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유럽인들 사이에 한 때  이탈리아로 가는 그랜드 튜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약 200년간 지속되었고요. 특히 영국 , 독일의 왕족이나 귀족자제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산 넘고 물 넘고 바다 건너가야 할 테니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여행을 하다 강도를 만나거나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당시 바이마르공국 재상으로 있던 괴테 역시 38살 때 1년 9개월 정도 이탈리아에 머물렀었다고 합니다. 괴테의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 역시 이곳에서 당시 얻은 경험들이 큰 몫을 했고요. 루벤스나 벨라스케스, 그리고 나폴레옹 역시 많은 영감을 얻어 돌아오지요. 당대 지성인들의 유학코스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영국의 경우 프랑스를 경유해 알프스를 넘고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방법이 있고, 플랑드르(네덜란드,벨기에)지역을 거쳐 가는 방법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쁘고 세련된 옷들은 프랑스 쪽이 많기에 선호도에 따라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도시국가였던 이탈리아가 한 깃발아래 모이게 된 것은 1861년이었습니다. 

 

 

 

 

 

19세기 유럽/나무위키

 

 

영국은 무늬만 왕이었고 실질적인 힘은 의회를 통해 나오는 입헌군주제를 시험하고 성공리에 안착시킵니다. 당시 유럽의 주변국가들 특히 프랑스,독일, 이탈리아 등이 정치적인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영국은 경제에 온 힘을 집중하며 산업혁명을 일으킵니다. 쌓여가는 부를 축적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의 여파는 프랑스에도 영향을 미치며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정치적으론 여전히 혼란한 묘한 불협화음 속에 도시는 근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술은 아이러니 하게도 경제적으로 부유해질 때 융성하게 됩니다. 신문물을 통해 급속도로 변해가던 파리는 인상파라는 걸출한 미술 사조 하나를 배출해 냅니다. 고대 문화를 대표하는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가 문화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반면 이탈리아는 상대적으로 발달이 느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는 급격한 공업화를 추진하였고 이러한 점이 당시 이탈리아의 젊은층에게 영향을 끼쳤던 거죠.  미래주의 사조는 속도와 역동성, 신기술 및 기계주의 등에 확고한 믿음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미래주의는 회화, 조각, 건축, 의복, 실내장식, 영상,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실험적인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래주의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은 미술 분야에선 움베르토 보치우니, 카를로 카라 지노 세베리니 , 자코모 발라 등이 있습니다. 오늘 주인공은 음악가이자 화가로서 활동 루이지 루솔로입니다. 

 

 

루솔로의 아버지는 가업을 이은 시계공이었지만 마을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도 활동했습니다. 다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루솔로는 베르디 음악원에 진학한 두 형 때문에 가족과 함께 밀라노로 이사했습니다. 음악가 집안에서 자랐지만, 음악가 대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합니다. 그래서 명화 복원 전문가 밑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판화를 배웠으나 정식 미술교육은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1909년, 파밀리아 아르키스티카에서 열린 그룹전'흑과 백'에 판화 몇 점을 출품하게 됩니다. 루솔로는 이 전시회를 통해 움베르토 보초니를 만나게 되고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낭만주의와 세기말 사조에서 탈피해 현대 산업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적 감수성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게 됩니다. 이듬해 고군분투하던 루솔로는 미술, 음악 등 다른 예술 장르에도 미래파의 기운을 전파하려던  이탈리아 출신의 시인 필리포 토마스 마리네티(Filippo Tommaso Emilio Marinetti,1876,12,22-1944,12,2)를 만나게 됩니다. 

 

 

 

Filippo Tommaso Emilio Marinetti/wikipedia

 

 

그는 20세기 문명에 지나친 기대를 걸었던 괴짜 시인입니다. 1909년 2월 20일 , 마리네티가 피가로지에 '미래파 선언'을 발표합니다.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을 위해 도서관과 미술관을 때려 부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러한 극단적인 표현은 세상의 눈길을 끄는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기존의 음식 문화에도 반기를 들었습니다. 파스타와 같은 이탈리아 전통 음식이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며 말이지요.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요리를 발명 해야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훗날 행위예술을 예고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는 옛 세상을 파괴하는 일에 맛들인 나머지 결국 파시스트가 되어 버렸습니다. 1919년에 '파시스트 선언'을 발표했거든요. 1920년대 탈퇴한 후 3년간 정치와 결벌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네티는 파시즘의 철학적 근거를 제공한 장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후 마리네트는 미래파를 이탈리아의 국가 예술로 만들려다가 무솔리니의 반대로 실패합니다.  2차 대전이 터지자 육십대 후반의 나이에 자원입대를 했고, 이탈리아 패망을 앞둔 1944년 심장마비로 죽게 됩니다.

 

 

이탈리아 미래파/NYCultureBeat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보다
경주용 자동차가 더 아름답다.


1909년 2월 20일자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마리네티가 기고한 '미래파의 창설과 선언문'을 1면 기사로 올립니다. 이렇게 미래파는 언론에 광고를 내고  시작된 미술사조입니다. 혁명적이고도 도발적인 선언문에서 그는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는 것은 전쟁뿐이라고 말합니다. 예술 또한 폭력적인 비행을 저질러도 된다고 주장하고요. 이게 무슨 예술이야 싶습니다만 다소 과격한 듯한 미래파의 예술은 일상생활에까지 영역을 넓히려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전위) 운동의 신호탄이 됩니다. 원래 아방가르드는 군대의 선두에서 적군의 상황을 알아보거나 장애물을 제거하는 부대를 의미하는 군사용어입니다. 영화 무용 연극 등 예술 장르뿐만 아니라 요리 장난감 등 일상의 모든 부문에서 미래파 선언이 이루어집니다.

 

 

이들은 사회 변혁에 방해가 되는 전통을 부수기 위해 매우 도발적인 작품을 세상에 던졌습니다. 말하자면 로마제국의 영화를 그리워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르네상스를 동경하는 이탈리아 미술의 과거지향주의에 환멸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이들은 미술 혁명을 일으켜 동시대 작가들이 미술계를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거고요. 미래파는 문학운동으로 출발했지만 미술, 광고, 패션, 음악 및 연극 부문까지 포용하면서 이탈리아를 넘어 영국과 러시아의 시인 마야코프스키까지 전 유럽에 영향을 미칩니다. 

 

 

 

기술 선언문에서 구체적인 행동 강령을 담았는데 엑스레이로 투시한 것 같은 해체, 모방에 대한 거부, 누드화 금지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미래파 제 1세대는 힘과 속도로 대표되는 역동성, 즉 다이너미즘과 아방가르드 예술을 최종 목표로 추구하며 움직임과 빛으로 현대사회를 해부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두개골이 있는 자화상>,1909/Google Arts& Culture

 

 

 

루이지 루솔로의 <두 개골이 있는 자화상>이란 작품입니다. 충격받은 표정의 이 남자 어디서 많이 본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바로크 시대 활동했던 천재적이지만 악당에 가까웠던 카라바조의 <메두사>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뒷 배경으로 7개 정도 보이는 해골이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옛날 로마에서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 소리로 외치게 했다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인가요? 아마도 그림 속  남자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볼지도 모르죠. 내면의 거울 속 자신을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두개골이 있는 자화상(1909-1910)에서 루이지 루솔로는 우리를 인간의 영원한 숙명인 죽음 앞에 던져 놓습니다. 평생동안 우리는 위대함, 명성, 권력, 부, 인간 영혼에 호소하는 모든 것을  찾아 나서기 바쁩니다. 모든 사람은 몸, 마음, 감정, 생각, 신념, 관점 등을 자신들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때가 더 많지요.  허무함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요. 모든 것은 죽음 앞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고,  잊히게 되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정체성이 없는 다른 모든 사람과 그저 유사한 두개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 놀란 토끼 눈과 벌어진 입이 어제는 그들이었으나 오늘은 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Music>,1911-12/wikipedia

 

 

 

소리와 음색을 선과 색채로 실감나게 옮겨놓았다.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1919)-

 

 

팔이 다섯 개입니다. 열 손가락도 모자라 모두 스물다섯 개의 손가락이 넓은 음역에 걸쳐 꽉 찬 화음을 빚어냅니다. 솔직히 말하면 검정색의로 표현된 주인공의 모습과 손가락을 쳐다보면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파랑 노랑 빨강 띠가 피아니스트의 머리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켜 허공을 가득 메웁니다. 피아노 음이 S자 곡선으로 폭을 넓히며 공중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고요. 화가 겸 음악가 루이지 루솔로의 대표작 <음악>입니다. 음악이 느껴지시나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퍼지는 느낌이 드시나요? 피아니스트의 머리에서 동심원처럼 뻗어가는 물결은 연주자의 후광 또는 아우라, 더 나아가서 소리가 빚어내는 파형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원색의 향연으로 수 놓인 막대에 매달린 가면들은 안동 하회탈 같기도 하고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가면 같기도 합니다. 객석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 관객들의 다양한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흥분한 듯, 웃는 듯, 무표정한 듯 한 무수한 표정들이 말입니다. <음악>이라는 표제에 드러나 듯 화가는 그림을 통해 음악적 음향과 특정 요소의 반복, 메아리의 반복 등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미래파 동료 화가인 카를로 카라는 "이 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얼굴의 가면에서 과거 위대한 작곡가들의 혼백이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 오감으로 전해오는 느낌은 다 다를 테니까요. 건반에서 멀어질수록 동심원 사이의 간격은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림 속의 등장하는 선과 곡선은 그가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고 음향학을 제대로 공부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듯합니다.

 

 

 

 

<Dynamism of a Car>,1913/wikipedia

 

 

 

 

 

 

루솔로의  <자동차의 역학>이라는 작품입니다. 이탈리아의 미래파는 (Futurism:1909-1944) 전통과의 단절을 원했고 기계문명과 속도를 찬양하는 이데올로기, 유럽 아방가르드 문화운동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이 그림에서 달리는 자동차 앞에서 벌어지는 음파의 압축 현상을 그려냈는데 놀랍게도 음향학 교재에서 도플러 효과를 설명할 때 나오는 그림과 흡사합니다. 도플러 효과는 어떤 파동의 파동원과 관찰자의 상대 속도에 따라 진동수와 파장이 바뀌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루솔로는 질주하는 자동차의 속도와 굉음을 시각화하고자 했습니다. 기계문명이 가져다 줄 이상사회를 꿈꾸던 미래주의자에게 달리는 자동차는 그 어떤 예술 작품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이지요.

 

 

 

검은 유선형 물체인  자동차가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이를 둘러싼 공기가  날카롭게 갈라지며 파도치듯 퍼져 나가 소음을 일으킵니다. 자동차의 엔진이 뿜어내는 열기는 불꽃처럼 뜨거운 에너지가 되어 주위를 새빨갗게 달구고요. 루솔로가 이 그림을 완성하던 1913년에 '소음의 예술'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온갖 소음을 일으키는 '악기'를 개발하여 연주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물론 루솔로가 예상했던 대로 객석의 반응은 '뭐 저딴걸 음악이라고 연주해'하며 분노 일색이었지만요. 그러나 '소음의 예술'이라는 그의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눈은 쉽게 감을 수 있어도, 귀를 닫고 들려오는 소음 소리를 제거할 수 없을 테니까요. 온갖 기계와 전자제품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루솔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https://sonichits.com/video/Luigi_and_Antonio_Russolo/Corale-serenade?track=1

 

Corale-serenade by Luigi and Antonio Russolo

Luigi Russolo (April 30, 1885 - February 4, 1947) was an Italian Futurist p… Read Full Bio ↴Luigi Russolo (April 30, 1885 - February 4, 1947) was an Italian Futurist painter and composer, and the author of the manifesto The Art of Noises (1913).He is o

sonichits.com

 

 

 

루솔로는 아방가르드 미술 사조에 자극을 받은 뒤에 다시 음악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고자 1913년부터 그림을 잠시 접고 음악 작업에 몰두합니다. 같은해 동료 화가들과 미래파 작곡가 프란체스코 프라텔라에게 편지로 보낸 선언문'소음의 예술'은 1916년 단행본으로 출간됩니다. 그는 이 음악에서 생활 주변에서 발생하는 소음들을 음악 작품에 포함시키는 작업에 이론적 미학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루솔로는 소음을 만드는 기계를 개발했고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음을 음악 작품 속에 포함하려고 합니다. 사이렌, 굴착기, 배수관, 호루라기, 기중기 소리 등 온갖 소음이 나오도록 고안해 냅니다. 현대 산업사회에 쉽게 들을 수 있는 잠들지 못하게 하는 기계의 소음을 음악으로 승화시킨거죠. 소음도 '오케스트라'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는 발상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1921년 루솔로는 파리에서 미래파 연주회를 세 차례 열었는데 27개의 소음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었습니다. 스트라빈스키, 디아길레프, 라벵 등 참석자 모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하네요. 디아길레프는 '라벨과 스트라빈스키에게 위촉한 발레음악에 이 악기를 넣어달라고 부탁할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말입니다. 아쉽게도 루솔로가 사용했던 '소음 악기'나 악보는 현재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1940년대 피에르 셰페르가 창안한 '구체음악'이나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루솔로의 소음음악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답니다. 

 

 

 

미래파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하는 것에 적극 찬성하여 의용군으로도 참전했습니다. 루솔로는  부상을 입고 1년 넘게 병상에 있었고요.  보초니는 전사했습니다. 그바람에 급속도로 영향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마리네티가 무솔리니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미래파는 미술사가나 큐레이터 사이에서 '퇴출 명령'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2024.01.24 - [지식&교양] - 50-63.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43)

 

50-63.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43)

20세기 들어서며 미술에 불기 시작한 최고의 혁신은 특정한 운동, '이즘(ism, 주의)'의 등장입니다. 입체주의 미래주의 구성주의 표현주의 (청기사파와 다리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등 한 번쯤

sun-n5y2.tistory.com

 

미래주의는 이탈리아가 다른 나라보다 발전이 느렸기에 그것을 만회하기 위한 급격한 공업화의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여기에는 열등의식이 한몫했고요. 그 열등의식은 이탈리아의 예술이 퇴보하였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산업도시와 자동차, 기차 등 산업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도상들을 작품에 담고 표현해 냅니다.

 

 

 

문제는 이러한 점이 도를 지나쳤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무정부주의와 폭력을 옹호하는 수준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이들은 반 문화, 반 전통, 반역사를 주장하며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을 파괴하여야 한다고 까지 주장했습니다. 반면 과학과 기계, 속도, 그리고 젊은이를 찬미하며, 파괴를 통해 구질서를 개편할 수 있는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극단적으로 전쟁과 폭력을 옹호하였고 미래주의의 끝은 세계 1차 대전이었습니다. 미래주의 자들은 1차 세계대전으로 폭력의 환멸을 느끼고 결국 미래주의에서 점점 이탈하게 됩니다.

 

 

파시즘과의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미래파는 유러 미술사, 특히 아방가르드의 초석을 제공한 문화 운동이었습니다. 미래파가 없었다면 다다(Dada), 키네틱 아트, 옵아트 등은  태동하지 않았을지 모르니까요. 

반응형
반응형

20세기 들어서며  미술에 불기 시작한 최고의 혁신은 특정한 운동, '이즘(ism, 주의)'의 등장입니다.

입체주의

미래주의

구성주의

표현주의 (청기사파와 다리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등

 

한 번쯤 들어 봤음직한 용어들이 더 헛갈리게 합니다. 현대미술을 주도했던 '이즘'은 20세기 초에 집중적으로 등장합니다. 공통된 사상에 뜻을 모은 화가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작품 활동에 이론을 도입하고 미술의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담론을 이끌어냈다는 얘기지요. 많은 이즘 중 20세기를 맞이하며 가장 열렬한 대응을 보인 것은 미래주의 (Futurism)입니다.

 

 

미래주의는 1909년 2월 20일 이탈리아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oppo Tommaso Emilio Marinetti, 1876-1944)가 <르 피가로>의 1면에 '미래주의 창립 선언'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운동입니다. 마리네티는  동시대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미술활동의 새로운 가치 체계를 만들게 됩니다.   마리네티의 선언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 미래주의 화가는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1882-1916)와 자코모 발라 (Giacomo Balla:1871-1958)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는 이탈리아 미래주의 화가, 조각가, 무대 디자이너 등 상상력과 통찰력을 지닌 미술가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1910년 두 편의 미래주의 선언문에 서명한 이후, 미래주의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이 되고요. 그의   비범한 상상력과 통찰력이 한몫 단단히 하며 근대 미술 양식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라는 빛의 산란과 굴절에 관한 과학적 이론들을 탐구했습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  빛과 움직임, 그리고 속도와 에너지라는 무형의 힘에 관련된 고도의 지적인 묘사를 낳게 됩니다. 또한 그는 안톤 줄리오 브라갈리아,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에티엔주리 마레와 같은 사진가들의 선구적인 작품들도  연구했습니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동물이나 사람의 움직이는  모습을 연속적인 사진으로 찍어서 움직임의 형식과 형태를 기록한 것들이지요.

 

 

 

그는 "새로운 시대의 미는 속도의 미다."라는 마리네티의 사상에서 영감을 얻어 고정된 시각과 촉각에 머물렀던 미술의 표현영역에 속도를 도입하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보아왔던 고전 예술의 화풍과 정신에 반기를 드는 예술 운동인 거죠. 마리네티의 선언은 당시 시대에 뒤떨어진 작업방식(분할주의)에 머물러있던 자코모 발로에게  빛처럼 다가왔습니다.  미래주의 선언은 창작의 모티프를 제공하고, 새로운 예술활동을 펼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주었고요. 이 선언은 또한 문학,미술, 음악, 건축, 연극 등 전 예술 분야로 확산한 전위예술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미래파는 기존의 전통적 예술을 거부하고 과학기술이 낳은 속도와 기계의 미를 적극적으로 예술에 도입하기 시작합니다.

 

 

 

 

 

 

 

<가로등>,1909/wikipedia

 

 

 

 

주로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한 발라는 1895년 토리노에서 로마로 이사하여, 초상화가 겸 삽화가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1900년 그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게 됩니다. 로마로 돌아오자, 발라는 신인상주의의 점묘법과 유사한 표현 기법을 자신의 그림에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가로등>(1909-1910)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표현법은 그가 계속해서 실험해 오던 빛과 대기, 그리고 움직임에 관한 묘사에 적합했던 거죠.

 

 

당시 유럽의 개스등 대신 전기가 들어오며 인공의 빛으로 자연의 빛을 한 번 눌러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요즘처럼 늘 당연한 듯 켜는 전기불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당시 유럽인들이 느꼈을 놀라움 또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전기의 등장으로 일상생활의 변화가 이전과 사뭇 달랐을 테니까요. 태양의 길이에 맞게 길들여진 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고요. 그 나 저마 빛 주변으로 알록달록한 꺾새 모양이  언뜻 보면 화려한 나비 같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 보게 됩니다. 

 

 

그가 색을 화면에 옮기려는 이론적인 노력은 색점으로 표현하는 점묘화로 전개됩니다.색에 몰두했던 화가들의 실험은 형태를 재현하는 기존의 전통적 방식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 <가로등>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만들어진 전례 없는 신문물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즉 자연광을 넘어서 전기로 발생되는 인공적인 빛이 과학의 힘과 미래의 발전을 상징하는 요소로서 비중 있게 다루어집니다.

 

 

 화가 자코모 발라는 이사를 간 로마의 광장에서 밝게 빛나는 불빛을 보고 <가로등>을 그렸습니다. 하늘의 초승달이 떠 있지만, 그 빛의 힘은 가로등 불빛에 훨씬 못 미치게 보입니다. 마치 초승달 장식 같은 느낌으로 존재감이 작아 보입니다. 인공의 전깃불이 자연의 달빛을 능가하기 때문이지요. 로마에 처음 설치된 전기 가로등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림 속  가로등 하나가 발산하는 불빛이 큰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일상의 사소한 재료가 화가의 예민한 눈을 거치니 저렇게 독특한 형태로 작품화되어 놀랍습니다. 노랑과 흰색이 섞인 별 모양의 중심에서 밝은 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나옵니다. 눈을 똑바로 뜨기 힘들 정도로 말이죠. 자코모  발라는 빛을 다채로운 색으로 분할하고 색들을 중첩시켜 빛의 강약과 변화를 묘사했습니다. 갈고리처럼 뾰족뾰족한 터치가 특이하지요. 갈고리 터치감이 색의 분할과 시각적 혼합을 유도할 뿐 아니라 불빛이 퍼지는 방향과 빛에너지의 역동적 힘까지 보여줍니다.

 

 

 

 

발라는 전등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묘사해 과학기술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제 전원적 낭만적 예술은 끝나고 현대의 기계 문명에 부합하는 도시적 역동적 예술이 도래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기술로 탄생한 속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기계의 미학을 추구하는 미래주의 예술의 탄생을 알리는 팡파르 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도시의 가로등과 달의 대립을 통해 과학과 자연의 병치를 시도했고요.

 

 

 

 

모든 것은 빠르게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다.
움직이는 형상들은 끊임없이 여러 개로 보인다.
즉 달리는 말은
4개의 발만 있는 게 아니라 20개의 발이 있다.
-자코모 발라-

 

 

미래주의 선언의 영향을 받아 발라는 '미래주의 회화기법 선언'(1910)을 하면서 미술작품에 속도감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부순 거지요. 미래주의 전략 중 정지 상태인 신체와 운동상태의 신체 구분을 무너뜨리고 미술에 운동감각을 입힌 것이 대표적입니다. 요약하면 , 2D평면 캔버스에 3D 입체 구현을 했다는 말이죠.

 

 

 

 

 

<Dynamism of a Dog on a leash>,1912/wikipedia

 
 

 

 

자코모 발라의 1912년 작품인 <끈에 묶인 개의 역동성>은 회화에 속도감을 표현한 대표 작품입니다. 보이는 개의 다리에 오토 바이가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만화에서 이런 장면들 많이 본 것 같고요.  발과 꼬리를 우당탕 휘젓고 있는 모습이 우습기도 합니다.  아마도 강아지가 주인보다 앞장서서 빨리 어딘가로  달려가고 싶은 가 봅니다. 아니면 좋아하는 간식이 눈앞에 아른 거리는 걸까요? 혹시 맞은편 강아지가 맘에 들었나? 은색의 목줄까지 신나게 움직입니다. 줄넘기를 하듯 말이죠.  아니면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도 목줄에 매여 제자리걸음인 강아지의 상황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아지 옆에 레이스 차림의 견주가 있습니다. 강아지의 움직임만큼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작가 자코모 발라는 강아지와 주인의 그저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한 게 아니라, 여러 개의 반복적인 형상을 그렸습니다. 또한 속도감을 더 느낄 수 있도록 자코모 발라는 바닥의 줄무늬를 대각선으로 그렸고요. 심지어 그의 사인과 연도도 대각선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깨알 같은 디테일 덕분에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속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림 배경인 바닥은 진동하는 듯하면서 분홍과 초록의 색감이 대조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발라는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비가시적 세계를 가시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술을 그림에 도입했습니다. 점묘법을 유용하게 사용한 거지요. 점묘법은 형태를 점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선과 색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흔들거리는 물체를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거죠. 작품 < 달리는 개의 역동성>은 움직임이 있는 물체의 시간차를 점묘법으로 그려 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동시성을 보여줌으로써 미래주의의  특징인 역동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지한 사물과 사진 속 움직이는 대상이 만나 활동사진이라 하는 영화에 모티프를 제공했듯이 속도감 있는 움직임으로 평면 속에 담아냈습니다. 발라의 역동성은 흔히 대중 만화에서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신체 부위를 중첩시키는 기법에 영감을 주게 됩니다.

 

 

 

2023.03.28 - [지식&교양] - 47. 신인상주의, 조르주 피에르 쇠라(7)

 

47. 신인상주의, 조르주 피에르 쇠라(7)

고등학교 시절 쇠라의 이름과 함께 기억에 남았던 영상은 단 한 가지였다. 점잖아 보이는 남성 옆에 여인이 입고 있던 옷차림이었다. 잘록한 허리만큼이나 엉덩이가 뽈록하게 나온 스타일이 사

sun-n5y2.tistory.com

 

 

 

 

 

당시 예술가들은 '산업화'를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산업화로 인한 대량생산, 인간의 창조성보다는 기계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회상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전통과 근대 사이의 충돌을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거부감을 표시했습니다.  요즘 AI로 초고속 문명으로 가는 속도전에 우려의 목소리가 많은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 미래파들은 오히려 산업화, 근대화에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세상은 계속 발전해 나가는데 계속 전통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예술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자코모 발라의 양식은 이 시기에 더욱 추상적이 되었으며, 1910년에 발표된 두 편의 미래주의 선언문에 서명하면서, 그는 미래주의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로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제작된 그의 역동적인 유화 작품들은 폭발적인 에너지와 리듬, 그리고 강렬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the hand of the Violinist>,1912/wikipedia

 

 

 

 

속도의  표현이라는 불가능한 일을 시도한 미래주의 미술은 처음에는 카메라의 동작의 분석, 특히 머리 브리지의 동작 분석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그러나 미래주의 미술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역동적인 디자인을 개발하여 차원 높은 수준의 표현 방식으로 속도를 형상화해 냈습니다. 

 

 

 

 

 

우리(미래주의 화가들)는
역동적인 디자인을 발명해야 하고,
그와 함께 역동적인
-삼각형, 원뿔, 나선형, 타원, 원 등-
형태로 표현해야 한다. 


 

 

<Girl Running on a Balcony>,1912/wikipedia>

 

 

 

<발코니를 뛰어가는 소녀>는 신인상주의 점묘법에 속도를 입힌 작품입니다. 소녀가 신고 있는 신발 보이시나요? 소녀의 중첩된 신발표현이 없었다면 속도감보다는 단순히 색의 분할을 시도한 작품으로 인식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동작이 더 분할되어 있고 형태가 면으로 추상화되어 있습니다. 속도란 움직임과 동급이죠.  움직이는 물체는 흔들리고 있으므로 형태와 윤곽이 선명하지 않습니다. 그 흔들림의 상태를 반복된 형식으로 효과적으로 그리는 데에는 입체파와 같이 형태를 면으로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었단 말인 거죠.  한편 움직이는 물체는 그 흔들림으로 인해 색채가 선명하지 않습니다. 떨리는 색채의 표현에는 점묘파의 채색법이 효과적이었던 거지요. 움직임이 더 커지면 형태와 색채는 더욱더 분해되어 추상화됩니다. 

 

 

 

 

모든 것은 움직이고,
모든 것은 달리고,
모든 것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Velocity of an Automobile,1913/Sothebys.com

 

 

 

 

자코모 발라는 새 시대 미술이 기계나 자동차의 활력적인 힘이 나 속도, 역동적인 운동성 자체를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관적인 표현이나 전통적인 공간구성법을 피하고, 그림 속 형태들이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나타내는 표현 방식을 찾으려 했습니다.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의 물체가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형식이었지요.

그에게 기계와 속도가 기계의 움직임만으로 표상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마치 자연계의 영원한 반복의 프랙털적 디자인에서 가져온 듯한 리드미컬한 흐름인 듯합니다.  때로는 음표의 연속으로 보이기도 하고, 기계와 자연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이질 적인 것들이 생각보다 조화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그리고 기계와 자연은 조화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과 기계의 확장은 곧 자연의 위축이고 축소이기 때문이죠.  인간의 욕심이 기후위기를 불러와 요즘 들어 부쩍 자연에게 호되게 당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은 공존의 개념과는 거리가  좀 먼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자연의 약탈과 이용에 의해 성장하지 않으면 문명의 흐름은 단절되기 때문이지요. 조화의 노력은 아주 짧은 순간의 의식 있는 사람들에 의한 노력일 뿐, 지속성을 갖기는 무척 힘듭니다. 예술 작품에 의한 조화와 긍정성의 표상은 그렇기에 이율배반적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From -Spirit Transformation>,1918/arthur.io

 
 

 

1914년경부터 발라는 조각 분야에서도 실험적인 시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보초니의 주먹, 1915>을 들 수 있습니다. 1917년 그는 아주 혁신적인 무대 디자인을 제작하기 시작했고요, 몇 편의 연극에도 출연하게 됩니다. 발라는 시각적인 환영과 현상들을 탐구하면서 미술에 대한 추상적이고 과학적인 실험을 계속합니다. 1925년 글자와 숫자들을 소재로 한 작품 연작을 내놓기 시작했고요. 말년에 그의 작품은 초창기에 선보였던 찬란한 추상성에서 멀어져 점묘법으로 더욱 기울어집니다.

 

 

 

 



 https://youtube.com/watch?v=OfqlWphI3TM&si=n6VM1-q_G7Sj75aX


 

 

 

 

 

예술은
박물관에서만 보는 게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일부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은
예술을 포용해야 합니다. 

 

 

20세기 이탈리아 미래주의 화가의 집입니다.   화가 자코모 발라의 손길로 완성된 로마의 아파트는 만화경 속을 들여다보는 듯 황홀합니다. 그에게 집이란 예술 세계를 일구는 실험실과 동급이었던 모양입니다. 카사 발라에 존재하는 모든 오브젝트는 자코모 발라의 미학을 담고 있습니다. 테베레강에서 멀지 않은 로마의 어느 골목, 1900년대 초반 건설된 별 특색 없는 중산층 아파트 4층에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아티스트 자코모 발라 가 창조한 그만의 우주가 비밀스럽게 담겨있습니다.  독특하고 만화경 같은 카사 발라(Casa Balla)의 내부 모습을 보면 눌러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지속적인 창의'라는 미래주의 관념에 따라 자신이 생활하는 평범한 아파트를 살아 있는 예술품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바닥부터 벽지와 천장을 가리지 않고 빈 공간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고, 테이블과 의자, 찬장 등의 가구들을 직접 디자인했으며, 그릇과 각종 도구,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부분까지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장식했습니다.

 

 

 

일상적인 오브제도 예술작품처럼 다룬 셈이죠. 그 덕분에 예술이 어깨높이 정도로 내려온 듯합니다. 발라는 집 안 곳곳에 회화작품, 드로잉, 조각상을 배치하고, 심지어 자신과 딸들이 입을 옷도 직접 구상하고 바느질까지 해 착용함으로써 공간에 머무는 자신 또한 예술의 일부로서 존재하도록 계획했습니다. 

 

 

 

 

<Pessimism and Optimism>,1923/Art.com

 

 

 

오랜 정치적 투쟁 끝에 1861년 새로운 이탈리아가 탄생했습니다. 보다 급진적인 국가 의식도 급도로 성장한 이탈리아의 경제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냈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문제 중 하나는 몇몇 공업도시를 제외하고는 지역 간 경제 불균형으로 인해 남부 지역의 불만이 커져간다는 점이었습니다. 1880년대 세계 불황과 과도한 세금 정책으로 인하여 경제가 악화되며 빈곤해지자 농촌 중심으로 과격한 저항 운동 정치집단이 형성됩니다. 크고 작은 무정부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혹은 극단적 사회주의자들의 저항 운동이 활개를 치며 1920년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집권을 하며 본격적인 전체주의 정치 체계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게 됩니다.

 

 

 

 

<Pessimism and Optimism>은 기계와 속도의 뉘앙스와는 약간 다르게 느껴집니다. 1910년대의 미래파의 유행이 끝난 영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관주의는 흑백의 뾰족함으로 나타나고, 낙관주의는 청색 계열의 둥그스름한 포용으로 나타납니다. 낙관주의는 비관주의를 감싸 안으며 다독거리는 모양새입니다. 비관주의는 낙관주의를 예리하게 공격하는 창날을 가지고 있고요. 마치 콕콕 찌르며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두 가지 모두의 관점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배제할 수 도 없으며, 일방적으로 한쪽을  궤멸시킬 수도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의 중량의 무게가 달라질 뿐인 거죠. 자코모 발라가 살았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중반까지의 세계사의 흐름은 과학기술의 역동성과 전쟁의 공포, 자본주의 팽창에 따른 식민지화로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강물처럼 흐르던  시대였습니다. 자신이 어느 편에 섰는가에 따라 비관과 낙관은 달라지죠. 세계에 대한 판단도 달라지고요. 

 

 

 

 

자코모 발라는  산업화 이전의 전통을 부정하고 근대 문명이 낳은 속도와 기계를 찬미했습니다. 과거와 단절하고 다이내믹한 형태를 표현하고자 노력했지요. 새로운 재료를 작품에 사용하기도 하며 기계의 이미지도 작품에 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급격한 변화의 감각을 작품에 표현하여 근대 디자인 이론의 발전에 시발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네티의 선언은 오랫동안 특별한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았던 이탈리아의 예술적 발전을 목표로 국수주의적 성향을 띠기 시작합니다.  이 미래파는 후에 파시즘(히틀러의 국가/인종주의)과 연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정된 시간에 머물렀던 회화가 표현에서 외연이 넓어지는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그의  예술적 시도 자체는 남달랐으니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dqdhUzQZyCs

 

 

 

미래파 운동(1910-1918)은 스피드를 강조했던 만큼 빠르게 사라져 버린 사조입니다. 옴베르토 보초니의 전쟁 중 낙마사고로 사망 이후 추진력을 잃었습니다. 전쟁의 본성을 미화한 마리네티의 미래주의는 파시즘을 옹호해 2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정치적 실패를 맛보았고요. 하지만 그들의 이루지 못한 '속도'감은 추상미술의 출발점이 되었고 키네틱 아트나 옵아트로 확장되어 갑니다. 

 

 

 

 

반응형
반응형

얼굴이 무섭다.

붙임성이 좋다.

힘이 세다.

호기심이 많다.

머리는 좋으나 의외로 허당이며 귀소본능이 없다.

사냥을 잘하고 산책을 좋아한다.

 

 

시베리안 허스키를 표현한 말들입니다. 러시아 시베리아의 동북쪽 끝 추코트카가 발현지인 개입니다. 그곳에서 대대로 거주하던 축치인(러시아 극동의 최동단에 위치한 축치 반도에 살아가는 민족)이 키우던 썰매견에서 유래된 견종입니다.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이름을 얻고 하나의 독립된 견종으로 고착된 것은 미국에서 이뤄진 것이며 이 때문에 견종 전문가들은 '미국 개'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_PA5T6NLmY&t=255s

 

 

 

추운 지방에 살았던 만큼 털이 2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빵빵한 느낌이 강합니다. 털갈이할 때 검정 봉지 큰 용량의  많은 털이 빠집니다. 이는 썰매견들의  공통 사항이라고 합니다.  지능이 높아 영리하며 기본적으로 단체 생활에 익숙합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적지만, 바깥에서 길러야 하는 타입입니다.

 

 

 

Shberian Husky(좌), Alaskan Malamute(우)/ 출처: 인터파크펫 Blog

 

 

 

허스키와 말라뮤트를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일단은 흰색 회색 검은색 조합의 썰매개라 매우 유사하지만 가장 구별하기 쉬운 차이점은 "체구"입니다. 허스키는 중형견이지만 말라뮤트는 허스키와 두 배는 덩치 차이가 날 정도로 큰 대형견입니다. 또한 얼굴 생김새와 표정이 다소 다르지요. 허스키 쪽이 얼굴이 좀 더 늑대와 닮아 사납게 생겼다면, 말라뮤트는 상대적으로 눈매가 처져 있습니다. 또한 말라뮤트는 체형이 허스키의 체형보다 굴곡진 편이고요. 둥글둥글하게 생겼으면 말라뮤트고, 날카롭고 차갑게 생겼으면 허스키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흰색의  홍채 때문에 눈동자가 삼백안 같은 매서운 눈빛을 가지고 있으나 겉보기와 달리 허스키는 대체로 성격이 순한 품종입니다. 보통 강아지는 검은색 혹은 갈색 눈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인데 시베리안 허스키는 검은색, 갈색뿐만 아니라 파란색 눈인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경호견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베리안 허스키가 순하다는 것은 상대가 인간일 때 한정이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산책 중에 만나게 되는 동물들 중 같은 개과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사냥감으로 인식하는 개체들도 상당수 있을 정도로 공격적입니다. 순한 품종이라는 인식 탓에 방심하고 있다가 사고 치는 사례가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썰매 끄는 개라서 힘도 좋은 편이라 대비하지 않으면  막기도 힘듭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개들에게는 신사적인 편으로 특별히 경계해야 할 종은 아니지만, 기본 덩치 자체가 크고 험하게 노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소형견과 함께 있을 경우 주의가 필요합니다. 다른 개를 먼저 공격하거나 공격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는 적습니다. 하지만 허스키 자체가 한 덩치 하는지라 덩치가 작고 자기 방어 기질이 높은 포메라니안, 치와와, 비송 프리제 등에게 접근할 경우  상당한 위협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예상치 않은 강렬한 반응이 나올 수도 있고, 이에 덩달아 허스키까지 흥분해 아차 하는 순간 투견장이 될 수도 있으니 순한  것과는 별개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KDIe670lrw

 

 

https://www.youtube.com/watch?v=3293XwJTRyg

 

 

 

 

 

호기심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영역권 안이라고 판단만 되면 뛰어놀다 대충 퍼질러져서 자다가 배고파서 깼는데 누가 부르면 슬슬 돌아가서 밥이나 먹으면 그만이라는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허스키가 도망가는 상황에 처했다면 절대로 쫓아가서는 안됩니다. 슬슬 추적하면서 접근하다 다른 사람이나 산책 중인 다른 강아지나 무언가에 끌렸을 때 급습해서 잡을 수 있습니다.  도망가는 거 잡겠다고 뒤에서 같이 뜀박질했다간 그것조차 새로운 놀이로 생각하고 정말 광속으로 멀어져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리는 종류가 허스키입니다.

 

 

 

 

남은 유일한 희망은'나는 간다'하고 소리 한번 질러서 쿨하게 뒤돌아서서 걸어가는 겁니다. 운이 좋다면 당신의 허스키가 뒤에서 타닥타닥 거리며 뛰어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단, 잡으려고 뒤돌아서면 1cm 차이로 당신 곁을 스쳐 지나가 왔던 길을 다시 역주행하며 광속으로 멀어질 겁니다. 개줄 꼭 묵으시고 놓지 마세요. 풀려난 허스키를 잡을 땐 당신과 허스키의 부상을 감수하더라도 미식축구 선수처럼 바디태클을 건다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어설프게 임했다간 내내 뜀박질을 하느라 진이 다 빠질 겁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꾸준히 마당 같은 곳에서 리콜 훈련을 시킬 의무성이 엄청나게 부각되는 견종입니다. 불렀을 때 항상 주인 옆에 오도록 어릴 때부터 작은 반경부터 차근차근 훈련시켜야 합니다.  나중에 공원에서도 뛰놀다가 올 수 있을 정도까지 말입니다. 훈련이 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에 날뛰다 주인이 부르는 소리 자체를 못 들어서 주인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허스키도 많습니다. 이렇게 훈련이 되었는데도 주인의 소리에 집중을 못해 제대로 리콜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아주 약한 전류를 흘려서 주인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장치를 목에 다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합니다.

 

 

 

호기심이 많은 데다 고집이 엄청 세서 한 번 하고 싶은 건 반드시 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허스키를 잘 살펴보면 마치 고양이의 영혼이 개의 육체에 깃들어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을 겁니다. 어릴 때부터 참을성을 갖고 엄격하게 훈련하지 않으면 24시간 호기심에 날뛰는 20kg짜리 중형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산책도 필수로 매일 해 주셔야 합니다. 순한 것으로 알려진 개들 중에서 가장 기르기 어려운 종이므로 분양받기 전에 신중해야 합니다. 성장하면서 불어난 살과 근육의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질질 끌려다니게 되거나, 아니면 밑도 끝도 없이 산책 중에 퍼질러져서 안 움직이려고 하는 20kg짜리 털뭉치를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NLzsQKC-lw

 

 

 

 

허스키라는 종의 특성으로는 장이 매우 약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사료의 양이 평소보다 많아지거나, 사료를 다른 제품으로 교체하거나, 슈퍼나 인근 마트에서 파는 저렴한 간식을 급여할 경우에 높은 확률로 지독한 냄새와 함께 거의 물에 가까운 설사가 나오게 됩니다. 예민한 개체는 간식은 고사하고 평소에 먹던 사료가 조금만 많아져도 설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야외에서 키운다면 큰 문제는 안 되겠지만 만약 실내에서 키울 예정이라면 생각보다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매 끼니마다 변의 굳기를 보면서 미세하게 사료량을 맞춰주어야 하고 만에 하나 실패했을 시 보게 되는 설사를 치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겠죠.

 

 

 

시베리안 허스키는 피지가 많이 분비되지 않습니다. 고양이처럼 그루밍을 하며 스스로 몸을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견종입니다. 그래서 개 냄새가 많이 나지 않는 편에 속합니다. 목욕을 2-3주에 한 번 정도 시키는 걸 권장하는데 시베리안 허스키는 최소 6주를 권장하며 3-4개월에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진돗개처럼 한 주인만 따르는 타입은 절대 아닙니다. 밥 주고 산책시켜주고 애정을 듬뿍 쏟아도 낯선 사람에게 꼬리 흔들며 달려가는 녀석을 볼 때마다 은근히 서운함과 함께 '내가 이 녀석을 왜 기르고 있나'하는 회의감이 든다는 견주들도 많습니다. 또한 털이 이중모라서 더위를 굉장히 많이 타고 털갈이할 때 빠지는 털의 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야외에서 키울 예정이라면 그늘막은 물론이고 배를 깔고 앉을 수 있는 곳에 대리석을 깔아주거나, 수시로 주변에 물을 뿌려서 더위를 식혀 주어야 합니다. 야외는 상관이 없지만 실내에서 기른다면 털갈이 중에는 수시로 산책을 나가서 빗겨주어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푸른 눈이 눈 질병이 발생하기 쉽다고 증명된 것은 없습니다. 단지 브리더들 사이에서의 낭설로 퍼진  이야기일 뿐입니다. 멜라닌이 부족하긴 하지만 눈을 햇빛으로부터 보호하는 다른 색소가 있기 때문에 별다를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알비노로 인한 적안은 멜라닌과 다른 색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이쪽은 눈에 관련된 질병이 발생할 확률이 높습니다. 다만 어떤 눈색을 가지고 있든 유전적으로 다른 개들에 비해 눈 질병이 발생할 확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F0biMM_2VA

 

 

 

 

새끼 때부터 철저한 복종 훈련을 시키지 않을 경우 성체가 되고 나서 통제가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각한 경우엔 주인이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반갑다고 주인을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동물병원이나 카페 같은 공공장소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다른 개에게 돌진하는 경우도 있고요. "앉아"와 "기다려"교육은 시베리안 허스키에게 필수입니다.

 

 

사역견 출신답게 운동량이 많습니다. 운동량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혹여라도 목줄이 약하거나, 견사의 바닥이 흙이라면 아주 손쉽게 목줄을 끊거나 바닥을 파서 가출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허스키는 귀소본능이 뛰어난 견종이 아니고 호기심이 왕성해서 일단 가출에 성공하면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떠돌이 개가  되기 쉽습니다. 너무 멀리 와버린 나머지 집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 말이죠. 만약 길가에 다 자란 허스키가 돌아다니고 있다면 키울 여건이 안 되어서 버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 가출을 해서 잃어버린 경우가 대다수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공들여 키운 허스키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면 튼튼한 목줄과 잦은 산책은 견주들의 필수사항입니다.

반응형
반응형

 

 

북위 55~71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이 길고 오후 3시만 되면 어두워집니다. 이러한 환경적인 특성 때문에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실내 디자인과 가구 디자인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밖의 차가운 풍경과 다른 밝고 따뜻하고 포근한 실내 인테리어를 추구한 거지요. 북유럽 특유의 자연을 소재로 하여 실용적이며 간결한, 자연의 빛과 에너지를 강조하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을 유행시킨 원조가 칼 라르손(Karl Larsson 1853-1919)과 카린 라르손(Karin Larsson 1859-1928) 부부입니다. 

 

 

출처:PNGWing

 

 

 

1853년 5월 28일 , 스톡홀름에서 라르손은 태어납니다.  1857년 그의 유일한 형제인 요한이 태어나고, 가족은 방 한 칸 짜리 아파트로 이사합니다. 늘 화만 내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훗날 가족에 대한 애착이 컸다고 밝힙니다. 어머니가 세탁부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했고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매일 술을 마시며 폭언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13살 때 학교 선생님의 설득으로 스톡홀름 미술 아카데미(Stockholm Academy of Fine Arts)에 들어갔습니다.1869년 앤티크 스쿨(antique school)에서 공부했고요. 학비도 벌고 가족을 부양하고자 신문, 잡지의 만화와 삽화 등 닥치는 대로 그리다가 1877년 파리로 떠날 결심을 합니다. 파리에 머물면서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려 살롱전에 출품하지만 번번이 낙선을 하게 됩니다. 라르손은 인상주의의 급진적인 화풍을 따르지 않고 밀레와 같은 자연주의 기법을 고수했기 때문이었지요.  거듭되는 실패로 자신감을 잃은 라르손은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된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파리는 인상파가 대세라 라르손이 고수하는 자연주의 기법은 파리 시민들에게 관심 밖이었습니다. 또한 라르손은  인상파 화가들과 친분을 쌓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ㅡ 인상주의에 자극은 받았던 모양이에요. 스톡홀름 아카데미의 후진양성에 반기를 든 화가 들 중 한 명이 되니까 말이죠.

 

 

 

 

마음을 고쳐먹고 고국에 돌아가 기력과 재정을 보충한 라르손은  파리 외곽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예술가들의 거주지 그레 쉬르 루앙(Grez-sur-Loing)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납니다. 그녀의 이름은 카린 베르게(Karin Bergoo1859-1928)로  스웨덴에서 온 유학생이었지요. 부유한 사업가인 카린의 아버지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883년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밉니다. 라르손 역시 그녀와 결혼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고요. 그녀와의 결혼으로 그의 인생도 180도 바뀌게 됩니다. 가장 먼저 화풍이 달라집니다. 유화를 고수해 오던 그에게 수채화를 권한 것도 아내 카린입니다. 밝은 색으로 그려진 풍경과 인물들은 그가 살롱전에 입선할 수 있도록 빛을 발합니다. 이후 카린과의 사이에 두 살 때 죽은 아이를 포함 모두 8자녀를 두었으며 아내와 자녀들이 작품의 중요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부모 복은 없었으나 아내 복이 참 많은 화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내 카린은 스웨덴 미술 아카데미 출신으로 전도유망한 화가였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가 남편을 내조하기 위해 스스로 모델이 되고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합니다. 당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높지 않아 전업 화가의 길은 포기했지만 미술 작업을 모두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그림 대신 패브릭 제품과 가구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국적인 식물을 키워 집 안팎으로 생기 넘치게 하거나 집안에서 사용되는 직물 (앞치마, 침대 덮개, 식탁보 등)과 자신과 아이들의 옷, 자수 작품, 가구(의자, 아이들의 나무 침대)를 디자인하게 됩니다. 밝고 유쾌하고 대담하고 생생한 색채와 모던한 추상적 스타일로 말입니다. 

 

 

 

 

<Flowers on the Windowsill>, 1895/Pixels

 

 

 

백 년 전 스타일이란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요즘 모던한 집에 초대받은 느낌입니다. 열린 창문 한 곳으로 신선한 바람이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어 환기를 시킵니다. 크고 작은 토분 위에 각종 다양한 녹색 식물들이 방안에 생기를 불어넣는 듯합니다. 물조리를 들고 하나하나 목을 축여주는 어린 딸은 무슨 생각을 하며 정성을 쏟을까요? '물 많이 먹고 쑥쑥 커라.' 하며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성장했을 것 같습니다. 테이블 위의 뜨다 만 털 실 꾸러미를 보니 방금 자리를 떴는지 주름 진 방석 모양새가  엄마 카린의 부재를 알립니다. 살고 있는 사람이 편안할 수 있도록 공간에 주어진 여백과 밝은 색상이 겨울 내내 집에만 있어도 우울하지 않을 듯합니다. 소박함과 안락함으로 안주인의 배려가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장인도 점차 사위 라르손을 인정하게 되고 1888년  순트보른에 있는 작은 집을 라르손에게 선물합니다. '작은 용광로(Lilla Huttnas)'라고 이름을 가지고 있던 이 집은 1891년 라르손 가족들이 스웨덴으로 귀국, 입주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조금씩 고쳐갔는데 라르손의 작품 속에 이 집이 묘사되면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의 집이 되었습니다. 순트보른으로 이주하면서 자신의 집을 예술가적인 취향으로 꾸며 그곳에서 가족들과 평화롭고 소박한 전원생활을 즐기게  됩니다. 작품도 전원생활을 주제로 한 아름답고 장식성이 강한 그림들을 그려 화제를 모으게 되고요. 수많은 삽화들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The Cottage>, 1895/웹진 누리&nbsp; ,1888년 슨트보른으로 이주한 칼 라르손이 아내 카린 베르거와 함께 손수 꾸미고 살았던 집

 

 

 

 

칼 라르손은 이충집에 30년 동안 살면서 7번이나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매년 여름마다 방을 하나씩 늘렸고요. 직접 제작한 의자에 흰색을 칠하고, 원목의 바닥, 자수한 텍스타일, 붉은 제라늄 화분의 단순한 민속 스타일로 집을 꾸민 아내 카린의 손길또한 남달랐습니다. 그녀 역시 화가이자 공간장식가이다 보니 눈썰미와 손놀림이 섬세합니다. 직접 만든 수공예 작품들로  그녀가 8자녀(죽은 아이 포함)를 정성 들여 키운 절제되고 온화한 손길이 느껴집니다. 담백하고  실용적이어서 쓸수록 더 정이 가는 것 같고요.  남편 칼 라르손도 집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 같습니다. 단순한 집이기 전에 영감을 얻는 장소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말이죠. 아내 카렌과 함께 몸소 실천하며 전달하고 자 했던 전원적이며 자유로운 생활 방식, 가족을 향한 따뜻한 철학은 이후  많은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와 그의 가족이 직접 보여준 동화 같은 일상이 스웨덴 사람들에게 삶의 모델로 자리잡게 된 거지요. 백 년이 훌쩍 지났어도 칼 라르손의 작품이 여전히 인기를 끄는 결정적인 이유 같기도 합니다. 

 

 

 

<10월(October),1882>

<커다란 자작나무 아래에서의 아침식사(Breakfast under the big Birch),1894-99

<한겨울의 희생(Midwinter sacrifice),1914-15>등이 잘 알려져 있어요.

 

 

 

 

[커다란 자작나무 아래에서의 아침식사(Breakfast under the big Birch),1895/wikipedia

 

 

 

이 나무가 없었더라면,
사유지 전체가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이 나무는 훌륭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바로 그곳을 지나는 바람이 작은 날벌레나 나방을 쫓아준다.

 

 

 

 

아침식사를 하는 모양새인데 앙징맞은 서열 막내가 딴짓을 하네요. 붉은 색 모자와 대롱거리는 줄무늬  타이즈가 귀엽습니다. 라르손의 말대로 자연이 주는 혜택은 말할 수 없이 많지요. 오늘 라르손 가족에게 주어진 선물은 온 가족이 빙 둘러앉아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는 거지요.  여인을 포함해 아이들까지 모두 모자를 쓰고 정장차림이네요. 덩치 큰 강아지도 식구들 틈에 끼어 먹고 싶은가 봅니다. 자연스럽게 눕혀진 나무 근처 음료병 두 개가 무심한 듯 놓여 있고 흰 닭 한 마리가 깜짝 우정출연했네요. 자세히 보니 나무에 'K'라는 이니셜과 하트도 보입니다. 수채화라 가볍고 화사한 색깔이 녹색의 나뭇잎들과 어울려 담백합니다.

 

 

 

 

/Marcia Strykowski

 

 

 

 

두딸과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 카렌의 모습입니다. 인스타에 올려도 조회수 꽤 나올 것 같습니다. 아늑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이라서 말이죠. 붉은색 그릇장과 준비대 선반에 올려진 갖가지 종류의 그릇들 독특한 중앙의 램프까지 무례하지 않다면 식사 초대받고 싶어 집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아내 카렌을 그리는 아빠 칼 라르손의 붓끝은 신이 나서 춤을 추웠을 거예요. 칼 라르손에게  어릴 적 '집'이라는 곳은 안전한 쉴 곳의 개념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말이죠.  그는 아이들을 위해 툭탁툭탁 만들고 색칠하고 아내가 짠  직물들로 옷을 해 입고 자연을 만끽하는 일상의  행복을 그래서 더 놓치고 싶지 않았겠다 싶기도 합니다. 

 

 

 

 

 

 

<Esbjorn Diong his homework>,1912/Pixels

 

 

 

 

 

제가 개인적으로 눈길이 한 번 더 간 작품입니다. 나가서 놀고 싶은 데 바지춤에 손을 넣은 채 바깥으로 시선을 두고  멍때리는 모습이 어디서 본 듯해서 말이죠. 한국이라면 "땡땡 아~공부해야지"라고 부르며 주의를 줄 것만 같습니다.  녹색의 사이드 테이블과 빨간색 의자 그리고 단단하게 매어 둔 방석까지 방 분위기에 활력을 넣어주는 포인트가 되어줍니다. 창가에 꽃아 둔 꽃 몇 송이는 엄마 카렌의 아들을 위한 깜짝 배려일까요? 섬세한 그녀의 감각과 배려를 보는 듯 해 기분이 좋아집니다. 벽에 걸린 액자, 빙 둘러앉은 주변 소품들 모두 아빠의 작품들일테지요. 거울에 비친 아빠 라르손의 눈길이 다정합니다. 열린 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도 퍽 이국적이고요.

 

 

 

<Sewing Girl>,1911/ Wikimedia Commons

 

 

 

 

집안 한쪽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직물기계가 눈을 사로잡습니다. 살림의 고수에 속하는 어느 지인의 집에 들렀다  낡은 재봉틀을 보고 깜짝 놀라고 반가웠던 기억이 있어서 말입니다. 작업대에 쌓인 천을 다 꿰매는 일이 오늘 그녀가 마무리 해야 할 일인가 봅니다. 삭막하지 않게 작업대와 창문 곁에 녹색식물들이 공간을 메우고 있습니다. 벽돌색, 톤 다운된 녹색, 그리고 겨자색 벽면이 원목의 느낌과 어우러져 편안함을 선물합니다. 벽에 걸린 총은 호신용이겠죠? 

 

 

 

 

 

라르손은 주제를 선택할 때, 소박하고 생기 있는 민속예술에서 자주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라르손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은 밝은 색채와 세심하게 공을 들인 선입니다. 그는 특히 전원풍경과 실내를 그린 수채화로 명성을 얻습니다. 항상 가정의 행복 또는 농민의 소박한 삶을 중심주제로 삼았습니다. 어린시절 라르손에게 집은 안락함과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카린과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집이라는 공간은  일터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당시 안데르스 소른과 에드바르드 뭉크 같은 중요한 스칸디나비아인 동료 화가들은 사랑과 죽음, 비극적 운명과 중산계층의 혁명과 같은 주제로 선택한 것에 비해, 라르손은 자신을 직접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소재를 얻었던 점이 차별화되는 부분입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스웨덴 군인들은 구약성서 다음으로 칼 라르손의 그림을 간직하고 다녔다고 하는 걸 보면 말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y8hnjkPZzb8

 

 

1890년대 출판물에 색을 재현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그의 자품은 점점 인기가 많아졌습니다. 그의 책들이 제작되었고 1909년 독일에서 '햇빛 속의 집(The House in the Sun)'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그의 작품 수록집은 3개월 만에 4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라르손 본인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말이죠. 2001년까지 40쇄를 인쇄했다고 합니다. 

 

 

 

[동지 제물(Midwinter Sacrifice)], 1914-1915/wikipedia

 

 

마지막 작품이  완성된 것은 1915년 제목은 ,동지 제물(Midwinter Sacrifice)이었는데 기근을 피하기 위해 스웨덴 왕이 제물로 나서는 장면으로 묘사한 세로 6미터 가로 14미터의 대작입니다. 북구의 신화에 등장하는 Domalde 왕은  자신의 재임 기간 내내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첫해는 제물을 두 번째 해는 사람을 각각 바쳤으나 세 번째 해에도 역시 대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결국 자신을 제물로 희생하고 풍연이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이 장면은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의 왕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작품이 완성되었지만 미술관 이사회에서 이 작품의 게시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거절을 통보 받은 라르손의 실마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역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내가 죽고 나면 훨씬 더 좋은  곳에 걸려 찬사를 받을 거야."라는 말을 남겼다는군요. 실제로 이 작품은 일본인에게 팔렸다가 1992년 스웨덴 국립 미술관에서 라르손 작품 전시회를 할 때 걸리게 됩니다. 스웨덴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논의가 끊이질 않았고 결구 1997년 일본인으로부터 다시 작품을 사들여 원래 전시하고자 했던 곳에 걸리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28EYsIupnY

 

 

 

<Brita and Me>,1895/Pixels

 

 

평화롭고 아늑한 전원생활의 고귀한 가치를 보여줌으로써 세기말에 대한 스웨덴 사람들의 시각을 구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화가 칼 라르손!!! 무등을 태우고 아이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아빠 칼 라르손의 모습이 훨씬 더 오래 기억에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칼 라르손에게 좋은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 뮤즈가 되어 준 아내 카린의 역할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테지요. 두 사람의 협업이 오늘날 스웨덴 브랜드 IKA를 통해 전 세계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디자이너 혹은 실내 인테리어 전문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기도 하고요. 백 년이 지났어도 그의 가족사랑은 따뜻함의 색감만큼 소소한 행복을 찾는 이들에게 오래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고층 건물로 뒤덮인 뉴욕의 거리를 뒤로 잠깐 돌려 봅니다. 좀 더 인간적인 뉴요커들을 만나보려고요. 

존 프렌치 슬론의 작품을 통해 지금보다 덜 화려하지만 사람 냄새 나는 뉴욕의 시간으로 들어갑니다.

 

187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록헤이븐에서 태어났습니다.

 

 

newsteacher.chosun.com

 

 

도시의 한 장면과 뉴욕 생활의 본질을 포착하는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는 슬론은 서점이자 작은 활자 판매업체인 Poter and Coates에서 보조 출납원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각종 연하장, 달력 디자인과 일러스트, 그리고 에칭 작업도 했고요. 책과 신문, 잡지 등에 삽화를 그리며 예술가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1892년부터 1895년까지 [필라데리피아 인콰이어러(The Philadelphia inquirer)]지에서

1895년부터 1910년까지 [프레스(Press)]지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습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리(The Philadelphia Inquirer)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지역을 담당하는 아침 일간신문입니다. 이 신문사는 1829년 6월 존 R. 워커와 존 노벨이 <펜실베이니아 인콰이어러>란 이름으로 창간하였고, 미국 내에서 세 번째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일간신문이기도 하고요. 미국 내에서 10번째로 가장 많은 주간 발매량을 가지고 있으며 퓰리처상을 20번 수상하였습니다. 

 

 

 

존슬론은 1904년 뉴욕으로 이주합니다. 그는 1907년경 뉴욕에서 로버트 헨리(Robert Henri), 조기 룩스, 아서 B. 데이비스 등과 함께 8인이 주축이 된 '에이트(The Eight)'그룹을 결성하고 미국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을 전개합니다. 그곳에서 로버트 헨리(Robert Henri,1865-1929)를 만나 당대의 진보적인 화풍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는 미국의 화가이자 교사입니다. 젊었을 때 인상파 화가들과 강하게 동질감을 느끼고 파리에서 공부했습니다. 열성적인 추종자들로 구성된 소규모 팀과 함께 도시에서 신선하고 덜 고상한 주제를 찾아 그림을 그렸던  화가입니다. 그리고 이듬해 1908년에 조직된 '애시캔파(Ash Can School)'에도 참여하고요. 아카데미 미술에 반기를 들고 회화가 일상생활과 결부되어야 한다는 신조 아래 슬론은 도시의 활기찬 일상과 소란스러운 분위기, 투박하고 거친 생활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Sunday,Women Drying Their Hair>,1912/The New York Times

 

 

 

그의 작품은 뉴욕 길거리 풍경, 식당과 술집 안, 나룻배, 옥상, 뒷마당 등 다양한 공간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뉴요커들을 생생하게 담아냈습니다. 건물 옥상에 세 명의 여인이 머리를 말리고 있네요. 헤어드라이기가 발명되기 전인가 봅니다.   한 가한 일요일 꿀잠 자고 느지막하게 일어나 밀린 빨래도 하고 머리도 감아 바람에 들어 말리니 마음까지 개운할 것 같습니다. 낯익은 포즈들을 바라보며 무슨 얘기들이 오고 갔을까 사뭇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우아를 떨지 않으니 그들 사이에 제 모습도 살짝 보이고 스스럼없이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 집니다. 남자친구 얘기, 동료얘기, 가족얘기 등 화제를 들쭉날쭉 바꾸며 웃고 떠들고 공감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습니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뉴요커들의 모습도 보기 좋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인간적인 뉴요커들의 모습도 정감 있어 좋습니다. 

 

 

 

 

<Sixth Avenue Elevated at Third Street>,1928/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1920년대 뉴욕은 부유한 문화와 급속한 혁신의 중심지였습니다.  금주 문화가 번성하며 불법 술집과 지하 도박장이 생기고 있었죠. 한편으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클럽에서 춤과 음악으로 활기찬 시간이 펼쳐지기도 했고요. 아마 그림 속 젊은 직장 여성들은 일 끝내고 어딘가로 놀러가는 가 봅니다. 움직임이 들떠있어요. 재즈바의 마음에 드는 피아노 맨이 있을지도 모르죠.  이 시기는 여성들이 미국에서 투표권을 얻은 시기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변화와 동시에 여성들의 자유로운 생활양식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으니까요. 도시의 높은 건물들이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며 모던한 도시의 상징이 되어갑니다. 기술 혁신과 경제 성장 또한 함께 펼쳐지던 시대였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xT08okBIztU

 

 

 

 

 

 

 

슬론은 인간의 삶, 그리고 그 삶의 기쁨을 담아내기 위해 초점을 촘촘하게 확보하고 피사체를 면밀히 관찰합니다. 두드러진 특징중 하나는 그의 작품이 후기로 갈수록 색채가 밝아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실제로 슬론은 1920년대 후반 생계가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자 도시 주제의 그림 대신 누드와 초상화를 주로 그리게 됩니다.

 

 

 

 

<Blond Nude with Orange,Blue Couch>,1925/ART&ARTISTS

 

이전작들과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죠? 개인적으로 슬론의 이전 작품들이 더 맘에 들긴 하지만요. 아름답지만 소시민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 그런가 봅니다. 그들의 희로애락이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위로가 되어 그런가 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tlE4AwE_g0

 

 

 

 

슬론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은 미국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사람들 자체에 관심이 많았고,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그는 풍요와 빈곤이 뒷섞여 있는 뉴욕에 살면서 매일 부딪치는 가난한 노동계급의 삶과 맨해튼의 환락가 등 궁핍과 혼란으로 가득 찬 도시풍경을 낙천적이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했습니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인물들의 자세는 신문 삽화가로 일했던 그의 경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슬론은 1914년부터 약 10년간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The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에서 미술을 가르쳤습니다. 이곳은 1875년 아티스트들로 설립된 곳으로 거의 대다수 학생들이 National Academy of Design in New York에 소속했고 , 상당수 학생들은 여자였다고 합니다.  프로페셔녈 아티스트와 아마추어 아티스트들을 위한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드로잉, 수채화, 페인팅, 조각, 파스텔화, 포토샵과 미술사 강좌 등 다양한 클래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트를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연령, 인종, 학력의 제한이 없고요. 자격시험이 까다롭지 않고 입학시험은 없습니다. 수업에 따라 강의료는 다양하고 자신이 원하는 수업 프로그램을 짜서 받을 수 있습니다. 국가, 연령 인종에 상관없이 아트 수업을 받을 수 있는 학교입니다.

 

 

 

단, 외국인의 경우 학생 비자가 필요한 경우라면 아트 포트 폴리오와 1년 이상의 미술 전공 자격증과 재정 증명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지원 방법은 온라인으로 한 뒤 전화를 하거나 직접 방문하면 됩니다.

 

 

이 학교 출신자는 이력서에 자신 있게 아트 스튜던트 리그 오브 뉴욕에서 수학했다고 적습니다. 이곳에서 공부한 유명한 화가 가운데 잭슨 폴락, 리히텐 슈타인, 조지아 오키프, 노먼 록웰, 마크 로스코, 알렉산더 칼더 등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정식 학위를 인정해주지 않지만 아티스트들이 인정해주는 사랑스럽고 멋진 학교입니다.  슬론은  1951년 뉴햄프셔주 하노버에서 암으로 사망합니다.

반응형
반응형

 개 품종 중 하나인 달마시안(Dalmatian)은 평생 물방울무늬를 한 채 예술적인 모습으로 오랫동안 인간들 곁에 함께 있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 원산지는 동유럽 발칸반도 근처 달마티아 지방(아드리아 해와 접한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방)입니다. 달마티아 지역은 크로아티아 남부 지방에 위치하며 바다를 따라 길게 펼쳐진 지역입니다. 마치 칠레의 영토처럼 기다란 띠 형태를 가지고 있어요. 복잡한 해안선과 함께 500여 개가 넘는 섬들이 있다고 해요. 지명의 유래는 기원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던 일리리아족 중 하나인 달마테(Dalmatae)족의 이름에서 따 왔다고 하고요. 로마 제국의 속주인 일리리쿰이 1세기에 분할되면서 달마티아라는 지역명이 시작되었습니다.

 

 

 

vpn.cnu.edu.cn

 

 

 

지도상에  두브로브니크(Dubrovnik)보이시죠? 이 지역이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달마시안(Dalmatian)의 고향입니다.  로마시대부터 이 지역을 그렇게 불렀다고 하니 달마시안 개 역시 오래되었다는 뜻이겠죠.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어로 '작은 떡갈나무 숲'이라는 의미라고 해요. 16세기부터 이미 아름다운 도시로 유명했고 크로아티아 최대 관광도시이기도 합니다. 한때는 이탈리아 베네치아(Venice)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무역도시였고요. 1979년 구시가지 전체와 성벽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예술적인 가치와 역사적인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도시입니다.

 

 

 

Dallas Observer/Shutterstock

 

 

 

주로 영국에서 달마시안 품종을 브리딩했으며, 잉글리시 포인터 종의 개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현재도 말을 사육하는 곳에서 달마티안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건너온 달마티안들은 소방서에서 인명구조견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IFL Science/Shutterstock

 

 

 

털은 짧고 검은 점박이 흰 털에 박혀 있어요. 잛은 털이지만 무척 많이 빠져요.  죽은 털을 제거하기 위해 정기적인 빗질은 필수입니다. 매끄럽고 근육질의 우아한 몸매를 자랑하는 중 대형견입니다. 달리기 무척 빠릅니다. 

 

키는 50-61cm

몸무게 15-32 kg 

평균수명 :10-12년

생후 2주가 되면 검은 점박이 무늬가 생긴다고 해요. 신기하죠.

 

 

 

서양에서 소방관의 개로서의 이미지가 큽니다. 특히 말들과의 궁합이 매우 좋았다고 해요. 소방관들이 당시 소방마차를 타고 가면 훈련된 달마시안들이 앞에  있는 장애물들을 미리 알렸다고 합니다. 마차나 승마 기수의 옆을 달리며 방향을 잡는 데 도움도 주고요.  떠돌이 개나 들개가 말의 근처에 오는 것을 막기도 하고요. 다른 동물이 다가오면 기수나 마부에게 신호를 보내는 식으로 말이죠. 사냥 도우미로 활약하는 달마티안도 있고, 인명구조견이나, 심지어 서커스에서 활약하는 달마티안도 있다고 합니다. 여전히 달마티안은 소방서의 마스코트로 남아 있습니다. 

 

 

 

위키백과

 

 

 

마차를 지키던 경호견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활동성이 높고 성격이 거칠어 교육하지 않으면 사고칠 확률이 높아요. 배타성도 강하고 고집도 세다 보니 교육이 쉽지 않습니다. 키우기 위해서 마당이 있으면 더 좋고요. 달마티안의 활동력과 체력은 모든 견종을 통틀어 가장 높은 편입니다. 이 넘치는 에너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마당은 필수인 거죠. 교육을 철저히 시켜 주시고 응석이 세니까 달라고 다 주면 안 됩니다.  안 되는 것과 되는 것을 확실히 인지 시켜야 합니다.  감시 및 경계 능력이 뛰어난 개입니다. 다른 개나 동물, 어린 아이들과 금방 친해져요. 다만 경계심이 심한 경우 다른 동물을 공격할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지능이 높아 명령어도 금방 배우는 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3upLN7avaE

 

 

 

 

달마시안을 키울 경우 어릴 때부터 사회성 훈련과 서열관리를 함께 해주셔야 합니다. 주인에게 매우 충성스럽지만 타인에게  배타적인 면이 있어 어릴 때 쓸데없이 짖거나 크게 흥분하는 일이 없도록 어릴 때부터 여러 환경을 접해주도록 하고, 여러 사람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101마리 달마시안> 애니며 이션이 나 영화의 재방송을 금지해 달라고 청원을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 등으로 입양한 달마티안이 생각보다 덩치도 크고, 운동량도 많고, 털도 많이 빠지고, 난청 및 요로 결석 등의 유전적 질병이 생기면서 버림받는 달마티안이 증가했기 때문이죠.

 

 

 

 

Abstract Hand Drawing Cute Dalmatian Dog Stock Vector/ Shutterstock

 

 

 

 

달마티안도 다른 견종과 마찬가지로 유전적 질병이 있어요.

 

- 10개월 미만의 달마티안은 호흡기 질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 유전적으로 청각 장애를 겪기 쉽습니다.

- 요로계 질환에 취약해요.

   비뇨기에 요산석(Uric Acid Stone)으로 고생하는 유일한 견종입니다.

- 홍채 괄약근 형성 이상

 

 

달마티안들에게 물을 많이 마시도록 하고, 푸린이 많이 함유된 음식은 피해 주세요. 빛에 너무 민감해지고 어두운 곳에서 잘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짝 유행이라고 트렌드에 휩쓸리지 마시고 입양할 개들의 특성과 주의점들을 잘 숙지하셔서 견주도 입양하는 개도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는  1886년 멕시코 과나후아토(Guanajuato)에서 태어났습니다. 헌신적인 가톨릭 메스티조(스페인*북미 원주민이 섞인 라틴 아메리카 사람) 출신의 어머니와  크리올로(중남미 태생의 유럽계의 사람)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디에고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은 어릴 적부터 빛이 났고 그의 첫 번째 벽화를 벽에 칠할 수 있도록 안 방을 내주면서  그의 커리어는 시작됩니다. 디에고 리베라와  애니메이션 <코코>의 고향인 '과나후아토' 먼저 구경해 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3G20IMxSyrg

 

 

 

6살 때  그의 가족은 과나후아토에서 멕시코 시티로 이주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디에고를 카판티에 카톨릭 대학에 보내기로 결정하지요. 10살이 되자 리베라는 직업 군인이 되기를 바라는 그의 아버지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예술학교에 다니고 싶어 합니다.

 

 

12살 때, 산 카를로스 미술학교에 정식 등록했고, 그곳에서 그는 보수적인 유럽식 회화 기법을 답습하며 교수진의 진부한 커리큘럼 아래 전통 그림과 조각 기술을 공부하게 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원근법, 색채, 앙플렌 에어(en plein air) 기법 등의 전통 기법을 익히지요. 또한 리베라는 멕시코 예술혁명의 이데올로기 세력 중 하나이자 토착공예와 멕시코 문화의 확고한 옹호자였던 게라르도 무릴로(Gerardo Murillo)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1905 두 학생은 사비아 머드나 잡지의 편집자들이 기획한 전시회에서 다른 유망한 예술가 그룹과  합류하게 됩니다. 무사히 학업을 마친 리베라는 그 이듬해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 미술 전시회에서 24점이 넘는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대의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라 에이지" 즉 "트레싱"은 인상주의의 요소들을 받아들여 독특한 느낌의 색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게라르도 무릴로(Gerardo Murillo)의 지원으로 리베라는 1906년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는 정부의 보조금을 받게 됩니다. 스페인에서 리베라는 프라도 박물관에서 본 엘 그레코(El Greco) 벨라스케스(Velasquez), 프란시스코 고야(Goya), 플랑드르 거장들의 작품을 실컷 연구하게 되지요. 훗날 그의 그림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됩니다. 스페인 현실주의 화가 에두아르도 치카로(Eduardo Chicharro)의 스튜디오에서 리베라는 현실주의 와 인상주의의 요소를 담은 작품인 아빌라의 네이트씬과 같은 그림을 그립니다. 다다이즘 시인 라몬 고메즈 데 라 세르나(Romon Gomez de la Serma)와 작가 라몬 잘레 인끌란(Ramon Valle-Inclan)등 마드리드 전위예술의 유력인사들과 알게 되지요.

 

 

 

 

1908년  마드리드에서 파리로 이주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와 그의 아내인 잔 에뷔테른을 포함한 몽파르나스 공동체의 다른 예술가들과 몇 년 동안 함께 살기도 합니다. 1909년 리베라는 발레 인끌란과 함께 파리와 벨기에를 여행했고 그곳에서 12년간 리베라의 파트너가 될 러시아 화가 안젤리나 벨로프(Angelina Beloff)를 만나게 됩니다.

 

 

 

<The House on the Bridge>,1909 /wikipedia

 

 

1910년 혁명이 시작된 멕시코 시티로 잠시 돌아온 리베라는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에서 그의 첫 전시회를 제의 받게 됩니다. 리베라의 복귀는 1917년까지 계속된 멕시코 혁명의 시작과 일치합니다.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리베라의 전시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작품 판매로 벌어들인 돈 덕분에 유럽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고요. 리베라는 이 전시회에서 <Head of a Breton Woman>등 6점의 그림을 선보입니다. 이 시기에 완성된 <Breton Girl>과 <The House on the the Bridge>등 여러 작품들은 빛의 변화적인 힘에 대한 인상주의의 초점을 잘 보여줍니다.

 

 

 

리베라가 멕시코를 잠깐 방문한 후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스타일은 20세기 초 2세기 동안 유럽에서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큐비즘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입체파들은 기하학적 형태나 교차하는 평면을 통해 단일 주체의 다중 형상을 묘사하려고 했거든요. 파블로 피카소와 사망한 폴 세잔의 영향으로 리베라의 그림은 점차적으로 더 추상적이 되어갑니다. 그는 큐비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갔고 , 큐비즘만이 진정한 혁명적인 그림의 형태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리베라는 미술평론가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와의 폭력적인 사건에 이어 다른 구성원들과의 어려운 관계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 결과 피카소(Picasso), 브라크(Braque), 후안 그리스(Juan Gris),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 자크 립시츠(Jacques. Lipchitz) 와의 우정이 끝나게 됩니다.

 

 

리베라는 이 사건 이후 세잔(Cezanne)과 앵그르(Ingres)와 같은 신고전주의 화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구상 회화의 재발견으로 초점을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1912년의 톨레도 관점은 눈에 띄는 건물과 입체파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고요. 다음 해부터의 <오스카 미스테차니노프의 초상화(Portrait of Oscar Miestchaninoff)는 리베라의 스타일에 대한 입체파적 영향력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1913년까지, 예술가들은 그의 예술에서 큐비즘을 완전히 받아들였는데, 이는 <Woman at a Well>과 <Sailor at Breakfast>같은 작품들에 의해 증명됩니다. 그는 피카소(picasso),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앙드레 로테(Andre Lhote ) 같은 사람들이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이 작품을 전시한 살롱 드 오토민 전시회에 작품을 제출하여, 미술계의 부정적인 반응과 긍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Motherhood Angelina and the Child Diego>,1916, Cubism/widipedia

 

 

 

1916년의 <Motherhood: Angelina and the Child>는 리베라의 마지막 순수 입체파 그림들 중 하나입니다.  그의 예술적 발전은 멕시코 혁명과 1917년 러시아 혁명과 같은 최근의 정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방향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는 노동계급과 그의 멕시코계 유산의 요소들을 결합시킨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고전예술을 공부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할 수 있는 또 다른 보조금을 받은 리베라는 1920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에트루스칸, 비잔틴, 르네상드 미술품을 베꼈고, 르네상스 시대의 14세기와 15세기의 프레스코화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듬해 멕시코로 돌아온 그는 벽화 작업에 참여하게 되고요. 리베라는 벽화주의자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와 멕시코의 현실주의자 데이비드 알파로 시크로스를 포함한 한 무리의 예술가들과 함께 후원 벽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됩니다. 리베라의 첫 번째 장르인 "창조"는 그가 멕시코 시티의 국립 준비학교 강당 벽에 그린 작품인데, 르네상스 후광을 가진 천상의 주인을 장엄하게 표현했습니다.

 

 

1921년 호세 바스콘셀로스(Jose Vasconcelos)가 멕시코 교육부 장관에 임명되자 리베라는 파트너인 안젤리나 벨로프(Angelina Beloff)뿐 아니라 1919년 리베라와 함께 딸 마리카를 둔 또 다른 러시아 화가 마레브나 스테벨스카(Marevna Stebelska)를 남겨두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Pan America Unity>, 1940/Pixels

 

 

리베라는 고전과 고대 예술에 대한 그의 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아 예술적 관점을 다시 일깨워 멕시코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교육부 미술 프로그램의 후원을 받아 많은 콜럼버스 이전의 고고학 유적지를 방문하여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국립예비학교에서 제작되고 <창조(Creation 1922)>라는 제목의 그의 첫 벽화는 서양 미술의 강한 영향력을 보여주게 되죠. 리베라는 곧 기술노동혁명조합에 가입하고 1922년 멕시코 공산당에 입당함으로써 지역 정치에 도 관여하게 됩니다. 이때 멕시코 시 교육부와 차핑고(Chapingo)의 국립농업학교에서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됩니다. 후자의 프로젝트 동안, 그는 그의 벽화를 모델로 한 이탈리아 사진작가 티나 모도티(Tina Modotti)와 관계를 맺게 되죠. 그 사건을 계기로  그의 두 번째 아내 루페 마린(Lupe Marin)과 헤어지게  된다.

 

 

 

<Flower Vendor>,1942/출처: Diego Rivera

 

 

 

내게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민과 희망을 아주 강렬하게 느끼게 해주는 출신 배경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해 주고 더 나은 세상을 보게 해줘야 한다는 게 나의 희망입니다.
(디에고 리베라)

 

 

 

 

리베라가 30대가 되었을 때 그는 단순한 선과 풍부한 색상을 가진 큰 인물들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의 장면들 중 많은 부분이 광부, 농부, 산업 노동자와 농민 같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의 작품 <Flower sellers with calla lilies>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 중 하나이죠.

 

 

디에고 리베라의 대표작 < 꽃 파는 사람>입니다. 카라가  풍성하게 한 바구니 담긴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더 아름다운 이유는 그 무거운  꽃바구니를 힘겹게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와 그 꽃바구니를 들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꽃을 사서 보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마음은 분명 다르겠지요. 언뜻 보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이 그림의 비밀은 뒤에서 무거운 카라 꽃바구니를 짊어지게 시키는 사람의 보이지 않는 손과 발, 그리고 머리에 있습니다. 멕시코 여인은 무릎을 꿇고 무거운 카라 꽃바구니를 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도 파는 사람에게는, 가난한 서민에게는 고된 노동이라는 디에고 리베라의 연민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1927년 리베라는 10월 혁명 1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는데, 이 경험은 그가 극도로 고무적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9개월 보내며 미술 학교에서 기념비적인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고요.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리베라는 알프레드 H.자르 주니어 (Alfred H. Barr,JR.)를 만났는데 알프레드 바르는 친구이자 후원자가 될 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관의 책임자가 될 중요한 인물이었죠. 화가인 프리다 칼로(Frida Kahlo)와 결혼하여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2023.12.13 - [지식&교양] - 50-52. 프리다 칼로(Frida Kahlo,39)

 

50-52. 프리다 칼로(Frida Kahlo,39)

2017년 추수감사절 기간 동안 북미 1위 를 차지한 애니메이션 이 하나 있습니다. 작품 입니다. 멕시코 마을에 사는 소년 미겔이 '죽은 자들의 세상'에 들어가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작품 속에 눈에

sun-n5y2.tistory.com

 

 

 

 

교육에 대한  그의 급진적인 생각은 그를 보수적인 교직원과 학생 단체들 사이에서 적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그는 정부와의 협력으로 공산당으로부터 제명되는 부침을 겪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리베라는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 드와이트 W. 모로(Dwight W. Morrow)에게 지지를 얻어 그 도시의 역사를 묘사한 쿠에르나바카(Cuernavaca)의 코르테즈 궁전 벽화를 그리게 됩니다. 리베라의 작품을 흠모한 모로는 예술가에게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 미국으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Detroit industry Murals>,1933, Detroit Institute of Arts.US/ wikipedia

 

 

리베라는 미국에서 4년 동안 머무르게 됩니다. 샌프란시스코, 뉴욕, 디트로이트의 벽화를 그리며, 노조, 교육, 산업, 예술의 강력한 힘을 찬양하며 일을 하지요. 뉴욕에서 그는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1인 전시회로 5만 7천 명의 관람객이라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벽화 중 일부는 물리적 손상으로 위협을 받았다는 논란도 있었습니다. 리베라의 미국 모험은 레닌의 초상화를 없애기를 꺼리는 리베라의 마음과 록펠러가에서 데이비드 록펠러의 모욕적인 초상화라고 여기는 것 때문에 존 D. 록펠러 주니어가 록펠러 센터의 로비를 위해 의뢰한 벽화, < 교차로에 서 있는 남자( Man at the Crossroads)>의 파괴를 명령했을 때 1933년 끝이 납니다.

 

 

<The Allegory of California >, /TheHistoryof Art.org

 

 

 

 

 

리베라는 1930-1931까지 샌프란시스코에 세 개의 벽화를 그리게 됩니다. 

<The Allegory of California>이 작품은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몸집이 큰 여성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그들 의사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The Making of a Fresco Showing the Building of a City>은 샌프란시스코 미술대학에서 그가 그린 벽화의 제목으로 각각 다양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몇 개의 방이 있는 열린 건물을 특징으로 합니다. <Pan American Unity>이며,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디에고 리베라 극장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것을 다섯 가지 프레스코스트의 웅대한 사업이었습니다.

 

 

 

 

1932년 그는 포드 자동차 회사의 발전을 묘사한 <Detriot Industry mural>이라고 알려진 27개의 패널을 그립니다. 리베라는 조수들의 도움으로 1933년에 완성한 이 시리즈를 그의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fICWhs8NsI

 

 

 

 

 

 

1937년 그와 칼로는 러시아 주요 공산당 지도자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와 그의 아내가 정치적 망명하는 것을 돕게 됩니다. 트로츠키 부부는 코요아칸(Coyoacan) 교외에 있는 "블루 하우스"에 2년 동안 리베라, 칼로와 함께 살게 되고요.

 

 

 

 

1949년  리베라는 멕시코 시티의 궁궐 미술관에서 50년 간의 그의 작품을 기념하는 기념 전시회를 갖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 몇 해 동안, 디에고는 때로 휴대용 패널로 작업하면서 벽화를 계속 그립니다. 그는 또한 많은 수의 유화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보통 멕시코 부르주아나 아이들, 또는 미국 관광객의 초상화를 제작했다고 합니다. 그의 소장품은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의 위대한 신전에서 영감을 받아 리베라가 직접 디자인한 건물인 아나우악 박물관(Anahuacalli Museum)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프리다칼로 (Frida kahlo)의 사망과 함께  1946년 이후 그의 미술상이자 권리보유자인 엠마 허타도(Emma Hurtado)와 1955년 결혼합니다. 프리다의 부탁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암 치료를 위해 소련 여행 후, 1957년 멕시코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디에고 리베라의  형태와 색채는 멕시코의 전통과 국민성에 뿌리를 박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멕시코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 할 수 있고요.  리베라는 그의 재능을 서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사용한 지역 사회 구성원의 로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의 작품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방미술 프로젝트와 같은 프로그램들을 고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예술가들이 건물의 측면에 일상생활의 장면을 그리는 것을 허용하게 된 거지요. 그의 작품을 후기 벽화 화가 벤 샨과 토마스 하트 벤튼 그리고 추상 인상파 화가 잭슨 폴락과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미술관을 벗어나 공공영역에서 예술을 접목시켜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디에고 리베라가 준 선물인 것 같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해가질 때까지 친구들과 밖에서 놀다 해가 져서야 아쉽게 집으로 돌아갔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노먼 퍼시벌 록웰(Norman Perceval Rockwell, 1894년 2월 3일 - 1978년 11월 8일 )입니다.

 

 

그는 1894년 뉴욕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였고, 록웰에게 어릴 적부터 책을 읽어주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래서인지 록웰은 자신의 그림 속의 주인공으로 아버지를 자주 그리곤 했습니다. 노먼 록웰은 14살 때부터 뉴욕에 있는 여러 미술 대학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아직 학생때였던 16살에 그는 생애 최초로 4장의 크리스카스 카드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해요. 이후 18살에 본격적으로 'Boys' Life'라는 책의 삽화를 그리며 전업 화가가 됩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대부분 작가들은 전쟁의 비탄과 비극을 작품에 담았지만 록웰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주로 그립니다. 젊은 시절 파리로 가서 20세기 현대미술운동에 참여하려다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이후로 미국 중산층의 생활 모습을 친근하고 인상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미국 시민의 대부분이 구독했 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의 표지 그림을 40년 넘게 그렸고요. 한평생 잡지 일러스트를 그리며 살았다는 얘기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XBhpSOMhZmo

 

 

 

1950년대를 지나면서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했졌습니다.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는 끊임없이 아메리칸드림과 같은 현대 생활의 풍요로움을 다루었고요. 이 흐름 속에  록웰이 주목한  것은 젊은이의 모습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뻥튀기처럼 부를 쌓아 올렸지만, 내면은 허위와 도덕적 해이로 얼룩졌던 시대였습니다. 

 

 

<The Gossips>,1948/Arthive

 

 

 

이른바 입소문이나 가십을 삽화로 묘사한 그의 재능은 말그대로 천재적입니다. 그림 속의 사람들 표정은 놀라움, 당연함, 의구심 등으로 다양하고요. 생생한 표정들로 뜨끔 하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들 모습 같아서 말입니다.  작가는 세상의 뜬소문은 그 소문을 낸 당사자에게 되돌아오고 결국 그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된다라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가십'에 나타난 왼쪽 첫 번째 여인과 오른쪽 맨 끝의 여인이 같은 인물인 것도 이를 대변하지요. 상대의 손가락이 결국 나를 향해 부메랑처럼 돌아온 다는 사실을 그녀 역시 이해했을 것 같습니다. 프란시스코 교황님께서 "험담만 하지 않아도 성인 된다."는 말씀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피카소도 훌륭하지만
나도 훌륭하다는말을
누가 한 번이라도 해주면 좋겠다.





<Girl with a Black Eye>,1953/Reddit

 

 

아이 표정이 너무 익살스럽지 않나요. 뭘 하다 멍이 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터프하지만 건강한 모습이 좋아 보입니다. 야단을 맞아야 하는 분위기인데 긴장했다기보다 자신의 그럴 수밖에 없는 행동을 당당히 어필할 것 같은 개구쟁이 모습입니다.

 

 

 

 

이 시기에는 광고성 그림과 책의 삽화를 담당하는 소위 "일러스트레이터"는 예술가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돈을 내고 구입할 만한 작품이라는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대부분은 불행히도 쓰레기가 되어 소각된 작품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엄청난 값어치를 자랑하지만요.

 

 

노먼 록웰은 일러스트레이터를 예술가로  취급하지 않았던 비평가들에게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인권, 인종차별 등 조금 더 사회 비판적인 내용의 심각한 주제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 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그리고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그림 등을 통해 큰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고요.

 

 

  당시에 저평가되었지만, 록웰의 작품을 보고 자란 세대가 문화의 중심이 되자 상황은 반전됩니다. 예를 들면 세계적인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감독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노먼 록웰의 그림으로 집을 전시장으로 만든 것은 물론, 구입할 때 서로 의논해서 순서를 정할 정도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 보고 자란 록웰의 그림들이 이들에겐 영감의 원천인 것이지요.  두 거장은 경제적 자유가 오는 순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록웰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2002년  기사 하나가 떴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일러스트레이터'노먼 록웰의 도난당한 그림 한 점이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사물실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인데, 소장자인 스필버그는 '장물'인 줄 알지 못하고 구입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스필 버그가 구입한 록웰의 작품은 <러시아 교실>이라는 작품입니다. 실제로 러시아 (당시 소련) 학생들의 수업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1973년 6월 25일 미 미주리주의 클레이튼 미술관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난 1989년 합법적인 경로로 이 작품을 구입한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이 FBI에 수사를 의뢰한 지난주까지 이것이 도난 작품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FBI는 전했습니다.  미술품 감정사들과 FBI의 조사 결과 진품으로 판명된 이 작품의 초기 감정가는 약 70만 달러(약 6억 6000만 원)입니다. 공산주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흉상이 놓인 교실에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러시아 학생들의 모습을 그린 이 유화 작품은 "처분이 결정될 때까지" 스필버그 감독의 소유로 남아 있을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포함한 40개가 넘는 책, 그리고 달력, 카탈로그, 포스터, 도장, 카드, 잡지 등 많은 작품들이 손상되어 버리거나 없어져버렸지만 록웰은 평생 동안 4000개가 넘는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Freedom from want, Freedom of speech and expression ,Freedom of worship, Freedom from fear,1943/TIME

 

 

 

 

노먼 록웰의 그림이 더 빛나는 이유는, 그의 붓끝에 담긴 문제 제기에 있습니다. 194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국회 연설을 듣고, 사회적 문제에 눈을 뜬 록웰은 '네 개의 자유'에 대한 그림을 그려 이슈를 만듭니다.

 

네 가지 자유(Four Freedoms)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미국 대통령 집권 당시 1941년 1월 6일 발표한 연두교서 연설에서 제시한 네 가지의 자유를 말합니다.이다.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 and expression)

신앙의 자유(Freedom of Worship)

결핍의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

 

표현의 자유와 신앙의 지유는 종교, 언론 및 출판의 집회 및 청원의 권리를 규정하는 아메리카 합중국 헌법 수정조항 제1조에 나타나 있습니다.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는 2차 세계 대전 기간과 그 이후에 사상적 측면에서 세계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네 가지 자유 연설의 내용은 대서양헌장과 국제 연합 헌장에 반영되었고요.

 

 

네 가지 자유는 세계 인권 선언에도 반영됩니다.  세계 모든 곳에서 이루어지는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 세계 모든 곳에서 모든 이들이 어느 곳에서나 원하는 방식대로 신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 세계 어는 곳에서나 모든 국가들이 거주민들을 위해  건강하고 평화로운 삶을 보장해 주도록 하는 경제적 약속을 의미합니다. 세계적인 측면에서 세계 어는 곳에서나 어떠한 국가도 이웃 국가에 물리적인 공격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세계적 규모의 군축을 의미하기도 하고요.

 

 

처음에 미국 정부 소속의 전쟁 정보 사무소(Office of War information)는 네 가지 자유를 주제로 하는 그림을 제공하겠다는 노먼 록웰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미국의 유명 잡지 <더 세터데이 이브닝 포스트(The Saturday Evening Post)에 게재되면서 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전쟁자금으로 1억 3천만 달러의 후원금이 모집되었고요. 1994년 미국 우편 공사에 의해 우표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노먼 록웰 박물관에 보관도 되어 있고요.

 

 

<우리가 함께 안고 살아가는 문제(Problem We All Live With)>,1964/BYU Magazine

 

 

 

 

 

이후 록웰은 '브라운 판결'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영감을 받아 또 다른 그림을 남겼는데, 오바마 정부 시절 미국 백악관에도 전시되었던 <우리가 함께 안고 살아가는 문제 <Problem we all live with(1964)>다.  

 

[브라운 판결]

1950-60년대의 미국은 인종차별이 만연한 사회였다. 린다 브라운이라는 흑인 소녀는 집에서 가까운 백인 초등학교에 입학 불가 판정을 받게 된다. 1마일 거리의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녀야 하자, 아버지 올리버 브라운이 유색인종 권리 향상위원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캔자스주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승리를 얻어낸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판결은 흑인 인권 운동의 시발점이 되어 1964년 흑인에게 실질적 참정권을 부여한 민권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된다. 

 

깨끗하게 흰 원피스와 곱게 정돈된 머리를 한 흑인 소녀가 경찰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책과 자, 연필 등을 보니 학교에 가고 있는 듯합니다. 소녀의 뒤로는 던져진 토마토가 보이고요. 이는 1960년 루이지애나에 살던 6세 흑인 소녀 루비 브리지스가 백인들만 다니던 초등학교에 보완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등교하는 역사적 장면을 그렸습니다. 이 소녀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학교에 가게 된 소녀라고 합니다. 인종차별주의가 팽배했던 역사적 현장을 탁월한 구도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1963년부터 이후 10년간   미국 잡지 <룩(Look)>의 삽화를 담당했던 록웰은 흑인은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당시 편집 방침에 맞서 브리지스의 등교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표지에 올립니다. 이때부터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시민의 권리, 인종차별, 빈곤, 그리고 우주 탐험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며 소시민 곁으로 가까이 오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GJc1YL2DBY

 

 

 

 

 

<집을 떠나며(Breaking Home Ties)>,1954 /위키피디아

 

 

 

<집을 떠나며>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부자 지간'의 시선이 서로 반대방향인 것을 알 수 있다. 젊은이는 홍조 띤 얼굴로 목을 길게 빼고 다가오는 미래에 이미 넋을 빼앗긴 듯 보인다. 어깨를 늘어뜨린 아버지의 손은 약해지지 않기 위해 모자를 꼭 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타지로 향하는 아들을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을  어떻게 ,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한 모습 같기도 하다. 주머니에 튀어나온 아들 마음 같은 차표와 이별을 슬퍼하는 개의 시무룩한 표정도 작가는 놓치지 않았다.  날 세워 다린 아들의 양복바지 위에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은 어딜 가나 엄마표 마음은 동일한 듯하다. 아랑 곳 없는 아들의 상기된 얼굴이 쉬이 설렘을 가라앉히기에 역부족으로 보인다.

 

<Girl at The Mirror>1954/ amazon.com

 

보기만 해도 귀여운 꼬마 숙녀가 거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름 심각한 표정이네. 갖고 놀 던 인형마저 땅바닥에 내동댕이 친 채 말이다. 무르팍에 올려진 잡지를 보며 어른 흉내를 내고 있나 보다. 머리까지 곱게 땋아 올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예쁜 이 녀석 천천히 어른 되거라. 떨어진 립스틱 쥐 잡아먹은 것처럼 빨갛게 칠하지 말고 , 그냥 그 모습이 그대로 오래 간직하고 있으렴.

 

 

 

 

 

박물관은 998개의 원본 그림과 그림을 포함하여 로크웰의 작품 중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컬렉션으르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 25년 동안 Stockbridge에 살았습니다. 이 스튜디오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5월에서 10월까지 일반에게 공개되며 원본 미술 자료, 도서관, 가구 및 개인 용품을 갖추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또한 작업 사진, 편지, 개인 달력, 팬 메일 및 비즈니스 문서를 포함하여 10만 개 이상의 항목으로 구성된 Norman Rockwell Archives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스톡 브리지의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올드 코너 하우스에서 처음 24년을 보냈던 이 박물관은 1993년 Houstationic River Valley가 내려다 보이는 36 에이커 규모의 부지로 이전되었습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Robert A.M. Stem 이 박물관 갤러리 건물을 디자인했습니다. 

 

 

박물관의 위대한 매력 중 하나는 그 위치입니다. 로크웰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미지 중 상당수는 주변 지역 사회와 주민들로부터 수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의 원작을 둘러싸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즐거운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록웰이 헌정된 진실성으로 그렸던 사람들의 자녀들과 손자들을 현지인들이 알아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현실을 무작정 미화한 화가가 아니라, 권위에 도전하는 신랄한 코드를 그림 곳곳에 숨긴 재기 발랄한 작가입니다. 그리고 전설적인 일러스트레이터로서 , 중산층의 일상생활을 친근하고 인상적으로 묘사해 왔습니다.  미디어나 통신매체의 발달로 가십거리가 홍수시대를 이루고 있는 세상을 자기답게 풍자해 낸 탁월한 작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1977년 '가장 생동감 있고 매력적인 미국의 인물'로 선정된 록웰은 '대통령의 자유 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상했으며, 이듬해인 1978년 84세로 스톨 브리지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S-3HZ2JBWk

노먼 록웰박물관

 

 

 

반응형
반응형

 

'Supreme (최고의)'의 영문 번역을 살펴보았습니다.

(of authority or an office, or someone holding it) superior to all others.

 

최고의 (ultimate), 최상의 (greatest)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모든 브랜드들의 로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브랜드 이름 만으로도 이미 사람들 뇌 속에 뚜렷하게 각인되는 효과가 있으니 말입니다.

 

 

Supreme New York/ 나무위키

 

 

 

슈프림은 나의 루이비통이다.
- 오프화이트 창립자 버질 아블로-

 

 

브랜드 슈프림(Supreme)은 1994년 제임스 제비아(James Jebbia)가 수장으로 있는 스트릿 브랜드입니다. 제임스는 미국인인 아버지와 영국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제임스는 어머니와 영국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9살에 아버지와 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영국에 입점을 하고 영국 래퍼 Oxtavian을 모델로 쓰는 등 영국과 친밀한 것도 그곳에서 자란 경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후 제임스는 미국 서부에서 스케이트 보더로 활동을 합니다. 뉴욕 소호의 패러슈트(Parachute)라는 미니멀리스트 스타일 샵에서 5-6년 일을 하면서 경험도 쌓고 돈도 벌게 됩니다.

 

 

 

뉴욕과 런던을 오가면서 런던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뉴욕에서 판매하기도 하지요. 1989년 LA에 '유니온 뉴욕시티(Union NYC)'라는 편집샵을 차리고 스텝을 맡게 됩니다. 이곳은 '스트릿 웨어'라고 불리는 컨셉으로 운영되는  샵이죠. 제임스는 유니온을 계기로 숀 스투시(Shaw Stussy)와 함께 1991년 프린스 스트리트에 스투시 매장을 오픈하게 됩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회의감을 느끼고 나오게 됩니다.  1994년 스투시를 나온 제임스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뉴욕 맨해튼 라파예트 거리에 슈프림 스케이트 샵을  오픈한 겁니다.  당시 많은 스케이트 샵은 문을 닫은 상태였고 , 스케이트 보더들의 수는 많았지만 제대로 된 스케이트 샵은 없었습니다. 있다 해도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였죠.

 

 

 

슈프림 매장 한 가운데 설치된 볼(bowl)/ 헤럴드 경제

 

 

 

스케이트 보더들은 넘어지고 옷이 찢겨도 다시 보드를 타고, 전문 의상 보다도 폴로나 구찌 같은 멋진 옷을 더 좋아하며 자신을 뽐낼 줄 아는 멋쟁이 들이었습니다 . 제임스는 이런 자유분방하고 멋을 아는 보더들에게 매료됩니다.  그는 제대로 된 스케이트 샵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되고 이 샵이 지금의 슈프림(Supreme)이 됩니다.

 

 

 

제임스는 매장을 기존의 스케이트 샵과 다르게 화이트 톤으로 꾸미고  심플하고 깔끔한 컨셉의 샵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매장 내에 볼을 만들어 스케이트 보더들이 쇼핑을 즐기면서 동시에 보드까지 즐길 수 있게 하고요. 제임스의 섬세한 배려에  보더들도 감동했을 것 같습니다. 현재 슈프림(Supreme)은 스케이트 보더들의 문화를 대변하는 하나의 매개체를 넘어, 스트릿 브랜드의 왕이라고 불릴 만큼 전 세계인의 열광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ZxRq7-5lS8

 

 

 

슈프림(Supreme)의 성공비결이 궁금해 집니다. 

 

 

모든 비즈니스는 고객에게 답이 있다고 하지요. 잘 나가는 브랜드는 고객과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하고, 고객과 상호작용하며 친해지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합니다. 그리고 고객의 데이터를 활용하여 고객이 선호하는 제품을 기획하고 매장을 꾸미고 마케팅을 진행하지요. 제임스 제비아(Jame Jebbia)는 이 모든 것을 탁월하게 해냅니다. 스케이트 보더라는 본인들의 타겟 고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죠. 그들과 같이 어울리며, 그들의 목소리를 가까운 곳에서 들으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문제 해결을 하는 데 올인합니다.

 

 

 

당시에 품질이 좋고 멋있는 스트릿 브랜드가 없었습니다. 그는 명품 브랜드에서 만들법한 최상의 원단을 고집합니다. 뉴욕의 스케이트 보더들이 만족하고 뽐낼 만한 디자인 퀄리티에 집중하고요. 매장 인테리어는 제품자체가 멋있게 보이도록 천장이  높은 매장을 선택합니다. 디스플레이의 디테일을 생각하는 것은 기본이고요. 매장을 "놀이터"처럼 꾸밈니다.  스케이터 보더들이 가볍게 와서 놀다가 제품을 구매하고 갈 수 있도록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들어 올 수 있게 합니다. 매장 안에 보드 데크를 만들고, 트릭(Trick:스케이트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설계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 안에서 그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슈프림이 스케이트 보더, 스트릿 문화를 대변하기 위한 멋있고 쿨한 브랜드로 인식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죠. 이러한 노력이 많은 스케이트 보더들의 사랑을 받게 된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수치화가 가능한 혜택으로 가장 직관적인 고객 가치 제안이 할인제도 입니다. 수프림은 할인 제도를 운영했지만, 특별한 정량화 전략도 사용합니다. 명품 브랜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리미티드(한정화) 전략이죠. 슈프림이 시작하고 현재까지 고집하고 있는 최고의 품질이라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소량 생산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기가 있는 제품이라도 대량 생산보다는 품질을 생각하여 400장이면 400장, 한정된 수량 생산을 고집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xO5eba7dIc

 

 

 

슈프림의 남다른 정책은 매장 수에도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운영 중인 매장 수는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6개 국가에 12개 만을 운영하고 있습니다.이것이 슈프림만의 정량화 전략입니다. 한정된 생산 수량과 매장 수로 효율적으로 운영합니다. 나머지는 제품의 품질과 디테일을 높이는데 집중하고요. 이러한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고객들에게 유니크함을 더해줍니다.

 

 

 

제임스 제비어는 고정관념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트렌드나 일반 대중의 의견을 따라가지 않고, 패션 업계 일반적인 판매 방식도 따르지 않습니다. 이른바 패션 업계 반항아인 셈이죠.  기존 패션 업계와 다른 판매 방식의 차별화를 둡니다. 슈프림은 매번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는 다른 브랜드와 다르게 일관성이 있는 디자인을 내놓았습니다.

 

 

 

다양한 프린트의 슈프림 스티커/ 나무위키

 

 

슈프림 박스 로고는 아티스트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프로파간다 아트(Propa-ganda art)와 선전 포스터를 예술로 승화한 그녀의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박스 로고는 스티커로 만들어져 뉴욕의 길거리 곳곳에 붙여지기도 합니다.

 

 

 

벽돌, 오레오, 의자, 지퍼락, 자물쇠, 망원경, 쇠 파이프와 같이 어울리지않을 법한 곳과 말도 안 되는 콜라보를 진행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특정 요일, 시간대에 신제품을 던지는 '드롭(Drop)'이라는 신선한 판매 방식으로 제품을 판매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기존 패션 업계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매장 앞에 슈프림의 제품을 사기 위해 문전성시를 이루는 모습들이 언론 매체에 보이기도 합니다. 고정관념을 깨고 슈프림이 시도한 차별화 전략이 스트릿 문화의 감성과 맞물려 스파크를 만들어 낸 거죠.

 

 

 

루이비통&슈프림/나무위키

 

 

 

 

영국의 탑모델 케이트 모스(Kate moss)가 속옷을 입고 등장한 캘빈클라인(Calvin Klein)의 광고에  슈프림의 로고를 붙여 판매를 했었죠. 캘빈 클라인은 슈프림을 상대로 고소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루이비통(Louis Vuitton)의 모노그램 패턴에 영감을 받아 스케이트보드를 제작하고 판매를 하다가  루이비통에게 판매 중단 요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캘빈클라인, 루이비통과의 컬래버레이션 제품을 실제로 발매하게 됩니다.  이러한 논란덕에 당시 슈프림은 뉴욕의 사회 반항적인 문화에 각인이 됩니다. 

 

 

 

물론 고소를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메리드 투 더 몹(Married to the Mob)이라는 브랜드에서 '슈프림 비치(Supreme Bitch)'로고 티셔츠를 제작하여 판매를 하자 슈프림 측이 고소를 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제품이 생산된 지 10년이 지난 후에 말이죠. 한 번은 뉴욕 포스트에 슈프림 티셔츠를 입고 있는 금융 사기 범의 체포 장면을 그대로 티셔츠에  프린팅 하여 판매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회 반항적인 슈프림의 콘셉트는 90년대 당시 상영되었던 10대들의 마약, 에이즈 문제들을 담은 영화 '키즈(KIDS)'와 겹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은 슈프림을 '키즈'의 현실 판이라고 지적도 받았다고 해요.

 

 

 

지오 에스테베즈/ 헤럴드 경제

 

 

 

제임스는 직원을 채용하는 방식도 남달랐습니다. 그는 매장의 직원들도 슈프림의  정신과 스타일을 담아낼 수 있는 개성이 강한 사람이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리의 악동들을 직원으로 채용했고 이들이 아티스트나 뮤지션의 꿈을 이루 수 있게 적극적인 지원을 해줬다고 합니다. 그 예로 슈프림의 첫 번째 점원이었던 스케이트 보더 지오 에스테베즈(Gio Estevez)는 현재 유명한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되었습니다.

 

 

 

슈프림의 성장 배경에는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끊임없는 코라보레이션도 있습니다. 1996년 브랜드 '반스(Vans)'와 함께 콜라보레이션 운동화를 선보였습니다. 반스는 슈프림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시도한 거지요. 이밖에도 슈프림은 나이키(NIKE),노스 페이스(The North Face), 매거진 플레이 보이(Playboy),꼼데 가르송(COMMe des GARCONS), 챔피온(Champion)등과도 함께 했었죠.

 

 

 

 

쓸데없이 브랜드를 확장하고 변형하지 않겠다.
슈프림이 생존하려면 더 '쿨'해질 필요가 있다.
-제임스 제비어-

 

 

 

슈프림의 새 콜렉션이 출시될 때마다 벌어지는 길게 늘어선 줄은 이제 하나의 문화가 되습니다.  마치 새 아이폰 출시 때 풍경과 비슷해 애플과 비교하는 이들도 있지요. 다만 이들 마니아들은 매장 앞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서로 어울려 춤을 추는 등 신상을 좀 더 흥겹게 맞이하는 점이 다른 점 같습니다. 

 

 

창립자의 말처럼 끝까지 '마이너'이길 추구하는 슈프림만의 문화는  제품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고 소장가치를 불러일으킨 것뿐만 아니라 유니크함을 더해 단순히 스트릿 문화를 대변하는 브랜드가 아닌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코카 스파니엘 (Cocker Spaniel) 이름만 들으면 왠지 스페인이 원산지일 것 같다. 하지만 코커 스파니엘 견종 자체의 원산지는 영국이다.

키:36-41cm

무게: 9-16kg

 

현재 잉글리시 코커 스파니엘, 아메리카 코커 스파니엘 2종류로 나뉜다.  잉글리시 코커 스파니엘 이 아머리카로 건너갔고, 말보로계 스파니엘이 섞여 잉글리시 코커 스파니엘과는 다른, 아메리칸 코코 스파니엘이 되었다.  아무래도 혈통이다 보니 성격은 비슷하지만, 골격이나 생김새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잉글리쉬 코커 스파니엘(Engish Cocker Spaniel)/ 나무위키

 

 

 

 

잉글리쉬 코코 스패니얼은 사냥견이었다. 사냥하는 주인이 총으로 새를 쏘면 물어오는 역할을 했다. 이름에서처럼  코코 스패니얼(cocker spaniel)은 원래 우드콕(woodcock=멧도요새)을 주로 사냥하던 개였다. 우드콕의 끝자인 cock을 따서 cocker spaniel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영국에서 스파니엘의 조상견에 대한 오래된 기록이 있는데 웰즈왕이었던 하우엘더의 법전에

'왕의 스파니엘은 1파운드의 가치가 있다.'

 

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이 최초라고 합니다. 오래 전에 사냥견으로만 적합하다고 여겨졌었기 때문에 몸이 약하거나 사냥에 뛰어나지 않을 경우 어렸을 때  그냥 죽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반려견으로 받아지기 시작한 거고요. 

 

 

아메리칸 코카 스패니얼(Anerican cocker Spaniel)/나무위키

 

 

아메리칸 코카 스패니얼은 애초에 사냥을 목적으로 미국에 건너가지 않았기 때문에 몸집이 상대적으로 더 작은 편입니다. 사냥에는 잉글리쉬 코카 스패니얼 못지않게 능통하다고 해요. 그러고 보면 피는 못 속이나 봅니다. 잉글리시 코커스패니얼이 몸집이 더 큽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주둥이 부분이고요. 잉글리시 코카 스패니얼이 주둥이가 긴 편입니다. 아메리칸 코카 스패니얼은 주둥이가 짧아요. 두 견종 다 윤기가 흐르고  약간 웨이브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색깔은 적갈색, 아이보리색, 까만색, 밤색, 까만색에 갈색 얼룩이 있는 블랙탄, 짙은 갈색에 연한 갈색 얼룩이 있는 초코탄 등 매우 다양합니다. 원래 사냥견으로 쓰일 때에는 숲에서 눈에 잘 띄는 크림색이 가장 선호되었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iGsOGZRYmds

 

 

 

코가 스파니엘은  정확히는 조렵견 중에서도 플러싱 도그(Flushing dog)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새 사냥을 할 때 잡초가 무성한 호수나 늪지, 풀숲에 옹기종기 숨어있는 새들을 날려 엽총으로 쏘기 쉽게 만드는 목적으로 말이죠.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난동을 부려야 새가 놀라서 날아오르죠.  이런 성격과 특성을 갖고 있는 개다 보니 실내에서 키울 때 활달함이 지나쳐 재앙급이 될 때가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27YncVI8o

 

 

3년 정도 잘 버티면 얌전해진다고 하는데, 개가 얌전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덤덤해진 거라는 얘기가 있다. 그러므로 코커 스파니엘은 지구력이 조금 떨어져서 주인이 자주 놀아주거나, 산책을 자주 시키면 지쳐서 잠들기 때문에 말썽이 조금 덜해진다. 덕분에 활발한 어린이들과 넓은 야외에서 놀게 할 수 있는 환경이면 좋은 개다. 애초에 좁고 제한된 한국형 아파트에서 수렵용 사냥개나 양치기 개를 기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욕심 아닐까 싶다. 개체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면서 활발한 견종들이 주인의 관심과 활동이 부족하면 외로움과 지루함을 못참고 말썽꾸러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너무 오래 혼자두지 말고 애정 표현도 자주 해주길 권한다. 낯선 사람이 오면 짖어서 알리긴 하지만 공격적으로 대하지는 않기 때문에 경비견으로 적합한 견종은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좋아하지만 코커 스파니엘은 주로 가족 중에 유독 한 사람을 잘 따르는 성향을 보인다고 한다. 또 , 암컷보다 수컷이 더 사교적이고 느긋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간혹 사람을 좋아하는데 같은 종족인 개한테는 유독 공격성을 표출하는 견종들도 있지만 코카 스패니얼은 사람뿐만 아니라 개나 고양이 등의 다른 동물들과도  굉장히 잘 어울린다. 그래도 어렸을 때 많은 사람과 강아지 고양이 친구들을 자주 만나게 해서 사회성을 길러주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알려진 코카스파니엘 수명은 아메리칸은 11-12살, 잉글리쉬 견종은 약 12-13살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인 중형견 종류 평균보다는 조금 짧은 편이긴 하다. 하지만 평균 수명은 어디까지나 개체의 건강과 유전요소, 그리고 생활환경 식습관 등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 

 

 

 

주의 해야 할 질병으로  늘어진 귀를 가지고 있어서 외이염 등 주의하며 귀청소를 자주 해줘야 한다. 그 밖에 슬개골탈구와 구관절이형성증 등의 관절질환, 그리고 심장질환과 함께  백내장 등의 안과질환도 주의가 필요하다. 피부는 약한 편에 속하기 때문에 피부에 좋은 영양제, 사료 그리고 털 관리도 잘 해주어야 하낟. 체질적으로 살이 찌기 쉬운 체질이라고 한다. 체중관리도 필수다.  매우 드물게 코커스파니엘의 경우 유전질환 중에 분노증후군이라는 질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런 전조증상 없이 갑자기 흥분하여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예측이 불가능한 증후군으로 부모견을 반드시 확인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견주되실 분들이 입양 전 해당되는 강아지의 품종 성향과 체력, 털 빠짐 및 특징을 모두 알고서 충분히 고민 후 입양을 결정하는 것을 권한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