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최초의 본격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는 1593년 7월 8일 로마에서 어머니 프르덴 시아 디 몬토네(Prudentia Montone)와 유명한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Orazio Gentileschi 1563-1639)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 자녀 중 맏이인 젠틸레스키는 어려서부터 미술에 대한 흥미와 재능을 보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오라치오는 로마 화단 최전선에서 도발적인 화가인 카라바조(Caravaggio)의 친구였습니다.  아버지는 카라바조와 함께 한 때 로마 거리에서 다른 화가를 비방하고 헛소문을 퍼뜨린 혐으로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12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십니다. 그녀 나이  13살이었을 때 카라바조는 살인에 연루되어 로마에서 나폴리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후 아버지가 혼자서 네 남매를 키우게 됩니다. 당시 미술학교 입학은 남자들의 전유물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 밑에서 물감을 섞고 안료를 빻으며 자연스레 그림을 배우게 됩니다.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녀가 17세에 그린 그림이 <수산나와 두 노인들>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도움을 조금은 받았겠지요. 그래도 그 표현만큼은 수습생 수준 이상입니다. 

 

 

 

 

내 딸은 견줄 만한 화가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솜씨가 뛰어나다.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xio Gentileschi)-

 

 

 

 

 

 

<수산나와 두 장로>,1610,17세 작품, 포머스펠덴의 쇠보른 가 소장/wikipedia

 

 

 

벌거벗은 한 여인이 고개를 돌리고 남자들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검은 머리 남자는 빨간 망토의 남자에게 귓속말로 속삭이고 있고요.  빨간 망토의 남자는 여인에게 뭔가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그 말에 진저리를 치고 있죠. 이 작품은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1593-1652)가 그린 <수잔나와 두 노인들>이라는 성서 이야기입니다. 

 

 

 

수산나와 요아킴은 유대인 부부입니다. 남편 요아킴이 유명인사라 집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그중에는 유대인 재판관 두 명도 끼어있습니다. 이 두 재판관은 아름다운 수산나를 탐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손님들 모두가 돌아가고 수산나가 정원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두 노인은 수산나에게 다가가 성관계를 요구하지요. 만일 거절할 경우 젊은 남자와 간통했다고 고발하겠다며 협박합니다. 

 

 

수산나는 거짓이 두려워 겁탈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거절합니다. 결국 이들의 모략에 당해 간통죄로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중 수산나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절실한 수산나의 기도가 닿았는지 , 성령이 어린 다니엘의 몸에 내려왔고, 다니엘이 진실을 밝혀 수산나의 누명이 벗겨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복제됩니다. 여자의 누드가 금지되던 당시, 성경의 이야기를 매개로  여자의 누드를 그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지요. 정원 풍경 속 여자의 누드는 그림을 매입하는 사람도 , 그리는 사람도 모두 남자였던 사회에서 최고의 관심거리였지요. 희생자인 수산나의 고통은 고려되지 않은 채 화가들에 의해 두 노인을 유혹하는 여자로, 때로는 두려움에 벌벌 떠는 연약한 모습으로 재현되기 일쑤였습니다. 여자의 위치가 아버지와 남편의 재산의 일부로 여겨지던 때입니다. 인권이란 말은 꿈조차 꾸지 못 하던 시대이지요. 

 

 

하지만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수산나는 이 상황이 몹시 불쾌했습니다. 여자의 누드에만 초점이 맞춰진 여타의 그림들과는 달리  그녀의 그림속 수잔나는  수치심과 저항감이 온몸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다른 화실의 견습생인 기로라모 모데네제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습니다.  남몰래 아르테미시아를 탐하던 아버지의 친구이자  화가인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 1578-1644)가  사사건건 이들을 방해합니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수산나와 두 노인들>에서 검은 곱슬머리의 남자가 제목과 다르게 노인이 아닌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수산나의 모습에 자신이 느끼는 불쾌감을 , 두 노인 중 한 명의 모습에 자신을 탐하는 타시(Tassi)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선배화가인 틴토레토(Tintoretto)의 <Susnnna and the Elders>(1555-1556)그림과 비교해 보시면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게 될 겁니다. 

 

 

 

<Susanna and the Elders>,1555-1556, Tintoretto/wikipedia

 

 

 

 


 

 

당시 타시는 아버지 오라치오와 퀴리날레 궁 추기경실에 들어갈 프레스코화를 공동 제작 중이었습니다. 타시는 오라치오에게 딸의 그림 선생이 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원근법에 능했던 타쉬가 그녀를 지도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싶어 아버지 오라치오는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수업을 핑계로 아르테미시아와 자연스레 만날 일이 많아진 타시(Tassi)는 마침내 그녀를 겁탈합니다. 타시는 이미 유부남이었지만 결혼을 약속하며 그녀를 다독이지요. 그러나 그 약속은 차일피일 미룬 채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도 참아왔던 아버지 오라치오는 그를 강간죄로 고소합니다.

 

 

알고 보니 타시(Tassi)는 상습범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강간해서 그 죄를 모면하기 위해 결혼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내의 어린 여동생(13세)도 강간해 임신까지 시켰고요. 아내의 여동생과의 성관계도 근친에 해당돼 벌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타시(Tassi)는 아내를 청부 살해해 달라고 의뢰합니다. 아내를 죽이고 처제와 결혼하는 것으로 죄를 면하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그 와중에 오라치오의 그림을 훔치려던 계획이 탄로 납니다. 놀랍게도 이게 실화냐 싶지만 사실입니다. 로마의 재판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재판의 쟁점은 타시(Tassi)가 '그녀를 강간했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순결했느냐'였습니다. 여성의 순결이 재산으로 간주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순결을 입증하기 위해 산파들 앞에서 부인과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타시(Tassi)와 대질 상태에서 '시빌레'라는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고요.

 

 

 

시빌레는 손가락 마디가 으스러질 때까지 조이는 고문입니다. 고문이 끝났을 때 그녀의 손은 시퍼렇게 부어올라 마비됐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에서 증언을 번복하지 않으면, 그 말은 진실로 입증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아르테미시아는 풀려났고 타시(Tassi)는 유죄가 확정이 됩니다. 어이없게도 타시의 후원자들이 힘을 행사해 타시(Tassi)는 금세 풀려납니다. 아르테미시아는 피해자이지만 재판을 통해 더 큰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 사건 이후 아르테미사아가 그린 그림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입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20/wikipedia

 

 

 

 

카라바조 Caravaggio<Judith Beheading Holoferness>,1598-1599/wikipedia

 

 

유디트는 성경의 외경(Apocrypha)중 유딧서(Book of Judith)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기원전 2세기 이스라엘 베툴리아(Bethulia) 지방의 과부였죠. 당시 베툴리아 지방은 아시리아의 홀로페르네스 군대에 의해 점령됐습니다. 유디트는 사절로 위장하고 적진에 접근합니다. 홀로페르네스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지요. 축제 중 홀로페르네스가 천막으로 들어가 술에 취해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을 때, 유디티와 그의 시녀 아브라는 기회를 엿보다가 홀로페르네스의 칼로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유디트는 홀로 페르네스의 목을 몰래 고향으로 가져갔고요.  그의 죽음으로 아시리아군은 퇴각하게 됩니다.  베툴리아에 다시 평화가 찾아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명작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재판 건으로 이래저래 마음이 상했던 아르테미시아가 내놓은 첫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공개되자  로마는 다시 한번 떠들썩해졌습니다. 목을 베는 유디트의 얼굴은 아르테미시아와 홀로페르내스의 얼굴은 타시(Tassi)와 판박이였기 때문입니다. 화가들이 제 얼굴을 성서 그림이나 역사화에 그려 넣은 건 르네상스 이후 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주인공이면서 이처럼 잔인한 역할로 그려진 적은 없었지요.

 

 

아르테미시아가 유디트에 자신을 투영해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함으로써, 아르테미시아는 이제가지 남성 중심적이었던 역사와 종교의 주제와 위계를 무너뜨린 최초의 여성이 됐습니다.  그림 속  유디티는 적장의 목을 베는 데에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보는 이마다 넋을 잃을 만큼 빼어났다는 성서 속 유디트의 아름다움을 지혜, 용기, 자신의 의지를 실행하고 관철할 수 있는 결단력 그리고 건강한 육체로 해석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이 극적인 이야기는 카라바조, 루벤스와 같이 바로크 시대 미술가들이 즐겨 그리던 주제입니다. 그들의 작품들과 달리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유디트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를 유혹해서 함정에 빠뜨리는 여자'유디트는 보는 남자들의 입맛에 맞게 재생되어 왔습니다. 살인을 저지르기에는 유약한 자세이거나, 아무것도 몰라요'하는 순진한 얼굴로 말이죠. 장군의 목을 베면서까지 관능적인 표정을 짓는 유디트의 그림도 있었으니까요.

 

 

아르테미시아가 표현한 유디트는 단호합니다. 마치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한치의 망설임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놀라울만치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장군이 꼼짝할 수 없게 위에서 짓누르는 하녀를 보세요.  저 정도 압박이 아니면 장수를 당할 수 없겠죠. 그리고 유디트의 힘이 잔뜩 들어간 팔뚝과  장군의 목에서 솟구치는 동맥혈은 현장감까지 느껴져 더 끔찍하게 보입니다.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에 한 가지 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타시(Tassi)를 그려 넣은 점입니다.  유디트에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넣고요. 이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죽을 듯이 괴로웠을 테지요. 그녀의 절망과 고통과 분노가  얼마큼 극에 달했는지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돼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의 아픈 서사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다른 거장들의 같은 작품은 기억조차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하고 힘이 셉니다.

 

 

 

아버지 오라치오는  재판이 끝나고 한 달 만에 아르테미시아를 피렌체에 살고 있는 피에트로 안토니오 스티아테시와 결혼시킵니다. 재판은 이겼지만 딸을 향한 주변의 시선은 차갑고 따갑습니다. 남편감 피에트로 역시 화가였습니다. 실력은 미미해 수습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죠. 낭비가 심해 빚더미에 앉아 있었고요.

 

 

 

그의 빚을 청산해 주는 조건으로 아르테미시아는 그와 결혼합니다. 도망치듯 결혼했지만, 다행히 피렌체로 간 아르테미시아는 짧지만 인생의 행복을 맛봅니다. 남편 피에트로는 자신의 소비를 충족시킬 만한 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아르테미시아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름도 지난날의 아픔을 지우고자 아르테미시아 로미로 바꾸게 되고요.

 

 

 

남편 피에트로는  주문을 받아오고 아르테미시아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르테미시아의 이름이 알려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초상화나 정물화는 물론 역사의 위대한 여인들의 싸움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들을 표현했습니다. 유디트 이야기와 야엘 이야기 같은 성경 속의 여성 영웅들, 그리고 루크레티아와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자신들의 최후는 자신들이 결정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IN8NlznHtE

 

 

젠틀레스키의 유디트 그림은 시간차를 달리해 여러 차례  재 생산됩니다. 그녀가 그려내는 유디트(Judith)는 은유가 아니고 복수 극장 같습니다.  마치 분노에 넘치는 폭로 미술 같습니다.  그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역동성은 대담한 색상과 극적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 사용으로 더욱 강조됩니다.

 

 

 

<유디트>/알라딘 서재

 

 

 

<유디트와 그녀의 하녀>/hillscounselling.co.uk

 

 

<유디트와 하녀>,1613-1614/wikipedia

 

 

 

 

 

유디트의 하녀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 홀로 페르네스의 참수한 머리가 담겨있는 섬뜩한 그림, 피렌체의 피티 궁전에 걸려 있던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의 대공 비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ddalena of Austria)의 소장품으로 1638년 궁정 재산 기록에 등재된 작품입니다.  성경 속 여주인공 유디트가 홀로 페르네스 장군을 참수하고 그녀의 하인 아브라와 함께 적장의 천막을 떠나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칼을 어깨에 걸친 유디트의 표정에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이 주제는 아르테미시아의 미술 경력 동안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묘사했던 '남자의 처형'작업을 기반으로 합니다.  유디트를 빌려 표현한 화가의 자전적 복수가 담긴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헤럴드 경제

 

 

 

 

 

 

 

 

 


 

 

 

 

 

<Danae>,1612/Google Arts&Culture

 

 

 

여전히  아르테미시아의 화폭에 소환되는 주제는 성폭행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다나에(Danae)는 아르고스(Argos)의 아크리시오스(Acrisius) 왕의 딸입니다. 다나에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아버지 왕이 살해될 것이라는 신탁의 예언에 따라 다나에는 궁전에 갇힌 젊은 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에 신들의 왕 제우스가 자신의 모습을 변용해 그녀와 동침에 성공하고 황금 정액으로 낳은 아들은 나중에 불길한 예언을 성취한  페르세우스(Perseus)였습니다. 다나에의 꼭 조인 다리의 모양새 보이시나요?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느껴집니다. 유난히 자신을 보호하려는 강력한 무릎과 무릎 사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카라바조 풍의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처럼 미술사 최초의 본격 화가였던 그녀도 같은 '카라바제스키(카라바조 같은) 아류 화가'로 분류됩니다. 때문에 이 작품은 그녀 아버지 작품으로 오랫동안 분류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이 그림이 10년 후에 그려진 그녀의 <클레오 파트라 (Cleopatra,1621)와 포즈와 구성의 유사성을 이유로  1990년에야 그녀의 작품으로 자리매김됩니다.  하녀의 모습이 있고 없고의 차이지 포즈랑 구성이 비슷하죠. 

 

 

 

 

 

 

 

 

<Cleopatra>,1611-1612/wikipedia

 

 

 


 

 

 

<어머니와 아이>,1612/wikipedia

 

 

 

400년이나 잊혔던 아르테미시아 작품이 미술계의 확고한 위치로 돌아온 것은  2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호주에서 아르테미시아는 몇 년 동안 유명한 화가들을 제치고 구글 검색 부동의 1위였던 적이 있습니다.  이유인즉 1976년 호주에서 우연히 발견된 <어머니와 아이 Mother and Child>라는 그림 때문이지요. 이 작품이 1612년 작품이라면, 그녀의 치욕의 재판 결과가 나오던 해입니다. 열일곱 살 로마 처녀 강간 사건 2년 후입니다. 상처 난 젖가슴의 핏자국 흉터는 우연일까요? 제게는 당시 아르테미시아가 겪어야 했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을 까 싶습니다. 

 

 

 


 

 

<Cleopatra>1633-35/Fine Art America

 

클레오 파트라의  자살 후 두 명의 시중드는 하녀에게 발견되는 장면입니다. 남성에 의해 성적 유혹의 대상이 되었던 또 다른 여성의 '죽음의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지요.  클레오 파트라의 죽음의 순간, 무심코 남성 욕망의 대상이 된 클레오파트라의 고독한 죽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남성 권력에 희생된 폭력에 응답하는 선택으로 피렌체 우피치에 소장하고 있던 기원전 3세기 <잠이 든 아리아드네(Arianna addoumentata)>그리스 헬레니즘 조각을 본떠 그렸습니다. 그녀 역시 남성의 노리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영원한 잠을 테마로 한 조각상이니까요. 

 

 


 

 

<세례 요한의 목과 살로메 Salome with the Head of Saint John the Baptist>,1610-1615, /wikipedia

 

 

쟁반 위에 놓인 세례 요한의 참수된 머리, '어디 한번 보자.' 하는 투의 태도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쥐고 있는 남성의 꽉 움켜쥔 손 표현이 성인의 얼굴과 함께 묘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림 속에서 남자를 이렇게 과하게 표현했던  페미니즘 화가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모든 작품이 십 대 시절 겪은 한 사건으로 모두 수렴되는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슬슬 그녀의 그림이 무서워지려 합니다. 

 


 

 

 

 

 

 

 

<야엘과 시스라 Jael and Sisera>,1620, 부다페스트 미술관 /wikipedia

 

 

 

<야엘과 시스라>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시스라 장군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치던 중,  야엘은 시스라를 자신의 천막으로 불러 안심시킵니다.  시스라를 잠들게 한 뒤 장막 말뚝과 방망이로 시스라의 관자놀이를 쳐 살해합니다. 야엘은 여호와의 적을 처단한 대담한 영웅으로 칭송됩니다. 적을 처단하는 그의 표정에 허둥거림이나 두려움은 일도 없습니다.

 

 

 

강한 짐승의 머리에 말뚝을 박은 이 잔학하고 끔찍한 주제는 선을 넘는  잔혹함 때문에 17세기 미술에서 간 큰 남자 화가들도 거의 꺼려하던 소재였습니다. 동시대의 다른 사례는 거의 없던 여자의 복수이야기. 그녀가 '남자의 복수'를 표현하기 위해 차용해 온 성서 속에서, 사사 드보라는 그녀의 행위를 크게 '잘한 짓'이라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괜스레 저는 모방범죄 같은 게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이런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는 듯싶어서 말입니다. 심장 약한 사람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림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남편 고향인 피렌체의 스티아테시로 이사했습니다. 피렌체에 사는 동안 아르테미시아는 유명한 예술 드로잉 아카데미에 입학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는 피렌체 화가 조합원이 되어서 이제는 남편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단독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피렌체의 실력자인 토스카나 대 공인 코시모 2세 Cosimo de Medici의 지원을 받아 여성 화가로 많은 수입도 올리게 되었습니다. 

 

 

 

1618년 아르테미시아는 남편과 사이에 아이들 다섯을  낳았습니다. 넷은 어려서 죽고 딸 푸루덴티아(Prudentia)만 남았습니다. 딸에게 준 이름'푸루덴티아'는 열두 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무렵 아르테미시아는 프란체스코 마리아 (Francesco Maria di Niccolo Maringhi)라는 피렌체 귀족과 열정적인 관계를 시작합니다. 서로 주고받은  연애편지가   2011년에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전시회에 공개도 되었고요. 

 

 

 

아르테미시아의 불륜에 대한 소문은 금방  피렌체 사방에 퍼져 부부 사이의 불화가 생기게 됩니다.  1621년 아르테미시아는 남편을 두고 딸과 함께 로마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로마에서 그녀는 카라바조의 추종 화가 그룹과 일했습니다. 딸과 함께 유랑 생활을 계속 한 젠틸레스키는 1630년 나폴리로 이주하여 마시모 스탄 치오네(Massimo Stanzione)와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1638년  런던으로 가게 되지요. 런던에는 이미 1626년에 간 아버지가 찰스 1세의 궁정 화가로 성공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런던에서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 도움으로 회화의 우화로서의 자화상(1638)을 포함하여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또한 그녀는 찰스 1세 왕의 아내인 헨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 여왕의 그리니치 거주지에 프레스코화작업을 아버지와  함께 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를 도와 많은 화가로서 여러 작업을 런던에서 했고 아버지 오라치오는 1639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1930/ Wikimedia Commons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

짐승의 머리를 들고 있는 사람은 다윗 대신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기존 거장들의 같은 주제와 비교해 보아도 아르테미스의 작품은 역시 다릅니다. 어린 다윗의 돌팔매에 죽은 골리앗의 이마에 난 선명한 자국이 그녀의  강건함을 함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명예의 알레고리>,1630-1635/wikipedia

 

 

 


 

 

 

<삼손과 데릴라>,1630-1638/wikipedia

 

 

델릴라(Delilah)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필리스티아(불레셋) 여인으로 , 초인적인 삼손(Samson)을 유혹하여 그를 파멸로 몰고 간 여성입니다. 선배 화가들이 단골로 그리던 주제이기도 하고요.  그녀는 이스라엘의 장군 삼손을 집요하게 유혹하여 그 힘의 비밀을 캐냅니다. 잠든 그의 머리카락을 자르려는 데릴라 손에 들린 날카로운 가위 보이십니까? 그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라 이미  필리스티아(불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있네요. 머리가 잘리는 줄도 모르고 데릴라 무릎에서 곤하게 자고 있는 삼손의 모습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다비드와 밧세바>,1636-1637,콜럼버스 미술 박물관/wikipedia

 

 

목욕을 하면서 다윗 왕을 유혹했던 밧세바의 모습,  구약에서 차용해 온 이야기의 그림입니다. 밧세바는 우리아의 아내였으나 미모에 반한 다윗이 그녀와 동침하여 임신하게 됩니다. 남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 다윗 왕은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 전사하게 만들고 그 아내를 취하지요.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우리아의 아내'로 소개된 밧세바는  훗날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다윗과의 사이에 낳은 첫아들은 하느님의 징계로 죽고, 후에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 등 4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다윗 말년에 왕자 아도니야가 반란을 계획할 때 선지자 나단의 후원에 힘입어 아들 솔로몬이 다윗의 후계자가 됩니다. 

 

 

밧세바의 몸에 떨어진 빛과 그림자가 영화의 조명처럼 주인공을 비치고 있네요. 발코니의 남자 모습이 다윗왕인가 봅니다. 머리를 빗겨주고, 보석을 들어 보이고 , 발 씻을 물을 대령하고, 깨진 돌자국까지 섬세합니다. 같은 주제지만 작가의 경험에 따라 밧세바의 느낌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회화의 알레고리로 그려진 자화상>,1639/wikipedia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젠틀레스키의 작품 중 화가로서 자부심을 완벽히 담고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회화의 알레고리로 그려진 자화상>입니다. 제목에서도 읽히듯 젠틸레스키 자신을 회화 그 자체로 바라보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고백합니다. 작품 속의 그녀는 일반적인 자화상들과 달리 정면을 응시하지 않습니다. 무척 파격적인 구도의 작품인 거죠.  두 손에 들린 팔레트와 붓은 그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그녀의 시선은 화면 밖의 캔버스라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화면 밖에서 그녀를 보는 시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당대 유사한 자화상들이 자신을 귀족처럼 표현한 것과 달리 그 어떤 화려한 옷도 장신구도 없는 온전히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두 팔을 크게 벌리고 거침없이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자신을 담아낸 겁니다. 

 

 

남성들만의 전유물이던 화가의 세계는 미술사에서는 물론 바로크 당시에도 유일한 여성화가 젠틸레스키가 화가로서 자부심을 표현하듯, 보란 듯이 팔레트와 그림붓을 들고 그림을 그려나갑니다. 신중하게 진행 중인 이 그림은 비록 미완성 작품이지만 자신의 화가로서의 자신감 넘치는 이 자화상은 회화의 우화로서의 16세기 체자레 리파(Cesare Ripa)의 미술 핸드북 <이코놀로지아  Iconologia>에서 표현한 아름다운 여성의 표준 도상학을 실천해 그리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이란, 완전한 검은 머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치형 눈썹, 그녀의 목에 금목걸이를 걸치고...'제안한 글 디렉션 대로 실천하고 있는 자화상입니다. 

 

 

 

아르테미시아는 1642년 잉글랜드 청교도 내전이 발발할 때 영국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폴리로 돌아옵니다. 그녀의 사망 날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가 1654년 나폴리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몇 가지 있죠. 그녀가 1656년에 도시를 황폐화시킨 전염병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pEkhH6AC0w

 

 

 

그녀가 죽은 후에 그녀는 미술사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많은 그녀의 작품은  아버지 오라치오 작품으로 귀속되었기 때문이지요. 1900년대 초가 되어 그녀가 재발견되면서 한동안 그녀의 삶과 그림에 대한 관심보다는 지나치게 성적인 편견이 가득한 '카더라'해석으로 채색되었습니다. 특히 그녀의 강간 사건이나 처녀막 검사, 결혼생활 중 외도 같은 선정적인 소설이 판을 쳤습니다.

 

 

 

그녀에 대한 진정한 발견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페미니스트 미술사 학자들에 의해서입니다. 1976년 전시회 "여성 미술가들(Women Artists:1550-1950)에서 미술사 학자 앤 서덜랜드 해리스(Ann Sutherland Harris)가 그녀는 '남성 중심의 서양 미술 역사상 최초의 여성화가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화가'라는 의미 부여를 하면서부터입니다.

 

 

 특유의 드라마, 빛의 효과, 색의 혼합을 통해 그녀는 바로크 미술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남성 중심적이었던 역사와 종교라는 주제의 위계를 과감히 무너뜨리면서 말이죠.  그래서 그녀를 최초의 페미니즘 화가로 부르나 봅니다. 

 

 

 

반응형
반응형

인류 역사상 문화가 가장 부흥했던 시기로 르네상스를 꼽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종교화가 신앙심의 근원인 동시에 위엄과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지요. 부정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위선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위선으로 가득 찬 시대에 인간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화가가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Caravaggio, 본명 Michelangelo merisi (1571-1610/39살)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활동한 유명한 화가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와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개신교의 등장으로 흔들리는 교인들의 마음을 붙잡아야 했습니다. 환상적이고 감동적인 성화로 말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현실적이며 인간 본연의 심리를 꿰뚫고 이를 작품에 녹여내려 했던 카라바조는 가톨릭 교회의 눈총을 받게 됩니다. 16세기 뒷골목을 오가는 불량배, 거지, 매춘부 등을 그림 속에 끌어들여 그들을 예수로, 성자로 둔갑시켰기 때문이죠. 그  가 그린 그림에는 그 어디에도 인간을 초월한 신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9.29-1610.7.18)는 후작의 집사 겸 건축가였던 페르모 메리시의 아들로 밀라노 근처 카라바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시절 풍습에 따라 이름에 아버지 고향 이름을 붙였습니다.(다 카라바조:카라바조 출신/2007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사실이 만학도 아마추어 미술사가에 의해 밝혀집니다.)

 

 

 

6살이 되던 해 , 전염병으로 아버지를 잃고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합니다. 13세에 화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는 명암표현법의 창시자로 그림 대부분을 암흑에 가깝도록 어둡게 처리하고 주인공과 그 주변에 빛이 떨어지도록 하는 기법을 처음 시도합니다. 이는 연극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대상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노리는 방법이지요. 인물표현이 아닌 내면적 심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기법입니다. 인간의 내면 표출에 대한 예술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탄생하게 된 기법인 셈이지요.

 


 

 

<Young Sick Bacchus>,1593/wikipedia

 

 

 

 

<병든 바쿠스 신>은 그의 초기작품 중 하나입니다. 무슨 영문인 지 알길 없으나  밀라노에서 로마로 혼자 가게 됩니다. 로마의 뒷골목을 헤매며 구걸도 하고 길거리 화가로 지내다 병에 걸립니다. 몸이 망가져  로마 주변에 있던  빈민구제소에서 치료를 받고 겨우 살아납니다. 살아 나왔던 카라바조 자신의 모습을 신의 모습에 빗대  표현합니다. 신이지만 손톱에 때가 끼고, 시든 화관을 쓰고 있습니다. 얼굴은 병 때문에 창백한 모습이고요.

 

 

그림을 그리는 기교가 뛰어났던 카라바조는 그림들을 스스로 익히면서 빛과 색채를 이해합니다.  술의 신인 바쿠스가 인간처럼 병에 걸리고 술주정을 한다는 발상이 카라바조 답습니다. 충동적인 그의 성격은 매력적인 예술가로 보이게 했습니다. 실력이 뛰어났기에 성격적 결함은 하나의 특징처럼 여져지기도 했지요. 보수적인 미술계에서는 스케치가 없는 계획되지 않는 작품 제작 방식, 지나치게 강렬하고 연극적인 연출 방식 등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하지만 젊은 작가들은 그에게 열광했습니다. 마치 디오니소스 뒤를 따랐던 광신도처럼 말입니다. 당시  젊은 작가들은 카라바조를 숭배했고, 그의 화풍을 흠모했으며, 자신들의 그림에 적극적으로 반영합니다. 

 

 

 

 

당시 기득권 미술가들은 카라바조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미리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카라바조는 캔버스에 스케치 없이 바로 그림을 그렸거든요. 그는 형식을 파괴했고 사실주의 를 추구했습니다. 그의 묘사가 지나치게 사실적이기 때문에 신 중심의 관념적인 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부분도 있습니다. 

 

 

 

 

/contents.kocw.or.kr

 

 


 

 

<The Fortune Teller>,1594/wikipedia

 

 

 

 

 

 처음으로 점쟁이를 사실적으로 등장시킨 작품이 카라바조의 <The Fortune Teller>입니다. 카라바조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에 반대하는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기 위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카라바조 자신이 로마 뒷골목 생활을 하며 모든 군상들을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길거리 생활을 몸소 겪으며 성스러운 도시 로마 사람들의 이면의 삶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젊은 여인이 청년을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청년은 장갑을 쥔 손을 칼에 올리고 젊은 여인에게 손을 맞긴 채 호기심에 가득한 눈빝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옷차림입니다. 당시 집시들은 치마를 한쪽 어깨에 매달아 입고 거리를 다녔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점을 봐주고 돈을 받는 거죠.  젊은 집시 여인에게 점을 보는 젊은 청년은 귀족입니다. 깃털 달린 모자와 화려한 옷차림 그리고 칼은 청년이 귀족임을 상징하고 있지요. 장갑 긴 손을 칼 위에 올리고 있는 것은 물질적인 부유함과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냅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손금을 보는 것이 아나리 청년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탐나는 가 봅니다. 귀족 청년은 훔치려는  여인의 행동을눈치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귀족 청년은 자신의  미래가 궁금하고, 집시 여인은 그런  귀족 청년을 바라보며 훔칠 기회를 노립니다.    이 작품에서 집시여인은 젊은 남자에게 두 가지를 훔칩니다. 운명을 점친다는 거짓말로 돈을 훔치고 그것을 미끼로 반지도 훔치려 하니 말입니다.  카라바조는 집시 여인의 행동에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배경을 생략했습니다.  카라바조는 길을 가다가 점을 보는 집시 여인을 불러 서  이 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마치 길거리 캐스팅처럼 말이죠. ) 다른 화가들에게도 카라바조의 모델 캐스팅 방법이  유행처럼 번졌다고 합니다. 그런 영향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걸 보면 말이죠.

 

 

카라바조는 화가로서 큰 성공을 기대하면서도 의뢰받은 종교화 대신 길거리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서민들의 생활상을 현실감 넘치게 표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당시 화가들이 선호했던 인물들에서 벗어나 매춘부, 농부, 부랑아 등을 과감하게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작품을 미술 애호가나 귀족들은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귀족들의 취향에 맞는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았던 그는 평범한 사람들을 모델로 종교화나 신화를 표현해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카라바조의 재능을 알아본 화상 발랑탱이 종교화를 의뢰했으나 그가 그린 것은 사기꾼을 묘사한 <점쟁이>였습니다. 이 작품을 받은 발랑탱은 카라바조에게 의뢰한 액수를 다 지불하지 않았고 카라바조는 다시 거리로 부랑아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Boy Bitten by a Lizard>,1593-1594/wikipedia

 

 

 

1595년경 로마의 유력한 예술 애호가 눈에 들어 순식간에 이탈리아 최고 화가로 각광받기 직전까지도 카라바조는 다른 화가의 공방에서 정물을 담당하는 도제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정물이란 성화의 배경을 장식하는 사소한 분야로 여겨졌지요. 주문자가 있었을 리 없는 가난한 화가였던 그가 사람들 눈길을 끌어 헐값이지만 판매에 성공했던 게 바로 이 그림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입니다.

 

 

어두운 배경에 강렬한 조명을 받으며 화면을 가득 채운 어린 소년은 탐스러운 과일에 손을 댔다가 숨어 있던 도마뱀에게 손가락을 물렸습니다. 화들짝 놀라면서도 수줍은 눈망울로 간청하듯 우리를 쳐다보니 그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지요. 중지를 물린 소년의 표정이 압권입니다.  벌어진 붉은 입술, 드러난 어깨, 장미를 꽂은 풍성한 머리카락은 보는 이의 성별에 상관없이 유혹적입니다. 소년 앞에는  탱글탱글한 식감이 눈에 보이는 신선한 체리와 고운 꽃이 있습니다. 물방울 맺힌 유리병에는 작업실 창문까지 비쳐 보이니 이 모두를 그려낸 화가의 재주에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유리 화병에 그려 넣은 것처럼 살짝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카라바조가 빛의 양을 조절했다는 말입니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어두운 곳에서 작업을 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빛을 조절하고 있었습니다. 기존 르네상스 작품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은 카라바조의 출현으로 이제 르네상스 작품에  관심이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카라바조를 따라 하는 젊은이들이 생기고 트렌드를 만들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Bacchus>,1596, The Uffizi, Florence /wikipedia

 

 

 

음악과 미술에 있어 당대 최고의 권위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델 몬테 추기경의 저택에서 머물던 시기의 카라바조는 추기경의 후원과 도움을 통해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델 몬태 추기경은 피렌체의 후원을 받아  메디치 가문의 예술품 매입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델 몬테 추기경은 카라바조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그린 그림을 그 자리에서 삽니다. 그리고 숙식을 제공하고 스튜디오를 마련해 주었지요. 카라바조는 그곳에서 다양한 창작을 실험해 보고, 테크닉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합니다.

 

 

 

카라바조는 1590년대 중후반 경에 투스카니(토스카나)의 메디치 대공을 위해 두 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위의 작품 <바쿠스 Bacchus,1596>와 <메두사의 머리 Head of tne Medudsa,1577>가 그것이지요. 

 

 

 

 

포도잎과 덩굴을 둥글게 말아서 만든 머리에 쓴 화환이 보입니다. 갈매기 눈썹에 동그란 얼굴, 적당히 취기가 오른 발그레한 볼이 생기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를 넘어 과하게 되면 술이 욕망이 가득한 사람을 잡아먹게 되지요. 술과 쾌락에 자신의 모든 젊음을 소비하는 당시 카라바조 자신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삼촌과 동생이 성직자였던 집안입니다. 누구보다 신앙심 깊었던 사람이 카라바조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관성의  법칙처럼 카라바조를 다시 구렁텅이 삶으로 밀어 넣습니다. 쾌락에 탕진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이 늘 깔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알고 있지만 살아내지 못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과일바구니 보이시나요. 실사같이 정교해 한 입 깨물고 싶어 집니다. 로마에서 최초의 정물화가였다고 해요. 이런 과일의 섬세한 디테일은 네덜란드로 많이 파려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바니타스'라는 정물화 스타일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상하고 벌레 먹은 구멍이 있는 사과는 현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세속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신성한 구원을 의미하는 포도는 검정 포도는 죽음을 청포도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바쿠스의 손에 들려 있는 입 넓은 커다란 잔에는 와인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투명한 병에 담겨 있는 와인은 아무리 마신다 해도 그 바닥이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림을 통해 카라바조가 생각한 그리스도의 집은 대성당이나 귀족의 저택처럼 너무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려하다는 것은 세속의 삶이 만들어 낸 지극히 계층적인 개념이지요.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야만 하는 일반 대중에게 그리스도의 집은 , 문 안으로 들어서기에 주저하지 않아도 되고, 배 고프지 않을 만큼 먹을 수 있고, 기분이 좋을 만큼 취할 수 있는, 편안한 곳이라는 점입니다. 카라바조는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이 그리 먼 곳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카라바조의 그런 독창성은 사물과 현상을 꿰뚫어 보는 천재적인 눈과 창의적인 해석에서 발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집시와 거지들 그리고 창녀들
오로지 그들만이
나의 스승이며 내 영감의 원천이다.
-카라바조-






<The Cardsharps>,1595/wikipedia

 

 

 

 

미국 텍사스의 킴벌미술관에 전시된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 <카드 사기꾼> 작품입니다. 영국에서 7천만 원에 판 그림이 170억 원 상당의 카라바조 작품으로 감정되자 옛 주인이 화가 나 경매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랍니다.(2014.10.28)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영국인 랜슬롯 드와이츠는 2006년 경매사 소더비를 통해 4만 2천 파운드(한화 7천100만 원)를 받고 그림 한 점을 내다 팔았습니다. 드와이츠의 집안에서 1962년 140파운드에 사들인 이 그림은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 <카드사기꾼>과 비슷했는데  소더비는 카라바조 시대의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판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사들인 저명 예술사가이자 수집가인 테니스 마흔 경은 이 그림이 카라바조의 진품이라면서 1천만 파운드(약 170억 원)의 가치가 있다고 깜짝 발표했습니다. 화가 난 드와이츠는 소더비가 제대로 감정을 하지 않아 손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냈습니다. 소더비는 카라바조의 작품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과실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고요.

 

 

현재 이 그림은 170 역원의 보험에 가입돼  있습니다. <카드사기꾼>은 미국 텍사스의 킴벌미술관에 전시돼 있으며 감정가는 5천만 파운드(847억 원)다.

 

 

<The Cardsharp with the Ace of Diamonds>,1620-1640,Georges de La Tour/wikipedia

 

 

 

조르주 들라트르의 작품입니다. 카라바조의  <카드 사기꾼> 작품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실어 봅니다. <타자>들의 세상이 보이시나요. 두 여인의  눈빛이 장난이 아닙니다. 

 


 

 

<Medusa>,1597, Uffizi, Florence/wikipedia

 

 

메두사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마녀로, 로르고 네스 세 자매 중 한 명입니다. 메두사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은 모두 돌로 변하지요.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거울처럼 잘 닦인 방패를 이용해 방패에 비친 모습을 보며 메두사의 머리를 잘랐습니다.  카라바조는 메두사의 이야기에서 다른 요소는 제외하고 잘린 메두사 머리만 그렸습니다. 원형 캔버스에 그려진 메두사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목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와 그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그림 속 메두사의 얼굴을 보면 여성의 모습이라고 추측하기는 어렵습니다. 메두사의 모습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자신의 충동 때문에 겪는 고통과, 이 충동을 누군가가 멈추어주기를 바라는 카라바조의 마음이 투사된 그의 자화상으로 추측됩니다.

 


 

 

<Judith and Holofernes>,1598-1599 or 1602/wikipedia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지요. 끔찍한 장면이기도 하고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s>는 구약성경 외전인 유딧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림입니다.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유대인 도시 베툴리아를 함락하기 직전 항복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합니다. 이때 신앙심 깊고 부유한 과부 유디트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나섭니다. 유디트는 아름답게 치장하고 거짓 투항하여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뒤 만취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돌아온다는 대범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디트는 하녀 아브라와 함께 이 계획을 실현하여 성공시킵니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강렬한 명암의 대조 속에 홀로페르네스의 고통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유디트의 자세는 다소 모호해 보이며 주춤하는 듯하고요. 이 작품을 극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강렬한 명암대조와 홀로페르네스의 얼굴 표정입니다. 마치"내가 꼭 이런 일까지 해야 해." 조력자로 함께한 늙은 노파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Narcissus>,1597-1599/wikipedia

 

 

 

 

고대 로마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따르면, 나르시스는 강의 신 케피소스와 물의 님프 리리오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나르시스는 너무 아름다워 누구든 그를 보기만 하면 사랑에 빠졌지요. 나르시스가 태어났을 때, 리리오페는 한 예언자에게 찾아가 나르시스가 장수할 것인지를 물었고 예언자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이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모두가 나르시스를 사랑하게 됐고 그의 아름다움을 찬미했습니다. 그러나 나르시스는 이들의 찬미와 감탄을 무시하고 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거만한 나르시스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한 님프가 신들에게 복수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가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만두소소, 그리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얻을 수 없게 하소서." 그리고 이 기도를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듣게 됩니다.

 

 

어느 날 나르시스는 숲 속에서 외딴 샘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쉬어가기로 합니다. 샘은 고요하고 맑았습니다. 그는 샘물 옆에 누워 휴식을 취한 후 갈증을 느껴 샘물을 말시려 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샘물 가까이 몸을 숙였을 때, 그는 고요하고 맑은 물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만 사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자신에게 깊이 빠져버린 나르시스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물속에 비친 자신을 안아 보고 싶었지만 손이 닻자마자 흐려지며 사라지는 형상을 어찌할 수 없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는 물속의 자신을 속절없이 바라보기만 하다 결국"아아. 허무하구나, 사랑하는 자여!... 안녕!"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습니다.

 

 

카라바조는 오비디우스의 로마신화에 나온 나르시스 이야기를 , <나르시스(Narcussus)>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나르시스를 극도의 빛과 어둠으로 묘사해 그 신체에 표현된 밝기는 어두운 배경과 대비가 되어 나르시스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듭니다. 물은 작품 구성을 반으로 나누는 역할을 합니다.  나르시스는 물가에 앉아 오랫동안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땅을 짚은 오른팔은 체중을 받치고 있지만, 왼팔은 물속의 형상을 잡고 싶은 듯 물속으로 뻗어있습니다. 나르시스의 두 손과 물에 반영된 두 손은 서로 만나 타원형을 이룹니다.

 

배경의 어둠은 나르시스의 바깥 세계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강렬한 욕망 때문에 세상을 잊은 걸까요? 아니면, 욕망 때문에 닥치게 될 어둠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나르시스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욕망 때문에 주위 세상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한때 자신을 사랑해던 존재들과 그의 가족, 그리고 주변의 동물과 식물마저 잊어버렸습니다. 또한 물속의 나르시스의 모습은 젊은 모습이  아닙니다. 나르시스의 병적인 자기애로 말미암아 숨기고 싶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금 보고 있는 건 아닌 지 모르겠습니다. 

 

 

 


 

 

 

 

 

<마태오의 소명 The Calling of Saint Mattew>,1599-1600/wikipedia

 

 

 

<성 마태의 소명>이라는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걸작 중의 하나로 예수님이 마태에게 그를 따르도록 영감을 주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저요?"하고 물어보는 듯한 수염 난 남자가 마태오일까요? 아니면 맨 끝에서 예수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돈 세고 있는 젊은 남자일까요?  세금징수원이었던  마태오가 한쪽 손에 늘 돈 주머니를 챙기고 다녔으니  그가 마태오가 틀림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카라바조가 1년 뒤에 <마태오와 천사>라는 작품을 그리는데, 이 그림에서의 마태오는 젊은 남자 옆에 서있는 안경 낀 남자와 가장 비슷했다고 합니다.  정확히 결론 나지 않은 상태이고 작품을 X-ray로 촬영해 보니 예수의 손가락 방향이 세 번이나 수정된 것도 알아냅니다. 이 그림을 통해 카라바조는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됩니다. 다만 성격이 워낙 폭력적이고 통제가 되지 않아 후원자들이 뒷 수습하기 바빴다고 합니다. 명성에 맞지 않게 로마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건 사고에 휘말렸는데 그때마다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곤 했었거든요.

 

1599년에서 1600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이와 같은 시기에 그린 <성 마태의 순교(Martyrdom of Saint Matthew)>와 나란히 현재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San Luigi dei Francesi)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xSjUvh0g8&t=8s

 

 

 


 

 

 

<Amor Vincit Omnia>,1601-1602/Gemaldegalerie, Berlin/wikipedia

 

 

 

 

큐피드가 아기의 모습이 아닌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일까요? 나체의 모습이 보기 민망해집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주인공은 사랑입니다. 라틴어의 ' Amor'는 '사랑'과 동급입니다. 

인간의 욕정, 육정, 욕망이 '사랑' 앞에 무릎을  꿇지요. '사랑(Amor)'앞에 인간은 체면이고 재산이고 다 집어던진다는 말입니다. 발 밑에 바이올린, 류티, 악보가 있습니다. ' ㄱ '자 모양으로 생긴 곡자가 있고, 컴퍼스가 걸쳐져 있고요.  갑옷도 보입니다.  뒤쪽으로 책 같은 것도 펼쳐져 있습니다. 책 위에 깃털 펜도 보이고 또 월계관도 하나 얹혀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세상의 지식들, 건축, 음악, 무력  등 모든 것들이 '사랑'이란 단어에 굴복하게 되어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육체적인 사랑이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기도 하잖아요. 무서운 사랑의 위력이라고나 할까.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니까 '사랑'앞에 함부로 개기지 말아라.

사랑이 다른 가치를 넘어서 버린다. 그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불나방 같은 사랑으로 그 '사랑'때문에 죽어도 좋다는 표현을 합니다. 

 

 


 

<Supper at Emmaus>,1601/wikipedia

 

 

 

 

이 그림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엠마오에서 Luke와 Cleopas로 추정되는 두 제자 앞에 나타났다가 곧 사라집니다. 가운데 앉아 오른손을 들고 있는 인물이 예수입니다. 조개껍데기가 달린 옷을 입고 양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이 클레오파스, 팔꿈치가 해진 옷을 입고 있는 또 다른 제자는 Luck, 그리고 왼쪽에 서 있는 젊은이는 카라바조 자신이다.

 

 

 

카라바조는 그의 모든 작품에서 예수의 후광을 없앱니다. 카라바조가 전통적인 묘사 방식과 이별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지요. 또 카라바조는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부분 그가 도박판이나 술판이 벌어지던 뒷골목에서 보던 사람들이지요. 예수는 수염이 없고 여성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카라바조가 잘 나가던 때 그려진 그림이라 예수의 얼굴이 제법 살집 있어 보입니다. 제자들도 신성한 사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하층민이었던 본래 그들의 모습과 닮아있죠. 카라바조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 땅에 있는 존재라고 보았던 거지요. 아마도 그의 이중적인 삶이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당시 추기경의 후원으로 상류 사회를 접함과 동시에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천박한 삶을 살았으니까요.  아무리 종교개혁이 있다고 하나 카라바조가 활동하던 당시 로마는 여전히 교회 세력이 막강했습니다. 카라바조의 이런 표현이 그들 눈에 많이 거슬렸을 겁니다. 

 

 

 

그림 속 빵은 생존에 꼭 필요한 양식으로 성찬례의 신비와 결합해 고유 의미가 있습니다. 포도주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계약의 피를 상징하고요. 흰색 식탁보는 그리스도 수의를 표현한 것으로  죽음과 부활을 상기시킵니다. 소박한 식탁 차림에 각종 과일이 담긴 바구니가 등장합니다. 작품 속 과일은 수많은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포도는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피와 성찬례의 신비를 상징합니다. 청포도는 부활을 검은 포도는 죽음을 나타냅니다. 썩은 사과와 색이 변한 무화과, 복숭아는 인류의 원죄를 상징하고요. 석류는 과즙과 껍질의 붉은색 때문에 그리스도가 흘린 피, 곧 수난을 의미합니다.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1605-1606,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가톨릭 신문

 

 

 

화가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이야기를 두 가지 도상으로 나눠 그리곤 합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임을 눈치채지 못한 채 길을 걸어가는  장면과 숙소에 머물며 식사할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는 장면으로 말입니다.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그린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작품입니다. 당시 카라바조는 파출소를 들락거리고, 자신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델몬테 추기경도 떠나가고, 소란 혐의 등등 점점 멘털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림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요. 예수님 모습이 심각해 보여요.

 

 

 

 

 

그림의 무대는 어떤 숙소입니다.  <엠마오 사건>중 빵을 쪼개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바로 그 순간을 옮긴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사실주의적 표현, 빛과 그림자의 대비와 극적인 구성으로 르네상스의 관념적 화풍에서 벗어나 근대 사실주의 회화 기법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는 작품에 사실주의에 대한 고집과 대담한 구성을 이용하면서 방금 일어난 일 같은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주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가구도 없으며, 불필요한 곳에 시선을 빼앗길 만한 기물도 없습니다. 대신 밝고 어둠이 강렬하게 대비된 화면에는 다섯 명이 등장합니다. 중앙에 예수님을 비롯해 좌우 각각 제자 한 명씩 그리고 숙소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그 옆에 시중드는 여자가 눈에 띕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빵을 떼는 순간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왼쪽의 등진 제자는 양손을 들어 깜짝 놀라는 동작을 하고, 오른쪽의 제자는 놀라운 감정을 강한 동작으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그는 양손으로 식탁을 잡고 몸을 앞으로 굽히며 순간적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려 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의 현존을 당장 알리고 싶은 심정이 동작으로 드러난 거지요. 마침내 안개가 사라지고 베일이 걷히듯 두 제자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순간의 반가움과 놀라움이 동시에 전달됩니다.

 

 

 

 반면 오른쪽에 서 있는 두 인물은 카라바조가 성경 밖의 인물을 그려 넣었습니다. 두 인물은 주제의 의미를 심화시키지요. 서 있는 남자는 놀란 제자들과 달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중요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네요. 더욱이 옆에 나이 든 여자는 식탁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전혀 관심 없는 얼굴입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손에 든 음식을 식탁에 잘 가져다 놓는 것일 뿐이죠. 이 두 사람은 평범한 인물로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은 특별한 인물이나 장소가 아닌 우리의 일상 안에서 체험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주의를 모으는 것은 식탁 위의 빵을 축복하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많은 화가가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지만 카라바조가 그린 예수님은 특별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카라바조 자신의 초상이기 때문이죠. 이 작품보다 5년  먼저 그린 같은 주제의 작품에서 예수님은 건장한 청년의 모습으로 당당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면 이 그림 속 예수님은 위엄과 당당함보다는 나약하고 고통받는 인간적인 모습이며, 하물며 식탁에 왼손을 짚어 몸을 의존한 채 오른손을 들어 빵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카라바조의 불후의 명성은 작품에서 나옵니다. 그의 바람 잘 날 없었던 인생에도 예수님이 머물기를 카라바조는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에 신성함이 없어,
자네에게는 신성한 영혼이 깃들어 있지 않아.
자네에게도 신성한 기운을 달라고 하게
그러면 예술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을 걸세
-보르게세 추기경의 경고-

 

 

 

 

 

<Death of the Virgin>,1604-1606/wikipedia

 

 

 

 

 

산타마리아 델라 스칼라 성당의 대형 제단화입니다. 당시 성당이 있던 지역은 로마의 빈민가였습니다. 성직자들이 빈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걸로 유명한 곳이었죠. 그만큼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던 의뢰인들은 성모의 죽음이 영적으로 묘사된 작품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작품이 공개되자 의뢰인들은 경악했고, 작품을 거부하기에 이릅니다. 

 

 

 

작품을 거부한 이유는 성모 마리아의 묘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는 거룩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성경의 내용과 무관하게 익사한 임산부를 등장시켰습니다. 더욱이 카라바조는 그가 사랑했던 매춘부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또한 카라바조는 전통적인 관례를 어겨버립니다. 아무리 주제가 성모의 죽음이더라도 실제 죽음을 묘사하지 않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가 그린 성모는 물에서 금방 건져 올려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퉁퉁 불어버린 발을 내보이고 침대 위에 숨진 채 누워있었고요.

 

 

 

종교계는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성모와 매춘부 사이의 수직적 위계질서가 파괴되도록 보고만 있을 수 없었지요. 결국 제단화는 철거되었으며 성직자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으로 교체됩니다. 카라바조의 눈에 성모의 죽음과 매춘부의 죽음은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 했던 모양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카라바조의 명성은 추락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는 이 시기에 살인을 저지르며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 

 

 

 


 

 

 

 

 

 

 

<포박당하는 그리스도 혹은 유다의 입맞춤 The Taking of Christ>,1602/ National Gallery of IReland

 

 

 

 

제자인 유다의 입맞춤으로 예수님이 체포당하는 수난을 그린 작품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물들의 움직임을 체포당하는 그 순간의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왼쪽의 인물 (아마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추정)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깜짝 놀란 듯한 동작과 휘둥그레진 눈을 치켜뜨고  놀라 소리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감으신 채로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약간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유다의 입맞춤을 받고 있고요. 유다는 그런 예수님을 단단히 부여잡고 예수님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손을 뻗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을  캡처하여 마치 지금 우리 관람객들의 눈앞에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계시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정도로 극적입니다.  그리고 화가는 그러한 느낌을 극대하 하기 위해서 또 한 가지 장치르 더 해 두었습니다. 화면 가장 오른쪽에 등불을 들고 비추는 인물이 바로 그 장치입니다. 이 인물이 누구냐면, 바로 화가 자신입니다. 화면상에 일부러 화가 자신을 그려넣음으로서, 마치 화가 자신이 그리스도가 체포당하는 순간을 직접 목격한 것을 그리고 있는 듯한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등불을 들고 비추어 봄으로서 캄캄한 방이었을 그 순간의 상황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듯한 효과로서 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DURJGv7-vI

 

 

 


 

 

 

<Tne Entombment of Christ.,1603-1604, Pinacoteca Vaticana,Vatican City/wikipedia

 

 

 

 

<그리스도의 매장>은 발리첼라의 산타 마리아 성당 정면에 걸릴 제단화로 그려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종교화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구도를 따랐으며, 당대 성직자들로부터 그의 최고 걸작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화면 전체를 감싼 캄캄한 어둠 속, 예수의 시신을 관 속에 눕히고 있는 요한과 니코데모, 성모 마리아와 다른 두 마리아가 대각선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서민적 모델의 사실적 묘사나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 등 카라바조 양식의 특징을 잘 드러내 줍니다.  특히 비통해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화면 오른쪽에서부터 예수의 시신 위로 쏟아지는 한 줄기 빛, 이 빛을 통해 카라바조의 '테너브리즘 기법이 효과적으로 살아나며 화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그리스도의 매장>으로 엄청난 명성과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가 운명을 다하고 17세기 바로크 시대가 도래하고 있던 그 무렵의 경계선에서, 종교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당시 가톨릭이 요구했던 반종교개혁의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미술양식을 탁월하게 구축해 나갑니다. 

 

 

 


 

 

<토마스의 의심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1602/wikipedia

 

 

 

카라바조가 1601-1602년에 제작한 <토마스의 의심>입니다. 예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토마스와 자연스럽게 머리를 구부리는 예수가 보입니다. '신도 아픔을 느낀다.'는 사실적 묘사가 얼마나 파격적인 발상입니까.

 

 

예수의 부활을 못 봤던 토마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며 손가락을 집어넣습니다. 검지 한마디가 들어간 걸 보니 상처 깊이와 길이가 장난이 아닙니다. 결국 예수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며 부활을 증명해 보입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성화는 많은 화가들에게 단골 주제였습니다. 이들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표현하기 바빴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성서 내용을 미화시킨 성화에 익숙한 보수적인 화가들과 주문한 교회는 카라바조 작품을 저주했습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가장 사실적으로 당시 현실을 묘사하면서 신 중심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베드로의 순교>/ART&Culture

 


 

 

 

 

https://www.youtube.com/watch?v=lH2V126BFeo

 

 

Chiesa di San Luigi dei Francesi <마태의 일생>

족보 없는 비렁뱅이 화가 카라바조에게 제단화를 맡긴 성당입니다. 

 

 

 


 

 

 

<Madonna and Child with st. Anne>,1605-1606, Galleria Borghese,Rome/wikipedia

 

 

 

 

이 그림은  카라바조가 가장 잘 나갈 수 있었던 때에 그린 가장 비극적인 작품이 되어버립니다. 무엇보다 성 안나를 묘사한 오른편의 늙은 여인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녀는 당시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집시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 성모 마리아 역시 빨래하는 아낙네처럼 치마를 걷어 올리고 있으며,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채로 그려집니다. 예수는 이미 많이 자랐음에도 갓난아기처럼 벌거벗은 채 그려져 있고요. 성스러워야 할 성화를 이런 식의 세속화된 인물들로 격하시켰다는 비판을 듣게 됩니다. 이 그림의 실패로 그는 로마를 떠나게 되고, 그에게 이 같은 절호의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교황 바오로 5세가 베드로 대성전을 수리하면서 새로 생긴 공간에 그의 작품을 걸기로 하고 제작을 의뢰합니다. 카라바조는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이 세계 교회의 심장인 베드로 대성전에 남게 된다는 것은 더 없는 영예이기에  흔쾌히 수락하고 심혈을 기울여 단기간에 완성합니다. 한 달가량 성당에 걸리면서 예기치 못한 반응들이 터져 나옵니다. 

 

 

 

이 작품에 대한 불같은 반대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먼저 이 작품이 도상학적으로 가톨릭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과 교황좌가 있는 베드로 대성당에 걸기에 너무 조잡해서 분심스럽다는 여론에 밀려 철거됩니다.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거기에서도 반대를 받아 다시 철거되게 됩니다. 이런  수모를 겪은 후 그의 작품의 옹호자이며 교황의 친척인 보르게세(Scipio Borghese) 추기경의 손으로 넘어가 그 가문의 소장품으로 남게 됩니다.

 


 

 

<성 앤드류의 십자가>,1607, The Cleveland Museum of Art/Artprinta

 

 

 

 

 

<성 앤드류의 십자가>는 당시 나폴리를 통치하고 있던 스페인 총독 후안 알론소 피멘텔 에레라(Juan Aonso Piementel Herrera)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총독의 고향이었던 스페인 발라돌리드의 저택이 소장하고 있던 17세기의 작품 목록에 이 그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 앤드류의 십자가>는 마치 카라바조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염두에 둔 작품처럼 보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최후의 죽음을 기다리는 성 앤드류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그림은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죽고 싶어 했던 성자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폴리에서 그려진 두 개의 대형 제단화 중 현존하고 있는 <성 앤드류의 삽자가>는 미국 클리블랜드 예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작품 <성 앤드류의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 앤드류의 기적에 관한 중세의 전설을 먼저 살표 보아야 합니다. 성 앤드류는 로마의 귀부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혐으로 체포되었다가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됩니다. 화면은 십자가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의 간청에 의해 성 앤드류의 십자가 처형이 취소되고, 사형집행관이 성 앤드류의 십자가에 묶인 노끈을 풀려고 하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석방의 순간, 성 앤드류는 자기가 믿고 있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기를 간청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립니다. 늙은 성자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되었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십자가 틀에 묶인 노끈을 풀려고 성 앤드류에게 다가갔던 사형집행관의 손이 마비되면서 성 앤드류는 기도한 대로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카라바조의 <성 앤드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성 앤드류의 최후에 대한 중세 전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자신에게 임박하고 있는 죽음을 예측이라도 하는 듯, 십자가에 초라하게 달려 마지막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 성 앤드류의 모습에서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사실의 재연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카라바조의 위대성은 관람자로 하여금 화면에 나타나고 있는 종교적 결단에 참여하도록 촉구하는 힘이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관람하고 있는 모두를 십자가 아래로 불러 모읍니다.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한 줄기 빛이 죽어가는 늙은 성자의 몸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도망자 처지인 카라바조 자신에게도 임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The Beheading of St.John the Baptist>,1608/wikipedia

 

 

 

 

1608년 몰타에서 그린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입니다. 1606년 5월 28일 로마에서 살인죄를 저지른 카라바조는 나폴리를 거쳐 1607년 7월 초에 몰타(Malta)로 도피합니다. 그가 나폴리에서의 보장된 성공과 안전을 포기하고 몰타로 이주했던 이유는 기사 작위를 통한 사면의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카라바조는 파사지오(Passaggio)라는 관례에 따라 성 요한 기사단에 그림을 헌정하여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몰타의 대 영주와 귀족들은 카라바조의 어두운 과거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사면의 특혜를 주어 카라바조의 그림을 얻고 싶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삶을 용서받고 새롭게 살겠다는 각오로 그림 속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에 피에 자신의  서명을 합니다. 카라바조는 세례자 요한의 잘린 목 밑으로 흥건히 고인 붉은 피를 찍어 ;f. michel'이라고 서명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Frater of Michelangelo'의 약자로 보이는데, 이는 카라바조가 성 요한 기사가 되면서 진심으로 자신의 과오를 씻어버리고, 새롭게 살겠다는 각오를 이름으로 새겨 넣은 것입니다.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은 마태오복음 14장 3-12절과 마르코 복음 6장 17-29절이 그 배경입니다. 이 작품은 몰타에서 목숨을 잃은 120명의 성 요한 기사단 소속 기사들의 영웅적인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교도의 침공을 막다가 작렬하게 전사했고, 그들의 시신은 수습되어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이 그려진 산 조반니 대성당에 안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도록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을 과감히 탈피합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 장면을 어두운 몰타 감옥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인 장면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다른 그림에서는 표현하지 않은 몰타의 성벽과 대문을 배경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또 성벽 오른쪽에는 감옥에 갇혀있는 두 명의 죄수들을 그려 넣어 창살 밖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살인 현장을 목격하게 했습니다. 중앙 땅바닥에 두 팔이 뒤로 결박된 채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목이 잘린 채 죽어가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의 몸을 가로지르는 붉은색 겉옷은 순교를 상징하듯이 세례자 요한의 붉은 선혈과 함께 상체와 하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참수형을 선고받고도 계속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주문받았고, 명작도 탄생시킵니다. 참수형을 피하기 위해 나폴리로 도주하고, 그림 실력으로 몰타 기사단의  인정을 받아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작위를 받은 후 6개월 후 기사단원과 싸워 중상을 입히고 또다시 도주자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몰타 기사단의 습격을 받아 얼굴이 크게 다치는 중상을 입고요.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1610/caravaggio.org

 

 

 

 

카라바조의 평생 충동이  조절되지 못했습니다. 더욱 파괴적으로 나타났지요. 주택침입죄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공증인 파스콸로네를 폭행해 체포되기도 했고요. 임대료를 6개월이나 납부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숙집 주인이 사는 방의 창문에 돌을 던진 혐으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1605년 , 교황 즉위 1년 축하식에서 일어납니다. 캄포 마르치오에서 네 사람씩 편을 이뤄 싸움을 했는데, 이 싸움으로 인해 한쪽 리더였던 란초 다 테르니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상대편 리더였던 카라바조는 살인죄를 저지른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참수형 선고를 예상이라도 한 듯, 그의 그림에는 참수에 관한 그림이 많이 등장합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그림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 살았던 소년입니다. 필리스타인의 투사 골리앗은 괴물처럼 큰 덩치에 청동투구와 비늘갑옷으로 무장한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군에게 1:1로 싸워지면 상대의 종이 되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때 소년 다윗이 갑옷과 투구를  모두 거절한 채 맨 몸으로 막대기와 돌멩이를 손에 들고나가 골리앗의 이마에 돌을 던집니다. 카라바조는 이 작품 속 다윗을 과거 소년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골리앗의 얼굴에는 습격을 받아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도달해 더는 도망갈 곳이 없는 지금의 자신의 삶이 끝나가고 있음을 깨달은 카라바조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조절되지 못했던 충동의 죗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1도 망자 신분이 되어 나폴리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입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위>은 승리자 다윗을 새롭게 해석하여 슬픈 듯 무심한 표정으로 그려냅니다. 목이 잘린 골리앗의 흉측한 얼굴이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라는 해석이 17세기부터 있었습니다. 골리앗의 목을 든 다윗 또한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을 모델로 했다는 주장도 있고요. 자신의 광포한 본성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가 영원한 형벌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자신의 비참한 얼굴(골리앗)을 들고 있는 순진무구한 소년의 얼굴(다윗)과 대비시키며 이중초상을 시도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평생 안정된 생활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고요.  이 그림을 들고 교황을 찾아가려다 중간에 폭력배들에게 칼도 맞고 잠시 억류되어 있다가  그림을 실은 배가 먼저 떠나가고 맙니다. 먼저 간 이 그림을 찾아 교황님께 용서를 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 수포로 돌아갔고 이 그림을 찾으러 가는 길 위에서 객사하고 맙니다. 교황은 이미 사면을 내린 상태였지만 카라바조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 후였죠. 

 

 

 

 

 

어떤 사학자는 다윗이 들고 있는 칼의 의미로 이 작품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칼에 새겨져 있는 라틴어는 성 아우수스티누스가 자신의 성경 <시편>에 단 주석의 일부라고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예수가 사탄을 물리쳤듯 겸손함으로 교만함을 무찔러야 한다."

 

세속적이며 사실적인 그림으로 빛의 마술사라 불리며 바로크 미술에 한 획을 그은 카라바죠, 그를 악마로 만들었던 것은 인간보다 신을 중시했던 당시 사회 풍토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림은 장식이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카라바조(어느 법정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xDXx3aNK4TA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 (1577-1640)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1605년 루벤스의 친형이 당대 카라바조의 후원자였던 보르메오 가문의 대주교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루벤스와 카라바조가 같은 이에게 후원을 받는 기간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 기간 루벤스가 카라바조의 작품 <그리스도의 매장>(1602-1604)을 접하고 구도 등이 비슷한 동명의 작품(1612년)을 그렸다고 분석합니다. 카라바조의 대표작 중 하나로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을 꼽았다.  그는 "당대엔 가만히 손을 모으고 있는 인물화가 주종을 이었는데, 얼굴을 찡그리는 찰나의 순간도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으며 활들 짝 놀라는 손짓으로도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크 미술의 시작점이자 중심이자 그 자체였던 카라바조의 영향력은 넓고 멀리 갑니다. 벨기에의 루벤스,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스페인의 벨라스케스... 그리고 카라바조의 빛은 현대의 <아이리쉬 맨> 영화의 감독 마틴스콜세이지와 같은 거장에 이르기까지 닿아 있습니다. 39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던 천재 중의 천재화가 카라바조를 기억합니다. 

 

 

 

 

반응형
반응형

블랙 러시안 테리어(Black Russian Terriers)는 대형견입니다. 보기 드문 견종으로  튼튼한 견종이죠. 크고 힘이 넘칩니다. 좋다고 사람에게 달려들면 덮치는 느낌이 들것 같습니다. 앞 발을 든 채 울타리에 서 있으면 웬만한 아이키를 훌쩍 넘는 모습이고요.

 

Black Russian Terrier/wikipedia

 

 

 

블랙 러시안 테리어(Black Russian Terrier)는 원산지가  러시아입니다. 러시아의 사역견종의 하나이죠. 1960년대 러시아 애견 전문가들이 탄생시킨 우람한 테리어종입니다. 자인언트 슈나우저와 에어데일 테리어, 로트와일러 등을 혼합 교배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별칭으로 Tchorny Terrier, BRT라고도 합니다.

 

 

 

신발끈여행사

 

 

 

 

 

블랙 러시안 테리어/ Cuwel.es

 

 

 

체고: 63-71cm

체중: 40-65kg

수명: 10-14년

 대형 사역견에 해당합니다.

 

방어 본능이 강하고 엄격한 훈련에도 잘 적응합니다. 러시아 군대에서 군용견, 경호견 등으로 활약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외부로의 반출을 금지하여 최근에 와서야 국제애견연맹(FCI)로부터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습니다.

 

 

 

 

Shutterstock

 

 

 

1940년대 러시아 육군의 켄넬 "레드 스타(RED Star)"는 그들의  필요에 의해 개를 브리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소비에트 브리더 전문가 집단에 의하여 개발된 프로그램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특별한 임무에 적합한 새로운 견종을 만들어 내지요. 크고, 건강하고, 활기차고, 그리고 넓은 국토의 엄청난 기후 차이를 잘 견딜 수 있는 개로 말입니다. 대략 20종류의 견종들이 블랙 러시안 테리어의 창조에 관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러시아의 "DOSAAF(군사조직)"브리더들은 레드스타(Red Star)로부터 개들을 데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견종의 외모를 표준화(Standardize)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1984년 5월 FCI로부터 견종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French Army에 마리노이즈가 있듯이 , RedArmy에는 블랙 러시안 테리어가 있는 셈입니다. 최종적으로 2004년 7월 1일 , 블랙 러시안 테리어는 AKC(American Kennel Club) Working Group에 공인을 받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v0_AiQvxoM

 

 

 

블랙러시안 테리어는  성격이 날카로운 편입니다. 낯선 사람에 대해 의심이 많고, 강한 보호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 표현을 주로 앞발로 해서 돌발상황에 주의 하셔야 합니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가정견이나 애완견으로도 적합하지요. 어린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견종은 인간과 동물들의 강한 연대감을 원합니다.

 

 

 

언제든 사나워질 수 있으므로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개를 줄에 묶어 걸을 때, 개를 절대로 사람 앞에서 걷게 해서는 안됩니다. 옆에서 또는 뒤에서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개의 마음 속에 무리의 리더는 항상 앞장서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일관된 리더십과 가족과의 밀접한 접촉은 이 개를 최고의 반려견으로 만들 겁니다.

 

 

 

북방지역 출신이라 추운 날씨에도 잘 견딥니다. 눈 위를 구르고 물에서 노는 것도 좋아하고요.

 

 

 

블랙 러시안 테리어(BRT 또는 스탈린의 개)/ Shutterstock

 

 

 

블랙 러시안 테리어의 외모는 몸집이 크고 뼈대가 굵으며,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몸 전체가 근육질이며 피부의 탄력도 뛰어나답니다. 털은 억세고 곱슬거리며 착 가라앉아 있습니다. 특히 머리에서부터 눈을 덮으며 흘러내리는 털과 수염이 독특합니다. 털의 색깔은 검은색 또는 잿빛을 띤 검은색입니다. 머리는 긴 편이고 이마는 평평합니다. 코는 검고 크며 귀는 늘어져 있습니다. 꼬리는 보통 위로 솟아 있으며 3-4번째 뼈마디에서 잘라줍니다.

 

 

 

 

무성한 녹색 들판에 자랑스럽게 서 있는 장엄한 블랙 러시안 테리어/Freepik

 

 

 

 

전천후 털로 빽빽하며, 눕혀있고, 웨이브가 있습니다. 4-10cm 길이의 털로 구성되어 있고요. 윗 목 부분과 두 견갑골 사이의 융기 부분에 갈기털이 있습니다. 밑털은 타이트하게 잘 발달되어있고요. 일주일에 최소 1회 이상 브러시로 빗어 주세요. 귀 통로의 털을 제거하고 발 밑의 털을 잘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규칙적으로 털을 브러시 해주면 털갈이 시 털 빠짐이 덜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Ogj4e-oF_s

 

 

 

 

고관절과 관절 형성장애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귀에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잘 관리하시고요. 블랙 러시안 테리어(

Black Russian Terrier)는 충분히 운동만 시켜준다면 , 아파트에서 사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실내에서 활동적이지 않으며 현관문에서 당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릴 겁니다. 블랙 러시안 테리어는 주인과 아주 가깝게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당에 두면 오히려 당신을 따라 다니며 당신이 문에 나타날 것을 기다릴 테니까요.  

반응형
반응형

바센지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까요? 저도 처음입니다.  '인류에게 이상적인 개'라고 칭송받는 바센지를 소개합니다.

 

다나와DPG

 

 

바센지는 체구:40-45cm(수컷:43cm/암컷: 40.5cm)

체중: 수컷 11-16kg/ 암컷 9-14kg

수명:12년 전후의 중형 견에 속합니다.

 

몸에 군더더기 하나 없어요. 마치 사슴 같아요. 약간  큰 귀, 장식털이 없는 꼬리와 긴 다리가 특징입니다. 기본적으로 이마에 주름이 있습니다. 목은 길고 몸통은 짧으며 가늘어요. 꼬리는 단단하게 말려 올라가 있습니다.  

 

 

 

 

출처:TBS

 

 

바센지는 콩고 공화국 출신의 사냥개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콩고 도그  혹은 아프리카부시 도그 라고 합니다. 바센지라는 이름은 원주민을 뜻하는 반투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를 생활 거점으로 하는 피그미족의 언어로'숲 속 야생 소동물'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요. 약 100년 전 콩고의  오지에서 난쟁이 족(피그미족)과 함께 생활하던 중 영국의 탐험가에 의 해 발견되었습니다. 기원전부터 존재하는 고대 견종이라 현존하는 개 중 가장 오래된 견종입니다.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애완견의 귀족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 원산의 이비잔하운드 견종과 비슷해서 잡종견으로 종종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유적에서 출토된 예술과 벽화에서도 기록이 남아 있어 바센지가 이미 고대 이집트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 무덤에서 바센지와 매우 흡사한 모양의 조각들이 발견되었다고 해요.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견종인 거죠.  1937년 영국에서 처음 소개됩니다. 1943년 미국전역에 바센지 클럽이 결성될 만큼 애견인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요. 

 

 

 

게티이미지코리아

 

 

 

바센지는 똑똑하고 호기심이 강합니다. 독립심은 최고이고요. 어설픈 교육은 말을 듣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어린 강아지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과 훈육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센지는  마이 페이스 스타일이라서 가정 교육과 훈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똑똑하지만 복종에 대한 훈련과 훈육에 끈기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칭찬을 해주면서 훈육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uHT5T_WQ_k

 

 

 

 

 

 

 

 

 

짖어도 위험하지 않고 얌전한 견종입니다. 주인과 가족에게 충실하고 다정한 견종입니다. 응석 부리는 모습은 얼마나 귀여운 지 몰라요. 낯선 사람에게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거리를 두며 이마를 찌푸리고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것이  특징입니다. 다른 강아지나 동물은 야생의 본능 때문에 낯선 사람을 쉽게 공격해  버리는 일이 많은 데 말이죠.

 

 

 

iStock

 

 

 

 

청결한 것을 좋아해 생후 6개월이 지나면 자신의 잠자리가 더러워지는 것을 싫어해 배변활동도 좀 떨어진 장소에서 하고 온답니다.  스스로 몸을 정리하고 청결히 하기 때문에 체취가 적은 것도 인기가 많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몸의 구석구석을 핥아 깨끗이 하는 특이한 행동을 보여요. 고양이처럼요. 진돗개랑 성향이 비슷해 보입니다. 

 

 

iStock

 

 

바센지의 털은  부드러운 질감의 단모입니다. 다양한 색상이 있지요. 바센지의 털은 빛을 받으면 반짝 거리며 유난히 빛을 내어 매우 매력적이라고 합니다. 단모종이라 털 빠짐이 거의 없는 편이기 때문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적합한 견종입니다. 털 색깔은 블랙&화이트, 레드&화이트 등 다양한 색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0vyqjUCJ6s

 

 

 

 

 

가장 독특한 점은 짖는 소리입니다. 바센지는 잘 짖지 않는 걸로 유명한 견종입니다. 기쁠 때에는 요들을 닮은 소리를 낸답니다. 그 이외는 거의 짖는 소리도 내지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조용한 점이 바센지가 세계적으로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시끄럽게  짖지도 않고 체취도 거의 없기 때문에 공동 주택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견종입니다. 기를  때 바센지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한 뒤 애정을 갖고 돌보아준다면 강아지와 함께하는 생활이 더욱 행복해질 겁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몸은 유연하고 신체능력이 턱월합니다. 도약력도 뛰어나고요. 낮은 서클 등은 쉽게 뛰어넘어 버리는 모습에서 고양이를 닮은 듯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강아지의 발정은 일 년에 두 번 있지만 바센지는 1회밖에 없다는 점도 특징 중 하나입니다. 시력이 우수합니다. 창문이나 정원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하고요.

 

 

 

 

게티이미지코리아

 

 

 

바센지는 매우 활동적인 개입니다. 산책할 때 대형견 수준의  운동량이 필요합니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므로 배변활동을 겸한 산책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2회 30분 정도 실시해 주십시오. 바센지는 민첩합니다. 움직이는 물체에 본능적으로 반응합니다. 후각도 뛰어나 설치류 사냥에 탁월한 능력을 보입니다. 반드시 목줄을 하고 산책을 시켜주세요. 특히 조류에 과민하게 반응합니다. 힘이 강한 견종이니 하네스보다는 체인 형태의 목줄을 권합니다. 영역 의식이 강해 다른 개와 함께 있을 경우 주도권 다툼으로 트러블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더운 나라 출신의 개이므로 여름철에는 다른 개에 비해 건강하지만 겨울철에는 힘이 듭니다. 겨울에는 가능한 한 따뜻한 장소에 침대를 설치해 주세요. 산책 시에는 옷을 입는 등 방한에 대비해 주시고요.  털의 손질은 매일 빗질, 때로는 물기를 짜낸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세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주의해야 할 것은  용혈성 빈혈과 팬코니 증후군이라는 병입니다. 용혈성 빈혈은 기운이 없고 운동을 싫어합니다. 식욕부진, 호흡 곤란, 황달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요. 팬코니 증후군은  많이 마시고 다량의  소변을 보게 되는 증상의 신장 질환입니다.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면 즉시 수의사에게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서혜부 탈출증은 다리의 관절 근처에서 장기가 튀어나오는 질병으로 예방이 어려워 조기 발견, 치료가 중요합니다. 디스크 부분이 커지면 장폐색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기력이 없고, 변비, 구토 등의 증상을 보인다면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배꼽탈장은 선천적으로 발병하는 경우와 비만이나 사고 등 외상에 의해 발병합니다. 증상에 따라 수술이 필요할 수 도 있습니다. 이밖에 눈 질환이 있어요. 각막염이나 결막염에 자주 걸리는 편이라 특히 유의해야 합니다. 위장 질환, 고관절계의 부상등도 바센지에게  잘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유전자 이상이 있는 경우 DNA검사에서 즉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참고해 주세요. 오랜 세월 동안 멸종되지 않고 현재까지 반려견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니 것 자체가  바센지(Basenji)가 지닌 또 다른 매력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https://www.youtube.com/watch?v=NKoM4cVUjn8

 

 

 

유행 따라 분양받는 것 지양해 주세요. 분양받기 전 반려견의 특징과 장점, 단점 등을 충분히 숙지하시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반려견이 되었다면 끝까지 책임져 주시고요. 

 

반응형
반응형

'작은 곰'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는 '버니즈 마운틴 독(Bernese Mountain Dog)'입니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세인트 버나드(Saint Bernard)'와 흡사한 외모를 자랑하지요. 스위스에서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버니즈 마운틴 독은 아주 건강한 견종입니다. 마음을 터놓은 주인과 같이 산책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견종이지요. 

 

힘이 센 천하장사 강아지,버니즈 마운틴 독(Bernese Mountain Dog)/ 비마이펫라이프

 

스위스 베른 출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여 년 전 로마의 군대가 스위스를 침략할 때 군인들의 양식을 위해 데려온 가축들을 지키기 위해 마스티프 종의 경비견들을 많이 데려왔습니다. 이 마스티프들이 그 지역의 재래 목양견들과 교배해 여러 품종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중 대표적인 녀석들이 '버나드 마운틴 독, 그레이트 스위스 마운틴 독, 아펜젤러 제넨훈트, 엔틀부처 제넨훈트'랍니다. 이 들은 스위스에서 태어난 녀석들인 데다 생김새도 비슷해 ' 스위스 제넨훈트(Swiss Senenhund)'라고 불립니다.  제넨훈트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알프스의 목초지를 뜻하는 Senne 과  개를 뜻하는 Hund에서 유래했습니다. 

 

 

엔틀 부처 제넨훈트(Entlegucher Sennenhund)/shutterstock

 

 

 

 

 

 

그레이터 스위스 마운틴 도그/iStock

 

 

 

아펜젤러 제넌훈트 Appenzekker Sennenhunde/Pinterest

 

 

 

스위스 베른/몽트래블 유럽여행

 

 

이 아이들 중 베른지역에 자리잡은 버니즈 마운틴 도그는 비교적 다른 토착견과의 접촉이 적어서 현재의 긴 털의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베른지방 출신이라 베른의 영어식 발음인 '버니즈(Bernese)가 붙어서 '버니즈 마운틴 독(Bernese Mountain Dog)'라는 현재의 이름도 얻게 되었답니다. 아름다운 외모가 곰과 흡사해'작은 곰'이라는 별칭도 얻은 이 녀석은 주로 농장에서 우유통을 실어 나르거나 가축을 지키는 목축견의 역할을 했습니다. (명확하진 않지만 개인적으로 <플란더즈의 개> 파트라슈의 모델이 '버니즈 마운틴 독'이 아닐까 싶습니다.)

 

 

 

 

버니즈 마운틴 독 /오케이독

 

 

 

스위스의 고립된 지역에서 살던 이 녀석이 외부에 알려지지않아 19세기 무렵 멸종위기를 겪게 됩니다. 1907년 스위스에 동호회가 설립되어 버니즈의 보존에 힘을 썼고, 그 후 1936년 미국애견협회(AKC)에 정식 품종으로 승인되면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버니즈 마운틴 독/ 비마이펫 라이프

 

 

체고:60-70cm

체중: 40-45kg

길고  부드러운 털로 덮인 근육질의 대형견입니다.

 

마스티프의 피가 섞인 녀석이라 골격이 크고 머리도 큰 당당한 체격을 자랑합니다. '세인트 버나드 (Saint Bernard)'와 닮아서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기도 하시는데 엄연히 다른 품종입니다. 대형견인 버니즈 마운틴 도그와 초 대형견인 세인트 버나드는 체급부터 다릅니다. 

 

 

 

 

초대형견 세인트 버나드(Saint Bernard)/나무위키 알프스 산맥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세인트 버나드, 산악구조견으로 예전부터 스위스 생베르나르고개에서 포도주통을 목에 걸고 조난당한 등산객의 구조견으로 활약했습니다.

 

 

 

 

 

버니즈는 크고 튼튼하며 균형잡힌 체구를 갖고 있습니다. 코와 주둥이는 곧고 코 끝은 검습니다. 귀는 두부의 위쪽에 위치해 삼각형 모양으로 볼까지 들어져 있으며 눈은 아몬드형의 짙은 갈색입니다. '네 개의 눈을 가졌다.'라고 불렸듯이 뺨과 양쪽 눈 위에 황색의 큰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은 검은 털로 덮여있습니다. 추운 고산지대에 살았던 만큼 이중털이 발달했으며 털은 길고 매끈한 비단결 같아 광택이 납니다. 털 빠짐이 장난 아니겠죠? 꼬리는 길게 늘어져 있으며 털이 북실북실하게 나있습니다.

 

 

 

 

털은  짙은 검은색이 주된 컬러로, 진한 황갈색, 흰색 무늬가 나타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황갈색 무늬는 볼과 눈 윗부분, 네 다리, 그리고 가슴 부위에 있습니다. 머리에 눈 사이를 지나는 흰색 줄무늬가 또렷하게 좌우 대칭을 이루면서 형성된 경우, 목과 가슴 부위에 다소 넓고 중간에 끊어지지 않는 흰색 반점이 형성된 경우가 있습니다. 발이나 꼬리 끝이 흰색인 경우도 있습니다. 

 

 

 

털은 윤기있는 장모입니다. 살짝 웨이브 지거나 직모입니다. 이중모라 털 빠짐이 당연히 많습니다. 털의 생장 주기에 따라 일 년 내내 죽은 털이 빠지고 새로운 털이 나며, 털갈이 시즌인 봄과 가을에 가장 많이 빠집니다. 평소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털갈이 시기에는 매일 빗질해 죽은 털을 제거해 주십시오.

 

 

 

https://www.youtube.com/watch?v=2-VQX8S0Nvk

 

 

 

 

버니즈 마운틴 독은 재산을 보호하고, 농장에서 고산 목초지로 가축을 몰고, 수레를 끄는 등의 역하를 하는 다재다능한 사역견이었습니다. 기질 또한 "매우 자신 있고, 기민하며, 착한" 견종입니다. 일상적인 상황에 겁을 내지 않으며, 예민하지 않고, 겁을 내지 않으며 원만하며, 유순한 성격입니다.

 

 

 

그 조상들의 DNA를 물려받아 장난끼가 없고 자립심이 강하며 고집이 상당히 세답니다. 좀 무뚝뚝하고 경계심이 강해 훈련 적응을 잘 못하지만 똑똑하고 기억력이 좋아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줄은 알죠.  사람도 무뚝뚝한 성격의 사람이 한번 맘을 터놓으면 깊게 사귀듯이 이 견종 또한 한번 마음을 터놓은 주인에겐 온 정성을 다한답니다. 주인에겐 상당히 순종적인 견종이라 한번 정해진 주인을 바꾸기 힘든 녀석입니다. 충성심이 상당한 녀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가족과 잘 지냅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상냥합니다. 하지만 대형견이고 힘이 좋기 때문에 놀자는 행동이 의도치 않게 아이들을 다치게 할 수 있으므로 늘 보호자가 아이와 강아지의 상호작용을 감독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에게 강아지를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알려주는 겁니다. 호기심이 많고, 다른 동물과도 잘 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LcAtZIkbBw

 

 

 

 

자립심이 강하고 똑똑해 무턱대고 야단치면 주인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닫아버릴 수 있습니다. 훈련성과가 약하고  자존심도 세기에 훈련이 잘 안된다고 야단치면 성격이 모나질 수 있습니다. 훈련을 시킬 땐 아이의 눈을 마주 보면서 교감하며 시켜주셔야 합니다. '눈높이 교육'아시죠.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교정하고 싶다면 항상 눈을 마주 보면서 따뜻한 말로 다독이듯이 훈련시켜주셔야 합니다. 이처럼  버니즈마운틴 독은 개를 좋아하지만 신체적인 접촉을 싫어하거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견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과 사세요." 사과 농장 홍보하는 버니즈 마운틴 도그/노트펫

 

 

스위스의 베른 협곡을 누비던 힘 좋은 사역견인 버니즈 마운틴 독은 운동량이 많습니다. 야외에서 산책하거나 노는 것 외에도 매일 최소 30분 이상의 격렬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버니즈 마운틴 독의 숱 많은 이중모는 추운 기후에 딱 맞습니다. 그래서인지 눈 속에서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추운 기후에 적합한 아이들은 반대로 더위에 취약하기 때문에 더운 날씨에는 산책 및 운동을 피하고 실내 온도를 조절해 열사병을 예방해 주세요.

 

 

 

수레를 끄는 버니즈 마운틴 독/Pinterest

 

버니즈 마운틴 독은 수레를 끌던 과거의 능력을 살려 어린아이들을 수레에 태우는 걸 즐깁니다. 이러한 기량을 뽐내는 carting and drafting competition에 참가하기도 하며, 어질리티, 허딩, 복종, 랠리, 트래킹 등에 참가해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bB6LrR_rGU

 

 

 

 

체중이  40kg를 넘나드는 대형견종이라 비만이 잘 되기에 항상 체중관리를 해주셔야하고 더불어 관절질환에 잘 걸리니 적절한 운동을 시켜주면서 체중관리 및 관절부위 근육발달에 힘써주셔야 합니다. 귀가 덮인 품종이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귓병 체크 해주시고요.

 

 

 

모든 대형 품종은 고창증에 취약합니다. 고창증은 위 내용물이 이상발효하여 다량의 가스가 발생되거나 트림을 통한 가스배출이 원활하지 못할 경우 위내에서 가스가 충만되어 배가 부풀어 오르는 질병입니다. 위염전(Gastric Torsion), 혈액 질환, 고관절이형성증, 팔꿈치이형성증, 일부 암, 점진적 망막 위축, 범골염(Panosteitis), 문맥대정맥 션트(Portosystemic Shunt) 폰 빌리브란트 씨 병의 위험이 있다고 하니 잘 기억하시고, 증상 및 대처 방법을 숙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반기지 않는 출생으로 삶을 시작하여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삶을 마감했던 프랑스 출신의 천재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1864.12.8-1943.10.19)을 소개합니다.

 

까미유는 1864년 프랑스의 페르 앙 다드누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축복받는 탄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던 순간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상당한 지위가 있는 공무원이었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카미유가 환영받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녀가 태어나기 일 년 전에 세상에 태어났다가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난 장남 샤를 앙리 클로델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카미유의 부모는 크게 상심합니다. 다시 아이를 가져 15개월 만에 아이가 태어납니다. 부모님은 이왕이면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딸인 카미유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실망감에 거리를 배회합니다. 어머니는 그녀의 존재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까미유에게 독설을 퍼붓습니다. 훗날 아버지는 딸의 미술적 재능을 반기고 후원해 줍니다. 반면 어머니는 그녀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부인하며 나중에 태어난 아들(폴 클로델:프랑스의 시인, 작가, 외교관으로 유명하다)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한 편애가 훗날 카미유가 정신병원에서 지내게 된 근본 원인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카미유는 혼자서  흙을 만지며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려서부터 점토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카미유는 12살에 <다비드>, <골리앗> 제작하여 천재성을 보입니다. 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클로델이 15살이 되자 조각가 알프레 부셰를 찾아갔습니다. 클로델은 부셰의 도움을 받아 17살에 파리의 사립학교인 콜라로시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 여성을 입학시켜 주는 곳이 많지 않았지만, 이곳은 드물게 허용을 해줍니다.

 

 

 

공모전에  당선된 스승 부셰가 로마로 떠나게 되며 로댕에게 자신의 제자들을 위탁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로댕과 까미유 두 사람은 만나게 되지요. 1883년의 일이었습니다. 스승 부셰는 사랑하는 제자 까미유에게 근심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부셰는 까미유가 예술적 재능은 뛰어나지만 격한 성격으로 일을 망치는 것을 무척이나 걱정했습니다. 또한 까미유에게 속물처럼 행동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많은 시간 인내를 갖고 겸허한 마음으로 예술가다운 진면목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조언하지요. 스승 부셰는 그녀에게 닥칠 불운한 기운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많은 충고와 조언을 남기고 떠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AZzAiX2614

 

 

 

 

 

 

Crouching Woman,1884-85/Pinterest

 

 

 

19살에 로댕의 눈에 띄게 되고 20살에 로댕의 아틀리에에 들어가게 됩니다. 조각사에서 로댕의 업적이라고 한다면 아름다움과 틀에 박힌 규칙만을 중요시 여기던 전통적인 조각을 벗어나 사실적인 표현으로 아름답지 않은 것도 예술로 끌어올리는 재능이었습니다.  매끄러운 피부 대신 울퉁불퉁한 굴곡을 많이 넣어 조각을 비쳐주는 빛의 효과도 중요하게 취급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로댕의 영향을 받아 카미유는 사실적이면서 삶의 무게가 그대로 실린 작품들을 제작하게 됩니다.

 

 

 

                                                                                                 43살 VS19살

 

 

 

 

이미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 덥수룩한 수염에 근엄한 인상까지 주는 로댕입니다.  최고의 조각가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요. 영특한 눈매에 19살의 천재적인 조각가 까미유는 로댕과 이렇게 대면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였을까요. 카미유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로뎅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로댕의 제자이자 , 연인이며, 예술의 동지이자 영감의 원천이 되어 갔습니다. 로댕은 그녀의 천재성을 인정하여 제자들에게  점토작업만 맡긴다는 규칙을 깨고 그녀에게 작품의 일부를 만들도록 허락합니다. 당시 여성 예술가를 무시하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문제는 로댕 곁에 오랜 세월 사실혼 관계를 이루고 있던 연상의 여인 로즈 뵈레가  있어습니다. 뵈레는 로댕이 무명이던 20여 년 전부터 지원해 주고 돌봐준 여인입니다. 힘든 시절을 함께 건너온 조강지처 격의 로즈 뵈레를 쉽게 버릴 수 없는 처지입니다.  또 두 사람 사이엔 클로델보다 두 살 어린 아들도 있었습니다.

 

'무슈 로댕'

'파드모아젤  끌로텔'

 

서로에게 깍듯한 존칭을 사용하며 로댕은 점점 이중적인 남자가 되어갑니다. 로댕은 그녀에게 무관심한 듯, 때로는 적대적인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집요하게 그녀의 견해나 충고를 열심히 물어보곤 했습니다. 로댕은  클로델을 보는 순간부터 깊이 매료됐다고 합니다. 클로델은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지적이었거든요. 조각가로서 성공하고 싶은 강한 의지도 갖고 있었죠. 로댕은 반짝이는 클로델에게 빠져 적극적으로 구애했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활활 타오르는 기쁨을 준다오. 
내 인생이 구렁텅이에 빠질지라도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슬픈 결말조차 후회스럽지 않아요. 
당신의 그 손을 나의 얼굴에 놓아주오.
나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나의 가슴이 신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로댕이 쓴 편지)





Portrait de Camille Claude by Autuste Rodin Scupture , Musee d'Orsay, Paris/Web Gallery of Art

 

 

 

그즈음 로댕의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사망합니다. 이때가 1883년 10월 26일이었습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로댕에게 까미유의 등장은 많은 위안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로댕은 로즈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 알코올 중독자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 외에 이런 가족들로 인해 심한 마음의 고통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의 고통이 까미유의 등장으로 인해 많은 위로를 받게 됩니다. 

 

 

 

 

 

<Paul Claudel enfant>,/Pinterest

 

 

1884년  까미유는 로댕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16세의 내 동생>을 완성합니다. 폴을 모델로 한 이 작품에는 아직 미성년의 모습으로 젊은이의 연약함과 기품 있는 모습이 조화롭게 살아 있습니다. 이 작품은 솔직하고 강직한 듯한 눈빛이나 곧게 세운 목, 어깨 위에 걸치고 있는 망토 등으로 마치 승리자의 모습처럼 동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생을 향한 누나의 애정이 듬뿍 들어간 작품입니다. 그녀는 동생 폴과 가깝게 지냈고 후손이 없던 카미유의 보호자가 되어줍니다. 

 

 

 

Paul Claudel,1905, by Camille Claudel ,Musee Bodin,Paris/Arthive

 

까미유는 그 후 1905년 폴의 중년 모습을 조각한 <37세의 폴 클로델>과  5년 후인 1910년에 다시 만든 <42세의 폴 끌로델 흉상>도 남기고 있습니다. 이제 마흔둘이라는 중후한 나이가 된 폴은 그 나이에 걸맞게 벗어진 이마, 깔끔하게 잘 다듬어진 콧수염이 섬세하게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강티의 흉상 Tete de Brigand>,1885 by Camille Claudel, Musse des Beaux Arts Cherbourg/캐나다 한국일보

 

 

 

 

1885년 까미유를 혼자서만 좋아했던 모델 지강티를 조각한 <지강티의 흉상>을 남겼는데 이 작품은 살아있는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듯합니다. 로댕은 까미유가 가진 예술적 재능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11월 까미유는 로댕의 권유로 그의 작업실에서 제자 겸 모델 일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녀가 가족들과 상의 없이 혼자서 결정했다는 점이죠. 이곳에서 그녀는 습작으로 두상과 손을 많이 제작했습니다. 그녀의 이 두상 습작은 로댕의 <지옥의 문>에 들어갈 '걷는 사람'의 얼굴로 다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손>은 그녀가 만든 다양한 모양을 취하고 있는  손들 중 한 작품인데 특히 섬세한 표현이 돋보입니다. 까미유는 이 무렵부터 2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목탄이나 연필을 사용한 연작 스케치를 하며 조각의 밑작업을 준비해 갑니다. 그 예로 자신의 아버지를 데생한 작품이지요. 그녀에게 아버지 루이 끌로델은 자신을 믿어 주고 조각가로서 천재성을 인정하며 적극적으로 이해해 주고 후원해 준 유일한 사람입니다. 

 

 

 

 

 

 

 

<까미유 끌로델> 영화(이자벨&nbsp; 아자니 & 제라르 드 빠르디유 주연 영화/ 한국강사신문

 

 

 

 

로댕은 자신이 참석하는 파리의 모든 사교계에 까미유를 동반하고 다닙니다. 사람들에게 그녀가 대단한 조각가임을 주지 시키면서 말이죠. 이제 그녀의 행동들은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충분했습니다. 까미유는 이제 파리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유명 여류 조각가가 되었으며, 그녀의 미모와 예술가적 기질이 보태지면서 사람들은 아름답고 대단한 이 여류 조각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하기 시작합니다. 

 

 

 

<Bust of Rodin>,1888-1889/Wahoo Art

 

 

 

 

 

키미유가 작업실에 등장한 이후 작업실에는 웃음이나 농담은 점차 사라져 갔고 차가운 냉기류만 더해져 갑니다. 작업실에서 고통을 감내하던 까미유에게 아버지마저도 로댕의 작업실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동안 자신을 잘 이해해 주고 후원해 주었던 아버지의 이런 모습은 까미유를 더욱 절망스럽게 했습니다. 

 

 

 

<The Gates of Hell>,1880-1917/MUSEE RODIN

 

 

이 무렵 로댕과 까미유는 단테와 보들레르로부터 받은 지옥에 대한 영감을 공유하여 <지옥의 문>을 위한 열정적인 작업에 임합니다. 로댕은 늘 까미유에게서 조언을 구했고, 이 조언으로 작업된 로댕의 조각상은 거꾸로 까미유에게 감동을 주곤 했습니다. 

 

 

<The Gates of Hell> 작업중인 까미유 끌로델/나무위키

 

 

 

 

 

 

 

 

 

https://www.youtube.com/watch?v=bfv9T1lSO2U

 

 

 

 

 

 

 

까미유의 또 다른 영감으로 제작된 로댕의 유명한 <입맞춤>도 둘만의 깊은 사랑이 근원이 되어 탄생한 대표적인 에로틱한 작품입니다. <입맞춤>은 풍부한 감수성에 힘입어 능숙한 구성으로 제작돼 로댕의 명성을 더욱 높여준 걸작입니다. 두 남녀의 면과 면이 접촉되는 부분에는 생명력과 고양된 긴장감이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의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하는 교묘한 형태의 배합이 특징인 작품입니다. 

 

 

 

<The Kiss>,1882 by Auguste Rodin/주간한국-한국아이닷컴

 

<Louise Claudel>,1887/Arthive

 

 

 

여동생 루이즈마저 페르디난드 드 마사리와 결혼을 하자 까미유는 가족을 떠나 로댕이 마련해 준 작업실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때에 까미유는 파스텔을 사용해 동생 루이즈를 그리게 됩니다.  1887년 그린 이 작품은 화면 중앙으로 루이즈의 모습을 부각하고 머리와 얼굴 부분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몸체는 마치 미완성인 듯 윤곽선으로만 표현하고요. 주변 배경은 거친 터치와 절제된 색채를 사용했습니다.

 

 

 

 

로댕은  까미유가 몰인정한 그녀의 어머니에게 쫓겨났을 때 임대비와 생활비를 책임져 주었습니다. 이즈음 로댕의 후원은 그녀가 떳떳하게 자립할 수 있는 성격의 급여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댕은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광란의 뇌부르그로 불리는 집과 투렌느 이즐리뜨 성을 빌립니다. 이곳에서 둘 만의 사랑도 키워 가고 , 아무도 오지 않고 단 둘 만이 작업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합니다. 까미유는 이 공간을 가족이나 시간에 제한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로운 곳으로 여기고 무척이나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까미유는 자신이 사랑했던 아버지에게 마저도 로댕과의 사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일체 비밀에 부치고 있었습니다. 

 

 

 

로댕은 까미유에 대한 사랑을 거리낌 없이 표출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로댕이 처음과는 달리 자리를 자주 비우게  되자, 까미유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아져 갔습니다. 무섭고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까미유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녀는 책을 통해 배울 것, 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독서 속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기도 하고요. 때때로 밤이 길어질 때까지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The Abandomnent>/KNS뉴스통신

 

 

 

 

<SAKUNTALA>,1888 , Canille Claudel vs&nbsp; &nbsp;<영원한 우상>, 로댕/오마이뉴스

 

 

 

 

 

<사쿤탈라Sakountala>,1888,로댕박물관/중기 이코노미

 

 

1888년  <사쿤탈라>는 샹젤리제 살롱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게 되며 세인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까미유는 정식으로 작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경쟁자들에게는 질시의 대상이 되고요. 이 작품은 열정적인 사랑을 표현하고 있으며 남자는 무릎을 꿇고 두 팔로 여인의 몸을 감싸고 있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까미유는 이 작품을 위해 많은 날들을 작업에 열중했으며 스무 번도 더 만들었다 부쉈다 하며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습니다.  이 작품 이후 까미유의 독특한 스타일이 완전히 구축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한 우상>1898,로댕작품, 로댕 박물관/Fruugo

 

 

 

 

두 사람 사이에 큰 균열이 일어나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로댕이 클로델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스캔들이 생긴 겁니다. 클로델의 <사쿤탈라>(1888)와 로댕의 '영원한 우상'(1898)이라는 작품입니다. 격정적인 에너지, 육감적인 포즈 등이 유사합니다.  로댕은 스캔들로 인해 자신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리고 클로델이 작품을 출품하지 못하게 압력을 가해 가까스로 표절 시비를 잠재웠습니다. 

 

 

 

작업에 열중하던 어느 날 폭우가 퍼붓고 있던 밤에 까미유 작업실에 로댕의 실질적인 아내 로즈 뵈레가 찾아옵니다. 비에 흠뻑 젖은  로댕의 아내는 거의 발광직전 상태로 까미유를 보자마자 심한 욕설과 증오를 퍼부어 댑니다. 로즈는 비록 로댕과 정식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으나 어려웠던 시절부터 헌신을 다 하면서 살아온 연상의 여인이었습니다. 증오를 가득 담고 까미유를 모욕하던 로즈는 그녀를 밀어 넘어 뜨렸고 조각품과 함께 작업대로 쓰러지게 됩니다. 이 순간 로댕이 들어와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되지만 이렇게 싸우고 있는  두 여인 사이에 어느 편도 들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심장이 좋지 않은 로즈를 데리고 가버립니다. 

 

 

 

혼자 남게 된 까미유는 심한 모멸감과 절망감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까미유가 이때의 심정을 데생으로 표현했는데 로댕과 로즈를 모델로 마치 한 편의 만화를 보는 듯한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로댕과 까미유는 사랑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지만 그들이 예술 세계에서 맺었던 상호성만은 매우 독특합니다. 로댕은 까미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까미유의 영감과 감각 또한 로댕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요. 두 사람이 함께 한 시절 동안 로댕의 창작열이 왕성했다는 점입니다. 예술적 동지로서 이만한 커플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술가들 역시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까미유는 전반적으로 대리석을 정교하게 조각하는 스타일입니다. 로댕의 작품 일부는 그녀의 손길을 거쳐 갔음을 터치에서 직감할 수 있는데, 사후에 평자들이 서명이 없는 작품들은 모두 로댕의 작품으로 분류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시기적으로 까미유 작품이 로댕보다 먼저 제작된 것으로, 이 작품을 통해 로댕이 까미유를 이용해 왔고 모방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Young Girl With A Sheaf>,1890/Arthive

 

 

까미유의 <밀단을 진 소녀 Young Girl With A Sheaf,1890> 조각입니다.  로댕의 <갈라티아 Galatea ,1889>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커다란 다리나 서로 맞댄 툭 튀어나온 무릎 등의 표현에서 이러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까미유의 이  작품은 테라코타로만 전해지다 1983년 브론즈 작품이 발견되었습니다.

 

 

 

<Young Girl with Chignon>,1889/Reprodart

 

까미유의 <쪽진 머리의 소녀>와 로댕의 <웃는 소녀의 두상>도 유사한 작품입니다.  두 작품 모두 웃는 얼굴이지만 로댕의 것은 매우 천진난만한 반면 까미유 작품은 약간 냉소적인 웃음을 띠고 있습니다. 그 후 까미유의 폭넓은 작업으로 독창적인 결과물이 계속 판매되었고 작가로서 활약도 점점 커져갔습니다. 하지만 로댕과의 사랑은 갈등이 더 심해졌고 조강지처 로즈뵈레의 질투도 심해지며 둘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합니다. 로즈와의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고 자신과 정식으로 결혼하기를 원했던 까미유와 오랜 세월 함께 한 로즈를 저버릴 수 없었던 로댕의 갈등이 심해지던 때이기도 합니다. 임신과 유산으로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갈등도 증폭되었습니다. 

 

 

 

1892년 까미유는 로댕의 작업실에서 나와 독립합니다. 까미유는 로댕과 함께 10년 동안 창작에 몰두하였으나 자신의 이름을 서명할 수 있었던 작품은 극히 소량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로댕의 작품을 도와주는 것은 물론이었고 로댕을 위해 기꺼이 모델이 되어 스스로 포즈를 취해 줬으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델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을 소요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매우 힘든 일로 보수를 주는 게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까미유는 사랑하는 로댕을 위해 단 한 푼의 모델료도 받지 않았습니다. 정기적인 급여마저도 받았다는 증거는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왈츠 추는 여인>/Pinterest

 

 

 

 

로댕이 자신을 떠나가고 만든 작품으로 작품 속 남녀는 다정하게 왈츠를 추고 있습니다. 클로델은 로댕을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잊지 못하고 그와의 추억을 곱씹었습니다. 동생의 친구였던 드뷔시와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그녀의 작품 중 이 작품이 그를 위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Les Causeuses,1897/ AEQAI

 

이 시기 까미유는 일본 화법을 수용하여 자연을 통한 크로키 작업에 열중하면서 전통적인 기법에서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리석과 부론즈로 만든 조그마한 군상, <수다쟁이들>, <파도>, < 벽난로 앞에서의 꿈>등의 작품이 탄생되었습니다. <수다쟁이들>은 한 모퉁이에 모인 네 여인들을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한 여인은 이야기를 하고 나머지 여인들은 듣는 모습입니다. 이야기하는 여인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진리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면, 머리를 맞대고 있는 여인들의 자세에서는 비밀이 감춰져 있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감정이 경이롭게 묘사되어 있어 매우 호평을 받았습니다. 어떤 예측도 불허하는 강한 의지를 작품 속에서 보여준 <수다쟁이들>은 특히 그녀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이 되고 있습니다. 

 

 

 

 

 

<The Wave>,1897/The Ekphrastic Review

 

 

 

1897년 <파도>는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처한 인간의 연약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거대한 파도가 3명의 여인들을 곧 덮치려는 듯하여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서로 손을 잡고 겁먹은 표정으로 난관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Le Reve au Coin du Feu>,1899/ Reddit

 

 

 

세계 전람회에 출품됐던 <벽난로 앞에서의 꿈>은 비롱 알퐁스로 치드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 한 여인이 등받이 의자에 앉아 벽난로 앞에 머리를 기댄 채, 피곤에 지쳐 잠시 꿈속을 거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02년 대리석으로 다시 제작되었습니다.

 

 

 

이즈음 여동생 루이즈가 남편과 사별해 어려움에 처해 있었는데 , 루이즈의 외로움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까미유가 모른 채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런 책임이 아버지에게 돌아가자 까미유의 부담은 더욱 커져갑니다. 1898년 까미유가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들이 전시 도중 도난당하자 이를 로댕의 음모라 생각한 그녀는 그를 비난하며 영원한 결별을 선언합니다. 그녀 나이 31살이었습니다. 

 

 

 

<성숙 The age of maturity>1899,오르세미술관/오마이뉴스

 

 

 

 

 

작품명 <성숙>이란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서 죽는다는 철학이 담긴 내용입니다. 보통 어린이, 어른, 노인 이렇게 삼대로 표현되지요. 이 작품에선 젊은 여인, 중년 남자, 노년 여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젊은 여인은 애원하는 자세이고, 중년 남자는 무기력하며 노년 여자가 중년 남자를 데리고 가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관계를 아는 이들이라면  늙은 부인 '로즈'에게로 떠나간 로댕을 그리워하며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끌로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클로델의 <성숙>(1899)이란 작품을 본  로댕은 이 작품으로 인해 자신이 큰 곤욕을 치르게 될까 봐, 클로델이 작품을 주물로 완성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까미유는 설명합니다. 남자는 한 예술가로서의 한 인간이고 늙은 여자는 자기 안에 너무 일찍 늙어버린 여자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젊은 여자는 그저 남자에게 매달리고 싶은 자기 안에 가엾은 젊은 여자를 표현한 것이라고요. 그래서 이 작품은 까미유 내면에 존재하는 삼위일체를 담고자 했다고 말입니다.  까미유는 이 작품으로 극찬을 받게 되고 조각가로서 인정받고 돈도 벌게 됩니다. 

 

 

 

 

 

 

<Persee et la gorgone>,1902/Wikimedia Commons

 

 

로댕과의 결별 후 홀로서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나이에 비해 훨씬 늙고 살찐 모습으로 변해있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현실을 탈피하고자 술을 많이 마신 것이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작품 속에 반영하였는데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버린 그리스 영웅 페르세우스와 고르곤을 조각한 모형에 까미유의 형상이 들어 있습니다. 목이 잘린 조각품의 형상이 그녀의 모습으로 대변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그녀는 스스로를 한 남자 영웅에 의해 자신의 무한한 힘과 숨통이 끊긴 괴물 즉 , '고르곤'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La Fortune,1904/Arthive

 

 

 

그녀는 튀렌느 거리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다음 해 1월 부르봉 지방의 생 루이성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녀의 20여 점의 석고상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화상 위젠느 블로와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녀의 작품들을 청동으로 제작하여 상업화하려고 했습니다. 까미유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들을 그에게 넘겼습니다. 1900년에 제작한 <운명>은 상체는 앞으로 가려는 데 하체는 오히려 뒤로 물러서려는 듯한 인체의 대조적인 움직임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두 눈을 가리고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또는 남자 없이 혼자서 왈츠라도 추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오직 자신의 운명을 음악적 리듬감에 맡긴 듯 팔을 높이 쳐들고 있습니다. 까미유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1905년 12월 4일 -16일까지 까미유는 블로와의 화랑에서 13점을 내놓고 <까미유 작품 전람회>를 가졌습니다. 이때 그녀의 심정은 환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는 블로와 가 전시회를 위해 준비한 의상을 입고 부축을 받으며 전람회장에 나갔습니다. 전시장은 많은 인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녀는 내심 자신의 아버지를 간절하게 찾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전시장에 그녀의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며 방문했는데 눈은 빛나건만 골이 깊게 파인 주름살이며 어느덧 일흔아홉 살의 늙은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1906년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우울증과 로댕에 대한 피해의식 및 정신착란 증세로 고통을 겪습니다. 그녀는 점점 더 심해지는 피해망상증과 편집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모든 실패와 불공정함에 대한 쓰라린 감정을 온통 로댕에게 돌렸습니다. 로댕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친 것도 부족해 자신을 죽일 음모를 꾸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작업실에 틀어박힌 채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작품 활동도 못하고 빈곤과 알코올중독, 그리고 스폰서의 권유로 하게 된 마지막 전시도 완전히 실패하면서 그녀는 낯선 사람이 되어갑니다. 반면 로댕의 작품들은 파격적이고 변형적이라는 극찬과 더불어 대단한 호응을 얻으며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그녀에게 준 재능을 모두 그녀의 불행을 위해 쓰였다.

-남동생 폴-

 

 

까미유는 일종의 조현병을 앓았던 모양입니다. 조현병이란 사고, 지각, 행동, 사회활동 등 다양한 정신기능의 이상을 초래하는 정신병으로 젊어서 발병하며 만성의 경과를 밟고 인격의 황폐를 초래하는 병이며 흔한 증상으로는 환각과 망상이 있습니다. 40살에 조현병에 걸린 후 그녀는 예술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세상이 두려워 은둔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지만 어머니와 남동생은 그녀를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녀의 존재는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추고 싶은 존재였던 거죠.

 

 

 

 

1906년 가족들 모두 외교관이 된 폴을 따라 중국으로 가게 되고 가족들 없이 혼자 남겨진 까미유의 병은 더 깊어지게 됩니다. 1913년 평생 후원자 역할을 해 온 아버지까지 죽게 되자 엄마와 남동생은 그렇게도 집에 가서 함께 살고 싶다는 까미유를 정신병원에 넣게 됩니다. 1914년 아비뇽의 몽크베트게 병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이후 30년 동안이나 수용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치료약도 없었고, 인권이 유린되어 묶이거나 감금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키미유는 남동생에게 지속적으로 퇴원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가족과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1943년 사망하게 됩니다. 1917년 로댕도 사망하고 1943년 정신병원 수용 30년 후 79세의 나이로 쓸쓸히 사망합니다. 당시 가족도 없던 그녀는 공동 매장되어 현재 무덤도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까미유 끌로델 박물관/  Aube Champagne

 

https://www.youtube.com/watch?v=bWuZY6zdbNY&t=91s

 

 

 

 

그렇다면 로댕은 엄청 나쁜 남자일까요? 로댕역시 파탄으로 끝난 이후에도 클로델을 사제지간과 연인을 넘어 서로의 작품세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한 예술적 '동반자'로서 존중했습니다. 실제로 도미니크 보나의 <위대한 열정/아트북스>에 따르면 로댕은 클로델의 정신병원 수감 이후에도 금전적 지원이나 '카미유 끌로델 미술관'을 지으려는 노력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녀의 예술활동 재개를 돕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남성 예술가에게 버림받은 아름다운 여제자 카미유 끌로델이 아닌, 로댕마저 흠모했던 재능을 지녔던 여성 예술가로서 그녀를 바라봄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을 모델로 한 영화도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고 비교해 보는 것도 괜찮은 경험일 듯싶습니다. 보이는 것들이 더 많아질 테니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qvz5oY3tWNI

 

 

영화 <까미유 끌로델>(2013)은 연인의 짙은 그림자에, 여성 예술가라는 굴레에 갇혀 외면당한 조각가 클로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브루노 뒤몽 감독이 연출하고, 줄리엣 비노쉬가 클로델 역을 맡았습니다. 영화는 클로델이 로댕과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그 사랑과 차별로 인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LBG1cbqn3o

 

 

 

 

오늘날  미술사학자 클로딘 미셸은 이러한 최고의 제자가  뛰어넘으려 한 것이 그녀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고 지적합니다.  로댕을 비롯한 예술가들에게 허용되던 에로스의 지성을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표현하려 했던 여성 조각가가 만난 것은 바로 19세기라는 시대의 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천재성을 '로댕'의 영향 아래에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일부 비평가들로 인해 심해졌고요. 이로 인한 그녀의 정신적 불안은  가족에 의해 더 부풀려졌다는 점입니다.

 

 

 

 

반응형
반응형

이름 끝에 하운드가 들어간 개들은 시각과 후각으로 사냥감을 쫓는 사냥개 출신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바셋하운드를 소개합니다. 바셋하운드는 벨기에에서 토끼, 사슴등을 사냥하던 사냥개였습니다.  16세기 프랑스에서  토끼 사냥을 위해 개종한 견종으로 덩치에 비해 매우 작은 키와 짧은 다리가 특징입니다.

 

 

 

Basset Hound/Sheknows

 

 

 

체고:수컷 33-38cm

암컷: 20-36cm

몸무게 수컷:23-34kg

암컷: 20-29kg

일부 개들은 2살이 넘어도 계속 성장하는데, 바셋하운드는 몸에 비해 뼈가 무거워서 성장이 느린 편입니다.

평균 수명은 12-13년

 

 

 

출처:123RF

 

 

 

 

 

 

https://www.youtube.com/watch?v=mFZXVAGKs0k

 

 

 

 

 

비글의 닮은꼴에 닥스훈트, 페키니즈처럼 짜리 몽땅한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셋하운드라고도 하고, 바세트 하운드(Basset hound)라고도 부릅니다. 슬퍼 보이는 눈과 어깨까지 내려오는 큰 귀, 짧은 다리와 긴 허리, 축 늘어진 피부를 가졌습니다. 입 주변 가죽도 축 늘어져서 침을 잘 흘리기 때문에  턱받이를 해주거나 침을 자주 닦아 청결을 유지해줘야 합니다. 다행히 털은 단모에 플랫 한 형태라서 털 빠짐이 심하지 않고 관리도 쉽습니다. 

 

 

 

 

 

바셋하운드/요미독

 

원산지는 프랑스이며, 1500년대 혁명 이전까지 프랑스인들이 토끼를 잡기 위해 이용한 낮고 견고한 몸을 지닌 수렵견으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벨기에 성 휴베르트 수도원은 다양한 사냥개를 개량해왔고 그중 특별히 다리가 짧은 개체들만 교배하여 바셋하운드의 초기 틀을 마련합니다. 바셋하운드는  불러드 하운드를 이용하여 개량된 견종으로 뛰어난 후각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짦은 다리 덕분에 초목이 무성한 산과 들에서 토끼와 사슴 같은 사냥감을 추적하는 능력이 뛰어났죠.

 

 

 

 프랑스어로 '낮다, 난쟁이'라는 뜻 bas에서 유래되어 바셋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1500년대부터 프랑스 서민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온 바셋 하운드는 실제로 세익스피어가 글귀에 바셋하운드에 관해 묘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귀족, 왕족의 보호를 받으며 수세기에 걸쳐 번영해 온 럭셔리한 멍멍이 견종입니다. 1863년 파리, 1875년 영국의 도그쇼에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게 됩니다.  미국으로 넘어간 바셋하운드는 수렵견에서 가족 반려동물로서의 인기몰이를 하게 되고요. 만화 및 방송에도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구축하게 됩니다. 

 

 

 

 

 

 

 

흰색과 황갈색 바셋하운드/123RF

 

 

축 쳐진 큰 귀와, 쳐진 눈꺼풀때문에 다소 억울해 보이기도 합니다. 다부진 체격에 통통한 몸매가 특징입니다.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느릿느릿하다고 하네요. 많은 사냥견들이 사냥감을 추적하고 물어 죽이는 반면 바셋하운드는 물어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격이 상냥하기 때문이랍니다.^^

 

 

 

 

느릿느릿한 속도로 사냥감을 추적하는 바셋하운드는 사람들이 쫓아가기도 편하고, 시야에서도 멀리 사라지지 않기에 오히려 다른 견종보다 사냥감을 쫓는데 더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셋 하운드는 신발브랜드인  '허쉬파피'라는 광고에 출연하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통통한 체격과 턱보다 길게 늘어진 귀가 무척 매력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qREORr11K0

 

 

 

 

 

 

 

 

보기와 달리 키우기 까다로운 강아지/다나와 DPG

 

 

 

 

바셋하운드의 성격은  상냥하고, 온정이 많은 강아지입니다. 주인에게 헌신적이고 충성심이 강합니다. 내성적이고  고집이 센 편입니다.또한 귀찮게 하는 걸 싫어한다고 합니다. 외모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느긋하고 둥글둥글한 성격입니다. 사람들은 물론 다른 동물들과도 잘 지내지요. 단점으로 고집이 세고 완고한 면이 있어서 훈련이 어렵다고 합니다. 문제행동이 생길 경우 교정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요. 또  바셋은 외로움을 잘 타서 혼자 두면 잘 울거나 땅을 파는 등 문제 행동을 보일 수 있습니다. 사냥 본능이 강해 풀어놓고 키우면 사냥감을 찾아 멋대로 가출할 수 있기 때문에 실외에서 키울 경우 문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초보자가 키우기 쉬운 견종은 아닙니다. 

 

 

 

 

Can Basset Hounds stay outside in tne cold?/Daily Update2024-02-04

 

 

 

 

또 비만이 되기 쉬우니 간단한 산책은 자주자주 시켜주시는 편이 좋습니다. 허리가 길어서 살이 찌면 척추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식이관리 및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줘야 합니다. 간식 급여를 하루 권장 칼로리의 10%를 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원래 사냥견이었기 때문에 운동을 자주 시켜줘야 관절염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출처:한국경제

 

 

 

 

바셋 하운드는 수렵견 출신이라 잘 짖습니다. 게다가 소리까지  우렁차서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서 키우면 민원을 받기 쉽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성대 수술을 고려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정말 최후의 방법입니다. 혼내도 고쳐지지 않는 다면 훈육 방법을 바꿔보세요.

 

 

 

개가 짖으면 '기다려' 혹은 '앉아' 같은 명령어를 내린 뒤 강아지가 짖지 않고 기다리면 간식으로 보상해 주십시오. 처음에는 3초, 그후에는 10초 이렇게 시간을 늘려가면서 강아지가 짖지 않고 침착하게 기다리면 간식으로 계속 보상해서 짖음 방지 훈련에 익숙해지도록 해주세요.

 

 

 

 

사냥개 출신이지만  활동량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 느긋하게 걷는 코스로 하루 1시간 정도 산책을 시켜주면 좋습니다. 이들 견종은  땅을 파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잘 가꿔진 공용 잔디 같은 곳을 산책할 때는 땅을 파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리가 짧아서 땅과 배 사이의 높이가 닿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는 열기가 빠르게 전해지는 아스팔트 같은 곳 위로 산책하는 것은 삼가는 게 좋습니다. 겨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냥 본능이 강하기 때문에 토끼처럼 작은 동물들이 보이면 돌격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목줄을 꽉 잡고 있어야 합니다. 

 

 

 

 

비마이펫라이프

 

 

 

 

피모색은 검은새, 흰색, 황갈색이 섞여있습니다. 비글과 상당히 흡사한 외모죠. 토끼, 오소리, 너구리, 쥐 등을 잘 사냥했던 바셋하운드지만 훈련능력은 다소 약한 편이라고 해요. 배변훈련이나 기타 훈련 등은 인내심을 가지고 하셔야 합니다.

 

 

 

출처:Mundo Perros

 

 

 

 

바셋하운드는 허리디스크,비만, 녹내장, 이염, 탈 구 등의 질병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 귀가 땅으로 꺼진 형태로 덮여있으니 귀질환도 조심해주셔야 합니다. 평소 걸음걸이 등 컨디션을 잘 체크해줘야 합니다. 

 

 

 

바셋하운드는 주인과 가족에게 매우 헌신적인 견종입니다.  혹시라도 바셋하운드가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가족을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고집 때문임을 알아주세요. 보호자의  끈기와 훈련이 필요함을 잊지마십시오.

반응형
반응형

애원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견주만 바라보고 있다면 이 잘생긴 하운드의 매력을 거부할 수 있을까요? 작은 하운드라는 의미를 담아서 견명이 탄생했습니다. 미국의 유명 만화인 스누피의 모델이 된 견종이기도 합니다. 

 

 

 

Beagle owner's Guide/ Greencross vets

 

 

체고:33-38cm

체중 : 3-13.6kg

 

비글의 머리는 반구형의 두개골과 늘어진 귀, 거의 정사각형 모양의 주둥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얼굴은 크고 표정이 풍부한 갈색 또는 담갈색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털은 흰색, 황갈색, 검은색 등 색이 다양한 짧고 부드러우며 숱이 많은 털을 가지고 있고요. 몸은 근육질의 단단한 몸과 평평한 등, 짧은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꼬리는 길고 위로 솟아 있으며 종종 끝이 하얀 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누피/나무위키

 

 

 

장난기가 많고 활동량이 많은 비글이 집안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날뛰어 견주가 감당하기 힘들어서 붙여진 별명이 '악마견 '입니다. 말처럼 정말 악마견일까요? 악마견이라 해서 성격이 공격적이고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치는 특징 때문이지요. 실내에서 집안을 어지럽히고 가구를 망가뜨릴 위험이 높기 때문에 사람의 입장에서 악마견이라고 불릴 뿐입니다. 실제로 유쾌한 성격과 사람을 너무도 잘 따르는 천사견입니다.

 

 

 

 

사람들이 비글을 악마견으로 오해하는 특징 중 또 다른 하나는 '베이'라고 일컫는, 하울링과 유사한 독특한 사냥 울음과 짖음 때문입니다. 일종에 '나 여기 있어요.'라는 위치신호라고 합니다.  만일 아파트와 같은 공공주택에서 이런 울음소리는 다른 이웃에게 불쾌할 수 있습니다. 비글이 이러한 소리를 내는 특징은 활기찬 성격상 지루함 때문에 짖지만, 많은 비글이 운동량과는 상관없이 그저 짖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낼 수도 있습니다. 

 

 

www.pinterest.co.kr

 

 

 

비글의 역사는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비글은 영국의 로버에서 교배가 이루어져 토끼를 잡는 데 사용된 견종으로 2억 2000만 개 이상의 후각 수용체를 가지고 환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항이나 위험물 수색 등 탐지견으로도 유명합니다. 

 

 

 

정확한  비글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기원전 400년에 쓰인 그리스 문서에 비글과 흡사한 외형의 개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토끼 사냥개를 지금의 영국으로 데려와 해당 지역의 토종견과 함께 길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비글은 사냥개 스포츠 그룹에 속하는 중형 품종입니다.  이 품종의 역사는 많은 변형이 있었지만 현대의 품종은 1800년대 초 영국의 잉글랜드에서 등장했습니다. 영국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통치하던 시절에는 털이 빳빳하고 사냥꾼들이 주머니에 넣고 다닐 만큼 체구가 작은 비글이 등장했었다고 합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비글의 크기는 점차 커졌다고 해요. 당시 '포켓 비글'이라고 불린 소형 비글도 가끔씩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글은 소형동물을 잘 사냥하는 하운드로 하운드 종에서는 작은 편입니다. 기질 자체가 침착하고 뛰어난 후각을 지닌 사냥견으로 유용합니다. 사냥을 잘하는 강아지답게 머리가 좋습니다. 행동도 민첩하고요.         

 

 

 

Beagles/ Sportsman's Pride

 

 

 

 

 

 

견고한 구조를 가진 비글은 폭스 하운드(여우를 들판에서 쫓기 위한 견종)과 비슷합니다. 비글은 토끼전문 사냥견으로 많은 비글을 데리고 들판에 풀어놓으면 스스로 온 들판을 다니면서 토끼의 흔적을 찾습니다. 체력은 필수이고 , 토끼굴을 발견하면 발로 흙을 마구 헤집어 토끼를 끌어냅니다. 때문에 땅을 잘 파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격은 관대하며, 침착하고, 친화력이 매우 좋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하는 가족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하지만 활발한 성격 덕분에 얌전히 있지 못하고 집안을 헤집어 놓을 수 있으니 예절 교육은 필수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JJqg0JYYkI

 

 

 

 

 

 

Beagle-Rasseportrait/Das Futterhaus

 

 

 

 

비글의 왕성한 호기심 때문에 집에서와 산책에서의 시간이 동일하도록 보내야 합니다. 공원이나 넓은 마당에서 뛰어 다니는 등 정기적인 운동을 해주어야 합니다. 뛰어난 후각으로 인해 하루종일 냄새 맡기를 하기 때문에 코가 헐거나  염증의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코에 의해 지배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냄새를 맡으면 그 냄새에 이끌려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와 수천 개의 집을 지나 이동할 수 도 있습니다. 산책 시 리드줄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잃어버릴 염려가 크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비글은 성격상 무리 짓는 속성이 있어 인간에게 많이 의존합니다.  다양한 활동과 여가를 즐기는 전원 생활의 가족들에게 적합한 반려동물입니다. 운동하고  뛰어놀 여건이 충부한 환경이라면, 다재다능한 비글은 최고의  추천 견종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IzliEXhIFk

 

 

 

 

 

 

 

비글은 대부분의 계절에 야외에서 살 수 있습니다. 짧고 밀착된 털로 비글은 광법위한 손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발의 회전율을 높이고 모발 축적을 최소 하기 위해 가끔씩 빗질을 해야 합니다. 털이  단모종이기 때문에 성견이 되면 많은 털이 빠집니다. 또한 털이 굵고 짧기 때문에 박히면 잘 빠지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미용을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미용 후에 나는 털이 좋지 못하다고 합니다.

 

 

 

귀가 매우 크기 때문에 귀가 서 있는 개와 달리 물이 들어가면 귓병이 생기기 쉽습니다. 목욕 시에는 귀를 솜등으로 막아서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귀 청소를 자주 해야 합니다. 털이 짧기 때문에 피부 질환에 취약합니다. 목욕 후에는 털을 잘 말려주어야 합니다.

 

 

귀소 본능이 약한 견종이라 산책시 주의해야 합니다. 주의 소리나 여러 자극에 따라가지 쉽습니다. 식탐이 매우 강합니다. 외출이나 부재 시에 음식물이 안 닿는 곳에 두셔야 합니다. 분리불안이나 질투, 엄살이 심합니다. 다른 견종에 비해 배변 훈련이 쉽지 않고 이불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침대에 비닐 커버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출처: Deutsche Familienversicherung

 

 

 

 

아이러니하게도 악마견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너무나 순종적이고 착하기 때문에 실험견으로도 쓰이는 견종입니다. 비글이 실험동물로 많이 사용되는 이유는 유전적인 질병이 거의 없어서라고 합니다. 개체 간의 형질차가 적어 실험의 재현성이 좋고요. 사람과 친화성이 좋고, 몸집이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절한 크기이며, 실험비용도 저렴하고, 새끼를 낳아도 부모견의 유전형질과 유사한 신체조건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당뇨병 치료제 개발 연구에 사냥개 비글이 실험동물로 사용되었습니다. 1920년 초 토론토 대학에서 불치병인 당뇨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인슐린이 발견되었습니다. 젊은 외과 의사인 벤팅(Frederick  Banting)과 의대생 베스트(Charles Best)가 '랑게르한스섬(islets of Langerhans)'에서 추출한 물질 'isletin(아일레틴, 추후에 Insulin으로 변경)'을 식별하는 유명한 실험을 수행하여 얻은 결과였습니다.

 

 

 

인슐린 발견 실험에 마조리 비글(Marjorie beagle)이란 사냥개가 실험동물로 사용되었습니다. 벤팅이 처음 지원받은 실험동물 비글 10마리는 모두 사망했고, 인슐린 개발의 일등 공신은 33번째의 마조리 비글이었습니다. 1921년 여름, 마조리 비글의 췌장을 떼어내고 당뇨병을 유발했고, 다른 동물에서 채취한 인슐린을 주입하는 실험을 하여 치료에 성공하게 됩니다. 덕분에 췌장이 제거된 개 마조리 비글을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당뇨병 치료제 인슐린의 발견으로 벤팅은 노벨상을 받았고, 당뇨병약 인슐린 개발 결과를 단돈 1달러에 특허권을 토론토 대학에 이양합니다. 인류의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고료를 세웠으나, 1941년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합니다.  불치병을 치료하는 인슐린 개발의 일등 공신은 사냥개 비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란 사실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6HFfqMOHn0

 

 

 

 

 

비글은 대체로 건강한 편입니다. 하지만 비만이 되기 쉬우므로 음식 조절과 운동량에 많은 주의 가 필요합니다. 백내장, 녹내장 등 유전적 안구질환도 조심하시고요.

 

 

나무위키

 

 

개를 키우기 전 그 견종에 대한 충분한 학습 필수로 하시고 , 잘 숙지하셔서 자신만의 '스누피 비글' 만들어 보십시오.

 

 

 

 

 

 

 

반응형
반응형

17세기 유럽 역사의 주인공은 네덜란드였습니다. 동인도회사를 통한 국제무역과 금융의 융성으로 돈이 넘쳐났거든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 던 암스테르담에 네덜란드 독립과 함께 여유자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니  미술품에 투자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지금의 아트 재테크처럼 말이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절 그림을 소유할 수 있는 계층은 군주나 귀족과 같은 부유층이었습니다. 반면 네덜란드에서 일반 서민들이 자신의 집 혹은 가게를 꾸미기 위해 미술시장이 활기를 띱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렘브란트를 비롯한 유명화가들의 손이 모자랄 지경으로 말입니다.

 

 

렘브란트 자화상/아트조선

 

 

'화가들의 화가','잊혀진 화가'로 불리던 바로크의 거장 렘브란트입니다. 그가 남긴 작품 수는 유화, 수채화, 동판화, 데생 등을 포함하여 2천여 점이 넘습니다. 성서, 신화, 역사, 풍경, 풍속, 위인 등  광범위하게 소재를 다룬걸로도 유명합니다. 빛의 효과를 통해 색채 및 명암의 대조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그림 속에는 환희, 슬픔, 자만과 후회, 그리고 인간적인 고뇌가 함께 합니다. 또한 신화와 종교의 엄숙함도 깃들여있고요. 풍경의 장엄함과 자화상의 내면 등 탁월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그를 '근대적 명암의 시조'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 알프레이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의 뒤를 이어 판화를 발전시킨 장본인이 렘브란트입니다. 20대 초반 테크닉을 갈고 닦기 위해 혹은 인물 탐구를 위해  자신을 모델로 '자화상'을 그리며 연습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vBwwyjHlhs

 

 

 

<근대 유럽을 완성시킨 30년 전쟁>/일베 저장소

 

 

 

아주 어린 나이부터 예술가로서 놀라운 재능을 보입니다. 그는 단순하고 매력적이면서도 극적인 풍경뿐만 아니라 역사적, 성서적, 신화적인 장면 등 모든 종류의 초상화의 달인이 되어갑니다. 그는 그의 메시지를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종류의 자료와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구성 능력, 색채 사용, 그리고 그림자에 대한 접근법은  가장 자연스러운 순간들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빛과 질감에 대한 통달은 모든 창작품들을 통해 공통된 주제를 만들었습니다.예술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혁신적인 거장들 중 한 명으로서 그의 지위를 굳건히 합니다. 이러한 자질들은 그의 크고  야심 찬 초기 역사 그림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더 친밀하고 빛나는 후기 스타일에서 깊어지고요. 그의  작품이 네덜란드 황금기로 알려진 위대한 부와 문화 업적의 전형으로 보입니다. 


 

<The Anatomy Lesson of Dr. Nicholas Tulp>,1632/wikipedia

 

 

 

1631년 아버지의 사망이후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 정착하게 됩니다. <튀엘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 1632>는 그의 초기 걸작으로  공개 해부학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밝은 흰색의 주름진 칼라를 달고 어색하게 포즈를 취한 7명의 외과 의사와 니콜라스 튈프(Nicolaes Pitersz ,1593-1674) 박사의 그룹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1603년부터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일련의 단체 초상화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은 튈프가 1632년 1월 시행한 해부학 수업에 서 비롯됩니다. 일주일에 두 번 암스테르담의 이 의사는 암스테르담의 외과의들에게 해부학 이론 강의를 해주었습니다.  인체 해부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해부학 극장의 실제 시연에 참석한 장면인 거죠. 주로 사형당한 죄수들의 시신을 썼다고 해요.  시신의 악취는 어느 때라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매년 겨울에 한 차례의 공공 부검이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튈프박사는 1632년에 두 번째 부검을 했고, 렘브란트가 그의 유명한 그림을 그린 것도 이때였습니다. 이런 중요한 주문을 의뢰받았을 때, 렘브란트는 아직 젊은 나이였습니다. 동료나 선배 화가들이 일렬로 주르륵 나열해 놓은 명암사진 같은 딱딱한 초상화를 그릴 때였습니다. 반면 렘브란트가 그린 외과의사들은 각기 스토리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자세히 보고 싶어 고개를 쭈욱 내민 호기심 가득한 외과의가 있는가 하면 두려워하는 표정의 외과의 모습도 보입니다. 별 관심 없어하는 외과의 모습도 보이고요. 덕분에 현장의 상황이 생동감 있게 전해집니다. 점잖은 스타일의 초상화에 비해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이 돋보입니다. 그저 젊은 화가 렘브란트의 탁월한 관찰력과 재능이 놀라울 뿐입니다.

 

 

 

 

관람객들의  관심은 팔의 근육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튈프 박사에게 집중돼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뷜프 박사가 근육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시체의 팔뚝을 절개한 순간을 선택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들이 강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요. 시체의 표현 또한 인상적입니다.

 

 

 

참가 의사들의 명단을 들고 있는 일곱 번째 남자 보이시나요? 그는 튈프 박사와 나머지 인물들을 구성적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공개 해부학 강의는 암스테르담의 외과 의사 조합이 정부로부터 허가받아 처형된 시신을 인도받아 1555년부터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해부학의 발전이라는 학문적 성격이 짙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입장료를 받고 일반인의 참관이 허용되기 시작하면서  암스테르담의 대중적인 행사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참을 수 없는 호기심 때문이지요. 또한 이런 유형의 단체 초상화는 협회나 다른 조직의 임원들을 기록하고 기리는 데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확립된 독특한 네덜란드식  전통인 거죠. 렘브란트는 이 그룹 초상화로 젊은 나이에 일약 스타화가가 되어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1633/reddit

 

https://www.youtube.com/watch?v=GK4eimjJv04

 

 

 

 

 

 

렘브란트의 유일한 바다풍경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예수가 갈릴리해에서 일어난 격렬한 폭풍 속에서 기적을 일으킨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루벤스의 영향도 보입니다. 바람이 불어오는 작은 배를 전복시키려고 위협하는 어둡게 휘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배의 돛대가 대각선을 만들어 구성을 두 개로 나눕니다. 왼쪽 에는 극심한 위험과 격렬한 활동이  곧 닥칠 것처럼 보입니다.어두운 구름의 가장자리, 불안해하는 사람들, 찢어진  돛을 비추는 황금빛이 보입니다. 오른쪽으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뱃멀미를 하는 듯 보입니다. 키잡이로 보이는 인물이 부딪치는 파도로부터 방향타를 고정시키고 있고요. 이 와중에  파란색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는  단 한 명의 인물만이 밧줄로 자신을 고정시켜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는 렘브란트의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네요. 렘브란트는  종종 자신의 작품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를 즐겼습니다.

 

 

 

변화무쌍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에 관람자 역시 초대된 듯한 기분이 들게합니다.   자연의 거대한 극적 힘은 인간을 시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또한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로도 표현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이해하셨을 때, 일어나서 폭풍을 향해 "조용히! 가만히 있어라! 그러자 폭풍이 잠잠해졌다. "라는 성경구절로 위태로운 상황을 마무리하십니다. 렘브란트는 왼쪽의 동적인 이미지와 오른쪽의  정적인 이미지를 한 화면에 표현해 냅니다. 이 부분이 대부분의 화가들과 다른 렘브란트만의 천재성입니다. 둘 중 한 가지만 택해 그리는 것이 당시 화가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거든요. 섬세한 묘사, 인물들의 다양한 표현, 세련된 붓놀림, 그리고 밝은 섹상은 렘브란트의 초기 스타일을 잘 드러내 줍니다. 


 

<Man in Oriental Costume>,1632/Flickr

 

 

 

 

1630년대 렘브란트는 그의 그림, 드로잉, 그리고 에칭화에 중동지역의 의복을 입고 있는 많은 인물들을 묘사했습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상업적인 기업들은 17세기 초까지 중동 지역을 드나들었습니다. 레반트(동부 지중해 및 그 섬과 연안 제국)사람들은 암스테르담의 거리와 시장에서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상상의 페르시아인(지금의 이란인), 오스만 (터키 사람)또는 다른 "동양인"왕자들의 초상화가 이 부산한 도시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천으로 몸을 감싸고 위엄있어 보이는 거대한 인물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깨와 머리는 앞뒤에서 극적으로 빛나고요. 그의 황금 의복은 금속 스카프와 은색 터번 아래서 반짝이고 있고, 장신구와 보석들은 광채를 내며 귀한 신분임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은 인물과 더불어 빛에 대한 화가로서의 렘브란트의 탁월함을 보여줍니다. 끝없는 깊이를 만들기 위해 그의 제한되고 다운된 팔레트의 사용법이 놀랍습니다. 그는 고르지 않은 황금빛 조명과 대담하고 늠름한 스트로크로 붓칠 한 하이라이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 깊은 그림자를 표현해 냅니다. 때로는 페인트를 많이 사용하기도 하고,  아주 조금 사용하기도 하며,  붓 손잡이로 캔버스를 긁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가 원하는 정확한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해봅니다.

 

 


 

 

 

 

 

<Belshazzar's Feast>,1635/wikipedia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마지막 왕인  구약성서의 벨사살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그린 작품입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네브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성전에서 약탈했던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을 가지고 신성모독을 저질렀습니다. 그가 연회장에서 많은 손님과 귀족들을 위해 포도주로 그릇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성전에서 제례의식 할 때만 쓰이도록 성별 된 그릇에 포도주를 부은 거지요. 검은 구름에서 손 하나가 나와 글씨를 쓰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이 모습에 기겁을 합니다. 놀란 왕이 예언자 다니엘을 부르고, 그는 그 단어들이 곧 바빌로니아가 페르시아 제국에게 정복되리라는 뜻이라고 해석해 줍니다. 그 일은 바로 그날 밤에 일어났고요.

 

 

 

당시 화가들은 화려한 옷차림의 바빌로니아인들이 유령의 손을 보고 경악하는 장면을 즐겨 그렸다고 합니다.렘브란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작품 안에서 드라마틱하고 움찔하는 자세로 관람객들을 집중시킵니다. 왼쪽에 충격을 받은 손님들 그룹이 있습니다.  위쪽 벽에는 유령 같은 이미지가 쓴 글자가 보이고요. 왕인 벨사살도  놀란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뒷벽에 반짝이는 메시지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터번 위에 왕관과 넘어진 포도주 잔에 흘러나오는 액체의 표현이 섬세합니다.  주변인들의 반응이 더 놀랍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여종 하나가 자기도 모르게 물그릇을 자기 손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19세기 빈센트 반 고흐가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반할 만하지요. 고흐가 "네덜란드 공화국의 위대한 세계적 초상화 화가"라고 선배화가 렘브란트를 추켜세웠을 정도로 말입니다. 

 

 

 

 


 

 

<Danae>,1636/wikipedia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다룬 작품이 많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역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 왕 아크리시오스의 딸 다나에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녀의 아버지인 아크리시오스 왕은 그의 딸이 자신을 죽일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후 딸을 청동으로 된 방안에 가두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킵니다. 그러나 다나에를 연모한 제우스는 그녀의 여종의 눈에 미끄러져 내리는 한 줄기 빛으로 다나에 앞에  나타납니다. 다나에와 제우스의 결합을 통해 페르세우스가 태어나고요. 그는 정말로 그의 할아버지를 죽이게 되지요.

 

 

 

정교하게 반짝이는 금으로 된 침대 지지대, 다나에의 보석으로 장식된 슬리퍼가 놓인 두꺼운 양탄자, 그리고 부드러운 벨벳천으로 덮인 방안은 관객들을 순식간에 작품 속으로 불러들입니다. 왼쪽에서부터 웅장한 천상의 황금빛이 쏟아지며 다나에의 얼굴과 몸을 따뜻하게 비춥니다. 그 효과는 매혹적인 여성을 둘러싼 모든 침구, 덮개, 그리고 빛나는 금속 장식품에서 부드러움과 관능성을 만들어 냅니다. 꽃팔찌와 다른 보석으로만 치장을 한 다나에는 분명 이 그림의 주제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황금빛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황금빛이 새어든 방안은 포근한 잠자리와 풍만한 여체로 감미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슬쩍 들어 온 제우스를 반기는 다나에의 모습도 보입니다. 화려하면서도 매우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실내 풍경이 플랑드르 화가답다 싶습니다.  그림에서 다나에 위에 맴도는 것은 순결의 상징인 손이 묶인 황금 천사의 모습입니다.  황금 천사의 표정 한번 살펴보고 가세요. 부드러운 아름다움과 빛에 대한 렘브란트식 표현법은   경이로움과 함께 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다나에를 연구하면서 프란스 할스를 볼 때마다 ...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하지만 렘브란트를 보면 포기하고 싶다"
-독일 인상파 화가 막스 리버반(Max Leiberman)-




 

 

 

https://www.youtube.com/watch?v=HjYNGjshjJQ

 

 

 

 

 

<The Night Watch>,1642/ The Guardian

 

 

 

 

 

17세기, 이 시기에 제작된 그림이나 판화의 수는 엄청납니다. 그중 상당수는 뛰어난 품질을 가지고 있고요. 이 작품은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절정이었던 1642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램브란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고요.  <The Night Watch>로 알려진 렘브란트의 이 작품은  그 스타일과 엄청난 크기로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실제로는 한낮에 일어나는 일을 그린 거라고 합니다. 이는 1940년까지 그것을 덮고 있었던 어두운 광택 때문에 이름이 잘못 붙여진 거라고 합니다. 민병대장의 명령 아래 부대가 출격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인물들이 부산스럽지요.   <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의 중대>라는 제목이 더 어울립니다. 당시 활동했던  민병대의 그룹 초상화라고 합니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도시를 수호하거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소집될 수 있는 건강한 남자들의 모임이지요.  16명의 부하들에 둘러싸여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붉은 허리와 검은 옷을 입고 있는 프란스 반닝 코크(Frans Banning Cocq) 대위와 흰색 허리띠와 노란 옷을 입고 있는 빌렘 반 라위턴뷔르흐(Willem van Ruytenburch) 중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문 위의 방패에는 초상화 속의 1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품 구성을 목적으로 캔버스 안에 18명의 민병대원들과 더불어 어린 아이나 북 치는 사람을 비롯한 16명의 가상 인물들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그림으로 인정받았을 때가 렘브란트 인생의 정점이었습니다. 자신이 실험해 오던 모든 기법들이 총동원되었습니다. 문제는 자기 혁신적 표현들로 그려 낸 새로운 스타일의  초상화를 돈을 내고 주문한 작품 속 인물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불만스러워했지요. 똑같은 돈을 내고 자신의 얼굴을 찾기가 쉽지 않아 말입니다. 

 

 

 

 

민병대는 그들이 모여 연습했던 장소인 크로브니어스둘른(Kloveniersdoelen)에서 정해진 시간에 만났습니다. 암스테르담에 새롭게 지어진 그들의 건물 중앙 홀에 걸기 위해서 6개의 대형 민병대 작품과 장교들의 단체 사진을 의 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렘브란트는 6개의 큰 작품 중 하나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던 거죠.  대장 코크와 대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나, 그들의 창과 총이 이쪽저쪽으로 비스듬히 있는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렘브란트가 그 인물들을 표현해 낸  방식은 이례적인 방식이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인물들을 그룹 짓거나 줄을 세우는 등의 전통적인 구성 방식과는 매우 다른 그만의 역동적인 방식으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그룹 초상화 안에서 전체 부대의 개성을 포착하고 있었습니다. 관람자는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활력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빛과 그늘의 두드러진 사용으로 강화되고요. 민병대 대원들은 방금 동작을 취해 이제 막 행진을 하려는 듯 어두운 문에서 빛으로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뒤에는 중대의 깃발이 보입니다. 대장 왼쪽의 금발 머리에 진주로 장식을 하고 노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완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녀는 민병대를 상징합니다. 그녀의 벨트에 매달린 닭의 발톱은 민병대의 심벌을 의미하고요.  민병대 의식의 뿔잔을 들고 있는 소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마스코트가 됩니다. 

 

 

 

 이 그림으로 인정받았을 때가 렘브란트 인생의 정점이었습니다. 이 작품 성공 이후 암스테르담 중심가의 비싼 지역으로 고가의 집을 사 이사를 합니다. 상류층이라도 된 것처럼 다양한 장식품 사치품들을 마구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자화상에서 자주 보이는 비싼 베레모차림을 고수하기도 하고요. 절제를 모르는 낭비벽은 암스테르담의 거품경제가 끝나가자 파산에 이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첫 번째 아내 사스키아 마저 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nT7N3kE4gg

 

 

 

 

 

 

 

 

 


 

 

<황금투구를 쓴 남자>,1650/Pinterest

 

 

투구의 강렬한 묘사와 대비되는 어두운 인물의 표정, 목보호대의 반사광은 렘브란트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Bathsheba at her Bath>,1654/wikipedia

 

 

 

 

렘브란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실물 크기의 캔버스는 성서의 등장인물, 다윗 왕과 군대의 장군 우리야의 부인 밧세바를 그린 그림입니다. 솔로몬의 어머니이기도 하지요. 성서의 이 인물은 대부분의  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고뇌에 빠진 밧세바에 집중하여 표현해 냅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은 궁전 테라스에서 그녀가 목욕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됩니다. 열정적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요.  다윗왕은  편지를 보내 자신에게 오도록 소환하지요.  다윗 왕은 그녀가 자기 장군들 중 한 명의 아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욕망이 다윗왕을 눈멀게 합니다. 

 

 

 

젊은 밧세바는 옷을 벗은 채 흰 천 위에  앉아 오른손에 편지를 들고 있습니다. 오리엔탈 스타일의 두건을 쓰고 있는 그녀의 여종은 그녀의 발을 말없이 말리고 있고요. 그녀는 고민에 빠집니다.  만약 그녀가 다윗 왕에게 간다면, 그녀는 그녀의 남편을 배반하게 됩니다. 그녀의 난감하고 심란한 마음 상태가 옆모습을 통해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고민을 하던 밧세바는 결국 이에 응했고, 그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그녀와 여러 차례 정을 통합니다. 결국 밧 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다윗 왕은 밧세바를 영원히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이자 군대장관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 도저히 살아올 수 없는 위험한 전투에 우리야(Uriah)를 내보내 죽게 합니다.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 왕은 즉시 밧 세바와 혼례를 올렸습니다.

 

 

 

 

신은 후에 이 죄에 대해 다윗왕을 심하게 벌했습니다. 밧세바는 임신했던 첫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예언자 나탄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윗을 꾸짖고 저주하였고 아이는 일주인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렘브란트는 이러한 이야기 중 다윗의 욕망을 표현하거나 다른 세부적인 일화를 따로 넣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왕의 편지로 인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밧세바의 표정을 통해 상황을 전달할 뿐입니다.  결국 피해자인 동시에 죄인이 되어버린 밧세바를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인간 내면에 깃든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름다운 여인 밧세바를 그리기 위하여 모델은 아마도 렘브란트의 보모로 들어온  핸드리케에 스토펠스(Hendrickje Stoffels)였을 겁니다. 첫 부인 사스키아가 죽고 젖먹이 아들 티투스를 키우고 집안 살림을 해줄 보모가 필요했습니다. 그들 중 핸드리케와 연인 사이로 발전을 했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렘브란트와 티투스에게 헌신 적었습니다. 다만 사스키야가 렘브란트의 절제 없는 생활이 마음에 걸렸나 봅니다. "재혼하면 아들 '티투스'에게 모든 유산을 남기겠다."라는 유언을 했거든요. 렘브란트는 헨드리케아와 결혼도 못하고 돈도 없고 그 상황에 덜컥 '코넬리아'라는 딸까지 임신하게 됩니다. 당시 개혁파 교회가 주류였던 암스테르담에  둘 사이의 관계는 이슈가 되었고 , 그녀는 '간통'이란 이름으로 법정에 서야 했습니다. 결국 딸 '코넬리아'를 낳고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요.

 

 

 

관람자의 시선까지 외면한 밧세바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예술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던 렘브란트를 어떡하든 돕고 싶었던 사람이 핸드리케였습니다. 일거리가 없어 점점 잊힌 화가 취급 당하는 렘브란트의 모습을 보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핸드리케의 모습이 어쩌면 밧세바의 모습은 아니었을 까 생각해 봅니다.  

 

 

 


 

 

 

 

 

<Jacob Blessing the Sons of Joseph>,1656/wikipedia

 

 

 

렘브란트는 항상 자신을  성경, 고전 역사, 신화의 장면들을 표현하는 역사 화가로 생각했습니다. 1656년의 그림은 역사 화가로서 렘브란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 아닐까 싶습니다. 주제는 창세기 48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죽어가는 가부장 야곱이 그의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장면입니다. 그들의 아버지 요셉과 그의 아내 아세나스는 아이들 뒤에 서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왼쪽에 있는 두 남자와 조화를 이루며 그녀를 대단히 위엄 있는 중심인물로 만들어 놓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맏아들, 곧 므낫세에게 오른손으로 축복하기보다는 , 귀염둥이 아들인 동생 에브라임에게 첫 번째 축복을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아버지가 실수했다고 생각하였으나 야곱이 대답합니다. "나도 알아, 아들아, 나도 알아; ;그도 또한 예언자가 될 것이고 또한 위대해질 것이다. 

 

 

이 그림의 주요 초점은 야곱은 에브라임에게 축복을 내리고,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도울 때 활짝 펴진 손동작과 친절한 미소를 짓는 고령의 가부장들의 부드러운 제스처에 있습니다. 중앙 장면은 놀랄 만큼 효율적 사용과 정밀함으로 섬세한 노란색, 갈색, 붉은색으로 광범위하게 그려져 렘브란트 특유의 신성하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m8H6mIcLMB0

 

 

 

<세 개의 십자가>는 검은색 백색으로만 시각적 효과를 낸 렘브란트의 판화 작품입니다. 공간감, 입체감이 경이롭고 고급스럽습니다. 

 


 

 

 

 

 

<The Prodigal Son in the Brothel>,1635/wikipedia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 혹은 술집에 있는 탕자>라는 이름의 작품입니다.  부유한 귀족 출신인 아내 사스키아를 무릎에 앉히고 삐깔나게 큰 술잔을 들어 권하고 있는 렘브란트는 모든 것을 소유한 듯 만족한 표정입니다.  왜 아니겠어요. 젊은 나이에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쥐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요. 그런 렘브란트의 표정과 달리 아내 사스키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습니다. 남편의 낭비벽이 걱정되어 그럴까요? 아니면 다가올 그의 시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요?  인위적으로 과장한 표정과 태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솔직한 자기 고백 같기도 한 그림입니다. 

 

 

렘브란트는 1634년 6살 어린 사스키아와 결혼합니다. 부유하고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1636년 낳은 첫아들은 얼마 못 가 죽습니다. 1638년 낳은 딸 역시 한 달도 살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1640년 낳은 딸도 곧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1641년 드디어 아들 티투스가 태어났습니다. 렘브란트에게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내 사스키아는 젖먹이 아들 티투스 하나를 남기도 30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Titus as a Monk>,1660/wikipedia

 

 

 

렘브란트의 사랑하는 아들 티투스의 초상화입니다. 아버지 렘브란트는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본받았으면 했나 봅니다. 화가로서 렘브란트는 명성도 쌓았고, 신분상승의 욕구도 채웠습니다. 그러나 잘 나갈 때 절제하지 못해 결국 파산에 이릅니다. 암스테르담 경제가 악화되며  렘브란트의 삶도 바닥에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예술에서는 최고 절정을 맛보았지만 그것도 잠시 인생에서 최악으로 떨어집니다. 그런 삶은 자기 하나로 족하니 아들만큼은 자신과 같은 삶이 아닌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절제하는 삶을 살기를 아버지 렘브란트는 바랬는지 모르겠습니다. 1668년, 안타깝게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들 티투스마저 26살의 꽃다운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Self-Portrait with Two Circles>,1660/wikipedia

 

 

 

 

 

 

렘브란트는 40점 이상의 자화상을 그렸지만  글미에서처럼 그림을 위해 단정한 옷을 입고 판에 박힌 듯한 포즈를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인위적으로 포즈를 취하거나 공들인 복장을 한 구성원을 연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순히 빨간 옷 위에 모피로 된 가운을 입고, 흰 베레모를 쓰고 있습니다. 그의 나무 팔레트, 붓, 그리고 그림 그리는 동안 손을 안정시키기 위해 휴식처로 사용된 긴 팔받침을 들고 있습니다. 화가는 그 위에 묘사된 큰 원들과 함께 밝은 색의 벽이나 캔버스 앞에 서서 허리께에 한 손을 내린 채 관람자를 직접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후기 작품에는 페인트가 빠르고 두껍게 칠해진 얼굴과 모자처럼 미완성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영역에서는 렘브란트가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거나 긁어서 선이 콧수염, 왼쪽 눈썹, 셔츠 깃에 잘립니다. 얼굴은 그의 취약성과 현실성을 보여주는 반면 부드러운 그림자는 끊임없이 탐구하는 지적인 마음을 암시합니다. 둥글게 디자인된 평평하고 창백한 배경은 렘브란트에게는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렘브란트 뒷 배경에 그려진 두 개의 원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역사적으로  완벽한 원이 예술적 기량을 상징한다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인 조토(Giotto)는 한 때 교황에게 그의 숙달성을 보여주도록 소환되었고 그래서 그는 한 번의 동작으로 완벽한 원을 그렸습니다. 더 오래된 이야기는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궁중 화가인 아펠레스(Apelles)가 어떻게 그의 뛰어난 재능을 증명하기 위해 완벽한 선을 그었는지 묘사합니다. 너무 원초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따져보면 원을 찌그러지지 않게 동그랗게 그려내는 것도 내공이란 생각이 듭니다.

 

 

 

렘브란트의 의도는 전통적인 자화상보다 그의 내면까지 담아내기 위해 자신을 수없이 객관화 켰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미 고상한 상류층의 눈밖에 났습니다. 잘 팔리는 그림이 아닌 자기만족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두 개의 원을 담고 있는 티치아노의 미완성 자화상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요.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는 그 그림에 대해 '매우 미완성된 방식이지만 그 색깔과 효과는 감탄스러운 그림을 발견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장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도 이 작품을 직접 그렸습니다.

 

 

 

 

 

 


 

 

 

 

<루크레티아의 자살>,1664/아츠비-미술을 즐기는 사람들

 

 

 

 

이 그림은 로마 여성인 루크레티아의 실화를 다뤘습니다. 약 2500년 전 로마 황제의 아들 타르퀴니우스 섹스투스가 정숙한 루크레티아를 성폭 한 사건입니다. 가해자 섹스투스는 사촌지간인 루크레티아의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호시탐탐 노리던 일을 벌였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인 뒤 하인과 간통해 죽였다는 소문을 내겠다며 협박합니다. 이 모함대로 된다면 루크레티아의 집안은 불명예로 풍비박산이 나게 될 기가 막힌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르네상스의 많은 거장이 그렸던 이 무거운 주제는 렘브란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그는 루크레티아가 자결을 결심하는 순간을 그렸습니다. 렘브란트는 생생한 구도와 어두운 색감으로 여인의 참혹함을 탁월하게 표현했습니다. 몸은 치욕을 벗기 위해 죽음을 강요당하는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머리는 두려움의 무게만큼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칼끝이 향한 심장만이 환하게 대비되어 여성의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전합니다.

 

 

 

이 그림을 통해  렘브란트는 창의적인 상황설정과 내면을 나타낸 표정, 질감 표현이란 세 가지 특징을 만들었습니다. 렘브란트 후기 작품의 특징이지요. 성폭행을 당한 수치심과 끔찍한 기억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눈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렘브란트의 자유로운 질감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얀 리넨과 드레스 소매의 질감이 부딪히며 실제 옷처럼 살아납니다. 소매 부분에 사용된 나이프의 거친 질감이 보이시나요. 부드러운 리넨 사이로 붉은 피가 소리 없이 번지고 있습니다. 오른손에 칼을 , 왼손에 끈을 잡아당기면 자신의 가족들이 그녀 앞으로 달려오겠지요.  나이프로 표현된 거친 질감은 생생한 표현으로 느껴지게 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몰입하게 합니다. 남편은 자결해야 할 이유를 듣고 죽어가는 여인 앞에서 오열하다가 복수하러 달려가 루크레티아의 치욕을 갚습니다. 시민들은 가해자를 죽였고, 그의 아버지는 추방했습니다.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는 한 여인이 기폭제가 돼 로마 왕정이 붕괴하고 공화정이 시작했다고 지적합니다.

 

 

 


 

 

 

 

 

<The Jewish Bride>,1667/wikipedia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라고 알려진 작품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쓰다듬고 있는 장면입니다. 굳은 신뢰를 주고받는 느낌도 들고요. 유독 이 그림앞에 중년 부부들이 멈춰서 그림을 한참동안 감상하고 간다고 합니다. 여성의 다홍색 치마의 색깔과 남성의 황금색 소매부분의 색깔이 환상적입니다. 질감의 표현 못지 않게 두 사람의 손 표현 또한 섬세하고 다정합니다. 마치 신뢰로 다져진 성숙한 사랑을 주고 받는 느낌이 들정도로 말입니다. 렘브란트의 아들 티투스와 자신에게 헌신했던 보모이자 연인이었던 핸드리케에 마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겨진 중년의 렘브란트가  죽기 직전 그려 낸 그림 중 하나입니다. 남성은 아니지만 여성의 모습은 죽은 그녀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세기 초에  이름을 얻었지만, 그 그림의 주제는 오늘날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의 목록에는 '구약성서 인물로서의 부부상, <유대인 신부>로 알려져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고요. 이 설명은 이 그림을 렘브란트의 동시대의 단순한 두 사람의 이중 초상화로 볼 것인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커플을 그린 종교화로 볼 것인가? 혹은 이 둘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볼 것인가 하는데 이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한 두 가지 가능성, 즉 성경의 인물로서 불멸의 존재였던 남자와 여자의 조합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은 이  커플이 창세기 26장에 나오는 이삭(이사악)과 리브가(레베카)를 대표한다고 믿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를 그린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 한 장의 소묘가 뉴욕에서 발견됐습니다. 그 소묘와 이 그림은 배경과 인물의 위치에서 분명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X선 조사 결과, 서 있는 두 사람은 처음에는 소묘에서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좀 더 중립적인 설명은 그 남자가 그의 아내에게 사랑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경우에 그림의 주제는 결혼의 미덕이 될 것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34년 J. 스미스가 작성한 목록의 <생일 축하 인사>에서 나왔습니다. 1826년 이 그림을 가지게 된 스미스는 1833년에 이것을 암스테르담의 수집가 아드리안 반 델 호프에게 팔았습니다. 호프는 이 그림에 "유대인 신부이다. 그의 아버지가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다."라는 설명을 달았습니다. 이것이 이 그림의 통칭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이 그림이 실존하는 모델을 그린 것만은 확실합니다.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1661-1669, /wikipedia

 

 

 

 

 

렘브란트가 죽기 직전인 1668-1669년 경에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의 일부분입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마지막 유작으로 미완성 작품입니다.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Hermitage Museum)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262cm*205cm(103in*81in) 크기의 대작입니다. 그림 속 인물의 크기가 실제 사람의 크기와 같으며, 그래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 속 한 사람, 한 사람과 대면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몇 주나  몇 달 만에 그린 것이 아닙니다. 6년 정도 구상했고 죽기 2년 동안 집중적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렘브란트는 캔버스 위에 한 사람, 한 사람 그릴 때마다 그 인물에 대해 수만 번 생각했고, 또 자신이 얼마나 그림 속 그 인물과 유사한지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캔버스에 탕자를 그리며 자신의 삶이 마치 탕자와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을 그리면서 자신의 말과 행동이 마치 첫째 아들과 같이 교만하고 이기적이었음을 발견합니다.

 

 

 

루카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의 주인공은 얼핏 보면  아버지의 품에 안긴 둘째 아들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림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둘째 아들에게 향하고 있고요. 탕자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 먼 곳으로 떠나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모든 유산을 탕진했습니다. 굶주림과 곤궁함에 지쳐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탕자가 된 둘째 아들의 몰골 좀 보세요.  한쪽 발에는 신발조차 없습니다. 머리카락은 다 빠져버렸고요.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야 단 한번 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신발과 옷과 반지를 주며  크게 환대합니다.

 

 

 

렘브란트는 캔버스에 둘째 아들을 그리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젊었을 때 화가로서 성공하며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습니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니 탕자처럼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모든 돈을 낭비했습니다.  또한 아들과 딸과 아내를 잃어버리는 큰 상실의 아픔도 겪었습니다. 돈도 가족도 모두 잃고  나이가 들어 병들고 외로운 가운데, 렘브란트는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줄 하느님의 품을 그리워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을 그리며 자신이 바로 그 탕자이고, 하느님의 용서와 위로가 필요한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림에서 눈이 짓무른 듯한 아비는  커다란 붉은 외투를 입고 있습니다.  외투는 고단한 나그네가 쉬어 갈 수 있는 장막을 상징하기도 하고, 새끼를 품고 지키는 어미새의 날개를 연상시킵니다.  많은 현대 작가들은 말합니다. 렘브란트가 가까이 지내기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는 후원자, 친구, 심지어 자신의 가족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은 비난하고 공격하는 유형의 사람이었거든요.

 

 

 

아버지는 탕자를 측은함과 사랑의 얼굴로 바로 보지만, 물끄러미 서 있는 첫째  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것이 마땅치 않은 가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또 가져갈까 봐 경계하면서 냉담하게 동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유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를 위한 잔치를 벌인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고 불평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닮은 아들이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못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아들을 조용히 타 아르며 잔치에 같이 참여하라고 권유합니다. 

 

 

아버지와 탕자 위로 빛이 쏟아집니다. 첫째 아들의 얼굴에도 작은 빛이 어른거리고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또 다른 형태의 아버지와 멀어진 탕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겉모습은 둘째 아들 같은 탕자의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은 첫째 아들같은 탕자의 모습으로 시계추가 되어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렘브란트 그림 속  두 손은 크기가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탕자의 등을 토닥여 주는 손은 어머니의 치유의 손길이고, '이제 다시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마라.' 하듯이 지그시 누르는 아버지의 손은 용서의 손이라고 말합니다.

 

 

 

 

렘브란트는 젊어서부터 탕자의 비유에 대한 그림을 여러 번 그렸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그린 탕자의 그림은 방탕한 탕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노년에 그린 이 그림은 아버지의 용서와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라는 이 그림을 보면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노심초사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봐 주십시오. 작은 아들이 먼 곳에서 오고 있을 때 그를 보고 버선발로 뛰어갔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주십시오. 큰 아들이 불평하고 있을 때 그 아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와서 그를 달래고 잔치에 함께 가자고 초대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보아주십시오. 

 

 

 

 


 

 

 

 

렘브란트의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다.
-루시언 프로이트(영국 사실주의 화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과 함께 렘브란트는 인생에서 최악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렘브란트 말년, 자신의 죽음을 지켜볼 사람 하나 없이 빈민가의 작은 독방에서 임종을 맞습니다. 아들 보내고 11개월 후의 일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뒤돌아 보고 심오한 내면의 세계를 연구했습니다. 일감이 없을 때도 예술에 궁극에 도달하고자 할 수 있는 실험은 다 해 보았습니다. 바닥을 치는 경험을 통해  세월의 무게를 담아내고자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자화상>을 그리며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 렘브란트를 '화가들의 화가'라고 부르나 봅니다. 

 

 

 

 

 

반응형
반응형

 

플랑드르 바로크 시대의 화가이자 외교관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손에 꼽습니다. <플란더스의 개.> 주인공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성화를 그린 화가입니다. 이만하면 힌트가 충분히 되었죠.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입니다.

 

 

바로크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고향인 플랑드르 (Flandre) 안트베르펜(Antwerpen)에서 처음 미술을 시작했습니다. 약 6년여간의 도제 기간을 거치고 그가 향한 곳은 이탈리아였습니다. 루벤스는 그곳에서 고대의 유물과 르네상의 장인의 작품들에 매료되어 수많은 작품을 모사했습니다. 그곳에서 8년 동안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다양한 후원자들을 위한 그림 의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전주의를 답습하는 평범한 화가가 되진 않았습니다. 그에겐 사물의 표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알프스 북부의 화풍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탈리아 고전주의의 특성이 모두 융합되어 있었습니다. 도저히 합쳐질 것 같지 않은 두 화풍이 이 위대한 화가의 붓으로 통합되어 빛나게 된 것입니다.               

 

 

 

<The Circumcision>,1605, 로마에 머물때 그린 작품/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nFM2xe1yz7A

 

 

 

 

출처: Wikimedia Commons

 

 


 

 

 

루벤스의 그림은 역동적인 구성,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사용, 인물의 관능적인 묘사가 특징입니다. 그는 특히 움직임과 감정을 묘사하는 데 능숙한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주로 고전 신화와 기독교 종교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루벤스는 또한 외교관 역할을 하며  다양한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영국의 찰스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을 정도로 그의 외교 기술은 탁월했습니다. 

 

 

<The Judgement of Paris>,1606/Album online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작품입니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미르미돈의 영웅 페렐우수의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여러 신들은 성대한 결혼식에 초대 받아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 두 사람을 축복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초대받지 못했던 언쟁과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화가 났습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자에게'라고 새겨진 황금사과를 연회석에  툭 던집니다. 여신들은 서로 황금사과를 가지기 위해 다투지요. 제우스부인 헤라,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다툰 장본인들입니다. 세 여신이 제우스에게 심판해 줄 것을 청했으나 제우스는 그 심판을 양치기 청년 파리스에게 맡깁니다. 세 여신은 파리스에게 각자의 특권으로 아테나는 지혜를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헤라는 세계의 주권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파리스는 달콤한 세 가지 유혹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황금사과를 그 여신에게 주어야 합니다. 고민이 많겠죠. 개도 그 결정이 궁금한가 봅니다. 

 

 

 

 

 


 

<삼손과 데릴라 Samson and Delilah>,1609-10/wikipedia

 

 

 

핏빛 드레스를 입은 데릴라 는 욕정으로 달아오른 가슴을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정욕에 눈이 멀어 델릴라의 품에 잠든 삼손의 남성적인 팔과 매력적인 등판은 사실적입니다. 루벤스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르네상스적인 인체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화폭에 담아냅니다. 삼손이 잠든 찰나를 놓치지 않고 머리를 자르는 사내와 탐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노파가 들고 있는 촛불은 마치 연극의  클라이맥스를 보는 듯합니다. 영화 포스터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요.  벽면에 그려진 비너스와 큐피드의 안타까운 표정, 문 밖에서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훔쳐보는 병사들의 표정이 실감 납니다. '쉿 조용히 해. 삼손이 깨면  큰일 난다고'뭐 이런 말들이 소리 없이 오고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작은 불빛 하나로 병사들은 조연역할 제대로 한 덕에 작품을 걸작으로 완성하고 있습니다.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전쟁이 없었던 해는 4년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루벤스가 활동하던 시기 유럽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화가의 대부분의 활동 기간을 차지하는 1618년부터 48년까지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30년 전쟁에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전 세계가 나의 나라'라고 했던 루벤스는 알레고리적인 의인화라는 기법을 자신의 모국 유럽의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세기 내내 이어진 종교 전쟁으로 교회화 미술품들이 파손되어 새로운 작품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습니다. 루벤스는 그의 이력 초기부터 제단화를 비롯한 기독교 주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루벤스의 고향 안트베르펜은 종교전쟁의 격전지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는 안정을 되찾고 파괴된 교회들을 재건하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단장을 시작한 교회는 대형 종교화가 많이 필요했기에 실력 있는 유학파 화가 루벤스도 주문을 많이 받으며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제작된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대형 제단화들은 루벤스 미술의 초기 양식이 잘 남아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움&nbsp; The Elevation of the Cross>,1610-11/wikipedia

 

 

그중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움>은 루벤스가 북부의 세밀화 전통과 이탈리아 고전주의를 어떻게 통합시켰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십자가를 들어 올리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남자들은 미켈란젤로의 인체를 연상시킵니다. 십자가의 세부와 몇몇 구성은 틴토레토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고요. 빛과 색채는 베네치아 회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편 군인이 입고 있는 갑옷과 그림 왼쪽 하단에 그려진 강아지의 곱슬곱슬한 털의 세밀한 묘사는 알프스 북부의 표현법입니다. 루벤스는 거기에 대각선 구성과 격정적인 동작, 강한 명암 대비와 피부 표면에서 일렁이는 빛의 움직임 등 자신만의 고유한 특징을 더합니다.   전체적으로 사선 구도를 취하면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담고 있습니다. 틴토레토의 그림과 비교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실어봅니다. 

                                                                                              

 

Tintoretto<Crucifixion>,1565/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1rJu72PzGis

 

 

안트베르펜에는 유럽에서 세 번째로 높은 노트르담 성당이 있습니다. 1352년 착공해 1521년 완공된 이 건물은 높이 123미터의 첨탑을 가진 고딕 성당으로 벨기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입니다. 그런나 1533년 화재가 나고, 1565년과 1581년에 종교개혁 과정에서 개신교도들이 성상파괴를 주도하여 불운을 겪기도 합니다. 이 성당에는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루벤스의 작품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 The Raising of the Cross 1609-1610)를 비롯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The Descent from the Cross,1611-1614>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엔트베르펜 시장이자 길드 조합장이던 로콕스(N. Rocockx)의 요청으로 루벤스가 그렸습니다. <예수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Christ 1611-1612), 그리고 <성모의 승천 The Assumption of the Virgin 1625-1626>의 4개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 The Descent from the Cross>1612-14/Indian Catholic Matters

 

 

 

 

 

  작품<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은 정적이 감돕니다. 그의 이탈리아 여행의 성과가 반영된 작품이고요.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 <라오콘>을 연구한 흔적이 보입니다.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조법은 카라바조의 화풍을 느끼게 하고요. 또 하나 십자가에 매달려 천이 흘러내리지 않게 물고 있는 남자는 고귀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처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역시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죠.

 

 

 

   정적인 분위기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도 천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예수의 시신이 고요함 속에서도 부드러운 운동감을 만들어 냅니다. 이 같은 구성은 수난의 공포와 비통함을 극대화시켜 신자들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감각적인 표현법입니다.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취지와 맞닿아 있기도 하고요.   만약 루벤스가 고전주의자였다면 십자가 세우기가 '완료'된 장면 또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시신'을 안고 있는 장면을 담았을 겁니다. 그런데 바로크의 대가 루벤스는 어떤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담아냈습니다.

 

 

 

루벤스는  끊임없는 주문에 바빴습니다.  그의 작품으로 기록된 그림은 소묘와 판화를 제외하고도 1300여 점에 이릅니다. 이렇게 다작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공장 시스템에 가까운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벤스가 간단한 스케치와 작은 견본을 그리면 제자들이 그것을 거대한 화폭에 옮겼습니다. 그의  곁에는 실력이 뛰어난 동료화가들이 있었습니다. 정물화에 탁월한 화가, 동물 그림에 재능 있는 화가 등 각종 전문가들이 루벤스와 함께하며 그림의 세부를 담당했습니다. 루벤스는 이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는데, 그림의 값을 책정할 때에도 자기가 참여한 비율에 따라 가격을 달리했다고 합니다. 이런 협업 과정의 마무리 작업은 루벤스가 맡았고요. 그의 작업장을 방문한 사람들은 루벤스가 단 몇 번의 붓질만으로 그림에 생기가 돌고 활력이 넘치게 만드는 장면을 보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1611-1612/wikipedia

 

 

 

 

 

 

 

 

그림에도 운명이란 것이 있나 봅니다. 미술품에 전혀 무지한 사람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작품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대가의 작품으로 판명이 나면 로또 상금 받는 것처럼 큰돈을 거머쥐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전문가가 대가의 작품일 것으로 보이지만 확증이 없는 작품을 구매한 후 대가의 작품임을 밝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루벤스의 <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  작품은  후자에 속했습니다.

 

 

2002년 7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는 루벤스의 작품이 4950만 6648파운드에 낙찰되면서 최고 낙찰가를 기록했습니다. 이 작품은 헤롯왕의 '영아 학살'순간을 그린 그림입니다. 성서에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때 그 당시 지배자인 헤롯왕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여겨 사람을 보내어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다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탐욕에서 비롯된 학살을 바로크 시대의 화가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1609-1611년 사이에 그린 것입니다. 총 8명의 응찰자가 경합을 한 끝에 영국의 기념품 전문 딜러인 샘 포그가 낙찰받았다고 합니다.

 

 

 

 보도에 따르면, 포그에게 응찰을 의뢰한 사람은 전 런던지부 <타임스> 소유주였던 캐나다 켈렉터 데이비드 톰슨으로 폴게티 미술관을 비롯한 몇몇 미술관보다 가격을 높게 불러 이 작품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 소장자는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89세의 오스트리아 여성입니다. 그녀는 1923년에 유산으로 이 작품을 물려받았지만 작품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오스트리아 북부 라이허스베르크에 위치한 수도원에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경매사 소더비의 플랑드르&네덜란드 미술 전문가인 조지 고든은 이메일로 본 이 작품의 이미지만으로 대단한 작품이라 판단하고 이 작품을 직접 보려고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손전등으로 비춰봐야 할 정도로 어두운 곳에 걸려 있었다고 해요. 고든은 이 작품이  루벤스의 <삼손과 델릴라>와 비교해 보게 되고,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졌을 거라 판단합니다.

 

 

 

그는 이 작품이 진짜 루벤스의 작품인지를 검증하기 위해 런던, 옥스퍼드, 앤트워프에 있는 저명한 루벤스 학자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들 모두는 이 작품이 루벤스가 그린 작품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소장자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수도원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작품이 미술사에 길이 남을 대가가 그린 명작으로 판명된 것이죠. 더불어 세계적인 경매사에 출품되어 올드 페인팅 분야에서 최고의 낙찰가를 기록했습니다. 그림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이러한 그림을 둘러싼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우리의 귀를 쫑긋하게 합니다. 

 


 

 

 

<Roman Charity>,1612/wikipedia

 

 

 

루벤스의  그림 속에 늙은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는 장면이 묘사돼 있습니다. 느낌이 좀 이상하지요. 보기에 따라 늙은 노인과 젊은 여자가 부적절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여져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부녀 관계입니다. 시몬의 딸 페로는 굶어 죽게 하는 형벌을 받고 감옥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면회 갔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너무나 굶주린 탓에 거의 죽음에 이른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마 당국은 그녀의 숭고한 사랑에 감동해 시몬을 석방했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DcA1Ssl3Rw

 

 

 

 

 

<시몬과 페로 Cimom and Pero,1630>

 

 

 


 

 

<Honeysuckle Bower>,1609/wikipedia

 

 

 

 

 루벤스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 브란트입니다. 가정적인 남자였던 루벤스는 가족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이 그림 역시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이고요.  그림 속 여인은 유명한 변호사의 딸로 루벤스는 그녀와의 결혼을 통해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화가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명성을 들은 플랑드르 총독 부부에 의해 궁정화가로 임명이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MTYsywfdtg

 

 

 

 

오래 사는 것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이의 얼굴>1615-16/www.mycelebs.com

 

 

 

 

 

루벤스의 가장 사랑스러운 그림들은 그의 가족을 담은 작품들입니다.  <아이의 얼굴>은 그의 딸 클라라 세레나를 모델로 그려졌습니다. 루벤스는 이 작은 초상화에서 복잡하고 화려한 구성을 위한 아무런 기교도 사용하지 않고 순진한 어린 딸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팔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일이 너무 바빠 딸내미 얼굴조차 보기 힘든 딸 바보 아빠가 보고 싶을 때 꺼내보려고  그린 그림입니다.

 

 

 

딸의  옷은 빠르고 거친 붓질로 채워졌습니다. 뒤로 묶은 머리는 한 올 한 올 금빛으로 빛나고요. 맑은 눈망울, 발그레한 통통한 볼, 미소를 머금은 윤기 있는 입술, 콧등의 하이라이트와 이마의 푸른 음영 등 딸의 얼굴에 생기발랄한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1623년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삼 년 뒤에는 사랑했던 부인마저 죽게 되고요. 실의에 빠진 루벤스는 슬픔을 이기고자 일에 다시 몰두하게 됩니다. 이때 그가  맡은 일은 고향을 떠나 스페인과 영국의 평화를 위해 양국을 오가며 외교 활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교양을 갖춘 루벤스는 외교관으로서의 역할도 탁월하게 잘 완수해 냅니다. 그의 말대로 유럽의 평화에 루벤스의 그림 외교가 크게 한 몫했습니다.

 

 


 

 

 

<하마와 악어사냥>,1615-1616/news.jtbc.co.kr

 

 

 

 

터번을 쓴 세 명의 말 탄 사내들이 창과 칼을 들고 일제히 하마의 숨통을 노리고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한 하마는 이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입을 벌리고 사력을 다해 방어하고 있고요. 하마만큼 흥분한 눈을 한 말들 또한 기승자의 명령에 따라 포효하는 하마의 등을 짓밟고 올라서려 합니다. 하마 아래에도 동시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네요. 두 마리의 개는 하마를 물어뜯으려 하고 그 아래 악어도 누운 남자와 한 마리 개에게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몸을 틀어 엎어진 남자는 아마도 싸움 중에 공격을 당하고 쓰러진 것 같습니다. 잠시 뒤면 하마의 숨통도 곧 끊어질 것 같습니다.  하나의 그림 안에 3D 화면 같은 입체감과 드라마를 장대하게 엮은 그림 같습니다. 그 당시 어떻게 이런 상상력을 발휘했는지 입이 쩍 벌어집니다. 

 

 

 

 

<하마와 악어 사냥>은 1615년 바바리아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주문으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사냥은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금지된 스포츠였습니다. 오직 권력과 부를 가진 귀족과 왕족에게만 사냥이 허가됐었지요. 17세기 유럽 사회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국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국가나 아프리카에서 포획된 이국적 동물들을 애완용으로 소유하기도 했으니까요. 또  그러한 취미를 권력의 향유물로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말 등에 얹어진 표범 가죽과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악어와 하마, 터번 같은 이국적 요소들로 채워진 이 그림도 막시밀리안 공작의 권세를 상징하는 작품입니다. 마지막으로 뒤틀린 몸과 흥분한 말의 눈동자,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오른 근육, 그리고 쓰러진 남자의 포즈는 어디선가 본 듯합니다.  이러한 표현과 기법들은 루벤스가 이탈리아에서 유학할 때  보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를 연상시킵니다. 그런 점에서 루벤스는 소화력이 뛰어난 천재인 것 같습니다. 

 

 

 

 

<The Battle of Anghiari>,1505, Leonardi da Vinci/wikipedia

 

 

 


 

<한복 입은 남자 A Man in Korean Costume>,1617/wikipedia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입니다. '루벤스 그림에 한국인이?' 하며 의아해할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인 소년을 이탈리아 상인 안토니오 카를레티에게 팔았다는 일본 측 기록에 근거하여 조선인 소년에게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소년이 그림 속 주인공이라는 주장이 다수설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한복 입은 남자>가 입은 옷은  성인 남자의 의복이라고 합니다. 노예로 팔려간 소년이 성인의 의복을 입고 갈 리도, 따로 챙겨갈 리도 없음은 물론이고요. <한복 입은 남자>의 하단을 보면 속치마를 입은 것처럼 겉옷 밖으로 안에 받쳐 입은 옷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입었던 철릭 위에 팔소매 밑단이 없는 답호라는 옷을 덧입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루벤스의 이 그림을 보며 그림이 가지는 기록성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보게 됩니다.  루벤스라는 화가가 왠지 더 친근하게 다가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점 하나가 서로에게 연결이 되니 말입니다. 

 


 

 

<The Arrival of Marie de Medici at Marseille>,1625/wikipedia

 

 

 

루벤스는 무미건조할 수 있는 주제를 특별하고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드 메디치의 생의 연작>은 그런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장대한 기록화입니다. 이 그림들의 의뢰자 마리아 드 메디치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공주로 프랑스 앙리 4세와 결혼합니다. 그러다 앙리 4세가 암살로 사망하자 아들을 대신하여 프랑스를 다스렸습니다. 그녀는 루벤스에게 자신의 삶의 주요 장면을 기록해 달라고 주문합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업적이 없는 여왕의 삶에서 주요 장면이라 할만한 사건이 없었습니다. 탄생과 교육, 결혼식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 전부였죠. 그런데 루벤스에게는 이렇게 평범한 일화들을 비범하게 그려내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마리아 드 메디치의 마르세이유 입항>은 마리아 드 메디치가 프랑스의 한 항구에 도착하는 장면을 신화와 우의를 동원하여 멋지게 윤색해 놓은 작품입니다. 황금으로 도금된 화려한 배에는 메디치가를 상징하는 여섯 개의 구슬이 있는 방패 문양의 문장이 달려있습니다. 공주가 배에서 내리자 군모를 쓴 남자가 영접을 합니다. 백합문양이 새겨진 푸른 망토를 두른 남자는 '프랑스'를 상징합니다. 선박 아래에는 바다의 신과 요정들이 마리아의 입항을 기뻐하고, 하늘에서는 명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두 개의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당당한 모습의 공주와 예를 갖춘 '프랑스', 관능적인 요정들이 한데 어우러진 이 그림은 피곤한 항해를 마치고 하선하는 평범한 사건에 극적이 인상을 심어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R8nW7RPTlE

 

 

 

 

 

 

 

 


 

https://www.youtube.com/watch?v=wt57QyyYkAM

 

 

 

 

<런던 방케팅 하우스(Banqueting House)>/Daum 카페

 

 

 

 

The Banqueting House- Whitehall Palace  17세기말 화재로 이곳을 제외하고 화이트홀 궁전은 전소되었다고 합니다. 1622년 만들어져 주로 궁정 행사에 사용되었습니다. 1649년 찰스 1세가 이곳에서 사형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고요. 엘리자베스 1세도 런던탑에 투옥되기 전 이곳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지금도 왕실 행사 등으로 사용되는 곳입니다.

 

 

이곳에 루벤스의 천장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각종 자연재해에도 훼손되지 않고 400년가량 보존되어 오리지널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68평 정도 총 9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루벤스는 앤트워프에서 그림 작업을 했고 당시 통풍을 심하게 앓고 있어서 영국으로 여행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실제 Banqueting House에 설치된 실물은 결국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폭격에도 이 천장화를 보전하고자 작게 잘라서 이동시켰다고 합니다. 당시 이미 유럽 내에서 유명 화가였던 루벤스는 외교 사절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냅니다. 런던을 방문하게 되었고 당시 왕이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루벤스에게 이곳의 천장화를 부탁한 것으로 보입니다.

 

 

 

루벤스 천장화는 3개의 테마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1. The Union of the Crowns 왕국연합 :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신 미네르바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관을 어린아이 머리 위로 모으고 있는 장면으로 어린아이는 영국(Great Britain)을 상징합니다.

2. The Peaceful Reign of Jame 1: 성경 스타일의 배경에 앉아 있는 제임스 1세 풍요와 지혜를 상징하는 인물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3. The Apotheosis of jame1: 신에게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왕이 커다란 독수리 날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정원>,1630-1635/조선일보

 

 

 

루벤스는 첫 부인 이사벨라가 죽은 후, 53세가 되던 1630년 16살의 어린 엘렌과 재혼합니다. 그 후에 그린 <사랑의 정원 >은 당시 그가 지닌 낙천적인 인생관과 즐거움을 표현한 자전적인 그림으로 보입니다. 이 장면은 루벤스의 저택에 모인 그의 친구들의 사교적인 모임이지만  공중에는 사랑의 신 큐피드들이 떼 지어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비너스 여신 조각의 분수에서는 물이 뿜어져 나오고요. 가장 왼쪽의 남자는 수줍어하는 여성을 설득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습니다. 뒤에 큐피드가 떠미는 모습이 인상적이지요. 중앙에 모여 있는 여성들은 즐거운 행복감에 빠져 있습니다. 가장 오른쪽에는 이런 과정과 경험을 통해 인생의 지혜를 얻은 남녀가 층계를 내려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러 번 관능적이고 풍만한 모습으로 루벤스의 그림에 등장했던 두 번째 부인 엘렌은 이 그림에서도 어느 한 여인의 모델로 표현되었을 겁니다.   아마도 이 그림을 루벤스가 어린 부인을 맞이하여 사랑의 여러 단계로 인도하는 과정을 나타낸 내용으로 해석됩니다.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남녀의 사랑과 인생의 즐거움 또는 쾌락의 표현은 서양미술에서 언제나 주요 주제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Rubens, His Wife Helena Fourment and Their Son Frans>,1638/my daily art display

 

 

그의 두 번째 아내 헬레나 푸르망, 아들, 그리고  페테르  파울로 루벤스의 초상입니다. 루벤스가 죽기 2년 전 그림입니다. 여자옷을 입은 남자아이입니다. 당시 귀족 남자아이들은 대여섯 살까지 치마를 입었다고 하네요. 

 

 

 

 

 

<Het Pelsken>,1638/wikipedia

 

 

아내를 잃은 슬픔은 깊었으나 그의 독신 생활을 길지 않았습니다. 1630년, 53살의 루벤스는 헬레나 푸르망이라는 16살 소녀와 결혼을 하여 행복한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루벤스는 그녀를 지극히 사랑했으며 자신의 그림에 비너스여신으로 자주 등장시켰습니다. 

 

 

 

<모피를 걸친 여인>이란 제목으로 유명한 헬레나의 초상화는 그녀를 그린 여러 작품 중에서도 독보적인 작품입니다. 욕실에서 막 나온 듯한 여인은 검은 모피만을 두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흘러드는 빛은 그녀의 피부를 부드럽게 비추고 카펫이 반사하는 붉은빛은 여인의 배와 팔꿈치를 분홍빛으로 물들입니다. 고전 조각에서는 팔로 가슴을 가리는 동작이 정숙함과 겸손을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루벤스는 비슷한 자세로 가슴을 드러내며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자세로 그려냅니다.

 

 

37살 연하인 두 번째 부인 헬레네 푸르망은 수줍은 표정으로 남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루벤스가 판매용이 아니라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그림 속 여인은 화가인 남편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루벤스 역시 동일한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고 있었겠죠.

 


 

<The Rape of the Daughters of Leucippus>,1619/en.wikipedia.org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  이 작품의 특징은 X자를 형성하는 구도입니다. 구성 요소들은 그 자태의 방향에 의해 원을 이루고 있고요. 두 여인을 떠받치고 있는 남자는 땅 위에 쓰러지려고 하고 있는 여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또 그 여인은 말에 매달린 사랑의 상징 큐핏의 머리를 돌리고 있고요. 그 방향은 레우키포스를 약탈하는 남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크 예술 양식을 나타내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엉키고 있는 요소들은 율동감이 듭니다. 긴장감을 지닌 채 말이죠.  루벤스가 표현한 여인의 관능과 건강에 넘치는 육체미는 방금 옆에서 벌어지는 일 같습니다. 여인들의 탄력 있는  살결은 거칠고 검은색의 남자들의 피부와 힘찬 근육에 윤기 있는 말의 피부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림의 주제는 그리스 신하와 관계가 있습니다.  제우스 신의 두 아들이 메시나의 두 왕녀를 약탈하는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죠.

 

 

 

형 카스토르가 검은 말 위에 앉아 있습니다. 동생 폴리데우케스는 갑옷과 투구로 무장도 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백마에서 내려 레우키포스의 딸들을 잡고 있고요. 카스토르가 말에 앉아 있는 것은 그가 말타기에 능하다는 점은 나타냅니다. 무장하지 않은 동생 폴리데우케스는 불사의 몸이라는 사실을 뜻하고요. 화면 아래쪽에 있는 여인이 포이베입니다. 금빛으로 빛나는 옷이 벗겨진 채 저항하고 있지요.

 

 

황금빛 옷은 결혼식을 의미합니다. 과거에는 결혼식 예복이 황금색이었거든요. 홀리데우케스의 팔에는 힐라에이라가 있습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팔을 뻗어 하늘을 보고 있죠. 벗겨진 그의 붉은 옷은 카스토르의 어깨에 걸쳐 있습니다. 힐라에이라를 원하는 사람이 카스토르임을 암시합니다.  루벤스의 이 작품에서 사건의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말입니다. 부릅뜬 눈으로 발을 들고 우뚝 서 있는 말은 이 장면에서 동물적인 힘을 상징합니다. 여성의 납치는 17세기 최고 인기가 많았던 그림 주제였다고 하네요.

 

 

 

 

 

 

 

<The Three Graces>,1630-35/wikipedia

 

 

루벤스의 대표작인 <삼미신>으로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이 자랑하는 명품 중의 명품입니다. 단순한 화면 구성 속에 루벤스의 모든 역량이 주입되어 있습니다. 주제는 이미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자주  다루어졌던 것이고, 그림의 수법은 르네상스의 보티첼리(Botticelli)와 라파엘로(Raphael)등에 의해 이상화하고 미화한 형상의 계승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체의 아름다움이 한층 내적인 충만감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루벤스 예술의 심화버전 작품으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헤시오도스의 신들 계보에 따르면 삼미신이란 제우스와 바다의 요정 사이에 태어난 아름다움의 세 여신인 아글라이아(Aglia), 탈리아(Thalia), 유프로시네(Euphrosine)를 말합니다. 이들은 각각 아름다움, 기쁨, 우아함을 상징하는 데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반려자로 등장하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삼위일체 사상과 결합되기도 했습니다. 그림에서 벌거벗은 세 여신은 숲 속 광장에서 손과 팔로 서로를 잡고 서있습니다. 나뭇가지에는 여신들이 벗어놓은 옷들이 걸려 있고요. 나팔을 안고 있는 큐피드 조각상에서는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뒷모습의 여신은 사랑을, 앞으로 보고 있는 여신은 미를, 옆을 보고 있는 여신은 쾌락을 상징합니다. 

 

 

 

루벤스는 이 작품에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두 번째 아내 헬레네 푸르망을 , 오른쪽에는 첫 번째 아내 이사벨라를 그려 넣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한 화폭에 담아낸 거죠. 루벤스는 가장 이상적인 여인으로 자신의 아내 두 사람을 모델로 한 것 같습니다. 루벤스의 누드화는 뚜렷한 선으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명암에 의해 표현된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림은 루벤스 사망 후 스페인 펠레페  4세가 구입하여 스페인으로 가져갔습니다. 

 

 

 

 


 

 

<A View of Her Steen in the Early Morning >,1636/wikipedia

 

 

루벤스가 시골에 살면서 자신의 집과 주변 풍광을 그려낸 풍경화입니다. 느낌이 많이 다르죠. '인상파 화가가 그렸나'라고 착각할 정도로 말이죠.  바로크 적인 구도를 잃지 않고 있는 이 광대한 스케일의 풍경화는 자연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의 결과로 보입니다. 도시생활에서의 해방으로 인한 기쁨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지요. 루벤스의 이 그림은 개인적인 이유로 그려진 것이었으며, 판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유럽의 많은 풍경화가들에게 지대한 영감을 불어넣어주었고요.

 

 

 

<전쟁에 대한 알레고리>,1637/오마이뉴스

 

 

 

신화에서 전쟁의 신 '마르스'는 사랑과 평화의 신'비너스'의 남편입니다. 불과 대장장장이의 신 '불카누스'를 속이고 사랑을 나누는 연인으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이들을 소재로 한 회화작품에서 둘은 사랑을 나누거나 불카누스의 심판을 받고 마르스가 도망을 치는 장면으로 재현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루벤스의 이 그림에서 이야기는 베제 된 채로 그림의 정 중앙에 갑옷을 입은 마르스가 비너스를 남겨두고 떠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마르스의 붉은색 망토는 비너스의 하얀 살결과 대비되어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전쟁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그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너스의 뒤쪽에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전쟁의 불길에 휩싸인 비참한 유럽의 상징으로서 애처로운 표정으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더불어, 마르스의 오른쪽에서 기근과 전염병을 상징하는 괴물들이 그의 손을 잡아끌고 있고요. 한편 전경 하단에 아이를 끌어안은 여인은 자비의 상징으로 전쟁 앞에서 이들은 한없이 약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유럽 전역이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여러 나라를 방문했던 루벤스는 그림을 통해서나마 전쟁의 비참함을 암시하고 평화를 기원했을 것입니다.

 

 

 

 

<전쟁에 대한 알레고리>는 루벤스의 말년작품입니다. 전투장면이나 영웅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그림은 30년 전쟁(1618-1648) 중에 탄생했습니다.  그림 왼쪽의 야누스 사원에서 전쟁이 신 마르스가 달려 나옵니다. 고대 로마의 야누스 사원은 평화로울 때는 항상 문이 닫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의 신 비너스가 마르스를 붙잡으려고  애를 쓰지만 소용없습니다. 오른쪽에선 기아와 흑사병을 동반한 여신이 마르스를 끌어당겨 전쟁터로 데려가려 합니다. 마르스는 책을 발로 밟고 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학문과 예술이 황폐해진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바닥의 부서진 악기를 손에 든 여인은 평화의 종말을 상징하며, 컴퍼스를 손에 들고 불현 한 자세로 쓰러져 있는 남자는 건축물의 파괴를 상징합니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는 두려움에 떨며 달아나는데  고통받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맨 왼쪽에서 절망에 찬 몸짓으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여인은 유럽의 상징하고 검은 상복을 입고 있습니다. 빛과 어둠,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이 급격히 교차하고 정확한 세부 묘사를 포기한 힘찬 곡선들이 역동적입니다. 오른쪽 아래를 향해 달려가는 동작의 움직임은 그림을 바라보는 감상자까지도 함께 나락으로 끌고 들어갈 기세입니다.

 


 

 

 

 

 

 

 

#루벤스는 살아생전에 명성을 누렸고 귀족의 작위까지도 하사받아았을 정도로 크게 성공한 화가입니다. 그는 역사와 신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궁정사회에서 교양인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웅변가적 언변으로 외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했고요. 루벤스가 가진 최고의 회화적 재능은 비루한 현실도 신화의 수준으로 격상시켜 그려낼 수 있는 상상력과 그것을 화면에 극적으로 구성해 내는 연극적 연출력 같습니다. 그는 남루한 진실보다 화려한 거짓을 현실처럼 만들어 낼 수 있는 화가였으니까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에서는 루벤스가 영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제리코와 들라크루아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요. 19세기말 사실주의 와 인상주의 도 각자의 입장에서 루벤스에게 영향받았음을 인정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컨스터블이 루벤스의 풍경화에 존경을 표했습니다. 루벤스가 바로크 미술의 영향력 있는 작가로 살아남기까지 화려한 장식과 드라마틱한 조명의 사용, 극적이고 정서적 강렬함이 한 몫했습니다. 인체 해부학, 신화와 우화를 주제로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는 탁월함을 보였습니다. 또한 플랑드르 특유의 디테일과 풍부한 색상 사용은 루벤스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합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예술을 외교 도구로 사용하여 군주 및 기타 중요한 인물의 초상화를 만들어 동맹과 외교 협정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서양 미술사에  이만한 화가도 없을 것 같습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