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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안에 물이 들어가면 안되죠.”

피아노의 구도자로 불리우는 백 건우 피아니스트의 말이다.  사십 년의 긴 연주 여행동안 그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장면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닮아가려 하지 않고 독특한 그 만의 감성을 싫어 청중에게 전달하기까지
부단히 노력했던 인고의 세월이 그 말 한마디에 다 담긴것 같아 뭉클했다.

MZ세대에 속하는 <서원미 작가>는 예술을 ‘다른 사람이 아닌 오로지 그 사람만 할 수 있는 작업’이라 정의 내리며 좀 더 솔직해진 ‘나’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말한다.
참 당차다. 그리고 부럽다.
젊은 작가가 몸으로 체득하며 풀어가는 삶의 방식이 어리지만 내 눈에 철든 어른 같아 몸만 어른인 나를

‘너, 지금 잘 사니?’

하며 방향감각 유난히 부족한 나를 한번 더
때리고 간다.

유튜브를 통해 들여다 본 두 예술가의 삶은 다른듯 몹시 닮아 있었다. 비록 세대를 달리하고 영역은 다르지만 ‘자아’를 찾아가는 길 위에 사람들 이라는 공통점이 내 눈에 들어왔다.
경건한 그들의 의식이 아름다워 보였다.

이른 결혼으로 ‘나’를 찾을 겨를도 없이 아이들과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성장이 오랫동안 멈춰있었다.  항상 내 자신에게 빚진듯한 묵직한 마음은 빈 둥지 증후군과 함께 헛헛한 마음으로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

젊은 엄마 시절 왜 성장은 아이들만 시키는 거라 생각했을까? 아이들만 닥달할뿐 텅빈
내 내면을 채워 두질 못해 항상 주변 상황에
휘청거리며 살았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니 부러운 대상 마냥 쫓아가다 가랭이 많이 찢어졌다.

특히 그 피해는 고스란히 큰 아이에게 집중되었고 마음처럼 따라 주지 않아 늘 내 마음속이 덜그럭 거리며 잡음이 많았었다. 내 욕심을 채우려 무리를 하고 아이를 은근 힘들게 한 철부지 젊은 엄마였음을 깊게 반성한다. 그래도 그런 실패의 경험이 나름 다른이의 삶을 이해할 때

‘그럴수도 있지!’

하는 조금은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여유가 내가 얻은 실패의 결과물이다.

이제는 자신이 선택한 길 위에서 본인들의
일상을 자신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잘 ~
감당하고 있는  아이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응원하며 바라볼 뿐이다.

더듬어보면 나의 ‘자아 찾기’ 과정이 이른 결혼 생활과 맞물려 수 없이 충돌했던 시간이었다. 찾지 못한 내 자아를 아이들을 통해 얻고자한 못난 엄마라 잘 참아준 아이들에게 오히려 고마워 하는 중이다.

요즘 나는 변신 중이다.
애써 헛헛한 마음을 다시 추스르고
뒤돌아서면 백지 상태로 변해
좌절감만 안기는 나의 녹슨 뇌에 다시
기름칠 하는 중이다.

가끔 사기가 꺾여

‘이거 뭐하는 짓인가!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대충 살면 안될까?’

하는 마음이 턱밑까지 차오르다가도
지금 하지 않으면 영영 후회할 것 같아 다시 배움을 시작했다. 영원한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등짝 때리며 시험 공부 하라고 빗 자루 들고 쫓아 올 부모님도 다 돌아가셨다. 누구의 압력이 아닌 순수한 내 내면의 갈증을 제대로 채우고 싶어 진짜 나를  찾아가는 인생 공부에 맛들이기 시작했다.

나의 불완전함를 인정하고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나의 장점을 더 키워가다 보면 앞으로 걸어 간 만큼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 있으리라 믿어보면서 말이다.



                      길

                         신경림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거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경림, <길>,[쓰러진 자의 꿈],
창비,1993-


#자아#백건우 피아니스트#서원미 작가#인생공부#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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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른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지난주 IT관련 유튜브 채널에  유명한 모 대학의 교수님이 나오셨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예, 경제적 부 기타 등등 소위 성공한 사람에 속하는 그런 분이셨다. 세상사람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더 낮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셨고 자신의 선택에 만족해 하시는 모습이었다.

그 분이 새로운 비젼을 소개하실 때 그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는 신이 났고, 흥분해 들떠 있었으며, 온 몸의 감각이 살아 움직여 인터뷰 내내 화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보는 나도
의외의 보기 드문 장면에 몰입해서 보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그의 시도에 박수 쳐 주고 싶었다.

그 분의 인터뷰가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그보다 좋을 수 없는 안전 지대를 벗어나자신이 가야할 방향과 속도를 다시 묻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이 여지껏 쌓아 올린 익숙한 환경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둥지를 옮기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도 가족이 있는 중년이 말이다.

소위 높은 곳에 좌표를 두고 올라가기 바쁘고 정상에 안주한 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주변이 썩어 들어가도 못 본척 책임지려 하지 않는 뻔뻔한 엘리트들을 또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
너무 많이 보고 식상해 그 교수의 선택이 밝은 한 줄기 희망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 희망에 싹이 트고 잡다한 것들을 시행착오를 통해 하나씩 하나씩 제거하다보면 열매 맺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 지지 않을까? 그 열매를 본인은 맛보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 한 토막이 있어 소개한다. 주인을 잃은 개가 주인의 담요 위에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누웠다고 한다. 보다 못한 가족은 조련사를 불렀고 그 조련사는 주인의 담요를 가져다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 뒤로 언제 그런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밥도 잘 먹고 잘 자더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가 고수하고 있는 담요 같은  안전 지대가 무엇일까?’

하며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돈, 가족, 명예,학벌…등등 각자 다양한 형태의 ‘담요’들이 있으리라.

내가 경험해 본 삶은 결코 이분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언제나 모호한 회색지대에 뿌연 안개 속 같았다. 잡힐 것 같은데 금새 사라져 버려 서 있는 자리를 헷갈리게 만들고 꼬이게 해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하고 무리를 해서 무조건 뛰어야 할 때가 더 많았다. 멈추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때 해결점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었다.

요즈음 소위 <쓸모 있는 것>으로  불리우는 직종에 종사하는  고급 인력들이  <쓸모 없는 것>으로 무시당한 인문학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허탈해 하거나 인간을 대하는 예의를 갖추지 못해 구설수에 쉼없이 오르 내리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된다. 그들이 자신의 삶의 방향과 속도를 꾸준히 물어 보는 자기 점검의 시간을 무시한다면 그들에게 희망은 없어 보인다. 적어도 그 자리가 국민들을 대표한 자리임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헐렁한 어른#안전지대#속도#방향#쓸모있는 것#쓸모 없는 것#자기 점검#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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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엄마는 늘 아침이 100m달리기다.
정해진 시간 안에 시간를 단축해 남편과 아이들을 챙기다 보면 매 번 우선 순위에서 자동적으로 밀려난다. 식사도 예외가 아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가족들 아침 준비를 하며 조리대 앞에서 간 보며 한 번, 도마 위에 썰면서 한 번 , 그릇에 담아 올리면서 한 번 이런식으로 선채로 아침을 해결할 때가 많다. 그러다보니 식탁에 앉아 다소곳이 먹기보다 후다닥 헤치우는 안 좋은 습관이 생겨 식사하는 즐거움을 매 번 놓치고 만다. 천천히 씹는 즐거움, 여유있게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스마트 폰을 켜고 눈을 화면에 고정 시킨채 엉뚱한 곳에 내 먹는 즐거움을 빼앗기고 만다.

가족들이 있으면 먹일 생각에 몸을 부산스럽게 움직이다가도 정작 혼자 먹는 밥상은 부실해진다. 나를 위한 밥상은 더 단촐해지고 설거지의 부담을 덜고자 잔머리를 굴린다.
40-50대 중년 여성들이 오히려 영영실조 걸리기 쉬운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것 같다.

어릴 적 친정 엄마의 급하게 뚝딱 해치우는 식사법이 어린 내 눈에도 품위없어 보여 싫었었다.

‘왜 저렇게 먹지?’
‘좀~  앉아서 먹지
저게 뭐야.’
‘나는 저렇게 살지 않을거야.’

하며 다짐했었다.

그런데 웬걸!
바쁜 미국 생활은 우아함을 사치롭다며 밀어 내고 그 자리에 나를 생활의 달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이들을 학교 근처에 내려주고 방과후에 다시 데리러 가는 반복되는 일상은 하루를 더 길게 느끼게 해주었다.

이곳 의료체계가 허술하다 보니 예방차원으로 식재료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현지인들의 다양한 식재료를 한국식 입맛에 맞게 슬쩍 슬쩍 바꿔 보기도 하고 아이들 입맛에 맞춰 한국 식재료를 현지인 입맞과 비슷하게 맞춰보기도   했다. 무한 반복의 시행착오의 시간이었다.
가족들의 입맛은 기를 쓰고 노력해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아낸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내 입맛은 항상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내가 정말 무엇을 좋아하는지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식구들 남은 음식을 살짝 변형해서 먹는 방법으로 내 입맛을 그렇게 달랬던 것 같다.

이제는 나를 챙길때도 되었건만 오래 몸에 베인 습관은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가끔 허겁지겁 먹고 있는 뒷 모습이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들킬때면 초라하고 속상해진다. 내가 나를 챙기지 않는데 어느 누가 나를 챙길것인가!
닮지 않으려 했건만 무의식적으로 닮아가는 모습에 돌아가신 친정 엄마의 모습까지  겹쳐 더 서글퍼진다.


                        찬밥
            
                                  문정희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일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훑어
누가 남긴 무 조각에 생선 가시를 훑던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를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문정희,<찬밥>,[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민음사, 2004


#찬밥#식사법#선채로 식사#닮아감#나쁜습관#내 입맛#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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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치다.

초등시절 넓게 느껴지는 운동장에서 어른 자전거를 배우려다 실패했다. 나를 잡아주던 그림자가 없어진 걸 알아채고 불안한 나는 축구 골대로 직진해 볼상스럽게 넘어졌다. 오른쪽 발목 부분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흉터로 남은 그 날 이후로 자전거 타기는 내게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휴일 산책을 나온 이들 틈에 한 무리의 자전거 부대가 지나간다. 라임칼라 형광빛 상의 딱 달라붙은 검정 바이커용 바지에 핼맷을 쓰고 운전자들 사이를 거침없이 지나간다. 경쾌하고 자유로운 그들 모습이 차안에 앉아 있는 나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오히려 그들이 휘청거릴까봐 옆 차선으로 옮겨 천천히 지나간다.

두 바퀴에 몸을 의지한 그들의 몸놀림이 신기할 뿐이다. 투실한 살집의 남성분 몸을 지탱해 주는 두 바퀴의 힘이 사실 더 놀랍다.
그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들 옆을 조심 조심  스쳐가는 내가 얼마나 그들을 시샘하고 있는지 말이다.

어릴적 아빠뒤에 타던 자전거에 든든함이 있었다. 아빠 땀 냄새 맡으며 온전히 의지한 체작은 꼬맹이는 신이 났었다. 젊은 아빠도 수없이 넘어졌을 그 길을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알고 가는 길이 아니라 수 없이 선택해서 가야하는 난감한 길임을  알아채지 못해 더 영웅같은 모습으로 비춰졌는지 모를 일이다.

대학 후배뒤에 타고 가는 자전거에 설레임과 낭만이 있었다. 귀신같이 용돈 타온 날을 알고 저녁을 사달라하고 무슨 마음이었나 나는 거절 못하고 타온 용돈의 절반을 식사 비용으로 내고 후배 이야기를 들어주는 수고까지 해야했었다. 중간 고사 시작하는 3학년 봄학기
불쑥  찾아 온 후배는 자전거를 태워 주겠다며 나를 불러냈고 그렇게 후배 등 뒤에 벗꽃 날리는 알싸한 봄 햇살을 만끽하며 시험 스트레스를 잊고 있었다. 이 감성을 가지고 어디서  마누라랑 잘 살고  있으리라.^^

아이들과 함께한 산책길에서 다리가 아픈 시늉을 했더니 큰 아이가 자기 저전거 뒤에 타라며 눈짓한다. 염치불구하고 어린 아들 뒤에 올라타 강변 산책로를 씽씽 달렸다. 아이취급하던 내 시선이 놀랍고 기특한 마음으로 바뀌는 감동의 순간이기도 했다. 운전대 잡은 큰 아이의 시선을 따라 내 마음도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큰 아이의 자전거 사랑은 대학 4년 내내 이어졌고 자기 차를 갖고 나서야 낡은 자전거는 뒤뜰로 고이 모셔졌다. 이 아이도 알고 있겠지 ! 삶의 균형을 찾기 위해 무수히 넘어지고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전적인 저전거 타기

                                            복효근

넘어져보라 수도 없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르팍에 상채기를 새기며
제대로 넘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하리라
요즘처럼 아주 작은 어린이용 저전거 말고
페달에 잘끝이 닿지도 않는
어버지의 삼천리호 자전거를 훔쳐 타고서
오른쪽으로 넘어질 것 같으면 더욱 오른쪽으로 핸들을 기울여보라
왼쪽으로 넘어질 것  같으면 왼쪽으로 핸들을 더욱 기울여보라
그렇다고 어떻게야 되겠느냐
왼쪽 아니면 오른쪽밖에 없는 이 곤두박질
나라에서 수도 없이 넘어져보라
넘어지는 쪽으로 오히려 핸들을 기울여야 하는 이치를
자전거를 배우다보면 알게 되리라
넘어짐으로 익힌 균형감각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아비들을 이해할 날도 있으리라
그러던 어느 날에 사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네가 아비가 되어 있으리라

#자전거#휴일 자전거 모임#아빠의 자전거# 후배의 자전거#아들의 자전거#넘어짐# 고전적 자전거 타기#균형#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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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아는 지인 분이 다녀가고 한 달 뒤
택배와 함께 사진 한 장이 작은 꾸러미들 속에 섞여왔다.

남편의 20대 후반 사진이었다. 머리 숱도 많고 이목구비 뚜렷한 청년 시절의 남편을 보니
참 ~ 낯설다. 바로 사진 속 그 청년이 태평양 건너 미국이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될 줄 어찌 알았겠나!

어제는 남편의 60세 생일이었다.
옛날 같으면 식구들 불러 큰 잔칫상 차리고 배불리 먹이며 축하해 주었을 텐데… 낯선 땅에 17년 째 살다보니 더 좁아진 인간 관계에 늘 허기를 느낀다.

삼 십년이란 세월은 설레임을 간직하며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연인을
길 위에 어깨동무 하고가는 평범한 동료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도~ 아내 역할은 아직 유효하니까!
새벽녘 일찍 눈을 떠 예쁜 꽃 다발 사진에
심쿵한 캘리그래피 찾아 합성해 남편 카톡에 보내 주었다. 큰 아이는 멀리 있어 빵파레 축하 메세지로 둘째는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 늦은 저녁 귀가를 알리며 립서비스로 한 마디

“아빠 , 생일 축하해!”

하는 건조한 말을 남기고 출근을 서두른다.

남자만 셋인 우리 집 쿨한 생일 아침 풍경이다. 각자 직장생활을 하니 서로의 시간을 맞추기 쉽지 않다. 남편과 운영하는 가게의 폐점시간이 늦다보니 음식점을 가도 그들의 끝나는 시간과 맞물려 환영받지 못한 손님으로 낙인 찍힐 때가 많아 눈치가 보인다. 올해도 그냥 맹숭 맹숭하게 둘이 앉아  닭다리 튀김,오뎅국, 잡채, 그리고 좋아하는 열무 김치와 맥주를 곁들인 생일상  차림으로 입막음 해야할 것 같다. 이혼 부부가 대부분인 이곳에서 ‘30년’이란 숫자는 현지인들에게 “amazing”하다며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이번 달 초에 남편 친구로부터 카톡 사진 7장이 날아들었다. 철인 삼종경기를 치르고 아내와 찍은 사진이었다. 한 컷 한 컷 손으로 넘길 때마다 거친 숨소리와 내면의 투쟁이 느껴지는 것 같아 뭉클했다. 비장함, 자랑스러움, 그리고 승리한 자의 여유가 느껴지는 표정 뒤에 일상을 쪼개어 연습을 해 낸 그 노력에 박수쳐 주고 싶었다.

남편의 댓글은 “큰 일 했네. 존경한다.”였다.
친구 사이에 이런 말이 쉬울까?
그런 댓글을 달아준 남편의 마음 한 켠에
아쉬움, 부러움 등의 마음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친구들 곁에 머물고 있는 남편임을 알기에 왠지 쓸쓸함도 느껴진다.

남편은 한창 시절  마라톤 광신도였다. 경기 열리는 곳 마다 동료들과 우루루 몰려 다니며 죽을만큼 뛰어 완주한 기억을 푸르른 시절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숨을 헐떡이며 들어오고 뒷 풀이로 동료들과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먹고와 마라톤을 왜 하는지 도대체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몸 상할까봐 잔소리도 많이 했었다. 동료들과 함께한 그 시간들이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다 포기하고 가족들을 챙겨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수없이 부대끼고 외로웠으리라!

여보!
잘 ~ 버텨줘서 고마워!!!



                              길

                                    신경림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슨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경림,<길>,[쓰러진 자의 꿈],창비,1993

#사진 한 장#60세 생일#철인삼종경기#마라톤#길#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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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가는 길 !
눈길이 머문 길 위의 사람들 풍경입니다.

내리막길
라임칼러 형광 빛 스포츠 웨어, 검정 바이킹 반 바지 차림의 백인 남성이 신나게 질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옵니다. 자전거 못타는 저에게도 열린 조수석 바람을 타고  경쾌함이 전해집니다.  볼때마다 신기합니다. 두 바퀴가 통통한 삼각형 모양 사람도 잘 버텨주는 걸 보면 말입니다.

좌회전을 하고 직진을 하다 신호등이 걸리네요. 무작정 횡단보도를 건너려하는 불독 한 마리와 안전하게 보도블럭 위로 끌어 올리려는 견주와의 실랑이로 우회전 하려는 차량들이 잠시 기다려 줍니다. 일요일 아침은 개들에게도 바깥바람 여유롭게 쐬며 주인과 룰루랄라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황금시간이지요.
무조건 직진 하려는 걸 보니 활달한 녀석인가 봅니다. 저희 집 개 두 마리도 성향이 정 반대입니다. “Sit”을 외쳐도 그 자리에 주인 말을 듣는 녀석이 있는가하면 튀어 나가려는 녀석도 있으니까요.

두 번째 신호등에 멈춰 섰을 때 주유소 입구로  한 무리의 오토바이족들이 몰려 듭니다.
값비싼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는 아니더라도 나름 성능 최고 오토바이를 끌고 잠시 휴식하는 저들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궁금해 집니다. 가죽 옷에 팔에 문신을 한 사람들이 대부분 이지만 지나가며 보니 젊은이들이 아닌 중년을 훌쩍 넘은 분들이네요.^^
마음은 푸르른 청춘 어느 시절에 머물러 있겠지요. 무탈하게 집으로 귀환하시길 …

세 번째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섰을 때
산책을 나온 운동복 차림인데 쥐고 계신 스마트 폰에 연신 손가락을 눌러대고 있는 걸 보니 누군가에게 메세지를 보내고 있나봅니다.
저렇게 걸으시다 사고 나지 않을까 괜히 걱정이 드네요. 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스마트 폰 으로 인한 길 거리 사고를 막으려 공공 미술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이곳에서도 필요하지 않을까싶네요.

네 번째 신호등을 만났을 때 학교 운동장만한 크기의 캐톨릭 공동 묘지가 보입니다. 항상 이 시간에 알록 달록 꽃을 싣고  히스패닉계 차량이 입구에 기다립니다. 흰 국화 꽃도 보이는 걸 보니 가을이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것  같네요. 그들의 망자를 대하는 모습은 꼭 슬프기만 한 것 같지 않습니다. 살아 생전 망자가 좋아하는 꽃 몇 송이 사들고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서로의 얘기를 나누며 부담없이 즐기는 것 같습니다.

학교 성당 입구 키를 훌쩍 넘은 옥수수대와 해바라기가 반겨주네요. 일주일만에 어쩜 저렇게 쑥쑥 잘 크는지 신기합니다. 다음 주 할로윈이 있어 호박 쇼핑하러 오는 차량들이 농장 안으로 들어가네요.

성당 입구 게이트에서 일찍 나온 경비원이 반갑게 손짓하며 차단기를 올려주네요. 매 주 얼굴이 바뀌는 걸 보면 파트 타임으로 일을 하는 가 봅니다.

이렇게 집을 출발해 다니던 성당까지 오는 길 위에서 많은 이들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제 글감의 조연으로 등장한 그들도 자신의 자리로 돌어가면 주인공의 삶을 살겠지요.이런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볼 수 있어 감사한 일요일 아침 이었네요.❤️

#일요일 아침# 자전거 타는 사람# 개와 견주# 오토바이족# 공동 묘지# 옥수수대# 성당#길 위의 사람들#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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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 희끗 머리에 서리가 온 듯하고 축축 파마가 풀리기 시작하면 버티다 가는 곳이 미장원이다.

공공의 장소지만 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앉아서 서비스를 기다리는 손님의 숫자만큼 각자 살아온 이야기가 다르고 처지가 다르고 연령도 다양하고 인종도 다양하다. 마치 옛날 빨래터에 온 동네 여인들이 식솔들 빨래를 두들기며 왁자지껄 자신들의 사는 이야기를 풀어 놓고 해소하고 쓸만한 정보를 얻어가는 특별한 공간처럼 말이다.

몇 시간을 머리에 롤을 말고 앉아 있다보면 당연히 옆 사람과 간단한 얘기가 오고 가고 마음이 맞는다 싶으면 몸을 좀더 기울여 상대의 이야기를 내가 열심히 듣고 있다는 몸짓을 취한다.

미장원 가운을 골라 입고 민낯의 얼굴을 마주 하고 있으면 모두가 평등해 보인다. 하지만 말을 하기 시작하면 상대의 개성이 여과없이 들어나기 시작한다. 오늘도 파마약 냄새 맡으며 흘러 나오는 노래 소리에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와중에 중년의 여자 손님 목소리가 유난히 맑게 들려왔다. 눈을 떠 그곳을 바라보니 백인 남편과 나란히 앉아있는 까만 단발 머리의 중년 여성이 보였다.

‘영어가 유창한 걸 보니 한인 2세인가?’

잠시후 빈 의자가 있는 내 옆으로 그녀가 왔고
처음 만난 그녀에게 목소리가 너무 좋다며 말을 건넸다. 이렇게 별 뜻없이 시작한 대화는 그녀가 살아온 시간들을 파노라마처럼 짧고 강렬하게 펼쳐 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들은 내용을 짜집기하며 열심히 머리속에 블록쌓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아이들, 자신의 직업, 소신, 요즘하는 일 …등등
고구마에 주렁 주렁 달려 나오는 생각지 않은 굵직한 얘기들이 민낯의 그녀를 다시 한 번 쳐다보게 했다. 적당히 추임새도 넣어가며 그녀의 이야기에 나 역시 몰입해서 들었고 그녀의 굵직한 삶이 남자로 태어 났으면 훨씬 좋았겠다 싶었다.

그녀와의 대화중 인상 깊었던 세 가지는
이것이다.

첫째, “고양이는 호랑이를 절대 키울 수 없다.” 이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 나왔을 때 나는 뒷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다.
자식의 성공을 무기로 나를 증명해 보이고자 했던 어리석은 젊은 엄마 시절의 내 모습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둘 째 ,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의대 공부하는 아이들의 힘듬을 함께 나누고자 50세대 변호사 공부를 시작해 변호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많지만 직접 자식의 힘듬을 공감하겠다며 실천에 옮기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있겠나!

빈 둥지 증후군에 시달리며 헛헛한 중년을 엉뚱한 곳에 쏟는 사람들이 대부분일텐데
고정 관념을 깨고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가는 그녀의 뒷 모습에 어느 자식이 힘들다고 포기하겠는가?

셋 째, 머리를 건강하게 길러 어린 암환자들에게 줄 머리를 도내이션 하신다는 이야기다.

그녀가 건강하게 모발을 잘 관리해 기부한 머리카락이 예쁜 가발이되어 암 환자 아이들에게 보내지고 그 가발을 쓰고 찍은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면 기분이 너무 좋다고 하신다.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훨씬 행복함을 알고 계신 분이셨다. 그녀는 남은 시간을 세상의 주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했다.

짧은 시간 의외의 장소에서 나이를 잘~  살아낸 성숙한 어른 한 명을 만난 기분이 들어
꼼짝없이 앉아 있던 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새로운 길을 내고 열심히 소신을 삶으로 살아낸 사람에게 화려하지 않아도 특별함이 있다.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에게 몸에 베인 태도는 겸손으로 드러난다. 배나 사과 크기의 능력을 가진이들이 앵두 크기로 낮아질 때 더 빛이 나는 것 같다. 자신의 능력을 사회의 낮은 곳으로 환원하고자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에 신앙을 가진 나도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일상에서 결코 만나 볼 수 없는 사람을 미장원이라는 일상의 공간에서 만나 짧지만 강한 인상으로 내 삶에 조연으로 등장한 그 분들께
고맙다는 이야기를 이 글을 통해 해드리고 싶다. 너무 바빠 볼일은 없을테지만…^^


#미장원#목소리#끌림#대화# 고구마 줄기#고양이•호랑이#본보기#가발#암환자#약자##겸손#조연#잘 산 어른#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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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달을 일 년으로 계산한 켈트족의 전통 풍습(10/31),캐톨릭의 모든 성인의 날(11/1)그리고 멕시코의 망자의 날(11/2)이 문화적으로 합쳐진 날이 할로윈이다. 공휴일은 아니지만 상업적 성격을 많이 띄고 있는 날이기도 하다.

산자들은 망자들에게 육신을 빼앗길까봐
기괴한 유령 복장을 하고 ‘’Trick or Treat”을 외치며 집집마다 사탕이나 쵸코렛를 받으러 다닌다.

어제 남편과 개를 데리고 늦은 밤 산책을 나갔다. 드문 드문 할로윈 장식들로 꾸며진 집들이 보여 몇 장 담아 보았다.

미국에서 가장 소비를 많이 하는 날은 크리스마스다. 그 다음이 바로 할로윈(Halloween)이다.약 80억 정도를 소비한다고 하니 엄청나지 않은가!

Modern family<Halloween>season2,6회(6/2/2015)편에 보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이 날을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날은 어른들도 만화의 주인공처럼 약간 유치해도 용인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괴하고,우스꽝 스럽고,귀엽기도하고, 무섭기도하고…등등 원하는 컨셉에 따라 이날 밤은 각자 입은 커스튬 복장의 주인공이 된다.

작년 이 맘때 ‘오징어 게임’테마의 할로윈 파티에서 실제 총격 사건이 일어나 8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지역 라이벌 갱들간의 실랑이가 벌어져 생긴 비극이었다.(11/3/2021/뉴스)
축제의 뒷 끝은 과욕을 담은 누군가의 몹쓸 짓으로 항상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유령이나 괴물 등의 복장을 하고 Jack-o’-lantern(호박 유령얼굴 등불)을 현관문 앞에 내놓은 집들을 돌며 받아 온 설탕, 쵸콜릿은 아이들이 일 년 동안 먹고도 남을 만큼 바구니에 한가득이다. 가끔 못된 어른들이 마리화나가 섞인 유사한 사탕류 젤리등을 주어 모르고 먹은 아이들이 응급실로 향하는 뉴스가 보도 될 때도 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대규모 할로윈 모임은 할 수 없었지만 아이들을 둔 대부분의 가정에서 자녀들이 실망할까봐 재료를 직접 주문해 초코렛이나 과자를 만들어 오히려 ‘Hershey’같은 쵸코렛 회사의 매출이 늘었었다고 전한다. 또한 나갈 수 없으니 집에서
기분이나 내 보자싶어 데코레이션 비용으로 지출도 많았다고 전한다.

본래의 틀에서 벗어나 상업적으로 너무 많이 이용 당하는 느낌이 들어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린 자녀들과 부모가 안전을 지키며 하룻 밤 축제처럼 즐기는 이 행사가 모두에게
의미있는 추억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할로윈#켈트족#케톨릭#망자의 날#호박#사탕#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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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관계가 있다.

힘든 새댁 시절을 우연히 마주보고 살았다.
별 볼일 없는 서로의 민낯을 수시로 대하고 아이들 문제로 고민하면서 활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와 말 수 적고 내향적인 내가 친구라는 폭넓은 울타리로 묶여 20여 년의 시간을 보냈다. 때로 아주 가까이 때로 아주 멀리 공간을 달리하며 드문드문 연락하며 지냈다.
몇 살 위인 그녀가 오히려 자존감 약한 나를 위해 친구가 되어 주었다는 표현이 맞는 말같다.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낼 수 있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집<광휘의 속삭임>(문학과 지성사,2008)

시인의 표현처럼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온다는 말이 그녀에게 어쩌면 찰떡같이 어울리는 표현같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 내가 친구 딸 유학 기간 동안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하며 그녀와의
뜸했던 관계가 다시 이어졌다.

이곳 추수 감사절  연휴에 그녀의 딸이 쉬어 가기도 하고 내가 한국을 가면 그 집에서 며칠 씩 머물기도 하면서 품앗이 생활를 했다.

겉으로 참 ~ 평탄하게 보였던 외관과 달리
그 친구와 딸을 대면하고 그들이 돌아간 자리에 어김없이 내 내면에 파도가 쳤다. 그들 앞에서면 왜이리 작아지는지 나름 열심히 동동거리며 살았는데 왜 별것 아닌 것처럼 내 자신이 하찮게 여겨지던지 성숙하지 못한 내 마음자리가 요란하게 휘청거렸다.

생각의 차이
능력의 차이
습관의 차이
정서의 차이
등등 따져 들어가기 시작하면 공통 분모가 많지 않아 이해 하는 척 했을 뿐 불편함이 찌꺼기가 되어 차곡 차곡 쌓여만 갔다. 차마 꺼내 놓기에 유치하고 담아 두고 있으려니 화가 치밀고 그렇게 무던하게 어줍잖은 착한 아줌마 가면을 오래 쓰고 살았다.

그러던 내가 긴 코로나의 터널을 지나며 그들에게 스트레스 받아하는 내 자신의 내면을 마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No’라고 못하는 내성적 성향
상대를 향한 은근한 질투심
두루 뭉실 예민하지 못했던 감각들
<기생충> 영화의 지하에 살고 있을 법한
눌러 놨던 시컴한 마음 등등
외부로 드러난 나와 진짜 나와의 간극이 너무 커서 마음이 그렇게  파도를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 들였을 때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문제의 원인이 그들이 아닌 나의 못난 내면에 있음을 알고 조금씩 토닥이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비교하는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고
주어진 내 자리를 소중히 여기기 시작했고
나의 장점을 최대한 끌어올릴 방법들을 찾고 일상에서 내 시간을 슬쩍 집어 넣고 균형을 잡으려 몸과 맘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책을 다시 가까이 하기 시작했고 때늦은 이 시간을 가장 적합한 때라 여기며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무식하게 몰입의 시간도 가지며 부족한 이모습도 나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 드렸다. 이렇게 흰 머리 희끗 희끗
중년이 되어 새롭게 찾은 내 정체성에 색깔을 입히니 나름 봐둘만 한 것 같다.

이제는 그들의 방문이 단순히 사람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온다는 말 뜻을 온 몸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스트레스 받으며 끌려가는 내가 아닌 내가 끌고 갈 수 있는 넓은 마음 자리도 한 켠에 마련해 두었다. 그들이 좀더 성숙해져 있다면 우리들의 만남은 껍질이 벗겨진 알맹이의 만남으로 탈 바꿈 할지도 모르겠다.

부서지기도 했을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 줄 수 있는 둥근 마음으로 내 뾰족한 마음의 모서리를 오늘도 갈고 간다.

우리의 묘한 관계도 찐한 우정으로 성숙해지길 바라며말이다.

#방문객#관계#사회적 나#진짜 나#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정체성# 찐 우정# 일상#
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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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강으로 배운 영문 캘리그래피를 연습 중이다. 배운 건 두 달 전인데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다 조금씩 다시 연습하는 중이다.

초보자 주제에 자꾸 작품이란 걸 흉내 내고 싶어 급기야 일을 저질렀다.
월 마트에 가서 종류별로 캔버스 액자를 한 박스어치 사서 차 뒷 트렁크에 집어 넣으며 작가가 된 것 마냥 함박 웃음을 지으며 신나서 돌아왔다. 명목상 자주 못간다는 이유로 왕창 사서 낑낑 거리며 패밀리 룸에 모셔 놓았다.

끄적 끄적 연습이랍시고 하다가 캔버스 천를 마주하니 하얀 여백이 넌즈시 말을 거는 것 같다.
‘너, 그 실력으로 되겠니?
망치면 어쩌지. 이거 비싼데..’

하며 걱정이 먼저와 나를 맞이한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도 한 번 손 맛을 보고 싶은 마음에 써보았다. 그리고 알맞은 그림도 넣어 보았다.



‘흠, 역시 내가 봐도 엉성하다. 재료 도구를
마커 팬, 붓펜, 지그 펜 ,에딩펜 등등 실험삼아 다양하게 써 보았다.

면  백프로 캔버스 천이다. 직접 여러 도구를 이용해 써 본 결과는 내 예상과 많이 어긋나 실수가 많았다. 우선 천 캔버스의 우툴 두툴한 면을 내가 가진 펜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모래 알갱이 느낌의 조직이 붓 끝에 와 닿을 때

‘헉,이건 내가 아는 그 피부가 아닌데…
매끈한 종이 질감 대신 조그만 여드름 올라온 낯이 선 느낌이랄까!’

예를 들면 붓펜은 글씨 굵기는 용이하나 획이 쉽게 뭉개져 폭망했다. 지울 수도 없고 민망해 여백을 그림으로 채웠다.

에딩 펜은 생각보다 발색이 진하지 않아 흐리멍텅한 검정색이 낡은 검정 고무신같다.
붓펜으로 글씨를 덮입혀 봤다. 친구 노트 베껴 쓰기 한 것 마냥 웬지~ 어색하다. 습자지에 그림 베껴본 경험자라면 알것이다.

지그 팬으로 썼을 때 캔버스 천에 쓰는 손 맛이 리듬을 타듯 경쾌했다. 나름 만족스러웠다.

‘아~, 이 천에 이 펜이 딱 이구나!’

나에게 꼭 맞는 구두를 찾은 느낌이다.

시도하지 않았다면 인강 강사가 시키는대로 비싼 재료들만 잔뜩 구입해 놓고 쳐다만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저녁에 식구들 식사 중에 자랑하고픈 마음에

“이 글씨 어때?”

하고 물었다.

남편은 쳐다 보지도 않고 귀찮은 듯

“응, 좋아 좋아~”

아들은

“구조가 어떻네,
밑에 글씨를 빼는 것이 좋겠네,
이것 스펠링이 왜 이래 못 알아 보겠어.”

등등 꼬치꼬치 찌른다.
어쩌면 그리 내 약점을 잘 잡아 내던지…

나도 내 작품 별로 인 것 아는데 가족들의 따뜻한 날 한 마디 대신 지적이 먼저 나오니
기분이 별로네.

‘ 예수님도 자기 고향에서 예언자 취급 못 받았다. 나라고 별 수 있나.’

나의 헛점을 봐주는 아들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하고 마음 돌려 먹으니 편해졌다.

아직 출발선에 있는 내가 결승선의 승자들 맛을 보려는 것도 오버라는 생각이 든다.
잘 해보려 전문가급 고수들의 서체를 검색해 보다 의욕은 고사하고 쓰고 싶은  사기마저 뚝떨어져  버렸다. 그들의 완성품을 보면 지금 내가하는 이 작은 시작이 별 의미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냥 속 편하게 안 보기로했다.

어쩌랴 ~ 부럽지만 저 분들도 올챙이 시절 있어으리라. 저 고급반 글씨체만 피해서 내 글씨체 하나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나? 이렇게 마음 돌려 막으니 내게 평화가 찾아온다.
남과의 무 분별한 비교가 아닌 어제의 나보다 한 뼘 성장하는 것에 무게 중심을 두니 나름 이 서툰 시작도 의미있어 보여 좋았다.
이제는  오래 즐기며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누군가의 삶을 흉내만 내다 가랭이 찢어지기 보다 나답게 오감을 뻗어 순간을 챙기며 살고싶다.

오늘 실컷 써 봤고 그려봤다. 초등 시절로 돌아 간 것 같아 유치하지만 즐거웠다. 이렇게 즐겁게 몰입했 던 적이 언제였나 싶다.모처럼 누구 엄마, 누구 아내라는 타이틀 벗고 내가 나에게 주는 오롯한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을 무엇과 바꾸겠나!
더불어  내 뇌가 쓰는동안 행복했으면 그걸로 족한거지!

          “CARPE DIEM”(현재를 잡아라!)

당분간 캔버스 천에 작품 하겠다는 무모한 땡깡은 이제 덜 부릴 것 같다.
한 번 해 봤으니까!
내 한계를 봤으니까!
연습만이 살길임을 알았으니까!
‘고고 ‘
하는 마음
‘워워’
하며 초심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무모한 시도 #영문 캘리그래피#캔버스 천#도구들#나답게#초심#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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