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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소비자들은 제품을 산다기보다 제품에 표기되어 있는 브랜드를 산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미 브랜드는 기업의 이미지나 무형의 가치 창출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행용 가방에서 시작해 안경, 시계, 신발, 향수 등 다양한 상품 라인에서 수많은 여성의 마음을 훔치는 기업이 있습니다.

 

Louis Vuitton, 나무위키

 

 

루이비통의 역사는 1821년 프랑스 안쉐(프랑스와 스위스 접경지대)라는 작은 마을의 살던 목공 집안의 한 아이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연스레 목공기술을 익히던 그가 14살이 되던 해 집을 나와 파리로 떠나게 됩니다. 썰에 의하면 계모의 냉대가 심해 떠났다는 말도 있더군요. 땡전 한 푼 없었던 루이 비통은 4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파리에 도착합니다. 돈 떨어지면 근처 가게에서 일하고 다시 걸어가고 이런 식으로 말이죠. 차를 타면 5시간 남짓 걸릴 거리를  1년이 되어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후 당시 파리에서 가방 제작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무슈 마레샬 아래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17년간 일을 하며 그의 섬세하고 특별한 기술은 유명해졌고 귀족들 사이에서 이름도 알려지게 됩니다.  많은 양의 짐을 싸는데 탁월한 기술을 갖췄던 루이비통은 프랑스 왕실 황후 외제니 드 몽티조(나폴레옹 3세)의 전담 패커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외제니 황후의 후원하에 파리 뇌브 데 카푸신 4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건 포장 회사를 개업합니다. 이는 오늘날 루이 비통의 뿌리가 되는 회사인거죠.

 

 

당시 트렁크는 현대에서 흔히 만들어지는 사각형이 아니었습니다. 윗부분이 볼록하게 생겨 차곡차곡 쌓기 힘든 모양새였지요. 쉽게 말하면, 애니메이션  영화의  보석상자 모양새라 생각하면 좋을 듯싶습니다. 이러다 보니 재수 없이 자신의 트렁크가 밑바닥에 깔리게 되면 안의 내용물이 부서지거나 트렁크가 망가지기도 했답니다. 혹은 물방울이나 비를 피하기 위해 윗부분을 둥글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여러모로 짐을 쌓기 불편한 구조였던 거지요.

 

 

 

아니에르 공방, 사진출처: Oliver Pilcher

 

아니에르 공방, 사진 출처: Oliver Pilcher

 

 

 

이에 착안하여 루이 비통은 트렁크를 평평하게 만들어  마차에 쌓기 편한 구조로 만들어 냅니다. 모양뿐만 아니라 기존의 나무재질에서 루이 비통만의 목공기술을 살려 특별제작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라는 소재로 방수처리한 천을 사용하게 되지요. 이러한 혁신적인 트렁크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기존 매장에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자 1859년 파리 근교 아니에르에 공방을 세우게 됩니다. 아니에르에 있는 이 트렁크 공방은 지금까지도 트렁크 제작을 하는 아주 특별한 장소입니다. 1885년 영국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매장을 열면서 첫 해외 지점도 오픈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72EbS5yKvA

 

 

 

루이 비통의 획기적인 기술과 명성은 아들 조르쥬 비통에게로 이어집니다. 인기가 많은 만큼 쉽게 모조품을 만들어 파는 경우들이 많아지면서 골머리를 앓게 됩니다. 상류층들이 주로 사용하는 이 트렁크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훔쳐가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막기 위해1886년 소매치기들이 가방을 쉽게 열지 못하도록 가방에 자물쇠를 부착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냅니다. 지금도 이 잠금장치 기술은 요긴하게 쓰이는 중이라고 합니다.  

 

 

 

루이 비통의 대 성공으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의 모조품들이 판을 치자 1888년 새로운 재질의 제품을 개발합니다. 이때 나온 것이 루이 비통의 대표적인 제품인 다미에 (체크무늬)캔버스입니다. 다미에 캔버스의 모조품들도 끊임없이 나오자 1896년 루이비통의 상징적인 패턴 모노그램 캔버스가 탄생합니다. 또 탐험가들이 가방을 주문하는 경우도 있어 아들 조르쥬는 모노그램 제품들을 들고 튀니지 사막을 횡단하며 견고성을 시험할 정도로 힘을 쏟습니다. 이 정도면 장인정신 최고 아닌가요? 샤넬이 직접 자신의 가방을 만들어 달라며 주문제작한 '알마 백'도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백을 주문해 만들어 낸 '스피디백(3초 백)'도 있고요.  대중교통이 용이해지며 트렁크나 여행용 가방을  만들 던 루이비통이 손가방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창업주 루이 비통이 죽고 경영권을 이어받은 조류즈 비통은 회사를 더욱더 성장시킵니다. 1914년 상제리제 거리에 세계에서 가장 큰 여행제품 매장인 7층짜리 매장을 세우게 됩니다.

 

 

1936년부터 1970년까지 3대 가스통 루이 비통이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프랑스 전역에 다수의 매장들을 열기 시작하였으며 파빌론백(빠삐용 백)등 상품 라인 넓히기 시작합니다. 

 

 

1970년부터 4대 마이클 비통이 가업을 이어받게 됩니다. 이때부터 유럽을 넘어 본격적으로 아시아와 신대륙에서 인기를 끌며 세계화가 진행됩니다. 특히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이백을 사기위해 파리에 오면 2,3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다고 해요.  일본에서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이 백을 많이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1977년 창업자 증손녀의 남편 앙리 라카미(철강유통사)가 경영권을 승계합니다. 그는 루이비통이라는 이름이 지닌  가능성을 식구들보다 먼저 알아보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공격적인 사업가이기도 했고요. 북미시장에 공을 들이고, 1978년 일본시장, 1984년 한국에 매장을 엽니다. 세계 속에 명품 여행용 가방, 핸드백 만드는 가방업체로 뻗어나간 시기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2fEl9AUF4I

 

 

https://www.youtube.com/watch?v=uDPyPwbU1Ok

 

 

 

 

하지만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가족 경영이 아닌 외부경영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987년 샴페인 브랜드 모엣&샹동, 꼬냑 브랜드 Hennessy와 합쳐져 LVMH라는 종합 명품 집단으로 탈바꿈하면서부터지요. 당시 크리스 찬 디올을 소유하고 있던 베르나르 아르노(별명: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늑대)가 LV 측의 요청으로 지분을 투자하여 지분 싸움에 참전하게 되고 이는 그룹의 역사와 뿌리 자체를 바꾸는 선택이 됩니다. 아르노는 경영자였지만 누구보다 변화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989년까지 공격적인 지분 인수로 그룹 전체의 43.5%를 확보하며 실권을 장악합니다. 그는 관습을 거부하는 매력적인 캐릭터 디자이너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소수의 특별한 창조적인 디자이너 들은 돈을 벌어도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요. 돈보다 그들이 가진 특별한 이미지와 캐릭터에 더 끌린다고 보았던 거지요. 

 

 

마크 제이콥스, 사진출처: 나무위키

 

 

이후 그는 80-90년 대 셀린느, 겐조, 벨루티, 렐랑, 로에베 등의 브랜드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입니다. 특히 1997년 젊은 천재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하고 동시에 그를 그룹의 총괄 디자이너로 임명하며 루이 비통이 대격변을 맞기 시작합니다. 일명 3초 백으로 불리는 PVC라인의 모노 그램 가방을 대중화시키며, 루이 비통의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뛰기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큰 규모까지 크게 됩니다.

 

 

 

 

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재미없는 요소를 뽑아내
화려한 것으로 탈바꿈시키기를 좋아한다.
어쩌면 속물적인 반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 마크 제이콥스-

 

 

평소 광적인 아트 컬렉터였던 그는 무라카미 타카시, 리처드 프린스, 스테판 스프라우스 등의 현대 미술가들과의 협업은 물론 더 나아가 퍼렐 윌리엄스를 시작으로 마돈나는 물론 카니예 웨스트 같이 떠오르던 셀럽과도 협업을 진행하며 유행을 선도합니다. 아주 특별한 능력 있는 관종이었던 거지요. 탁월한 캐릭터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드는 그런 디자이너였습니다. 제이콥스 덕분에 콜라보 라인을 적절하게 결합시켜  루이비통이 명품 가방 업체에서 명품 브랜드로 우뚝 서게 되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디자이너의 캐릭터를 중요시했던 아르노 회장의 베팅이 맞아떨어진 거지요. 마크 제이콥스가 수장으로 있던 기간 동안    (1997-2013)  루이비통이 5-10% 꾸준히 성장한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2013년 11월 마크 제이콥스가 떠나고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렌시아가를 맡고 있던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임명됩니다. 루이 비통의 클래식 팬들은 마크 제이콥스가 너무 상업적인 방향으로 브랜드를 밀고 나가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루이 비통의 위상을 낮추었다는 평이 있어 그가 떠난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미래지향적이면서 고풍스러운 미니멀 디자인으로 남녀노소 호불호 없이 브랜드를 유지합니다. 조용하고 우직하게 브랜드를 고급화하는 방향으로 말이죠. 또 이 시기부터 니콜라와 발렌시아가 시절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셀렙들이 루이 비통으로 넘어와 셀럽 위주의 캠페인 홍보, SNS활용이 본격화됩니다.

 

 

한편, 2011년부터 남성 부문을 이끌던 킴 존스가 2018년 가을, 겨울 컬렉션을 끝으로 디올로 건너가며 루이 비통을 떠나고, 오프화이트의 버질 아블로가 새 수석 디자이너가 됩니다. 당시 럭셔리 브랜드 중에서도 최상위 브랜드인 루이 비통의 남성 부문 디자인 수장으로 영입된 인사조치는 상당히 파격적이라는 평입니다. 거기에 역사상 첫 흑인 디자이너에다 비전공자라는 점 역시 여러모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2021,11월 28일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집니다. 사인은 2년 간 투병해 왔던 희귀성 심장 혈관 육종(심장암)으로 사망 전까지 투병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고 다음 컬렉션들과 아이템들을 연구하고 활발한 활동을 했던 점이 많은 사람들을 인상 깊고 안타깝게 하는 부분입니다. 

 

 

 

2023년 2월, 버질이 떠난 남성 부분의 새로운 디렉터로 페렐 윌리엄스가 임명됩니다. 동년 여름 진행될 SS24 컬렉션부터 업무를 맡게 됩니다. 버질에 이어 패션 비전공자 출신의 유색인종이 다시 한번 임명됩니다. 그는 21세기 대중음악계를 대표한 아이콘이기도 해서  엄청난 파격성을 띈 인사였지요. 루이 뷔통 입장에서는 영국계 엘리트 디자이너들 보다는 매출 신장을 위해 이미 인지도가 높고 다방면에서 특출함을 보이는 페렐이 오히려 안전한 선택이었다는 의견도 다수 존재합니다. 다만 아직 풀 컬렉션을 진행해 본 경험이 없고 , 과거 디자인했던 제품들 또한 호불호가 꽤나 갈리는 편인지라 우려 섞인 반응들 또한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2023년 6월 20일, 페렐의 SS데뷔 컬렉션이 파리 패션위크 오프닝날에 진행되었습니다. 이미 루이 뷔통 내에는 버질이 없는 동안 컬렉션을 전개해온 특출 난 제단사들과 디자이너들이 있었습니다. 비 전공자인 퍼렐은 스트릿 컬렉션을 주된  방향성으로  밀고 가며 창의적인 부분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얼굴마담 격이라는 우려 섞인 의견도 다수 있었지만 말이죠. 이러한 예상과 달리 전임이었던 버질 아블로와 유의미하게 비교될 정도로 스트릿이랑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테일러링 착장으로 선보였고, 얼굴마담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기존 LV 다미엔 패턴에 카모플라쥬 색을 입힌 '다모플라쥬'패턴을 쇼 초반부에 배치하며 새로운 퍼렐 본인의 시그니쳐를 선보입니다. 과거 샤넬과의 컬래버, NIGO와의 오랜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한 퍼렐만의 색을 진하게 입혔는데 본인이 샤넬에도 오랫동안 몸 담았던 터라 중후반부에 대거 등장시킨 진주 장식과 트위드, 크롭 기장에 꽉 끼는 재킷 특유의 핏 등 샤넬의 색이 너무 들어간 것 아닌가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 말이죠. 전체적으로 안전한 선택이었다는 비판이었습니다.

 

https://youtu.be/pDsjAIrmSKM

 

 

의례 그런 패션쇼 이려니 하고 보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뮤지션 출신이라 음악 선택도 탁월했고요. 종교적인  가스펠 음악을 패션쇼에 삽입하면서 예상치 않은 신선한 조합에 몸이 같이 움직이더군요. ' 조이'라는 음악을 흥에 겨워 신들리듯 불러대는 모습에  마음까지 시원해졌습니다. 럭셔리, 고귀함, 스트릿을 혼합한 패션쇼, 그리고 재해석능력이 뛰어났다는 개인적 생각과 함께 패션 좋아하는   남자들의 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덕분에 루이 비통은 더 커진 파이를 가져갈 수 있겠다 싶고요. 보수적인 집단이면서 오픈 마인드로 그 시대 사람들과 조금 더 소통하려는 루이 비통의 노력이 퇴색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장인정신을 갖춘 기업으로 첫 마음을 잃지 않는 기업이면 더 좋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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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 시간보다 늦은 시간에 미술관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이미 파장 분위기였고, 입구 쪽으로 새로운 그림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전시회를 위해 작업을 하느라 기계소리까지  윙윙거려 전체적으로  어수선했습니다. 마음이 급해 후다닥 그림을 보고 올 요량으로 전시관을 휘젓고 다녔지요. 그러다 관심 있는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와 자세히 보려고 그림 쪽으로 향했습니다. 디테일을 확인하고 싶어서요. 그런데 생각 없이 뒤로 물러서다 그만  백인 할머니의 발을 밟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일로 당황했고 할머니는 구시렁거리시며 기분 나쁜 황당함으로 언짢은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모기만 한 소리로 사과를 하고 얼른 자리를 피했지요. 관람객과 그림 사이의 거리감도 중요하지요.

 

 

 

자신의 작품을 45cm에서 봐 주기를 바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러시아 출생의 미국인 화가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입니다. 로스코의 그림은 평면 캔버스에 단순한 형태와 순색(명도와 채도가 높은 색)이 빚어내는 강한 울림의 미학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이 쏟아내는 고요하고 정적인 에너지가 어찌나 크고 격정적인지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왠지 모를 경건함마저 들어 혹자는 그의 그림을 종교적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에게, 이것도 그림이야?'

"네모, 색 몇 개 ... 작가가 너무 날로 먹는 것 아냐?", "네모와 색위에 달 하나 그리면 화투그림이네.", "이런 그림이 도대체 왜 이렇게 비싼 거야?" 하며 반론을 제기하는 관람객들도 있지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림은 사람과 교감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며
감상자에 의해 확장되고 성장한다.
-마크 로스코-

 

 

 

 

너무 단순한 그의 그림 앞에 관람객들은 당황합니다. 저런 그림이 왜 값이 비싼 지 이유조차 아리송해 고개까지  갸우뚱 하게 되지요. 그러나 마크 로스코 작품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그 단순함에서 비롯됩니다. 전(before)과 후(after)가 있듯이 마크 로스코가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을 알고 다시 이 그림들을 바라보면 뭔가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23년 뉴욕으로 온 뒤 전설적인 예술 학생 연맹에서 수학한 것을 제외하면 마크 로스코는 정식 미술 수업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마크로스코에게는 화가 밀턴 에버리(Milton Avery)라는 중요한 스승이 있었으며, 에버리의 절제된 형상, 미묘한 색감은 젊은 로스코의 작업 방향에 심오한 영향을 끼칩니다. 젊은 시절 드라마에 가졌던 관심을 발전시켜 신화와 심리 분석서들을 닥치는 대로 탐독했고, 렘브란트의 그림, 모차르트의 음악, 니체의 철학은 마크 로스코의 사상에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합니다.

 

 

 

The entrance to the subway,1938,그림출처:Arthive

 

 

 

 

 

모든 시작점에 선 창작자들이 그러하듯 로스코 역시 전원 풍경화, 실내화, 도시 풍경화, 정물화 , 그리고 뉴욕의 지하철 그림들 등 다양한 시도를 해 봅니다. 그때 그려진 그림들 중 하나입니다. 지하철이라는 폐쇄적 공간을 평면적이고 냉소적으로 그려낸 초기 작품이지요. 작가는 인간 소외와 소통의 단절을 표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1930년대 다다이즘과 피카소의 그림이 유명하던 시절 마크 로스는 그리스비극, 니체의 비극, 셰익스피어 비극 등에 심취합니다. 한마디로 주류화풍과 거리 두기를 한 셈이지요. 대신 신화적 요소를 차용해 오기 시작합니다. 

 

 

전쟁이 잃어 난 후
절단된 신체 말고는 그릴 것이 없다.

 

 

 

마크 로스코<안티고네>,1941,그림출처:www. nga.gov

 

 

프로이트가 자신의 심리학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인물을 사용하듯, 마크 로스코 역시 초기에는 신화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표현합니다. 그런 자신을 '신화 제작자'라 칭하기도 했고요. 그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신화야 말로 모든 문화를 관통하며 인간의 본원적인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느낀 인간의 불행을 한 차원 높여 보편적인 불행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안티고네>를 통해 작가는 인간의 본원적인 비극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오이디푸스의 딸인 안티고네가 자신의 동생이자 반역자인 폴리네 이케스의 시신을 길거리에 방치하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땅에 묻어주는 모습에서 국가에 맞서는 개인의 고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2차 대전과 전쟁 직후에 그린 작품들은 상징적이며 그리스 신화나 기독교적 모티브에 기반을  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로스코는 순수추상회화로 옮겨가던 과도기 시절에 소위 '멀티폼(multiform)'이란 것을 만들어 냅니다. 기존의 그림들과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거지요. 멀티폼이라고 불리는 이 방식은 캔버스에 색 덩어리를 이용하여 공간과 색을 배치하는 방식입니다. 로스코는 자신이 평생을 염원해 온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 것이지요. 이러한 추상을 그리기 전, 그는 면의 크기와 색의 농도를 머릿속에 수없이 조합한 후 직관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에 비해 실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매우 짧았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해왔거든요.

 

 

<Untitled,1948>, 마르코 로스

 

 

<무제>를 살펴보면, 마치 색덩어리들만 뭉쳐있어 작가가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대부분의 초현실주의 작품에 해당하는 작품군들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이 시기부터 로스코는 존재하는 대상을 그리는 구상표현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작품을 보신 분들은 색이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것 같다고 표현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White Center(Yellow, Pink and Lanvender on Rose),1950, wikipidia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그린 황금기에는 색감의 시대에 비해 작품에 존재하는 색 덩어리의 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사각형 모양도 보이고요.  물 먹은 한지 위의 떠다니는 사각형처럼 말이죠. 그는 밑 칠을 하지 않는 '로우 캔버스'를 통해 색을 여러 번 덧칠하는 형식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림에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에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직도 관람객들은 어렵게 느껴지지만요. 실제로 그의 그림은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거대한 캔버스 안에 치열하게 놓인 색채들을 바라보면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림을 앞에 두면 너무 가까워서 놀랄지도 모릅니다. 커다란 캔버스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갖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그는 그런 방식으로 관람자가 작품과 교감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일부러 캔버스의 크기를 크게 만들기도 했고요. 큰 작품 안에서 자신을 찾고 싶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Seagram murals@tate london

 

 

이건...널 위로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야
벽에 거는 장식품이 아니라고...!!
-마크 로스코-

 

 

 

 

 

 

1958년 시그램 회사에서 마크 로스코에게 회사 신축 건물 1층에 있는 고급레스토랑에 위치할 벽화를 그려 줄 것을 부탁합니다.  30년 동안의 재정적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거액의 계약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스토랑에 방문한 후 마크 로스코는 고급스러움에 거부감을 느껴 결국 벽화를 그리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곳에 큰돈을 내고 레스토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돈을 거머쥘 기회를 자신의 그림에 대한 철학과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하였습니다. 미술품이 단지 장식품이 되는 것을 거부한 거지요. 이 일화는 그가 그림에 대해 어떠한 철학을 가졌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현재 영국 런던 테이트 컬렉션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앤디워홀, 리히텐슈타인 등 팝 아트가 트렌드일 때 로스코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유로움 대신 고상함을 택합니다. 

 

 

그림과 마주하라.

 

 

 

 

Rothko Chapel, 그림출처:Pinterest

 

 

 

나는 색채나 형태에는 관심이 없다.
비극, 아이러니, 운명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가진 것과 똑같은
종교적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 대한 철학이 잘 표현되는 것이 바로 로스코 채플입니다.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 위치한 공간으로 예배당에 잘 어울릴 만한 회화 연작을 부탁하였습니다. 1964년-1967까지 14개 이상 작품을 그리고 건축설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당시 로스코는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아침 6부터 마셔대는 술, 줄담배로 심장과 간질환이 있었고  두 번째 결혼한 아내와도 헤어진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 로스코의 힘듦이 고스란히 작품에도 투영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로 검은색 계열로 전성기 때 사용하 던 오렌지 같은 밝은 칼라 대신  어두운 색으로 표현합니다. 로스코는 그 채플을 갤러리이자 사람들의 영혼이 쉬어갈 수 있는 안식처로 탈바꿈해 놓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이런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듯 보이고요.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고 하니 말입니다. 

 

 

 

검게 칠한 캔버스 앞에서 그동안 살피지 못했던 '나'와 조우하게 합니다. 이것은 실랄한 민낯을 스스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묻어 둔 나의 속 이야기를  풀어헤쳐야 하고, 나의 존재론적 고민도 덤으로 하게 되는 것이지요. 못난 자신과의  용서와 화해의 작업을 원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스코의 작품을 바라보며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 신음, 고뇌를 꺼내어 울음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도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 비극적 감정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관람자가 그의 그림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고 깊숙한 내면을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이유에서 어떠한 조형적 묘사 없이 캔버스를 비워두고 대신 강렬한 색의 울림만을 담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IYXyyeGTs0

 

 

 

 

'피로 그린 그림'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제(레드)>로 마크 로스코가 죽기 전에 그렸다고 알려진 작품입니다. 실제로 이 그림을 본 제인 딜렌버거라는 미술사학자는 작품을 보자마자 캔버스에서 공포를 느끼고 마크 로스코를 잡아 줘야 한다고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 기울이지 않았고, 결국 마크 로스코는 10개월 뒤 작업실에서 숨을 거둔 상태로 발견됩니다. 실제 이 작품을 마주하면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운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붉은 나머지 생명이 아닌 오히려 죽음에 서서히 다가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죽기 전 마지막 해에 추상표현주의 작가 마크 로스코(1903-1970)에 집착했다는 얘기는 다들 알고 계시죠. 한 사람은 혁신적인 제품을 만드는 사업가이고, 또 한 사람은 한 세기의 예술 흐름을 바꾼 아티스트입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산 자'는 '죽은 자'의 예술혼과 철학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음이라는 큰 명제 앞에 스티브 잡스도 마크 로스코가 표현하고자 했던 자신을 만나는 작업을 하고 갔을 거라 추측해 봅니다.

 

 

그의 그림에서 나타난 표현의 단순화, 종교적 명상의 태도,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 등 로스코가 견지해 온 모든 사유의 편린들이 잡스의 마지막 순간들과 함께 했을 겁니다. IT 업계에 충격을 던져 준 잡스나 20세기 회화 표현에 혁명을 일으킨 로스코는 그렇게 반세기 차이로 비슷한 길을 걸었고 , 자신만의 사고를 개척했습니다. 스마트 폰을 통해 단순함이 주는 파급효과를 스티브 잡스는 살면서 보았지만 마크 로스코는 로스코 채플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70년 2월 25일 우울증이 심해지며 뉴욕 자신의 작업실에서 자살한 채로 발견됩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앤 컬쳐

 

 # 마크 로스코# 추상회화# 테이트 모던# 로스 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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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한 품종으로 남유럽 지방의 섬나라인 몰타가 원산인 소형견이다. (몰타섬) 지중해에 위치한 몰타에서 인위적인 교배가 아니라 자연 발생한 견종으로 보고 있다.

 

몰타섬, 사진출처:아주경제

 

기원전 1500년경, 페니키아인의 중계무역 장소였던 지중해의 몰타 섬에 유입된 개가 조상으로 여겨진다. 항해 중 선내의 쥐를 잡기 위해서 작지만 재빠르고 활동량이 많은 종으로 개량되었다.  기원전부터 로마나 그리스에서 귀부인들이 몰티즈를 길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애견화의 역사가 오래된 종이다.

 

 

 

 

말티즈 성견, 사진출처:나무위키

 

 

작은 체구와 깨끗해 보이는 하얀 털을 가진 귀여운 외모로 인기가 많다.

키: 수컷: 20-25cm 암컷: 20-23cm

몸무게: 4-7파운드(1.8-3.2kg) 사이, 6파운드(2.7kg) 미만 선호/미국애견협회(American Kennel Club)

            3-6kg 거대 몰티즈도 종종 보임

 

털이 가늘어서 일정 길이 이상으로 자라면 앞다리나 뒷다리의 사이 등, 마찰이 자주 일어나는 부위의 털이 잘 엉켜 관리하기가 까다롭다. 

 

 

 

활발하고 놀기를 좋아하며 주인에게 치대는 성향이 강하다. 눈치가 빨라서 주인의 마음을 민감하게 감지할 줄 알지만 한편으로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 어릴 때 엄격하게 훈련을 시켜 놓지 않으면 나중에 주인이 힘들어진다. 기본적으로 소형견들은 체구가 작은 만큼 쉽게 위협을 느끼고, 이로 인해 공격성이 높은 편이다. 특히 다른 동물에 대해 공격성과 질투심을 크게 표출하는데 다른 동물의 범위에는 개나 고양이뿐만 아니라 인간도 포함된다. 덩치가 작아 만만한 인간 아이들을 경쟁자로 생각하고 물거나 짖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호기심 및 공격성이 강해 낯선 사람과 마주치면 쫓아가서 미친 듯이 달려든다. 가게나 학원 같은 곳에 놓아둘 경우 늙어서 체력이 없거나 사람들을 많이 마주쳐 적응이 된 경우가 아니라면 들어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달려든다. 엄격하게 훈련을 시켜 놓지 않았거나 습관이 배지 않은 경우 행인에게 무조건 달려든다. 소형견이라도 산책 시 반드시 하네스를 착용하고 행인에게 달려들지 않도록 잘 컨트롤하고 훈련시키는 것이 필수다.

 

하네스(Harness): 로프에 몸을 고정하기 위해 착용하는 장비. 용도에 따라 패브릭이나 가죽 등의 벨트로 되어 있으며, 몸통이나 하반신, 허벅지같이 크고 널찍한 부위를 전체적으로 감싸는 형태로 되어 있다. 로프에 의해 몸에 가해지는 힘을 넓은 바위로 분산시켜 안정적으로 붙들기 위한 도구이다. 

 

타고난 공격 본능이 강해서 입질도 심하다. 물건을 물어뜯는 것도 문제지만 사람을 물기 때문에 몰티즈의 무는 습관은 반드시 철저히 교육해야 한다. 소형견 중에서 머즐(강아지 주둥이)이 큰 편이어서 악력이 강해 사람을 물면 상처가 생각보다 깊게 나고 대미지가 적지 않다. 

 

 

 

https://www.youtube.com/watch?v=9xFqDi0HOq8 

 

 

몰티즈는 행동이 매우 민첩한 편이기 때문에 소형견들과 비교해도 특히 활동량이 많은 축에 속한다. 또한 민첩한 행동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이나 개를 공격할 때 상대에게 공격하겠다는 시그널을 주지 않고 순간적으로 달려드는 경우가 있어 상당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왕성한 활동성에 비해 골격, 특히 슬개골이 약하기 때문에 슬개골 탈구나 골절 등이 고질적으로 나타난다.

 

 

 

 

 

어린 시절 스트레스, 억압 충격 등에 의해 성격 이상이 오는 경우가 다른 견종보다 많다. 특히 훈련을 잘 안 받으려 하고 훈련을 시키는 견주에게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많이 하고 주인은 주인대로 이런 몰티즈를 확실히 훈육시키기 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견주와 몰티즈 사이에 오해와 스트레스가 쌓여 아무리 말해 도 주인의 말을 절대 따르려 하지 않으며 고집을 피운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달성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인간의 중2병 성향과 유사하다고 보면 쉬울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xMdYicOUYw0

 

 

 

털 빠짐이 적고, 아파트 같은 주택 내에서도 비교적 키우기 수월하여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견종 1위에 올라있다. 그만큼 유기율도 높다는 얘기다. 슬개골이 좋지 않기 때문에 두 발로 서있거나, 격하게 뛰는 일이 많아 자칫하면 수술을 하게 될 수 도 있다. 그래서 높은 침대나 소파에서는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훈련시키고 애견용 계단 등을 놓아주어야 하며, 집에서 몰티즈가 자주 다니는 영역에는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아 주는 것도 방법이다. 또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잦은 편이라 방치하면 눈물자국이 쉽게 생기기 때문에 자주 닦아줘야 한다. 털은 매일 빗겨주고 샤워 주기는 2주 정도로 다른 강아지들과 비슷하게 하면 된다. 너무 예뻐하면 분리불안이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하라. 귀에 질병이 생길 수 있으니 털은 되도록이면 짧게 깎아주길 권한다. 아주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유루증, 눈곱, 눈물자국: 눈물관이 막힘으로 인해 눈물샘 넘침과 눈물자국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종인데 종 자체가 가진 유전병이라고 볼 수 있다. 무리한 소형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부작용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몰티즈 특유의 귀여운 외모는 유전병의 고통을 대가로 얻은 것이라고 해야 함이 옳을 듯싶다.

 

 

건강한 몰티즈를 맞이하고 싶다면 강아지 공장과 연결돼 있을 확률이 높은 큰 애견샵보다 가정분양을 알아보는 것이 좋다.  또한 부모견의 건강을 꼭 확인하고 데려오자. 부모견이 눈물이 많고 눈물자국이 있다면 강아지 또한 눈물이 많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눈곱은 눈곱 빗을 이용하거나 그것이 어려운 경우 물이나 물티슈를 이용해 닦아준다. 눈물자국에 효과가 있는 사료를 급여하는 방법도 있다. 눈 주변 털 길이가 길어지면 찔림 방지를 위해 가위 등으로 털을 잘라내줘야 한다. 심할 경우 동물병원에서 내안각성형술을 실시할 수도 있다.

 

 

#골격문제: 다리가 약해서 골절되기 쉽다. 종의 개량 탓에 나이 들어서 류머티즘염을 많이 앓으며, 이빨이 약해지거나 앞니가 빠지기도 한다. (6-7살) 몸집이 작아 유산할 위험이 있으니 특별히 더 조심했으면 좋겠다.

 

 

#기관지 협착증:숨 쉴 때마다 컥컥거리거나 호흡을 힘들어 할 수 도 있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거나 가루약 처방 혹은 기관지 모양을 잡아주는 관을 삽입하는 수술을 할 수도 있다. 2000년대 이후로 각종 기형을 가진 몰티즈들이 비약적으로 늘고 있다. 강아지 공장에서 무분별하게 번식한 개체에서 주로 이런 문제가 발생하며 대표적으로 사시를 들 수 있다. 양 눈동자가 바깥쪽으로 벌어져 초승달 형태의 흰자가 보이는 형태를 띠는 경우다. 상업적 애견 문화가 짧다 보니 과격함과 공격성을 가진 경우도 브리딩되는 경우가 많은데  브리딩 역사가 긴 독일의 경우 철저히 못하게 막는다고 한다. 

 

 

소형견이 겪을 수 있는 대부분의 질병에 모두 취약해서 키울 때 생각보다 애로 사항이 많을 수 있다. 개의 귀여움에 반해 무조건 데려오기 전에 견주의 준비도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입양하기 전에 견종 특유의 유전병에 대해 이해하고, 발병한 개도 끝까지 안고 갈 각오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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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는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사람입니다. 호퍼는 미국 전통적인 리얼리즘에 새로운 시선과 형식을 가져오면서, 단순한 조형과 분위기적인 조명,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관찰 등으로 유명합니다.

 

그림의 표지에 에드워드 호퍼 그림이 나오면 책이 더 잘 팔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도시의 고독을 그린 화가' 호퍼는 한국에도 팬층이 두텁고요. 그의 그림은 인물들의 외로움과 고독, 도시 생활의 불안정한 면모 등을 잘 표현주고 있습니다. 도시의 일상적 공간을 주로 그렸던  호퍼는 당시 활기찬 분위기를 자아냈던 동료들과 달리 마치 사진 같은 구도속에서 조용한 분위기와 개성 없는 인물,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도심의 고독함을 표현해 냅니다.

 

 

 

에드워드 호퍼<푸른 밤>,1914, Google Arts& Culture

 

 

호퍼의 그림들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샘솟을 수 있는 지 는 단편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 (2017)가 증명해 줄 것입니다.  '공포, 스릴러 소설의 제왕'스티븐 킹을 비롯해 호퍼의 팬인 17명의 소설가들이 서로 다른 호퍼 그림 17점에 영감 받아 쓴 단편들을 모은 것입니다. 샌틀로퍼의 <밤의 창문>을 바탕으로 한 단편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초기 주요작<푸른 밤>(1914)은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로버트 O. 버틀러가 그림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신비롭고 불길한 이야기로 풀어냈습니다. 

 

 

푸르스름한 초저녁 카페에 창백하게 분장한 피에로가 앉아 있습니다. 아이들 생일 파티에 불려갔다 온 분위기는 아닌 듯싶습니다. 흰색 옷차림, 빨간 립스틱, 그리고 삐져나온 담배까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지요. 뒷 태까지 군기 들어 보이시는 군복을 입은 남자도 보입니다. 옛 시절이라면 어떻게 감히 옆 자리 함께 앉을 생각을 했을까 싶습니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현대라서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그리고 베레모를 쓴 남자가 무심한 듯  마주 않아 있습니다. 초록 드레스의 여인은 그런 그들 곁에서 다소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내려다보고 있네요. 그 여인 태도 참 불손합니다. 불가능하지 않지만 보기 쉽진 않은 장면이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현실의 장면인데도 기묘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말입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버틀러의 단편을 풀어가는 방식도 현실과 심리적 환상의 경계에 묘하게 걸쳐져 있습니다.

 

 

퓰리처상(Pulitzer Prize): 미국의 신문 언론, 문학적 업적과 명예, 음악적 구성에서 가장 놓은 기여자로 꼽히는 사람에게 주는 상.

 

Edward Hopper's New York(1925-26),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에드워드 호퍼의 수채화<맨하튼 다리>입니다. 전업 화가가 되는 게 소원이었지만 10년 간 작품을 한 점도 못 팔았기에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때려치울 엄두를 못 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전환기를 맞은 것은 마흔이 넘어서였습니다. 항구도시 글로스터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마침 거기에서 뉴욕예술학교 동창 화가 조세핀을 만납니다. 그녀의 영향을 받아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주선으로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그가 그린 수채화들을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호평을 받은 작품이 미술관에 팔리면서 용기를 얻어 호퍼는 드디어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초기에 프랑스 인상주의 아류에 불과했던 호퍼의 유화가 특유의 맑고 넓은 색면의 유화로 진화하는 데 수채화 창작이 영향을 미쳤다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1942/Google Arts&Culture

 



 

호퍼의 작품과 아카이브를 가장 많이 갖춘 곳은 뉴욕휘트니미술관입니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시카고 미술관이 소장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1942)입니다.  미국 회화사에서 가장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이 그림이 완성된  그 달에 단돈 $3,000에 시카고 박물관에 팔렸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호퍼는
대도시의 권태,
텅 빈 거리와텅 빈 창문들의
고독한 황폐함,
햇빛과 바람이
씻어 내린 듯한
하늘과 거리 포장도로등을 표현하는
위대한 시각 미술의 시인이다.

- 미술사가 데이비드 파이퍼(Sir DavidPiper)경

 

 

그가 작품활동하던 시기는 미국에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로, 회사들이 하나둘씩 파산하고 동시에 실업자들이 늘어나는 비극적인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화가의 역할은 그런  시대상을 표현하는 사람들이고요.

 

 

그림 속 레스토랑의 큰 유리창은 인물들의 행동과 보는 이들을 격리시키고 있습니다. 훔쳐보는 외부인이란 느낌이 들도록 말입니다.  한밤 중에 피곤한 사람들이 빛과 유리로 된  깨지기 쉬운 피난처 속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둠 속의 레스토랑은 빛의 원천으로 그 빛은 보도로 새어 나와 거리가 더 텅 비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림 속 세 사람은 서로 하찮은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제 화면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인물은 중앙에 수직으로 앉아 침묵에 묻혀 고독하게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남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커다란 등판에 '나 , 고독'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습니다. 중절모의 밤새는 남자 그는 왠지 건드리면 무너져 내릴 것 같습니다.

 

 

 

그림에서 가장 밝은 데는
밝은 천장으로
그림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내를 환화게 비추는
아주 밝은 형광등 불빛이 가까이 있다.
- 아내 조 호퍼의 기록-

 

 

호퍼가 습작을 할 때마다 아내 조가 상세하게 기록을 남기는 식으로 작품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환한 천장은 손님들이 서로 나누는 이야기를 명백히 드러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 호퍼의 작품에 들어있는 리얼리즘이라고 하네요. 식사를 하는 바깥쪽으로는 밤으로 보이도록 어두운 색들이  지배적이고요.

 

 

 이 그림에 대해 한 가지 알고 갈 사항이 있습니다. 미국의 저작권법상 그림이 그려진 시기 이후 28년이 되는 해에 예술가 본인 혹은 사망했다면 가족, 주변인이 저작권을 갱신해야 합니다. 문제는 호퍼 사망 후 1년 뒤 그의 아내마저 사망을 했고  이들 부부에게 아이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안타깝게도 호퍼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신경 쓸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는 얘기지요. 결국 갱신되지 않은 채 몇몇 작품의 저작권은 만료된 상태라고 합니다.  사실상 미국에서는 그림이 상업적으로 사용되어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얘기지요. 바로 이 작품이 그러한 경우에 속합니다. 그의 그림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기를 바라지만 상업적으로 함부로 사용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밤의 창문,1928>,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Scala, Florence,Digital image copy 2023

 

 

 

누아르 영화를 좋아했던 호퍼와 앨프리드 히치콕은 서로의 팬이었습니다. 히치콕의 공포 스릴러 걸작'사이코'(1960)에 나오는 으스스한 집은 호퍼의 첫 주요작'철길 옆의 집'(1925)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호퍼의 <밤의 창문>(1928) 작품이 히치콕의 또 다른 명작 <이창>(1954)에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창>은 다리를 다쳐 한동안 집을 못 나가게 된 남자가 심심한 나머지 건너편 아파트 이웃들의 다양한 일상을 훔쳐보다가 살인사건을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타인의 내밀한 삶을 엿보고 싶은 인간의 관찰자적 혹은 나쁘게 말해 관음증적 욕망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입니다.

 

 

<밤의 창문>은 그가 고가 전철을 타고 가다 우연히 본 장면에 인상을 받아 재구성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감시와 엿보기와 관련한 여러 범죄가 떠오르며 불편함을 주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호퍼의 팬인 소설가 겸 미술가 조너선 샌틀로퍼가 이 그림에서 영감 받아 쓴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줄거리는  한 여성이 성범죄자가 남성의 엿보기 습관을 역이용해서 복수를 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Rooms By The Sea,1951>

< Morning Sun, 1952>

<Office in a Small City,1953>

< Second Story Sunlight,1960>

 

 

호퍼의 위 4 작품은 고독함과 도시라는 주제는 같지만, 색감이 너무 예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크게 알려진 바 없는 미국의 한 화가였던 호퍼가 이런 특유의 색감 때문에 한국 한 광고의 모티브가 되어 세련되고 알록달록하고 깔끔한 여상미로 인기를 끈 바 있습니다.(SSG의 TV 광고) 그의 작품과 관련된 그림, 인테리어, 티셔츠 등 지금도 상업적인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Whitney Museum of Amerocan Art, Edward Hopper

 

 

 

에드워드 호퍼는 미국으로 이주한 네덜란드 출신의 부모 밑에서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미술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해 화가의 꿈을 키워나갔지만 한동안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광고회사에 취직했다가 일러스트, 포스트 제작 등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이 와중에도 작품 제작의 끈은 놓지 않고 화가로서의 커리어를 계속했지만 성과는 없었습니다. 되는 건 없고 그렇다고 멈출 수 도 없고 답답한 가운데 정체된 일상을 반복하던 호퍼의 삶에 한 여인이 다가옵니다.  후에 그의 아내가 되는 조세핀 니비슨(Josephine Nivision)입니다. 

 

 

호퍼가 좋아하는 작품 <이층에서 내리는 햇빛>입니다. 이 그림 속 늙은 여인과 젊은 여인 모두 아내 조를 모델로 한 작품입니다. 둘 다 마흔을 넘긴 나이에 결혼을 했습니다.  '조'라는 애칭의 조세핀은 평생에 걸쳐 호퍼의 중요한 조언자이자 모델이 됩니다. 그렇다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 것은 물론 아니고요.

 


그냥 우물에 돌을 던지는 것 같아.
차이점이라면
우물에 던진 돌과 달리
쿵 소리도 안 난다는 거지.(조)
VS
여자 하나와 사는 건
호랑이 두세 마리와 사는 것과 맞먹어(호퍼)


어떠신가요? 글 속의 두 사람의 성격이 느껴지시나요?

호퍼가 매우 자기중심적인 데다가 둘은 외모부터 성격까지 정반대였습니다. 호퍼는 2m 가까운 키에 돌덩어리처럼 느리고 과묵했고요. 조는 152cm 키에 새처럼 재빠르고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결혼생활이 그러하듯, 사랑 넘치는 부부 생활은 아니었습니다. 때로 몸싸움까지 동반한 격렬한 부부싸움은 기본값이 될 때가 더 많았답니다. 그럼에도 이 부부는 해로했답니다. 개인적으로 '호퍼'라는 창작자와 그를 키워내는 매니저 '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퍼의 아내 조는 늘 참지는 않았어도 자신의 커리어를 과감히 희생하고 양보한 측면이 컸던 것 같습니다. 아내 조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호퍼의 스케치와 조가 남편 호퍼를 위해 꼼꼼히 기록한  작품 장부들을 보면 같은 예술가 동료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조합을 보는 듯도 합니다. 둘이 함께 본 수많은 연극 티켓은  그곳에서 영감을 받아 남편 호퍼에 의해 작품으로 표현됩니다. 작품이 막힐 때면  아내 조는 기꺼이 들어주는 청자이자  조언이나  대화를 하며 남편을 격려하는 동료화가였던 셈이지요. 소위  예술가식 사랑법이었나 싶기도 합니다. 호퍼가 84세에 세상을 떠나자 불과 열 달 뒤에 조도 세상을 떠납니다.

 

 

 

호퍼의 그림들은 구도가 심플하면서 연극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하고 크고 밝은 삭면이 시원스러운 쾌감을 주기에 광고에 잘 녹아든다고 합니다. 호퍼는 전업 화가가 되기 전에 광고, 잡지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던 경험이 그의 그림에 녹아들었던 거지요. 보는 이의 눈을 빠르게 휘어잡아야 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의 감각이 그의 과묵하고 고독한 그림에 은근히 살아 있답니다. 비록 싫어하는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cQ4JKxxukY

<셸리에 관한 모든 것(Shirley)>, 2013,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의 영화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의 영화 <셸리에 관한 모든 것, 2013>입니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호퍼의 그림을 그대로 세트를 만든 다음 배우가 그 세트 안에서 극히 제한적인 동작만으로 셀리란 여성의 내면을 연기하는 방식의 실사영화입니다. 호퍼의 그림의 색감은 물론, 광선의 각도까지 완벽하게 재연해 냈다는 평가입니다. 호퍼 그림의 텅 빈 건축 공간, 거기에 빛이 만들어 놓은 사각형, 상념에 잠긴 인물들은 한 데 어울려 복합적인 관념과 정서,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창출해 냅니다. 이 그림들을 정교하게 영상으로 재현하고 교묘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 만든 세련미 넘치는 영화입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삶은 어쩌면 '평범함' 그 자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다른 예술 거장들처럼 '희대의 난봉꾼'도 아니고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도 아니었으니까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주인공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우리 주변에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겪은 이웃의 모습으로 살다 간 화가라는 얘기지요. 평범함 속에 이룬 위대한 예술!!! 그래서 더 위로가 되는 작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도 그의 그림이 누군가에게 패러디되며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보이고 있겠지요.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 앤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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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국견

사냥개(과거)

프랑스 귀족 여성들에게 인기

하루 1회 이상 빗질은 필수, 털 빠짐이 적음

밝고 활발한 성격, 똑똑함(세계 천재견 순위 2위)

분리불안(주인을 잘 따름)

주인의 감정을 굉장히 많이 공유

노인들에게 남은 인생을 함께 하자는 의미의 개로 사랑받음

 

 

 

검은색 스탠다드푸들,위키피디아

 

 

 

푸들은 원래 양생물새 사냥에 활용되던 견종이다. 바베트(Barbet)라는 견종의 후손으로, 그 특성이 많이 남아 있다. 1743년부터 프랑스어로 바베트 암컷을 '카니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후 바베트와 카니쉬(푸들)가 따로 분리되었다.  다정하고 명랑하면서 충성심이 강한 성격 덕분에 최근 들어 반려견으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오리를 사냥하는 푸들, 위키피디아

 

 

 

전통적으로 푸들 중에 가장 큰 품종인 스탠다드 푸들은 특히 오리 사냥과 때로는 고지대 조류 사냥에 사용되었다. 푸들은 1990년대 초부터 캐나다와 미국에서 새 사냥에  적극 사용되었다. 사냥에 적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리한 작업 지능, 민첩한 수영을 할 수 있는 수영에 특화된 발, 습한 조건에서 점퍼처럼 작용하는 곱슬곱슬한 털 등이다. 19세기 후반에 서커스와 부유층의 지위 상징으로 주로 길러지다가 사냥에 사용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20세기에는 애완견으로 길러진다.

 

 

 

미국과 캐나다의 일부 사육자들은 푸들 중 새를 쫓는 개를 선택하여 교배시켜 사냥 본능을 되살리는 것을 성공시켰다. 이후 1996년 스탠다드 푸들을 사냥개로 인정하기 시작한다. 스탠다드 푸들은 문제를 독립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편이다. 주인 입장에서 새를 추적할 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야 한다.  경연 대회에서 개에게 작업을 시킬  때 특히 중요한 점이라고 한다. 훈련된 푸들은 총소리에 쉽게 겁을 내지 않는다. 트래이너는 견고하고 친절하며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 새를 사냥하도록 훈련시킬 때 주인이 너무 위압적으로 굴면 푸들이 전체 경험을 두려워하고 물이나 덤불 속으로 움직이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고 한다.

 

 

사냥개 푸들은 일반적으로 빠른 반사 신경를 가진 개로  쓰러진 새를 쫓고 새가 떨어진 곳을 기억하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며, 키가 큰 잔디에 숨어있는 새 냄새를 맡고 추적할 수 있는 코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고지대의 새를 사냥하는 데 능숙하다. 북미쪽은  일반적으로 개가 처음 사육된 기후와 달리 영 도시 이하로 내려갈 때가 많다. 푸들의 곱실거리는 털은 눈과 얼음으로부터 그들의 몸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미니어쳐 파티푸들(Pudel ZwergHarlekin,jpg),위키피디아

 

 

최근에는 미니어처 푸들도 사냥꾼 목록에 추가되기 시작했다. 미니어처 푸들의 작은 크기는 큰 리트리버가 할 수 없는 모서리와 덤불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푸들은 17세기부터 군대에서 일하는 개로 사용되어 왔다고 전한다. 총격을 무시할 수 있는 훈련을 받을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아주 지능적이고 훈련 가능한 성격과 총사냥개로서의 배경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역사 속에서 푸들을 아꼈던 군주들이 많다. 잉글랜드 내전 시기 라인 강의 루퍼트 왕자는 말을 타도 주인과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냥 푸들을 가져왔다. 보나파르트는 마 렝고 전투에서 주인의 몸과 함께 머물며 얼굴을 핥고 그를 다시 살려준 척탄병의 애완동물 푸들의 충실함에 대해 회곡록을 써 놓기도 했다.

 

 

 

마렝고 전투(Battle of Marengo,1800년 6월 14일):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알렉산드리아 도시 근교 남동쪽 5km 떨어진 마렝고 평원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프랑스군이 미하엘 폰 멜라스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격전 끝에 이를 물리치고 오스트리아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낸 전투. 이 전투의 승리로 나폴레옹은 파리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푸들은 활동적인 성향으로 산책을 많이 나가야 한다. 산책교육에서는 산책예절과 산책에서 주인을 따르는 법을 배운다. 또 푸들은 주인을 굉장히 잘 따르기 때문에 주인 외의 사람을 잘 대할 수 있는 사회성 교육이 필요하다. 강아지 유치원이나 펫 카페에 방문하는 등 다른 개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자주 주어야 한다.

 

 

 

푸들은 흰색, 검은색, 크림색, 살구색, 갈색, 회색이 대표적이며 그 이외에는 파란색, 은색 , 카레 오레 , 은색 베이지, 빨간색 등 다양한 색상을 가지고 있다. 푸들의 털은 곱슬곱슬하기 때문에 털이 엉키지 않도록 매일 빗질을 해주어야 한다. 털이 계속 자라기 때문에 미용은 필수이다. 푸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기 때문에 눈 주변의 털이 변색되는 눈물독이 생기지 않도록 케어해주어야 한다. 푸들은 얼굴털 관리가 중요하다. 얼굴털을 방치하면 얼굴에 염증이 생길 수 있다.  푸들의 털을 곱슬곱슬하게 만들어 주려면 3-4개월 때 배냇미용을 해 주는 것이 좋다. 0.5mm에서 2mm 사이로 깎아주는데 이렇게 배냇미용을 하고 난 후 털이 곱슬곱슬해진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지만 푸들의 곱슬곱슬한 털을 가지려면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푸들은 흐르는 눈물 과다로 인한 문제를 겪는 대표적인 견종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현재 시중에는 이미 다양한 제품이 나와 있으나 부작용이 야기되어 한약재를 활용하여 부작용이 없는 안전한 보조제를 개발하였다. 귀 감염은 모든 푸들 품종에서 문제가 된다. 귀의 문제는 귀관 내의 정기적으로 청소하고 털을 뽑는 등 적절한 귀 관리를 통해 최소화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9krnAQ5NUk

 

 

https://www.youtube.com/watch?v=zdY0_ZzMkGs

 

 

 

 

 

국제애견협회는 같은 종의 푸들이라는 종의 크기에 따른 차이로 스탠다드, 미디엄, 미니어처, 토이 네 가지를 규정한다.

 

 

푸들은 발바닥에서 어깨 높이를 측정한 체고 및 체중에 따라 스탠다드,미니어쳐, 토이 푸들로 나뉜다. 사진출처:국민일보

 

 

 

스탠더드 푸들 의 가장 심각한 건강문제는 애디슨병, GDV, 갑상선 문제, 기관파괴, 간질, 피지선염, 엉덩이 이상증, 암 등이다.  애디슨병은 초기 증상이 모호하고 다른 상태로 쉽게 오인되기 때문에 종종 진단되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 무기력, 빈번한 위장 장애 또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어할 때 검사를 받는 것이 좋다. 치명적인 나트륨, 칼륨 불균형을 유발할 수 있지만 조기에 잡아 평생 약물 치료를 받으면 대분분의 개는 비교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푸들은 무릎관절을 보호하는 슬개골 및 고관절 질환에 취약하다.  기르는 푸들이 절뚝거리거나 무릎을 펴기 어려워하고, 다리가 과도하게 안쪽으로 굽거나 밖으로 휜다면 수의사 진찰을 받아야 한다. 슬개골은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내부 관절을 보호하고 다리를 굽히고 펴는 근육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그런데 푸들 중에도 덩치가 작게 개량된 미니어처 푸들, 토이 푸들은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슬개골이 좌우로 탈골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탈모, 가려움증, 각질 생성에 시달리는 푸들이 많다. 이는 흔한 유전질환인 피지선염의 대표 증상이다. 피지선염은 피부를 통해 노폐물을 배출하는 구멍인 피지선에 생긴 염증을 가리킨다. 종종 음식물 알레르기로 오인되지만 피지선염은 선천적 유전질환이며 알려진 치료법은 없다고한다.

 

 

스탠더드푸들은 드물게 심장·뇌 관련 유전질환을 앓는다. 심방결손(ASD)은 심장에서 피가 머무는 부위인 심방에 구멍이 뚫리는 질환을 말한다.  그 구멍이 작으면 별다른 증상이 없지만 심할 경우 반려견이 기침, 호흡곤란, 주기적인 실신에 시달리고, 드물게는 심정지에 의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ASD는 심방의 구멍을 막는 외과적 수술로 치료할 수 있다.

 

 


발작을 동반하는 신생아뇌병증(NEWS)도 주의해야 한다. 스탠더드푸들 중에는 태어날 때부터 동작이 굼뜨고, 지능이 발달하지 않는 뇌병변이 발견되는 때도 있다고 한다. 대개 생후 4~5주에 증상이 드러나며, NEWS를 앓는 푸들은 발작을 겪고 걷고 서기 어렵다. 해당 질병은 치료법이 없기 때문에  심할 경우 인도적 안락사가 권고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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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방송에 한 저명 교수가  나와 풀어낸 썰이 하나 기억에 남아 담아 봅니다.

자신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 지?(50%)

어떤 부모아래 자랐는지?(30%)

개인의 노력 정도(10%)

행운(10%) 

 

한 개인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4가지를 설명한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보통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뭐라고, 개인의 노력 여부가 성공 요인의 10%밖에 안 된다고?' 처음에 의아했고 화도 났습니다. 학창 시절 자의든 타의든 가스라이팅 당해왔던 " 열심히 노력해야 성공한다."는 말은 어른들의 뻥이란 말인가! 싶어서였죠. 방송 내용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니,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입니다.

 

'지금 높은 자리 혹은 상당한 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뻐기지 말아라. 네가 잘 나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작용한 다른 요소가 그 자리에 너를 있게 한 것임을 잊지 마라.  그러니 매사에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겸손해라. 그렇지 않으면 가진 것, 높은 자리에 있는 그 자리에서 데구루루 굴러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런 식으로 나름 걸러 들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 중 상위 0.1%의 조건을 갖춘 토리 번치(Tory Burch)를 보면 이 이론이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났어요.(50%) 

부모님이 상류층 유대인이었고요.(30%)

본인의 노력(10%) 

행운(10%)

 

이 모두를 합친 값이 지금 토리 번치가 누리고 있는 성공의 비결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본인은 결사반대일 테지만요. 순전히 자신 만의 노력이었다고 우길 수도 있지요. 

 

 

 

Tory Burch, 나무위키

 

 

토리 버치(Tory Burch, 1966,6,17)는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 사교계 명사, 사업가입니다. 196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밸리 포지(Valley Forge) 태생이고요. 유대계 가정의 외동딸로 남자 형제 로버트, 제임스, 레오너드와 함께  목가적인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로 금융, 정보, 지식분야에 올인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죄인들이라는 원죄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민족입니다. 수세기에 걸쳐 미운털이 박힌 채 오랜 박해와 추방을 견디며 살아왔고요. 언제라도 살던 곳에서 쫓겨갈 수 있으니 위급할 때 몸에 지니고 도망가려면 머리에 넣고 갈 수 있는 전문지식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어머니 리바 로빈슨(Reva Robinson) 여사는 전직 배우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 스티브 맥퀸, 말론 브란도 등 톱 배우들과 염문을 뿌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버디(Buddy Robinson)는 유산으로 상당한 주식과 종이컵 제조 회사를 물려받은 부유한 투자 전문가였고요. 이브닝 재킷의 디테일을 직접 디자인하여 주문할 만큼 남다른 패션 감각을 지닌 신사였다고 해요. 아마 토리가 그런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혼 전에 그레이스 켈리(모라코 왕비)나 조안 베넷과 데이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리바 여사보다 14세 많은 버디는 2008년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5NkqJ7NwEqE

 

 

 

 

아녜스  어윈 스쿨 시절 테니스부 주장을 맡고 승마를 즐겼다고 해요. 1988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진학해 미술사를 전공합니다. 대학 시절 토리 버치는 재니스 조플린의 음악을 듣고 향을 피우며 그레이트풀  데드의 티셔츠를 입고 다니던 보헤미안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에르메스 스타일의 럭셔리 한 승마 룩으로 다니거나  프랑스나 이탈리아 여성들처럼 정성스럽게 주얼리로 장식을 했던 숙녀이기도 합니다. 

토리웨어(Tory wear)"라고 불릴 정도로 독특한 패션 센스를 지니고 있었고요.

 

 

대학 졸업 후 토리가 처음 얻은 직업은 유고슬라비아 출신 쿠튀르 디자이너 조란(Zoran)의 조수였습니다. 신비로운 분위기로 고객을 압도했 던 조란은 어머니 리바 여사의 단골 디자이너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토리는 디자인부터 홍보까지 모든 업무를 보조했다고 합니다.

 

 

이후 하퍼스 바자로 옮겨서 일하다가 폴로 랄프 로렌의 카피라이터가 되었습니다. 1995년, 랄프 로렌을 떠나 베라 왕의 홍보로 입사한 토리는 같은 건물에서 일하던 크리스토퍼 버치를 만나게 됩니다. 1997년 , 토리는 베라 왕의 대변인으로서 카레나 고어(Karenna Gore)의 결혼식이나 69회 아카데미 시상식 등 굵직한 이벤트에서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이며 주목받게 됩니다. 

 

2005년, '뉴 리테일 콘셉트'상 수상

2007년, '론칭 액세서리 브랜드상' 수상

2008년, '올해의 액세서리 디자이너상' 수상

2010년 포브스에서 세계에서 가장 파워풀한 여성

2011 글래머우먼 어워드(Glamour Woman of the year award) 수상

 

 

토리 버치는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기 전에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기로 결심했을 때, 업무 공간이 된 곳은 자신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 아파트 내부였다고 합니다. 뉴욕의 업타운에 속하는 이 지역은 부촌으로 한국의 강남이라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작은 팀과 함께 8개월간의 치밀한 준비를 거쳐 2004년 2월, 놀리타(NoLlta)의 엘리자베스 가(Elizabeth Street)에 첫 부티크를 오픈한 날, 상류 인사들과 패션계 거물들로 가게 안 거의 모든 물건이 품절되는 사태가 빚어졌다고 합니다. 이후 브랜드는 곧 미국 전역에 18개 의 프리 스탠딩 부티크를 오픈하는 저력을 발휘합니다. 미국의 주요 백화점에도 유통망을 확장시키고요. 토리의 라이프 스타일과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는 잡지와 신문에서 다양한 각도로 끊임없이 조명됩니다.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2005,4월, 오프라 윈프리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의 이 말 한마디로 미국 전역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토리버치의 웹사이트에 8만 명 넘게 접속을 했으니 말입니다.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고 하네요. 토리 버치 스타일은 "프레피-보헤미안 럭스(Preppy-bohemain luxe)"라는 말로 요약되는데, 엘리트적인 '프레피'와 60년대의 향수가 느껴지는 '보헤미안'이란 두 단어 속에 상류 사회의 일원이면서도 자유분방하고 소탈한 성품을 지닌 그녀의 라이프스타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토리의 패션은 "입기 쉽다(easy to wear)"는 것이 최고의 장점입니다. 정식 디자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노하우를 쌓았다고 합니다. 사진과 예술작품, 건축물, 프린트 등 영감이 될 만한 모든 이미지를 모아 자신만의 디자인 영감을 위한 책으로 만들었고요.  버치는 "패션을 전공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됐다"며 "일반적인 디자이너들이 생각하는 틀에서 벗어나 창조적이면서도 독특한 디자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토리 버치의 레트로 스타일부터 영감 받은 시그니쳐 룩에는 두터운 마니아층이 존재합니다. T로고가 새겨진 메달리온 장식 덕택에, 토리 버치의 액세서리는 쉽게 눈에 띄고요. 또한 토리 버치 의상과 액세서리는 직장인 여성부터 상류 사회 여성들, 사교계 인사들, 부유층 여성들이 다양하게 응용하여 입을 수 있도록 고안된 점이 특징입니다. 

 

 

사진출처: TORY BURCH/Mobile

 

 

 

미국의 저명한 경제지 포춘은 토리 버치의 히트 아이템 발레리나 플랫 슈즈 (리바 발레리나 플랫)를  캘빈 클라인의 브리프 팬티, 라코스테의 테니스 셔츠와 궤를 같이하는 히트 아이템으로 선정하기도 합니다. 버치는 기존  플랫슈즈가 우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편하고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착용감을 향상하기 위해 부드러운 가죽과 고무 밑창을 사용하고 뒤꿈치에는 고무밴드를 달았답니다. 소비자들은 고무밴드 덕에 맞춤 신발처럼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을 수 있었고요. 기존에 작은 리본 정도만 장식하던 발등 부분에 브랜드 로고를 메달 형태로 크게 부착해 개성도 살렸고요. 이 발레슈즈에 토리 버치는 엄마의 이름을 붙입니다. 그녀에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하고,  최고의 영감을 주는 근원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녀 엄마 역시 자신의 이름을 딴 신발로 이렇게 유명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합니다. 토리버치는 또한  티셔츠를  패션 아이템으로 승화시킨 몇 안 되는 리더들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토리버치는 품질이 훌륭하고
가치 있는
트렌디한 룩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정확히 이해하고
통찰하는 디자이너이다.


-론프 라시(Ron Frasch):삭스의 대표이자 CMO(chief merchandising officer)-

 

 

토리 버치는 여성들에게 소규모 사업 자금을 대출해 주고 기업가 자질에 대한 교육과 정보를 제공해 주는 멘토링을 목적으로 '토리버치 재단'을 설립합니다. 여성을 위한 그녀의 오랜 꿈이었다고 합니다. 버치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여성과 아이들을 돕는 재단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어떤 도움을 줬을 때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고민한 끝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재단을 만들게 됐다."라고 설명합니다. 토리 버치 재단은 악시온유에스에이(ACCION USA)와 파트너십을 체결해 1만 1000개 이상의 미국 내 작은 사업체에 500달러(약 57만 원)에서 5만 달러를 대출해주고 있다.

 

 

한 제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디자이너들의 숨은 이야기와 그들의 노고를 알게 되면 제품에 대한 친근감이 더해지지요. 그들의 가고자 하는  지향점을 알게 되면 내가 선택하는 물건에 한 번 더 신중을 기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녀는 럭셔리 브랜드도 다가가기 쉽고 편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사회적 책임 기업으로 거듭나고 싶어 합니다. 그녀의 소탈한 기업 정신이 싱글 맘이자 디자이너, 기업가로서 세 마리 토끼를 잡아가는 영향력 있는 슈퍼 개인으로 잘 무르익어 갈 수 있도록 지켜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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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파 인물들 속에 낯선 일본인 이름이 나와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떻게 그 시대 때 프랑스 파리까지 와 공부할 생각을 했던 걸까? 그의 지나 온 시간이 궁금해 들여다봅니다.

 

구글 일본지도

 

 

1886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후지타 쓰구아키라는 육군 군의총감의 자리까지  오른 군의관이었다.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현 쓰쿠바 대학 부속 소학교)와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 중학교(현 쓰쿠바 대학 부속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지타는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도쿄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Self-portrait of the artist with a cat>

 

피카소나 오드리 헵번 같은 유명인들이 고양이를 좋아한 것처럼 후지타 역시 고양이와 여자를 사랑한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고양이 그림은 생각보다 비싸다고 한다. 화가의 등에 장난치듯 올라 선 고양이의 자세가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 후지타의 영감을 생생하게 불어넣어을  지도 모를 일이다. 

국적을 굳이 따지지 않는 다면, 한국 개화기시절 책상 앞에 앉은 부잣집 도련님 같아 보인다. 공부를 마친 후지타는 결혼과 함께 신주쿠에 아틀리에를 차렸지만 곧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26살에 일본에는 일 년 전에 결혼한 부인을 홀로 남겨둔 채 말이다. 처음 유학을 떠날 당시에는 3년을 계획하였지만 파리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미술가를 무시하는 나라'인 일본에 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갓빠머리' 박태원 vs '갓빠머리'를 유행시킨 일본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 출처: 조선일보 DB, 위키피디아

 

일제 강점기 조선과 북한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이자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박태원의 머리스타일이다. 지금 보면 동그란 안경태에 다소 촌스럽기 짝이 없지만 당시 후지타 쓰구하루가 유행시킨 일명'갓빠머리'스타일이라고 한다. 서양물 먹고 돌아온 후지타가 긴자 거리를 유유히 걸어가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요즘 연예인 못지않은 패션 감각이었으리라. 그를 따라한 스타일이 유행을 할 정도였다니 말이다.

 

 

파리로 유학을 온 후지타는 4년 후 파리에서 각광받는 화가로 성장하며 20세기 초 유럽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일본 출신의 화가로 유명세를 탄다.  그는 파리  몽파르나스에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합니다. 1917년 6월 파리에서 고대하 던 그의 첫 개인전이 열립니다. 당시 수채화 110점이 모두 팔렸고 피카소가 이 전시를 3시간에 걸쳐 감상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로 인기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1919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한 여섯 점이 모두 입선되어 선배 화가인  마티스와 보나르 등과 같은 방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는 파리에서 리베라와 샤갈 등과 교류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예술의 세계를 넓혀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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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 [지식&교양] - 50-38.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33)

 

50-38.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33)

러시아식 이름 '모이셔 자하로비치 샤갈(Marc Zakharovich Chagall, 1887년 7월 7일 ~ 1985년 3월 28일)은 지금의 벨라루스(구 러시아)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화가이다. 그는 23살 프랑스를 처음 방문하고 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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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타 쓰구하루는 일본의 전통을 이어받아  선을 중시하는 동양의 화풍으로 서구적인 주제를 그렸습니다. 특히 삽화로 파리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당시 파리에서는 인상파들에 의해 일본판화인 우키요에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시기로 일본 출신인 후지타는 삽화로 단숨에 파리 화단에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됩니다.

 

우키요에: 17세기-20세기 초 일본 에도 시데에 성립한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 그린 풍속화의 형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본국에서의 송금이 끊겨 빈곤한 나날을 보내던 중 후지타는 프랑스인 모델 페르난드 바레이(Fernande Barrey)와 두 번째 결혼을 합니다.

 

 

 

 

 

<Deux Enfants,1918>, 그림출처: totally History

 

 

 

파리 이주 후 후지타가 그린 주제는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귀엽고 천진난만한 표정의 아이들이 아니라 어딘지 섬뜩하고 염세적이며 차가운 표정의 아이들입니다. 개인적으로 전쟁을 겪고 난 아이들이라서 그런 걸까요? 작은 입술만큼이나 표정도 새초롬한 것 같습니다. 어딘지 생기도 없어 보이고요. 피부가 너무 창백하게 보여 일본의 전통 공연 예술인 가부키 느낌도 들고요.

 

 

 

1921년 살롱 도톤에 '나부상'을 출품하여 '놀라운 유백색의 피부'라는 극찬을 받은 후지타는 여자의 누드, 고양이, 어린아이들을 즐겨 그립니다. 특히 후지타 특유의  은은한 광택과 미끄러질 듯한 피부 표현법은 지금도 놀랄 정도입니다. 촉촉하고 빛나는 피부를 뽐내는 그의 작품 속의 인물들은 그의 작품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시선을 고정시키게 만들 뿐만 아니라 경탄을 불러일으킬만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기법과 기묘한 구도와 형태로 사람들의 시선을 머물게 합니다. 하지만 그가 구사한 인물의 표현 방법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후지타는 자신의 캔버스나 재료를 공개하지 않았고 자신만이 가능한 기법을 숨긴 채 떠났습니다.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는 등 화가로서 성공하기 시작한 후지타는 192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습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나폴레옹이 1802년에 제정한 훈장으로서 프랑스의 훈장 중 가장 명예롭다.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발전에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
훈장 수훈자는 각종 국가적 행사에서 특별한 예우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후 후지타는 1933년 일본으로 돌아가 파리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일본의 화단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합니다. 

 

 

후지타 쓰구하루가 활동하던 20세기 초, 1939년 일어난 제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참혹했던 전쟁으로 기억됩니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주요 3국 중 하나였고요. 전쟁 시 일본의 미술가들은 다양한 형태로 전쟁에 협력을 했습니다. 파시즘체제 아래 권력을 옹호하거나 민중을 선동했고, 종군기록화를 제작함으로써 실제 전투장면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하면서 15년간의 전쟁 속의 미술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잊혀 갔습니다. 사실 일본인들에게 전쟁 책임의 문제와 패전에 대한 논의는 금단의 영역이었을 것입니다. 후지타 쓰구하루 역시 미술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일본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화가입니다. 왜냐하면 종군화가로 전쟁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는 사실 때문이죠.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종전 후 전쟁 협력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여론의 호된 비판을 견디지 못한 후지타는 파리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는 1955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고 1959년 아내와 함께  가톨릭 세례를 받습니다. 이름을 레오나르 후지타로 개명하고요. 

 

 

 

 

오구리 코헤이 감독의 10년만의 복귀작 [FOUJITA], 후지타 쓰구하루의 반생을 그린 작품

 

 

 

 

1968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망하고 그의 시신은 일본이 아닌  파리 교외에 묻힙니다.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의 생애는 일본의 근대상과 참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후지타는 서양화를 본토에서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 후 일본적인 요소를 적극 활용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서구를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근대 일본, 전통에 대한 추구를 통해 서구와의 차이를 강조하려 했던 근대 일본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후, 패전 이후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자리에선 자신 역시 전쟁의 피해자임을 역설했던 근대국가 일본의 모습과 스스로 지지하며 그렸던 전쟁화에 대한 비난을 자신이 희생양이 된 듯 그려낸 후지타의 말년의 작품들이 소리 없이 겹쳐집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 앤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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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즈 슬링(Moise Kisling, 1891-1953)은 폴란드 남부 마우폴스카 주의 크라코프에서 출생한 유대계 화가이다.

사진출처: 신발끈여행사
폴란드의 행정구역, 사진출처:위키백과

 

 

크라코프 미술 아카데미에서 요세프 판키에비치(Jozef Pankiewicz)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를 통해 인상주의, 특히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와 에두아르 뷔야르(Jean-Edouard Vuillard)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키슬링이 처음 파리를 찾은 것은 1910년 그의 나이 19살 때였다. 동급생 대분이 빈이나 뮌헨으로의 유학을 목표로 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키슬링만 스승의 가르침을 지켜 세잔과 르누아르의 나라 프랑스로 향했다. 이미 인상파는 과거의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당시 파리 젊은 이들은 "입체파"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 미학의 주도자 격인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등과 친해져, 자주 제작을 함께 할 기회도 가졌다고 한다. 

 

 

 

<Still life with fruit, 1913>,그림출처: Wahoo Art.

 

 

세잔의 느낌도 나고 피카소의 입체파 영향도 받은 느낌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그림이다."

이것저것 후배의 그림에 훈수를 두려 하는 피카소에게 젊은 키슬링이 반론을 제기하며 자신의 그림에

자부심을 드러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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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슬링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외인부대에 자원하여 입대했고, 1915년 프랑스 솜전투(Battle of the Somme)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하게 된다. 전장에서 돌아온 키슬링은 몽파르나스에 거주하면서 당대 예술가들과 다양한 교류를 했다. 특히 20세기 초 파리로 모여든 동유럽 출신의 미술가 및 유대인 미술가들과 함께 모여 에콜 드 파리(파리파)를 결성했다. 한마디로 에콜 드 파리(파리파)는 같은 이념이나 양식, 명확한 계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 폴란드 등으로부터 예술의 도시 파리를 동경해 타국으로부터 모여 온 예술가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그는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파리파)의 대표 화가였으며 초상화와 정물화에 능했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줄스 파스킨(Jules Pascin), 리투아니아의 생 수틴(Chaim Soutine), 옛 러시아의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이탈리아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파리에서 가난하고 비참하게 생활하면서도 각자의 민족적 자질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특징을 보인다.

 

 

 

 

Portrait of Moise Kisling, Amedeo Modigliani, 위키피디아

 

 

실물은 훨씬 귀여워 보이던데 모딜리아니가 그린 친구 키슬링은 각이 지고 강해 보여 살짝 무섭게 보인다.

모딜리아니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그는 가난하고 병든 그를 자신의 아틀리에로 맞이했으며, 그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기도 했다. 키슬링은 1919년 개인전을 통해 호평을 받고 이후 화가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다. 그의 작품들을 크게 분류한다면  초상화, 정물화, 그리고 여성 누드화이다. 그는 현대 미술 운동의 요소들을 자신의 그림에 적극 받아들여 매혹적인 방법으로 그것들을 소화해 내고 적용했다. 

 

 

 

폴 세잔(Paul Cezanne)과 드랭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정물화와 풍경화는 엄격한 구성에 입체파의 대담한 기하학적 형태와 풍부한 색채감으로 추상적인 완벽함은 물론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보여준다. 정물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장면의 본질을 포착하려 노력했으며 이 독특함은 그의 초상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색깔은 선명하고 붓놀림은 거침이 없다. 천부적으로 쾌활하고 열린 마음인 그는 많은 친구들을 얻었고, 파리의 밤 축제에서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결혼한 그의 아내 르네는 종종 남편의 모델이 되어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해와 신뢰로 가득 찬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결말이 비극적이었던 친구화가 모딜리아니에 비하면 드물게 '축복받은 화가'아닌가 싶다.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Potrait of Madame Renee Kisling>, Allpainter Onlin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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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슬링은 무엇보다도 이국적이고  관능미에 찬 나부상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대한 단순하게 생략된 배경에 우울한 표정의 여인들이 담긴 초상화와 누드화는 파리파의 근저에 깔려있는 감성과 표현주의적 경향을 자세히 드러내 준다. 얼굴보다 아이라인이 커다란 눈이 먼저 시선을 잡는다. 크고 아몬드 모양을 하고 있어 마치 인형 눈인가 착각이 들정도다. 빛의 부드러움과 모든 디테일의 정밀함이 모델의 눈을   초현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 같다. 그의 전체 작품 중 3분의 1은 초상화이다. 그가 이 카테고리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은 키슬링의 여성 편향적 성향과 애수 어린 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소재이기도 했다.

 

<Nu sur un divan noir>,1913, 위키피디아

 

 

위에서 모델을 내려다보는 듯한 이 그림은 세잔의 영향과 놀랄만한 견고성과 공간의 깊이를 형성하는 처리 기술을 보여준다. 복잡한 형태를 다룰 줄 아는 성숙한 예술가의 솜씨라고나 할까. 1913년 파리로 돌아오면서 키슬링은 몽파르나스에 있는 조제프-바라 거리 3번지의 스튜디오로 이사했는데, 이 작품이 아마도 그 곳에서 그려지지 않았나 전문가들은 추측한다. 그가 파리 비평가들과 수집가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부터라서 말이다.

 

 

<KiKi de Montparnasse in a red Jumper and a blue scarf,1925>, Mutual Art.

 

 

 

1925년 완성된 키슬링의 <몽파르나스의 키키>의 주인공, 앨리스 프린(Alice Prin)통칭 키키라고 하는 모델이다. 그녀는  프랑스의 시골마을 부르고뉴(Bourgogne) 태생으로 몽파르나스 부근에서 키슬링을 비롯한 슈틴, 후지타 쓰구하루, 등 에꼴 드 파리의 화가들이 경쟁적으로 그녀를 모델 삼아 20세기 가장 많은 화가들에 의해서 그려진 모델이라 전해지고 있다. 당시 몽파르나스 주변에 거주하고 있던 가난한 화가의 모델을 주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키슬링, 드랭, 피카소, 후지타 등 의 모델로서 또는 몽파르나스의 카페에 모인 예술가들의 여왕으로 군림하면서 키슬링은 100장 이상의 키키의 초상을 그렸다. 그녀를 그린 그림은 파리의 거리에서 대호평으로 이어졌다. 

 

 

키슬링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불안한 시대 배경 속에서 술이나 마약에 빠지거나 야단법석 파티를 일삼는 가운데 일찍부터 화가로서 성공한 '축복받은 화가'로 불리고 있었다. 에콜 드 파리의 화가답게 누구를 추종하는 것이 아닌 빛나는 색채로, 정물, 풍경, 초상화 등 독자적인 작품을 그려냈다. 

 

 

 

<Portrait De Femme>, 그림출처: Paintingstar.com

 

 

개인적으로 묘한 분위기의 검은 머리의 이 소녀가  내 시선을 잡아 끈다. 애수에 찬 저 눈빛, 그렁그렁한 그래서 또르르 곧 쏟아질 것만 같은 저 아이의 눈, 아이의 눈을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니 그녀의 속사정을 왠지 침묵하며 들어줘야 할 것만 같다. 미국의 여성화가 마가렛 킨(Margaret Keane,1927~ )의 <빅 아이즈> 작품 속 눈 큰 아이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업 수완이 좋았던 두 번째 남편 월터의 유령화가로 존재하다 법정에서 그림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마가렛 킨이 그려낸 눈 큰 아이와 참 많이 닮아있다. 키슬링이 먼저 태어났지만 말이다.

 

 

<빅아이즈>, 다음영화

 

 

 

 

 

 

키슬링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잠시 미국으로 가서 미술학교 교수로도 있었으나, 전쟁이 끝난 1946년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1953년  4월 29일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스-코트다쥐르(Provence-Alpes-Cote d Azur)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의 상당 부분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스위스 아비뇽 프티 팔레 미술관(Musee du Petit Palais)에 소장되어 있다. 모이즈 키슬링이 살았던 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그의 두 아들 중 작은 아들 장(Jean)은 파리에 살며 그의 아버지의 작품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한다.

 

 

 

#모이즈 키슬링# 마가렛 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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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머리와 박쥐처럼 생긴 귀가 특징인 불도그는 털이 짧고 부드러우며 광택이 있다. 몸빛은 흰색  또는 검은색이 대부분이다. 통나무 같은 몸배에 근육형, 각진 얼굴에 납작한 코와 쭈글쭈글한 주름이 언뜻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표정이 풍부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H6FC_uXs

강형욱의tv-프렌치 불독편

 

 

2022년 아메리카켄넬클럽(AKC)의 반려견 통계에 의하면 30년 이상 가장 인기 있었던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제치고 프렌치 불도그가 가장 인기 있는 반려견 순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AKC 측은 프렌치불도그는 작고 똑똑한 견종으로 1인 가구부터 대가족까지 두루 사랑을 받아왔다고 전한다. 또 잘 짖지 않고 자주 운동시키지 않아도 되므로 도시에서 키우기 쉬운 견종으로 뽑힌다. 다만, 이 견종은 좁은 콧구멍과 작은 기도를 가진 납작한 얼굴로 호흡 기능 문제 나 특정한 건강문제가 발생하기 쉽다고 말한다.

 

 

 

호흡기로 인한 고통이 시작되는 시기가 세 살 무렵이기 때문에 그전에 변화 추이를 유심히 살펴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사람도 코가 막히면 숨을 쉬기 어려워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불독같은 단두종 강아지는 평생 답답한 상태로 살아야 할 수도 있으니 꾸준히 신경 쓰고 관리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키우는 반려견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 줄 수 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 이차적인 기관 협착이나 후두 부분, 만성 기관지염 등을 유발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3차적인 심장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하체도 약한 편이라 조금만 먹이고 간식을 서 너 번 소량 으로 나눠 주며 는 조절 해주는 게 좋다. 

 

프렌치 불독은 영국이 원산인 불도그가 프랑스로 유입된 후, 1860년대에 개량되면서 탄생한 견종이다. 19세기 산업화의 여파로 일자리를 잃은 영국인들이 프랑스 노르망디로 이주하는 붐이 일었을 때 불도그가 프랑스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프랑스인들에 의해 다른 종과 교배되었는데 특히 프랑스 토종 테리어와 많이 교배가 이루어졌고 퍼그와도 교배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19세기말 이 견종이 미국으로 전래된 이후 다른 나라에도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깨높이 30cm,

몸무게 10-13kg 

 

 

성격은 활달하고 명랑하며 믿음직스러워 아이들의 친구로서 좋으며 집 지키는 개로서도 적당하다. 심지어 집에 침입한 양생곰을 퇴치하기도 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대중매체를 통해 본 것 같다. 그들의 조상이 소와 싸운 적이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전해진다.  원래 투견이었던 불도그를 소형화하여 개량했기 때문에 온순해졌지만 공격적인 본능이 아직 남아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프렌치 불도그를 맹견으로 분류해 사람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자치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이가 프렌치 불도그를 데리고 공원 산책을 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대체로 온순하고 애교가 있지만 말이다.  특히 어릴 때 혼자 두는 빈도가 높아질수록 즉 분리불안을 느끼면 공격성이 놓아진다고 한다. 이 경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막으면 사물 등을 물거나 시끄럽게 짖는다. 

 

 

영국산 불도그의 피를 이어받아 근친혼 등을 통해 인위적으로 개량된 품종이기 때문에 건강과 관련해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비극적인 품종이기도 하다.  마치 스페인 왕실의  근친혼으로 인한 주걱턱이 길어지는 삶을 살았던  그들처럼 말이다.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적 결함 때문에 암을 비롯하여 유전적 원인에 의한 질환에 걸리기 쉽다. 척추 기형 등 척추 질환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불도그는 신체 구조상 스스로 교미와 출산이 불가능하다. 인위적인 시술 없이 번식과 생존이 불가능한 동물이 과연 정상적인 종인지에 대한 비판도 나오는 품종이다. 차라리 족보 없는 시골 강아지가 국제 인증서를 갖고 있는 순종보다 더 개답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너무 심한 개량으로 다양한 질병에 노출되어 있어 다른 중형견에 비해 생애 주기가 짧은 편이라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하다. 사람의 욕심으로 인해 불도그의 일상생활이 불편하다니 마음 한편이 불편해진다. 아이러니하게  인간에 의한 개량이 더 많아질수록  사람들에게 인기가 더 많다고 한다.

 

 

불도그는 머리가 매우 크기 때문에 자연분만으로 출산을 하면 새끼가 어미 개의 골반에 껴 질식으로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어미 개의 건강에도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80-90%는 제왕절개를 통해 출산을 하고 있다. 아래턱 돌출로 음식을 씹기 힘들고 침 흐림도 심한 편이다. 

 

 

얼굴에 주름이 많고 침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주름 사이나 입 주위에 세균 감염이 일어나기 쉽다.  아가들 손수건이라도 목에 매 줘야 할 정도로 침을 많이 흘리는 종이다. 주름 사이와 입 주변 청결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써야 하며 소홀히 했을 경우 쉽게 피부병에 걸린다. 잦은 목욕도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다. 일주일에 한 번 목욕은 필수이고 한 달에 한 번은 미용실에 데려가 정돈을 해줄 필요가 있다고 한다.

 

 

눈이 많이 돌출되어 있기 때문에 각막염 등 각종 안과 질환에 걸리기 쉽다. 호흡이 곤란하기 때문에 잘 때 코를 많이 고는 견종이다. 뿡뿡거리며 방귀도 많이 뀌는 편이다. 더불어 입을 벌려 숨을 쉬는 행동 때문에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자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견종이다.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니 프렌치불독 키우시는 분들은  이 점 유의하셔서  반려견이 외롭지 않게 애정 표현 많이 해 주시고 잘 놀아 주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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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식 이름 '모이셔 자하로비치 샤갈(Marc Zakharovich Chagall, 1887년 7월 7일 ~ 1985년 3월 28일)은  지금의 벨라루스(구 러시아)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화가이다.  그는 23살 프랑스를 처음 방문하고 프랑스식 이름 마르크 샤갈(Marc Chagall)로 이름을 바꾼다.  생몰연대를 보면  보기 드물게 장수한 화가이다.  그의 사후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서 자신의 나라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서로 주장하기도 했던 화가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태어난

러시아에서 (1906-1910/ 1914-1922(8년),

프랑스(파리)에서 [1910-1914, 4년 /1922-1941,19년/ 프로방스 1948-1985,37년]: 총 60년, 샤갈의 무덤

미국(1941-1948, 4년)

그가  젊은 시절을 유학을 하고 사랑하는 연인 벨라와 어린 딸이다와 같이 행복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며 자신의 마지막 순간도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에서 숨을 거둔지라 이만하면 프랑스의 깃발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듯싶다. 

 

 

아버지는 청어 생선가게 종업원, 어머니는 야채가게 종업원으로  9형제 중 장남, 그것도 유럽에서 2등 시민 취급받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1906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자 예술의 중심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가게 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통행증이 없으면,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으므로 유명한 예술학교들이 즐비했지만 샤갈에게 그림의 떡인 셈이었다. 샤갈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정규교육조차 받기 어려운 10대 시절을 보낸 셈이다. 그는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어서  친구에게 임시통행증을 얻어 그곳 명문 예술학교에 등록해 2년 동안 초상화와 풍경화를 그렸다. 짜반체바 미술 학교(1908-1910)에서  '레옹 박스트'라는 유대인이며 장식예술 디자이너이자 유명한 발레 무대배경과 의상 디자이너였던 그를 롤모델 삼아  성공하고 싶어 했다. 샤갈의 그림을 본 레옹 박스트는 마치 색채가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색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다. 실험극장과 폴 고갱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며  러시아 출신 유태인 변호사  막심 리버의 후원으로 23살 프랑스 파리로 미술 공부를 하러 드디어  떠나게 된다.

 

I

<I and the Village>, Wikipedia

 

후원자의 도움으로 동경해 오던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로 건너왔다.   하지만 언어가 수월하지 않으니 답답하고, 자고 나면 낯선 이국의 자연환경이 '어쩌다 내가 이곳에 와 이 고생인가?'싶은 소외된 샤갈의 시선이 향수병으로 커지게 된다.
이민자들이나 유학생들이라면 샤갈의 마음 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는다. 후원받아 겨우겨우 온 주제에 마음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밤이 되면 두고 온 고향이 그립고 가족이 보고 싶다.  사람들마다 풀어 가는 방식이 다 다를 테지만 샤갈은 꿈속에서나마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꿈을 꿀 때  그리운 고향의 풍경과 가족들의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그림으로 얼른 옮기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머릿속 생각이 손가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메모를 하듯이 말이다.

 

 

샤갈의 작품 대부분은 그가  어떤 감정, 어떤 추억을 기억에 담아 내려 했을 지 그의 입장에서 감상하면 오히려 쉬울 수 있다.   <나와 마을> 작품은 24살에 그려진 작품으로 엄청난 화제작이었다.  당시 피카소의 큐비즘과 야수파 마티스의 영향을 샤갈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해  그려낸 작품이다. 두 사조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지만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낸다. 실제로 샤갈은 어느 유파에도 속한 적이 없다. 모딜리아니처럼 말이다. 언뜻 보면 아이들 그림 동화 속 삽화인가 싶을 정도로 보는 이들은 초현실주의 느낌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샤갈 자신은 초현실주의 작가로 불리는 걸 극도로 싫어했지만 말이다.

 

 

저는  오직 제 경험과 추억만을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염소와 초록색 어린 소년이 교감하듯 서로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다.  염소 젖을 짜는 여인이 등장하고, 일터로 가는 듯한 남성, 뒤집어진 집과 엄마인 듯한 여성, 늘 다니던 유대교 사원 등 두고 온 고향 가족들의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 샤갈이 주로 쓰고 있는 빨간색은 고향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나타내거나 유대인에 대한 형제애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파란색은 자유의 상징으로 노란색과 초록색은 기쁨과 평화의 상징으로 쓰고 있다. 일례로 샤갈이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던 1937년 제작된 작품들은 유난히 빨간색, 파란색, 흰색이 많았다고 전한다.  전문가들은 샤갈이 파리에 머물던 5년 동안 이미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한 것으로 보았고 나머지 80년 동안 반복한 사람으로 그를 이해했다. 

 

 

 

 

마티스 이후
진정 색채가 무엇인지
이해한 화가는
샤갈뿐이다.
- 파블로 피카소-

 

 

<생일(The Birthday),1915>,구글아트앤컬쳐

 

 

샤갈이 사랑하는 여인 벨라 로젠펠트가  꽃을 들고 작업실을 찾아왔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당신 생일이잖아요."

 

자신의 생일도 잊은 채 그림을 그리는 샤갈!

꽃을 들고 축하해 주러 온 벨라의 모습이 샤갈 눈에 얼마나 사랑스러웠겠는가!

 

"잠깐만~"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보답으로 당시의 기쁨을 작업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모습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샤갈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공중부양 할 수 있는 장면이다. 현실에서 불가능 한 자세로 입맞춤하는 장면이 샤갈의 마음상태라서 가능한 것일 테니 눈감아 주시라. 

 

<벨라 샤갈>,위키피디아

 

 

마치 거인의 모습으로 그려진 샤갈의 영원한 뮤즈 첫 번째 아내 벨라 로젠펠트(Bella Rosenfeld: 1895-1944)이다.  그녀는 러시아 출신 유태인이며 보석 도매업을 해 부를 쌓은 부모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다. 샤갈과는  8살 나이 차이가 나고,

첫 만남은 14살 (샤갈22세)로 작가 지망생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도 내 것이었다.
부모님, 내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닭 살 돋는 내용이긴 하다. 서로가 첫눈에 반해 장거리 연애를 했던 두 사람이다. 샤갈이 파리에서 유학할 당시 그녀가 보고 싶어 상사병에 걸릴 정도였다고 한다. 귀하게 기른 딸을 가난뱅이 화가에게 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벨라 부모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고  샤갈이 유명세를 치르고도 한참 이어졌으며 오랜 설득 끝에 둘을 결혼하고 딸이다를 출생한다.  사랑과 행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듯한 샤갈의 삶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로 인해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게 된다. 게다가 볼셰비키 혁명까지 일어나게 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전쟁이 나면 유럽 역사속 희생양은 항상 유태인이었다. 샤갈은 아내와 딸이 계속 차별을 받을 것이 뻔한 러시아 고향 마을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다. 이미 성공한 화가였기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서의 생활은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샤갈 생애의 가족과 함께 보낸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록  유럽 상황은 세계대전으로 뒤숭숭했지만 말이다.  

 

<에펠탑과 신랑신부,1939>,구글아트앤 컬쳐

 

 

에펠탑아래에  이제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수탉을 타고 하늘을 비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러시아를 떠나 오랫동안 방황하던 그가 파리를 창작의 안식처이자 마음의 고향으로 삼은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뒷쪽으로 유태인 전통 결혼식 장면이 그려져 있고 , 고향 마을 비테스크브르크,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  악기로 변신한 염소, 거꾸로 그려진 세 개의 촛대, 수탉 등은 유대교의 상징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유대인 결혼식, 장례식에  빠지지 않는 악기가 바이올린이라고 한다. 닭은 자기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림 속 닭은 샤갈 자신이란 이야기가 된다. 

 

 

샤갈 그림의 평생 화두는 신, 고향마을, 그리고 아내 벨라였다. 아내를 너무나 사랑한 샤갈 이다. 하지만 1941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33년 나치 당원들이 샤갈의 작품을 다른 '퇴폐예술'과 함께 불태워버린다. 아돌프 히틀러가 프랑스까지 점령하자  홀로코스트를 피해 1941년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잠깐 피하려고 들른 뉴욕에서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벨라가 감염이 되고 전쟁 중이라 약을 구하기 어려워  아내를 떠나보내게 된다. 스페인 독감으로 이른 나이 사망한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도 비슷한 상황으로 알고 있다. 아내를 잃고 벽에 걸린 벨라의 그림을 모두 돌려놓을 정도로 폐인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딸이다의 위로와 제안으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잔뜩 담아 서 말이다. 

 

 

<하얀 십자가(1938)>,출처: 서울신문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칭을 지닌 샤갈이 최대한 색을 절제하며 쓴 작품이다. 나치 치하의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예수나 십자가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다.' 라는 메시지로  세계인들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하얀 십자가>는 샤갈 자신이 겪은 1925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공산 혁명과 1938년 나치의 수정같이 빛나는 밤의 공격사건 두 가지를 한 화면에 담아낸 그림이다.  정 중앙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가시관 대신 두건을 하의를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두르는 흰색과 검은색 숄로 가리고 있다. 발아래 놓인 촛대, 무서워 떨고 있는 아이와 엄마, 붙타는 토라(유대인의 율법책), 불타는 유대교 회당에 나치 완장을 한 군인이 들어가고 있고 회당 윗편에 이미 독일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왼쪽 편을 보면 너무  급하게 나와 신발도 한쪽만 신고 나온 인물, 마을이 불타고 이미 죽은 사람, 죽은 가족을 끌어안고 슬퍼하는 모습, 겨우 탈출했지만 노가 하나밖에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늘을 향해  그저 기도밖에 할 수 없는 배안의 사람들, 붉은 기로 무장하고 칼 들고 달려오는 저들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가 없다.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머리 위의 그들의 선조들이 울고 있다.  샤갈의  이 작품 덕분에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이 많이 수그러진 것도 사실이다.

 

 

 

 

예술에도,
삶에도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색깔은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사랑의 색이다. 

 

 

 

두 번째 연인이었던 버지니아  맥닐과 7년동안 결혼하지 않고 살았지만 죽은 벨라를 잊지 못하는 샤갈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어린 아들을 데리고 그를 떠난다.  딸이다의 소개로 1952년 바바 브로드스키를 만나 세 번째 결혼을 하고 프로방스에서 98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앤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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