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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현존하는 테리어 종류는 약 30여 종이 넘게 존재합니다. 오늘 소개할 불  테리어는 다부진 체격과 삼각형의 얼굴로 친근함과 동떨어진 얼굴을 하고 있지만 성격은 반전 매력을 지니고 있는 불테리어(Bull terrier)를 소개합니다.

 

 

Bull terrier/Zooplus.be

 

 

 

불독과 테리어 교배종입니다. 초기에  영국의 제임스 힝크스에 의해 개싸움과 쇼에 참여하며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화이트 잉글리시 테리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테리어의 기원은 개싸움과 소골리기(개와 황소와의 싸움)와 연관이 있습니다.   다행히 1835년 영국에서 소골리기를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지금은 투견을 금지시키고, 쥐잡이개  반려견으로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출처:iStock

 

 

 

불테리어는 영국 출신이다.

체고 : 48-56cm

체중 :20-25kg

평균 수명: 10-14년

품종 그룹: 테리어 종류

색상: 흰색 브린들, 브린들&흰색 등

1885년 AKC공인으로  중형견에 속합니다.

 

 

Bull terrier/ Zooplus.ch

 

 

덩치에 비해서 몸무게가 꽤 나가는 견종입니다. 근육이 탄탄하고 균형이 잘 잡혀있고요. 별명이 박명수 판박이 랍니다. 불테리어는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가족을 보호하는 백의의 기사로 불릴 정도로 보호본능이 강한 편입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와 달리 요즘은 고양이와도 함께 키울 정도로 유순하다고 하네요. 어릴 때 사회화 훈련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테리어 종류의  특징이 그러하듯 자신만의 고집을 갖고 있습니다. 훈련시키기 그래서 좀 어렵기도 하고요. 장난꾸러기 다운 성격과 높은 활동량, 땅 파는 것을 특히 좋아하는 강인하고 건강한 품종입니다.

 

 

 

Bull terrier/ Mascotas Saint Daniel

 

 

 

 

 

 

 

 

 

불테리어의 털은  관리하기 쉽습니다. 그저 가끔 빗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겨울에는 털이 짧기 때문에  따뜻하게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불테리어는 아주 많이 먹는 경향이 있어 식사량을 조절해야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v4lAaMaSxk

 

 

 

 

 

 

 

 

불테리어는  모색도 다양합니다. 한국에서 바우 와우 강아지로 유명하지요. 또 한쪽에만 점박이 모양을 한 모습이 인기가 많은 편입니다. 볼테리어는 얼굴형이 계란형으로 독특한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구마처럼 이마부터 코 끝까지 둥근 아이들이 인기가 많은 편에 속하고요.

 

 

 

Bull terrier/Experto Animal

 

 

 

 

불테리어는 다른 품종 보다 꼬리를 쫓는 경향이 더 놓은 견종입니다. 정기적으로 꼬리를 쫓거나 속도를 높이거나 자신의 그림자를 쫓는 경우 검진을 받아 보는 것이 좋습니다. 불테리어가 꼬리를 쫓는 것은 강박 장애 CCD의 징후 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테리어는 선천성 감각신경성 난청이라는 유전병 < CSD>을  갖고 있어요. 연구에 의하면 10% 이상의 불테리어가 CSD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Bull terrier/MercadoLibre-Mercado Libre Colombia

 

 

 

불테리어 새끼 들은 운동량이 많습니다. 잦은 산책과 놀이 시간을 충분히 마련해 줘야 말썽을 피우지 않습니다.기르기 수월하다고 자칫 집안에 가둬만 놓으면 그 많은 에너지로 악마견이 되기 쉽습니다. 

 

 

 

 

불테리어는 조기 교육이 매우 중요합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견종이라 플라이볼, 어질리티와 같은 독 스포츠에 탁월한 경향이 있어 흥미로운 활동위주나 긍정 강화 훈련으로 교육 시키는 게 좋습니다. 어릴 때 사회화와 긍정강화훈련으로 잘 가르치면 이보다 충직하고 재미있는 강아지를 찾을 수 없을 겁니다. 

 

 

Bull terrier/ Catei de vanzare

 

 

 

 

불테리어를 집에 데려왔다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게 좋습니다.  혼자 방치하는 건 분리불안이 생겨 문제 행동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견종은 주인에 대한  애착이 큽니다. 만약 불 테리어를 돌볼 시간이 많지 않다면 다른 종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매일 30-1시간 정도의 산책이 이상적입니다. 공공장소에서는 입마개와 목줄을 사용하는 것이 의무적입니다. 입마개를 사용하는 것이 점차 편안해져서 입마개의 사용이 처벌이 아님을 인식하고 착용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English Bull Terrier Dog with A. Jack Russell Terrier Puppy/ fortunacreatives.com

 

 

 

불테리어 새끼들은 사교성이 좋습니다. 다른 동물 친구들과도 아주 잘 어울리는 성격이라 산책 중에 다른 강아지를 만나도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워낙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이 강하기 때문에 낯선 사람에게는 경계할 수 있습니다.

 

 

 

불테리어는 근육질의 체격과외모로 인해 다소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투견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불테리어 성격은 보호본능을 갖고 있어 가족들과 잘 어울리고 친근하며 장난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유머 감각도 있어요. 장난스럽고 두려움이 없고 활력이 넘치는 사랑스럽고 사교적이 견종입니다. 

 

 

 

불테리어는 의외로 강인한 외모와 달리 냉철합니다. 그리고 아주 느긋한 성격도 보이고요. 실내견으로 좋은 점을 많이 가지고 있으나 충분히 체력 소모를  밖에서 해주어야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kwb7vtFxEA

 

 

 

 

불테리어는  투견으로 오래도록 길러졌기 때문에 공격성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불테리어들이 모두 공격이진 않습니다.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귀찮게 해도 다 받아줄 정도로 순하고 인내심이  강한 편이지요. 하지만 귀를 잡아당기면 으르렁거릴 수 있기 때문에 개와 상호작용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들과 함께 할 때는 아이들을 항상 감독해야 합니다. 만약 집에 어린아이가 있다면., 불 테리어와 소통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불테리어는  피부가 다른 견종보다 약한 편이어서 꾸준히 관리를 해줘야 한다. 코코넛 오일 같은 걸 발라주면 털도 덜 빠지고 건조하지 않아 좋습니다. 단모종들 털 빠지는 게 너무 힘들다면 코코넛 오일로 관리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털 빠짐이 확실히 줄어드는 걸 느끼실 것이다.

 

 

 

 

불테리어는  노년층보다 젊은 층이게 더 잘 어울리는 견종입니다. 투견으로 개량된 견종이 때문에 더 그러하고요. 어릴 때 충분한 훈련이 필요하다 보니 사전에 견종에 대한 공부를 충분히 마친 후 분양 결정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Bull terrier/ ShotterStock

 

 

외모가 독특하고  매럭적인 불테리어  새끼들은 단순히 귀여운 외모에  충동적으로 분양받기 쉬운 데 먼저 견종에 대한 성격과 특징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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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컬렉터'라고  하면 조금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겁니다. 예술을 거래하는 일이 우아한 비즈니스만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죠. 그림이  고위층 비자금 조성 수단으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으니까요. 그래서 이 시장의 최정점인 미술 컬렉터를 보는 시각은 극과 극입니다. 미술에 투자하며 예술계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존경받기도 하고, 오직 돈을 좇으며 미술계를 왜곡하는 '검은손'으로 지탄받기도 합니다.

 

 

 

전설적인 미술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도 호평과 혹평을 고루 받았습니다.  뒤샹, 피카소, 달리, 칸딘스키, 몬드리안 작품을 사들이며 현대 미술 의 기틀을 세운 위대한 예술 중독자이지요. 그 옆엔 천 명의 남성과 잠자리를 가진 섹스 중독자라는 평가도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녀의 사적인 생활에 초점을 두다 보면 페기가 살아생전  이루어 놓은 업적이 묻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이 현대미술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은 절대적입니다. 그의 삶을 훑는 건 20세기 미술 지형도를 그리는 일과 같습니다. 

 

 

 

Peggy Guggenheim/NYCulture Beat

 

 

 

미술품 하면 먼저 막대한 돈이 떠오릅니다. 구겐하임 가문의 이단아 미술 컬렉터의 중요한 자질 역시  재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페기 구겐하임은 준비된 컬렉터였죠. 페기는 미국 명문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1898년 필라델피아에서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나고 ,뉴욕에서 성장합니다. 유대계 아버지 벤자민 구겐하임은 광산업으로 어머니 가족은 은행업으로 부자가 됐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배경에서 자랐지만 페기의 유년은 우울함으로 가득합니다. 친가,외가, 양쪽 모두에 불행이 닥칩니다. 집안 내력처럼 이모, 외삼촌들의 성격과 행동은 어딘가 기이하고 괴팍했습니다. 그런 가풍을 참지 못한 이모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외삼촌 중 한 명도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요.

 

 

 

타이타닉호 침몰사고/나무위키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페기의 아버지는 가족에게 많은 상처를 줍니다. 어느 날 저녁 식사자리에서 일곱 살 페기가 아버지를 향해 " 밤마다 외출하는 걸 보니 애인이 생겼나 봐요?"라고 물을 정도였죠. 페기에게 아버지는 애증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신경질적인 어머니는 머나먼 존재였으니까요. 오직 아버지만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미술관과 여행을 다니며 좋은 취향을 길러 주려 했습니다. 그랬던 아버지가 황망하게 떠납니다. 페기의 아버지는 타이타닉호 승선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타이타닉 Titanic ,1997> 영화에 상류층으로서 마지막 신사도를 발휘해 젊은 여인과 아이들에게  구명조끼와 자리를 양보하는 벤자민 구겐하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화가 조지아 오키프&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인디포스트

 

 

 

 

아버지를  잃은 페기는 명문가 여자의 삶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눈썹을 다 미는가 하면, 가족의 반대에도 푼돈을 받으며 서점에서 일을 합니다. 22세에 250만 달러 (현 ,3410만 달러)를 상속받게 됩니다. 신탁을 통해 매년 2만 2500달러를 벌었고요. 맨해튼 44 Street의 아방가르드 서점 "The Sunwise Turn'에서 회계로 일하면서 상류층 인사, 예술가들과 사귀게 됩니다.

 

 

 

전위적인 분위기와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교제하며 페기의 안목이 길러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즈음 스캇 피츠제러드<위대한 개츠비>,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도 사귀게 됩니다. 스티글리츠는 FIVE 애브뉴의 갤러리에서 세잔, 피카소,  마티스의 전시회를 미국에 처음 소개한 장본인이었습니다.  페기는 스티글리츠의 아내이자 화가 조지아 오키프와 첫 남편이 될 조각가 로렌스 베일을 만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0GnhPj7FKE

 

 

 

 

가문에서 페기는 이단아 취급을 받습니다. 성인이 된 페기는 탈출하듯 미국을 떠납니다. 목적지는 전 세계 예술가들을 자석처럼 끌어모았던 파리였습니다.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는 1920년대 파리로 시간 여행을 하는 작품입니다. 영화엔 피카소, 달리, 샤갈, 장콕도,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 등이 등장합니다. 그 시절 파리는 20세기, 예술의 중요한 순간을 한데 그러모은 시기였습니다. 1921년 파리로 건너간 페기는 금세 예술의 도시에 푹 빠집니다. 미국에선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여겼던 페기는 보헤미안들로 가득한 파리에 녹아들며 예술가들과 어울립니다.

 

 

 

 

 

나는 현대미술에 대한 건 전부 뒤샹에게 배웠다.

 

 

 

Marcel Duchamp, <Fountain>,1917/wikipedia

 

 

1920년 파리로 이주해 몽파르나스에 사는 화가, 작가들과 교류했습니다. 만 레이(Man Ray, 본명 Emnanuel Radnitzky 1890-1976), 콘스탄틴 브란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1968)도 이 시절 친구가 됩니다. 뒤샹은 구겐하임에게 지속적으로 미술 자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뒤샹은 모던 아트에 대해 가르쳐주었으며,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어떤 작품을 사야 할지를 조언해 주고요.

 

추상미술: 대상의 구체적인 형상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점, 선, 면, 색과 같은 순수한 조형 요소로 표현한 미술의 한 가지 흐름이다. 형이나 색은 각각의 고유한 의미와 느낌을 가지고 있어 형과 색의 어울림만으로도 그리는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 :기성의 미학 도덕과는 관계엇이 이성의 속박을 벗어나서 비합리적인 것이나 의식 속에 숨어 있는 비현실의 세계를 즐겨 표현하려는 회화 시 등의 예술 혁신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에서 다다이즘(DADAISM)에 이어서 일어남. 무의 식의 세계를 그대로 기록하는 자동기술법을 중요한 기법으로 삼음.

 

 

 

페기, 아들& 첫 남편 로렌스 베일Laurence Vail/Elisa Rolle

 

 

 

페기와 아이들/NYCulture Beat

 

 

 

 

파리에서  페기는 로런스 베일(Laurence  Vail 1891-1968)이라는 예술가와 결혼합니다. 7년간(1922-1930)의 결혼생활은 무참히 끝납니다. 로런스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울분을 품었고, 아내를 심하게 때렸습니다. 페기는 로런스와 이혼하고 존 홈스라는 비평가를 만납니다. 존은 여자를 존중하는 남자였죠. 예술 전 분야에서 뛰어난 심미안을 지닌 존 옆에서 페기는 안목을 키웠습니다. 5년간 이어진 연애는 예고 없이 막을 내립니다.  존은 간단한 수술 중 마취사고로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의료사고인가 싶지만 수술 전날 술을 엄청 먹고 수술대 위에 올라갔다고 하네요.

 

 

 

 

허무하게 아버지를 잃고, 연거푸 사랑에 실패한 페기는 영원한 관계는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존을 잃은 후 페기는 많은 남자들과  짦은 만남을 이어갑니다. 수많은 남성을 침대로 끌어들인 유태인 재벌 상속녀는 호사가들 먹잇감이 됩니다. '돈 많은 창녀'라는 심한 비난까지 있었고요. 페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섹스를 하는 것은 하나의 여흥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Festival De Cannes logo.svg/wikipedia/ 매년 5월 프랑스 남부 지역 깐느에서 열리는 이 로고를 디자인 한 사람이 '장콕도(Jean Cocteau)'이다.

 

 

 

영국으로  거처를 옮긴 페기는 딱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냅니다. 지인이 페기에게 화랑을 열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합니다. 페기는 바로 실행에 옮기고요. 1938년 런던에서 모던 아트 갤러리  '구겐하임 죈(Guggenheim Jeune)'화랑을 열게 됩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화가 장 콕도 (Jean Cocteau)의 드로잉을 개관 전에 소개합니다. 이어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영국 첫 개인전도 열고요. 이브 탕기 (Yves Tanguy 1900-1955)그리고 신인 작가들의 전시를 열었습니다. 헨리 무어(Henry Spencer Moore 1898-1986), 알렉산더 칼더, (Alexander Calder 1898-1976) 브란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를 모은 그룹전도 기획합니다. 페기에겐 현대미술의 신화로 추앙받는 마르셀 뒤샹이라는 천재 조력자가 그녀를 돕습니다. 

 

 

 

 

 

Samuel Beckett/Peggy Guggenheim collection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무엘 버켓(Samuel Beckett 1906-1989))도 페기구겐하임의 연인이었습니다.베켓은 1939년 파리에서 작가 제임스 조이스( 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1941)의 비서로 일하던 중 파티에서 페기를 만납니다. 베켓도 페기에게 유럽의 옛날 거장 (Old Masters)들보다 모던 아트에 집중하라고 조언합니다.  

 

 

 

 

예술가들의 예술가였던 뒤샹과 손잡은 페기는 미술 컬렉터로서 명성을 얻어 갑니다. '구겐하임 죈(Guggenheim Jeune)' 화랑에서 열린 현대미술 전시회도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사업 수완은 부족했죠. 적자가 심해져 1년 6개월 만에 '구겐하임 죈'문을 닫게 됩니다. 대신 페기는 더 큰돈을 들여 런던에 제대로 된 갤러리를 짓기로 합니다. 개관 전시회에 선보일 화가  리스트도 작성했지만, 끝내 새 화랑은  문을 열진 못합니다. 전운이 유럽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한편 삼촌 솔로몬 R. 구겐하임은 뉴욕에서 뮤지엄 건립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xNnH8ygSzc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미술 컬렉터들은 미국으로 탈출합니다. 페기는 오히려 서슬 퍼런 파리로 향하고요. 나치에 붙잡히면 목숨도 잃을 수 있었지만,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파리에서 하루에 그림 한 점씩 사들였습니다. 주로 초현실주의 작품을 구매합니다. 흥정도 필요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초현실적인 난장판 속에서 초현실주의 예술은 장난처럼 여져졌습니다. 그림 값은 터무니없이 쌉니다. 피카소 10점, 막스 에른스트 40점, 후안 미로 8점, 마그리트 4점, 만 레이 3점, 달리 3점, 클레 1점, 샤갈 1점... 등 당시 화가들이 그녀의 집 근처에 길게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하네요. 

 

 

 

 

 

#페기는 그림을 안전하게 보관하려 루브르 박물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박물관측은 "당신의 그림은 가치가 없다." 라며 무시합니다. 그 당시 페기는 칸딘스키, 몬드리안, 달리, 마그리트, 자코메티 등의 작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박물관측도 30-40대 젊은 작가들을 연구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 , 주로 미술사로 가치가 있는 작품 위주로 보관이 결정되다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유럽의 미술이 미국으로 옮겨 가는 행운을 잡게 됩니다. 

 

 

 

Modern Group Portraits in New York Exile/Stedelijk Studies

 

 

 

 

 

 

위:J.ERNST(지미 에른스트) , Peggy Guggenheim(페기 구겐하임), FERREN(패런) , DUCHAMP(뒤샹), MONDRIAN(몬드리안)

중간:M. ERNST(막스 에른스트), OZENFANT(오젠팡), BRETON(브르통), LEGER(레제), ABBOTT(애보트)

맨 아래:HAYTER(헤이터), CARRINGTON(캐링턴), KIESLER(키슬러), SELIGMANN(셀리그먼)

 

 

 

나치의  공세가 거세졌습니다. 페기도 유럽을 떠나야만 했지만, 그림을 두고 갈 수 없었습니다. 페기는 미국행 선박에 미술품을 싣기로 합니다. 그림을 이불보 사이에 넣어 불바다가 된 유럽에서 탈출시킵니다. 페기와 함께 미국에 온 건 그림뿐만이 아닙니다. 그녀는 나치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가 망명 작전에도 참여합니다. 페기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탈출한 인물 중엔 마르크 샤갈, 이브  탕기, 막스 에른스트 등이 있었습니다.

 

 

 

 

막스 에른스트와 도로시 채닝/NYCulture Beat

 

 

 

 

페기 구겐하임은 남부로 피난갔다가 1941년 여름 뉴욕에 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페기는 <금세기 미술관 The 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열고 유럽에서 가져온 그림을 선보입니다.  큐비즘, 추상주의, 초현실주의, 키네틱 아트를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30명이었어야 하는데...

 

1941년 12월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와 결혼합니다. 전쟁을 저지른 독일이란 적성국가에서 온 탓에 정부 감시를 받고 있던 에른스트는 애정과 상관없이 안전을 위해 페기와 결혼을 합니다.  새로운 예술가 발굴에도 힘쓴 페기는 '여성 작가 31인 기획전'을 열게 됩니다. 여성 미술가로만 이뤄진 최초 전시회였습니다. 하필 이 기획전의 여성 화가인 도로시 채닝과 남편 에른스트가 열애에 빠지면서 결혼 생활도 파경에 이릅니다. 프리다 칼로는 이 전시로 미국 진출 발판을 마련합니다.

 

 

알렉산더 칼더의 작품/조선일보

 

 

 

 

1942년 맨해튼에서 아트 오브 디스 센추리가 입체파, 추상화, 초현실주의 그룹전으로 갠관하며, 오프닝 파티를 했을 때 페기 구겐하임은 한쪽 귀엔 알렉산더 칼더가 만든 귀걸이를 , 한쪽 귀에 이브 탕기가 만든 귀걸이를 달고 나타납니다. 페기는 유럽 화가들 외에도 로버트 마더웰, 마크 로스코, 자넷 소벨, 클리포드 스틸, 그리고  잭슨 폴락을 소개하게 됩니다. 

 

 

 

 

 

 

 

 

내 첫번째 성취는 잭슨 폴록,
두 번째는 아트 컬렉션이다.
-Peggy Guggenheim-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ARTLECTURE Contemporary Art Platform

 

 

 

 

2024.04.17 - [지식&교양] - 51-5. 잭슨 폴락( Jackson Pollock ,60)

 

51-5. 잭슨 폴락( Jackson Pollock ,60)

물감 자국으로 가득한 혼돈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할까요? 누군가는 문득 우주를 떠올리며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고통만을 느낄 수도 있지요. 또는 '그림에서 꼭

sun-n5y2.tistory.com

 

 

 

 

 

페기는  신인 화가 공모전도 개최합니다. 미술관에서 잡부로 일하던 한 남자가 그림을 출품합니다. 페기는 이 무명화가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합니다. 추상미술계의 스타 잭슨 폴록이 구겐하임 뮤지엄의 목수로 일하고 있을 때 그를 발굴합니다. 그리고 가난했던 폴락과 화가 부인 리 크래스너가 롱아일랜드 스프링 지역의 집을 살 때 2천 달러를 빌려줍니다. 그리고 매달 생활비를 지원합니다. <금세기 미술관>에서 개인전도 열어줍니다. 미국 현대미술 슈퍼스타 잭슨 폴록은 그렇게 탄생합니다. 페기는 1950년 베니스의 무세오 코레르에서 폴락의 전시도 열어 줍니다. 페기는 인생을 통틀어 폴록을 발견한 점이 가장 큰 성취라고 회고합니다. 그는 유럽에 소개되고,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금세기 미술관>/bianca-ariel.blogspot.com

 

 

 

 

1946년 화가 도로시아 채닝과 바람난 남편 막스 에른스트와 이혼한 페기는 이듬해 갤러리를 닫고 베니스에서 살기로 작정하고 유럽으로 떠납니다.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그리스 국가관에서 자신의 컬렉션을 소개하게 됩니다. 이듬해엔 베니스 그랜드 카날 위팔라쪼 베니에 데이 레오니( Palazzo Venier dei Leoni)에 정착합니다.  1948년 페기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잭슨 폴락(Jackson Pollock 1912-1956), 마크 로스코(Marj Rothko 1903-1970), 아쉴리 고르키(Arschile Gorky 1904-1948)를 초대한 전시회를 열고 유럽에 이들 미국 화가들을 소개합니다. 

 

 

peggy Guggenheim/ bianca-ariel.blogspot.com

 

 

 

 

 

"세상에 즐거움을 줬으면 됐지" 페기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마음엔 늘 유럽이 있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다시 유럽에 갑니다. 이번엔 파리가 아니라 베니스였습니다. 운하 근처 대저택을 개조해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열었습니다. 이 미술관은 오늘날 현대미술 애호가라면 꼭 들러야 할 성지입니다. 페기는 베니스에서 30여 년을 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LPcv0hnN24

 

 

 

 

 

추상표현주의 화가 로버트 드니로 시니어(1922-1993)&배우 로버트 드니로/newsis

 

여담으로 배우 로버트 드 니로는 1946년 자신의 화가 부모(로버트 드 니로 시니어&버지니아 애드미럴)가 , 자신이 3살 때 베니스의 페기 구겐하임의 갤러리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도르소두로에 위치한 페기 구겐하임 박물관/익스피디아

 

 

 

https://www.youtube.com/watch?v=NK25iL7PfWE

 

 

 

 

 

 

이후 구겐하임은 유럽의 뮤지엄에 컬렉션을 대여했으며, 1969년엔 삼촌이 설립한 뉴욕 구겐하임뮤지엄에 대여했습니다. 결국 페기 구겐하임은 1976년 자신의 베니스 집과 컬렉션을 솔로몬 R. 구겐하임 뮤지엄에 기부합니다.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은 입체파, 초현실주의, 미래파, 추상표현주의 등 20세기 전반 미국과 유럽 미술을 아우르는 중요한 컬렉션이 됩니다. 

 

 

 

화려한  삶을 산 여성은 남성들의 숙덕공론에 둘러싸이기 일쑤죠. 페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력은 페기에게 자유와 명성을 줬지만, 세상은 자유롭고 잘 나가는 여성을 마뜩잖게 여깁니다. 페기는 전쟁이라는 불구덩이에서 인류의 보물을 지켜내고 대중과 공유했습니다. 그럼에도 기회를 틈타 값싸게 예술을 사들인 장사치로 폄하됩니다. 평생 아무 일 안 해도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재벌이 굳이 목숨까지 걸며 포화 속으로 뛰어든 이유가 꼭 돈 때문일까요?

 

 

 

 

 

 

투자 목적으로 그림을 사니 감상은커녕 창고에 넣어두기만 한다.
주식을 가장 유리한 시점에 팔려고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Peggy Guggenheim-

 

 

 

 

 

페기는 예술을 돈벌이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잭슨 폴록 작품 수십 점을 기부한 페기는 "세상에 즐거움을 줬으면 됐지."라고 쿨하게 말합니다.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자신의 컬렉션을 과감히 대여해주기도 합니다. 비즈니스와 거리가 먼 행보들입니다. 페기는 투기사업으로 변질된 뉴욕 미술 시장을 보며 한탄합니다. 

 

 

 

 

 

Peggy Guggenheim/ 실용오디오

 

Peggy Guggenheim/NYCulture Beat

 

 

 

페기 구겐하임은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근현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고, 소개하고, 구입하면서 미술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습니다. 페기는 1976년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베니스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합니다. 81세의 페기 구겐하임은 자신의 집 정원 14마리의 라사 압소(Lhasa Apso) 애견 옆에 묻혔습니다. 구겐하임은 한 때 57마리의 라사 압소견들과 함께 살았다고 하네요. 1976년 그녀 사후  그녀의 소장품으로 베니스에 뮤지엄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The Peggy Guggenheim Collection)이 창설됩니다. 

 

 

 

 

 

Peggy Guggenheim/조글로

 

 

프랑스에 살고 있는 페기 구겐하임의 자손 7명은 한때 파리 법정에 구겐하임 재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구겐하임의 증손자이자 아트딜러인 산드로 롬니는 구겐하임이 페기 구겐하임의 컬렉션 그대로 베니스 팔라쪼에 전시할 것을 소망했지만, 구겐하임 측은 지속적으로 미술품을 사들여 거의 절반을 바꾸어 전시하며, 할머니가 애견들과 잠들어 있는 정원을 파티장소로 대여함으로써 품격을 떨어트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Peggy Guggenheim/yes24

 

 

 

 

 

 

페기 구겐하임의 딸 페긴 베일 (1925-1967)은 화가였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베긴은 몬드리안, 레제의 친구였던 프랑스 화가 장 엘롱과 결혼해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이혼 후 런던의 프란시스 베이컨 전시 오프닝에서 만난 영국인 화가 랄프 롬니와 재혼합니다.

 

Pegeen Vail Guggenheim/ Bridgeman images

 

Pegeen Vail Guggenheim/Visit Venice Italy

 

 

 

 

 

양아버지 막스 에른스트를 비롯, 이브 탕기, 앙드레 브레통, 마르셸 뒤상, 잭슨 폴락과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은 베긴은 MOMA를 비롯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에서 전시했습니다.  페긴은 1943년과 1945년에 엄마의 < 아트 오브 디스 센추리 갤러리>에서 열린 여성작가 31인전 'The Women'에서 프리다 칼로, 리크래스너, 도로시아 채닝 등의 작품과 함께 전시됐습니다. 평생 우울증에 시달려온 페긴은 41세에 마약중독으로 사망합니다. 랄프와 롬니 사이에 4명의 아들을 남겼고요.

 

 

 

 

미술을 사는 사람들,그들은 열정으로 사람을 매혹시킨다. /아트인사이트

 

 

 

 

페기는  오해와 손가락질에도 꿋꿋이 할 일을 했습니다. 마지막 영혼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예술을 사랑했고요. 예술 안에서 살다가 자신의 안목과 작품을 남긴 채 떠났습니다. 그가 유럽에서 구해내고, 미국에서 발굴한 예술은 인류의 자산으로 남았습니다. 우리가 피카소, 몬드리안, 폴록, 뒤샹, 칸딘스키의 이름을 잊지 않는 한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이름도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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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자국으로 가득한 혼돈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할까요? 누군가는 문득 우주를 떠올리며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고통만을 느낄 수도 있지요. 또는 '그림에서 꼭 무언가를 느껴야만 하는가?'라는 경지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소용돌이치는 내면을 떠안고 살았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1.28-1956.8.11)의 혼돈의 시간을 따라가 봅니다.

 

 

 

<Convergence>,1952/Jackson Pollock

 

 

예술가들을 향한  2차 대전의 파괴력은 1차 대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했습니다. 나치는 상상력마저 학살하려 했으니까요. 예술가들은 핍박을 받습니다. 전쟁 중 많은 예술가들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떠납니다. 우리들이 잘 알 고 있는  뒤샹, 샤갈, 칸딘스키, 달리 등 유럽을 한때 주름잡던 예술가들은 미국행 배에 오릅니다. 이들 무리를 이끌고 도움을 준 큰 손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페기 구겐하임(  Marguerite Peggy Guggenheim ,1898.8.26-1979.12.23)입니다. 미국인 페기는 부유한 가문의 상속녀였습니다. 그녀는 일찍이 유럽으로 건너가 화가들과 교류합니다. 미술 컬렉터로 명성도 쌓고요. 전쟁 중 페기는 쉰들러 리스트 작전처럼 예술가들이 미국 피난길에 오르는 걸 돕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페기는 뉴욕에 '금세기 미술관'을 오픈합니다. 그곳에서 자신과 함께 이 땅을 밟은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현대미술 중심지는 자연스럽게 파리에서 뉴욕으로 교체됩니다. 하지만 미국이 현대미술 랜드마크가 된 건 유럽 예술가가 뉴욕으로 건너와 활동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페기와 그의 동료들은 한 젊은 미국인 화가를 발굴하고 그에게 기회를 줍니다. 이 화가는 세상이 상상하지 못한 실험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미술계를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피카소와 맞먹는 슈퍼스타가 됐습니다. 전 세계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 젊은 예술가를 주목했습니다. 당연히 미국 예술의 위상은 눈부시게 치솟습니다. 

 

 

 

<Going West>,1934-1935,Jackson Pollock/Arthur.io

 

 

 

 

 

잭슨 폴록 스승 토마스 하트 벤튼 벽화<America Today>,1930-31/NYCulture Beat

 

 

 

폴록의 스승인 토마스 벤튼의 작품입니다. 미국 지역주의 화가였던 벤턴은 멕시코 벽화의 영향을 받아 거대한 화면으로 작품을 구성합니다.  잭슨 폴락은 그에게서 큰 화면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능숙하고 재빠른 붓터치를 배웠습니다. 

 

 

 

 

잭슨 폴록의 예술적 자양분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그는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살던  와이오밍은 허허롭고 광활한 지역이지요. 미국의 주중에서 가장 인구수도 적고요. 그 대신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품고 있을 만큼 경이로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4명의 형제들과 함께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에서 자랐습니다. 자녀 4명 중 잭슨을 포함한 3명이 예술가가 되었어요. 폴록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측량을 나가면서 네이티브 아메리칸(인디언) 문화를 접하게 됩니다. 또한 멕시코의 벽화가 두 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습니다.

 

 

 

미국 와이오밍 주/123RF

 

 

 

 

 

 

잭슨폴락의 액션 페인팅 스승,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David Alfaro Siqueiros<Our Present Image>,1947/Flickr

 

 

잭슨 폴락의 스승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 <Pormetheus>,1930/wikipedia

 

 

 

 

 

대공황 동안 프랭클린 디 루즈벨트 대통령은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예술공공사업'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폴록과 동생 샌포드는 직업을 얻게 됩니다. 이 계획을 통해 폴록,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 1883-1949), 빌럼 데 쿠닝( Willem de Kooning, 1904-1997) ,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와 같은 세대의 아티스트가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폴록은 1929년 뉴욕에 가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 시기 멕시코에서 벽화 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당시 멕시코 혁명이라는 열기로 뜨거웠고요. 벽화 운동도 혁명의 일부였거든요. 멕시코 벽화 운동을 이끈 화가는 프리다 칼로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 였습니다. 그는 민중봉기 등을 주제로 삼아 거대한 벽화를 그렸습니다. 디에고와 함께 벽화 운동을 이끈 화가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1896-1974)입니다. 시케이로스는 1930년대에 뉴욕으로 건너와 벽화작업을 이어갑니다. 폴록은 시케이로스의 조수가 됐고요. 시케이로스는 깡통에 물감을 담아 캔버스에 쏟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창조했습니다. 폴록은 생경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케이로스에게 큰 영감을 받게 됩니다. 훗날 그가 캔버스에 물감을 휘갈기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 건 우연이 아닌 거지요. 

 

 

 

폴록이 자양분으로 삼은 장르는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폴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에게 화두였던 무의식에 집착합니다. 캔버스 위를 걸으며 직관과 충동적 에너지로 이미지를 만들어낸 폴록의 작업 방식은 초현실주의 화법과 닮아있습니다. 와이오밍 출신답게 폴록은 인디언에게도 관심을 가집니다. 형형색색으로 염색한 모래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창조한 서부 인디언의 미술은 폴록의 인상에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멕시코,유럽, 인디언 예술을 골고루 받아들여 융합한 폴록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이 여정을 출발토록 만든 마지막 연료는 자기 자신이었죠. 폴록이라는 인간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도 어려워할 만큼 산만했습니다. 알코올 중독, 우울증, 강박증에 시달렸고요. 폭력성도 짙어 툭하면 싸움을 벌입니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잠들고, 아무 데나 소변을 갈기는 난봉꾼이었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오래 받았지만, 부글부글 끓는 폴록의 내면세계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자기 파괴적인 에너지는 그의 삶을 진창으로 끌어내립니다. 하지만, 캔버스 위에서만큼은 이 에너지가 창조 원동력으로 작동합니다. 이 우주에 오직 나 혼자만 있다고 여기는 인간처럼, 광기에 가까운 몰입속에서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속기술의 인물 형상>,1942/www. mycelebs.com

 

 

두 인물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열띈 토론을 하는 장면입니다. 미로, 피카소, 마티스의 영향이 보입니다. 몬드리안의 눈에 띈 이 작품으로 , 페기 구겐하임에게 "여태 본 작가 중 가장 흥미롭다."라고 말한 작품입니다. 우리 눈에 여전히 난해한 그림인데 말입니다. 

 

 

 

 

<Male and Female>,1942, 필리델피아 미술관, 펜실바니아,미국 /Wahoo Art

 

 

오른쪽에 남자의 형상이 직선적으로 길게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으로는 붉은 여성의 곡선으로 드러나고요.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선이 자동기술법의 호안 미로를 연상시키는 작품입니다.

 

 

 

 

 

 

<원을 자르는 달의 여인 The moon-woman cut the circle>,1943/www.mycelebs.com,조르주 퐁피두 센터

 

 

 

1943년에 제작된 <원을 자르는 달의 여인>은 폴록의 트레이드 마크로 알려진 '트레핑 기법'으로 제작한 전면 회화(올 오버 페인팅)의 바로 직전 단계의 작품입니다. 1940년에 제작된 <미친 달 -여인>과 1942년 그린 <달의 여인>과 함께 1943년 금세기화랑에서 열린 폴록의 첫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입니다. 

 

 

 

 

<벽화 Mural>,1943,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미술관/wikipedia

 

<벽화>는 페기 구겐하임이 집의 장식을 위해 주문한 거대한 사이즈의 작품입니다. 몇 달을 빈 캔버스를 바라만 보던  폴락이 하룻밤 사이에 광기의 모습으로 해치웠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그림입니다. 초기 폴락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주며 추상표현주의의 문을 연 중요한 작품입니다. 주제와 배경이 없이 올오보페인팅(all-over paint)으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만큼이나 극적이고 표현적입니다. <벽화> 작업 이후 폴락은 페기 구겐하임이 운영하는 <금세기화랑>에서 1943년 개인전을 갖습니다. 페기 구겐하임은 거대한 크기의 이 작품을 1951년 아이오와 대학 미술관에 기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WAbVpkV0jQ

 

 

 

 

 

 

<암늑대>,1943,뉴욕 현대 미술관/www. mycelebs.com

 

 

 

<암늑대>는 미술관에서 팔린 첫 작품으로 이 시기의 대표작입니다. <암늑대>는 로마 건국신화의 쌍둥이에게 젖을 먹여 키운 신성한 존재로 무의식 속에 내재된 신화적인 이미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두 마리의 소가 하나의 붉은 화살에 꽂혀 있습니다. 금세기화랑의 개인전에 출품된 이 작품을 '현대미술관'초대관장이던 알프레드 바가 구입했고, 알프레드 바는 폴락의 작품에 "액션 페인팅"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Eyes in the Heat>,1946, 베니스 페기구겐하임 컬렉션/Guggen heim.org. /완전한 추상표현주의 화풍으로 나아가기 직전에 그린 <열기 속의 눈> 이때까지 드리핑(물감 뿌리기)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유럽 예술가를 미국으로 데려오고, 1942년 뉴욕에 <금세기 미술관>을 연 페기 구겐하임은 미술계 큰 손이 됩니다. 페기의 비서가 주목할 만한 젊은 화가가 있다고 귀띔합니다. 잭슨 폴록이었죠. 페기는 약속을 잡고 폴록 작업실을 찾아갑니다. 바깥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버린 플록은 약속 시간을 한참 넘겨 작업실로 옵니다. "애송이 주제에 나를 바람맞히다니!" 페기는 폴록에게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는 폴록 그림에서도  큰 매력을 못 느꼈거든요. 폴록 작품은 아직 추상표현주의로 나아가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피카소가 개척한 입체주의 화풍 영향을 받은 티가 역력했거든요.

 

 

 

 

하지만 뒤샹은 의견이 달랐습니다. 화장실에 있는 남자 소변기를 작품으로 내고 제목을 <샘>이라 표현한 바로 그 뒤샹 맞습니다.  뒤샹은 폴록의 그림을 보고 "나쁘지 않군"이라고 말했거든요. 페기가 유럽에 머무는 동안 그에게 예술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알려준 인물이 뒤샹입니다.  그런 뒤샹이 폴록에게 뭔가를 발견하자 페기도 태도를 바꾸고 이 젊은 예술가를 후원하기로 합니다. 페기는 폴록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한적한 곳에 집을 얻어줍니다. 매달 일정한 생활비까지 지원하고요.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폴록을 최대한 어르고 구슬리며 예술에 집중하도록 돕습니다. 페기는 1943년 <금세기 미술관>에서 폴록 개인 전시회를 열어줍니다. 폴록이 뉴욕 미술계에 공식 데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페기의 후광 덕분에 폴록은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지만, 이 전시회에서 폴록은 그림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합니다. 

 

 

 

 

"빌어먹을  피카소! 그놈이 다 해 처먹었어."

 

 

데뷔전에서 실망한 폴록은 별안간 피카소를 향해 불만을 쏟아냅니다. 물론 폴록은 피카소를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지요. 실컷 저주합니다. 피카소는 죽을 때까지 회화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실험을 했거든요. 천재 중의 천재였고 그리고 거장이 됐습니다. 폴록은 자신이 발버둥 쳐봐야 피카소 손바닥 안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페기라는 든든한 후원자까지 등에 업었지만 폴록의 불안감은 커져갑니다. 

 

 

 

<아른아른 빛나는 물질>,1946, 뉴욕 현대 미술관/아트윈스-세계미술전문점

 

 

 

그러다 사건이 발생합니다. 1947년 어는 날 폴록은 이젤에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충동을 느꼈고, 캔버스를 작업실 바닥에 눕히게 됩니다. 폴록은 캔버스에  물감을 들이 부었습니다. 그렇게 현대미술의 신화가 탄생합니다. 

 

 

 

잭슨 폴락의 구원자 리 크래스너(Lee Krasner)/NYCulture Beat

 

 

 

잭슨 폴록의 아내 Lee Krasner, <self-portrait>,1929/ The Metropolitan Museument of Art

 

 

 

잭슨 폴록의 행운의 여신 으로 아내가 되는 유태계 화가 '리 크레이스 너'입니다.  그녀는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러시아계 유대인 화가로, 폴락을 만나고 그의 재능을 알아봅니다. 그녀는 자신의 화가로서의 야망도 접고 오로지 폴록의 뒷바라지에만 헌신합니다. 당시 크래 이스너의 스승 한스 호프만이 칭찬했을 만큼 그녀 역시 뛰어난 화가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4살 아래 폴락에게서 천재성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에 열중하기보다 폴락의 작업을 지원하면서 '미시즈 폴락'으로 머무는데 만족합니다. 1946년 11월 폴락은 리 크래스너와 결혼하고 롱 아일랜드 이스트 햄프턴의 작은 농가로 이사를 합니다.  그의 작품이 대부분 사이즈가 크기 때문에   창고같은 커다란 작업실이 필수였던 거죠.

 

 

 

 

<Full Fathom Five>,1947/Jackson Pollock Paintings, (열쇠, 동전, 담배, 성냥, 손톱 등 사용한 다양한 표현)

 

 

 

1947년부터 폴락의 이전 작품과는 조금 다른 표현들, 가늘고 굵은 세분화된 선들을 교차시킨 표현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뿌리는 기법, 혹은 액션 페인팅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Number 1A,1948>,1948/MoMA(뉴욕현대미술관)

 

 

 

 

 

이전의 작품들과 다른 점은 작품의 전체성에 있습니다. 기법이 그림을 창작하는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모든것이 됩니다.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할 때는 무작위적인 표시에 불과하던 기법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의도된 다양한 움직임으로 처음 생겨나는 시점에서만 우연성을 띨 뿐, 최종적으로는 작가의 고심 어린 결정이 반영되게 됩니다. 

 

 

 

<Number 13A:Arabesque>,1948/Flickr

 

 

 

폴락은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동부와 서부를 자주 오갔습니다. 그때 보았던 서부의 인디언들이 그린 모래 그림에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주로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막대기로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깡통에 물감을 넣고 휘두르며 물감을 흘리며 작품을 합니다. 아이들이 장난쳐 놓은 듯한 이 그림이 스트레스 확 풀리는 느낌을 받는 건 왠지 모르겠네요. 

 

 

 

 

<넘버 19>,1948/Artnet

 

잭슨 폴락의 작품들은 미리 구상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 대부분 제목에 숫자를 붙여서 구분합니다. <넘버 19>는 다른 작품에 비해 크기가 매우 작지만 매우 뛰어난 조형성을 가진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특별히 강조한 부분이 없이 물감을 흘리고 끼얹고 서로 엇갈린 화면의 밀도가 깊고 탄탄합니다. 

 

 

 

 

 

1949년 8월호 라이프지는 잭슨 폴록을 집중 조명한 기사를 실었다./매일경제

 

 

 

추상표현주의 VS액션 페인팅 , 폴록이 그림을 그린 방식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거대한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캔버스 위를 종횡무진하며 말 그대로  물감을 뿌렸습니다. 당연히 결과물은 혼돈이죠. 무엇을 그린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거든요. 어린아이가 낙서를 한 듯합니다. 

 

 

<Yellow-Red-Blue>,1925 by Wassily kandinsky

 

 

 

미술계는 폴록의 그림을 '추상표현주의 '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폴록이전에도 추상화를 그리던 화가들은 있었습니다. 칸딘스키가 대표적이지요. 칸딘스키는 회화가 어떤 대상을 재현해야 한다는 의무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구체적인 피사체 대신 원, 면, 선처럼 순수한 도형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은 칸딘스키 그림에서도 최소한 사각형, 삼각형, 원통이라는 도형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동기술법 대가/조글로

 

폴록의 그림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그는 도형이라는 회화 기초 언어마저 거부하고 물감을 덕지덕지 뿌립니다. 관객들은 폴록의 추상화 앞에서 직관적으로 압도됩니다. 그림 크기가 벽화 수준으로 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감 흔적이 전부인 그림 내용에는 혼란을 느꼈습니다.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평론가들이 나설 차례입니다.

 

 

 

 

페기 구겐하임&잭슨 폴록/아트인사이트

 

 

 

폴록을 스타로 만든 일등 공신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16-1994.5.7)입니다. 그는 뉴욕에서 활동한 비평가 중 가장 영향력이 센 거물이었습니다. 그린버그 머릿속엔 '회화는 회화만의 순수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이상향이 있었습니다. 폴록을 만나기 전까지 그린버그에겐 피카소가 영웅이었거든요. 피카소는 원근법이라는 족쇄를 파괴한 혁명가였기 때문이죠. 원근법은 회화가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기법입니다.

 

 

 

파카소는 생각합니다. "왜 그림이 세상을 그대로 담아야 하지? 세상은 3차원이고 캔버스는 2차원인데 말이야." 그리고 원근법을 버렸습니다. 우리 현실 세계에서 한 사람을 볼 때 좌, 우, 앞모습을 동시에 볼 수 없지만, 피카소 그림에선 볼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여러 방향에서 본 사람의 모습을 한 화면에 그렸습니다. 조각난 파편을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인 모양새로 말이죠.  세상은 이런 기법을 입체주의 (큐비즘)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피카소 그림엔 어쨌든 피사체가 등장하고 배경도 있습니다. 피카소 그림에서도 어느 정도 3차원적인 공간감이 느껴지고요. 그러나 폴록 그림엔 피사체도 배경도 없습니다. 완벽한 평면입니다. 그린버그는 폴록 그림처럼 물감 배열로만 이뤄진 순수한 2차원 세계가 회화의 본질이라 여겼습니다. 그린버그는 폴록과 그의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예술의 미래라고 선언합니다. 

 

 

Jack Pollock/ 조글로

 

 

 

그린버그와 이름이 비슷한 또 다른 스타 평론가 로젠버그도 폴록에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는 그린버그와 달리 폴록의 그림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 대신 작품을 만들어내는 폴록의 '행위'에 중점을 둡니다. 화가의 고민, 에너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 등 예술가의 운동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봤습니다. 작품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 어떤 흔적일 뿐이라고 주장하고요. 독특한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 낸 폴록의 작업은 로젠버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으로 폴록을 이해하려 했고, 누구의 이론을 적용하든 폴록은 그에게 혁명가로 비쳤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온 힘을 다해 폴록을 영웅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2차 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미국은 유럽 강대국을 제치고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합니다. 하지만 예술에서는 여전히 삼류 취급을 받고 있어 죠. 문화 패권마저 쥐고 싶었던 미국은 이 땅에서 나고 자란 토종 스타 예술가가 필요했습니다. 당연히 잭슨 폴록이 최적 후보였지요. 1949년 미국 유명 잡지 '라이프'는 8월호에서 대중적으론 무명에 가까웠던 잭슨 폴록을 집중 조명합니다.  그는 생존하는 미국인 화가 중 가장 위대한가?라는 제목의 기사로 폴록을 소개하고 치켜세웁니다. 미국 전역에 잭슨 폴록이라는 이름이 퍼졌습니다. 미국 정부도 전시회 개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폴록의 비상을 도왔습니다. 추상표현주의는 유럽 예술을 한물간 유물로 만들 만큼 위세가 커졌습니다. 폴록 뒤를 이어 '추상표현주의 ' '액션 페인팅'타이틀을 단 예술가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Jackson Pollock/허프포스트 코리아

 

단기간에 명성을 얻어버린 탓인지 폴록 자신조차도 어리둥절해했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미국이 전략적으로 육성한 화가라고 폄하하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이젤이 아닌 바닥에 캔버스를 두고 마치 춤을 추는 듯 움직이며 작품을 완성시키는 '액션 페인팅'과 그 과정 속에서 페인트를 튀기도 붓는 '드리핑 기법'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파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인트를 튀기고 뿌리는 방법 자체는 미술계에서 자주 쓰이던 기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뉴욕 현대미술과 큐레이터 윌리엄 루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제는 뿌리거나 쏟기, 흘리기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기법을 가지고 폴록이 무엇을 했느냐입니다.

 

 

 

 

 

액션페인팅을 하는 폴록의 모습/www.galeriemagazine.com

 

 

폴록은 액션 페인팅을 통해 작품 자체가 아닌,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중시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그 자체의 순수한 의미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는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무의식을 중요시하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캔버스 위에서 한 손에는 페인트를, 다른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역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동안 그는 순수한 창조를 위한 무의식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무의식이 나를 표현하게 한다.

 

 

 

 

폴록의 예술 신념은 완고했고, 관념적인 예술의 틀을 부수었던 그는 자신만의 추상회화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액션페인팅'과 '드리핑 기법'의 개념을 완성시켜 다른 추상표현주의 작가들로부터 창의적인 접근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드리핑 기법으로 작품을 만드는 폴록/나무위키

 

바닥에 놓은 캔버스에 페인트를 뿌려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 기존의 이젤에 세워지는 서양 전통의 기법에 비해 그림 전체를 다양한 각도에서 그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올 오버 페인팅"과 "액션 페인팅"이라고도 불리며 전신을 사용하여 페인트를 두드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그림 속에 있을 때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내가 어떤 행위를 저질렀는가를 알게 되는 것은,
그림과 친숙해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한 뒤에야 가능해진다.
그림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니기 때문에 
나는 그림을 고치거나 이미지를 부수는 일에 대해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런 식으로 그림이 완성되기를 허용할 뿐이다.  
나 자신과 그림의 접촉이 끊어지는 경우는 
결과가 엉망진창으로 나타날 때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림과 나 사이애 서로 주고받는
완벽한 조화 관계가 성립되며,
이때 그 그림은 괜찮은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일지 중에서 (잭슨 폴락)-

 

 

 

 

https://www.youtube.com/watch?v=8PQfMd3Vv-g

 

 

 

 

 

 

 

 

 

<NO.5>,1948/wikipedia

 

 

 

회색, 갈색, 흰색 및 노란색 페인트가 어지럽게 뿌려져 있는 이 작품은 2011년 4월까지 역사상 가장 비싼 그림이었던 폴록의 <NO.5>입니다. 2006년 경매에서 데이비드 마르테네즈에게 약 1억 6540만 달러에 팔리게 되면서 당시 최고 기록을 세웠지만 2017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둥이가 약 4억 5030만 달러를 기록하면서 자리를 양보하게 됩니다.

 

 

 

<NO.5> 작품은 1949년 예술가  알폰소 A. 오소리오가 1500달러에 이 작품을 구매하자 그의 파트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것에 돈을 썼느냐"라고 반응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흔히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대표하는 예시로 폴록의 작품이 쓰이는 것처럼 당시에도 그의 예술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비평가들은 그를 조롱했습니다. 반면, 오소리오처럼 폴록의 창조성을 칭송하던 사람도 존재했죠. 이렇게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Autumn Rhythm>,1950/wikipedia

 

 

 

갈색, 검은색, 흰색, 회색의 역동적인 물감 표현이 극에 달한 폴록의 <가을 아침>입니다.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그림으로 행위의 순수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폴록의 가치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칠한 모든 선과 점들은 어떠한 형태라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불규칙합니다. 그는 나무 작대기나 붓을 이용해 페인트를 떨어뜨리거나 통째로 부어 어떠한 질서도 없이, 무의식적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작품을 완성합니다. 가로 266.7cm 세로 525.8cm로 폴록의 작품 중 가장 크기가 큰 작품이기도 합니다. 

 

 

 

 

<넘버 1, 라벤더 안개>,1950, 워싱턴 국립 미술관 미국 워싱턴 D.C/에덴아트

 

 

 

 

 

폴록의 명성을 굳혀준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길게 늘어진 희고 검은 선들과 짧고 선명한 방울들, 활처럼 휜 선과 흩뿌려진 선들, 에너멜 물감의 두꺼운 질감의  반점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폴락의 친구이면서 예술 비평가인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라벤더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지만'그림이 뿜어내는 분위기를 반영하기 위해 <라벤더 안개>라는 제목을 제안했습니다. 이 그림은 하얀색과 파란색 노란색, 회색, 적갈색, 장밋빛 분홍색 및 검은색 물감의 변주로 구성되었습니다. 

 

 

<Parana 풍경, 파란 막대기들 넘버11>,1952, 내셔널 갤러리, 오스트레일리아/TRiCERA ART

 

 

1947-1951년 잭슨 폴락의 작품은 절정을 이루었고 그 이후 그의 그림페인팅은 초기 작품처럼 형상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엘로우 아일랜드 Yellow Islands>,1952,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 갤러리/Tate

 

 

물감을 뿌리는 대신 부어서 물감의 얼룩이 흐르게 한 작품으로 뿌리기와 조금 다른 폴락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 보는 단계로 보이는 작품입니다. 1951-1954년 ,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작품에 대한 격렬한 고뇌를 하던 시기입니다. 

 

 

 

폴록은  한순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됐습니다. 하지만 피폐한 삶은 그대로였습니다. 폴록의 초상화를 사려는 컬렉터가 줄을 섰습니다.  폴록은 한 군데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닥에 내려놓은 캔버스를 다시 이젤에 올려놓고 새로운 장르의 그림을 그리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폴록에게 기대한 건 추상화뿐이었습니다. 한때 피카소를 넘어서지 못하리란 공포에 시달렸던 폴록은 이번엔 자신이 쌓은 벽에 부딪힙니다. 자신의 모든 작품이 새로워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던 폴락은 점점 술에 의지하게 되고 무절제한 생활로 정신분열로 심해집니다. 

 

 

 

 

<심연 The Deep>,1953/Artchive

 

 

유채색보다는 무채색의 대비가 눈에 돋보이는 이 작품은 폴록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 몇 년 전에 그린 작품입니다. 알코올 중독으로 피폐해진 그는 1950년대부터 색을 피하고자 했으며 이는 폴록의 심리상태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그는 자신의 화풍이자 싱징이었던 드리핑 기법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그동안의 작품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스타일을 보입니다. <심연>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그림의  중심에 위치한 검은 구멍이 우리를 깊은 내면으로 끌어당기는 듯합니다. 이는 폴록 자신이 처한 슬픔을 드러내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그의 인생의 변화가 작품에까지 비추어졌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랫동안 그림을 못 그릴 정도로 절망에서 허우적거리고 술을 퍼마셨습니다. 폭력성, 우울증, 강박증이 다시 심해집니다. 1956년 8월 폴록은 술에 취한 채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힘껏 밟으며 나무로 돌진합니다. 시속 120km로 길가의 자작나무를 들이박고 즉사합니다. 그렇게 폴록은 44세 나이로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의 사후  아내 리 크리스 너는 장례를 치르고 잭슨 폴락의 작품을 모두 박물관에 기증합니다. <폴과 크리스 너> 재단을 만들어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고요. 미국은 '천재 예술가의 요절'이란 서사를 적절히 이용했고, 폴록을 아예 신화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날 폴록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화가로 꼽힙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3Uj_HAAvbk

 

 

 

 

 

 

추상표현주의는 유럽 중심의 미술이 미국으로 옮겨지던 1940-1950년대에 일어난 가장 미국적인 미술 양식입니다. 잭슨 폴락의 사망은 곧 추상표현주의의 몰락을 의미했고, 추상표현주의의 자리에는 구체적인 형상을 앞세운 '팝 아트(POP ART)가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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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gian Tervuren Dog/Getty Images

 

 

 

 

원산지:벨기에

체고:56-66cm

체중: 20-30kg 중형견

 

 

 

벨기에 셰퍼드 도그 테뷰렌(Belgian Shepherd dog Tervuren)의 털은 컽털은 길고 직선적이며 풍성합니다. 모질은 중간 정도의 뻣뻣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속털이 매우 조밀합니다. 특히, 기온이나 기후의 높낮음이 적응력이 강하지요. 머리와 귀의 외부와 다리 밑부분의 털은 짧습니다. 장식털은 목 주변에 여성복의 칼라 같이 특히 길고 풍성합니다. 앞다리의 뒷부분에는 긴 장식털이 있고요. 뒷부분에는 특히 길고 풍성한 털로 덮여 반바지 입은 듯한 모습입니다. 꼬리는 길고 두터우며 풍성한 털로 덮여 있습니다. 털의 색깔은 검은색입니다. 전체적으로 검습니다.

 

 

 

 

 

 

 

 

 

FPS Foreigh Affairs/Belgium

 

 

 

 

벨기에 세페드(Belgian Shepherd)는 '벨기에 쉽독(Belgian Shepdog) 또는 시에우 드 벼르지 벨지(Chien de Berger Belge)라고도 알려져 있는  중간 크기의 목축견입니다. 주로 단일 품종으로 간주되지요. 검은색의 털이 긴 그로넨달(Groenendael), 엷은 활갈색의 거친 털을 가진 라케노이즈(Laekenois), 엷은 황갈색을 띤 짧은 털의 말리노이즈(Malinois), 그리고 황갈색의 긴털을 가진 테뷰렌(Tervuren)등 4개 품종으로 구분됩니다.

 

 

 

Belgian Tervuren Dog/Daily Paws

 

 

 

 

벨기에 세퍼드 도그 테뷰렌(Belgian Shepherd dog Tervuren)은 벨기에 셰퍼드 도그 네 가지 견종 가운데 하나입니다.

"벨지안 테르브(Belgian Terv)"라고도 부르지요. 벨지안 쉽독 가운데 털이 길고 검은색이 섞이지 않은 것을 골라 혼합 교배하여 탄생했습니다. 테뷰런(Tervuren)이라는 이름은 처음 이 견종을 사육한 벨기에 수도인 브뤼셀(Brussels) 교외의 작은 마을인 테뷰렌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품종은 서유럽 전역에서 발견되는 흔한 종류의 양치기 개(Shepherd dog)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부비에 데 아르덴(Bouvier des Ardennes), 더치 세페드 도그(Detch Shepherd Dog), 그리고 저먼 셰퍼드 도그 (German Shepherd Dog) 등과 같은 현대 품종을 포함하고 있고요.

 

 

 

Belgian Tervuren Dog/ www.hdcuisines.com

 

 

19세기말에 이르러서야 품종 클럽이 결성되어 품종을 표준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벨기에 셰퍼드 종은 목축견으로서 역사적 역할 외에도 보조견, 반려견, 탐지견, 경비견, 안내견, 경찰련, 그리고 수색 및 구조견 등으로 활용 돼왔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군대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두 개의 세계대전에서 모두 활약했거든요. 그들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군대에서 다양한 역할의 임무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중세 무렵부터 벨기에 세페드 도그 테뷰렌은 목양견, 경비견, 그리고 군용견 등으로 사육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는 구조견이나 마약탐지견, 경찰견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uXVLvNDt9dA

 

 

 

 

벨기에  세퍼드 도그 테뷰렌은 벨기에 태생으로 강인합니다. 일 잘하는 양치기 개들로 소문이 나 있죠. 중세 시대에는 다소 거친 견종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 개들의 유형은 가축보호견 능력에 중점을 두고 번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 잘하는 암캐의 새끼를 원하는 주인들은 되도록이면 가까운 혈통 중에서 뛰어난 양치기 개를 골라 자신의 암캐와 교배시켰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중 4종만이 남아 있습니다. 벨기에 셰퍼드 도그는 벨지안 쉽도그 테뷰렌(Belgian Shepherd dog Tervuren)을 비롯해 벨지안 쉽도그 그로넨달(Belgian Sheepdog Groenendael), 벨지안 쉽도그 라케노이즈(Belgian Sheepdog Laekenois), 벨지안 쉽도그 말리노이즈(Belgian Sheepdog Malinois) 등과 함께 4종으로 분류됩니다.

 

 

이 이름들은 그들이 각자 제일 유명했던 지역의 이름을 본따 지은 것입니다. 그 기준은 털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일합니다. 파겔씨의 기록에 의하면 이 4가지 종류 중 말리노이즈(Malinois)가 제일 먼저 타입을 확립했다고 합니다. 최고의 사역견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이 종을 제외한 나머지 3종은 한 때 "다른 말리노이즈 변종"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목탄 같은 황갈색의 털을 가진 말리노이즈(Malinois)는 말리네 토종의 뛰어난 목양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말리노이즈는 훈련이 용이하고 강한 사역견으로 모든 작업을 능숙하게 처리하며 기후가 좋지 않은 곳에서도 잘 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 속에서 그로넨달(Groenendael)은 부상자들을 찾아내고 전선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조국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이런 훌륭한 활약상으로 그로넨달은 전쟁에 참가하였던 미국 군인들에 의하여 북미 대륙에 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그로넨달은 현재 전 세계에서 열리는 많은 전람회에 참가하고 있고요. 이들은 복종을 잘하고 또한 가족과 잘 어울리는 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DFpOn9zVEM

 

 

 

벨기에 세퍼드 도그 테뷰렌(Belgian Shepherd dog Tervuren)의 성격은 총명하고 활달하며 민첩하면서 기민하고 용감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필 줄 알고 질투심과 소유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길들이기 쉽습니다. 맡겨진 일은 능숙하게 잘 처리하고요. 주인에게 복종심과 충성심을 보입니다. 낯선 사람에게는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고요. 털은 정기적으로 빗질을 해주어야 하고 먹이는 적당량을 줍니다.  활동적인 개이므로 충분한 운동과 몰두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벨기에  세퍼드 도그 테뷰렌(Belgian Shepherd dog Tervuren)은 주로 가축 보호견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사람과 주인의 재산을 보호하려는 능력이 필수지요. 경계심이 강하고 주의력이 깊습니다. 명령을 수행하며 항상  움직이지요.  이 견종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가장 친밀하며 친근합니다. 사람의 주의를 끌려는 질투심이 강하고  소유력이 강합니다.

 

 

 

 

벨기에 세퍼드 도그 테뷰렌의 첫인상은 좋은 균형의 사각형 개로 그 외형이 우아합니다. 튼튼하고 민첩하며 좋은 근육질을 가진 기민하고 활달한 견종이지요. 수캐는 암캐보다  좀 더 장엄하고 웅장합니다. 암캐는 여성스럽고요. 머리는 깨끗하고 튼튼하며 전체 크기는 몸의 크기에 비례를 합니다.  눈빛은 영리하고 호기심 많습니다. 눈은 갈색이나 선호되는 색은 진한 갈색이고요. 귀는 삼각형으로 탄탄하게 서 있습니다. 다만 귀의 밑둥치는 눈의 중앙지점이하로 내려오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귀가 하운드처럼 늘어져도 안되고요.

 

 

Belgian Tervuren Dog/wide open spaces

 

 

 

 

만약 당신이 활발하고 충성심 강한 강아지를 찾고 있다면 벨기에 테뷰런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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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최초의 본격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는 1593년 7월 8일 로마에서 어머니 프르덴 시아 디 몬토네(Prudentia Montone)와 유명한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Orazio Gentileschi 1563-1639)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 자녀 중 맏이인 젠틸레스키는 어려서부터 미술에 대한 흥미와 재능을 보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오라치오는 로마 화단 최전선에서 도발적인 화가인 카라바조(Caravaggio)의 친구였습니다.  아버지는 카라바조와 함께 한 때 로마 거리에서 다른 화가를 비방하고 헛소문을 퍼뜨린 혐으로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12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십니다. 그녀 나이  13살이었을 때 카라바조는 살인에 연루되어 로마에서 나폴리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후 아버지가 혼자서 네 남매를 키우게 됩니다. 당시 미술학교 입학은 남자들의 전유물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 밑에서 물감을 섞고 안료를 빻으며 자연스레 그림을 배우게 됩니다.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녀가 17세에 그린 그림이 <수산나와 두 노인들>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도움을 조금은 받았겠지요. 그래도 그 표현만큼은 수습생 수준 이상입니다. 

 

 

 

 

내 딸은 견줄 만한 화가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솜씨가 뛰어나다.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xio Gentileschi)-

 

 

 

 

 

 

<수산나와 두 장로>,1610,17세 작품, 포머스펠덴의 쇠보른 가 소장/wikipedia

 

 

 

벌거벗은 한 여인이 고개를 돌리고 남자들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검은 머리 남자는 빨간 망토의 남자에게 귓속말로 속삭이고 있고요.  빨간 망토의 남자는 여인에게 뭔가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그 말에 진저리를 치고 있죠. 이 작품은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1593-1652)가 그린 <수잔나와 두 노인들>이라는 성서 이야기입니다. 

 

 

 

수산나와 요아킴은 유대인 부부입니다. 남편 요아킴이 유명인사라 집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그중에는 유대인 재판관 두 명도 끼어있습니다. 이 두 재판관은 아름다운 수산나를 탐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손님들 모두가 돌아가고 수산나가 정원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두 노인은 수산나에게 다가가 성관계를 요구하지요. 만일 거절할 경우 젊은 남자와 간통했다고 고발하겠다며 협박합니다. 

 

 

수산나는 거짓이 두려워 겁탈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거절합니다. 결국 이들의 모략에 당해 간통죄로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중 수산나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절실한 수산나의 기도가 닿았는지 , 성령이 어린 다니엘의 몸에 내려왔고, 다니엘이 진실을 밝혀 수산나의 누명이 벗겨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복제됩니다. 여자의 누드가 금지되던 당시, 성경의 이야기를 매개로  여자의 누드를 그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지요. 정원 풍경 속 여자의 누드는 그림을 매입하는 사람도 , 그리는 사람도 모두 남자였던 사회에서 최고의 관심거리였지요. 희생자인 수산나의 고통은 고려되지 않은 채 화가들에 의해 두 노인을 유혹하는 여자로, 때로는 두려움에 벌벌 떠는 연약한 모습으로 재현되기 일쑤였습니다. 여자의 위치가 아버지와 남편의 재산의 일부로 여겨지던 때입니다. 인권이란 말은 꿈조차 꾸지 못 하던 시대이지요. 

 

 

하지만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수산나는 이 상황이 몹시 불쾌했습니다. 여자의 누드에만 초점이 맞춰진 여타의 그림들과는 달리  그녀의 그림속 수잔나는  수치심과 저항감이 온몸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다른 화실의 견습생인 기로라모 모데네제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습니다.  남몰래 아르테미시아를 탐하던 아버지의 친구이자  화가인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 1578-1644)가  사사건건 이들을 방해합니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수산나와 두 노인들>에서 검은 곱슬머리의 남자가 제목과 다르게 노인이 아닌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수산나의 모습에 자신이 느끼는 불쾌감을 , 두 노인 중 한 명의 모습에 자신을 탐하는 타시(Tassi)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선배화가인 틴토레토(Tintoretto)의 <Susnnna and the Elders>(1555-1556)그림과 비교해 보시면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게 될 겁니다. 

 

 

 

<Susanna and the Elders>,1555-1556, Tintoretto/wikipedia

 

 

 

 


 

 

당시 타시는 아버지 오라치오와 퀴리날레 궁 추기경실에 들어갈 프레스코화를 공동 제작 중이었습니다. 타시는 오라치오에게 딸의 그림 선생이 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원근법에 능했던 타쉬가 그녀를 지도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싶어 아버지 오라치오는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수업을 핑계로 아르테미시아와 자연스레 만날 일이 많아진 타시(Tassi)는 마침내 그녀를 겁탈합니다. 타시는 이미 유부남이었지만 결혼을 약속하며 그녀를 다독이지요. 그러나 그 약속은 차일피일 미룬 채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도 참아왔던 아버지 오라치오는 그를 강간죄로 고소합니다.

 

 

알고 보니 타시(Tassi)는 상습범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강간해서 그 죄를 모면하기 위해 결혼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내의 어린 여동생(13세)도 강간해 임신까지 시켰고요. 아내의 여동생과의 성관계도 근친에 해당돼 벌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타시(Tassi)는 아내를 청부 살해해 달라고 의뢰합니다. 아내를 죽이고 처제와 결혼하는 것으로 죄를 면하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그 와중에 오라치오의 그림을 훔치려던 계획이 탄로 납니다. 놀랍게도 이게 실화냐 싶지만 사실입니다. 로마의 재판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재판의 쟁점은 타시(Tassi)가 '그녀를 강간했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순결했느냐'였습니다. 여성의 순결이 재산으로 간주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순결을 입증하기 위해 산파들 앞에서 부인과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타시(Tassi)와 대질 상태에서 '시빌레'라는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고요.

 

 

 

시빌레는 손가락 마디가 으스러질 때까지 조이는 고문입니다. 고문이 끝났을 때 그녀의 손은 시퍼렇게 부어올라 마비됐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에서 증언을 번복하지 않으면, 그 말은 진실로 입증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아르테미시아는 풀려났고 타시(Tassi)는 유죄가 확정이 됩니다. 어이없게도 타시의 후원자들이 힘을 행사해 타시(Tassi)는 금세 풀려납니다. 아르테미시아는 피해자이지만 재판을 통해 더 큰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 사건 이후 아르테미사아가 그린 그림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입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20/wikipedia

 

 

 

 

카라바조 Caravaggio<Judith Beheading Holoferness>,1598-1599/wikipedia

 

 

유디트는 성경의 외경(Apocrypha)중 유딧서(Book of Judith)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기원전 2세기 이스라엘 베툴리아(Bethulia) 지방의 과부였죠. 당시 베툴리아 지방은 아시리아의 홀로페르네스 군대에 의해 점령됐습니다. 유디트는 사절로 위장하고 적진에 접근합니다. 홀로페르네스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지요. 축제 중 홀로페르네스가 천막으로 들어가 술에 취해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을 때, 유디티와 그의 시녀 아브라는 기회를 엿보다가 홀로페르네스의 칼로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유디트는 홀로 페르네스의 목을 몰래 고향으로 가져갔고요.  그의 죽음으로 아시리아군은 퇴각하게 됩니다.  베툴리아에 다시 평화가 찾아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명작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재판 건으로 이래저래 마음이 상했던 아르테미시아가 내놓은 첫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공개되자  로마는 다시 한번 떠들썩해졌습니다. 목을 베는 유디트의 얼굴은 아르테미시아와 홀로페르내스의 얼굴은 타시(Tassi)와 판박이였기 때문입니다. 화가들이 제 얼굴을 성서 그림이나 역사화에 그려 넣은 건 르네상스 이후 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주인공이면서 이처럼 잔인한 역할로 그려진 적은 없었지요.

 

 

아르테미시아가 유디트에 자신을 투영해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함으로써, 아르테미시아는 이제가지 남성 중심적이었던 역사와 종교의 주제와 위계를 무너뜨린 최초의 여성이 됐습니다.  그림 속  유디티는 적장의 목을 베는 데에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보는 이마다 넋을 잃을 만큼 빼어났다는 성서 속 유디트의 아름다움을 지혜, 용기, 자신의 의지를 실행하고 관철할 수 있는 결단력 그리고 건강한 육체로 해석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이 극적인 이야기는 카라바조, 루벤스와 같이 바로크 시대 미술가들이 즐겨 그리던 주제입니다. 그들의 작품들과 달리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유디트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를 유혹해서 함정에 빠뜨리는 여자'유디트는 보는 남자들의 입맛에 맞게 재생되어 왔습니다. 살인을 저지르기에는 유약한 자세이거나, 아무것도 몰라요'하는 순진한 얼굴로 말이죠. 장군의 목을 베면서까지 관능적인 표정을 짓는 유디트의 그림도 있었으니까요.

 

 

아르테미시아가 표현한 유디트는 단호합니다. 마치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한치의 망설임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놀라울만치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장군이 꼼짝할 수 없게 위에서 짓누르는 하녀를 보세요.  저 정도 압박이 아니면 장수를 당할 수 없겠죠. 그리고 유디트의 힘이 잔뜩 들어간 팔뚝과  장군의 목에서 솟구치는 동맥혈은 현장감까지 느껴져 더 끔찍하게 보입니다.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에 한 가지 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타시(Tassi)를 그려 넣은 점입니다.  유디트에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넣고요. 이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죽을 듯이 괴로웠을 테지요. 그녀의 절망과 고통과 분노가  얼마큼 극에 달했는지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돼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의 아픈 서사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다른 거장들의 같은 작품은 기억조차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하고 힘이 셉니다.

 

 

 

아버지 오라치오는  재판이 끝나고 한 달 만에 아르테미시아를 피렌체에 살고 있는 피에트로 안토니오 스티아테시와 결혼시킵니다. 재판은 이겼지만 딸을 향한 주변의 시선은 차갑고 따갑습니다. 남편감 피에트로 역시 화가였습니다. 실력은 미미해 수습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죠. 낭비가 심해 빚더미에 앉아 있었고요.

 

 

 

그의 빚을 청산해 주는 조건으로 아르테미시아는 그와 결혼합니다. 도망치듯 결혼했지만, 다행히 피렌체로 간 아르테미시아는 짧지만 인생의 행복을 맛봅니다. 남편 피에트로는 자신의 소비를 충족시킬 만한 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아르테미시아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름도 지난날의 아픔을 지우고자 아르테미시아 로미로 바꾸게 되고요.

 

 

 

남편 피에트로는  주문을 받아오고 아르테미시아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르테미시아의 이름이 알려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초상화나 정물화는 물론 역사의 위대한 여인들의 싸움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들을 표현했습니다. 유디트 이야기와 야엘 이야기 같은 성경 속의 여성 영웅들, 그리고 루크레티아와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자신들의 최후는 자신들이 결정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IN8NlznHtE

 

 

젠틀레스키의 유디트 그림은 시간차를 달리해 여러 차례  재 생산됩니다. 그녀가 그려내는 유디트(Judith)는 은유가 아니고 복수 극장 같습니다.  마치 분노에 넘치는 폭로 미술 같습니다.  그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역동성은 대담한 색상과 극적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 사용으로 더욱 강조됩니다.

 

 

 

<유디트>/알라딘 서재

 

 

 

<유디트와 그녀의 하녀>/hillscounselling.co.uk

 

 

<유디트와 하녀>,1613-1614/wikipedia

 

 

 

 

 

유디트의 하녀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 홀로 페르네스의 참수한 머리가 담겨있는 섬뜩한 그림, 피렌체의 피티 궁전에 걸려 있던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의 대공 비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ddalena of Austria)의 소장품으로 1638년 궁정 재산 기록에 등재된 작품입니다.  성경 속 여주인공 유디트가 홀로 페르네스 장군을 참수하고 그녀의 하인 아브라와 함께 적장의 천막을 떠나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칼을 어깨에 걸친 유디트의 표정에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이 주제는 아르테미시아의 미술 경력 동안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묘사했던 '남자의 처형'작업을 기반으로 합니다.  유디트를 빌려 표현한 화가의 자전적 복수가 담긴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헤럴드 경제

 

 

 

 

 

 

 

 

 


 

 

 

 

 

<Danae>,1612/Google Arts&Culture

 

 

 

여전히  아르테미시아의 화폭에 소환되는 주제는 성폭행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다나에(Danae)는 아르고스(Argos)의 아크리시오스(Acrisius) 왕의 딸입니다. 다나에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아버지 왕이 살해될 것이라는 신탁의 예언에 따라 다나에는 궁전에 갇힌 젊은 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에 신들의 왕 제우스가 자신의 모습을 변용해 그녀와 동침에 성공하고 황금 정액으로 낳은 아들은 나중에 불길한 예언을 성취한  페르세우스(Perseus)였습니다. 다나에의 꼭 조인 다리의 모양새 보이시나요?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느껴집니다. 유난히 자신을 보호하려는 강력한 무릎과 무릎 사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카라바조 풍의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처럼 미술사 최초의 본격 화가였던 그녀도 같은 '카라바제스키(카라바조 같은) 아류 화가'로 분류됩니다. 때문에 이 작품은 그녀 아버지 작품으로 오랫동안 분류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이 그림이 10년 후에 그려진 그녀의 <클레오 파트라 (Cleopatra,1621)와 포즈와 구성의 유사성을 이유로  1990년에야 그녀의 작품으로 자리매김됩니다.  하녀의 모습이 있고 없고의 차이지 포즈랑 구성이 비슷하죠. 

 

 

 

 

 

 

 

 

<Cleopatra>,1611-1612/wikipedia

 

 

 


 

 

 

<어머니와 아이>,1612/wikipedia

 

 

 

400년이나 잊혔던 아르테미시아 작품이 미술계의 확고한 위치로 돌아온 것은  2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호주에서 아르테미시아는 몇 년 동안 유명한 화가들을 제치고 구글 검색 부동의 1위였던 적이 있습니다.  이유인즉 1976년 호주에서 우연히 발견된 <어머니와 아이 Mother and Child>라는 그림 때문이지요. 이 작품이 1612년 작품이라면, 그녀의 치욕의 재판 결과가 나오던 해입니다. 열일곱 살 로마 처녀 강간 사건 2년 후입니다. 상처 난 젖가슴의 핏자국 흉터는 우연일까요? 제게는 당시 아르테미시아가 겪어야 했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을 까 싶습니다. 

 

 

 


 

 

<Cleopatra>1633-35/Fine Art America

 

클레오 파트라의  자살 후 두 명의 시중드는 하녀에게 발견되는 장면입니다. 남성에 의해 성적 유혹의 대상이 되었던 또 다른 여성의 '죽음의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지요.  클레오 파트라의 죽음의 순간, 무심코 남성 욕망의 대상이 된 클레오파트라의 고독한 죽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남성 권력에 희생된 폭력에 응답하는 선택으로 피렌체 우피치에 소장하고 있던 기원전 3세기 <잠이 든 아리아드네(Arianna addoumentata)>그리스 헬레니즘 조각을 본떠 그렸습니다. 그녀 역시 남성의 노리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영원한 잠을 테마로 한 조각상이니까요. 

 

 


 

 

<세례 요한의 목과 살로메 Salome with the Head of Saint John the Baptist>,1610-1615, /wikipedia

 

 

쟁반 위에 놓인 세례 요한의 참수된 머리, '어디 한번 보자.' 하는 투의 태도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쥐고 있는 남성의 꽉 움켜쥔 손 표현이 성인의 얼굴과 함께 묘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림 속에서 남자를 이렇게 과하게 표현했던  페미니즘 화가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모든 작품이 십 대 시절 겪은 한 사건으로 모두 수렴되는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슬슬 그녀의 그림이 무서워지려 합니다. 

 


 

 

 

 

 

 

 

<야엘과 시스라 Jael and Sisera>,1620, 부다페스트 미술관 /wikipedia

 

 

 

<야엘과 시스라>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시스라 장군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치던 중,  야엘은 시스라를 자신의 천막으로 불러 안심시킵니다.  시스라를 잠들게 한 뒤 장막 말뚝과 방망이로 시스라의 관자놀이를 쳐 살해합니다. 야엘은 여호와의 적을 처단한 대담한 영웅으로 칭송됩니다. 적을 처단하는 그의 표정에 허둥거림이나 두려움은 일도 없습니다.

 

 

 

강한 짐승의 머리에 말뚝을 박은 이 잔학하고 끔찍한 주제는 선을 넘는  잔혹함 때문에 17세기 미술에서 간 큰 남자 화가들도 거의 꺼려하던 소재였습니다. 동시대의 다른 사례는 거의 없던 여자의 복수이야기. 그녀가 '남자의 복수'를 표현하기 위해 차용해 온 성서 속에서, 사사 드보라는 그녀의 행위를 크게 '잘한 짓'이라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괜스레 저는 모방범죄 같은 게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이런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는 듯싶어서 말입니다. 심장 약한 사람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림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남편 고향인 피렌체의 스티아테시로 이사했습니다. 피렌체에 사는 동안 아르테미시아는 유명한 예술 드로잉 아카데미에 입학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는 피렌체 화가 조합원이 되어서 이제는 남편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단독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피렌체의 실력자인 토스카나 대 공인 코시모 2세 Cosimo de Medici의 지원을 받아 여성 화가로 많은 수입도 올리게 되었습니다. 

 

 

 

1618년 아르테미시아는 남편과 사이에 아이들 다섯을  낳았습니다. 넷은 어려서 죽고 딸 푸루덴티아(Prudentia)만 남았습니다. 딸에게 준 이름'푸루덴티아'는 열두 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무렵 아르테미시아는 프란체스코 마리아 (Francesco Maria di Niccolo Maringhi)라는 피렌체 귀족과 열정적인 관계를 시작합니다. 서로 주고받은  연애편지가   2011년에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전시회에 공개도 되었고요. 

 

 

 

아르테미시아의 불륜에 대한 소문은 금방  피렌체 사방에 퍼져 부부 사이의 불화가 생기게 됩니다.  1621년 아르테미시아는 남편을 두고 딸과 함께 로마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로마에서 그녀는 카라바조의 추종 화가 그룹과 일했습니다. 딸과 함께 유랑 생활을 계속 한 젠틸레스키는 1630년 나폴리로 이주하여 마시모 스탄 치오네(Massimo Stanzione)와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1638년  런던으로 가게 되지요. 런던에는 이미 1626년에 간 아버지가 찰스 1세의 궁정 화가로 성공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런던에서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 도움으로 회화의 우화로서의 자화상(1638)을 포함하여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또한 그녀는 찰스 1세 왕의 아내인 헨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 여왕의 그리니치 거주지에 프레스코화작업을 아버지와  함께 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를 도와 많은 화가로서 여러 작업을 런던에서 했고 아버지 오라치오는 1639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1930/ Wikimedia Commons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

짐승의 머리를 들고 있는 사람은 다윗 대신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기존 거장들의 같은 주제와 비교해 보아도 아르테미스의 작품은 역시 다릅니다. 어린 다윗의 돌팔매에 죽은 골리앗의 이마에 난 선명한 자국이 그녀의  강건함을 함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명예의 알레고리>,1630-1635/wikipedia

 

 

 


 

 

 

<삼손과 데릴라>,1630-1638/wikipedia

 

 

델릴라(Delilah)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필리스티아(불레셋) 여인으로 , 초인적인 삼손(Samson)을 유혹하여 그를 파멸로 몰고 간 여성입니다. 선배 화가들이 단골로 그리던 주제이기도 하고요.  그녀는 이스라엘의 장군 삼손을 집요하게 유혹하여 그 힘의 비밀을 캐냅니다. 잠든 그의 머리카락을 자르려는 데릴라 손에 들린 날카로운 가위 보이십니까? 그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라 이미  필리스티아(불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있네요. 머리가 잘리는 줄도 모르고 데릴라 무릎에서 곤하게 자고 있는 삼손의 모습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다비드와 밧세바>,1636-1637,콜럼버스 미술 박물관/wikipedia

 

 

목욕을 하면서 다윗 왕을 유혹했던 밧세바의 모습,  구약에서 차용해 온 이야기의 그림입니다. 밧세바는 우리아의 아내였으나 미모에 반한 다윗이 그녀와 동침하여 임신하게 됩니다. 남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 다윗 왕은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 전사하게 만들고 그 아내를 취하지요.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우리아의 아내'로 소개된 밧세바는  훗날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다윗과의 사이에 낳은 첫아들은 하느님의 징계로 죽고, 후에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 등 4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다윗 말년에 왕자 아도니야가 반란을 계획할 때 선지자 나단의 후원에 힘입어 아들 솔로몬이 다윗의 후계자가 됩니다. 

 

 

밧세바의 몸에 떨어진 빛과 그림자가 영화의 조명처럼 주인공을 비치고 있네요. 발코니의 남자 모습이 다윗왕인가 봅니다. 머리를 빗겨주고, 보석을 들어 보이고 , 발 씻을 물을 대령하고, 깨진 돌자국까지 섬세합니다. 같은 주제지만 작가의 경험에 따라 밧세바의 느낌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회화의 알레고리로 그려진 자화상>,1639/wikipedia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젠틀레스키의 작품 중 화가로서 자부심을 완벽히 담고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회화의 알레고리로 그려진 자화상>입니다. 제목에서도 읽히듯 젠틸레스키 자신을 회화 그 자체로 바라보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고백합니다. 작품 속의 그녀는 일반적인 자화상들과 달리 정면을 응시하지 않습니다. 무척 파격적인 구도의 작품인 거죠.  두 손에 들린 팔레트와 붓은 그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그녀의 시선은 화면 밖의 캔버스라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화면 밖에서 그녀를 보는 시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당대 유사한 자화상들이 자신을 귀족처럼 표현한 것과 달리 그 어떤 화려한 옷도 장신구도 없는 온전히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두 팔을 크게 벌리고 거침없이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자신을 담아낸 겁니다. 

 

 

남성들만의 전유물이던 화가의 세계는 미술사에서는 물론 바로크 당시에도 유일한 여성화가 젠틸레스키가 화가로서 자부심을 표현하듯, 보란 듯이 팔레트와 그림붓을 들고 그림을 그려나갑니다. 신중하게 진행 중인 이 그림은 비록 미완성 작품이지만 자신의 화가로서의 자신감 넘치는 이 자화상은 회화의 우화로서의 16세기 체자레 리파(Cesare Ripa)의 미술 핸드북 <이코놀로지아  Iconologia>에서 표현한 아름다운 여성의 표준 도상학을 실천해 그리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이란, 완전한 검은 머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치형 눈썹, 그녀의 목에 금목걸이를 걸치고...'제안한 글 디렉션 대로 실천하고 있는 자화상입니다. 

 

 

 

아르테미시아는 1642년 잉글랜드 청교도 내전이 발발할 때 영국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폴리로 돌아옵니다. 그녀의 사망 날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가 1654년 나폴리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몇 가지 있죠. 그녀가 1656년에 도시를 황폐화시킨 전염병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pEkhH6AC0w

 

 

 

그녀가 죽은 후에 그녀는 미술사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많은 그녀의 작품은  아버지 오라치오 작품으로 귀속되었기 때문이지요. 1900년대 초가 되어 그녀가 재발견되면서 한동안 그녀의 삶과 그림에 대한 관심보다는 지나치게 성적인 편견이 가득한 '카더라'해석으로 채색되었습니다. 특히 그녀의 강간 사건이나 처녀막 검사, 결혼생활 중 외도 같은 선정적인 소설이 판을 쳤습니다.

 

 

 

그녀에 대한 진정한 발견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페미니스트 미술사 학자들에 의해서입니다. 1976년 전시회 "여성 미술가들(Women Artists:1550-1950)에서 미술사 학자 앤 서덜랜드 해리스(Ann Sutherland Harris)가 그녀는 '남성 중심의 서양 미술 역사상 최초의 여성화가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화가'라는 의미 부여를 하면서부터입니다.

 

 

 특유의 드라마, 빛의 효과, 색의 혼합을 통해 그녀는 바로크 미술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남성 중심적이었던 역사와 종교라는 주제의 위계를 과감히 무너뜨리면서 말이죠.  그래서 그녀를 최초의 페미니즘 화가로 부르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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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문화가 가장 부흥했던 시기로 르네상스를 꼽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종교화가 신앙심의 근원인 동시에 위엄과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지요. 부정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위선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위선으로 가득 찬 시대에 인간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화가가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Caravaggio, 본명 Michelangelo merisi (1571-1610/39살)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활동한 유명한 화가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와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개신교의 등장으로 흔들리는 교인들의 마음을 붙잡아야 했습니다. 환상적이고 감동적인 성화로 말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현실적이며 인간 본연의 심리를 꿰뚫고 이를 작품에 녹여내려 했던 카라바조는 가톨릭 교회의 눈총을 받게 됩니다. 16세기 뒷골목을 오가는 불량배, 거지, 매춘부 등을 그림 속에 끌어들여 그들을 예수로, 성자로 둔갑시켰기 때문이죠. 그  가 그린 그림에는 그 어디에도 인간을 초월한 신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9.29-1610.7.18)는 후작의 집사 겸 건축가였던 페르모 메리시의 아들로 밀라노 근처 카라바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시절 풍습에 따라 이름에 아버지 고향 이름을 붙였습니다.(다 카라바조:카라바조 출신/2007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사실이 만학도 아마추어 미술사가에 의해 밝혀집니다.)

 

 

 

6살이 되던 해 , 전염병으로 아버지를 잃고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합니다. 13세에 화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는 명암표현법의 창시자로 그림 대부분을 암흑에 가깝도록 어둡게 처리하고 주인공과 그 주변에 빛이 떨어지도록 하는 기법을 처음 시도합니다. 이는 연극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대상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노리는 방법이지요. 인물표현이 아닌 내면적 심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기법입니다. 인간의 내면 표출에 대한 예술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탄생하게 된 기법인 셈이지요.

 


 

 

<Young Sick Bacchus>,1593/wikipedia

 

 

 

 

<병든 바쿠스 신>은 그의 초기작품 중 하나입니다. 무슨 영문인 지 알길 없으나  밀라노에서 로마로 혼자 가게 됩니다. 로마의 뒷골목을 헤매며 구걸도 하고 길거리 화가로 지내다 병에 걸립니다. 몸이 망가져  로마 주변에 있던  빈민구제소에서 치료를 받고 겨우 살아납니다. 살아 나왔던 카라바조 자신의 모습을 신의 모습에 빗대  표현합니다. 신이지만 손톱에 때가 끼고, 시든 화관을 쓰고 있습니다. 얼굴은 병 때문에 창백한 모습이고요.

 

 

그림을 그리는 기교가 뛰어났던 카라바조는 그림들을 스스로 익히면서 빛과 색채를 이해합니다.  술의 신인 바쿠스가 인간처럼 병에 걸리고 술주정을 한다는 발상이 카라바조 답습니다. 충동적인 그의 성격은 매력적인 예술가로 보이게 했습니다. 실력이 뛰어났기에 성격적 결함은 하나의 특징처럼 여져지기도 했지요. 보수적인 미술계에서는 스케치가 없는 계획되지 않는 작품 제작 방식, 지나치게 강렬하고 연극적인 연출 방식 등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하지만 젊은 작가들은 그에게 열광했습니다. 마치 디오니소스 뒤를 따랐던 광신도처럼 말입니다. 당시  젊은 작가들은 카라바조를 숭배했고, 그의 화풍을 흠모했으며, 자신들의 그림에 적극적으로 반영합니다. 

 

 

 

 

당시 기득권 미술가들은 카라바조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미리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카라바조는 캔버스에 스케치 없이 바로 그림을 그렸거든요. 그는 형식을 파괴했고 사실주의 를 추구했습니다. 그의 묘사가 지나치게 사실적이기 때문에 신 중심의 관념적인 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부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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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rtune Teller>,1594/wikipedia

 

 

 

 

 

 처음으로 점쟁이를 사실적으로 등장시킨 작품이 카라바조의 <The Fortune Teller>입니다. 카라바조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에 반대하는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기 위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카라바조 자신이 로마 뒷골목 생활을 하며 모든 군상들을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길거리 생활을 몸소 겪으며 성스러운 도시 로마 사람들의 이면의 삶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젊은 여인이 청년을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청년은 장갑을 쥔 손을 칼에 올리고 젊은 여인에게 손을 맞긴 채 호기심에 가득한 눈빝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옷차림입니다. 당시 집시들은 치마를 한쪽 어깨에 매달아 입고 거리를 다녔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점을 봐주고 돈을 받는 거죠.  젊은 집시 여인에게 점을 보는 젊은 청년은 귀족입니다. 깃털 달린 모자와 화려한 옷차림 그리고 칼은 청년이 귀족임을 상징하고 있지요. 장갑 긴 손을 칼 위에 올리고 있는 것은 물질적인 부유함과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냅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손금을 보는 것이 아나리 청년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탐나는 가 봅니다. 귀족 청년은 훔치려는  여인의 행동을눈치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귀족 청년은 자신의  미래가 궁금하고, 집시 여인은 그런  귀족 청년을 바라보며 훔칠 기회를 노립니다.    이 작품에서 집시여인은 젊은 남자에게 두 가지를 훔칩니다. 운명을 점친다는 거짓말로 돈을 훔치고 그것을 미끼로 반지도 훔치려 하니 말입니다.  카라바조는 집시 여인의 행동에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배경을 생략했습니다.  카라바조는 길을 가다가 점을 보는 집시 여인을 불러 서  이 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마치 길거리 캐스팅처럼 말이죠. ) 다른 화가들에게도 카라바조의 모델 캐스팅 방법이  유행처럼 번졌다고 합니다. 그런 영향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걸 보면 말이죠.

 

 

카라바조는 화가로서 큰 성공을 기대하면서도 의뢰받은 종교화 대신 길거리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서민들의 생활상을 현실감 넘치게 표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당시 화가들이 선호했던 인물들에서 벗어나 매춘부, 농부, 부랑아 등을 과감하게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작품을 미술 애호가나 귀족들은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귀족들의 취향에 맞는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았던 그는 평범한 사람들을 모델로 종교화나 신화를 표현해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카라바조의 재능을 알아본 화상 발랑탱이 종교화를 의뢰했으나 그가 그린 것은 사기꾼을 묘사한 <점쟁이>였습니다. 이 작품을 받은 발랑탱은 카라바조에게 의뢰한 액수를 다 지불하지 않았고 카라바조는 다시 거리로 부랑아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Boy Bitten by a Lizard>,1593-1594/wikipedia

 

 

 

1595년경 로마의 유력한 예술 애호가 눈에 들어 순식간에 이탈리아 최고 화가로 각광받기 직전까지도 카라바조는 다른 화가의 공방에서 정물을 담당하는 도제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정물이란 성화의 배경을 장식하는 사소한 분야로 여겨졌지요. 주문자가 있었을 리 없는 가난한 화가였던 그가 사람들 눈길을 끌어 헐값이지만 판매에 성공했던 게 바로 이 그림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입니다.

 

 

어두운 배경에 강렬한 조명을 받으며 화면을 가득 채운 어린 소년은 탐스러운 과일에 손을 댔다가 숨어 있던 도마뱀에게 손가락을 물렸습니다. 화들짝 놀라면서도 수줍은 눈망울로 간청하듯 우리를 쳐다보니 그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지요. 중지를 물린 소년의 표정이 압권입니다.  벌어진 붉은 입술, 드러난 어깨, 장미를 꽂은 풍성한 머리카락은 보는 이의 성별에 상관없이 유혹적입니다. 소년 앞에는  탱글탱글한 식감이 눈에 보이는 신선한 체리와 고운 꽃이 있습니다. 물방울 맺힌 유리병에는 작업실 창문까지 비쳐 보이니 이 모두를 그려낸 화가의 재주에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유리 화병에 그려 넣은 것처럼 살짝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카라바조가 빛의 양을 조절했다는 말입니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어두운 곳에서 작업을 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빛을 조절하고 있었습니다. 기존 르네상스 작품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은 카라바조의 출현으로 이제 르네상스 작품에  관심이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카라바조를 따라 하는 젊은이들이 생기고 트렌드를 만들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Bacchus>,1596, The Uffizi, Florence /wikipedia

 

 

 

음악과 미술에 있어 당대 최고의 권위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델 몬테 추기경의 저택에서 머물던 시기의 카라바조는 추기경의 후원과 도움을 통해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델 몬태 추기경은 피렌체의 후원을 받아  메디치 가문의 예술품 매입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델 몬테 추기경은 카라바조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그린 그림을 그 자리에서 삽니다. 그리고 숙식을 제공하고 스튜디오를 마련해 주었지요. 카라바조는 그곳에서 다양한 창작을 실험해 보고, 테크닉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합니다.

 

 

 

카라바조는 1590년대 중후반 경에 투스카니(토스카나)의 메디치 대공을 위해 두 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위의 작품 <바쿠스 Bacchus,1596>와 <메두사의 머리 Head of tne Medudsa,1577>가 그것이지요. 

 

 

 

 

포도잎과 덩굴을 둥글게 말아서 만든 머리에 쓴 화환이 보입니다. 갈매기 눈썹에 동그란 얼굴, 적당히 취기가 오른 발그레한 볼이 생기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를 넘어 과하게 되면 술이 욕망이 가득한 사람을 잡아먹게 되지요. 술과 쾌락에 자신의 모든 젊음을 소비하는 당시 카라바조 자신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삼촌과 동생이 성직자였던 집안입니다. 누구보다 신앙심 깊었던 사람이 카라바조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관성의  법칙처럼 카라바조를 다시 구렁텅이 삶으로 밀어 넣습니다. 쾌락에 탕진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이 늘 깔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알고 있지만 살아내지 못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과일바구니 보이시나요. 실사같이 정교해 한 입 깨물고 싶어 집니다. 로마에서 최초의 정물화가였다고 해요. 이런 과일의 섬세한 디테일은 네덜란드로 많이 파려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바니타스'라는 정물화 스타일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상하고 벌레 먹은 구멍이 있는 사과는 현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세속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신성한 구원을 의미하는 포도는 검정 포도는 죽음을 청포도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바쿠스의 손에 들려 있는 입 넓은 커다란 잔에는 와인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투명한 병에 담겨 있는 와인은 아무리 마신다 해도 그 바닥이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림을 통해 카라바조가 생각한 그리스도의 집은 대성당이나 귀족의 저택처럼 너무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려하다는 것은 세속의 삶이 만들어 낸 지극히 계층적인 개념이지요.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야만 하는 일반 대중에게 그리스도의 집은 , 문 안으로 들어서기에 주저하지 않아도 되고, 배 고프지 않을 만큼 먹을 수 있고, 기분이 좋을 만큼 취할 수 있는, 편안한 곳이라는 점입니다. 카라바조는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이 그리 먼 곳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카라바조의 그런 독창성은 사물과 현상을 꿰뚫어 보는 천재적인 눈과 창의적인 해석에서 발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집시와 거지들 그리고 창녀들
오로지 그들만이
나의 스승이며 내 영감의 원천이다.
-카라바조-






<The Cardsharps>,1595/wikipedia

 

 

 

 

미국 텍사스의 킴벌미술관에 전시된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 <카드 사기꾼> 작품입니다. 영국에서 7천만 원에 판 그림이 170억 원 상당의 카라바조 작품으로 감정되자 옛 주인이 화가 나 경매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랍니다.(2014.10.28)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영국인 랜슬롯 드와이츠는 2006년 경매사 소더비를 통해 4만 2천 파운드(한화 7천100만 원)를 받고 그림 한 점을 내다 팔았습니다. 드와이츠의 집안에서 1962년 140파운드에 사들인 이 그림은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 <카드사기꾼>과 비슷했는데  소더비는 카라바조 시대의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판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사들인 저명 예술사가이자 수집가인 테니스 마흔 경은 이 그림이 카라바조의 진품이라면서 1천만 파운드(약 170억 원)의 가치가 있다고 깜짝 발표했습니다. 화가 난 드와이츠는 소더비가 제대로 감정을 하지 않아 손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냈습니다. 소더비는 카라바조의 작품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과실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고요.

 

 

현재 이 그림은 170 역원의 보험에 가입돼  있습니다. <카드사기꾼>은 미국 텍사스의 킴벌미술관에 전시돼 있으며 감정가는 5천만 파운드(847억 원)다.

 

 

<The Cardsharp with the Ace of Diamonds>,1620-1640,Georges de La Tour/wikipedia

 

 

 

조르주 들라트르의 작품입니다. 카라바조의  <카드 사기꾼> 작품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실어 봅니다. <타자>들의 세상이 보이시나요. 두 여인의  눈빛이 장난이 아닙니다. 

 


 

 

<Medusa>,1597, Uffizi, Florence/wikipedia

 

 

메두사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마녀로, 로르고 네스 세 자매 중 한 명입니다. 메두사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은 모두 돌로 변하지요.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거울처럼 잘 닦인 방패를 이용해 방패에 비친 모습을 보며 메두사의 머리를 잘랐습니다.  카라바조는 메두사의 이야기에서 다른 요소는 제외하고 잘린 메두사 머리만 그렸습니다. 원형 캔버스에 그려진 메두사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목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와 그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그림 속 메두사의 얼굴을 보면 여성의 모습이라고 추측하기는 어렵습니다. 메두사의 모습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자신의 충동 때문에 겪는 고통과, 이 충동을 누군가가 멈추어주기를 바라는 카라바조의 마음이 투사된 그의 자화상으로 추측됩니다.

 


 

 

<Judith and Holofernes>,1598-1599 or 1602/wikipedia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지요. 끔찍한 장면이기도 하고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s>는 구약성경 외전인 유딧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림입니다.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유대인 도시 베툴리아를 함락하기 직전 항복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합니다. 이때 신앙심 깊고 부유한 과부 유디트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나섭니다. 유디트는 아름답게 치장하고 거짓 투항하여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뒤 만취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돌아온다는 대범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디트는 하녀 아브라와 함께 이 계획을 실현하여 성공시킵니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강렬한 명암의 대조 속에 홀로페르네스의 고통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유디트의 자세는 다소 모호해 보이며 주춤하는 듯하고요. 이 작품을 극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강렬한 명암대조와 홀로페르네스의 얼굴 표정입니다. 마치"내가 꼭 이런 일까지 해야 해." 조력자로 함께한 늙은 노파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Narcissus>,1597-1599/wikipedia

 

 

 

 

고대 로마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따르면, 나르시스는 강의 신 케피소스와 물의 님프 리리오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나르시스는 너무 아름다워 누구든 그를 보기만 하면 사랑에 빠졌지요. 나르시스가 태어났을 때, 리리오페는 한 예언자에게 찾아가 나르시스가 장수할 것인지를 물었고 예언자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이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모두가 나르시스를 사랑하게 됐고 그의 아름다움을 찬미했습니다. 그러나 나르시스는 이들의 찬미와 감탄을 무시하고 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거만한 나르시스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한 님프가 신들에게 복수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가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만두소소, 그리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얻을 수 없게 하소서." 그리고 이 기도를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듣게 됩니다.

 

 

어느 날 나르시스는 숲 속에서 외딴 샘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쉬어가기로 합니다. 샘은 고요하고 맑았습니다. 그는 샘물 옆에 누워 휴식을 취한 후 갈증을 느껴 샘물을 말시려 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샘물 가까이 몸을 숙였을 때, 그는 고요하고 맑은 물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만 사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자신에게 깊이 빠져버린 나르시스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물속에 비친 자신을 안아 보고 싶었지만 손이 닻자마자 흐려지며 사라지는 형상을 어찌할 수 없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는 물속의 자신을 속절없이 바라보기만 하다 결국"아아. 허무하구나, 사랑하는 자여!... 안녕!"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습니다.

 

 

카라바조는 오비디우스의 로마신화에 나온 나르시스 이야기를 , <나르시스(Narcussus)>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나르시스를 극도의 빛과 어둠으로 묘사해 그 신체에 표현된 밝기는 어두운 배경과 대비가 되어 나르시스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듭니다. 물은 작품 구성을 반으로 나누는 역할을 합니다.  나르시스는 물가에 앉아 오랫동안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땅을 짚은 오른팔은 체중을 받치고 있지만, 왼팔은 물속의 형상을 잡고 싶은 듯 물속으로 뻗어있습니다. 나르시스의 두 손과 물에 반영된 두 손은 서로 만나 타원형을 이룹니다.

 

배경의 어둠은 나르시스의 바깥 세계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강렬한 욕망 때문에 세상을 잊은 걸까요? 아니면, 욕망 때문에 닥치게 될 어둠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나르시스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욕망 때문에 주위 세상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한때 자신을 사랑해던 존재들과 그의 가족, 그리고 주변의 동물과 식물마저 잊어버렸습니다. 또한 물속의 나르시스의 모습은 젊은 모습이  아닙니다. 나르시스의 병적인 자기애로 말미암아 숨기고 싶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금 보고 있는 건 아닌 지 모르겠습니다. 

 

 

 


 

 

 

 

 

<마태오의 소명 The Calling of Saint Mattew>,1599-1600/wikipedia

 

 

 

<성 마태의 소명>이라는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걸작 중의 하나로 예수님이 마태에게 그를 따르도록 영감을 주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저요?"하고 물어보는 듯한 수염 난 남자가 마태오일까요? 아니면 맨 끝에서 예수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돈 세고 있는 젊은 남자일까요?  세금징수원이었던  마태오가 한쪽 손에 늘 돈 주머니를 챙기고 다녔으니  그가 마태오가 틀림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카라바조가 1년 뒤에 <마태오와 천사>라는 작품을 그리는데, 이 그림에서의 마태오는 젊은 남자 옆에 서있는 안경 낀 남자와 가장 비슷했다고 합니다.  정확히 결론 나지 않은 상태이고 작품을 X-ray로 촬영해 보니 예수의 손가락 방향이 세 번이나 수정된 것도 알아냅니다. 이 그림을 통해 카라바조는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됩니다. 다만 성격이 워낙 폭력적이고 통제가 되지 않아 후원자들이 뒷 수습하기 바빴다고 합니다. 명성에 맞지 않게 로마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건 사고에 휘말렸는데 그때마다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곤 했었거든요.

 

1599년에서 1600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이와 같은 시기에 그린 <성 마태의 순교(Martyrdom of Saint Matthew)>와 나란히 현재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San Luigi dei Francesi)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xSjUvh0g8&t=8s

 

 

 


 

 

 

<Amor Vincit Omnia>,1601-1602/Gemaldegalerie, Berlin/wikipedia

 

 

 

 

큐피드가 아기의 모습이 아닌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일까요? 나체의 모습이 보기 민망해집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주인공은 사랑입니다. 라틴어의 ' Amor'는 '사랑'과 동급입니다. 

인간의 욕정, 육정, 욕망이 '사랑' 앞에 무릎을  꿇지요. '사랑(Amor)'앞에 인간은 체면이고 재산이고 다 집어던진다는 말입니다. 발 밑에 바이올린, 류티, 악보가 있습니다. ' ㄱ '자 모양으로 생긴 곡자가 있고, 컴퍼스가 걸쳐져 있고요.  갑옷도 보입니다.  뒤쪽으로 책 같은 것도 펼쳐져 있습니다. 책 위에 깃털 펜도 보이고 또 월계관도 하나 얹혀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세상의 지식들, 건축, 음악, 무력  등 모든 것들이 '사랑'이란 단어에 굴복하게 되어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육체적인 사랑이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기도 하잖아요. 무서운 사랑의 위력이라고나 할까.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니까 '사랑'앞에 함부로 개기지 말아라.

사랑이 다른 가치를 넘어서 버린다. 그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불나방 같은 사랑으로 그 '사랑'때문에 죽어도 좋다는 표현을 합니다. 

 

 


 

<Supper at Emmaus>,1601/wikipedia

 

 

 

 

이 그림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엠마오에서 Luke와 Cleopas로 추정되는 두 제자 앞에 나타났다가 곧 사라집니다. 가운데 앉아 오른손을 들고 있는 인물이 예수입니다. 조개껍데기가 달린 옷을 입고 양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이 클레오파스, 팔꿈치가 해진 옷을 입고 있는 또 다른 제자는 Luck, 그리고 왼쪽에 서 있는 젊은이는 카라바조 자신이다.

 

 

 

카라바조는 그의 모든 작품에서 예수의 후광을 없앱니다. 카라바조가 전통적인 묘사 방식과 이별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지요. 또 카라바조는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부분 그가 도박판이나 술판이 벌어지던 뒷골목에서 보던 사람들이지요. 예수는 수염이 없고 여성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카라바조가 잘 나가던 때 그려진 그림이라 예수의 얼굴이 제법 살집 있어 보입니다. 제자들도 신성한 사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하층민이었던 본래 그들의 모습과 닮아있죠. 카라바조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 땅에 있는 존재라고 보았던 거지요. 아마도 그의 이중적인 삶이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당시 추기경의 후원으로 상류 사회를 접함과 동시에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천박한 삶을 살았으니까요.  아무리 종교개혁이 있다고 하나 카라바조가 활동하던 당시 로마는 여전히 교회 세력이 막강했습니다. 카라바조의 이런 표현이 그들 눈에 많이 거슬렸을 겁니다. 

 

 

 

그림 속 빵은 생존에 꼭 필요한 양식으로 성찬례의 신비와 결합해 고유 의미가 있습니다. 포도주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계약의 피를 상징하고요. 흰색 식탁보는 그리스도 수의를 표현한 것으로  죽음과 부활을 상기시킵니다. 소박한 식탁 차림에 각종 과일이 담긴 바구니가 등장합니다. 작품 속 과일은 수많은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포도는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피와 성찬례의 신비를 상징합니다. 청포도는 부활을 검은 포도는 죽음을 나타냅니다. 썩은 사과와 색이 변한 무화과, 복숭아는 인류의 원죄를 상징하고요. 석류는 과즙과 껍질의 붉은색 때문에 그리스도가 흘린 피, 곧 수난을 의미합니다.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1605-1606,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가톨릭 신문

 

 

 

화가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이야기를 두 가지 도상으로 나눠 그리곤 합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임을 눈치채지 못한 채 길을 걸어가는  장면과 숙소에 머물며 식사할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는 장면으로 말입니다.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그린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작품입니다. 당시 카라바조는 파출소를 들락거리고, 자신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델몬테 추기경도 떠나가고, 소란 혐의 등등 점점 멘털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림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요. 예수님 모습이 심각해 보여요.

 

 

 

 

 

그림의 무대는 어떤 숙소입니다.  <엠마오 사건>중 빵을 쪼개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바로 그 순간을 옮긴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사실주의적 표현, 빛과 그림자의 대비와 극적인 구성으로 르네상스의 관념적 화풍에서 벗어나 근대 사실주의 회화 기법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는 작품에 사실주의에 대한 고집과 대담한 구성을 이용하면서 방금 일어난 일 같은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주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가구도 없으며, 불필요한 곳에 시선을 빼앗길 만한 기물도 없습니다. 대신 밝고 어둠이 강렬하게 대비된 화면에는 다섯 명이 등장합니다. 중앙에 예수님을 비롯해 좌우 각각 제자 한 명씩 그리고 숙소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그 옆에 시중드는 여자가 눈에 띕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빵을 떼는 순간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왼쪽의 등진 제자는 양손을 들어 깜짝 놀라는 동작을 하고, 오른쪽의 제자는 놀라운 감정을 강한 동작으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그는 양손으로 식탁을 잡고 몸을 앞으로 굽히며 순간적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려 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의 현존을 당장 알리고 싶은 심정이 동작으로 드러난 거지요. 마침내 안개가 사라지고 베일이 걷히듯 두 제자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순간의 반가움과 놀라움이 동시에 전달됩니다.

 

 

 

 반면 오른쪽에 서 있는 두 인물은 카라바조가 성경 밖의 인물을 그려 넣었습니다. 두 인물은 주제의 의미를 심화시키지요. 서 있는 남자는 놀란 제자들과 달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중요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네요. 더욱이 옆에 나이 든 여자는 식탁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전혀 관심 없는 얼굴입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손에 든 음식을 식탁에 잘 가져다 놓는 것일 뿐이죠. 이 두 사람은 평범한 인물로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은 특별한 인물이나 장소가 아닌 우리의 일상 안에서 체험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주의를 모으는 것은 식탁 위의 빵을 축복하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많은 화가가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지만 카라바조가 그린 예수님은 특별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카라바조 자신의 초상이기 때문이죠. 이 작품보다 5년  먼저 그린 같은 주제의 작품에서 예수님은 건장한 청년의 모습으로 당당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면 이 그림 속 예수님은 위엄과 당당함보다는 나약하고 고통받는 인간적인 모습이며, 하물며 식탁에 왼손을 짚어 몸을 의존한 채 오른손을 들어 빵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카라바조의 불후의 명성은 작품에서 나옵니다. 그의 바람 잘 날 없었던 인생에도 예수님이 머물기를 카라바조는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에 신성함이 없어,
자네에게는 신성한 영혼이 깃들어 있지 않아.
자네에게도 신성한 기운을 달라고 하게
그러면 예술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을 걸세
-보르게세 추기경의 경고-

 

 

 

 

 

<Death of the Virgin>,1604-1606/wikipedia

 

 

 

 

 

산타마리아 델라 스칼라 성당의 대형 제단화입니다. 당시 성당이 있던 지역은 로마의 빈민가였습니다. 성직자들이 빈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걸로 유명한 곳이었죠. 그만큼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던 의뢰인들은 성모의 죽음이 영적으로 묘사된 작품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작품이 공개되자 의뢰인들은 경악했고, 작품을 거부하기에 이릅니다. 

 

 

 

작품을 거부한 이유는 성모 마리아의 묘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는 거룩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성경의 내용과 무관하게 익사한 임산부를 등장시켰습니다. 더욱이 카라바조는 그가 사랑했던 매춘부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또한 카라바조는 전통적인 관례를 어겨버립니다. 아무리 주제가 성모의 죽음이더라도 실제 죽음을 묘사하지 않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가 그린 성모는 물에서 금방 건져 올려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퉁퉁 불어버린 발을 내보이고 침대 위에 숨진 채 누워있었고요.

 

 

 

종교계는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성모와 매춘부 사이의 수직적 위계질서가 파괴되도록 보고만 있을 수 없었지요. 결국 제단화는 철거되었으며 성직자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으로 교체됩니다. 카라바조의 눈에 성모의 죽음과 매춘부의 죽음은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 했던 모양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카라바조의 명성은 추락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는 이 시기에 살인을 저지르며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 

 

 

 


 

 

 

 

 

 

 

<포박당하는 그리스도 혹은 유다의 입맞춤 The Taking of Christ>,1602/ National Gallery of IReland

 

 

 

 

제자인 유다의 입맞춤으로 예수님이 체포당하는 수난을 그린 작품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물들의 움직임을 체포당하는 그 순간의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왼쪽의 인물 (아마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추정)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깜짝 놀란 듯한 동작과 휘둥그레진 눈을 치켜뜨고  놀라 소리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감으신 채로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약간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유다의 입맞춤을 받고 있고요. 유다는 그런 예수님을 단단히 부여잡고 예수님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손을 뻗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을  캡처하여 마치 지금 우리 관람객들의 눈앞에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계시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정도로 극적입니다.  그리고 화가는 그러한 느낌을 극대하 하기 위해서 또 한 가지 장치르 더 해 두었습니다. 화면 가장 오른쪽에 등불을 들고 비추는 인물이 바로 그 장치입니다. 이 인물이 누구냐면, 바로 화가 자신입니다. 화면상에 일부러 화가 자신을 그려넣음으로서, 마치 화가 자신이 그리스도가 체포당하는 순간을 직접 목격한 것을 그리고 있는 듯한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등불을 들고 비추어 봄으로서 캄캄한 방이었을 그 순간의 상황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듯한 효과로서 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DURJGv7-vI

 

 

 


 

 

 

<Tne Entombment of Christ.,1603-1604, Pinacoteca Vaticana,Vatican City/wikipedia

 

 

 

 

<그리스도의 매장>은 발리첼라의 산타 마리아 성당 정면에 걸릴 제단화로 그려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종교화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구도를 따랐으며, 당대 성직자들로부터 그의 최고 걸작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화면 전체를 감싼 캄캄한 어둠 속, 예수의 시신을 관 속에 눕히고 있는 요한과 니코데모, 성모 마리아와 다른 두 마리아가 대각선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서민적 모델의 사실적 묘사나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 등 카라바조 양식의 특징을 잘 드러내 줍니다.  특히 비통해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화면 오른쪽에서부터 예수의 시신 위로 쏟아지는 한 줄기 빛, 이 빛을 통해 카라바조의 '테너브리즘 기법이 효과적으로 살아나며 화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그리스도의 매장>으로 엄청난 명성과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가 운명을 다하고 17세기 바로크 시대가 도래하고 있던 그 무렵의 경계선에서, 종교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당시 가톨릭이 요구했던 반종교개혁의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미술양식을 탁월하게 구축해 나갑니다. 

 

 

 


 

 

<토마스의 의심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1602/wikipedia

 

 

 

카라바조가 1601-1602년에 제작한 <토마스의 의심>입니다. 예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토마스와 자연스럽게 머리를 구부리는 예수가 보입니다. '신도 아픔을 느낀다.'는 사실적 묘사가 얼마나 파격적인 발상입니까.

 

 

예수의 부활을 못 봤던 토마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며 손가락을 집어넣습니다. 검지 한마디가 들어간 걸 보니 상처 깊이와 길이가 장난이 아닙니다. 결국 예수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며 부활을 증명해 보입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성화는 많은 화가들에게 단골 주제였습니다. 이들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표현하기 바빴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성서 내용을 미화시킨 성화에 익숙한 보수적인 화가들과 주문한 교회는 카라바조 작품을 저주했습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가장 사실적으로 당시 현실을 묘사하면서 신 중심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베드로의 순교>/ART&Culture

 


 

 

 

 

https://www.youtube.com/watch?v=lH2V126BFeo

 

 

Chiesa di San Luigi dei Francesi <마태의 일생>

족보 없는 비렁뱅이 화가 카라바조에게 제단화를 맡긴 성당입니다. 

 

 

 


 

 

 

<Madonna and Child with st. Anne>,1605-1606, Galleria Borghese,Rome/wikipedia

 

 

 

 

이 그림은  카라바조가 가장 잘 나갈 수 있었던 때에 그린 가장 비극적인 작품이 되어버립니다. 무엇보다 성 안나를 묘사한 오른편의 늙은 여인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녀는 당시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집시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 성모 마리아 역시 빨래하는 아낙네처럼 치마를 걷어 올리고 있으며,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채로 그려집니다. 예수는 이미 많이 자랐음에도 갓난아기처럼 벌거벗은 채 그려져 있고요. 성스러워야 할 성화를 이런 식의 세속화된 인물들로 격하시켰다는 비판을 듣게 됩니다. 이 그림의 실패로 그는 로마를 떠나게 되고, 그에게 이 같은 절호의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교황 바오로 5세가 베드로 대성전을 수리하면서 새로 생긴 공간에 그의 작품을 걸기로 하고 제작을 의뢰합니다. 카라바조는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이 세계 교회의 심장인 베드로 대성전에 남게 된다는 것은 더 없는 영예이기에  흔쾌히 수락하고 심혈을 기울여 단기간에 완성합니다. 한 달가량 성당에 걸리면서 예기치 못한 반응들이 터져 나옵니다. 

 

 

 

이 작품에 대한 불같은 반대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먼저 이 작품이 도상학적으로 가톨릭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과 교황좌가 있는 베드로 대성당에 걸기에 너무 조잡해서 분심스럽다는 여론에 밀려 철거됩니다.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거기에서도 반대를 받아 다시 철거되게 됩니다. 이런  수모를 겪은 후 그의 작품의 옹호자이며 교황의 친척인 보르게세(Scipio Borghese) 추기경의 손으로 넘어가 그 가문의 소장품으로 남게 됩니다.

 


 

 

<성 앤드류의 십자가>,1607, The Cleveland Museum of Art/Artprinta

 

 

 

 

 

<성 앤드류의 십자가>는 당시 나폴리를 통치하고 있던 스페인 총독 후안 알론소 피멘텔 에레라(Juan Aonso Piementel Herrera)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총독의 고향이었던 스페인 발라돌리드의 저택이 소장하고 있던 17세기의 작품 목록에 이 그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 앤드류의 십자가>는 마치 카라바조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염두에 둔 작품처럼 보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최후의 죽음을 기다리는 성 앤드류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그림은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죽고 싶어 했던 성자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폴리에서 그려진 두 개의 대형 제단화 중 현존하고 있는 <성 앤드류의 삽자가>는 미국 클리블랜드 예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작품 <성 앤드류의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 앤드류의 기적에 관한 중세의 전설을 먼저 살표 보아야 합니다. 성 앤드류는 로마의 귀부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혐으로 체포되었다가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됩니다. 화면은 십자가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의 간청에 의해 성 앤드류의 십자가 처형이 취소되고, 사형집행관이 성 앤드류의 십자가에 묶인 노끈을 풀려고 하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석방의 순간, 성 앤드류는 자기가 믿고 있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기를 간청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립니다. 늙은 성자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되었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십자가 틀에 묶인 노끈을 풀려고 성 앤드류에게 다가갔던 사형집행관의 손이 마비되면서 성 앤드류는 기도한 대로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카라바조의 <성 앤드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성 앤드류의 최후에 대한 중세 전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자신에게 임박하고 있는 죽음을 예측이라도 하는 듯, 십자가에 초라하게 달려 마지막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 성 앤드류의 모습에서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사실의 재연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카라바조의 위대성은 관람자로 하여금 화면에 나타나고 있는 종교적 결단에 참여하도록 촉구하는 힘이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관람하고 있는 모두를 십자가 아래로 불러 모읍니다.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한 줄기 빛이 죽어가는 늙은 성자의 몸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도망자 처지인 카라바조 자신에게도 임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The Beheading of St.John the Baptist>,1608/wikipedia

 

 

 

 

1608년 몰타에서 그린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입니다. 1606년 5월 28일 로마에서 살인죄를 저지른 카라바조는 나폴리를 거쳐 1607년 7월 초에 몰타(Malta)로 도피합니다. 그가 나폴리에서의 보장된 성공과 안전을 포기하고 몰타로 이주했던 이유는 기사 작위를 통한 사면의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카라바조는 파사지오(Passaggio)라는 관례에 따라 성 요한 기사단에 그림을 헌정하여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몰타의 대 영주와 귀족들은 카라바조의 어두운 과거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사면의 특혜를 주어 카라바조의 그림을 얻고 싶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삶을 용서받고 새롭게 살겠다는 각오로 그림 속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에 피에 자신의  서명을 합니다. 카라바조는 세례자 요한의 잘린 목 밑으로 흥건히 고인 붉은 피를 찍어 ;f. michel'이라고 서명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Frater of Michelangelo'의 약자로 보이는데, 이는 카라바조가 성 요한 기사가 되면서 진심으로 자신의 과오를 씻어버리고, 새롭게 살겠다는 각오를 이름으로 새겨 넣은 것입니다.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은 마태오복음 14장 3-12절과 마르코 복음 6장 17-29절이 그 배경입니다. 이 작품은 몰타에서 목숨을 잃은 120명의 성 요한 기사단 소속 기사들의 영웅적인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교도의 침공을 막다가 작렬하게 전사했고, 그들의 시신은 수습되어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이 그려진 산 조반니 대성당에 안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도록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을 과감히 탈피합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 장면을 어두운 몰타 감옥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인 장면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다른 그림에서는 표현하지 않은 몰타의 성벽과 대문을 배경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또 성벽 오른쪽에는 감옥에 갇혀있는 두 명의 죄수들을 그려 넣어 창살 밖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살인 현장을 목격하게 했습니다. 중앙 땅바닥에 두 팔이 뒤로 결박된 채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목이 잘린 채 죽어가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의 몸을 가로지르는 붉은색 겉옷은 순교를 상징하듯이 세례자 요한의 붉은 선혈과 함께 상체와 하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참수형을 선고받고도 계속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주문받았고, 명작도 탄생시킵니다. 참수형을 피하기 위해 나폴리로 도주하고, 그림 실력으로 몰타 기사단의  인정을 받아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작위를 받은 후 6개월 후 기사단원과 싸워 중상을 입히고 또다시 도주자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몰타 기사단의 습격을 받아 얼굴이 크게 다치는 중상을 입고요.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1610/caravaggio.org

 

 

 

 

카라바조의 평생 충동이  조절되지 못했습니다. 더욱 파괴적으로 나타났지요. 주택침입죄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공증인 파스콸로네를 폭행해 체포되기도 했고요. 임대료를 6개월이나 납부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숙집 주인이 사는 방의 창문에 돌을 던진 혐으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1605년 , 교황 즉위 1년 축하식에서 일어납니다. 캄포 마르치오에서 네 사람씩 편을 이뤄 싸움을 했는데, 이 싸움으로 인해 한쪽 리더였던 란초 다 테르니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상대편 리더였던 카라바조는 살인죄를 저지른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참수형 선고를 예상이라도 한 듯, 그의 그림에는 참수에 관한 그림이 많이 등장합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그림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 살았던 소년입니다. 필리스타인의 투사 골리앗은 괴물처럼 큰 덩치에 청동투구와 비늘갑옷으로 무장한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군에게 1:1로 싸워지면 상대의 종이 되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때 소년 다윗이 갑옷과 투구를  모두 거절한 채 맨 몸으로 막대기와 돌멩이를 손에 들고나가 골리앗의 이마에 돌을 던집니다. 카라바조는 이 작품 속 다윗을 과거 소년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골리앗의 얼굴에는 습격을 받아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도달해 더는 도망갈 곳이 없는 지금의 자신의 삶이 끝나가고 있음을 깨달은 카라바조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조절되지 못했던 충동의 죗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1도 망자 신분이 되어 나폴리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입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위>은 승리자 다윗을 새롭게 해석하여 슬픈 듯 무심한 표정으로 그려냅니다. 목이 잘린 골리앗의 흉측한 얼굴이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라는 해석이 17세기부터 있었습니다. 골리앗의 목을 든 다윗 또한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을 모델로 했다는 주장도 있고요. 자신의 광포한 본성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가 영원한 형벌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자신의 비참한 얼굴(골리앗)을 들고 있는 순진무구한 소년의 얼굴(다윗)과 대비시키며 이중초상을 시도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평생 안정된 생활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고요.  이 그림을 들고 교황을 찾아가려다 중간에 폭력배들에게 칼도 맞고 잠시 억류되어 있다가  그림을 실은 배가 먼저 떠나가고 맙니다. 먼저 간 이 그림을 찾아 교황님께 용서를 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 수포로 돌아갔고 이 그림을 찾으러 가는 길 위에서 객사하고 맙니다. 교황은 이미 사면을 내린 상태였지만 카라바조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 후였죠. 

 

 

 

 

 

어떤 사학자는 다윗이 들고 있는 칼의 의미로 이 작품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칼에 새겨져 있는 라틴어는 성 아우수스티누스가 자신의 성경 <시편>에 단 주석의 일부라고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예수가 사탄을 물리쳤듯 겸손함으로 교만함을 무찔러야 한다."

 

세속적이며 사실적인 그림으로 빛의 마술사라 불리며 바로크 미술에 한 획을 그은 카라바죠, 그를 악마로 만들었던 것은 인간보다 신을 중시했던 당시 사회 풍토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림은 장식이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카라바조(어느 법정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xDXx3aNK4TA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 (1577-1640)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1605년 루벤스의 친형이 당대 카라바조의 후원자였던 보르메오 가문의 대주교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루벤스와 카라바조가 같은 이에게 후원을 받는 기간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 기간 루벤스가 카라바조의 작품 <그리스도의 매장>(1602-1604)을 접하고 구도 등이 비슷한 동명의 작품(1612년)을 그렸다고 분석합니다. 카라바조의 대표작 중 하나로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을 꼽았다.  그는 "당대엔 가만히 손을 모으고 있는 인물화가 주종을 이었는데, 얼굴을 찡그리는 찰나의 순간도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으며 활들 짝 놀라는 손짓으로도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크 미술의 시작점이자 중심이자 그 자체였던 카라바조의 영향력은 넓고 멀리 갑니다. 벨기에의 루벤스,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스페인의 벨라스케스... 그리고 카라바조의 빛은 현대의 <아이리쉬 맨> 영화의 감독 마틴스콜세이지와 같은 거장에 이르기까지 닿아 있습니다. 39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던 천재 중의 천재화가 카라바조를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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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러시안 테리어(Black Russian Terriers)는 대형견입니다. 보기 드문 견종으로  튼튼한 견종이죠. 크고 힘이 넘칩니다. 좋다고 사람에게 달려들면 덮치는 느낌이 들것 같습니다. 앞 발을 든 채 울타리에 서 있으면 웬만한 아이키를 훌쩍 넘는 모습이고요.

 

Black Russian Terrier/wikipedia

 

 

 

블랙 러시안 테리어(Black Russian Terrier)는 원산지가  러시아입니다. 러시아의 사역견종의 하나이죠. 1960년대 러시아 애견 전문가들이 탄생시킨 우람한 테리어종입니다. 자인언트 슈나우저와 에어데일 테리어, 로트와일러 등을 혼합 교배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별칭으로 Tchorny Terrier, BRT라고도 합니다.

 

 

 

신발끈여행사

 

 

 

 

 

블랙 러시안 테리어/ Cuwel.es

 

 

 

체고: 63-71cm

체중: 40-65kg

수명: 10-14년

 대형 사역견에 해당합니다.

 

방어 본능이 강하고 엄격한 훈련에도 잘 적응합니다. 러시아 군대에서 군용견, 경호견 등으로 활약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외부로의 반출을 금지하여 최근에 와서야 국제애견연맹(FCI)로부터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습니다.

 

 

 

 

Shutterstock

 

 

 

1940년대 러시아 육군의 켄넬 "레드 스타(RED Star)"는 그들의  필요에 의해 개를 브리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소비에트 브리더 전문가 집단에 의하여 개발된 프로그램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특별한 임무에 적합한 새로운 견종을 만들어 내지요. 크고, 건강하고, 활기차고, 그리고 넓은 국토의 엄청난 기후 차이를 잘 견딜 수 있는 개로 말입니다. 대략 20종류의 견종들이 블랙 러시안 테리어의 창조에 관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러시아의 "DOSAAF(군사조직)"브리더들은 레드스타(Red Star)로부터 개들을 데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견종의 외모를 표준화(Standardize)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1984년 5월 FCI로부터 견종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French Army에 마리노이즈가 있듯이 , RedArmy에는 블랙 러시안 테리어가 있는 셈입니다. 최종적으로 2004년 7월 1일 , 블랙 러시안 테리어는 AKC(American Kennel Club) Working Group에 공인을 받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v0_AiQvxoM

 

 

 

블랙러시안 테리어는  성격이 날카로운 편입니다. 낯선 사람에 대해 의심이 많고, 강한 보호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 표현을 주로 앞발로 해서 돌발상황에 주의 하셔야 합니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가정견이나 애완견으로도 적합하지요. 어린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견종은 인간과 동물들의 강한 연대감을 원합니다.

 

 

 

언제든 사나워질 수 있으므로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개를 줄에 묶어 걸을 때, 개를 절대로 사람 앞에서 걷게 해서는 안됩니다. 옆에서 또는 뒤에서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개의 마음 속에 무리의 리더는 항상 앞장서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일관된 리더십과 가족과의 밀접한 접촉은 이 개를 최고의 반려견으로 만들 겁니다.

 

 

 

북방지역 출신이라 추운 날씨에도 잘 견딥니다. 눈 위를 구르고 물에서 노는 것도 좋아하고요.

 

 

 

블랙 러시안 테리어(BRT 또는 스탈린의 개)/ Shutterstock

 

 

 

블랙 러시안 테리어의 외모는 몸집이 크고 뼈대가 굵으며,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몸 전체가 근육질이며 피부의 탄력도 뛰어나답니다. 털은 억세고 곱슬거리며 착 가라앉아 있습니다. 특히 머리에서부터 눈을 덮으며 흘러내리는 털과 수염이 독특합니다. 털의 색깔은 검은색 또는 잿빛을 띤 검은색입니다. 머리는 긴 편이고 이마는 평평합니다. 코는 검고 크며 귀는 늘어져 있습니다. 꼬리는 보통 위로 솟아 있으며 3-4번째 뼈마디에서 잘라줍니다.

 

 

 

 

무성한 녹색 들판에 자랑스럽게 서 있는 장엄한 블랙 러시안 테리어/Freepik

 

 

 

 

전천후 털로 빽빽하며, 눕혀있고, 웨이브가 있습니다. 4-10cm 길이의 털로 구성되어 있고요. 윗 목 부분과 두 견갑골 사이의 융기 부분에 갈기털이 있습니다. 밑털은 타이트하게 잘 발달되어있고요. 일주일에 최소 1회 이상 브러시로 빗어 주세요. 귀 통로의 털을 제거하고 발 밑의 털을 잘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규칙적으로 털을 브러시 해주면 털갈이 시 털 빠짐이 덜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Ogj4e-oF_s

 

 

 

 

고관절과 관절 형성장애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귀에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잘 관리하시고요. 블랙 러시안 테리어(

Black Russian Terrier)는 충분히 운동만 시켜준다면 , 아파트에서 사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실내에서 활동적이지 않으며 현관문에서 당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릴 겁니다. 블랙 러시안 테리어는 주인과 아주 가깝게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당에 두면 오히려 당신을 따라 다니며 당신이 문에 나타날 것을 기다릴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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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센지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까요? 저도 처음입니다.  '인류에게 이상적인 개'라고 칭송받는 바센지를 소개합니다.

 

다나와DPG

 

 

바센지는 체구:40-45cm(수컷:43cm/암컷: 40.5cm)

체중: 수컷 11-16kg/ 암컷 9-14kg

수명:12년 전후의 중형 견에 속합니다.

 

몸에 군더더기 하나 없어요. 마치 사슴 같아요. 약간  큰 귀, 장식털이 없는 꼬리와 긴 다리가 특징입니다. 기본적으로 이마에 주름이 있습니다. 목은 길고 몸통은 짧으며 가늘어요. 꼬리는 단단하게 말려 올라가 있습니다.  

 

 

 

 

출처:TBS

 

 

바센지는 콩고 공화국 출신의 사냥개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콩고 도그  혹은 아프리카부시 도그 라고 합니다. 바센지라는 이름은 원주민을 뜻하는 반투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를 생활 거점으로 하는 피그미족의 언어로'숲 속 야생 소동물'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요. 약 100년 전 콩고의  오지에서 난쟁이 족(피그미족)과 함께 생활하던 중 영국의 탐험가에 의 해 발견되었습니다. 기원전부터 존재하는 고대 견종이라 현존하는 개 중 가장 오래된 견종입니다.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애완견의 귀족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 원산의 이비잔하운드 견종과 비슷해서 잡종견으로 종종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유적에서 출토된 예술과 벽화에서도 기록이 남아 있어 바센지가 이미 고대 이집트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 무덤에서 바센지와 매우 흡사한 모양의 조각들이 발견되었다고 해요.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견종인 거죠.  1937년 영국에서 처음 소개됩니다. 1943년 미국전역에 바센지 클럽이 결성될 만큼 애견인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요. 

 

 

 

게티이미지코리아

 

 

 

바센지는 똑똑하고 호기심이 강합니다. 독립심은 최고이고요. 어설픈 교육은 말을 듣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어린 강아지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과 훈육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센지는  마이 페이스 스타일이라서 가정 교육과 훈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똑똑하지만 복종에 대한 훈련과 훈육에 끈기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칭찬을 해주면서 훈육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uHT5T_WQ_k

 

 

 

 

 

 

 

 

 

짖어도 위험하지 않고 얌전한 견종입니다. 주인과 가족에게 충실하고 다정한 견종입니다. 응석 부리는 모습은 얼마나 귀여운 지 몰라요. 낯선 사람에게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거리를 두며 이마를 찌푸리고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것이  특징입니다. 다른 강아지나 동물은 야생의 본능 때문에 낯선 사람을 쉽게 공격해  버리는 일이 많은 데 말이죠.

 

 

 

iStock

 

 

 

 

청결한 것을 좋아해 생후 6개월이 지나면 자신의 잠자리가 더러워지는 것을 싫어해 배변활동도 좀 떨어진 장소에서 하고 온답니다.  스스로 몸을 정리하고 청결히 하기 때문에 체취가 적은 것도 인기가 많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몸의 구석구석을 핥아 깨끗이 하는 특이한 행동을 보여요. 고양이처럼요. 진돗개랑 성향이 비슷해 보입니다. 

 

 

iStock

 

 

바센지의 털은  부드러운 질감의 단모입니다. 다양한 색상이 있지요. 바센지의 털은 빛을 받으면 반짝 거리며 유난히 빛을 내어 매우 매력적이라고 합니다. 단모종이라 털 빠짐이 거의 없는 편이기 때문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적합한 견종입니다. 털 색깔은 블랙&화이트, 레드&화이트 등 다양한 색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0vyqjUCJ6s

 

 

 

 

 

가장 독특한 점은 짖는 소리입니다. 바센지는 잘 짖지 않는 걸로 유명한 견종입니다. 기쁠 때에는 요들을 닮은 소리를 낸답니다. 그 이외는 거의 짖는 소리도 내지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조용한 점이 바센지가 세계적으로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시끄럽게  짖지도 않고 체취도 거의 없기 때문에 공동 주택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견종입니다. 기를  때 바센지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한 뒤 애정을 갖고 돌보아준다면 강아지와 함께하는 생활이 더욱 행복해질 겁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몸은 유연하고 신체능력이 턱월합니다. 도약력도 뛰어나고요. 낮은 서클 등은 쉽게 뛰어넘어 버리는 모습에서 고양이를 닮은 듯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강아지의 발정은 일 년에 두 번 있지만 바센지는 1회밖에 없다는 점도 특징 중 하나입니다. 시력이 우수합니다. 창문이나 정원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하고요.

 

 

 

 

게티이미지코리아

 

 

 

바센지는 매우 활동적인 개입니다. 산책할 때 대형견 수준의  운동량이 필요합니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므로 배변활동을 겸한 산책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2회 30분 정도 실시해 주십시오. 바센지는 민첩합니다. 움직이는 물체에 본능적으로 반응합니다. 후각도 뛰어나 설치류 사냥에 탁월한 능력을 보입니다. 반드시 목줄을 하고 산책을 시켜주세요. 특히 조류에 과민하게 반응합니다. 힘이 강한 견종이니 하네스보다는 체인 형태의 목줄을 권합니다. 영역 의식이 강해 다른 개와 함께 있을 경우 주도권 다툼으로 트러블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더운 나라 출신의 개이므로 여름철에는 다른 개에 비해 건강하지만 겨울철에는 힘이 듭니다. 겨울에는 가능한 한 따뜻한 장소에 침대를 설치해 주세요. 산책 시에는 옷을 입는 등 방한에 대비해 주시고요.  털의 손질은 매일 빗질, 때로는 물기를 짜낸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세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주의해야 할 것은  용혈성 빈혈과 팬코니 증후군이라는 병입니다. 용혈성 빈혈은 기운이 없고 운동을 싫어합니다. 식욕부진, 호흡 곤란, 황달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요. 팬코니 증후군은  많이 마시고 다량의  소변을 보게 되는 증상의 신장 질환입니다.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면 즉시 수의사에게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서혜부 탈출증은 다리의 관절 근처에서 장기가 튀어나오는 질병으로 예방이 어려워 조기 발견, 치료가 중요합니다. 디스크 부분이 커지면 장폐색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기력이 없고, 변비, 구토 등의 증상을 보인다면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배꼽탈장은 선천적으로 발병하는 경우와 비만이나 사고 등 외상에 의해 발병합니다. 증상에 따라 수술이 필요할 수 도 있습니다. 이밖에 눈 질환이 있어요. 각막염이나 결막염에 자주 걸리는 편이라 특히 유의해야 합니다. 위장 질환, 고관절계의 부상등도 바센지에게  잘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유전자 이상이 있는 경우 DNA검사에서 즉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참고해 주세요. 오랜 세월 동안 멸종되지 않고 현재까지 반려견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니 것 자체가  바센지(Basenji)가 지닌 또 다른 매력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https://www.youtube.com/watch?v=NKoM4cVUjn8

 

 

 

유행 따라 분양받는 것 지양해 주세요. 분양받기 전 반려견의 특징과 장점, 단점 등을 충분히 숙지하시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반려견이 되었다면 끝까지 책임져 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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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곰'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는 '버니즈 마운틴 독(Bernese Mountain Dog)'입니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세인트 버나드(Saint Bernard)'와 흡사한 외모를 자랑하지요. 스위스에서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버니즈 마운틴 독은 아주 건강한 견종입니다. 마음을 터놓은 주인과 같이 산책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견종이지요. 

 

힘이 센 천하장사 강아지,버니즈 마운틴 독(Bernese Mountain Dog)/ 비마이펫라이프

 

스위스 베른 출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여 년 전 로마의 군대가 스위스를 침략할 때 군인들의 양식을 위해 데려온 가축들을 지키기 위해 마스티프 종의 경비견들을 많이 데려왔습니다. 이 마스티프들이 그 지역의 재래 목양견들과 교배해 여러 품종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중 대표적인 녀석들이 '버나드 마운틴 독, 그레이트 스위스 마운틴 독, 아펜젤러 제넨훈트, 엔틀부처 제넨훈트'랍니다. 이 들은 스위스에서 태어난 녀석들인 데다 생김새도 비슷해 ' 스위스 제넨훈트(Swiss Senenhund)'라고 불립니다.  제넨훈트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알프스의 목초지를 뜻하는 Senne 과  개를 뜻하는 Hund에서 유래했습니다. 

 

 

엔틀 부처 제넨훈트(Entlegucher Sennenhund)/shutterstock

 

 

 

 

 

 

그레이터 스위스 마운틴 도그/iStock

 

 

 

아펜젤러 제넌훈트 Appenzekker Sennenhunde/Pinterest

 

 

 

스위스 베른/몽트래블 유럽여행

 

 

이 아이들 중 베른지역에 자리잡은 버니즈 마운틴 도그는 비교적 다른 토착견과의 접촉이 적어서 현재의 긴 털의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베른지방 출신이라 베른의 영어식 발음인 '버니즈(Bernese)가 붙어서 '버니즈 마운틴 독(Bernese Mountain Dog)'라는 현재의 이름도 얻게 되었답니다. 아름다운 외모가 곰과 흡사해'작은 곰'이라는 별칭도 얻은 이 녀석은 주로 농장에서 우유통을 실어 나르거나 가축을 지키는 목축견의 역할을 했습니다. (명확하진 않지만 개인적으로 <플란더즈의 개> 파트라슈의 모델이 '버니즈 마운틴 독'이 아닐까 싶습니다.)

 

 

 

 

버니즈 마운틴 독 /오케이독

 

 

 

스위스의 고립된 지역에서 살던 이 녀석이 외부에 알려지지않아 19세기 무렵 멸종위기를 겪게 됩니다. 1907년 스위스에 동호회가 설립되어 버니즈의 보존에 힘을 썼고, 그 후 1936년 미국애견협회(AKC)에 정식 품종으로 승인되면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버니즈 마운틴 독/ 비마이펫 라이프

 

 

체고:60-70cm

체중: 40-45kg

길고  부드러운 털로 덮인 근육질의 대형견입니다.

 

마스티프의 피가 섞인 녀석이라 골격이 크고 머리도 큰 당당한 체격을 자랑합니다. '세인트 버나드 (Saint Bernard)'와 닮아서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기도 하시는데 엄연히 다른 품종입니다. 대형견인 버니즈 마운틴 도그와 초 대형견인 세인트 버나드는 체급부터 다릅니다. 

 

 

 

 

초대형견 세인트 버나드(Saint Bernard)/나무위키 알프스 산맥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세인트 버나드, 산악구조견으로 예전부터 스위스 생베르나르고개에서 포도주통을 목에 걸고 조난당한 등산객의 구조견으로 활약했습니다.

 

 

 

 

 

버니즈는 크고 튼튼하며 균형잡힌 체구를 갖고 있습니다. 코와 주둥이는 곧고 코 끝은 검습니다. 귀는 두부의 위쪽에 위치해 삼각형 모양으로 볼까지 들어져 있으며 눈은 아몬드형의 짙은 갈색입니다. '네 개의 눈을 가졌다.'라고 불렸듯이 뺨과 양쪽 눈 위에 황색의 큰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은 검은 털로 덮여있습니다. 추운 고산지대에 살았던 만큼 이중털이 발달했으며 털은 길고 매끈한 비단결 같아 광택이 납니다. 털 빠짐이 장난 아니겠죠? 꼬리는 길게 늘어져 있으며 털이 북실북실하게 나있습니다.

 

 

 

 

털은  짙은 검은색이 주된 컬러로, 진한 황갈색, 흰색 무늬가 나타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황갈색 무늬는 볼과 눈 윗부분, 네 다리, 그리고 가슴 부위에 있습니다. 머리에 눈 사이를 지나는 흰색 줄무늬가 또렷하게 좌우 대칭을 이루면서 형성된 경우, 목과 가슴 부위에 다소 넓고 중간에 끊어지지 않는 흰색 반점이 형성된 경우가 있습니다. 발이나 꼬리 끝이 흰색인 경우도 있습니다. 

 

 

 

털은 윤기있는 장모입니다. 살짝 웨이브 지거나 직모입니다. 이중모라 털 빠짐이 당연히 많습니다. 털의 생장 주기에 따라 일 년 내내 죽은 털이 빠지고 새로운 털이 나며, 털갈이 시즌인 봄과 가을에 가장 많이 빠집니다. 평소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털갈이 시기에는 매일 빗질해 죽은 털을 제거해 주십시오.

 

 

 

https://www.youtube.com/watch?v=2-VQX8S0Nvk

 

 

 

 

버니즈 마운틴 독은 재산을 보호하고, 농장에서 고산 목초지로 가축을 몰고, 수레를 끄는 등의 역하를 하는 다재다능한 사역견이었습니다. 기질 또한 "매우 자신 있고, 기민하며, 착한" 견종입니다. 일상적인 상황에 겁을 내지 않으며, 예민하지 않고, 겁을 내지 않으며 원만하며, 유순한 성격입니다.

 

 

 

그 조상들의 DNA를 물려받아 장난끼가 없고 자립심이 강하며 고집이 상당히 세답니다. 좀 무뚝뚝하고 경계심이 강해 훈련 적응을 잘 못하지만 똑똑하고 기억력이 좋아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줄은 알죠.  사람도 무뚝뚝한 성격의 사람이 한번 맘을 터놓으면 깊게 사귀듯이 이 견종 또한 한번 마음을 터놓은 주인에겐 온 정성을 다한답니다. 주인에겐 상당히 순종적인 견종이라 한번 정해진 주인을 바꾸기 힘든 녀석입니다. 충성심이 상당한 녀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가족과 잘 지냅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상냥합니다. 하지만 대형견이고 힘이 좋기 때문에 놀자는 행동이 의도치 않게 아이들을 다치게 할 수 있으므로 늘 보호자가 아이와 강아지의 상호작용을 감독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에게 강아지를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알려주는 겁니다. 호기심이 많고, 다른 동물과도 잘 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LcAtZIkbBw

 

 

 

 

자립심이 강하고 똑똑해 무턱대고 야단치면 주인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닫아버릴 수 있습니다. 훈련성과가 약하고  자존심도 세기에 훈련이 잘 안된다고 야단치면 성격이 모나질 수 있습니다. 훈련을 시킬 땐 아이의 눈을 마주 보면서 교감하며 시켜주셔야 합니다. '눈높이 교육'아시죠.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교정하고 싶다면 항상 눈을 마주 보면서 따뜻한 말로 다독이듯이 훈련시켜주셔야 합니다. 이처럼  버니즈마운틴 독은 개를 좋아하지만 신체적인 접촉을 싫어하거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견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과 사세요." 사과 농장 홍보하는 버니즈 마운틴 도그/노트펫

 

 

스위스의 베른 협곡을 누비던 힘 좋은 사역견인 버니즈 마운틴 독은 운동량이 많습니다. 야외에서 산책하거나 노는 것 외에도 매일 최소 30분 이상의 격렬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버니즈 마운틴 독의 숱 많은 이중모는 추운 기후에 딱 맞습니다. 그래서인지 눈 속에서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추운 기후에 적합한 아이들은 반대로 더위에 취약하기 때문에 더운 날씨에는 산책 및 운동을 피하고 실내 온도를 조절해 열사병을 예방해 주세요.

 

 

 

수레를 끄는 버니즈 마운틴 독/Pinterest

 

버니즈 마운틴 독은 수레를 끌던 과거의 능력을 살려 어린아이들을 수레에 태우는 걸 즐깁니다. 이러한 기량을 뽐내는 carting and drafting competition에 참가하기도 하며, 어질리티, 허딩, 복종, 랠리, 트래킹 등에 참가해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bB6LrR_rGU

 

 

 

 

체중이  40kg를 넘나드는 대형견종이라 비만이 잘 되기에 항상 체중관리를 해주셔야하고 더불어 관절질환에 잘 걸리니 적절한 운동을 시켜주면서 체중관리 및 관절부위 근육발달에 힘써주셔야 합니다. 귀가 덮인 품종이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귓병 체크 해주시고요.

 

 

 

모든 대형 품종은 고창증에 취약합니다. 고창증은 위 내용물이 이상발효하여 다량의 가스가 발생되거나 트림을 통한 가스배출이 원활하지 못할 경우 위내에서 가스가 충만되어 배가 부풀어 오르는 질병입니다. 위염전(Gastric Torsion), 혈액 질환, 고관절이형성증, 팔꿈치이형성증, 일부 암, 점진적 망막 위축, 범골염(Panosteitis), 문맥대정맥 션트(Portosystemic Shunt) 폰 빌리브란트 씨 병의 위험이 있다고 하니 잘 기억하시고, 증상 및 대처 방법을 숙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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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지 않는 출생으로 삶을 시작하여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삶을 마감했던 프랑스 출신의 천재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1864.12.8-1943.10.19)을 소개합니다.

 

까미유는 1864년 프랑스의 페르 앙 다드누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축복받는 탄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던 순간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상당한 지위가 있는 공무원이었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카미유가 환영받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녀가 태어나기 일 년 전에 세상에 태어났다가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난 장남 샤를 앙리 클로델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카미유의 부모는 크게 상심합니다. 다시 아이를 가져 15개월 만에 아이가 태어납니다. 부모님은 이왕이면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딸인 카미유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실망감에 거리를 배회합니다. 어머니는 그녀의 존재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까미유에게 독설을 퍼붓습니다. 훗날 아버지는 딸의 미술적 재능을 반기고 후원해 줍니다. 반면 어머니는 그녀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부인하며 나중에 태어난 아들(폴 클로델:프랑스의 시인, 작가, 외교관으로 유명하다)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한 편애가 훗날 카미유가 정신병원에서 지내게 된 근본 원인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카미유는 혼자서  흙을 만지며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려서부터 점토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카미유는 12살에 <다비드>, <골리앗> 제작하여 천재성을 보입니다. 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클로델이 15살이 되자 조각가 알프레 부셰를 찾아갔습니다. 클로델은 부셰의 도움을 받아 17살에 파리의 사립학교인 콜라로시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 여성을 입학시켜 주는 곳이 많지 않았지만, 이곳은 드물게 허용을 해줍니다.

 

 

 

공모전에  당선된 스승 부셰가 로마로 떠나게 되며 로댕에게 자신의 제자들을 위탁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로댕과 까미유 두 사람은 만나게 되지요. 1883년의 일이었습니다. 스승 부셰는 사랑하는 제자 까미유에게 근심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부셰는 까미유가 예술적 재능은 뛰어나지만 격한 성격으로 일을 망치는 것을 무척이나 걱정했습니다. 또한 까미유에게 속물처럼 행동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많은 시간 인내를 갖고 겸허한 마음으로 예술가다운 진면목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조언하지요. 스승 부셰는 그녀에게 닥칠 불운한 기운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많은 충고와 조언을 남기고 떠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AZzAiX2614

 

 

 

 

 

 

Crouching Woman,1884-85/Pinterest

 

 

 

19살에 로댕의 눈에 띄게 되고 20살에 로댕의 아틀리에에 들어가게 됩니다. 조각사에서 로댕의 업적이라고 한다면 아름다움과 틀에 박힌 규칙만을 중요시 여기던 전통적인 조각을 벗어나 사실적인 표현으로 아름답지 않은 것도 예술로 끌어올리는 재능이었습니다.  매끄러운 피부 대신 울퉁불퉁한 굴곡을 많이 넣어 조각을 비쳐주는 빛의 효과도 중요하게 취급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로댕의 영향을 받아 카미유는 사실적이면서 삶의 무게가 그대로 실린 작품들을 제작하게 됩니다.

 

 

 

                                                                                                 43살 VS19살

 

 

 

 

이미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 덥수룩한 수염에 근엄한 인상까지 주는 로댕입니다.  최고의 조각가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요. 영특한 눈매에 19살의 천재적인 조각가 까미유는 로댕과 이렇게 대면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였을까요. 카미유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로뎅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로댕의 제자이자 , 연인이며, 예술의 동지이자 영감의 원천이 되어 갔습니다. 로댕은 그녀의 천재성을 인정하여 제자들에게  점토작업만 맡긴다는 규칙을 깨고 그녀에게 작품의 일부를 만들도록 허락합니다. 당시 여성 예술가를 무시하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문제는 로댕 곁에 오랜 세월 사실혼 관계를 이루고 있던 연상의 여인 로즈 뵈레가  있어습니다. 뵈레는 로댕이 무명이던 20여 년 전부터 지원해 주고 돌봐준 여인입니다. 힘든 시절을 함께 건너온 조강지처 격의 로즈 뵈레를 쉽게 버릴 수 없는 처지입니다.  또 두 사람 사이엔 클로델보다 두 살 어린 아들도 있었습니다.

 

'무슈 로댕'

'파드모아젤  끌로텔'

 

서로에게 깍듯한 존칭을 사용하며 로댕은 점점 이중적인 남자가 되어갑니다. 로댕은 그녀에게 무관심한 듯, 때로는 적대적인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집요하게 그녀의 견해나 충고를 열심히 물어보곤 했습니다. 로댕은  클로델을 보는 순간부터 깊이 매료됐다고 합니다. 클로델은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지적이었거든요. 조각가로서 성공하고 싶은 강한 의지도 갖고 있었죠. 로댕은 반짝이는 클로델에게 빠져 적극적으로 구애했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활활 타오르는 기쁨을 준다오. 
내 인생이 구렁텅이에 빠질지라도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슬픈 결말조차 후회스럽지 않아요. 
당신의 그 손을 나의 얼굴에 놓아주오.
나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나의 가슴이 신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로댕이 쓴 편지)





Portrait de Camille Claude by Autuste Rodin Scupture , Musee d'Orsay, Paris/Web Gallery of Art

 

 

 

그즈음 로댕의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사망합니다. 이때가 1883년 10월 26일이었습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로댕에게 까미유의 등장은 많은 위안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로댕은 로즈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 알코올 중독자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 외에 이런 가족들로 인해 심한 마음의 고통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의 고통이 까미유의 등장으로 인해 많은 위로를 받게 됩니다. 

 

 

 

 

 

<Paul Claudel enfant>,/Pinterest

 

 

1884년  까미유는 로댕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16세의 내 동생>을 완성합니다. 폴을 모델로 한 이 작품에는 아직 미성년의 모습으로 젊은이의 연약함과 기품 있는 모습이 조화롭게 살아 있습니다. 이 작품은 솔직하고 강직한 듯한 눈빛이나 곧게 세운 목, 어깨 위에 걸치고 있는 망토 등으로 마치 승리자의 모습처럼 동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생을 향한 누나의 애정이 듬뿍 들어간 작품입니다. 그녀는 동생 폴과 가깝게 지냈고 후손이 없던 카미유의 보호자가 되어줍니다. 

 

 

 

Paul Claudel,1905, by Camille Claudel ,Musee Bodin,Paris/Arthive

 

까미유는 그 후 1905년 폴의 중년 모습을 조각한 <37세의 폴 클로델>과  5년 후인 1910년에 다시 만든 <42세의 폴 끌로델 흉상>도 남기고 있습니다. 이제 마흔둘이라는 중후한 나이가 된 폴은 그 나이에 걸맞게 벗어진 이마, 깔끔하게 잘 다듬어진 콧수염이 섬세하게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강티의 흉상 Tete de Brigand>,1885 by Camille Claudel, Musse des Beaux Arts Cherbourg/캐나다 한국일보

 

 

 

 

1885년 까미유를 혼자서만 좋아했던 모델 지강티를 조각한 <지강티의 흉상>을 남겼는데 이 작품은 살아있는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듯합니다. 로댕은 까미유가 가진 예술적 재능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11월 까미유는 로댕의 권유로 그의 작업실에서 제자 겸 모델 일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녀가 가족들과 상의 없이 혼자서 결정했다는 점이죠. 이곳에서 그녀는 습작으로 두상과 손을 많이 제작했습니다. 그녀의 이 두상 습작은 로댕의 <지옥의 문>에 들어갈 '걷는 사람'의 얼굴로 다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손>은 그녀가 만든 다양한 모양을 취하고 있는  손들 중 한 작품인데 특히 섬세한 표현이 돋보입니다. 까미유는 이 무렵부터 2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목탄이나 연필을 사용한 연작 스케치를 하며 조각의 밑작업을 준비해 갑니다. 그 예로 자신의 아버지를 데생한 작품이지요. 그녀에게 아버지 루이 끌로델은 자신을 믿어 주고 조각가로서 천재성을 인정하며 적극적으로 이해해 주고 후원해 준 유일한 사람입니다. 

 

 

 

 

 

 

 

<까미유 끌로델> 영화(이자벨&nbsp; 아자니 & 제라르 드 빠르디유 주연 영화/ 한국강사신문

 

 

 

 

로댕은 자신이 참석하는 파리의 모든 사교계에 까미유를 동반하고 다닙니다. 사람들에게 그녀가 대단한 조각가임을 주지 시키면서 말이죠. 이제 그녀의 행동들은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충분했습니다. 까미유는 이제 파리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유명 여류 조각가가 되었으며, 그녀의 미모와 예술가적 기질이 보태지면서 사람들은 아름답고 대단한 이 여류 조각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하기 시작합니다. 

 

 

 

<Bust of Rodin>,1888-1889/Wahoo Art

 

 

 

 

 

키미유가 작업실에 등장한 이후 작업실에는 웃음이나 농담은 점차 사라져 갔고 차가운 냉기류만 더해져 갑니다. 작업실에서 고통을 감내하던 까미유에게 아버지마저도 로댕의 작업실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동안 자신을 잘 이해해 주고 후원해 주었던 아버지의 이런 모습은 까미유를 더욱 절망스럽게 했습니다. 

 

 

 

<The Gates of Hell>,1880-1917/MUSEE RODIN

 

 

이 무렵 로댕과 까미유는 단테와 보들레르로부터 받은 지옥에 대한 영감을 공유하여 <지옥의 문>을 위한 열정적인 작업에 임합니다. 로댕은 늘 까미유에게서 조언을 구했고, 이 조언으로 작업된 로댕의 조각상은 거꾸로 까미유에게 감동을 주곤 했습니다. 

 

 

<The Gates of Hell> 작업중인 까미유 끌로델/나무위키

 

 

 

 

 

 

 

 

 

https://www.youtube.com/watch?v=bfv9T1lSO2U

 

 

 

 

 

 

 

까미유의 또 다른 영감으로 제작된 로댕의 유명한 <입맞춤>도 둘만의 깊은 사랑이 근원이 되어 탄생한 대표적인 에로틱한 작품입니다. <입맞춤>은 풍부한 감수성에 힘입어 능숙한 구성으로 제작돼 로댕의 명성을 더욱 높여준 걸작입니다. 두 남녀의 면과 면이 접촉되는 부분에는 생명력과 고양된 긴장감이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의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하는 교묘한 형태의 배합이 특징인 작품입니다. 

 

 

 

<The Kiss>,1882 by Auguste Rodin/주간한국-한국아이닷컴

 

<Louise Claudel>,1887/Arthive

 

 

 

여동생 루이즈마저 페르디난드 드 마사리와 결혼을 하자 까미유는 가족을 떠나 로댕이 마련해 준 작업실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때에 까미유는 파스텔을 사용해 동생 루이즈를 그리게 됩니다.  1887년 그린 이 작품은 화면 중앙으로 루이즈의 모습을 부각하고 머리와 얼굴 부분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몸체는 마치 미완성인 듯 윤곽선으로만 표현하고요. 주변 배경은 거친 터치와 절제된 색채를 사용했습니다.

 

 

 

 

로댕은  까미유가 몰인정한 그녀의 어머니에게 쫓겨났을 때 임대비와 생활비를 책임져 주었습니다. 이즈음 로댕의 후원은 그녀가 떳떳하게 자립할 수 있는 성격의 급여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댕은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광란의 뇌부르그로 불리는 집과 투렌느 이즐리뜨 성을 빌립니다. 이곳에서 둘 만의 사랑도 키워 가고 , 아무도 오지 않고 단 둘 만이 작업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합니다. 까미유는 이 공간을 가족이나 시간에 제한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로운 곳으로 여기고 무척이나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까미유는 자신이 사랑했던 아버지에게 마저도 로댕과의 사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일체 비밀에 부치고 있었습니다. 

 

 

 

로댕은 까미유에 대한 사랑을 거리낌 없이 표출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로댕이 처음과는 달리 자리를 자주 비우게  되자, 까미유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아져 갔습니다. 무섭고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까미유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녀는 책을 통해 배울 것, 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독서 속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기도 하고요. 때때로 밤이 길어질 때까지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The Abandomnent>/KNS뉴스통신

 

 

 

 

<SAKUNTALA>,1888 , Canille Claudel vs&nbsp; &nbsp;<영원한 우상>, 로댕/오마이뉴스

 

 

 

 

 

<사쿤탈라Sakountala>,1888,로댕박물관/중기 이코노미

 

 

1888년  <사쿤탈라>는 샹젤리제 살롱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게 되며 세인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까미유는 정식으로 작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경쟁자들에게는 질시의 대상이 되고요. 이 작품은 열정적인 사랑을 표현하고 있으며 남자는 무릎을 꿇고 두 팔로 여인의 몸을 감싸고 있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까미유는 이 작품을 위해 많은 날들을 작업에 열중했으며 스무 번도 더 만들었다 부쉈다 하며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습니다.  이 작품 이후 까미유의 독특한 스타일이 완전히 구축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한 우상>1898,로댕작품, 로댕 박물관/Fruugo

 

 

 

 

두 사람 사이에 큰 균열이 일어나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로댕이 클로델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스캔들이 생긴 겁니다. 클로델의 <사쿤탈라>(1888)와 로댕의 '영원한 우상'(1898)이라는 작품입니다. 격정적인 에너지, 육감적인 포즈 등이 유사합니다.  로댕은 스캔들로 인해 자신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리고 클로델이 작품을 출품하지 못하게 압력을 가해 가까스로 표절 시비를 잠재웠습니다. 

 

 

 

작업에 열중하던 어느 날 폭우가 퍼붓고 있던 밤에 까미유 작업실에 로댕의 실질적인 아내 로즈 뵈레가 찾아옵니다. 비에 흠뻑 젖은  로댕의 아내는 거의 발광직전 상태로 까미유를 보자마자 심한 욕설과 증오를 퍼부어 댑니다. 로즈는 비록 로댕과 정식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으나 어려웠던 시절부터 헌신을 다 하면서 살아온 연상의 여인이었습니다. 증오를 가득 담고 까미유를 모욕하던 로즈는 그녀를 밀어 넘어 뜨렸고 조각품과 함께 작업대로 쓰러지게 됩니다. 이 순간 로댕이 들어와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되지만 이렇게 싸우고 있는  두 여인 사이에 어느 편도 들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심장이 좋지 않은 로즈를 데리고 가버립니다. 

 

 

 

혼자 남게 된 까미유는 심한 모멸감과 절망감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까미유가 이때의 심정을 데생으로 표현했는데 로댕과 로즈를 모델로 마치 한 편의 만화를 보는 듯한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로댕과 까미유는 사랑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지만 그들이 예술 세계에서 맺었던 상호성만은 매우 독특합니다. 로댕은 까미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까미유의 영감과 감각 또한 로댕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요. 두 사람이 함께 한 시절 동안 로댕의 창작열이 왕성했다는 점입니다. 예술적 동지로서 이만한 커플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술가들 역시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까미유는 전반적으로 대리석을 정교하게 조각하는 스타일입니다. 로댕의 작품 일부는 그녀의 손길을 거쳐 갔음을 터치에서 직감할 수 있는데, 사후에 평자들이 서명이 없는 작품들은 모두 로댕의 작품으로 분류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시기적으로 까미유 작품이 로댕보다 먼저 제작된 것으로, 이 작품을 통해 로댕이 까미유를 이용해 왔고 모방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Young Girl With A Sheaf>,1890/Arthive

 

 

까미유의 <밀단을 진 소녀 Young Girl With A Sheaf,1890> 조각입니다.  로댕의 <갈라티아 Galatea ,1889>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커다란 다리나 서로 맞댄 툭 튀어나온 무릎 등의 표현에서 이러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까미유의 이  작품은 테라코타로만 전해지다 1983년 브론즈 작품이 발견되었습니다.

 

 

 

<Young Girl with Chignon>,1889/Reprodart

 

까미유의 <쪽진 머리의 소녀>와 로댕의 <웃는 소녀의 두상>도 유사한 작품입니다.  두 작품 모두 웃는 얼굴이지만 로댕의 것은 매우 천진난만한 반면 까미유 작품은 약간 냉소적인 웃음을 띠고 있습니다. 그 후 까미유의 폭넓은 작업으로 독창적인 결과물이 계속 판매되었고 작가로서 활약도 점점 커져갔습니다. 하지만 로댕과의 사랑은 갈등이 더 심해졌고 조강지처 로즈뵈레의 질투도 심해지며 둘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합니다. 로즈와의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고 자신과 정식으로 결혼하기를 원했던 까미유와 오랜 세월 함께 한 로즈를 저버릴 수 없었던 로댕의 갈등이 심해지던 때이기도 합니다. 임신과 유산으로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갈등도 증폭되었습니다. 

 

 

 

1892년 까미유는 로댕의 작업실에서 나와 독립합니다. 까미유는 로댕과 함께 10년 동안 창작에 몰두하였으나 자신의 이름을 서명할 수 있었던 작품은 극히 소량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로댕의 작품을 도와주는 것은 물론이었고 로댕을 위해 기꺼이 모델이 되어 스스로 포즈를 취해 줬으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델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을 소요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매우 힘든 일로 보수를 주는 게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까미유는 사랑하는 로댕을 위해 단 한 푼의 모델료도 받지 않았습니다. 정기적인 급여마저도 받았다는 증거는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왈츠 추는 여인>/Pinterest

 

 

 

 

로댕이 자신을 떠나가고 만든 작품으로 작품 속 남녀는 다정하게 왈츠를 추고 있습니다. 클로델은 로댕을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잊지 못하고 그와의 추억을 곱씹었습니다. 동생의 친구였던 드뷔시와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그녀의 작품 중 이 작품이 그를 위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Les Causeuses,1897/ AEQAI

 

이 시기 까미유는 일본 화법을 수용하여 자연을 통한 크로키 작업에 열중하면서 전통적인 기법에서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리석과 부론즈로 만든 조그마한 군상, <수다쟁이들>, <파도>, < 벽난로 앞에서의 꿈>등의 작품이 탄생되었습니다. <수다쟁이들>은 한 모퉁이에 모인 네 여인들을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한 여인은 이야기를 하고 나머지 여인들은 듣는 모습입니다. 이야기하는 여인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진리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면, 머리를 맞대고 있는 여인들의 자세에서는 비밀이 감춰져 있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감정이 경이롭게 묘사되어 있어 매우 호평을 받았습니다. 어떤 예측도 불허하는 강한 의지를 작품 속에서 보여준 <수다쟁이들>은 특히 그녀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이 되고 있습니다. 

 

 

 

 

 

<The Wave>,1897/The Ekphrastic Review

 

 

 

1897년 <파도>는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처한 인간의 연약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거대한 파도가 3명의 여인들을 곧 덮치려는 듯하여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서로 손을 잡고 겁먹은 표정으로 난관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Le Reve au Coin du Feu>,1899/ Reddit

 

 

 

세계 전람회에 출품됐던 <벽난로 앞에서의 꿈>은 비롱 알퐁스로 치드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 한 여인이 등받이 의자에 앉아 벽난로 앞에 머리를 기댄 채, 피곤에 지쳐 잠시 꿈속을 거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02년 대리석으로 다시 제작되었습니다.

 

 

 

이즈음 여동생 루이즈가 남편과 사별해 어려움에 처해 있었는데 , 루이즈의 외로움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까미유가 모른 채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런 책임이 아버지에게 돌아가자 까미유의 부담은 더욱 커져갑니다. 1898년 까미유가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들이 전시 도중 도난당하자 이를 로댕의 음모라 생각한 그녀는 그를 비난하며 영원한 결별을 선언합니다. 그녀 나이 31살이었습니다. 

 

 

 

<성숙 The age of maturity>1899,오르세미술관/오마이뉴스

 

 

 

 

 

작품명 <성숙>이란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서 죽는다는 철학이 담긴 내용입니다. 보통 어린이, 어른, 노인 이렇게 삼대로 표현되지요. 이 작품에선 젊은 여인, 중년 남자, 노년 여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젊은 여인은 애원하는 자세이고, 중년 남자는 무기력하며 노년 여자가 중년 남자를 데리고 가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관계를 아는 이들이라면  늙은 부인 '로즈'에게로 떠나간 로댕을 그리워하며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끌로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클로델의 <성숙>(1899)이란 작품을 본  로댕은 이 작품으로 인해 자신이 큰 곤욕을 치르게 될까 봐, 클로델이 작품을 주물로 완성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까미유는 설명합니다. 남자는 한 예술가로서의 한 인간이고 늙은 여자는 자기 안에 너무 일찍 늙어버린 여자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젊은 여자는 그저 남자에게 매달리고 싶은 자기 안에 가엾은 젊은 여자를 표현한 것이라고요. 그래서 이 작품은 까미유 내면에 존재하는 삼위일체를 담고자 했다고 말입니다.  까미유는 이 작품으로 극찬을 받게 되고 조각가로서 인정받고 돈도 벌게 됩니다. 

 

 

 

 

 

 

<Persee et la gorgone>,1902/Wikimedia Commons

 

 

로댕과의 결별 후 홀로서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나이에 비해 훨씬 늙고 살찐 모습으로 변해있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현실을 탈피하고자 술을 많이 마신 것이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작품 속에 반영하였는데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버린 그리스 영웅 페르세우스와 고르곤을 조각한 모형에 까미유의 형상이 들어 있습니다. 목이 잘린 조각품의 형상이 그녀의 모습으로 대변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그녀는 스스로를 한 남자 영웅에 의해 자신의 무한한 힘과 숨통이 끊긴 괴물 즉 , '고르곤'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La Fortune,1904/Arthive

 

 

 

그녀는 튀렌느 거리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다음 해 1월 부르봉 지방의 생 루이성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녀의 20여 점의 석고상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화상 위젠느 블로와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녀의 작품들을 청동으로 제작하여 상업화하려고 했습니다. 까미유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들을 그에게 넘겼습니다. 1900년에 제작한 <운명>은 상체는 앞으로 가려는 데 하체는 오히려 뒤로 물러서려는 듯한 인체의 대조적인 움직임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두 눈을 가리고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또는 남자 없이 혼자서 왈츠라도 추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오직 자신의 운명을 음악적 리듬감에 맡긴 듯 팔을 높이 쳐들고 있습니다. 까미유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1905년 12월 4일 -16일까지 까미유는 블로와의 화랑에서 13점을 내놓고 <까미유 작품 전람회>를 가졌습니다. 이때 그녀의 심정은 환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는 블로와 가 전시회를 위해 준비한 의상을 입고 부축을 받으며 전람회장에 나갔습니다. 전시장은 많은 인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녀는 내심 자신의 아버지를 간절하게 찾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전시장에 그녀의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며 방문했는데 눈은 빛나건만 골이 깊게 파인 주름살이며 어느덧 일흔아홉 살의 늙은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1906년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우울증과 로댕에 대한 피해의식 및 정신착란 증세로 고통을 겪습니다. 그녀는 점점 더 심해지는 피해망상증과 편집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모든 실패와 불공정함에 대한 쓰라린 감정을 온통 로댕에게 돌렸습니다. 로댕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친 것도 부족해 자신을 죽일 음모를 꾸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작업실에 틀어박힌 채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작품 활동도 못하고 빈곤과 알코올중독, 그리고 스폰서의 권유로 하게 된 마지막 전시도 완전히 실패하면서 그녀는 낯선 사람이 되어갑니다. 반면 로댕의 작품들은 파격적이고 변형적이라는 극찬과 더불어 대단한 호응을 얻으며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그녀에게 준 재능을 모두 그녀의 불행을 위해 쓰였다.

-남동생 폴-

 

 

까미유는 일종의 조현병을 앓았던 모양입니다. 조현병이란 사고, 지각, 행동, 사회활동 등 다양한 정신기능의 이상을 초래하는 정신병으로 젊어서 발병하며 만성의 경과를 밟고 인격의 황폐를 초래하는 병이며 흔한 증상으로는 환각과 망상이 있습니다. 40살에 조현병에 걸린 후 그녀는 예술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세상이 두려워 은둔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지만 어머니와 남동생은 그녀를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녀의 존재는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추고 싶은 존재였던 거죠.

 

 

 

 

1906년 가족들 모두 외교관이 된 폴을 따라 중국으로 가게 되고 가족들 없이 혼자 남겨진 까미유의 병은 더 깊어지게 됩니다. 1913년 평생 후원자 역할을 해 온 아버지까지 죽게 되자 엄마와 남동생은 그렇게도 집에 가서 함께 살고 싶다는 까미유를 정신병원에 넣게 됩니다. 1914년 아비뇽의 몽크베트게 병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이후 30년 동안이나 수용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치료약도 없었고, 인권이 유린되어 묶이거나 감금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키미유는 남동생에게 지속적으로 퇴원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가족과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1943년 사망하게 됩니다. 1917년 로댕도 사망하고 1943년 정신병원 수용 30년 후 79세의 나이로 쓸쓸히 사망합니다. 당시 가족도 없던 그녀는 공동 매장되어 현재 무덤도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까미유 끌로델 박물관/  Aube Champagne

 

https://www.youtube.com/watch?v=bWuZY6zdbNY&t=91s

 

 

 

 

그렇다면 로댕은 엄청 나쁜 남자일까요? 로댕역시 파탄으로 끝난 이후에도 클로델을 사제지간과 연인을 넘어 서로의 작품세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한 예술적 '동반자'로서 존중했습니다. 실제로 도미니크 보나의 <위대한 열정/아트북스>에 따르면 로댕은 클로델의 정신병원 수감 이후에도 금전적 지원이나 '카미유 끌로델 미술관'을 지으려는 노력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녀의 예술활동 재개를 돕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남성 예술가에게 버림받은 아름다운 여제자 카미유 끌로델이 아닌, 로댕마저 흠모했던 재능을 지녔던 여성 예술가로서 그녀를 바라봄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을 모델로 한 영화도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고 비교해 보는 것도 괜찮은 경험일 듯싶습니다. 보이는 것들이 더 많아질 테니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qvz5oY3tWNI

 

 

영화 <까미유 끌로델>(2013)은 연인의 짙은 그림자에, 여성 예술가라는 굴레에 갇혀 외면당한 조각가 클로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브루노 뒤몽 감독이 연출하고, 줄리엣 비노쉬가 클로델 역을 맡았습니다. 영화는 클로델이 로댕과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그 사랑과 차별로 인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LBG1cbqn3o

 

 

 

 

오늘날  미술사학자 클로딘 미셸은 이러한 최고의 제자가  뛰어넘으려 한 것이 그녀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고 지적합니다.  로댕을 비롯한 예술가들에게 허용되던 에로스의 지성을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표현하려 했던 여성 조각가가 만난 것은 바로 19세기라는 시대의 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천재성을 '로댕'의 영향 아래에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일부 비평가들로 인해 심해졌고요. 이로 인한 그녀의 정신적 불안은  가족에 의해 더 부풀려졌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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