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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역사를 바꾼 커다란 사건 3가지를 손꼽자면 종교개혁. 프랑스 대혁명, 산업혁명 이렇게 꼽을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죽음 이후 유럽의 군주들은 빈 회의(1815)를 열고 나폴레옹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고자 머리를 맞대고 함께 했습니다. 혁명의 맛을 알아버린 시민들은 계몽주의로 무장한 채 더 이상 옛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요. 결국 나폴레옹 이전 시대로 건너갈 수 없게 됩니다.
유럽지도의 중심에 해당하는 독일은 9개 나라와 국경선은 맞대고 있습니다. 유럽의 제후들 역시 독일이 통일이 되어 주변국들을 위협할 까 항상 노심초사했고요. 한쪽이 너무 커지면 힘이 균형이 깨지기 때문에 주변국들에 의해 독일은 다시 쪼개집니다. 35개의 공국과 4개의 대도시로 말입니다.
19세기 초 정치, 사회적 상황으로 독일에 드리운 병적인 좌절감과 어두움은 엉뚱하게 예술과 문학에서 낭만주의 사조를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실연했다고 자살하는 지금생각하면 살짝 이상한 그런 이야기가 트렌드가 되어 인기를 모으게 되지요. 음악의 슈베르트는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라는 실연의 아픔을 독일 가곡들을 통해 전합니다. 다소 감정 과잉처럼 말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TW2pCG5kPI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는 1774년 독일 발트 해안의 항구도시인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에서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납니다. 루터파 신자인 아버지의 엄격한 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이 아버지 아돌프 고트리프 프리드리히(Adolf Gottlieb Friedrich)는 양초와 비누를 만드는 수공업자였습니다.
그는 7살 때 어머니가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납니다. 다음 해에는 누이 엘리자베스가 떠나고요. 13살 때 호수에서 얼음이 깨져 자신을 구하려던 동생 요한 크리스토퍼가 익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고요. 또 다른 누이 마리아가 발진 티푸스로 사망하는 고통을 겪지요. 죽음이 늘 그의 주변을 감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픈 경험들은 그를 평생 우울증, 대인기피증,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 내면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죽음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버리죠. 프리드리히는 가족들의 죽음을 통해 너무 일찍 그 비밀을 알아버리게 됩니다. 종교에 더 깊이 침잠하게 되고요. 자연스레 그의 작품 세계는 고독, 우울함, 경건함이 짙게 묻어나 있습니다. 프리드리히의 이렇게 복합적인 감정들은 마주하는 대자연을 범접할 수 없는 신의 모습처럼 표현하며 신비와 숭고함을 작품에 담게 됩니다.
그는 미술학교에서 소묘를 배웠고, 20살인 1794년 덴마크의 코펜하겐 왕립미술학교에서 유학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스타일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계발합니다. 자연의 신성함과 장엄함을 강조하고 자신의 감정과 상상력을 반영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 당시에 미술 전시회들로 유명했던 드레스덴은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프리드리히는 드레스덴의 시인들과 사상가들 그리고 화가인 필리프 오토 룽게로부터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의 회화가 인정을 받은 결정적 계기는 1810년 베를린의 아카데미 전시회에 출품된 <Monk by the Sea>(1809)과 < The Abbey in the Oakwood>(1808-10)을 빌헬름 황태자가 구입하면서부터입니다.
무한하고 균일한 공간 앞에서
마치
눈꺼풀이 잘려 나간 것 같은 느낌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1810년 베를린 아카데미의 전시에 이 작품이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결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형식의 풍경화에 대해 하인리히 폰 프라이스트의 묘사입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표현은 모래 해변과 검은 바다, 그리고 구름으로 가득 찬 어둑한 하늘이 이루는 수평선을 제외하고는 눈의 초점을 맞출 만한 곳이 없습니다. 불필요한 세부 묘사를 모두 생략해 버려 마치 동양화의 여백미처럼 무한한 공간감을 느끼게 됩니다. 덕분에 신비롭고 영적인 세계를 잘 표현했다는 평가죠.
바다와 하늘이 이루는 두 개의 수평선을 가르는 단 하나의 수직선은 왜소하기 그지없는 수도승의 앞모습도 아닌 뒷모습입니다. 넓게 분포된 하늘은 네달란드식 풍경화의 영향이라고 해요. 지정학적으로 네덜란드는 지평선이 낮은 곳이라 큰 산이 없습니다. 보이는 곳이 다 하늘인 거죠. 캔버스 대부분을 차지한 하늘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수도승의 모습을 통해 대자연 앞에 점처럼 작은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수도승은 우리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어 우리도 그의 시선을 따라 허공이나 다름없는 풍경을 바라보게 됩니다. 처절한 고독과 공포감도 느껴지고요. 그런데 이 음침하고 메마른 바닷가는 사실 프리드리히가 자주 여름을 보내곤 했던 발트해의 뤼겐섬 풍경이라고 합니다. 사제 복장을 한 인물은 화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고요. 무한 앞에 방향을 잃은 인간의 혼돈과 절망,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는 내면적이고 우울했던 화가의 자화상인 거지요.
Albert Boime 은 카스파르의 작품이 공포영화의 장면처럼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의 고딕풍에 등장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황혼 무렵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이 서 있는 숲 속 수도원 모습입니다. 주변이 너무 어두워 자세히 보아야 사람의 형체를 볼 수 있습니다. 발길 한 번 줄 것 같지 않은 이 폐허의 공간에서 고요한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끝나지 않는 겨울과 황폐와 절망을 읽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고비를 넘긴 겨울과 멀리 다가오고 있는 봄은 느낀다고 하고요. 개인적으로 후자였으면 합니다. 음산하게 뻗어 난 잔 가지들이 봄이 오면 잎사귀로 뒤덮여 무성할 테니까요.
그가 살던 시기는 유럽 전체에 걸쳐 물질주의가 점점 팽배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 대해 사람들의 염증이 점점 커짐에 따라서 정신적 영역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싹트고 있었고요.이상적인 세계에 관한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종종 우리를 둘러싼 자연적 세계(the natural World)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를 비롯해서 J.M.W.Turner(1775-1851), John Constable(1776-1837)같은 화가들은 "인간문명의 술수에 대항하기 위한 신의 신성한 피조물"로서 자연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줍니다. 프리드리히와 동시대를 산 프랑스 조각가 다비드 당제를 <David d'Angers(1788-1856)>는 그를 가리켜 "풍경의 비극(the tragedy of landscape)"을 발견한 화가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년의 프리드리히는 작품이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위 작품은 전통적인 종교화의 상징들을 대체하려는 노력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보헤미아 지역을 여행하고 그린 그림이고요. 푸른 전나무나 담쟁이들은 그의 영적 감수성을 더 풍부하게 하는 소재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의 글에 따르면 산은 믿음, 나무는 희망, 석양의 빛은 그리스도 이전의 세계의 종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프리드리히는 풍경화가 종교적인 계시의 전달 수단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그의 생각이 잘 반영된 그림인 거죠. 이 작품의 주제는 그가 여러 번 사용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의 다른 풍경화들과 만찬가지로 북유럽의 강렬하고 시적인 풍경 묘사로 채워집니다. 그리고 세심하고 신중한 형식적인 양식으로 그려지고요. 그의 풍경화들은 직접 관찰하며 그린 것이지만, 자연을 충실히 담아 내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프리드리히의 이미지들이 세상에 대한 우울한 관조의 전형이 되었지만, 풍경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단지 개인적인 시각이 아닌, 그 시대의 풍조였습니다.
낭만주의 화풍에 나타나는 자연의 개념은 문학 및 음악 뿐만 아니라 미술에서도 폭넓게 묘사되는 방랑자(wayfarer, or wanderer)의 모습을 등장시킵니다. 방랑자는 말 그대로 미지의 세계를 두루 여행하기 위해 집이 주는 안락과 안전을 포기한 사람이지요. 특히 독일문화에 많이 예시되고 있습니다. 이 테마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건의 중심 속에서는 결코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고, 그 사건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인간학적인 개념으로부터 나옵니다. 세계는 빈번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것에 맞설 수 없는 조화와 질서의 부재를 보여주지요.
낭만주의는 격렬하게 부는 태풍, 암울하고 산이 많은 풍경, 영원히 길을 잃을 것 같아 보이는 숲 등 자연을 가장 드라마틱한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이 풍경들은 극도로 음울하고 고독한 장소들이며, 절대자를 향한 저항할 수 없는 비이성적 탐구심에 이끌려 정처 없이 온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방랑하는 장소들입니다.
이 방랑자들은 루드비히 리히터(Ludwig Adrian Richter,1803-84)나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프리드리히는 정처 없는 이 방랑자의 오랜 방랑의 정수를 가장 성공적으로 포착해 낸 화가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화가는 자기 앞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본 것도 그려야 한다.
내면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면
앞에 있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는 19세기 독일 초기 낭만주의 화풍의 그림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그는 특히 중기 시대에 제작한 우의적 풍경화가로 유명합니다. 이 그림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때까지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사람의 뒷모습을 그린점입니다. 대자연에 압도되며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보는 이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거대하고 신비로운 자연 앞에 선 작은 인간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경건함마저 일으킵니다. 후세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입니다.
프리드리히는 세계와 관계 맺는 방법으로 여행을 자주 다녔다고 해요. 세속적인 성공을 뒤로 하고 독일 전역을 여행합니다. 자연의 원형을 잘 갖춘 바다나 험준한 산같은 곳으로 말입니다. 산 정상을 올라가 본 경험을 가진 분들은 충분히 느꼈을 겁니다. 자연의 광활함에 절로 경외감이 드는 광경을 말입니다. 자욱한 안개 바다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의 고독한 뒷모습이 보입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광활한 대자연에 홀로 마주 한 인간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개인적으로 작은 점 하나 같은 존재감 그래도 작아도 좋으니 그런 점 하나 찍고 가고 싶은 양가감정이 남성의 뒤태에서 읽히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그의 풍경화에서는 다른 풍경화에서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슬픔이나 외로움, 공포, 적막감 등이 느껴집니다. 거기에는 프리드리히의 불운했던 어린 시절의 영향도 한몫했고요.
프리드리히 그림 중 모처럼 화사한 그림이 등장합니다. 독신생활을 하던 44살의 프리드리히는 1818년 아내 카롤리네 봄머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 그림은 신혼여행을 떠났을 때 작품이라고 해요. 세 사람 모두 여전히 뒷모습만 보이네요. 풍경이 고즈넉하고 아름답죠. 팔짱끼고 바다에 시선을 두는 이가 프리드리히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이런 곳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의 그림은 영국의 존 컨스터블이나 윌리엄 터너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그냥 감상하기만 하면 되는 기존의 풍경화가 아닙니다. 그의 그림은 편안하기보다는 뭔가 생각하게 만듭니다. 인생의 풍파와 어려움을 겪고 난 뒤 회한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하고요. 그로 인해 성숙한 인간의 고뇌와 번민도 함께 덤으로 오지요. 마치 칸트 같은 독일 철학자의 진지함이 화가인 그에게도 강하게 느껴집니다.
잔설이 남아있는 들판에 외롭게 서 있는 떡갈나무는 그가 가장 즐기던 소재 중 하나였습니다. 여기서 고목은 주로 기독교 이전의 이교적인 세계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화면 전면에 부러져 나 뒹구는 나무 가지들은 낡은 시대의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말해줍니다. 고목이 서서히 새로운 싹들이 움터 나오고 있고 잔뜩 찌푸렸던 날씨도 서서히 푸른 하늘을 드러내며 메시아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고요. 얼핏 단순한 풍경으로 읽혀지기 쉬운 그의 작품 세계는 마치 양파껍질처럼 한 커플씩 벗겨보는 재미를 독자들에게 줍니다.
뒤태가 단아한 여인이 창밖을 보고 있습니다. 실내는 인테리어라고 할 만한 것이 딱히 없습니다. 어두운 단색의 직선의 모습이 오래되고 딱딱해 보이는 실내 풍경입니다. 오히혀 열린 창문 밖 세상이 훨씬 화사합니다. 적막하고 정갈한 방 안과 대조적으로 연녹색의 포플러 나무숲과 지나가는 배의 돛대가 보입니다. 비록 강과 범선은 보이지 않지만, 지나가는 저 돛대만 보아도 먼 곳으로 의 기나긴 여행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그의 부인 카롤린을 모델로 썼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의 얼굴과표정을 볼 수 없습니다. 이 고독한 관조에 그저 최대한 동참할 뿐이죠. 그녀도, 우리도 이쪽에 몸을 둔 채로 더 넓은 저 편의 무한한 공간을 상상해 보게 됩니다.
1930년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그들은 카스파르의 작품을 북구 유럽적 특징을 구현한 작품으로 선전합니다. 카스파르의 작품을 국수주의적 특징을 구현한 작품으로 간주한 나치의 오해로 인해서 그의 작품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한동안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현대에 이르러 프리드리히의 대표작으로 손꼽힙니다. 발표 당시에는 독특한 구도와 절망감이 느껴지는 주제로 인해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죽을 때까지 팔리지 않았거든요. 인적이 끊긴 극지에서 두껍고 날카로운 빙해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범선의 조각들이 보입니다. 이 풍경은 낭만주의 자들에게 있어서 자연의 힘에 비해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미약하고 부질없는 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이 작품에서 삼각형이라는 구도를 반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화면 중앙의 압독적인 모습의 빙해는 그 날카로운 얼음판의 끝이 하늘로 치솟아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깊은 절망감을 안겨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차가운 색채는 북극의 배경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며 매혹적인 풍경을 보여 줍니다.
이 그림 속에 다섯 사람과 다섯 척의 배가 등장합니다. 그 다섯 사람은 인생의 각 시기를 말하고요. 다섯 척의 배는 인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스웨덴 국기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두 아이는 유년기를, 아이들 곁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는 청년기를, 중절모를 쓴 정장 차림의 남자는 중년기를,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뒷모습의 노인은 노년기를 나타냅니다. 한가운데 있는 십자가 모양의 배는 프리드리히의 신앙심을 암시하고요. 일상적인 바다 풍경을 숭고한 신의 경지로 승화시킨 작품입니다.
프리드리히는 1920년대의 표현주의 작가(Expressionists)들과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의 초현실주의 (Surrealists)및 실존주의 (Existentialists)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와서 1906년 베를린에서 그의 그림 32점과 조각들의 전시는 그동안 잊고 있던 그의 작품에 새로운 평가와 이해를 불러왔습니다.1970년대에 와서야 프리드리히는 진정으로 독일 낭만주의 화풍의 아이콘이자 국제적인 중요성을 가진 한 화가로 새로이 그의 명성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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