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특히 인물과 인물 사이 감정선을 예민하게 표현한 예술가로 높이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특히 그의 모든 그림이 잘 짜인 소설 같은 밀도를 갖는다는 평이 따라오지요. 민중의 삶과 꿈을 붓칠한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IIya Repin, 1944-1930을 소개합니다.
레핀의 모든 그림은
레핀 개인만의 진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러시아 미술 전체의 진보였다.
그의 모든 그림은 사건이었다.
- 네스테로프-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재학 시절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강변에 들렀다가 한 무리의 노동자들과 맞딱뜨리게 됩니다. 남루한 노동자들이 가슴에 빳빳한 밧줄을 두르고 커다란 배를 힘겹게 끄는 모습이 레핀의 시야에 들어옵니다. 1870년대 러시아의 가난한 항구 노동자들의 모습입니다. 혁명이외에는 아무런 출구가 없어 보이는 밑바닥 러시아 민중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레핀의 영원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자, 글의 작품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레핀은 1870년대 러시아 회화의 대표적인 이 작품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 Barge Haulers on the Volga> 를 통해 러시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우뚝 섰습니다. 먼저 작품 크기 (131.5cm* 281cm)에 압도당합니다. 감상자의 눈 높이로 시선이 맞추어져 있어 항구 노동자들의 땀냄새가 훅하고 코 끝에 먼저 와 닿을 것 같습니다. 멀리서도 그들의 피로도가 금방 전달이 되는 듯합니다. 배를 끌고 있는 인부들의 고단한 삶과 피로가 얼룩진 얼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반복된 노동이 만들었을 강인한 인부들의 육체와 몸동작까지 열 한 명 뱃사람의 독특한 개성이 모두 드러납니다.
러시아 '이동파'의 대가 일리야 레핀(IIya E. Repin , 1844-1930)이 그린 이 작품은 그림은 한마디로 격렬한 삶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뜨거움 일 수도 있겠고요. 거친삶 속에 위안이라곤 찾아 보기 힘들었을 그들의 고통, 분노, 열정, 그리고 희망이 함축된 작품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
이동파(Peredvizhniki)는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활동한 사실주의 미술 운동입니다. 한마디로 , 미술계의 브나르도('민중속으로!)운동을 펼친 유파입니다. 파리의 작가들이 캔버스의 화구를 들고 햇빛 찬란한 야외로 나가 인상주의자가 되었을 때 러시아 작가들은 캔버스와 화구를 들고 민중들의 삶으로 들어가 이동파가 된 것이죠. 화가들은 사실주의적 접근 방식을 통해 사회적 문제와 민중의 삶을 그려냈습니다. 그들은 농노제의 유물과 자본주의의 악덕을 적발하는 그림을 그리며,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동파는 러시아의 모든 민중들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주기 위해 여러 도시로 옮겨 다니며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동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이동파 화가들은 당시의 아카데미즘의 권위주의에 대항하여 더 민중적인 미술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아카데미의 교육 내용에 반항하여 '러시아 이동전람회연합'을 창설했습니다. 이동파 화가들은 아름다움 자체보다는 도덕적, 사회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러시아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고,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사회적 관심을 끌었습니다.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은 19세기 러시아 이동파 미술을 완성시킨 화가입니다.
"프랑스 인상파에게는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으며, 러시아 이동파에게는 형식은 없고 내용만 있다. "
(이동파 운동의 지도자 이반 크람스코이)
이동파 미술의 숙제가 젊은 화가 레핀의 등장으로 해결된 셈입니다. 바로 러시아 이동파의 창조성을 극점으로 끌어올린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인부들 Barge Haulers on the Volga> 작품으로 말이죠.
이동파 운동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이콘화(성상화)의 전통을 깬 근대 러시아 미술을 서유럽 미술과 근본적으로 단절시킨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17세기 말 표트로 대제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근대화, 서구화, 귀족화된 서유럽 미술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1923년까지 존속한 러시아의 이동파는 세계 미술운동사에 유례없는 실험이자 성과였으며, 훗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모태가 됐습니다. 세계 미술사에서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반체제적 성격을 지닌 미술 운동은 없었습니다. 이동파 화가들에게 그림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었고 삶을 변혁하는 무기였습니다. 19세기 러시아의 사회현실과 시대정신에 대한 창조의 열정은 아방가르드 화가들을 통해 러시아 혁명 분위기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솟구쳤습니다.
일리야 레핀(IIta Repin, 1844-1930)은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항구 노동자들을 관찰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은 쉽게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레핀은 볼가강 뱃사람들을 소재로 수많은 드로잉과 유화를 밑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3년 후, 1870년부터 레핀의 스케치를 지켜봤던 비평가 스타소프가 완성작을 보고,
"아주 짧은 시간에 작가는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
지금까지 러시아 미술이 창조해 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그림을 가지고 나타났다."
라고 극찬하며 대작이 마침내 탄생했음을 알렸습니다.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의 표정과 몸짓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무거운 시대에 짓눌려 고통 받는 노동자의 삶(왼쪽 첫번째), 운명을 담금질 하며 스스로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면서 내적인 견고함을 갖게 된 강한 민중상(두번째), 사회 모순에 억눌려 배반적인 삶에 저항하는 노동자의 이글거리는 분노(네번째), 희망을 잃지 않고 미래를 그리며 변혁을 꿈꾸는 어린 노동자(여섯번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다른 인부들에게 끌려가고 있는 절망하는 노동자의 현주소(열한번째)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진정성을 높였습니다. 특히 러시아 민중이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흔적을 캔버스에 옮겨 저마다의 성격과 심리, 자세와 동작을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게 살려냈습니다. 구성이 역동적이며, 캐릭터가 분명하고요.
그림 전반에 흐르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완강한 긴장미 입니다. 그리고 순순히 강가로 끌려오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배와 악전고투를 벌이는 노동자들간의 팽팽한 대립구도는 이 작품의 주제를 뒷받침합니다. 마치 배가 기득권 체제를 공고히 하는 거대한 사회구조를 상징한다면 , 배를 끄는 노동자들은 사회모순에 신음하며 끝까지 저항하는 러시아 민중의 현실같고요. 그렇다면 여럿이 배를 끄는 이들 민중의 삶은 그 자체로 노동이고, 투쟁이며, 아름다운 연대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슬픔, 고통, 분노, 열정, 희망의 밧줄을 끄는 주체는 어떤 영웅도 아니고 혁명지도자도 아닌 바로 가난을 딛고 험난한 역경을 헤쳐나가는 풀뿌리 민중임을 그는 성찰하고 있습니다. 일리야 레핀의 작품 대부분은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과 성격까지 읽을 수 있는 생생한 눈빛과 표정, 몸짓, 주변배경 등의 묘사가 압권입니다. 그의 인간에 대한 폭넓은 성찰과 삶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걸작들인 셈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gkdcNq9VSHU
일리야 레핀은 19세기 말 러시아 리얼리즘 회화의 거장입니다.1844년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 츄구예프에서 한 하급군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당시 최고 의 명문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은 그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이며, 사후 에도 그의 예술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독립을 선언합니다. 구체적으로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가 독립선언법을 채택하였으며,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에서 독립이 가결되었습니다. 우크라아니가 독립 선언 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해체와 함께 독립국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독립 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흑해 함대와 세바스코 폴 해군 기지의 사용권 문제로 갈등을 겪었습니다. 1997년, 양국은 흑해 함대를 분할하고 러시아가 일부 세바스톨폴 해군 기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합의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와 같은 민족으로보며, 독립된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축출된 이후,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합병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켰습니다. 2014년 이후, 러시아는 동부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반군을 지원하며, 돈바스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관계는 한층 더 악화됩니다. 2022년 2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대규모로 침공했습니다. 이 침공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관계를 최악으로 끌고 갔으며, 국제적 긴장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고 현재까지도 양국 간의 갈등은 지속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레핀의 작품에는 19세기 러시아의 현실과 시대정신을 풍부하게 담아냈습니다. 격동기를 살아가는 민중의 삶이 거침없이 그려졌고요. 뛰어난 예술 재능과 풍부한 감성, 날카로운 통찰력은 그의 리얼리즘 회화를 완성시킨 뼈대였습니다. 동시대가 그에게 준 것은 '낭만에 대하여'가 아니었습니다. 체험과 관찰을 통한 냉엄한 현실이었고, 모순과 혼란으로 뒤범벅된 암울한 사회와 역사였습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용트림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역사, 민중의 삶이었습니다. 레핀은 보통사람들의 일상과 그들의 희노애락을 탁월한 사실적 붓질로 묘사했습니다. 그의 그림 중심에는 항상 인간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인간은 사회였고, 역사였으며, 변혁의 동력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러시아 변혁의 꿈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반 4세, 즉 이반(Ivan the Terrible)는 16세기 러시아의 차르로, 절대 왕정의 기반을 닦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폭군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들 이반 이바노비치를 쇠지팡이로 때려 죽이는 순간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 이반 4세는 공포에 질려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의 동공이 튀어나와 있고, 아들의상처를 틀어 막고 있는 손에서 슬픔과 후회가 느껴집니다. 이반 4세의 얼굴은 비통한 표정으로, 그의 행동의 결과에 대한 후회와 고통이 명확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권력과 폭력의 비극적인 결과를 보여주며, 인간의 한계와 후회를 강조합니다. 레핀은 이 작품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삶에 대한 사색을 유도하려고 했습니다.
레핀의 <이반 4세와 그의 아들>은 가족의 헌신을 당연히 여길 때 빚어질 수 있는 극단적 재앙을 묘사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루스 차르국(옛 러시아 제국)의 지도자 이반 4세 (Ivan IV, 1530-1584)는 원래 유능하고 결단력 있는 황제였습니다. 벼락의 신처럼 위엄있는 군주, 아울러 천둥과 번개처럼 두려운 군주라는 뜻에서 뇌제로 불린 남자였습니다. 그런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만이 옳다는 생각에 갇혔습니다. 모두가 잠자코 따르기를 강요했지요. 그렇게 이반 4세는 고집불통의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황실의 식구는 세세한 일정은 물론, 음식 하나까지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 끝내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반 4세는 그를 챙기러 온 황태자비, 그러니까 며느리의 복장을 보고 발끈했습니다. 임신한 여자가 어떻게 얇은 옷을 입을 수 있느냐며 불같이 화를 냈지요.
"내가 조신하게 입으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이반 4세는 황태자비가 감히 자신에게 반항한다고 생각해 응징했습니다. 거칠게 밀치고, 그것으로 모자라 쓰러진 그녀를 마구 폭행했습니다. 황태자비는 이 일로 유산을 경험했습니다. 참다못한 황태자가 씩씩대며 이반 4세의 방 앞에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대체 어디까지 맞춰야 하느냐며 소리를 빽 질렀습니다. 아집에 사로잡힌 이반 4세는 이 또한 항명으로 받아들였지요. 그는 꼬챙이 같은 쇠지팡이를 들고와 황태자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곳이 하필 급소였지요. 황태자는 픽 쓰러졌습니다. 잠깐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 숨통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정사 아닌 소문에 가까운 설이지만, 레핀의 그림을 그리던 시절 상당수 국민은 이를 실화처럼 믿었습니다.
레핀의 그림 속 이반 4세는 공포에 질려있다. 그는 가족의 무조건적인 배려란 언제나 당연하다는 식의 고집을 버리지 못했죠. 그런 그는 뒤늦게 자기가 벌인 일을 눈앞에 보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세상에 사로잡혔던 이반 4세는 황태자와 황태자비, 세상 빛도 못 본 손주까지 죽이고 말았네요. 이제야 뒤늦게 후회하고 있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야 없지않습까! 모든 건 엎질러진 후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Lnvq0nFOdc
레핀의 <신병 배웅 Seeing off a recruit>이란 작품입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 지는 그림입니다. 온 가족이 한 청년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제 막 입대하는 청년에 대해 안고, 흐느끼고, 다독이며 아낌없이 슬퍼합니다. 진지한 표정의 청년 또한 매달린 여인을 꽉 끌어안으며 아쉬움을 감추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주변의 보는 눈과는 상관없이, 할 수 있을 때 서로에게 사랑을 듬뿍 표하고 있습니다. 주변 이웃들은 그들의 몸짓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있고요. 전선에 선 청년, 다시 생을 꾸려가는 가족 모두 서로에게 보인 솔직한 마음을 두고두고 꺼내볼 테지요. 그 순간을 곱씹으며 마음만은 함께라고 생각할 겁니다. 1년 뒤 재회하든, 10년 뒤 다시 보든, 이들 사이 낯섦의 감정은 없을 겁니다.
'에케 호모 Ecce Homo' 는 요한복음 19장 5장에 나오는 라틴어 말로 본시오 빌라도가 예수에게 채찍질하고 난 후, 머리에 가시관을 씌운 뒤 몰려든 군중 무리들 앞에서 예수를 세우고 가리키면서 말한 대사 '이 사람을 보라'는 뜻입니다. 수많은 화가들이 이 역사적인 장면을 그렸습니다.
쿠오드 에스트 베리타스 (Quod Est Veritas '진리가 무엇이냐?' ) 잡혀온 나사렛 목수에게 빌라도가 묻던 심문입니다. 그날 밤은 세상의 빛과 어둠으로 양분되는 두 사람이 '인류사적인 대칭' 속에 서 있었습니다. 총독은 목수에게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잡혀온 목수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니 답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정작 질문을 한 빌라도는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하고 그는 창가로 갔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이라는 성난 군중들을 만나기 위해서였죠.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ous Bosch, 1450-1516)의 작품 <에케 호모 Ecce Homo, 1480>작품과 비교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 Job and His Friends >로, 성경의 '욥기'에서 욥이 고난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키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높이가 137cm* 너비 200cm로 현재 러시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욥이 친구들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받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레핀은 이 그림을 통해 인간의 고난과 신앙의 테마를 표현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하느님의 징벌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욥은 하느님의 의 를 믿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이 그림은 신앙의 시험과 하느님의 의를 믿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성경속 욥은 우스 땅의 의로운 사람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한 사람입니다. 그는 순진하고 정직하며, 하느님을 경외하는 인물입니다. 하느님과 사탄 사이의 대화로 인해,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사탄은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하느님은 사탄에게 욥의 재산을 다루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손대지 말라고 명합니다. 욥은 그의 자녀들과 재산을 잃고 , 설상가상으로 그의 몸의 악성 종기까지 그를 괴롭힙니다. 욥의 친구들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그를 위로하러 오지만, 결국은 그를 정죄하는 말들을 합니다(정죄-사람의 관점/심판-하느님의 관점). 이로 인해 욥은 고통의 이유와 정의에 대해 생각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은 욥에게 직접 나타나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상기시킵니다. 이에 대한 욥의 반응은 하느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회개하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러 왔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고, 욥에게 이전의 소유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십니다. 욥은 140년을 더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본 이후 죽게 됩니다. 욥은 성경에서 깊은 인간적 고뇌와 신앙의 시험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의 이야기는 신앙의 중요성과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871년 성서를 주제로 <야이로 딸의 부활 Raising of Jairus'daughter>을 그려 졸업작품전에서 금상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6년짜리 유학 기회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레핀은 부푼 꿈을 안고 오스트리아 빈, 이탈리아 로마, 프랑스 파리 등 유명 도시를 견학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상파 같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표현하는 화풍에 끌리기도 했지만,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레핀은 지금의 시대상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게 그에게 더 맞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유학 기간이 남았는데도 망설임 없이 귀국했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 중 한 사람으로, 그의 12살 된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찾아와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의 딸을 살려 주기 위해 그의 집으로 함께 갑니다. 그러나 도중에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의 옷을 만지며 병이 나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예수와 야이로가 집으로 가는 도중, 야이로의 집에서 전갈이 와서 딸이 죽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여 ,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사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보내신 후, 딸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딸이 살아나서 걸어 다니기 시작합니다. 딸이 살아난 것을 본 부모는 기뻐하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곧 퍼져나가게 됩니다. 이 사건은 예수의 능력과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성경에서 중요한 부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푸른 옷의 예수와 흔 옷의 야이로의 딸이 대조를 이룬다. 성화에서 보기 드문 프른 옷의 예수다.
개인적으로 푸른 옷을 입은 예수의 모습이 흰 옷의 소녀와 대조되며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그림입니다.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로마노바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녀입니다. 황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셋째 딸로, 표도르 3세와 이반 5세의 친누나이며, 피터 대제(표트르1세)의 이복누나입니다. 1682년부터 1689년까지, 아직 어린 이반 5세와 피터 대제가 공동 차르로 즉위했을 때, 소피아는 섭정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기간동안 그녀는 권력의 맛을 보았고, 이후 피터 대제와의 권력 투쟁을 벌였습니다. 소피아는 피터 대제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1689년부터 1704년까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유폐되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그녀의 측근과 친위대원들이 피터 대제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소피아는 강한 야망과 복수심을 가진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녀는 권력을 향한 그녀의 열망과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의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합니다.
러시아의 표트르 1세 , 즉 피터 대제(Peter the Great)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중요한 황제 중 한 명으로, 1672년부터 1725년까지 재위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러시아으 근대화와 서구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피터 대제는 러시아를 서구화하고 근대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1697-1698년 서유럽을 여행하며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배웠고, 이를 러시아에 도입했습니다. 피터 대제는 러시아의 행정 체제를 개혁하여, 능력주의 기반의 관료제를 도입했습니다. 그는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를 강화하고, 지방 행정도 개혁했습니다. 피터 대제는 러시아 군대를 근대화하고 강화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군사 체제를 도입하고, 해군을 창설하여 러시아의 해상력을 강화했습니다. 피터 대제는 17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여,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는 러시아의 서구화와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피터 대제는 대외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전쟁을 치렀습니다. 특히, 스웨덴과의 대북방 전쟁에서 승리하여, 발트해 연안을 획득하고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습니다. 피터 대제는 러시아의 문화와 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서구식 교육을 도입했습니다. 이와 같은 업적으로, 피터 대제는 러시아를 근대국가로 변모시키고,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였습니다. 그의 통치는 러시아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Sophia Alekseyevna)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러시아의 피터 대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황녀입니다. 1689년부터 1704년까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유폐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그녀의 측근과 근위대원 등 1700여 명이 피터 대제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1870년대 후반에서 1880년대 초 사이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레핀은 이 시기에 많은 리얼리즘적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특히 노동자와 빈민들의 삶을 묘사하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이 소녀는 당시 러시아 사회의 빈곤과 고통을 상징합니다. 레핀이 이 그림을 통해 당시 러시아 사회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특히 여성의 삶과 고통을 강조했습니다. 레핀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러시아의 빈곤층의 삶을 묘사함으로써 사회적 문제를 비판하며, 당시 러시아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레핀의 딸 나데즈다(Nadezhda)를 그린 초상화입니다. 나데즈다는 레핀의 딸로, 이 초상화는 그녀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레핀은 나데즈다의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그녀의 순순함과 어린 시절의 아름다움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레핀의 예술적 실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초상화 중 하나로, 그의 딸을 통해 가족의 사랑과 행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을꽃다발>은 장녀인 딸 의 모습을 아주 어릴때부터 완숙한 여인에 이르기까지 화폭에 자주 담았던 레핀은 이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잔잔한 부정을 느끼게 합니다. 겨울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비워가면서도 서리 맞은 꽃을 피어내는 원숙한 가을을 닮은 사랑하는 딸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풍성하면서도 강한 사랑을 품은 러시아 여인의 모습을 가을 꽃다발과 함께 선물로 남겨주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FYWazblaUA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이 오페라 '삿코(Sadko)'를 위해 그린 수중 장면입니다. 오늘날 멕시코 출신의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감독이 만든 영화 '세이프 오브 워터 (The Shape of Water' )수중 촬영 영화가 떠올려지는 작품입니다. 아래 그림을 보면 아마 그 감독이 벤치마킹을 하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로 일리야 레핀의 상상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ICZkU5Jkc0
이 수중 장면인 '사코 Sadko'는 레핀이 1869년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만든 환상적인 음악시 오페라 '사드코 Sadko'를 위해 비주얼을 구사한 작품입니다. 물속의 생생한 세상을 묘사한 이 수중 왕국의 그림은 오늘날 최첨단 라스베이거스 수중 쇼 'O'를 능가하는 상상력입니다. 아마도, 앞으로 끝없는 재평가를 받으면서 그의 대표작을 꼽을 만한 귀한 역작으로 보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WCmhEqX2VI
러시아 제국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반영합니다. 이 시기 러시아에서는 혁명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지요. 이 그림은 러시아 경찰이 혁명 운동가인 전파자(propagandist)를 체포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그림에는 경찰과 혁명 운동가,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 등장하며, 당시 러시아 사회의 정치적 긴장과 갈등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레핀은 이 그림을 통해 당시 러시아 사회의 정치적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림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각 인물의 표정과 자세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레핀의 리얼리즘적 표현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이 그림은 러시아 제국 시대의 정치적 탄압과 혁명 운동의 갈등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레핀은 혁명 운동가의 체포를 통해 당시 러시아 사회의 정치적 상황을 비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러시아로 돌아온 레핀은 전쟁과 봉기로 이어지는 19세기의 격동기 속 러시아 국민의 삶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러시아 전역을 돌며 전시회를 연 이동파에 합류했고,이를 계기로 소외된 민중의 생활상을 더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레핀은 이 시기에 혁명을 주제로 한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다만 단편적 묘사에만 그치지 않았죠. 투사와 투사의 가족 사이 복잡한 심리를 담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처럼 한층 더 입체적인 작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는 인간과 시대에 대한 깊은 고찰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었습니다. 레핀은 1894년부터 13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일했습니다. 그는 화가란 사회 현상 비평가이며, 그렇기에 사회적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걸 강조했습니다.
레핀은 현실주의적 예술가로, 그이 작품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사람들을 모델로 삼아 그들의 삶과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레핀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할 모델을 선택할 때, 주로 현실적인 인물들을 선호했습니다. 레핀은 모델을 선택한 후, 여러 번의 스케치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모델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더욱 사실적인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레핀은 종종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레핀은 모델들이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예를 들어 <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와 같은 작품에서는 실제로 지역 주민들이 모델로 참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레핀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델들을 선택하고,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레핀의 리얼리즘적 예술 스타일을 대표하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일리야 레핀의 <Hunchback>(1881)는 러시아의 리얼리즘 화가 레핀의 중요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은 레핀의 다른 작품인 <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1880-1883)의 준비 과정에서 그려진 스케치 중 하나입니다. 레핀은 이 스케치를 통해 작품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곱추를 묘사했습니다. 곱추는 레핀이 고토그보(Khotkovo)에서 만난 실제 인물입니다. 레핀은 곱추의 모습을 여러 번 그렸습니다. 이 인물은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곱추의 외모를 그린 것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곱추는 빈곤과 고통을 겪는 인물로, 그러나 강한 의지와 정신력을 지닌 인물로 묘사됩니다 . 이 작품은 레핀의 리얼리즘적 표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레핀의 예술적 실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스케치 중 하나로, 러시아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문제를 다루는 그의 작품의 한 부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TxyNejxkAs
레핀은 1880년대부터 수많은 러시아 문화 엘리트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고골 등을 미롯한 무소르스키. 림스키 코르샤코프 등의 음악가, 스타소프 같은 예술비평가, 그밖의 왕족과 귀족 우아한 상류사회 여성 등 이 레핀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레핀은 종종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러시아 유명한 미술 비평가이자 음악 비평가인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스타소프( Vladimir Vasilyevich Stasov)를 그릴 때 그러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1873년 작품으로 스타소프의 강한 인격과 지적 면모를 잘 표현했습니다. 스타소프는 러시아의 이동파화가들(페레드비쥬니키, Peredvizhniki)을 지원하며 러시아 예술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레핀도 이 그룹의 일원으로 예외가 아니었죠. 스타소프와의 관계는 그의 예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는 19세기 러시아의 중요한 미술 및 음악 비평가로 , 러시아 예술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사실주의 예술 운동을 지지하며, 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했습니다. 이 작품은 스타소프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자세까지 모든 부분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레핀의 초상화 스타일은 주인공의 인격과 당시 사회적 배경을 함께 담아내는 특징이 있습니다.
'민중'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의 작품 <쿠르크스 현의 십자가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입니다. 이 그림은 평범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합니다. 러시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십자가 행렬로, 교회 안에 있는 이콘(성상화)이나 성물을 들고 행진을 하는 행사라고 합니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어떤 신념으로 자리잡을 때는 분명 인간의 귀천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과 인간을 연결지어주는 인간이 개입하게 되면, 이상하게도 계급에 따라 신의 사랑은 차별을 두게 됩니다.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의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이콘을 들고 걷는 귀부인은 자부심이 차 있습니다. 화려한 복장의 성직자는 지루한 것처럼 보이고요. 두 명의 여인은 조심스레 성물 상자를 들고 걷고 있습니다. 행렬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치안 담당자는 말을 타고 민중을 향해 거만하게 굴며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채찍을 휘두르기까지 합니다. 민중들을 거칠게 다루는 모습이 밉상입니다.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오면 그들역시 그들과 똑같은 민중일텐데요. 지친 아이들은 동행하는 어른의 지적을 받고 있는 듯 보이고요. 솔직히 아이들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한편, 이 행렬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림의 왼쪽 하단, 그러나 화면에서 감상자와 가장 가까이 있는 그들입니다.
레핀은 원래 십자가 행렬을 위해 숲을 지나는 배경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르느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에서 표현된 일렁이는 햇빛의 효과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핀은 참나무 숲 속의 햇빛 효과를 포기합니다.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 내는 인상을 포기하고 화창한 하늘 아래, 뽀얀 먼지 일어나는 흙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레핀이 얻은 효과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들입니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의 1876년 작품입니다. 야외에서 빛을 포착하고, 밝은 색상을 사용하여 일상의 순간을 표현한 인상주의적 특징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지요. 그림의 배경은 파리 몽마르크 지역의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일요일 오후에 열리는 무도회를 묘사했습니다. 이 장소는 19세기 말 노동자 계급의 파리 사람들이 저녁까지 춤추고, 마시고,갈레트를 먹으며 시간을 보내던 인기 있는 엔터네인먼트 장소였습니다. 그림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르누아르의 친구들입니다. 르누아르는 햇빛과 인공 조명을 사용하여 움직이는 군중을 생생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림은 밝고 다채로운 붓놀림으로 처리되어 있고요.
이 그림은 1877년 제3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이후 1879년부터 1894년까지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소장했으며, 1894년 프랑스 정부에 기증되었다가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은 그림자 하나 없는 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행렬에 참가하는 마음과 표정 뿐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계급까지 표정에 담고 있는 듯 합니다. 인물의 표정 안에 개개인의 역사를 담아내는 것, 바로 레핀의 탁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행렬에 끼지 못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곱추 소년입니다. 소년은 레핀이 가장 공을 들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절름발이 곱추 소년을 위해 여러 장의 습작을 남겼는데, 다양한 표정을 연구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 중에서 그는 슬픈 표정이 아니라 무표정한 듯 앞으로 열심히 나가는 소년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소년의 얼굴에는 행렬에 낀 사람들의 오만함도, 지루함도 없습니다.
레핀은 그림을 통해서 민중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르느아르가 군중의 모습으로 빛과 그림자를 보여주고자 했다면 , 레핀에게 인물은 군중이 아니라 민중이었습니다. 그들의 궁핍하고 황폐해진 삶은 행렬 뒤쪽의 민둥산이 증명해 줍니다. 나무와 숲이 사라진 민둥산과 뽀얀 흙먼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건조한 민중들은 종교를 통해 구원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신의 은총 역시 모든 사람 앞에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민중은 포기하지 않고 행렬 언저리에서 열심히 앞으로 걸어갑니다. 불만을 표현하지도 않고 지루해 하지도 않고 그저 열심히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의 눈에 그들은 군중이 아나리 '민중'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j6WrS3-FSU
19세기 러시아의 중요한 작가로, 그의 작품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주로 소설과 희곡을 썼으며, 그의 작품은 사회적 비판과 현실주의적 묘사로 특징지어집니다. 레핀은 피셈스키의 초상화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피셈스키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담아내고 있으며, 그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자세까지 모든 부분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레핀의 초상화 스타일은 주인공의 인격과 당시 사회적 배경을 함께 담아내는 특징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가인 안톤 그리고리예비치 루빈스타인 (Anton Grigorievich Rubinstein)의 초상화입니다. 이 시기 레핀은 이미 러시아의 주요한 리얼리즘 화가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안톤 루빈슈타인은 19세기 러시아 음악계의 거장으로, 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 러시아 음악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레핀은 루빈슈타인의 초상화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루빈슈타인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담아내고 있으며, 그의 음악적 재능과 인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레핀은 루빈슈타인의 얼굴과 손, 그리고 자세를 매우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루빈슈타인의 음악적 열정과 인격을 잘 전달하고 있고요. 당시 러시아 음악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초상화가 완성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루빈슈타인은 1894년에 사망했습니다. 레핀은 루빈슈타인의 초상화를 그린 후에도 그의 음악적 재능과 인격에 대한 존경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안톤 그레고리예비치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 피아노 협주곡 NO.4
https://www.youtube.com/watch?v=mLpg39XnBaQ
<전람회의 그림>을 작곡한 러시아 작곡가 무소르그스키(Mussorgsky)가 등장할 때는 마치 사진인양 어디서든 소개되는 이 작품은 무소르그스키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그린 초상화이다. 레핀은 그의 헝클어진 머리와 수염 그리고 알코올 중독으로 코가 빨개진 모습까지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리야 레핀의 초상화 작품의 얼굴 표정이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적으로 미묘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레핀은 미표한 움직임을 포착하며 묘사함으로써 인물의 내면세계와 성격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QYC--HbEdM
https://www.youtube.com/watch?v=2vyMwDx9rF0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로, 1894년부터 1917년까지 재위했습니다. 그는 절대주의를 강력히 지지했으며, 의회 참여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1905년 10월에야 국민 대표 회의인 두마(Duma)를 창설하고 헌법적 체제를 약속했지만, 이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보여 1891년에 인도, 중국,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동아시아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1904-1905년의 러일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또한 ,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의 군사적 실패를 겪었으며, 1915년 9월부터 1917년 3월까지 군대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니콜라이2세는 가족을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는 아내 알렉산드라와 함께 세 딸과 혈우병을 앓는 아들 알렉세이를 둔 가족을 가졌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반란과 군대의 반란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는 3월 15일 토위할 것에 서명했습니다.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볼셰비키에 의해 감금되었고, 1918년 7월 17일 예카테린 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니콜라이 2세의 통치는 러시아의 현대화와 산업화 시도를 보여주었지만, 그의 절대주의적 태도와 군사적 실패로 인해 결국 러시아 제국은 붕괴됩니다.
니콜라이 2세의 재임 기간 동안 러시아 사회는 여러 주요 사건들이 발생했습니다. 이들 사건들은 그의 통치와 러시아 제국의 붕괴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 당규약 문제로 레닌과 율리 마르토프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레닌의 지지자들은 표결에서 다수파를 차지하여 스스로를 '볼셰비키(다수파)'라고 불렀고, 마르토프의 지지자들은 '멘셰비키(소수파)'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볼셰비키(다수파)는 혁명이 성공하려면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다른 좌파 정당인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와는 다른 입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세운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가 노동자 정부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러일 전쟁(1904-1905)입니다.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의 아시아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일본과 전쟁을 벌였지만,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큰 패배를 겪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만주와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고, 사할린 섬의 남부를 일본에 양도해야 했습니다. 이 패배는 러시아 내부에서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05년 혁명입니다. 러일 전쟁의 패배와 함께, 러시아는 1905년 혁명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시위와 폭동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피의 일요일"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는 시위대가 차르의 궁전 앞에서 무차별적으로 사살되는 사건으로, 니콜라이 2세의 인기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이 혁명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는 의회인 두마(Duma)를 창설하고 헌법적 체제를 약속해야 했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러시아를 참여시켰습니다. 전쟁 초기에 러시아는 큰 손실을 겪었고, 1915년부터 니콜라이 2세는 직접 군대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사적 무능력과 전선에서의 패배는 러시아 내부의 불만을 더욱 키웠습니다.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반란과 군대의 반란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는 3월 15일 퇴위를 서명해야 했습니다. 이로써 300년 이상 지속된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 전제정이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출범했습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대한 지지를 유지하며,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불만이 계속되었습니다. 1917년 7월에 볼셰비키(다수파)는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지만, 당시에는 실패했습니다. 볼셰비티 당원은 대부분 노동자였으며, 공장과 소비에트 안에서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투쟁을 전진시킬 방법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논쟁했습니다. 이로 인해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의 신뢰을 얻고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볼셰비키는 정치적으로 분명한 입장ㅇ르 취할 만큼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었으며, 노동계급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겨룰 수 있었습니다.
10월에 볼셰비키는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에서 충분한 지지를 얻고, 10월 25일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봉기를 일으켜 임시정부를 전복했습니다.1918년 7회 대회에서 볼셰비키는 당명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변경했습니다. 이후 볼셰비키는 레닌주의자와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혁명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정당으로,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과 소비에트 체제의 확립을 주장하며, 이후 소련의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볼셰비키 혁명의 결과로 소비에트 체제가 확립되고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혁명이 성공 후, 볼셰비키와 반혁명 세력 간의 러시아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이 내전은 1922년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볼셰비키가 승리하여 소련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습니다. 노동자들과 농민의 요구를 반영하여 지지를 얻었습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의 핵심적인 지도자가 되어 러시아와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라스푸틴의 영향력입니다. 니콜라이 2세의 통치 시기에 그레고리 라스푸틴이 차르 가족, 특히 차르의 아내 알렉산드라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러시아 내부에서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1916년 라스푸틴의 암살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2세의 고립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rBxo6mbaS8
1905년 러시아는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러시아 제1차 혁명의 시기로, 다음과 같은 사회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농업과 산업의 발전이 느리고, 빈부 격차가 심각했으며, 정치적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1904-1905년 러시아-일본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이후, 러시아 내부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전쟁의 패배는 러시아 제국의 약점을 드러내었고, 내부의 불만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극심한 빈곤과 착취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개선, 토지 개혁 등을 요구하며 시위와 파업을 벌였습니다.
인텔리겐차(지식인 계급)는 민중을 계몽하고 각성시키는 '브나로드 운동(민중 속으로)'을 통해 사회 변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많은 인텔리겐차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1905년 10월17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일부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고, 두마(러시아의 의회)의 설립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혁명 운동을 완전히 진압하지도 못했습니다. 혁명 운동은 계속되었죠.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막심 고리키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고리키의 소설<어머니>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노동자 계급의 각성을 촉구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그림의 내용은 1905년 10월 17일 , 레시아 제1차 혁명의 한 순간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실제로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델로 삼아 그려진 작품입니다. 이 날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일부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는 내용을 발표한 날입니다. 그러나 지켜지지 못한 약속으로 인해 혁명 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레핀은 이 그림을 통해 혁명의 열기와 당시 러시아 사회의 혼란을 생생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림에는 시위대와 군대,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하며, 혁명의 격렬함과 사회적 긴장감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 사회의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평가받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순간을 기록한 중요한 작품입니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레오 톨스토이의 초상화로, 레핀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레핀은 1887년 톨스토이의 저택인 야스나야 폴리아나를 방문하여 이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 시기 톨스토이는 이미 유명한 작가로, 사회적 및 철학적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레핀은 톨스토이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톨스토이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담아내고 있으며, 그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옷차림까지 모든 부분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레핀은 톨스토이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그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작품에 반영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단순히 톨스토이의 외모를 그린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과 당시 사회적 배경을 함께 담아내는 작품입니다. 레핀은 톨스토이와의 교류를 통해 그의 철학과 사상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작품에 담아내어 톨스토이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레핀과 톨스토이는 1880년 모스크바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도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레핀은 톨스토이의 철학과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그의 작품에 새로운 영감을 얻었습니다.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는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세계 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1828년 9월 9일에 태어나 1910년 11월 20일 사망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후반 생애에는 기독교적 무저항주의와 무정부주의적인 사상를 지니게 되며, 귀족 생활을 떠나 수도원에서 수도자로 살기 위해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수도원에서 나와서 자신의 신앙과 철학을 바탕으로 한 삶을 살았습니다. 톨스토이의 가장 대표적인 소설은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리나>입니다. 이 두 작품은 러시아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으며, 세계적으로도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전쟁과 평화>: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러시아의 귀족 가문과 일반인들이 삶을 묘사하며, 전쟁과 평화, 사랑과 죽음, 가족과 사회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룹니다.
<안나 카레리나>: 러시아 귀족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내면을 깊이 탐구한 소설로, 안나 카레니나라는 여인의 삶을 통해 사랑과 배신, 죄책감과 자살 등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묘사했습니다.
톨스토이는 현실주의와 사실주의를 기반으로 한 문학적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인물들의 내면과 외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당시 러시아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철학과 사상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기독교적 무저항주의와 무정부주의적 사상을 지녔으며, 이러한 사상은 그이 작품에 반영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중편소설<고백>은 이러한 철학과 사상을 깊이 담고 있습니다.
일리야 레핀(1844-1930)은 작가 톨스토이 초상화를 많이 그린 화가로도 유명합다. 그들은 동시대를 살았고 레핀이 야스나야 뽈랴나 (톨스토이의 거주지)를 자주 방문할 정도로 톨스토이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톨스토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사상도 기질도 비슷했다고 합니다. 귀족의 아들이며 대문호인 톨스토이는 늘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사랑했던 러시아의 큰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감히 러시아 황제 짜르를 꾸짖기도 하고 직접 쟁기질을 하는 등 농부의 삶을 살고자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농노 해방 후 토지를 농노에게 나누어 주려다가 가족의 반대로 실패한 톨스토이는 82세 되던 가을, 집을 떠나 떠돌다 객사합니다. 레핀은 톨스토이의 성품에 매료되어 30년 동안이나 우정을 나누며 평생 그를 존경하하며 그의 모습을 많은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XUcmQrbDkY&t=33s
레핀의 여성투사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뜻밖의 방문객, 그리고 놀라는 리액션 표정들, 정말 현대판 헤롤드 핀터의 연극 무대 장면 같습니다. 극적 긴장과 구성의 중량감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들 '뜻밖에 Not expected'시리즈, 뜻밖에 생긴일, 우리가 번번이 만나는 그런 우연한 일, 그러나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사실주의 화가에게 우연하고 갑작스러운 '뜻밖'의 소제들은 보는 것 만으로도 흥미롭습니다.
해롤드 핀터는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시인, 각본가, 감동, 배우로, 20세기 후반의 가장 복잡하고 도전적인 극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작품은 종종 "핀터스퀘(Pinteresque)"라고 불리는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일상 대화 속에 숨겨진 위협과 권력 게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의 극작은 복잡하고 도전적인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극작은 비현실적이고 암시적이며,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을 요구합니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한 남성의 등장으로 몇 평 안되는 방안 공기가 싸늘해 집니다. 문간 여인의 눈동자, 딸과 아들의 눈동자, 그리고 반가운 몸짓으로 일어났지만 선뜻 달려가지 못하고 얼어버린 여인의 뒷모습.
"여보..."
여인의 입에서 당황스럽게 나온 단어입니다.
"내가, 왔어."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던 사내의 입에서 나온 짧은 한 마디 입니다. 길고 긴 세월을 건너 돌아온 그는, 이 집안의 가장입니다. 동시에 정치세력의 열성 당원이고요. 사내는 이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이날만을 고대하며 주어진 험한 시간을 버텼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갈라졌던 가족 사이 상봉치곤 어딘지 공기가 싸 ~합니다. 당장 달려가 이 남자를 안아 주질 못합니다. 울면서 남편에게 매달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입니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아버지의등장에 아들은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존재 자체를 망각해버렸던 딸 아이는 대놓고 경계하는 표정입니다. 하녀와 동네 이웃 또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요. 그러니까 , 아무도 사내가 집에 돌아오는 걸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이죠. 제목처럼 말입니다.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 (IIya Repinm , 1844-1930)이 그린 이 그림은 제목에서조차 의미심장합니다. 이 가족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먼저 작품의 바탕이 되는 당시 러시아 사회의 분위기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1879년 결성된 러시아 제국의 '인민의 의지당'은 농민 봉기를 끌어내 보수적인 차르 전제정을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급진적이었던 선전과 부채질은 외려 대다수 농민과 노동자에게 거부감만 살 뿐이었습니다. 결국 '인민의 의지당'은 노선을 다시 짜야 했습니다. 그것은 적은 지지층으로도 할 수 있는 암살과 테러였습니다. '인민의 의지당' 계열 단체들은 그해 11월 중순부터 당시 차르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 1818-1881)에 대한 암살을 세 차례 이상 시도했습니다.
처음에는 철도 수비대로 위장 취업해 알렉산드르 2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정을 잘못 파악해 허무하게 실패했습니다. 그 다음은 알렉산드를 2세를 태운 기차가 지나는 철로 밑에 폭탄을 깔았습니다. 예정대로 기차가 달리긴 했지만, 하필 설치해둔 게 불량품이었습니다. 이들은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재차 철로 아래 폭탄을 설치했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작동했습니다. 그런데, 녀석을 애꿎게도 알렉산드르 2세가 탄 기차가 아닌 수행원들이 탄 기차가 지날 때 폭발했습니다. 더 굴욕적인 건, 이 일로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인민의 의지당'은 1881년 3월 1일에 다시 기회를 잡았습니다. 이날 알렉산드르 2세의 행렬 일정을 입수한 '인민의 의지당'은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핵심 당원들은 차르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단검과 권총, 사제 폭탄과 다이너마이트까지 챙긴 뒤 곳곳에 잠복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알렉산드르 2세가 탄 마차를 부쉈습니다. 그가 콜록대며 밖으로 나오자 그대로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기습을 당한 차르의 최후는 끔찍했습니다. 그는 팔다리가 찢어진 채 비명을 질렀고, 고통에 허우적대다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 콘스탄틴 마코프스키< 임종을 맞은 차르 알렉산데르 2세>
이제 러시아 각지에서 혁명이 터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쩜니까! 이들의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농민은 칼과 곡갱이를 들고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참혹한 죽음에 충격을 받은 민초는 되레 '인민의 의지당'에 반감을 표하는 기류였습니다. 역풍이 제대로 불었습니다. 수사 당국은 여론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피의 숙청에 나 설 수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붙잡힌 당원들이 다른 가담자의 신원을 술술 불었습니다. 관계자가 줄줄이 붙잡혔지요. 이들 모두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숨통이 붙어있으면 시베리아 유배지로 내몰렸고요. 그렇게 온도가 영하 수십도로 곤두박질치는곳에 맨몸으로 추방됐습니다. 사실상 사형 선고였지요.
" 당신이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한때 차르 암살에 가담했던 그가 혹독한 고문과 유형을 모두 견디고 다시 가족들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이었습니다. 묘한 당혹감이 작품 전체에 흐르는 이유입니다.
사내는 들끓는 피를 안고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권위적인 차르 정부의 행보는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습니다. 그는 마음속 불꽃에 이끌려 가장 과격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어느새 '인민의 의지당'까지 왔고, 나아가 암살과 테러 엄무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속한 당은 이름과는 무색하게 농민에게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작전 또한 어설픈 실패를 이어가고 있었고요. 그는 그럴수록 이 일에 더 매섭게 매달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 그가 나름의 사명감을 불태우는 동안 나머지 가족은 어땠을까요? 그의 가문은 농민 내지 노동자 집안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화려한 벽지와 고급스러운 가구가 깔린 그림 속 거실 풍경으로 볼 때, 외려 차르 정부에서 고위직을 맡아왔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저돌적인 아들의 행동에 가족들은 긴 시간 속 애가 탔을 게 분명합니다. 아내 또한 나가기만 하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남편 모습에 밤을 재새웠을테고요. 사내는 종종 집에 있을 때도 쉬지 않고 혁명 정신을 설파했겠죠.
화폭 정면에 걸린 액자 중 왼쪽에선 차르 전제정을 맹렬하게 비판한 시인 타라스 셰브첸코로 짐작되는 얼굴이 보입니다. 오른쪽은 농민의 아픔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한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초상화로 추정되고요. 이들 사이에는 희생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그림 또한 떡하니 걸려있습니다. 사내가 밖에서도, 안에서도 뼛속 깊이 '인민의 의지당원'이었음을 상징하는 소품들입니다. 가족은 스스로 생각하는 더 중요한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친 자식이자, 남편, 가장인 그를 최대한 존중했을 것입니다. 가끔은 지금 가는 길이 정녕 맞는지, 농민과 노동자마저 왜 호흥하지 않는지를 짚어보라고 애원하면서도 뒷바라지는 멈추지 않았을 테지요. 사내는 끝내 알렉산드르 2세를 죽이며 과업을 마쳤지만, 얼마 안돼 비밀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는 연기처럼 증발하고 말았고요.
가족 모두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말을 잃었습니다. 묘한 기분이었죠. 분명 슬펐고, 가엾고, 그리고 불쌍했을 것입니다. 이 와중에 마음 한편에서 솔솔 피어나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쉽사리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이었죠. 이제 밑빠진 독처럼 돈 나갈 일이 사라졌습니다. 압수와 수색, 미행 등 살 떨리는 정부의 감시망도 피할 수 있었고요. 과격분자가 사는 집이라는 식의 지긋지긋한 소문에 서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1년이 흐르고, 곧이어 3년이 또 흘렀습니다.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가족은 그가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인과 여인은 상복 같은 검은 옷을 입는 등 나름의 애도를 표했습니다. 모두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았고요. 암묵적인 합의였습니다. 이들은 빠르게 일상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딱 이런 무렵, 사내가 예고 없이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노인과 여인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본능적인 반가움이었지요. 하지만 돌아온 그의 눈빛을 보곤 멈칫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눈빛은 그대로였거든요. 퀭한 표정, 비쩍 마른 몸, 거지꼴의 행색을 하고도 두 눈만은 여전히 이글이글 타올랐습니다. 이는 모든 시계가 과거의 불안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방 안의 모든 인물들이 형용할 수 없는 당혹감에 휩쓸린 이유입니다. 노인과 여인은 원망과 두려움, 공포와 불안감이 피어나고 있다는 걸 감추지 못했습니다. 사내 또한 수년간 바란 이 순간이 꿈과는 너무도 다른 데 대해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VL5-3j--WI
<알렉산더 3세 앞의 보이트들의 위임>(1886) .
레핀은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이 그림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1613년 2월 21일, 모스크바의 보이트들(보이아르들의 대표자)이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로 선출한 장소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장면은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을 상징하고요. 그림에서는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 선출된 후, 보이트들이 알렉산더 3세(실제로는 미하일 로마노프의 선출 당시 차르가 아닌 미하일의 아버지 팔라레트 로마노프가 등장해야 하지만, 레핀은 역사적 오류를 범하여 알렉산더 3세를 등장시킴)를 향해 경의 를 표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의 <성 니콜라스 미라(Myra)의 세 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음에 구하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레핀이 1884년 미라(Myra)의 니콜라스 콘벤트의 수도승으로부터 의뢰를 받은 후 완성된 작품입니다. 레핀은 이 작품을 통해 성 니콜라스의 용기와 정의감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그림은 미라(Myra)의 총독 에우스타티우스(Eustathius)가 뇌물로 매수된 후 세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려고 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성 니콜라스는 이 부당한 처형을 막기 위해 미라(Myra)로 돌아와 처형장이 있는 디오스쿠로프 필드에 도착합니다. 그림은 성 니콜라스가 처형자가 첫 번째 무고한 사람을 처형하려는 순간에 간섭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이 먼저 들어옵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진 성 니콜라스, 비현실적인 표정을 보이는 도시의 총독, 그리고 성 니콜라스의 간섭에 급당황한 처형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모든 희망을 잃은 채 무릎을 꿇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동그란 눈을 뜨고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않는 듯 당황한 모습의 사람, 성니콜라우스의 등장으로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 보는 노인의 모습,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밝고 강렬한 색상과 조명이 사용되어 각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3세기 성 니콜라우스(St. Nicholas) 아이콘입니다. 주교복장을 하고 한 손에는 닫힌 복음서를 들고 다른 손으로 축복하는 모습이지요. 성 니콜라스는 3세기 후반 리키아(현재 터키)의 파타라에서 부유한 기독교인 부모에게 태어났습니다. 그는 성경을 공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미라(Myra)의 주교로 선출되었습니다. 니콜라스는 세 명의 처녀를 매춘에서 구해내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또한 무고한 세 명의 사람들을 사형에서 구하고 바다의 폭풍을 진정시키는 등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325년에 그는 니케아 제 1공의회에 참여하여 아리우스의 이단을 단죄했습니다.
성 니콜라스는 343년 12월 6일에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미라(Myra)에 보관되었지만 후에 1087년에 이탈리아의 바리로 옮겨졌습니다. 성 니콜라스는 러시아에서 매우 존경받는 성인입니다. 그의 아이콘(icon)은 보호자로 간주되며 다른 중요한 성인들과 함께 교회와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nlSjAo-SFc
같은 주제의 다른 버전입니다. < 세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주는 성 니콜라우스>집행직전의 사형수, 칼날앞에 무릎을 꿇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붉은 옷을 입고 공포에 질린 사람, 기적을 갈구하고 있는 노인,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가족과 사람들, 죽음앞에선 인간의 절절한 공포, 끝없는 절망을 화폭에 담고 있습니다. 사형을 말리려고 급하게 온 듯한 성인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터키의 술탄 메메드 4세에게 보내는 자포로제 카자흐인의 회신 (Reply of the Zaporozhian Cossacks to Sultan Mehmed IV)1891, State Russian Museum, St.Petersburg 작품입니다.
3.6m가 넘는 대형 그림은 2년여에 걸쳐 완성된 대작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4세 Mehmed IV 술탄 (재위 1648-1687)의 역사적인 장면을 재현한 그림 타블로( Tableau)입니다. 이 그림을 본 알레산드르 3세는 감탄하면서 즉석에서 3만 5천 루블을 하사했습니다. 이 금액은 러시아 황실 그림 역사상 가장 많은 액수의 그림 값입니다. 일리야 레핀의 그림들은 러시아의 생생한 역사 현장을 극명하게 묘사한 때문으로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러시아 미술관(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과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국립 미술관(Tretyakov Gallery, Moscow)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6jRF7kQWT0
초상화의 주인공 나탈리아 페트로브나 골로비나 백작부인입니다. 19세기 러시아의 고위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당시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레핀은 골로비나 백작부인의 초상화를 매우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그녀의 얼굴과 옷, 배경까지 모든 부분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레핀의 초상화 스타일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주인공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레핀의 작품이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당시 러시아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ZGiNOJZJow
https://www.youtube.com/watch?v=lI20zV40Zds
그날 밤 베드로는 '제가요?' 라며 펄쩍 뛰었습니다. '주님 저는 주와 함께 죽게 된다고 해도, 결코 주를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 베드로의 대답에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모두 '저두요., 저도요; 라며 똑같이 다짐했습니다. 이 그림 제목 <모두 다 벌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Even of all fall away, I will not>는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이 그날 밤 베드로가 했던 고백을 , 그 림 제목으로삼았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 구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모든 제자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강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예술님은 이에 대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라고 예언합니다.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은 러시아의 19세기 최고의 리얼리즘 화가로,그의 작품은 당시 러시아의 모순된 현실과 시대정신을 탁월하게 묘사했습니다. 레핀의 대표작 중 하나는 작가 막심 고르키의 초상화입니다. 이 초상화는 레핀의 사실주의적 표현을 보여주며, 역사와 현실을 통찰하는 냉정한 관찰자로서 포착한 삶에 대한 명석한 해석을 치밀하게 표현했습니다. 레핀은 작품을 매우 천천히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렸습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백여 장 이상의 스케치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레핀은 고르키의 내면과 외면을 섬세하게 담아내어, 관람자에게 깊은 감동을 전달했습니다.
막심 고리키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가로,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입니다. 그는 1868년 3월 28일에 러시아 제국의 니즈니노브고로도에서 태어났고, 1936년 6월 18일에 소련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습니다. 고리키는 20세기 새로운 러시아 문학을 개척한 작가로,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원조로 평가받습니다.
고리키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삶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러시아 제국의 하류계급의 참혹한 생활상을 세세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신문 기자로도 활동하며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틈틈이 소설을 쓰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고리키는 반체제 운동과 혁명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여러 번 체포되고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혁명 운동을 지원하며, 1917년 10월 혁명 이후에도 볼셰비키 정권의 언론탄압을 비판하는 논설을 썼습니다.
고리키의 문학적 태도는 사회변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문학을 강조하며, 그는 스스로를 작가라기보다는 숙련공이라고 자처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역사적으로도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의 1980년대에는 사회주의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리키의 대표작으로 소설 <어머니>와 희곡<밑바닥에서>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으며, 노동자 계급의 의식화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 밑바닥에서>는 빈민 합숙소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묘사한 작품으로, 인상적인 구절과 강렬한 에너지가 특징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kVkQf4WlM4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은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집안아들로 태어나, 고향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상화가에게 그림을 배우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나와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Russian Academy of Theatrical Art)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수업을 했습니다. 이 아카데미에서 러시아 국비 장학생 금메달을 탔는데, 그 장학금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미술 인생의 귀중한 생애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귀국해서 러시아 역사화에 열중하다가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의 역사화 교수가 되어 학생 지도에 전념하기도 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 제2차 '10월 혁명 Octorber Revolution'이 나자 핀란드로 가서 헬싱키에서 핀란드 점령 러시아 해군 제독의 딸 작가 나탈리야 보리소브나 노르드만-세베로바 Natalia Borisovna Nordman-Severova Nordman)를 만나 귀국하지 않은 채,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 어느 날 저녁 무렵. 아마도 마지막 만찬 Last Supper 자리였을 것입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들은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 그 말씀에 베드로가 앞장서 나섭니다. '주님 모두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Even of all fall away, I will not.' 말이 끝나자마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밤 수탉이 두 번 울기도 전에,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
한 쌍의 젊은 남녀가 파도가 사납게 요동치는 바닷가에서 손을 붙들고 서 있습니다. 파도는 금방이라도 두 사람을 집어 삼킬 듯하고요.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은 두 사람이 금세 급류에 휩쓸려 가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게 되지만 두 사람은 걱정 말라는 태도입니다. 둘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놀랍게도 웃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여자는 혹시라도 모자가 벗겨질까 다소 주저하지만 남자의 자신감 앞에서 공포심도 잊은 모습입니다.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이 그린 <기막힌 해방감>은 러시아 사회가 새로운 국가 건설을 놓고 옥신각신하던 제정 말의 정치적 혼란기에 그려졌습니다. 사회주의에 공명했던 그는 그림에서도 기독교 주제와 신화의 세계에 안주한 아카데미 미술에 반발해 현실의 부조리에 눈을 돌리라고 외쳤습니다. <기막힌 해방> 에서도 그런 그의 목소리는 사그라지진 않았고요. 아리따운 여인은 당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며 포효하는 파도는 자유를 갈구하는 친구들의 함성입니다. 놀라운 건 이런 강력한 메시지를 너무나 로맨틱한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러시아인들이 일리야 레핀 (IIya Repin, 1844-1930)을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만의 특별한 표현법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1901년에는 러시아 국가의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형 프로젝트를 의뢰받았습니다. 레핀의 마지막 대작이 된 < 1901년 5월 7일 국가소비에트 회의>를 완성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레핀은 오른손 관절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레핀은 생애 말년을 핀란드의 쿠오칼라에 보냈고 그곳에서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레핀이 거주하던 쿠오칼라 마을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념하여 1948년 레핀의 이름을 따 "레피노"라 개칭되기도 했습니다.
1930년 9월 29일, 일리야 레핀은 86세를 일기로 핀란드에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현재 레핀기념관인 페나테스(Penates)뒤뜰에 묻혀 있습니다. 이곳,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과 바다가 만나고 러시아 미술의 체취를 돋우는 쿠오칼라 마을은 레핀의 이름을 따서 '레피노'로 부르고 있습니다. 러시아 최고 권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의 이름도 '레핀 아카데미'이고요.
"러시아 문학은 톨스토이, 미술은 일리야 레핀 "
이 문장 하나로도 레핀에 대한 러시아 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Sh7LTtPP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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