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면서도 대단히 묘사적인 붓놀림으로 표현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세상은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늘 소개할 러시아 출신 화가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의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실물보다 멋진 초상화를 상상하셨다면 실망하실겁니다. 아름다운 꽃과 먹음직스런 과일 정물화를 기대하셨다면 더 실망하실 겁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 껍질벗겨진 토끼, 벽에 걸린 죽은 가오리 ...등 그로데스키(Grotteschi)한 새로운 미학적 시도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다소 괴기하고 부자연스러운 것들이라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Grotteschi"는 이탈리아어로 "그로데스크"를 의미합니다. 예술에서 기괴하거나 우스꽝스러운 스타일을 말합니다.이 용어는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벽화나 장식에 사용된 복잡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디자인을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이러한 디자인은 종종 환상적인 생물, 식물, 그리고 인간의 형태를 결합하여 독특하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20세기 미술은 전통적 규범에서 벗어나 새로운 표현 방식을 탐구하며, 사회적 변화와 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받았던 시대입니다. 강렬한 원색과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했던 마티스를 대표로 한 야수파(Fauvism),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분해하고 재구성한 피카소와 브라크가 주도했던 입체파( Cubism), 꿈과 무의식을 탐구했던 달리와 마그리트같은 초현실주의(Surrealism) 등이 있습니다.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은 모딜리아니와 샤갈 등과 '에콜 드 파리 Ecole de Paris"의 일원이었습니다. '파리파' 라고 불립니다. '에콜 드 파리 Ecole de Paris'는 20세기 초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국제적인 예술가 그룹을 일컫습니다. 이 그룹은 특정한 양식이나 주의를 따르지 않습니다. 각기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하지요. 모딜리아니(이탈리아), 카임 수틴(리투아니아), 샤갈(러시아), 키슬링(폴란드), 파스킨(불가리아), 후지타(일본), 반 동겐(네덜란드) 등이 속해 있었습니다.'에콜 드 파리'의 중요한 예술가는 거의 전부가 이방인이었다는 거죠. 이들 중 사틴, 샤갈, 모딜리아니, 그리고 키슬링은 유태계 화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로 고독감과 향수, 불안 등을 작품에 표현했습니다. 파리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기여했던 그룹입니다. 특히 외국인 예술가들이 프랑스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하고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이 그룹은 해체되었습니다.
당시 예술계의 추상화를 향한 시대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수틴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재, 인식 가능한 주제에 대한 예술관을 유지하며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수틴은 자신의 예술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실험하기 보다는 자신의 표현법을 더욱 개발시키는데 집중합니다. 수틴은 자신의 작품 안에서 불안한 아름다움을 주는 여러 가지 곡선과 자유롭고 거칠게 표현되는 붓터치를 사용하여 캔버스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가 특징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왜곡된 형태는 색채와 브러시 효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수틴은 강렬한 색채와 역동적인 브러시 터치를 통해 감정과 에너지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왜곡된 형태와 함께 작품에 생동감과 불안정한 분위기를 더합니다. 그는 현실을 과장하거나 감정적인 해석을 반영하기 위해 색채를 선택합니다. 다양한 붓놀림을 통해 인물과 환경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깊은 감정을 보는이들에게 전달합니다.
그의 대표작 <작은 페이스트리 요리사 The Little Pastry Chef> (1922-23) 입니다. 요리사의 손에 가려진 붉은 손수건이 화면 전체에 걸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수틴의 표현주의적 스타일이지요. 수틴은 주제를 표현하면서 내면의 감정을 강조했습니다.내면에 감추어진 불안과 같은 깊은 감정 말이죠. 카임 수틴의 작품에서 왜곡된 형태는 감정적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수틴은 물체나 대상, 공간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현실과 다른 관점을 창조해 냅니다. 자신의 강렬한 감정을 왜곡의 형태로 표현한 거죠. 이러한 왜곡은 작품에 생동감과 불안정함을 더합니다. 때로는 불안과 고통 같은 깊은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요. 이렇듯 1920년대는 수틴에게 예술가로서 가장 활동적인 시기였고, 가장 수익성이 높은 시기였습니다. 특히 이 작품을 통해 수틴은 유명 수집가의 관심을 받게됩니다. 수틴의 고된 삶의 이유 중 하나였던 가난을 벗어나 남은 삶 동안 재정적 안정을 누리며 살 수 있었 던 복받은 시기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0pwgwX9-mo
카임 수틴( Chaim Soutine, 1893-1943)은 러시아 제국 산하에 있던 나라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의 한 소도시 스밀로비치에서 태어났습니다. 보수적인 유대교를 믿는 가난한 열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고향이라 부를 터전이 없어지고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며 그래서 모든 나라에서 이방인이어야 했던 유대인들의 숙명,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그림과 회화를 터부시 하는 가장 보수적인 하시디즘 공동체에서 태어났습니다. 수틴이 가진 예술적 재능은 그 자체로 항상 공격받는 저주받은 능력이었지요. 가난한 재봉사였던 아버지에게 그런 아들이 마음에 들리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카임 수틴에겐 폭력적인 체벌 또한 일상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그림에 대한 열망은 억눌러야만 했습니다. 불타는 듯한 불안이자 고통이었지요. 그런 그가 성년이 되어 가족을 떠나 예술가들의 성지였던 파리로 향합니다.
현재 몽파르나스(Montparnasse)에는 파리의 유일한 고층건물과 베르사유 궁전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는 역이 있습니다. 특별한 게 없어서 관광객들은 잘 가지 않죠.
피카소를 비롯한 후대에 유명한 작가들은 몽마르트의 바토 라브와르( Le Bateau-Lavoir)라는 작업실에서 작품하고 놀고했습니다. 일명 "세탁선" 이라 불리던 곳이죠. 그 건물은 온방시설과 수돗물이 없었던 건물입니다. 보기 흉한 몰골과 쓰러질 듯 흔들리는 모양이 마치 세탁부들이 빨래터로 쓰는 강변의 낡은 배와 비슷했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30여개의 아틀리에, 수도꼭지와 화장실은 2층에 단 하나 뿐이었다고 합니다. 달동네 수준이라 물가, 집세가 가장 싸서, 화구 하나 들고 예술가를 꿈꾸며 파리로 온 이방인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자신의 이상을 함께 나눌 동료들이 가까이 있으니 많은 예술가들이 일부러라도 들어왔겠죠.
20세기 가장 뛰어난 작품들의 산실이었습니다. 삼류 가수, 댄스, 창녀, 약장수, 건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무질서한 환경이 오히려 예술가들에게 자유와 새로운 예술의 창조력을 키우는 토양이 되었지요. 문제는 이 곳이 점점 더 유명해 지기 시작하면서 물가와 집값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좀 더 싼 곳을 원한 가난한 예술가들은 이곳을 떠났습니다.
피카소는 1912년 세느강을 건너 몽마르트르의 반대쪽인 몽파르나스(Montparnasse)로 이사합니다. 몽마르트르로 오는 많은 관강객들을 피해서 몽파르나스에 다른 예술인들이 그때쯤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로마노프 러시아 왕정을 피해온 러시아 및 동유럽 예술가 특히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때 몽파르나스에 등장한 예술가들은 몽마르트파를 비롯해 수틴, 모딜리아니, 샤갈 등등, 이들은 몽파르나스(Montparnasse)에서 피카소를 비롯한 몽마르트르의 예술가로부터 다시 한 번 현대미술을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6Lnp4rZK_4
1913년 불어 한마디도 못하고 검은 피부에 검정머리로 철저히 '이방인'었던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 그는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하면서 거장들의 그림과 시, 소설, 철학서를 탐독했습니다. 21세에는 모딜리아니 등과 친분을 가지면서 종종 그의 그림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출신 화가 마크 샤갈(1887-19850 와 몽파르나스의 이방인으로 " 에콜 드 파리 ,파리학파"로 활동하기도 하고요. 동료화가 모딜리아니아 함께 프랑스 남쪽 피레네 지방의 세레에 체류했는데 이때 그의 화풍은 그전까지의 어두운 색채에서 강렬한 원색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렇듯 카임 수틴( Chaim Soutine, 1893-1943)은 1920년대에 모딜리아니, 샤갈, 헤밍웨이와 같은 예술가와 문학인들과 교류하며 , 예술가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자리잡은 프랑스 몽파르나스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카임 수틴의 작품 <Still Life with Herring>(1916)은 그의 초기 정물화 중 하나로, 강렬한 색채와 독특한 형태 왜곡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 작품은 생선과 같은 일상적인 사물을 통해 감정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요소를 강조합니다. 수틴은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아 정물화에 생명과 죽음의 상징성을 담아내며,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표현합니다. 작품에서 사용된 과장된 색채와 형태는 수틴의 내면적 불안과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카임 수틴이 그린 <모이즈 키슬링(Moise Kisling, 1891-1953)의 초상, Portrait of Moise Kisling>(1919-20) 작품입니다.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은 이탈리아계 유대인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 1884-1920)와 폴란드계 유대인인 키슬링(Kialing)과 서로 화가를 꿈꾸며 유대인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유난히 서로 친했습니다. 주머니 가벼운 그들은 서로의 작품에 모델이 되어 주었지요. 친구 모이즈 키슬링을 각자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그려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EGBtss0MYM
아마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가 1915년 제작한 유화입니다. 그의 친구이자 폴란드계 유대인 화가인 모이즈 키슬링(Moise Kisling, 1891-1953) 을 그린 초상화입니다. 파리에서 활동한 '에콜 드 파리'라는 예술가 그룹의 일원으로서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모딜리아니의 독특한 스타일인 길게 늘어진 얼굴과 목, 부드러운 색채 사용, 그리고 간결한 형태가 특징입니다. 작품은 현재 이탈리아 밀라노의 피나코데가 디 브레라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모델이 되어준 모이즈 키슬링(Moise Kisling , 1891-1953) 의 작품도 감상해 보시고 , 친구였던 모딜리아니와 카임 수틴의 스타일도 비교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92EVcUuAXNI
구겨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지 모르겠습니다. 어깨는 움츠러들어있고 눈을 크게 떠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의 눈빛은 선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조금 겁에 질려 있는 듯 합니다. 불안한 모습으로 쪼그라든 그림 속 그녀. 작품의 제목까지 <Mad Woman>이네요.
간혹 길을 걷다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분들을 보게 됩니다. 다른 세계를 보는 것만 같은 눈빛, 혹은 혼잣말, 언어로 일상의 우리와 무언가 다르다는 신호를 감지하게 됩니다. 저들도 누군가와 농담을 하고 돈을 벌고 밥을 해 먹고 빨래를 개던 평범한 일상이 있었겠지요. 어쩌다 ...? 안스러운 마음 한편으로 작은 스트레스도 조절 못해 목까지 차오른 던 고삐 풀린 감정들을 힘들어 하던 시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도 저 작품속 그녀는 고통과 분노가 내면을 할퀴어서 뒤틀리고 찢어질 지언정 남을 공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타인을 망가뜨리기보다 차라리 자신을 놓아버리는 길을 택한 걸까요? 일렁이는 붉은 빛이 아직도 그녀의 진행중인 고통과 분노처럼 느껴집니다.
카임 수틴의 작품 <Mad Woman>에서 큐비즘 예술가들의 영향은 형태의 왜곡과 색채의 사용을 통해 간접접으로 드러납니다 . 수틴은 파리에서 큐비즘의 선구자들과 함께 활동했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감정 표현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큐비즘의 기하학적 단순화 대신, 형태를 자유롭게 왜곡하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인물의 내면적 불안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그의 작품에 독특한 생동감과 감정적 깊이를 더했습니다.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은 모딜리아니와 샤걀 같은 외국인 예술가들과만 교류했습니다. 언제나 철저한 이방인의 삶. 그렇기에 존재 자체가 늘 불안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이그러지고 꿈틀거리고 요동치고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항상 억눌러야만 했던 마음속 고통과 불안이 그의 렌즈를 거친 모든 것에 투영되어 있습니다. 사람도, 정물도, 집도, 풍경도 , 끝도 없이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으며 휘몰아치는 춤을 한바탕 추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1920년 모딜리아니 사망 후, 카임 수틴은 프랑스 남부 세르(Ceret)에서 미국인 수집가 알버트 반스의 후원을 받으며 작품활동에 매진합니다. 풍경화는 카임 수틴의 작품 활동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수틴은 화면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듯한 풍경을 통해 자신만의 깊은 불안과 침울함으로 풍경을 표현했습니다.
또한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강조와 왜곡 기법을 사용해 묘사하는 '데포르마숑 '기법을 사용한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화가로서 유명해지고 부유해지자, 청년기 특유의 광기나 개성은 많이 사라졌지만, 카임 수틴의 그림에는 사람의 마음 마저도 뒤틀어 버리는 강렬한 매력이 있습니다.
데포르마숑(deformation)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변형, 과장, 축소, 왜곡하여 표현하는 기법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표현하려는 감정적 메시지는 주로 현실을 벗어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감정과 주관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기법은 대상을 왜곡하거난 과장하여 표현함으로써, 관객에세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고, 작품 속에 숨겨진 내면의 의미나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표현주의와 야수파 화가들이 이러한 방법을 많이 사용하여, 작품의 감정적 깊이를 더하고 새로운 미적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카임 수틴의 작품 < Landscape with House and Tree> (1920-1921)는 프랑스 남부의 세르 지역에서 그린 풍경화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수틴의 독특한 표현주의 스타일을 보여주며,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색채를 통해 내면의 불안과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수틴은 자연과 건물을 왜곡하며 마치 풍경이 흔들리는 듯한 효과를 주었습니다. 남 프랑스의 색채와 빛의 영향으로 풍경화를 그리는 동안 주황색, 녹색, 노란색과 같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와 , 대상을 강하게 왜곡시키는 주관적 표현을 개발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불안정한 삶과 감정 상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PDXijpuBJ8
https://www.youtube.com/watch?v=RiBfoAfsanE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이 세르( Ce'ret)에서 그린 풍경화는 작품 중에서도 두드러진 주제 중 하나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수틴의 풍경화는 주로 세르(Ceret) 지역의 풍경과 농장을 주된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세르(Ceret)는 프랑스의 남부 작은 시골 마을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시골 풍경으로 유명합니다. 당시 유럽에서 떠오르던 새로운 미술 경향인 큐비즘, 입체주의 화가들이 많은 영감을 발견한 피레네 산맥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큐비즘(Cubism)은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예술 운동으로, 전통적인 사실주의적 표현에서 벗어나 대상을 다양한 시점에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기법을 사용합니다.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쥬 브라크가 주도한 이 운동은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여 평면에 표현함으로써, 관객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큐비즘은 이후 미래주의, 다다이즘 등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PH3yUZzt0k
절친으로 동료 화가인 모딜리아니 부부를 잃고 남프랑스에서 지내던 그에게 그림 속 나무처럼 무수한 바람이 마음 속에 불던 시절 그렸던 그림입니다.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의 미술은 예술의 진정한 힘은 자연의 단순한 모방과 현실에 대한 복사, 형식적 통일성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유기적 조화를 깨드리는 것으로부터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중세 르네상스 이래로 길들여온 예쁘고 아름답고 멋진 미술의 세계에서 추하고 병들고 사납고 공포스러운 표현작업으로 옮겨 갑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낯설게 하기, 거리두기 작업을 시도합니다. 우리들에게 '보여지는 세상'에 대한 찬미, 미화를 통해 우리가 동화되고 몰입하게 하는 대신, 그의 정서적인 훼방을 통해, 또다른 형태의 강렬함을 얻어 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VpmnU-wbDc
수틴 특유의 왜곡된 형태와 과장된 색채를 통해 강렬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역동적인 윤곽선과 대담한 붓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화가의 내면적 감정과 외부의 움직임을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1922년 세잔, 마티스, 르누아르 등을 수집한 필라델피아의 아트 콜렉터 알버트 C. 반즈 박사가 수틴의 회화 50여점을 구입하면사 수틴의 명성이 올라갑니다.
알버트 쿰스 반스( Albert Coombs Barnes, 1872-1951) 는 미국의 화학자, 사업가, 미술 수집가, 작가, 그리고 교육자였습니다. 그는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반스 재단(Barnes Foundation)을 설립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재단은 방대한 미술품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Barnes Foundation은 예술 컬렉션 및 교육 기관입니다. 1922년 앨버트 C. 반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및 현대 미술 작품을 포함하여 4,000개 이상의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재단은 원래 메리언에 있었으나, 2012년에 필라델피아의 벤자민 프랭클린 파크웨이로 이전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아난 반스는 또한 인종 평등을 위한 중요한 옹호자였습니다. 예술과 교육에 대한 그의 기여는 문화 기관과 사회 정의 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Barnes 재단의 컬렉션에는 여러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요 작가로는 피에르 외귀스트 르누아르(181점), 폴 세잔(69점), 앙리 마티스(59점), 파블로 피카소(46점),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 (7점) 등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ajgUkrpoXE
카임 수틴의 풍경화는 소용돌이치는 나무들의 붓놀림과 들쭉날쭉하고 기울어진 수평선, 뒤틀린 마을의 건물들을 통해 카임 수틴이 느꼈던 내면의 불안과 어둠을 직관적으로 전달합니다. 또한 이러한 독특한 스타일이 담긴 왜곡 표현과 생생한 색채, 강렬한 브러시의 움직임을 통해 카임 수틴만의 야성적 화풍과 깊은 내면 감정을 반영합니다.
카임 수틴 (Chaim Soutine )의 가오리 정물<Nature morte a la raie>(1923) 작품으로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Cleveland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아래 쪽 그림은 정물화가로 유명한 18세기 프랑스 화가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뎅( Jean-Simeon Chardin, )이 그린 <가오리 La Raie, 1725-26> 작품입니다. 샤르댕의 정물화 기법을 잘 보여주는 생생한 색채와 섬세한 구도로 찬사를 받은 작품입니다. 일상적인 대상을 깊이 있고 강렬하게 묘사하는 능력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유명해져 1728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입니다. 카임 수틴의 작품과 비교해 보세요.
카임 수틴( Chaim Soutine, 1893-1943) 의 <조각가 오스카 미스차니노프의 초상 Portrait du sculpteur Oscar Miestchaninoff > (1923-24년경) 작품입니다. 퐁피두 센터, 프랑스 국립현대 미술관 (Centre Georges Pompidou) 소장되어 있습니다. 아래 그림과 비교해 보시고 어떤 공통점이 있는 지 찾아 보세요.
초상화로 프랑스 화가 장 푸케 (Jean Fouquet )의 작품 <프랑스 왕 챨스 7세 대제 Charles VII roi de France > (1445-50년경), 입니다. 루브르 미술관( musee du Louvre) 소장품이고요. 15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화가이자 미니어쳐 화가로, 패널 회화와 필사본 조명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인 인물입니다. 그는 1420년경 프랑스 투르에서 태어났고, 후기 고딕과 초기 르네상스 시기를 잇는 중요한 인물로 여겨집니다. 푸케는 이탈리아를 여행한 최초의 프랑스 예술가로, 프라 안젤리코와 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카임 수틴의 주된 주제 중 하나인 정물화에서 수틴은 마치 영혼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처럼 도축된 동물을 묘사한 정물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수틴이 정물화의 주제로 동물 시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상징적 표현과 복잡한 관계를 담은 소재이자 수틴이 루브루 박물관에 방문해 연구하곤 했던 렘브란트의 작품에 대한 영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틴은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파리의 한 도살장에서 도축된 후의 소를 구입해 자신의 작업실에 걸어둔 후 며칠에 한 번씩 신선한 소의 피 한 통을 가져오도록 했고, 이 작품을 그리는 동안 수틴은 시체의 밝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피를 시체 위에 쏟으며 갓 자른 고개의 색을 연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더 정밀한 동물의 색을 묘사하기 위해 수 많은 붓을 활용해 40가지 이상의 색을 사용했다고도 알려져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수틴의 정물화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색채 또한 특징적인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카임 수틴의 정물화는 수틴의 화풍과 함께 깊은 어두움과 고독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수틴은 정물화 작품에서 주로 어두운 배경을 활용하고 정물들은 눈에 띄게 형태가 왜곡되거나 부패한 상태로 그려지는 경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삶의 끝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적막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주로 빨간색을 강조하며 표현된 색채와 자유로운 붓질은 현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그려지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수틴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반영하며, 종종 불안과 고통의 감정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카임 수틴은 (1893-1943)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거장들의 꽃 ,과일, 음식, 사냥감 등 정물화를 연구했습니다. 수틴은 종종 작업실에 동물 시체를 들여와 이웃들을 경악시켰습니다. 악취 때문에 경찰이 찾아왔을 때 수틴은 예술의 중요성에 대해 강연했다고 합니다. 마크 샤갈은 수틴의 방에서 복도까지 피가 흘러나온 것을 보고 "누군가 수틴을 죽였다"고 외치며 뛰언나간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도살된 소를 그리면서 참혹했던 어린시절의 기억을 지울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코셔법률로 동물들이 고통이나 지체됨 없이, 신속하게 목을 잘라 피를 뺀 채 효율적으로 도축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수틴은 작업실에서 썩어가는 동물 시체의 색깔을 살리기 위해 반복적으로 피를 부었습니다.
코셔법은 유대교의 식사 규정으로, 토라에 기록된 율법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구분하는 법입니다. 코셔는 히브리어로 '적합한'또는 '허용된'이라는 뜻이며, 이는 유대인들이 종교적 규율에 맞춰 철저히 관리된 식재료와 조리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코셔법은 동물의 도축 방법, 고기와 유제품의 분리, 특정 해산물과 돼지고기의 금지 등 다양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토라는 히브리어로 "가르침" 또는 "법"을 의미하며,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인 모세오경을 가리킵니다. 모세오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통적으로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토라는 유대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도 중요한 문서로 인식됩니다. 또한 토라는 성문 토라와 구전 토라로 나뉘며, 후자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설명합니다.
카임 수틴은 1920년부터 1929년 사이 렘브란트의 <살육된 황소 Slaughtered Ox, 1655)에서 영감을 받은 동물 시체 연작을 10여점 그렸습니다. 왜 수틴은 동물 시체에 집착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파리에 살던 젊은 화가 수틴은 유대인 이민자이자 모더니스트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정물은 수틴이 컬러, 구도, 붓질을 실험하고, 테크닉을 발휘할 수 있는 장르였죠. 인간의 먹거리인 소, 생선, 가금류 등의 그림은 강렬한 표현주의 색채로 음식으로서 먹음직스러움 보다는 죽음의 잔인한 상태를 강조합니다. 동물과 인간, 아름다움과 고통, 생명과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져줍니다. 수틴이 어릴 적 고향에서 목도했던 유대인을 타겟으로 한 폭력 뿐만 아니라 제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고발한 것처럼 보입니다.
2006월 2월에 이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카임 수틴의 아이콘 그림인 '고깃덩어리 시리즈 Series Le Boeuf Ecorche(1924) 가 나왔습니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랐던 생소한 작가의 작품에 경매장이 웅성웅성하며 얼떨떨하게 만들고 있을때 , 어느 익명의 바이어가 170만 영국 파운드($13.8 million)를 써넣어 최고 낙찰가로 구입하면서 소더비 경매시장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무명의 카임 수틴이 경매시장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던 순간이었죠. 그가 쪽방동네 푸줏간에서 잠시 빌려와 그린 고깃 덩어리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쇠고기가 되던 날이되기도 한날이었습니다.
무일푼으로 예술에 대한 열정 하나로 프랑스 파리로 떠난 카임 수틴( Chaim Soutine, 1893-1943)의 삶은 굉장히 고된 삶이었습니다. 물론 힘든 와중에도 수틴은 화가의 꿈을 포기 하지 않았고 일이 없을때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작품을 연구하고, 다른 일을 통해 모은 돈으로 마련한 작업실에서 도축된 동물을 구입해 정물화를 그려냈습니다. 특히 <가죽을 벗긴 소>는 수틴이 존경하던 렘브란트에 대한 헌정 표시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활동하던 17세기 네덜란드 정물은 의미와 상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에서 동물의 사체는 인간의 죽음을 연상하게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즉 , 렘브란트는 해체된 소를 통해 '메멘토 모리', 인간의 죽음과 삶의 덧없음을 암시했고,렘브란트를 존경하던 카임 수틴은 이러한 영향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 하게 되었습니다.
카임 수틴의 인물 초상화는 카임 수틴의 작품관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는 주제입니다. 수틴은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무작위로 만나게 된 지역 마을 사람들과 요리사, 가정부, 구두 닦는 사람과 같은 노동자의 초상화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는 또한 대상 뿐만 아니라 자기 성찰의 모습으로도 보입니다.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은 1920년대와 1930년대 파리에서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던 화가로 당시 빈센트 반 고흐의 후계자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이른 1920년대 프랑스의 호텔과 레스토랑의 요리사와 호텔 직원들의 유니폼의 강렬한 색상에 매료되어 십여 년간 그들을 그린 초상화들로써 작가의 명성을 구축하였습니다.
흰 셔츠와 빨간 조끼를 입은 벨보이를 에머랄드 그린 배경에 담고 있는 역동적인 초상화입니다. 인물의 왼쪽 눈은 강렬한 시선을 드러내며 존엄성과 강렬함을 전달합니다. 이 작품은 수틴이 서비스 직종의 인물들을 그린 시리즈의 일부로, 과장된 특징과 대담한 색상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깊이와 표현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수틴의 스타일은 전통적인 표현과 표현주의 적 요소를 결합하여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감정적 영향을 중시합니다.
카임 수틴의 <The Page Boy> 작품입니다. 마치 무언가,아마도 사탕같은 것을 제공하는 듯한 자세로 손을 뻗고 있는 페이지 보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년의 눈은 검은 공허함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얼굴은 핑크색의 오목한 조각처럼 보이고요. 이는 폭력이나 손상을 암시합니다. 고딕적인 위협과 빨간색의 사용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빨간색은 배경을 지배하고 주인공의 특징에 은밀하게 스며들어 그림의 감정적 강렬함과 심리적 깊이를 더합니다.
카임 수틴의 인물화에서는 정교한 묘사보다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 왜곡과 평면적인 표현, 그리고 강렬한 색채의 강조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인물화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옷, 신체, 자세 모두 과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수틴의 빠른 붓놀림은 인물과 주변 환경을 극적으로 표현해 긴장감과 함께 모호한 공간이 연출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물화에서도 빠르고 강렬하게 움직이는 브러시 효과를 사용하여 깊은 감정과 에너지를 함축해 전달합니다. 수틴의 붓놀림은 때로는 급격하고 격렬하며, 때로는 부드럽고 유연하게 움직이며 인물의 생동감을 더하고, 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FlwNNg1vEQ
카임 수틴이 1929년에 그린 <마들렌 카스탱의 초상Portait de Madeleine Castaing>입니다. 파리의 유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골동품상인 마들렌 카스탱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초상화는 그녀의 안절부절못하는 손, 어색하게 놓인 다리, 긴장된 표정을 담고 있으며, 이는 수틴의 파리 스튜디오에서 여섯 번의 세션 동안 그녀가 느꼈던 조바심과 불편함을 반영합니다. 이 작품은 역동적인 붓질과 강렬한 감정 표현으로 특징지어지는 수틴의 표현주의 스타일을 잘 보여줍니다.
카임 수틴은 그의 중요 작품들을 고전에서 많이 차용해 왔습니다. 그는 렘브란트(Rambrandt), 샤르댕(1699-1779, Chardin), 그리고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프 쿠르베(Courbet)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카임 수틴의 <물에 들어가는 여자 >(1931)는 렘브란트의 <목욕하는 헨드릭예>를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수틴의 버전에서는 여성과 물 사이의 구분이 거의 없으며, 그녀의 드레스, 피부, 자세가 뒤틀리고 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완전히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빠른 붓질은 인물과 주변을 평평하게 만들어 긴장감이 가득한 응축된 공간을 형성합니다. 이 현대적 해석은 전통적인 영향과 수틴만의 독특한 비전을 결합하여 자연주이적 깊이보다는 붓질의 질감과 복잡성에 중점을 둡니다.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b, 1606-1669)은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바로크 시대 화가입니다. "빛의 화가"로도 불립니다. 그는 명암의 대조를 강조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통해 인물의 생생한 표정과 감정을 표현하며, 특히 초상화와 자화상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 "야경", "밧세바" 등이 있으며, 유화 약 600점, 에칭 300점 이상을 남겼습니다.
샤르트르 대성당( Chartres Cathedral)은 프랑스에 위치한 대표적인 프랑스 고딕 양식의 건축물입니다 . 원래 1145년에서 1155년 사이에 건설되었습니다. 큰 화재가 있었고, 그 이후 1194년부터 1220년까지 재건되었습니다. 이 성당은 중세 시대부터 보존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들로 유명합니다 . 건축적 특징으로는 플라잉 버트레스와 두 개의 대조적인 첨탑이 있는데, 하나는 단순하고 다른 하나는 화려합니다. 성당이 가진 유물 덕분에 중요한 순례지로 여겨지고 있으며, 종교적 방문객과 일반 관광객 모두에게 인기있는 장소입니다. 수틴의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를 통해 대성당의 독특한 분위기를 표현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k3VsinLgvc&t=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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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gMFSIYskXyI
들판과 나무와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주로 그리던 그의 말년은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던 해였습니다.
그는 미술작업을 하면서 평생에 변변한 개인 작품 전시회 한번 열지 못했습니다. 수틴의 첫번째 전시회는 1935년 시카고에서 열렸습니다. 전쟁중이던 1937년에는 파리에서 국제 독립미술가전이 열려서 그를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곧 프랑스 파리가 독일에 함락되고 유대인 예술가였던 그는 독일의 비밀경찰 Gestapo에 체포령이 내려 파리의 야외에서나 수풀속에서 피신하며 잠을 자며 지내야 했습니다. 그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이 작품들이 그의 말년 작품들입니다. 시골길, 아이들, 그리고 은신처 주변의 산과 들판의 모습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파리는 독일군의 점령하에 들어갑니다. 카임 수틴과 같은 유대인 예술가들은 다시 이방인들이 됐습니다. 샤갈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은 미국으로 도망갔습니다. 수틴은 몇 번 파리의 미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으려고 시도했지만, 서류 부족으로 계속 거부당했습니다.
그는 수풀이나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잤고 끼니를 거르며 몇 작품을 그렸습니다. 이 도피 기간중에 얻은 위궤양으로 점점 고통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을 만큼 심각한 위궤양으로 결국 파리 외곽의 은신처에서 더이상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응급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천공성 궤양으로 더이상 생명를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1943년 8월 9일 숨을 거두고, 집도 절도 가족도 없었던 그는 근처 몽파르나스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불우한 가운데 절망과 빈곤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의 나이 쉬흔살이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의 동심의 아이들을 표현 하면서도 그의 화풍은 날씨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카임 수틴의 그로테스크 미술이 정말 놀라운 것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어떤 역경이 몰아쳐도 그가 파리에서 시작한 거칠고 원초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잔혹의 붓질, 그 미술적 표현은 확고 부동하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나이 쉬흔, 죽기 전에 그린 마지막 초상화 작품입니다. 그의 마지막 초상화에는 어머니와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아마 고향 리투아니아를 생각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S8VkDrp_RY
수틴의 장례식엔 파블로 피카소, 장 콕도 등이 왔으며, 그의 유태인 예술가 친구들은 경찰 감시가 두려워 장례식에도 참석 못했다고 하네요. 그는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습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말합니다. "프랑스의 미술사는 몽파르나스에서 끝났다. " 라고요. 카페와 피카소의 연애 이야기도 프랑스의 과거를 로망하는 것에 불과하다고요. 'Money Power'가 꼭 프랑스를 미술종주국에서 밀려나게 한 것만은 아니라고요. 프랑스의 민족주의 와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가 프랑스 미술을 몽파르나스에서 끝나게 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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