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최근 언론은 '멘탈플로스'(Mental Floss)를 인용해 개가 갸우뚱거리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 인간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개들 측면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은 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거나 공감을 시도한다는 의미지요. 인간 역시 다른 이의 이야기 등을 들을 때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개들도 우리 인간의 감정을 인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인간에게 자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개들은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요.

또 다른 재미있는 이유로는 청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소리의 근원을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개들이 소리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귀의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공감능력 뛰어난 오늘의 주인공 '보도콜리'입니다.

 

 

 

보더콜리/나무위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견종 1위입니다. 강아지 지능순위 아이큐에 대해 의구심을 보이는 분들도 많지만, 대부분 복종훈련이 잘 되는 견종, 학습능력 , 사람말을 잘 듣는지 여부(사람과의 교감, 소통능력)등을 토대로 보통 지능순위를 매긴다고 합니다. 보더콜리는 7살 아이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지능과 학습력을 지녔다는 얘기지요. 또 사람의 명령을 빠르게 알아듣고 이해하는 개라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영국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즈,아일랜드/123RF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경(Border)지방에서 양몰이를 했던 목양견 출신입니다. 그래서 보더콜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요. '콜리'라는 단어는 켈트어로 '유용하다'라는 뜻이라고 해요. 비어드 콜리나 러프 콜리처럼 콜리들은 모두 영국에서 가축, 특히 양을 모는 개였습니다. 휘슬 소리와 명령어에 맞춰 가끔 오리몰이를 하기도 합니다. 

 

 

보더콜리의 조상으로 사람들이 추정하는 견종은 Hemp이라는 양몰이견입니다. 1873년 영국에서 양몰이 시범이  열렸고 Hemp라는 강아지가 능숙하게 양들을 몰았다고 합니다. Hemp의 유전을 바탕으로 브리딩된 강아지가 지금의 보더콜리가 된 것으로 사람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른 강아지들처럼 황제 또는 귀족들에게 사랑받아온 견종은 아닙니다. 주인과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터에서 호흡을 맞춰왔던 개입니다. 다른 견종과 견주어 기품이 있는 견종은 아니지만, 주인과의 호흡은 다른 견종과 견주어 최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더콜리는

무게가 18-23kg

체고가 48-53cm

 

대형견에 가까운 중형견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hMGp1lx82k

 

 

 

보더콜리의 털 색상은 다양하며 바이 칼라(2가지), 트라이 칼라(3가지), 세이블 등이 보더콜리의 일반적인 털 색상입니다. 

블랙:검은색

블루: 청회색

골드(레몬): 노란빛의 밝은 갈색

라일락: 더 밝은 청회색

페드: 짙은 깊은 붉은 빛

 

위의 색으로 색이 어떻게 섞였느냐에 따라 명칭이 조금 다르게 불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0v98iq-mRs

 

 

 

체이서라는 보더콜리는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강아지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이 강아지는 1022개의 단어를 알아들어요. 미국 워포드 대학교 심리학과 명예교수 고 존 필리 교수의 반려견 체이서는 필리 교수의 특별한 교수법으로 유명하답니다. 3년간 하루 4-5시간씩 보더콜리 체이서에게 단어를 가르치면서 알아듣도록 교육했다고 해요. 물건을 보여주고 40번 이상 물건 이름을 말한 후 그 물건을 숨긴 다음 체이서에게 찾아오도록 하면서 물건이름을 익히도록 훈련했고요. 하루 4시간 이상씩 보더콜리와 소통하고 교감하면서 단어를 가르쳤다니 대단하죠. 체이서는 명사 동사의 차이도 구별할 수 있으며 모르는 장난감 사이에 이름을 알고 있는 장난감을 섞어 놓아도 해당 장난감의 이름을 말하며 지시하면 그것을 쏙 가져오는 똑똑함을 보이는 강아지라고 합니다.

 

 

 

 

대체적으로 명량한 표정에 균형 잡힌 몸을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12가지 다양한 모색을 가지고 있지만 블랙 앤 화이트의 보더콜리들이 가장 많습니다. 중형견에 속하는 견종으로 웬만한 산책이나 운동으로는 소모하기 힘든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체력이 좋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일중독자로도 불립니다. 양치는 일도 잘 하지만 집안에서도 사람이 이런저런 일들을 시키면 에너지가 넘치게 잘 수행해 낸다고 합니다.

 

 

체력이 좋고 훈련도 잘 되기 때문에 도그스포츠에서 대부분 상위 랭킹을 차지하는 보더콜리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vCQnka-geQ

 

 

 

보더콜리의 대표적인 성격은 쾌활하고 사교적입니다. 잡일이 주어지거나 이들의 힘을 분출시킬 때 가장 행복해합니다. 활력적이로 민첩하며 의욕적이지요. 과거에 양몰이에 특화된 견종이었고 에너지가 비글보다 넘친다고 할 정도로 활동적입니다. 끈기까지 있는 견종이라 쉽게 지치지도 않아서 보더콜리를 키우신다면 하루에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할 수 있는 스포츠를 해주어야 합니다. 단순 산책으로 에너지를 소비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다른 동물을 자신의 뜻대로 몰아가는 것도 좋아합니다. 

 

 

 

보더 콜리는 매우 똑똑하고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리한 성격의 특징은 무조건 좋지만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가족과 친구들에게 애정이 깊고 소유욕이 강하지만 낯선 사람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굴거나 적당히 경계하는 총명함도 볼 수 있습니다. 친구에게 다정하고 낯선 이들에게는 상당히 냉담해서 훌륭한 경비견이 될 수 있다는 얘기지요. 산책 도중 보더콜리를 보면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몰이견답게 다른 동물을 째려보고 쫓아가는 습성이 있어 보더콜리와 함께 조그만 동물을 키우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 보더콜리의 훈련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똑똑하고 영리한 지능을 이용해서 문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_GAcGbmHjI

 

 

 

 

 

 

입양 시 꼭 알아두세요. 일반적으로 소형견보다 덩치가 클수록 활동량은 크게 늘어납니다. 특히 보더콜리의 경우 활동량이 월등히 뛰어난 편입니다. 이 때문에 보호자분께서 최소 1-2시간 이상은 에너지를 소모시켜주어야 합니다. 단순히 산책 시간뿐 아니라 액티비티 한 활동들을 함께하며 지루하지 않도록 보살펴 주어야 집안에서 사고를 치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움직이는 것을 쫓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산책 도중 차를 쫓아가지 않도록 유의하고 보더콜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야외 운동으로는 원반놀이가 대표적이며 원반에 대한 집착이 무서울 정도로 강하다고 합니다. 

 

 

 

잦은 산책과 운동, 그리고 털 빠짐 때문에 보더콜리는 아파트에서 키우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지능이 높아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진다고 해요.  도시보다는 외곽지역이나 마당이 있는 시골에서 키우는 것이 적합합니다. 보더 콜리는 지능이 높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교육하면 빠르게 습득하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안 좋은 습관도 금방 습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보호자분이 교육적으로 철저하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쉽게 안 좋은 습관이 형성되니 다양한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키우셔야 합니다. 또 서열정리가 잘 안 될 경우 주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보더콜리 주인이 된다면, 가족의 리더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진 출처:모나미몰-라이프 스타일 편집샵

 

 

보더콜리는 털 빠짐이 상당히 많은 편에 속합니다. 숱이 상당하면서 속털이 깊어서 한번 엉키면 곤란해집니다. 털이 엉키지 않도록 빗질을 주기적으로 자주 해 주세요. 단색종의 털이 아니고 강아지 2마리를 키우는 느낌처럼 흰색털, 검은색털 등 다양하게 빠진다고 합니다. 

 

 

 

보더콜리는 피부가 약하기 때문에 피부병에 잘 걸린다고 합니다. 털의 빠짐이 심할 경우 피부병에 걸렸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목욕 후 드라이를 잘해줘야 하며 습한 환경은 좋지 않습니다. 

 

 

보더콜리의 경우 평균 수명은 10-14년이며 제로이드 리포 수흐 친 증후군이라는 유전병이 가장 무섭다고 합니다. 이는 진행성 운동장애와 지적장애, 시력장애를 일으키는 치명적인 병이며 1세 이후에 발병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고, 이 질환의 경우 치료법이 없다고 합니다.

 

 

콜로아이 증후군은 안과질환으로 눈에 출혈이 발생하거나 망막 병리 현상이 나타나 심각할 경우에는 실명에 이르게 됩니다. 평소 보더콜리의 행동을 관찰하시어,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넘어지는 일이 자주 발생하면 가까운 동물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유전성 난청은 태어날 때부터 청각이 없이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생후 한 달 이내에 알 수 있으며 소리에 반응을 잘하는지 꼼꼼히 확인해야 합니다.

 

 

보더콜리는 견종의  혈통을 중요시했던 문화 때문에 부분 혈통을 유지하고자 인위적으로 근친교배를 통해 개량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생긴 유전적인 질환으로 대형견들에게 아주 흔하게 나타나고 대표적인 유전적 질환입니다. 엉덩이 쪽에 위치한 대퇴고관절이 기형, 변형이 일어나게 되며 심한 통증을 유발하고 관절의 탈구, 뒷다리 파행 등 각종 증상이 나타납니다.

 

 

 

보더콜리는 똑똑하고 총명해서 키우기 쉽다는 것만 보고 입양했다가 감당 안 되는 에너지와 어마어마한 털 빠짐 탓에 파양률이 매우 높은 견종 중 하나입니다. 만약 보더콜리를 키우고 싶다면 유기견 보호시설에서 보호하고 있는 아이들을 입양하는 것이 어떨까요? 보더콜리가 뛰는 만큼 견주 역시 함께 뛸 각오가 되신 분들만 키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서로에게 민폐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반응형
반응형

워쇼스키 감독의 영화 '매트릭스 3'<겨울비(Golconde)>(1953)

마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피레네의 성(Le chateau des Pyreness)>(1959)

<올마이어의 성(Almayer's Folly>(1951)

권오광 감독의 <돌연변이>

CBS 방송사 로고

비틀즈의 사과 앨범

영화 <The Exorcist>

김영하 작가의 장편소설 <빛의 제국>

 

 

등등 , 이 정도 힌트면 아실 까요? 맞습니다. 

벨기에 레신 출신의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입니다. 그의 얼굴은 자세히 모르지만 중절모를 쓴 익명의 신사의 모습으로 한 번쯤 접하셨을 겁니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장르 불문하고 재미난 영감과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지요.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1898-1967)의 아버지는 양복점을 경영하였고, 결혼 전에 모자가게를 경영하셨 던 어머니 사이에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14살 사춘기 시절 (1912년), 오랜 우울증에 시달리 던 어머니는 샤틀레르의 샹보르에서 투신 자살한 채 발견됩니다. 어머니의 시신이 강으로 인양되었을 때 셔츠로 얼굴이 덮혀 있었다고 해요. 조류 때문이지 아니면 당신 자신의 선택이 옳지 못함을 알고 계셨던 지 그의 그림에 천으로 덮혀진 인물들이 한 동안 등장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영향은 20년대 후반의 몇몇 그림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Georgette at the Piano>,1923/Total History

 

 

화가로서의 출발은 1916년 들어간 브뤼셀의 미술 학교에서 시작됩니다. 1921년부터 한때 세계적으로 유명하 던 벨기에의 벽지회사 UPL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게 됩니다.  1920년 중반까지 순수미술에 빠져 미래주의와 입체주의 성향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 작품은 아내인 조제트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입체주의 스타일로 그린 초기 작품입니다. 아내인 조제트를 10대 마을 축제 때 만나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6년간 못 만났다 우연히 재회하며 1922년 결혼을 하고 마그리트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했다고 합니다. 물론 마그리트가 유명해지기 전까지 아내인 조제트가 미술용품점에서  일하며 거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요. 그의 뮤즈이자 후원자 조력자를 든든하게 둔 덕분에 그의 작품 속에 조화로운 유대감이 묻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시대의 다른 여러 화가들처럼 처음에는 인상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화가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점차 미래파 화가들의 작품, 특히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으면서 그림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사랑의 노래>라는 작품으로  어둡고 탁한 건축물에 갑자기 나타난 석고상과 고무장갑 그리고 초록색 공까지 이런 이상한 조합과 심오한 분위기의 작품을 보고 마그리트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뜩입니다. 바로 "데페이즈망(depaysemetn)"입니다. 프랑스어로 '추방'을 의미합니다. 사물을 익숙한 장소에서 낯선 장소로 '추방'시켜 사물의 원래 쓰임새를 무너뜨린 다는 말이죠. 전혀 관련 없는 것을 엉뚱하게 조합하거나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둠으로써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 방법입니다. 

 

 

마그리트와 조제트는 3년 동안 파리 근교의 페로 쉬르 마른느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파리에 화랑을 연 괴망스의 중재로 브르통과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접촉하게 됩니다.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미로(Joan Miro), 달리(Salvador Dali) 등이지요. 그는 초현실주의 모든 활동에 가담하였고 "초현실주의 혁명"의 출간에도 힘썼습니다.  이 잡지의 마지막 호에 자신의 회화적 이상을 확실하게 선언한 '단어와 이미지'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요. 비록 뜨겁지도 소원하지도 않은 관계였지만 마그리트는 죽을 때까지 브르통과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그리트는 자신의 회화관에 충실하여 그의 회화적 독자성을 지켜갑니다.

 

 

 

파리의 초 현실주의자들의 대열에 참여한 지 2년 후인 1929년 12월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자들의 기관지로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가능케 해 주었던 "초 현실주의 혁명"에 초현실주의에 대한 그의 주요 공헌이라 할 만한 글을 발표합니다. 이 잡지에 발표한 "단어와 이미지"라는 글에서는 18개의 작은 컷으로 이루어진 경구적이 짧은 내용을 언급한 네모난 구획의 작품을 다루었고요. 여기에서 "대상은 그 이름이나 이미지가 가지는 똑같은 기능을 결코 완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The Treason of image>,1929/wikipedia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품 <이미지의 배반,1929> 입니다.

"분명 그림에 있는 물체는 파이프임에도 불구하고 르네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궁금합니다. 아니 왜? 하면서 말이죠. 르네는 "이것이 진짜 파이프라면 당장 여기에 불을 붙이고 담배를 피워보아라."라고 말합니다. 그의 발언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고정관념을 깰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지요. 그는 미술의 본질과 사물의 본질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 작품은 파이프의 이미지를 그린 것뿐이지 아무도 이 그림을 가지고 담배를 피울 수 없다 라면서 말이죠. 현실과 묘사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이미지는 현실이 아니고 환상일 뿐 조작된 것이라는 얘길 합니다.

 

 

이런 강력한 선언은 르네 마그리트의 모든 작품의 특성에 대하여 정확한 개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확실하게 믿고 있는 대상들과 그것들의 이름과 의미와 기능에 있어서, 그 관계는 실제로 우리가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미약하다는 인식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전쟁이후 기존에 것에 반발하여 '파괴'에 포커스를 두었던 다다이즘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들의 예술 파괴운동을 수정, 발전시키고 비합리적인 잠재의식과 꿈의 세계를 탐구하여 표현의 혁신을 꾀하는 초현실주의 예술 운동이 나타납니다.  초현실주의 예술의 중심은 무엇보다 파리 문필가인 브르통, 아라공, 에드와르, 아르쿠르에 의하여 구성되었고 그 중심적 내용은 꿈과 욕망의 세계를 해방시킴으로써 예술과 삶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자동기술법(aitp, atos,)"을 채택하게 되고요. 가장 힘든 것은 자동기술법적 과정들이 조형 예술가들에게는 가능성의 한계로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화가들은 그들의 회화작업의 중요한 원천으로서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세계를 충실히 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다른 초현실주의 자들과는 달리 꿈과 욕망이 그의 회화의 기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오브제를   엉뚱한 공간에 추방시키면서 관객들에게 낯섦을 주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아마 이 때문에 그와 브르통 사이의 관계는 항상 미약했으며 거리감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도 완전한 결별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요. 또한 이 지점이 다른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그를 구별 짓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세대를 거듭해 인용되고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The Son of Man>,1964/wikipedia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그리트는 마치 광고언어처럼 인접성과 유사성에 의해 대상들 사이에 세워진 연상작용에서 모든 가능한 조각을 뽑아내어 이 개념적 조작을 점점 더 세련되고 복잡하게 만들어 나갑니다. 근접성에 의하거나 또는 대립에 의한 사물들이 가지는 관계성을 지속하면서, 사과나 태양과 같은 둥근 모양으로 사람의 머리를 대신하게 하거나, 나뭇가지와 나뭇잎의 잎맥 위에 새들을 앉힌다든지 하여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엉뚱한 결합을 통해 다른 사물로  대상을 변형시킵니다. 

 

 

 

마그리트는 중절모와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의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똑같은 옷차림에 개성은 1도 없어 보이죠. 경직되어 있고요. 사과도 놓아 보고 ,비둘기로 가려보고, 빵빵하게 부풀려도 봅니다. 궁금증도 덩달아 커져갑니다. 무얼 의도한 걸까 싶어서 말이죠. 마그리트는  어울리지 않은 사물이나 자연물을 합쳐 새롭게 하거나 크기나 위치의 변화를 통해 낯선 느낌을 시도합니다. 초현실주의 작가들만이 할 수 있는 엉뚱한 시도들이죠. 덕분에 관람객들은 고개를 갸웃 둥 하면서도 작가의 기발한 생각에 무릎을 탁 치기도 합니다. 친숙한 대상을 생소한 장소에 놓으면서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주죠. 상식과 고정관념이 여지없이 깨고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되는  거죠. 작가들이 주는 선물인 셈이죠.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튀고 싶어 안달란 예술가들과 달리 평범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중절모를 쓴 익명성에 자신을 투영한 거죠. 우리 역시 그 익명성을 지닌 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자신을 작품에 기꺼이 투영할 수 있는거고요. 

 

 

 

마그리트의  이미지는 마치 은유와 같은 기능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은유는 시적인 본성을 지니지요. 이미지들은 가끔 불안정하지만 다른 초현실주의 자의 이미지처럼 무섭게 소름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마그리트의 회화는 어떠한 비극적 신념도 현실과 신비 사이의 경계 없는 연속에 의해 와해시키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v3C5oBeGM

 

 

 

 

 

 

 

1930년에는 다시 부뤼셀에 정착하였으나 파리의 그룹과는 계속적으로 접촉하여 1934년 "초현실주의는 무엇인가"라는 브르통의 책 표지에 '폭력'이라는 작품을 실었습니다. 또 1937년 '미나 타우로' 10호의 타이틀 표지에 작품을 실고요. 또한 여러 다른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에도 참여하여 뉴욕에서 그의 첫 전시를 개최합니다.

 

 

 

<The Voice of Space>,1931/wikipedia

 

 

 

마그리트의 회화는 친숙한 대상들과 재현된 대상들 사이에 비정상적인 관계를 만듭니다. 객관적인 방법에 의한 세부 묘사에 따라 재현되고요. 화면을 꽉 채운 커다란 종이 현실에 가능할까요? 마치 UFO가 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저 커다란 종을 소리 나게 하려면 바람도 힘이 세야 할 것 같고요. 평온한 들판에 묵직한 쇳소리가 깊은  정적을 깰지도 모르겠습니다. 공기 중에 떠 있는 거대한 종들은 20년대 말기의 마그리트 작품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그는 사물의 음향적 속성을 이용하여 시적으로 바람의 속삭임을 표현한 거라 말합니다. 

 

 

 

 

 

<여름>, 1939/Pinterest

 

 

실제로  창문의 개념으로서의 회화론은 르세상스 시대부터 서구회화의 기원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작가 마그리트의 창문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많은 그림들에서 보이는 시각적 내용의 주제는 중재역할을 맡은 문 또는 창문입니다. 다른 대상  즉 전환적 요소를 통하여 나타나는 실내와 실외 사이의 관계를 신비스럽게 합니다.

 

 

 

이런 기초 위에서 마그리트는 전이와 변형의 효과로서 그림을 제작합니다. 열린 문을 통하여 슬그머니 구름이 방 안으로 스며들기도 하며, 화병이 창문 안에서 풍경으로 변화되고, 창문 앞에 있는 그림이 창문밖에 보이는 정경의 부분으로 그림 안에 재현되어 대치되기도 합니다. 거울 같은 은유와 무한 대까지 연장될 수 있는 회화와 시각의 본성에 대한 끝을 알 수 없는 사색을 다루고 있고요. 그려진 그림 속 존재하는 대상들은 "동시에 방 안에서, 그림의 안과 밖에서, 실제의 풍경 안에서 그려진 풍경으로서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똑똑 노크하고 들어온 구름 덕분에 빼꼼히 열린 문을 통해 바다를 보고 모래사장을 봅니다. 그저 그림일 뿐인 데 문틈사이로 삐집고 들어 온 빛처럼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1943년과 1948년에 그의 작품에 있어서 기존 작품과는 단절을 보이는 두 시기를 맞게  됩니다. 그 하나는 르누아르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르누아르의 마지막 시기에 그려진 여성 누드의 양식에 가까운 회화적이고 붓자국이 잘 드러나는 양식의 몇 작품을 완성하게 됩니다. 전쟁으로 우울한 시기와 대비되는 밝고 부드러운 색이 돋보이는 자신의 이 스타일을 마그리트는 '햇빛아래 초현실주의'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원색의 따뜻한 붓터치가 일품입니다.

 

 

 

<보물섬>,1942/출처:생글생글- 한국경제

 

 

 

가장 힘들게 처리되는 전이의 방법들 중 하나는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혼성의 인간과 대상을 실험하고 변이의 현상을 다루고 있는 점입니다 . <붉은 모델> 실물과 똑같은 발가락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개인적으로, 오래전 장례식장에 인사하러 갔다가 발가락 양말 신은 중녀 남자분의 뒷모습에 절 하다 빵 터질 뻔했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사물은 기능적으로 관련된 다른 사물-사람의 발과 사람의 형태를 가진 옷과 신발들과 혼동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는 형태적 유사성에 의해 혼동을 일으키는 전이형태로  담배로 변화하는 물고기 그림이 있지요.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물고기로 대체되거나 물고기의 하반신이 담배로 대체는 등 그의 상상력에 그저 혀를 내두를 뿐입니다.  이러한 주제는 마그리트의 모든 작품에 뿌리 깊게 존재합니다.

 

 

 

 

 

 

 

 

<위대한 가족>,1947/Toute La Culture

 

 

 

 

"넓은 하늘 안에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고 있는 새"라고 시인 앙리 미쇼는 이 그림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사이의 상호 경계선을 표현한 좋은 예들 중 하나입니다. 

 

창공을 나는 새인가? 새 모양의 창공인가? 헷갈립니다. 주변은 어두워 오는 회색빛인데 새 형상 안의 구름은 환한 대낮 같습니다. 다시 한번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하늘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통 새는 하늘을 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이 둘은 엄밀히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습니다. 이 작품에서 새는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관람객은 으레 새를 떠올리지요.  이처럼 부재하는 것(새)이 실재한다(새 모양의 하늘)는 생각은 우리의 습관과도 같은 인식의 태도에서 연유합니다. 그의 이 작품을 통해 하나의 사물이 두 개의 사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인식 태도에 의문을 던지게게 합니다. 이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마그리트는 교묘하게도 아주 일상적인 사물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렇기에 관람자는 의심 없이 감각기관을 이용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참'이라고 믿게 됩니다.  하나의 사물에 잠재하는 또 다른 성질 즉 이중성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The Empire of Light>,1950/MoMA

 

 

 

 

 

이처럼 밤과 낮이
함께 공존하는 풍경으로부터
우리는 경이롭고
매혹적인 힘을 느낀다.
나는 이 힘을 시라고 부른다.
-르네 마그리트-

 

 

 

1948년부터 마그리트는 같은 주제의 변형으로 이루어진 10개 이상을 그림을 그렸는데 그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마감하게 됩니다. 모든 작품은 <빛의 제국>이라는 공통의 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작품에 보이는 것은 창문 안에서 발산되는 빛이나 실외에 있는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가로등이 발산하는 빛에 의해 조명되는 잎이 풍성한 나무와 그 사이에 있는 집과 밀집된 건물뿐입니다. 이상한 것은 하늘인데, 밝고 부드러운 구름으로 덮인 대낮의 푸르른 하늘이 그림의 화면을 덮고 있습니다. 전기불빛이 주의를 끌고 있는 밤의 풍경과 양립할 수 없는 푸른 대낮의 풍경은 감상자가 주의 깊게 살필 때어만 인지되지요. 현실에서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이질 적인 두 요소가 모순이란 생각도 듭니다. 마그리트의 작품들 중 초현실주의에 더 가까운 작품입니다. <빛의 제국>이란 이름으로 17점의 유화와 10개의 구아슈 작품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용할 때는
그 물건 속에서 상징적 의도를 찾지 않지만,
그림을 볼 때는
그 용도를 찾을 수 없고
회화를 접하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의미를 찾게 되다.
사람들은 편안해지기 위하여
의지할 만한 것을 원한다.
안전하고 매달릴만한 것을 원하고
그렇게 하여 공허함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다.
상징적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본질적인 시적 요소와 이미지의
신비함을 간과하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신비함을 
감지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떨쳐 버리고 싶어 할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라고 물음으로써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만약
신비함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다른 반응을 할 것이다.
다른 것을 묻게 될 것이다.

-수지 개블릭, <르네 마그리트>중에서-

 

 

 

 

<피레네 산맥에 있는 성>,1959/wikipedia

 

 

 

 

 

결코 우리가 찾을 수 없는 대상들을
나의 그림에 위치시키는 것

 

 

마그리트는 그의 그림에 가해진 때 이른 질책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합니다. 일상성 안에서 시적 효과를 해방시키기 위한 주요 메커니즘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절규하고 있는 친숙한 대상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상들의 일상적인 관계의 질서를 바꾸는 것이 필수적이다."라고요.  공중부양한 헬멧형태의 바위가 바다 위에 떠 있습니다. 그 위에 성채가 있고요. 불가능한 이 상황에 SF영화를 떠올리며 기분 좋은 상상을 해 봅니다. 딱딱한 바위와 유연한 파도,  정적인 성채와 동적인 파도소리, 무거움과 가벼움 등 대립 요소를 그림 안에 부각해 긴장감을 주는 듯도 보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 천연덕스런 마그리트의 상상력에 그저 웃습니다. 실현될 수 없는 백일몽을 뜻하는 프랑스식 관용어, '허공 위의 성곽'을 비틀어 쓴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돌덩이를 자주 등장시킨 1950년대를 마그리트의 '석기시대'라 하고요. 물리학자들이 이 그림 앞에 서면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해집니다. 

 

 

 

 

 

 

 

<야간보초병의 방>,1959/DailyArt magazine

 

 

 

 

마그리트에 의하면 그림의 중요한 기능은 인식의 도구로서, "일상적인 방식과 다른 방법"으로 보도록 강요함으로 인해 시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림을 구성하는 일상적인 대상들이 초현실적인 성질을 획득하는 것이 필요하고요. 이렇게 하기 위한 여러 과정들 중 하나는 , 일상과 초현실 사이의 갈등 속에 숨어 있는 초월적이고 시적인 힘을 더욱 활동적인 것으로 만드는 거지요. 사물 사이에서 충돌적인 연상작용을 만들어 보는 거죠.

 

 

이런 효과를 성취하기 위한 메커니즘은 위쪽에 있어야 할 사물의 위치를 아래쪽으로 위치시키거나 그 반대로 하여 변화시키는 것이죠. 그 대상을 포함하고 있는 공간과 대상 사이의 비례의 관계를 변화시키기도 하고요. 이러한 조작의 목적은 모든 것이 항상 고정되어 나타나는 곳에 교환할 수 있는 대체물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시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대상을 내포한 공간과 대상과의 비례의 교체가 가장 명확하게 표현된 작품들 중 한 예입니다. 이런 모순된 조작은 열린 공간의 실외의 사과와 주위 환경에서부터 고립되어 인위적인 방 안의 닫힌 공간 안에 있는 사과의 본성 사이의 대립으로 요약됩니다. 이 그림은 또한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던 그의 어머니가 그와 동생들을 작은 방에 가두었을 때 경험이라고도 하더군요. 공포에 떨고 작은 공간에 갇혀 있어 정신적 학대가 컸을 테지요. 그런 부분들이 그의 작품에 무의식적으로 표현되었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The heartstrings>,1960/Arthive

 

 

 

 

 

꿈이 깨어있는 순간들의 또 다른 형태라면,
깨어 있는 순간들도 꿈의 다른 형태이다.
-르네 마가리트-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이 당혹감을 느끼는 이유는 캔버스에 등장하는 사물이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캔버스에 등장하는 대상은 유리잔과 구름, 그리고 산과 강이 있는 풍경입니다. 이 모든 요소는 누구나 쉽게 접하고, 느끼며, 볼 수 있죠. 그러나 그것들이 이와 같이 조합되는 순간, 각 사물이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어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구름이 얹힌 유리잔은 현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일종의 신비감까지 느껴집니다. 마치 소인국 풍경에 등장한 거인국 사물을 보는 것처럼 말이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저 구름이 셔벗 같아 한 술 떠먹고 싶은 상상도 해 보고요. 이러한 작품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이유는 유리잔의 크기와는 상관없는 듯합니다. 유리잔이 있어야 할 장소가 구름의 밑이기 때문에 당혹감이 느껴지는 거지요. 그러기에 익숙했던 유리잔이 정말 유리잔일까 하는 의문마저 듭니다.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 기법이 물씬 풍겨 나와  낯설게 합니다. 

 

 

이처럼 어떤 사물을 본래의 위치에서 떼어내 다른 맥락이나 상황에 놓아 충격 효과를 내는 것을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이라고 합니다.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시인 로트레아몽이 "재봉틀과 우산이 병원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는 아름다움"이란 표현이란 글로 재미있게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낯설게 하기'가 가지는 심리적 요동상태를 잘 보여준 예입니다.

 

 

 

 

<표절>,1960/그린큐레이터

 

 

 

 

 

 

마그리트는 세계로 난 창과 종종 그 창을 대신해서 등장하는 캔버스, 창 대신 선택한 문, 도려내어진 오브제 자리에 풍경이 펼쳐지면서 세상의 안과 밖, 그림의 안과 밖이라는 인식의 이분법을 깨트립니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보면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려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쏭달쏭하지요. <표절> 작품에서 처럼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은 '진실'이 어쩌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빚어진 '착각'의 오류일 수 도 있겠다 싶습니다. 한 번쯤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는 마그리트의 철학적 질문 같기도 합니다. 

 

 

 

 

 

 

 

 

 

 

 

 

<저무는 해(Le Soir qui Tombe)>,1964/디 아티스트

 

 

평소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상식 혹은 의식을 '의심해 보게'하는 장면입니다. 믿어 의심치 않은 세계가 어느 날 "실은 당신이 알고 있던 것은 모두 착각이야"라며 뒤통수를 가격하는 듯합니다.  작품 <저무는 해>는 바로 이 의식의 세계가 깨지는 사건, 이로 인해 야기되는 혼란스러움을 표현했습니다.

 

 

 

 

 

 

<The blank signature>,1965/Pinterest

 

 

 

 

이 작품의 제작방법은 창문 앞에 놓인 그림을 표현한 작업들의 또 다른 변이 형태의 작업입니다. 그림 속 숲은 그림 같기도 하고 또 그림 밖 풍경같기도 합니다. 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안과 밖을 구분해 내죠? 자세히 보면 두 나무기둥 사이의 나뭇잎들의 부분은 뜻하지 않게 나무의 기둥과 말을 나타내는데 말의 궁둥이와 왼쪽 다리는 또한 말이 지나가고 있는 나무들과 공간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백지위임장> 작품에서처럼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은 하나의 세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음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저 여인의 몸통 위에 나무를 걸쳐 그리거나 그 반대로 표현했을 뿐인 거죠. 우리가 아는 세계는 어쩌면 우리 지각 너머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관계>,1967/Pinterest

 

 

 

 

 

 여러 개의 전이된 요소들은 하늘에 감추어진 미묘한 우주의 자취인 듯, 우의적인 새로운 의미로 융합되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얼굴과 잘 맞지 않는 기구라는 사물은 안구라는 새로운 대상의 의미로 용해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사물이 다른 이름으로 대치되는 마그리트의 창작 원칙 중 하나입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좌절과 절망으로 뒤덮인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의 배경이 된 철학, 역사, 문화에 대한 저항이 하나의 예술 형태로 나타났지요. 우선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은 대부분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친근한 사물이라는 점입니다. 살바도르 달리 같은 초현실주의자는 꿈과 같은 비이성적 행위의 산물을 표현했기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이미지가 캔버스에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일상생활에서 발견하는 대상을 캔버스에 그렸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을 관람하는 이들은 이런 사물을 무심히 지나쳤던 자신의 태도를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지요. 일상 속에서 초현실을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또한 이미지와 텍스트 간의 연관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몰두했다는 점이 마그리트 만의 특징입니다.  그의 캔버스에는 사물의 이미지와 더불어 텍스트가 함께 등장합니다. 그는 그 간극에 대한 우리의 인식체계를 뒤흔드는 다수의 작품을 남겼고요. 물론 언어도 일상적인 사물이라고 생각하면 마그리트는 철저히 일상성을 중요시한 작가인 셈이죠. 이러한 독창적인 시선과 해석으로  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쓴 마그리트, 그의 작품은 일상 속에 있었기에 세상 이곳저곳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인용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늠름해 보이는 군견 도베르만을 축소한 것만 같은 외모를 가졌으나, 앙증맞은 작은 사이즈의 소형견 종류로 미니어처 핀셔가 있습니다. 이름처럼 작아서 실내에서 키우기 좋은 견종이란 말이죠. 아파트 위주의 주거문화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견종입니다. 2000년대 중반 미니어처 핀셔에 대한 인기가 올라가자 몰지각한 동물분양업체에서 블랙탄 치와와와 어린 개체를 미니핀으로 속여 분양한 것이 적발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해외에서 특히 반려견 품종 순위 상위권에 늘 랭크되는 인기 많은 견종입니다. 

 

미니어쳐 핀셔(7개월)/123RF

 

원산지: 독일

평균 몸무게 : 3.5kg-5.0kg(암컷:4kg, 수컷: 4-5kg)

평균 체고:25cm-32cm

 

짧은 털을 가진 단모종 강아지 종류로 털의 색깔은 블랙탄, 적갈색 및 짙은 갈색 등이 대부분입니다. 곧게 선 큰 귀를 가지고 있으며, 검은색의 코와 함께 짙은 갈색의 눈을 가지고 있어요. 몸의 길이와 높이가 거의 비슷해서  스퀘어형 체형을 가지고 있답니다. 티비에서 보는 군견이나 경찰견인 도베르만을 축소한 듯한 외모로 오해도 많이  받는 강아지이기도 하지요. 

 

 

미니어쳐 핀셔는 독일에서 탄생된 강아지 품종입니다. 애칭으로 미니핀으로 불리고요.  미니핀은 1600년대(17세기 이후)부터 기록이 존재하는 견종입니다. 19세기까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반도 일대에서 쥐 잡는 개로 사육되었다고 해요. 도베르만은 1900년대인 20세기 등장한 개이고요. 엄청 선배견이므로 도베르만과 헛갈리지 말아 주세요. 둘 다 독일 출신이고 비슷하게 닮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란 사실 꼭 기억하세요. 

 

 

아쉽게도 미니핀 강아지 탄생에 대한 정확한 기록인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내용은 저먼 핀셔, 닥스훈트, 이탈리안 그레이 하운드를 선택 교배하고 개량하여 탄생이 된 견종이라는 이야기가 유력한 상태입니다.  독일의 핀셔클럽에서 1985년 미니핀 견종 특징을 확립하고 현재의 미니어쳐 핀셔의 품종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에 이어 영국에서 소형화 과정을 거치면서 귀를 곤두서게 하고, 크기를 더욱 작게 품종개량 노력을 거듭한 끝에 오늘날과 같은 작고 귀여운 미니핀을 만들어 냈답니다. 

 

 

미니핀이 처음 전람회장에 모습을 보였을 때 그의 늠름하고 당당한 모습에 "토이 그룹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고 합니다. 독일에서 미니핀을 츠베르크(초소형)핀셔라고 부르고요. 1920년대 미국에 알려지면서 1929년 미국핀셔클럽이 결성됩니다. 20세기 초에 미국에 처음 알려졌을 정도로 애완견으로서의 역사는 비교적 짧은 편입니다. 1935년 시카고 애완견 전람회에서 대상을 받은 이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애완견으로서 애완견 중의 애완견이라는 찬사를 받아 왔습니다. 지금도 덴마트,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지에서는 최고의 토이종으로 사랑받고 있답니다.

 

 

두 미니어쳐 핀셔/123RF

 

 

 

미니핀은 좁고 쐐기 모양을 한 머리와 각이 뚜렷하고 튼튼하고 균형 잡힌 체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갈색의 날카롭고 또렷한 눈과 검은 코가 특징이고요. 매끄럽고 굵고 짧은 광택 있는 털이 전신을 덮고 있어요. 꼬리는 엉덩이의 높은 부분에 위치해 짧은 편입니다.  걸을 때 마장에서 경기하러 등장하는 말처럼 앞발을 높이 쳐들고 경쾌하게 걷는 특징이 있습니다. 조그맣고 깔끔하고 경쾌하고 발랄한 개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CdOwarrmqM

 

 

 

작은 소형견 종류라고 무시했다가 큰 코 다칠 수 있습니다. 실제 미니어처 핀셔는 대형견들도 무서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덤벼드는 모습을 보입니다. 대형견 못지않은 용맹성과 침착성을 지니고 있어요. 겁 없이 용감한 성격이긴 하지만 체력은 대형견을 절대로 못 당하죠. 그러니 대형견과 맞서게 하지 말아 주세요.

 

 

기본적으로 경계심이 강한 성격입니다. 고집도 있어서 반려견으로 키우시려면 어린 강아지 시기부터 사회성교육을 지속적으로 해 주셔야 합니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내거나  힘조절이 쉽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있는 가정에는 어울리지 않는 견종입니다. 미니어처 핀셔를 자극하여 공격성을 보이게 하거나 사고를 낼 수 있으므로 보호자의 통제하에 아이들과 함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NH9PNZ0WfY

 

 

 

미니핀은  보호본능과 경계심이 매우 강해 주인 이외의 모르는 사람에게는 끝가지 경계를 늦추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위협적인 동작을 취할 때  종종 물기도 합니다. 대담하고 강인한 성질 때문에 다른 개와 함께 키우게 되면 시끄러울 수 있습니다. 

 

 

생기발랄한 견종이므로 충분한 운동과 산책은 필수입니다. 눈치도 빠르고 지능도 좋은 편입니다. 기본적으로 사회성교육과 함께 사랑 듬뿍 받고 자라면 더 멋지고 근사한 반려견으로 성장할 겁니다. 산책할 때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하고 목줄을 반드시 착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방울을 꼭 달아주세요. 미니핀의 방울은 여러 가지 역할을 하는데 일단 개가 시야에서 멀어지더라도 소리로 찾을 수 있습니다. 까만색이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어요. 덩치는 작아도 까맣고 야무지게 생겨서 달려들면 상대가 무서워합니다. 단지 냄새를 맡으러 달려가는 걸 텐데 말이죠. 그래서 방울을 달아서 개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알려주어야 합니다. 쥐를 잡던 사냥개라 흙이나 풀냄새를 맡으면 영역 표시를 하고 대변을 봅니다. 항상 야외 산책 시 대비하세요. 매달 발톱 관리는 기본입니다. 발톱이 길면 바닥에 미끄러져 관절이 약한 미니핀에겐 좋지 않거든요. 

 

 

미니어처  강아지 수명은 건강과 유전적 요소, 생활환경, 식습관 등에 차이가 있지만 평균 12-16년으로 다른 소형견 종류 개들과 비슷합니다. 기본적으로 튼튼한 견종입니다. 하지만 디스크, 슬개골탈구 등의 관절질환과 함께 강아지 갑상선 질환, 귓바퀴 괴사 등 의 질환에 취약합니다. 특히 빛을 감지하는 신경 세포에 문제가 생겨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질병인 진행성 망막 위축증은 미니핀들의 고질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살이 찌면 슬개골이 쉽게 탈구될 수 있으니 늘 체중관리를 신경 써서 해 주세요. 미니핀은 뒷다리 근육운동이 필수입니다.

 

 

만약 미니핀을 입양하고 싶다면 짖는 것과 털 관리를 간접 체험하시고 선택하시길 권합니다. 털이 짧고 까맣기 때문에 다른 개들보다 더위와 추위를 많이 탑니다. 여름에 가능하면 실외 산책을 삼가야 하고 봄, 가을에도 흰색이난 밝은 색 계열로 옷을 입혀 직사광선을 피해야 합니다. 

 

 

단모종들은 얼굴 표정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기분이 좋은지 , 나쁜지, 우울한지 , 배가 고픈지 말이죠. 이런 교감을 느끼고 싶으신 분들, 의리가 있어 항상 주인을 기억한다고 하니 관심 있는 분들 좋은 선택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반응형
반응형

유럽인들 사이에 한 때  이탈리아로 가는 그랜드 튜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약 200년간 지속되었고요. 특히 영국 , 독일의 왕족이나 귀족자제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산 넘고 물 넘고 바다 건너가야 할 테니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여행을 하다 강도를 만나거나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당시 바이마르공국 재상으로 있던 괴테 역시 38살 때 1년 9개월 정도 이탈리아에 머물렀었다고 합니다. 괴테의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 역시 이곳에서 당시 얻은 경험들이 큰 몫을 했고요. 루벤스나 벨라스케스, 그리고 나폴레옹 역시 많은 영감을 얻어 돌아오지요. 당대 지성인들의 유학코스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영국의 경우 프랑스를 경유해 알프스를 넘고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방법이 있고, 플랑드르(네덜란드,벨기에)지역을 거쳐 가는 방법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쁘고 세련된 옷들은 프랑스 쪽이 많기에 선호도에 따라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도시국가였던 이탈리아가 한 깃발아래 모이게 된 것은 1861년이었습니다. 

 

 

 

 

 

19세기 유럽/나무위키

 

 

영국은 무늬만 왕이었고 실질적인 힘은 의회를 통해 나오는 입헌군주제를 시험하고 성공리에 안착시킵니다. 당시 유럽의 주변국가들 특히 프랑스,독일, 이탈리아 등이 정치적인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영국은 경제에 온 힘을 집중하며 산업혁명을 일으킵니다. 쌓여가는 부를 축적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의 여파는 프랑스에도 영향을 미치며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정치적으론 여전히 혼란한 묘한 불협화음 속에 도시는 근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술은 아이러니 하게도 경제적으로 부유해질 때 융성하게 됩니다. 신문물을 통해 급속도로 변해가던 파리는 인상파라는 걸출한 미술 사조 하나를 배출해 냅니다. 고대 문화를 대표하는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가 문화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반면 이탈리아는 상대적으로 발달이 느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는 급격한 공업화를 추진하였고 이러한 점이 당시 이탈리아의 젊은층에게 영향을 끼쳤던 거죠.  미래주의 사조는 속도와 역동성, 신기술 및 기계주의 등에 확고한 믿음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미래주의는 회화, 조각, 건축, 의복, 실내장식, 영상,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실험적인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래주의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은 미술 분야에선 움베르토 보치우니, 카를로 카라 지노 세베리니 , 자코모 발라 등이 있습니다. 오늘 주인공은 음악가이자 화가로서 활동 루이지 루솔로입니다. 

 

 

루솔로의 아버지는 가업을 이은 시계공이었지만 마을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도 활동했습니다. 다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루솔로는 베르디 음악원에 진학한 두 형 때문에 가족과 함께 밀라노로 이사했습니다. 음악가 집안에서 자랐지만, 음악가 대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합니다. 그래서 명화 복원 전문가 밑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판화를 배웠으나 정식 미술교육은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1909년, 파밀리아 아르키스티카에서 열린 그룹전'흑과 백'에 판화 몇 점을 출품하게 됩니다. 루솔로는 이 전시회를 통해 움베르토 보초니를 만나게 되고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낭만주의와 세기말 사조에서 탈피해 현대 산업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적 감수성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게 됩니다. 이듬해 고군분투하던 루솔로는 미술, 음악 등 다른 예술 장르에도 미래파의 기운을 전파하려던  이탈리아 출신의 시인 필리포 토마스 마리네티(Filippo Tommaso Emilio Marinetti,1876,12,22-1944,12,2)를 만나게 됩니다. 

 

 

 

Filippo Tommaso Emilio Marinetti/wikipedia

 

 

그는 20세기 문명에 지나친 기대를 걸었던 괴짜 시인입니다. 1909년 2월 20일 , 마리네티가 피가로지에 '미래파 선언'을 발표합니다.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을 위해 도서관과 미술관을 때려 부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러한 극단적인 표현은 세상의 눈길을 끄는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기존의 음식 문화에도 반기를 들었습니다. 파스타와 같은 이탈리아 전통 음식이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며 말이지요.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요리를 발명 해야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훗날 행위예술을 예고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는 옛 세상을 파괴하는 일에 맛들인 나머지 결국 파시스트가 되어 버렸습니다. 1919년에 '파시스트 선언'을 발표했거든요. 1920년대 탈퇴한 후 3년간 정치와 결벌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네티는 파시즘의 철학적 근거를 제공한 장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후 마리네트는 미래파를 이탈리아의 국가 예술로 만들려다가 무솔리니의 반대로 실패합니다.  2차 대전이 터지자 육십대 후반의 나이에 자원입대를 했고, 이탈리아 패망을 앞둔 1944년 심장마비로 죽게 됩니다.

 

 

이탈리아 미래파/NYCultureBeat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보다
경주용 자동차가 더 아름답다.


1909년 2월 20일자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마리네티가 기고한 '미래파의 창설과 선언문'을 1면 기사로 올립니다. 이렇게 미래파는 언론에 광고를 내고  시작된 미술사조입니다. 혁명적이고도 도발적인 선언문에서 그는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는 것은 전쟁뿐이라고 말합니다. 예술 또한 폭력적인 비행을 저질러도 된다고 주장하고요. 이게 무슨 예술이야 싶습니다만 다소 과격한 듯한 미래파의 예술은 일상생활에까지 영역을 넓히려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전위) 운동의 신호탄이 됩니다. 원래 아방가르드는 군대의 선두에서 적군의 상황을 알아보거나 장애물을 제거하는 부대를 의미하는 군사용어입니다. 영화 무용 연극 등 예술 장르뿐만 아니라 요리 장난감 등 일상의 모든 부문에서 미래파 선언이 이루어집니다.

 

 

이들은 사회 변혁에 방해가 되는 전통을 부수기 위해 매우 도발적인 작품을 세상에 던졌습니다. 말하자면 로마제국의 영화를 그리워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르네상스를 동경하는 이탈리아 미술의 과거지향주의에 환멸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이들은 미술 혁명을 일으켜 동시대 작가들이 미술계를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거고요. 미래파는 문학운동으로 출발했지만 미술, 광고, 패션, 음악 및 연극 부문까지 포용하면서 이탈리아를 넘어 영국과 러시아의 시인 마야코프스키까지 전 유럽에 영향을 미칩니다. 

 

 

 

기술 선언문에서 구체적인 행동 강령을 담았는데 엑스레이로 투시한 것 같은 해체, 모방에 대한 거부, 누드화 금지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미래파 제 1세대는 힘과 속도로 대표되는 역동성, 즉 다이너미즘과 아방가르드 예술을 최종 목표로 추구하며 움직임과 빛으로 현대사회를 해부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두개골이 있는 자화상>,1909/Google Arts& Culture

 

 

 

루이지 루솔로의 <두 개골이 있는 자화상>이란 작품입니다. 충격받은 표정의 이 남자 어디서 많이 본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바로크 시대 활동했던 천재적이지만 악당에 가까웠던 카라바조의 <메두사>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뒷 배경으로 7개 정도 보이는 해골이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옛날 로마에서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 소리로 외치게 했다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인가요? 아마도 그림 속  남자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볼지도 모르죠. 내면의 거울 속 자신을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두개골이 있는 자화상(1909-1910)에서 루이지 루솔로는 우리를 인간의 영원한 숙명인 죽음 앞에 던져 놓습니다. 평생동안 우리는 위대함, 명성, 권력, 부, 인간 영혼에 호소하는 모든 것을  찾아 나서기 바쁩니다. 모든 사람은 몸, 마음, 감정, 생각, 신념, 관점 등을 자신들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때가 더 많지요.  허무함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요. 모든 것은 죽음 앞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고,  잊히게 되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정체성이 없는 다른 모든 사람과 그저 유사한 두개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 놀란 토끼 눈과 벌어진 입이 어제는 그들이었으나 오늘은 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Music>,1911-12/wikipedia

 

 

 

소리와 음색을 선과 색채로 실감나게 옮겨놓았다.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1919)-

 

 

팔이 다섯 개입니다. 열 손가락도 모자라 모두 스물다섯 개의 손가락이 넓은 음역에 걸쳐 꽉 찬 화음을 빚어냅니다. 솔직히 말하면 검정색의로 표현된 주인공의 모습과 손가락을 쳐다보면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파랑 노랑 빨강 띠가 피아니스트의 머리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켜 허공을 가득 메웁니다. 피아노 음이 S자 곡선으로 폭을 넓히며 공중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고요. 화가 겸 음악가 루이지 루솔로의 대표작 <음악>입니다. 음악이 느껴지시나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퍼지는 느낌이 드시나요? 피아니스트의 머리에서 동심원처럼 뻗어가는 물결은 연주자의 후광 또는 아우라, 더 나아가서 소리가 빚어내는 파형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원색의 향연으로 수 놓인 막대에 매달린 가면들은 안동 하회탈 같기도 하고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가면 같기도 합니다. 객석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 관객들의 다양한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흥분한 듯, 웃는 듯, 무표정한 듯 한 무수한 표정들이 말입니다. <음악>이라는 표제에 드러나 듯 화가는 그림을 통해 음악적 음향과 특정 요소의 반복, 메아리의 반복 등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미래파 동료 화가인 카를로 카라는 "이 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얼굴의 가면에서 과거 위대한 작곡가들의 혼백이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 오감으로 전해오는 느낌은 다 다를 테니까요. 건반에서 멀어질수록 동심원 사이의 간격은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림 속의 등장하는 선과 곡선은 그가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고 음향학을 제대로 공부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듯합니다.

 

 

 

 

<Dynamism of a Car>,1913/wikipedia

 

 

 

 

 

 

루솔로의  <자동차의 역학>이라는 작품입니다. 이탈리아의 미래파는 (Futurism:1909-1944) 전통과의 단절을 원했고 기계문명과 속도를 찬양하는 이데올로기, 유럽 아방가르드 문화운동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이 그림에서 달리는 자동차 앞에서 벌어지는 음파의 압축 현상을 그려냈는데 놀랍게도 음향학 교재에서 도플러 효과를 설명할 때 나오는 그림과 흡사합니다. 도플러 효과는 어떤 파동의 파동원과 관찰자의 상대 속도에 따라 진동수와 파장이 바뀌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루솔로는 질주하는 자동차의 속도와 굉음을 시각화하고자 했습니다. 기계문명이 가져다 줄 이상사회를 꿈꾸던 미래주의자에게 달리는 자동차는 그 어떤 예술 작품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이지요.

 

 

 

검은 유선형 물체인  자동차가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이를 둘러싼 공기가  날카롭게 갈라지며 파도치듯 퍼져 나가 소음을 일으킵니다. 자동차의 엔진이 뿜어내는 열기는 불꽃처럼 뜨거운 에너지가 되어 주위를 새빨갗게 달구고요. 루솔로가 이 그림을 완성하던 1913년에 '소음의 예술'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온갖 소음을 일으키는 '악기'를 개발하여 연주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물론 루솔로가 예상했던 대로 객석의 반응은 '뭐 저딴걸 음악이라고 연주해'하며 분노 일색이었지만요. 그러나 '소음의 예술'이라는 그의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눈은 쉽게 감을 수 있어도, 귀를 닫고 들려오는 소음 소리를 제거할 수 없을 테니까요. 온갖 기계와 전자제품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루솔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https://sonichits.com/video/Luigi_and_Antonio_Russolo/Corale-serenade?track=1

 

Corale-serenade by Luigi and Antonio Russolo

Luigi Russolo (April 30, 1885 - February 4, 1947) was an Italian Futurist p… Read Full Bio ↴Luigi Russolo (April 30, 1885 - February 4, 1947) was an Italian Futurist painter and composer, and the author of the manifesto The Art of Noises (1913).He is o

sonichits.com

 

 

 

루솔로는 아방가르드 미술 사조에 자극을 받은 뒤에 다시 음악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고자 1913년부터 그림을 잠시 접고 음악 작업에 몰두합니다. 같은해 동료 화가들과 미래파 작곡가 프란체스코 프라텔라에게 편지로 보낸 선언문'소음의 예술'은 1916년 단행본으로 출간됩니다. 그는 이 음악에서 생활 주변에서 발생하는 소음들을 음악 작품에 포함시키는 작업에 이론적 미학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루솔로는 소음을 만드는 기계를 개발했고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음을 음악 작품 속에 포함하려고 합니다. 사이렌, 굴착기, 배수관, 호루라기, 기중기 소리 등 온갖 소음이 나오도록 고안해 냅니다. 현대 산업사회에 쉽게 들을 수 있는 잠들지 못하게 하는 기계의 소음을 음악으로 승화시킨거죠. 소음도 '오케스트라'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는 발상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1921년 루솔로는 파리에서 미래파 연주회를 세 차례 열었는데 27개의 소음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었습니다. 스트라빈스키, 디아길레프, 라벵 등 참석자 모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하네요. 디아길레프는 '라벨과 스트라빈스키에게 위촉한 발레음악에 이 악기를 넣어달라고 부탁할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말입니다. 아쉽게도 루솔로가 사용했던 '소음 악기'나 악보는 현재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1940년대 피에르 셰페르가 창안한 '구체음악'이나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루솔로의 소음음악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답니다. 

 

 

 

미래파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하는 것에 적극 찬성하여 의용군으로도 참전했습니다. 루솔로는  부상을 입고 1년 넘게 병상에 있었고요.  보초니는 전사했습니다. 그바람에 급속도로 영향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마리네티가 무솔리니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미래파는 미술사가나 큐레이터 사이에서 '퇴출 명령'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2024.01.24 - [지식&교양] - 50-63.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43)

 

50-63.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43)

20세기 들어서며 미술에 불기 시작한 최고의 혁신은 특정한 운동, '이즘(ism, 주의)'의 등장입니다. 입체주의 미래주의 구성주의 표현주의 (청기사파와 다리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등 한 번쯤

sun-n5y2.tistory.com

 

미래주의는 이탈리아가 다른 나라보다 발전이 느렸기에 그것을 만회하기 위한 급격한 공업화의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여기에는 열등의식이 한몫했고요. 그 열등의식은 이탈리아의 예술이 퇴보하였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산업도시와 자동차, 기차 등 산업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도상들을 작품에 담고 표현해 냅니다.

 

 

 

문제는 이러한 점이 도를 지나쳤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무정부주의와 폭력을 옹호하는 수준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이들은 반 문화, 반 전통, 반역사를 주장하며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을 파괴하여야 한다고 까지 주장했습니다. 반면 과학과 기계, 속도, 그리고 젊은이를 찬미하며, 파괴를 통해 구질서를 개편할 수 있는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극단적으로 전쟁과 폭력을 옹호하였고 미래주의의 끝은 세계 1차 대전이었습니다. 미래주의 자들은 1차 세계대전으로 폭력의 환멸을 느끼고 결국 미래주의에서 점점 이탈하게 됩니다.

 

 

파시즘과의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미래파는 유러 미술사, 특히 아방가르드의 초석을 제공한 문화 운동이었습니다. 미래파가 없었다면 다다(Dada), 키네틱 아트, 옵아트 등은  태동하지 않았을지 모르니까요. 

반응형
반응형

20세기 들어서며  미술에 불기 시작한 최고의 혁신은 특정한 운동, '이즘(ism, 주의)'의 등장입니다.

입체주의

미래주의

구성주의

표현주의 (청기사파와 다리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등

 

한 번쯤 들어 봤음직한 용어들이 더 헛갈리게 합니다. 현대미술을 주도했던 '이즘'은 20세기 초에 집중적으로 등장합니다. 공통된 사상에 뜻을 모은 화가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작품 활동에 이론을 도입하고 미술의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담론을 이끌어냈다는 얘기지요. 많은 이즘 중 20세기를 맞이하며 가장 열렬한 대응을 보인 것은 미래주의 (Futurism)입니다.

 

 

미래주의는 1909년 2월 20일 이탈리아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oppo Tommaso Emilio Marinetti, 1876-1944)가 <르 피가로>의 1면에 '미래주의 창립 선언'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운동입니다. 마리네티는  동시대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미술활동의 새로운 가치 체계를 만들게 됩니다.   마리네티의 선언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 미래주의 화가는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1882-1916)와 자코모 발라 (Giacomo Balla:1871-1958)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는 이탈리아 미래주의 화가, 조각가, 무대 디자이너 등 상상력과 통찰력을 지닌 미술가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1910년 두 편의 미래주의 선언문에 서명한 이후, 미래주의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이 되고요. 그의   비범한 상상력과 통찰력이 한몫 단단히 하며 근대 미술 양식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라는 빛의 산란과 굴절에 관한 과학적 이론들을 탐구했습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  빛과 움직임, 그리고 속도와 에너지라는 무형의 힘에 관련된 고도의 지적인 묘사를 낳게 됩니다. 또한 그는 안톤 줄리오 브라갈리아,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에티엔주리 마레와 같은 사진가들의 선구적인 작품들도  연구했습니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동물이나 사람의 움직이는  모습을 연속적인 사진으로 찍어서 움직임의 형식과 형태를 기록한 것들이지요.

 

 

 

그는 "새로운 시대의 미는 속도의 미다."라는 마리네티의 사상에서 영감을 얻어 고정된 시각과 촉각에 머물렀던 미술의 표현영역에 속도를 도입하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보아왔던 고전 예술의 화풍과 정신에 반기를 드는 예술 운동인 거죠. 마리네티의 선언은 당시 시대에 뒤떨어진 작업방식(분할주의)에 머물러있던 자코모 발로에게  빛처럼 다가왔습니다.  미래주의 선언은 창작의 모티프를 제공하고, 새로운 예술활동을 펼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주었고요. 이 선언은 또한 문학,미술, 음악, 건축, 연극 등 전 예술 분야로 확산한 전위예술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미래파는 기존의 전통적 예술을 거부하고 과학기술이 낳은 속도와 기계의 미를 적극적으로 예술에 도입하기 시작합니다.

 

 

 

 

 

 

 

<가로등>,1909/wikipedia

 

 

 

 

주로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한 발라는 1895년 토리노에서 로마로 이사하여, 초상화가 겸 삽화가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1900년 그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게 됩니다. 로마로 돌아오자, 발라는 신인상주의의 점묘법과 유사한 표현 기법을 자신의 그림에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가로등>(1909-1910)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표현법은 그가 계속해서 실험해 오던 빛과 대기, 그리고 움직임에 관한 묘사에 적합했던 거죠.

 

 

당시 유럽의 개스등 대신 전기가 들어오며 인공의 빛으로 자연의 빛을 한 번 눌러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요즘처럼 늘 당연한 듯 켜는 전기불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당시 유럽인들이 느꼈을 놀라움 또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전기의 등장으로 일상생활의 변화가 이전과 사뭇 달랐을 테니까요. 태양의 길이에 맞게 길들여진 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고요. 그 나 저마 빛 주변으로 알록달록한 꺾새 모양이  언뜻 보면 화려한 나비 같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 보게 됩니다. 

 

 

그가 색을 화면에 옮기려는 이론적인 노력은 색점으로 표현하는 점묘화로 전개됩니다.색에 몰두했던 화가들의 실험은 형태를 재현하는 기존의 전통적 방식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 <가로등>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만들어진 전례 없는 신문물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즉 자연광을 넘어서 전기로 발생되는 인공적인 빛이 과학의 힘과 미래의 발전을 상징하는 요소로서 비중 있게 다루어집니다.

 

 

 화가 자코모 발라는 이사를 간 로마의 광장에서 밝게 빛나는 불빛을 보고 <가로등>을 그렸습니다. 하늘의 초승달이 떠 있지만, 그 빛의 힘은 가로등 불빛에 훨씬 못 미치게 보입니다. 마치 초승달 장식 같은 느낌으로 존재감이 작아 보입니다. 인공의 전깃불이 자연의 달빛을 능가하기 때문이지요. 로마에 처음 설치된 전기 가로등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림 속  가로등 하나가 발산하는 불빛이 큰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일상의 사소한 재료가 화가의 예민한 눈을 거치니 저렇게 독특한 형태로 작품화되어 놀랍습니다. 노랑과 흰색이 섞인 별 모양의 중심에서 밝은 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나옵니다. 눈을 똑바로 뜨기 힘들 정도로 말이죠. 자코모  발라는 빛을 다채로운 색으로 분할하고 색들을 중첩시켜 빛의 강약과 변화를 묘사했습니다. 갈고리처럼 뾰족뾰족한 터치가 특이하지요. 갈고리 터치감이 색의 분할과 시각적 혼합을 유도할 뿐 아니라 불빛이 퍼지는 방향과 빛에너지의 역동적 힘까지 보여줍니다.

 

 

 

 

발라는 전등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묘사해 과학기술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제 전원적 낭만적 예술은 끝나고 현대의 기계 문명에 부합하는 도시적 역동적 예술이 도래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기술로 탄생한 속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기계의 미학을 추구하는 미래주의 예술의 탄생을 알리는 팡파르 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도시의 가로등과 달의 대립을 통해 과학과 자연의 병치를 시도했고요.

 

 

 

 

모든 것은 빠르게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다.
움직이는 형상들은 끊임없이 여러 개로 보인다.
즉 달리는 말은
4개의 발만 있는 게 아니라 20개의 발이 있다.
-자코모 발라-

 

 

미래주의 선언의 영향을 받아 발라는 '미래주의 회화기법 선언'(1910)을 하면서 미술작품에 속도감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부순 거지요. 미래주의 전략 중 정지 상태인 신체와 운동상태의 신체 구분을 무너뜨리고 미술에 운동감각을 입힌 것이 대표적입니다. 요약하면 , 2D평면 캔버스에 3D 입체 구현을 했다는 말이죠.

 

 

 

 

 

<Dynamism of a Dog on a leash>,1912/wikipedia

 
 

 

 

자코모 발라의 1912년 작품인 <끈에 묶인 개의 역동성>은 회화에 속도감을 표현한 대표 작품입니다. 보이는 개의 다리에 오토 바이가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만화에서 이런 장면들 많이 본 것 같고요.  발과 꼬리를 우당탕 휘젓고 있는 모습이 우습기도 합니다.  아마도 강아지가 주인보다 앞장서서 빨리 어딘가로  달려가고 싶은 가 봅니다. 아니면 좋아하는 간식이 눈앞에 아른 거리는 걸까요? 혹시 맞은편 강아지가 맘에 들었나? 은색의 목줄까지 신나게 움직입니다. 줄넘기를 하듯 말이죠.  아니면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도 목줄에 매여 제자리걸음인 강아지의 상황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아지 옆에 레이스 차림의 견주가 있습니다. 강아지의 움직임만큼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작가 자코모 발라는 강아지와 주인의 그저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한 게 아니라, 여러 개의 반복적인 형상을 그렸습니다. 또한 속도감을 더 느낄 수 있도록 자코모 발라는 바닥의 줄무늬를 대각선으로 그렸고요. 심지어 그의 사인과 연도도 대각선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깨알 같은 디테일 덕분에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속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림 배경인 바닥은 진동하는 듯하면서 분홍과 초록의 색감이 대조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발라는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비가시적 세계를 가시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술을 그림에 도입했습니다. 점묘법을 유용하게 사용한 거지요. 점묘법은 형태를 점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선과 색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흔들거리는 물체를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거죠. 작품 < 달리는 개의 역동성>은 움직임이 있는 물체의 시간차를 점묘법으로 그려 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동시성을 보여줌으로써 미래주의의  특징인 역동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지한 사물과 사진 속 움직이는 대상이 만나 활동사진이라 하는 영화에 모티프를 제공했듯이 속도감 있는 움직임으로 평면 속에 담아냈습니다. 발라의 역동성은 흔히 대중 만화에서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신체 부위를 중첩시키는 기법에 영감을 주게 됩니다.

 

 

 

2023.03.28 - [지식&교양] - 47. 신인상주의, 조르주 피에르 쇠라(7)

 

47. 신인상주의, 조르주 피에르 쇠라(7)

고등학교 시절 쇠라의 이름과 함께 기억에 남았던 영상은 단 한 가지였다. 점잖아 보이는 남성 옆에 여인이 입고 있던 옷차림이었다. 잘록한 허리만큼이나 엉덩이가 뽈록하게 나온 스타일이 사

sun-n5y2.tistory.com

 

 

 

 

 

당시 예술가들은 '산업화'를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산업화로 인한 대량생산, 인간의 창조성보다는 기계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회상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전통과 근대 사이의 충돌을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거부감을 표시했습니다.  요즘 AI로 초고속 문명으로 가는 속도전에 우려의 목소리가 많은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 미래파들은 오히려 산업화, 근대화에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세상은 계속 발전해 나가는데 계속 전통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예술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자코모 발라의 양식은 이 시기에 더욱 추상적이 되었으며, 1910년에 발표된 두 편의 미래주의 선언문에 서명하면서, 그는 미래주의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로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제작된 그의 역동적인 유화 작품들은 폭발적인 에너지와 리듬, 그리고 강렬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the hand of the Violinist>,1912/wikipedia

 

 

 

 

속도의  표현이라는 불가능한 일을 시도한 미래주의 미술은 처음에는 카메라의 동작의 분석, 특히 머리 브리지의 동작 분석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그러나 미래주의 미술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역동적인 디자인을 개발하여 차원 높은 수준의 표현 방식으로 속도를 형상화해 냈습니다. 

 

 

 

 

 

우리(미래주의 화가들)는
역동적인 디자인을 발명해야 하고,
그와 함께 역동적인
-삼각형, 원뿔, 나선형, 타원, 원 등-
형태로 표현해야 한다. 


 

 

<Girl Running on a Balcony>,1912/wikipedia>

 

 

 

<발코니를 뛰어가는 소녀>는 신인상주의 점묘법에 속도를 입힌 작품입니다. 소녀가 신고 있는 신발 보이시나요? 소녀의 중첩된 신발표현이 없었다면 속도감보다는 단순히 색의 분할을 시도한 작품으로 인식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동작이 더 분할되어 있고 형태가 면으로 추상화되어 있습니다. 속도란 움직임과 동급이죠.  움직이는 물체는 흔들리고 있으므로 형태와 윤곽이 선명하지 않습니다. 그 흔들림의 상태를 반복된 형식으로 효과적으로 그리는 데에는 입체파와 같이 형태를 면으로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었단 말인 거죠.  한편 움직이는 물체는 그 흔들림으로 인해 색채가 선명하지 않습니다. 떨리는 색채의 표현에는 점묘파의 채색법이 효과적이었던 거지요. 움직임이 더 커지면 형태와 색채는 더욱더 분해되어 추상화됩니다. 

 

 

 

 

모든 것은 움직이고,
모든 것은 달리고,
모든 것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Velocity of an Automobile,1913/Sothebys.com

 

 

 

 

자코모 발라는 새 시대 미술이 기계나 자동차의 활력적인 힘이 나 속도, 역동적인 운동성 자체를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관적인 표현이나 전통적인 공간구성법을 피하고, 그림 속 형태들이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나타내는 표현 방식을 찾으려 했습니다.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의 물체가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형식이었지요.

그에게 기계와 속도가 기계의 움직임만으로 표상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마치 자연계의 영원한 반복의 프랙털적 디자인에서 가져온 듯한 리드미컬한 흐름인 듯합니다.  때로는 음표의 연속으로 보이기도 하고, 기계와 자연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이질 적인 것들이 생각보다 조화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그리고 기계와 자연은 조화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과 기계의 확장은 곧 자연의 위축이고 축소이기 때문이죠.  인간의 욕심이 기후위기를 불러와 요즘 들어 부쩍 자연에게 호되게 당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은 공존의 개념과는 거리가  좀 먼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자연의 약탈과 이용에 의해 성장하지 않으면 문명의 흐름은 단절되기 때문이지요. 조화의 노력은 아주 짧은 순간의 의식 있는 사람들에 의한 노력일 뿐, 지속성을 갖기는 무척 힘듭니다. 예술 작품에 의한 조화와 긍정성의 표상은 그렇기에 이율배반적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From -Spirit Transformation>,1918/arthur.io

 
 

 

1914년경부터 발라는 조각 분야에서도 실험적인 시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보초니의 주먹, 1915>을 들 수 있습니다. 1917년 그는 아주 혁신적인 무대 디자인을 제작하기 시작했고요, 몇 편의 연극에도 출연하게 됩니다. 발라는 시각적인 환영과 현상들을 탐구하면서 미술에 대한 추상적이고 과학적인 실험을 계속합니다. 1925년 글자와 숫자들을 소재로 한 작품 연작을 내놓기 시작했고요. 말년에 그의 작품은 초창기에 선보였던 찬란한 추상성에서 멀어져 점묘법으로 더욱 기울어집니다.

 

 

 

 



 https://youtube.com/watch?v=OfqlWphI3TM&si=n6VM1-q_G7Sj75aX


 

 

 

 

 

예술은
박물관에서만 보는 게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일부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은
예술을 포용해야 합니다. 

 

 

20세기 이탈리아 미래주의 화가의 집입니다.   화가 자코모 발라의 손길로 완성된 로마의 아파트는 만화경 속을 들여다보는 듯 황홀합니다. 그에게 집이란 예술 세계를 일구는 실험실과 동급이었던 모양입니다. 카사 발라에 존재하는 모든 오브젝트는 자코모 발라의 미학을 담고 있습니다. 테베레강에서 멀지 않은 로마의 어느 골목, 1900년대 초반 건설된 별 특색 없는 중산층 아파트 4층에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아티스트 자코모 발라 가 창조한 그만의 우주가 비밀스럽게 담겨있습니다.  독특하고 만화경 같은 카사 발라(Casa Balla)의 내부 모습을 보면 눌러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지속적인 창의'라는 미래주의 관념에 따라 자신이 생활하는 평범한 아파트를 살아 있는 예술품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바닥부터 벽지와 천장을 가리지 않고 빈 공간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고, 테이블과 의자, 찬장 등의 가구들을 직접 디자인했으며, 그릇과 각종 도구,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부분까지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장식했습니다.

 

 

 

일상적인 오브제도 예술작품처럼 다룬 셈이죠. 그 덕분에 예술이 어깨높이 정도로 내려온 듯합니다. 발라는 집 안 곳곳에 회화작품, 드로잉, 조각상을 배치하고, 심지어 자신과 딸들이 입을 옷도 직접 구상하고 바느질까지 해 착용함으로써 공간에 머무는 자신 또한 예술의 일부로서 존재하도록 계획했습니다. 

 

 

 

 

<Pessimism and Optimism>,1923/Art.com

 

 

 

오랜 정치적 투쟁 끝에 1861년 새로운 이탈리아가 탄생했습니다. 보다 급진적인 국가 의식도 급도로 성장한 이탈리아의 경제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냈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문제 중 하나는 몇몇 공업도시를 제외하고는 지역 간 경제 불균형으로 인해 남부 지역의 불만이 커져간다는 점이었습니다. 1880년대 세계 불황과 과도한 세금 정책으로 인하여 경제가 악화되며 빈곤해지자 농촌 중심으로 과격한 저항 운동 정치집단이 형성됩니다. 크고 작은 무정부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혹은 극단적 사회주의자들의 저항 운동이 활개를 치며 1920년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집권을 하며 본격적인 전체주의 정치 체계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게 됩니다.

 

 

 

 

<Pessimism and Optimism>은 기계와 속도의 뉘앙스와는 약간 다르게 느껴집니다. 1910년대의 미래파의 유행이 끝난 영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관주의는 흑백의 뾰족함으로 나타나고, 낙관주의는 청색 계열의 둥그스름한 포용으로 나타납니다. 낙관주의는 비관주의를 감싸 안으며 다독거리는 모양새입니다. 비관주의는 낙관주의를 예리하게 공격하는 창날을 가지고 있고요. 마치 콕콕 찌르며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두 가지 모두의 관점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배제할 수 도 없으며, 일방적으로 한쪽을  궤멸시킬 수도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의 중량의 무게가 달라질 뿐인 거죠. 자코모 발라가 살았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중반까지의 세계사의 흐름은 과학기술의 역동성과 전쟁의 공포, 자본주의 팽창에 따른 식민지화로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강물처럼 흐르던  시대였습니다. 자신이 어느 편에 섰는가에 따라 비관과 낙관은 달라지죠. 세계에 대한 판단도 달라지고요. 

 

 

 

 

자코모 발라는  산업화 이전의 전통을 부정하고 근대 문명이 낳은 속도와 기계를 찬미했습니다. 과거와 단절하고 다이내믹한 형태를 표현하고자 노력했지요. 새로운 재료를 작품에 사용하기도 하며 기계의 이미지도 작품에 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급격한 변화의 감각을 작품에 표현하여 근대 디자인 이론의 발전에 시발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네티의 선언은 오랫동안 특별한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았던 이탈리아의 예술적 발전을 목표로 국수주의적 성향을 띠기 시작합니다.  이 미래파는 후에 파시즘(히틀러의 국가/인종주의)과 연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정된 시간에 머물렀던 회화가 표현에서 외연이 넓어지는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그의  예술적 시도 자체는 남달랐으니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dqdhUzQZyCs

 

 

 

미래파 운동(1910-1918)은 스피드를 강조했던 만큼 빠르게 사라져 버린 사조입니다. 옴베르토 보초니의 전쟁 중 낙마사고로 사망 이후 추진력을 잃었습니다. 전쟁의 본성을 미화한 마리네티의 미래주의는 파시즘을 옹호해 2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정치적 실패를 맛보았고요. 하지만 그들의 이루지 못한 '속도'감은 추상미술의 출발점이 되었고 키네틱 아트나 옵아트로 확장되어 갑니다. 

 

 

 

 

반응형
반응형

얼굴이 무섭다.

붙임성이 좋다.

힘이 세다.

호기심이 많다.

머리는 좋으나 의외로 허당이며 귀소본능이 없다.

사냥을 잘하고 산책을 좋아한다.

 

 

시베리안 허스키를 표현한 말들입니다. 러시아 시베리아의 동북쪽 끝 추코트카가 발현지인 개입니다. 그곳에서 대대로 거주하던 축치인(러시아 극동의 최동단에 위치한 축치 반도에 살아가는 민족)이 키우던 썰매견에서 유래된 견종입니다.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이름을 얻고 하나의 독립된 견종으로 고착된 것은 미국에서 이뤄진 것이며 이 때문에 견종 전문가들은 '미국 개'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_PA5T6NLmY&t=255s

 

 

 

추운 지방에 살았던 만큼 털이 2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빵빵한 느낌이 강합니다. 털갈이할 때 검정 봉지 큰 용량의  많은 털이 빠집니다. 이는 썰매견들의  공통 사항이라고 합니다.  지능이 높아 영리하며 기본적으로 단체 생활에 익숙합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적지만, 바깥에서 길러야 하는 타입입니다.

 

 

 

Shberian Husky(좌), Alaskan Malamute(우)/ 출처: 인터파크펫 Blog

 

 

 

허스키와 말라뮤트를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일단은 흰색 회색 검은색 조합의 썰매개라 매우 유사하지만 가장 구별하기 쉬운 차이점은 "체구"입니다. 허스키는 중형견이지만 말라뮤트는 허스키와 두 배는 덩치 차이가 날 정도로 큰 대형견입니다. 또한 얼굴 생김새와 표정이 다소 다르지요. 허스키 쪽이 얼굴이 좀 더 늑대와 닮아 사납게 생겼다면, 말라뮤트는 상대적으로 눈매가 처져 있습니다. 또한 말라뮤트는 체형이 허스키의 체형보다 굴곡진 편이고요. 둥글둥글하게 생겼으면 말라뮤트고, 날카롭고 차갑게 생겼으면 허스키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흰색의  홍채 때문에 눈동자가 삼백안 같은 매서운 눈빛을 가지고 있으나 겉보기와 달리 허스키는 대체로 성격이 순한 품종입니다. 보통 강아지는 검은색 혹은 갈색 눈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인데 시베리안 허스키는 검은색, 갈색뿐만 아니라 파란색 눈인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경호견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베리안 허스키가 순하다는 것은 상대가 인간일 때 한정이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산책 중에 만나게 되는 동물들 중 같은 개과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사냥감으로 인식하는 개체들도 상당수 있을 정도로 공격적입니다. 순한 품종이라는 인식 탓에 방심하고 있다가 사고 치는 사례가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썰매 끄는 개라서 힘도 좋은 편이라 대비하지 않으면  막기도 힘듭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개들에게는 신사적인 편으로 특별히 경계해야 할 종은 아니지만, 기본 덩치 자체가 크고 험하게 노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소형견과 함께 있을 경우 주의가 필요합니다. 다른 개를 먼저 공격하거나 공격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는 적습니다. 하지만 허스키 자체가 한 덩치 하는지라 덩치가 작고 자기 방어 기질이 높은 포메라니안, 치와와, 비송 프리제 등에게 접근할 경우  상당한 위협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예상치 않은 강렬한 반응이 나올 수도 있고, 이에 덩달아 허스키까지 흥분해 아차 하는 순간 투견장이 될 수도 있으니 순한  것과는 별개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KDIe670lrw

 

 

https://www.youtube.com/watch?v=3293XwJTRyg

 

 

 

 

 

호기심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영역권 안이라고 판단만 되면 뛰어놀다 대충 퍼질러져서 자다가 배고파서 깼는데 누가 부르면 슬슬 돌아가서 밥이나 먹으면 그만이라는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허스키가 도망가는 상황에 처했다면 절대로 쫓아가서는 안됩니다. 슬슬 추적하면서 접근하다 다른 사람이나 산책 중인 다른 강아지나 무언가에 끌렸을 때 급습해서 잡을 수 있습니다.  도망가는 거 잡겠다고 뒤에서 같이 뜀박질했다간 그것조차 새로운 놀이로 생각하고 정말 광속으로 멀어져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리는 종류가 허스키입니다.

 

 

 

 

남은 유일한 희망은'나는 간다'하고 소리 한번 질러서 쿨하게 뒤돌아서서 걸어가는 겁니다. 운이 좋다면 당신의 허스키가 뒤에서 타닥타닥 거리며 뛰어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단, 잡으려고 뒤돌아서면 1cm 차이로 당신 곁을 스쳐 지나가 왔던 길을 다시 역주행하며 광속으로 멀어질 겁니다. 개줄 꼭 묵으시고 놓지 마세요. 풀려난 허스키를 잡을 땐 당신과 허스키의 부상을 감수하더라도 미식축구 선수처럼 바디태클을 건다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어설프게 임했다간 내내 뜀박질을 하느라 진이 다 빠질 겁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꾸준히 마당 같은 곳에서 리콜 훈련을 시킬 의무성이 엄청나게 부각되는 견종입니다. 불렀을 때 항상 주인 옆에 오도록 어릴 때부터 작은 반경부터 차근차근 훈련시켜야 합니다.  나중에 공원에서도 뛰놀다가 올 수 있을 정도까지 말입니다. 훈련이 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에 날뛰다 주인이 부르는 소리 자체를 못 들어서 주인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허스키도 많습니다. 이렇게 훈련이 되었는데도 주인의 소리에 집중을 못해 제대로 리콜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아주 약한 전류를 흘려서 주인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장치를 목에 다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합니다.

 

 

 

호기심이 많은 데다 고집이 엄청 세서 한 번 하고 싶은 건 반드시 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허스키를 잘 살펴보면 마치 고양이의 영혼이 개의 육체에 깃들어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을 겁니다. 어릴 때부터 참을성을 갖고 엄격하게 훈련하지 않으면 24시간 호기심에 날뛰는 20kg짜리 중형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산책도 필수로 매일 해 주셔야 합니다. 순한 것으로 알려진 개들 중에서 가장 기르기 어려운 종이므로 분양받기 전에 신중해야 합니다. 성장하면서 불어난 살과 근육의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질질 끌려다니게 되거나, 아니면 밑도 끝도 없이 산책 중에 퍼질러져서 안 움직이려고 하는 20kg짜리 털뭉치를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NLzsQKC-lw

 

 

 

 

허스키라는 종의 특성으로는 장이 매우 약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사료의 양이 평소보다 많아지거나, 사료를 다른 제품으로 교체하거나, 슈퍼나 인근 마트에서 파는 저렴한 간식을 급여할 경우에 높은 확률로 지독한 냄새와 함께 거의 물에 가까운 설사가 나오게 됩니다. 예민한 개체는 간식은 고사하고 평소에 먹던 사료가 조금만 많아져도 설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야외에서 키운다면 큰 문제는 안 되겠지만 만약 실내에서 키울 예정이라면 생각보다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매 끼니마다 변의 굳기를 보면서 미세하게 사료량을 맞춰주어야 하고 만에 하나 실패했을 시 보게 되는 설사를 치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겠죠.

 

 

 

시베리안 허스키는 피지가 많이 분비되지 않습니다. 고양이처럼 그루밍을 하며 스스로 몸을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견종입니다. 그래서 개 냄새가 많이 나지 않는 편에 속합니다. 목욕을 2-3주에 한 번 정도 시키는 걸 권장하는데 시베리안 허스키는 최소 6주를 권장하며 3-4개월에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진돗개처럼 한 주인만 따르는 타입은 절대 아닙니다. 밥 주고 산책시켜주고 애정을 듬뿍 쏟아도 낯선 사람에게 꼬리 흔들며 달려가는 녀석을 볼 때마다 은근히 서운함과 함께 '내가 이 녀석을 왜 기르고 있나'하는 회의감이 든다는 견주들도 많습니다. 또한 털이 이중모라서 더위를 굉장히 많이 타고 털갈이할 때 빠지는 털의 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야외에서 키울 예정이라면 그늘막은 물론이고 배를 깔고 앉을 수 있는 곳에 대리석을 깔아주거나, 수시로 주변에 물을 뿌려서 더위를 식혀 주어야 합니다. 야외는 상관이 없지만 실내에서 기른다면 털갈이 중에는 수시로 산책을 나가서 빗겨주어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푸른 눈이 눈 질병이 발생하기 쉽다고 증명된 것은 없습니다. 단지 브리더들 사이에서의 낭설로 퍼진  이야기일 뿐입니다. 멜라닌이 부족하긴 하지만 눈을 햇빛으로부터 보호하는 다른 색소가 있기 때문에 별다를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알비노로 인한 적안은 멜라닌과 다른 색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이쪽은 눈에 관련된 질병이 발생할 확률이 높습니다. 다만 어떤 눈색을 가지고 있든 유전적으로 다른 개들에 비해 눈 질병이 발생할 확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F0biMM_2VA

 

 

 

 

새끼 때부터 철저한 복종 훈련을 시키지 않을 경우 성체가 되고 나서 통제가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각한 경우엔 주인이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반갑다고 주인을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동물병원이나 카페 같은 공공장소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다른 개에게 돌진하는 경우도 있고요. "앉아"와 "기다려"교육은 시베리안 허스키에게 필수입니다.

 

 

사역견 출신답게 운동량이 많습니다. 운동량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혹여라도 목줄이 약하거나, 견사의 바닥이 흙이라면 아주 손쉽게 목줄을 끊거나 바닥을 파서 가출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허스키는 귀소본능이 뛰어난 견종이 아니고 호기심이 왕성해서 일단 가출에 성공하면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떠돌이 개가  되기 쉽습니다. 너무 멀리 와버린 나머지 집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 말이죠. 만약 길가에 다 자란 허스키가 돌아다니고 있다면 키울 여건이 안 되어서 버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 가출을 해서 잃어버린 경우가 대다수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공들여 키운 허스키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면 튼튼한 목줄과 잦은 산책은 견주들의 필수사항입니다.

반응형
반응형

 

 

북위 55~71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이 길고 오후 3시만 되면 어두워집니다. 이러한 환경적인 특성 때문에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실내 디자인과 가구 디자인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밖의 차가운 풍경과 다른 밝고 따뜻하고 포근한 실내 인테리어를 추구한 거지요. 북유럽 특유의 자연을 소재로 하여 실용적이며 간결한, 자연의 빛과 에너지를 강조하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을 유행시킨 원조가 칼 라르손(Karl Larsson 1853-1919)과 카린 라르손(Karin Larsson 1859-1928) 부부입니다. 

 

 

출처:PNGWing

 

 

 

1853년 5월 28일 , 스톡홀름에서 라르손은 태어납니다.  1857년 그의 유일한 형제인 요한이 태어나고, 가족은 방 한 칸 짜리 아파트로 이사합니다. 늘 화만 내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훗날 가족에 대한 애착이 컸다고 밝힙니다. 어머니가 세탁부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했고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매일 술을 마시며 폭언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13살 때 학교 선생님의 설득으로 스톡홀름 미술 아카데미(Stockholm Academy of Fine Arts)에 들어갔습니다.1869년 앤티크 스쿨(antique school)에서 공부했고요. 학비도 벌고 가족을 부양하고자 신문, 잡지의 만화와 삽화 등 닥치는 대로 그리다가 1877년 파리로 떠날 결심을 합니다. 파리에 머물면서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려 살롱전에 출품하지만 번번이 낙선을 하게 됩니다. 라르손은 인상주의의 급진적인 화풍을 따르지 않고 밀레와 같은 자연주의 기법을 고수했기 때문이었지요.  거듭되는 실패로 자신감을 잃은 라르손은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된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파리는 인상파가 대세라 라르손이 고수하는 자연주의 기법은 파리 시민들에게 관심 밖이었습니다. 또한 라르손은  인상파 화가들과 친분을 쌓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ㅡ 인상주의에 자극은 받았던 모양이에요. 스톡홀름 아카데미의 후진양성에 반기를 든 화가 들 중 한 명이 되니까 말이죠.

 

 

 

 

마음을 고쳐먹고 고국에 돌아가 기력과 재정을 보충한 라르손은  파리 외곽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예술가들의 거주지 그레 쉬르 루앙(Grez-sur-Loing)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납니다. 그녀의 이름은 카린 베르게(Karin Bergoo1859-1928)로  스웨덴에서 온 유학생이었지요. 부유한 사업가인 카린의 아버지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883년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밉니다. 라르손 역시 그녀와 결혼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고요. 그녀와의 결혼으로 그의 인생도 180도 바뀌게 됩니다. 가장 먼저 화풍이 달라집니다. 유화를 고수해 오던 그에게 수채화를 권한 것도 아내 카린입니다. 밝은 색으로 그려진 풍경과 인물들은 그가 살롱전에 입선할 수 있도록 빛을 발합니다. 이후 카린과의 사이에 두 살 때 죽은 아이를 포함 모두 8자녀를 두었으며 아내와 자녀들이 작품의 중요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부모 복은 없었으나 아내 복이 참 많은 화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내 카린은 스웨덴 미술 아카데미 출신으로 전도유망한 화가였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가 남편을 내조하기 위해 스스로 모델이 되고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합니다. 당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높지 않아 전업 화가의 길은 포기했지만 미술 작업을 모두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그림 대신 패브릭 제품과 가구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국적인 식물을 키워 집 안팎으로 생기 넘치게 하거나 집안에서 사용되는 직물 (앞치마, 침대 덮개, 식탁보 등)과 자신과 아이들의 옷, 자수 작품, 가구(의자, 아이들의 나무 침대)를 디자인하게 됩니다. 밝고 유쾌하고 대담하고 생생한 색채와 모던한 추상적 스타일로 말입니다. 

 

 

 

 

<Flowers on the Windowsill>, 1895/Pixels

 

 

 

백 년 전 스타일이란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요즘 모던한 집에 초대받은 느낌입니다. 열린 창문 한 곳으로 신선한 바람이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어 환기를 시킵니다. 크고 작은 토분 위에 각종 다양한 녹색 식물들이 방안에 생기를 불어넣는 듯합니다. 물조리를 들고 하나하나 목을 축여주는 어린 딸은 무슨 생각을 하며 정성을 쏟을까요? '물 많이 먹고 쑥쑥 커라.' 하며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성장했을 것 같습니다. 테이블 위의 뜨다 만 털 실 꾸러미를 보니 방금 자리를 떴는지 주름 진 방석 모양새가  엄마 카린의 부재를 알립니다. 살고 있는 사람이 편안할 수 있도록 공간에 주어진 여백과 밝은 색상이 겨울 내내 집에만 있어도 우울하지 않을 듯합니다. 소박함과 안락함으로 안주인의 배려가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장인도 점차 사위 라르손을 인정하게 되고 1888년  순트보른에 있는 작은 집을 라르손에게 선물합니다. '작은 용광로(Lilla Huttnas)'라고 이름을 가지고 있던 이 집은 1891년 라르손 가족들이 스웨덴으로 귀국, 입주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조금씩 고쳐갔는데 라르손의 작품 속에 이 집이 묘사되면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의 집이 되었습니다. 순트보른으로 이주하면서 자신의 집을 예술가적인 취향으로 꾸며 그곳에서 가족들과 평화롭고 소박한 전원생활을 즐기게  됩니다. 작품도 전원생활을 주제로 한 아름답고 장식성이 강한 그림들을 그려 화제를 모으게 되고요. 수많은 삽화들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The Cottage>, 1895/웹진 누리&nbsp; ,1888년 슨트보른으로 이주한 칼 라르손이 아내 카린 베르거와 함께 손수 꾸미고 살았던 집

 

 

 

 

칼 라르손은 이충집에 30년 동안 살면서 7번이나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매년 여름마다 방을 하나씩 늘렸고요. 직접 제작한 의자에 흰색을 칠하고, 원목의 바닥, 자수한 텍스타일, 붉은 제라늄 화분의 단순한 민속 스타일로 집을 꾸민 아내 카린의 손길또한 남달랐습니다. 그녀 역시 화가이자 공간장식가이다 보니 눈썰미와 손놀림이 섬세합니다. 직접 만든 수공예 작품들로  그녀가 8자녀(죽은 아이 포함)를 정성 들여 키운 절제되고 온화한 손길이 느껴집니다. 담백하고  실용적이어서 쓸수록 더 정이 가는 것 같고요.  남편 칼 라르손도 집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 같습니다. 단순한 집이기 전에 영감을 얻는 장소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말이죠. 아내 카렌과 함께 몸소 실천하며 전달하고 자 했던 전원적이며 자유로운 생활 방식, 가족을 향한 따뜻한 철학은 이후  많은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와 그의 가족이 직접 보여준 동화 같은 일상이 스웨덴 사람들에게 삶의 모델로 자리잡게 된 거지요. 백 년이 훌쩍 지났어도 칼 라르손의 작품이 여전히 인기를 끄는 결정적인 이유 같기도 합니다. 

 

 

 

<10월(October),1882>

<커다란 자작나무 아래에서의 아침식사(Breakfast under the big Birch),1894-99

<한겨울의 희생(Midwinter sacrifice),1914-15>등이 잘 알려져 있어요.

 

 

 

 

[커다란 자작나무 아래에서의 아침식사(Breakfast under the big Birch),1895/wikipedia

 

 

 

이 나무가 없었더라면,
사유지 전체가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이 나무는 훌륭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바로 그곳을 지나는 바람이 작은 날벌레나 나방을 쫓아준다.

 

 

 

 

아침식사를 하는 모양새인데 앙징맞은 서열 막내가 딴짓을 하네요. 붉은 색 모자와 대롱거리는 줄무늬  타이즈가 귀엽습니다. 라르손의 말대로 자연이 주는 혜택은 말할 수 없이 많지요. 오늘 라르손 가족에게 주어진 선물은 온 가족이 빙 둘러앉아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는 거지요.  여인을 포함해 아이들까지 모두 모자를 쓰고 정장차림이네요. 덩치 큰 강아지도 식구들 틈에 끼어 먹고 싶은가 봅니다. 자연스럽게 눕혀진 나무 근처 음료병 두 개가 무심한 듯 놓여 있고 흰 닭 한 마리가 깜짝 우정출연했네요. 자세히 보니 나무에 'K'라는 이니셜과 하트도 보입니다. 수채화라 가볍고 화사한 색깔이 녹색의 나뭇잎들과 어울려 담백합니다.

 

 

 

 

/Marcia Strykowski

 

 

 

 

두딸과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 카렌의 모습입니다. 인스타에 올려도 조회수 꽤 나올 것 같습니다. 아늑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이라서 말이죠. 붉은색 그릇장과 준비대 선반에 올려진 갖가지 종류의 그릇들 독특한 중앙의 램프까지 무례하지 않다면 식사 초대받고 싶어 집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아내 카렌을 그리는 아빠 칼 라르손의 붓끝은 신이 나서 춤을 추웠을 거예요. 칼 라르손에게  어릴 적 '집'이라는 곳은 안전한 쉴 곳의 개념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말이죠.  그는 아이들을 위해 툭탁툭탁 만들고 색칠하고 아내가 짠  직물들로 옷을 해 입고 자연을 만끽하는 일상의  행복을 그래서 더 놓치고 싶지 않았겠다 싶기도 합니다. 

 

 

 

 

 

 

<Esbjorn Diong his homework>,1912/Pixels

 

 

 

 

 

제가 개인적으로 눈길이 한 번 더 간 작품입니다. 나가서 놀고 싶은 데 바지춤에 손을 넣은 채 바깥으로 시선을 두고  멍때리는 모습이 어디서 본 듯해서 말이죠. 한국이라면 "땡땡 아~공부해야지"라고 부르며 주의를 줄 것만 같습니다.  녹색의 사이드 테이블과 빨간색 의자 그리고 단단하게 매어 둔 방석까지 방 분위기에 활력을 넣어주는 포인트가 되어줍니다. 창가에 꽃아 둔 꽃 몇 송이는 엄마 카렌의 아들을 위한 깜짝 배려일까요? 섬세한 그녀의 감각과 배려를 보는 듯 해 기분이 좋아집니다. 벽에 걸린 액자, 빙 둘러앉은 주변 소품들 모두 아빠의 작품들일테지요. 거울에 비친 아빠 라르손의 눈길이 다정합니다. 열린 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도 퍽 이국적이고요.

 

 

 

<Sewing Girl>,1911/ Wikimedia Commons

 

 

 

 

집안 한쪽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직물기계가 눈을 사로잡습니다. 살림의 고수에 속하는 어느 지인의 집에 들렀다  낡은 재봉틀을 보고 깜짝 놀라고 반가웠던 기억이 있어서 말입니다. 작업대에 쌓인 천을 다 꿰매는 일이 오늘 그녀가 마무리 해야 할 일인가 봅니다. 삭막하지 않게 작업대와 창문 곁에 녹색식물들이 공간을 메우고 있습니다. 벽돌색, 톤 다운된 녹색, 그리고 겨자색 벽면이 원목의 느낌과 어우러져 편안함을 선물합니다. 벽에 걸린 총은 호신용이겠죠? 

 

 

 

 

 

라르손은 주제를 선택할 때, 소박하고 생기 있는 민속예술에서 자주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라르손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은 밝은 색채와 세심하게 공을 들인 선입니다. 그는 특히 전원풍경과 실내를 그린 수채화로 명성을 얻습니다. 항상 가정의 행복 또는 농민의 소박한 삶을 중심주제로 삼았습니다. 어린시절 라르손에게 집은 안락함과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카린과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집이라는 공간은  일터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당시 안데르스 소른과 에드바르드 뭉크 같은 중요한 스칸디나비아인 동료 화가들은 사랑과 죽음, 비극적 운명과 중산계층의 혁명과 같은 주제로 선택한 것에 비해, 라르손은 자신을 직접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소재를 얻었던 점이 차별화되는 부분입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스웨덴 군인들은 구약성서 다음으로 칼 라르손의 그림을 간직하고 다녔다고 하는 걸 보면 말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y8hnjkPZzb8

 

 

1890년대 출판물에 색을 재현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그의 자품은 점점 인기가 많아졌습니다. 그의 책들이 제작되었고 1909년 독일에서 '햇빛 속의 집(The House in the Sun)'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그의 작품 수록집은 3개월 만에 4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라르손 본인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말이죠. 2001년까지 40쇄를 인쇄했다고 합니다. 

 

 

 

[동지 제물(Midwinter Sacrifice)], 1914-1915/wikipedia

 

 

마지막 작품이  완성된 것은 1915년 제목은 ,동지 제물(Midwinter Sacrifice)이었는데 기근을 피하기 위해 스웨덴 왕이 제물로 나서는 장면으로 묘사한 세로 6미터 가로 14미터의 대작입니다. 북구의 신화에 등장하는 Domalde 왕은  자신의 재임 기간 내내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첫해는 제물을 두 번째 해는 사람을 각각 바쳤으나 세 번째 해에도 역시 대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결국 자신을 제물로 희생하고 풍연이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이 장면은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의 왕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작품이 완성되었지만 미술관 이사회에서 이 작품의 게시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거절을 통보 받은 라르손의 실마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역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내가 죽고 나면 훨씬 더 좋은  곳에 걸려 찬사를 받을 거야."라는 말을 남겼다는군요. 실제로 이 작품은 일본인에게 팔렸다가 1992년 스웨덴 국립 미술관에서 라르손 작품 전시회를 할 때 걸리게 됩니다. 스웨덴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논의가 끊이질 않았고 결구 1997년 일본인으로부터 다시 작품을 사들여 원래 전시하고자 했던 곳에 걸리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28EYsIupnY

 

 

 

<Brita and Me>,1895/Pixels

 

 

평화롭고 아늑한 전원생활의 고귀한 가치를 보여줌으로써 세기말에 대한 스웨덴 사람들의 시각을 구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화가 칼 라르손!!! 무등을 태우고 아이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아빠 칼 라르손의 모습이 훨씬 더 오래 기억에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칼 라르손에게 좋은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 뮤즈가 되어 준 아내 카린의 역할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테지요. 두 사람의 협업이 오늘날 스웨덴 브랜드 IKA를 통해 전 세계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디자이너 혹은 실내 인테리어 전문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기도 하고요. 백 년이 지났어도 그의 가족사랑은 따뜻함의 색감만큼 소소한 행복을 찾는 이들에게 오래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고층 건물로 뒤덮인 뉴욕의 거리를 뒤로 잠깐 돌려 봅니다. 좀 더 인간적인 뉴요커들을 만나보려고요. 

존 프렌치 슬론의 작품을 통해 지금보다 덜 화려하지만 사람 냄새 나는 뉴욕의 시간으로 들어갑니다.

 

187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록헤이븐에서 태어났습니다.

 

 

newsteacher.chosun.com

 

 

도시의 한 장면과 뉴욕 생활의 본질을 포착하는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는 슬론은 서점이자 작은 활자 판매업체인 Poter and Coates에서 보조 출납원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각종 연하장, 달력 디자인과 일러스트, 그리고 에칭 작업도 했고요. 책과 신문, 잡지 등에 삽화를 그리며 예술가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1892년부터 1895년까지 [필라데리피아 인콰이어러(The Philadelphia inquirer)]지에서

1895년부터 1910년까지 [프레스(Press)]지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습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리(The Philadelphia Inquirer)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지역을 담당하는 아침 일간신문입니다. 이 신문사는 1829년 6월 존 R. 워커와 존 노벨이 <펜실베이니아 인콰이어러>란 이름으로 창간하였고, 미국 내에서 세 번째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일간신문이기도 하고요. 미국 내에서 10번째로 가장 많은 주간 발매량을 가지고 있으며 퓰리처상을 20번 수상하였습니다. 

 

 

 

존슬론은 1904년 뉴욕으로 이주합니다. 그는 1907년경 뉴욕에서 로버트 헨리(Robert Henri), 조기 룩스, 아서 B. 데이비스 등과 함께 8인이 주축이 된 '에이트(The Eight)'그룹을 결성하고 미국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을 전개합니다. 그곳에서 로버트 헨리(Robert Henri,1865-1929)를 만나 당대의 진보적인 화풍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는 미국의 화가이자 교사입니다. 젊었을 때 인상파 화가들과 강하게 동질감을 느끼고 파리에서 공부했습니다. 열성적인 추종자들로 구성된 소규모 팀과 함께 도시에서 신선하고 덜 고상한 주제를 찾아 그림을 그렸던  화가입니다. 그리고 이듬해 1908년에 조직된 '애시캔파(Ash Can School)'에도 참여하고요. 아카데미 미술에 반기를 들고 회화가 일상생활과 결부되어야 한다는 신조 아래 슬론은 도시의 활기찬 일상과 소란스러운 분위기, 투박하고 거친 생활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Sunday,Women Drying Their Hair>,1912/The New York Times

 

 

 

그의 작품은 뉴욕 길거리 풍경, 식당과 술집 안, 나룻배, 옥상, 뒷마당 등 다양한 공간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뉴요커들을 생생하게 담아냈습니다. 건물 옥상에 세 명의 여인이 머리를 말리고 있네요. 헤어드라이기가 발명되기 전인가 봅니다.   한 가한 일요일 꿀잠 자고 느지막하게 일어나 밀린 빨래도 하고 머리도 감아 바람에 들어 말리니 마음까지 개운할 것 같습니다. 낯익은 포즈들을 바라보며 무슨 얘기들이 오고 갔을까 사뭇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우아를 떨지 않으니 그들 사이에 제 모습도 살짝 보이고 스스럼없이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 집니다. 남자친구 얘기, 동료얘기, 가족얘기 등 화제를 들쭉날쭉 바꾸며 웃고 떠들고 공감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습니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뉴요커들의 모습도 보기 좋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인간적인 뉴요커들의 모습도 정감 있어 좋습니다. 

 

 

 

 

<Sixth Avenue Elevated at Third Street>,1928/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1920년대 뉴욕은 부유한 문화와 급속한 혁신의 중심지였습니다.  금주 문화가 번성하며 불법 술집과 지하 도박장이 생기고 있었죠. 한편으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클럽에서 춤과 음악으로 활기찬 시간이 펼쳐지기도 했고요. 아마 그림 속 젊은 직장 여성들은 일 끝내고 어딘가로 놀러가는 가 봅니다. 움직임이 들떠있어요. 재즈바의 마음에 드는 피아노 맨이 있을지도 모르죠.  이 시기는 여성들이 미국에서 투표권을 얻은 시기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변화와 동시에 여성들의 자유로운 생활양식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으니까요. 도시의 높은 건물들이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며 모던한 도시의 상징이 되어갑니다. 기술 혁신과 경제 성장 또한 함께 펼쳐지던 시대였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xT08okBIztU

 

 

 

 

 

 

 

슬론은 인간의 삶, 그리고 그 삶의 기쁨을 담아내기 위해 초점을 촘촘하게 확보하고 피사체를 면밀히 관찰합니다. 두드러진 특징중 하나는 그의 작품이 후기로 갈수록 색채가 밝아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실제로 슬론은 1920년대 후반 생계가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자 도시 주제의 그림 대신 누드와 초상화를 주로 그리게 됩니다.

 

 

 

 

<Blond Nude with Orange,Blue Couch>,1925/ART&ARTISTS

 

이전작들과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죠? 개인적으로 슬론의 이전 작품들이 더 맘에 들긴 하지만요. 아름답지만 소시민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 그런가 봅니다. 그들의 희로애락이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위로가 되어 그런가 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tlE4AwE_g0

 

 

 

 

슬론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은 미국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사람들 자체에 관심이 많았고,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그는 풍요와 빈곤이 뒷섞여 있는 뉴욕에 살면서 매일 부딪치는 가난한 노동계급의 삶과 맨해튼의 환락가 등 궁핍과 혼란으로 가득 찬 도시풍경을 낙천적이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했습니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인물들의 자세는 신문 삽화가로 일했던 그의 경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슬론은 1914년부터 약 10년간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The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에서 미술을 가르쳤습니다. 이곳은 1875년 아티스트들로 설립된 곳으로 거의 대다수 학생들이 National Academy of Design in New York에 소속했고 , 상당수 학생들은 여자였다고 합니다.  프로페셔녈 아티스트와 아마추어 아티스트들을 위한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드로잉, 수채화, 페인팅, 조각, 파스텔화, 포토샵과 미술사 강좌 등 다양한 클래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트를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연령, 인종, 학력의 제한이 없고요. 자격시험이 까다롭지 않고 입학시험은 없습니다. 수업에 따라 강의료는 다양하고 자신이 원하는 수업 프로그램을 짜서 받을 수 있습니다. 국가, 연령 인종에 상관없이 아트 수업을 받을 수 있는 학교입니다.

 

 

 

단, 외국인의 경우 학생 비자가 필요한 경우라면 아트 포트 폴리오와 1년 이상의 미술 전공 자격증과 재정 증명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지원 방법은 온라인으로 한 뒤 전화를 하거나 직접 방문하면 됩니다.

 

 

이 학교 출신자는 이력서에 자신 있게 아트 스튜던트 리그 오브 뉴욕에서 수학했다고 적습니다. 이곳에서 공부한 유명한 화가 가운데 잭슨 폴락, 리히텐 슈타인, 조지아 오키프, 노먼 록웰, 마크 로스코, 알렉산더 칼더 등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정식 학위를 인정해주지 않지만 아티스트들이 인정해주는 사랑스럽고 멋진 학교입니다.  슬론은  1951년 뉴햄프셔주 하노버에서 암으로 사망합니다.

반응형
반응형

 개 품종 중 하나인 달마시안(Dalmatian)은 평생 물방울무늬를 한 채 예술적인 모습으로 오랫동안 인간들 곁에 함께 있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 원산지는 동유럽 발칸반도 근처 달마티아 지방(아드리아 해와 접한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방)입니다. 달마티아 지역은 크로아티아 남부 지방에 위치하며 바다를 따라 길게 펼쳐진 지역입니다. 마치 칠레의 영토처럼 기다란 띠 형태를 가지고 있어요. 복잡한 해안선과 함께 500여 개가 넘는 섬들이 있다고 해요. 지명의 유래는 기원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던 일리리아족 중 하나인 달마테(Dalmatae)족의 이름에서 따 왔다고 하고요. 로마 제국의 속주인 일리리쿰이 1세기에 분할되면서 달마티아라는 지역명이 시작되었습니다.

 

 

 

vpn.cnu.edu.cn

 

 

 

지도상에  두브로브니크(Dubrovnik)보이시죠? 이 지역이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달마시안(Dalmatian)의 고향입니다.  로마시대부터 이 지역을 그렇게 불렀다고 하니 달마시안 개 역시 오래되었다는 뜻이겠죠.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어로 '작은 떡갈나무 숲'이라는 의미라고 해요. 16세기부터 이미 아름다운 도시로 유명했고 크로아티아 최대 관광도시이기도 합니다. 한때는 이탈리아 베네치아(Venice)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무역도시였고요. 1979년 구시가지 전체와 성벽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예술적인 가치와 역사적인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도시입니다.

 

 

 

Dallas Observer/Shutterstock

 

 

 

주로 영국에서 달마시안 품종을 브리딩했으며, 잉글리시 포인터 종의 개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현재도 말을 사육하는 곳에서 달마티안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건너온 달마티안들은 소방서에서 인명구조견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IFL Science/Shutterstock

 

 

 

털은 짧고 검은 점박이 흰 털에 박혀 있어요. 잛은 털이지만 무척 많이 빠져요.  죽은 털을 제거하기 위해 정기적인 빗질은 필수입니다. 매끄럽고 근육질의 우아한 몸매를 자랑하는 중 대형견입니다. 달리기 무척 빠릅니다. 

 

키는 50-61cm

몸무게 15-32 kg 

평균수명 :10-12년

생후 2주가 되면 검은 점박이 무늬가 생긴다고 해요. 신기하죠.

 

 

 

서양에서 소방관의 개로서의 이미지가 큽니다. 특히 말들과의 궁합이 매우 좋았다고 해요. 소방관들이 당시 소방마차를 타고 가면 훈련된 달마시안들이 앞에  있는 장애물들을 미리 알렸다고 합니다. 마차나 승마 기수의 옆을 달리며 방향을 잡는 데 도움도 주고요.  떠돌이 개나 들개가 말의 근처에 오는 것을 막기도 하고요. 다른 동물이 다가오면 기수나 마부에게 신호를 보내는 식으로 말이죠. 사냥 도우미로 활약하는 달마티안도 있고, 인명구조견이나, 심지어 서커스에서 활약하는 달마티안도 있다고 합니다. 여전히 달마티안은 소방서의 마스코트로 남아 있습니다. 

 

 

 

위키백과

 

 

 

마차를 지키던 경호견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활동성이 높고 성격이 거칠어 교육하지 않으면 사고칠 확률이 높아요. 배타성도 강하고 고집도 세다 보니 교육이 쉽지 않습니다. 키우기 위해서 마당이 있으면 더 좋고요. 달마티안의 활동력과 체력은 모든 견종을 통틀어 가장 높은 편입니다. 이 넘치는 에너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마당은 필수인 거죠. 교육을 철저히 시켜 주시고 응석이 세니까 달라고 다 주면 안 됩니다.  안 되는 것과 되는 것을 확실히 인지 시켜야 합니다.  감시 및 경계 능력이 뛰어난 개입니다. 다른 개나 동물, 어린 아이들과 금방 친해져요. 다만 경계심이 심한 경우 다른 동물을 공격할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지능이 높아 명령어도 금방 배우는 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3upLN7avaE

 

 

 

 

달마시안을 키울 경우 어릴 때부터 사회성 훈련과 서열관리를 함께 해주셔야 합니다. 주인에게 매우 충성스럽지만 타인에게  배타적인 면이 있어 어릴 때 쓸데없이 짖거나 크게 흥분하는 일이 없도록 어릴 때부터 여러 환경을 접해주도록 하고, 여러 사람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101마리 달마시안> 애니며 이션이 나 영화의 재방송을 금지해 달라고 청원을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 등으로 입양한 달마티안이 생각보다 덩치도 크고, 운동량도 많고, 털도 많이 빠지고, 난청 및 요로 결석 등의 유전적 질병이 생기면서 버림받는 달마티안이 증가했기 때문이죠.

 

 

 

 

Abstract Hand Drawing Cute Dalmatian Dog Stock Vector/ Shutterstock

 

 

 

 

달마티안도 다른 견종과 마찬가지로 유전적 질병이 있어요.

 

- 10개월 미만의 달마티안은 호흡기 질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 유전적으로 청각 장애를 겪기 쉽습니다.

- 요로계 질환에 취약해요.

   비뇨기에 요산석(Uric Acid Stone)으로 고생하는 유일한 견종입니다.

- 홍채 괄약근 형성 이상

 

 

달마티안들에게 물을 많이 마시도록 하고, 푸린이 많이 함유된 음식은 피해 주세요. 빛에 너무 민감해지고 어두운 곳에서 잘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짝 유행이라고 트렌드에 휩쓸리지 마시고 입양할 개들의 특성과 주의점들을 잘 숙지하셔서 견주도 입양하는 개도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는  1886년 멕시코 과나후아토(Guanajuato)에서 태어났습니다. 헌신적인 가톨릭 메스티조(스페인*북미 원주민이 섞인 라틴 아메리카 사람) 출신의 어머니와  크리올로(중남미 태생의 유럽계의 사람)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디에고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은 어릴 적부터 빛이 났고 그의 첫 번째 벽화를 벽에 칠할 수 있도록 안 방을 내주면서  그의 커리어는 시작됩니다. 디에고 리베라와  애니메이션 <코코>의 고향인 '과나후아토' 먼저 구경해 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3G20IMxSyrg

 

 

 

6살 때  그의 가족은 과나후아토에서 멕시코 시티로 이주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디에고를 카판티에 카톨릭 대학에 보내기로 결정하지요. 10살이 되자 리베라는 직업 군인이 되기를 바라는 그의 아버지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예술학교에 다니고 싶어 합니다.

 

 

12살 때, 산 카를로스 미술학교에 정식 등록했고, 그곳에서 그는 보수적인 유럽식 회화 기법을 답습하며 교수진의 진부한 커리큘럼 아래 전통 그림과 조각 기술을 공부하게 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원근법, 색채, 앙플렌 에어(en plein air) 기법 등의 전통 기법을 익히지요. 또한 리베라는 멕시코 예술혁명의 이데올로기 세력 중 하나이자 토착공예와 멕시코 문화의 확고한 옹호자였던 게라르도 무릴로(Gerardo Murillo)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1905 두 학생은 사비아 머드나 잡지의 편집자들이 기획한 전시회에서 다른 유망한 예술가 그룹과  합류하게 됩니다. 무사히 학업을 마친 리베라는 그 이듬해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 미술 전시회에서 24점이 넘는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대의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라 에이지" 즉 "트레싱"은 인상주의의 요소들을 받아들여 독특한 느낌의 색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게라르도 무릴로(Gerardo Murillo)의 지원으로 리베라는 1906년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는 정부의 보조금을 받게 됩니다. 스페인에서 리베라는 프라도 박물관에서 본 엘 그레코(El Greco) 벨라스케스(Velasquez), 프란시스코 고야(Goya), 플랑드르 거장들의 작품을 실컷 연구하게 되지요. 훗날 그의 그림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됩니다. 스페인 현실주의 화가 에두아르도 치카로(Eduardo Chicharro)의 스튜디오에서 리베라는 현실주의 와 인상주의의 요소를 담은 작품인 아빌라의 네이트씬과 같은 그림을 그립니다. 다다이즘 시인 라몬 고메즈 데 라 세르나(Romon Gomez de la Serma)와 작가 라몬 잘레 인끌란(Ramon Valle-Inclan)등 마드리드 전위예술의 유력인사들과 알게 되지요.

 

 

 

 

1908년  마드리드에서 파리로 이주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와 그의 아내인 잔 에뷔테른을 포함한 몽파르나스 공동체의 다른 예술가들과 몇 년 동안 함께 살기도 합니다. 1909년 리베라는 발레 인끌란과 함께 파리와 벨기에를 여행했고 그곳에서 12년간 리베라의 파트너가 될 러시아 화가 안젤리나 벨로프(Angelina Beloff)를 만나게 됩니다.

 

 

 

<The House on the Bridge>,1909 /wikipedia

 

 

1910년 혁명이 시작된 멕시코 시티로 잠시 돌아온 리베라는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에서 그의 첫 전시회를 제의 받게 됩니다. 리베라의 복귀는 1917년까지 계속된 멕시코 혁명의 시작과 일치합니다.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리베라의 전시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작품 판매로 벌어들인 돈 덕분에 유럽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고요. 리베라는 이 전시회에서 <Head of a Breton Woman>등 6점의 그림을 선보입니다. 이 시기에 완성된 <Breton Girl>과 <The House on the the Bridge>등 여러 작품들은 빛의 변화적인 힘에 대한 인상주의의 초점을 잘 보여줍니다.

 

 

 

리베라가 멕시코를 잠깐 방문한 후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스타일은 20세기 초 2세기 동안 유럽에서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큐비즘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입체파들은 기하학적 형태나 교차하는 평면을 통해 단일 주체의 다중 형상을 묘사하려고 했거든요. 파블로 피카소와 사망한 폴 세잔의 영향으로 리베라의 그림은 점차적으로 더 추상적이 되어갑니다. 그는 큐비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갔고 , 큐비즘만이 진정한 혁명적인 그림의 형태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리베라는 미술평론가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와의 폭력적인 사건에 이어 다른 구성원들과의 어려운 관계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 결과 피카소(Picasso), 브라크(Braque), 후안 그리스(Juan Gris),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 자크 립시츠(Jacques. Lipchitz) 와의 우정이 끝나게 됩니다.

 

 

리베라는 이 사건 이후 세잔(Cezanne)과 앵그르(Ingres)와 같은 신고전주의 화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구상 회화의 재발견으로 초점을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1912년의 톨레도 관점은 눈에 띄는 건물과 입체파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고요. 다음 해부터의 <오스카 미스테차니노프의 초상화(Portrait of Oscar Miestchaninoff)는 리베라의 스타일에 대한 입체파적 영향력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1913년까지, 예술가들은 그의 예술에서 큐비즘을 완전히 받아들였는데, 이는 <Woman at a Well>과 <Sailor at Breakfast>같은 작품들에 의해 증명됩니다. 그는 피카소(picasso),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앙드레 로테(Andre Lhote ) 같은 사람들이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이 작품을 전시한 살롱 드 오토민 전시회에 작품을 제출하여, 미술계의 부정적인 반응과 긍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Motherhood Angelina and the Child Diego>,1916, Cubism/widipedia

 

 

 

1916년의 <Motherhood: Angelina and the Child>는 리베라의 마지막 순수 입체파 그림들 중 하나입니다.  그의 예술적 발전은 멕시코 혁명과 1917년 러시아 혁명과 같은 최근의 정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방향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는 노동계급과 그의 멕시코계 유산의 요소들을 결합시킨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고전예술을 공부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할 수 있는 또 다른 보조금을 받은 리베라는 1920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에트루스칸, 비잔틴, 르네상드 미술품을 베꼈고, 르네상스 시대의 14세기와 15세기의 프레스코화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듬해 멕시코로 돌아온 그는 벽화 작업에 참여하게 되고요. 리베라는 벽화주의자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와 멕시코의 현실주의자 데이비드 알파로 시크로스를 포함한 한 무리의 예술가들과 함께 후원 벽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됩니다. 리베라의 첫 번째 장르인 "창조"는 그가 멕시코 시티의 국립 준비학교 강당 벽에 그린 작품인데, 르네상스 후광을 가진 천상의 주인을 장엄하게 표현했습니다.

 

 

1921년 호세 바스콘셀로스(Jose Vasconcelos)가 멕시코 교육부 장관에 임명되자 리베라는 파트너인 안젤리나 벨로프(Angelina Beloff)뿐 아니라 1919년 리베라와 함께 딸 마리카를 둔 또 다른 러시아 화가 마레브나 스테벨스카(Marevna Stebelska)를 남겨두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Pan America Unity>, 1940/Pixels

 

 

리베라는 고전과 고대 예술에 대한 그의 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아 예술적 관점을 다시 일깨워 멕시코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교육부 미술 프로그램의 후원을 받아 많은 콜럼버스 이전의 고고학 유적지를 방문하여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국립예비학교에서 제작되고 <창조(Creation 1922)>라는 제목의 그의 첫 벽화는 서양 미술의 강한 영향력을 보여주게 되죠. 리베라는 곧 기술노동혁명조합에 가입하고 1922년 멕시코 공산당에 입당함으로써 지역 정치에 도 관여하게 됩니다. 이때 멕시코 시 교육부와 차핑고(Chapingo)의 국립농업학교에서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됩니다. 후자의 프로젝트 동안, 그는 그의 벽화를 모델로 한 이탈리아 사진작가 티나 모도티(Tina Modotti)와 관계를 맺게 되죠. 그 사건을 계기로  그의 두 번째 아내 루페 마린(Lupe Marin)과 헤어지게  된다.

 

 

 

<Flower Vendor>,1942/출처: Diego Rivera

 

 

 

내게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민과 희망을 아주 강렬하게 느끼게 해주는 출신 배경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해 주고 더 나은 세상을 보게 해줘야 한다는 게 나의 희망입니다.
(디에고 리베라)

 

 

 

 

리베라가 30대가 되었을 때 그는 단순한 선과 풍부한 색상을 가진 큰 인물들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의 장면들 중 많은 부분이 광부, 농부, 산업 노동자와 농민 같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의 작품 <Flower sellers with calla lilies>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 중 하나이죠.

 

 

디에고 리베라의 대표작 < 꽃 파는 사람>입니다. 카라가  풍성하게 한 바구니 담긴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더 아름다운 이유는 그 무거운  꽃바구니를 힘겹게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와 그 꽃바구니를 들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꽃을 사서 보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마음은 분명 다르겠지요. 언뜻 보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이 그림의 비밀은 뒤에서 무거운 카라 꽃바구니를 짊어지게 시키는 사람의 보이지 않는 손과 발, 그리고 머리에 있습니다. 멕시코 여인은 무릎을 꿇고 무거운 카라 꽃바구니를 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도 파는 사람에게는, 가난한 서민에게는 고된 노동이라는 디에고 리베라의 연민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1927년 리베라는 10월 혁명 1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는데, 이 경험은 그가 극도로 고무적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9개월 보내며 미술 학교에서 기념비적인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고요.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리베라는 알프레드 H.자르 주니어 (Alfred H. Barr,JR.)를 만났는데 알프레드 바르는 친구이자 후원자가 될 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관의 책임자가 될 중요한 인물이었죠. 화가인 프리다 칼로(Frida Kahlo)와 결혼하여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2023.12.13 - [지식&교양] - 50-52. 프리다 칼로(Frida Kahlo,39)

 

50-52. 프리다 칼로(Frida Kahlo,39)

2017년 추수감사절 기간 동안 북미 1위 를 차지한 애니메이션 이 하나 있습니다. 작품 입니다. 멕시코 마을에 사는 소년 미겔이 '죽은 자들의 세상'에 들어가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작품 속에 눈에

sun-n5y2.tistory.com

 

 

 

 

교육에 대한  그의 급진적인 생각은 그를 보수적인 교직원과 학생 단체들 사이에서 적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그는 정부와의 협력으로 공산당으로부터 제명되는 부침을 겪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리베라는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 드와이트 W. 모로(Dwight W. Morrow)에게 지지를 얻어 그 도시의 역사를 묘사한 쿠에르나바카(Cuernavaca)의 코르테즈 궁전 벽화를 그리게 됩니다. 리베라의 작품을 흠모한 모로는 예술가에게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 미국으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Detroit industry Murals>,1933, Detroit Institute of Arts.US/ wikipedia

 

 

리베라는 미국에서 4년 동안 머무르게 됩니다. 샌프란시스코, 뉴욕, 디트로이트의 벽화를 그리며, 노조, 교육, 산업, 예술의 강력한 힘을 찬양하며 일을 하지요. 뉴욕에서 그는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1인 전시회로 5만 7천 명의 관람객이라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벽화 중 일부는 물리적 손상으로 위협을 받았다는 논란도 있었습니다. 리베라의 미국 모험은 레닌의 초상화를 없애기를 꺼리는 리베라의 마음과 록펠러가에서 데이비드 록펠러의 모욕적인 초상화라고 여기는 것 때문에 존 D. 록펠러 주니어가 록펠러 센터의 로비를 위해 의뢰한 벽화, < 교차로에 서 있는 남자( Man at the Crossroads)>의 파괴를 명령했을 때 1933년 끝이 납니다.

 

 

<The Allegory of California >, /TheHistoryof Art.org

 

 

 

 

 

리베라는 1930-1931까지 샌프란시스코에 세 개의 벽화를 그리게 됩니다. 

<The Allegory of California>이 작품은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몸집이 큰 여성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그들 의사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The Making of a Fresco Showing the Building of a City>은 샌프란시스코 미술대학에서 그가 그린 벽화의 제목으로 각각 다양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몇 개의 방이 있는 열린 건물을 특징으로 합니다. <Pan American Unity>이며,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디에고 리베라 극장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것을 다섯 가지 프레스코스트의 웅대한 사업이었습니다.

 

 

 

 

1932년 그는 포드 자동차 회사의 발전을 묘사한 <Detriot Industry mural>이라고 알려진 27개의 패널을 그립니다. 리베라는 조수들의 도움으로 1933년에 완성한 이 시리즈를 그의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fICWhs8NsI

 

 

 

 

 

 

1937년 그와 칼로는 러시아 주요 공산당 지도자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와 그의 아내가 정치적 망명하는 것을 돕게 됩니다. 트로츠키 부부는 코요아칸(Coyoacan) 교외에 있는 "블루 하우스"에 2년 동안 리베라, 칼로와 함께 살게 되고요.

 

 

 

 

1949년  리베라는 멕시코 시티의 궁궐 미술관에서 50년 간의 그의 작품을 기념하는 기념 전시회를 갖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 몇 해 동안, 디에고는 때로 휴대용 패널로 작업하면서 벽화를 계속 그립니다. 그는 또한 많은 수의 유화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보통 멕시코 부르주아나 아이들, 또는 미국 관광객의 초상화를 제작했다고 합니다. 그의 소장품은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의 위대한 신전에서 영감을 받아 리베라가 직접 디자인한 건물인 아나우악 박물관(Anahuacalli Museum)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프리다칼로 (Frida kahlo)의 사망과 함께  1946년 이후 그의 미술상이자 권리보유자인 엠마 허타도(Emma Hurtado)와 1955년 결혼합니다. 프리다의 부탁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암 치료를 위해 소련 여행 후, 1957년 멕시코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디에고 리베라의  형태와 색채는 멕시코의 전통과 국민성에 뿌리를 박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멕시코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 할 수 있고요.  리베라는 그의 재능을 서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사용한 지역 사회 구성원의 로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의 작품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방미술 프로젝트와 같은 프로그램들을 고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예술가들이 건물의 측면에 일상생활의 장면을 그리는 것을 허용하게 된 거지요. 그의 작품을 후기 벽화 화가 벤 샨과 토마스 하트 벤튼 그리고 추상 인상파 화가 잭슨 폴락과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미술관을 벗어나 공공영역에서 예술을 접목시켜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디에고 리베라가 준 선물인 것 같습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