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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끝에 하운드가 들어간 개들은 시각과 후각으로 사냥감을 쫓는 사냥개 출신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바셋하운드를 소개합니다. 바셋하운드는 벨기에에서 토끼, 사슴등을 사냥하던 사냥개였습니다.  16세기 프랑스에서  토끼 사냥을 위해 개종한 견종으로 덩치에 비해 매우 작은 키와 짧은 다리가 특징입니다.

 

 

 

Basset Hound/Sheknows

 

 

 

체고:수컷 33-38cm

암컷: 20-36cm

몸무게 수컷:23-34kg

암컷: 20-29kg

일부 개들은 2살이 넘어도 계속 성장하는데, 바셋하운드는 몸에 비해 뼈가 무거워서 성장이 느린 편입니다.

평균 수명은 12-13년

 

 

 

출처:123RF

 

 

 

 

 

 

https://www.youtube.com/watch?v=mFZXVAGKs0k

 

 

 

 

 

비글의 닮은꼴에 닥스훈트, 페키니즈처럼 짜리 몽땅한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셋하운드라고도 하고, 바세트 하운드(Basset hound)라고도 부릅니다. 슬퍼 보이는 눈과 어깨까지 내려오는 큰 귀, 짧은 다리와 긴 허리, 축 늘어진 피부를 가졌습니다. 입 주변 가죽도 축 늘어져서 침을 잘 흘리기 때문에  턱받이를 해주거나 침을 자주 닦아 청결을 유지해줘야 합니다. 다행히 털은 단모에 플랫 한 형태라서 털 빠짐이 심하지 않고 관리도 쉽습니다. 

 

 

 

 

 

바셋하운드/요미독

 

원산지는 프랑스이며, 1500년대 혁명 이전까지 프랑스인들이 토끼를 잡기 위해 이용한 낮고 견고한 몸을 지닌 수렵견으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벨기에 성 휴베르트 수도원은 다양한 사냥개를 개량해왔고 그중 특별히 다리가 짧은 개체들만 교배하여 바셋하운드의 초기 틀을 마련합니다. 바셋하운드는  불러드 하운드를 이용하여 개량된 견종으로 뛰어난 후각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짦은 다리 덕분에 초목이 무성한 산과 들에서 토끼와 사슴 같은 사냥감을 추적하는 능력이 뛰어났죠.

 

 

 

 프랑스어로 '낮다, 난쟁이'라는 뜻 bas에서 유래되어 바셋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1500년대부터 프랑스 서민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온 바셋 하운드는 실제로 세익스피어가 글귀에 바셋하운드에 관해 묘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귀족, 왕족의 보호를 받으며 수세기에 걸쳐 번영해 온 럭셔리한 멍멍이 견종입니다. 1863년 파리, 1875년 영국의 도그쇼에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게 됩니다.  미국으로 넘어간 바셋하운드는 수렵견에서 가족 반려동물로서의 인기몰이를 하게 되고요. 만화 및 방송에도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구축하게 됩니다. 

 

 

 

 

 

 

 

흰색과 황갈색 바셋하운드/123RF

 

 

축 쳐진 큰 귀와, 쳐진 눈꺼풀때문에 다소 억울해 보이기도 합니다. 다부진 체격에 통통한 몸매가 특징입니다.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느릿느릿하다고 하네요. 많은 사냥견들이 사냥감을 추적하고 물어 죽이는 반면 바셋하운드는 물어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격이 상냥하기 때문이랍니다.^^

 

 

 

 

느릿느릿한 속도로 사냥감을 추적하는 바셋하운드는 사람들이 쫓아가기도 편하고, 시야에서도 멀리 사라지지 않기에 오히려 다른 견종보다 사냥감을 쫓는데 더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셋 하운드는 신발브랜드인  '허쉬파피'라는 광고에 출연하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통통한 체격과 턱보다 길게 늘어진 귀가 무척 매력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qREORr11K0

 

 

 

 

 

 

 

 

보기와 달리 키우기 까다로운 강아지/다나와 DPG

 

 

 

 

바셋하운드의 성격은  상냥하고, 온정이 많은 강아지입니다. 주인에게 헌신적이고 충성심이 강합니다. 내성적이고  고집이 센 편입니다.또한 귀찮게 하는 걸 싫어한다고 합니다. 외모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느긋하고 둥글둥글한 성격입니다. 사람들은 물론 다른 동물들과도 잘 지내지요. 단점으로 고집이 세고 완고한 면이 있어서 훈련이 어렵다고 합니다. 문제행동이 생길 경우 교정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요. 또  바셋은 외로움을 잘 타서 혼자 두면 잘 울거나 땅을 파는 등 문제 행동을 보일 수 있습니다. 사냥 본능이 강해 풀어놓고 키우면 사냥감을 찾아 멋대로 가출할 수 있기 때문에 실외에서 키울 경우 문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초보자가 키우기 쉬운 견종은 아닙니다. 

 

 

 

 

Can Basset Hounds stay outside in tne cold?/Daily Update2024-02-04

 

 

 

 

또 비만이 되기 쉬우니 간단한 산책은 자주자주 시켜주시는 편이 좋습니다. 허리가 길어서 살이 찌면 척추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식이관리 및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줘야 합니다. 간식 급여를 하루 권장 칼로리의 10%를 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원래 사냥견이었기 때문에 운동을 자주 시켜줘야 관절염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출처:한국경제

 

 

 

 

바셋 하운드는 수렵견 출신이라 잘 짖습니다. 게다가 소리까지  우렁차서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서 키우면 민원을 받기 쉽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성대 수술을 고려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정말 최후의 방법입니다. 혼내도 고쳐지지 않는 다면 훈육 방법을 바꿔보세요.

 

 

 

개가 짖으면 '기다려' 혹은 '앉아' 같은 명령어를 내린 뒤 강아지가 짖지 않고 기다리면 간식으로 보상해 주십시오. 처음에는 3초, 그후에는 10초 이렇게 시간을 늘려가면서 강아지가 짖지 않고 침착하게 기다리면 간식으로 계속 보상해서 짖음 방지 훈련에 익숙해지도록 해주세요.

 

 

 

 

사냥개 출신이지만  활동량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 느긋하게 걷는 코스로 하루 1시간 정도 산책을 시켜주면 좋습니다. 이들 견종은  땅을 파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잘 가꿔진 공용 잔디 같은 곳을 산책할 때는 땅을 파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리가 짧아서 땅과 배 사이의 높이가 닿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는 열기가 빠르게 전해지는 아스팔트 같은 곳 위로 산책하는 것은 삼가는 게 좋습니다. 겨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냥 본능이 강하기 때문에 토끼처럼 작은 동물들이 보이면 돌격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목줄을 꽉 잡고 있어야 합니다. 

 

 

 

 

비마이펫라이프

 

 

 

 

피모색은 검은새, 흰색, 황갈색이 섞여있습니다. 비글과 상당히 흡사한 외모죠. 토끼, 오소리, 너구리, 쥐 등을 잘 사냥했던 바셋하운드지만 훈련능력은 다소 약한 편이라고 해요. 배변훈련이나 기타 훈련 등은 인내심을 가지고 하셔야 합니다.

 

 

 

출처:Mundo Perros

 

 

 

 

바셋하운드는 허리디스크,비만, 녹내장, 이염, 탈 구 등의 질병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 귀가 땅으로 꺼진 형태로 덮여있으니 귀질환도 조심해주셔야 합니다. 평소 걸음걸이 등 컨디션을 잘 체크해줘야 합니다. 

 

 

 

바셋하운드는 주인과 가족에게 매우 헌신적인 견종입니다.  혹시라도 바셋하운드가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가족을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고집 때문임을 알아주세요. 보호자의  끈기와 훈련이 필요함을 잊지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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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원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견주만 바라보고 있다면 이 잘생긴 하운드의 매력을 거부할 수 있을까요? 작은 하운드라는 의미를 담아서 견명이 탄생했습니다. 미국의 유명 만화인 스누피의 모델이 된 견종이기도 합니다. 

 

 

 

Beagle owner's Guide/ Greencross vets

 

 

체고:33-38cm

체중 : 3-13.6kg

 

비글의 머리는 반구형의 두개골과 늘어진 귀, 거의 정사각형 모양의 주둥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얼굴은 크고 표정이 풍부한 갈색 또는 담갈색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털은 흰색, 황갈색, 검은색 등 색이 다양한 짧고 부드러우며 숱이 많은 털을 가지고 있고요. 몸은 근육질의 단단한 몸과 평평한 등, 짧은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꼬리는 길고 위로 솟아 있으며 종종 끝이 하얀 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누피/나무위키

 

 

 

장난기가 많고 활동량이 많은 비글이 집안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날뛰어 견주가 감당하기 힘들어서 붙여진 별명이 '악마견 '입니다. 말처럼 정말 악마견일까요? 악마견이라 해서 성격이 공격적이고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치는 특징 때문이지요. 실내에서 집안을 어지럽히고 가구를 망가뜨릴 위험이 높기 때문에 사람의 입장에서 악마견이라고 불릴 뿐입니다. 실제로 유쾌한 성격과 사람을 너무도 잘 따르는 천사견입니다.

 

 

 

 

사람들이 비글을 악마견으로 오해하는 특징 중 또 다른 하나는 '베이'라고 일컫는, 하울링과 유사한 독특한 사냥 울음과 짖음 때문입니다. 일종에 '나 여기 있어요.'라는 위치신호라고 합니다.  만일 아파트와 같은 공공주택에서 이런 울음소리는 다른 이웃에게 불쾌할 수 있습니다. 비글이 이러한 소리를 내는 특징은 활기찬 성격상 지루함 때문에 짖지만, 많은 비글이 운동량과는 상관없이 그저 짖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낼 수도 있습니다. 

 

 

www.pinterest.co.kr

 

 

 

비글의 역사는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비글은 영국의 로버에서 교배가 이루어져 토끼를 잡는 데 사용된 견종으로 2억 2000만 개 이상의 후각 수용체를 가지고 환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항이나 위험물 수색 등 탐지견으로도 유명합니다. 

 

 

 

정확한  비글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기원전 400년에 쓰인 그리스 문서에 비글과 흡사한 외형의 개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토끼 사냥개를 지금의 영국으로 데려와 해당 지역의 토종견과 함께 길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비글은 사냥개 스포츠 그룹에 속하는 중형 품종입니다.  이 품종의 역사는 많은 변형이 있었지만 현대의 품종은 1800년대 초 영국의 잉글랜드에서 등장했습니다. 영국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통치하던 시절에는 털이 빳빳하고 사냥꾼들이 주머니에 넣고 다닐 만큼 체구가 작은 비글이 등장했었다고 합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비글의 크기는 점차 커졌다고 해요. 당시 '포켓 비글'이라고 불린 소형 비글도 가끔씩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글은 소형동물을 잘 사냥하는 하운드로 하운드 종에서는 작은 편입니다. 기질 자체가 침착하고 뛰어난 후각을 지닌 사냥견으로 유용합니다. 사냥을 잘하는 강아지답게 머리가 좋습니다. 행동도 민첩하고요.         

 

 

 

Beagles/ Sportsman's Pride

 

 

 

 

 

 

견고한 구조를 가진 비글은 폭스 하운드(여우를 들판에서 쫓기 위한 견종)과 비슷합니다. 비글은 토끼전문 사냥견으로 많은 비글을 데리고 들판에 풀어놓으면 스스로 온 들판을 다니면서 토끼의 흔적을 찾습니다. 체력은 필수이고 , 토끼굴을 발견하면 발로 흙을 마구 헤집어 토끼를 끌어냅니다. 때문에 땅을 잘 파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격은 관대하며, 침착하고, 친화력이 매우 좋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하는 가족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하지만 활발한 성격 덕분에 얌전히 있지 못하고 집안을 헤집어 놓을 수 있으니 예절 교육은 필수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JJqg0JYYkI

 

 

 

 

 

 

Beagle-Rasseportrait/Das Futterhaus

 

 

 

 

비글의 왕성한 호기심 때문에 집에서와 산책에서의 시간이 동일하도록 보내야 합니다. 공원이나 넓은 마당에서 뛰어 다니는 등 정기적인 운동을 해주어야 합니다. 뛰어난 후각으로 인해 하루종일 냄새 맡기를 하기 때문에 코가 헐거나  염증의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코에 의해 지배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냄새를 맡으면 그 냄새에 이끌려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와 수천 개의 집을 지나 이동할 수 도 있습니다. 산책 시 리드줄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잃어버릴 염려가 크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비글은 성격상 무리 짓는 속성이 있어 인간에게 많이 의존합니다.  다양한 활동과 여가를 즐기는 전원 생활의 가족들에게 적합한 반려동물입니다. 운동하고  뛰어놀 여건이 충부한 환경이라면, 다재다능한 비글은 최고의  추천 견종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IzliEXhIFk

 

 

 

 

 

 

 

비글은 대부분의 계절에 야외에서 살 수 있습니다. 짧고 밀착된 털로 비글은 광법위한 손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발의 회전율을 높이고 모발 축적을 최소 하기 위해 가끔씩 빗질을 해야 합니다. 털이  단모종이기 때문에 성견이 되면 많은 털이 빠집니다. 또한 털이 굵고 짧기 때문에 박히면 잘 빠지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미용을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미용 후에 나는 털이 좋지 못하다고 합니다.

 

 

 

귀가 매우 크기 때문에 귀가 서 있는 개와 달리 물이 들어가면 귓병이 생기기 쉽습니다. 목욕 시에는 귀를 솜등으로 막아서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귀 청소를 자주 해야 합니다. 털이 짧기 때문에 피부 질환에 취약합니다. 목욕 후에는 털을 잘 말려주어야 합니다.

 

 

귀소 본능이 약한 견종이라 산책시 주의해야 합니다. 주의 소리나 여러 자극에 따라가지 쉽습니다. 식탐이 매우 강합니다. 외출이나 부재 시에 음식물이 안 닿는 곳에 두셔야 합니다. 분리불안이나 질투, 엄살이 심합니다. 다른 견종에 비해 배변 훈련이 쉽지 않고 이불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침대에 비닐 커버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출처: Deutsche Familienversicherung

 

 

 

 

아이러니하게도 악마견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너무나 순종적이고 착하기 때문에 실험견으로도 쓰이는 견종입니다. 비글이 실험동물로 많이 사용되는 이유는 유전적인 질병이 거의 없어서라고 합니다. 개체 간의 형질차가 적어 실험의 재현성이 좋고요. 사람과 친화성이 좋고, 몸집이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절한 크기이며, 실험비용도 저렴하고, 새끼를 낳아도 부모견의 유전형질과 유사한 신체조건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당뇨병 치료제 개발 연구에 사냥개 비글이 실험동물로 사용되었습니다. 1920년 초 토론토 대학에서 불치병인 당뇨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인슐린이 발견되었습니다. 젊은 외과 의사인 벤팅(Frederick  Banting)과 의대생 베스트(Charles Best)가 '랑게르한스섬(islets of Langerhans)'에서 추출한 물질 'isletin(아일레틴, 추후에 Insulin으로 변경)'을 식별하는 유명한 실험을 수행하여 얻은 결과였습니다.

 

 

 

인슐린 발견 실험에 마조리 비글(Marjorie beagle)이란 사냥개가 실험동물로 사용되었습니다. 벤팅이 처음 지원받은 실험동물 비글 10마리는 모두 사망했고, 인슐린 개발의 일등 공신은 33번째의 마조리 비글이었습니다. 1921년 여름, 마조리 비글의 췌장을 떼어내고 당뇨병을 유발했고, 다른 동물에서 채취한 인슐린을 주입하는 실험을 하여 치료에 성공하게 됩니다. 덕분에 췌장이 제거된 개 마조리 비글을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당뇨병 치료제 인슐린의 발견으로 벤팅은 노벨상을 받았고, 당뇨병약 인슐린 개발 결과를 단돈 1달러에 특허권을 토론토 대학에 이양합니다. 인류의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고료를 세웠으나, 1941년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합니다.  불치병을 치료하는 인슐린 개발의 일등 공신은 사냥개 비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란 사실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6HFfqMOHn0

 

 

 

 

 

비글은 대체로 건강한 편입니다. 하지만 비만이 되기 쉬우므로 음식 조절과 운동량에 많은 주의 가 필요합니다. 백내장, 녹내장 등 유전적 안구질환도 조심하시고요.

 

 

나무위키

 

 

개를 키우기 전 그 견종에 대한 충분한 학습 필수로 하시고 , 잘 숙지하셔서 자신만의 '스누피 비글' 만들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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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유럽 역사의 주인공은 네덜란드였습니다. 동인도회사를 통한 국제무역과 금융의 융성으로 돈이 넘쳐났거든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 던 암스테르담에 네덜란드 독립과 함께 여유자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니  미술품에 투자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지금의 아트 재테크처럼 말이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절 그림을 소유할 수 있는 계층은 군주나 귀족과 같은 부유층이었습니다. 반면 네덜란드에서 일반 서민들이 자신의 집 혹은 가게를 꾸미기 위해 미술시장이 활기를 띱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렘브란트를 비롯한 유명화가들의 손이 모자랄 지경으로 말입니다.

 

 

렘브란트 자화상/아트조선

 

 

'화가들의 화가','잊혀진 화가'로 불리던 바로크의 거장 렘브란트입니다. 그가 남긴 작품 수는 유화, 수채화, 동판화, 데생 등을 포함하여 2천여 점이 넘습니다. 성서, 신화, 역사, 풍경, 풍속, 위인 등  광범위하게 소재를 다룬걸로도 유명합니다. 빛의 효과를 통해 색채 및 명암의 대조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그림 속에는 환희, 슬픔, 자만과 후회, 그리고 인간적인 고뇌가 함께 합니다. 또한 신화와 종교의 엄숙함도 깃들여있고요. 풍경의 장엄함과 자화상의 내면 등 탁월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그를 '근대적 명암의 시조'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 알프레이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의 뒤를 이어 판화를 발전시킨 장본인이 렘브란트입니다. 20대 초반 테크닉을 갈고 닦기 위해 혹은 인물 탐구를 위해  자신을 모델로 '자화상'을 그리며 연습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vBwwyjHlhs

 

 

 

<근대 유럽을 완성시킨 30년 전쟁>/일베 저장소

 

 

 

아주 어린 나이부터 예술가로서 놀라운 재능을 보입니다. 그는 단순하고 매력적이면서도 극적인 풍경뿐만 아니라 역사적, 성서적, 신화적인 장면 등 모든 종류의 초상화의 달인이 되어갑니다. 그는 그의 메시지를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종류의 자료와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구성 능력, 색채 사용, 그리고 그림자에 대한 접근법은  가장 자연스러운 순간들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빛과 질감에 대한 통달은 모든 창작품들을 통해 공통된 주제를 만들었습니다.예술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혁신적인 거장들 중 한 명으로서 그의 지위를 굳건히 합니다. 이러한 자질들은 그의 크고  야심 찬 초기 역사 그림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더 친밀하고 빛나는 후기 스타일에서 깊어지고요. 그의  작품이 네덜란드 황금기로 알려진 위대한 부와 문화 업적의 전형으로 보입니다. 


 

<The Anatomy Lesson of Dr. Nicholas Tulp>,1632/wikipedia

 

 

 

1631년 아버지의 사망이후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 정착하게 됩니다. <튀엘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 1632>는 그의 초기 걸작으로  공개 해부학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밝은 흰색의 주름진 칼라를 달고 어색하게 포즈를 취한 7명의 외과 의사와 니콜라스 튈프(Nicolaes Pitersz ,1593-1674) 박사의 그룹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1603년부터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일련의 단체 초상화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은 튈프가 1632년 1월 시행한 해부학 수업에 서 비롯됩니다. 일주일에 두 번 암스테르담의 이 의사는 암스테르담의 외과의들에게 해부학 이론 강의를 해주었습니다.  인체 해부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해부학 극장의 실제 시연에 참석한 장면인 거죠. 주로 사형당한 죄수들의 시신을 썼다고 해요.  시신의 악취는 어느 때라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매년 겨울에 한 차례의 공공 부검이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튈프박사는 1632년에 두 번째 부검을 했고, 렘브란트가 그의 유명한 그림을 그린 것도 이때였습니다. 이런 중요한 주문을 의뢰받았을 때, 렘브란트는 아직 젊은 나이였습니다. 동료나 선배 화가들이 일렬로 주르륵 나열해 놓은 명암사진 같은 딱딱한 초상화를 그릴 때였습니다. 반면 렘브란트가 그린 외과의사들은 각기 스토리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자세히 보고 싶어 고개를 쭈욱 내민 호기심 가득한 외과의가 있는가 하면 두려워하는 표정의 외과의 모습도 보입니다. 별 관심 없어하는 외과의 모습도 보이고요. 덕분에 현장의 상황이 생동감 있게 전해집니다. 점잖은 스타일의 초상화에 비해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이 돋보입니다. 그저 젊은 화가 렘브란트의 탁월한 관찰력과 재능이 놀라울 뿐입니다.

 

 

 

 

관람객들의  관심은 팔의 근육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튈프 박사에게 집중돼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뷜프 박사가 근육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시체의 팔뚝을 절개한 순간을 선택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들이 강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요. 시체의 표현 또한 인상적입니다.

 

 

 

참가 의사들의 명단을 들고 있는 일곱 번째 남자 보이시나요? 그는 튈프 박사와 나머지 인물들을 구성적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공개 해부학 강의는 암스테르담의 외과 의사 조합이 정부로부터 허가받아 처형된 시신을 인도받아 1555년부터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해부학의 발전이라는 학문적 성격이 짙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입장료를 받고 일반인의 참관이 허용되기 시작하면서  암스테르담의 대중적인 행사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참을 수 없는 호기심 때문이지요. 또한 이런 유형의 단체 초상화는 협회나 다른 조직의 임원들을 기록하고 기리는 데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확립된 독특한 네덜란드식  전통인 거죠. 렘브란트는 이 그룹 초상화로 젊은 나이에 일약 스타화가가 되어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1633/reddit

 

https://www.youtube.com/watch?v=GK4eimjJv04

 

 

 

 

 

 

렘브란트의 유일한 바다풍경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예수가 갈릴리해에서 일어난 격렬한 폭풍 속에서 기적을 일으킨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루벤스의 영향도 보입니다. 바람이 불어오는 작은 배를 전복시키려고 위협하는 어둡게 휘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배의 돛대가 대각선을 만들어 구성을 두 개로 나눕니다. 왼쪽 에는 극심한 위험과 격렬한 활동이  곧 닥칠 것처럼 보입니다.어두운 구름의 가장자리, 불안해하는 사람들, 찢어진  돛을 비추는 황금빛이 보입니다. 오른쪽으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뱃멀미를 하는 듯 보입니다. 키잡이로 보이는 인물이 부딪치는 파도로부터 방향타를 고정시키고 있고요. 이 와중에  파란색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는  단 한 명의 인물만이 밧줄로 자신을 고정시켜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는 렘브란트의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네요. 렘브란트는  종종 자신의 작품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를 즐겼습니다.

 

 

 

변화무쌍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에 관람자 역시 초대된 듯한 기분이 들게합니다.   자연의 거대한 극적 힘은 인간을 시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또한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로도 표현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이해하셨을 때, 일어나서 폭풍을 향해 "조용히! 가만히 있어라! 그러자 폭풍이 잠잠해졌다. "라는 성경구절로 위태로운 상황을 마무리하십니다. 렘브란트는 왼쪽의 동적인 이미지와 오른쪽의  정적인 이미지를 한 화면에 표현해 냅니다. 이 부분이 대부분의 화가들과 다른 렘브란트만의 천재성입니다. 둘 중 한 가지만 택해 그리는 것이 당시 화가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거든요. 섬세한 묘사, 인물들의 다양한 표현, 세련된 붓놀림, 그리고 밝은 섹상은 렘브란트의 초기 스타일을 잘 드러내 줍니다. 


 

<Man in Oriental Costume>,1632/Flickr

 

 

 

 

1630년대 렘브란트는 그의 그림, 드로잉, 그리고 에칭화에 중동지역의 의복을 입고 있는 많은 인물들을 묘사했습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상업적인 기업들은 17세기 초까지 중동 지역을 드나들었습니다. 레반트(동부 지중해 및 그 섬과 연안 제국)사람들은 암스테르담의 거리와 시장에서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상상의 페르시아인(지금의 이란인), 오스만 (터키 사람)또는 다른 "동양인"왕자들의 초상화가 이 부산한 도시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천으로 몸을 감싸고 위엄있어 보이는 거대한 인물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깨와 머리는 앞뒤에서 극적으로 빛나고요. 그의 황금 의복은 금속 스카프와 은색 터번 아래서 반짝이고 있고, 장신구와 보석들은 광채를 내며 귀한 신분임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은 인물과 더불어 빛에 대한 화가로서의 렘브란트의 탁월함을 보여줍니다. 끝없는 깊이를 만들기 위해 그의 제한되고 다운된 팔레트의 사용법이 놀랍습니다. 그는 고르지 않은 황금빛 조명과 대담하고 늠름한 스트로크로 붓칠 한 하이라이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 깊은 그림자를 표현해 냅니다. 때로는 페인트를 많이 사용하기도 하고,  아주 조금 사용하기도 하며,  붓 손잡이로 캔버스를 긁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가 원하는 정확한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해봅니다.

 

 


 

 

 

 

 

<Belshazzar's Feast>,1635/wikipedia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마지막 왕인  구약성서의 벨사살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그린 작품입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네브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성전에서 약탈했던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을 가지고 신성모독을 저질렀습니다. 그가 연회장에서 많은 손님과 귀족들을 위해 포도주로 그릇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성전에서 제례의식 할 때만 쓰이도록 성별 된 그릇에 포도주를 부은 거지요. 검은 구름에서 손 하나가 나와 글씨를 쓰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이 모습에 기겁을 합니다. 놀란 왕이 예언자 다니엘을 부르고, 그는 그 단어들이 곧 바빌로니아가 페르시아 제국에게 정복되리라는 뜻이라고 해석해 줍니다. 그 일은 바로 그날 밤에 일어났고요.

 

 

 

당시 화가들은 화려한 옷차림의 바빌로니아인들이 유령의 손을 보고 경악하는 장면을 즐겨 그렸다고 합니다.렘브란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작품 안에서 드라마틱하고 움찔하는 자세로 관람객들을 집중시킵니다. 왼쪽에 충격을 받은 손님들 그룹이 있습니다.  위쪽 벽에는 유령 같은 이미지가 쓴 글자가 보이고요. 왕인 벨사살도  놀란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뒷벽에 반짝이는 메시지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터번 위에 왕관과 넘어진 포도주 잔에 흘러나오는 액체의 표현이 섬세합니다.  주변인들의 반응이 더 놀랍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여종 하나가 자기도 모르게 물그릇을 자기 손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19세기 빈센트 반 고흐가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반할 만하지요. 고흐가 "네덜란드 공화국의 위대한 세계적 초상화 화가"라고 선배화가 렘브란트를 추켜세웠을 정도로 말입니다. 

 

 

 

 


 

 

<Danae>,1636/wikipedia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다룬 작품이 많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역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 왕 아크리시오스의 딸 다나에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녀의 아버지인 아크리시오스 왕은 그의 딸이 자신을 죽일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후 딸을 청동으로 된 방안에 가두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킵니다. 그러나 다나에를 연모한 제우스는 그녀의 여종의 눈에 미끄러져 내리는 한 줄기 빛으로 다나에 앞에  나타납니다. 다나에와 제우스의 결합을 통해 페르세우스가 태어나고요. 그는 정말로 그의 할아버지를 죽이게 되지요.

 

 

 

정교하게 반짝이는 금으로 된 침대 지지대, 다나에의 보석으로 장식된 슬리퍼가 놓인 두꺼운 양탄자, 그리고 부드러운 벨벳천으로 덮인 방안은 관객들을 순식간에 작품 속으로 불러들입니다. 왼쪽에서부터 웅장한 천상의 황금빛이 쏟아지며 다나에의 얼굴과 몸을 따뜻하게 비춥니다. 그 효과는 매혹적인 여성을 둘러싼 모든 침구, 덮개, 그리고 빛나는 금속 장식품에서 부드러움과 관능성을 만들어 냅니다. 꽃팔찌와 다른 보석으로만 치장을 한 다나에는 분명 이 그림의 주제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황금빛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황금빛이 새어든 방안은 포근한 잠자리와 풍만한 여체로 감미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슬쩍 들어 온 제우스를 반기는 다나에의 모습도 보입니다. 화려하면서도 매우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실내 풍경이 플랑드르 화가답다 싶습니다.  그림에서 다나에 위에 맴도는 것은 순결의 상징인 손이 묶인 황금 천사의 모습입니다.  황금 천사의 표정 한번 살펴보고 가세요. 부드러운 아름다움과 빛에 대한 렘브란트식 표현법은   경이로움과 함께 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다나에를 연구하면서 프란스 할스를 볼 때마다 ...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하지만 렘브란트를 보면 포기하고 싶다"
-독일 인상파 화가 막스 리버반(Max Leiberman)-




 

 

 

https://www.youtube.com/watch?v=HjYNGjshjJQ

 

 

 

 

 

<The Night Watch>,1642/ The Guardian

 

 

 

 

 

17세기, 이 시기에 제작된 그림이나 판화의 수는 엄청납니다. 그중 상당수는 뛰어난 품질을 가지고 있고요. 이 작품은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절정이었던 1642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램브란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고요.  <The Night Watch>로 알려진 렘브란트의 이 작품은  그 스타일과 엄청난 크기로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실제로는 한낮에 일어나는 일을 그린 거라고 합니다. 이는 1940년까지 그것을 덮고 있었던 어두운 광택 때문에 이름이 잘못 붙여진 거라고 합니다. 민병대장의 명령 아래 부대가 출격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인물들이 부산스럽지요.   <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의 중대>라는 제목이 더 어울립니다. 당시 활동했던  민병대의 그룹 초상화라고 합니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도시를 수호하거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소집될 수 있는 건강한 남자들의 모임이지요.  16명의 부하들에 둘러싸여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붉은 허리와 검은 옷을 입고 있는 프란스 반닝 코크(Frans Banning Cocq) 대위와 흰색 허리띠와 노란 옷을 입고 있는 빌렘 반 라위턴뷔르흐(Willem van Ruytenburch) 중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문 위의 방패에는 초상화 속의 1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품 구성을 목적으로 캔버스 안에 18명의 민병대원들과 더불어 어린 아이나 북 치는 사람을 비롯한 16명의 가상 인물들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그림으로 인정받았을 때가 렘브란트 인생의 정점이었습니다. 자신이 실험해 오던 모든 기법들이 총동원되었습니다. 문제는 자기 혁신적 표현들로 그려 낸 새로운 스타일의  초상화를 돈을 내고 주문한 작품 속 인물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불만스러워했지요. 똑같은 돈을 내고 자신의 얼굴을 찾기가 쉽지 않아 말입니다. 

 

 

 

 

민병대는 그들이 모여 연습했던 장소인 크로브니어스둘른(Kloveniersdoelen)에서 정해진 시간에 만났습니다. 암스테르담에 새롭게 지어진 그들의 건물 중앙 홀에 걸기 위해서 6개의 대형 민병대 작품과 장교들의 단체 사진을 의 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렘브란트는 6개의 큰 작품 중 하나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던 거죠.  대장 코크와 대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나, 그들의 창과 총이 이쪽저쪽으로 비스듬히 있는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렘브란트가 그 인물들을 표현해 낸  방식은 이례적인 방식이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인물들을 그룹 짓거나 줄을 세우는 등의 전통적인 구성 방식과는 매우 다른 그만의 역동적인 방식으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그룹 초상화 안에서 전체 부대의 개성을 포착하고 있었습니다. 관람자는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활력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빛과 그늘의 두드러진 사용으로 강화되고요. 민병대 대원들은 방금 동작을 취해 이제 막 행진을 하려는 듯 어두운 문에서 빛으로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뒤에는 중대의 깃발이 보입니다. 대장 왼쪽의 금발 머리에 진주로 장식을 하고 노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완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녀는 민병대를 상징합니다. 그녀의 벨트에 매달린 닭의 발톱은 민병대의 심벌을 의미하고요.  민병대 의식의 뿔잔을 들고 있는 소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마스코트가 됩니다. 

 

 

 

 이 그림으로 인정받았을 때가 렘브란트 인생의 정점이었습니다. 이 작품 성공 이후 암스테르담 중심가의 비싼 지역으로 고가의 집을 사 이사를 합니다. 상류층이라도 된 것처럼 다양한 장식품 사치품들을 마구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자화상에서 자주 보이는 비싼 베레모차림을 고수하기도 하고요. 절제를 모르는 낭비벽은 암스테르담의 거품경제가 끝나가자 파산에 이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첫 번째 아내 사스키아 마저 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nT7N3kE4gg

 

 

 

 

 

 

 

 

 


 

 

<황금투구를 쓴 남자>,1650/Pinterest

 

 

투구의 강렬한 묘사와 대비되는 어두운 인물의 표정, 목보호대의 반사광은 렘브란트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Bathsheba at her Bath>,1654/wikipedia

 

 

 

 

렘브란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실물 크기의 캔버스는 성서의 등장인물, 다윗 왕과 군대의 장군 우리야의 부인 밧세바를 그린 그림입니다. 솔로몬의 어머니이기도 하지요. 성서의 이 인물은 대부분의  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고뇌에 빠진 밧세바에 집중하여 표현해 냅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은 궁전 테라스에서 그녀가 목욕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됩니다. 열정적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요.  다윗왕은  편지를 보내 자신에게 오도록 소환하지요.  다윗 왕은 그녀가 자기 장군들 중 한 명의 아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욕망이 다윗왕을 눈멀게 합니다. 

 

 

 

젊은 밧세바는 옷을 벗은 채 흰 천 위에  앉아 오른손에 편지를 들고 있습니다. 오리엔탈 스타일의 두건을 쓰고 있는 그녀의 여종은 그녀의 발을 말없이 말리고 있고요. 그녀는 고민에 빠집니다.  만약 그녀가 다윗 왕에게 간다면, 그녀는 그녀의 남편을 배반하게 됩니다. 그녀의 난감하고 심란한 마음 상태가 옆모습을 통해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고민을 하던 밧세바는 결국 이에 응했고, 그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그녀와 여러 차례 정을 통합니다. 결국 밧 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다윗 왕은 밧세바를 영원히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이자 군대장관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 도저히 살아올 수 없는 위험한 전투에 우리야(Uriah)를 내보내 죽게 합니다.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 왕은 즉시 밧 세바와 혼례를 올렸습니다.

 

 

 

 

신은 후에 이 죄에 대해 다윗왕을 심하게 벌했습니다. 밧세바는 임신했던 첫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예언자 나탄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윗을 꾸짖고 저주하였고 아이는 일주인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렘브란트는 이러한 이야기 중 다윗의 욕망을 표현하거나 다른 세부적인 일화를 따로 넣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왕의 편지로 인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밧세바의 표정을 통해 상황을 전달할 뿐입니다.  결국 피해자인 동시에 죄인이 되어버린 밧세바를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인간 내면에 깃든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름다운 여인 밧세바를 그리기 위하여 모델은 아마도 렘브란트의 보모로 들어온  핸드리케에 스토펠스(Hendrickje Stoffels)였을 겁니다. 첫 부인 사스키아가 죽고 젖먹이 아들 티투스를 키우고 집안 살림을 해줄 보모가 필요했습니다. 그들 중 핸드리케와 연인 사이로 발전을 했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렘브란트와 티투스에게 헌신 적었습니다. 다만 사스키야가 렘브란트의 절제 없는 생활이 마음에 걸렸나 봅니다. "재혼하면 아들 '티투스'에게 모든 유산을 남기겠다."라는 유언을 했거든요. 렘브란트는 헨드리케아와 결혼도 못하고 돈도 없고 그 상황에 덜컥 '코넬리아'라는 딸까지 임신하게 됩니다. 당시 개혁파 교회가 주류였던 암스테르담에  둘 사이의 관계는 이슈가 되었고 , 그녀는 '간통'이란 이름으로 법정에 서야 했습니다. 결국 딸 '코넬리아'를 낳고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요.

 

 

 

관람자의 시선까지 외면한 밧세바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예술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던 렘브란트를 어떡하든 돕고 싶었던 사람이 핸드리케였습니다. 일거리가 없어 점점 잊힌 화가 취급 당하는 렘브란트의 모습을 보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핸드리케의 모습이 어쩌면 밧세바의 모습은 아니었을 까 생각해 봅니다.  

 

 

 


 

 

 

 

 

<Jacob Blessing the Sons of Joseph>,1656/wikipedia

 

 

 

렘브란트는 항상 자신을  성경, 고전 역사, 신화의 장면들을 표현하는 역사 화가로 생각했습니다. 1656년의 그림은 역사 화가로서 렘브란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 아닐까 싶습니다. 주제는 창세기 48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죽어가는 가부장 야곱이 그의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장면입니다. 그들의 아버지 요셉과 그의 아내 아세나스는 아이들 뒤에 서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왼쪽에 있는 두 남자와 조화를 이루며 그녀를 대단히 위엄 있는 중심인물로 만들어 놓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맏아들, 곧 므낫세에게 오른손으로 축복하기보다는 , 귀염둥이 아들인 동생 에브라임에게 첫 번째 축복을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아버지가 실수했다고 생각하였으나 야곱이 대답합니다. "나도 알아, 아들아, 나도 알아; ;그도 또한 예언자가 될 것이고 또한 위대해질 것이다. 

 

 

이 그림의 주요 초점은 야곱은 에브라임에게 축복을 내리고,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도울 때 활짝 펴진 손동작과 친절한 미소를 짓는 고령의 가부장들의 부드러운 제스처에 있습니다. 중앙 장면은 놀랄 만큼 효율적 사용과 정밀함으로 섬세한 노란색, 갈색, 붉은색으로 광범위하게 그려져 렘브란트 특유의 신성하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m8H6mIcLMB0

 

 

 

<세 개의 십자가>는 검은색 백색으로만 시각적 효과를 낸 렘브란트의 판화 작품입니다. 공간감, 입체감이 경이롭고 고급스럽습니다. 

 


 

 

 

 

 

<The Prodigal Son in the Brothel>,1635/wikipedia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 혹은 술집에 있는 탕자>라는 이름의 작품입니다.  부유한 귀족 출신인 아내 사스키아를 무릎에 앉히고 삐깔나게 큰 술잔을 들어 권하고 있는 렘브란트는 모든 것을 소유한 듯 만족한 표정입니다.  왜 아니겠어요. 젊은 나이에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쥐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요. 그런 렘브란트의 표정과 달리 아내 사스키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습니다. 남편의 낭비벽이 걱정되어 그럴까요? 아니면 다가올 그의 시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요?  인위적으로 과장한 표정과 태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솔직한 자기 고백 같기도 한 그림입니다. 

 

 

렘브란트는 1634년 6살 어린 사스키아와 결혼합니다. 부유하고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1636년 낳은 첫아들은 얼마 못 가 죽습니다. 1638년 낳은 딸 역시 한 달도 살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1640년 낳은 딸도 곧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1641년 드디어 아들 티투스가 태어났습니다. 렘브란트에게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내 사스키아는 젖먹이 아들 티투스 하나를 남기도 30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Titus as a Monk>,1660/wikipedia

 

 

 

렘브란트의 사랑하는 아들 티투스의 초상화입니다. 아버지 렘브란트는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본받았으면 했나 봅니다. 화가로서 렘브란트는 명성도 쌓았고, 신분상승의 욕구도 채웠습니다. 그러나 잘 나갈 때 절제하지 못해 결국 파산에 이릅니다. 암스테르담 경제가 악화되며  렘브란트의 삶도 바닥에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예술에서는 최고 절정을 맛보았지만 그것도 잠시 인생에서 최악으로 떨어집니다. 그런 삶은 자기 하나로 족하니 아들만큼은 자신과 같은 삶이 아닌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절제하는 삶을 살기를 아버지 렘브란트는 바랬는지 모르겠습니다. 1668년, 안타깝게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들 티투스마저 26살의 꽃다운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Self-Portrait with Two Circles>,1660/wikipedia

 

 

 

 

 

 

렘브란트는 40점 이상의 자화상을 그렸지만  글미에서처럼 그림을 위해 단정한 옷을 입고 판에 박힌 듯한 포즈를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인위적으로 포즈를 취하거나 공들인 복장을 한 구성원을 연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순히 빨간 옷 위에 모피로 된 가운을 입고, 흰 베레모를 쓰고 있습니다. 그의 나무 팔레트, 붓, 그리고 그림 그리는 동안 손을 안정시키기 위해 휴식처로 사용된 긴 팔받침을 들고 있습니다. 화가는 그 위에 묘사된 큰 원들과 함께 밝은 색의 벽이나 캔버스 앞에 서서 허리께에 한 손을 내린 채 관람자를 직접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후기 작품에는 페인트가 빠르고 두껍게 칠해진 얼굴과 모자처럼 미완성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영역에서는 렘브란트가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거나 긁어서 선이 콧수염, 왼쪽 눈썹, 셔츠 깃에 잘립니다. 얼굴은 그의 취약성과 현실성을 보여주는 반면 부드러운 그림자는 끊임없이 탐구하는 지적인 마음을 암시합니다. 둥글게 디자인된 평평하고 창백한 배경은 렘브란트에게는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렘브란트 뒷 배경에 그려진 두 개의 원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역사적으로  완벽한 원이 예술적 기량을 상징한다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인 조토(Giotto)는 한 때 교황에게 그의 숙달성을 보여주도록 소환되었고 그래서 그는 한 번의 동작으로 완벽한 원을 그렸습니다. 더 오래된 이야기는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궁중 화가인 아펠레스(Apelles)가 어떻게 그의 뛰어난 재능을 증명하기 위해 완벽한 선을 그었는지 묘사합니다. 너무 원초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따져보면 원을 찌그러지지 않게 동그랗게 그려내는 것도 내공이란 생각이 듭니다.

 

 

 

렘브란트의 의도는 전통적인 자화상보다 그의 내면까지 담아내기 위해 자신을 수없이 객관화 켰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미 고상한 상류층의 눈밖에 났습니다. 잘 팔리는 그림이 아닌 자기만족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두 개의 원을 담고 있는 티치아노의 미완성 자화상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요.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는 그 그림에 대해 '매우 미완성된 방식이지만 그 색깔과 효과는 감탄스러운 그림을 발견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장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도 이 작품을 직접 그렸습니다.

 

 

 

 

 

 


 

 

 

 

<루크레티아의 자살>,1664/아츠비-미술을 즐기는 사람들

 

 

 

 

이 그림은 로마 여성인 루크레티아의 실화를 다뤘습니다. 약 2500년 전 로마 황제의 아들 타르퀴니우스 섹스투스가 정숙한 루크레티아를 성폭 한 사건입니다. 가해자 섹스투스는 사촌지간인 루크레티아의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호시탐탐 노리던 일을 벌였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인 뒤 하인과 간통해 죽였다는 소문을 내겠다며 협박합니다. 이 모함대로 된다면 루크레티아의 집안은 불명예로 풍비박산이 나게 될 기가 막힌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르네상스의 많은 거장이 그렸던 이 무거운 주제는 렘브란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그는 루크레티아가 자결을 결심하는 순간을 그렸습니다. 렘브란트는 생생한 구도와 어두운 색감으로 여인의 참혹함을 탁월하게 표현했습니다. 몸은 치욕을 벗기 위해 죽음을 강요당하는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머리는 두려움의 무게만큼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칼끝이 향한 심장만이 환하게 대비되어 여성의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전합니다.

 

 

 

이 그림을 통해  렘브란트는 창의적인 상황설정과 내면을 나타낸 표정, 질감 표현이란 세 가지 특징을 만들었습니다. 렘브란트 후기 작품의 특징이지요. 성폭행을 당한 수치심과 끔찍한 기억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눈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렘브란트의 자유로운 질감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얀 리넨과 드레스 소매의 질감이 부딪히며 실제 옷처럼 살아납니다. 소매 부분에 사용된 나이프의 거친 질감이 보이시나요. 부드러운 리넨 사이로 붉은 피가 소리 없이 번지고 있습니다. 오른손에 칼을 , 왼손에 끈을 잡아당기면 자신의 가족들이 그녀 앞으로 달려오겠지요.  나이프로 표현된 거친 질감은 생생한 표현으로 느껴지게 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몰입하게 합니다. 남편은 자결해야 할 이유를 듣고 죽어가는 여인 앞에서 오열하다가 복수하러 달려가 루크레티아의 치욕을 갚습니다. 시민들은 가해자를 죽였고, 그의 아버지는 추방했습니다.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는 한 여인이 기폭제가 돼 로마 왕정이 붕괴하고 공화정이 시작했다고 지적합니다.

 

 

 


 

 

 

 

 

<The Jewish Bride>,1667/wikipedia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라고 알려진 작품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쓰다듬고 있는 장면입니다. 굳은 신뢰를 주고받는 느낌도 들고요. 유독 이 그림앞에 중년 부부들이 멈춰서 그림을 한참동안 감상하고 간다고 합니다. 여성의 다홍색 치마의 색깔과 남성의 황금색 소매부분의 색깔이 환상적입니다. 질감의 표현 못지 않게 두 사람의 손 표현 또한 섬세하고 다정합니다. 마치 신뢰로 다져진 성숙한 사랑을 주고 받는 느낌이 들정도로 말입니다. 렘브란트의 아들 티투스와 자신에게 헌신했던 보모이자 연인이었던 핸드리케에 마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겨진 중년의 렘브란트가  죽기 직전 그려 낸 그림 중 하나입니다. 남성은 아니지만 여성의 모습은 죽은 그녀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세기 초에  이름을 얻었지만, 그 그림의 주제는 오늘날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의 목록에는 '구약성서 인물로서의 부부상, <유대인 신부>로 알려져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고요. 이 설명은 이 그림을 렘브란트의 동시대의 단순한 두 사람의 이중 초상화로 볼 것인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커플을 그린 종교화로 볼 것인가? 혹은 이 둘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볼 것인가 하는데 이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한 두 가지 가능성, 즉 성경의 인물로서 불멸의 존재였던 남자와 여자의 조합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은 이  커플이 창세기 26장에 나오는 이삭(이사악)과 리브가(레베카)를 대표한다고 믿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를 그린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 한 장의 소묘가 뉴욕에서 발견됐습니다. 그 소묘와 이 그림은 배경과 인물의 위치에서 분명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X선 조사 결과, 서 있는 두 사람은 처음에는 소묘에서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좀 더 중립적인 설명은 그 남자가 그의 아내에게 사랑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경우에 그림의 주제는 결혼의 미덕이 될 것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34년 J. 스미스가 작성한 목록의 <생일 축하 인사>에서 나왔습니다. 1826년 이 그림을 가지게 된 스미스는 1833년에 이것을 암스테르담의 수집가 아드리안 반 델 호프에게 팔았습니다. 호프는 이 그림에 "유대인 신부이다. 그의 아버지가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다."라는 설명을 달았습니다. 이것이 이 그림의 통칭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이 그림이 실존하는 모델을 그린 것만은 확실합니다.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1661-1669, /wikipedia

 

 

 

 

 

렘브란트가 죽기 직전인 1668-1669년 경에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의 일부분입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마지막 유작으로 미완성 작품입니다.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Hermitage Museum)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262cm*205cm(103in*81in) 크기의 대작입니다. 그림 속 인물의 크기가 실제 사람의 크기와 같으며, 그래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 속 한 사람, 한 사람과 대면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몇 주나  몇 달 만에 그린 것이 아닙니다. 6년 정도 구상했고 죽기 2년 동안 집중적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렘브란트는 캔버스 위에 한 사람, 한 사람 그릴 때마다 그 인물에 대해 수만 번 생각했고, 또 자신이 얼마나 그림 속 그 인물과 유사한지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캔버스에 탕자를 그리며 자신의 삶이 마치 탕자와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을 그리면서 자신의 말과 행동이 마치 첫째 아들과 같이 교만하고 이기적이었음을 발견합니다.

 

 

 

루카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의 주인공은 얼핏 보면  아버지의 품에 안긴 둘째 아들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림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둘째 아들에게 향하고 있고요. 탕자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 먼 곳으로 떠나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모든 유산을 탕진했습니다. 굶주림과 곤궁함에 지쳐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탕자가 된 둘째 아들의 몰골 좀 보세요.  한쪽 발에는 신발조차 없습니다. 머리카락은 다 빠져버렸고요.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야 단 한번 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신발과 옷과 반지를 주며  크게 환대합니다.

 

 

 

렘브란트는 캔버스에 둘째 아들을 그리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젊었을 때 화가로서 성공하며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습니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니 탕자처럼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모든 돈을 낭비했습니다.  또한 아들과 딸과 아내를 잃어버리는 큰 상실의 아픔도 겪었습니다. 돈도 가족도 모두 잃고  나이가 들어 병들고 외로운 가운데, 렘브란트는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줄 하느님의 품을 그리워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을 그리며 자신이 바로 그 탕자이고, 하느님의 용서와 위로가 필요한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림에서 눈이 짓무른 듯한 아비는  커다란 붉은 외투를 입고 있습니다.  외투는 고단한 나그네가 쉬어 갈 수 있는 장막을 상징하기도 하고, 새끼를 품고 지키는 어미새의 날개를 연상시킵니다.  많은 현대 작가들은 말합니다. 렘브란트가 가까이 지내기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는 후원자, 친구, 심지어 자신의 가족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은 비난하고 공격하는 유형의 사람이었거든요.

 

 

 

아버지는 탕자를 측은함과 사랑의 얼굴로 바로 보지만, 물끄러미 서 있는 첫째  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것이 마땅치 않은 가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또 가져갈까 봐 경계하면서 냉담하게 동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유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를 위한 잔치를 벌인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고 불평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닮은 아들이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못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아들을 조용히 타 아르며 잔치에 같이 참여하라고 권유합니다. 

 

 

아버지와 탕자 위로 빛이 쏟아집니다. 첫째 아들의 얼굴에도 작은 빛이 어른거리고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또 다른 형태의 아버지와 멀어진 탕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겉모습은 둘째 아들 같은 탕자의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은 첫째 아들같은 탕자의 모습으로 시계추가 되어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렘브란트 그림 속  두 손은 크기가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탕자의 등을 토닥여 주는 손은 어머니의 치유의 손길이고, '이제 다시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마라.' 하듯이 지그시 누르는 아버지의 손은 용서의 손이라고 말합니다.

 

 

 

 

렘브란트는 젊어서부터 탕자의 비유에 대한 그림을 여러 번 그렸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그린 탕자의 그림은 방탕한 탕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노년에 그린 이 그림은 아버지의 용서와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라는 이 그림을 보면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노심초사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봐 주십시오. 작은 아들이 먼 곳에서 오고 있을 때 그를 보고 버선발로 뛰어갔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주십시오. 큰 아들이 불평하고 있을 때 그 아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와서 그를 달래고 잔치에 함께 가자고 초대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보아주십시오. 

 

 

 

 


 

 

 

 

렘브란트의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다.
-루시언 프로이트(영국 사실주의 화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과 함께 렘브란트는 인생에서 최악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렘브란트 말년, 자신의 죽음을 지켜볼 사람 하나 없이 빈민가의 작은 독방에서 임종을 맞습니다. 아들 보내고 11개월 후의 일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뒤돌아 보고 심오한 내면의 세계를 연구했습니다. 일감이 없을 때도 예술에 궁극에 도달하고자 할 수 있는 실험은 다 해 보았습니다. 바닥을 치는 경험을 통해  세월의 무게를 담아내고자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자화상>을 그리며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 렘브란트를 '화가들의 화가'라고 부르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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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바로크 시대의 화가이자 외교관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손에 꼽습니다. <플란더스의 개.> 주인공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성화를 그린 화가입니다. 이만하면 힌트가 충분히 되었죠.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입니다.

 

 

바로크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고향인 플랑드르 (Flandre) 안트베르펜(Antwerpen)에서 처음 미술을 시작했습니다. 약 6년여간의 도제 기간을 거치고 그가 향한 곳은 이탈리아였습니다. 루벤스는 그곳에서 고대의 유물과 르네상의 장인의 작품들에 매료되어 수많은 작품을 모사했습니다. 그곳에서 8년 동안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다양한 후원자들을 위한 그림 의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전주의를 답습하는 평범한 화가가 되진 않았습니다. 그에겐 사물의 표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알프스 북부의 화풍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탈리아 고전주의의 특성이 모두 융합되어 있었습니다. 도저히 합쳐질 것 같지 않은 두 화풍이 이 위대한 화가의 붓으로 통합되어 빛나게 된 것입니다.               

 

 

 

<The Circumcision>,1605, 로마에 머물때 그린 작품/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nFM2xe1yz7A

 

 

 

 

출처: Wikimedia Commons

 

 


 

 

 

루벤스의 그림은 역동적인 구성,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사용, 인물의 관능적인 묘사가 특징입니다. 그는 특히 움직임과 감정을 묘사하는 데 능숙한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주로 고전 신화와 기독교 종교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루벤스는 또한 외교관 역할을 하며  다양한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영국의 찰스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을 정도로 그의 외교 기술은 탁월했습니다. 

 

 

<The Judgement of Paris>,1606/Album online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작품입니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미르미돈의 영웅 페렐우수의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여러 신들은 성대한 결혼식에 초대 받아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 두 사람을 축복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초대받지 못했던 언쟁과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화가 났습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자에게'라고 새겨진 황금사과를 연회석에  툭 던집니다. 여신들은 서로 황금사과를 가지기 위해 다투지요. 제우스부인 헤라,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다툰 장본인들입니다. 세 여신이 제우스에게 심판해 줄 것을 청했으나 제우스는 그 심판을 양치기 청년 파리스에게 맡깁니다. 세 여신은 파리스에게 각자의 특권으로 아테나는 지혜를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헤라는 세계의 주권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파리스는 달콤한 세 가지 유혹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황금사과를 그 여신에게 주어야 합니다. 고민이 많겠죠. 개도 그 결정이 궁금한가 봅니다. 

 

 

 

 

 


 

<삼손과 데릴라 Samson and Delilah>,1609-10/wikipedia

 

 

 

핏빛 드레스를 입은 데릴라 는 욕정으로 달아오른 가슴을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정욕에 눈이 멀어 델릴라의 품에 잠든 삼손의 남성적인 팔과 매력적인 등판은 사실적입니다. 루벤스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르네상스적인 인체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화폭에 담아냅니다. 삼손이 잠든 찰나를 놓치지 않고 머리를 자르는 사내와 탐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노파가 들고 있는 촛불은 마치 연극의  클라이맥스를 보는 듯합니다. 영화 포스터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요.  벽면에 그려진 비너스와 큐피드의 안타까운 표정, 문 밖에서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훔쳐보는 병사들의 표정이 실감 납니다. '쉿 조용히 해. 삼손이 깨면  큰일 난다고'뭐 이런 말들이 소리 없이 오고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작은 불빛 하나로 병사들은 조연역할 제대로 한 덕에 작품을 걸작으로 완성하고 있습니다.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전쟁이 없었던 해는 4년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루벤스가 활동하던 시기 유럽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화가의 대부분의 활동 기간을 차지하는 1618년부터 48년까지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30년 전쟁에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전 세계가 나의 나라'라고 했던 루벤스는 알레고리적인 의인화라는 기법을 자신의 모국 유럽의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세기 내내 이어진 종교 전쟁으로 교회화 미술품들이 파손되어 새로운 작품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습니다. 루벤스는 그의 이력 초기부터 제단화를 비롯한 기독교 주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루벤스의 고향 안트베르펜은 종교전쟁의 격전지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는 안정을 되찾고 파괴된 교회들을 재건하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단장을 시작한 교회는 대형 종교화가 많이 필요했기에 실력 있는 유학파 화가 루벤스도 주문을 많이 받으며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제작된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대형 제단화들은 루벤스 미술의 초기 양식이 잘 남아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움&nbsp; The Elevation of the Cross>,1610-11/wikipedia

 

 

그중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움>은 루벤스가 북부의 세밀화 전통과 이탈리아 고전주의를 어떻게 통합시켰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십자가를 들어 올리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남자들은 미켈란젤로의 인체를 연상시킵니다. 십자가의 세부와 몇몇 구성은 틴토레토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고요. 빛과 색채는 베네치아 회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편 군인이 입고 있는 갑옷과 그림 왼쪽 하단에 그려진 강아지의 곱슬곱슬한 털의 세밀한 묘사는 알프스 북부의 표현법입니다. 루벤스는 거기에 대각선 구성과 격정적인 동작, 강한 명암 대비와 피부 표면에서 일렁이는 빛의 움직임 등 자신만의 고유한 특징을 더합니다.   전체적으로 사선 구도를 취하면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담고 있습니다. 틴토레토의 그림과 비교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실어봅니다. 

                                                                                              

 

Tintoretto<Crucifixion>,1565/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1rJu72PzGis

 

 

안트베르펜에는 유럽에서 세 번째로 높은 노트르담 성당이 있습니다. 1352년 착공해 1521년 완공된 이 건물은 높이 123미터의 첨탑을 가진 고딕 성당으로 벨기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입니다. 그런나 1533년 화재가 나고, 1565년과 1581년에 종교개혁 과정에서 개신교도들이 성상파괴를 주도하여 불운을 겪기도 합니다. 이 성당에는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루벤스의 작품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 The Raising of the Cross 1609-1610)를 비롯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The Descent from the Cross,1611-1614>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엔트베르펜 시장이자 길드 조합장이던 로콕스(N. Rocockx)의 요청으로 루벤스가 그렸습니다. <예수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Christ 1611-1612), 그리고 <성모의 승천 The Assumption of the Virgin 1625-1626>의 4개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 The Descent from the Cross>1612-14/Indian Catholic Matters

 

 

 

 

 

  작품<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은 정적이 감돕니다. 그의 이탈리아 여행의 성과가 반영된 작품이고요.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 <라오콘>을 연구한 흔적이 보입니다.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조법은 카라바조의 화풍을 느끼게 하고요. 또 하나 십자가에 매달려 천이 흘러내리지 않게 물고 있는 남자는 고귀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처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역시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죠.

 

 

 

   정적인 분위기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도 천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예수의 시신이 고요함 속에서도 부드러운 운동감을 만들어 냅니다. 이 같은 구성은 수난의 공포와 비통함을 극대화시켜 신자들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감각적인 표현법입니다.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취지와 맞닿아 있기도 하고요.   만약 루벤스가 고전주의자였다면 십자가 세우기가 '완료'된 장면 또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시신'을 안고 있는 장면을 담았을 겁니다. 그런데 바로크의 대가 루벤스는 어떤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담아냈습니다.

 

 

 

루벤스는  끊임없는 주문에 바빴습니다.  그의 작품으로 기록된 그림은 소묘와 판화를 제외하고도 1300여 점에 이릅니다. 이렇게 다작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공장 시스템에 가까운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벤스가 간단한 스케치와 작은 견본을 그리면 제자들이 그것을 거대한 화폭에 옮겼습니다. 그의  곁에는 실력이 뛰어난 동료화가들이 있었습니다. 정물화에 탁월한 화가, 동물 그림에 재능 있는 화가 등 각종 전문가들이 루벤스와 함께하며 그림의 세부를 담당했습니다. 루벤스는 이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는데, 그림의 값을 책정할 때에도 자기가 참여한 비율에 따라 가격을 달리했다고 합니다. 이런 협업 과정의 마무리 작업은 루벤스가 맡았고요. 그의 작업장을 방문한 사람들은 루벤스가 단 몇 번의 붓질만으로 그림에 생기가 돌고 활력이 넘치게 만드는 장면을 보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1611-1612/wikipedia

 

 

 

 

 

 

 

 

그림에도 운명이란 것이 있나 봅니다. 미술품에 전혀 무지한 사람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작품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대가의 작품으로 판명이 나면 로또 상금 받는 것처럼 큰돈을 거머쥐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전문가가 대가의 작품일 것으로 보이지만 확증이 없는 작품을 구매한 후 대가의 작품임을 밝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루벤스의 <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  작품은  후자에 속했습니다.

 

 

2002년 7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는 루벤스의 작품이 4950만 6648파운드에 낙찰되면서 최고 낙찰가를 기록했습니다. 이 작품은 헤롯왕의 '영아 학살'순간을 그린 그림입니다. 성서에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때 그 당시 지배자인 헤롯왕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여겨 사람을 보내어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다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탐욕에서 비롯된 학살을 바로크 시대의 화가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1609-1611년 사이에 그린 것입니다. 총 8명의 응찰자가 경합을 한 끝에 영국의 기념품 전문 딜러인 샘 포그가 낙찰받았다고 합니다.

 

 

 

 보도에 따르면, 포그에게 응찰을 의뢰한 사람은 전 런던지부 <타임스> 소유주였던 캐나다 켈렉터 데이비드 톰슨으로 폴게티 미술관을 비롯한 몇몇 미술관보다 가격을 높게 불러 이 작품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 소장자는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89세의 오스트리아 여성입니다. 그녀는 1923년에 유산으로 이 작품을 물려받았지만 작품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오스트리아 북부 라이허스베르크에 위치한 수도원에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경매사 소더비의 플랑드르&네덜란드 미술 전문가인 조지 고든은 이메일로 본 이 작품의 이미지만으로 대단한 작품이라 판단하고 이 작품을 직접 보려고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손전등으로 비춰봐야 할 정도로 어두운 곳에 걸려 있었다고 해요. 고든은 이 작품이  루벤스의 <삼손과 델릴라>와 비교해 보게 되고,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졌을 거라 판단합니다.

 

 

 

그는 이 작품이 진짜 루벤스의 작품인지를 검증하기 위해 런던, 옥스퍼드, 앤트워프에 있는 저명한 루벤스 학자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들 모두는 이 작품이 루벤스가 그린 작품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소장자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수도원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작품이 미술사에 길이 남을 대가가 그린 명작으로 판명된 것이죠. 더불어 세계적인 경매사에 출품되어 올드 페인팅 분야에서 최고의 낙찰가를 기록했습니다. 그림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이러한 그림을 둘러싼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우리의 귀를 쫑긋하게 합니다. 

 


 

 

 

<Roman Charity>,1612/wikipedia

 

 

 

루벤스의  그림 속에 늙은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는 장면이 묘사돼 있습니다. 느낌이 좀 이상하지요. 보기에 따라 늙은 노인과 젊은 여자가 부적절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여져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부녀 관계입니다. 시몬의 딸 페로는 굶어 죽게 하는 형벌을 받고 감옥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면회 갔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너무나 굶주린 탓에 거의 죽음에 이른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마 당국은 그녀의 숭고한 사랑에 감동해 시몬을 석방했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DcA1Ssl3Rw

 

 

 

 

 

<시몬과 페로 Cimom and Pero,1630>

 

 

 


 

 

<Honeysuckle Bower>,1609/wikipedia

 

 

 

 

 루벤스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 브란트입니다. 가정적인 남자였던 루벤스는 가족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이 그림 역시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이고요.  그림 속 여인은 유명한 변호사의 딸로 루벤스는 그녀와의 결혼을 통해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화가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명성을 들은 플랑드르 총독 부부에 의해 궁정화가로 임명이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MTYsywfdtg

 

 

 

 

오래 사는 것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이의 얼굴>1615-16/www.mycelebs.com

 

 

 

 

 

루벤스의 가장 사랑스러운 그림들은 그의 가족을 담은 작품들입니다.  <아이의 얼굴>은 그의 딸 클라라 세레나를 모델로 그려졌습니다. 루벤스는 이 작은 초상화에서 복잡하고 화려한 구성을 위한 아무런 기교도 사용하지 않고 순진한 어린 딸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팔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일이 너무 바빠 딸내미 얼굴조차 보기 힘든 딸 바보 아빠가 보고 싶을 때 꺼내보려고  그린 그림입니다.

 

 

 

딸의  옷은 빠르고 거친 붓질로 채워졌습니다. 뒤로 묶은 머리는 한 올 한 올 금빛으로 빛나고요. 맑은 눈망울, 발그레한 통통한 볼, 미소를 머금은 윤기 있는 입술, 콧등의 하이라이트와 이마의 푸른 음영 등 딸의 얼굴에 생기발랄한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1623년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삼 년 뒤에는 사랑했던 부인마저 죽게 되고요. 실의에 빠진 루벤스는 슬픔을 이기고자 일에 다시 몰두하게 됩니다. 이때 그가  맡은 일은 고향을 떠나 스페인과 영국의 평화를 위해 양국을 오가며 외교 활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교양을 갖춘 루벤스는 외교관으로서의 역할도 탁월하게 잘 완수해 냅니다. 그의 말대로 유럽의 평화에 루벤스의 그림 외교가 크게 한 몫했습니다.

 

 


 

 

 

<하마와 악어사냥>,1615-1616/news.jtbc.co.kr

 

 

 

 

터번을 쓴 세 명의 말 탄 사내들이 창과 칼을 들고 일제히 하마의 숨통을 노리고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한 하마는 이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입을 벌리고 사력을 다해 방어하고 있고요. 하마만큼 흥분한 눈을 한 말들 또한 기승자의 명령에 따라 포효하는 하마의 등을 짓밟고 올라서려 합니다. 하마 아래에도 동시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네요. 두 마리의 개는 하마를 물어뜯으려 하고 그 아래 악어도 누운 남자와 한 마리 개에게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몸을 틀어 엎어진 남자는 아마도 싸움 중에 공격을 당하고 쓰러진 것 같습니다. 잠시 뒤면 하마의 숨통도 곧 끊어질 것 같습니다.  하나의 그림 안에 3D 화면 같은 입체감과 드라마를 장대하게 엮은 그림 같습니다. 그 당시 어떻게 이런 상상력을 발휘했는지 입이 쩍 벌어집니다. 

 

 

 

 

<하마와 악어 사냥>은 1615년 바바리아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주문으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사냥은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금지된 스포츠였습니다. 오직 권력과 부를 가진 귀족과 왕족에게만 사냥이 허가됐었지요. 17세기 유럽 사회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국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국가나 아프리카에서 포획된 이국적 동물들을 애완용으로 소유하기도 했으니까요. 또  그러한 취미를 권력의 향유물로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말 등에 얹어진 표범 가죽과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악어와 하마, 터번 같은 이국적 요소들로 채워진 이 그림도 막시밀리안 공작의 권세를 상징하는 작품입니다. 마지막으로 뒤틀린 몸과 흥분한 말의 눈동자,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오른 근육, 그리고 쓰러진 남자의 포즈는 어디선가 본 듯합니다.  이러한 표현과 기법들은 루벤스가 이탈리아에서 유학할 때  보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를 연상시킵니다. 그런 점에서 루벤스는 소화력이 뛰어난 천재인 것 같습니다. 

 

 

 

 

<The Battle of Anghiari>,1505, Leonardi da Vinci/wikipedia

 

 

 


 

<한복 입은 남자 A Man in Korean Costume>,1617/wikipedia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입니다. '루벤스 그림에 한국인이?' 하며 의아해할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인 소년을 이탈리아 상인 안토니오 카를레티에게 팔았다는 일본 측 기록에 근거하여 조선인 소년에게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소년이 그림 속 주인공이라는 주장이 다수설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한복 입은 남자>가 입은 옷은  성인 남자의 의복이라고 합니다. 노예로 팔려간 소년이 성인의 의복을 입고 갈 리도, 따로 챙겨갈 리도 없음은 물론이고요. <한복 입은 남자>의 하단을 보면 속치마를 입은 것처럼 겉옷 밖으로 안에 받쳐 입은 옷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입었던 철릭 위에 팔소매 밑단이 없는 답호라는 옷을 덧입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루벤스의 이 그림을 보며 그림이 가지는 기록성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보게 됩니다.  루벤스라는 화가가 왠지 더 친근하게 다가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점 하나가 서로에게 연결이 되니 말입니다. 

 


 

 

<The Arrival of Marie de Medici at Marseille>,1625/wikipedia

 

 

 

루벤스는 무미건조할 수 있는 주제를 특별하고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드 메디치의 생의 연작>은 그런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장대한 기록화입니다. 이 그림들의 의뢰자 마리아 드 메디치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공주로 프랑스 앙리 4세와 결혼합니다. 그러다 앙리 4세가 암살로 사망하자 아들을 대신하여 프랑스를 다스렸습니다. 그녀는 루벤스에게 자신의 삶의 주요 장면을 기록해 달라고 주문합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업적이 없는 여왕의 삶에서 주요 장면이라 할만한 사건이 없었습니다. 탄생과 교육, 결혼식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 전부였죠. 그런데 루벤스에게는 이렇게 평범한 일화들을 비범하게 그려내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마리아 드 메디치의 마르세이유 입항>은 마리아 드 메디치가 프랑스의 한 항구에 도착하는 장면을 신화와 우의를 동원하여 멋지게 윤색해 놓은 작품입니다. 황금으로 도금된 화려한 배에는 메디치가를 상징하는 여섯 개의 구슬이 있는 방패 문양의 문장이 달려있습니다. 공주가 배에서 내리자 군모를 쓴 남자가 영접을 합니다. 백합문양이 새겨진 푸른 망토를 두른 남자는 '프랑스'를 상징합니다. 선박 아래에는 바다의 신과 요정들이 마리아의 입항을 기뻐하고, 하늘에서는 명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두 개의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당당한 모습의 공주와 예를 갖춘 '프랑스', 관능적인 요정들이 한데 어우러진 이 그림은 피곤한 항해를 마치고 하선하는 평범한 사건에 극적이 인상을 심어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R8nW7RPTlE

 

 

 

 

 

 

 

 


 

https://www.youtube.com/watch?v=wt57QyyYkAM

 

 

 

 

<런던 방케팅 하우스(Banqueting House)>/Daum 카페

 

 

 

 

The Banqueting House- Whitehall Palace  17세기말 화재로 이곳을 제외하고 화이트홀 궁전은 전소되었다고 합니다. 1622년 만들어져 주로 궁정 행사에 사용되었습니다. 1649년 찰스 1세가 이곳에서 사형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고요. 엘리자베스 1세도 런던탑에 투옥되기 전 이곳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지금도 왕실 행사 등으로 사용되는 곳입니다.

 

 

이곳에 루벤스의 천장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각종 자연재해에도 훼손되지 않고 400년가량 보존되어 오리지널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68평 정도 총 9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루벤스는 앤트워프에서 그림 작업을 했고 당시 통풍을 심하게 앓고 있어서 영국으로 여행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실제 Banqueting House에 설치된 실물은 결국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폭격에도 이 천장화를 보전하고자 작게 잘라서 이동시켰다고 합니다. 당시 이미 유럽 내에서 유명 화가였던 루벤스는 외교 사절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냅니다. 런던을 방문하게 되었고 당시 왕이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루벤스에게 이곳의 천장화를 부탁한 것으로 보입니다.

 

 

 

루벤스 천장화는 3개의 테마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1. The Union of the Crowns 왕국연합 :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신 미네르바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관을 어린아이 머리 위로 모으고 있는 장면으로 어린아이는 영국(Great Britain)을 상징합니다.

2. The Peaceful Reign of Jame 1: 성경 스타일의 배경에 앉아 있는 제임스 1세 풍요와 지혜를 상징하는 인물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3. The Apotheosis of jame1: 신에게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왕이 커다란 독수리 날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정원>,1630-1635/조선일보

 

 

 

루벤스는 첫 부인 이사벨라가 죽은 후, 53세가 되던 1630년 16살의 어린 엘렌과 재혼합니다. 그 후에 그린 <사랑의 정원 >은 당시 그가 지닌 낙천적인 인생관과 즐거움을 표현한 자전적인 그림으로 보입니다. 이 장면은 루벤스의 저택에 모인 그의 친구들의 사교적인 모임이지만  공중에는 사랑의 신 큐피드들이 떼 지어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비너스 여신 조각의 분수에서는 물이 뿜어져 나오고요. 가장 왼쪽의 남자는 수줍어하는 여성을 설득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습니다. 뒤에 큐피드가 떠미는 모습이 인상적이지요. 중앙에 모여 있는 여성들은 즐거운 행복감에 빠져 있습니다. 가장 오른쪽에는 이런 과정과 경험을 통해 인생의 지혜를 얻은 남녀가 층계를 내려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러 번 관능적이고 풍만한 모습으로 루벤스의 그림에 등장했던 두 번째 부인 엘렌은 이 그림에서도 어느 한 여인의 모델로 표현되었을 겁니다.   아마도 이 그림을 루벤스가 어린 부인을 맞이하여 사랑의 여러 단계로 인도하는 과정을 나타낸 내용으로 해석됩니다.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남녀의 사랑과 인생의 즐거움 또는 쾌락의 표현은 서양미술에서 언제나 주요 주제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Rubens, His Wife Helena Fourment and Their Son Frans>,1638/my daily art display

 

 

그의 두 번째 아내 헬레나 푸르망, 아들, 그리고  페테르  파울로 루벤스의 초상입니다. 루벤스가 죽기 2년 전 그림입니다. 여자옷을 입은 남자아이입니다. 당시 귀족 남자아이들은 대여섯 살까지 치마를 입었다고 하네요. 

 

 

 

 

 

<Het Pelsken>,1638/wikipedia

 

 

아내를 잃은 슬픔은 깊었으나 그의 독신 생활을 길지 않았습니다. 1630년, 53살의 루벤스는 헬레나 푸르망이라는 16살 소녀와 결혼을 하여 행복한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루벤스는 그녀를 지극히 사랑했으며 자신의 그림에 비너스여신으로 자주 등장시켰습니다. 

 

 

 

<모피를 걸친 여인>이란 제목으로 유명한 헬레나의 초상화는 그녀를 그린 여러 작품 중에서도 독보적인 작품입니다. 욕실에서 막 나온 듯한 여인은 검은 모피만을 두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흘러드는 빛은 그녀의 피부를 부드럽게 비추고 카펫이 반사하는 붉은빛은 여인의 배와 팔꿈치를 분홍빛으로 물들입니다. 고전 조각에서는 팔로 가슴을 가리는 동작이 정숙함과 겸손을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루벤스는 비슷한 자세로 가슴을 드러내며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자세로 그려냅니다.

 

 

37살 연하인 두 번째 부인 헬레네 푸르망은 수줍은 표정으로 남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루벤스가 판매용이 아니라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그림 속 여인은 화가인 남편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루벤스 역시 동일한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고 있었겠죠.

 


 

<The Rape of the Daughters of Leucippus>,1619/en.wikipedia.org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  이 작품의 특징은 X자를 형성하는 구도입니다. 구성 요소들은 그 자태의 방향에 의해 원을 이루고 있고요. 두 여인을 떠받치고 있는 남자는 땅 위에 쓰러지려고 하고 있는 여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또 그 여인은 말에 매달린 사랑의 상징 큐핏의 머리를 돌리고 있고요. 그 방향은 레우키포스를 약탈하는 남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크 예술 양식을 나타내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엉키고 있는 요소들은 율동감이 듭니다. 긴장감을 지닌 채 말이죠.  루벤스가 표현한 여인의 관능과 건강에 넘치는 육체미는 방금 옆에서 벌어지는 일 같습니다. 여인들의 탄력 있는  살결은 거칠고 검은색의 남자들의 피부와 힘찬 근육에 윤기 있는 말의 피부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림의 주제는 그리스 신하와 관계가 있습니다.  제우스 신의 두 아들이 메시나의 두 왕녀를 약탈하는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죠.

 

 

 

형 카스토르가 검은 말 위에 앉아 있습니다. 동생 폴리데우케스는 갑옷과 투구로 무장도 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백마에서 내려 레우키포스의 딸들을 잡고 있고요. 카스토르가 말에 앉아 있는 것은 그가 말타기에 능하다는 점은 나타냅니다. 무장하지 않은 동생 폴리데우케스는 불사의 몸이라는 사실을 뜻하고요. 화면 아래쪽에 있는 여인이 포이베입니다. 금빛으로 빛나는 옷이 벗겨진 채 저항하고 있지요.

 

 

황금빛 옷은 결혼식을 의미합니다. 과거에는 결혼식 예복이 황금색이었거든요. 홀리데우케스의 팔에는 힐라에이라가 있습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팔을 뻗어 하늘을 보고 있죠. 벗겨진 그의 붉은 옷은 카스토르의 어깨에 걸쳐 있습니다. 힐라에이라를 원하는 사람이 카스토르임을 암시합니다.  루벤스의 이 작품에서 사건의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말입니다. 부릅뜬 눈으로 발을 들고 우뚝 서 있는 말은 이 장면에서 동물적인 힘을 상징합니다. 여성의 납치는 17세기 최고 인기가 많았던 그림 주제였다고 하네요.

 

 

 

 

 

 

 

<The Three Graces>,1630-35/wikipedia

 

 

루벤스의 대표작인 <삼미신>으로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이 자랑하는 명품 중의 명품입니다. 단순한 화면 구성 속에 루벤스의 모든 역량이 주입되어 있습니다. 주제는 이미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자주  다루어졌던 것이고, 그림의 수법은 르네상스의 보티첼리(Botticelli)와 라파엘로(Raphael)등에 의해 이상화하고 미화한 형상의 계승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체의 아름다움이 한층 내적인 충만감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루벤스 예술의 심화버전 작품으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헤시오도스의 신들 계보에 따르면 삼미신이란 제우스와 바다의 요정 사이에 태어난 아름다움의 세 여신인 아글라이아(Aglia), 탈리아(Thalia), 유프로시네(Euphrosine)를 말합니다. 이들은 각각 아름다움, 기쁨, 우아함을 상징하는 데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반려자로 등장하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삼위일체 사상과 결합되기도 했습니다. 그림에서 벌거벗은 세 여신은 숲 속 광장에서 손과 팔로 서로를 잡고 서있습니다. 나뭇가지에는 여신들이 벗어놓은 옷들이 걸려 있고요. 나팔을 안고 있는 큐피드 조각상에서는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뒷모습의 여신은 사랑을, 앞으로 보고 있는 여신은 미를, 옆을 보고 있는 여신은 쾌락을 상징합니다. 

 

 

 

루벤스는 이 작품에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두 번째 아내 헬레네 푸르망을 , 오른쪽에는 첫 번째 아내 이사벨라를 그려 넣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한 화폭에 담아낸 거죠. 루벤스는 가장 이상적인 여인으로 자신의 아내 두 사람을 모델로 한 것 같습니다. 루벤스의 누드화는 뚜렷한 선으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명암에 의해 표현된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림은 루벤스 사망 후 스페인 펠레페  4세가 구입하여 스페인으로 가져갔습니다. 

 

 

 

 


 

 

<A View of Her Steen in the Early Morning >,1636/wikipedia

 

 

루벤스가 시골에 살면서 자신의 집과 주변 풍광을 그려낸 풍경화입니다. 느낌이 많이 다르죠. '인상파 화가가 그렸나'라고 착각할 정도로 말이죠.  바로크 적인 구도를 잃지 않고 있는 이 광대한 스케일의 풍경화는 자연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의 결과로 보입니다. 도시생활에서의 해방으로 인한 기쁨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지요. 루벤스의 이 그림은 개인적인 이유로 그려진 것이었으며, 판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유럽의 많은 풍경화가들에게 지대한 영감을 불어넣어주었고요.

 

 

 

<전쟁에 대한 알레고리>,1637/오마이뉴스

 

 

 

신화에서 전쟁의 신 '마르스'는 사랑과 평화의 신'비너스'의 남편입니다. 불과 대장장장이의 신 '불카누스'를 속이고 사랑을 나누는 연인으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이들을 소재로 한 회화작품에서 둘은 사랑을 나누거나 불카누스의 심판을 받고 마르스가 도망을 치는 장면으로 재현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루벤스의 이 그림에서 이야기는 베제 된 채로 그림의 정 중앙에 갑옷을 입은 마르스가 비너스를 남겨두고 떠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마르스의 붉은색 망토는 비너스의 하얀 살결과 대비되어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전쟁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그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너스의 뒤쪽에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전쟁의 불길에 휩싸인 비참한 유럽의 상징으로서 애처로운 표정으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더불어, 마르스의 오른쪽에서 기근과 전염병을 상징하는 괴물들이 그의 손을 잡아끌고 있고요. 한편 전경 하단에 아이를 끌어안은 여인은 자비의 상징으로 전쟁 앞에서 이들은 한없이 약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유럽 전역이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여러 나라를 방문했던 루벤스는 그림을 통해서나마 전쟁의 비참함을 암시하고 평화를 기원했을 것입니다.

 

 

 

 

<전쟁에 대한 알레고리>는 루벤스의 말년작품입니다. 전투장면이나 영웅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그림은 30년 전쟁(1618-1648) 중에 탄생했습니다.  그림 왼쪽의 야누스 사원에서 전쟁이 신 마르스가 달려 나옵니다. 고대 로마의 야누스 사원은 평화로울 때는 항상 문이 닫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의 신 비너스가 마르스를 붙잡으려고  애를 쓰지만 소용없습니다. 오른쪽에선 기아와 흑사병을 동반한 여신이 마르스를 끌어당겨 전쟁터로 데려가려 합니다. 마르스는 책을 발로 밟고 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학문과 예술이 황폐해진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바닥의 부서진 악기를 손에 든 여인은 평화의 종말을 상징하며, 컴퍼스를 손에 들고 불현 한 자세로 쓰러져 있는 남자는 건축물의 파괴를 상징합니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는 두려움에 떨며 달아나는데  고통받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맨 왼쪽에서 절망에 찬 몸짓으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여인은 유럽의 상징하고 검은 상복을 입고 있습니다. 빛과 어둠,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이 급격히 교차하고 정확한 세부 묘사를 포기한 힘찬 곡선들이 역동적입니다. 오른쪽 아래를 향해 달려가는 동작의 움직임은 그림을 바라보는 감상자까지도 함께 나락으로 끌고 들어갈 기세입니다.

 


 

 

 

 

 

 

 

#루벤스는 살아생전에 명성을 누렸고 귀족의 작위까지도 하사받아았을 정도로 크게 성공한 화가입니다. 그는 역사와 신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궁정사회에서 교양인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웅변가적 언변으로 외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했고요. 루벤스가 가진 최고의 회화적 재능은 비루한 현실도 신화의 수준으로 격상시켜 그려낼 수 있는 상상력과 그것을 화면에 극적으로 구성해 내는 연극적 연출력 같습니다. 그는 남루한 진실보다 화려한 거짓을 현실처럼 만들어 낼 수 있는 화가였으니까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에서는 루벤스가 영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제리코와 들라크루아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요. 19세기말 사실주의 와 인상주의 도 각자의 입장에서 루벤스에게 영향받았음을 인정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컨스터블이 루벤스의 풍경화에 존경을 표했습니다. 루벤스가 바로크 미술의 영향력 있는 작가로 살아남기까지 화려한 장식과 드라마틱한 조명의 사용, 극적이고 정서적 강렬함이 한 몫했습니다. 인체 해부학, 신화와 우화를 주제로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는 탁월함을 보였습니다. 또한 플랑드르 특유의 디테일과 풍부한 색상 사용은 루벤스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합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예술을 외교 도구로 사용하여 군주 및 기타 중요한 인물의 초상화를 만들어 동맹과 외교 협정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서양 미술사에  이만한 화가도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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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에서는 라사압소(Lhasa Apso)를 평화와 행운의 상징이라 여깁니다. 종교와 정치가 일치되어 있던 티베트입니다. 그곳에서 열반하지 못한 승려가 라사압소로 환생한다고 인식되어 악령을 쫓아주는 영험한 개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신성시하게 여기는 견종입니다. 티베트인들에게 대접을 잘 받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또한 우리에게 친근한 시츄의 조상인 견종이라고 합니다. 시츄는 라사압소와 페키니즈를 개량한 견종입니다. 실제로 시츄와 라사압소는 외모가 아주 닮았습니다. 시츄는 단두종으로 라사압소보다 더 주둥이가 짧습니다. 눈이 크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요. 시츄는 라사압소보다 크기가 더 작고 털도 적다고 합니다.

 

 

 

 

 

근세에 들어서며 달라이 라마가 외국으로 방문할 때나 외교 사절단에게 선물하면서 세계 각지로 조금씩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초에 영국에 반입되어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1930년대 미국에 전해지게 됩니다.  1929년 영국에서 열린 도그쇼에 소개되어 오리엔탈 타리즈만 독 (동양의 부적이 되는 개)으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1933년 영국켄넬클럽에 의해 공인되었습니다. 

 

 

 

라사 압소&nbsp; Lhasa Apso:티베트에서 온 신성한 강아지/DPG-다나와

 

 

https://www.youtube.com/watch?v=qhhe07B99iE

 

 

 

출생지:티베트

수명: 12-14년

색상 :검정, 백색, Dark Grizzle, Sandy ,Honey, 골든, 갈색

높이: 암컷:25-28 

           수컷: 25-28cm

몸무게 : 5-8kg

 

 

 

 

라사압소/게티이미지코리아

 

 

 

라사압소는 언뜻 보면 도인처럼 웃고 있는 묘한 모습입니다. 위엄이 있고 균형이 잘 잡힌 체형을 가지고 있고요.  몸 전체가 풍부한 털에 싸여 있습니다. 머리 털이 두텁게 뒤덮여 눈 위까지 털이 늘어져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전체적으로 해학적인 인상을 풍기고 털이 무성한 귀가 아래로 축 늘어져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그윽하고 정감 넘치는 매력적인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티베트자치구/위키백과

 

 

 

 

라사압소는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티베트에서 살아온 3000여 년의 순수 혈통사를 자랑하는 귀족 애완견입니다. 라마교의 교주 달라이 라마는 대대로 중국 황제에게 라사압소 수캐를 선물로 보냈다고 합니다. 이 수캐가 근원이 되어 시추와 페키니즈가 중국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압소라는 이름은 티베트어로 염소란 뜻의 랍소(Rapso)의 변형이라는 설과 티베트어로 짖는 번견이란 뜻의 압소 생 계(Apso seng kye)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라사압소/photoAC

 

 

서양에 동양의 역사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처럼 극동지역 개들의 기원들 또한 대략적으로 밖에 알 수 없습니다. 티베트산 테리어 (티베트의 털이 덥수룩한 목양견)가 다른 많은 견종과 타입의 기반이 되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습니다. 자연선택으로 오래전 커다란 늑대개들로부터 티베트 마스티프가 생겨났습니다. 티베트 테리어 중 작은 것(단두증)의 자연선택으로 그보다 주둥이가 약간 짧고, 키가 작으며, 약간 굵은 다리를 가진 개가 탄생했습니다. 덥수룩한 털과 등위로 말려 올라간 꼬리는 계속 이어지며, 그 결과 라사압소 타입의 개가 생겨났습니다. 

 

 

 

 

손질 된 라사압소 개 /123RF

 

 

 

 

이 작은 '신성한 개'들은 행운의 마스코트나 '감사의 선물'로 손님들에게 선사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경보견 뿐만아니라,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알려졌지요. 수사자처럼 얼굴이 털로 덮인 라사압소는 그래서 <사자재>라는 별칭으로도 불렸습니다.  '라사' , 즉 '사자개'는 티베트 귀족들의 집안과 라마 사원의 장식물이 되었고요. 물론 이 작은 개들에게 경비견의 역할도 맡겨졌고요.

 

 

라사압소/Freepik

 

 

 

 

성격은 온순하고 명랑하며 주인에 대한 충성심은 진돗개 못지않다고 합니다. 주인의 마음을 정확하게 헤아리는 지혜와 절제력이 대단하고요. 상대를 완전히 파악한 후 눈을 맞추고, 아무한테나 꼬리를 흔들지 않는 도도함이 있습니다. 사원에 들어오는 낯선 사람을 보고 첫눈에 우호적인 사람을 구분해 낼 정도로 직감이 빠르다고 합니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잘 짖고요. 대형견에서 느낄 수 있는 당당함과 낙천적인 기질로 대담하면서도 온순하며 쾌활합니다. 영리한 판단력으로 제때 위험을 알리고 시끄러운 헛짖음 없이 집을  잘 지킵니다. "움직이는 세콤"이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습니다.   

 

 

 

 

라사압소/비마이펫 라이프

 

 

 

라사 압소는 길고 단단한 겉털과 밀도있는 속 털 때문에 4000m 넘는 고산지대인 티베트 지방이 추위도 잘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뛰어난 적응력과 생동감 넘치는 활력으로 전 세계의 다양한 기후와 여러 생활환경에 대해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고 있어 무병장수하는 개로도 유명합니다.  일반 견종이 15년 전후로 살아가는 것에 비해 최대 29년까지 사는 경우가 흔하다고 합니다.       

 

 

 

 

  이 덥수룩한 작은 개를 보면 영락없이 올드 잉글리시 쉽독의 축소판 같습니다 . 목 주위에 갈기 같은 풍부한 장식 털 때문이죠. 이런 고상한 분위기와 어우러진 격조 있는 라사압소의 털은 국제 애견쇼의 아름다운 털 분야에서 세계 최정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털의 색상은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황금색, 흰색, 엷은 청색, 검은색, 갈색, 짙은 회색, 모래색, 청회색 등 다양합니다. 모질이 우수하여 쉽게 엉키지 않는 등 털 관리가 쉬워 미용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FD6gyfAXx8

 

 

 

 

 

라사압소는 많은 반려견 중 가장 아름답고 우수한 모질과 훌륭한 성품을 가져 수준 높은 반려인들 사이에서 매혹적인 반려견으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라사 압소를 사랑하는 브리더들은 라사 압소의 성격을 자랑하면서 은은한 기품과 순박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고려청자의 멋에 빗대기도 합니다.

 

 

 

라사압소는  조금 특이한 형태의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아지보다는 고양이 발 모양과 비슷한 형태입니다. 일반적인 강아지 발보다 전테적으로 모양이 둥글고 발가락 아치도 깊습니다. 또한 세 번째 발가락이 짧다고 합니다. 이런 형태의 발은 지지력이 훨씬 강해 강아지가 쉽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도와준다고 합니다. 라사압소 외에도 비숑, 도베르만 등의 견종이 이런 모양의 발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라사압소는  궁중과 사원에서 대우받던 혈통 때문인지 냉정하고 새침한 면도 있습니다. 쾌활하고 활동적이면서도 때로는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독립적인 성격을 보이기도 합니다. 어릴 적부터 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온몸을 뒤덮는 긴 털은 부드러운 것보다는 무거운 느낌을 주는 털이 좋습니다. 털은 생후 8개월경에 성견의 털로 바뀌므로 몸을 만지는 것에 순응시키기 위해 생후 3개월쯤부터 털의 손질을 시작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놀기 좋아하므로 하루 한 번 이상 산책은 필수입니다.       

 

 

 

 

라사압소/iStock

 

 

   

 

허리 디스크는 척추뼈 사이에 존재하는 디스크의 수핵이 제자리에서 밀려 나와 척추 신경을 압박해 통증이 발생하는 질환입니다. 허리드스크 증상은 사람과 매우 유사하여 허리와 다리 통증이 주로 발생합니다. 걸음이 느려지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절거나 바닥에 끌고 다닙니다.  통증으로 움직임이 극도로 저하돼 자주 주저앉거나 산책을 피하기 위해 숨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허리를 안아 들어 올릴 때 격하게 싫어하거나 공격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 장기간 방치할 경우 신경 압박으로 인한 통증이 더욱 심해지다 결국 뒷다리와  허리를 거의 사용하지 못하게 돼 주의가 필요합니다. 증상 초기에는 약물치료를 통해 통증을 완하하고, 물리치료나 재활치료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또 과도한 움직임으로 신경 압박이 더욱 심해질 수 있어 운동을 제한하고, 비만인 경우 식이요법을 통해 체중을 감량합니다.

 

 

 

 

라사압소(시츄랑 헷갈리지 마세요.)/뉴시스

 

 

 

요로결석은 신장과 요도, 요관, 방광 등에 다양한 무기질 성분이 결석화되며 생기는 질병으로, 결석의 크기는 작은 입자에서부터 커다란 덩어리까지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결석은 신장에서 많이 생기지만 개는 방광과 요도에 많이 발생하는 편입니다. 견종이나 결석을 이루는 성분에 따라 원인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무기질 성분이 다량 함유된 사료를 장기간 섭취했거나 균형 잡히지 않은 식단, 호르몬 이상 등으로 소변 내에 무기 질량이 점점 증가하면서 요로 결석의 위험도 커지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u-5hsT2V3s

 

 

 

 

 

방광이 세균에 감염되었을 경우 방광에 생긴 염증 물질이 결석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처럼 수분 섭취량이 너무 적어 소변을 자주 보지 않을 경우에도 요로결석은 발병하게 됩니다. 방광과 요도 관을 막고 있는 결석의 자극으로 혈뇨를 동반한 심한 배뇨 곤란이 나타납니다. 소변보기를 수시로 시도하지 마만, 소량씩만 나오는 빈뇨가 가장 흔한 증상입니다. 이렇게  배출 못하는 소변이 방광에 모여 개의 배가 볼록하게 부어 있는 모습이 관찰되기도 합니다.  웅크린 자세를 오래 취하고 있다면 자세히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결석의  크기가 점점 커져 소변을 전혀 못 보게 되는 경우에는 방광이 파열하거나 콩팥이 망가지는 신부전으로 진행돼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아래 사진의 티베탄 테리어(Tibetan Terrier)와 혼동하지 마세요.

 

티베탄 테리어 Tibetan Terrier/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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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 컨셉 같기도 하고 , 여성으로  화장시켜도 고운 얼굴일 것 같은 짖꿎은 상상도 해봅니다. 손이 어쩜 저리 가늘고 고운지 탐 이날 정도로 말이죠. 눈빛이 야심만만해 보입니다. 

 

 

 

<self-portrait>,1620,안토니 반 다이크/ Licensed by Google
출처:서울신문

 

 

 

명예욕과 자기애가 강했던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는 평생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아 있는 그림 중 가장 이른 것은 14살 때 그린 것이라고 하고요.  플랑드르 출신입니다. 그는 부유한 비단 상인인 아버지와 뛰어난 자수 기술로 유명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직물에 대한 이해가 높았습니다. 자연스레 이러한 지식을 그림에도 풀어냈고요.  그가 루벤스보다 오래 살아남았더라면 바로크 시대 최고의 초상화가 순위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초상화의 새 지평을 열었으나 안타깝게도 1641년 마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스승인 루벤스가 죽은 지 불과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궁중 화가로 활동했던 그는 매우 우아하고 기품 있는 초상화를 많이 그려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실력을 보였던 반 다이크는 그의 나이 16세 때 17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수석 조수로 활동했습니다. 루벤스는 반 다이크를 '내 최고의 제자'라고 부르며 그의 재능을 높이 치겨세워주기도 했지요. 이후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전해졌고 영국 왕실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왕실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반 다이크는 채색에 매우 뛰어났습니다. 탁월한 채색 기술로 빛과 인물의 움직임, 직물에 놓인 자수와 실의 짜임까지도 완벽하게 묘사했습니다.  특유의 섬세함으로 특히 레이스와 같은 복잡한 직물 묘사를 정확하면서도 회화적으로 해냈습니다. 당시 귀족들의 의상을 사실적이면서도 완벽에 가깝게 화폭에 옮겨놓았을 정도로 말입니다.      

 

 

<The Mystic Marriage of Saint Catherine>,1618/google Arts&Culture

 

 

 

 

스승 루벤스와 반 다이크 사이의 작은 일화 하나를 소개할 까 합니다. 스승 루벤스는 어느 날 오랜 시간에 걸쳐 대작품을 완성했고, 그동안의 피로를 풀기 위해 잠시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그 사이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작품을 구경하기 위해 화실로 몰려왔고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뛰어 들어가며 서로 밀고 당기는 소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한 제자가 그만 떠밀려 넘어지면서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림을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엉망이 된 그림을 보곤 사색이 되었고, 귀중한 작품을 망쳐 버린 것에 대한 두려움과 당황함으로 제자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던 그때, 제자 중 한 사람이 붓을 들고 손상된 부분을 직접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스승 루벤스가 산책을 마치고 화실로  돌아왔고 이 광경을 보았지만, 그는 자신의 그림을 수정하는 제자의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뒤에 서 있던 스승을 발견한 제자는 바짝 긴장한 채 책망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긴장감이 흐르던 긴 침묵 끝에 루벤스는 말문을 열었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을 자네가 더 좋게 고쳐놓았군!" 

 

 

 

 

<코르넬리우스 판 데르 히스트의 초상화 Cornelis van der Geest>,1620/wikipedia

 

 

 

 

부유한 상인이자 플랑드르 미술을 선호하고 후원한 문화계의 주요인물 코르넬리우스의 초상화입니다. 50대의 그의 얼굴엔 이렇다 할 특별한 장식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의 얼굴, 살아있는 눈빛으로 고상한 그의 취미와 그의 인격을 드러내 보입니다.  

 

 

<The Brazen Serpent>,1618-1620/wikipedia

 

 

 성경 말씀 중 ' 뱀에게 물린 자마다 모세가 세워 놓은 '구리뱀'을 보면 살리라'.(민수기 21;6-9)

 

 

<유다의 그리스도 배신>,1618-20/CHICMENT Magazine

 

 

 

1618년,19살!

 안트베르펜 화가 길드로부터 장인으로 인정받은 반 다이크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스승에 버금가는 화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가 '르벤스 공방'에 머물렀던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제작된 루벤스의 그림 중에는 반 다이크의 손을 거친 것이 많다고 합니다. 누가 어디를 그렸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죠. 스승의 든든한 협력자였던 반 다이크는 당시의 유행을 따라 1620년에 이탈리아로 떠나게 됩니다. 스승의 아내를 넘보아 루벤스가 여행을 보냈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 무렵 반다이크가 루벤스에게 작품 하나를 선물합니다.  루벤스는 이 그림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늘 식당 벽난로에 걸어두고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청출어람의 제자를 보며  루벤스는 흐뭇했던 모양입니다. 

 

 

 

 

이 그림에서 반 다이크는 빛과 어둠을 이용한 카라바조(Carabaggio, 1573-1610)의 기법과 사물의 표면에 생기를 더하는  루벤스의 붓질을 잘 버무려  아주 극적인 화면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몰려드는 무리는 어지러이 움직입니다. 다가올 수난을 예감한 그리스도는 오히려 고요하게 서 있고요. 유다는 체포하라는 신호로 약속된 입맞춤을 하기 위해 스승의 손을 꼭 잡은 채 예수에게 다가섭니다.

 

 

 

어둠에  잠겨 있는 유다의 얼굴과 횃불을 받아 밝게 빛나는 예수의 얼굴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혼란과 고요,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는 루벤스 화실에서 익힌 바로크 미술의 특징을 실감 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반 다이크는 스승보다 한층 부드러운 색조를 사용하면서 인물의 표정을 더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예수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성인의 초탈한 표정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체념과 제자에 대한 연민, 그리고 배신자를 보는 착잡함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 보입니다.

 

 

 

 

 

 

 

<엘레나 그리말디 카타네오의 초상,1622/National Gallery of Art

 

 

 

 

 

초상화는 섬세한 심리묘사가 중요합니다. 탁월한 반 다이크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고요. 당시의 초상화는 일정한 공식이 있었습니다. 왕과 귀족 들은 대개 갑옷을 입고 기사처럼 말을 타고 있거나, 격식을 갖춘 화려한 옷을 입고 품격 있는 실내에 머물러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런 설정들이 인물의 힘과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죠. 반 다이크는 이런 초상화의 공식들을 깨고 연극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꽃이나 지팡이 같은 사물을 들고 야외 배경과 어우러진 다채로운 인물화를 그려냈습니다. 그의 인물상들은 대부분 마르고 키가 크게 그려집니다. 그로 인해 예민하고 연약하면서도 어딘가 기품 있어 보이기 때문이죠. 

 

 

 

이런 반 다이크의 초상화를 좋아한 사람 중에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절대왕정을 꿈꾸었던 영국의 황제 찰스 1세(Charles1, 1600-1649)도 있었습니다.

 

 

찰스라는 이름은 영국에서 그리 반가운 이름이 아닙니다. 찰스 1세는 영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하들에게 붙잡혀 반역죄로 처형당한 비운의 국왕이기 때문입니다. 아들 찰스 2세 역시 폐위와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찰스 2세 이후 오랜만에 찰스라는 이름의 국왕이 등장했습니다. 어머니 엘리자벳 2세가 장수하셔서 허연 머리의 국왕이 얼마나 오랫동안 통치할지 모르지만 불운한 기운이 감도는 징크스를 깨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탄생/에펌코리아

   

 

후계자가 없었던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는 원래 스코틀랜드 국왕이었습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위까지 물려받아 최초로 영국 통합 군주가 됩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지 못했고, 이를 위해 이미지 메이킹을 묘안으로 내세웁니다.           

 

 

 

 

    사진이나 TV가 없던 시절, 유럽 군주들은 자기 모습을 담은 초상에 유난히 공을 들였습니다. 국왕의 초상은 국민 대부분에게 왕을 간접적으로 나마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주는 당대 최고 화가에게 초상화는 물론이고, 초상 속에 군왕의 위엄을 최대한 과시함으로써 자신이 '하늘이 내려준 국왕'임을 만천하에 과시하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찰스 1세는 어릴쩍부터 병약해 160cm도 안 될 만큼 키가 작았습니다. 성격마저 내성적이었지요. 그는 자신을 위대하게 그려줄 화가가 필요했습니다. 루벤스 공방 출신으로 촉망받던 33세 안토니 반 다이크가 궁정화가로 낙점됩니다.   찰스 1세는 1632년 빼어난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반다이크를 영국 런던으로 초빙해 궁정화가 직위 및 기사 작위를 줍니다. 영국에 내세울 만한 초상 화가가 없으니 이웃 나라에 그림 장인을 수입해 온 거죠.  이때부터 반다이크는 런던에 머물며 찰스 1세를 비롯한 스튜어트 왕실 가족의 초상화를 다수 그리게 됩니다. 그로 인해 반 다이크는 자기 생애 주요 작품들을 영국에 남겼어요. 플랑드르 출신임에도 영국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게 됩니다. 반다이크는 영국 회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 200년간 영국 초상화의 양식을 확립시킵니다.

 

 

 

<The Balbi children>,1623-27/wikipedia

 

 

 

 

<Portrait of Cardinal Guido Bentivoglzo>,1623/wikipedia

 

엔디미언 포터 경과 안톤 반 다이크 초상화 Sir Endymion Porter and Anthony Van Dyck,1633/wikipedia

 

 

 

 

 

이 그림은 영국 왕실에서 일하는 외교관이었던  엔디미온 포터 경을 그린 작품입니다. 평상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포터 경은 반 다이크가 영국에 체류하게 되었을 때 그를 만나 그의 작품의 위대함을 인지하고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로 인해 연을 맺게 되고 이 그림은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그린 초상화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두 사람이 한 공간에 등장한 다는 점입니다.  한 명은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 에디미언 포터 경이고 오른편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놓았습니다. 주인공은 정면을 응시하며 몸의 방향이 앞을 향함으로 모든 이들을 바라보도록 그려놓음으로 지위와 걸맞은 위치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반 다이크는 자신을 비스듬히 옆 자세로 포터 경의 자리를 넘지 않는 구도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냅니다.  그 덕분에 그림 어느 부분도 균형을 잃지 않았고 등장인물 모두가 돋보이게 그려낸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반 다이크는 사소한 부분에까지 세심한 배려를 했습니다. 자신을 후원했던 후원자의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별 차이가 없지만, 자신을 살짝 낮은 자세로 그려 넣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유심히 보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그림을 멀리서 보게 되면 왼편의 검은 옷을 입은 안톤 반 다이크가 엔디미온 포터 경 쪽으로 몸 방향이 향해 있습니다.  마치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하고 그분을 소개하듯이 말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포터 경이 같은 곳에 손을 얹음으로써  자신과 포터 경의 우애를 과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찰스 1세 기마초상>,1633/위키피디아

 

 

   

 

 

   반 다이크가 궁정화가로 임명된 이듬해 그린 찰스 1세의 기마 초상화입니다.  로마 시대  최전성기 황제들처럼 그를 강력한 지배자로 각인시킵니다. 말을 탄 모습으로  표현해 키가 훨씬 더 커 보입니다. 왕의 오른쪽 아래 붉은 옷을 입은 시종이 그를 높이 우러러볼 정도로 말이죠. 왼쪽에 왕을 상징하는 왕관과 문장이 그려져 있습니다. 제 눈에 말이 더 주인공처럼 느껴집니다. 아무튼 왕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없었던 시민들은 이 그림을 통해 군왕다운 찰스 1세의 모습을 보고 땅에 고개를 조아리겠죠. 위로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테니까요.     

 

 

 

 

 

그러나 이 같은 당대 최고 화가의 솜씨에도 그림 속 찰스 1세 얼굴에서는 군왕의 참된 위엄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군주라기보다 군주 역을 어설프게 연기하는 배우처럼 보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이 초상의 주인공 찰스 1세가 의 회와 반목을 거듭하다 마침내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을 일으킨 주인공이 됐음을 알려줍니다. 이 내전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에  패한 찰스 1세는 폐위됐고 1649년 1월 30일 처형되기에 이릅니다. 예술적인 감각은 뛰어났지만 군주 자리에 오르기엔 여러모로 현저히 모자라는 인물이었습니다.

 

 

 

뛰어난  초상화가였던 반다이크의 그림에서는 이처럼 숨기고 싶은 진실, 즉 '왕 답지 못한 왕'의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반다이크의 그림 속 말은 실물보다 좀 더 큽니다. 이 크고 온순한 말은 찰스 1세가 원하던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국민 이미지였겠지요. 그러나 당시 영국 국민은 왕과 신을 동일시하며 무조건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던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의회를 통한 합리적인 정치를 원했습니다. 정치감각이 뒤떨어진  찰스 1세는 끝까지 그런 국민의 바람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림 속  찰스 1세의 우울한 표정이 보이시나요. 둘 사이의  근본적 차이, 즉 왕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믿었던 찰스 1세와 더는 절대왕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국민사이의 괴리감을 말하는 듯싶습니다.  그래도 그가 수집한 미술 컬렉션 상당수는 지금까지 영국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주요 작품으로 남아있습니다

 

 

 

 

 

<Queen Henrietta Maria with Sir Jeffrey Hudson>,1633/www.nga.gov

 

 

 

<난쟁이 제프리 허드슨 경과 함께  있는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의 초상> 챨스 1세의 아내 헨리에타 왕비입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공주였고요. 다른 왕실의 결혼처럼 그녀 역시 정략결혼으로 영국 왕비가 되었습니다. 아름답고 풍성한 드레스와 은은하게 미소 짓는 미인의 모습으로 그려놓았습니다.  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해요. 4남 5녀의 자녀를 둘 정도로 말이죠. 그러나 서로 양보하지 못하는 부분이 종교문제였습니다. 찰스 1세는 영국의 국교가 된 성공회를 믿고 있었고, 프랑스 공주인 헨리에타 왕비는 당연히 가톨릭이었죠. 왕실끼리  결혼은 했지만 서로이고 사는 하늘이 달랐다는 말이죠. 헨리에타 왕비는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개종하지 않아 영국 왕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일반인들도 성공회로 개종하지 않으면  출세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법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림 오른쪽에 황금 휘장에 고이 놓인  쓰지 않은 왕관이 보이시나요? 대신 사냥할 때 쓰는 검은색 챙 넓은 모자를 썼습니다.

 

 

 

 

왼쪽으로 난쟁이 제프리 허드슨경도 보입니다. 당시 난쟁이는 유럽 왕실 가족에게 웃음을 주는 역할을 맡으며 궁정의 흔한 존재였다고 합니다.  원숭이와 같은 이국적 동물을 소유하는 것이 유럽 귀족문화에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원숭이의 의미는 방종, 음란함, 인간의 어리석음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런 원숭이를 여왕 헨리에타가 살포시 누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육체적 욕망을 절제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라는 말이지요.

 

 

<사냥복 차림의 찰스 1세 > ,1635/ Slideplayer.gr

 

 

 

 

<사냥복 차림의 찰스 1세>는 사냥을 나갔던 왕이  잠시 말에서 내려 우연히 화가를 바라보는 순간적인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 속 황제는 격식에서 벗어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왕관도 쓰지 않았고 왕홀도 들지 않았습니다. 지팡이와 허리에 찬 검을 보고 짐작만 할 뿐이죠. 그럼에도 충분히 돋보이며 왕처럼 보입니다. 수행원들과 그가 타고 온 말은 어둠에 묻혀 있지만 왕은 신의 선택을 받은 것처럼 밝은 빛 속에 전신을 드러내고 서있습니다. 게다가 왕은 수행원보다 앞서 서 있기 때문에 훨씬 키가 커 보입니다. 나뭇가지는 닫집처럼 왕을 감싸며 그의 위치를 돋보이게 해 주고요. 뿐만 아니라 밝은 상의와 붉은 바지의 조합은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깁니다. 왕의 표정은 어딘가 산만해 보이는 수행원들의 표정과 달리 당당하면서도 지적이고 우수에 젖어 있습니다. 챙이 넓은 모자가 얼굴을 후광처럼 감쌉니다. 바로 뒤에 있는 말도 온순히 머리를 조아리며 왕의 권위를 예찬하고 있습니다. 반 다이크는 이렇게 치밀한 구성을 통해 왕의 '일상적인 모습'을 '가장 왕다운 모습'으로 만들어냈습니다. 반다이크의  마법 같은 붓질로 찰스 1세는 캔버스 안에서 최고의 왕으로 빛났습니다.

 

 

 

 

 

 

<영국와 , 찰스1세의 초상>,1636/www.mycelebs.com

 

 

 

 

한 화면 안에 세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세 명의 인물 모두 찰스 1세입니다. '삼중 초상'이라 불립니다. 한 사람을 세 개의 다른 방향에서 그려 한 화면에 합친 겁니다. 마치 세 쌍둥이 같죠.  왕의 얼굴은 정면, 측면, 3/4 정면으로 그려졌습니다. 이 작품은 벽에 걸기 위해 주문한 초상화가 아니라 조각가에게 흉상을 주문하기 위해 그려진 일종의 밑그림 같은 겁니다. 17세기 영국교회는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교황 우르바노 8세는 영국을 회유하기 위해  찰스 1세에게 흉상을 선물하려 했습니다.

 

 

 

원래 흉상을 제작하는 데에는 손 부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 다이크는 작품에 찰스 1세의 손을 그려 넣어 이전의 삼중 초상과는 차별화된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왕은 품위 있는 표정으로 자신만만한 눈빛을 띠고 있죠. 언뜻 보면  한 명이 여러 자아로 분열되어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볼 수 도 있고요.

 

 

 

베르니니라는  당대 최고의 조각가가 자기 동상을 제작해 준다는 말을 듣고 찰스 1세는 뛸 뜻이 기뻐합니다. 그는 곧 최고의 화가 안토니 반다이크를 시켜 밑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반다이크는   찰스 1세의 얼굴을 부드러운 호남형으로 바꿔 놓습니다. 나중에 동상을 받아 든 찰스 1세는 감격했다고 합니다. 권력자의 초상은 사실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가 그리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다는 사실을 챨스 1세는 깨닫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Five Eldest Children of Charles1>,1637/Google Arts& Culture

 

 

 

https://www.youtube.com/watch?v=51AIGsdBza8

 

 

 

 

<Cupid and Psyche>,1638/wikipedia

 

 

 

 

 

 

 

<존 스튜어트와 버나드 스튜어트 형제>,1638/위키백과

 

 

 

 

 

영국 국왕의 권위는 점점 약해지고 , 찰스 왕을 배출한 스튜어트 가문 일족도 가혹한 역사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반 다이크가 그린 '존 스튜어트와 버나드 스튜어트 형제의 초상화'속 인물들은 모두 스코틀랜드 출신 귀족이자 찰스 1세의 친척으로 공작이나 백작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왼쪽의 황색 옷을 입은 사람이 당시 17세의 형 존 스튜어트입니다. 청색 옷을 입은 사람이 한 살 아래 동생 버나드 스튜어트이고요. 그림의 크기가 상당합니다. 높이가 2.4m에 폭이 1.5m 정도로 그림 속 인물들은 실제 인물보다 더 커 보입니다.    이 그림은 형제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포즈에서 풍기는 자신감과 화려한 레이스 장식이 달린 의복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비단 특유의 광택과 매끈한 질감을 생생하게 표현했죠. 이런 점 때문에 영국 귀족들이 반 다이크의 그림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형제가 황색, 청색, 대조적인 느낌의 옷을 입고 있는 데다 자세와 시선도 달라 은근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왼쪽 계단 위에 서 있는 형 존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동생 버나드는 한쪽 다리를 계단 위에 올리고 고개를 돌려 관객을 바라봅니다. 특히 허리에 왼쪽 손을 올린 버나드의 자세는 찰스 1세의 사냥하는 초상화 속 자세와 거의 똑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감 넘쳐 보이는 두 청년이 맞이할  험난한 인생사를 알게 되면 그림은 달라 보입니다. 형 존은 왕당파의 기병대를 지휘하며 의회파에 맞서 싸우다 1644년 부상으로 사망합니다. 그의 나이 겨우 23세였죠. 버나드 역시 1645년 로턴 히스 전투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두 형제의 이 같은 비극적 운명을 알고 그림을 보면 반 다이이크가 그려낸 당당한 청년 귀족들의 모습이 한편으론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이처럼 영국 역사에서 '찰스라는 이름은 그리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찰스 1세는 처형된 왕이고, 찰스 2세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죠. 그의 친인척들도 젊은 나이에 비극적 결말을 맞이합니다. 

 

 

 

 

 

<제임스 스튜어트 리치몬드와 레녹스의 공작>,1633/에포크타임스

 

 

 

 

 

 

반다이크의  수많은 후원자 중 한 명인 제임스 스튜어트는 리치먼드와 레녹스의 공작이었습니다. 찰스 1세의 사촌인 제임스는 왕과 귀족들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궁정의 침실 신하이자 경비원, 국무위원 등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요. 1633년, 영국 최고의 기사 작위인 가터 기사로 임명됩니다. 제임스는 이 높은 영예를 기념하기 위해 반 다이크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제임스 스튜어트, 리치몬드와 레녹스의 공작'은 세계적인 걸작으로 남았습니다.

 

 

 

이 그림은 매우 연극적인 구성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림 속 제임스가 착용한 망토에는 은색의 커다란 별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보석이 달린 황금 훈장을 목에 걸고 있고요. 또 하나 그의 왼쪽 무릎에는 금색의 가터 장식이 옷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에 반사된 빛의 묘사는 그림 속 사물이 마치 조각처럼 보이게 합니다. 반 다이크는 이러한 연출을 통해 작품에 우아 함고 화려함을 연출해 냅니다. 그림 속 스튜어트가 입은 옷은 당대 패션계에서 최고로  여져진 것들이죠. 스튜어트는 이 옷들을 여유롭고 우아하게 소화 냅니다. 반 다이크는 그림 속 인물에게 이러한 여유로움과 우아함을 부여해 인물의 지위와 고귀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슈튜어트가 입은 옷의 레이스 장식입니다. 레이스는  당시 아주 고급스러운 소재로, 부유층의 초상화에서 강조되어 표현되었습니다. 촘촘한 붓으로 자국을 남기는 회화 기법을 통해 사실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묘사되었고요.

 

 

 

반 다이크는 어릴 적부터 익히 봐 온 직물에 대한 이해도를 더해 다른 화가들보다 더 섬세하고 정확하면서도 우아하게 레이스를 묘사했습니다. 스튜어트가 신은 신발 한번 보실까요? 프랑스식 디자인으로 높은 굽과 커다란 장미 장식이 돋보입니다. 발 모양에 꼭 맞게 제작된 신발은 당시 귀족들이 향유했던 복식 문화중 하나입니다. 그가 신은 양말은 가로로 주름이 져 있고요. 잘 정돈된 금발 머리와 시대의 유행을 반영한 핫한 의상으로 귀족적인 모습과 낭만적인 이미지를 연출해 냈습니다.

 

 

 

 

또 한 가지 , 그림 속 스튜어트는 개 한 마리와 함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개는 스튜어트가 멧돼지 사냥을 하던 중 위기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으로 유명한 그레이하운드 종입니다. 이 품종은 고귀함과 충성심을 상징합니다. 예술 작품에 개가 등장하는 것은 보통 충성심을 나타내는 의도로 사용됩니다. 반 다이크는 앞다리를 우아하게 편 채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개의 모습을 통해 단순한 충성심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아함과 침착함까지 함께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개는 스튜어트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찰스 왕에 대한 스튜어트의  헌신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반다이크는 그림 속 인물의 복장, 자세, 주위의 사물이나 동물을 통해 인물의 성향과 특성을 잘 잡아낸 화가였습니다.  그는 초상화의 모델이 되는 인물에 대한 높은 이해와 애정을 그림 속에 풀어냅니다. 그렇게 탄생한 반 다이크의 초상화 <제임스  스튜어트, 리치먼드와 레녹스의 공작>은 뛰어난 예술적 기교로 불멸의 작품으로 남아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PX1KjKefQA

 

 

 

 

 

< 성 히에로니무스>로테르담 박물관/연합뉴스

 

 

 

600불에 사들인 헛간그림/애틀란타 K

 

 

 

 

 

미국의 헛간에서 새똥이 잔뜩 엉겨 붙은 상태로 발견된 유화 한 점입니다. 17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의 작품으로 판명돼 300만 달러(약 37억 원)를 호가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하얀 수염을 가슴께까지 늘어뜨린 노인의 나신을 그린 세로 95cm, 가로 58.5cm 크기의 이 작품에는 <성 히에로니무스를 위한 습작>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기독교의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성 예로니모라고도 불립니다. 소더비의 오래된 유화 책임자인 크리스토퍼 어파슬은 반 다이크가 10대 후반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안트베르펜(앤트워프)에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의 작업실에서 일하던 시절 이 습작을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반다이크는 천재로 태어난 모차르트 같았다.
-크리스토퍼 어파슬(소더비의 유화책임자)-


 

발견된 습작이 <성 히에로니무스> 작품을 그리기 위한 습작일 가능성을 추정해 봅니다. 고인이 된 앨버트 로버트(공무원, 수집가>는 2002년 이 작품이 네덜란드의 숨은 빈티지 작품일 것으로 보고 600달러(약 75만 원)에 사들였습니다. 로버츠는 그림을 오랫동안 그의 자택에 걸어뒀고요. 이후 본격적으로 이 작품의 유래를 추적하면서 1618-1620년 완성된 <성 히에로니무스와 천사>를 위해 반 다이크가 그린 습작이 아닌가 의심을 품었다고 합니다. 로버츠는 2021년 세상을 떠났고 이 작품은 로버츠의 유산 중 하나로 경매에 나오게 됩니다. 

 

 

 


 

 

<Anthony Van Dyck>1599-1641/www.meisterdrucke.ie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대의 유명한 화가, 주로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고급스러운 색채와 정교한 디테일로 유명하고요. 반다이크는 거장 루벤스가 평생 쌓은 노하우를 순식간에 배웠습니다. 네덜란드를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가문 귀족의 초상화를 수주하는 등 루벤스가 독점하던 일감을 미친 듯이 따내기도 했고요. 영국 왕 찰스 1세의 관심을 끌게 됐고, 1632년 영국으로 건너가 궁정 화가가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수많은 명작 초상화를 남겼습니다.

 

 

 

그렇게 반다이크는 불과 30대의 나이에 '루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이란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전문가는 주저 없이 바로크 미술의 일인자로 루벤스를 꼽습니다. 반다이크가 간과했던 건강, 디테일, 그리고 인성 부분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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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셰퍼드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원산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미국이 원산지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바스크인들이 데려온 양치기 개가 미국으로 건너가 오늘날의 목양견으로 개량된 것으로 보입니다.  기원으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또 다른 설로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피레니즈 산맥에서 만들어져 목장에서 몰이견으로 일 할 수 있도록 미국에서 다듬어졌다는 설입니다. 주요한 조상은 바스크인 양치기들과 메리노종 양 떼들과 동행하여 식민지 초기에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로 수출된 스페니쉬독으로 추정됩니다.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Australian shepherd/Rover.com

 

 

 

원산지: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

체고:수컷 51-58cm/암컷 46-53cm

체중: 수컷 25-29kg/암컷 18-25kg 

대형견(목축견)

수컷이 암컷보다 체고와 체중이 더 나가는 편입니다. 

 

 

 

USA map/123RF

 

 

 

        미국의 목축업자들이 이 견종의 발전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습니다. 날카로운 지성과 훌륭한 목양능력은 오래전부터 칭찬을 받아왔고요. 사람의 주목을 받던 외모가 유지될 수 있도록 계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화나 텔레비전의 쇼를 통해서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붐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의 수도 점차 증가했습니다. 이 견종의 다용도 능력과 훈련하기 쉬운 성격은 미국의 농장이 나 목장에서 사육하기에 적합했고 , 수요가 많아 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캘리포니아의 다양한 기후 조건에 맞는 사역견 셰퍼드로 사육되었지만 가정생활과 보조견으로서의 일, 특히 수색과 구조에도 능숙하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_6VYno1jcw

 

 

 

 

 

겉모습이 콜리나 쉽독을 닮았습니다.  튼튼하고 골격이 잘 발달해  있고요. 눈은 아몬드 모양으로 갈색, 푸른색, 호박색, 얼룩무의 등이 있고 깊게 들어가 있거나 튀어나와 있지 않습니다. 코는 검거나 갈색이며 귀는 조금 큰 삼각형으로 시작하는 부분이 높습니다. 경계할 때는 귀가 앞이나 위로 향하거나 옆으로 향합니다. 꼬리는 날 때부터 짧거나 짧게 단미 해줍니다.

 

 

Australian Shepherd dogs/Pngtree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는 털의 색, 눈의 색, 코의 색 그리고 훈련과 용도가 다양한 견종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안의 코트는 4가지 컬러로 나뉩니다. 블루멀, 레드멀, 브라운, 블랙입니다.

 

블루멀(Blue Merie): 블루멀은 푸른빛이 도는 옅은 회색과 쥐색, 검정이 섞인 코트입니다. 

 

레드멀(Red Merie): 레드멀은 붉은빛이 도는 갈색과 연회색이 섞인 코트입니다.

 

브라운(Brown): 전체적으로 적갈색을 띠며 목 주변 가슴 부분에 크림, 화이트가 있는 코트입니다. 

 

블랙(Black): 몸 전체가 검은색이거나 또는 목주변이 브라운, 크림이 섞인 코트입니다. 

 

블루멀, 레드멀의 코트를 가진 아이들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지 만 선천적으로 시각, 청각장애를 유발하는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생후 6주 이후가 지나면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며 검사는 필수입니다.  교배 시에는 멀(Merie)끼리의 교배는 안 하도록 합니다. 

 

 

 

 

 

여배우와 그녀의 개/노트펫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는 일명 오시(Aussie)라고도 불리는 견종입니다. 이 견종은 할리우드 영화배우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반려견으로 유명해져서 더 알려졌습니다.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인스타그램에도 강아지 사진을 자주 올린다고 합니다. 여배우와 반려견의 사진을 더 보고 싶은 분은 한 번 찾아 보시길 권합니다. 촬영장에도 종종 동행할 정도로 애견 사랑이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Australian shepherd/pngtree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의 눈의 경우에는 갈색, 푸른색, 금색, 반점과 마블링까지 포함해 4-5가지의 독특한 눈 색깔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코의 경우 코트 색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블루멀과 블랙 코트인 아이는 코가 검은색인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레드멀과 브라운은 레버색(적갈색) 일 가능성이 높고요. 멀(Merie) 종류인 경우 코에 핑크색 반점이 있을 수 있긴 하지만, 1년이 넘은 성견에 코의 반점이 25%가 넘으면 결함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ustralian shepherd dog/Pxfuel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는 발목은 중간정도의 길이로 약간 경사가 있고, 발은 계란형으로 작습니다. 발바닥은 두툼하고 탄력이 있고 뒷다리는 앞발의 폭과 같으며 발목의 비절은 적당한 각도로 굽어져 있습니다.  경쾌함이 느껴지는 걸음걸이가 특징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K68f7zpNpU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의 털은 거칠고 길이는 적당하며 곧거나 곱슬거립니다. 머리, 귀, 앞다리, 앞쪽, 뒷무릎 아래에 난 털은 짧고 부드럽습니다. 앞다리 뒤와 무릎 우리는 장식털이 알맞게 나있고요. 또 중간정도의 길이로 방수성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속털의 양은 기후에 따라 변화합니다.           

 

 

 

 

 

   온순한 성격을 가진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는 활동적이며 견주와 가족에게 애정이 깊은 견종입니다. 견주와 가족을 기쁘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열심히 일하며 매력적인 견종이고요. 하지만 보호본능이 강해서 낯선 사람이나 동물에게 흥분하거나 하면 피지컬이 좋은 체격조건으로 인해서 주의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특히 목양견의 역사가 있어서 달려가는 사람이나 자전거 오토바이를 충동적으로 쫓아가거나, 동물들과 아이들을 몰면서 발목을 무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교육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Australian Shepherd dogs/ DPG-다나와

    

 

               

 

 

 

 

 

골든리크리버나 래브라도 레트리버와 유사한 기질을 소유한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 상냥하고 장난을 좋아하긴 하지만 일을 하려는 강한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눈치가 빨라서 이 견종을 두고 견주가 원하는 것을 육감으로 알 수 있는 개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목양견이 그러하듯 지능이 높고 체력이 좋아서, 현재는 도그 어질리 티나 구조견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을 하는 다재다능한 견종입니다. 

 

 

 

 

넓은 들판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양을 기키던 견종인지라 순간적인 상황판단력도 뛰어납니다.   늘 주인의 모습을 눈으로 좇고, 무엇이든 지시를 받으면 신나게 따릅니다. 놀이를 무척 좋아해서 놀이하듯 훈련하면 놀랄 만큼 다양한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만일, 운동량이 부족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면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변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골칫덩어리가 될 수 있습니다.   헛짖음, 공격성 등의 문제 행동이 나타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개가 들판에서 원반을 가지고 놀고 있다. 애완동물과 스포츠/123RF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는 스포츠 도그로서도 최적의 견종입니다. 기본 훈련뿐 아니라 다양한 재주를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는 똑똑한 견종이므로, 여러 기술에 도전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http://www.partrasue.net/bbs/board.php?bo_table=movie&wr_id=30&ckattempt=1

 

오스트레일리안셰퍼드 훈련영상

견종 : 오스트레일리안셰펴드 성별 : 수컷 내용 : 기본적인 훈련을 어떤식으로 하는지에 대한 영상입니다. 기본적인 산책훈련부터, 앉아, 엎드려, 기다려 같은 명령어교육을 어떻게 연습하는지

www.partrasue.net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의 수명은 약 3-15년으로 평소 생활습관 식습관과 함께 스트레스 없는 환경에 따라서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건강한 견종이지만 선천적으로 유전될 수 있는 안과질환인 콜리아이, 간질, 백내장을 주의해야 합니다. 멀리서 보면 셔틀랜드 쉽독, 셸티를 닮은 느낌인 견종이지만 덩치는 더 크고 어엿한 오스트레일리안 쉽독이라는 품종으로 등록된 견종입니다. 믿음직스럽고 늠름한 품종이니 활동적이신 분들은 한번 시도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단 , 위에 있는 사항들 잘 숙지하시고 말이죠.

 

2024.03.04 - [지식&교양] - 50-79. 셔틀 랜드 쉽독(Shetland Sheepdog, 26)

 

50-79. 셔틀 랜드 쉽독(Shetland Sheepdog, 26)

셔틀랜드 쉽독(줄여서 '셸티')라고 부릅니다. 외모만 봤을 때는 '래쉬'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출현한 견종인 러프콜리 종류와 상당히 닮아 헷갈려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에서 대중적으

sun-n5y2.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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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채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들을 당시에는 약간 경멸하는 듯 한 말투로 '일요화가'라고 칭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전통적인 미술의 원칙을 떠나 본능과 무의식을 통해 작품을 제작한다는 점 때문에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소박파(Naive Art)'라고  불리며 미술사에서 대접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들 작품은 어떤 유파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창조적 동력에 몸을 맡겨 작품이 완성되었기 때문이죠. 이들은 현대미술의 원리와 원칙과는 거리가 먼 문외한이며 아웃사이더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미국에서는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 Art)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큐비즘은 아프리카 조각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표현주의는 남태평양의 원시예술에서 영향을 받았고요. 소박파(Naive Art) 미술도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현대 미술의 2% 부족함을 메워주는 이미지의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주류 미술을 통칭해 '아르뷔르(Art burt)'라고 하는데 정신 분열증 환자와 아마추어 화가들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순수하고 꾸밈없이 그려내는 "순수한 미술"을 의미합니다. 2008년 <세라핀>이란 영화로도 만들어져 유명세를 탄 세라핀 루이스의 작품을 살펴봅니다.

 

 


 

 

난 슬플 때면 시골길을 걸어요.
그리고 나무를 만지죠.
새, 꽃들, 벌레들에게 말을 걸어요.
그러다 보면 슬픔이 가시죠.

 

 

 

 

 

<Tree of Paradise>.1928/www.icanvas.com

 

 

 

기존에 보아오던 정물화의 느낌과 너무 달라 깜짝 놀랐습니다. 조용한 구도와 정적인 분위기에 길들여 진 우리의 눈을 현란하게 자극시키는 것 같습니다. 나뭇잎의 색깔이 이렇게 다양하며 잎사귀 하나하나가 다 다릅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체 같습니다. 이런 나무를 꿈에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초록 아니면 연두로 다 통일시켜 생각해 왔으니까요.  

 

 

 

 

간특하지 않음
잘난 체 하지 않음
순수함
-이자벨 스파크(Isabelle Spaak/저널리스트-

 

 

 

 

 

1864년 9월 3일 태어난 세라핀은 7세 이전 부모를 모두 잃고, 큰 언니 손에 자라며 일찍부터 어린 손으로 양치기 등의 노동을 했습니다. 10세 때 성당 신부님의 배려로 들어간 학교에서 문 뒤에 숨어 미술 수업을 몰래 엿들었다는 일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마을을 떠돌며 시계를 고치는 장인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녀가 물려받았을지 모를  손재주가 짐작될 뿐입니다. 그녀가 가진 어떤 것도 예술적 환경, 혹은 어린이가 받아야 할 돌봄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13세가 된 그녀를 기다린 것은 중산층 사람들이 자신의 집이면서도 남에게 미루는 일들- 마룻바닥 박박 문질러 닦기, 주기적으로 창틀과 창문 닦기, 세탁물을 삶아 비틀어 짜기, 놋 제품 광내기, 손에 선지를 묻혀가며 소시지 혹은 순대 만들기 같은 온갖 허드레 일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좋지 않은 평판 때문에 20년간 일한 수녀원에서 나와 홀로 마을의 다락방에서 살게 된 이후였습니다. 1905년의 일로 ,세라핀의  말에 따르면 "천사가 성모 마리아를 위해 그림을 그리라는 사명을 전달해 주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날로 그녀는 종이뿐만 아니라 각종 병, 도자기, 널빤지, 가구 위에조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권용화의 미술 사이렌, Seraphine Louis/ 광명시민신문

 

 

 

남의 집 허드렛일로 받은 품삯으로 먹을 것과 땔감 대신 흰색 물감을 삽니다. 들판의 꽃과 수초에서 염류를 채취하고요. 푸줏간에서 얻은 동물의 피나 색깔 있는 초의 파라핀을 물감 삼아 자신만의 색채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그녀도 흰색은 만들 수 없었습니다. 세라핀은 산업용 도료인 '리플린 도료'를 이용해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배합은 아직 비밀로 밝혀져 있고요.

 

 

 

 

주변 사람들은 몇 달째 집세를 밀리면서 골방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리는 그녀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 마을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멸시와 조롱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그림 그리기가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변변한 붓 하나 없이 캔버스에 손가락으로 쓱쓱 그려나갑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채워가는 세라핀의 그림엔 배경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화폭엔 나무와 꽃,  과일들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녀가 표현한 꽃, 나무, 들판 등의 자연은 무언가에 홀린 듯 강렬합니다. 그 안에는 기괴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한 아름다움이 엿보였고요. 하지만 그녀의 재능은 빌헬름 우데가 발굴할 때까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 변 사람들은 하녀 주제에 무슨 그림을 그린다는 거야 하는 식으로 최하층 계급이 예술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질시와 냉대가 이어질 뿐이었습니다.

 

 

 

<Grand Bouquet au vase noir et fond bleu>,1929/ wikipedia

 

 

 

 

벽면에 그녀의 그림을 걸면 뻗어가는 에너지로 방안을 가득 채울 것만 같습니다. 영감의 원천은 신이지만 그녀 그림의 스승은 자연입니다. 세라핀은 예쁘지 않습니다. 남자처럼 큰 덩치와 손톱에 낀 검은 때, 상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정수리로 틀어 올린 머리칼, 맨발로 청소를 하거나 강가에서 빨래를 해 주고 동전을 받습니다. 다 해진 옷에 커다란 앞치마를 두르고 군화 같이 투박하고 큰 구두를 철거덕거리며 다닙니다. 빛바래고 닳아 빠진 밀짚모자를 쓰고 다니고요.

 

 

 

꽃과  나무를 수없이 그렸던 세라핀의 작품엔 눈에 보이는 사물의 모습을 넘어서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순수한 에너지와 영혼까지 모두 흡수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있는 그대로를 모두 받아들인 정도가 아니라 온몸으로 사물을 보고 함께 그들 안에서 머물 수 있었던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란 생각도 들고요.

 

 

 

본다는 것이  어떤 경지까지 갈 수 있는 것인지, 보는 것과 느끼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표현하는 것의 경지가 어는 정도 까지 갈 수 있는지. 세라핀 이라는 작가를 통해 자꾸 묻게 됩니다. 

 

 

 

<Bouquet of Flowers>/Etsy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해주세요.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아요.

 

세라핀의 이 그림을 보며 저는 '여자 '고흐'같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흐는 자신을 알아주는 평생 친구이자 동생인 테오가 있어 그래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세라핀은  믿을 곳이 신과 자연밖에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세라핀은 마치 중세 시대의 깊은 신앙심을 가진 구도자처럼 이 세상에 최초로 존재할 것 같은 열매와 나무와 꽃들을 화폭에 그려냅니다. 그녀 눈에 아름답고 보석 같은 존재들을 말이죠. 

<Apples with leaves>/Etsy

             

 

 

  세라핀이 50세가 되던 1912년 그녀에게 세상과 이어 줄 행운의 사나이가 나타납니다. 피카소를 발굴한 미술사가이자 미술품 감식가 빌헬름 우데(Wilhelm Uhde)가 주말 휴식 차 상리스의 전원주택을 빌림으로써 그녀 인생에 비로소 봄바람이 붑니다. 

 

 

 

 

그녀는  좋은 것이나  많은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큼의 노동을 원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성실히 행했을 뿐입니다. 그림이 팔리면서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남의 집 청소와 개울가에서 이불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평생 품삯으로 받은 동전만으로 물감을 사던 그녀의 손에 지폐가 쥐어졌거든요.

 

 


 

 

사진출처:전시/작가 정보- 화방넷

 

 

 

우데가 모임에 초대 받아 갔다가 판자에 그려진 한 신비스러운 사과 그림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의 전원주택 허드레 일을 하러 오는 하녀 세라핀의 그림임을 알고 전율합니다. 우데는 막 파리에서 예술적 배경이 취약한 세관원출신 화가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를 소박화가(Naive art)로서 성공적으로 주목받게 하고 온 직후였습니다. 

우데는   카미유 봉브와(Camille Bombois 1883-1970), 루이 비뱅(Louis Vivin, 1861-1936), 앙드레 보샹(Andre Bauchant, 1873-1958) 등 소박파(naive art)의 전시를 열기도 했습니다. 우데는 이들에게서 자연과 현실에 대한 경건한 태도, 그리고 원시적인 생명력을 발견해 소개했습니다.

 

 

 

 

소박파 화가들은 19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갑자기 미술양식의 교체나 변화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은 원근법이나 명암법 등을 무시하고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미술 작가들이 중요하게 생각해 온 규범들을 모두 무시하고 있었던 거죠. 이들의 공통점은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미술양식이나 운동에 무관심한 현대 미술의 아웃사이더인 셈이죠. 실제로 루소는 아프리카에 가본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파리의 동물원과 식물원을 다니며 본 것을 조합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데가 후원했던 소박파 작가들의 작품들입니다. 

 

 

 

 

<The Dream,1910>, Henri Rousseau/google Arts& culture

 

 

 

 

<Les bas noirs avec journal>,1930, Camille Bombois /Pinterest

 

루이비뱅, 화가가 된 파리의 우체부/ 국내도서-교보문고

 

<Bank of flowerw ina Landscape>, Andre Banchant/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우데는 망설임 없이 세라핀을 전폭적으로 후원합니다. 세라핀은 더 이상 일을 나가지 않고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녀가 그린 그림들은 그려지는 대로 족족 우데가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권용화의 미술 사이렌,Seraphine Louis/광명시민신문

 

 

 

 

 

 

 

 

 

 

https://www.youtube.com/watch?v=HpK_qugNHCM

 

 

 

 

 

권옹화의 미술 사이렌, Seraphine Louis/광명시민신문

 

 

 

 

 

 

               하지만 그녀의 행운은 너무도 짧았습니다. 그녀의 남은 생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얼룩져 버립니다. 1914년 8월, 독일인이었던 우데는 쫓기듯 한밤중에 프랑스 국경을 넘게 됩니다. 우데가 프랑스 거주 독일인인 데다 탈영했던 과거사가 있기 때문이었다죠. 상리스 마을 사람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칩니다.오직 세라핀만이 마을에 혼자 남았습니다.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는 비참함 속에서도 버팁니다.   그리고 13년 후인 1927년 상리스를 다시 찾아온 우데와 극적으로 재회하며 감격할 만큼 성장한 작품 세계에 놀랍니다. 우데는 파리에서 세라핀의 개인전을 열어주기로 약속하지만 당시 유럽을 강타한 경제 공황으로 전시회는 또다시 미뤄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라핀은 성당의 마리아상에 온통 분홍색칠을 하고 잠이 듭니다. 세라핀에게 서서히 정신병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죠.  세라핀의 무아지경과 정신적 망상은 통제될 수 없는 방향으로 짙어갑니다. 순백의 드레스에 면사포까지 쓰고 자신이 사들였던 촛대와 은 식기들을 동네 집집마다 문 앞에 놓고 돌아다닙니다. 천사들이 자기 전시회를 보러 올 거라고 하며 온 동네를 헤매고 다니는 것이죠.

 

 

 

 

현대미술의 아웃사이더, 나이브 아트/핸드메이커

 

 

불안과 초조가 더해진 세라핀은 결국 정신착란증으로 정신병원에 강제로 감금됩니다. 그녀는 병원에 갇혀 2차 대전 중에 다른 정신이상자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돌봄을 받지 못하며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다 1942년 사망합니다. 세라핀 이 죽고 3년 후, 우데의 노력으로 파리와 전 세계에서 그녀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녀의 본능, 세상은 예술이라 부른다./오마이스타-오마이뉴스

 

 

 

한 생명으로 움트고 자라고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 세파핀 작품 속 나무들!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가지에 가지를 뻗어 공중으로 퍼져 나가며 번성합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인류 생명의 기원과 진화의 번성의 비밀을 품은 생명의 나무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재현해 냅니다.

 

 

 

여자이고 후원자도 없이 갖은 편견에 시달리며 자신의 길을 걸어간 세라핀 루이스! 미술사의 유명 대가들 못지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득 산책길에 짓이겨 뭉개버린 작은 들꽃이 그녀의 삶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름다움을 위해 가시를 제거하기도 하고, 향기도 조작하고, 필요에 의해 둥글게 깎여지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파티에서 파트너가 없어서 춤을 추지 못하는 인기 없는 세라핀 루이스 같은 화가들 이 지금도 얼마나 많겠습니까? 부디 , 독학하는 미술가들에게도 눈 밝은 미술상 빌헬름 우데 같은 인연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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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초상화의 대가로 이름을 알렸던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 그는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미국 국적의 초상화가입니다. 윈슬로 호머, 토마스 이킨스와 함께 3대 거장으로 소재되지요. 또 19세기 미국의 인상주의 10인 화가 중 한 명으로 소개됩니다. 

 

 

 

그는 피렌체 태생의 미국화가입니다.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전통적인 형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활동을 하던 뒤랑 밑에서 다양한 기교와 강한 명암법을 배웠습니다. 스케치 없이 바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들도 배웠고요. 여행을 하며 벨라스케즈(Diego Velazquez)와 할스(Frans Hals) 같은 대가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주로 파리, 런던, 뉴욕의 상류사회 인물들을 묘사한 초상화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엠버그리스의 연기>/알라딘 모바일 서재

 

 

엠버그리스(용연향)는 향유 고래에게서 나오는 향수를 만드는 재료입니다. 향로를 피우고 온몸을  두꺼운 베일로 감싼 채 이마 앞으로 차양을 만들고 향을 스미게 하는 중입니다. 여인의 모습이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신비롭게 보입니다. 이 작품은 두 번째 살롱전시에 큰 호평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사전트는 1879-80년 사이 북아프리카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본 건물과 다른 지역의 의상과 장신구들을 결합해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제의 의식 같은 분위기를 그려냈습니다. 하얀색 농담만으로 말이죠.

 


 

 

 

<로시나 Rosina>,1878/DailyArt Magazine

 

 

 

 

1878년 카프리섬을 여행하던 사전트는 카프리 섬의 풍경과 원주민들에게 매료됩니다. 특히 열 일곱 살의 섬 소녀 로시나에 말이죠. 로시나는 그리스 혈통으로 어딘지 신비스러우면서도 열정적이고 교태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로시나가 춤추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순백의 풍성한 블라우스와  하얀 이가 살짝 드러난 입술, 여자가 봐도 매력적입니다. 마치 경쾌하고 톤 높은 웃음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리는 듯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처럼요. 

 

 

 

 

  

 


 

 

20대 초반의 서전트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돌며 그곳 거장들의 작품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베니스에서 광선과 그림자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고요. 그곳  건축물은 물론 그림자 속의 뒷골목과 그곳 사람들을 실험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역시 벨라스케스에 매료되었고, 베니스의 전문 사진 작가 카를로 나야 (Carlo Naya 1816-1882)등이 추구했던 씰루엣과 가위로 잘라낸 듯한 장면 포착 방식의 화면 구성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베니스의 거리>/작가들의 온라인 아트마켓

 

 

1882년 , 존 싱어 사전트(Jonh Singer Sargent)는  베니스, 피렌체, 시에나 그리고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30살이 된 벨리스케스가 고향 스페인을 떠나 이탈리아 지역에 2년간 머무르며 대가들의 작품에 푹 빠져든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선배화가 벨라스케스의 여행 동선과 거의 겹칩니다. 사전트 역시 벨라스케스 처럼  고전 작품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당시 벨라스케스는  단색의 그림까지도 찾아볼 수 있었던 환경 속에서 흙빛으로 이루어진 진한 톤의 그림들에 매료됩니다. 아울러 그 속에서 순간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동세와 표정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고요. 거장들의 작품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베니스에서 광선과 그림자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그곳 건축은 물론 그림자 속의 뒷골목과 그곳 사람들을 실험적으로 묘사했고요.

 

 

 

 

사전트의 초기 작품입니다. 그리 튀지 않은 몸짓이지만 그녀가 걸친 숄과 밝은 빛 스커트에서 보이는 움직임으로 보아, 실제 그녀는 빠르게 두 남자 앞을 지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교차한 두 손 , 두 남자의 주의를 피하는 듯하면서도 그들로부터의 관심은 기대하는 듯한 몸짓입니다.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한 남자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갑니다. 사전트는 후기 인상파의 방식으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인이 입은 드레스, 건물 벽면에 그려진 넓은 붓터치와 함께 마치 사진을 잘라낸 듯한 (Cropping) 구성 등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사전트는 거리가 보여주는 건축적 측면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대신 인물들의 구성과 그것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에 집중하게 합니다.

 

 

 


 

 

 

 

<달리 보이트의 딸들 The Daughters of Edward Darley Boit>,1882/wikipedia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Las Mennias,1656>/wikipedia

 

 

 

초기 작품으로 사전트에 대한 옛 거장들의 영향을 잘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는 <시녀들  Las Mennias,1656>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사용한 매우 변칙적인 스퀘어 형식은 물론, 스페인 예술가가 인물의 성격을 포착하기 위해 포즈를 취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인물들을 표현했습니다. 각 피사체마다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전통적인 그룹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구성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소녀들은 무미건조한 패션으로 보이는 어렴풋하고 깔끔하게 꾸며진 방 주위에 흩어져 있습니다. 두 개의 거대한 청백자 화병을 포함하여 배치된 가구들에 의해 왜소해 보입니다.  네 명의 소녀 중 세명은 보는이를   응시합니다. 네 번째 소녀는 흑백 앙상블을 매치한 체 여동생을 마주 보고 있고요. 마루에 앉은 막내딸 (4살) 줄리아의 편안한 자세는 자신의 뒤에 뻣뻣하게 서 있는 언니들의 자세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커다란 인형을 앞에 두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여 좋고요. 가장 나이 많은 14살의 플로렌스와 12살의 제인은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부분적으로 그늘에 가려져 있습니다.  사전트의 묘사는 개인들이 어떻게 매너와 예절의 '벽'뒤에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숨기는 경향이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당시 젊은 상류층 여성들이 길러졌던 제한적이고 억압적인 환경을 잘 드러낸 작품입니다. 

 

 

 

 

<El Jaleo>,1882/wikipedia

 

 

 

스페인 집시 댄서가 플라맹고를 추는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특히 댄서의 격정적인 포즈, 일렁이는 조명과 그림자의 표현, 펄럭이는 검은 상의와 조명이 비친 흰색 치마의 강한 대비가 매력적입니다. 왼쪽 마루 바닥 쪽에서 빛을 받아 벽에 기댄 기타 연주자들과 댄서가 자신의 감정에 몰입하다 절정을 향해 치닫는 느낌이 듭니다. 마치  실제로 공연 장면이 눈앞에 일어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사전트의 이 작품이 제일 맘에 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xLjePthwR8o

 

 

 


 

 

 

 

 

<자신의 집에 있는 닥터 포치&nbsp; Dr. Pozzi at Home>,1881/wikipedia

 

 

 

 

 

 

목과 손목에 하얀 린넨 레이스가 장식된 묵직한 트위드 재질의 붉은색 긴 실내복이 고급스럽습니다. 가운의 긴 옷자락 아래 양단슬리퍼를 신은 발이 살짝 보입니다. 이 당당하고 잘 생긴 남성이 벨 에포크 시대 사교계의 인기 남이었던 의사 '사무엘 장 포치'입니다.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를 비롯해 여인들과 스캔들이 많았다고 해요. 유명한 <마담 X의 초상>의 모델인 마담 고트로의 연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실내복의 끈에 살짝 걸친 왼손과 자연스럽게 심장 가까이 올려져 있는 긴 손가락의 섬세함이 눈길을 끕니다. 

 

 

 

<Portrait of Madame X>,1884/wikipedia

 

 

 

 

사전트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 작품입니다.  프랑스 은행가인 피에르 고트로(Pierre Gautreau)와 결혼한 버지니 아멜리 아베뇨 고트로(Virginie Amelie Avegno Gautreau)라는 이름의 미국인 국외 거주자이고 마담 X로 알려진 젊은 사교계의 명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파리 최고의 초상화가를 꿈 꾼 사전트는 더 큰 야망을 위해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그 무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같은 미국인으로 부유한 프랑스 은행가의 아내였던 사교계 최고의 미인 버지니 고트로(Virginie Gautreau)에게 접근하여 초상화를 그리자고 설득합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고트로 부인의 초상화라면 살롱에서 큰 화젯거리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고트로 부인 역시 사전트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여 모델이 되기로 합니다.

 

 

 

사전트는 대담하게 초상화 속 그녀의 어깨를 드러냅니다. 지금이야  헐리 웃  유명 배우들이 더 심한 모습을 하고 레드카펫을 밟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지만, 19세기 프랑스는 신체를 많이 드러낼수록 밤일하는 직업여성으로 오해받기 쉬웠습니다.  당당하게 드러낸 어깨, 매끈한 피부를 노출시키고 , 따뜻하고 부드럽게 완화시킨 브라운 톤을 배경으로  그녀의 두드러진 존재감을 생생하게 강조합니다. 다소 노출이 심한 코르셋을 입은 그녀가 자세를 취하고, 보석으로 장식된 얇은 끈 이 달린 검정 새틴 드레스는 그녀의 놀라운 자태를 뽐내기 충분합니다. 그녀의 적갈색 머리카락과 화장한 얼굴색이 어우러져 현대적이고  귀족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을 세운 듯합니다.

 

 

 

이 초상화를 그린 것은 사전트와 고트로 모두에게 도전이었습니다. 화가는 준비과정에서 몇 달 동안 고트로에 대한 30개 이상의 포즈를 그렸고 그림을 완성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결국 그는 여러 번 구도를 변경한 끝에 그녀의 특징적인 옆모습을 강조하는 자세를 그리기로 결정합니다.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포즈를 사용한 거죠.

 

 

1884년 파리 살롱에 열린 전시회에 이 초상화가 걸렸고 그로 말미암아 사전트는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비록 그림의 모델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경악했고요. 그들은 가슴이 깊게 파인 검은색이브닝드레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지나치게 흰 살결로 인해 죽음을 연상시키는 피부색에 혐오감을 느꼈고요. 부자연스럽게 비틀어진 오른팔에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고트로 부인의 가족은 사전트에게 그림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전트는 살롱이 끝날 때까지 그림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1916년 후반에 "내가 그린 그림 중에 그것이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하면서 성공으로 간주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 사전트의 말처럼 그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숲 가장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Painting by the Edge of a Wood, 1885>/pinterest

 

 

 

 

사전트의 수채화 작업은 일반적으로 그의 경력 후반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가 사회 엘리트들의 최고의 초상화 화가로 자리매김할 때, 일 찍이 다양한 매체와 스타일을 실험한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전트는 파리의 에콜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학창 시절에 클로드 모네(Clude Monet)를 만났고 그 후 몇 년 동안 그들의 우정은 이어집니다.

 

 

1880년대 사전트는 파리 외곽 지베르니(Giverny)에 있는 모네의 집을 수없이 방문했습니다. 그의 친구가 직접 야외에서 자연을 그리는 이 이미지에서, 사전트는 모네의 외광파 화풍의 기술로 그림을 그립니다. 모네의 두 번째 아내 앨리스(Alice)가 뒤에서 끈기 있게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고요. 비록 모네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 이미지는 이젤에서 언급되듯 하늘과 함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지만, 사전트 자신의 이미지는 잔디와 나무 위에서 반짝이는 햇살은 물론 오히려 두 인물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23.03.15 - [지식&교양] -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4)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4)

그네를 타고 있는 나를 향해 3-4명의 남자 아이들이 '수련장(참고서 이름)' 이라며 놀린 기억이 있다. 별로 나쁜 별명은 아닌데 숫기없던 내가 그때 했던 행동은 그저 가만히 땅을 내려다 보는 것

sun-n5y2.tistory.com

 

 

 

 

<Carnation , Lily,Lily,Rose>,1885-1886/wikipedia

 

 

 

 

매우 두려울 정도로 어려운 소재다. 
이 아름다운 색채를 그대로 재현할 수가 없다...
물감은 이 풍경을 묘사해 내기에 충분히 밝지 않아
영롱한 느낌들이 10여분 후 사라져 가는 느낌이다.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중에서-


파리에서 10년간 미술공부를 하며 젊고 유망한 화가로 주목받고 있었던 그는 1884년 <마담 X>가 살롱전에 공개되면서 그 선정성으로 인해 큰 물의 를 일으키게 됩니다.  결국 쏟아지는 비난 속에 파리를 떠났고 활동무대를 영국 런던으로 옮깁니다. 사전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초상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초상화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을 시도하였습니다.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인상파적 기법과 색채로 영국과 미국의 인상주의 화풍 확립에 크게 이바지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가 인상주의 방식으로 야외에서 그린 몇 안 되는 인물 작품 중 하나입니다. 색감이 너무 예쁜 작품이지요. 1885년 여름 그는 미국 예술가 에드윈 오스틴 아비(Edwin Austin Abbey)와 함께 팡번(Pangbourne)에서 템즈 강으로 뱃놀이를 갔다 다이빙을 하던 중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인근의 브로드웨이 빌리지의 코츠월드(Cotswolds)로 옮겨져 치료를 받게 됩니다. 그곳은 영국과 미국의 젊은 작가들이 여름 휴양지로 보내는 예술인 마을이었습니다. 요양을 하면서 그곳의 평화로운 정경과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그는 같은 해 9월부터 우스터셔(Wowcestershire) 브로드웨이에 있는 프란시스 데이비스 밀레(Francis Davis Millet)의 집에 머물면서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밀레의 다섯 살 난 딸 캐서린(Katharine)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일러스트 작가 프레데릭 바나드(Frederick Barnard)의 딸인 폴리(Polly)와 도로시 바나드(Dorothy Barnard)로 대체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전트가 찾고 있던 정확한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11살의 돌리는 왼쪽에 있고, 7살의 폴리는 오른쪽에 있습니다. 여름의 어슴푸레한 저녁 무렵 두 명의 소녀가 정원에서 등불을 밝히는 모습을 화폭에 담고자 한 사전트는 그림에 착수하면서 그 시간이 고작 몇 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혹해합니다. 그는 첫 해에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이듬해 여름 같은 장소로 와 작품을 계속 진행합니다.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라는 다소 시적인 제목은 당시 유행하였던 노래 가사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꽃과 소녀, 등불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이 작품은 빛이 사라져 가는 무렵의 어스름과 그때의 주변의 색채, 분위기 등을 탁월하게 재현하여 작품의 제목만큼이나 시적인 풍경을 선사합니다.  그 짧은 순간을 화폭 위에 영원히 정지시켜 놓아 보는 이에게 깊은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작품은 1887년 로열 아카데미 전에 전시되어 큰 호응을 얻었으며, 사전트를 일약 영국 화단의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자벨라 스튜어트 가드너의 초상&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Isabella Stewart Gardner>,1888/wikipedia

 

 

 

 

가드너 부인의 초상화는 사전트가 1888년 1월 보스턴을 방문하는 동안 제작되었습니다. <Madame X, (1884)>를 둘러싼 소란이 잠잠해지자, 사전트는 영국에서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곧 인기를 얻습니다. 사전트는 미국인들로부터도 초상화 주문을 받았는데, 그중에서 보스턴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설립했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의 주문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사벨라(Isabella)는 사촌이 구입한 플라멩코 댄서를 묘사한 <엘 할레오(El Jaleo)>를 보고 1882년 사전트를 알게 되었으며, 1888년 자신의 초상화를 주문합니다. 그는 이 초상화에 대해 $3000의 돈을 받았고요.  이 초상화는 보스턴의 세인트 보톨프 클럽(St. Botolph Club)에서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마담 X>에 비하여 이사벨라의 초상화는 품위를 지킨 그림이었거든요. 하지만 이 그림이 보스턴에서 전시되었을 때, 이사벨라의 깊게 파인 옷은 물의 를 일으켰고 그녀의 남편은 이 그림을 다시는 전시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간청했습니다. 실제로 그 초상화는 가드너 부인이 죽을 때까지 비공개로 남아 있던 고딕 방에 놓여 있게 됩니다.

 

 

 

 

 독특한 배경이 이 그림의 가장 인상적인 요소이긴 합니다. 대칭적이며 동시에 정면을 향하고 있는 모델의 자세도 사전트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결합이고요. 그림의 배경은 가드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15세기의 벨벳 문직 작품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전트는 문양을 확대하여 이사벨라의 머리 주위에 후광이 둘러진 것 같은 효과를 창출해 냅니다. 결과적으로 이 그림은 성상의 분위기를 띠게 되었지요. 소설가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비잔틴 성모 마리아'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이사벨라와 사전트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사벨라는 사전트의 초상화를 22점이나 구입했으며 영향력 있는 고객을 소개해 주었지요. 1920년 이사벨라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사전트는 오랜 우정에 대한 찬사로 애정 어린 초상화를 그려 이사벨라의 호의에 보답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YOdl9jjfMo

 

 

 


칼 메이어 부인과 그녀의 자녀들 Mrs.Carl Meyer and Her Children,1896/The Jewish Museum

 

 

 

 

 사전트의 명성을 얻게 된 상류층 초상화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아델 메이어(Adele Meyer), 아들 프랭크(Frank), 딸 엘시(Elsie)의 모습입니다. 메이어 준 남작은 영국의 은행가 겸 다이아몬드 광산업자로,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과 드 비어스 그룸(De Beers gruop)과의 인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메이어(Meyer)와 같은 부유한 부호들은 가장 돋보이고 매력 넘치는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방법을 찾습니다.  예술가의 흠잡을 데 없는 재능을 사용하여 엘리트 사회 내에서 그들의 부와 지위를 전달하기 위해 사전트 같은 성공한 예술가들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는 방법으로 말이죠.

 

 

 

가족의 복장과 이미지 안에 포함된 가구는 18세기 영국의 화려함을 자아냅니다. 정교하게 무늬를 새긴 금색 소파가 부티 납니다.   메이어 부인의 가운의 무지갯빛 장미 비단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사전트는 런던 상류층의 호화로운 일원으로서 그녀의 명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호화로운 사치품들로 메이어를 에워쌌습니다.

 

 

 

사전트가 돋보이게 하는 세부사항들, 즉 소재들은  마치  반 다이크(Van Dyck)와 같은 가장 성공적인 올드 마스터 초상화가들이 사용한 방법에서 빌려온 듯합니다. 소파 뒤에서 어깨 위로만 드러내며 시야에서 주로 가려진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앞과 중앙에 메이어 부인이 배치되어 있는 것은 세 사람 사이의 가족적인 관계를 암시합니다. 메이어 부인에게는 아이들보다 주변환경의 매력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의 매력을 부각하는 것이 분명히 더 중요했을 테니까요. 

 

 


 

 

<베두인족 Bedouins>,1905-1906/kor.animalia-life.club

 

 

 

1905년 9월부터 1906년 1월까지 사전트는 예루살렘(Jerusalem), 시리아(Syria), 베이루트(Beirut)를 방문하면서 당시 오스만 레반트(Ottoman Lebant)로 알려진 곳을 두루 여행합니다. 그는  그 지역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고, 이러한 관심을 레반트(Levant)의 고고학과 게트루드 벨(Gertrude Bell)에 의해 깊어졌습니다.

 

 

사전트는 말을 타고 여행을 했으며, 요르단 계곡의 천막 생활을 하는 아랍 유목민 베두인족 캠프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후에 보스턴 공공도서관(Boston Public Library)의 그의 광범위한 벽화 사이클인 <종교의 승리(Triumph of Religion(1895-1916)>의 영감으로 그 여행의 경험을   참고하기도 했지요. 비록  그  남성들의 복장뿐만 아니라 주변환경에 대한 처리에서도 인상적인 방식이 두드러집니다. 유명한 그의 초상화들과 같은 사실주의적  뉘앙스와 디테일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강렬한 인디고 블루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남성들의 이국적인 눈빛도 한 몫하고요. 따뜻한 갈색, 후크시아 톤의 팔레트로 따뜻한 색 표현을 했습니다.  남자들의 머리 스카프는 하얀 구아슈 하이라이트로 장식되어 사막의 한낮의 타는 듯한 열기를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Gassed,1919/wikipedia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대 피터 부뤼헬/리포르 만다

 

 

 

1918년부터 사전트는 영국 정보부에 고용되어 군인들의 전시 경험, 영미 협력 정신을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준비하기 위해 사전트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최전방에 있는 군인들을 방했고요. 높이 7.5m, 길이 20피트 이상의 이 그림은 아주 큰 사이즈로 독일의 독가스 공격의 여파를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색 팔레트는 칙칙한 카키, 그린, 베이지색이 지배적입니다. 사전트의 다른 많은 작품들과 극명하게  대비되고요. 전경에 한 무리, 배경에 한 무리로 보이는 두 무리의 부상자 군단이 가스의 영향으로 시야가 흐려져 서로의 어깨를 잡고 의료지원 텐트를 향해 행진합니다. 수많은 시체들이 길가에 널려 있고요. 한 줄로 늘어선 부상자들은 대 피터 부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이 그린 프랑드르 르네상스 그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The Blind Leading the Blind,1568>를 떠올리게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시에서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생화학 무기를 사용합니다. 독가스는 노출된 피부에, 그리고 흡입하면 폐에 큰 물집이 생기죠.  노출 후 약 24시간이 지나야 효과가 나타나고, 반드시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고통스럽습니다. 느리고 힘겨운 행군 중인 남자들 사이의 동지애를  느낄지 모르지만, 결국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발 앞에 있는 죽은 남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될지 참담한 기분입니다. 

 

 

 

이 그림은 E.M. 포스터(Edward Mprgan Fprster)와 버지니아 울프(Virgomoa Woolf>와 같은 저명한 작가들과 사회 비평가들에 의해 공격받기도 하고 환영받기도 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야(Goya), 피카소(Picasso)등 다른 위인들을 포함한 전쟁의 잔혹함에 헌신한 많은 걸작들 중 하나입니다.

 

 


 

<Nude Study of Thomas E. McKeller>,1917-1920/wekipedia

 

 

 

남자의 누드가 참 낯섭니다. 고대 그리스 조각 작품이 아닌 일상에서 보는 남성의 몸이라 더 그런가 봅니다. 아마 남성들도 여성의 누드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비슷한 느낌 아닐까 싶습니다. 포즈가 난감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서 말이죠. 후반기에 사전트는 많은 남성 누드를 그렸습니다. 이 작품들 대부분은 그의 생전에 전시되지 않았습니다.

 

 

 

작품들 중에 보스턴 호텔의 엘리베이터 기사인 맥켈라(McKellar)의 여러 연구가 있습니다. 맥컬리의 강인하고 근육질의 몸매가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깃털로 덮인 날개와 빛나는 푸른 백색의 빛으로 보이는 것과 함께 그의 뒤에 석벽에 대한 화가의 묘사는 그가 인간과 신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 그림은 1986년 보스턴 미술관에 의해 구입되기 전까지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전트는 남성 나체, 특히 맥컬러에 대한 연구는 최근 사람들에게 그의 매력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학문적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화가의 탐구는 그를 제리코(Gericault)나 앵그르(ingres) 같은 초기 현대 거장과 연결시킵니다. 이들 작품에서 언급된 기술은 그들이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사교계의 상류층을 사로잡기 위해 헌신한 경력 내에 숨겨야 할 필요성을 느낀 그의 관심사였죠. 사전트의 성적 선호도는 여전히 불분명합니다. 사전트가 내성적이고 냉담한 독신남이라는 주류적 이미지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면이기도 하고요.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는 모델의 내면을 예리하게 파악해 내고 부각하며 세련되고 우아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미국 국적의 사전트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영어 외외도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요. 미국과 영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 미국과 유럽의 장점 만을 받아들여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화가로 보입니다. 평생 900점가량의 오일 페인팅과 2000점 이상의 수채화를 그렸고 수 없이 많은 스케치와 드로잉을 남겼습니다.

 

 

1922년  뉴욕 그랜드 센트럴 내 아트 갤러리를 오픈하며, 그랜드센트럴 미술학교도 창립했습니다. 1924년 이 갤러리에서 사전트의 회고전을 열었죠. 이듬해 1925년 4월 14일 영국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합니다.  사생활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유럽에서 거주하며 미국은 작품 활동 때에만 방문합니다. 그의 작품 중 유명 작품들은 대부분 미국 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미국인 화가 빅 3으로 소개되는 이유일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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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짧은 강아지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견종 '웰시코기'입니다. 그 짧은 다리로도 너무나 신나고 빠르게 잘 뛰며 활발하고 사랑이 넘치는 견종이죠. 웰시코기(Wales Corgi)는 영국 웨일즈 태생으로 웨일즈어로 웨일즈(Welsh)의 난쟁이(Cor) 개(gi)로 "웨일즈의 난쟁이 강아지"라는 뜻입니다. 영국에서는 큰 강아지들이 많다 보니 웰시코기는 작은 강아지로 불리나 봅니다.

 

 

원래 꼬리가 짧은 강아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꼬리를 자르는 전통은 목양견 계통의 '견종'이기에 가축이나 말 들에게 꼬리가 밟히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 외관상의 이유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유럽과 일부 나라에서  불법입니다. 

 

 

  수명: 12-15살

체고: 25-32cm

체중: 12-17kg

 

 

 

웰시 코기/나무위키

 

 

 

웰시코기는 '펨브로크 웰시코기'와 '카디건 웰시코기'두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웰시코기는 '펨브로크 웰시코기'입니다. 두 종류는  몸집의 크기나, 꼬리의 길이, 귀의 크기 등으로 구분이 되며 '펨브로크 웰시코기'는 말 그대로 웨일스의 '펨브로크'지역에서 유래되었습니다.   

 

 

 

in West Wales, pembroke/Erw Wen

 

       

 

 

 

 

Pembroke Welsh Corgi/ Daily Paws

 

 

두 강아지는 1934년 영국켄넬클럽에서 별도의 견종이라고 분류하기 전까지는 같은 견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교배도 자주 있어서 현재에 두 견종의 모습은 아주 비슷해졌습니다. 그 덕분에 딱 봐서 한 번에 그 차이를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덩치 입니다. 카디건이 펨브룩에 비해 살 짝 크고 무거운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코기라고 부르는 견종은 보통 펨브룩을 말한다고 합니다. 카디건은 그 수도 적고 키우는 분도 아주 드물다고 합니다. 하지만 견종의 역사는 카디건 쪽이 더 길다고 합니다.

 

 

 

Cardigan welsh Corgis/Embark

 

웰시 코기 펨부룩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1100년경 프랑스인이 웨일스의 펨브룩셔 지방에 반입했다는 설이 있고 스웨덴 주변에 살 던 개가 바다를 건너온 것이 아닐까?라는 설도 있습니다. 11세기 후반에 영국에 살고 있었고, 12세기 초에는 영국의 왕, 헨리 2세의 사랑을 받아 왕실의 개가 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반면  카디건은 3-4천 년 전부터 중부 유럽에서 영국 웨일스로 들어왔다가, 카디건 지방에서 목축 개로 활약했다고 하는 것이 지금의 이름으로 이어졌다는 설입니다. 1930년대에는 영국 왕실에서 길러지기도 했습니다.

 

 

 

왕실견'웰시 코기'마지막 후손 , 세상 떠나/조선일보

 

 

 

 

 

 

 

 

 

성격은 두 견종 모두 활발하고, 사교적이며, 적극적이고, 호기심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직 목축견이다보니 경계심도 강하고요. 카디건 쪽이 조금 더 다혈질이라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카디건 쪽이 귀가 조금 더 크고 길쭉한 느낌입니다. 약간 더 작고 앙증맞은 쪽이 펨브룩 이라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결국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골격과 덩치인 것 같습니다. 가끔 꼬리를 자르지 않은 펨브룩을 카디건이라고 속여 분양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QdYYRFV-3s  

 

 

 

 

대부분의 목양견 출신들이 그러하듯 활기차고 발랄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리하기까지 해서 사고를 쳐도 창으적으로 칩니다. 이 정도면 '산책을 아주 적극적으로 해줘야겠다!'싶으실 겁니다. 충성심이 뛰어나고 사회성도 워낙 밝은 성향이라 친구들과 재미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합니다. 혹여 와일드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 소형견 혹은 체급 차이가 너무 나는 대형견과 첫 만남 때에는 주의해 주셔야 합니다.'웰시'가 강렬히 산책을 원할 때는 희한한 방법을 다 동원하는 영리한 친구들입니다. 하네스를 물어오기도 하고 주인이 미동도 하지 않으면 목줄을 가져오고 그래도 안되면 신발까지 물어올 수 있습니다.

 

 

 

 

리가 짧은 친구들은 높은 곳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부분을 항상 주의 해 주셔야 합니다. 성격상 겁이 많거나 도전 정신이 없는 '웰시'는 별로 없으니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계단이나 소파, 침대에서 잘 뛰어 올라가고 내려오고 합니다. 하지만 무수히 반복되면 허리나 다리에 좋지 않다는 걸 개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보호자들이 신경 써야 할 부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0THOfCHCgk     

 

 

 

 

 

 

털빠짐이 상당히 많은 편에 속하는 견종입니다. 단모에 이중모입니다. 생후 4-5개월령부터 본격적으로 털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365일 털이 빠지지만 특히 봄가을에 심해집니다. 미용은 특별히 할 필요는 없지만 엉덩이 부분을 가위 컷 정도 해주시면 더욱 풍성한 엉덩이를 볼 수 있습니다. 빗질을 자주 해주셔야 합니다. 빗질할 때마다 털이 강아지 한 마리씩은 나오게 됩니다.

 

 

 

 

보통 강아지들은 산책 한번 다녀오면 2-3시간은 적어도 자고 일어나는데 이 녀석들은 금방일어나 목줄을 가져오며 견주들 쉴 틈을 주지 않습니다.  목양견이다 보니 활동성이 남다릅니다. 어릴 때 사고도 많이 치고 낭 들어도 넘치는 활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산책을 자주 시켜주세요. 

 

 

 

다른 종보다 신부전, 요도 폐쇄, 눈 질환(PRA, 녹내장), 디스크, 관절염, Hip dysplasia(고관절 이형성), 피부병, 비만  등에 쉽게 노출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 노령에 발생하는 질병이니 6살 이후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상담과 검사받아 보시기 권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uayaUmXf0M

 

 

 

정말 이쁘고 사랑스런 견종 '웰시 코기'입니다. 보기에 최고의 견종이지만 함께 한 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이왕 마음을 정하셨다면 끝까지 책임지시는 견주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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