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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 사이에 여성이 끼여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요즘은 동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며 인정을 받고 있지만 여성 작가들이 등장해서  활발히 활동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페미니즘이 국제적인 운동으로 대두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서구 여성 작가들이 등장한다. '미국 인상주의의 어머니'로 불리는 메리 카사트(Mary Cassatt)와 같은 인물이 그래서 더 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녀가 접한 19세기 '인상주의'가 대중에게 왜 이렇게 호감을  사게 되었는지 잠깐 살펴보자. 첫째, 인상주의 화가는 전통적인 그림의 주제와 기교에 얽매이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그림의 동기와 대상을 찾았다는 것이다. 둘째, 햇살 아래 수시로 변화하는 풍경을 현장에서 직접 화폭에 그림으로써 생동감과 친근감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풍경, 나무, 집뿐 아니라 거리풍경과 철도역 장면에까지 골고루 확대 적용한 점이다. 그리고 셋째로, 인상주의 화가는 빛과  색의 조화, 대상과 면의 구성을 나름대로 실험하였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그림을 통해 그 시대 여성들의 일상을 엿볼수 있어 무엇보다 좋았던 것 같다.  모유수유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차를 마시고 독서를 하고 뜨개질을 하는 모습 등 지금도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을 일상의 일들이 그녀 특유의 따뜻한 붓터치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녀의 그림 대부분에 어머니와 아이가 등장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카세트가 아이 엄마였겠거니 생각하지만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녀가 독신으로 산 이유는 결혼 생활을 하면서 전문화가로서 성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가의 길을 선택한 대신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전문직에 종사하는 많은 여성들은 결혼과 육아 그리고 자기 성장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고민 중인 분들이 많을 것이다.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을 그 당시 여성들의 모습에 조금 미안해지기도 한다. 적어도 그다지 많은 제제와 편견을 받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매리 카사트(Mary Cassatt,1844-1926)는 현재의 피츠버그인 펜실베니아의 알레게니 시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매우 부유한 집안과 좋은 환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로봇 심슨 카사트(Rovert Simpson Cassatt)로 부동산 중개업자였으며, 어머니인 캐서린 케소 존스턴(Katherine Kelso Johnston)의 집안은 금융업을 하는 부유한 가문이었다. 특히 메리의 엄마 캐서린 존스턴은 미국 상류 사회에서 대단히 유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학위도 있고 교양이 넘쳤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좋은 엄마였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7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2명은 어린 아기일 때 죽었다. 이후 그의 가족은 동쪽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처음은 펜실베이니아의 랜캐스터로 이사를 갔으나 이후 필라델피아 근처로 다시 이사를 갔으며 그곳에서 그는 6살이 되어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매리 카사트는 여행을 교육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여기는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는 유럽에서 5년 이상을 지내면서 런던과 파리, 베를린과 같은 여러 수도들을 돌아다녔다. 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웠고 처음으로 미술과 음악 수업을 받게 된다. 그야말로 글로벌 교육을 어릴 적부터 받은 인재상이다.  현대에 태어나도 이런 조건의 부모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울트라급 금수저인셈이다. 우선 경제적 뒷받침을 해준 그녀의 아버지와 딸의 꿈을 믿고 지지해 준 어머니의 역할에 감사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살짝 부럽기도 했다.  재능은 있으나 경제적 문제로 다른 길을 선택하거나, 선택한 길을 고지식하게 걸어가도 경제적 이유로 무너지는 지인들을 삶 속에서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1855년 Paris World's Fair에서 처음으로 그녀는  프랑스 화가 앵그르, 외젠 들라크루아, 코로 그리고 쿠르베의 작품들을 보게 된다. 그녀가 맛 본 고전주의 미술에서 처음으로 격렬한 충격을 받고  평생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고전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생생하게 보았으니 그 여운은 상당했으리라 추측된다. 매리 카사트의 집안은 화가가 되겠다는 그녀의 결심에 상당히 반대했으나, 그녀는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5살이 되던 해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미술 학원에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당시에 미국에서 여성들이 미술을 한다는 것이 제약이 많았다. 실제로 학원의 20%는 여학생이었는데 대다수는 사교계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하나의 기술로서 그림을 배웠으며 매리카사트처럼 전문적으로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공부하는 여학생은 극히 드물었다. 그야말로 남편 잘 만나기 위한 재테크개념 아니었을까 싶다. 신부수업 같은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벌어졌을 당시에도 여전히 그림을 공부했다. 교사들의 느린 교육 방식과, 여학생에 관해 생색내는 듯한 남학생들의 태도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옛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을 보며 혼자 공부하기로 마음먹는다. 기대와 다른 현실에 마음의 상처가 컸던 모양이다. 훗날 그녀는  필라델피아의 학원에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여학생들은 그림을 배울 때 필수조건인 누드모델을 쓸 수도 없었다. 제대로 그림을 그리려면 모델을 그리며 연구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오로지 추측과 상상으로만 그림을 그려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지 상상이 간다.

 

 

 

 

 

 

유럽으로

 

 

 

 

 

1866년 그의 어머니와 가족의 친구들을 보호자로 삼아 파리로 이사했다. 에꼴데 보자르는 아직 여성을 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매리 카사트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화가들에게 개인적으로 교습을 받기로 한다. 그녀는 장 레온 제롬(Jean-Leon Gerome)에게서 수학하게 되었는데, 그는 극 사실적인 작풍과 테크닉, 이국적인 소재를 주제로 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그녀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모작하여 그의 예술적인 감각도 키워나갔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이 예술가를 꿈꾸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장소로 최고의 성지 같은 곳이었다. 에드워드 마네가 드가를 만나 인상주의 뼈대를 세운 시작점도 이곳이었다. 그녀는 작품 모작을 할 때 필요했던 '모작 허가증'을 받는다. 당시 "모작가"들을 관리하기 위해 필요했던 증명서로, 모작가들 중 대부분은 수입이 적은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박물관을 가득 메우며 모작한 작품을 팔았다. 남녀 간 교육의 불평등으로 인해  재주 있는 여성들이 이런 식으로 내몰리고 자신의 생계유지를 위해 녹록지 않았을 그 시대 여성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기도 하다.  배고프고 가난한 젊은 천재들의 발걸음이 머물렀을 이 공간이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걸 보면 다 이유가 있어 보인다.

 

 

 

 

 

 

1866년이 끝날 즈음, 그녀는  찰스 채플린 (Charles Chaplin)이 가르치던  그림 교실에 합류하게 된다. 1868년 또 다른 화가 토마스 쿠쳐(Thomas Couture)에게서 그림을 배우게 되는데 대다수가 로맨틱하거나 도시적이었다. 예를 들면 야외로 스케치 수업을 나갈 때 학생들은 실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데 소재로는  농부들의 일상생활을 그리곤 했다. 이 즈음 프랑스의 미술은 점점 작풍이 변화해 가는 단계에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쿠르베와 마네와 같은 화가들이 전통적인 미술 양식을 거부하는 풍조가 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인상파 양식의 기초를 세우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매리 카사트는 계속해서 전통적인 미술 양식을 공부했으며 10여 년간 여러 좌절을 겪으면서도 파리 살롱에 꾸준히 그림을 제출했다. 1870년대 초 그녀는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여행하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벨라스케스, 루벤스, 코르레지오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또 한 번 깊은 인상을 받는다.

 

 

 

 

 

 

 

관람석에서 (in the Loge,1878), 미국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파리의 유명한 코미디 프랑세즈 극장 특별관람석에 앉은 한 여성이 오페라 스코프로 무대를 바라보는 낮 공연 모습이다. 검은 드레스 정장을 입은 그녀와 박스 시트 관람석의 빨간색 벨벳과 금색 장식이 그림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고, 누군가 멀리에서 오페라 스코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남성 관람객 모습이 이 그림의 숨은 재미 같다. 드가와 친해지며 그와 함께 발레 공연이나 오페라 공연 장소에서  여러 인물들의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려낸다. 아주 노골적으로 자세까지 확 틀어 쳐다보는 늙은 남성의 시선이 지금 어딘가에서도 벌어지고 있을 것 같다. 속물이라고 하기에 나 역시 젊고 잘생긴 남자가 지나가면 눈 돌아가듯이 그저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장면쯤으로 봐줄까 한다. 대신 옆에 않아 계시는 마누라한테 티 내지 않는 조건으로 말이다. 1878년 카사트가 보스턴에서 이 그림을 전시했을 때, 한 비평가는 이 작품이 '비슷한 그림을 그렸던 대부분 남성들의 유사한 그림의 힘을 능가한다.'라는 글을 써서 그녀를 칭찬했다. 여성이라 이런 스토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귀환

 

 

 

 

 

 

1870년 늦여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녀는 알투나에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의 직업에 대해 반대했으며 그의 생활비를 대주기는 했으나 미술용품에 관련한 비용은 지원해주지 않았다.  너무나 현실적인 부동산업자 아버지가 딸을 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측에서 경제적 지원을 중단할 수도 있었을 텐데 생활비는 대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녀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적정선에서 타협하신 선택 같다. 그녀는 뉴욕 갤러리에 그의 작품 두 개를 전시했다.  이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으나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71년 7월 그녀는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내 개인 화실을 포기했고 아버지의 초상화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6주 동안 붓을 한 번도 들지 않았으며 유렵으로 돌아갈 때까지 붓을 다시 들 생각조차 없다. 나는 이다음 가을에 어서 서쪽으로 가고 싶고 일자리도 구하고 싶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정하지 못했다."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는 주변환경들에 고민하는 그녀를 본다. 게다가 1871년 일어났던 시카고 대 화제사건 (Great Chicago Fire)로 그녀의 초기 작품들을 모두 잃게 된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작품들은 피츠버그의 대주교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는 카사트에게 이탈리아의 파르마에 있는 코레지오의 작품들을 모작해 줄 것을 부탁했으며, 일의 대가로 받는 비용은 그의 여행비와 생화비로 충당한다.  그녀는 그 일에 대해 매우 들뜬 마음으로 이렇게 적어두었다. 

 

 

 

"나는 지금 어서 일을 시작하고 싶다."

 

 

 

그녀는 필라델피아의 유명한 예술가 가문 출신인 에밀리 사테인(Emily Sartain)과 함께 유럽으로 다시 돌아간다.

1874년까지 카사트는 파리의 스튜디오에 자리를 잡았다. 3년 후, 그녀의 부모와 그녀의 여동생 리디아가 프랑스에서 합류했다.

여러 차례 출품했던 작품이 남성 중심 살롱에 의해 거절당했고,  그녀의 출품작 중 어느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녀는 파리의 공식 미술계의 정치와 전통적인 취향을 혐오하게 되었다. 마침 화가 에드거 드가(Edgar Degas)가 그녀를 초대하여 인상파 화가로 알려진 독립 예술가 그룹을 소개하고 합류를 권유하자 그녀는 기뻤다. 그들의 그림옆에 나란히 얼굴이라도 내밀수 있어서 말이다. 특히 드가의 예술과 생각은 그녀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카새트는 인상파 운동에 있어 상당한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직접 경제적 도움을 주기도 했고, 그 밖에도 미국에 인상파 화가들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카새트는 그녀의 형제인 알렉산더(Alexander)에게 마네, 모네, 모리조, 르느아르, 드가, 피사로의 작품을 구매토록 설득하여, 그 후 알렉산더는 미국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수집가가 되었다. 카새트는 드가를 존경하였지만, 화풍에 있어서는 드가의 화풍을 맹목적으로 모방을 하지 않고 자신의 특색을 유지하면서 다른 인상파 화가의 영향을 받아 주위의 일상적인 삶을 표현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고, 인물들의 동작의 중요성과 함께 직관의 감각을 중요시하였다. 

 

 

 

 

 

 

 

 

편지( The Letter,1890-91) 종이 위에 동판 애쿼틴트와 드라이포인트 요판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 politan Museum of Art , New York)

 

 

 

 

 

 

 

1890년  4월, 카사트도 당시에 새로운 화풍을 찾던 다른 인상파 화가들처럼 에콜 데 보자르 (Ecole des Beaux-Arts)에서 열린 '일본 우키요에 목판화 전시회에 참석했다. 생전 못 보던 왜색 색판화 전시를 인상 깊게 본 그녀는 자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의  삶을 시리즈 연작으로  목판화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연속 10 작품이나 도전했다. 그 시리즈들은 아이들 씻기고, 화장실에 있는 여성들, 차를 마시는 장면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그림이다. 한 여성이 책상 앞에서 방금 도착한 편지를 뜯는지, 밀봉하는지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어쩐지 내 어설픈 행동양식 하나를 살짝 ~들킨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림 속 그녀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 역시 침으로 편지를 부쳐서 말이다. 구성은 벽지와 여성의 옷 무늬, 편지와 봉투의 종이의 균형이 보는 사람을 그림 속 가까이 다가오게 만든다. 전통적인 일본 목판화 기법 영향 때문인지 일상을 소재로 한 그녀의 작품에 친근감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다시 유럽으로, 그리고 인상파

 

 

 

 

 

 

1880년대 이후 카사트는 특히 엄마와 아이들,  여성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졌다. 당시에 투표권과 사회적 평등권, 심지어 고등교육과 복장 개혁에 이르기까지 신여성이 등장하던 계몽적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1대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며 지금 시대에 보더라도 꽤나 과격한 주장을 했던 나혜석(1896-1948) 화가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그녀는  일본 유학 당시 읽은 여성잡지를 통해 여성계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 당시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글들을 투고하는 등 당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녀 사후  여러 형태의 비판이 존재하지만 먼저 세월을 앞서간 그녀의 인간을 향한 진심만큼은 왜곡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젊은 엄마의 뜨개질(Young Mother Sewing,190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언제 보아도 웃게 하는 그림이다. 아이의 볼그레한 볼과 통통한 손가락 그리고 손뜨개질하는 젊은 엄마를 보며 잠시 눈을 감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겨울이었고 굵은 대바늘 두 개로 식구들 입힐 조끼를 뜨고 계셨던 엄마 생각이 난다. 젊은 엄마들이 5-6명 이웃집 누군가의 안방에 모여 수다를 떨며 대바느질 하는 모습 말이다. 하하 호호 웃음소리에 손은 재빨리 오르락 내리락하며 쉴 새 없이 코를 뜬다. 따뜻한 뜨개실의 질감과 열심히 셋바람 맞고 깨지고 있을 남편, 자식들의 홑겹의 시간을 당신들이 손수 짜놓은 옷들을 입히고 목도리를 두르고 손에 껴주며 차가운 세상을  재미난 놀이터로 만들어 주신 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이제는 이런 느림의 시간이 별 것 아닌 취급을 받지만 그녀들의 마음자리가 한기 드는 겨울밤이면 맥없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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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쇠라의 이름과 함께 기억에 남았던 영상은 단 한 가지였다. 점잖아 보이는 남성 옆에 여인이 입고 있던 옷차림이었다. 잘록한 허리만큼이나 엉덩이가 뽈록하게 나온 스타일이 사춘기였던 내 눈에 무척 신기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나름 그 당시 파리의 최첨단 패션이었을 테니까. 아름다움을 향한 여인들의 노력은 무죄이나 어쩐지 허세 잔뜩 부린 수꿩 혹은 수컷 공작새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림 속 휴일을 즐기러 온 파리지앵들은 다들 정장차림을 하고 있다.  커다란 그림 안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표정도 읽히지 않고  움직임도 느낄 수 없어 어딘지  모르게 '얼음 땡 '하고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생

 

 

 

 

 

조르주 쇠라(Georges-Pierre Seurat)는 집안 대대로 부유한 상인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법률 관련 고위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도 꽤 부유한 집안 태생이었기에 어릴 적부터 경제적으로 전혀 부족함 없이 자랐다. 19살 때 국립미술학교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하고 징병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880년 초반부터 열심히 화가로서 활동하지만 주류예술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자 인정받지 못하던 젊은 다른 화가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리게 된다.

 

 

 

 

 

 

19세기 중반 파리 사회는 기술문명과 교통수단이 혁명적으로 바뀌어 한 나절 여행이 가능해졌다. 튜브물감의 발명으로 빛을 찾아 화가들은 야외에서 하루 종일 거친 붓터치로 '순간 포착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같은 인물이 그들이고  이것이 인상주의의 시작점이 된다. 쇠라가 활동하던 시절  광학이론이나 색채론 같은 과학적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인상주의를 계승하면서도 과학적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색채분할'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방법론으로 찾은 실행기법이 점찍는 기법이었다. 일명 점묘법인셈이다. 말 그대로 점을 하나하나씩 찍어 그림을 완성했다는 얘기다. 그것도 3m*2m짜리 대작을 말이다. 이것을 열심히  실행한  쇠라나 폴 시냑[Victor Jules Signac, (1863-1935)]과 같은 화가를 신인상주의라 한다.

 

 

 

 

 

 

 

 

 

 

 

 

 

 

 

 

그링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 Jatte),1884,미국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

 

 

 

 

 

 

 

햇살 알갱이들이 무수히 부서져 내리는 센 강변의 공원에 40여 명의 인물이 그려진, 점묘주의의 출현을 알린 대표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다. 한 땀 한땀 손바느질 하는 느낌으로 점을 찍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인물들이 생동감은 온데간데없고  뻣뻣해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쇠라는 2년에 걸쳐 유채 물감으로도 그리고, 스케치, 드로잉으로 다시 시도하면서 무려 70점 이상의 예비 작업을 거쳐 비로소 완성한다. 거대한 캠퍼스에 점을 하나하나 찍어가며 그려야 했으니 2년이란 시간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력은 또 얼마나 나빠졌을까! 이런 면에서 화가라기보다 과학자 혹은 수도자 느낌이 더 드는 화가다. 그림을 그린 1884년, 8 번째이며 마지막으로 열렸던 인상파 전시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였고, 그해 말 이 그림이 독립파 앵데팡당(Independent)에 걸렸을 때,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Felix Feneon)이 '네오-임프레셔니즘(Neo-Impressionism)이야'라고 흥분해, 처음으로 '신 인상파 주의'이름이 명명되었다고 한다. 비록 이 전시회를 끝으로 해산이 되어버리는 문제의 그림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당시 인상파 사이에 두 주류가 있었다고 한다. 클로드 모네, 르느아르처럼 철저히 야외의 순간적인 빛을 그려야 한다는 외광파가 있었고,  반대편에 사실적인 화풍으로 극단적인 구도를 추구하는 에드가 드가파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쇠라의 그림에 외광파 모네는 반대를 했고, 드가는 찬성을 하며 카미유 피사로 같은 중재자의 부재로 결국 해산하고 만다."어떻게 해야 빛을 잘 표현할 수 있지?"에 대한 접근법이 서로 달랐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찰나와 과감한 붓터치의 그림을 선호한  외광파에게   아틀리에에 처박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정적이고 고요한 쇠라의 작품이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쇠라의 점묘법은 색을 팔레트에 섞어서 바르던 기존 유화방식을 거부하고 원색의 점들을 병치시켜 그린 그림이다. 멀리서 보면 보라색으로 보이는 정체는 파란색과 빨간색이 인접해서 보라색처럼 보이는 착시효과 때문이다. 19세기에는 과학의 발달로 인간이 어떻게 빛과 색을 인지하는지 분석하기 시작했고 광학적으로 색을 분석하는 이론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광학적 색채 이론에 영향을 받았고 이를 통해 점묘 분할법을 시도한다.  마치 3D이미지를 보는 듯 매우 질서 정연하고 입체적이지만 그로 인해 더 가상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전시회에 나온 이 그림을 보고 이집트 고대 그림과 비슷하다며 조롱당했다고 하는 걸 보면 이해가 간다. 오히려 디지털 세상인 지금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그랑자트섬은 어디일까?

 

 

 

 

 

파리 센 강 북서부 위치한 유원지로 도시인들이 콧바람 쐬러 가는 피크닉 장소였다. 19세기 파리의 브리즈와들이 근교로 소풍을 나와서 주말에 여가를 즐기는 모습은 근대화 이후 새롭게 등장한 풍경이었다. 그랑자트섬이 브르즈와 계통이 즐겨 찾는 섬이었다면 강건너에는 노동자 계층이 유원지가 있는데 아스니엘이라는 쇠라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 그랑자트섬에는 브르주아 계층뿐만 아니라 노동자, 군인,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한데 모여있다. 쇠라는 근대화 이후 다양한 계층이 모호하게 뒤섞여버린 새로운 시대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아무 관심 없다는 듯이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다. 정 가운데  흰 드레스를 입은 꼬맹이만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는 공간을 근경, 중경, 원경으로 분할하고 화면을 정확히 수평과 수직 대각선 구도로 분할해서 철저하게 계산된 위치에 수학적 질서를 가지고 인물을 배치한다. 감각적이기보다는 분석적이고 즉흥적이기보다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완성된 쇠라의 작품은 신 인상주의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이 거대 작품 속 인물 군상을 알게 되면 더 흥미롭지 않을까? 아는 만큼 읽히고 보일 테니까.  작품의 오른쪽 옷을 잘 차려입은 남녀가 강 건너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여자의 손에는 가죽 끈이 들려있고 그 끝에 원숭이 한 마리가 묶여있다. 당시 원숭이는 방탕함을 상징했다고 한다.  이 여인은 방탕한 여자 즉 매춘 여성임을 암시한다고 한다. 가장 돋보이는 위치의 그와 그녀는 사실  도시의 이목을 피해서 그랑자트섬으로 밀회를 즐기러 나온 커플인셈이다.  사람 사는 곳이라 시대만 다를 뿐이지 인간의 원초적 욕구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당시 이 섬이 성을 파는 직업여성들의 활동 장소였고 그림 속 두 명의 경찰관이 이들의 문란행위를 순찰하고 있는 중이란다. 이걸 알고 그림을 다시 보면 그림이 도시인들의 은밀한 욕망을 상징하는 곳으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림을 보는 재미 아닐까 싶다.  여기 있는 사람의 얼굴은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게 뭉특한 가면처럼 그려져 있다. 이들은 그저 옷차림 만으로 직업과 신분을 파악할 수 없는 익명의 존재들이다.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겨진 도시인의 욕망이 느껴지는가?  가까이 다가가면 작은 점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이 작품 속에서 도시의 작은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독한 마음까지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으로 무명화가였던 쇠라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점을 찍는 대작을 하며 에네지를 너무 고갈해서 그럴까?  쇠라는 화가로서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던 31살의 나이에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그의 점묘법은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들], 피카소의 큐비즘, 브라크, 마티스까지 영향을 미친다. 20세기 회화의 시작점에 점하나 찍고 홀연히 떠나가버렸다.  그가 이른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어머니가 이 그림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거절당하고 현재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에 팔렸다. 1924년 이후 단 한 번도 다른 미술관에 빌려 준 적이 없을 정도로  가장 사랑받는 대표 소장품으로써 명예를 누린다고 한다. 그의 점묘법은 동료 화가였 던 폴 시냑에 의해 더 연구되고 발전된다. 

 

 

 

 

 

 

 

 

분첩을 쥐고 화장하는 젊은 여성(Young Woman Powdering Herself),1888-1890, 영극 런던대학교 코톨드 미술연구소(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 London)

 

 

 

 

 

그림 속 '분첩으로 화장하는 여인'의 모델은 마들렌 노브로크(Madeleine Knobloch)이다. 그녀는 쇠라의 모델이며 애인이었고 이 당시 쇠라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지만, 쇠라의 부모나 주변에서 그녀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투명 인간이었다. 숨겨진 여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오늘 화장을 한다. 슬프게도 이 그림을 완성하고 1년 뒤 31살이던 쇠라와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피에르는 유행병 디프테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부모에게 소개하여 결혼하기로 한지 며칠도 안 돼 갑자기 요절하고 만 것이다. 요절한 쇠라만큼이나 날벼락 맞은 여인이 마들렌 아닐까? 불행 끝 행복 시작의 평탄한 미래를 꿈꾸었을 그녀의 소박한 꿈은 개꿈이 되어 쇠라와 어린 아들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세상에 남은 이 그림 외에 자신의 정체성마저 인정받을 수 없었던 노브로크는 아들과 쇠라가 세상을 떠나고 시댁 가족과 의사소통마저 완전히 단절되었지만, 결국 쇠라의 그림 중 집에서  보관하던 일부를 상속 재산으로 챙겼다. 비운의 화가만큼이나 비운의 여인이 된 그림 속 여주인공 마들렌이다. 그녀 역시 쇠라 사후 12년 뒤인 1903년 , 35살로 비슷한 증세로 죽는다. 

 

 

 

 

 

  

 

 

 

서커스 The Circus (Le Cirque),1890-1,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

 

 

 

 

 

 

 

쇠라의 세 번째 서커스 시리즈  작품이다. 초기 구성의 고요한 모습 대신 역동적인 움직임의 서커스 연희 장면이 특징이다. 활동적인 움직임의 마술 장면은 언제 봐도 아슬아슬 긴장감이 든다. 텀블링을 하는 광대, 귀한 백마을 타고 기예에 가까운 묘기를 보이는 그녀, 사람들의 표정은 읽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분위기만큼은 흥미진진했을 것 같다. 그림 속의 말은 1888년 당시 동물 서커스로 높은 인기를 누렸던 신세계 곡마단 누보 서커스( Nouveau Cirque) 단 포스터에서 차용했다고 보인다. 하지만  선과 색의 감정적 묘사라든지 마상의 곡예 장면 등은 쇠라가 구성했다.  등장하고 있는 관중 모습들 속에는 좌석의 첫 번째 줄에 실크 굴뚝 모자를 쓴 동료 화가 샤를 앙그랑(Charles Angrand) 모습도 보이지만, 이 그림을 마지막으로 쇠라는 1891년 3월 갑자기 사망했을 때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었다.  경제적 어려움 없이 원하는 그림을 그렸던 몇 안 되는 화가였지만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지는 않는 모양이다.  신인상주의파 리더인 그의 친구 폴 시냑(Paul Signac)이 갑작스럽게 가버린 쇠라의 그림을 사주고 점묘법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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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적인 중산층이자 은행원이었던 챨스 스트릭랜드는 평소 주변사람에게 무심하고 말이 없고 재미없는 사내로 여겨졌다. 아내는 교양있지만 속물적인 구석이 있는 여자로 나타난다. 작중'나'도 처음엔 그를 특별할 것 없는 전형적인 사내라고 평가했고, 아내 조차 그를 예술따위엔 관심이 없는 교양없는 자라고 언급한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스트릭랜드가 아내를 버리고 파리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스트릭랜드에게 가정으로 돌아오라는 아내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파리로 가게된다. 여자가 생겨서 파리로 갔을 거라는 아내의 예상과 달리 스트릭랜드는 느닷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휩싸여 집을 떠난 것이었다. '나'는 그가  이렇게 색다른 인물이었나에 대해 회상해본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을 좇아 떠난 그에게 금전적인 여유는 없었다. 더럽고 낡은 호텔방에서 머무르며 파리 하층민의 삶을 전전하던 스트릭랜드는 곧 생활고에 몸저 눕게 되지만, 평소 스트릭랜드를 천재라 여기고 가까이 하던 더크 스트로브라는 유순한 네덜란드 인의 도움을 받아 회복을 한다....-[달과 6펜스 중]

 

 

 

 

윌리엄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1874-1965)의 작품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1919]입니다. 

그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타히티를 직접 답사했고, 거기서 폴 고갱이 살았던 집에 가 보고, 그가 데리고 살았던 여자와 얘기도 나누고, 그가 그린 그림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폴 고갱을 모델로 한 이 소설을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입시키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까?  개인적으로 이렇게 무책임한 가장이 또 있을까 싶다.  30대 중반의 아이들은  다섯, 외벌이 아내를 두고  자기하고싶은 일 있다며 사라져 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처음에 들었던 폴 고갱에 대한 편견이 자료를 찾다보니 그에게도 변명의 시간은 주어져야 공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주식 중개업을 하던 그가 프랑스 주식 시장의 붕괴로  일순간 가지고 있던 직업, 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이를  견디지 못한 아내 메트가 덴마크로 돌아가버렸고, 고갱도 뒤따라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고갱이 제대로 밥벌이를 못하자 메트의 가족들이 나가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프랑스로 돌아와야만 했다. 처가에서 쫓겨났다고 보는 쪽이 더 맞을 것 같다. 적어도 고갱이 처자식을 팽개쳤다는 누명은 벗겨주고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같다. 

 

 

 

 

 

  외젠 앙리 폴 고갱(  Eugene Henri Paul Gauguin) )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과 어머니 알린 샤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럽에서는 혁명이 한창 진행중이라 혼란스러웠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당시 34세로 오를레앙에서 이주한 사업가 집안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인이었다. 클로비스는 신문에 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어머니 알린은 당시 22세로 인그레이빙 작가였던 앙드레 샤잘과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의 딸이었다. 트리스탕은 앙드레 샤잘의 폭력과 학대 때문에 결별한다. 폴 고갱의 외할머니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유명한 구호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다.  폴 고갱은 외할머니를 이상화하여 흠모하였으며 그녀의 저술을 평생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폴 고갱이 타히티에서 사람들과 논쟁을 자주 벌이고 사고를 쳤던 밑바닥에는 집안의 이런 내력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1850년 프랑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클로비스는 장모인 트리스탕의 연줄을 통해 페루에서 언론인 경력을 계속 쌓고자 하였다. 클로비스는 가족을 동반하고 여행길에 올랐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페루에는 아내 알린과 18개월 된 폴 고갱 그리고 2살 반이었던 누나 마리만이 도착하게 되었다. 훗날 고갱은 페루에서의 시기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족하고 행복한 때로 회상하였다.전업작가가 된 이후로 늘 돈에 쪼들렸던 고갱의 삶을 비춰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이때 경험한 페루 고대 문명의 독특한 도자기, 그리고 젊었을 적 견습 도선사로 각 항구를 돌며 보고 들은 문물은 고갱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남미 계통 히스패닉분들은 열정적이고 낙천적인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성분들은 표현에 거침이 없어 깜짝 깜짝 놀라기도한다. 동양사람들이 민망해하는 패션을 올록 볼록 엠보싱같은 몸매에도 당당하게 입고 자신을 드러내는 화끈한 여인들이 그들이다. 아마 폴 고갱의 외할머니도 그런 남미 여인을 닮았고 그 모습을 내면화하지 않았을까 가볍게 추측해본다. 여유로운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처럼 주말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주말 화가"로만 남아있었다면,   훗날 인상파로 불린 카미유, 피사로 ,세잔,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작품을  팔아주기만 했었다면 미술사 속 폴 고갱을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모든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는 있었으나 현실은 고갱의 의지를 수없이 꺽었다.  현실에 꿈을 끼워맞추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걸림돌은 발을 떼는 곳마다 번호표 받고 대기중이었을 것이다.

당시 스승과 같이 느끼던 피사로와의 편지에 고갱이 얼마나 힘들었느지를 볼 수가 있다. 굉장히 구질구질한 삶을 스스로 끝내고 싶지만

 

 

 

 

"나를 잡고 있는 건 그림이기  때문에 그림만이 나의 삶을 잡고 있다."

 

 

 

 

그림이 본인의 삶의 목적이 되었던 고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초기에는 프랑스 서부 부르타뉴 지방 퐁타방에서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고 파리로 가서 미술계의 최신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고갱의 목적은 인상파가 초기에 줬던 충격처럼 파리 시민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는 작품을 만들어 미술계의 넘버 원이 되고싶어했다.  [제 8회 인상파 전시회]에 19점의 작품을 선보였지만 그때 당시에 같이 소개되었던 쇠라[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가 거의 모든 관심이 쏠리게 되면서 주목도 받지 못했다.  또 어떻게 보면 인상파 화가들 중  유일하게 도록에 화실 주소가 없었을 정도로 가난했던  고갱은 이런 파리 생활에 지쳐있었다. 

 

 

 

 

 

"자연을 너무 곧이 곧대로 베끼지 말라,"

"예술은 추상적이고 자연에서 추상을 뽑아내라."

 

 

 

 

 

 

[설교 뒤의 환상 (Vision After the Sermon)'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Jacob's Fight with the Angel)],Paul Gauguin,1888]

 

 

 

 

 

 

선명한 붉은 색감과 단순한 구성을 볼 수 있다. 야곱과 천사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오른쪽과 왼쪽에는 싸움을 지켜보는 퐁타방의 여인들이 있다.  그림 속 여인들 머리에 쓴 흰색의 쓰개머리 모자가 인상적이다. 몇년 전 재미있게 보았던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2019)에 나오는 일하는 사람들 복장과 유사해 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림속 천사와 싸우는 야곱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성경속 이야기를 빌리면 다음과 같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늙어서 아들 이사악을 얻었다. 이사악은 레베카와 결혼하여 아들 에사우와 야곱을 얻는다. 이들이 성장한 어느날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사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장자권 갖는 이의 축복을 받는다. 이를 안 형이 동생 야곱을 죽이려 하자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자신이 첫눈에 반한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14년을 일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는다. 세월이 흘러 야곱은 형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그동안 모은 재산, 처자식을 먼저 보낸다. 그래도 야곱은 형이 두려워 야폭강가에서 머뭇거린다. 잠을 청한 야곱에게 천사가 나타나 동틀무렵까지 씨름을 하고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 야곱을 향해 축복해주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느다. 천사가 야곱의 엉덩이 뼈를 치고 멀리서 절뚝거리며 오는 동생의 모습을 본 형 에사우는 벼르고 있던 마음을 내려놓고 동생 야곱과 화해한다. 이 이야기를 알고 있으면 작품이 더 풍성하게 다가오지 않을까싶다.

고갱이 고흐한테 이 그림에 대해서 편지를 썼었다. 

 

 

 

"풍경과 싸움하는 모습은 설교가 끝나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네."

 

 

 

 

결국 이 화면 속의 모습은 여인들이 기도를 올리고 머릿속에서 그려진 환영을 표현하고있다. 단순화된 인물들과 밝은 붉은 색은 당시 유럽 화가들 사이에 유행이던 일본식 우키요에의 영향이다. 우키요에는 17세기에서 20세기 초 일본 에도 시대에 성립한 당대 사람들의 일상 생활이 나 풍경, 풍물 등 그린 풍속화를 말한다. 중앙에 나무가 이렇게 가로지르면서 이쪽 세계를 이 나무로 갈라서 표현을 하고 있다. 불혹의 나이에 그림 속에서 찾은 굵은 윤곽선과 색채다. 드디어 자연주의에서 벗어난 원색의 미술이 시작된 시기이다.  '자연은 원시 미술의 하녀;라는 1888년, 그가 쓴 글이 있어 소개한다.

 

 

 

 

'정제된 미술은 관능으로부터 나오며 영혼으로부터 자연을 섬긴다. 그냥저냥의 자연주의는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사람의 영혼을 실추시키고 가증스러운 오류로 굴러떠러지고 마는 것이다, 자연은 원시미술 속에 깃든 영혼에서 나온다.'

- 자연은 원시 미술의 하녀'1888-

 

 

 

 

 

 

 

 

 

 

고갱은  일본의 우키요에를

접하고 어린 시절 본 페루의 도자기를 사 모으면서 그런 경험을 살려서 도자기 만드는 작업도 했다. 이를 통해서 고갱은 유럽에서 있어봤자 모두가 놀랄 그림은 안 나오겠다 싶었고  유럽을 떠나려고 결심한다. 당시 매형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서 근무 한다는 것을 알고 파나마로 떠났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 공사는 실패했고  매형은 파산해서 고갱을 챙겨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파나마를 떠나 마르티니크 섬에서 몇 달 간 머물렀다. 이때 마르티니크 섬에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성과를 거둔다.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후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친구였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고흐가 고갱을 동경해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있는 아를로 와주기를 간청했다. 여기에는 고흐의 이상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결말은 좋지 않게 끝나고 말았다. 고갱은 고흐의 초청으로 아를에 있는 고흐의 집, 노란색벽 때문에 노란 집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그곳에서 9주  동안 고흐와 함께 지내며 작업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 사건이 일어나자 고갱은 노란 집을 떠났다. 두 사람은 이후에 다시 만나지 않았지만 오만한 고갱도  고흐의 사건이 충격이었던지 파리로 돌아간 후 귀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만든 도자기가 남아있다. 

 

 

 

 

 

 

황색의 그리스도 [The Yellow Christ, Paul Gauguin, 1889, 뉴욕 버퍼로 올브라이트 녹스 아트 갤러리(The Albright-Knox Art Gallery),41]

 

 

 

 

 

 

[황색의 그리스도 (The Yellow Christ),1889]

 

 

 

 

1889년 2월에 고갱은 남프랑스의 퐁타방으로 와서 베르나르와 함께 지내며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5월 초에는 파리로 돌아와 파리 만국 박람회가 열렸지만 고갱을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출품을 거부당했다. 고갱은 파리 만국 박람회 전시장 옆의 카페 볼피니에서 인상파 화가 특별 전시회를 열었는데, 고갱의 작품만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고 팔리지도 않았다. 6월 20일 ,터덜 터덜, 다시 퐁차방에서 작은 어촌 르풀뒤로 와 작업실을 마련했는데,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 세계에 대한 혐오감은 더해만 갔다. 그 당시에 그린 '엘로 그리스도'이다.짙은 윤곽선과 굵은 윤곽선으로 구획을 표현하는 클로아조니즘(Cloisonnism)방식이다. 다시말해 강렬한 선으로 화면을 구획지어 대담하게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 화법을 일컫는다. 이 윤곽 구획 방식은 함께 작업하던 에밀 베르나르가 시작한 방식이다. 모티브를 단순화해서 파악, 그 윤곽선을 강조해서 그리는 수법으로  인상주의와 자연주의의  단편화된 테크닉에 반발해 시도되었다.  십자가 속에 그리스도가 분명한 이 '노랑 예수'는 경건하고 육체적으로는 무척 고단해 보인다. 되는 일도 없던 시절이라 신앙심 하나로 퐁타방 마을 가까운 트레마로의 교회에 걸려있던 작가 미상의 나무 십자가 조각상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 교회에 선물했는데, 주교가 교회에 걸을 수가 없는 그림이라고 거절당한다. 아무도 받아들여주지 않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지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고갱의 넘어지기만 하는 뒷 모습에 짠한 마음이 든다. 여하튼  고갱의 이 그림은 시가 1천 6백억 원이 넘게 평가된다고 한다.

 

 

 

 

 

 

 

이후 부르타뉴로 돌아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같은 걸작을 만든 후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동남아시아와 일본, 태평야의 독특한 문화를 접한 고갱은 다시금 유럽을 탈출하면 영감이 솟구치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서 타히티로 떠났다.  심지어 타히티에 갈 때 고갱은 자신이 공식적인 초상화 화가로 파견되었다고 거짓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고갱의 거짓말을 몰랐던 것이 타히티가 프랑스의 식민지이긴 했어도 머나먼 변방이었기 때문에 그런 데서 사기를 쳐봤자 아무도 따질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이 컸다. 고갱은 때묻지 않은 타히티의 원주민들과 교류하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했지만 상상과는 달랐다.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는 문명화가 진행된 곳이었고, 서양인들도 지배층으로 어느정도 정착했던지라 타히티의 원주민 소녀들은 뚱한 표정으로 고갱을 소 닭 보듯 할 뿐이었다. 고갱이 이후에 유명해졌다지만 당시의 고갱은 유명인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도 아닌 그냥 흔한 서양인 아저씨일 뿐이라 굳이 아는 체를 할 이유가 없었던것이다. 고갱의 그림 속 파레오를 입은 원주민 여성들의 표정이 그냥 시큰둥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로는 타히티 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정작 그 때쯤에는 타히티를 떠났다.

 

 

 

 

 

 

 

망고 꽃을 든 두 타히티 여인(Two Tahitian Women, Paul Gauguin, 1899,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51

 

 

 

 

 

'망고 꽃을 든 두 타히티 여인들' 또는 '빨간 꽃과 유방'으로 불리는 이 그림은 벗은 것에 대한 수치심이 없는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이 묘사되어있다.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고갱이 이 섬과 원주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보여 준다. 화면 구성이 도발적이면서도 그 구도가 대담하고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풍만한 정감을 준다. 그러나 여전히 빈곤과 고독에 시달렸고, 지병에 괴로움을 당한 데다 타히티 섬의 현지 행정 당국의 백인 관리들과 자주 충돌했다.

 

 

 

 

 

 

 

 

 

타히티에서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자신만의 그림을 체득한 고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것도 의기양양하게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미술계에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하지만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람들은 이게 그래서 뭐 어쨌다고? 라는 반응 정도였다.  게다가 고갱이 그림제목으로 붙인 타히티어들을 유치찬란하다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1897)]를 보면 원초적인 그림과는 다르게 금테두리로 장식을 하였는데 자신의 그림이 대작이라고 확신한 고갱이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고전들처럼 화려한 장식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당대에는 고갱이 허세를 부린다며 비웃었다고 한다. 또 인정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결국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 고갱의 삶은  그야말로 궁핍과 잦은 분쟁의 연속이었다. 그림을 그린후  프랑스로 보내 친구들에게 팔아서 돈을 부치라고 했고 친구들은 어렵게 그림을 팔아 돈을 부쳐줬다. 하지만 고갱의 경제관념 부족으로 그렇게 부쳐진 돈은 며칠 안돼서 날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투견 본능이 충만했는지 타히티의 정치싸움에 끼어들어서 타히티에 건너온 중국인을 비난하는 글을 현지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타히티의 중국인은 고갱을 미워한다고 한다. 이후 타히티보다 좀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겼지만 이곳에서는 앞서 정착해있던 카톨릭 주교와 다툼을 일으켰고 현지인을 위한답시고 총독을 비난하는 등 좌충우돌 했다. 결국 알코올 의존증과 매독과 유사한 통증으로 1903년 5월 8일 고갱은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둔다. 늘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과시욕이 많던 화가 폴 고갱은 파리가 아닌 이렇게 먼 섬에서 마지막을 맞았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그곳에 있으며, 덕분에 고갱의 묘는 유명 화가의 묘역중에서 찾아가기 가장 힘든 장소가 되었다. 굳이 힘들게 그곳까지 가려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싶긴하다. 고갱이 화가로서의 인생 중 상당 기간을 보낸 타히티에는 고갱 박물관이 있다. 아이러니하게  고갱의 진품 그림은 한 점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갱은 돈이 필요해서 그림을 그리면 말리자마자 배편으로 프랑스로 보내 팔았기 때문에 타히티에는 제대로 된 고갱의 그림을 찾을 수 없다.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색면, 실제  대상의 색깔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이다. 그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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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을 신들이 사는 낙원과 같이 묘사하는 것, 그것이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들 중 하나다.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특출난 표현을 선보였으며 꽃, 귀여운 어린이들, 그리고 웃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찬 야외 풍경그리기를 좋아했던 화가 르누아르다. 

 

 

 

 

가난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다양하다. 이왕이면 긍정적 태도를 갖고 사는 사람에게 한표 던지고 싶다. 현실은 비록 아수라장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의 세계만큼은 웃음과 행복한 일상을  듬뿍 담아 표현하고 싶었던 화가 르누아르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르누아르는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일곱 자식 가운데서 여섯째다. 아버지 레오나르 르누아르는 석공이었고  어머니 마르게리트 메를레 는 여직공이였다. 가난한 집에 흥부네 식구들 저리가라할 정도로 많은 아이들을  부양하느라  부모는 허리가 휘고 자식들은 늘 배가 고프다.  그런  가족들을 데리고 집안 사정이 좀 나아질까싶어 아버지는 리모주를 떠나 파리로 이사한다.  자신이 낳고 자란 공간을 떠나는 순간 고생은 불보듯 훤하고 산업화가 막 시작된 파리 도시는 르느와르 아버지같은 마음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이들로 가득찼다. 오히려 절대 빈곤층으로 내려앉는 그들의 삶은 더 이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난이 아이들을 일찍 철들게 했을까? 13살 때 르누아르는 도자기 공방 레비 프레르 와 콩파니에서 조각 장식을 배우는 견습생활을 시작한다. 주경야독의 시간이 르느와르에게 시작되었다.  낮에는 일해서 푼돈 모으고, 저녁에는 장식 예술과 소묘학교 야학반 수업에 드나들었다.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하나로 날마다 직장에서 틈만나면 파리 루브르 미술관으로 달려갔다.  꿈을 보러가는 시간! 주머니에 벌어놓은 돈은 몇 푼 없었지만 마음만은 행복했을 르느와르를 생각해본다. 박물관에서 그는  18세기, 19세기 거장들의 작품 앞에 서서 자신의 그림이 그들과 나란히 걸리는 상상을 해본다.  당시 도기 공장도 기계화의 물결에 밀려 그림을 프린트로 인쇄해서 수행하게 되자 자동으로 실직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닥치는대로 간판 그림도 그리고 점포 차양에 그림도 그리고 부채, 가구에 그림도 그리며 생활비를 벌었다. 한 손에 꿈을 다른 한 손에 현실을 살아내며 본인이 써 볼 수 있는 방법은 다 쓰면서 꿈을 삶에 끼워넣기한다. 꿈에게 미안하지 않기위해서 말이다.

마침내 알음알음 글레르 선생 아뜨리에 들어가 정식 그림 교습을 받게된다. 열심히 살아 낸 시간 덕분에 화실에서 그는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바로 클로드 모네, 프레데리크 바지유, 알프레드 시슬레 같은 화실 동기생들과의 만남이다. 특히 크로드 모네와 함께 파리 외곽의' 라 그르누엘리에르'의 물가에서 스케치를 자주 했다고한다. 두 사람은 하루의 다양한 시간에 나무와 물에 비치는 빛과 움직임의 영향을 포착하기 위해 느슨한 붓질을 사용하는 등 인상주의를 불러일으킬 여러 이론과 기법 실천을 동시에 전개했다. 그 와중에 오지랖 넓은 프레데리크

바지유덕에 세잔과 피사로도 소개 받는다.

 

 

 

 

 

 

인상주의에 첫발을 내딛다.

 

 

 

 

 

 

꽤 유명한 장소이자 당대의 가이드북에 조금 '서민적'인 곳이라고 나와있던 그르누예르(크루아시쉬르센 섬의 해수욕장)에서 모네와 함께 머물었던 경험은 르누아르의 화가  인생에 있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르누아르는 그곳에서 진정한 '야외 사생'을 했으며 이 야외에서의 작업은 그의 팔레트를 바꾸며 붓터치를 세부화했다.  르느아르는 빛의 효과를 표현하는 것을 이해했으며, 더 이상 그림자를 표현하는 데에 검은색을 쓰지 않았다. 바로 이때부터 르누아르의 인상주의 시기가 시작된다. 모네는 풍경화를 그리는 것을 선호한 반면 르누아르는 인물화를 선호했다. 그르누예르의 같은 풍경을 두고, 르느아르는 인물들의 중요성을 더 크게 담을 수 있도록 허락한 근접 시점을 받아들였다. 

 

 

 

 

 

 

 

 

 

관람석 La Loge(1874),33살, 영국 런던에 있는 프랑스 인상파 수집 전문 갤러리 코톨드 미술 연구원 미술관(Courtauld Institute Gallery, Londres)

 

 

 

 

 

 

우아한 분위기의 커플이 묘사된 이 '관람석(La Loge)' 그림은 파리의 현대 생활에 대한 찬사로, 그야말로 무명의 르누아르 '스타 탄생'을 예고하는 그림이다.  같은 해 첫 번째로 열렸던 파리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되어 가장 눈부신 작품으로 지목되면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 꽉 찬 느낌의 이 그림 속에는 오페라부터 캉캉 춤까지 구성된 버라이어티 쇼를 공연하는 극장의 흥겨운 모습과 파리의 문화 생활과 삶의 기쁨이 잘 녹아 있다. 개인적으로 오페라 스코프를 내리고 있는 그녀의 하얀 피부와 푸른 눈, 꽃 장식, 진주 장식 등 화려하고 세련된 그녀의 모습에 먼저 눈길이 갔다. 당시 여인들의 패션 트랜드를 살짝 엿보기 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에 초점을 맞추며 극장을 묘사하고 있지만, 입고 있는 복장과 분위기는 파리의 삶을 보여주는 두드러진 역할을 한다. 

 

 

 

 

 

 

 

 

 

르누아르는 1877년 몽마르트르에서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Le Moulin de la Galette),1876]라는 자신의 걸작을 완성한다. 이 작품은 인상파의 후원가이자 동료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사갔다. 이 야심에 찬 그림은 1870년대 르누아르가 추구한 양식의 특징을 갖고있다. 부드럽고 화사한 붓터치, 화사한 그림자, 검은색 미사용, 질감의 효과, 잎들과 구름을 가로지르며 스며드는 빛의 유희, 파리 대중들의 생활 풍경과 자기 주변의 모델들(몽마르트르의 "보엠"들과 친구들)에서 따온 풍취가 바로 그 특징이다. 하지만 에너지 넘치고 행복해 보이는 파리지앵들의 모습뒤에 슬픈 역사가 함께 하고 있음을 아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간의 전쟁(1870,7,19-1871,5,10) 이 있었다. 일명 보불전쟁이라고 하는데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프로이센과 이를 저지하려는 프랑스 제2제국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에서는 제2제국이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세워졌으며,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연방 내 모든 회원국을 통합해서 독일 제국을 세웠다. 당시 전쟁에 참여한 르느와르는 예술적 동료 바지유(1841-1870)를  이 전쟁에서 잃었다. 전쟁후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강화조약으로 인해  프랑스 땅 3개 현이 독일에게 넘어가고 정신 못차린 프랑스 정부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이 와중에 혁명자치 정부가 수립되고 이 그림의 장소 '물랭 드 갈레트'에서 지도부가 정부군가 싸웠으며 엄청난 수의 파리 시민군들이 이곳에서 정부군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피로 얼룩진 상처의 현장에 르느와르는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일상을 열심히 살아내는 파리지앵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다. 

 

 

 

 

 

알퐁스 도데의[마지막 수업 (The Last Lesson)]이라는 작품이 있다. 1871년 프로이센(독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넘겨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프로이센(독일)에 땅이 귀속된 후 학교 수업에서 프랑스어를 금지하자 한 교사가 눈물을 머금고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을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ViVE LA FRANCE !"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어를 사용할 수 없는 슬픈 역사를 경험한 공통분모가 있어서일까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머릿속에 이 제목만큼은 기억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이 책을 공부했던 학창시절에도 나랏말의 소중함을 마음에 느꼈던 것같다.

 

 

 

 

 

 

 

 

 

 

 

뱃 놀이 일행의 오찬(Lunch of the Boating Party(1880), 40살 무렵

 

 

 

 

 

 

 

햇살이 눈부신 여름, 사토섬 선상에서 뱃놀이하면서 식사를 즐기는 행복한 남녀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르누아르의 초상화와 행복한 일상 생활의 단면이 잘 맞아 떨어진 작품이다.  세느강 위의 메종 푸르네즈 레스토랑 Maison Fournaise restaurant 의 배위(선상) 발코니다. 때마침 새로운 현대사회로 가는 파리의 풍속도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한가하게 식사를 한 후 술을 즐기는 분위기를 잘 포착하고있으며, 다양한 인물 표정들의  왁자지껄한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나도 살짝 엿듣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 보트위에 점심식사에 나오는 사람들도 그 시절 르느와르의 친구들 모습이다. 앞 줄 오른쪽에 밀짚모자에 소매 없는 옷을 입고 있는 인상주의 화가 '귀스타브 칼리옷'이 의자를 돌리고 앉아 여배우 '에렌 앙들레'와 이야기하고 있다. 그룹을 함께 초대한 백작 바르비에르는 검정 모자를 쓴 다른 남자와 돌아서서 대화하고 있다. 그림이 쏠려있는 왼쪽 모서리에 꽃모자를 쓰고 강아지를 안고 앉아있는 여성, 알린 샤리고 (Aline Charigot)는 이 그림을 그리던 당시에는 간이식당 종업원이었지만, 훗날 그녀는 르느와르의 아내가 된다. 그 옆에 밀짚모자를 쓰고 서있는 남자는 아마도 르누아르 자신인 것 같다. 문화는 다르지만 어디선가 봄직한 이 장면을 통해 차려놓은 음식 몇 가지 없이도 이야기거리 풍성한 모든이의 젊은 날에 어느 하루를 지켜본 느낌이라 행복했던 그림이었다.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며 예쁜것이어야 한다.

세상에는 이미 불유쾌한 우울이 너무 많은데 또다른 불유쾌한 것을 만들어 낼 필요가 어디 있는가!"

 




 

 

 

 

 

"나는 여성을 좋아해.

여자들은 아무것도 의심하려 들지 않아.

그들과 함께 있으면 세상은 정말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변하지."

 

 

 

 

 

 

평생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들과 일상을 그린 작품을 살펴보자.

 

 

 

 

 

 

[샤를르와 주르주 뒤랑 뤼엘],1882, 뒤랑-뤼엘, 파리

[바느질하는 마리 테레즈 뒤랑 뤼엘], 1882, 클락 미술관, 미국

[시골 무도회], 1883, 오르세 미술관, 파리

[피아노 치는 소녀들],1892, 오랑주리 미술관,파리

[피아노 치는 이본느와 크리스틴느 르롤], 1897,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가브리엘, 장르누아르와 어린 여자아이],1895-1896, 베르넴-젼느 갤러리, 파리

[알제리 여인 차림의 가브리엘], 1905, 레온느 세를랭 컬렉션, 파리

[광대 복장을 한 코코], 1909,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Nude',(1910), 베오그라드 세르비아 국립미술관, 69세

 

 

 

 

 

 

 

르느아르는 관능적이고 풍만한 여인의 누드를 즐겨 그렸는데

 

 

"나는 여인의 엉덩이를 두드리듯 나의 누드화를 완성시킨다."

 

 

하고 말할정도다. 그의 누드화의 주요 색조는 붉은색으로서 그는 건강한 살결의 색을 표현 하는데 특히 주의를 기울인다.

Belgrade   버전 '누드'의 모델 가브리엘라 (Gabriela) 르느와르 미술 인생 하반기에 중요한 뮤즈로 등장한다. 르느아르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그녀는 아이들의 유모로 르느아르와 가족같이 지내며 그의 모델이 된다. 남프랑스 르누아르의 작업실, 레 코레트에서 모델 겸 하녀 겸 가족으로 함께 지내며 많은 작품에 등장하며 르느아르의 예술 작업에 생기를 부여한다. 말년에 심한 관절염으로 손목이 마비된 그는  붓을 손목에 묶어 그림을 그렸다고한다. 그래서일까? 안타깝게도 르누아르의 후기 누드화를 보면 이런 필력의 감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초기 포동포동하고 건강해 보였던 여인의 누드가 부은 듯 뚱뚱하게 과장되어 있고 색채도 많이 망가져있다.

 

 

 

 

 

[습작, 토르소, 빛의 효과],1875-1876, 오르세 미술관, 파리

[풍경 속 여인의 누드], 1883,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몸을 닦는 여인], 1912-1914,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쿠션에 기댄 누드, 대형누드],1907, 오르세 미술관, 파리

 

 

 

 

 

말년에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에서 잠깐 떠나 장식미술과 모던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당시 알제리와 이탈리아 및 프랑스 남부 지방을 몇차례 여행한 것이 그의 예술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친것 같다. 특히 라파엘의 그림에서 발견한 고전주의의 매력과 부드러운 채색의 표현력에 심취한다. 관절염이 심해진 르누아르를 자주 방문했던 앙리 마티스는  당연히 그의 영향를 받았을 것이다. 인상주의의 기본 원칙에 도전하며 실험과 혁신의 길을 택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인상주의의 테크닉을 완전히 버린것은 아니어서 그 기본기 위에 클래식하고 장식적인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가 후대에 그린 수많은 여성 누드와 초상화, 인물화들은 20세기 초 모더니즘으로 가는 젊은 화가들에게 지속적인 영감을 불어 넣어준다.  파브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같은 후배 화가들에게 말이다. 르느와르의 미술은 19세기 후반 미술과 20세기 초 모더니즘 사이의 간격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준 존재감 있는 화가로 기억해 주는 것이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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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를 타고 있는 나를 향해 3-4명의 남자 아이들이  '수련장(참고서 이름)' 이라며 놀린 기억이 있다. 별로 나쁜 별명은 아닌데 숫기없던 내가 그때 했던 행동은 그저 가만히 땅을 내려다 보는 것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미술시간에 알게된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보는 순간 움츠러 있던 내 마음 한 칸이 펴지는 경험을 했다. 웬지 고상해진 느낌, 뭔가 세련되진 느낌 그래서 내 존재가 괜찮은 느낌이 들었던 거다. 모네의 그림덕분에  내 인생을 다리미로 편 느낌을 떠올리며 그의 삶을 들여다볼까한다.

 

 

 

 

까치 The Magpie,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68-1869. 파리 오르세 미술관 Musee d'Orsay, Paris 소장,  왼쪽 대문에 외로운 까치 한 마리가 앉아있는 눈 내린 풍경, 그야말로 춥고 배고프던 시절의 그림이다. 이 시절에 모네는 눈이 내린 풍경을 자주 그렸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모네의 [까치] 그림이다. 온통 사방이 흰 눈으로  덮여있다.  생명체 까치 한마리가 걸쳐둔 대문에 앉아  떠오르는 아침 햇빛을 음미한다고 할까? 시각적으로 추운데 촉각은 왠지 따뜻하다. 외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길게 늘어선 그림자 사이로 빛이 스며들어 온기를 느끼게한다. 내 오랜 유년의 기억속에 할머니댁에 가면 이런 분위기가 연출된 적 있다. 그때 할머니는 싸리나무 빗자루로 눈을 치우고 계셨다. 그 비질소리가 춥다고 웅크리고 있던 나를 문 밖으로  불러냈다. 사방으로 포위된 눈 울타리에 둘러쌓여 눈이 부시게 하얀 눈 덩이와 등을 훑고 간 한 줄기 빛이 따뜻하게 나를 통과해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춥지만 따뜻했던  어린시절 기억의 한 모퉁이에 잠시 머물다 올 수 있어  나는 모네의 이 그림이 참  좋다. 

 


 

인상파 등장 배경

 

 

 

인상파가 등장할 수 있던 배경을 먼저 살펴보자. 당시 그때 그때 물감을 만들어 쓰다보니 아틀리에 안에서만 그려지는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튜브 물감이 발명 된 후 화가들은 이젤과 작아진 캔버스를 들고 밖으로 나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 즈음 르네상스 시절의 후원가들처럼 화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술가들을 다독이고 재정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와주며 작가들의 예술활동을 도우면서 작가들의 작품을 가지고 판매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진행했던 인물들이다. 일부 귀족층에게 판매하는 일련의 과정에 한계를 느낀다. 그러던중 그들은 중산층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중산층들을 예술로 가까이 끌어오기 위해 비평가들과 함께  예술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려 노력했다. 1년에 딱 한 번뿐인 살롱전에 작품을 내기위해 기존의 작가들은 약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많은 작품들을 팔고 싶어했던 화상들은 빠른 회화작업, 독창성 있는 새로운 미술의 주류가 필요했고 집에 걸 수 있는 작은 그림이 필요했다. 이 모든 기준들이 인상파와 맞아 떨어졌다.

 


 
 '인상파'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 미완성 작품이며 이것은 마치 인상과 같다. "

 

를루아라는 비평가가 클로드 모네[인상, 해돋이(1872)] 작품에 쏟아 부은  비판이다.  인상파 화가들 대부분이 살롱전에서 낙선한 작가들이었다. 엄청난 자존심의 상처를 받은 그들은 나폴레옹 3세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그런 그들을 위해 낙선전을 개최할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한다. 일명 거절당한 사람들의 전시회인 셈이다. 파리 시민들의 반응은 이들에대해 부정적이었다. 프랑스 화단의 이단아로 취급했고 임산부가 보기에 적절치 않다며 전시를 조롱하는 삽화를 싣기도 했다. 그래도 '익명의 화가들'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그들은 1874-1886 총 8회 전시를  개최한다. 지금으로 치면 '핵인싸'였던 그들은 카페 게르부아(Cafe Guerbois)에 모여 이야기하고 토론하며 서로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끌로드 모네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는 모네. 동료 화가들이 밖에서 스케치 후, 작업실에서 마무리하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 밖에서 모든 작업을 마무리했던 모네다. 모네는 고전적인 미술 시스템 안에서 주어졌던 색감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하늘 색깔, 나무 색깔, 강의 색깔, 심지어 그림자 색깔까지 직접 봤을 때 시각, 햇빛, 날씨등에  따라서 달라졌던 풍경의 모습을 경험한다. 그는 빛을 작품 안으로 옮겨오기 위해 노력했으며 빨리 캐치해야 하므로 붓칠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래도 다양한 풍경들을 여러 색으로 표현하고 그림자에게까지 색을 입혀 풍부한 색을 만들어냈다. 

 

 

 

 

모네는 약 20년간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외면받고 가난한 화가로 지내왔다. 좌절과 고난의 연속이던 거장의 30-40대를 거치며 모네는 파리를 떠나 한적한 시골 마을 지베르니에 정착한다. 그가 시련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은 빛! 그 빛에 대한 연구만은 멈추지 않은 모네! 그런 모네가 그림에만 열중했다는 증거가 동료들의 그림속에  남아있다.

 

 

 

[아르장퇴유의 정원에서 그림 그리는 모네]

[스튜디오 보트에서 작업하는 모네]

[숲 언저리에서 그림 그리는 모네]

 

 

 

온 종일 풍경을 보고 그림을 그리던 모네는 그야말로 한 우물만 파는 빛의 화가임에 틀림없다. 시간의 흐름에따라 빛의 변화하고 풍경의 색과 형태의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빛을 연구해왔던 모네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그것은 빛과 풍경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연작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같은 풍경을 봄,여름,가을,겨울, 새벽, 아침, 점심,저녁, 빛의 변화에 따라 매 순간을 포착할 계획을 세운다. 한 가지 대상을 가지고 여러 개의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은 그당시 획기적인 도전이기도 했다. 그 첫 번째 실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집 근처 '건초 더미'였다. 그리고 집요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계절에 따른 변화를 담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른 대상의 변화를 표현해 같은 대상이지만 각각 다른 매력을 지닌 [건초 더미] 연작이 탄생한다. 심지어 작품에 전부 다른 제목을 붙이기까지한다.

 

 

 

 

[건초 더미] 연작은 성공했을까? 

 

 

 

 

1891년 5월  뒤랑 뤼엘 화랑에서 [건초 더미]는 작품당 3천-4천 프랑으로 팔리며 평균 3백-4백 프랑에 거래된 이전 그림에 비해 무려 열 배가 오른 그림값으로 팔렸다. 드디어 모네에게 쨍하고 해뜰날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모네의 의도를 깨닫고 그의 무모할 것같은 시도를 인정한 것인지 대중뿐 아니라 평단의 반응도 우호적이었다. 모네에게 이어진 극찬세례로 가난한 화가에서 별안간 스타 화가로 발돋움한 시기이다. 모네는 살고있는 지베르니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도시 지베르니는 그림의 소재가 다양하지 않았다. 우리들에게 아무렇게나  쌓인 논밭의 '노적가리'는 매력적이지 않다.  하지만 모네는  하루 일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노적가리의 색을  끊임없이 탐구했다.  황당하게도 농부들이 노적가리를 다 실어가 버려 그림을 그릴 대상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난처한 상황도 있었다. 모네는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찾아 나섰고 강변의 '포플러 나무'를 소재로 연작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는 소재라는 모네의생각은 예상과 빗나가고 어느 날 강변 목재업자들이 포플러 나무를 베어버린다. 포플러 나무가 베어진 후 충격에 빠진 모네는 움직이지 않는 소재를 또 다시 찾아야 했다. 그때 찾은 것이 바로 '루앙 대성당' 이다. 

 

 

 

[푸른 안개에 싸인 루앙 성당,1894]

[아침의 루앙 성당,1894]

[햇빛 아래 루앙 성당,1894]

[석양의 루앙 성당,1894]

[흐린날의 루앙 성당,1984]

 

 

 

모네에게도 어려운 과제였던 연작 [루앙 성당]은 약 30점이 그려진다. 

 

 

 

[생 라자르 역,1877] 증기와 햇빛이 어우러진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다. 직접 기관사를 찾아가 "나 화가인데 기차를 좀 멈춰달라." 하고 요구하고 실제로 손님들이 내리기도 했다는 얘길 들으며 대단하단 생각을 했다. 

 

 

 


 지금의 모네를 만든 일생일대의 선택, 그것은 바로 지베르니에 정원이 딸린 저택을 구매한 것이다. 내 집 마련에 성공한 모네는 농가 주택을 사 작업실로 사용하던  중 주변의 땅을 구입하며 점차 넓혀간 정원에 모네는 자신이 좋아하는 꽃과 나무를 심고 황량한 땅에 물을 대 연못으로 재탄생 시킨다. 색감,온도 등 미묘한 표현을 중요시했던 모네는 자신의 그림을 실험할 야외 연구실을 하나 만든 셈이다. 자신의 진정한 걸작은 정원이라 할 만큼 정원에 대한 애정과 그 자부심은 최고였다. 이 시기 모네가 매료된 또 다른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수련] 이다. '수련'은 물과 빛의 반사, 나뭇잎들과의 조화 덕분에 모네에게 최고의 영감을 준 존재다. 초기에는 수련의 풍경을 넓게 담아냈지만 점점 수련에만 집중하며 대담한 구도와 필체를 꽃피운 [수련] 직접 가꾼 정원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데 몰두한 모네 드디어 가난에서 벗어나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던 이때  모네에게 예기치 못한 악재가 한꺼번에 닥친다. 오랜 시간 밖에서 그림을 그리다보니 그의 눈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썬텐 크림을 바르고 썬글라스를 써도 이렇게 장시간 오래 노출된 모네의 눈이 성하다면 더 이상할 노릇이다. 그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었다. 백내장은 수정체가 혼탁해져서 시력이 저하되는 질병이다.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하며, 발병 초기에는 특별한 이상증상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한다. 당시에 백내장 수술의 성공률이 그리 높지 않은 데다 관찰을 해야하는 화가에겐 더욱 절망적인 질병임은 사실이다.

 

 

 

 

 

[죽음의 침대 위 까미유,1879]

 

 

 

 

 투병끝에 죽음에 이른 첫 번째 부인 까미유의 모습이다. 죽은 영혼이 빠져나가기 직전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작품이다. 서늘한 공기와 빛,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안타까운 마음까지 합쳐진 보기드문 작품이다. 저런 상황에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 놀랍다. 철저한 반복에 의한 직업의식 아니면 가능했을까? 모네의 인생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여인은 엘리스 오슈데다. 그녀는 모네의 그림을 후원했던 사람의 아내다. 경제 불황으로 남편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자 그녀는 6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 저곳 옮겨 다니다  모네의 집에 함께 살게된다. 아픈 카미유의 생활를 도왔던 엘리스는 잠적을 감춘 남편이 죽고나서 모네와 재혼한다. 까미유의 아이 2, 엘리스의 아이 6 총 8명의 생계를 해결해야하는 외벌이 모네는 그래서 작품가격에 더 예민했는 지 모르겠다. 인간적으로 '연작'을 해서 빨리 팔지 않으면 집값과 아이들 부양을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런 엘리스 마저 잃고 까미유의 큰 아들까지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뒤이어 1차 세계대전으로 쑥대밭이 된 조국 전쟁의 공포와 상실의 아픔 한 가운데서 모네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수련(water Lilies),1915-1926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진흙 속에 핀 수련처럼 자신만의 꽃을 피워낸 화가 모네 ,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 중대한 결심을 한다.  초대형[수련]을 그리기로 마음 먹는다.  목숨을 바칠 각오로 말이다.  [수련]으로 일생일대의 대작을 만들겠노라 다짐을 한다. 일흔 살이 넘는 연로한 나이에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매진한 초대형[수련]입니다. 모네는 왜 이런 악조건 속에서 초대형 프로젝트를 감행했을까요?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 모네는 자신의 모든 삶을 태워 대작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죠. 베토벤이 청력을 잃은 후 9번 운명 교향곡을 작곡한 것처럼요. 모네에게 [수련 프로젝트]가 절망의 탈출구였던 셈이죠. 빛을 예민하게 살펴야했던 그의 작업방식이 그림을 그리는 내내 시력에 무리를 준게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69세에 처음 시력에 이상을 느낀 후로 10년 사이 색과 형체마저 구분이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네는 어떻게 끝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시력 약화로 물리적 한계는 있었지만 사물의 색채,형태는 기억과 경험으로 재현이 가능했다고해요. 백내장 진단 이후 시각적 심상 표현을 심리적 심상 표현으로 그려냅니다.  실제로 백내장이 악화된 1910년대 후반~임종 직전의 수련 그림은 매직아이를 보는 수준으로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그저 수많은 선의 모임으로만 보인다고 합니다. 
 

 

 

 

 

어쩌면 [수련]이 주는 감동은 모네의 처절한 노력과 고민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모네는 [수련]시리즈를 불멸의 작품으로 삼고 1818년 1차 세계대전 직후 평화를 기리기 위해 프랑스 정부에 기증합니다. 프랑스 정부는 오렌지 나무를 기르던 왕실의 온실을 재설계해 모네만의 모네만을 위한 미술관을 건립합니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모네의 [수련] 중 총 8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높이 2미터 길이는 약 100미터로 8점의 그림을 이어 붙여 놓았죠. 엄청난 크기로 관객들을 압도합니다. 덕분에 인상파의 시스티나라는 별명을 얻은 오랑주리 미술관.  그만큼 대단한 모네의 [수련]을 한껏 감상할 수 있는 곳! 

약 8년간 계속된 모네의 초대형 [수련]프로젝트!

사람에게 상처받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모네의 [수련]을 들여다보며 다시금 희망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평생 빛을 따라다닌 빛의 화가 모네의 집념어린 영혼과 마주칠 때  우리는 앉은 자리에서 툴툴 털고 웃으며 일어설  용기를 얻지 않을까.

 

 

"이곳에 들어가서는 다른 어떤 생각을 하지 말고 감상에만 집중해줬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의 눈으로 돌아와서 내 망막을 통해서 지켜 본 이 현실의 세상들을 눈으로 그린 화가 모네.
 노화가의 투혼을 편안하게 놓여진 의자에 앉아 실컷 느끼고 감상해 볼 수 있어 이 세대는 축복인지 모르겠다.

 



" 아무리 돌이라도 빛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빛은 곧 색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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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거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1882,1,7, 고흐가 테오에게-

빈센트 반 고흐가 영혼의 동반자 동생테오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는 편지들 중 하나다.


고흐는 살아 생전 달랑 그림 한 작품 팔고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다가 37세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작가다. 살아 생전에 화상인 동생 테오의 경제적 뒷받침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주고 받은 형제간의 편지들 덕분에 당시 미술사의 귀한 자료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행운도 얻었다. 테오의 꼼꼼한 배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고흐 사후에 제수씨 요한나의 ‘고흐 그림 알리기 프로젝트’로 무명의 화가 고흐는 전 세계에 차츰 얼굴이  알려지게 되고 그림값도 2-3배씩 뛰게 된다. 하마터면 비운의 화가로 역사 속에 잊혀질 뻔한 그를 일약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화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게 한 것도 평생을 ‘고흐’ 알리기에 바친 제수씨 요한나의 희생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흐가 하늘에서 동생 테오와 제수씨 요한나를 만나거든 크게 한턱 내셔야하지 않을까!
고흐의 유년 시절


칼뱅파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와 미술적 재능을 물려준 어머니 아나 코르넬리아 사이에 태어난 둘 째같은 첫째다. 낳자마자 사망한 장남 빈세트의 이름을 부모님은 고흐에게 그대로 물려주신다. 고흐는 그런 부모님의 의사와 상관없이 형의 삶까지 짊어지고 사는 느낌으로 평생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고흐는 장 앙리 파브르처럼 곤충학자가 꿈이었던 독서광이다. 모든 곤충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고 과학자처럼 자세히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꼼꼼하게 수집하고 분류했다고 한다. 고흐의 꿈처럼 화가의 길이 아닌 곤충학자가 되었다면 괴짜 학자의 길을 걷고 있지 않았을까 ?화가로 살지 않았다면 좀더 오래 살기는 했을 것 같다.

고흐 집안을 보면 신께서 병도 주시고 약도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병 내력이 집안에 있었다. 더불어 고흐와 동생 테오의 형제간의 찐한 우애도 함께 주셨다.  아버지 테오도뤼스와 헤이그에서 화상으로 성공한 큰 아버지 사이의 우애도 남달랐다고 전한다. 그것도 고흐 집안의 좋은 내력같다.  당시 네덜란드에 바르비종파가 유행이었는데 큰 아버지는 그들의 그림을 수집•판매하며 화가들을 육성하는 일을 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고흐는 여러 대가들의 그림을 볼 기회가 많았고 특히 ‘밀레’라는 작가의 그림을 좋아해 모사를 하며 닮아가려 애쓴다. 참고로 바르비종파는 밖으로 나가 스케치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말한다. 밀레의 작품중 <이삭 줍는 사람들> 그림이 그 중 하나다. 대부분의 그림이 안에서 그려지던 예전 시대에 비하면 획기적인 변화이기도 했다.
청년 고흐


16세 때 큰 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헤이그 미술 상인 구필 (Giypil &cie)화랑에서 일을 시작한다.  당시 아돌프 구필은 파리 살롱 수상작들을 판화로 만들어 찍어 파는 판화 인쇄업도 겸하고 있었다. 점차 수요가 늘고 구필 화랑의 런던 지점으로 파견되어 런던 생활을 시작한다. 고흐가 본 런던은 고도로 산업화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크게 가치없는 그림이라도 돈을 위해 감언이설로 팔아야 하는 화상의 생활 방식에 슬슬 염증이 나기 시작한다. 가난한 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살롱 수상작 같은 엘리트  중심 미술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던 것 같다. 게다가 미술의 관점에 대해  손님들과 자주 논쟁을 벌여 결국 7년 만에 해고 되고 만다.

개인적으로 고흐의 여자 보는 눈은 빵점같다.그는 남녀간의 사랑을 사랑의 감정보다 연민에 가까운 순수함으로 여자들을 대한 것같다. 런던의 하숙집 주인 딸인 외제니 로예에게 실연을 당할때도 그랬다. 헤이그의 매춘부 시엔과의 동거 생활로 가족들과 주변 지인들의 지탄을 받을 때도 똑같았다. 고흐의 초기 대작인 <감자 먹는 사람들> 주인공 딸의 임신 소식에 동네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고 따돌림 당할 때는 더 덥답한 생각이 들었다.

선교사

고흐 할아버지, 아버지 두 분 모두 개신교 목사셨다. 그런 집안 분위기 때문일까 집으로 돌아 온 고흐는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종교인으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했다. 고흐의 일생에서 그를 이해해 준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인 영국 감리회 소속 토머스 슬래이드  존스( Thomad slade Jones) 목사를 만나 그의 보조목사 겸 존스 목사의 학교에서 조수 교사로 채용되어 일하게 된다. 안정적으로 설교를 하면서 잘하면 목사가 되어서 자신의 생각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울증이 찾아와 다시 집으로 가게 된다. 이를 보다못한 큰 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로테르담’근처의 도르트레흐트 근처에서 서점일을 하게 된다. 그 일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고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고흐의 이모부인 암스테르담의 요한에스 스트릭커 목사에게 도움을 구하고 목사고시 준비를 하던 중 코넬리아 보스- 스트릭커 목사 딸과 사랑에 빠져 중도 포기하고 정신적 충격만 더 커진 채 혼란스러워 한다. 그때 당시 고흐는 성직자들의 전도하는 방식에 다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같다. 전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명인데도 그런 전도보다는 실질적으로 전도에는 불필요한 지식을 쌓는 것을 더 중요시하고, 그래야만 성직자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풍토에 신물이 나있었다. 일부러 시험 문제가 너무 어려워 합격할 수 없겠다는 식으로 빠져 나왔다는 이야기도 들리는 걸 보면 말이다.

이런 고흐를 아버지와 존스 목사가 브뤼셀에 있는  전도사 양성학교에 빈센트를 입학 시킨다. 이 선교 단체는 벨기에의 악명높은 탄광지대인 보리나주(Borinage)로 파견하는 일을 했다. 젊은 고흐는 탄광의 열악하고 비참한 환경 속에 노출된 광부들처럼 극단적인 세계로 자신을 밀어넣었다. 고흐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던 와중에 선교단체에서 보리나주로 시찰관을 파견했고 고흐의 상태를 본 시찰관은 선교단체에 부적절하다고 보았고 1880년 보리나주를 떠나 브뤼셀로 가게된다.


화가로 길을 걷다.



외사촌 화가 안톤 모베에게 그림 지도 받은 것이 전부이고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했다.
당시 화상의 길을 걷고 있던 동생 테오로부터  파리 미술계에 불던 인상주의나 종합주의 같은 새로운 미술 사조들을 보내준 화집이나
편지를 통해 알게된다.  새로운 미술 사조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늦은편이었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고흐의 독특한 화풍이 생겨날 수 있었던 점은 다행인 부분이기도 하다.

뇌넨 시절의 고흐


뇌넨으로 다시 돌아 온 고흐는 아버지의 신앙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하고 30에 가까운 아들이 재정적 독립은 고사하고 직장도 없이
화가의 길을 가려하는 고흐의 결정에 부모는 못마땅해 한다. 요즘같아도 그런 길을 응원해 줄 부모는 많지 않을 것 같다.


<감자 먹는 사람들>,188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 소장. copyright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고흐가 그림을 그린 기간이 10년이다. 초창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5명의 광부와 광부의 식구들이 찐 감자와 커피로 저녁식사를 하는 다소 분위기가 어둡고 투박한 작품이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촌으로부터 색채 사용과 모델 관찰등 그림의 기초를 배운 것 외에 정규학습을 받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밀레, 들라크루아, 렘브란트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독학한 것이 전부이다보니 당시 네덜란드의 어두운 화풍이 그대로 전해진 것 같다. 당시 에밀 졸라의 소설<Germinal, 1885>에 감명을 받아 그린것으로 알려져있다. 작가인 에밀 졸라는 1884년 , 북프랑스 앙장 탄광의 스트라이크를 직접 돌아본 뒤에 이 대작을 쓴 것으로 고흐 역시 그들의 진실한 삶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해 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테오에게 보낸 이 그림은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동생 테오는 형에게 파리로 오라는 초청을 하고 그곳에서 고흐는 1880년대 전후로 당시 파리에서 유행한 인상파 미술의 흐름을 배우게 된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과 색을 포착하는 인상파의 혁신적인 미술 기법으로 고흐도 화풍의 변화를 겪는다. 예전보다 한층 밝아진 고흐의 그림은 자신을 화가로 묘사한  자화상 그림에서 당시 인상파 화가 ‘쇠라’의 점묘법을 응용한 그림을 통해 잘 나타나 있다. 이 자화상을 통해 본인 스스로를 화가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비록 30대 늦은 나이에 시작을 했고, 미술학교도 나오지 않았으며 , 그림 한 점 제대로 팔 지 못했지만 말이다.

당시 고흐는 파리에 머물면서 인상주의 기법을 배우고 싶어했고 함께 그림을 그릴 미술 동료들을 만들고 싶어했다.  고흐가 파리에 왔을 때 에밀 베르나르,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폴 고갱등이 외국인 화가인 고흐를 환대해 주었다. 화랑 직원인 동생 테오의 형이라 홀대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성실하고 진실한 고흐의 성격 뒤에 감정의 기복이 크고 극단적이며 타인의 비평을 눈꼽만큼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을 동료 화가들이 알게된 것이다.  당시 파리 미술계에 정기적인 그림 품평회를 열어 서로의 그림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자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비판을 견디지 못했다고한다. 다른 화가들과 다툼이 생기면 무릎을 꿇고 결투를 신청할 정도라 그의 괴팍한 성격을 견디지 못해 모두 떠나갔다.
<고흐의 초상,1887,툴루즈 로트렉>
이 작품에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고흐의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 당시 파리 미술계의 외면에 고흐도 지쳐 있었는 지 모를 일이다. 좁은 집에서 형과 함께 생활하며 형과 화랑 고객의 다툼에 동생 테오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고흐는 동생과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파리를 떠나 생 라자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남부로 떠나버린다. 무려 16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 아를에 도착한다.

고흐의 운명을 바꾼 아를


기온이 높고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의 ‘아를’ 지역은 원색적 색감이 살아있는 곳이다. 지중해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마을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길가의 키 큰 사이프러스 나무와 라벤더가 가득핀 꽃밭이 생각만해도 그림같은 풍경이다. 눈이 녹고 꽃이 피면서 고흐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한 달 동안 무려 14점의 과수원 그림을 그려댔다.
<과수원의 꽃피는 살구나무, 1888, 고흐>
초록, 파란색을 섞어 표현한 나무줄기에서 왕성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비슷한 시기 다른 작품 <꽃피는 복숭아 나무,1888,고흐>
풍성하게 핀 복숭아 꽃은 생명의 불꽃 같은 느낌이다. 아를 이란 지역이 이렇게 고흐를 화가로 키우는 중이었다. 아를에서 고흐는 태양의 색, 희망의 색, 생명의 색인 노랑을 발견한다.
<추수,1888,고흐>


고흐가 파리에서 그린 풍경화와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이 아를에서 드디어 탄생했다.
<해질녘, 씨뿌리는 사람,1888,고흐>
밀레의 그림에서 힌트를 얻은 작품으로 밀밭이 노란색, 하늘이 파란색인 것이 일반적인 우리들 생각이다. 고흐는 아를에서 환한 빛에 대한 영감을 발견하고 하늘이 노란색, 밀밭이 파란색으로 표현한다. 마치 땅에서 방금 솟아오른듯 경쾌하게 걷는 농부의 모습 속에 희망과 환희가 담겨있다. 아를에서 보낸 봄날이 고흐의 짧은 인생의 봄날이기도했다.
우키요에가 고흐에게 미친 영향
‘우키요에’는 일본의 서민 생활을 기조로 한 회화 양식이다. 당시 유럽에서 일본 에도시대 목판화(우키요에)가 큰 인기를 얻어 많은 화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1876,모네>


작품에도 등장해 상당수의 인상주의 화가들, 오스트리아 구스타프 클림트 등 당시 많은 화가들이 자포니즘(Japonism)영향을 받았다.
목판화는 대량 생산이  가능해 가격이 비교적 저렴해서 고흐같이 주머니가 가벼운 화가에게도 직접 사서 세밀하게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다리 위 소나기,1887,고흐>
고흐는 캔버스를 모눈 종이 형태로 구획을 나눈 뒤 차례대로 면을 메우는 방식으로 우키요에를 똑같이 그릴 수 있었다. 일본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의 작품을 모눈 종이 방식으로 똑같이 그려낸 고흐는 우키요에의 선위주 구성과 밝고 가벼운 화풍에 영향을 받는다.

<다리 위 소나기, 1887,고흐>
<아를의 랭글로아 다리, 1888>
<생 마레 드 라메르의 고깃배들,1888,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8,고흐>
<일본풍 가부키 배우,1887,고흐>
지중해성 기후를 낀 아를의 여름밤은 비가 오지 않아 많이 어둡지 않다. 여름밤을 가득 매운 별빛에 매료된 고흐는 어떤 도시보다 투명하고 화려한 아를의 여름밤의 색감을 좋아했다. 동생 테오에게 아를 밤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며 써보낸 편지를 보면 말이다.  아를의 포룸 광장과 카페로 오는 주민들을 표현한
<밤의 카페 테라스,1888>
작품에 가스등 불빛때문에 노란빛으로 표현된 카페와 푸르게 표현된 하늘엔 큰 별들이 빛나고 있다. 아를에서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고른다면
<론강 위에 빛나는 별들,1888,9>
을 꼽을 것 같다. 노란 등불과 유사한 별빛, 지상과 천상이 하나로 이어진 듯한 고요하고 맑은 밤하늘, 그림을 그릴 당시 고흐의 마음자리가 평온해 보인다.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1888,9>





<론강 위의 빛나는 별들>을 그린 9개월 후 생 레미 요양원에서 고흐의 밤 하늘은 극명하게 달라져 있었다.




<별일 빛나는 밤,1889>


밤하늘은 어지러운 소용돌이로 표현했고 달은 불길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도대체 고흐의 고요한 밤하늘은 어디로 간 것일까? 9개월 동안 고흐에게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폴 고갱의 등장
라마르틴 광장 인근에 방 2칸을 얻은 고흐는 자신이 빌린 방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 2장을 동생 테오에게 보낸다.
<노란집, 1888,고흐>
<노란 의자가 있는 침실, 1888,고흐>
고흐는 테오의 돈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최소 생활비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왜 굳이 방 2개를 빌렸을까? 그는 프랑스 남부에 화가의 공동 스튜디오를 꾸미고 싶어했다. 친구라고 생각한 파리 미술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기다렸지만 아무도 고흐의 편지에 답을 보내지 않았다. 고흐는 파리의 미술가를 친구로 생각했지만 그들은 모두 고흐의 괴팍한 성격에 넌더리난 상태였다. 가장 호의적이던 툴루즈 로트렉마저 고흐에게 답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파리를 떠나 남부 시골로 내려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고흐처럼 파리화단의 외톨이였던 고갱만이 여름에 아를에 갈 것을 전했다.
고갱은 원래 주식 중개인으로 지내다 서른이 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당시 파리 미술계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그림도 잘 팔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남아메리카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경험이 있는 고갱은 원시의 현란한 빛과 강렬한 색감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동생 테오는 아를에 가서 형과 함께 그림을 그리면 아를에서 그린 그림을 구매해 주는 조건으로 부탁을 받아 들인다. 고흐는 꿈에도 모른 채 기쁜 마음으로 고갱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 테오의 주선으로 1887년 고흐와 고갱의 짧은 만남이 있었다. 그때 고흐는 자신의 작품 가운데 하나를 고갱에게 선물하고 싶어했다.



<두 송이의 해바라기,1887,고흐>
<해바라기, 1888,고흐>

고흐의 이런 섬세한 마음도 모른 채 고갱이 타이티로 가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흐의 그림을 미련없이 팔아버린다. 아무튼 고흐는 해바라기 그림을 좋아한 고갱을 위해 총 7점의 해바라기 그림을 그려  그림 2점을 고갱의 방에 걸었다고 테오에게 편지를 보낸다. 고갱이 해바라기 그림을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느끼길 기대하며 말이다. 태양을 닮은 해바라기, 꽃병, 배경, 테이블도 온통 노란색으로 표현되어 있어 해바라기 그림이 고갱에게 환한 빛으로 다가가길 기대했던 것 같다. 이렇게 단 한 명의 동료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고흐의 마음이 느껴지는가?
1888,10,23
아를에 고갱이 도착한다. 방에 걸린 해바라기 그림을 보고 고흐에게 보답하고 싶었던 고갱은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를 그려 선물로 준다. 고갱의 그림 속 자신을 보고 미쳐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한 고흐는 함께 살자마자 부딪히기 시작한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강한 에고를 지닌 자기 중심적 고갱과 타인의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성품의 고흐가 모든 일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림의 성향이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 야외 스케치를 다니는 고흐를 구식이라고 비웃기까지 하자 고흐는 고갱과의 사이에 위기감을 느낀다. <고갱의 의자,1888,고흐>

어려운 형편 속에서 고갱을 위해 팔걸이 의자를 준비한 고흐는 그림 속 의자 위에 기우뚱한 촛불과 미끄러질듯한 책 2권으로 당시 고흐의 불안를 표현한다. 1888,12.
고흐가 고갱에게 술잔을 던지며 격렬하게  싸우고 난 후 화해할 목적으로 들라크루아 전시를 보기 위해 마르세유로 떠난다. 그곳에서도 들라크루아에 대한 두 사람의 해석은 극단으로 엇갈렸다. 대단한 화가로 생각한 고흐에 반해 철지난 싸구려 화가라고 생각한 고갱의 말다툼은 심해지고 아를에 머무는 것에 회의를 느낀 고갱은 파리로 돌아갈 것을 선언한다. 고갱의 선언에 단 한 명의 동료인 고갱과 이별하게 된 고흐의 정신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1888,12,23
또 한 차례 격렬한 말싸움으로 다툼이 심해지자 고갱은 밖에서 잠을 자겠다고 집을 나선다. 그런 그를 면도칼을 든 고흐가 뒤따라가고 5년간의 선원 생활로 세계를 떠돌았 던 고갱은 거친 남자 고흐를 무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고흐는 칼을 떨어트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술집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집으로 간 고갱은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진 고흐를 발견한다. 고갱을 해치려던  칼로 자신의 귀를 자른 것이다. 고갱은 동생 테오에게 고흐 상태를 알린 뒤 아를을 떠난다.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아를에 도착한 테오는 고흐를 정신 병원에 입원 시킨다. 발작이 일어날 때 물감을 빨아 먹는 등 괴이한 행동을 하고 발작이 끝나면 발작 상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형의 모습에 동생 테오 역시 수심이 깊어진가. 다행히 한 달 여의  치료가 끝나고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고흐가 퇴원 후 그린 첫 작품으로
<귀를 자른 자화상,1889,고흐>
<자화상,1889,고흐>
자신의 상태가 나아졌다고 스스로에게 선언하지만 상태가 안 좋아져 그림을 그리지 못할 수 도 있다는 불안감으로 힘들어 한다. 병원 치료후 고흐의 그림에 소용돌이가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발작을 하면 그림을 그릴 수 없고 발작이 끝나면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해 간헐적 발작이 멈췄을 때 그린 그림들이다. 소용돌이 치는 세상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 고흐의 모습이 안스럽다.
1890년
고흐에게 생 레미  요양원은 퇴원을 권한다. 경찰 탄원 등 주민의 반대로 아를에는 돌아갈 수 없었다. 파리로 갔지만 요한나와 결혼해 파리에서 가정을 꾸린 동생 테오의 집에도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화가 피사로의 제안으로 파리 인근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가게 되고 당시 화가이며 우울증 환자인 의사 가셰를 만나게 된다.
<닥터 가셰의 초상,1890,고흐>

결혼한 동생 테오에게 아들이 생기고 형의 이름을 따 빈센트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테오는 형에게 아들의 대부를 요청하지만 몸과 마음이 건강한 어른이 아이의 대부가 되면 좋겠다고 하며 거절한다. 그러자 형에게 아기방을 장식할 그림을 요청하고 조카를 위해 아를 생활 초기의 과수원 풍경을 회상하며 자신의 행복했던 기억을 그림으로 그려준다. 고흐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아를에서의 봄과 여름을 듬뿍 담아서 말이다.

<꽃피는 아몬드나무,1890,고흐> 1890,여름
고흐 화가 인생 최초로 아를에서 그린

<아를 인근 붉은 포도밭,1888,고흐>
그림이 약 400프랑에 팔린다. 동생 테오는
”세상이 형의 재능을 알아봤고 형은 이제 곧 성공할 거야.”
하며 형을 격려 했지만 갈수록 심각해지는 고흐의 우울증은 원근법이 무시된 채 그림 속에서 이미 길을 잃고 있었다. 고흐의 성공에 대한 테오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드디어 세상이 고흐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흐는 성공을 기다리기  힘든 상태였다.  고흐의 마지막 그림으로 알려진 밑그림 없이 급하게 그린 <나무 뿌리와 둥치,1890,고흐>
그림에 숲에서 길을 잃고 뒤엉킨 삶의 매듭을 스스로 끊어 버리려는 모습이 보인다.
<번개 구름 아래 밀밭, 1890,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고흐> 1890,7월
고흐는 밀밭에 가서 권총 자살을 시도한다. 삶의 마지막까지 가혹했던 고흐는 심장을 비켜 늑골 사이에 총알이 박혀 피를 흘린 채 하숙집으로 돌아온다. 고흐의 상태가 치료할 수 없는 수준임을 알아차린 의사 가셰는 고흐를 방치한 채 파리의 테오를 부른다. 테오는 고흐가 죽기 전에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건강도 나쁘고 직장 생활도 좋지 않아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로 돌아가겠다. 형도 이제부터 자신의 삶을 알아서 살아라.“

더 이상 형에게 생활비를 보내기 힘들다는 뜻을 전했다. 10여 년 동안 고흐의 생활비를 지원한 테오에게 아무도 뭐라할 수 없다. 하지만 고흐는 테오의 편지에 대해 테오가 자신을 외면한 것으로 받아 들였고 내 편이 하나도 없는 고흐의 선택은 죽음이었다. 고독을 이기지 못한 한 인간의 쓸쓸함이 고흐의 죽음을 통해 절절히 느껴진다. 이렇듯 예술가를 경외하는 이유가 작품에 대한 뛰어난 재능만이 아니라 재능을 불꽃처럼 태우며 자신의 삶을 희생양 삼아 만들어 낸 걸작들 때문 아닐까 생각해본다.

1890,7,29,고흐 사망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테오 반 고흐도 정신병이 생겨 형이 죽은 지 6개월 후인 1891,2,25서른 넷의 나이로 형을 따라갔다.
직적적인 자살은 아니었지만 사실 자살같은 죽음이었고 형재는 현재 나란히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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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아이라면 한번쯤 가져보는 환상이 있다. 바로 무대위의 발레리나다. 발레복을 입고 여리여리한 무용수가 포즈를 취하는 장면은 언제봐도 부러운 장면이다.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꽃다발이 무대 위로 던져질때면 그 부러움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다 이런 환상이 깨져버린 날이 있었다.
바로 강수진 발레리나의 흉한 발 사진을 보고서였다. 혹독한 연습으로 발가락 마디가 기형적으로  돌출되어있었다. 그런 그녀의 흉한
발을 보며 참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었다. 화려한 무대 뒤에 소리없이 뿌려야했을 그녀의
눈물과 뼈를 깎는 자기 훈련이 일상처럼 지루하게 반복되었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었을 무한한 시간을 무너져 내리는 자아를 수시로 다독이며 자기를 넘어 선 찐 예술가로서의 모습이 일그러진 발가락을 보며 진한 울림으로 공명했다.



[Little Dancer of Fourteen Years],(1881), 오르세미술관


#무용의 화가 ‘드가’
‘무용의 화가’로 불리우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작품<열네 살의 어린 발레리나>이다. 언뜻보면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는 자세처럼 보인다.

드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개한 조각 작품으로 ,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대신 발레리나가 마주한 참담한 현실과 육신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운명의 선택 앞에서 떨면서도 짐짓 의연한 척하는  아이의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더 큰 슬픔을 느끼게 한다.  1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고 있는 발레리나의 모습이고 집안의 생계를 모두 짊어져야 하는 소녀의 모습이다. 당시 발레리나는 발레를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보고 귀족에게 후원을 받는 하층민 출신의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귀족들이
예술로서의 발레가 아닌 발레리나에게 투자를 했을 뿐이고 자신이 후원하는 발레리나가
등장할 때 무대의 뒤편에서 관람하거나 무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보는 특권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후원의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제로는 어린 발레리나들이 후원하는 귀족에게 성상납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드가 작품에 등장하는 피곤하고 지친 발레리나 옆에 표정을 숨긴채 딸의 고통을 묵인하는 엄마의 무관심한 모습이 인정사정 없는 매니져 같아 보인다.

’그런 일은 내가 알바 아니고 너는 후원자들에게 잘 보일 생각이나 해. 너도 알다시피 당장우리 목구멍이 포도청이야.’

라고 읽히는 것은 내 과한 상상력일까?


무대 안팎을 다니며 개인적 움직임을 그려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무용수 선생님과 잘 안다는 이유로 무대 뒷편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장면들이 드가의 그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무대의 앞• 뒤에서 리허설 연습 장면을 그린 그림속에 발레리나들의 다양한 포즈를 본다. 슬프게도 그림 속 그녀들은 서로가 소외되고 서로가 분산된 채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드가 덕분에 편하게 그가 살아낸 시대로 시간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시대상과 문화 그리고 그림 속  인적구성을 통해 우리의 현재 모습과 비교도 해보고 추측도 해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그림이 기록적인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작품을 본 평론가  
위스망스는 “조각의 혁명”이라며 극찬했다.
당시에 ‘누가 조각에 실제 의상과 신발을 입힐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점에서다.
의상과 신발은 나중에 다른 사람이 입혀놓은 거라고 생각했을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이런걸보면 드가는 조각이라는 재료의 한계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얼마나 기발하고 혁신적인 예술을 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족 이야기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은 진정한 파리지앵 ‘드가’와 그의 가족들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프랑스 혁명이후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이 크게 전유럽으로 번지면서 생활양식은 물론 생각들도 크게 변하는 산업화시대였다.

에드거 드가는 상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맏아들이다. 그의 본명은 일레르 제르맹 애드가 드가(Hilaire-Germain-Edgar De Gas)이다.
그의 풀네임 이름중 ‘일레르(Hilaire)’는  프랑스 대혁명 때 이탈리아 나폴리로 가서 은행가로 성공한 할아버지에게서 딴 것이고,
제르맹(Germain)은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목화 사업으로 큰 돈을 번 외조부에게서 딴 것을 표나게 조합하여 이름에 짜맞춘 아버지의 자부심이 담긴 이름이라고 한다.  당시 드가 집안 역시 이탈리아와 미국에 은행과 기업체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40대까지 돈 걱정없이 그림을 실컷 그릴 수 있었던 드가의 밑천이
바로 양쪽 집안의 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아버지를 두고 다른 남자를 사랑했기에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때의 영향일까? 평생 독신으로 살며 ’여성‘ 을 주제로 노년에 까지 그림을 그려낸 걸 보면 말이다.
#<개의 노래>


[The Song of The Dog], (1875-1877), The Cafe Concert



드가는 자신이 즐겨 갔던 카페를 배경으로 <개의 노래>를 그렸다. 제목이 너무 특이해 웃음이 나온다.^^ 손을 앞으로 내밀고 부르는 장면이 개와 닮아 붙여진 여자 가수의 별명이라고 한다. 다시 보니 우리 집 키우는 두마리 개의 제스처랑 너무 닮았다.^^

작품의 모델은 당시 인기 있었던 가수 엠마 발라동이다. 드가는 그녀의  노래에 , “발라동의 커다란 입에서 흘러나오는
관능적인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부드러웠어!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할 수 없었네.“ 라며 찬탄를 보냈다고 한다.
<개의 노래>라는 작품은 당시 ‘음악을 회화에 어떻게 담을 것이냐?’ 하는 질문에 대한
드가 나름의 대답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백인 위주의 그림 속 주인공이 이방인의 얼굴로 바뀌어 볼거리의 풍성함를 함께 드러내 준다.
근처 카페에 앉아 느긋한 저녁을 즐기며 노래를 음미하고 있었을 당대 파라지앵들의 일상을 느껴볼 수 있어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품이다. “회화는 약간의 수수께끼, 약간의 모호함,
약간의 환상을 필요로 하는 거야. 당신이 만약 의미를 완전하게 읽어버리면 더없이 지루하게 되고 말걸.”(드가)



#호기심과 진실

드가는 ‘호기심’이 많았던 작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아 그런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다. 덕분에 작품의 주제도 폭이 참 넓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만 그리던 전기를 지나
점차 일상 생활을 하는 그림으로 옮겨오는
후기의 화풍속에 무용수, 일상의 여인들, 경마장 속 움직임도 그의 손끝에서 잡아낸다. 드가는 누구보다도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회화는 진실을 쫓아야 된다.”
현실 속 진실과 회화의 거리감은 솔직히 멀다.
움직임을 그리려할수록 움직임은 화가를 배신한다. 결국 진실을 추구하지만 진실을 잡을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당시 드가는 예술은 그저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것 뿐이다 라는 결론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괴리를 꾸준히 성찰해왔기 때문에 드가의 성찰적인 예술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는 고지식한 작가라는 말이다. 그림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담을 수 없다.
그래서 가장자리에서는 무엇인가 잘려나가게 된다. 이 가장자리를 자르는 방식에서 예술가들은 의외로 자기 나름의 기질을 발휘하게 된다. 어떤 작가는 대범하고 어떤이는 교묘하게 말이다.
<모자점에서>(1882)라는 작품 속에 드가의 동료 화가였던 메리커셋이 거울 앞에서 모자를 써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다.
그림 속의 거울이 점원을 몽땅 잘라서 가려버린다. 그래서 이 점원은 얼굴이 없는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그림 속 점원은 불만스럽겠지만 보는 우리는 이런 부분이 대단히 매력적이고 색다른 느낌을 준다.

#드가의 젊은 시절


파리의 유명 고등학교 시절 ,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며 고전 명화들을 모사하는 일을 했다.
좋은 작품을 보고 연습 하는 것만큼 큰 공부는 없는 것 같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에 모사를 하는 방이 따로 있었고 일정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앞선 선배들의 작품들이 후배들의 그림 실력을 업그래이드 시키는 훌륭한 교재로써의 역할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리 박물관 지도를 보면 드가가 습작했던 루브르 박물관에서 다리만 건너면 드가의 작품을 모아 놓은 오르세 박물관이 보인다. 수없이 드나들었을 드가의 젊은 열정이 지금은 그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미래의 드가를 꿈꾸는 어느 누군가의 삶을 바꿔 놓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22살에 에콜데보자르(국립 미술 학교)에 입학, 미술을 전공한다. 이곳은 세계 제일의 정통 미술학교로 많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를 배출한 곳이다.
쥘 마자랭 추기경이 소묘, 회화, 조각, 판화, 건축과 기타 다른 매체에 재능을 가진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특히 루이 14세때 이 학교 졸업생들을  선발하여 베르사유 궁전의 왕실의 거주지들을 장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로인해 왕실의 사치에 백성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었다. 이곳 출신 예술가들을 열거 하자면 제리코, 들라크루아, 앵그르, 모네, 르누아르, 쇠라, 시슬레 등이 있다.

드가는 24세에 이탈리아 사는 고모를 방문하러 간 적이 있다.  벨레빌 가족  <the bellelli family>,(1858) 이라는 작품으로 고모와 두딸 그리고 사업가 고모부의 어정쩡한 가족 관계를 묘사한 초기 작품이다.

상복입은 차가운 표정의 고모와 사업하느라 정신이 없어 가족과 유리된 고모부의 뒷모습이 드가의 손을 통해 잘 표현된 작품이다.  10년 동안 붙들고 그린 꼼꼼한 작품이라고 한다. 화목해 보이지 않는 가족의 모습이 보는 내내 불편하다. 남편은 뭔가 항변하고 싶은데 씨알도 안먹힐 것 같은 싸늘한 표정의 고모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엄마편에 적극적인 아이와 웬지 중간적 존재로 애매함을 가진 아이의 모습도 대조적이다. 이 작품을 보면 드가는 미묘한 심리 묘사의 달인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탈리아에 몇년 머물면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배운다. 흔히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미술을 본것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추측하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드가는 여행에서 자극 받거나 그로인해 화풍이나 스타일이 변한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드가가 마네에 이끌려 카페 게르브아에서 다른 여러 예술가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던 그 순간이 결정적 순간으로 본다. 얼떨결에 인상주의 화풍의 리더격이 되어 버린 마네를 따르는 젊은 작가들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시점이란 얘기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 그림 모사를 하던 드가에게 마네가 먼저 말을 걸어 왔다고 한다. 20대 후반의 드가를 30대에 들어선 마네가 함께 카페게르브아에 모여있던 동료들에게 데리고 간다. 그야말로 동아리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새로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고 논쟁으로 날을 새던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모두 모여있던 곳이다. 마네가 만들어준 초고속 인상파 네트워크인 셈이다. 당대 실험적인 신선한 이념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드가는
‘독설 대마왕’으로 불리웠을 정도로 쓴소리를 많이 했다고한다. 그래도 결이 비슷한듯 다른 마네와 20년간 예술가로서 미묘한 경쟁의식을 가지며 교감해 왔다고 한다.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면
50대에 죽은 마네의 그림을 식견이 부족한 가족이   그의 그림을 잘라서 팔려고 하자 83세까지 살았던 드가가 마네의 짤려진 그림을 수습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젊은 시절 마네는 드가가 그려준 <마네 부부>,(1868~69)의 그림을 부인 얼굴쪽 부분만 잘라 버렸다고 한다. 마네는 이에대해 변명도 없었고 사과도 없었다고 한다. 자기 부인에 대한 강박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 거란 추측이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 마음이 다쳐 다시는 안볼텐데 그래도 예술가로서 마네의 그림이 잘려지는 모습은 원치 않았던 것 같다. 서로의 예술세계는 보호해 주고 싶었던 예술가로서의 마지막 양심 같은 것 아니었을까!



보자르를 졸업했지만 파리의 살롱 문화에는 별로 흥미를 못느낀것 같다. 드가는 인상파 전시회에 일곱 번 출품하여 인상주의를 지지했지만  ‘인상주의‘라는 말을 싫어해서 스스로 사실주의 화가 또는 자연주의 화가로 불리길 더 선호했다. 결국 독자적인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것을 보면 말이다.

드가는 외롭고 또 고독한 화가이며 매우 개인적이고 은둔적인 생활신조를 지닌 화가같다.  
자신의 작업실에 지인들을 한번도 초대하지 않은걸 보면 말이다.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간섭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더욱이 예술 창작 활동을 하는 미술가는 사회와 격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 보면 더 그런생각이 앞선다. 예술가를 구도자로 착각한것 아닐까싶다.



#드가를 보는 시선 르네상스,바로크와 같이 한 양식이 몇 세기동안  지속대던 시대가 끝나고 , 한 사조가 발생하면 곧바로 그것에 맞대응하는 다음 사조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19세기 신고전주의 , 낭만주의, 사실주의를 관통하는 중심에 ‘드가’의 예술이 있다. 그를 이해하지 않고 그의 고집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상주의’사조는 제대로 형태를 갖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방인을 출현시키고, 고갱을 아꼈으며, 쇠라의 작품을 걸 수 있게 용인해준 작가다. ‘메리트 모리조 ’라는 여성 동료 화가를 부모님의 반대, 마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전방위 설득시켜 인상주의 화풍안에 받아 들인 사람도 그다. ‘메리커셋’이란 미국인 여성에게 제 1회 전시를 가능하게 도운 사람 역시 드가다.
“ 내겐 추도사 같은 건 필요 없네.
그저 내 무덤 앞에서 그는 진정으로 데생을 사랑했노라고 말해 주시게”-드가-
드가의 삶을 살펴 보며 요즘처럼 사진 기술이 좋아 온갖 형태의 실험을 쉽고 다양하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움직임을  일일이 눈으로 관찰하고 손으로 그려낸 그의 시간들이 고통으로 다가온다. 수없이 정교하게 그려댔을 별 것 아닌 선 한줄이 고민끝에
그려진 것을 안다. 원하는 동작을 그려내기 위해 무용수들의 각도를 계산하고, 모델의 머리를 4시간 동안 빗겨 주며 새로운 감을 잡아갔을 드가의 오랜 일상을 너무 쉽게 몇 줄 요약한 것 같아 미안해진다. 예술이란 이름을 달고
자신을 넘어서려 애썼던 그와 그녀들에게 마음의 박수를 쉼없이 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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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철학적 함의를 찾아내려는 사람들도 있고, 좀 더 음탕한 작자들은 외설적인 의도 운운하면서 흠집을 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마네 당신은 그런 대중들에게 큰 소리로 말해주어야한다. 그건 당신들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니라고. 당신에게 그림은 분석의 소재일뿐이라고. 내가 확실히 아는 한 가지는 마네는 훌륭한 그림을 그려냈다는 사실이다.
마네는 생상하게 이 세상을 풀어냈고, 빛과 어둠의 진실, 사물과 인간의 실제를 독특한 문법으로 표현해냈다. -에밀졸라,1867-
# 나-그림, 너 -관객

나를 향한 부정적 댓글 몇줄에도 우리는 한없이 쪼그라든다. 그림속 당돌한 시선의 그녀는 억울하다. 파리시내 남녀들이 누드의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과 욕설을 거침없이 해대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제성 높은 그림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다. 주먹질 하기도 하고 지팡이로 후려치려는 무뢰배도 섞여있다. 고상한 척 하던 남자들이 순간 당황하고 뻘쭘해진다. 어제 밤 한 일을 들킨 것 같아 욕하고 화를 내며 위선를 감추려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올랭피아>,(1863)를 보고 당대 파리 시민들이 보인 호들갑스런 반응이다. ‘낙선전’의 작품 <풀밭위의 점심> 을 보고 이미 화가 잔뜩 나 있던 관객들은 마네에게 또 한 방 크게 얻어 맞은 느낌이다. 당시 아카데미 학파 스타일에 길들여진 파리의 고상한 관객들이 <올랭피아>를 보고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하늘거리는 천이나 성스런 샘물 근처에 그려져야할 여신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방금 길거리 어느 모퉁이에서 부딪혔을 것 같은 여인이 무심한 듯 그림 밖을 응시하고 있으니 화가 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지 모르겠다. 붓질 자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들여 그린 그림에 그들의 눈은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웬걸, 붓질이 그대로  다 보인다. 입체감이나 음영감도 없다. 평평한 느낌 그 자체다. 대신 물감을 여러번 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채도가 떨어지지 않아 화사해 보이긴 한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나체에 대한 의례적 미화없이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보이는 벌거벗은 몸을 그린거다.  그것도 거만하게 그림밖의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는 자세로 말이다. 표정에 수치심 따윈 찾아 볼 수 없다 .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말이다.   머리의 꽃장식, 팔찌,벨벳 목걸이,천사가 아닌 흑인 여성이 들고 있는 후원자의 꽃다발, 그리고 발끝의 검은 고양이까지 현실의 매춘부를 연상하기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그래서 고상한 관객들은 천박한 작품으로 취급하며 분노했던 것이다.
그림 앞에 경호원 3명을 배치 시키고 다른 작품보다 높게 걸기도 했다고 한다.그래도 까치발을 하면서까지 보려는 여인네들 마음 속은 어떤 꿍꿍이 속인지 궁금해진다.

이 작품의 실제 모델은 ‘빅토르 뫼랑’이란 이름의 화가 지망생이다. 아버지는 금속관련 일을 하는 장인이었고, 어머니는 모자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이만하면 예술가 집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실제로 그녀는 기타와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도 하다. 16살 어느날 우연히 길에서 기타를 메고가는 그녀를 보고 , 마네가 모델을 의뢰했다고 한다. 요즘같으면 길거리 캐스팅이라 해야 할 것같다. 사춘기에서 여인으로 변해가는 그 어디 쯤에 뫼랑의 신비로움이  있었으리라. 마네의 표현을 빌리면, “눈 빛은 신비롭고 얼굴은 매정한 어린아이 같다.” 라며 자유 분방함과 대담함을 함께 지닌, 그리고 화가로서의 재능까지 겸비한 그녀를 매우 아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마네의 예술 세계에 빼놓을 수 없는 모델임은 틀림없다.
어쩌면 영적 멘토 역할을  창작자와  모델이라는 연장선에서 주고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기존 관념을 깨부수는 인상주의 태동의 입구에서 안내자 역할로 역사에 남았다.
모델은 비난과 욕설 속에 살아 남아 사람들 속에 영원히 회자되고 있다. 특히 그녀의 평범함속에 숨어 있는 단호하면서 냉정한 모습이 마네의 모델로서는 최상의 조건이었다고 전한다. 모델로서의 인내심, 대중적인 매력, 활기, 자유분방함과 대담함등 그녀의 모델로서의 자질은 <풀밭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에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연일 이어지는 비난 속에도 정작 본인은 별로 게의치 않고 일상을 살아 낸 것을 보면 어리지만 내공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



에두아르 마네는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의 전환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네 주위에 늘 실험적인 젊은 화가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기존 사회에 대한 반역과 낡은 미의식에 대한 혁신을 외쳤다.
상류계층에 속하는 마네가 그런 개혁에 동참하기에 내키지 않았을 것 같다.

마네는 할아버지와 어버지가 모두 판사였던 귀족 가문 출생의 금수저다.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아버지는 마네가 판사가 되길 바라셨고 화가로서의 길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17살에 남아메리카 항로의 견습사원이 되기도 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낙방의 고배를 마시기도 한다.

1850년 겨우 쿠튀르의 아틀리에에 들어 갔지만 학구적인 역사화가인 스승에게 반발하고 나오게 된다. 루브르 박물관 등에서 고전회화를 모사, F. 학스나 벨라스케스 등 네덜란드, 에스파냐화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것처럼 창작에도 고전을 모사하는 것 만큼 좋은 스승은 없는 것 같다. 당시 화단에 두 부류가 있었다고 한다.
밀레, 쿠르베, 마네, 드가처럼 생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던 작가들과 모네와 르누아르처럼 생계를 유지해야 했었던 작가들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마네는 돈을 버는 것과 좀 떨어져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표현하고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굳건히 믿었던 작가들 중 하나다.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했던 집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게 된 최초의 그림은 <스페인 가수>이다. 이 작품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그런 마네가 살롱전에서 낙선하게된다.

‘낙선 전람회’에 출품한 작품 <풀밭 위의 점심>을 보고 사람들은 미풍양속을 어지럽히는 뻔뻔스런 그림이라며 심하게 마네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옷을 입고 있는데 , 유일하게 여자만 옷을 벗고 있다. 여자의 몸은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시기까지 하다. 그런데 벌거벗은 여자는 부끄러운 줄고 모르고 , 오히려 관객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마치 사람들이
눈앞에서 실제 벌거벗은 여인을 쳐다보다 들킨 것처럼 당황스러워 한다.

나에게도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
몇년 전 조카 결혼식이 열리는 뉴욕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근처 유명 미술관에 들러 그림을 감상하는데 3층 전시장에 아이가 엄마 몸을 빠져 나오는 사진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찍혀 있어 급 당황해 얼른 다른 곳으로 옮겨 간 적이 있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해져 피하고 싶었다. 내밀한 부분을 누군가 보는 것 마냥 찝찝했었다. 들키고 부끄러워 숨고 싶은 마음이 턱까지 차올라 급하게 다른 전시실로 이동하며 내 뒷꼭지가 뜨끔 뜨끔한 느낌을 받았었다. 내가 비정상이었을까?^^

아무리 새로운 기법으로  그린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지만 기성세대 심사위원들이 선뜻 그림을 선택하기에 민망하고 도발적이다는 느낌도 있었을 것 같다.
여하튼 <풀밭위의 점심>은 마네에게 인생에쓴 맛을 알게 해준 작품이다. 어마 어마한 악풀에 시달리고 ,수많은 기사, 칼럼, 사람들의 비난이 ’그림계의 이단아‘ 마네에게 쏟아진다. 당시 살롱전은 주제, 구도, 색감이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마네는 이것들을 깨부수고자 했다. 중요한 사람들, 위대한 사람들, 신적인 사람들 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던 시대에 반기를 든다.

#“내가 제일 잘나가.”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이란 작품을 보면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는 이 피리 부는 소년을 중앙에 떡하니 세우고 배경을 과감히 없애 버렸다. 손과 발 부분을 빼고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을 강조한 작품이다. 1864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하였을 때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고 한다. 당시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작아지는 과학적인 원근법을 사람들 머릿속에서 없애기 위해 고민했다고 한다. 배경을 지워버리는 방법으로 말이다. 배경과 인물을 뜯어내기 위해 경계선과 같은 테두리 선을 표현했다. 표현 대상에 대한 부피감, 무게감, 덩어리감을 나타내는 양감의 느낌도 거의 없애 버렸다. 굉장히 편평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는 눈에 너무 익숙해서 당연한 것 같은데 당시 원근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아주 쇼킹한 뉴스거리였다고 한다. 특히 살롱전 심사 위원들에게 마네의 이 작품은 영화 <친구>의 버전을 빌어 표현 하자면,

“마네, 이제 튀는 짓 그만해라.
이만하면 많이 놀랐다 아이가”

하며 제발 그만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또 낙선을 시킨다.

내 입장에서 <피리 부는 소년>은 특별할 것 없이 그냥 증명사진 찍은 느낌이었다. 아이들 학교에서 혹은 직장에서 그저 흔하게 찍어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진말이다. 이 그림이 뭐라고 그렇게 말이 많고 유명할까 싶었다. 기존에 상식으로 알고 있던 원근법을 없애려무지 노력했던 작가 마네의  고뇌에 찬 시도임을 알았을 때 보이는 것들이 정말 달리 보였다. 고전 티치아노의 작품<우르비노의 비너스> 에 아름다운 여인이 옆으로 누워있는
소위 ‘비너스의 구도’가 있다. 이 작품의 구도를 똑같이 따라한 작품이 <올랭피아>이다. 모델만 바꿨을 뿐인데,
“ 이 작품은 비난할 가치도 없다.”
’임산부와 노약자는 전시를 보러 가지 마라.‘
라는 신문기사가 실릴 정도로 뭇매를 맞았다.
왜 그랬을까? 그림속 비너스나 여인들이 누드로 등장을 했을 때 장신구, 옷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네의 <올랭피아> 그림 속 그녀는 다양한 장신구를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초커, 목걸이, 구두, 팔찌 등 이 여인이 인간이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순히 인간의 여인뿐만 아니라 이 모든 아이템들이 당시 파리에서 유행했던 매춘부들의 옷차림이라고 한다.

<올랭피아>라는 이름 자체도 고급 매춘부들이 즐겨쓰던 가명이었다고 하니 그들의 분노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들이 손가락질 하던 매춘부들의 문화가 시간이 지나 귀족 부인들이 따라 했다는 걸 보면 아이러니하다.

이전까지 욕망이 가득한 시선으로 우리를 위해 그려진 비너스 그림을 보았다면
이제는 그림속<올랭피아>가 관람객인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듯 바라봐지고 전시가 되는 듯한 그런 느낌의 시선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주객이 바뀐 그림 앞에 파리 시민들은 분노하고 손가락질 했던 거다. 어쩌면 미술사속 커다란 흐름은 기존의 미술사를 부정하고 혁신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순환의 과정이란 생각을 해본다.


              헌신

                   복효근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이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 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주리니
그대 다시 나를 돌어보거나 말거나
먼 길 함께 했다는 흔적이라면
이 발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
헌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인상주의#마네(1)#풀밭위의 점심#올랭피아#피리부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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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도 있다.그남자

‘이런 남자가 또 있구나!’

앞•뒤 •옆까지 꽝 막혀 오디오 북을 들으면서내내 답답함이 몰려 왔다. 내 짝꿍도 어느 면에서 가끔 그런 적이 있어 미워만 할 수도 없는 캐릭터다.

주인공 오베는 아내 소냐가 죽은 이후 살아갈 이유가 없다며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죽기로 다짐할 때마다 오베를 필요로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웃으로 온 패트릭의 차를 고쳐주기도 하고, 갈 곳 없는 고양이을 키우기도 하고, 기차에 치일 뻔한 사람을 구하기도 한다. 투박하고 거친 그의 이웃을 향한 고함 소리는 처음에, ‘뭐 , 이런 고약한 영감탱이가 다 있어.’ 하며 전형적인 꽉막힌 꼰대를 연상했었다.
그런데 그의 어린 시절과 끔찍히 사랑하는 아내 소냐를 잃은 결혼생활을 알고 나니 괴팍한 성격과 일방 통행식 사고가 점점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일방적으로 그의 편을 들기 시작하며 그의 마음 속 시선을 깊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우직하게 자신의 일을 처리하고, 남을 도울 수 있을 때는 정성껏 돕는 성격으로 영혼없는 립서비스에 식상한 현대인들에게 ‘영혼의 양파스프’ 같은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죽음을 미루고 문제 해결사가 되어가다. 주인공 오베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다양한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게 된다. 임신부 파르바네의 운전 연습을 돕다가 패닉에 빠져 운전을 하지 못하는 그녀의 차 뒤에서  클럭션을 울려대는 차에 대고 소리치는 장면은 압권이다.

노인네가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나오는 지
젊은 양아치한테 한 방 맞으면 어쩌려구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이런 반응이 우리 같은 소심한 이들에게 정답같은 선택지일텐데 그는 달랐다.

“너는 차에 초보인적 없냐?”

문신을 한 젊은 남자 둘이 오베 아저씨 기상에 멋지게 제압당하는 장면은 통쾌했다. 고속도로에서  옆차 끼어들기도 못해 직진만하다 엉뚱한 행선지에 두리번 거리며 진땀 빼던 나의 초보 시절도 생각났다. 커다란 트럭의 운전자가 클락션까지 눌러 대는 급 당황한 상황은  ‘뿅’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했던 나의 아찔한 경험과 파르바네가  터뜨린 울움은 어쩌면 동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칠게 젊은이들을 혼내고 운전석
파르바네에게,

“당신은 괜찮은 사람 중에 하나다.“

라고 달래며 운전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배려 해준 모습은 그가 당신 죽은 아내에게 어떤 남편 일지 보여주는 회심의 한 장면같다.

마치 우리 집 남편이 빗자루를 들고 매일 아침  마당 쓰는 소리에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끼며 일상을 시작하는 내 모습처럼 말이다.
빗자루에 쓸리는 소리, 공기 중에 묻어 나는 흙 냄새, 그리고 빗자루 주변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는 두 마리 개들이 만들어 낸 꾸불 꾸불 작은 동선이 경쾌한 아침 일상을 만들어 낸다. 주인공 오베는 뚱뚱이 옆집 아이 지미가  어릴 적 가정 폭력에 시달릴 때 친구 루네와 함께 구해내기도 한다.

얼굴에 화장을 하는 게이 미르사드를  위해
위스키 한잔 먹으며 아버지와 화해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특히 오랫동안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의 경우 더 그렇다.

게이 아들을 용서 하지 못해 집 밖으로 쫓아 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 당한 채 하룻밤 거주할 곳을 찾는 미르사드에게 오베는 기꺼이 잠자리를 제공한다.

내 아이가 이런 경우면 나는 어떻게 할까?
서로를 이해하려 거리를 좁히는 시간이 양쪽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자식의 행복을 부모라고 마움대로 다룰 수 없음을 알기에 그들의 삶을 존중해 주는 것이 먼저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요양원에 끌려갈 뻔한 친구 ‘루네’를  패트릭과 가까운 이웃들이 ’흰색 셔츠를 입은 사람들’과 3명의 건장한 남자 간호사로 부터 구해내기도 한다. 어서 빨리 죽어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가고 싶어하는 오베!
인생 최악의 선택을 하는 중에 이웃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가며 최고의 이웃들을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조금씩 그들의 이웃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간섭하고 간섭 당하면서 말이다. 이웃들이 똘똘뭉쳐 공무원들의 구린점을 찾고  끝까지 이웃 집 ‘루네’를 지켜 내는 모습은 작은 승리 큰 기쁨이다.

오베는 한 방이 있는 상남자다.

옳은 일은 옳기 때문에 해야 한다거나 남자는 행동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남자인 거라는 명언을 날려주는 행동파 상남자다.

오베는 숫자와 수학을 좋아한다. 화학 공장에 다니는 엄마를 7살에 잃었다. 집안을 환하고 아늑하게 해 줄 빛이 사라져 버렸다. 엄마 죽음 이후 세상은 오베에게 흑백의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그의 괴팍함은 어쩌면 모성 부재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들으면서 생각했다. 정직하고 팔 힘 강한 아버지를 그는 16살에 사고로 떠나 보낸다. 오베는 9살 때 아버지와 기차에서 돈이 많이 들어있는 지갑을 주워 유실물 보관소에 맡기고 돌아오면서 정직함의 가치를 배웠다. 가진 것 없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준 참 귀한 유산인 셈이다. 아버지 동료 톰과는 그일 이후로 악연이 되었지만 말이다. 객차 통로에 떨어져 있던 돈을 훔친 톰이 오베에게 도둑 누명을 씌었지만 조사과정에서 오베는 톰이 돈을 훔친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오베의 집이 화재로 홀라당 타 버리고 설상가상으로 집 보험까지 사기꾼에게 다 털려 결국 집을 파는 서류에 서명하고 만다. 그날 오베는 철도회사 탈의실에서 톰과 무리들을 만났고 오베가 샤워 중에 아버지가 물려준 시계를  훔친 톰을 향해 분노의 한방을 휘둘러  때려 눕힌다. 오베의 주먹에 내 마음도 함께 실었다.
얼마나 유쾌•상쾌•통쾌 하던지!
부도덕한 톰을 향해 오베의 한 방은 ‘너, 이 자식 그렇게 살지마!‘ 하는 경고였고 ‘너 , 나 또 건드리면 그 다음은 죽는다.’ 하는 오베식 정의였다. 작가의 이 장면이 없었다면 나는 잠못이루고 뒤척였을 지도 모른다. 너의 책 속 세계관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면서 말이다. 색을 지닌 여인 ‘소냐’ 남자만 셋인 우리집은 조용한 가족 컨셉이다. 세 남자에게 빛을 구석 구석 쏴주느라 영혼이 탈탈 털리는 중이다.  내가 충만하게 채워져 있지 않으면 줄 수 없다. 의기소침한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는 심리학자로, 아플 때 이마라도 짚어주고 입맛 끌어 올리려 애쓰는 간호사, 영양사 컨셉, 싸한 분위기 따뜻하게 데워주는 중재자 역할 등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은 일곱 빛깔 무지개 총 천연색으로 반짝이는 특수 직업군이라 나는 생각한다. 여자에서 엄마라는  터널을 통과하면 주어지는 훈장 같은 거라 생각한다.

손에 쥘 수 있는 것들로만 채워진 남자 오베에게 아내 ‘소냐’는 그런 여인이다. 그와는 취향도 성격도 전혀 달랐지만 서로 지극히 사랑하는 사이다. 삐죽삐죽 모난 정같은 오베를 살살 달구고 설득시켜 선으로 나아가고 이웃들 속으로 들여 보내려 애쓰는 사랑의 여인 소냐!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해 해 주는 세상에 유일한 여인 소냐!
젖은 비누 하나를 두 손으로 꽉쥐고 넘어질 듯 서있는 오베를 향해 유일하게 웃어 주는 여인 소냐!
친구들의 둔탁한 시선을 사랑으로 녹여낸 여인 소냐! 그런 그녀를 오베는 더 이상 만져 볼 수 없다.

오베와 함께 스페인으로 버스 여행을 갔을 때 버스 기사의 음주운전으로 하반신 마비가 되고 뱃속 아이도 잃고 만다. 오베 기억속에 손에 꼽을 만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 산산이 흝어져 흔적조차 가물가물하다.  소냐는 선을 위해 싸웠고 오베는  그런 소냐를 위해 로마 병정처럼 ‘흰색 셔츠를 입은 사람들’과 싸우기 시작한다. “모든 어둠을 쫓아 버리는 것은 빛 줄기 하나면 돼요.”

“사랑은 집과 같다. 처음에는 집이 자기 소유라는 것에 사랑을 하고 세월이 지나 집이 낡으면 불완전해서 사랑한다.“

소냐가 오베와 나눈 두 대화가 내 삶에도 유효하다고 깊이 공감한다. 서로가 낡아서 불완전함을 인정할 때 그 사랑은 농익은 사랑이 되어 많은 이들을 편안하게 친구로 초대할 것이다.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Fredrik Backman)

스웨덴의 칼럼니스트이고 블로그에 연재하던 글을 묶어 작가로 데뷔하게 된 작품이 <오베라는 남자>이다. 개인적으로 스웨덴 사람들의 문화나 생활 방식을 처음 접하다 보니 내가 생각하는 서유럽 생활과 많이 달라 보인다.

복지가 잘 된 국가의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의외로 ‘흰 색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관료들의 이미지는 어느 사회나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젊은 주인공 남녀가 아니어서 좋았다.부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감사했다. 마음 따뜻한 일상에서 파르바네 같은 붙임성 좋은 이가 할아버지 곁에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스웨덴 차 사브와 볼보를 통해 차를 사랑하는 오베의 흑백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내게도 멀지 않은 노년의 모습을 미리 그려 볼 수 있어 그또한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 하는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삶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은데 말이다.

‘꽃’이란 시로 유명한 김 춘수 시인이 수족같은 아내를 잃고 쓴 시 한편을 소개한다.         강우
                
                   김 춘수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김 춘수,<강우>,[거울 속의 천사],민음사,2001- 삶은 수많은 습관으로 이어져 있다. 늘~ 그녀가 거기 그렇게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누군가를 잃게 되면 참 별난 것까지 그리워진다. 돌아 눕는 것 까지도 말이다.

반려자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몰라하는 노 시인의 삶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 하며 무덤가에 꽃을 바치고 넋두리 하는 주인공 오베와 닮았다는 생각은 내 착각일까?

늘 있었던 그녀를 상실한 채  만져 볼 수 없는
그녀의 빛깔을 그리워하는 흑백의 남자 오베!

괴팍하고 지랄맞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과묵하고 정해진 규칙을 철저히 지키며 맡은 일을 철두철미하게  처리하는 상남자 오베!

우리 동네에도 이런 오베 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꼰대라고 멀리만 할 것이 아니라 멋진 이웃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설 자리도 마련해 두면서 뒷담화를 해도 해야하지 않을까?


#오베라는 남자# 해결사#김춘수 <강우>#프래드릭 배크만#스웨덴 #SAAB#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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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kg”
😱
’환상의 몸무게네!‘

일주일을 꼬박 앓고 기운이 생겨 체중계에 올라갔다. 평상시에 보고 싶어도 좀처럼 얻어지지 않는 꿈의 숫자다. !!!

세상은 공평하다. 일주일의 말미를 주며 마치 지끔껏 굳은 나의 낡은 사고 방식, 습관을

‘이래도 안 버릴꺼야, 이래도~‘

하며 종용하는 것 같다.

앓고 있었던 일주일 안에 ‘결혼 기념일’도 끼어 있었다. 선물을 바라지도 않았다. 핸드폰 배경 화면에 각각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 한 편씩을 깔아 상큼한 기분 눈으로 즐기며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을 뿐이다.


CES2023(라스베가스)행사를 다녀온 둘째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남편으로 그리고 나에게로 바톤이 선물처럼 ‘툭’ 넘겨졌다.
각각 일주일 넘는 시간을 오로지 본인과 작은 전투를 하며 보냈었다. 대신 아파줄 수 없으니까! 자신과 self가 민낯으로 만나야만 하는 본능의 시간이었다.


아프다고 하던 일을 안할 수도 없고 가족들 끼니를 거를 수도 없으니 내가 아프면 힘듬이 배가된다. 아픈 몸으로 나도 가족도 돌봐야하니 ’엄마‘라는 타이틀을 안보면 슬쩍 버리고 오고 싶은 심정이 된다.

나라는 사람이
’이거 밖에 안되는 존재인가?‘
한번쯤 묻고 성찰하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동안 달려만 왔으니 좀 쉬어거라는 신호같기도 하다. 가족들이  밥 해주는 이의 건강도 소중함을 알아가는 각성의  시간이기도 하다. 옆에 암환자가 아무리 고통을 호소해도 일 주일 감기 몸살로 앓아 누운 내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지는 모순을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내 몸의 눈, 코, 입이 왜 붙어 있는지 신비 체험을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특히 입맛을   잃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오들 오들 한기를 느끼며 밤새 열로 끙끙 앓다 열먹은 하마가 된 기분이다. 몇 배는 무거워진 코끼리 몸둥아리를 일으켜 가족을 먹이는 임무 완수하고 나니 정작 입맛 떨어진 나를 위해 죽이라도 끓이려하니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나도 누가 해준 따뜻한 밥 먹고 싶다!‘
하루종일 내 이마 짚어 주며

’괜찮아?‘

하며 물어주는 다정한 손길도 느끼고 싶다.
실컷 짜증도 부리며 뒷일 걱정 하지 않는 아이가 되고 싶기도 했다. 현실의 반응은 싸할테지만 말이다.

어디 이런 환자들 응석 다 ~받아주는

“로봇 간호사 없어요?”

하며 외치고 싶다. 만들면 대박 날거라고  장담하면서 말이다.^^



잠이 주는 치유를  몸소 경험했던 시간이었다.
겨울잠 자는 곰 새끼 마냥 자고 자고 또 잤던 것 같다. 밀린잠으로 온몸을 도배하고 나니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잠이 보약이 되어준 시간이었다. 겨울철 모자란 빛을 찾아 나란히 마주 보고 누워 자고 있는 키우는 개 두 마리의 잠 자는 모습속에도 면역력 이라는 치유의 보약이 만들어지고 있으리라.^^




우리집 세 남자의 반응이 흥미롭다.
남편왈,

“물 많이 먹고 쉬어.”

본인이 이겨낸 처방법이다. 다른 사람은 플러스 알파가 더 필요하다는 걸 이제는 알때도 되었겄만… 표현의 부족일까? 중년의 무던함일까? 어째 2%부족한 저 모습은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속에 곁길로 빠져나가는 못된 생각들을 서둘러 칼로 싹뚝 잘라 버린다.

어젯밤 늦은 퇴근을 한 첫째가

“엄마 좀 어때?”

하며 아침 컨디션을 묻는다.
그 별것 아닌 말이 별것처럼 들려
다정함이 새삼 고마워진다. 잘 때 먹을 수 있는 알약을 전해주는 그 손이 이렇게 예뻐 보일수가 없다!

코맹맹이 소리에 눈치 빠른 둘째녀석 자기가 먹고 효과 본 레몬향 품은 티 형식의 감기약 한 박스를 내밀며,

“엄마 이거 티 처럼 마셔.
빈 속이라도 괜찮아.”

슬쩍 포장지를 스캔하다

‘이걸로 될까?’

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물만 먹고 뱃속은 텅 비어 음식 냄새가 구역질 반응으로 나타나 먹는 것 자체가 고역인 시간이었다. 이렇게 텅텅 빈 윗속을 레몬티 감기약으로 반복해서 채우고 나니 느낌상 1mm 앞으로 빠져 나온 느낌이다. 티 형태라 부담없이 마셔대서 그랬을까 의외로 효과 만점이었다.

이렇게 가끔씩 앓는 감기 몸살을 통해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런 기회를 통해 보이기 시작한다. 숨을 쉬고, 먹고, 마시는 단순한 동작에서 시작해 점점 밖으로 나선형 계단을 만들며 나, 가족, 그리고 삶으로 뾰족한 가시 달린 질문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놓치고 산 것, 버려야 할 것, 그래도 꼭 지켜야 할 것 등등 얼마나 고마운 시간인가! 따끔하게 회초리 맞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땅에 고개 쳐박고 있지 말고 주변도 살피라는 벌침 한 방 주시는 소중한 시간 같아서 말이다.

아가들이 아프고 나면 이쁜짓이 늘듯이 이제 나이값하며 철좀 들라고 주셨던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픔도 죽음도 오로지 혼자 맞이하는 시간임을 가볍지 않게 느꼈던 시간이었다.

슬슬  내 몸이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신호
를 보내오기 시작한다.

‘이만하면 살만하다.’ 싶다.

이제 생존모드에서 허세모드로 다시 스위치 바꾸는 시간이 돌아왔다.


                       쉰
            
                           김수열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줄 알았다
설운 서른에 바라본 쉰은
너무 아득하여 누군가
손잡아주지 않으면 못 닿을 줄 알았다
비틀거리며 마흔까지 왔을 때도
쉰은 저만큼 멀었다

술은 여전하였지만
말은 부질없고 괜히 언성만 높았다
술에 잠긴 말은 실종되고
더러는 익사하여 부표처럼 떠다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몇 벗들은 술병과 씨름하다
그만 샅바를 놓고 말았다
팽개치듯 처자식 앞질러 간 벗을 생각하다
은근슬쩍 내가 쓰러뜨린 술병을 헤아렸고
휴지처럼 구겨진 카드 영수증을 아내 몰래 버리면서
다가오는 건강검진 날짜를 손 꼽는다

-김 수열,<쉰>,[생각을 훔치다],삶창,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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