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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적인 외모에 현대의 공동주택에 함께 살기 적합한 성격을 지닌 로첸(Lowchen)은 자칫 역사 속에서 없어져 전설로만 남게 될 뻔 한 견종입니다. 다행히 사람들의 노력으로 우리 곁에 소중히 남아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쁘띠 시엥 라이언(Petit Chien Lion)

리틀 라이언 도그(Little Lion Dog)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Lowchen with lion haircut/wikipedia

 

 

 

로첸(Lowchen)이란 독일어로 '작은 사자'라는 뜻입니다. 풍성한 갈기털이 사자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기원은 프랑스로 되어 있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 좀 애매하다고 합니다. 로첸(Lowchen)은 중세 때부터 유럽 각지에서 키워졌던 흔한 반려견 중 하나거든요. 프랑스, 포르투갈, 독일 등으로 그 당시 유럽 각 나라의 그림에서 로첸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반려견이었습니다. 미국 켄넬 클럽에는 ' 그 기원은 지중해로 추정되며 아마도 독일일 것이다'라는 애매한 설명이 쓰여 있습니다.

 

 

 

Lowchen Grooming/Animal Behavior College

 

 

 

 

 

 

www.congress-intercultural.eu

 

 

 

 

체고: 30-35.6cm/수컷, 28-33cm/암컷

체중:5-8kg/수컷, 4-6kg(암컷)

수명:13-15년 

색상: 검정, Black& Silver, 초콜릿, 크림색, 흑갈색, 푸른색

출생지: 독일,프랑스, 유럽

 

 

 

 

Lowchen with golden coat/wikipedia

 

 

 

 

소형견으로  몸은 작으면서 짧고 튼튼해 보이며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머리는 몸에 비해 짧고 머리 꼭대기와 주둥이는 넓은 편이고요. 

 

 

 

 

 

<A Lowchen by A Fountain>,oil painting by Jan Wyck/MeisterDrucke UK

 

 

 

 

 

Wedding portrait of Magnus Gabriel De la Gardie and Maria Eufrosyne,1653.Beside them, a little dog in lion cut./wikipedia

 

 

 

< The Letter, Les Jeunes> Francisco de Goya/wikipedia

 

 

 

 

Duchess Katharina von Mecklenburg, by Lucas Cranach the Elder,1514, showing dog in lion cut./wikipedia

 

 

 

 

Madame Bennert walking her Lowchens/wikipedia

 

 

 

 

 

 

15세기 유럽에서 귀족 부인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견종입니다. 1442년부터는  유럽 지역의 그림이나 조각, 판화, 데생, 회화, 태피스트리 등에서 로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Multiple Color Lowchens in Litter/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pklXvPb6F10

 

 

 

 

 

이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19세기에는 거의 볼 수 없는 멸종에 가까운 상태로 바뀌게 됩니다. 1897년 메들 에인 베네트(Madelaine Bennert)란 분이 멸종위기에 처한 로첸(Lowchen)의 보전에 힘을 썼고 한 개인의 각고의 노력으로 로첸(Lowchen)은 유럽에 불어 닥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속에서도 살아남게 됩니다.  1971년 미국으로 전파되어 1999년 미국 켄넬클럽에 정식 견종으로 등록되었습니다. 

 

 

 

 

 

 

9month old Sable and Crean Lowchen/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pan_feNQCeE

 

 

 

 

 

 

 

 

 

 

 

Lowchen/Dogster

 

 

 

 

 

 

로첸(Lowchen)을 이야기할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자 컷'입니다. 로첸은 사실 사자를 닮지는 않았습니다. 로첸 하면 사자 컷으로 유명한데 꼬리로부터 약 1/3-1/2의 몸통의 털을 밀어내어 머리와 가슴부위의 털을 강조하는 컷으로 로첸이 가장 잘 어울리게 소화할 수 있는 컷입니다. 이로 인해 로첸(Lowchen)에게 '리틀 라이언'이라는 애칭이 붙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자 컷은 벌거벗은 부분이 주인에게 따뜻함을 제공할 수 있게 하고, 긴 털은 주인에게서 이와 서캐를 모으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된다고 해요. 

 

 

 

 

Lowchen/American Kennel Club

 

 

로첸(Lowchen)은 아파트에서 기르기 좋은 견종입니다. 성격은 부드럽고 활기차고요. 뭐든 빨리 배우는 영리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아이들과 다른 반려견들과도 잘 지내는 친절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다만 성격상 수줍음을 잘 타고 낯가림이 심해서 어릴 적 사회화 교육은 필수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로첸(Lowchen)의 시도 때도 없는 짖음 소리로 곤란할 수 있습니다. 로첸은 또한 어린이가 있는 가족에게도 좋은 애완동물입니다. 

 

 

 

 

 

Lowchen/PetHelpful

 

 

분리 불안 장애를 쉽게 앓을 수 있습니다. 혼자사는 일인 가정이 키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고요.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운동 능력이 뛰어나 함께 운동하고 자 할 때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IwhQIJLYUY

 

 

 

특별한  유전적 질병이 없이 건강한 견종입니다. 백내장 및 퇴행성 망막 위축은 특징적으로 발현하기  쉬운 질병입니다. 매년 검사해 주시길 바래요. 슬개골 탈구도 주의하시고요. 수시로 긴 털을 빗어주어야 윤기 있고 건강한 모질을 유지시켜 줄 수 있습니다. 

 

 

Lowchen at 2019 American Kennel Club National Championship/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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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기운이 무르익어 갈 무렵, 이탈리아는 여러 공국으로 분열된 상태였습니다. 각 지역의 통치자들은 혈통 대신 군사력이나 부를 이용해 왕위에 올랐습니다.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굳히는 일이 늘 화두였지요. 이것을 위해 결혼 동맹을 맺거나 외교적 제휴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확실한 방법은 명성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과 가문의 이미지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대 실력자의 수준은 그가 얼마나 유능한 미술가들을 고용하느냐에 달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 빈치와 벨리니 (Bellini)그리고 알베르티(Alberti) 같은 거장들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토양에서였습니다.

 

 

 

파도바 출신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를 소개합니다.   북이탈리아 만토바 공국 후작인 곤차가 (Gonzaga)의 궁정화가로 두칼레 궁의 천장 프레스코화 같은 많은 걸작을 남긴 화가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의 인물이나 사물에까지 원근을 적용하는 단축법을 혁신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 우첼로 (Uccello)나 엘 그레코 (El Greco)의 그림에서도 원근법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대담한 단축법의 시행은  만테냐가 처음이었습니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의 작품은 지금도 파도바의 오베타리 예배당을 가면 볼 수 있습니다. 만테냐는  원근법으로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그의 양식과 기법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 ,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 1452-1519),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1471-1528)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차용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천재성은 일찍부터 돋보여, 어린 시절부터 유명 화가의 제자로 들어가 일을 배울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의가 컸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 만테냐는 전통에 따라 그림을 작업했습니다. 회화 말고도 그는 다수의 동판화들을 만들었는데, 특히 동판화의 일종으로 부식 과정 없이 판면에 철침으로 직접 그림을 새기는 '드라이 포인트'기법을 개발해 여러 색조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만테나는 이탈리아 최초의 인그레이빙 (금속판에 끌로 직접 선을 새겨 인쇄하는 기법) 작가이기도 하고요.  원근법을 포함한 다양한 그의 기법은 몇 세기를 걸쳐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만테냐는 고전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파도바의 프란 체스코 스쿼치오네와 함께 작업을 통해 회화의 표현력이 탁월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특히 공간감을 다루는데 당대 최고였습니다. 

 

 

 

<Agony in the Garden>,1455-56/Egg tempera/wikipedia

 

 

 

<겟사마네의 기도 Agogy in the Garden>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북부 이탈리아 파도바 화파의 천재화가 만테냐(Andera Mantegna ,1431-1506)가 그린 종교화 중 가장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이 작품은 만테냐가 만토바공의 궁전화가 가 된 1456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목판에 템파라로 그린 약 25호 (80*63cm) 크기의 그림입니다.  그림의 소장자가 17세기 초부터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미술계의 3D 아시죠? (Death, Divorce, Debt) 1894년 노스브르크 백작에게서 현재의 런던 국립 회화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작품 내용은 신약성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올리브 동산의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제자들을 산기슭에 남겨두고 홀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 제자들이 골아 떨어져 있는 모습, 그들을 쫓는 무리들과 예루살렘 성, 그리고 하느님의 사자 어린 천사들을 압축법을 사용한 화면에 담고 있습니다.

 

 

 

세상 죄를 한 몸에 짊어진 하느님의 어린양,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인간으로서 그 고뇌와 슬픔을 억누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이 잔을 "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며 당신의 마지막 기도를 피땀이 흘리도록 바치시는 장면이고요. 한시도 깨어있지 못하고  깊은 잠에 골아 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칭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베드로와 야곱 그리고 요한이었는데도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자 어린 천사들이 십자가를 들고 하늘로부터  나타난 모습입니다.  이를 우러러 바라보며 기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맑은 표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룬 순간을 느끼게 합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검은색 의복과 오른쪽 나무의 죽은 가지에 앉은 한 마리의 새 (까마귀)의 존재도 이 장면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나봅니다. 중경에 위치한 예루살렘성의 건물들의 밝은 표현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층 강하게 부각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유다와 한 무리의 로마 병사들이 쫓아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Padova/아미코 이탈리아

 

 

 

<Picture Bearers(first Canvas)>,1450/wikipedia

 

 

 

<The Vase Bearers(fourth Canvas)>,1450/wikipedia

 

 

<Portrait of Cardinal Ludovico Trevisan>,1459-1460, Tempera on Panel, Gemaldegalerie, Berlin/wikipedia

 

 

 

 

 

<Death of the Virgin>,1462-1464,tempera &gold on panel, Museo del Prado,Madrid /wikipedia

 

 

 

그림을 살펴보면, 침대 주변에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한 무리가 삼삼오오 모여있습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온 것이죠. 그들의 손에는 성모에게 경의를 표현하는 물건들이 들려 있습니다. (시리오스라 부르는 촛불, 종려나무 가지, 책과 향). 이 둘 중 가롯 유다는 죽어서 없지만  이후에 뽑힌 마티아 사도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11명인 이유는 도마 복음서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도마가 인도로 선교여행을 갔기 때문에 이 장소에 없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배경이 등장합니다. '만투아의 호수'입니다. 특히 저 호수에는 <산 조리지오 (San giorgio)라고 불리는 다리가 서 있었는데, 사실적인 배경을 그림 속에 넣은 화가가 바로 만테냐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만 투아의 궁전이라는 사실이 의외이기는 합니다. 만테냐가 자신이 머물던 주변 풍경을 배경으로 선택한 거죠. 이 그림 속에 인물의 표현력이 자세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탈리아에 있던 모자이크를 모티브로 그린 그림입니다.  그 모자이크는 안드레아 델 카피뇨가 그렸던 구성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실내와 실외의 대조를 구성하면서 마치 내가 실제로 그 장소에 서 있는 느낌이 들도록 그린 그림입니다. 

 

 

곤자가의 루이 3세는 1458년 만투아의 두크성 예배당을 위해  이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이후 많은 변화와 소유의 변동 속에서 작품이 손상이 생겼다고 합니다. 1990-1991년 프라도 미술관에서 어두운 광칠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춘 복원 작업을 거쳤습니다. 

 

 

 

 

이 그림은 전형적인 베네치아 스타일로 평소에 사용하던 스타일처럼 차가운 색상으로 임종의 상황을 피부로 느끼게 그렸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조경을 보면 처남인 조반니 벨리니의 영향력이 풍기고 있기도 합니다. 안드레아 만테냐는 베네치아의 화가 집안인 야코포 벨리니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만테냐의 그림에 대한 실력은 엄청나게 진보하는 계기를 낳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u-0kAn4u6w

 

 

 

 

 

 

 

 

 

 

<Madonna with Sleeping Child>, 1465-1470,glue-tempera on canvas, Gemaldegalerie, Berlin/wikipedia

 

 

 

 

 

 

 

 

 

 

 

<신혼의 방 천장화 Camera degli Sposi>,1474, 이탈리아 만토바의 공작궁전/ Artchive

 

 

 

그는 만토바의 영주였던 루도비코 곤차가의 주문을 받아 <신혼의 방>이라고 불리는 궁전 침실을 그림으로 장식했습니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완벽하게 구사한 만테냐는 천장에 창을 그리고 그 주위를 풍성한 과일 묶음과 동그란 구멍이 뚫린 난간으로 둘러쌌습니다. 진짜처럼 보이지만 전부 그림입니다. 난간 위에는 공작새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수풀이 무성한 화분을 나무 막대 하나로 위태롭게  받쳐 놓아서 누군가 건드리면 아래 누운 이의 얼굴로 떨어질 것 같습니다.

 

 

옛적의 '신혼 첫날밤' 치르는 광경처럼 그 옆에서는 웃음을 띤  동네 여인들과 날개를 단 통통한 사내아이들이 침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여인네들 눈초리가 사뭇 날카롭습니다. '어디 한 번 보자.' 하는 식으로 우습기도 하고요. 화가의 유머코드가 심겨 있는 것 같아 재치 있다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신화의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이 아기들은 큐피드처럼 세속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난간 구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가 빠지지 않아 울고 있거나 사과를 아래로 던질 듯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천진한 아기들의 장난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다분히 성적인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금단의 열매였던 사과는 육체적 쾌락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터번을 두른 노예 같은 검은 얼굴도 보입니다. 

 

 

 

 

<Camera degli Sposi > view of the northern and western walls/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GN0P5RkQAow

 

 

 

The "Meeting Scene", 1474/wikipedia

 

 

 

 

 

 

 

 

 

 

<청동 다비드상> , 도나텔로 (Donatodi Niccolo di Betto bardi , 1386-1466)/wikipedia

 

 

 안드레아 만테냐는 도나텔로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렸으며 조각풍의 혁신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통을 따랐으며 무엇보다도 원근법에 능숙하여 최고의 궁정화가로서 동판화와 드로잉을 그렸습니다. 북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 하게 됩니다. 

 

 

 

 

 

<The Lamentation over the Dead Christ>,1480, Tempera on Canvas/wikipedia

 

 

 

 

 

 

 

 

<Lamentation on Dead Christ>/Silvia Minguzzi

 

 

 

 

거장  파올로 우체로 Paolo Uccello는 원근법과 단축법을 사용하여 사물을 입체적이면서 사실적으로 그리고자 애썼습니다. 단축법이란 단일의 사물이나 인물에 적용하는 원근법으로 대상의 형태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축소시키는 회화 작법을 말하는데 이러한 기법이 만테냐에게 영향을 미쳐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냈습니다.  대리석 위에 놓여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은 매우 비정상적인 비례의 그림입니다. 인체의 비례가 보통의 그림과는 다르게 화가가 발끝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로 인해 하체가 무척 짧게 보입니다.

 

 

 

상체는 조각같이 단단한 모습입니다.  손으로 만져 낸 듯 그린 몸에는 살 밑에 있는 단단한 골격이 드러나 있습니다. 얼굴의 미간에 있는  깊은 주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의 흔적을 적나라하게 부각시켰습니다. 또한 시신을 덮은 세마포의 주름은 마치 물결치는 듯한 로마풍의 조각을 연상시킵니다. 이로 인해   발과 손등의 못 자국 상흔 역시 도드라지게  보입니다.  만테냐가 진정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은 이 상처들과 심연의 슬픔을 안은 그리스도의 얼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1480)는 콜럼버스가 대서양 항해(1432)를 시작하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 빈치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꿈꿀 정도로 탐험과 혁명의 기운이 높았던 시절에 그려진 그림이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구도의 이 그림은 크고 두툼한 두 발에서 시점이 출발해 단연 단축시킨 몸통을 거쳐 발의 크기와 거의 비슷한 머리가 화면 뒤를 지탱하며 끝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끝을 소실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도로써 원근의 효과를 내려는 화가의 의도가 분명히 포착됩니다. 

 

 

 

 

언뜻 보면 마치 일꾼과도 같은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오히려 격조 높은 인간의 진실과 겸허함이 느껴집니다.  로마 후기의 목자상도, 비잔틴 교회제단 위에 그려진 제왕의 위엄을 갖춘 예수상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뤼네달트(Grunewald)의 "이젠하임 제단화"에서 보이는 것 같은 뒤틀린 고통의 형상도 아니고요.  이 절망과 같은 죽음의 그림은 도리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숭고함과 장엄한 죽음의 승리까지 느끼게 합니다. 

 

 

 

그것은 차라리 인간의 나약함에서 강한 믿음을 발견하려는 만테냐의 신앙 고백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만테냐 역시 르네상스 시대의 다른 화가들 처럼, 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진실한 속성에서 신의 숨결을 들으려 한 것 같습니다. 죽음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이라는 역설을 이 그림으로  다시 상기시키면서 말이죠. "... 한 알의 밀이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마태복음 12:24)

 

 

 

 

 

https://www.youtube.com/watch?v=8e20mMzj5Ug&t=270s

 

 

 

 

 

 

 

 

 

<동방박사들의 경배>,1461, 목판에 템페라 , 우피치 미술관,피렌체/wikipedia

 

 

 

 

이 그림은 만토바의 산 조르죠 성의 두칼레 성당 장식을 위해 루두비코 2세 곤차가가 주문한 세 폭 제단화 (왼쪽 패널:예수님 승천, 오른쪽 패널:할례)의 중앙 패널 부분으로 , <동방 박사들의 경배> 장면입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그린 주제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이 드러나게 되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만테나의 이 그림에서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비뿐만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의 신비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성모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십니다.  케루빔으로 둘러싸인 성모자가 있는 곳은 마구간이 아니라 동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동굴은 탄생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무덤의 공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성모님 위에 동방박사들의 여정을 인도한 자연계의 표징인 하늘의 별에서 빛줄기가 칼처럼 날카롭게 수직으로 동굴을 향해 내려져 있습니다. 뾰족한 칼은 어머니 성모마리아가 아들의 죽음으로  겪어야 할 고통을 상징합니다.  동굴 왼쪽 바위에는 무화과나무가 묘사돼 있고, 동굴 위에는 말라버린 나무에 새순이 자란 가지가 있습니다. 세 사람은 무화과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었다고 믿어 왔기에, 이 나무는 그리스도 수난의 상징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라버린 나무는 죽음을 , 새순이 자란 가지는 탄생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음 후에 다시 태어나 부활한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성화에서 세 명의 동방박사는 노년, 장년, 청년의 모습으로 각기 다른 연령층으로 표현됩니다. 각기 다른 연령층은 인간의 삶의 세 단계를 의 미하고, 다른 인종의 표현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온 인류의 기쁨임을 상징합니다. 동방박사들의 뒤로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이나 성모자 왼쪽에 소와 나귀 (이스라엘 백성과 이교도를 의미)에서도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인간세계뿐만이 아니라 자연세계를 비롯한 전우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으로 말합니다.

 

 

 

세 명의 동방박사는 모두 화화로운 궁정 예복을 입고 있습니다. 가장 나이 많은 박사는 꿇어 엎드려 있고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박사는 한 손에 예물을 들고 허리를 깊숙이 숙여 예수님께 경배하고 있습니다. 젊은 흑인 박사는 예물을 손에 들고 무릎을 꿇고 있고요. 동방박사들은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황금은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왕이신, 임금의 상징입니다. 유향은 가장 거룩한 제사에서 태우는 값비싼 향료료, 한 분이신 하느님을 의 미하고요. 몰약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뜻하는 예물로써, 참사랑이 심을 상징합니다. 박사들이 가진 예물을 아기 예수님께 드릴 때 그들은 바로 자기 자신들을 선물로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별을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동방박사에 대한 보답으로 하느님께서는 그 별빛보다 더 강력한 빛으로 그들의 마음을 비추십니다. 초라한 마구간(동굴) 구유에 태어난 아기였을 지라도 그들은 그 아기가 바로 세상의 구원자이자 자신의 구원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성 세바스티아노(St. Sebastian)>, 1478-1480, Tempera on liner/Obelisk Art History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노 St. Sebastian)> 작품입니다. 프랑스 남부 나르본(Narbonne)태생인 성 세바스티아(Sebastianus)는 283년경에 로마에서 군인이 되었고, 성 마르첼리아누스(Marcellianus 6월 18일 와 성 마르쿠스(Marcus,6월 18일) 부제를 격려하며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키도록 했던 열렬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는데, 그들 중에는 재판장, 그의 아내 성녀 조아 (Zoa, 7월 5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성녀 조아는 벙어리였으나 그의 기도로 완쾌되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간수 클라우디우스, 로마의 집정관 크로마티우스와 그의 아들 티부르티우스 등이 있습니다.

 

 

그는 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친위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황제는 그가 그리스도인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신자임이 드러난 것은 막시미아누스 황제로 그리스도교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그는 즉시 처형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나 성 카스룰루스(Castulus, 3월 26일)의 미망인인 성녀 이레네(Irene)가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가서 보니 아직 살아있음을 보고 극진히 간호하여 회복시킵니다.  그 후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황제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의 잔인성을 고발하자 황제는 화가 나서 그를 몽둥이로 때려죽이도록 한 다음 로마의 하수구인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에 던져 버리게 합니다. 그의 죽음과 용기는 신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요.

 

 

 

아피아(APPia) 가도,로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나무위키

 

 

 

한편 순교한 후에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로마에 사는 루치나(Lucina)라는 부인의 꿈에 나타나 하수구에서 자신의 시신을 찾아서 지금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당이 있는 자리 근처의 지하 묘지에 매장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의 시신은 루치나 부인에 의해 아피아(Appia) 가도에 있는 지하묘지에 묻혔고요.  그는 군인, 운동선수, 그리고 궁술가의 수호성인이자 전염병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전염병의 수호성인이 된 것은 680년 로마에 페스트가 발병했을 때 로마인들이 페스트가 멈추기를 기원하며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유해를 모시고 장엄한 행렬을 거행하자 그 뒤로 페스트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또 1575년에 밀라노 (Milano), 1599년에는 리스본(Lisbon)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보호를 기원하는 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점차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전염병 희생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자 , 이 사람이오" Ecce Homo>, 1500, tempera on canvas, wikipedia

 

 

 

만테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통에 따라 작업했고, 특히 고대 로마의 조각들의 형태를 인물에 반영했으며 , 환영적인 원근법을 능숙하게 사용했습니다.

 

 

<요한 복음서 제19장 1절-5절>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빌라도가 다시 나와 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수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하고 말하였다. 

 

 

만테냐가 1500년경에 그린 <자, 이 사람이오.>은 그의 말기 작품입니다.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던  때 그려진 작품이지요. 라틴어로 '에체 호모'(Ecce Homo)라 하고, 이 도상의 예수님의 수난을 말하는 전통적인 도상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에체 호모(Ecce Homo)' 유형의 그림들은 대개 예수의 머리나 상체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있거나, 종종 목둘레를 줄로 묶기도 하고, 손목을 결박하고, 채찍 자국이 있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경우 예수는 대체로 자신을 처형한 사람들을 연민의 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재현되곤 했습니다. 

 

 

 

만테냐는 선명한 색채, 뚜렷한 형태, 뛰어난 공간 구성에 대한 이해를 이용하여 이 유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예수의 옆에 있는 사악한 얼굴들은 모두 다섯인데, 이들은 그림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있고 예수의 살을 할퀸 터번을 쓴 늙은 여인의 표정과 손가락이 돋보입니다. 예수와 뒤의 처형자들이 삼각형 구도를 이루게 그림으로써, 만테냐는 그들 중 세 사람을 어두운 그림자 속에 묻게 하여 처형자들을 더욱 사악하게 보이게 했습니다. 예수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냈고요.

 

 

 

오른쪽 수석 사제의 이마에 쓰인 글자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고발한 내용입니다. 또 상단 양쪽에 모서리에 펼쳐진 종이에는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요한 19,6)하고 외쳤던 그 외침이 양쪽으로 적혀있습니다. 그 외침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졌기에 예수님의 배경에 검은 십자가의 형태가 형성되었습니다. 예수의 초점을 잃고 살짝 입을 벌린 슬픈 표정과 주변 처형자들의 매서운 시선이 현저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O8M3Aiat90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는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동시대는 물론 후대의 화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만토바에서 1506년 사망합니다. 만테냐가 르네상스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며, 특히 그의 영향은 처남이었던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와 독일의 거장 알브레흐트 뒤러(Albrecht Durer , 1471-1528)의 그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2024.05.15 - [지식&교양] - 51-15.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 66)

 

51-15.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 66)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는 베네치아 화풍의 기초를 세우고 완성한 화가입니다. 지암벨리노라는 별명으로 알려죠 있고요. 조반니 벨리니의 영향력은 조르조네(Giorgione 1478-1510)와 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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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는 베네치아 화풍의 기초를 세우고 완성한 화가입니다. 지암벨리노라는 별명으로 알려죠 있고요. 조반니 벨리니의 영향력은 조르조네(Giorgione 1478-1510)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76)에게  미치게 됩니다. 특히 가볍고 천천히 마르는 유채의 기법을 사용하여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감을 그림자를 통해 도드라지게 그려 완성한 화가로 유명합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내부와 북유럽(플랑드르 지역:벨기에 , 네덜란드)으로부터의 외부 영향에 개방적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베니스항을 통해 새롭게 이탈리아로 들어 온 유화 물감의 예술적 가능성을 시험하려는 의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강건한 기독교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인간상의 뉘앙스를  전하기 위해 그림을 사용하기로 결심합니다. 벨리니 작품 속 인물들은  인간적이면서도 신성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의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우화에 새로운 인간적 유연함을 가져다주듯이 말이죠. 벨리니의 오일 실험은 그의 작품의 전반적인 우아함을 더합니다. 그는 유화를 통해 가장 미묘한 색채 배열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을 완성했습니다. 그의 정교한 그림은 다른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줍니다.  많은 동시대 사람들 과는 달리 벨리니는  자연경관에 큰 존경을 표합니다. 자연계는 전형적으로 그려진 서사에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고안되었지요.  벨리니는 의상과 피부색을 섬세하게 표현해 낸 것 외에도 빛과 색채에 뛰어납니다. 

 

 

 

 

<Portrait of Doge Leonardo Loredan,1501-02, National Gallery,London/wikipedia

 

 

 

머리에 두른 관이 참 독특합니다. 근엄한 얼굴에 걸친 옷의 섬세한 문양과 장식 또한 실사 사진을 보는 듯 정교하고요. 당시 베네치아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초상화입니다. 벨리니의 <레오나르도 로레단 총독 The Doge Leonardo Lorodan> 초상화는 레오나르도 로레단 총독 통치  첫 해에 완성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옥외의 푸른 배경 앞에 놓인 받침대 뒤에 앉아 있는 완전한 예복 차림의 총독의 3/4 흉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베네치아 초상화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 전반에 대한  중요성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15세기 예술에 대한 공식적인 접근 방식의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실물 같은 초상화를 제작하는 예술가들이 슬슬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16세기 전반기에 그 수요가  엄청나게 급증하게 됩니다. 

 

 

 

 

 

 

베니스의 무역 연계는 벨리니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스튜디오들이 특히 네덜란드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로 진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초상화는 네덜란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첫번째 증거는 일반적인 이탈리아의 프로필과는 대조적으로 모델이 3/4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총독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갈색의 받침대 뒤에 그를 배치한 점이고요. 그가 관람자와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묘사했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템페라보다는 기름으로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이 매체를 통해 벨리니는 총독의 피부를 아주 부드럽고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정교함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벨리니가 그린 이 초상화는 베네치아를 통치하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지만, 위엄과 인간미를 동시에 지닌 현명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베니스의 푸른 하늘빛을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짙게 칠함으로써 인물의 사실적 묘사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총독의 눈동자의 평온함과 회피된 초점은 "베니스에서 가장 고요한 공화국"을 완벽하게 의인화하고, 빛이 비치는 오른쪽은 엄숙하고, 그늘진 왼쪽은 자애로워 보입니다. 금실로 짠 비단 망토를 입고 뿔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는 총독은 의상의 조화로 인해 절제되고 균형 잡힌 품성이 더욱 강조됩니다. 옷감의 광택은 벨리니가 일부러 물감을 거칠게 하여 표현했으며, 그의 화려한 예복은 전혀 사치스럽게 보이지 않고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nOKNSqNEcg&t=1s

 

 

 

 

 

 

 

 

 

 

 

베니스/디트NEWS24

 

 

 

벨리니는 베니스의 예술가 가문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야코보 벨리니(Jacopo Bellini)는 유명 화가였으며 그의 형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역시 화가였습니다. 매부인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는 르네상스 시대의 으뜸가는 화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반니 벨리니는 1400년대 북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아주 중요한 화가로 자리매김 합니다. 티치아노(Tiziano)나 틴토레토(Tintoretto)같은 베니스 화가들에게뿐 아니라 북 이탈리아 전 지역에 걸친 수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회화적 기술과 예술성은 이탈리아 후기 고딕 예술로부터 르네상스 문예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가교 역할을 합니다. 

 

 

 

<Agony in the Garden>,1459-1465, National Gallery,London/wikipedia

 

 

 

<감람산의 그리스도 The Agony in the Garden>는 유다의 배신으로 로마 군인들에게 포로가 되기 전 겟세마네 (Gethsemane)동산에서 그리스도가 기도하는 종교적 주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버전에서 그리스도는 바위 봉우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깨어있지 못하고 모두 잠에 골아떨어졌습니다. 유다와 로마 병사들이 오고 있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죠. 무릎 꿇은 예수님 위의 구름 속에는  천사가 보입니다. 다가올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컵과 성반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전경의 인물들 너머, 저 멀리 ,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로마 병사들과 유다의 모습이 보입니다. 

 

 

 

벨리니는 만토바(Mantua)보다 더 멀리 여행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야코포의 여행 덕분에 피렌체에서 유행하고 있던 원근법과 드로잉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학문은 벨리니에게 영감을 주어 그의 주위의 자연세계를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사실주의와 종교적 헌신으로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벨리니는  만테냐의 예루살렘 첨탑을 당시 베니스 주변 시골에서 발견된 정착촌으로 묘사합니다. 시골의 한산함은 군인들의 행렬을 더 먼 곳으로 배치함으로써 저 멀리 모여드는 폭풍 구름처럼 고요함은 임박한 운명의 강력한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그림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점은 벨리니가 감질나는 분홍빛 새벽빛을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강과 바위를 포착하고 넓은 계곡으로 물밀듯이 밀려들면서 떠오르는 태양의 핑크빛 온기는 주제의 긴장감과  상관없이 아름답습니다.  그 빛은 파랑에 골드를 첨가하여 한층 강화된 찬란함으로 예수의 예복 뒷면에 파문처럼 번집니다. 벨리니는 이런 식으로 빛과 색깔을 계속 활용함으로써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달인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UxGYgS1DyU

 

 

 

 

 벨리니는   르네상스 시대의 중요한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았을 뿐 아니라 파도바(Padova)에서 만테냐의 작품들을 접할 기회를 가집니다. 벨리니의 화풍은 부친인 야코보의 영향 아래 시작되었으며 베니스와 피렌체 회화를 결합한 형태입니다.

그의  부친은 한 때 피렌체에 거주하며, 그곳의 중요한 화가인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에게서 원근법의 새로운 기술들을 배우게 됩니다. 이 기술을 통해 아들 조반니는 드넓은 초원의 독창적인 풍경화를 개발하게 되지요. 수세기에 걸쳐 북부 유럽과 베니스 화파의 근본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San Girolamo nel deserto>,1455/wikipedia

 

 

 

 

벨리니에게 있어 가장 깊은 예술적 교류는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와 이루어집니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가 조반니 벨리니 동생 니코로시아(Nicolosia Bellini)와 결혼을 하면서 가족이 됩니다. 풍경과 인물 등 다양한 구도적 변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고요. 만테냐는 열정을 다해 벨리니에게 고전주의 형식 및 그레코-로만 양식의 고전미를 가르칩니다.  또한 만테냐의 고장인 파도바에서 피렌체의 위대한 조각가이자 고아출신의 화가인 도나텔로(Donatello)의 예술 세계와 만나게 됩니다. 벨리니는   피렌체의 르네상스 예술의 장대함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한편으로 만테냐에게서 고전주의 를 다른 한편으로는 도나텔로에게서 피렌체 예술의 합리성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벨리니의 화풍에는 피렌체와 베니스의 융합적 르네상스가 표현됩니다. 

 

 

 

 

 

 

피에타 Pieta(Dead Christ Supported by the Madonna and Saint John),1460/wikipedia

 

 

 

 

 

 

벨리니가 여기서 잉태한 슬픔은 오직 넘치는 인간성 속에서만 신성한 것이다. 
-미술사학자 로저 프라이(Roger Fry)-

 

 

 

 

<피에타 Pieta>는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 그림 아래쪽 가운데에 서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피에타'는 '연민','자비'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지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벨리니의 작품 역시 마리아와 요한이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칼에  찔린 상처와 십자가에 못 박힌 상처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세 인물은 중앙 전경에 위치하며, 그들 뒤에  가려진 농촌 풍경이 긴장감을 풀어줍니다. 이 그림은 벨리니가 만테냐와 파두안 학파의 양식적 관행에서 벗어난 것이어서 의미가 큽니다. 그것은 화가 자신의 독특한, 보다 조용하고 친밀한 스타일을 탐구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 의상의 뻣뻣한 직물은 훨씬 더 부드럽고, 더 광범위하고, 주름 잡힌 것으로 대체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주변적인 변화가 이미지에 더해져 어머니와 하나뿐인 아들 사이의 감정의 친밀감을 뒷받침합니다. 이것은 벨리니 작품의 한 단면으로서 앞으로 그의 그림에서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되어 갑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고전적인 주제와 구성을 개인적인 해석으로 주입하는 그의 능력입니다. 마리아와 비교했을 때 다소 건장한 모습의 요한은 예수의 시신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시울은 달아올라 있고 목 근육도 부풀어 올라 역시 개인적인 슬픔에 젖어 무언가를 외치고 있는 듯합니다. 마리아의 슬픔이 내면의 슬픔이라면 요한의 슬픔은 밖으로 울부짖는 절규입니다. 열렬한 한 제자의 상실감을 넘어  단순하고 보편적이며 고통스러운 어머니의 상실감이 전해집니다. 선과 윤곽에 대한 강조에서 벗어나 더 많은 모델링 된 평면과 명암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팔에 죽음의 무게를 더하고 그의 피부에 부드러움을 주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구세주의 피 The Blood of the Redeemer>,1465,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wikipedia

 

 

벨리니의 초기 작품 <구세주의 피The Blood of the Redeemer>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뒤에, 그의 피가 세계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고뇌의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들고 있고요. 천사는 미사에서 사용되는 것과 비슷한 성배로 옆구리의 상처에서 그의 피를 받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풍스럽고 이교도적인 의식을 묘사한 난간 양각들의 표현이 독특합니다. 1978년 세척을 통해 석고를 칠한 바탕, 즉 지면의 텅 빈 부분들은 원래 붉은색과 푸른색의 천사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나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많은 금색으로 구름처럼 그려졌고요. 왜 천사들이 제거되었는지, 언제 제거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St.Francis in Ecstasy>,1480/wikipedia

 

 

 

 

 

 

 

벨리니가 <법열에 빠진 성 프란체스코 St. Francis in Ecstasy>를 통해 선보인 감각적인 스타일과 화려한 색감, 명암은 베네치아화파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1475년 작품을 그리기 사작하여 1480년경에 완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작품은 뉴욕 프릭 컬렉션( New York Frick Collection)에 소장되어 있으며 헨리 클레이 프릭의 거실 (Henry Clay Frick's living room)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일부가 잘려나가기는 했지만 현재 보존 상태는 우수하다고 합니다. 벨리니의 걸작이며, 프릭 컬렉션(The Frick Collection)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르네상스 그림일지도 모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Saint Francis of Assisi)는 이탈리아 가톨릭교회의 탁발 수사입니다.  그는 수도사로 프란체스코 수도회(the Franciscan Order)의 설립자이기도 하지요. 현  프란체스코 교황님이 닮고자 하는 삶의 모델이시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표적인 종교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작품 속 성인은 15세기에 널리 알려진 성 프란체스코의 일대기에서 볼 수 있는 전설과는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도상학적인 모티브를 따르지도  않았고요.

 

 

 

화가는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가 홀로 돌이 많은 그의 소박한 은신처에서 영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듯한 황금빛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아마도 1224년 이 성인이 알베르나 산 (Mount Alverna)에 도피중일 때인 것으로 보입니다. 법열에 빠진 성 프란체스코는 모세처럼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벗고 맨발로 서 있습니다.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그의 얼굴은 하늘을 보고 있고요. 태양의 찬송을 부르고 있거나 그리스도의 성흔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화면 위쪽  위의 구름 속에서부터 나오는 초 자연적인 빛을 통해 신격화된 모습입니다.

 

 

 

 

그림에서  주목할 부분은 배경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왼쪽 상단에서 발원하는 달빛에  암석물의 벽을 밝히고, 오른쪽 전경에 성자와 그의 작업공간을 가리는 벽에 붙은 나뭇가지 뒤로 깊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이런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왼쪽 상단의 월계수는 마치 초자연적인 힘을 향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빛을 내면서 휘어진 모습입니다. 성인의 왼편에는 겸손과 인내이면서 동시에 나태함, 완고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되는 당나귀가 서 있습니다. 오른쪽 구석의 앞에는 전원생활을 연출하는 소박한 독서 테이블 위에 성자의 기도서가 있고요.

 

 

 

동굴은  프란체스코와 제롬 (Jerome)을 연관시킵니다. 왼편의 개울은 모세와 그의 위대한 샘을 상징하는 데 중앙의 메마른 나무는 모세가 호렙 산에서 발견한 불이 피어오르나 타지는 않는 나무, 불타는 수풀(Burning bush)을 의미합니다. 멀리 뒤편으로는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천상의 예루살렘이 나타납니다. 그 경치는 동물, 새, 사람, 식물, 캐슬, 두 개골과 샌들과 같은 물체, 심지어 종과 줄까지 세세하게 관찰된 세부사항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왼쪽  하단의 일부 나뭇가지에 걸린 종이 조각은 그 화가의 자랑할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성은 성 프란체스코가 창세기 (the book of Genesis)에 언급된 세상의 창조에 대해 명상하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D8KxM1Ia9c

 

 

 

 

 

 

 

<Madonna and Child with St. John the Baptist>,1480/wikipedia

 

 

 

 

 

당시 예술가들은 여행이 쉽거나 단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새로운기법을 배우며 서로 간에 관계를 맺기 위해 더 많이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 (Antonello da Messina)는 베니스를 방문하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거슬러 올랐다고 합니다.

 

 

조반니 벨리니는 플랑드르 화파의 화가들과 연분이 돈독했던 안토넬로를 만나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며 새로운 회화적 기법을 연마하게 됩니다 . 그는 부드러운 사실주의를 사용한 화풍을 발전시키며 조르조네(Giorgione), 티치아노(Tiziano), 그리고 틴토레토(Tintoretto)와 같은 훌륭한 베니스 화가들에게 길을 열어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BU3SwIANyQ

 

 

 

 

 

 

 

1480년 그의 형이 콘스탄티노플로 떠난 해로부터 벨리니의 경력은 성공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1483년 정식 월급을 받는 베니스 공화국의 공식화가로 지명됩니다. 1487년에는 예술적 성숙도가 드러나는 매우 중요한 작품 < 산 지오베의 제단 La Pala di San Giobbe>을 그리게 됩니다. 여기에 비잔틴식 모자이크 영상을 배경으로 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의 영향이 보입니다.

 

 

 

 

 

 

Gentile Bellini& Giovanni Bellini ,<St. Mark Preaching in Alexandria>, 1504-1507, Pinacoteca di Brera, Milan/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rudav6yjqNc&t=1s

 

 

 

 

 

 

 

<성 조베 제단화 San Giobbe Altarpiece>,1487, 이탈리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wikipedia

 

 

 

 

 

안토넬로 다 메시나 Antonello da Messina<Saint Sebastian>,1477-1479/wikipedia

 

 

 

 

 

 

 

 

벨리니의 작품을 보며  우리는 베니스와 비잔티움 사이의 깊은 관련성을  기억하게 됩니다.산 마르코 대성당 (Basilica di San Marci)은 베니스와 비잔티움 사이의 깊은 문화 예술적 관계를 보여주는 극명한 본보기입니다. 제단의 예를 들어 그림에 나타난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o)성인은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의 대표작 중 하나로 메시나의 인용을 언급할 수 있으며, 또한 세바스티아누스 성인은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양측으로부터 존경받는 성인입니다.

 

 

 

벨리니의 <성 조베 제단화 St Giobbe Altarpiece>입니다.   베니스의 성 조베 교회 (Church of St Giobbe)를 위해 그 려졌고요. 성인들과 천상이 모여 논의하는 성모 마리아라는 일반적인 종교적 주제를 그린 작품입니다. 관람객 입장에서 왼쪽으로 성 프란체스코 (St Francis), 성요한 (St John), 성 욥(St Job), 오른쪽 안쪽으로부터  성 도미니크 (St Dominic), 성 세바스찬 (St Sebastian, 화살), 성 루이(St Louis)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모마리아의 왕좌 아래에는 악기를 든 세 명의 천사가 앉아 있습니다. 이 그림은 베네치아 교회의 건축 속에 설정된 <성모자상; 성스러운 대화>의 최초의 예였습니다. 이전에, 신성한 집단은 천상의 환경 안에서 설정되었다면 벨리니는 그들을 바로 지상으로 데려옵니다. 성 조베 교회 안에 있는 원래 자리에는 성모 마리아와 그리스도와 모든 신자들이 예배자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는 암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림의 공간 안에 있는 것과 비슷한 기둥들로 둘러싸여 있었을 겁니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위대한 교회인 산마르코 대성당 (St Marks Basilica)의 실내를 연상케합니다. 친숙한 그림의 건축 양식이 이런 효과를 더 했을 겁니다.  둥근 지붕의 금과 성모 마리아 뒤의 벽에 늘어선 대리석은 모두 바실리카 성당의 매우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성경 장면에 대한 이러한 건축적 배경의 사용은 많은 미래의 종교 화가들, 특히 프라 바르톨로메오(Fra Bartolomeo)의 1512년 < 성 카타리나의 신비한 결혼 Mystio Marriage of St Catherine>에 영향을 주었고, 현재 플로렌스의 아카데미아 캘러리에 있습니다.  이 사진 속의 황금빛의 따뜻함은 아마도 벽에 걸린 방대한 양의 금에 의해 생성되는 산마르코 성당의 신성하고 신비로운 빛에서 영감을 받은 것일 겁니다. 이 그림이 주목할 만한 이유 중 하나는 단연 그 분위기를 꼽습니다. 이때쯤 벨리니는 점점 더 기름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는 기름을 사용하여 얇은 층 위에 다시 얇은 층을 쌓아 올려, 그 장면에 가득 찬 빛의  풍부함과 깊이를 부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xCTyVQMVbs

 

 

 

 

 

 

 

 

 

 

<Madonna with Child, infant St.John and St. Joseph>,1490 St. John on the small tree mirroring the enigmatic child in the Holy Allegory/wikipedia

 

 

 

 

 

조반니 벨리니는 항상 동방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리고 북유럽 예술 간의 교접접을 보이는 방식과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벨리니의 작품 중에는 많은 양의 성모화가 존재합니다. 그가 새로운 성모상의 도상을 위해 목판이나 그림 위에 스케치한 대부분의 밑그림들은 흔히 알려진 성화 표현법에 기초하여 표현되었습니다. 즉 성모는 성인들이나 그림의 기증자 혹은 투자가들로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습니다. 

 

 

 

벨리니  작품의 중요한 요소는 바로 종교성입니다. 이는 그가 비잔티움 세계와 연관된 1400년대 베니스의 문화적 여건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 아래 르네상스의 기독교관을 지닌 위대한 화가이며, 또한 풍경에 몰두 한 성스러운 관념의 전달자이기도 합니다. 이를 표현하고자  그는 신성함이 아닌 고전성으로 풍경 안에 녹아 들은 종교관과 고전 세계의 기법을 사용하며 전통적 그레코-로만 양식의 신들의 향연 (Festino degli dei)'을 내놓기도 합니다.

 

 

 

 

<축복을 내리고 있는 그리스도 Christ Blessing>,1500, Kimbell Art Museum Texas /wikipedia

 

 

 

 

벨리니의 <축복을 내리고 있는 그리스도 Christ Blessing>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 미스터리인  인간이면서  신성한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지상으로 보내졌을 때의 화신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축복을 하는 오른손을 들고, 왼손으로 부활의 기치(죽음에 대한 승리를 나타내는 적십자가 그려진 백기)의 밝고 붉은 지팡이를 쥐고 있습니다.  머리 위와 옆면에서 금빛 광선이 뿜어져 나와 그의 신성을 알립니다. 기독교적 연민의 메시지는 손과 가슴에 살짝 비치는 고통의 상처로 전해지는 반면, 그의 치켜든 팔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부활의 실체를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먼 풍경 속의 다양한 모티브가 부활의 주제를 암시하고요. 패널의 왼쪽에는 외로운 새 한 마리가 있는 말라죽은 나무가 보입니다.  낡은 구약을 상징합니다. 토끼 한 쌍은 재생을 의미하고요. 양 떼를 보살피는 목동은 그리스도 자신이 선한 목자임을 상기시킵니다. 

 

 

 

 

<산 자카리아 제단화 San Zaccaia Altarpiece>, 1505, 이탈리아 베니스 산 차카리아 교회/smarthistory

 

 

 

 

 

옛 날에 성모상은 성자들의 전통적 이미지로 엄격하게 측면 배치되곤 했다. 
벨리니는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고 단순 대칭적인 배열로 생명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산 자카리아 제단화 San Zaccaria Altarpiece>는 다시 한번 판자에 유화로 그린  한 예로서 벨리니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 작품을 세계 최고의 그림이라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일반적인 종교적 주제인 <성모자상;성스러운 대화>를 묘사하고 있고요. 다른 많은 예들과 마찬가지로, 그림의 중심에 성모 마리아와 차일드 아기 예수가 전통적인 피라미드 구조로 배치되어 있고, 성자들의 모습이 양옆에 나란히 그려져 있습니다.

 

 

이 경우 성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성 베드로 (St Peter), 성 캐서린(St Catherine), 성 루시 (St Lucy),  성 제롬(St Jerome)입니다. 이 성인 그룹은 성스러운 건축물 안에 위치하고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둥근 반형 지붕 아래 왕좌에 앉아 있습니다. 그의 경력 말년기에 만들어진 이 그림은 벨리니의 인간적인 모습과 관점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모든 것을 보여 줍니다. 그가 색채를 이용해 어떻게 작품 구성을 함께 결합시키는지에 대한 예이기도 하고요. 성자들의 예복의 대조적이고 보안적인 배열은 단순히 구조적인 것보다 더 깊은 조화를 만들어 냅니다. 성자들의 얼굴의 침착함과 평온함, 성 캐서린의  미소와 그의 책에 몰두하는 성 제롬은 성자들에게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는 , 그리고 초기 <성 조베 제단화 St Giobbe Altarpiece>에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선사합니다.

 

 

베니스의 산자카리아 교회의 측면 제단 위에 놓인  이 그림과 그 원근 화법의 건축 양식은 성 조베 제단화의 예와 같이 단순히 교회 내부 공간의 확장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그러나 탁 트인 평원의 주변 경관 덕분에 이 사례는 유명한 전작보다 더 큰 빛과 공간감을 줍니다. 

 

 

 

 

 

 

<시메온의 노래 Sacra Conversation( Nunc Dimittis)>,1505-1510, Museo Thyssen-Bornemisza,Madrid/wikipedia

 

 

 

 

주님 ,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시메온의 노래-

 

 

 

 

 

 

 

 

 

라틴어로' NUNC DIMITTIS'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거룩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고 경건하게 살았으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에게 아기 예수가 나타났고 이 아기를 안고 "눈크 디미티스 (NUNC DIMITTIS)"로 알려진 시메온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과부가 된 안나라는 여인과 함께 시메온은 "죽기 전에"하느님의 영광을 보겠노라는 예언을 듣고 매일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다리다 예수를 만난 후 예언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모든 화가들이 공통으로 그리는 이 그림은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고 그 오른편에 예언자 시메온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왼편에 젊은 여인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상징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의식에 의하면, 산모가 남자 아이를 낳으면 40일이 지나서 예루살렘에 와서 정결한 예식을 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합니다. 이때 만난 장면인데, 자세히 보면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안는 장면입니다. 보통은 아기의 두 어깨 사이에 손을 넣어서 아기를 안습니다. 하지만, 시메온은 두 손을 내밀어 마치 귀한 물건을 받듯이 하고 있습니다.  조반니 벨리니 외 수많은 화가들이 이 부분을 공통적으로 그립니다. 그 이유는 시메온의 겸손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시메온의 예언-

 

 

 

 

 

 

 

<거울 앞에 벌거벗은 젊은 여자 Naked Young Woman in Front of a Mirror>,1515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wikipedia

 

 

 

 그의 모든 예술적 기법들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작품은 현재 비엔나의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 Museum)에 소장된 <거울 앞의 벌거벗은 여인>입니다. 이는 노년기인 1515년에 탄생하며 종교적인 주제와는 별개로,  방안의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나체의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의 형상은 그레코-로만 양식의 고전적 여성상을 떠오르게 하고요. 그녀의 어깨 뒤에 걸린 거울에는 풍성한 머리칼을 덮은 망건이 비치며 마치 조각상에 견줄 만큼 유일한 완벽성을 보입니다.

 

 

 

 

거울이 걸린 벽면은 검은색으로, 보다 선명하게 형태의 특징들을 살리는 메시나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전형적 영향이 인용되었습니다. 왼쪽 뒷면의 창문을 통해 플랑드르 지방과 거의 흡사한 풍경과 창틀 위의 투명한 꽃병이 보이는데, 이는 머지않아 '정물화'라 불리게 될 새로운 화풍의 출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과일, 꽃 혹은 일상의 생명이 없는 사물을 주제로 대부분 그릇이나 물병 혹은 꽃병들을 표현한 1600년대 회화의 화풍을 말합니다.

 

 

 

또한 젊은 여인은 값비싼 옷감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녀의  뒤에는 거울이 걸려 있는 짙은 녹색의 벽면이 있고요. 벨리니는 주요 모티브와 풍경에서 같은 색상을 사용함으로써 두 영역을 이어주며 , 그림의 기본 무드는 온화하고 통일적입니다. 젊은 여자가 오른 손에는 또 다른 거울을 들고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거울은 한쪽은 허영(Vanitas)의 상징이고 다른  한 손에는 비너스의 속성 정숙함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벨리니는 두 거울의 장치를 사용하여 관찰자가 그림에서만 가능한 관점인 하나의 관점에서 여성 머리의 두 가지 관점을 볼 수 있게 합니다. 게다가, 그는 비록 물리적인 거리는 매우 작지만, 보는 사람의 시야에서 여성의 행동의  독립성을 강화합니다. 오른쪽의 작은 종이쪽지에 적힌 그의 서명에서 벨리니는 풀리니우스 (Pliny)에 의해 공식 표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림의 아름다움과 창조력이라는 작품의 기본 테마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입니다.

 

 

 

이  작품에서 여인의 모습은 성모들을 표현한 타 작품들과는 달리 관능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르네상스로부터 바로크에 이르는 아니, 모든 서양 예술사의 유산으로 남을 상징과 인용, 그리고 기법이 집합되어 있습니다. 성모와 같은 성스러운 형상이 젊은 여성의 명백한 아리따움을 통해 세속적이 아닌 거룩함으로 변화됩니다. 그 반대로 세속적인 젊은 여인의 육감적이며 관능적인 모습이 종교적으로 격상되어 거룩한 형상으로 뒤바뀌고요. 이러한 것들은 오로지 서로 다른 문화적 공간을 거슬러 계속적인 변화를 시도한 광대한 예술성의 뛰어난 화가 조반니 벨리니 만이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노화가의 비범함이죠.

 

 

 

신들의 축제 The Feast of the Gods(1524& 1529[Additions made by Dosso Dossi and Tirian], 미국 워싱턴 DC 국립 미술관/wikipedia

 

 

 

 

<신들의 축제 The Feast of the Gods>는 벨리니가 생의 막바지에 그린 소수의 세속적인 그림들  중  가장 훌륭한 예입니다. 가로로 된 배치에서 로마의 프리즈(방이나 건물의 윗부분에 그림이나 조각으로 띠 모양의 장식을 한 것)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구성입니다. 박카스 (Bacchus), 헤르메스(Hermes), 주피터(Jupiter), 판 (Pan), 냅튠( Neptune), 아폴로(Apollo)등 17명의 인물이 숲에서 잔치를 벌이는 오비디우스(Ovid)의 한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그것은 페라라 공작이 그의 학문을 위해 의뢰했고 따라서 그 주제는 좀 더 사적인 것으로 허용되었습니다. 많은 여신들과 요정들이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고 그림 오른쪽의 초록색 옷을 입은 프리아포스 (Priapus)가 잠든 로티스(Lotis)의 치마를 들어 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림에는 여러 가지 성적 상징들이 가득 있으며 중앙에 있는 부부, 복숭아색 옷을 입은 여인,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손을 얹은 옆에 있는 남자가 공작 내외의 초상화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벨리니가 죽은후, 화가 도소 도시 (Dosso Dossi)는 공작의 지시에 따라 그림을 수정합니다. 주된 변화는 원래 벨리니가  그린 인물들은 그대로 둔 채 풍경을 다시 작업한 티치아노(Titian)에 의해서 마무리되지요. 이 그림은 유명했던 벨리니 특유의 강렬한 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젊은 박카스의 푸른색 가운은 특히 유명하고요. 비록 이 형상들이 신들이지만, 그들을 거의 신들처럼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볼 때 이것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의 자연주의 적인 장면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벨리니의 이런 종류의 그림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필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간주되는 신화적 인물들을 인간화한 것으로도 귀결될 수도 있습니다.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회화의 특징은 "색조"와 "고전적인 자연주의 "와 "기독교의 영성"을 융합한 스타일입니다. 이런 영향력이 티치아노(Tiziano), 조르조네(Giorgione), 피옴보(Piombo)의 작품에서 더욱 크게 드러나고요. 조반니 벨리니는 당시 북유럽의 미학을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접목해서 더욱 활성화시키고자 늘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1425-1479)의 플랑드르 유화의 전달을 통해 조반니 벨리니는 풍부하고 화려한 자연과의 색채감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네치아라는 수상도시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가 지닌 장점을 충분히 활용한 화가라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 동 서양을 아우르는  문화 집합체처럼 융성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꽃 피웠던 베네치아 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 낸 화가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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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알래스카가 원산지입니다. 북극에서 가장 오래된 썰매견이고요. 알래스카 지역명과 이누이트 중 하나인 맬러뮤트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말라뮤트는 고립된 지역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견종이기에 순종으로 인정받는 범위가 넓습니다. 가끔 알래스칸 말라뮤트랑 자이언트 말라뮤트가 다른 견종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크기의 차이일 뿐 다른 견종은 아닙니다. 

 

 

 

Alaskan Malamute/애니멀러브

 

 

 

맬러뮤트 족이 썰매 견으로 오랜 세월 함께 했던 견종입니다. 장거리나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일을 수행했던 대형견이고요. 무리지어 생활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당연히 힘과 지구력 또한 강하겠죠. 

 

 

 

 

  단거리 달리기에는 글리코겐이 에너지원으로 소모되며 장거리 달리기에는 지방과 단백질이 에너지원으로 소모되는데, 대부분의 동물은 단백질, 지방질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소량의 글리코겐을 소모합니다. 때문에 체내에 지방과 단백질이 남아 있어도 글리코겐이 바닥나면 더 이상 달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썰매견들은 탄수화물 없이 지방과 단백질로 이루어진 고기만을 먹고도 바로 에너지를 쓸 수 있는 독특한 매커니즘의 에너지 소모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랫동안 빨리 달릴 수 있는  비결이고요. 그 체력은 하루에 마라톤 풀코스를 다섯 번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으며, 하룻밤만에 회복하여 다음날에도 똑같은 거리를 달릴 수 있다 하니 상상이 안 가는 체력입니다. 썰매견들은 이런 식으로 열흘도 버틸 수 있을 만큼 체력이 강하다고 합니다. 

 

 

 

 

알래스칸 말라뮤트/나무위키

 

 

 

 

알래스카/위키백과

 

 

 

 

 

알래스칸 말라뮤트/위키백과

 

 

 

 

 

 

 

체고: 58-71cm

체중:38-56kg

평균 수명: 10-14년

 

등으로 말린 꼬리, 쫑긋한 귀, 쐐기 모양의 머리 등이 특징입니다.

어린 시절은 귀가 아래로 쳐져 있습니다. 눈은 갈색 계열로 파란색 눈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Alaskan Malamute/Alpha Feeds

 

 

 

 

 

https://www.youtube.com/watch?v=wdAImRsoVCM

 

 

 

 

 

풍성한 이중모의 털을 가졌습니다. 연간 2회 털갈이를 하고 털빠짐이 심합니다. 거친 겉털과 약 5cm 정 된 되는 속 털을 가지고 있습니다. 털색은 회색, 검은색, 세이블, 붉은색 등 다양하며 얼룩무늬를 보이고 단색은 흰색이 유일합니다. 털 빠짐이 심해 주기적인 빗질을 통해 관리가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대형견 미용은 매우 어려워서 애견 미용실 방문 전에 문의를 하고 예약하는 것이 좋습니다. 약 2-4개월에 한 번 정도 미용을 해주세요.

 

 

 

아기 강아지는 백신 접종 종료 후 약 3-4주 후 목욕과 미용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백신 접종 전에는 빗질, 발톱 관리 등을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노령견의 경우 미용하는 것이 부담이 될 수 있으므로 횟수를 줄이고 빗질과 워터리스 샴푸로 관리해 주면 좋습니다. 평소에 덩치부터 산마 한 썰매견이니 혼자서 씻기는 것보다 2-3명이 같이 씻기길 권장합니다. 제대로 씻기기 위해선 샴푸 한 통을 다 써야 할지도 몰라요. 

 

 

 

https://www.youtube.com/watch?v=mX4Lt466sqM

 

 

 

멋진 외모의 알래스칸 말라뮤트는 오랜 단체 생활 특성이 남아 있어 서열 정리와 복종 훈련이 필수인 품종입니다. 사역견, 워킹 그룹에 속하는 견종으로 지능이 높습니다. 조심성과 경계심도 많은 편이고요. 체력이 강하고 활동량이 풍부해 에너지 소비를 위한 충분한 운동, 산책, 놀이 등이 필요한 견종입니다. 산책시 엄청난 힘으로 인해 견주가  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내가 바로 썰매견 , Alaskan Malamute/CBMPRESS 벤쿠버

 

 

 

알래스칸 말라뮤트 새끼를 보면 인형같이 귀엽습니다. 2010년 알래스카 주의 공식 개로 인정받아 알래스카의 마스코트가 되었습니다. 물개와 북극곰 사냥에도 이용되었고요. 잘 다듬어진 근육질 몸매와 강인한 체력이 특징입니다.

 

 

 

알래스칸 말라뮤트는 보호자, 가족에 대한 보호 본능이 강합니다. 주인에게 충성스럽다는 말이 있지만, 그보다는 전반적으로 사람에게 친화적인 종입니다. 키우는 사람 입장에서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주인은 제쳐두고 낯선 이에게 온갖 애교를 떠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덕분에 다른 사람에게 짖거나 위협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생김새도 멋있으면서 주인이 우호적인 신호를 보내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는 편이라 산책 시에 인기 만점이라네요. 단 견종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에 한정합니다. 동물과 거리가 아예 먼 사람들은 큰 개라면 일단 위협적으로 느낄 테니까요. 

 

 

 

 

 

Alaskan Malamute/ amusi

 

 

 

알래스칸 말라뮤트는  터프한 외모와 달리 다정하고 상냥한 성격의 대형견입니다. 다른 동물 및 사람과의 친화력이 매우 뛰어나고요. 또한 독립적이며 고집이 세고 외향적인 성격에 장난스러운 기질이 많은 견종이기도 합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고 좋아하는 견종입니다.  질투하는 퍼그 같은 견종과 달리 인내심도 있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잘 한다고 합니다. 썰매견 종류들이 아이를 사람으로 인식 못하는 경우 서열정리 대상으로 여기고 무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이가 있는 견주라면 아이와 개 양쪽에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알래스칸 말라뮤트의 외모는 시베리안 허스키와 비슷합니다. 허스키보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편이고요. 허스키는 날카롭고 매서운 늑대 인상이라면 말라뮤트는 곰돌이 같은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때 멸종위기에 처하기도한 말라뮤트는 인기 견종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알래스칸 말라뮤트 VS허스키/ 동물과 자연의 사진을 담은 훌륭한 갤러리입니다. (2023)

 

 

 

 

썰매 끌던 종이라 활동력이 상당하고, 크기가 큰 견종이니 공동주택에 선 기르기 힘들고 마당이 필요합니다. 또한 살던 곳이 살던 곳이니만큼 언제나 냉방 대책을 잘 세워 줘야 합니다. 여름에는 상시 에어컨을 틀어줘야 되며 얼음도 제공할 여력이 있으면 더 좋을 듯합니다. 알래스칸 말라뮤트는 땅파기, 하울링 등을 잘합니다.  사이렌 소리와 다른 울음소리를 듣거나 '계란이 왔어요.' 따위의 소리를 들으면 하울링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단독 주택이라면 모르겠지만 아파트같이 다세대 주택에서 살 경우 조심해야 합니다. 수영, 하이킹, 달리기, 어질리티 등을 함께하면 좋습니다.

 

 

 

Alaskan Malamute/ helloBARK!

 

 

건강한 편이지만 고관절 이형성증, 연골 형성 장애, 갑상선 질환, 다발성 신경병증, 혈전증, 백내장,  위장병 등을 주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에이트 빌로우 Eight Below /나무위키

 

 

 

 2006년 공개된 미국의 서바이벌 드라마 영화입니다. 1983년 개봉한 일본의 영화<남극이야기>를 리메이크한 영화이고요. 기지에 남겨진 개들의 생존기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남극 기지의 탐사대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COeNSfQf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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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32살)

21세기 피카소

파카소와 고흐

무대디자이너

수영장 화가

iPad 그림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아티스트

80번째 생일(런던의 테이트 브리튼, 파리의 퐁피두 센터,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생존작가 중 가장 비싼 화가

 

 

 이 정도 힌트면 감이 오실 것 같습니다. 예. 맞습니다. 바로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입니다.  

 

 

호크니의 그림은 파노라믹하고 아이코닉한 작품들로 가득합니다. 처음에는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립니다. 나중에 영화 같은 그림을 그린 작가지요.  영화처럼 움직임을 품은 그림이란 화가가 모델을 이쪽에서도 보고 저쪽에서도 보느라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는 뜻입니다. 여러 방향에서 바라본 이미지를 모아 한 군데에 배열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는 거지요.  전통적으로 화가 지망생들은 그림을 그릴 때 한자리에서 그리도록 배웁니다. '원근법'때문이지요. 원근법은 가까운 사물은 크고 뚜렷하게, 먼 곳에 있는 사물은 작고 흐릿하게 그려서 입체감을 나타내는 기법입니다. 가깝고 먼 비율을 정확하게 하려면 화가의 위치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화가가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 다니며 그림을 그리면 멀리 있던 것이 가까워지고 가깝던 것이 멀어질 테니까요.

 

 

 

<My Parents'>,1977/Tate

 

 

 

데이비드 호크니는 브래드퍼드 예술학교 학생 시절 실물 드로잉과 외부 세계에 대한 충실한 관찰에 입각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음산한 색과 환영적 공간을 특징으로 하는 회화와 석판화를 제작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한창 각광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크니는 추상과 재현적 이미지를 구분하는 경계를 흐려가면서, 도식화된 인물의 형태, 그라피티 등을 사용해 성과 사랑에 관한 주제를  그렸습니다.

 

 

호크니의 많은  작업에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통 한 쌍의 인물들입니다. <나의 부모님 My Parents>(1977)은 그의 엄마와 아빠를 그린 작품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이들어가는 부모님의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호크니가 그들의 성격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세요. 어머니는 다소곳한 자세로 똑바로 단정하게 앉아 계십니다. 백발의 온화한 미소, 두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은 모습이 '참, 곱게 나이 드셨구나.'싶습니다.  화사한 색감이  매력적입니다.  살짝 들린 구두 뒤꿈치,  집에서도 일을 놓지 못하고 열중하시는 아버지의 모습.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양새입니다.  모델 서시는 날은 아들과 눈 맞춤이라도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쑥스러우신 건지. 관심이 없으신 건지. 오랜 습관의 관성이신지.  두 분 사이에 센스 있게 놓아진  튤립 화병만큼이나 집안은 밝고 청량해 보입니다. 부모님을 향한 호크니의   정성이 담겨있는 작품입니다. 

 

 

 

 

Bradford,England/Britannica

 

1937년 7월 9일 영국 브래드 포드 (Bradford) UK 출생의 영국계 미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환영적 양식으로 그린 차 그림 Tea painging in an illusionistic style>,1961/Arthive

 

 

이 시기 호크니는 추상화를 풍자적으로 해석한 작품을 선보입니다. 이 작품같은 대상을 다른 스타일로 그린 4개의 연작 중 하나인데, 호크니는 이 연작에 대해 "나는 의도적으로 피카소처럼 4개의 전혀 다른 화면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했다."라고 제작 의도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 영국 왕립 예술 학교 재학 중이던 호크니는 영국의 '타이푸(Typhoo)라는 브랜드와 차 포장 용기를 보고 이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학교에 가곤 했다. 거기에서 차를 마시곤 했는데, 항상 타이푸(Typhoo)였다. 티백 포장용지가 쌓여갔는데 어느 날 그게 정물화처럼 보였다. 지극히 평범하고 대중적인 브랜드 차의 포장용지였고, 나는 그것을 모티브로 사용했다. 이건 내가 지금껏 했던 작업 중 가장 팝아트 다운 것이었다. "-데이비드 호크니 -

 

 

이 작품은 호크니가 처음으로 맞춤 캔버스 (shaped canvas)를 제작해 그림을 그린 것이기도 합니다. 왕립 예술 학교의 학생들 중 전통적인 사각형의 캔버스로부터 탈피해 위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은 그가 처음이라고 하네요. 이 일화는 화면구성과 공간에 대한 여러 개념, 전통에 대해 탐구하며 새로운 시도를 이어나간 호크니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로로 긴 좁다란 화면에 사람처럼 보이는 도상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일반적인 차의 겉 포장 용기가 그렇듯, 제품 설명 등이 적혀 있습니다. 측면에는 'TEA'가 아니라 'TAE'라고 잘못 적혀있기도 합니다. 이것에 대해 호크니는 "나는 맞춤법에 약하다. 그래도 3글자 짜리 단어를 틀리다니! 하지만 이걸 원근법에 따라 그리기란 쉽지 않았다. 이를 그리기 위해 오랫동안 계획했고, 내 마음이 오로지 '평면성'과 '추상성'만을 향해 있어 오타가 났다."라며 유쾌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난봉꾼의 행각 A Rake's Progress:14plates>,1961-1963/ MutualArt

 

 

 

 

18세기  영국 사회를 풍자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이자 판화가였던 윌리엄 호가스가 그린 동명의 원작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여 제작한 판화입니다. 호크니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현대 사회상과 시대에 맞게 내용을 교훈적으로 각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961년 첫 뉴욕 방문 시 작품 구상을 위한 이미지를 수집했고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정체성을 잃는 과정, 미술계의 부패와 타락 등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뤘습니다.  이 시기에 무엇이든 작품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호크니는 , 피카소처럼 다양한 양식과 여러 그림 제작 방식을 의도적으로 실험하고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왕립예술 학교를 졸업한 후 더욱 성숙한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특성을 작품에 부여하고 양식 상의 자유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 시기에  호크니는 무엇이든 작품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피카소처럼 다양한 양식과 여러 그림 제작 방식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왕립예술학교를 졸업한  후 성숙한 예술가로서 작품에 자신만의 특성을 부여하고, 양식상의 자유를 발전시켜나갔다. 

 

 

 

 

<호텔 우물의 경관 III>1984-5, 석판화 에디션 80/Artlecture Contemporary Art Platform

 

 

 

 

 

1960년대 호크니는 작품 스타일과 매체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며 계속하여 다작을 이어갑니다. 사진, 연극 무대 디자인, 중국의 화권(두루마리 회화)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면서 일시적으로는 판화로 관심을 돌려 입체주의 ,회화공간, 3차원 공간에서 일어나는 여러 다른 실재들을 2차원 평면에 어떻게 재현하는 가 하는 문제에 집중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사진에 대해 "외눈박이 순간을 포착하는 것과 같다."라고 이야기하며 사진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시공간을 표현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합니다.  

 

 

호크니가 움직이는 초점이라고 지칭하는 이 시기의 아이디어는 원근, 기억, 공간을 제안하는 복합적인 실내 풍경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운데 우물이 놓여 있고 그 주위를 둥근 기둥들이 둘러싼 장소를 그린 작품입니다. 마치 볼록 거울로 비춘 듯 기둥들이 우리를 향해 튀어나와 보입니다.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보이는 원근법과 반대되는 효과를 낸 것이죠.

 

 

 

 

<카리브해의 티타임,1987>/경향신문

 

 

1990년대 초, 카메라가 세상을 동질화하고 능동적으로 보는 행위를 퇴화시킨다고 결론을 내린 호크니는 세계를 묘사할 수 있는 실험적인 방식들을 계속해서 모색했습니다.  이 시기에 호크니는 추상적 패턴과 형태가 조합된 이미지로 회귀하였습니다. 선명한 색감과 다양한 패턴의 면, 춤을 추는 것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의 조합은 생경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심지어 작품을 고정하고 있는 액자 틀에도 붓질해 3차원의 조각처럼 보이게 하는 등 다양한 기법으로 추상적 화면을 만들어갔습니다. 

 

 

 

<깔끔한 잔디밭 A Neat Lawn>,1967/Vogue Korea

 

 

2021년 6월 24일 수요일 밤 필립스 (Phillips)는 뉴욕에서 '현대 미술 이브닝 세일'을 개최하여 1억 1,190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그중에 팔린 호크니의 '깔끔한 잔디밭'입니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와 돈 바차디  Christopher isherwood and Don Bachardy, 1968 /더 아트인

 

 

 

 

 

 

Mr and Mrs Clark and Percy, 1971/The Age of Uncertainty

 

 

 

 

그는 '로스엔젤리스의 영국인'으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절을 눈부신 캘리포니아에서 보냈습니다. 수영장에 이어 호크니는 초상화라는 전통적인 장르를 택합니다. 미술에서 가장 오래된 장르인 초상화를 일상의 순간을 포착한 스냅 사진처럼 보여줬습니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한낮에 부부가 자기 집에 편안하고 느슨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막 사진을 찍으려는 화가의 카메라를 향해 눈길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작품의 모델은 오시 클라크와 셀리아 버트웰로 호크니의 절친한 친구이자 1960-70년대 런던 패션 산업을 선도한 디자이너 부부입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호크니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세계에 상당히 감성적으로 반응하며 이미지를 제작했습니다.  그가 오랜 시간 관찰을 통해 느낀 빛과 그림자, 인물, 그리고 공간과 깊이를 표현하는 데 보다 집중합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려진 2인 초상화 시리즈는 영국 테이트미술관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들입니다.이 작품들은 오랫동안 주변 인물들을 모델로 면밀히 관찰하고 다수의 습작 드로잉을 거듭한 끝내 탄생했습니다.  특히 <클라크 부부와 퍼시 >(1970-1971)의 등장인물들은 거의 실물 크기로 제작되어 마치 관객이 서 있는 실제 공간에 대상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2vPPviP9B8

 

 

 

 

 

 

 

더 큰 첨벙 A Bigger Splash,1967/ www. tate. org.UK

 

 

 

 

1964년부터 호크니는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 인근에 거주하며 이 도시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중충한 날씨로 유명한 영국에서 살아온 호크니는 뜨거운 햇빛과 자유로움을 발산하는 로스앤젤레스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묘사'에 관한 문제에 계속해서 몰두했습니다. 바로 사진 기술이 발달하면서 포토리얼리즘과 회화 사이에 세 내적 갈등했던 거죠. 호크니는 실재를 구축하는 문제에 질문을 던지며 "이것이 관객을 좁은 원근 체계에 가둘 뿐만 아니라 관객을 그림과 단절시키고 그림으로부터 분리시킨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위 작품을 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튀어 오른 물벼락만 하얗게 두드러져 있습니다. 누군가 막 다이빙대 위에서 '풍덩'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나봅니다.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을 그림으로 포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호크니는 '풍덩'하는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놓고 그걸 보면서 그렸다고 합니다. 정지된 순간이라는 느낌을 그림에서 강하게 받게 됩니다. 

 

 

 

 

그는 기술적인 면에서 회화가 사진에 비해 사실성을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있다는 점을 직시하게 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리의 투명성이나 계속해서 움직이는 물의 특성을 포착하는 방식 등에 천착합니다. 특히 로스앤젤레스에서 작업하던 어느 시점부터 호크니는 빠르게 건조되고 캔버스에서 벗겨지지 않는 재료인 아크릴 물감을 재료로 사용하게 됩니다. 덧칠할수록 색의 청량함이 반감되는 아크릴의 특성 때문에 그는 최대한 수정 없이 작업을 마무리해야 했고, 더욱 작품의 표면에 집중했습니다. 철저한 계획과 세심한 붓질이 요구되는 작업이 작업 속도는 늦었지만 결과적으로 관찰 능력의 향상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2018년 2월 7일 그의 수영장 첨벙의 풍경 '더 큰 물보라 The Splash'가 2,980만 달러 ( 369억 원)에 판매되었습니다.

 

 

 

<예술가의 초상  Portrait of an Artist/Pool with two figures >, 1972/SSALAD

 

 

 

 

 

그가 오늘날 현존 아티스트 중 가장 비싼 작품의 주인공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2018년 11월 15일 열린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호크니의 작품 <예술가의 초상 Portrait of an Artist/Pool with two figures >(1972)이 9030만 달러 (약 1019억 원)에 팔렸습니다. 예상 낙찰가는 8000만 달러(약 910억 원)였으나 실제 경매에서 <예술가의 초상>은 1000만 달러나 더 비싸게 낙찰되며 현재 살아있는 작가 중 최고가 경매 낙찰 기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술가의 초상>은 1972년 제작된 호크니의 '수영장 시리즈'중 하나입니다. 물속에서 평영을 하는 남자와 빨간 재킷 차림으로 수영장 밖에 서서 물끄러미 수영하는 남자를 지켜보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있는 남성은 호크니의 11살 연하 애인이었던 피터 슐레진저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호크니 자신이 또 다른 자신을 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고요. 정적이면서도 많은 사연이 담긴듯한 분위기의 그림은 호크니 작품의 정수로 현존 작가 최고액이라는 기록을  낳았습니다.

 

 

 

<닉의 수영장에서 나오는 피터 Peter Getting Out of Nick's Pool>,1966/Alamy

 

 

 

 

 

<요정 스웨터를 입은 오시 Ossie Wearing a Fairisle Sweater>, 1970/ Vogue Korea

 

 

 

<조지 로슨과 웨인 슬립 George Lawson and Wayne Sleep>,1972-5, Tate/Getty Images

 

 

 

 

호크니의 파트너인 조지 로손 George Lawson과 댄서인 웨인 슬립 Wayne Sleep의 모습입니다. 출입구에 서 있는 웨인이 조지를 바라보는 시선은 호크니가 느꼈던 사랑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가 포착한 많은 그림 중 여러 작품이 그가 사랑하고 함께 시간을 보냈던 '특별한 남자 친구들'의 초상들입니다. 그런 그림들에서도 부모님을 표현할 때 그림처럼 호크니는 사랑하는 남성들에게도 오래도록 남기고 싶은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마음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그의 친구도 그렇고, 그가 존경하는 다른 커플 역시 만찬가지입니다.

 

 

 

 

The Old Guitarist, from The Blue Guitar, 1977/The Art Institute of Chicago

 

 

 

 

1973년  피카소가 사망한 이후 그의 화풍과 예술 세계가 호크니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푸른 기타 The Old Guitarist form The Blue Guitar,1976-7> 시리즈에서는 피카소에 대한 호크니의 경외심과 탐구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자연주의 (사실감, 현실성)' 바탕으로 하는 회화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합니다.  호크니에게 피카소와의 유대감은 위안을 줍니다. 양식의 엄격함에서 벗어나 세상을 새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고요. 비록 본인은 판화가가 아니며 단지 약간의 판화 작업을 일삼는 화가일 뿐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 판화를 통해 호크니는 20세기 후반 판화사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한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Nichols Canyon>,1980/ Artchive

 

 

 

 

데이비드  호크니의 홈 스튜디오는 할리우드 힐스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선셋 브리버드 (Sunset Boulevard)에서 운전하여 협곡 쪽으로, 1920년대 아르데코 주택들과 산비탈 사이에 자리 잡은 한 코너 하우스에 살고 있었죠. 니콜라스 캐니언 <Nichols Canyon>(1980 ) 캘리포니아 호크니의 집 바로 옆에 있는 할리우드 드라이브의 계곡을 그린 그림입니다.  소더비 Sotheby's에서 2011년 1,175만 달러 (120 억 원)에 낙찰된 작품이고요.  10년 뒤인 2020년 12월 필립스 Phillips에서 무려 4100만 달러 (500억 원)에 다시 낙찰됩니다. 

 

 

 

 

 

< 텔레비젼을 보는 이안 Ian Watching Television>,1987/Flickr

 

 

 

 

 

1980년대 호크니는 작품 스타일과 매체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며 계속해 다작을 이어갑니다.  사진, 연극 무대 디자인, 중국의 회권(두루마리 회화)에 대한 연구에 집중합니다. 일시적으로는 판화로 관심을 돌려 입체주의, 회화 공간, 3차원 공간에서 일어나는 여러 다른 실재들을 2차원 평면에 어떻게 재현하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하게 됩니다.

 

 

 

1990년대 초, 카메라가 세상을 동질화하고 능동적으로 보는 행위를 퇴화시킨다고 결론을 내린 호크니는 세계를 묘사할 수 있는 실험적인 방식들을 계속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The other Side>,1993, r/museum/Reddit

 

 

 

 

 

눈은 언제나 움직인다.
눈이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눈이 움직일 때,
내가 보는 방식에 따라
시점도 달라지기 때문에
대상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실제로 다섯 명의 인물을 바라볼 때
그곳에는 1천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데이비드 호크니-

 

 

 

 

 

 

<더 큰 그랜드캐니언>,1998/ Artlecture Contemporary Art Platform

 

 

 21세기 전환기에 제작된 호크니의 그랜드 캐니언 풍경화 작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nDAidgLZiE

 

 

 

 

 

<개로비 힐 올라가다 Going up Garrowby Hill>,1998/ The David Hockney Foudation

 

 

 

호크니는  런던에 살고 있지만 캘리포니아에 다른 두 집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와 영국은 매우 다른 장소이며 대조적인 곳이죠. 그의 작업이 '하늘과 땅 차이'로 많이 다르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캘리포니아는  영국에 비해 맑은 날이 많지요.  우중충한 영국 날씨는 항상 변합니다. 따라서 호크니가 영국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변화하는 계절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개로비 언덕을 올라가기 Going up Garrowby Hill '(1998)에서 호크니는 그가 자란 요크셔의 풍경을 캔버스로 그렸습니다. 계절을 그린 그의 그림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색상으로 가득합니다. 

 

 

 

 

 

 

<개로비 힐 올라가다  Going up Garrowby Hill>,2000년

 

 

 

 

 

 

 

<캘리포니아 말리부 Malibu>, 1993/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빛에 대한 현란한 집착, 솔직한 평범, 사실주의 팝 아트와 사진, 기술과 표현의 경제성. 이 모든 것들이 호크니를 독특하게 만드는 '미술의 힘'입니다. 호크니는 그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놀이와 즐거움과 기쁨, 눈부심을 경험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 미완성인 자화상과 모델 Model with Unfinished Self-Portrait>,1977/Arthive

 

 

 

 

<HollywoodHills House>,1980/Arthive

 

 

 

 

 

 

팝 아티스트 호크니의 그림 스타일은 바로크에서 입체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소스를 포함하며 최근에는 컴퓨터 그래픽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대 화가이며  이미 거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성과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젊은 기분으로, 인습을 깨고 우상을 파괴하는 이콘 파괴자 iconoclast로 종횡무진 활약 합니다. 비례, 선형 관점 및 색상 이론의 해체를 즐깁니다.  다시 말해, 그의 그림은 고전을 숭상하면서도 현재의 모든 규칙을 고위적으로 깨뜨리며 활동합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빌리와 오드리 와일더 Billy+Audrey Wilder in Los Angeles>,1982/newsteacher.chosun. com

 

 

 

 

 

호크니는 1980년대 붓을 잠시 놓고 아예 사진만으로 그림을 구성해 보기로 합니다. 카메라로 찍은 사진 144장을 퍼즐 맞추듯 구성한 작품입니다. 사진을 이어 붙인 '포토 콜라주'이지만 이 그림부터 호크니는 작품에 움직임을 반영합니다. 144컷 속에는 144개의 서로 다른 시선이 숨어 있으니까요. 화가가 서 있던 자리를 조금씩 옮겨서 찍은 사진들이거든요. 호크니는 피카소의 복수 시점, 한눈에 보기에는 너무 커서 걸어 다니면서 봐야 하는 중국 두루마리 그림 등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z5vWgKy2Sc&t=81s

 

 

 

 

 

 

 

<My Mother Sleeping,Los Angeles>,1982/MyArtBroker

 

 

 

<Nude, 17th June>,1984/Arthive

 

 

 

 

 

아무리 사진이 발전해도
사진은
결코
천국이나 지옥을 찍을 수 없어
미술과는 경쟁할 수 없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호크니는 50여 년 전 1970년대에는 사진작가를 꿈꾸었습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화가를 시작하기 전, 아니 화가를 계속하면서도, 조이너스 Joiners라고 불리는 사진 콜라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가 말했듯이  호크니도 사 진 이의 한계성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찰칵 한 방과 끊임없는 붓질이 주는 깊이감은 분명 다르니까요. 그는 사진이 표현할 수 없는 미술, 사진이 할 수 없는 미술을 위해 붓을 다시 듭니다. 그것이 그만의 성공 비결이 됩니다.  

 

 

 

David Hockney showed portraits of close friends at his new exhibition/USA Art News

 

 

 

호크니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로스 앤 제레스, 런던, 파리를 오가며 살았습니다. 그는 1974년 파리 센 강에서 만난 그레고리 에번스 Gregory Evans(그림 왼쪽), 그와 함께 1976년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서 10년이 넘도록 개인적인 특별한 관계를 함께 했으며, 오랜 연인 관계였습니다. 그레고리 에번스 Gregory Evans는 캘리포니아의 옆집에 살면서 호크니의 아트 비즈니스를 위해 활동했고, 수많은 작품 속에서 모델로 재탄생합니다. 50년이 넘는 특수 관계는 아직도 끝나지 않아서, 2021년 현재도 비즈니스 파트너로 남아 있습니다.

 

 

 

 

<로스 앤젤레스, 실내장면 Domestic Scene Los Angeles>,1963/Christie's

 

 

 

 

<비버리 힐스에서 샤워하는 남자 Man in Shower in Beverly Hills>,1964/Artchive

 

 

<노팅힐에서 실내 장면 Domestic Scene , Notting Hill>,1963/ The David Hockney Foundation

 

 

 

 

사람들은 호크니가 게이 선구자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그는 영국에서 게이 섹스가 여전히 불법으로 금지되고 있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이 게이라는 섹슈얼리티를 '내놓고' 표현했습니다. 1967년까지 영국은 동성애가 합법화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영국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간 가장 큰 이유 역시 자신의 '성'에 제한받기 싫어서이기도 합니다.

 

 

 

 

 

<May Blossom on the Roman Road>, 2009/Creative Boom

 

 

 

 

 

<Winter Timber>,2009/ arthur.io

 

 

 

 

 

Arrival of Spring in Woldgate East Yorkshire in 2011 : Digital:Works/ David Hockney

 

 

 

 

 

 

 

<Gardem>,2015/Arthive
<블루 테라스가 있는 정원 Garden with Blue Terrace> ,2015/더 아트 인

 

 

 

1937년 7월 9일 영국 브래드 포드 Bradford, UK 출생의 영국계 미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우리 나이로 87세 (2024년)이지만, 요즘에 그는 캘리포니아 보다 고향 요크셔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영국 요크셔에 머무르면서, 매일 6-7시간 동안 여전히 왕성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지요. 미술에 대한 많은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David Hockney, Yosemite- on an iPad/The New York Times

 

 

 

 

 

호크니의 미술 작업이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iPad로 그립니다.  아이패드 그림은 누워서도 작업이 가능합니다. 스마트폰은 사용하기 쉬웠고요.  화가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아침 일찍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아침에는 넓은 선으로 인상을 그리기 시작했고, 낮이 되면 아이패드 화면에 직접 눈부신 색상을 그렸습니다. 아이패드의 가장 큰 장점은 작업이 완료되면, 즉시 그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든 과정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시간을 돼 감는 것과 같이 말이죠. 그림의 복제도 가능하고 키울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습니다.  그림 보관을 위해 커다란 수납 고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캔버스를 들고 다닐 필요도 없고 물감 값이 들지 않습니다. 그는 완전히 예술적 매체로 새로운 그림 세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2010년 과 2011년에 북부 캘리포니아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방문하는 동안 호크니가 iPad에서 만든 3부작 David Hockney Paints <Yosemite iPod>, 뉴욕타임스( The New York Times)입니다. 호크니는 더 큰 화면으로 그의 예술적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색상, 빛 및 선의 더 복잡한 상호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iPad를 사용해 그림을 그립니다. 좋아하는 주제인 산사나무 꽃이 특징인 합성 사진 작업을 해서 해마다 사시사철 변화는 화려한 창밖의 모습인 계절을 풍성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와터 근처의 더 큰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 사진 시대를 위한 야외에서 그린 회화>1998 /월간 객석, auditorium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야외에서 그린 이 작품은 50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완성하는데 6주가 걸렸다고 한다.

 

 

 

 

 

원근법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부터 쓰였습니다. 정확한 원근법은 고정된 위치에서 사물을 바라본 한 방향의 시선, 즉 단일 시점을 전제로 합니다.  원근법은 600년 가까이 서양 미술을 지배했습니다. 원근법은 그림의 사실적 느낌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됐지만 대부분의 그림이 엇비슷한 구도가 되게 만들었지요. 19세기 후반부터 화가들은 원근법에서 벗어나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호크니에게 큰 영감을 준 파블로 피카소는 다양한 각도에서 사물을 본 후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의 그림이 여러 개의 시선을 가졌다고 해서 이를 복수 시점이라 부릅니다. 호크니가 복수 시점을 잘 표현한 작품을 소개합니다. 

 

 

 

2000년대 태어난 고향으로 관심을 돌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전원 풍경을 그립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호크니는 이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계절의 변화와 그 경이로운 광경에 감동을 받고 영국 요크셔의 풍경을 캔버스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호크니는 풍경을 그릴 때 수없이 반복하며 그렸는데 드로잉과 수채화로 먼저 풍경을 그려보고 다시 유화를 그렸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풍경화를 그리면서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에서 정점을 이 웁니다.  가장 큰 규모로  높이 4.5m 폭 12m의 크기로 총 50개의 캔버스가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룹니다.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은 봄이 오기 직전 와터 근처의 새순을 머금은 겨울나무를 그린 것으로 화면의 중심에는 가지를 뻗은 거대한 플라타너스가 있고 키가 큰 나무들과 수선화들이 피어있고, 오른쪽에는 두 채의 집이 보입니다. 또한 배경에는 분홍빛 숲이 보입니다. 

 

 

 

이 작품은 커다란 규모로 인해 앞에 다가서는 순간 마치 실제 나무숲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는 호크니가 말하는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한 복판에 자리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처음 작품을 접할 때는 요소들의 다양성과 복잡한 관계를 한눈에 포착하기는 어렵지만  이로 인한 약간의 불안감은 곧 작품 곳곳을 탐색하게 되는 즐거움과 환희로 바뀌게 됩니다.  또한 호크니는 이 풍경화를 그릴 때 배경의 숲을 염두에 두고 그렸는데 큰 나무 뒤에 있는 공간을 살리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겨울나무를 그리게 되었고요.  나무의 잎이 무성한 여름철이 배경이 되면 뒷 배경의 공간이 보이기 힘들겠죠.  그와 우리를 구별 짓는  그만의 독특한 시선을 느끼게 합니다. 

  

 

 

 

평범한 나무들을 보면서
가지에 달린 몇 개의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그 환상적인 형태를 생각했다.
공간에 대한 관심을 잃으면서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도 잃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데이비드 호크니-

 

 

 

 

 

 

 

 

 

https://www.youtube.com/watch?v=q4TaBiSro4o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림이야말로 저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면서 60년 동안 계속 그렸습니다.

 

 

 

 

 

 

 

 

 

 

<TASCHEN Books: David Hockney,<My Window>/ www.taschen.com/iPad 그림

 

 

호크니가  요크셔 집의 창문을 통해 계절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적인 작품과 안목 있는 예술 애호가를 위한 작품, 그의 요크셔 집 창문 밖에서 변화하는 계절에 대한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의 iPad 그림이 또 다른 감성으로 다가옵니다. 

 

 

<My Window>, David Hockney/ Gilt Magazine

 

 

이제  미술 도서 출판사 타센 TASCHEN에서 그의 표현대로라면 '일본  스모 선수만큼 큰 책'에 화려한 해상도로 인쇄 한 새 책, '나의 창문 My Window'이 나왔습니다. 작가가 연대순으로 정렬 한 iPad 그림 120 개 작품이 들어있습니다.

 

나의 창문 My Window'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의 iPad 그림 한스 베르너 홀츠 워스 Hans Werner Holzwarth 편저 아트북 전문 출판사 타셴 TASCHEN, 가격 1,750( 책 한 권 무려 280만 원)

 

 

<데이비드 호크니의 아이패드 그림들>/헤이팝

 

 

 

 

 

 

https://www.youtube.com/watch?v=qW76WLCgQJo

 

 

 

 

 

 

82 Portraits,2016/Artlecture Contemporary Art Platform

 

 

 

 

 1980년대에 복사기와 팩스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듯 2010년 이후 그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려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청력이 좋지 않은 그는 전화 통화 대신 문자를 주로 이용하는데, 매일 아침 친구들에게 싱싱한 꽃 그림을 그려 보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아이패드의 훌륭한 점은 스케치북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준비된 물감을 비롯한 모든 것을 항상 가지고 다닐 수 있지요."

 

그렇다고 그가 첨단의 매체만을 추구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는 영상매체는 새로운 매체이고 낡은 매체라는 생각이야말로 낡은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즉  새로운 매체와의 만남을 시도하지만, 동시에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매체인 캔버스와 붓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생각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는 최근 런던에서 83점의 새로운 페인팅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이번에는 풍경화가 아닌 초상화들이죠. 그의 초상화 속 인물들은 서양화라기보다는 동양화에서 느껴지는 구도와 원근법에 더욱 가까우며 색채는 여전히 신선한 밝은 톤입니다.

 

 

 

 

 

영화< 호크니>/ 디 아티스트

 

 

 

https://www.youtube.com/watch?v=to4y4gF5ang

 

 

 

 

 

David Hockney,iPad,2012/Morgan Library

 

 

 

 

그는  담배 한 개비가 관에 박는 못 한 개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올해로 흡연 역사는 70년입니다. 1960년대 초 그가 런던의 왕립 미술학교 (Royal College of Art ) 재학 시절, 동기생 알비키 타지 R.B. Kitaj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해골 그림을 5파운드에 팔았다고 합니다.  호크니는 그 첫 그림 판매 수입으로 담배 20 갑을 샀던 기쁨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합니다. 아들의 지독한 흡연을 걱정하던 그의 아버지는 , 담배 대신 초콜릿 비스킷을 자주 주셨지만, 담배를 즐겨 피우는 그보다 10년 먼저 75 세에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아직도 서른 살, 나의 화실로 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uBPaKSCsIU

 

 

 

 

 

 

David Hockney, Park Hoter MUNICH/JARI STUDIO

 

 

 

 

 

 

우리는 마음과 기억으로 본다

 

 

 

호크니는 캘리포니아 시기에는 평면성을 강조하며 그렸습니다. 영국으로 넘어간 노년에는 공간을 살리는 풍경으로 변화했고요.  그는 나무, 잎사귀, 풀 등을 그리면서 "더욱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는 호크니 삶과 예술에서 궁극적인 행위이며 이를 통해 그는 가능한 왜곡 없는 실제를 올바로 보고자 갈망한 예술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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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경마는 1226년부터 열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영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입니다. 영국 상류계층은 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경주마를 갖기 위해 끊임없이 개량종 만들기를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1806년 스포팅 매거진에 잉글리쉬 서러브레드(Thoroughbred) 종이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혈통이 순수하다는 의미입니다. 가능한 한 속력이 있는 말을 작출 하는 것에 주목적을 두고 사육되어 온 종으로 순수혈통이라는 것이 선발 시 지침이 된다고 합니다. 서러브레드는 영국에서 토종 암말과 아랍 또는 북아프리카의 수말을 교배해서 개량한 말로 가장 빨리 달리는 품종입니다. 

 

 

 

 

경마의 바탕에는 누구의  말이 가장 빠른가에 대한 호기심과 가장 빠른 말을 가진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경쟁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돈을 거는 도박이 결합하면서 영국의 황실과 귀족들은 미친 듯이 경마에, 또 경주마 양성에 몰두하게 됩니다. 

 

 

 

 

 

 

George Stubbs<Whistle Jacket>,1762,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wikipedia

 

 

 

 

단순한 동물화가가 아닌 탁월한 말 화가를 소개합니다.  조지 스터브스(George Stubbs 1724-1806)는 그의 대표작 <휘슬 재킷Whistle jacket>으로 유명하지요. 작품은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걸려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액자를 박차고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말의 기세, 말의 움직임과 근육 하나하나까지 그의 피나는 노력이 깃들어 있는 특별한 작품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부와 명예를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립니다. 그것도 일부 허락된 사람들에게만 말이죠. 사람도 평생 자기 초상화 한 점을 갖기 함들던 시절에 실물 크기의 초상화를 보유한 말이 되었네요. 당시 <휘슬 재킷>의 주인은 영국 총리를 역임했던 정치인이자 당대 최고의 부자이며, 정치를 빼고는 경마에만 열중했던 로킹엄 후작이었습니다.

 

 

 

 

로킹엄 후작 찰스 왓슨 웬트워스 Charles Watson-Wentworth, 1730-1782/wikipedia

 

 

 

 

 

로킹엄 후작 초상화 <휘슬재킷Whistle jacket>은 유럽에서도 손꼽히게 큰 그의 저택 마당에 풀어 키우던 200여 마리의 말 중 하나입니다.  현재 경주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러브레드(Thoroughbred) 종의 조상인 고돌핀 아리비안(Godolphin Arabian)의 손자이고요. 중동 지방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라비안 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름 또한 마지막 주인의 성인 고돌핀 와 아라비안종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휘실재킷Whistle jacket>은 1762년부터 시작된 그의 초기 말 초상화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은 사람 없이 말만 등장하는 그림 중에서도 좋은 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후작의 소유물인 말을 훌륭히 묘사했기 때문이죠. <휘슬재킷 Whistle jacket>은 화려한 족보에 비해 경주마로서나 종마로서 기록이 특출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토록 기념비적인 초상화의 주인공이 된 건,  그의 우아한 외모와 자유분방하고도 고귀한 성격 덕분입니다.

 

 

 

 

 

말의 탄탄한 몸통을 비롯해 갈기와 꼬리의 푸슬거리는 느낌까지 가감 없이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올라탔거나 옆에 서 있었더라면 말의 온전한 모습을 보기 힘들었을 겁니다. 실제로 스텁스의 말 그림들은 말을 탄 사람들보다, 옆에 서 있거나 아예 안장이 없는 말의 모습이 많습니다.

 

 

하나 더 특이한 점은 <휘슬재킷Whistle jacket>에는 배경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는 원래 자연 풍경을 즐겨 그렸고 하늘과 들판을 그리는 데 익숙한 화가였습니다. 그의 그림들에는 수많은 자연 풍경이 많았죠. 이 경우 스텁스는 아마 배경을 그리는 것 자체가 휘슬재킷(Whistle jacket)을 방해할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휘슬재킷Whistle Jacket>은 꽤 활발한 성격의  말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리기도 쉽지 않았겠죠. 스텁스(Stubbs)도 '놀라울 정도로 다루기 힘들다'란 말을 했을 정도니까요.  그리는 동안 한 소년이 말을 앞뒤로 다니게 하면서 다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스텁스가 그림을 그리고 있자 휘슬재킷(Whistle jacket)은 소년을 끌고 가 그림에 얼굴을 들이박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덕분에 스텁스와 소년은 휘슬재킷이 이 그림을 망치고 다른 말들까지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느라 고군분투했다고 합니다.

 

 

 

 

 

뒤 발목에 하얀 띠를 두른 ,<휘슬 재킷 Whistle jacket>은 기름진 갈색 몸통에 부드러운 크림색 갈기를 날리며, 앞발을 들어 우리를 쳐다봅니다. 주인도, 마구도, 안장도 없이, 온 세상에 홀로 남은 듯 무한한 배경에 선 <휘슬재킷>은 아름답고 자유롭고 고고합니다.  스텁스는 이전까지 왕과 귀족의 권세를 드높이기 위한 받침대처럼 존재했던 흔한 말 그림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한 마리의 말, <휘슬재킷 Whistle jacket>을 보여줍니다.

 

 

 

 

<Racehorses Exercising at Goodwood >, 1759-60, Goodwood House/w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mqQbSg5gPmA

 

 

 

 

 

 

 

 

<암말과 망아지 Mares and Foals> ,1762/wikipedia

 

 

 

조지 스텁스가  1762년에 그린 <암말과 망아지>또한 영국 귀족계급의 취향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림에 나오는 말은 경주에서 우승한 말이거나 성공적인 경주마의 어미로 이름난 말들이 대부분입니다. 당연히 그의 고객은 모두 부와 지위가 높은 귀족들로 동시에 말의 주인이기도 했습니다.

 

 

 

말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림의 모델이 모두 암말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서는 씨수말 같은 덩치가 큰 근육질의 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배가 처져 있어 새끼를 낳는 번식마인 것처럼 보이고요.  말의 습성 때문인데 야생일 경우 씨수말 한 마리가 여러 마리의 암말을 거느리는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기르는 말이라면 100% 암말들인 거죠. 씨수말을 암말과 함께 방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임신기간이 아니면 씨수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요. 또한 씨수말을 포함한 암말과  새끼말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죠.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 말고도 동물을  그린 화가는 많았습니다. 그런대 왜 그의 말 그림을 최고라는 할까요?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사냥과 경마에 대한 영국인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말 그림에 있어서는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려냈지요.

 

 

 

그는 살아있는 말을 관찰하길 좋아했습니다. 그의 열정은 말의 해부학까지 파고들어 해부학 책까지 출판할 정도였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말들은 마치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있는 것 같은 아우라를 보여줍니다. 일류 모델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말이죠. 배경이 없는 과감한 구성과 각 말들이 취하고 있는 아름다운 포즈, 리듬감 있는 배열까지 뛰어납니다. 이런 구도에서는 무엇보다 말이 돋보이게 됩니다. 

 

 

 

 

윤기 흐르는 털과 아름답게 골진 근육, 근육 위로 퍼진 핏줄 선까지 섬세하게 전달됩니다. 이쯤되면 궁금해집니다. 화가는 도대체  움직이는 말들을 그것도 여러 마리를 동시에 어떻게 그릴 수 있었던 걸까? 말들을 모아 이런 포즈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 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화가는 여러 곳에서 각각 관찰하여 그린 말 드로잉과 스케치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화면에 조립하듯 하나로 구성하여 자연스러운 장면으로 만들어 냅니다.

 

 

 

 

아마도  말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겁니다.  화가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하기도 힘들었을 테니까요.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는 비즈니스 마인드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말의 주인의 눈에 비치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을 그려주었기 때문이죠.  포샵을 주인 눈에 쏙 들게 해 준 겁니다.  그러다 보니 귀족들이 너도나도 스텁스를 찾고 말 그림을 의뢰합니다. 덕분에  말 그림으로   화가로서의 명성과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Hound Coursing a Stag>,1762, Philadelphia Museum of Art/wikipedia

 

 

 

 

 

 

 

<Cheetah and Stag with Two Indians>,1765, Manchester Art Gallery / wikipedia

 

 

 

 

 

<Painting of a Kangaroo>,1772/wikipedia

 

 

 

 

영국 리버풀 지도/신발끈 여행사

 

 

영국 화가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 1724-1806)는 영국 리버풀 출신으로 가업을 특이하게 계승한 화가입니다. 10대까지 가죽 직공이던 아버지를 따라 무두질을 했지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동물 해부에 몰두한 결과 최고의 동물 전문 화가가 되고요.  그의 그림 덕분에 영국인들이 처음으로 캥거루를 보게 됩니다.  이 그림을 본 18세기 영국인들은 문화적 충격을 받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캥거루를 이때 처음 보았기 때문이죠. 

 

 

 

 

가죽공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스텁스의 삶의 전반적인 정보는 거의 전적으로 동료 예술가이자 절친인 오자스 험프리의 기록에 의존합니다. 험프리의 비공식적 회고록은 스텁스가 험프리와 나눈 사적인 대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스텁스는 청소년기까지 아버지 일을 도왔는데,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을에서 지나다니는 동물들을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했거든요. 어느날 스텁스는 아버지에게 화가가 되고 싶다는 얘길 꺼냅니다. 아버지는 처음엔 반대했는데 , 결국 적절한 멘토 선생을 찾는 조건으로 나중에는 아들이 하는 일을 묵인했다고 합니다. 스텁스는 영국 랭커셔에 사는 판화가 햄릿 윈스탠리에게 자문을 구하게 됩니다. 

 

 

 

딩고 /handmaker

 

 

 

<딩고>는 남작인 조지프 뱅크스가 1770년 제임스 쿡 중위가 호주에서 딩고들을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의뢰한 그림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런던 국립해양박물관이 기부금을 받아 그림을 매입했다고 합니다. 

 

 

처음  견습 생활부터 시작했던 스텁스는 이후 예술가로서의 독학을 시작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해부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많은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에 대한 관심을 해부학으로 돌렸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관찰을 많이 했습니다. 기술을 배우면서 수많은 스케치를 했고요.

 

 

 

 

<조지 스터브스의 해부학적 작품들 The Anatomical Works of George Stubbs>1766/round Table Books

 

 

 

영국 요크셔/위키백과

 

 

스텁스는  1744년 전문가 밑에서 해부학을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영국 요크로 이사를 합니다. 그는 1753년까지 요크에서 초상화 전문 화가로 일하면서 요크 카운티 병원의 외과의사에게 인체 해부학을 배웠습니다. 그는 이 병원에서 인체 해부학에 참관해 아주 정확한 드로잉들을 그립니다. 이 드로잉들은 존 버튼 박사의 <완벽한 새로운 조산제도에 관한 소고>(1751)의 도판으로 실려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책을 낸 것뿐만이 아닌 의대생들에게 개인 해부학 수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식견이 높았다고 합니다. 

 

 

 

 

1755년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납니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이탈리아  고전주의에 마음이 흔들리는데 스텁스는  자연주의의 신봉자로 그대로 남게 됩니다. 험프리는 스텁스가 이탈리아로 간 이유는 '자연은 그리스인이든 로마인이든 예술이든 그 무엇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였다고 회고합니다. 스텁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남긴 예술보다 자연이 우월하다는 개인적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스텁스는 1756년 링컨셔의 외딴 농가를 빌려 1년 반 동안 말을 체계적으로 해부하고 이를 스케치하기 시작합니다. 가까운 무두질 공장에서 말의 시체들을 입수하여 피를 뺀 후, 혈관에 밀랍을 채워 넣었습니다. 그런 후에 말을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도록 자세를 취한 후, 해부를 해 가며 각 단계별로 상세하게 스케치했습니다.

 

 

 

 

 

<말의 해부학 The Anotomy of the horse>,1766, George Stubbs/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런던지도/위키백과

 

 

그는  런던으로 영구 이주한 뒤 예술가들과 학자들에게 중요 참고서가 된, 1766년에 출간된 <말의 해부학 The Anatomy of the Horse>을 위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스텁스의 판화가 실린 이 책은 예술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정확한 해부학적 연구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760년대 들어 스텁스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는 작은 것에서 커다란 크기까지 모든 스케일로 작업을 하기 시작합니다.  경주, 사냥, 사격 등의 모습을 포함한 말과 야생 동물,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당시 스포츠였던 승마는 부유층들의 취미였기 때문에 활기찬 모습의 말은 주인들의 체면을 올려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Mares and Foals in a Landscape>1769/Fine Art America

 

 

 

후원자들은 스텁스의 그림이 다른 화가들의 작품보다 더 정확하며 사실적이라 느꼈습니다.  1759년 제 3대 리치먼드 공작으로부터 커다란 그림 세 점을 의뢰받은 이후 스텁스는 화가로서도 재정적인 안정감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그의 그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경주나 사냥을 위해 비싼 옷을 입고 말과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을 먼저 그리고 배경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먼저 각 말들을 그리고 칠한 다음 빈 배경 안에 세세하게 묘사합니다. 그다음에 영국의 배경을 채워 넣어 말과 어우러질 수 있게 합니다.

 

 

 

 

<A Lion Attacking a Horse>1762-63/Yale Center for British Art-Yale University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 운동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18세기 후반 등장한 낭만주의 는 감정과 자연의 회귀를 강조합니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분노나 두려움, 경외심 등의 감정을 동물에게 투영한 작품을 제작했고 스텁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파리 대학의 장 클레이 미술사학교수는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동물들의 에너지, 공포가 낭만주의 와도 연결되며 그의 시리즈가 늘어날수록 그 공포는 전체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평합니다. 

 

 

 

 

<A Lion Attacking a Horse>,1765, National Gallery of Victoria/wikipedia

 

 

 

  1763년 , 그는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것에 대한 수십 개의 작업을 진행합니다. 30년 동안 그는 약 17개의 이미지로 사자와 말을 그리고 재해석합니다. 학자들은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그의 그림을 두고 특이성, 독창성이 두드러진 18세기 영국 미술의 뛰어난 유산 중 하나라 평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스텁스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모로코에 들렀다가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것을 목격한 것에서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이 주제를 다룬 골동품이나 조각상등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Turf,with Jockey Up, at Newmarket, 1765/Art UK

 

 

 

 

 

 

 

<John and Sophia Musters Out Riding at Colwick Hall>,1777/Fine Art Prints on Demand

 

 

 

 

 

<Bulls Fighting>,1786, Yale Center for British Art /Album online

 

 

 

1770-1780년대 들어  예술성과 현실성 등이 높이 평가된 스텁스의 작품을 토대로 한 판화가 점점 더 많이 복제되며 널리 유통되었습니다. 그의 말 그림들은 대부분 온화하면서 따뜻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두 마리의 황소가 머리를 맞대고 싸우는 장면이나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보면 그가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잔인함과 공격성 또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특히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그림들은 아주 본능적입니다.  그가 좋아하는 이미지였고요. 말년에 그는 역사적인 사건도 그림으로 다뤘지만 동물 주제에 비해서는 인기가 덜했다고 합니다.

 

 

 

 

 

 

<Horse in the Shade of a Wood>,1780, Tate Britain /National Gallery/wikipedia

 

 

 

 

 

 

 

 

 

<A Couple of Foxhounds>,1792, Tate Britaiin/wikipedia

 

 

 

 

<soldiers of the 10th Light Dragoons>,1793, Royal Collection Trust/wikipedia

 

 

 

 

 

 

 

 

 

 

<Wedgwood Family>, Art UK/wikipedia

 

 

 

조지 스텁브스(George Stubbs)는 웨지우드 가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의 외가이자 처가였던 웨지우드(Wedgwood) 가문은 명품 도자기 '웨지우드'를 생산하는 집안입니다. 오른쪽 나무 아래에 앉은 두 사람은 다윈의 외할아버지인 조시아 웨지우드 1세입니다. 여인은 외할머니인 세라이고요. 말은 탄 여자가 다윈의 어머니인 수잔나(15세)입니다. 어머니 수잔나는 다윈이 8살이던 해인 1817년 7월 15일 세상을 떠납니다. 

 

 

 

 

<Reapers>,1785,Tate Britain/wikipedia

 

 

 

스텁스의 작품은 인기가 많았습니다.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도 있었고요. 하지만 그는 그가 미술계에서 그토록 얻고자 애썼던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활동적인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부유한 후원자들의 인기를 얻었고, 그의 그림의 대부분은 개인 소장품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성 안에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들이 20세기가 넘어서야 세상에 공개되자 그는 더 큰 주목과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가 그린 이국적인 동물 그림들 입니다. 

 

 

<Rhinoceros>,1780-1791, Hunterian Art Gallery/wikipedia

 

 

 

<Zebra>,1763, Yale Center for British Art/wikipedia

 

 

 

 

 

 

<The Monkey>,1799, Walker Art Gallery /wikipedia

 

 

 

 

 

<Hambletonian, Rubbing Down>,1800, National Trust, Mount Stewart/wikipedia

 

 

 

 

특이한 건 그는 '스포츠 화가'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로열 아카데미 정회원 자격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입니다.  영국 로열 아카데미는 1768년에 설립된 유명한 미술 학교이자 전시관입니다. 이 기관은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단체 중 하나로, 매년 여름 전시회를 개최하지요. 로열 아카데미는 회원 제도를 운영합니다. 회원들은 영국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요. 이 기관은 영국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상관없었습니다. 그는 웨일스 왕자를 포함한 많은 귀족 후원자들의 의뢰를 받아 나이가 들어서까지 일했으니까요. 81세의 나이에 런던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M8BmsrC18g

 

 

 

 

다른  화가들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지만 화가 벤자민 마샬이 그의 전통을 이어 많은 사냥과 경주 작품을 남겼다고 합니다. 미술계의 눈으로 봤을 때 그는 그저 단순한 말 화가로 치부되었습니다.  예술가로서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었고요.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이제야 비로소  한 예술가가 이뤄낸  특별한 업적에 경의를 표했다는 점이죠.  편견을 없애고 바라보면  스텁스(Stubbs) 역시 18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 중 하나로 자리 잡아도 손색이 없을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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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나우저하면 보통 실내 반려견으로 많이 키우시는 미니어처 슈나우저를 쉽게 떠올리실 겁니다.  털이 덥수룩해 할아버지 수염을 연상시키는 견종이죠. 자이언트 슈나우져는 리젠 슈나우져(Riesenschnauzer)라고도 불립니다. 체구가 커서 강인함과 다부진 인상을 주는 견종입니다. 주인에 대한 흔들림 없는 성격이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감각기관이 상당히 발달한 편이어서 총명하여 훈련시키기가 쉽다고 합니다. 

 

 

Giant Schnauzer/pinterest

 

 

 

크기에 따라 미니어쳐 ,스탠다드, 자이언트 슈나우져로 나뉩니다. 슈나우저는 15-16세기 독일에서 농장의 개로 널리 애용되던 품종입니다.  이 시대의 초상화에 자이언트 슈나우져의 그림이 제법 많이 발견되지요. 슈나우저는 원래 남부 독일의 뷔르템베르크와 바바리아 지방의 소와 양을 키우는 목장에서 개량되었습니다. 슈나우저와 비슷한 표준형 크기의 개가 16세기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 조상으로는 푸들이나 화이어 헤이드 저먼 핀셔가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감사하게도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헌신한 견종입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간 동안 자이언트 슈나우져는 많은 불상사를 겪으면서 경찰견과 군견으로 용감한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뷔르템베르크/나무위키

 

 

초창기의 슈나우저는 쥐잡기나 번견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었습니다. 뛰어난 체력과 다부진 몸으로 마차를 끄는 개로도 활약하고요. 자이언트 슈나우저의 조상은 쉽독과 캐틀독 등이 섞여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바이에른 알프스의 농장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가축을 잘 보호하고 다른 큰 포식자들에게도 지지 않고 소와 양을 모는 데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유럽 전역에서 경찰견과 군견으로도 사용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trUpKxA3HY

 

 

 

 

 

 

 

 

 

 

Watch Giant Schnauzer's reaction to meeting mini version of the breed /Newsweek

 

 

 

자이언트 슈나우저는 대형견입니다.

 

체고 59-70cm

체중: 32-35kg

평균수명:10-12년

 

대체로 수컷들이 암컷들 보다는 조금 더 큰 편입니다.  그리고 AKC의 그룹 구분에서는 일반적인 사역 견을 의미하는 워킹그룹에 속하는 견종입니다. 

 

 

2024.02.20 - [지식&교양] - 50-74. 미니어쳐 슈나우저(24)

 

50-74. 미니어쳐 슈나우저(24)

작지만 에너지 넘칩니다. 스탠다드 슈나우저의 모든 재미, 에너지, 그리고 풍성한 수염을 가지고 있고요. 미니어처 슈나우저의 덥수룩한 턱수염, 긴 눈썹, 접힌 귀는 사교성, 적응력, 지능과 함

sun-n5y2.tistory.com

 

 

 

 

자이언트 슈나우저의 외모를 KKF(한국 애견연맹)의 견종표준에 의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힘이 셉니다. 호리호리하지 않아 다부진 인상이고요. 또 체구가 거대합니다. 강인한 이미지가 강하죠.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는 항상 방어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공손한 태도가 기본적으로 느껴지고요.

 

 

 

The Dog of All Dogs/SparklingSchnauzers

 

 

 

 

 

자이언트 슈나우저의 성격은 원만한 편입니다. 안정적이고 주인에게 흔들림 없는 충성을 합니다. 또 감각기관이 상당히 발달한 편이어서 총명합니다. 훈련시키기 쉽고요. 목양견이나 경비견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경계심과 보호본능을 가지고 있어 사회성을 발달시키기 위해 충분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초기 사회화와 지속적인 복종 훈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자이언트 슈나우져는 힘, 지구력, 이동속도도 우수한 편입니다. 날씨 변화와 질병에 잘 견디고요. 스트레스 상황을 견디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자신감이 강한 견종으로. 반려견, 스포츠 견, 사역견으로서 매우 적합합니다. 자이언트 슈나우져는 슈나우져 삼 형제 중 가장 몸집이 커서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일을 하는 견종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견종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SDtB6a9UlI

 

 

 

특히  자이언트 슈나우져는 흥분해서 소란스럽게 짖어대는 일이 없습니다. 온순하고 얌전한 성격으로 일반 가정에서도 인기가 높습니다. 책임감이 강합니다. 가족에게 애정이 깊은 훌륭한 반려견입니다. 하지만 친화력은 높은 편이 아니라고 하네요. 수상한 소리나 인기척은 철저히 경계하고, 주인을 지키는 일에 무엇보다 열심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집을 맡길 수 있다고 합니다.

 

 

 

경비견이나 집을 지키는 번견으로서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성은 보통 정도입니다. 대형견이고 , 활동량도 어느 정도 많은 편이라 아파트나 빌라 등 공동주택에서 기르기에는 부적절합니다. 단독주택이나 전원주택의 실외에서 기르는 것이 좋습니다. 

 

 

 

Giant Schnauzer/wikipedia

 

 

자이언트 슈나우저의 신체 비율은 체고와 체장과이 거의 동일합니다. 몸은 정사각형에 가깝고요. 머리 길이 (코끝에서 후두부까지 측정한 길이)가 등선 길이 (기갑에서 꼬리 시작점까지 측정한 길이)의 절반과 같습니다. 자이언트 슈나우저의 머리 부분 중 두부에서 두개골은 튼튼하고, 길쭉한 편이나 , 후두부가 심하게 돌출되지는 않았습니다.

 

 

 

 

자이언트 슈나우져의 귀는 알파벳 V자 모양입니다. 양쪽 귀의 모양이 동일하고요. 방향은 관자놀이 쪽으로 기울어진 형태입니다. 양쪽 귀의 접힌 부분이 서로 평행하며, 접힌 부분이 두개골 윗면보다 높게 올라오지 않아야 합니다.

 

 

자이언트 주둥이는 끝이 뭉툭한 쐐기 모양입니다.  콧등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고요. 입술은 검은색이면서 매끈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턱에 밀착되어 있으며, 입 가장자리는 닫혀 있는 모양입니다. 자이언트 슈나우져의 턱은 위아래 턱이 모두 튼튼하고 , 완전 협상교합(새하얀 이빨이 치식에 맞게 42개 모두 갖추어진 구성)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자이언트 슈나우져의 머리는 전체적인 체구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마가 평평하면서도 주름은 없습니다. 두개골 윗면은 콧등과 평행합니다. 그리고 스톱은 눈썹이 두드러져서 윤곽이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자이언트 슈나우져의 안면 부 중 먼저 코는 가죽이 잘 발달된 편으로, 콧구멍이 큼직하며 검은색입니다. 

 

 

 

Giant Schnauzer Seongbin Im Flickr/cincyvegans.org

 

 

 

자이언트 슈나우저도 스탠다드나 미니어처처럼 특유의 수염을 가지고 있습니다. 튼튼하고 굵직한 뼈대를 지녀 억세게 생겼습니다.  자이언트 슈나우저는 우락부락한 체형과 조밀하고 거친 털을 지녔습니다. 특유의 아치형 눈썹과 억센 콧수염 및 구레나룻이 완고한 할아버지의 이미지와 비슷해 보이지요. 폼 잡고 제대로 서있으면 조각상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자이언트 슈나우져의 식탐은 비교적 많은 편입니다. 특히 식사량 관리를 제대로 해주셔야 합니다. 금세 비만견으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철저한 식사량 관리와 함께 매일 2번, 적어도 1시간씩 산책을 병행하여 운동을 시켜야 합니다. 

 

 

자이언트 슈나우져는 훈련 정도에  따라서 다양한 연령층에 서도 쉽게 기를 수 있는 견종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의사표현을 충분히 할 수가 있는 견종이라  적절한 제어를 할 수 있습니다.  또 의사표현에 따른 제반 사항들을 제어하거나, 들어 줄 수가 있을 정도로 유사한 견종을 길러 본 유경험자에게 더 어울린다고도 합니다. 

 

 

 

Giant Schnauzer/ cincyvegans.org

 

 

 

자이언트 슈나우져의 피부는  전신 피부가 몸에 단단히 밀착되어 있습니다. 모색은 순수한 검은색이며, 아래쪽 털도  동일한 색입니다. 페퍼 앤 솔트(Pepper and salt)로 검은색과 흰 색이 모두 선명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자이언트 슈나우져의 털은 뻣뻣하고, 거친 털이 빽빽하게 자랍니다.  털의 구조는 이중 모 구조이고요. 밀도가 촘촘하고 윗부분은 길이가 너무 짧지 않은 털이 몸에 밀착되어 누운 형태로 자랍니다. 상모는 거칠고, 털의 질감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길어야 하며, 지나치게 꺼칠꺼칠하거나 뻣뻣하지 않아야 합니다.  털 손질은 핀브러시나 빗으로 브러싱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합니다. 

 

 

 

 

 

자이언트 슈나우저는 지능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지능을 필요로 하는 임무 수행에 적합한 높은 지능을 갖고 있습니다. 또 훈련성과도 좋아 주인에게 절대 복종하는 편입니다. 자이언트 슈나우져를 산책시킬 때  계속 걷게만 하지 말고, 가볍게 달리거나 도그 런 같은 넓은 장소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으면 더욱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이언트 슈나우져는 어질리티나, 프레스비에도 어느 정도의 소질을 보인다고 하는 만큼, 도그 스포츠도 같이 시킨다면 잘 따라 할 겁니다. 

 

 

 

Giant Schnauzer/Reddit

 

 

 

 

 

자이언트 슈나우져가 잘 걸리는 질병으로  '진행성 망막 위축증'이 있습니다. 슈나우져들은 망막세포가 위축되어 기능을 잃는 진행성 망막 위축증에 걸리기 쉽습니다. 실명까지 이를 수 있으니 반드시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통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큰 개를  키운다는 것은 많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자이언트 슈나우져 분양하기에 앞서 이 품종이 자신의 생활방식과 맞는지 먼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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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대등한 위치에 영국의 미술을 올려놓은 개척자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헨리 무어( Henry Moore  1898-1986)입니다. 현대 조소를 크게 발전시킨 알렉산더 칼더(Alezander Calder 1898-1976)와 같은 시기에 태어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요. 

 

 

영국에서  가장 외지고 추운 요크셔 출신입니다. 8남매 중 일곱째 이고요. 12살에 이미 조각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지만, 광부였던 아버지는 그가 선생님이 돼 안정적인 삶을 꾸리기 바랐습니다. 아버지 희망대로 잠시 교사 생활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1917년 1차 세계대전으로 자원입대 합니다. 최전선 전투에서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으로 부상을 당하여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영국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군대를 제대하면서 결국 자신의 꿈을 좇아 예술 대학에 진학 합니다. 1921년 당시 영국 최고의 미술대학인 왕립예술대 장학금을 받아 런던으로 간 무어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부지런히 다니며 여러 다양한 문화의 조각을 접하게 됩니다.

 

 

 

 

젊은 조각가로서 
나는 대영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고,
그곳에서  걸작품들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헨리 무어-

 

 

 

 

대영 박물관에 출입하면서 여러 나라의 조각을 접하게 됩니다.  무어는 콜럼버스 신대룩 발견 이전 시대의 아메리카 예술과 오세아니아 예술, 그리고 아프리카 예술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무어의 해외 미술 여행은 1925년 왕립 미술학교의 여행 장학금을 얻어 6개월 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한 것이 처음입니다.  이때 미켈란젤로나 지오토, 마사치오를 연구하게 되지요. 아메리카 인디언,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원시예술에서 이상적인 조각미에 대한 영감을 찾게 됩니다. 

 

 

 

 

1920년대에 무어는 런던의 왕립미술 칼리지를 다니며,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들을 모사하거나 대영 박물 간에서 작품들을 스케치하면서 실력을 쌓게 됩니다. 1928년 , 그는 첫 공공 작품으로 지하철역을 위한 부조 작품을 위촉받았고, 이듬해 같은 학교 회화과 학생이었던 이리나 라데츠키와 결혼하여 런던에 스튜디로을 차립니다. 멕시코의 차크몰 조각에서 영감을 얻어 최초의 와상이 만들어진 것도 이 해이며 그의 작품에 구멍이 나타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다방면에서 남편에게 좋은 조언자 역할을 했던 아내와 함께 살던 신혼 집이 폭격에 의 해 부서지고 맙니다. 둘은 허트 포드셔 시골집에 평생의 보금자리이자 창작소를 만들고 살게 됩니다.  헨리 무어는 기존의 찰흙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캐스팅을 하던 전통적인 기법을 철저히 거부합니다. 대신 직접, 돌이나 나무 등을 깎는 방법을 선택하여 조소의 새로운 세계를 엽니다.  

 

 

 

1930년대 헨리 무어는 <유닛 원 Unit One>이라는 젊은 예술가 단체와 교류합니다. 이 단체는 현대 미술과 건축 분야의 국제적인 동향을 영국 대중에게 전파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어서 무어는 1936년에 런던에서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참가함으로써 영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요한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노스런던의 햄스테드에서 살며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국제적 모더니즘에 정통한 미술가들과 가깝게 지냅니다.

 

 

 

 

누워있는 형태가 가장 자유로우며,종합적이고, 공간적이다.
그리고 와상 즉 누워있는 사람은 어떠한 표현에서도 눕힐 수 있다. 
또한 자유롭고 견고하고 영속적인 조각이라는 이념을 갖게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헨리 무어-

 

 

 

 

 

 

 

 

 

 

 

<기댄 형상 :축제 Reclining Figure : Festival>,1951/ Scottish 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wikipedia무어의 전작 가운데 가장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 받은 작품. 2016년 6월 30일 크리스티 런던 경매 에 출품돼 2400만 파운드(약 360억원)에 판매됐다. 무어의 작품중에서는 물론, 영국 조각가의 작품 가운데 지금까지도 가장 높은 경매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Yorkshire map/Shutterstock

 

 

 

 

 

<기댄 형상 축제(Reclining Festival, 1951년)>라는  작품입니다. 여인의 상반신은 서 있는 듯하면서도, 하반신은 누운 듯한 이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누 운상태가 상징하는 죽음과 서 있는 상태를 상징하는 삶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Reclining Figure>,1951, Sculptural Process and Public Identity/ Tate

 

 

 

 

이 작품은 1949년 영국 예술위원회 의뢰로 시작됩니다. 2년후 예정된 대형 문화축제 행사장에 설치하기 위해서였죠. 이 축제의 100주년 기념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최신식으로 지어진 전시회장 입구에 설치될 작품이었습니다. 위원회는 가족상을 의뢰했지만, 무어는 비스듬히 기대어 누운 형상을 제작합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인물상이면서 동시에 자연 풍경 같은 독특한 형태가 '사람과 땅의 관계'와 영국의 농경 역사를 보여주려는 행사 취지에 잘 맞아떨어져 큰 문제없이 설치가 이뤄졌습니다.

 

 

 

 

 

<Reclining Figure>,1951/Tate

 

 

 

 

무어는  1920년대 후반부터 기대어 누운 형상에 대해 탐구해왔습니다. 이 주제를 다른 그의 작품 가운데서도 <기댄 형상 :축제>는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20여 년이 넘는 선구적인 탐험의 성취를 보여주는 궁극의 결과물인 셈이죠. 예술적, 기술적 성숙의 절정을 증명하는 이 청동 조각은 1951년 제작 당시 그의 기댄 형상 가운데 가장 율동적이고 선적인 형태를 띤 것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시도에 해당했습니다. 또한 2m가 넘는 크기로 기댄 청동 조각으로는 가장 컸습니다.

 

 

 

 

<Reclining Figure>,1951, Broze/ResearchGate

 

 

 

오늘날에는 빈 공간이 포함된 물결치는 듯한 양식이 모던 조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저항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 문화축제 이후, 보수 성향 지역으로 옮겨져 설치됐을 때 파란색 물감으로 조각 전체가 지저분하게 덮인 적이 있습니다. 1956년 원상회복 후, 이 작품은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에서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습니다. 총 6개 에디션 가운데 나머지도 테이트 미술관,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등 세계 유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중 유일하게 개인 소장가 손에 남아 있던 한 점이 2016년 6월 30일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 출품돼 2400만 파운드(약 360억 원)에 판매됩니다. 이는 무어의 작품 중에서는 물론, 영국 조각가 작품 가운데 지금까지도 가장 높은 경매 기록에 해당됩니다.

 

 

 

 

 

 

알렉산드르 아키펭코 Aleksandr Archipenko/ Google Arts & Culture

 

 

 

<Mademoiselle Pogany>, 콘스탄틴 브랑쿠시 Constantin Brancusi/The New York Times

 

 

카르타헤나 콜롬비아의 프리콜롬비아 석조조각/ Freepik

 

 

 

그의 이런 작품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닐 테죠. 무어(Moore)의 뛰어난 학습 능력과 초기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특히 아르키펭코(Aleksandr Archipenko)와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영향이 컸습니다. 동시에 그리스, 이집트, 그리고 프리 콜롬비아의 원시 미술도 그의 제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르네상스 마스터들인 미켈란젤로(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 Michelandelo di Lodovico Buenarroti Simoni  1475-1564), 지오티 디 본도네 (Giotto di Bondore 1267-1337), 지오반니 피사노( Giovanni Pidano 1248-1315) 같은 조각가들의 작품 또한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David of Michelangelo>,1504/wikipedia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wikipedia

 

조반니 피사노( Giovanni Pisano 1248-1315),< The Crucifixion from the pulpit of Saint' Andreas, Pistoia/wikipedia

 

 

 

 

 

미술사에서 종종 등장하는 길게 드러누운 여인이라는 주제가 무어(Moore)의 전형적인 작품형태가 된 것은 1930년대입니다. 유기적인 선만 남기고 세부묘사를 제거하여 원초적인 생명력을 한 층 강조하게 됩니다. 그가  기댄 형상을 선호한 것은 서 있거나 앉은 형상보다 안정적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구성과 공간 측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창작의 자유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기댄 형상 :축제>가 보여주듯 전통을 깨는 급진적인 시도를 가능케 하면서 모순되게도 가장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형태에서 발견되는 조각적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기댄 형상 자체가 가장 오래된 조각의 주제이자 전통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Reclining Figure>/Getty Images

 

 

 

 

이 작품에서  그가 선보인 또 다른 획기적인 발명은 조각 표면을 따라 나타나는 율동적인 패턴에 기하하적 선을 더한 점입니다. 이를 통해 여성의  가슴과 머리 같은 신체 부위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고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냅니다. 기대어 누운 여인이 곧 산과 계곡, 동굴, 절벽이나 언덕 같은 풍경처럼 보입니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율동적인 형태가 신체인 동시에 풍경을 연상시킵니다. 즉 인물이면서 풍경이자 풍경이면서 인물인 조각인 셈이죠. 그야말로 자연 합일의 극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구상과 추상 사이의 경계에 의도적으로 머물면서 안과 밖, 채움과 비움의 우아한 조각적 합성을 보여줍니다. 아즈텍 문명의 조각상 등 원시 미술에서 받은 영향을 자신만의 양식으로 극대화한 이 작품에 대해 무어 자신도 '형태와 공간을 조각적 융합하는 데에 성공한 첫 번째 작품'이라며 자신의 전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과로 평가했습니다.

 

 

 

신기한  부분은 무어가 동물의 뼈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자연이 만들어 낸 유기적인 곡선과 직선미 그리고 뼈의 안과 밖으로 이어진 조화로운 시각적 공간에 몰입하면서 말이죠. 이후에도 그는 나무, 돌,  조개껍질 같은 자연물과 풍경에서 예술적 영감을 추구하곤 했습니다. 자연물에 영감을 얻어, 언덕과 동굴의 풍경을 닮은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고요.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무어(Moore)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전쟁화가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독특한 기념비적인 그림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독일군의 폭격 때문에 런던 지하도에 시민들이 대피하여 생활하는 모습을 그만의 해석으로 표현합니다. 

 

 

 

<Woman Seated in the Underground>,1941/ The Tretyakov Gallery Magaznine

 

 

 

 

<Grey Tube Shelter>,1940/Google Arts&Culture

 

 

 

<Tube Shelter Perspective>,1941/Media roundups-RoseM Home.blog

 

 

 

 

 

 

인체의 형상을 왜곡하고 조각에 급진적인 새로운 형태를 도입하긴 했지만, 무어는 전통적인 조각 양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자신의 작품들에 인간성을 표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는 공습 때문에 런던의 지하철역 대피소로 대피한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그의 드로잉들에서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1,2차 세계 대전을 한 번은 병사로서 또 한 번은 종군화가로서 폭격으로 고통받는 서민과 노동자의 삶을  목격하게 됩니다.  무어의 삶에 찢어지게 가난했던 아버지와 같은 광부의 삶이 무척이나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방공호>  시리즈 데생 스케치 작업은 헨리 무어의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이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무어(Moore)는 기념비적인 청동 조각상들을 제작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야말로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조각가로 스타반열에 오른 거지요. 그런 그의 공로로 영국 왕실의 작위를 받게 되는데, 여기서 그의 성격과 강력한 신념이 잘 드러납니다. 그는 그의 작위를 거부합니다. 그가  왕실 작위를 받게 되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로 비칠 것에 대해 그것을 거부합니다.  그의 이유는 단순 명료했습니다. 

 

 

 

 

 

 

그런 직함은
저와 비슷한 작업을 목표로 하는 동료 화가들과 저를 단절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건 배신이고 옳지 않습니다. 
-헨리 무어-

 

 

 

 

 

 

같은 해, 작위를 거부한 무어는 노동당 정부와 BBC 가 주최하는 브리튼 축제에서 생존 작가 최초로 다큐멘터리 주인공이 됩니다.  왕실의 작위를 거부하니 노동당 정부가 홍보한 다큐멘터리에서는 영웅이 되어 돌아옵니다. 

 

 

 

 

 

 

<Three Standing Figures>,1945/Tate

 

 

 

 

 

 

 

 

무어는 현대 조각가 중, 작품을 가장 많이 사회에 기부한 화가입니다. 엄청난 부를 지니게 되고 그의 유산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하죠. 그의 조각을 그가 만든 재단을 통해 전 세계에 기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부와 명예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적 공유에 관심이 많았죠. 무어가 생각하기에 돈을 받고 개인이 소장하거나,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보다 공공장소에 모든 이들을 위해 놓여지는 것이 그의 작품과 잘 어울린다고 믿어 왔습니다. 

 

 

 

 

<세 개의 부분을 위한 작업 모형 3번:척추 >,1968 /매일경제

 

 

 

 

자갈과 바위는 돌을 작업하는 자연의 방식을 보여준다.
-헨리 무어-

 

 

 

 

 

 

<세 개의 부분을 위한 작업 모형 3번: 척추(1968)> 는 헨리 무어의 후기 작품 중에서 대표작입니다.  여러 개의 부분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총길이 2m가 넘는 크기의 추상 청동 조각으로 2012년 2월 7일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서 약 500만 파운드 (약 75억 원)에 판매된 적 있는 작품입니다.  그가 평생 탐구해 온 비스듬히 누운 형상이 공간적, 형태적, 유기체적 변형을 통해 더욱 추상적으로 변모했음을 보여줍니다. 얼핏 보면 추상 조각으로 보이나 자연의 일부인 인체 척추뼈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입니다. 이에 대해 무어는 "추상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전부 유기적 형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분리된 몇 개의 부분이 하나의 형상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개념을 조각에 도입해 추상적이면서도 고대 유물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시대를 초월하는 미를 선보였습니다. 

 

 

 

 

 

 

조각은 야외의 예술입니다.
햇빛이 필요하며
제 조각에게 필요한 가장 좋은 환경은 자연입니다. 
내가 아는 그 어떤 아름다운 건물 안 보다는 
어디든 바람과 햇빛이 풍성한 풍경에 놓은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헨리 무어- 

 

 

 

 

 

 

 

 

 

<옆으로 누운 사람>/페로 타임즈(Ferro Times)

 

 

 

 

 

 

 

 

무어의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도난이나 파손이 높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울 때 고철은 자체가 제품이며 원료가 되지요. 한때 고철 품귀현상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도둑들이 설치게 되지요. 그들의  절도행각도 천태만상입니다.   이 청동 조각상은 시가 520만 달러 (약 52억 원)로 런던 북부 허트포드셔 소재 헨리 무어 재단 건물 정원에서 도난당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3명의 도둑이 트럭 두 대를 동원해 이 조각상을 훔쳐 달아났다고 전합니다. 제일 안타까운 점은 도둑들이 작품을 녹여 고철로 팔아버린 경우입니다.  실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엄청난 미술품이 녹아 사라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2012년에 작품을 훔친 두 명의 범인이 징역을 살게 되기도 했습니다. 글렌클린 조각공원의 시가 46억짜리 <서 있는 여인>도 도난당하는 사건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그가 대중들이 생활하는 공공 공원이나 야외에 자신의 조각품들이 설치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계속 고수하는 한 이런 종류의  도난과 파손사건은 계속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야외 대형 조각들이 지닌 가장 힘든 부분 아닐 까 싶습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피에타>,1498-1499/wikipedia

 

 

 

 

 

 

<Mother and Child>1932/Sainsbury Centre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갖는 특징은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마리아의 얼굴이 매우 앳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르네상스 시대 다른 작품 들까 달리 이상과 자연주의의 균형을 이룸으로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입니다.  미켈란 젤로의 작품과 달리  무어(Moore)가 표현한 어머니의 모습은 건강해 보입니다. 어머니의 형상이 둥글둥글한 선으로 제작되어 마치 자연의 일부분인 어머니로 보입니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끄떡없을 것처럼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두 여인과 아이>. 조각만이 아니라 독특한 방식으로 인체를 3차원적으로 표현한 무어의 드로잉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은 2019년 5월 13일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약 300만 달러( 약 33억원)에 판매된 바 있습니다.

 

 

 

<가족>1950/예술인-한국예술인 복지재단

 

 

 

 헨리 무어의 작품 <가족>입니다. 단단하고 차가운 돌 위에 유대감으로 굳건한 가족의 사랑을 오묘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뜻하고 은근하며 깊은 사랑을 영원성으로 승화시킨 듯합니다. 헨리 무어는 기존의 보수적인 영국 조소의 작업 방식이나 조형적 가치를 거부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인체나 조소의 아름다움을 찾았습니다. 

 

 

 

<King and Queen,1952>bronze/Tate

 

 

 

1952년에 디자인된 청동 조각품입니다. 이 조각상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남성과 여성의 두 인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둘 다 약간 왼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한 쌍의 성인 인물을 묘사한 무어의 유일한 조각품입니다.

 

 

 

 

 

 

<Large interior Form>,1953-54, Chicago,IL/Public Art Archive

 

 

 

 

 

https://www.youtube.com/watch?v=xG8Vxb3SV9M

 

 

 

 

 

 

Rotterdam Kunstwerk Wall Relief NO.1, 1955/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As6BE7uNRnw

 

 

 

 

 

 

 

 

 

 

<Nuclear Energy> ,1964-1966(LH526),청동 /wikipedia

 

 

세계 최초의 원자로인 Chicago Pile-1 부지에 있는 시카고 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헨리 무어의 청동 조각품입니다. 인간이 만든 최초의  핵 연쇄 반응이 1942년 12월 2일 이곳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조각품은 포장 돌이 조각품에서 바깥쪽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있는 화강암으로 포장된 사각형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인접한 기념비에는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벽, 기념지는 국립 역사 랜드마크 이자 시카고 랜드마크입니다. 

 

 

 

 

<대형 스핀들 조각 Spindle Piece>,1968, 일본 센다이 미야기 미술관의 대형 스핀들 조각, 청동,(LH 593)/en.wikipedia.org

 

 

 

 

이 작품은 1968년 런던 하이드파크에 전시된 무어의 스핀들 조각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이 시리즈는 신의 손이 아담의 손가락에 닿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의 미켈란젤로 그림의 세부 묘사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조각품은 구멍이 뚫려 있고 양쪽에서 튀어나온 점이 있는 무정형의 비틀린 흐르는 형태입니다 무어는 "조각적으로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두 점이 막 만나려는 모습이다. 이 작품도 같은 주제로 두 손가락만 나가고 들어가지 않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PuqDJADlLA

 

 

 

 

 

 

 

<Oval with Points,1969-70>/ Princeton University Art Museum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cqQIFgd9Cpo

 

 

 

 

 

 

<Large Arch>, Columbus, Indiana,broze, 1969/ Collections-GetArchive

 

 

 

1969년 미국 인디애나 콜럼버스에 설치된 아치입니다. 1963년의 플로렌스 아치를 확장하여 브론즈로 제작하면서, 작품명을 <라지 아치>로 했습니다. 피부색이 다른 켄싱턴가든의 것과 쌍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클리오 로저스 도서관 앞 광장에 설치된 라지 아치는 도서관 설계자인 글로벌 건축가 아이엠 페이의 제안으로 이 지역 유력재벌가인 커민스엔진의 어윈 밀러 회장이 헨리 무어에게 제작 요청하여 설치되었습니다. 아치의 여러 버전 중에서 제일 큽니다. 

 

 

 

 

 

 

Henry Moore,<The Arch(LH503b)>,1971, fiverglass cast,in the Fortedi Belvedere , Florence/National Gallery of Art

 

 

 

 

 

 

재료는  화이버글라스입니다. 스무스한 면이 있는 기하면 긁힌 부분이 있고요. 당시 무어는 사람이 지나다니고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상징적인 대형 조각물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약 6m 높이로 그전까지의 누워있는 여인상 등, 바라만 보는 조각물에서 탈피하기 시작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9__h9n00tY

 

 

 

 

 

 

 

<The Arch 1979-1980>, 켄팅턴 가든의 아치/wikipedia

 

 

 

 

 

영국 런던의 켄싱턴 가든에 1980년 전시한 작품입니다. 처음에는 헨리무어의 80회 생일축하 전시의 일부로 1978년 전시됐다고 합니다. 켄싱턴 가든의 서펀타인 갤러리에 일정기간 전시하는 기획전시의 일부였죠. 1963년 이태리 플로렌스(피렌체)에 전시할 때처럼 화이버글라스로 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본 런던 시민들의 반응이 좋아서 켄싱턴가든 쪽에서 영구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무어는 영구 배치를 감안해 , 화이버글라스를 내구성이 좋은 석재로 바꾸어 다시 제작해 똑같은 위치에 2년 뒤 설치하게 됩니다. (처음 전시 때 일반 시민들은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 연못에 비치는 아치의 모습도 공원에도 잘 어울릴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재료는 로만 트래버틴(Roman Travertine )이라는 수려한 색상과 질감의 대리석 일종으로 로마 성베드로 성당 외벽에도 사용된 결이 있고 아름다운 돌입니다.  하지만 5. 74m 높이의 아치는 1996년 구조상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분리해체해서 창고에 보관 중이었다고 합니다.. 최근 2012년에 구조적 결함을 해결하여 다시 복구하여 원위치에 설치됩니다. 

 

 

 

 

 

< 더 아치>는 뼛조각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내부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생명체의 근본 구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헨리 무어) 혹자는 스톤헨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Man Enters the Cosmos>,1980,청동, 애들러 천문관 (야외),일리노이 시카고/ Public Art in Chicago

 

 

 

<인간이 우주에 들어가다 Man Enters the Cosmos>는 1980년에 제작된 약 4.0m(13피트) 크기의 기능성 활줄 적도 해시계입니다. 해시계는 이전에 천문관의 주요 입구 광장 계단에서 약간 더 남쪽에 위치했지만 지금은 미시간 호숫가에 바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런던의 Printing House Square에 있는 The Times신문의 사무실을 위해 1960년대에 처음 만들어진 작품의 후기 사본입니다. Henry Moore Foundation에 따르면 제목은 'Sundial 1965-66'입니다. 

 

 

 

 

애들러 천문관 (야외), 일리노이주 시카고

 

 

 

 

<Man Enters the Cosmos>/Flickr, 밤풍경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예술관은 현대 조각을 하는 후배 예술가들에게 또 다른 영감의 원천이 되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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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  '아는 것이 힘이다.'를 주장한  그  철학자 맞나?

아닙니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 철학자의 배다른 형인 니컬러스 베이컨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시각적 충격'은 서양 미술계에 강력한 무기죠. 피카소는 "회화는 아파트를 장식하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림은 나의 적에 대한 공격이자 방어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림이 나의 창조력을 알지 못하는 사회를 공격해서 충격을 주고, 나의 개성을 방어해 주는 성곽이 된다는 뜻이죠.

 

 

 

19세기말 사실주의적 구상화가 해체됩니다. 그런데 사실주의 해체는 하나의 길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전격적인 추상을 택하지 않고 구상이 추상의로 부서져 나가는 과정을 탐험하는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헌 집을 불도저로 완전히 밀어 버리고 새집을 짓는 게 아니라 헌 집을 뜯어 내면서 거친 철근과 벽면을 드러내는 건축 기법과 유사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어두운 면/Fahrenheit Magazine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이렇게 구상을 '뜯어내고 들이대는 '화법을 선도하고 정착시킨 화가입니다. 사실주의적인 그림속의 부드럽고 예쁜 인간 이미지를  세게 후려치는 느낌입니다.  남겨진 살점과 뼈를 재구성한 그의 그림은 마치 의학책에서 악성 종양의 끔찍하고 징그러운 모습을 볼 때와 비슷한 시각적 충격을 불러일으킵니다.

 

 

 

괴상망측한 느낌이 들어 순간 멈칫합니다. 눈을 가리다가도 손가락을 살짝 벌려 훔쳐보듯 보고 싶어 집니다. 두 충돌하는 감각이 한쪽이 너무 세다보니 일방적으로 기우는 느낌입니다.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가 베이컨의 작품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얘기할 정도로 베이컨은 20세기 내내 현대미술에 넓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Mother and Child Divided>, 데미언 허스트 Damien Hirst/Singulart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슬픔을 마주하지요. 두들겨 맞고 모욕당하면서 일그러지고 왜곡됩니다. 고통이 각인되는 곳은 결국 육체입니다. 그래서 베이컨이 그린 뒤틀린 육체 안에는 연약한 인간의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속절없는 고통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


 

 

 

Francis Bacon(1909-1992)/facebook

 

 

 

 

사람들이 베이컨 그림 앞에 서면 압도됩니다.  이유는 끔찍한 이미지가 뿜어내는 어두운 에너지 때문이지요. 하지만 단지 기괴한 이미지를 그렸기 때문에 베이컨이 위대한 화가 칭호를 얻었다고 볼 순 없습니다. 베이컨은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 "라는 말도 남겼고요. 베이컨은 살을 가지고 태아난 점에서 인간과 동물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의 또 다른 이름은 고기라고 생각한 거죠. 고기는  언제든지 정육점에 내걸린 신세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베이컨은 동물이든 인간이든 이 세상에서 육체를 지니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비참함을 견디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베이컨의 그림은 기이하게 뒤틀려있습니다.  고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인간이 산산조각나 있는 모습으로 말이죠. 그가 그려낸 불길한 이미지를 들여다보면 수위 높은 공포 영화를 보는 기분입니다. 

"나도 내 작품을 다 이해하는 건 아니다."

 

라고 말한 베이컨은 관람객들에게 자유로운 해석을 주문합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엔 해석의 여지가 많지 않아 보입니다. 고통과 공포 이외의 감정을 느끼기 어려워서 말이죠. 거실에 걸어두고 싶지 않은 베이컨 그림은 소수 마니아들에게만 인기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는 생전에 스타 화가 대우를 받았습니다. 죽어서는 몸값이 더 치솟았고요. 오늘날 베이컨은 손가락에 꼽히는 비싼 작가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베이컨의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습작, 1969>이 1500억 원에  낙찰 됐습니다. 2012년 1350억 원에 팔렸던 뭉크의 <절규, 1893>를 제치고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깼습니다.

 

 

 

 

 

<십자가 형 Crucifixion>,1933/wikipedia 베이컨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했던 작품

 

 

 

<The Crucifixion>,1933/Artimage

 

 

 

 

<The Three Dancers>,1925, Pablo Picasso/ Black Miners museum

 

 

 

피카소의 영향을 받은 <Crucifixion>으로 그는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후 작품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잠시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다시 재기합니다.  베이컨의 주제는 당연히 고깃덩어리 입니다. 렘브란트의 전승을 기억한 것이죠. 베이컨은 인간과 동물의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인간의 존재감이 총알 하 나 만도 못한 살육의 시대를 경험했으니까요. 그것을 처절하게 경험한 베이컨은 인간이 정육점에 매달린 고기와 다를 바 없구나 싶었던 거죠. 베이컨은 삶을 지배하는 것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보았습니다.  

 

 

 

독학으로 미술을 배웠습니다. 피카소가 에로스(삶의 본능)가 강한 작가라면 베이컨은 타나토스(죽음의 본능)가 강한 작가입니다. 그럼에도 베이컨은 매우 명랑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절망감을 미술사가들은 '명랑한 절망감'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엘리펀트맨 Elephant Man>,1980/르몽드 디플로 마티크

 

 

 

<엘리펀트맨>흉측한 외모 때문에 조롱받는 '기형인간'의 슬픔 /세계일보

 

 

 

<Traninsporting>OST/벅스

 

 

 

베이컨  그림에 담긴 에너지는 여러 영역으로 뻗어 나갑니다. 영화계에도 베이컨처럼 악몽 같은 작품을 만들어온 감독들이 있습니다. 린치는 일찍이 베이컨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영화에 반영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습니다. 1980년작 <엘리펀트 맨>에는 희소병에 걸려 기형적인 얼굴을 가진 남자가 등장합니다. 뒤틀린 얼굴을 한 그는 베이컨의 작품에서 막 튀어나온 듯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 2010>에도 베이컨 그림이 의미심장하게 등장합니다. '분열'이라는 에너지로 가득한 이 영화는 큰 틀에서 뒤틀린 감독 역할에 충실한 작품이죠. <트레인스포팅, 1996>을 제작할 때도 베이컨 그림의 음울한 색채를 반영했다고 합니다. 

 

 

 

 

베이컨 출세작 <십자가 책형 발치의 인물들을 위한 세 개의 습작들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1944/wikipedia

 

 

 

베이컨이 화단에 공식적으로 진출한 작품입니다. 실제로 이전 10여 년간 작업한 작품들을 대부분 없애고 10여 점의 작품만 남겨 놓았다고 합니다. 이 작품이 화가로서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 작품은 캔버스 3개로 구성된 3부작입니다. '삼면화'는 오랫동안 그려진 종교화의 방식입니다. 베이컨은 이 삼면화를 통해 다양한 자아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알 수 없는 시공간 속에서  폭력을 당하는 일그러진 육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언뜻보면 외계인처럼 보일 만큼 끔찍한 형체들과 강렬한 오렌지색은 관람자를 한눈에 사로잡고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시체에서 그 영감을 얻었습니다. 수천만 명의 죽음, 핵폭탄 투하, 홀로코스트 등으로 세계가 뿌리째 흔들리는 시대에서 살았습니다. 이때부터 베이컨은 공포와 비명, 분노, 타락 등의 악몽 같은 이미지들을 강렬하고 그로테스크(grotesque)하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세 개의 화폭에 담아낸 슬픔, 공포, 분노의 감정 표현들은 인간이 지닌 가장 본능적인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을 그림으로써 미술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습니다. 그는 아주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스스로 공부하며 영역을 넓혔습니다.  위 작품은 종교화의 형식을 따왔을 뿐 아니라 여러 요소를 모티프로 하여 이목을 주목시킵니다. 또 의학 서적을 읽으며 기괴한 이미지의 확장과 섬세함에 집중하기도 했습니다.

 

 

 

 

 

 

러스킨 스피어(Ruskin Spear)가 그린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제주도민 일보

 

 

 

위 그림에서 화가 러스킨 스피어(Ruskin Spear, 1911-1990)는 그림자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히치콕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혼미한 기운을 덧씌워 놓았습니다.  악명 높은  화가 베이컨은 75세의 나이에 스피어를 위해 무려 25점 이상의 초상화 포즈를 취해주었다고 합니다. 베이컨을 그린 다른 화가들과 달리 스피어는 베이컨 특유의 양식을 고스란히 본뜨거나, 화가로서 자신의 장기를 내비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빨간색 배경을 배치함으로써, 광적이고 흠결 많은 생으로 유명한 화가의 명성을 농담조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빨간색 배경에는 폭력에 대한 암시 역시 담겨 있고요.  스피어가 베이컨을 허름한 카디건 차림의 인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색채 선택과 물감 사용은 이 그림을 비밀스럽고도 인상적인 초상화로 만들고 있습니다. 

 

 

 

 

<조커가 사랑한 유일한 작가 ,프랜시스 베이컨>/INDIEPOST

 

 

 

 

프랜시스 베이컨은 육군성에서 일하던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 이사를 자주 다녀야 했습니다. 천식을 앓아 건강하지 못했다고요.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까지 겹쳐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16세 때 아버지에게 동성애적 성향을 들켜 집에서 쫓겨난 후 런던에서 올라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그를 삼촌이 살고 있는 베를린으로 보냈으나 그곳에서도 방탕한 생활을 하다 파리로 떠나게 됩니다. 그는 작품만큼이나 강렬한 삶을 산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화가로서의 엄청난 성공과 함께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 알코올 중독과 약물 남용 등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Francis Bacon 작업실/나무아이미디어

 

 

20살. 런던으로 돌아와 가구 제작을 하면서 회화 기법을 배우고, 틈틈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잦은 기침과 천식 때문에 혼자 그림을 그리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열심히 초현실주의자 그림이나 피카소를 흉내 내어 그렸습니다. 습작기 10년 동안 대부분 그림들은 버리거나 사라졌고 겨우 10작품 남아있습니다. 

 

 

 

 

에드바르 뭉크, <절규 The Scream>1893/wikipedia

 

 

 

에드바르 뭉크<절규>작품 속 인물은  입을 벌린 채  고함을 지르고 있습니다. 베이컨이 표현하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인간의 모습 또한 다른지 않았나 봅니다. 베이컨 작품 속   인간의 부정적인 내면 심리 표현에  영향을 미칩니다. 

 

 

씨네멘터리,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계단>의 비극/SBS뉴스

 

 

https://www.youtube.com/watch?v=yZmRJxTrmh4

 

 

 

 

베이컨은 런던에 정착합니다. 이 시기에 베이컨에게 큰 영향을 끼친 두 개의 콘텐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뭉크의 '절규'였고 또 하나는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 1925>이었습니다. 베이컨은 뭉크 그림에 절절히 배어 있는 고통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가 <전함 포템킨>에서 본 것도 결국 고통이었고요. 이 작품엔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면으로 추앙받는 신이 있습니다. '오데사 계단 신'으로 불리는 장면인데, 영화 몽타주 기법 교과서로 평가받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계단에서 학살당하는 가운데 아기를 태운 유모차가 위태롭게 계단 위를 데구루루 굴러가는 장면입니다. 이 신에서 총에 맞은 여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컷이 등장합니다. 베이컨은 입을 벌린 채 고통스러워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정육점에 들어가서 고깃덩어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살피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다른 생명을 잡아먹고 사는 삶에 깃든 
모든 공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 공포의 미학을 거론하다.


 

 

 

<Painting 1946>,1946, Museum of Modern Art , New York /wikipedia

 

 

 

 

 

검은색 정장차림으로 남성의 얼굴은 검정 우산에 가리워져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붉은 색감의 배경은 마치 정육점 같아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이 그림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그려진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이 지닌 잔인한 내면의 심리를 베이컨은 직접적으로 끄집어냅니다. 

 

 

 

 

 

 

 

<Slaughtered OX>,1655, Rembrandt/wikipedia

 

 

 

 

 

 

베이컨의 도살장에 대한 관심은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었습니다. 미술사학자 '던 에이도스'에 따르면 베이컨은 '조르쥬 바타이 으'가 발간한 예술 비평 잡지 '다큐멘트(Documents)'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여기엔 파리 근교의 도살장 사진들이 여러 점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미술사학자 '던 에이도스'는 베이컨이 자신의 친구이자 '바타이 으'의 동료로서 도큐망 발간에 참여한 바 있는 '미셸 레리스로'부터 잡지 '다큐멘트'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접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베이컨의 작업실에서 발견된 자료들 중에는 잡지 '다큐멘트'를 비롯하여 다른 잡지 등에서 오려낸 도살장 사진들 뿐만 아니라 '렘부란트(Rembrandt Harmensz 1606-1669)'와 러시아계 프랑스 화가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의 화집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손때 묻은 화집의 상태로 보나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베이컨의 언급들로 미루어 볼 때 베이컨이 두 거장의 회화를 참조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Head VI>,1949, Hayward Gallery, London/wikipedia

 

 

 

 

 

베이컨의 회화에 나타나는 이중적 성향은 기존의 재현적이고 상투적인 이미지를 과감히 벗어납니다. 베이컨이 만들어 낸 새로운 이미지는  전통의 부정을 통해 창조됩니다.

 

 

 

베이컨의 그림은  강열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그의 그림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으니까요.  그림에서 움직임을 제안할 뿐만 아니라 그림과 사진을 보다 일관성 있는 조합으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갑니다. 베이컨의 성공은 그의 두드러진 조형적 접근에 달려있습니다.   그림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아주  전통적인 것이었습니다. 옛 거장들은 그에게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줍니다.  특히 베이컨이 자신의 유명한 시리즈인 "소리치는 교황들"의 기초로 사용했던 디에고 벨라즈케즈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림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때, 베이컨은 자신이 그린 그림이 "국립 갤러리나 혹은 쓰레기통 둘 중 한 곳에는 들어갈 만하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우상파괴자로 벨라스케스의 교황 그림을 수도 없이 재해석하고 해체시킵니다. 

 

 

 

 

 

 

Velazquez's Portrait of Innocent X,1650/wikipedia

 

 

 

 

 

 

 

내 그림들은 인간 본성이 그림을 통해 관통되듯,
인간의 현존과 지나간 사건들에 대한 기억의 흔적을 남기듯, 
달팽이 한 마리가 점액을 남기며 지나가는 듯 보였으면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에서 출발한 습작/나무위키

 

 

 

 

 벨라스케스의 원본 그림과 비교해 보면 베이컨의 그림은 확실히 기괴함이 느껴집니다. 위엄있고 권위 있어야 할 교황님의 초상이 고함 소리 쩌렁쩌렁 울리며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해 내니 말입니다.  1946년부터 베이컨은 두상 연작을 제작합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두상 IV'는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에서 소재를 얻은 그림입니다. 후일 유럽인을 충격에 빠뜨려 명성을 드높일 '밸라 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노 10세의 초상화 연구'의 서두가 되는 그림이고요. 

 

 

 

그 형상은 마치 폭력이 가해진 신체처럼 찢기고 일그러져 있습니다.  만져질 듯 이 생생한 살의 느낌과 선명한 색채는 관객들의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눈길을 사로 잡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왜곡된 형상이 대상과 기묘한 닮음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통적인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재현과는 거리가 먼 닮음이지요. 베이컨의 이러한 회화적 특징은 한때 그를 전통적인 구상 회화의 명맥을 잇는 화가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또는  실존주의 맥락에서 2차 대전 후의 시대적인 아픔과 존재의 고뇌를 드러낸 화가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베이컨은 이와 같은 분석들을 모두 거부합니다.  어떤 범주에도 속하기를 꺼려하고요.  이러한 이유로  베이컨에 대한 미술사적인 연구는 주로 전기적인 관점에서 또는 베이컨 본인과의 대담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Seated Figure>,1960/ MutualArt

 

 

 

 

 

 

베이컨은 살아 있는 모델과 일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절친의 초상을 그릴 때마저 사진을 보면서 그렸습니다. 또한 새로운 작업에 들어갈 때면 먼저 책이나 잡지에서 사진을 찾아보고는 했습니다. 베이컨의 가장 유명한 연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교황 초상화 연작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스페인 바로크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1650년작 <이노센트 10세 교황 초상화>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실제 작품이 아니라 예술 서적에 나온 인쇄본을 참조로 한 것입니다.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 II>/29CM

 

 

 

 

<Homage to Gogh>,Francis Bacon, 1960/ Pinterest

 

 

 

프랜시스 베이컨이 좋아한 화가 렘브란트, 피카소, 고흐, 벨라스케스, 푸생 그의 그림에 이  다섯 화가의 그림을 밑그림 한 작품이 많습니다. 베이컨이 초기에 좋아했던 작가 중  고흐와 푸생의 작품입니다. 베이컨은 실제로 침대 곁에  항상 반 고흐 관련 책을 몇 권 두고 자고는 했답니다. 그는 고흐를 '영웅'이라고 일컫고 '사물의 현실에 대한 엄청난 통찰력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높게 평가했습니다.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1628/wikipedia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또한 영감을 준 화가는 바로 16세기 프랑스 미술을 처음으로 세계화시킨 '니콜라스 푸생'(1594-1665)입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1628)

 

 

 

 

<Two Figures>,1953/Daily Update:2024-04-17-SVET

 

 

 

 

 

베이컨의 미술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동성애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자기 애인과의 성교를 그린 <Two Figures,1953>은 당시 유럽에서 매우 충격적인 그림이었습니다. 베이컨의 친구였던 화가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Freud)가 이 그림을 사서 오래 소장하였지만 베이컨이 살아 있을 때는 공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 남자의 얼굴은 뭉그려져 있습니다. 시체같이 창백한 몸뚱이는 두들겨 맞은 멍이 묻어있는 듯 붓칠이 되어있고요. 둘의 성교는 마치 서로 죽일 듯이 몸싸움을 하고 용트림을 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동물적 야만성과 인간의 성적 욕구가 엉키면서 인체 묘사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섹스를 하며 느낀 몸의 감각을 동작과 표정을 통해 직접 드러내 더 충격적이고요.  베이컨은 이 성행위를 그것도 동성애를 누구나 볼 수 있게 무대에 올려놓았습니다. 교접하는 순간 쾌락과 고통을 오가는 불분명하고 유동적인 감각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서양 미술계에서는 '본능적(visceral)' 탐험이라며 칭찬을 했다고 하네요. 은밀해야 할  사적인 영역을 그림이라는 도구를 통해 드러내는 것 또한 큰 용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기와 남자 형상 ,1954>,시카고 미술관 소장/wikipedia

 

 

 

 

The painting <Figure with Meat" Bacon in Batman/Spotern

 

 

 

 

 

 

 <다크 나이트  ,2008> 팀 버튼 감독 <배트맨 1989> 미술관에   쳐들어가서 드가, 렘브란트, 르누아르 그림을 훼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다 조커는 한 그림 앞에 멈춰서 부하들에게 말합니다.

"이건 마음에 들어. 내버려 둬."

 

핏물 가득한 고깃덩이 사이에 한 남자가 고통스럽게  앉아 있는 그림입니다. 조커가 살려준 그림은 프린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고기와 남자 형상 , 1954>입니다.

 

 

 

 

막살았던 남자 베이컨은 1940년대 이후 수십 년간 그림에만 몰두합니다. 1960년대에 거장으로 대우받지요. 1971년 파리에서 대규모 회고전도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회고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하지만 베이컨의 삶만큼은 10대 때 집에서 쫓겨난 직후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병적으로 육체적 관계에 집착했습니다. 명성에 비해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었고요. 돈이 생길 때마다 술과 도박으로 탕진했기 때문이죠. 스튜디오는 푸줏간을 방불케 할 만큼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영국 왕가에서 주는 훈장도 모두 거절할 정도로 반골 기질도 강했습니다. 스타 화가가 된 이후에도 뒷골목을 드나들며 알코올 중독자, 도박꾼, 부랑자들과 어울렸습니다. 빛보다는 어둠에 속한 삶을 유지했고, 그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Portrait head>,1959/Artimage

 

 

 

 

 

베이컨이 1959년에 그린 '머리 초상'도 렘브란트 노년의 자화상에서 영향받은 작품입니다. 꿈틀거리듯 유동적인 물감 터치와 과감하게 쓸고 문지른 흔적은 화면 중심부에 자리 잡은 검고 깊은 눈에 시선이 고정됩니다.  마치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입니다. 재현 회화에 존재하지 않는 직접적이고 신체적인 감각을 일깨우면서 말이죠. 흰 물감 덩어리와 휩쓸린 이목구비에서도 느껴집니다. 이와 같은 비재현적인 선과 색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프랑스의 철학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시뮬라크르 개념의 잠재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말하듯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이지 않으면서도 실재적이고, 추상적이지 않으면서도 관념적인 것이다. 이는 베이컨 회화에서 우연의 흔적들이 지닌 사실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질 루이 르네 들뢰즈(Gilles Louis Rene Deleuze 1925.1.18-1995. 11. 4):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이다. 철학, 문학, 영화, 예술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저작들을 썼다.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 와 정신분열증(1972)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2>(1980)

 

 

 

 

<방 안에 있는 인물>,1962/예스 24

 

 

 

 

이건희 컬렉션 중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방안에 있는 인물>(1962)입니다. 창문도 없고 문도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답답하고 불안합니다.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베이컨 본인의 경험까지 더해져 있는 작품입니다. 그는 주로 나체의 남성을 자주 그렸습니다. 이를 통해 현대인의 각박한 삶을 표현하려 했지요.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 , 1962/The Guggenheim Museums and Foundation

 

 

 

 

베이컨은 세계의 화면을 연결해 그리는 삼면화(Trypeic )를 즐겨 그렸습니다. <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1963>의 중앙에는 침대 위에 누드가 보입니다. 그 누두는 얼굴이 짓이겨져 있고 신체 부분들이 잘려 있습니다. 흉측하게 파괴되어 있고 피가 주변에 튀어 있고요. 이렇게 파괴된 인체는 동물의 시체와 별다름이 없어 보입니다. 오른쪽 십자가형의 골조에는 마치 도살장에 매달린 동물의 사체처럼 껍질 벗겨진 인간의 시체가 매달려 있습니다. 왼쪽 화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남자가 어둡고 불쾌한 실루엣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평론가들은 "우리는 잠재적 사체다.(We are potential carcass)"라고 한 베이컨의 말을 인용하며,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을 빗대어 인간의 운명적 죽음을 표현했다고 평합니다. 

 

 

 

https://vimeo.com/203995200

 

 

 

베이컨은 인터뷰(interviews with Francis Bacon/데이비드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회화가 지닌 이중성에 대해 공공연히 언급함으로써 이들 평가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최근까지 미술사와 비평적 연구들에서 이와 같은 베이컨 회화의 이중적 특성에 관해 기존의 지적 이상의 발전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베이컨이 수많은 전통 화가들의 작품과 사진 일러스트 등의 이미지를 참조하여 작업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나마 그가 참조한 이미지는 베이컨만의 방식을 통해 변형되고 재창조되어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참조에서 더 나아가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베이컨은 기존의 이미지를 변형시키기 위해 그 이미지들 위에 즉각적인 붓 터치와 물감 표현, 비구상적인 표시들로 구상성을 지워나갔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베이컨의 작품에서 이미지의 구상성과 추상성이 혼재하는 양상을 가져옵니다. 이처럼 서로 대립하는 듯이 보이는 요소가 공존하는 형식적인 특징은 내적인 면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이를테면 그의 초기 회화를 대표하는 십자가 책형 이미지는 죽음과 함께 삶의 느낌을 동시에 전해줍니다.  베이컨 자신의 사도마조히즘(SM)적인 성경험을 묘사한 이미지에서는 고통과 쾌락의 감각을 함께 드러내고요. 

 

 

 

 

 

<Study for Head of George Dyer>,1967 / Francis Bacon

 

 

 

인체의 이미지를 '뜯어내어' 재구성하는 베이컨의 화법은 얼굴을 그릴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베이컨의 연인이었던 조지 다이어의 초상화는 이목구비에 산 (acid)을 부어 반쯤 뭉그러뜨린 후 붓으로 얼굴을 재구성한 느낌을 줍니다. 멍들고 긁힌 피부의 생채기를 솔질로 표현한 듯하고요.  얼굴 곳곳에 핏자국 같은 빨강이 퍼져 있고, 입술 바로 위가 찢어져 꿰맨 자국이 보입니다. 베이컨과 다이어와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애증과 갈등, 폭력으로 얼룩졌지요. 베이컨은 연인과 벌어진 잔혹한 '상처'들을 캔버스에 그려냈습니다. 

 

 

 

 

 

 

Photograph of Francis Bacon & George Dyer at the Private view for the exhibition' Isabel Lambert' at Marlborough Gallery, 3-7-1968/Tate Images

 

 

 

베이컨의 연인 중 널리 알려진 인물은 조지 다이어입니다. 둘은 1960년대 중반에 만났습니다. 60년대 영국에서도 동성애가 불법이던 시절이었지요. 조지 다이어는 베이컨 집에 든 좀도둑이었습니다. 둘은 어쩌다 보니 연인 관계로 발전했죠. 베이컨은 조지 다이어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조지 다이어는 베이컨 못지않게 자기 파괴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베이컨이 다른 남자에게 한눈을 팔면 서슴없이 자해하며 관심을 받으려 했습니다. 결국 사건이 터졌습니다. 베이컨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던 조지 다이어는 우울증, 강박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1971년 자살합니다. 파리에서 베이컨 회고전이 열리기 직전이었지요.

 

 

갑작스러운 연인의 죽음에 베이컨은 충격을 받습니다. 조지 다이어가 죽고 나서도 그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 드리운 작품을 연달아 그렸습니다. 이때부터 베이컨은 인물화에 집중했습니다. 배경조차 그리지 않았고요. 오직 고통과 불안에 떠는 인간 자체에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훗날 새로운 연인을 만나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지요. 베이컨 그림은 뒤로 갈수록 따뜻하고 밝은 색채를 얻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뒤틀린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습니다. 

 

 

 

 

Triptych <Three Studies for Portrait of George Dyer>/Francis Bacon

 

 

 

베이컨의 초상화입니다. 일반적인 초상화와 많이 다릅니다. 일그러지고 뒤틀려있어 원래 누구의 얼굴을 그린 것인지 짐작하기 힘듭니다. 흡사 피카소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릅니다. 정지 상태와 운동 상태가 뒤섞인듯하고 대상을 왜곡시키며 순간을 포착한 듯 보이는 이런 화법은 베이컨 그림의 특징입니다. 베이컨은 초상화를 그리며 얼굴을 '해체'시킵니다. 항상 자신의 그림에서 '형상을 해체'시킵니다. 베이컨은 "새로운 감각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자화상의 경우 그 밑바탕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찌그러진 모습으로 형상화했다고 설명합니다. 

 

 

 

 

Lucian Freud and Francis Bacon: A look at Their turbulent Friendship and Artistic Exchange /MyArtBroker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린 루시안 프로이트< Three studies of Lucian Freud>, 1969/wikipedia

 

 

 

 

 

프란시스 베이컨과 동시대 작가인 루시안 프로이트(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는 몸을 그리는 화가인데 서로 절친이었습니다. 베이컨이 그린 프로이트 모습입니다. <루시안 프로이트 습작 3부작>은 20세기 거장이 화가이자 모델로서 서로의 대화를 상징하는 서사시적 걸작입니다.

 

 

 

 

프란시스 베이컨과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인 루시안 프로이드는 친구이자 라이벌이었습니다. 노란색을 배경으로 한 습작은 베이컨의 노련한 붓질로 의자에 않은 프로이드의 모습을 역동적인 앵글로 포착했습니다. 프로이드의 발, 무릎과 손의 움직임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한 느낌을 줍니다. 무엇보다 이전 그림에 비해 덜 기괴하고 안정된 분위기가  편안한 마음으로 보게 됩니다. 

 

 

 

이  습작 세 점은 1970년 이탈리아 토리노의 갤러리에서 처음 전시된 후 15년간 흩어져 있었습니다. 오른쪽 그림을 소장한 로마의 콜렉터가 3부작을 모두 구입하기 위해 20여 년을 소요했습니다. 그는 1980년대 초 파리의 딜러로부터 중간 그림을 구입한 후 80년대 말 일본의 콜렉터로부터  오른쪽 그림을 사서 3부작을 소장하게 됐습니다. 2013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한화로 약 1800억 원에 낙찰됩니다. 

 

 

 

 

 

 

 철학자 들뢰즈는 베이컨을 최고의 작가로 칭송했습니다. 1960년대 전성기 색채와 구도 등 모든 면에서 베이컨 특유의 신경계에 직접 호소하는 작가 (들뢰즈)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더 유명해졌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vJ_-kvzo6I

 

 

 

 

 

 

그는 자신의 화가로서의 삶의 시작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 흥미로운 주제를 찾기 위함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평범치 않게 다가옴으로써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것이 주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독특한 표현 방법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표현 방법은 데포르메 (데포르마시용)을 이용하여 왜곡, 변형하고 그로테스크함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방식이 무엇보다 베이컨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베이컨이 탐지한 힘>

1. 격리의 힘:  아플라 속에 들어 있으며 윤곽 주위에서 둥글게 감싸질 때, 그리고 아플라를 형상 주위에 감돌게 할 때 보인다.

2. 변형의 힘: 형상의 신체와 머리에 침범하여 머리가 얼굴을 뒤흔들거나 신체가 그 유기적 조직을 뒤흔들 때마다 드러난다.

3. 흩뜨리는 힘: 상이 지워져 아프라에 합쳐질 때 나타나다.

4. 놀랄 만한 에너지로 두 신체를 결합한다.

5. 결합과 분리의 힘 (영원한 시간의 힘): 삼면화에서 나옴, 순수한 빛에 의하여 나타난다. 

 

<삼면화에 존재할 세 개의 리듬>

1. 적극적 리듬: 증가적인 변화와 팽창

2. 수동적 리듬: 감소적 변화나 제거

3. 증인적 리듬: 그림에 참여 (삼면화의 판들은 관찰자들 이거나 기도하는 자들 혹은 후견인을 내포한다. 삼면화를 움직임과 등가물로 만들고 음악의 한 부분으로 만든다. 삼면화란 기본 3박자의 분배가 될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들뢰즈가 말하는 '기관 없는 신체(뭉개버린 신체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조차 나뉘지 않은 감각 덩어리)를 그린 화가인지 모릅니다. 베이컨은 육체를 그릴 때 머리로 그리지 않고 바로 촉각으로 그립니다. (우리의 두뇌를 통과하지 않고 바로 신경을 건드린다. )그래서 푸줏간 고깃덩어리로 보이는 거죠. 우리의 본능적인 감각을 건드리면서 말입니다.

 

 

<Triptych>,1976/wikipedia

 

 

 

 

1976년 제작된 <트립틱 Triptych>은  3개의 대형 패널 그림 (각각 패널 78*58인치, 198*147.5)으로 색채가 짙고 추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베이컨은 왼쪽 패널에서 시작해서 이어나가면서 일하는, 늘 하던 기술을 사용합니다. 이 작품은 그리스의 고전적인 우상화와 신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몇 가지 해석이 주장하는 것처럼 프로베테우스를 언급하고 있고요. 이 작품은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2008년 소더비 뉴욕에서 8천6백2십8만 천 달러 ($86,281,000)에 사들였습니다. 

 

 

 

<Studies for a Portrait of John Edwards>,1984, 베이컨의 일생 중 가장 중요했던 관계를 기념하는 작품/ 매일경제

 

 

1984년 그려진 <존 에드워즈의 초상화를 위한 세 가지 습작>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런던 동쪽 끝에서 온 술집 매니저인 존 에드워즈입니다. 그는 베이컨을 10년 전에 만났고 계속해서  그 예술가의 가장 가깝고 신뢰받는 친구들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세 개의 패널 전체에 걸쳐 베이컨은 그의 독특한 활기와 화가 특유의 인상적인 방식으로 흰색 셔츠와 회색 바지의 소박한 옷을 입은 에드워즈의 유연한 자태를  그려냅니다.  이  작품은 크리스티 뉴욕에서  8천80만 5,000 달러($80,805,000)에 팔렸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rnQyp7fpJQ

 

 

 

 

 

 

 

 

 

 

1992년 4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머무는 동안 베이컨은 천식과 이로 인한 폐렴으로 급히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6일 후인 4월 8일 , 그곳에서 사망합니다.  그의 나이 81 세였고, 사인은 천식으로 인한 심장 마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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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네즈는 몰티즈, 비숑프리제, 꼬똥드뚤레아와 같은 비숑 그룹군에 속하는 견종입니다. 외모에서 유사성이 많이 있지만 하이브리드 견종은 아니고요. 나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사랑을 받아온 전통 있는 견종 중 하나입니다. 

 

 

 

 

볼로네즈/ en. wikipedia.org

 

 

 

 

 

볼로네즈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기원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유럽의 반려견입니다. 중세 이전부터 이탈리아 귀족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혈통을 보존하였고 볼로네즈란 이름도 이탈리아의 북부 도시인 볼로냐 (Bologna) 지방에서 유래될 만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왕족들에게 길러진, 비숑, 몰티즈처럼 볼로네즈도 유럽 왕족, 귀족들에게 사랑받았죠. 순금 밥그릇을 사용하거나 전용 하인을 둔 개체도 있었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이탈리아의 맨하튼 이라 불리는 볼로냐지방/ Trip.com

 

 

 

 

 

유명한 중세 화가들의 그림에도 자주 등장하는 나름 유명한 견종입니다. 11세기부터 이탈리아에서 처음 키워진 고유한 품종입니다. 볼로네즈에 대한 최초 기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귀족들은 소형견 볼로네즈를 서로 선물할 정도로 부의 상징으로 여긴 강아지 종류였고요.  이들을 키운 대표적인 유명인으로는 러시아의 캐서린 대왕, 프랑스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 스페인의 필립 2세, 마리 앙뜨와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사 황후 등이 있습니다.

 

 

 

 

 

볼로네즈/나무위키

 

 

 

 

 

오랫동안 혈통을 보존하면서 숨어 있다가 다른 전통 견종에 비하여 꽤나 늦은 1989년에 비로소 국제 애견협회에 정식 등록이 됩니다. 비숑프리제와는 또다른 매력으로 최근 아파트에서 키우기 좋은 견종으로 추천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2023.12.12 - [지식&교양] - 50-53.비숑 프리제(14)

 

50-53.비숑 프리제(14)

비숑 프리제는 프랑스, 벨기에에서 유래된 견종으로 이름은 '곱슬거리는 털'이라는 프랑스어의 어원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특유의 복실복슬한 털이 한 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입니

sun-n5y2.tistory.com

 

 

 

 

비숑프리제만큼 활기찬 편은 아니자만 활동성이 높고 다정하며 호기심이 많고 장난을 좋아합니다. 볼로네즈의 경우 하루라도 일찍 교육을 해주는 것이 좋다고 권할 정도로 영리하고 학습 효과가 뛰어납니다. 특히 짖음 방지와 물어뜯는 것에 대해서는 강아지 때에 확실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Bolognese Dog Club UK

 

 

 

 

 

체고: 25-30cm

체중: 5kg

평균 수명12-14년 

소형견입니다.

 

 

 

 

 

Bolognese Dog /CynoPhilia

 

 

 

 

소형견 볼로네즈는 웨이브 모양의 털을 가지고 있습니다. 털 색은 대부분 흰색, 아이보리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단일 모라서 털 빠짐이 적고 털갈이도 없어서 강아지 털 알레르기가 걱정되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키울 수 있습니다.  작고 땅딸막한 품종으로 푹신한 털을 가졌고요. 정사각형 근육질 체형을 갖고 있습니다.  털 빠짐이 적지만 털 관리가 까다로운 편으로 엉키지 않게 자주 빗질을 해줘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귀관리에도 신경 써줘야 하고요. 

 

 

 

 

 

작은 소형견 체구에도 불구하고 강한 턱과 검은 코, 길고 늘어진 귀로 머리가 크게 보이고 풀코트로 털을 기르면 눈을 가릴 정도로 길게 자랍니다.  꼬리는 등위로 구부러져 있습니다. 

 

 

 

 

Bolognese Puppies/Yahoo

 

 

 

 

자기 가족들에게 다정하고 충실하며 애교가 넘칩니다.  또 사교성이 좋아 다른 동물들과도 잘 지내고요. 하지만 고집이 강해서 가끔 완고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헛짖음이 있어서 공동주택에서 키울 경우 짖음 방지 훈련이 필요합니다. 

 

 

 

 

 

만약  볼로네즈란 견종에 대한 지식 없이 처음 보았다면 비숑과 푸들의 믹스견으로 착각했을 만큼 정말 외모적인 부분은 다른 견종의 특징적 부분이 잘 섞여 있는 듯한 모습이어서 무척이나 익숙합니다. 볼로네즈는 비숑의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비숑보다 활동량이 적다는 것이 대부분의 중론으로 아파트에서 키우기 적합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요즘 시대에 맞는 견종입니다. 

 

 

 

 

 

Bolognese Dog/Daily Paws

 

 

 

 

이 외에도 볼로네즈는 혼자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자칫 분리불안증에 걸리기 쉽습니다.  강아지의 분리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음성 기능이 있는 홈카메라를 집에 설치하는 보호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분리불안이 있는 개들에게 썩 좋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실체 없이 주인의 목소리만 들리는 상황은 개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강아지가 분리 불안이 너무 심해서 고민이라면 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 이동장을 놓고 그곳에서 주인을 기다리게 하는 훈련을 시켜보세요. 사방이 막힌 이동장의 폐쇄적인 구조는 오히려 강아지를 안심하게 만들기 때문에 분리불안이 심한 개한테 사용하면 효과가 좋습니다. 

 

 

 

 

또 자기 가족에겐 헌신적이지만 낯선 사람들은 경계하기 때문에 집을 자주 비우거나 사람들 방문이 잦은 가정은 신중하게 고민 후 키우시길 바랍니다.

 

 

 

 

 

American Kennel Club

 

 

 

 

 

 

하루  30분 내외의 가벼운 산책이면 충분합니다. 또 이들은 활동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너무 격한 운동을 시키거나 장거리 코스로 산책을 하면 지쳐서 걷지 않고 안아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주변에 강아지 전용 놀이터가 있다면 그곳에 풀어놓고 30분 정도 맘껏 뛰놀게 해 보세요. 날아다니는 솜뭉치를 보게 될 겁니다.

 

 

 

 

 

Bolognese Dog/DogTime

 

 

 

 

 

볼로네즈는 대체적으로 건강하지만 5-8월때 간혹 나타나는 '고관절 이형서증'은 조심해야 합니다. 강아지가 절뚝거리거나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다면 이 질병을 의심해 봐야 하고 치료는 수술을 통하여 치료가 가능합니다.  눈병이 생기기 쉬우니 눈 세정제 및 눈물 제거제 등을 사용해 눈 주변을 청결하게 관리해 주길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w52PF2nZ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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