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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지 않는 출생으로 삶을 시작하여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삶을 마감했던 프랑스 출신의 천재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1864.12.8-1943.10.19)을 소개합니다.

 

까미유는 1864년 프랑스의 페르 앙 다드누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축복받는 탄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던 순간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상당한 지위가 있는 공무원이었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카미유가 환영받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녀가 태어나기 일 년 전에 세상에 태어났다가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난 장남 샤를 앙리 클로델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카미유의 부모는 크게 상심합니다. 다시 아이를 가져 15개월 만에 아이가 태어납니다. 부모님은 이왕이면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딸인 카미유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실망감에 거리를 배회합니다. 어머니는 그녀의 존재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까미유에게 독설을 퍼붓습니다. 훗날 아버지는 딸의 미술적 재능을 반기고 후원해 줍니다. 반면 어머니는 그녀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부인하며 나중에 태어난 아들(폴 클로델:프랑스의 시인, 작가, 외교관으로 유명하다)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한 편애가 훗날 카미유가 정신병원에서 지내게 된 근본 원인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카미유는 혼자서  흙을 만지며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려서부터 점토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카미유는 12살에 <다비드>, <골리앗> 제작하여 천재성을 보입니다. 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클로델이 15살이 되자 조각가 알프레 부셰를 찾아갔습니다. 클로델은 부셰의 도움을 받아 17살에 파리의 사립학교인 콜라로시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 여성을 입학시켜 주는 곳이 많지 않았지만, 이곳은 드물게 허용을 해줍니다.

 

 

 

공모전에  당선된 스승 부셰가 로마로 떠나게 되며 로댕에게 자신의 제자들을 위탁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로댕과 까미유 두 사람은 만나게 되지요. 1883년의 일이었습니다. 스승 부셰는 사랑하는 제자 까미유에게 근심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부셰는 까미유가 예술적 재능은 뛰어나지만 격한 성격으로 일을 망치는 것을 무척이나 걱정했습니다. 또한 까미유에게 속물처럼 행동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많은 시간 인내를 갖고 겸허한 마음으로 예술가다운 진면목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조언하지요. 스승 부셰는 그녀에게 닥칠 불운한 기운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많은 충고와 조언을 남기고 떠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AZzAiX2614

 

 

 

 

 

 

Crouching Woman,1884-85/Pinterest

 

 

 

19살에 로댕의 눈에 띄게 되고 20살에 로댕의 아틀리에에 들어가게 됩니다. 조각사에서 로댕의 업적이라고 한다면 아름다움과 틀에 박힌 규칙만을 중요시 여기던 전통적인 조각을 벗어나 사실적인 표현으로 아름답지 않은 것도 예술로 끌어올리는 재능이었습니다.  매끄러운 피부 대신 울퉁불퉁한 굴곡을 많이 넣어 조각을 비쳐주는 빛의 효과도 중요하게 취급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로댕의 영향을 받아 카미유는 사실적이면서 삶의 무게가 그대로 실린 작품들을 제작하게 됩니다.

 

 

 

                                                                                                 43살 VS19살

 

 

 

 

이미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 덥수룩한 수염에 근엄한 인상까지 주는 로댕입니다.  최고의 조각가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요. 영특한 눈매에 19살의 천재적인 조각가 까미유는 로댕과 이렇게 대면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였을까요. 카미유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로뎅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로댕의 제자이자 , 연인이며, 예술의 동지이자 영감의 원천이 되어 갔습니다. 로댕은 그녀의 천재성을 인정하여 제자들에게  점토작업만 맡긴다는 규칙을 깨고 그녀에게 작품의 일부를 만들도록 허락합니다. 당시 여성 예술가를 무시하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문제는 로댕 곁에 오랜 세월 사실혼 관계를 이루고 있던 연상의 여인 로즈 뵈레가  있어습니다. 뵈레는 로댕이 무명이던 20여 년 전부터 지원해 주고 돌봐준 여인입니다. 힘든 시절을 함께 건너온 조강지처 격의 로즈 뵈레를 쉽게 버릴 수 없는 처지입니다.  또 두 사람 사이엔 클로델보다 두 살 어린 아들도 있었습니다.

 

'무슈 로댕'

'파드모아젤  끌로텔'

 

서로에게 깍듯한 존칭을 사용하며 로댕은 점점 이중적인 남자가 되어갑니다. 로댕은 그녀에게 무관심한 듯, 때로는 적대적인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집요하게 그녀의 견해나 충고를 열심히 물어보곤 했습니다. 로댕은  클로델을 보는 순간부터 깊이 매료됐다고 합니다. 클로델은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지적이었거든요. 조각가로서 성공하고 싶은 강한 의지도 갖고 있었죠. 로댕은 반짝이는 클로델에게 빠져 적극적으로 구애했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활활 타오르는 기쁨을 준다오. 
내 인생이 구렁텅이에 빠질지라도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슬픈 결말조차 후회스럽지 않아요. 
당신의 그 손을 나의 얼굴에 놓아주오.
나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나의 가슴이 신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로댕이 쓴 편지)





Portrait de Camille Claude by Autuste Rodin Scupture , Musee d'Orsay, Paris/Web Gallery of Art

 

 

 

그즈음 로댕의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사망합니다. 이때가 1883년 10월 26일이었습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로댕에게 까미유의 등장은 많은 위안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로댕은 로즈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 알코올 중독자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 외에 이런 가족들로 인해 심한 마음의 고통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의 고통이 까미유의 등장으로 인해 많은 위로를 받게 됩니다. 

 

 

 

 

 

<Paul Claudel enfant>,/Pinterest

 

 

1884년  까미유는 로댕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16세의 내 동생>을 완성합니다. 폴을 모델로 한 이 작품에는 아직 미성년의 모습으로 젊은이의 연약함과 기품 있는 모습이 조화롭게 살아 있습니다. 이 작품은 솔직하고 강직한 듯한 눈빛이나 곧게 세운 목, 어깨 위에 걸치고 있는 망토 등으로 마치 승리자의 모습처럼 동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생을 향한 누나의 애정이 듬뿍 들어간 작품입니다. 그녀는 동생 폴과 가깝게 지냈고 후손이 없던 카미유의 보호자가 되어줍니다. 

 

 

 

Paul Claudel,1905, by Camille Claudel ,Musee Bodin,Paris/Arthive

 

까미유는 그 후 1905년 폴의 중년 모습을 조각한 <37세의 폴 클로델>과  5년 후인 1910년에 다시 만든 <42세의 폴 끌로델 흉상>도 남기고 있습니다. 이제 마흔둘이라는 중후한 나이가 된 폴은 그 나이에 걸맞게 벗어진 이마, 깔끔하게 잘 다듬어진 콧수염이 섬세하게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강티의 흉상 Tete de Brigand>,1885 by Camille Claudel, Musse des Beaux Arts Cherbourg/캐나다 한국일보

 

 

 

 

1885년 까미유를 혼자서만 좋아했던 모델 지강티를 조각한 <지강티의 흉상>을 남겼는데 이 작품은 살아있는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듯합니다. 로댕은 까미유가 가진 예술적 재능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11월 까미유는 로댕의 권유로 그의 작업실에서 제자 겸 모델 일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녀가 가족들과 상의 없이 혼자서 결정했다는 점이죠. 이곳에서 그녀는 습작으로 두상과 손을 많이 제작했습니다. 그녀의 이 두상 습작은 로댕의 <지옥의 문>에 들어갈 '걷는 사람'의 얼굴로 다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손>은 그녀가 만든 다양한 모양을 취하고 있는  손들 중 한 작품인데 특히 섬세한 표현이 돋보입니다. 까미유는 이 무렵부터 2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목탄이나 연필을 사용한 연작 스케치를 하며 조각의 밑작업을 준비해 갑니다. 그 예로 자신의 아버지를 데생한 작품이지요. 그녀에게 아버지 루이 끌로델은 자신을 믿어 주고 조각가로서 천재성을 인정하며 적극적으로 이해해 주고 후원해 준 유일한 사람입니다. 

 

 

 

 

 

 

 

<까미유 끌로델> 영화(이자벨&nbsp; 아자니 & 제라르 드 빠르디유 주연 영화/ 한국강사신문

 

 

 

 

로댕은 자신이 참석하는 파리의 모든 사교계에 까미유를 동반하고 다닙니다. 사람들에게 그녀가 대단한 조각가임을 주지 시키면서 말이죠. 이제 그녀의 행동들은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충분했습니다. 까미유는 이제 파리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유명 여류 조각가가 되었으며, 그녀의 미모와 예술가적 기질이 보태지면서 사람들은 아름답고 대단한 이 여류 조각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하기 시작합니다. 

 

 

 

<Bust of Rodin>,1888-1889/Wahoo Art

 

 

 

 

 

키미유가 작업실에 등장한 이후 작업실에는 웃음이나 농담은 점차 사라져 갔고 차가운 냉기류만 더해져 갑니다. 작업실에서 고통을 감내하던 까미유에게 아버지마저도 로댕의 작업실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동안 자신을 잘 이해해 주고 후원해 주었던 아버지의 이런 모습은 까미유를 더욱 절망스럽게 했습니다. 

 

 

 

<The Gates of Hell>,1880-1917/MUSEE RODIN

 

 

이 무렵 로댕과 까미유는 단테와 보들레르로부터 받은 지옥에 대한 영감을 공유하여 <지옥의 문>을 위한 열정적인 작업에 임합니다. 로댕은 늘 까미유에게서 조언을 구했고, 이 조언으로 작업된 로댕의 조각상은 거꾸로 까미유에게 감동을 주곤 했습니다. 

 

 

<The Gates of Hell> 작업중인 까미유 끌로델/나무위키

 

 

 

 

 

 

 

 

 

https://www.youtube.com/watch?v=bfv9T1lSO2U

 

 

 

 

 

 

 

까미유의 또 다른 영감으로 제작된 로댕의 유명한 <입맞춤>도 둘만의 깊은 사랑이 근원이 되어 탄생한 대표적인 에로틱한 작품입니다. <입맞춤>은 풍부한 감수성에 힘입어 능숙한 구성으로 제작돼 로댕의 명성을 더욱 높여준 걸작입니다. 두 남녀의 면과 면이 접촉되는 부분에는 생명력과 고양된 긴장감이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의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하는 교묘한 형태의 배합이 특징인 작품입니다. 

 

 

 

<The Kiss>,1882 by Auguste Rodin/주간한국-한국아이닷컴

 

<Louise Claudel>,1887/Arthive

 

 

 

여동생 루이즈마저 페르디난드 드 마사리와 결혼을 하자 까미유는 가족을 떠나 로댕이 마련해 준 작업실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때에 까미유는 파스텔을 사용해 동생 루이즈를 그리게 됩니다.  1887년 그린 이 작품은 화면 중앙으로 루이즈의 모습을 부각하고 머리와 얼굴 부분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몸체는 마치 미완성인 듯 윤곽선으로만 표현하고요. 주변 배경은 거친 터치와 절제된 색채를 사용했습니다.

 

 

 

 

로댕은  까미유가 몰인정한 그녀의 어머니에게 쫓겨났을 때 임대비와 생활비를 책임져 주었습니다. 이즈음 로댕의 후원은 그녀가 떳떳하게 자립할 수 있는 성격의 급여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댕은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광란의 뇌부르그로 불리는 집과 투렌느 이즐리뜨 성을 빌립니다. 이곳에서 둘 만의 사랑도 키워 가고 , 아무도 오지 않고 단 둘 만이 작업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합니다. 까미유는 이 공간을 가족이나 시간에 제한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로운 곳으로 여기고 무척이나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까미유는 자신이 사랑했던 아버지에게 마저도 로댕과의 사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일체 비밀에 부치고 있었습니다. 

 

 

 

로댕은 까미유에 대한 사랑을 거리낌 없이 표출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로댕이 처음과는 달리 자리를 자주 비우게  되자, 까미유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아져 갔습니다. 무섭고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까미유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녀는 책을 통해 배울 것, 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독서 속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기도 하고요. 때때로 밤이 길어질 때까지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The Abandomnent>/KNS뉴스통신

 

 

 

 

<SAKUNTALA>,1888 , Canille Claudel vs&nbsp; &nbsp;<영원한 우상>, 로댕/오마이뉴스

 

 

 

 

 

<사쿤탈라Sakountala>,1888,로댕박물관/중기 이코노미

 

 

1888년  <사쿤탈라>는 샹젤리제 살롱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게 되며 세인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까미유는 정식으로 작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경쟁자들에게는 질시의 대상이 되고요. 이 작품은 열정적인 사랑을 표현하고 있으며 남자는 무릎을 꿇고 두 팔로 여인의 몸을 감싸고 있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까미유는 이 작품을 위해 많은 날들을 작업에 열중했으며 스무 번도 더 만들었다 부쉈다 하며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습니다.  이 작품 이후 까미유의 독특한 스타일이 완전히 구축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한 우상>1898,로댕작품, 로댕 박물관/Fruugo

 

 

 

 

두 사람 사이에 큰 균열이 일어나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로댕이 클로델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스캔들이 생긴 겁니다. 클로델의 <사쿤탈라>(1888)와 로댕의 '영원한 우상'(1898)이라는 작품입니다. 격정적인 에너지, 육감적인 포즈 등이 유사합니다.  로댕은 스캔들로 인해 자신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리고 클로델이 작품을 출품하지 못하게 압력을 가해 가까스로 표절 시비를 잠재웠습니다. 

 

 

 

작업에 열중하던 어느 날 폭우가 퍼붓고 있던 밤에 까미유 작업실에 로댕의 실질적인 아내 로즈 뵈레가 찾아옵니다. 비에 흠뻑 젖은  로댕의 아내는 거의 발광직전 상태로 까미유를 보자마자 심한 욕설과 증오를 퍼부어 댑니다. 로즈는 비록 로댕과 정식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으나 어려웠던 시절부터 헌신을 다 하면서 살아온 연상의 여인이었습니다. 증오를 가득 담고 까미유를 모욕하던 로즈는 그녀를 밀어 넘어 뜨렸고 조각품과 함께 작업대로 쓰러지게 됩니다. 이 순간 로댕이 들어와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되지만 이렇게 싸우고 있는  두 여인 사이에 어느 편도 들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심장이 좋지 않은 로즈를 데리고 가버립니다. 

 

 

 

혼자 남게 된 까미유는 심한 모멸감과 절망감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까미유가 이때의 심정을 데생으로 표현했는데 로댕과 로즈를 모델로 마치 한 편의 만화를 보는 듯한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로댕과 까미유는 사랑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지만 그들이 예술 세계에서 맺었던 상호성만은 매우 독특합니다. 로댕은 까미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까미유의 영감과 감각 또한 로댕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요. 두 사람이 함께 한 시절 동안 로댕의 창작열이 왕성했다는 점입니다. 예술적 동지로서 이만한 커플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술가들 역시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까미유는 전반적으로 대리석을 정교하게 조각하는 스타일입니다. 로댕의 작품 일부는 그녀의 손길을 거쳐 갔음을 터치에서 직감할 수 있는데, 사후에 평자들이 서명이 없는 작품들은 모두 로댕의 작품으로 분류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시기적으로 까미유 작품이 로댕보다 먼저 제작된 것으로, 이 작품을 통해 로댕이 까미유를 이용해 왔고 모방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Young Girl With A Sheaf>,1890/Arthive

 

 

까미유의 <밀단을 진 소녀 Young Girl With A Sheaf,1890> 조각입니다.  로댕의 <갈라티아 Galatea ,1889>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커다란 다리나 서로 맞댄 툭 튀어나온 무릎 등의 표현에서 이러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까미유의 이  작품은 테라코타로만 전해지다 1983년 브론즈 작품이 발견되었습니다.

 

 

 

<Young Girl with Chignon>,1889/Reprodart

 

까미유의 <쪽진 머리의 소녀>와 로댕의 <웃는 소녀의 두상>도 유사한 작품입니다.  두 작품 모두 웃는 얼굴이지만 로댕의 것은 매우 천진난만한 반면 까미유 작품은 약간 냉소적인 웃음을 띠고 있습니다. 그 후 까미유의 폭넓은 작업으로 독창적인 결과물이 계속 판매되었고 작가로서 활약도 점점 커져갔습니다. 하지만 로댕과의 사랑은 갈등이 더 심해졌고 조강지처 로즈뵈레의 질투도 심해지며 둘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합니다. 로즈와의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고 자신과 정식으로 결혼하기를 원했던 까미유와 오랜 세월 함께 한 로즈를 저버릴 수 없었던 로댕의 갈등이 심해지던 때이기도 합니다. 임신과 유산으로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갈등도 증폭되었습니다. 

 

 

 

1892년 까미유는 로댕의 작업실에서 나와 독립합니다. 까미유는 로댕과 함께 10년 동안 창작에 몰두하였으나 자신의 이름을 서명할 수 있었던 작품은 극히 소량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로댕의 작품을 도와주는 것은 물론이었고 로댕을 위해 기꺼이 모델이 되어 스스로 포즈를 취해 줬으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델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을 소요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매우 힘든 일로 보수를 주는 게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까미유는 사랑하는 로댕을 위해 단 한 푼의 모델료도 받지 않았습니다. 정기적인 급여마저도 받았다는 증거는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왈츠 추는 여인>/Pinterest

 

 

 

 

로댕이 자신을 떠나가고 만든 작품으로 작품 속 남녀는 다정하게 왈츠를 추고 있습니다. 클로델은 로댕을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잊지 못하고 그와의 추억을 곱씹었습니다. 동생의 친구였던 드뷔시와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그녀의 작품 중 이 작품이 그를 위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Les Causeuses,1897/ AEQAI

 

이 시기 까미유는 일본 화법을 수용하여 자연을 통한 크로키 작업에 열중하면서 전통적인 기법에서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리석과 부론즈로 만든 조그마한 군상, <수다쟁이들>, <파도>, < 벽난로 앞에서의 꿈>등의 작품이 탄생되었습니다. <수다쟁이들>은 한 모퉁이에 모인 네 여인들을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한 여인은 이야기를 하고 나머지 여인들은 듣는 모습입니다. 이야기하는 여인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진리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면, 머리를 맞대고 있는 여인들의 자세에서는 비밀이 감춰져 있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감정이 경이롭게 묘사되어 있어 매우 호평을 받았습니다. 어떤 예측도 불허하는 강한 의지를 작품 속에서 보여준 <수다쟁이들>은 특히 그녀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이 되고 있습니다. 

 

 

 

 

 

<The Wave>,1897/The Ekphrastic Review

 

 

 

1897년 <파도>는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처한 인간의 연약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거대한 파도가 3명의 여인들을 곧 덮치려는 듯하여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서로 손을 잡고 겁먹은 표정으로 난관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Le Reve au Coin du Feu>,1899/ Reddit

 

 

 

세계 전람회에 출품됐던 <벽난로 앞에서의 꿈>은 비롱 알퐁스로 치드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 한 여인이 등받이 의자에 앉아 벽난로 앞에 머리를 기댄 채, 피곤에 지쳐 잠시 꿈속을 거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02년 대리석으로 다시 제작되었습니다.

 

 

 

이즈음 여동생 루이즈가 남편과 사별해 어려움에 처해 있었는데 , 루이즈의 외로움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까미유가 모른 채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런 책임이 아버지에게 돌아가자 까미유의 부담은 더욱 커져갑니다. 1898년 까미유가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들이 전시 도중 도난당하자 이를 로댕의 음모라 생각한 그녀는 그를 비난하며 영원한 결별을 선언합니다. 그녀 나이 31살이었습니다. 

 

 

 

<성숙 The age of maturity>1899,오르세미술관/오마이뉴스

 

 

 

 

 

작품명 <성숙>이란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서 죽는다는 철학이 담긴 내용입니다. 보통 어린이, 어른, 노인 이렇게 삼대로 표현되지요. 이 작품에선 젊은 여인, 중년 남자, 노년 여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젊은 여인은 애원하는 자세이고, 중년 남자는 무기력하며 노년 여자가 중년 남자를 데리고 가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관계를 아는 이들이라면  늙은 부인 '로즈'에게로 떠나간 로댕을 그리워하며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끌로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클로델의 <성숙>(1899)이란 작품을 본  로댕은 이 작품으로 인해 자신이 큰 곤욕을 치르게 될까 봐, 클로델이 작품을 주물로 완성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까미유는 설명합니다. 남자는 한 예술가로서의 한 인간이고 늙은 여자는 자기 안에 너무 일찍 늙어버린 여자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젊은 여자는 그저 남자에게 매달리고 싶은 자기 안에 가엾은 젊은 여자를 표현한 것이라고요. 그래서 이 작품은 까미유 내면에 존재하는 삼위일체를 담고자 했다고 말입니다.  까미유는 이 작품으로 극찬을 받게 되고 조각가로서 인정받고 돈도 벌게 됩니다. 

 

 

 

 

 

 

<Persee et la gorgone>,1902/Wikimedia Commons

 

 

로댕과의 결별 후 홀로서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나이에 비해 훨씬 늙고 살찐 모습으로 변해있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현실을 탈피하고자 술을 많이 마신 것이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작품 속에 반영하였는데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버린 그리스 영웅 페르세우스와 고르곤을 조각한 모형에 까미유의 형상이 들어 있습니다. 목이 잘린 조각품의 형상이 그녀의 모습으로 대변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그녀는 스스로를 한 남자 영웅에 의해 자신의 무한한 힘과 숨통이 끊긴 괴물 즉 , '고르곤'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La Fortune,1904/Arthive

 

 

 

그녀는 튀렌느 거리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다음 해 1월 부르봉 지방의 생 루이성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녀의 20여 점의 석고상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화상 위젠느 블로와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녀의 작품들을 청동으로 제작하여 상업화하려고 했습니다. 까미유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들을 그에게 넘겼습니다. 1900년에 제작한 <운명>은 상체는 앞으로 가려는 데 하체는 오히려 뒤로 물러서려는 듯한 인체의 대조적인 움직임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두 눈을 가리고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또는 남자 없이 혼자서 왈츠라도 추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오직 자신의 운명을 음악적 리듬감에 맡긴 듯 팔을 높이 쳐들고 있습니다. 까미유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1905년 12월 4일 -16일까지 까미유는 블로와의 화랑에서 13점을 내놓고 <까미유 작품 전람회>를 가졌습니다. 이때 그녀의 심정은 환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는 블로와 가 전시회를 위해 준비한 의상을 입고 부축을 받으며 전람회장에 나갔습니다. 전시장은 많은 인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녀는 내심 자신의 아버지를 간절하게 찾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전시장에 그녀의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며 방문했는데 눈은 빛나건만 골이 깊게 파인 주름살이며 어느덧 일흔아홉 살의 늙은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1906년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우울증과 로댕에 대한 피해의식 및 정신착란 증세로 고통을 겪습니다. 그녀는 점점 더 심해지는 피해망상증과 편집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모든 실패와 불공정함에 대한 쓰라린 감정을 온통 로댕에게 돌렸습니다. 로댕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친 것도 부족해 자신을 죽일 음모를 꾸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작업실에 틀어박힌 채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작품 활동도 못하고 빈곤과 알코올중독, 그리고 스폰서의 권유로 하게 된 마지막 전시도 완전히 실패하면서 그녀는 낯선 사람이 되어갑니다. 반면 로댕의 작품들은 파격적이고 변형적이라는 극찬과 더불어 대단한 호응을 얻으며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그녀에게 준 재능을 모두 그녀의 불행을 위해 쓰였다.

-남동생 폴-

 

 

까미유는 일종의 조현병을 앓았던 모양입니다. 조현병이란 사고, 지각, 행동, 사회활동 등 다양한 정신기능의 이상을 초래하는 정신병으로 젊어서 발병하며 만성의 경과를 밟고 인격의 황폐를 초래하는 병이며 흔한 증상으로는 환각과 망상이 있습니다. 40살에 조현병에 걸린 후 그녀는 예술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세상이 두려워 은둔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지만 어머니와 남동생은 그녀를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녀의 존재는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추고 싶은 존재였던 거죠.

 

 

 

 

1906년 가족들 모두 외교관이 된 폴을 따라 중국으로 가게 되고 가족들 없이 혼자 남겨진 까미유의 병은 더 깊어지게 됩니다. 1913년 평생 후원자 역할을 해 온 아버지까지 죽게 되자 엄마와 남동생은 그렇게도 집에 가서 함께 살고 싶다는 까미유를 정신병원에 넣게 됩니다. 1914년 아비뇽의 몽크베트게 병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이후 30년 동안이나 수용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치료약도 없었고, 인권이 유린되어 묶이거나 감금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키미유는 남동생에게 지속적으로 퇴원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가족과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1943년 사망하게 됩니다. 1917년 로댕도 사망하고 1943년 정신병원 수용 30년 후 79세의 나이로 쓸쓸히 사망합니다. 당시 가족도 없던 그녀는 공동 매장되어 현재 무덤도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까미유 끌로델 박물관/  Aube Champagne

 

https://www.youtube.com/watch?v=bWuZY6zdbNY&t=91s

 

 

 

 

그렇다면 로댕은 엄청 나쁜 남자일까요? 로댕역시 파탄으로 끝난 이후에도 클로델을 사제지간과 연인을 넘어 서로의 작품세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한 예술적 '동반자'로서 존중했습니다. 실제로 도미니크 보나의 <위대한 열정/아트북스>에 따르면 로댕은 클로델의 정신병원 수감 이후에도 금전적 지원이나 '카미유 끌로델 미술관'을 지으려는 노력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녀의 예술활동 재개를 돕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남성 예술가에게 버림받은 아름다운 여제자 카미유 끌로델이 아닌, 로댕마저 흠모했던 재능을 지녔던 여성 예술가로서 그녀를 바라봄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을 모델로 한 영화도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고 비교해 보는 것도 괜찮은 경험일 듯싶습니다. 보이는 것들이 더 많아질 테니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qvz5oY3tWNI

 

 

영화 <까미유 끌로델>(2013)은 연인의 짙은 그림자에, 여성 예술가라는 굴레에 갇혀 외면당한 조각가 클로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브루노 뒤몽 감독이 연출하고, 줄리엣 비노쉬가 클로델 역을 맡았습니다. 영화는 클로델이 로댕과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그 사랑과 차별로 인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LBG1cbqn3o

 

 

 

 

오늘날  미술사학자 클로딘 미셸은 이러한 최고의 제자가  뛰어넘으려 한 것이 그녀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고 지적합니다.  로댕을 비롯한 예술가들에게 허용되던 에로스의 지성을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표현하려 했던 여성 조각가가 만난 것은 바로 19세기라는 시대의 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천재성을 '로댕'의 영향 아래에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일부 비평가들로 인해 심해졌고요. 이로 인한 그녀의 정신적 불안은  가족에 의해 더 부풀려졌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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