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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 사이에 한 때 이탈리아로 가는 그랜드 튜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약 200년간 지속되었고요. 특히 영국 , 독일의 왕족이나 귀족자제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산 넘고 물 넘고 바다 건너가야 할 테니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여행을 하다 강도를 만나거나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당시 바이마르공국 재상으로 있던 괴테 역시 38살 때 1년 9개월 정도 이탈리아에 머물렀었다고 합니다. 괴테의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 역시 이곳에서 당시 얻은 경험들이 큰 몫을 했고요. 루벤스나 벨라스케스, 그리고 나폴레옹 역시 많은 영감을 얻어 돌아오지요. 당대 지성인들의 유학코스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영국의 경우 프랑스를 경유해 알프스를 넘고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방법이 있고, 플랑드르(네덜란드,벨기에)지역을 거쳐 가는 방법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쁘고 세련된 옷들은 프랑스 쪽이 많기에 선호도에 따라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도시국가였던 이탈리아가 한 깃발아래 모이게 된 것은 1861년이었습니다.
영국은 무늬만 왕이었고 실질적인 힘은 의회를 통해 나오는 입헌군주제를 시험하고 성공리에 안착시킵니다. 당시 유럽의 주변국가들 특히 프랑스,독일, 이탈리아 등이 정치적인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영국은 경제에 온 힘을 집중하며 산업혁명을 일으킵니다. 쌓여가는 부를 축적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의 여파는 프랑스에도 영향을 미치며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정치적으론 여전히 혼란한 묘한 불협화음 속에 도시는 근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술은 아이러니 하게도 경제적으로 부유해질 때 융성하게 됩니다. 신문물을 통해 급속도로 변해가던 파리는 인상파라는 걸출한 미술 사조 하나를 배출해 냅니다. 고대 문화를 대표하는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가 문화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반면 이탈리아는 상대적으로 발달이 느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는 급격한 공업화를 추진하였고 이러한 점이 당시 이탈리아의 젊은층에게 영향을 끼쳤던 거죠. 미래주의 사조는 속도와 역동성, 신기술 및 기계주의 등에 확고한 믿음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미래주의는 회화, 조각, 건축, 의복, 실내장식, 영상,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실험적인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래주의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은 미술 분야에선 움베르토 보치우니, 카를로 카라 지노 세베리니 , 자코모 발라 등이 있습니다. 오늘 주인공은 음악가이자 화가로서 활동 루이지 루솔로입니다.
루솔로의 아버지는 가업을 이은 시계공이었지만 마을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도 활동했습니다. 다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루솔로는 베르디 음악원에 진학한 두 형 때문에 가족과 함께 밀라노로 이사했습니다. 음악가 집안에서 자랐지만, 음악가 대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합니다. 그래서 명화 복원 전문가 밑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판화를 배웠으나 정식 미술교육은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1909년, 파밀리아 아르키스티카에서 열린 그룹전'흑과 백'에 판화 몇 점을 출품하게 됩니다. 루솔로는 이 전시회를 통해 움베르토 보초니를 만나게 되고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낭만주의와 세기말 사조에서 탈피해 현대 산업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적 감수성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게 됩니다. 이듬해 고군분투하던 루솔로는 미술, 음악 등 다른 예술 장르에도 미래파의 기운을 전파하려던 이탈리아 출신의 시인 필리포 토마스 마리네티(Filippo Tommaso Emilio Marinetti,1876,12,22-1944,12,2)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20세기 문명에 지나친 기대를 걸었던 괴짜 시인입니다. 1909년 2월 20일 , 마리네티가 피가로지에 '미래파 선언'을 발표합니다.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을 위해 도서관과 미술관을 때려 부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러한 극단적인 표현은 세상의 눈길을 끄는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기존의 음식 문화에도 반기를 들었습니다. 파스타와 같은 이탈리아 전통 음식이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며 말이지요.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요리를 발명 해야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훗날 행위예술을 예고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는 옛 세상을 파괴하는 일에 맛들인 나머지 결국 파시스트가 되어 버렸습니다. 1919년에 '파시스트 선언'을 발표했거든요. 1920년대 탈퇴한 후 3년간 정치와 결벌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네티는 파시즘의 철학적 근거를 제공한 장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후 마리네트는 미래파를 이탈리아의 국가 예술로 만들려다가 무솔리니의 반대로 실패합니다. 2차 대전이 터지자 육십대 후반의 나이에 자원입대를 했고, 이탈리아 패망을 앞둔 1944년 심장마비로 죽게 됩니다.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보다
경주용 자동차가 더 아름답다.
1909년 2월 20일자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마리네티가 기고한 '미래파의 창설과 선언문'을 1면 기사로 올립니다. 이렇게 미래파는 언론에 광고를 내고 시작된 미술사조입니다. 혁명적이고도 도발적인 선언문에서 그는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는 것은 전쟁뿐이라고 말합니다. 예술 또한 폭력적인 비행을 저질러도 된다고 주장하고요. 이게 무슨 예술이야 싶습니다만 다소 과격한 듯한 미래파의 예술은 일상생활에까지 영역을 넓히려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전위) 운동의 신호탄이 됩니다. 원래 아방가르드는 군대의 선두에서 적군의 상황을 알아보거나 장애물을 제거하는 부대를 의미하는 군사용어입니다. 영화 무용 연극 등 예술 장르뿐만 아니라 요리 장난감 등 일상의 모든 부문에서 미래파 선언이 이루어집니다.
이들은 사회 변혁에 방해가 되는 전통을 부수기 위해 매우 도발적인 작품을 세상에 던졌습니다. 말하자면 로마제국의 영화를 그리워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르네상스를 동경하는 이탈리아 미술의 과거지향주의에 환멸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이들은 미술 혁명을 일으켜 동시대 작가들이 미술계를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거고요. 미래파는 문학운동으로 출발했지만 미술, 광고, 패션, 음악 및 연극 부문까지 포용하면서 이탈리아를 넘어 영국과 러시아의 시인 마야코프스키까지 전 유럽에 영향을 미칩니다.
기술 선언문에서 구체적인 행동 강령을 담았는데 엑스레이로 투시한 것 같은 해체, 모방에 대한 거부, 누드화 금지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미래파 제 1세대는 힘과 속도로 대표되는 역동성, 즉 다이너미즘과 아방가르드 예술을 최종 목표로 추구하며 움직임과 빛으로 현대사회를 해부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루이지 루솔로의 <두 개골이 있는 자화상>이란 작품입니다. 충격받은 표정의 이 남자 어디서 많이 본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바로크 시대 활동했던 천재적이지만 악당에 가까웠던 카라바조의 <메두사>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뒷 배경으로 7개 정도 보이는 해골이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옛날 로마에서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 소리로 외치게 했다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인가요? 아마도 그림 속 남자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볼지도 모르죠. 내면의 거울 속 자신을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두개골이 있는 자화상(1909-1910)에서 루이지 루솔로는 우리를 인간의 영원한 숙명인 죽음 앞에 던져 놓습니다. 평생동안 우리는 위대함, 명성, 권력, 부, 인간 영혼에 호소하는 모든 것을 찾아 나서기 바쁩니다. 모든 사람은 몸, 마음, 감정, 생각, 신념, 관점 등을 자신들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때가 더 많지요. 허무함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요. 모든 것은 죽음 앞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고, 잊히게 되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정체성이 없는 다른 모든 사람과 그저 유사한 두개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 놀란 토끼 눈과 벌어진 입이 어제는 그들이었으나 오늘은 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소리와 음색을 선과 색채로 실감나게 옮겨놓았다.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1919)-
팔이 다섯 개입니다. 열 손가락도 모자라 모두 스물다섯 개의 손가락이 넓은 음역에 걸쳐 꽉 찬 화음을 빚어냅니다. 솔직히 말하면 검정색의로 표현된 주인공의 모습과 손가락을 쳐다보면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파랑 노랑 빨강 띠가 피아니스트의 머리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켜 허공을 가득 메웁니다. 피아노 음이 S자 곡선으로 폭을 넓히며 공중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고요. 화가 겸 음악가 루이지 루솔로의 대표작 <음악>입니다. 음악이 느껴지시나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퍼지는 느낌이 드시나요? 피아니스트의 머리에서 동심원처럼 뻗어가는 물결은 연주자의 후광 또는 아우라, 더 나아가서 소리가 빚어내는 파형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원색의 향연으로 수 놓인 막대에 매달린 가면들은 안동 하회탈 같기도 하고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가면 같기도 합니다. 객석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 관객들의 다양한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흥분한 듯, 웃는 듯, 무표정한 듯 한 무수한 표정들이 말입니다. <음악>이라는 표제에 드러나 듯 화가는 그림을 통해 음악적 음향과 특정 요소의 반복, 메아리의 반복 등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미래파 동료 화가인 카를로 카라는 "이 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얼굴의 가면에서 과거 위대한 작곡가들의 혼백이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 오감으로 전해오는 느낌은 다 다를 테니까요. 건반에서 멀어질수록 동심원 사이의 간격은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림 속의 등장하는 선과 곡선은 그가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고 음향학을 제대로 공부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듯합니다.
루솔로의 <자동차의 역학>이라는 작품입니다. 이탈리아의 미래파는 (Futurism:1909-1944) 전통과의 단절을 원했고 기계문명과 속도를 찬양하는 이데올로기, 유럽 아방가르드 문화운동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이 그림에서 달리는 자동차 앞에서 벌어지는 음파의 압축 현상을 그려냈는데 놀랍게도 음향학 교재에서 도플러 효과를 설명할 때 나오는 그림과 흡사합니다. 도플러 효과는 어떤 파동의 파동원과 관찰자의 상대 속도에 따라 진동수와 파장이 바뀌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루솔로는 질주하는 자동차의 속도와 굉음을 시각화하고자 했습니다. 기계문명이 가져다 줄 이상사회를 꿈꾸던 미래주의자에게 달리는 자동차는 그 어떤 예술 작품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이지요.
검은 유선형 물체인 자동차가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이를 둘러싼 공기가 날카롭게 갈라지며 파도치듯 퍼져 나가 소음을 일으킵니다. 자동차의 엔진이 뿜어내는 열기는 불꽃처럼 뜨거운 에너지가 되어 주위를 새빨갗게 달구고요. 루솔로가 이 그림을 완성하던 1913년에 '소음의 예술'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온갖 소음을 일으키는 '악기'를 개발하여 연주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물론 루솔로가 예상했던 대로 객석의 반응은 '뭐 저딴걸 음악이라고 연주해'하며 분노 일색이었지만요. 그러나 '소음의 예술'이라는 그의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눈은 쉽게 감을 수 있어도, 귀를 닫고 들려오는 소음 소리를 제거할 수 없을 테니까요. 온갖 기계와 전자제품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루솔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https://sonichits.com/video/Luigi_and_Antonio_Russolo/Corale-serenade?track=1
루솔로는 아방가르드 미술 사조에 자극을 받은 뒤에 다시 음악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고자 1913년부터 그림을 잠시 접고 음악 작업에 몰두합니다. 같은해 동료 화가들과 미래파 작곡가 프란체스코 프라텔라에게 편지로 보낸 선언문'소음의 예술'은 1916년 단행본으로 출간됩니다. 그는 이 음악에서 생활 주변에서 발생하는 소음들을 음악 작품에 포함시키는 작업에 이론적 미학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루솔로는 소음을 만드는 기계를 개발했고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음을 음악 작품 속에 포함하려고 합니다. 사이렌, 굴착기, 배수관, 호루라기, 기중기 소리 등 온갖 소음이 나오도록 고안해 냅니다. 현대 산업사회에 쉽게 들을 수 있는 잠들지 못하게 하는 기계의 소음을 음악으로 승화시킨거죠. 소음도 '오케스트라'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는 발상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1921년 루솔로는 파리에서 미래파 연주회를 세 차례 열었는데 27개의 소음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었습니다. 스트라빈스키, 디아길레프, 라벵 등 참석자 모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하네요. 디아길레프는 '라벨과 스트라빈스키에게 위촉한 발레음악에 이 악기를 넣어달라고 부탁할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말입니다. 아쉽게도 루솔로가 사용했던 '소음 악기'나 악보는 현재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1940년대 피에르 셰페르가 창안한 '구체음악'이나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루솔로의 소음음악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답니다.
미래파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하는 것에 적극 찬성하여 의용군으로도 참전했습니다. 루솔로는 부상을 입고 1년 넘게 병상에 있었고요. 보초니는 전사했습니다. 그바람에 급속도로 영향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마리네티가 무솔리니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미래파는 미술사가나 큐레이터 사이에서 '퇴출 명령'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2024.01.24 - [지식&교양] - 50-63.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43)
미래주의는 이탈리아가 다른 나라보다 발전이 느렸기에 그것을 만회하기 위한 급격한 공업화의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여기에는 열등의식이 한몫했고요. 그 열등의식은 이탈리아의 예술이 퇴보하였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산업도시와 자동차, 기차 등 산업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도상들을 작품에 담고 표현해 냅니다.
문제는 이러한 점이 도를 지나쳤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무정부주의와 폭력을 옹호하는 수준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이들은 반 문화, 반 전통, 반역사를 주장하며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을 파괴하여야 한다고 까지 주장했습니다. 반면 과학과 기계, 속도, 그리고 젊은이를 찬미하며, 파괴를 통해 구질서를 개편할 수 있는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극단적으로 전쟁과 폭력을 옹호하였고 미래주의의 끝은 세계 1차 대전이었습니다. 미래주의 자들은 1차 세계대전으로 폭력의 환멸을 느끼고 결국 미래주의에서 점점 이탈하게 됩니다.
파시즘과의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미래파는 유러 미술사, 특히 아방가르드의 초석을 제공한 문화 운동이었습니다. 미래파가 없었다면 다다(Dada), 키네틱 아트, 옵아트 등은 태동하지 않았을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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