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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 컨셉 같기도 하고 , 여성으로  화장시켜도 고운 얼굴일 것 같은 짖꿎은 상상도 해봅니다. 손이 어쩜 저리 가늘고 고운지 탐 이날 정도로 말이죠. 눈빛이 야심만만해 보입니다. 

 

 

 

<self-portrait>,1620,안토니 반 다이크/ Licensed by Google
출처:서울신문

 

 

 

명예욕과 자기애가 강했던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는 평생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아 있는 그림 중 가장 이른 것은 14살 때 그린 것이라고 하고요.  플랑드르 출신입니다. 그는 부유한 비단 상인인 아버지와 뛰어난 자수 기술로 유명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직물에 대한 이해가 높았습니다. 자연스레 이러한 지식을 그림에도 풀어냈고요.  그가 루벤스보다 오래 살아남았더라면 바로크 시대 최고의 초상화가 순위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초상화의 새 지평을 열었으나 안타깝게도 1641년 마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스승인 루벤스가 죽은 지 불과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궁중 화가로 활동했던 그는 매우 우아하고 기품 있는 초상화를 많이 그려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실력을 보였던 반 다이크는 그의 나이 16세 때 17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수석 조수로 활동했습니다. 루벤스는 반 다이크를 '내 최고의 제자'라고 부르며 그의 재능을 높이 치겨세워주기도 했지요. 이후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전해졌고 영국 왕실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왕실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반 다이크는 채색에 매우 뛰어났습니다. 탁월한 채색 기술로 빛과 인물의 움직임, 직물에 놓인 자수와 실의 짜임까지도 완벽하게 묘사했습니다.  특유의 섬세함으로 특히 레이스와 같은 복잡한 직물 묘사를 정확하면서도 회화적으로 해냈습니다. 당시 귀족들의 의상을 사실적이면서도 완벽에 가깝게 화폭에 옮겨놓았을 정도로 말입니다.      

 

 

<The Mystic Marriage of Saint Catherine>,1618/google Arts&Culture

 

 

 

 

스승 루벤스와 반 다이크 사이의 작은 일화 하나를 소개할 까 합니다. 스승 루벤스는 어느 날 오랜 시간에 걸쳐 대작품을 완성했고, 그동안의 피로를 풀기 위해 잠시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그 사이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작품을 구경하기 위해 화실로 몰려왔고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뛰어 들어가며 서로 밀고 당기는 소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한 제자가 그만 떠밀려 넘어지면서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림을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엉망이 된 그림을 보곤 사색이 되었고, 귀중한 작품을 망쳐 버린 것에 대한 두려움과 당황함으로 제자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던 그때, 제자 중 한 사람이 붓을 들고 손상된 부분을 직접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스승 루벤스가 산책을 마치고 화실로  돌아왔고 이 광경을 보았지만, 그는 자신의 그림을 수정하는 제자의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뒤에 서 있던 스승을 발견한 제자는 바짝 긴장한 채 책망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긴장감이 흐르던 긴 침묵 끝에 루벤스는 말문을 열었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을 자네가 더 좋게 고쳐놓았군!" 

 

 

 

 

<코르넬리우스 판 데르 히스트의 초상화 Cornelis van der Geest>,1620/wikipedia

 

 

 

 

부유한 상인이자 플랑드르 미술을 선호하고 후원한 문화계의 주요인물 코르넬리우스의 초상화입니다. 50대의 그의 얼굴엔 이렇다 할 특별한 장식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의 얼굴, 살아있는 눈빛으로 고상한 그의 취미와 그의 인격을 드러내 보입니다.  

 

 

<The Brazen Serpent>,1618-1620/wikipedia

 

 

 성경 말씀 중 ' 뱀에게 물린 자마다 모세가 세워 놓은 '구리뱀'을 보면 살리라'.(민수기 21;6-9)

 

 

<유다의 그리스도 배신>,1618-20/CHICMENT Magazine

 

 

 

1618년,19살!

 안트베르펜 화가 길드로부터 장인으로 인정받은 반 다이크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스승에 버금가는 화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가 '르벤스 공방'에 머물렀던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제작된 루벤스의 그림 중에는 반 다이크의 손을 거친 것이 많다고 합니다. 누가 어디를 그렸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죠. 스승의 든든한 협력자였던 반 다이크는 당시의 유행을 따라 1620년에 이탈리아로 떠나게 됩니다. 스승의 아내를 넘보아 루벤스가 여행을 보냈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 무렵 반다이크가 루벤스에게 작품 하나를 선물합니다.  루벤스는 이 그림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늘 식당 벽난로에 걸어두고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청출어람의 제자를 보며  루벤스는 흐뭇했던 모양입니다. 

 

 

 

 

이 그림에서 반 다이크는 빛과 어둠을 이용한 카라바조(Carabaggio, 1573-1610)의 기법과 사물의 표면에 생기를 더하는  루벤스의 붓질을 잘 버무려  아주 극적인 화면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몰려드는 무리는 어지러이 움직입니다. 다가올 수난을 예감한 그리스도는 오히려 고요하게 서 있고요. 유다는 체포하라는 신호로 약속된 입맞춤을 하기 위해 스승의 손을 꼭 잡은 채 예수에게 다가섭니다.

 

 

 

어둠에  잠겨 있는 유다의 얼굴과 횃불을 받아 밝게 빛나는 예수의 얼굴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혼란과 고요,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는 루벤스 화실에서 익힌 바로크 미술의 특징을 실감 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반 다이크는 스승보다 한층 부드러운 색조를 사용하면서 인물의 표정을 더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예수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성인의 초탈한 표정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체념과 제자에 대한 연민, 그리고 배신자를 보는 착잡함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 보입니다.

 

 

 

 

 

 

 

<엘레나 그리말디 카타네오의 초상,1622/National Gallery of Art

 

 

 

 

 

초상화는 섬세한 심리묘사가 중요합니다. 탁월한 반 다이크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고요. 당시의 초상화는 일정한 공식이 있었습니다. 왕과 귀족 들은 대개 갑옷을 입고 기사처럼 말을 타고 있거나, 격식을 갖춘 화려한 옷을 입고 품격 있는 실내에 머물러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런 설정들이 인물의 힘과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죠. 반 다이크는 이런 초상화의 공식들을 깨고 연극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꽃이나 지팡이 같은 사물을 들고 야외 배경과 어우러진 다채로운 인물화를 그려냈습니다. 그의 인물상들은 대부분 마르고 키가 크게 그려집니다. 그로 인해 예민하고 연약하면서도 어딘가 기품 있어 보이기 때문이죠. 

 

 

 

이런 반 다이크의 초상화를 좋아한 사람 중에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절대왕정을 꿈꾸었던 영국의 황제 찰스 1세(Charles1, 1600-1649)도 있었습니다.

 

 

찰스라는 이름은 영국에서 그리 반가운 이름이 아닙니다. 찰스 1세는 영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하들에게 붙잡혀 반역죄로 처형당한 비운의 국왕이기 때문입니다. 아들 찰스 2세 역시 폐위와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찰스 2세 이후 오랜만에 찰스라는 이름의 국왕이 등장했습니다. 어머니 엘리자벳 2세가 장수하셔서 허연 머리의 국왕이 얼마나 오랫동안 통치할지 모르지만 불운한 기운이 감도는 징크스를 깨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탄생/에펌코리아

   

 

후계자가 없었던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는 원래 스코틀랜드 국왕이었습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위까지 물려받아 최초로 영국 통합 군주가 됩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지 못했고, 이를 위해 이미지 메이킹을 묘안으로 내세웁니다.           

 

 

 

 

    사진이나 TV가 없던 시절, 유럽 군주들은 자기 모습을 담은 초상에 유난히 공을 들였습니다. 국왕의 초상은 국민 대부분에게 왕을 간접적으로 나마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주는 당대 최고 화가에게 초상화는 물론이고, 초상 속에 군왕의 위엄을 최대한 과시함으로써 자신이 '하늘이 내려준 국왕'임을 만천하에 과시하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찰스 1세는 어릴쩍부터 병약해 160cm도 안 될 만큼 키가 작았습니다. 성격마저 내성적이었지요. 그는 자신을 위대하게 그려줄 화가가 필요했습니다. 루벤스 공방 출신으로 촉망받던 33세 안토니 반 다이크가 궁정화가로 낙점됩니다.   찰스 1세는 1632년 빼어난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반다이크를 영국 런던으로 초빙해 궁정화가 직위 및 기사 작위를 줍니다. 영국에 내세울 만한 초상 화가가 없으니 이웃 나라에 그림 장인을 수입해 온 거죠.  이때부터 반다이크는 런던에 머물며 찰스 1세를 비롯한 스튜어트 왕실 가족의 초상화를 다수 그리게 됩니다. 그로 인해 반 다이크는 자기 생애 주요 작품들을 영국에 남겼어요. 플랑드르 출신임에도 영국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게 됩니다. 반다이크는 영국 회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 200년간 영국 초상화의 양식을 확립시킵니다.

 

 

 

<The Balbi children>,1623-27/wikipedia

 

 

 

 

<Portrait of Cardinal Guido Bentivoglzo>,1623/wikipedia

 

엔디미언 포터 경과 안톤 반 다이크 초상화 Sir Endymion Porter and Anthony Van Dyck,1633/wikipedia

 

 

 

 

 

이 그림은 영국 왕실에서 일하는 외교관이었던  엔디미온 포터 경을 그린 작품입니다. 평상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포터 경은 반 다이크가 영국에 체류하게 되었을 때 그를 만나 그의 작품의 위대함을 인지하고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로 인해 연을 맺게 되고 이 그림은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그린 초상화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두 사람이 한 공간에 등장한 다는 점입니다.  한 명은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 에디미언 포터 경이고 오른편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놓았습니다. 주인공은 정면을 응시하며 몸의 방향이 앞을 향함으로 모든 이들을 바라보도록 그려놓음으로 지위와 걸맞은 위치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반 다이크는 자신을 비스듬히 옆 자세로 포터 경의 자리를 넘지 않는 구도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냅니다.  그 덕분에 그림 어느 부분도 균형을 잃지 않았고 등장인물 모두가 돋보이게 그려낸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반 다이크는 사소한 부분에까지 세심한 배려를 했습니다. 자신을 후원했던 후원자의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별 차이가 없지만, 자신을 살짝 낮은 자세로 그려 넣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유심히 보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그림을 멀리서 보게 되면 왼편의 검은 옷을 입은 안톤 반 다이크가 엔디미온 포터 경 쪽으로 몸 방향이 향해 있습니다.  마치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하고 그분을 소개하듯이 말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포터 경이 같은 곳에 손을 얹음으로써  자신과 포터 경의 우애를 과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찰스 1세 기마초상>,1633/위키피디아

 

 

   

 

 

   반 다이크가 궁정화가로 임명된 이듬해 그린 찰스 1세의 기마 초상화입니다.  로마 시대  최전성기 황제들처럼 그를 강력한 지배자로 각인시킵니다. 말을 탄 모습으로  표현해 키가 훨씬 더 커 보입니다. 왕의 오른쪽 아래 붉은 옷을 입은 시종이 그를 높이 우러러볼 정도로 말이죠. 왼쪽에 왕을 상징하는 왕관과 문장이 그려져 있습니다. 제 눈에 말이 더 주인공처럼 느껴집니다. 아무튼 왕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없었던 시민들은 이 그림을 통해 군왕다운 찰스 1세의 모습을 보고 땅에 고개를 조아리겠죠. 위로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테니까요.     

 

 

 

 

 

그러나 이 같은 당대 최고 화가의 솜씨에도 그림 속 찰스 1세 얼굴에서는 군왕의 참된 위엄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군주라기보다 군주 역을 어설프게 연기하는 배우처럼 보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이 초상의 주인공 찰스 1세가 의 회와 반목을 거듭하다 마침내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을 일으킨 주인공이 됐음을 알려줍니다. 이 내전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에  패한 찰스 1세는 폐위됐고 1649년 1월 30일 처형되기에 이릅니다. 예술적인 감각은 뛰어났지만 군주 자리에 오르기엔 여러모로 현저히 모자라는 인물이었습니다.

 

 

 

뛰어난  초상화가였던 반다이크의 그림에서는 이처럼 숨기고 싶은 진실, 즉 '왕 답지 못한 왕'의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반다이크의 그림 속 말은 실물보다 좀 더 큽니다. 이 크고 온순한 말은 찰스 1세가 원하던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국민 이미지였겠지요. 그러나 당시 영국 국민은 왕과 신을 동일시하며 무조건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던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의회를 통한 합리적인 정치를 원했습니다. 정치감각이 뒤떨어진  찰스 1세는 끝까지 그런 국민의 바람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림 속  찰스 1세의 우울한 표정이 보이시나요. 둘 사이의  근본적 차이, 즉 왕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믿었던 찰스 1세와 더는 절대왕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국민사이의 괴리감을 말하는 듯싶습니다.  그래도 그가 수집한 미술 컬렉션 상당수는 지금까지 영국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주요 작품으로 남아있습니다

 

 

 

 

 

<Queen Henrietta Maria with Sir Jeffrey Hudson>,1633/www.nga.gov

 

 

 

<난쟁이 제프리 허드슨 경과 함께  있는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의 초상> 챨스 1세의 아내 헨리에타 왕비입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공주였고요. 다른 왕실의 결혼처럼 그녀 역시 정략결혼으로 영국 왕비가 되었습니다. 아름답고 풍성한 드레스와 은은하게 미소 짓는 미인의 모습으로 그려놓았습니다.  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해요. 4남 5녀의 자녀를 둘 정도로 말이죠. 그러나 서로 양보하지 못하는 부분이 종교문제였습니다. 찰스 1세는 영국의 국교가 된 성공회를 믿고 있었고, 프랑스 공주인 헨리에타 왕비는 당연히 가톨릭이었죠. 왕실끼리  결혼은 했지만 서로이고 사는 하늘이 달랐다는 말이죠. 헨리에타 왕비는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개종하지 않아 영국 왕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일반인들도 성공회로 개종하지 않으면  출세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법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림 오른쪽에 황금 휘장에 고이 놓인  쓰지 않은 왕관이 보이시나요? 대신 사냥할 때 쓰는 검은색 챙 넓은 모자를 썼습니다.

 

 

 

 

왼쪽으로 난쟁이 제프리 허드슨경도 보입니다. 당시 난쟁이는 유럽 왕실 가족에게 웃음을 주는 역할을 맡으며 궁정의 흔한 존재였다고 합니다.  원숭이와 같은 이국적 동물을 소유하는 것이 유럽 귀족문화에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원숭이의 의미는 방종, 음란함, 인간의 어리석음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런 원숭이를 여왕 헨리에타가 살포시 누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육체적 욕망을 절제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라는 말이지요.

 

 

<사냥복 차림의 찰스 1세 > ,1635/ Slideplayer.gr

 

 

 

 

<사냥복 차림의 찰스 1세>는 사냥을 나갔던 왕이  잠시 말에서 내려 우연히 화가를 바라보는 순간적인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 속 황제는 격식에서 벗어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왕관도 쓰지 않았고 왕홀도 들지 않았습니다. 지팡이와 허리에 찬 검을 보고 짐작만 할 뿐이죠. 그럼에도 충분히 돋보이며 왕처럼 보입니다. 수행원들과 그가 타고 온 말은 어둠에 묻혀 있지만 왕은 신의 선택을 받은 것처럼 밝은 빛 속에 전신을 드러내고 서있습니다. 게다가 왕은 수행원보다 앞서 서 있기 때문에 훨씬 키가 커 보입니다. 나뭇가지는 닫집처럼 왕을 감싸며 그의 위치를 돋보이게 해 주고요. 뿐만 아니라 밝은 상의와 붉은 바지의 조합은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깁니다. 왕의 표정은 어딘가 산만해 보이는 수행원들의 표정과 달리 당당하면서도 지적이고 우수에 젖어 있습니다. 챙이 넓은 모자가 얼굴을 후광처럼 감쌉니다. 바로 뒤에 있는 말도 온순히 머리를 조아리며 왕의 권위를 예찬하고 있습니다. 반 다이크는 이렇게 치밀한 구성을 통해 왕의 '일상적인 모습'을 '가장 왕다운 모습'으로 만들어냈습니다. 반다이크의  마법 같은 붓질로 찰스 1세는 캔버스 안에서 최고의 왕으로 빛났습니다.

 

 

 

 

 

 

<영국와 , 찰스1세의 초상>,1636/www.mycelebs.com

 

 

 

 

한 화면 안에 세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세 명의 인물 모두 찰스 1세입니다. '삼중 초상'이라 불립니다. 한 사람을 세 개의 다른 방향에서 그려 한 화면에 합친 겁니다. 마치 세 쌍둥이 같죠.  왕의 얼굴은 정면, 측면, 3/4 정면으로 그려졌습니다. 이 작품은 벽에 걸기 위해 주문한 초상화가 아니라 조각가에게 흉상을 주문하기 위해 그려진 일종의 밑그림 같은 겁니다. 17세기 영국교회는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교황 우르바노 8세는 영국을 회유하기 위해  찰스 1세에게 흉상을 선물하려 했습니다.

 

 

 

원래 흉상을 제작하는 데에는 손 부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 다이크는 작품에 찰스 1세의 손을 그려 넣어 이전의 삼중 초상과는 차별화된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왕은 품위 있는 표정으로 자신만만한 눈빛을 띠고 있죠. 언뜻 보면  한 명이 여러 자아로 분열되어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볼 수 도 있고요.

 

 

 

베르니니라는  당대 최고의 조각가가 자기 동상을 제작해 준다는 말을 듣고 찰스 1세는 뛸 뜻이 기뻐합니다. 그는 곧 최고의 화가 안토니 반다이크를 시켜 밑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반다이크는   찰스 1세의 얼굴을 부드러운 호남형으로 바꿔 놓습니다. 나중에 동상을 받아 든 찰스 1세는 감격했다고 합니다. 권력자의 초상은 사실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가 그리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다는 사실을 챨스 1세는 깨닫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Five Eldest Children of Charles1>,1637/Google Arts& Culture

 

 

 

https://www.youtube.com/watch?v=51AIGsdBza8

 

 

 

 

<Cupid and Psyche>,1638/wikipedia

 

 

 

 

 

 

 

<존 스튜어트와 버나드 스튜어트 형제>,1638/위키백과

 

 

 

 

 

영국 국왕의 권위는 점점 약해지고 , 찰스 왕을 배출한 스튜어트 가문 일족도 가혹한 역사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반 다이크가 그린 '존 스튜어트와 버나드 스튜어트 형제의 초상화'속 인물들은 모두 스코틀랜드 출신 귀족이자 찰스 1세의 친척으로 공작이나 백작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왼쪽의 황색 옷을 입은 사람이 당시 17세의 형 존 스튜어트입니다. 청색 옷을 입은 사람이 한 살 아래 동생 버나드 스튜어트이고요. 그림의 크기가 상당합니다. 높이가 2.4m에 폭이 1.5m 정도로 그림 속 인물들은 실제 인물보다 더 커 보입니다.    이 그림은 형제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포즈에서 풍기는 자신감과 화려한 레이스 장식이 달린 의복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비단 특유의 광택과 매끈한 질감을 생생하게 표현했죠. 이런 점 때문에 영국 귀족들이 반 다이크의 그림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형제가 황색, 청색, 대조적인 느낌의 옷을 입고 있는 데다 자세와 시선도 달라 은근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왼쪽 계단 위에 서 있는 형 존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동생 버나드는 한쪽 다리를 계단 위에 올리고 고개를 돌려 관객을 바라봅니다. 특히 허리에 왼쪽 손을 올린 버나드의 자세는 찰스 1세의 사냥하는 초상화 속 자세와 거의 똑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감 넘쳐 보이는 두 청년이 맞이할  험난한 인생사를 알게 되면 그림은 달라 보입니다. 형 존은 왕당파의 기병대를 지휘하며 의회파에 맞서 싸우다 1644년 부상으로 사망합니다. 그의 나이 겨우 23세였죠. 버나드 역시 1645년 로턴 히스 전투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두 형제의 이 같은 비극적 운명을 알고 그림을 보면 반 다이이크가 그려낸 당당한 청년 귀족들의 모습이 한편으론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이처럼 영국 역사에서 '찰스라는 이름은 그리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찰스 1세는 처형된 왕이고, 찰스 2세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죠. 그의 친인척들도 젊은 나이에 비극적 결말을 맞이합니다. 

 

 

 

 

 

<제임스 스튜어트 리치몬드와 레녹스의 공작>,1633/에포크타임스

 

 

 

 

 

 

반다이크의  수많은 후원자 중 한 명인 제임스 스튜어트는 리치먼드와 레녹스의 공작이었습니다. 찰스 1세의 사촌인 제임스는 왕과 귀족들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궁정의 침실 신하이자 경비원, 국무위원 등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요. 1633년, 영국 최고의 기사 작위인 가터 기사로 임명됩니다. 제임스는 이 높은 영예를 기념하기 위해 반 다이크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제임스 스튜어트, 리치몬드와 레녹스의 공작'은 세계적인 걸작으로 남았습니다.

 

 

 

이 그림은 매우 연극적인 구성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림 속 제임스가 착용한 망토에는 은색의 커다란 별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보석이 달린 황금 훈장을 목에 걸고 있고요. 또 하나 그의 왼쪽 무릎에는 금색의 가터 장식이 옷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에 반사된 빛의 묘사는 그림 속 사물이 마치 조각처럼 보이게 합니다. 반 다이크는 이러한 연출을 통해 작품에 우아 함고 화려함을 연출해 냅니다. 그림 속 스튜어트가 입은 옷은 당대 패션계에서 최고로  여져진 것들이죠. 스튜어트는 이 옷들을 여유롭고 우아하게 소화 냅니다. 반 다이크는 그림 속 인물에게 이러한 여유로움과 우아함을 부여해 인물의 지위와 고귀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슈튜어트가 입은 옷의 레이스 장식입니다. 레이스는  당시 아주 고급스러운 소재로, 부유층의 초상화에서 강조되어 표현되었습니다. 촘촘한 붓으로 자국을 남기는 회화 기법을 통해 사실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묘사되었고요.

 

 

 

반 다이크는 어릴 적부터 익히 봐 온 직물에 대한 이해도를 더해 다른 화가들보다 더 섬세하고 정확하면서도 우아하게 레이스를 묘사했습니다. 스튜어트가 신은 신발 한번 보실까요? 프랑스식 디자인으로 높은 굽과 커다란 장미 장식이 돋보입니다. 발 모양에 꼭 맞게 제작된 신발은 당시 귀족들이 향유했던 복식 문화중 하나입니다. 그가 신은 양말은 가로로 주름이 져 있고요. 잘 정돈된 금발 머리와 시대의 유행을 반영한 핫한 의상으로 귀족적인 모습과 낭만적인 이미지를 연출해 냈습니다.

 

 

 

 

또 한 가지 , 그림 속 스튜어트는 개 한 마리와 함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개는 스튜어트가 멧돼지 사냥을 하던 중 위기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으로 유명한 그레이하운드 종입니다. 이 품종은 고귀함과 충성심을 상징합니다. 예술 작품에 개가 등장하는 것은 보통 충성심을 나타내는 의도로 사용됩니다. 반 다이크는 앞다리를 우아하게 편 채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개의 모습을 통해 단순한 충성심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아함과 침착함까지 함께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개는 스튜어트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찰스 왕에 대한 스튜어트의  헌신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반다이크는 그림 속 인물의 복장, 자세, 주위의 사물이나 동물을 통해 인물의 성향과 특성을 잘 잡아낸 화가였습니다.  그는 초상화의 모델이 되는 인물에 대한 높은 이해와 애정을 그림 속에 풀어냅니다. 그렇게 탄생한 반 다이크의 초상화 <제임스  스튜어트, 리치먼드와 레녹스의 공작>은 뛰어난 예술적 기교로 불멸의 작품으로 남아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PX1KjKefQA

 

 

 

 

 

< 성 히에로니무스>로테르담 박물관/연합뉴스

 

 

 

600불에 사들인 헛간그림/애틀란타 K

 

 

 

 

 

미국의 헛간에서 새똥이 잔뜩 엉겨 붙은 상태로 발견된 유화 한 점입니다. 17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의 작품으로 판명돼 300만 달러(약 37억 원)를 호가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하얀 수염을 가슴께까지 늘어뜨린 노인의 나신을 그린 세로 95cm, 가로 58.5cm 크기의 이 작품에는 <성 히에로니무스를 위한 습작>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기독교의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성 예로니모라고도 불립니다. 소더비의 오래된 유화 책임자인 크리스토퍼 어파슬은 반 다이크가 10대 후반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안트베르펜(앤트워프)에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의 작업실에서 일하던 시절 이 습작을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반다이크는 천재로 태어난 모차르트 같았다.
-크리스토퍼 어파슬(소더비의 유화책임자)-


 

발견된 습작이 <성 히에로니무스> 작품을 그리기 위한 습작일 가능성을 추정해 봅니다. 고인이 된 앨버트 로버트(공무원, 수집가>는 2002년 이 작품이 네덜란드의 숨은 빈티지 작품일 것으로 보고 600달러(약 75만 원)에 사들였습니다. 로버츠는 그림을 오랫동안 그의 자택에 걸어뒀고요. 이후 본격적으로 이 작품의 유래를 추적하면서 1618-1620년 완성된 <성 히에로니무스와 천사>를 위해 반 다이크가 그린 습작이 아닌가 의심을 품었다고 합니다. 로버츠는 2021년 세상을 떠났고 이 작품은 로버츠의 유산 중 하나로 경매에 나오게 됩니다. 

 

 

 


 

 

<Anthony Van Dyck>1599-1641/www.meisterdrucke.ie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대의 유명한 화가, 주로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고급스러운 색채와 정교한 디테일로 유명하고요. 반다이크는 거장 루벤스가 평생 쌓은 노하우를 순식간에 배웠습니다. 네덜란드를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가문 귀족의 초상화를 수주하는 등 루벤스가 독점하던 일감을 미친 듯이 따내기도 했고요. 영국 왕 찰스 1세의 관심을 끌게 됐고, 1632년 영국으로 건너가 궁정 화가가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수많은 명작 초상화를 남겼습니다.

 

 

 

그렇게 반다이크는 불과 30대의 나이에 '루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이란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전문가는 주저 없이 바로크 미술의 일인자로 루벤스를 꼽습니다. 반다이크가 간과했던 건강, 디테일, 그리고 인성 부분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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