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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초 짜리 짧은 광고 한 편이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한 아이가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밖에서 물로 배를 채우고 돌아 왔다. 빈 도시락을 가방에 다시 넣으려는데 묵직하다. 열어 보니 반 친구들이 십시일반 채워 넣은 내용물들로 작은 도시락이 가득 찼다.

‘내가 준 거야 .’ 하며 은근 티를 내는 친구들도 보이고 본인 가진 것 다 주고도 친구가 미안해 할까봐 시치미 딱 떼고 앞만 쳐다보며 먹고 있는 옆 짝궁의 모습도 보인다. 능청스럽게 아닌 척 열심히 먹고 있는 그 녀석에게 눈길이 한 번 더 머문다.

‘고녀석 연기가 아카데미 주연상 감이네!’

어쩐지 낯설지 않은 이 풍경이   따뜻한 바람을 몰고와 교실안 온도를 ‘확 ‘올려주는 것 같다. 급식하는 요즘 아이 들에게 이런 풍경이 이해가 갈 지 모르겠다. 이 머뭇거림이 아날로그 감성을 타고 내 머릿 속을 통과해 마음 자리에 오래 머물다 간다.

‘배려’가득한 아이로 성장해 주길 어느 부모인들 바라지 않겠는가? 머리로는 알지만 정작 이렇게 키웠다가 우리 아이만 손해 보고 살 것 같아 현실의 부모는 자꾸 옆집 아이와 비교하며 초조해 한다. 이런 나눔의 자리조차 ‘성공’이란 거창한 이름 아래 별 것 아닌 일로  취급되어 그들만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복효근

어둠이 한기처럼 스며들고
배 속에 붕어 새끼 두어 마리 요동을 칠 때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가는데
먼저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멘  책가방 지퍼가 열렸다며 닫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집 썰렁한 내 방까지
붕어빵 냄새가 따라왔다.

학교에서  받은 우유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종이봉투에
           붕어가 다섯 마리
       내 열여섯 세상에
       가장 따뜻했던 저녁

-복효근,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운동장 편지],창비교육,2016

이 시를 읽고 나면 수채화같은 그림 하나가 내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아 가슴 한켠이  훈훈해 진다. 친구를 살피고 나누고 배려해 준 ‘선재’라는 아이가 내 삶에도 있었나 한 번
더듬어 본다. 아리랑 곡선의 내 삶 어딘가에 이름 모를 ‘선재’같은 이들이 내밀어 준 따뜻한 손을 덥석 잡고 나는 무수히 구덩이에서
다시 일어났으리라!

3주 전 기계치인 내가 디지털 관련 유용한 인터넷 강의가 있어 신청을 했다. 그런데 웬걸 첫 강의 부터 외국어 듣는 것 마냥 익숙지 않은 용어가 발목을 잡았다. 후회가 밀려 왔다. 그래도 다시 힘을내어 두 번 째 강의를 듣는 데 이번엔 절망감이 밀려왔다. 삼 세 번이다. 혹시나 하고 세 번째  강의를 들었다.
역시나…

컴퓨터를 부셔 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까지 이해를 못하는 내 문해력이 한심해서 가슴까지 갑갑해 졌다.

‘이 나이에 뭘 ~ 하겠다고…’

알면 너무 유용할 정보들이 눈 앞에서 손 가락 사이로 다 빠져 나가버리는 것 같아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여기서 그만 두자.
아니야 ~그냥 끝까지 한 번 들어나 봐
아깝잖아. ‘

두 마음이 엎치락 뒤치락 싸우고 있었다.

그냥 다 듣고 후회하기로 했다.
엉덩이 붙이고 열개의 강의를 다 들었다. 아니 모니터에 화면 지나가는 것만 열 개를 본 기분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숨어 있었다. 마지막 편 3분을 남기고 강사가 전해 준 진심어린 위로의 말이 강의 뒷편에 숨겨져 있었다.
마치 보물처럼 말이다.

‘우와 이걸 놓쳤으면 큰 일 날 뻔 했네.’

강의를 어려워 할 나같은 기계치들을 배려해 담아 낸 그 짧은 영상 하나가 다시 천천히 들어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해 준 결정적  계기가 되어 주었다. 상대의 진정성 있는 작은 배려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도 디지털을 소 닭 보듯 쳐다만 보며 영영 해 보려 시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저 포도 시어서 못먹을거야!’

하고 말하는 여우처럼 내 자신을 열심히 합리화 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인간을 향한 공감과 배려는 어쩌면 미래의 휴머노이드 로봇과의 경쟁에서 멋지게 살아 남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배려#빈 도시락#종이 봉지 속 붕어빵#작은 배려# 공감•배려#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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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발톱을  깍아 드린 적이 있는가?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이 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을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 놀이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
     굳은 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셔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이 승하,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깍아드리며,[아픔이 너를 꽃피웠다],문학사상,2018


가장 품위 없어 보이고 성한 것 없어 보이는 발톱을 가물 가물 손 가락에 셀 정도로 몇 번 깎아드린 기억이 내게도 있다.

돌아 가신 친정 엄마는 오랫동안 당뇨를 앓으셨다. 어쩌다 발톱을 깎아 드리면 오른 쪽 네 번째 발가락이 손톱깎이 입을 최대한 벌여도 깍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들려 있었다.
혼자 잘난척 하는 것 마냥 두툼하게 말이다.
당시 혈액 순환이 잘 되지 않아 그랬던 모양이다.

유난히 작은 엄마의 발!
아파도 삐족 구두 신고 멋내고 싶었던
그 조그마한 발!
아프다는 소리 하지 말고 편한 운동화 신고
운동하라며 나도 잘 하지 않는 운동 하라며 싫은 소리 많이 들었던 엄마의 그 발!

나이가 드니 왜이리 더 작아 보이던지!
지 새끼 챙기기 바빠 자주 내려오지도 못하고 동동 거리는 것을 알기에 어쩌다 명절 바쁜 것 피해 내려가면 발톱을 깎아달라 부탁 하셨다.

당시 젊은 엄마인 내가 친정 엄마의
애로사항이 눈에 들어오기나 했겠나?

이곳 미국에서 베트남 여성들이 꽉 잡고 있는 업계가 발 맛사지와 손•발톱 메니큐어 발라주고 손질해 주는 분야다.

가벼운 샌들 차림에 아가씨들이 와서 예쁘게 치장하고 기분내고 간다. 손톱을 무기인냥 길게 늘어 뜨려 카드 단말기 번호 누룰때 에라가 나기도 하고 그런 손톱에 할퀴면 까딱 잘못하면 죽음이다 싶기도 하다.

중년 여인들도 가볍게 즐기는 걸 보면 그들에게 일상이며 문화 같기도 하다. 나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봉숭아 물들이는 일 같으면 몰라도… ^^그리운 얼굴들이 떠올라 더 그런지 모르겠다.

화학적인 냄새가 확 뿜어져 나와 싫다.  음식할 때 묻어 나올 것 같아 찝찝해서 더 싫다. 요즘엔 한 번 해 볼까 싶다가도 손•발톱이 얇아져 하고 싶어도 못한다. 그래서 옆집이 네일 가게 인데도 불구하고 관심도 없고 가본 적이 없다.

이런 내가 다시 관심을 갖게된 계기가 있다.
어느날 차 한 대가 장애인 파킹랏에 멈춰 섰는데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모시고 할아버지가 옆집 네일 가게로 들어가시는 거다.

‘아니, 몸도 물편하신 분이 무슨 네일 가게냐?’

이렇게 삐딱한 시선으로 보다  할아버지까지 들어 가 한참 있다 나오시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으아했다.

‘아니, 할아버지가 저 곳에 무슨 볼일이 있을까?’

눈도 침침하고 손도 떨리는  노 부부가 발톱을 깎아 줄 사람이 없어 손수 운전하고 여기까지 오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아~그랬구나!  나이들면 저런 간단한 일상의 일도 그들에게 버거운 일일 수 있겠구나.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이런 곳을 들락 거려야 하는 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졌다.

발톱을 내 손으로 직접 깎을 수 있는 것도 복이고 나이 더 들어 발톱 깎아 줄 자식이 함께 산다면 더 큰 복일 것 같다. 내 맘대로 되지 않을 걸 알지만 시인의 글처럼 어미의 거친 발톱을 깎아 주려 몸을 둥글게 말고 구부리는 다 큰 자식의 돌봄 또한 받고 싶은 것은 과한 욕심일까?


# 발톱 깎기#네일가게#문화#돌봄#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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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평소때라면 귀찮이즘이 발동해 낯선이가 지쳐 돌아설 때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았었다.

요즘 둘째 아들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UPS나Amazon 택배가 수시로 들락거려 배달 온 물건 확인차 열어 준다.

그날도 초인종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해 택배 인 줄 알고 문을 열었더니 왠 한국인
중년 부부가 인사를 건넨다.
간단하게 서로 인사를 건네고 용건을 물었더니 남자 분이 대뜸 행복에 관해 얘길 하겠다고 하신다.

‘헉, 😱

아침부터 잘못걸렸네.’싶었다.

상대방 얘기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말 꼬리를 자르고 잡상인 취급하듯  인사만
하고 문을 꽝~하고 닫아 버렸다.
닫고 난 문 사이로 여자 분의
“안녕히 계세요.”하는 인사말이 가늘게 바늘 끝이 되어 따끔하다.

그걸로 끝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문제는 문을 닫고 돌아 선 내가 지레 겁먹고
과잉 방어를 한건 아니었나 싶어 마음이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좀더 얘길 들어줄껄 그랬나?’
초면인데 너무 야박하게 굴었나싶었다.
아이처럼 급하게 문을 닫아 버린 미숙한 내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분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 집이 방문하는
첫 집 일텐데 아침부터 소박맞고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쇠로된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위치만 바뀌면 언제라도 그들의 모습이 내 모습이 될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짠한 생각이 들었다.

거절당하고 돌아 선 그들의 하루를 아침부터 내가 망친 건 아닐까싶어 주어진 일을 하다가도 말 풍선이 그려져 집중도가 떨어졌다.
혹시 속상한 마음에 뒤돌아 가며
‘잘먹고 잘 살아라.’하고
욕하고 가진 않았을까?
웬 쓸데없는 오지랖인지 !
거절당한 그 분들보다 오히려 내가 더 찝찝한 하루를 보냈다.

한국에서 살 때 아찔한 경험을 한 적 있다.

아이들이 어릴 적 있었던 일로 기억한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선한 인상의
여자 두 분이 서 계셨다. 별 의심없이 문을 열어 드렸고 집 안으로 들어 온 두 분은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하며 훅 빠지게 했다. 당시 어리석은 젊은 엄마의 가득찬 욕망을  그들은
읽고 있었던 것 같다. 욕심에 눈이 가리워져 있던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싶은 말만 쏙쏙 뽑아 듣고 있었다.

나중에 돈 이야기가 나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아닌데…’
하는 낯선 감정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든 그들을 밖으로 보내야 했고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멀리서 일단  기다리라며 안심 시킨 뒤 은행 가는 척 하며 아파트 주민들 틈에 끼여 줄행랑을 쳤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꽁공 걸어 잠그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 자신이 너무 바보같아 퇴근한 남편에게 말도 꺼내지 못했었다.

묵은 기억 때문인지 둘 씩 짝지어 방문하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보면 방어기제가 먼저 발동 하는 것 같다.

내 내면을 들키고 싶지 않고 내 얼마남지 않은 믿음이 저들 앞에서 흔들리게 될까봐 겁이 나다소 무례하다 싶은 행동을 하는 것 같다.

그 당시 사건으로부터 시간, 공간 , 그리고 나의 처지가 많이 달라져 있음을 안다. 그래도 나의 무의식 어딘가에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젊은 엄마가 자리잡고 있었나보다.

소리없이 가진 것들이 많아져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점점 무거워지는 삶에게 물어 본다?
“너 오늘 괜찮아?”



#방문자#거절#망친 하루#아찔한 경험#괜찮아#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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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곳 뒷편에 community park이 있다.

주중에 대부분 동네 주민들이 애완동물과 함께 산책을 한다. 가끔씩 모형 비행기 날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주말에 이 공간은 사람들과 파킹한 차들로 꽉~찬다.

유소년 축구•야구,여자 축구, 성인축구,미국 독립 기념일(7/4)불꽃 놀이,그리고 코로나 때 차 속에서 가족들과 야외 영화를 보며 거리 두기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공간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난 주말 알록 달록 유니폼입고 제법 선수티 물씬 풍기는 여자 꼬맹이 축구팀 경기가 있었다.

뛰는 선수들 보다 응원하러 온 가족들 숫자가 더 많아 마치 시골 학교 운동회 마냥 시끄럽다.
편안한 옷 차림에 집에서 앉던 접이식 의자 들고 손주•손녀를 응원해 주시는 어르신들 모습이 생기있고 푸근해 보여 참 좋았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부모가 챙기는 모습은 국적 불문하고 비슷한 것 같다. 주로 자원 봉사자의 형태를 띄고 심판 역할을 하거나 아이들 간식을 준비하는 일 등등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은 같아 보인다. 하지만 어르신들이 유치원 부터 시작해 대학교 과정까지 자잘한 행사에 일일이 함께 참여하며 성장 과정을 지켜봐 주고 응원해 주시는 모습들은 내가 교육현장에서 본 가장 아름답고 따뜻한 일로 기억한다.

이 태주 시인에게 외 할머니는 시인의 품성을 심어주셨듯 나의 성장에 친할머니는 든든한 보디가드셨다. 어쩌면 그런 내 마음이 투과되어 노동이 적당히 배제된 이곳 어르신들의 쿨한 모습이 더 눈길이 갔는지 모르겠다.

축구에 진심인 남미 히스패닉 이민자들은 대 가족이 함께 출동해 숫자로 분위기를 압도한다.

이민 초기 그들을 향한 내 시선은  편견 투성이였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해 왜곡된 면이 너무 많았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불살라 버리듯 사는 그들의 삶이 내일에 저당잡혀 오늘을 제대로 즐길 줄 몰랐던 한국계 이민자 내 눈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마치 쾌락 주의와 성취 주의의 대립을 보는 것 같았다.

어느날 저녁 식탁에서 큰 아이가 학교에서 있었 던 일을 얘기 한 적있다.
선생님이 반 아이들을 향해 각자의 꿈을 얘기해 보는 시간 한 히스패닉 학생이 손을 번쩍들고 “맥도날드 매니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라고 말해 반 친구들이 한 바탕 웃었다고 한다. 너무도 솔직하고 현실적인 그의 꿈에 대해
한국 교실이라면,
“그것도 꿈이라고 얘기하냐.”하며 한 대 쥐어 박히고 놀림감이 되었을 지 모르겠다.
듣고 있던 나도 ‘어떻게 그걸 꿈이라고  얘길하지!’하며 그자리에서 웃었다.
‘그러니까 너희들 현실이 그 모양이지.’하며
다소 깔보는 시선을 감춘 채  그렇게 웃고 넘어 갔었다.

그들과의 부딪힘이 많아지고 심지어 도움도 받으며 자세히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똑같은 사람이고 주류인 백인들 눈에
우리들은 모두 비주류 이민자들이란 공통의 이름으로 묶이고 있다는 사실이 내 시선을 좀 더 겸손하게 만들어줬다.

부모 세대는 비록 불법의 형태로 거주할지라도 그들의 자녀들은 히스패닉 커뮤니티를 대변할 꿈나무 정치인들을 키워내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들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한인 커뮤니티가 개 개인의 우수성은 뛰어 나지만 제대로 갖춰진 꿈 나무 정치인을 키워내는 일은 그들보다 많이 뒷쳐져 있는 것 같다.
한 수 아래로 취급했 던 그들에게 어쩌면 한 수 배울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삶의 태도가 가끔씩부럽기도 했다. 앞만 보며  뛰는 삶이 최고이고 당연하다 생각하며 살아 왔는 데 코로나로 강제로 주어진 멈춤의 시간은 틀린 것이 아닌  이제 다른 삶도 찾아 보라며 주변을 보게 해 준 고마운 시간이었다.

앞으로 찐 팬 천 명이면 먹고 사는 데 별 문제가 없을거라한다. 거대 기업들이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무수히 많은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없어질 것이다.

올바른 방향성과 진정성을 가지고 아이를 돌보듯 함께 무럭 무럭 잘 키워가는  커뮤니티!
개개인의 가려워 하는 부분을 놓치지 않고  
섬세한 소통을 잘 ~ 해내는 커뮤니티!
좋은 것만 쏙쏙 골라내 취하고 나몰라라 무책임하게 떠나가는 얌체족이 들어올 수 없는
커뮤니티!
역할 기여와 보상이 공정하고 투명한
커뮤니티!

어쩌면 이런 일련의 노력들이 불가능을 향해 한 발짝 걸어 나가는 막막하고 다소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행동처럼 보여질 때도 있다.
그래도~
그 한 발이 길을 내고 그 길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더 넓은 길을 또 내며 옆 사람과 어깨 동무하며 더 먼 곳 까지 갈 수 있게 하는 한알의 겨자씨가 기꺼이 되어줄 것이다.

#커뮤니티 #커뮤니티 공원##히스패닉 커뮤니티#한인 커뮤니티# 찐팬 커뮤니티#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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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뿌리를 올라가자면 다소 치욕적이지만
‘같은 값이면 여럿 중에서도 모양 좋고 보기 좋은 것을 선택하겠다.’라는 속담이다.

출근길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추었을 때 조수석 창가쪽으로 그림이 그려진 신호등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이 길을 아침 저녁으로 다녔는데 이제야 눈에 들어와 시선이 머문다.

이태주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드문 드문 설치된 이 ‘street box’가 주위 풍경과 어우러져 애완견 데리고 산책 나온 이들 나처럼  운전석에서 바라보는 이들 등등
많은 이들의 눈을 즐겁게한다.

‘예술이 별거야!’

작은  박스라도 자신의 세계관을 담아내면
되는거 아닐까?

이길을 벗어나니 무채색 ‘street box’들이 눈에 들어온다.

‘흠, 2%부족한 걸!’

난 이미 잠깐이나마 길거리 미술관을 드라이브 트루로 봐버려 밋밋한 이 박스가
개성없는 자아처럼 보였다.
무표정하고 맥없는 표정으로 그냥 서 있는 모습이 어쩐지 쓸쓸한 현대인의 모습 같다.

그럼, 나의 하루는 어떤가?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을 나는 어떻게 의미있게 쪼개 쓰고 있는가?

통장 쪼개기는 나의 호주머니 사정을 든든하게 만들어 주지만 다람쥐 쳇 바퀴 도는 나의 오늘 하루는 어디 쯤 잠깐 멈춰 붓을 들고 나의 소중한 하루를 담아 낼 수 있을까?

가족, 인간 관계 , 건강 ,자기 계발,경제 등등
끼워넣기 해야할 목록의 수가 많아 질 수록 질 좋은 삶으로 가야 정상인데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다. 배터리 충전하고 따라 가도 금방 방전되기 일쑤다.

나다운 방법을 찾아 자음 모음 긁적 긁적이며
민 무늬의 표정 없는 삶이 아닌
이왕이면 이쁜 색을 찾고 선을 찾아 붓을 휘갈겨본다. 하루라는 박스에 담길 웃음 보따리도 함께 넣어 무게 중심을 잡아 본다.
#같은 값이면#신호등#무채색#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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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예상치 않은 사건이나 사람을 통해
횡재한 기분이 든 적 있는가?


한창 때 잘 나가는 친구가 부러워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그저 먼 발치에서 까치발을 하고 해바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냥 다 부러웠다.
늦게 와도 존재감 확실했 던 그녀 주변에 늘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동그랗게 둘러 쌓인 사람들 속에 그녀는 우리들만의 스타였다. 그런 내가 철이 들어 시간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저 우러러 보는 높이가 최고가 아닌 깊이와 넓이로 확장되기 시작하며 기나긴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멀리서 주변인으로 서성이던 나를 내 옆구리 가까이 가져다놓고 어설프고 부족한 나를 끌어 안고 다독이기 시작했다. 쭈그려 앉아있던 나를 일으켜 세우며

‘너로서 충분해!’
‘이 모습도 너야. 괜찮아.’

먼 길 돌아온 나를 그렇게 토닥여주고 나니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우연히 드라마를 보다 잠깐 멈칫 한 적이 있었다.

‘어쩜, 저렇게 연기를 잘 하지!’

주인공과 비교해 전혀 주눅들지 않고 능청스레 역할 소화를 해내는 모습이 멋있게 느껴졌다. 그 사람만의 독특함이 전체 분위기를 살려 내고 있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조연 역할에 자신의 독특함을 양념으로 버무려 대체 불가능한 인물로 살려낸 그의 일에 대한 열정에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조연하면 늘상 떠오르는 존재감 없는 모습을 말끔이 지울 수 있게 해준 그의 명품 연기에 엄지 척 해주며 내 안의 편견 하나를 덜어 냈다.싹뚝 싹뚝 잘라낸 그 자리에 라임칼라 입힌 또 다른 희망이 자라나길 고대하면서 말이다.

책을 읽다 스쳐지나가는 인물이 알고보니 책 전체의 무게 중심을 잡아 주는 중심축 역할을 할 때가 있다. 그 때 만난 인물은
‘아하!그렇구나 그런 뜻이었구나!’하며
무릎을 탁치는 깨달음을 준다.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에 보면 사람들에게 강 건너 주는 일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뱃사공 ‘바주데바’라는 인물이 나온다.
강 이편에서 강 저편으로 수 많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단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즐거운 일, 슬픈일, 설렘을 안고 가는 일 때로는 수행자나 현자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며 그는 자신의 일에 마음을 다한다.망원경으로 본 그의 삶은 그저 흔한 주변인일 뿐인데 가까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그는 숨은 현자의 모습을 하고있다.
거들떠 보지 않는 숨은 고수말이다.

우리 삶에도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소리없이 콕콕 박혀 기꺼이 조연역할을 기쁘게 감당하는 이들이 많다. 무대 뒷 편에서 자신의 작은 몫을 큰 몫으로 생각하며 버텨주는 성숙한이들! 그들이 있어 세상이 살만한 것 아닐까?

요즘 우리는 거대 플랫폼에 내가 가진 정보 탈탈 털리고 빈손으로 퇴장하는 중이다.
‘좋아요’ 버튼에 중독되어 불만을 잠재우고 팔로워 숫자로 만족하는 새로운 권력에 취해가고 있다. 그렇게 불안함과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올 세상을 기다리는 중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피라미드 권력형 시대가
저물어 가고 하늘의 촘촘히 박힌 별들의 시대로 옮겨 가고 있다는 얘기다. 반짝 반짝 빛날 수 많은 별들이 자신의 빛을 잃지 않고 제 빛깔을 내며 반짝였으면  좋겠다. 어쩌면 별들이
길 잃지 않게 북두칠성같은 별밤지기가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내 별도 저곳에 빛나고 있겠지?💓



#빛나는 조연#헤르만 헷세#웹3.0#별#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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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이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사춘기 시절 라디오를 통해 수 없이 들었 던 노래 <얼굴>의 가사 일부다. 가늘고 청아한 목소리가 사연을 가진 많은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었다.  보고 싶은 얼굴, 그리움에 사묻힌 얼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 메아리로 돌아오는 얼굴…
노래를 부른 주인공이 ‘윤 연선’ 이란 이름으로 활동 했다는 것을 세월이 한참  흘러서야
알게 되었다.

내게도 보고싶고 미안한 얼굴 하나가
지나간다.
엘리자베스 이모!

이민 초창기 크고 작은 문제들로 골머리 썩고 있을 때 마라톤 전화로 귀찮을 법도 할 텐데 충분히  기다려 주고 들어 주셨 던 유일한 분이셨다. 아이들 문제, 경제적 문제, 그리고 여자로서의 정체성 문제 등등 갈피를 못 잡고 이리 저리 널뛰기 하는 내 감정을 차분히 들어 주시고 바라봐 주신 큰 언니 같은 분이셨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 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별 것 아닌 일로 참 많이 괴롭혀 온 것 같아 민망 하기도 하다.

이모의 개인적인 삶 역시 힘들었 던 시간임을 알기에 더 고맙고 그립다.

지금도 미안하고 나의 이기적인 마음을 용서해 달라 청하고 싶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어느날 일하는 곳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한창 바쁘게 일을 하던 중 걸려 온 전화라 사실 귀찮았다. 전화 번호를 보니 ‘엘리자벹 이모’였다.
‘바쁜데,하필이면…나중에 전화하지 뭘.’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하던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또 나에게 주어진 일상을 사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며칠 후 갑작스런 이모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망치로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 이모가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했구나!’

두 번 째 항암 치료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며 가며 잠깐씩 인사만 주고 받을 뿐 내 발등에 불끄기 바빠 따로 시간을 내어 찾
아 뵙질 못했다. 서투르고 어리석고 이기적인 그때 내 행동은 살면서 두고 두고 후회로 남았다.

더이상 이모에게 받았 던 사랑을 돌려 드릴 수 없음을 안다. 받았던 그 기억을 살려 누군가에게 내리 사랑으로 전달해 줘야 함을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 더 무겁다.

화장기 없이도 풋풋했 던 20대를 지나고
내가 아닌 누구의 아내, 엄마로만 불리우며
남편과 아이들을 챙기느라 자신에게 몹시 야박하게  굴었던 30-40대의 푸석하고
용감 무쌍한 시간을 지나 이제 내 삶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하는 50대 시간으로 들어섰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주저 앉은 주변의 작은 이를 일으켜 세워 함께 갈 수 있는 내공을 키우려 마음 공부 중이다.

혼자서 빨리 가는 삶 보다 함께 멀리 가는 삶을 택하고 싶다. 누가 알아 주지 않아도 내가 알아주면 되지 않겠나!


#얼굴#엘리자벹 이모#후회#함께 가자#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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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에 소리없이 끼어들었을까?

내가 잘나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내가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들렀 던 많은 간이역마다 멈추지 않고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들을 떠올려 본다.

가까이 나의 가족이 있고 공동체의 주변 어르신들도 계시고 친구들이 빈 공간을 채워주고
동료가 내민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내기도 했다.

이 태주 시인에게 외 할머니가 계시다면
나에게 친 할머니가 그 역할을 해 주신 분이시다.

어렴풋한 내 유년의 시간을 지나 결혼을 하기까지 친 할머니는 포근한 쿠션이 되어주신 분이시다. 영아 때 언니를 묻고 3년이 지나 내가 태어 났다. 일찍 혼자되신 친 할머니는 손 귀한 집 손주 태어난 것 마냥  기뻐하셨다고 하신다.

모성이 둘이 될 수 없듯 엄마보다 친 할머니 품에서 더 오랜 시간을 지냈다.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 말싸움이라고 날때면 어김없이 친 할머니 편을 들어 엄마를 서운하게 했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영정 속 잘 생긴 친 할아버지 자리에 날 끼워 넣기 하시며 사셨던 분이시다.

어렸을 적 엄마는 어설픈 내 눈에도 알뜰 살뜰 살림 잘하는 며느리는 아니셨다.선비같이 꼿꼿한 할머니와 나약한 자아를 가진 엄마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했다. 젊은 엄마에게 할머니는 두렵고 무섭기만한 존재였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 와중에 젊은 아빠는 중간자 역할을 제대로 해 주지 못했었다. 오히려 그 애매한 비 무장지대에 내가 서 있었던 것이다.

이웃의 손자•손녀가 학교가는 모습이 부러우셨던 할머니는 준비도 안 된 나를 억지로 1학년으로 밀어 넣으셨다. 방과후 따뜻하게 나를 맞아 준 사람도 할머니셨다. 쪽진 머리 비녀 꽂고 앞 치마 질끈 동여맨 키가 큰~ 할머니!

무슨 이유인 지 알 수 없으나 부모님은 남 동생만 데리고 먼 곳으로 이사를 나가셨다. 나는 그렇게 할머니 곁에 껌딱지처럼 남겨졌다.
가끔 아빠가 돼지고기 몇 근 끊어 둘둘 말아 손에 들고 할머니를 찾아 오셨다. 어김없이 그날 저녁에 맛있는 김치 찌개가 밥상 머리에 올라 왔었다. 그런데 맛있게 잘 먹고 다음날부터 며칠 간 끙끙 앓았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도
아빠를 향한 그리움을 몸이 먼저 알아챘 던 것 같다.

할머니 발길 닿는 곳 마다 영문 모르고 따라 나선 적이 많다. 가까운 마실 나가실 때,
놀러 가실 때 , 친척집 방문 하실 때 등등…
나를 방패삼아 당신의 고단한 삶을 그런 식으로 풀고 사신 것 같다.

먼 곳으로 다닌 고등 학교 시절 그리고 대학 시절까지 할머니는 든든한 나의 보디 가드셨다.내가 휘트니 휴스턴처럼 능력많은 사람도 아닌데 나만의 케빈 코스트너가 되어 주셨다.
이른 결혼으로 그 역할도 마침표를 찍으셨다.

또래보다 애 어른 같은 내 성격도 어쩌면 할머니곁에 머물 던 유년시절에 형성 된 것 같다.겉은 아이인데 어렴풋이나마 사람들의 오고 가는 마음들을 예민하게 느꼈던 것 같다.

답답하실 때 입에 무시던 기다란 곰방대 생각이 난다. 잎 담배 자른 것을 꾹꾹 누루고 불을 부치고 한 잎 길게 들이키면 공기 중에 퍼지던 흰 색의 연기 주머니!
당신의 고단한 삶을 모락 모락 담배 연기에 띄워 보내고 계셨으리라!

할머니의 쪽진 머리가 짧은 컷으로 바뀌던 날
어색해 하시는 모습 속에 낯 선 여인 하나가 내 앞에 떡 버티고 서 계신것 같았다. 그 생경함과 묘한 흥분을 뭘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 할머니도 여자 였구나!’하며
가슴으로 느꼈던 시간이었다.

할머니가 항상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사진한 장이 있다. 동네 어른신들과 봄 맞이 꽃 구경가서 찍은 단체 사진이다. 찐한 연 분홍 철쭉 옆에 대략 10분 정도 되시는 할머니들이 화사한 옷 차림으로 활짝~ 웃고 계신 사진이었다. 키가 크신 할머니는 맨 뒷줄에 서서 이를 드러내며 정말 환하게 웃고 계셨다.

내 남편 내 새끼 챙기느라 발 동동 구르며 앞만 보고 달려가던 어느날 할머니가 나를 보고 싶어 하신다는 전갈을 받았다. 쌀쌀맞고 무심하게 넘긴 내가 할머니를 찾았을 때 이미
정신줄을 놓고 계셨다.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 나는 할머니와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다. 할머니의 체온이 뚝뚝 떨어질 때 마다 내 마음과 멀어지고 계셨다.
한 칸씩 한 칸씩 그렇게 이승의 연을 놓고 계셨다.

배은 망덕하게도 할머니 사랑 독차지하며 자란 나는 받았던 사랑을 온전히 이웃과 나누고 살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렇게 글로라도 할머니를 기억해 드리고 싶었다. 빚진 마음 탕감 받는 기분으로 말이다.

날씨가 선선해지니 할머니가 끓여 주시 던 팥 칼국수 한 그릇 먹고 싶어 진다. 따끈한 온기와 사랑 가득한 눈길이 그리워 그런가 보다.

먼 이국 땅에서 내 머리에도 어느새 희끗 희끗 서리가 앉기 시작했다.

내 안의 내적 자산이 되어 내 유년의 기억을 풍성하게 해 주신 분 친 할머니!
이 글을 끝으로 그분과의  추억을 떠나 보내려 한다. ‘할머니 감사했어요,진심으로…’

# 그림자를 꿰매주는 사람들#친 할머니#곰방대#커트#팥죽#철쭉 #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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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가신 엄마가 장녀이고 아래로 여동생 두 분이 계신다.

어릴 적 방학이면 늘상 찾아간 둘째 이모 집!

큰 집도 아니었고 살림살이가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유독 둘째 이모 집은 오고 가는 사람들로 늘~붐볐다. 맛있는 먹거리와 또래 사촌 동생들이 부족함을 메꾸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어릴 적 ‘이모가 내 엄마 였으면 좋겠다.’하고 못된 상상을 한 적도 있다. 딸의 눈에도 엄마는 살림에 재능이 없으셨다. 반면에 이모는 없는 살림에 알뜰 살뜰 식솔들 잘 ~ 살피고 뚝딱하면 근사한 한 상 차림이 나왔다. 나도 어른이 되면 아이들에게 이모같은 엄마가 되어 주고 싶었다.

결혼 생활을 하고  내 발등에 불끄기 바빠 자주 찾아 뵙지 못했지만 해 마다 이모 집에서 거르지 않고 치르는 행사가 있었다.
바로 김장 담그기다.

엄마 집, 막네 이모, 결혼해 객지 생활하는 자식들, 그리고 본인 먹을 김장을 이모 집에서 한 꺼번에 며칠에 걸쳐 담그는 고된 일정이다.

산 더미 같은 배추가 앞 마당에 높게 쌓이기 시작한다. 이모 지휘아래 품앗이 하는 동네
이웃 몇 몇과 막네 이모가 힘을 보태
배추 숨을 죽이고 물 빼고 젓갈 넣어 양념을  만들고 버무리셔 맛있는 김장 김치를 담근다.
내 눈에 축제처럼 보여졌다. 중 노동하시는 그 분들 몸 상태는 아랑곳 없이 말이다.
상상만으로도 벌써 침이 꼴깍 넘어간다.

미국으로 건너와 영혼이 탈탈 털릴 정도로 정신없이 살다가 10년 만에 남 동생 결혼으로 잠시 한국을 찾았다.  아프신 엄마를 대신해 ‘팥죽’이야기를 했더니 바지런하신 우리 이모는 벌써 가마 솥에 팥 삶고 밀가루로 반죽해 칼국수를 만들어 먼 길 왔으니 먹고 가라며 한 상 차림을 해 주셨다. 당신 딸도 아니고 조카 딸 왔다고 이리 신경을 써 주니 좋으면서도 목이 메였다. 너무 고마워서…

주부들은 알 것이다. 결혼 생활 시작과 함께 내 밥그릇 챙기기 쉽지 않다는 것을
우렁 각시라도 나와 내 대신 세 끼 밥좀 챙겨 줬으면 하는 생각도 자주 했을 것이다. 젊은 나도 이렇게 귀찮아 하는 데 이모는 노년의 몸으로 싫은 내색 하나없이 그렇게 빨간 팥죽을 끓여 주셨다.

몸이 아파 수술하러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수술한 몸으로 지방 병원에 입원한 친정 엄마 를 보러 내려 가야했다. 그때도 아프지 말라며 사주신 ‘생합죽’을 엄마도 나도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 다시 서울로 올라 갈 시간!
고속 철도 매표소까지 따라 오시며 입구를 통과해 걸어가는 내내 이모의 시선이 따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뒤덜아 섰을 때 이모는 그 자리에 그렇게 서서 걸아 들어가는 내 발길과 함께 시선도 따라 오고 있었던 것이다.
목덜미에 전해지는 따끈한 시선이 늦 가을 찬 바람의 으스스함을 날려주고 있었다.

가을 향 솔솔 나는 초입이다.
11월 찬 바람 불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이모집 마당에서 김장 담그기는 또 시작될 것이다.
사랑을 꾹꾹 눌러 담아 멀리 사는 자식들에게
이웃에게 보물처럼 택배에 실어 이모만의 따뜻한 온기를 전해 줄 것이다.
‘이것 먹고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하는 당부의 말과 함께…

나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따뜻한 사람으로 남고싶다.


#둘째 이모#알뜰살뜰# 팥죽#생합죽#김장김치#따뜻한 사람#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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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자신의 진로를 찾아가고 그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지켜 보며 며칠 전 돌이 지난 조카가 떠올랐다.

인생 후반전에 들어선 내게 만약 지금 한 살짜리 조카를 키우라는 미션이 주어지면 잘 키워낼것 같은 엉뚱한 자신감이 들었다. 실수는 최대한 줄이고 아이의 능력은 최대한 높일 수 있는 마이더스의 손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  어설픈 젊은 엄마를 둔 우리 집 두 아들들의 불평섞인 목소리도 함께 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들을 성장시키며 내가 뼈저리게 후회하고 미안해 하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로 아이들이 스스로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지 않았다. 특히 큰 아이에게 심했다. 하던 일이 잘못되면 혹시 그 부분이 부족해 그런건 아닐까? 하며 미안하기도 했다.

당시 젊은 엄마인 내 욕심이 저만치 먼저 앞서고 아이는 출발선에서 할까 말까 고민하며 발도 떼지 못하고 항상 엉거주춤 서 있는 모양새였다.

이웃 엄마의 부추김, 아이를 잘 키워 나의
낮은 자존감을 보상받고 싶었던 미성숙했던 내 마음, 내 아이만 뒤쳐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 등등…이 모든 것들이 범벅이 되어 큰 아이의 어깨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무식하게 얹어졌다. 엄마 노릇  이만하면 잘 하고 있다고 나름 자족하면서 말이다.

둘째, 아이의 발달 상황과 마음 자리를 살피지 못하고 늘 성공한 어느 미래에 촛점을 맞추고 현재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했고 즐기지 못했다.

아이의 잘 하는 면을 더 강화 시켜 줬다면 자신감과 자신의 개성을 더 빨리 찾았을 지 모르겠다. 어릴 적 미술학원을 빠져 나온 아이의 표정을 보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실컷 돈을 주며 아이가 싫어하는 걸 억지로 시키고 있구나!’싶었다. 그당시 나의 분별력도 꽝이었고 아이도 순둥이라  상태는 더 심각했지만 그만 둘 용기는 생기지 안았었다.
아이가 행복해야 할 시간을 나는 돈을 주어가며 빼았은 못된 엄마였던 것이다.

셋 째, 아이만 성장시켰지 아이와 함께 엄마도 공부하며 성장해야 함을 간과하고 살았다는 점이다.

누구의 아내 , 엄마로서의 역할은 열심히 하고 살았지만 단 30분도 나를 위한 시간을 끼워 넣지 못하고 살았었다. 그 결과는 뻔했다.
내 작은 틀에 아이를 낑겨 넣기 바빴고 잘못됨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해결책을 찾으려 고민하려 들지 않았었다.

어설픈 젊은 엄마의 시행착오 쳇 바퀴 안에서 그래도 잘 자라 자신의 몫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요즘은 나 역시 잘 늙어 가기 위해 마음 공부 중이다. 재수없으면 백살? 이라는 농담섞인 진담을 들으며 존재감 잃지 않고 인생 후반전좋은 이웃들과 함께 성장하고 싶다.
밑천 떨어지지 않게 충전 열심히 하며 풍성한 열매로 성숙하게 익어가고 싶다.

#엄마의 반성문# 실패할 기회#아이만 성장#마음 공부#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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