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술가로 타고났고, 따라서 예술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 책임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다른 예술가들의 삶을 연구하고, 세상을 연구하면서 배웠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살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그림은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림은 마법처럼 존재한다.
- 키스 해링 저널-
우리에게 친숙한 현대미술 작가 중에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이 있습니다. 키스 해링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그의 그림은 한 번씩 봤을 정도로 유명하죠. 핸드폰 케이스, 티셔츠 등에 다양하게 상품화되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검은 피카소'라 불리는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ael Basquiat, 1960-1988)처럼 그 또한 스트리트 아트를 예술계에 끌어들이며 두 분야의 조화를 꾀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선, 상징적인 형상, 리듬감을 특징으로 합니다. 낙서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사람들에게 친숙한 예술을 선보이고자 노력했던 작가입니다. 그의 정신은 시간이 흘러서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keith Haring의 <Ignorance=Fear>( 1989) 작품입니다. Haring 은 1988년 AIDS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의 예술은 AIDS 위기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두게 되지요. 이 작품은 AIDS위기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부적절한 대응을 비판하고, 대중의 무지와 침묵이 공포를 초래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림 속 세 인물은 각각 눈, 귀, 입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는 AIDS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을 상징합니다. Haring은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AIDS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이해와 동정을 촉구하고자 했습니다.
작가는 1958년 5월 4일 펜실베이니아주 레딩(Kutztown) 근처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기본적인 만화 기술을 배웠습니다. 월트 디지니나 닥터 수수 (Dr. Seuss)와 같은 대중문화에 영향을 받았고요. 197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링은 피츠버그에 있는 상업 예술 학교인 아이비 전문 미술 학교( Ivy School of Professional Art)에 입학했으나, 자신이 상업 그래픽 아티스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고 중퇴 후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에 이릅니다.
뉴욕으로 넘어간 해링은 시각예술학교(School of Visual Arts, SVA)에 다니게 됩니다. 그곳에서 기존 예술계의 밖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던 대안 예술과 더불어 당시 유행하던 그라피티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가 대중 속에서 예술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은 그가 존경하는 화가이자 학교 스승이었던 키스 소니어(Keith Sonnier)의 전시회를 도우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작품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예술과 대중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술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 여겼던 그의 생각과 전혀 반대되는 모습이 그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죠.
뉴욕은 신선하고 활기찬 에너지가 뿜어져나오는 도시였습니다. 키스해링(Keith Haring , 1958-1990)은 뉴욕 거리의 벽면과 지하철 플랫폼에 그려져 있는 낙서 스타일의 그림을 보고 깊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는 그만의 예술언어로 도시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키스 해링의 특징은 밑그림 없이 바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고, 자기만의 독특하고 특징적인 양식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배경에 만화적인 인물들과 형상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표현 매체에 매료되어 그는 매일 거의 40점에 가까운 새로운 지하철 작품을 그려나가기도 했습니다. 지하철 드로잉 시리즈는 해링이 자신의 사진을 달고 처음으로 공공장소에 게시한 작품입니다.
5년동안 뉴욕 지하철의 비어있는 광고판에 검은색 종이 위에 분필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작품 수만 해도 5000여 점이 넘는 방대한 양이었습니다. 해링은 일련의 공공벽화를 통해 고급미술과 저급미술의 경계를 허물고자 노력한 유일한 팝아트화가 이기도 합니다. 번번이 공공기물 훼손혐으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점차 해링의 독특한 이미지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키스 해링(Keith Haring)은 늘 분필을 들고 다니면서 바닥과 벽에 낙서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성에 대한 자유, 과거의 전통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우드스탁 운동이 한참 일어나고 있을때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키스해링은 공동체를 만나고, 사회에 대한 이슈를 인식시키기 위해 사회적 이슈를 그림으로 그려냈습니다.
우드스탁 운동의 배경은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 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당시 젊은 세대들은 기성 사회에 대한 불만과 저항 의식을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가 강했고, 이는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는 히피 문화의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이러한 반문화 운동의 절정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드스탁은 단순한 음악 축제를 넘어 젊은이들의새로운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보여주는 장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평화'라는 모토 아래, 참가자들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음악을 즐기고 공동체 의식을 경험했습니다. 이 운동은 기성세대와 정부의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변화를 알리는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었습니다. 우드스탁은 이후 미국 사회와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며, '우드스탁 세대'라는 용어를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해링은 지하철에서 검은 종이를 덮어놓은 빈 광고판을 보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매체를 발견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하철 전체에 있는 빈 광고판에 흰색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1980년부터 1985년 사이 작가는 수백 개의 공개 드로잉을 제작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의 작품은 지하철을 타고 통근하는 사람들에게 친숙해졌으며,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에게 말을 건네며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소통을 통해 작가는 더욱 열심히 작업을 진행했으며 지하철은 작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실험실'이 되었습니다.
Keith Haring은 1987년 Cranbrook Art Musem에서 획기적인 임시 벽화를 제작했습니다. 이 벽화는 Haring이 자신의 c최고 작품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1990년 31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그의 시각적 언어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Cranbook 벽화는 Haring의 스타일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의도적인 물감 흘림과 얼룩을 도입했습니다. 광대, 마스크, 해골, 순교자, 종교적 아이콘 등 그가 이후 작품에서 계속 탐구한 캐릭터들을 묘사했습니다.
이 벽화 프로젝트는 Haring이 AIDS 진단을 받은 후 작품과 행동주의가 더욱 개인적으로 변화한 시기에 해당합니다. 종말론적 사고와 철학에 몰두한 Haring의 후기 작품들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혼란스러운 서사와 장-미셸 바스키아의 폭력적인 유희성과 예술사적 친밀성을 보입니다.
Cranbrook Art Museum 는 2017년 "Keith Haring: The End of the Line" 전시회를 개최하여 이 중요한 벽화 프로젝트를 기념하고 문서화했습니다.
키스 해링은 항상 대중과 소통하며 미술을 통한 행복한 지구를 꿈꿨습니다. 타임스퀘어 전광판 애니메이션, 스와치 시계디자인, 앱솔루트 보트카 광고 등 상업미술가로도 성공을 하기도 했습니다.
Keith Haring 의 Absolute Vodka 작품은 1986년에 제작된 광고 캠페인의 일환으로, 그의 독특한 팝 아트 스타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Haring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단순하고 대담한 선으로 그려진 인물 형상들을 사용했습니다. Absolut보드카 병 모양을 중심으로 여러 춤추는 듯한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어, 활기차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색상은 주로 검정과 흰색을 사용했으며, 보드카 병 부분에만 파란색을 적용하여 시선을 끌도록 했습니다. 이 광고 포스터는 텍스트 없이 순수하게 Haring 의 예술적 표현만으로 브랜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크기는 대략 41.75cm*30인치(106*76cm)정도이며, 오프셋 리소그래프 기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000부 한정판으로 제작되어 현재 미술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경매에서 최고 650만 달러에 낙찰된 기록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상업 광고와 순수 예술의 경계를 허문 Haring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의 예술 세계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프셋 리소 그래피는 현대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인쇄 기법 중 하나입니다. 이 기법은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원리를 활용합니다. 평판 인쇄의 한 종류로, 표면으 요철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인쇄판에서 고무 블랭킷으로, 다시 종이로 잉크를 전사하는 간접 인쇄 방식입니다. 고품질 인쇄물을 대량으로 생산하는데 적합합니다. 원래 석회석 판을 사용했지만, 현재는 주로 금속판(특히 아연판)을 사용합니다. 물을 흡수하고 잉크를 반발하는 부분과 잉크를 흡수하는 부분을 만들어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이 기법은 대량 인쇄에 효율적이며 고품질의 결과물을 제공하여 책, 잡지, 신문, 포장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됩니다.
Andy Warhol<Marlyn Diptych>
Roy Lichetnstein<Whaam!>
Robert Rauschenberg<Retroactive I>
Jasper Johns<Flag>
이 기법은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고품질의 인쇄물을 제작할 수 있어 , 현대 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팝 아트 운동에서 널리 사용되어 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했습니다.
키스 해링(Keith Haring)은 덧칠이나 선이 삐뚤어진 것을 절대 볼 수 없습니다. 밑그림도 없이 한 번에 모든 걸 그려냅니다.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그대로 벽에 옮겨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해링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중시합니다.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종문제와 문화를 작품에 녹여냈고요. 사회 문제도 예술의 세계로 끌어왔습니다.
Keith Haring의 <Art is for Everybody> 철학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핵심 개념입니다. 이 철학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들은 미술관뿐만 아니라, 지하철, 거리 등 일상적인 공간에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생동감 넘치는 색채, 활기찬 선, 그리고 짖는 개나 '빛나는 아기'같은 상징적 캐릭터를 사용했습니다. 자본주의, 정치, 성, 종교 등 당시의 긴급한 사회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회화, 조각, 드로잉뿐만 아니라 비디오, 사진, 개인 일기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했습니다. Haring의 작품은 즐거움을 전하는 동시에 심오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 오늘날까지도 현대 예술과 대중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키스 해링은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작업하는 데 보내었습니다. 그는 아동 도서를 여럿 출간하는 가 하면, 팝 숍에서 파매할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상품들을 디장인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도시에서 아이들과 워크숍을 개최하기도 하고요. 해링의 이미지는 보편적이면서 특이했고, 그는 언어를 사용하여 예술을 해석하는 창조력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빨강과 파랑을 먼저 그리고 검은선을 그려서 형태를 완성하고, 모든 그림을 보면 빨간색이 꼭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빨강과 파랑의 이야기> 특별히 해링이 어린이들을 위해 만든 21개의 석판화 시리즈입니다. 해링은 이 작품을 만들면서 어린이들이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길 원했다고 합니다. 각 그림은 해링이 배열한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고, 마지막 장에는 빨강과 파랑이 보라색의 계란 모양 형태가 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해링은 시리즈가 합쳐져서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을 의도했다고 합니다. 키스 해링의 말처럼 어른들이 잊고 있는 아이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작품입니다. 이 프린트들은 이야기 경연대회에도 사용됐으며, 미국의 많은 학교, 어린이 미술관에서 교재로 채택해서 교육프로그램에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빨강은 가장 강렬한 색 중에 하나이다.
빨강은 피의 색이고
시각적으로 가장 강한 힘을 갖는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신호등의 불빛도 빨강인 것 같다.
정지신호도 그렇고
실제로 나는 모든 그림에 빨간색을 쓴다.
사람들과 소통하며 예술의 선한 면을 전파했던 그는 경력 전반에 걸쳐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공사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1 982년부터 1989년 사이에 전 세계 수십 개 도시에서 50개 이상의 공공 미술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중 다수는 자선 단체, 병원, 어린이집, 고아원을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또한 뉴욕 , 암스테르담, 런던, 도쿄 등의 도시의 학교와 박물관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 워크숍을 개최하고 많은 문맹 퇴치 프로그램과 기타 공공 서비스 캠페인을 위한 이미지를 제작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GFH2WL5Jh4
Keith Haring 은 1983년 Marquette University의 Haggerty Museum of Art 건설 현장에서 벽화를 제작했습니다. 이 벽화는 건설 울타리에 그려졌으며, 8피트 높이와 96피트 길이의 24개 패널로 구성되었습니다. Haring의 벽화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을 반영하며, 활기찬 이미지와 상징적인 캐릭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Haring 의 초기 작업 중 하나로, 그의 시각적 언어가 발전하는 중요한 시기를 나타냅니다. 벽화는 박물관의 기공식에서 중심 역할을 했고, Haring의 공공 예술에 대한 기여를 잘 보여줍니다.
Keith Haring의 "Crack is Wack"작품은 마약, 특히 크랙 코카인에 대한 강렬한 반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유명한 벽화입니다. 이 작품은 Harig의 친구가 마약 중독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벽화에는 Haring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과 어린이가 쓴 것 같은 거대한 문자가 등장합니다. 작품에 포함된 두 개의 해골은 마약으로 인한 죽음을 상징하며, 이를 통해 마약 사용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Crack is Wack"은 Haring 의 간결한 선과 강렬한 원색 사용, 그리고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표현 방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Haring의 사회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며, 그의 예술이 단순한 미적 표현을 넘어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c-Cy8_hGpQ
단순하고 가벼운 느낌으로 이뤄진 그림 스타일 때문에 그가 다룬 주제 또한 가벼울 것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가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이유가 '대중과의 소통'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친숙한 표현 방식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예술 작품을 선보이려 한 그의 의도였습니다.
키스해링은 단순한 표현뒤에 담긴 깊은 주제와 같이 밝음과 어둠, 가벼움과 무거움 강약대비를 통해 그의 작품에서는 놀라운 조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 주제는 무제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정확한 의미 전달은 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Keith Haring의 Lucky Strike 시리즈는 1987년 담배 회사 Lucky Strike의 의뢰로 제작된 광고 작품입니다. Haring은 총 9개의 드로잉을 만들었고, 그 중 5개가 실크스크린 프린트로 제작되었습니다. 생동감 넘치는 선과 춤추는 듯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밝고 대비되는 색상을 사용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Lucky Strike 시리즈는 Haring 의 예술이 상업적 영역과 만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그의 독특한 시각 언어를 대중적인 광고 캠페인에 적용한 사례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Haring이 친구들을 위해 담배를 피우는 해골을 그린 10번째 스케치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Lucky Strike 경영진의 불만을 샀지만, Haring의 유머와 사회 비판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작품들은 Haring의 예술이 갖는 대중성과 접근성, 그리고 그의 독특한 시각적 언어의 힘을 잘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키스 해링의 <마약은 인생을 망친다>라는 이 작품은 마약중독에 걸린 친구를 걱정하며 그린 그림입니다. 그 당시 유행처럼 번지는 마약밀반입에 반대하여 할렘 강변도로에 근접한 운동장 벽면에 '마약은 인생을 망친다'라는 레터링을 큼지막하게 삽입하여 그림과 함께 그려 넣습니다. 처음에는 낙서행위에 대한 벌금형을 받지만 얼마 안돼서 벽화를 완성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됐다고 하네요.
앤디 워홀은 가벼운 주제를 무겁고 심각하게 표현한 반면,
키스 해링은 정반대로 무거운 주제를 밝게 그려낸다.
-오노 요코(세계적인 멀티미디어 예술가 )-
키스 해링은 자신의 예술철학을 위해 작품을 상품화 한 작가입니다. 해링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그의 작품의 가격도 덩달아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중을 위한 그림을 그려왔는데, 아이러니하게 돈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그는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아먄 했습니다. 그는 저작권 문제와 더불어 자신의 철학에 맞는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 팝 숍(Pop Shop)을 열게 됩니다.
1986년 4월, 해링은 소호에 자신의 이미지가 새겨진 티셔츠, 장난감, 포스터, 단추, 자석 등을 판매하는 가게, 팝 숍(Pop Shop)을 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상품화하면서 판매한 것은 작가의 작품이 인기를 끌면서 부작용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1984년부터는 지하철에 그린 그림을 훔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두세 시간이 지나면 이미 그림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죠. 이는 뉴욕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적인 인기에 작가의 허락 없이 제품이 만들어져 팔렸습니다. 팝 숍에 만들어지기 몇 년 전부터 일본에서는 티셔츠, 브라질에서는 운동화, 호주에서는 드레스가 만들어져 판매되었습니다.
Keith Haring의 <방사하는 아기 Radiant Baby>는 1980년대 뉴욕 지하철에서 처음 등장한 그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선으로 그려진 아기가 손과 무릎으로 기어가는 모습을 표현하며, 아기 주변에는 빛나는 선들이 방사되고 있습니다. <방사하는 아기>는 순순함, 희망, 그리고 무한한 잠재력을 상징합니다. Haring은 아기를 "인간 존재의 가장 순수하고 긍정적인 경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작품은 생명의 본질과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가능성을 나타내며,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종교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기 주변의 빛나는 선들은 기독교 도상학에서 성인들의 후광을 연상시키며, 특히 아기 예수의 표현과 유사점을 가집니다. <방사하는 아기>는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 1980년대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으며,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작품은 Haring의 예술 철학인 대중과의 소통, 예술의 민주화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유의 남아프리카 , Free South Africa>는 남아공에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차별정책의 조건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었습니다. 백인 소수 민족이 대다수 원주민 혹은 인구를 계속 억압했던 식민시대미 이후의 아이러니를 표현하기 위해 검은 형상은 의도적으로 백색 형상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검은색선을 사용하면 인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검은색 윤곽은 또한 흑인 형상의 목에 감겨 있는 올가미 주위를 맴도는 아우라처럼 심리적으로 더 많이 격앙된 요소들에 대한 인식을 고조시킵니다.
대중적인 시위 포스터는 남아공의 인식과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유명인사, 정치인, 시민들의 세계적인 대중적 압력과 결합된 포스터, 티셔츠, 엽서 유통에 적합한 이해하기 쉬운 이미지를 사용하여 해링과 같은 예술가들에 의해 캠페인을 펼칩니다. 이 러한 시위 운동의 물결은 남아공 정부에 30년간 감옥에 죄수였던 변호사이자 활동가인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결국 감옥에서 풀려나 대통령으로 선출되게 되었습니다. 거의 10년 후인 1994년에 만델라 대통령은 인종차별정책을 영원히 끝냈습니다.
<많은 이유가 있는 반항아 Rebel with Many Causes>는 헤링의 반복적인 주제인 "악한 것을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마라"의 한 예로서, 사회 문제, 특히 에이즈 위기를 외면할 사람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예술가로서 그리고 활동가로서 해링의 태도를 암시하는 데, 그는 두 가지 정체성을 모두 자신의 예술작품에 접목시켰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금기시되고 있을 때 공공연히 동성연애자임을 드러낸 그는 예를 들어 정부의 에이즈 대책 강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단체 <액트 업 ACT UP: 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등의 운동을 통해 연방정부의 대처가 더딘 에이즈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데 전념했습니다. 그의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급속한 확산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또한 노골적인 소비주의, 환경문제, 인권에 관심을 모으기 위해 예술과 캠페인을 제작했습니다.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은 1980년대의 뉴욕시의 거리 문화에 반응한 미국의 예술가 및 사회 활동가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그가 살면서 일했던 기간 동안 매우 적합한 출생, 죽음, 섹스, 전쟁에 관할 것이었습니다. 키스 해링은 대부분의 비- 성애자들이 성적인 성향을 비밀리에 유지하던 시기에 공공연히 동성연애자임을 알립니다. 예술가로서 해링의 중요성 중 하나는 그의 예술이 에이즈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높였는지였습니다. 그의 작품들 중 많은 것들이 에이즈 연구와 에이즈 인식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한 레드 핫 기구(Red Hot Organization)의 활동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키스 해링 (Keith Haring) 자신도 1990년 32세의 나이로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RHO(Red Hot Organization, RHO)는 비영리단체로, 대중문화를 통한 에이즈 퇴치를 헌신하는 국제기구입니다. 1989년 설립 이후, 400명 이상의 아티스트, 프로듀서, 디렉터들이 전 세계 에이즈 바이러스(HIV)와 에이즈(AIDS) 구호 및 인식을 위한 총 1,000만 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15개 이상의 앨범 모음집, 관련 텔레비전 프로그램 및 미디어 행사에 기여했습니다.
해링은 출생, 죽음, 사랑, 성과 전쟁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직접적인 선과 직관적인 메시지로 표현하면서 광범위한 청중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88년 에이즈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는 생과 사에 대한 고뇌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뇌를 작품으로 나타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에이즈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 편견 그리고 동성애자의 인권을 예술을 통해 외쳤습니다.
해링의 작품은 그래서 데카당스 합니다. 노골적인 동성 간 성행위, 기독교를 조롱하는 상징으로 가득합니다. 보는 이에 따라 불편한 감정이 들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해링의 작품은 거리와 지하철을 벗어나 티셔츠, 배지, 벽화, 공인광고, 포스터 등으로 제작되었고,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표현했습니다.
팝아트의 거장인 앤디워홀입니다. 키스해링은 생전 앤디워홀과 많은 교류를 하면서, 앤디워홀이 뒤를 이을 팝아트의 전성기를 이끌 화가로 기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워홀은 해링의 멘토이자 영웅으로, 해링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해링은 워홀에 대한 종경심을 작품으로 표현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앤디 마우스 Andy Mouse'입니다. 이 작품은 워홀의 이미지를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와 결합하여 표현한 것으로, 팝 아트의 거장인 워홀에 대한 해링의 경의를 나타냅니다.
두 예술가는 단순히 멘토-멘티 관계를 넘어 친분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교류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팝 아트와 그라피티 아트의 융합, 그리고 대중문화와 순순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해링은 워홀로부터 영감을 받아 예술의 대중화와 상업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그의 작품 세계와 예술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3년 첫 만남을 시작으로 30살이 넘는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적 동지가 됩니다. 그런데 워홀이 세상을 떠나자 해링은 이 엔디 마우스 시리즈로 워홀을 추모했습니다. 그림 가운데 생쥐가 귀가 달리고 큰 안경을 쓴 캐릭터가 보이는데 이 캐릭터가 앤디 마우스입니다.
<A Pile of Crowns for Jean-Michel Basquiat>는 Keith Haring 이 1988년에 제작함 작품으로, 그의 친구이자 동료 예술가였던 Jean-Michel Basquiat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작품은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캔버스에 그려졌으며, 크기는 270cm* 300cm입니다.
작품의 중심에는 Basquiat으 트레이드마크인 왕관들이 높이 쌓여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왕관 모티프는 Basquiat 작품의 상징적 요소로, 대중문화에서도 널리 인식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Haring은 삼각형 모양의 캔버스를 사용했으며, 이는 경고 표지판을 연상시킵니다. 캔버스 가장자리는 붉은색 윤곽선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에는 검은색과 흰색의 왕관들이 승리의 상징처럼 빛나고 잇습니다. 오른쪽 하단에는 저작권 기호가 있는데, 이는 Basquiat의 서명 중 하나였습니다. 이 작품은 Haring과 Basquiat의 깊은 우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 1980년대 뉴욕 예술계의 중요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2024.07.21 - [지식&교양] - 51-29.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77 )
키스 해링은 1988년 에이즈 진단을 받은 이후 1년 만에 키스 해링 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재단을 설립한 이유는 작가의 유산과 더불어 그의 예술과 이상을 유지, 확장,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올바른 에이즈 교육, 예방 및 치료 방법을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해링은 에이즈에 대한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자신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와 더불어 이 재단은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 활동 및 지원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작업하기를 즐겨했던 작가의 마음이 반영된 재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_zmWSmjvWA
1989년 6월 Keith Haring 이 이탈리아 피사에 그린 'Tuttomondo'(전 세계)는 그의 마지막 대규모 공공 벽화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피사 시내 Sant'Antonil Abate 교회의 외벽에 위치하며, 180제곱미터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Turromondo>는 세계 평화와 조화를 주제로 30개의 다채로운 인물 형상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캐릭터는 평화로운 세계의 다양한 측면을 상징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화된'가위는 악(뱀)을 물리치기 위한 협력을 ,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은 모성을, 돌고래를 지지하는 두 남성은 자연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 벽화는 Haring 이 처음부터 영구적인 작품으로 구성한 유일한 작품으로, 그가 보통 하루 만에 벽화를 완성했던 것과 달리 일주일이 걸쳐 제작되었습니다. Haring은 이 프로젝트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여겼으며 , 작업 과정을 '펠리니적'이고 '비현실적'인 경험으로 회상했습니다.
<Tuttomondo>는 Haring의 특유의 만화 같은 스타일로 그려졌으며.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피사의 숨겨진 보물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DYykA8WVqw
키스 해링의 작품은 현재 많은 브랜드에서 콜라보를 해서 케이스, 티셔츠, 유모차, 후드, 모자, 야구잠바, 타투까지 나타납니다. 아직까지 키스 해링의 작품은 우리들에 삶에 스며들어 사랑을 받고 있는 팝아트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키스 해링은 많은 문화에 대해서도 알리려고 했고 수없이 미술을 저렴하고 많이 접할 수 있게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키스 해링은 1990년 2월 16일 31세의 나이에 에이즈 관련 합병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추도식은 1990년 5월 4일 뉴욕시의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에서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강렬하게 예술계에 흔적을 남겼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술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작가의 노력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UgNeCynV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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