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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 잉글랜드 북부의 요크셔 지역에서 처음 탄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산업혁명 이후 공업도시들이 많이 생겨났던 요크셔에는 일자리를 찾아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주자들이 대거 몰려들기시작했다.그들이 이주하며 함께 데려온 스코틀랜드 출신 여러 테리어들이 현재 요크셔테리어의 조상이다. 당시 쥐 잡기용 개로 이용했다고 한다.

 

 

오랜 기간에 걸친 품종 교배로 점차 소형화됐다. 소형 애완견으로 움직이는 보석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친근한 표현으로 흔히 "요키(Yorkie)"라고도 한다. 각국의 애견 클럽 분류상 토이그룹(가장 작은 견종 분류)에 속하는 작고 귀여운 종으로 같은 토이 그룹에 속한 견종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작고 예쁘고, 똑똑하고, 아름다운 털 등 많은 장점 덕에 오랜 시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왔다. 20세기 중후반에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뛰어난 외모로 인기가 높지만,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 훈련이 어렵고 잘 짖는 편이다. 몸은 작아도 원래 사냥개 출신이기 때문이다. 개체별로 차이는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 특성이라 단언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보편적으로 타 견종 대비 지능이 좋은 편이고 털이 적게 빠진다는 점, 그리고 초소형견으로 매우 작고 매우 예쁜 털색을 가졌다는 점이다.

 

 

 

단모로 미용한 성견/나무위키

 

 

 

당시 요크세에는 면직과 양모를 가공하는 섬유 공장들과 탄광이 많았는데, 이들 공장과 탄광에서의 가장 큰 골칫덩이는 쥐였다. 근로환경과 근로자들의 위생이 위협받았기에 이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마침 스코들랜드 출신 노동자들이 고향에서 함께 데려왔던 소형 테리어 여러 종이 쥐 사냥에 적합해 이들을 교배하던 끝에 현재의 요크셔테리어가 탄생했다. 방직기계 틈 사이와 좁고 어두운 탄광의 갱도 안에서 빠르고 날랜 쥐를 잡으려면 예민하고 작고 빠른 소형견이 적합했는데, 작지만 매우 재빠르며 후각이 예민하고 덩치 큰 쥐가 반격해도 전혀 겁먹지 않는 요크셔테리어가 쥐 사냥꾼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페이즐리 테리어(Paisley Terrier)

스카이 테리어(Skye Terrier)

에어데일 테리어(Airedale Terrier), 말티즈 등

 

이들 중 가장 직접적이고 가까운 조상은 페이즐리 테리어로 보고 있으나 현재는 멸종된 상태다.

 

 

 

1850년대  요크셔에서 태어난 올드크랩(Old Crab,수컷), 키티(Kitty, 암컷),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암컷 1마리에서 시작되었다. 웨스트 요크셔에서 태어난 이 3마리 개들로부터 현재 요크셔테리어와 흡사한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이 몇 차례 더 교배한 끝에 현재의 요크셔테리어가 되었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mgRcG6Z5kBY

 

 

 

 

요크셔 테리어의 품종적 특성(키와 몸무게, 털의 빛깔 등)을 완성하고 그 특성을 확산시킨 개체로 현재의 모든 요크셔테리어들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개는 허더즈필드 벤(Huddersfield Ben)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수캐다. 웨스트 요크셔의 브래드포드에서 1865년 태어난 벤은 페이즐리 테리어 혈통을 받은 믹스견이었다. 모견인 레이디가 바로 올드크랩과 키티의 증증손녀였다고 한다.

 

 

 

현대의 요크셔 테리어와 같은 사랑스러운 모습을 한 벤을 보고 소유주 M.A포스터 부부가 도그쇼에 출품시켰다. 이 대회에 2위를 차지하고 수정궁에서 열린 도그 쇼에서도 우승(1870),1871년 2위를 기록하는 등 출전하는 도그 쇼마다 상위권 수상을 휩쓸며 요크셔테리어라는 품종이 알려지는 데 큰 몫을 차지했다. 벤이 살았던 도시 허더즈필드의 축구팀 허더즈필드 타운은 '테리어스'라는 애칭이 있고 엠블럼 상단에도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를 그려 놓았다.

 

 

당시 영국의 귀족과 부유층 사이에서 액세서리로 개를 기르는 것이 유행이었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쥐잡이용 개였던 서민용 개 요크셔 테리어가 도그 쇼에서 맹활약 하는 덕택에 점차 유명해져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영국 최고의 인기견이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 영국에서 최고의 인기견이라 하면 단연 요크셔테리어라고 할 수 있다. 자국 내의 보급 이후 요크셔테리어는 1887년 미국에 첫 소개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나 영국의 식민지에도 보급되면서 세계적인 견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주인과 함께 배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일부 요크셔테리어들은 그곳에서 현재의 오스트레일리안아 실키 테리어의 조상이 되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RtBEdQDnAs

 

 

 

20-23cm (키)

3.2kg(몸무게)

13-14년(수명) , 정성과 사랑으로 돌보면 20년도 가능하다고 한다. 

 

요크셔 테리어는 테리어 중에서도 가장 작은 견종으로 수컷 성견이라도 '와 정말 작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앙증맞은 개다. 

 

 

요크셔 테리어의 상징이자  최대의 매력인 털은 자견일 때는 등 부분은 짙은 검은색, 사지와 배 쪽은 약간의 짙은 금색이지만 성견으로 자라면서 서서히 색이 바뀐다. 등의 대부분을 덮는 검은 털은 부분이 검푸른 색깔에서 짙은 회색, 연한 회색으로 개의 연령에 따라 변화하고, 아래쪽의 짙은 금색 털도 점점 밝아지면서 아주 멋스러운 황금빛 갈색이 된다.무려 7번의 털의 변화를 일으킨다고 하니 놀랍지 않은가!

 

 

'표정으로 말하는 개'라는 별명이 있는데, 눈빛만 봐도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눈빛으로 감정을 아주 잘 표현하는 매력적인 견종이다. 이목구비가 얼굴을 오밀조밀하게 채웠는데 입 주변 털을 살려 이발하면 귀여움의 극치에 달한다. 

 

 

한시도 주인 곁을 떠나려 하지 않고 주인의 행동이나 말에 잘 반응한다. 무엇보다 요키는 거의 대부분 매우 깔끔을 떤다. 자신이 싸 놓은 대변을 건드리거나 심지어 먹어보는 개들도 흔한데, 요키는 대변을 보는 중에도 혹시나 자신 몸에 닿기라도 할까 요리조리 피해 가며 볼 일을 보기도 하며, 소변을 밟거나 하는 일도 없다. 배변 패드를 주인이 제때 치워주지 않으면 더러운 배변패드를 피하고 근처에 볼 일을 보고 주인에게 치워달라고 짖는 경우가 흔하다. 고양이 느낌 받을 수 있다.

 

 

성견/나무위키

 

 

 

전반적으로 까칠하고 애교많고 깔끔 떠는 요조숙녀 느낌이지만 태생이 사냥개라 활발하고 성깔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큰 개한테도 겁 없이 잘 덤빈다. 원래 쥐를 잡던 개이기 때문에 소형동물인 기니피그나 다람쥐나 햄스터 같은 동물을 근처에 두면 안 된다. 한 입감이 될 수도 있고 원치않는 비극이 자고 나면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하길 권한다. 

 

 

 

고양이에 가까운 느낌일 때도 많고, 애교도 식구 모두 보다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관심을 주는 경향이 많다. 가족들 중에도 NO.1 주인이라 생각하는 사람과 그 이외의 가족에 대한 차별대우가 있다. 예를 들어 다른 가족한테 무릎 위에 않아 있거나 기대 있거나 하는 식으로 붙어 있다가도 서열 1위의 가족이 외출해다가 돌아오면 바로 서열 1위 가족에게서 데려오려고 하면 으르렁대며 손도 못 대게끔 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 판단으로 집에 오는 손님도 차별대우 한다.  아파트나 작은 빌라에서 기르기 가장 적합한 종이기도 하다. 헛짖음이 적은 편이지만 주인 외의 낯선 사람을 보면 미친듯이 짖기 때문에, 손님이 방문할 예정이라면 다른 방에 격리하는 것이 현명하다.

 

 

 

요크셔테리어의 건강은 다른 테리어들에 비해서 상당히 강하다. 하지만 워낙 인위적인 교배과정을 걸친 견종이라서 선천적으로 심장과 뼈가 상당히 약한 편에 속한다. 그래서 소형견이 잘 걸리는 슬개골 탈골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집안에는 매트를 깔아줘서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해주면 좋다. 침대나 소파와 같은 곳에 반려견용 계단을 설치해서 뛰지 못하게 해주는 것도 방법이다. 집에서는 공 던지기와 같은 속도를 내는 놀이는 자제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주인이 반갑다고 두 발로 서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못하게 몸을 확 하고 돌리시는 방법을 쓰거나 훈련을 해주시는 게 좋다. 그리고 요크셔테리어는 심장 판막증이 심해진다면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호흡기 질환이나 지루성 피부염 또한 저혈당증과 같은 질병에 걸리기 쉬워서 주기적인 산책은 물론이고 1년에 한 번 정도는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리더 성격이 강한 개이니 상전으로 모시고 살고 싶지 않으면  어릴 때 훈련 잘 시키셔서 행복한 견주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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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추수감사절 기간 동안 북미 1위 를 차지한  애니메이션 이 하나 있습니다. 작품 <코코, 2017>입니다. 멕시코 마을에 사는 소년 미겔이  '죽은 자들의 세상'에 들어가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작품 속에   눈에 띄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딱 봐도 갈매기 눈썹의 프리다 칼로(Fida Kahlo,1907-1954)입니다.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사진출처:경향신문

 

 

 

 

평생 남편의 바람기와 사고 휴유증으로 고통스러웠던 아내 프리다와 남편 디에고는 멕시코 화폐에 실릴 정도로 유명인사이기도 합니다. 화폐는 그 자체로 '작품'이자 '역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폐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위인이 실리기도 하고, 그 나라의 문화유산이 실리기도 하기 때문이지요.아마도 한 지폐에 그것도 부부가 함께 들어가 있는데 앞뒤로 갈라선 경우는 전 세계에 이 지폐 뿐일 겁니다. 멕시코의 500페소 지폐입니다. 한국 돈으로 약 35,000원에 해당하고요. 멕시코의 물가로 계산해도 꽤 고액의 화폐단위에 해당합니다. 멕시코의 독립운동가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가 그려진 1000페소 지폐도 있지만 유독 위조지폐가  많아 실제로 유통되는 500페소의 지폐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두 번이나 결혼한 부부였음에도 지폐의 앞면과 뒷면으로 서로 '갈라서' 있습니다.  모든 여성들의 공공의 적같은 존재가 앞면을 차지하고 있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입니다. 그가 멕시코에 미친 영향은  '국가의 영혼'을 작품으로 그려냈다는 점입니다. 

 

 

멕시코는 유럽의 지배에서 1910년 멕시코 혁명의 시작 이후 1920년대까지 극심한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1921년 유럽에서 돌아온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모든 계층이 이해하는 그림'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벽화로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민중의 삶과 민족의 역사적 상징을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이는 멕시코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큰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을 현재는 '멕시코 벽화운동'이라고 합니다. 

 

 

 

아내인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의 반대쪽인 뒷면에 있습니다. 멕시코보다는 멕시코 바깥에서 멕시코의 영향을 더 크게 미친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는 그녀의 작품에 대해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에게 "우리는 절대 그녀처럼 얼굴을 그릴 수 없을 것이네." 라는 말을 할 정도로 당대 초현실주의 작가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의 유명세를 얻은 것은 그녀가 죽은 지 약 20년이 지나서였습니다. 1970년대 미국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었을까?>를 통해 페미니즘 운동의  아이콘으로  부상하면서입니다.

 

 

 

 

내 그림들은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혁명적인 것은 아니다.
왜 내 그림이 호전적이기를 기대하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림이 내 삶을 완성했다.
내 그림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그녀는 멕시코의 코요아칸에서 태어났습니다. 멕시코 원주민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프리다'라는 이름으로 불려졌지요. 그녀의 아버지인  기예르모가  붙인 것으로  독일어로 평화를 뜻한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삶은 평생 평화롭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사진작가였던 아버지 기예르모는 무뚝뚝했지만 총명한 칼로를 유난히 아끼고 북돋아줬습니다. 어린 칼로를 철학, 고고학,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로 말이지요. 칼로는 사진기를 다루는 법도 배우고, 아버지를 도와 수정 작업 등도 관여했는데, 이는 사실적이고 세밀한 칼로의 초상화에 대한 접근법에 밑거름이 되기도 했습니다.

 

 

 

1913년 6살 척추성 소아마비로 9달간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가느다란 오른쪽 다리를 가리려 양말 여러 켤레를 겹겹이 신어야 했고요. 오른쪽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긴치마의 멕시코 의상을 입곤 했지요. 프리다는 멕시코 독일계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후 1922년 멕시코 국립 예비 학교에 입학합니다. 입학시험에 합격했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 기예르모로 당시 전통은 가장 똑똑한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없던 기예르모는 좌절된 학자의 꿈을 이루고자 프리다에게 희망을 걸었던 거지요. 프리다는 의과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5년 과정을 등록합니다. 멕시코 시티 중앙에 위치했던 국립 예비 학교는 당시 멕시코 최고의 교육 기관이자 멕시코 혁명 이후 행동주의, 개혁주의 등 뜨거운 열정의  중심부였습니다. 당시 진보적인 교육부 장관이었던 호세 바스콘 셀로스의 정책 덕에 그 해 여학생 입학이 처음으로 허용되어 프리다가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교생 2000명 중 여학생 35명이었다니 대단하지요. 멕시코 최고의 수재들이자 장차 멕시코의 주역이 될 아이들이 동급생이었으니 말입니다.

 

 

 

 

 

 

<부서진 기둥>,1944/나무위키

 

 

 

1925년 9월 17일 , 당시 남자친구였던 알레한드로와 함께 본가인 코요아칸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큰 사고가 났습니다. 척추 세 군데가 산산조각 났고요. 쇄골과 갈비뼈도 부러졌습니다. 골반뼈와 어깨뼈 탈골, 오른쪽 다리에 열한 군데 골절을 입었습니다. 이 정도면 몸이 산산이 부서질 정도로 치명상이었다는 말이지요. 가장 심각한 부상은 쇠로 만든 난간 끝부분이 그녀의 복부를 관통해 생식기를 뚫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합니다. 고통스럽고요. 출혈이 너무 심해 온몸이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버스를 탔던 사람이 들고 있던 도자기 항아리가 깨지면서 그 안에 든 금가루가 칼로의 온몸을 뒤덮었습니다. 마치 사고 이후의 계속될 그녀의 심각한 고통을 예언하듯이 말입니다. 프리다의 부모님은 아마도 마른하늘의 날벼락같은 소식이었겠지요. 쇠 난간이 뚫고 들어간 복부, 피, 금가루, 당구공, 시끄러운 구급차 사이렌 소리는 모조리 프라다 칼로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외과 전문의 들은 마치 프리다의 몸을 콜라주 작품처럼  다시 붙여야 했습니다. 살아난 것만도 기적이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가 직잡 그린 디에고와 본인 / 나무위키

 

 

 

 

국립학교에 다닐 당시 프리다는 벽화 작업을 하고 있던 디에고를 만났습니다. 남편 디에고는 당시 젊고 당돌한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고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성과 몸집이 모두 산과 같았던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림 속 그와 그녀의 모습이 마치  아버지와 딸 같지 않은가요? 그녀는 어린 나이에 죽음이 늘 가까이 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만성통증과 상실감을 실제로 겪어내야 했고요. 놀림받고 멸시당하고 부정당하는 상황도 수시로 겪어야 했습니다. 결혼 후  디에고와 여러 작품 활동을 했지만 디에고의 여성 편력으로 2차례의 이혼과 재결합을 하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프리다는 그녀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또 다른 사고'라고 말할 정도로 말입니다. 진통제 없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던 프리다에게 남편의 그칠 줄 모르는 바람기는 심리적인 좌절감을 안겨주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타인이 정해주는 대로 사는 삶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삶에 책임을 지려합니다.

 

 

 

 

나는 죽지 않았어요.
살고 싶었고
깁스를 하고 누워 있는 것이
끔찍하게 지루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그러지 않았어요.

- 영화 프리다 중에서-

 

 

 

 

<Henry Ford Hospital>,1932/Frida Kahlo Virtual Exhibition

 

 

 

프리다 칼로는 전문적인 미술수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진사인 아버지로부터 배운 사실적인 수법과 판화공방에서 습득한 묘사력 등이 전부였지요. 그래도 프리다의 초기 작품은 동시대의 미술경향에 대한 지식들을 결합시킨 모습입니다.

 

 

 

과거에 겪었던 교통사고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해서 그녀는 평생 아이를 원했지만 모두 유산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침대 위쪽에 매달아준 거울을 올려다보면서 회복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서 슬퍼하는 딸을 위해 사진가였던 아버지는 침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특수이젤을 제작해 주었고요. 그림 작업은 프리다에게 구원 같았죠. 프리다가 그린 자화상 들은 개인적인 삶,  가톨릭 교리, 그리고 멕시코 토착문화에 대한 이해 등이 모두 통합된 것이었습니다.

 

 

 

 

프리다의 그림들은 크기는 작지만 그녀 자신의 자전적 주제를 다루는 측면으로 볼 때 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현실 세계와 상상 속 세계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의미로 그녀의 삶 자체가 곧 예술이었죠. 그림 속 그녀는 틀에서 벗어나 꽃들이 온몸을 에워싸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신체적인 결함과 망가진 생식력을 숨겼습니다. 화려한 컬러의 옷도 보호막이 되어주었고요. 특히 그녀는 오른쪽 신발의 굽을 더 길게 그렸다고 해요. 문자 그대로 균형을 잃은 채 살아가는 느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멕시코의 벽화 화가이자 여성 편력으로  유명한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 대외적인 화가로써의 인지도를 쌓기 시작합니다. 끊임없는 리베라의 외도와 계속되는 유산으로  심리적 고통은 나날이 심해져 갔고 프리다는 심적인 고통이 커갈 때마다 그림에 매달렸습니다. 표현할 수 있는  매체가 없었다면 프리다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면적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해 내는 능력이 뛰어나서인지 점차 디에고의 그늘 아래서 벗어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1934년  미국의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더 큰 악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동생이 관계를 맺어 배신감과 좌절로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할 지경에 이릅니다.  맞은 곳 또 때려 실신 직전입니다. 그러나 프리다는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작품에 올인하는 방법으로 망가진 마음을 다독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1936년 이후 프리다의 작품은 기법에서도 풍부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녀 삶에서 일어난 믿지 못할  사건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직관과 세밀한 통찰력을 발휘해  더욱 세련된 기교를  드러냅니다.

 

 

 

 

1938년 프리다는 초현실주의  거장인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게 됩니다. 브르통은 멕시코를 초현실주의가 구체화된 곳이라 보았고, 더불어 프리다를 초현실주의자로 높이  평가해 주었습니다. 그해 11월 뉴욕의 쥴리앙 레비(Julien  Levy)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그때 화랑 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전위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다루는 화랑은 더 적었기 때문에 프리다의 전시회는 중요한 문화적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첫 개인전에서 프리다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언론의 주목도 받게 됩니다. 경제공황이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전시된 총 25점 중 반이나 팔려 나갔다고 합니다. 전시장을 방문한 사람 중 상당수가 화가에게 새 작품을 위로했을 정도로 말이죠.

 

 

 

 

<What the Water Gave Me>,1938/ wikipedia

 

 

 

1939년 프리다는 처음으로 뉴욕과 파리에서 국제 전시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브르통의 제안을 받아 파리 피에르 콜르(PierreColle)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어 피카소, 칸딘스키 등으로부터 격찬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참 유행하고 있는 초현실실 주의 모임에 동참하면서 그녀의 작품들은 더욱 강한 초현실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The Two Fridas>,1939/wikipedia

 

 

 

<두 명의 프리다>는 리베라와 결별한 후 3개월 만에 완성한 그림입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이 프리다의 이중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으로 그녀 안에 내재된 두 가지면, 즉 유럽인인 동시에 멕시코 토착인이며, 무덤덤한 동시에 과격하고 상심한 동시에 분노를 터트리는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는 점이 그렇게 보이나 봅니다.  그녀는 두 가지 측면 모두 자신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프리다의 카멜레온과 같은 면을 받아들이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우리 안에도 얼마나 다른 내가 존재합니까!  칼로 잘게 분석하고 샆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다중성을 모두 포함한 모습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습니다. 

 

 

 

1940년 멕시코에서 열린 대규모의 <초현실주의 국제 전시회>에 [두 명의 프리다(The Two Fridas,1939)]와 [상처 입은 탁자(The Wounded table,1940)]를 출품하여 더욱 명성을 날렸습니다. 남미의 화가로서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영예도 안았고요. 그 이후 주요 단체의 전시회에 많은 작품을 출품하면서 예술가로서의 프리다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그녀는 라 에스메랄다 공립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이후 10년 동안 재직하게 됩니다.

 

 

 

 

1946년 계속되는 건강악화로 뉴욕에 필립 박사와 윌슨 박사에게 척추접합수술을 받게 됩니다. 프리다는 다시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작업도 하루에 몇 시간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고요. 이런 육체적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작품 활동 외에도 정치 활동에도 적극 참여합니다.

 

 

 

1950년대 프리다는 여러 차례의 수술을 또 받아야 했습니다. 오른발이 썩어 들어가 발가락 절단 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 영국 병원에서 받은 골수이식수술은 세균감염으로 재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힘이 허락하는 한 그림을 계속 그렸지만, 육체의 붕괴는 어쩔 수 없이 그림에 흔적을 남겨 산만하고 거칠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뒤로 정물화를 주로 그리게 됩니다. 거의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계속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고통에 시달렸기 때문이죠. 이 시기의 정물화의 소재들은 집 정원에서 따거나 현지 시장에서 사다가 프리다의 옆 테이블에 놓아둔 것들이죠. 빨강, 노랑, 초록 등 최소한의 색채를 사용하고 있으며, 형태의 윤곽선도 배경에 흡수되고 표면자체도 거칠어집니다. 이런 과일의 깃발이나 평화의 비둘기, 문구 등을 곁들여 작품에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1953년 프리다는 멕시코에서의 첫 개인전을 열 기회를 얻게 됩니다. 전시장소는 프리다의 친구 롤라 알바레스의 소유로 멕시코 시티에 위치한 '갈레리아 데 아르테 콘템포라네오(현대 미술 갤러리)'이고요. 역사적인 개막식 날, 프리다의 병세는 너무 악화되어 지인들은 상의 끝에 카사 아술의 침대를 갤러리에 옮겨 프리다의 그림들 사이에 놓기로 합니다. 

 

 

 

 

 

 

<Viva la Vida, Watermelons>,1954/ google Arts& Culture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일기 중-

 

 

사망하기 8일 전 수박들의 단면을 통해 자기 인생의 고통스러웠던 면을 승화시킨 'Viva la Vida"라는 그림입니다. 프리다는 다채로운 모양으로 잘라 놓은 수박을 그려 자신의 삶을 묘사했습니다. 그녀는 풍랑 치듯 힘들었던 지나온 시간을 부드러운 수박 속 살에 'Viva La Vida>'인생이여 만세'란 말로 예찬합니다. 짧은 인생 그러나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다 간 그녀의 인생을 응원하는 말 같습니다. 무척 담대하고, 사랑에 대담했으며 , 자신의 인생 자체도 고통 스러울텐데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모습이 우리가 그녀를 주목하는 이유 같습니다. 자신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향해 프리다는 본인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어진 현실 안에서 창조하며 살라고 마지막 한 마디를 건네는 것 같습니다.

 

 

이혼 후에도 여러 작품을 그리면서 활동을 열심히 했으며, 재결합 후 여러 작품을 남기고 공산주의 활동에 나서다 폐렴의 재발로 인해 1954년 7월 13일 사망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PAdUv90AxI

 

 

 

오늘날 프리다 유골은 고대 멕시코  공예품 단지에 담겨 가장 편안했던 마음의 고향인 코요아칸의 파란 집 '카사 아술'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1958년 '프리다 박물관'으로 새 단장하여 개관되었고요.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초고가를 기록하는 그림은 남편 디에고의 작품이 아니라 아내 프리다 칼로의 작품입니다. 살아생전 바람기로 속 썩이던 남편을 작품으로 한 방 먹인 것 같아  '셈통이다' 싶기도 합니다. 죽음이 늘 주변에 낮게 갈리워졌던 그녀의 고단한 삶을 살펴보며 우리는 그녀에 비해 가진 것이 참 많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녀만큼 치열하게 사는 것 같지 않고요.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프리다 칼로를 향해 엄지 척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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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숑 프리제는 프랑스, 벨기에에서 유래된 견종으로 이름은 '곱슬거리는 털'이라는  프랑스어의 어원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특유의 복실복슬한 털이 한 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입니다.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듯한 느낌이  솜사탕 같기도 하고요. 눈사람 같은 인상으로 검정 콩알이 콕콕콕 3개 박혀있는 것 같습니다. 비숑의 경우 머리 모양을 주로 커다란 원형으로 미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견주들은 보기 좋은데 비숑은 힘들어한데요. 비숑을 키우고 있는 주인들은 이 머리 모양을 '하이바'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털은 풍성하지만 다른 견종에 비해 털 빠짐이 적습니다. 털 색깔은 하얀색이 절대다수이나 살구색, 미색 등도 있고요. 생긴 모양새가  곱슬곱슬한 탓에 푸들과 닮았고, 어릴 땐 몰티즈와 흡사합니다.

 

 

 

처음부터 가정견으로 개량되었기 때문에 수렵견보다는 1500년대부터 프랑스 귀부인들의 반려견으로 많이 사랑받은 견종입니다. 유럽 귀부인들이 풍성한 비숑의 털에 향수를 뿌려 안고 다녔다고 합니다. 순하고 훈련 효과도 좋으며 독립적이라 집에 혼자 두어도 헛짖음이 적은 편입니다. 잔병치레도 적고 수명도 길어 현대적인 의미에서 반려견에 적합하지요. 성격도 좋아 치유견이나 맹인 안내견으로 사육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소형견이라 실내 활동에 더욱 잘 어울리기에 리트리버종의 맹인 안내견보다 잘 보이지 않고요.

 

 

 

 

비숑 프리제/나무위키

 

 

몸무게 5-8kg

키 23-31cm

 

 

활발하고 명랑하여 고양이와 앵무새 와도 잘 지낼 만큼 성격이 좋습니다. 가끔  명랑함이 지나쳐 자신들의 내면 에너지를 발산할 때가 있는데 비숑 견주들은 다른 견주들이 그러하듯 이를 '비숑타임'이라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푸들이 우당탕 하듯이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산책 중에 다른 개를 만나면 특유의 친화력으로 반갑다고 상대 견공 주변을 좋아라 뛰어다닌다네요. 주변에 너무 호기심과 관심이 많고 주의가 산만해서, 주인의 지시와 교류에 집중해서 특정 행동이나 반응을 하도록 훈련시키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을 너무 좋아해 집을 지키는 반려견을 찾는 다면 빵점입니다. 

 

 

 

 

원체 곱슬거리는 털인지라 털 빠짐은 많지 않지만, 모질이 가늘어 미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연히  다른 견종보다 미용비가 많이 드는 편이지요. 견주들이 직접 생활용 컷으로 적당히 대칭 맞춰 잘라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가기가 얼마나 귀찮겠어요. 사진 속 모양새를 만드는 미용실 샵 자체가 극히 적다고 합니다. 성견은 하루에 한 번 정도 맘먹고 해 줘야 털이 엉키지 않습니다. 비숑 프리제 미용은 푸들과 다르게 상당히 익히기 어려운 고급 기술이기 때문에 애견 미용 강사도 수년이 걸려 익혀야 할 정도로 까다롭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i1_nDQ3pCo

 

 

 

일본과 외국에서 한동안 인기 절정이다가 지나친 활발함, 미용비, 소형견으로서는 조금 큰 사이즈로 인해 20위권 밖으로 벗어난 지 오래입니다.  2010년대 몰티즈 또는 흰색 푸들과의 교배로 태어난 개들이 상당히 많아 주의를 요하기도 하고요. 보통 말티즈와 비숑을 교배시켜 미니 비숑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곤 하는 데 이 견종은 원산지인 프랑스에서 존재하지 않습는다.

 

 

순종을 고르기 위한 방법으로 

1. 두 눈과 코가 정확히 역 정삼각형이다.

2. 코가 눈보다 훨씬 크다.

3. 꼬리가 등으로 동그랗게 말려 올라가야 한다.

4. 귀는 항상 덮여 있고 눈 높이 조금 위에서 상단이 위치한다.

5. 털 색은 약간의 연한 살구색과 회색 이외에는 순백이어야 한다.

 

 

 

 

제법  건치인 데다 어릴 적엔 씹는 걸 퍽 좋아합니다. 씹고 질겅질겅 하거나 딱딱한 것을 좋아하니 장난감 뼈다귀나 씹을 것을 주는 것이 가장 적합하고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싼 구두나 신발들이 테러를 당하기 쉽거든요. 또 가족이 없고 집에 홀로 남겨졌을 때, 음식을 꺼내와 곳곳에 자기 방석 또는 자신만 아는 곳에 숨기는 것 또한 취미 겸 특징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f_A_cnwwvk

 

 

 

 

 

푸들과 혼동되는 경우가 많아 양쪽을 비교해 보면,

비숑은 일단 키에 비해서 다리가 짧고 덩치와 머리가 커보인다.

2. 코가 눈에 비해 확연히 크다.

3. 털이 산양털 같이 꼬여있되 그 느낌이 심하지 않다.

4. 꼬리는 거의 등에 붙듯이 정가운데 척추라인을 따라 올라가 있다.

 

 

반대로 푸들의 경우

1. 주둥이가 길다.

2. 털색이 색채를 띠고 있다.

3. 머리가 작고 다리가 길어 전체적으로 늘씬하고 키에 비해 몸이 가는 호리호리한 느낌이다.

4. 꼬리가 많이 짧다. (어릴 때 꼬리를 잘랐을 경우)

 

 

 

 

 

https://www.youtube.com/watch?v=1hZKeSU-0qc

 

 

 

 

비숑 프리제는 건강한 견종이지만, 유전병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소형견에게서 많이 발생하는 슬개골 탈구를 주의해야 합니다. 피부병, 고관절 이형성증, 백내장, 그리고 방광 결석을 조심해야 합니다. 밝은 색의 털 특히 하얀색 털을 가진 견종에게 흔히 발생하는 문제로 유루증에 의한 눈물 자국이 있습니다. 유루증은 눈물이 흘러넘치는 현상으로 털의 색깔이 적갈색으로 변색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원인으로 눈물이 안쪽으로  흘러내리는 누관이 막혀 바깥쪽으로 넘쳐흐르는  경우 발생합니다. 또한  음식 알레르기, 감염, 털관리 문제 등이 있습니다.

 

 

 

누관이 막힌 경우 병원에서 수술을 통해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음식 알레르기는 특정 사료나 음식으로 인한 경우이므로 알레르기의 원인이 되는 음식이나 사료를 찾아내면 됩니다. 눈 주위가 붉어지거나 분비물이 나오고 부어오른다면 감염 증상일 수 있으니 수의사와 상당하고 진료 후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또 얼굴 주변에 반곱슬의 털이 자라면서 안구를 찔러 눈물이 많이 흘러내릴 수 있으니, 눈 주변의 털을 짧게 관리해 주어야 합니다. 눈물이 나올 때마다 젖은 천으로 닦아주거나 눈물 얼룩 제거제와 용액을 이용해 눈물 자국으로 인한 변색을 줄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기적인 건강 검진,  수의사와의 상담으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내고 해결하는 방법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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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는 22-27cm,

체중은 4-7kg 사이,

주둥이는 짧고 눈이 굉장히 크다.

장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털은 잘 안 빠지는 편이다.

태어난 지 약 3개월이면 얼굴 주위에 난 털이 국화처럼 피어난다고 해서 국화개라는 별명이 있다.

 

 

 

시츄, 나무위키

 

 

작은 몸집에 사랑스러운 외모를 자랑하는 귀염둥이 시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본디 중국 개다. 중국 황실을 위해 티베트의 라사압소를 들여와 페키니즈와 교배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낸 견종이라는 게 일반적인 설이다. 서태후가  키우던 애견으로 더 유명하다. 중국이 공화국으로 바뀐 1912년 서양으로 전파되었고 1931년 영국에 최초로 전해졌다고 한다. 사자개, 작은 사자 등의 별명을 가질 정도로 라이언 독의  외모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순하고 애정이 넘쳐 반려견으로 매력이 큰 개다. 

 

 

 

좋은 품종은 아름답고 긴 황금색의 가까운 갈색과 흰색 털이 나 있다. 다른 견종과 다르게 시추는 정해진 색이 없다. 다만 이마의 하얀 털 면적이 넓으면  넓을 수록 좋은 유전자를 많이 이어받았다는 말이 있다. 일반화시키긴 어렵지만 모색이 진한 시추가 덩치가 크고 좀 더 활발한 경향이 있다. 가장 많이 보이는 골드앤 화이트 쪽이 좀 더 체구가 작고 고양이 못지않게 얌전하다. 

 

 

 

 

다른 견종에 비해 시추만의 독특한 성격과 특성이 강하다. 대중적인 견종 중에서 가장 공격성이 낮으며, 가장 덜 짖는 견종으로 알려져 있다. 성격적인 장점 이외에도 장모종치고 털이 잘 안 빠진다. 푸들처럼 전혀 안 빠지는 수준은 아니지만 푸들 같은 별종을 제외하면 장모종 중에서 털 빠짐이 매우 적은 편이다. 시추는 개의 탈을 쓰고 있지만 보통의 개들과는 다른 별종의 동물에 가까우며, 가장에서 키우기에 시추만큼 좋은 견종도 없다.

 

 

 

 

하지만 단점도 만만치않다. 시추는 키우는 숫자 대비 가장 많이 유기되는 견종으로 알려져 있다. 고집이 황소고집이라 훈련이 매우 힘든 것으로 악명이 높다. 눈치는 굉장히 빠르지만 기본적인 손, 앉아, 배변훈련 등이 어렵다.  심한 경우 식분증까지 나타난다. 자기가 눈 똥을 먹는다는 말이다. 식분증이 모든 견종에서 일어날 수 있지만 시추에게서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며 웬만해서 고쳐지지도 않는다.  시추 자체가 원래 습성을 고치기가 어려운 견종이기도 하고 해서 많은 견주들이 그냥 포기하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 사료와 간식을 충분히 공급하는 방법으로 치료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번 식분증이 생긴 개들은 이 본능을 고치기가 무척 어렵고 평생 고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원인으로 특유의 겁이 많은 성격과 식탐, 그리고 주인에 대한 복수심을 꼽는다. 야생 시절 자신의 똥을 먹어 자신의 체취를 지우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주로 어린 강아지 시절 새로운 가정에 입양된 직후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데 너무 어릴때 어미와 떨어져 불안감을 느끼고 낯선 환경에 위협을 느껴 자신의 체취를 숨기려고 하는 행동이다. 견주는 입양된 시추가 견주를 당연히 주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라 착각하지만 어린 강아지의 경우 어미와 생이별당하고 납치당해 애견센터나 동물병원에서 감금 상태로 오랫동안 있다가 다시 생면부지의 해당 견주에게 오게 된 것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겁이 많은 시추는 이런 낯선 환경에서 새 주인 역시 다를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경계할 수밖에 없다. 이 겁 많은 개가 끝까지 주인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 못하고 무조건 야단치는 경우 시추는 주인을 더 경계하게 되고 식분증과 배변 문제가 고쳐지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집안에 혼자 자라는 경우보다 다견 가정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먼저 있던 개보다 새로 들어오게 된 새끼 강아지에게 훨씬 더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다른 개들과 경쟁 관계로 인한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에 대한 복수로 평소 불만 있는 주인을 향해 일부러 주인이 싫어하는 짓을 하는 것이다. 시추의 경우 비만견이더라도 사료를 줄이지 말고 운동량 증가를 유도하는 것이 좋다. 사료를 줄였다가 식분증이 더 악화되기 십상이다. 대변을 바로바로 치워주면 좋고, 그 외에 과일이나 파인애플을 조금씩 주거나 꾸준히 변비에 좋은 플레인 요플레를 먹이는 것도 효과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Z0fO7PLY9M

 

 

 

 

 

 

시츄의 평균 수명은 약 10-16년 정도로 건강한 편이지만 안구 질환, 유루증, 외이염, 귓병(쳐진 귀)등을 신경 쓰는 것이 좋다고 한다. 또한 소형견이기에 슬개골 탈구 등을 주의 하는 것이 좋고 식탐이 강해 과체중이 나비만을 관리하는 것이 좋다. 눈이 돌출되어 망막 분리 등 안구 질환에 주의하는 것이 좋고 눈 주변 털 관리, 눈물 관리 등에도 신경 쓰는 것이 좋다. 단두종 특유의 문제점을 관리하는  것이 좋고 여름철 온도, 습도 관리를 통해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도 건강한 반려동물 가족이 되는 방법이다.

 

 

 

시츄를 포함해 대부분의 단두종은 자연발생 종이기 보다 인위적으로 개량된 경우가 많다. 상부기도의 해부학적 결함이 생겨 건강상의 문제가 자주 발생하는 품종이기도 하다.  얼굴이 눌리도록 근친교배되며 호흡곤란, 유전질환이 생긴 품종이 많아 더 많은 사랑과 관리를 해주면 좋겠다. 

 

 

 

 

가장  크게 나타나는 문제는 호흡기 관련 질환이고, 부정 교합, 안검 내반증, 자연 분만의 어려움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어 건강상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코가 납작해 호흡 수가 많고 체온이 오르기 쉬운 외형을가지고 있어 개구 호흡을 하는 경우가 많고 과한 호흡으로 심장에 부담이 가는 경우도 많다. 또한 비루관이 짧아 눈물이 많고 눈물 자국이 많이 생겨 자주 닦아주는 것이 좋다. 가쁜 호흡으로 심장에 부담이 되고 체온이 올라 열사병에 취약하다. 더운 날은 집안에서 놀아주길 권장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rpesmXAswLs

 

 

 

 

느긋하고 낙천적이지만 자존심 강해서 명령조롤 가르치기보다는 칭찬으로 잘 가르치시고 혼자 있는 외로움도 잘 참아내는 편이라 맞벌이 부부가 키우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을겁니다. 매일 털을 손질해 줘야 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털이 잘 안 빠지는 편이라 부담스럽지 않은 테고요. 잘 익히고 준비하셔서  매력적인 시츄 키워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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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더 이상 종교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졸지에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로운 시장을 발견해야 했지요. 결국 자신들의 특별한 솜씨를 보여주는 전문화의 길로 나서게 됩니다. 작품의 주제를 어느 한 부분으로 한정해서 의도적으로 개발한 그림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풍속화입니다. 그 당시 풍속을 다룬 이런 그림을 뭐라 칭해야 할지 명칭이 따로 없었습니다. 한 때 장르화라 부르기도 했고요.

 

 

네덜란드와 벨기에/ 위키백과

 

16세기 플랑드르(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 최고의 풍속화가는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입니다. 자손들이 다 화가였고 이름도 같은 인물도 있기 때문에 이 화가의 이름 뒤에는 통상적으로 the Elder를 붙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별로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고 작품 수도 그다지 많지 않지만,  볼 수록 관심과 흥미가 더 커지는 화가이기도 합니다.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1558/ 위키피디아

 

 

깃털, 밀랍을 이용해 날개를 만들고 하늘을 날개 된 이카루스와 그의 아버지 타이달로스 이야기 아시죠? 이카루스는 태양가까이 가면 밀랍이 녹아서 떨어지고 말테니 조심하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합니다. 결국 너무 가까이 갔다가 바다로 추락해 버리지요.  대부분의 작가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이카루스의 모습을 그린 것에 반해 브르겔은 오른쪽 구석에 이미 떨어져 발만 달랑거리는  추락한 이카루스를 그려놓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조연급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주인공처럼 등장합니다. 마치 첫 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농부와 양치기 그리고 낚시꾼이 더 주인공처럼 보이는 그림입니다. 헛된 꿈을 찾아 헤매지 말라는 브르헬의 충고일까요? 아니면 당시 플랑드르 농민들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걱정할 여유조차 없었던 걸까요? 발만 대롱거리는 이카루스를 구해 줄 생각도 없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으니 말입니다. 

 

 

 

 

 

<네덜란드의 속담>,1559/위키피디아

 

 

 

 

100개이상의 네덜란드 속담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플랑드르 주민들의 일상을 통해 당시 유행하는 속담들을 그림 속에 표현해 놓았어요.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며 몇 가지 살펴봅니다.

서로 코 잡아끌기 =서로 속고 속인다는 뜻입니다.(2층 창문쪽)

달을 향해 소변보기=불가능한 일을 한다는 뜻이고요.(2층, 초승달 그려진 곳)

악마도 베개에 묶을 수 있다=집요하면 무슨 짓이 든 할 수 있다.(왼쪽 아래, 붉은 옷 여인)

암퇘지가 통 마개를 뽑는다=서투른 일은 결국 대가를 치른다(왼쪽 드럼통 근처 암퇘지)

돌담에 머리박기=안 되는 일을 무모하게 밀어붙이다(왼쪽 칼 들고 머리 박도 있는 남자)

여우와 두루미가 서로 대접한다=사기꾼이 서로 사기당한다(강가 코너의 두루미와 여우)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는 어렸을 적 동화로도 본 듯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본질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놀이>,1560,빈 미술사 박물관/위키피디아

 

 

 

아이들이 장난감이 없던 시절 어떻게 놀았는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아이들이 엄청 많죠. 그림 속에 이렇게 많은 등장인물이 들어있는 건 처음 봅니다. 세어보면 아이들이 250명 정도 된다고 해요. 16세기 플랑드르 지역 아이들은 뭘 하고 놀았는지 한 번 볼까요? 굴렁쇠를 돌리는 아이도 보이고 , 말뚝박기, 공기놀이, 팽이치기, 꼬리잡기 , 드럼통 타기 등 놀이의 가짓수도 가지가지입니다. 어린 꼬마들이 있는 집이라면 같이 찾아보고 얘기를 해도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질 것 같아요. 21세기 아이들보다 건강하게 노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더 창의적으로 노는 것 같고요.  한국 김홍도 풍속화 속 아이들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브뤼겔은  기록적인  풍속화의 의미도 있지만 어린아이처럼 쓸데없는 시간에 낭비하는 어른들에게 충고하는 의미의 그림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죽음의 승리>,1562,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위키피디아

 

 

종교화를 그릴 때 브뤼겔은 단순히 종교화만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정치적 사회적 특징을 그림 속에 잘 녹여냈답니다. 당시 유행했 던 흑사병을 주제로 그렸다는 전문가들 의견이 있습니다. 플랑드르 지방이  스페인과 종교 전쟁을 벌였고 독립 전쟁의 성격을 띠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종교적인 갈등 때문에 죽었거든요. 해골군대를 스페인 군대로 풍자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본인이 플랑드르 사람이니 스페인에게 악 감정이 당연히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페인 왕에게 이 그림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면 하늘에서도 억울할 듯합니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플랑드르 지역을 지배했을 때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에서 가져왔으니까요.

 

 

 

 

오른쪽 윗부분, 수레바퀴 처형대와 교수대에 시체가 방치되어 까마귀의 먹잇감이 되고 있고, 여전히 누군가의 목을 치는 해골이 보입니다. 희생자는 헛되이 기도하고 있고요. 나무등걸 속으로 숨으려 했던 누군가는 그러나 어김없이 발각되어 등에 창이 꼽혀 있습니다. 도망치던 남자는 붙잡혀서 절벽 아래로 거꾸로 끌어당겨지고 있고요. 꿈에 나타날 까 걱정도 되는 그림이네요.

 

 

왼쪽 위에는 죽음의 종을 치는 해골 둘이 보이고, 곁에서는 다른 해골 둘이 매장된 관에서 해골을 꺼내고 있습니다. 본래 마을의 성채 역할을 하는 건물인데 거꾸로 죽음의 전사들을 찍어내는 공장이 되어버렸네요. 개들은 인간을 공격하고 수중 생물도 올라와서 저주를 토해내고 있습니다. 와,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걸까? 게임 캐릭터로도 손상이 없을 듯싶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공황상태에서 여기저기 쓰러지고, 아마도 생전에 경건한 사람들이었을 토가를 입은 해골들은 이 끔찍한 장면을 바라보며 마지막 회개를 촉구하는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최후의 보루였던 성벽이 뚫리고 죽음의 전사들이 큰 낫을 휘두르고 있다. 귀신이 된 듯한 붉은말을 타고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몰아붙이고 있다. 미쳐버린 말은 사람을 가차 없이 발굽으로 밟는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과 아직 숨이 붙은 사람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다.  해골들의 무리에  쓸려오고, 그 기세에 밀려 사람들은 넘어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뒤로 떠밀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향해 호소해 보지만 듣는 이는 없고 해골들의 조롱만 뒤따른다. 그 틈에 한 신사의 겉옷 단추를 푸르는 해골의 바쁜 손동작도 보인다. 그들은 컨테이너 박스와 같은 감옥으로 속절없이 몰려 들어가는데, 연결된 감옥 문을 신이 난 해골들이 힘껏 당겨 열고 있다. 그들의 생명 하나하나는 돈으로 환산되어 쌓이고, 압도적인 숫자의 해골군대는 관짝을 방팻삼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몇몇 기사와 무사들이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으나 그들에게 희망은 없어 보인다. 이미 바닥에 쓰러져서 한쪽 팔에 쥔 부러진 칼로 방어를 해보지만 거대한 낫에 금방이라도 희생당할 것 같다. 그 와중에, 방금 전까지 신나는 파티 현장이었던 곳은 함께 놀고 있던 친구들이 사실은 이미 죽은 해골이었음이 밝혀지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박판과 주사위 놀음판이 엎어지는 순간이 묘사된다. 그 틈에 식탁 밑으로  도망치는 광대와, 술을 부어버리는 해골, 그리고 방금까지 먹던 맛있는 음식이 사실은 해골이었음이 드러나자 경악한다.  그리고 죽음이 코앞에 와서 이미 자신들과 함께 놀고 있었음을 아직 까지도 알아치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도 함께 보인다. 팬데믹을 거치며 느꼈던 감정들도 어쩌면 비슷한 면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1550년-1850년 사이, 북반구에 이례적인 혹한이 지속됩니다. 소위 '소빙하기'라고 불리는 그즈음 현실적인 묘사를 통해 보기만 해도 냉기가 느껴지는 겨울 풍경화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겨울풍경>,1565/위키피디아

 

 

 오른쪽 그림에 새 덫이 보이나요. 새들에게  위기의 순간입니다. 반면  왼쪽 사람들은 여유롭게 동계스포츠를 한껏 즐기는 장면입니다.  그리스 신화나 종교화만 그리다가 사람들의 풍속을 다룬 이런 그림에 대한 명칭이 따로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익숙한 종교화를 보다 일상의 그림을 보고 "이게 무슨 장르야" 하고 물었다는 거지요. 피터 브뤼겔이 1세대 설경 풍경화가인 셈이죠. 종교개혁의 영향도 한몫했습니다. 

 

 

 

날짜와 서명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피터 브뤼겔의 그림 원작은 대부분 그의 아들들에 의해 복제됩니다. 실제로 대다수 그림이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요.  중세말에서  르네상스 초기 시절 플랑드르 모습을 현장에서 본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그림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골프, 컬링, 스케이트... 등 북유럽 네덜란드가 동계스포츠 강국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 그림을 통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눈 속에 파묻힌 황량한 대지 위에 앙상한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고, 마을을 관통하는 운하를 따라 줄지어 선 건물들 또한 희 눈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두꺼운 회색 구름 뒤로 태양은 자취를 감췄고, 날아가던 새마저 얼어붙은 듯 차가운 대기에는 조금의 온기도 없습니다. 이처럼 세세한 디테일을 전달하면서도 마치 높은 언덕 위에 서서 까마득히 먼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것 같은 조망을 만들어 내는 것이 브뤼겔 그림의 특징입니다.

 

 

 

 

 

<눈 속의 사냥꾼>,1565,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위키피디아

 

 

 

이 그림은 원근법을 많이 생략해 세련돼 보입니다. 평면적이라 화이트와 블랙 대비가 명확하게 떨어져 현대미술 같은 느낌도 들고요. 까만 강아지와 나뭇가지는 검정에 가까운 진한 색으로 표현했습니다. 설경의 눈은 화이트로 표현해 대비시켰고요. 개인적으로 일러스트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사냥꾼들이 마을로 돌아가는 장면이네요. 어깨에 작은 토끼 한 마리가 전부이고요.  분위기를 사냥을 망친 모양입니다.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으니 말이죠. 사냥꾼 앞에 작은 토끼 발자국 보이시나요. 아마도 잡아던 토끼가 도망갔나 봅니다. 저 깨알 같은 디테일이 플랑드르 지역 화가들의 특징입니다. 정말 섬세하지요.

 

 

네덜란드, 벨기에는 낮은 지역이라 당시 저렇게 놓은 산봉우리가 없답니다. 브뤼겔이 그려낸 상상의 영역인 거지요. 젊은 시절 어느 여행지의 모습이기도 할 테고요. 까치와 까마귀를 그려 다가 올 불길함을 상징하는 듯도 보이고요. 사냥에 실패한 사냥꾼들과 상관없이 마을 사람들은  동계스포츠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대조적인 모습이라 그림 속 이야기가 더 풍성해집니다.

 

 

 

피터 브뤼겔, <농가의 결혼식>,1568, 빈 미술사 박물관/ 위키피디아

 

 

위 작품은 농가에서 축제라고 할 수 있는 결혼잔치의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단지 먹고 마시는 잔치에 대한 그림이 아닙니다. 일단 결혼식 장소는 곡식 창고입니다. 식탁과 의자는 임시로 만들어져서 허름한 느낌이고요.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결혼식 자체는 이미 끝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피로연으로 보면 될 것 같아요. 음식을 나르는 도구가 문짝 같아 보입니다. 아이디어 갑이네요. 흰새, 푸른색, 붉은색 대비가 선명하고요. 그런데 그들이 먹는 건 기껏해야 수프와 음료 그리고 테이블 위에 빵 조각이 전부네요. 그것마저도 앉아 있는 사람이나 문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그리 넉넉해 보이지도 않고요. 요즘 같으면 먹고 남았을 음식들이 결혼식임에도  넉넉하지 않은 당시 농민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그림 같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전체적으로 특별히 주인공이 있는 그림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몇몇 인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브뤼겔 작품의 구도와 놀라운 묘사 덕분일 테지요.  결혼식이니 신랑과 신부를 찾게 됩니다. 가운데 녹색천 앞에 않아 있는 여자는 신부가 분명해 보입니다. 화관을 쓰고 자신의 긴 머리를 과감하게 노출시킨 걸 보면 말입니다. 그런데 신랑은 보이지 않네요. 어디로 간 거죠? 그래서 신부의 얼굴이 살짝 구겨져 보이는 걸까요? 즐거운 표정이라 하기에도 뭔가 이상하고 그렇다고 불행한 것도 아닌, 오묘한 표정입니다. 혹시  술을 따르고 있는 차려입은 저 남자가 신랑 아닐까요? 하객들 대접하느라 저곳에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왼쪽의 백파이프를 들고 있는 남자와 아래에 자기 접시를 손가락으로 긁어먹는 아이를 보면 순간 먹먹해지기도 합니다.  백파이프 남자는 잔치에 연주를 하러 온 것이 분명한데 그의 시선은 두 남자가 운반하는 음식을 향하고 있어요. 아이는 누구 하나 챙겨주지 않는 상황에서 빈 접시를 끌어안은 채 바닥에 않아 있고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축제에서도, 가난한 농가의 잔치는 여전히 허기집니다. 

 

 

이 장소에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 복장을 하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검은 옷의 남자가 있습니다. 옆에 있는 수도승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남자는 이곳의 농부들과는 달리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음식을 먹고 있지도 않고요. 마치 이런 별 볼 일 없는 음식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죠. 그와 마찬가지로 이 결혼식 자체에도 별로 관심이 없는 듯싶습니다. 깨알 콘셉트 식탁 밑에 강아지 모습도 보여요. 화가의  디테일에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이 그림을 그린 후 얼마 안돼서 화가 브뤼겔은 죽습니다. 그의 나이 40세 정도에 말이죠.

 

 

 

한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일상을 알아가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때때로 교훈을 주기도 하고요. 브뤼겔이 살았던 시대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군대와 통치자를 보내 갖은 압력을 행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풍자와 해학을 그리며 그 시대를 표현해 냈지요. 그 덕분에 16세기 플랑드르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는 다르지만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질도 살펴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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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퀀텀 오브 솔러스>의 주인공 다니엘 크레이그가 '톰 포드' 슈트를 입고 등장합니다. 이후 <007 스카이폴>, < 007 스펙터>, <007 노타임 투 다이>에서까지 이어지지요. 영화의 성공과 함께 '톰 포드 '슈트는 품격 있고 섹시한 남자를 상징하는 옷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그의 액션신에도 불구하고 톰 포드의  섹시한 슈트핏은 우아하기까지 합니다. 섹시함이 여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더란 말이죠. 영화 스토리 라인, 스펙타클한 배경, 그리고 이에 걸맞은 음악까지 종합예술에 속하는 영화가 '톰 포드'슈트 덕분에 더 빛났습니다.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비비안 리가 흑인 하녀의 힘을 빌어 코르셋을 입는 장면이 나옵니다. 덩치 큰 하녀가 코르셋 끈을 꽉꽉 잡아당깁니다. 잘못했다간 숨을 못 쉰 채 기절도 할 수 있는 무기가 되기도 하지요. 이런 날렵하고 쏙 들어간 허리 라인을 클래식한  남성복에 재해석해 적용한 겁니다. 

 

 

 

또한 그의 수트 입는 방식은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완벽합니다. 0.1mm의 오차도 허락지 않는 영국 슈트의 완벽한 테일러링과 이탈리아 슈트의 슬림하면서도 정교한 감성, 프렌치 슈트의 뀌뛰르 적인 섬세함이 조화롭게 교차되거든요. 거기에 톰 포드만의 관능이 한 스푼 더해집니다. 성공한 남성이라면  '톰 포드처럼 슈트를 입고 싶다.'는 욕망을 남자들에게 들끓게 한 장본인 셈이죠. 마치 여자들이 하이힐을 신고 자신감 넘치는  실루엣을 만들며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나가.'라는 드라마틱 연출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2023 S/S 톰 포드 컬렉션 피날레

 

와이드 라펠(Wide lapel: 넓은 폭의 칼라)

로프트 숄더(roped Shoulder: 어깨 끝 라인을 올린 정통 스타일)

슬림한 허리 라인

큰 티켓 포켓( 동전, 전차 티켓 등을 넣기 위해 디자인된 포켓으로 보통 오른쪽 포켓 위에 덧대어져 있다.)

 

그야말로 허리는 조이고 어깨 패드는 키우는 스타일인거죠. 이러한 요소들이 남성의 섹슈얼한 매력을 한층 우아하게 극대화시켜 준다고 합니다. 

 

 

톰 포드는 검정 ,회색 그리고  백색의 '모노크롬 시크룩 표현에 탁월합니다.

(monochrome chic: 흑백의 미니멀한 컬러로 연출하는 스타일)

검정슈트와 새하얀 셔츠, 짙은 회색 슈트와 좀 더 연한 회색의 셔츠를 매치시키는 등 '흑백 스타일링'에 엄지 척입니다. 이 전통 깊은 컬러들이 수십 또는 수백 가지의 톤과 질감을 지녀, 어떤 프린트나 화려한 컬러들보다 더 강력한 한방의 임팩트가 되지요.

 

 

그는 '타이룩'에서 딤풀(dimple:넥타이 매듭 중앙의 주름)을 깊게 넣는 윈저 노트(windsor knot: 매듭이 좌우로 대칭되는 매듭법)와 포켓스퀘어까지 장식한 정통 클래식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내 남자가 멋있게 보이게 하는 방법일 수 있으니 상식으로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노타이룩'에선 '톰포드룩'의 상징이 된 가슴 중앙까지 풀어헤친 셔츠로 은밀하게 섹시함을 드러내거나, 머플러를 여러 번 둘러 스타일리시한 룩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일하는 순간조차 톰 포드는 풀어헤친 화이트 셔츠 위로 클래식한 조끼를 덧입어 남자들의 뽐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합니다.

 

 

 

 

텍사스, 뉴멕시코/MeetHk.com

 

 

톰 포드의 유년시절은 어땠을까요.  그는  텍사스 오스틴시에서 자라다가 뉴멕시코주로 11세 때 이주합니다. 어려서 부터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10살 때 어머니를 졸라 구찌의 하얀색 로퍼를 구입했다고 하고요. 학교에 갈 때는 책가방 대신 브리프 케이스를 들고 다녔다고 해요. 중학교 때부터는 남성 패션지 GQ를 탐독하고요. 이 정도면 패션에 진심이란 생각이 듭니다. 

 

 

톰 포드는 뉴욕대 입학후 미술사를 전공으로 공부하였으나 1년 후 중퇴합니다. 이후 TV광고모델 활동에 전념해  전국구 스타가 됐지만 또 그만둡니다. 파슨스 더 뉴스쿨 포 디자인에서 1986년까지 건축학을 배웠지만 진로를 그쪽으로 정하지 않습니다.  졸업 후에는 뉴욕의 의류 브랜드 Cathy Hardwic, 패리 앨리스에서 근무하며 그의 상사였던  마크 케이콥스를 만납니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헷갈릴 때가 있지요. 톰 포드도 자신이 겪어 낸 일련의 일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었던 거지요. 그는 끌로에에서 인턴 생활을 하면서 패션이라는 천직을 드디어 찾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옷을 만들기 위해서 집요함을 발휘하게 되지요. 예를 들면 백화점에서 모든 스커트를 뒤집어 보면서 옷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재봉사를 옆에 두고 옷 만드는 법을 익히기도 하고요.

 

 

 

톰 포드가 29살 되던 해 구찌 본사가 있는 이탈리아로 건너갑니다. 미국이 아닌 이탈리아가 자신이 원하는 옷을만들 수 있는 장소라 확신한 거지요. 당시 변화가 절실히 필요했던 구찌로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무명의 톰 포드를 영입합니다. 구찌로서 신의 한 수 같은 결정을 내린 거지요. 73년의 나이 든 브랜드를 젊은 층이 매력적으로 여길만한 섹시함과 품격으로 레트로와 유행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디자인을 만들어 냅니다.  섹스 어필한 광고까지 더해져 구찌의 매출 성장과 함께 톰 포드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늘 뭔가 신선한 충격을 갈망하는 패션 피플들을 단숨에 매혹시킵니다. 마돈나, 기네스 펠트 같은 스타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찌를 입고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젊고 감각 있는 패션 피플들이 점점 구찌의 톰 포드를  찾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톰포드가 재임한 10년 동안 구찌의 매출이 13배 늘어났다고 합니다. 

 

 

 

 

1995-1996년 구찌의 판매량은 90% 증가합니다. 그가 구찌를 떠나는 2004년 구찌 그룹의 시가 총액은 100억불에 도달했을 정도고요. 실적뿐만 아니라 그 뒤 세대의 의상에 끼친 영향까지 20세기말 톰 포드는 압도적인 세계 최정상의 디자이너로 군림합니다.  톰 포드가 떠날 때 그가 하던 일을 나눠하기 위해 구찌가 고용한 사람이 무려 4명이었다는 전설도 남아있습니다.

 

 

 

 구찌 광고에 노골적인 섹스코드를 삽입해 구찌에 에로틱한 이미지를 덧입힌 장본인입니다. 클래식과 섹스를 섞은 최초의 디자이너였지요. 자칫 천박해 보일 수 있는 섹스를 클래식을 사용해 적절한 균형을 잡아주었습니다. 본인이 직접 모델로 등장하기도 하고요. 자신의 고향인 미국 남부의 스타일을 클래식과 함께 섞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상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구찌를 떠납니다. 

 

 

 

구찌(Gucci), 입생로랑(Yves Saint Laurent)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유명해진 톰 포드는 2005년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는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톰 포드'를 만듭니다. 아이웨어, 향수를 시작으로 남성복을 만들었고요. 슈트 가격이 5천 달러에서 시작할 정도로 초고가 제품이었습니다. 선택된 소수를 위한 특별한 제품인 셈이죠. 선글라스나 향수는 일반인들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가격대로 '톰 포드'브랜드를 소비하기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jeOXx1Ibk4

 

 

 

 

 

 

 

2009년 ,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싱글맨>을 발표하여 영화 감독으로 데뷔합니다. 농담이거나 허세가 아니었죠.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소설 <싱글맨>의 판권을 사고, 페이드 투 블랙이라는 영화사를 설립합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한 700만 달러는 개인 돈으로 조달했다고 합니다.

줄거리는 오랜 연인을 잃은 남자가 죽음보다 못한 일상을 버티는 이야기로 수작이었다는 평판입니다. 배우의 모든 의상, 소품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톰 포드의 손을 거쳐 스타일링된 영화였습니다. <싱글맨>은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됩니다. '톰 포드' 슈트가 얼마나 유혹적인가는 그가 감독한 첫 번째 영화 '싱글맨'에서 다시 증명됩니다. 영국 배우 콜린 퍼스가 연기한 조지는 톰 포드 그 자체였지요. 이 영화 덕분에 배우 콜린 퍼스는  '싱글맨'을 통해 남성 슈트사에 영원히 기록될 스타일로 재탄생됩니다. 시상식 룩을 결정해야 할 때마다 톰 포드에게 조언을 구한다는 콜린 퍼스는 자신이 톰 포드를 알기 전과 후로 , 그의 스타일이 나뉜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Rwa31jgsr4

 

 

2016년  7년만에 차기작이 나옵니다.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오스틴 라이트의 토니와 수잔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역대급 심리 스릴러라는 극찬을 받은 영화고요. 골든 글로브 시상식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될 정도로 말이죠. 톰 포드는 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영화계 경력도 없었지만 그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분명히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패션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톰 포드(Tom Ford)사 트위터 캡쳐/ 패션업계의 유력 부부, 톰 포드와 리처드 버클리/연합뉴스

 

 

톰 포드는 27년간 동거해온 남자 친구 리처드 버클리와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2014년 결혼합니다. 1986년 패션쇼에서 처음 만난 둘은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당시 리처드 버클리가 33세 톰 포드가 25세로 커플의 나이차이가 좀 있는 편이죠. 둘이 처음 데이트해서 사귀던 시절은 에이즈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80년대였어요. 현재 게이 커뮤니티에 40-50대 중년층이 부족한 일종의 세대 갭이 존재하는데 이는 1980년대 많은 동성애자들이 에이즈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둘 사이에 2012년 대리모 출산으로 얻은 아들이 있습니다.

 

 

 

그의 연인 리처드 버클리가 1989년부터 인후암 수술을 했으며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그는 2005년까지 유명 패션지 '보그'의 남성용 판인 '보그 옴므 인터내셔널'( Vogue Hommes Intenational)의 편집장으로 6년간 일했습니다. 뷰티 패션 저널 WWD(Women's Wear Daily), 유명 라이프스타일 잡지 배니티 페어(Vanity Fair)에서 에디터로도 활동하는 등 이 분야에서 25년간 경력을 쌓아온 베테랑이죠. 72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제 고객은
평범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민주당 당원으로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었고,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7년 영부인 멜라니아 트럼프에게 절대 자기 옷을 입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가 백화점에서 퇴출당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습니다. 당시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퍼스트 레이디는 미국인 대다수가 입을 수 있는 가격대의 의상을 입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옷은 너무 비싸서 퍼스트레이디의 옷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거지요. 심지어 이탈리아 제품이고요. 결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퍼스트레이디가 입은 옷은 랄프 로렌이었습니다.  자신만의 취향이 뚜렷한 전 세계의 부호들이 톰 포드의 수혜자들인 거지요. 웬만한 명품은 성에 안 차는 사람들이고요. 그런 소수에게 제공하는  특별한 서비스인 셈이지요.  선택된 소수를 철저히 대접하는 방법으로 성장합니다.  최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극도의 절제력을 발휘하고요. 소량생산, 30% 높은 가격, 제품과 매장 수를 지극히 보수적으로 늘리는 방식으로 최고의 지구촌 세일즈를 합니다.

 

 

https://www.tiktok.com/@giogioshin/video/7271285375400758536

 

TikTok · Gio Shin 님

좋아요 27.6K개, 댓글 106개가 있습니다. "톰 포드 향수 추천_ 바닐 노트의 향수들 #톰포드뷰티소속직원 📍가을 맞이 톰 포드 향수 추천 드려요. 📍 Tom Ford Fragrance Recommendation for fall. 📍가까운 톰

www.tiktok.com

 

 

 

최근들어 톰 포드 남자 정장슈트부터 톰 포드 향수, 톰 포드 선글라스, 톰 포드 립스틱까지 토털 패션 브랜드로 성장하다가  뷰티 업게 대기업 에스티 로더 (Estee Lauder Companies)가 28억 달러(한화 약 3조 6900억 원)에 인수하기로 결정됩니다. 최대 규모의 인수 합병이었다고 하네요. 에스티 로더 측은 럭셔리 뷰티 카테고리에 모멘텀을 구축하기 위해 톰 포드를 인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생 로랑, 프라다, 발렌티노 등의 명품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 경쟁사인 로레알과의 격차를 좁히기 위한 조처로 보입니다. 맥(M.A.C), 크리니크(Clinique), 라메르(La mer)등의 화장품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 에스티 로더는 톰 포드 인수를 통해 기존 제품군을 강화하고 럭셔리 패션 마켓에 진출할 계획입니다.

 

 

 

디자이너이자 창업자 톰 포드는 2023년 말까지 브랜드에 남아 크리에이티브 비저너리 역할을 할 예정입니다. 이번 인수 합병으로 톰 포드는 억만장자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얻었습니다. 그는 성명서에서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 톰 포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고 밝혔고요.  그가 맞이할 새 챕터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미국의 랄프 로렌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돈도 없고 빽도 없던 텍사스 촌놈이 3조 7천억 원짜리 브랜드를 만들어 낸 걸 보면 단순한 디자이너 이상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지구촌 최고의 자수성가 스토리인가? 했더니 그보다 더 큰 무엇인가를 가진 디자이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것이 뭐야?' 하며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신의 길을 실험하고 열어가는 모습이 일반인들도 눈여겨봐야 할 자세라는 생각도 들고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집요하게 덤벼들고 승부스를 내는 모습이 톰 포드를 더욱 그답게 만들지 않나 싶습니다. 클래식과 섹스를 섞어 세상에 없던 제품을 만들어 내고, 상위 1%를 위한 브랜드를 만들고서 절제합니다. 톰 포드가 여러 회사와 믹스해서 만든 제품들 또한 성공의 요인이고요. 그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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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스훈트를 볼 때마다 인간으로서 좀 미안해진다. 욕심부리고 더 개량하는 인간들 때문에 유전질환도 생기고 수의사 개입 없이 번식도 못한다고 하니 말이다.

 

 

닥스훈트의 원래 혈통은 작은 동물을 포획하기 위한 수렵견으로, 이름부터가 닥스(오소리, der Dachs) 훈트(개, der Hund). 허리가 길고 다리가 짧은 것도 오소리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들이 매복할 때 굴에 들어갈 수 있게 하려고 현재의 모습이 될 때까지 갖은 개량을 했기 때문이다. 생김새 때문에 허리관절 고질병이 많고 체중조절은 필수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버릇은 절대 금물이다.

 

 

 

나무위키

 

닥스훈트, 위키피디아

 

 

생김새 때문에 북미권에선 핫도그 의상을 입혀 개 경주를 시키는 달리는 소시지 대회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 닥스훈트는 연골발육부전증(achondrodysplasia)이라는 유전병에 걸린 견종이다. 허리 길이는 정상적으로 자라지만 팔다리는 자라지 않는 병이다. 일종의 난쟁이 개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와이어 헤어(강모), 롱 헤어(장모), 스무드 헤어(단모)/사진출처: 비 마이 펫, 다음

 

 

스무드 헤어(단모종)과 롱 헤어(장모종), 와이어헤어(강모) 종에 따라 성격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롱헤어(장모종)는 차분하며 애교가 많지만 가끔은 신경질적이 되기도 한다. 스무드 헤어(단모종)는  쾌활하고 명랑하여 사람을 잘 따르는 경향이 있다. 와이어헤어(강모)는 세 타입 중 가장 장난이 많고, 호기심이 왕성한 개구쟁이로 통한다.

 

 

 

  에너지도 많고 애교와 붙임성도 매우 좋아 사람 자체를 무척 좋아하는 견종이다. 하루종일 뛰어다니고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스태미나 최고인 견종이다. 기본적으로 사냥개 기질은 깔고 간다. 사냥개 종 특성상 청설모나 참새는 순식간에 사냥할 정도로 겁대가리가 없다. 장모 종이 비교적 가장 온순하지만 말이다. 성질의 강도는 와이어헤어(강모)-->스무드 헤어(단)--> 롱 헤어(장모 ) 순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rUjuH8zqsY

 

 

 

헛짖음과 무는 성질이 강해 어렸을 때 잘 훈련시켜야 하는 종이다. 웃기고 귀여운 외모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다가갈 경우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다리가 짧고 덩치가 작아 활동량이 적을 것 같지만 야외에 풀어놓으면 웬만한 표준 길이를 보유한 개보다 더 빠르다. 밤에도 거실을 운동장으로 만드는 패기를 뽐낼정도라 한다. 사냥개 시절 몰려다니며 그룹사냥을 한 터라 같은 견종에게 상당히 우호적이다. 2마리 이상 모이면 다른 견종을 괴롭히며 쫓아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어서 여러 마리 개를 기르는 가정에서 비추천한다.

 

 

 

추위를 많이 탄다. 단모종들이 그런 경향이 많은데, 실내에서 기를 경우 겨울이 되면 따뜻한 아랫목을 찾아 몸을 지지는 모습을 자주 보거나 바닥 보일러 라인을 따라 눕거나 이불에 파고들어 코만 내밀고 자는 모습도 보게 될 것이다. 여름철에도 그늘진 곳에 있지 않고 햇볕에 일광욕을 하는 닥스훈트들도 있다.

 

 

 

새끼 때의 귀여움에 우쭈쭈 하다가  나중에 개가 주인을 훈련시키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짖을 때 외모나 크기에 비해 그 소리가 엄청 크기 때문이다. 눈치도 빠르고 똑똑하기에 주인을 맘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경향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엄청난 고집쟁이로 자기주장이 강해 견주는 끝없는 인내심과 단호함이 생활화되어야 한다. 견주 집이 마룻바닥일 때 발톱을 자주 깎아주어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짜리 몽땅한 앞발들이 휘는 것을 방지해 주어야 한다. 목줄은 목 디스크 위험이 있어서 닥스훈트용 하니스를 사서 걷는 편이 낫다. (가슴을 다 감싸며 고리가 일반 것 보다 더 허리 쪽으로 나와 있음)

 

 

 

 

https://www.youtube.com/watch?v=VmnGyG9Vy3k

 

 

 

 

허리를 위해 절대 비만이 되면 안 된다. 신이 나서 우당탕 뛰는 것도 허리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 자제해야 한다. 몸통이 길고 낮기 때문에 사람들이 발에 잘 걸려 넘어진다. 함께 사는 사람들의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많은 견주들이 모르지만 안아 드는 방법이 따로 있다. 포인트는 절대 허리와 엉덩이를 덜렁거리게 하지 않는 것이다. 잘못하면 허리가 나갈 수도 있다. 빼빼로처럼 일자로 드는 것은 최악의 자세로 알려져 있다. 

 

 

 

강한 충성심과 주인을 향한 애정은 최고다. 주인과 장난치는 걸 좋아하고 항상 주인 곁에 붙어 있고 싶어 하기 때문에 고립장애로 이어지기 쉽다. 그래서 어릴 때 훈련이 중요하다.  사냥개의 후손답게 똑똑하고 말을 잘 알아듣는다. 그 똑똑함이 오히려 독이 될 수 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귀여운 외모에 혹하여 얼굴 가까이했다가 역으로 공격당해 얼굴에 부상을 입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조심해야 한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 때문에 집안이 순식간에 운동장이 될 수도 있다. 우렁찬 짖음 소리는 관악기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라고 한다. 제대로 관리를 안 해주면 미친 듯이 짖어 대어 이웃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다. 함께 있을 시간이 많이 없다면 절대로 키우지 말아야 한다. 지치지 않고 짖는 소리 때문에 지랄견종 중 하나이다.  유전병인 허리디스크로 힘들어하고 엄청난 털 빠짐으로 3일에 한 번씩 브러싱은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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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소비자들은 제품을 산다기보다 제품에 표기되어 있는 브랜드를 산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미 브랜드는 기업의 이미지나 무형의 가치 창출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행용 가방에서 시작해 안경, 시계, 신발, 향수 등 다양한 상품 라인에서 수많은 여성의 마음을 훔치는 기업이 있습니다.

 

Louis Vuitton, 나무위키

 

 

루이비통의 역사는 1821년 프랑스 안쉐(프랑스와 스위스 접경지대)라는 작은 마을의 살던 목공 집안의 한 아이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연스레 목공기술을 익히던 그가 14살이 되던 해 집을 나와 파리로 떠나게 됩니다. 썰에 의하면 계모의 냉대가 심해 떠났다는 말도 있더군요. 땡전 한 푼 없었던 루이 비통은 4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파리에 도착합니다. 돈 떨어지면 근처 가게에서 일하고 다시 걸어가고 이런 식으로 말이죠. 차를 타면 5시간 남짓 걸릴 거리를  1년이 되어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후 당시 파리에서 가방 제작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무슈 마레샬 아래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17년간 일을 하며 그의 섬세하고 특별한 기술은 유명해졌고 귀족들 사이에서 이름도 알려지게 됩니다.  많은 양의 짐을 싸는데 탁월한 기술을 갖췄던 루이비통은 프랑스 왕실 황후 외제니 드 몽티조(나폴레옹 3세)의 전담 패커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외제니 황후의 후원하에 파리 뇌브 데 카푸신 4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건 포장 회사를 개업합니다. 이는 오늘날 루이 비통의 뿌리가 되는 회사인거죠.

 

 

당시 트렁크는 현대에서 흔히 만들어지는 사각형이 아니었습니다. 윗부분이 볼록하게 생겨 차곡차곡 쌓기 힘든 모양새였지요. 쉽게 말하면, 애니메이션  영화의  보석상자 모양새라 생각하면 좋을 듯싶습니다. 이러다 보니 재수 없이 자신의 트렁크가 밑바닥에 깔리게 되면 안의 내용물이 부서지거나 트렁크가 망가지기도 했답니다. 혹은 물방울이나 비를 피하기 위해 윗부분을 둥글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여러모로 짐을 쌓기 불편한 구조였던 거지요.

 

 

 

아니에르 공방, 사진출처: Oliver Pilcher

 

아니에르 공방, 사진 출처: Oliver Pilcher

 

 

 

이에 착안하여 루이 비통은 트렁크를 평평하게 만들어  마차에 쌓기 편한 구조로 만들어 냅니다. 모양뿐만 아니라 기존의 나무재질에서 루이 비통만의 목공기술을 살려 특별제작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라는 소재로 방수처리한 천을 사용하게 되지요. 이러한 혁신적인 트렁크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기존 매장에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자 1859년 파리 근교 아니에르에 공방을 세우게 됩니다. 아니에르에 있는 이 트렁크 공방은 지금까지도 트렁크 제작을 하는 아주 특별한 장소입니다. 1885년 영국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매장을 열면서 첫 해외 지점도 오픈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72EbS5yKvA

 

 

 

루이 비통의 획기적인 기술과 명성은 아들 조르쥬 비통에게로 이어집니다. 인기가 많은 만큼 쉽게 모조품을 만들어 파는 경우들이 많아지면서 골머리를 앓게 됩니다. 상류층들이 주로 사용하는 이 트렁크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훔쳐가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막기 위해1886년 소매치기들이 가방을 쉽게 열지 못하도록 가방에 자물쇠를 부착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냅니다. 지금도 이 잠금장치 기술은 요긴하게 쓰이는 중이라고 합니다.  

 

 

 

루이 비통의 대 성공으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의 모조품들이 판을 치자 1888년 새로운 재질의 제품을 개발합니다. 이때 나온 것이 루이 비통의 대표적인 제품인 다미에 (체크무늬)캔버스입니다. 다미에 캔버스의 모조품들도 끊임없이 나오자 1896년 루이비통의 상징적인 패턴 모노그램 캔버스가 탄생합니다. 또 탐험가들이 가방을 주문하는 경우도 있어 아들 조르쥬는 모노그램 제품들을 들고 튀니지 사막을 횡단하며 견고성을 시험할 정도로 힘을 쏟습니다. 이 정도면 장인정신 최고 아닌가요? 샤넬이 직접 자신의 가방을 만들어 달라며 주문제작한 '알마 백'도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백을 주문해 만들어 낸 '스피디백(3초 백)'도 있고요.  대중교통이 용이해지며 트렁크나 여행용 가방을  만들 던 루이비통이 손가방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창업주 루이 비통이 죽고 경영권을 이어받은 조류즈 비통은 회사를 더욱더 성장시킵니다. 1914년 상제리제 거리에 세계에서 가장 큰 여행제품 매장인 7층짜리 매장을 세우게 됩니다.

 

 

1936년부터 1970년까지 3대 가스통 루이 비통이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프랑스 전역에 다수의 매장들을 열기 시작하였으며 파빌론백(빠삐용 백)등 상품 라인 넓히기 시작합니다. 

 

 

1970년부터 4대 마이클 비통이 가업을 이어받게 됩니다. 이때부터 유럽을 넘어 본격적으로 아시아와 신대륙에서 인기를 끌며 세계화가 진행됩니다. 특히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이백을 사기위해 파리에 오면 2,3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다고 해요.  일본에서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이 백을 많이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1977년 창업자 증손녀의 남편 앙리 라카미(철강유통사)가 경영권을 승계합니다. 그는 루이비통이라는 이름이 지닌  가능성을 식구들보다 먼저 알아보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공격적인 사업가이기도 했고요. 북미시장에 공을 들이고, 1978년 일본시장, 1984년 한국에 매장을 엽니다. 세계 속에 명품 여행용 가방, 핸드백 만드는 가방업체로 뻗어나간 시기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2fEl9AUF4I

 

 

https://www.youtube.com/watch?v=uDPyPwbU1Ok

 

 

 

 

하지만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가족 경영이 아닌 외부경영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987년 샴페인 브랜드 모엣&샹동, 꼬냑 브랜드 Hennessy와 합쳐져 LVMH라는 종합 명품 집단으로 탈바꿈하면서부터지요. 당시 크리스 찬 디올을 소유하고 있던 베르나르 아르노(별명: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늑대)가 LV 측의 요청으로 지분을 투자하여 지분 싸움에 참전하게 되고 이는 그룹의 역사와 뿌리 자체를 바꾸는 선택이 됩니다. 아르노는 경영자였지만 누구보다 변화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989년까지 공격적인 지분 인수로 그룹 전체의 43.5%를 확보하며 실권을 장악합니다. 그는 관습을 거부하는 매력적인 캐릭터 디자이너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소수의 특별한 창조적인 디자이너 들은 돈을 벌어도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요. 돈보다 그들이 가진 특별한 이미지와 캐릭터에 더 끌린다고 보았던 거지요. 

 

 

마크 제이콥스, 사진출처: 나무위키

 

 

이후 그는 80-90년 대 셀린느, 겐조, 벨루티, 렐랑, 로에베 등의 브랜드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입니다. 특히 1997년 젊은 천재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하고 동시에 그를 그룹의 총괄 디자이너로 임명하며 루이 비통이 대격변을 맞기 시작합니다. 일명 3초 백으로 불리는 PVC라인의 모노 그램 가방을 대중화시키며, 루이 비통의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뛰기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큰 규모까지 크게 됩니다.

 

 

 

 

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재미없는 요소를 뽑아내
화려한 것으로 탈바꿈시키기를 좋아한다.
어쩌면 속물적인 반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 마크 제이콥스-

 

 

평소 광적인 아트 컬렉터였던 그는 무라카미 타카시, 리처드 프린스, 스테판 스프라우스 등의 현대 미술가들과의 협업은 물론 더 나아가 퍼렐 윌리엄스를 시작으로 마돈나는 물론 카니예 웨스트 같이 떠오르던 셀럽과도 협업을 진행하며 유행을 선도합니다. 아주 특별한 능력 있는 관종이었던 거지요. 탁월한 캐릭터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드는 그런 디자이너였습니다. 제이콥스 덕분에 콜라보 라인을 적절하게 결합시켜  루이비통이 명품 가방 업체에서 명품 브랜드로 우뚝 서게 되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디자이너의 캐릭터를 중요시했던 아르노 회장의 베팅이 맞아떨어진 거지요. 마크 제이콥스가 수장으로 있던 기간 동안    (1997-2013)  루이비통이 5-10% 꾸준히 성장한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2013년 11월 마크 제이콥스가 떠나고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렌시아가를 맡고 있던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임명됩니다. 루이 비통의 클래식 팬들은 마크 제이콥스가 너무 상업적인 방향으로 브랜드를 밀고 나가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루이 비통의 위상을 낮추었다는 평이 있어 그가 떠난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미래지향적이면서 고풍스러운 미니멀 디자인으로 남녀노소 호불호 없이 브랜드를 유지합니다. 조용하고 우직하게 브랜드를 고급화하는 방향으로 말이죠. 또 이 시기부터 니콜라와 발렌시아가 시절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셀렙들이 루이 비통으로 넘어와 셀럽 위주의 캠페인 홍보, SNS활용이 본격화됩니다.

 

 

한편, 2011년부터 남성 부문을 이끌던 킴 존스가 2018년 가을, 겨울 컬렉션을 끝으로 디올로 건너가며 루이 비통을 떠나고, 오프화이트의 버질 아블로가 새 수석 디자이너가 됩니다. 당시 럭셔리 브랜드 중에서도 최상위 브랜드인 루이 비통의 남성 부문 디자인 수장으로 영입된 인사조치는 상당히 파격적이라는 평입니다. 거기에 역사상 첫 흑인 디자이너에다 비전공자라는 점 역시 여러모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2021,11월 28일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집니다. 사인은 2년 간 투병해 왔던 희귀성 심장 혈관 육종(심장암)으로 사망 전까지 투병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고 다음 컬렉션들과 아이템들을 연구하고 활발한 활동을 했던 점이 많은 사람들을 인상 깊고 안타깝게 하는 부분입니다. 

 

 

 

2023년 2월, 버질이 떠난 남성 부분의 새로운 디렉터로 페렐 윌리엄스가 임명됩니다. 동년 여름 진행될 SS24 컬렉션부터 업무를 맡게 됩니다. 버질에 이어 패션 비전공자 출신의 유색인종이 다시 한번 임명됩니다. 그는 21세기 대중음악계를 대표한 아이콘이기도 해서  엄청난 파격성을 띈 인사였지요. 루이 뷔통 입장에서는 영국계 엘리트 디자이너들 보다는 매출 신장을 위해 이미 인지도가 높고 다방면에서 특출함을 보이는 페렐이 오히려 안전한 선택이었다는 의견도 다수 존재합니다. 다만 아직 풀 컬렉션을 진행해 본 경험이 없고 , 과거 디자인했던 제품들 또한 호불호가 꽤나 갈리는 편인지라 우려 섞인 반응들 또한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2023년 6월 20일, 페렐의 SS데뷔 컬렉션이 파리 패션위크 오프닝날에 진행되었습니다. 이미 루이 뷔통 내에는 버질이 없는 동안 컬렉션을 전개해온 특출 난 제단사들과 디자이너들이 있었습니다. 비 전공자인 퍼렐은 스트릿 컬렉션을 주된  방향성으로  밀고 가며 창의적인 부분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얼굴마담 격이라는 우려 섞인 의견도 다수 있었지만 말이죠. 이러한 예상과 달리 전임이었던 버질 아블로와 유의미하게 비교될 정도로 스트릿이랑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테일러링 착장으로 선보였고, 얼굴마담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기존 LV 다미엔 패턴에 카모플라쥬 색을 입힌 '다모플라쥬'패턴을 쇼 초반부에 배치하며 새로운 퍼렐 본인의 시그니쳐를 선보입니다. 과거 샤넬과의 컬래버, NIGO와의 오랜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한 퍼렐만의 색을 진하게 입혔는데 본인이 샤넬에도 오랫동안 몸 담았던 터라 중후반부에 대거 등장시킨 진주 장식과 트위드, 크롭 기장에 꽉 끼는 재킷 특유의 핏 등 샤넬의 색이 너무 들어간 것 아닌가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 말이죠. 전체적으로 안전한 선택이었다는 비판이었습니다.

 

https://youtu.be/pDsjAIrmSKM

 

 

의례 그런 패션쇼 이려니 하고 보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뮤지션 출신이라 음악 선택도 탁월했고요. 종교적인  가스펠 음악을 패션쇼에 삽입하면서 예상치 않은 신선한 조합에 몸이 같이 움직이더군요. ' 조이'라는 음악을 흥에 겨워 신들리듯 불러대는 모습에  마음까지 시원해졌습니다. 럭셔리, 고귀함, 스트릿을 혼합한 패션쇼, 그리고 재해석능력이 뛰어났다는 개인적 생각과 함께 패션 좋아하는   남자들의 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덕분에 루이 비통은 더 커진 파이를 가져갈 수 있겠다 싶고요. 보수적인 집단이면서 오픈 마인드로 그 시대 사람들과 조금 더 소통하려는 루이 비통의 노력이 퇴색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장인정신을 갖춘 기업으로 첫 마음을 잃지 않는 기업이면 더 좋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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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 시간보다 늦은 시간에 미술관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이미 파장 분위기였고, 입구 쪽으로 새로운 그림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전시회를 위해 작업을 하느라 기계소리까지  윙윙거려 전체적으로  어수선했습니다. 마음이 급해 후다닥 그림을 보고 올 요량으로 전시관을 휘젓고 다녔지요. 그러다 관심 있는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와 자세히 보려고 그림 쪽으로 향했습니다. 디테일을 확인하고 싶어서요. 그런데 생각 없이 뒤로 물러서다 그만  백인 할머니의 발을 밟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일로 당황했고 할머니는 구시렁거리시며 기분 나쁜 황당함으로 언짢은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모기만 한 소리로 사과를 하고 얼른 자리를 피했지요. 관람객과 그림 사이의 거리감도 중요하지요.

 

 

 

자신의 작품을 45cm에서 봐 주기를 바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러시아 출생의 미국인 화가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입니다. 로스코의 그림은 평면 캔버스에 단순한 형태와 순색(명도와 채도가 높은 색)이 빚어내는 강한 울림의 미학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이 쏟아내는 고요하고 정적인 에너지가 어찌나 크고 격정적인지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왠지 모를 경건함마저 들어 혹자는 그의 그림을 종교적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에게, 이것도 그림이야?'

"네모, 색 몇 개 ... 작가가 너무 날로 먹는 것 아냐?", "네모와 색위에 달 하나 그리면 화투그림이네.", "이런 그림이 도대체 왜 이렇게 비싼 거야?" 하며 반론을 제기하는 관람객들도 있지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림은 사람과 교감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며
감상자에 의해 확장되고 성장한다.
-마크 로스코-

 

 

 

 

너무 단순한 그의 그림 앞에 관람객들은 당황합니다. 저런 그림이 왜 값이 비싼 지 이유조차 아리송해 고개까지  갸우뚱 하게 되지요. 그러나 마크 로스코 작품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그 단순함에서 비롯됩니다. 전(before)과 후(after)가 있듯이 마크 로스코가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을 알고 다시 이 그림들을 바라보면 뭔가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23년 뉴욕으로 온 뒤 전설적인 예술 학생 연맹에서 수학한 것을 제외하면 마크 로스코는 정식 미술 수업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마크로스코에게는 화가 밀턴 에버리(Milton Avery)라는 중요한 스승이 있었으며, 에버리의 절제된 형상, 미묘한 색감은 젊은 로스코의 작업 방향에 심오한 영향을 끼칩니다. 젊은 시절 드라마에 가졌던 관심을 발전시켜 신화와 심리 분석서들을 닥치는 대로 탐독했고, 렘브란트의 그림, 모차르트의 음악, 니체의 철학은 마크 로스코의 사상에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합니다.

 

 

 

The entrance to the subway,1938,그림출처:Arthive

 

 

 

 

 

모든 시작점에 선 창작자들이 그러하듯 로스코 역시 전원 풍경화, 실내화, 도시 풍경화, 정물화 , 그리고 뉴욕의 지하철 그림들 등 다양한 시도를 해 봅니다. 그때 그려진 그림들 중 하나입니다. 지하철이라는 폐쇄적 공간을 평면적이고 냉소적으로 그려낸 초기 작품이지요. 작가는 인간 소외와 소통의 단절을 표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1930년대 다다이즘과 피카소의 그림이 유명하던 시절 마크 로스는 그리스비극, 니체의 비극, 셰익스피어 비극 등에 심취합니다. 한마디로 주류화풍과 거리 두기를 한 셈이지요. 대신 신화적 요소를 차용해 오기 시작합니다. 

 

 

전쟁이 잃어 난 후
절단된 신체 말고는 그릴 것이 없다.

 

 

 

마크 로스코<안티고네>,1941,그림출처:www. nga.gov

 

 

프로이트가 자신의 심리학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인물을 사용하듯, 마크 로스코 역시 초기에는 신화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표현합니다. 그런 자신을 '신화 제작자'라 칭하기도 했고요. 그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신화야 말로 모든 문화를 관통하며 인간의 본원적인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느낀 인간의 불행을 한 차원 높여 보편적인 불행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안티고네>를 통해 작가는 인간의 본원적인 비극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오이디푸스의 딸인 안티고네가 자신의 동생이자 반역자인 폴리네 이케스의 시신을 길거리에 방치하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땅에 묻어주는 모습에서 국가에 맞서는 개인의 고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2차 대전과 전쟁 직후에 그린 작품들은 상징적이며 그리스 신화나 기독교적 모티브에 기반을  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로스코는 순수추상회화로 옮겨가던 과도기 시절에 소위 '멀티폼(multiform)'이란 것을 만들어 냅니다. 기존의 그림들과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거지요. 멀티폼이라고 불리는 이 방식은 캔버스에 색 덩어리를 이용하여 공간과 색을 배치하는 방식입니다. 로스코는 자신이 평생을 염원해 온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 것이지요. 이러한 추상을 그리기 전, 그는 면의 크기와 색의 농도를 머릿속에 수없이 조합한 후 직관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에 비해 실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매우 짧았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해왔거든요.

 

 

<Untitled,1948>, 마르코 로스

 

 

<무제>를 살펴보면, 마치 색덩어리들만 뭉쳐있어 작가가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대부분의 초현실주의 작품에 해당하는 작품군들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이 시기부터 로스코는 존재하는 대상을 그리는 구상표현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작품을 보신 분들은 색이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것 같다고 표현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White Center(Yellow, Pink and Lanvender on Rose),1950, wikipidia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그린 황금기에는 색감의 시대에 비해 작품에 존재하는 색 덩어리의 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사각형 모양도 보이고요.  물 먹은 한지 위의 떠다니는 사각형처럼 말이죠. 그는 밑 칠을 하지 않는 '로우 캔버스'를 통해 색을 여러 번 덧칠하는 형식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림에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에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직도 관람객들은 어렵게 느껴지지만요. 실제로 그의 그림은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거대한 캔버스 안에 치열하게 놓인 색채들을 바라보면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림을 앞에 두면 너무 가까워서 놀랄지도 모릅니다. 커다란 캔버스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갖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그는 그런 방식으로 관람자가 작품과 교감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일부러 캔버스의 크기를 크게 만들기도 했고요. 큰 작품 안에서 자신을 찾고 싶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Seagram murals@tate london

 

 

이건...널 위로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야
벽에 거는 장식품이 아니라고...!!
-마크 로스코-

 

 

 

 

 

 

1958년 시그램 회사에서 마크 로스코에게 회사 신축 건물 1층에 있는 고급레스토랑에 위치할 벽화를 그려 줄 것을 부탁합니다.  30년 동안의 재정적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거액의 계약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스토랑에 방문한 후 마크 로스코는 고급스러움에 거부감을 느껴 결국 벽화를 그리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곳에 큰돈을 내고 레스토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돈을 거머쥘 기회를 자신의 그림에 대한 철학과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하였습니다. 미술품이 단지 장식품이 되는 것을 거부한 거지요. 이 일화는 그가 그림에 대해 어떠한 철학을 가졌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현재 영국 런던 테이트 컬렉션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앤디워홀, 리히텐슈타인 등 팝 아트가 트렌드일 때 로스코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유로움 대신 고상함을 택합니다. 

 

 

그림과 마주하라.

 

 

 

 

Rothko Chapel, 그림출처:Pinterest

 

 

 

나는 색채나 형태에는 관심이 없다.
비극, 아이러니, 운명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가진 것과 똑같은
종교적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 대한 철학이 잘 표현되는 것이 바로 로스코 채플입니다.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 위치한 공간으로 예배당에 잘 어울릴 만한 회화 연작을 부탁하였습니다. 1964년-1967까지 14개 이상 작품을 그리고 건축설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당시 로스코는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아침 6부터 마셔대는 술, 줄담배로 심장과 간질환이 있었고  두 번째 결혼한 아내와도 헤어진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 로스코의 힘듦이 고스란히 작품에도 투영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로 검은색 계열로 전성기 때 사용하 던 오렌지 같은 밝은 칼라 대신  어두운 색으로 표현합니다. 로스코는 그 채플을 갤러리이자 사람들의 영혼이 쉬어갈 수 있는 안식처로 탈바꿈해 놓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이런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듯 보이고요.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고 하니 말입니다. 

 

 

 

검게 칠한 캔버스 앞에서 그동안 살피지 못했던 '나'와 조우하게 합니다. 이것은 실랄한 민낯을 스스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묻어 둔 나의 속 이야기를  풀어헤쳐야 하고, 나의 존재론적 고민도 덤으로 하게 되는 것이지요. 못난 자신과의  용서와 화해의 작업을 원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스코의 작품을 바라보며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 신음, 고뇌를 꺼내어 울음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도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 비극적 감정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관람자가 그의 그림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고 깊숙한 내면을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이유에서 어떠한 조형적 묘사 없이 캔버스를 비워두고 대신 강렬한 색의 울림만을 담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IYXyyeGTs0

 

 

 

 

'피로 그린 그림'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제(레드)>로 마크 로스코가 죽기 전에 그렸다고 알려진 작품입니다. 실제로 이 그림을 본 제인 딜렌버거라는 미술사학자는 작품을 보자마자 캔버스에서 공포를 느끼고 마크 로스코를 잡아 줘야 한다고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 기울이지 않았고, 결국 마크 로스코는 10개월 뒤 작업실에서 숨을 거둔 상태로 발견됩니다. 실제 이 작품을 마주하면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운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붉은 나머지 생명이 아닌 오히려 죽음에 서서히 다가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죽기 전 마지막 해에 추상표현주의 작가 마크 로스코(1903-1970)에 집착했다는 얘기는 다들 알고 계시죠. 한 사람은 혁신적인 제품을 만드는 사업가이고, 또 한 사람은 한 세기의 예술 흐름을 바꾼 아티스트입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산 자'는 '죽은 자'의 예술혼과 철학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음이라는 큰 명제 앞에 스티브 잡스도 마크 로스코가 표현하고자 했던 자신을 만나는 작업을 하고 갔을 거라 추측해 봅니다.

 

 

그의 그림에서 나타난 표현의 단순화, 종교적 명상의 태도,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 등 로스코가 견지해 온 모든 사유의 편린들이 잡스의 마지막 순간들과 함께 했을 겁니다. IT 업계에 충격을 던져 준 잡스나 20세기 회화 표현에 혁명을 일으킨 로스코는 그렇게 반세기 차이로 비슷한 길을 걸었고 , 자신만의 사고를 개척했습니다. 스마트 폰을 통해 단순함이 주는 파급효과를 스티브 잡스는 살면서 보았지만 마크 로스코는 로스코 채플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70년 2월 25일 우울증이 심해지며 뉴욕 자신의 작업실에서 자살한 채로 발견됩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앤 컬쳐

 

 # 마크 로스코# 추상회화# 테이트 모던# 로스 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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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한 품종으로 남유럽 지방의 섬나라인 몰타가 원산인 소형견이다. (몰타섬) 지중해에 위치한 몰타에서 인위적인 교배가 아니라 자연 발생한 견종으로 보고 있다.

 

몰타섬, 사진출처:아주경제

 

기원전 1500년경, 페니키아인의 중계무역 장소였던 지중해의 몰타 섬에 유입된 개가 조상으로 여겨진다. 항해 중 선내의 쥐를 잡기 위해서 작지만 재빠르고 활동량이 많은 종으로 개량되었다.  기원전부터 로마나 그리스에서 귀부인들이 몰티즈를 길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애견화의 역사가 오래된 종이다.

 

 

 

 

말티즈 성견, 사진출처:나무위키

 

 

작은 체구와 깨끗해 보이는 하얀 털을 가진 귀여운 외모로 인기가 많다.

키: 수컷: 20-25cm 암컷: 20-23cm

몸무게: 4-7파운드(1.8-3.2kg) 사이, 6파운드(2.7kg) 미만 선호/미국애견협회(American Kennel Club)

            3-6kg 거대 몰티즈도 종종 보임

 

털이 가늘어서 일정 길이 이상으로 자라면 앞다리나 뒷다리의 사이 등, 마찰이 자주 일어나는 부위의 털이 잘 엉켜 관리하기가 까다롭다. 

 

 

 

활발하고 놀기를 좋아하며 주인에게 치대는 성향이 강하다. 눈치가 빨라서 주인의 마음을 민감하게 감지할 줄 알지만 한편으로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 어릴 때 엄격하게 훈련을 시켜 놓지 않으면 나중에 주인이 힘들어진다. 기본적으로 소형견들은 체구가 작은 만큼 쉽게 위협을 느끼고, 이로 인해 공격성이 높은 편이다. 특히 다른 동물에 대해 공격성과 질투심을 크게 표출하는데 다른 동물의 범위에는 개나 고양이뿐만 아니라 인간도 포함된다. 덩치가 작아 만만한 인간 아이들을 경쟁자로 생각하고 물거나 짖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호기심 및 공격성이 강해 낯선 사람과 마주치면 쫓아가서 미친 듯이 달려든다. 가게나 학원 같은 곳에 놓아둘 경우 늙어서 체력이 없거나 사람들을 많이 마주쳐 적응이 된 경우가 아니라면 들어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달려든다. 엄격하게 훈련을 시켜 놓지 않았거나 습관이 배지 않은 경우 행인에게 무조건 달려든다. 소형견이라도 산책 시 반드시 하네스를 착용하고 행인에게 달려들지 않도록 잘 컨트롤하고 훈련시키는 것이 필수다.

 

하네스(Harness): 로프에 몸을 고정하기 위해 착용하는 장비. 용도에 따라 패브릭이나 가죽 등의 벨트로 되어 있으며, 몸통이나 하반신, 허벅지같이 크고 널찍한 부위를 전체적으로 감싸는 형태로 되어 있다. 로프에 의해 몸에 가해지는 힘을 넓은 바위로 분산시켜 안정적으로 붙들기 위한 도구이다. 

 

타고난 공격 본능이 강해서 입질도 심하다. 물건을 물어뜯는 것도 문제지만 사람을 물기 때문에 몰티즈의 무는 습관은 반드시 철저히 교육해야 한다. 소형견 중에서 머즐(강아지 주둥이)이 큰 편이어서 악력이 강해 사람을 물면 상처가 생각보다 깊게 나고 대미지가 적지 않다. 

 

 

 

https://www.youtube.com/watch?v=9xFqDi0HOq8 

 

 

몰티즈는 행동이 매우 민첩한 편이기 때문에 소형견들과 비교해도 특히 활동량이 많은 축에 속한다. 또한 민첩한 행동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이나 개를 공격할 때 상대에게 공격하겠다는 시그널을 주지 않고 순간적으로 달려드는 경우가 있어 상당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왕성한 활동성에 비해 골격, 특히 슬개골이 약하기 때문에 슬개골 탈구나 골절 등이 고질적으로 나타난다.

 

 

 

 

 

어린 시절 스트레스, 억압 충격 등에 의해 성격 이상이 오는 경우가 다른 견종보다 많다. 특히 훈련을 잘 안 받으려 하고 훈련을 시키는 견주에게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많이 하고 주인은 주인대로 이런 몰티즈를 확실히 훈육시키기 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견주와 몰티즈 사이에 오해와 스트레스가 쌓여 아무리 말해 도 주인의 말을 절대 따르려 하지 않으며 고집을 피운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달성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인간의 중2병 성향과 유사하다고 보면 쉬울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xMdYicOUYw0

 

 

 

털 빠짐이 적고, 아파트 같은 주택 내에서도 비교적 키우기 수월하여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견종 1위에 올라있다. 그만큼 유기율도 높다는 얘기다. 슬개골이 좋지 않기 때문에 두 발로 서있거나, 격하게 뛰는 일이 많아 자칫하면 수술을 하게 될 수 도 있다. 그래서 높은 침대나 소파에서는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훈련시키고 애견용 계단 등을 놓아주어야 하며, 집에서 몰티즈가 자주 다니는 영역에는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아 주는 것도 방법이다. 또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잦은 편이라 방치하면 눈물자국이 쉽게 생기기 때문에 자주 닦아줘야 한다. 털은 매일 빗겨주고 샤워 주기는 2주 정도로 다른 강아지들과 비슷하게 하면 된다. 너무 예뻐하면 분리불안이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하라. 귀에 질병이 생길 수 있으니 털은 되도록이면 짧게 깎아주길 권한다. 아주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유루증, 눈곱, 눈물자국: 눈물관이 막힘으로 인해 눈물샘 넘침과 눈물자국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종인데 종 자체가 가진 유전병이라고 볼 수 있다. 무리한 소형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부작용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몰티즈 특유의 귀여운 외모는 유전병의 고통을 대가로 얻은 것이라고 해야 함이 옳을 듯싶다.

 

 

건강한 몰티즈를 맞이하고 싶다면 강아지 공장과 연결돼 있을 확률이 높은 큰 애견샵보다 가정분양을 알아보는 것이 좋다.  또한 부모견의 건강을 꼭 확인하고 데려오자. 부모견이 눈물이 많고 눈물자국이 있다면 강아지 또한 눈물이 많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눈곱은 눈곱 빗을 이용하거나 그것이 어려운 경우 물이나 물티슈를 이용해 닦아준다. 눈물자국에 효과가 있는 사료를 급여하는 방법도 있다. 눈 주변 털 길이가 길어지면 찔림 방지를 위해 가위 등으로 털을 잘라내줘야 한다. 심할 경우 동물병원에서 내안각성형술을 실시할 수도 있다.

 

 

#골격문제: 다리가 약해서 골절되기 쉽다. 종의 개량 탓에 나이 들어서 류머티즘염을 많이 앓으며, 이빨이 약해지거나 앞니가 빠지기도 한다. (6-7살) 몸집이 작아 유산할 위험이 있으니 특별히 더 조심했으면 좋겠다.

 

 

#기관지 협착증:숨 쉴 때마다 컥컥거리거나 호흡을 힘들어 할 수 도 있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거나 가루약 처방 혹은 기관지 모양을 잡아주는 관을 삽입하는 수술을 할 수도 있다. 2000년대 이후로 각종 기형을 가진 몰티즈들이 비약적으로 늘고 있다. 강아지 공장에서 무분별하게 번식한 개체에서 주로 이런 문제가 발생하며 대표적으로 사시를 들 수 있다. 양 눈동자가 바깥쪽으로 벌어져 초승달 형태의 흰자가 보이는 형태를 띠는 경우다. 상업적 애견 문화가 짧다 보니 과격함과 공격성을 가진 경우도 브리딩되는 경우가 많은데  브리딩 역사가 긴 독일의 경우 철저히 못하게 막는다고 한다. 

 

 

소형견이 겪을 수 있는 대부분의 질병에 모두 취약해서 키울 때 생각보다 애로 사항이 많을 수 있다. 개의 귀여움에 반해 무조건 데려오기 전에 견주의 준비도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입양하기 전에 견종 특유의 유전병에 대해 이해하고, 발병한 개도 끝까지 안고 갈 각오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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