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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가로 타고났고, 따라서 예술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 책임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다른 예술가들의 삶을 연구하고, 세상을 연구하면서 배웠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살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그림은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림은 마법처럼 존재한다. 
- 키스 해링 저널-

 

 

 

 

 

 

 

우리에게 친숙한 현대미술 작가 중에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이 있습니다.  키스 해링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그의 그림은 한 번씩 봤을 정도로 유명하죠.  핸드폰 케이스, 티셔츠 등에 다양하게 상품화되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검은 피카소'라 불리는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ael Basquiat, 1960-1988)처럼 그 또한 스트리트 아트를 예술계에 끌어들이며 두 분야의 조화를 꾀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선, 상징적인 형상, 리듬감을 특징으로 합니다. 낙서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사람들에게 친숙한 예술을 선보이고자 노력했던  작가입니다.  그의 정신은 시간이 흘러서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Ignorance =Fear, 1989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keith Haring의  <Ignorance=Fear>( 1989) 작품입니다. Haring 은 1988년 AIDS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의 예술은 AIDS 위기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두게 되지요.  이 작품은 AIDS위기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부적절한 대응을 비판하고, 대중의 무지와 침묵이 공포를 초래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림 속 세 인물은 각각 눈, 귀, 입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는 AIDS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을 상징합니다. Haring은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AIDS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이해와 동정을 촉구하고자 했습니다. 

 

 

 

 

Kutztown, Pennsylvania(PA)/ US Beacon

 

 

 

 

 

 

작가는 1958년 5월 4일 펜실베이니아주 레딩(Kutztown) 근처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기본적인 만화 기술을 배웠습니다.  월트 디지니나 닥터 수수 (Dr. Seuss)와 같은 대중문화에 영향을 받았고요. 197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링은 피츠버그에 있는 상업 예술 학교인 아이비 전문 미술 학교( Ivy School of Professional Art)에 입학했으나, 자신이 상업 그래픽 아티스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고 중퇴 후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에 이릅니다.

 

 

 

 

  뉴욕으로 넘어간 해링은 시각예술학교(School of Visual Arts, SVA)에 다니게 됩니다. 그곳에서 기존 예술계의 밖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던 대안 예술과 더불어 당시 유행하던 그라피티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가 대중 속에서 예술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은 그가 존경하는 화가이자 학교 스승이었던 키스 소니어(Keith Sonnier)의 전시회를 도우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작품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예술과 대중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술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 여겼던 그의 생각과 전혀 반대되는 모습이 그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죠.

 

 

 

 

 

Murals Map/Pinterest

 

 

Keith Haring , Subway Drawing/MutualArt

 

 

 

뉴욕은 신선하고 활기찬 에너지가 뿜어져나오는 도시였습니다. 키스해링(Keith Haring , 1958-1990)은 뉴욕 거리의 벽면과 지하철 플랫폼에 그려져 있는 낙서 스타일의 그림을 보고 깊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는 그만의 예술언어로 도시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키스 해링의 특징은 밑그림 없이 바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고, 자기만의 독특하고 특징적인 양식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배경에 만화적인 인물들과 형상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표현 매체에 매료되어 그는 매일 거의 40점에 가까운 새로운 지하철 작품을 그려나가기도 했습니다.  지하철 드로잉 시리즈는 해링이 자신의 사진을 달고 처음으로 공공장소에 게시한 작품입니다.

 

 

 

 

5년동안 뉴욕 지하철의 비어있는 광고판에 검은색 종이 위에 분필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작품 수만 해도 5000여 점이 넘는 방대한 양이었습니다.  해링은  일련의 공공벽화를 통해 고급미술과 저급미술의 경계를 허물고자 노력한 유일한 팝아트화가 이기도 합니다. 번번이 공공기물 훼손혐으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점차 해링의 독특한 이미지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Keith Haring/ 시사매거진

 

 

 

 

 

 

키스 해링(Keith Haring)은 늘 분필을 들고 다니면서 바닥과 벽에 낙서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성에 대한 자유, 과거의 전통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우드스탁 운동이 한참 일어나고 있을때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키스해링은 공동체를 만나고, 사회에 대한 이슈를 인식시키기 위해 사회적 이슈를 그림으로 그려냈습니다. 

 

 

 

 

 

Woodstock: The Last Great Music Festival/Pinterest

 

 

 

 

 

우드스탁 운동의 배경은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 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당시 젊은 세대들은 기성 사회에 대한 불만과 저항 의식을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가 강했고, 이는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는 히피 문화의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이러한 반문화 운동의 절정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드스탁은 단순한 음악 축제를 넘어 젊은이들의새로운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보여주는 장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평화'라는 모토 아래, 참가자들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음악을 즐기고 공동체 의식을 경험했습니다. 이 운동은 기성세대와 정부의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변화를 알리는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었습니다. 우드스탁은 이후 미국 사회와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며, '우드스탁 세대'라는 용어를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Keith Haring's Monumental Mural sells for Record US $3.86M at Bonhms New York/ The VALUE

 

 

Keith Haring 'UNTITLED'(Subway Drawing)12/ MutualArt

 

 

 

Keith Haring/ AnOther Magazine

 

 

 

이런 혼란 속에서 해링은 지하철에서 검은 종이를 덮어놓은 빈 광고판을 보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매체를 발견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하철 전체에 있는 빈 광고판에 흰색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1980년부터 1985년 사이 작가는 수백 개의 공개 드로잉을 제작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의 작품은 지하철을 타고 통근하는 사람들에게 친숙해졌으며,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에게 말을 건네며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소통을 통해 작가는 더욱 열심히 작업을 진행했으며 지하철은 작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실험실'이 되었습니다.

 

 

 

 

 

 

 

 

 

Keith Haring's Cranbrook Mural/ www.ai-ap.com

 

 

 

Keith Haring은 1987년 Cranbrook Art Musem에서 획기적인 임시 벽화를 제작했습니다. 이 벽화는 Haring이 자신의 c최고 작품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1990년 31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그의 시각적 언어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Cranbook  벽화는 Haring의 스타일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의도적인 물감 흘림과 얼룩을 도입했습니다. 광대, 마스크, 해골, 순교자, 종교적 아이콘 등 그가 이후 작품에서 계속 탐구한 캐릭터들을 묘사했습니다. 

 

이 벽화 프로젝트는 Haring이 AIDS 진단을 받은 후 작품과 행동주의가 더욱 개인적으로 변화한 시기에 해당합니다. 종말론적 사고와 철학에 몰두한 Haring의 후기 작품들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혼란스러운 서사와 장-미셸 바스키아의 폭력적인 유희성과 예술사적 친밀성을 보입니다. 

 

 

Cranbrook Art Museum 는 2017년 "Keith Haring: The End of the Line" 전시회를 개최하여 이 중요한 벽화 프로젝트를 기념하고 문서화했습니다. 

 

 

Keith haring 'Absolute Vodka'/ Art Wise

 

 

 

 

 

키스 해링은 항상 대중과 소통하며 미술을 통한 행복한 지구를 꿈꿨습니다. 타임스퀘어 전광판 애니메이션, 스와치 시계디자인, 앱솔루트 보트카 광고 등 상업미술가로도 성공을 하기도 했습니다.

 

 

 

Keith Haring 의 Absolute Vodka 작품은 1986년에 제작된 광고 캠페인의 일환으로, 그의 독특한 팝 아트 스타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Haring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단순하고 대담한  선으로 그려진 인물 형상들을 사용했습니다. Absolut보드카 병 모양을 중심으로 여러 춤추는 듯한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어, 활기차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색상은 주로 검정과 흰색을 사용했으며, 보드카 병 부분에만 파란색을 적용하여 시선을 끌도록 했습니다. 이 광고 포스터는 텍스트 없이 순수하게 Haring 의 예술적 표현만으로 브랜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크기는 대략 41.75cm*30인치(106*76cm)정도이며, 오프셋 리소그래프 기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000부 한정판으로 제작되어 현재 미술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경매에서 최고 650만 달러에 낙찰된 기록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상업 광고와 순수 예술의 경계를 허문 Haring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의 예술 세계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프셋 리소 그래피는 현대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인쇄 기법 중 하나입니다. 이 기법은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원리를 활용합니다. 평판 인쇄의 한 종류로, 표면으 요철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인쇄판에서 고무 블랭킷으로, 다시 종이로 잉크를 전사하는 간접 인쇄 방식입니다. 고품질 인쇄물을 대량으로 생산하는데 적합합니다. 원래 석회석 판을 사용했지만, 현재는 주로 금속판(특히 아연판)을 사용합니다. 물을 흡수하고 잉크를 반발하는 부분과 잉크를 흡수하는 부분을 만들어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이 기법은 대량 인쇄에 효율적이며 고품질의 결과물을 제공하여 책, 잡지, 신문, 포장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됩니다.

Andy Warhol<Marlyn Diptych>
Roy Lichetnstein<Whaam!>
Robert Rauschenberg<Retroactive I>
Jasper Johns<Flag>

이 기법은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고품질의 인쇄물을 제작할 수 있어 , 현대 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팝 아트 운동에서 널리 사용되어 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했습니다. 

 

 

 

 

Untitled, 1982/ MoMA

 

 

 

 

키스 해링(Keith Haring)은 덧칠이나 선이 삐뚤어진 것을 절대 볼 수 없습니다. 밑그림도 없이 한 번에 모든 걸 그려냅니다.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그대로 벽에 옮겨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In AN NYC Stairwell, One of Keith Haring's Muarls May Be In Peril./NPR

 

해링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중시합니다.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종문제와 문화를 작품에 녹여냈고요. 사회 문제도 예술의 세계로 끌어왔습니다. 

 

 

 

 

Keith Haring: Boys Club Mural/Pioneer Works

 

 

Keith Haring:Art is for Everybody/ Walker Art Center

 

 

 

 

Keith Haring의 <Art is for Everybody> 철학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핵심 개념입니다. 이 철학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들은 미술관뿐만 아니라, 지하철, 거리 등 일상적인 공간에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생동감 넘치는 색채, 활기찬 선, 그리고 짖는 개나 '빛나는 아기'같은 상징적 캐릭터를 사용했습니다. 자본주의, 정치, 성, 종교 등 당시의 긴급한 사회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회화, 조각, 드로잉뿐만 아니라 비디오, 사진, 개인 일기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했습니다. Haring의 작품은 즐거움을 전하는 동시에 심오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 오늘날까지도 현대 예술과 대중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keith Haring, 빨강과 파랑의 이야기 21개 시리즈,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 ARTLECTURE.com

 

 

 

 

 

키스 해링은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작업하는 데 보내었습니다. 그는 아동 도서를 여럿 출간하는 가 하면, 팝 숍에서 파매할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상품들을 디장인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도시에서 아이들과 워크숍을 개최하기도 하고요. 해링의 이미지는 보편적이면서 특이했고, 그는 언어를 사용하여 예술을 해석하는 창조력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빨강과 파랑을 먼저 그리고 검은선을 그려서 형태를 완성하고, 모든 그림을 보면 빨간색이 꼭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빨강과 파랑의 이야기> 특별히 해링이 어린이들을 위해 만든 21개의 석판화 시리즈입니다. 해링은 이 작품을 만들면서 어린이들이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길 원했다고 합니다. 각 그림은 해링이 배열한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고, 마지막 장에는 빨강과 파랑이 보라색의 계란 모양 형태가 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해링은 시리즈가 합쳐져서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을 의도했다고 합니다. 키스 해링의 말처럼 어른들이 잊고 있는 아이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작품입니다. 이 프린트들은 이야기 경연대회에도 사용됐으며, 미국의 많은 학교, 어린이 미술관에서 교재로 채택해서 교육프로그램에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빨강은 가장 강렬한 색 중에 하나이다. 
빨강은 피의 색이고
시각적으로 가장 강한 힘을 갖는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신호등의 불빛도 빨강인 것 같다. 
정지신호도 그렇고
실제로 나는 모든 그림에 빨간색을 쓴다. 

 

 

 

 

Art Activism Keith Haring/ Art History Kids

 

 

 

To My Friends at Horn: Keith Haring and Iowa City/ Stanley Museum of Art- The University of Iowa

 

 

사람들과 소통하며 예술의 선한 면을 전파했던 그는 경력 전반에 걸쳐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공사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1 982년부터 1989년 사이에 전 세계 수십 개 도시에서 50개 이상의 공공 미술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중 다수는 자선 단체, 병원, 어린이집, 고아원을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또한 뉴욕 , 암스테르담, 런던, 도쿄 등의 도시의 학교와 박물관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 워크숍을 개최하고 많은 문맹 퇴치 프로그램과 기타 공공 서비스 캠페인을 위한 이미지를 제작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GFH2WL5Jh4

 

 

 

 

 

 

The Enduring Legacy of Keith Haring (+18NSFW)/ Danny with Love

 

 

 

 

 

Untitled, 1983/ Marquette University

 

 

 

 

Keith Haring 은 1983년 Marquette University의 Haggerty Museum of Art 건설 현장에서 벽화를 제작했습니다. 이 벽화는 건설 울타리에 그려졌으며, 8피트 높이와 96피트 길이의 24개 패널로 구성되었습니다. Haring의 벽화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을 반영하며, 활기찬 이미지와 상징적인 캐릭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Haring 의 초기 작업 중 하나로, 그의 시각적 언어가 발전하는 중요한 시기를 나타냅니다. 벽화는 박물관의 기공식에서 중심 역할을 했고, Haring의 공공 예술에 대한 기여를 잘 보여줍니다. 

 

 

 

 

Keith Haring/Noirmont Art Production

 

 

 

 

Keith Haring Mural, Amsterdam,Netherlands/Atlas Obscura

 

 

 

Keith Haring and Japan/ Google Arts& Culture

 

 

 

The Crack is Wack/Singulart

 

 

 

 

 

Keith Haring의 "Crack is Wack"작품은 마약, 특히 크랙 코카인에 대한 강렬한 반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유명한 벽화입니다. 이 작품은 Harig의 친구가 마약 중독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벽화에는 Haring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과 어린이가 쓴 것 같은 거대한 문자가 등장합니다. 작품에 포함된 두 개의 해골은 마약으로 인한 죽음을 상징하며, 이를 통해 마약 사용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Crack is Wack"은 Haring 의 간결한 선과 강렬한 원색 사용, 그리고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표현 방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Haring의 사회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며, 그의 예술이 단순한 미적 표현을 넘어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c-Cy8_hGpQ

 

 

 

 

 

 

 

Keith Haring, 'Untitled(Circa, 1986)/MutualArt

 

 

 

 

단순하고 가벼운 느낌으로 이뤄진 그림 스타일 때문에 그가 다룬 주제 또한 가벼울 것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가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이유가 '대중과의 소통'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친숙한 표현 방식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예술 작품을 선보이려 한 그의 의도였습니다. 

 

 

 

키스해링은 단순한 표현뒤에 담긴 깊은 주제와 같이 밝음과 어둠, 가벼움과 무거움 강약대비를 통해 그의 작품에서는 놀라운 조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 주제는 무제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정확한 의미 전달은 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Lucky Strike,1987/The Keith Haring Foundation

 

 

 

 

Keith Haring의  Lucky Strike 시리즈는 1987년 담배 회사 Lucky Strike의 의뢰로 제작된 광고 작품입니다. Haring은 총 9개의 드로잉을 만들었고, 그 중 5개가 실크스크린 프린트로 제작되었습니다. 생동감 넘치는 선과 춤추는 듯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밝고 대비되는 색상을 사용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Lucky Strike 시리즈는 Haring 의 예술이 상업적 영역과 만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그의 독특한 시각 언어를 대중적인 광고 캠페인에 적용한 사례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Haring이 친구들을 위해 담배를 피우는 해골을 그린 10번째 스케치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Lucky Strike 경영진의 불만을 샀지만, Haring의 유머와 사회 비판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작품들은 Haring의 예술이 갖는 대중성과 접근성, 그리고 그의 독특한 시각적 언어의 힘을 잘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NYC-East Village : Bowery Mural-Tribute to Keith Haring/Flickr

 

 

 

키스 해링의 <마약은 인생을 망친다>라는 이 작품은 마약중독에 걸린 친구를 걱정하며 그린 그림입니다. 그 당시 유행처럼 번지는 마약밀반입에 반대하여 할렘 강변도로에 근접한 운동장 벽면에 '마약은 인생을 망친다'라는 레터링을 큼지막하게 삽입하여 그림과 함께 그려 넣습니다. 처음에는 낙서행위에 대한 벌금형을 받지만 얼마 안돼서 벽화를 완성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됐다고 하네요. 

 

 

 

 

 

앤디 워홀은 가벼운 주제를 무겁고 심각하게 표현한 반면,
키스 해링은 정반대로 무거운 주제를 밝게 그려낸다.
-오노 요코(세계적인 멀티미디어 예술가 )-

 

 

 

 

 

 

Keith Haring at the Opening ofPop Shop in Soho, 1986/ Pinterest

 

 

 

키스 해링은 자신의 예술철학을 위해  작품을 상품화 한 작가입니다.  해링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그의 작품의 가격도 덩달아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중을 위한 그림을 그려왔는데, 아이러니하게 돈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그는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아먄 했습니다. 그는 저작권 문제와 더불어 자신의 철학에 맞는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 팝 숍(Pop Shop)을 열게 됩니다.

 

 

 

Keith Haring Pop Shop III, 1989/ The Keith Haring Foundation

 

 

 

 

 

Accessibility and Participation-revisiting the Legacy of Keith Haring;s PoP Shop/ WideWalls

 

 

Pop Shop, Keith Haring/Keith Haring foundation

 

 

 

 

 

 

 

Keith Haring in Europe, keith haring/timelineagencia. com.br

 

 

 

 

1986년 4월, 해링은 소호에 자신의 이미지가 새겨진 티셔츠, 장난감, 포스터, 단추, 자석 등을 판매하는 가게, 팝 숍(Pop Shop)을 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상품화하면서 판매한 것은 작가의 작품이 인기를 끌면서 부작용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1984년부터는 지하철에 그린 그림을 훔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두세 시간이 지나면 이미 그림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죠. 이는 뉴욕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적인 인기에 작가의 허락 없이 제품이 만들어져 팔렸습니다. 팝 숍에 만들어지기 몇 년 전부터 일본에서는 티셔츠, 브라질에서는 운동화, 호주에서는 드레스가 만들어져 판매되었습니다.

 

 

 

 

Radiant Baby from icons series, 1990/ The Keith Haring Foundation

 

 

 

 

Keith Haring의  <방사하는 아기  Radiant Baby>는 1980년대 뉴욕 지하철에서 처음 등장한 그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선으로 그려진 아기가 손과 무릎으로 기어가는 모습을 표현하며, 아기 주변에는 빛나는 선들이 방사되고 있습니다. <방사하는 아기>는 순순함, 희망, 그리고 무한한 잠재력을 상징합니다.  Haring은 아기를 "인간 존재의 가장 순수하고 긍정적인 경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작품은 생명의 본질과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가능성을 나타내며,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종교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기 주변의 빛나는 선들은 기독교 도상학에서 성인들의 후광을 연상시키며, 특히 아기 예수의 표현과 유사점을 가집니다. <방사하는 아기>는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 1980년대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으며,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작품은 Haring의 예술 철학인 대중과의 소통, 예술의 민주화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Keith Haring, PoP Shop IV( Littmannpp. 146-147), 1989/Guy Hepner

 

 

Keith Haring, Free South Africa,1985 / Google Art & Culture

 

 

 

남아프리카 공화국/위키백과

 

 

 

 

<자유의 남아프리카 , Free South Africa>는 남아공에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차별정책의 조건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었습니다. 백인 소수 민족이 대다수 원주민 혹은 인구를 계속  억압했던 식민시대미 이후의 아이러니를 표현하기 위해 검은 형상은 의도적으로 백색 형상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검은색선을 사용하면 인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검은색 윤곽은 또한 흑인 형상의 목에 감겨 있는 올가미 주위를 맴도는 아우라처럼 심리적으로 더 많이 격앙된 요소들에 대한 인식을 고조시킵니다.

 

 

 

넬슨 만델라와 빌 클린턴/위키백과

 

 

 

대중적인 시위 포스터는 남아공의 인식과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유명인사, 정치인, 시민들의 세계적인 대중적 압력과 결합된 포스터, 티셔츠, 엽서 유통에 적합한 이해하기 쉬운 이미지를 사용하여 해링과 같은 예술가들에 의해 캠페인을 펼칩니다. 이 러한 시위 운동의 물결은 남아공 정부에 30년간 감옥에 죄수였던 변호사이자 활동가인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결국 감옥에서 풀려나 대통령으로 선출되게 되었습니다. 거의 10년 후인 1994년에 만델라 대통령은 인종차별정책을 영원히 끝냈습니다. 

 

 

 

 

 

Keith Haring, Pyramid Heart/MutualArt

 

 

Silence=Death/ Keith Haring Foundation

 

 

 

 

Rebel with Many Causes/The Artist

 

 

 

 

 

 

<많은 이유가 있는 반항아 Rebel with Many Causes>는 헤링의 반복적인 주제인 "악한 것을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마라"의 한 예로서, 사회 문제, 특히 에이즈 위기를 외면할 사람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예술가로서 그리고 활동가로서 해링의 태도를 암시하는 데, 그는 두 가지 정체성을 모두 자신의 예술작품에 접목시켰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금기시되고 있을 때 공공연히 동성연애자임을 드러낸 그는 예를 들어 정부의 에이즈 대책 강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단체 <액트 업 ACT UP: 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등의 운동을 통해 연방정부의 대처가 더딘 에이즈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데 전념했습니다. 그의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급속한 확산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또한 노골적인 소비주의, 환경문제, 인권에 관심을 모으기 위해 예술과 캠페인을 제작했습니다. 

 

 

 

 

Safe Sex,1985/ The Keith Haring Foundation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은 1980년대의 뉴욕시의 거리 문화에 반응한 미국의 예술가 및 사회 활동가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그가 살면서 일했던 기간 동안  매우 적합한 출생, 죽음, 섹스, 전쟁에 관할 것이었습니다. 키스 해링은 대부분의 비- 성애자들이 성적인 성향을 비밀리에 유지하던 시기에 공공연히 동성연애자임을 알립니다.  예술가로서 해링의 중요성 중 하나는 그의 예술이 에이즈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높였는지였습니다. 그의 작품들 중 많은 것들이 에이즈 연구와 에이즈 인식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한 레드 핫 기구(Red Hot Organization)의 활동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키스 해링 (Keith Haring) 자신도 1990년 32세의 나이로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RHO(Red Hot Organization, RHO)는 비영리단체로, 대중문화를 통한 에이즈 퇴치를 헌신하는 국제기구입니다. 1989년 설립 이후, 400명 이상의 아티스트, 프로듀서, 디렉터들이 전 세계 에이즈 바이러스(HIV)와 에이즈(AIDS) 구호 및 인식을 위한 총 1,000만 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15개 이상의 앨범 모음집, 관련 텔레비전 프로그램 및 미디어 행사에 기여했습니다. 

 

 

 

 

 

 

Keith Haring, Untitled from Untitled, 1983/MutualArt

 

 

 

Keith Haring'The Political Line'/MutualArt

 

 

 

해링은 출생, 죽음, 사랑, 성과 전쟁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직접적인 선과 직관적인 메시지로 표현하면서 광범위한 청중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88년 에이즈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는 생과 사에 대한 고뇌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뇌를 작품으로 나타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에이즈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 편견 그리고 동성애자의 인권을 예술을 통해 외쳤습니다. 

 

 

 

해링의 작품은 그래서 데카당스 합니다. 노골적인 동성 간 성행위, 기독교를 조롱하는 상징으로 가득합니다. 보는 이에 따라 불편한 감정이 들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해링의 작품은 거리와 지하철을 벗어나 티셔츠, 배지, 벽화, 공인광고, 포스터 등으로 제작되었고,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표현했습니다. 

 

 

 

Keith Haring's Line/Duke University Press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 ph.pinterest.com

 

 

앤디 마우스, 키스 해링/ Pinterest

 

 

 

 

 

팝아트의 거장인 앤디워홀입니다. 키스해링은 생전 앤디워홀과 많은 교류를 하면서, 앤디워홀이 뒤를 이을 팝아트의 전성기를 이끌 화가로 기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워홀은 해링의 멘토이자 영웅으로, 해링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해링은 워홀에 대한 종경심을 작품으로 표현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앤디 마우스 Andy Mouse'입니다. 이 작품은 워홀의 이미지를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와 결합하여 표현한 것으로, 팝 아트의 거장인 워홀에 대한 해링의 경의를 나타냅니다. 

 

 

 

 

두 예술가는 단순히 멘토-멘티 관계를 넘어 친분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교류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팝 아트와 그라피티 아트의 융합, 그리고 대중문화와 순순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해링은 워홀로부터 영감을 받아 예술의 대중화와 상업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그의 작품 세계와 예술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Keith Haring/ Arts& Culture

 

 

 

 

Andy Mouse- New Coke, 1985/나무위키

 

 

 

 

 

1983년 첫 만남을 시작으로 30살이 넘는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적 동지가 됩니다. 그런데 워홀이 세상을 떠나자 해링은 이 엔디 마우스 시리즈로 워홀을 추모했습니다. 그림 가운데 생쥐가 귀가 달리고  큰 안경을 쓴 캐릭터가 보이는데 이 캐릭터가 앤디 마우스입니다. 

 

 

 

 

 

A Pile of Crowns for Jean-Michel Basquiat, 1988/ Keith Haring/wikipedia

 

 

 

 

 

<A Pile of Crowns for Jean-Michel Basquiat>는 Keith Haring 이 1988년에 제작함 작품으로, 그의 친구이자 동료 예술가였던 Jean-Michel Basquiat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작품은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캔버스에 그려졌으며, 크기는  270cm* 300cm입니다. 

 

 

 

 

작품의 중심에는 Basquiat으 트레이드마크인 왕관들이 높이 쌓여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왕관 모티프는 Basquiat 작품의 상징적 요소로, 대중문화에서도 널리 인식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Haring은 삼각형 모양의 캔버스를 사용했으며, 이는 경고 표지판을 연상시킵니다. 캔버스 가장자리는 붉은색 윤곽선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에는 검은색과 흰색의 왕관들이 승리의 상징처럼 빛나고 잇습니다. 오른쪽 하단에는 저작권 기호가 있는데, 이는 Basquiat의 서명 중 하나였습니다.  이 작품은 Haring과 Basquiat의 깊은 우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 1980년대 뉴욕 예술계의 중요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2024.07.21 - [지식&교양] - 51-29.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77 )

 

51-29.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77 )

나는 갤러리 마스코트가 아니다. 진정한 스타가 되고 싶었다.-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장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 1960-1988). 201

sun-n5y2.tistory.com

 

 

 

 

 

 

 

 

키스 해링은 1988년 에이즈 진단을 받은 이후 1년 만에  키스 해링 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재단을 설립한 이유는 작가의 유산과 더불어 그의 예술과 이상을 유지, 확장,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올바른 에이즈 교육, 예방 및 치료 방법을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해링은 에이즈에 대한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자신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와 더불어 이 재단은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 활동 및 지원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작업하기를 즐겨했던 작가의 마음이 반영된 재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_zmWSmjvWA

 

 

 

 

 

 

 

 

 

Tuttomomdo, 1989, Pisa, Italy/wikipedia

 

 

이탈리아 피사/동아일보

 

 

 

1989년 6월 Keith Haring 이 이탈리아 피사에 그린 'Tuttomondo'(전 세계)는 그의 마지막 대규모 공공 벽화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피사 시내 Sant'Antonil Abate 교회의 외벽에 위치하며,  180제곱미터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Turromondo>는 세계 평화와 조화를 주제로 30개의 다채로운 인물 형상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캐릭터는 평화로운 세계의 다양한 측면을 상징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화된'가위는 악(뱀)을 물리치기 위한 협력을 ,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은 모성을, 돌고래를 지지하는 두 남성은 자연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 벽화는 Haring 이 처음부터 영구적인 작품으로 구성한 유일한 작품으로, 그가 보통 하루 만에 벽화를 완성했던 것과 달리 일주일이 걸쳐 제작되었습니다. Haring은 이 프로젝트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여겼으며 , 작업 과정을 '펠리니적'이고 '비현실적'인 경험으로 회상했습니다. 

 

 

 

<Tuttomondo>는 Haring의 특유의 만화 같은 스타일로 그려졌으며.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피사의 숨겨진 보물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DYykA8WVqw

 

 

 

 

Self Portrait / Keith Haring Foundation

 

 

 

 

 

 

키스 해링의 작품은 현재 많은 브랜드에서 콜라보를 해서 케이스, 티셔츠, 유모차, 후드, 모자, 야구잠바, 타투까지 나타납니다.  아직까지 키스 해링의 작품은 우리들에 삶에 스며들어 사랑을 받고 있는 팝아트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키스 해링은 많은 문화에 대해서도 알리려고 했고 수없이 미술을 저렴하고 많이 접할 수 있게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Keith Haring 제품들: 한국경제

 

 

Keith Haring/ GS shop

 

 

 

 

 

 

 

 

키스 해링은 1990년 2월 16일 31세의 나이에 에이즈 관련 합병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추도식은 1990년 5월  4일 뉴욕시의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에서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강렬하게 예술계에 흔적을 남겼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술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작가의 노력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UgNeCynV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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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갤러리 마스코트가 아니다.
진정한 스타가 되고 싶었다.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A Basquiat sells for 'Mind- Blowing'(2017.5.18)$110.5Million at Auction/The New York Times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장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 1960-1988). 2017년 뉴욕 소더비 컨템포러리 아트 경매에서 '무제' (1982)가  1억 150만 달러(약 1243억 원)에 낙찰되면서 그동안의 바스키아의 작품 경매 기록이 깨졌습니다.  아이들 장난 같은 낙서 그림입니다.  파란색 배경에 맞춰진 강렬한 윤곽의 두개골은 미국 예술가가 경매한 작품  중 두 번째로 비싼 작품이 되었습니다. 

 

 

 

 

 

 

Jean-Michel Basquiat/ Casa Locomotiva

 

 

 

 

 

 

 

New York City/pinterest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아틀라스뉴스

 

 

장 미셜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1960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이 어머니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그의 아버지는 아이티 (Haiti :높은 산들의 나라)포르토 프랭스(Port -au-Prince) 에서 온 이민자였습니다.  이 인종적 유산의 결과로 젊은 쟝 미셸(Jean-Michel)은 영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에 능통합니다. 어려서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읽은 것은 그가 성인이 된 후 작품 활동에 영향을 미쳤고요.

 

 

 

아이티(Haiti)/ 캐나다 한국일보

 

 

 

 

어렸을 때 예술에 재능을 보인 바스키아는 어머니의 격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회계사이던 아버지가 회사에서 가져온 사무용품 종이나 문구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어린 아들의 창의적인 면을 눈여겨 본 어머니는 바스키아를  뉴욕에서 열린 많은 미술관 전시회에  데리고 다닙니다.  6살이 되자 장 미셸(Jean-Michel)은 브루클린 뮤지엄(Brooklyn Museum)의 주니어 회원(Junior Member)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쟝 미셸의 어머니는 일찌감치 예술에 대한 사랑을 어린 아들에게 심어준 거지요.

 

 

 

 

 

 

SAMO/출처:아트 인사이트

 

 

 

 

바스키아의 작품은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천진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보호받기를 거부한 그는 거리의 악사가 되어 뉴욕의 빌리지를 'SAMO :Same Old Shit 흔해 빠진 낡은 것)'라는 사인과 함께 철학적인 시들과 낙서로 채워나갑니다. 그라피티는 당국의 입장에선 논쟁적이고 도발적이었지요. 앤디 워홀을 비롯해 당시 예술계 인사들에게 'SAMO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소년'으로 바스키아는 존재를 알리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SAMO is DEAD'/나무위키

 

 

바스키아와 알 디아즈(오른쪽 안경)/ ARTART

 

 

 

 

   

 '사모 SAMO(1980) '라는 이름으로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의 3년 동안 뉴욕 타임스 스퀘어 거리에 지속적으로 낙서 (Graffiti)를 했습니다. 자신이 그린 그라피티의 로고 또는 이름에는 당연히 '바스키아'를 썼지만 당시 함께 작업했던 협력자인 디아즈(Diaz)와 저지른 낙서들에는 상당히 신비스럽고 상징주의적인 태그 인 '사모 SAMO'를 썼습니다. 1980년 그의 협업 자와 헤어졌을 때, 맨해튼 사방 군데에 써갈긴 '사모는 죽었다 SAMO IS DEAD'라는 낙서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 시절 바스키아는 작업이 없을 때는 종종 브롱크스와 할렘 등에서 다른 하위문화 예술가들과 어울리고 사교 활동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Downtown 81 Outtakes/Cleveland Museum of Art

 

 

The Bronx New York City / Shutterstock

 

 

 

 

바스키아의 작품은 1980년대 도시 문화 환경을 배경으로 태어났습니다. 농담, 허튼소리, 불량배, 애송이들과 동성연애자, 빈민가 흑인과 푸에르토리코 소년들의 '거리낙서'와 힙합문화의 상징 그라피티 (Graffiti) , 느릿느릿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와 똥 싼 바지 Saggy Pants, 그 힙합 hip-hop이 발생한 곳도  1970년대 뉴욕 브롱크스 지구였습니다. 그곳에는 스트리트 컬처(거리문화)와 비보이와 브레이크 댄스, 랩뮤직과 비트박스, DJ, MC등과 그라피티 등 힙합이 얽히고설킨 문화가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 중심, 그 장소 중심에 바스키아가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Z6qzDnQzGI

 

 

 

Untitled'Fallen Angel', 1981/나무위키

 

 

 

 

장 미셸 바스키아의 < Fallen Angel>(1981) 작품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스타일과 주제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바스키아의 특징적인 그래피티 스타일, 원시적인 표현, 그리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결합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중심에는 날개를 가진 인물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제목에서 언급된'타락한 천사'를 나타냅니다. 바스키아 특유의 거칠고 즉흥적인 선과 색채를 사용하여 표현되었으며, 해부학적 요소와 텍스트가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바스키아가 자주 다루던 인종주의,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스키아의 독특한 스타일인 간단한 그림과 글씨, 독특한 도안, 그리고 선명한 색채가 이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며 그의 예술적 천재성과 자유로운 표현 방식을 보여줍니다. 

 

 

 

 

Warrior, 1982/ Tatier Asia

 

 

 

 

장 미셸 바스키아의 1982년 작품 <전사 Warrior>는 원색의 추상적 심벌과 그래피티 스타일을 결합한 작품입니다. 그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잘 보여주고요. 이 작품은 46.4*38.1cm 크기로, 바스키아의 사회적 메시지와 개인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최근 이 작품은 약 472억 원에 낙찰되며 아시아 미술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바스키아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부와 가난, 정체성 등을 탐구했습니다. 

 

 

 

 

바스키아의 전성기 시절 제작된 대표작입니다.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는 바스키아의 반 자전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은색 검을 들고 돌진하는 듯한 전사의 모습과 인상적인 눈 표현은 바스키아의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줍니다. 그가 27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한정되어 있어 희소가치가 높습니다. 바스키아는 거리 예술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선구자적 인물이고 , 현대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전사>는 아시아 미술 경매에서 서양 작품 중 최고가인 약 472억 원에 낙찰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Dustheads>,1982 , sold for $48Million/Pinterest

 

 2013년 <더스트 헤드Dustheads>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4,800만 달러(약 594억 원) 이상에 팔렸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구매자인 말레이시아 사업가 조 로우는 돈세탁 혐의에 연루되어 현재 도주 중입니다.  2016년 , 그는 1300만 달러의 손실을 보고 매각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IxBX2orLe5c

 

 

https://www.youtube.com/watch?v=W2LtUsyySOA

 

 

 

 

 

 

 

눈알과 달걀 Eyes and Eggs, 1983/ The Broad

 

 

 

 

8살 때 길거리에서 까불고 놀다 자동차에 치인 후 , 바스키아는 지라 (비장)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회복하는 동안 병원 입원실에서 1858년에 발행된 '그레이 해부학 Gray's Anatomy'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낸 것이 훗날 그의 작업이 생체 역학 이미지가 새겨진 남다른 에너지의 그림을 선보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Grays Anatomy by Henry Gray on Rare Book Cellar/ Rare Book Cellar

 

 

Gray's Anatomy 는 인체 해부학에 대한 포괄적인 교과서입니다. 다양한 해부학적 구조, 시스템, 조직 등을 포함하며, 상세한 설명과 함께 다수의  삽화와 다이어그램을 제공하는 의대생이나 의료 전문가들을 위한 필수적인 책입니다.  책은 골격계, 근육계, 신경계, 순환계, 소화계, 호흡계, 생식계 등 인체의 모든 주요 시스템을 다루고 있고요.

 

 

 

 

 

출처: Museum Boijamans van Beuningen

 

 

 

 

 

 

 

부모는 이혼했습니다. 뉴욕과 푸에르토 리코에서 드문드문 학교에 다녔지만 1978년 9월, 17세에 브루클린에 있는 에드워드 머로 Edward R. Murrow 고등학교를 중퇴했습니다.

 

 

 

 

Untitled 오렌지 스포츠 피겨 Orange Sports Figure/ Artnet

 

 

 

 

학교를 그만두고 뉴욕의 거리로 튀어 나갔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는 길거리 그라피티를 시작하게 됩니다. 1978년 낙서 그룹 SAMO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SAMO(Same Old Shit의 약자)라는 그라피티 그룹을 결성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이 그룹을 통해 맨해튼의 외벽을 낙서로 채워나갔으며, 자신의 예술적 표현을 시작했습니다. SAMO 활동을 통해 바스키아는 그의 작품에 항상 'SAMOc'라는 서명을 남겼습니다. 거리의 낙서를 통해 10대 특유의 반항의식을 표현했습니다.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과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했고요.

 

 

 

 

마치 무당이 접신이 되어 한판 흐드러지게 굿판을 벌이듯 그렇게 뿜어져 나오는 그 무엇을 , 무의식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자아를 표출해 냅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대중적 시"또는 "개념 미술"의 형태로 인식했습니다. 그의 길거리 그라피티는 다운타운 펑크 전시가(punk scenester)로 등업 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몰고 와 경력 몇 년 만에 유명 스타가 됩니다. 마치 뉴욕이 그를 열광적으로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말입니다. 

 

 

 

 

 

 

Irony of Negro Policeman, 1981/ Reddit

 

 

 

 

 

바스키아는 말장난을 좋아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단어와 구를 지우고 반복했으며 잘못된 철자까지  사용했습니다. 또는 텍스트와 드로잉의 조합을 통해 뉴욕 풍경과, 자신의 내면을 혼합하여 표현했습니다. 

 

 

 

 

 

The Collaboration/ About Warhol and Basquiat, Plans Broadway Bow/ The New York Times

 

 

SOHO, NEW YORK/트리플

 

 

 

 

 

앤디 워홀에게 바스키아가 자신의 그림을 10달러에 사라고 우겼던날, 

 

너무 대충 그린 그림이잖아(앤드 워홀)
당신 그림도 그렇잖아요?(장 미셸 바스키아)

 

 

 

 

 

소호의 거리에서 그래피티를 하고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던 아이티계의  바스키아와 당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아티스트 워홀이 만나게 됩니다. 소호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든 엽서를 앤디 워홀에게 팔기 위해 보여주었고 워홀은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보게 됩니다. 미국의 미술 시장은 새로운 스타를 갈망하고 있었고 바스키아의 격정적인 추상 표현주의 작업은 화랑가를 열광하게 합니다. 최초의 흑인 스타가 미술시장에 탄생하게 된 것이라서요.

 

 

 

 

 

뉴욕 그린위치빌리지의 거리에서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고 용돈 벌이를 하면서 TV 출연을 하기도 했던 그는 1981년 카셀도큐멘타에 최연소 작가로 참여했습니다. 두 사람은 워홀의 동료인 미술상 브루노 비쇼프베르거(Bruno Bischofberger, 1940~)와  그라피티 아티스트 키스 해링 (Keith Haring 1958-90)의 소개로 가능했고  워홀의 작업실 '공장 facotry'에서 마주합니다.

 

 

 

 

 

 

Basquiat-Warhol: a rare artistic duo, reunited in Paris/ Times of Malta

 

 

Basquiat-Warhol: 두 개의 머리 , 1982, le poids des Maux,le choc des Pinceaux / Paris Match

 

 

 

 

 앤디 워홀 (Andy Warhol)이 친구가 되어주고 바스키아를 제도권으로 인도했습니다. 이른바 뉴욕 신 표현주의 예술 운동의 엘리트 집단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 두개의 머리 (Dos Cabezas, 1982) 작품입니다. 당시 54세였던 워홀은 22세에 불과한 바스키아와 함께 폴라로이드를 찍었습니다. 바스키아는 집으로 돌아가 2시간 만에 이 사진을 바탕으로 워홀과 자신의 얼굴을 그려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워홀에게 보냅니다. 워홀은 그 작품의 뛰어남에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마스크, 두개골, 그라피티, 모호한 상징은 곧 워홀의 팝 아트 이미지, 로고, 신문 헤드라인과 함께 공동 초상화로 결합되었습니다. 

 

 

 

 

Andy Warhol Marliyn Monroe/Masterworks Fine Art Gallery

 

 

 

워홀은 당시 이미 팝아트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바스키아는 혜성같이 등장한 신예 화가였고요. 두 사람의 만남은 바스키아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예술가는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뜻밖의 제 3의 작품형태로 대중에게 어필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Andy Warhol's soup can paintings/ CNN Business

 

 

 

 

앤디 워홀은 대중문화와 소비주의를 주제로 한 작품들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은 종종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현대 사회의  대량 생산과 소비를 표현했습니다. 

 

 

 

앤디워홀의 다이어리 , 1982년 10월 4일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그가 바스키아를 데려왔다. 

그리니치빌리지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SAMO'라는 이름을 쓰는 그 아이다. 

 

나는 그에게 10달러를 쥐여줬고, 그가 그림을 그린 티셔츠를 세련디피티에서 팔아 볼 수있게 주선해 준 적도 있디. 

그는 나를 귀찮게 하는 그런 유형의 아이였다. 

 

 

 

일기 내용만 보면 ,이미 유명했던 앤디워홀에게 바스키아는 수많은 스타작가 워너비 중 한 명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 바스키아의 예술성은 대중들과 미술 전문가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받기 시작합니다. 앤디 워홀은 마침내 바스키아를 인정하게 됩니다. 

 

 

 

 

 

 

 

 

 

Highlight Sotheby's Contemporary Evening Auction/ Sotheby's

 

 

 

 

네오-표현주의와 스트리트 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바스키아.  그의 작품은 즉흥적이고 거칠며 강렬한 색채와 그라피티 스타일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스키아의 예술은 데생, 콜라주, 그래픽, 텍스트 등 다양한 방식을 실험하며 발전했습니다. 

 

 

 

 

Basquiat-Warhol Paris exhibition/ South China Morning Post

 

 

 

 

 

Warhol and Bawquiat; Collaboration & Contrast/ The Andy Warhol Museum

 

 

 

 

 

워홀의 작품이 대체로 정제되고 계산되는 느낌이라면, 바스키아의 작품은 보다 원시적이로 직관적인 특성을 보입니다. 바스키아의 "낙서"같은 표현 방식은 워홀의 예술적 성격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를 넘어 거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은 사랑과 지원의 연결로 이어집니다. 워홀은 바스키아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하고요.  바스키아는 1983년 8월 워홀 소유의 다락방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앤디워홀의 다이어리, 1983년 9월 13일 

바스키아가 찾아왓다.... 담배 한 갑을 사고 싶어서 자기 그림을 75센트에 팔았는데 일주일 뒤에 그의 갤러리에서 전화가 와서는 똑같은 그림을 자기네는 1000달러에 샀다고 말했다. 

바스키아는 그게 웃긴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건 웃기는 일이다. 

그는 작기 그림을 2달러에 살 사람이 혹시 있나 찾아보고 있었다. 

요즘 바스키아의 작품들은 15000달러에 팔리고 있다. 

정작 그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작품을 2달러에 사 줄지 궁금해한다. 

 

 

 

 

 

 

예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공통의 관심사가 많았던 두 사람은 1984년부터 공동 작업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첫 공동작업에는 워홀과 바스키아 외에 이탈리아 작가 프란체스코 클레멘테가 참여합니다. 스위스에 있는 비쇼프베르거의 차고에서 함께  하거나 한 사람이 그림을 그려 우편으로 보내면 그 위에 그림을 덧그려 보내는 방식으로 15점을 완성합니다. 이후 워홀과 바스키아의 협업이 본격화됩니다. 워홀의 팝아트 기법과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회화가 결합한 제3의 작품을 제작하게 됩니다. 다양한 작품들은 예술계의 이데올로기적 억압에 대한 일종의 장난스러운 진술 같기도 합니다. 두 사람 모두와 친구였던 헤링은 "그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라고 두 사람의 협업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1984년과 1985년 2년 동안 약 160점의 그림을 함께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협업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1985년 가을 열린 '엔디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1985.9.14-10.19)전이 혹평을 받으며 금이 갑니다. 합작한 작품 16점이 출품된 전시회에 대해 당시 뉴욕타임스는 (바스키아가) 워홀의 명성에 편승했다. (워홀은) 젊은 바스키아의 인기를 이용한다."며 두 사람 모두를 싸잡아 비난했습니다. 실패한 전시회에서 비롯된 갈등은 더욱 심해져서 두 사람은 결별했습니다. 워홀은 집착적으로 바스키아에게 연락했지만 바스키아는 좌절과 분노를 이기지 못했고  마약에 과하게 의존하는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던 중 워홀이 가벼운 담낭수술을 받은 다음날 상태가 갑작스레 악화돼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1987년 2월 22일  워홀의 나이 58세 였죠.  

 

 

 

 

Basquiat* Warhol at the Brant Foundation / Palmer PB

 

 

 

Warhol and Basquiat/Right now Arken shows an exhibition/Flickr

 

 

 

 

https://www.youtube.com/watch?v=3Dyj6i7Fod4

 

 

 

 

 

 

 

Basquiat and Madonna/ The Sun

 

 

 

 

 

 

Basquiat 와 Madonna는 1982년 뉴욕에서 만나 짧지만 열정적인 연인 관계를 가졌습니다. 두 사람은 1982년 뉴욕의 한 파티에서 처음 만났고, 즉시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당시 Basquiat는 이미 유명한 아티스트였고, Madonna는 음악계에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예 가수였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몇 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서로의 예술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Madonna는  Basquiat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헌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보면 그가 침대에 없고 캔버스 앞에서 몰입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Basquiat 의  헤로인 중독 문제로 인해 결국 관계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헤어진 후 Basquiat는 Madonna에게 선물했던 그림들을 돌려받아 검은색으로 덮어버렸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짧았지만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1980년대 뉴욕 예술계의 상징적인 로맨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바스키에는 클럽을 즐겼고  양성애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찢어질 듯이 예민하고 여린 감수성을 지녔고요. 한순간에 스타가 된 바스키아는 미술시장 생리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워홀이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고 우울증과 마약에 깊이 빠지게 됩니다. 

 

 

 

 

 

기존 미술 시장에 반대 (반항)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하위 문화들이 아트리에나  살롱, 갤러리로 넘쳐듯 흘러들어 갑니다. 또한 소더비에서 경매된 그의 그림 값이 가히 기절할 지경이고요.

 

 

 

Flesh and Spirt, 1983 / Getty Images

 

<Flesh and Spirt>(1983) , 2018년 sale price 30,711, 000 USD(365억원)

 

 

https://www.youtube.com/watch?v=FL5XdMVcnVY

 

 

Untitled(Yellow tar and Feathers)/ Artnet

 

 

           <untitled(yellow tar and Feathers)> / 13 November 2013, sale price 25,925,000 USD(310억 원)

 

 

Brother's Sausage/ Artnet

 

<Brother's sausage> 17 November 2016/ sale price 18,650,000 USD(230억)

 

 

Untitled Head/ Arts & Culture

<Untitled (head)> / 20, June2020/ sale price 15,184,900 USD(180억 원 정도)

 

 

Untitled(One Eyed Man or Xerox Face)/뉴시스

 

 

 

 <Untitled(one eyed man or xerox face)> , 8 MARCH 2017 sale price 11,971,250 GBP( 187억 원 정도)

 

 

 

Crown, 1982/ 나무위키

 

 

 

 

장 미셜 바스키아(Jean Michael Basquiat, 1960-1988) 작품 <Crown>(1982)입니다. 그의 예술에서 중요한 상징 중 하나이고요. 특정 아티스트나 흑인들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왕관은 바스키아 작품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이고요. 때로는 서명 대신 사용되어 작품의 소유권을 표시했습니다. 왕관은 바스키아의 야먕, 결단력, 끈기를 상징하기도 하며, 예술계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냅니다. 특정 인물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우는 것은 그 인물을 사회의 규범적 모델과 대비되는 대안적 권위자로 인정하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왕관은 바스키아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그의 예술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Beat Bop, 1983, 앨범표지 (앞면 및, 뒷면) /Lennox& Harvey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스키아가 글을 쓰고 지운 흔적이 보입니다. 텍스트와 드로잉을 한 화면 안에 배치하는 작업 방식을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버러스(William Burroughs, 1914-1997)의 글씨를 쓰고, 지우고, 재배열하는 컷 업 (Cut-up) 기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에 단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바스키아의 작품들 /Harper's BAZAAR Korea

 

무제, 흑인의 역사 , 1983/ CHICMENT Magazine

<무제 , 흑인의 역사> (1983) 페널에 아크릴 페인트와 유성 페인트,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미술 재단.

 

 

 

 

바스키아는 자신의 조상이 미국 대륙에 도착한 서사시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와 아프리카의 나머지 지역뿐만 아니라 미국 남부에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역 센터까지. 그림의 중앙에는 오시리스 신이 나일강을 따라 인도하는 노란색 이집트 배가 보입니다. 두 개의 누비아 가면이 이미지 왼쪽에 있고, 그리피티는 "파라오를 지키는 "개와 "멤피스 테베 Memphis THEBES"라는 태그가 보입니다. 아프리카 계 미국인 사회에서 특별히 아프리카 유산 및 역사와 다시 연결하려는 시도로 이집트가 서구 문명의 선구자라는 아프리카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Jean- Michel Basquiat's ' Untitled.( Devil)', 1982/ Hypebeast

 

 

 

 

 

폭이 16피트가 넘고 거의 8피트에 달하는 <Untitled, Devil>(1982) 작품은   화가의 가장 큰 캔버스 중 하나입니다. 바스키아가 겨우 22살이었을 때 만든 작품이고요. 중심인물은 충동적인 붓놀림과 풍부한 색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악마입니다.  거리 예술가에서 스튜디오로 경력을 바꾼 바스키아의 오마주에서 이 극적인 인물은 캔버스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표현적인 제스처의 폭발 속에서 자신을 악마로 묘사하는 바스키아의 영웅적인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는 사람은 악마의 매혹적인 시선에 사로잡혀 최면에 걸릴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1981년과 1982년 봄에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보낸 두 시기 동안 바스키아가 그린 그림 시리즈 중 가장 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2022년 5월 필립스에서 8,500만 달러 (약 1. 054억 원)에 판매되었습니다. 

 

 

 

 

 

 

in This Case,1983 / 국제뉴스, $93.1Million at Christie's

 

 

 

 

바스키아의 3부작 대형 두개골 작품 중 마지막 작품으로, 어린 시절부터 인간 해부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합니다. 이것들 중 하나는 L.A 의 브로드 박물관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그림입니다.  원래 발렌티노의 공동 설립자인 잔카를로 지암메티의 컬렉션에 있었는데, 2021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9310만 달러를 달성하여 5천만 달러의 추정치를 거의  두 배로 늘린 작품입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Kor.animalia-life,club

 

   

 

 

 

 

바스키아의 가장 유명한 두 가지 모티프는 서아프리카에서 민족의 구비 설화를 들려주던 연희자인 그리오 grio가 있고, 유서 깊은 광대 왕관 바스키아 크라운( crown)이 있습니다. 가는 팔과 큰 머리를로 보아  전통적인 서 아프리카 원시 예술의 형태를 가져와 표현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나무 칸막이 위에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그리오 grio의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자신감, 여전히 폐와 복부의 해부학적 묘사가 돋보입니다.  크라운( crown)은 그의 시그니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Versus Medici,1982/ ARTART

 

 

 

 

1980년대 초, 바스키아는 이탈리아 모데나에 두 개의 전시회를 가졌는데 , 그곳에서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와 같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의 작업실 조수 스테판 토르톤에 따르면, 그는 1494년 메디치 왕조를 전복시킨 도미니카 수도회 수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게 매료되었고, 그것이 이 그림의 주제가 유래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그 제목에서 서양의 예술 규범에 대한 도전이며 바스키아가 갈망하던 1982년에 그려졌습니다. 2021년 5월 소더비에서 5080만 달러 (약 629억 원)에 판매되었고요. 

 

 

 

 

 

 

Arm and Hammer/ 컬처 램프

 

 

 

    <암 앤드 해머, 팔과 망치 II(1985)>,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 스크린, 스위스 브루노 비숍 베르거 Bruno Bischofberger AG 아트 갤러리 .

 

 

 

빨간색 원 안에 망치를 들고 있는 근육질 팔, 암 앤드 해머 (Arm& Hammer)는 미국의 가정 용품 제조업체인 처치 앤드 와이트 (Church & Dwight )가 판매하는 베이킹 소다 브랜드 입니다. 이 회사는 탈취제 베이킹 소다를 사용하여 치약, 세탁 세제, 겨드랑이 탈취제, 고양이 용품을 만들어 대중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 회사의 유명한 무쇠 팔뚝 상표 브랜드를 복제해서 앤드 워홀 (Andy Warhol)이 팝 아트 변형 작업을 했고, 바스키아( Basquiat )도 팔뚝 대신 색소폰 연주자를 넣어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붉은 원에는 'Liberty 1955'라는 표시처럼, '리버티 레코드 Liberty Records'음반 레이블로 변형시켰고요. 1950년대 때마침 새롭게 인기를 얻고 떠오른 아프리카계 재즈 음악 성공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존재감을 새롭게 일깨워준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시기를 재음미한 것입니다. 음반 레이블이 팝 아트와 아트 팝에 기여한 부분이 큽니다.      

 

 

 

 

Ten Punching bags by Jean Michael Basquiat and Andy Warhol/Flickr

 

 

 

 

<최후의 만찬 , 10개의 펀칭 백 (1986-87)>. 펀치 백에 아크릴과 유채, 앤디 워홀 미술관 The Andy Warhol Museum.

 

 

10개의 흰색 샌드백에 바스키아가 그린 예수님의 이미지와 각각 '심판'이란 말이 적힌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길 건너편에서 전시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바스키아 Basquiat와 앤디 워홀 Andy Warhol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지금은 앤디 워홀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고 있습니다. 바스키아의 시그니처인 왕관 모티프도 보입니다.   

 

 

 

 

Riding with Death,Paris, France, 04th Oct, 2018/ Alamy

 

 

 

 <죽음을 타고 Riding with Death> (1988), 아크릴, 크레용. 캔버스, 개인소장품.

 

 

 

확신과 혼란, 바스키아가 해골을 타고 가는 라이더 (기사)의 모습입니다.  바스키아의 마지막 그림 중 하나이며, 죽기 몇 주 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골격이 말과 같은 생명체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바스키아는 이를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탐구합니다. 그의 작품에는 종종 단어와 텍스트가 포함되며,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스키아의 작품들은 하룻밤 사이에 그를 유명 인사가 되어 슈퍼 히어로처럼 명성과 부를 얻게 했습니다.  앤디 워홀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1988년 늦여름 어느 날, 바스키아는 그의 작업실에서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바스키아는 살아생전 맨해튼이라는 도시를 캔버스 삼아 강렬하고도 충동적인 작품을 그려냈습니다.

 

 

 

 

 

Jean-Michel Basquiat's grave/ Flickr

 

 

 

 

 

 

1980년대  미술계를 뒤흔든 반항적인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 '팝아트의 황제'로 20세기 후반 미국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과 우정과 애정을 넘나드는 예술적 동지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우주인 이 그린 듯한 이해할 수 없는 도상과 이미지들, 강력한 색채와 글자들로 가득했지만요.  어느 사조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화법에 진지하고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예술가였던 바스키아. 지금도 어딘가에서  바스키아를 꿈꾸는 이들의 멘토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영원히

 

 

 

 

https://www.youtube.com/watch?v=TVX8z5b7jHQ

 

 

 

장편영화 <장 미셸 바스키아 >(1996)

 

 

 

https://www.youtube.com/watch?v=C8S7ePyMJ4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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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향한 인간의 욕구는 절대적으로 원시적이며,
빵을 갈망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강렬한 것이다.
빵이 없다면 굶어 죽겠지만
예술 없이는 지루해 죽는다.

 

 

 

국제화단에서 뉴욕이 성과를 높이면서  파리의 위상은 예전에 비해 현저히 추락하게 됩니다. 그래도 프랑스 파리에서 계속 활약하며 유럽미술의 자존심을 지킨 작가가 있습니다. 바로 장 뒤뷔페(Jean Du buffeet, 1901-1985)입니다.  뒤뷔페는 생전에 기존의 예술전통을 거부하고 파격적인 예술실험과 독창적 스타일로 당시 서구 미술계에 혁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20세기 미술사를 장식한 '앵포르멜'미술을 개척하며 현대미술의 최전선에서 활약했습니다. 

 

엥포르멜:정형화되고 아카데믹한 미술에서 벗어나 비정형적이고 서정적인 회화를 지향하는 게 특징입니다. 

 

 

 

 

 

Coucou Bazar An animated picture/ MAD Paris

 

 

 

장 뒤뷔페( Jean Dubuffet, 1901-1985) 하면 '쿠쿠바자'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쿠쿠바자는 패션과 퍼포먼스, 입체와 평면, 가면, 오브제 등을 모두 포괄하는 종합 예술입니다. 움직이는 그림 공연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뒤뷔페는 쿠쿠바자에 대해서 '더 이상 눈으로 보는 그림이 아닌, 실존하는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장 뒤뷔페가 '발포 폴리스티렌'이라는 재료로 조각을 만드는데, 이 조각으로 의상을 제작해서 배우들이 입고 공연을 합니다. 1973년에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하고요. 이 쿠쿠바자 공연은 계속해서 대중과 만나면서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무너뜨립니다. 작품을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아니라 거리로 걸어 나오게 합니다. 

 

 

 

1901년 프랑스 르아브르에서 태어난 장 뒤뷔페(Jean Dubuffet)는 , 부모가 와인 도매상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30대까지 와인 업에 종사하게 되지요. 41살의 어찌 보면 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비록 상대적으로 늦은 시작이었지만 일찍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자신만의 화풍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자유분방한 선의 사용과 마치 어린아이 같은 스타일로 작업을 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장 뒤뷔페는 '알르부뤼'라는 개념을 창시하면서 현대미술에 큰 획을 긋고요. 이 개념을 바탕으로 비 주류미술, 즉 아웃사이더 아트에 무게를 두고 작업을 이어 나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e-Zn58M794

 

 

 

 

 

장 뒤뷔페는 정말 뛰어난 최후의 파리 화가다.
프랑스 회화는 뒤뷔페 이후로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데이비드 호크니-









정형을 벗어난 날 것의 '미학'/ 오마이 뉴스

 

 

 

구상과 비구상을 초월하여 모든 정형을 부정하고 새로운 조형의 의미를 창조해내고자 한 그는 가공 되지 않은 날것, 원초적 가치를 추구했습니다. '아르 브뤼(Art Brut: 가공되지 않은 순수 그대로의 예술)' 개념이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는 작가노트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예술작품이란 존재 저 깊숙한 곳에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투영이 일어날 때 비로소 흥미로운 것이다.
나는 순수하고 원시적인 상태에서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예술의 창작 과정을
오직 이 '아르 브뤼' 안에서만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아웃사이더의 대 사제 Grand Maitre of the Outsider, 장 뒤뷔페, 1947>구상적인 아르뷔루( Art Brut), 캔버스 위에 에멀션 도료와 유채 혼합 

 

장 뒤뷔페의 위 작품을 보면 조잡하고  어린아이 같은 낙서 그림이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 저 걸  그림이라고 그린거야.'하며 갸우뚱 하실 것  같고요. 이 초상화는 그림이 발표되자마자 파리 화단에 거대한 논쟁에 휩싸였습니다. 뒤뷔페의 새로운 미술 스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 그림은 아스팔트에 도료와 유채 혼합 작품으로   '오트 파트 hautes pates '입니다. 

 

 

 

오트 파트(hautes pates)는 "높은 반죽"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로, 회화에서 두껍게 물감을 바르는 기법을 가리킵니다. 이 기법은 1945년 장 뒤뷔페가 자신의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였습니다.  캔버스에 물감을 두껍게 발라 올려 부조와 같은 입체적인 효과를 만듭니다. 물감에 모래. 자갈, 작은 돌 등 다양한 재료를 섞어 사용합니다. 물감이 마르기 전에 레이스, 파편, 조각 등을 넣어 질감을 만듭니다.  이 기법은 평면적인 이미지를 넘어 촉각적이고 공간감 있는 표면을 만들어내어 관람객에게 새로운 예술 경험을 제공합니다. 장 뒤뷔페 외에도 장 포트리에, 브람 보가크, 안토니 타피에스 등 여러 현대 미술가들이 이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사회적 명성이나 경쟁 같은 것에 속하지 않은 채로 진정한 창작 욕구로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작가가 그린 그림보다 소중하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장 뒤뷔페는 어린아이의 그림이나,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그림에 주목했습니다. 뒤뷔페는 주류 문화가 예술에 있어서 새로운 발전을 흡수하기도 하고,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르 브뤼( Art Brut)만이 이런 문화의 권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순수한 동기로 창작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모나리자>,1948/www. maison Korea.com

 

 

 

 

 

 

눈사람을 닮은 장 뒤뷔페의 <모나리자>(1948)입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작 모나리자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독특한 해석입니다. 원작과는 아주 다른 스타일로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낙서하듯 말이죠. 뒤뷔페의 특유의 거칠고 원시적인 스타일리 적용되어 있습니다 . 원본의 고유성을 파괴하고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현재 약 110억 원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며, 해당 전시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뒤뷔페의 해석에서 '모나리자'는 아주 귀여운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 모나리자>도 대단하지만 눈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 곁에 다가 온 뒤뷔페의 '모나리자'역시 신선합니다. 전통적인 미술의 틀을 깨고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한 두뷔페의 '모나리자'를 보며 묘한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기존 명작에 대한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재해석이 용기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1951년 그는 한 강의에서  '반문화적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문화를 분석하거나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자연의 형태에 가깝게 바라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개념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는 예술이 제도권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갈라진 틈이나 반짝이는 자갈, 풀 포기 같은 것들에게 찬사를 보내라고 하면서 '원시 예술'을 지향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림을 그리는 것도 의식적으로 아름다움을 쫓는 게 아니라, 순수한 창작 충동에 집중하는 어린 아이나 정신 질환자 혹은 문명권 밖에 있는 사람들의 그림에 주목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현대의 비주류 예술, '아웃사이더 아트'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정신장애인 등의 작품을 주목한 뒤뷔페는 다듬어지지 않은 순수한 예술이란 의미의 '아트 브뤼트(Art Brut)'란 용어를 만들었고, 이는 거리 예술을 포함한 '아웃사이더 아트'개념의 기반이 됐습니다. 그는 장르를 뛰어 넘는 이른바 크로스오버 작업의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뒤뷔페는 사실 정규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습니다. 미술에 관심은 컸지만 가업인 포도주 상을 하다가 40세가 돼서야 전업 작가의 길로 들었섰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비주류 작가인 셈이죠. 어쩌면 비주류였기에 그는 기존의 예술전통에 맞서 혁신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Jean Dubuffet/wikipedia

 

 

 

 

 

 

장 뒤뷔페는 1918년 파리로 나와, 아카데미 쥘리앵(Acacemie Julian)에서 공부하였으나 약 6개월 동안 에 불과하고 학교를 때려치우고 주로 혼자 독학하였습니다. 이 시절 유대계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막스 자코브 (Max Jacob 1876-1944)를 만나게 됩니다. 시인 막스 자코브(Max Jacob)는  독특하고 실험적인 시 스타일로 유명했습니다. 종교적 주제와 초현실적 이미지를 자주 사용했고요.  그의 대표작으로는 시집 "Le Cornet a des"(주사위 컵)가 있습니다. 유대인 출신이었던 Jacob은 1909년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이후 그의 작품에 종교적 요소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나치 점령기 프랑스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드랑시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막스 자코브(Max Jacob)는 파블로 피카소, 기욤 아폴리네르 등 당대 유명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20세기 초 프랑스 문학과 예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시인 자코브는 생전에 뒤뷔페에게 파리의 몽마르트에서 아폴리네르, 피카소 등 당대의 시인과 화가들을 소개해주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뒤뷔페도 모범 화가로 전통주의적 기법의 그림에 열중하던 시절입니다.  

 

 

 

그러다 장  뒤베는 갑자기 그림을 중단하고 아버지를 도와 가업인 포도주 도매상을 10여 년 정도 하게 됩니다.  그는 다시 미술을 하리라 생각하지 못했으나 41살 되던 1942년 그는 다시 파리에 나타나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요. 1944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때 화랑에 등장한 그의 그림은 달라졌습니다. 그의 그림은 특히 재료에 의해 큰 변화가 있었는데, 화방에서 구할 수 없는 것, 우리들 주변에 쉽게 볼 수 있는 재료들, 예컨대 쓰레기나 폐물들, 이른바 정크( junk) 들을 모아 쌓아 놓은 마티에르 (Matiere) 변화했습니다.

 

 

 

 

 

장 뒤뷔페는 캔버스나 종이나 패널에 우아하게 그리던 전통적인 방식에서 종종 타르나 유지, 자갈이나 숯과 모래 같은 재료들을 니스나 아교 같은 접착제에 버무려 거칠고 투박한 이미지를 만들어 거기에 어린아이들 그림 같은 (낙서 같은 ) 소박한 (아니 유치한 ) 그림과 소묘들을 창조해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아직 미완성된 것' 같은 그림이었죠.

 

 

 

 

장 뒤뷔페 , 그는 미술의 어떤 카테고리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지 않았지만, 그의미술은 '원시 예술, 아르브뤼 (art brut) 라 부릅니다. 

 

 

 

<Will to Power>, 1946/ The guggenheim Museums and Foundation

 

 

 

 

1946년 1월에 제작된 유화 작품으로, 오일, 자갈, 모래, 유리 , 밧줄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작품의 중심에는 괴상한 남성 누드 형상이 있습니다. 거칠고 투박한 질감, 육중한 비율, 박힌 돌 이빨, 유리 파편으로 만든 눈 등이 특징접입니다.  이 인물은 위협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동시에 손을 등 뒤로 한 자세로 인해 취약함도 드러냅니다.  작품 제목은 니체의 철학에서 차용한 나치 이데올로기의 핵심 개념을 가리키지만, 뒤뷔페는 이를 통해 파시즘의 권위와 남성성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뒤뷔페의 '아르 부뤼(Art Brut)' 스타일을 잘 보여 주며, 전통적인 미적 기준에 도전하는 그의 예술 철학을 반영합니다. <will to Power>(1946)는 뒤뷔페의 독특한 재료 사용과 표현 방식, 그리고 사회적 비판을 담은 예술적 접근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ortrait of Henri Michaux, 1947/Tate

 

 

이 작품은 검은 인디아 잉크를 사용하여 스크래치보드 위에 그려졌습니다. 작품의 대상은 앙리 미쇼(Henri Michaux, 1899-1984)로 , 벨기에 출신의 시인이자 화가입니다. 뒤뷔페의 특유의 원시적이고 거친 스타일이 잘 드러나는 초상화입니다. 이 초상화는 뒤뷔페의 '아르 부뤼(Art Brut)'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전통적인 초상화의 개념을 벗어나 대상의 본질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뒤뷔페는 이 시기에 여러 작가와 예술가들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 작품도 그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Typist {from 'Matter and Memory'}>, 1945/ Tate

 

 

 

 

장 뒤뷔페가 한 낱 말썽쟁이 아웃사이더로 끝나지 않은 것도 '시대적인 행운'이 있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1948년, 이른바 파리 몽파르나스(Monparnasse)를 중심으로  뜨내기 화가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중심으로 형성된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즉 파리파에서 비정형성 추상 운동인 '앵포르멜 Informel 운동'이 시작되자, 때마침 시작한 그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하고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운 좋게도 뒤뷔페의 비정형 회화들이 파리의 미술 평론가로부터 전후 유럽의 추상미술 중에 가장 선구적인 추상 운동 선구자로 추앙되었습니다. 

 

 

 

 

 

 

Large Black Landscape,1946/Tate

 

 

 

장 뒤뷔페의 <Large Black Landscape>(1946)는 그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원시미술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거칠고 단순화된 형태와 강렬한 검은색 사용이 특징적입니다. 뒤뷔페는 전통적인 미술 기법을 거부하고,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표현을 추구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추상화된 풍경을 통해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느낌을 전달하며, 전후 유럽의 황폐화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뒤뷔페의 아트 브뤼(Art Brut) 스타일의 초기 발전 단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로 여겨집니다. 

 

 

 

 

그가 공격하는 기성 화단은 엘리트주의와 자본가의 힘이 만든 허상, 가식과 인공적이고 모방적인 자기선전으로 가득 찬 곳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우아하고 멋진 박물관에 양반다리를 하고 걸려 있는 미술 개념 대신 우리 주변에 흔한 것 , 생짜들의 가공되지 않은 순수함을 아름다움의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The Cow with The Subtle Nose, 1954/ Flickr

 

 

 

 

 

 

<이상한 코뚜레를 한 암소 The Cow With The Subtle Nose>

마치 기원전 1만 5천 년 전 라스코 동굴 벽에 그려진 야생의 들소가 오늘의 현세에 환생한 것 같습니다.   아이차럼 순진무구하고, 자유로우면서 야만적인 이 그림과 제목을 보면, 고귀한 문명에 대한 그의 계산된 조롱이 담겨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특별히 미술사조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고급 미술'에 대한 심한 농담과 야만적( savage )인 돌진 같은 거지요. 그 스스로도 전체적으로 문명화 시대를 향해, 미래의 세대를 향한 전진, 그 재확인 작업이라고 하네요. 

 

 

 

 

 

 

Soul of the Underground, Vence, December 1959/ MoMA

 

 

 

 

  장 뒤뷔페(Jean Dubuffet)의  <Soul of the Underground>는 1959년 12월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흙과 땅바닥"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뒤뷔페의 독특한 예술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뒤뷔페는 이 작품에서 재료 자체를 미술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미술 재료에서 벗어나 흙과 같은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그의 "야만적인 현대 원시 미술"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 작품은 지하의 영혼을 표현한 작품으로, 땅속 깊은 곳의 신비로운 느낌을 전달합니다. 뒤뷔페는 이 작품을 통해 문명화된 세계 아래에 숨겨진 원시적이로 본질적인 요소들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반문화적이고 비 관습적인 예술 접근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본격적으로 그림물감에 모래나 석회, 알루미늄 호일, 아스팔트 등을 오일과 섞어 만들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런 물감을 뿌려 그리는 그림을 태시즘 (Tachisme)이라고 부릅니다. 화면에 두꺼운 반죽을 두른 풍부한 느낌의 이 재료들은 거친 텍스처를 가진 부조처럼 중후한 질감을 만들어 냅니다.  마치 옆집 벽이나 마당을 파온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지요. 이런 미술을 '오트 파트 (Hautes pastes)'라 부릅니다. 

 

 

 

 

 

<The beautiful heavy breast>,1950/ Phillips

 

 

 

 

 

 

그의 누드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구상인지? 추상인지? 분류하기 어려운 일련의 작품들이 계속됩니다. 이 무렵 그의 작품을 일컬어 재질학 (Texturologies)이라 분류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 두꺼운 반죽 미술로 짓이겨서 화면 질감의 물질의 회하적 요소를 창출해 냅니다. 1950년부터 그가 오트 파트 (Hautes pates) 방식으로 '귀부인의 신체 'Ladies' Bodies'연작 시리즈를 연속적으로 그려 나갔던 작품 중 하나입니다. 캔버스에 무정형의 여성 신체가 나체로 펼쳐져 있으며, 멍든 듯한 분홍색, 보라색, 빨간색 등의 색상을 사용하여 살덩어리 풍경을 통해 흐르는 체액을 연상시킵니다. 

 

 

 

 

뒤뷔페는  이 시리즈를 통해 전통적인 미의 개념에 도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 조각상이나 광택 잡지에서 확립된 "허구으 아름다움 개념"에 항의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일상적인 것을 낯설게 만들어 관람자로 하여금 일상생활의 기이함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장 뒤뷔페( Jean Dubuffet , 1901-1985)는 비난받고 경멸 당하던 원시미술 운동 (the art movement Art Brut) 작업을 줄기차게 진행합니다.  미국과 프랑스를 베이스로 풍부하고 다량의 작품 생산을 즐기면서 자신의 미술 경력을 쌓아갔습니다. 그의 창작 활동은 기존의 모든 미술적 전통을 회피했고, 자본시장에 찌들고 엘리트주의에 빠진 기존 서구 미술을 경멸했습니다. 차라리 길바닥이나 동네 거리의 낙서나 쓰레기에서 영감을 받았고 발끝에 닿는 하찮은 것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Comings and goings,1965/pinterest

 

 

 

 

 

 

1950년대 후반부터는 그는 차츰 장식성이 강한 조각 그림 맞추기 '지그소 퍼즐(Jigsaw puzzle: 그림 조각 맞추기)을 시도합니다.  그의 후기 작품 중 하나로, 1950년대  후반부터 발전시킨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앵포르멜 미술의 특징을 잘 나타내며, 뒤뷔페가 '날것'의 예술에 주목한 그의 예술 철학을 반영합니다.

 

 

 

 

< Comings and Goings>는 추상적이고 원시적인 형태를 사용하여 인간의 움직임과 일상적인 활동을 표현한 것 으로 보입니다. 뒤뷔페의 작품 특성상, 거칠고 텍스처가 풍부한 표면, 강렬한 색채, 그리고 단순화된 형태를 통해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역동성을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960년대는 작곡과 건축 환경 조성을 함께 실험합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형상과 바탕이 되는 화면과의 종합적 시도를 꾀합니다. 회화와 조각의 다양한 재료로 계속 아르 브뤼의 가능성을 탐구하였습니다.  만년에는 공공장소에 놓은 흑백의 유리 섬유로 만든 대형 조각을 여러 개 만들었습니다. 

 

 

 

 

 

지름길 Court les rues, 1962/Flickr

 

 

 

 

장 뒤뷔페의 1962년 작품 'Court Les rues' 는 그의 중기 작품으로 앵포르멜 미술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의 제목 'Court Les rues'는 프랑스어로 '거리를 달리다' 또는 '거리를 누비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현대 도시 생활의 복잡성, 인간의 움직임, 그리고 일상의 단면을 뒤뷔페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장 뒤뷔페(Jean Dubuffet)는 새로운 예술이란 문화적 인습과 가치에 길들여지지 않은 ,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 것, 야만적인 것,야생적인 것(sauvagerie)에서 새로운 순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배우거나 훈련받지 않고 표현할 수 있어야 그것이 예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Car on a Black Road, 1963/pinterest

 

 

 

그의 인생 완숙기이던 1940년대부터는 파리와 뉴욕은 물론 유럽 전 지역에서 수많은 전시회가 줄을 이었습니다.  수많은 저술과 연구 논문들이 봇불을 이루었고요. 2001년에는 '퐁피두센터'에서 '장 뒤뷔페 탄생 100주년 전'이 대대적으로 열렸으며 프랑스에서는 현재 제1의 국민화가로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qafW9rXMpg

 

 

 

 

 

 

 

우를루프(L'Hourloupe) ,1966 / Musee de Grenoble

 

 

 

 

 

 

 

우를루프(L' Hourloupe)는 장 뒤뷔페의 대표적인 시리즈입니다. 우를루프라는  단어는 '외치다, 울부짖다. 늑대'를 뜻하는 각각의 프랑스어를 합쳐 만들었 습니다.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에너지를 담은 이름입니다. 뒤뷔페는 이 작업에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검은 선과 함께 주로 붉은색과 파란색, 흰색을 사용했습니다. 선은 자유로우면서도 색은 제한적으로 사용해 조화를 이루고 있고요. 무의 식적으로 연결된 이 선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인물이나 형상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피아노나 계단, 탑, 배, 찻주전자 등 일상의 사물들을 해체해 검은색 굵은 테두리를 가진 비 정형의 모습으로 재구성하고 흰색과 붉은색, 파란색으로 조각 맞추기처럼 해체해 놓았습니다. 이 시리즈는 1962년에 처음 시작되어 수십 년 동안 사랑받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쿠쿠바자 공연에서 이 우를루프 시리즈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다양한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Monument with Stanging Beast /Chicago Public Art

 

 

 

 

 

https://www.youtube.com/watch?v=gTfFfzEJYVM

 

 

 

 

미국 시카고에<Monument with Stanging Beast>라는 대형 공공미술 작품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톰슨 센터 앞에 놓여 있는 작품으로, 현재 미국에 존재하는 장 뒤뷔페의 3개의 기념비중 하나입니다. 높이만 약 8.8m에 달하는 대형 조각입니다. '스탠딩 비스트'라는 작품명에서 알 수 있듯이, 서 있는 동물과 나무, 건축 양식 등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뒤뷔페의 시그니처인 우를루프 시리즈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고요. 예술을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장 뒤뷔페의 신념에 따라, 이 작품은 누구나 만지거나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대중들 뿐만 아니라 이곳을 오가는 관광객들에게도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뒤뷔페의 '우를루프' 시리즈는 파랑,빨강, 흰색, 검정 등 극히 제한된 기본 색깔의 자유분방한 선들이 특징으로 그의 미적감각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사람이나 물건, 배경 등 모든 것의 구별이 쉽지 않을 만큼 함께 어우러져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i0zrIdZSlQ

 

 

 

 

 

'쿠쿠바자'는 뒤뷔페가 우룰루프 축제, 환상무도회라는 의미로 지은 제목이자 종합예술 프로젝트입니다. 요즘의 퍼포먼스로 분류되기도 하지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1973) 등에서 선보이기도 한 '쿠쿠바자'는 회화와 조각, 다양한 재료로 제작한 의상, 무대장치 등으로 구성된 시나리오 없는 무대 예술, 살아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카르푸 몽마르트 -랑뷔토, 1975, 자크 빌레글레/ 비즈 N 동아일보

 

 

 

 

앙상 블라주 기법의 작품들을 비롯해 그의 초기 작품들에서도 기존 예술에의 저항, 새로운 예술의 모색을 갈망한 뒤뷔페의 노력이 엿보입니다.  빌레글레의 작품들을 통해서는 두 예술가의 예술적 교류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거리 벽보를 찢어서 자신만의 미적 감각으로 표현한 작품들은 당대의 시대상 등을 보여주며 흥미를 끕니다. 

 

 

 

 

 

Monument to the Phantom, 1977, Sculpture/ 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Winu_oldN1k

 

 

 

뒤뷔페와 20여 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술혼을 교류한 자크 빌레글레 (Jacques villegle' ,1926-2022)는 프랑스의 혼합 미디어 예술가이자 누보 레알리즘(Nouveau Realisme) 운동의 주요 인물입니다. 그는 찢어진  광고 포스트를 사용한 "데콜라주(decollage) 기법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빌레글레는 1947년  시작해 처음에는 찢어진 광고 포스터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시그니처 매체가 되었습니다. 동료 예술가 레이몽 아인스(Raymond Hains)와 함께 작업하며, 빌레글레는 1950년대에 울트라 -레트리스트 사이코 지오그래픽 하이퍼 그래픽(Ultra0Lettrist Psychogeographics)을 개발했습니다. 그의 예술적 과정은 포스터를 여러 겹으로 쌓고, 그것을 찢거나 찢어서 아래층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복잡하고  텍스처가 풍부한 구성을 만들어 냅니다. 이 기법을 통해 빌레글레는 현대 프랑스 문화와 사회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제공했으며, 차용된 이미지를 통해 사회적, 정치적 비판을 자주 포함했습니다.

 

 

빌레글레의 작품은 문명의 익명성과 주변부 잔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의 예술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에 의해 헤르만 브라운 -베가(Hermam Braun-Vega)와 마놀로 발데스(Manolo Valdes)와 함께 "액체 예술(liquid art)"로 묘사되었습니다. 1960년에 빌레글레는 누보 레알리즘 그룹에 합류하여 전위 예술 장면에서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그의 혁신적인 예술 제작 접근 방식은 예술 작품의 경계를 재정의하며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0ooUVvJw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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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혹독한 기후와 환경 속에서 용감하게 늑대와 짐승으로부터 양과 염소 등 가축을 지켜온 터키의 국보급 국견이 있습니다.  튀르키예 사람들이 주장하길 아시리아의 예술품에 표기된 최초의 마스티프 타입의 후손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캉갈의 역사는 오래전 1000년  이상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목양견으로 가축의 감시를 하거나 , 호위견, 군견으로 맹활약했습니다. 캉갈독이라는 이름은 1960년대 비교적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붙여진 계기는 1960년대 영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계기로 터키 원산의 시프독을 분류하여 각각 이름 짓자는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캉갈(Kangal)이라는 견종이 만들어졌습니다.  튀르키예 동부의 시바스 지역인 캉갈이라는 곳에서 유래한 역사가 깊은 견종이기도 합니다. 현재 터기 정부에 의해 '국견'으로 지정되어 터키 국보급 견종이라는 타이틀로 세계적인 지명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튀그키예의 국견이기 때문에 현재 정부의 허가 없이는 해외로 나갈 수 없는 개입니다. 튀르키예에서 우편이나 동전에도 드장하는 보물과 같은 개로 문화적으로 중요한 개입니다. 

 

 

 

 

소중한  가축을 지켜주던 경비견이여서 맹수들로부터 물리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튀르기예 사람들은 캉갈의 목에 가시가 돋아있는 목걸이도 만들어서 걸어주었다고 합니다. 

 

 

 

 

 

캉갈/나무위키

 

 

튀르키예 시바스 캉갈 지역/위키백과

 

 

 

 

캉갈은 토지 소유자의 토지 보호나 집의 경비 또는 가족들의 보호 등의 용도로도 쓰였지만 대부분은 늑대와 곰과 자칼등의 포식자로부터 양 떼와 염소들을 보호하는 것이 주된 용무였습니다. 고대로부터 이런 용도로 쓰여서 그런지 체계적인 번식을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캉갈(Kangal)들은 똑같은 체험과 성품을 가지고 자연 번식이 되었습니다. 

 

 

 

 

 

 

 

 

 

캉갈 /나무위키

 

 

 

 

 

 

 

튀르키예(터키)/한인포스트

 

    

 

 

 

 

 

캉갈의 체고 : 85cm 전후

체중: 60kg 

수명: 12-15세

초대형 견종

 

 

 

 

 

 

나무위키

 

 

 

 

다리가 길고 튼튼한 체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형견 중에서 드물게 민첩성을 갖추고 있고요. 달리는 속도는 최고 시속 50km로 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엄청나죠.  캉갈(Kangal)은 '검은 머리리'라는 뜻도 가지고 있답니다. 머즐과 귀가 검은 특징적인 털색을 하고 있습니다.   이 캉갈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주니스 넬슨이라는 미국인이 터키에 거주하는 동안 캉갈을 접하고 나서 유럽과 북미에 소개를 하게 되면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캉갈은 다른 나라로 수출이 금지되어있지만 주니스 넬슨이 1985년 미국에 수입을 하여 소개를 하게 되면서 미국에서 캉갈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더욱더 전 세계에 알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나톨리안 쉐퍼드(Anatolian Shepherd)/ 다나와 DPG

 

 

 

 

 

튀르키예 사람들은  시바스 캉갈 지방에서만 진정한 캉갈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전 영국인인 스틸과 다른 서양인으로인해 개발된 견종이 캉갈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개발한 견종은 처음에 아나톨리아(Karrbash) 쉽독의 잡종의 하나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튀르키예 정부는 아나톨리안 쉽독과는 별개의 품종으로 인정한다고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미국 애견협회를  통해  수입을 하여 확고한 혈통관리를 통해 미국식 캉갈(도베르만과 그레이트 덴처럼)을 만들고자 노력을 하고 있는데  튀르키예 정부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입장입니다. 여타 대형 견종들보다 더 빠른 속도와 민첩성을 가진 견종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마스티프 품종들만큼 무게에 비해 가벼운 몸놀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S-smhqBB-o

 

 

 

 

 

 

용감합니다. 영리해서 보호자를 잘 따르고 경계심이 강해 가축에 대한 보호 본능이 높아 야생 동물로부터 가축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의외의 온순한 기질도  가지고 있고요. 제대로 교육을 한다면 가족이나 어린이들 외에 사람에 대해서도 우호적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주변경계를 스스로하며 양을 돌보던 습성으로 인해 독립적인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보호자를 따르기보다는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충성심이 높지만 애교스러운 면은 잘 없는 캉갈(Kangal)입니다. 스스로 독립적인 판단을 하며 경비를 하던 개라서 지능이 높은 편입니다.  경비견으로 활약을 많이 하던 캉갈은 공격성보다는 보호 및 방어의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사납지는 않고 용감한 개입니다. 

 

 

 

캉갈/나무위키

 

 

 

덩치가  초대형견이지만 늘씬한 체형에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으며 민첩해서 개들 평균 달리는 속도보다 2배 가까이 빠르게 달릴 수있는 개입니다. 

 

 

 

 

캉갈독은 견종 중에 최강이라 불립니다. 캉갈이 가지고 있는 능력 때문이죠. 속도가 50km, 다리 힘은 4.5t 트럭을 견인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씹는 힘도 아주 강해서 340kg에 이른다고 하네요. 이 힘은 사자와도 비슷하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네요. 또한 목양견이나 군견으로 활약을 했고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하던 동물이 야생 곰이나 늑대 같은 무서운 동물들이었다고 합니다. 군견으로 전쟁에서 살아남는 생명력을 길러 어떤 사납고 무서운 동물에게도 물러서지 않는 용감함과 공격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견종에 비해 신체적 능력은 압도적이고요. 커다란 몸집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체격과 민첩함 그리고 용감한 성격 때문에 캉갈은 견종 중 최강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루리웹

 

 

 

 

 

캉갈/나무위키

 

 

 

 

털의 경우 겨울과 여름에 일 할 수 있도록 전천후 모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나 눈을 맞더라도 한번 털면 대부분이 제거되는 털을 가지고 있고요. 또한 주로 늑대로부터 가축들을 지키던 견종이라 늑대의 이빠로부터 보호될 수 있도록 조밀한 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늑대 잡는 개 캉갈(Kangal)이라는 말이 있는데 소형 늑대의 경우는 캉갈이 손쉽게 이긴다고 합니다. 물론 개와 싸움의 특징상 가장 공격을  많이 당하는 목에 보호형 목걸이를 착용하고서 말이죠.

 

 

 

 

아프리카 나비비아 /위키백과

 

 

 

1990년대 캉갈(Kangal)은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도 맹활약을 했습니다. 나미비아 축산업자는 가축을 습격하는 치타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캉갈은 그런 가축을 지키는 역할을 했고요. 나미비아에서450마리의 가축을 지키면서 92%의 만족도를 이루어 내며 연간 60마리의 습격을 당했지만 캉갈의 활약으로 5년 동안 1마리밖에 습격받지 않게 되었다는 실제 사례가 보고됐습니다.  캉갈(kangal)이 치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짖거나  쫓아다니면서 위협을 가하자 치타가 더 이상 가축을 습격할 수 없었던 거죠. 

 

 

 

 

 

 

 

 

출처: 인스티즈

 

 

 

 

 

 

https://www.youtube.com/watch?v=1MLyL8rzri4

 

 

 

 

 

 

캉갈은 다른 초대형견들에 비해 수명이 깁니다. 잔병이 적고 건강한 편이죠. 하지만 대형견들이 피해갈 수 없는 고관절 이형성증이 잘 발생할 수 있습니다.  눈꺼풀이나 속눈썹이 눈 안쪽으로 밀려들어가는 안검내반증이 잘 생기기도 합니다. 선천적인 경우가 많으므로 어려서부터 잘 살펴보고 충혈이나 눈물양이 늘거나 눈꺼풀에 경련이 일어나지 않는지도 살펴봐주는 것이 좋습니다. 

 

 

 

 

 

 

늑대잡는 개/ MLBpark

 

 

 

 

 

일단 사람들과 부딪힐 때는 덩치로 인해 겁을 먹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통제가 잘 되도록 해 주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zjeNUKKQV4c

 

 

 

 

 

 

캉갈/ 웹진 인벤

 

 

 

 

 

독립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주인 외외에 다른 사람들을 보면 물어 죽일 듯 사나운 개지만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은 개라 주인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임을 인정하면 경계는 하되, 물거나 짖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에 의해 경계심이 적은 견종으로 아이들과는 잘 지낸다고 합니다. 아마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여 아이의 경우 주인에게 해가 되지 않음을 인지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 개를 키우게 된다면 일단 많이 키워본 경험자들이 키우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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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에서 약 1400년에서 1600년에 이르는 시기 전체를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거의 200여 년을 지속한 르네상스는 다시 초기, 전성기, 그리고 후기로 구분이 되지요. 각각의 단계가 나타나는 시기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크게 알프스 산맥을 중심으로  지역적인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알프스 이남 이탈리아에서는 1400년경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고 그 후 백 년 늦게 시작된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는 약 1500년에서 시작하여 1550년까지 지속됩니다. 대표적인 미술가로 알브레히트 뒤러(Albrect Durer, 1471-1528)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 형제가 있습니다. 

 

 

 

 

 

 

붉은 터번을 쓴 남자 Portrait of a Man(self-Portrait),1433, National Gallery,London/wikipedia

 

 

 

Graafschap Flandriae 플란데런 백국( 862년- 1794년)/위키백과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는 플랑드르의 네덜란드 화가입니다. 후베르트 반 에이크의 동생으로 15세기 북유럽에서 중요한 화가중 한 사람이고요. 11세기 이후 모직물업으로 도시가 번성했고 벨기에가 독립하여 분리될 때까지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영어 이름 '플랜더스(Flanders)'는 저지대 또는 '물이 범람하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얀 반 에이크는 15세기 초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사의 선구자로, 그의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기술과 특징이 나타납니다. "유화의 아버지" 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유화 기법의 혁신을 가져온 화가입니다.  강도와 유연성이 뛰어난 유화 기법을 개발하여 얇고 투명한 덧칠과 미세한 정밀묘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인물과 사물을 매우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고요. 중세미술과 달리 인물을 이상화하지 않고 개성을 가진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일상적인 사물에 종교적 상징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관찰과 사생에 근거한 사실적인 풍경 묘사 기법을 사용했고요. 수학적 정확성보다는 경험과 직관에 의한 원근법을 구사했습니다. 수면에 비치는 광선 등 빛의 효과를 효과적으로 포착했습니다. 이러한 기술과 특징들로 인해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는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형 후베르트 반 에에크(1366-1426)/ 위키피디아

 

 

 

 

 

 

 

후베르트 반 에이크는 얀 반 에이크의 형입니다. 동생 람베르트(Lambert van Eyck)와 누이 마르케레테(Margaretha van Eyck)도 화가라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가문 출신입니다.  그는 '성스러운 팔'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뛰어난 기술을 가진 화가였습니다. 

 

 

 

 

 

그림 속  인물은 붉은 터번 (실제로는 chaperon이라는 모자)을 쓰고 있습니다. 어두운 배경 앞에 3/4 측면으로 앉아 있는 자세로 말입니다. 인물의 얼굴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주름진 피부와 약간 충혈된 눈이 특징적입니다. 특히 관람자를 직접 응시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인상적입니다.

 

 

 

이 작품은 종종 반 에이크의 자화상으로 여겨집니다.  그 근거로는 화면 상단에 새겨진"AIs Ich Can"(내가 할 수 있는 대로)이라는 문구와 인물의 직접적인 시선 때문이지요. 반 에이크의  뛰어난 기술이 돋보이는 이 초상화는 인물의 피부 질감과 터번의 주름을 섬세하게 표현하여 사실적인 느낌을 줍니다. 붉은 터번은 인물의 창백한 피부 및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어 작품에 생동감을 더하고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의 "붉은 터번을 쓴 남자" 작품에서 터번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터번은 당시 사회적 지위와 학식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특히 학자들이 착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붉은색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반적으로 붉은색은 권위, 부, 또는 고귀함을 상징했습니다. 무도회 장면에서 귀족들이 붉은 터번을 착용한 것으로 묘사되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지요.  이 작품이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자화상으로 여겨지는 점을 고려하면, 붉은 터번은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예술적 권위를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터번의 정교한 주름과 질감은 반 에이크의 뛰어난 기술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는 화가의 능력을 강조하고 현실감 있는 묘사를 통해 관람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The Birth of St.John/ wikimedia commons

 

 

 

 

 

The Three Marys at the Tomb, 1425-1435/wikipedia

 

 

 

얀 반 에이크는   당시의  유화 기법을 집대성하여 회화의 새로운 표현 곧 대상을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그릴 수 있는 길을 연 화가입니다. 그는 유화를 통해 선명한 색채, 빛과 음영의 놀라운 조화, 그리고 꼼꼼한 세부 묘사를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형 후베르트와 함께 1425-35년경에 그린 <무덤가의 세 마리아>는 유화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마르코복음 < 16장 1-8절>이 그 배경입니다.

 

 

 

이 그림은  무덤을 찾은 세 마리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마리아 살로메가 그들이지요. 여자들은 저마다 향유 병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샀기 때문이죠. 터번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무릎을 꿇고 천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여자는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예수님이 묻혔던 석관은 중앙에 있고 , 여자들은 왼쪽에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들쭉날쭉한 바위 언덕 아래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고요. 무덤 정중앙 관뚜껑 위에는 하얗고 긴 겉옷을 입은 천사가 왕홀을 손에 쥐고 여자들에게 손짓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섬세하게 묘사된 천사의 날개가 인상적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천사와 관뚜껑이 대각선을 이루고 있듯이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무장한 세 명의 군사도 대각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배경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비슷한 15세기 중세 성벽 도시가 그려져 있습니다. 당시 살고 있는 곳으로 묘사해야 더 실감 나게 공감할 수 있을 테니까요.  도시 위의 하늘에는 네덜란드 회화에서 가장 초기에 묘사된 새 떼가 지나가네요.

 

 

 

 

 

Saint Francis of Assisi Receiving the Stigmata, 1430-1432/wikipedia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성 프란치스코의 성흔"(Saint Francis of Assisi Receiving the Stigmata)작품은 1430-1432년경에 제작된 소형 유화입니다. 작품의 크기가 작은 것 (12.7*14.6cm)으로 보아 휴대용 개인 소장품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소유자가 예루살렘 순례 여행 중에 휴대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 작품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40일간의 금식 중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상처(성흔)를 받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날개를 가진 천사(세라핌)의 모습으로 공중에 떠 있습니다. 반 에이크는 미세한 세부 묘사 기법을 사용하여 아주 선명하면서도 멀리 있는 듯한 이미지를 창조해 냈습니다.  전설 속 바위투성이 풍경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멀리 네덜란드 도시의 모습을 포함시켜 이 기적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작품은 반 에이크(1390-1441)의 뛰어난 세부 묘사 능력과 풍경화 기법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자연주의적 풍경화보다 50년 이상 앞선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Portrait of a Man with a Blue Chaperon, 1430, Brukenthal National Museum, Sibiu/wikipedia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푸른 샤프롱을 쓴 남자의 초상"(Portrait of a Man with a Blue Chaperon)은 1430년경에 제작된 소형 유화 작품입니다. 아주 작은 크기로 , 액자 포함 22.5*16.6cm입니다. 나무 패널에 그려진 유화이고요. 전형적인 반 에이크의 세속 초상화 스타일로, 약간 과장된 크기의 머리, 어둡고 평평한 배경, 인물의 얼굴 세부 묘사가 섬세합니다.

 

 

정체불명의 남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푸른색 샤프롱(중세 시대의 모자 종류)를 쓰고 있고요. 남자의 오른손에 들고 있는 반지는 과거에는 그의 작업이 보석상이나 금세공인일 것이라고 해석되었지만, 최근에는 약혼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현재 루마니아 사비우의 브루켄탈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반 에이크의 뛰어난 세부 묘사 능력과 유화 기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초상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제단화는 가톨릭 교회에서 '제대화'라 불립니다. 교회 동쪽 중심 제단 뒤에 수직으로 서 있는 패널화로, 미사 때 모든 신자가 볼 수 있었지요. 설교가 청각이라면, 제단화는 시각적 교화 수단이었습니다. 라틴어 성경을 읽지 못했던 당시 대다수 신도에게 효과적이었죠. 그러나 미술사에서는 내용 못지않게 외형이 중요했습니다.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는데, 가장 단순한 것이 한 폭으로 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형식의 '팔라(Pala)'입니다. 두 폭 제단화로는 작가 미상의 <월턴 두 폭 제단화>가 유명하고요. 개폐가 가능한 세 폭 제단화 (트립 티콘 Trypticon)가 가장 일반적이었습니다. 날개형은 마인 프랑크에서 활동한 그뤼네발트가 완성했습니다. 통상 다섯 개 이상의 패널로 구성된 것이 다폭 제단화입니다. 

 

 

 

플랑드르 지역은 습지로, 이탈리아처럼 프레스코화가 유행하기 어려웠습니다. 화판, 즉 패널화(Panel)가 유행했지요. 제대화는 습기가 많은 북유럽 고유의 양식으로 그곳 미술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세에는 일상 생활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내세가 중요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것이 점차 제단화에서 벗어나 15세기부터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합니다. 풍경화와 정물화는 17세기에 와서 네덜란드로에서 유행하게 되고요.  1648년 프랑스 왕립 미술원에 역사화(성경, 신화, 역사)->초상화->풍경화-> 정물화->풍속화 순으로 공식화합니다. 

 

 

 

 

 

Ghent Altarpiece, 1432, The twelve interior panels 5.2*3.75m/wikipedia

 

 

 

 

 

 

형 후베흐트 반 에이크 (Hubert van Eyck,  1370 ?-1426)가 시작하여 동생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 1395?-1441)가 완성한 <헨트 Ghent 제단화 , 1432>입니다. 일명 <어린양의 경배> 또는 <신비의 어린양>으로 불리는 참나무 12폭 작품입니다. 5세기 초 플랑드르 지역 헨트(겐트) 시 성 바봉 (Saint Bavo) 성당의 가족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시장 요스 베이트(Joos Vijd)가 반 예이크 형제에게 주문하여 제작했습니다.

 

 

 

겐트 제단화 (Ghent Altarpiece)는 1432년에 완성된 얀 반 에이크의 대표작으로, 초기 네덜란드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입니다. 대형 다폭 제단화로, 여러 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열고 닫을 수 있지요. 중앙 패널에는 '신비의 어린양 경뱨배'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Diagram, Jan van Eyck, Ghent Altarpiece(open)/Smarthistory

 

 

 

 

전체적으로 열린 화면의 그림은 도상학적 의미가 매우 복잡합니다. 화면 (365*515cm)은 천상과 지상 2단으로 나뉩니다. 하단 다섯 폭이 <어린 양의<어린양의 경배>입니다. 양은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었으나 중세 시대 미술에서는 통상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상단이 복잡하네요. 왼편부터 열두 폭을 순서대로 서술하면, 아담-노래하는 천사들-마리아-하느님-세례자 요한- 연주하는 천사들-이브 순입니다. 중앙 인물을 예수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바로 아래 <어린양의 경배> 위쪽 반원의 성령(비둘기)과 연결할 때 아무래도 하느님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습니다. 

 

 

Diagram, Jan van Eyck, Ghent Altarpiece(closed)/ Smarthistory

 

 

 

 

닫혔을 때는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단에는 봉헌자 요스 베이트- 세례자 요한 - 사도 요한 -이사별 보루트, 가운데는 수태고지하는 가브리엘 천사와 성모 마리아, 상단은 선지자 즈카르야-이교도 무녀 에리트 레이와 쿠마이-선지자 미가 등 한 폭, 한 폭이 마치 개인 초상화처럼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뒤쪽 배경을 이루는 풍경은 사실주의의 느낌이 물씬 풍기며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 전쟁과 수난을 겪었지만 대부분 원형이 보존되어 있어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가 있습니다. 섬세한 세부 묘사, 풍부한 상징성, 혁신적인 기법으로 인해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VhwinCiELI

 

 

 

 

 

 

 

 

유화가  개발되기전까지 템페라 기법(달걀노른자를 물감에 섞어 바름)이나 프레스코(회벽 위에 수성 물감이 스미게 함)를 사용하였지만, 광택이나 물감이 스미는 문제가 있어 정교한 묘사가 어려웠습니다. 얀 반 에이크는 기름에 물감을 섞어 바르는 유화기법을 개발하였습니다. 기름이 마르는 시간 동안 몇 겹을 덧칠할 수 있고 보다 더 정밀하고 섬세한 표현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hRFw208o8

 

 

 

 

 

템페라(Tempera): 안료와 매체의 혼합. 안료를 녹이는 용매로는 주로 계란이 이용되었습니다. 계란이나 아교질, 벌꿀, 무화과나무의 수액 등을 용매로 사용해서 색채가루인 안료와 섞어 물감을 만들고 이것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화가들은 광물이나 식물에서 색채를 직접 마련하였습니다. 색채가 있는 광물을 맷돌에 갈아서 색채 가루인 안료를 만들고 이것을 용매와 섞어서 물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때 사용된 용매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주로 계란이 사용되었습니다. 

 

 

 

 

템페라 화법은 건조가 빠르고, 또 엷고 투명한 물감의 층이 광택을 띠어 덧칠하면 붓자국이 시각적인 혼합효과를 냅니다.또 일단 건조된 뒤에는 변질되지 않고, 갈라지거나 떨어지지도 않으며, 온도나 습도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 빛을 거의 굴절시키지 않아 유화보다 맑고 생생한 색을 낼 수 있어 벽화 등에 아주 적합한 기법입니다. 그러나 붓의 움직임이 원활하지 못하므로 색조가 딱딱해지는 흠이 있고 , 수채화나 유화같이 자연스러운 효과와 명암, 톤의 미묘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Leal, Souvenir,oil on oak,1432, National Gallery , London/wikipedia

 

 

 

 

"Leal Souvenir"(층실한 기억)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가 1432년에 그린 초상화입니다. 이 작품은 오크 패널에 유화로 그려진  33.3*13.09cm 크기의 소품으로, 현재 런던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충실한 기억"이라는 뜻으로 남자의 초상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초상화는 중세 유럽 예술에서 세속적인 인물 묘사의 중요한 예시로 여겨집니다. 반 에이크의 뛰어난 관찰력과 세밀한 묘사 기술이 잘 나타나 있으며, 15세기 초 북유럽 르네상스 시대를 배경으로 그려졌습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가 활동하던 플랑드르 지역은 당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으며,부유한 상인과 귀족들이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충실한 기억>과 같은 세속적 초상화의 제작을 촉진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사실적으로 정교한 묘사 기법이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얀 반 에이크는 이러한 기술적 진보를 활용하여 인물의 특징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개인의 정체성과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충실한 기억>은 이러한 예술적, 사회적 변화의 맥락에서 탄생한 작품으로, 중세의 전통과 르세상스의 새로운 경향이 공존하는 과도기적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OuO99BljB4

 

 

 

유화(Oil Painting) 

 

서양미술의 대표적 형태 중 하나로, 기름으로 갠 물감(안료)을 사용하여 그리는 서양화의 한 기법입니다. 유화 기법의 특징은 다른 기법과 비교해서 색조, 색의 농담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동시에 선전 표현도 가능하고 광택, 반광택, 무광택의 효과, 혹은 불투명, 반투명, 투명의 묘법도 자유자재로 구사 할 수 있으며 두꺼운 칠, 얇은 칠, 혹은 기복의 변화가 있는 화면 등 재질감의 표현이 가능합니다. 또한 제작 중의 색과 건조 후의 색의 변화도 없는 등의 장점을 가집니다.  

 

 

 

 

 

프레스코 Fresco

 

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라는 뜻입니다.  덜 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한 벽화, 그림물감이 표면으로 배어들어 벽이 마르면 그림은 완전히 벽의 일부가 되어 물에 용해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수명도 벽의 수명만큼 지속되지요. 프레스코는 석고가 마르기 전에  재빨리 그림을 그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림의 수정도 거의 불가능해 정확하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합니다. 또 사용할 수 있는 안료의 색깔도 제한되어 있고요 (15-16세기 화가들은 프레스코에는 천연 안료만이 적합한 것으로 보았다. ). 벽이 마를수록 색깔도 옅어지며, 색의 농담을 이용한 효과도 얻을 수 없습니다. 습기가 차면 석고가 부서지므로 그림도 함께 떨어져 나가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건조한 지방에서는 가장 영구적이며, 그 결과 베니스를 제외한 이탈리아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며 북유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KCW8LIukfE

 

 

 

 

The Arnolfini Portrait, 1434, Oil on oak Panel, National Gallery, London/wikipedia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는 최초의 유화 작품이라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기록상으로론 있었지만 이 기법을 널리 전파시킨 계기는 이 작품이 처음입니다. 그가 색채 가루를 최초로 기름에 섞어서 사용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세심한 고찰, 정교한 세부 묘사가 가능했습니다. 

 

 

 

 

조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와 조반니 체나미(Giovanna Cenani)의 결혼식을 그렸습니다. 

최초의 유화 작품이고요. 그 이전에도 기록상 있었지만 유화기법을 예술적인 수준으로 올리고 널리 전파시킨 계기는 이 작품이 처음입니다. 사실적이고 경험주의적 예술을 추구했던 플랑드르 문화권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최초의 전신 초상화이고요.

 

 

 

 

배경의 사물들이 주인공의 높은 경제적 수준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그림에 포함되었습니다. 여자가 착용한 목걸이 팔찌 등 장신구와, 정교하게 만들어진 황동 샹들리에, 침대 밑에 깔린 바닥의 작은 오리엔탈 카펫이 그러합니다. 

 

 

 

신부의 헤드드레스의 용도는 머리카락을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결혼 전의 처녀들은 머리카락을 드러내고 다닐 수 있었지만 결혼한 여자들은 외출 시 머리카락을 보여선 안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림 속의 신부가 헤드드레스를 쓰고 있는 것은 이제 결혼을 한 여인으로서 남편의 뜻에 종속됨을 의미합니다.

 

 

두꺼운 커튼으로 가리는 높은 침대는 15세기에 실용적인 목적이 아닌 부유함의 과시 수단으로서 가정집 내에서 가장 중요한 방에 설치되었습니다. 가격이 비싸 부유층만이 구입이 가능했던 오렌지나 남녀의 의상에 나타나는 모피 등도 이 예비부부의 재정적 여유로움을 보여줍니다. 창문밖으로 보이는 체리열매는 부부의 사랑을 상징하고, 오렌지는 인간의 타락 이전 에덴동산에서의 순수와 결백을 상징합니다. 또한 네덜란드에서는 오렌지가 매우 비싼 수입과일이었으므로 이들이 매우 부유한 계층임을 나타냅니다. 

 

 

 

 

신 앞에서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선서를 하는 모양새, 아르놀피니의 엄숙한 표정과 위쪽을 향해 들어 올린 오른손은 그가 이러한 맹세의 의식을 행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신랑이 외부로 향하고 있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의 전통적인 역할을 나타냅니다. 신부의 그림자가 침대에 드리워져 있는 것은 여자의 역할을 상징하고요.  마치 임신한 것처럼 불러있는 여자의 배는 당시에 유행하던 복식 중 하나라고 합니다. 천장의 샹들리에에 단 하나의 양초가 켜져 있습니다. 이것은 신의 통찰력과 지혜, 혹은 신선한 결혼의 맹세를 의미합니다. 샹들리에는 금속의 표면 질감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강아지는 본래 주인에게 충실한 본성을 지닌 동물입니다.  따라서 부부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충실한 애정을 말해줍니다.  강아지 털을 아주 세밀히 묘사하였습니다. 

 

 

 

 

wikipedia

 

 

 

 

맹세를 상징하는 남자의 손, 여자의 손위치는 손종과 겸손을 상징합니다.  로마 후기부터 전해지는 전통적인 방식의 결혼식에서 는 남녀가 서로의 오른손을 잡고 예식을 치르는 반면 아르놀피니는 왼손으로 신부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르놀피니의 약혼식을 재현한 그림이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약혼식은 가까운 장래에 두 남녀가 결혼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기본적인 의미 외에도, 양가가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친척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재정적, 사회적 이득을 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해관계에 기반한 일종의 계약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결혼식의 장면으로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결혼식에서 중요한 의식 중 하나인 남녀가 서로 손을 잡는 행위 때문입니다.

 

 

 

 

침대 위에 붙어있는 나무장식은  임산부의 수호 성녀 마가레트( 라틴어로 진주) 상으로 임신을 원하는 부부의 바람이 담겨있습니다. 벗어놓은 신발은 성경 구절에 기초한 것으로 구약성격에 출애굽기 편에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대목이 나옵니다.   신발은 매우 세속적인 물건으로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경건한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기독교적 유리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들이 신발을 벗고 결혼 서약에 임하는 것도 마찬가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wikipedia

 

 

 

 

배경의 벽면에 걸린 거울 안에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뒷모습 외에도 결혼식의 증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합니다. 특히 그중 한 인물이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며, 이 결혼을 성립을 기록하고 증언하기 위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거울의 테두리 장식도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10장 면의 예수 수난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예수의 수난은 곧 교회와의 결합이며 종종 결혼으로써 비유되기도 합니다.  10이라는 숫자는 예수 자신 혹은 기독교적인 문맥 내에서 '완전함'의 상징성을 가집니다. 화면 왼쪽 묵주와 오른쪽 위 먼지떨이 솔은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결혼 선물로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의미입니다.

 

 

 

 

wikipedia

 

 

 

 

 

얀 반 에이크는 최초로 작품에 사인을 한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거울 윗부분 벽에 이름과 날짜가 다음과 같이 라틴어로 기입되어 있습니다. 

"Jahnnes de dyck fuit hic.1434"

(얀 반 에이크 이곳에 있었다. 1434)

 

 

https://www.youtube.com/watch?v=9ODhKqFaugQ&t=3s

 

 

 

 

 

Portrait of Baudouin de Lannoy , oil on oak,1435/wikipedia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dml "보드앵 드 라노이의 초상화(Portrait of Baudouin de Lannoy)는 1435년경에 그려진 소형 유화 초상화입니다. 이 작품은 필립 선한 공(Philip the Good)의 궁정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플랑드르의 정치가이자 영국 헨리 5세 궁정의 대사였던 보두앵 드 라노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상화에서 보두앵은 공식적인 자세롤 표현되어 있으며, 황금양털 기사단의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의복은 갈색 자주색 브로케이드 벨벳으로 만들어졌으며, 큰 모피 모자를 쓰고 있어 그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냅니다. 

 

 

 

반에이크는 모델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현실과 약간의 차이를 두었습니다. 특히 인물의 머리가 몸에 비해 비율이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가는 초상화를 미화하지 않고 실제 모습 그대로를 표현했습니다. 

 

 

 

 

 

The Madonna of Chancellor Rolin, 1435, oil on panel, Muse'e du Louvre, Paris/wikipedia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대법관 롤랭과 성모(The Madonna of Chancellor Rolin)"는 1435년경에 제작된 초기 네덜란드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입니다. 이 유화 작품은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림은 세 주요 인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중앙에 왕관을 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왼쪽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니콜라 롤랭 대 법관입니다. 성모 마리아 위에는 천사가 떠 있어 그녀에게 왕관을 씌우고 있습니다. 배경은 상세하고 풍부합니다. 인물들은 화려한 로지아(loggia)에 위치해 있으며 , 그 뒤로 도시와 강이 보이는 광활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 도시는 롤랭의 고향인 오튕(Autun)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림에는 상징적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둥 밖의 작은 정원에는 마리아의 덕목을 상징하는 다양한 꽃들이 묘사되어 있고, 공작새와 까치는 선과 악의 대비를 나타냅니다. 이 작품은 반 에이크의 뛰어난 기술과  세부 묘사 능력을 보여주며, 당시의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권력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니콜라 롤랭 대법관의 여러 의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롤랭의 종교적 열망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나타냅니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어, 자신의 신앙심과 겸손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롤랭의 정치적 지위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가 성모 마리아와 같은 공간에 동등한 크기로 묘사된 것은 그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암시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롤랭의 개인적인 봉헌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종교 작품을 성인이나 성모에게 봉헌하는 관행에 따라, 롤랭은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신앙과 헌신을 표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그림은 롤랭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기도의 표현이 기도 합니다. 그림 속 세부 묘사와 상징들은 롤랭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ahur-E9gjY

 

 

 

 

 

 

Saint Barbara, 1437, Royal Museum of Fine Arts Antwerp, Belgium/wikipedia

 

 

 

 

 

얀 반 에이크의 '성녀 바바라'(Saint Barbara)는 1437년에 제작된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41.2*27.5cm 크기의 오크 패널에 그려진 소형 드로잉으로, 작가의 서명과 연도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성녀 바바라는 책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그 뒤로 건설 중인 고딕 대성당이 보입니다. 바바라는 전형적인 반 에이크 초상화 스타일의 좁은 어깨를 가지고 있으며, 후플랑드(houppelande)라는 넓은 소매의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배경에는 건설 현장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건축가, 감독관, 석재를 운반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는 후대 피터 브뤼겔의 작품을 예견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 작품의 특이점은 완성된 그림인지, 미완성 드로잉인지, 혹은 계획된 유화의 밑그림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것입니다. 붓터치, 철필, 은점, 잉크, 유화, 흑생 안료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으며, 청색과 울트라마린 안료는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The Dresden Triptych, 1437/wikipedia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드레스덴 삼연화(Dresden Triptych)는 1437년에 제작된 소형 제단화입니다. 이 작품은 중앙 패널과 양쪽의 이중 날개로 구성된 총 5개의 개별 패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앙 패널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묘사되어 있으며, 왼쪽 날개에는 대천사 미카엘과 기부자, 오른쪽 날개에는 성 카타리나가 그려져 있습니다. 

 

 

 

 

얀 반 에이크의 유일한 현종하는 삼연화 제단화입니다. 작가의 서명, 날짜, 개인 모토인 "ALC IXH XAN" (내가 할 수 있는 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래의 프레임이 보존되어 있으며, 프레임에는 라틴어 명문과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크기가 매우 작은 휴대용 제단화로 추정됩니다. 

 

 

 

 

이 작품은 얀 반 에이크의 공간 처리 능력의 발전을 보여줍니다.  15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성모 마리아 초상화의 도상학적 요소를 확립했습니다. 현재 드레스덴의 겜엘데갤러리 알테 마이스터(Gemaldegalerie Alte Meister)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MgbOq5T_RQ

 

 

 

 

 

 

Portrait of Margaret Van Eyck, 1439/wikipedia

 

 

 

 

 

얀 반 에이크의 "마르가리타 반 에이크의 초상"은 1439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현재 브뤼헤의 그뢰닝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초상화는 화가의 아내인 마르가리타를 그린 것으로, 그녀가 34세 경일 때 제작되었습니다. 

 

 

 

작품의 크기는 25.8* 32.6cm로 비교적 작은 편입니다. 얀 반 에이크는 이 초상화에서 그의 특징적인 사실주의적 표현과 세밀한 묘사 기법을 보여줍니다. 그의 유화 기법 사용은 색채의 풍부함과 질감의 표현을 가능하게 했으며 , 이는 당시 북유럽 미술에 혁신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초상화는 18세기 초까지 브뤼헤의 화가 조합 예배당에 전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작품이 단순히 개인적인 초상화를 넘어 공적인 가치를 인정받았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가 사망한 후 브뤼헤 시 당국이 유명 화가의 미망인인 마르가리타를 특별히 대우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당시 얀 반 에이크의 명성과 그의 가족에 대한 존경을 보여줍니다. 얀 반 에이크의 세심한 관찰력과 정교한 세부 묘사는 이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며, 마르가리타의 개성과 당시의 복식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0vwQJqgoRc

 

 

 

 

 

 

Madonna in the Chirch, 1438-1440, Gemaldegalerie, Berlin/wikipedia

 

 

 

 

 

 

 

 

얀 반 에이크의 '교회 안의  성모(Madonna in the Chirch)는 1438-1440년경에 제작된 소형 유화 패널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 내부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국의 여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보석이 박힌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크기가 주변 건축물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어, 이는 비잔틴 성모 도상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성당 내부로 들어오는 빛의 표현이 매우 뛰어나며, 이는 마리아의 순결함과 신의 존재를 상징합니다. 성당 후면의 조각에는 마리아의 생애 장면들이 새겨져 있고, 벽감에는 유사한 자세의 마리아와 아기 예수 조각상이 있어 마치 그 조각이 살아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 작품은 반 에이크의 뛰어난 빛의 표현과 세밀한 묘사력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 베를린의 겜엘데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의 성모'작품이 고딕 양식의 성당 내부를 배경으로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딕 성당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배경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신성함을  강조합니다. 고딕 건축의 특징인 높이 솟은 첨탑과 천장은 하늘을 향한 영적 상승을 상징합니다. 이는 마리아의 영적 고양을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고딕 성당의 큰 창문들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신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이는 마리아의 순결함과 신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됩니다. 

 

 

 

작품이 제작된 15세기는 고딕 양식이 유럽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적, 문화적 맥락을 반영합니다. 고딕 건축은 중세 기독교 세계관을 구현하는 메타포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이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그녀의 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얀 반 에이크는 성모 마리아의 신성함과 중요성을 시각적으로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kUdm-GiSVc&t=4s

 

 

 

 

무엇이든 한 분야의 선구자가 되는 건 용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얀 반 에이크처럼 말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템페라(달걀 노른자) 기법의 불편함을 해결하고자  많은 이들이 꺼리는 '유화(아마씨유)'를 선택했습니다. 시간적으로 빨리 마르는 템페라의 기법보다 인내심이 필요한 유화의 기법이 얀 반 에이크에게 더 맞는 방법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눈으로 본 것을 가장 현실에 가깝게 그리려고 노력한 화가였으니까요.  섬세한 그의 손길 덕분에 그는 그의 그림에 새로운 가치를 불어넣을 수 있었고 미술사에 영향력 있는 화가로 남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새긴 문장 하나가 계속 맴돕니다. 

 

 

I DO AS I 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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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독일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독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

독일 미술의 아버지

서양 최초의 국제적인 미술가 ,

서양미술 최초의 적극적인 자기 PR가,

현란한 아이디어맨 이자 환상적인 상상가,

혁신가 (innovator)

 

 

 

 

 

 

독일 르네상스 화가 중 가장 위대한 한 명인 알프레히트 뒤러(Albrecht Duer 1471-1528)를 소개합니다. 뒤러는 제단화, 종교화, 초상화, 자화상, 판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례론과 원근법에 관한 저서를 출판했던 다재다능한 화가였지요. 르네상스의 물결이 피렌체, 베네치아를 넘어 북유럽에 상륙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르네상스를 개척한 화가이고요.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수학적, 논리적인 원근법과 표현을 북유럽의 특유의 섬세한 표현을 결합하여 이탈리아와는 다른 르네상스 미술을 보여줍니다. 

 

 

 

self-portrait, 1498, Museo del Prado, Madrid/wikipedia

 

 

 

 

그가 28때 그린 <자화상 >(1498)입니다.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소장이지요.  오늘날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뒤러의 자화상 회화 작품입니다. 곱슬한 금발머리, 연극배우 뺨칠 정도의 외모, '나 , 요즘 잘 나가.' 하며 한껏 멋을 낸 뒤러, 디테일 강한  옷차림과 비싼 장갑까지 끼고 존재감 확실히 드러냅니다. 원근법을 살린 배경 묘사가 작품에 멋을 더합니다.

 

 

 

뒤러는 스스로를 이탈리아 여행과 인문적 학식을 겸비한 신사로서 묘사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일개 손재주나 부리는 공방쟁이가 아니라 신이 내려준 창조력과 사고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예술가임을 소리높여 외치고 싶어 했지요. 혹시 보이시나요?  관람객을 향해 직시하는 눈길, 한껏 등을 곧추세운 가장 잘 나가던 때의 뒤러의 자신감찬 모습말입니다. 

 

 

 

 

 

 

 

독일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는 판화를 미술의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사용한 첫 번째화가입니다. 간접예술인 판화는 '판'을 매개물로 하여 종이 등의 평면에 이미지를 찍어 낸 그림을 말합니다. 이런 판화는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소수 엘리트들이 많이 향유하던 문화 예술이었습니다.  그런 판화를 뒤러가 일반인들도 누릴 수 있게 예술의 대중화에 힘씁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원인도  그의 판화 작품 덕입니다.  그는 빽빽한 선을 사용하여 판화에서 유화 못지 않은 세밀한 질감과 색조를 묘사해 냅니다. 

 

 

 

 

Melencolial,1514/wikipedia

 

 

 

 

 

 

2014년,  알브레히트 뒤러 (1471-1528)가 그린 걸작 판화작품 중 하나인 <멜랑콜리아 I>(1514년)을 완성한지 500주년이 되는 해였지요. 뒤러의 <멜랑콜리아 I>은 <기사, 죽음, 악마>와 <서재에 앉아있는 성 제롬>과 더불어 1513-14년에 완성한 대형 판화 3부작 중 한 작품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3대  미덕으로 꼽히던 도덕적, 신학적, 지적 학구주의를 상징하는 작품이지요.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란 이 세 가지 미덕을 갖춘 교양과 소양 있는 자로서 그가 창의적 결과물을 창조하기까지는 영혼적 고뇌와 정신적 우울증이라는 창조의 고통도 감내해야 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멜랑콜리아 Melancholia I>판화는 뒤러의 대표적인 동판화 중 하나로 수수께끼와도 같은 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으로 나타내 풍자하는 특성을 담은 그림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확 잡아당기는 것은 화면 우측 절반을 차지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왜 그렇게 어두운 표정일까? 그녀의 정서를 이해하기 위해 이쪽저쪽 시선을 옮겨보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화면 하단 1/3에는 대패, 톱, 자, 망치, 못 등  목수들이 사용할 만한 도구들이 보입니다.

 

 

 

양? 개?한 마리가 몸을 움츠리고 누워 있네요.  그 주변으로 기하학적 다면체와 공이 보입니다. 자세히 보니 여인의 손에 컴퍼스가 쥐어져 있네요. 몸에는 열쇠와 돈 주머니도 달려있고요. 그리고 그녀의 오른편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통통이 아기 천사도 보입니다. 박쥐 같은 모양에 꼬리가 달린 이상한 괴물...특이하게도 날개에 배너광고처럼 어떤 글자를 보여주고 있네요.

 

"Mellncolia I"

 

 

 

그는 많은 작품들 속에 수수께기 같은 장치들을 숨겨 놓은 별난 화가입니다.  여인의 표정이 '멜랑콜릭"해 보입니다. 먼저 아래편에 놓인 목공 도구들은 실용적 기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인이 든 컴퍼스와 입체적 도형들은 기하학을 의미하고요. 종, 모래시계, 지거나 혹은 뜨는 해는 모두 시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추측해 봅니다. 

 

'실용적 기술과 수학적 지식을 모두 동원해 보았다. 하지만 이미 해가 지고, 혹은 먼동이 트고 있다. '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아직 문제는 해결이 안되고, 그러니 주인공의 표정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멜랑콜리아는 중세 의학에서 인간의 체질을 다혈질 (sanguine),점액질(phlegmatic), 담즙질(choleeric) 그리고 우울질 (melancholy)의 네 가지로 나눈 것에서 기원합니다. 이렇게 우울질이 15세기 후반부터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멜랑콜리아는 사람을 판단할 때 부정적으로 여겼습니다. 우울질이 많은 사람은 성격이 욕심이 많고 감정적이며 혼자 사색하는 걸 좋아하고 창조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한마디로  뒤러 이전의 멜랑콜리를 표현하자면 게으르고 나태한 이미지의 대표였다고 합니다. 그런 이미지를 뒤러가 동판화를 통해 완전히 뒤집었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중세의 나태함의 부정적인 이미지 '멜랑콜리아'는 르네상스 시대의 뒤러에 이르러 "지적인 성찰, 지성, 사색, 철학"으로 표현됩니다.  고뇌하는 천재의 좌절과 우울로 천재들만이 갖는 어떤 특별한 감성(열정)으로 격상시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작품은 이상과 좌절을 그린 뒤러 자신의 정신적 자화상이라 보는 시선이 지배적입니다. 

 

 

 

 

 

 

독일 남부 여행/ 노컷뉴스

 

 

 

 

흔히들'르네상스'하면  이탈리아 미술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떠올리지요.  반면,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라는 이름은 어딘지 낯설게 느껴지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특히 알프스 산맥 이북 지방에 자리해 있는 북부 유럽권에서는 더 그렇죠. 이들에게 뒤러는 미술의 역사에서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늘 함께 하는 화가로서 그들의 머리와 가슴에 깊이 자리 잡은 화가입니다. 

 

 

 

 

뒤러가 태어나고 활동한 뉘른베르크(Nurnbreg)입니다. 이곳은 유럽 한가운데에 자리한 당시 신성로마제국 최대 도시인 쾰른 다음가는 규모의 도시로, 인문주의를 비롯한 학문, 인쇄, 항해와 천문 도구 개발을 중심으로 한 과학 기술과 무역이 발달한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ynFG723JOI

 

 

 

 

 

Portrait Diptychot Durer's Parents/ Wikimedia Commons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버지 (Albtecht Du"rer the Elder)는 1455년 헝거리에서 독일 뉘른베르크로 이민  온 유명한 금세공  장인이자 Nuremgerg Goldsmiths' Guild의 마스터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요. 슬하 18명의 자녀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화가 뒤러는 어려서부터 금세공 공방에서 목판과 금속판 세공 기술을 배웠습니다. 목금속 판화가 뒤러가 최고로 자랑하는 장르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이 어린 시절부터 쌓은 공방 수련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화가가 되고 싶어 했던 그는 15살이 되던 1486년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lgemut)의 작업장에 도제로 4년을 보냅니다. 그곳에서 제단화를 비롯한 종교화와 책의 삽화, 목판화 등을 배웠고요.   도제수업을 마친 그는 견문을 넓히려고 19살이 되던 1490년 부터 4년간, 독일, 네덜란드, 북부 프랑스, 수위스를 여행합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접하고 학식을 쌓은 선진적인 사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미술면에서는 북이탈리아에서 만난 만테냐 (Andrea Mategna)와 벨리니(Giovanni Bellini)로부터 영향을 받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를 이상적인 미술가의 전형으로 본받았습니다.

 

 

 

 

 

독어권 문화를 포함한 북유럽에서 자화상이라는 미술쟝르는  유난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50년 전에 살았던 화가 제도공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가 자화상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그가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을까 알 길이 없었을 겁니다. 공방 기술자에서 창조적인 개인으로서 의식적 자각을 자화상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되는 뒤러의 자화상이 탄생하기 훨씬 전부터 중세 교회 조각가들과 장인들은 건축물이나 작품 한 구석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그들의 얼굴을 새겨 넣는 관행을 즐겼습니다. 뒤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미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은필 소묘로 <13세의 자화상>(1484)을 그려 그 빼어난 손재주를  드러냅니다. 

 

 

 

 

 

 

 

<13살의 자화상 self -portrait at the Age of 13>, 1484, Silver point drawing , Vienna/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mex3sbaLxMk

 

 

 

 

 

 

<13살의 자화상 Self-Portrait at the Age of 13>(1484) 작품은 연필 이전의 은첨필로 (Silver point)로 한 소묘입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1484년 <13살의 자화상 >에서 보이는 알프레히트 뒤러의 아이 같은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남자다운 목, 강한 코, 왠지 길어 보이는 검지 손가락. 소년에서 성인으로 옮겨가는 뒤러의 모습입니다.  

 

 

현재 적어도 12개의 자화상이 전해지는데, 1493년 작품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 그리고 1498년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외 다른 자신의 작품들 속에도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판화 작품에는 넣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1515년 과슈로 그린 자신의 자화상을 라파엘로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self-portrait with a pillow, drawing go , 1491-1492/wikipedia

 

 

 

 

<Portrait of the Artist Holding a Thistle>,1493, Musee du Louvre/wikipedia

 

 

 

 

 

엉겅퀴를 들고 있는 자화상 (Portrait of the Artist Holding a Thistle)은 캔버스에 붙인 양피지에 그린 유화로 1493년 제작되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의 자화상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북유럽 작가의 자화상 중 최초의 작가 자화상입니다. 서양 회화사 최초의 독립적인 자화상이기도 하고요.

 

 

 

1420년경 이후로는 북유럽에서 3/4 각도로 비스듬한 측면의 포즈로 그리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후기 중세와 르네상스 초기 예술은 더욱 어려운 3/4 각도를 개발하였고, 작가들은 이 포즈를 사용하는 기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뒤러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심리적으로 복잡해 보입니다. 다소 우울하고 내성적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15세기 동안, 엉겅퀴는 부부간에 있어 남자의 충실성에 대한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종교적으로 엉겅퀴 가시는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암시를 함축하고 있고요.

 

 

 

자화상은 어두운 톤을 배경으로 초상화의 전통적인 자세인 측면으로 3/4 각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포즈는 약간 어색해 보이는데, 이는 끊임없이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 보며 그려야 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뒤러의 세련된 옷차림이 유난히 눈에 들어옵니다. 붉은 털실 방울이 달린 모자와 우아한 푸른빛이 도는 회색 조끼, 목부분에 수놓아진 흰색 슈미즈(Chemise)와 멋스럽게 어울립니다. 작가의 손에 들려있는 식물과 날짜는 작품이 약혼 초상화(Brautportrat)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식물 학자에 의하면 손에 들린 식물은 에란 지움 아메치스(eryngium amethystinum)라 불리는데, 부부간에 있어 남자의 신의와 정절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자화상이 만들어 진 1493년은 뒤러가 22살로,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일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 마이클 울프무트의 도제 수습을 마치고, 1494년  벽돌 제조업자의 딸인 아그네스 프레이(Agnes Frey)와 결혼합니다. 아내 아그네스 프라이( Agnes Frey)와 결혼한 해인 1494년, 뒤러는  새 신부를 놔두고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릅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1494-95년 , 1505-07년 두 번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릅니다. 

 

 

 

 

Lamentation of Christ by Andrea Mantegna(1431-1506), 1480, Tempera on canvas/wikipedia

 

 

1495년 뒤러는 베니스를 떠났고 그곳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유명한 예술가인 안드레아 만테냐를 만났습니다. 뒤러는 만테냐의 그림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의 유화 기법을 연구했습니다.

 

 

 

뒤러는 또 다른 베네치아 예술가인 지오반니 벨리니의 Giovanni Belin의 예술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와 함께 여러 프로젝트에서 작업했습니다. 베니스에 있는 동안 뒤러는 유화 뿐만 아니라 수많은 목판화와 동판화를 제작했습니다. 뒤러는 1495년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후 계속해서 고품질의 예술 작품을 제작하여 유럽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Portrait of FrederickIII of Saxony, 1496/wikipedia

 

 

나무위키

 

 

 

 

알브레히트 뒤러가 1496년에 제작한 작센의 프리드리히 3세의 초상화는 당시 중요한 후원자의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작센의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3세는 뛰어난 예술 애호가로, 뒤러의 여러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판화 기법으로 제작되었으며, 뒤러의 정교한 기술과 세밀한 묘사력을 보여줍니다. 당시 26세였던 뒤러는 이미 유럽에서 인정받는 예술가로 자리잡고 있었고, 이 작품을 통해 그의 뛰어난 재능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의 초상화는 뒤러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그의 예술적 성장과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 시기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키고 있었습니다.  뒤러의 정밀한 관찰력과 인물의 특징을 포착하는 능력을 잘 보여주며, 당시 독일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숲속의 연못>,1497, 종이에 수채화와 구아슈/ Artmajeur 매거진

 

 

 

 

이 시기 뒤러의 작품들은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1494년 가을 베니스로 떠나는 여행 중에 만들어진 것과 1495년 봄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숲속의 연못>은 후자에 속하며, 이탈리아 그림의 영향을 받은 뒤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풍경화에 대한 관심과 예술적 진화를 보여준 작품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서양 미술사에서 최초로 정확한 풍경을 묘사한 수채화로 평가받습니다.

 

구아슈: 수용성 아라비아고무를 교착제로 사용하여 만든 불투명한 수채물감입니다. 구아슈의 특징은 수채화와 달리 불투명한 효과를 냅니다. 수채화와 병용해 두껍게 발라 마티에르 효과 등 다양한 표현이 가능합니다. 선명하지만 유화와 달리 광택이 없고 부드러운 효과를 냅니다. 종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질 재료에도 사용 가능합니다.  구아슈는 중세 삽화장식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회화 전반에 걸쳐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SE46jKL9VY

 

 

 

 

 

 

Christ as the Man of Sorrows,1493-1494 /wikimedia commons

 

 

 

 

 

 

 

 

알브레히트 뒤러의 3대 목판화와 4대 동판화가 있습니다.

3대 목판화는 각각 < 성모 마리아의 생애>, <대 수난>, <요한 묵시록>

 4대 동판화는 <아담과 하와>, <기마병>, <서재의 성 예로니모>, <멜랑콜리아 I>입니다. 

 

 

<성모의 생애>/www.mycelebs.com

 

 

<그리스도의 수난>,1507-1513/ www.mycelebs.com

 

 

 

<성모 마리아의 생애>는 성모 마리아의 탄생부터 영면의 과정을 묘사한 20점의 목판화 연작입니다. <대수난>은 예수가 고통받는 모습을 담은 2점의 연작이며, <요한 묵시록> 15점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천국의 도래 등을 표현했습니다. 

 

 

 

 

<아담과 하와>,1504, 동판화,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오토쉐퍼박물관 소장/머니투데이

 

 

 

<서재의 성 예로니모 Saint Jerome in His Study>, 1514/가톨릭 평화신문 CPBC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뱀의 형상을 한 마귀로부터 선악과를 받아 들면서 원죄를 짓기 직전의 성경 구절을 옮겼습니다. 헤로니모 성인이 작업하는 모습을 담은 <서재의 성 예로니모> 동판화입니다. 

 

 

대다수 작품이 성경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 만큼 그리스도교인에게는 더욱 친숙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경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마리아의 약혼>을 보면 건축 양식이나 예복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뒤러의 고향인 뉘른베르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하단에 작게 그려진 악마를 상징하는 용은 성경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성장해 <요한 묵시록>에서는 거대한 용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뒤러 이전에도 글의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삽화와 판화는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뒤러는 그의 의로인의 요청을 넘어 자신의 생각을 녹여냄으로써 삽화를 판화라는 하나의 예술 장르로 승화한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스스로 장인이 아니라 아티스트로 도약함과 동시에 문자의 보조 역할을 하던 이미지를 개별적인 의미 전달 매체로 끌어올린 셈이지요. 이러한 자의식을 반영하듯 수많은 자화상을 남긴 뒤러는 그를 상징하는 이니셜 'AD'를 작품마다 다양한 형태로 각인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1498/wikipedia

 

 

 

 

 

 

알브레히트 뒤러의 <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1498)는 목판화 작품으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유명한 연작 중 하나입니다. 야콥 헬러(Jakob Heller)의 의뢰로 그의 개인 예배당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요한계시록 6장에 묘사된 네 명의 기사를 표현하고 있으며, 각 기사는 재앙, 전쟁, 기근, 죽음을 상징합니다. 뒤러는 이 성경 구절을 극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로 해석했습니다.  화면에는 네 명의 기사가 말을 타고 질주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로, 세계의 멸망을 예고합니다.

 

 

 

뒤러의 섬세하고 정교한 판화 기술이 이 작품에서 잘 드러나며, 복잡한 구도와 세밀한 표현이 특징입니다. 이 작품은 27세의 젊은 뒤러를 독일과 유럽에서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는 뒤러의 예술적 재능과 깊은 종교적 통찰력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판화는 판목이나 동판  한 장으로 똑같은 작품을 무한수로 대량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때문에 일반 고객을 상대로 한 대량 판매가 가능하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재 디자인 하거나 책으로 묶어 출판할 수 있습니다.  아예 판목과 동판 자체를 내다 팔 수도 있고요. 웬만한 대작 회화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러 명의 조수를 부려가며 반복 수정 작업을 거쳐야 했던 화가들과는 다르게 뒤러는 그 솜씨 좋은 손으로 펜, 끌, 조각 탈을 놀려서 스케치하고, 목금속판 파고, 인쇄에 이르는 제작 전 과정을 손수 혼자서 해냅니다. 

 

 

 

 

뒤러는 대량 인쇄 매체로서의 판화를 재발견했던 것이죠. 지금도 그의 판화작품마다 일일이 새겨져 있는 AD모노그램(화가의 이름 알파벳 첫 글자인 A와 D를 따서 만든 결합문자로)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유 상표 (trademark)나 로고 (logo)와 그 개념이 통합니다. 그는 자신의 판화 판매 촉진을 위해서 자기 PR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AD모노그램이 무단복제로 남용될 것을 우려해 법정에 저작권 보호를 요청하기도 한 저작권법의 선구자이기도 하고요.

 

 

 

 

전쟁, 화재, 소실 등을 거친 오랜 역사 끝에 오늘날 과연 뒤러가 생전 제작했던 회화며 드로잉, 판화 작품들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될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근 400점 의 회화 및 드로잉, 판화작마다 AD 모노그램이 새겨져 있다는 점과 , 생전 화가가 자신의 수중에 있던 작품들을 철저히 수집 관리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뒤러는 분명 자신의 천재성과 작품이 후대에 전해질 영향력을 의식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의 드로잉 인쇄본과 복사본들은 훗날 매너리즘,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이 선배 대가 뒤러의 놀라운 기법과 구도를 배우고 본뜨는 데 사용한 표본으로써  그 구실을 톡톡이 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4CxSaDT31c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self-portrait, 1500, Alte Pinakothek, Munich/ wikipedia

 

스물여덟 살의 자화상 (Selr-Portrait at Twenty-Eight), 패널에 유화, 뮌헨 알 테 피나코텍(Alte Pinakothek in Munich).

 

 

 

1500년 자신의 29번째 생일 직전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작가의 3개의 자화상 중 이 작품이 가장 개인적이고, 상징적이며 복합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초기 표현과 매우 유사하여 가장 주목할 만합니다. 종교화에서의 관습과 균형성, 검은 톤, 그리고 작가가 관람객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강복처럼 축복을 주는 모습이 연상되는  가슴 한가운데까지 손을 들어 올리는 자세가 독특합니다.

 

 

 

이전의 자화상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뒤러의 얼굴은 이마를 중심으로 하여 정확히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얼굴은 단호함과 인간미 없는 위엄을 지니고 있어 보입니다.  빛나는 이마는 뛰어난 지성을 , 눈은 화가의 관찰력을, 손은 훌륭한 솜씨를 지녀야 진정한 화가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뒤러 자신이 바로 그런 화가라는 말이죠. 자칫 잘못하면 자만심 가득한 젊음 이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그는 평생  자신의 삶으로 자신이 르네상스형 지식인임을 보여주고 살았습니다. 

 

 

 

 

작가가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관람객과 대면하는 방식은 이전의 자화상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또한 종래의 배경 처리 방식과 다르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톤의 배경은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뒤러 자신을 내보이려는 듯 보입니다.

 

 

 

뒤러 좌우 배경에 쓰여 있는 명문의 배치는 마치 공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초상화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검은 배경에 맞추어 갈색 톤의 전체적으로 어두침침한 분위기는 작가의 이전 두 자화상에서 보이는 붓터치와 톤의 가벼움 보다 훨씬 더 내향적인 복잡성에 대한 표현을 강조시키고 있습니다. 

 

 

 

미술사가 마르셀 브리튼 (Marcel Brion)은 이 작품에서, 뒤러의 스타일이 앵그르(Ingres) 같은 고전주의 양식이라 말합니다.  구성에 대한 기하학적 분석은 상대적으로 단단한 대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몇 하이라트 표시는 화면 중간까지 이르는 수직 축에 아주 가깝게 정렬되어 있고요. 얼굴이 정중앙으로부터 약 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고, 시선은 약간 왼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가닥 흘러내린 머리가 좌우 대칭의 균형을 깨고 있습니다. 1500년에 정면 포즈는 세속적인 초상화에서는 예외적이었다고 합니다.  1500년과 그 이후로 , 정면을 응시하는 포즈는 중세 종교예술의 이미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연관 지어졌습니다. 

 

 

 

Apocalypse, 1511/wikipedia

 

 

 

또한 이 시기 뒤러는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부유한 뉘른베르크(Nurnberg) 귀족가문들의 초상화가로 일하게 됩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Fredrick III of Saxony, 1463-1525)과 같은 지방 영주들로부터 작품을 의료 받았고요. 또한, 독일의 가장 뛰어난 학자, 인문주의자들과 교우하게 됩니다. 자신의 동판화 및 목판화들의 판매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특히 목판화 연작 "묵시록(Apocalypse)"은 유럽 전역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면서 뒤러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초상화는 작가의 삶에 전환점을 축하하고, 황금시대로 접어들었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중세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세비야의 이시도르 (Isidore of Seville, 560-636)는 28세가 젊음을 통과하였으나 아직 퇴보하지 않았으며, 힘, 지성, 도덕적 엄정함, 신체적 아름다움이 정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명예와 영광을 위해 공적인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나이라고 언급한 바 있고요. 죽음이 늘 가까이 있던 중세시대 '28세'는 그렇게 실력과 경험이 버무려진 원숙한 나이로 무게감 있는 나이였나 봅니다. 

 

 

작품의 라틴어 명문에는

 

 

 

 

"나 , 뉘른베르크의 알부레히트 뒤러는
28세의 나이에
영원히 변하지 않을 색으로
나 자신을 묘사하였다."
고 쓰여 있습니다. 

 

 

 

뒤러는 이 자화상을 통해 명백하게 성안 (the Holy face)으로 불리는 특정한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자신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 이론에 근거한 시각으로 보면, 북유럽에서 화가들이 아직까지 장인의 지위에 머물러 있던 1490년대에 뒤러는 이탈리아에서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함으로써 '창조자'혹은 '예술가'로서의 화가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여 뒤러는 이 작품에서 그는 진실되고 신성한 신의 초상인 '성안'의 권위 및 신비한 힘의 속성을 자신의 이미지에 전이시킴으로써 이 개념의 극대화를 가져왔다 해석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kOC4Tm5u9U

 

 

 

 

 

 

 

 

 

 

 

 

출처: Artlecture Contemporary Art Platform

 

 

 

 

말년으로 치닫던 해인 1522년 , 누드의 모습 <누드 자화상>(1450-55)으로 등장한 화가는 '멜랑콜리'또는 만성적인 우울증(Melancholid)에 시달리는 자신의 건강상태를 호소하기 위해서 의사에게 보낸 설명 그림입니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이 자리가 아프답니다. "

 

이 드로잉에서 뒤러는 한 손가락을 복부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은 비장이 위치해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비장이 담즙을 지나치게 분비하면 우울증으로 나타난다고 했던 고대 의학 이론에 정통해 있던 뒤러는 이렇게 자가진단을 내렸습니다. 1528년 57세의 나이로 환각증세와 악몽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뜰 때까지 뒤러는 자신이 앓던 우울증세를 천재성 때문이라고 여기면서 고통받는 예수의 도상을 빌린 자화상 소묘를 지속해 그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세계가 신학(중세)에서 과학(근대)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순한 토끼 그림이 아니라, 세계관의 변화를 드러내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지요. 동시에 '모방-앎-즐거움의 공식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관념적 신의 세계를 표현한 중세를 지나 세계에 대한 인문주의 (인간의 정신, 창조력을 찬미하는 낙관주의적 인간관)적 탐구가 진행되는 르네상스와 근대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들토끼>는 변화하는 세계관을 반영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들토끼 수채화 Young Hare, 1502, Albertina ,Vienna/ wikipedia

 

 

 

 

뒤러가 르네상스 화가라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뒤러는 관념 속 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중세 미술에서 탈피하여 직접 자신의 눈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옮겼습니다. 즉 관념이 아닌 '관찰과 탐구'라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로 사물에 접근한 것입니다. 토끼가 정말 사진처럼 리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살아서 움직일 것처럼, 금방이라도 코끝을 찡긋할 것처럼 말입니다. 

 

 

 

 

뒤러는 가볍게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수채화로 토끼의 털을 표현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토끼의 몸 위에 털을 켜켜이 쌓아 올리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각 부위별 털의 질감을 살렸습니다. 토끼의 털이 이처럼 다채롭다는 것을 우리는 화가의 작품을 통해서 새삼 깨닫게 됩니다.

 

 

 

 

  화가는 자신 앞에  한 마리의 개별적 토끼를 그렸지만 그 개별성을 통해 토끼에 대한 보편적 앎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별성에서 보편적 앎을 깨달으면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더욱 압권은 토끼의 눈을 들여다보면 창문이 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뒤러는 살아있는 토끼를 생포해서 작업실에 가져와서 그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자세히 , 눈동자에 비춘 창문의 빛 마저 관찰하여 그림으로 옮겼습니다. '관찰과 탐구'에 근거한 모방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뒤러는 <들토끼> 그림을 통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매발톱꽃 /문화매거진

 

 

 

 

식물도감을 보고 있는 착각이 들정도로 세밀한 작품 < 매발톱꽃>입니다. 매발톱꽃의 이름은 동서양 모두 같은 의미를 지녔습니다. 꽃의 뒤쪽에 붙은 '꽃불'이라 불리는 꿀주머니가 마치 매의 발톱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 비유했고, 켈트족은 꿈과 환상의 세계와 연결하는 문이라 믿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실의에 빠졌을 때 매발톱꽃의 꽃잎을 두 손에 문질러 바르면 용기가 생겨난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입니다.  이 때문에 '성모의 장갑'이란 별칭도 얻었고요. 인디언들 사이에선 매발톱꽃에 숨겨져 있는 넥타르 성분 때문인지, 뱀과 인삼 등을 섞어 사랑의 묘약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 약초를 먹으면 사자의 힘이 솟아났다고 하네요. 영국에서는 '사자의 허부' 이탈리아에서는 은밀한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 중국에서는 바람둥이 꽃이라는 의미로 '매춘화'라고도 불리고요.

 

 

 

 

 

 

 

베네치아/ 디트 NEWS24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그의 예술적 시야를 크게 넓혔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여행에서 뒤러는 "전혀 예감하지 못했던 색채가 지닌 힘"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뒤러는 베네치아를 여행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진 문화에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의 원근법, 해부학, 인체 비례등을 배웠고, 이를 통해 그의 예술적 기법이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뒤러가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고 북유럽적, 독일적인 미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506년  베네치아에서 머물던 뒤러가 절친한 친구 피르크하이머 (Willibald Pirckeimer)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태양 아래에서 떵떵거리고 있다네. 내 나라는 나를 기생충 취급을 하지만 여기서 나는 거장 취급을 받고 있다고"

 

라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공방 장인 취급을 받아오던 뒤러가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남다른 천재성을 지닌 창조자로 특권적인 계층이 된 것 같은 사회적 대접을 받았으니 그가 느꼈을 뿌듯한 기분은 능히 짐작이 됩니다. 

 

 

 

 

 

빌리발트 피르크하이머 Willibald Pirckheimer, 독일 르네상스 변호사 작가이자 인본주의자./ iStock

 

 

 

 

빌리발트 피르크하이머(Willibald Pirckheimer 1470-1530))의 모습입니다. 알프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1471-1528)의 친구이자 뉘른베르크 출신의 유명한 인문주의자로 뒤러의 많은 작품을 구입하고 그의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뒤러에게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했습니다. 종교와 인문학에 통달한 피르크하이머와의 대화를 통해 뒤러는 '묵시록'등의 목판화 연작을 탄생시켰습니다. 뒤러와 황제 사이의 관계를 중재하는 역학도  했습니다. 법률가 집안 출신인 피르크하이머의 도움으로 금세공사의 아들이었던 뒤러가 중세 미술의 거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원과 교류를 통해 피르크하이머는 뒤러의 예술적 발전과 사회적 지위 향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베네치아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Venetian Woman, 1505,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wikipedia

 

 

 

 

베네치아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Venetian Woman)은 독일 작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느릅나무로  만들어진 패널 위에 유화로 그려진 반신상 크기의 작은 패널화입니다. 작가의 두 번째 이탈리아 방문 때 만들어진 다른 여러 상류 사회의 초상화들과 함께 제작되었습니다. 

 

 

 

 

 

젊은 여인이 끈이 달린 슈미즈(Chemise)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르고, 뒷머리는 작은 캡에 감싸여 있습니다. 이 작품의 조화로움과 우아함은 여인의 창백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피부와 불그스름한 금발 머리에서부터 그녀의 검은색 보석과 진주가 어우러진 목걸이와 부유층이 선호하는 패턴의 드레스까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혼합되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검은 배경에 의해 더욱 강조되고 있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NbA5s4waMQ

 

 

 

 

 

 

 

 

장미화관의 축제 Feast of the Rosary ,1506, National Gallery , Prague/ wikipedia

 

 

 

 

뒤러가 1506년에 그린 <장미 화관의 축제 Feast of the Rosary>는 독일 작가 특유의 세부 묘사에 이탈리아적인 인체 묘사가 어우러진 알브레히트 뒤러의 수작입니다. 아기 천사들이 받쳐 들고 있는 초록색 장막 아래에 성모님께서 푸른 옷을 입고 옥좌에 좌정하고 계십니다.  작은 구름을 탄 아기 천사들은 성모님의 머리 위에서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천상 모후의 관을  들고 있고요. 의자에 앉아계신 성모님의 무릎에는 아기 예수님이 비스듬한 자세로 기대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자세와 통통한 살점의 표현, 그리고 성모님의 옷 주름을 통해 드러나는 인체의 굴곡에서 뒤러의 르네상스적 회화의 특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작품 중심에는 성모님의 좌우로 무릎 꿇고 있는 이들은 율리오 2세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황제입니다. 성모님은 황제의 머리에 장미 화관을 씌워주시고, 아기 예수님은 이와 똑같은 장미 화관을 교황의 머리에 씌워주려 합니다.  교황 발치에는 세속 권력을 상징하는 황제의 왕관이 있는데, 교황과 황제는 화려한 관을 내려놓고 예수님과 성모님으로부터 장미 화관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1500년 당시 유럽의 최고 권력인 교황과 황제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성모님 왼편에 서 있는 성 도미니코는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행렬용 십자가를 들고 있는 추기경에게 장미 화관을 씌워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 당시 도미니코 수도회가 교회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동정 성모에게 묵주를 받는 성 도미니코는 묵주기도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황과 황제의 뒤편에 각각 좌우 대칭으로 자리 잡은 사람들은 베네치오 로사리오 형제회 설립자와 이 그림의 후원자들로, 시선이 모두 성모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뒤편에 있는 몇몇은 시선을 딴 데로 두고 있어요. 오른쪽 나무 아래 명문을 들고 서 있는 금발 머리 남자가 바로 뒤러 자신입니다.

 

 

 

그 명문에는 "독일인 알브레히트 뒤러가 5개월 만에 그렸음. 1506년. 서명"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멀리 배경으로 보이는 푸른 바위산의 풍경도 이탈리아에서 배운 원근법입니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이 작품을 더욱 자연스러워 보이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산 자카리아 성당, 베니스, 1505, 조반니 벨리니/스투비플래너

 

 

 

 

뒤편의 후원자들 위로도 아기 천사들이 장미 화관을 들고 내려와 사람들의 머리에 장미 화관을 씌우고 있습니다. 작품 중앙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 밑에는 류트를 연주하고 있는 천사도 보이네요. 이 장면은 조반니 벨리니가 1505년에 베네치아 산 즈카르야 성당에 그린 벽화와 비슷합니다. 뒤러는 장미 화관을 쓰고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바치려는 여러 인물을 통해 봉헌과 구원의 축제 분위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손 Praying Hands, 1508 /www.bbb.or,kr

 

 

기도하는 손/ 아트모션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늘 머리와 가슴속에 기억하고 있는 <기도하는 손> 작품입니다.  1508년경에 제작된 유명한 펜과 잉크 드로잉입니다. 스케치는 팔이나 어깨 등 다른 신체부위가 일체 제거된 채 한데 모은 두 손만이 공중에 떠 있는 특유의 이미지 때문에 보는 이에게 유난히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정식 명칭은 "사도의 손에 대한 연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알베르티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뒤러가 자체 제작한 청색 종이에 흰색 하이라이트와 검은 잉크를 사용하여 그렸습니다.  원래는 프랑크푸르크에 설치된 헬러 제단화의 중앙 패널을 위한 스케치로 여겨졌지만 , 최근에는 완성된 그림의 정교한 기록물로 보는 견해가 더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손'은 서양에서 가장 널리 재현되는 기도의 이미지가 되었으며, 포스터, 커피잔, 휴대폰 등 다양한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1871년 비엔나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인정받았으며 , 뒤러의 18명의 형제 중 한 명의 손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Virgin and Child with a Pear, 1512/ Google Arts & Culture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묘사하고 있으며, 뒤러의 섬세한 기법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 종교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뒤러의 작품들은 종교 개혁 시기의 영향을 받아, 성스러운 인물들을 더욱 현실적이고 인간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성모와 아기 예수의 모습이 평범한 모자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어 , 당시의 예술적 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접근을 보여줍니다. 

 

 

이 시기는 뒤러가 예술가로서 원숙기에 접어든 때입니다. 그의 섬세한 기법과 세밀한 묘사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이 작품에서도 그의 뛰어난 기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이 북유럽으로 확산되던 때입니다. 뒤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켰고, 이 작품에서 그 융합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제작 시기는 예술적, 종교적, 사회적 변화의 교차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Knight, Death and the Devil>,1513/wikipedia

 

 

 

/wikipedia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Knight, Death and the Devil)는 1513년에 제작된 동판화입니다. 이 작품은 뒤러의 세 가지 주요 판화 중 하나로,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가 등장합니다. 기사가 중세의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있으며, 그의 옆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과 악마가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인생의 여정과 도덕적 결의를 상징하며, 죽음과 악마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중세적 미신 세계와 뒤러의 상상력이 결합된 판타지적 요소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적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기사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의지와 결단력, 그리고 삶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인간 정신의 강인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당시 독일 사회의 종교적, 철학적 사고를 반영하며, 삶과 죽음, 선과 악의 대비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The Virgin and Child , 1514/ 세계의 명화 BAND

 

 

 

 

 

 

 

 

코뿔소 Rhinoceros,1515/wikipedia

 

 

 

 

 

알브레히트 뒤러의 "코뿔소(Rhinoceros)' 작품은 그의 가장 유명한 목판화 중 하나입니다. 1515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뒤로 가 직접 코뿔소를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들어낸 놀라운 예술 작품입니다. 

 

 

 

 

뒤러는 포르투갈에서 인도로 보내진 코뿔소에 대한 스케치와 설명을 바탕으로 이 목판화를 제작했습니다. 그의 상상력과 뛰어난 관찰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다른 유럽인들에게 신비로운 동물인 코뿔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뒤러는 코뿔소의 피부를 마치 갑옷처럼 표현했고, 등에 비늘 같은 무늬를 더했습니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는 뒤러의 뛰어난 기술과 자연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줍니다. "코뿔소" 목판화는 뒤러의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인들의 이국적인 동물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Portrait of Emperor Maximilian I, 1519/wikipedia

 

 

 

알부레히트 뒤러의 <막시밀리안 1세 초상화>(1519) 작품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를 묘사한 것으로 뒤러의 뛰어난 세부 묘사와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현재 빈예술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크기는 61.5*74cm이며,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5세기부터 왕실 초상화가 국가와 통치자의 상징으로 중요해졌고, 막시밀리안 1세는 이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초상화를 통해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의 지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력을 영속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활용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초상화를 여러 점 제작하고 배포함으로써 황제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고 권위를 세우려는 목적이 지요. 이처럼 막시밀리안 1세의 초상화는 단순한 개인의 모습을 넘어 정치적, 상징적 의미를 지닌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바치는 개선문,/Art and Culture by Jina Park

 

 

 

 

 

이 작품은 알브레히트 뒤러가 제작한 대규모 목판화로, 1518년경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목판화는 크기가 357*295cm로,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목판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총 192개의 판목으로 제작되었으며, 이는 당시 목판화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막시 밀리안 1세 황제는 뒤러에게 자주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이 개선문 목판화도 그중 하나입니다. 황제는 판화의 정치적 선전 가능성을 인식하고 이를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이 작품은 황제의 재임 기간 마지막 해에 의뢰되었고, 뒤러는 1518년에 준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대규모 목판화는 황제의 통치 업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그의 권력과 위엄을 과시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뒤러의 뛰어난 예술적 기량과 황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총천연색으로 인쇄된 이 대작은 뒤러의 대표적인 판화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안트웨르펜항구, 알브레히트 뒤러 / 녹색아카데미

 

 

 

 

 

네 명의 사도 The Four Apostles, 1526/Ordo Praedicatorum

 

 

 

 

 

 

알브레히트 뒤러의 <네 명의 사도 The Four Apostles>는 그의 마지막 대작으로, 1526년에 완성된 패널화입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유럽에서 중요한 사회적, 종교적 변화, 특히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시기에 살았습니다. 이 작품은 뒤러의 예술적 성숙도와 르네상스 정신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실물보다 큰 크기로 묘사된 네 명의 사도들을 그렸습니다. 뒤러의 뛰어난 기술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그의 화가로서의 능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뒤러의 종교적 신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뒤러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표현했습니다.  뒤러는 이 작품을 자신의 고향인 뉘른베르크 시의회에 기증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예술적 유산을 남기고자 했음을 시사합니다.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이 작품은 성경 구절과 함께 제작되어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체 비례와 해부학적 정확성을 중시한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뒤러의 마지막 대작으로 그의 예술적 여정의 정점을 나타냅니다. 

 

 

 

이 작품은 뒤러가 북유럽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독일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yNqLrb0LRE&t=3s

 

 

 

 

 

 

 

 

 

 

어머니의 초상,

 

 

 

 

알브레히트 뒤러의 <화가 어머니의 초상>은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입니다. 이 초상화는 뒤러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개월 전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작품에서는 어머니의 병약한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 동시에 강인함과 책임감 있는 인간의 모습도 함께 드러납니다. 뒤러는 이 작품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했으며, 인간의 연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포착해 냈습니다. 

 

 

 

이 초상화는 뒤러의 예술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표현력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이 작품은 뒤러의 가족에 대한 애정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반영하고 있어, 단순한 초상화를 넘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뉘른베르크에서의 마지막 몇 년 동안 Albrecht Durer는 측정과 비율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면서 뛰어난 예술 작품을 계속 제작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작업장에서 수습생을 훈련시켰습니다. 불행하게도 뒤러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1528년 4월 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1622년 그의 명예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진 뉘른베르크의 성 요한 교회 묘지에 묻혔습니다. 뉘른베르크는 이제 그의 삶과 작품이 함께하는 박물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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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표정, 납작하게 눌린 얼굴, 동그랗고 커다란 눈망울, 게다가 축 늘어진 귀. 작지만 다부지고 균형 잡힌 몸매를 하고 있는 퍼그(Pug) 견종을 살펴볼 까 합니다.

 

 

 

퍼그 /위키백과

 

 

 

출처: Maps 중국

 

 

 

 

 

 기원전 400년전부터 고대 중국황제가 키웠다고 하는 가설이 존재할 정도로 오래된 견종입니다. 그 당시 현재의 우리가 알고 있는 개의 크기보다 훨씬 컸다고 합니다. 군견으로 활약할 정도로 말이죠. 강인한 체력과 용맹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송나라 황제가 반려견으로 개량하기 위해 크기가 상당히 작은 소형견 품종인 시츄나 피키니즈 등의 교배를 통해서 현재의 작은 크기로 브리딩되었습니다.

 

 

 

Pug/나무위키

 

 

 

 

 유럽 국가에 알려지게 된 시점은 약 1500년대쯤으로 네덜란드의 상인들이 중국에 건너가게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특이하고 귀여운 강아지 종류인 퍼그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됨에 따라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유럽의 귀족들에게서 사랑을 받은 강아지 품종이지요.  당시 유럽에서는 불도그와 같이 얼굴이 납작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강아지를 키우는 게 유행이었다고 해요.  근친교배의 과정을 거치며 점차 비정상적으로 얼굴이 납작한 형태로 개량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69s5SjtaB4

 

 

 

 

 

 

 

 

 

출처; Aulife Natural Pet Food

 

 

 

 


체고: 30cm 내외

체중: 약 6-8kg

평균수명: 약 13년(미국 아메리칸켄넬클럽 AKC의 표본측정 결과)

 중, 소형견에 속합니다. 

 

 

 

 

theresarussell.co.UK

 

 

 

 

간혹 미니퍼그 종류라고 해서 몸무게가 5kg 이하로 나가는 경우도 있는데 크기가 너무 작으면 슬개골탈구나 기관지 협착, 비강협착 등 다양한 유전적 질환이 생길 수 도 있습니다. 이럴 땐 미니 퍼그 종류의 입양을 신중하게 고민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부모견을 확일 할 수 있는 상태가 가장 좋다고 하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GINijOaNMe0

 

 

 

 

 

 

 

 

 

 

Pug/ Freepik

 

 

 

 

일반적인 퍼그의 몸집은 커다란 편은 아니지만 워낙 몸매가 다부지고 근육질을 하고 있다 보니 소형견 느낌이 강한 편입니다.

 

 

 털이 짧은 단모종으로써 속털은 모량이 풍성하고 부드러운 편입니다. 겉털은 약간 거칠고 뾰족한 것이 특징입니다.

 

 

 

 

퍼그 털 빠짐 정도는 개들 중에서 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심한 편입니다. 단모종의 특징인 짧은 털이 빠지고 자라나는 것이 반복되다 보니 수시로 빗질을 해주지 않는 다면 집안에 온통 짧은 털로 뒤덮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섬유재질의 옷이나 이불 등에 털이 박히게 될 수도 있고요.

 

 

 

 

츨처: Unsplash

 

 

 

 

 퍼그는 고집이 센 편입니다. 시츄, 차우차우, 페니키즈 등과 같은 중국개들의 대표적인 성격 특징이지요. 자기의 주장이 상당히 강한 편입니다.  그로 인해 자기 마음대로 안되면  그것에 대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짖거나 입질하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부분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보호자와의 서열정리를 확실하게 해 줌으로써 절제력을 길러주시는 게 중요합니다.

 

 

 

 

살구 퍼그 강아지/ takingtimetotalk.co.UK

 

 

 

 

 밝은 성격을 가진 강아지로 견주 및 가족에게 애정과 애교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가족들을 즐겁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입니다. 미국의 AFC에서는 퍼그의 성격을 "고르고 매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흔 견종이기도 합니다. 

 

 

 

헛짖음이 거의 없고 낯선 사람에게도 경계심 없이 다가가는 편으로 성격으로만 보자면 가정에서 키우기에 정말 좋은 반려견이기도 합니다. 단 질투심이 있기도 하니 여러 마리 사육 시 다른 강아지를 특별히 편애하는 모습을 보이면 질투를 하기도 하니 주의해야 합니다. 너무 과잉보호하면 사람처럼  버릇없이 자라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집에서의 규율을 잘 잡아주고 양육해 주시길 바랍니다.

 

 

 

퍼그 강아지는 소형견인데도 푸들이나 몰티즈, 포메라니안 등과 같은 견종에 비해서 에너지가 많은 편입니다. 평상시에 산책을 하루에 1시간씩 꼭 시켜주면서 에너지 발산을 해주셔야 합니다. 간혹 야외 활동을 시키지 않고 집어만 놔두면 스트레스로 인해 물건이나 집안 가구 등을 다 물어 뜨어 놓고 먹어치워 버리는 이식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출처: Clube para Cachorros

 

 

 

 

 

 

 

 

https://www.youtube.com/watch?v=j220tzwpeZo

 

 

 

 

 

 

 

 

귀여운 강아지 인테리어 장식 소품 퍼그/ 잉글리쉬 불독/ 11번가 모바일

 

 

 

 

 

 

단두종의 특징이 코골이가 심하다는 것인데 퍼그 외모를 보면 알다시피 코가 아주 납작한 형태를 하고 있어서 비강협착으로 인한 코골이가 생길수도 있으니 수면에 민감하신 분들이라면  강아지 종류 선택할 때 퍼그 입양은 신중히 결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식탐이 많습니다. 먹을 것을 주면 주는 대로 다 먹어치워 버리기 때문에 식단 조절을 꼭 해주셔야 합니다.  퍼그는 꼭 정해진 만큼의 식사를 통해 체중관리를 해주세요. 게으른 편이기도 해서 운동을 일부러라도 시켜주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퍼그 성격이지만 혼자 있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으므로 오랜 시간 집을 비워 혼자 있게 되는 경우 스트레스와 함께 분리불안 증세를 보일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공격성이  거의 없다곤 하지만 치악력이 강한 편으로 혹시라도 흥분하거나 실수로라도 물리게 되면 다칠 수 있기 깨문에 입질하는 습관은 절대 갖지 않도록 교육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Pug/ Pinterest

 

 

 

 더위에 약한 편입니다. 퍼그는 머즐이 짧다 보니 더운 여름철에 산책을 나가면 호흡곤란 증상이 빈번히 발생하게 됩니다. 입으로 숨을 쉬고 침을 많이 흘리다 보니 열사병의 위험성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더운날에는 야외활동을 최대한 피해주세요.  만약 산책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늘진 곳으로만 돌아다녀야  합니다. 너무 더워하면 바로 물을 먹여주어 수분 공급을 해 주셔야 탈수가 생기지 않습니다. 추위에 강한 것도 아니라서 늘 온도관리에 힘써야 합니다. 

 

 

 

 

 

 

출처:Peakpx

 

 

 

 

 

 

퍼그 100마리 중 12마리 정도는 퍼그 뇌염이라는 질병에 걸린다고 합니다. 자가 면역에 문제가 생김에 따라 생기게 될 수 있는 질병으로 암컷이나 크림색 미니퍼그, 새끼 강아지에게서 발병 빈도가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 치료 방법이 없고, 치사율도 상당히 높은편입니다.

 

 

 

 

퍼그는 급격한 개량 과정을 통한 견종이라서 현재 유전적으로 문제가 많은 견종이기도 합니다.  지난 2008년 BBC의 다큐멘터리에서 조사한 영국의 퍼그 1만 마리를 대상으로 확인한 결과 1만 마리 중에서 유전자풀이 겨우 50마리 정도의 개체에 속할 정도로 좁은 유전자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성이 매우 협소하다는 말이죠. 그로 인해서 다양한 질환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퍼그의 사망원인으로 가장 대표적인 질병이 안면종입니다. 안면에 종양이 생기는 질병입니다. 근친교배의 영향으로 발생된 유전병 중 하나입니다.

 

 

 

 

Pug/RBK

 

 

 퍼그 얼굴은 주름이 상당히 많다 보니 주름사이를 수시로 관리해 주지 않는 다면 습진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에 따라 심한 가려움증, 통증을 유발할 수도 있고요.

 

 

2024.02.10 - [지식&교양] - 50-69. 샤페이(Shar Pei, 21)

 

50-69.샤페이(Shar Pei, 21)

쭈글이 샤페이는 몸에 주름이 많아 개성이 넘치고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마니아층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견종입니다. '모래처럼 거칠한 피부'라는 뜻이라고 해요. 본래 중국에서 가축들을

sun-n5y2.tistory.com

 

 

 

 

책임감을 갖고 입양하시고 퍼그의 웃음 짓게 하는 행동들로 가정이 밝아지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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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투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정견으로 키우면서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견종이고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견종으로 낙인이 찍힌 미국 원산지의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ican Pit Bull Terrier)를 소개합니다. 한국에서 맹견으로 규정되어 입마개와 목줄 없인 집밖으로 나갈 수 없는 개지요.  미국을 제외한 유럽 12개국 외 호주, 캐나다 , 푸에르토리코, 싱가포르에선 자격증 없인 키울 수 없는 개이기도 합니다. 

 

 

 

 

 

Ameican Pit Bull Terrier/ The Spruce Pets

 

 

 

 

핏불(Pitbull)이란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듯 소와 싸우는 개입니다. 소의 두꺼운 피부에 구멍을 뚫는 개라는 뜻이죠. 아메리카 핏불테리어(Ameica Pit Bull Terrier)는 크기가 다양합니다. 훈련에 따라  근육량이 다양해서 엄청 우람한 핏불이 있는가 하면 의외로 날씬한 핏불도 있습니다. 최종 개량된 곳이 미국이라 아메리칸 핏불 테리어라고 불립니다. 

 

 

 

 

 

미국지도/ Freepik

 

 

 

 

 

 

핏불 테리어는

체고 46-56cm,

체중 23-36kg

수명 12년 내외

 중형견입니다.

 

굉장히 단단하게 짜여진 운동선수 같은 근육질 몸매를 가졌습니다. 불테리어는 불독과 화이트 잉글리시 테리어, 폭스테리어 등을 교배시켜서 태어난 견종입니다. 이런 불테리어 중에서 체급이 큰 녀석들이 태어났는데 사람들은 이 녀석들을 핏불테리어(Pitbull Terrier)라고 불렀습니다. 후에 핏불테리어는 미국으로 건너가 최종개량되어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ican ptibull terrier)라 불리게 되었지요. 

 

 

 

 

Ameican Pit Bull Terrier/ 다나와 DPG

 

 

 

핏불테리어의 모색은 다양합니다. 털은 짧고 뻣뻣하며 얼룩이 있기도 합니다. 머리는 넓고 평평한 두 개골을 가지고 있고요.  사각형 주둥이와 검고 둥근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선택사항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귀는 자릅니다.

 

 

 

 

 

 

 

Ameican Pit Bull Terrier/ Mattia Pascal

 

 

 

 

 

 

 

고대부터 중세시대엔 투견이 상당히 흥행했습니다. 마스티프 종류의 개들이 로마시대때부터 다른 동물과 싸우거나 사냥 또는 전쟁에 이용되었는데 이런 여러 싸움에 이용된 개들이 투견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불 바이팅(Bull-biting)이라는 , 개와 소를 이용한 게임이 성행했다고 합니다.  베어 바이팅(Bear-biting, 곰과 개의 싸움) 같은 잔인한 게임들도 벌어졌고요. 특히 불바이팅이 흥행했는데 수소를 묶어서 도망가지 못하게 한 뒤 개를 한 마리씩 차례차례 풀어서 소에게 이길 시 그 주인에게 상금을 주는 경기였다고 합니다.

 

 

 

 

게임에 좀 더 효율성 높은 개를 만들기 위해 품종 개량이 진행되면서 불독과 테리어의 시초가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불 바이팅이 금지되면서 투견용이었던 핏불테리어는 애완견으로서 온순하도록 품종이 개량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핏불테리어도 예전의 핏불처럼 공격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A8NI1ysCac

 

 

 

 

 

 

 

 

 

Red and White Pit Bull Terrier/Pinterest

 

 

 

핏불테리어는 굉장히 와일드한 성격과 강인한정신력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강인한 정신력은 미국 해병대의 심벌이 될 정도랍니다. 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독일의 훌륭한 군견들(셰퍼드, 도베르만)에 의해 공수부대들의 작전이 빈번히 실패했을 때 미군은 아메리칸 핏불테리어를 투입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아메리칸 핏불테리어들이 독일의 명견들을 물어 죽였고요.  이에 훈장을 받은 핏불 들이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반대로 미국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물어 죽이는 대표적 견종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6Ey74D8bk4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ican Pit Bull Terrier)는 불도그류의 강한 턱과 집요함, 그리고 테리어류의 운동성을 결합시켜 미국의 척박한 환경에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견종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퓨마나 늑대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견종이죠. 어찌 보면 핏불의 역사는 미국의 개척사와 함께한 품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아메리칸 핏불테리어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공격적이지만 사람에게는 철저히 복종한다고 합니다. 다만 가정견으로 길러질 때, 선천적으로 타고난 핏불의 본능 때문인지 사고가 많이 일어나곤 합니다. 견주들의 특별한 관리와 관심이 필요한 견종입니다. 어떻게 교육받고 길러졌느냐에 따라 사랑받는 견종으로 함께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출처: peacecommission.kdsg.gov.ng

 

 

 

 

 

Local man a pit bull's best friend/ The State Journal-Rigister

 

 

 

 

 

 에너지가 넘치는 견종으로 많은 활동량을 필요로 합니다. 충분한 운동과 산책, 놀이를 통해서 에너지를 발산시켜줘야 합니다. 많은 문제가 스트레스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스트레스 해소와 심신의 안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핏불테리어는 싸움을 좋아하는 호전적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성격과 동물을 물고 싶어 하는 욕구가 많은 견종이므로 초보자가 키우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들에 의해 오랫동안 투견으로 이용되고 길들여졌기 때문이지요. 안타까운 점은 핏불테리어가 고통을 참아내는 인내력과 강한 힘을 투견에 이용한 사람들로 인해 부정적이고 나쁜 이미지로 세상에 알려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XLPzI6E_A0

 

 

 

 

 

 

본래 이 견종은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는 애정과 애교가 넘치고 보호본능이 강합니다. 주인을 도와 가축을 지키는 고된 일을 하는 순종적인 개였다고 합니다. 실제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ican Pit Bull Terrier)는 성격이 대담하면서도 느긋하고 조용하다고 합니다. 또 강한 체력과 힘을 갖추었고, 냉철합니다.

 

 

 

 

 

출처: 나무위키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ican Pit Bull Terrier)는 주인의 힘이 세지 않으면 제어하기 힘들기 때문에 입마개를 필수로 착용하고 산책 나갈 것을 추천합니다. 하지만 주의 깊은 관심과 , 꾸준한 사회화 훈련으로 매력적인 반려견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투견으로 이용되며 투쟁본능이 강한 기질을 가진 혈통 위주로 선택적 번식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모든 핏불테리어가 사람과 동물에게 함부로 공격하진 않습니다. 주의 깊은 관심과, 사회화 훈련이 꼭 필요한 매력적인 견종일 뿐입니다.

 

 

 

 

 

어메리칸 핏불 테리어/ 인벤

 

 

 

 핏불테리어는 미국에서 500개의 테스트를 통해 사람에게 있어 안전한 품종으로 평가되었다고 합니다. 낯선 사람에게도 친근감을 표시하기 때문에 경비견으로론 부족했다고 해요. 다른 동물에 대한 공격적 성향을 낮추기 위해선 강아지 때부터 사회성을 길러주고, 일관된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또, 귀나, 꼬리를 아이들이 잡아당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절대적 상남자 핏불테리어/ㅍㅍㅅㅅ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ican Pit Bull Terrier)는 멋진 외형 때문에 키우고 싶어 하는 애견인이 많습니다. 그러나 반려동물을 선택하기 전에 특히 커다란 맹견 종이라면 내가 15년 이상 키울 수 있는 환경과 시간 그리고 돈이 준비되어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준비 안된 반려인은 주인도 반려동물도 불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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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존재는 모든 것을 대변한다.
-미카 요시타케( Yoshitake Mika)-

 
 
2023년 새해부터 루이 비통과의 협업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아티스트가 있습니다. 바로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 현재 9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아직도 매일 그림을 그리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녀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펴봅니다. 
 
 

 

일명 '땡댕이 무늬'의 대명사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 ,1929- ).  그녀는 팝아트, 미니멀리즘, 페미니즘, 아트 무브먼트 등의 선구자로 평가되며 조각, 회화,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해 온 아티스트입니다. 2016년 타임지에 의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에는 모국인 일본에서 문화훈장을 받는 등 그녀의 몸값이 생존 여성 작가들 중 탑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쿠사마의 경우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낙인으로작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관객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했지요. 쿠사마의 작품은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전시 때마다 인파 관리가 필요할 만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2013년 데이빗 즈워너 갤러리 전시 때 관람객이 몰려 이례적으로 관객 당 감상시간을 45초로 한정해야 했습니다. 2012년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의 전시 1년 치 티켓이 예매 시작 몇 분만에 매진되었고요. 로스앤젤레스 브로드 미술관에서 열린 2018년 전시에 첫날 하루에만도 9만 개  표가 팔리는 등 쿠사마는 현재 엄청난 인기와 명성을 누리고 있습니다.
 
 

 

 

쿠사마 야요이/ eyesmag.com

 
 
 

 

 

쿠사마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를 기묘하게 조합하며 우리를 새로운 세계와 차원으로 끌어당기는 선수입니다.

 

 

 
 
 
 

나는 나를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년시절에 시작되었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술을 추구할 뿐이다.
 - 쿠사마 야요이, 1985-

 
 
 
 
 
 
 

Yayoi Kusama wax model at Louis Vitton for 2012 Collection unveiling/wikipedia

 
 
 

 

일본 나가노현/ 위키백과

 

 

 

 

한국경제

 
 
 
쿠사마 야요이는 1929년 일본 나가노현에서 4인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종묘업을 하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꽃과 나무를 스케치하는 것에 익숙했다고 해요. 그러나 그녀는 소녀 시절부터 조현병을 앓으며 반복해서 환각이나 환청에 시달렸다고 합니다.쿠사마의 자서전에 따르면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가한 사람이라고 해요. 어머니는 어린 쿠사마에게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는 아버지를 미행하고 자신에게 보고하게 시켰다는데 이것이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고 적었습니다. 
 
 

 


7살부터는 제비꽃, 호박, 개 등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환청과 꽃에 사람 같은 얼굴이 있거나 주변 사물에 환하게 불이 켜지는 등의 환시를 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는 조현병 (Schizophrenia)의 증상으로 의심되는 지점이지요. 과거 "정신분열병"으로 불리웠던 조현병은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의 나이에 시작하여 만성적 경과를 보이는 정신적으로 혼란된 상태로, 현실과 현실이 아니 것을 구별하는 능력의 약화를 유발하는 뇌 질환을 말합니다.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근 학계에서는  뇌의 기질적 이상을 그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쿠사마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 내가 본 것을 그렸다. 본것을 기록하는 것은 발생한 에피소드의 쇼크와 공포를 경감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 이것이 내 회화의 근본이다."라 밝힙니다.
 
 

 


보고 들은 기묘한 것을 기록하고자 낙서에 몰두하는 어린 쿠사마를 위해 아버지가 물감, 붓 등 재료를 사주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여성은 얌전히 커서 결혼하고 가정주부가 되어야지 화가가 돼서 안된다고 꾸짖으며 쿠사마의 그림을 찢어버리곤 했고요. 아동기의 쿠사마에게 정서적인 학대로 작용했을만한 부양자의 폭력적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쿠사마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낙하산 공장에 차출되어 일했는데 낮에 고된 노동을 해도 집에 돌아오면 밤에도 늘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죠.
 
 

 


1948년 전쟁이 종료되고 쿠사마는 쿄토시립예술 대학에 진학하지만 전통적 교습 방식과 니혼가 (일본화)만을 고집하는 커리큘럼에 강한 반감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한편 부모가 자신을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정략결혼을 시키려 하여 심한 불안감에 시달리고요. 쿠사마는 자신의 20대를 회고하며 신경쇠약증에 수없이 시달린 시기였다고 고백합니다. 
 

 


 
 조현병 환자는 혼자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설득이 불가능한 망상에 시달리는 일이 잦은데, 청년기의 갑작스러운 변화들과 맞물려 증상이 더 심해지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작품활동에 몰두하여 1952년 첫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이 전시가 마츠모토시의신슈대학 의학대학 정신과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그가 쿠사마 야요이의 작업을 분석하여 정신병학 학회에서 "조현병 경향성을 가진 천재 여성 아티스트"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쿠사마에게서 조현병 증상은 매우 명확히 드러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한편 니시마루는 쿠사마에게 신경증이 악화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가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 조언했다고 쿠사마는 적고 있습니다.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고요. 1955년 미국 화가인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화집을 보고 매료된 쿠사마가 자신의 수채화 그림을 동봉하여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연이 되어 미국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거지요.
 
 
 
 

500억 짜리 꽃...사막에서 다시 태어난 화가 조지아 오키프/ 매일경제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 1986)는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주요 화가로, 독특하고 혁신적인 스타일로 유명합니다. 오키프는 꽃을 대형 캔버스에 확대하여 그림으로써, 일상적인 대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추상적 요소와 사실주의적 묘사를 결합하여 미국식 사실주의인 정밀주의와 연관성을 보입니다. 미국 남서부의 사막 풍경을 단순화하고 본질적인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강렬하고 대담한 색채 사용으로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순수하게 표현하며, 관객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자연의 본질적 형태를 탐구하고, 일상적인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독창적인 접근으로 미국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쿠사마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되려고 한 것은 이니었습니다. 강박신경증과 편집증 그리고 불안신경증으로 인한 병을 자신 스스로 이려 내고자 하는 노력에서 그녀의 활동이 예술이 되어버린 것이죠. 어둠 속에서 밀려오는 공포와 같은 영상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괴로움, 하얀 좁쌀들이 벽을 타고 흐르던지 평면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들, 하나하나 모두 벽에서 끄집어내려고 하기 위해 스케치북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잠을 잘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살아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Accumulation>, 1952/Arthive

 
 
 
 
1952년  23살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틀뿐인 전시였지만 200점을 넘는 그림들로 벽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이 전시에서 그녀는 니시마루 신조 라는 신경정신과 교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이 소개로 다른 정신과 의사를 소개받기도 하고, 그것이 인연으로 도쿄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니시마루 교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녀의 정신병에 대해 조언하며 주치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A Flower(NO. 14)/ICA Boston

 
 
 
 
 
 
 

저의 예술, 즉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싸우며
우리가 무엇인지, 
삶과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예술에 있어 
일본은 너무 작고,
너무 노예적이고,
너무 봉건적이며,
여성을 경멸했습니다. 
제 예술에는 더 무한한 자유와 더 넓은 세상이 필요했습니다. 
-쿠사마 야요이-

 
 
 
 
 
 
 
 
1952년  마쓰모토에서 개인전을 연 이후에는 더 넓은 곳으로 나가길  원했습니다. "제 예술을 위해 무한한 자유와 더 넓은 세상이 필요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쿠사요는 뉴욕과 도쿄를 오가며 활동하게 됩니다.  미국행은 작가의 인생에 전환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이후 회화, 조각, 공연, 멀티미디어, 퍼포먼스,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아시아의 여성 작가 중에서도 단연  두각을 드러냅니다. 
 
  
 
 

<태평양 Pacific Ocean>, 1960/ Design DB

 
 
 
 
 
 

더 이상 어린 소녀로 살아갈 수 없다고 느꼈던 암울한 전쟁의 시기,
제가 살던 집 뒤에는 수백만 개의 흰 돌이 놓인 강이 있었습니다. 
반짝이는 태양 아래 '존재' 하나하나를 각인시키던 돌의 모습은 
제가 빠져버린 환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자연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 외에도, 
저는 마음속 욕망의 이미지와 함께 
정신의 신비한 세계에 사로잡혔습니다. 
- 쿠사마 야요이-

 
 
 
 
 
 
 
 
 조지오 오키프의 도움으로 시애틀로 정착하여 1년을 보낸 후에는 뉴욕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1957년 뉴욕으로 이주 후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성중심의 화단, 그리고 전후 미국 내 강한 반일감정과 맞서야 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금 그림에 몰입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종종 음식을 섭취하지도 수면을 취하지도 않으며 50-60시간씩 그림에 골몰했습니다. 아마 이 시기 양극성 장애 (Bipolar disorder)의 조증 단계가 발현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조증은 심한 흥분에 따른 고양감, 불안감, 충동성, 사고의 비약과 같은 증상을 특징으로 하며, 심한 조증 삽화(Manic episode)의 진단을 위한 단서로는 수면 욕구 감소, 목표 지향적 활동의 증가, 쾌락적인 활동에 지나치게 몰두, 과장된 자신감, 주의 산만 등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름은 <무한 망 (infinity Net)> 시리즈입니다. <무한 망Infinity Net>은 검은 바탕 위에 흰 물감으로 작고 균질한 크기의 호(arc)를 촘촘히 연결하여 멀리서 보았을 때  마치 흰 레이스 천이 검은 캔버스 위에 올려진 듯 보이는 회화입니다. " 나와 내 주변 사이에 불특정 회색의 얇은 실크커튼 같은 막이 생기는 환상을 보게 되어 " 이를  시각화한 것이었다. 
 

 


캔버스 전체를 망으로 뒤덮다 못해 점차 그걸 책상에도 그리고 바닥에도 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몸 위에도 그렸습니다.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보니 망이 무한으로 증식하더라고 쿠사마는 회고합니다. 1959년 브라타 갤러리 (Brata Gallery)에서 이 작품들을 선보이며 뉴욕 화단에 성공적으로 입성했지만 쿠사마는 자신의 조현병 증세가 심화되었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매일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던 어느날 아침에 깨서 눈을 떠보니 전날 그린 망이 창문에도 있더라는 것이다. 이에 손을 뻗어 만져보려 했더니 그 무늬가 살아 움직이며 기어서 자신의 피부로 옮겨 오더라고 그녀는 회술 한다. 이로 인해 공황장애 발작(Panic attack)이 오고, 스스로 앰뷸런스를 불러 벨뷰(Bellevue)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이후로도 며칠에 한 번씩 같은 일이 반복됐다. 
 

 

며칠씩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안정을 찾는 쿠사마의 이러한 행위는 점점 더 강박적으로 그림을 그림으로써 세상은 마음대로 되는 곳이 아니라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피하고자 애써 노력하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무한 망과 유사하게 속칭 " 땡땡이" 점 무늬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폴카닷(Polka dot) 시리즈 또한 이 시기에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쿠사마는 그러한 끝없는 반복을 통해 자신의 증세를 경감시키고자 했다고 설명합니다.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행위를 "자기말소(Self-Obliteration)"라 칭하고요. 끝없는 반복이 머릿속의 시끄러운 잡음을 고요하게 만들고 삶의 불안을 지워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느꼈다는 것입니다. 
 
 
 
 

 
#검은색 바탕 위에 흰색으로 그린 미세한 고리는 그물 패턴처럼 캔버스를 균일하게 덮고 있다. 그 위에 흰색으로 얇게 칠한 터라 멀리서 보면 빈 캔버스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제법 두껍고 유기적으로 쌓인 물감이 드러나며 미묘한 인상을 준다. '그물망' 사이사이 빈 곳으로 시선을 이동하면 검은색 배경이 점처럼 눈에 띄기 시작한다. 엎치락뒤치락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물망과 점의 관계는 쿠사마가 생각하는 무한한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위치를 상징했다 이 작품은 곧장 뉴욕 예술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lt;Infinity Nets Yellow&gt;, 1960/Flickr

 
 

 

당시는 아트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바뀌며, 추상표현주의의 제 2세대의 전성기였습니다. 쿠사마는 앤디 워홀이나 클래스 올덴 버그 등의 작가들과 동시대에 활발히 활동하며 전시를 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의 쿠사마의 성공은 빨랐습니다. 그녀의 대표작인 <무한 망>은 첫 개인전에서 프랭크 스텔라가 구입해 자택에 두었다고 하며, 도널드 저드 또한 그녀의 무한 망 작품을 소장했었고, 2008년에는 그 작품이 경매에서 510만 달러에 팔려 쿠사마는 생존하는 여성화가 중 가장 비싼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녀는 조셉 코넬과 만납니다. 
 
 


 

미술나라의 이상한 앨리스/NYCultureBeat

 
 
 
 
 

자신이 무한대로 확장된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은 무한한 공간에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없음을 느낍니다. 
-쿠사마 야요이-

 
 
 
 
 
 
 
 
 
1961년의 쿠사마는 전위적인 무브먼트의 대표적인 아티스트로 성장합니다. 1960년대의 그녀의 대표적인 스타일은 '축적(accumulation)과 '강박관념(obsession)'으로 무한망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입니다. 의자나 소파, 부엌용품 등 온갖 사물에 남근 형상의 오브제(soft-sculpture)를 축적해 붙인 것이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남근들판 Phalli-Field>, Infinity Mirror Room/ Afterall.org

 

 

 

<남근 들판 Phalli-Field> 또한 정신적 문제에 대한 쿠사마의 대응기제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은 일종의 소프트 스컬프쳐(부드러운 소재로 만든 조각)로 천에 솜을 채워 만든 수백 개의 남근 형태의 오브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쿠사마는 어린 시절 받은 가정교육의 영향으로 성 (Sex)에 대한 공포증(phobia)을 갖고 있었습니다. 
 
 
 
결혼 전 방종을 막기 위해 어머니는 성이 더럽고 부끄러운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아버지의 바람의 현장을 목격해와 어머니에게 보고하고 그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과정을 겪으며 성을 터브시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인이 된 쿠사마는 이 오랜 공포증을 물리치기 위해 공포의 대상을 작고 다루기 쉬운 사물로 치환하고 그것의 반복 생산 및 설치합니다.  일종의 의식처럼 미술관 혹은 갤러리 공간 한가득 남성 생식기 모양 조각을 채워 넣다 보면 어느덧 성은 두려울 것도 없고 오히려 재밌고 즐거운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니 쿠사마에게 예술은 발산의 기회이면서 정신적 문제에 대한 치유의 방편이 됩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아동기 학대는 만성적 스트레스 요인이 되어 양극성 장애를 조기에, 그리고 더 중도로 발현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심리학 연구에서는 장기간 혹은 심한 신체적 학대를 받은 아동의 경우 영구적으로 뇌구조와 기능 상의 변화가 생기고, 면역체계 기능에 부정적 영향을 주며, 신체 및 정신 이상에 쉽게 걸릴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 심리학자 퍼피츄아 니오(Perpetua Neo)는 어린 시절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받았던 아티스트들의 경우를 분석하며 "그들 중 대다수가 고통받은 자아를 의미 창출을 위해 사용하고 그것을 예술을 통해 실행한다."라고 설명합니다. 즉 정신질환으로 인해 천재적인 아티스트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관련 증상을 유발한 과거의 경험을 발판 삼아 그것에 대한 대응기제( coping mechanism)로 예술창작을 행하는 과정에서 좋은 성과를 낸 작가들이 여럿 존재한다고 보는 편이 더 작절한 것 같습니다. 

 

 


 
쿠사마는 도전적인 작업을 맹렬하게 선보이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극심한 불안과 피로에 시달리게 됩니다. 정신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쿠사마는 예술 없이 삶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1965년에는 가장 실험적인 작품 중 하나인 <무한 거울 방 >시리즈를 전개합니다.  요즘에야 무한히 서로를 비추는 거울의 방은 결코 낯선 공간이 아니지만, 무려 60년 전에 '무한 거울 방'의 철학을 상상했던 쿠사마의 선택은 가히 과감했습니다. 무한히 서로를 비추는 거울은 쿠사마의 예술 철학을 극대화했습니다. 설치 작품 속 쿠사마의 극적인 초상에서 볼 수 있듯, <무한 거울방 > 이후 쿠사마의 작업에서 퍼포먼스와 자아 이미지의 분열은 더욱 강화됩니다. 
 
 
 
 

 뉴욕 시절의 쿠사마는 '쿠사마 해프닝'이라고 칭해지는 야외에서의 누드 데모 등의 과격한 퍼포먼스나 인스터레이션을 표현했습니다. 남녀의 성차별을 부정하는 것을 베이스로, 자본주의나 베트남전쟁에도 반대하는 운동을 리드했다고 합니다. 대부분 신체에 물방울 무늬를 그린 누드 퍼포먼스로, 월가나 UN 본부 같은 보수적인 장소에서 행하여 기성세대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나무위키

 
 
 
 
 
 
 
 1966년 베니스 빈엔날레에서 그녀는 초청받지 못한 작가로서 전시장 앞 잔디에 약 1500여 개의 물방울무늬 오부제를 깔아놓습니다. <나르시스 정원> 플라스틱제의 미러볼 1500개로 이탈리아의 파빌리온 밖의 잔디 위를 가득 채운 것으로, 개당 2달러로 작품을 파는 퍼포먼스이기도 했습니다. 이 게릴라 전시는 비엔날레 측에 의해 중지당했으나 그녀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다 되었고, 또한 자기 자신을 머천다이징 한 아티스프로 평가받게 됩니다. 

 
 
 

Artist Yayoi Kusama in the Orez Gallery in the Hague, Netherlands, 1965 in KUSAMA-INFINITY/ Artnet News

 

 

 

 

약 16년간 미국에서 거주하며 회화라는 장르에서 벗어나 조각, 영화, 신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합니다. 특히나 당시 미국에는 반전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는 시기였는데 예술활동을 통한 반전시위에도 앞장서게 됩니다. 
 

 
 
 
 
 

Self-Obliteration(1966-1974), Yayoi Kisama/objects/M+

 
 
 
 
 
 
 
 

물방울무늬로 공간과 우리 몸을 지울 때 
비로소 우리는 환경의 일부가 됩니다.
-쿠사마 야요이-



 
 
1966년부터 일본에 돌아간 직후인 1974년까지 작업한 <자기 소멸>은 자아의 증폭과 소멸 사이에서 요동치는 시리즈 입니다. 쿠사마는 뉴욕에 거주하며 반 문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시기에 <자기 소멸>을 제작했습니다. 물방울무늬로 뒤덮인 마네킹은  공연자의 나체에 점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수십 번 이어가던 행위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강렬하면서도 어딘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자기 소멸'이란 제목은 눈앞에 펼쳐진 다채로운 장면과 유쾌하게 대비됩니다. 쿠사마는 자신의 예술 세계 전반에 걸쳐 '지우기'라는 개념을 탐구했는데, 이는 부정과 긍정이 하나가 된다는 믿음에 뿌리를 둡니다. 마네킹으로 제시한 인간의 존재에 물방울무늬를 가득 채울수록 자연스럽게 더 큰 전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죠.
 
 
 
 
 
 

Kusama and Cornell: A fusion of Art/Pinterest

 
 
 
 
쿠사마 야요이와 조셉 코넬은 예술적 관계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쿠사마는 코넬의 콜라주 기법을 존경하며 자신의 작품에 이를 도입했습니다. 코넬은 주로 콜라주와 상자 작품으로 유명하며, 다양한 사진과 오브제를 상용해 독특한 콜라주를 만들었습니다. 반면 쿠사마는 소프트 조각과 반복적인 패턴을 사용한 설치 미술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코넬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적 요소가 강하며, 일상적인 오브제를 통해 꿈같은 세계를 표현합니다. 쿠사마는 강박적 반복과 무한을 주제로 하여, 점과 거울을 사용해 무한한 공간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요. 코넬의 작업 방식은 쿠사마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는 그의 기법을 통해 추상에서 벗어나 형상을 나타내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쿠사마는 코넬과의 관계를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었고, 이는 그녀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73년에 절친하던 파트너 조셉 코넬의 사망 후, 건강이 나빠지고 환각 증세가 심해진 쿠사마는 일본으로 귀국합니다. 스스로 신주쿠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병원에서 창작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기도 하며, 소설과 단편, 시 등을 발표했지요. 78년에는 소설 <크리스토퍼 스트릿의 매춘굴>로 일본 신인문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Pumpkin>, 1983/MutralArt

 
 

 
 
 
 
 

저는 제 위치로부터 무한한 우주를 가늠해보고 싶었습니다.
입자들의 축적을 그리며 저의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인생은 곧 이런 수백 만개의 입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쿠사마 야요이-

 
 
 
 
 
 
 

<인간의 이미지 Imagery of Human Beings>,1987,Acrylic on Canvas, triptych,Lito and Kim Camacho collection/ 기아 디자인 매거진

 
 

 


 
1987년 작 <인간의 이미지(Imagery of Human Beings)>(1987)에는 물방울무늬 철학의 연장선으로 서로 연결된 존재에 대한 쿠사마의 관점이 녹아 있습니다. 다양한 크기의 동그란 흰색 점이 보라색 면을 뒤덮었습니다. 대부분의 점에는 작은 꼬리가 달려 있고, 때로는 다른 점과 연결됩니다. 올챙이를 닮은 점은 마치 남성의 정자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은하계의 장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보는 거리와 방법에 따라 작품 속 점의 밀도와  간격을 다채롭게 느낄 수 있고요. 눈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살펴보면 점들이 흩어지며 움직이는 듯합니다. 이는 에너지의 변화, 끊임없는 움직임을 통한 재생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점 하나가 하나의 생명을 상징할 때 이 작품은 서로 연결된 우리가 모두 우주적 하나라는 더 큰 차원으로 이해의 폭을 넓힙니다. 태초부터 우리가 무수히 많은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불교의 눈으로 보면 우리 모두는 수많은 생애 동안 다른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윤회 개념은 쿠사마의 세계관에서 큰 축을 차지합니다. 우주의 먼지이면서도 저마다 고유한 존재인 인간을 바라보는 그의 예술 철학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세포로 구성된 것처럼 인류 전체가 하나의 존재이며, 하나의 세포 안의 우주 전체가 들어 있는 것이죠.
 
 
 
 
 
 
 
 

Yayoi Kusama/MoMA 'Yayoi Kusama, Love Forever'Poster(아트상품),1998/ MutualArt

 
 
 
본격적으로 재평가 받게 된 계기는 1989년에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쿠사마 야요이의 회고전'Love Forever:Yayoi Kusama, 1958-1968)입니다. 이 전시로 다시 쿠사마는 세계에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Yayoi Kusama at 90's : How the 'undiscobered genius' became an international sensation/CNN

 
 
 
 
 
 
 
 

1993년 제 45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일본관 /단비뉴스

 
 
 
뉴욕을 떠난 후로 예술계에서는 잊히는 듯했던 쿠사마가 다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부터 시작된 회고전으로부터입니다. 이때부터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1993년에는 과거 초대받지 못해 게릴라로 참가했던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정식으로 일본 대표로서 참가하기도 합니다. 
 
 
 

 
 
 

Yayoi Kusama Art Exhibition at National Gallery,2005 /Lady Porcelain-Weebly

 
 
 

 
 
 
 
 

어느날 , 책상 위의 붉은 꽃무늬의 식탁보를 본 후,
시선을 천장으로 돌리니
온 천장에, 창문에도 기둥에도 같은 붉은 꽃의 모양이 달라붙어 있었다.
온 방, 온몸, 전 우주가 붉은 꽃 모양으로 뒤덮어져,
결국에 나는 소멸해버린다.
그리고 영원한 시간의 무한과 , 공간의 절대 속에서 나는 회귀하여, 환원되어 버린다.
이 것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경악했다. 

-<무한 망, 쿠사마 양요이 자서전 >,2002년-

 
 
 
 
 
 
 

Yayoi Kusama의 인생예찬: 삶과 꿈 사이에서/NYCultureBeat

 
 

 

현재도 여러 나라를 돌며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녀의 작품은 현재 생존해 있는 여성 아티스트 중 가장  고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009년부터 그려온 대형 회화 시리즈 <내 영원한 영혼> 132점 등이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궁지에 몰린 스스로의 열기 같은 것으로,
아마 예술에서는 먼 곳에서부터 원시적, 본능적으로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내 영혼의 편력과 투쟁>(예술 생활)1975년-

 
 
 
 
 
 
 
 

Yayoi Kusama/Infinity-Nets(ENNO)2011/Mutual Art

 
 
 
 
 
 
 

루이비통&amp; 쿠사마 야요이 콜라보레이션 , 2012/디자인 DB

 
 

 
마크 제이콥스가 루이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은 1997년 이후 줄곧 그는 예술과 콜라보레이션등 유명 예술작가와 협업을 한 바 있습니다. 예술가와 브랜드 간 콜라보레이션이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예술가에게는 자신의 작업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가 되고, 브랜드에 있어서는 예술가와의 협업을 통해, 상품, 그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죠. 또한 일부 지정된 매장에서 한정된 수량을 판매하기 때문에 소장의 가치가 있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84b8D-k_ERk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쿠사마 야요이/ 교보문고

 
 
 
 
 
 
 
 
 

쿠사마 야요이<무한 거울방 Infinity Mirrored Room- 수백만 광년 너머의 영혼 (The Souls of Millions of Light Years Away> 2013, 뉴욕 데이빗 즈워너 갤러리/미주 한국일보

 
 
 
 
 

<자화상>,2015, Acrylic on canvas/ 기아 디자인 매거진

 
 
 
 
 

저는 때때로 이상하리만치 기계화되고
표준화된 획일적인 환경에 놓인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문명사회라는 낯선 정글과 사람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정신적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저는 항상 사람과 사회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배경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저의 예술적 표현은 언제나 이런 바탕에서 성장했습니다.
- 쿠사마 야요이-

 
 
 
 
 
https://www.youtube.com/watch?v=CfzdQQuYq_0

 
 
 
 
 
 
 

쿠사마 야요이 미술관, 일반 사단 법인 신주쿠 관광 진흥 협회/신주쿠

 

 

 


 
2017년 10월 개관했습니다. 약 2회 쿠사마 작품의 전람회를 실시하는 공간입니다. 강연회 등을 개최하는 것으로, 쿠사마 씨가 작품을 통해 반복해 호소해 온 세계 평화화 인간애라는 메시지를 널리 세계에 전해, 많은 분들에게 현대 미술에 익숙해져 주시는 미술관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The moment of Regneration>/ 나무위키

 
 
 
 이 빨간 촉수처럼 생긴 것은 남성의 성기를 표현한 것입니다.
 
 

<소멸의 방>,Yayoi Kusama, 5.11.2020/Arthive

 
 
 
 
 
 
<소멸의 방> 작품은 관람객이 직접 만들어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고 스티커를 붙여나가는 과정에서 도트가 채워져 최초의 방의 모습은 소멸되어 버립니다.
 

 

 


뉴욕에서 어느 날 캔버스 전체를 아무런 구성없이 무한한 망고 점으로 그리고 있었는데 내 붓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캔버스를 넘어 식탁, 바닥, 방 전체를 망과 점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내 손을 봤을 때, 빨간 점이 손을 뒤덮기 시작했고 내 손에서부터 점이 번지기 시작해서 나는 글 점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 점들은 계속 번져가면서 나의 손, 몸 등 모든 것을 무섭게 뒤덮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고 응급차가 와서 벨뷰병원에 실려갔다. 의사가 진단하기를 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고 정신이상과 심장수축 증상에 대한 진단이 나왔다. 이러한 사건 이후에 나는 조각과 퍼포먼스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내 작업의 방향 변화는 언제나 내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결과다. -쿠사마 야요이-
 
 
 
 
 
https://www.youtube.com/watch?v=KYRegEz7CgY

 
 
 
 

 

 


 

달도 물방울무늬고,
태양도 물방울무늬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 역시 물방울무늬죠.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우주에서도
무수한 물방울무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물방울무늬를 통해서 저는 삶의 철학을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물방울무늬는 결코 혼자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서로 소통하는 삶처럼
두 개, 세 개 그 이상의 물방울무늬가 모여 움직임이 됩니다.
지구는 우주의 수많은 별 중 하나의 물방울무늬에 불과합니다.
물방울무늬는 무한으로 가는 길입니다. 
-쿠사마 야요이-

 
 
 
 
 
 
 
 
 
 
 
 
 

Ascension of Polka Dots on the Trees was created by Yayoi Kusama/Dezeen

 
2021, 4, 21
 
그녀는 집안의 빨간 꽃무늬 식탁보를 본 뒤, 눈에 남은 잔상이 온 집안에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 둥근 물방울무늬로 변형되어 계속해서 시선과 자신의 신체에까지 따라붙었던 물방울무늬 무늬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하게 되는 작업의 중요하고도 유일한 소재가 된다. 
 
 
 
 
 

Yayoi Kusama,<; Infinity Mirror Rooms&gt>, 2020/ LA Infused

 
 
 

그녀의 작품에서는 무한성이 느껴지는 작품이 있다. 바로 <무한 거울방>이라는 설치작품인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한 속에서의 반복과 그 속에 있는 나의 반복을 보여줍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쿠사마는 여러 인스터레이션 작품을 제작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거울을 사용한 무한 거울의 방과, 의자나 테이블이 설치된 심플한 가구의 방에 UV로 빛나는 물방울무늬가 있는 방 등, 무한한 공간이 넓혀져 있는 듯한 공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lt; Infinity Mirror Rooms&gt;/Pinterest

 
 
 
 
 
 
 

Dancing Pumpkin is made of painted bronze/Dezeen

 
 
 
 

 호박에 대하여

호박은  애교가 있고 

굉장히 야성적이며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사로잡는다. 

나, 호박 너무 좋아

호박은 나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마음의 고향으로서

무한대의 정신성을 지니고 

세계 속 인류들의

평화와 인간찬미에 기여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다. 

호박은 나에게는 마음속의 

시적인 평화를 가져다준다.

호박은 말을 걸어준다.

호박, 호박, 호박

 

내 마음의 신선한 모습으로 

세계의 전 인류가 살고 있는 생에

대한 환희와 근원인 것이다. 

호박 때문에 나는 살아내는 것이다.

-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가 호박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그녀의 어린 시절 경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녀는 부모의 학대와 방치로 인해 정신적인 혼란과 불안감을 겪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호박이 가득 찬 창고에 숨곤 했습니다. 호박의 안정감 있고 유머러스한 형태는 그녀에게 위로와 안정을 주었고, 이는 그녀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호박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으며, 그녀의 예술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자리 자리 잡았습니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세계/아트인사이트

 
 
 
 
 
 

My Soul Blooms Forever in the Enid A. Haupt Conservatory/Dezeen

 
 
 
 
 
최근 몇 년 동안 쿠사마는 작품에 시를 암시하는 긴 제목을 붙인 적이 많습니다. 사랑, 예술, 평화를 위한 기도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화면에 텍스트를 새겨 표현한 작품으로 예술을 향한 헌신, 사랑과 죽음에 관한 기도를 담은 자작시를 함께 선보입니다.

 

 

 

한편 쿠사마의 가능성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많은 사람에게 각인한 계기는 2012년에 루이 비통과 함께한 프로젝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쿠사마는 루이 비통의 트렁크에도 도트 패턴의 핸드 페인팅을 더하며 주목받았습니다.  하지만 일회성으로 그칠 줄 알았던 프로젝트가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부활했습니다. 이번에도 무한함을 상징하는 모티브를 메종의 프로덕트에 가미해 실제 작품의 텍스처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도트 무늬를 구현하면서 패션계와 아트 신의 호응을 동시에 이끌어냈습니다. 
 

 

 


 

Yayoi Kusama/Dots Obsession/Rice Gallery

 
 
 
 
 
https://www.youtube.com/watch?v=a58e9OCvx4Y

 
 
 
 

 

 

 

 

쿠사마 야요이는 평생에 걸쳐 자기 작품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길 염원했습니다. 더 나아가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세계에 관한 안목을 기를 수 있기를 바랐지요. 100년 후에도 감동할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계속 작업해야 한다고 말했던 쿠사마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 지금도 그의 병실이자 작업실에서 자기 자신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삶을 지속 중입니다. 작품을 만들 때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란 생각에 잠긴다는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 1929-   ) . 삶과 예술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매번 처음인 것처럼 자문하는 그녀의 작품 세계에는 언제나 시작만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무한히 펼쳐지는 시작 그 자체가 의미의 종결점이기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gSBtXNJj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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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cm 정도의 키에 바짝 마른 몸, 게다가 88세 (1999) 할머니 예술가입니다. 그녀는  <마망 Maman>이란 이름의 커다란 거미 조각의 창작자입니다. 놀라움과 찬사 그리고 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쭈글쭈글한 그녀의 얼굴만큼 예술가로서 버텨온 그녀의 자부심에 엄지척 해드립니다. 98세(2010. 5. 31/뉴욕)로 돌아가시기 까지 인생의 후반전이 더 아름다웠던 그녀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만들었다. '라는 말이 있지요. 끝이 뾰족한 다리를 길게 뻗고 위태롭게 서 있는 거미.  뜻밖에도 프랑스어로'엄마(Maman)'라는 의미를 지닌 그녀의 후기 대표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작가는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라는 프랑스계 미국인 여류 작가입니다. 60세까지 철저히 무명시절을 보내다가 이 '마망'시리즈로 70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해서 98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작가입니다. 

 

 

 

 

<엄마 Maman>,1999,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Stainless steel,bronze,marble/wikipedia

 

 

 

 

 

거미는 나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찬사입니다.
그녀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어머니는 거미처럼 실을 짰고 거미처럼 매우 영리했습니다.
거미는 모기를 잡아먹는 친근한 존재다.
우리는 거미가 질병을 퍼트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거미들은 우리 엄마들처럼 도움이 되고 보호한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96년 부르주아는 1947년 잉크 &목탄 드로잉으로 그렸던 거미에서 착안해 첫 강철 거미 조각 'Spider'를 제작합니다. 거미는 부르주아의 엄마에게 헌사하는 작품으로 '베틀을 돌리고, 짜고, 양육하고, 보호하는 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1999년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미술관을 위해 '마망(MaMan)을 제작합니다. '마망'은 테이트 모던을 비롯, 삼성 리움미술관, 빌바오 구겐하임뮤지엄, 캐나다 국립갤러리(오타와), 도쿄 모리미술관  , 크리스탈브리지 미술관(아칸사주 벤튼빌), 도하 카타르 국립컨벤션센터 등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France /123RF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작가입니다. 태피스트리를 수선하고 판매하는 아버지 루이 부르주아 (Louis Bourgeois)와 어머니 조세핀 부르주아(Josephine Bourgeois)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하고 있던 테피스트리 사업은 직물 공장 같은 것으로, 당시에 상당히 큰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유복한 환경이었습니다. 가정교사까지 둬서 공부를 할 수 있던 걱정도 없고 부족할 것도 없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이후의 평생을 결정짓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유년 시절 수년을 믿고 따르며 친언니처럼 따르고 사랑했던 가정교사가, 아버지와 불륜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해 왔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그녀의 행복했던 유년 시절은 이때부터 산산조각 나게 됩니다.

 

 

 

그녀는 분노했습니다. 아버지를 증오했고, 가정교사를 증오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그녀가 증오하게 되었던 것은 이 모든 사실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가정을 깨지 않으며 이를 방관했던 무력한 어머니였습니다. 부정을 저질렀던 아버지와 가정교사 보다도 이러한 부당한 상황을 이어가고자 했던 바보 같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Louise Bourgeois/ Twosome

 

 

 

그 녀는 이 사건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후에 이야기했습니다. 그녀가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원천은 이러한 '관계'에 대한 허무함과 고민 때문이었다고요. 그런 루이즈 부르주아는 성장하면서 애착을 요구하는 관계에서 힘겨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부모, 형제자매, 남편,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모순적(양가적 ) 감정으로 어려웠다고 호소합니다. 

 

 

 

<엄마 Maman> 작품 속  거미는  칼처럼 뾰족뾰족한  날카로운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면 거미의 몸통 부분이 실제보다 많이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미는 긴 다리로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몸통을 가능한 낮게 위치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작품의 거미는 몸통이 굉장히 위쪽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얇은 다리들이 억지로 들어 올린 몸통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탱하고 있는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바로 옆으로 쓰러질 듯한 아주 위태로운 모습입니다. 

 

 

 

 

 

Sac Containing marble eggs, at Zurichsee-Schifffahrtsgesellschaft,Zurich,2011

 

 

 

 

나는 수선공 집안에서 태어났다.
거미는 수선공이다.
만약 당신이 거미줄을 뭉갠다고 해도, 그녀는 화내지 않는다.
그녀는 거미줄을 다시 짜고 수선한다.
-루이스 부르주아-

 

 

 

 

 

 

 

이렇게 보통의  거미답지 않은 자세로 몸통을 잔뜩 치켜올린 모습을 아래쪽에서 보면, 다른 부분이 한 가지 눈에 띕니다. 망으로 둘러쳐진 그물 안에 대리색으로 만들어진 하얀 대리석 구슬들이 보입니다. 이것들은 바로 거미의 '알'들입니다.

 

 

거미가 이렇게  위태로운 모습으로 저항하듯 하늘로 몸을 잔뜩 추켜올리면서도 꿋꿋이 버티고  서 있는 그 이유는, 바로 이 배 아래쪽의 알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입니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거미의 이 모습에서 '엄마'를 발견해 냈던 것입니다.

 

 

거미가 매일 실을 뽑아내듯 직물을 뽑아내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엄마, 남편의 부정을 미련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거미처럼 흉측한 엄마, 하지만 거미가 알을 지키려 하는 것처럼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엄마. 부들부들 떨리는 얇은 다리로 자식들을 배 아래 숨기고 자신이 모든 고통을 감내했던, 우둔한, 너무나 미운, 하지만 생각할 수록 눈물이 나는, 바보 같은 그런 엄마의 모습을  알게 된 겁니다. 

 

 

 

 이렇게 자신 안의 모순된 감정을 해결해 가는 처절한 삶의 과정이 바로 '마망'으로 탄생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에게 닥쳤던 가장 고통스러운 일들을 극보해 내기 위해 괴로움을 고백하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작품을 '고백 예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녀의 삶을 이해하고 다시 거미를 보니 이 거미가 안고 있는 삶의 무게와 모성애가 조금 다르게 와닿지 않나요. 

 

 

작품은 거대한 사이즈의 거미를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조각입니다. 가까이 보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알을 품고 있고요. 특히 영국 런던의 현대미술관인 테이트모던이 2000년 첫 문을 열 때 이곳의 거대한 전시장인 '터빈홀'을 처음으로 채웠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리움 미술관, 호암미술관에서도 전시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르주아(Bourgeois)는 이 작품에 있는  그대로 자신의 엄마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땅을 딛고 있는 다리는 가냘프게 보일지언정 단단한 강철로 되어 있으며, 크기로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그 위협적인 겉모습 속에 자식들을 부드럽게  품고 있는 모양. 때로는 연약해 애틋한 마음이 들게 하지만 아이를 세상에 낳아 기른 누구보다 강인한 존재, 엄마를 표현했다는 걸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TsFuZ80OyY

 

 

 

 

그런데 이러한 예술적 표현은 그녀가 활동하던 당시 미국에서는 낯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술에는 흔히 당대 주목을 받는 흐름이나 표현 방식이 있습니다. 많은 작가들은 재빨리  이 흐름에 올라타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며 생존에 필사적이지요.  부르주아(Bourgeois)가 활동할 무렵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이 대세였습니다. 

 

 

 

<Blue Poles>, 1952,Jackson Pollock,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Canberra/wikipedia

 

 

Mark Rothko/ The New York Times

 

 

 

 

 

추상표현주의는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 1970)의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추상화라고 이해할 수 있고, 이들 작품에서는 작가 개인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미니멀리즘 예술은 아예 제목을 '무제'로 하는 등, 작가를 더욱 숨기는 경향을 보입니다.

 

 

 

<The Welcoming Hands>,1996/EUtouring.com

 

 

 

 

<The Welcoming Hands, 1996>. 브론즈로 제작되었으며 은질산염 파티나로 마감되어 있습니다. 여러 개의 손과 팔을 표현한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화강암 받침대 위에 놓여 있습니다. 손들은 서로를 잡거나 맞잡는 자세로 표현되어 있어 따뜻한 애정, 안전, 그리고 신체적 접촉의 친밀함을 나타냅니다.

 

 

 

작품의 손들은 실제 사람들의 손을 모델로 하여 제작되었습니다. 부르주아는 자신과 친구 제리 고로보이의 손과 팔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원래 뉴욕에서 처음 전시되었으며, 이후 파리의 튈르리 정원에도 설치되었습니다. 부르주아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보편적인 상징을 사용하여 관객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전달합니다.  작품은 부르주아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반영하면서도, 인간의 보편적인 접촉과 연결에 대한 욕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정신적 불안감을 느꼈던 부루주아는 수학의 예측 가능하고 안정된 체계에 끌려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과 기하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나 곧 수학적 관념이 불변의 진리가 아니며 이론적 구조일 뿐임을 깨닫고 예술의 세계로 들어서기로 결심합니다. 파리 소르본 대학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명문대학입니다. 최상위 엘리트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 있고요. 졸업하면 일자리가 보장된 꽃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의 사망과 예술가를 기생충 취급하는 아버지의 반대를 뒤로 하고 자력으로 예술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부루주아(Bourgeois)는 에꼴 데 보자르 (Ecole des Beaux Arts)와 에꼴 드 루부르(Ecole du Louvre)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몽마르트 및 몽파르나스에 있는 화가들의 스튜디오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시절에 그녀를 가르쳤던 여러 화가들 중에서도 특히 페르낭 레제 (Fernand Leger, 1881-1955)는 부루주아(Bourgeois)에게 삼차원에 대한 관념을 심어주어 훗날 조각가가 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화가에서 기하학적인 작품을 뽑아내는 조각가로 돌아선 그녀의 선택은, 그리고 페르낭 레제의 안목은 탁월했습니다. 

페르낭 레제 (Fernand Leger): 기계 시대의 인간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습니다. 입체파와 구상을 독특하게 융합한 작품 스타일로 유명합니다. 피카소, 브라크와 함께 20세기 초 가장 중요한 예술 운동인 입체파를 이끈 화가 중 한명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사실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난 혁신적인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Louise Bourgeois& Robert Goldwater/NYCulture Beat

 

 

 

 

 

1938년 미국의 미술 사학자이자 아프리카 예술 학자인 로버트 골드 워터(Robert  Goldwater, 1907-1973)를 만나 결혼하여 ,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컬럼비아대와 하버드대 석사를 거쳐서 뉴욕대에서 '현대미술 속의 원시주의 (Primitivism in Modern Art)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루이스 부르주아와 결혼 후 퀸즈 칼리지와 뉴욕대 교수로 강의하다가 1957년 미드타운 54 스트릿의 원시미술관(Museum of Primitive Art) 초대 관장을 지냈습니다. 골드워터는 뉴욕 뮤지엄 최초로 아프리카 미술 전시회를 기획합니다. 넬슨 록펠러가 창립한 원시미술관은 1976년 폐관하고, 컬렉션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으로 들어가고요.  골드워터는 1973년 사망합니다. 

 

 

 

 

<New Orleans>,1946/MutualArt

 

 

 

 

 

 

<New Orleans, 1946> 작품은 유화를 사용하여 판지 위에 그려졌습니다. 이 작품은 Bourgeois가 뉴욕에 도착한 1938년부터 1940년대 후반, 조각으로 전향하기 전까지의 시기에 제작된 회화 중 하나입니다. 그녀의 예술적 목소리가 처음으로 등장한 중요한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지요. 부르주아의 다른 초기 회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20세기 유럽 아방가르드 운동, 특히 모더니즘 건축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녀의 초기 회화 작품으로, 그녀의 예술적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1930-40년대  그녀는 주로 드로잉이나 판화 작업들을 했습니다. 70대 이후로 다시 판화 작업을 시작하지요. 판화는 그녀에게 다양한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과거에 대한 치유이며, 회상이며, 불만이며, 억제이며, 시간의 통로이며, 손의 움직임 등 복합적이죠. 그녀는  판을 부식시키는 에칭 작업보다 판에 직접 드로잉의 흔적을 새기는 인그레이빙이나 드라이포인트를 선호합니다.

 

 

 

 

Fallen Woman(Femme Maison), 1946-47/ The Art Wolf

 

 

그녀의 초창기 작품들은 특히나 공격적이고 파격적이며, 폭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과감한 에로티시즘에 대한 표현이 아버지로 인해 받은 상처와, 불신의 감정, 그리고 남성성을 이긴 어머니란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나타냅니다.

 

 

 

 

Self-Portrait as Bird, 1945/MoMA

 

 

 

1940년 대 말부터 기하학의 영향이 엿보이는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한 그녀는 1949년 뉴욕의 페리도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갖게 됩니다.  물론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녀의 조각은 재료가 다양해지고 주제가 과감해진 50년대와 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는 급속도로 부상한 페미니즘 열풍과 함께 더욱 강렬하고 파격적인 인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70년대 말부터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는 198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열린 회고전을 계기로 국제적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작업했던 1500여 점 작품들을 1990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하기도 합니다. 부르주아(Bourgeois)는 이후로 미국과 유럽, 남미와 일본 등지에서 수차례 회고전을 가졌으며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황금 사자상을 수상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vYvqxHejY

 

 

 

 

Louise Bourgeois , I Love You Do You. Love Me?,1987/ MoMA

 

 

 

 

 

The family,2007, Digital print on fabric/MoMA

 

 

 

<The Family, 2007>는 작가의 오랜 경력 동안 탐구해 온 주제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21점의 선명한 붉은색 종이 작품으로 구성된 이 연작은 성적 친밀감의 순간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Bourgeois는 가족 관계에서 발생하는 고통, 갈등, 정체성 문제, 의존성 등을 솔직하게 다룹니다. 작품의 붉은색은 신체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며, 습식 기법으로 그려져 우연한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여성의 형태는 여러 개의 늘어진 가슴이 목에 달린 추상화된 다산의 상징으로 표현됩니다. 부르주아는 가족의 불안정한 본질을 viscerally 조명하며, 신체를 추상적으로 변형시켜 부부간, 그리고 모자간의 미묘한 상황들을 탐구합니다.  이 작품은 Bourgeois의 개인적 경험,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와 모성에 대한 그녀의 관심을 반영합니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 성장과 쇠퇴, 분리와 결합 등 삶의 순환을 다루며, 작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의식도 담겨 있습니다. 

 

 

 

당시 치명적인 유행이었던 스페인 독감에 걸린 엄마를 8살 때부터 간호하면서, 태피스트리 도안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1932년 21살 때 엄마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배신감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때부터 평생 버림받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평생에 걸쳐 '외로움이나 질투, 분노와 두려움' 등 인간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다양한 재료와 모티브를 탐구하며 창작에서 손을 놓지 않았고요.

 

 

자신을  직시하는 것과 함께 부루주아(Bourgeois)는 또 사람들이 공포감이나 두려움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죠.

 

 

1951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부터 부르주아는 불안과 분노, 죄의식, 버림받은 느낌에 시달리며 광장 공포증, 강박, 불안, 자살 충동을 겪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공격한다. 

나는 우울을 옮겨낼 에너지를 찾을 수 없다. ...나는 하루를 마주 대할 수 가 없다.

온 세계는 회색이다....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세상은 텅 비었다. ...

 

나는 나 자신, 증오스러운 나 자신을 주시하기를 견딜 수 없다. ...

나는 나 자신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내게로 불러올 수는 있다. 나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정신 분석 치료 당시 루이스 부르주아가 작성한 글-

 

 

 

 

 

이렇게 해서 그녀는 정신분석가 헨리 로웬펠드에게 30년에 걸친 치료를 받기 시작합니다. 이 정신 분석 치료 경험은 그녀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EYE BENCHES II/ Hauser&Wirth

 

 

 

 

 

 

<Eye Benches II>는 1996-1997년에 제작된 조각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거대한 관찰하는 눈 모양을 한 두 개의 기능적인 벤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검은 짐바브웨 화강암으로 조각된 이 작품은 추상과 구상 사이를 오가며, 부르주아의 수십 년에 걸친 예술 실천을 상징합니다. 매끄러운 표면의 눈꺼풀과 동심원으로 이루어진 눈동자는 거대하고 매혹적인 시선을 만들어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를 넘어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각의 상징, 여성의 성적 해부학에 대한 암시, 유혹과 관음증의 표현, 그리고 명상과 휴식의 공간을 제공합니다. 이 작품은 부르주아의 기억, 관계, 심리상태에 대한 탐구를 반영하며, 정체성, 성별, 섹슈얼리티, 모성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야외에 설치되어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빛의 변화를 반영하고 흡수합니다. 

 

 

 

 

 

 

 

Louise Bourgeois, Crochet I-V(MoMA 590-594), ,1998/MutualArt

 

 

 

 

이런 가운데 부르주아(Bourgeois)는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30년 간 단 8번의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아마도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에 익숙해져 있는 미술계 사람들에게  그녀의 작품이 생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 그녀를 미술사가 피터 바이어마이어(Peter Weiermair)는 "20세기 조각계의 '외로운 늑대(Lone Wolf)' "였다고도 표현했습니다. 

 

 

<IN AND OUT>,1995/Haus der Kunst

 

 

 

<IN AND OUT>. 작가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녀가 자주 탐구했던 주제인 물질성, 성규범, 그리고 자신의 심리적 깊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대체로 자서전적 성격을 띠며, 그녀의 어린 시절 경험과 트라우마를 반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작가의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의 긴장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추상 적으면서도 인간의 형상을 암시하는 부르주아(Bourgeois)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배신, 걱정, 외로움 등의 주제가 암시적으로 드러나며, 이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연결됩니다. <IN AND OUT>이라는 제목은 내부와 외부, 은밀함과 노출, 혹은 심리적 내면과 외적 표현 사이의 경계를 탐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르주아(Bourgeois)가 자주 다루었던 정체성, 성별, 섹슈얼리티의 주제와도 연관됩니다. 그녀의 작품은 고백 예술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 IN AND OUT>도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Cells 연작은 총 28개의 동일한 주제로 진행된 설치 연작입니다. 제목인 Cells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교도소를 의미하는 prison cell, 수도사의 방을 의미하는 monk's cell, 생물학적인 세포를 의미하는 cell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밀폐된 유리 혹은 철망, 오래된 문으로 구성된 셀의 공간은 폐쇄적인 느낌을 줍니다. 이는 그녀가 앓았던 광장 공포증과 연관되어, 세상에서 홀로 남겨져 고립된 듯한 느낌을 받았던 당시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부와 격리된 공간 안에는 그녀의 개인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물들이 배치되어 긴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배치된 몰체 중 하나는 침대에 누워 허리를 아치형으로 들어 올린 여성의 나체 조각입니다. 이 동작은 히스테리 질환을 겪는 여성에게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자세라고 합니다. 원인이 없는 근육 경직과 불안감을 나타내고요. 작품을 해석하는 이들은 정신 분석학적 이론을 주목하여, 권력에 의해 억압받은 상징적 히스테리 환자들의 표출이며, 여성의 욕망과 분노를 동시에 대변한다고 설명합니다. 

 

 

 

 

 

 

내가 찾는 것은 이미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디어도 아니에요.
내가 재창조하고자 하는 것은 감정입니다.
그것은 원하면서 주고 싶기도 하고,
파괴하고 싶기도 한 감정이에요.
그러한 힘에 대한 확인 (Identification)입니다.

 

 

 

 

 

 

 

 

<아버지의 파괴 Deconstruction of Father>1974,붉은 조명솨 함께 공포스러운 /Pinterest

 

 

 

The destruction of the father(아버지의 파괴),1974/출처 BBC

 

"I got peace of mind, only through the study of rules nobody could change."

- Louise Bourgeois-

 

 

 

아버지에게 느꼈던 폭력과 분노는 방 크기의 재현작 <아버지의 파괴  Deconstruction of Father , 1974>로 드러납니다. 부르주아(Bourgeois)에게 아버지는 지속적으로 그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존재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권위적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1974년 <아버지의 파괴 Deconstructio  of Father >라는 작품을 제작하게 됩니다. 방을 설치한 후 라텍스와 석고 등을 이용하여 설치한  이 작품에서 그녀는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가슴을 직접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도살장에 방문하여 직접 캐스팅하고, 토막 난 동물들의 몸체의 부분들을 식탁이자 침대이기도 한 테이블 위의 여기저기에 흩어놓습니다. 아버지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부르주아( Bourgeois)와 아이들이 아버지의 팔과 다리를 절단하고 찢어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먹는 연출입니다. 일종의 상상의 폭력이죠. 

 

 

 

항상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억압적인 식사 분위기를 만드는 아버지 앞에서 침묵해야 하는 어린 소녀는 매번 좌절합니다.  부르주아의 아버지는 스타일리시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겐 늘 연인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부르주아의 엄마가 병에 걸려 요양하기 위해 남프랑스로 이주한 후 일어납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집에 함께 살게 된 영어 가정교사가 아버지의 새 연인이 되었죠. 그때의 상황을 그녀는 폴 가드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집으로  온 가정교사 세이디(Sadie)가 알고 보니 아버지의 애인이었어요. 세이디는 우리 집에 살았고, 아버지가 차를 운전하면 그녀가 조수석에 앉았죠. 엄마와 나는 뒷좌석에 앉았고, 나는 그런 엄마가 정말 싫었어요!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라도 아빠를 지켜봐야 그가 밖으로 돌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Bourgeois)가 단순히 아버지를 원망하고 비난만 했을까요? 감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엄마의 수용,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엄마 아빠의 사랑하는 마음, 그 가운데서 수많은 혼란을 겪었다고 회고합니다. 

 

 

여기에  나를 위해 집으로 온 영어  선생님이 왜 내가 아닌 아버지에게 집중하는지 , 그에 대한 질투와 배신감도 느꼈고요. 그러면서 때때로 세이디나 아버지를 죽이는 상상도 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할 때 드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외면하거나 회피하게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이 들더라도, 부모에 대해 가져야 하는 윤리적인 태도로 그 감정을 억누르거나 잊어버리려 하죠. 그런데 부르주아9Bourgeois)는 이러한 감정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고 늘어지면서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 그녀는 권위적인 아버지를 파괴하고 그를 다시 자신 속의 새로운 아버지로 재탄생시키는 엑소시즘을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된 목적은 두려움으로부터의 탈출이고, 탈출의 모험은 트라우마에 대한 하나의 치료학인 셈이죠.  

 

 

 

 

 

매일매일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거나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당신이 힘든 과거와 타협할 수 없다면,
그때부터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 루이스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

 

 

 

 

 

 

Louise Bourgeois/ Museo Picasso Malaga

 

 

내 모든 작품은 내 삶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I Do, I Undo, I Redo>,1999/Pinterest

 

 

 

 

 

 

<I Do, I Undo, I Redo>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유니레버 시리즈 설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Bourgeois의 예술 철학과 창작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I Do , I Undo, I Redo>는 세 가지 단계를 나타냅니다. 

 

I Do: 창작의 단계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I Undo: 반성과 파괴의 단계로, 이전 사업을 해체하고 재고하는 과정입니다. 

I Redo: 재구성과 해결의 단계로, 새로운 통찰을 바탕으로 작품을 재창조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형상을 암시하면서도 추상적이며, 배신, 걱정, 외로움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그녀의 개인적 경험과 트라우마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실 그녀는 꽤 늦은 나이에 예술계에 입문했습니다. 40대, 그리고 여성이란 것은 예술계에선 흔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의 수였죠.  하지만 그녀는 남자들이 독식하고 있던 예술계에 40대의 나이로 당당하게 입성하게 됩니다.  

 

 

1960년대부터 무거운 돌덩어리나 무쇠 같은 재료에서 석고나 라텍스 같은 부드러운 재질을 이용한 조각으로 바뀝니다. 1966년이 전환점이 되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qy7xJhImnLw

 

 

 

Assistant for 30 Years: Life with Louise Bourgeois/ vulture.com

 

 

 

1980년 부르주아는 조지아 오키프와 후안 해밀턴의 관계처럼 여생의 우정을 지속할 젊은 조수 제리 고로보이( Jerry Gorovoy)를 만납니다. 당시 큐레이터였던 고로보이와의 만남에 대해 부르주아(Bourgeois)는 말합니다. 

 

"당신이 우물의 바닥에 있을 때 주변을 살펴본다. 누가 나를 밖으로 이끌어낼까? 이 경우 제리가 다가와 밧줄을 던져주고, 나를 끼워서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라고 밝혔다. 고로보이는 현재 루이스 부르주아 재단의 대표입니다. 

 

 

 

 

 

<Do Not Abandon Me>,1999/ artnet Magazine

 

 

 

 

< Do Not Abandon Me>는 정체성, 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버림받는 것에 대한 불안을 솔직하게 다룹니다. Bourgeois는 이 작품을 통해 "버림받음의 트라우마"를 표현하며, 가족생활 속에서도 느꼈던 고립감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은 빨강, 파랑, 검정 구아슈 물감으로 그려진 남성과 여성의 토르소 실루엣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녀의 심리적 상태와 신체적 욕구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iGjzV7Nk48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작품이 Tracey Emin과의 협업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Emin은 Bourgeois의 초기 그림 위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작은 인물들을 그려 넣었고, 때로는 손글씨로 내러티브를 추가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녀의  예술세계의 핵심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통과 상처를 정화하고 치유하려는 그녀의 예술적 투쟁을 잘 보여줍니다. 

 

 

 

 

주제에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부르주아(Bourgeois)의 예술은 그녀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의 예술은 그녀의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던 트라우마가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와 예술작품으로 표출되는 일련의 과정으로서 트라우마와 화해하기 위해 분투했던 결과물이었습니다.

 

 

 

출산 이후 부적절한 감정에 사로잡힌 루이즈 부르주아(Bourgeois)는 가족에 대해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탯줄이 잘리지 않은 채 몸 밖으로 나와 있는 아기와 여성을 표현한 작품, 집을 가면처럼 눌러쓴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Louise Bourgeois,<CELL XIV>, 2000/ Dazed

 

 

 

 

 

 

 

 

 

예술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카타르시스(정화)다.
내가 경험한 상처, 증오, 연민을 표현하고자 한다."

(루이스 부르주아 인터뷰)

 

 

 

 

Eight in Bed, 2000/Mutual Art

 

 

 

 

 

 

 

 

 

 

 거미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거울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이고,
바늘은 무용한 것을 유용한 것으로 엮어내는 관용의 역할을 한다.
뭔가 잊어버리기 위해 선 우선 용서해야 한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Seven in bed 2001, Fabric, Stainless Steel, Glass and Wood/ WordPress.com

 

 

 

 

 

파격적이던 그녀의 작품은 점점 모성애와 사람과의 관계의 이해로 변해갑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오는 여성이란 존재의 나약함. 아니 이 나약함은 힘이 없는 나약함이라기보다 섬세한 여성의 마음과 몸, 그 가녀리고 부서질 것 같은 유리 같은 여성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한 엄마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여자이고... 여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고...

 

 

 

 

복수심과 증오로 가득 찼던 소녀는 엄마가 되고 작가가 되면서, 자신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터프한 용사에서 , 세상 모든 어머니를 이해하고 딸들을 어루만지는 가족을 생각하는 더 큰 존재가 되었습니다. 

 

 

 

 

<The Couple>plate 5of7, from the portfolio, La Reparation, 2001/MoMA

 

 

 

여성을 그릴 땐 대부분 빨간 하이힐에 진주목걸이를 한 모습이다. 그 두 가지는 섹시함을 대표한다. 

 

 

 

 

 

Louise Bourgeois , Untitled 2002/Art Blart

 

 

 

 

 

 

 

 

 

 

 

 

 

<Heart>,2004/Artnet

 

 

 

 

루이스 부르주아가 천을 덧대고 실로 꿰매어 만들어냈던 너덜너덜한 형상의 작품들입니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자신의 갈기갈기 찢어진 몸과 마음을 꿰매고 또 꿰매어가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인생과, 타인의 인생을 꿰매어 주고 온기로 끌어안았습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실로 그림을 그리는 태피스트리 일을 하게 된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싶어 종종 수선 일을 도왔다고 합니다. 이때의 영향을 받아 그녀는 실과 관련된 이미지를 자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서로 연결하고, 짓고, 고치는 실의 이미지는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을 꿰매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Louise Bourgeois, Drawing intimacy, 1939-2010 show/Galleries now

 

 

 

 

 

<The Ladders>,2006/HARLAN&WEAVER

 

 

 

 

 

 

 

 

 

 

 

<Turning inward set>(I see you!),2007, 국제갤러리/ 리아뜰 매거진

 

 

 

 

부르주아(Bourgeois)는 아버지와의 관계 말고도 자신이 삶에서 겪은 많은 감정들을 작품에 풀어놓았습니다. 이러한 드로잉들도 일상에서 기록한 것들로 그녀는 이것을 '생각 깃털(thought feather)'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이미지 가운데 발전되는 것은 더 큰 규모의 설치나 작품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솔직함이 어떻게 그녀를 세상과 소통하게 해 준 것일까요?

 

 

 

바로 감정을 파고들면서 내면 깊숙이 들어간 그녀가 '인간의 본질'을  마주하고 그것을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지만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감정을 끄집어내 주었고, 그 결과 관객은 그녀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거대한 거미 엄마를 보고 '우리 엄마'를 떠올리며 쉽게 작가와 감정적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부르주아(Bourgeois)는 "내 작품 세계에는 외로움과 잔인함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예술은 그런 삶의 어려움을 풀어나가는 치유의 방법이었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그녀는 결국 예술을 통해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몸을 끌어안을 수 있었고,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임을 묵묵히 작품으로 노래했으며 마침내 그 솔직한 이야기는 공감을 무기로 관객에게 가 닿을 수 있었습니다. 마케팅에서 진정성이 중요하다는 뻔한 이야기를 예술에 적용해 볼 수 있겠지요. 

 

 

부르주아가 말년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은 것에 대해 대답한 이야기입니다.

 

 

"성공? 그게 뭔지 난 모르겠어요."

 

다만 우리 모두는 나이 들수록 더 멋진 사람이 되죠. 마치 프랑스 와인처럼요. 요즘 나는 아주 부유한 여인이 된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죠. 내가 성공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아니라 진정한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The Smell of Eucalyptus #2,2006/MoMA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유칼립투스의 향기 The Smell of Eucalyptus>(2021, 국제 갤러리) 전에는 작가가 생애 마지막 10여 년간 작업한 판화 작품과 조형물이 전시되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 프랑스 남부에 머무르며 병든 어머니를 보살폈던 젊은 시절의 부르주아(Bourgeois)는 당시 유칼립투스를 약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억으로 작가에게 유칼립투스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또한 스튜디오를 환기시키기 위해 유칼립투스를 태우곤 했던 작가의 습관을 떠올리면 작가에게 유칼립투스는 실질적인 면에서 혹은  상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추억을 자극하여 과거를 현재로 소환해 내는 매개체이자 '미술의 치유적 기능에 대한 은유'로 작동합니다.

 

 

 

 

 

 

 

The Smell of Eucalyptus /KuKje Gallery

 

 

 

 

 

다양한 질감의 종이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된 작품이 걸려 있습니다. 동판화 (에칭)로 찍어낸 그림은 나뭇잎이나 씨앗, 꽃이나 식물 줄기를  연상시킵니다. 때로 여성의 가슴이나 음부를 떠올릴 수 있고요. 여러 겹 섬세하게 덧대어 그어진 선은 대상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고 유연합니다.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가 아흔이 넘어 작업한 판화 작품에서는 직설적인 폭력이 아닌 은유적인 시정과 치유의 기운이 넘실거렸습니다. 

 

 

 

외부와의 역학 관계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노년에 접어들어 변해갑니다. 주요 모티브로 반복되는 씨앗과 낙엽, 꽃줄기 같은 자연의 일부, 똬리를 틀고 있는 혈관과 내부 장기처럼 자연과 유기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억압적으로 작용하는 감정에서 벗어나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 속 유동적 존재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시도하고 시도하고... 그러다 갑자기 거기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자신의 작품 세계)이 그런 식으로 될지 몰랐어요.
그것은 미스터리랍니다. 
-루이스 부르주아-

 

 

 

 

The Maternal Man ,2008/Parkett Art

 

 

 

 

흔히들 그녀를 페미니즘 작가라고 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내 작품을 어떤 '이즘'으로 묶는 것에 반대한다. 다만, 아는 것에 관해서만 얘기할 뿐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없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성 '들을 위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늘 '나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

 

그는 그동안 드로잉에서부터 천 조각에 석판화를 찍는 작업, 수건으로 만든 조각 작품, 손바느질한 천 조각 등 장르와 재료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업을 해왔지만, 일관된 주제는 오랫동안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어릴 적 상처다. 

 

-신동아 매거지 ㄴ2010.08.01 통권 611호 (p512-523) 루이스 부르주아 인터뷰 중-

 

 

비록 그녀는 배신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죽는 순간까지 그를 용서하진 못했지만,.. 그 아픈 상처와 증오 뒤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결혼이 올바르고, 영원히 행복하길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이, 그 행복이... 자신에게도,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존재하길 꿈꿨다. 관계... 그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혼이란 관계가 완벽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나길 바란, 그런 여자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어찌 보면 그녀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그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 가족의... 아름답고 완벽한 가족에 대한 동경을 항상 마음에 품은 체 말이다.

 

 

 

Everyone should have the right to marry.

To make a commitment to love someone forever is a beautiful thing...

-Louise Bourgeois-

 

 

 

 

 

https://www.youtube.com/watch?v=noaDoY6fbJQ

 

 

 

 

 

 

<Insomnia Drawings>/a 1000mistakes-WordPress.com

 

 

 

여러 학교에서 판화, 조각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의 작업을 병행한 작가입니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 살롱문화를 만들어 예술가와 학생들이 자신의 작품을 가져와 부르주아(Bourgeois)로부터  무자비한 비평을 듣는 <피의 일요일>이란 살롱문화도 만들었습니다.

 

 

 

 

70세가 되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개최) 미술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된 그녀는 98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새로운 기법과 시도로 누구보다 활발하고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그녀에게 예술은 고통스러운 삶에 대처하며 깨끗한 정신을 지켜내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글을 쓰고 작품 활동에 몰두했으며 70여 년에 걸쳐 끝없이 시도하길 멈추지 않은 작가입니다. 자신의 어두운 상처와 두려움, 불안으로부터 마침내 부드럽고 고요한 '치유'의 세상을 빚어낸 사람,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정면으로 부딪쳐 돌파했고 그로써 자신과 화해하는 평온함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유칼립투스의 온화한 선을 그리기까지, 자신의 기억과 내면을 온전히 바라보기까지 그녀가 거쳤을 불면의 얼마나 길고 깊었을까 거기 침몰되지 않기 위해 강박적으로 일기를 쓰고 작업에 몰두했을 그녀를 상상하면 우리 모두의  현실적 고통과 불안이  옅어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을 것 같고요.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한 자신만의 작품으로 진실되게 관객과 소통해 온 루이스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 1911-2010). 그녀의 손이 유난히 위대해 보이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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