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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는 여전히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입니다. 19세기 당시 티소는 주류가 아닌 데다 상업화가였기에 미술사적으로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거든요. 인상주의 시기에 굉장히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요. 전문가들은 그를 '모호한 근대성'이란 단어로 그의 작품들을 규정짓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아카데미 화가로 분류하기에는 그가 다루었던 소재들이 지극히 동시대적이었습니다. 인상주의 혹은 모던 화가로 분류하기에  그의  스타일은  너무나 고전 적었거든요. 전통적인 초상화나 역사화에나 어울릴법한 테크닉으로 그가 그린 대상은 일상적인 사람들의 취미생활, 신흥 브르주아들의 일상, 그리고 집안의 여인 초상 등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시 파리에서는 보들레르의 '모던한 삶의 화가'에 걸맞은 마네와 드가식의 스타일이 예술계의 대세로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파리의 급변하는 삶의 속도를 포착하기 위해서 말이죠. 현대적인 마네와 드가의 방식은 동료 예술가들의 지침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행 속에서 티소의 그림은 고루하고 보수적인 느낌을 주기 충분하죠. 그럼에도 그의 완벽한 회화적 테크닉만은 모두의 감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Seaside>/www.clevelandart.org

 

 

1863년 여성의 초상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면서 '스타화가'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센스 도 한 몫했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각종 장신구와 옷주름까지 섬세하고 스타일리시 하게 표현했거든요. 그래서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 중 한 명이었답니다. 작품 속 배경은 바닷가 근처 같아요.  얼굴, 손목 다 가렸지만 편안하고 우아한 모습이 참 매력적인 그림입니다. 리본과 프릴의 디테일이 살아있어  바람이 스치면 출렁이는 모습 또한 아름다울 것 같고요. 

 

 

<Young Ladies Looking at Japanest objects>,1869/wikipedia

 

 

엄마와 딸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여성 두 사람이 모형 배같은 물건을 신기한 듯 골똘히 바라보고 있어요. 바닥에 깔린 카펫을 제외하고 주변 환경은 동양적인 , 특히 일본의 느낌이 물씬  베어있고요. '이곳이 프랑스 파리 맞나?'싶습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집니다. 일본여성의 기모노, 게이샤문화, 우키요에 판화 등 마네, 모네, 휘슬러 등의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 선풍적인 유행이었지요. 주머니 사정 가벼웠 던 고흐도 우키요에 판화를 소유할 수 있었을 정도로 인기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을 그리고 싶어도 너무 멀다 보니 모델을 구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서양식 얼굴, 금발 머리 모델들에게 아쉬운 대로 기모노를 입혀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제임스 티소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요. 당시 파리에 외국 물건을 취급하던 상점 같습니다. 해외로 식민지를 넓히고 있을 때라 동양의 독특한 물건들이 많이 수입되고 전시되었죠. 우리가 수입 물품 상점에서 느끼던 감탄과 비슷한 느낌 아닐까 싶습니다. 

 

 

낭트/ 해시넷위키

 

 

제임스 티소는 1836년 10월 15일 프랑스 낭트 출생입니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공부를 마쳤고요. 티소는 1859년 살롱에서 전통주의 작풍의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요. 드가가 그를 그릴 정도로 꽤 친한 사이였지만 둘이 크게 싸운 후 드가가 요청한 인상파 전시회 참가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1871년 보불 전쟁이 끝나고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파리코뮌 정권이 들어 서자 바로 정부군의 역습으로 정권이 무너집니다. 3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합니다. 파리 코뮌의 지원자로 의심을 받은 제임스 티소 (James Tissot/1836-1902)는  체포를 피해 영국 런던행 배에 몸을 싣습니다. 파리와의 작별이었죠.

 

 

런던으로 이주한 티소는 화가로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빅토리아식 귀족사회에 안정적으로 흡수됩니다. 엄청난 초상화를 의뢰받았고, 실제로 친구였던 드가가 그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냈을 정도로 말입니다.  어린 시절 보았던 낭트의 항구의 풍경은 템즈강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이어집니다. 

 

 

강에 정박된 화물선들, 산업사회를 상징하는 뿌연 매연, 그 강가에서 뱃놀이를 하는 잘 차려입은 군인과 여인들, 변화하는 런던 사회와 그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전통이 프랑스에서 온 외국인의 눈에 그저 경이로울 뿐입니다. 아마 제임스 티소라는 화가의 이름은 낯이 설지만 어디서 본듯한  그림들이 보이실 겁니다. 티소의 작품은 우아한 몸짓과 옷차림으로 사교를 즐기는 사람들의 한가한 모습, 반복적인 주제들 안에서 이루어진 구도의 변주들, 그리고 유연한 공간 구성이 돋보입니다.

 

 

 

<선상 무도회 The Ball on Shipboard>,1874/wikipedia

 

 

<선상 무도회 The Ball on Shipboard/1874>

1874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선상 무도회' 작품입니다. 아랫 층에서 선상 무도회가 진행되는 동안 갑판 위의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죠. 화려한 야외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성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작품은 갑판 위 남녀의 모습을 담고 있어요. 신사는 적고 귀부인, 숙녀들만 잔뜩 갑판 위에 모여 있습니다. 아마도 갑판 아래에서 펼쳐지는 무도회에 참석했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아니면 댄스 파트너를 찾기 위해 갑판 위로 올라와 있는 듯 보입니다. 마땅한 남성 파트너가 잘 보이지 않아 그런지 몇몇 여인들은 벌써 선상 무도회가 싫증이 난 듯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두 숙녀 옆에 노신사가 난간에 기대어 있지만, 두 숙녀는 1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 남성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있나 봐요. 몸이 앞쪽으로 기울인 채 관심 있게 듣는 걸 보면 말입니다. 걸려 있는 만국기가 한창 뻗어 나가는 영국의 국력을 넌지시 얘기해 주는 것 같습니다. 

 

 

 

<쉿 Hush!>,1875/wikipedia

 

 

 

<쉿 Hush/1875>

이제 막 연주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도대체 분위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화면 가운데 연주자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고요함이 있는데 왼쪽은 소란스럽습니다. 이국적인 복장을 한 사람도 눈에 띄는 것을 보면 그래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 같습니다. 왼쪽의 여인은 연주자의 자세와 관계없이 아예 몸을 돌리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부채를 펼쳐든 모습도 퍽 인상적이고요. 계단까지 잘 차려진 젠틀맨과 부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면 권력이나 부가 막강한 사람 같습니다. 저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기도 불편할 듯합니다. 저런 스타일의 옷차림이 당시 유행이었나 봐요. 그나저나 연주는 언제 시작하나. 빈 좌석 고급 의자가 주인을 대신해 위엄을 드러내 보입니다. 

 

 

 

 

<템즈강 The Thames,1876/cybermusee.com

 

<템즈강 The Thames/1876>

템즈강은 그가 영국에서 사는 동안 즐겨 찾았던 그의 주제였습니다. 템즈강을 따라 가는 보트 여행입니다. 강 옆에 정박 중인 배에서는 거대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하늘은 온통 스모그로 덮여 있습니다. 강물도 회색입니다. 짐을 올리고 내리는 인부들의 고함소리도 배가 강물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고 있습니다.

 

 

 

'유럽의 할머니'로 불리우며 슬하의 9자녀를 유럽 각지에 시집 장가 보냈 던 빅토리아 여왕시대였습니다. 1770년 증기기관의 개량으로 역마차나 배 대신 철도로 물류를 대량 공급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산업혁명으로 남아도는 물류는 아시아로, 필요한 원료들은 아프리카에서 충당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죠. 1851년 빅토리아의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의 주도로 만국 박람회가 영국에서 열립니다. 영국 산업혁명의 결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거죠.  그림 속 파이프를 물고 여유로운 자세를 취한 남성의 모습에서 무역, 정치, 경제분야에 영국의 부유함과 당당함이 묻어 나옵니다. 

 

 

<휴일 Holyday>,1876/wikipedia

 

 

 

몇 년 전 깃발 여행으로 유럽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에 끼워 맞추다 보니 막상 영국에 도착했을 때 멍 때리는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림 속 장면처럼 돗자리 들고 점심이나 와인 혹은 책을 들고 공원 주변에 잠시 앉았다 오고 싶었거든요. 티소의 그림으로 대신해 봅니다.  <휴일 Holyday,1876> 템즈강 시리즈와 더불어 공원의 피크닉도 이 시기의 티소가 반복해서 그린 소재였습니다. 휴일 공원에서 한가로이 티타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물의 내면보다는 눈으로 보이는 시각적인 풍경에 더 주목하고 있었던 티소의 관심사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그의 그림에서 정치색이나 주제의식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그의 그림은 정확히 보들레르의 '덧없는 순간'을 표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제 눈에 이 장면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찰나의 행복을 즐기고 싶은 티소의 마음은 아니었을 까 싶은데 말이죠. 휴일의 느긋하고 나른한 느낌이 그림에 가득합니다.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공원에서 소풍을 즐기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모자 스타일도 참 다양합니다. 

 

 

 

영국에 도착한 티소는  자크 조셉 티소라는 프랑스 이름을 제임스 티소라는 영국식 이름으로 바꿉니다.영국 사람들 기호에 맞는 초상화를 그려 곧바로 인기를 얻고요. 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꾸게 만드는 이혼녀 캐틀린 뉴튼을 만나게 됩니다. 캐틀린은 집안의 결정에 따라 17세가 되던 해, 인도에 있는 군의관과 결혼을 하기 위해 인도로 가던 중, 배 안에서 만난 팰리서 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인도에 도착한 캐틀린은 뉴튼과 결혼식을 올리지만, 결혼식 직후 팰리서와의 관계에 대해 남편에게 고백해 버립니다. 남편에게 돌아온 답은 즉시 이혼이었고 그녀는 다시 영국행 배에 올라야 했습니다. 영국에 도착한 후 팰리서의 아이를 낳았고 그 무렵 티소를 만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10월 Ocotober>,1877/ Daum 카페/시향미술관

 

 

<10월 Ocotober/1877>치마를 살짝 걷고 숲으로 들어가는 여인 뒤로, 햇빛으로 가득한 노란 단풍잎들이 모두 조명이 되어 줍니다. 덕분에 여인의 얼굴 선이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옆구리에 책을 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무 밑에 앉아 편하게 책이라도 볼 요량인 것 같습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봐서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티소의 유일한 여인이었던 캐틀린 뉴튼 입니다. 티소의 그림 속의 가장 많은 모델이었고 신비스러운 매력을 가졌다는 여인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림 속 포즈는 그녀가 아니어도 근사하게 나오는 포즈라 한번쯤 시도해 보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그림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기록물로서의 역할입니다.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 그림만큼 좋은 기록 매체는 많지 않았지요. 중세의 풍속화를 통해서 우리가 당시 삶의 양태를 짐작할 수 있는 것도 그림 덕분입니다. 의상의 변천을 연구하는 복식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화가가 제임스 티소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의 의상은 복식사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Bustle/wikipedia

 

 

<The Ball>,1878/wikipedia

 

 

<무도회/1878>오르세 미술관 소장 

티소의 '무도회'는 파티에 참석하는 여자의 야망과 그것을 적당히 즐기고 있는 남자를 날카롭게 비평한 작품입니다. 야망을 가진 자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죠. 이 작품에서 노란 드레스에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시선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화면 가득한 화려한 노란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 주인공입니다. 젊은 여인은 백발의 노신사와 팔짱을 끼고 있습니다. 그녀의 드레스 밑자락은 화려한 레이스의 물결을 이루고 있고 검은 바탕에 있는 물고기는 레이스를 마치 거슬러 올라갈 것 같습니다. 그녀는 노란 부채를 들고 팔은 노신사에게 시선은 다른 사람에게 두고 있습니다. 티소 그림의 특징이 여인은 항상 시선이 밖을 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말이죠. 두 사람 뒤에는 무도회장과 거실 입구를 가르는 붉은색의 커튼이 쳐져 있고요. 커튼 앞에 있는 신사와 그 옆의 젊은 여인은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습니다. 무도회장의 남자들은 거의 노년의 신사들이고 무도회에 참석한 여인들은 한결같이 젊습니다. 이 작품에서 남자와 여자의 나이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노란 드레스의 여인은 그와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 캐틀린 뉴턴입니다. 그녀가 폐결핵으로 죽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6년동안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혼 경력이 있는 그녀와의 사랑은 당시 인기 화가였던 그에게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게 됩니다.  한 때 인기 있던 초상화가 티소가 행실 좋지 못한 유부녀와 함께 어울린다는 말은 그의 밥줄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말과 같았거든요. 당시 빅토리아 시대는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가정 생활을 중시했어요. 여왕 부부가 몸소 실천하며 그렇게 살았거든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티소가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다는 얘기죠. 실제로 여기저기 수군거림과 보이지 않는 질시 때문에 왕따가 된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소는 그녀가 죽은 후에도 그녀를 모델로 작품을 제작하는 뚝심을 보이지요.

 

 

 

 

<야망을 품은 여인 A Woman of Ambition,1885/wikipedia

 

 

  드레스 색상만 바꾼 <야망을 품은 여인 A Woman of Ambition/1885>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 역시 캐슬린을 모델로 했습니다.  한 눈에도 범상치 않은 화려한 의상의 여인이 남자의 팔을 끼고 입장하고 있습니다. 드레스와 그에 어울리는 부채 그리고 당당한 눈빛을 가진 여인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오른쪽 남자는 누군가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습니다. 턱을 괴고 쳐다보는 중년 남성의 시선도 곱지는 않네요. 그러나 여인은 주위의 수군거림에 전혀 신경 안 쓰는 표정입니다. 그 정도 비웃음에 머뭇거린다면 그것은 야심이 아니겠죠.

 

 

 

 

<정원벤치 The Garden Bench>,1882/세계일보

 

 

 

<정원 벤치 The Garden Bench/1882>

캐더린에 대한 티소의 사랑의 정도는 시간과 공간을 건너 뛰어 캐더린이 죽은 후에도 계속됩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어떤 여자와도 로맨틱한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정원의 벤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캐더린과 그녀의 아이들입니다. 넌지시 아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엄마 캐틀린의 눈길이 다정합니다.엄마 옆에 딱 달라 붙은 딸 아이의 모습도 사랑스럽습니다. 놀러 온 조카의 모습도 보이고요.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과 여인의 드레스 색상도  세련되고 우아합니다.

 

 

 

티소의 인물 묘사도 뛰어나지만 의상과 소품에 대한 묘사도 탁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티소는 동거에 들어 간 캐더린,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시간이 그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1882년 캐더린이 28세 그리고 티소가 46세 되던 해, 그녀는 폐결핵 말기를 비관하여 아편 과다 복용으로 자살하고 맙니다. 티소의 행복한 시간은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이 작품은 그녀가 죽은 후 티소의 기억을 빌어 그려진 그림이고 그가 가장 아꼈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죽음이후 10여 년간의 영국 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옵니다. 파리로 돌아온 티소는 3년 정도 파리의 생활을 화폭에 옮깁니다. 여러 사회 계층 여성들과 그 주변환경을 묘사한 초상화를 성공적으로 그려내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6vgmHxd1UZA

 

 

 

 

<L.L.의 초상>, /Artlecture Contemporary Art Platform

 

 

<L.L. 의 초상/오르세미술관>

1864년 티소는 살롱에서 아래의 초상화를 선보입니다.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동시대 신흥 부르주아 집안의 소녀. 흰색, 빨간색, 검은색이라는 파격적인 색상대비와 옷 장식, 화려한 벽지의 패턴과 의자의 디자인까지. 패션과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고개를 쭉 빼고 가까이 가 보고 싶은 그림일 겁니다. 이미 그는 20대 후반부터 섬세한 데생과  대조적인 색상의 사용, 벽지와 사물에서 볼 수 있는 치밀한 관찰과 완벽한 마무리라는 스타일을 완성했답니다. 당대 유행하던 복식과 취미, 집안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재현해 내 보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이런 질감에 대한 섬세한 표현의 시작은 모자가게와 직물상을 하던 부모에게서 자란 영향이었을 겁니다. 그의 이런 스타일은  부를 쌓기 시작한 부르주아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귀족들이 삶의 양식을 답습하고 싶은 새로운 지배계급의 취미에 재빠르게 대응하며 그를 성공가도에 올려놓습니다. 

 

 

 

캐틀린의 죽음 이후 티소는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신비주의 와 심령술에 잠시 빠진 적이 있습니다. 영매를 불러 죽은 그녀를 만나고 싶어서 말입니다. 이정도면 정말 사랑한 것 만나봐요. 보수적인 카톨릭 전통에서 자란 그는 자신의 신앙에 이 신비주의를 결합시키기 시작합니다.  1888년부터 티소는 종교적 계시를 경험하게 되고 죽을 때까지 성서에서 주제를 따온 작품들에 전념하며,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을 여러 번  방문하며 얻은 견문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넓혀갑니다. 이 기독교 관련 작품들은 프랑스어와 영어로 출간해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듭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긴 구약과 신약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수채화가 700점 남겨져 있습니다.

 

 

 

<<Baptism of Jesus>,1836-1902/Brooklyn Museum

 

 

<What our Savior saw from the Cross>,1886-1894/wikipedia

 

 

 

<우리 구세주가 십자가에서 내려다 본 것은  What our Savior saw from the Cross/1886-1894>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내려다 본 풍경입니다. 예수님 발아래로 성모 마리아와 막달레나 마리아가 있습니다. 신 포도주를 적셔 주었던 장대도 보입니다. 소리를 지르고 있는 유대의 제사장들도 있고 걱정스러운 듯이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흐의 박물관에 걸려 있던 장 레옹 제롬의 <골고다>, 루벤스의 <십자가의 책형>이 극적인 장면을 묘사해 보는 이들을 충격에 빠트리지요. 대부분의 화가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화면에 묘사했기 때문에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안쓰럽고 , 안타깝고, 그리고 무서운 느낌을 갖게 됩니다.  뼛속까지 죄인의 마음이 되지요. 그런데 티소의  이 작품은 시점이 달라서 인지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몇몇 여인을 제외하면 모두가 방관자의 자세로 올려다 보고 있습니다. 육신의 고통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일과 자신은 관계가 없다는 듯 올려다볼 뿐입니다.  이 상화은 마치 당연한 결과였다는 듯이 말이죠.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눈 빛에서 인간 예수는 죽어가면서도 고통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제임스 티소는 프랑스 화가이지만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너무 영국적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대중들로부터는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의 작품들은 고가로 팔렸습니다 . 한편으로는 미술사보다는 옷의 역사를 다루는 복식사에서 그의 작품을 더 많이 인용한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1960년대 이후 영화, 디자인, 패션사가 연구되면서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한 화가이고요. 상업적이라는 한계 때문에 여전히 주류 미술사 시각에서는 거장의 반열에 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인상파였던 르누아르가 도시 여성을 다루는 소박한 미와 비교될 정도로 인공적이고 마네킹 같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점원이든 귀부인이든 철저히 상품화된 여성성의 표상은 마치 여성들이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이 남성의 유혹인 것처럼 표현되어 불편한 면도 있고요. 하지만 그 덕분에 당시 여성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 누군가의 호기심을 충분히 채워줬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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