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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면서도 대단히 묘사적인 붓놀림으로 표현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세상은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늘 소개할 러시아 출신 화가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의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실물보다 멋진 초상화를 상상하셨다면 실망하실겁니다. 아름다운 꽃과 먹음직스런 과일 정물화를 기대하셨다면 더 실망하실 겁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 껍질벗겨진 토끼, 벽에 걸린 죽은 가오리 ...등 그로데스키(Grotteschi)한 새로운 미학적 시도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다소 괴기하고 부자연스러운 것들이라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Grotteschi"는 이탈리아어로 "그로데스크"를 의미합니다. 예술에서 기괴하거나 우스꽝스러운 스타일을 말합니다.이 용어는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벽화나 장식에 사용된 복잡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디자인을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이러한 디자인은 종종 환상적인 생물, 식물, 그리고 인간의 형태를 결합하여 독특하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20세기 미술은 전통적 규범에서 벗어나 새로운 표현 방식을 탐구하며, 사회적 변화와 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받았던 시대입니다.  강렬한 원색과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했던 마티스를 대표로 한 야수파(Fauvism),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분해하고 재구성한 피카소와 브라크가 주도했던 입체파( Cubism),  꿈과 무의식을 탐구했던 달리와 마그리트같은 초현실주의(Surrealism) 등이 있습니다.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은 모딜리아니와 샤갈 등과 '에콜 드 파리 Ecole  de Paris"의 일원이었습니다.  '파리파' 라고 불립니다.  '에콜 드 파리  Ecole de Paris'는 20세기 초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국제적인 예술가 그룹을 일컫습니다. 이 그룹은 특정한 양식이나 주의를 따르지 않습니다. 각기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하지요. 모딜리아니(이탈리아), 카임 수틴(리투아니아), 샤갈(러시아), 키슬링(폴란드), 파스킨(불가리아), 후지타(일본), 반 동겐(네덜란드) 등이 속해 있었습니다.'에콜 드 파리'의 중요한 예술가는 거의 전부가 이방인이었다는 거죠. 이들 중 사틴, 샤갈, 모딜리아니, 그리고 키슬링은 유태계 화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로 고독감과 향수, 불안 등을 작품에 표현했습니다. 파리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기여했던 그룹입니다. 특히 외국인 예술가들이 프랑스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하고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이 그룹은 해체되었습니다. 

 

 

 

 

당시 예술계의 추상화를 향한 시대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수틴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재, 인식 가능한 주제에 대한 예술관을 유지하며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수틴은 자신의 예술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실험하기 보다는 자신의 표현법을 더욱 개발시키는데 집중합니다. 수틴은 자신의 작품 안에서 불안한 아름다움을 주는 여러 가지 곡선과 자유롭고 거칠게 표현되는 붓터치를  사용하여 캔버스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작은 페이스트리 요리사 The Little Pastry Chef, 1922-23/Musee' de I'Orangerie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가 특징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왜곡된 형태는 색채와 브러시 효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수틴은 강렬한 색채와 역동적인 브러시 터치를 통해 감정과 에너지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왜곡된 형태와 함께 작품에 생동감과 불안정한 분위기를 더합니다. 그는 현실을 과장하거나 감정적인 해석을 반영하기 위해 색채를 선택합니다. 다양한 붓놀림을 통해 인물과 환경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깊은 감정을  보는이들에게 전달합니다.

 

 

 

 그의 대표작 <작은 페이스트리 요리사 The Little Pastry Chef> (1922-23) 입니다.   요리사의 손에 가려진 붉은 손수건이 화면 전체에 걸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수틴의 표현주의적 스타일이지요. 수틴은 주제를 표현하면서 내면의 감정을 강조했습니다.내면에 감추어진  불안과 같은 깊은 감정 말이죠. 카임 수틴의 작품에서 왜곡된 형태는 감정적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수틴은 물체나 대상, 공간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현실과 다른 관점을 창조해 냅니다. 자신의 강렬한 감정을 왜곡의 형태로 표현한 거죠. 이러한 왜곡은 작품에 생동감과 불안정함을 더합니다. 때로는 불안과 고통 같은 깊은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요.  이렇듯 1920년대는 수틴에게  예술가로서 가장 활동적인 시기였고, 가장 수익성이 높은 시기였습니다.  특히  이 작품을 통해 수틴은  유명 수집가의 관심을 받게됩니다. 수틴의 고된 삶의 이유 중 하나였던 가난을 벗어나 남은 삶 동안 재정적 안정을 누리며 살 수 있었 던 복받은 시기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Zum뉴스

 

 

 

 

https://www.youtube.com/watch?v=50pwgwX9-mo

 

 

 

 

 

 

카임 수틴( Chaim Soutine, 1893-1943)은 러시아 제국 산하에 있던 나라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의 한 소도시 스밀로비치에서 태어났습니다.  보수적인 유대교를 믿는 가난한 열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고향이라 부를 터전이 없어지고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며 그래서 모든 나라에서 이방인이어야 했던 유대인들의 숙명,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그림과 회화를 터부시 하는 가장 보수적인 하시디즘 공동체에서 태어났습니다. 수틴이 가진 예술적 재능은 그 자체로 항상 공격받는 저주받은 능력이었지요.  가난한 재봉사였던 아버지에게 그런 아들이 마음에 들리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카임 수틴에겐 폭력적인 체벌 또한 일상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그림에 대한 열망은 억눌러야만  했습니다.  불타는 듯한 불안이자 고통이었지요. 그런 그가  성년이 되어 가족을 떠나 예술가들의 성지였던 파리로 향합니다. 

 

 


 

 

 

 

모바일 한경

 

 

 

현재 몽파르나스(Montparnasse)에는 파리의 유일한 고층건물과 베르사유 궁전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는 역이 있습니다. 특별한 게 없어서 관광객들은 잘 가지 않죠.

 

 

 

le Batrau-Lavoir, Momtmartre, Paris

 

 

피카소를 비롯한 후대에 유명한 작가들은 몽마르트의 바토 라브와르( Le Bateau-Lavoir)라는 작업실에서 작품하고 놀고했습니다.  일명 "세탁선" 이라 불리던 곳이죠.  그 건물은 온방시설과 수돗물이 없었던 건물입니다. 보기 흉한 몰골과 쓰러질 듯 흔들리는 모양이 마치 세탁부들이 빨래터로 쓰는 강변의 낡은 배와 비슷했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30여개의 아틀리에, 수도꼭지와 화장실은 2층에 단 하나 뿐이었다고 합니다. 달동네 수준이라 물가, 집세가 가장 싸서, 화구 하나 들고 예술가를 꿈꾸며 파리로 온 이방인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자신의 이상을 함께 나눌 동료들이 가까이 있으니 많은 예술가들이 일부러라도 들어왔겠죠. 

 

 

 

20세기 가장 뛰어난 작품들의 산실이었습니다. 삼류 가수, 댄스, 창녀, 약장수, 건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무질서한 환경이 오히려 예술가들에게 자유와 새로운 예술의 창조력을 키우는 토양이 되었지요. 문제는 이 곳이 점점 더 유명해 지기 시작하면서 물가와 집값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좀 더 싼 곳을 원한 가난한 예술가들은 이곳을 떠났습니다. 

 

 

 

 피카소는 1912년 세느강을 건너 몽마르트르의 반대쪽인 몽파르나스(Montparnasse)로 이사합니다. 몽마르트르로 오는 많은 관강객들을 피해서 몽파르나스에 다른 예술인들이 그때쯤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로마노프 러시아 왕정을 피해온 러시아 및 동유럽 예술가 특히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때 몽파르나스에 등장한 예술가들은 몽마르트파를 비롯해 수틴, 모딜리아니, 샤갈 등등, 이들은 몽파르나스(Montparnasse)에서 피카소를 비롯한 몽마르트르의 예술가로부터 다시 한 번 현대미술을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6Lnp4rZK_4

 

 

 

 

 

 

 1913년 불어 한마디도 못하고 검은 피부에 검정머리로 철저히 '이방인'었던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 그는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하면서 거장들의 그림과 시, 소설, 철학서를 탐독했습니다.  21세에는 모딜리아니 등과 친분을 가지면서 종종 그의 그림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출신 화가 마크 샤갈(1887-19850 와 몽파르나스의 이방인으로 " 에콜 드 파리 ,파리학파"로 활동하기도 하고요.  동료화가 모딜리아니아 함께 프랑스 남쪽 피레네 지방의 세레에 체류했는데 이때 그의 화풍은 그전까지의 어두운 색채에서 강렬한 원색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렇듯 카임 수틴( Chaim Soutine, 1893-1943)은 1920년대에 모딜리아니, 샤갈, 헤밍웨이와 같은 예술가와 문학인들과 교류하며 , 예술가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자리잡은 프랑스 몽파르나스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Still Life with Herring, 1916/ Giles Ward

 

 

 

카임 수틴의 작품 <Still Life with Herring>(1916)은 그의 초기 정물화 중 하나로, 강렬한 색채와 독특한 형태 왜곡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 작품은 생선과 같은 일상적인 사물을 통해 감정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요소를 강조합니다. 수틴은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아 정물화에 생명과 죽음의 상징성을 담아내며,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표현합니다.  작품에서 사용된 과장된 색채와 형태는 수틴의 내면적 불안과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Portrait of Moise Kisling, 1919-20/PubHist

 

 

카임 수틴이 그린 <모이즈 키슬링(Moise Kisling, 1891-1953)의 초상, Portrait of Moise Kisling>(1919-20) 작품입니다.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은 이탈리아계 유대인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 1884-1920)와 폴란드계 유대인인 키슬링(Kialing)과 서로 화가를 꿈꾸며  유대인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유난히 서로 친했습니다.  주머니 가벼운 그들은 서로의 작품에 모델이 되어 주었지요. 친구 모이즈 키슬링을 각자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그려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EGBtss0MYM

 

 

 

 

 

 

모딜리아니의 'Portrait de Moise" Kisling', 1915, Amedeo Modigliani/wikipedia

 

 

아마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가 1915년 제작한  유화입니다. 그의 친구이자 폴란드계 유대인 화가인 모이즈 키슬링(Moise Kisling, 1891-1953) 을 그린 초상화입니다. 파리에서 활동한 '에콜 드 파리'라는 예술가 그룹의 일원으로서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모딜리아니의 독특한 스타일인 길게 늘어진 얼굴과 목, 부드러운 색채 사용, 그리고 간결한 형태가 특징입니다.  작품은 현재 이탈리아 밀라노의 피나코데가 디 브레라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모델이 되어준 모이즈 키슬링(Moise Kisling , 1891-1953) 의 작품도 감상해 보시고 , 친구였던 모딜리아니와 카임 수틴의 스타일도 비교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92EVcUuAXNI

 

 

 


 

 

 

 

 

 

 

Mad Woman,1920/USEUM

 

 

 

 

 구겨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지 모르겠습니다. 어깨는 움츠러들어있고 눈을 크게 떠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의 눈빛은 선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조금 겁에 질려 있는 듯 합니다. 불안한 모습으로 쪼그라든 그림 속 그녀. 작품의 제목까지 <Mad Woman>이네요.

 

 

 

간혹 길을 걷다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분들을 보게 됩니다. 다른 세계를 보는 것만 같은 눈빛, 혹은 혼잣말, 언어로 일상의 우리와 무언가 다르다는 신호를 감지하게 됩니다. 저들도 누군가와 농담을 하고 돈을 벌고 밥을 해 먹고 빨래를 개던 평범한 일상이 있었겠지요.  어쩌다 ...?  안스러운 마음 한편으로  작은 스트레스도 조절 못해 목까지 차오른 던 고삐 풀린 감정들을 힘들어 하던 시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도 저 작품속 그녀는 고통과 분노가 내면을 할퀴어서 뒤틀리고 찢어질 지언정  남을 공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타인을 망가뜨리기보다 차라리 자신을 놓아버리는 길을 택한 걸까요? 일렁이는 붉은 빛이 아직도 그녀의 진행중인 고통과 분노처럼 느껴집니다. 

 

 

 

 

카임 수틴의 작품 <Mad Woman>에서 큐비즘 예술가들의 영향은 형태의 왜곡과 색채의 사용을 통해 간접접으로 드러납니다 . 수틴은 파리에서 큐비즘의 선구자들과 함께 활동했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감정 표현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큐비즘의 기하학적 단순화 대신, 형태를 자유롭게 왜곡하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인물의 내면적 불안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그의 작품에 독특한 생동감과 감정적 깊이를 더했습니다.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은 모딜리아니와 샤걀 같은 외국인 예술가들과만 교류했습니다. 언제나 철저한 이방인의 삶. 그렇기에 존재 자체가 늘 불안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이그러지고 꿈틀거리고 요동치고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항상 억눌러야만 했던 마음속 고통과 불안이 그의 렌즈를 거친 모든 것에 투영되어 있습니다. 사람도, 정물도, 집도, 풍경도 , 끝도 없이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으며 휘몰아치는 춤을 한바탕 추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Road Map Ceret/ Map of France

 

 

 

 

 

 

1920년 모딜리아니 사망 후, 카임 수틴은 프랑스 남부 세르(Ceret)에서 미국인 수집가 알버트 반스의 후원을 받으며 작품활동에 매진합니다.  풍경화는 카임 수틴의 작품 활동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수틴은 화면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듯한 풍경을 통해 자신만의 깊은 불안과 침울함으로 풍경을 표현했습니다.  

 

 

 

또한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강조와 왜곡 기법을 사용해 묘사하는 '데포르마숑 '기법을 사용한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화가로서 유명해지고 부유해지자, 청년기 특유의 광기나 개성은 많이 사라졌지만, 카임 수틴의 그림에는 사람의 마음 마저도 뒤틀어 버리는 강렬한 매력이 있습니다. 

데포르마숑(deformation)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변형, 과장, 축소, 왜곡하여 표현하는 기법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표현하려는 감정적 메시지는 주로 현실을 벗어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감정과 주관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기법은 대상을 왜곡하거난 과장하여 표현함으로써, 관객에세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고, 작품 속에 숨겨진 내면의 의미나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표현주의와 야수파 화가들이 이러한 방법을 많이 사용하여, 작품의 감정적 깊이를 더하고 새로운 미적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Landscape with House and Tree , 1920-1921, Barnes Foundation

 

 

 

카임 수틴의 작품 < Landscape with House and Tree> (1920-1921)는  프랑스 남부의 세르 지역에서 그린 풍경화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수틴의 독특한 표현주의 스타일을 보여주며,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색채를 통해 내면의 불안과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수틴은 자연과 건물을 왜곡하며 마치 풍경이 흔들리는 듯한 효과를 주었습니다. 남 프랑스의 색채와 빛의 영향으로 풍경화를 그리는 동안 주황색, 녹색, 노란색과 같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와 , 대상을 강하게 왜곡시키는 주관적 표현을 개발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불안정한 삶과 감정 상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PDXijpuBJ8

 

 

 

 

 

https://www.youtube.com/watch?v=RiBfoAfsanE

 

 

 

 

 

 

 

 

 

카임 수틴, 세르 풍경 Ceret, 1921-22년경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이 세르( Ce'ret)에서 그린 풍경화는 작품 중에서도 두드러진 주제 중 하나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수틴의 풍경화는 주로 세르(Ceret) 지역의 풍경과 농장을 주된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세르(Ceret)는 프랑스의 남부 작은 시골 마을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시골 풍경으로 유명합니다. 당시 유럽에서 떠오르던 새로운 미술 경향인 큐비즘, 입체주의 화가들이 많은 영감을 발견한 피레네 산맥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큐비즘(Cubism)은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예술 운동으로, 전통적인 사실주의적 표현에서 벗어나 대상을 다양한 시점에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기법을 사용합니다.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쥬 브라크가 주도한  이 운동은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여 평면에 표현함으로써, 관객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큐비즘은 이후 미래주의, 다다이즘 등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PH3yUZzt0k

 

 

 

 

Home, 1921/ Arthive

 

 

Landscape with Figures-Ceret, 1922/Wikimedia Commons

 

 절친으로 동료 화가인 모딜리아니 부부를 잃고 남프랑스에서 지내던 그에게  그림 속 나무처럼 무수한 바람이 마음 속에 불던 시절 그렸던 그림입니다.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의 미술은 예술의 진정한 힘은 자연의 단순한 모방과 현실에 대한 복사, 형식적 통일성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유기적 조화를 깨드리는 것으로부터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중세 르네상스 이래로 길들여온 예쁘고 아름답고 멋진 미술의 세계에서 추하고 병들고 사납고 공포스러운 표현작업으로 옮겨 갑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낯설게 하기, 거리두기 작업을 시도합니다.  우리들에게 '보여지는 세상'에 대한 찬미, 미화를 통해 우리가 동화되고 몰입하게 하는 대신, 그의 정서적인 훼방을 통해, 또다른 형태의 강렬함을 얻어 갑니다.  

 

 

 

 

Farm Girl , 1922, Poster Print/ Posterazzi, 캐나다 에두와르 뷰이알 뮤지엄 Edouard Vuillard Museum

 

 

 


 

 

https://www.youtube.com/watch?v=bVpmnU-wbDc

 

 

 

 

 

shizuoka prefectural museum of art, Japan/Mus3ums

 

 

Shizuoka Prefectural Museum of Art, Japan, Floof Plan: Rodin Wing / Spmoa,Shizuoka. Shizuoka.jp

 

 

 

 

landscape at Cagnes (La Gaude), 1923, Shizuoka Prefectural Museum of Art, Japan/ PubHist

 

 

 

 

수틴 특유의 왜곡된 형태와 과장된 색채를 통해 강렬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역동적인 윤곽선과 대담한 붓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화가의 내면적 감정과 외부의 움직임을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Man in a Green Coat, 1921 /PubHist

 

 


 

 

Still life with fish and fruit, 1922/ Arthive

 

 


 

1922년 세잔, 마티스, 르누아르 등을 수집한 필라델피아의 아트 콜렉터 알버트 C. 반즈 박사가 수틴의 회화 50여점을 구입하면사 수틴의 명성이 올라갑니다. 

 

 

 

 

알버트 C. 반즈박사 Doctor Albert Coombs Barnes, 1872-1951/wikipedia

 

 

 

 

필라델피아/Pinterest

 

 

 

알버트 쿰스 반스( Albert Coombs Barnes, 1872-1951) 는 미국의 화학자, 사업가, 미술 수집가, 작가, 그리고 교육자였습니다. 그는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반스 재단(Barnes Foundation)을 설립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재단은 방대한 미술품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Barnes Foundation은 예술 컬렉션 및 교육 기관입니다. 1922년 앨버트 C. 반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및 현대 미술 작품을 포함하여 4,000개 이상의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재단은 원래 메리언에 있었으나, 2012년에 필라델피아의 벤자민 프랭클린 파크웨이로 이전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아난 반스는 또한 인종 평등을 위한 중요한 옹호자였습니다. 예술과 교육에 대한 그의 기여는 문화 기관과 사회 정의 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Barnes 재단의 컬렉션에는 여러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요 작가로는 피에르 외귀스트 르누아르(181점), 폴 세잔(69점), 앙리 마티스(59점), 파블로 피카소(46점),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 (7점) 등이 있습니다. 

 

 

 

Giorgio de Chirico, Portrait of Albert C. Barnes, 1926/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PajgUkrpoXE

 

 

 

 


 

 

 

 

 

 

View of Cagres, 1924-25, Metropolitan Museum of Art/ Wikimedia Commons

 

 

 

 

 

 

 

카임 수틴의 풍경화는 소용돌이치는 나무들의 붓놀림과 들쭉날쭉하고 기울어진 수평선, 뒤틀린 마을의 건물들을 통해 카임 수틴이 느꼈던 내면의 불안과 어둠을 직관적으로 전달합니다. 또한 이러한 독특한 스타일이 담긴 왜곡 표현과 생생한 색채, 강렬한 브러시의 움직임을 통해 카임 수틴만의 야성적 화풍과 깊은 내면 감정을 반영합니다. 

 

 

 


 

 

Woman in Red, 1924/ Meister Drucke

 

 

 

 


 

 

 

 

Nature morte a la raie, 1923/MutualArt

 

 

카임 수틴 (Chaim Soutine )의 가오리 정물<Nature morte a la raie>(1923) 작품으로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Cleveland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아래 쪽 그림은 정물화가로 유명한 18세기 프랑스 화가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뎅( Jean-Simeon Chardin,  )이 그린 <가오리 La Raie, 1725-26> 작품입니다. 샤르댕의 정물화 기법을 잘 보여주는 생생한 색채와 섬세한 구도로 찬사를 받은 작품입니다. 일상적인 대상을 깊이 있고 강렬하게 묘사하는 능력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유명해져 1728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입니다. 카임 수틴의 작품과 비교해 보세요.

 

 

 

La Raie, 1725-26, 루부르 박물관, Jean-Simeon Chardin/wikipedia

 

 

 

카임 수틴 자화상& 가오리가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Rayfish , 1924/ NYCultureBeat

 


 

 

 

Portrait du sculpteur Oscar Miestchaninoff ,1923-24,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centre Georges Pompidou/ Alamy

 

 

카임 수틴( Chaim Soutine, 1893-1943) 의 <조각가 오스카 미스차니노프의 초상 Portrait du sculpteur Oscar Miestchaninoff > (1923-24년경) 작품입니다.  퐁피두 센터, 프랑스 국립현대 미술관 (Centre Georges Pompidou) 소장되어 있습니다. 아래 그림과 비교해 보시고 어떤 공통점이  있는 지 찾아 보세요. 

 

 

 

 

 

Charles VII by Jean Fouquet , 1445-1450/wikimedia Commons

 

 

 

 초상화로  프랑스 화가 장 푸케 (Jean Fouquet )의 작품 <프랑스 왕 챨스 7세 대제 Charles VII roi de France > (1445-50년경), 입니다.  루브르 미술관( musee du Louvre) 소장품이고요. 15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화가이자 미니어쳐 화가로, 패널 회화와 필사본 조명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인 인물입니다. 그는 1420년경 프랑스 투르에서 태어났고, 후기 고딕과 초기 르네상스 시기를 잇는 중요한 인물로 여겨집니다. 푸케는 이탈리아를 여행한 최초의 프랑스 예술가로, 프라 안젤리코와 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카임 수틴의 주된 주제 중 하나인 정물화에서 수틴은 마치 영혼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처럼 도축된 동물을 묘사한 정물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수틴이 정물화의 주제로 동물 시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상징적 표현과 복잡한 관계를 담은  소재이자 수틴이 루브루 박물관에 방문해 연구하곤 했던 렘브란트의 작품에 대한 영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틴은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파리의 한 도살장에서 도축된 후의 소를 구입해 자신의 작업실에 걸어둔 후 며칠에 한 번씩 신선한 소의 피 한 통을 가져오도록 했고, 이 작품을 그리는 동안 수틴은 시체의 밝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피를 시체 위에 쏟으며 갓 자른 고개의 색을 연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더  정밀한 동물의 색을 묘사하기 위해 수 많은 붓을 활용해 40가지 이상의 색을 사용했다고도 알려져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수틴의 정물화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색채 또한 특징적인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카임 수틴의 정물화는  수틴의 화풍과 함께 깊은 어두움과 고독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수틴은 정물화 작품에서 주로 어두운 배경을 활용하고 정물들은 눈에 띄게 형태가 왜곡되거나 부패한 상태로 그려지는 경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삶의 끝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적막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주로 빨간색을 강조하며 표현된 색채와 자유로운 붓질은 현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그려지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수틴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반영하며, 종종 불안과 고통의 감정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Le Boeuf, 1923/Kosh mArt

 

 

 

 

 

 카임 수틴은 (1893-1943)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거장들의 꽃 ,과일, 음식, 사냥감 등 정물화를 연구했습니다.  수틴은 종종 작업실에 동물 시체를 들여와 이웃들을 경악시켰습니다. 악취 때문에 경찰이 찾아왔을 때 수틴은 예술의 중요성에 대해 강연했다고 합니다. 마크 샤갈은 수틴의 방에서 복도까지 피가 흘러나온 것을 보고 "누군가 수틴을 죽였다"고 외치며 뛰언나간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도살된 소를 그리면서 참혹했던 어린시절의 기억을 지울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코셔법률로 동물들이 고통이나 지체됨 없이, 신속하게 목을 잘라 피를 뺀 채 효율적으로 도축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수틴은 작업실에서 썩어가는 동물 시체의 색깔을 살리기 위해 반복적으로 피를 부었습니다.

 

 

 

 

코셔법은 유대교의 식사 규정으로, 토라에 기록된 율법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구분하는 법입니다. 코셔는 히브리어로 '적합한'또는 '허용된'이라는 뜻이며, 이는 유대인들이 종교적 규율에 맞춰 철저히 관리된 식재료와 조리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코셔법은 동물의 도축 방법, 고기와 유제품의 분리, 특정 해산물과 돼지고기의 금지 등 다양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토라는 히브리어로 "가르침" 또는 "법"을 의미하며,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인 모세오경을 가리킵니다. 모세오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통적으로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토라는 유대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도 중요한 문서로 인식됩니다. 또한 토라는 성문 토라와 구전 토라로 나뉘며, 후자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설명합니다. 

 

 

 

 

 

Carcass of Beef, 1925/ Buffalo AKG ART MUSEUM

 

 

 

Boeuf e' corche' , 1925/wikipedia

 

 

 

카임 수틴은 1920년부터 1929년 사이 렘브란트의 <살육된 황소 Slaughtered Ox, 1655)에서 영감을 받은 동물 시체 연작을 10여점 그렸습니다. 왜 수틴은 동물 시체에 집착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파리에 살던 젊은 화가 수틴은 유대인 이민자이자 모더니스트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정물은 수틴이 컬러, 구도, 붓질을 실험하고, 테크닉을 발휘할 수 있는 장르였죠. 인간의 먹거리인 소, 생선, 가금류 등의 그림은 강렬한 표현주의 색채로 음식으로서 먹음직스러움 보다는 죽음의 잔인한 상태를 강조합니다. 동물과 인간, 아름다움과 고통, 생명과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져줍니다. 수틴이 어릴 적 고향에서 목도했던 유대인을 타겟으로 한 폭력 뿐만 아니라 제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고발한 것처럼 보입니다. 

 

 

 

2006월 2월에 이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카임 수틴의 아이콘 그림인 '고깃덩어리 시리즈 Series Le Boeuf Ecorche(1924) 가 나왔습니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랐던 생소한 작가의 작품에 경매장이 웅성웅성하며 얼떨떨하게 만들고 있을때 , 어느 익명의 바이어가 170만 영국 파운드($13.8 million)를 써넣어 최고 낙찰가로 구입하면서 소더비 경매시장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무명의 카임 수틴이 경매시장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던 순간이었죠. 그가 쪽방동네 푸줏간에서 잠시 빌려와 그린 고깃 덩어리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쇠고기가 되던 날이되기도 한날이었습니다.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 Slaughtered Ox, 1655, Louvre, Paris/wikipedia

 

 

 

 

 

 

무일푼으로 예술에 대한 열정 하나로 프랑스 파리로 떠난 카임 수틴( Chaim Soutine, 1893-1943)의 삶은 굉장히 고된 삶이었습니다. 물론 힘든 와중에도 수틴은 화가의 꿈을 포기 하지 않았고 일이 없을때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작품을 연구하고, 다른 일을 통해 모은 돈으로 마련한 작업실에서 도축된 동물을 구입해 정물화를 그려냈습니다. 특히 <가죽을 벗긴 소>는 수틴이 존경하던 렘브란트에 대한 헌정 표시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활동하던 17세기 네덜란드 정물은 의미와 상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에서 동물의 사체는 인간의 죽음을 연상하게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즉 , 렘브란트는 해체된 소를 통해 '메멘토 모리', 인간의 죽음과 삶의 덧없음을 암시했고,렘브란트를 존경하던 카임 수틴은 이러한 영향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 하게 되었습니다. 

 

 


 

 

 

 

 

 

Woman in Pink , 1924/ Saint Louis Art Museum

 

 

 


 

 

chinken, hanging on front of brick wall, 1924/Arthive

 

 

 

 

 

 

Nature morte aufaisan,1924,오랑주리 미술관/wikipedia

 

 

 

 

 

 

Cagnes Landscape with Tree(Paysage de Cagnes, 1925-6/ Art UK

 

 

 

 

 


 

 

 

카임 수틴의 인물 초상화는 카임 수틴의 작품관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는 주제입니다. 수틴은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무작위로 만나게 된 지역 마을 사람들과 요리사, 가정부, 구두 닦는 사람과 같은 노동자의 초상화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는 또한 대상 뿐만 아니라 자기 성찰의 모습으로도 보입니다.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은 1920년대와 1930년대 파리에서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던 화가로 당시 빈센트 반 고흐의 후계자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이른 1920년대 프랑스의 호텔과 레스토랑의 요리사와 호텔 직원들의 유니폼의 강렬한 색상에 매료되어 십여 년간 그들을 그린 초상화들로써 작가의 명성을 구축하였습니다.

 

 

 

 

플로어 웨이터 The Bellhop ,1927 /Reproduction Gallery

 

 

 

 

흰 셔츠와 빨간 조끼를 입은 벨보이를 에머랄드 그린 배경에 담고 있는 역동적인 초상화입니다. 인물의 왼쪽 눈은 강렬한 시선을 드러내며 존엄성과 강렬함을 전달합니다. 이 작품은 수틴이 서비스 직종의 인물들을 그린 시리즈의 일부로, 과장된 특징과 대담한 색상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깊이와 표현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수틴의 스타일은 전통적인 표현과 표현주의 적 요소를 결합하여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감정적 영향을 중시합니다. 

 

 

 

 

The Page Boy, 1927,Buffalo AKG Art Museum

 

 

 

카임 수틴의 <The Page Boy> 작품입니다. 마치 무언가,아마도 사탕같은 것을 제공하는 듯한 자세로 손을 뻗고 있는 페이지 보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년의 눈은 검은 공허함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얼굴은 핑크색의 오목한 조각처럼 보이고요. 이는 폭력이나 손상을 암시합니다. 고딕적인 위협과 빨간색의 사용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빨간색은 배경을 지배하고 주인공의 특징에 은밀하게 스며들어 그림의 감정적 강렬함과 심리적 깊이를 더합니다. 

 

 

 

 

 

<심부름하는 소년>,1927/art2me.org

 

 

카임 수틴의 인물화에서는 정교한 묘사보다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 왜곡과 평면적인 표현, 그리고 강렬한 색채의 강조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인물화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옷, 신체, 자세 모두 과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수틴의 빠른 붓놀림은 인물과 주변 환경을 극적으로 표현해 긴장감과 함께 모호한 공간이 연출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물화에서도 빠르고 강렬하게 움직이는 브러시 효과를 사용하여 깊은 감정과 에너지를 함축해 전달합니다. 수틴의 붓놀림은 때로는 급격하고  격렬하며, 때로는 부드럽고 유연하게 움직이며 인물의 생동감을 더하고, 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FlwNNg1vEQ

 

 

 

 

 

가스탕 부인의 초상 Portait de Madeleine Castaing, 1929/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Wikipedia

 

 

 

 

카임 수틴이 1929년에 그린 <마들렌 카스탱의 초상Portait de Madeleine Castaing>입니다. 파리의 유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골동품상인 마들렌 카스탱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초상화는 그녀의 안절부절못하는 손, 어색하게 놓인 다리, 긴장된 표정을 담고 있으며, 이는 수틴의 파리 스튜디오에서 여섯 번의 세션 동안 그녀가 느꼈던 조바심과 불편함을 반영합니다. 이 작품은 역동적인 붓질과 강렬한 감정 표현으로 특징지어지는 수틴의 표현주의 스타일을 잘 보여줍니다. 

 

 

 

 

 

 


 

 

 

 

 

Small Town Square in Venice, 1929, Art institue of Chicago / Meister Drucke

 

 

 

 

 

 


 

 

 

 

카임 수틴은 그의 중요 작품들을 고전에서 많이 차용해 왔습니다. 그는 렘브란트(Rambrandt), 샤르댕(1699-1779, Chardin), 그리고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프 쿠르베(Courbet)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물에 들어가는 여자 La femme entrant dans I'eau, 1931/Christie's

 

 

렘브란트의 A Woman Bathing in a Stream , 1654/wikipedia

 

 

 

카임 수틴의 <물에 들어가는 여자 >(1931)는 렘브란트의 <목욕하는 헨드릭예>를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수틴의 버전에서는 여성과 물 사이의 구분이 거의 없으며, 그녀의 드레스, 피부, 자세가 뒤틀리고 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완전히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빠른 붓질은 인물과 주변을 평평하게 만들어 긴장감이 가득한 응축된 공간을 형성합니다. 이 현대적 해석은 전통적인 영향과 수틴만의 독특한 비전을 결합하여 자연주이적 깊이보다는 붓질의 질감과 복잡성에 중점을 둡니다.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b, 1606-1669)은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바로크 시대 화가입니다. "빛의 화가"로도 불립니다. 그는 명암의 대조를 강조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통해 인물의 생생한 표정과 감정을 표현하며, 특히 초상화와 자화상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 "야경", "밧세바" 등이 있으며, 유화 약 600점, 에칭 300점 이상을 남겼습니다. 

 

 

 

 

 


 

 

 

 

Servant girl in Blue, 1934/ PubHist

 

 

 

 

 


 

 

 

Chartres Cathedral, Chaim Soutine, 1934/Amazon.com

 

 

 

 

 

Chaim Soutine ,Chartres Cathedral/PubHist

 

 

 

샤르트르 대성당( Chartres Cathedral)은 프랑스에 위치한 대표적인 프랑스 고딕 양식의 건축물입니다 . 원래 1145년에서 1155년 사이에 건설되었습니다. 큰 화재가 있었고, 그 이후 1194년부터 1220년까지 재건되었습니다. 이 성당은 중세 시대부터 보존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들로 유명합니다 . 건축적 특징으로는 플라잉 버트레스와 두 개의 대조적인 첨탑이 있는데, 하나는 단순하고 다른 하나는 화려합니다. 성당이 가진 유물 덕분에 중요한 순례지로 여겨지고 있으며, 종교적 방문객과 일반 관광객 모두에게 인기있는 장소입니다. 수틴의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를 통해 대성당의 독특한 분위기를 표현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k3VsinLgvc&t=2s

 

 

 

 

 


 

 

Chaim Soutine Baumallee in Chartres, 1935/ Artchiv

 

 

 

A

 


 

 

https://www.youtube.com/watch?v=gMFSIYskXyI

 

 

 

 

 

 

Woman on Profile (테넌트 부인의 초상 Portrai of Madame Rennent), 1937, 미국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 The Phillips Collection, Washington,DC,USA/Arthive

 

 

 

 


 

 

 

오세르의 바람부는 날 Windy Day Auxerre, 1939, The Phillips Collection

 

 

 

 

들판과 나무와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주로 그리던 그의 말년은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던 해였습니다.  

 

 


 

 

그는 미술작업을 하면서 평생에 변변한 개인 작품 전시회 한번 열지 못했습니다. 수틴의 첫번째 전시회는 1935년 시카고에서 열렸습니다. 전쟁중이던 1937년에는 파리에서 국제 독립미술가전이 열려서 그를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곧 프랑스 파리가 독일에 함락되고 유대인 예술가였던 그는 독일의 비밀경찰 Gestapo에 체포령이 내려 파리의 야외에서나 수풀속에서 피신하며 잠을 자며 지내야 했습니다. 그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이 작품들이 그의 말년 작품들입니다. 시골길, 아이들, 그리고 은신처 주변의 산과 들판의 모습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파리는 독일군의 점령하에 들어갑니다. 카임 수틴과 같은 유대인   예술가들은 다시 이방인들이 됐습니다. 샤갈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은 미국으로 도망갔습니다. 수틴은 몇 번 파리의 미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으려고 시도했지만,  서류 부족으로 계속 거부당했습니다. 

 

 

 

그는 수풀이나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잤고 끼니를 거르며 몇 작품을 그렸습니다. 이 도피 기간중에 얻은 위궤양으로 점점 고통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을 만큼 심각한 위궤양으로 결국 파리 외곽의 은신처에서 더이상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응급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천공성 궤양으로 더이상 생명를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1943년 8월 9일 숨을 거두고, 집도 절도 가족도 없었던 그는 근처 몽파르나스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불우한 가운데 절망과 빈곤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의 나이 쉬흔살이었습니다. 

 

 

 

어린이의 초상 La Pauvrette, 1937, 건물 바닥재 리놀륨 위에 유채 , Private collection/Greg.org

 

 

 

 

 

 

울타리 곁의 소녀 fillette a la barriere, 1939/ Arthur.io. A Digital Museum

 

 

 

 

아름다운 풍경의 동심의 아이들을 표현 하면서도 그의 화풍은 날씨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카임 수틴의 그로테스크 미술이 정말 놀라운 것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어떤 역경이 몰아쳐도 그가 파리에서 시작한 거칠고 원초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잔혹의 붓질, 그 미술적 표현은 확고 부동하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교길 Returning from School, 1939, Private collection/Wikimedia Commons

 

 

길가는 두 아이 Two Children on a Road/ Deux enfants sur a route, 1942 , 스위스 제네바 역사미술관/Freeart.com

 

 

 

 

 

 


 

 

 

 

Mother and Child, 1942-3년경, private collection/Arthive

 

 

 

그가 나이 쉬흔, 죽기 전에 그린 마지막 초상화 작품입니다. 그의 마지막 초상화에는 어머니와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아마 고향 리투아니아를 생각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S8VkDrp_RY

 

 

 

 

 

수틴의 장례식엔 파블로 피카소, 장 콕도 등이 왔으며, 그의 유태인 예술가 친구들은 경찰 감시가 두려워 장례식에도 참석 못했다고 하네요.  그는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습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말합니다. "프랑스의 미술사는 몽파르나스에서 끝났다. " 라고요. 카페와 피카소의 연애 이야기도 프랑스의 과거를 로망하는 것에 불과하다고요.  'Money Power'가 꼭 프랑스를 미술종주국에서 밀려나게 한 것만은 아니라고요. 프랑스의 민족주의 와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가 프랑스 미술을 몽파르나스에서 끝나게 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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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특히 인물과 인물 사이 감정선을 예민하게 표현한 예술가로 높이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특히 그의 모든 그림이 잘 짜인 소설 같은 밀도를 갖는다는 평이 따라오지요. 민중의 삶과 꿈을 붓칠한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IIya Repin, 1944-1930을 소개합니다. 

 

 

 

레핀의 모든 그림은
레핀 개인만의 진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러시아 미술 전체의 진보였다.
그의 모든 그림은 사건이었다.
- 네스테로프-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 Barge Haulers on the Volga>, 1870-1873,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러시아 미술관 State Russian Museum.St.Petersburg/위키백과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재학 시절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강변에 들렀다가 한 무리의 노동자들과 맞딱뜨리게 됩니다.  남루한 노동자들이 가슴에 빳빳한 밧줄을 두르고 커다란 배를 힘겹게 끄는 모습이 레핀의 시야에 들어옵니다. 1870년대 러시아의 가난한 항구 노동자들의 모습입니다. 혁명이외에는 아무런 출구가 없어 보이는 밑바닥 러시아 민중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레핀의 영원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자, 글의 작품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레핀은 1870년대 러시아 회화의 대표적인 이 작품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 Barge Haulers on the Volga> 를 통해 러시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우뚝 섰습니다. 먼저 작품 크기 (131.5cm* 281cm)에 압도당합니다.  감상자의 눈 높이로 시선이 맞추어져 있어 항구 노동자들의 땀냄새가 훅하고 코 끝에 먼저 와 닿을 것 같습니다.  멀리서도 그들의 피로도가 금방 전달이 되는 듯합니다. 배를 끌고 있는 인부들의 고단한 삶과 피로가  얼룩진 얼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반복된 노동이 만들었을 강인한 인부들의 육체와 몸동작까지 열 한 명 뱃사람의 독특한 개성이 모두 드러납니다. 

 

 

 

 

 

러시아 '이동파'의  대가 일리야  레핀(IIya E. Repin , 1844-1930)이 그린 이 작품은 그림은 한마디로 격렬한 삶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뜨거움 일 수도 있겠고요.  거친삶 속에 위안이라곤 찾아 보기 힘들었을 그들의 고통, 분노, 열정, 그리고 희망이  함축된 작품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

 

이동파(Peredvizhniki)는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활동한 사실주의 미술 운동입니다. 한마디로 , 미술계의 브나르도('민중속으로!)운동을 펼친 유파입니다. 파리의 작가들이 캔버스의 화구를 들고 햇빛 찬란한 야외로 나가 인상주의자가 되었을 때 러시아 작가들은 캔버스와 화구를 들고 민중들의 삶으로 들어가 이동파가 된 것이죠. 화가들은 사실주의적 접근 방식을 통해 사회적 문제와 민중의 삶을 그려냈습니다. 그들은 농노제의 유물과 자본주의의 악덕을 적발하는 그림을 그리며,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동파는 러시아의 모든 민중들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주기 위해 여러 도시로 옮겨 다니며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동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이동파 화가들은 당시의 아카데미즘의 권위주의에 대항하여 더 민중적인 미술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아카데미의 교육 내용에 반항하여 '러시아 이동전람회연합'을 창설했습니다.  이동파 화가들은 아름다움 자체보다는 도덕적, 사회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러시아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고,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사회적 관심을 끌었습니다.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은 19세기 러시아 이동파 미술을 완성시킨 화가입니다.

 

"프랑스 인상파에게는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으며, 러시아 이동파에게는 형식은 없고 내용만 있다. "

(이동파 운동의 지도자 이반 크람스코이)

 

이동파 미술의 숙제가 젊은 화가 레핀의 등장으로 해결된 셈입니다. 바로 러시아 이동파의 창조성을  극점으로 끌어올린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인부들 Barge Haulers on the Volga> 작품으로 말이죠.

 

 

 

이동파 운동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이콘화(성상화)의 전통을 깬 근대 러시아 미술을 서유럽 미술과 근본적으로 단절시킨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17세기 말 표트로 대제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근대화, 서구화, 귀족화된 서유럽 미술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1923년까지 존속한 러시아의 이동파는 세계 미술운동사에 유례없는 실험이자 성과였으며, 훗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모태가 됐습니다. 세계 미술사에서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반체제적 성격을 지닌 미술 운동은 없었습니다. 이동파 화가들에게 그림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었고 삶을 변혁하는 무기였습니다. 19세기 러시아의 사회현실과 시대정신에 대한 창조의 열정은 아방가르드 화가들을 통해 러시아 혁명 분위기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솟구쳤습니다. 

 

 

 

 

"One of the sketches for 'Burlaki'", 1870/wikipedia

 

 

1900s photograph of burlaks on the Volga River/wikipedia

 

 

 

  일리야 레핀(IIta Repin, 1844-1930)은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항구 노동자들을 관찰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은 쉽게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레핀은 볼가강 뱃사람들을 소재로 수많은 드로잉과 유화를 밑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3년 후, 1870년부터 레핀의 스케치를 지켜봤던 비평가 스타소프가 완성작을 보고,

 

"아주 짧은 시간에 작가는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

지금까지 러시아 미술이 창조해 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그림을 가지고 나타났다."

 

라고 극찬하며 대작이 마침내 탄생했음을 알렸습니다.   

 

 

 

Brulak women,1900s/wikipedia

 

Barge Haulers Crossing a Ford, 1872, The State Tretyakov Gallery,Moscow/wikipedia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의 표정과 몸짓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무거운 시대에 짓눌려 고통 받는 노동자의 삶(왼쪽 첫번째), 운명을 담금질 하며 스스로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면서 내적인 견고함을 갖게 된 강한 민중상(두번째), 사회 모순에 억눌려 배반적인 삶에 저항하는 노동자의 이글거리는 분노(네번째), 희망을 잃지 않고 미래를 그리며 변혁을 꿈꾸는 어린 노동자(여섯번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다른 인부들에게 끌려가고 있는 절망하는 노동자의 현주소(열한번째)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진정성을 높였습니다. 특히 러시아 민중이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흔적을 캔버스에 옮겨 저마다의 성격과 심리, 자세와 동작을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게 살려냈습니다. 구성이 역동적이며, 캐릭터가 분명하고요.

 

 

 

그림 전반에 흐르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완강한 긴장미 입니다. 그리고 순순히 강가로 끌려오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배와 악전고투를 벌이는 노동자들간의 팽팽한 대립구도는 이 작품의 주제를 뒷받침합니다. 마치 배가 기득권 체제를 공고히 하는 거대한 사회구조를 상징한다면 , 배를 끄는 노동자들은 사회모순에 신음하며 끝까지 저항하는 러시아 민중의 현실같고요. 그렇다면 여럿이 배를 끄는 이들 민중의 삶은 그 자체로 노동이고, 투쟁이며, 아름다운 연대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슬픔, 고통, 분노, 열정, 희망의 밧줄을 끄는 주체는 어떤 영웅도 아니고 혁명지도자도 아닌 바로 가난을 딛고 험난한 역경을 헤쳐나가는 풀뿌리 민중임을 그는 성찰하고 있습니다. 일리야 레핀의 작품 대부분은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과 성격까지 읽을 수 있는 생생한 눈빛과 표정, 몸짓, 주변배경 등의 묘사가 압권입니다. 그의 인간에 대한 폭넓은 성찰과 삶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걸작들인 셈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gkdcNq9VSHU

 

 

우크라이나 지도/BBC

 

 

 

일리야 레핀은 19세기 말 러시아 리얼리즘 회화의 거장입니다.1844년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 츄구예프에서 한 하급군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당시 최고 의 명문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은 그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이며, 사후 에도 그의 예술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독립을 선언합니다. 구체적으로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가 독립선언법을 채택하였으며,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에서 독립이 가결되었습니다. 우크라아니가 독립 선언 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해체와 함께 독립국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독립 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흑해 함대와 세바스코 폴 해군 기지의 사용권 문제로 갈등을 겪었습니다. 1997년, 양국은 흑해 함대를 분할하고 러시아가 일부 세바스톨폴 해군 기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합의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와 같은 민족으로보며, 독립된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축출된 이후,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합병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켰습니다. 2014년 이후, 러시아는 동부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반군을 지원하며, 돈바스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관계는 한층 더 악화됩니다.  2022년 2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대규모로 침공했습니다. 이 침공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관계를 최악으로 끌고 갔으며, 국제적 긴장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고 현재까지도 양국 간의 갈등은 지속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레핀의 작품에는 19세기  러시아의 현실과 시대정신을 풍부하게 담아냈습니다. 격동기를 살아가는 민중의 삶이 거침없이 그려졌고요. 뛰어난 예술 재능과 풍부한 감성, 날카로운 통찰력은 그의 리얼리즘 회화를 완성시킨 뼈대였습니다. 동시대가 그에게 준 것은 '낭만에 대하여'가 아니었습니다. 체험과 관찰을 통한 냉엄한 현실이었고, 모순과 혼란으로 뒤범벅된 암울한 사회와 역사였습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용트림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역사, 민중의 삶이었습니다. 레핀은 보통사람들의 일상과 그들의 희노애락을 탁월한 사실적 붓질로 묘사했습니다. 그의 그림 중심에는 항상 인간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인간은 사회였고, 역사였으며, 변혁의 동력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러시아 변혁의 꿈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반 그로즈니와 그의 아들 이반 Ivan the Terrible and His Son Ivan on November 16th, 1581,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Russia, 1885, 모스크바 트레챠코프 미술관 소장/ wikipedia

 

 

 

이반 4세, 즉 이반(Ivan the Terrible)는 16세기 러시아의 차르로, 절대 왕정의 기반을 닦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폭군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들 이반 이바노비치를 쇠지팡이로 때려 죽이는 순간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 이반 4세는 공포에 질려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의 동공이 튀어나와 있고, 아들의상처를 틀어 막고 있는 손에서 슬픔과 후회가 느껴집니다. 이반 4세의 얼굴은 비통한 표정으로, 그의 행동의 결과에 대한 후회와 고통이 명확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권력과 폭력의 비극적인 결과를 보여주며, 인간의 한계와 후회를 강조합니다. 레핀은 이 작품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삶에 대한 사색을 유도하려고 했습니다. 

 

 

 

 

 

레핀의 <이반 4세와 그의 아들>은 가족의 헌신을 당연히 여길 때 빚어질 수 있는 극단적 재앙을 묘사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루스 차르국(옛 러시아 제국)의 지도자 이반 4세 (Ivan IV, 1530-1584)는 원래 유능하고 결단력 있는 황제였습니다. 벼락의 신처럼 위엄있는 군주, 아울러 천둥과 번개처럼 두려운 군주라는 뜻에서 뇌제로 불린 남자였습니다. 그런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만이 옳다는 생각에 갇혔습니다. 모두가 잠자코 따르기를 강요했지요. 그렇게 이반 4세는 고집불통의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황실의 식구는 세세한 일정은 물론, 음식 하나까지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 끝내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반 4세는 그를 챙기러 온 황태자비, 그러니까 며느리의 복장을 보고 발끈했습니다. 임신한 여자가 어떻게 얇은 옷을 입을 수 있느냐며 불같이 화를 냈지요. 

 

"내가 조신하게 입으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이반 4세는 황태자비가 감히 자신에게 반항한다고 생각해 응징했습니다. 거칠게 밀치고, 그것으로 모자라 쓰러진 그녀를 마구 폭행했습니다. 황태자비는 이 일로 유산을 경험했습니다. 참다못한  황태자가 씩씩대며 이반 4세의 방 앞에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대체 어디까지 맞춰야 하느냐며 소리를 빽 질렀습니다. 아집에 사로잡힌 이반 4세는 이 또한 항명으로 받아들였지요. 그는 꼬챙이 같은 쇠지팡이를 들고와 황태자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곳이 하필 급소였지요. 황태자는 픽 쓰러졌습니다. 잠깐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 숨통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정사 아닌 소문에 가까운 설이지만, 레핀의 그림을 그리던 시절 상당수 국민은 이를 실화처럼 믿었습니다. 

 

 

 

 

레핀의 그림 속 이반 4세는 공포에 질려있다. 그는 가족의 무조건적인 배려란 언제나 당연하다는 식의 고집을 버리지 못했죠.  그런 그는 뒤늦게  자기가 벌인 일을 눈앞에 보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세상에 사로잡혔던 이반 4세는 황태자와 황태자비, 세상 빛도 못 본 손주까지 죽이고 말았네요. 이제야 뒤늦게 후회하고 있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야 없지않습까! 모든 건 엎질러진 후였습니다. 

 

 

루스 차르국 류리크 왕조 초대 차르 이반 4세/나무위키

 

 

 

 

 

 

https://www.youtube.com/watch?v=sLnvq0nFOdc

 

 

 

 

 


 

 

 

 

신병 배웅 Seeing off a recruit, 1879/ Wikimedia Commons

 

 

 

 

 

 

레핀의 <신병 배웅 Seeing off a  recruit>이란 작품입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 지는 그림입니다.  온 가족이 한 청년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제 막 입대하는 청년에 대해 안고, 흐느끼고, 다독이며 아낌없이 슬퍼합니다. 진지한 표정의 청년 또한 매달린 여인을 꽉 끌어안으며 아쉬움을 감추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주변의 보는 눈과는 상관없이, 할 수 있을 때 서로에게 사랑을 듬뿍 표하고 있습니다.  주변 이웃들은 그들의 몸짓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있고요. 전선에 선 청년, 다시 생을 꾸려가는 가족 모두 서로에게 보인 솔직한 마음을 두고두고 꺼내볼 테지요. 그 순간을 곱씹으며 마음만은 함께라고 생각할 겁니다. 1년 뒤 재회하든, 10년 뒤 다시 보든, 이들 사이 낯섦의 감정은 없을 겁니다. 

 

 


 

 

 

일리야 레핀의 에케 호모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1867/Alamy

 

 

 

 

 

 

'에케 호모 Ecce Homo' 는 요한복음 19장 5장에 나오는 라틴어 말로 본시오 빌라도가 예수에게 채찍질하고 난 후, 머리에 가시관을 씌운 뒤 몰려든 군중 무리들 앞에서 예수를 세우고 가리키면서 말한 대사 '이 사람을 보라'는 뜻입니다. 수많은 화가들이 이 역사적인 장면을 그렸습니다. 

 

 

쿠오드  에스트 베리타스 (Quod Est Veritas '진리가 무엇이냐?' ) 잡혀온 나사렛 목수에게 빌라도가 묻던 심문입니다.  그날 밤은 세상의 빛과 어둠으로 양분되는 두 사람이 '인류사적인 대칭' 속에 서 있었습니다. 총독은 목수에게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잡혀온 목수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니 답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정작 질문을 한 빌라도는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하고 그는 창가로 갔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이라는 성난 군중들을 만나기 위해서였죠.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ous Bosch, 1450-1516)의 작품 <에케 호모 Ecce Homo, 1480>작품과 비교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cce Homo, 1480, Hieronymus Bosch/wikipedia

 

 

 

 

 


 

Job And His Friends by IIya Repin, 1869/wikipedia

 

 

 

 

<욥과 그의 친구들 Job and His Friends >로, 성경의 '욥기'에서 욥이 고난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키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높이가 137cm* 너비 200cm로 현재 러시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욥이 친구들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받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레핀은 이 그림을 통해 인간의 고난과 신앙의 테마를 표현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하느님의 징벌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욥은 하느님의 의 를 믿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이 그림은 신앙의 시험과 하느님의 의를 믿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성경속 욥은 우스 땅의 의로운 사람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한 사람입니다. 그는 순진하고 정직하며, 하느님을 경외하는 인물입니다. 하느님과 사탄 사이의 대화로 인해,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사탄은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하느님은 사탄에게 욥의 재산을 다루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손대지 말라고 명합니다.  욥은 그의 자녀들과 재산을 잃고 , 설상가상으로  그의 몸의 악성 종기까지 그를 괴롭힙니다. 욥의 친구들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그를 위로하러 오지만, 결국은 그를 정죄하는 말들을 합니다(정죄-사람의 관점/심판-하느님의 관점). 이로 인해 욥은 고통의 이유와 정의에 대해 생각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은 욥에게 직접 나타나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상기시킵니다. 이에 대한 욥의 반응은 하느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회개하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러 왔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고, 욥에게 이전의 소유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십니다. 욥은 140년을 더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본 이후 죽게 됩니다. 욥은 성경에서 깊은 인간적 고뇌와 신앙의 시험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의 이야기는 신앙의 중요성과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야이로 딸의 부할 Raising of Jairus' Daughter, Russian Museum, 1871/ Art and the Bible

 

 

 

 

1871년 성서를 주제로 <야이로 딸의 부활 Raising of Jairus'daughter>을 그려 졸업작품전에서 금상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6년짜리 유학 기회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레핀은 부푼 꿈을 안고 오스트리아 빈, 이탈리아 로마, 프랑스 파리 등 유명 도시를 견학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상파 같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표현하는 화풍에 끌리기도 했지만,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레핀은 지금의 시대상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게 그에게 더 맞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유학 기간이 남았는데도 망설임 없이 귀국했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 중 한 사람으로, 그의 12살 된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찾아와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의 딸을 살려 주기 위해 그의 집으로 함께 갑니다. 그러나 도중에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의 옷을 만지며 병이 나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예수와 야이로가 집으로 가는 도중, 야이로의 집에서 전갈이 와서 딸이 죽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여 ,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사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보내신 후, 딸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딸이 살아나서 걸어 다니기 시작합니다. 딸이 살아난 것을 본 부모는 기뻐하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곧 퍼져나가게 됩니다.  이 사건은 예수의 능력과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성경에서 중요한 부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푸른 옷의 예수와 흔 옷의 야이로의 딸이 대조를 이룬다. 성화에서 보기 드문 프른 옷의 예수다.  

 

 

개인적으로 푸른 옷을 입은 예수의 모습이 흰 옷의 소녀와 대조되며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그림입니다. 

 


 

 

 

로마노프 가계도/위키백과

 

 

 

 

 

 

 

 

 

 

 

소피야 알렉세예브나 로마노바/나무위키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로마노바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녀입니다. 황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셋째 딸로, 표도르 3세와 이반 5세의 친누나이며, 피터 대제(표트르1세)의 이복누나입니다.  1682년부터 1689년까지, 아직 어린 이반 5세와 피터 대제가 공동 차르로 즉위했을 때, 소피아는 섭정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기간동안 그녀는 권력의 맛을 보았고, 이후 피터 대제와의 권력 투쟁을 벌였습니다.  소피아는 피터 대제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1689년부터 1704년까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유폐되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그녀의 측근과 친위대원들이 피터 대제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소피아는 강한 야망과 복수심을 가진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녀는 권력을 향한 그녀의 열망과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의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합니다. 

 

 

 

피터 대제/ HMAP

 

 

 

 

러시아의 표트르 1세 , 즉 피터 대제(Peter the Great)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중요한 황제 중 한 명으로, 1672년부터 1725년까지 재위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러시아으 근대화와 서구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피터 대제는 러시아를 서구화하고 근대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1697-1698년 서유럽을 여행하며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배웠고, 이를 러시아에 도입했습니다. 피터 대제는 러시아의 행정 체제를 개혁하여, 능력주의 기반의 관료제를 도입했습니다. 그는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를 강화하고, 지방 행정도 개혁했습니다.  피터 대제는 러시아 군대를 근대화하고 강화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군사 체제를 도입하고, 해군을 창설하여 러시아의 해상력을 강화했습니다. 피터 대제는 17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여,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는 러시아의 서구화와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피터 대제는 대외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전쟁을 치렀습니다. 특히, 스웨덴과의 대북방 전쟁에서 승리하여, 발트해 연안을 획득하고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습니다. 피터 대제는 러시아의 문화와 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서구식 교육을 도입했습니다.  이와 같은 업적으로, 피터 대제는 러시아를 근대국가로 변모시키고,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였습니다. 그의 통치는 러시아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유폐된 소피야 공주, 1879/ 나무위키

 

 

 

 

 

 

이 작품은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Sophia Alekseyevna)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러시아의 피터 대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황녀입니다. 1689년부터 1704년까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유폐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그녀의 측근과 근위대원 등 1700여 명이 피터 대제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일리야 레핀, Beggar(Fisher Girl)/Wikimedia Commons

 

 

 

1870년대  후반에서 1880년대 초 사이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레핀은 이 시기에 많은  리얼리즘적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특히 노동자와 빈민들의 삶을 묘사하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이 소녀는 당시 러시아 사회의 빈곤과 고통을 상징합니다. 레핀이 이 그림을 통해 당시 러시아 사회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특히 여성의 삶과 고통을 강조했습니다. 레핀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러시아의 빈곤층의 삶을 묘사함으로써 사회적 문제를 비판하며, 당시 러시아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Painter's Daughter Portrait,1898/ Wikinedia Commons

 

 

 

 

 

레핀의 딸 나데즈다(Nadezhda)를 그린 초상화입니다. 나데즈다는 레핀의 딸로, 이 초상화는 그녀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레핀은 나데즈다의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그녀의 순순함과 어린 시절의 아름다움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레핀의 예술적 실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초상화 중 하나로, 그의 딸을 통해 가족의 사랑과 행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painter's daughter portrait/ Useum

 

 

 

 

 

<가을꽃다발>은 장녀인 딸 의 모습을 아주 어릴때부터 완숙한 여인에 이르기까지 화폭에 자주 담았던 레핀은 이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잔잔한 부정을 느끼게 합니다. 겨울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비워가면서도 서리 맞은 꽃을 피어내는 원숙한 가을을 닮은 사랑하는 딸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풍성하면서도 강한 사랑을 품은 러시아 여인의 모습을 가을 꽃다발과 함께 선물로 남겨주고 있습니다. 

 

 

 

꽃을 든 소녀/헤럴드 경제

 

 

 


 

 

 

https://www.youtube.com/watch?v=XFYWazblaUA

 

 

 

 

 

 

Sadko in the underwater kingdom, 1875/ Contemporary -art.org동명의 그림으리 위한 초벌 그림 Sketch for the picture of the same name, The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수중 왕국에 있는 사코 Sadko in the Underwater Kingdom., 1876,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wikipedia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이 오페라 '삿코(Sadko)'를 위해 그린 수중 장면입니다. 오늘날 멕시코 출신의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감독이 만든 영화 '세이프 오브 워터 (The Shape of Water' )수중 촬영 영화가  떠올려지는 작품입니다. 아래 그림을 보면 아마 그 감독이 벤치마킹을 하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로 일리야 레핀의 상상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ICZkU5Jkc0

 

 

 

 

 

 이 수중 장면인 '사코 Sadko'는 레핀이 1869년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만든 환상적인 음악시 오페라 '사드코 Sadko'를 위해 비주얼을 구사한 작품입니다. 물속의 생생한 세상을 묘사한  이 수중 왕국의 그림은 오늘날 최첨단 라스베이거스 수중 쇼 'O'를 능가하는 상상력입니다.  아마도, 앞으로 끝없는 재평가를 받으면서 그의 대표작을  꼽을 만한 귀한 역작으로 보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WCmhEqX2VI

 

 

 


 

Putting a Propagandist Under Arrest, 1878 /Artchive

 

 

 

 

 

러시아 제국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반영합니다. 이 시기 러시아에서는 혁명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지요.  이 그림은 러시아 경찰이 혁명 운동가인 전파자(propagandist)를 체포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그림에는 경찰과 혁명 운동가,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 등장하며, 당시 러시아 사회의 정치적 긴장과 갈등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레핀은 이 그림을 통해 당시 러시아 사회의 정치적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림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각 인물의 표정과 자세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레핀의 리얼리즘적 표현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이 그림은 러시아 제국 시대의 정치적 탄압과 혁명 운동의 갈등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레핀은 혁명 운동가의 체포를 통해 당시 러시아 사회의 정치적 상황을 비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Refused of The Confession, 1879-1885), xmfpcldizhvm altnfrhks/ Artchive

 

 

 

러시아로 돌아온 레핀은 전쟁과 봉기로 이어지는 19세기의 격동기 속 러시아 국민의 삶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러시아 전역을 돌며 전시회를 연 이동파에 합류했고,이를 계기로 소외된 민중의 생활상을 더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레핀은 이 시기에 혁명을 주제로 한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다만 단편적 묘사에만 그치지 않았죠. 투사와 투사의 가족 사이 복잡한 심리를 담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처럼 한층 더 입체적인 작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는 인간과 시대에 대한 깊은 고찰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었습니다. 레핀은 1894년부터 13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일했습니다. 그는 화가란 사회 현상 비평가이며, 그렇기에 사회적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걸 강조했습니다.  

 

 

 


 

 

레핀은 현실주의적 예술가로, 그이 작품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사람들을 모델로 삼아 그들의 삶과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레핀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할 모델을 선택할 때, 주로 현실적인 인물들을 선호했습니다. 레핀은 모델을 선택한 후, 여러 번의 스케치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모델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더욱 사실적인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레핀은 종종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레핀은 모델들이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예를 들어 <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와 같은 작품에서는 실제로 지역 주민들이 모델로 참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레핀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델들을 선택하고,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레핀의 리얼리즘적 예술 스타일을 대표하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곱추 소년 Hunchback, 1881, 트레티 야코프 미술관 State Tretyakov Gallery,Moscow/Artchive

 

 

 

 

일리야 레핀의 <Hunchback>(1881)는 러시아의 리얼리즘 화가 레핀의 중요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은 레핀의 다른 작품인 <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1880-1883)의 준비 과정에서 그려진 스케치 중 하나입니다. 레핀은 이 스케치를 통해 작품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곱추를 묘사했습니다. 곱추는 레핀이 고토그보(Khotkovo)에서 만난 실제 인물입니다. 레핀은 곱추의 모습을 여러 번 그렸습니다. 이 인물은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곱추의 외모를 그린 것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곱추는 빈곤과 고통을 겪는 인물로, 그러나 강한 의지와 정신력을 지닌 인물로 묘사됩니다 . 이 작품은 레핀의 리얼리즘적 표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레핀의 예술적 실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스케치 중 하나로, 러시아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문제를 다루는 그의 작품의 한 부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TxyNejxkAs

 

 

 

 

 


 

 

레핀은 1880년대부터 수많은 러시아 문화 엘리트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고골 등을 미롯한 무소르스키. 림스키 코르샤코프 등의 음악가, 스타소프 같은 예술비평가, 그밖의 왕족과 귀족 우아한 상류사회 여성 등  이 레핀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차이콥스키 발굴을 위시한 러시아의 문화 전반에 새 바람을 일으켰던 비평가 , 블라디미르 스타소프(Vladimir Stasov, 의 초상,1873

 

 

 

 

레핀은 종종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러시아 유명한 미술 비평가이자 음악 비평가인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스타소프( Vladimir Vasilyevich Stasov)를 그릴 때 그러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1873년 작품으로 스타소프의 강한 인격과 지적 면모를 잘 표현했습니다. 스타소프는 러시아의 이동파화가들(페레드비쥬니키, Peredvizhniki)을 지원하며 러시아 예술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레핀도  이 그룹의 일원으로 예외가 아니었죠.  스타소프와의 관계는 그의 예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는 19세기  러시아의 중요한 미술 및 음악 비평가로 , 러시아 예술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사실주의 예술 운동을 지지하며, 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했습니다. 이 작품은 스타소프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자세까지 모든 부분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레핀의 초상화 스타일은 주인공의 인격과 당시 사회적 배경을 함께 담아내는 특징이 있습니다. 

 

 

 

 


 

 

 

 

 

참나무 숲속의 십자가 행렬 습작 Religious Procession in an Oak forest. Appearance of the icon 1878 by llya Repin stock photo,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Alamy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1883,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Smarthistory

 

 

 

 

 

'민중'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의 작품 <쿠르크스 현의 십자가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입니다. 이 그림은 평범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합니다.  러시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십자가 행렬로, 교회 안에 있는 이콘(성상화)이나 성물을 들고 행진을 하는 행사라고 합니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어떤 신념으로 자리잡을 때는 분명 인간의 귀천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과 인간을 연결지어주는 인간이 개입하게 되면, 이상하게도 계급에 따라 신의 사랑은 차별을 두게 됩니다.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의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이콘을 들고 걷는 귀부인은 자부심이 차 있습니다. 화려한 복장의 성직자는 지루한 것처럼 보이고요. 두 명의 여인은 조심스레 성물 상자를 들고 걷고 있습니다. 행렬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치안 담당자는 말을 타고 민중을 향해 거만하게 굴며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채찍을 휘두르기까지 합니다. 민중들을 거칠게 다루는 모습이 밉상입니다.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오면 그들역시 그들과 똑같은 민중일텐데요.  지친 아이들은 동행하는 어른의 지적을 받고 있는 듯 보이고요. 솔직히 아이들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한편, 이 행렬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림의 왼쪽 하단, 그러나 화면에서 감상자와 가장 가까이 있는 그들입니다. 

 

 

 

 

레핀은 원래 십자가 행렬을 위해 숲을 지나는 배경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르느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에서 표현된 일렁이는 햇빛의 효과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핀은 참나무 숲 속의 햇빛 효과를 포기합니다.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 내는 인상을 포기하고 화창한 하늘 아래, 뽀얀 먼지 일어나는 흙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레핀이 얻은 효과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들입니다. 

 

 

 

Auguste Renoir,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Dance at Le Moulin de la Galette, 1876/wikipedia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의 1876년 작품입니다. 야외에서 빛을 포착하고, 밝은 색상을 사용하여 일상의 순간을 표현한 인상주의적 특징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지요. 그림의 배경은 파리 몽마르크 지역의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일요일 오후에 열리는 무도회를 묘사했습니다. 이 장소는 19세기 말  노동자 계급의 파리 사람들이 저녁까지 춤추고, 마시고,갈레트를 먹으며 시간을 보내던 인기 있는 엔터네인먼트 장소였습니다. 그림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르누아르의 친구들입니다.  르누아르는 햇빛과 인공 조명을 사용하여 움직이는 군중을 생생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림은 밝고 다채로운 붓놀림으로 처리되어 있고요. 


이 그림은 1877년 제3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이후 1879년부터 1894년까지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소장했으며, 1894년 프랑스 정부에 기증되었다가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1883/ Arthive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Gubernia/ Khan Academy

 

 

 

 

Religious Procession in Krusk Gubernia/ Khan Academy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Gubernia / Khan Academy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governorate repin images: PICRYL-Public Domain Media Search Engine Public Domain Search

 

 

 

 

 

 

 

 

사람들의 표정은 그림자  하나 없는 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행렬에 참가하는 마음과 표정 뿐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계급까지 표정에 담고 있는 듯 합니다. 인물의 표정 안에 개개인의 역사를 담아내는 것, 바로 레핀의 탁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행렬에 끼지 못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곱추 소년입니다. 소년은 레핀이 가장 공을 들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절름발이 곱추 소년을 위해 여러 장의 습작을 남겼는데, 다양한 표정을 연구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 중에서 그는 슬픈 표정이 아니라 무표정한  듯 앞으로 열심히 나가는 소년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소년의 얼굴에는 행렬에 낀 사람들의 오만함도, 지루함도 없습니다. 

 

 

 

 

레핀은 그림을 통해서 민중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르느아르가 군중의 모습으로 빛과 그림자를 보여주고자 했다면 , 레핀에게 인물은 군중이 아니라 민중이었습니다. 그들의 궁핍하고 황폐해진 삶은 행렬 뒤쪽의 민둥산이 증명해 줍니다. 나무와 숲이 사라진 민둥산과 뽀얀 흙먼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건조한 민중들은 종교를 통해 구원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신의 은총 역시 모든 사람 앞에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민중은 포기하지 않고 행렬 언저리에서 열심히 앞으로 걸어갑니다. 불만을 표현하지도 않고 지루해 하지도 않고 그저 열심히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의 눈에 그들은 군중이 아나리 '민중'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j6WrS3-FSU

 

 

 

 


 

 

 

 

 

 

러시아 제국 극작가 겸 리얼리즘 소설가 알렉세이 피셈스키(1821-1881), 작가 알렉세이 피셈스키의 초상 Portrait of the Author Alexey Pisemsky, 1880/ wikipedia

 

 

 

19세기 러시아의 중요한 작가로, 그의 작품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주로 소설과 희곡을 썼으며, 그의 작품은 사회적 비판과 현실주의적 묘사로 특징지어집니다.  레핀은 피셈스키의 초상화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피셈스키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담아내고 있으며, 그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자세까지 모든 부분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레핀의 초상화 스타일은 주인공의 인격과 당시 사회적 배경을 함께 담아내는 특징이 있습니다. 

 

 


 

 

 

 

피아니스트로서 당대의 프란츠 리스트의 라이벌이었던 작곡가 겸 지휘자인 안톤 그리고리예비치 루빈시테인의 초상 Portrait of the Pianist conductor and composer Anton Grigorievich Rubinstein, 1881/wikipedia

 

 

 

 

러시아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가인 안톤 그리고리예비치 루빈스타인 (Anton Grigorievich Rubinstein)의 초상화입니다. 이 시기 레핀은 이미 러시아의 주요한 리얼리즘 화가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안톤 루빈슈타인은 19세기 러시아 음악계의 거장으로, 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 러시아 음악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레핀은 루빈슈타인의 초상화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루빈슈타인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담아내고 있으며, 그의 음악적 재능과 인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레핀은 루빈슈타인의 얼굴과 손, 그리고 자세를 매우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루빈슈타인의 음악적 열정과 인격을 잘 전달하고 있고요. 당시 러시아 음악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초상화가 완성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루빈슈타인은 1894년에 사망했습니다. 레핀은 루빈슈타인의 초상화를 그린 후에도 그의 음악적 재능과 인격에 대한 존경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안톤 그레고리예비치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 피아노 협주곡 NO.4

 

https://www.youtube.com/watch?v=mLpg39XnBaQ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초상 Portrait of the composer M.P.Mussorgsky, 1881/ Arthive

 

 

 

 

<전람회의 그림>을 작곡한 러시아 작곡가 무소르그스키(Mussorgsky)가 등장할 때는 마치 사진인양 어디서든 소개되는 이 작품은 무소르그스키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그린 초상화이다. 레핀은 그의 헝클어진 머리와 수염 그리고 알코올 중독으로 코가 빨개진 모습까지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리야 레핀의 초상화 작품의 얼굴 표정이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적으로 미묘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레핀은 미표한 움직임을 포착하며 묘사함으로써 인물의 내면세계와 성격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QYC--HbEdM

 

 

 

 

 

 


 

 

 

 

https://www.youtube.com/watch?v=2vyMwDx9rF0

 

 

 


 

 

 

 

 

 

 

Portrait of Nicholas II ,the last Russian Emperor, 1896/Arthive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로, 1894년부터 1917년까지 재위했습니다. 그는 절대주의를 강력히 지지했으며, 의회 참여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1905년 10월에야 국민 대표 회의인 두마(Duma)를 창설하고 헌법적 체제를 약속했지만, 이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보여 1891년에 인도, 중국,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동아시아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1904-1905년의 러일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또한 ,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의 군사적 실패를 겪었으며, 1915년 9월부터 1917년 3월까지 군대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니콜라이2세는 가족을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는 아내 알렉산드라와 함께 세 딸과 혈우병을 앓는 아들 알렉세이를 둔 가족을 가졌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반란과 군대의 반란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는 3월 15일 토위할 것에 서명했습니다.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볼셰비키에 의해 감금되었고, 1918년 7월 17일 예카테린 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니콜라이 2세의 통치는 러시아의 현대화와 산업화 시도를 보여주었지만, 그의 절대주의적 태도와 군사적 실패로 인해 결국 러시아 제국은 붕괴됩니다.

 

 

 

 

 

니콜라이 2세 가족/나무위키

 

 

 

 

니콜라이 2세의 재임 기간 동안 러시아 사회는 여러 주요 사건들이 발생했습니다. 이들 사건들은 그의 통치와 러시아 제국의 붕괴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 당규약 문제로 레닌과 율리 마르토프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레닌의 지지자들은 표결에서 다수파를 차지하여 스스로를 '볼셰비키(다수파)'라고 불렀고, 마르토프의 지지자들은 '멘셰비키(소수파)'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볼셰비키(다수파)는 혁명이 성공하려면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다른 좌파 정당인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와는 다른 입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세운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가 노동자 정부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러일 전쟁(1904-1905)입니다.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의 아시아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일본과 전쟁을 벌였지만,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큰 패배를 겪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만주와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고, 사할린 섬의 남부를 일본에 양도해야 했습니다. 이 패배는 러시아 내부에서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05년 혁명입니다.  러일 전쟁의 패배와 함께, 러시아는 1905년 혁명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시위와 폭동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피의 일요일"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는 시위대가 차르의 궁전 앞에서 무차별적으로 사살되는 사건으로, 니콜라이 2세의 인기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이 혁명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는 의회인 두마(Duma)를 창설하고 헌법적 체제를 약속해야 했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러시아를 참여시켰습니다. 전쟁 초기에 러시아는 큰 손실을 겪었고, 1915년부터 니콜라이 2세는 직접 군대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사적 무능력과 전선에서의 패배는 러시아 내부의 불만을 더욱 키웠습니다.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반란과 군대의 반란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는 3월 15일 퇴위를 서명해야 했습니다. 이로써 300년 이상 지속된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 전제정이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출범했습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대한 지지를 유지하며,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불만이 계속되었습니다. 1917년 7월에 볼셰비키(다수파)는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지만, 당시에는 실패했습니다. 볼셰비티 당원은 대부분 노동자였으며, 공장과 소비에트 안에서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투쟁을 전진시킬 방법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논쟁했습니다. 이로 인해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의 신뢰을 얻고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볼셰비키는 정치적으로 분명한 입장ㅇ르 취할 만큼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었으며, 노동계급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겨룰 수 있었습니다. 

10월에 볼셰비키는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에서 충분한 지지를 얻고, 10월 25일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봉기를 일으켜 임시정부를 전복했습니다.1918년 7회 대회에서 볼셰비키는 당명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변경했습니다. 이후 볼셰비키는 레닌주의자와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혁명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정당으로,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과 소비에트 체제의 확립을 주장하며, 이후 소련의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볼셰비키 혁명의 결과로 소비에트 체제가 확립되고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혁명이 성공 후, 볼셰비키와 반혁명 세력 간의 러시아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이 내전은 1922년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볼셰비키가 승리하여 소련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습니다. 노동자들과 농민의 요구를 반영하여 지지를 얻었습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의 핵심적인 지도자가 되어 러시아와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라스푸틴의 영향력입니다.  니콜라이 2세의 통치 시기에 그레고리 라스푸틴이 차르 가족, 특히 차르의 아내 알렉산드라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러시아 내부에서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1916년 라스푸틴의 암살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2세의 고립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라스푸틴의 손에 놀아나는 차르 부부를 풍자한 그림/나무위키

https://www.youtube.com/watch?v=frBxo6mbaS8

 

 

 

 

 

 

 

 

 

 

 

 


 

 

 

 

 

 

1905년 러시아는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러시아 제1차 혁명의 시기로, 다음과 같은 사회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농업과 산업의 발전이 느리고, 빈부 격차가 심각했으며, 정치적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1904-1905년 러시아-일본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이후, 러시아 내부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전쟁의 패배는 러시아 제국의 약점을 드러내었고, 내부의 불만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극심한 빈곤과 착취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개선, 토지 개혁 등을 요구하며 시위와 파업을 벌였습니다. 

 

 

 

인텔리겐차(지식인 계급)는 민중을 계몽하고 각성시키는 '브나로드 운동(민중 속으로)'을 통해 사회 변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많은 인텔리겐차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1905년 10월17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일부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고, 두마(러시아의 의회)의 설립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혁명 운동을 완전히 진압하지도 못했습니다.  혁명 운동은 계속되었죠.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막심 고리키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고리키의 소설<어머니>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노동자 계급의 각성을 촉구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1905년 10월 17일 시위 Demonstration on October 17, 1905, State Russian Museum , St. Petersburg/wikipedia

 

 

 

 

 이 그림의 내용은 1905년 10월 17일 , 레시아 제1차 혁명의 한 순간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실제로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델로 삼아 그려진 작품입니다. 이 날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일부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는 내용을 발표한 날입니다. 그러나  지켜지지 못한 약속으로 인해 혁명 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레핀은 이 그림을 통해 혁명의 열기와 당시 러시아 사회의 혼란을 생생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림에는 시위대와 군대,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하며, 혁명의 격렬함과 사회적 긴장감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 사회의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평가받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순간을 기록한 중요한 작품입니다. 

 

 

 

 

 

 

 


 

 

 

 

 

레오 톨스토이의 초상 Portrait of Leo Tolstoy, 1887, 위키문헌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레오 톨스토이의 초상화로, 레핀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레핀은 1887년 톨스토이의 저택인 야스나야 폴리아나를 방문하여 이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 시기 톨스토이는 이미 유명한 작가로, 사회적 및 철학적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레핀은 톨스토이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톨스토이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담아내고 있으며, 그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옷차림까지 모든 부분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레핀은 톨스토이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그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작품에 반영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단순히 톨스토이의 외모를 그린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과 당시 사회적 배경을 함께 담아내는 작품입니다. 레핀은 톨스토이와의 교류를 통해 그의 철학과 사상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작품에 담아내어 톨스토이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레핀과 톨스토이는 1880년 모스크바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도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레핀은 톨스토이의 철학과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그의 작품에 새로운 영감을 얻었습니다.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는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세계 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1828년 9월 9일에 태어나 1910년 11월 20일 사망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후반 생애에는 기독교적 무저항주의와 무정부주의적인 사상를 지니게 되며, 귀족 생활을 떠나 수도원에서 수도자로 살기 위해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수도원에서 나와서 자신의 신앙과 철학을 바탕으로 한 삶을 살았습니다. 톨스토이의 가장 대표적인 소설은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리나>입니다. 이 두 작품은 러시아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으며, 세계적으로도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전쟁과 평화>: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러시아의 귀족 가문과 일반인들이 삶을 묘사하며, 전쟁과 평화, 사랑과 죽음, 가족과 사회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룹니다. 

 <안나 카레리나>: 러시아 귀족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내면을 깊이 탐구한 소설로, 안나 카레니나라는 여인의 삶을 통해 사랑과 배신, 죄책감과 자살 등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묘사했습니다. 

톨스토이는 현실주의와 사실주의를 기반으로 한 문학적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인물들의 내면과 외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당시 러시아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철학과 사상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기독교적 무저항주의와 무정부주의적 사상을 지녔으며, 이러한 사상은 그이 작품에 반영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중편소설<고백>은 이러한 철학과 사상을 깊이 담고 있습니다. 


 

 

 

 

 

Leo Tolstoy Barefoot, Russian Museum, 1901/Google Arts & Culture

 

 

 

 

숲속에 휴식을 취하는 톨스토이, 1891/이모작 뉴스

 

 

 

 

 

Tolstoy writing at Yasnaya Polyana, Pushkin House, 1891/ wikipedia

 

 

 

 

 

일리야 레핀(1844-1930)은  작가 톨스토이 초상화를 많이 그린 화가로도 유명합다. 그들은 동시대를 살았고 레핀이 야스나야 뽈랴나 (톨스토이의 거주지)를 자주 방문할 정도로 톨스토이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톨스토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사상도 기질도 비슷했다고 합니다.  귀족의 아들이며 대문호인 톨스토이는 늘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사랑했던 러시아의 큰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감히 러시아 황제 짜르를 꾸짖기도 하고 직접 쟁기질을 하는 등 농부의 삶을 살고자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농노 해방 후 토지를 농노에게 나누어 주려다가 가족의 반대로 실패한 톨스토이는 82세 되던 가을, 집을 떠나 떠돌다 객사합니다. 레핀은 톨스토이의 성품에 매료되어 30년 동안이나 우정을 나누며 평생 그를 존경하하며 그의 모습을 많은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XUcmQrbDkY&t=33s

 

 

 


 

 

 

First version of The Did Not Expect Him. 1883/wikipedia

 

 

 

 

 

 

레핀의 여성투사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뜻밖의 방문객, 그리고 놀라는 리액션 표정들, 정말 현대판 헤롤드 핀터의 연극 무대 장면 같습니다. 극적 긴장과 구성의 중량감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들 '뜻밖에 Not expected'시리즈, 뜻밖에 생긴일, 우리가 번번이 만나는 그런 우연한 일, 그러나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사실주의 화가에게 우연하고 갑작스러운 '뜻밖'의 소제들은 보는 것 만으로도 흥미롭습니다. 

 

 

해롤드 핀터는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시인, 각본가, 감동, 배우로, 20세기 후반의 가장 복잡하고 도전적인 극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작품은 종종 "핀터스퀘(Pinteresque)"라고 불리는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일상 대화 속에 숨겨진 위협과 권력 게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의 극작은 복잡하고 도전적인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극작은 비현실적이고 암시적이며,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을 요구합니다.

 

뜻밖의 방문자 The Did Not Expect Him, 1884-1888, The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wikipedia

 

 

 

 

 

They Did Not Expect Him/ wikipedia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소셜타임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소셜타임스

 

 

 

 

 

남루한 옷차림을 한 한 남성의 등장으로 몇 평 안되는 방안 공기가 싸늘해 집니다. 문간 여인의 눈동자, 딸과 아들의 눈동자, 그리고 반가운 몸짓으로 일어났지만 선뜻 달려가지 못하고 얼어버린 여인의 뒷모습. 

 

"여보..."

여인의 입에서 당황스럽게  나온 단어입니다.

 

"내가, 왔어."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던 사내의 입에서 나온 짧은 한 마디 입니다.  길고 긴 세월을 건너 돌아온 그는, 이 집안의 가장입니다. 동시에 정치세력의 열성 당원이고요. 사내는 이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이날만을 고대하며 주어진 험한 시간을 버텼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갈라졌던 가족 사이 상봉치곤 어딘지 공기가 싸  ~합니다.  당장 달려가 이 남자를 안아 주질 못합니다.   울면서 남편에게 매달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입니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아버지의등장에 아들은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존재 자체를 망각해버렸던 딸 아이는 대놓고 경계하는 표정입니다. 하녀와 동네 이웃 또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요. 그러니까 , 아무도 사내가 집에 돌아오는 걸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이죠. 제목처럼 말입니다.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 (IIya Repinm , 1844-1930)이 그린 이 그림은 제목에서조차 의미심장합니다.  이 가족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먼저 작품의 바탕이 되는 당시 러시아 사회의 분위기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1879년 결성된 러시아 제국의 '인민의 의지당'은 농민 봉기를 끌어내 보수적인 차르 전제정을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급진적이었던 선전과 부채질은 외려 대다수 농민과 노동자에게 거부감만 살 뿐이었습니다. 결국 '인민의 의지당'은 노선을 다시 짜야 했습니다. 그것은 적은 지지층으로도 할 수 있는 암살과 테러였습니다. '인민의 의지당' 계열 단체들은 그해 11월 중순부터 당시 차르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 1818-1881)에 대한 암살을 세 차례 이상 시도했습니다.

 

 

 

 

처음에는 철도 수비대로 위장 취업해 알렉산드르 2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정을 잘못 파악해 허무하게 실패했습니다. 그 다음은 알렉산드를 2세를 태운 기차가 지나는 철로 밑에 폭탄을 깔았습니다. 예정대로 기차가 달리긴 했지만, 하필 설치해둔 게 불량품이었습니다. 이들은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재차 철로 아래 폭탄을 설치했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작동했습니다. 그런데, 녀석을 애꿎게도 알렉산드르 2세가 탄 기차가 아닌 수행원들이 탄 기차가 지날 때 폭발했습니다. 더 굴욕적인 건, 이 일로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인민의 의지당'은 1881년 3월 1일에 다시 기회를 잡았습니다. 이날 알렉산드르 2세의 행렬 일정을 입수한 '인민의 의지당'은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핵심 당원들은 차르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단검과 권총, 사제 폭탄과 다이너마이트까지 챙긴 뒤 곳곳에  잠복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알렉산드르 2세가 탄 마차를 부쉈습니다. 그가 콜록대며 밖으로 나오자 그대로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기습을 당한 차르의 최후는 끔찍했습니다. 그는 팔다리가 찢어진 채 비명을 질렀고, 고통에 허우적대다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 콘스탄틴 마코프스키< 임종을 맞은 차르 알렉산데르 2세>

 

 

알렉산드르2세의 암살, 1881/위키백과

 

 

임종을 맞은 차르 알렉산데르 2세 /헤럴드경제

 

 

 

이제  러시아 각지에서 혁명이 터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쩜니까! 이들의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농민은 칼과 곡갱이를 들고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참혹한 죽음에 충격을 받은 민초는 되레 '인민의 의지당'에 반감을 표하는 기류였습니다. 역풍이 제대로 불었습니다. 수사 당국은 여론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피의 숙청에 나 설 수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붙잡힌 당원들이 다른 가담자의 신원을 술술 불었습니다. 관계자가 줄줄이 붙잡혔지요. 이들 모두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숨통이 붙어있으면 시베리아 유배지로 내몰렸고요. 그렇게 온도가 영하 수십도로 곤두박질치는곳에 맨몸으로 추방됐습니다. 사실상 사형 선고였지요.

 

" 당신이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한때 차르 암살에 가담했던 그가 혹독한 고문과 유형을 모두 견디고 다시 가족들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이었습니다. 묘한 당혹감이 작품 전체에 흐르는 이유입니다. 

 

 

 

사내는 들끓는 피를 안고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권위적인 차르 정부의 행보는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습니다. 그는 마음속 불꽃에 이끌려 가장 과격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어느새 '인민의 의지당'까지 왔고, 나아가 암살과 테러 엄무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속한 당은 이름과는 무색하게 농민에게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작전 또한 어설픈 실패를 이어가고 있었고요. 그는 그럴수록 이 일에 더 매섭게 매달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 그가 나름의 사명감을 불태우는 동안 나머지 가족은 어땠을까요? 그의 가문은 농민 내지 노동자 집안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화려한 벽지와 고급스러운 가구가 깔린 그림 속 거실 풍경으로 볼 때, 외려 차르 정부에서 고위직을 맡아왔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저돌적인 아들의 행동에  가족들은 긴 시간 속 애가 탔을 게 분명합니다. 아내  또한 나가기만 하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남편 모습에 밤을 재새웠을테고요.  사내는 종종 집에 있을 때도 쉬지 않고 혁명 정신을 설파했겠죠. 

 

 

 

 

 

화폭 정면에 걸린 액자 중 왼쪽에선 차르 전제정을 맹렬하게 비판한  시인 타라스 셰브첸코로 짐작되는 얼굴이 보입니다. 오른쪽은 농민의 아픔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한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초상화로 추정되고요.  이들 사이에는 희생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그림 또한 떡하니 걸려있습니다. 사내가 밖에서도, 안에서도 뼛속 깊이 '인민의 의지당원'이었음을 상징하는 소품들입니다.  가족은 스스로 생각하는 더 중요한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친 자식이자, 남편, 가장인 그를 최대한 존중했을 것입니다. 가끔은 지금 가는 길이 정녕 맞는지, 농민과 노동자마저 왜 호흥하지 않는지를 짚어보라고 애원하면서도 뒷바라지는 멈추지 않았을 테지요.   사내는 끝내 알렉산드르 2세를 죽이며 과업을 마쳤지만, 얼마 안돼 비밀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는 연기처럼 증발하고 말았고요.

 

 

 

 

가족 모두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말을 잃었습니다. 묘한 기분이었죠. 분명 슬펐고, 가엾고, 그리고 불쌍했을 것입니다. 이 와중에 마음 한편에서 솔솔 피어나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쉽사리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이었죠. 이제 밑빠진 독처럼 돈 나갈 일이 사라졌습니다. 압수와 수색, 미행 등 살 떨리는 정부의 감시망도 피할 수 있었고요.  과격분자가 사는 집이라는 식의 지긋지긋한 소문에 서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1년이 흐르고, 곧이어 3년이 또 흘렀습니다.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가족은 그가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인과 여인은 상복 같은 검은 옷을 입는 등 나름의 애도를 표했습니다. 모두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았고요. 암묵적인 합의였습니다. 이들은 빠르게 일상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딱 이런 무렵, 사내가 예고 없이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노인과 여인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본능적인 반가움이었지요. 하지만 돌아온 그의 눈빛을 보곤 멈칫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눈빛은 그대로였거든요.  퀭한 표정, 비쩍 마른 몸, 거지꼴의 행색을 하고도 두 눈만은 여전히 이글이글 타올랐습니다. 이는 모든 시계가 과거의 불안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방 안의 모든 인물들이 형용할 수 없는 당혹감에 휩쓸린 이유입니다.  노인과 여인은 원망과 두려움, 공포와 불안감이 피어나고 있다는 걸 감추지 못했습니다. 사내 또한 수년간 바란 이 순간이 꿈과는 너무도 다른 데 대해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Duel between Onegin and Lenski, 1899/reddit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VL5-3j--WI

 

 

 

 


 

 

 

 

Delegation of Voigts before Alexander III, 1886/wikimedia commons

 

 

 

 <알렉산더 3세 앞의 보이트들의 위임>(1886) .

레핀은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이 그림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1613년 2월 21일, 모스크바의 보이트들(보이아르들의 대표자)이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로 선출한 장소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장면은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을 상징하고요. 그림에서는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 선출된 후, 보이트들이 알렉산더 3세(실제로는 미하일 로마노프의 선출 당시 차르가 아닌 미하일의 아버지 팔라레트 로마노프가 등장해야 하지만, 레핀은 역사적 오류를 범하여 알렉산더 3세를 등장시킴)를 향해 경의 를 표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Saint Nicholas of Myra saves three innocents from death, 1888/wikipedia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의 <성 니콜라스 미라(Myra)의 세 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음에 구하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레핀이 1884년 미라(Myra)의 니콜라스 콘벤트의 수도승으로부터 의뢰를 받은 후 완성된 작품입니다. 레핀은 이 작품을 통해 성 니콜라스의 용기와 정의감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그림은 미라(Myra)의 총독 에우스타티우스(Eustathius)가 뇌물로 매수된 후 세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려고 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성 니콜라스는 이 부당한 처형을 막기 위해 미라(Myra)로 돌아와 처형장이 있는 디오스쿠로프 필드에 도착합니다.  그림은 성 니콜라스가 처형자가 첫 번째 무고한 사람을 처형하려는 순간에 간섭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이 먼저 들어옵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진 성 니콜라스, 비현실적인 표정을 보이는 도시의 총독, 그리고  성 니콜라스의 간섭에 급당황한 처형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모든 희망을 잃은 채 무릎을 꿇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동그란 눈을 뜨고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않는 듯 당황한 모습의 사람,   성니콜라우스의 등장으로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 보는 노인의 모습,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밝고 강렬한 색상과 조명이 사용되어 각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Saint Nicholas on a 13th century icon, Saint Catherine's Monastery, Sinai, Egypt

 

 

 

13세기 성 니콜라우스(St. Nicholas) 아이콘입니다. 주교복장을 하고 한 손에는 닫힌 복음서를 들고 다른 손으로 축복하는 모습이지요. 성 니콜라스는 3세기 후반 리키아(현재 터키)의 파타라에서 부유한 기독교인 부모에게 태어났습니다. 그는 성경을 공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미라(Myra)의 주교로 선출되었습니다. 니콜라스는 세 명의 처녀를 매춘에서 구해내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또한 무고한 세 명의 사람들을 사형에서 구하고 바다의 폭풍을 진정시키는 등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325년에 그는 니케아 제 1공의회에 참여하여 아리우스의 이단을 단죄했습니다.

 

 

 

성 니콜라스는 343년 12월 6일에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미라(Myra)에 보관되었지만 후에 1087년에 이탈리아의 바리로 옮겨졌습니다. 성 니콜라스는 러시아에서 매우 존경받는 성인입니다. 그의 아이콘(icon)은 보호자로 간주되며 다른 중요한 성인들과 함께 교회와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nlSjAo-SFc

 

 

 

 

 

Saint Nicholas of Myra saves three innocents from death, 1890/wikipedia

 

 

같은 주제의 다른 버전입니다. < 세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주는 성 니콜라우스>집행직전의 사형수, 칼날앞에 무릎을 꿇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붉은 옷을 입고 공포에 질린 사람, 기적을 갈구하고 있는 노인,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가족과 사람들, 죽음앞에선 인간의 절절한 공포, 끝없는 절망을 화폭에 담고 있습니다.  사형을 말리려고 급하게 온 듯한 성인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1891/ 나무위키

 

 

 

 

터키의 술탄 메메드 4세에게 보내는 자포로제 카자흐인의 회신 (Reply of the Zaporozhian Cossacks to Sultan Mehmed IV)1891, State Russian Museum, St.Petersburg 작품입니다.

 

3.6m가 넘는  대형 그림은 2년여에 걸쳐 완성된 대작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4세 Mehmed IV 술탄 (재위 1648-1687)의 역사적인 장면을 재현한 그림 타블로( Tableau)입니다. 이 그림을 본 알레산드르 3세는 감탄하면서 즉석에서 3만 5천 루블을 하사했습니다. 이 금액은 러시아 황실 그림 역사상 가장 많은 액수의 그림 값입니다. 일리야 레핀의 그림들은  러시아의 생생한 역사 현장을 극명하게 묘사한 때문으로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러시아 미술관(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과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국립 미술관(Tretyakov Gallery, Moscow)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6jRF7kQWT0

 

 

 

 

 

 


 

 

 

Portrait of Countess Natalia Petrovna Golovina, 1896/ wikipedia

 

 

초상화의 주인공 나탈리아 페트로브나 골로비나 백작부인입니다. 19세기 러시아의 고위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당시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레핀은 골로비나 백작부인의 초상화를 매우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그녀의 얼굴과 옷, 배경까지 모든 부분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레핀의 초상화 스타일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주인공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레핀의 작품이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당시 러시아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ZGiNOJZJow

 

 

 

 

 

https://www.youtube.com/watch?v=lI20zV40Zds

 

 

 

 

Even if all fall away, I will not, 1896, 러시아 노브고로드 주립 미술관 Novgorod State Museum

 

 

 

 

그날 밤 베드로는 '제가요?' 라며 펄쩍 뛰었습니다. '주님 저는 주와 함께 죽게 된다고 해도, 결코 주를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 베드로의 대답에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모두 '저두요., 저도요; 라며  똑같이 다짐했습니다. 이 그림 제목 <모두 다 벌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Even of all fall away, I  will not>는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이 그날 밤 베드로가 했던 고백을 , 그 림 제목으로삼았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 구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모든 제자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강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예술님은 이에 대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라고 예언합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혁명적 낭만주의 작가 막심 고리키 Portrait of Maxim Gorky, 1899/wikipedia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은 러시아의 19세기 최고의 리얼리즘 화가로,그의 작품은 당시 러시아의 모순된 현실과 시대정신을 탁월하게 묘사했습니다. 레핀의 대표작 중 하나는 작가 막심 고르키의 초상화입니다. 이 초상화는 레핀의 사실주의적 표현을 보여주며, 역사와 현실을 통찰하는 냉정한 관찰자로서 포착한 삶에 대한 명석한 해석을 치밀하게 표현했습니다. 레핀은 작품을 매우 천천히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렸습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백여 장 이상의 스케치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레핀은 고르키의 내면과 외면을 섬세하게 담아내어, 관람자에게 깊은 감동을 전달했습니다. 

 

막심 고리키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가로,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입니다. 그는  1868년 3월 28일에 러시아 제국의 니즈니노브고로도에서 태어났고, 1936년 6월 18일에  소련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습니다. 고리키는 20세기 새로운 러시아 문학을 개척한 작가로,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원조로 평가받습니다. 

고리키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삶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러시아 제국의 하류계급의 참혹한 생활상을 세세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신문 기자로도 활동하며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틈틈이 소설을 쓰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고리키는 반체제 운동과 혁명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여러 번 체포되고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혁명 운동을 지원하며, 1917년 10월 혁명 이후에도 볼셰비키 정권의 언론탄압을 비판하는 논설을 썼습니다. 

고리키의 문학적 태도는 사회변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문학을 강조하며, 그는 스스로를 작가라기보다는 숙련공이라고 자처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역사적으로도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의 1980년대에는 사회주의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리키의 대표작으로 소설 <어머니>와 희곡<밑바닥에서>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으며, 노동자 계급의 의식화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 밑바닥에서>는 빈민 합숙소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묘사한 작품으로, 인상적인 구절과 강렬한 에너지가 특징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kVkQf4WlM4

 


 

 

 

Two Tsars ,1900/wikipedia

 

 

 

 

 


 

 

 

 

 

 

작가 나탈리야 보리소브나 노르드만-세베로바와 함께 있는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Natalia Borisovna Nordman-Severova, 1903, 1887년에 개관한 핀란드 아테네움 핀란드 국립 예술 미술관 Ateneum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은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집안아들로 태어나, 고향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상화가에게 그림을 배우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나와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Russian Academy of Theatrical Art)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수업을 했습니다. 이 아카데미에서 러시아 국비 장학생 금메달을 탔는데, 그 장학금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미술 인생의 귀중한 생애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귀국해서 러시아 역사화에 열중하다가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의 역사화 교수가 되어 학생 지도에 전념하기도 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 제2차 '10월 혁명 Octorber Revolution'이 나자 핀란드로 가서 헬싱키에서 핀란드 점령 러시아 해군 제독의 딸 작가 나탈리야 보리소브나 노르드만-세베로바 Natalia Borisovna Nordman-Severova Nordman)를 만나 귀국하지 않은 채,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최후의 만찬Last Supper, 1903, 러시아 노브고로드 주립 미술관 Novgorod State Museum

 

 

 

그 어느 날 저녁 무렵. 아마도 마지막 만찬 Last Supper 자리였을 것입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들은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 그 말씀에 베드로가 앞장서 나섭니다. '주님 모두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Even of all fall away, I will not.' 말이 끝나자마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밤 수탉이 두 번 울기도 전에,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

 


 

 

 

기막힌 해방감, 1903, 샹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국립미술관/더 칼럼니스트

 

 

 

한 쌍의 젊은 남녀가 파도가 사납게 요동치는 바닷가에서 손을 붙들고 서 있습니다. 파도는 금방이라도 두 사람을 집어 삼킬 듯하고요.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은 두 사람이 금세 급류에 휩쓸려 가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게 되지만 두 사람은 걱정 말라는 태도입니다. 둘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놀랍게도 웃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여자는 혹시라도 모자가 벗겨질까 다소 주저하지만 남자의 자신감 앞에서 공포심도 잊은 모습입니다.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이 그린 <기막힌 해방감>은 러시아 사회가 새로운 국가 건설을 놓고 옥신각신하던 제정 말의 정치적 혼란기에 그려졌습니다. 사회주의에 공명했던 그는 그림에서도 기독교 주제와 신화의 세계에 안주한 아카데미 미술에 반발해 현실의 부조리에 눈을 돌리라고 외쳤습니다. <기막힌 해방> 에서도 그런 그의 목소리는 사그라지진 않았고요. 아리따운 여인은 당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며 포효하는 파도는 자유를 갈구하는 친구들의 함성입니다. 놀라운 건 이런 강력한 메시지를 너무나 로맨틱한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러시아인들이 일리야 레핀 (IIya Repin, 1844-1930)을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만의 특별한 표현법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Ceremonial Sitting of the State Council on 7 May 1901 Marking the Centenary of its Foundation, 1903, State Russian Museum. Saint Petersburg/wikipedia

 

 

1901년에는 러시아 국가의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형 프로젝트를 의뢰받았습니다. 레핀의 마지막 대작이 된 < 1901년 5월 7일 국가소비에트 회의>를 완성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레핀은 오른손 관절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레핀은 생애 말년을 핀란드의  쿠오칼라에 보냈고 그곳에서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레핀이 거주하던 쿠오칼라 마을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념하여 1948년 레핀의 이름을 따 "레피노"라 개칭되기도 했습니다. 

 

 

 

 

1930년 9월 29일,  일리야 레핀은 86세를 일기로 핀란드에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현재 레핀기념관인 페나테스(Penates)뒤뜰에 묻혀 있습니다. 이곳,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과  바다가 만나고 러시아  미술의 체취를 돋우는 쿠오칼라 마을은 레핀의 이름을 따서 '레피노'로 부르고 있습니다. 러시아 최고 권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의 이름도 '레핀 아카데미'이고요. 

 

"러시아 문학은 톨스토이, 미술은 일리야 레핀 "

 

이 문장 하나로도 레핀에 대한 러시아  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Sh7LTtPP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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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여성 화가입니다. 미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독자적인 기념미술관을 가진 최초의 여성화가이기도 하고요. '매혹적'이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그림들을 그린 화가입니다. 특히 꽃의 한 부분을 과감하게 확대하여 화면 가득 채운 화가입니다. 당시 남성 화가들이 잘 쓰지 않았던 분홍빛 계열과 같은 색채를 수채화처럼 부드럽고 오묘하게 표현한 시리즈로 유명합니다. 늘 주변부에 머물렀지만 한 세기가 지나도 시들지 않는 매력으로 다가오는 화가입니다. 힌트를 너무 많이 드렸나 봅니다.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e, 1887-1986)의 시간으로 떠나봅니다. 

 

 

 

 

Sky Above Clouds,IV,1965( 8ft by 24ft), The largest painting O'keeffe ever produced(Art Institute of Cicago) /singulart

 

 

 

 

 

 

조지아 오키프의  1965년 작품 <구름 위의 하늘> 연작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입니다.  그녀가 비행기 안에서 내려단 본 구름의 모습들 입니다. 상상이 가시죠? 가로 7미터, 세로 2.5미터의 이 작품은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큽니다. 이 작품의 제작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고스트 랜치(Ghoast Ranch)의 차고를 제2의 작업실로 개조했습니다. 매일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이곳에서 열정적으로 작업했지요. 차고에 난방시설을 갖추지 않아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했거든요.

 

 

 

이 작품은 타원형의 작은 구름들이 끝없이 펼쳐진 하얀 물방울 카펫처럼 먼 수평선을 향해 펼쳐져 있습니다. 마치 대기의 무한한 차원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고요. 이러한 구름의 구성 방식은 '안마당 연작'에서 주제로 삼았던 공간적 관계를 도입한 것입니다. 무한성과 보편성에 대한 강렬한 도전을 암시합니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e, 1887-1986)는 미국을 대표하는 추상 표현주의 화가입니다.  강렬한 색채의 추상적인 꽃 그림과 미국 남서부의 풍경을 미니멀리즘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대표적이죠.  그녀의 추상화된 꽃 그림들은 에로틱하면서 도발적인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강렬한 색채와 과장된 크기가 때론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1910년부터 1970년대까지 뉴욕과 텍사스 그리고 뉴 멕시코를 오가며 활동한 화가입니다.  그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재들에 애정을 쏟아부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싯구가 생각날 정도로 말입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관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대상들의 소소하고 작은 모습들에 애정을  기울입니다. 관찰한 사물의 핵심은 그녀의 붓끝에서 도발적인 색을 입고 강렬한 에너지를 뿜으며 거대한 크기로 피어납니다.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크기로 추상화해 냄으로써 보는 이의 시선을 자석처럼 끌어당깁니다. 길가의 꽃들과 뉴 멕시코의 사막과 돌산의 마른 풍경을 섬세하게 훑어내려 갑니다.  오키프의 대상의 본질을 담아내려던 그녀의 의지에 박수를 보낼정도로 말이죠.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e, 1887-1986) 는 삶에 대한 깊은 애착을 꽃으로 표현한 여인이라고 정의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녀가 그린 꽃과 뉴 멕시코의 풍경들은 그녀 자신의 본성이자 자연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삶은 예술과 완전한 통합을 이룬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녀의 초기 몇 년은 마치 흙에 대한 무한 애정을 가진  정원사 같습니다. 뉴욕주의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조지 호수의 스티글리츠 저택에 기거하던 시절, 그녀는 정원을 가꾸는 일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꽃의 접사와 나무와 나뭇잎들을 그리지요. 스무 점이 넘는 칸나와 페투니아, 양귀비 ,칼라, 릴리 등 을 줌인하여 관찰하고 그렸습니다. 이후 남서부의 사막 한 가운데로 거쳐를 옮긴 이후에도 생명의 원초적 본질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정원을 일구고, 계속해서 꽃을 그려나갑니다. 

 

 

 

 

Drawing no.2-Special , Charcoal on Fabriano laid paper, 1915, National Gallery of Art, 1915/wikipedia

 

 

 

 

 

 

 

난 완전히 새로워지는 중이야.
내가 이제껏 했던 모든 것을 집어던졌어.
그것들 중 어떤 것도 또 다시 집어 들지 않을 거야.
영훤히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오랫동안 그렇게 될 거야.'
-1915년 친구 애니타 폴리처에게 보낸 편지 중-

 

 

 

 

 

 

 

 

Blue Series,1916, Blue #1/wikipedia

 

 

 

 

Palo Duro Canyon paintings of O'keeffe, Red Landscape, 1916-1917, Panhandle-Plains Historical Museum, West Texas A&M University/wikipedia

 

 

 

 

 

 

Georgia O'Keffe,1918 by Alfred Stieglitz: Ameican photographer, 1864-1946)

 

 

 

 

 

 

 

 

평범하게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곳에 살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말하고 싶다고 모두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바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 1887-1986-

 

 

 

 

 

위스콘신주(wisconsin)/위키백과

 

 

 

https://www.youtube.com/watch?v=rEhy-aNN9XA  

 

 

 

 

1887년 미국 위스콘신(Wisconsin)의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뉴욕과 텍사스 등을 오가며 그림을 그렸고요. 열 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고 배우기 시작했으니 생의 초기 10년과 시력을 상실했던 말기의 15년을 제외하고는 일평생 그림을 그렸던 화가입니다. 시카고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던 그녀는, 피카소가 아비뇽의 여인들을 그리던 그 해에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맨해튼에서 그림을 공부하며 꽃과 정물들을 주로 그리며 동료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하고, 상업 미술과 미술 선생님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그림을 잠시 중단하기도 합니다. 한때, 노스 캘로라이나와 텍사스에서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아서 웨슬리 도브를 만나게 됩니다. 그에게 배우면서 선과 색채와 색감의 잘 어우러진 조합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그림이라던 그의 추상미술에 대한 개념에 공감하며 그림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 같은 그녀의 초기 20년간 형성된 시각은 이후의 작품세계를 관장하며 객체의 본질적인 핵심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유럽의 미술이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를 선두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을 무렵, 신대륙 미국의 미술은 여전히 전통적인 미술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다. 소수의 예술가들만이 새롭게 전위미술을 개척하고 있었죠. 대도시의 풍경을 현실적으로 묘사한 '에이트 그룹(The Eight)'과 추상과 재현의 경계를 오가며 형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정밀주의'화가들은 미술의 현대적 해석을 시도하며 전위적인 흐름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e, 1887-1986))는 당시 남성들의 독무대였던 미국 화단에서 어떠한 사조와도 연관되지 않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했습니다. 미국 미술에서 차지하는 뚜렷한 그녀의 위치와 명성은, 작품뿐만 아니라 뉴멕시코 사막에서 독립적이고 전설적인 삶을 개척한 여성으로서  그녀의 개성이 돋보입니다. 그녀는 미국 모더니즘의 초창기부터 추상적 경향의 1950-1960년대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미술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녀의 대표적인 그림의 주제는 꽃과 식물의 기관, 동물의 뼈, 조개껍데기, 산 등 자연물이 주류를 이룹니다.  특히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확대된 꽃은 어떠한 배경처리도 없이 거대한 캔버스에 커다랗게 그려져 관람자를 압도시킵니다. 색채의 표면적인 힘과 감춰진 관능성으로 충만한 작품에는 자연에 대한 그녀의 내적인 친근함과 깊이감이 느껴지는 신비스러운 추상성이 돋보입니다. 

 

 

 

 

 

 

Music Pink and Blue No.2, 1918/Whitney Museum of Ameican Art, New York

 

 

 

 

 

 

 

Red Canna, 1919, High Museum of Art, Atlanta, Georgia/wikipedia

 

 

 

 

Georgia O'Keeffe series-1-no-8/Poster/Redbubble

 

 

 

 

 

 

파란색과 녹색의 음악 Blue and Green Music, 1919-1921/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Chicago

 

 

 

 

 

Red and Orange Streak, 1919/Georgia O'Keeffe Museum Custom Prints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e, 1887-1986)는  20세기 초 뉴욕 아방가르드 예술계를 이끌었던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glitz: 1864-1946)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생활이 작품보다 먼저 도마에 오르기 일쑤입니다.알프레드 스피글리츠는 본인 역시 '미국 근대 사진의 개척자'로 불리는 선구적인 사진가이면서 뉴욕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갤러리스트이자 잡지 발행인, 컬렉터였습니다.  스티글리츠는 수세기 동안 미술가들을 지배해 온 "미술은 이러해야 한다."는 제약 아래서 꿈틀거리며 균열을 일으키던 모더니스트들을 옹호하고 적극적으로 소개했습니다. 

 

 

 

1916년 뉴욕, 오키프가 미국 서부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틈틈이 그린 그림을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glitz) . 그는 단번에 오키프의 예술성에 감탄하고 자신이 운영하던 '291 화랑'에 전시하게 됩니다. 스티그리츠는 아직 한 번도 전시해보지 못한 무명으 오키프의 목탄 소묘 몇 점에서 그녀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뉴욕291번 가에 있던 '291 화랑'은 당시 아카데미 미술계가 인정하지 않았던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콘스탄틴 브랑쿠시, 폴 세잔,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들을 미국에 처음 소개한 진보적인 화랑입니다.

 

 

 

 

스티글리츠는 이 일을 계기로 그녀와 가까워지고 결국 둘은 동거하게 됩니다. 문제는 당시 스티글리츠가 미국 '근대 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향력 있는 작가인데다 유부남이라는 점이 둘 사이에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그녀는 스티글리츠의 어린 정부, 모델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습니다. 나중에는 스티글리츠의 두 번째 아내가 되지만요. 젊은 오키프는 세간의 곱지않은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작품을 그려나갔습니다.

 

 

 

 

 

 

 

 

 

 

Lake George Reflection, 1921-1922/Arthur.io

 

 

 

 

Pool in the Woods Lake George, 1922/Gallery Systems, reynoldahouse.emuseum.com

 

 

 

 

정원을 가꾸는 일과
과일을 수확하는 일을
특히 관심이 있다.
- Lake George 에서-


 

Lake George, formerly Reflection Seascape, 1922/Artsy

 

 

 

 

 

마치 푸른색 첼로를 옆으로 눕혀놓은 것으로도 보이는 1922년 작 <조지아 호수>입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편안함이 몰려드는 작품이지요.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와 함께하는 동안 그녀의 모든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고자 했습니다. 누드를 포함한 그녀의 사진을 2년 동안 수백 장 찍어 1921년 '앤더슨 갤러리'에서 오키프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키프는 미술가로서가 아니라 스티글리츠의 모델이자 뮤즈로서 조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미술교사였던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사진과 함께 단번에 미술계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사진작가였던 스티글리츠가 찍은 사진에는 오키프의 신체 부위를 극적으로 확대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단호하고 굳건한 얼굴의 오키프의 모습도 있고, 은밀하고 관능적인 모습도 담고 있었고요. 이로인해 세간의 얼룩진 평판은 덤으로 따라왔습니다.  사랑 받는 연인으로서 그가 스티글리츠에게 내밀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텐데 말입니다. 또한 예술가의 동반자로서 스티글리츠의 작품 세계에 공감하고 동참한 것일 뿐이죠. 하지만 세간에 발표된 그 사진들이 오키프의 이미지를 한정 짓게 됩니다. 나아가 그의 작품들까지 단정지어버린 것은 예술가 오키프에겐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오키프는  가십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가벼운 '평가는 더욱 참을 수 없었습니다.  영향력이 컸던 탓에 오키프에게  스티글리츠는 독이 되기도 하고, 실이 되기도 했지요. 어쨌든 , 오키프는 이에 직접 나서서 해명하기 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작품 세계를 그려나갔습니다. 특히 1917년 콜로라도 여행에서 처음으로 뉴멕시코 고원의 사막과 깊은 계곡을 본 그녀는 강렬한 영감을 받고 뉴욕과 뉴멕시코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특이한 형태의 바위나 강렬한 햇빛에 새하얗게 육탈된 동물의 뼈 등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Red Canna,1924/Georgia O'Keeffe.net

 

 

 

 

 

36인치의 거대한 캔버스에서 개화한 <Red Canna>입니다.  그녀가 24세 연상의 사진작가 스티글리츠와 오랜 연애 끝에 법적으로 결혼을 하게 된 1924년에 그려졌습니다.  세간의 따가운 눈총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니 , 사랑의 주체인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마음껏 표현한 거지요.  그림의 초보자도 이 꽃은 만개한 사랑을 느끼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캔버스에 투영된 것은 칸나의 본질인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오키프 자신의 본질이기도 하고요. 꽃으로 표현된 그녀의 자아상은 그녀의 절대 지지자이자 남편이었던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glitz, 1864-1946)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여인으로서의 개화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예술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 시작한 화가로서의 화려한 개화이기도 했지요. 

 

 

 

 

그녀가 미국의 미술계에 존재를 알리게 된 것은 1916년. 28살에 그린 나팔꽃을 닮은 보랏빛 페투니아와 코스모스를 그린 그림이 52세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glitz, 1864-1946)의 눈에 들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스티글리츠는 당시의 뉴욕 예술계를 이끌어가며 사진예술을 순수예술의 한가운데로 등단시킨 작가입니다. 그는 또한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갤러리 '291' 을 통해 유럽의 피카소, 몬드리안, 마티스, 브라크의 미술을 소개하며 현대 예술의 본거지를 파리로부터 뉴욕으로 이끌어온 개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렌즈를 3-4분간 장시간 빛에 노출시켜 사진을 그림처럼 보이도록 찍은 뉴욕의 거리 사진들은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세련된 사진입니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glitz, 1864-1946), The Glow of Night-New York,1897, The J. Paul Getty Museum /Google Arts & Culture

 

 

 

 

 

 

 

 

Two Towers-New York, 1911/ National Gallery of Art

 

 

 

 

 

 

 

첫 만남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방대한 양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깊이를 더해 가고 다양하게 변모해 갑니다. 1923년 연초 스티글리츠는 앤더슨 갤러리에서 오키프의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습니다. 100여 점의 드로잉과 회화작품을 아우르는 최초의 대규모 전시회였지요. 오키프는 2년 전에 열렸던 스티글리츠의 전시회를 통해 관습과 속박에서 벗어난 여성 미술 가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비평가들도 그와 같은 시각으로 오키프의 작품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전시회는 많은 관람객들로 성황을 이루었으며, 이로써 1924년에는 오키프의 회화 51점과 스티글리츠의 사진 61점이 앤더슨 갤러리에서 동시에 전시됐습니다.

 

 

 

 

스티글리츠의 사진 작품 대부분은 오키프를 찍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스티글리츠는 원치 않은 결혼으로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오키프와 12월 11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애인에서 결국 남편으로 법적 지위를 바꾸어가며 정신적인 지지자로서 긴 세월을 함게 하게 됩니다. 이시기는 오키프 역시  창조력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오늘날 미국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우뚝 서게 만든, 거대한 크기의 꽃과 도시 풍경 그림들을 제작했습니다. 

 

 

 

 

 

오키프의 예술은 언제나 자신의 환경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 그녀의 작품은 스티글리츠의 여름 별장이 있는 조지 호수(Lake George)주변의 풍경과 꽃, 그리고 뉴욕을 그린 그림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오키프는 1918년부터 꽃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확대된 꽃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스티글리츠와 결혼한 후 1924년부터였습니다. 꽃은 오키프에게 가장 친근한 주제로서 그녀의 전 작품을 통해 대표적 특징이 되었습니다. 1918년부터 1932년까지 오키프는 200여 점 이상의 꽃 그림을 그렸습니다. 장미. 페튜니아, 양귀비, 동백꽃, 해바라기, 금낭화, 수선화 같은 흔한 꽃들 뿐만 아니라 검은 붓꽃이나 이국적인 난과 같이 희귀한 꽃들도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Autumn Trees the Maple, 1924, Georgia O'Keeffe Museum, Santa Fe, New Mexico/Arthur.io

 

 

 

 

From the Lake,1924, Des Moines Art Center(디모인 아트 센터), IOWA, 코핀 파인 아트 트러스트/Georgia O'Keeffe.net

 

 

 

 

 

사람들은 꽃을 보고 여러 가지를 연상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꽃을 보지 않아요.
제대로
꽃은  너무 작고 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소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본 것을 그리겠다.
내가 느끼는 꽃을 그리겠지만 
꽃을 크게 그려서 
사람들이 놀라서 한참 동안 꽃을 바라보게 하겠다고
-책 <조지아 오키프> , 리사 민츠 메싱어, 임미정 옮김, 시공아트-

 

 

 

 

 

 

 

 

 

Petunias, 1925 Custom FramedArt-Etsy

 

 

 

 

Pink Tulip, 1926/Obelisk Art History

 

 

 

 

 

Black Iris, 1926,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wikipedia

 

 

Oriental Poppies, 1927/wikipedia

 

 

 

 

 

 

Single Calla Lily with Red(붉은 바탕의 한 송이 백합), 1928/Sotheby's

 

 

Two Calla Lilly On Pink(분홍 바탕의 두 송이 칼라), 1928/ Georgia O'Keeffe Museum Custom Prints

 

 

 

 

 

무엇보다 그녀가 실물보다 크게 그렸던 꽃 중의 하나는 칼라(Calla)였습니다. 대중들에게 이것은 곧 그녀의 '엠블럼'이 되었고요. 1928년에 제작한 <분홍 바탕의 두 송이 칼라 Two Calla Lillay On Pink>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납니다. 대체로 오키프의 꽃 그림은 캔버스 전체가 단지 한두 송이의 꽃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꽃들은 매우 클로즈업되어 그려져 있고요. 그 결과 잎과 줄기의 외곽선은 종종 잘린 채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확대를 통해 꽃들은 자연 상태로부터 벗어나 특별하고 확장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접사를 통한 확대는  꽃송이 각각의 구조를 상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오키프는 동시에 꽃 그림에서 형태의 단순화에 신경을 썼습니다. 

 

 

 

이렇듯 , 칼라(Calla)가 그녀가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가 된 것은 바로 구조적으로 단순함의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키프는 꽃을 그릴 때 꽃의 고유색을 사용했으며 동시에 붉은 양귀비, 검은 붓꽃과 같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단색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색을 가장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여겼습니다. 

 

 

 

 

 

 

 

 

Jack in the Pulpit-No.2, 1930/ National Gallery of Art

 

 

 

 

 

손을 들고 있는 여성의 흑백사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 )/Unsplash

 

 

 

 

 

 

Alfred Stieglitz/ Georgia O'Keeffe-Hands/ Richard Nilsen

 

 

남편이 된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손을 찍기를 즐겼습니다.  그녀의 손을 찍은 앨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glitz, 1864-1946)의 사진은 2006년 소더비에서 147만 2000달러(약 15억)로 사진 경매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New York Street with Moon (달이 뜬 뉴욕),1925/Museo Thyssen

 

 

 

 

 

 

1920년대 내내 오키프를 사로잡았던 두 번째 주제는 뉴욕입니다. 단순화되고 기하학적으로 축약된 형태, 명쾌한 선과 부르럽고 매끈한 표면 등이 돋보이는 오키프의 그림들은 미국식 사실주의와 정밀주의 와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가들과 사진가들은 객관성, 단일 초점, 정확성을 특징으로 하는 정밀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했으며, 그 소재는 자주 중복되었습니다. 오키프는 자신의 작품에 이러한 요소들을 시각적 표현으로 도입했습니다. 1925년 초 그녀는 마천루에서 바라본 형태에 매료되어 <달이 뜬 뉴욕>이라는 첫 번째 도시 풍경을 그렸습니다.  점차 작품에 도시 풍경이 늘어나게 되었지요.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솟은 빌딩이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과 함께 구조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해 가을 오키프와 스티글리츠는 셸턴 호텔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28층, 나중에는 30층에 있는 방 두 개짜리 객실을 빌렸습니다. 호텔 객실에서 바라보는 장대한 광경은 오키프에게 뉴욕을 화폭에 담도록 새로운 관심을 부여했습니다. 오키프는 1925년부터 1930년까지 뉴욕이라는 도시와 뉴욕의 건축물을 분위기 있고 환영적이며 감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으로 표현했습니다. 스티글리츠가 사진에서 열정적으로 시도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다른 시간대와 다른 날씨에 따른 도시의 분위기를 사진의 시점을 도입해 표현했습니다. 

 

 

 

 

 

The Selton with Sunsports(흑점이 있는 셸턴), 1926/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Chicago

 

 

 

 

오키프는 도시를 그린 작품에서 빛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흑점이 있는 셸턴 The Selton with Sunsports>에서는 눈부신 태양의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면은 희뿌연 구름 사이로 흩뿌려진 태양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화면 상단의 호텔 정면을 비추는 환한 빛과 화면에 불규칙하게 산재해 있는 '태양의 흑점'에 의해 햇빛의 반짝이는 인상은 더욱 강조됩니다.  부분적인 투명함은 화면에 분위기를 보다 분명하게 더해주고요. 불규칙적인 위치와 반투명한 성향 때문에 태양의 흑점은 마치 카메라로 태양을 찍을 때 생기는 것과 같은 희뿌연 효과, 즉 렌즈에 반사된 빛이 필름에 나타나는 현상을 만들어냅니다.

 

 

 

 

 

New York Skyscraper paintings of Georgia O'keefe, Radiator Building-Night, New York, 1927, The AlfredStieglitz Collection,Crystal Bridges Museum of American Art, Bentonville, Arkansas/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b7EMVU2eRnM

 

 

New York, Night, 1928-1929/ The Georgia O'Keeffe Museum

 

 

 

 

 

오키프는 사진에서 태양의 중심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커다란 광배효과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키프에게 낮과 밤은 각각 나름대로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키프가 느끼는 도시 분위기의 주관적 성격은 인공 불빛에 감싸인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밤을 그린 작품에서 정점에 달합니다.  밝게 빛나는 창문, 높이 솟은 뾰족한 탑을 비추는 조명, 깜빡 거리는 자동차 전조등, 전광판의 광고, 교통신호와 네온사인등으로 맨하튼은 마치 빛의 도시 같습니다. 

 

 

 

 

오키프의 회화는 빛의 반사와 같은 사진적 시점과 독창적인 회화적 요소를 이용하여 낭만적인 감정으로 거대 도시 뉴욕이라는 도시의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와 매력을 시각화했습니다. 

 

 

 

한편 스티글리츠와 함께 한 뉴욕에서의 삶도 양면서이 있었습니다. 스티글리츠를 통해 만나게 된 뉴욕의 예술가 그룹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배웠지만, 동시에 오키프는 이 도시에서 극심한 고독감과 우울감을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1927년 조지아 오키프는 남편 스티글리츠와 도로시 노먼(Dorothy Norman: American Photographer,Writer, 1905-1997)과의  불륜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두 차례의 흉부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곁을 떠나 그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며 예술가로서의 자기 개발과 주장에 더욱 몰두하게 됩니다. 몇 년 후 그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파괴를 향한 그의 힘은 창조력만큼이나 강렬했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법,
나는 그 둘을 모두 경험했고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야 했을 때
비로소
그를 넘어 설 수 있었다. 

 

 

 

 

 

 

 

Pink Dish and Green Leaves(분홍 그릇과 녹색잎), 1929/ The Georgia O'Keeffe Museum

 

 

근경과 원경을 병치하는 것은 이미 1928년 의 <분홍 그릇과 녹색 잎>같은 작품에 등장했던 '사진적인'방식이다. 이러한 인상적인 그림에서 오키프는 사진의 시각적 기법에 근거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Calla Lilies with Red Anemine,1928, Private Collection/Amazon.com

 

 

 

 

1987년 오키프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회가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에서 열렸습니다. 타계하기 전 오키프의 유화 한 점이 187만 달러라는 최고의 가격에 팔렸고요. 2001년 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붉은 아네모네와 칼라 Calla Lilies with Red Anemone> 가 620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이 가격은 경매 사상 어떤 여성 화가의 작품도 받을 수 없었던 기록적인  가격이었습니다. ( 이 기록은 2014년 깨집니다.)

 

 

 

Black Cross with Stars and Blue, Private Collection, 1929/Arthur.io

 

 

 

 

1929년부터 오키프와 스티글리츠는 서서히 각자의 길을 향해 멀어지게 됩니다. 1929년부터 1949년까지 오키프는 매년 뉴욕을 떠나 뉴멕시코를 비롯한 미국 서부를 여행하며 6개월씩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랑하지만 자신을 외롭게 하는 사람들과, 화려하지만 억압적인 시선으로 가득한 도시를 떠나 광활한 자연 아래 홀로 서 있을 때의 고독과 환희가 동시에 느껴지는 그림들을 많이 그리게 됩니다. 부드럽고 환상적인 꽃을 그려내는 오키프도 좋지만, 거친 바위와 동물의 뼈를 강렬하게 그린 작품에선 경외감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The Lawrence Tree, 1929/en.wikipedia.org

 

 

 

 

 

 

 

 

https://www.youtube.com/watch?v=wQq2xOs2BYU&t=2s

 

 

 

 

 

Georgia O'Keeffe, Ca, 1930/Alfred Stiglitz

 

 

 

 

 

 

뉴멕시코주/ 위키백과

 

 

 

https://www.youtube.com/watch?v=ZglmaMXTVSI

 

 

 

 

 

1927년 여름, 오키프는 부유한 문필가이자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즐겼던 예술 옹호자 메이블 다지 루한 (Mabel Dodge Luhan: 1879-1962)의 초대를 받아 뉴멕시코 타오스(Taos)에 머무르며 새로운 풍경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 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곳은 드라마틱하고 높이 솟은 사막의 풍경과 강렬한 햇빛에 이끌려 19세기 중반부터 문필가와 화가 들이 이주한 곳이기도 합니다. 고독과 조용함을 오랫동안 소망해왔던 그녀는 예술가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 1931년 타오스 서부의 리오그란데 알칼데라는 작은 마을에 오두막 한 채를 빌려 해마다 여름 동안 이곳에서 지내곤 했습니다. 그녀는 건너편에 위치한 블랙 메사로 이루어진 붉은 모래언덕의 형태에 매료되어 몇 년 동안 작품을 제작하게 됩니다.

 

 

Black Mesa Landscape,New Mexico,1930/Georgia O'keeffe Museum Custom Prints

 

 

 

 

 

Rust Red Hills, 1930, Sloan Fund Purchase Brauer Musuem of Art/Valpariaso University

 

 

 

 

Georgia O'Keeffe,1931,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by Alfred Stieglitz: American Photographer, 1864-1946)

 

 

 

 

 

오키프는 사막에서 발견한 소와 야생동물의 뼈를 모았습니다. 이러한 동물의 뼈는 사막 풍경의 자연적인 구성요소로서 그녀에게 조개, 돌, 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1930년대 작품에서는 고립된 동물의 뼈가 뉴멕시코의 풍경적 요소와 결합되어 장대한 사막 풍경으로 구현되는 등 주제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키프의 주요 모티프 가운데 하나로서 등장하는 동물의 뼈에 대한 평론가들은 죽음과 부활을 연관지었습니다. 그러나 오키프의 눈에는 햇볓에 바짝 마른 뼈가 강렬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 어느 것과도 아름다움에 비견되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뉴멕시코의 스페인계 사람들은 장례식에 동물의 뼈와 조화를 사용한다고 합니다.오키프는 동물의 뼈와 조화를 화면에 병치하여 초현실적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주제에 대한 장식적인 관심을 표현할 때 예상 밖의 물체를 병치함으로써 놀라운 의외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Cow's Skull:Red,White, and Blue,1931/wikipedia

 

 

 

 

 

 

Cow's Skull with Calico Roses, 1932/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Ram's Head with Hollyhock-Hills, New Mexico ,1935/Georgia O'Keeffe

 

 

 

 

Summer Days(여름날), 1936,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York, Print Shop

 

 

 

 

 

 

 

오키프의 작품 <여름날 Summer Days>입니다.  화면의 위쪽으로 향해 있는 사슴의 머리뼈는 사막의 산맥 위에 높이 떠 있습니다. 머리뼈는 정면에 그려져서 관람자의 시선을 정면으로 끌어들입니다.  야생화는 사막의 반짝이는 빛무리로부터 올라오고 있습니다. 비록 전경의 하늘은 화창한 여름날 하늘이지만 산 너머로 폭풍이 몰려듭니다.  이는 뉴멕시코(New Mexico)의 특징을 이루는 , 서로 다른 날씨대가 공존하는 모습을 그리려 한 것입니다.  각 구성요소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데, 각기 자신만의 시점을 가지고 있어서 관람자의 눈에는 분리된  실체로 인식됩니다. 각각의 세부가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구성요소는 새로운 그림의 출발점 역할을 합니다. 

 

 

 

오키프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대상의 객관적인 아름다움 자체에 관심을 둡니다. 각각의 대상에 대한 명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여름날 Summer Days>은 풍경화보다는 정물화에 가깝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한편 전쟁 등 여러 사정으로 '291 갤러리' 를 닫고, 인티메이트 갤러리(Intimate Gallery)를 새로 운영하던 남편 스티글리츠도 1929년 무렵 새로운 장소에 '아메리칸 플레이스(An american Place)'라는 이름으로 갤러리를 다시 열게 됩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갤러리는 '미국'의 현대미술, 사진작가들을 집중적으로 알리고 홍보하는 곳이었습니다.  앞선 두 갤러리에서 유럽의 미술을 소개하여 모국의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던 것처럼 이번에 '아메리칸 플레이스'를 세우고 죽을때까지 그곳에서 헌신합니다. '미국의 예술가'를 위한 토양을 만들겠다는 평생의 신념을 가지고 말입니다. 

 

 

 

 

Ansel Adams, Alfred Stieglitz, An American Place, New York/ SFMOMA

 

 

 

 

 

From the Faraway , Nearby(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1937/ Georgia O'Keeffe.net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From the Faraway, Nearby>에 대한 작품의 영감은 1929년 알게 된 사진가 앤설 애덤스(Ansel Adams: 1902-1984)와 함께 1937년 콜로라도를 여행할 때 얻은 것입니다.  이 작품은 애덤스가 사막을 표현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그는 스티글리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광경을 사진 같은 언어로 묘사한 바 있습니다.

 

"하늘과 대지는 너무나 광활하며, 세부는 너무나 정교하고 섬세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 있든 거대함과 미세함 사이의 세계에서 고립되고 맙니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우리들의 위, 아래로 사라지며 시계는 오래전에 멈추었습니다. "

 

오키프는 광대함과 미세한 사이를 통해 뉴멕시코(New Mexico) 사막의 낭만적인 본질을 놀라운 방식으로 포착했습니다. 이는 확대시점을 망원 시점과 결합한 것으로서 자신이 살고 있던 '광활함과 경이로움의 세계'를 표현하는 적절한 형식이었습니다. 

 

 

 

 

 

 

콜로라도주/위키백과

 

 

 

 

https://www.youtube.com/watch?v=lz5O153kr4c

 

 

 

 

 

 

 

 

 

Jimson Weed,1936/ Georgia O'Keeffe

 

 

 

 

Hollyhock Pink with Pedernal, 1937/The Georgia O'keeffe Museum

 

 

From the Courtyard of the O'keeffe house at Ghost Ranch, view of the Pedernal(today)/ cancerroadtrip.com

 

 

 

 

 

 

 

White Shell with Red, 1938/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1916년부터 텍사스와 뉴 멕시코를 왕래하며 그림의 모티프를 얻곤 했었던 그녀는 62세가 되던 1949년, 스티글리츠가 작고한 시점으로부터 3년이 지난해에 뉴 멕시코 사막위의 민둥산으로 완전히 은둔하게 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햇살이 춤추는 땅'이라고 부르는 해발 2135m 산타페의 고원지대의 은둔하며 그곳을 영혼의 안식처로 삼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치 사막의 수도자가 된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남편과 사별 후 그린 뉴 멕시코의 메마른 고산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한 참을 앉아 있게 됩니다. 

 

 

 

 

Hawaii series, Hibiscus with Plumeria, 1939, Smithsonia American Art Museum/wikipedia

 

 

Pedernal, 1941/ Google Arts& Culture

 

 

 

 

 

https://www.youtube.com/watch?v=GGCgYLem3Vc

 

 

 

 

모던 패셔니스타 '조지아 오키프'/ NYCultureBeat

 

 

 

1940년대의 그림은 화면 전체를 가득 매운 단일 형태가 특징적입니다. 양식적인 변화가 일어난 거지요. 이는 주변 풍경에 대한 태도가 새로워졌음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단순함과 명료함을 강조하는 이러한 성향은 햇빛에 바랜 사막의 동물의 뼈를 그린 그림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Pelvis II, 1944,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 New York /Flickr

 

 

1944년 작 <골반뼈 II>에서는 뼈의 구멍과 갈라진 틈새를 통해 파란 하늘이 보입니다. 오키프는 뉴멕시코 하늘의 강렬한 파란색을 사랑했습니다. 파란색은 그 후 그녀의 작품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1943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동물의 골반 뼈는 그 이후 더욱 확대되어 극도의 접사시점으로 그린 뼈는 그림 중앙에 있는 타원형 구멍이 추상화를 연상케 합니다. 

 

 

 

The Horn of a Goat with Red, 1945/ Smithsonian Institution

 

 

 

 

Pelvis Series,Red with Yellow, 1945/ The Georgia O'Keeffe Museum

 

 

 

 

오키프는 1940년 고스트 랜치(Ghost Ranch)에 약간의 토지와 집 한 채를 구입합니다. 오키프는 오늘날 '오키프의 세계'로 알려져 있는 에스파뇰라부터 아비키우까지를 캔버스에 담아냈습니다. 검정색 포드 자동차를 몰고 뉴멕시코의 먼  지역까지 탐방 한 거죠. 그 차는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넓었다고 해요. 갑작스러운 소나기뿐 아니라 여름 태양의 열기로부터도 보호해 주었고요.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들은 1944년의 연작 '검은 대지(Black Place)'입니다. 

 

 

 

 

Black Hills with Cedar,1941/Georgia O'Keefe

 

 

 

 

그림의 장소는 고스트 랜치에서 150마일 떨어진 회색 언덕이 흰 모래로 덮인 곳입니다. 꽃 그림과 마찬가지로 언덕이 캔버스 전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전경의 확대, 주변으로 부터의 분리, 명확한 지평선의 제거를 통해 자연에서 발췌된 모습은 관람자로 하여금 보다 큰 전체를 완성하게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오키프는 뉴멕시코 풍경의 광대함과 웅장함을 한 화면 안에 포착하는 데 성공합니다. 둥근 언덕의 표면은 촘촘하고 균일한 붓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키프는 밝은 사막의 빛으로 풍경의 미묘한 차이점을 부각시킵니다. 특히 언덕의 형태에 초점을 맞추어 각각의 윤과과 표면을 드러냈습니다. 금방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위치에 말입니다. 그녀는 지면의 도랑과 움푹 파인 곳을 인체의 윤곽과 접힘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Black Place III,1944/Google Arts& Culture

 

 

 

 

Dark Tree Trunks,1946, Brooklyn Museum, New York

 

 

 

1946년 5월,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오키프의 회고전이 열렸습니다. 근대미술관에서 여성작가의 회고전이 개최된 것은 그그때가 처음이었죠. 그해 7월, 82세의 남편 스티글리츠는 심각한 심장마비 증세를 보였습니다. 뉴멕시코에서 여름을 보내던 오키프는 즉시 돌아와 그의 임종까지 (7월13일)며칠을 함께 했습니다.

 

 

 

Georgia O'Keefe & Alfred Stiglitz/ 아트 인사이트

 

 

 

그후 오키프는 거의 3년 동안을 뉴욕에서 보내면서 스티글리츠의 부동산을 처분하고, 그가 남긴 작품 컬렉션을 분류하여 미국 협회와 여러 미술관에 보내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당연히 그림은 그리지 못했고, 가끔 뉴멕시코에 들러 1945년에 매입한 낡은 벽돌집을 수리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집은 고스트 랜치에서 수 마일 떨어진 동네인 아비키우에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XSHq_QywTw

 

 

in the PatioVIII,1950/ Google Arts & Culture

 

 

 

그림을 통해 보게 된 사막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아도비로 지은 그녀의 거주지는 일체의 군더더기와 장식이 배제된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으로 구성된 미니멀리즘의 건축입니다.  그녀의 침실과 작업실을 들여다보면  고요와 적막 속에서 영혼에 쌓인 먼지를 씻어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뉴 멕시코의 먼지 풀풀 날리는 사막 한가운데로 삶의 거처를 옮겨온 그녀는 돌산이 빚어내는 색채의 조합을 사랑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사막 한가운데 자신의 정원을 만들어 내고 가꾸었습니다.  사막의 한 가운데 물길을 트고 자신의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일은 구도의 길에 다름이 아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주어 세상 한가운데 우뚝 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사랑하는 남편이 세상을 하직하고 났을 때 ,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선택은 사막으로 은둔하여 지칠 때가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고 가꾸며 아침저녁으로 그곳을 거니는 일이었던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조지아 오키프의 도발적인 꽃 그림들보다 그녀가 그린 텍사스, 그리고 옆 동네 뉴 멕시코의 미니멀리즘적인 풍경이 마음 깊이 더  와 닿습니다. 

 

 

 

 

오키프는 특히 신선한 야채를 키울 수 있는 정원에 매료되었습니다. 수리를 모두 마친 1949년 뉴 멕시코로 영구히 이주하게 됩니다. 여름은 고스트 랜치에서 , 겨울은 아비키우에서 보내는 방식으로 말이죠. 오키프는 고스트 랜치의 집보다 더욱 신경을 써서 아비키우 집의 내부를 디자인 했습니다. 필요에 따라 단순하면서도 널찍한 공간으로 장식된 각 방은 오키프의 미적 취향을 보여줍니다. 가장 중요한 공간인 작업실에는 커다란 창문을 설치해서 주변 절경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수많은 고전음반을 수집하기도 했고, 알레산더 콜더, 아서 도브, 우타가와 히로시게 같은 작가의 작품을 자신의 그림들과 함께 간소하게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Georgia O'Keeffe's Abiquiu Garden/The Georgia O'Keeffe Museum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지은 집의 평범함과 명쾌함은 오키프가 매우 소중하게여긴 기능적 미학과 단순성을 보여줍니다. 벽돌집은 미국 원주민 문화의 상징이자 뉴멕시코 풍경의 특징을 이룬 요소로서 그림에 도입했습니다. 오키프는 안뜰 벽에 나 어두운 문에 매료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1960년대까지 작품의 주요 모티프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기도 하지요. 다양한 시점, 계절의 변화에 따른 모습을 다루면서도 영속적인 형태로 주제를 훌륭히 포착해 나갑니다. 

 

 

 

Georgia O'Keeffe's Abuquiu Home/Pam Penick

 

 

Ladder to the Moon(달을 향한 사다리), 1958/Georgia O'Keeffe .net

 

 

 

그림 속의 사다리는 날개라도 달린 듯 검은 능선을 벗어나 달을 향해 올라가는 중입니다. 땅에 놓인 평범한 사다리가 아니라 우주공간을 향해 날아가는 로켓 사다리입니다. 분리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하늘사다리가 되었네요. 조지아 오키프가 71세가 되는 1958년, 미국의 뉴 멕시코 주 아비키우(Abiquiu)에 있는 자신의 낡은 벽돌집에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다리는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집의 마당 건물 외벽에 기대 놓은 실제 사디리이고요. 아마도 오키프는 하늘사다리를 타고 우주와 소통하고 싶었나 봅니다.  예로부터 사다리는 정신적, 도덕적인 차원에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자기 완성일 수도 깨달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요. 

 

 

 

 

그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패더널 산을  배경으로 하나의 사다리가 밤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마치 달빛의 주술에 사로 잡힌 것 같은 환상적인 소재의 배치가 화면에 초현실적인 모습을 불어 넣고 있습니다. 실제의 모습 또한 사다리는 마당 외벽에 기대어져 패더널 산을 배경으로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뉴멕시코 인디언의 삶에서 사다리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지붕에서 일출과 오후의 석양을 바라보며 자연종교의 핵심을 이루는 우주적 힘과 직접적으로 소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다리는 이러한 지붕과 땅을 연결하는 존재로 여겨지고요. 오키프는 원주민들의 환경에서 사다리를 분리해  땅 위로 들어올림으로써 자연과 우주의 연결을 상징할 뿐 아니라 뉴 멕시코 초기 거주민들의 우주적 의식과 맏닿아 있는 보편적 상징을 화면에 부여하고 있습니다. 

 

 

 

 

Pedernal-from the Ranch #1, 1956/ The Georgia O'Keeffe Museum

 

 

 

 

오키프는 1951년부터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합니다. 1953년 66세 나이에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하며, 프랑스와 스페인을 방문하게 됩니다. 1956년 페루와 안데스에서 보낸 3개우러 동안 잉카 문명지를 방문했습니다. 72세 노 예술가는 1959년에는 3개월에 걸쳐 인도, 동남아시아, 파키스탄, 중동과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1년 후에는 일본, 대만, 홍콩, 캄보디아, 필리핀 그리고 태평양 군도를 여행했습니다.

 

 

 

 

오랫동안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며 내려단 본 풍경은 오키프에게 새로운 회화 주제를 제공했습니다. 메마른 사막지역을 흐르는 강이 그러한 예에 해당합니다. 이 새로운 연작들은 빠른 필치의 스케치와 단색조의 목탄 드로잉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빨강과 분홍, 파랑과 녹색, 파랑, 검정, 회색 등 색의 다양한 조합을 선보이며 유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연작에서도 오키프는 이전 작품들처럼 현실과 유리된 환상적 표현을 전개했습니다. 

 

 

 

 

From the River-Pale, 1959, Georgia O'keeffe Museum, Santa Fe, New Mexico/ Top of Art

 

 

Mountains and Lake, 1961/Georgia O'Keffe Museum Custom Prints

 

 

 

Above the Clouds I, 1962-1963/ Google Arts & Culture

 

 

 

https://www.youtube.com/watch?v=NBT3maaWy-Q

 

 

 

 

 

 

 

오키프의 1960년대 작품들은 매사추세츠의 우스터 미술관과 텍사스 포트워스의 에이먼 카터 미술관에서 열린 두 번의 회고전에 전시되었습니다. 특히 1970년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은 대중적 인지도의 측면에서 큰 획을 그었습니다. 전시회의 대성공과 전국적인 인지도를 통해 오키프는 미국 미술계의 우상으로 화고히 자리 잡게 됩니다. 비평가들 또한 그녀를 미국 현대미술, 즉 추상표현주의와 색면회화의 중요한 선구자로 평가합니다. 이제 오키프는 새로운 페미니스트 세대의 우상이자 현대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의 화신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연이은 수상으로 그녀의 업적에대한 대중적인 인지도도 화고해졌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Nf73Q9GI7bc

 

 

 

1977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시민 훈장인 자유메달을 받게 됩니다. 같은 해 11월 그녀를 소재로 한 페리 밀러 아다토의 다큐멘터리 영화 <예술가의 초상>이 오키프의 90번째 생일을 맞아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개봉합니다. 영화에서 오키프는 주위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예술가이자 사막 풍경과 일체다 된 모습으로 명료하게 그려졌습니다. 그리고 1985년 4월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예술 훈장을 받았습니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들이 있는 검은 바위 Black Rock With Blue Sky And White Clouds, 1972/ The Art Instituet of Chicago, Chicago

 

 

 

 

Dan Budnik(1933-2020)-Georgia O'Keeffe in the Gost Ranch Pottings/Medicine Man Gallery

 

 

 

오키프가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기 직전에 그린 작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1971년부터 오키프의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세계가 점차 희미해져 갔지만, 단순한 형태와 그림자를 알아볼 수 는 있었죠. 이전보다 다른 사람의 도움에 더 의지하게 된 오키프에게 1973년 26살의 젊은 조각가 존 부르스(후안)Bruce (Juan )Hamilton,1946- ) 가 그녀의 삶 안으로 들어옵니다. 

 

 

 

오키프는 그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죠. 해밀턴은 오키프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도록 격려했습니다. 오키프는 새로운 재료인 점토로 작업하기 시작했고요. 오키프는 해밀턴의 배려에 힘입어. 1975년 수채화와 유화를 그릴 때 약한 시력으로도 색채와 형태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오키프에게 조언을 구했던 많은 젊은 미술가들 가운데서 해밀턴만이 그녀의 폭넓은 경험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Georgia O'Keeffe's Minimalist Desert Home/Pinterest

 

 

 

 

그후 몇  년간 해밀턴은 유일한 조교로서 전시회 준비와 자서전 출판을 도왔을 뿐 아니라 여러 번의 여행에도 동행했습니다. 34살의 해밀턴은 오키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몰락에 낙담하여 1980년 안나 마리 프로호로프 어스카인이라는 여인과 결혼합니다. 그러나 오키프는 해밀턴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키프로서는 해밀턴의 인생에 여자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1986년 3월 6일 사망하기 전까지 자신과 해밀턴이 결혼할 것이라 믿고 있는 오키프는 1979년 8월 8일 작성한 유언장에 해밀턴이 ' 솔 이솜브라(현재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를 포함해서 그녀의 부동산과 미술관에 기부하기로 약속한 대부분의 그림을 유산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새로운 조항이 첨부되었습니다.

 

 

 

 

 

해밀턴은 오키프 소유의 엄청난 몫을 유산으로 상속받았습니다. 오키프 사망 후 유족 대표인 의붓 딸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오키프의 유산 중 부동산과 재산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옴으로써 희대의 스캔들 사건이 되었습니다. 86살에 오키프가 만난 26살의 청년 존 부르스 해밀턴은 그녀가 숨지기 전까지 사실상 10년이 넘도록 오키프의 남자였다는 궁극적인 판결 때문입니다. 1987년 7월 뉴멕시코 법정은 오키프의 유언장을 근거로 해밀턴이 정식 상속자 중 한 사람이라 판결과 함께 그에게 오키프의 유산 중 7,800만 달러(850억원)을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Georgia O'Keefee, Abuquiu, New Mexico, 1984 She Weared Kimono and Posed in front of scaled-up version of <Abstraction>sculpture. by Bruce Webber: American Photographer,1946-

 

 

 

 

 

오키프는  장례식도 치르지 말고 추모식도 거행하지 말라고 생전에 당부했습니다. 해밀턴은 그녀의 시신을 화장한 유골을 담은 작은 단지를 들고 차를 몰아 아비키우의 북부 지역 메사의 기슭에 닿았습니다. 그는 페더널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유골을 뿌렸습니다. 오키프의 유골은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고스트 랜치를 향해 한줌의 재가 되어 흩어졌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N8bCaPBooY

 

 

 

 

1997년 7월 18일 뉴 멕시코 산타페의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이 개관하던 날, 섭씨 40도의 무더위 속에서 2,000여 명의 관객들이 세 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첫 주 동안에 1만 5,000명 이상의 관람객이 다녀가고요. 그녀가 남긴 초월적인 시각방식의 작품들은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소개하며 극사실주의와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 미국의 현대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Georgia O'Keeffe House, Ghost Ranch, The Courtyard view in Georgia O'Keeffe's day/ cancerroadtrip.com

 

 

 

Untitled(Abstraction Red Wave with Circle), 1979, Watercolor on Paper/ Geprgia O'Keeffe Museum Custom Prints, 시력을 잃은 아흔한 살에 오키프가 시도한 추상 수채화

 

 

 

 

 

 

https://www.youtube.com/watch?v=I7tclGaHf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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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타워즈>

애니메이션 <네모바지 스펀지밥>

유명 TV드라마<위기의 주부들>

각종 문화예술 분야에서 패러디되는 건 기본이고 '미국의 모나리자'라는 호칭을 얻는 작품이 있습니다. 대공황 때  미국인을 '위로'한 작품이기도 하지요. "가장 미국적인 그림"이란 찬사를 받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힌트가 되었겠죠. 바로 그랜우드의 <아메리칸 고딕 American Gothic>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시카고 미술관의 소장품 중 하나로 그랜트 우드(Grant Wood, 1891-1942)가 1930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배경은  아이오와(Iowa) 주 엘든에 있는 고딕 양식으로 지은 집입니다. 앞에 한 농부와 함께 부인 같기도 하고 딸 같기도 한 여인이 서 있습니다. 그 집의 건축 양식을 따서 그림의 제목이 지어졌습니다.  고딕(Gothic)이라고 하면 , 12세기 중반부터 15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서 주로 발전한 건축 양식을 떠올리게 됩니다. 높고 뾰족한 첨탑,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는 창이 특징이죠. 얼마 전 화재로 일부 소실 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쾰른 대성당, 샤르트르 대성당 같은 곳이 대표적입니다. 

 

 

 

 

American Gothic, 1930,Art Institute of Chicago, Chicago/wikipedia

 

 

아이오와주(IOWA)/123RF

 

 

 

이쯤 되면 아이오와(IOWA) 주는 어떤 곳일지 궁금해집니다. 아이오와(IOWA) 주는 미국 중서부 지역에 속합니다. 1846년 12월 28일에 연방에 가입한 29번째 주입니다. 주도는 디모인 (Des Moines)입니다. 아이오와주는 '매의 눈'이라는 별명과 함께 '황새의 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지역은 농업 중심지로, 미국에서 가장 많은 옥수수와 계란을 생산합니다. 축산업도 발달해 있으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교육, 경제, 건강보험, 삶의 질 등 다양한 지표에서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New York Yankees, Chicago White Sox to play game on 'Field do Dreams' field in IOWA next Season/6ABC

 

https://www.youtube.com/watch?v=mXBMqbWcqzg

 

 

 

 

 

The Bridges of Madison County, Robert James Waller(1939-2017)/나무위키

 

 

 

 

In a universe of ambiguity , this kind of certainty comes only once,
and never again, no matter how many lifetimes you live.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 오는 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을 거요.

 

 

 

 

클린트 이스트우드 멜리 스티립 주연, 1995/나무위키

 

 

 

https://www.youtube.com/watch?v=sZp8Xu0lAc8

 

 

 

 

 

 

아이오와(IOWA)주는 99개의 카운티로 나뉘며, 인구는 약 292만 명입니다. 주민들은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며, 범죄율이 낮아 안전한 생활환경을 제공합니다. 자연경관도 아름다워 관광명소가 많고, '꿈의 구장'과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같은 유명한 장소가 있습니다. 

 

 

 

 

개신교의 영향력이 큰 곳입니다.  전통 보수적인 가치를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곳입니다. 우드는 아이오와주 애나모사 출신입니다. 고향에서만 활동하던 시골뜨기 화가였지요. 국제무대에 나온 경험도, 대도시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한 경력도 없는 지역 작가의 그림이 국가적 자부심을 상징하는 최고 지위에 오르는 이변이 벌어집니다. 

 

 

 

  우드는 1920년대 유럽 여행을 하는 동안 그의 그림은 강한 인상주의적 영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뮌헨에서 얀 반 에이크와 한스 멤링의 작품을 보고 난 후 다시 한번 양식의 변화를 보이고요. 중세 말기의 고딕 화풍에 담긴 본능적인 순수함은 그에게 계시처럼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적인 배경에다 그 원리를 적용시키기로 결심합니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 유럽 근대 미술의 추상화 경향에 반대하여, 미국에서 1930년대 나타난 지역주의 운동의 선두주자가 되었습니다. 고향인 아이오와 주의 시더래피즈에 작업실을 연 우드는 중서부에서는 최초로 미술가 마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1930년대 우드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단순화되고 감각적으로 완성된 풍경화였습니다. 그것은 기계화 시대, 황진 시대, 대공황 사태의 궁핍한 현실로부터 거리가 있는 농업국가로서의 미국이라는 이상적 풍경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 그는 자신이 동네화가라는 약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강점인 지역성을 더 부각시키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우드는 1920년데 후반~1930년대 초반 미국 미술의 독자성을 추구하던 새로운 미술운동인 '지방주의 미술'의 이론과 실천을 주도한 대표 화가로 성장합니다.  지방주의 미술가들은 보수성이 강한 중서부 지방에서 주로 작업하던 지역 작가들로 구성됐습니다. 지역문화와 지역적 특성을 강화해 국가적 일체감과 자부심을 드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fRrDeHRcJ0

 

 

 

미국 시대상황은 1929년에 시작된 세계적 경제 위기로, 미국을 중심으로 발생하여 1930년대까지 '대공황'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경제 위기는 주식 시장의 붕괴, 대규모 실업, 은행의 파산, 그리고 전반적인 경제 침체를 초래했지요. 

 

많은 나라에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일부 국가는 전체주의로 기울기도 했지요. 반면, 소련은 계획경제를 통해 경제적 호황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미국 역시 경제학자들의 적극적인 정부의 개입과 공공사업을 통해 경기 부양을 권장했고, 이는 뉴딜 정책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The Dibble House, Eldon, Iowa/wikipedia

 

 

 

 

 

1930년 8월, 존 샤프라는 젊은 현지 화가는 우드를 데리고 아이오와 주 엘든 주변을 드라이브했습니다. 그 때 다음 그림에 대한 영감을 찾고 있던 우드는 고딕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작은 흰색의 집인 '디블 하우스( The Dibble House)'를 발견하게 됩니다. 새하얀 칠을 한 이 목조 가옥은 지붕의 경사가 가파른 데다 뾰족한 아치형 창문이 달린 '고딕 양식'으로 지여졌지요.

 

 

 

원래 고딕 양식은 유럽에서 성당을 지을 때 많이 쓰였습니다 . 날카롭고 직선적인 건축 양식이라 엄숙한 종교 시설에 잘 어울렸거든요. 하지만 미국 중부에서는 신앙심을 표현하고 멋도 낼 겸 자택을 지을 때 고딕 양식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일명 유럽 고딕 건축 양식을 모방한 미국식 짝퉁 주택이었던 거죠.

 

 

 

첨탑 교회로 상징되는 유럽의 고딕 건축양식을 미국에서 주택건축에 활용한 것이 목수 고딕(Carpenter Gothic) 양식입니다.  우드는 교회 건축양식이 미국 농가의 조잡한 집창문에 엉성하게 응용된 것에 흥미를 느꼈다고 합니다. 저렴하게 집을 지을 수 있는 데다 유럽 문화를 동경하는 지역민의 허세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어 대공황 시대를 살아가는 미국 노동계급에 인기가 많았습니다. 

 

 

 

 

 

 

예술가는 자신이 잘 아는 땅과 사람을 그려야 한다. 
자신이 태어나고 활동하는 지역에 머물며 작업할 때만 개성적인 양식을 확립할 수 있다.
-Grant Wood-

 

 

 

 

우드는 가지고  있던 봉투에 그 집을 쓱슥 그리기 시작합니다. 집주인의 허락을 받은 우드는 그 집에 어울릴 것 같은  사람들을 모델로 하여 그 집을 그리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화가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가옥을 보며 전형적인 미국 중부 서민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고딕 양식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 바로 수직성이 강조된 다는 점입니다. 이 그림 역시 수직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잘 보시면, 농부가 들고 있는 길쭉한 쇠스랑과 사람들 얼굴이 모두 길쭉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우드는 고딕 양식에 영감을 받아, 미국에 맞는 스타일로 재해석한 겁니다. 

 

 

 

우드는 미국의 정신이 지역성에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지역주의가 미술의 미래라는 우드의 예술철학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고요.  등장인물과 소재가 지역성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Nan Wood Graham(the artist's sister & Dr. Byron Mckeeby (the woods' Family dentist)in the Gallery at the Cedar Rapids Public Library Setember 1942/wikipedia

 

 

 

 


실제 그림 속 모델들이 궁금하실 겁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얼핏 보면 부부같죠?  농부인 아버지와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딸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그림의 실제 모델들은 그의 여동생인 낸 우드 그레이엄(30살)과  그들 가족의 치과 의사인 바이런 맥키비(62) 박사라고 합니다. 그는 미국 중부의 보수성을 드러내기 위해 동생에게는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일 무렵 유행한 고전적인 앞치마를 입히고 고리타분해 보이는 브로치를 매달게 했습니다. 맥키비 박사에게는 고리타분해 보이는 멜빵바지를 입히고, 시골 느낌이 잘 나타나도록 쇠갈퀴를 든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남자의 안경은 세상을 떠난 우드의 아버지가 쓰던 것이고요. 2층 창문을 가린 커튼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지역민의 정서를 상징합니다. 

 

 

 

 

그림 속  현관문 앞에 있는 식물들은 산세비에리아와 베고니아입니다. 우드가 1929년에 자신의 어머니를 그린 <묘목을 든 여인>에도 등장합니다.

 

 

 

 

Woman with Plats,1929/ Shannon's Fine Art Auctioneers

 

 

 

 

 

우드가 이렇게 농부를 그리게 된 것은 , 그가 사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으로 가득한 미국 중부지역 아이오아(Iowa) 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드는 그러한 영향때문인지 미 중서부 지방의 당시 상황을 잘 반영하는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중서부 '지방주의 미술(regionalism)'을 대표하는 화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림 속 엘든의 목조주택은 지역 관광명소로 변신해 백악관을 제외하고 미국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집이 됐습니다. 

 

 

 

 

 

 

지방주의 미술(regionalism)은  유럽 영향하에 탄생한 미동부 연안 모더니즘의 복잡한 성격에 맞서, 미 중부 지방의 견실한 농촌가치를 옹호하고자 한 운동이라고 합니다. 우드의 유명작들은 인위적인 위장과 몰입을 부추기는 복잡함, 해독불가능한 양가성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우드 작품에서는 당시 독일 신즉물주의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유럽에 네 차례 가서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우드에게 가장 명확한 영감을 준 화가는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반 에이크 같은 플랑드르 화가들의 작품입니다.

 

 

 

 

 

그랜트 우드는 이 그림을 캔버스에 그리지 않고, 건축재료인 섬유판 비버보드 (Beaver Board)를 썼습니다. 그리고 시카고아트인스티튜드콘테스트에 출품했고요. 심사위원 한 명이 '코믹한 발렌타인 카드'라고 평가절하했지만, 이 작품에 매료된 뮤지엄의 파워풀한 후원자가 심사위원단을 설득해서 동메달과 상금 300달러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원자들은 뮤지엄 측에 회화를 구입하도록 설득해서 '아메리칸 고딕'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Art Institute of Chicago)로 들어가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WttqyBcXrc

 

 

 

 

이후 '아메리칸 고딕(American Gothic)'은 시카고, 뉴욕, 보스턴, 캔사스시티, 인디애나폴리스까지 신문에 나면서 혹평과 찬사로 갈리게 됩니다. 그의 고향인 아이오아(IOWA)의 주민들은 "초췌하고, 엄숙하며, 성경 신봉하는 금욕주의자들"의 이미지에 격분했습니다. 아이오와(IOWA) 주의 한 농부 아내는 우드에게 강타를 날리겠다고 했다네요. 어떤 이는 우드의 귀를 물어뜯겠다고 협박하기도 하고요.  이에 대해 그랜트 우드(Grant Wood)는 "난 충성스러운 아이오와인이며, 아이오와인들을 풍자한 것이 감사를 표한 것이다. 아이오(IOWA)와 에 감사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라고 항변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7wM5VQQnys

 

 

 

 

한편, 당대의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과 크리스토퍼 몰리는 미국사회의 억압, 편협한 시골 생활에 대한 풍자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거드루드 스타인, 1935, 칼 반 베흐텐이 촬영한 사진/wikipedia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은 187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시인입니다. 20세기 초 파리에서 활동하며 현대 예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는 <길 잃은 세대>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인물로, 이 표현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허무와 절망을 상징하는 문학적 세대를 일컫습니다. 

스타인은 파리에서 유명한 살롱을 운영하며 피카소, 마티스, 헤밍 웨이 등 당대의 예술가들과 작가들을 후원하고 교류했습니다. 그녀의 살롱은 예술가들이 모여 창작과 토론을 나누는 중심지였으며, 그녀는 이들을 지원하는 '예술가들의 대모'로 불렸습니다. 

스타인의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3인의 여성>(1908), <미국인의 형성>(1925), 그리고 자서전 <앨리스 B. 토클라스의 자서전>(1933) 등이 있으며, 그녀의 독특한 문체는 '자동 기술'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메리칸 고딕> 작품은 보는 이들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소지가 많아 보입니다. 소박한 농가의 초상, 구식 애도의 초상화 ,금욕주의의 초상화, 유럽 문화의 미국 이식, 대공황을 극복사, 그리고 미국인의 견고한 개척정신 등으로 말입니다. 

 

 

 

'아메리칸 고딕'은 그랜트 우드가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미국인들에겐 자신들의 자화상처럼 보입니다. 중서부의 시골 노인들에겐 부인하고 싶은 초상이며, 여성들에겐 가부장제에서 억압된 모습이기도 하고, 그리고  공황기 미국인들에겐 불굴의의지를 부추기는 포스터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2016년부터 2017년까지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과 런던의 영국왕립미술원에 전시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aUqX8Kl7qA

 

 

 

특히 이 그림은 미국 회화 중에 가장 많이 패러디가 된 그림으로 유명합니다. 인터넷에서' Ameircan Gothic 패러디'를 검색해 보면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을 볼 수 있습니다.

 

 

art parody/pinterest

 

 

 

American Gothic Parody-Myrtle Beach Art

 

재미있는 인테리어 그림이 있는 곳 런던 드라마

 

 

 

 

Serioulsy Funny American Gothic Parodies/ Cedar Rapids Museum of Art

 

 

Arnold Comes of Age, 1930, Sheldon Museum of Art,Lincoin, Nebraska,Arnold Pyle in front of a river with skinny -dipping men/wikipedia

 

 

 

 

Fall Plowing, 1931/wikipedia

 

 

 

 

Grant Wood의 < Fall Plowing> 작품은 미국 중서부의 농촌 풍경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지역주의(Regionalism)예술 운동의 대표적인 예로, 지역의 특색을 강조하고 일상적인 농촌 생활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가을철 경작 활동을 주제로 하여, 넓게 펼쳐진 경작지와 그 위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그려냅니다. 이 작품은 농업이 중심이 되는 중서부 지역의 풍경과 생활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랜트 우드의 다른 작품들처럼 지역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드러내고요.  작품의 구성과 색채는 명확하고 선명하며, 이는 우드가 영향을 받은 초기 네덜란드 및 플랑드르 화가들의 스타일을 반영합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지역 사회와 자연 환경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해석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로, 그의 대표작과 함께 중서부 지역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Appraisal, 1931/wikipedia

 

 

 

 

 

도시와 농촌의 대조를 주제로 한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1931년 아이오(IOWA)와 주 박람회 미술 대회에서 수상한 작품으로, 도시 여성과 농촌 여성이 서로 마주하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림 속 도시 여성은 유행에 맞춘 옷을 입고 비즈로 장식된 가방을 들고 있습니다. 농촌 여성은 자신이 소중히 기른 닭을 들고 있습니다. 도시 여성은 그녀의 미래 식사를 평가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요.  농촌 여성은 이에 개의치 않고 정성껏 기른 자신의 닭을 당당한 모습으로 내보입니다.  이는 농촌 여성이 자신의 농장에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The Midnight Ride of Paul Revere, 1931, Metropolitan Museum of Art/wikipedia

 

 

 

 

미국 독립 전쟁의 유명한 사건인 폴 리비어의 자정 기마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헨리 워즈 워스 롱펠로의 1860년 시 " Paul Revere's Ride"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의 시 <Paul Revere's Ride>는 1775년 4월 18일 밤, 미국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폴 리비어의 야간 경주를 기념하는 작품입니다. 이 시는 리비어가 영국군의 접근을 경고하기 위해 매사추세츠 미들섹스 카운티를 가로질러 말을 타고 달려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시에서 리비어는 친구에게 올드 노스 교회에 신호등을 걸어 영국군이 육로로 오는지 해로롤 오는지를  알리도록 부탁합니다. 친구가 두 개의 신호등을 걸어 영국군이 바다로 온다는 것을 알리자, 리비어는 메드퍼드, 렉싱턴, 콩코드를 거쳐 애국자들에게 경고를 전합니다. 

이 시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롱펠로는 이를 통해 미국의 전설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시는 미국 독립 전쟁의 긴박함과 용기를 강조하며, 당시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그림은 높은 시점에서 렉싱턴, 메사추세츠의 밝게 빛나는 마을을 지나가는 폴 리비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리비어가 타고 있는 말은 어린이의 흔들 목마를 모델로 하여 다소 비현실적이고 동화 같은 느낌을 줍니다. 또한 그림의 배경은 부드럽고 푹신한 베개 같은 언덕과 나무로 구성되어 있어 마치 꿈속의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예술적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당시 미국 문화에서 식민지 및 혁명적 영웅을 미화하는 경향을 반영합니다. 그랜트 우드(Grant Wood, 1891-1942)는 이 그림을 통해 미국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며, 지역주의 미술 운동의 일환으로 미숙의 농촌 풍경과 역사적 사건을 독창적으로 표현했습니다. 

 

 

 

 

Daughters of Revolution, 1932, Cincinnati Art Museum/wikipedia

 

 

 

 

풍자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그림입니다.  미국 독립 전쟁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세 명의 나이 든 여성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이 작품은 Wood가 자신의 유일한 풍자화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 그림은 Emauel Leutze의 유명한 그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독일에서 그려진 작품이고요. 이는 아이러니를 강조하는 요소로, 독일에서 제작된 이 그림 앞에 서 있는 여성들이 미국 혁명 영웅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을 통해 풍자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드(Wood)는 이 작품을 통해 지역의 보수적인 단체인 미국 혁명 딸들 (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DAR)을 비판했습니다. 이는 그가 독일에서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대한 DAR의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그들을 "토리 소녀들"이라고 부르며 공화국에서 출생한 귀족제를 만들려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Nearsundown,1933/wikipedia

 

 

 

 

 

Parson Weem' Fable, 1939, Amon Carter Museum/wikipedia

 

 

 

 

 

미국의 독립 영웅 조지 워싱턴과 관련된 전설적인 체리 나무 이야기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워싱턴의 전기 작가인 메싱슨 록 웜스(Parson Weems)가 창작한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림은 웜스가 극장 커튼을 열어 젖히며 이야기를 소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조지 워싱턴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장면에서, 그의 머리는 성인 버전의 워싱턴의 모습으로 그려져, 이 이야기가 허구임을 암시합니다. 이 장면은 워싱턴에 체리 나무를 벤 후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고백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우드(Wood)는 이 작품을 통해 미국의 민속과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애국심과 관련된 신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그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작품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탐구하며,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이야기와 전설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Sentimental Ballad, 1940, New Britain Museum/wikipedia

 

 

 

 

 

January, 1940-41, Cleveland Museum of Art/wikipedia

 

 

 

 

그의 말년 작품 중 하나로, 아이오(IOWA)와 농장에서의 어린 시절에 깊이 뿌리내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겨울철의 농촌 풍경을 담고 있으며, 추운 날씨 속에서도 풍요로운 땅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작품에서는 눈 덮인 옥수수 더미가 기하학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는 추상적인 디자인 요소로 작용하고요. 이 더미들은 무한히 멀리까지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어, 겨울의 정적이 풍요로운 풍경을 강조합니다. 그림 속에서 유일한 활동의 흔적은 토끼 발자국입니다.  상상이 되시죠? 이는 정지된 장면에 생명력을 부여합니다. 

 

 

 

이 작품은 그랜트 우드가 자신의 고향과 그곳에서의 경험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해석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입니다. 지역주의 미술 운동의 일환으로 미국 중서부의 농촌 풍경을 사실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lowa Cornfield, 1941/wikipedia

 

 

 

 

 

2004, Iowa state quarter honoring Grant Wood. Elements depicted include: the School house, teacher and Students planting a tree, Cation:"Foundation in Education", and Grant Wood.

 

 

 

 


아이오와 주의 쿼터는 미국 조폐국의 50개 주 쿼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발행되었습니다. 주의 교육 유산을 강조하는 디자인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 쿼터에는 외딴 학교 건물, 교사, 나무를 심고 있는 학생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Foundation in Education>과 <Grant Wood>라는 문구와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아이오와 출신의 유명한 미국 예술가로, 그의 대표작 <American Gothic>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종종 미국 농촌의 주제를 기념했으며, 이는 아이오와 쿼터의 교육 및 지역 사회 중심의 이미지와 일치합니다. 쿼터에 그의 이름이 포함된 것인 미국 예술에 대한 그의 기여와 아이오와의 연관성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February, 1940, Berkshire Museum ,Lithograph(석판화)/google arts& cl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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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1988년작)을 보신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중년 영화감독 살바토레 토토 앞으로 고향에서 한 통의 전화가 옵니다.  알프레도라는 남자가 죽었고, 내일이 장례식이라는 소식이죠.  알고 보니 이 토토라는 남자는 30년간 고향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토토는 회상에 잠기고, 고향에서 알프레도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립니다.  알프레도는 마을의 유일한 오락거리인 영화관의 영사실에서 일했습니다. 가난했던 토토에게 영화관은 유일한 놀이터였지요. 

 

 

토토가  실연의 아픔으로 힘들 때, 알프레도는  이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말합니다.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이 마을엔 미래가 없고 ,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마을을 떠나라 합니다.  그리하여 말썽꾸러기 소년은 알프레도의  조언대로 고향을 떠나 성공한 영화감독이 되었고. 알프레도가 죽고 나서야 마을로 돌아옵니다. 

 

 

다시 온 고향에서 토토는 알프레도의 장례식을 마치고 , 그가 자신에게 남긴 물건을 받습니다. 그건 알프레도와 토토가 함께 영사실에 있던 시절, 검열당해 상영되지 못한 무수히 많은 '키스 ' 장면이었습니다. 토토는 그 필름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수없이 많은 키스 장면이 편집된 그 영상을 보며 토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습니다. 선정적이라고 거부당했던 그 장면들을 보면서, 왜 그렇게 흐뭇한 표정을 지었던 걸까요. 아마도 두고 온 시절을 향한 그리움과  함께 했던 공동체를 향한 그리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미술계에서 <키스>하면 클림트 의 작품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림 속 남녀가 절벽 위에서 열정적으로 포옹하고 있는 작품말입니다. 이들의 옷이 독특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지요. 오스트리아 상징주의의 대표작으로, 클림트의 '황금시기'에 그려졌습니다. 금박을 사용하여 화려함과 부유함을 강조했고요. 낭만적 사랑의 황홀함을 묘사했던 작품이지요. 많은 종류의 굿즈로 만들어져 우리들 일상 안으로 들어온 작품이기도 하지요. 

 

 

 

그런 클림트보다 훨씬 정열적이고 낭만적인 키스를 그린 이탈리아 화가가 있습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1791-1882)입니다.

 

 

 

 

 

The Kiss. 1859, Pinacoteca di Brera, Milan/wikipedia

 

 

 

 

 

 

첫번째 <키스 II bacio> 버전입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1791-1882)는 총 5가지 버전의 키스 작품을 그렸다고 합니다 (유채 4, 수채 1).  연인들이 작별할 때 나누는 '키스(Kiss)'는 육체는 떨어져 있지만, 영혼만은 항상 곁에 있을 것이라는 하나의 징표 같은 것이죠. 그래서인지 보고만 있어도 찌리릿 할 정도로 은밀하고 강렬한 모습입니다. 

 

 

 

19세기 중엽 이탈리아는 나폴레옹 체제 이후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인해 자유주의와 해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지요.  세 차례에 걸친 독립전쟁과 프랑스&오스트리아 간의 외교교섭으로 인해 이탈리아는 드디어 독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랑스혁명( 1789-1799)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으로, 절대왕정과 신분제의 모순을 타파하고자 일어났습니다. 주요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과 불평등한 세금 제도, 그리고 계몽사상과 미국 독립 전쟁의 영향이었습니다. 이 혁명은 루이 16세의 처형과 공화정 수립, 나폴레옹의 등장을 통해 급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에 큰 여향을 미쳤습니다. 

 

 

 

 

이탈리아 통일 /나무위키

 

 

 

 

이탈리아 통일(1815-1870)을 위한 세 차례의 독립 전쟁
1.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1848-1849):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오스트리아에 맞서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해방하려 했으나, 오스트리아의 군사 개입으로 실패했습니다. 

2.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1859): 사르데냐-피에몬테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여 롬바르디아를 획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3.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1866):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중에 이탈리아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워 베네치아를 통합했습니다. 

이탈리아 통일은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촉진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이탈리아의 통일이 독일 통일에 대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이탈리아가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유럽 내 세력 균형이 재편되었습니다.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프랑스와 사르테냐-피에몬테 왕국의 동맹은 유럽 외교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이는 나폴레옹 3세의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탈리아 국기/위키백과

 

 

프랑스 국기/ 위키백과

 

 

 

Francesco Hayez: the romantic revolutionary with the hidden message/ shopping & charity

 

 

 

이런 배경 속에 프란치스코는 당시 독립 전쟁에 참가한 이탈리아 병사와 프랑스인 여성이 나눈 뜨거운 키스 장면을 작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실제 인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국적과 복장, 키스 행위는 나름의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병사가 입고 있는 초록색과 빨간색은 이탈리아를 나타냅니다. 여인이 입고 있는 푸른색과 하얀색은 프랑스를 상징하고요.

 

 

 

 

 

 

브레라 미술관( Pinacoteca di Brera)의 간판으로 통하는 작품 <키스>는 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 동맹관계를 의미합니다. 가로 88cm, 세로 119cm 크기의 아담한 작품입니다.  <키스>는 전장에 나서는 의용군 청년이 연인과 입맞춤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표정은 알 수 없지만, 키스로 연결된 남녀의 불타는 사랑이 그림 밖으로 번질 듯한 구도입니다다.  프란체스코의 부모님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연인 혹은 부부와 같은 관계로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XE64VzKjnY

 

 

 

 

 

 

밀라노에 가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브레라 미술관입니다. <키스>는 브레라의 2층 마지막 갤러리 제38호실에 전시돼 있습니다. 1층부터 하나씩 살피면서 관람할 경우 제일 마지막으로 만나는 명화가 '키스' 작품입니다. 38호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의 중심 테마는 통일입니다. 다시 말해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에 관련된 그림들이 브레라 뮤지엄의 마지막 전시화 들인 거죠. 따라서 38호 갤러리는 보통 '통일 갤러리'라고도 불립니다.  

 

 

 

 

이탈리아 반도 내 통일을 달성한 것은 1871년입니다.  통일 운동이 1820년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반세기에 걸쳐진 결과물인 셈이죠. 이탈리아인은 19세기 이룩된 통일을 '리솔지멘토(Risorgimento)'라 부릅니다.  '재기, 부활'이란 의미이고요. 대제국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건한 것이란 의미가 함축돼 있습니다. 

 

 

통일 갤러리 주인공은 역시 하예즈의 명화 <키스>입니다. 이탈리아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그림인 동시에, '리솔지멘토(Risorgimento)' 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나눠집니다.

 

 

 

 

이탈리아 통일을 도와준 프랑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의 키스가 첫 번째입니다.  리솔지멘토(Risorgimento)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 합스부르크가 의 억압정치에서 시작됐습니다. 나폴레옹 사후의 유럽질서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베니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국토의 상당수가 오스트리아 수중에 넘어갑니다. 원흉인 합스부르크가를 타도하는 과정에서 이탈이아와 프랑스가 힘을 합칩니다.  중세 봉건제를 타도하자는 나폴레옹의 혁명이념이 이탈리아 지식인의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거지요.

 

 

 

 

두 번째 해석은 전장으로 떠나는 통일 의용군의 마지막 인사로서의 <키스>입니다. 붉은색은 리솔지멘토(Risorgimento)를 주도한 가리발디(Garibaldi) 의용군의 상징입니다. 이탈리아 곳곳에 존재한 중세체제를 타도하는 과정에서 가리발디 의용군이 무력으로 타도했습니다. 명화 <키스>는 붉은 바지 청년이 의용군으로 떠나기 직전의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최후의 순간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장면입니다. 숭고하고도 고결한 목적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청년. 그를 지지하고 아끼는 여성과의 애틋하고도 순결한 시간이 화폭에 담겨 있습니다. 청년이 계단에 왼쪽 다리를 올린 것은 이별의 키스가 끝나는 순간 곧바로 떠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입니다. 사랑과 애국심이 동시에 발현된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작품 < 키스 II bacio> 였습니다.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1807-1882), 1866년 사진/위키백과

가리발디(Garibaldi) 의용군은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주세페 가리발디가 조직한 부대입니다. 1859년에는 알프스 의용대를 조직했으며, 1860년에는 "붉은 셔츠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부대를 결성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 부대는 가리발디의 지도 아래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여러 전투에 참여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syBHOw5gg0

 

 

 

 


 

 

 

https://www.youtube.com/watch?v=0nxtgbNZufU

 

 

 

 

밀라노, 이탈리아/나무위키

 

 

 

 

https://www.youtube.com/watch?v=q4zyEOkMveY

 

 

 

 

 


 

 

이탈리아지도/노란풍선

 

 

 

 

 

 

1791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1791-1882)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이모의 손에 길러졌다고 합니다. 미술에 재능이 있어 밀라노와 로마에서 미술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는 복원가가 되기 위한 도제 생활을 하기도 했고, 프란체스코 마지오토의 제자가 되어 3년 동안 그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밀라노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테오도로 마테이니에게 그림을 배웠습니다. 

 

 

 

 

프란체스코 아예즈는 1809년 베네치아 아카데미 대회에서 우승하여 로마의 산 루카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는 1814년 그의 나이 24세 때까지 로마에 머물렀습니다. 이후 프랑스 장군 요아킴 뮈라의 의뢰로 작품을 그리는 등 활약하다가 1850년 밀라노의 브레라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생의 후반 약 30여 년간을 브레라 아카데미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하예즈의 작품은 주로 성서와 역사, 인물을 주제로 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당대의 유명 인사들을 그린 초상화로 커다란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전의 바로크와 로코코의 웅장하고 화려한 기법을 거부하고 단순함과 명료함 등 신고전주의적 요소를 따랐습니다. 또한 그가 표현한 전체적인 색채의 분위기와 이미지들은 개인적인 감성과 인간과 자연이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짙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크: 17세기에서 18세기 초반까지 유럽에서 유행한 예술양식으로, 미술, 건축, 음악, 문학 등을 포함합니다. 이 양식은 포르투갈어로 '찌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perola barroca'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바로크 양식은 역동적이고 현란한 장식, 과장된 표현이 특징입니다.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하고 부분들의 조화를 통해 균형을 강조합니다. 
로코코 양식: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로코코 양식은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이 특징입니다. 곡선과 비대칭성을 강조하며, 밝은 색상과 관능적인 주제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로코코는 실내 장식에 중점을 두었고, 귀족적인 쾌락과 우아함을 표현했습니다. 

신고전주의:  로코코 이후 등장한 신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재해석한 양식으로, 엄격한 대칭성과 간결함을 중시했습니다. 이 양식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성적이고 질서 있는 미를 추구했습니다. 

 

계몽주의: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철학적, 문화적 운동으로 이성과 과학을 통해 사회의 무지와 미신을 타파하고 현실을 개혁하자는 사상입니다. 계모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권위와 종교적 독단에 반대하며,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강조했습니다. 이 운동은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진보를 추구하며,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하예즈는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의 이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화가였습니다. 그의 그림은 기법보다는 주제에서 더욱 낭만주의적이며, 극도로 세밀한 묘사와 인물의 미세한 감정변화까지 포착해내는 정교함으로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1809년 베네치아 아카데미 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화가로서 확고한 입지를 잡게 됩니다. 이후 다양한 나라에서 작품 의뢰가 들어왔고요.  당시 신고전주의의 영향으로 주로 성서, 역사, 소설 속 인물들이 작품의 주제로 조명받는 시대였습니다. 프란체스코 또한 이전 시대에 유행한 바로크, 로코코의 화려한 화풍을 거부하고 단순하고 명료한 신고전주의 화풍을 따랐습니다. 

 

 

 

 

 

Laocoon, 1812/End of Line

 

 

 

<라오쿤>은 낭만주의 스타일의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서 라오쿤이라는 사제의 이야기를 묘사한 신화적 작품입니다. 유화로 캔버스에 그려졌으며 , 크기는 246*175cm입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팔라초 브레라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라오쿤은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의 신관으로, 아폴론을 섬겼습니다. 그는 토로이 전쟁 중 그리스군의 목마를 성 안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으나, 이로 인해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해신 포세이돈이 보낸 두 마리의 큰 바다뱀에 의해 라오쿤과 드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트로이 목마의 함정을 경고한 라오쿤의 비극적인 운명을 보여줍니다. 

 

 

 


 

 

 

Rinaldo and Arimida, 1813/Wikimedia Commons

 

 

 

 

 

 프란체스코의 가장 대표적인 초기 작품은 <리날도와 아르미다 Rinaldo and Arimida>(1813)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배경입니다. 십자군 전쟁 영웅 리날도와 그의 연인 아르미다 그리고 동시에 아르미다로 변신한 적장의 여 마법사에 관한 그림입니다.

 

 

1099년 예루살렘을 포위한 십자군의 사령관 고프레도는 명장 리날도에게 예루살렘 함락에 성공하면 그가 사랑하는 자신의 딸 아르미나와의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미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허락을 못 받았던 리날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습니다. 

 

 

 

여 마법사 아르미다가 리날도의 연인 아르미나로 변신해 유혹하는 장면입니다. 리날도는 아르미나를 생각하며 그리운 마음을 키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처럼 위협적인 아르미다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리날도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마터면 이루어질 수 없을 뻔한 사랑을 애틋하고 정열적으로 그린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표현이 낭만적이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로코로 시대  프랑수아 부셰(Francois Boucher, 1703-1770)의 작품 < Rinaldo and Armida>(1734) 과  비교해 보세요. 다른 점도 찾아보시고요. 

 

 

 

프랑수아 부셰 Francois Boucher'Rinaldo & Armida', 1734/wikimedia commons

 

 

 

 


 

 

 

 

Odysseus at the Court of Alcinous, 1814-1816/wikipedia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1791-1882)의 작품 <알키노오스의 궁정에 있는 오디세우스 Oaysseus at the Court of Alcinous>(1814-1816)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장면의 본질을 포착하는 여러 주요 요소를 특징으로 합니다.

 

 

 

이 그림은 오디세우스가 알키노오스 왕의 궁정에서 열린 연회 중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에서의 자신의 업적을 노래하는 곡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강조되어 감정적 강도가 두드러집니다. 배경은 알키노오스 왕과 아레테 왕비가 있는 왕궁을 포함하며, 환대, 정체성, 영웅의 여정을 주제로 합니다. 

 

 

오디세우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영웅입니다. 지혜와 꾀로 유명하지요.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트로이 목마 전략을 고안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호메로스의 서서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으로, 전쟁 후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을 그린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그는 육체적인 힘보다는 지혜와 인내를 중시하며, 여러 신화 속 사건에서 냉정하고 전략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호메로스:  고대 그리스의 시인입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라는 두 편의 서사시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고대 그리스 문학의 기초를 이루며, 호메로스는 역사적으로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됩니다. 그의 서사시는 이오니아 방언으로 쓰였으며, 호메로스가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그의 작품은 서양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예즈의 '로미오와 줄리엣, 1823/wikipedia

 

 

 

 

이후 10년 뒤 베네치아와 로마, 밀라노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은 프란체스코 하예즈는 이탈리아 설화을 바탕으로 탄생한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키스 한 장면으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1823년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창문을 사이에 두고 키스를 나누는 모습과 달리 그림 속에서는 창문을 통해 줄리엣의 방으로 들어온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키스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둘은 원수 관계에 있는 가문 자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었죠. 그 때문인지 애틋한 감정이 둘 사이를 흐릅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4세기 이탈리아 베로나입니다. 이 시기는 로마의 변혁기였으며, 두 가문 간의 갈등 속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두 주인공의 금지된 사랑과 그로 인한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사랑의 순순성과 가족 간의 갈등을 탐구합니다. 또한, 두 연인의 죽음이 적대적인 두 가문 간의 화해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보여주고요.  운명과 죽음, 사랑의 순결성, 그리고 가족 간의 갈등을 주요 테마로 삼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8nidgnpNdM

 

 

 

https://www.youtube.com/watch?v=r50AhS3gspY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 1616):잉글랜드의 극작가이자 시인으로 , 영어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햄릿>, <오셀로>,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등 수많은 희곡과 소네트를 남겼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시대를 초월한 주제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공연되고 있습니다. 


 

 

 

 

 

카롤리나 주키의 초상화(Ritratto di Carolina Zucchi, 1825/Wikimedia Commons

 

 

 

 

 

Lampughani's Conspiracy, 1826/wikipedia

 

 

 


 

 

 

 

self-Portrait in a Group of Friends, 1824-1827/wikipedia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작품 <Self-Portrait in a Group of Friends>(1824-27)는 19세기 밀라노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유럽 초상화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자화상이 아니라 문화적 선언으로 여겨지며, 낭만주의 시대의 밀라노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예즈는 이 작품에서 자신을 중심에 두고 네 명의 친구들고 함께 그렸습니다. 이들은 화가 조반니 밀리아라, 펠라지오 팔라지, 주세페 몰테니, 그리고 작가 토마소 그로시로, 모두 낭만주의 스타일의 대표자들입니다. 

 


 

 

 

Caterina Cornaro Deposed from the Throne of Cyprus, 1842/Alamy

 

 

 

 

 

 

 

 

 

이 작품은 키프로스의 여왕 카테리나 코르나로가 왕위에서 물러나는 역사적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121*151cm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졌습니다. 현재 이탈리아 베르가모의 아카데미아 카라라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카테리나 코르나로(Caterina Cornaro)는 1454년 베네치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키프로스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1468년 , 키프로스의 제임스 2세와 결혼하여 베네치아와의 동맹을 강화했습니다. 제임스 2세는 1473년에 사망하였고 , Caterina는 아들 제임스 3세의 섭정으로 통치하다가 아들의 사망 후 여왕으로 즉위했습니다. 1489년 베네치아의 압력으로 퇴위하고 아솔로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아소로에서 여생을 보내며  예술과 문학의 중심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궁정은 르네상스 후기의 예술과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화가 젠틸레 벨리니와 시인 안드레아 나바게로 등이 그녀의 궁전을 방문했습니다. 특히 시인 페에트로 벰보는 아소로를 배경으로 한 플라토닉 사랑에 관한 대화집 <Gli Asolani>를 집필했습니다.  Caterina는 아소로에서 20년 이상을 보내며 예술적 , 문학적 활동을 후원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그녀가 1510년 사망할때까지 아소로를 문화적 허브로 만들었고, 그녀의 궁정은 예술과 문학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야곱과 에사우의 만남 Meeting of Jacob and Esau, 1844/Wikimedia Commons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야곱과 에사우의 만남 "(1844)은 창세기의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사우가 화해하는 성경 이야기를 묘사한 유화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는 야곱이 에사우의 장자권을 속임수로 뺏앗은 후, 두 형제간의 갈등과 그로 인한 후손 국가들 간의 분쟁을 다룹니다. 작품은 이러한 역사적이고 감정적인 재회를 강조하며, 야곱이 에사우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이루는 순간을 표현합니다. 

 

 

 

 

이 그림은 208cm*300cm의 큰 크기로 유명합니다. 하예즈는 19세기 중반 밀라노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역사화와 초상화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야곱의 속임수로 인해 소원해졌던 형제들이 마침내 재회하는 극적이고 감정적인 순간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Accusa Segreta, 1847-1848/wikipedia

 

 

프란체스코 하예츠의 작품 < 비밀 고발 Accusa Sereta>(1847-1848) 입니다. 낭만주의  스타일의 장르 회화로,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졌습니다. 그의 복수 삼부작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의 크기는 높이 153cm , 너비 120cm입니다. 

 

 

이 작품은 마리아라는 여성이 배신한 연인을 정치적으로 고발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익명으로 연인을 비난하는 편지를 게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당시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Francesco Hayez- Alchetron, The Free Social Encyclopedia

 

 

 

 


 

 

 

Portrait of Teresa Manzoni Stampa Borri, 1849/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c_6A8c02ZT4

 

 

 

 

 

 

Portrait of Matilde Juva Branca, 1851/wikipedia

 

 

 


 

Portrait of Countess Antonietta Negroni Prati Morosini as a Child, 1858/wikipedia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작품 <어린 시절의 안토니에타 네그로니 프라티 모로시니 백작 부인의 초상 Portrait of Countess Antonietta Negroni Prati Morosini as a Child>은  1858년에 제작된 유화입니다. 이 작품은 하예즈의 낭만주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지요. 그녀의 아버지인 알렉산드로 네그로니 프라티 모로시니 백작의 의뢰로 만들어졌습니다.  약 133.5cm*110cm 크기로 , 하예즈의 후기 초상화 중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u7LZtNFtko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of Jerusalem, 1867/wikipedia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1867년 작품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서기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포위와 파괴를 묘사합니다. 이 작품은 성전의 파괴와 그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혼란과 황폐함을 포착합니다. 유화로 제작된 이 역사적 작품은 82*183cm크기로 , 역동적인 구성과 감정적 강렬함으로 유명합니다. 하예즈의 작품은 당시의 투쟁과 혼란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억압과 갈등이라는 더 넓은 주제를 반영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두 차례 파괴되었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왕에 의해 건축되었으나, 바벨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습니다. 두 번째 성전은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 유대인들이 귀환하여 재건하였고, 헤로데 대왕에 의해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도 로마 제국의 티투수 장군에 의해 서기 70년에 파괴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로마 전쟁의 일환으로,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발생하였으며, 성전의 파괴는 유대교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유대교 사회에 여려 가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성전이 파괴되면서 유대교는 성전 중심의 제사 의식에서 벗어나 회당과 율법 연구에 집중하며 유대교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했고, 이는 오늘날 랍비 유대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또한 성전 파괴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를 가속화시켰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종교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달리스크 Odalisque,1867/pinterest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오달리스크>(1867)는 오리엔탈리즘 스타일의 장르 회화입니다.  이 유화 작품은 82*68cm크기로, 이탈리아 밀라노의 팔라초 브레라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하렘의 여성 시종인 오달리스크를 묘사하며, 19세기 유럽 미술에서 인기 있는 주제였습니다. 작품은 하예즈의 낭만주의 스타일의 특징인 풍부한 색감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하렘: 역사적으로 이슬람 문화권에서 왕이나 귀족의 여성 가족들이 거주하는 구역을 의미합니다. 하렘은 일반적으로 외부인, 특히 남성의 출입이 제한되었으며, 여성들만의 생활공간으로 기능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왕의 부인, 첩, 자녀,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시녀들이 생활했습니다. 하렘은 단순한 거주 공간을 넘어 정치적, 사회적 역할도 수행했으며, 왕실의 권력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HljIFz-QIE

 

 

 

 

피옴보 계단에 선 마리노 팔리에로 최후의 순간 The Final Moment of Doge Marino Faliero on the del Piombo Staircase , 1867/월간조선

 

 

 

 

 

 

 

  '피옴보 계단에 선 마리노 팔리에로 최후의 순간 The Final Moments of Doge Marino Faliero on the del Piombo" Staircase)'이란 긴 타이틀의 유화이지요. 왕정 쿠데타를 시도한 베니스 총독 팔리에로의 마지막을 그렸습니다.  10점 가운데 가장 큰 가로 192cm, 세로 238cm 에 달하는 대형 작품입니다. 

 

 

 

 

팔리에로(Paliero)는 유럽 중세사에 등장하는 비극의 주인공 중 한 명입니다. 1354년 공화국 베니스의 대표자인 도지 (Doge, 행정 최고 지도자)에 오른 인물이 입니다. 도지에 오르자마자, 공화국 체제를 왕국으로 바꾸려는 쿠데타를 벌이려다 적발됩니다.  체포된 뒤 시민법정에서 최악의 형벌에 처해집니다. 공개 참수와 사지 절단으로 말이죠. 관련된 10명도 전부 비슷한 형벌에 처해진 뒤 베니스 시민 모두에게 공개됩니다.  공화정에 반대할 경우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지를 보여준, 이탈리아 정치의 기본정신이 팔리에로 그림에 나타나 있습니다. 

 

 

 

 

피옴보 계단에서 내려오는 팔리에로는 검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공개 참수 형벌이 내려진 직후의 모습일 듯하고요. 도끼를 들고 있는 참수 집행자가 그림 하단에 들어서 있습니다. 붉은 옷을 입은 베니스 인들이 차가운 시선과 더불어, 어두운 표정의 팔리에로 얼굴이 인상 깊습니다. 19세기 이탈리아 리솔지멘토(Risorgimento)는 폭정과 압제에 대한 반발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외부의 개입과 함께 이탈리아 전체가 조각난 채 경제, 종교, 정신적 수탈이 어어졌습니다. 하나로 합쳐, 공화정에 기초한 하나의 원칙에 의해 국민 한 명 한 명이 모두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자는 것이 리솔지멘토(Risorgimento)의 근본이념입니다.  반대자는 팔리에르와 같은 운명에 처해질 뿐이라는 강력한 결의가 하예즈 그림 속에 각인돼 있습니다. 

 

 

 

리솔지먼트(Risorgimento):19세기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위한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의미합니다. 이 운동은 이탈리아 반도에 여러 독립된 국가와 외세의 지배를 끝내고, 하나의 통일된 이탈리아 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리솔지먼토'는 이탈리아어로 "부흥" 또는 "부활"을 의미하며, 이탈리아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부상을 상징합니다. 

 

 

 

제 55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대통령) , 프라디야 오르티스의 마리노 팔리에로(Marino Faliero 1274-1353), Dux LV,1883/wikipedia

 

 

 

 

 

 

제55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대통령)인 마리노 팔리에로가  베네치아  시민들 앞에 섰습니다.

 

"참수형을 시행하고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라." 

 

 

그리스 미래의 전통인 기억 말살형(damnatio memoriae)에 처해진 팔리에로의 초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색 캔버스가 있습니다.

 

팔리에로는 청년기부터 베네치아 정치에 깊숙이 참여한 인물입니다. 베네치아의 입법, 사법, 행정의 요직을 두루 거친 후 도제의 자리에 오른 노련한 정치가 였지요. 하지만 참수와 함께 기억말살형( dammatio memoriae)에 처해집니다. 80세 먹은 노인이 새삼스럽게 왕정을 수립해 절대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고 합니다.  고령에다 최고 행정 수장이라는 점, 공화국에 대한 오랜 봉사와 공헌을 고려해 형을 경감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기억 말살형'이 내려집니다.   팔리에로는 목이 잘린 후 사지를 찢기는 형벌에 처해졌습니다.  그 누구도 공화정과 법치를 깰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인 것이죠. 지금도 역대 베네치아 도제(대통령)의 사진이 놓인 벽 면에 제55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였던 마리노 팔리에로의 자리만 초상이 없습니다. 다만   검은색  캔버스가  그의 초상을 대신할 뿐이죠. 안타깝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  그 자리에 있는 한 그의 이름은 대대손손 잊힌 이름인 채로 역사에서 지워져 버렸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3KVXsBskMw

 

 

 

 

2024.08.03 - [지식&교양] - 51-32.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79)

 

51-32.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79)

벨라스케스(Vela'zquez, 1599-1660)가 죽은 뒤 스페인은 유럽 미술계에서 거의 유명무실한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몇몇 화가들이 벨라스케스가 일구어낸 서유럽 르네상스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sun-n5y2.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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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den Light

 

by Dante Gabriel Rossetti

 

 

I have been here before,

But when or how I cannot tell:

I know the grass beyond the door, 

The sweet keen smell,

The sighing sound, the lights around the shore.

 

 

You have been mine before,----

How long ago I may not know:

But just When at that swallow's soar

Your neck turned so, 

Some veil did fall, ---I knew it all of yore.

 

 

Has this been thus before?

And shall not thus time's eddying flight

Still with our lives our love restore

in death's despite,

 And day and night yield one delight once more?

 

갑작스러운 빛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예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어요. 

하지만 언제 어떻게 인지는 알 수 없지요.

문 넘어 그 풀밭을 알고 있어요.

달콤하게 코를 찌르는 냄새,

한숨 소리와 바닷가를 비추던 불빛들도

 

예전에 당신은 제 사람이었어요.

얼마나 오래 전인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제비가 날아오르던 그 순간

그렇게 당신이 고개를 돌리자

베일이 벗겨졌지요.- 난 예전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예전에도 이랬었나요?

이렇듯 소용돌이치는 시간의 흐름이

우리의 삶, 우리의 사랑과 더불어

죽음의 어둠 속에서도 다시 회복되고

밤낮으로 다시 한번 즐거움을 주지는 않을까요?

 

 

 

갑자기 왠 시냐구요?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는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입니다.  옛 사랑을 회상하며 다시금 추억을 현실 속에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죠. 이태리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에 '단테'를 넣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의 작품은 종종 단테의 주제를 다루기도 했습니다.

 

 

 

세계사에서  13세기는 천재들이 유난이 많이 등장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는 중세 가톨릭 교회의 도미니코회 수사신부이자 저명한 신학자, 스콜라 철학자입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조화시키려는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인물이지요. 그의 대표작인 <신학대전>은 신학적 논의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중요한 저작입니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 했으며, 그의 사상은 현대 철학과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는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입니다 .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이고요. 그는 중세 말기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활동하며,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인물 표현을 통해 회화의 혁신을 이끌었습니다. 지오토는 특히 프레스코화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은 감정 표현과 공간감이 뛰어납니다. 대표작으로는 이탈리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있는 프레스코화가 있습니다. 그의 작업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씨시의 성인 프란체스코( Sanctus Franciscus Assisiensis ,1181-1226)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가톨릭 성인으로, 프란치스코회(Franciscan Order)의 창립자입니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젊은 시절부터 가난과 겸손을 실천하며 신앙생활에 헌신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며,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여겼습니다. 그는 새들에게 설교한 일화로도 유명하며,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가브리엘은 13세기 시인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읊습니다. 평생에 단지 두 번(9살, 18살) 본 여인을 사랑한 단테(Dante)는 그 녀를 <신곡>속에 되살려 천국을 안내하게 했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고,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베아트리체( 24살 사망)는 시인의 펜 끝에서 살아나 영원한 사랑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은 지금처럼 생생하죠. 그 모습과 냄새와 소리가 가슴에 여전히 남아있으니까요. 오로지 사랑했던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그 특별한 기억들. 비록 죽음으로 갈라진 사랑이라 하더라도 시간을 되돌려 그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다시 맛보고 싶어 합니다.  지금 우리가 AR 기기나 VR기기를 통해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싶은 것처럼 말입니다. 현실에서 볼 수 없지만, 시 속에서의 판타지는 서로 보고, 만지고, 느끼는 현실에서의 느낌 그 이상을 만들어 냅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시처럼  갑작스럽게 회상의 빛으로 쏟아져 내립니다. 

 

 

 

 19세기 이미 산업혁명의 성공을 거둔 영국의 무분별하고 탐욕적인 팽창주의와 산업화, 기계화된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회의를 느낀 영국 낭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타락하지 않은 과거, 그 중에서도 중세에서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예술적 이상향과 낙원을 찾고자 했습니다. 

 

 

 

가장 앞자리에 섰던 이들이 라파엘전파(Pre- Raphaelite Brotherhood)입니다. 약자로' P.R.F' 라고 씁니다. 이름에서처럼 라파엘전파의 형식과 주제에서 문명 이전의 때묻지 않은 타락하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한 중세로의 회귀를 갈망합니다. 그러한 동경은 기독교적인 중세주의의 부활로까지 소급됩니다. 그들은 중세를 타락 이전의 정신성을 회복시켜 줄 숭고한 성소에 비유하였습니다.

 

 

로세티는 라파엘 전파를 결성해 인물과 풍경을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라파엘 전파는 19세기에 나타난 복고적인 화파입니다. <오필리아Ophelia>를 그린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도 라파엘 전파를 주도한 화가입니다. 1848년 로열아카데미 출신 화가 밀레이, 단테 게이브리얼 로제티, 윌리엄 홀맨 헌트 등은 아카데미가 가르치는 기존 화풍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스타일을 무조건 모방할 것이 아니라, 라파엘로 이전 중세 화가들의 작품을 본보기 삼아 그림을 그리자는 것이었습니다. 

 

 

 

 

19세기 영국에서 중세는 지적, 정신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세기 영국에서 고전주의에 의해 암흑시대와 결부된 원시적인 것으로 비하되었던 중세가 재조명되기 시작합니다. 중세는 고도의 물질주의와 기계화에 의해 훼손되고 잃어버린 19세기 영국인들이 다시 돌아가야 할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옆나라 프랑스에서 '인상주의'로 미술사를 이끌고  있을 때 영국은 100년 전 뒤로 후퇴하게 됩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는 영국의 화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출신의 문학 교수이자 단테의 시를 흠모하는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단테에 버금가는 예술적 소양을 갖추길 바라며, 아들의 이름을 '단테'로 지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로세티는 어린 시절부터 단테의 작품에 친숙해졌고, 이는 그의 예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세티는 단테의 시와 작품을 외우고 다녔으며, 자신을 단테의 분신으로 여길 정도로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가브리엘의 가족은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형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William Michael Rossetti, 1829-1919)는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로 활동했습니다. 라파엘 전파(Pre- Raphaelite Brotherhood)의 일원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윌리엄은 라파엘 전파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으로, 예술과 문학에 대한 비평을 통해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기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비평과 기록은 로세티의 작품이 더 널리 알려지고 평가 받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의 여동생 크리스티나 로세티(Christina Georgina Rossetti, 1830-1894)도 탁월한 시인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중요한 문학 인물 중 한 사람이고요. 종교적 주제와 여성의 경험을 다룬 시로 유명합니다. 크리스티나의 대표작으로는<고블린 시장과 다른 시들 Goblin Market and Other Poems>(1862)이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상징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띱니다. 또한 헌신적인 기독교 신자로, 종교적 주제와 시와 찬송가도 많이 썼습니다. 

 


 

 

그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작품으로 가 보실까요?

제 개인적인 느낌은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여성들은 대부분 중성적인 인상입니다. 마치 동일한 사람을 이름만 달리하여 작품화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뮤즈들입니다.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했죠.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모델은 4명입니다. 아내 엘리자벳스  시달( Elizabeth Siddai, 1829-1862), 가정부, 정부, 뮤즈인 패니 콘포스( Fanny Cornforth, 1835-1909),  모리스의 아내 제인 모리스(Jane Morris, 1839-1924), 그리고 모델 알렉사 와일딩( Alexa Wilding, 1847-1884) 입니다. 

 

 

 

 

Pia de' Tolomei, 1868, Spencer Museum of Art, Lawrence,Kansas/wikipedia

 

 

 

 

 

붉은 머리, 매력적인 여인이 멜랑콜리(Melancholy)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읽다 만 듯 보이는 편지 , 성경책, 그리고 묵주가 조용히 공간을 채웁니다. 그런데 반지를 만지작 만지작 하고 있는 걸 보면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듯 싶습니다. 서양 역사에서 멜랑콜리(Melancholy)라는 단어가 기원전 4세기부터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멜랑콜리'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 화가도 있습니다. 라파엘 전파(Pre- Raphaelites)대표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입니다. 

 

 

 

 

 

 

 

<톨로메이 라 피아  Pia de' Tolomei>(1868) 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라 피아'는 연옥에서 단테를 만나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합니다. 실제로 남편에 독살당한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했다고 합니다.   라 피아의 남편은 결혼 후 사랑이 식자, 아내를 죽이기 위해 요새 꼭대기에 가둬 서서히 죽게 만듭니다. 남편이 라 피아를 죽게 만들면 결혼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에서 왼손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만지고 있는 것은 그 반지를 끼워준 사람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기도서 위의 묵주와 머리 위의 무화과나무는 종교적 의무를 상징합니다. 의자에 힘없이 기대어 앉아 있는 자세와 창백한 피부는 죽음의 길에 가까워졌음을 상징합니다. 

 

 

 

 

1868년 로세티가 그린 '톨레메의 라 피아 <La Pia de' Tolomei>'는 멜랑콜리 (Melancholy)분위기를 자아내도록 그려진 작품입니다. 절친이었던 윌리엄 모리스(Willam Morris, 1834-1896)의 아내를 모델로 했죠. 로세티는 제인이 사랑하지도 않는 모리스와 어쩔 수 없이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리스가 제인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다고 여겼죠..  원래 이 그림의 주인공은 로세티의 또다른 그림에서 모델로 자주 등장하는 알렉사 와일딩(Alexa Wilding, 1847-1884)이었습니다. 원래 와일딩을 모델로 해 그렸던 작품을 제인으로 바꾼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제인의 멜랑콜리(우울함)을 표현하기 위해 고개를 앞으로 꺾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결혼반지를 만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모리스와의 결혼생활을 후회하는 제인을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초크로 그린 '톨로메이 라 피아', 모델 알렉사 와일딩(Alexa Wilding), 1868, 피츠 윌리엄 박물관/경향신문

 

 

 

 

왜 로세티는 와일딩 대신, 모리스의 아내 제인(Jane Morris, 1839-1924)으로 주인공을 바꿔서 그림을 완성했을까요? 완성작을 그리기 전 습작에서는 와일딩(Wilding)을 모델로 한 그림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초크로 그린 이 습작이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됩니다. 2018년 12월 4일 부터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피츠윌리엄 박물관에서 열리는 '이보르 베첼러 경 부부 수집 & 기증품 전 에서 선을 보이게 됩니다.

 

 

 

2005년 88세로 세상을 떠난 이보르 베텔러 경은 영국 던디대학 교수였습니다. 아내는 수십년 간 예술품을 수집했다고 해요. 두 사람은 1956년 에딘버러의 한 중고서점에서 로세티의 작품을 발견하고 56파운드에 구매했습니다. 1950년대의 56파운드를 2017년 가치로 환산하면 1823파운드 (약 262만원)정도입니다. 2014년 소더비 경매에서 로세티의 작품이 700만파운드(약 100억원)경매예상가로 매겨졌다고 합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친구의 아내 제인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로제티는 그녀를 모델로 작품을 열성적으로 제작합니다. 제인을 그린 작품들은 그의 전성기를 대표하는데, 로제티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이 마음껏 발휘됩니다. 로제티가 생각하기에, 제인이 남편과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제인의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 <톨로메의 라 피아> 입니다. 

 

 

 

 

여인의 오른쪽 끝에 있는 담쟁이는 "나는 내가 붙은 곳에 죽을 것"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식물로서 전통적으로 부부간의 정절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 작품에서 남편을 따르는 것은 죽음이 된다는 의미로 쓰였고요. 로세티에게 있어 묘사되는 여성들은 당시 유럽에서 진행되던 변혁의 시대에 걸맞지 않게 수동적입니다. 남편 또는 남성에 의해 좌우되는 여성의 모습이 대부분이죠.  아이러니한 것은 그림의 내용상으로는 수동성을 묘사하나, 표현되는 여성의 이미지는 팜므파탈적이고 중성적이며 독립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팜므파탈( femme fatale): 프랑스어로 "치명적인 여성"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는 남성을 유혹하여 파멸로 이끄는 매력적인 여성을 가리킵니다. 팜므파탈은 종종 영화나 문학에서 등장하며, 남성 주인공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캐릭터로 묘사됩니다. 이 개념은 단순한 섹시함을 넘어서, 복잡한 감정과 위험을 내포한 여성상을 나타냅니다. 

 

 


 

 

The Girlhood of Mary Virgin, 1849, Tate Britan, London/wikipedia

 

 

 

<The Girlhood of Mary Virgin>(1849)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Dante Gabriel Rossetti)의  첫 주요 유화 작품입니다. 라파엘 전파( Pre- Raphaelite Brotherhood)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이고요.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의 어린 시절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어머니 성 안나의 지도 아래 백합을 수 놓은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지요. 배경에서 아버지 요아킴은 포도나무를 다듬고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도래를 암시합니다. 

 

 

 

로세티는 이 작품에서 다양한 상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닥의 교차된 종려나무 가지는 성주간을, 책의 색상은 기독교의 덕목을 상징합니다. 작품의 모델은 로세티의 어머니와 여동생 크리스티나가 맡았으며, 로세티는 이 작품을 통해 라파엘 전파의 새로운 예술 운동을 알렸습니다. 

 

 


 

Ecce Ancilla Domini, 1850, Tate Britain, London/wikipedia

 

 

 

 

<Ecce Ancilla Domini>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1850년에 제작한 유화로, 현재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성경의 수태고지를 주제로 하며, 성모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 탄생의 소식을 듣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로세티는 이 작품에서 제한된 색상 팔레트를 사용하여 상징성을 강조했습니다. 흰색은 순결을 상징하며, 파란색은 성모 마리아의 망토를 표현할 때 주로 쓰던 색이고, 빨간색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냅니다. 백합은 순결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례 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전시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로세티는 이후 공공 전시를 꺼리게 되었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J4B-CWYgctY

 

 

 

 


Arthu's tomb, 1855/wikipedia

 

 

 

 

< Arthur's Tomb>(1855)는 아서 왕 전설을 주제로 한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란슬롯 경과 귀네비어 여왕의 마지막 만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란슬롯은 아서왕의 대리석 조각상 위에 몸을 굽히고 귀네비어의 얼굴을 응시하며 간청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로세티의 초기 라파엘 전파 시기의 대표작 중 하나로, 강렬한 감정과 드라마틱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여왕의 눈빛이 매섭습니다. 

 

 


 

Found, 1854, Delaware Art Museum, Wilmington, Delaware/wikipedia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작품 < Found>는 1854년에 시작된 미완성 작품입니다. 도시에서 길을 잃은 여성과 그녀를 발견한 옛 연인의 재회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도덕적 타락과 구원의 주제를 탐구하며, 산업화된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와 고통을 반영합니다. 로세티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림 속 여성의 모습은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이상화된 여성상으로 그려졌습니다. <Found> 는 로세티의 중세적 이상과 사회적  현실을 결합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키스당한 입 Bocca Baciata, 1859, Museum of Fine Arts, Boston, Boston/wikipedia

 

 

 

 

위의 그림은 <보카 박시아타 Bocca Baciata >입니다.  <키스당한 입>으로 해석되지요.  이 작품은 '퍼니 콘포스' 라는 여성과 밀애를 나눌 당시에 만든 작품입니다. 제목이 도발적이죠. <키스한  여성>도 아니고, "당한"으로 묘사한 이유는 <키스당한 입>이라는 용어를 14세기의 작가 보카치오에게서 인용한 때문입니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의 작가인데, 데카메론은 "데카"에서 보듯이 100편의 단편들로, 당시에 보기 드물게 중세의 외설적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운명의 힘, 인간의 의지력, 비극적으로 끝맺는 사랑, 행복한 결말이 있는 사랑, 목숨을 건 영리한 대답, 남자를 속이는 여자의 속임수, 사람들의 속임수, 미덕 등 온갖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조반니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 1313-1375)
1313년 이탈리아 체르탈도에서 태어난 소설가이자 시인입니다. 그는 피렌체 르네상스를 이끈 주요 인물 중 하날, 단테와 페트라르카와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데카메론>은 흑사병을 피해 모인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가톨릭 교회의 부패에 대한 비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보카치오는 또한 외교관, 역자, 신화작가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문학 작품을 남겼습니다. 

 

<데카메론>:  중세 유럽판 '천일야화'입니다. 액자 소설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를 떠난 여자 일곱 명과 남자 세 명이 나폴리 근처의 빌라에 모여 열흘 동안 하루에 한 사람씩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인물은 매일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총 100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다양한 인간 군상과 사회적 풍자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이 작품은 성직자들의 부패와 위선을 풍자하며, 당시 사회의 도덕적 기준에 도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고전 문학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로세티는 이 그림의 뒤쪽에 "키스당한 입은 그 신선함을 잃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달이 그러듯이 다시 새로워진다."라는 문구를 새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구의 내용과는 달리 그림에서의 모델은  화려합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풀어 헤친 옷, 온통 황금색 장신구와 장미로 치장된 그녀는 "신선함"이라기보다는 "농염함"에 훨씬 가까운 모습입니다.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고요. 그의 동료들과 비평가들은 이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아 "로세티가 금욕주의 떠나 쾌락주의로 가고 있다."라고 폄하합니다. "기술적으로는 탁월하지만, 너무나 감각적이어서 구역질이 날 정도"라고 혹평하기도 하고요. 그림 속의 여성 '퍼니 콘포스'가 유독 그런 혹평을 받는 이유는 아마도 그녀와의 밀회를 로세티가 즐기는 와중에, 그의 부인 시달은 딸을 사산하고 우울증에 걸린 상태에서 마약 과다 복용으로 자살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Dantis Amor, 1860, Tate/wikipedia

 

 

 

이 작품은 로세티가 이탈리아의 대시인 단테 알리기에리에( Dante Alighieri, 1265-1321) 대한 깊은 동경을 표현한 것으로, 그의 문학적 영향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로세티는 단테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여러 차례 그의 주제를 반복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이는 그의 예술적 탐구와 중세에 대한 이상화된 표현의일환입니다.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 1829-1862)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아내이자 유명한 모델로, 라파엘 전파( Pre- Raphaelite Brotherhood) 화가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1829년에 태어나 1862년에 요절했습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10년간의 긴 약혼기간, 2년여의 짧은 결혼기간이 전부였습니다. 그녀는 결혼한 후에도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키워갔습니다.  남편의 후원으로 공부를 이어갔고, 라파엘 전파 화풍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색을 담아 작품 활동을 해나갑니다. 시달의 작품은 <오필리아를 넘어>라는 전시로 2018년 영국 워트윅 대저택에서 대중에게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엘리자 벳스 시달은 로세티의 작품에서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묘사되 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달과 로세티와의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남편 로세티의 끊임없는 바람기와 아이를 사산하고 우울증으로  힘들어 합니다. 급기야 아편중독에 시달리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한동안 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로세티는 그의 작품에 언제나 여성의 이상적인 전형으로 애수에 젖은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녀의 죽음 이후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가고요.

 

 

로세티는 아내가 죽자 그이 시집을 관 속에 같이 묻었으나 친구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7년 후에 시집을 펴내어 간행합니다.

 

엘리자베스 시달이 죽은 지 1년이 지났을 때 로세티가 그린 초상화 . 축복받은 베아트리체 Beata Beatrix, 1870, Tate Britain,London/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ZfrYS5gzGlI

 

The painting's compositional sketch/wikipedia

 

 

 

 

 

 

Beata Beatrix, 1871-1872, Art Institute of Chicago , Chicago/wikipedia

 

 

 

 

 

 

 

라파엘 전파 (Pre-Raphaelite Brotherhood)의 가장 유명한 모델이자 뮤즈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 사람이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시달( Elizabeth Siddal, 1829-1862)입니다. "리치"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녀는 풍성한 빨간 곱슬머리에 짙은 눈꺼풀을 가진, 키가 크고 인상적인 이목구비의 소유자 였지요.  본래 모자 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노동계급의 딸이었습니다. 존 에버렛 밀레이가 "리치"를 모델로 그린 <오필리어의 죽음>은 세익스피이어의 오필리어 캐릭터를 밀레의 그림에 그려진 오필리어와 동일시할 정도로 대단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영감을 받은 작가들이 그린 <오필리어 > 그림 중에 가장 잘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2024.08.18 - [지식&교양] - 51-34.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 81)

 

51-34.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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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oved, 1865-66/Tate Gallery, London/Artchive

 

 

 

 

이 작품은 다양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기념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특히 네 명의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묘사하고 있지요. 그림에는 흑인 아이가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미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도 있지만, 정치적 의도 없이 미적 요소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작품의 액자는 로세티가 직접 디자인했으며,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작품에서 모델로 사용된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부 역할은 마리 포드(Marie Ford)가 맡았으며, 그녀는 아일랜드계 모델이었습니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여성들은 로세티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모델들로, 케이티 맥도날드(Katie McDonald), 윌리엄 모리스의 아내 제인 모리스(Jane Morris) , 그리고 피델리아 브리지스(Fidelia Bridges)입니다. 

 

 


 

 

Monna Vanna, 1866,Tate Britain,London/wikipedia

 

 

작품 <Monna Vanna>(1866)는  유화로, 알렉사 와일딩(Alexa Wilding, 1847-1884)을 모델로 한 반신 초상화입니다. 이 그림은 베네치아의 이상적인 여성미를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녀는 화려한 흰색과 금색의 자수 드레스를 입고 깃털 부채를 들고 있습니다. 작품의 원래 제목은 < Venus Veneta>로 , 티치아노 등 르네상스 화가들의 전통에 대한 반응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후 <Monna Vanna> 로 제목이 변경되었으며, 이는 단테 알리기에리( Dante Alighieri, 1265-1321)의 < La Vita Nuova>에 등장하는 인물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Monna Vanna>는 여러 상징을 사용하여 베네치아 여성의 이상적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작품에서 사용된 주요 상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이 들고 있는 깃털 부채는 우아함과 세련미를 상징합니다. 그림 속 여성은 다양한 보석과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으며, 이는 그녀의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성격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그림의 주제를 더욱 부각시키며, 로세티의 화려한 세부 묘사를 보여줍니다. 작품의 오른쪽 상단에 위치한 꽃병과 여성의 금색 브로케이드 로브에 있는 꽃무늬는 봄고 새로운 시작을 상징합니다. 이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 La Vita Nuova>에서 영감을 받은 요소입니다. 

 

이 작품은 제목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 La Vita Nuova>는 봄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며, 이는 로세티의 아내 엘리자베스 시달( Elizabeth Siddal, 1829-1862)의 죽음 이후 그의 삶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Tiziano Vecellio, 1488-90 ~1576)는 이탈리아 베니치아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그는 캔버스에 유채 기법을 개척하여 서양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은 베네치안 학파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들의 영향은 유럽 전역에 퍼졌습니다.
대표작으로 < 풀밭 위의 콘서트>, <천상과 세속의 사랑>, <성모의 승천>, <우르비노의 비너스> 등이 있습니다. 

 

 


 

로세티가 패니 콘포스(Fanny Cornforth)를 모델로 그린 '레이디 릴리스' Lady Lilith, 1868, Wilmington, Delaware/wikipedia

 

 

 

 

 

로세티의 곁에는 늘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패니 콘포스 (Fanny Cornforth 1835-1909)는 시달이 죽자 로세티의 집으로 들어가 가정부로 일했습니다. 동시에 로세티의 뮤즈이자 정부이기도 했지요. 로세티는 1856년 콘포스를 만난 뒤 그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시달이 콘포스를 매우 싫어했다는 설도 있고, 일부 학자들은 시달이 콘포스의 존재 자체를 몰랐을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콘포스는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내면이 매력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가정부의 딸로 태어나 가난하게 자란 콘포스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로세티의 친구들은 고상하지 않은 콘포스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종종 둘을 떼어놓으려고 했다는 군요. 

 


 

 

 

이후 로세티의 마음을 훔친 건 제인 모리스 (Jane Morris, 1839-1924)였습니다. 1857년 로세티는 제인을 마주치고 그의 아름다움에 반해 작품 모델 제안을 합니다. 가난한 마부의 딸이었던 제인은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모델이 됩니다.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 1834-1896)또한 제인을 그리며 그의 매력에 빠져듭니다. 모리스는 가난한 집안의 제인과 결혼하기 위해 계획을 세웁니다. 바로 제인에게 다양한 교육을 시킵니다. 똑똑하고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제인은 곧 런던 상류층 여인들 못지않게 불어와 이탈리아어에 능숙해졌고 뛰어난 피아노 연주 실력까지 갖춥니다.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는 영국의 디자이너, 시인, 소설가, 번역가, 사회주의자입니다. 그는 미술공예운동과 영국 전통 직물 예술의 부활에 기여했으며. 근대 판타지 문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리스는 예술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입니다. 모리스-마샬-포크너 회사를 설립하여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또한, 그는 초창기 사회중의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예술 철학은 "미적 사회주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예술이 사회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술의 쇠퇴를 극복하기 위해 예술 개혁과 사회 개혁을 강조했습니다. 모리스는 공예품 제작 과정에서 창의성과 장인정신을 중시하며, 작업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회를 꿈꿨습니다. 그의 철학은 단순히 예술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창조적 노동과 삶의 방식에 적용될 수 있은 원칙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모리스 부부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아내 시달을 잃은 로세티의 마음이 제인에 흔들렸고, 제인 또한 로세티의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더 놀라운 건 모리스가 아내와 친구의 사랑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모리스는 로세티와 공동 임차인으로 여름 별장을 빌려 제인과 아이들을 지내게 했습니다. 로세티는 제인을 작품의 뮤즈로, 인생의 연인으로 여겼습니다. 인정받은 불륜 화가는 걸작을 남겼습니다. 

 

 

 

 

 

Pandora, 1871, private collection/wikimedia commons

 

 

 

 

 

<판도라>는 그의 친구 윌리엄 모리스의 아내인 제인 모리스를 신화 속 인물 판도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전적 주제와 그의 뮤즈인 제인 모리스에 대한 로세티의 매혹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녀는 그의 작품에서 중심적인 역할를 하는 신비롭고 영혼이 깃든 아름다움을 구현했습니다. 그림에서 판도라는 재앙을 세상에 풀어놓은 상징으로 붉은 연기로 표현된 영혼들이 나오는 운명의 상자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습니다.  상자 안에는 '희망'이 남아 있고요. 이 작품은 풍부한 상징성과 로세티의 개인적, 예술적 관심사를 반영한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Veronica Veronese, 1872/ Alexa Wilding Archives, Pre-Raphaelite Sisterhood

 

 

 

 

 

<Veronica Veronese>는 1872년에 제작된 유화로, 알레사 와일딩( Alexa Wilding, 1847-1884)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이 작품은 로세티의 또 다른 작품인 <Lady Lilith>와 짝을 이루도록 구상되었습니다. < Veronica Veronese>는 창작의 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예술적 영혼이 창조 행위에 참여하는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그림 속의 상징으로는 자연과 영혼의 결합을 나타내는 새와 다양한 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미국 델라웨어 아트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Veronica Veroness>의 배경 이야기는 예술 창작의 과정을 주제로 합니다. 이 작품은 음악을 작곡하는 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주인공 베로니카가 새의 노래를 들으며 영감을 얻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작품 속 상징으로는 자유로운 새와 다양한 꽃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예술적 영혼과 창조의 과정을 나타냅니다.작품에서 새는 자연의 소리와 영혼의 결합을 나타내며, 이는 예술 창작의 신비로운 새벽을 상징합니다. 또한 그림에는 다양한 꽃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새장 안의 카모마일은 역경 속의 에너지를, 앵초는 젊음을, 수선화는 반성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상징들은 예술 창작의 과정을 알레고리로 표현하는 데 기여합니다. 

 

 

 


 

 

페르세포네 Proserpine, 1874, Tate Britan,London/wikipedia

 

 

 

 

 

 

 




아득히 먼, 빛, 싸늘한 환호를 가져오는,
벽 위의, 하나의 순간, 그러나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 내 먼 궁전의 문
아득히 먼, 황량함에서 피아난 하나의 꽃
잔인한 과일, 단 한 번 맛본 것만으로 벗어날 수 없는
아득히 먼, 지하세계의 회색빛으로부터의 하늘
뼛속으로 스며드는 냉기, 아득히 먼, 멀고 먼
밤들, 그러했던 낮들로부터 오게 될


아득히 멀리, 자아로부터 이토록 멀리 떨어진 듯한 나, 그리고 날개
생각에 잠긴 낯선 길들, 그리고 신호에 귀 기울이는 
그리하여 아직도 파리한 영혼에 기우는 어떤 마음
<누구의 소리인가, 내 깊은 곳에서 이끌려오는 , 끝없이 탄식하는 이것은>
"그대로 하여 나 비통에 잠기니, 불행한 페르세포네여!"

-<로세티의 페르세포네>그림 위쪽에 적혀 있는 제인을 위한 시-

 

 

 

 

 

오른쪽 위의 글귀는 이탈리아어로 쓴 소네트입니다.  제인에 대한 로세티의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jdCOUGrNK8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 그리고 제인 모리스(Jane Morris, 1839-1924)의 위험한 줄타기가 시작됩니다. 로제티와 제인의 사랑은 모리스를 불행하게 만들면서 끝내는 모리스가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레드 하우스(Red House)로 들어가 모리스부부와 로제티가 함께 동거를 하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 집니다. 함께 동거하며 제인을 모델로 그린 로제티의 페르세포네 작품입니다.  

 

 

 

 

그리스신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Proserpine). 페르세포네의 아름다움에 반한 하데스가 그녀를 꾀어 지옥으로 데리고 들어 갑니다.  어머니 데메테르는 딸을 찾기 위해 세상을 떠돌다 대지를 돌보지 않으니 대지가 황폐해집니다. 어머니에게 보내달라고 하는 페르세포네에게 석류를 먹으면 보내 주겠다고 합니다.  세상에 나가기 전에 지옥의 음식을 먹은 페르세포네(Proserpine)는 끝내 하데스의 아내가 되어 1년 중에 3개월은 지옥에서 살게 됩니다.  그 후 페르세포네가 지상에 올라와 어머니와 있을 때는 곡식이 무르익고 페르세포네가 지하로 내려가는 3개월은 차가운 겨울이 된다는 하데스의 여인 페르세포네 입니다. 

 

 

 

 

제인은 왼손에 한입먹은 석류를 쥐고 있습니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잡은 제인의 얼굴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고요. 아마도 정말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로세티와의 정분을 모리스에게 말하려고 다짐을 하는 건지 그녀의 꼭 다문 입술이 더 비밀스러워 보입니다. 

 

 

 

구불구불한 머릿결과 마치 바닷물이 출렁이듯 물결치는 불라우스는 페르세포네를 신비스럽게 만들어 줍니다.  페르세포네의 여리고 순한 아름다운 여신의 우아함보다는 팜무파탈의 자신을 송두리째 던질 수 있는 강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도 남편 모리스와 애인인 로제티 사이에서 고민하는 제인은 무거울 수밖에 없는 시선과 불안한 가슴을 야무진 입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 합니다.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시대로 성실한 부부관계, 모범적인 가정생활이 우선시 되는 사회였습니다.  로제티와의 동거는 가장 기본을 헤치는  사회적 비난을 받는 가십거리로 모리스에게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로세티와 제인, 두 사람의 사랑은 제인이 로제티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게 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가 비난을 받자 친구인 모리스는 로제티에게 제인과의 관계를 청산하기를 부탁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리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동거에 들어갑니다. 

 

 

 

제인을 사랑했던 모리스는 불륜을 인정하고 그들을 자신의 영지 켐스코트로 불러들입니다.  두 사람은 한때 공개적으로 행복한 생활을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앗던 제인과의 관계는 로제티가 마약과 술에 중독되면서 끝이 납니다.  이미 로제티는 부인이 죽은 이후로 술과 마약에 쩔어 온  상태였습니다.  중독으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리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죠.  결국 그는 자살하기 위해 아내 시달과 같은 방법으로 마약을 통째로 들이켰으나, 죽지 못합니다.  말년에 클로랄 중독으로 정신병 증세까지 보이면서 외로움과 은둔 속에서 생을 마치게 됩니다. 

 

 

 


 

 

Roman Widow, 1874, Museo de Arte de Ponce, Ponce, Puerto Rico/wikipedia

 

 

 

 

 

 

로세티가 라파엘 전파 (Pre-Raphaelite Bortherhood)운동의 일환으로 제작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젊은 로마 과부가 남편의 유골함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하며, 그녀는 두 개의 작은 하프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주제는 죽은 이를 향한 지속적인 사랑을 표현합니다. 핑크색 장미는 사랑을 상징하고요. 그림의 또 다른 제목인 < Di^sManibus>는 로마 장례 기념비의 전형적인 문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작품의 모델언 알렉사 와일딩 (Alexa Wilding)입니다. 그녀는 1860년대 후반과 1870년대에 라파엘 전파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주요 모델로 활동한 인물입니다.  1847년경 영국 서리(Surrey)에서 태어난 그녀는 노동계급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 와일딩은 로세티가 번화한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후 그의 작품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로세티의 예술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낭만적인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Dante's Dream at the Time of the Death of Beatrice, 1871, The Walker Art Gallery Liverpool,Liverpool/wikipedia

 

 

 

 

 

단테의 작품<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단테의 여정을 다룬 서사시입니다. 이 여정에서 단테는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그의 젊은 시절 사랑했던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받습니다. 작품은 기독교적 사후 세계를 배경으로 하며, 다양한 역사적, 신하적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신곡>은 당시 유럽의 사후 세계에 대한 관점을 반영하며, 사회적 풍자와 단테의 정치적 견해도 담고 있습니다.

 

 

 

 

 로세티는 자신의 작품에서 주로 사용한 모델 중 한 명인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을 베아트리체로 묘사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시달은 로세티의 뮤즈이자 단기간이었지만 그의 부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로세티의 많은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 특히 <오필리아>와 다른 유명 작품에서도 모델로 활동했습니다. <Dante's Dream>은 로세티의 가장 큰 작품 중 하나로, 그의 그림 중 가장 대규모의 캔버스에 그려졌습니다. 그의 작품 중 이렇게 큰 규모의 캔버스에 그린 것은 드문 경우입니다. 

 

 

 

 이 그림은 원래 리버풀의 사업가 윌리엄 그레이엄(William Graham)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레이엄은 로세티의 주요 후원자 둥 한 명으로, 그의 작품 여러 점을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때로 < The Death of Beatrice>라고도 불립니다. 이는 작품의 테마가 단테의 <신곡>에서 베아트리체의 죽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 Dante's Dream>은 1883년 왕립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처음 전시되었으며, 당시 로세티의 작품 중 에서도 특히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평론가들의 반응은 혼란스러웠고, 로세티의 복잡하고 상징적인 스타일은 모두에게 호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Dante's Dream>에서는 로세티가 자신의 이상적인 사랑과 영감의 원천인 베아트리체를 통해 단테 알리기에리의 시적 세계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체의 죽음을 경계를 탐구합니다. 로세티의 작품은 감성적이며 신비롭고,때로는 멜랑콜리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가브리엘 로세티는 많은 상징적 요소를 사용하여 다양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이 작품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중 <신곡>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과 죽음을 테마로 하며, 각 요소들이 복합적인 상징과 의미를 가집니다. 그림의 배경에는 고딕 양식의 아치와 창문이 보이며, 이는 중세의 신비로움과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베아트리체의 순수하고 성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하고, 그녀가 단테에게 가지는 영적인 중요성을 상징합니다. 인물들의 자세와 표정은 각각의 심리적 상태와 관계의 복잡성을 나타냅니다. 단테는 애도하는 자세로 베아트리체를 바라보며, 베아트리체의 비통하고 평화로운 표정은 그녀의 죽음과 영적인 순결을 반영합니다. 

 

 

 

 

빨간색과 녹색은 각각 열정과 생명, 회복과 영원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로세티는 이 색상들을 사용하여 인물들의 감정적 상태와 이야기의 주제를 강조합니다. 죽은 새는 보통 예고된 죽음이나 잃어버린 무언가를 상징합니다. 이 그림에서 죽은 새는 베아트리체의 죽음과 단테의 슬픔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불가피한 운명과 상실의 아픔을 드러냅니다. 그림 전반에 걸쳐 흩어져 있는 장미와 꽃잎은 사랑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장미는 전통적으로 열정과 낭만적 사랑을 의미하지만, 꽃잎이 떨어져 있는 모습은 죽음과 슬픔을 암시합니다. 

 

 

 

 

 

 

 

이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여러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프리 라파엘라이트 형제단의 예술적 원칙과 목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지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는 1848년 영국에서 창립되었습니다.  로세티는 그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고요. 이 운동은 르네상스 이전의 '순수한 ' 예술 스타일로 돌아가자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자연과 정확한 세부 묘사에 특징입니다. < Dante's Dream>에서도 로세티는 섬세하고 정교한 세부 묘사를 통해 이러한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로세티의 작품은 강렬한 감정적 표현과 상징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깊은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Dante's Dream>에서는 단테의 사랑과 애도, 베아트리체의 영적 순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미술에서 보기 드문 심리적 깊이와 내면의 세계를 탐구하는 시도였습니다.  로세티는 미술과 문학을 결합하여 보다 풍부하고 다층적인 작품을 창조하였습니다. < Dante's Dream>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을 시각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이는 문학 작품을 기반으로 한 시각 예술의 가능성을 확장시킨 중요한 사례입니다. 로세티는 자신의 개인적 감정과 경험을 작품에 반영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사랑과 관계, 특히 자신의 뮤즈였던 여성들과의 복잡한 관계는 그의 작품에 깊이 있는 감정과 인간적인 면모를 더합니다. 

 

 

 

<Dante's Dream>은 이러한 미술사적 맥락 속에서 볼 때, 라파엘 전파의 예술적 이상을  구현하고, 빅토리아 시대 미술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예술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고, 후대 예술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h41iu_Isfw

 

 

 


 

 

 

La Ghirlandata, 1873,Guildhall Art Gallery,London/ wikipedia

 

 

 

 

< La Ghirlandata>(1873)의 모델은 알렉사 와일딩(Alexa Wilding)입니다. 이 작품은 로세티가 1874년에 제작한 같은 제목의 작품으로8번째이자 마지막 버전입니다. <La Ghirlandata>는 로세티의 전형적읜 스타일을 보여주며, 여성의 이상적이고 감미로운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작품은 로세티의 다른 작품들처럼 중세적 이상을 이상화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La Ghirlandata>의 주제는 주로 아름다움과 음악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합니다. 이 작품은 음악을 연주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예술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며, 로세티의 독특한 색채 사용과 상징주의가 돋보입니다. 그림의 상징성은 명확하지 않지만, 청춘과 예술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하면서도 인간의 유한성을 암시하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La-Bella-Mano, 1875, Delaware Art Museum/ wikimedia commons

 

 

 

로세티의 독특한 스타일과 주제를 잘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여성의 손을 중심으로 한 구도로, 로세티가 자주 다룬 주제인 여성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 여성은 우아하게 손을 바라보며, 로세티 특유의 장식적이고 화려한 색채가 사용되었습니다. <La Bella Mano>는 로세티의 다른 작품들처럼 중세적이고 이상화된 여성상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의 화신인 비너스를 중심으로 한 구도로, 로세티가 사랑과 미의 주제를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같은 제목의 소네트를 썼으며 , 이는 그림과 시가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그의 창작 방식을 보여줍니다. 작품 속 여성의 손은 순수함과 사랑의 상징으로, 로세티의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게 된 계기는 사랑의 물리적이고 영적인 측면을 융합한 여성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려는 그의 예술적 탐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로세티가 단테의 시와 로맨틱한 이상에 깊이 영향을 받아,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구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한 후 같은 제목의 소네트를 작성하여, 그림과 시가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창작 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Astarte Syriaca, 1877, Manchester Art Gallery, Manchester,UK/ Artchive

 

 

이 작품은 로세티가 사랑한 친구의 아내를 모델로 삼았으며, 신화적이고 신비로운 여신 아스타르테(Astarte)를 그린 것으로, 강렬한 색채와 장식적인 구도가 특징적입니다. 이 그림은 로세티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며, 중세와 14-15세기에 대한 동경을 이상화하여 표현한 작품입니다. 로세티는 불면증과 심신 쇠약으로 고통받았으며, 최면제와 술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그의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Desdemona's Death Song, 1878-1881/wikipedia

 

 

 

 

 

A Vision of Fiammetta, 1878, Private Collection of Andrew Lioyd Webber/wikipedia

 

 

 

 

 보카치오의 뮤즈인 피암메타에게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로세티의 "이중 작품" 중 하나로, 그의 시집 < Ballads and Sonnets>(1881)와 함께합니다. 그림의 액자에는 보카치오의 소네트" On his Last Sight of Fiammetta>와 로세티의 번역, 그리고 그의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섬세한 묘사, 감정의 깊이, 순수함을 상징하는 배합과 같은 상징적 요소가 특징입니다. 

 

 

 

 피암메타는  보카치오의 여러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로, 지혜롭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묘사됩니다. 그녀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필로스트라토와 경쟁적으로 이야기하며, 교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긍정적인 톤을 유지하지만,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날의 이야기에서는 예외적으로 다소 부정적인 톤을 보입니다 

 

 

 


 

The Day Dream, 1880,Victoria and Albert Museum/wikipedia

 

 

 

 

낭만주의 운동의 감정적 깊이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유화입니다. 이 그림에는 로세티의 자주 등장하는 뮤즈이자 비밀 연인이었던 제인 모리스(Jane Morris, 1839-1924)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에 앉아 인동덩굴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이 식물은 빅토리아 시대에 사랑을 상징하며 그들의 관계를 은근히 암시합니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모나 프리마베라>라는 제목이었으나, 나중에 몽상이라는 주제로 발전하여, 무성한 녹음 속에서 생각에 잠긴 듯한 모리스의 평온한 표정으로 잘 드러납니다. 그녀의 위를 향한 시선과 손에 든 인동덩굴은 성찰과 봄의 덧없는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은 감정적 깊이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로세티의 낭만주의를 반영합니다. 

 

 


 

 

The Salutation of Beatrice, Toledo Museum of Art, 1880-1882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작품 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생"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된 그림입니다. 로세티가 이탈리아 시인에 대해 가진 깊은 존경심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상화된 사랑을 상징하는 베아트리체의 환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로제티는 문학적 주제를 시각 예술과 결합하여 서사적인 특성을 만들어 내는 데 능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그가 추구한 문학적 미적 표현의 조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단테의 문학적 주제에 독특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됩니다. 이 그림의 모델은 제인 모리스(Jane Morris, 1839-1924)입니다. 로제티는 자신의 비전과 비교했을 때 작품의 실행에 대해 종종 불만족을 느꼈으며, 시와 회화 사이의 더 깊은 연결을 추구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QMZIDh-u8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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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화관을 늘어진 버들가지에 걸려고 할 때

심술궂은 은빛 가지가 갑자기 부러져서

오필리아는 흐느끼는 시냇물 속에 빠지고 말았어.

 

그러자 옷자락이 물 위에 활짝퍼져

인어처럼 잠시 수면에 피었었다는 구나.

 

그애는 마치 인어처럼

늘 부르던 찬송가를 부르더라 .

마치 자신의 불행을 모르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것도 잠깐

마침내

옷이 물에 스며들어 무거워지는 바람에

아름다운 노래도 끊어지고 

 

 

그 가엾은 것이 시냇물 진흑 바닥에 

휘말려 들어가 죽고 말았지.

-셰익스피어 <햄릿>중-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햄릿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인 오필리아의 죽음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주인공 '햄릿 Hamlet'보다 조연인 '오필리아'가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비극의 여주인공이라서 말입니다. 햄릿의 진실한 사랑을 끝내 지키지 못한 '오필리아'. 19세기 중, 후반 낭만주의 성향의 화가들의 상상력을 무한 자극했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햄릿: 덴마크 왕자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으로부터 숙부 클로디어스가 왕을 독살했다는 사실을 듣고 복수를 계획합니다. 결국, 복수 과정에서 많은 인물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2. 리어왕: 리어왕은 세 딸에게 왕국을 나누어 주고자 하지만, 두 딸의 배신과 막내딸 코델리아의 진실한 사랑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결과적으로 가족과 왕국이 파멸에 이릅니다. 

3. 오셀로: 베니스의 무어인 장군 오셀로는 이아고의 계략으로 인해 아내 데스데모나의 불륜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그녀를 죽인 후 진실을 알고 자살합니다. 

4. 맥베스: 스코틀랜드 장국 맥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에 따라 왕이 되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점점 파멸로 치닫습니다. 


 

 

 

Ophelia,1851-1852, Tate Britain , London /wikipedia

 

 

 

 

글을 읽고 각자 떠올려 본  오필리아의 모습이 비슷하신가요? 물위에 몸을 맡기고 먼 곳을 응시하는 사실적인 표현으로 우리 감각을 사로잡습니다. 수풀과 물이 함께 오필리아의 고통을 흘려보내는 정교한 자연의 모습이 감탄스럽고요. 19세기의 영국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오필리아 Ophelia>(1851-1852 )입니다. 

 

 

 

그의 작품은 마치 실제를 보는 듯 합니다.   물위에 누워 휴식을 즐기는 모습으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분명 허구의 이야기인데 사실적인 느낌이 드는 건 왜 일까요? 치밀하게 묘사된 '오필리아 Ophelia '주변 배경 때문일 겁니다.  기존의 그림들은 배경이 덜 중요한 요소로 생각되어 나중에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밀레이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잉글랜드 근교의 호그스밀 (hogsmill)강가에서 넉 달  동안 머무르며 배경을 그릴 정도로 인물보다 배경 묘사에 더 많은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치밀하게 묘사한 풍경위에 겹쳐진 밀레이의 시적 상상력이 나은 '오필리아Ophelia'인 거지요. 

 

 

 

 

 

'오필리아Ophelia'가 이렇게 죽게된 이유는 비극적인 상황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햄릿이 쓰여지던 16세기 후반 혹은 17세기 초반 영국 사회에서 여성은 주체적으로 삶을 살기는 어려웠습니다. 여성의 삶은 그녀 자신보다 그녀의 신분, 가족, 연인 등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필리아'가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은 그녀가 삶을 잃어버린 것이기도 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그녀의 죽음이 사고사를 가장한 듯 그려진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작품을 들여다보면 수십 종의 다양한 식물과 꽃들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각각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고요. 그림 속 버드나무는 세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강을 묘사한 부분에도 등장합니다.   '버림받은 사랑'을 상징하고요.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양귀비도 눈에 띄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쐐기풀은 고통, 흰색의 데이지는 순수, 제비꽃은 순결 혹은 젊은날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오필리아 귓가에  작은 '장미'꽃 보이시나요.  '오필리아Ophelia'의 '햄릿'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염려했던 친 오빠 레어티스가 그녀를 '5월의 장미'라 불렀다고 합니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 활동하던 그들을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화가들이라 부릅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런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TATE BRITAIN)에 소장되어 있는 존 에버릿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아 Ophelia>이고요. 그들은 라파엘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이전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화가들은  문학적 스토리, 낭만적 서정, 그리고 중세적 신비를  자신들의 그림에 녹여내려 했습니다.

 

 

 

존 에버릿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는 봄, 여름에는 풍경을 스케치하고 겨울 동안 주로 자신의 작업실에서 스케치한 풍경에다 전경에 형상들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인물이 들어 갈 자리는 비워 놓은 채 말입니다. '오필리아Ophelia'는 희곡속의 가상의 인물입니다. 스케치할 실제 이미지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화가들에게 인기 있어 던 모델은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이었습니다. 그녀는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대표라고 불리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연인이었죠. 나중에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가련한 오필리아의 운명처럼 그녀 역시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와와 불행한 결혼 생활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밀레이는 실제로 익사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느낌을 잡기 위해 밀레이는 엘리자베스 시달( Elizabeth Siddal, 1829-1862)을 무려 4개월 동안 물이 받아진 욕조에 누워 포즈를 취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겨울에 말이죠.  욕조의 차가운 물을 램프로 데우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지만 문제는 램프의 불이 자주 꺼져 폐렴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가 밀레이를 상대로 병원비와  치료비를 내지 않으면 법정에 고발 하겠다고 협박할 정도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2M7U8eCeHA

 

 

 

 


 

 

영국지도/ Freepik

 

 

 

 

 

얘는 천재니 얼른 입학시켜달라.
-밀레이의 엄마-

화가는 무슨 화가. 굴뚝 청소부 훈련이나 시키세요.
- 왕립예술원 원장-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는 어려서부터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신동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런  아들을 위해 왕립미술아카데미가 있는 런던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영국의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하신분이네요. 아무리 그래도 9살은 왕립예술원에서 공부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회장은 밀레이를 기초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불과 2년 뒤, 밀레이는 11살의 나이에 왕립 예술원에 들어갔습니다. 왕립예술원 역사상 최연소 입학생의 탄생이었습니다. 재학 중에 아카데미의 모든 상을 휩쓸었고요. 

 

 

 

 

왕립 예술원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묘사하는 르네상스 미술을 주로 가르쳤습니다.하지만 밀레이가 보기에 이런 미술은 비현실적이었습니다.

1848년 친구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 1828-1882),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 1827-1910) 등과  의기투합해 일종의 비밀 조직인 라파엘전파(Pre- Raphaelite Brotherhood)를 만듭니다.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는 르네상스시대의 라파엘로 이전의 자연관찰과 세부묘사를 그리던 중세 미술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의 매너리즘적 아카데믹 예술에 반발하고요. 라파엘 전파( Pre-Raphaelite Brotherhood)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에서 영감을 받아 사실적이고 복고적인 작품을 제작했으며,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를 특히 강조했습니다. 

 

 


 

 

 

 

 

Isabella, 1848-1849, Walker Art Gallery,Liverpool/wikipedia

 

 

 

 

밀레이가 제작한 완벽한 라파엘전파주의(Pre- Raphaelite Brotherhood)에 합당한 첫 작품은 <이사벨라 Isbella>(1848-49)입니다. 이 작품은 1849년 로제티의 첫 라파엘전파 작품보다 한 달 늦게 왕립미술원의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굉장히  사실적이어서 관람자에세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입니다. 

 

 

 

 

화면 속의 형제들은 라파엘전파의 구성원 일곱 명과 비슷해서 그가 라파엘전파 구성원들에 대한 자신의 형제애를 표명이라도 하듯 이사벨라의 의자 가장자리에 PRB라는 이니셜을 새겨놓았습니다. 왼편에 포도주잔을 들고 있는 인물이 페더릭 조지 스티븐스로 화가로 출발했지만 나중에 유명한 평론가가 되었습니다. 인물들의 얼굴표정에서 그가 모델들을 철저하게 관찰했음을 알게됩니다. 이렇듯 밀레이는 직업모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나 지인을 모델로 함으로써 충실한 묘사를 통해 각 인물의 특징을 살리며  생동감을 불어 넣습니다. 

 

 

 

 

 

존 키츠( John Keats, 1795-1821)의 시 <이사벨라, 혹은 바질 단지 Isabella:or the Pot of basil>는 라파엘전파 (Pre-Raphaelite Brotherhood)구성원들로 하여금 새로운 원칙을 완전히 실행하게 될 회화로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키츠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를 썼습니다. 주인공 으로 등장하는 이사벨라와 로렌초 Lorenzo의 이야기를 시의 소재로 다루었습니다.주인공 이사벨라가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 이후 그의 머리를 바질 화분에 묻고 애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제와 모델들의 의상이 라파엘로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존 키츠(John Keats, 1795-1821)는 생생한 이미지와 감각적이 매력을 지닌 시로 유명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었습니다.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14세 때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그는 상당한 양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은 생전에는 널리 인정받지 못했지만, 사후에 상당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엔디미온"과 "나이팅게일에게 부치는 노래"가 있습니다. 키츠는 25세의 나이에 로마에서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영향은 알프레드 테니슨과 윌프레드 오언과 같은 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키치의 시에서 이사벨라는 오빠들의 하인이었던 로렌초와 사랑에 빠집니다.  <이사벨라>는 오빠들이 여동생을 정략적으로 결혼시키려던 계획이 방해받자 매우 화가 난 모습을 나타낸 작품입니다. 불운한 운명의 연인을 주제로 한 이 작품에서 이사벨라와 로렌초가 운명의 핏빛 오렌지를 나눠먹는 중입니다. 후에 로렌초의 머리를 벤 뒤 숲속에 묻어버리는 오빠들 가운데 하나가 호두를 거칠 게 까면서 오른발을 앞으로 쭉 뻗어 이사벨라의 개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수평적 화면이 극적 효과를 자아냅니다.

 

 

 

<이사벨라>는 사실적이면서도 매우 양식화되어 있으며 계획된 신선함이 있습니다. 인물들의 빈틈없고 다양한 묘사, 어느 정도시대착오적이기는 하지만 세부에 대한 정확한 관찰, 멍청한 두 형제의 악의를 포착하는 화가의 방법 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개를 걷어차기 위해 다리를 뻗치는 모티프는 계획적입니다. 개를 쓰다듬는 이사벨라의 자연스러운 우아함은 로렌초에게서 오렌지 반쪽을 힘들게 받아들이는 상징적인 동작과 대조를 이루고요. 그리고 치밀한 세부묘사는 전체적인 구도의 비현실과 충돌합니다.

 

 

 

원근감이 무시된 채 좁은 공간안에 인물들이 빽빽히 차 있습니다. 공간 안에 함께 있을 뿐 서로에게 관심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배경에 보이는 항아리는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상징물로 존재하는 데, 로렌초가 살해당한 뒤 그의 영혼이 이사벨라에게 나타나 진실을 밝히자 그녀는 시체를 파내어 그의 머리를 항아리 속에 담아두게 됩니다. 

 

 

 

 

 구도는 화면의 테마가 되는 중심사건에서 급격하게 왼편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관람자의 눈은 천천히 왼편을 향하면서 울통불퉁하게 나열되어 있는 인물들의 얼굴을 보게 되고요. 이는 다시 건너편에 앚아 있는 인물들의 초상을 훑어보다가 불운한 여인의 부드러운 태도에 머물게 됩니다.  뒤쪽 벽을 덮고 있는 태피스트리의 평면성과 바깥쪽 풍경이 보이는 인접 벽면 사이의 관계 설정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공간이 애매모호하며, 풍경이 보이는 벽면은 테이블의 오른쪽 선과 평행을 이루면서 뒷면의 태피스트리로부터 오른쪽으로 꺽이는 각도로 설정된 것처럼 보입니다 . 태피스트리와 나란하게 옆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밀레이는 회화 공간을 재편성하려고 시도했지만, 자연주의적 관점의 요구에 구성의 대담함을 적용시키는 일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라파엘전파( Pre-Raphaelite Brotherhood)는 피사의 캄포 산토에 있는 15세기 프레스코를 본뜬 조반니 파오로 라시니오의 석판화집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동일한 양식으로 일련의 드로잉을 제작합니다.  이는 구성원들 모두가 동일한 양식을 구사한 유일한 예이고요. 밀레이가 1848년에 그린 드로잉 <장미덩굴 곁의 연인들 Lovers by a Rosebush>은 <이사벨라>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두 연인은 물론 개까지도 <이사벨라>와 동일한 모델로 보입니다. 또한 꽃에 대한 묘사에서 밀레이가 자연을 철저하게 관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밀레이의 <이사벨라>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져 있는 연인들에게 화를 내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사벨라와 로렌초의 이야기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이사벨라는 오빠의 하인인 로렌초와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사벨라의 오빠들은 그녀를 더 좋은 집안으로 결혼 시키기 위해  로렌초를 죽이기로 합니다. 그들은 로렌초를 죽여 숲에 묻어 버리고, 후에 로렌초의 죽은 영혼이 그를 그리워하던 이사벨라에게 나타나 사건의 진실을 밝힙니다. 결국 그녀는 숲속에서 로렌초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의 머리를 항아리 속에 담아둔 채 두고 두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14세기 중세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집으로,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를 떠난 일곱 명의 여성과 세 명의 남성이 나폴리 근처의 별장에서 열흘 동안 매일 한 사람씩 돌아가며 100개의 이야기를 나누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사랑, 불륜, 신분 상승, 인간의 탐욕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중세 사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데카메론>은 당시 사회적 상황과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림 오른쪽에 앉아 있는 여인이 바로 이사벨라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붉은 옷을 입고 접시를 들고 있는 남자가 로렌초이고요. 그들은 오렌지를 나누어 먹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오빠 중 한 명은 호두를 까면서 개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있네요. 이사벨라와 로렌초의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을 암시합니다.  또한 로렌초가 들고 있는 접시에 담긴 오렌지는 연인의 불행을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레이는 창가에 있는 큰 항아리와 시계꽃으로 이사벨라와 로렌초의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을 암시했습니다 . 시계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식물로서 꽃부리는 가시관을, 암술은 십자가의 못을, 꽃 수술은 못이 박힌 그리스도의 다섯 군데의 상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식탁 위에 있는 접시 중 하나는 살로메가 세례 요한의 목을 참수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 로렌초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Isabella and her lover, whose head ultimately ends up in a pot of basil, 1849/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HJOC637xFuA&t=1s

 

 

 

 

 


 

부모의 집에 있는 예수 (목수의 작업장) Christ in the House of His Parents, 1849-1850, Tate Britain , London/wikipedia

 

 

 

초기에 라파엘 전파의 그림들은 조롱을 받았습니다. 특히 <올리버 트위스트>로 유명한 인기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는 밀레이의 작품인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 Christ in the House of His Parents>를 택해, 혹독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찰스 디킨스 (1812-1870)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사회 비평가로,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위대한 유산 등이 있으며, 15개의 소설을 포함해 수많은 단편소설과 비평을 썼습니다.디킨스는 자신의 어린 시절 가난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노동자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고,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부모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1849). 실수로 손바닥을 못에 찔린 소년 예수는 피를 흘리고 있고, 가족들은 이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손바닥에 난 상처는 훗날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지요. 어머니 마리아는 소년 예수의 상처를 보고 걱정이 가득합니다.  잘 그렸지만 처음 발표했을 때 "불경하다"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밀레이가 1848년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일종의 비밀 조직인 라파엘전파(Pre -Raphaelite Brotherhood: 르네상스 거장인 라파엘로 이전 14,15세기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 ,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화풍을 추구하는 유파)를 결성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그리고 결성 이듬해 밀레이는 <부모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 >를 그렸습니다.

 

'이 훌륭한 작품을 보면 사람들도 우리 생각에 공감하겠지.'

 

완성된 작품을 본 밀레이는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은 밀레이의 그림에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성스러운 가족을 무슨 술주정뱅이와 거지처럼 그렸다. "

-찰스 디킨스-

 

밀레이는 화가로서 매장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그를 구해준 건 권위 있는 작가이자 예술평론가인 존 러스킨 (John Ruskin, 1819-1900)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그려낸 밀레이와 그 동료들이야 말로 영국 미술의 위대한 전통을 만든 사람들이다. "

 

러스킨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미술계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는 비평가의 한 마디에 여론은 단숨에 반전됩니다. 

 

"러스킨 말을 듣고 나서 그림을 다시 보니, 엄청나게 잘 그리긴 했네..."

 

뭐 ,이런식으로 말이죠. 

 

러스킨이 거들어 준 것은 사실이지만,  밀레이의 그림 실력이 워낙 뛰어났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밀레이는 러스킨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승승장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RPLiTZAry4

 

 

 

 


 

 

 

 

the Return fo the Dove to the Ark, 1851/wikipedia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 1829-1896)의 작품 < The Return of the Dove to the Ark>는 1851년에 완성된 그림으로 , 성경에서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방주로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평화를 상징하며, 노아의 두 며느리가 비둘기를 맞이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저명한 미술 비평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이 작품의 세부 묘사와 감정적 깊이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러스킨은 이 작품을 매우 좋아하여 구매하려 했으나 , 이미 토머서 콤에게 팔린 상테였습니다. 이 그림은 감정과 자연에 대한 신성한 연결을 강조하는 낭만주의 스타일로 특징지어집니다. 

 

 


 

 

Mariana, 1851/wikipedia

 

 

 

 

 

 

알프레드 테니슨 경의 시 <Mariana>는 셰익스피어의 연극  < Measure for Measure>에 등장하는 인물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연인에게 버림받고 황량하고 쇠락한 환경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리아나라는 여성을 묘사합니다. 시 속의 이미지는 마리아나의 고립감과 절망감을 강조합니다. 또한 그녀는 충족되지 않은 삶과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한탄합니다. 

 

 

 

이런 시 내용을 바탕으로 밀레이가 그린 <Mariana>입니다.  외로움 속에서 이미 떠난 연인을 허망하게 기다리는 여인의 고독함이 묻어납니다. 과거 빅토리아 시기 영국에서는 결혼 할 나이가 된 여성의 경우 집에서 수를 놓으며 연인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직물을 잘 짜는 여성의 경우 훌륭한 신붓감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여인들은 오랜 시간 작업에 몰두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여성들이 바깥출입은 뜸할 수 밖에 없었지요.  즉 좋은 직물짜기 솜씨는 여성의 정절과 정숙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림 속 마리아나의 경우 자수에 공을 들이고, 정숙한 여인이 되고자 애를 써봐야 허무하기만 할 뿐입니다.  마리아나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나오는 여주인공으로 바다에서 결혼 지참금을 몽땅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정혼자에게  버림받은 가엾은 여자이지요.  그래서인지 , 자수를 두다가 피곤한 듯  허리에 손을 받치고 기지재를 켜는 여인의 그림은 쓸쓸하기만 합니다.  주변으로 떨어진 잎사귀가 더 마음속을 스산하게 만들고요. 그림의 배경이 되는 스테인드 글라스 그림은 '수태고지 ' 장면으로, 그녀의 성적 좌절감을 상징합니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와 달리 스테인드글라스에 수놓아진 현란함은 그녀의 욕망과 현실의 상반된 이미지를 연출하는데 효과적으로 쓰였습니다. 밀레이의  섬세한 색채 및 세부 표현이 일품입니다. 

 

 

 


 

 

 

신부 들러리 The Bridesmaid, 1851/Artchive

 

 

 

 

 

 

 

패널에 유화 작품으로 피츠윌리엄 박물관 소장 작품입니다. 당시의 미신을 시각화한 흥미로운 그림입니다 . 이 그림은 퍼스의 아네트 별장 정원에서 그려졌습니다. 밀레이는 이 장소에서 영감을 받아 젊은 여인의 모습을 통해 당시 사회의 미신과 풍습을 표현했습니다. 

 

작품은 신부 들러리의 역할을 넘어서, 당시 결혼과 관련된 미신적 행위를 시도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관습과 젊은 여성들의 기대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오렌지색 머리를 풀어헤친 젊은 여인이  어떤 미신적인 행위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A Huguemot, on St. Bartholomew's Day, 1852, private collection/wikipedia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위그노 연인 >(1851-1852). 라파엘전파(Pre-Rapahelite Brotherhood)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이 그림은 1572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가톨릭 세력의 신교도 학살을 다룬 작품입니다. 젊은 여성은 연인의 왼팔에 '카톨릭 신자의 상징'인 흰색 완장을 두르려 하지만, 남성은 여인을 부드럽게 제지하고 있습니다. 저 흰색 완장이 있어야만 무사히 통과 할 수 있을 텐데요.  이 작품은 영국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라파엘전파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1572년 8월 24일 부터 10월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가톨릭 세력이 개신교 신자였던 위그노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살을 벌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위그노 전쟁 중에 발생했으며,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긴장과 갈등이 심화된 결과였습니다. 학살은 결혼식에 참석하가 위해 파리를 방문한 위그노 귀족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으며,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가톨릭 군대가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aFnNykLgng

 

 

 


 

 

The order of Release, 1852-1853, Tate Britain, London/wikipedia

 

 

출처:경향신문

 

 

 

 

자코바이트 사건은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스튜어트 왕조의 복위를 목표로 한 반란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제임스 2세의 지지자들이 주도했으며,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특히 강력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자코바이트는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잉글랜드의 가톨릭 군주에 대한 거부감과 프랑스의 제한된 지원으로 인해 실패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745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이끈 반란으로, 이는 결국 1746년 4월 16일, 컬로든 전투에서 패배로 끝났습니다. 자코바이트 반란의 마지막 전투로, 스코틀랜드 인버네스 근처 컬로든 습지에서 벌어졌습니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이끄는 자코바이트 군대는 컴벌랜드 공작이 지휘하는 영국 정부군과 맞섰으나 패배했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자코바이트 반란은 종결되었고, 스코틀랜드의 독립 항쟁도 사실상 끝이 났습니다. 

 

 

 

 

 

 

이 작품은 밀레이가  아내를 모델로 그린 그림입니다. 18세기 중반 반란에 가담한 스콜틀랜드 병사가 방면 받고 옥에서 풀려나는 장면입니다.  감격에 겨워 아내의 어깨에 머리를 묻은 병사와 주인을 만나 기뻐 날 뛰는 개, 아버지의 등장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잠든 아이의 표현이 무척 사실적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옥에서 풀려나는 순간, 그의 아내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습니다. 그림 속 여자는 남편을 구출하고자 성상납을 했습니다. 남편의 자유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치욕 앞에서 그녀는 웃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 속 그녀의 맨발은 고귀한 순결을, 성모마리아 베일 마냥 두른 파란 색 천은 거룩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Autumn Leaves, 1856, Manchester Cith Art Gallery,Manchester/wikipedia

 

 

 

 

 

 

<낙엽>(1856).

스산한 가을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네 명의 소녀가 마당에서 끌어모은 낙엽을 태우고 있습니다. 청순하고 아름다운 소녀들의 모습과 무덤을 연상시키는 낙엽 더미가 타들어가는 장면이 인상적인 대비를 이룹니다. 밀레이는 가을 특유의 쓸쓸한 분위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낙엽 타는 냄새를 특히 좋아해 '지나간 여름의 향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작품의 소재로 즐겨 삼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낙엽 더미를 둘러싼 소녀들이 각기 짓는 표정은 삶과 죽음을 대하는 저마다의 태도를 상징합니다. 

 

 

 

 

왼쪽 끝의 소녀는 낙엽 태우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 오른쪽에 있는 소녀는 움켜준 낙엽을 더미 위에 올려놓고 있으면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는 듯 보입니다. 빗자루를 든  소녀는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네요. 손에 과일을 든 소녀는 낙엽더미를 그저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림은 소녀와 낙엽이 라는 서로 대비되는 소재를 통해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세련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러스킨은 "황혼을 그림으로 완벽하게 표현한 첫 사례"라고 소개했습니다. 

 

 


 

 

The BlindGirl,1856, Birmingham Museum &Art Gallery, Birmingham/wikipedia

 

 

 

 

 

 

 

 

풀포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소녀의 거친 손에서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인 콘체르티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거리 음악가로 추정되는 눈먼 소녀와 그녀의 여동생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홍시처럼 불그레한 볼을 가진 눈 먼 소녀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어두운 하늘 아래 황금빛 들판과 더블 무지개가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내지만 그녀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감각을 통해 세상을 경험할 겁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더 아름다운 모습의 세상으로 말이죠. 그녀의 영혼의 순수함과 민감함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Peace Concluded, 1856, Minneapolis Institute of Arts Minneapolis/wikipedia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 Peace Concluded, 1856>은 크림전쟁의 종전을 반영한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소파에 기대어 평화를 알리는 신문을 들고 있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가정의 장면을 묘사합니다. 그녀의 주변에는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을 상징하는 장난감 동물들과 함께 노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전쟁의 최근 혼란과 대조적으로 가정의 평온함을 통해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안도감과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밀레이는 풍부한 색채와 세밀한 표정을 사용하여 그 순간의 감정적 깊이를 전달합니다. 

 

 


 

 

 

 

The Vale of Rest , 1858-1859/wikipedia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그림 <the Vale of Rest>(1858-1859)는 황혼의 묘지를 배경으로 두 명의 수녀가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한 수녀는 무덤을 파고 있고, 다른 수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10월의 일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가을 풍경과 수녀들의 활동을 통해 죽음과 자연의 순환이라는 주제를 반영합니다. 이 작품은 프리 라파엘파의 세밀한 묘사와 상징성으로 주목받으며, 명확한 서사가 없어 자연의 아름다움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숙고하게 합니다. 

 

 

 


 

Spring(Apple Blossoms), 1859/wikimedia commons

 

 

 

 

존 에버렛 밀레이의 1859년 작품 <Spring (Apple Blossoms)>는 영국의 레이디 리버 아트 갤러리에 소장된 유화입니다. 이 작품은 꽃이 만발한 사과나무 아래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젊은 여성들과 소녀들을 묘사하며, 젊음과 시간의 흐름을 상징합니다. 구도는 전경의 인물들과 함께 은근히 포함된 낫을 특징으로 하여 죽음을 암시합니다. 밀레이는 명확한 서사보다는 빛의 효과를 포착하고 시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w19oYd7TxY&t=1s

 

 

 


 

 

 

 

The Eve of St. Agnes, 1863/wikipedia

 

 

 

 

 

 

도판 <성 아그네스의 전야  The Eve of St. Agnes>(1863)는 존 키츠의 시 <성 아그네스의 전야>의 같은 제목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이 캔버스 유화는 주인공 마들렌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서 나오는 청록색 빛에 감싸여 옷을 벗는 깊이 있는 순간을 묘사합니다. 장면의 감정적 강렬함을 포착하며, 기대감과 초자연적인 주제를 반영합니다. 말레이의 해석은 키츠의 서사에서 벗어나 시의 세부 사항에 엄격히 따르기보다는 시각적 스토리텔링에 중점을 둡니다.

 


 

 

 

My First Sermon, 1863/ The Victorian Web

 

 

My Second Sermon, 1864/ The Victorian Web

 

 

 

 

<나의 첫번째 설교>(1863)

<나의 두 번째 설교>(1864)

 

 

다섯 살 짜리 자신의  딸을 모티브로 그린 이 연작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난생 처음 교회를 가서 설교를 들을 때는 긴장한 마음에 애써 똘망똘망하게 눈을 뜨고 있었지만, 두번째 설교에서는 그만 잠들어버리고 만 아이다운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화가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도 잘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Leisure Hours, 1864/Wikimedia Commons

 

 

 

 

 

이 작품은 사실주의 스타일로 그려졌습니다. 소녀들은 부유한 가정의 딸들로, 그들의 붉은 벨벳 드레스와 호화로운 주변 환경이 이를 나타냅니다. 소녀들은 글래스고의 부유한 섬유 상인인 존 펜더 경의 딸들입니다. 레드 벨벳의 느낌이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잘 표현되어 있네요.  장식적 배경이 강한 병풍, 아이들 앞에 놓인 어항 속 물고기 2마리. 럭셔리한 옷에 잠깐 부러운 마음도 들지만 왠지 아이답지 않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모습같아 답답함 또한 드는 작품입니다. 어항 속 물고기가 자유롭지 못한 아이들 모습 같기도 하고요.  이작품은 현재 디트로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Esther, 1865, private collection/wikipedia

 

 

 

구약성경의' 에스더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아하수에로 왕 시대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스더는 유대인으로서 왕비가 되어, 모르드개와 함께 유대 민족을 멸망시키려는 하만의 음모를 저지합니다. 에스더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왕비가 되었으며,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 음모를 발견하여 왕의 목숨을 구합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하만의 계획을 폭로하고,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의 부림절을 기념하는 배경이 됩니다. 

 

 

부림절(Purim)은 유대인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학살 위기를 극복한 것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이 절기는 '에스더서'에 기록된 사건에서 유래하며, 주사위(푸르)를 던져 학살 날짜를 정하려 했던 하만의 음모가 좌절된 날을 기념합니다. 부림절은 유대력 아달월 14일과 15일에 지켜지며, 에스더서를 읽고, 서로 음식을 나누고, 가난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들이 즐겁게 지내는 날로, 하만의 귀라 불리는 과자를 먹고 축제를 즐깁니다. 

 

 


 

 

Rosalind in the Forest, 1867-1868/Walker Art Gallery

 

 

 

 

 

 

이 그림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에 나오는 로절린드라는 인물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로, 주로 사랑과 정체성의 혼란을 다룹니다. 이 이야기에서 로절린드(Rosalind)는 그녀의 삼촌인 프레데릭 공작에 의해 추방되고, 친구 셀리아와 함께 아든 숲으로 도망칩니다. 로절린드는 가니미드라는 소년으로 변장하고, 셀리아는 농부 여인 알리애나로 가장 합니다. 그들은 숲에서 다양한 인물들과 얽히며 사랑과 정체성의 문제를 탐구합니다. 결국 로절린드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여러 커플이 함께 결혼하며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사랑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사랑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이 희곡은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처럼 유머와 풍자를 통해 사회적 관습을 비판합니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 스타일로 그려졌으며, 리버풀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의 작은 버전은 1868년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되었습니다. 

 

 


 

 

The Boyhood of Raleigh, 1870, Tate Gallery, London/wikipedia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기에 두 소년이 혼이 나간 듯  골똘한 모습일까요?  이 그림은 어린 월터 롤리와 그의 형제가 데번셔 해안에서 제노바 선원의 바다와 육지 모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후반의 영웅적 제국주의 주제를 반영하고 있고요. 엘리자베스 시대의 항해자들에 관한 제임스 앤서니 프루드의 에세이와 롤리의 전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림 속 소년들은 밀레이의 아들들이 모델이 되었고, 선원은 전문 모델이 포즈를 취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후반의 영웅적 제국주의 주제를 반영하고 있으며, 정치 만화에서 패러디되거나 대중문화에서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chill October, 1870, private collection/wikipedia

 

 

 

 

 

<Chill October>는 1870년에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가 그린 유화로, 가을의 스코틀랜드 풍경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141.0cm* 186.7cm 크기로,밀레이가 처음으로 그린 대형 스코틀랜드 풍경화입니다. 이작품은 밀레이의 아내 가족의 집 근처, 퍼스에서 던디로 가는 철도 노선 근처 야외에서 그려졌습니다. 그림에는 긴 풀, 버드나무와 갈대가 있는 강둑, 그리고 멀리 언덕이 보이며, 전체적으로 음울한 회색 하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1871년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되었고, 1878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The Martyr of Solway, 1871/ Artchive

 

 

 

Adove Stock

 

 

<솔웨이의 순교자 The Martyr fo Solway>(1871)는 주로 스코틀랜드의 코버넌터(Covenanters)였던 18세의 마거릿 윌슨(Margaret Wilson)을 다루고 있습니다. 17세기 후반 "킬링 타임(Killing Time)"동안 순교한 그녀는 1685년 , 장로교 신앙을 포기하고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죄로 익사형을 당했습니다. 이 그림은 그녀의 처형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며 , 장로교 역사에서 순교의 상징으로 그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Hearts are Trumps, 1872/TATE

 

 

 

존 에버렛 밀레이의 유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작가이자 미술 수집가인 월터 암스트롱의 세 딸인 엘리자베스, 다이애나, 메리를 묘사하고있습니다. 그림은 그들이 카드 게임을 하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는 그들의 계급 사회에서 잘 결혼하기 위한 여성들 간의 사회적 기대와 경쟁을 상징합니다. <Hearts are Trumps>라는 제목은 이러한 주제를 암시합니다. 이 작품은 표현력 있는 붓질과 사회 구조를 전달하는 내러티브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이 작품은 런던의 테이트미술관 소장품입니다. 

 

 

 


 

 

The Yeoman of the Guard, 1876/TATE

 

 

 

The two Princess are Richard of Shrewsbury(left)and Edward V of England(right). They are the sons of King Edward IV of England and Elizabeth Woodville, Edward V wears the garter of the Order of the Garter beneath his left Knee. The assassin's shadow is on the stairs.,1878/wkipedia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1878년 작품 <탑 속의 왕자들 The Princes in the Tower> 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5세 (Edward V)와 그의 동생 리처드(Richard of Shrewsbury)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에드워드 4세 (Edward IV)와 엘리자베스 우드빌(Elizabeth Woodville)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런던탑에 갇혀 있는 동안의 두 왕자를 그린 것으로,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캔버스의 유화로 런던 대학교의 로열 할러웨이(Royal Holloway)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무르익은 버찌 Cherry Ripe, 1879/wikipedia

 

 

 

Portrait of John Everett Millais, 1881/ wikipedia

 

 

 

< 19세기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Portrait of John Everett Millais>(1881)

1881년 50대의 밀레이는 사실성과 감미로운 감성이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을 우아한 화가의 모습으로 화면에 꽉 차있게 그려 놓았습니다. 평온하고 안정적인 느낌으로 내면세계의 온유함과 부드러운 성향을 보여주듯 잔잔하면서 섬세한 세부묘사로 사실과 색채묘사가 돋보이는 자화상입니다.  인자함과 인내심이 보이는 인상에서 편안함과 평안함이 함께 보이는 밀레이.  화면의 바탕색과 의상의 색은 배경과 인물의 동등한 위치를 동일시하는 색채로, 자연스러운 부드러움은 능란한 묘사로 뛰어난 시각적 색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Effie Gray/wikipedia

 

 

 

 

 

 

존 러스킨 Porrait of John Ruskin, 1853-1854/wikipedia, 밀레이가 그린 러스킨의 초상화, 애슈몰린 박물관 소장

 

 

 

 

 

 

살면서 '사랑'이란 이름은 다양한 빛깔로 찾아듭니다.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그리고 에피 그레이 (Effie Gray, 1855-1896)의 '금지된 사랑' . 하지만 행복한 결혼생활로 마무리 될 수 있어 다행이다 싶은 세 사람간의 관계 이야기를 해 볼까합니다. 

 

 

 

 1848년 영국의 한 교회.  29세의 러스킨과 19세의 그레이는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러스킨은 영국에서 이름 높은 지식인이었던 데다 얼굴도 잘생긴 편이었습니다. 그레이는 발랄한 성격의 매력적인 여성이었지요. 누가 봐도 흠잡을 때 없는 커플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스킨과 그레이의 결혼은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먼저 둘의 성격부터 정반대였습니다. 러스킨은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그레이는 거침없는 외향적 성격이었거든요.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중매로 결혼한 두 사람은 결혼 한지 6년이나 지났는데도 잠자리를 한번도 함께 한 적이 없습니다. 러스킨은 애초에 아이를 원치 않고 에피를 소중히 지켜주고 싶기 때문에 그랬다고 했지만, 실은 에피의 벗은 몸이 자기가 상상한 여인의 모습과 달라서 거부감이 들었다고 실토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여러 추측이 제기되고 있지요. 러스킨에게 육체적인 문제 혹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말입니다. 

 

 

 

 

1853년 여름.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이 밀레이를 스코틀랜드로 초청하게 됩니다. 당시 존 러스킨은 에피라는 여인과 결혼을 한 상태였으며,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기 위하여 밀레이를 스코틀랜드 고원으로 초청했던 것이죠.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밀레이를 자기 제자처럼 아끼는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밀레이는 그곳에서 러스킨의 아내인 그레이(Gray)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첫눈에 반합니다.  불행한 세월을 살던 아내 그레이의 눈에 밀레이가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자꾸 보다 보니 괜찮은 사람 같았습니다. 얼굴도 잘생겼고 그림도 잘 그리는 데다 성격도 쾌활했거든요. 에피(Effie Gray)는 밀레이가 배려심 많고 남자다운 모습에 점점 가까워집니다. 마침내 그레이는 결혼 생활 속사정을 밀레이에게 털어놓게 됩니다. 망설임도 잠시, 친정 부모를 설득하고 , 둘은 힘을 합쳐 법원에 소송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1854년 그레이와 러스킨의 결혼이 무효라는 판결을 얻어냅니다.  이듬해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와 에피 그레이(Effie Gray)는 결혼하게 되고요.

 

 

 

 

당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기   딱 좋은 가십거리였지요. 밀레이는 '은인 뒤통수를 친 불한당.'

그레이는 '남편을 배신한 천벌을 받을 여자'가 됐습니다. 러스킨은 '졸지에 아내를 빼앗긴 불쌍한 사람'이 되었고요.  하지만, 뒤에서 사람들은 수군댔습니다. "따지고 보면 러스킨도 잘못이 있다"고요. 아내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 애초에 결혼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다." 그레이와 밀레이의 삶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사랑이든 직업이든 투자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방향을 바꾸기는 어렵지요.  주변의 시선이나 비난이 신경 쓰일 수도 있고, '본전 생각'이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론 과감하게 키를 돌려 자신의 길을 가는 게 행복의 지름길 일 수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과거는 흘러갔고 내 인생을 책임질 사람은 나뿐이니, 스스로 떳떳하다면 방향을 틀어서 라도 행복을 거머줘어야지요.

 

 

 

 

 

어쨌거나 에피 찰머스 그레이 (Effie Chalmers Gray 1828-97)는 1848년 에피 러스킨이 되었다가 1855년 에피 밀레이가 되었습니다. 그레이와의 금슬은 좋아서 자식을 8명이나 낳았습니다. 이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밀레이는 자신의 그림 스타일을 좀 사업적으로 바꿨습니다. 이를 본 비평가들은 "밀레이가 돈을 벌기 위해 예술과 타협하고 재능을 낭비한다."는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물론 밀레이는 친구의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에서 탈퇴하고 그가 비난하던 아카데미즘 화풍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고 그는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삽화가가 되어  일러스트레이션 그림들도 다수 그렸습니다. 1869년에는 주간 신문인 <그래픽>지에 화가로 채용되었습니다. 이후 밀레이의 그림들은 매우 상업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870년대에는 돈이 잘 벌리는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아이들을 그린 그림들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 비누회사에 그려준 <비눗방울 >이미지가 대박을 터트리기도 하고요.

 

 

 

 1853년에 왕립 미술아카데미의 준회원 자격을 얻었고, 1863년에는 정식 회원이 되었습니다.  1885년에 준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았고, 이로써 그는 세습되는 직위를 수여받은 최초의 미술가가 되었습니다. 1896년에 왕립 미술아카데미의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에 사망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돈과 사랑과 명예를 모두 거머쥔 행복한 화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한편, 러스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적성에 안맞는 결혼에 집착하지 않고 독신을 고수하며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일에 집중한 덕분에 러스킨은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예술 비평가로 오늘날까지 칭송받고 있습니다. 러스킨은 밀레이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몇 번 쓰기도 했습니다. 이전처럼 열렬한 찬사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호평이었습니다. 정말로 밀레이를 깊이 원망했다면 그러진 않았겠지요. 세 사람의 어긋난 사랑이 제자리를 찾아간 느낌이라 다행인 부분입니다. 

 


 

 

 

 

 

<비눗방울들>,1886/한국경제

 

 

 

 

 

 

아이가 비눗방울을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 귀엽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된 밀레이가  다섯 살 외손자를 바라봤을 때 딱 그런 느낌인 거죠. 비누 회사 페어스의 광고팀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밀레이는 처음에 완강히 거부합니다. 이래뵈도 라파엘전파에서 순수예술을 했던 사람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광고 포스터 이미지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영국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대박이 나 평생 먹고 살 돈을 벌게 됩니다.   비누 회사 페어스의 광고 포스터 이미지이자 포장지로 쓰이면서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둔거지요.  한편 비령가들에게는 "지나치게 상업적"이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광고지는 나오는 족족 사라져 버렸고, 그는 영국에서 가장 부자 화가가  되었습니다. 

 

 

 

 

비누광고의 모델, 외손자 윌리엄 멜본 제임스 경 Sir William Miboune James, 1881-1973/wikipedia, 영국의 해군 제독, 정치인, 작가

 

 

 

 

 

 

 

영원히 남는 예술을 하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하지마.
지금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게 뭐 어때?
난 사람들이 내 작품을 좋아했으면 좋겠고,
칭친하고 기꺼이 돈 주고 사면 좋겠어.
몇백년 뒤 사람들이 뭘 좋아할 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때 좋은 평가를 받아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그때 난 죽고 묻혀서 먼지가 됐을 텐데.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동료였던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에게 보낸편지에서-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는 1848년에 결성된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주요 3대 화가 중 한 명입니다.  활동했던 시기부터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한 인물의 모습이나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가 커다란 크기의 화폭에 순수한 자연의 모습만을 담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에 들어서부터였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간간이 이 작품에서처럼 우연히 등장하는 듯한 인물들을 풍경 속에 등장시키기는 했습니다. 그는 풍경을 그리면서 쏟아지는 초상화 작업 의뢰로부터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다.

 

 

 

 

 

실제로 말년에 들어서 그는 초상화가로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특히 그의 대부분의 수입원이 바로 초상화 판매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풍경화는 그에게 있어서  순수하게 자연을 접하는 일종의 안식처였던 것이죠. 초상화가로 명성을 쌓던 시기에도 그는 꾸준하게 자신의 풍경 작품들을 전시했습니다.  이 풍경화들도 수집가들에게 팔리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죠.  이 작품 역시  왕립 아카데미에서 이러한 목적으로 전시되었습니다. 

 

 

 

 

 

 

Glen Birnam, 1891, Manchester Art Gallery/Art UK

 

 

 

 

 

 

1855년 결혼에 이르게 된 두 사람은 그녀가 나고 자라난 퍼스 지방 부근의 보워스웰에서 1857년까지 머물렀습니다. 말년에 들어 밀레이는 돈이 덜 되는 풍경화에 천착했습니다. 당시 운동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던 그는 1873년, 스코틀랜드에 사냥과 낚시를 하며 풍경화를 그릴 수 있는 집을 한 채 빌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특히 퍼트셔의 테이 강 유역에 있는 버넘과 던켈드의 마을 풍경을 좋아했는데, 1881년부터 1890년까지는 가족들과 함께 버넘 홀에서 늦여름과 가을을 보냈습니다. 

 

 

 

겨울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은 밀레이가 버넘 홀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특별히 사랑했던 지방의 풍경을 그린 그의 모든 작품들 중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고요. 밀레이를 잘 알고 있었던 어린이 책의 저자이자 삽화가인 베아트릭스 포터는 이 작품에 대하여 1892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버넘 홀을 무척 사랑했던 밀레이는

그곳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마음에 무척 아쉬워했다.

작품 속에서 뒤돌아 서 있는 애절한 모습의 인물은

마치 그곳을 떠나야 하는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

-지엔씨미디어

 

 

 

 

 

 

 

 

 

 

 

현재에 충실하고 행복하며, 미래에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좋은 사례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그림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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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인들은 대부분 태어난 도시에서 살다 그곳에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봉건사회의 특성상 인적 종속관계를 이루고 있었죠. 여행이 오늘날처럼 안전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마 오늘의 주인공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도 기록은 없지만 위트레흐트나 남부 네덜란드 등을 여행하지 않았을까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

엘 보스코

헤오로니무스 보스

히에로니무스 반 아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 운 그는 환상적이고 독특한 그림체가 특징입니다.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을 소름끼지게 표현했죠. 때문에 <지옥의 화가>, 혹은 <악마의 화가>라 불렸습니다. 악몽같은 환영을 그린 대형 패널화들을 15-16세기에 제작했습니다.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었고요. 종교 제단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공상적인 반인반수의 짐승들을 묘사한 그림으로 더 유명합니다. 또헌 , 그의 기괴한 그림과 풍자는 네덜란드 속담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거나 설교서의 삽화에서 모티브을 얻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Temptations of Saint Anthony, 1501/wikipedia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은 1501년경에 제작된 세 폭 제단화입니다. 삼면화는 성당의 제단화로서 서사적 구조와 짜임새 있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삼면화는 세 개의 연결된 패널로 구성되어 있어, 하나의 주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으며, 복잡한 내러티브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루며 , 삼위일체와 같은 기독교 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 적합합니다.  공간 활용 면에서도 펼쳐졌을 때와 접혔을 때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작품 보존에 유리한 면도 있고요. 관람자가 패널을 열고 닫으며 작품과 상호작용 할 수 있어, 더 깊은 몰입감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삼면화는 단일 화면의 그림이나 다른 예술 형식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표현 방식과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 작품은 성 안토니우스가 겪은 정신적, 영적 고통을 묘사합니다.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와 유혹을 통해 영적 교훈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왼쪽 패널은 성 안토니우스가 육체적 시련을 겪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악마들에 의해 하늘에서 떨어지는 안토니우스의 모습과 악마가 이끄는 행렬이 있는  동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중앙 패널은 성 안토니우스가 다양한 유혹에 직면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야외 식탁에서 벌어지는 사악한 연회가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죽음에 이르는 유혹을 상징합니다. 수도자의 두건을 쓴 여인이 안토니우스를 유혹하는 모습과 함께 악마의 지배를 받는 도시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오른쪽 패널은 성 안토니우스의 명상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 부분에서는 안토니우스가 유혹을 극복하고 기도와 명상을 통해 영적 성장을 이루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기도와 절제, 인내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은 르네상스 초기로, 중세 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는 유럽에서 종교적,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이 시기에 종교 개혁으 조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인쇄술의 발명으로 지식과 정보의 전파가 빨라졌습니다. 신세계 발견으로 인한 지리적 확장이 이루어졌습니다. 르네상스 정신이 북유럽으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스의 작품은 중세의 종교적 주제와 르네상스의 새로운 예술 기법을 결합하여, 당시 사회의 도덕적 혼란과 영적 갈등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작품은 악의 유혹과 신앙의 힘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불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출처: Netherlands

 

 

 

Hieronymus Bosch/wikipedia

 

 

 

14-16세기 유럽에서 유행하던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했던, 네덜란드의 화가 보쉬는 네덜란드 북부의 브라반트(Brabant)에 있는 "스-헤르토겐보쉬('s-Hertogenbosch)"란 작고 외진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 보스는 네덜란드의 노르트브라반트 주의 스헤르토 헨 보스('s-Hertogen Bosch)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거기서 죽었기에 붙여졌습니다. 지금도 인구 약 15만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이죠. 14세기들어 도심이 확장되고 당시 네덜란드 지역의 북방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배출되었는데,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1463년 도시에 대 화재가 일어났으며, 13살의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인 보스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TNpZ2QzaY0

 

 

 

 

1520년까지 스헤르토헨보스는 번영하여 위트레흐트 다음으로 인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독립전쟁 당시 독립된 주교령이었던 스헤르토헨보스는 합스부르크 세력에 가담하여 칼뱅주의 반란을 진압하고, 네덜란드 공화국 군을 막아내며 긴 전쟁의 서막을 열개 됩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난 뒤. 30년 전쟁의 발발로 1629년 네덜란드의 손으로 들어가며 스헤르토헨보스 가톨릭 인구와 브라반트인 (과거의 브라반트 공국으로 현재 북부는 네덜란드가 남부는 벨기에가 차지하고 있다.)"들은 암암리에 차별을 받게 됩니다. 1526년 18, 571명이었던 인구가 1665년에는 9,000명까지 급감하게  될정도로 말이죠.

 

 

30년 전쟁(1618-1648)은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종교적 갈등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토적 분쟁으로도 발전했습니다.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가톨릭 신앙을 강요하면서 시작되었고,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이에 반발하여 개신교 제후 동맹을 결성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났으며, 유럽의 정치 지형과 종교적 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815년 네덜란드 연합 왕국이 설립된 이후 주도가 되었지만, 보수적인 시의 정책은 1203년에 세워진 성벽 밖으로 도심의 확장의 제한하여 주거난과 영아사망률이 네덜란드에서 최고였습니다. 또한 도시에 진입하는 노동자를 저지하기 위해 산업화 와 인텔리들을 불러올 고등교육 시설 설립을 막는 폐쇄적인 정책으로 도시의 중요도가 떨어졌다고 해요.

 

 

 

보쉬는 정통파 가톨릭 교회의 교인이었으며 지방 종교협회의 회원이었습니다. 그의 대부분의 개성있는 그림들로 인하여 "16세기의 이단아 ( a heretic)"로 알려졌을 정도로 매우 기괴합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있는 40여 점 정도 되는 보쉬의 진품들은 정확한 연대나 날짜가 붙어있는 것이 없어 무척 아쉽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Crucifixion", "마술사 Magician"처럼 , 그의 초기로 추정되는 작품들은 스케치와 구성, 그리고 화법에서도 미완성된 듯 다소 어색한 표현을 보여줍니다. 

 

 

 

 

이 초기의 작품들은 냉정하고 산문적인 배경을 통하여 악이나 죄, 육욕, 이단, 외설의 유혹과 같은 "인류의 취약성이나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그래도 심상의 표현은 여전히 비교적 전통적이며, 때로는 숨어있는 악마나 이상하게 잘 차려 입은 마술사처럼 기괴한 표현이 있기도 합니다. 

 

 

 

 

 

 

 

 

동방박사의 경배/ 나무위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동방박사의 경배"는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에서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라아가 있는 곳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리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칩니다. 황금은 예수의 왕권을 상징합니다. 유향은 예수가 대제사장임을 의미하고요. 몰약은 예수의 죽음을 예고합니다. 구세주이자 인류의 구원을 상징하는 아기 예수, 예수의 어머니로서 순결과 헌신을 상징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보행용 도구를 갖고 있는 아기 그리스도/ 나무위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Christ Carrying the Cross, 1480, Kunsthistorisches Musem, Vienna, Austria/ wikipedia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1480, 비엔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보스의 특징적인 스타일을 잘 보여주며, 종교적 주제를 독특하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품에서는 십자가를 질어진 그리스도가 중앙에 위치하며, 주변에는 다양한 인물드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하고 괴롭히는 군중들을 나타내며, 보스 특유의 기괴하고 과장된 표정과 제스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스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잔인함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대비시키며, 당시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독특한 상상력과 표현 방식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흥미롭게 느껴지며, 후대 초현실주의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보스의 종교적 주제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함께, 그의 뛰어난 예술적 기량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Christ Carring the Cross, Madid,Spain/Arthive

 

 

 

 

 

두 그림을 보면, 둘 다 보쉬의 작품이고 제목도 같지만 분명히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이 조금은 다른 작품입니다. 먼저 구도를 보면, 이전에 주로 사용하던, 위에서 내려자 보는 높은 시각으로 인하여 뒤 배경이 되는 공간, 즉 후경이 다소 축소되어 버렸습니다(비엔나 작품).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의 주요 주제와 그림 안의 주인공들의 표정에 집중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래서 극중의 비탄에 빠진 주인공들의 긴장감을 훨씬 더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과 머리를 살펴볼까요. 얼굴을  찡그린 병사들과 사악한 자들, 그리고 경멸할 만한 자들과 같은 밀집한 군중을 배경으로 윤곽만 보입니다. 그의 발과 발목을 비롯하여 허리 등 세로로 매달게 될 나무로 만든 큰 못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고통은 더욱 심화됩니다. 전경을 지배하는 그리스도는 무거운 십자가에 눌려 있습니다. 구레네(Cyrene)인 시몬은 등으로 쳐들어 올리려고 애를 씁니다. 

 

 

 

위 두 번째 그림(스페인 작품)에서 저 멀리 뒤 배경으로 비탄에 빠진 듯 보이는 여인이 오열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비엔나 작품을 보면   화폭의 앞 쪽, 선한 도둑이 성직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 동안 병사들을 악한 절도범을 괴롭히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참회하는 선한 도둑의 극도에 달한 긴장감이 확연한 대조를 보임으로써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christ Carrying the Cross, 벨기에 Ghent,1516/wikipedia

 

 

 

 

 

 

특별하고 무척 극적인 작품입니다. 대상에 바짝 밀접하여 주인공들의 머리만으로 구성한 대답한 구도로, 1500년대의 예술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화풍입니다. 이런 경향은 일반적으로 보쉬 후기의 위대한 창작들에서 발견됩니다. 화폭의 앞 면 전경 왼쪽에 폭도에 둘러싸여 있는 성스러운 여인(성 베로니카, St. Veronica)의 맑은 옆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였습니다. 모서리쪽, 그녀가 들고 있는 천에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얼굴 형상"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림에 응용하는 선과 악의 대조적인 모습은 보쉬 인생의 기독교 신앙이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최고의 절정으로 끌어올리고 있죠.전체적으로 같은 제목에 세 번 째 벨기에 겐트  작품은 인간의 얼굴 표정과 악마의 얼굴을 비교 할수 있는 더없이 좋은 결과물입니다 . 이때까지 아직은 혼돈과 풍자적인 요소가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중앙에 있는 그리스도의 온화한 표정을 통하여 난폭한 대중들의 악마적인 표정과 대조시킴으로써 사건의 "평온"을 강조하고 있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Ecce Homo, 1475-1485, wikipedia

 

 

Hieronymus Bosch의 <Ecce Homo>는 1475년에서 1485년 사이에 그려진 예수의 수난 장면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군중 앞에 끌려나온 순간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가시관을 쓰고 있으며, 채찍질로 인해 손과 가슴, 다리에 상처가 나 있습니다. 작품의 중심에는 예수와 본시오 빌라도가 있고, 주변에는 조롱하는 군중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빌라도의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라는 말과 군중들의 "Crucifige Eum"(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이라는 응답이 고딕 문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템페라와 유화를 사용해 오크 패널에 그려졌으며, 크기는 71cm*61cm입니다. 현재 독일 프랑크푸프트의 슈테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쾌락의 정원 The Garden of Earthy Delights, Museo del Prado , Madrid, 1500/wikipedia

 

 

 

 종교화하면 예수와 제자들, 십가자 등 전형적인 클리셰(Cliche')들이 떠오릅니다. 성경을 주제로하기 때문에 이미 많은 화가들이 주요 주제들을 다뤘고,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에 각색도 쉽지 않은 게 사실이지요.그런데 500년이 지난 현시점에도 연구대상이 될 정도로 기괴하고 참신하고 독특한 작품이 있습니다.  종교화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는 플랑드르 화파 '헤레로니무스 보스' 작품 <쾌락의 정원 The Garden of Earthy Delights>그림을 소개합니다.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그려낸 1500년대 최고의 사회상 고발입니다. "세 폭 화"는 르세상스 당시에 플랑드르에서 주로 사용하던 기법으로 12폭 병풍처럼 그린 화폭도 있을 정도로 메인 그림 주변에 그 그림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구성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평일에는 양 날개를 접어서 닫아두고 주일날 미사를 들릴 때만 열었다 제단화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죠.  십자가처럼 소중하게 다루어야 했던 그림들이라 나름의 방법을 간구한 것이죠.

 

 

 

The exterior panels show the world during creation ; probably on the Third Day, after the addition of plant life but before the appearance of animals and humans, 1450/wikipedia

 

 

 

이 작품의 왼편은 "천국", 가운데는 "현실", 그리고 오른편은 "지옥"입니다.  이 그림을 닫으면 왼편 제일 상단부에 흰 원 안에 사람이 책을 들고 서 있습니다.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상단부에 왼편과 오른편 날개에 나뉘어서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중앙에는 지구의 천지창조 3일째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요.  상단부에 쓰여 있는 글귀는 시편 33편 9절의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당시에 아직도 천동설이 그 중심을 이루었기 때문에 지구의 모습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열면 화려하고 복잡하고 산만한 그림이 펼쳐집니다.  제단화로 이 그림이 펼쳐진다면 각자의 상상력을 풀어헤쳐 오해를 낳을 여지가 많은 그림이지요. 왼편 천국 편부터 하나씩 풀어가 봅니다. 

 

 

Showing the pre-incarnate Christ blessing Eve before she is presented to Adam.1500/wikipedia

 

 

 

 

 

천국 편은 4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제일 상단부의 산에 날고 있는 새, 중심부의 물가에 있는 분홍색 건물, 그리고 그 아래 3명의 인간, 그리고 제일 아래 하단부에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있습니다. 

 

 

제일 하단에 작은 웅덩이가 보입니다. 그 웅덩이 제일 오른쪽에 이상한 녀석이 보일 겁니다.  하반신은 물고기인데, 상반신은 팔도 나 있고, 머리는 오리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팔에 뭔가가 들려 있죠. 바로 책입니다.  저 녀석이 읽고 있는 저 책이 바로 "원죄"라는 책입니다.  저 원죄를 읽고 있는 녀석은 바로 루시퍼 ,악의 상징이며 악의 우두머리인 사탄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는데, 과연 반성은 할까요? 저 녀석이 책을 읽으며 고민하는 내용은 어떻게 하면 하느님이 만든 인류를 타락시킬까?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붉은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앉아 있는 벌거벗은 남자는 아담, 그리고 그 옆에 하느님의 손에 이끌려 오는 여인은 하와입니다. 하와 뒤에 토끼를 그려놓은 이유는 다산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담의 뒤에 있는 나무는 독일 르네상스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토록 만나보고 싶어 했던 자신의 이상적인 스승인 "마르틴 숀가우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무들 모양입니다.  사탄의 계략은 하느님이 선하게 만드신 이 세상과 자신을 닮은 창조물이라고 하는 인간을 타락시키겠다는 계략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Birds sqarming through cavities of a hut-shaped form in the left background of the left pannel,1500 /wikipedia

 

 

 

 

 

 

나무숲 위로 푸르른 강줄기가 흐릅니다.  분홍색의 집이 등장합니다.  놀라운 것은 1400년대에 저런 건물을 생각해  냈다는 사실이죠.  그의 머릿속이 궁금해지는 장면입니다. 창문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부엉이 입니다. 부엉이는 2가지 의미로 존재합니다. 방탕을 상징하는 "밤"과 미네르바를 상징하는 "지혜"의 모습입니다. 곧 사탄이 계획했는데, 그 계획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저 두 인간을 타락시키려고 한다는 것, 그럼 방법은 무엇일까? 그 답은 제일 상단의 왼쪽 산에 있습니다. 산을 자세히 보면 오른편으로 새들이 나와서 산꼭대기로 돌더니  왼편의 무슨 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까지가 천국의 이야기 입니다. 

 

 

 

 

The centeral water-bound glove in the middle panel's upper background is a hybrid of stone and organic matter. It is adorned by nude figures cavorting both with each other and with various creatures, some of whom are realistic, others are fantastic or hybrid, 1500/wikipedia

 

 

 

 

 

이제 현실의 세계를 들여다 볼까요? 천국에서 사라진 새들이 이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9시 방향의 물가에 모여 있는 새들이 보일 겁니다. 그리고 정중앙에 붉은색 V자 모양이 거꾸로 된 모습이 있습니다. 3시 방향에 부엉이도 있고 새들은 정확하게 중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현실의 세계 중심에 이미 악마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악마들이 도대체 왜 새로 표현된 것일까? 새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새들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사람들이 쉽게 유혹되어 넘어간다는 의미입니다.   현실 세계의 물을 보면 상단부의 물은 깨끗하지만, 하단부로 내려갈수록 물이 어두워집니다. 하느님이 만들어 준 세상은 맑은 물이었으나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어둡게 변해 버린 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상단부의 맑은 물 부분은 4개의 강줄기로 나누어집니다. 인류의 4개 문명의 발생지를 의미하고요. 생명을 상징하는 물이 스스로 타락함으로 인해 생명을 저버리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붉은색 V자 모양을 뒤엎어 놓은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 있습니다.  그 밑에 수많은 사람이 새에게서 열매를 받아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모습은 9시 방향에도 같이 등장합니다. 새의 등에 앉아 고민하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가 앉아 있는 새가 입에 열매를 물고 있는데 회색의 사람들이 그 밑에서 그 열매를 받아먹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악마들의 달콤한 속삼임 속에 넘어가는 장면의 표현입니다. 

 

 

 

 

중앙에 큰 무리가 동물들을 타고 원형으로 돌고 있습니다. 시계 반대방향이죠. 시간의 역주행으로 거스른다는 의미를 말합니다.  이 동물을 타고 있는 자들의 특징들이  당시 7가지 죄악으로 규정된 종교적 규율을 벗어난 탐욕, 음욕 등을 상징합니다. 3시 방향에 보면, 3명의 사람이 파란색의 물고기 물어 뜯어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물고기 위헤서 토끼가 앉아 있지요. 토끼는 다산을 상징하지만, 무병장수와 풍요로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분명 자신들이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큰 물고기는 사람들에게 물어뜯어 먹히면서도 작은 붉은색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습니다. 탐식의 모습입니다.  자연을 관리하도록 신에게 위탁받은 인간은 관리가 아닌 파괴로 인해 모든 상황을 망가뜨려 버린 것입니다.  이 돌고 있는 무리 가운데 연못처럼 생긴 곳이 있습니다. 그 물가를 보면 검은색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림 속에서 검은색은 사탄의 세력에 장악이 된 "원죄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원죄의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같이 물들이고 있습니다.

 

 

 

 

 

 

 

사람들 머리에 열매가 있습니다.  이 열매는 3시 방향의 숲에서 보입니다. 사람들이 숲에서 열매를 따고 있고, 그리고 부부같이 보이는 사람인지 큰 열매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그 주변을 보니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부엉이가 등장했습니다. 열매를 손에 들고 또 나뭇가자를 들고 있는 두 사람이 꽃같이 생긴 것으로 뒤집어쓴 채 춤을 추고 있습니다. 대낮인데 ,부엉이가 등장했네요. 바로 타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럼 열매가 상징하는 것은 새들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도구라는 것이죠. "체리"는 "성적 욕망"을 상징합니다. 딸기는 "여자"를 상징하고요. 그래서 새들이 사람들에게 먹이를 주는 상황이 보인 것입니다.

 

 

 

 "대항해시대". 유럽은 모든 것이 가장 풍성한 시기가  이때엿습니다. 종교도 덩달아 풍요의 시기가 되었죠. 바로 현실의 장면 맨 오른쪽 아래 끝을 보면, 서 있는 5명의 무리가 보일 것입니다.  맨 앞에 검은색의 사람 그리고 그 옆에 흰색의 사람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얼굴만 흰색이고 몸에는 레깅스 스타일의 옷을 입힌 것처럼 목 부분부터 발목까지 옅은 회갈색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이들은 "사제"를 의미합니다.  모든 이들을 선한 길로 이끌어야 할 사제들까지 탐욕에 물들어 원죄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11시 방향으로 분홍색 건물 앞 잔디에 커다란 딸기 한 개가 있습니다. 그 밑에는 전부 남자들이네요. 상상은 읽는 분의 몫으로 남겨 둘께요.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타락의 길을 거닐게 됩니다.  어디까지 그 타락이 이어졌을까요? 4개의 물이 만나는 곳에 파란색의 집이 보이시나요. 이 집을 유심히 보면 아래 물이 잠긴 부분에 원으로 문이 나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왼편에 남자가 가운데 여인의 중요한 부위를 만지고 있죠. 더 황당한 것은 그 여인의 뒤편에 한 남자가 붙어 있는 그림입니다. 이 처럼 다양한 묘사들이 거의 19금 수준입니다.

 

 

Detail showing nudes within a transparent sphere, which is the fruit of a plant, 1500/wikipedia

 

 

 

9시 방향으로 작은 크리스털이 보이시나요? 그 크리스털을 예전에 남성의 생식기라고 많이들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것보다  플랑드르 속담 중에 "불륜의 하룻밤은 깨어지는 유리와 같다."라는 표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크리스털 속 모습은 10대로 보이는 소년과 2.30대 중년 부인의 모습입니다.  크리스털은 이미 금이 가 있습니다.  불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사랑이 아닌 단순히 즐기기 위한 성적 욕망를 채워가는 모습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 밑에 보면, 한 사람이 원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고 그곳에는 투명 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유리관 끝에는 검은 생쥐가 한 마리 보이네요. 원래 쥐는 그림에서 "선한 사람을 꼬여 타락하게 만드는 속임수"를 상징합니다.  결국, 맞은편 얼굴만 등장하는 이에게 쥐는 타락으로 빠져들도록 만든다는 것이죠. 그 타락에 빠진 자들은 흑사병으로 30-60%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는데, 엄청난 파급력으로 인간은 죽게 될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A Scene from the hellscape panel showing the long beams of light emitted from the burning city the panel's background,1500/wikipedia

 

 

 

 

오른쪽 패널은 바로 이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불에 타는 듯한 모습의 건물들입니다.  번쩍이는 불빛은 그것을 더욱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검은색의 지옥 불빛 중 오른편을 유심히 찾아봐 주세요. 빛이 길게 앞으로 뻗어 나오고 있고 ,그 오른편에는 3그루의 나무가 보입니다. 그 빛과 나무 밑으로 붉은색의 용광로 같은 것이 보일 겁니다. 그 뻗어 나오는 빛은 바로 지옥문입니다. 작아서 안 보이지만, 내려받아서 확대해보면 사람들이 한 줄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신이 만들어 준 세상을 현실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욕망으로 인해 타락시킨 인간들이 들어갈 곳은 이곳이라는 소리죠. 

 

 

 

 

The "Tree-Man" of the right panel, and a pair of human ears brandising a blade, A cavity in the torso is populated by three naked persons at a table, seated on an animal, and a fully clothed woman pouring drink from a barrel. /wikipedia

 

 

 

 

 

사람의 위 모양이 보입니다.  위는 사람이 평생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을 저장한 창고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분홍색 끝부분이 피리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그 앞에 흰 천으로 둘러싸인 사람. 그 앞에 악마의 손에 끌려가는 게 힘없어 보이는 사람. 아마도 자신이 지었던 삶속에서의 죄를 저 피리가 다 이야기하나보다.  변명의 여지도 없고 희망도 없자 모든 걸 포기하고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그 밑에는 얼굴과 깨어진 엉덩이가 보입니다. 깨어진 엉덩이 부분 옆에 있는 긴 나무에 열쇠가 있습니다.  그 열쇠에 매달려 죽은 사람과 그 밑에 머리, 뼈 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가 그려 놓은 줄 착각할 정도입니다. 

 

 

 

 

 

 귀가 보입니다.  그 사이에 칼도 있네요. 성경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 귀는 꽉 막혀 있네요. 들어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한 채 자신의 고집스러움으로 결국 귀가 막혀 판단력이 없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 벌로 그 귀를 자르고 있는데, 문제는 칼의 날이 제대로 서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날이 제대로 서지 않은 칼은 날카롭지가 않죠. 그래서 자를 수 없고요.  그렇다면 잘리는 귀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멀금한  사람 얼굴이 보입니다.  누구일까요? 독일에 르네상스 바람을 몰고 왔던 뒤러의 말을 빌려봅니다. 그는  자화상에서 "화가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5가지 주 된 특징을 사용한다. "  라고 말합니다.  그 4가지는 첫째는 사인입니다.  둘째, 관람객을 전면 응시하는  얼굴입니다. 또는 수많은 군중 속에서 목표물을 바라보지 않고 유일하게 우리를 내려다보는 한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죠. 셋 째, 배경입니다.   넷째, 종입니다.  아무튼 지금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 그림의 주인공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입니다. 지옥에서 그 중심부을 차지하며 여러 가지 시사하는 그림에 둘러싸여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림 속  엉덩이 부분은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깨어진 그 부분 안에 왼편에는 술 창고가 있고, 오른편에는 탁자같은 것이 있어서 심판대가 아니냐? 는 추측을 낳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해석이 일어나는 건 그의 천재적인 표현법 속에 아직 우리가 온전히 그 뜻이 무엇인지를 분석해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리 아래로 내려오다 보면 스케이트 타는 악마도 있고, 나름 무거워지려는 그림 속에 익살스러움을 삽입하는 화가들의 유희도 즐겨보면 행복하답니다.  

 

 

 

Gibson compares this"Prince of Hell"to a figure in the 12th-century Irish religious text vision of Tundale, who feeds on the souls of corrupt and lecherous/ wikipedia

 

 

 

 

 

마지막 하단부분입니다. 하프에 매달린 사람, 메트로놈 같은 악상 기계에 눌려 죽은 사람, 오른편에 의자에 앉아서 냄비를 뒤집어쓴 새가 사름을 잡아먹는 장면, 그 의자 밑에 누워 기절한 여자, 왼편 아래에는 도박꾼들의 최후를 드러내는 듯한 모습, 마지막으로 오른편 아래에 수녀 가운을 쓰고 있는 돼지와 한 인간 사이의 묘한 이야기 등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우선 하프에 매달린 사람은 평생 쾌락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사람에 대한 징벌입니다.  세상의 쾌락을  이제는 고통으로 느끼게 하는 저 하프를 볼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엉덩이에 악보가 그려져 있네요.

 

 

 

오른편으로 이동을 하면, 냄비를 쓴 새가 등장하는데, 이 새는 없는 새입니다. 환상 속의 새로,  이 새의 이름은 "툰달"입니다.  아일랜드 수도사가 쓴 "기사 툰달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툰달이 지옥을 다녀왔는데, 지옥에서 한 새가 사람을 잡아먹고 있기에 "저 새가 무엇이냐?"고 묻자, 옆에 있던 지옥인이 "탐식의 사람을 잡아먹는 새다"라고 했다네요. 그 말을 툰달은 수도사에게 했고, 이후 지옥에 다녀온 툰달의 이야기에 근거해 지옥의 새는 "툰달"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 저렇게 사람을 잡아먹는 벌을 내리는데, 자세히 보면 너무 단순합니다.  왜냐하면, 잡아먹고 바로 사람을 그 엉덩이 부분의 유리로 보여주는데 , 바로 원래대로 살아납니다.  자세히 보면 그 유리에서 아래 작은 웅덩이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 속에서 뭐 하나 봤더니, 바로 양옆에서 토하고 싸는 것을 그대로 먹으며 사는 형벌을 받는 모습이네요. 아우 생각만 해도 역겨운데요.  죄와 벌의 상관 관계가  묘하죠. 

 

 

 

 

 

그리고 그 툰달 발밑에서 한 여자가 쓰려져 있습니다. 그 여자의 가슴에는 두꺼비 한 마리가 있고요. 두꺼비는 그림 속에서 허영을 상징합니다.  7가지 죄악 중에 등장하는 허영의 죄로 죽은 여인의 최후의 모습으로 악마에게 조롱을 당하며 죽어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왼편으로 오면 토끼가 사람을 매고 가고 있습니다. 저 그림은 노름꾼들의 최후의 광경입니다.  카드놀이와 다트판을 대신한 악마들의 놀이에 이용당하고 있죠. 그래서 저 그림에 그 의미를 알려주는 주사위와 카드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의 마지막 답이 남았습니다. 

 

 

 

 

 

바로 오른편 돼지입니다. 돼지가  수녀의 가운을 쓰고 있네요. 진짜 돼지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남자 다른 사람들과 다른 피부색이다. 약간 회색빛이 도는 옷을 입고 있네요. 사제의 무릎에 있는 것은 결혼 서약서입니다.  이 시기는 "대항해시대"로  유럽은 임명 , 황금기를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 황금기로 인해 "종교와 양심의 타락"을 맞이하게 되지요. 작가는 이 그림을 통해 당시 종교적인 모든 타락상을 고발하고 싶었나 봅니다.  아무도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행인 것은 펠리페 2세가 주변의 도움으로 그의 그림들을 스페인으로 잘 가지도 왔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오늘 전 세계의 적은 작품들이 존재하는 그의 그림 중 10편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 그림은 "인간의 양면성"을 고발한 그림으로 당시에 그림의 주제도 그랬지만., 파격적인 그림의 형태를 지녀서 그 시기에는 누구도 이 그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현대에 와서 바르셀로나의 미로가 이 그림을 접한 후 충격에 싸여 있었고, 이후 이 그림을 모티브로 "경작지"를 완성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초현실주의 이상적인 출발점을 제시한 그림으로 무려 500년을 앞서서 그린 최고의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The Wayfarer,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1500-1502/ ARTCHIVE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하던 톤도(tondo, 둥글다:이탈리아어)로 목판에 그려졌습니다. 톤도는 원형으로 그려진 회화나 부조를 말하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이 새겨진 예로 고대부터 있었습니다. 특히 중세 말기부터 15-16세기 이탈리아에서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팔각형으로 표구를 한 흔치 않은 모양입니다.

 

 

 

신발은 도망을 치느라 그런 건지 돈이 없어 쫓겨나는 건지 알 수 없으나 왼발에는 부츠, 오른발에는 슬리퍼를 신고 온 걸 보면 다급했던 모양입니다.  혹시 상처 때문에 슬리퍼를 신은 건가 싶지만 부츠의 발목이 그리 길지 않은 앵글이라서 그렇게 보이진 않네요. 허리춤에는 단도와 주머니를 차고 있고 바구니에는 수건으로 보이는 물건이 매달려 있습니다. 버들고리의 둥근 고리에는 나무로 만든 숟가락이 끼워져 있습니다. 문고리에 숟가락 끼워 놓은 것처럼 말이죠. 홀쭉한 뺨과 목의 주름을 보면 중년 이후로 보입니다 . 오른쪽의 죽은 나뭇가지에는 악의 상징인 올빼미가 앉아 있습니다. 마당에는 새 두마리가 땅을 헤적이며 모이를 찾고 있습니다. 목에 날카로운 장식을 두른 강아지는 몸을 웅크리고 공격적인 표정을 하고 행상인을 바라보네요.  

 

 

 

 

The Wayfarer, 1500-1502/ARTCHIVE

 

 

 

 

 

 

 

이곳은 사창가입니다.  문 앞에서 남자가 오크통에서 와인을 따르러 가는 여자를 잡고 수작을 부리네요. 술은 필요 없으니 자신과 함께 있자고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여자는 집 밖에서 소변을 보는 남자를 기다리는 걸까요? 아니면 이 집을 지나쳐 가는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는걸까요? 그는 술집에서 방금 나온 게 아니라, 여행길에 그곳을 지나치다가 쾌락에 유혹당한 듯 길 위에 멈춰 선 모습입니다. 그는 유혹 때문에 현재의 가난한 상태가 되었고, 또다시 유혹에 넘어갈 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어찌 되었든 나그네의 영적인 상태는 덜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 같습니다. 

 

 

오른손에는 모자를 잡고 있는 팔과 몸은 계속 앞으로 가는 방향이자만, 고개는 사창가를 향하며 갈등하고 고민하는 나그네 마음을 시각화하였습니다. 외양간에는 소가 음메 소리를 내며 울 듯하고 문틀에는 까치 한 마라가 앉아 있습니다. 저 멀리 전원 풍경이 평화롭게 펼쳐지고 있고요.

 

 

상처 입은 집은 지붕이 무너져 기둥이 드러난 지 오래되었는데 미처 손을 쓸 여력이 없었나 봅니다. 창문도 떨어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유리창은 아홉군데나 깨져있네요.  이층  창틀에 걸린 빨래까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는 북유럽 화가들의 전통입니다.  다리에 난 털과 발바닥의 각질과 주름까지 묘사된 나그네든 행상인이든 거리에서 지내야 하는 이의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그림이다. 

 

 

 

 

 

보쉬의 중기 작품들은 파노라마 식의 3폭 그림입니다. 그 작품 숙의 인물들은 다채롭고 창으력이 풍부하며, 화려하면서도 대단히 복잡합니다. 환상이 폭발한 것처럼, 대혼란의 종말이나 악몽의 상황을 예언한 풍경과 인류 최초의 순결한 전원 풍경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 중기의 작품들은 초기의 환상과 관념이 점차 다듬어지고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쉬의 후기 작품들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무척 특이합니다. 규모도 파격적이며 인간심리를 그려낸 초원이나 지옥의 풍경이 조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의 그림들은 플랑드르(현재에 벨기에 서부와 네덜란드 남서부,프랑스 북부를 포함해 면한 중세의 국가) 속담이나 문학, 비밀문서에서 출발한 상상력을 보여주는데, 반은 인간이며 반은 동물인 환상적인 창작 인물이나 악마가 자유롭게 산재합니다. 물론 "기도 중인 성자 (ST. Jerome in Prayer)와 같은 평화롭고 근심 없는 작품들도 존재합니다. 

 

 

 

 

The Ship of Fools, 1490-1500, Louvre, Paris, France/ Artchive

 

 

 

 

 

중세 사람들에게 '배'라는 것은 무엇을 뜻했는가? '이것은 대개 교회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가엾은 기독교들의 영혼들이 가득 승선한 배의 종착지는 천국이 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풍랑에 의해 배가 난파되어 버릴 수 도 있고 자칫 잘못하면 지옥으로 떨어질 수 도 있을 터 , 이 배를 요리조리 잘 움직여 가엾은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선장과 승무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교회였던 것이죠.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바보들의 배>에 나오는 '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검은 강물 위에 떠 있는 나무 보트가 전경을 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요상합니다.   떠들썩하고 방탕한 느낌이 드니 말입니다. 중세 시대에 배라는 것은 주로 교회를 의미했고, 그랬다면 보쉬의 이 그림에서도 경건함과 엄숙함이 느껴져야 하는 것일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이 배의 오른쪽 돛대줄 위에 건들건들 올라 앚아 있는 것은 어릿광대, 볼 장 다 본 느낌입니다. 

 

 

 

 

'여러 세기 동안 궁정의 어릿광대나 바보는 사회의 도덕과 관습을 풍자해도 탈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 광대는 당나귀 귀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자신의 모형이 달린 막대기를 들고 다니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습니다(월터 보싱) . 우리는 이 어릿광대를 <바보들의 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쉬는 '배'의 이미지를  패러디함으로써 당시의 부패한 교회를 슬쩍 비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보트 안에는 사람들이 한 가득 올라타 질펀하게 놀고 있습니다. 유독 눈에 띄는 옷차림을 한 자들이 있네요. 바로 수도승과 수녀들 입니다. 가운데에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둔 이 성직자들은 한창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계시는데 중세의 그림에서 이 노래의 의미는 아주 남달랐습니다. 즉 이시기 '남녀의 이중창'은 대개 '정사'의 바로 전 단계를 뜻했기 때문입니다.  세부 묘사를 들여다 보면 체리 접시와 배의 여기저기에 매달려 있는 포도주 단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육욕'의 결정판입니다. 게다가 배의 돛대에는 십자가 대신 터키의 초승달이 그려진 분홍색 깃발이 보입니다.  중세의 문헌에 등장하는 '배'가 일단 맥락상 '교회'를 뜻한다면, 그 배의 돛대는 무조건 십자가를 의미했습니다. 돛대 나무의 무성한 잎사귀 속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올빼미가 보입니다.  보쉬의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듯 올빼미는 주로 '사악함'을 의미합니다.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 The Seven Deadly Sins and the Four Last Things, 1500/ wikipedia

 

 

 

 

 

 

조각 가운데에는 그리스도( Christ) 모습과 함께 단어가 보입니다.  "조심, 조심, 하느님이 지켜보고 있다." 네 개의 작은 장면과  일곱 가지 대죄를 묘사했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윤리관에서는 '일곱 가지 큰 죄(칠죄종)를 주요 악덕으로 구분합니다.  일곱 가지 죄는 그 자체가 죄이며 인간이 자기 뜻에 따라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로서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나태를 일컫습니다. 화가들은 미술작품에서 인간을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 큰 죄들과 함께 비겁함과 변덕, 우둔함과 무지, 간통과 부정, 우상 숭배 등과 같은 것을 더해 악덕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죄의 근원을 동시대의 일상 생활을 배경으로 자세히 묘사해 생생하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문서화 된 주인은 스페인의 Philip II 왕이었습니다.  1574년  San Lorenzo de El Escorial 왕립 수도원에서 전시되었다가, 1939년 Museo del Prado가 취득 하게 됩니다. 

 

 

 

 

위쪽으로 '죽음(왼쪽)', 최후의 심판(오른쪽), 아래쪽으로 '지옥 (왼쪽), '천국(오른쪽)'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죽음 이후를 심판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폭식과 과음 gluttony(Gula)/1500, wikipedia

 

 

 

나태 , 게으름 Sloth(Accidia)/wikipedia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거대한 회전 룰렛처럼 둥근 판이 위치해 있는데, 도넛 판은 7개의 죄를 의미하는 그림들과 죄명이 나뉘어 있습니다. 폭식과 과음을 의미하는 gula 영역에는 술을 병 째 마시는 사람, 계속해서 음식을 나르는 여인, 뚱뚱한 자식이 음식을 달라고 보채고 있는 모습입니다. 나태, 게으름을 의미하는 acedia 영역에는 벽난로 앞에 앉아 만사가 귀찮은 듯 눈을 감고 쉬고 있는 사람과 앞에서 기도를 권하는 수녀가 서있습니다.  

 

 

 

 

 

욕망, 쾌락, 사치 Lust(Luxuria)/ wikipedia

 

 

 

오만함 Pride(Superbia)/wikipedia

 

 

 

분노 wrath(Ira)/wikipedia

 

 

욕망, 쾌락, 사치를 의미하는 luxuria 영역에서는 두 커플이 분홍색 텐트 안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네요.그 앞에서 광대들이 연극을 선보입니다.  오만함을 의미하는 superbia 영역에서는 악마가 쥐고 있는 거울을 보고 있는 한 여성이 보입니다.  자아도취에 흠뻑 빠진 모습입니다.  분노를 의미하는  ira 영역에서는 술을 취해 칼을 들고 싸우는 두 남성과 이를 말리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시기, 질투 Envy(Invidia)/wikipedia

 

 

탐욕 Greed(Avaricia)/wikipedia

 

 

 

 

 

시기와 질투를 의미하는 invidia 영역에서는 노예를 부리고 매를 키우는 한 남성을 보며 시기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한 부부가 등장합니다.  마지막으로 탐욕을 의미하는 avarcia영역에는 소송자에게 귀를 기울이는 척 하면서 뒤에서 다른 손으로 뇌물을 받고 있는 한 판사가 보입니다. 

 

 

"Death of a sinner", angel and devil weigh a man's soul/wikipedia

DEATh

죽음, 침대 위로 보이는 해골과 천사와 마귀가 죽은 이의 영혼을 데려가려한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Hell"and the punishment of the seven deadly sins/wikipedia

 

 

Hell

지옥, 지옥에서 참혹한 형벌을 받고  있는 참상을 그렸다. 

 

 

 

 

"Glory" or Heavn/wikipedia

 

Paradise

 

천국, 황금빛으로 그려진 천국에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환영하는 천사들과 하느님

 

 

 

 

"Last Judgment"/wikipedia

 

 

 

Last Jugement

최후의심판, 예수 그리스도와 12사도의 모습, 아래는 심판에서 구원을 기다리며 무덤에서 일어나려 하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전체 화폭에서 네 갈래의 모서리에는 둥그런 그림 4개가 또한 그려져 있습니다.  인간이 맞는 최후의 것 4가지 죽음, 최후의 심판, 천국, 지옥을 표현했습니다. 스케일이 큰  이 그림은 성서 내용을 상당 부분 정리하는 동시에 히에로니무스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이 죄를 짓는 모습과 최후를 그만의 화풍으로 표현해 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3QkJ4wIDwQ

 

 

 

 

Death and the Miser, 1490-1516,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wikipedia

 

 

 

<죽음과 수전노>는 1490-1516년 사이에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작품입니다. 목판에 그린 유화 작품은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적인 예이며, '메멘토 모리(mementomori)'전통에 속하는 관람자에게 죽음의 불가피성을 상기시킵니다.

 

 

이 그림은 수전노 또는 고리대금업자의 임종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장면은 여러 시간대를 결합하여, 수전노가 젊었을 때 재물을 축적하는 모습과 죽어가는 순간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림의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음: 화살을 든 해골 형성으로 옷장에서 나오는 모습

수전노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천사

유혹을 상징하는 금화 주머니를 들고 있는 악마

영적 구원을 상징하는 창문의 십자가

세속적 소유물과 악마들로 가득 찬 상자

 

 

 

이 작품은 도덕성, 삶의 덧없음, 물질적 부와 영적 구원 사아의 갈등을 탐구합니다. 탐욕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며, 죽음 앞에서 도덕적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보스의 복잡한 상징주의와 생생한 이미지는 복잡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며, 오늘날까지도 관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 작품은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우선순위와 물질적 집착의 궁극적인 무의미함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작품은 인간의 선과 악, 기괴한 상상의 짐승, 비현실적인 풍경 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스의 작품 주제는 크게 종교와 도덕적 교훈이 혼합돼 나타납니다. 종교화 속에 장르화(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익명의 사람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적인 요소가 보이거나, 장르화 속에 도덕적 교훈과 함께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스의 작품 <건초수레>도 인간의 악덕과 어리석음을 상징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다룬, 도덕적 교훈이 담긴 하나의 풍자적인 교리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건초마차 Haywain Triptych, 1516/wikipedia

 

 

 

 

 

 

 

 

 

 

세 폭 패널로 구성된 <건초 수레 Haywain Triptych>의 중앙 패널에는 인간의 타락한 도덕성을 풍자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거대한 건초 수레는 오른쪽 패널의 지옥을 향하고 있습니다. 지옥에서는 인간들의 저지른 죄로 인해서 벌을 받고 있고요. 왼쪽 패널에는 인간의 영벌에 관한 주제를 담은 총 네 개의 이야기를 묘사했습니다. 반역 천사의 추락, 이브의 탄생, 뱀의 유혹 그리고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이 그려져 있습니다. 

 

 

 

 

중앙 패널에는 커다란 건초더미를 가득 실은 마차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 시끌벅적한 모습입니다.  네덜란드에는 "세상은 건초더미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건초더미에서 각자 움켜잡을 수 있는 만큼 취한다"는 오래된 속담이 있습니다. 마차 뒤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교황과 황제를 비롯해 세속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말을 타고 뒤따르고 있습니다. 마차 주위에는 서민들이 하나같이 한 움큼이라도 건초를 더 가지려고 욕심스럽게 다투고 있고요.  사다리를 놓고 건초더미에 오르려는 사람, 갈퀴로 건초를 빼돌리려는 사람, 바퀴에 걸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손에 건초를 조금이라도 더 움켜잡으려고 격렬하게 싸우는 사람 등 사람들이 치열하게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모두 커다란 건초더미를 보호하려는 마음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건초를 양껏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건초 수레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한없는 욕심을 상징합니다.  건초를 차지하려는 탐욕은 다른 죄를 낳기도 하고요. 화면 아래 오른쪽에는 뚱뚱한 수도사가 한 손에 포도주잔을 들고 자신이 모아 놓은 건초를 보며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그를 대신해 수녀들이 큰 자루에 건초를 채워 넣고 있고요. 마음의 수양을 쌓고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이 오히려  수도자의 서약은 저버리고 교회 재산을 빼돌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들 왼쪽에는 여자 환자가 고통스럽게 돌팔이 의사에게 치료받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아이가 치맛자락을 잡고 보채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여인이 한 집시에게 손금을 보고 있고요. 이들 뒤로는 검정 모자에 망토를 두르고 아이를 업은 마술사이자 도둑이 보입니다.  모두  탐욕에 젖어 속임수와 도둑질을 일삼는 자들입니다.  더욱이 이들 위쪽에는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장면도 묘사돼 있습니다. 

 

 

 

 

 

건초 꼭대기에는 두 쌍의 남녀가 한때를 즐기고 있습니다. 소박한 차림의 한 쌍은 덤불 속에서 입을 맞추고 있고, 우아한 차림을 한 다른 한 쌍은 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들 오른쪽에는 공작새 꼬리를 한 파란색 악마가 있습니다. 이들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탐욕에만 눈길이 가 있습니다.  부를 향한 인간의 온갖 탐욕과 범죄, 혼돈과 분열의 결말은 어떨까요? 수레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수레는 기이한 생물들에 의해 천천히 그들의 목적지인 오른쪽 패널, 곧 최후의 심판인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uPSEdduXXc

 

 

 

 

 

2016년 뉴서커스와 연극,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보스 드림즈(4월 6-8일 , LG아트 센터)는 15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1516)의 그림들을 바탕으로 합니다.  보스 서거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보스재단의 의뢰로 2016년 초연한 작품입니다. 캐나다의 서커스 단체 '세븐 핑거스'와 덴마크 극단 '리퍼블릭크' , 프랑스의 비디오 아티스트 앙쥐포티에가 협업했습니다.

 

 

 

 

세븐 핑거스의 예술감독인 사무엘 테트로는 "서커스는 공중에 더 있는 에어리얼 퍼포먼스 등으로 신체를 초현실적 이미지로 만드는 것과 같기 때문에 보스의 그림을 표현하기에 아주 적합했다.고 설명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hAkfWEooME

 

 

 

 

 

 

https://www.youtube.com/watch?v=vBG621XEe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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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Vela'zquez, 1599-1660)가 죽은 뒤 스페인은 유럽 미술계에서 거의 유명무실한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몇몇 화가들이 벨라스케스가 일구어낸 서유럽 르네상스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급급할 뿐이었죠. 그러나 변혁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납니다.  '미술사의 전환'을 이끌어갈 주인공이 변방 스페인에서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변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1746-1828)입니다. 후대 미술사가들은 스페인 동북부 시골 출신의 이 화가가 '근대 미술'로의 전환을 이끌었다고 말합니다.  

 

 

 

Saturn Devouring His Son, 1820-1823, Museo del Prado, Madrid/wikipedia

 

 

 

 

 

끔찍한 공포감을 주는 고야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광기어린 눈빛으로 이미 상반신을 먹어치운 '사투르누스' , 여전히 희생자의 몸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에 오싹해 집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고야가 자신의 집 벽에 직접 그린 14점의 '검은 그림'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로마 신화의 사투르누스)가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사투르누스는 자신의 자식 중 하나가 자신을 몰아낼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자식들을 삼켰습니다. 

 

 

 

 

이 작품은 고야의 말년에 제작되었으며, 전쟁의 폭력과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공포를 목격한 작가의 정신 상태를 반영한다고 여겨집니다. 고야의 독특한 화풍과 어두운 주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경험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Lawz8TcPig

 

 

 

 

Madrid, Spain/Alamy

 

 

 

 

https://www.youtube.com/watch?v=BYFrvyNCOlM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1746-1828)는 극적인 사실주의화로 유명한 18-19세기 스페인의 궁정화가 입니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고 판화가이기도 하지요.  고야는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로서 많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와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스페인, 사라고사/여행과 날씨

 

 

1746년 스페인 아라곤주 푸엔데토도스(사라고사 Zaragoza인근 소도시)에서 금도금 업자의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10대시절 가족과 함께 사라고사로 넘어가서 14살 때 호세 루잔 마르티네스(Jose Luzan Martinez)이라는 화가의 도제가 되어 미술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4년 동안 도제로 일하면서 이후 같은 호세루잔 도제이자 미래의 궁정화가 프란시스코 바이유(Franxisco Bayeu)와 친분을 만들어, 1763년 그를 따라 마드리드로 이사가게 됩니다.

 

 

 

 

 

1763년에 마드리드에 들어와 프란시스코 바이유 밑에서 일을 하면서, 미술 대회 입상을 노려보지만, 벨라스 아르테스 산 페르난도 (Bellas Artes de San Fernando)아카데미에 주최하는 2차례의 미술대회에 입상에는 실패하게 되어 1770년에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이탈리아에서 미술 공부를 하면서 파르마 아카데미(Academy of Parma)에서 주최한 미술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여 본인이 고대하던 입상을 하게 됩니다. 

 

 

 

고야는 1771년 사라고사로 돌아와, 수도원과 성당의 프레스코화 장식을 맡으면서  사라고사에 돌아온 프란시스코 바이유의 도제로써 미술공부를 이어가게 됩니다.  1773년 고야는 베이유의 여동생 호세파와 결혼합니다. 그 후 그는 왕립 미술학회 회원이었던 베이유의 도움으로 1775년경부터 산타바바라(Santa Barbara) 스페인 왕궁에 보낼 테피스트리(tapestry)삽화를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테피스트리(tapestry)는 두꺼운 천 위에 수를 놓아서 만든 장식으로 벽이나 창문에 설치하여 겨울  같은 날에 방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엘 에스큐리알과 엘 파르도 궁전의 테피리스트 제작에 참여하여 5년 여 간에 걸쳐 42개의 패턴을 제작하게 됩니다 . 고야는 이 작업으로 왕가의 주목을 받았고 성 프란시스코 성당의 제단화를 그려 실력을 인정받은 후 왕실 미술학회의 회원이 됩니다. 

 

 

 

 

 

 

 

 

 

 

 

Hunting Party, 1775/ Museo del Prado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의 <Hunting Party>(1775)작품입니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이고요.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졌으며, 크기는 290cm*226입니다. 

 

 

 

고야는 이 작품에서 두 가지 유형의 사냥, 즉 도보 사냥과 기마 사냥을 한 장면에 담아냈습니다. 그림에는 다양한 사냥 도구와 사냥개들이 등장하며, 사냥꾼들이 서로 다른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야가 왕실 테피스트리 디자인을 위해 받은 의뢰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그렇게 고야는 자신만의 로코코 양식의 테피스트리(tapestry)삽화 제작으로 인지도를 쌓다가 1780년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 회원(Royal Academy of San Fernando)으로 선출됩니다. 1783년 고야는 카를로소 3세의 측근이었던 블랑카 백작의 초상화를 제작 하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고야는 많은 왕가의 초상화를 제작하게 됩니다. 1785년 아카데미의 부원장으로 임명되더니 1786년 스페인 왕실 화가로 임명됩니다. 1788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고 1789년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합니다.

 

 

 

 

 

 

The Parasol,1777, Francisco Goya, Artmajeur 매거진

 

 

 

 

 

이 작품은 고야가 왕립 테피스트리 공장에서 일 할 때 제작한 것으로, 당시 스페인 사회의 일상적인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에는 우아한 젊은 여성이 양산을 들고 있는 모습이 중심에 묘사되어 있으며, 그 옆에 남성 동반자가 서 있습니다.  < The Parasol>은 고야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은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이 시기 고야는 스페인 귀족과 왕족의 초상화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장면을 담은 그림들을 많이 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고야가 마드리드에서 저명한 예술가로 자리잡아가던 시기에 제작되었습니다. 그의 예술적 재능과 당대 스페인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St. Bernardino of Siena Preaching to Alfonso V of Aragon, 1782-1783/Artchive

 

 

 

 

이 그림은 고야가 스페인 왕실의 궁정 화가로 활동하던 초기에 그린 것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은 15세기 이탈리아의 성인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가 아라곤의 알폰소 5세 앞에서 설교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야는 이 역사적 순간을 웅장하고 극적인 구도로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은 고야의 초기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은 화려하고 세련된 기법이 돋보입니다. 특히 인물들의 의상과 배경의 세밀한 묘사,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효과적인 사용이 눈에 띕니다. 

 

 

또한, 고야가 종교화와 역사화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화가임을 보여주며, 그의 예술적 재능과 기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덕분에 고야가 스페인 왕실의 인정을 받고 궁정 화가로 자리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The Family of the Infante Don Luis, 1784/Artchive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의 'The Family of the Infante Don Luis'는 1783-1784년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현재 이탈리아 파르마의 Fondazione Magnani-Rocca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스페인 왕실의 루이스 인판테와 그의 가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야가 왕실의 초청을 받아 아레나스 데 산 페드로에서 작업한 것입니다. 

 

 

 

작품은 루이스 인판테가 카드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중심으로, 그의 아내 마리아 테레사와 자녀들이 주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고야 자신도 그림의 왼쪽 하단에 등장하고요.이 장면은 일상적이고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정적인 자세로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Manuel Osorio Manrique de Zuniga(1784-1792)/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8세기 말에 그려진 초상화 작품입니다. 작품은 붉은 옷을 입은 어린 소년 마누엘 오소리오 만리케 데 수니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년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고야는 그의 부모의 의뢰를 받아 이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림에서 소년은 화려한 붉은 의상을 입고 있습니다. 손에는 새장에 묶인 새를 들고 있고요.주변에는 고양이들과 새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고양이 눈동자가 커져 있는 걸 보면 금방이라도 까치로 보이는 새를 훔칠 것 같습니다. 새가 물고 있는 것이 고야의 명암이라는 하네요. 당시 귀족 가문의 부와 지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야의 초기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예로, 밝고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디테일이 특징적입니다. 후기 작품들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이 초상화는 밝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D7U82wcxQ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만큼  미술 세계뿐 아니라 다른 여러 방면에서 후세에 큰 반향을 남긴 화가는 드물것입니다. 프라도 미술관이 1819년 문을 열었을 때 고야는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그의 전시실에는 단 세 작품만 전시되어 있었죠. 이후 고야의 작품은 쉬지 않고 들어왔습니다. 왕실 컬렉션 외에 다른 경로로도 들어왔는데 현재는 미술관에서 가장 많이 소장한 작품이 고야의 것이지요. 150여 점의 회화 작품과 500여 점의 소묘, 판화 컬렉션까지 더해져 한 화가의 수집품으로서 질적이나 양적으로 가장 완벽합니다. 벨라스케스의 경우와 같이 고야를 이해 하려면 프라도 미술관의 방문은 필수적일 것입니다. 

 

 

 

 

The Duke and Duchess of Osuna and their Children, 1787-1788/ wikipedia

 

 

 

 

이 작품은 오수나 공작 페드로 텔레스 기론, 그의 아내 호세파 알론소 데 피멘텔, 그리고 그들의 네 자녀를 그린 가족 초상화입니다. 고야는 이들 가족을 개별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여 각 인물의 개성을 잘 드러냈습니다. 회색과 녹색 톤을 사용하여 섬세하게 직물과 레이스 등의질감을 표현했습니다. 아이들 입은 옷차림이 다른 초상화들에 비해 편안한 차림이 눈에 띕니다. 고야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고 해요. 그래서일까요. 그림 분위기가 따뜻해 보입니다. 다른 귀족 초상화들에서 보이는 뻐기는 자세는 1도 없는 모습입니다. 우아하고 품위있습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드문 가족 초상화로, 플랑드르나 영국의 모델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화실에서의 자화상, 1791-1792, 스페인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Artmajeur

 

 

 

고야의 자화상은 약 스무 점 남짓 전해옵니다. 그 중 몇몇 작품은 화가의 삶을 여러 각도로 비추는 프리즘 같은 구실을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프리즘을 발광시키는 작품이 바로 <화실에서의 자화상> 작품입니다. 밝은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을 배경으로 서 있는 화가는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젤이 화면 밖으로 노출되어 있지 않아 화가가 무엇을 그리는 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화가는 그림밖 세상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 속 화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면 관람자가 화가의 모델이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고야는 자신을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페인 전통 의상을 멋드러지게 차려입고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Francisco Goya, 1796-1797 /Comfycap

 

 

 

그러던 1792년 고야의 인생에 있어서 갑작스러운 터닝포인트가 발생합니다. 왕실 화가로써 꽤 높은 수입을 벌고 있던 46세에 청력장애를 앓기 시작한 겁니다. 정확한 병명은 모르겠으나 학계에서는 뇌졸증, 뇌염, 납 중동, 매독 등의 다양한 추측들만 있을 뿐입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병에 대한 우울증 때문에 고야의 작품은 어둡게 변해갑니다. 이때 학계에서는 로코코 스타일의 화풍이 표현주의적으로 변화하는 기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The White Duchess, 1795 (왼) The Black Duchess , 1797(오),알바공작 부인 , 1797/NYCultureBeat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알바 공작부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요녀"라고 부르고, 고야는 "걸어 다니는 남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열애는 스페인에서 화젯거리가 되었으나,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공작부인은 자신의 초상화에 또 다른 화젯거리를 남깁니다. 

 

 

 

고야는 값비싼 레이스와 반짝이는 비단의 질감을 당시 어느 화가보다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재능이 번쩍이는 공작 부인 초상화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부인의 당당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자존감이 가득한 고야는 그림을 통해 누구보다도 당당한 모습으로 그녀의 연인을 지목합니다.  레이스로 화려하게 치장한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흙바닥에는 "나에게는 오직 고야 뿐 (Solo Goya)"이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란한 화제를 제공한 두 사람의 열애는 오래가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공작 부인에게 절교를 선언 받은 고야의 그림은 더욱 더 검은 어둠 속의 그림으로 변해갑니다. 

 

 

 

 

알바 공작부인은 40세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녀는 죽음에 이르러 고야의 아들에게도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녀의 다른 정부는  그 시기 스페인 권력에 중심에 있었던 재상 고도이였다고 합니다. 고도이의 또다른 정부가 카를로스 4세의 왕비인 마리아 테레지아였고요. 

 

 

이러한 이유로 '옷을 입은 마야와 옷을 벗은 마야'의 실제 모델이 귀족인 알바 공작부인이라는 추정에 대해 고야는 당시 유럽에서 악명 높던 스페인의 이단종교재판소에서 작품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고통을 치르게 됩니다. 공작부인과의 열애는 고야의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인 고통으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녀에 대한 불만을 표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01년 이후 고야는 높은 연봉을 계속 받음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위임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19세기 초, 고야는 주로 작위나 계급이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 이미지를 계속해서 그렸습니다. 그는 또한 계급이나 계층등을 따지지 않고 대상이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친밀하고 심리적으로 심오한 초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Capricho No.1 : Francisco Goya y Lucientes,pintor(Francisco Goya y Lucientes,painter), 1797-1799/wikipedia

 

 

 

 

1792년 콜레라에 걸린 고야는 고열로 인해 청각을 잃게 됩니다. 5년뒤 회복에 이르기까지 고야는 깊은 상실감을 맛 보게 됩니다. 고통스러운 기간동안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에 이끌렸고 관련 철학책들을 읽기 시작합니다.프랑스 대 혁명이 가져온 계몽주의에 눈을 뜨게 된 거지요.  이러한 시기에 제작된 판화 연작이 바로 "로스 카프리초스"입니다.

 

 

 

 

고야는 1793년부터 아쿠아틴타(Aquatinta)와 에칭(Etching)기법을 이용한 80점의 판화 작품을 제작하여 1799년  "로스 카프리초스"라는 제목의 판화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카프리초스"라는 말은 이탈리아어인 "카프리치오"(Capriccio)에서 나온 말로 "기분, 변덕, 혹은 착상"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프리치오"는 회화, 음악 그리고 문학의 용어로도 사용이 되는데, 형식에 구애받지않고 즉흥적으로 떠 오르는 내적인  착상에 의해 창작된 작품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야가 살았던 18세기 중반이후의 스페인 사회에 대해 간략히 살펴봅니다. 당시 스페인 사회는 타락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성적인 문란함, 성직자들의 타락, 정치인들의 부정과 부패, 교회의 권위에 항거하면 종교재판의 "마녀 사냥"에 희생양이 되어 버리는 이러한 상태의 사회에서 정의는 온데 간데 없었고 불안과 공포 그리고 욕망에 대한 탐닉이 사람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고야는 자신이 감내해야 했던 존재적 좌절감과 불안감 그리고 당시 스페인이 처해있던 참혹한 현실을 미술로 승화하여 표현하고자 했던 시도가 바로 80점에 이르는 "로스 카르피초스"연작입니다. 

 

 

 

1799년 마침내 고야는 80점의 작품이 수록된 판화집 "로스 카프리초스"를 출판합니다. 자신들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사회비판적 작품이 요통이 되는 것을 고위 관리 그리고 성직자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리 없었겠지요. "검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원래는 모두 270 부가 출판이 되었지만, 시중에는 27부만이 돌았다고 합니다. 

 

 

 

고야 자신도 "검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출판이후 판화 원본을 스페인 국와에게 선물로 헌정합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판화 작품들이 영국의 윌리엄 호가스(Willian Hogarth, 1697-1764)의 작품들을 연상시키듯, 우매한 민중들을 교육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포장을 합니다. 그리고 각 작품들에 아주 교훈적인 제목과 설명을 덧 붙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고야가 작품에서 고발하고자 했던 것은, 가난과 성매매, 미신, 타락한 성직자들의 행태, 종교재판이라는 공포스러운 제도를 앞세워 남용되는 교회의 권위 그리고 귀족들의 잔혹함이었습니다. 

 

 

 

 

Los Caprichos, NO.43: The Sleep of Reason, 1797-1798/wikipedia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이 작품은 1797-1798년에 제작된 80점의 판화 시리즈 "Los Caprichos" 중 하나입니다. 책상에 엎드러 잠든 남성(고야 자신으로 추정)과 그를 둘러싼 불길한 동물들(박쥐, 올빼미 등)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잠든 이성을 표현하며, 이성이 잠들면 비 이성적인 괴물들이 나타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에칭과 아쿼틴트 기법을 사용하여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에 대한 믿음과 동시에 그 한계에 대한 고야의 비판적 시각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은 후대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 고야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Capricho No.24: NO hubo remedio(there was no help), 1797-1799/wikipedia

 

 

 

 

15년 동안 궁정 소속 화가로 활동한 끝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하게 되었고 수석 궁정 화가로 임명되어 왕과왕후를 비롯한 많은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1780년대에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많은 귀족에게 주문을 받았고요.  그들 중 계몽주의 정치인이나 지식인들과도 친분을 맺게 됩니다. 그들은 새로운 지적, 도덕적, 정치적 개념을 고야(Goya)와 공유했고, 이들을 통해 익힌 그의 사상은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카를 4세와 그의 가족들 Charles IV of Spain and His Family, 1800-1801/wikipedia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프란시스코 고야가 1800년에 시작해 1801년에 완성한 대형 유화 작품입니다. 현재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을 묘사하고 있으며, 고야의 날카운 풍자와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입니다. 고야는 왕실 인물들의 외형적 특징과 내면적 성격을 세밀하게 표현했으며, 특히 왕비의 권위와 왕의 무능함을 강조했습니다. 이 작품은 왕실의 허영과 탐욕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lvXGblFsv8&t=3s

 

 

 

 

 

1800년대는 스페인의 역사에 있어서 암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18세기말부터 카를로스 4세의 정치적 무관심으로 여러 혼란이 일어납니다. 반면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1804년 황제에 즉위합니다. 18세기말부터 스페인의 내정을 간섭해 오던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총통으로 즉위하자 카를로스 4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친형 조셉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를 스페인의 국왕으로 임명해 버립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1808년부터 스페인 독립운동이 시작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Senora Sabasa Garcia, 1804/National Gallery of Art

 

 

 

 

 

미국 워싱턴 D.C. 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가 그린 초상화 작품입니다. 고야는 이 작품에서 배경을 완전히 생략하고 의상을 인상주의적으로 처리하여 불필요한 세부 묘사를 줄였습니다. 대신 생동감 넘치는 붓놀림으로 세뇨라 사바사 가르시아( Senora Sabasa Garcia)의 만틸라(스페인 여성들이 머리에 쓰는 레이스 숄)의 섬세한 질감을 표현했습니다. 

 

 

 

모델인 사바사 가르시아(Sabasa Garcia)는 당시 스페인 외무장관이었던 에바리스토 페레스 데 카스트로의 조카였습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고야가 외무장관의 공식 초상화를 그리던 중 사바사 가르시아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고야의  뛰어난 초상화 기법을 보여주며, 모델의 절제된 열정과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스페인의 미"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고 평가받습니다. 

 

 

 

 

 

옷을 벗은 마하 La Maja desnuda, 1799-1800, 프라도 미술관 1층 36실/ 옷을 입은 마하 The Clothed maja, 1805 /View of the two paintings side by side/wikipedia

 

 

 

 

 

기존의 누드화들은 대부분 신화 속 존재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화에서도 누드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긴 하지만, 대부분'이야기 전개상'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드물게 실제 여성의 누드를 그린 그림도 발견되지만, 대 체로 화가가 자신의 연인을 담아 개인적으로 보관하는 것이거나 습작용에 불과했지요. 그러나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는 스페인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멋쟁이 여자 '마하'가  나체로 누어 있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하(Maha)는 집시에 가까운 자유분방한 여성을 뜻합니다.  비너스 등 여성 누드화의 단골들은 인간이 아닌 상상 속의 인물들로 9등신 8등신 등 완벽한 몸을 가지고 있지요. 대체로 그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타고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화가들은 그 모델을 완벽한 비율의 과거 조각상에서 찾았습니다. 여신도 아니고 완벽한 비율의 조각 같은 몸도 아닌 '그냥 진짜 여자'마하, 게다가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는 '도발적인 시선'옷을 벗은 마하는  'nude(고상하고 이상적인 신체로서의 몸)'라기보다는 날것 그대로의 알몸, 즉 'naked'의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의 주문자는 카를로스 4세 시절 왕비의 애인이자 왕을 대신해 나랏일을 쥐락펴락하던 재상 마누엘 고도이 (Manuel Faria, 1767-1851)였습니다. 고야가 발가벗은 여자의 몸을 그리면서도 종교재판소의 매 같은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주문자의 '권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죠.

 

 

 

 

카를로스 4세와 고도이가 쫓겨나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고도이가 소장했던 작품들이 대거 국가에 귀속 됩니다. 그들 중에는 당연히 이 작품들을 비롯해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버너스>도 함께 있었습니다. 고야는 뒤늦게 <옷을 벗은 마하>로 인해 종교재판소의 호출을 받게 됩니다. 다행히도 고야는 페르난도 7세의 신임을 받던 화가였기에 처벌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술과 외설이라는 케케묵은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던 이 작품으로 고야는 당시 궁정화가로서의 직위마저 박탈당합니다. 

 

 

 

궁정화가 직위를 박탈당한 뒤 고야는 이 작품 속 누드 모델에게 그대로 옷을 입힌 작품< 옷 입은 마하>를 내놓아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받습니다. 작품 속 모델은 옷을 입고 있지만 여전히 선정적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옷 입은 마하>를 보면서 <옷 벗은 마하>를 상기시키는 것이죠. 경직된 스페인 사회에 대한 고야 특유의 통렬하고 냉소적인 항의 표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드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사람들은 궁금합니다. 그중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가 바로 알바 공작부인입니다. 고야는 스페인 실세 가문 알바 공작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녀와 만나게 됩니다. 왕비보다 더 직함이 많을 정도로 지체 높은 알바 공작 부인은 남편이 죽자, 마드리드를 떠나 남부 안달루시아의 별장으로 갔는데, 고야도 그녀를 따라가 몇 달을 함께 머물렀다고 합니다.  

 

 

 

 

고야는 마하 복장 차림의 그녀가 손가락으로 바닥에 새긴 글자, '오직 고야 (Solo Goya)를 가리키고 있는 장면을 비롯해 그녀의 초상화를 자주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 때문에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지요. 그러나 둘의 신분 차이로 미루어보아 두 사람의 관계는  일방적인 짝사랑이었거나 설사 둘 사이에 심상치 않은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 해도 고야는 알바 부인  정도의 권력자가 거느릴 수 있는 '심심풀이 정부들'중 하나에 불과했을 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그림의 모델을 알바 공작부인이라고 단정하지만 정작 알바 공작의 후손들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공작부인의 유해까지 파내는 소동을 벌였습니다. 뜻밖에도 유해 검시관들이 그림모델이 알바 공작부인과 비슷하다는 의견을 내놓는 바람에 또 한 차례 격론이 이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고야가 그림을 그릴 때 공작부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게다가 이 그림들이 재상 고도이의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라면 고도이의 집안과 정치적 숙적 관계에 놓여 있던 알바 집안 여자를 고야가 굳이 모델로 할 이유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모델은 고도이의 또 다른 연인 페피타 투도라는 여성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1808년 5월 2일 :맘루크의 공격 The Charge of the Mamelukes, 1814/wikipedia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끝난 뒤 스페인 밖으로 추방당했던 카를로스 4세에 장남이 1814년에 페르난도 7세로 스페인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운 마드리드 시민을 기리는 그림을 제작할 것을 고야에게 주문했지요.고야는 1808년 5월 2일과 이튿날인 3일에 일어난 사건을 두 점의 그림으로 제작했습니다.

 

 

 <1808년 5월 2일>

 

 

당시 나폴레옹 군대는 이집트에서 데려온 마멜루코 용병과 프랑스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터번을 쓰고 둥글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는 등의 아랍식 복장과 프랑스식 군복을 입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마드리드에는 수도를 수호할 만한 군대도 없었기 때문에 마드리드 시민들은 맨손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민들은 짧은 칼, 밧줄, 나무 몽둥이를 들고 싸웠지요. 이 날의 시민 봉기부터 프랑스에 맞선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땅바닥에는 프랑스 군인과 마드리드 시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습니다. 앞줄의 마드리드 시민들은 말을 공격하고 마멜루코 용병을 칼로 찌르고 말에서 끌어 내리려 합니다. 이 시기는 신고전주의가 유행했고 신고전주의자들은 역사화를 많이 제작했습니다. 그러나 고야의 작품이 다른 역사화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역사화에는 늘 영웅이 등장하지요.  민중을 이끄는 영웅이라든지,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영웅 말입니다. 그러나 고야(Goya)의 이 그림에는 그런 비장한 인물이 없습니다. 프랑스 군인들은 침략자니까 영웅일리 가 없고, 그렇다면 마드리드 시민은 어떤가요?  가장 뒷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죠.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한 무리의 무지한 군중들처럼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시기에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태일 겁니다.  붉은 바지를 입고 피를 흘리며 말에서 거꾸러져 있는 마멜루코 용병과 그를 찌르는 스페인 사람을 보세요. 용병은 피도 많이 흘렸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것이 이미 죽은 것 같습니다. 칼로 그를 찌르는 사람은 그것도 알지 못한 채 그를 계속 찌르고 있습니다. 광기가 그림 전체에  휘몰아 칩니다. 

 

 

 

 

 

The Third of May 1808/wikipedia, 1814

 

 

 

 

그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 봉기에 가담했던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스 군대에게 처형당했습니다. 마드리드 시 외곽과 시내 곳곳에서 처형이 자행되었다고 합니다.  고야는  이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 1808년 5월 3일 El 3 de mayo en Madrid>에서 곧 죽음을 맞을 사라들의 표정과 반응은 다양합니다.  기도하는 사람, 공포로 눈을 둥그렇게 뜬 사람, 좌절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두 팔을 벌리고 죽음을 마주보는 사람 등, 그러나 프랑스 군대는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은 자세로 총을 들고 아무도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총살이 자행되는 순간의 프랑스 군대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일렬로 선 군인들과 마치 처형당하는 예수처럼 팔을 벌린 마드리드 시민 사이에는 불을 밝힌 초롱이 있어서 곧 죽게 될 사람을 밝게 비춥니다. 고야의 남자는 죽음을 두러워하지 않고 죽음을 응시하는 듯 보입니다. 

 

 

 

고야는 1800년대 들어서는 로코코를 포기하게 됩니다. 대중적이거나 풍자적인 암시들을 단순화시켜 환상적으로나타내는 사실주의를 드러냅니다.  1810년 경부터 우세하게 나타나는 검은색과 갈색의 굵은 터치를 비롯하여 '검은 그림' 시리즈를 완성합니다.  검은색은 19세기 고야가 살았 던 불안의 시대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색인지도 모릅니다. 실존적인 불안은 아예 예술적 형상을 엄청나게 화려한 칼라로 표현하거나 아니면 고야처럼 무의식의 세계를 검은색 톤으로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고야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불안감은 고스란히 작품들 속에 표현 됩니다.  그 은밀하고 지속적인 내면의 불안은 곧 죽음과도 밀접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혁명"과 "나폴레옹의 제정"은 유럽 전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막연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했기때문이죠.중세의 꿈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 그 미지의 세계는 삶과 죽음이 직접적 으로 교감하면서 시작됩니다. 한편, 고야의 그로테스크한 판화 작품은 18세기 이후 여러 미술 사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고흐, 마네, 모네, 세잔과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서부터 들라크루아와 같은 낭만주의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고야에게 큰 영향을 받습니다. 

 

 

 




A Spanish civilian about to decapitate a Fench soldier with an axe, 1863, Real Academia de Bellas Artes de San Fernando/wikipedia

 

 

 

 

 

고야는 전쟁의 잔혹함을 다룬 여러 작품을 남겼습니다. 특히 1810년에서 1820년 사이에 제작한 <전쟁의 재난>연작에서 나폴레옹 전쟁 중 일어난 폭력과 잔학행위를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고야는 프랑스군의 만행뿐만 아니라 스페인 사람들이 자국민에게 가한 폭력도 똑같이 기록했습니다. 그이 작품들은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고야(Goya)는 전쟁의 무의미함과 잔혹성을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이는 후대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페르디난도 7세 Fernando VII, 1814-1815/wikipedia

 

 

 

 

프란시스코 고야의 1814-15년 작품<페르디난도 7세의 초상>은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도 7세를 그린 초상화입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점령이 끝나고 페르디난도 7세가 왕위에 복귀한 후 제작되었습니다. 고야는 이 초상화에서 왕의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며, 왕의 복장과 자세를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시기는 고야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그는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 속에서도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페르디난도 7세가 왕위에 복귀한 후, 고야의 작품 세계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고야는 여전히 궁정 화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그이 작품에 는 이전과는 다른 솔직함과 비판적인 시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페르디난도 7세의 초상화에서 고야는 왕의 모습을 당혹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Francisco Goya, 귀먹은 화가의 자화상 , 1815/pinterest

 

 

 

 

 

고야의 자화상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1815년에 제작된 <귀먹은 화가의 자화상>입니다. 1792년경 겨울, 고야는 세비야를 여행하던 중 이름 모를 중병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게 됩니다.  이후 고야는 죽을 때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귀머거리로 살게 되지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적막에서 오는 공포가  작품 속 화가의 표정에 잔뜩 묻어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귀먹은 화가의 자화상>에는 화가의 오른쪽 귀가 유독 도드라져 보입니다.  적막함의 공포가 화가의 귀를 더욱 쫑긋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여러 위기를 겪으며 왕정의 신임을 잃고 마드리드 생활에 환멸을 느낀 고야는 1819년 외곽에 '귀머거리의 집'이란 뜻의 '킨타 델 소르도'로 이사를 합니다. 그는 1층과 2층에 있는 거실의 벽에 거대한 벽화들로 장식하였는데 모두가 악행, 공포, 불안 , 죽음과 같이 무거운 주제를 품고 있습니다. 이 그림들 모두에 일관적인 도상적 의미가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작가의 광기를 띠고 있어 '검은 그림'으로 널리 알려집니다. 이 검은 그림들은 고야 사후에 조심스럽게 잘려 캠버스에 담겨  스페인 정부에 기증됩니다.

 

 

 

 

Two Old Ones Eating Soup, 1819-1823, Oil Mural transterred to Canvas / wikipedia

 

 

 

 

<두 노인의 식사>, 1820-23/ 캔버스로 옮겨진 삽화

 

이 작품의 제목은 <두 노인의 식사>입니다. 아주 어두운 배경 위에 한 노인이 식사를 합니다. 그 옆의 노인은 해골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인간인지 죽음 그 자체인지 불투명합니다. 책을 읽는 중으로 보이지만 식사를 방해하는 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과 함께 지적인 갈망을 함께 표현해 낸 듯한 이 작품을 통해 절망적인 세상 속에서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작가의 심리를 엿볼 수 있겠습니다. 주로 갈색과 회색 톤으로 그려졌는데 강한 표현을 위해 일부러 일그러진 형태로 표현된 인물들은 최소한 의 붓질로 완성되었습니다.  보는 이에게는 악몽을 꾸는 듯한 불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요. 이 작품을 비롯한 '검은 그림'들은 추후 이 집을 구매한 프랑스 남작에 의해 벽화를 캔버스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1881년 스페인 정부에 모든 그림들이 기증되면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됩니다. 

 

 

 

 

 

이렇듯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에 걸쳐 고야가 살아왔던 시대는 옛 왕정 체제가 끝날 즈음이며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사상이 만연한 현대적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예술은 미적, 도덕적 경계를 초월하여 앞서 갔었고, 오늘날까지 신선하고 충격적입니다. 이탈리아 바로크식과 프랑스의 세련된 로코코식 회화로 시작된 그의 초기 작품을 지나 학구적인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거쳐 인간중심으로, 그들의 희로애락을 주제로 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개발하며 이후 20세기 표현주의의와 초현실주의의 초석을 마련합니다. 

 

 

 

 

 

 

 

 

 

난 항상 초조함 속에 살고 있어.
파고든 주제의 끝까지 가지 못하면 난 잠도 잘 수 없고 
휴식도 취할 수 없어 .
지금의 이 삶을, 난 '산다'라고 말할 수 없어.
- 고야가 영원한 친구인 사파테르에게 쓴 편지 내용 중-

 

 

 

 

 

 

 

 

The Dog, 1823/네이트뉴스

 

 

 

고야가 '개'를 그린 이유는 그의 개인적인 상황과 당시 스페인의 사회적 맥락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야는 70대에 정신적, 육체적 병마로 고통받으며 홀로 지내던 시기에 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관심과 고립감이 작품에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스페인의 정치적 갈등과 분쟁에 대한 고야의 환멸감이 작품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스페인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추악함과 순수함에 모두 민감했던 화가로, 이 작품을 통해 인간 본연의 본질과 야만성에 대한 그의 통찰을 포현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귀쫓기 / 아트인사이트

 

 

 

사회적 풍자, 성적 내용, 미신과 마녀 및 유령을 소재로 하는 그의 그림은 '환상적'입니다.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섬뜩한 느낌마저 들고요.

 

 

 

 

Fight with Cudgels /네이트 뉴스

 

 

 

 

 

 

 

 

고야는 자신의 (계몽주의를 추구하는 )'깨인 '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계몽주의자들이 비판하는 사회적 모순, 이를테면 미신과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그림에 표현했습니다. 고야가 친구들과 달랐던 점은 스스로를 '이성적'이라고 믿고 '비이성적'인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신과 환상을 이해하고 '이성'과 '비이성'을 같은 위치에 있는 인간의 특성으로 보았던 점입니다. 이성의 빛으로 어둡고, 혼탁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계몽주의 역시 사실은 야만과 공포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고야(Goya) 스스로 예감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그의 '비이성'적인 그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고야의 예감처럼 계몽주의 를 내세우며 들이닥친 나폴레옹 군에 의해 스페인은 황폐화 됩니다.  계몽주의 사상과 유럽 문명은 다른 나라를 점령하기 위한 구실 또는 변명으로 사용됨으로써 신뢰를 잃었지요.  그 이후 식민 지배자들의 이익을 위해 자행되는 정책적 위장으로 인식되기에 이릅니다. 고야(Goya)전쟁 그림에는 잔혹한 학살의 장면이 담겼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는 참혹한 사회적 현상들을 데생 연작으로 그려냅니다. 

 

 

 

 

사람들이 '빛'과 '이성', '지식'을 방패 삼아 우리의 공포를 하찮게 취급할 때, 고야는 그 공포를 직접 드러냈습니다. 그는 우리의 세계가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았고,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 표현할 줄 알았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예술가 (창조력을 지닌 작가들)이 어떻게  현실적 정치와 국가정치라는 폭력에 맞서 예술로써 싸우는 지 조명하고 탐색했던 화가였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을 '진실'이라 믿는 우리와 달랐습니다. 고야가 멸망하는 진실은 눈에 보이는 형태들의 진실이 아니라 멸망, 사랑, 폭력, 전쟁 그리고 광기의 진실이었습니다. 

 

 

 

 

 

Spanish entertainment, 1825/wikipedia

 

 

 

 

 

프란시스코 고야의 1825년 작품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Tauromaquia>(투우마키아)시리즈입니다 . 이 석판화 작품들은 스페인의 대표적인 엔터테인먼트인 투우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Taurimaquia>는 고야(Goya)의 말년에 제작된 중요한 프로젝트로, 투우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고야의 예술적 경력 전반에 걸쳐 그를 매료시켰던 주제로의 회귀를 보여줍니다. 

 

 

 

고야의 작품은 단순한 엔테테인먼트의 묘사를 넘어서, 당시 스페인 사회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의 대담한 붓터치와 주관적인 표현은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Taurmaquia> 시리즈는 고야의 예술적 성숙도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스페인의 전통문화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중요한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Fransisco Goya, Bullfight in a Divided Ring, 1828/ Alamy

 

 

 

 

 

그는 가장 용감한 겁쟁이였다.
-체코 출신 영화감독 밀로시 포로만, <고야의 유령>(2008)-

 

 

 

 

 

 

 

https://www.youtube.com/watch?v=d4q2S8-U-bk

 

 

 

 

 

 

의사와 함께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Dr Arrieta , 1820/ G. Economy

 

 

 

 

 

 

이 작품은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소장 작품으로 1820년에 그려진 유화 작품입니다. 고야가 병상에서 자신을 돌봐준 의사 아리에타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고야의 다른 자화상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 뿐만 아니라 의사 아리에타를 함께 그린 점이 매우 특별합니다. 이는 단순한 자화상을 넘어 관계성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의초기 자화상들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룹니다.전통적인 종교화의 요소를 차용하면서도 세속적인 맥락에서 재해석했습니다. 이는 스페인  초상화의 현대화와 세속화 경향을 보여줍니다. 배경에 등장하는 어두운  형상들은 고야의 '검은 그림'시리즈와 연관성을 가지며, 병중의 환영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ERSI8avqQQ

 

 

 

 

 

 

 

 잔인한 괴물들을 잊지 않는다면, 진실은 살아있을 것이다.
- 츠베탕 토도로프<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

 

 

 

 

 

 

영화 <고야의 유령>(2008)

 

체코 출신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이 영화<고야의 유령(2008)>에 등장하는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 고야를 평한 발언이다. 고야(Goya)야말로 평생 세속적 영광과 예술적 성취 사이에서 방황한 불쌍한 영혼이었다며, 용감한 겁쟁이라고 언급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p0rq9ak98o

 

 

 

 

 

 

 

 우리는 항상 경계를 구분 짓고자 합니다.  자신이 세운 경계 안에서 옳고  그름을 따집니다. 하지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진실은 어디에 있을 까? 과연 보이는 것이 진실일까?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는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정확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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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큰 견종 라인인 "마스티프(Mastiffs)"는 "전정한 자비로운 거인"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품종입니다. 타고난 큰 골격 구조, 강한 근육 및 시원한 워킹 스타일을 보고 "비헤 모스(behemoth 거대한 짐승)"라는 별명도 따라붙습니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대체적으로 침착한 품종이 '마스티프'의 기질입니다. 가축과 주인을 지키고 성난 소 또는 양을 제압하는 용감하고 힘이 센 가드견으로써 계량된 품종이 '마스티프'입니다. 오늘은 페르시안 마스티프(Persian Mastiff)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Iranian Mastiff/Pinterest

 

 

 

페르시안 마스티프(Persian Mastiff),

이라니안 마스티프(Iranian Mastiff),

이라니안 셰퍼드 도그 (Iranian Shepherd Dog),

사라비 도그(Sarabi Dog),

사라비 (Sarabi)

 

비슷해서 헷갈리시죠? 모두 페르시안 마스티프(Persian Mastiff)를 부르는  여러 가지 이름들입니다.

 

 

 

 

 

페르시안 마스티프/ en,wikipedia.org

 

 

 

 

이란/ Shutterstock

 

 

 

페르시안 마스티프(Persian Sarabi Mastiff)의 원산지는 중동의 이란(Iran)입니다. 이 개는 페르시안 사라비 (Persian Sarabi)또는 페르시안 마스티프 (Persian Mastiff)라고도 하지요. 이란의 북부 지역인 사라브 아르데빌 (Sarab Ardebi)에서 유래한 가축보호 및 재산 보호를 위한 개의 품종입니다. 고대 페르시아 (Persia)의 대형의 앗시리아 개(Assyrian dogs)나 전쟁견에서 진화했다고 합니다.

 

 

 

 

 

 

 

 

 

Persian Mastiff/Doglime

 

 

 

이 개는 머리가 매우 큰 무거운 뼈를 가진 몰로셔(Molosser)입니다. 넓은 머즐(Muzzle코와 주둥이 부분)은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죠.

 

 

 

 

 

 

123RF

 

 

 

체고 :수컷 81-89cm 암컷 71-81cm

체중 :수컷 65-90kg OR 100kg 이상

암컷 50-70kg

대형견

 

 

 

 

 

 

https://www.youtube.com/watch?v=Rqn_tp8AM54

 

 

 

 

 

Sarabi Puppies/ Pinterest

 

 

 

Persian Sarabi Dog/www.juridiconline.com

 

 

 

 

 

이 품종은 거대한 체구와 큰 머리, 무시무시하게 무는 힘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개 중 하나입니다. 주인에게 충성하고 낯선 사람이나 동물에게는 맹수로 돌변해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 개들은 가축을 매우 효율적으로 보호합니다. 어떤 야생 짐승이 다가갈 때마다 뾰족하게 선 귀를 가지고 경계 자세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모든 위해로운 적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아주  큰 짖음으로 꼬리를 올립니다. 개는 일반적으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지만, 침입자가 접근하면 위협적인 자세로 자기 영역을 보호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bNNJLPNQY

 

 

 

 

 

 

Sarabi Mastiff/ Pinterest

 

 

 

 

 

 

 

 

www. lanpyakyel.org

 

 

 

 

이 개는 다른 거대한 마스티프 (Mastiff) 품종들보다 다소 작은 듀랩(Deqlap-목 밑에 처진 살)을 가지고 있습니다. 윗입술은 늘어져 있죠. 눈은 짙은 노란색으로 아몬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등이 곧고 다리가 굵죠. 두툼한 꼬리는 길고 낫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개는 보통 검은 얼굴과 함께 갈색의 그늘진 음영인 세이드(Shade)가 있고 단색의 검은색이 있습니다. 가슴의 약간의 흰 자국은 괜찮습니다.

 

 

 

 

 

코트는 단모형과 중 모형의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단모형은 짧고 밀집된 털을 가지고 있어 관리가 비교적 쉽습니다. 이 유형은 더운 기후에서 더 적합하죠. 중 모형은 중간 길이의 털을 가지고 있으며, 더 두꺼운 언더코트를 포함하여 추운 기후에 더 적합합니다. 이 유형은 정기적인 빗질이 필요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qNvOwBUqh4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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