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최초의 본격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는 1593년 7월 8일 로마에서 어머니 프르덴 시아 디 몬토네(Prudentia Montone)와 유명한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Orazio Gentileschi 1563-1639)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 자녀 중 맏이인 젠틸레스키는 어려서부터 미술에 대한 흥미와 재능을 보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오라치오는 로마 화단 최전선에서 도발적인 화가인 카라바조(Caravaggio)의 친구였습니다. 아버지는 카라바조와 함께 한 때 로마 거리에서 다른 화가를 비방하고 헛소문을 퍼뜨린 혐으로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12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십니다. 그녀 나이 13살이었을 때 카라바조는 살인에 연루되어 로마에서 나폴리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후 아버지가 혼자서 네 남매를 키우게 됩니다. 당시 미술학교 입학은 남자들의 전유물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 밑에서 물감을 섞고 안료를 빻으며 자연스레 그림을 배우게 됩니다.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녀가 17세에 그린 그림이 <수산나와 두 노인들>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도움을 조금은 받았겠지요. 그래도 그 표현만큼은 수습생 수준 이상입니다.
내 딸은 견줄 만한 화가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솜씨가 뛰어나다.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xio Gentileschi)-
벌거벗은 한 여인이 고개를 돌리고 남자들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검은 머리 남자는 빨간 망토의 남자에게 귓속말로 속삭이고 있고요. 빨간 망토의 남자는 여인에게 뭔가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그 말에 진저리를 치고 있죠. 이 작품은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1593-1652)가 그린 <수잔나와 두 노인들>이라는 성서 이야기입니다.
수산나와 요아킴은 유대인 부부입니다. 남편 요아킴이 유명인사라 집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그중에는 유대인 재판관 두 명도 끼어있습니다. 이 두 재판관은 아름다운 수산나를 탐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손님들 모두가 돌아가고 수산나가 정원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두 노인은 수산나에게 다가가 성관계를 요구하지요. 만일 거절할 경우 젊은 남자와 간통했다고 고발하겠다며 협박합니다.
수산나는 거짓이 두려워 겁탈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거절합니다. 결국 이들의 모략에 당해 간통죄로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중 수산나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절실한 수산나의 기도가 닿았는지 , 성령이 어린 다니엘의 몸에 내려왔고, 다니엘이 진실을 밝혀 수산나의 누명이 벗겨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복제됩니다. 여자의 누드가 금지되던 당시, 성경의 이야기를 매개로 여자의 누드를 그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지요. 정원 풍경 속 여자의 누드는 그림을 매입하는 사람도 , 그리는 사람도 모두 남자였던 사회에서 최고의 관심거리였지요. 희생자인 수산나의 고통은 고려되지 않은 채 화가들에 의해 두 노인을 유혹하는 여자로, 때로는 두려움에 벌벌 떠는 연약한 모습으로 재현되기 일쑤였습니다. 여자의 위치가 아버지와 남편의 재산의 일부로 여겨지던 때입니다. 인권이란 말은 꿈조차 꾸지 못 하던 시대이지요.
하지만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수산나는 이 상황이 몹시 불쾌했습니다. 여자의 누드에만 초점이 맞춰진 여타의 그림들과는 달리 그녀의 그림속 수잔나는 수치심과 저항감이 온몸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다른 화실의 견습생인 기로라모 모데네제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습니다. 남몰래 아르테미시아를 탐하던 아버지의 친구이자 화가인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 1578-1644)가 사사건건 이들을 방해합니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수산나와 두 노인들>에서 검은 곱슬머리의 남자가 제목과 다르게 노인이 아닌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수산나의 모습에 자신이 느끼는 불쾌감을 , 두 노인 중 한 명의 모습에 자신을 탐하는 타시(Tassi)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선배화가인 틴토레토(Tintoretto)의 <Susnnna and the Elders>(1555-1556)그림과 비교해 보시면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게 될 겁니다.
당시 타시는 아버지 오라치오와 퀴리날레 궁 추기경실에 들어갈 프레스코화를 공동 제작 중이었습니다. 타시는 오라치오에게 딸의 그림 선생이 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원근법에 능했던 타쉬가 그녀를 지도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싶어 아버지 오라치오는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수업을 핑계로 아르테미시아와 자연스레 만날 일이 많아진 타시(Tassi)는 마침내 그녀를 겁탈합니다. 타시는 이미 유부남이었지만 결혼을 약속하며 그녀를 다독이지요. 그러나 그 약속은 차일피일 미룬 채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도 참아왔던 아버지 오라치오는 그를 강간죄로 고소합니다.
알고 보니 타시(Tassi)는 상습범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강간해서 그 죄를 모면하기 위해 결혼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내의 어린 여동생(13세)도 강간해 임신까지 시켰고요. 아내의 여동생과의 성관계도 근친에 해당돼 벌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타시(Tassi)는 아내를 청부 살해해 달라고 의뢰합니다. 아내를 죽이고 처제와 결혼하는 것으로 죄를 면하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그 와중에 오라치오의 그림을 훔치려던 계획이 탄로 납니다. 놀랍게도 이게 실화냐 싶지만 사실입니다. 로마의 재판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재판의 쟁점은 타시(Tassi)가 '그녀를 강간했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순결했느냐'였습니다. 여성의 순결이 재산으로 간주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순결을 입증하기 위해 산파들 앞에서 부인과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타시(Tassi)와 대질 상태에서 '시빌레'라는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고요.
시빌레는 손가락 마디가 으스러질 때까지 조이는 고문입니다. 고문이 끝났을 때 그녀의 손은 시퍼렇게 부어올라 마비됐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에서 증언을 번복하지 않으면, 그 말은 진실로 입증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아르테미시아는 풀려났고 타시(Tassi)는 유죄가 확정이 됩니다. 어이없게도 타시의 후원자들이 힘을 행사해 타시(Tassi)는 금세 풀려납니다. 아르테미시아는 피해자이지만 재판을 통해 더 큰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 사건 이후 아르테미사아가 그린 그림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입니다.
유디트는 성경의 외경(Apocrypha)중 유딧서(Book of Judith)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기원전 2세기 이스라엘 베툴리아(Bethulia) 지방의 과부였죠. 당시 베툴리아 지방은 아시리아의 홀로페르네스 군대에 의해 점령됐습니다. 유디트는 사절로 위장하고 적진에 접근합니다. 홀로페르네스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지요. 축제 중 홀로페르네스가 천막으로 들어가 술에 취해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을 때, 유디티와 그의 시녀 아브라는 기회를 엿보다가 홀로페르네스의 칼로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유디트는 홀로 페르네스의 목을 몰래 고향으로 가져갔고요. 그의 죽음으로 아시리아군은 퇴각하게 됩니다. 베툴리아에 다시 평화가 찾아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명작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재판 건으로 이래저래 마음이 상했던 아르테미시아가 내놓은 첫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공개되자 로마는 다시 한번 떠들썩해졌습니다. 목을 베는 유디트의 얼굴은 아르테미시아와 홀로페르내스의 얼굴은 타시(Tassi)와 판박이였기 때문입니다. 화가들이 제 얼굴을 성서 그림이나 역사화에 그려 넣은 건 르네상스 이후 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주인공이면서 이처럼 잔인한 역할로 그려진 적은 없었지요.
아르테미시아가 유디트에 자신을 투영해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함으로써, 아르테미시아는 이제가지 남성 중심적이었던 역사와 종교의 주제와 위계를 무너뜨린 최초의 여성이 됐습니다. 그림 속 유디티는 적장의 목을 베는 데에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보는 이마다 넋을 잃을 만큼 빼어났다는 성서 속 유디트의 아름다움을 지혜, 용기, 자신의 의지를 실행하고 관철할 수 있는 결단력 그리고 건강한 육체로 해석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이 극적인 이야기는 카라바조, 루벤스와 같이 바로크 시대 미술가들이 즐겨 그리던 주제입니다. 그들의 작품들과 달리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유디트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를 유혹해서 함정에 빠뜨리는 여자'유디트는 보는 남자들의 입맛에 맞게 재생되어 왔습니다. 살인을 저지르기에는 유약한 자세이거나, 아무것도 몰라요'하는 순진한 얼굴로 말이죠. 장군의 목을 베면서까지 관능적인 표정을 짓는 유디트의 그림도 있었으니까요.
아르테미시아가 표현한 유디트는 단호합니다. 마치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한치의 망설임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놀라울만치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장군이 꼼짝할 수 없게 위에서 짓누르는 하녀를 보세요. 저 정도 압박이 아니면 장수를 당할 수 없겠죠. 그리고 유디트의 힘이 잔뜩 들어간 팔뚝과 장군의 목에서 솟구치는 동맥혈은 현장감까지 느껴져 더 끔찍하게 보입니다.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에 한 가지 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타시(Tassi)를 그려 넣은 점입니다. 유디트에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넣고요. 이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죽을 듯이 괴로웠을 테지요. 그녀의 절망과 고통과 분노가 얼마큼 극에 달했는지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돼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의 아픈 서사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다른 거장들의 같은 작품은 기억조차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하고 힘이 셉니다.
아버지 오라치오는 재판이 끝나고 한 달 만에 아르테미시아를 피렌체에 살고 있는 피에트로 안토니오 스티아테시와 결혼시킵니다. 재판은 이겼지만 딸을 향한 주변의 시선은 차갑고 따갑습니다. 남편감 피에트로 역시 화가였습니다. 실력은 미미해 수습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죠. 낭비가 심해 빚더미에 앉아 있었고요.
그의 빚을 청산해 주는 조건으로 아르테미시아는 그와 결혼합니다. 도망치듯 결혼했지만, 다행히 피렌체로 간 아르테미시아는 짧지만 인생의 행복을 맛봅니다. 남편 피에트로는 자신의 소비를 충족시킬 만한 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아르테미시아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름도 지난날의 아픔을 지우고자 아르테미시아 로미로 바꾸게 되고요.
남편 피에트로는 주문을 받아오고 아르테미시아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르테미시아의 이름이 알려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초상화나 정물화는 물론 역사의 위대한 여인들의 싸움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들을 표현했습니다. 유디트 이야기와 야엘 이야기 같은 성경 속의 여성 영웅들, 그리고 루크레티아와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자신들의 최후는 자신들이 결정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IN8NlznHtE
젠틀레스키의 유디트 그림은 시간차를 달리해 여러 차례 재 생산됩니다. 그녀가 그려내는 유디트(Judith)는 은유가 아니고 복수 극장 같습니다. 마치 분노에 넘치는 폭로 미술 같습니다. 그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역동성은 대담한 색상과 극적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 사용으로 더욱 강조됩니다.
유디트의 하녀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 홀로 페르네스의 참수한 머리가 담겨있는 섬뜩한 그림, 피렌체의 피티 궁전에 걸려 있던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의 대공 비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ddalena of Austria)의 소장품으로 1638년 궁정 재산 기록에 등재된 작품입니다. 성경 속 여주인공 유디트가 홀로 페르네스 장군을 참수하고 그녀의 하인 아브라와 함께 적장의 천막을 떠나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칼을 어깨에 걸친 유디트의 표정에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이 주제는 아르테미시아의 미술 경력 동안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묘사했던 '남자의 처형'작업을 기반으로 합니다. 유디트를 빌려 표현한 화가의 자전적 복수가 담긴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아르테미시아의 화폭에 소환되는 주제는 성폭행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다나에(Danae)는 아르고스(Argos)의 아크리시오스(Acrisius) 왕의 딸입니다. 다나에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아버지 왕이 살해될 것이라는 신탁의 예언에 따라 다나에는 궁전에 갇힌 젊은 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에 신들의 왕 제우스가 자신의 모습을 변용해 그녀와 동침에 성공하고 황금 정액으로 낳은 아들은 나중에 불길한 예언을 성취한 페르세우스(Perseus)였습니다. 다나에의 꼭 조인 다리의 모양새 보이시나요?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느껴집니다. 유난히 자신을 보호하려는 강력한 무릎과 무릎 사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카라바조 풍의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처럼 미술사 최초의 본격 화가였던 그녀도 같은 '카라바제스키(카라바조 같은) 아류 화가'로 분류됩니다. 때문에 이 작품은 그녀 아버지 작품으로 오랫동안 분류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이 그림이 10년 후에 그려진 그녀의 <클레오 파트라 (Cleopatra,1621)와 포즈와 구성의 유사성을 이유로 1990년에야 그녀의 작품으로 자리매김됩니다. 하녀의 모습이 있고 없고의 차이지 포즈랑 구성이 비슷하죠.
400년이나 잊혔던 아르테미시아 작품이 미술계의 확고한 위치로 돌아온 것은 2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호주에서 아르테미시아는 몇 년 동안 유명한 화가들을 제치고 구글 검색 부동의 1위였던 적이 있습니다. 이유인즉 1976년 호주에서 우연히 발견된 <어머니와 아이 Mother and Child>라는 그림 때문이지요. 이 작품이 1612년 작품이라면, 그녀의 치욕의 재판 결과가 나오던 해입니다. 열일곱 살 로마 처녀 강간 사건 2년 후입니다. 상처 난 젖가슴의 핏자국 흉터는 우연일까요? 제게는 당시 아르테미시아가 겪어야 했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을 까 싶습니다.
클레오 파트라의 자살 후 두 명의 시중드는 하녀에게 발견되는 장면입니다. 남성에 의해 성적 유혹의 대상이 되었던 또 다른 여성의 '죽음의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지요. 클레오 파트라의 죽음의 순간, 무심코 남성 욕망의 대상이 된 클레오파트라의 고독한 죽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남성 권력에 희생된 폭력에 응답하는 선택으로 피렌체 우피치에 소장하고 있던 기원전 3세기 <잠이 든 아리아드네(Arianna addoumentata)>그리스 헬레니즘 조각을 본떠 그렸습니다. 그녀 역시 남성의 노리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영원한 잠을 테마로 한 조각상이니까요.
쟁반 위에 놓인 세례 요한의 참수된 머리, '어디 한번 보자.' 하는 투의 태도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쥐고 있는 남성의 꽉 움켜쥔 손 표현이 성인의 얼굴과 함께 묘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림 속에서 남자를 이렇게 과하게 표현했던 페미니즘 화가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모든 작품이 십 대 시절 겪은 한 사건으로 모두 수렴되는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슬슬 그녀의 그림이 무서워지려 합니다.
<야엘과 시스라>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시스라 장군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치던 중, 야엘은 시스라를 자신의 천막으로 불러 안심시킵니다. 시스라를 잠들게 한 뒤 장막 말뚝과 방망이로 시스라의 관자놀이를 쳐 살해합니다. 야엘은 여호와의 적을 처단한 대담한 영웅으로 칭송됩니다. 적을 처단하는 그의 표정에 허둥거림이나 두려움은 일도 없습니다.
강한 짐승의 머리에 말뚝을 박은 이 잔학하고 끔찍한 주제는 선을 넘는 잔혹함 때문에 17세기 미술에서 간 큰 남자 화가들도 거의 꺼려하던 소재였습니다. 동시대의 다른 사례는 거의 없던 여자의 복수이야기. 그녀가 '남자의 복수'를 표현하기 위해 차용해 온 성서 속에서, 사사 드보라는 그녀의 행위를 크게 '잘한 짓'이라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괜스레 저는 모방범죄 같은 게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이런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는 듯싶어서 말입니다. 심장 약한 사람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림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남편 고향인 피렌체의 스티아테시로 이사했습니다. 피렌체에 사는 동안 아르테미시아는 유명한 예술 드로잉 아카데미에 입학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는 피렌체 화가 조합원이 되어서 이제는 남편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단독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피렌체의 실력자인 토스카나 대 공인 코시모 2세 Cosimo de Medici의 지원을 받아 여성 화가로 많은 수입도 올리게 되었습니다.
1618년 아르테미시아는 남편과 사이에 아이들 다섯을 낳았습니다. 넷은 어려서 죽고 딸 푸루덴티아(Prudentia)만 남았습니다. 딸에게 준 이름'푸루덴티아'는 열두 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무렵 아르테미시아는 프란체스코 마리아 (Francesco Maria di Niccolo Maringhi)라는 피렌체 귀족과 열정적인 관계를 시작합니다. 서로 주고받은 연애편지가 2011년에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전시회에 공개도 되었고요.
아르테미시아의 불륜에 대한 소문은 금방 피렌체 사방에 퍼져 부부 사이의 불화가 생기게 됩니다. 1621년 아르테미시아는 남편을 두고 딸과 함께 로마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로마에서 그녀는 카라바조의 추종 화가 그룹과 일했습니다. 딸과 함께 유랑 생활을 계속 한 젠틸레스키는 1630년 나폴리로 이주하여 마시모 스탄 치오네(Massimo Stanzione)와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1638년 런던으로 가게 되지요. 런던에는 이미 1626년에 간 아버지가 찰스 1세의 궁정 화가로 성공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런던에서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 도움으로 회화의 우화로서의 자화상(1638)을 포함하여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또한 그녀는 찰스 1세 왕의 아내인 헨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 여왕의 그리니치 거주지에 프레스코화작업을 아버지와 함께 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를 도와 많은 화가로서 여러 작업을 런던에서 했고 아버지 오라치오는 1639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
짐승의 머리를 들고 있는 사람은 다윗 대신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기존 거장들의 같은 주제와 비교해 보아도 아르테미스의 작품은 역시 다릅니다. 어린 다윗의 돌팔매에 죽은 골리앗의 이마에 난 선명한 자국이 그녀의 강건함을 함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델릴라(Delilah)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필리스티아(불레셋) 여인으로 , 초인적인 삼손(Samson)을 유혹하여 그를 파멸로 몰고 간 여성입니다. 선배 화가들이 단골로 그리던 주제이기도 하고요. 그녀는 이스라엘의 장군 삼손을 집요하게 유혹하여 그 힘의 비밀을 캐냅니다. 잠든 그의 머리카락을 자르려는 데릴라 손에 들린 날카로운 가위 보이십니까? 그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라 이미 필리스티아(불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있네요. 머리가 잘리는 줄도 모르고 데릴라 무릎에서 곤하게 자고 있는 삼손의 모습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목욕을 하면서 다윗 왕을 유혹했던 밧세바의 모습, 구약에서 차용해 온 이야기의 그림입니다. 밧세바는 우리아의 아내였으나 미모에 반한 다윗이 그녀와 동침하여 임신하게 됩니다. 남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 다윗 왕은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 전사하게 만들고 그 아내를 취하지요.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우리아의 아내'로 소개된 밧세바는 훗날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다윗과의 사이에 낳은 첫아들은 하느님의 징계로 죽고, 후에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 등 4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다윗 말년에 왕자 아도니야가 반란을 계획할 때 선지자 나단의 후원에 힘입어 아들 솔로몬이 다윗의 후계자가 됩니다.
밧세바의 몸에 떨어진 빛과 그림자가 영화의 조명처럼 주인공을 비치고 있네요. 발코니의 남자 모습이 다윗왕인가 봅니다. 머리를 빗겨주고, 보석을 들어 보이고 , 발 씻을 물을 대령하고, 깨진 돌자국까지 섬세합니다. 같은 주제지만 작가의 경험에 따라 밧세바의 느낌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젠틀레스키의 작품 중 화가로서 자부심을 완벽히 담고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회화의 알레고리로 그려진 자화상>입니다. 제목에서도 읽히듯 젠틸레스키 자신을 회화 그 자체로 바라보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고백합니다. 작품 속의 그녀는 일반적인 자화상들과 달리 정면을 응시하지 않습니다. 무척 파격적인 구도의 작품인 거죠. 두 손에 들린 팔레트와 붓은 그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그녀의 시선은 화면 밖의 캔버스라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화면 밖에서 그녀를 보는 시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당대 유사한 자화상들이 자신을 귀족처럼 표현한 것과 달리 그 어떤 화려한 옷도 장신구도 없는 온전히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두 팔을 크게 벌리고 거침없이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자신을 담아낸 겁니다.
남성들만의 전유물이던 화가의 세계는 미술사에서는 물론 바로크 당시에도 유일한 여성화가 젠틸레스키가 화가로서 자부심을 표현하듯, 보란 듯이 팔레트와 그림붓을 들고 그림을 그려나갑니다. 신중하게 진행 중인 이 그림은 비록 미완성 작품이지만 자신의 화가로서의 자신감 넘치는 이 자화상은 회화의 우화로서의 16세기 체자레 리파(Cesare Ripa)의 미술 핸드북 <이코놀로지아 Iconologia>에서 표현한 아름다운 여성의 표준 도상학을 실천해 그리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이란, 완전한 검은 머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치형 눈썹, 그녀의 목에 금목걸이를 걸치고...'제안한 글 디렉션 대로 실천하고 있는 자화상입니다.
아르테미시아는 1642년 잉글랜드 청교도 내전이 발발할 때 영국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폴리로 돌아옵니다. 그녀의 사망 날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가 1654년 나폴리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몇 가지 있죠. 그녀가 1656년에 도시를 황폐화시킨 전염병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pEkhH6AC0w
그녀가 죽은 후에 그녀는 미술사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많은 그녀의 작품은 아버지 오라치오 작품으로 귀속되었기 때문이지요. 1900년대 초가 되어 그녀가 재발견되면서 한동안 그녀의 삶과 그림에 대한 관심보다는 지나치게 성적인 편견이 가득한 '카더라'해석으로 채색되었습니다. 특히 그녀의 강간 사건이나 처녀막 검사, 결혼생활 중 외도 같은 선정적인 소설이 판을 쳤습니다.
그녀에 대한 진정한 발견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페미니스트 미술사 학자들에 의해서입니다. 1976년 전시회 "여성 미술가들(Women Artists:1550-1950)에서 미술사 학자 앤 서덜랜드 해리스(Ann Sutherland Harris)가 그녀는 '남성 중심의 서양 미술 역사상 최초의 여성화가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화가'라는 의미 부여를 하면서부터입니다.
특유의 드라마, 빛의 효과, 색의 혼합을 통해 그녀는 바로크 미술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남성 중심적이었던 역사와 종교라는 주제의 위계를 과감히 무너뜨리면서 말이죠. 그래서 그녀를 최초의 페미니즘 화가로 부르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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