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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표정, 납작하게 눌린 얼굴, 동그랗고 커다란 눈망울, 게다가 축 늘어진 귀. 작지만 다부지고 균형 잡힌 몸매를 하고 있는 퍼그(Pug) 견종을 살펴볼 까 합니다.

 

 

 

퍼그 /위키백과

 

 

 

출처: Maps 중국

 

 

 

 

 

 기원전 400년전부터 고대 중국황제가 키웠다고 하는 가설이 존재할 정도로 오래된 견종입니다. 그 당시 현재의 우리가 알고 있는 개의 크기보다 훨씬 컸다고 합니다. 군견으로 활약할 정도로 말이죠. 강인한 체력과 용맹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송나라 황제가 반려견으로 개량하기 위해 크기가 상당히 작은 소형견 품종인 시츄나 피키니즈 등의 교배를 통해서 현재의 작은 크기로 브리딩되었습니다.

 

 

 

Pug/나무위키

 

 

 

 

 유럽 국가에 알려지게 된 시점은 약 1500년대쯤으로 네덜란드의 상인들이 중국에 건너가게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특이하고 귀여운 강아지 종류인 퍼그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됨에 따라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유럽의 귀족들에게서 사랑을 받은 강아지 품종이지요.  당시 유럽에서는 불도그와 같이 얼굴이 납작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강아지를 키우는 게 유행이었다고 해요.  근친교배의 과정을 거치며 점차 비정상적으로 얼굴이 납작한 형태로 개량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69s5SjtaB4

 

 

 

 

 

 

 

 

 

출처; Aulife Natural Pet Food

 

 

 

 


체고: 30cm 내외

체중: 약 6-8kg

평균수명: 약 13년(미국 아메리칸켄넬클럽 AKC의 표본측정 결과)

 중, 소형견에 속합니다. 

 

 

 

 

theresarussell.co.UK

 

 

 

 

간혹 미니퍼그 종류라고 해서 몸무게가 5kg 이하로 나가는 경우도 있는데 크기가 너무 작으면 슬개골탈구나 기관지 협착, 비강협착 등 다양한 유전적 질환이 생길 수 도 있습니다. 이럴 땐 미니 퍼그 종류의 입양을 신중하게 고민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부모견을 확일 할 수 있는 상태가 가장 좋다고 하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GINijOaNMe0

 

 

 

 

 

 

 

 

 

 

Pug/ Freepik

 

 

 

 

일반적인 퍼그의 몸집은 커다란 편은 아니지만 워낙 몸매가 다부지고 근육질을 하고 있다 보니 소형견 느낌이 강한 편입니다.

 

 

 털이 짧은 단모종으로써 속털은 모량이 풍성하고 부드러운 편입니다. 겉털은 약간 거칠고 뾰족한 것이 특징입니다.

 

 

 

 

퍼그 털 빠짐 정도는 개들 중에서 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심한 편입니다. 단모종의 특징인 짧은 털이 빠지고 자라나는 것이 반복되다 보니 수시로 빗질을 해주지 않는 다면 집안에 온통 짧은 털로 뒤덮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섬유재질의 옷이나 이불 등에 털이 박히게 될 수도 있고요.

 

 

 

 

츨처: Unsplash

 

 

 

 

 퍼그는 고집이 센 편입니다. 시츄, 차우차우, 페니키즈 등과 같은 중국개들의 대표적인 성격 특징이지요. 자기의 주장이 상당히 강한 편입니다.  그로 인해 자기 마음대로 안되면  그것에 대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짖거나 입질하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부분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보호자와의 서열정리를 확실하게 해 줌으로써 절제력을 길러주시는 게 중요합니다.

 

 

 

 

살구 퍼그 강아지/ takingtimetotalk.co.UK

 

 

 

 

 밝은 성격을 가진 강아지로 견주 및 가족에게 애정과 애교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가족들을 즐겁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입니다. 미국의 AFC에서는 퍼그의 성격을 "고르고 매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흔 견종이기도 합니다. 

 

 

 

헛짖음이 거의 없고 낯선 사람에게도 경계심 없이 다가가는 편으로 성격으로만 보자면 가정에서 키우기에 정말 좋은 반려견이기도 합니다. 단 질투심이 있기도 하니 여러 마리 사육 시 다른 강아지를 특별히 편애하는 모습을 보이면 질투를 하기도 하니 주의해야 합니다. 너무 과잉보호하면 사람처럼  버릇없이 자라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집에서의 규율을 잘 잡아주고 양육해 주시길 바랍니다.

 

 

 

퍼그 강아지는 소형견인데도 푸들이나 몰티즈, 포메라니안 등과 같은 견종에 비해서 에너지가 많은 편입니다. 평상시에 산책을 하루에 1시간씩 꼭 시켜주면서 에너지 발산을 해주셔야 합니다. 간혹 야외 활동을 시키지 않고 집어만 놔두면 스트레스로 인해 물건이나 집안 가구 등을 다 물어 뜨어 놓고 먹어치워 버리는 이식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출처: Clube para Cachorros

 

 

 

 

 

 

 

 

https://www.youtube.com/watch?v=j220tzwpeZo

 

 

 

 

 

 

 

 

귀여운 강아지 인테리어 장식 소품 퍼그/ 잉글리쉬 불독/ 11번가 모바일

 

 

 

 

 

 

단두종의 특징이 코골이가 심하다는 것인데 퍼그 외모를 보면 알다시피 코가 아주 납작한 형태를 하고 있어서 비강협착으로 인한 코골이가 생길수도 있으니 수면에 민감하신 분들이라면  강아지 종류 선택할 때 퍼그 입양은 신중히 결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식탐이 많습니다. 먹을 것을 주면 주는 대로 다 먹어치워 버리기 때문에 식단 조절을 꼭 해주셔야 합니다.  퍼그는 꼭 정해진 만큼의 식사를 통해 체중관리를 해주세요. 게으른 편이기도 해서 운동을 일부러라도 시켜주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퍼그 성격이지만 혼자 있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으므로 오랜 시간 집을 비워 혼자 있게 되는 경우 스트레스와 함께 분리불안 증세를 보일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공격성이  거의 없다곤 하지만 치악력이 강한 편으로 혹시라도 흥분하거나 실수로라도 물리게 되면 다칠 수 있기 깨문에 입질하는 습관은 절대 갖지 않도록 교육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Pug/ Pinterest

 

 

 

 더위에 약한 편입니다. 퍼그는 머즐이 짧다 보니 더운 여름철에 산책을 나가면 호흡곤란 증상이 빈번히 발생하게 됩니다. 입으로 숨을 쉬고 침을 많이 흘리다 보니 열사병의 위험성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더운날에는 야외활동을 최대한 피해주세요.  만약 산책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늘진 곳으로만 돌아다녀야  합니다. 너무 더워하면 바로 물을 먹여주어 수분 공급을 해 주셔야 탈수가 생기지 않습니다. 추위에 강한 것도 아니라서 늘 온도관리에 힘써야 합니다. 

 

 

 

 

 

 

출처:Peakpx

 

 

 

 

 

 

퍼그 100마리 중 12마리 정도는 퍼그 뇌염이라는 질병에 걸린다고 합니다. 자가 면역에 문제가 생김에 따라 생기게 될 수 있는 질병으로 암컷이나 크림색 미니퍼그, 새끼 강아지에게서 발병 빈도가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 치료 방법이 없고, 치사율도 상당히 높은편입니다.

 

 

 

 

퍼그는 급격한 개량 과정을 통한 견종이라서 현재 유전적으로 문제가 많은 견종이기도 합니다.  지난 2008년 BBC의 다큐멘터리에서 조사한 영국의 퍼그 1만 마리를 대상으로 확인한 결과 1만 마리 중에서 유전자풀이 겨우 50마리 정도의 개체에 속할 정도로 좁은 유전자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성이 매우 협소하다는 말이죠. 그로 인해서 다양한 질환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퍼그의 사망원인으로 가장 대표적인 질병이 안면종입니다. 안면에 종양이 생기는 질병입니다. 근친교배의 영향으로 발생된 유전병 중 하나입니다.

 

 

 

 

Pug/RBK

 

 

 퍼그 얼굴은 주름이 상당히 많다 보니 주름사이를 수시로 관리해 주지 않는 다면 습진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에 따라 심한 가려움증, 통증을 유발할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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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을 갖고 입양하시고 퍼그의 웃음 짓게 하는 행동들로 가정이 밝아지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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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투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정견으로 키우면서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견종이고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견종으로 낙인이 찍힌 미국 원산지의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ican Pit Bull Terrier)를 소개합니다. 한국에서 맹견으로 규정되어 입마개와 목줄 없인 집밖으로 나갈 수 없는 개지요.  미국을 제외한 유럽 12개국 외 호주, 캐나다 , 푸에르토리코, 싱가포르에선 자격증 없인 키울 수 없는 개이기도 합니다. 

 

 

 

 

 

Ameican Pit Bull Terrier/ The Spruce Pets

 

 

 

 

핏불(Pitbull)이란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듯 소와 싸우는 개입니다. 소의 두꺼운 피부에 구멍을 뚫는 개라는 뜻이죠. 아메리카 핏불테리어(Ameica Pit Bull Terrier)는 크기가 다양합니다. 훈련에 따라  근육량이 다양해서 엄청 우람한 핏불이 있는가 하면 의외로 날씬한 핏불도 있습니다. 최종 개량된 곳이 미국이라 아메리칸 핏불 테리어라고 불립니다. 

 

 

 

 

 

미국지도/ Freepik

 

 

 

 

 

 

핏불 테리어는

체고 46-56cm,

체중 23-36kg

수명 12년 내외

 중형견입니다.

 

굉장히 단단하게 짜여진 운동선수 같은 근육질 몸매를 가졌습니다. 불테리어는 불독과 화이트 잉글리시 테리어, 폭스테리어 등을 교배시켜서 태어난 견종입니다. 이런 불테리어 중에서 체급이 큰 녀석들이 태어났는데 사람들은 이 녀석들을 핏불테리어(Pitbull Terrier)라고 불렀습니다. 후에 핏불테리어는 미국으로 건너가 최종개량되어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ican ptibull terrier)라 불리게 되었지요. 

 

 

 

 

Ameican Pit Bull Terrier/ 다나와 DPG

 

 

 

핏불테리어의 모색은 다양합니다. 털은 짧고 뻣뻣하며 얼룩이 있기도 합니다. 머리는 넓고 평평한 두 개골을 가지고 있고요.  사각형 주둥이와 검고 둥근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선택사항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귀는 자릅니다.

 

 

 

 

 

 

 

Ameican Pit Bull Terrier/ Mattia Pascal

 

 

 

 

 

 

 

고대부터 중세시대엔 투견이 상당히 흥행했습니다. 마스티프 종류의 개들이 로마시대때부터 다른 동물과 싸우거나 사냥 또는 전쟁에 이용되었는데 이런 여러 싸움에 이용된 개들이 투견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불 바이팅(Bull-biting)이라는 , 개와 소를 이용한 게임이 성행했다고 합니다.  베어 바이팅(Bear-biting, 곰과 개의 싸움) 같은 잔인한 게임들도 벌어졌고요. 특히 불바이팅이 흥행했는데 수소를 묶어서 도망가지 못하게 한 뒤 개를 한 마리씩 차례차례 풀어서 소에게 이길 시 그 주인에게 상금을 주는 경기였다고 합니다.

 

 

 

 

게임에 좀 더 효율성 높은 개를 만들기 위해 품종 개량이 진행되면서 불독과 테리어의 시초가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불 바이팅이 금지되면서 투견용이었던 핏불테리어는 애완견으로서 온순하도록 품종이 개량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핏불테리어도 예전의 핏불처럼 공격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A8NI1ysCac

 

 

 

 

 

 

 

 

 

Red and White Pit Bull Terrier/Pinterest

 

 

 

핏불테리어는 굉장히 와일드한 성격과 강인한정신력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강인한 정신력은 미국 해병대의 심벌이 될 정도랍니다. 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독일의 훌륭한 군견들(셰퍼드, 도베르만)에 의해 공수부대들의 작전이 빈번히 실패했을 때 미군은 아메리칸 핏불테리어를 투입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아메리칸 핏불테리어들이 독일의 명견들을 물어 죽였고요.  이에 훈장을 받은 핏불 들이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반대로 미국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물어 죽이는 대표적 견종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6Ey74D8bk4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ican Pit Bull Terrier)는 불도그류의 강한 턱과 집요함, 그리고 테리어류의 운동성을 결합시켜 미국의 척박한 환경에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견종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퓨마나 늑대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견종이죠. 어찌 보면 핏불의 역사는 미국의 개척사와 함께한 품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아메리칸 핏불테리어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공격적이지만 사람에게는 철저히 복종한다고 합니다. 다만 가정견으로 길러질 때, 선천적으로 타고난 핏불의 본능 때문인지 사고가 많이 일어나곤 합니다. 견주들의 특별한 관리와 관심이 필요한 견종입니다. 어떻게 교육받고 길러졌느냐에 따라 사랑받는 견종으로 함께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출처: peacecommission.kdsg.gov.ng

 

 

 

 

 

Local man a pit bull's best friend/ The State Journal-Rigister

 

 

 

 

 

 에너지가 넘치는 견종으로 많은 활동량을 필요로 합니다. 충분한 운동과 산책, 놀이를 통해서 에너지를 발산시켜줘야 합니다. 많은 문제가 스트레스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스트레스 해소와 심신의 안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핏불테리어는 싸움을 좋아하는 호전적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성격과 동물을 물고 싶어 하는 욕구가 많은 견종이므로 초보자가 키우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들에 의해 오랫동안 투견으로 이용되고 길들여졌기 때문이지요. 안타까운 점은 핏불테리어가 고통을 참아내는 인내력과 강한 힘을 투견에 이용한 사람들로 인해 부정적이고 나쁜 이미지로 세상에 알려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XLPzI6E_A0

 

 

 

 

 

 

본래 이 견종은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는 애정과 애교가 넘치고 보호본능이 강합니다. 주인을 도와 가축을 지키는 고된 일을 하는 순종적인 개였다고 합니다. 실제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ican Pit Bull Terrier)는 성격이 대담하면서도 느긋하고 조용하다고 합니다. 또 강한 체력과 힘을 갖추었고, 냉철합니다.

 

 

 

 

 

출처: 나무위키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ican Pit Bull Terrier)는 주인의 힘이 세지 않으면 제어하기 힘들기 때문에 입마개를 필수로 착용하고 산책 나갈 것을 추천합니다. 하지만 주의 깊은 관심과 , 꾸준한 사회화 훈련으로 매력적인 반려견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투견으로 이용되며 투쟁본능이 강한 기질을 가진 혈통 위주로 선택적 번식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모든 핏불테리어가 사람과 동물에게 함부로 공격하진 않습니다. 주의 깊은 관심과, 사회화 훈련이 꼭 필요한 매력적인 견종일 뿐입니다.

 

 

 

 

 

어메리칸 핏불 테리어/ 인벤

 

 

 

 핏불테리어는 미국에서 500개의 테스트를 통해 사람에게 있어 안전한 품종으로 평가되었다고 합니다. 낯선 사람에게도 친근감을 표시하기 때문에 경비견으로론 부족했다고 해요. 다른 동물에 대한 공격적 성향을 낮추기 위해선 강아지 때부터 사회성을 길러주고, 일관된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또, 귀나, 꼬리를 아이들이 잡아당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절대적 상남자 핏불테리어/ㅍㅍㅅㅅ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ican Pit Bull Terrier)는 멋진 외형 때문에 키우고 싶어 하는 애견인이 많습니다. 그러나 반려동물을 선택하기 전에 특히 커다란 맹견 종이라면 내가 15년 이상 키울 수 있는 환경과 시간 그리고 돈이 준비되어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준비 안된 반려인은 주인도 반려동물도 불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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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존재는 모든 것을 대변한다.
-미카 요시타케( Yoshitake Mika)-

 
 
2023년 새해부터 루이 비통과의 협업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아티스트가 있습니다. 바로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 현재 9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아직도 매일 그림을 그리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녀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펴봅니다. 
 
 

 

일명 '땡댕이 무늬'의 대명사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 ,1929- ).  그녀는 팝아트, 미니멀리즘, 페미니즘, 아트 무브먼트 등의 선구자로 평가되며 조각, 회화,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해 온 아티스트입니다. 2016년 타임지에 의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에는 모국인 일본에서 문화훈장을 받는 등 그녀의 몸값이 생존 여성 작가들 중 탑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쿠사마의 경우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낙인으로작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관객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했지요. 쿠사마의 작품은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전시 때마다 인파 관리가 필요할 만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2013년 데이빗 즈워너 갤러리 전시 때 관람객이 몰려 이례적으로 관객 당 감상시간을 45초로 한정해야 했습니다. 2012년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의 전시 1년 치 티켓이 예매 시작 몇 분만에 매진되었고요. 로스앤젤레스 브로드 미술관에서 열린 2018년 전시에 첫날 하루에만도 9만 개  표가 팔리는 등 쿠사마는 현재 엄청난 인기와 명성을 누리고 있습니다.
 
 

 

 

쿠사마 야요이/ eyesmag.com

 
 
 

 

 

쿠사마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를 기묘하게 조합하며 우리를 새로운 세계와 차원으로 끌어당기는 선수입니다.

 

 

 
 
 
 

나는 나를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년시절에 시작되었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술을 추구할 뿐이다.
 - 쿠사마 야요이, 1985-

 
 
 
 
 
 
 

Yayoi Kusama wax model at Louis Vitton for 2012 Collection unveiling/wikipedia

 
 
 

 

일본 나가노현/ 위키백과

 

 

 

 

한국경제

 
 
 
쿠사마 야요이는 1929년 일본 나가노현에서 4인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종묘업을 하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꽃과 나무를 스케치하는 것에 익숙했다고 해요. 그러나 그녀는 소녀 시절부터 조현병을 앓으며 반복해서 환각이나 환청에 시달렸다고 합니다.쿠사마의 자서전에 따르면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가한 사람이라고 해요. 어머니는 어린 쿠사마에게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는 아버지를 미행하고 자신에게 보고하게 시켰다는데 이것이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고 적었습니다. 
 
 

 


7살부터는 제비꽃, 호박, 개 등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환청과 꽃에 사람 같은 얼굴이 있거나 주변 사물에 환하게 불이 켜지는 등의 환시를 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는 조현병 (Schizophrenia)의 증상으로 의심되는 지점이지요. 과거 "정신분열병"으로 불리웠던 조현병은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의 나이에 시작하여 만성적 경과를 보이는 정신적으로 혼란된 상태로, 현실과 현실이 아니 것을 구별하는 능력의 약화를 유발하는 뇌 질환을 말합니다.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근 학계에서는  뇌의 기질적 이상을 그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쿠사마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 내가 본 것을 그렸다. 본것을 기록하는 것은 발생한 에피소드의 쇼크와 공포를 경감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 이것이 내 회화의 근본이다."라 밝힙니다.
 
 

 


보고 들은 기묘한 것을 기록하고자 낙서에 몰두하는 어린 쿠사마를 위해 아버지가 물감, 붓 등 재료를 사주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여성은 얌전히 커서 결혼하고 가정주부가 되어야지 화가가 돼서 안된다고 꾸짖으며 쿠사마의 그림을 찢어버리곤 했고요. 아동기의 쿠사마에게 정서적인 학대로 작용했을만한 부양자의 폭력적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쿠사마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낙하산 공장에 차출되어 일했는데 낮에 고된 노동을 해도 집에 돌아오면 밤에도 늘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죠.
 
 

 


1948년 전쟁이 종료되고 쿠사마는 쿄토시립예술 대학에 진학하지만 전통적 교습 방식과 니혼가 (일본화)만을 고집하는 커리큘럼에 강한 반감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한편 부모가 자신을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정략결혼을 시키려 하여 심한 불안감에 시달리고요. 쿠사마는 자신의 20대를 회고하며 신경쇠약증에 수없이 시달린 시기였다고 고백합니다. 
 

 


 
 조현병 환자는 혼자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설득이 불가능한 망상에 시달리는 일이 잦은데, 청년기의 갑작스러운 변화들과 맞물려 증상이 더 심해지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작품활동에 몰두하여 1952년 첫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이 전시가 마츠모토시의신슈대학 의학대학 정신과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그가 쿠사마 야요이의 작업을 분석하여 정신병학 학회에서 "조현병 경향성을 가진 천재 여성 아티스트"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쿠사마에게서 조현병 증상은 매우 명확히 드러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한편 니시마루는 쿠사마에게 신경증이 악화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가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 조언했다고 쿠사마는 적고 있습니다.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고요. 1955년 미국 화가인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화집을 보고 매료된 쿠사마가 자신의 수채화 그림을 동봉하여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연이 되어 미국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거지요.
 
 
 
 

500억 짜리 꽃...사막에서 다시 태어난 화가 조지아 오키프/ 매일경제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 1986)는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주요 화가로, 독특하고 혁신적인 스타일로 유명합니다. 오키프는 꽃을 대형 캔버스에 확대하여 그림으로써, 일상적인 대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추상적 요소와 사실주의적 묘사를 결합하여 미국식 사실주의인 정밀주의와 연관성을 보입니다. 미국 남서부의 사막 풍경을 단순화하고 본질적인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강렬하고 대담한 색채 사용으로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순수하게 표현하며, 관객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자연의 본질적 형태를 탐구하고, 일상적인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독창적인 접근으로 미국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쿠사마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되려고 한 것은 이니었습니다. 강박신경증과 편집증 그리고 불안신경증으로 인한 병을 자신 스스로 이려 내고자 하는 노력에서 그녀의 활동이 예술이 되어버린 것이죠. 어둠 속에서 밀려오는 공포와 같은 영상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괴로움, 하얀 좁쌀들이 벽을 타고 흐르던지 평면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들, 하나하나 모두 벽에서 끄집어내려고 하기 위해 스케치북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잠을 잘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살아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Accumulation>, 1952/Arthive

 
 
 
 
1952년  23살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틀뿐인 전시였지만 200점을 넘는 그림들로 벽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이 전시에서 그녀는 니시마루 신조 라는 신경정신과 교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이 소개로 다른 정신과 의사를 소개받기도 하고, 그것이 인연으로 도쿄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니시마루 교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녀의 정신병에 대해 조언하며 주치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A Flower(NO. 14)/ICA Boston

 
 
 
 
 
 
 

저의 예술, 즉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싸우며
우리가 무엇인지, 
삶과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예술에 있어 
일본은 너무 작고,
너무 노예적이고,
너무 봉건적이며,
여성을 경멸했습니다. 
제 예술에는 더 무한한 자유와 더 넓은 세상이 필요했습니다. 
-쿠사마 야요이-

 
 
 
 
 
 
 
 
1952년  마쓰모토에서 개인전을 연 이후에는 더 넓은 곳으로 나가길  원했습니다. "제 예술을 위해 무한한 자유와 더 넓은 세상이 필요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쿠사요는 뉴욕과 도쿄를 오가며 활동하게 됩니다.  미국행은 작가의 인생에 전환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이후 회화, 조각, 공연, 멀티미디어, 퍼포먼스,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아시아의 여성 작가 중에서도 단연  두각을 드러냅니다. 
 
  
 
 

<태평양 Pacific Ocean>, 1960/ Design DB

 
 
 
 
 
 

더 이상 어린 소녀로 살아갈 수 없다고 느꼈던 암울한 전쟁의 시기,
제가 살던 집 뒤에는 수백만 개의 흰 돌이 놓인 강이 있었습니다. 
반짝이는 태양 아래 '존재' 하나하나를 각인시키던 돌의 모습은 
제가 빠져버린 환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자연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 외에도, 
저는 마음속 욕망의 이미지와 함께 
정신의 신비한 세계에 사로잡혔습니다. 
- 쿠사마 야요이-

 
 
 
 
 
 
 
 
 조지오 오키프의 도움으로 시애틀로 정착하여 1년을 보낸 후에는 뉴욕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1957년 뉴욕으로 이주 후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성중심의 화단, 그리고 전후 미국 내 강한 반일감정과 맞서야 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금 그림에 몰입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종종 음식을 섭취하지도 수면을 취하지도 않으며 50-60시간씩 그림에 골몰했습니다. 아마 이 시기 양극성 장애 (Bipolar disorder)의 조증 단계가 발현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조증은 심한 흥분에 따른 고양감, 불안감, 충동성, 사고의 비약과 같은 증상을 특징으로 하며, 심한 조증 삽화(Manic episode)의 진단을 위한 단서로는 수면 욕구 감소, 목표 지향적 활동의 증가, 쾌락적인 활동에 지나치게 몰두, 과장된 자신감, 주의 산만 등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름은 <무한 망 (infinity Net)> 시리즈입니다. <무한 망Infinity Net>은 검은 바탕 위에 흰 물감으로 작고 균질한 크기의 호(arc)를 촘촘히 연결하여 멀리서 보았을 때  마치 흰 레이스 천이 검은 캔버스 위에 올려진 듯 보이는 회화입니다. " 나와 내 주변 사이에 불특정 회색의 얇은 실크커튼 같은 막이 생기는 환상을 보게 되어 " 이를  시각화한 것이었다. 
 

 


캔버스 전체를 망으로 뒤덮다 못해 점차 그걸 책상에도 그리고 바닥에도 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몸 위에도 그렸습니다.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보니 망이 무한으로 증식하더라고 쿠사마는 회고합니다. 1959년 브라타 갤러리 (Brata Gallery)에서 이 작품들을 선보이며 뉴욕 화단에 성공적으로 입성했지만 쿠사마는 자신의 조현병 증세가 심화되었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매일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던 어느날 아침에 깨서 눈을 떠보니 전날 그린 망이 창문에도 있더라는 것이다. 이에 손을 뻗어 만져보려 했더니 그 무늬가 살아 움직이며 기어서 자신의 피부로 옮겨 오더라고 그녀는 회술 한다. 이로 인해 공황장애 발작(Panic attack)이 오고, 스스로 앰뷸런스를 불러 벨뷰(Bellevue)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이후로도 며칠에 한 번씩 같은 일이 반복됐다. 
 

 

며칠씩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안정을 찾는 쿠사마의 이러한 행위는 점점 더 강박적으로 그림을 그림으로써 세상은 마음대로 되는 곳이 아니라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피하고자 애써 노력하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무한 망과 유사하게 속칭 " 땡땡이" 점 무늬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폴카닷(Polka dot) 시리즈 또한 이 시기에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쿠사마는 그러한 끝없는 반복을 통해 자신의 증세를 경감시키고자 했다고 설명합니다.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행위를 "자기말소(Self-Obliteration)"라 칭하고요. 끝없는 반복이 머릿속의 시끄러운 잡음을 고요하게 만들고 삶의 불안을 지워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느꼈다는 것입니다. 
 
 
 
 

 
#검은색 바탕 위에 흰색으로 그린 미세한 고리는 그물 패턴처럼 캔버스를 균일하게 덮고 있다. 그 위에 흰색으로 얇게 칠한 터라 멀리서 보면 빈 캔버스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제법 두껍고 유기적으로 쌓인 물감이 드러나며 미묘한 인상을 준다. '그물망' 사이사이 빈 곳으로 시선을 이동하면 검은색 배경이 점처럼 눈에 띄기 시작한다. 엎치락뒤치락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물망과 점의 관계는 쿠사마가 생각하는 무한한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위치를 상징했다 이 작품은 곧장 뉴욕 예술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lt;Infinity Nets Yellow&gt;, 1960/Flickr

 
 

 

당시는 아트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바뀌며, 추상표현주의의 제 2세대의 전성기였습니다. 쿠사마는 앤디 워홀이나 클래스 올덴 버그 등의 작가들과 동시대에 활발히 활동하며 전시를 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의 쿠사마의 성공은 빨랐습니다. 그녀의 대표작인 <무한 망>은 첫 개인전에서 프랭크 스텔라가 구입해 자택에 두었다고 하며, 도널드 저드 또한 그녀의 무한 망 작품을 소장했었고, 2008년에는 그 작품이 경매에서 510만 달러에 팔려 쿠사마는 생존하는 여성화가 중 가장 비싼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녀는 조셉 코넬과 만납니다. 
 
 


 

미술나라의 이상한 앨리스/NYCultureBeat

 
 
 
 
 

자신이 무한대로 확장된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은 무한한 공간에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없음을 느낍니다. 
-쿠사마 야요이-

 
 
 
 
 
 
 
 
 
1961년의 쿠사마는 전위적인 무브먼트의 대표적인 아티스트로 성장합니다. 1960년대의 그녀의 대표적인 스타일은 '축적(accumulation)과 '강박관념(obsession)'으로 무한망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입니다. 의자나 소파, 부엌용품 등 온갖 사물에 남근 형상의 오브제(soft-sculpture)를 축적해 붙인 것이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남근들판 Phalli-Field>, Infinity Mirror Room/ Afterall.org

 

 

 

<남근 들판 Phalli-Field> 또한 정신적 문제에 대한 쿠사마의 대응기제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은 일종의 소프트 스컬프쳐(부드러운 소재로 만든 조각)로 천에 솜을 채워 만든 수백 개의 남근 형태의 오브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쿠사마는 어린 시절 받은 가정교육의 영향으로 성 (Sex)에 대한 공포증(phobia)을 갖고 있었습니다. 
 
 
 
결혼 전 방종을 막기 위해 어머니는 성이 더럽고 부끄러운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아버지의 바람의 현장을 목격해와 어머니에게 보고하고 그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과정을 겪으며 성을 터브시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인이 된 쿠사마는 이 오랜 공포증을 물리치기 위해 공포의 대상을 작고 다루기 쉬운 사물로 치환하고 그것의 반복 생산 및 설치합니다.  일종의 의식처럼 미술관 혹은 갤러리 공간 한가득 남성 생식기 모양 조각을 채워 넣다 보면 어느덧 성은 두려울 것도 없고 오히려 재밌고 즐거운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니 쿠사마에게 예술은 발산의 기회이면서 정신적 문제에 대한 치유의 방편이 됩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아동기 학대는 만성적 스트레스 요인이 되어 양극성 장애를 조기에, 그리고 더 중도로 발현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심리학 연구에서는 장기간 혹은 심한 신체적 학대를 받은 아동의 경우 영구적으로 뇌구조와 기능 상의 변화가 생기고, 면역체계 기능에 부정적 영향을 주며, 신체 및 정신 이상에 쉽게 걸릴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 심리학자 퍼피츄아 니오(Perpetua Neo)는 어린 시절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받았던 아티스트들의 경우를 분석하며 "그들 중 대다수가 고통받은 자아를 의미 창출을 위해 사용하고 그것을 예술을 통해 실행한다."라고 설명합니다. 즉 정신질환으로 인해 천재적인 아티스트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관련 증상을 유발한 과거의 경험을 발판 삼아 그것에 대한 대응기제( coping mechanism)로 예술창작을 행하는 과정에서 좋은 성과를 낸 작가들이 여럿 존재한다고 보는 편이 더 작절한 것 같습니다. 

 

 


 
쿠사마는 도전적인 작업을 맹렬하게 선보이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극심한 불안과 피로에 시달리게 됩니다. 정신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쿠사마는 예술 없이 삶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1965년에는 가장 실험적인 작품 중 하나인 <무한 거울 방 >시리즈를 전개합니다.  요즘에야 무한히 서로를 비추는 거울의 방은 결코 낯선 공간이 아니지만, 무려 60년 전에 '무한 거울 방'의 철학을 상상했던 쿠사마의 선택은 가히 과감했습니다. 무한히 서로를 비추는 거울은 쿠사마의 예술 철학을 극대화했습니다. 설치 작품 속 쿠사마의 극적인 초상에서 볼 수 있듯, <무한 거울방 > 이후 쿠사마의 작업에서 퍼포먼스와 자아 이미지의 분열은 더욱 강화됩니다. 
 
 
 
 

 뉴욕 시절의 쿠사마는 '쿠사마 해프닝'이라고 칭해지는 야외에서의 누드 데모 등의 과격한 퍼포먼스나 인스터레이션을 표현했습니다. 남녀의 성차별을 부정하는 것을 베이스로, 자본주의나 베트남전쟁에도 반대하는 운동을 리드했다고 합니다. 대부분 신체에 물방울 무늬를 그린 누드 퍼포먼스로, 월가나 UN 본부 같은 보수적인 장소에서 행하여 기성세대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나무위키

 
 
 
 
 
 
 
 1966년 베니스 빈엔날레에서 그녀는 초청받지 못한 작가로서 전시장 앞 잔디에 약 1500여 개의 물방울무늬 오부제를 깔아놓습니다. <나르시스 정원> 플라스틱제의 미러볼 1500개로 이탈리아의 파빌리온 밖의 잔디 위를 가득 채운 것으로, 개당 2달러로 작품을 파는 퍼포먼스이기도 했습니다. 이 게릴라 전시는 비엔날레 측에 의해 중지당했으나 그녀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다 되었고, 또한 자기 자신을 머천다이징 한 아티스프로 평가받게 됩니다. 

 
 
 

Artist Yayoi Kusama in the Orez Gallery in the Hague, Netherlands, 1965 in KUSAMA-INFINITY/ Artnet News

 

 

 

 

약 16년간 미국에서 거주하며 회화라는 장르에서 벗어나 조각, 영화, 신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합니다. 특히나 당시 미국에는 반전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는 시기였는데 예술활동을 통한 반전시위에도 앞장서게 됩니다. 
 

 
 
 
 
 

Self-Obliteration(1966-1974), Yayoi Kisama/objects/M+

 
 
 
 
 
 
 
 

물방울무늬로 공간과 우리 몸을 지울 때 
비로소 우리는 환경의 일부가 됩니다.
-쿠사마 야요이-



 
 
1966년부터 일본에 돌아간 직후인 1974년까지 작업한 <자기 소멸>은 자아의 증폭과 소멸 사이에서 요동치는 시리즈 입니다. 쿠사마는 뉴욕에 거주하며 반 문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시기에 <자기 소멸>을 제작했습니다. 물방울무늬로 뒤덮인 마네킹은  공연자의 나체에 점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수십 번 이어가던 행위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강렬하면서도 어딘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자기 소멸'이란 제목은 눈앞에 펼쳐진 다채로운 장면과 유쾌하게 대비됩니다. 쿠사마는 자신의 예술 세계 전반에 걸쳐 '지우기'라는 개념을 탐구했는데, 이는 부정과 긍정이 하나가 된다는 믿음에 뿌리를 둡니다. 마네킹으로 제시한 인간의 존재에 물방울무늬를 가득 채울수록 자연스럽게 더 큰 전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죠.
 
 
 
 
 
 

Kusama and Cornell: A fusion of Art/Pinterest

 
 
 
 
쿠사마 야요이와 조셉 코넬은 예술적 관계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쿠사마는 코넬의 콜라주 기법을 존경하며 자신의 작품에 이를 도입했습니다. 코넬은 주로 콜라주와 상자 작품으로 유명하며, 다양한 사진과 오브제를 상용해 독특한 콜라주를 만들었습니다. 반면 쿠사마는 소프트 조각과 반복적인 패턴을 사용한 설치 미술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코넬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적 요소가 강하며, 일상적인 오브제를 통해 꿈같은 세계를 표현합니다. 쿠사마는 강박적 반복과 무한을 주제로 하여, 점과 거울을 사용해 무한한 공간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요. 코넬의 작업 방식은 쿠사마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는 그의 기법을 통해 추상에서 벗어나 형상을 나타내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쿠사마는 코넬과의 관계를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었고, 이는 그녀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73년에 절친하던 파트너 조셉 코넬의 사망 후, 건강이 나빠지고 환각 증세가 심해진 쿠사마는 일본으로 귀국합니다. 스스로 신주쿠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병원에서 창작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기도 하며, 소설과 단편, 시 등을 발표했지요. 78년에는 소설 <크리스토퍼 스트릿의 매춘굴>로 일본 신인문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Pumpkin>, 1983/MutralArt

 
 

 
 
 
 
 

저는 제 위치로부터 무한한 우주를 가늠해보고 싶었습니다.
입자들의 축적을 그리며 저의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인생은 곧 이런 수백 만개의 입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쿠사마 야요이-

 
 
 
 
 
 
 

<인간의 이미지 Imagery of Human Beings>,1987,Acrylic on Canvas, triptych,Lito and Kim Camacho collection/ 기아 디자인 매거진

 
 

 


 
1987년 작 <인간의 이미지(Imagery of Human Beings)>(1987)에는 물방울무늬 철학의 연장선으로 서로 연결된 존재에 대한 쿠사마의 관점이 녹아 있습니다. 다양한 크기의 동그란 흰색 점이 보라색 면을 뒤덮었습니다. 대부분의 점에는 작은 꼬리가 달려 있고, 때로는 다른 점과 연결됩니다. 올챙이를 닮은 점은 마치 남성의 정자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은하계의 장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보는 거리와 방법에 따라 작품 속 점의 밀도와  간격을 다채롭게 느낄 수 있고요. 눈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살펴보면 점들이 흩어지며 움직이는 듯합니다. 이는 에너지의 변화, 끊임없는 움직임을 통한 재생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점 하나가 하나의 생명을 상징할 때 이 작품은 서로 연결된 우리가 모두 우주적 하나라는 더 큰 차원으로 이해의 폭을 넓힙니다. 태초부터 우리가 무수히 많은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불교의 눈으로 보면 우리 모두는 수많은 생애 동안 다른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윤회 개념은 쿠사마의 세계관에서 큰 축을 차지합니다. 우주의 먼지이면서도 저마다 고유한 존재인 인간을 바라보는 그의 예술 철학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세포로 구성된 것처럼 인류 전체가 하나의 존재이며, 하나의 세포 안의 우주 전체가 들어 있는 것이죠.
 
 
 
 
 
 
 
 

Yayoi Kusama/MoMA 'Yayoi Kusama, Love Forever'Poster(아트상품),1998/ MutualArt

 
 
 
본격적으로 재평가 받게 된 계기는 1989년에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쿠사마 야요이의 회고전'Love Forever:Yayoi Kusama, 1958-1968)입니다. 이 전시로 다시 쿠사마는 세계에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Yayoi Kusama at 90's : How the 'undiscobered genius' became an international sensation/CNN

 
 
 
 
 
 
 
 

1993년 제 45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일본관 /단비뉴스

 
 
 
뉴욕을 떠난 후로 예술계에서는 잊히는 듯했던 쿠사마가 다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부터 시작된 회고전으로부터입니다. 이때부터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1993년에는 과거 초대받지 못해 게릴라로 참가했던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정식으로 일본 대표로서 참가하기도 합니다. 
 
 
 

 
 
 

Yayoi Kusama Art Exhibition at National Gallery,2005 /Lady Porcelain-Weebly

 
 
 

 
 
 
 
 

어느날 , 책상 위의 붉은 꽃무늬의 식탁보를 본 후,
시선을 천장으로 돌리니
온 천장에, 창문에도 기둥에도 같은 붉은 꽃의 모양이 달라붙어 있었다.
온 방, 온몸, 전 우주가 붉은 꽃 모양으로 뒤덮어져,
결국에 나는 소멸해버린다.
그리고 영원한 시간의 무한과 , 공간의 절대 속에서 나는 회귀하여, 환원되어 버린다.
이 것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경악했다. 

-<무한 망, 쿠사마 양요이 자서전 >,2002년-

 
 
 
 
 
 
 

Yayoi Kusama의 인생예찬: 삶과 꿈 사이에서/NYCultureBeat

 
 

 

현재도 여러 나라를 돌며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녀의 작품은 현재 생존해 있는 여성 아티스트 중 가장  고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009년부터 그려온 대형 회화 시리즈 <내 영원한 영혼> 132점 등이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궁지에 몰린 스스로의 열기 같은 것으로,
아마 예술에서는 먼 곳에서부터 원시적, 본능적으로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내 영혼의 편력과 투쟁>(예술 생활)1975년-

 
 
 
 
 
 
 
 

Yayoi Kusama/Infinity-Nets(ENNO)2011/Mutual Art

 
 
 
 
 
 
 

루이비통&amp; 쿠사마 야요이 콜라보레이션 , 2012/디자인 DB

 
 

 
마크 제이콥스가 루이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은 1997년 이후 줄곧 그는 예술과 콜라보레이션등 유명 예술작가와 협업을 한 바 있습니다. 예술가와 브랜드 간 콜라보레이션이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예술가에게는 자신의 작업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가 되고, 브랜드에 있어서는 예술가와의 협업을 통해, 상품, 그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죠. 또한 일부 지정된 매장에서 한정된 수량을 판매하기 때문에 소장의 가치가 있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84b8D-k_ERk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쿠사마 야요이/ 교보문고

 
 
 
 
 
 
 
 
 

쿠사마 야요이<무한 거울방 Infinity Mirrored Room- 수백만 광년 너머의 영혼 (The Souls of Millions of Light Years Away> 2013, 뉴욕 데이빗 즈워너 갤러리/미주 한국일보

 
 
 
 
 

<자화상>,2015, Acrylic on canvas/ 기아 디자인 매거진

 
 
 
 
 

저는 때때로 이상하리만치 기계화되고
표준화된 획일적인 환경에 놓인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문명사회라는 낯선 정글과 사람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정신적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저는 항상 사람과 사회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배경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저의 예술적 표현은 언제나 이런 바탕에서 성장했습니다.
- 쿠사마 야요이-

 
 
 
 
 
https://www.youtube.com/watch?v=CfzdQQuYq_0

 
 
 
 
 
 
 

쿠사마 야요이 미술관, 일반 사단 법인 신주쿠 관광 진흥 협회/신주쿠

 

 

 


 
2017년 10월 개관했습니다. 약 2회 쿠사마 작품의 전람회를 실시하는 공간입니다. 강연회 등을 개최하는 것으로, 쿠사마 씨가 작품을 통해 반복해 호소해 온 세계 평화화 인간애라는 메시지를 널리 세계에 전해, 많은 분들에게 현대 미술에 익숙해져 주시는 미술관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The moment of Regneration>/ 나무위키

 
 
 
 이 빨간 촉수처럼 생긴 것은 남성의 성기를 표현한 것입니다.
 
 

<소멸의 방>,Yayoi Kusama, 5.11.2020/Arthive

 
 
 
 
 
 
<소멸의 방> 작품은 관람객이 직접 만들어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고 스티커를 붙여나가는 과정에서 도트가 채워져 최초의 방의 모습은 소멸되어 버립니다.
 

 

 


뉴욕에서 어느 날 캔버스 전체를 아무런 구성없이 무한한 망고 점으로 그리고 있었는데 내 붓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캔버스를 넘어 식탁, 바닥, 방 전체를 망과 점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내 손을 봤을 때, 빨간 점이 손을 뒤덮기 시작했고 내 손에서부터 점이 번지기 시작해서 나는 글 점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 점들은 계속 번져가면서 나의 손, 몸 등 모든 것을 무섭게 뒤덮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고 응급차가 와서 벨뷰병원에 실려갔다. 의사가 진단하기를 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고 정신이상과 심장수축 증상에 대한 진단이 나왔다. 이러한 사건 이후에 나는 조각과 퍼포먼스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내 작업의 방향 변화는 언제나 내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결과다. -쿠사마 야요이-
 
 
 
 
 
https://www.youtube.com/watch?v=KYRegEz7CgY

 
 
 
 

 

 


 

달도 물방울무늬고,
태양도 물방울무늬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 역시 물방울무늬죠.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우주에서도
무수한 물방울무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물방울무늬를 통해서 저는 삶의 철학을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물방울무늬는 결코 혼자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서로 소통하는 삶처럼
두 개, 세 개 그 이상의 물방울무늬가 모여 움직임이 됩니다.
지구는 우주의 수많은 별 중 하나의 물방울무늬에 불과합니다.
물방울무늬는 무한으로 가는 길입니다. 
-쿠사마 야요이-

 
 
 
 
 
 
 
 
 
 
 
 
 

Ascension of Polka Dots on the Trees was created by Yayoi Kusama/Dezeen

 
2021, 4, 21
 
그녀는 집안의 빨간 꽃무늬 식탁보를 본 뒤, 눈에 남은 잔상이 온 집안에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 둥근 물방울무늬로 변형되어 계속해서 시선과 자신의 신체에까지 따라붙었던 물방울무늬 무늬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하게 되는 작업의 중요하고도 유일한 소재가 된다. 
 
 
 
 
 

Yayoi Kusama,<; Infinity Mirror Rooms&gt>, 2020/ LA Infused

 
 
 

그녀의 작품에서는 무한성이 느껴지는 작품이 있다. 바로 <무한 거울방>이라는 설치작품인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한 속에서의 반복과 그 속에 있는 나의 반복을 보여줍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쿠사마는 여러 인스터레이션 작품을 제작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거울을 사용한 무한 거울의 방과, 의자나 테이블이 설치된 심플한 가구의 방에 UV로 빛나는 물방울무늬가 있는 방 등, 무한한 공간이 넓혀져 있는 듯한 공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lt; Infinity Mirror Rooms&gt;/Pinterest

 
 
 
 
 
 
 

Dancing Pumpkin is made of painted bronze/Dezeen

 
 
 
 

 호박에 대하여

호박은  애교가 있고 

굉장히 야성적이며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사로잡는다. 

나, 호박 너무 좋아

호박은 나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마음의 고향으로서

무한대의 정신성을 지니고 

세계 속 인류들의

평화와 인간찬미에 기여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다. 

호박은 나에게는 마음속의 

시적인 평화를 가져다준다.

호박은 말을 걸어준다.

호박, 호박, 호박

 

내 마음의 신선한 모습으로 

세계의 전 인류가 살고 있는 생에

대한 환희와 근원인 것이다. 

호박 때문에 나는 살아내는 것이다.

-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가 호박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그녀의 어린 시절 경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녀는 부모의 학대와 방치로 인해 정신적인 혼란과 불안감을 겪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호박이 가득 찬 창고에 숨곤 했습니다. 호박의 안정감 있고 유머러스한 형태는 그녀에게 위로와 안정을 주었고, 이는 그녀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호박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으며, 그녀의 예술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자리 자리 잡았습니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세계/아트인사이트

 
 
 
 
 
 

My Soul Blooms Forever in the Enid A. Haupt Conservatory/Dezeen

 
 
 
 
 
최근 몇 년 동안 쿠사마는 작품에 시를 암시하는 긴 제목을 붙인 적이 많습니다. 사랑, 예술, 평화를 위한 기도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화면에 텍스트를 새겨 표현한 작품으로 예술을 향한 헌신, 사랑과 죽음에 관한 기도를 담은 자작시를 함께 선보입니다.

 

 

 

한편 쿠사마의 가능성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많은 사람에게 각인한 계기는 2012년에 루이 비통과 함께한 프로젝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쿠사마는 루이 비통의 트렁크에도 도트 패턴의 핸드 페인팅을 더하며 주목받았습니다.  하지만 일회성으로 그칠 줄 알았던 프로젝트가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부활했습니다. 이번에도 무한함을 상징하는 모티브를 메종의 프로덕트에 가미해 실제 작품의 텍스처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도트 무늬를 구현하면서 패션계와 아트 신의 호응을 동시에 이끌어냈습니다. 
 

 

 


 

Yayoi Kusama/Dots Obsession/Rice Gallery

 
 
 
 
 
https://www.youtube.com/watch?v=a58e9OCvx4Y

 
 
 
 

 

 

 

 

쿠사마 야요이는 평생에 걸쳐 자기 작품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길 염원했습니다. 더 나아가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세계에 관한 안목을 기를 수 있기를 바랐지요. 100년 후에도 감동할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계속 작업해야 한다고 말했던 쿠사마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 지금도 그의 병실이자 작업실에서 자기 자신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삶을 지속 중입니다. 작품을 만들 때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란 생각에 잠긴다는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 1929-   ) . 삶과 예술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매번 처음인 것처럼 자문하는 그녀의 작품 세계에는 언제나 시작만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무한히 펼쳐지는 시작 그 자체가 의미의 종결점이기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gSBtXNJj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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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cm 정도의 키에 바짝 마른 몸, 게다가 88세 (1999) 할머니 예술가입니다. 그녀는  <마망 Maman>이란 이름의 커다란 거미 조각의 창작자입니다. 놀라움과 찬사 그리고 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쭈글쭈글한 그녀의 얼굴만큼 예술가로서 버텨온 그녀의 자부심에 엄지척 해드립니다. 98세(2010. 5. 31/뉴욕)로 돌아가시기 까지 인생의 후반전이 더 아름다웠던 그녀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만들었다. '라는 말이 있지요. 끝이 뾰족한 다리를 길게 뻗고 위태롭게 서 있는 거미.  뜻밖에도 프랑스어로'엄마(Maman)'라는 의미를 지닌 그녀의 후기 대표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작가는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라는 프랑스계 미국인 여류 작가입니다. 60세까지 철저히 무명시절을 보내다가 이 '마망'시리즈로 70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해서 98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작가입니다. 

 

 

 

 

<엄마 Maman>,1999,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Stainless steel,bronze,marble/wikipedia

 

 

 

 

 

거미는 나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찬사입니다.
그녀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어머니는 거미처럼 실을 짰고 거미처럼 매우 영리했습니다.
거미는 모기를 잡아먹는 친근한 존재다.
우리는 거미가 질병을 퍼트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거미들은 우리 엄마들처럼 도움이 되고 보호한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96년 부르주아는 1947년 잉크 &목탄 드로잉으로 그렸던 거미에서 착안해 첫 강철 거미 조각 'Spider'를 제작합니다. 거미는 부르주아의 엄마에게 헌사하는 작품으로 '베틀을 돌리고, 짜고, 양육하고, 보호하는 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1999년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미술관을 위해 '마망(MaMan)을 제작합니다. '마망'은 테이트 모던을 비롯, 삼성 리움미술관, 빌바오 구겐하임뮤지엄, 캐나다 국립갤러리(오타와), 도쿄 모리미술관  , 크리스탈브리지 미술관(아칸사주 벤튼빌), 도하 카타르 국립컨벤션센터 등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France /123RF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작가입니다. 태피스트리를 수선하고 판매하는 아버지 루이 부르주아 (Louis Bourgeois)와 어머니 조세핀 부르주아(Josephine Bourgeois)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하고 있던 테피스트리 사업은 직물 공장 같은 것으로, 당시에 상당히 큰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유복한 환경이었습니다. 가정교사까지 둬서 공부를 할 수 있던 걱정도 없고 부족할 것도 없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이후의 평생을 결정짓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유년 시절 수년을 믿고 따르며 친언니처럼 따르고 사랑했던 가정교사가, 아버지와 불륜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해 왔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그녀의 행복했던 유년 시절은 이때부터 산산조각 나게 됩니다.

 

 

 

그녀는 분노했습니다. 아버지를 증오했고, 가정교사를 증오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그녀가 증오하게 되었던 것은 이 모든 사실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가정을 깨지 않으며 이를 방관했던 무력한 어머니였습니다. 부정을 저질렀던 아버지와 가정교사 보다도 이러한 부당한 상황을 이어가고자 했던 바보 같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Louise Bourgeois/ Twosome

 

 

 

그 녀는 이 사건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후에 이야기했습니다. 그녀가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원천은 이러한 '관계'에 대한 허무함과 고민 때문이었다고요. 그런 루이즈 부르주아는 성장하면서 애착을 요구하는 관계에서 힘겨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부모, 형제자매, 남편,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모순적(양가적 ) 감정으로 어려웠다고 호소합니다. 

 

 

 

<엄마 Maman> 작품 속  거미는  칼처럼 뾰족뾰족한  날카로운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면 거미의 몸통 부분이 실제보다 많이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미는 긴 다리로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몸통을 가능한 낮게 위치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작품의 거미는 몸통이 굉장히 위쪽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얇은 다리들이 억지로 들어 올린 몸통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탱하고 있는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바로 옆으로 쓰러질 듯한 아주 위태로운 모습입니다. 

 

 

 

 

 

Sac Containing marble eggs, at Zurichsee-Schifffahrtsgesellschaft,Zurich,2011

 

 

 

 

나는 수선공 집안에서 태어났다.
거미는 수선공이다.
만약 당신이 거미줄을 뭉갠다고 해도, 그녀는 화내지 않는다.
그녀는 거미줄을 다시 짜고 수선한다.
-루이스 부르주아-

 

 

 

 

 

 

 

이렇게 보통의  거미답지 않은 자세로 몸통을 잔뜩 치켜올린 모습을 아래쪽에서 보면, 다른 부분이 한 가지 눈에 띕니다. 망으로 둘러쳐진 그물 안에 대리색으로 만들어진 하얀 대리석 구슬들이 보입니다. 이것들은 바로 거미의 '알'들입니다.

 

 

거미가 이렇게  위태로운 모습으로 저항하듯 하늘로 몸을 잔뜩 추켜올리면서도 꿋꿋이 버티고  서 있는 그 이유는, 바로 이 배 아래쪽의 알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입니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거미의 이 모습에서 '엄마'를 발견해 냈던 것입니다.

 

 

거미가 매일 실을 뽑아내듯 직물을 뽑아내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엄마, 남편의 부정을 미련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거미처럼 흉측한 엄마, 하지만 거미가 알을 지키려 하는 것처럼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엄마. 부들부들 떨리는 얇은 다리로 자식들을 배 아래 숨기고 자신이 모든 고통을 감내했던, 우둔한, 너무나 미운, 하지만 생각할 수록 눈물이 나는, 바보 같은 그런 엄마의 모습을  알게 된 겁니다. 

 

 

 

 이렇게 자신 안의 모순된 감정을 해결해 가는 처절한 삶의 과정이 바로 '마망'으로 탄생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에게 닥쳤던 가장 고통스러운 일들을 극보해 내기 위해 괴로움을 고백하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작품을 '고백 예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녀의 삶을 이해하고 다시 거미를 보니 이 거미가 안고 있는 삶의 무게와 모성애가 조금 다르게 와닿지 않나요. 

 

 

작품은 거대한 사이즈의 거미를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조각입니다. 가까이 보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알을 품고 있고요. 특히 영국 런던의 현대미술관인 테이트모던이 2000년 첫 문을 열 때 이곳의 거대한 전시장인 '터빈홀'을 처음으로 채웠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리움 미술관, 호암미술관에서도 전시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르주아(Bourgeois)는 이 작품에 있는  그대로 자신의 엄마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땅을 딛고 있는 다리는 가냘프게 보일지언정 단단한 강철로 되어 있으며, 크기로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그 위협적인 겉모습 속에 자식들을 부드럽게  품고 있는 모양. 때로는 연약해 애틋한 마음이 들게 하지만 아이를 세상에 낳아 기른 누구보다 강인한 존재, 엄마를 표현했다는 걸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TsFuZ80OyY

 

 

 

 

그런데 이러한 예술적 표현은 그녀가 활동하던 당시 미국에서는 낯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술에는 흔히 당대 주목을 받는 흐름이나 표현 방식이 있습니다. 많은 작가들은 재빨리  이 흐름에 올라타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며 생존에 필사적이지요.  부르주아(Bourgeois)가 활동할 무렵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이 대세였습니다. 

 

 

 

<Blue Poles>, 1952,Jackson Pollock,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Canberra/wikipedia

 

 

Mark Rothko/ The New York Times

 

 

 

 

 

추상표현주의는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 1970)의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추상화라고 이해할 수 있고, 이들 작품에서는 작가 개인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미니멀리즘 예술은 아예 제목을 '무제'로 하는 등, 작가를 더욱 숨기는 경향을 보입니다.

 

 

 

<The Welcoming Hands>,1996/EUtouring.com

 

 

 

 

<The Welcoming Hands, 1996>. 브론즈로 제작되었으며 은질산염 파티나로 마감되어 있습니다. 여러 개의 손과 팔을 표현한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화강암 받침대 위에 놓여 있습니다. 손들은 서로를 잡거나 맞잡는 자세로 표현되어 있어 따뜻한 애정, 안전, 그리고 신체적 접촉의 친밀함을 나타냅니다.

 

 

 

작품의 손들은 실제 사람들의 손을 모델로 하여 제작되었습니다. 부르주아는 자신과 친구 제리 고로보이의 손과 팔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원래 뉴욕에서 처음 전시되었으며, 이후 파리의 튈르리 정원에도 설치되었습니다. 부르주아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보편적인 상징을 사용하여 관객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전달합니다.  작품은 부르주아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반영하면서도, 인간의 보편적인 접촉과 연결에 대한 욕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정신적 불안감을 느꼈던 부루주아는 수학의 예측 가능하고 안정된 체계에 끌려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과 기하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나 곧 수학적 관념이 불변의 진리가 아니며 이론적 구조일 뿐임을 깨닫고 예술의 세계로 들어서기로 결심합니다. 파리 소르본 대학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명문대학입니다. 최상위 엘리트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 있고요. 졸업하면 일자리가 보장된 꽃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의 사망과 예술가를 기생충 취급하는 아버지의 반대를 뒤로 하고 자력으로 예술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부루주아(Bourgeois)는 에꼴 데 보자르 (Ecole des Beaux Arts)와 에꼴 드 루부르(Ecole du Louvre)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몽마르트 및 몽파르나스에 있는 화가들의 스튜디오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시절에 그녀를 가르쳤던 여러 화가들 중에서도 특히 페르낭 레제 (Fernand Leger, 1881-1955)는 부루주아(Bourgeois)에게 삼차원에 대한 관념을 심어주어 훗날 조각가가 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화가에서 기하학적인 작품을 뽑아내는 조각가로 돌아선 그녀의 선택은, 그리고 페르낭 레제의 안목은 탁월했습니다. 

페르낭 레제 (Fernand Leger): 기계 시대의 인간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습니다. 입체파와 구상을 독특하게 융합한 작품 스타일로 유명합니다. 피카소, 브라크와 함께 20세기 초 가장 중요한 예술 운동인 입체파를 이끈 화가 중 한명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사실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난 혁신적인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Louise Bourgeois& Robert Goldwater/NYCulture Beat

 

 

 

 

 

1938년 미국의 미술 사학자이자 아프리카 예술 학자인 로버트 골드 워터(Robert  Goldwater, 1907-1973)를 만나 결혼하여 ,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컬럼비아대와 하버드대 석사를 거쳐서 뉴욕대에서 '현대미술 속의 원시주의 (Primitivism in Modern Art)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루이스 부르주아와 결혼 후 퀸즈 칼리지와 뉴욕대 교수로 강의하다가 1957년 미드타운 54 스트릿의 원시미술관(Museum of Primitive Art) 초대 관장을 지냈습니다. 골드워터는 뉴욕 뮤지엄 최초로 아프리카 미술 전시회를 기획합니다. 넬슨 록펠러가 창립한 원시미술관은 1976년 폐관하고, 컬렉션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으로 들어가고요.  골드워터는 1973년 사망합니다. 

 

 

 

 

<New Orleans>,1946/MutualArt

 

 

 

 

 

 

<New Orleans, 1946> 작품은 유화를 사용하여 판지 위에 그려졌습니다. 이 작품은 Bourgeois가 뉴욕에 도착한 1938년부터 1940년대 후반, 조각으로 전향하기 전까지의 시기에 제작된 회화 중 하나입니다. 그녀의 예술적 목소리가 처음으로 등장한 중요한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지요. 부르주아의 다른 초기 회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20세기 유럽 아방가르드 운동, 특히 모더니즘 건축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녀의 초기 회화 작품으로, 그녀의 예술적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1930-40년대  그녀는 주로 드로잉이나 판화 작업들을 했습니다. 70대 이후로 다시 판화 작업을 시작하지요. 판화는 그녀에게 다양한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과거에 대한 치유이며, 회상이며, 불만이며, 억제이며, 시간의 통로이며, 손의 움직임 등 복합적이죠. 그녀는  판을 부식시키는 에칭 작업보다 판에 직접 드로잉의 흔적을 새기는 인그레이빙이나 드라이포인트를 선호합니다.

 

 

 

 

Fallen Woman(Femme Maison), 1946-47/ The Art Wolf

 

 

그녀의 초창기 작품들은 특히나 공격적이고 파격적이며, 폭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과감한 에로티시즘에 대한 표현이 아버지로 인해 받은 상처와, 불신의 감정, 그리고 남성성을 이긴 어머니란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나타냅니다.

 

 

 

 

Self-Portrait as Bird, 1945/MoMA

 

 

 

1940년 대 말부터 기하학의 영향이 엿보이는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한 그녀는 1949년 뉴욕의 페리도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갖게 됩니다.  물론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녀의 조각은 재료가 다양해지고 주제가 과감해진 50년대와 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는 급속도로 부상한 페미니즘 열풍과 함께 더욱 강렬하고 파격적인 인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70년대 말부터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는 198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열린 회고전을 계기로 국제적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작업했던 1500여 점 작품들을 1990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하기도 합니다. 부르주아(Bourgeois)는 이후로 미국과 유럽, 남미와 일본 등지에서 수차례 회고전을 가졌으며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황금 사자상을 수상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vYvqxHejY

 

 

 

 

Louise Bourgeois , I Love You Do You. Love Me?,1987/ MoMA

 

 

 

 

 

The family,2007, Digital print on fabric/MoMA

 

 

 

<The Family, 2007>는 작가의 오랜 경력 동안 탐구해 온 주제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21점의 선명한 붉은색 종이 작품으로 구성된 이 연작은 성적 친밀감의 순간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Bourgeois는 가족 관계에서 발생하는 고통, 갈등, 정체성 문제, 의존성 등을 솔직하게 다룹니다. 작품의 붉은색은 신체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며, 습식 기법으로 그려져 우연한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여성의 형태는 여러 개의 늘어진 가슴이 목에 달린 추상화된 다산의 상징으로 표현됩니다. 부르주아는 가족의 불안정한 본질을 viscerally 조명하며, 신체를 추상적으로 변형시켜 부부간, 그리고 모자간의 미묘한 상황들을 탐구합니다.  이 작품은 Bourgeois의 개인적 경험,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와 모성에 대한 그녀의 관심을 반영합니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 성장과 쇠퇴, 분리와 결합 등 삶의 순환을 다루며, 작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의식도 담겨 있습니다. 

 

 

 

당시 치명적인 유행이었던 스페인 독감에 걸린 엄마를 8살 때부터 간호하면서, 태피스트리 도안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1932년 21살 때 엄마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배신감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때부터 평생 버림받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평생에 걸쳐 '외로움이나 질투, 분노와 두려움' 등 인간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다양한 재료와 모티브를 탐구하며 창작에서 손을 놓지 않았고요.

 

 

자신을  직시하는 것과 함께 부루주아(Bourgeois)는 또 사람들이 공포감이나 두려움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죠.

 

 

1951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부터 부르주아는 불안과 분노, 죄의식, 버림받은 느낌에 시달리며 광장 공포증, 강박, 불안, 자살 충동을 겪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공격한다. 

나는 우울을 옮겨낼 에너지를 찾을 수 없다. ...나는 하루를 마주 대할 수 가 없다.

온 세계는 회색이다....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세상은 텅 비었다. ...

 

나는 나 자신, 증오스러운 나 자신을 주시하기를 견딜 수 없다. ...

나는 나 자신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내게로 불러올 수는 있다. 나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정신 분석 치료 당시 루이스 부르주아가 작성한 글-

 

 

 

 

 

이렇게 해서 그녀는 정신분석가 헨리 로웬펠드에게 30년에 걸친 치료를 받기 시작합니다. 이 정신 분석 치료 경험은 그녀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EYE BENCHES II/ Hauser&Wirth

 

 

 

 

 

 

<Eye Benches II>는 1996-1997년에 제작된 조각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거대한 관찰하는 눈 모양을 한 두 개의 기능적인 벤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검은 짐바브웨 화강암으로 조각된 이 작품은 추상과 구상 사이를 오가며, 부르주아의 수십 년에 걸친 예술 실천을 상징합니다. 매끄러운 표면의 눈꺼풀과 동심원으로 이루어진 눈동자는 거대하고 매혹적인 시선을 만들어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를 넘어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각의 상징, 여성의 성적 해부학에 대한 암시, 유혹과 관음증의 표현, 그리고 명상과 휴식의 공간을 제공합니다. 이 작품은 부르주아의 기억, 관계, 심리상태에 대한 탐구를 반영하며, 정체성, 성별, 섹슈얼리티, 모성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야외에 설치되어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빛의 변화를 반영하고 흡수합니다. 

 

 

 

 

 

 

 

Louise Bourgeois, Crochet I-V(MoMA 590-594), ,1998/MutualArt

 

 

 

 

이런 가운데 부르주아(Bourgeois)는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30년 간 단 8번의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아마도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에 익숙해져 있는 미술계 사람들에게  그녀의 작품이 생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 그녀를 미술사가 피터 바이어마이어(Peter Weiermair)는 "20세기 조각계의 '외로운 늑대(Lone Wolf)' "였다고도 표현했습니다. 

 

 

<IN AND OUT>,1995/Haus der Kunst

 

 

 

<IN AND OUT>. 작가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녀가 자주 탐구했던 주제인 물질성, 성규범, 그리고 자신의 심리적 깊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대체로 자서전적 성격을 띠며, 그녀의 어린 시절 경험과 트라우마를 반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작가의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의 긴장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추상 적으면서도 인간의 형상을 암시하는 부르주아(Bourgeois)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배신, 걱정, 외로움 등의 주제가 암시적으로 드러나며, 이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연결됩니다. <IN AND OUT>이라는 제목은 내부와 외부, 은밀함과 노출, 혹은 심리적 내면과 외적 표현 사이의 경계를 탐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르주아(Bourgeois)가 자주 다루었던 정체성, 성별, 섹슈얼리티의 주제와도 연관됩니다. 그녀의 작품은 고백 예술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 IN AND OUT>도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Cells 연작은 총 28개의 동일한 주제로 진행된 설치 연작입니다. 제목인 Cells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교도소를 의미하는 prison cell, 수도사의 방을 의미하는 monk's cell, 생물학적인 세포를 의미하는 cell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밀폐된 유리 혹은 철망, 오래된 문으로 구성된 셀의 공간은 폐쇄적인 느낌을 줍니다. 이는 그녀가 앓았던 광장 공포증과 연관되어, 세상에서 홀로 남겨져 고립된 듯한 느낌을 받았던 당시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부와 격리된 공간 안에는 그녀의 개인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물들이 배치되어 긴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배치된 몰체 중 하나는 침대에 누워 허리를 아치형으로 들어 올린 여성의 나체 조각입니다. 이 동작은 히스테리 질환을 겪는 여성에게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자세라고 합니다. 원인이 없는 근육 경직과 불안감을 나타내고요. 작품을 해석하는 이들은 정신 분석학적 이론을 주목하여, 권력에 의해 억압받은 상징적 히스테리 환자들의 표출이며, 여성의 욕망과 분노를 동시에 대변한다고 설명합니다. 

 

 

 

 

 

 

내가 찾는 것은 이미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디어도 아니에요.
내가 재창조하고자 하는 것은 감정입니다.
그것은 원하면서 주고 싶기도 하고,
파괴하고 싶기도 한 감정이에요.
그러한 힘에 대한 확인 (Identification)입니다.

 

 

 

 

 

 

 

 

<아버지의 파괴 Deconstruction of Father>1974,붉은 조명솨 함께 공포스러운 /Pinterest

 

 

 

The destruction of the father(아버지의 파괴),1974/출처 BBC

 

"I got peace of mind, only through the study of rules nobody could change."

- Louise Bourgeois-

 

 

 

아버지에게 느꼈던 폭력과 분노는 방 크기의 재현작 <아버지의 파괴  Deconstruction of Father , 1974>로 드러납니다. 부르주아(Bourgeois)에게 아버지는 지속적으로 그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존재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권위적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1974년 <아버지의 파괴 Deconstructio  of Father >라는 작품을 제작하게 됩니다. 방을 설치한 후 라텍스와 석고 등을 이용하여 설치한  이 작품에서 그녀는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가슴을 직접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도살장에 방문하여 직접 캐스팅하고, 토막 난 동물들의 몸체의 부분들을 식탁이자 침대이기도 한 테이블 위의 여기저기에 흩어놓습니다. 아버지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부르주아( Bourgeois)와 아이들이 아버지의 팔과 다리를 절단하고 찢어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먹는 연출입니다. 일종의 상상의 폭력이죠. 

 

 

 

항상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억압적인 식사 분위기를 만드는 아버지 앞에서 침묵해야 하는 어린 소녀는 매번 좌절합니다.  부르주아의 아버지는 스타일리시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겐 늘 연인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부르주아의 엄마가 병에 걸려 요양하기 위해 남프랑스로 이주한 후 일어납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집에 함께 살게 된 영어 가정교사가 아버지의 새 연인이 되었죠. 그때의 상황을 그녀는 폴 가드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집으로  온 가정교사 세이디(Sadie)가 알고 보니 아버지의 애인이었어요. 세이디는 우리 집에 살았고, 아버지가 차를 운전하면 그녀가 조수석에 앉았죠. 엄마와 나는 뒷좌석에 앉았고, 나는 그런 엄마가 정말 싫었어요!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라도 아빠를 지켜봐야 그가 밖으로 돌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Bourgeois)가 단순히 아버지를 원망하고 비난만 했을까요? 감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엄마의 수용,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엄마 아빠의 사랑하는 마음, 그 가운데서 수많은 혼란을 겪었다고 회고합니다. 

 

 

여기에  나를 위해 집으로 온 영어  선생님이 왜 내가 아닌 아버지에게 집중하는지 , 그에 대한 질투와 배신감도 느꼈고요. 그러면서 때때로 세이디나 아버지를 죽이는 상상도 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할 때 드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외면하거나 회피하게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이 들더라도, 부모에 대해 가져야 하는 윤리적인 태도로 그 감정을 억누르거나 잊어버리려 하죠. 그런데 부르주아9Bourgeois)는 이러한 감정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고 늘어지면서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 그녀는 권위적인 아버지를 파괴하고 그를 다시 자신 속의 새로운 아버지로 재탄생시키는 엑소시즘을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된 목적은 두려움으로부터의 탈출이고, 탈출의 모험은 트라우마에 대한 하나의 치료학인 셈이죠.  

 

 

 

 

 

매일매일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거나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당신이 힘든 과거와 타협할 수 없다면,
그때부터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 루이스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

 

 

 

 

 

 

Louise Bourgeois/ Museo Picasso Malaga

 

 

내 모든 작품은 내 삶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I Do, I Undo, I Redo>,1999/Pinterest

 

 

 

 

 

 

<I Do, I Undo, I Redo>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유니레버 시리즈 설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Bourgeois의 예술 철학과 창작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I Do , I Undo, I Redo>는 세 가지 단계를 나타냅니다. 

 

I Do: 창작의 단계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I Undo: 반성과 파괴의 단계로, 이전 사업을 해체하고 재고하는 과정입니다. 

I Redo: 재구성과 해결의 단계로, 새로운 통찰을 바탕으로 작품을 재창조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형상을 암시하면서도 추상적이며, 배신, 걱정, 외로움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그녀의 개인적 경험과 트라우마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실 그녀는 꽤 늦은 나이에 예술계에 입문했습니다. 40대, 그리고 여성이란 것은 예술계에선 흔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의 수였죠.  하지만 그녀는 남자들이 독식하고 있던 예술계에 40대의 나이로 당당하게 입성하게 됩니다.  

 

 

1960년대부터 무거운 돌덩어리나 무쇠 같은 재료에서 석고나 라텍스 같은 부드러운 재질을 이용한 조각으로 바뀝니다. 1966년이 전환점이 되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qy7xJhImnLw

 

 

 

Assistant for 30 Years: Life with Louise Bourgeois/ vulture.com

 

 

 

1980년 부르주아는 조지아 오키프와 후안 해밀턴의 관계처럼 여생의 우정을 지속할 젊은 조수 제리 고로보이( Jerry Gorovoy)를 만납니다. 당시 큐레이터였던 고로보이와의 만남에 대해 부르주아(Bourgeois)는 말합니다. 

 

"당신이 우물의 바닥에 있을 때 주변을 살펴본다. 누가 나를 밖으로 이끌어낼까? 이 경우 제리가 다가와 밧줄을 던져주고, 나를 끼워서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라고 밝혔다. 고로보이는 현재 루이스 부르주아 재단의 대표입니다. 

 

 

 

 

 

<Do Not Abandon Me>,1999/ artnet Magazine

 

 

 

 

< Do Not Abandon Me>는 정체성, 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버림받는 것에 대한 불안을 솔직하게 다룹니다. Bourgeois는 이 작품을 통해 "버림받음의 트라우마"를 표현하며, 가족생활 속에서도 느꼈던 고립감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은 빨강, 파랑, 검정 구아슈 물감으로 그려진 남성과 여성의 토르소 실루엣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녀의 심리적 상태와 신체적 욕구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iGjzV7Nk48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작품이 Tracey Emin과의 협업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Emin은 Bourgeois의 초기 그림 위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작은 인물들을 그려 넣었고, 때로는 손글씨로 내러티브를 추가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녀의  예술세계의 핵심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통과 상처를 정화하고 치유하려는 그녀의 예술적 투쟁을 잘 보여줍니다. 

 

 

 

 

주제에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부르주아(Bourgeois)의 예술은 그녀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의 예술은 그녀의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던 트라우마가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와 예술작품으로 표출되는 일련의 과정으로서 트라우마와 화해하기 위해 분투했던 결과물이었습니다.

 

 

 

출산 이후 부적절한 감정에 사로잡힌 루이즈 부르주아(Bourgeois)는 가족에 대해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탯줄이 잘리지 않은 채 몸 밖으로 나와 있는 아기와 여성을 표현한 작품, 집을 가면처럼 눌러쓴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Louise Bourgeois,<CELL XIV>, 2000/ Dazed

 

 

 

 

 

 

 

 

 

예술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카타르시스(정화)다.
내가 경험한 상처, 증오, 연민을 표현하고자 한다."

(루이스 부르주아 인터뷰)

 

 

 

 

Eight in Bed, 2000/Mutual Art

 

 

 

 

 

 

 

 

 

 

 거미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거울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이고,
바늘은 무용한 것을 유용한 것으로 엮어내는 관용의 역할을 한다.
뭔가 잊어버리기 위해 선 우선 용서해야 한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Seven in bed 2001, Fabric, Stainless Steel, Glass and Wood/ WordPress.com

 

 

 

 

 

파격적이던 그녀의 작품은 점점 모성애와 사람과의 관계의 이해로 변해갑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오는 여성이란 존재의 나약함. 아니 이 나약함은 힘이 없는 나약함이라기보다 섬세한 여성의 마음과 몸, 그 가녀리고 부서질 것 같은 유리 같은 여성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한 엄마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여자이고... 여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고...

 

 

 

 

복수심과 증오로 가득 찼던 소녀는 엄마가 되고 작가가 되면서, 자신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터프한 용사에서 , 세상 모든 어머니를 이해하고 딸들을 어루만지는 가족을 생각하는 더 큰 존재가 되었습니다. 

 

 

 

 

<The Couple>plate 5of7, from the portfolio, La Reparation, 2001/MoMA

 

 

 

여성을 그릴 땐 대부분 빨간 하이힐에 진주목걸이를 한 모습이다. 그 두 가지는 섹시함을 대표한다. 

 

 

 

 

 

Louise Bourgeois , Untitled 2002/Art Blart

 

 

 

 

 

 

 

 

 

 

 

 

 

<Heart>,2004/Artnet

 

 

 

 

루이스 부르주아가 천을 덧대고 실로 꿰매어 만들어냈던 너덜너덜한 형상의 작품들입니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자신의 갈기갈기 찢어진 몸과 마음을 꿰매고 또 꿰매어가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인생과, 타인의 인생을 꿰매어 주고 온기로 끌어안았습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실로 그림을 그리는 태피스트리 일을 하게 된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싶어 종종 수선 일을 도왔다고 합니다. 이때의 영향을 받아 그녀는 실과 관련된 이미지를 자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서로 연결하고, 짓고, 고치는 실의 이미지는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을 꿰매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Louise Bourgeois, Drawing intimacy, 1939-2010 show/Galleries now

 

 

 

 

 

<The Ladders>,2006/HARLAN&WEAVER

 

 

 

 

 

 

 

 

 

 

 

<Turning inward set>(I see you!),2007, 국제갤러리/ 리아뜰 매거진

 

 

 

 

부르주아(Bourgeois)는 아버지와의 관계 말고도 자신이 삶에서 겪은 많은 감정들을 작품에 풀어놓았습니다. 이러한 드로잉들도 일상에서 기록한 것들로 그녀는 이것을 '생각 깃털(thought feather)'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이미지 가운데 발전되는 것은 더 큰 규모의 설치나 작품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솔직함이 어떻게 그녀를 세상과 소통하게 해 준 것일까요?

 

 

 

바로 감정을 파고들면서 내면 깊숙이 들어간 그녀가 '인간의 본질'을  마주하고 그것을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지만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감정을 끄집어내 주었고, 그 결과 관객은 그녀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거대한 거미 엄마를 보고 '우리 엄마'를 떠올리며 쉽게 작가와 감정적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부르주아(Bourgeois)는 "내 작품 세계에는 외로움과 잔인함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예술은 그런 삶의 어려움을 풀어나가는 치유의 방법이었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그녀는 결국 예술을 통해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몸을 끌어안을 수 있었고,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임을 묵묵히 작품으로 노래했으며 마침내 그 솔직한 이야기는 공감을 무기로 관객에게 가 닿을 수 있었습니다. 마케팅에서 진정성이 중요하다는 뻔한 이야기를 예술에 적용해 볼 수 있겠지요. 

 

 

부르주아가 말년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은 것에 대해 대답한 이야기입니다.

 

 

"성공? 그게 뭔지 난 모르겠어요."

 

다만 우리 모두는 나이 들수록 더 멋진 사람이 되죠. 마치 프랑스 와인처럼요. 요즘 나는 아주 부유한 여인이 된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죠. 내가 성공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아니라 진정한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The Smell of Eucalyptus #2,2006/MoMA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유칼립투스의 향기 The Smell of Eucalyptus>(2021, 국제 갤러리) 전에는 작가가 생애 마지막 10여 년간 작업한 판화 작품과 조형물이 전시되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 프랑스 남부에 머무르며 병든 어머니를 보살폈던 젊은 시절의 부르주아(Bourgeois)는 당시 유칼립투스를 약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억으로 작가에게 유칼립투스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또한 스튜디오를 환기시키기 위해 유칼립투스를 태우곤 했던 작가의 습관을 떠올리면 작가에게 유칼립투스는 실질적인 면에서 혹은  상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추억을 자극하여 과거를 현재로 소환해 내는 매개체이자 '미술의 치유적 기능에 대한 은유'로 작동합니다.

 

 

 

 

 

 

 

The Smell of Eucalyptus /KuKje Gallery

 

 

 

 

 

다양한 질감의 종이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된 작품이 걸려 있습니다. 동판화 (에칭)로 찍어낸 그림은 나뭇잎이나 씨앗, 꽃이나 식물 줄기를  연상시킵니다. 때로 여성의 가슴이나 음부를 떠올릴 수 있고요. 여러 겹 섬세하게 덧대어 그어진 선은 대상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고 유연합니다.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가 아흔이 넘어 작업한 판화 작품에서는 직설적인 폭력이 아닌 은유적인 시정과 치유의 기운이 넘실거렸습니다. 

 

 

 

외부와의 역학 관계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노년에 접어들어 변해갑니다. 주요 모티브로 반복되는 씨앗과 낙엽, 꽃줄기 같은 자연의 일부, 똬리를 틀고 있는 혈관과 내부 장기처럼 자연과 유기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억압적으로 작용하는 감정에서 벗어나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 속 유동적 존재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시도하고 시도하고... 그러다 갑자기 거기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자신의 작품 세계)이 그런 식으로 될지 몰랐어요.
그것은 미스터리랍니다. 
-루이스 부르주아-

 

 

 

 

The Maternal Man ,2008/Parkett Art

 

 

 

 

흔히들 그녀를 페미니즘 작가라고 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내 작품을 어떤 '이즘'으로 묶는 것에 반대한다. 다만, 아는 것에 관해서만 얘기할 뿐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없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성 '들을 위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늘 '나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

 

그는 그동안 드로잉에서부터 천 조각에 석판화를 찍는 작업, 수건으로 만든 조각 작품, 손바느질한 천 조각 등 장르와 재료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업을 해왔지만, 일관된 주제는 오랫동안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어릴 적 상처다. 

 

-신동아 매거지 ㄴ2010.08.01 통권 611호 (p512-523) 루이스 부르주아 인터뷰 중-

 

 

비록 그녀는 배신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죽는 순간까지 그를 용서하진 못했지만,.. 그 아픈 상처와 증오 뒤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결혼이 올바르고, 영원히 행복하길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이, 그 행복이... 자신에게도,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존재하길 꿈꿨다. 관계... 그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혼이란 관계가 완벽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나길 바란, 그런 여자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어찌 보면 그녀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그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 가족의... 아름답고 완벽한 가족에 대한 동경을 항상 마음에 품은 체 말이다.

 

 

 

Everyone should have the right to marry.

To make a commitment to love someone forever is a beautiful thing...

-Louise Bourgeois-

 

 

 

 

 

https://www.youtube.com/watch?v=noaDoY6fbJQ

 

 

 

 

 

 

<Insomnia Drawings>/a 1000mistakes-WordPress.com

 

 

 

여러 학교에서 판화, 조각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의 작업을 병행한 작가입니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 살롱문화를 만들어 예술가와 학생들이 자신의 작품을 가져와 부르주아(Bourgeois)로부터  무자비한 비평을 듣는 <피의 일요일>이란 살롱문화도 만들었습니다.

 

 

 

 

70세가 되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개최) 미술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된 그녀는 98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새로운 기법과 시도로 누구보다 활발하고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그녀에게 예술은 고통스러운 삶에 대처하며 깨끗한 정신을 지켜내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글을 쓰고 작품 활동에 몰두했으며 70여 년에 걸쳐 끝없이 시도하길 멈추지 않은 작가입니다. 자신의 어두운 상처와 두려움, 불안으로부터 마침내 부드럽고 고요한 '치유'의 세상을 빚어낸 사람,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정면으로 부딪쳐 돌파했고 그로써 자신과 화해하는 평온함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유칼립투스의 온화한 선을 그리기까지, 자신의 기억과 내면을 온전히 바라보기까지 그녀가 거쳤을 불면의 얼마나 길고 깊었을까 거기 침몰되지 않기 위해 강박적으로 일기를 쓰고 작업에 몰두했을 그녀를 상상하면 우리 모두의  현실적 고통과 불안이  옅어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을 것 같고요.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한 자신만의 작품으로 진실되게 관객과 소통해 온 루이스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 1911-2010). 그녀의 손이 유난히 위대해 보이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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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은퇴한 선배가 작은 아들을 데리고 1박을 하고  갔습니다. 예전 같으면 귀찮다고 궁시렁 거릴텐데, 이젠 그들을 대하는 제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선배의 지난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같은 역사가 내 삶 안으로 잠시 걸어 들어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흐트러졌던 일상을 부리나케 정리해야 했습니다. 치우고 버리고 그리고 갈무리하면서 제 일상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외부로부터 누군가 와야 긴장이 생깁니다. 알면서도 관성에 의해 못 본 척 , 아닌 척했던 살림살이를 원 위치 시켜 놓느라 부산을 떨게 됩니다. 

 

 

이제 몇 번을 서로 보고 살 지 장담할 수 없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그 쓸모를 알아가기 위해 남은 시간을 공들여 살아겠지요.  30년 넘게 '아비'노릇 하느라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엄지 척해드렸습니다.  버텨온 시간은  영광일 수도 상처일 수도 있는 흔적들을 몸에 남기죠. 선배 역시 억지로 채식주의자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좋아하던 술친구들 뒤로 하고 이제 혼자 등산을 한다고 합니다. 술이라는 매개체가 없으니 자연히 인간관계의 가지치기가 저절로 되었고요. 서로 가끔씩 오래 보는 관계로 선배의 인생 컨셉이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오늘은  시대를 거슬러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스테인(Jan Steen , 1626-1679)의 삶을 살펴봅니다. 

 

 

얀 스텐(Jan Steen)은 렘브란트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다 간 화가입니다. 렘브란트보다 20년 뒤에 태어나 그보다 10년 뒤에 죽었으니까요. 그는 렘브란트처럼 무겁고 비장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가정과 일상을 주제로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 친근한 그림을 많이 그렸지요. 인간의 심리에 대한 그의 통찰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놀라울 정도입니다. 물론 야심을 지닌 화가로서 그는 풍속 주제뿐 아니라 종교, 역사, 신화, 풍경, 초상, 정물 주제 등 회화의 거의 모든 주제와 장르에 관심을 갖고 그 모두를 넘나들었던 화가 입니다. 그러나 그를 오늘날까지 유명하게 해 주고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남은 것은 대부분 당대 네덜란드의 일상풍속을 다룬 풍속화들입니다. 네덜란드 판 김홍도 같은 화가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얀 스텐(Jan Steen)은 세태를 꼬집는 당대의 속담에 의지해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663년에 그린 <사치를 조심하라> 또한 네덜란드 속담에 기초한 그의 걸작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일이 잘 풀릴수록, 상황이 좋아질수록, 오히려 이를 경계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라는 권면을 담은 그림입니다.

 

 

 

Beware of Luxury , 1663, Kunsthistorisches Musem Wien, Vienna/wikipedia

 

 

 

 

풍족할 때 조심하라. 그리고 회초리를 두려워하라.
-네달란드 속담-

 

 

 

 

 

아수라장이 따로 없습니다. 아주 번잡해 보이는 실내에서 한 여인이 앉아 졸고 있습니다. 값비싼 반코트를 입은 그림 왼편의 여인이 그 주인공이죠. 그녀가 졸고 있는 사이, 집안은 개판이 되었습니다. 소란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요. 여인은 여전히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 모릅니다. 왼쪽 창가부터 살펴볼까요. 테이블 위의 차려놓은 음식은 개가 먹어치우고 있는 중입니다.  아기는 음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값비싼 목걸이를 가지고 놀고 있고요. 뒤쪽의 남자아이는 곰방대를 입에 물고 어른 흉내를 냅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인 듯한 남자는 화면 중앙에서 하녀와 시시덕거리며 수작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빨리 일어나라고 안주인의 어깨라도 잡아 흔들고 싶을 정도입니다. 망조가 들어도 큰 망조가 든 집안입니다.  다른 등장인물들과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 음식들, 그리고 등장한 돼지까지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된 집안의 형편을 생생히 드러낸 작품입니다.  이 그림을 그리며 얀 스텐(Jan Steen)은 염두에 둔 속담을 그림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놓인 석판에 써 놓았습니다.

 

 

 

졸고 있는 부인이나 하녀와 수작을 부리는 남편이나 다 잘 차려입었고 세간도 이만하면 잘 갖춰져 있습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집이죠.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때는 건실한 삶을 살지만 성취하고 난 다음에는 패가망신하기 쉽습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 좋은 일이 있을수록 스스로 돌아보아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 를 기울여야 하지요. 이 집은 바로 그 교훈을 잊고 있기에 이처럼 뿌리부터 허물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죠.  얀 스텐(Jan Steen)은 그 속담을 강조하기 위해 천장에 매달린 바구니에 칼과 목발을 그려 넣었습니다. 칼과 목발은 징벌의 상징입니다. 집안이 이렇게 돌아가는데도 여인이 계속 졸고 있다면 징벌을 피할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물론 징벌은 여인에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집안사람에게 뻗칠 수밖에 없죠.

 

 

 

이 그림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림의 중심이 주부라는 것이죠. 서양회화에서 주부들의 일상이 본격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한 것은 시민사회의 부상과 더불어서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이렇듯 주부들의 중요한 소재로 조명 받기 전, 유럽에서는 오로지 귀족 여성들의 화려한 이미지만이 캔버스를 수놓았습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애당초 귀부인 초상은 일반적인 주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평민 여성은 그려진다 해도 주부로서 보다는 농촌 일에 바쁜 농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려지곤 했습니다. 가정 안에서 사랑으로 아이들을 기르고 부지런히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며 때로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기도 하는 전형적인 가정부부의 모습은 도시 부르주아의 등장 없이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미지입니다. 시민 공화국을 형성한 17세기의  네덜란드에서 서양 미술사상 처음으로 주부 주제가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자상한 어머니만큼 가정의 행복을 위해 중요한 존재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자연히 주부의 덕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졌지요. 물론 이런 의식은 당시의 네덜란드를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데 적지 않게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안에 다소 가부장적인 편견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치를 조심하라>의 바람을 피우는 남편에서 보듯 집안의 문제에는 남편의 잘못도 큰데, 그 모든 원인이 아내에게 있는 듯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zJlu2Q4kSg

 

 

 

 

 

 

플래그 네덜란드지도,레이덴(Leiden)/123RF

 

 

 

https://www.youtube.com/watch?v=YLDe6uMr5o4

 

 

 

 

 

얀 스테(Jan Steen)은 레이덴(Leiden)에서 잘 나가는 양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제가 몇 명이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8명 이상 되었던 듯합니다. 그래도 집안이 유복한 편이었기에 라틴어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이후 위트레흐트에서 독일인 화가 니콜라우스 크뉘페를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얀 스텐의 독특한 구성과 색채는 무엇보다 크뉘퍼에게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큽니다. 크뉘퍼 외에 농촌 풍속을 즐게 그린 오스타데 형제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1648년 유명한 풍경화가 얀 판 호이옌의 조수가  되었다가 이듬해 호이옌의 딸과 결혼합니다. 이런 밀접한 관계로 인해 장인인 호이예와는 네덜란드의 미술시장이 침체되는 1654년까지 줄곧 협업을 했습니다. 얀 스텐(Jan Steen)이 해학과 유머가 넘치는 풍속화를 그리게 된 바탕에는 무엇보다 가업 등 집안 배경이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조부에 이어 2대째 양조업을 했고, 얀 스텐 또한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으나 한때 양조업을 했습니다. 당시 양조업을 하노라면 보통 선술집도 같이 운영하게 되는데, 어릴 때부터 선술집 풍경에 익숙했던 그로서는 그곳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후에 야조장과 선술집 대신 여관을 운영해 가정 경제를 보완했습니다. 여관 또한 선술집 못지않게 인간을 관찰하는데 그만인 곳이었죠.

 

 

 

 

 

Prayer before a Meal/Jan Steen, 1660/wikipedia

 

 

 

한 가정이 식사전 빙 둘러앉아 감사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금처럼 음식이 넘쳐나  오히려 단식을 통해 인위적인 조절을 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복이었죠. 비록 흰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이 빵과 버터 그리고 끓고 있는 수프가 전부인 소박한 상차림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두 손을 모으고 가족이 올리는 감사기도가 위에서 보시기 기특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하는 마음만큼 귀한 것도 없을 테니까요. 이 와중에  테이블 아래 강아지는 빵 부스러기라도 떨어질까 싶어 기다리는 모양입니다. 개한테까지 돌아갈 빵 부스러기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요람 속에 고이 잠든 아기의 모습, 촘촘하게 짜인 요람형태 바구니가 집에 하나 있었으면 할 정도로 탐이 납니다.  모자를 벗고 위를 향해 드리는 진지한 기도, 아가의 고사리 손으로 드리는 기도,  안주인의 두 손가락을 마주 모은 기도, 가장의 두툼한 손을 모은 기도 등 기도의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이들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등을 돌린 채 가족의 맛난 수프를 끓이고 있는 여인의 바쁜 손놀림, 그 사이 삐집고 들어온 붉은 화덕의 온기가  단출한 집안의 차가운 공기를 따뜻하게 덥히는 것 같습니다. 

 

 

 

 

<Country Wedding>,1662-1666/wikimedia Commons

 

 

 

 

 

 

아주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골 결혼식 피로연 풍경입니다. 그림 맨 왼쪽의 두 남녀는 좀 진한 애정 표현 중입니다. 남자가 나이든 걸로 봐서는 썩 유쾌한 관계는 아닌 것 같고요. 어린 소녀는 할머니에게 음료수를 가져다줍니다. 아니면 춤추는 두 남녀의 모습에 넋 놓고 계시는 할머니 것을 슬쩍 빼앗아  가는 것일 수도 있고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동작이 신이 나야 분위기가 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나 봅니다.  의자 위로 올라간 걸 보면 말입니다. 그 옆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미 술이 거나한 모습들입니다. 오랜만에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죠.  안부를 전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다락방에 있는 사내에게도 음식을 전달하기 위해 아주머니는 잘 굽혀지지 않는 몸을 힘껏 뻗고 있습니다. 춤을 추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어렵게 무대로 끌려 나오다시피 한 아주머니가 수줍은 듯 그러나 싫지 않은 듯 남자의 발재간에 자신도 스텝을 옮겨 봅니다.  '나는 잘 못하는데~ '하는 표정입니다만 혹시 모르죠. 그녀가 퀸카 일 수도 있을지.. 조금 뒤가 궁금해집니다. 그나마 초대받지 못한 아이들은 창 밖에서 멍하게 보는 것 이외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오래간만에 강아지도 뼈다귀와 인간들 흥 구경에 넋을 놓고 있네요. 자리를 제대로 잡았는데요.

 

 

 

 

Twelfth -Night Feast, 1662/wikimedia commons

 

 

 

 

12절은 우리에게 낯선 이름입니다. 크리스마스로부터 12일 째 되는 날을 말하는데, 대개 1월 6일입니다. 이 날이 의미가 있는 것은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만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죠.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이날 와플을 먹었다고 합니다. 식탁에 빙 둘러 않은 사람들의 표정이 유쾌합니다. 가운데 켜 놓은 촛불을 등을 보이는 사람이 막고 있어서 입체감이 더 커졌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 자리에 참석한 듯합니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아이는 아이들끼리 그렇게 아기 예수가 세상에 도착하였음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의사의 왕진 The Physician's visit, 1658-1662/wikipedia

 

 

 

아픈 여인을 위해 의사가 왕진을 왔지만 분위기는 별로 심각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프다는 환자나 맥을 짚고 있는 의사나 표정이 묘합니다.  아마 여인이 앓고 있는 병은 상사병일 것입니다. 상사병에 별 다른 약이 없지요. 하녀가 들고 있는 노란색 액체가 든 유리 병이 '상사병'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고 해요. 애가 탄 하녀는 표정이 어둡지만 죽을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의사는 차마 상사병이라는 말을 하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더구나 의자 뒤에 앉아 있는 활을 든 꼬마의 모습은 큐피드를 떠올리게 합니다. 

 

 

 

 

 

Rhetoricians at a Window, 1658-1665,Philadelphia Museum of Art/ Wikimedia

 

 

 

얀스텐(Jan Steen)이  연극을 좋아했던 것도 '인간 극장'을 즐겨 그린 그의 중요한 자양분이 되어주었습니다. 그가 연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수사학회 멤버들을 자주 그렸던 데서 잘 드러납니다. 네덜란드의 수사학회 (Chambers of rhetoric)는 극회로 , 그 멤버들을 수사학자(Rederijkers, 영어로 Rhetoricians)라 부르던 데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습니다. 이들은 연극과 서정시에 주로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도시의 권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공공 집회에서 도시 홍보의 일환으로 시를 낭송하고 연극을 공연하곤 했습니다. 연극에 대한 얀스텐의 이런 호감은 그의 그림이 일종의 연극적 전개로 표현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풍속화적인 주제와 연극적인 표현은 매우 잘 어울리는 것이어서, 그 적절한 조화를 이룬 그의 그림은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드 놀이가 끝난 뒤의 싸움 Argunent over a Card Game, 1664-1665/ Alamy

 

 

 

 

카드놀이가 끝났지만 두 사람은 참지 못하고 서로의 무기를 빼 들었습니다. 바닥에 나 뒹구는 카드와 그릇을 보니 누군가 놀이판을 뒤집은 모양입니다. 두 사람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가 됩니다. 왼쪽의 사내는 옷도 그럴듯하고 칼을 찼습니다. 아이와 여인이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필사적으로 말리고 있고요. 반면에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은 비록 송곳 정도의 작은 칼을 들고 있지만 아주 강해 보입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앉아 있는 사람에게 서 있는 사내가 당한 모양입니다. 오른쪽 구경하는 사람들은 이런 광경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들입니다. 자기보다 배운 것이 없을 것 같아서 깔보았다가 아주 심하게 당한 모습입니다. 

 

 

 

 

<The happy family>,1668, Rijksmuseum,Amsterdam/wikipedia

 

 

 

 

 

어른들이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도 재잘댄다.
-네덜란드 속담-

 

 

 

 

 

얀 스텐(Jan Steen)의 또 다른 걸작인 <즐거운 가족>도 속담에 의지한 작품입니다. 온 가족이 왁자지껄 음악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격식을 갖춘 공연은 아니지만, 세상 그  어느 공연보다 흥이 납니다. 할아버지는 술잔을 높이 치켜든 채 노래를 부르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함께 악보를 보며 정답게 음정을 맞춥니다. 아빠와 아들도 백파이프와 피리 연주에 깊이 빠져 있고요. 그런데 그 와중에 어린아이들은 딴짓을 합니다. 심지어 담뱃대를 빠는 아이도 있고요. 여자 아이들은 술 따르는 시늉을 하고 한 잔 받아 먹는 소꿉놀이 중인가요? 쟁반과 숟갈 등이 바닥에 떨어져 난장판이 되었지만 그것에 신경을 쓰는 가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장단을 맞추는 이 시간이 그저 즐겁고 행복할 뿐이죠. 그림 오른쪽 상단에 속담이 적혀 있습니다. 

 

 

 

아래 세대는 윗세대를  따라 하기 마련이죠.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우리 속담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속담이라하겠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어른이 먼저 본을 보이는 게 중요하지요. 그림에서 어른들이  저렇게 인생을 즐겁게 사니 아이들도 장차 삶을 유쾌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먼저 즐겁게  놀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죠. 이 그림에서처럼 바닥이 어지럽혀져 있고 심지어 아이가 담뱃대를 들고 있는 복썽사나운 모습까지 연출된다면  자칫 삶을 낭비하는 잘못된 습관을 길러줄 수 있습니다. 인생을 즐기되  그것이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얀 스텐(Jan Steen)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그림입니다.

 

 

 

 

Celebrating the Birth, 1664, Wallace Collection,London.UK/WahooArt.com

 

 

 

 

가정을 주제로 한 얀 스텐(Jan Steen)의 그림들 가운데 1664년 작품 <아기 탄생 축하 Celebrating the Birth >입니다. 방금 산모가 해산을 한 산실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당연히 대부분 여성들이죠. 화면 왼편 뒤쪽으로 이 사건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산모가 침대에 누워 죽을 받아먹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주 작게 표현되어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그 앞으로 친척과 하녀로 보이는 여성들이 방금 전까지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덜려는 듯 식탁 주위로 모여들어 술과 음식을 나누려고 합니다. 물론 이 축복의 자리에는  남성도 함께 하고 있고요. 대표적인  인물이 아기를 안고 있는 아기의 아버지 입니다. 그는 화면 중심에서 약간 오른쪽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그림에서는 보통 아기 엄마가 조명을 받는데, 이 그림에서는 오히려 아기 아빠가 크게 부각되어 있습니다. 화가는 왜 이렇게 구성했을까요?

 

 

 

 

그  열쇠를 쥐고 있는 이가 아기 아빠 왼쪽에 그려진 남성입니다. 지금 방에서 살금살금 밖으로 나가려 하는 그는 아기 머리 위에 특이한 제스처로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입니다. 언뜻 보면 'V'자 같기도 하고요. 젊은 이의 이 손짓은 아기의 아버지가 오쟁이 진 남편 , 곧 '부정한 아내'를 둔 남편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기의 탄생으로 누구보다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남자가 실은 진짜 아버지가 아니며, 어리석게도 그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갓난아기의 아버지 치고 남자는  꽤 나이가 들어 보입니다. 그는 어린 여자와 결혼해 이렇게 노년에 손자 같은 아기를  품에 안게 되었지만 , 실은 그가 성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을 화가는 그림 여러 곳에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이를테면 그림 왼편  바닥에 놓여 있는 온열 팬은 이 부부의 침대를  덥히는 게 두 사람의 뜨거운 육체가 아니라 바로 이 팬뿐임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른편 벽난로에 소시지가 축 늘어진 형태로 매달려 있는 것도 남자의 성적 무능력을 상징하는 이미지입니다. 이렇게 오쟁이(자기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다) 진 남편이 되었음에도 그는 그 '출생의 비밀'을 까맣게 모른 채 그에게  수고비를 달라는 산파와 요리하는 여인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돈을 꺼내 주려 합니다. 이 그림이 이런 유머에 실어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이 무렵 나이 든 남자가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자와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대부분 정략결혼이죠. 이처럼 돈이나 욕심을 앞세운 결혼은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하게 만든다는 거죠. 좋은 가정을 이루려면 먼저 헛된 욕심을 버리고 여러 가지 면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짝을 찾는 게 우선이라고 충고합니다. 

 

 

 

 

소년과 소녀들을 위한 학교 A School for Boys and Girls,1670/Wikimedia Commons

 

 

 

 

 

이곳이 교실 맞습니까? 난장판이 따로 없습니다. 교실은 분명한데 공부를 하는 녀석은 몇 안되고 완전히 놀이판의 모습입니다. 어제 밤 뭘 했길래 잠을 자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책상 위에 올라가 듣던 말든  노래를 부르는 모습 같기도 하고, 아니면  "선생님, 제네 싸워요."하고 이르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끼리끼리 어울려 놀이에 빠진 아이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남자 선생님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딴청을 피우시네요. 권위가 옷차림에만 있는 건 아닐 텐데 말입니다. 여 선생님은 그 와중에도 아이를 가르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소란스럽고  어지럽지만 그 안에도 학업열 불타오르는 영민한 아이들은 있을 테니까요.  나이 성별 차이 없이 한 교실에서 함께 부딪끼며 배운 모습입니다. 무엇에도 얽매임이 없는 아이들의 에너지와 호기심이  얀 스텐(Jan Steen)의 그림을 살려냅니다. 

 

 

 

 

 

 

 

The Severe Teacher, 1668/ PubHist

 

 

 

 

 

"이 녀석 이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지!"

아이의 손은 벌써 눈가에 가 있습니다. 더듬거리며 읽는 아이 뒤에 서 있는 여자 아이는 이미 겁에 질렸습니다. 맨 앞에 앉은 아이는 여유있어 보입니다. 선생님 테스트에 패스했나 봅니다. 궁둥이 붙이고 앉은 자세가 훨씬 여유로워 보여 말이죠. 스테인 작품 속에는 특히 아이들의 표정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미 당대의 렘브란트 다음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작품 가격도 비교적 높았다고 합니다. 

 

 

 

Netherlands Map/ wikipedia in interlingua

 

 

https://www.youtube.com/watch?v=MBTx1WKNUh8

 

 

 

 

 

 

 

1648, 스텐은 헤이그에 있는 스승 호이옌의 집으로 이사합니다. 그리고 호이옌과 함께 작업을 합니다. 1649년 , 스물 세 살이 되던 해, 그는 호이옌의 딸 마그리트와 결혼합니다. 둘 사이에 여덟 명의 아이를 두었다고 합니다. 스테인은 1654년까지 호이옌과 함께 작업을 하다가 델프트로 이사를 합니다. 

 

 

 

 

 

결혼 계약 Marriage Contract, 1668/ Web Gallery of Art

 

 

 

 

결혼은 기쁘고 즐거운 것이어야 하는데, 벌어진 상황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습니다. 무릎을 끓고 신부를 간청하는 남자는 평판이 좋지 않은 귀족이거나 동네의 돈 많은 유지겠지요. 호시탐탐 이 집 아가씨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중매쟁이를 세워 결혼에 이르게 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 결혼이 못 마땅한 아버지는 신랑에게 주먹을 쥐어 보입니다.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아비를 곁에 있는 여인이 다독입니다.   딸아이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슬픔 그 자체입니다. 뻔히 알면서도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 보입니다.  반면 계약서를 작성하는 사람이나 문을 열고  너스레를 떨며 들어오는 남성의 입가에 벌써 미소가 걸렸습니다. 이 가정에 닥친   황당한 사연은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델프트 폭발 사고로 미술 시장은 급격하게 축소됩니다. 그래도 생계는 중요해 양조장을 빌려 2년간 운영했지만 별 재미는 보지 못했습니다. 양조장을 접은 스테인은 다시 라이덴으로 이사를 가서 4년간 살다가 하를렘으로 옮겨 10년 간 머뭅니다. 라이덴괴 하를럼에서 사는 동안 스테인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합니다. 

 

 

 

The Doctor and His Patient/ wikimedia commons

 

 

 

 

 

 

스테인은 의사와 환자를 소재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 작품은  여성 환자의 맥을 짚고 있는 의사의 모습인데, 작품마다 담고 있는 내용은 조금씩 다릅니다. 작품 속 여인의 얼굴은  웃고 있어 환자 같지 않습니다.  여인은 지금 임신중이거든요.  한의사가 맥을 짚듯  17세기 네덜란드 의사들도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환한 여인의 얼굴이  이해가 되고요. 집안에 경사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The Village Schol, 1670, National Gallery of IREAND

 

 

 

스승과 제자의 사랑, 김 홍도 그림 <서당>/우리문화신문

 

 

 

김홍도의 그림으로 치자면 훈장님이 곰방대가 아닌 숟가락 같은 무기로 아이를  혼내시는 중입니다.

 

"손바닥 이리내!"

선생님 말씀에 벌써 부터 우는 시늉을 합니다. 녀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시험지에 이런 낙서만 잔뜩 해 놓았군요. 녀석은 상습범인가 봅니다. 엉엉 대고 우는 모습이 아니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눈치거든요. 그 걸 알고 있는지 옆에 소녀의 표정은 '아이, 셈통이다.'뭐 이런 표정입니다.  보고 있던 꼬맹이 표정이 사뭇  심각합니다. 안쓰럽게 바라보는 걸 까요? 까만 눈에 통통한 볼살이 아주  귀엽습니다.  깨알 같은 글씨를 읽고 있는지 모자를 푹 눌러쓴 녀석  혼날까 봐 마음이 바쁩니다. 그 뒤에 머리 하나 큰  아이는  비상입니다.  친구 매 맞는 모습이 남 일 같지 않거든요. 엎드려 답안지를 고치는 녀석도 있고. 아무튼 큰 시험이든 작은 시험이든 '시험'은 항상 불친절합니다.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니까요. 

 

 

 

 

연회 The Bean Feast( Driekoningenfeest), 1668/wikipedia

 

 

 

 

<Bean-feast>는 1년에 한 번 고용주가 한 턱 내는 것을 말합니다. 가운데 앉은 두 남녀가 오늘 연회를 열어 준 주인집 부부입니다.  흥이 오른 사내가 '개인기'를 선 보이고 취기가 오른 여인은 이미 온 몸을 의자에 맡겼습니다. 여전히 술병은 손에 쥔 채로 말입니다. 그 모습이 우스운지 개가 물끄러미 사내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악사는 연주보다 저 자리에 편안히 앉아 동료들과 음식을 먹고 싶습니다. 들어오는 음식에 눈길이 멎는 걸 보면 말입니다. 왜 아니겠어요.  이런 자리는 고단한 사람들에게 기름기 들어간 음식 한 번 실컷 먹어볼 수 있는 손꼽아 기다린 날 아닙니까.  주인집 부부가 감탄하고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니 남자의 개인기는 오늘 성공한 것 같습니다. 

 

 

 

 

 

 

 

 

 

Leaving the Tavern/wikiMedia Commons

 

 

술집 앞 풍경은 어디나 비슷한가 봅니다. 한 무리의 남녀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며 쏟아져 나옵니다. 한 남자는 이미 뱃전을 잡고 비몽사몽 잠에 골아 떨어진 지 오래이고요.  운하를  운행하는 배에 오른 사람들은 술 한 통 사들고 오는 남성을 보자마자 환호성을 지릅니다. 나무 밑에 자리를 잡은 여인은 이미 술에 취해 잠이 들었습니다. 붉은 천 위에 앉은 남녀는 남은 이야기를 나누느라  표정이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혼자 노는 저 아이는 도대체 누구 집 아이죠? 떠들썩한 소리에 개까지 컹컹 짖으며 한 수 보탭니다. 나무 뒤편으로 카드놀이를 하는 한 무리의 남자들도 보이고 내려다보며 훈수 두는 남성도 보이네요.  창문 너머로 이 모든 것을 넘어다 보는 여인도 보입니다. 그녀 눈에 그들은 한심한 남자들일까요? 아니면 한몫 잡고 싶은 남자들일까요? 술집이 매력 있는 이유는 마음을 무장 해제 시키는 까닭이겠지요. 그림 속  이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어떻게 관찰했는지 작가의 섬세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네덜란드 하를렘(Haarlem)/pinterest

 

 

https://www.youtube.com/watch?v=nbBy2uvdNvA

 

 

 

 

 

 

 

인간 삶의 불행은 항상 연달아 옵니다. 1669년 하를렘(Haarlem)에서 사는 동안  스테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납니다. 또 그 해 스테인은 약국을 갖게 되면서 10 플로린(네덜란드 은화의 단위)이라는 얼마 되지 않은 부채를 지게 되는데, 빚을 못 갚았는지 그림을 압수당하고 경매에 넘겨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 스테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1670년 스테인은 자신의 고향 라이덴으로 다시 이사를 합니다. 

 

 

 

 

 

성 니콜라우스 축제 The Feast of St. Nicholas , 1665-1668, Rijksmuseum , Amsterdam/wikipedia

 

 

 

 

 

 

성 니콜라우스는 오늘 날 산타클로스의 모델이라고 여져지는 인물입니다. 그를 기리는 축제가 성 니콜라우스 축제입니다. 당연히 오늘날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가져다주실 거라고 아이들은 기다리고 있었겠지요. 선물을 받은 여자 아니도 있고 그렇지 못한 아이는 울음보가 터졌네요. 벌써 알고 커튼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 있는 뒤쪽 여인의 모습도 눈에 들어옵니다. 한 젊은 아버지는 아마 저기 저 굴뚝을 통해 내려오셔라고 하시는지 아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합니다. 

 

 

 

 

 

 

 

라이덴(Leiden)으로 돌아 온 스테인은 1672년 선술집 허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달갑지 않은 일이 발생합니다. 소위 '재난의 해'라고 말해지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의 네덜란드 침공이 있었습니다. 이 사태로 인해 모든 예술과 관련된 가계와 극장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스테인은 1673년 서적상의 미망인이었던 에그문트와 재혼합니다. 둘 사이에 역시 아이가 하나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 자신이 창립 멤버였던 라이덴의 성 루카 길드의 회장으로 선출됩니다. 그리고 1679년  53세의 나이로 고향인 라이덴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당대 렘브란트를 제외하고 모든 네덜란드 화가들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평을 받은 화가로 말입니다. 

 

 

Leiden, Hague, Delft,Haarlem으로 이곳저곳 이사를 다녔던 얀 스테인(Jan Steen). 새로운 스타일을 끝없이 추구했던 그에게는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천성이 밝고 사교적이라  여러 화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의 작품의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중 아마 가장 즐거운 화가였을 것이라는 말도 있고요. 그의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을 받는  풍속화가  그를  더 인간적 가깝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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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6 - [지식&교양] - 50-95.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t Harmenszoon van Rijn,57)

 

50-95.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t Harmenszoon van Rijn,57)

17세기 유럽 역사의 주인공은 네덜란드였습니다. 동인도회사를 통한 국제무역과 금융의 융성으로 돈이 넘쳐났거든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 던 암스테르담에 네덜란드 독립과 함께

sun-n5y2.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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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도시 피렌체. 르네상스 시대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피렌체. 피렌체라는 인류의 문화 콘테츠가 탄생하게 된 것은 정복자 줄리어스 시저 덕분입니다.  그는 기원전 59년 이곳 피렌체를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들면서 아르노 강가의 이 작은 마을을 "꽃 피는 마을"이란 뜻의 "플로렌티아"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후로 플로렌스는 변방의 마을로 지속되어 오다가 14-15세기에 이르러 도시국가 피렌체 공화국으로 탄생합니다. 피렌체 공화국에는 강력한 메디치 가문이 있었습니다.  메디치가의 정예군 검은 군단은 일대를 휩쓸며 이 일대를 코스카나 공국으로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피렌체는 그 수도가  되었습니다.

 

 

 

3명의 교황을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ser Pier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를 필두로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 모두 메디치가의 후원 아래 수많은 작품을 피렌체에 남겼습니다. 이 시기가 사실상 피렌체의 황금시대입니다.  

 

 

 

 

오늘 살펴 볼,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hllini, 1500-1571))는 1500년 11월 3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조반니 첼리니( Giovanni Celini )는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음악가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웠지요. 실제로 유명한 플룻 연주자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에서 활동할 때에는 플룻으로 유명해져 교황 직할 연주단에서 플룻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그는 금세공사인 안토니오 마르코네 디 산드로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피렌체인들은 첼리니를 그들의 자랑스러운 금세공의 원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피렌체의 오래된 다리 양쪽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은방들이 들어선 폰테 베키오에(Poner Vecchio)는 첼리니(Celini)를 기념하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Fx2lmnrr8g

 

 

 

 

 

 

 

 

Cellini Salt Cellar, 1543,26cm*33.5cm/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GY8ymP-1Eck

 

 

 


1543년 프랑수아 1세를 위해 황금 소금통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았고요. 조각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살리에라( Saliera )황금 소금통은 높이 가 고작 26cm 밖에 안 되는 작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 섬세함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대단한 작품입니다. 살리에라는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금세공 기술의 끝을 보여주는 걸작 중에 걸작으로 꼽힙니다. 이 작품은 2003년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hes Museum)에서 도난을 당했고 2006년 다시 찾게 됩니다. 

 

 

 

 

이 금세공의 초상의 작품인 소금 그릇의 제작동기와 디자인의 상징적인 의미, 그리고 완성하는 과정 등의 설명이 자세하게 그의 자서전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의  프랑스 체류는 왕의 애첩의 질투와  갈등으로 1545년  퐁테블루의 작업을 미 완성한 채 피렌체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틸리아 /몽트래블 유럽 여행

 

15살때 금세공술을 배웠습니다. 단 1년 만에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피렌체에서 유명해집니다. 작품 실력이 아니라 친구들과 난동을 부리다가 잡혀서 유명해졌습니다. 그렇게 약 6개월간 시에나( Siena)로 도망을 갔습니다. 프란체스코 카스트로 밑에서 도제생활을 했고요. 프라카스트로(Fracastoro)라는 가명으로 금세공 일을 했습니다.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볼로냐( Bologna)로 옮겨 활동했고 그곳에서 플룻과 금세공사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피사( Pisa)로 옮겼다가 다시 로마로 옮겼습니다. 이 모든 일이 그가 20살이 되기 전의 일입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이탈리아 북부를 다 쓸고 다녔다는 얘기죠.

 

 

 

로마에서  첼리니는 귀족 가문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훌륭한 플루트 연주자였던 그는 궁정 음악가로 임명되어, 교황 클레멘트 7세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첼리니는 특히 교황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1527년 로마 방어 전투에 참가하여 침략자인 부르봉의 공작 카를 3세를 사살한 그의 용맹성이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입니다. 첼리니는 곧 피렌체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교황이 그의 공로를 인정해 포상으로 두루 여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좋은 직장을 찾아 로마로, 페라라로 만투아로 베네치아로 프랑스의 퐁텐블로로 옮겨 다녔다는 얘기입니다. 교황 클레멘테 7세와 바오로 3세, 프랑스의 프랑스와 1세와 수없는 추기경들과 군주들을 찾아 57세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타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타향살이가 그의 출세하려는 야심과 동시에 전염병과 전쟁을 피하려는 방편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Leda and the Swan/wikipedia

 

 

 

 

Cellini's Medal portrait of Clement VII and morse, 1534/wikipedia

 

 

 

 

Clement VII medallion/wikipedia

 

 

로마에서 내려온 20살 의 벤베누토 첼리니(Benveuto Cellini)는 은세공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주로 촛대 등 작은 소품으로 시작해 귀족 집안의 황금 레다와 백조 메달 작업을 하는 등 그의 실력과 명성은 금방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황 클레멘스 7세 (Clement VII)와 바오로 3세( Paul III ) 아래에서 교황의 초상이 들어간 메달과 동전 및 각종 보석 작업을 맡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세공 실력은 당시 유럽 최고였습니다. 

 

 

 

 

첼리니는  일생동안 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샤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강점했을 때 (1527)그는 교황 클레멘테 7세가 피난해 있던 산 안젤로 성곽에서 임시 차용당한 대포의 사격수로 생명을 걸고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전쟁자금이 필요했던 교황 클레멘테는 첼리니를 불러 그 성곽에서 교회의 삼중관의 보석들을 떼어내어 감추고 금들을 녹이게 할 만큼 그를 신뢰했습니다. 1534년 발생한 그의 경쟁자인 폼페이오 데 카프티네이의  살인사건과 로마 강점시대에 교황 클레멘테의 보물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1538년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무죄를 주장한 자서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 당시의 취조 문서가 발견되어 증명되었습니다. 

 

 

 

 

첼리니는 아이러니칼하게 이 사건과 모략 때문에 자기가 교황청을 방어한 바로 그 산 안젤로 성곽의 동굴에 교황 바오로 3세에 의 해 감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높은 성곽에서 다리를 부수면서까지 대담하게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러다 다시 체포되어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석방되었습니다. 그가 더럽고 햇빛도 들지 않는 동굴 감옥에서 겪었던 고통 속에서 신앙적으로 그는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아틀라스/ 위키백과

 

 

 

벤베누토 첼리니는 다시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서 세공사 일에 전념합니다. 이 시기의 걸작은 헤라클레스와 네메아의 사자입니다. 네메아의 사자는 그리스 신화 속 네메아 골짜기에 살고 있는 불사신으로 영웅 헤라클레스가 아폴론 신에게 받은 12가지 과업 중 첫 번째 임무를 담은 작품입니다.

 

 

 

또 다른 한 점은 천구를 지고 있는 아틀라스입니다.  아틀라스는 티탄(Titan)신족의 하나로, 크로노스의 형제 중 한 명인 이아페토스(lapetos , 힘의 신)의 아들입니다. 제우스와는 사촌 지간이죠.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을 위시한 새로운 올림포스의 신족들과, 원래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티탄 신족들 간의 싸움인 티타노마키아에서 티탄 신족은 패배합니다. 그 이후 제우스에 대항했던 티탄 신족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봉인 (주로는 지하 세계인 타르타로스에 갇히게 되었죠)되거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일부 티탄 신족들은 일찌감치 제우스 편을 들어 무사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아틀라스는 대부분의 티탄 신족들과 마찬가지로 제우스와 맞서 싸웠기에 패배에 대한 벌을 받게 되었고, 그가 받은 형벌은 하늘을 떠받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조각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아틀라스의 왼쪽 무릎에 피라미드 지지대를 놓은 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탈리아 /나무위키

 

 

 

 

 1529년 ,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동생 체치노(Cecchino)가 교황 경비대원을 죽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역시 병사의 총에 맞아 상처가 심하게 났고  결국 체치노 역시 죽게 됩니다. 그런데 벤베누토 첼리니는 이 소식을 듣고 쫓아 내려가서 동생에게 총을 쏜 병사를 찾아가 살인을 하게 됩니다. 체치노에게 총을 쏜 병사는 자기 방어로 발사를 했는데 말이죠. 이렇게 쫓기게 된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교황청 관할구역 밖인 나폴리 공국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가는 중에도 작은  사고를 많이 쳤는데 새로운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사면이 됐습니다. 이 정도라면 조용히 살아야 할 텐데 또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이번에 라이벌 세공사 폼페오 (Pompeo)를 살해한 것입니다.

 

 

 

 

1540년 새 교황 바오로 3세의 호의로 사면을 받게 됩니다. 석방된 첼리니는 프랑스와 1세(Francis I)의 초청으로 파리와 퐁텐블로 에서 작품을 만들어 명성을 얻습니다.  당시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받았던 것과 같은 높은 보수와 성을 거처로 받았고요. 그는 왕이 자주 찾아와 작품들을 보려고 할 정도로 높은 신망을 얻는 조각가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작은 크기의 세공 작품이지만 조각도 틈틈이 했습니다.  건축 작업으로는 파리 남쪽의 퐁텐블로 성 (Chateau de fontainebleau)이 걸작으로 남아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rwVLiVjhNg

 

 

 

 

 

 

 

 

 

 

Nymph of Fontainebleau, bronzw, by Benvenuto Cellini, 1542-1543(205*409cm)/wikipedia

 

Close-up view of the original broze by Cellini

 

 

 

 

 

 

 

 

 

 

 

https://www.youtube.com/watch?v=BhxD0JTXoKY

 

 

 

 

 

 

벤베누토 첼리니의 또 한 점 걸작은 퐁테블로 요정 청동 부조입니다. 요염한 자세로 누워있는 요정은 마치 침대에 누워있는 티치아노와 다른 거장들의 비너스와 비슷한 포즈로 배경 아치 중앙 상단의 뿔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1540년,  '프랑수아 1세의  왕실로 초청되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만든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퐁텐블로 궁전' 정문에 올릴 거대한 청동 '팀파늄 Tympan' 주조상이었죠.

 

 

 

 

하지만, '프랑수와 1세'의 아들 '앙리 2세 Henri II가 왕위에 오르자, 엉뚱하게도 왕의 정부이던 '디안느 드 뿌와띠에 Diane de Poitier'의 소유지 '아네 성 (Chateau d'Anet)'에 세워집니다. 왕궁에 있던 물건이 왕의 정부가 거주하던 성의 장식으로 쓰이게 된거죠.  프랑스 대혁명이 진행되던, 1797년 '루브르 박물관'으로 들어오게 되고 현재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를 보고 계단을 올라가노라면 볼 수 있습니다. 

 

 

 

 

 

 

 

 

 

 

Seal of Cardinal Ippolito d' Este,1540, Musee des Beaux-Arts, Lyon/Wga.hu

 

 

 

 

그 외에 이폴리토 데스테( Ippolito d'Este )추기경의 의뢰로 만든  은 조각상 12개의 신과 여신은 또 하나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Benvenuto Cellini Satyr;Description of the artwork/Arthive

 

 

Benvenuto Cellini,<A Satyr>,1544-1545/Album online

 

 

 

 

 

 

 

 

 

 

 

<Statue of Cellini,Piazzale degli Uffizi, Florence>/wikipedia

 

우피치 미술관에 서 있는 벤베누토 첼리니의  모습입니다.

 

 

이후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메디치가 의 코시모 1세를 위해 일합니다. 청동상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1545-1554)를 제작하고요.

 

 

 

 

 

 

 

 

 

 

<Perseus with the head of Medusa>,1545,Bronze/Flickr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Perseus with the Head of Medusa), 페르세우스는 사람을 돌로 변하게 만드는 뱀 머리를 가진 괴물 메두사를 퇴치한 영웅입니다. 회랑 안에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상'이 보입니다.   단연 압도적인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애제자 답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1j-gPKAcDA

 

 

 

 

 

 

 

1545년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돌아와 코시모 메디치( Cosimo de'Medici) 아래서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의 조각상이 모여 있는 로자 데이 란치( the Loggia dei Lanzi)에 코시모 메디치의 청동상과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는 그의 조각 실력 역시 거장 급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직접 용광로를 건설하였습니다.

 

 

 

첼리니가  고향 피렌체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로마에서 일하던 미켈란젤로를 고향으로  데려오려던 그의 노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죽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미켈란젤로의 장례식에 칠레니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회화계를 대표하는 바사리와 조각계를 대표하는 첼리니가 장례식의 절차와 장소로 의견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첼리니는 조각가로서의 미켈란젤로를 추념하기를 원했으나 바사리가 자신의 주장대로 관철했기 때문이죠. 

 

 

 

 

<가니메데스Ganymede>,1547, Broze,Muse Nazionale del Bargello,Florence/Wga.hu

 

 

 

독수리를 탄 트로이의 미 소년 , 가니메데스(Ganymede)입니다. 브론즈로 만들어진  높이 62m 작품으로 피렌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니메데스(Ganymedes)는 트로이의 왕 트로스(Tros)와 칼리로에(Calirrhoe)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중 한 명으로, 일로스(llus)와 아사라코스(Assaracus)가 그의 나머지 형제들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 (Homeros)에 따르면 가니메데스는 필멸의 인간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미남이었다고 합니다. <일리아스(llias)와 대결하게 된 트로이의 왕족 아이네이아스(Aeneas)가 자신의 혈통을 자랑하며 읊어 내려간 조상들 가운데 가니메데스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등장합니다.

 

 

신들이  가니메데스를 제일 잘 생겼다는 이유로 데려간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12 신들에게는 그들의 먹는 음식 암브로시아 (Ambrosia)와 음료 넥타르(Nectar)를  시중 들어줄 이가 필요했습니다. 신들의 식생활을 담당하는 이 중요한 임무는 이전까지 젊음의 신 헤베(Hebe)가  맡고 있었죠. 그런데 헤베는 마침 불사의 몸이 되어 천상으로 올라온 헤라클레스(Heracles)와 전격 결혼을 하면서 (혹은 발목을 다치게 되면서 ) 일을 그만두게 됩니다. 공석이 생긴 것이죠.

 

 

 

이에  신들은 이 임무를 맡길만한 이를 물색하던 차에 제우스의 강력 추천으로 가니메데스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제우스는 트로이 출신의 아름다운 왕자 가니메데스에게 일찌감치 매료되어 있었거든요. 신화 기록가들에 따라 제우스가 그를 데려온 과정은 조금씩 다르게 묘사됩니다. 신의 본모습으로 직접 내려가서 데려왔다는 설도 있고 또는 신조인 독수리를 보내서, 혹은 독수리로 변해서 이다 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가니메데스를  낚아채 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가니메데스는 천상에 올라와 헤베로부터 술잔을 넘겨받음으로써 신들의 , 그중에서도 특히 제우스의 음식 식사 시중을  드는 이가 되었습니다. 

 

 

 

초기의  신화가 대체로 헤베를 대신해 신들의 식사와 음료를 나르는 임무를 맡게 된 가니메데스의 일화를 언급하고 있다면 후기로 갈수록 점차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가니메데스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이들이 동성애적 코드가 부각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 시대에 활동한 그리스 출신의 작가 루키아노스 (Lukiano)는 <대화편(Dialogi)>에서 제우스의 가니메데스에 대한 사랑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헤라의 입장을 실감 나게 서술한 바 있습니다. 훗날 트로이 전쟁에서 헤라가 그리스 군의 편을 들어 가니메데스의 조국인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데에 일조한 것은 이러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헤라의 거센 반대와 지탄에도 불구하고 제우스는 자신이 데려온 소년의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불멸의 암말 두 필, 또는 포도나무 한 그루를 하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니메데스는 제우스 옆에서 남은 일생 동안 그의 시중 역할을 다 하다가 밤하늘을 수놓는 '물병자리'성좌가 되어 '독수리자리'옆에 놓였습니다.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여신 또는 여인들이 대부분 고된 탄압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성인 남자와 소년의 관계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동성애와는 분명 다른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조각상이 아니라 살과 영혼이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Cristo Crucificado, Benvenuto Cellini, 1562/Pinterest

 

 

 

 

 

젊어서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비드상을 보고 반한 그가 실제로 로마에서 미켈란젤로를 만났는데, 오다가다 스쳐지나 만난 것 같습니다. 이후로 미켈란젤로를 존경하게 됩니다. 그 역시 미켈란젤로만큼 성공한 예술가로 명성을 날리고 싶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가였기 때문에 그 역시 조각에 많은 노력을 들였습니다. 그렇게 나온 걸작으로 실물 크기의 십자가형은 실제 사람의 크기로 대리석을 깎아 만든 걸작입니다. 단지 예수의  성기까지 노출을 시켰다는 것과 근육질 몸매로 만들었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걸린 예수의 팔 근육의 모양과 힘 빠진 얼굴 표정은 몇 년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스케치한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온건해진 첼리니는 1558년 수도 생활에 들어갑니다. 그는 감옥에서 체험했던 환영에 기초해 대형 <십자가 고난상>(1562)를 만들었습니다. '나의 죄 흰 눈과 같이 깨끗하게 하소서. '그는 하얀 상아와 대리석 마불로 십자가의 처형을 조각하면서 그 십자가 아래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서전을 집필합니다.

 

 

 

 

 

 

 

 

 

Cellin's Crucifix at El Escorial Monastery/wikipedia

 

 

Studies by Benvenuto Cellini, drawing/ArtPaintingArtist

 

 

 

 

 

 

 

Dell'oreficeria("On the Goldsmith's Art",1811)/wikipedia

 

 

 

 

 

첼리니의 말년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1557년, 5년 전에 저지른 사건에 대한 고소로 그는 금 50 스쿠디의 벌금과 4년 징역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군주 코시모 1세의 개입으로 실형은 가택연금으로 감형되고요. 어떤 작품이나 외부 활동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심정에서 그는 승려가 되려고 수도사 서약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이 서약을 파기합니다. 이 기간에 그는 자서전을 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직접 썼으나 시간 낭비가 심해 이웃에 있는 학생을 시켜서 자기의 회고록을 받아쓰게 했습니다. 이 자서전은 4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성됩니다. 1567년, 원고를 축소하여 자비로 피렌체에서 출판합니다.  전문가들은 그의 자서전을 참고하긴 하지만 내용이 너무 과장되어 있기 때문에 걸러내고 작품의 연도와 큰 사건의 시기 등 기록이 없는 자료를 찾는 데 유용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자서전을 통해  미켈란젤로에 대한 존경심을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해지고 싶은 그의 마음과 그의 종교관도 볼 수 있고요. 그리고 16세기 당시 로마, 피렌체, 밀라노, 나폴리 및 프랑스에서 미술계는 물론이고 주변 인물들의 이름과 활동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점은  벤베누토 첼리니가 어떻게 살리에라 같은 걸작을 만들 수 있었는지 확실한 과정에 대해서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열렬한 기백과 강한 개성을 풍기는 이 자서전은 비록 개인적이고 사적인 기록이지만 르네상스 시대 활동하던 예술가들의 전기를 쓴 것으로 잘 알려진 조르주 바사리 (Giorgio Vasari)의 <미술가 열전> 평전과 더불어 르네상스 시대와 피렌체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자서전을 쓰는 동안에 틈틈이 금세공 작업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금세공업과 조각에 대한 논문도 썼습니다. 1571년 2월 13일 , 70세의 나이로 벤베누토 첼리니는 피렌체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571년 사망한 첼리니는 피렌체의 한 교회에서 아카데미아의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후 그곳에 매장됩니다.  그의 작품과 인생을 기념하는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군중과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서로 입장하려고 밀치곤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굴곡진 삶을 살았던 첼리니의 자서전을 발견한 사람은 대문호 괴테입니다. 괴테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피렌체에 와서 '벤베누토 첼리니의 자서전'을 발견하죠. 대문호 괴테의 손에 의해 가장 먼저 독일어로 출판됩니다. 또한 초현실 주의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가 첼리니 자서전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는 초현실주의 아트북 벤베누토 첼리니의 일러스트북을 출판하기도 했고요. 이밖에도 이 자서전을 통해 작가, 화가, 음악가 등이 치명적인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19세기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 극작가 폴 뫼리스 (Paul Meurice, 1818-1905), 루이 갈레(Louis Gallet),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현대의 애거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빅토르 위고,  나다니엘 호손  등 이 그들입니다. 

 

 

 

<특별영상>

Hector Berlioz(1803-1869): Benvenuto Cellini, OP. 23/ Valeru Gergiev- Salzburg 2007

 

 

 

 

 

https://www.youtube.com/watch?v=a82dmk0p5Rc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음악축제 (Salzburg Festival ) 때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rk) 지휘한 오페라 무대입니다. 거의 3시간에 가까운 작품이에요. 시간 여유있게 잡으시고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벤베누토 첼리니> 오페라.

이탈리아의 유명한 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인 '벤베누토 첼리니'가 아름다운 여인 테레자를 사랑한 이야기를 엮은 오페라입니다. 

 

줄거리: 피렌체 출신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는 교황 재무관인 발두치의 딸 테레사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에겐 아버지가 정한 약혼자가 이미 있었죠. 테레사는 약혼자인 피에라모스카의 여자가 되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었습니다. 금세공사 첼리니와 교황 재무관의 딸 테레사는 그녀의 아버지 발두치의 눈을 피해 피렌체로 도망갈 계획을 세웁니다. 카니발 기간을 틈타 도망가려던 그들의 계획은 테레사의 약혼자 피에라모스카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첼리니가 살인혐으로 교수형에 처할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피에라모스카의 모략으로 살인범이 된 벤베누토 첼리니는 신에 대적해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갑니다. 첼리니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의뢰한 페르세우스 동상을 완성하는 조건으로 사형을 면하게 되고, 갖은 고초 끝에 동상을 완성하여 명성과 사랑을 모두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등장인물:

 

벤베누토 첼리니(조각가 겸 금 세공사)

지아코모 발두치 (교황청 회계책임자)

피에라모스카(교황청의 조각가)

교황 클레멘트 7세

폼페오(피에라모스카의 친구)

테레자(발두티의 딸)

아스카니오(첼리니의 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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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간은 참여와 소통, 시간과 역사성을 기본으로 한 삶의 다양성을 담고 있습니다. 예술을 매개로 한 사람들의 커뮤니티를 포함하지요.  또한 현재 거주하는 구성원의 기억이나 쟁점, 요구들이 뒤섞여  있기도 하고요.  아니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의존한 채 생을 잇고 있는 이들에 의해 공유되어 온 흔적들이 깃들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소개할 작가 '하우메 플렌자(Jaume Plensa)'는 '공공미술'의 가장 근원적인 의미를 구현하는 작가로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야외 조각엔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경고문이 늘 따라붙어요.
그 뒤에 생략된 게 무언지 아세요?
쓰다듬어 달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처럼 애정을 갖고 대하란 말이죠.
그게 공공 미술을 대하는 제 태도입니다. 

-하이메 플렌자 (Jaume Plensa)

 

 

 

 

 

1955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한 '하우메 플렌자'는 첫 전시를 미로미술관(Fundacio Joan Miro, Barcelona, Spain,1980)에서 개최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이후 매년 3~6회씩 세계 여러 곳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미국, 독일, 영국 등에서 공공미술, 드로잉, 조각 작업을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습니다. 

 

 

 

 

<연금술사 Alchemist>,2010 MIT, Cambridge,Massachusetts,USA-Public Space/Jaume Plensa

 

 

 

흰색바탕의 숫자와 기호들이 질서있게 웅크린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연금술사 Alchemist,2010>입니다. 트인 구조로 만들어져 있어 마치 어머니 자궁처럼 아늑한 맛도 있습니다. 공부하다 지친 학생들이 오며 가며 한 번쯤 앉아 생각들을 정리하거나 멍 때리기 참 좋은 장소 같습니다.  게다가 시원하게 안팎이 뚫려 있어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빛 그리고 주변 경관들과 잘 어우러져 있고요.

 

 

지금도 하우메 플렌자의 작품은 예술이 사람들과 어떻게 교감하고 소통하는지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미술과 사회, 사회와 공공장소 사이의 대화를 강조하는 새로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nt)의 원형에 따라 늘 새로운 작업으로 도출됩니다.  그의 작품이 들어선 곳은 어디서나  세계 미술계의 화제가 됩니다.  지역 주민들에게  자부심으로  어깨 으쓱하게 만들고요. 

 

 

 

 

 

<크라운 분수대 Crown Fontain >,2004, 시카고 밀레니엄 공원 /HMAP

 

 

시카고 지도 맵 시카고

 

 

 

 

 

https://www.youtube.com/watch?v=Ma4LmhYlVLQ

 

 

 

<크라운 분수대 Crown Fontain>(2004)입니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를 찾는 많은 시민들에게 휴식과 즐거움을 제공하며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세계적인 작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플렌자에 의 해 디자인 되고 시카고 주민들의 아이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이 분수는 LED스크린에 시민 1000명 얼굴이 13분마다 번갈아 나타나는 참여형 예술 작품입니다. 즉 '공동체'에 주목하고 '공공성의 실현'에 목적을 두는 방향에서 완성되는 '미술적 가치의 실현'을 이룬 작업이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크라운 분수대>의 초기 작업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현재는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시계이자, 분수가  다시  작업을  시작하면 봄이 시작된다는 내용을 신문에 발표할 만큼 명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4년 6개월간 정부를 설득해야 했습니다.  분수대를 설치하는 건축 작업과 정밀한 기술팀과의 오랜 협업도 필요했습니다. 물론 주민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없었다면 실현되지 못할 공공미술이었죠.

 

 

예술계에서 권위 있는 상 중의 하나인 '세계 미술상 (Grand Fine Art)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예술 분야에 권위 있는  상으로 프리츠커 건축상 (Pritzker Prize: 건축 분야 권위 있는 상, 매년 한 명 건축가에게 수여), 터너 판화상(Turner Prize: 영국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 1984년부터 매년  영국 작가에게 수여), 휴고 보스 상 (Hugo Boss Prize: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수여하는 현대미술 분야의 권위 있는 상) 등이 있습니다. 수상혜택으로 상금(휴고 보스상의 경우 10만 달러) , 전시 기회, 작품 구매 , 그리고 후원 및 지원을 제공합니다. 

 

 

 

 

Conversation a Nice, 2007, Place Mussena, Nice/Jaume Plensa

 

 

 

프랑스 , 니스 지도 /좋은지도 지도 좋은

 

 

하우메 플렌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은 당대의 현대미술이라 생각하기에 자신을 어느 형식이나 장르에 규정짓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미술이 직접적인 공공에 개입하여 주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며 미술이 일상에 녹아 미적 정서를 고취시키는 역학을 한다면 일단 공공기제로써의 공공미술의 기능성, 정체성은 확보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The Dream>,2009, Sutton Manor, Liverpool,U.K/Jaume Plensa

 

 

 

Where is Liverpool,UK/Whereig.com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가 2009년 영국 리버풀 인근 서턴 매너(Shtton Manor)에 설치한 공공 조각 작품입니다. 높이 20m의 거대한 여성 머리 형상으로, 눈을 감고 있는 명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콘크리트와 스페인 돌로미트 자갈로 제작되었으며, 373톤의 무게입니다.

 

 

과거 석탄 광산 부지에 설치되어 지역의 산업 유산을 상징합니다. 영국 리버풀 폐광지역 전직 광부들과 함께 조각한 작품이지요.  1,880만 파운드 (약 280억 원)의 제작비용이 들었습니다.  'Dream'은 영국 최고 조각상인 마시 조각상(2009), 영국 콘크리트 연합 창의성상(2009)등을 수상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생기 잃은 도시에 지역 주민들의 염원을 담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Onc9JJQRrg

 

 

 

 

창의적인 예술을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직관력과 감각을 꼽습니다. 로고스(logos)적이기보단 어떤 불명확함에서조차 흔들림 없는 파토스(Pathos) 적인 것이라 여기지요. 둘 다 청중을 설득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입니다.  로고스(Logos)는 사실, 통계, 논리적 추론 등을 활용하여 청중을 설득하는 방식이죠. 파토스(Pathos)는 감정적 설득을 뜻하고요. 따라서 작가의 성장과정과 경험에 덧대어 직관력과 감각은 그 어떤 이성이나 지식보다 중요하며 창조의 기본이랄 수 있습니다. 하우메 플렌자는 그 모든 것에 일체감 가득한 밸런스를 보입니다.  물론 그에게도 영향을 미친 선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죠.

 

 

 

하우메 플렌자가 추구해 온 공공의 예술 뒤에는'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실수를 신경 쓰지 않고 생각하는 것들을 실험하고, 계속 무엇인가 탐구하여 끝없어 노력했다는  부분이 작가에겐 실천력과 아이디어의 원천이었던 셈이죠.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기존의 전통적인 예술 개념을 전복시킨 혁명적인 예술가.

<샘(Fountain),1917>이라는 작품을 통해 일반 공상품인 남성용 소변기를 예술작품으로 출품하여 큰 놀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작품이란 작가가 직접 손으로 제작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작가의 선택'이라는 '레디메이드'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뒤샹은 작품을 통해 '예술이란 무엇인가', '작품의 가치는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예술의 본질이 작품 자체가 아닌 작가의 의도와 관념에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우메 플렌자는 'ArtFutura festival' 기간 중 바바라 샌손 (Barbara Sansone)과의 인터뷰에서 "작가로서  창의적인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은 신비하며 환상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하는가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위해 일을 하는 행위이다. 자신을 믿고 실수에서 우연을 찾아내는 것이야 말로 흥미로운 일이며 끝임 없이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난해하지 않으나 사고를 유발하는 언어 아래 묵직함이 내재되어 있는 이 발언은 그의 작품들이 확실히 존재만으로 침묵과 무형의 시를 전달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WORLD VOICES>, 2010, Burj Khalifa, Dubai, United Arab Emirates/Jaume Plensa

 

 

colorful Country Map of The United Arab Emirate Dubai/ www. nitrion,com.br

 

하우메 플란자(Jaume Plensa)는 소수만이 방문하는 화이트큐브에서의 전시가 아닌, 사람과 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 작품이 살아나는 공공장소에서의 설치를 선호한다. 

 

 

 

 

OGiJiMA's Soul,2010,Japan/Jaume Plensa

 

일본 가가와현 / 골프한국-한국아이닷 컴

 

<Ogijima's Soul>은 하우메 플렌자가 2010년 제작한 대규모 공공 조각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일본 가가와현 세토나이카이 해협의 오기지마 섬에 영구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오기지마 섬의 정체성과 역사를 상징하며, 섬 주민들의 모임 장소 역할도 합니다. 거대한 두상 형상의 조각상 내부에는 계단식 좌석이 있어 공연이나 행사 등을 열 수 있습니다. 플렌자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영혼과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Nuria and Irma>,2010, Sculptures by Jaume Plensa/Pinterest

 

 

이 작품은 스테인리스 스틸  와이어 메시로 제작된 10대 소녀들의 머리 조각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눈은 감은 채 내면을 응시하는 듯한 모습은 자아 성찰과 내적 대화를 상징합니다. 와이어 메시의 투명성으로 인해 주변 풍경이 조각 속으로 들어와 작품과 하나가 되는 효과를 줍니다. 플랜사는 이 작품을 통해 개인과 사회, 육체와 영혼 등 이분법적 개념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작가는 최신 기술을 활용하여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하는 동시에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지며 사유의 계기를 제공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KCb7fjNsM

 

 

 

 

 

 

 

 

<ECHO>,2011,Madison Square Park/ Madison Square Park Conservancy

 

 

아메리카 합중국 지도 /123RF

 

 

 

 

https://www.youtube.com/watch?v=9J98Yv00Gss

 

 

 

 

 

뉴욕 메디슨 스퀘어 공원에 위치한 14m의 대형 거대한 두상 조각 <ECHO>(2011)입니다. 이 작품은  기술적으로 도저히 설치 불가능 할 것으로 보였지만 조각을 분리해 이동시켜 조립하는 방식으로 성공한 프로젝트로 손꼽힙니다. 이 프로젝트는 2011년 5월 5일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한 면에 <기념시: 꿈의 시 (Monuments: The Poetry of Dreams>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는데, 당시 그는 "작품을 구상할 때 기술적인 해결 방법도 함께 확인하는가?"라는 카롤 키노(Carol Kino)기자의 질문에 "사전에 기술적인 부분을 생각하면 문제가 생긴다. 꿈을 꾸고 난 후, 구현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으면 된다."고 대답해 자신의 예술적 가치가관의 목적은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임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이는 달리 말해 공공성을 기본으로  한 조각이란 태도의 문제이지 형식이 아님을 지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Le Nomade d'Antibes/Stay in France

 

 

 

 

알파벳 문자들로 이루어진 8미터 높이의 거대한 조각상입니다. 웅크린 익명의 인체 형상으로 , 라틴 알파벳 문자들로 이루어진 '피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별 문자들은 의미가 없지만, 조합되어 단어와 언어, 문화를 이룹니다. 이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은유합니다. 작가는 "우리의 피부가 경험으로 이루어진 문자들로 새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관람객들이 작품 내부로 들어가 여행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2007년 여름 안티브 피카소 미술관 전시를 위해 제작되었고, 2010년 영구 설치되었습니다. 안티브 시와 피카소 미술관의 위탁으로 제작되어 바스티옹 생자크 요새 위에 설치되었습니다. 작품 주변의 고대 유적과 지중해를 향해 열린 공간이 작품의 의미를 강화합니다. <Le Nomade>는 문자와 언어, 개인과 사회에 대한 플렌자의 철학이 담긴 대표작으로, 안티브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Antibes France map/World Maps

 

 

 

 

 

 

 

 

예술가는 공공미술을 할 때 가장 겸손해 지는 것 같습니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예술이 단지 보이는 것, 그리는 것, 묘사하는 것, 대상을 밝히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그 이상의 높은 차원으로 관객을 유도하는 장치로써의 힘을 수용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그의 작품에 있어 가장 큰 특징은 누구나 예술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고 기억을 그리드 (Grid)할 수 있는 공공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밤이면 새로운 영혼이 살아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기법을 주로 사용합니다.  실제로 그가 자주 애용하는 'White box'라이트는 사람을 주로 표현 소제로 삼는 그의 작품을 보다 매력적으로 만드는 알고리즘이 되고 있습니다. 

 

 

 

 

 

 

 

 

<Together,(Chichester Hand)>, 2014/ Jaume Plensa

 

 

 

 

 

 

결국 내 작품은 메시지 쓰기, 의사 소통의 쓰기라 할 수 있다.
-하우메 플렌자(Jaume Plendsa)-

 

 

 

 

 

 

 

 

2조원 롯데월드타워(123층 빌딩)에 설치된 웅크린 8.5m 아기 , 30 억짜리 공공 조형물,2016/chosun.com

 

 

한국/Shuttersoock

 

 

나의 꿈은 내 작품 안에서 연인과 아이들, 가족들이 하나가 됐으면 하는 것이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야외에 한글로 작업한 설치작품입니다. 현실과 인류의 다양한 측면(Possbilities)을 하나로 아우르고 싶어 작품 제목도 '가능성(Possibilities)'으로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인체상을 알파벳 조합으로 만든 그의 대표작인 <클라우드 오브 레터스(Cloud of Letters)'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알파벳, 라틴어, 히브리어, 힌두어 등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킨 글자와 숫자를 조합해 거대한 사람 형상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세계인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 '(사람, 사랑, 평화), 우리가 누리고 보전해야 할 '환경과 자연'(하늘, 꽃, 바람), '사람 간의 관계(벗, 으뜸, 꿈)를 지향하는 단어들로 작품을 구성했습니다. 

 

 

 

그의  예술이 사람들과 어떻게 교감하고 소통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롯데에 설치된 작품 '가능성(Possibilities)은 높이만 8.5m에 달합니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소재로 다양한 크기의 '희망과 도전'을 의미하는 단어들을 용접 방식으로 강력하게 결합하여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냈습니다. 관람객들은 작품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야간에는 업라이팅 조명으로 멋을 더하죠. 그는 공공미술의 치장성보다 예술에 무게들 더 둡니다. 시적인  수식의 아름다움과 삶에 무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중시합니다. 

 

 

 

 

세계인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한글과 여러 언어를 함께 사용해
사람, 사랑, 하늘 등 보편적인 단어를 작품으로 구성했다.

 

 

 

 

그는 공공미술이 건물에 포커스를 맞춰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건물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다리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지요.  주위와의 조화가 논란이 되긴 하지만 도시엔 없어선 안 될 요소입니다. 다리를 감싼 채 웅크린 사람 형상의 철 조각 (높이 8.5m)입니다. 멀리서 보면 하얀 레이스를 감싼 듯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 꿈, 사랑 같은 한글이 영어, 라틴어, 힌디어. 러시아어 글자와 섞여 있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빌딩 옆에 서면 위압감이 들기 마련이지요. 제 조각이 행인과 건물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길 바랍니다. "  골리앗 옆 다윗처럼 앉은 조각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자궁 속에서 태아가 웅크린 형태랍니다. 괴로울 때 본능적으로 취하는 자세기도 하고요. 그는 "세상살이에 지친 현대인을 끌어안아 주는 엄마의 품, 한편의 시 같은 포근한 쉼터를 생각했다. "며 반드시 작품 안에 들어가 하늘을 쳐다보길 권했습니다. 

 

 

 

 

 

 

공공미술은 작가 손을 떠나는 순간,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모두의 것이 된다.
부디
서울 사람들이 내 작품을 잘 돌봐줬으면 한다. 

 

 

 

 

 

 

 

<Behind the Walls>,2018, display at the Museo Nacional de Arte in Mexico City /wikipedia

 

 

<Behind the Walls>는 2018년 제작한 7.467m 높이의 거대한 청소년 소녀 머리 조각상입니다. 소녀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린 모습을 형상화했는데, 이는 내면의 세계와 꿈을 상징하거나 우리 주변 세계를 인식할 책임을 환기시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 작품은 2019년 5월 뉴욕 프리즈 조각 페스티벌에서 처음 전시 되었습니다. 같은 해 10월부터 2020년 2월까지 멕시코시티 국립미술관에 설치되었고요. 현재는 미시간대학 미술관 앞마당에 영구 설치되어 있습니다. 

 

 

프렌자는  이 작품을 통해 공공장소에 청소년 여성의 모습을 대형 조각으로 구현하며, 대규모 공공미술에서 여성이 충분히 대표되지 못했던 점을 환기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는 "미래는 여성의 것"이라는 말을 작품으로 형상화 했습니다. 

 

 

 

<Julia>vid plaza de Colon i Madrid, 2018/wikipedia

 

 

 

스페인 마드리드 지도/Shotterstock

 

 

스페인 마드리드 콜론 광장에 설치된 12m 높이의 거대한 소녀 조각상입니다. 폴리에스터 수지와 백색 대리석 가루로 제작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고요. 작가는 이 작품이 "공공 공간의 소란 속에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성찰을 불러일으키기를"바란 다고 말했습니다. 플렌사는 이 시리즈 작품들이 "우리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자신을 성찰하도록"의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2018년 12월 콜론 광장의 콜럼버스 동상 대신 설치되었습니다.  2023년까지 전시 기간이 연장되었고요.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사부 피터슨 재단의 후원으로 제작되었고, 마드리드 시의회가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선정했습니다. 

 

 

 

 

 

 

<Water's Soul:Bring a sense of serenity to an 'incredibly noisy time'/NJ.com,2020

 

 

www. universityguru.com

 

 

<Water's Soul>은  2020년 작품으로 높이 약 24m(80ft)로 플렌사가 제작한 공공조각 작품 중 가장 큰 규모입니다. 뉴저지 저지시티 허드슨 강  워터프론트에 영구 설치된 대형 조각상입니다. 젊은 여성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고,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침묵할 것을 권하는 상징물입니다.

 

 

 

주민들의 접근성이 좋고, 작품 주제와 의미를 잘 드러낼 수 있으며, 사회성과 예술성을 갖춘  공공미술작품으로서 허드슨강 워터프런트가 적절한 설치 장소로 선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과 인간의 관계를 형상화하여 인류의 연대와 평화를 상징합니다.  플렌사는 이 작품이 뉴포트 지역의 상징적 조형물이 되기를 희망하며, 인류의 미래와 평화로운 공존을 기원한다고 밝혔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IRANB8uLkM

 

 

 

 

 

공공미술이 도시의 상징으로 부각되는 시대입니다. 도시에 문화적 활력을 불어넣고 도시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지요.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공공미술 작가 하우메 플렌자(Jaume Plensa) 도 그 중심에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전 세계 사람들과의 링크, 인류는 하나라는 메시지를 늘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공 미술의 대가인 플렌자의 작품을 통해 일상에 놓칠 뻔 한 뜻밖의 여유와 낭만을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BDwS8sLKz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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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시립 현대미술관(MAM)에서 화가 니콜라 드 스탈 의 작품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가 2024년 1월에 열렸습니다. 그의 작품이 20년 만에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죠. 미술계에서 그의 예술적 이정표를 되짚어보고자 하는 기대와 호기심으로 개최된 전시회이기도 하지요. 그의 작품을 다양한 시각에서 다시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니까요.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입니다.  서정 추상의  한 경향인 '앵포르멜 미술'을 추구했지요. 전 후 유럽 추상 미술을 대표하는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 (1914-1955)의 삶을 살펴봅니다.

 

 

 

단순하고도 섬세한 붓질로 물감의 특질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놀랍게도 빛과 거리감이 살아 있도록 풍경을 환기시킨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중

 

 

 

 

 

<Le Grand Concert>,1955,Nicolas De Stael / Arthur.io

 

 

 

방금 연주를 끝낸 걸 까요? 그랜드 피아노와 덩치 큰 콘트라 베이스만이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니콜라  드 스탈( Nicolas de Stael)의 작품 <콘서트 le Grand Concert>입니다. 가로 6m, 세로 3.5m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가끔 손 끝에 상처가 나  핏방울 맺히는 모습만 봐도 사람은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하물며 온통 핏빛으로 물들인 캔버스를 보며 관객들은 압도당합니다.  당시 그의 격정적인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실제 작품 앞에 서 본 관객들은 왠지 모를 뭉클한 전율이 짜릿하게 전해진 다고 합니다. 실제로  저 그림 앞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는 관객들도 계시고요.

 

 

 

"나는  나를 위해 필요하다."

-니콜라 드 스탈-

 

 

 

인생이라는 콘서트의 마지막을 암시한 작품이었나 봅니다.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은 이 그림을 완성하고 앙티브의 자신의 화실 11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였죠. 

 

 

 

싱트페테르부르크/Steemit

 

 

 

 

니콜라 드 스탈 (Nicilas de Stael) , 그는 1913년 생트 -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ourg)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장교 출신으로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의 소장이자 부사령관이었습니다. 호화로운 표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혁명이 일어납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많은 백인 러시아인들처럼 그의 가족도 강제 추방되어 폴란드에 정착합니다. 그러나 그가 6살이 되던 1919년 부모가 사망하면서 그는 고아가 됩니다. 1922년 그의 대모로부터 말리나(Marina)와 올가(Olga) 두 자매와 함께 브뤼셀의 프리세로(Fricero)가문에 맡겨집니다. 다행히 그의 양부모 역시 부유하고 교양이 있는 사람들로 그들 남매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며 사랑을 주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혁명:  차르 정권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을 수립한 혁명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골동품 그림과 회화를 공부했습니다.   학업을 마친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 모로코 등 넓은 세상을 여행합니다.

 

 

 

'내겐  그림과 여행밖에 없어'

 

 

 

 

알제리에서 만난 여인 자닌(Jeannine)과  1941년 예술의 본고장인  프랑스로 이사하여 화가로서의 기반을 닦기 시작합니다. 

 

 

 

Nicilas de Stael,Composition,1947/Artprice.com

 

 

 

그의 초기 작품입니다.  이 시기 그의 그림들은 자주 어둡고 우울한 색상을 띱니다.  아마도 그가 겪어 낸    유년의 암울하고 냉혹한 환경 탓인 것 같습니다. 어두운 톤이 지배하는 작품에서 새로운 언어의 추상화를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구상적인 형태를 보이다가 또다시 비-구상으로 넘어가기를 반복하기도 하고요.

 

 

 

 

 

<Portrait of Jeannine>, 1941-42/pinterest

 

 

 

Nice/Delta News Hub

 

 

Nicolas de Stael/ The World of Mara, Marietta

 

 

 

 

<자닌 Jeannine의 초상;(1941-42) >.  고생만 하다 먼저 간 첫 번째 아내 자닌 기유 ( Jeannie Guillou)의 초상화입니다.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이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제대하고, 니스에서 살 때 그린 우울한 초상입니다. 이때만 해도 존재감 없는 스탈의 그림은 16세기 엘 그레코 (El Greco)를 흉내 내고 있었죠. 아내의 초상에는 전쟁의 암울함과 궁핍이 보입니다. 지독한 가난과 고통 속에 밑도 끝도 없이 희망 없는 그림을 그리던 무명시절, 아내 자닌(Jeannie)은 나치가 점령해 있던 파리에서 딸을 낳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내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1946년 2월에 영양실조로 사망하게 됩니다.  시기는 어려웠고 성공은 너무 멀리 있던 상태였죠.  스탈은 1945년 파리에서 처음 그룹전과 개인전을 가졌지만 당시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습니다. 그러다  파리를 떠나게 됩니다. 

 

 

 

 

 

 

나의 삶은 불확실한 바다 위에서 계속되는 여행이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단단한 내 배를 만들기 위한 이유다.
-니콜라 드 스탈-

 

 

 

 

 

 

<De la danse>,1946-1947/Flickr

 

 

 

 

 

아내도 잃고 아이들은 셋 딸린 가난에 찌들어 지내던 그에게 두 번째 아내인 프랑수아즈 샤푸통과의 만남은 많은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 후 프랑수아즈와  결혼을 하고  다시금 재개를 꿈꾸며 창작 활동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스탈의 마음가짐과 새 아내 프랑수아즈의 노력으로 이후 니콜라의 작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가게 됩니다. 많은 아트딜러들이 그에게 찾아와 작품을 의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드 스탈은 서서히 선과 색을 이용하여 '구상회화'의 틀을 깨는 작업을 진행하였고 완전 추상으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겪습니다.

 

 

 

 

 

<Composition>,1949/Flickr

 

 

 

 

첫 번째 추상회화 '구성 Composition'으로서의 화풍을 굳혀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B-cGdQcfTI

 

 

 

 

 

 

좌충우돌하며 자신만의 미술의 갈 길을 찾던 스탈의 그림이 바뀝니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미술 방식을 찾기 시작한 것은 떡칠하기, 임파스토(impasto)방식의 그림이 시작되었죠. 유화물감을 팔레트 나이프나 또는 손가락으로 두껍게 반죽처럼 칠해 강한 질감을 표현하는 거친 방식입니다. 이 표현기법은 형태가 무시된 비정형의 앵포르멜(informel) 추상 미술의 표현 방식입니다.  그렇게 그에게 '서정 추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앵포르멜이란? 

 

독일 표현주의와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 '피에트 몬드리안으로 대표되는 차가운 추상에 대응하여 서정적 측면을 강조, 색채에 중점을 두며 보다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호소력을 갖는 표현주의적 추상예술을 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S5n3P_UZE8

 

 

 

 

 

 

 

 

 

 

 

Les Musiciens by Nicolas de Stael ,1952/Poster/Redbubble

 

 

 

 

니콜라 드 스탈은 세잔, 마티스, 반 고흐, 브라크 그리고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등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약 15년 동안 무려 1120점이라는 다작을 남겼으니까요. 작품을 많이 제작했던 만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없이 파괴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는 평소  그가 존경했던 브라크 (Georges Braque)처럼 라벨이나 유행을 완강히 거절합니다. 그림에서 유행 같은 흐름이나 추세를 싫어했지요. 자신을 둘러싼 사물에 대한 생생한 감수성을 개인적이고도 자유롭게 작품으로 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는 종이에 먹, 캔버스 위에 유화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또 찾습니다. 

 

 

 

 

<Bord de Mer>, 1952/ MutralArt

 

 

 

 

 

 

 

1950년에서 1955년은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 그가 남다른 화가라고 인정받게 된 결정적인 시기들로 10년을 좌충우돌 방황하던 스탈에게 작품이 활화산처럼 용솟음치기 시작하던 시기입니다. 이 기간 5년 동안 제작된 작품들은 죽은 후에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1950년 앙티브 해 새로운 미술 형식인 '서정적 추상'을 추구합니다.  그만의 굵고 과감한 에너지와 캔버스를 터트릴 듯 과감한 터치들로 자신의 내적 심리상태와 감정을 표현합니다. 계획적인 구성을 거부하고 주관적인 표현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Footballeurs>,1952/Artnet/스위스, 마르티니, 피에르 지아나다 미술재단 미술관

 

 

 

 

1952년 파리를 떠나기 전에 제작된 축구 선수들(Les Footballeurs)은 약 15 작품의 연작 시리즈가 있습니다.  판지와 캔버스에 그린 이 그림은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의 임파스토(Impasto) 방식을 강한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의 출발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작품입니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아직은 '서정적 추상'이라고는 하기에는 조금 거칠어 보입니다. 

 

 

 

 

 

 

 

<Mediterranean, Le Lavandou>,1952/Barbara Isherwood, Art Education&Writing

 

 

 

지중해 , 라방 두 <Le Lavandou>은 그가 막 완성했던 축구 선수들 <Les Footballeurs>에서의 떡칠하기, 임파스토 (impasto) 방식을 서정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풍경 주제는 그가 죽음을 맞는 4년 뒤까지 그의 표현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설명이 없는 인물이 지평선 주위에 가끔 얼쩡거리기도 하지만, 사물과 풍경을 설명하는 장치 없이 감정이나 정서가 캔버스를 채우고 있습니다. 

 

 

 

 

남프랑스의 지중해 해안 마을 라방두 (Le Lavandou)에서 그의 미술이 얌전한 임파스토(impasto) 방식이 아니라 주걱까지 사용해서 문지르고 깎아내고 회 칠하듯이 캔버스를 밀어붙입니다.

 

 

 

 

<젠트리Gentilly, 퐁트네Fontenay 풍경>,1952/MutualArt

 

 

 

 

 

<풍경Landscape>,1952/Tate Modern

 

 

<옹플뢰르Honfleur풍경>,1952, 2017년 크리스티에서 경매, 개인소장품/MutualArt

 

 

 

 

타고난 색감각과  천재적인 화면 구성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죠. 이 시기에 작업했던 그의 작품은 대중들에게 아주 큰 환영을 받게 됩니다.   당시 뉴욕은 물론  워싱턴 필립스 컬렉션에서도 앞다퉈 그의 작품 구매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간의 노력 끝에 그의 작품들이 주목받는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성공한 화가가 되면 너도나도 백만 불짜리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타는 것이 상징처럼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미 작품 한 점에 백만 불을 호가하고 있었지만 롤스로이스는 타지 못했습니다. 

 

 

 

 

 

 

콤포지션(구성)Composition,1952/False Start

 

 

 

 

https://www.youtube.com/watch?v=q2Kq2ukJ-LQ

 

 

 

 

 

 

 

1953년 그가 파리에서 남프랑스 지중해의 메네르브(Menerbes)의 해안가 르 카스틀레(Le Castelet)의 17세기의 큰 건물을 구입해 이사했을 때 이제는 재정적으로 굶주린 사람은 아니었죠. 더 이상 돈이 부족하지 않았고, 한 가족의 아버지이며 홀아비였던 그는 재혼했고 새 아내와 세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를 발견 한 수집가들은 유럽이 아니라 멀리 미국에서 찾아왔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미국 최고의 화랑인 뉴욕의 뇌들러 갤러리(Knoedler Gallery)가 그중 하나입니다. 분명히 모든 것이 잘되고 있었습니다. 

 

 

 

 

 

 

<그리냥 성 Grigana>,1953/ Art of Darkness/Daily Art Blog

 

 

 

 

1953년 그의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특히 1951년-53년 작품들, 그것들에서는 주저하거나 흔들림 없는 확고한 신념과 가치관이 보다 뚜렷하게 표현되어 나타납니다. 

 

 

 

 

 

화가는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항상 그의 눈앞에 감동의 원동력이 있어야 한다.
-니콜라 드 스탈-

 

 

 

 

 

 

 

 

<정오 풍경 Paysage du midi>, 1953, 2011년 크리스티에서 경매/ Artnet

 

 

 

 

 

나는 끊임없는 안갯속에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른다....
결정적으로 메스꺼움을 갖게 하는
이 긴 하루의 풍경에서
그럼에도 나는 움직였다.
-니콜라 드 스탈-

 

 

 

 

 

 

 

그는 직접 야외 풍경을 보고 그리기 위해 작업실 밖을 나갔습니다. 그만큼 그의 시각적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죠. 240점이라는 풍경화로 고스란히 남았으니까요. 대부분 작거나 중간 크기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지방과 각각의 장소들에서 그리는 방식과 서로 다른 독특한 인상이 생성되어 있습니다. 

 

 

 

 

 

피에졸레 Fiesole,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 1953/ Redbubble(poster)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도/Freepik

 

 

 

나는 모든 바다를 수영하면서 몇몇 크로키 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니콜라 드 스탈-

 

 

 

 

 

 

 

Agrigente:focus sur un chef-d'oeuvre/Connaissance des Arts

 

 

 

 

 

시칠리아 이탈리아 섬 지도/123RF

 

 

 

 

 

 

 

 

우리는 절대 보이는 대로 또는 보아 믿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
우리는 천 개의 진동에서 받은 충격을 그린다.
-니콜라 드 스탈-

 

 

 

 

 

Nicolas De Stael/Du9, I'autre bande dessinee

 

 

 

Offset de Nicolas De Stael, Dessins sur Amorosart

 

 

 

1953년 8월 그는 가족들과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여행하게 됩니다. 시칠리아 여행하는 동안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아그리젠토와 시라쿠사의 고대 유적을 방문하여 펠트펜으로 스케치를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프로방스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그의 그림은 시칠리아의 영향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는 몇 달 동안 강렬한 빛으로 눈부신 섬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1953년 시칠리아 여행은 그의 색채를 급진화시켰습니다.  멀리서 봐도 노랑과 주황의 밝고 빛나는 색채가 눈에 띄게 다름을 느낍니다. 

 

 

 

 

 

 

<아그리젠토 Agrigente>,1953/Connaissance des Arts

 

 

 

 

 

눈 내린 마르세유Marseille under the Sonw, 1954/ www.pinterest.jp

 

 

 

 

 

억세고 치열했던 그의 미술들은 1954년'눈 내린 마르세유 Marseille under the Snow>에서부터 그 치열함이 얌전해집니다. 소란스러운 색들은 음이 소거되어 5가지 색상을 사용합니다. 옅은 회색에서 부드러운 파란색, 왼쪽 전경의 정사각형에서 눈에 띄는 진한 검은색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것은 드 스탈(de Stael)의 화가 경력의 마지막 단계를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드러운 그림의 시작인 거죠.  눈이나 마을을 정확히 식별할 수는 없지만 색상 팔레트와 구조적 배열이 고요한 침잠의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살만한 세상, 그것이 1954년의 그의 미술 작품들에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Nicolas de Stael , Views of Menerbes,1954, Abstract art landscape/Pinterest

 

 

 

오렌지 바탕의 배 , 정물화 Nature morte, poires, fond vert et orange>, 1954/ Redbubbie

 

 

 

와인잔이 있는 정물Nature morte au verre, 1954/Artnet

 

 

 

1954년 봄 전시회에서는 세계적인 현대미술 아트 딜러 폴 로젠버그(Paul Rosenberg)가 그에게 앞으로 추가로 15 작품을 더 그려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전시회는 상업적으로나 비판적으로 성공적이었습니다. 1954년 4월에는 네 번째 아이인 귀스타브(Gustave)도 태어났습니다. 파리에서 쟈크 뒤부르그 (Jacques Dubourg)의 갤러리에서도 성공적인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그의 정물과 풍경 그림들에 '서정 추상'이라는 닉네임이 붙여졌습니다.

 

 

 

 

 

 

 

 

 

 

 

 

Antibes/Tide Forecast

 

 

 

 

1954년 가을, 그는 가족과 함께 앙티브(Antibes)로 이사했습니다. 1954년 9월, 앙티브로 이사를 하여 바다를 마주한 작업장에서 수많은 정물화와 풍경화를 제작했습니다.  1955년 6월과 7월에 예정된 앙티브의 전시회를 위해서였지요. 그 누구도 그가 자살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그림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성공이 시작되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심약한 그는 피로와 불면증 및 우울증으로 고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사회적 이슈가 되는 악플로 인한 연예인들의 자살 사례들처럼 그 또한 여러 찬사와 인기와 함께 냉혹한 비평들이 그의 내면을 요동치게 합니다.  부모님의 죽음, 첫 번째 아내의 죽음으로 유달리 섬세하고 유약한 성격을 가졌던 그는 비평가들과 예술평론가들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일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림으로 불태우며 자신의 가진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1955년 3월 16일, 그를 억척스럽게 비난하던 미술 평론가 더글러스 쿠퍼 (Douglas Cooper)와의 실망스러운 만남으로 그는 자살하고 맙니다. 그는 앙티브에 있는 11층 스튜디오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맞이합니다.  보상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 유작이 되어버린 <콘서트>를 끝으로 영원히 붓과 이별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41세. 한창 꽃 피울 나이에 소진한 불꽃이 되어 버립니다.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el)은 몽루즈 묘지 (Montrouge Cemetery)에 묻혀 있습니다.

 

 

 

1955년

그의 인생 마지막 해의 작품들입니다. 

 

 

 

 

 

<Seagulls>,1955/Pinterest

 

 

 

 

일몰의 바다 풍경chemin de fer au bord de la Mer Soleil Couchant,1955/Soho Art

 

 

 

 

 

 

 

 

https://www.youtube.com/watch?v=jbjQzQCOoU0

 

 

 

 

 

 

 

누워있는 푸른 누드(Nu couche bleu), 1955

 

 

누어 있는 푸른 누드 Nu couche bleu, 1955/Passion Estampes

 

 

 

 

 

누워있는 푸른 누드 (Nu couche bleu>는 그의 누드 시리즈의 마지막이며 연작 중에 가장 큰 그림입니다.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남프랑스의 라네 (Lagnes), 메네르브(Menerbes)및 앙티브(Antibes)에서 오렌지와 블루 등 네 가지 버전을 그렸고 이 작품'푸른 누드'작품은 2011년 12월 6일 화요일 파리의 경매에서 700만 유로(한화 100억)가 넘는 가격에 미국 국적의 수집가에게 낙찰되었습니다. 

 

 

 

 

12년 동안 스탈은 작품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새로운 길을 탐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대의 유행을 따르지 않은 그의 작품은 의도적으로 추상과 구상의 구별을 뒤집고, 더욱 조밀하고 간결한 예술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는 바다를 마주하든, 축구 경기를 바라보든, 탁자 위에 놓인 과일 조각을 바라보든 세상의 광경과 그 다양한 빛에 매료됩니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이 관객에게도 전달되지요.  그의 작품은 공간과 색채를 탐구하며 추상과 구상적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과 색채였지요. 그의 작품을 왜 '서정 추상 Lyrical Abstraction'이라 부르는지  좀 알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3BJTPqrx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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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ilasson)은 아이슬란드와 덴마크에서 거주해 온 북유럽 아트스트입니다. 빙하와 화산으로 뒤덮인 대 자연에 매료되어 이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예술활동을 시작했지요. 현재는 기계 장치와 기술을 이용해 인공의 자연을 표현합니다.

 

 

1967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습니다. 덴마크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모님이 아이슬란드인이었기에 그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아이슬란드에스서 보냈습니다. 그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그는 자연스럽게  북유럽의 신비롭고 경이로운 자연 풍경들을 수없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엘리아슨이 경험했던 북유럽의 아름다운 풍경들, 그리고 빛과 그림자, 물과 얼음, 안개 등의 자연 현상은 그의 작품의 주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엘리아슨은  예술가이자 요리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적부터 예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예술 제작과 관련된 자신만의 방식을 형성하게 된 것은 십대 초반 '브레이크 댄스'를 추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엘리아슨은 춤이 제공하는 신체적인 감각과 공간에 대한 인식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이는 이후에 관람객에게 직접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적 체험을 선사하고자 하는 그의 예술적 경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올라퍼 엘리아슨-

 

올라퍼 엘리아슨은 방대한 예술세계를 지녔습니다. 그가 영감을 받는 것은 빛, 물, 온도, 안개, 빙하, 돌 등 다양한 자연 요소들이죠. 선보이는 작품의 장르 또한 다양합니다. 유화, 수채화, 조각, 설치, 미디어 아트, 인터렉티브 아트, 건축까지. 한 사람의 예술가가 어떻게 이토록 다양한 장르,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을까 싶어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 그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선보이며 우리가 바라본 세상을 전혀 다른 각도로 조명합니다. 

 

 

 

 

엘리아슨은 색다른 재료, 색다른 방식으로 구조를 만든다.
그의 개방적 사고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예술이 탄생했다.
-아이 웨이웨이(엘리아슨의 동료작가)-

 

 

 

 

<The Weather Procect 2003>/ Studio Olafur Eliasson

 

 

 

날씨좋지 않은 영국에 거대한 인공 태양이 떴습니다. 그것도 내부에 말이죠. 상상력이 놀랍지 않나요? 이 작품은 엘리아슨이 유명해지게 된 계기인 <Weather Project ,2003>입니다.  단색광을 활용해 앞의 관객들이 흑백으로 보이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가장 큰 공간인 터바인 홀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200여 개의 단색 파장 전구로 만든 태양은 그 넓은 공간을 온통 빛으로 물들입니다. 

 

 

 

 

엘리아슨 작품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공간'입니다. 저 인공 태양은 절반만 만들어져 반원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반원의 단면부, 즉 미술관 천장에 거울을 비춰 온전한 태양의 형상을 만든 것이죠. 이렇게 하면 미술관 위쪽 공간이 확장되어 보입니다. 더불어 이 공간이  거대한 곳에 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원래도 큰 터바인 홀을 두 배로 더 웅장하게 만든 것이죠. 또 엘리아슨은 이전에 자주 사용하던 재료인 안개를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안개가 있으면, 멀리 있는 대상이 전보다 희 미하게 보여 공간감이 커집니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덤이고요.

 

 

이처럼 엘리아슨은 거울을 천장에 배치해 수직 공간의 규모를 키우고, 안개를 홀 전체에 깔아 수평 공간의 심리적 거리감을 늘렸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_k8D5QowTY

 

 

 

 

<The Weather Procect, 2003>/Studio Olafur Eliasson

 

 

 

 

 

구구절절, 지나칠 정도로 길게 쓰여진 글은 관객으로 하여금
'난 이것도 이해 못하는 바본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올라프 엘리아슨-

 

 

 

 

관객들은 이 반쪽짜리 인공태양 아래에서 일광욕을 하기도, 춤을 추기도, 요가를 하기도 하며 일상을 옮겨 놓은 모습입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머리를 맞댄채 특별한 경험을 즐기는 모습입니다. 이 경험을 한 아이들은 훗날 커서 어떤 형태로든 기후 문제와 관련된 상상력을 발휘하며 살겠지요. 이렇듯 엘리아슨은 예술적 체험을 관객에게 넘겨주는 일을 즐겼습니다. 그는 관객을 작품의 일부로 만들기로 합니다. 관람객이 작품의 공저가 될 수 있는 작업을 많이 선보였죠.

 

 

 

 

 

 

관객이 작품의 일부로서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되면,
'내가  작품의 내러티브를 공동으로 제작할 만큼 똑똑하구나'하는 생각을 만든다.
-올라프 엘리아슨-

 

 

 

 

<The Wether Project, 2003>/Studio Olafur Eliasson

 

 


 

 

엘리아슨의 초기작 <Beauty,1993>입니다.  이 작품은 전시장 천정에 거꾸로 매달린 물 분무기에서 아래로 미세한 물방울을 안개처럼 뿜어 내고, 농도 짚은 안개에 프레즈널 램프를 설치하여 허공에 영롱한 무지대를 만들었습니다. 그 사이를 지나가는 관람객은 온몸으로 서늘하고 습기 있는 촉각적 자극을 받게 됩니다. 마치 북극광을 연상시킵니다.  물 위의 기름띠처럼  일그러진 무지개는 순간 홀연히 사라져 버립니다. 

 

 

<Beauty>1993/ Studio Olafur Eliasson

 

 

 

이 작품은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사람이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의 무지개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다양한 관점'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엘리아슨은 눈의 각도와 물방울의 각도에 따라 작품의 색깔과 모양이 달라지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작품을 보는 눈, 즉 관객이 없다면 이 작품에는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관객이 작품에 필수적인 요소로 작동하게 만든 것입니다.

 


 

 

 

<Moss Wall>,1994/Studio Olafur Eliasson

 

 

<Moss Wall,1994>은 이끼를 벽 전체에 이식하고 증식시켜 성장하고 번식하면서 색과 형상을 바꾸는 추상회화와 같은 느낌을 주게 한 설치 작품입니다. 

 


 

 

<Green River>,1998/ Studio Olafur Eliasson

 

 

 

 

 

베를린, 도쿄, 스톡홀름 등에서 진행한 <Green River,1998-2001>프로젝트는  환경에 무해한 녹색 염료를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물의 상류에 몰래 풀어놓은 작품입니다. 형광 염료인 '우라닌'을 활용해 도심의 강을 형광 '녹색빛'으로 물들인 작품이지요.  갑자기 강물이 온통 녹색으로 변한 이 기이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하여 첫날 도시 전체에서 엄청난 토론과 반향이 일어났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몰랐 던 시민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도시가 재앙이라도 당한 느낌이었겠죠. 나아가 매일 마주하던 '자연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겠죠. 그러나 녹색이 곧 사라진 후 거짓말처럼 소란도 금세 가라앉았습니다. 

 


 

 

 

 

 

<Double Sunset>,1999/Pinterest

 

 

<Double Sunset >. 그는 1999년 네덜란드 유트레히트 미술관 지붕에 단색광 전구들로 일몰의 태양과 같은 형태의 빛 구조물 을 설치합니다. 도시의 지평선 너머로 마치 두 개의 태양이 지는 듯한 장관을 연출하여 세기말의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지요. 

 

 

 


 

관객 참여형 작품은 엘리아슨의 작품세계를 넓히는 데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Ice Watch,2014>/Studio Olafur Eliasson

 

 

 

예술가가 지속가능한 작업을 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합니다. 엘리아슨의 작품은 팔기 쉽지않아 정부나 국제기구의 의뢰를 받은 작품을 종종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ice Watch,2014>/Studio Olafur Eliasson

 

 

그리고 그가 내놓은 이 작품,<ice Watch>는 엄청난 성공작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지질 학자 미니크 로싱(Minik Rosing)과 함께  그린란드의 빙하 12개를 시계처럼 배치해 전시한 것이 특징입니다. 광장에 놓인 얼음은 다양한 관객들 앞에 전시되었습니다.  길을 오가던 시민, 관객은 이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직접 만져보며 그들만의 특별한 시간을 가졌고요. 다양한 생김새 만큼이나 작품을 대하는 시민들의 반응은 놀랍도록 솔직했습니다. 

 

 

 

 

<ice Watch,2014>/Studio Olafur Eliasson

 

 

 

 

<Ice Watch,2014>/Studio Olafur Eliasson

 

 

작품은 겨울에 전시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음이 점점 녹아갔습니다. 빙하가 있던 그린란드보다는 광장이 더 따뜻했기 때문이죠. 관객들은 얼음이 녹는 모습을 작품으로 감상하며 눈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린란드의 빙하도  이렇게 녹을 것을 예감하게 됩니다. 적어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민들 만큼은 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기후변화'관련 내용들을 허트르 듣지는 않은 테지요.  그래서 누군가는 '기후 변화'의 재앙을 줄이거나 늦출만한 기동찬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9l-Xd4WS38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능력이 있다는 걸 믿을 때,
상황은 정말 바뀔 수 있다.

 

 

 

 

 

 

 

엘리슨은 의뢰를 받고, 어떻게 하면 기후인식을 높이고 이를 행동으로까지 이 끌 수 있을 지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행동'이 변하려면, '감정'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전에도  얼음의 녹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기후 위기를 언급하는 콘텐츠는 많았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오히려 식상할 지경이었죠. 하지만 엘리아슨은 관객이 직접 경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촉각적으로, 시각적으로 직접 경험하고 목격하게 만들어 관객의 감정을 건드렸습니다. 

 

 

 

 

 

<Ice Watch,2014>/Studio Olafur Eliasson

 

 

 

기후위기는 현재도 진행중이고,  앞으로 노력을 통해 조금 늦출 수 있더라도 완전히 막을 순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아슨은 정해진 운명에 낙담하는 대신, 다가올 미래의 새로운 잠재력에 집중하길 바랐습니다.

 

 

 

때문에  엘리아슨은 기후를 이야기할 때, 절망적인 단어로 묘사하는 걸 극도로 꺼립니다. 다가올 미래의 디스토피아적이고 부정적인, 두려움에 근거한 내러티브가 던져지는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태도로 이를 대하지 않으면 현재의 문제, 기후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합의를 도출하기 아주 어렵게 됩니다. 

 

 

엘리아슨이  주로 영감을 받는 건 자연입니다. 어린 시절 덴마크에서 자라며 많은 자연 풍경을 접한 영향 때문이죠. 엘리아슨에게는 '자연을 예술로 통역하는 작가'라는 별명도 있을 정도로, 자연을 레퍼런스로 한 작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환경과 교감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작가라고 할 수 있죠.

 

 


 

 

 

아름다운 곳에 위치해 있는 루이지아나 미술관, 덴마크/ 케이타운 일번가

 

 

 

 

 

올라퍼 엘리아슨의 핵심 키워드 세 가지

천재성,

창의성,

선한 영향력

 

 

 

 

 

 

그의  예술은  미술관에 계곡을 옮겨오거나, 랜드마크에 인공폭포를 만들거나, 해무를 미술관 정원에 만들어내는 식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집니다. 안개, 물, 색, 바람과 같은 자연적 대상들을 소재로 강렬한 빛과 어둠을 만들기도 하고요. 축축한 흙이나 이끼의 냄새 그리고 뿌연 안개 등의 요소로 관람객의 시각, 청각, 후각 등 다양한 감각을 자극합니다.

 

 

실제의 자연요소들을 전시장으로 옮겨오는 시도를 통해 관람객들의 선입관을 과감히 깨버립니다. 과학기술과 기계장치를 통해 인공 자연을 새롭게 창조하고요. 익숙한 대자연의 이미지를 낯선 곳으로 옮겨와 독특한 경험을 연출해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연을 보아왔던 방식을 교란시킵니다. 우리에게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선사하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하게 합니다. 

 

 

 


 

출처:Bid Piece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던 엘리아슨은 그곳에서 조명과 관련된 작업을 하게 됩니다.  생생한 경험과 감각에 의존하는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하죠.  1995년 '올라퍼 엘리아슨 스튜디오'를 열면서 이러한 감각적 방식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그를 매혹했던 자연 현상들을 재현하는 작품들을 만들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우연한 발견을 통해 만들어진 작업도 있습니다. 단색광을 활용해 공간 안의 모든 것을 흑백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그 예지요. 우연한 기회에 단색광을 접하게 되며, 바로 작품에 적용한 케이스입니다. 

 

 

단색광은 백색광과 달리, 사물의 빛을 구현해 내는 능력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 조명 아래에 서면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보이죠. 엘리아슨은 미술관 안에 아무것도 없이, 백색광만 배치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자신의 손을 쳐다보라 요청했죠. 그러면 관객들은 자신의 몸의 흑백으로 변한 걸 보게 됩니다.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죠. 엘리아슨은 단색광이 사물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또 컬러로 바라볼 때 보다  더 섬세하게 이를 느낄 수 있다는 연구를 접하게 되었죠.

 

 


 

 

 

<Lava Floor>,2002, 파리 시립 근대미술관/Studio Olafur Eliasson

 

 

 

 

엘리아슨은  종종 과학적 원리와 도구를 사용하여 자연의 현상을 증폭시키거나 원래의 자리를 바꾸어 버려 모방을 넘어서는 초현실적인 유사자연( Artificial Nature)을 창조해 내기도 합니다. 파리 시립 근대미술관에서 발표한 설치작품 <Lava Floor, 2002>는 화산지대에서 채취한 용암 슬러지를 미술관 바닥 전체에 깔아 놓고 군데군데 연기를 피어오르게 한 덕분에 관객들은 전시장에서 화산지대를 산책하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작업 아이디어는 그다지 색다를 것이 없는 탈 물질화, 비 객체화이지만 그 가운데서 관람객과 현상학적인 법칙들을 보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관람객의 '참여 (Involvement)'와 작품의 '일시성(Temporality)'이 자신의 지속적인 관심사라고 강조합니다. 

 

 

 


 

 

 

<The Meditated Motion>,2001/ Tanya Bonakdar Gallery

 

 

 

 

 

 

 


 

 

Olafur Eliasson's New York Cith Waterfalls,Brooklyn Bridge Stock photo Alamy/ ser saude ocupacional

 

 

 

뉴욕시의 요청으로 뉴욕 곳곳에 설치된 폭포(the Waterfalls, 2008)

 

 

 

 

https://www.youtube.com/watch?v=6wUwV0eDDQI

 

 


 

 

 

<Din blinde passage>,2010, Tate Modern,London/ Studio Olafur Eliasson

 

 

 

 

<Din blinde passage>,2010, Tate Modern , London/Studio Olafur Eliasson

 

 

 

 

 

 

https://www.youtube.com/watch?v=JhQqtNUIlTY

 

 

 

 


 

 

 

<Little Sun .Artwork>,2012/Studio Olafur Eliasson

 

 

 

엘리아슨이 선보인 <Little Sun> 프로젝트는 태양광 패널을 단 손전등 작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이 작품은 미술관 기프트 샵에서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한화 약 3만 원) 판매된 금액으로 만들어진 손전등은 아프리카에 전달되어 그들의 밤에 빛을 선물합니다. 

 

 

 

 

https://vimeo.com/41830924

 

 

 

<Little Sun.Artwork 2012>/Studio Olafur Eliasson

 

 

 

이 작업은 전 세계 인구 8명 중 1명이 제대로 된 빛을 누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약간의 빛이라도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죠. 하지만 엘리아슨은 이 프로젝트가 실용적인 해결책이 될 거라 보진 않았습니다. 다만 부정적 에너지만 내뿜으며 좌절하기보다,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능력이 존재함을 증명해 보인 것이죠. 

 


 

 

<Endless staircase :Umschreibung>,2004, permanently installed at KPMG Deutsche Treuhand-Gesellschaft, Munich/Studio Olafur Eliasson

 

 

 

 

 

 

종종 우리는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무언가를 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하고,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해서
실제로 우리가 그것을 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엘리아슨의 이런 긍정성, 인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은 전염성이 있습니다. 엘리아슨은 이를 잘 알고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 타고난 긍정성을 활용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과학 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엘리아슨의 스튜디오는 과학을 재료 삼아 예술을 창작하는 작업실 같습니다. 그는 그런 작업을 통해 관객이 변화를 일으키도록  고양하고, 권한을 부여하고, 영감을 주길 원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인정합니다.

 

 

이를  헷갈리지 않기 위해선, 단계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서, 실제로 행동하고 , 또 다른 행동하는 것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때로 어렵지만, 엘리아슨은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안주함도,
절망감도,
그 무엇도 우리의 옵션에는 없다는 것.



 

 

 

 

 

Studio Olafur Eliasson/olafureliasson.net

 

 

 

 

엘리아슨은 지금도 세상을 보는 다양한 방식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력할수록 더 보인다는 생각, 그의 예술관 때문이죠. 엘리아슨의 이런 탐구정신은 그의 작품세계가 방대해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고, 거대한 대자연에 영감 받은 작품을 내놓았죠.

 

 

 

또 이 관점을 관객이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관객이 주체가 되는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관객이 주체가 되기 위해선, 시각, 촉각, 공간감 등 다양한 감각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를 잘 느낄 수 있도록 때로는 과학적으로, 때로는 자연친화적으로 설계되죠. 이를 통해 작품의 메시지는 오롯이 관객에게 전달됩니다. 때문에 관객은 예술가의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소비자가 아닌 작품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생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엘리아슨은 관객이 곧 '작가'이자 '아티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제 역할은 그들이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올라퍼 엘리아슨-

 

 

엘리아슨의 메시지는 선합니다. 관객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고, 더 많은 사람이 빛을 누릴 수 있게 하며, 자연의 위기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킵니다. 자신의 작업 방식이 가진 몰입도를 선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합니다. 

 

 


 

 

 

 

 

 

 

Overdeepening, 아모레 퍼시픽 본사 야외, 2018/ Studio Olafur Eliasson

 

 

 

아모레퍼시픽 본사 야외에 올라퍼가 2018년에 스테인리스 스틸과 LED를 이용해 만든 오더디프닝(Overdeepening)이란 작품입니다. Overdeepning은 빙하가 흘러내리면서 해수면 이하로 지표를 깊이 깎아 내는 침식작용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두 개의 반원형 고리가 각각 거울과 검은 수면에 반사되어 서로 얽혀 있습니다. 반원의 고리가 빛의 작용에 의해 온전한 원형을 형성합니다. 반사된 형상이 무한히 반복되며 깊어지는 공간적 환영을 통해 인식과 감각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작가의 의도를 담았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MwWhBOAsao

 

 

 

 

 


 

 

 

현재 그는 베를린에 자신의 이름을 딴 'Studio Olafur Eliasson'을 설립하여 30명에 달하는 건축가들, 과학자들, 연구원들, 설치자들을 직접 이끌고 다양한 커미션과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도 관람자의 체험과 자연에 대한 탐구, 그리고 이를 구현해 낼 과학적 원리와 기술에 대한 실험을 이어갑니다. 조각과 설치뿐만 아니라 페인팅, 미디어 아트, 건축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통해서 말이죠. 

 

 

앞으로 올라퍼 엘리아슨은 어떤 작품을 만들까요? 그 안에서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관점과 경험을 가져갈 수 있을까요?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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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게리(Frank Gehry:1929,2,28- )의 건축은 딱딱한 모더니즘 건축을 지양하고 유동적이고 개성 있는 해체주의 건축을 선보인 건축가입니다. 그의 건축에서 해체주의 개념은 기존의 건축적 질서와 위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와 공간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선,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로 기존 건축의 직선적이고 규칙적인 모습에서 벗어납니다.  건축 요소들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효과를  창출해 냅니다. 건축물의 내부와 외부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공간의 연속성을 추구합니다. 다양한 재료와 기술의 실험적 결합으로 건축의 한계를 극복합니다.  그는 건축과 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조형미를 추구합니다. 요즘 디지털 기술과 예술의 결합으로 건축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또한 여전히 시도 중이고요.  그의 환상적인 작품들을 살펴봅니다. 

 

 

 


 

<루이비통 메종 서울>/브리크매거진

 

 

 

 

 

2019년 가을, 프랭크 게리의 건물이 서울 한복판에 들어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들썩였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이어 프랭크 게리가 루이 비통을 위해 만든 두 번째 건물 '루이비통 메종 서울'. 프랭크 게리는 네모난 형태 위에 얹힌 수원 화성의 포탑 지붕과 동래학춤의 춤선에서 건물의 이미지를 착안했다고 전합니다. 한편 빛을 최대한 건물에 끌어오기 위해 주로 사용하던 금속이 아닌, 스페인에서 직접 공수해 온 유리로 패널을 마감했습니다. 마치 건물 위를 유영하는 하얀 돛단배의 이미지. 프랭크 게리는 '루이 뷔통 메종 서울'을 보고 도포 자락이 떠오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프랭크 게리의 비교적 최근작인 ' 루이 뷔통 메종 서울'은 프랭크 게리가 90세에 완공한 건물입니다. 

 

 

서울시 지도 /www.pinterest.co.kr

 

 

 

 

 

 

 

https://www.youtube.com/watch?v=KYpr2AF7CCI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대부분의 지자체가 커다란 랜드마크를 세웁니다. 사람이 몰리고, 돈을 벌어줄 거라서요.  하지만 그 결과가 성공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는 말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 그 어려운 일을 건물 하나로 해낸 사람이 있습니다. 구게하임 미술관으로 무너져가는 스페인의 도시 빌바오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축가, 프랭그 게리입니다. 한번쯤 그 이름을 들어봤거나, 혹은 한 번쯤 그의 뒤틀리고 구겨진 건물을 보았을 겁니다. 그는 어떻게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가 될 수 있었을 까요? 

 

 

건축가 프랭크 게리 하우스, 산타 모니카 ,캘리포니아/123RF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위키백과

 

 

 

 

 

A dumb little house with charm/STIRworld

 

 

 

 

 

Frank Gehry, <Easy Edges> side Chair/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LA로 돌아와 빅터 그루언 (gruen)사무실에 잠깐 있다가  가구를 제작하여 돈벌이를 합니다. 이지 에지스 "easy edges" 라는 가구들입니다. 이때 번 돈으로 산타모니카에 있는 벙갈로 같은 허름한 주택을 매입, 개조하여 자신의 집을 꾸밉니다. 프랭크 게리가 처음 건축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자신의 집인 '게리 하우스'를 설계한 이후부터입니다. 유년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강철과 목재 합판 등의 싸구려 재료를 조합해 만든 디자인은 일종의 판잣집과 같은 모습이었죠. 그 기괴함에 마을 사람들은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괴팍한 건물을 통해 무명의 프랭크 게리는 유명세를 얻었고 훗날 이 건물은 미국 건축가 협회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캐나다, 토론토 지도/나무위키

 

 

 

프랭크 게리는 1929년 2월 28일 캐나다 토론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이 드문 캐나다 토론토에서 프랭크 게리는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또래 친구들은 그를 유대인이라며 놀려댔습니다. 이는 친구가 아닌 가족 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작은 철물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유독 프랭크 게리를 아꼈던 그의 할머니는 토요일 아침마다 철물점에서 사용하고 남은 나무와 철판 조각으로 작은 미래 도시 모형을 만들며 함께 놀았습니다. 이 놀이 경험은 훗날 프랭크 게리의 모형 중심의 설계 방식과 금속 합판과 골판지 등의 소재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과정 중에 프랭크 게리는 재료의 본성에 대해 본능적으로 탐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구부러지고 휘어진 훗날 건축물의 특성으로 이어지고요.  한편 프랭크 게리는 아버지와도 자주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합니다. 이처럼 프랭크 게리는 유년 시절 가족으로부터 건축적인 동시에 예술적인 영감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댄싱하우스>,프라하 체코,1996 /123RF

 

 

체코/신발끈 여행사

 

 

 

 

<댄싱 하우스 1996> 입니다. '건물이 이렇게 휘어져도 멀쩡할 수 있구나!' '벌어진 건물 다리만으로도 정말 건물이 춤을 추네!' 건축에 문외한인 제가 처음 보자마자 느꼈던 생각입니다. 만화에 나올 법한 건물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통념을 깨는 것 같아 유쾌했습니다. 

 

 

프랭크 게리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로스 앤젤레스 주재의 건축 설계 사무소 빅터 그루엔에서 잠시 근무하게  됩니다.  이후 파리로 떠난 그는 그곳에서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창작의 저변을 넓혀갔습니다. 그가 당시 교류했던 예술가들의 목록은 제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센버그, 리처드 세라 등. 여러 예술가들과 교유하면서 받은 영감은 그를 건축가와 예술가의 경계에 선 인물로 불리게  합니다. 한편 바바라 아이젠버그가 쓴 프랭크 게리의 인터뷰집 < 프랭크 게리와의 대화>에서 그는 산드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앙리 마티스, 조르지오 모란디와 같은 , 세기와 양식을 넘나드는 회화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런 그를 두고 예술적 형식에 집착한 나머지 기능과 효율을 간과한 낭비적 건축이라고 비판합니다. 프랭크 게리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인 프라하 체코의 <댄싱 하우스>역시 위와 같은 비판을 받은 사례입니다. 비평가들은 바로크, 고딕, 아르누보 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고도 프라하에 근본 없는 키치 양식의 건물이 들어서며 주변 경관을 해친다고 비난합니다. '건축가인가? 예술가인가?라는 질문은 프랭크 게리의 평생을 꼬리표처럼 따라 다닙니다.

 

 

하지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같은 분류에 대해 "쓸데없는 질문"이라며 일축합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불려도 좋으며, 그저 예술과 관련된 건축물을 만들고 싶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프랭크 게리는 건축뿐만 아닌, 다양한 인스톨레이션 작업과 의자 등을 디자인하며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댄싱하우스>는 지금도 프랭크 게리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로 남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8cJVsst0vU

 

 


 

 

 

 

 

Frank Gehry/Architectural Digest

 

 

 

 

 

 

일본 고베지도/여행과 날씨

 

 

<Fish dance restaurant,kobe, japan,1989> 물고기에 대한 애정과 관심도 대단했습니다. 어렸을 적의 기억 때문이라고 하네요. 인지도가 상승하면서 물고기를 소재로 한 작품을  다수 만들기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zTZ9wvNHhY

 

 

 

Golden fish by Frank Gehry at the Olympic Village in Barcelona, Catalunya,Spain,1992/Alamy

 

 

Fish Lamps by Frank Gehry/ Colossal

 

 

 

 


 

 

 

 

 

스페인 구겐하임 미술관, 1997/ 미주한국일보-워싱턴 DC

 

 

 

 

스페인 빌바오/땅집고

 

 

 

 

1991년 프랭크 게리는 인생을 바꿀 만한 제안을 받게됩니다. 바로 스페인 항구 도시 빌바오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건물을 지어달라는 제안이었죠. 광업 도시인 바스크 지방의 빌바오는 산업 구조의 변화에 따라 1970년대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인구는 끊임없이 감소하고 도시는 점점 슬럼화되어 가고 있어 지요. 이에 바스크 정부가 꾀한 대책은 문화예술 산업을 통한 경제부흥. 그 일환으로 바스크 정부는 미술관 그립을 계획합니다. 정부는 프랭크 게리에게 다소 무리한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공업 도시 빌바오의 분위기에 역행하는 동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건물을 지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프랭크 게리는 이 도전을 받아들이고 개발에 착수합니다. 그렇게  지어진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입니다.

 

 

 

빛이  반사되는 티타늄 외벽의 우주 전함을 연상케하는 외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금세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1997년 개관 이후 빌바오는 매년 1백만 명이 찾아오는 문화예술도시로 탈바꿈했습니다. 건물 하나로 도시 전체의 번영을 꾀하는 일, 사람들은 이를 두고 '빌바오 효과'라고 일컫기 시작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rDLh7OsThM

 

 

 

 

 

 

https://www.youtube.com/watch?v=zd6xbBL6ejw

 

 

 

 

2024.04.19 - [지식&교양] - 51-6. 페기 구겐하임( Peggy Guggenheim ,61)

 

51-6. 페기 구겐하임( Peggy Guggenheim ,61)

'미술 컬렉터'라고 하면 조금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겁니다. 예술을 거래하는 일이 우아한 비즈니스만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죠. 그림이 고위층 비자금 조성 수단으로

sun-n5y2.tistory.com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트립어드바이저

 

 

 

 

로스엔젤레스,캘리포니아주, 미국/위키백과

 

 

 

 

프랭크 게리가 18살이 되던 1947년 그의 가족은 캐나다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는 트럭으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니게 됩니다. 처음 프랭크 게리는 로스앤젤레스 시립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원소들과 씨름하던 그는 이내 화학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지요.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유년 시절의 자신이 어머니와 함께 박물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음악과 그림을 즐겼으며 , 무엇보다 할머니와 모형을 만들던 순간이 기억에 사무쳤다고 회고합니다. 

 

 

 

프랭크 게리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건축과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학교(USC)를 옮겨 건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고요. 이후 프랭크 게리의 가족은 다시 케임브리지로 이주하게 됩니다.  1956년 27세인 그는  이후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 도시계획을 공부하게 됩니다. 훗날 프랭크 게리는 직장을 위해 다시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오게 됩니다.(1960년)

 

 

로스앤젤레스 특유의 온화한 날씨와 자유로운  분위기, 과연 그의 가족이 로스앤젤레스가 아닌 다른 도시로 이사했다면 프랭크 게리의 선택이 지금과 같았을까요? 프랭크 게리를 연구하는 많은 이들은 그의 건축적인 특징이 로스엔젤리스와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1998년  프랭크 게리는 자신의 정서적 고향인 로스 엔젤레스의 기념비적인 건물을 짓기 시작합니다. 완공까지 약 5년이 걸린 건물의 이름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입니다. 프랭크 게리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 구겨진 철판으로 점철된 건물은 로스 앤젤레스의 명소를 넘어 '미국을 바꾼 10개의 건물'로 선정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AEd1uDOZJE

 

 

 

 


 

 

Marques de Riscal Reserva Rioja/ Winegraph

 

 

 

 

 

La RioJa, Spain Map/Britannica

 

 

 

 

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 2005 엘시에고 스페인 프랭크 게리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모델 작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모든 작업은 모델에서 시작해서 모델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델 작업에서 구조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동시에 해결하고, 디테일 등 모든 작업을 모델에서 판단, 결정합니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 역사에서 꼭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CATIA'시스템입니다. 본래 항공기, 자동차 디자인에 사용되던 'CATIA'는 프랭크 게리가 원하는 정밀도로 철재 패널을 비틀고 구부릴 수 있었습니다. 흡사 우주 전함을 닮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다 이 소프트 웨어를 통해 철저한 모델 작업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프랭크 게리의 'CATIA'시스템은 이후 자하 하디드와 같은 유명 건축가의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정작 프랭크 게리는 컴퓨터에 그리 밝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오히려 스스로를 컴맹에 가깝다고 소개합니다. 컴퓨터 작업 이전 그는 철저하게 모형을 통해 재료의 특성과 구조 세부 등을 연구한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프로젝트 전시에 공개된 수백 개의 건축 연구 모형은 세간을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도저히 당시의 컴퓨터로는 불가해한 창의적인 구조 역시 수많은 모형을 통한 모델 작업의 결과입니다. 프랭크 게리의 여러 건물 중 가장 구부러지고 비틀린 작품을  고르자면 그건 단연 스페인의 와이너리 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 아닐까 싶습니다. 포도나무의 비틀린 형상을 토대로 벽돌 건물 위에 얹은 티타늄 캐노피는 마치 미래의 피라미드를 연상케 합니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조형물을 만들어 냅니다.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아  무리를 해서라도 꼭 한번 가고  싶을 정도로 말이죠.

 

 

 

Marques de Riscal Reserva Rioja/ 컬처램프
윈스턴의 와인스토리-마르께스 데 리스칼 /컬처램프

 

 

 

 


 

musee louis vuitton paris/sportgranada.com

 

 

 

구겐하임 빌바오의 성공이 계속되자 루이비통에서 동반자가 되자고 게리를 끌어 안습니다. 그의 나이 80대. 파리에 루이뷔통재단 미술관을 짓게 됩니다. 헤엄치는 물고기의 형상을 이미지화한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입니다. 

 

 

Celebrating Louis Vuitton's daring construction by Frank Gehry/Vogue France

 

 

 

 

 

https://www.youtube.com/watch?v=_ed-d4Zxxnc

 

 


 

 

 

Rip Zaha Hadid/World Red Eye

 

2000년대 들어 자하 하디드와 교우가 많아 지면서 무척 가까워졌습니다. 프랭크 게리와 자하 하디드는 해체주의 건축의 대표적인 건축가들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건축계에 새로운 경향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더 프랭크 게리의 건물을 볼 수 있을까요? 올해 95세를 맞은 그는 아직 은퇴하기에 너무 바쁘다고 말합니다. 백 세 시대 그의 상상력이 첨단 디지털 기술의 영향을 받아 얼마나 나래를 펼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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