kocw.or.kr

 

 

 

<Portrait of Pope JuliusII>,1511-1512/wikipedia

 

 

 

 

당시 교황령을 다스리고 있던 율리우스 2세 교황입니다. 그는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아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로마로 불러 모았습니다.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에게 성베드로 대성당을 새로 짓게 합니다. 미켈란젤로에게는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그림을 그리도록 명령하고요. 라파엘로는 그의 선종 1년 전에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를 운 좋게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표정에 고뇌와 걱정이 그득해 보입니다. 

 

 

 

라파엘로는 초록색 커튼으로 배경을 단순화시키면서 교황의 붉은 옷과 뚜렷하게 대비시킵니다. 이처럼 단순하고 명료한 구성은 관람자가 교황의 얼굴에 더욱 집중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교황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흰 손에 끼워진 화려한 반지들은 교황의 지위를 뚜렷하게 보여주지만 움푹 들어간 눈은 그늘 속에 잠겨 있습니다. 반듯하고 단단해 보이는 이마와 코는 고집스러운 그의 성격을 보여주고요. 멍하게 앞을 보고 있는 교황은 초상화를 위해 모델을 서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업무 중에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합니다. 당시 율리우스 2세 교황은 프랑스, 베네치아, 에스파냐 등의 세력들과 외교 줄다리기를 하며 교황청의 대외적 영향력을 높이고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라파엘로는 인간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비유하자면 연출된 증명사진이 아니라 우연히 찍은 스냅사진과 같은 연출법으로 말이죠. 라파엘로는 이렇게 교황의 실제 모습을 포착하여 세상 밖으로 꺼내 놓았습니다.

 

 

 

당시 라파엘로는 로마에서 그리 많이 알려진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르비노 고향 선배인 브라만테가 율리우스 교황에게  라파엘로라는 화가를 소개합니다. 라파엘로는 1508년에 율리우스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향하고요. 그는 로마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율리우스와 추기경들에게 자신이 뛰어난 화가임을 입증해 보입니다. 로마의 분위기에 동화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귀족들에게도 높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고요. 라파엘로는 이후 12년 동안 로마에 머물며, 걸작을 잇달아 그리게 됩니다. 로마의 고대 유적과 고전이 라파엘로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완성단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를 보고 모범으로 삼을 수 있었고요.

 

 

 

1514년 바티칸의 스탄차를 리모델링하는 작업 중 브라만테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 70세 였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의 신축사업, 그 시작을 맡은 야심 찬 건축가였죠. 교황도 바뀌게 됩니다. 라파엘로를 아꼈지만 미켈란젤로는 유독 변덕스럽게 대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도 브라만테와 같은 일흔 살의 나이로 1513년 선종합니다.

 

 


 

 

 

율리우스 2세 교황은 당대의 최고 철학자들과 의논하여 그릴 벽화의 주제를 정해줍니다. 법합, 철학, 신학, 시학(예술). 이렇게 네 가지 주제로 반원형의 네 벽면의 채우는 것이 라파엘로의 첫 과제였습니다. 이 방의 그림들은 모두 훌륭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역시 철학을 주제로 한 <아테네 학당>입니다.

 

 

 

 

 

 

 

<아테네 학당>1509-1511/ Artsper Magazine

 

 

 

스승에게 독립한 라파엘로는 예술의 메카인 피렌체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 무렵 메디치 가문은 몰락했고 피렌체는 더 이상 예술의 중심지가 아니었습니다. 반면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로마에서 대규모 공사를 벌이며 예술가들을 영입하고 있었습니다. 우르비노에서 갓 상경한 라파엘로를 로마로 이끌어 준 사람은 같은 고향 출신의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였습니다. 그는 건축적 재능만큼이나 정치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성당을 새로 짓는 대사업을 주도하며 작업에 참여할 예술가들을 직접 불러 교황에게 소개했는데 그중에 라파엘로도 끼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 라파엘로는 몇 개 안 되는 계단으로 공간을 분리시켜 화면을 안정적으로 나눕니다. 계단 위에선 플라톤(중앙에 붉은 망토를 두른 인물), 아리스토텔레스(푸른 망토를 두른 인물)를 비롯한 인문 철학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계단 아래에는 피타고라스(왼쪽 하단에 큰 책에 메모를 하는 인물), 유클리드(오른쪽 하단. 컴퍼스를 들고 석판에 도형을 그리는 인물)와 같은 수학자들과 자연철학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연구를 하고 있고요. 그리고 개처럼 거리에서 살았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계단에 비스듬히 누워 관람자의 시선을 중앙으로 향하게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6Nlnjj_3GI

 

 

 

 

 

<The Pamassus>,1511/wikipedia

 

 

 

 

<파르나수스>는 라파엘로의 재치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그리스 코린토스 만 북쪽에 있는 높이 2,457m의 파르나수스 산에는 아폴론과 아홉 명의 무사가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판 '노아의 홍수'인 데우칼리온 신화에도 이 산이 나오고요. 제우스가 지상에 홍수를 보냈는데, 데우칼리온이 탔던 배만 둥둥 떠 있다가 물이 마르자 파르나수스 산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아래쪽에 직사각형 모양의 창문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자칫 그림의 구도를 살리지 못할 수도 있었거든요. 젊은 라파엘로는  고민합니다. 그리고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창문 위에 언덕을 그려 넣어 언덕이 돌출되는 효과를 낸 것이죠. 역시 천재 맞나 봅니다. 불리할 수도 있는 상황을 통쾌하게 해결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에게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라파엘로는 벽면에 있는 창문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파르나소스 언덕을 만들고  호메로스(파란 옷을 입은 눈먼 노인)와 단테(호메로스 뒤에 붉은 옷을 입고 옆으로 선 남자)를 비롯한 시인들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중 사포 sappho는 유일하게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비틀린 자세와 웅장한 근육 등은 라파엘로의 이전 그림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입니다. 이것은 분명 미켈란젤로의 인물을 본 딴 것입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만큼 다양한 자세의 인체를 그리는데 능숙한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 사포의 자세가 어딘가 어색하고 창문에 기댄 팔도 허공에서 중심을 잃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라파엘로는 르네상스의 거인들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만의 장점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The Sistine Madonna>,1512/ITALLAN RENAISSANCE ART.COM

 

 

 

 

교황 율리우스 2세 분묘를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이 작품은 처음에 이탈리아 피아첸차에 있는 성 식스투스 수도원에 있다가, 작센의 아우구스투스 3세 에게 기증되어 현재는 독일 드레스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성모를 주제로 그린 대부분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삼각 구도의 조화와 균형은 감상자들의 마음을 차분하고 경건하게 만들어 줍니다.  전체적으로 우아함과 아름답고 경건함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왼쪽의 교황 식스투스 1세가 신앙심 깊은 모습으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은 성녀 바르바라의 모습이고요. 성녀는 아래쪽의 아기 천사 푸토들을 평화롭고 따뜻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통통한 아기천사들 표정이 실감 납니다. 시선은 위로 향해 있어 궁금하면서도 기다리려니 따분한가 봅니다. 아름답고 순수함을 드러내 보이는 표정을 보노라면 라파엘로가 미세한 감정의 표현에 얼마나 능숙한 화가였는지 알 게 됩니다. 

 

 

성모를 주제로 그린 대부분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듯이 삼각 구도의  조화와 균형은 감상자들의 마음을 차분하고 경건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성모의 신성한 얼굴에 깃든 아름다움, 순결함, 슬픔과 두 눈 속의 겸허와 고뇌를 찬미하게 됩니다. 아기 예수도 성모와 더불어 평범한 인간의 아기가 아닌 것처럼 보이고요. 예언자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는 아기 예수는 안겨 있다기보다는 팔에 기대어 앉아있습니다. 그는 영웅적인 자세로 신처럼 앉아서 확고한 눈길로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나  미켈란젤로처럼 혁명적인 혁신을 가져오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 회화가 갖고 있었던 장점들을 강화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서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양식을 완성해냈습니다. 완전하게 균형 잡힌 화면, 군더더기 없는 표현들, 우아한 선과 기품 있는 인물들은 고귀하고도 아주 드문 것이었습니다. 

 

 

 

 

 

<의자에 앉은 성모마리아>,1513, 피렌체 팔라초 피티 소장/ wikipedia

 

 

 

 

 

 

1513년에서 14년경에 그려진 라파엘로의 작품은 원형의 틀 안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원형의 틀이 가지는 형태를 인물들의 움직임 속에 투영시킴으로써 틀과 인물 간의 관계를 조화롭게 해결합니다. 원형과 조화로운 회화적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 팔과 다리, 머리와 휘감긴 옷 주름 등이 서로 얽히고설킨 복잡한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둥근 화면과 그림 속 인물들 간의 조화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마치 감상자를 응시하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시선이 어딘지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둥근 천장을 통해 침입자인  우리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아기 예수는 몸을 뒤로 움츠리며 어머니 마리아의 품을 파고듭니다. 언제나 그렇듯 라파엘로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성모 마리아를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발산하는 아름다움은 여성의 세속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종교적 숭고미입니다. 라파엘로는 인물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던  르네상스 거장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후대 미술가들에게 중요한 모범이 되어 지속적으로 모사되었습니다.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의 초상>,1518/wikipedia

 

 

 

레오 10세는 율리우스의 뒤를 이어 즉위한 교황이자 라파엘로에게 여러 가지 업무를 맡겼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로 유명해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싹트는 데 크게 공헌한 가문입니다.  레오 10세 교황이 되기 전 그의  이름은 조반니 데 메디치였습니다. 그리고 조반니 역시 , 예술에 대한 애호는 조상들 못지 않았고요.  라파엘로는 <그리스도의 변용>을 완성하지 못하고 , 3년 뒤인 1520년 4월 6일 세상을 떠납니다.

 

 

 

 

 

<The Transfiguration of Christ>1518-1520/wikipedia

 

 

 

 

 

<그리스도의 변용>은 보통 큰 그림이 아닙니다. 높이가 4m에 육박하는 나무판에 유화로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께서 수난 받을 것을 예언하신 후 베드로와 야곱,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타보르산)에 올라가셨다. 제자들은 그때 예수님의 얼굴이 태양같이 빛나고 옷이 하얗게 변하면서 모세, 엘리야와 말씀을 나누는 것을 보았다.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소리가 울리자 제자들은 땅에 엎드려 두려움에 떨었다. <마태복음 17:1-9>

 

 

 

 

윗부분은 라파엘로 자신이 직접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림은 2단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밝고 고요하면서도 성스러운 상단과는 다르게 하단은 굉장히 어지럽습니다. 하단 중앙부에서 한 노인이 소년을 향해 손가락을 뻗고 있습니다. 진홍색 옷을 입고 있는 다른 사람은 예수에게로 손가락을 뻗고 있고요.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알아보고 노력해 봐도 치료되지 않자, 그들은 타보르 산에 있는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물론 사도들도 악마가 씐 소년을 치료하지 못했지요. 이를 모습을 바꿔 나타난 예수가 고쳐주었다는 이야기를 토대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그리스도의 변용> ,이그림은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중에 서른일곱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죠.(1520.4.6) 그의 병은 약 15일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알았던 지 , 그는 자신의 공방은 로마노와 펜니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운영하며 , 판테온 신전에 묻어달라는 한 장의 유언을 남겼습니다. 교황의 명령 하에 라파엘로의 장례식은 교황 주관 국장으로 치러집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요. 사람들은 그를 추기경으로 만들어 고인의 죽음을 기리자는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끝으로 ,이 그림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에 앞서 마니에리스모 즉 바로크 시기로 이동하는 화풍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명암 배합이 너무나도 확연하며, 르네상스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인물들의 과도한 움직임도 모두 마니에리스모로 향해고 있었고 그 흐름은 바로크 시대를 엽니다. 

 


 

 

 

 

라파엘의 무덤 판테온 로마 이탈리아 /123RF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가져야 할 만큼의 재능을 가진 화가였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맞먹는 만큼의 부와 명성을 얻은 화가였고요. 르네상스 후반기에 태어나 당대의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 젤로를 만나 그들의 예술을 흡수하고 소화시켰습니다. 고향 까마귀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로마에 가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와 교황 레오 10세의 초상화를 그리는 행운도 얻었고요. 능력 좋고 인성 좋은 라파엘로는 단명했다는 사실만 제외하고 억세게 운 좋은 천재화가였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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