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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은퇴한 선배가 작은 아들을 데리고 1박을 하고  갔습니다. 예전 같으면 귀찮다고 궁시렁 거릴텐데, 이젠 그들을 대하는 제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선배의 지난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같은 역사가 내 삶 안으로 잠시 걸어 들어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흐트러졌던 일상을 부리나케 정리해야 했습니다. 치우고 버리고 그리고 갈무리하면서 제 일상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외부로부터 누군가 와야 긴장이 생깁니다. 알면서도 관성에 의해 못 본 척 , 아닌 척했던 살림살이를 원 위치 시켜 놓느라 부산을 떨게 됩니다. 

 

 

이제 몇 번을 서로 보고 살 지 장담할 수 없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그 쓸모를 알아가기 위해 남은 시간을 공들여 살아겠지요.  30년 넘게 '아비'노릇 하느라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엄지 척해드렸습니다.  버텨온 시간은  영광일 수도 상처일 수도 있는 흔적들을 몸에 남기죠. 선배 역시 억지로 채식주의자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좋아하던 술친구들 뒤로 하고 이제 혼자 등산을 한다고 합니다. 술이라는 매개체가 없으니 자연히 인간관계의 가지치기가 저절로 되었고요. 서로 가끔씩 오래 보는 관계로 선배의 인생 컨셉이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오늘은  시대를 거슬러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스테인(Jan Steen , 1626-1679)의 삶을 살펴봅니다. 

 

 

얀 스텐(Jan Steen)은 렘브란트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다 간 화가입니다. 렘브란트보다 20년 뒤에 태어나 그보다 10년 뒤에 죽었으니까요. 그는 렘브란트처럼 무겁고 비장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가정과 일상을 주제로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 친근한 그림을 많이 그렸지요. 인간의 심리에 대한 그의 통찰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놀라울 정도입니다. 물론 야심을 지닌 화가로서 그는 풍속 주제뿐 아니라 종교, 역사, 신화, 풍경, 초상, 정물 주제 등 회화의 거의 모든 주제와 장르에 관심을 갖고 그 모두를 넘나들었던 화가 입니다. 그러나 그를 오늘날까지 유명하게 해 주고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남은 것은 대부분 당대 네덜란드의 일상풍속을 다룬 풍속화들입니다. 네덜란드 판 김홍도 같은 화가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얀 스텐(Jan Steen)은 세태를 꼬집는 당대의 속담에 의지해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663년에 그린 <사치를 조심하라> 또한 네덜란드 속담에 기초한 그의 걸작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일이 잘 풀릴수록, 상황이 좋아질수록, 오히려 이를 경계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라는 권면을 담은 그림입니다.

 

 

 

Beware of Luxury , 1663, Kunsthistorisches Musem Wien, Vienna/wikipedia

 

 

 

 

풍족할 때 조심하라. 그리고 회초리를 두려워하라.
-네달란드 속담-

 

 

 

 

 

아수라장이 따로 없습니다. 아주 번잡해 보이는 실내에서 한 여인이 앉아 졸고 있습니다. 값비싼 반코트를 입은 그림 왼편의 여인이 그 주인공이죠. 그녀가 졸고 있는 사이, 집안은 개판이 되었습니다. 소란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요. 여인은 여전히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 모릅니다. 왼쪽 창가부터 살펴볼까요. 테이블 위의 차려놓은 음식은 개가 먹어치우고 있는 중입니다.  아기는 음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값비싼 목걸이를 가지고 놀고 있고요. 뒤쪽의 남자아이는 곰방대를 입에 물고 어른 흉내를 냅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인 듯한 남자는 화면 중앙에서 하녀와 시시덕거리며 수작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빨리 일어나라고 안주인의 어깨라도 잡아 흔들고 싶을 정도입니다. 망조가 들어도 큰 망조가 든 집안입니다.  다른 등장인물들과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 음식들, 그리고 등장한 돼지까지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된 집안의 형편을 생생히 드러낸 작품입니다.  이 그림을 그리며 얀 스텐(Jan Steen)은 염두에 둔 속담을 그림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놓인 석판에 써 놓았습니다.

 

 

 

졸고 있는 부인이나 하녀와 수작을 부리는 남편이나 다 잘 차려입었고 세간도 이만하면 잘 갖춰져 있습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집이죠.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때는 건실한 삶을 살지만 성취하고 난 다음에는 패가망신하기 쉽습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 좋은 일이 있을수록 스스로 돌아보아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 를 기울여야 하지요. 이 집은 바로 그 교훈을 잊고 있기에 이처럼 뿌리부터 허물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죠.  얀 스텐(Jan Steen)은 그 속담을 강조하기 위해 천장에 매달린 바구니에 칼과 목발을 그려 넣었습니다. 칼과 목발은 징벌의 상징입니다. 집안이 이렇게 돌아가는데도 여인이 계속 졸고 있다면 징벌을 피할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물론 징벌은 여인에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집안사람에게 뻗칠 수밖에 없죠.

 

 

 

이 그림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림의 중심이 주부라는 것이죠. 서양회화에서 주부들의 일상이 본격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한 것은 시민사회의 부상과 더불어서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이렇듯 주부들의 중요한 소재로 조명 받기 전, 유럽에서는 오로지 귀족 여성들의 화려한 이미지만이 캔버스를 수놓았습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애당초 귀부인 초상은 일반적인 주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평민 여성은 그려진다 해도 주부로서 보다는 농촌 일에 바쁜 농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려지곤 했습니다. 가정 안에서 사랑으로 아이들을 기르고 부지런히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며 때로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기도 하는 전형적인 가정부부의 모습은 도시 부르주아의 등장 없이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미지입니다. 시민 공화국을 형성한 17세기의  네덜란드에서 서양 미술사상 처음으로 주부 주제가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자상한 어머니만큼 가정의 행복을 위해 중요한 존재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자연히 주부의 덕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졌지요. 물론 이런 의식은 당시의 네덜란드를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데 적지 않게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안에 다소 가부장적인 편견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치를 조심하라>의 바람을 피우는 남편에서 보듯 집안의 문제에는 남편의 잘못도 큰데, 그 모든 원인이 아내에게 있는 듯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zJlu2Q4kSg

 

 

 

 

 

 

플래그 네덜란드지도,레이덴(Leiden)/123RF

 

 

 

https://www.youtube.com/watch?v=YLDe6uMr5o4

 

 

 

 

 

얀 스테(Jan Steen)은 레이덴(Leiden)에서 잘 나가는 양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제가 몇 명이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8명 이상 되었던 듯합니다. 그래도 집안이 유복한 편이었기에 라틴어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이후 위트레흐트에서 독일인 화가 니콜라우스 크뉘페를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얀 스텐의 독특한 구성과 색채는 무엇보다 크뉘퍼에게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큽니다. 크뉘퍼 외에 농촌 풍속을 즐게 그린 오스타데 형제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1648년 유명한 풍경화가 얀 판 호이옌의 조수가  되었다가 이듬해 호이옌의 딸과 결혼합니다. 이런 밀접한 관계로 인해 장인인 호이예와는 네덜란드의 미술시장이 침체되는 1654년까지 줄곧 협업을 했습니다. 얀 스텐(Jan Steen)이 해학과 유머가 넘치는 풍속화를 그리게 된 바탕에는 무엇보다 가업 등 집안 배경이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조부에 이어 2대째 양조업을 했고, 얀 스텐 또한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으나 한때 양조업을 했습니다. 당시 양조업을 하노라면 보통 선술집도 같이 운영하게 되는데, 어릴 때부터 선술집 풍경에 익숙했던 그로서는 그곳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후에 야조장과 선술집 대신 여관을 운영해 가정 경제를 보완했습니다. 여관 또한 선술집 못지않게 인간을 관찰하는데 그만인 곳이었죠.

 

 

 

 

 

Prayer before a Meal/Jan Steen, 1660/wikipedia

 

 

 

한 가정이 식사전 빙 둘러앉아 감사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금처럼 음식이 넘쳐나  오히려 단식을 통해 인위적인 조절을 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복이었죠. 비록 흰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이 빵과 버터 그리고 끓고 있는 수프가 전부인 소박한 상차림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두 손을 모으고 가족이 올리는 감사기도가 위에서 보시기 기특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하는 마음만큼 귀한 것도 없을 테니까요. 이 와중에  테이블 아래 강아지는 빵 부스러기라도 떨어질까 싶어 기다리는 모양입니다. 개한테까지 돌아갈 빵 부스러기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요람 속에 고이 잠든 아기의 모습, 촘촘하게 짜인 요람형태 바구니가 집에 하나 있었으면 할 정도로 탐이 납니다.  모자를 벗고 위를 향해 드리는 진지한 기도, 아가의 고사리 손으로 드리는 기도,  안주인의 두 손가락을 마주 모은 기도, 가장의 두툼한 손을 모은 기도 등 기도의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이들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등을 돌린 채 가족의 맛난 수프를 끓이고 있는 여인의 바쁜 손놀림, 그 사이 삐집고 들어온 붉은 화덕의 온기가  단출한 집안의 차가운 공기를 따뜻하게 덥히는 것 같습니다. 

 

 

 

 

<Country Wedding>,1662-1666/wikimedia Commons

 

 

 

 

 

 

아주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골 결혼식 피로연 풍경입니다. 그림 맨 왼쪽의 두 남녀는 좀 진한 애정 표현 중입니다. 남자가 나이든 걸로 봐서는 썩 유쾌한 관계는 아닌 것 같고요. 어린 소녀는 할머니에게 음료수를 가져다줍니다. 아니면 춤추는 두 남녀의 모습에 넋 놓고 계시는 할머니 것을 슬쩍 빼앗아  가는 것일 수도 있고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동작이 신이 나야 분위기가 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나 봅니다.  의자 위로 올라간 걸 보면 말입니다. 그 옆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미 술이 거나한 모습들입니다. 오랜만에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죠.  안부를 전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다락방에 있는 사내에게도 음식을 전달하기 위해 아주머니는 잘 굽혀지지 않는 몸을 힘껏 뻗고 있습니다. 춤을 추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어렵게 무대로 끌려 나오다시피 한 아주머니가 수줍은 듯 그러나 싫지 않은 듯 남자의 발재간에 자신도 스텝을 옮겨 봅니다.  '나는 잘 못하는데~ '하는 표정입니다만 혹시 모르죠. 그녀가 퀸카 일 수도 있을지.. 조금 뒤가 궁금해집니다. 그나마 초대받지 못한 아이들은 창 밖에서 멍하게 보는 것 이외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오래간만에 강아지도 뼈다귀와 인간들 흥 구경에 넋을 놓고 있네요. 자리를 제대로 잡았는데요.

 

 

 

 

Twelfth -Night Feast, 1662/wikimedia commons

 

 

 

 

12절은 우리에게 낯선 이름입니다. 크리스마스로부터 12일 째 되는 날을 말하는데, 대개 1월 6일입니다. 이 날이 의미가 있는 것은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만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죠.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이날 와플을 먹었다고 합니다. 식탁에 빙 둘러 않은 사람들의 표정이 유쾌합니다. 가운데 켜 놓은 촛불을 등을 보이는 사람이 막고 있어서 입체감이 더 커졌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 자리에 참석한 듯합니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아이는 아이들끼리 그렇게 아기 예수가 세상에 도착하였음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의사의 왕진 The Physician's visit, 1658-1662/wikipedia

 

 

 

아픈 여인을 위해 의사가 왕진을 왔지만 분위기는 별로 심각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프다는 환자나 맥을 짚고 있는 의사나 표정이 묘합니다.  아마 여인이 앓고 있는 병은 상사병일 것입니다. 상사병에 별 다른 약이 없지요. 하녀가 들고 있는 노란색 액체가 든 유리 병이 '상사병'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고 해요. 애가 탄 하녀는 표정이 어둡지만 죽을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의사는 차마 상사병이라는 말을 하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더구나 의자 뒤에 앉아 있는 활을 든 꼬마의 모습은 큐피드를 떠올리게 합니다. 

 

 

 

 

 

Rhetoricians at a Window, 1658-1665,Philadelphia Museum of Art/ Wikimedia

 

 

 

얀스텐(Jan Steen)이  연극을 좋아했던 것도 '인간 극장'을 즐겨 그린 그의 중요한 자양분이 되어주었습니다. 그가 연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수사학회 멤버들을 자주 그렸던 데서 잘 드러납니다. 네덜란드의 수사학회 (Chambers of rhetoric)는 극회로 , 그 멤버들을 수사학자(Rederijkers, 영어로 Rhetoricians)라 부르던 데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습니다. 이들은 연극과 서정시에 주로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도시의 권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공공 집회에서 도시 홍보의 일환으로 시를 낭송하고 연극을 공연하곤 했습니다. 연극에 대한 얀스텐의 이런 호감은 그의 그림이 일종의 연극적 전개로 표현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풍속화적인 주제와 연극적인 표현은 매우 잘 어울리는 것이어서, 그 적절한 조화를 이룬 그의 그림은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드 놀이가 끝난 뒤의 싸움 Argunent over a Card Game, 1664-1665/ Alamy

 

 

 

 

카드놀이가 끝났지만 두 사람은 참지 못하고 서로의 무기를 빼 들었습니다. 바닥에 나 뒹구는 카드와 그릇을 보니 누군가 놀이판을 뒤집은 모양입니다. 두 사람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가 됩니다. 왼쪽의 사내는 옷도 그럴듯하고 칼을 찼습니다. 아이와 여인이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필사적으로 말리고 있고요. 반면에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은 비록 송곳 정도의 작은 칼을 들고 있지만 아주 강해 보입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앉아 있는 사람에게 서 있는 사내가 당한 모양입니다. 오른쪽 구경하는 사람들은 이런 광경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들입니다. 자기보다 배운 것이 없을 것 같아서 깔보았다가 아주 심하게 당한 모습입니다. 

 

 

 

 

<The happy family>,1668, Rijksmuseum,Amsterdam/wikipedia

 

 

 

 

 

어른들이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도 재잘댄다.
-네덜란드 속담-

 

 

 

 

 

얀 스텐(Jan Steen)의 또 다른 걸작인 <즐거운 가족>도 속담에 의지한 작품입니다. 온 가족이 왁자지껄 음악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격식을 갖춘 공연은 아니지만, 세상 그  어느 공연보다 흥이 납니다. 할아버지는 술잔을 높이 치켜든 채 노래를 부르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함께 악보를 보며 정답게 음정을 맞춥니다. 아빠와 아들도 백파이프와 피리 연주에 깊이 빠져 있고요. 그런데 그 와중에 어린아이들은 딴짓을 합니다. 심지어 담뱃대를 빠는 아이도 있고요. 여자 아이들은 술 따르는 시늉을 하고 한 잔 받아 먹는 소꿉놀이 중인가요? 쟁반과 숟갈 등이 바닥에 떨어져 난장판이 되었지만 그것에 신경을 쓰는 가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장단을 맞추는 이 시간이 그저 즐겁고 행복할 뿐이죠. 그림 오른쪽 상단에 속담이 적혀 있습니다. 

 

 

 

아래 세대는 윗세대를  따라 하기 마련이죠.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우리 속담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속담이라하겠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어른이 먼저 본을 보이는 게 중요하지요. 그림에서 어른들이  저렇게 인생을 즐겁게 사니 아이들도 장차 삶을 유쾌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먼저 즐겁게  놀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죠. 이 그림에서처럼 바닥이 어지럽혀져 있고 심지어 아이가 담뱃대를 들고 있는 복썽사나운 모습까지 연출된다면  자칫 삶을 낭비하는 잘못된 습관을 길러줄 수 있습니다. 인생을 즐기되  그것이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얀 스텐(Jan Steen)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그림입니다.

 

 

 

 

Celebrating the Birth, 1664, Wallace Collection,London.UK/WahooArt.com

 

 

 

 

가정을 주제로 한 얀 스텐(Jan Steen)의 그림들 가운데 1664년 작품 <아기 탄생 축하 Celebrating the Birth >입니다. 방금 산모가 해산을 한 산실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당연히 대부분 여성들이죠. 화면 왼편 뒤쪽으로 이 사건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산모가 침대에 누워 죽을 받아먹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주 작게 표현되어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그 앞으로 친척과 하녀로 보이는 여성들이 방금 전까지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덜려는 듯 식탁 주위로 모여들어 술과 음식을 나누려고 합니다. 물론 이 축복의 자리에는  남성도 함께 하고 있고요. 대표적인  인물이 아기를 안고 있는 아기의 아버지 입니다. 그는 화면 중심에서 약간 오른쪽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그림에서는 보통 아기 엄마가 조명을 받는데, 이 그림에서는 오히려 아기 아빠가 크게 부각되어 있습니다. 화가는 왜 이렇게 구성했을까요?

 

 

 

 

그  열쇠를 쥐고 있는 이가 아기 아빠 왼쪽에 그려진 남성입니다. 지금 방에서 살금살금 밖으로 나가려 하는 그는 아기 머리 위에 특이한 제스처로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입니다. 언뜻 보면 'V'자 같기도 하고요. 젊은 이의 이 손짓은 아기의 아버지가 오쟁이 진 남편 , 곧 '부정한 아내'를 둔 남편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기의 탄생으로 누구보다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남자가 실은 진짜 아버지가 아니며, 어리석게도 그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갓난아기의 아버지 치고 남자는  꽤 나이가 들어 보입니다. 그는 어린 여자와 결혼해 이렇게 노년에 손자 같은 아기를  품에 안게 되었지만 , 실은 그가 성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을 화가는 그림 여러 곳에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이를테면 그림 왼편  바닥에 놓여 있는 온열 팬은 이 부부의 침대를  덥히는 게 두 사람의 뜨거운 육체가 아니라 바로 이 팬뿐임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른편 벽난로에 소시지가 축 늘어진 형태로 매달려 있는 것도 남자의 성적 무능력을 상징하는 이미지입니다. 이렇게 오쟁이(자기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다) 진 남편이 되었음에도 그는 그 '출생의 비밀'을 까맣게 모른 채 그에게  수고비를 달라는 산파와 요리하는 여인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돈을 꺼내 주려 합니다. 이 그림이 이런 유머에 실어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이 무렵 나이 든 남자가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자와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대부분 정략결혼이죠. 이처럼 돈이나 욕심을 앞세운 결혼은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하게 만든다는 거죠. 좋은 가정을 이루려면 먼저 헛된 욕심을 버리고 여러 가지 면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짝을 찾는 게 우선이라고 충고합니다. 

 

 

 

 

소년과 소녀들을 위한 학교 A School for Boys and Girls,1670/Wikimedia Commons

 

 

 

 

 

이곳이 교실 맞습니까? 난장판이 따로 없습니다. 교실은 분명한데 공부를 하는 녀석은 몇 안되고 완전히 놀이판의 모습입니다. 어제 밤 뭘 했길래 잠을 자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책상 위에 올라가 듣던 말든  노래를 부르는 모습 같기도 하고, 아니면  "선생님, 제네 싸워요."하고 이르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끼리끼리 어울려 놀이에 빠진 아이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남자 선생님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딴청을 피우시네요. 권위가 옷차림에만 있는 건 아닐 텐데 말입니다. 여 선생님은 그 와중에도 아이를 가르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소란스럽고  어지럽지만 그 안에도 학업열 불타오르는 영민한 아이들은 있을 테니까요.  나이 성별 차이 없이 한 교실에서 함께 부딪끼며 배운 모습입니다. 무엇에도 얽매임이 없는 아이들의 에너지와 호기심이  얀 스텐(Jan Steen)의 그림을 살려냅니다. 

 

 

 

 

 

 

 

The Severe Teacher, 1668/ PubHist

 

 

 

 

 

"이 녀석 이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지!"

아이의 손은 벌써 눈가에 가 있습니다. 더듬거리며 읽는 아이 뒤에 서 있는 여자 아이는 이미 겁에 질렸습니다. 맨 앞에 앉은 아이는 여유있어 보입니다. 선생님 테스트에 패스했나 봅니다. 궁둥이 붙이고 앉은 자세가 훨씬 여유로워 보여 말이죠. 스테인 작품 속에는 특히 아이들의 표정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미 당대의 렘브란트 다음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작품 가격도 비교적 높았다고 합니다. 

 

 

 

Netherlands Map/ wikipedia in interlingua

 

 

https://www.youtube.com/watch?v=MBTx1WKNUh8

 

 

 

 

 

 

 

1648, 스텐은 헤이그에 있는 스승 호이옌의 집으로 이사합니다. 그리고 호이옌과 함께 작업을 합니다. 1649년 , 스물 세 살이 되던 해, 그는 호이옌의 딸 마그리트와 결혼합니다. 둘 사이에 여덟 명의 아이를 두었다고 합니다. 스테인은 1654년까지 호이옌과 함께 작업을 하다가 델프트로 이사를 합니다. 

 

 

 

 

 

결혼 계약 Marriage Contract, 1668/ Web Gallery of Art

 

 

 

 

결혼은 기쁘고 즐거운 것이어야 하는데, 벌어진 상황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습니다. 무릎을 끓고 신부를 간청하는 남자는 평판이 좋지 않은 귀족이거나 동네의 돈 많은 유지겠지요. 호시탐탐 이 집 아가씨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중매쟁이를 세워 결혼에 이르게 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 결혼이 못 마땅한 아버지는 신랑에게 주먹을 쥐어 보입니다.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아비를 곁에 있는 여인이 다독입니다.   딸아이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슬픔 그 자체입니다. 뻔히 알면서도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 보입니다.  반면 계약서를 작성하는 사람이나 문을 열고  너스레를 떨며 들어오는 남성의 입가에 벌써 미소가 걸렸습니다. 이 가정에 닥친   황당한 사연은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델프트 폭발 사고로 미술 시장은 급격하게 축소됩니다. 그래도 생계는 중요해 양조장을 빌려 2년간 운영했지만 별 재미는 보지 못했습니다. 양조장을 접은 스테인은 다시 라이덴으로 이사를 가서 4년간 살다가 하를렘으로 옮겨 10년 간 머뭅니다. 라이덴괴 하를럼에서 사는 동안 스테인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합니다. 

 

 

 

The Doctor and His Patient/ wikimedia commons

 

 

 

 

 

 

스테인은 의사와 환자를 소재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 작품은  여성 환자의 맥을 짚고 있는 의사의 모습인데, 작품마다 담고 있는 내용은 조금씩 다릅니다. 작품 속 여인의 얼굴은  웃고 있어 환자 같지 않습니다.  여인은 지금 임신중이거든요.  한의사가 맥을 짚듯  17세기 네덜란드 의사들도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환한 여인의 얼굴이  이해가 되고요. 집안에 경사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The Village Schol, 1670, National Gallery of IREAND

 

 

 

스승과 제자의 사랑, 김 홍도 그림 <서당>/우리문화신문

 

 

 

김홍도의 그림으로 치자면 훈장님이 곰방대가 아닌 숟가락 같은 무기로 아이를  혼내시는 중입니다.

 

"손바닥 이리내!"

선생님 말씀에 벌써 부터 우는 시늉을 합니다. 녀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시험지에 이런 낙서만 잔뜩 해 놓았군요. 녀석은 상습범인가 봅니다. 엉엉 대고 우는 모습이 아니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눈치거든요. 그 걸 알고 있는지 옆에 소녀의 표정은 '아이, 셈통이다.'뭐 이런 표정입니다.  보고 있던 꼬맹이 표정이 사뭇  심각합니다. 안쓰럽게 바라보는 걸 까요? 까만 눈에 통통한 볼살이 아주  귀엽습니다.  깨알 같은 글씨를 읽고 있는지 모자를 푹 눌러쓴 녀석  혼날까 봐 마음이 바쁩니다. 그 뒤에 머리 하나 큰  아이는  비상입니다.  친구 매 맞는 모습이 남 일 같지 않거든요. 엎드려 답안지를 고치는 녀석도 있고. 아무튼 큰 시험이든 작은 시험이든 '시험'은 항상 불친절합니다.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니까요. 

 

 

 

 

연회 The Bean Feast( Driekoningenfeest), 1668/wikipedia

 

 

 

 

<Bean-feast>는 1년에 한 번 고용주가 한 턱 내는 것을 말합니다. 가운데 앉은 두 남녀가 오늘 연회를 열어 준 주인집 부부입니다.  흥이 오른 사내가 '개인기'를 선 보이고 취기가 오른 여인은 이미 온 몸을 의자에 맡겼습니다. 여전히 술병은 손에 쥔 채로 말입니다. 그 모습이 우스운지 개가 물끄러미 사내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악사는 연주보다 저 자리에 편안히 앉아 동료들과 음식을 먹고 싶습니다. 들어오는 음식에 눈길이 멎는 걸 보면 말입니다. 왜 아니겠어요.  이런 자리는 고단한 사람들에게 기름기 들어간 음식 한 번 실컷 먹어볼 수 있는 손꼽아 기다린 날 아닙니까.  주인집 부부가 감탄하고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니 남자의 개인기는 오늘 성공한 것 같습니다. 

 

 

 

 

 

 

 

 

 

Leaving the Tavern/wikiMedia Commons

 

 

술집 앞 풍경은 어디나 비슷한가 봅니다. 한 무리의 남녀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며 쏟아져 나옵니다. 한 남자는 이미 뱃전을 잡고 비몽사몽 잠에 골아 떨어진 지 오래이고요.  운하를  운행하는 배에 오른 사람들은 술 한 통 사들고 오는 남성을 보자마자 환호성을 지릅니다. 나무 밑에 자리를 잡은 여인은 이미 술에 취해 잠이 들었습니다. 붉은 천 위에 앉은 남녀는 남은 이야기를 나누느라  표정이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혼자 노는 저 아이는 도대체 누구 집 아이죠? 떠들썩한 소리에 개까지 컹컹 짖으며 한 수 보탭니다. 나무 뒤편으로 카드놀이를 하는 한 무리의 남자들도 보이고 내려다보며 훈수 두는 남성도 보이네요.  창문 너머로 이 모든 것을 넘어다 보는 여인도 보입니다. 그녀 눈에 그들은 한심한 남자들일까요? 아니면 한몫 잡고 싶은 남자들일까요? 술집이 매력 있는 이유는 마음을 무장 해제 시키는 까닭이겠지요. 그림 속  이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어떻게 관찰했는지 작가의 섬세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네덜란드 하를렘(Haarlem)/pinterest

 

 

https://www.youtube.com/watch?v=nbBy2uvdNvA

 

 

 

 

 

 

 

인간 삶의 불행은 항상 연달아 옵니다. 1669년 하를렘(Haarlem)에서 사는 동안  스테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납니다. 또 그 해 스테인은 약국을 갖게 되면서 10 플로린(네덜란드 은화의 단위)이라는 얼마 되지 않은 부채를 지게 되는데, 빚을 못 갚았는지 그림을 압수당하고 경매에 넘겨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 스테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1670년 스테인은 자신의 고향 라이덴으로 다시 이사를 합니다. 

 

 

 

 

 

성 니콜라우스 축제 The Feast of St. Nicholas , 1665-1668, Rijksmuseum , Amsterdam/wikipedia

 

 

 

 

 

 

성 니콜라우스는 오늘 날 산타클로스의 모델이라고 여져지는 인물입니다. 그를 기리는 축제가 성 니콜라우스 축제입니다. 당연히 오늘날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가져다주실 거라고 아이들은 기다리고 있었겠지요. 선물을 받은 여자 아니도 있고 그렇지 못한 아이는 울음보가 터졌네요. 벌써 알고 커튼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 있는 뒤쪽 여인의 모습도 눈에 들어옵니다. 한 젊은 아버지는 아마 저기 저 굴뚝을 통해 내려오셔라고 하시는지 아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합니다. 

 

 

 

 

 

 

 

라이덴(Leiden)으로 돌아 온 스테인은 1672년 선술집 허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달갑지 않은 일이 발생합니다. 소위 '재난의 해'라고 말해지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의 네덜란드 침공이 있었습니다. 이 사태로 인해 모든 예술과 관련된 가계와 극장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스테인은 1673년 서적상의 미망인이었던 에그문트와 재혼합니다. 둘 사이에 역시 아이가 하나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 자신이 창립 멤버였던 라이덴의 성 루카 길드의 회장으로 선출됩니다. 그리고 1679년  53세의 나이로 고향인 라이덴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당대 렘브란트를 제외하고 모든 네덜란드 화가들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평을 받은 화가로 말입니다. 

 

 

Leiden, Hague, Delft,Haarlem으로 이곳저곳 이사를 다녔던 얀 스테인(Jan Steen). 새로운 스타일을 끝없이 추구했던 그에게는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천성이 밝고 사교적이라  여러 화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의 작품의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중 아마 가장 즐거운 화가였을 것이라는 말도 있고요. 그의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을 받는  풍속화가  그를  더 인간적 가깝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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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6 - [지식&교양] - 50-95.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t Harmenszoon van Rijn,57)

 

50-95.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t Harmenszoon van Rijn,57)

17세기 유럽 역사의 주인공은 네덜란드였습니다. 동인도회사를 통한 국제무역과 금융의 융성으로 돈이 넘쳐났거든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 던 암스테르담에 네덜란드 독립과 함께

sun-n5y2.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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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도시 피렌체. 르네상스 시대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피렌체. 피렌체라는 인류의 문화 콘테츠가 탄생하게 된 것은 정복자 줄리어스 시저 덕분입니다.  그는 기원전 59년 이곳 피렌체를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들면서 아르노 강가의 이 작은 마을을 "꽃 피는 마을"이란 뜻의 "플로렌티아"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후로 플로렌스는 변방의 마을로 지속되어 오다가 14-15세기에 이르러 도시국가 피렌체 공화국으로 탄생합니다. 피렌체 공화국에는 강력한 메디치 가문이 있었습니다.  메디치가의 정예군 검은 군단은 일대를 휩쓸며 이 일대를 코스카나 공국으로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피렌체는 그 수도가  되었습니다.

 

 

 

3명의 교황을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ser Pier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를 필두로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 모두 메디치가의 후원 아래 수많은 작품을 피렌체에 남겼습니다. 이 시기가 사실상 피렌체의 황금시대입니다.  

 

 

 

 

오늘 살펴 볼,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hllini, 1500-1571))는 1500년 11월 3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조반니 첼리니( Giovanni Celini )는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음악가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웠지요. 실제로 유명한 플룻 연주자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에서 활동할 때에는 플룻으로 유명해져 교황 직할 연주단에서 플룻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그는 금세공사인 안토니오 마르코네 디 산드로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피렌체인들은 첼리니를 그들의 자랑스러운 금세공의 원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피렌체의 오래된 다리 양쪽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은방들이 들어선 폰테 베키오에(Poner Vecchio)는 첼리니(Celini)를 기념하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Fx2lmnrr8g

 

 

 

 

 

 

 

 

Cellini Salt Cellar, 1543,26cm*33.5cm/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GY8ymP-1Eck

 

 

 


1543년 프랑수아 1세를 위해 황금 소금통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았고요. 조각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살리에라( Saliera )황금 소금통은 높이 가 고작 26cm 밖에 안 되는 작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 섬세함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대단한 작품입니다. 살리에라는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금세공 기술의 끝을 보여주는 걸작 중에 걸작으로 꼽힙니다. 이 작품은 2003년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hes Museum)에서 도난을 당했고 2006년 다시 찾게 됩니다. 

 

 

 

 

이 금세공의 초상의 작품인 소금 그릇의 제작동기와 디자인의 상징적인 의미, 그리고 완성하는 과정 등의 설명이 자세하게 그의 자서전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의  프랑스 체류는 왕의 애첩의 질투와  갈등으로 1545년  퐁테블루의 작업을 미 완성한 채 피렌체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틸리아 /몽트래블 유럽 여행

 

15살때 금세공술을 배웠습니다. 단 1년 만에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피렌체에서 유명해집니다. 작품 실력이 아니라 친구들과 난동을 부리다가 잡혀서 유명해졌습니다. 그렇게 약 6개월간 시에나( Siena)로 도망을 갔습니다. 프란체스코 카스트로 밑에서 도제생활을 했고요. 프라카스트로(Fracastoro)라는 가명으로 금세공 일을 했습니다.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볼로냐( Bologna)로 옮겨 활동했고 그곳에서 플룻과 금세공사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피사( Pisa)로 옮겼다가 다시 로마로 옮겼습니다. 이 모든 일이 그가 20살이 되기 전의 일입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이탈리아 북부를 다 쓸고 다녔다는 얘기죠.

 

 

 

로마에서  첼리니는 귀족 가문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훌륭한 플루트 연주자였던 그는 궁정 음악가로 임명되어, 교황 클레멘트 7세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첼리니는 특히 교황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1527년 로마 방어 전투에 참가하여 침략자인 부르봉의 공작 카를 3세를 사살한 그의 용맹성이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입니다. 첼리니는 곧 피렌체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교황이 그의 공로를 인정해 포상으로 두루 여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좋은 직장을 찾아 로마로, 페라라로 만투아로 베네치아로 프랑스의 퐁텐블로로 옮겨 다녔다는 얘기입니다. 교황 클레멘테 7세와 바오로 3세, 프랑스의 프랑스와 1세와 수없는 추기경들과 군주들을 찾아 57세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타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타향살이가 그의 출세하려는 야심과 동시에 전염병과 전쟁을 피하려는 방편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Leda and the Swan/wikipedia

 

 

 

 

Cellini's Medal portrait of Clement VII and morse, 1534/wikipedia

 

 

 

 

Clement VII medallion/wikipedia

 

 

로마에서 내려온 20살 의 벤베누토 첼리니(Benveuto Cellini)는 은세공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주로 촛대 등 작은 소품으로 시작해 귀족 집안의 황금 레다와 백조 메달 작업을 하는 등 그의 실력과 명성은 금방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황 클레멘스 7세 (Clement VII)와 바오로 3세( Paul III ) 아래에서 교황의 초상이 들어간 메달과 동전 및 각종 보석 작업을 맡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세공 실력은 당시 유럽 최고였습니다. 

 

 

 

 

첼리니는  일생동안 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샤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강점했을 때 (1527)그는 교황 클레멘테 7세가 피난해 있던 산 안젤로 성곽에서 임시 차용당한 대포의 사격수로 생명을 걸고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전쟁자금이 필요했던 교황 클레멘테는 첼리니를 불러 그 성곽에서 교회의 삼중관의 보석들을 떼어내어 감추고 금들을 녹이게 할 만큼 그를 신뢰했습니다. 1534년 발생한 그의 경쟁자인 폼페이오 데 카프티네이의  살인사건과 로마 강점시대에 교황 클레멘테의 보물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1538년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무죄를 주장한 자서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 당시의 취조 문서가 발견되어 증명되었습니다. 

 

 

 

 

첼리니는 아이러니칼하게 이 사건과 모략 때문에 자기가 교황청을 방어한 바로 그 산 안젤로 성곽의 동굴에 교황 바오로 3세에 의 해 감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높은 성곽에서 다리를 부수면서까지 대담하게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러다 다시 체포되어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석방되었습니다. 그가 더럽고 햇빛도 들지 않는 동굴 감옥에서 겪었던 고통 속에서 신앙적으로 그는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아틀라스/ 위키백과

 

 

 

벤베누토 첼리니는 다시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서 세공사 일에 전념합니다. 이 시기의 걸작은 헤라클레스와 네메아의 사자입니다. 네메아의 사자는 그리스 신화 속 네메아 골짜기에 살고 있는 불사신으로 영웅 헤라클레스가 아폴론 신에게 받은 12가지 과업 중 첫 번째 임무를 담은 작품입니다.

 

 

 

또 다른 한 점은 천구를 지고 있는 아틀라스입니다.  아틀라스는 티탄(Titan)신족의 하나로, 크로노스의 형제 중 한 명인 이아페토스(lapetos , 힘의 신)의 아들입니다. 제우스와는 사촌 지간이죠.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을 위시한 새로운 올림포스의 신족들과, 원래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티탄 신족들 간의 싸움인 티타노마키아에서 티탄 신족은 패배합니다. 그 이후 제우스에 대항했던 티탄 신족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봉인 (주로는 지하 세계인 타르타로스에 갇히게 되었죠)되거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일부 티탄 신족들은 일찌감치 제우스 편을 들어 무사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아틀라스는 대부분의 티탄 신족들과 마찬가지로 제우스와 맞서 싸웠기에 패배에 대한 벌을 받게 되었고, 그가 받은 형벌은 하늘을 떠받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조각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아틀라스의 왼쪽 무릎에 피라미드 지지대를 놓은 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탈리아 /나무위키

 

 

 

 

 1529년 ,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동생 체치노(Cecchino)가 교황 경비대원을 죽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역시 병사의 총에 맞아 상처가 심하게 났고  결국 체치노 역시 죽게 됩니다. 그런데 벤베누토 첼리니는 이 소식을 듣고 쫓아 내려가서 동생에게 총을 쏜 병사를 찾아가 살인을 하게 됩니다. 체치노에게 총을 쏜 병사는 자기 방어로 발사를 했는데 말이죠. 이렇게 쫓기게 된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교황청 관할구역 밖인 나폴리 공국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가는 중에도 작은  사고를 많이 쳤는데 새로운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사면이 됐습니다. 이 정도라면 조용히 살아야 할 텐데 또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이번에 라이벌 세공사 폼페오 (Pompeo)를 살해한 것입니다.

 

 

 

 

1540년 새 교황 바오로 3세의 호의로 사면을 받게 됩니다. 석방된 첼리니는 프랑스와 1세(Francis I)의 초청으로 파리와 퐁텐블로 에서 작품을 만들어 명성을 얻습니다.  당시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받았던 것과 같은 높은 보수와 성을 거처로 받았고요. 그는 왕이 자주 찾아와 작품들을 보려고 할 정도로 높은 신망을 얻는 조각가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작은 크기의 세공 작품이지만 조각도 틈틈이 했습니다.  건축 작업으로는 파리 남쪽의 퐁텐블로 성 (Chateau de fontainebleau)이 걸작으로 남아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rwVLiVjhNg

 

 

 

 

 

 

 

 

 

 

Nymph of Fontainebleau, bronzw, by Benvenuto Cellini, 1542-1543(205*409cm)/wikipedia

 

Close-up view of the original broze by Cellini

 

 

 

 

 

 

 

 

 

 

 

https://www.youtube.com/watch?v=BhxD0JTXoKY

 

 

 

 

 

 

벤베누토 첼리니의 또 한 점 걸작은 퐁테블로 요정 청동 부조입니다. 요염한 자세로 누워있는 요정은 마치 침대에 누워있는 티치아노와 다른 거장들의 비너스와 비슷한 포즈로 배경 아치 중앙 상단의 뿔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1540년,  '프랑수아 1세의  왕실로 초청되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만든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퐁텐블로 궁전' 정문에 올릴 거대한 청동 '팀파늄 Tympan' 주조상이었죠.

 

 

 

 

하지만, '프랑수와 1세'의 아들 '앙리 2세 Henri II가 왕위에 오르자, 엉뚱하게도 왕의 정부이던 '디안느 드 뿌와띠에 Diane de Poitier'의 소유지 '아네 성 (Chateau d'Anet)'에 세워집니다. 왕궁에 있던 물건이 왕의 정부가 거주하던 성의 장식으로 쓰이게 된거죠.  프랑스 대혁명이 진행되던, 1797년 '루브르 박물관'으로 들어오게 되고 현재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를 보고 계단을 올라가노라면 볼 수 있습니다. 

 

 

 

 

 

 

 

 

 

 

Seal of Cardinal Ippolito d' Este,1540, Musee des Beaux-Arts, Lyon/Wga.hu

 

 

 

 

그 외에 이폴리토 데스테( Ippolito d'Este )추기경의 의뢰로 만든  은 조각상 12개의 신과 여신은 또 하나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Benvenuto Cellini Satyr;Description of the artwork/Arthive

 

 

Benvenuto Cellini,<A Satyr>,1544-1545/Album online

 

 

 

 

 

 

 

 

 

 

 

<Statue of Cellini,Piazzale degli Uffizi, Florence>/wikipedia

 

우피치 미술관에 서 있는 벤베누토 첼리니의  모습입니다.

 

 

이후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메디치가 의 코시모 1세를 위해 일합니다. 청동상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1545-1554)를 제작하고요.

 

 

 

 

 

 

 

 

 

 

<Perseus with the head of Medusa>,1545,Bronze/Flickr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Perseus with the Head of Medusa), 페르세우스는 사람을 돌로 변하게 만드는 뱀 머리를 가진 괴물 메두사를 퇴치한 영웅입니다. 회랑 안에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상'이 보입니다.   단연 압도적인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애제자 답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1j-gPKAcDA

 

 

 

 

 

 

 

1545년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돌아와 코시모 메디치( Cosimo de'Medici) 아래서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의 조각상이 모여 있는 로자 데이 란치( the Loggia dei Lanzi)에 코시모 메디치의 청동상과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는 그의 조각 실력 역시 거장 급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직접 용광로를 건설하였습니다.

 

 

 

첼리니가  고향 피렌체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로마에서 일하던 미켈란젤로를 고향으로  데려오려던 그의 노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죽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미켈란젤로의 장례식에 칠레니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회화계를 대표하는 바사리와 조각계를 대표하는 첼리니가 장례식의 절차와 장소로 의견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첼리니는 조각가로서의 미켈란젤로를 추념하기를 원했으나 바사리가 자신의 주장대로 관철했기 때문이죠. 

 

 

 

 

<가니메데스Ganymede>,1547, Broze,Muse Nazionale del Bargello,Florence/Wga.hu

 

 

 

독수리를 탄 트로이의 미 소년 , 가니메데스(Ganymede)입니다. 브론즈로 만들어진  높이 62m 작품으로 피렌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니메데스(Ganymedes)는 트로이의 왕 트로스(Tros)와 칼리로에(Calirrhoe)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중 한 명으로, 일로스(llus)와 아사라코스(Assaracus)가 그의 나머지 형제들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 (Homeros)에 따르면 가니메데스는 필멸의 인간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미남이었다고 합니다. <일리아스(llias)와 대결하게 된 트로이의 왕족 아이네이아스(Aeneas)가 자신의 혈통을 자랑하며 읊어 내려간 조상들 가운데 가니메데스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등장합니다.

 

 

신들이  가니메데스를 제일 잘 생겼다는 이유로 데려간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12 신들에게는 그들의 먹는 음식 암브로시아 (Ambrosia)와 음료 넥타르(Nectar)를  시중 들어줄 이가 필요했습니다. 신들의 식생활을 담당하는 이 중요한 임무는 이전까지 젊음의 신 헤베(Hebe)가  맡고 있었죠. 그런데 헤베는 마침 불사의 몸이 되어 천상으로 올라온 헤라클레스(Heracles)와 전격 결혼을 하면서 (혹은 발목을 다치게 되면서 ) 일을 그만두게 됩니다. 공석이 생긴 것이죠.

 

 

 

이에  신들은 이 임무를 맡길만한 이를 물색하던 차에 제우스의 강력 추천으로 가니메데스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제우스는 트로이 출신의 아름다운 왕자 가니메데스에게 일찌감치 매료되어 있었거든요. 신화 기록가들에 따라 제우스가 그를 데려온 과정은 조금씩 다르게 묘사됩니다. 신의 본모습으로 직접 내려가서 데려왔다는 설도 있고 또는 신조인 독수리를 보내서, 혹은 독수리로 변해서 이다 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가니메데스를  낚아채 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가니메데스는 천상에 올라와 헤베로부터 술잔을 넘겨받음으로써 신들의 , 그중에서도 특히 제우스의 음식 식사 시중을  드는 이가 되었습니다. 

 

 

 

초기의  신화가 대체로 헤베를 대신해 신들의 식사와 음료를 나르는 임무를 맡게 된 가니메데스의 일화를 언급하고 있다면 후기로 갈수록 점차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가니메데스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이들이 동성애적 코드가 부각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 시대에 활동한 그리스 출신의 작가 루키아노스 (Lukiano)는 <대화편(Dialogi)>에서 제우스의 가니메데스에 대한 사랑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헤라의 입장을 실감 나게 서술한 바 있습니다. 훗날 트로이 전쟁에서 헤라가 그리스 군의 편을 들어 가니메데스의 조국인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데에 일조한 것은 이러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헤라의 거센 반대와 지탄에도 불구하고 제우스는 자신이 데려온 소년의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불멸의 암말 두 필, 또는 포도나무 한 그루를 하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니메데스는 제우스 옆에서 남은 일생 동안 그의 시중 역할을 다 하다가 밤하늘을 수놓는 '물병자리'성좌가 되어 '독수리자리'옆에 놓였습니다.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여신 또는 여인들이 대부분 고된 탄압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성인 남자와 소년의 관계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동성애와는 분명 다른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조각상이 아니라 살과 영혼이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Cristo Crucificado, Benvenuto Cellini, 1562/Pinterest

 

 

 

 

 

젊어서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비드상을 보고 반한 그가 실제로 로마에서 미켈란젤로를 만났는데, 오다가다 스쳐지나 만난 것 같습니다. 이후로 미켈란젤로를 존경하게 됩니다. 그 역시 미켈란젤로만큼 성공한 예술가로 명성을 날리고 싶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가였기 때문에 그 역시 조각에 많은 노력을 들였습니다. 그렇게 나온 걸작으로 실물 크기의 십자가형은 실제 사람의 크기로 대리석을 깎아 만든 걸작입니다. 단지 예수의  성기까지 노출을 시켰다는 것과 근육질 몸매로 만들었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걸린 예수의 팔 근육의 모양과 힘 빠진 얼굴 표정은 몇 년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스케치한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온건해진 첼리니는 1558년 수도 생활에 들어갑니다. 그는 감옥에서 체험했던 환영에 기초해 대형 <십자가 고난상>(1562)를 만들었습니다. '나의 죄 흰 눈과 같이 깨끗하게 하소서. '그는 하얀 상아와 대리석 마불로 십자가의 처형을 조각하면서 그 십자가 아래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서전을 집필합니다.

 

 

 

 

 

 

 

 

 

Cellin's Crucifix at El Escorial Monastery/wikipedia

 

 

Studies by Benvenuto Cellini, drawing/ArtPaintingArtist

 

 

 

 

 

 

 

Dell'oreficeria("On the Goldsmith's Art",1811)/wikipedia

 

 

 

 

 

첼리니의 말년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1557년, 5년 전에 저지른 사건에 대한 고소로 그는 금 50 스쿠디의 벌금과 4년 징역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군주 코시모 1세의 개입으로 실형은 가택연금으로 감형되고요. 어떤 작품이나 외부 활동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심정에서 그는 승려가 되려고 수도사 서약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이 서약을 파기합니다. 이 기간에 그는 자서전을 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직접 썼으나 시간 낭비가 심해 이웃에 있는 학생을 시켜서 자기의 회고록을 받아쓰게 했습니다. 이 자서전은 4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성됩니다. 1567년, 원고를 축소하여 자비로 피렌체에서 출판합니다.  전문가들은 그의 자서전을 참고하긴 하지만 내용이 너무 과장되어 있기 때문에 걸러내고 작품의 연도와 큰 사건의 시기 등 기록이 없는 자료를 찾는 데 유용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자서전을 통해  미켈란젤로에 대한 존경심을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해지고 싶은 그의 마음과 그의 종교관도 볼 수 있고요. 그리고 16세기 당시 로마, 피렌체, 밀라노, 나폴리 및 프랑스에서 미술계는 물론이고 주변 인물들의 이름과 활동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점은  벤베누토 첼리니가 어떻게 살리에라 같은 걸작을 만들 수 있었는지 확실한 과정에 대해서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열렬한 기백과 강한 개성을 풍기는 이 자서전은 비록 개인적이고 사적인 기록이지만 르네상스 시대 활동하던 예술가들의 전기를 쓴 것으로 잘 알려진 조르주 바사리 (Giorgio Vasari)의 <미술가 열전> 평전과 더불어 르네상스 시대와 피렌체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자서전을 쓰는 동안에 틈틈이 금세공 작업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금세공업과 조각에 대한 논문도 썼습니다. 1571년 2월 13일 , 70세의 나이로 벤베누토 첼리니는 피렌체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571년 사망한 첼리니는 피렌체의 한 교회에서 아카데미아의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후 그곳에 매장됩니다.  그의 작품과 인생을 기념하는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군중과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서로 입장하려고 밀치곤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굴곡진 삶을 살았던 첼리니의 자서전을 발견한 사람은 대문호 괴테입니다. 괴테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피렌체에 와서 '벤베누토 첼리니의 자서전'을 발견하죠. 대문호 괴테의 손에 의해 가장 먼저 독일어로 출판됩니다. 또한 초현실 주의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가 첼리니 자서전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는 초현실주의 아트북 벤베누토 첼리니의 일러스트북을 출판하기도 했고요. 이밖에도 이 자서전을 통해 작가, 화가, 음악가 등이 치명적인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19세기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 극작가 폴 뫼리스 (Paul Meurice, 1818-1905), 루이 갈레(Louis Gallet),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현대의 애거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빅토르 위고,  나다니엘 호손  등 이 그들입니다. 

 

 

 

<특별영상>

Hector Berlioz(1803-1869): Benvenuto Cellini, OP. 23/ Valeru Gergiev- Salzburg 2007

 

 

 

 

 

https://www.youtube.com/watch?v=a82dmk0p5Rc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음악축제 (Salzburg Festival ) 때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rk) 지휘한 오페라 무대입니다. 거의 3시간에 가까운 작품이에요. 시간 여유있게 잡으시고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벤베누토 첼리니> 오페라.

이탈리아의 유명한 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인 '벤베누토 첼리니'가 아름다운 여인 테레자를 사랑한 이야기를 엮은 오페라입니다. 

 

줄거리: 피렌체 출신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는 교황 재무관인 발두치의 딸 테레사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에겐 아버지가 정한 약혼자가 이미 있었죠. 테레사는 약혼자인 피에라모스카의 여자가 되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었습니다. 금세공사 첼리니와 교황 재무관의 딸 테레사는 그녀의 아버지 발두치의 눈을 피해 피렌체로 도망갈 계획을 세웁니다. 카니발 기간을 틈타 도망가려던 그들의 계획은 테레사의 약혼자 피에라모스카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첼리니가 살인혐으로 교수형에 처할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피에라모스카의 모략으로 살인범이 된 벤베누토 첼리니는 신에 대적해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갑니다. 첼리니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의뢰한 페르세우스 동상을 완성하는 조건으로 사형을 면하게 되고, 갖은 고초 끝에 동상을 완성하여 명성과 사랑을 모두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등장인물:

 

벤베누토 첼리니(조각가 겸 금 세공사)

지아코모 발두치 (교황청 회계책임자)

피에라모스카(교황청의 조각가)

교황 클레멘트 7세

폼페오(피에라모스카의 친구)

테레자(발두티의 딸)

아스카니오(첼리니의 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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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간은 참여와 소통, 시간과 역사성을 기본으로 한 삶의 다양성을 담고 있습니다. 예술을 매개로 한 사람들의 커뮤니티를 포함하지요.  또한 현재 거주하는 구성원의 기억이나 쟁점, 요구들이 뒤섞여  있기도 하고요.  아니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의존한 채 생을 잇고 있는 이들에 의해 공유되어 온 흔적들이 깃들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소개할 작가 '하우메 플렌자(Jaume Plensa)'는 '공공미술'의 가장 근원적인 의미를 구현하는 작가로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야외 조각엔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경고문이 늘 따라붙어요.
그 뒤에 생략된 게 무언지 아세요?
쓰다듬어 달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처럼 애정을 갖고 대하란 말이죠.
그게 공공 미술을 대하는 제 태도입니다. 

-하이메 플렌자 (Jaume Plensa)

 

 

 

 

 

1955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한 '하우메 플렌자'는 첫 전시를 미로미술관(Fundacio Joan Miro, Barcelona, Spain,1980)에서 개최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이후 매년 3~6회씩 세계 여러 곳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미국, 독일, 영국 등에서 공공미술, 드로잉, 조각 작업을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습니다. 

 

 

 

 

<연금술사 Alchemist>,2010 MIT, Cambridge,Massachusetts,USA-Public Space/Jaume Plensa

 

 

 

흰색바탕의 숫자와 기호들이 질서있게 웅크린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연금술사 Alchemist,2010>입니다. 트인 구조로 만들어져 있어 마치 어머니 자궁처럼 아늑한 맛도 있습니다. 공부하다 지친 학생들이 오며 가며 한 번쯤 앉아 생각들을 정리하거나 멍 때리기 참 좋은 장소 같습니다.  게다가 시원하게 안팎이 뚫려 있어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빛 그리고 주변 경관들과 잘 어우러져 있고요.

 

 

지금도 하우메 플렌자의 작품은 예술이 사람들과 어떻게 교감하고 소통하는지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미술과 사회, 사회와 공공장소 사이의 대화를 강조하는 새로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nt)의 원형에 따라 늘 새로운 작업으로 도출됩니다.  그의 작품이 들어선 곳은 어디서나  세계 미술계의 화제가 됩니다.  지역 주민들에게  자부심으로  어깨 으쓱하게 만들고요. 

 

 

 

 

 

<크라운 분수대 Crown Fontain >,2004, 시카고 밀레니엄 공원 /HMAP

 

 

시카고 지도 맵 시카고

 

 

 

 

 

https://www.youtube.com/watch?v=Ma4LmhYlVLQ

 

 

 

<크라운 분수대 Crown Fontain>(2004)입니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를 찾는 많은 시민들에게 휴식과 즐거움을 제공하며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세계적인 작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플렌자에 의 해 디자인 되고 시카고 주민들의 아이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이 분수는 LED스크린에 시민 1000명 얼굴이 13분마다 번갈아 나타나는 참여형 예술 작품입니다. 즉 '공동체'에 주목하고 '공공성의 실현'에 목적을 두는 방향에서 완성되는 '미술적 가치의 실현'을 이룬 작업이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크라운 분수대>의 초기 작업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현재는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시계이자, 분수가  다시  작업을  시작하면 봄이 시작된다는 내용을 신문에 발표할 만큼 명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4년 6개월간 정부를 설득해야 했습니다.  분수대를 설치하는 건축 작업과 정밀한 기술팀과의 오랜 협업도 필요했습니다. 물론 주민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없었다면 실현되지 못할 공공미술이었죠.

 

 

예술계에서 권위 있는 상 중의 하나인 '세계 미술상 (Grand Fine Art)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예술 분야에 권위 있는  상으로 프리츠커 건축상 (Pritzker Prize: 건축 분야 권위 있는 상, 매년 한 명 건축가에게 수여), 터너 판화상(Turner Prize: 영국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 1984년부터 매년  영국 작가에게 수여), 휴고 보스 상 (Hugo Boss Prize: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수여하는 현대미술 분야의 권위 있는 상) 등이 있습니다. 수상혜택으로 상금(휴고 보스상의 경우 10만 달러) , 전시 기회, 작품 구매 , 그리고 후원 및 지원을 제공합니다. 

 

 

 

 

Conversation a Nice, 2007, Place Mussena, Nice/Jaume Plensa

 

 

 

프랑스 , 니스 지도 /좋은지도 지도 좋은

 

 

하우메 플렌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은 당대의 현대미술이라 생각하기에 자신을 어느 형식이나 장르에 규정짓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미술이 직접적인 공공에 개입하여 주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며 미술이 일상에 녹아 미적 정서를 고취시키는 역학을 한다면 일단 공공기제로써의 공공미술의 기능성, 정체성은 확보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The Dream>,2009, Sutton Manor, Liverpool,U.K/Jaume Plensa

 

 

 

Where is Liverpool,UK/Whereig.com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가 2009년 영국 리버풀 인근 서턴 매너(Shtton Manor)에 설치한 공공 조각 작품입니다. 높이 20m의 거대한 여성 머리 형상으로, 눈을 감고 있는 명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콘크리트와 스페인 돌로미트 자갈로 제작되었으며, 373톤의 무게입니다.

 

 

과거 석탄 광산 부지에 설치되어 지역의 산업 유산을 상징합니다. 영국 리버풀 폐광지역 전직 광부들과 함께 조각한 작품이지요.  1,880만 파운드 (약 280억 원)의 제작비용이 들었습니다.  'Dream'은 영국 최고 조각상인 마시 조각상(2009), 영국 콘크리트 연합 창의성상(2009)등을 수상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생기 잃은 도시에 지역 주민들의 염원을 담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Onc9JJQRrg

 

 

 

 

창의적인 예술을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직관력과 감각을 꼽습니다. 로고스(logos)적이기보단 어떤 불명확함에서조차 흔들림 없는 파토스(Pathos) 적인 것이라 여기지요. 둘 다 청중을 설득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입니다.  로고스(Logos)는 사실, 통계, 논리적 추론 등을 활용하여 청중을 설득하는 방식이죠. 파토스(Pathos)는 감정적 설득을 뜻하고요. 따라서 작가의 성장과정과 경험에 덧대어 직관력과 감각은 그 어떤 이성이나 지식보다 중요하며 창조의 기본이랄 수 있습니다. 하우메 플렌자는 그 모든 것에 일체감 가득한 밸런스를 보입니다.  물론 그에게도 영향을 미친 선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죠.

 

 

 

하우메 플렌자가 추구해 온 공공의 예술 뒤에는'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실수를 신경 쓰지 않고 생각하는 것들을 실험하고, 계속 무엇인가 탐구하여 끝없어 노력했다는  부분이 작가에겐 실천력과 아이디어의 원천이었던 셈이죠.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기존의 전통적인 예술 개념을 전복시킨 혁명적인 예술가.

<샘(Fountain),1917>이라는 작품을 통해 일반 공상품인 남성용 소변기를 예술작품으로 출품하여 큰 놀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작품이란 작가가 직접 손으로 제작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작가의 선택'이라는 '레디메이드'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뒤샹은 작품을 통해 '예술이란 무엇인가', '작품의 가치는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예술의 본질이 작품 자체가 아닌 작가의 의도와 관념에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우메 플렌자는 'ArtFutura festival' 기간 중 바바라 샌손 (Barbara Sansone)과의 인터뷰에서 "작가로서  창의적인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은 신비하며 환상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하는가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위해 일을 하는 행위이다. 자신을 믿고 실수에서 우연을 찾아내는 것이야 말로 흥미로운 일이며 끝임 없이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난해하지 않으나 사고를 유발하는 언어 아래 묵직함이 내재되어 있는 이 발언은 그의 작품들이 확실히 존재만으로 침묵과 무형의 시를 전달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WORLD VOICES>, 2010, Burj Khalifa, Dubai, United Arab Emirates/Jaume Plensa

 

 

colorful Country Map of The United Arab Emirate Dubai/ www. nitrion,com.br

 

하우메 플란자(Jaume Plensa)는 소수만이 방문하는 화이트큐브에서의 전시가 아닌, 사람과 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 작품이 살아나는 공공장소에서의 설치를 선호한다. 

 

 

 

 

OGiJiMA's Soul,2010,Japan/Jaume Plensa

 

일본 가가와현 / 골프한국-한국아이닷 컴

 

<Ogijima's Soul>은 하우메 플렌자가 2010년 제작한 대규모 공공 조각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일본 가가와현 세토나이카이 해협의 오기지마 섬에 영구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오기지마 섬의 정체성과 역사를 상징하며, 섬 주민들의 모임 장소 역할도 합니다. 거대한 두상 형상의 조각상 내부에는 계단식 좌석이 있어 공연이나 행사 등을 열 수 있습니다. 플렌자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영혼과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Nuria and Irma>,2010, Sculptures by Jaume Plensa/Pinterest

 

 

이 작품은 스테인리스 스틸  와이어 메시로 제작된 10대 소녀들의 머리 조각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눈은 감은 채 내면을 응시하는 듯한 모습은 자아 성찰과 내적 대화를 상징합니다. 와이어 메시의 투명성으로 인해 주변 풍경이 조각 속으로 들어와 작품과 하나가 되는 효과를 줍니다. 플랜사는 이 작품을 통해 개인과 사회, 육체와 영혼 등 이분법적 개념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작가는 최신 기술을 활용하여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하는 동시에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지며 사유의 계기를 제공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KCb7fjNsM

 

 

 

 

 

 

 

 

<ECHO>,2011,Madison Square Park/ Madison Square Park Conservancy

 

 

아메리카 합중국 지도 /123RF

 

 

 

 

https://www.youtube.com/watch?v=9J98Yv00Gss

 

 

 

 

 

뉴욕 메디슨 스퀘어 공원에 위치한 14m의 대형 거대한 두상 조각 <ECHO>(2011)입니다. 이 작품은  기술적으로 도저히 설치 불가능 할 것으로 보였지만 조각을 분리해 이동시켜 조립하는 방식으로 성공한 프로젝트로 손꼽힙니다. 이 프로젝트는 2011년 5월 5일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한 면에 <기념시: 꿈의 시 (Monuments: The Poetry of Dreams>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는데, 당시 그는 "작품을 구상할 때 기술적인 해결 방법도 함께 확인하는가?"라는 카롤 키노(Carol Kino)기자의 질문에 "사전에 기술적인 부분을 생각하면 문제가 생긴다. 꿈을 꾸고 난 후, 구현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으면 된다."고 대답해 자신의 예술적 가치가관의 목적은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임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이는 달리 말해 공공성을 기본으로  한 조각이란 태도의 문제이지 형식이 아님을 지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Le Nomade d'Antibes/Stay in France

 

 

 

 

알파벳 문자들로 이루어진 8미터 높이의 거대한 조각상입니다. 웅크린 익명의 인체 형상으로 , 라틴 알파벳 문자들로 이루어진 '피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별 문자들은 의미가 없지만, 조합되어 단어와 언어, 문화를 이룹니다. 이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은유합니다. 작가는 "우리의 피부가 경험으로 이루어진 문자들로 새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관람객들이 작품 내부로 들어가 여행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2007년 여름 안티브 피카소 미술관 전시를 위해 제작되었고, 2010년 영구 설치되었습니다. 안티브 시와 피카소 미술관의 위탁으로 제작되어 바스티옹 생자크 요새 위에 설치되었습니다. 작품 주변의 고대 유적과 지중해를 향해 열린 공간이 작품의 의미를 강화합니다. <Le Nomade>는 문자와 언어, 개인과 사회에 대한 플렌자의 철학이 담긴 대표작으로, 안티브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Antibes France map/World Maps

 

 

 

 

 

 

 

 

예술가는 공공미술을 할 때 가장 겸손해 지는 것 같습니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예술이 단지 보이는 것, 그리는 것, 묘사하는 것, 대상을 밝히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그 이상의 높은 차원으로 관객을 유도하는 장치로써의 힘을 수용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그의 작품에 있어 가장 큰 특징은 누구나 예술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고 기억을 그리드 (Grid)할 수 있는 공공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밤이면 새로운 영혼이 살아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기법을 주로 사용합니다.  실제로 그가 자주 애용하는 'White box'라이트는 사람을 주로 표현 소제로 삼는 그의 작품을 보다 매력적으로 만드는 알고리즘이 되고 있습니다. 

 

 

 

 

 

 

 

 

<Together,(Chichester Hand)>, 2014/ Jaume Plensa

 

 

 

 

 

 

결국 내 작품은 메시지 쓰기, 의사 소통의 쓰기라 할 수 있다.
-하우메 플렌자(Jaume Plendsa)-

 

 

 

 

 

 

 

 

2조원 롯데월드타워(123층 빌딩)에 설치된 웅크린 8.5m 아기 , 30 억짜리 공공 조형물,2016/chosun.com

 

 

한국/Shuttersoock

 

 

나의 꿈은 내 작품 안에서 연인과 아이들, 가족들이 하나가 됐으면 하는 것이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야외에 한글로 작업한 설치작품입니다. 현실과 인류의 다양한 측면(Possbilities)을 하나로 아우르고 싶어 작품 제목도 '가능성(Possibilities)'으로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인체상을 알파벳 조합으로 만든 그의 대표작인 <클라우드 오브 레터스(Cloud of Letters)'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알파벳, 라틴어, 히브리어, 힌두어 등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킨 글자와 숫자를 조합해 거대한 사람 형상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세계인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 '(사람, 사랑, 평화), 우리가 누리고 보전해야 할 '환경과 자연'(하늘, 꽃, 바람), '사람 간의 관계(벗, 으뜸, 꿈)를 지향하는 단어들로 작품을 구성했습니다. 

 

 

 

그의  예술이 사람들과 어떻게 교감하고 소통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롯데에 설치된 작품 '가능성(Possibilities)은 높이만 8.5m에 달합니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소재로 다양한 크기의 '희망과 도전'을 의미하는 단어들을 용접 방식으로 강력하게 결합하여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냈습니다. 관람객들은 작품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야간에는 업라이팅 조명으로 멋을 더하죠. 그는 공공미술의 치장성보다 예술에 무게들 더 둡니다. 시적인  수식의 아름다움과 삶에 무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중시합니다. 

 

 

 

 

세계인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한글과 여러 언어를 함께 사용해
사람, 사랑, 하늘 등 보편적인 단어를 작품으로 구성했다.

 

 

 

 

그는 공공미술이 건물에 포커스를 맞춰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건물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다리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지요.  주위와의 조화가 논란이 되긴 하지만 도시엔 없어선 안 될 요소입니다. 다리를 감싼 채 웅크린 사람 형상의 철 조각 (높이 8.5m)입니다. 멀리서 보면 하얀 레이스를 감싼 듯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 꿈, 사랑 같은 한글이 영어, 라틴어, 힌디어. 러시아어 글자와 섞여 있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빌딩 옆에 서면 위압감이 들기 마련이지요. 제 조각이 행인과 건물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길 바랍니다. "  골리앗 옆 다윗처럼 앉은 조각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자궁 속에서 태아가 웅크린 형태랍니다. 괴로울 때 본능적으로 취하는 자세기도 하고요. 그는 "세상살이에 지친 현대인을 끌어안아 주는 엄마의 품, 한편의 시 같은 포근한 쉼터를 생각했다. "며 반드시 작품 안에 들어가 하늘을 쳐다보길 권했습니다. 

 

 

 

 

 

 

공공미술은 작가 손을 떠나는 순간,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모두의 것이 된다.
부디
서울 사람들이 내 작품을 잘 돌봐줬으면 한다. 

 

 

 

 

 

 

 

<Behind the Walls>,2018, display at the Museo Nacional de Arte in Mexico City /wikipedia

 

 

<Behind the Walls>는 2018년 제작한 7.467m 높이의 거대한 청소년 소녀 머리 조각상입니다. 소녀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린 모습을 형상화했는데, 이는 내면의 세계와 꿈을 상징하거나 우리 주변 세계를 인식할 책임을 환기시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 작품은 2019년 5월 뉴욕 프리즈 조각 페스티벌에서 처음 전시 되었습니다. 같은 해 10월부터 2020년 2월까지 멕시코시티 국립미술관에 설치되었고요. 현재는 미시간대학 미술관 앞마당에 영구 설치되어 있습니다. 

 

 

프렌자는  이 작품을 통해 공공장소에 청소년 여성의 모습을 대형 조각으로 구현하며, 대규모 공공미술에서 여성이 충분히 대표되지 못했던 점을 환기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는 "미래는 여성의 것"이라는 말을 작품으로 형상화 했습니다. 

 

 

 

<Julia>vid plaza de Colon i Madrid, 2018/wikipedia

 

 

 

스페인 마드리드 지도/Shotterstock

 

 

스페인 마드리드 콜론 광장에 설치된 12m 높이의 거대한 소녀 조각상입니다. 폴리에스터 수지와 백색 대리석 가루로 제작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고요. 작가는 이 작품이 "공공 공간의 소란 속에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성찰을 불러일으키기를"바란 다고 말했습니다. 플렌사는 이 시리즈 작품들이 "우리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자신을 성찰하도록"의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2018년 12월 콜론 광장의 콜럼버스 동상 대신 설치되었습니다.  2023년까지 전시 기간이 연장되었고요.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사부 피터슨 재단의 후원으로 제작되었고, 마드리드 시의회가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선정했습니다. 

 

 

 

 

 

 

<Water's Soul:Bring a sense of serenity to an 'incredibly noisy time'/NJ.com,2020

 

 

www. universityguru.com

 

 

<Water's Soul>은  2020년 작품으로 높이 약 24m(80ft)로 플렌사가 제작한 공공조각 작품 중 가장 큰 규모입니다. 뉴저지 저지시티 허드슨 강  워터프론트에 영구 설치된 대형 조각상입니다. 젊은 여성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고,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침묵할 것을 권하는 상징물입니다.

 

 

 

주민들의 접근성이 좋고, 작품 주제와 의미를 잘 드러낼 수 있으며, 사회성과 예술성을 갖춘  공공미술작품으로서 허드슨강 워터프런트가 적절한 설치 장소로 선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과 인간의 관계를 형상화하여 인류의 연대와 평화를 상징합니다.  플렌사는 이 작품이 뉴포트 지역의 상징적 조형물이 되기를 희망하며, 인류의 미래와 평화로운 공존을 기원한다고 밝혔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IRANB8uLkM

 

 

 

 

 

공공미술이 도시의 상징으로 부각되는 시대입니다. 도시에 문화적 활력을 불어넣고 도시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지요.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공공미술 작가 하우메 플렌자(Jaume Plensa) 도 그 중심에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전 세계 사람들과의 링크, 인류는 하나라는 메시지를 늘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공 미술의 대가인 플렌자의 작품을 통해 일상에 놓칠 뻔 한 뜻밖의 여유와 낭만을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BDwS8sLKz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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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시립 현대미술관(MAM)에서 화가 니콜라 드 스탈 의 작품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가 2024년 1월에 열렸습니다. 그의 작품이 20년 만에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죠. 미술계에서 그의 예술적 이정표를 되짚어보고자 하는 기대와 호기심으로 개최된 전시회이기도 하지요. 그의 작품을 다양한 시각에서 다시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니까요.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입니다.  서정 추상의  한 경향인 '앵포르멜 미술'을 추구했지요. 전 후 유럽 추상 미술을 대표하는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 (1914-1955)의 삶을 살펴봅니다.

 

 

 

단순하고도 섬세한 붓질로 물감의 특질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놀랍게도 빛과 거리감이 살아 있도록 풍경을 환기시킨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중

 

 

 

 

 

<Le Grand Concert>,1955,Nicolas De Stael / Arthur.io

 

 

 

방금 연주를 끝낸 걸 까요? 그랜드 피아노와 덩치 큰 콘트라 베이스만이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니콜라  드 스탈( Nicolas de Stael)의 작품 <콘서트 le Grand Concert>입니다. 가로 6m, 세로 3.5m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가끔 손 끝에 상처가 나  핏방울 맺히는 모습만 봐도 사람은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하물며 온통 핏빛으로 물들인 캔버스를 보며 관객들은 압도당합니다.  당시 그의 격정적인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실제 작품 앞에 서 본 관객들은 왠지 모를 뭉클한 전율이 짜릿하게 전해진 다고 합니다. 실제로  저 그림 앞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는 관객들도 계시고요.

 

 

 

"나는  나를 위해 필요하다."

-니콜라 드 스탈-

 

 

 

인생이라는 콘서트의 마지막을 암시한 작품이었나 봅니다.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은 이 그림을 완성하고 앙티브의 자신의 화실 11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였죠. 

 

 

 

싱트페테르부르크/Steemit

 

 

 

 

니콜라 드 스탈 (Nicilas de Stael) , 그는 1913년 생트 -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ourg)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장교 출신으로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의 소장이자 부사령관이었습니다. 호화로운 표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혁명이 일어납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많은 백인 러시아인들처럼 그의 가족도 강제 추방되어 폴란드에 정착합니다. 그러나 그가 6살이 되던 1919년 부모가 사망하면서 그는 고아가 됩니다. 1922년 그의 대모로부터 말리나(Marina)와 올가(Olga) 두 자매와 함께 브뤼셀의 프리세로(Fricero)가문에 맡겨집니다. 다행히 그의 양부모 역시 부유하고 교양이 있는 사람들로 그들 남매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며 사랑을 주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혁명:  차르 정권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을 수립한 혁명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골동품 그림과 회화를 공부했습니다.   학업을 마친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 모로코 등 넓은 세상을 여행합니다.

 

 

 

'내겐  그림과 여행밖에 없어'

 

 

 

 

알제리에서 만난 여인 자닌(Jeannine)과  1941년 예술의 본고장인  프랑스로 이사하여 화가로서의 기반을 닦기 시작합니다. 

 

 

 

Nicilas de Stael,Composition,1947/Artprice.com

 

 

 

그의 초기 작품입니다.  이 시기 그의 그림들은 자주 어둡고 우울한 색상을 띱니다.  아마도 그가 겪어 낸    유년의 암울하고 냉혹한 환경 탓인 것 같습니다. 어두운 톤이 지배하는 작품에서 새로운 언어의 추상화를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구상적인 형태를 보이다가 또다시 비-구상으로 넘어가기를 반복하기도 하고요.

 

 

 

 

 

<Portrait of Jeannine>, 1941-42/pinterest

 

 

 

Nice/Delta News Hub

 

 

Nicolas de Stael/ The World of Mara, Marietta

 

 

 

 

<자닌 Jeannine의 초상;(1941-42) >.  고생만 하다 먼저 간 첫 번째 아내 자닌 기유 ( Jeannie Guillou)의 초상화입니다.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이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제대하고, 니스에서 살 때 그린 우울한 초상입니다. 이때만 해도 존재감 없는 스탈의 그림은 16세기 엘 그레코 (El Greco)를 흉내 내고 있었죠. 아내의 초상에는 전쟁의 암울함과 궁핍이 보입니다. 지독한 가난과 고통 속에 밑도 끝도 없이 희망 없는 그림을 그리던 무명시절, 아내 자닌(Jeannie)은 나치가 점령해 있던 파리에서 딸을 낳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내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1946년 2월에 영양실조로 사망하게 됩니다.  시기는 어려웠고 성공은 너무 멀리 있던 상태였죠.  스탈은 1945년 파리에서 처음 그룹전과 개인전을 가졌지만 당시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습니다. 그러다  파리를 떠나게 됩니다. 

 

 

 

 

 

 

나의 삶은 불확실한 바다 위에서 계속되는 여행이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단단한 내 배를 만들기 위한 이유다.
-니콜라 드 스탈-

 

 

 

 

 

 

<De la danse>,1946-1947/Flickr

 

 

 

 

 

아내도 잃고 아이들은 셋 딸린 가난에 찌들어 지내던 그에게 두 번째 아내인 프랑수아즈 샤푸통과의 만남은 많은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 후 프랑수아즈와  결혼을 하고  다시금 재개를 꿈꾸며 창작 활동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스탈의 마음가짐과 새 아내 프랑수아즈의 노력으로 이후 니콜라의 작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가게 됩니다. 많은 아트딜러들이 그에게 찾아와 작품을 의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드 스탈은 서서히 선과 색을 이용하여 '구상회화'의 틀을 깨는 작업을 진행하였고 완전 추상으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겪습니다.

 

 

 

 

 

<Composition>,1949/Flickr

 

 

 

 

첫 번째 추상회화 '구성 Composition'으로서의 화풍을 굳혀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B-cGdQcfTI

 

 

 

 

 

 

좌충우돌하며 자신만의 미술의 갈 길을 찾던 스탈의 그림이 바뀝니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미술 방식을 찾기 시작한 것은 떡칠하기, 임파스토(impasto)방식의 그림이 시작되었죠. 유화물감을 팔레트 나이프나 또는 손가락으로 두껍게 반죽처럼 칠해 강한 질감을 표현하는 거친 방식입니다. 이 표현기법은 형태가 무시된 비정형의 앵포르멜(informel) 추상 미술의 표현 방식입니다.  그렇게 그에게 '서정 추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앵포르멜이란? 

 

독일 표현주의와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 '피에트 몬드리안으로 대표되는 차가운 추상에 대응하여 서정적 측면을 강조, 색채에 중점을 두며 보다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호소력을 갖는 표현주의적 추상예술을 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S5n3P_UZE8

 

 

 

 

 

 

 

 

 

 

 

Les Musiciens by Nicolas de Stael ,1952/Poster/Redbubble

 

 

 

 

니콜라 드 스탈은 세잔, 마티스, 반 고흐, 브라크 그리고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등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약 15년 동안 무려 1120점이라는 다작을 남겼으니까요. 작품을 많이 제작했던 만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없이 파괴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는 평소  그가 존경했던 브라크 (Georges Braque)처럼 라벨이나 유행을 완강히 거절합니다. 그림에서 유행 같은 흐름이나 추세를 싫어했지요. 자신을 둘러싼 사물에 대한 생생한 감수성을 개인적이고도 자유롭게 작품으로 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는 종이에 먹, 캔버스 위에 유화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또 찾습니다. 

 

 

 

 

<Bord de Mer>, 1952/ MutralArt

 

 

 

 

 

 

 

1950년에서 1955년은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 그가 남다른 화가라고 인정받게 된 결정적인 시기들로 10년을 좌충우돌 방황하던 스탈에게 작품이 활화산처럼 용솟음치기 시작하던 시기입니다. 이 기간 5년 동안 제작된 작품들은 죽은 후에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1950년 앙티브 해 새로운 미술 형식인 '서정적 추상'을 추구합니다.  그만의 굵고 과감한 에너지와 캔버스를 터트릴 듯 과감한 터치들로 자신의 내적 심리상태와 감정을 표현합니다. 계획적인 구성을 거부하고 주관적인 표현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Footballeurs>,1952/Artnet/스위스, 마르티니, 피에르 지아나다 미술재단 미술관

 

 

 

 

1952년 파리를 떠나기 전에 제작된 축구 선수들(Les Footballeurs)은 약 15 작품의 연작 시리즈가 있습니다.  판지와 캔버스에 그린 이 그림은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의 임파스토(Impasto) 방식을 강한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의 출발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작품입니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아직은 '서정적 추상'이라고는 하기에는 조금 거칠어 보입니다. 

 

 

 

 

 

 

 

<Mediterranean, Le Lavandou>,1952/Barbara Isherwood, Art Education&Writing

 

 

 

지중해 , 라방 두 <Le Lavandou>은 그가 막 완성했던 축구 선수들 <Les Footballeurs>에서의 떡칠하기, 임파스토 (impasto) 방식을 서정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풍경 주제는 그가 죽음을 맞는 4년 뒤까지 그의 표현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설명이 없는 인물이 지평선 주위에 가끔 얼쩡거리기도 하지만, 사물과 풍경을 설명하는 장치 없이 감정이나 정서가 캔버스를 채우고 있습니다. 

 

 

 

 

남프랑스의 지중해 해안 마을 라방두 (Le Lavandou)에서 그의 미술이 얌전한 임파스토(impasto) 방식이 아니라 주걱까지 사용해서 문지르고 깎아내고 회 칠하듯이 캔버스를 밀어붙입니다.

 

 

 

 

<젠트리Gentilly, 퐁트네Fontenay 풍경>,1952/MutualArt

 

 

 

 

 

<풍경Landscape>,1952/Tate Modern

 

 

<옹플뢰르Honfleur풍경>,1952, 2017년 크리스티에서 경매, 개인소장품/MutualArt

 

 

 

 

타고난 색감각과  천재적인 화면 구성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죠. 이 시기에 작업했던 그의 작품은 대중들에게 아주 큰 환영을 받게 됩니다.   당시 뉴욕은 물론  워싱턴 필립스 컬렉션에서도 앞다퉈 그의 작품 구매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간의 노력 끝에 그의 작품들이 주목받는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성공한 화가가 되면 너도나도 백만 불짜리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타는 것이 상징처럼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미 작품 한 점에 백만 불을 호가하고 있었지만 롤스로이스는 타지 못했습니다. 

 

 

 

 

 

 

콤포지션(구성)Composition,1952/False Start

 

 

 

 

https://www.youtube.com/watch?v=q2Kq2ukJ-LQ

 

 

 

 

 

 

 

1953년 그가 파리에서 남프랑스 지중해의 메네르브(Menerbes)의 해안가 르 카스틀레(Le Castelet)의 17세기의 큰 건물을 구입해 이사했을 때 이제는 재정적으로 굶주린 사람은 아니었죠. 더 이상 돈이 부족하지 않았고, 한 가족의 아버지이며 홀아비였던 그는 재혼했고 새 아내와 세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를 발견 한 수집가들은 유럽이 아니라 멀리 미국에서 찾아왔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미국 최고의 화랑인 뉴욕의 뇌들러 갤러리(Knoedler Gallery)가 그중 하나입니다. 분명히 모든 것이 잘되고 있었습니다. 

 

 

 

 

 

 

<그리냥 성 Grigana>,1953/ Art of Darkness/Daily Art Blog

 

 

 

 

1953년 그의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특히 1951년-53년 작품들, 그것들에서는 주저하거나 흔들림 없는 확고한 신념과 가치관이 보다 뚜렷하게 표현되어 나타납니다. 

 

 

 

 

 

화가는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항상 그의 눈앞에 감동의 원동력이 있어야 한다.
-니콜라 드 스탈-

 

 

 

 

 

 

 

 

<정오 풍경 Paysage du midi>, 1953, 2011년 크리스티에서 경매/ Artnet

 

 

 

 

 

나는 끊임없는 안갯속에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른다....
결정적으로 메스꺼움을 갖게 하는
이 긴 하루의 풍경에서
그럼에도 나는 움직였다.
-니콜라 드 스탈-

 

 

 

 

 

 

 

그는 직접 야외 풍경을 보고 그리기 위해 작업실 밖을 나갔습니다. 그만큼 그의 시각적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죠. 240점이라는 풍경화로 고스란히 남았으니까요. 대부분 작거나 중간 크기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지방과 각각의 장소들에서 그리는 방식과 서로 다른 독특한 인상이 생성되어 있습니다. 

 

 

 

 

 

피에졸레 Fiesole,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 1953/ Redbubble(poster)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도/Freepik

 

 

 

나는 모든 바다를 수영하면서 몇몇 크로키 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니콜라 드 스탈-

 

 

 

 

 

 

 

Agrigente:focus sur un chef-d'oeuvre/Connaissance des Arts

 

 

 

 

 

시칠리아 이탈리아 섬 지도/123RF

 

 

 

 

 

 

 

 

우리는 절대 보이는 대로 또는 보아 믿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
우리는 천 개의 진동에서 받은 충격을 그린다.
-니콜라 드 스탈-

 

 

 

 

 

Nicolas De Stael/Du9, I'autre bande dessinee

 

 

 

Offset de Nicolas De Stael, Dessins sur Amorosart

 

 

 

1953년 8월 그는 가족들과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여행하게 됩니다. 시칠리아 여행하는 동안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아그리젠토와 시라쿠사의 고대 유적을 방문하여 펠트펜으로 스케치를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프로방스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그의 그림은 시칠리아의 영향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는 몇 달 동안 강렬한 빛으로 눈부신 섬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1953년 시칠리아 여행은 그의 색채를 급진화시켰습니다.  멀리서 봐도 노랑과 주황의 밝고 빛나는 색채가 눈에 띄게 다름을 느낍니다. 

 

 

 

 

 

 

<아그리젠토 Agrigente>,1953/Connaissance des Arts

 

 

 

 

 

눈 내린 마르세유Marseille under the Sonw, 1954/ www.pinterest.jp

 

 

 

 

 

억세고 치열했던 그의 미술들은 1954년'눈 내린 마르세유 Marseille under the Snow>에서부터 그 치열함이 얌전해집니다. 소란스러운 색들은 음이 소거되어 5가지 색상을 사용합니다. 옅은 회색에서 부드러운 파란색, 왼쪽 전경의 정사각형에서 눈에 띄는 진한 검은색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것은 드 스탈(de Stael)의 화가 경력의 마지막 단계를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드러운 그림의 시작인 거죠.  눈이나 마을을 정확히 식별할 수는 없지만 색상 팔레트와 구조적 배열이 고요한 침잠의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살만한 세상, 그것이 1954년의 그의 미술 작품들에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Nicolas de Stael , Views of Menerbes,1954, Abstract art landscape/Pinterest

 

 

 

오렌지 바탕의 배 , 정물화 Nature morte, poires, fond vert et orange>, 1954/ Redbubbie

 

 

 

와인잔이 있는 정물Nature morte au verre, 1954/Artnet

 

 

 

1954년 봄 전시회에서는 세계적인 현대미술 아트 딜러 폴 로젠버그(Paul Rosenberg)가 그에게 앞으로 추가로 15 작품을 더 그려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전시회는 상업적으로나 비판적으로 성공적이었습니다. 1954년 4월에는 네 번째 아이인 귀스타브(Gustave)도 태어났습니다. 파리에서 쟈크 뒤부르그 (Jacques Dubourg)의 갤러리에서도 성공적인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그의 정물과 풍경 그림들에 '서정 추상'이라는 닉네임이 붙여졌습니다.

 

 

 

 

 

 

 

 

 

 

 

 

Antibes/Tide Forecast

 

 

 

 

1954년 가을, 그는 가족과 함께 앙티브(Antibes)로 이사했습니다. 1954년 9월, 앙티브로 이사를 하여 바다를 마주한 작업장에서 수많은 정물화와 풍경화를 제작했습니다.  1955년 6월과 7월에 예정된 앙티브의 전시회를 위해서였지요. 그 누구도 그가 자살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그림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성공이 시작되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심약한 그는 피로와 불면증 및 우울증으로 고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사회적 이슈가 되는 악플로 인한 연예인들의 자살 사례들처럼 그 또한 여러 찬사와 인기와 함께 냉혹한 비평들이 그의 내면을 요동치게 합니다.  부모님의 죽음, 첫 번째 아내의 죽음으로 유달리 섬세하고 유약한 성격을 가졌던 그는 비평가들과 예술평론가들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일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림으로 불태우며 자신의 가진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1955년 3월 16일, 그를 억척스럽게 비난하던 미술 평론가 더글러스 쿠퍼 (Douglas Cooper)와의 실망스러운 만남으로 그는 자살하고 맙니다. 그는 앙티브에 있는 11층 스튜디오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맞이합니다.  보상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 유작이 되어버린 <콘서트>를 끝으로 영원히 붓과 이별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41세. 한창 꽃 피울 나이에 소진한 불꽃이 되어 버립니다.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은 몽루즈 묘지 (Montrouge Cemetery)에 묻혀 있습니다.

 

 

 

1955년

그의 인생 마지막 해의 작품들입니다. 

 

 

 

 

 

<Seagulls>,1955/Pinterest

 

 

 

 

일몰의 바다 풍경chemin de fer au bord de la Mer Soleil Couchant,1955/Soho Art

 

 

 

 

 

 

 

 

https://www.youtube.com/watch?v=jbjQzQCOoU0

 

 

 

 

 

 

 

누워있는 푸른 누드(Nu couche bleu), 1955

 

 

누어 있는 푸른 누드 Nu couche bleu, 1955/Passion Estampes

 

 

 

 

 

누워있는 푸른 누드 (Nu couche bleu>는 그의 누드 시리즈의 마지막이며 연작 중에 가장 큰 그림입니다.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남프랑스의 라네 (Lagnes), 메네르브(Menerbes)및 앙티브(Antibes)에서 오렌지와 블루 등 네 가지 버전을 그렸고 이 작품'푸른 누드'작품은 2011년 12월 6일 화요일 파리의 경매에서 700만 유로(한화 100억)가 넘는 가격에 미국 국적의 수집가에게 낙찰되었습니다. 

 

 

 

 

12년 동안 스탈은 작품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새로운 길을 탐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대의 유행을 따르지 않은 그의 작품은 의도적으로 추상과 구상의 구별을 뒤집고, 더욱 조밀하고 간결한 예술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는 바다를 마주하든, 축구 경기를 바라보든, 탁자 위에 놓인 과일 조각을 바라보든 세상의 광경과 그 다양한 빛에 매료됩니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이 관객에게도 전달되지요.  그의 작품은 공간과 색채를 탐구하며 추상과 구상적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과 색채였지요. 그의 작품을 왜 '서정 추상 Lyrical Abstraction'이라 부르는지  좀 알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3BJTPqrx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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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ilasson)은 아이슬란드와 덴마크에서 거주해 온 북유럽 아트스트입니다. 빙하와 화산으로 뒤덮인 대 자연에 매료되어 이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예술활동을 시작했지요. 현재는 기계 장치와 기술을 이용해 인공의 자연을 표현합니다.

 

 

1967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습니다. 덴마크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모님이 아이슬란드인이었기에 그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아이슬란드에스서 보냈습니다. 그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그는 자연스럽게  북유럽의 신비롭고 경이로운 자연 풍경들을 수없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엘리아슨이 경험했던 북유럽의 아름다운 풍경들, 그리고 빛과 그림자, 물과 얼음, 안개 등의 자연 현상은 그의 작품의 주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엘리아슨은  예술가이자 요리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적부터 예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예술 제작과 관련된 자신만의 방식을 형성하게 된 것은 십대 초반 '브레이크 댄스'를 추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엘리아슨은 춤이 제공하는 신체적인 감각과 공간에 대한 인식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이는 이후에 관람객에게 직접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적 체험을 선사하고자 하는 그의 예술적 경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올라퍼 엘리아슨-

 

올라퍼 엘리아슨은 방대한 예술세계를 지녔습니다. 그가 영감을 받는 것은 빛, 물, 온도, 안개, 빙하, 돌 등 다양한 자연 요소들이죠. 선보이는 작품의 장르 또한 다양합니다. 유화, 수채화, 조각, 설치, 미디어 아트, 인터렉티브 아트, 건축까지. 한 사람의 예술가가 어떻게 이토록 다양한 장르,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을까 싶어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 그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선보이며 우리가 바라본 세상을 전혀 다른 각도로 조명합니다. 

 

 

 

 

엘리아슨은 색다른 재료, 색다른 방식으로 구조를 만든다.
그의 개방적 사고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예술이 탄생했다.
-아이 웨이웨이(엘리아슨의 동료작가)-

 

 

 

 

<The Weather Procect 2003>/ Studio Olafur Eliasson

 

 

 

날씨좋지 않은 영국에 거대한 인공 태양이 떴습니다. 그것도 내부에 말이죠. 상상력이 놀랍지 않나요? 이 작품은 엘리아슨이 유명해지게 된 계기인 <Weather Project ,2003>입니다.  단색광을 활용해 앞의 관객들이 흑백으로 보이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가장 큰 공간인 터바인 홀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200여 개의 단색 파장 전구로 만든 태양은 그 넓은 공간을 온통 빛으로 물들입니다. 

 

 

 

 

엘리아슨 작품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공간'입니다. 저 인공 태양은 절반만 만들어져 반원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반원의 단면부, 즉 미술관 천장에 거울을 비춰 온전한 태양의 형상을 만든 것이죠. 이렇게 하면 미술관 위쪽 공간이 확장되어 보입니다. 더불어 이 공간이  거대한 곳에 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원래도 큰 터바인 홀을 두 배로 더 웅장하게 만든 것이죠. 또 엘리아슨은 이전에 자주 사용하던 재료인 안개를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안개가 있으면, 멀리 있는 대상이 전보다 희 미하게 보여 공간감이 커집니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덤이고요.

 

 

이처럼 엘리아슨은 거울을 천장에 배치해 수직 공간의 규모를 키우고, 안개를 홀 전체에 깔아 수평 공간의 심리적 거리감을 늘렸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_k8D5QowTY

 

 

 

 

<The Weather Procect, 2003>/Studio Olafur Eliasson

 

 

 

 

 

구구절절, 지나칠 정도로 길게 쓰여진 글은 관객으로 하여금
'난 이것도 이해 못하는 바본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올라프 엘리아슨-

 

 

 

 

관객들은 이 반쪽짜리 인공태양 아래에서 일광욕을 하기도, 춤을 추기도, 요가를 하기도 하며 일상을 옮겨 놓은 모습입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머리를 맞댄채 특별한 경험을 즐기는 모습입니다. 이 경험을 한 아이들은 훗날 커서 어떤 형태로든 기후 문제와 관련된 상상력을 발휘하며 살겠지요. 이렇듯 엘리아슨은 예술적 체험을 관객에게 넘겨주는 일을 즐겼습니다. 그는 관객을 작품의 일부로 만들기로 합니다. 관람객이 작품의 공저가 될 수 있는 작업을 많이 선보였죠.

 

 

 

 

 

 

관객이 작품의 일부로서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되면,
'내가  작품의 내러티브를 공동으로 제작할 만큼 똑똑하구나'하는 생각을 만든다.
-올라프 엘리아슨-

 

 

 

 

<The Wether Project, 2003>/Studio Olafur Eliasson

 

 


 

 

엘리아슨의 초기작 <Beauty,1993>입니다.  이 작품은 전시장 천정에 거꾸로 매달린 물 분무기에서 아래로 미세한 물방울을 안개처럼 뿜어 내고, 농도 짚은 안개에 프레즈널 램프를 설치하여 허공에 영롱한 무지대를 만들었습니다. 그 사이를 지나가는 관람객은 온몸으로 서늘하고 습기 있는 촉각적 자극을 받게 됩니다. 마치 북극광을 연상시킵니다.  물 위의 기름띠처럼  일그러진 무지개는 순간 홀연히 사라져 버립니다. 

 

 

<Beauty>1993/ Studio Olafur Eliasson

 

 

 

이 작품은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사람이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의 무지개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다양한 관점'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엘리아슨은 눈의 각도와 물방울의 각도에 따라 작품의 색깔과 모양이 달라지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작품을 보는 눈, 즉 관객이 없다면 이 작품에는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관객이 작품에 필수적인 요소로 작동하게 만든 것입니다.

 


 

 

 

<Moss Wall>,1994/Studio Olafur Eliasson

 

 

<Moss Wall,1994>은 이끼를 벽 전체에 이식하고 증식시켜 성장하고 번식하면서 색과 형상을 바꾸는 추상회화와 같은 느낌을 주게 한 설치 작품입니다. 

 


 

 

<Green River>,1998/ Studio Olafur Eliasson

 

 

 

 

 

베를린, 도쿄, 스톡홀름 등에서 진행한 <Green River,1998-2001>프로젝트는  환경에 무해한 녹색 염료를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물의 상류에 몰래 풀어놓은 작품입니다. 형광 염료인 '우라닌'을 활용해 도심의 강을 형광 '녹색빛'으로 물들인 작품이지요.  갑자기 강물이 온통 녹색으로 변한 이 기이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하여 첫날 도시 전체에서 엄청난 토론과 반향이 일어났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몰랐 던 시민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도시가 재앙이라도 당한 느낌이었겠죠. 나아가 매일 마주하던 '자연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겠죠. 그러나 녹색이 곧 사라진 후 거짓말처럼 소란도 금세 가라앉았습니다. 

 


 

 

 

 

 

<Double Sunset>,1999/Pinterest

 

 

<Double Sunset >. 그는 1999년 네덜란드 유트레히트 미술관 지붕에 단색광 전구들로 일몰의 태양과 같은 형태의 빛 구조물 을 설치합니다. 도시의 지평선 너머로 마치 두 개의 태양이 지는 듯한 장관을 연출하여 세기말의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지요. 

 

 

 


 

관객 참여형 작품은 엘리아슨의 작품세계를 넓히는 데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Ice Watch,2014>/Studio Olafur Eliasson

 

 

 

예술가가 지속가능한 작업을 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합니다. 엘리아슨의 작품은 팔기 쉽지않아 정부나 국제기구의 의뢰를 받은 작품을 종종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ice Watch,2014>/Studio Olafur Eliasson

 

 

그리고 그가 내놓은 이 작품,<ice Watch>는 엄청난 성공작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지질 학자 미니크 로싱(Minik Rosing)과 함께  그린란드의 빙하 12개를 시계처럼 배치해 전시한 것이 특징입니다. 광장에 놓인 얼음은 다양한 관객들 앞에 전시되었습니다.  길을 오가던 시민, 관객은 이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직접 만져보며 그들만의 특별한 시간을 가졌고요. 다양한 생김새 만큼이나 작품을 대하는 시민들의 반응은 놀랍도록 솔직했습니다. 

 

 

 

 

<ice Watch,2014>/Studio Olafur Eliasson

 

 

 

 

<Ice Watch,2014>/Studio Olafur Eliasson

 

 

작품은 겨울에 전시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음이 점점 녹아갔습니다. 빙하가 있던 그린란드보다는 광장이 더 따뜻했기 때문이죠. 관객들은 얼음이 녹는 모습을 작품으로 감상하며 눈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린란드의 빙하도  이렇게 녹을 것을 예감하게 됩니다. 적어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민들 만큼은 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기후변화'관련 내용들을 허트르 듣지는 않은 테지요.  그래서 누군가는 '기후 변화'의 재앙을 줄이거나 늦출만한 기동찬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9l-Xd4WS38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능력이 있다는 걸 믿을 때,
상황은 정말 바뀔 수 있다.

 

 

 

 

 

 

 

엘리슨은 의뢰를 받고, 어떻게 하면 기후인식을 높이고 이를 행동으로까지 이 끌 수 있을 지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행동'이 변하려면, '감정'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전에도  얼음의 녹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기후 위기를 언급하는 콘텐츠는 많았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오히려 식상할 지경이었죠. 하지만 엘리아슨은 관객이 직접 경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촉각적으로, 시각적으로 직접 경험하고 목격하게 만들어 관객의 감정을 건드렸습니다. 

 

 

 

 

 

<Ice Watch,2014>/Studio Olafur Eliasson

 

 

 

기후위기는 현재도 진행중이고,  앞으로 노력을 통해 조금 늦출 수 있더라도 완전히 막을 순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아슨은 정해진 운명에 낙담하는 대신, 다가올 미래의 새로운 잠재력에 집중하길 바랐습니다.

 

 

 

때문에  엘리아슨은 기후를 이야기할 때, 절망적인 단어로 묘사하는 걸 극도로 꺼립니다. 다가올 미래의 디스토피아적이고 부정적인, 두려움에 근거한 내러티브가 던져지는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태도로 이를 대하지 않으면 현재의 문제, 기후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합의를 도출하기 아주 어렵게 됩니다. 

 

 

엘리아슨이  주로 영감을 받는 건 자연입니다. 어린 시절 덴마크에서 자라며 많은 자연 풍경을 접한 영향 때문이죠. 엘리아슨에게는 '자연을 예술로 통역하는 작가'라는 별명도 있을 정도로, 자연을 레퍼런스로 한 작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환경과 교감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작가라고 할 수 있죠.

 

 


 

 

 

아름다운 곳에 위치해 있는 루이지아나 미술관, 덴마크/ 케이타운 일번가

 

 

 

 

 

올라퍼 엘리아슨의 핵심 키워드 세 가지

천재성,

창의성,

선한 영향력

 

 

 

 

 

 

그의  예술은  미술관에 계곡을 옮겨오거나, 랜드마크에 인공폭포를 만들거나, 해무를 미술관 정원에 만들어내는 식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집니다. 안개, 물, 색, 바람과 같은 자연적 대상들을 소재로 강렬한 빛과 어둠을 만들기도 하고요. 축축한 흙이나 이끼의 냄새 그리고 뿌연 안개 등의 요소로 관람객의 시각, 청각, 후각 등 다양한 감각을 자극합니다.

 

 

실제의 자연요소들을 전시장으로 옮겨오는 시도를 통해 관람객들의 선입관을 과감히 깨버립니다. 과학기술과 기계장치를 통해 인공 자연을 새롭게 창조하고요. 익숙한 대자연의 이미지를 낯선 곳으로 옮겨와 독특한 경험을 연출해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연을 보아왔던 방식을 교란시킵니다. 우리에게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선사하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하게 합니다. 

 

 

 


 

출처:Bid Piece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던 엘리아슨은 그곳에서 조명과 관련된 작업을 하게 됩니다.  생생한 경험과 감각에 의존하는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하죠.  1995년 '올라퍼 엘리아슨 스튜디오'를 열면서 이러한 감각적 방식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그를 매혹했던 자연 현상들을 재현하는 작품들을 만들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우연한 발견을 통해 만들어진 작업도 있습니다. 단색광을 활용해 공간 안의 모든 것을 흑백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그 예지요. 우연한 기회에 단색광을 접하게 되며, 바로 작품에 적용한 케이스입니다. 

 

 

단색광은 백색광과 달리, 사물의 빛을 구현해 내는 능력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 조명 아래에 서면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보이죠. 엘리아슨은 미술관 안에 아무것도 없이, 백색광만 배치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자신의 손을 쳐다보라 요청했죠. 그러면 관객들은 자신의 몸의 흑백으로 변한 걸 보게 됩니다.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죠. 엘리아슨은 단색광이 사물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또 컬러로 바라볼 때 보다  더 섬세하게 이를 느낄 수 있다는 연구를 접하게 되었죠.

 

 


 

 

 

<Lava Floor>,2002, 파리 시립 근대미술관/Studio Olafur Eliasson

 

 

 

 

엘리아슨은  종종 과학적 원리와 도구를 사용하여 자연의 현상을 증폭시키거나 원래의 자리를 바꾸어 버려 모방을 넘어서는 초현실적인 유사자연( Artificial Nature)을 창조해 내기도 합니다. 파리 시립 근대미술관에서 발표한 설치작품 <Lava Floor, 2002>는 화산지대에서 채취한 용암 슬러지를 미술관 바닥 전체에 깔아 놓고 군데군데 연기를 피어오르게 한 덕분에 관객들은 전시장에서 화산지대를 산책하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작업 아이디어는 그다지 색다를 것이 없는 탈 물질화, 비 객체화이지만 그 가운데서 관람객과 현상학적인 법칙들을 보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관람객의 '참여 (Involvement)'와 작품의 '일시성(Temporality)'이 자신의 지속적인 관심사라고 강조합니다. 

 

 

 


 

 

 

<The Meditated Motion>,2001/ Tanya Bonakdar Gallery

 

 

 

 

 

 

 


 

 

Olafur Eliasson's New York Cith Waterfalls,Brooklyn Bridge Stock photo Alamy/ ser saude ocupacional

 

 

 

뉴욕시의 요청으로 뉴욕 곳곳에 설치된 폭포(the Waterfalls, 2008)

 

 

 

 

https://www.youtube.com/watch?v=6wUwV0eDDQI

 

 


 

 

 

<Din blinde passage>,2010, Tate Modern,London/ Studio Olafur Eliasson

 

 

 

 

<Din blinde passage>,2010, Tate Modern , London/Studio Olafur Eliasson

 

 

 

 

 

 

https://www.youtube.com/watch?v=JhQqtNUIlTY

 

 

 

 


 

 

 

<Little Sun .Artwork>,2012/Studio Olafur Eliasson

 

 

 

엘리아슨이 선보인 <Little Sun> 프로젝트는 태양광 패널을 단 손전등 작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이 작품은 미술관 기프트 샵에서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한화 약 3만 원) 판매된 금액으로 만들어진 손전등은 아프리카에 전달되어 그들의 밤에 빛을 선물합니다. 

 

 

 

 

https://vimeo.com/41830924

 

 

 

<Little Sun.Artwork 2012>/Studio Olafur Eliasson

 

 

 

이 작업은 전 세계 인구 8명 중 1명이 제대로 된 빛을 누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약간의 빛이라도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죠. 하지만 엘리아슨은 이 프로젝트가 실용적인 해결책이 될 거라 보진 않았습니다. 다만 부정적 에너지만 내뿜으며 좌절하기보다,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능력이 존재함을 증명해 보인 것이죠. 

 


 

 

<Endless staircase :Umschreibung>,2004, permanently installed at KPMG Deutsche Treuhand-Gesellschaft, Munich/Studio Olafur Eliasson

 

 

 

 

 

 

종종 우리는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무언가를 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하고,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해서
실제로 우리가 그것을 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엘리아슨의 이런 긍정성, 인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은 전염성이 있습니다. 엘리아슨은 이를 잘 알고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 타고난 긍정성을 활용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과학 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엘리아슨의 스튜디오는 과학을 재료 삼아 예술을 창작하는 작업실 같습니다. 그는 그런 작업을 통해 관객이 변화를 일으키도록  고양하고, 권한을 부여하고, 영감을 주길 원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인정합니다.

 

 

이를  헷갈리지 않기 위해선, 단계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서, 실제로 행동하고 , 또 다른 행동하는 것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때로 어렵지만, 엘리아슨은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안주함도,
절망감도,
그 무엇도 우리의 옵션에는 없다는 것.



 

 

 

 

 

Studio Olafur Eliasson/olafureliasson.net

 

 

 

 

엘리아슨은 지금도 세상을 보는 다양한 방식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력할수록 더 보인다는 생각, 그의 예술관 때문이죠. 엘리아슨의 이런 탐구정신은 그의 작품세계가 방대해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고, 거대한 대자연에 영감 받은 작품을 내놓았죠.

 

 

 

또 이 관점을 관객이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관객이 주체가 되는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관객이 주체가 되기 위해선, 시각, 촉각, 공간감 등 다양한 감각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를 잘 느낄 수 있도록 때로는 과학적으로, 때로는 자연친화적으로 설계되죠. 이를 통해 작품의 메시지는 오롯이 관객에게 전달됩니다. 때문에 관객은 예술가의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소비자가 아닌 작품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생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엘리아슨은 관객이 곧 '작가'이자 '아티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제 역할은 그들이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올라퍼 엘리아슨-

 

 

엘리아슨의 메시지는 선합니다. 관객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고, 더 많은 사람이 빛을 누릴 수 있게 하며, 자연의 위기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킵니다. 자신의 작업 방식이 가진 몰입도를 선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합니다. 

 

 


 

 

 

 

 

 

 

Overdeepening, 아모레 퍼시픽 본사 야외, 2018/ Studio Olafur Eliasson

 

 

 

아모레퍼시픽 본사 야외에 올라퍼가 2018년에 스테인리스 스틸과 LED를 이용해 만든 오더디프닝(Overdeepening)이란 작품입니다. Overdeepning은 빙하가 흘러내리면서 해수면 이하로 지표를 깊이 깎아 내는 침식작용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두 개의 반원형 고리가 각각 거울과 검은 수면에 반사되어 서로 얽혀 있습니다. 반원의 고리가 빛의 작용에 의해 온전한 원형을 형성합니다. 반사된 형상이 무한히 반복되며 깊어지는 공간적 환영을 통해 인식과 감각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작가의 의도를 담았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MwWhBOAsao

 

 

 

 

 


 

 

 

현재 그는 베를린에 자신의 이름을 딴 'Studio Olafur Eliasson'을 설립하여 30명에 달하는 건축가들, 과학자들, 연구원들, 설치자들을 직접 이끌고 다양한 커미션과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도 관람자의 체험과 자연에 대한 탐구, 그리고 이를 구현해 낼 과학적 원리와 기술에 대한 실험을 이어갑니다. 조각과 설치뿐만 아니라 페인팅, 미디어 아트, 건축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통해서 말이죠. 

 

 

앞으로 올라퍼 엘리아슨은 어떤 작품을 만들까요? 그 안에서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관점과 경험을 가져갈 수 있을까요?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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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게리(Frank Gehry:1929,2,28- )의 건축은 딱딱한 모더니즘 건축을 지양하고 유동적이고 개성 있는 해체주의 건축을 선보인 건축가입니다. 그의 건축에서 해체주의 개념은 기존의 건축적 질서와 위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와 공간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선,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로 기존 건축의 직선적이고 규칙적인 모습에서 벗어납니다.  건축 요소들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효과를  창출해 냅니다. 건축물의 내부와 외부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공간의 연속성을 추구합니다. 다양한 재료와 기술의 실험적 결합으로 건축의 한계를 극복합니다.  그는 건축과 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조형미를 추구합니다. 요즘 디지털 기술과 예술의 결합으로 건축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또한 여전히 시도 중이고요.  그의 환상적인 작품들을 살펴봅니다. 

 

 

 


 

<루이비통 메종 서울>/브리크매거진

 

 

 

 

 

2019년 가을, 프랭크 게리의 건물이 서울 한복판에 들어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들썩였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이어 프랭크 게리가 루이 비통을 위해 만든 두 번째 건물 '루이비통 메종 서울'. 프랭크 게리는 네모난 형태 위에 얹힌 수원 화성의 포탑 지붕과 동래학춤의 춤선에서 건물의 이미지를 착안했다고 전합니다. 한편 빛을 최대한 건물에 끌어오기 위해 주로 사용하던 금속이 아닌, 스페인에서 직접 공수해 온 유리로 패널을 마감했습니다. 마치 건물 위를 유영하는 하얀 돛단배의 이미지. 프랭크 게리는 '루이 뷔통 메종 서울'을 보고 도포 자락이 떠오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프랭크 게리의 비교적 최근작인 ' 루이 뷔통 메종 서울'은 프랭크 게리가 90세에 완공한 건물입니다. 

 

 

서울시 지도 /www.pinterest.co.kr

 

 

 

 

 

 

 

https://www.youtube.com/watch?v=KYpr2AF7CCI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대부분의 지자체가 커다란 랜드마크를 세웁니다. 사람이 몰리고, 돈을 벌어줄 거라서요.  하지만 그 결과가 성공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는 말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 그 어려운 일을 건물 하나로 해낸 사람이 있습니다. 구게하임 미술관으로 무너져가는 스페인의 도시 빌바오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축가, 프랭그 게리입니다. 한번쯤 그 이름을 들어봤거나, 혹은 한 번쯤 그의 뒤틀리고 구겨진 건물을 보았을 겁니다. 그는 어떻게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가 될 수 있었을 까요? 

 

 

건축가 프랭크 게리 하우스, 산타 모니카 ,캘리포니아/123RF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위키백과

 

 

 

 

 

A dumb little house with charm/STIRworld

 

 

 

 

 

Frank Gehry, <Easy Edges> side Chair/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LA로 돌아와 빅터 그루언 (gruen)사무실에 잠깐 있다가  가구를 제작하여 돈벌이를 합니다. 이지 에지스 "easy edges" 라는 가구들입니다. 이때 번 돈으로 산타모니카에 있는 벙갈로 같은 허름한 주택을 매입, 개조하여 자신의 집을 꾸밉니다. 프랭크 게리가 처음 건축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자신의 집인 '게리 하우스'를 설계한 이후부터입니다. 유년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강철과 목재 합판 등의 싸구려 재료를 조합해 만든 디자인은 일종의 판잣집과 같은 모습이었죠. 그 기괴함에 마을 사람들은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괴팍한 건물을 통해 무명의 프랭크 게리는 유명세를 얻었고 훗날 이 건물은 미국 건축가 협회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캐나다, 토론토 지도/나무위키

 

 

 

프랭크 게리는 1929년 2월 28일 캐나다 토론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이 드문 캐나다 토론토에서 프랭크 게리는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또래 친구들은 그를 유대인이라며 놀려댔습니다. 이는 친구가 아닌 가족 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작은 철물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유독 프랭크 게리를 아꼈던 그의 할머니는 토요일 아침마다 철물점에서 사용하고 남은 나무와 철판 조각으로 작은 미래 도시 모형을 만들며 함께 놀았습니다. 이 놀이 경험은 훗날 프랭크 게리의 모형 중심의 설계 방식과 금속 합판과 골판지 등의 소재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과정 중에 프랭크 게리는 재료의 본성에 대해 본능적으로 탐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구부러지고 휘어진 훗날 건축물의 특성으로 이어지고요.  한편 프랭크 게리는 아버지와도 자주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합니다. 이처럼 프랭크 게리는 유년 시절 가족으로부터 건축적인 동시에 예술적인 영감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댄싱하우스>,프라하 체코,1996 /123RF

 

 

체코/신발끈 여행사

 

 

 

 

<댄싱 하우스 1996> 입니다. '건물이 이렇게 휘어져도 멀쩡할 수 있구나!' '벌어진 건물 다리만으로도 정말 건물이 춤을 추네!' 건축에 문외한인 제가 처음 보자마자 느꼈던 생각입니다. 만화에 나올 법한 건물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통념을 깨는 것 같아 유쾌했습니다. 

 

 

프랭크 게리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로스 앤젤레스 주재의 건축 설계 사무소 빅터 그루엔에서 잠시 근무하게  됩니다.  이후 파리로 떠난 그는 그곳에서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창작의 저변을 넓혀갔습니다. 그가 당시 교류했던 예술가들의 목록은 제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센버그, 리처드 세라 등. 여러 예술가들과 교유하면서 받은 영감은 그를 건축가와 예술가의 경계에 선 인물로 불리게  합니다. 한편 바바라 아이젠버그가 쓴 프랭크 게리의 인터뷰집 < 프랭크 게리와의 대화>에서 그는 산드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앙리 마티스, 조르지오 모란디와 같은 , 세기와 양식을 넘나드는 회화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런 그를 두고 예술적 형식에 집착한 나머지 기능과 효율을 간과한 낭비적 건축이라고 비판합니다. 프랭크 게리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인 프라하 체코의 <댄싱 하우스>역시 위와 같은 비판을 받은 사례입니다. 비평가들은 바로크, 고딕, 아르누보 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고도 프라하에 근본 없는 키치 양식의 건물이 들어서며 주변 경관을 해친다고 비난합니다. '건축가인가? 예술가인가?라는 질문은 프랭크 게리의 평생을 꼬리표처럼 따라 다닙니다.

 

 

하지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같은 분류에 대해 "쓸데없는 질문"이라며 일축합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불려도 좋으며, 그저 예술과 관련된 건축물을 만들고 싶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프랭크 게리는 건축뿐만 아닌, 다양한 인스톨레이션 작업과 의자 등을 디자인하며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댄싱하우스>는 지금도 프랭크 게리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로 남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8cJVsst0vU

 

 


 

 

 

 

 

Frank Gehry/Architectural Digest

 

 

 

 

 

 

일본 고베지도/여행과 날씨

 

 

<Fish dance restaurant,kobe, japan,1989> 물고기에 대한 애정과 관심도 대단했습니다. 어렸을 적의 기억 때문이라고 하네요. 인지도가 상승하면서 물고기를 소재로 한 작품을  다수 만들기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zTZ9wvNHhY

 

 

 

Golden fish by Frank Gehry at the Olympic Village in Barcelona, Catalunya,Spain,1992/Alamy

 

 

Fish Lamps by Frank Gehry/ Colossal

 

 

 

 


 

 

 

 

 

스페인 구겐하임 미술관, 1997/ 미주한국일보-워싱턴 DC

 

 

 

 

스페인 빌바오/땅집고

 

 

 

 

1991년 프랭크 게리는 인생을 바꿀 만한 제안을 받게됩니다. 바로 스페인 항구 도시 빌바오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건물을 지어달라는 제안이었죠. 광업 도시인 바스크 지방의 빌바오는 산업 구조의 변화에 따라 1970년대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인구는 끊임없이 감소하고 도시는 점점 슬럼화되어 가고 있어 지요. 이에 바스크 정부가 꾀한 대책은 문화예술 산업을 통한 경제부흥. 그 일환으로 바스크 정부는 미술관 그립을 계획합니다. 정부는 프랭크 게리에게 다소 무리한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공업 도시 빌바오의 분위기에 역행하는 동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건물을 지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프랭크 게리는 이 도전을 받아들이고 개발에 착수합니다. 그렇게  지어진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입니다.

 

 

 

빛이  반사되는 티타늄 외벽의 우주 전함을 연상케하는 외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금세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1997년 개관 이후 빌바오는 매년 1백만 명이 찾아오는 문화예술도시로 탈바꿈했습니다. 건물 하나로 도시 전체의 번영을 꾀하는 일, 사람들은 이를 두고 '빌바오 효과'라고 일컫기 시작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rDLh7OsThM

 

 

 

 

 

 

https://www.youtube.com/watch?v=zd6xbBL6ejw

 

 

 

 

2024.04.19 - [지식&교양] - 51-6. 페기 구겐하임( Peggy Guggenheim ,61)

 

51-6. 페기 구겐하임( Peggy Guggenheim ,61)

'미술 컬렉터'라고 하면 조금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겁니다. 예술을 거래하는 일이 우아한 비즈니스만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죠. 그림이 고위층 비자금 조성 수단으로

sun-n5y2.tistory.com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트립어드바이저

 

 

 

 

로스엔젤레스,캘리포니아주, 미국/위키백과

 

 

 

 

프랭크 게리가 18살이 되던 1947년 그의 가족은 캐나다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는 트럭으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니게 됩니다. 처음 프랭크 게리는 로스앤젤레스 시립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원소들과 씨름하던 그는 이내 화학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지요.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유년 시절의 자신이 어머니와 함께 박물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음악과 그림을 즐겼으며 , 무엇보다 할머니와 모형을 만들던 순간이 기억에 사무쳤다고 회고합니다. 

 

 

 

프랭크 게리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건축과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학교(USC)를 옮겨 건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고요. 이후 프랭크 게리의 가족은 다시 케임브리지로 이주하게 됩니다.  1956년 27세인 그는  이후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 도시계획을 공부하게 됩니다. 훗날 프랭크 게리는 직장을 위해 다시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오게 됩니다.(1960년)

 

 

로스앤젤레스 특유의 온화한 날씨와 자유로운  분위기, 과연 그의 가족이 로스앤젤레스가 아닌 다른 도시로 이사했다면 프랭크 게리의 선택이 지금과 같았을까요? 프랭크 게리를 연구하는 많은 이들은 그의 건축적인 특징이 로스엔젤리스와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1998년  프랭크 게리는 자신의 정서적 고향인 로스 엔젤레스의 기념비적인 건물을 짓기 시작합니다. 완공까지 약 5년이 걸린 건물의 이름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입니다. 프랭크 게리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 구겨진 철판으로 점철된 건물은 로스 앤젤레스의 명소를 넘어 '미국을 바꾼 10개의 건물'로 선정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AEd1uDOZJE

 

 

 

 


 

 

Marques de Riscal Reserva Rioja/ Winegraph

 

 

 

 

 

La RioJa, Spain Map/Britannica

 

 

 

 

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 2005 엘시에고 스페인 프랭크 게리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모델 작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모든 작업은 모델에서 시작해서 모델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델 작업에서 구조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동시에 해결하고, 디테일 등 모든 작업을 모델에서 판단, 결정합니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 역사에서 꼭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CATIA'시스템입니다. 본래 항공기, 자동차 디자인에 사용되던 'CATIA'는 프랭크 게리가 원하는 정밀도로 철재 패널을 비틀고 구부릴 수 있었습니다. 흡사 우주 전함을 닮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다 이 소프트 웨어를 통해 철저한 모델 작업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프랭크 게리의 'CATIA'시스템은 이후 자하 하디드와 같은 유명 건축가의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정작 프랭크 게리는 컴퓨터에 그리 밝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오히려 스스로를 컴맹에 가깝다고 소개합니다. 컴퓨터 작업 이전 그는 철저하게 모형을 통해 재료의 특성과 구조 세부 등을 연구한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프로젝트 전시에 공개된 수백 개의 건축 연구 모형은 세간을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도저히 당시의 컴퓨터로는 불가해한 창의적인 구조 역시 수많은 모형을 통한 모델 작업의 결과입니다. 프랭크 게리의 여러 건물 중 가장 구부러지고 비틀린 작품을  고르자면 그건 단연 스페인의 와이너리 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 아닐까 싶습니다. 포도나무의 비틀린 형상을 토대로 벽돌 건물 위에 얹은 티타늄 캐노피는 마치 미래의 피라미드를 연상케 합니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조형물을 만들어 냅니다.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아  무리를 해서라도 꼭 한번 가고  싶을 정도로 말이죠.

 

 

 

Marques de Riscal Reserva Rioja/ 컬처램프
윈스턴의 와인스토리-마르께스 데 리스칼 /컬처램프

 

 

 

 


 

musee louis vuitton paris/sportgranada.com

 

 

 

구겐하임 빌바오의 성공이 계속되자 루이비통에서 동반자가 되자고 게리를 끌어 안습니다. 그의 나이 80대. 파리에 루이뷔통재단 미술관을 짓게 됩니다. 헤엄치는 물고기의 형상을 이미지화한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입니다. 

 

 

Celebrating Louis Vuitton's daring construction by Frank Gehry/Vogue France

 

 

 

 

 

https://www.youtube.com/watch?v=_ed-d4Zxxnc

 

 


 

 

 

Rip Zaha Hadid/World Red Eye

 

2000년대 들어 자하 하디드와 교우가 많아 지면서 무척 가까워졌습니다. 프랭크 게리와 자하 하디드는 해체주의 건축의 대표적인 건축가들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건축계에 새로운 경향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더 프랭크 게리의 건물을 볼 수 있을까요? 올해 95세를 맞은 그는 아직 은퇴하기에 너무 바쁘다고 말합니다. 백 세 시대 그의 상상력이 첨단 디지털 기술의 영향을 받아 얼마나 나래를 펼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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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적인 외모에 현대의 공동주택에 함께 살기 적합한 성격을 지닌 로첸(Lowchen)은 자칫 역사 속에서 없어져 전설로만 남게 될 뻔 한 견종입니다. 다행히 사람들의 노력으로 우리 곁에 소중히 남아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쁘띠 시엥 라이언(Petit Chien Lion)

리틀 라이언 도그(Little Lion Dog)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Lowchen with lion haircut/wikipedia

 

 

 

로첸(Lowchen)이란 독일어로 '작은 사자'라는 뜻입니다. 풍성한 갈기털이 사자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기원은 프랑스로 되어 있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 좀 애매하다고 합니다. 로첸(Lowchen)은 중세 때부터 유럽 각지에서 키워졌던 흔한 반려견 중 하나거든요. 프랑스, 포르투갈, 독일 등으로 그 당시 유럽 각 나라의 그림에서 로첸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반려견이었습니다. 미국 켄넬 클럽에는 ' 그 기원은 지중해로 추정되며 아마도 독일일 것이다'라는 애매한 설명이 쓰여 있습니다.

 

 

 

Lowchen Grooming/Animal Behavior College

 

 

 

 

 

 

www.congress-intercultural.eu

 

 

 

 

체고: 30-35.6cm/수컷, 28-33cm/암컷

체중:5-8kg/수컷, 4-6kg(암컷)

수명:13-15년 

색상: 검정, Black& Silver, 초콜릿, 크림색, 흑갈색, 푸른색

출생지: 독일,프랑스, 유럽

 

 

 

 

Lowchen with golden coat/wikipedia

 

 

 

 

소형견으로  몸은 작으면서 짧고 튼튼해 보이며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머리는 몸에 비해 짧고 머리 꼭대기와 주둥이는 넓은 편이고요. 

 

 

 

 

 

<A Lowchen by A Fountain>,oil painting by Jan Wyck/MeisterDrucke UK

 

 

 

 

 

Wedding portrait of Magnus Gabriel De la Gardie and Maria Eufrosyne,1653.Beside them, a little dog in lion cut./wikipedia

 

 

 

< The Letter, Les Jeunes> Francisco de Goya/wikipedia

 

 

 

 

Duchess Katharina von Mecklenburg, by Lucas Cranach the Elder,1514, showing dog in lion cut./wikipedia

 

 

 

 

Madame Bennert walking her Lowchens/wikipedia

 

 

 

 

 

 

15세기 유럽에서 귀족 부인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견종입니다. 1442년부터는  유럽 지역의 그림이나 조각, 판화, 데생, 회화, 태피스트리 등에서 로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Multiple Color Lowchens in Litter/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pklXvPb6F10

 

 

 

 

 

이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19세기에는 거의 볼 수 없는 멸종에 가까운 상태로 바뀌게 됩니다. 1897년 메들 에인 베네트(Madelaine Bennert)란 분이 멸종위기에 처한 로첸(Lowchen)의 보전에 힘을 썼고 한 개인의 각고의 노력으로 로첸(Lowchen)은 유럽에 불어 닥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속에서도 살아남게 됩니다.  1971년 미국으로 전파되어 1999년 미국 켄넬클럽에 정식 견종으로 등록되었습니다. 

 

 

 

 

 

 

9month old Sable and Crean Lowchen/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pan_feNQCeE

 

 

 

 

 

 

 

 

 

 

 

Lowchen/Dogster

 

 

 

 

 

 

로첸(Lowchen)을 이야기할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자 컷'입니다. 로첸은 사실 사자를 닮지는 않았습니다. 로첸 하면 사자 컷으로 유명한데 꼬리로부터 약 1/3-1/2의 몸통의 털을 밀어내어 머리와 가슴부위의 털을 강조하는 컷으로 로첸이 가장 잘 어울리게 소화할 수 있는 컷입니다. 이로 인해 로첸(Lowchen)에게 '리틀 라이언'이라는 애칭이 붙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자 컷은 벌거벗은 부분이 주인에게 따뜻함을 제공할 수 있게 하고, 긴 털은 주인에게서 이와 서캐를 모으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된다고 해요. 

 

 

 

 

Lowchen/American Kennel Club

 

 

로첸(Lowchen)은 아파트에서 기르기 좋은 견종입니다. 성격은 부드럽고 활기차고요. 뭐든 빨리 배우는 영리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아이들과 다른 반려견들과도 잘 지내는 친절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다만 성격상 수줍음을 잘 타고 낯가림이 심해서 어릴 적 사회화 교육은 필수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로첸(Lowchen)의 시도 때도 없는 짖음 소리로 곤란할 수 있습니다. 로첸은 또한 어린이가 있는 가족에게도 좋은 애완동물입니다. 

 

 

 

 

 

Lowchen/PetHelpful

 

 

분리 불안 장애를 쉽게 앓을 수 있습니다. 혼자사는 일인 가정이 키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고요.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운동 능력이 뛰어나 함께 운동하고 자 할 때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IwhQIJLYUY

 

 

 

특별한  유전적 질병이 없이 건강한 견종입니다. 백내장 및 퇴행성 망막 위축은 특징적으로 발현하기  쉬운 질병입니다. 매년 검사해 주시길 바래요. 슬개골 탈구도 주의하시고요. 수시로 긴 털을 빗어주어야 윤기 있고 건강한 모질을 유지시켜 줄 수 있습니다. 

 

 

Lowchen at 2019 American Kennel Club National Championship/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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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기운이 무르익어 갈 무렵, 이탈리아는 여러 공국으로 분열된 상태였습니다. 각 지역의 통치자들은 혈통 대신 군사력이나 부를 이용해 왕위에 올랐습니다.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굳히는 일이 늘 화두였지요. 이것을 위해 결혼 동맹을 맺거나 외교적 제휴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확실한 방법은 명성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과 가문의 이미지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대 실력자의 수준은 그가 얼마나 유능한 미술가들을 고용하느냐에 달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 빈치와 벨리니 (Bellini)그리고 알베르티(Alberti) 같은 거장들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토양에서였습니다.

 

 

 

파도바 출신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를 소개합니다.   북이탈리아 만토바 공국 후작인 곤차가 (Gonzaga)의 궁정화가로 두칼레 궁의 천장 프레스코화 같은 많은 걸작을 남긴 화가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의 인물이나 사물에까지 원근을 적용하는 단축법을 혁신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 우첼로 (Uccello)나 엘 그레코 (El Greco)의 그림에서도 원근법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대담한 단축법의 시행은  만테냐가 처음이었습니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의 작품은 지금도 파도바의 오베타리 예배당을 가면 볼 수 있습니다. 만테냐는  원근법으로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그의 양식과 기법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 ,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 1452-1519),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1471-1528)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차용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천재성은 일찍부터 돋보여, 어린 시절부터 유명 화가의 제자로 들어가 일을 배울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의가 컸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 만테냐는 전통에 따라 그림을 작업했습니다. 회화 말고도 그는 다수의 동판화들을 만들었는데, 특히 동판화의 일종으로 부식 과정 없이 판면에 철침으로 직접 그림을 새기는 '드라이 포인트'기법을 개발해 여러 색조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만테나는 이탈리아 최초의 인그레이빙 (금속판에 끌로 직접 선을 새겨 인쇄하는 기법) 작가이기도 하고요.  원근법을 포함한 다양한 그의 기법은 몇 세기를 걸쳐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만테냐는 고전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파도바의 프란 체스코 스쿼치오네와 함께 작업을 통해 회화의 표현력이 탁월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특히 공간감을 다루는데 당대 최고였습니다. 

 

 

 

<Agony in the Garden>,1455-56/Egg tempera/wikipedia

 

 

 

<겟사마네의 기도 Agogy in the Garden>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북부 이탈리아 파도바 화파의 천재화가 만테냐(Andera Mantegna ,1431-1506)가 그린 종교화 중 가장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이 작품은 만테냐가 만토바공의 궁전화가 가 된 1456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목판에 템파라로 그린 약 25호 (80*63cm) 크기의 그림입니다.  그림의 소장자가 17세기 초부터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미술계의 3D 아시죠? (Death, Divorce, Debt) 1894년 노스브르크 백작에게서 현재의 런던 국립 회화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작품 내용은 신약성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올리브 동산의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제자들을 산기슭에 남겨두고 홀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 제자들이 골아 떨어져 있는 모습, 그들을 쫓는 무리들과 예루살렘 성, 그리고 하느님의 사자 어린 천사들을 압축법을 사용한 화면에 담고 있습니다.

 

 

 

세상 죄를 한 몸에 짊어진 하느님의 어린양,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인간으로서 그 고뇌와 슬픔을 억누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이 잔을 "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며 당신의 마지막 기도를 피땀이 흘리도록 바치시는 장면이고요. 한시도 깨어있지 못하고  깊은 잠에 골아 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칭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베드로와 야곱 그리고 요한이었는데도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자 어린 천사들이 십자가를 들고 하늘로부터  나타난 모습입니다.  이를 우러러 바라보며 기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맑은 표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룬 순간을 느끼게 합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검은색 의복과 오른쪽 나무의 죽은 가지에 앉은 한 마리의 새 (까마귀)의 존재도 이 장면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나봅니다. 중경에 위치한 예루살렘성의 건물들의 밝은 표현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층 강하게 부각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유다와 한 무리의 로마 병사들이 쫓아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Padova/아미코 이탈리아

 

 

 

<Picture Bearers(first Canvas)>,1450/wikipedia

 

 

 

<The Vase Bearers(fourth Canvas)>,1450/wikipedia

 

 

<Portrait of Cardinal Ludovico Trevisan>,1459-1460, Tempera on Panel, Gemaldegalerie, Berlin/wikipedia

 

 

 

 

 

<Death of the Virgin>,1462-1464,tempera &gold on panel, Museo del Prado,Madrid /wikipedia

 

 

 

그림을 살펴보면, 침대 주변에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한 무리가 삼삼오오 모여있습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온 것이죠. 그들의 손에는 성모에게 경의를 표현하는 물건들이 들려 있습니다. (시리오스라 부르는 촛불, 종려나무 가지, 책과 향). 이 둘 중 가롯 유다는 죽어서 없지만  이후에 뽑힌 마티아 사도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11명인 이유는 도마 복음서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도마가 인도로 선교여행을 갔기 때문에 이 장소에 없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배경이 등장합니다. '만투아의 호수'입니다. 특히 저 호수에는 <산 조리지오 (San giorgio)라고 불리는 다리가 서 있었는데, 사실적인 배경을 그림 속에 넣은 화가가 바로 만테냐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만 투아의 궁전이라는 사실이 의외이기는 합니다. 만테냐가 자신이 머물던 주변 풍경을 배경으로 선택한 거죠. 이 그림 속에 인물의 표현력이 자세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탈리아에 있던 모자이크를 모티브로 그린 그림입니다.  그 모자이크는 안드레아 델 카피뇨가 그렸던 구성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실내와 실외의 대조를 구성하면서 마치 내가 실제로 그 장소에 서 있는 느낌이 들도록 그린 그림입니다. 

 

 

곤자가의 루이 3세는 1458년 만투아의 두크성 예배당을 위해  이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이후 많은 변화와 소유의 변동 속에서 작품이 손상이 생겼다고 합니다. 1990-1991년 프라도 미술관에서 어두운 광칠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춘 복원 작업을 거쳤습니다. 

 

 

 

 

이 그림은 전형적인 베네치아 스타일로 평소에 사용하던 스타일처럼 차가운 색상으로 임종의 상황을 피부로 느끼게 그렸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조경을 보면 처남인 조반니 벨리니의 영향력이 풍기고 있기도 합니다. 안드레아 만테냐는 베네치아의 화가 집안인 야코포 벨리니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만테냐의 그림에 대한 실력은 엄청나게 진보하는 계기를 낳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u-0kAn4u6w

 

 

 

 

 

 

 

 

 

 

<Madonna with Sleeping Child>, 1465-1470,glue-tempera on canvas, Gemaldegalerie, Berlin/wikipedia

 

 

 

 

 

 

 

 

 

 

 

<신혼의 방 천장화 Camera degli Sposi>,1474, 이탈리아 만토바의 공작궁전/ Artchive

 

 

 

그는 만토바의 영주였던 루도비코 곤차가의 주문을 받아 <신혼의 방>이라고 불리는 궁전 침실을 그림으로 장식했습니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완벽하게 구사한 만테냐는 천장에 창을 그리고 그 주위를 풍성한 과일 묶음과 동그란 구멍이 뚫린 난간으로 둘러쌌습니다. 진짜처럼 보이지만 전부 그림입니다. 난간 위에는 공작새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수풀이 무성한 화분을 나무 막대 하나로 위태롭게  받쳐 놓아서 누군가 건드리면 아래 누운 이의 얼굴로 떨어질 것 같습니다.

 

 

옛적의 '신혼 첫날밤' 치르는 광경처럼 그 옆에서는 웃음을 띤  동네 여인들과 날개를 단 통통한 사내아이들이 침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여인네들 눈초리가 사뭇 날카롭습니다. '어디 한 번 보자.' 하는 식으로 우습기도 하고요. 화가의 유머코드가 심겨 있는 것 같아 재치 있다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신화의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이 아기들은 큐피드처럼 세속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난간 구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가 빠지지 않아 울고 있거나 사과를 아래로 던질 듯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천진한 아기들의 장난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다분히 성적인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금단의 열매였던 사과는 육체적 쾌락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터번을 두른 노예 같은 검은 얼굴도 보입니다. 

 

 

 

 

<Camera degli Sposi > view of the northern and western walls/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GN0P5RkQAow

 

 

 

The "Meeting Scene", 1474/wikipedia

 

 

 

 

 

 

 

 

 

 

<청동 다비드상> , 도나텔로 (Donatodi Niccolo di Betto bardi , 1386-1466)/wikipedia

 

 

 안드레아 만테냐는 도나텔로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렸으며 조각풍의 혁신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통을 따랐으며 무엇보다도 원근법에 능숙하여 최고의 궁정화가로서 동판화와 드로잉을 그렸습니다. 북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 하게 됩니다. 

 

 

 

 

 

<The Lamentation over the Dead Christ>,1480, Tempera on Canvas/wikipedia

 

 

 

 

 

 

 

 

<Lamentation on Dead Christ>/Silvia Minguzzi

 

 

 

 

거장  파올로 우체로 Paolo Uccello는 원근법과 단축법을 사용하여 사물을 입체적이면서 사실적으로 그리고자 애썼습니다. 단축법이란 단일의 사물이나 인물에 적용하는 원근법으로 대상의 형태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축소시키는 회화 작법을 말하는데 이러한 기법이 만테냐에게 영향을 미쳐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냈습니다.  대리석 위에 놓여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은 매우 비정상적인 비례의 그림입니다. 인체의 비례가 보통의 그림과는 다르게 화가가 발끝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로 인해 하체가 무척 짧게 보입니다.

 

 

 

상체는 조각같이 단단한 모습입니다.  손으로 만져 낸 듯 그린 몸에는 살 밑에 있는 단단한 골격이 드러나 있습니다. 얼굴의 미간에 있는  깊은 주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의 흔적을 적나라하게 부각시켰습니다. 또한 시신을 덮은 세마포의 주름은 마치 물결치는 듯한 로마풍의 조각을 연상시킵니다. 이로 인해   발과 손등의 못 자국 상흔 역시 도드라지게  보입니다.  만테냐가 진정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은 이 상처들과 심연의 슬픔을 안은 그리스도의 얼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1480)는 콜럼버스가 대서양 항해(1432)를 시작하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 빈치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꿈꿀 정도로 탐험과 혁명의 기운이 높았던 시절에 그려진 그림이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구도의 이 그림은 크고 두툼한 두 발에서 시점이 출발해 단연 단축시킨 몸통을 거쳐 발의 크기와 거의 비슷한 머리가 화면 뒤를 지탱하며 끝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끝을 소실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도로써 원근의 효과를 내려는 화가의 의도가 분명히 포착됩니다. 

 

 

 

 

언뜻 보면 마치 일꾼과도 같은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오히려 격조 높은 인간의 진실과 겸허함이 느껴집니다.  로마 후기의 목자상도, 비잔틴 교회제단 위에 그려진 제왕의 위엄을 갖춘 예수상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뤼네달트(Grunewald)의 "이젠하임 제단화"에서 보이는 것 같은 뒤틀린 고통의 형상도 아니고요.  이 절망과 같은 죽음의 그림은 도리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숭고함과 장엄한 죽음의 승리까지 느끼게 합니다. 

 

 

 

그것은 차라리 인간의 나약함에서 강한 믿음을 발견하려는 만테냐의 신앙 고백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만테냐 역시 르네상스 시대의 다른 화가들 처럼, 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진실한 속성에서 신의 숨결을 들으려 한 것 같습니다. 죽음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이라는 역설을 이 그림으로  다시 상기시키면서 말이죠. "... 한 알의 밀이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마태복음 12:24)

 

 

 

 

 

https://www.youtube.com/watch?v=8e20mMzj5Ug&t=270s

 

 

 

 

 

 

 

 

 

<동방박사들의 경배>,1461, 목판에 템페라 , 우피치 미술관,피렌체/wikipedia

 

 

 

 

이 그림은 만토바의 산 조르죠 성의 두칼레 성당 장식을 위해 루두비코 2세 곤차가가 주문한 세 폭 제단화 (왼쪽 패널:예수님 승천, 오른쪽 패널:할례)의 중앙 패널 부분으로 , <동방 박사들의 경배> 장면입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그린 주제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이 드러나게 되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만테나의 이 그림에서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비뿐만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의 신비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성모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십니다.  케루빔으로 둘러싸인 성모자가 있는 곳은 마구간이 아니라 동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동굴은 탄생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무덤의 공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성모님 위에 동방박사들의 여정을 인도한 자연계의 표징인 하늘의 별에서 빛줄기가 칼처럼 날카롭게 수직으로 동굴을 향해 내려져 있습니다. 뾰족한 칼은 어머니 성모마리아가 아들의 죽음으로  겪어야 할 고통을 상징합니다.  동굴 왼쪽 바위에는 무화과나무가 묘사돼 있고, 동굴 위에는 말라버린 나무에 새순이 자란 가지가 있습니다. 세 사람은 무화과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었다고 믿어 왔기에, 이 나무는 그리스도 수난의 상징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라버린 나무는 죽음을 , 새순이 자란 가지는 탄생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음 후에 다시 태어나 부활한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성화에서 세 명의 동방박사는 노년, 장년, 청년의 모습으로 각기 다른 연령층으로 표현됩니다. 각기 다른 연령층은 인간의 삶의 세 단계를 의 미하고, 다른 인종의 표현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온 인류의 기쁨임을 상징합니다. 동방박사들의 뒤로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이나 성모자 왼쪽에 소와 나귀 (이스라엘 백성과 이교도를 의미)에서도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인간세계뿐만이 아니라 자연세계를 비롯한 전우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으로 말합니다.

 

 

 

세 명의 동방박사는 모두 화화로운 궁정 예복을 입고 있습니다. 가장 나이 많은 박사는 꿇어 엎드려 있고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박사는 한 손에 예물을 들고 허리를 깊숙이 숙여 예수님께 경배하고 있습니다. 젊은 흑인 박사는 예물을 손에 들고 무릎을 꿇고 있고요. 동방박사들은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황금은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왕이신, 임금의 상징입니다. 유향은 가장 거룩한 제사에서 태우는 값비싼 향료료, 한 분이신 하느님을 의 미하고요. 몰약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뜻하는 예물로써, 참사랑이 심을 상징합니다. 박사들이 가진 예물을 아기 예수님께 드릴 때 그들은 바로 자기 자신들을 선물로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별을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동방박사에 대한 보답으로 하느님께서는 그 별빛보다 더 강력한 빛으로 그들의 마음을 비추십니다. 초라한 마구간(동굴) 구유에 태어난 아기였을 지라도 그들은 그 아기가 바로 세상의 구원자이자 자신의 구원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성 세바스티아노(St. Sebastian)>, 1478-1480, Tempera on liner/Obelisk Art History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노 St. Sebastian)> 작품입니다. 프랑스 남부 나르본(Narbonne)태생인 성 세바스티아(Sebastianus)는 283년경에 로마에서 군인이 되었고, 성 마르첼리아누스(Marcellianus 6월 18일 와 성 마르쿠스(Marcus,6월 18일) 부제를 격려하며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키도록 했던 열렬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는데, 그들 중에는 재판장, 그의 아내 성녀 조아 (Zoa, 7월 5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성녀 조아는 벙어리였으나 그의 기도로 완쾌되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간수 클라우디우스, 로마의 집정관 크로마티우스와 그의 아들 티부르티우스 등이 있습니다.

 

 

그는 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친위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황제는 그가 그리스도인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신자임이 드러난 것은 막시미아누스 황제로 그리스도교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그는 즉시 처형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나 성 카스룰루스(Castulus, 3월 26일)의 미망인인 성녀 이레네(Irene)가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가서 보니 아직 살아있음을 보고 극진히 간호하여 회복시킵니다.  그 후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황제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의 잔인성을 고발하자 황제는 화가 나서 그를 몽둥이로 때려죽이도록 한 다음 로마의 하수구인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에 던져 버리게 합니다. 그의 죽음과 용기는 신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요.

 

 

 

아피아(APPia) 가도,로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나무위키

 

 

 

한편 순교한 후에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로마에 사는 루치나(Lucina)라는 부인의 꿈에 나타나 하수구에서 자신의 시신을 찾아서 지금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당이 있는 자리 근처의 지하 묘지에 매장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의 시신은 루치나 부인에 의해 아피아(Appia) 가도에 있는 지하묘지에 묻혔고요.  그는 군인, 운동선수, 그리고 궁술가의 수호성인이자 전염병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전염병의 수호성인이 된 것은 680년 로마에 페스트가 발병했을 때 로마인들이 페스트가 멈추기를 기원하며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유해를 모시고 장엄한 행렬을 거행하자 그 뒤로 페스트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또 1575년에 밀라노 (Milano), 1599년에는 리스본(Lisbon)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보호를 기원하는 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점차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전염병 희생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자 , 이 사람이오" Ecce Homo>, 1500, tempera on canvas, wikipedia

 

 

 

만테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통에 따라 작업했고, 특히 고대 로마의 조각들의 형태를 인물에 반영했으며 , 환영적인 원근법을 능숙하게 사용했습니다.

 

 

<요한 복음서 제19장 1절-5절>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빌라도가 다시 나와 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수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하고 말하였다. 

 

 

만테냐가 1500년경에 그린 <자, 이 사람이오.>은 그의 말기 작품입니다.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던  때 그려진 작품이지요. 라틴어로 '에체 호모'(Ecce Homo)라 하고, 이 도상의 예수님의 수난을 말하는 전통적인 도상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에체 호모(Ecce Homo)' 유형의 그림들은 대개 예수의 머리나 상체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있거나, 종종 목둘레를 줄로 묶기도 하고, 손목을 결박하고, 채찍 자국이 있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경우 예수는 대체로 자신을 처형한 사람들을 연민의 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재현되곤 했습니다. 

 

 

 

만테냐는 선명한 색채, 뚜렷한 형태, 뛰어난 공간 구성에 대한 이해를 이용하여 이 유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예수의 옆에 있는 사악한 얼굴들은 모두 다섯인데, 이들은 그림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있고 예수의 살을 할퀸 터번을 쓴 늙은 여인의 표정과 손가락이 돋보입니다. 예수와 뒤의 처형자들이 삼각형 구도를 이루게 그림으로써, 만테냐는 그들 중 세 사람을 어두운 그림자 속에 묻게 하여 처형자들을 더욱 사악하게 보이게 했습니다. 예수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냈고요.

 

 

 

오른쪽 수석 사제의 이마에 쓰인 글자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고발한 내용입니다. 또 상단 양쪽에 모서리에 펼쳐진 종이에는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요한 19,6)하고 외쳤던 그 외침이 양쪽으로 적혀있습니다. 그 외침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졌기에 예수님의 배경에 검은 십자가의 형태가 형성되었습니다. 예수의 초점을 잃고 살짝 입을 벌린 슬픈 표정과 주변 처형자들의 매서운 시선이 현저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O8M3Aiat90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는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동시대는 물론 후대의 화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만토바에서 1506년 사망합니다. 만테냐가 르네상스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며, 특히 그의 영향은 처남이었던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와 독일의 거장 알브레흐트 뒤러(Albrecht Durer , 1471-1528)의 그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2024.05.15 - [지식&교양] - 51-15.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 66)

 

51-15.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 66)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는 베네치아 화풍의 기초를 세우고 완성한 화가입니다. 지암벨리노라는 별명으로 알려죠 있고요. 조반니 벨리니의 영향력은 조르조네(Giorgione 1478-1510)와 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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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는 베네치아 화풍의 기초를 세우고 완성한 화가입니다. 지암벨리노라는 별명으로 알려죠 있고요. 조반니 벨리니의 영향력은 조르조네(Giorgione 1478-1510)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76)에게  미치게 됩니다. 특히 가볍고 천천히 마르는 유채의 기법을 사용하여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감을 그림자를 통해 도드라지게 그려 완성한 화가로 유명합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내부와 북유럽(플랑드르 지역:벨기에 , 네덜란드)으로부터의 외부 영향에 개방적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베니스항을 통해 새롭게 이탈리아로 들어 온 유화 물감의 예술적 가능성을 시험하려는 의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강건한 기독교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인간상의 뉘앙스를  전하기 위해 그림을 사용하기로 결심합니다. 벨리니 작품 속 인물들은  인간적이면서도 신성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의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우화에 새로운 인간적 유연함을 가져다주듯이 말이죠. 벨리니의 오일 실험은 그의 작품의 전반적인 우아함을 더합니다. 그는 유화를 통해 가장 미묘한 색채 배열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을 완성했습니다. 그의 정교한 그림은 다른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줍니다.  많은 동시대 사람들 과는 달리 벨리니는  자연경관에 큰 존경을 표합니다. 자연계는 전형적으로 그려진 서사에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고안되었지요.  벨리니는 의상과 피부색을 섬세하게 표현해 낸 것 외에도 빛과 색채에 뛰어납니다. 

 

 

 

 

<Portrait of Doge Leonardo Loredan,1501-02, National Gallery,London/wikipedia

 

 

 

머리에 두른 관이 참 독특합니다. 근엄한 얼굴에 걸친 옷의 섬세한 문양과 장식 또한 실사 사진을 보는 듯 정교하고요. 당시 베네치아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초상화입니다. 벨리니의 <레오나르도 로레단 총독 The Doge Leonardo Lorodan> 초상화는 레오나르도 로레단 총독 통치  첫 해에 완성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옥외의 푸른 배경 앞에 놓인 받침대 뒤에 앉아 있는 완전한 예복 차림의 총독의 3/4 흉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베네치아 초상화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 전반에 대한  중요성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15세기 예술에 대한 공식적인 접근 방식의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실물 같은 초상화를 제작하는 예술가들이 슬슬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16세기 전반기에 그 수요가  엄청나게 급증하게 됩니다. 

 

 

 

 

 

 

베니스의 무역 연계는 벨리니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스튜디오들이 특히 네덜란드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로 진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초상화는 네덜란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첫번째 증거는 일반적인 이탈리아의 프로필과는 대조적으로 모델이 3/4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총독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갈색의 받침대 뒤에 그를 배치한 점이고요. 그가 관람자와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묘사했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템페라보다는 기름으로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이 매체를 통해 벨리니는 총독의 피부를 아주 부드럽고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정교함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벨리니가 그린 이 초상화는 베네치아를 통치하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지만, 위엄과 인간미를 동시에 지닌 현명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베니스의 푸른 하늘빛을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짙게 칠함으로써 인물의 사실적 묘사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총독의 눈동자의 평온함과 회피된 초점은 "베니스에서 가장 고요한 공화국"을 완벽하게 의인화하고, 빛이 비치는 오른쪽은 엄숙하고, 그늘진 왼쪽은 자애로워 보입니다. 금실로 짠 비단 망토를 입고 뿔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는 총독은 의상의 조화로 인해 절제되고 균형 잡힌 품성이 더욱 강조됩니다. 옷감의 광택은 벨리니가 일부러 물감을 거칠게 하여 표현했으며, 그의 화려한 예복은 전혀 사치스럽게 보이지 않고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nOKNSqNEcg&t=1s

 

 

 

 

 

 

 

 

 

 

 

베니스/디트NEWS24

 

 

 

벨리니는 베니스의 예술가 가문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야코보 벨리니(Jacopo Bellini)는 유명 화가였으며 그의 형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역시 화가였습니다. 매부인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는 르네상스 시대의 으뜸가는 화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반니 벨리니는 1400년대 북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아주 중요한 화가로 자리매김 합니다. 티치아노(Tiziano)나 틴토레토(Tintoretto)같은 베니스 화가들에게뿐 아니라 북 이탈리아 전 지역에 걸친 수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회화적 기술과 예술성은 이탈리아 후기 고딕 예술로부터 르네상스 문예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가교 역할을 합니다. 

 

 

 

<Agony in the Garden>,1459-1465, National Gallery,London/wikipedia

 

 

 

<감람산의 그리스도 The Agony in the Garden>는 유다의 배신으로 로마 군인들에게 포로가 되기 전 겟세마네 (Gethsemane)동산에서 그리스도가 기도하는 종교적 주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버전에서 그리스도는 바위 봉우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깨어있지 못하고 모두 잠에 골아떨어졌습니다. 유다와 로마 병사들이 오고 있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죠. 무릎 꿇은 예수님 위의 구름 속에는  천사가 보입니다. 다가올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컵과 성반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전경의 인물들 너머, 저 멀리 ,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로마 병사들과 유다의 모습이 보입니다. 

 

 

 

벨리니는 만토바(Mantua)보다 더 멀리 여행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야코포의 여행 덕분에 피렌체에서 유행하고 있던 원근법과 드로잉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학문은 벨리니에게 영감을 주어 그의 주위의 자연세계를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사실주의와 종교적 헌신으로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벨리니는  만테냐의 예루살렘 첨탑을 당시 베니스 주변 시골에서 발견된 정착촌으로 묘사합니다. 시골의 한산함은 군인들의 행렬을 더 먼 곳으로 배치함으로써 저 멀리 모여드는 폭풍 구름처럼 고요함은 임박한 운명의 강력한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그림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점은 벨리니가 감질나는 분홍빛 새벽빛을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강과 바위를 포착하고 넓은 계곡으로 물밀듯이 밀려들면서 떠오르는 태양의 핑크빛 온기는 주제의 긴장감과  상관없이 아름답습니다.  그 빛은 파랑에 골드를 첨가하여 한층 강화된 찬란함으로 예수의 예복 뒷면에 파문처럼 번집니다. 벨리니는 이런 식으로 빛과 색깔을 계속 활용함으로써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달인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UxGYgS1DyU

 

 

 

 

 벨리니는   르네상스 시대의 중요한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았을 뿐 아니라 파도바(Padova)에서 만테냐의 작품들을 접할 기회를 가집니다. 벨리니의 화풍은 부친인 야코보의 영향 아래 시작되었으며 베니스와 피렌체 회화를 결합한 형태입니다.

그의  부친은 한 때 피렌체에 거주하며, 그곳의 중요한 화가인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에게서 원근법의 새로운 기술들을 배우게 됩니다. 이 기술을 통해 아들 조반니는 드넓은 초원의 독창적인 풍경화를 개발하게 되지요. 수세기에 걸쳐 북부 유럽과 베니스 화파의 근본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San Girolamo nel deserto>,1455/wikipedia

 

 

 

 

벨리니에게 있어 가장 깊은 예술적 교류는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와 이루어집니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가 조반니 벨리니 동생 니코로시아(Nicolosia Bellini)와 결혼을 하면서 가족이 됩니다. 풍경과 인물 등 다양한 구도적 변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고요. 만테냐는 열정을 다해 벨리니에게 고전주의 형식 및 그레코-로만 양식의 고전미를 가르칩니다.  또한 만테냐의 고장인 파도바에서 피렌체의 위대한 조각가이자 고아출신의 화가인 도나텔로(Donatello)의 예술 세계와 만나게 됩니다. 벨리니는   피렌체의 르네상스 예술의 장대함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한편으로 만테냐에게서 고전주의 를 다른 한편으로는 도나텔로에게서 피렌체 예술의 합리성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벨리니의 화풍에는 피렌체와 베니스의 융합적 르네상스가 표현됩니다. 

 

 

 

 

 

 

피에타 Pieta(Dead Christ Supported by the Madonna and Saint John),1460/wikipedia

 

 

 

 

 

 

벨리니가 여기서 잉태한 슬픔은 오직 넘치는 인간성 속에서만 신성한 것이다. 
-미술사학자 로저 프라이(Roger Fry)-

 

 

 

 

<피에타 Pieta>는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 그림 아래쪽 가운데에 서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피에타'는 '연민','자비'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지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벨리니의 작품 역시 마리아와 요한이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칼에  찔린 상처와 십자가에 못 박힌 상처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세 인물은 중앙 전경에 위치하며, 그들 뒤에  가려진 농촌 풍경이 긴장감을 풀어줍니다. 이 그림은 벨리니가 만테냐와 파두안 학파의 양식적 관행에서 벗어난 것이어서 의미가 큽니다. 그것은 화가 자신의 독특한, 보다 조용하고 친밀한 스타일을 탐구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 의상의 뻣뻣한 직물은 훨씬 더 부드럽고, 더 광범위하고, 주름 잡힌 것으로 대체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주변적인 변화가 이미지에 더해져 어머니와 하나뿐인 아들 사이의 감정의 친밀감을 뒷받침합니다. 이것은 벨리니 작품의 한 단면으로서 앞으로 그의 그림에서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되어 갑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고전적인 주제와 구성을 개인적인 해석으로 주입하는 그의 능력입니다. 마리아와 비교했을 때 다소 건장한 모습의 요한은 예수의 시신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시울은 달아올라 있고 목 근육도 부풀어 올라 역시 개인적인 슬픔에 젖어 무언가를 외치고 있는 듯합니다. 마리아의 슬픔이 내면의 슬픔이라면 요한의 슬픔은 밖으로 울부짖는 절규입니다. 열렬한 한 제자의 상실감을 넘어  단순하고 보편적이며 고통스러운 어머니의 상실감이 전해집니다. 선과 윤곽에 대한 강조에서 벗어나 더 많은 모델링 된 평면과 명암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팔에 죽음의 무게를 더하고 그의 피부에 부드러움을 주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구세주의 피 The Blood of the Redeemer>,1465,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wikipedia

 

 

벨리니의 초기 작품 <구세주의 피The Blood of the Redeemer>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뒤에, 그의 피가 세계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고뇌의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들고 있고요. 천사는 미사에서 사용되는 것과 비슷한 성배로 옆구리의 상처에서 그의 피를 받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풍스럽고 이교도적인 의식을 묘사한 난간 양각들의 표현이 독특합니다. 1978년 세척을 통해 석고를 칠한 바탕, 즉 지면의 텅 빈 부분들은 원래 붉은색과 푸른색의 천사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나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많은 금색으로 구름처럼 그려졌고요. 왜 천사들이 제거되었는지, 언제 제거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St.Francis in Ecstasy>,1480/wikipedia

 

 

 

 

 

 

 

벨리니가 <법열에 빠진 성 프란체스코 St. Francis in Ecstasy>를 통해 선보인 감각적인 스타일과 화려한 색감, 명암은 베네치아화파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1475년 작품을 그리기 사작하여 1480년경에 완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작품은 뉴욕 프릭 컬렉션( New York Frick Collection)에 소장되어 있으며 헨리 클레이 프릭의 거실 (Henry Clay Frick's living room)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일부가 잘려나가기는 했지만 현재 보존 상태는 우수하다고 합니다. 벨리니의 걸작이며, 프릭 컬렉션(The Frick Collection)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르네상스 그림일지도 모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Saint Francis of Assisi)는 이탈리아 가톨릭교회의 탁발 수사입니다.  그는 수도사로 프란체스코 수도회(the Franciscan Order)의 설립자이기도 하지요. 현  프란체스코 교황님이 닮고자 하는 삶의 모델이시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표적인 종교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작품 속 성인은 15세기에 널리 알려진 성 프란체스코의 일대기에서 볼 수 있는 전설과는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도상학적인 모티브를 따르지도  않았고요.

 

 

 

화가는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가 홀로 돌이 많은 그의 소박한 은신처에서 영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듯한 황금빛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아마도 1224년 이 성인이 알베르나 산 (Mount Alverna)에 도피중일 때인 것으로 보입니다. 법열에 빠진 성 프란체스코는 모세처럼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벗고 맨발로 서 있습니다.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그의 얼굴은 하늘을 보고 있고요. 태양의 찬송을 부르고 있거나 그리스도의 성흔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화면 위쪽  위의 구름 속에서부터 나오는 초 자연적인 빛을 통해 신격화된 모습입니다.

 

 

 

 

그림에서  주목할 부분은 배경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왼쪽 상단에서 발원하는 달빛에  암석물의 벽을 밝히고, 오른쪽 전경에 성자와 그의 작업공간을 가리는 벽에 붙은 나뭇가지 뒤로 깊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이런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왼쪽 상단의 월계수는 마치 초자연적인 힘을 향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빛을 내면서 휘어진 모습입니다. 성인의 왼편에는 겸손과 인내이면서 동시에 나태함, 완고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되는 당나귀가 서 있습니다. 오른쪽 구석의 앞에는 전원생활을 연출하는 소박한 독서 테이블 위에 성자의 기도서가 있고요.

 

 

 

동굴은  프란체스코와 제롬 (Jerome)을 연관시킵니다. 왼편의 개울은 모세와 그의 위대한 샘을 상징하는 데 중앙의 메마른 나무는 모세가 호렙 산에서 발견한 불이 피어오르나 타지는 않는 나무, 불타는 수풀(Burning bush)을 의미합니다. 멀리 뒤편으로는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천상의 예루살렘이 나타납니다. 그 경치는 동물, 새, 사람, 식물, 캐슬, 두 개골과 샌들과 같은 물체, 심지어 종과 줄까지 세세하게 관찰된 세부사항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왼쪽  하단의 일부 나뭇가지에 걸린 종이 조각은 그 화가의 자랑할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성은 성 프란체스코가 창세기 (the book of Genesis)에 언급된 세상의 창조에 대해 명상하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D8KxM1Ia9c

 

 

 

 

 

 

 

<Madonna and Child with St. John the Baptist>,1480/wikipedia

 

 

 

 

 

당시 예술가들은 여행이 쉽거나 단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새로운기법을 배우며 서로 간에 관계를 맺기 위해 더 많이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 (Antonello da Messina)는 베니스를 방문하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거슬러 올랐다고 합니다.

 

 

조반니 벨리니는 플랑드르 화파의 화가들과 연분이 돈독했던 안토넬로를 만나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며 새로운 회화적 기법을 연마하게 됩니다 . 그는 부드러운 사실주의를 사용한 화풍을 발전시키며 조르조네(Giorgione), 티치아노(Tiziano), 그리고 틴토레토(Tintoretto)와 같은 훌륭한 베니스 화가들에게 길을 열어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BU3SwIANyQ

 

 

 

 

 

 

 

1480년 그의 형이 콘스탄티노플로 떠난 해로부터 벨리니의 경력은 성공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1483년 정식 월급을 받는 베니스 공화국의 공식화가로 지명됩니다. 1487년에는 예술적 성숙도가 드러나는 매우 중요한 작품 < 산 지오베의 제단 La Pala di San Giobbe>을 그리게 됩니다. 여기에 비잔틴식 모자이크 영상을 배경으로 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의 영향이 보입니다.

 

 

 

 

 

 

Gentile Bellini& Giovanni Bellini ,<St. Mark Preaching in Alexandria>, 1504-1507, Pinacoteca di Brera, Milan/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rudav6yjqNc&t=1s

 

 

 

 

 

 

 

<성 조베 제단화 San Giobbe Altarpiece>,1487, 이탈리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wikipedia

 

 

 

 

 

안토넬로 다 메시나 Antonello da Messina<Saint Sebastian>,1477-1479/wikipedia

 

 

 

 

 

 

 

 

벨리니의 작품을 보며  우리는 베니스와 비잔티움 사이의 깊은 관련성을  기억하게 됩니다.산 마르코 대성당 (Basilica di San Marci)은 베니스와 비잔티움 사이의 깊은 문화 예술적 관계를 보여주는 극명한 본보기입니다. 제단의 예를 들어 그림에 나타난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o)성인은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의 대표작 중 하나로 메시나의 인용을 언급할 수 있으며, 또한 세바스티아누스 성인은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양측으로부터 존경받는 성인입니다.

 

 

 

벨리니의 <성 조베 제단화 St Giobbe Altarpiece>입니다.   베니스의 성 조베 교회 (Church of St Giobbe)를 위해 그 려졌고요. 성인들과 천상이 모여 논의하는 성모 마리아라는 일반적인 종교적 주제를 그린 작품입니다. 관람객 입장에서 왼쪽으로 성 프란체스코 (St Francis), 성요한 (St John), 성 욥(St Job), 오른쪽 안쪽으로부터  성 도미니크 (St Dominic), 성 세바스찬 (St Sebastian, 화살), 성 루이(St Louis)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모마리아의 왕좌 아래에는 악기를 든 세 명의 천사가 앉아 있습니다. 이 그림은 베네치아 교회의 건축 속에 설정된 <성모자상; 성스러운 대화>의 최초의 예였습니다. 이전에, 신성한 집단은 천상의 환경 안에서 설정되었다면 벨리니는 그들을 바로 지상으로 데려옵니다. 성 조베 교회 안에 있는 원래 자리에는 성모 마리아와 그리스도와 모든 신자들이 예배자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는 암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림의 공간 안에 있는 것과 비슷한 기둥들로 둘러싸여 있었을 겁니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위대한 교회인 산마르코 대성당 (St Marks Basilica)의 실내를 연상케합니다. 친숙한 그림의 건축 양식이 이런 효과를 더 했을 겁니다.  둥근 지붕의 금과 성모 마리아 뒤의 벽에 늘어선 대리석은 모두 바실리카 성당의 매우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성경 장면에 대한 이러한 건축적 배경의 사용은 많은 미래의 종교 화가들, 특히 프라 바르톨로메오(Fra Bartolomeo)의 1512년 < 성 카타리나의 신비한 결혼 Mystio Marriage of St Catherine>에 영향을 주었고, 현재 플로렌스의 아카데미아 캘러리에 있습니다.  이 사진 속의 황금빛의 따뜻함은 아마도 벽에 걸린 방대한 양의 금에 의해 생성되는 산마르코 성당의 신성하고 신비로운 빛에서 영감을 받은 것일 겁니다. 이 그림이 주목할 만한 이유 중 하나는 단연 그 분위기를 꼽습니다. 이때쯤 벨리니는 점점 더 기름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는 기름을 사용하여 얇은 층 위에 다시 얇은 층을 쌓아 올려, 그 장면에 가득 찬 빛의  풍부함과 깊이를 부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xCTyVQMVbs

 

 

 

 

 

 

 

 

 

 

<Madonna with Child, infant St.John and St. Joseph>,1490 St. John on the small tree mirroring the enigmatic child in the Holy Allegory/wikipedia

 

 

 

 

 

조반니 벨리니는 항상 동방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리고 북유럽 예술 간의 교접접을 보이는 방식과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벨리니의 작품 중에는 많은 양의 성모화가 존재합니다. 그가 새로운 성모상의 도상을 위해 목판이나 그림 위에 스케치한 대부분의 밑그림들은 흔히 알려진 성화 표현법에 기초하여 표현되었습니다. 즉 성모는 성인들이나 그림의 기증자 혹은 투자가들로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습니다. 

 

 

 

벨리니  작품의 중요한 요소는 바로 종교성입니다. 이는 그가 비잔티움 세계와 연관된 1400년대 베니스의 문화적 여건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 아래 르네상스의 기독교관을 지닌 위대한 화가이며, 또한 풍경에 몰두 한 성스러운 관념의 전달자이기도 합니다. 이를 표현하고자  그는 신성함이 아닌 고전성으로 풍경 안에 녹아 들은 종교관과 고전 세계의 기법을 사용하며 전통적 그레코-로만 양식의 신들의 향연 (Festino degli dei)'을 내놓기도 합니다.

 

 

 

 

<축복을 내리고 있는 그리스도 Christ Blessing>,1500, Kimbell Art Museum Texas /wikipedia

 

 

 

 

벨리니의 <축복을 내리고 있는 그리스도 Christ Blessing>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 미스터리인  인간이면서  신성한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지상으로 보내졌을 때의 화신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축복을 하는 오른손을 들고, 왼손으로 부활의 기치(죽음에 대한 승리를 나타내는 적십자가 그려진 백기)의 밝고 붉은 지팡이를 쥐고 있습니다.  머리 위와 옆면에서 금빛 광선이 뿜어져 나와 그의 신성을 알립니다. 기독교적 연민의 메시지는 손과 가슴에 살짝 비치는 고통의 상처로 전해지는 반면, 그의 치켜든 팔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부활의 실체를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먼 풍경 속의 다양한 모티브가 부활의 주제를 암시하고요. 패널의 왼쪽에는 외로운 새 한 마리가 있는 말라죽은 나무가 보입니다.  낡은 구약을 상징합니다. 토끼 한 쌍은 재생을 의미하고요. 양 떼를 보살피는 목동은 그리스도 자신이 선한 목자임을 상기시킵니다. 

 

 

 

 

<산 자카리아 제단화 San Zaccaia Altarpiece>, 1505, 이탈리아 베니스 산 차카리아 교회/smarthistory

 

 

 

 

 

옛 날에 성모상은 성자들의 전통적 이미지로 엄격하게 측면 배치되곤 했다. 
벨리니는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고 단순 대칭적인 배열로 생명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산 자카리아 제단화 San Zaccaria Altarpiece>는 다시 한번 판자에 유화로 그린  한 예로서 벨리니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 작품을 세계 최고의 그림이라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일반적인 종교적 주제인 <성모자상;성스러운 대화>를 묘사하고 있고요. 다른 많은 예들과 마찬가지로, 그림의 중심에 성모 마리아와 차일드 아기 예수가 전통적인 피라미드 구조로 배치되어 있고, 성자들의 모습이 양옆에 나란히 그려져 있습니다.

 

 

이 경우 성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성 베드로 (St Peter), 성 캐서린(St Catherine), 성 루시 (St Lucy),  성 제롬(St Jerome)입니다. 이 성인 그룹은 성스러운 건축물 안에 위치하고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둥근 반형 지붕 아래 왕좌에 앉아 있습니다. 그의 경력 말년기에 만들어진 이 그림은 벨리니의 인간적인 모습과 관점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모든 것을 보여 줍니다. 그가 색채를 이용해 어떻게 작품 구성을 함께 결합시키는지에 대한 예이기도 하고요. 성자들의 예복의 대조적이고 보안적인 배열은 단순히 구조적인 것보다 더 깊은 조화를 만들어 냅니다. 성자들의 얼굴의 침착함과 평온함, 성 캐서린의  미소와 그의 책에 몰두하는 성 제롬은 성자들에게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는 , 그리고 초기 <성 조베 제단화 St Giobbe Altarpiece>에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선사합니다.

 

 

베니스의 산자카리아 교회의 측면 제단 위에 놓인  이 그림과 그 원근 화법의 건축 양식은 성 조베 제단화의 예와 같이 단순히 교회 내부 공간의 확장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그러나 탁 트인 평원의 주변 경관 덕분에 이 사례는 유명한 전작보다 더 큰 빛과 공간감을 줍니다. 

 

 

 

 

 

 

<시메온의 노래 Sacra Conversation( Nunc Dimittis)>,1505-1510, Museo Thyssen-Bornemisza,Madrid/wikipedia

 

 

 

 

주님 ,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시메온의 노래-

 

 

 

 

 

 

 

 

 

라틴어로' NUNC DIMITTIS'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거룩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고 경건하게 살았으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에게 아기 예수가 나타났고 이 아기를 안고 "눈크 디미티스 (NUNC DIMITTIS)"로 알려진 시메온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과부가 된 안나라는 여인과 함께 시메온은 "죽기 전에"하느님의 영광을 보겠노라는 예언을 듣고 매일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다리다 예수를 만난 후 예언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모든 화가들이 공통으로 그리는 이 그림은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고 그 오른편에 예언자 시메온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왼편에 젊은 여인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상징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의식에 의하면, 산모가 남자 아이를 낳으면 40일이 지나서 예루살렘에 와서 정결한 예식을 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합니다. 이때 만난 장면인데, 자세히 보면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안는 장면입니다. 보통은 아기의 두 어깨 사이에 손을 넣어서 아기를 안습니다. 하지만, 시메온은 두 손을 내밀어 마치 귀한 물건을 받듯이 하고 있습니다.  조반니 벨리니 외 수많은 화가들이 이 부분을 공통적으로 그립니다. 그 이유는 시메온의 겸손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시메온의 예언-

 

 

 

 

 

 

 

<거울 앞에 벌거벗은 젊은 여자 Naked Young Woman in Front of a Mirror>,1515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wikipedia

 

 

 

 그의 모든 예술적 기법들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작품은 현재 비엔나의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 Museum)에 소장된 <거울 앞의 벌거벗은 여인>입니다. 이는 노년기인 1515년에 탄생하며 종교적인 주제와는 별개로,  방안의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나체의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의 형상은 그레코-로만 양식의 고전적 여성상을 떠오르게 하고요. 그녀의 어깨 뒤에 걸린 거울에는 풍성한 머리칼을 덮은 망건이 비치며 마치 조각상에 견줄 만큼 유일한 완벽성을 보입니다.

 

 

 

 

거울이 걸린 벽면은 검은색으로, 보다 선명하게 형태의 특징들을 살리는 메시나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전형적 영향이 인용되었습니다. 왼쪽 뒷면의 창문을 통해 플랑드르 지방과 거의 흡사한 풍경과 창틀 위의 투명한 꽃병이 보이는데, 이는 머지않아 '정물화'라 불리게 될 새로운 화풍의 출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과일, 꽃 혹은 일상의 생명이 없는 사물을 주제로 대부분 그릇이나 물병 혹은 꽃병들을 표현한 1600년대 회화의 화풍을 말합니다.

 

 

 

또한 젊은 여인은 값비싼 옷감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녀의  뒤에는 거울이 걸려 있는 짙은 녹색의 벽면이 있고요. 벨리니는 주요 모티브와 풍경에서 같은 색상을 사용함으로써 두 영역을 이어주며 , 그림의 기본 무드는 온화하고 통일적입니다. 젊은 여자가 오른 손에는 또 다른 거울을 들고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거울은 한쪽은 허영(Vanitas)의 상징이고 다른  한 손에는 비너스의 속성 정숙함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벨리니는 두 거울의 장치를 사용하여 관찰자가 그림에서만 가능한 관점인 하나의 관점에서 여성 머리의 두 가지 관점을 볼 수 있게 합니다. 게다가, 그는 비록 물리적인 거리는 매우 작지만, 보는 사람의 시야에서 여성의 행동의  독립성을 강화합니다. 오른쪽의 작은 종이쪽지에 적힌 그의 서명에서 벨리니는 풀리니우스 (Pliny)에 의해 공식 표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림의 아름다움과 창조력이라는 작품의 기본 테마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입니다.

 

 

 

이  작품에서 여인의 모습은 성모들을 표현한 타 작품들과는 달리 관능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르네상스로부터 바로크에 이르는 아니, 모든 서양 예술사의 유산으로 남을 상징과 인용, 그리고 기법이 집합되어 있습니다. 성모와 같은 성스러운 형상이 젊은 여성의 명백한 아리따움을 통해 세속적이 아닌 거룩함으로 변화됩니다. 그 반대로 세속적인 젊은 여인의 육감적이며 관능적인 모습이 종교적으로 격상되어 거룩한 형상으로 뒤바뀌고요. 이러한 것들은 오로지 서로 다른 문화적 공간을 거슬러 계속적인 변화를 시도한 광대한 예술성의 뛰어난 화가 조반니 벨리니 만이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노화가의 비범함이죠.

 

 

 

신들의 축제 The Feast of the Gods(1524& 1529[Additions made by Dosso Dossi and Tirian], 미국 워싱턴 DC 국립 미술관/wikipedia

 

 

 

 

<신들의 축제 The Feast of the Gods>는 벨리니가 생의 막바지에 그린 소수의 세속적인 그림들  중  가장 훌륭한 예입니다. 가로로 된 배치에서 로마의 프리즈(방이나 건물의 윗부분에 그림이나 조각으로 띠 모양의 장식을 한 것)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구성입니다. 박카스 (Bacchus), 헤르메스(Hermes), 주피터(Jupiter), 판 (Pan), 냅튠( Neptune), 아폴로(Apollo)등 17명의 인물이 숲에서 잔치를 벌이는 오비디우스(Ovid)의 한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그것은 페라라 공작이 그의 학문을 위해 의뢰했고 따라서 그 주제는 좀 더 사적인 것으로 허용되었습니다. 많은 여신들과 요정들이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고 그림 오른쪽의 초록색 옷을 입은 프리아포스 (Priapus)가 잠든 로티스(Lotis)의 치마를 들어 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림에는 여러 가지 성적 상징들이 가득 있으며 중앙에 있는 부부, 복숭아색 옷을 입은 여인,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손을 얹은 옆에 있는 남자가 공작 내외의 초상화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벨리니가 죽은후, 화가 도소 도시 (Dosso Dossi)는 공작의 지시에 따라 그림을 수정합니다. 주된 변화는 원래 벨리니가  그린 인물들은 그대로 둔 채 풍경을 다시 작업한 티치아노(Titian)에 의해서 마무리되지요. 이 그림은 유명했던 벨리니 특유의 강렬한 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젊은 박카스의 푸른색 가운은 특히 유명하고요. 비록 이 형상들이 신들이지만, 그들을 거의 신들처럼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볼 때 이것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의 자연주의 적인 장면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벨리니의 이런 종류의 그림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필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간주되는 신화적 인물들을 인간화한 것으로도 귀결될 수도 있습니다.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회화의 특징은 "색조"와 "고전적인 자연주의 "와 "기독교의 영성"을 융합한 스타일입니다. 이런 영향력이 티치아노(Tiziano), 조르조네(Giorgione), 피옴보(Piombo)의 작품에서 더욱 크게 드러나고요. 조반니 벨리니는 당시 북유럽의 미학을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접목해서 더욱 활성화시키고자 늘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1425-1479)의 플랑드르 유화의 전달을 통해 조반니 벨리니는 풍부하고 화려한 자연과의 색채감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네치아라는 수상도시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가 지닌 장점을 충분히 활용한 화가라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 동 서양을 아우르는  문화 집합체처럼 융성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꽃 피웠던 베네치아 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 낸 화가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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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알래스카가 원산지입니다. 북극에서 가장 오래된 썰매견이고요. 알래스카 지역명과 이누이트 중 하나인 맬러뮤트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말라뮤트는 고립된 지역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견종이기에 순종으로 인정받는 범위가 넓습니다. 가끔 알래스칸 말라뮤트랑 자이언트 말라뮤트가 다른 견종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크기의 차이일 뿐 다른 견종은 아닙니다. 

 

 

 

Alaskan Malamute/애니멀러브

 

 

 

맬러뮤트 족이 썰매 견으로 오랜 세월 함께 했던 견종입니다. 장거리나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일을 수행했던 대형견이고요. 무리지어 생활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당연히 힘과 지구력 또한 강하겠죠. 

 

 

 

 

  단거리 달리기에는 글리코겐이 에너지원으로 소모되며 장거리 달리기에는 지방과 단백질이 에너지원으로 소모되는데, 대부분의 동물은 단백질, 지방질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소량의 글리코겐을 소모합니다. 때문에 체내에 지방과 단백질이 남아 있어도 글리코겐이 바닥나면 더 이상 달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썰매견들은 탄수화물 없이 지방과 단백질로 이루어진 고기만을 먹고도 바로 에너지를 쓸 수 있는 독특한 매커니즘의 에너지 소모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랫동안 빨리 달릴 수 있는  비결이고요. 그 체력은 하루에 마라톤 풀코스를 다섯 번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으며, 하룻밤만에 회복하여 다음날에도 똑같은 거리를 달릴 수 있다 하니 상상이 안 가는 체력입니다. 썰매견들은 이런 식으로 열흘도 버틸 수 있을 만큼 체력이 강하다고 합니다. 

 

 

 

 

알래스칸 말라뮤트/나무위키

 

 

 

 

알래스카/위키백과

 

 

 

 

 

알래스칸 말라뮤트/위키백과

 

 

 

 

 

 

 

체고: 58-71cm

체중:38-56kg

평균 수명: 10-14년

 

등으로 말린 꼬리, 쫑긋한 귀, 쐐기 모양의 머리 등이 특징입니다.

어린 시절은 귀가 아래로 쳐져 있습니다. 눈은 갈색 계열로 파란색 눈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Alaskan Malamute/Alpha Feeds

 

 

 

 

 

https://www.youtube.com/watch?v=wdAImRsoVCM

 

 

 

 

 

풍성한 이중모의 털을 가졌습니다. 연간 2회 털갈이를 하고 털빠짐이 심합니다. 거친 겉털과 약 5cm 정 된 되는 속 털을 가지고 있습니다. 털색은 회색, 검은색, 세이블, 붉은색 등 다양하며 얼룩무늬를 보이고 단색은 흰색이 유일합니다. 털 빠짐이 심해 주기적인 빗질을 통해 관리가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대형견 미용은 매우 어려워서 애견 미용실 방문 전에 문의를 하고 예약하는 것이 좋습니다. 약 2-4개월에 한 번 정도 미용을 해주세요.

 

 

 

아기 강아지는 백신 접종 종료 후 약 3-4주 후 목욕과 미용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백신 접종 전에는 빗질, 발톱 관리 등을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노령견의 경우 미용하는 것이 부담이 될 수 있으므로 횟수를 줄이고 빗질과 워터리스 샴푸로 관리해 주면 좋습니다. 평소에 덩치부터 산마 한 썰매견이니 혼자서 씻기는 것보다 2-3명이 같이 씻기길 권장합니다. 제대로 씻기기 위해선 샴푸 한 통을 다 써야 할지도 몰라요. 

 

 

 

https://www.youtube.com/watch?v=mX4Lt466sqM

 

 

 

멋진 외모의 알래스칸 말라뮤트는 오랜 단체 생활 특성이 남아 있어 서열 정리와 복종 훈련이 필수인 품종입니다. 사역견, 워킹 그룹에 속하는 견종으로 지능이 높습니다. 조심성과 경계심도 많은 편이고요. 체력이 강하고 활동량이 풍부해 에너지 소비를 위한 충분한 운동, 산책, 놀이 등이 필요한 견종입니다. 산책시 엄청난 힘으로 인해 견주가  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내가 바로 썰매견 , Alaskan Malamute/CBMPRESS 벤쿠버

 

 

 

알래스칸 말라뮤트 새끼를 보면 인형같이 귀엽습니다. 2010년 알래스카 주의 공식 개로 인정받아 알래스카의 마스코트가 되었습니다. 물개와 북극곰 사냥에도 이용되었고요. 잘 다듬어진 근육질 몸매와 강인한 체력이 특징입니다.

 

 

 

알래스칸 말라뮤트는 보호자, 가족에 대한 보호 본능이 강합니다. 주인에게 충성스럽다는 말이 있지만, 그보다는 전반적으로 사람에게 친화적인 종입니다. 키우는 사람 입장에서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주인은 제쳐두고 낯선 이에게 온갖 애교를 떠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덕분에 다른 사람에게 짖거나 위협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생김새도 멋있으면서 주인이 우호적인 신호를 보내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는 편이라 산책 시에 인기 만점이라네요. 단 견종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에 한정합니다. 동물과 거리가 아예 먼 사람들은 큰 개라면 일단 위협적으로 느낄 테니까요. 

 

 

 

 

 

Alaskan Malamute/ amusi

 

 

 

알래스칸 말라뮤트는  터프한 외모와 달리 다정하고 상냥한 성격의 대형견입니다. 다른 동물 및 사람과의 친화력이 매우 뛰어나고요. 또한 독립적이며 고집이 세고 외향적인 성격에 장난스러운 기질이 많은 견종이기도 합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고 좋아하는 견종입니다.  질투하는 퍼그 같은 견종과 달리 인내심도 있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잘 한다고 합니다. 썰매견 종류들이 아이를 사람으로 인식 못하는 경우 서열정리 대상으로 여기고 무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이가 있는 견주라면 아이와 개 양쪽에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알래스칸 말라뮤트의 외모는 시베리안 허스키와 비슷합니다. 허스키보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편이고요. 허스키는 날카롭고 매서운 늑대 인상이라면 말라뮤트는 곰돌이 같은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때 멸종위기에 처하기도한 말라뮤트는 인기 견종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알래스칸 말라뮤트 VS허스키/ 동물과 자연의 사진을 담은 훌륭한 갤러리입니다. (2023)

 

 

 

 

썰매 끌던 종이라 활동력이 상당하고, 크기가 큰 견종이니 공동주택에 선 기르기 힘들고 마당이 필요합니다. 또한 살던 곳이 살던 곳이니만큼 언제나 냉방 대책을 잘 세워 줘야 합니다. 여름에는 상시 에어컨을 틀어줘야 되며 얼음도 제공할 여력이 있으면 더 좋을 듯합니다. 알래스칸 말라뮤트는 땅파기, 하울링 등을 잘합니다.  사이렌 소리와 다른 울음소리를 듣거나 '계란이 왔어요.' 따위의 소리를 들으면 하울링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단독 주택이라면 모르겠지만 아파트같이 다세대 주택에서 살 경우 조심해야 합니다. 수영, 하이킹, 달리기, 어질리티 등을 함께하면 좋습니다.

 

 

 

Alaskan Malamute/ helloBARK!

 

 

건강한 편이지만 고관절 이형성증, 연골 형성 장애, 갑상선 질환, 다발성 신경병증, 혈전증, 백내장,  위장병 등을 주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에이트 빌로우 Eight Below /나무위키

 

 

 

 2006년 공개된 미국의 서바이벌 드라마 영화입니다. 1983년 개봉한 일본의 영화<남극이야기>를 리메이크한 영화이고요. 기지에 남겨진 개들의 생존기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남극 기지의 탐사대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COeNSfQf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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