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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유럽 역사의 주인공은 네덜란드였습니다. 동인도회사를 통한 국제무역과 금융의 융성으로 돈이 넘쳐났거든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 던 암스테르담에 네덜란드 독립과 함께 여유자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니  미술품에 투자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지금의 아트 재테크처럼 말이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절 그림을 소유할 수 있는 계층은 군주나 귀족과 같은 부유층이었습니다. 반면 네덜란드에서 일반 서민들이 자신의 집 혹은 가게를 꾸미기 위해 미술시장이 활기를 띱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렘브란트를 비롯한 유명화가들의 손이 모자랄 지경으로 말입니다.

 

 

렘브란트 자화상/아트조선

 

 

'화가들의 화가','잊혀진 화가'로 불리던 바로크의 거장 렘브란트입니다. 그가 남긴 작품 수는 유화, 수채화, 동판화, 데생 등을 포함하여 2천여 점이 넘습니다. 성서, 신화, 역사, 풍경, 풍속, 위인 등  광범위하게 소재를 다룬걸로도 유명합니다. 빛의 효과를 통해 색채 및 명암의 대조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그림 속에는 환희, 슬픔, 자만과 후회, 그리고 인간적인 고뇌가 함께 합니다. 또한 신화와 종교의 엄숙함도 깃들여있고요. 풍경의 장엄함과 자화상의 내면 등 탁월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그를 '근대적 명암의 시조'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 알프레이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의 뒤를 이어 판화를 발전시킨 장본인이 렘브란트입니다. 20대 초반 테크닉을 갈고 닦기 위해 혹은 인물 탐구를 위해  자신을 모델로 '자화상'을 그리며 연습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vBwwyjHlhs

 

 

 

<근대 유럽을 완성시킨 30년 전쟁>/일베 저장소

 

 

 

아주 어린 나이부터 예술가로서 놀라운 재능을 보입니다. 그는 단순하고 매력적이면서도 극적인 풍경뿐만 아니라 역사적, 성서적, 신화적인 장면 등 모든 종류의 초상화의 달인이 되어갑니다. 그는 그의 메시지를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종류의 자료와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구성 능력, 색채 사용, 그리고 그림자에 대한 접근법은  가장 자연스러운 순간들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빛과 질감에 대한 통달은 모든 창작품들을 통해 공통된 주제를 만들었습니다.예술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혁신적인 거장들 중 한 명으로서 그의 지위를 굳건히 합니다. 이러한 자질들은 그의 크고  야심 찬 초기 역사 그림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더 친밀하고 빛나는 후기 스타일에서 깊어지고요. 그의  작품이 네덜란드 황금기로 알려진 위대한 부와 문화 업적의 전형으로 보입니다. 


 

<The Anatomy Lesson of Dr. Nicholas Tulp>,1632/wikipedia

 

 

 

1631년 아버지의 사망이후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 정착하게 됩니다. <튀엘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 1632>는 그의 초기 걸작으로  공개 해부학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밝은 흰색의 주름진 칼라를 달고 어색하게 포즈를 취한 7명의 외과 의사와 니콜라스 튈프(Nicolaes Pitersz ,1593-1674) 박사의 그룹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1603년부터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일련의 단체 초상화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은 튈프가 1632년 1월 시행한 해부학 수업에 서 비롯됩니다. 일주일에 두 번 암스테르담의 이 의사는 암스테르담의 외과의들에게 해부학 이론 강의를 해주었습니다.  인체 해부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해부학 극장의 실제 시연에 참석한 장면인 거죠. 주로 사형당한 죄수들의 시신을 썼다고 해요.  시신의 악취는 어느 때라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매년 겨울에 한 차례의 공공 부검이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튈프박사는 1632년에 두 번째 부검을 했고, 렘브란트가 그의 유명한 그림을 그린 것도 이때였습니다. 이런 중요한 주문을 의뢰받았을 때, 렘브란트는 아직 젊은 나이였습니다. 동료나 선배 화가들이 일렬로 주르륵 나열해 놓은 명암사진 같은 딱딱한 초상화를 그릴 때였습니다. 반면 렘브란트가 그린 외과의사들은 각기 스토리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자세히 보고 싶어 고개를 쭈욱 내민 호기심 가득한 외과의가 있는가 하면 두려워하는 표정의 외과의 모습도 보입니다. 별 관심 없어하는 외과의 모습도 보이고요. 덕분에 현장의 상황이 생동감 있게 전해집니다. 점잖은 스타일의 초상화에 비해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이 돋보입니다. 그저 젊은 화가 렘브란트의 탁월한 관찰력과 재능이 놀라울 뿐입니다.

 

 

 

 

관람객들의  관심은 팔의 근육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튈프 박사에게 집중돼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뷜프 박사가 근육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시체의 팔뚝을 절개한 순간을 선택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들이 강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요. 시체의 표현 또한 인상적입니다.

 

 

 

참가 의사들의 명단을 들고 있는 일곱 번째 남자 보이시나요? 그는 튈프 박사와 나머지 인물들을 구성적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공개 해부학 강의는 암스테르담의 외과 의사 조합이 정부로부터 허가받아 처형된 시신을 인도받아 1555년부터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해부학의 발전이라는 학문적 성격이 짙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입장료를 받고 일반인의 참관이 허용되기 시작하면서  암스테르담의 대중적인 행사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참을 수 없는 호기심 때문이지요. 또한 이런 유형의 단체 초상화는 협회나 다른 조직의 임원들을 기록하고 기리는 데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확립된 독특한 네덜란드식  전통인 거죠. 렘브란트는 이 그룹 초상화로 젊은 나이에 일약 스타화가가 되어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1633/reddit

 

https://www.youtube.com/watch?v=GK4eimjJv04

 

 

 

 

 

 

렘브란트의 유일한 바다풍경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예수가 갈릴리해에서 일어난 격렬한 폭풍 속에서 기적을 일으킨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루벤스의 영향도 보입니다. 바람이 불어오는 작은 배를 전복시키려고 위협하는 어둡게 휘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배의 돛대가 대각선을 만들어 구성을 두 개로 나눕니다. 왼쪽 에는 극심한 위험과 격렬한 활동이  곧 닥칠 것처럼 보입니다.어두운 구름의 가장자리, 불안해하는 사람들, 찢어진  돛을 비추는 황금빛이 보입니다. 오른쪽으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뱃멀미를 하는 듯 보입니다. 키잡이로 보이는 인물이 부딪치는 파도로부터 방향타를 고정시키고 있고요. 이 와중에  파란색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는  단 한 명의 인물만이 밧줄로 자신을 고정시켜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는 렘브란트의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네요. 렘브란트는  종종 자신의 작품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를 즐겼습니다.

 

 

 

변화무쌍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에 관람자 역시 초대된 듯한 기분이 들게합니다.   자연의 거대한 극적 힘은 인간을 시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또한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로도 표현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이해하셨을 때, 일어나서 폭풍을 향해 "조용히! 가만히 있어라! 그러자 폭풍이 잠잠해졌다. "라는 성경구절로 위태로운 상황을 마무리하십니다. 렘브란트는 왼쪽의 동적인 이미지와 오른쪽의  정적인 이미지를 한 화면에 표현해 냅니다. 이 부분이 대부분의 화가들과 다른 렘브란트만의 천재성입니다. 둘 중 한 가지만 택해 그리는 것이 당시 화가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거든요. 섬세한 묘사, 인물들의 다양한 표현, 세련된 붓놀림, 그리고 밝은 섹상은 렘브란트의 초기 스타일을 잘 드러내 줍니다. 


 

<Man in Oriental Costume>,1632/Flickr

 

 

 

 

1630년대 렘브란트는 그의 그림, 드로잉, 그리고 에칭화에 중동지역의 의복을 입고 있는 많은 인물들을 묘사했습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상업적인 기업들은 17세기 초까지 중동 지역을 드나들었습니다. 레반트(동부 지중해 및 그 섬과 연안 제국)사람들은 암스테르담의 거리와 시장에서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상상의 페르시아인(지금의 이란인), 오스만 (터키 사람)또는 다른 "동양인"왕자들의 초상화가 이 부산한 도시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천으로 몸을 감싸고 위엄있어 보이는 거대한 인물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깨와 머리는 앞뒤에서 극적으로 빛나고요. 그의 황금 의복은 금속 스카프와 은색 터번 아래서 반짝이고 있고, 장신구와 보석들은 광채를 내며 귀한 신분임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은 인물과 더불어 빛에 대한 화가로서의 렘브란트의 탁월함을 보여줍니다. 끝없는 깊이를 만들기 위해 그의 제한되고 다운된 팔레트의 사용법이 놀랍습니다. 그는 고르지 않은 황금빛 조명과 대담하고 늠름한 스트로크로 붓칠 한 하이라이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 깊은 그림자를 표현해 냅니다. 때로는 페인트를 많이 사용하기도 하고,  아주 조금 사용하기도 하며,  붓 손잡이로 캔버스를 긁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가 원하는 정확한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해봅니다.

 

 


 

 

 

 

 

<Belshazzar's Feast>,1635/wikipedia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마지막 왕인  구약성서의 벨사살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그린 작품입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네브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성전에서 약탈했던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을 가지고 신성모독을 저질렀습니다. 그가 연회장에서 많은 손님과 귀족들을 위해 포도주로 그릇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성전에서 제례의식 할 때만 쓰이도록 성별 된 그릇에 포도주를 부은 거지요. 검은 구름에서 손 하나가 나와 글씨를 쓰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이 모습에 기겁을 합니다. 놀란 왕이 예언자 다니엘을 부르고, 그는 그 단어들이 곧 바빌로니아가 페르시아 제국에게 정복되리라는 뜻이라고 해석해 줍니다. 그 일은 바로 그날 밤에 일어났고요.

 

 

 

당시 화가들은 화려한 옷차림의 바빌로니아인들이 유령의 손을 보고 경악하는 장면을 즐겨 그렸다고 합니다.렘브란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작품 안에서 드라마틱하고 움찔하는 자세로 관람객들을 집중시킵니다. 왼쪽에 충격을 받은 손님들 그룹이 있습니다.  위쪽 벽에는 유령 같은 이미지가 쓴 글자가 보이고요. 왕인 벨사살도  놀란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뒷벽에 반짝이는 메시지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터번 위에 왕관과 넘어진 포도주 잔에 흘러나오는 액체의 표현이 섬세합니다.  주변인들의 반응이 더 놀랍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여종 하나가 자기도 모르게 물그릇을 자기 손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19세기 빈센트 반 고흐가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반할 만하지요. 고흐가 "네덜란드 공화국의 위대한 세계적 초상화 화가"라고 선배화가 렘브란트를 추켜세웠을 정도로 말입니다. 

 

 

 

 


 

 

<Danae>,1636/wikipedia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다룬 작품이 많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역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 왕 아크리시오스의 딸 다나에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녀의 아버지인 아크리시오스 왕은 그의 딸이 자신을 죽일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후 딸을 청동으로 된 방안에 가두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킵니다. 그러나 다나에를 연모한 제우스는 그녀의 여종의 눈에 미끄러져 내리는 한 줄기 빛으로 다나에 앞에  나타납니다. 다나에와 제우스의 결합을 통해 페르세우스가 태어나고요. 그는 정말로 그의 할아버지를 죽이게 되지요.

 

 

 

정교하게 반짝이는 금으로 된 침대 지지대, 다나에의 보석으로 장식된 슬리퍼가 놓인 두꺼운 양탄자, 그리고 부드러운 벨벳천으로 덮인 방안은 관객들을 순식간에 작품 속으로 불러들입니다. 왼쪽에서부터 웅장한 천상의 황금빛이 쏟아지며 다나에의 얼굴과 몸을 따뜻하게 비춥니다. 그 효과는 매혹적인 여성을 둘러싼 모든 침구, 덮개, 그리고 빛나는 금속 장식품에서 부드러움과 관능성을 만들어 냅니다. 꽃팔찌와 다른 보석으로만 치장을 한 다나에는 분명 이 그림의 주제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황금빛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황금빛이 새어든 방안은 포근한 잠자리와 풍만한 여체로 감미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슬쩍 들어 온 제우스를 반기는 다나에의 모습도 보입니다. 화려하면서도 매우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실내 풍경이 플랑드르 화가답다 싶습니다.  그림에서 다나에 위에 맴도는 것은 순결의 상징인 손이 묶인 황금 천사의 모습입니다.  황금 천사의 표정 한번 살펴보고 가세요. 부드러운 아름다움과 빛에 대한 렘브란트식 표현법은   경이로움과 함께 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다나에를 연구하면서 프란스 할스를 볼 때마다 ...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하지만 렘브란트를 보면 포기하고 싶다"
-독일 인상파 화가 막스 리버반(Max Leiberman)-




 

 

 

https://www.youtube.com/watch?v=HjYNGjshjJQ

 

 

 

 

 

<The Night Watch>,1642/ The Guardian

 

 

 

 

 

17세기, 이 시기에 제작된 그림이나 판화의 수는 엄청납니다. 그중 상당수는 뛰어난 품질을 가지고 있고요. 이 작품은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절정이었던 1642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램브란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고요.  <The Night Watch>로 알려진 렘브란트의 이 작품은  그 스타일과 엄청난 크기로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실제로는 한낮에 일어나는 일을 그린 거라고 합니다. 이는 1940년까지 그것을 덮고 있었던 어두운 광택 때문에 이름이 잘못 붙여진 거라고 합니다. 민병대장의 명령 아래 부대가 출격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인물들이 부산스럽지요.   <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의 중대>라는 제목이 더 어울립니다. 당시 활동했던  민병대의 그룹 초상화라고 합니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도시를 수호하거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소집될 수 있는 건강한 남자들의 모임이지요.  16명의 부하들에 둘러싸여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붉은 허리와 검은 옷을 입고 있는 프란스 반닝 코크(Frans Banning Cocq) 대위와 흰색 허리띠와 노란 옷을 입고 있는 빌렘 반 라위턴뷔르흐(Willem van Ruytenburch) 중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문 위의 방패에는 초상화 속의 1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품 구성을 목적으로 캔버스 안에 18명의 민병대원들과 더불어 어린 아이나 북 치는 사람을 비롯한 16명의 가상 인물들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그림으로 인정받았을 때가 렘브란트 인생의 정점이었습니다. 자신이 실험해 오던 모든 기법들이 총동원되었습니다. 문제는 자기 혁신적 표현들로 그려 낸 새로운 스타일의  초상화를 돈을 내고 주문한 작품 속 인물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불만스러워했지요. 똑같은 돈을 내고 자신의 얼굴을 찾기가 쉽지 않아 말입니다. 

 

 

 

 

민병대는 그들이 모여 연습했던 장소인 크로브니어스둘른(Kloveniersdoelen)에서 정해진 시간에 만났습니다. 암스테르담에 새롭게 지어진 그들의 건물 중앙 홀에 걸기 위해서 6개의 대형 민병대 작품과 장교들의 단체 사진을 의 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렘브란트는 6개의 큰 작품 중 하나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던 거죠.  대장 코크와 대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나, 그들의 창과 총이 이쪽저쪽으로 비스듬히 있는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렘브란트가 그 인물들을 표현해 낸  방식은 이례적인 방식이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인물들을 그룹 짓거나 줄을 세우는 등의 전통적인 구성 방식과는 매우 다른 그만의 역동적인 방식으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그룹 초상화 안에서 전체 부대의 개성을 포착하고 있었습니다. 관람자는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활력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빛과 그늘의 두드러진 사용으로 강화되고요. 민병대 대원들은 방금 동작을 취해 이제 막 행진을 하려는 듯 어두운 문에서 빛으로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뒤에는 중대의 깃발이 보입니다. 대장 왼쪽의 금발 머리에 진주로 장식을 하고 노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완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녀는 민병대를 상징합니다. 그녀의 벨트에 매달린 닭의 발톱은 민병대의 심벌을 의미하고요.  민병대 의식의 뿔잔을 들고 있는 소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마스코트가 됩니다. 

 

 

 

 이 그림으로 인정받았을 때가 렘브란트 인생의 정점이었습니다. 이 작품 성공 이후 암스테르담 중심가의 비싼 지역으로 고가의 집을 사 이사를 합니다. 상류층이라도 된 것처럼 다양한 장식품 사치품들을 마구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자화상에서 자주 보이는 비싼 베레모차림을 고수하기도 하고요. 절제를 모르는 낭비벽은 암스테르담의 거품경제가 끝나가자 파산에 이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첫 번째 아내 사스키아 마저 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nT7N3kE4gg

 

 

 

 

 

 

 

 

 


 

 

<황금투구를 쓴 남자>,1650/Pinterest

 

 

투구의 강렬한 묘사와 대비되는 어두운 인물의 표정, 목보호대의 반사광은 렘브란트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Bathsheba at her Bath>,1654/wikipedia

 

 

 

 

렘브란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실물 크기의 캔버스는 성서의 등장인물, 다윗 왕과 군대의 장군 우리야의 부인 밧세바를 그린 그림입니다. 솔로몬의 어머니이기도 하지요. 성서의 이 인물은 대부분의  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고뇌에 빠진 밧세바에 집중하여 표현해 냅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은 궁전 테라스에서 그녀가 목욕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됩니다. 열정적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요.  다윗왕은  편지를 보내 자신에게 오도록 소환하지요.  다윗 왕은 그녀가 자기 장군들 중 한 명의 아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욕망이 다윗왕을 눈멀게 합니다. 

 

 

 

젊은 밧세바는 옷을 벗은 채 흰 천 위에  앉아 오른손에 편지를 들고 있습니다. 오리엔탈 스타일의 두건을 쓰고 있는 그녀의 여종은 그녀의 발을 말없이 말리고 있고요. 그녀는 고민에 빠집니다.  만약 그녀가 다윗 왕에게 간다면, 그녀는 그녀의 남편을 배반하게 됩니다. 그녀의 난감하고 심란한 마음 상태가 옆모습을 통해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고민을 하던 밧세바는 결국 이에 응했고, 그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그녀와 여러 차례 정을 통합니다. 결국 밧 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다윗 왕은 밧세바를 영원히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이자 군대장관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 도저히 살아올 수 없는 위험한 전투에 우리야(Uriah)를 내보내 죽게 합니다.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 왕은 즉시 밧 세바와 혼례를 올렸습니다.

 

 

 

 

신은 후에 이 죄에 대해 다윗왕을 심하게 벌했습니다. 밧세바는 임신했던 첫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예언자 나탄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윗을 꾸짖고 저주하였고 아이는 일주인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렘브란트는 이러한 이야기 중 다윗의 욕망을 표현하거나 다른 세부적인 일화를 따로 넣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왕의 편지로 인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밧세바의 표정을 통해 상황을 전달할 뿐입니다.  결국 피해자인 동시에 죄인이 되어버린 밧세바를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인간 내면에 깃든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름다운 여인 밧세바를 그리기 위하여 모델은 아마도 렘브란트의 보모로 들어온  핸드리케에 스토펠스(Hendrickje Stoffels)였을 겁니다. 첫 부인 사스키아가 죽고 젖먹이 아들 티투스를 키우고 집안 살림을 해줄 보모가 필요했습니다. 그들 중 핸드리케와 연인 사이로 발전을 했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렘브란트와 티투스에게 헌신 적었습니다. 다만 사스키야가 렘브란트의 절제 없는 생활이 마음에 걸렸나 봅니다. "재혼하면 아들 '티투스'에게 모든 유산을 남기겠다."라는 유언을 했거든요. 렘브란트는 헨드리케아와 결혼도 못하고 돈도 없고 그 상황에 덜컥 '코넬리아'라는 딸까지 임신하게 됩니다. 당시 개혁파 교회가 주류였던 암스테르담에  둘 사이의 관계는 이슈가 되었고 , 그녀는 '간통'이란 이름으로 법정에 서야 했습니다. 결국 딸 '코넬리아'를 낳고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요.

 

 

 

관람자의 시선까지 외면한 밧세바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예술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던 렘브란트를 어떡하든 돕고 싶었던 사람이 핸드리케였습니다. 일거리가 없어 점점 잊힌 화가 취급 당하는 렘브란트의 모습을 보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핸드리케의 모습이 어쩌면 밧세바의 모습은 아니었을 까 생각해 봅니다.  

 

 

 


 

 

 

 

 

<Jacob Blessing the Sons of Joseph>,1656/wikipedia

 

 

 

렘브란트는 항상 자신을  성경, 고전 역사, 신화의 장면들을 표현하는 역사 화가로 생각했습니다. 1656년의 그림은 역사 화가로서 렘브란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 아닐까 싶습니다. 주제는 창세기 48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죽어가는 가부장 야곱이 그의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장면입니다. 그들의 아버지 요셉과 그의 아내 아세나스는 아이들 뒤에 서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왼쪽에 있는 두 남자와 조화를 이루며 그녀를 대단히 위엄 있는 중심인물로 만들어 놓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맏아들, 곧 므낫세에게 오른손으로 축복하기보다는 , 귀염둥이 아들인 동생 에브라임에게 첫 번째 축복을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아버지가 실수했다고 생각하였으나 야곱이 대답합니다. "나도 알아, 아들아, 나도 알아; ;그도 또한 예언자가 될 것이고 또한 위대해질 것이다. 

 

 

이 그림의 주요 초점은 야곱은 에브라임에게 축복을 내리고,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도울 때 활짝 펴진 손동작과 친절한 미소를 짓는 고령의 가부장들의 부드러운 제스처에 있습니다. 중앙 장면은 놀랄 만큼 효율적 사용과 정밀함으로 섬세한 노란색, 갈색, 붉은색으로 광범위하게 그려져 렘브란트 특유의 신성하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m8H6mIcLMB0

 

 

 

<세 개의 십자가>는 검은색 백색으로만 시각적 효과를 낸 렘브란트의 판화 작품입니다. 공간감, 입체감이 경이롭고 고급스럽습니다. 

 


 

 

 

 

 

<The Prodigal Son in the Brothel>,1635/wikipedia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 혹은 술집에 있는 탕자>라는 이름의 작품입니다.  부유한 귀족 출신인 아내 사스키아를 무릎에 앉히고 삐깔나게 큰 술잔을 들어 권하고 있는 렘브란트는 모든 것을 소유한 듯 만족한 표정입니다.  왜 아니겠어요. 젊은 나이에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쥐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요. 그런 렘브란트의 표정과 달리 아내 사스키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습니다. 남편의 낭비벽이 걱정되어 그럴까요? 아니면 다가올 그의 시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요?  인위적으로 과장한 표정과 태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솔직한 자기 고백 같기도 한 그림입니다. 

 

 

렘브란트는 1634년 6살 어린 사스키아와 결혼합니다. 부유하고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1636년 낳은 첫아들은 얼마 못 가 죽습니다. 1638년 낳은 딸 역시 한 달도 살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1640년 낳은 딸도 곧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1641년 드디어 아들 티투스가 태어났습니다. 렘브란트에게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내 사스키아는 젖먹이 아들 티투스 하나를 남기도 30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Titus as a Monk>,1660/wikipedia

 

 

 

렘브란트의 사랑하는 아들 티투스의 초상화입니다. 아버지 렘브란트는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본받았으면 했나 봅니다. 화가로서 렘브란트는 명성도 쌓았고, 신분상승의 욕구도 채웠습니다. 그러나 잘 나갈 때 절제하지 못해 결국 파산에 이릅니다. 암스테르담 경제가 악화되며  렘브란트의 삶도 바닥에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예술에서는 최고 절정을 맛보았지만 그것도 잠시 인생에서 최악으로 떨어집니다. 그런 삶은 자기 하나로 족하니 아들만큼은 자신과 같은 삶이 아닌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절제하는 삶을 살기를 아버지 렘브란트는 바랬는지 모르겠습니다. 1668년, 안타깝게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들 티투스마저 26살의 꽃다운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Self-Portrait with Two Circles>,1660/wikipedia

 

 

 

 

 

 

렘브란트는 40점 이상의 자화상을 그렸지만  글미에서처럼 그림을 위해 단정한 옷을 입고 판에 박힌 듯한 포즈를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인위적으로 포즈를 취하거나 공들인 복장을 한 구성원을 연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순히 빨간 옷 위에 모피로 된 가운을 입고, 흰 베레모를 쓰고 있습니다. 그의 나무 팔레트, 붓, 그리고 그림 그리는 동안 손을 안정시키기 위해 휴식처로 사용된 긴 팔받침을 들고 있습니다. 화가는 그 위에 묘사된 큰 원들과 함께 밝은 색의 벽이나 캔버스 앞에 서서 허리께에 한 손을 내린 채 관람자를 직접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후기 작품에는 페인트가 빠르고 두껍게 칠해진 얼굴과 모자처럼 미완성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영역에서는 렘브란트가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거나 긁어서 선이 콧수염, 왼쪽 눈썹, 셔츠 깃에 잘립니다. 얼굴은 그의 취약성과 현실성을 보여주는 반면 부드러운 그림자는 끊임없이 탐구하는 지적인 마음을 암시합니다. 둥글게 디자인된 평평하고 창백한 배경은 렘브란트에게는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렘브란트 뒷 배경에 그려진 두 개의 원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역사적으로  완벽한 원이 예술적 기량을 상징한다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인 조토(Giotto)는 한 때 교황에게 그의 숙달성을 보여주도록 소환되었고 그래서 그는 한 번의 동작으로 완벽한 원을 그렸습니다. 더 오래된 이야기는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궁중 화가인 아펠레스(Apelles)가 어떻게 그의 뛰어난 재능을 증명하기 위해 완벽한 선을 그었는지 묘사합니다. 너무 원초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따져보면 원을 찌그러지지 않게 동그랗게 그려내는 것도 내공이란 생각이 듭니다.

 

 

 

렘브란트의 의도는 전통적인 자화상보다 그의 내면까지 담아내기 위해 자신을 수없이 객관화 켰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미 고상한 상류층의 눈밖에 났습니다. 잘 팔리는 그림이 아닌 자기만족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두 개의 원을 담고 있는 티치아노의 미완성 자화상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요.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는 그 그림에 대해 '매우 미완성된 방식이지만 그 색깔과 효과는 감탄스러운 그림을 발견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장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도 이 작품을 직접 그렸습니다.

 

 

 

 

 

 


 

 

 

 

<루크레티아의 자살>,1664/아츠비-미술을 즐기는 사람들

 

 

 

 

이 그림은 로마 여성인 루크레티아의 실화를 다뤘습니다. 약 2500년 전 로마 황제의 아들 타르퀴니우스 섹스투스가 정숙한 루크레티아를 성폭 한 사건입니다. 가해자 섹스투스는 사촌지간인 루크레티아의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호시탐탐 노리던 일을 벌였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인 뒤 하인과 간통해 죽였다는 소문을 내겠다며 협박합니다. 이 모함대로 된다면 루크레티아의 집안은 불명예로 풍비박산이 나게 될 기가 막힌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르네상스의 많은 거장이 그렸던 이 무거운 주제는 렘브란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그는 루크레티아가 자결을 결심하는 순간을 그렸습니다. 렘브란트는 생생한 구도와 어두운 색감으로 여인의 참혹함을 탁월하게 표현했습니다. 몸은 치욕을 벗기 위해 죽음을 강요당하는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머리는 두려움의 무게만큼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칼끝이 향한 심장만이 환하게 대비되어 여성의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전합니다.

 

 

 

이 그림을 통해  렘브란트는 창의적인 상황설정과 내면을 나타낸 표정, 질감 표현이란 세 가지 특징을 만들었습니다. 렘브란트 후기 작품의 특징이지요. 성폭행을 당한 수치심과 끔찍한 기억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눈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렘브란트의 자유로운 질감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얀 리넨과 드레스 소매의 질감이 부딪히며 실제 옷처럼 살아납니다. 소매 부분에 사용된 나이프의 거친 질감이 보이시나요. 부드러운 리넨 사이로 붉은 피가 소리 없이 번지고 있습니다. 오른손에 칼을 , 왼손에 끈을 잡아당기면 자신의 가족들이 그녀 앞으로 달려오겠지요.  나이프로 표현된 거친 질감은 생생한 표현으로 느껴지게 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몰입하게 합니다. 남편은 자결해야 할 이유를 듣고 죽어가는 여인 앞에서 오열하다가 복수하러 달려가 루크레티아의 치욕을 갚습니다. 시민들은 가해자를 죽였고, 그의 아버지는 추방했습니다.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는 한 여인이 기폭제가 돼 로마 왕정이 붕괴하고 공화정이 시작했다고 지적합니다.

 

 

 


 

 

 

 

 

<The Jewish Bride>,1667/wikipedia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라고 알려진 작품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쓰다듬고 있는 장면입니다. 굳은 신뢰를 주고받는 느낌도 들고요. 유독 이 그림앞에 중년 부부들이 멈춰서 그림을 한참동안 감상하고 간다고 합니다. 여성의 다홍색 치마의 색깔과 남성의 황금색 소매부분의 색깔이 환상적입니다. 질감의 표현 못지 않게 두 사람의 손 표현 또한 섬세하고 다정합니다. 마치 신뢰로 다져진 성숙한 사랑을 주고 받는 느낌이 들정도로 말입니다. 렘브란트의 아들 티투스와 자신에게 헌신했던 보모이자 연인이었던 핸드리케에 마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겨진 중년의 렘브란트가  죽기 직전 그려 낸 그림 중 하나입니다. 남성은 아니지만 여성의 모습은 죽은 그녀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세기 초에  이름을 얻었지만, 그 그림의 주제는 오늘날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의 목록에는 '구약성서 인물로서의 부부상, <유대인 신부>로 알려져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고요. 이 설명은 이 그림을 렘브란트의 동시대의 단순한 두 사람의 이중 초상화로 볼 것인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커플을 그린 종교화로 볼 것인가? 혹은 이 둘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볼 것인가 하는데 이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한 두 가지 가능성, 즉 성경의 인물로서 불멸의 존재였던 남자와 여자의 조합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은 이  커플이 창세기 26장에 나오는 이삭(이사악)과 리브가(레베카)를 대표한다고 믿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를 그린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 한 장의 소묘가 뉴욕에서 발견됐습니다. 그 소묘와 이 그림은 배경과 인물의 위치에서 분명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X선 조사 결과, 서 있는 두 사람은 처음에는 소묘에서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좀 더 중립적인 설명은 그 남자가 그의 아내에게 사랑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경우에 그림의 주제는 결혼의 미덕이 될 것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34년 J. 스미스가 작성한 목록의 <생일 축하 인사>에서 나왔습니다. 1826년 이 그림을 가지게 된 스미스는 1833년에 이것을 암스테르담의 수집가 아드리안 반 델 호프에게 팔았습니다. 호프는 이 그림에 "유대인 신부이다. 그의 아버지가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다."라는 설명을 달았습니다. 이것이 이 그림의 통칭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이 그림이 실존하는 모델을 그린 것만은 확실합니다.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1661-1669, /wikipedia

 

 

 

 

 

렘브란트가 죽기 직전인 1668-1669년 경에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의 일부분입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마지막 유작으로 미완성 작품입니다.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Hermitage Museum)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262cm*205cm(103in*81in) 크기의 대작입니다. 그림 속 인물의 크기가 실제 사람의 크기와 같으며, 그래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 속 한 사람, 한 사람과 대면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몇 주나  몇 달 만에 그린 것이 아닙니다. 6년 정도 구상했고 죽기 2년 동안 집중적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렘브란트는 캔버스 위에 한 사람, 한 사람 그릴 때마다 그 인물에 대해 수만 번 생각했고, 또 자신이 얼마나 그림 속 그 인물과 유사한지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캔버스에 탕자를 그리며 자신의 삶이 마치 탕자와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을 그리면서 자신의 말과 행동이 마치 첫째 아들과 같이 교만하고 이기적이었음을 발견합니다.

 

 

 

루카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의 주인공은 얼핏 보면  아버지의 품에 안긴 둘째 아들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림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둘째 아들에게 향하고 있고요. 탕자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 먼 곳으로 떠나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모든 유산을 탕진했습니다. 굶주림과 곤궁함에 지쳐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탕자가 된 둘째 아들의 몰골 좀 보세요.  한쪽 발에는 신발조차 없습니다. 머리카락은 다 빠져버렸고요.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야 단 한번 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신발과 옷과 반지를 주며  크게 환대합니다.

 

 

 

렘브란트는 캔버스에 둘째 아들을 그리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젊었을 때 화가로서 성공하며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습니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니 탕자처럼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모든 돈을 낭비했습니다.  또한 아들과 딸과 아내를 잃어버리는 큰 상실의 아픔도 겪었습니다. 돈도 가족도 모두 잃고  나이가 들어 병들고 외로운 가운데, 렘브란트는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줄 하느님의 품을 그리워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을 그리며 자신이 바로 그 탕자이고, 하느님의 용서와 위로가 필요한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림에서 눈이 짓무른 듯한 아비는  커다란 붉은 외투를 입고 있습니다.  외투는 고단한 나그네가 쉬어 갈 수 있는 장막을 상징하기도 하고, 새끼를 품고 지키는 어미새의 날개를 연상시킵니다.  많은 현대 작가들은 말합니다. 렘브란트가 가까이 지내기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는 후원자, 친구, 심지어 자신의 가족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은 비난하고 공격하는 유형의 사람이었거든요.

 

 

 

아버지는 탕자를 측은함과 사랑의 얼굴로 바로 보지만, 물끄러미 서 있는 첫째  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것이 마땅치 않은 가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또 가져갈까 봐 경계하면서 냉담하게 동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유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를 위한 잔치를 벌인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고 불평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닮은 아들이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못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아들을 조용히 타 아르며 잔치에 같이 참여하라고 권유합니다. 

 

 

아버지와 탕자 위로 빛이 쏟아집니다. 첫째 아들의 얼굴에도 작은 빛이 어른거리고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또 다른 형태의 아버지와 멀어진 탕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겉모습은 둘째 아들 같은 탕자의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은 첫째 아들같은 탕자의 모습으로 시계추가 되어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렘브란트 그림 속  두 손은 크기가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탕자의 등을 토닥여 주는 손은 어머니의 치유의 손길이고, '이제 다시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마라.' 하듯이 지그시 누르는 아버지의 손은 용서의 손이라고 말합니다.

 

 

 

 

렘브란트는 젊어서부터 탕자의 비유에 대한 그림을 여러 번 그렸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그린 탕자의 그림은 방탕한 탕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노년에 그린 이 그림은 아버지의 용서와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라는 이 그림을 보면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노심초사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봐 주십시오. 작은 아들이 먼 곳에서 오고 있을 때 그를 보고 버선발로 뛰어갔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주십시오. 큰 아들이 불평하고 있을 때 그 아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와서 그를 달래고 잔치에 함께 가자고 초대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보아주십시오. 

 

 

 

 


 

 

 

 

렘브란트의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다.
-루시언 프로이트(영국 사실주의 화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과 함께 렘브란트는 인생에서 최악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렘브란트 말년, 자신의 죽음을 지켜볼 사람 하나 없이 빈민가의 작은 독방에서 임종을 맞습니다. 아들 보내고 11개월 후의 일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뒤돌아 보고 심오한 내면의 세계를 연구했습니다. 일감이 없을 때도 예술에 궁극에 도달하고자 할 수 있는 실험은 다 해 보았습니다. 바닥을 치는 경험을 통해  세월의 무게를 담아내고자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자화상>을 그리며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 렘브란트를 '화가들의 화가'라고 부르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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