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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국견

사냥개(과거)

프랑스 귀족 여성들에게 인기

하루 1회 이상 빗질은 필수, 털 빠짐이 적음

밝고 활발한 성격, 똑똑함(세계 천재견 순위 2위)

분리불안(주인을 잘 따름)

주인의 감정을 굉장히 많이 공유

노인들에게 남은 인생을 함께 하자는 의미의 개로 사랑받음

 

 

 

검은색 스탠다드푸들,위키피디아

 

 

 

푸들은 원래 양생물새 사냥에 활용되던 견종이다. 바베트(Barbet)라는 견종의 후손으로, 그 특성이 많이 남아 있다. 1743년부터 프랑스어로 바베트 암컷을 '카니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후 바베트와 카니쉬(푸들)가 따로 분리되었다.  다정하고 명랑하면서 충성심이 강한 성격 덕분에 최근 들어 반려견으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오리를 사냥하는 푸들, 위키피디아

 

 

 

전통적으로 푸들 중에 가장 큰 품종인 스탠다드 푸들은 특히 오리 사냥과 때로는 고지대 조류 사냥에 사용되었다. 푸들은 1990년대 초부터 캐나다와 미국에서 새 사냥에  적극 사용되었다. 사냥에 적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리한 작업 지능, 민첩한 수영을 할 수 있는 수영에 특화된 발, 습한 조건에서 점퍼처럼 작용하는 곱슬곱슬한 털 등이다. 19세기 후반에 서커스와 부유층의 지위 상징으로 주로 길러지다가 사냥에 사용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20세기에는 애완견으로 길러진다.

 

 

 

미국과 캐나다의 일부 사육자들은 푸들 중 새를 쫓는 개를 선택하여 교배시켜 사냥 본능을 되살리는 것을 성공시켰다. 이후 1996년 스탠다드 푸들을 사냥개로 인정하기 시작한다. 스탠다드 푸들은 문제를 독립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편이다. 주인 입장에서 새를 추적할 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야 한다.  경연 대회에서 개에게 작업을 시킬  때 특히 중요한 점이라고 한다. 훈련된 푸들은 총소리에 쉽게 겁을 내지 않는다. 트래이너는 견고하고 친절하며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 새를 사냥하도록 훈련시킬 때 주인이 너무 위압적으로 굴면 푸들이 전체 경험을 두려워하고 물이나 덤불 속으로 움직이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고 한다.

 

 

사냥개 푸들은 일반적으로 빠른 반사 신경를 가진 개로  쓰러진 새를 쫓고 새가 떨어진 곳을 기억하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며, 키가 큰 잔디에 숨어있는 새 냄새를 맡고 추적할 수 있는 코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고지대의 새를 사냥하는 데 능숙하다. 북미쪽은  일반적으로 개가 처음 사육된 기후와 달리 영 도시 이하로 내려갈 때가 많다. 푸들의 곱실거리는 털은 눈과 얼음으로부터 그들의 몸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미니어쳐 파티푸들(Pudel ZwergHarlekin,jpg),위키피디아

 

 

최근에는 미니어처 푸들도 사냥꾼 목록에 추가되기 시작했다. 미니어처 푸들의 작은 크기는 큰 리트리버가 할 수 없는 모서리와 덤불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푸들은 17세기부터 군대에서 일하는 개로 사용되어 왔다고 전한다. 총격을 무시할 수 있는 훈련을 받을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아주 지능적이고 훈련 가능한 성격과 총사냥개로서의 배경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역사 속에서 푸들을 아꼈던 군주들이 많다. 잉글랜드 내전 시기 라인 강의 루퍼트 왕자는 말을 타도 주인과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냥 푸들을 가져왔다. 보나파르트는 마 렝고 전투에서 주인의 몸과 함께 머물며 얼굴을 핥고 그를 다시 살려준 척탄병의 애완동물 푸들의 충실함에 대해 회곡록을 써 놓기도 했다.

 

 

 

마렝고 전투(Battle of Marengo,1800년 6월 14일):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알렉산드리아 도시 근교 남동쪽 5km 떨어진 마렝고 평원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프랑스군이 미하엘 폰 멜라스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격전 끝에 이를 물리치고 오스트리아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낸 전투. 이 전투의 승리로 나폴레옹은 파리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푸들은 활동적인 성향으로 산책을 많이 나가야 한다. 산책교육에서는 산책예절과 산책에서 주인을 따르는 법을 배운다. 또 푸들은 주인을 굉장히 잘 따르기 때문에 주인 외의 사람을 잘 대할 수 있는 사회성 교육이 필요하다. 강아지 유치원이나 펫 카페에 방문하는 등 다른 개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자주 주어야 한다.

 

 

 

푸들은 흰색, 검은색, 크림색, 살구색, 갈색, 회색이 대표적이며 그 이외에는 파란색, 은색 , 카레 오레 , 은색 베이지, 빨간색 등 다양한 색상을 가지고 있다. 푸들의 털은 곱슬곱슬하기 때문에 털이 엉키지 않도록 매일 빗질을 해주어야 한다. 털이 계속 자라기 때문에 미용은 필수이다. 푸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기 때문에 눈 주변의 털이 변색되는 눈물독이 생기지 않도록 케어해주어야 한다. 푸들은 얼굴털 관리가 중요하다. 얼굴털을 방치하면 얼굴에 염증이 생길 수 있다.  푸들의 털을 곱슬곱슬하게 만들어 주려면 3-4개월 때 배냇미용을 해 주는 것이 좋다. 0.5mm에서 2mm 사이로 깎아주는데 이렇게 배냇미용을 하고 난 후 털이 곱슬곱슬해진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지만 푸들의 곱슬곱슬한 털을 가지려면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푸들은 흐르는 눈물 과다로 인한 문제를 겪는 대표적인 견종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현재 시중에는 이미 다양한 제품이 나와 있으나 부작용이 야기되어 한약재를 활용하여 부작용이 없는 안전한 보조제를 개발하였다. 귀 감염은 모든 푸들 품종에서 문제가 된다. 귀의 문제는 귀관 내의 정기적으로 청소하고 털을 뽑는 등 적절한 귀 관리를 통해 최소화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9krnAQ5NUk

 

 

https://www.youtube.com/watch?v=zdY0_ZzMkGs

 

 

 

 

 

국제애견협회는 같은 종의 푸들이라는 종의 크기에 따른 차이로 스탠다드, 미디엄, 미니어처, 토이 네 가지를 규정한다.

 

 

푸들은 발바닥에서 어깨 높이를 측정한 체고 및 체중에 따라 스탠다드,미니어쳐, 토이 푸들로 나뉜다. 사진출처:국민일보

 

 

 

스탠더드 푸들 의 가장 심각한 건강문제는 애디슨병, GDV, 갑상선 문제, 기관파괴, 간질, 피지선염, 엉덩이 이상증, 암 등이다.  애디슨병은 초기 증상이 모호하고 다른 상태로 쉽게 오인되기 때문에 종종 진단되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 무기력, 빈번한 위장 장애 또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어할 때 검사를 받는 것이 좋다. 치명적인 나트륨, 칼륨 불균형을 유발할 수 있지만 조기에 잡아 평생 약물 치료를 받으면 대분분의 개는 비교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푸들은 무릎관절을 보호하는 슬개골 및 고관절 질환에 취약하다.  기르는 푸들이 절뚝거리거나 무릎을 펴기 어려워하고, 다리가 과도하게 안쪽으로 굽거나 밖으로 휜다면 수의사 진찰을 받아야 한다. 슬개골은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내부 관절을 보호하고 다리를 굽히고 펴는 근육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그런데 푸들 중에도 덩치가 작게 개량된 미니어처 푸들, 토이 푸들은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슬개골이 좌우로 탈골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탈모, 가려움증, 각질 생성에 시달리는 푸들이 많다. 이는 흔한 유전질환인 피지선염의 대표 증상이다. 피지선염은 피부를 통해 노폐물을 배출하는 구멍인 피지선에 생긴 염증을 가리킨다. 종종 음식물 알레르기로 오인되지만 피지선염은 선천적 유전질환이며 알려진 치료법은 없다고한다.

 

 

스탠더드푸들은 드물게 심장·뇌 관련 유전질환을 앓는다. 심방결손(ASD)은 심장에서 피가 머무는 부위인 심방에 구멍이 뚫리는 질환을 말한다.  그 구멍이 작으면 별다른 증상이 없지만 심할 경우 반려견이 기침, 호흡곤란, 주기적인 실신에 시달리고, 드물게는 심정지에 의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ASD는 심방의 구멍을 막는 외과적 수술로 치료할 수 있다.

 

 


발작을 동반하는 신생아뇌병증(NEWS)도 주의해야 한다. 스탠더드푸들 중에는 태어날 때부터 동작이 굼뜨고, 지능이 발달하지 않는 뇌병변이 발견되는 때도 있다고 한다. 대개 생후 4~5주에 증상이 드러나며, NEWS를 앓는 푸들은 발작을 겪고 걷고 서기 어렵다. 해당 질병은 치료법이 없기 때문에  심할 경우 인도적 안락사가 권고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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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방송에 한 저명 교수가  나와 풀어낸 썰이 하나 기억에 남아 담아 봅니다.

자신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 지?(50%)

어떤 부모아래 자랐는지?(30%)

개인의 노력 정도(10%)

행운(10%) 

 

한 개인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4가지를 설명한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보통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뭐라고, 개인의 노력 여부가 성공 요인의 10%밖에 안 된다고?' 처음에 의아했고 화도 났습니다. 학창 시절 자의든 타의든 가스라이팅 당해왔던 " 열심히 노력해야 성공한다."는 말은 어른들의 뻥이란 말인가! 싶어서였죠. 방송 내용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니,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입니다.

 

'지금 높은 자리 혹은 상당한 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뻐기지 말아라. 네가 잘 나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작용한 다른 요소가 그 자리에 너를 있게 한 것임을 잊지 마라.  그러니 매사에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겸손해라. 그렇지 않으면 가진 것, 높은 자리에 있는 그 자리에서 데구루루 굴러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런 식으로 나름 걸러 들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 중 상위 0.1%의 조건을 갖춘 토리 번치(Tory Burch)를 보면 이 이론이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났어요.(50%) 

부모님이 상류층 유대인이었고요.(30%)

본인의 노력(10%) 

행운(10%)

 

이 모두를 합친 값이 지금 토리 번치가 누리고 있는 성공의 비결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본인은 결사반대일 테지만요. 순전히 자신 만의 노력이었다고 우길 수도 있지요. 

 

 

 

Tory Burch, 나무위키

 

 

토리 버치(Tory Burch, 1966,6,17)는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 사교계 명사, 사업가입니다. 196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밸리 포지(Valley Forge) 태생이고요. 유대계 가정의 외동딸로 남자 형제 로버트, 제임스, 레오너드와 함께  목가적인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로 금융, 정보, 지식분야에 올인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죄인들이라는 원죄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민족입니다. 수세기에 걸쳐 미운털이 박힌 채 오랜 박해와 추방을 견디며 살아왔고요. 언제라도 살던 곳에서 쫓겨갈 수 있으니 위급할 때 몸에 지니고 도망가려면 머리에 넣고 갈 수 있는 전문지식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어머니 리바 로빈슨(Reva Robinson) 여사는 전직 배우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 스티브 맥퀸, 말론 브란도 등 톱 배우들과 염문을 뿌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버디(Buddy Robinson)는 유산으로 상당한 주식과 종이컵 제조 회사를 물려받은 부유한 투자 전문가였고요. 이브닝 재킷의 디테일을 직접 디자인하여 주문할 만큼 남다른 패션 감각을 지닌 신사였다고 해요. 아마 토리가 그런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혼 전에 그레이스 켈리(모라코 왕비)나 조안 베넷과 데이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리바 여사보다 14세 많은 버디는 2008년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5NkqJ7NwEqE

 

 

 

 

아녜스  어윈 스쿨 시절 테니스부 주장을 맡고 승마를 즐겼다고 해요. 1988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진학해 미술사를 전공합니다. 대학 시절 토리 버치는 재니스 조플린의 음악을 듣고 향을 피우며 그레이트풀  데드의 티셔츠를 입고 다니던 보헤미안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에르메스 스타일의 럭셔리 한 승마 룩으로 다니거나  프랑스나 이탈리아 여성들처럼 정성스럽게 주얼리로 장식을 했던 숙녀이기도 합니다. 

토리웨어(Tory wear)"라고 불릴 정도로 독특한 패션 센스를 지니고 있었고요.

 

 

대학 졸업 후 토리가 처음 얻은 직업은 유고슬라비아 출신 쿠튀르 디자이너 조란(Zoran)의 조수였습니다. 신비로운 분위기로 고객을 압도했 던 조란은 어머니 리바 여사의 단골 디자이너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토리는 디자인부터 홍보까지 모든 업무를 보조했다고 합니다.

 

 

이후 하퍼스 바자로 옮겨서 일하다가 폴로 랄프 로렌의 카피라이터가 되었습니다. 1995년, 랄프 로렌을 떠나 베라 왕의 홍보로 입사한 토리는 같은 건물에서 일하던 크리스토퍼 버치를 만나게 됩니다. 1997년 , 토리는 베라 왕의 대변인으로서 카레나 고어(Karenna Gore)의 결혼식이나 69회 아카데미 시상식 등 굵직한 이벤트에서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이며 주목받게 됩니다. 

 

2005년, '뉴 리테일 콘셉트'상 수상

2007년, '론칭 액세서리 브랜드상' 수상

2008년, '올해의 액세서리 디자이너상' 수상

2010년 포브스에서 세계에서 가장 파워풀한 여성

2011 글래머우먼 어워드(Glamour Woman of the year award) 수상

 

 

토리 버치는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기 전에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기로 결심했을 때, 업무 공간이 된 곳은 자신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 아파트 내부였다고 합니다. 뉴욕의 업타운에 속하는 이 지역은 부촌으로 한국의 강남이라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작은 팀과 함께 8개월간의 치밀한 준비를 거쳐 2004년 2월, 놀리타(NoLlta)의 엘리자베스 가(Elizabeth Street)에 첫 부티크를 오픈한 날, 상류 인사들과 패션계 거물들로 가게 안 거의 모든 물건이 품절되는 사태가 빚어졌다고 합니다. 이후 브랜드는 곧 미국 전역에 18개 의 프리 스탠딩 부티크를 오픈하는 저력을 발휘합니다. 미국의 주요 백화점에도 유통망을 확장시키고요. 토리의 라이프 스타일과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는 잡지와 신문에서 다양한 각도로 끊임없이 조명됩니다.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2005,4월, 오프라 윈프리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의 이 말 한마디로 미국 전역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토리버치의 웹사이트에 8만 명 넘게 접속을 했으니 말입니다.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고 하네요. 토리 버치 스타일은 "프레피-보헤미안 럭스(Preppy-bohemain luxe)"라는 말로 요약되는데, 엘리트적인 '프레피'와 60년대의 향수가 느껴지는 '보헤미안'이란 두 단어 속에 상류 사회의 일원이면서도 자유분방하고 소탈한 성품을 지닌 그녀의 라이프스타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토리의 패션은 "입기 쉽다(easy to wear)"는 것이 최고의 장점입니다. 정식 디자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노하우를 쌓았다고 합니다. 사진과 예술작품, 건축물, 프린트 등 영감이 될 만한 모든 이미지를 모아 자신만의 디자인 영감을 위한 책으로 만들었고요.  버치는 "패션을 전공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됐다"며 "일반적인 디자이너들이 생각하는 틀에서 벗어나 창조적이면서도 독특한 디자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토리 버치의 레트로 스타일부터 영감 받은 시그니쳐 룩에는 두터운 마니아층이 존재합니다. T로고가 새겨진 메달리온 장식 덕택에, 토리 버치의 액세서리는 쉽게 눈에 띄고요. 또한 토리 버치 의상과 액세서리는 직장인 여성부터 상류 사회 여성들, 사교계 인사들, 부유층 여성들이 다양하게 응용하여 입을 수 있도록 고안된 점이 특징입니다. 

 

 

사진출처: TORY BURCH/Mobile

 

 

 

미국의 저명한 경제지 포춘은 토리 버치의 히트 아이템 발레리나 플랫 슈즈 (리바 발레리나 플랫)를  캘빈 클라인의 브리프 팬티, 라코스테의 테니스 셔츠와 궤를 같이하는 히트 아이템으로 선정하기도 합니다. 버치는 기존  플랫슈즈가 우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편하고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착용감을 향상하기 위해 부드러운 가죽과 고무 밑창을 사용하고 뒤꿈치에는 고무밴드를 달았답니다. 소비자들은 고무밴드 덕에 맞춤 신발처럼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을 수 있었고요. 기존에 작은 리본 정도만 장식하던 발등 부분에 브랜드 로고를 메달 형태로 크게 부착해 개성도 살렸고요. 이 발레슈즈에 토리 버치는 엄마의 이름을 붙입니다. 그녀에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하고,  최고의 영감을 주는 근원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녀 엄마 역시 자신의 이름을 딴 신발로 이렇게 유명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합니다. 토리버치는 또한  티셔츠를  패션 아이템으로 승화시킨 몇 안 되는 리더들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토리버치는 품질이 훌륭하고
가치 있는
트렌디한 룩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정확히 이해하고
통찰하는 디자이너이다.


-론프 라시(Ron Frasch):삭스의 대표이자 CMO(chief merchandising officer)-

 

 

토리 버치는 여성들에게 소규모 사업 자금을 대출해 주고 기업가 자질에 대한 교육과 정보를 제공해 주는 멘토링을 목적으로 '토리버치 재단'을 설립합니다. 여성을 위한 그녀의 오랜 꿈이었다고 합니다. 버치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여성과 아이들을 돕는 재단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어떤 도움을 줬을 때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고민한 끝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재단을 만들게 됐다."라고 설명합니다. 토리 버치 재단은 악시온유에스에이(ACCION USA)와 파트너십을 체결해 1만 1000개 이상의 미국 내 작은 사업체에 500달러(약 57만 원)에서 5만 달러를 대출해주고 있다.

 

 

한 제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디자이너들의 숨은 이야기와 그들의 노고를 알게 되면 제품에 대한 친근감이 더해지지요. 그들의 가고자 하는  지향점을 알게 되면 내가 선택하는 물건에 한 번 더 신중을 기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녀는 럭셔리 브랜드도 다가가기 쉽고 편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사회적 책임 기업으로 거듭나고 싶어 합니다. 그녀의 소탈한 기업 정신이 싱글 맘이자 디자이너, 기업가로서 세 마리 토끼를 잡아가는 영향력 있는 슈퍼 개인으로 잘 무르익어 갈 수 있도록 지켜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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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파 인물들 속에 낯선 일본인 이름이 나와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떻게 그 시대 때 프랑스 파리까지 와 공부할 생각을 했던 걸까? 그의 지나 온 시간이 궁금해 들여다봅니다.

 

구글 일본지도

 

 

1886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후지타 쓰구아키라는 육군 군의총감의 자리까지  오른 군의관이었다.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현 쓰쿠바 대학 부속 소학교)와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 중학교(현 쓰쿠바 대학 부속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지타는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도쿄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Self-portrait of the artist with a cat>

 

피카소나 오드리 헵번 같은 유명인들이 고양이를 좋아한 것처럼 후지타 역시 고양이와 여자를 사랑한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고양이 그림은 생각보다 비싸다고 한다. 화가의 등에 장난치듯 올라 선 고양이의 자세가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 후지타의 영감을 생생하게 불어넣어을  지도 모를 일이다. 

국적을 굳이 따지지 않는 다면, 한국 개화기시절 책상 앞에 앉은 부잣집 도련님 같아 보인다. 공부를 마친 후지타는 결혼과 함께 신주쿠에 아틀리에를 차렸지만 곧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26살에 일본에는 일 년 전에 결혼한 부인을 홀로 남겨둔 채 말이다. 처음 유학을 떠날 당시에는 3년을 계획하였지만 파리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미술가를 무시하는 나라'인 일본에 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갓빠머리' 박태원 vs '갓빠머리'를 유행시킨 일본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 출처: 조선일보 DB, 위키피디아

 

일제 강점기 조선과 북한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이자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박태원의 머리스타일이다. 지금 보면 동그란 안경태에 다소 촌스럽기 짝이 없지만 당시 후지타 쓰구하루가 유행시킨 일명'갓빠머리'스타일이라고 한다. 서양물 먹고 돌아온 후지타가 긴자 거리를 유유히 걸어가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요즘 연예인 못지않은 패션 감각이었으리라. 그를 따라한 스타일이 유행을 할 정도였다니 말이다.

 

 

파리로 유학을 온 후지타는 4년 후 파리에서 각광받는 화가로 성장하며 20세기 초 유럽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일본 출신의 화가로 유명세를 탄다.  그는 파리  몽파르나스에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합니다. 1917년 6월 파리에서 고대하 던 그의 첫 개인전이 열립니다. 당시 수채화 110점이 모두 팔렸고 피카소가 이 전시를 3시간에 걸쳐 감상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로 인기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1919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한 여섯 점이 모두 입선되어 선배 화가인  마티스와 보나르 등과 같은 방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는 파리에서 리베라와 샤갈 등과 교류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예술의 세계를 넓혀갑니다.

 

 

 

 

2023.09.03 - [지식&교양] - 50-33.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Clemente Modigliani),31

 

50-33.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Clemente Modigliani),31

1. 들어가기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 36세 요절 유대인 잔 에뷔테른 콘스탄틴 브랑쿠시 2. 생애 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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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 [지식&교양] - 50-38.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33)

 

50-38.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33)

러시아식 이름 '모이셔 자하로비치 샤갈(Marc Zakharovich Chagall, 1887년 7월 7일 ~ 1985년 3월 28일)은 지금의 벨라루스(구 러시아)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화가이다. 그는 23살 프랑스를 처음 방문하고 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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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타 쓰구하루는 일본의 전통을 이어받아  선을 중시하는 동양의 화풍으로 서구적인 주제를 그렸습니다. 특히 삽화로 파리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당시 파리에서는 인상파들에 의해 일본판화인 우키요에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시기로 일본 출신인 후지타는 삽화로 단숨에 파리 화단에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됩니다.

 

우키요에: 17세기-20세기 초 일본 에도 시데에 성립한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 그린 풍속화의 형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본국에서의 송금이 끊겨 빈곤한 나날을 보내던 중 후지타는 프랑스인 모델 페르난드 바레이(Fernande Barrey)와 두 번째 결혼을 합니다.

 

 

 

 

 

<Deux Enfants,1918>, 그림출처: totally History

 

 

 

파리 이주 후 후지타가 그린 주제는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귀엽고 천진난만한 표정의 아이들이 아니라 어딘지 섬뜩하고 염세적이며 차가운 표정의 아이들입니다. 개인적으로 전쟁을 겪고 난 아이들이라서 그런 걸까요? 작은 입술만큼이나 표정도 새초롬한 것 같습니다. 어딘지 생기도 없어 보이고요. 피부가 너무 창백하게 보여 일본의 전통 공연 예술인 가부키 느낌도 들고요.

 

 

 

1921년 살롱 도톤에 '나부상'을 출품하여 '놀라운 유백색의 피부'라는 극찬을 받은 후지타는 여자의 누드, 고양이, 어린아이들을 즐겨 그립니다. 특히 후지타 특유의  은은한 광택과 미끄러질 듯한 피부 표현법은 지금도 놀랄 정도입니다. 촉촉하고 빛나는 피부를 뽐내는 그의 작품 속의 인물들은 그의 작품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시선을 고정시키게 만들 뿐만 아니라 경탄을 불러일으킬만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기법과 기묘한 구도와 형태로 사람들의 시선을 머물게 합니다. 하지만 그가 구사한 인물의 표현 방법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후지타는 자신의 캔버스나 재료를 공개하지 않았고 자신만이 가능한 기법을 숨긴 채 떠났습니다.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는 등 화가로서 성공하기 시작한 후지타는 192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습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나폴레옹이 1802년에 제정한 훈장으로서 프랑스의 훈장 중 가장 명예롭다.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발전에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
훈장 수훈자는 각종 국가적 행사에서 특별한 예우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후 후지타는 1933년 일본으로 돌아가 파리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일본의 화단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합니다. 

 

 

후지타 쓰구하루가 활동하던 20세기 초, 1939년 일어난 제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참혹했던 전쟁으로 기억됩니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주요 3국 중 하나였고요. 전쟁 시 일본의 미술가들은 다양한 형태로 전쟁에 협력을 했습니다. 파시즘체제 아래 권력을 옹호하거나 민중을 선동했고, 종군기록화를 제작함으로써 실제 전투장면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하면서 15년간의 전쟁 속의 미술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잊혀 갔습니다. 사실 일본인들에게 전쟁 책임의 문제와 패전에 대한 논의는 금단의 영역이었을 것입니다. 후지타 쓰구하루 역시 미술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일본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화가입니다. 왜냐하면 종군화가로 전쟁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는 사실 때문이죠.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종전 후 전쟁 협력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여론의 호된 비판을 견디지 못한 후지타는 파리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는 1955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고 1959년 아내와 함께  가톨릭 세례를 받습니다. 이름을 레오나르 후지타로 개명하고요. 

 

 

 

 

오구리 코헤이 감독의 10년만의 복귀작 [FOUJITA], 후지타 쓰구하루의 반생을 그린 작품

 

 

 

 

1968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망하고 그의 시신은 일본이 아닌  파리 교외에 묻힙니다.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의 생애는 일본의 근대상과 참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후지타는 서양화를 본토에서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 후 일본적인 요소를 적극 활용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서구를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근대 일본, 전통에 대한 추구를 통해 서구와의 차이를 강조하려 했던 근대 일본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후, 패전 이후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자리에선 자신 역시 전쟁의 피해자임을 역설했던 근대국가 일본의 모습과 스스로 지지하며 그렸던 전쟁화에 대한 비난을 자신이 희생양이 된 듯 그려낸 후지타의 말년의 작품들이 소리 없이 겹쳐집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 앤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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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즈 슬링(Moise Kisling, 1891-1953)은 폴란드 남부 마우폴스카 주의 크라코프에서 출생한 유대계 화가이다.

사진출처: 신발끈여행사
폴란드의 행정구역, 사진출처:위키백과

 

 

크라코프 미술 아카데미에서 요세프 판키에비치(Jozef Pankiewicz)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를 통해 인상주의, 특히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와 에두아르 뷔야르(Jean-Edouard Vuillard)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키슬링이 처음 파리를 찾은 것은 1910년 그의 나이 19살 때였다. 동급생 대분이 빈이나 뮌헨으로의 유학을 목표로 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키슬링만 스승의 가르침을 지켜 세잔과 르누아르의 나라 프랑스로 향했다. 이미 인상파는 과거의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당시 파리 젊은 이들은 "입체파"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 미학의 주도자 격인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등과 친해져, 자주 제작을 함께 할 기회도 가졌다고 한다. 

 

 

 

<Still life with fruit, 1913>,그림출처: Wahoo Art.

 

 

세잔의 느낌도 나고 피카소의 입체파 영향도 받은 느낌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그림이다."

이것저것 후배의 그림에 훈수를 두려 하는 피카소에게 젊은 키슬링이 반론을 제기하며 자신의 그림에

자부심을 드러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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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슬링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외인부대에 자원하여 입대했고, 1915년 프랑스 솜전투(Battle of the Somme)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하게 된다. 전장에서 돌아온 키슬링은 몽파르나스에 거주하면서 당대 예술가들과 다양한 교류를 했다. 특히 20세기 초 파리로 모여든 동유럽 출신의 미술가 및 유대인 미술가들과 함께 모여 에콜 드 파리(파리파)를 결성했다. 한마디로 에콜 드 파리(파리파)는 같은 이념이나 양식, 명확한 계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 폴란드 등으로부터 예술의 도시 파리를 동경해 타국으로부터 모여 온 예술가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그는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파리파)의 대표 화가였으며 초상화와 정물화에 능했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줄스 파스킨(Jules Pascin), 리투아니아의 생 수틴(Chaim Soutine), 옛 러시아의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이탈리아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파리에서 가난하고 비참하게 생활하면서도 각자의 민족적 자질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특징을 보인다.

 

 

 

 

Portrait of Moise Kisling, Amedeo Modigliani, 위키피디아

 

 

실물은 훨씬 귀여워 보이던데 모딜리아니가 그린 친구 키슬링은 각이 지고 강해 보여 살짝 무섭게 보인다.

모딜리아니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그는 가난하고 병든 그를 자신의 아틀리에로 맞이했으며, 그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기도 했다. 키슬링은 1919년 개인전을 통해 호평을 받고 이후 화가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다. 그의 작품들을 크게 분류한다면  초상화, 정물화, 그리고 여성 누드화이다. 그는 현대 미술 운동의 요소들을 자신의 그림에 적극 받아들여 매혹적인 방법으로 그것들을 소화해 내고 적용했다. 

 

 

 

폴 세잔(Paul Cezanne)과 드랭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정물화와 풍경화는 엄격한 구성에 입체파의 대담한 기하학적 형태와 풍부한 색채감으로 추상적인 완벽함은 물론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보여준다. 정물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장면의 본질을 포착하려 노력했으며 이 독특함은 그의 초상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색깔은 선명하고 붓놀림은 거침이 없다. 천부적으로 쾌활하고 열린 마음인 그는 많은 친구들을 얻었고, 파리의 밤 축제에서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결혼한 그의 아내 르네는 종종 남편의 모델이 되어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해와 신뢰로 가득 찬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결말이 비극적이었던 친구화가 모딜리아니에 비하면 드물게 '축복받은 화가'아닌가 싶다.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Potrait of Madame Renee Kisling>, Allpainter Onlin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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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슬링은 무엇보다도 이국적이고  관능미에 찬 나부상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대한 단순하게 생략된 배경에 우울한 표정의 여인들이 담긴 초상화와 누드화는 파리파의 근저에 깔려있는 감성과 표현주의적 경향을 자세히 드러내 준다. 얼굴보다 아이라인이 커다란 눈이 먼저 시선을 잡는다. 크고 아몬드 모양을 하고 있어 마치 인형 눈인가 착각이 들정도다. 빛의 부드러움과 모든 디테일의 정밀함이 모델의 눈을   초현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 같다. 그의 전체 작품 중 3분의 1은 초상화이다. 그가 이 카테고리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은 키슬링의 여성 편향적 성향과 애수 어린 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소재이기도 했다.

 

<Nu sur un divan noir>,1913, 위키피디아

 

 

위에서 모델을 내려다보는 듯한 이 그림은 세잔의 영향과 놀랄만한 견고성과 공간의 깊이를 형성하는 처리 기술을 보여준다. 복잡한 형태를 다룰 줄 아는 성숙한 예술가의 솜씨라고나 할까. 1913년 파리로 돌아오면서 키슬링은 몽파르나스에 있는 조제프-바라 거리 3번지의 스튜디오로 이사했는데, 이 작품이 아마도 그 곳에서 그려지지 않았나 전문가들은 추측한다. 그가 파리 비평가들과 수집가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부터라서 말이다.

 

 

<KiKi de Montparnasse in a red Jumper and a blue scarf,1925>, Mutual Art.

 

 

 

1925년 완성된 키슬링의 <몽파르나스의 키키>의 주인공, 앨리스 프린(Alice Prin)통칭 키키라고 하는 모델이다. 그녀는  프랑스의 시골마을 부르고뉴(Bourgogne) 태생으로 몽파르나스 부근에서 키슬링을 비롯한 슈틴, 후지타 쓰구하루, 등 에꼴 드 파리의 화가들이 경쟁적으로 그녀를 모델 삼아 20세기 가장 많은 화가들에 의해서 그려진 모델이라 전해지고 있다. 당시 몽파르나스 주변에 거주하고 있던 가난한 화가의 모델을 주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키슬링, 드랭, 피카소, 후지타 등 의 모델로서 또는 몽파르나스의 카페에 모인 예술가들의 여왕으로 군림하면서 키슬링은 100장 이상의 키키의 초상을 그렸다. 그녀를 그린 그림은 파리의 거리에서 대호평으로 이어졌다. 

 

 

키슬링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불안한 시대 배경 속에서 술이나 마약에 빠지거나 야단법석 파티를 일삼는 가운데 일찍부터 화가로서 성공한 '축복받은 화가'로 불리고 있었다. 에콜 드 파리의 화가답게 누구를 추종하는 것이 아닌 빛나는 색채로, 정물, 풍경, 초상화 등 독자적인 작품을 그려냈다. 

 

 

 

<Portrait De Femme>, 그림출처: Paintingstar.com

 

 

개인적으로 묘한 분위기의 검은 머리의 이 소녀가  내 시선을 잡아 끈다. 애수에 찬 저 눈빛, 그렁그렁한 그래서 또르르 곧 쏟아질 것만 같은 저 아이의 눈, 아이의 눈을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니 그녀의 속사정을 왠지 침묵하며 들어줘야 할 것만 같다. 미국의 여성화가 마가렛 킨(Margaret Keane,1927~ )의 <빅 아이즈> 작품 속 눈 큰 아이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업 수완이 좋았던 두 번째 남편 월터의 유령화가로 존재하다 법정에서 그림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마가렛 킨이 그려낸 눈 큰 아이와 참 많이 닮아있다. 키슬링이 먼저 태어났지만 말이다.

 

 

<빅아이즈>, 다음영화

 

 

 

 

 

 

키슬링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잠시 미국으로 가서 미술학교 교수로도 있었으나, 전쟁이 끝난 1946년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1953년  4월 29일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스-코트다쥐르(Provence-Alpes-Cote d Azur)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의 상당 부분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스위스 아비뇽 프티 팔레 미술관(Musee du Petit Palais)에 소장되어 있다. 모이즈 키슬링이 살았던 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그의 두 아들 중 작은 아들 장(Jean)은 파리에 살며 그의 아버지의 작품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한다.

 

 

 

#모이즈 키슬링# 마가렛 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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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머리와 박쥐처럼 생긴 귀가 특징인 불도그는 털이 짧고 부드러우며 광택이 있다. 몸빛은 흰색  또는 검은색이 대부분이다. 통나무 같은 몸배에 근육형, 각진 얼굴에 납작한 코와 쭈글쭈글한 주름이 언뜻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표정이 풍부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H6FC_uXs

강형욱의tv-프렌치 불독편

 

 

2022년 아메리카켄넬클럽(AKC)의 반려견 통계에 의하면 30년 이상 가장 인기 있었던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제치고 프렌치 불도그가 가장 인기 있는 반려견 순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AKC 측은 프렌치불도그는 작고 똑똑한 견종으로 1인 가구부터 대가족까지 두루 사랑을 받아왔다고 전한다. 또 잘 짖지 않고 자주 운동시키지 않아도 되므로 도시에서 키우기 쉬운 견종으로 뽑힌다. 다만, 이 견종은 좁은 콧구멍과 작은 기도를 가진 납작한 얼굴로 호흡 기능 문제 나 특정한 건강문제가 발생하기 쉽다고 말한다.

 

 

 

호흡기로 인한 고통이 시작되는 시기가 세 살 무렵이기 때문에 그전에 변화 추이를 유심히 살펴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사람도 코가 막히면 숨을 쉬기 어려워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불독같은 단두종 강아지는 평생 답답한 상태로 살아야 할 수도 있으니 꾸준히 신경 쓰고 관리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키우는 반려견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 줄 수 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 이차적인 기관 협착이나 후두 부분, 만성 기관지염 등을 유발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3차적인 심장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하체도 약한 편이라 조금만 먹이고 간식을 서 너 번 소량 으로 나눠 주며 는 조절 해주는 게 좋다. 

 

프렌치 불독은 영국이 원산인 불도그가 프랑스로 유입된 후, 1860년대에 개량되면서 탄생한 견종이다. 19세기 산업화의 여파로 일자리를 잃은 영국인들이 프랑스 노르망디로 이주하는 붐이 일었을 때 불도그가 프랑스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프랑스인들에 의해 다른 종과 교배되었는데 특히 프랑스 토종 테리어와 많이 교배가 이루어졌고 퍼그와도 교배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19세기말 이 견종이 미국으로 전래된 이후 다른 나라에도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깨높이 30cm,

몸무게 10-13kg 

 

 

성격은 활달하고 명랑하며 믿음직스러워 아이들의 친구로서 좋으며 집 지키는 개로서도 적당하다. 심지어 집에 침입한 양생곰을 퇴치하기도 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대중매체를 통해 본 것 같다. 그들의 조상이 소와 싸운 적이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전해진다.  원래 투견이었던 불도그를 소형화하여 개량했기 때문에 온순해졌지만 공격적인 본능이 아직 남아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프렌치 불도그를 맹견으로 분류해 사람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자치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이가 프렌치 불도그를 데리고 공원 산책을 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대체로 온순하고 애교가 있지만 말이다.  특히 어릴 때 혼자 두는 빈도가 높아질수록 즉 분리불안을 느끼면 공격성이 놓아진다고 한다. 이 경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막으면 사물 등을 물거나 시끄럽게 짖는다. 

 

 

영국산 불도그의 피를 이어받아 근친혼 등을 통해 인위적으로 개량된 품종이기 때문에 건강과 관련해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비극적인 품종이기도 하다.  마치 스페인 왕실의  근친혼으로 인한 주걱턱이 길어지는 삶을 살았던  그들처럼 말이다.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적 결함 때문에 암을 비롯하여 유전적 원인에 의한 질환에 걸리기 쉽다. 척추 기형 등 척추 질환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불도그는 신체 구조상 스스로 교미와 출산이 불가능하다. 인위적인 시술 없이 번식과 생존이 불가능한 동물이 과연 정상적인 종인지에 대한 비판도 나오는 품종이다. 차라리 족보 없는 시골 강아지가 국제 인증서를 갖고 있는 순종보다 더 개답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너무 심한 개량으로 다양한 질병에 노출되어 있어 다른 중형견에 비해 생애 주기가 짧은 편이라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하다. 사람의 욕심으로 인해 불도그의 일상생활이 불편하다니 마음 한편이 불편해진다. 아이러니하게  인간에 의한 개량이 더 많아질수록  사람들에게 인기가 더 많다고 한다.

 

 

불도그는 머리가 매우 크기 때문에 자연분만으로 출산을 하면 새끼가 어미 개의 골반에 껴 질식으로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어미 개의 건강에도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80-90%는 제왕절개를 통해 출산을 하고 있다. 아래턱 돌출로 음식을 씹기 힘들고 침 흐림도 심한 편이다. 

 

 

얼굴에 주름이 많고 침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주름 사이나 입 주위에 세균 감염이 일어나기 쉽다.  아가들 손수건이라도 목에 매 줘야 할 정도로 침을 많이 흘리는 종이다. 주름 사이와 입 주변 청결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써야 하며 소홀히 했을 경우 쉽게 피부병에 걸린다. 잦은 목욕도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다. 일주일에 한 번 목욕은 필수이고 한 달에 한 번은 미용실에 데려가 정돈을 해줄 필요가 있다고 한다.

 

 

눈이 많이 돌출되어 있기 때문에 각막염 등 각종 안과 질환에 걸리기 쉽다. 호흡이 곤란하기 때문에 잘 때 코를 많이 고는 견종이다. 뿡뿡거리며 방귀도 많이 뀌는 편이다. 더불어 입을 벌려 숨을 쉬는 행동 때문에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자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견종이다.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니 프렌치불독 키우시는 분들은  이 점 유의하셔서  반려견이 외롭지 않게 애정 표현 많이 해 주시고 잘 놀아 주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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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식 이름 '모이셔 자하로비치 샤갈(Marc Zakharovich Chagall, 1887년 7월 7일 ~ 1985년 3월 28일)은  지금의 벨라루스(구 러시아)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화가이다.  그는 23살 프랑스를 처음 방문하고 프랑스식 이름 마르크 샤갈(Marc Chagall)로 이름을 바꾼다.  생몰연대를 보면  보기 드물게 장수한 화가이다.  그의 사후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서 자신의 나라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서로 주장하기도 했던 화가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태어난

러시아에서 (1906-1910/ 1914-1922(8년),

프랑스(파리)에서 [1910-1914, 4년 /1922-1941,19년/ 프로방스 1948-1985,37년]: 총 60년, 샤갈의 무덤

미국(1941-1948, 4년)

그가  젊은 시절을 유학을 하고 사랑하는 연인 벨라와 어린 딸이다와 같이 행복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며 자신의 마지막 순간도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에서 숨을 거둔지라 이만하면 프랑스의 깃발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듯싶다. 

 

 

아버지는 청어 생선가게 종업원, 어머니는 야채가게 종업원으로  9형제 중 장남, 그것도 유럽에서 2등 시민 취급받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1906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자 예술의 중심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가게 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통행증이 없으면,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으므로 유명한 예술학교들이 즐비했지만 샤갈에게 그림의 떡인 셈이었다. 샤갈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정규교육조차 받기 어려운 10대 시절을 보낸 셈이다. 그는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어서  친구에게 임시통행증을 얻어 그곳 명문 예술학교에 등록해 2년 동안 초상화와 풍경화를 그렸다. 짜반체바 미술 학교(1908-1910)에서  '레옹 박스트'라는 유대인이며 장식예술 디자이너이자 유명한 발레 무대배경과 의상 디자이너였던 그를 롤모델 삼아  성공하고 싶어 했다. 샤갈의 그림을 본 레옹 박스트는 마치 색채가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색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다. 실험극장과 폴 고갱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며  러시아 출신 유태인 변호사  막심 리버의 후원으로 23살 프랑스 파리로 미술 공부를 하러 드디어  떠나게 된다.

 

I

<I and the Village>, Wikipedia

 

후원자의 도움으로 동경해 오던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로 건너왔다.   하지만 언어가 수월하지 않으니 답답하고, 자고 나면 낯선 이국의 자연환경이 '어쩌다 내가 이곳에 와 이 고생인가?'싶은 소외된 샤갈의 시선이 향수병으로 커지게 된다.
이민자들이나 유학생들이라면 샤갈의 마음 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는다. 후원받아 겨우겨우 온 주제에 마음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밤이 되면 두고 온 고향이 그립고 가족이 보고 싶다.  사람들마다 풀어 가는 방식이 다 다를 테지만 샤갈은 꿈속에서나마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꿈을 꿀 때  그리운 고향의 풍경과 가족들의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그림으로 얼른 옮기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머릿속 생각이 손가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메모를 하듯이 말이다.

 

 

샤갈의 작품 대부분은 그가  어떤 감정, 어떤 추억을 기억에 담아 내려 했을 지 그의 입장에서 감상하면 오히려 쉬울 수 있다.   <나와 마을> 작품은 24살에 그려진 작품으로 엄청난 화제작이었다.  당시 피카소의 큐비즘과 야수파 마티스의 영향을 샤갈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해  그려낸 작품이다. 두 사조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지만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낸다. 실제로 샤갈은 어느 유파에도 속한 적이 없다. 모딜리아니처럼 말이다. 언뜻 보면 아이들 그림 동화 속 삽화인가 싶을 정도로 보는 이들은 초현실주의 느낌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샤갈 자신은 초현실주의 작가로 불리는 걸 극도로 싫어했지만 말이다.

 

 

저는  오직 제 경험과 추억만을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염소와 초록색 어린 소년이 교감하듯 서로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다.  염소 젖을 짜는 여인이 등장하고, 일터로 가는 듯한 남성, 뒤집어진 집과 엄마인 듯한 여성, 늘 다니던 유대교 사원 등 두고 온 고향 가족들의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 샤갈이 주로 쓰고 있는 빨간색은 고향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나타내거나 유대인에 대한 형제애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파란색은 자유의 상징으로 노란색과 초록색은 기쁨과 평화의 상징으로 쓰고 있다. 일례로 샤갈이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던 1937년 제작된 작품들은 유난히 빨간색, 파란색, 흰색이 많았다고 전한다.  전문가들은 샤갈이 파리에 머물던 5년 동안 이미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한 것으로 보았고 나머지 80년 동안 반복한 사람으로 그를 이해했다. 

 

 

 

 

마티스 이후
진정 색채가 무엇인지
이해한 화가는
샤갈뿐이다.
- 파블로 피카소-

 

 

<생일(The Birthday),1915>,구글아트앤컬쳐

 

 

샤갈이 사랑하는 여인 벨라 로젠펠트가  꽃을 들고 작업실을 찾아왔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당신 생일이잖아요."

 

자신의 생일도 잊은 채 그림을 그리는 샤갈!

꽃을 들고 축하해 주러 온 벨라의 모습이 샤갈 눈에 얼마나 사랑스러웠겠는가!

 

"잠깐만~"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보답으로 당시의 기쁨을 작업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모습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샤갈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공중부양 할 수 있는 장면이다. 현실에서 불가능 한 자세로 입맞춤하는 장면이 샤갈의 마음상태라서 가능한 것일 테니 눈감아 주시라. 

 

<벨라 샤갈>,위키피디아

 

 

마치 거인의 모습으로 그려진 샤갈의 영원한 뮤즈 첫 번째 아내 벨라 로젠펠트(Bella Rosenfeld: 1895-1944)이다.  그녀는 러시아 출신 유태인이며 보석 도매업을 해 부를 쌓은 부모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다. 샤갈과는  8살 나이 차이가 나고,

첫 만남은 14살 (샤갈22세)로 작가 지망생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도 내 것이었다.
부모님, 내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닭 살 돋는 내용이긴 하다. 서로가 첫눈에 반해 장거리 연애를 했던 두 사람이다. 샤갈이 파리에서 유학할 당시 그녀가 보고 싶어 상사병에 걸릴 정도였다고 한다. 귀하게 기른 딸을 가난뱅이 화가에게 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벨라 부모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고  샤갈이 유명세를 치르고도 한참 이어졌으며 오랜 설득 끝에 둘을 결혼하고 딸이다를 출생한다.  사랑과 행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듯한 샤갈의 삶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로 인해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게 된다. 게다가 볼셰비키 혁명까지 일어나게 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전쟁이 나면 유럽 역사속 희생양은 항상 유태인이었다. 샤갈은 아내와 딸이 계속 차별을 받을 것이 뻔한 러시아 고향 마을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다. 이미 성공한 화가였기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서의 생활은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샤갈 생애의 가족과 함께 보낸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록  유럽 상황은 세계대전으로 뒤숭숭했지만 말이다.  

 

<에펠탑과 신랑신부,1939>,구글아트앤 컬쳐

 

 

에펠탑아래에  이제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수탉을 타고 하늘을 비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러시아를 떠나 오랫동안 방황하던 그가 파리를 창작의 안식처이자 마음의 고향으로 삼은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뒷쪽으로 유태인 전통 결혼식 장면이 그려져 있고 , 고향 마을 비테스크브르크,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  악기로 변신한 염소, 거꾸로 그려진 세 개의 촛대, 수탉 등은 유대교의 상징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유대인 결혼식, 장례식에  빠지지 않는 악기가 바이올린이라고 한다. 닭은 자기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림 속 닭은 샤갈 자신이란 이야기가 된다. 

 

 

샤갈 그림의 평생 화두는 신, 고향마을, 그리고 아내 벨라였다. 아내를 너무나 사랑한 샤갈 이다. 하지만 1941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33년 나치 당원들이 샤갈의 작품을 다른 '퇴폐예술'과 함께 불태워버린다. 아돌프 히틀러가 프랑스까지 점령하자  홀로코스트를 피해 1941년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잠깐 피하려고 들른 뉴욕에서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벨라가 감염이 되고 전쟁 중이라 약을 구하기 어려워  아내를 떠나보내게 된다. 스페인 독감으로 이른 나이 사망한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도 비슷한 상황으로 알고 있다. 아내를 잃고 벽에 걸린 벨라의 그림을 모두 돌려놓을 정도로 폐인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딸이다의 위로와 제안으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잔뜩 담아 서 말이다. 

 

 

<하얀 십자가(1938)>,출처: 서울신문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칭을 지닌 샤갈이 최대한 색을 절제하며 쓴 작품이다. 나치 치하의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예수나 십자가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다.' 라는 메시지로  세계인들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하얀 십자가>는 샤갈 자신이 겪은 1925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공산 혁명과 1938년 나치의 수정같이 빛나는 밤의 공격사건 두 가지를 한 화면에 담아낸 그림이다.  정 중앙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가시관 대신 두건을 하의를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두르는 흰색과 검은색 숄로 가리고 있다. 발아래 놓인 촛대, 무서워 떨고 있는 아이와 엄마, 붙타는 토라(유대인의 율법책), 불타는 유대교 회당에 나치 완장을 한 군인이 들어가고 있고 회당 윗편에 이미 독일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왼쪽 편을 보면 너무  급하게 나와 신발도 한쪽만 신고 나온 인물, 마을이 불타고 이미 죽은 사람, 죽은 가족을 끌어안고 슬퍼하는 모습, 겨우 탈출했지만 노가 하나밖에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늘을 향해  그저 기도밖에 할 수 없는 배안의 사람들, 붉은 기로 무장하고 칼 들고 달려오는 저들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가 없다.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머리 위의 그들의 선조들이 울고 있다.  샤갈의  이 작품 덕분에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이 많이 수그러진 것도 사실이다.

 

 

 

 

예술에도,
삶에도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색깔은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사랑의 색이다. 

 

 

 

두 번째 연인이었던 버지니아  맥닐과 7년동안 결혼하지 않고 살았지만 죽은 벨라를 잊지 못하는 샤갈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어린 아들을 데리고 그를 떠난다.  딸이다의 소개로 1952년 바바 브로드스키를 만나 세 번째 결혼을 하고 프로방스에서 98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앤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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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오렌지 컬러와 로고! 

아들과 뉴욕  여행길에서 밤거리를 거닐다 나도 모르게  멈추고 찰칵했다.

 

'역시 뭐가 달라도 달라.'

 

보면서 들었 던 생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_lBQ5cxWQPk

 

 

개인적으로 에르메스의 스카프 라인을 좋아한다. 특히  실크 소재로 사이즈가   가장 큰 것으로 말이다. 펼쳐놓고 보면 한 폭의 그림 같은 느낌이 고급스러움을 넘어 한 땀 한 땀 작가의 정성이 눈으로 먼저 읽힌다. 베이직한 옷이 대부분이라 포인트 주기 좋고, 흰색 셔츠 같은  정장차림에도 어울리고, 살짝 세미 케쥬얼로 무게 중심을 잡을 때 도 효과 만점이다.  케쥬얼 차림이라면 믹스 매치해 입어  감각을 뽐낼 수 도 있으니 두루두루 뽕 뽑는 아이템이라 가성비 갑이다. 아직  작품 같은 스카프를 자연스럽게 두를 자격은 안되고  이쯤 되면 하나 가져도 되겠다 싶을 때  내 분위기와 딱 떨어지는 것으로 고를 기회가 주어지 길 희망 해 볼 뿐이다.

 

 

 

 

 

www.hermes.com 1945년부터 사용되는 에르메스 심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Hermes)는 여행자, 목동 , 발명, 상업, 그리고 도둑과 거짓말쟁이의 교활함을 주관하는 신이며, 주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전령 역할을 한다. 뛰어난 정보꾼이고, 젊은 미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언변 좋은 꾀돌이, 또는 떠돌이들의 수호신 등등 여러모로 현대에도 인기가 많은 신이다.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특별한 날 공짜선물을 받고 싶어 한다. 특히 사랑하는 남편이나 연인이 명품 선물을 한다면 오렌지 칼라에 에르메스 심볼로고가 새겨진 이 브랜드를 NO. 1로 꿈꿔보지 않을까 싶다.  마치 돈과 힘을 소유한 백마 탄 왕자님이 자신에게 나타나 준 것 같은 착각을 주기  딱 좋은 브랜드로 이 로고 만큼 심쿵한 것이 있을 까싶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바꾼다.

-티에리 에르메스(Thierry Hermes)

 

 

 

에르메스는 지금도 최고의 사람들이 , 최상의 재료로, 최고의 방법을 동원해,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모인 팀으로 알려져 있다. 그야말로 명품  중의 명품이라 별칭을 지닌 '에르메스'다. 모든 브랜드에는 경쟁기업과 상품, 서비스의 차별화를 위해서 또 자사의 철학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심벌, 로고를 갖고 있다. 



창립초기인 1800년대 주요 운송, 이동수단인 말을 위해서 말과 관련된 마구 용품과 안장을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가방이나 지갑과 같은 제품들을 추가하게 되었고 마차 모양 로고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러한 역사에서 기원한다. 제품을 구매할 능력이 있다고 해도 제품을 구경하거나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한정적인 브랜드다. 그래서 더 구경하고 싶고, 구매하길 희망하는 패션 명품 브랜드이다. 

 

 

 

에르메스는  많은 명품브랜드들이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수합병되고 대기업으로 그룹화된 것과   다르게, 아직 가족 경영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에르메스 가문이 지분의 73.7%가량을 , 루이비통을 소유한 LVMH와  일반인들이 나머지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가죽제품을 비롯해 의류, 시계, 스카프, 향수 등 16개 제품군을 생산하지만 가죽제품이 전체 매출의 50%를 차지한다.  루이뷔통, 샤넬과 함께 3대 명품으로 불리지만 그중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도 가족경영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사륜마차는 '뒤끄'라는 이름의 고급마차로 에르메스와 고객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아한  디자인의 마차와 새롭게 단장한 말과 빛나는 마구, 말  앞에 서 있는 마부는 고객을 기다리는 에르메스를 형상화한 것이다. 에르메스가 오렌지색 심벌 로고 칼라를 채택한 배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해 염료가 부족했던 시기에 오렌지색이 천연가죽 색과 가장 흡사했고 또 저렴한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은 여러 가지 상징이 있는데 의리와 충절, 힘과 태양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이런 이미지가 고급스러운 제품이라는 프리미엄과 함께  오렌지 칼러의 시각적인 정체성과 더해져  세계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진출처: NYCulture Beat

 

 

 티에리 에르메스의 손자가 세계대전 중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그는 지퍼를 보고 들어와 프랑스에서 만들어지는 자사 가방에 최초로 지퍼를 사용하여 보급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에르메스의 백을 살펴보면 1935년 모나코의 왕비인 그레이스켈리가 임신한 자신의 배를 가방으로 가리는 모습이 라이프 잡지에 실리면서 유명해진 켈리백으로  고급스럽고 캐주얼한 느낌을 갖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0lE1Yy-Y18 

 

 

 

 

1984년도에 출시된 버킨백은 1970년 중반 패션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제인 버킨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제인 버킨이 비행기에서 가방을 올리려다 떨어트렸고 주머니가 없는 가방에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자 같은 비행기에 탔던 에르메스 회장이 이 모습을 보고 그녀를 위해 만들어 선물하게 된 것이 지금의 버킨백이라고 한다. 버킨백은 켈리 백과는 다르게 손잡이가 두 개로 사용하기 편리하며 밀봉력 또한 좋아 많이들 선호하는 에르메스의 대표 인기 제품이다. 백이 워낙 튼튼해 강아지나 잡다한 소품을 넣고 다녀도 끄떡없다고  한다. 몇 년 전  버킨백을 불태우는 장면이 방연 돼 나름 이름값을 톡톡히 치루기도 했던 백이다.

 

 

 

에르메스는 여러 세대에 걸쳐 계승된 탁월한 노하우를 지닌 기업이다. 동시에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고 세계 최상급의 소재를 끊임없이 연구하며 차별화되는 독특한 정체성을 구축한 기업이기도 하다. 사회적 가치의 창조와 책임감을 중요시하는  에르메스는 프랑스 여러 지방의 공방을 세우고 환경 보전에 힘쓰며 미래의 장인들을 양성하고 있다. 

 

 

 

 

디자인에서부터 축소 모형, 프로토타이프를 거쳐 최종 오브제로 탄생하기까지 에르메스의 장인들의 적극적인 작업을 통해 창의성이 자유롭게 표현됩니다. 눈여겨볼 점은 직원들의 경력과 배경에 있어서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룹 내 커리어의 유연성과 분위기로 누구든지 회사에서 제공되는 기회를 통해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고객과 접촉하고 매장에 활기를 불어넎는 직원들은 한 가족 경영 기업이 장인들과 함께 새로운 트렌드에 따라 변화하며 펼치는 유일무이한 대여정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메신저들이고요. 세계적인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면을 잃지 않아 더 매력적입니다. 창작과 구매를 연결하는 일련의 단계에서 진정성 있는 태도와 디테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직원들이 있어 가능한 일입니다.  장인들의 복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에르메스는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오브제를 창조"하는 것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는 기업입니다.

 

 

 

소박하지만 어느 물건 하나는 내가 애정을 갖고 귀히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현명한 선택과 소비가 이루어 지길 바라고  제품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구입할 때 의미가 더 해질 것 같습니다. 그 물건을 소유했다고 자신이 같은 레베의 명품이 될 수 없듯이 먼저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 되어 주는 태도를 지닌 내면이 꽉 찬 사람이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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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메라니안(Pomeranian)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애완견 15종 중 첫 번째로, 귀여운 외모로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견종이다. 포메라니안의 조상은 북극 지역에서 많은 일을 하던 개였다고 한다. 독일어로 "뾰족한 얼굴"이라는 뜻에서 울프스피츠 또는 스피츠종이라고 알려져 있다. 16세기  카운트 에버하르트주 자인이 개의 코와 주둥이 부분이 뾰족하다는 점을 참고해 이 말을 사용했었다. 이 품종은 발트해에 접한 폴란드 북부와 독일에 걸쳐 있는 포메라니아 지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협회에서 포메라니안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나무위키

 

 

작고 귀여운 외모와 복슬복슬한 털이 특징이며 털빠짐이 있다. 소형견으로 분류되는데 대형 스피츠종   독일 스피츠(German Spitz)에서 유래되었다. 자이언트 스피츠, 미텔스피츠, 클라인 스피츠 등의 품종으로 나뉘지만, 미국에서는 모두 통틀어 독일 스피츠라고 부른다. 

 

 

몸무게 :1.8-4kg

어깨높이: 14-18cm

 

포메라니안은 작지만 풍부하고 거친 질감으로 보이는 털과 높고 평평한 플룸드 테일이 솟아있다. 뒷덜미와 머리 아래 목 주위에 목도리 같이 둘러져 있는 보호 털이 있고, 이 털은 머리부터 엉덩이 부분까지 덮여 있다. 초기 품종의 털빛깔은 주로 흰색으로 가끔 갈색과 검은색도 있었으나,  현재는 흰색, 검정, 갈색, 빨강, 주황, 크림, 파란색, 흑담비색, 블랙앤탠, 브라운앤탠, 점무늬, 얼룩무늬 그리고 이러한 색을 섞은 혼합 등을 포함한 다양한 색 종류의 포메라니안이 있다.

 

 

포메라니안은 털이 이중으로 되어있다. 손질이 어렵지는 않지만, 털갈이와 복잡한 털 때문에 매일 털손질을 해 주는 것이 좋다. 바깥쪽의 털은 길고, 직모이며 별로 좋지 않은 감촉으로 되어 있는 데 반해 속털은 부드러우며 짧고 숱이 많다. 털의 끝은 잘 엉키는데, 특히 속털은 일 년에 두 번씩 털갈이가 일어나고, 털관리를 잘해주어야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2uut1oSRqBo 

 

 

 

 

 

두 명의 영국 왕실 가족이 포메라니안 품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767년 조지 3세의 왕비였던 샬럿 왕비는 두 마리의 포메라니안을 영국에 들여왔다. 두 마리 개의 이름은 포이베와 머큐리였는데, 토머스 게인즈버러는 두 마리의 개를 그림으로 남겼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무게 14-23kg이었다고 전한다.  지금보다 다소 큰 느낌이다. 풍성한 털, 큰 귀, 허리까지  말려있는 꼬리 등은  지금의 품종과 비슷하다.  샬럿 왕비의 손녀 빅토리아는 포메라니안을 유달리 좋아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이탈리아 피렌체 방문중 작은 코와 똑똑해 보이는 눈과 귀여운 모습에 반했다고 한다. 

 

 

 

 

토머스 게인즈버러가 1785년 그린 윌리엄 핼릿 부부의 초상화, 옛날에는 컷던 포메라니안의 모습, 위키피디아

 

 

 

 

네모 모양의 몸을 가진
이 개들은
눈에 잘 뜨는 길고 두꺼운 털을 갖고 있으며,
귀는 작고 여우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며
다리와 등은 짧고
꼬리는 등에 붙어 있고
새끼 고양이처럼 활발하다. 

 

 

 

 



당시 영국 왕실은 말과 개를 기르는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로얄 패밀리들의 개 유행은 귀족들이 더 많은 개들을 사도록 장려했다. 그러다 보니  사육업자들이 더 작은 개를 만드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빅토리아 여왕이 대중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거다. 번식을 위한 큰 개 사육장도 있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이 제일 좋아하던 개는 "윈저스 마르코"라는 이름의 다른 개보다 비교적 작은 레드 세이블 포메라니안으로 , 몸무게는 5.4kg이었다고 한다. 여왕의 일생 동안 포메라니안 품종의 크기는 50%까지 줄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포메라니안은 자신을 대형견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썰매견 특유의 용맹한 성격까지 가지고 있어 대형견에게 까지 자신의 작아진 모습은 생각하지 않은 채 적대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단다. 이밖에 빅토리아 여왕 이외에 조제핀 드 보아르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내, 조지 4세 등을 포함한 많은 왕족들이 포메라니안을 길렀다.  한 가지 더 , 1912년 타이타닉의 침몰 당시 살아남은 세 마리의 개 중 두 마리가 포메라니안이었다. 미스 마가렛 헤이즈가 기르던 "레이디"라는 포메라니안은 7호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했고, 다른 한 마리는 에리자베스 바렛 로스차일드가 기르던 것으로 6호 구명보트를 타고 함께 탈출했다.

 

 

 

 

 

포메라니안의 수명은 12년에서 15년이다. 적절한 운동과 좋은 습관을 길들인다면 내과적 질환에서는 비교적 건강한 개이다. 소형견이기 때문에 고관절이형성과 같은 질병은 흔치 않다. 털, 치아, 귀, 눈 등 위생 관리를 해주지 않는다면 건강 상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정기적인 관리를 통해 이러한 건강 문제는 쉽게 방지할 수 있다. 

 

 

청각 장애 발병이 일어나기 쉽다. 슬개골 탈구는 포메라니안 품종에서 흔한 질병이다.  슬개골 탈구는 외상 또는 선천적 기형을 통해 앓게 되는데, 무릎에 있는 슬개골이 안전하게 앉아 있어야 할 슬개골 홈이 얕게 되어 있을 경우에도 발생한다. 이 경우 옆쪽에서 "탈구"가 일어나 땅에 발을 못 딛게 된다.

 

 

기관허탈은 호흡 기관의 기관지 약화로 인해 발병한다. 증상은 거위와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며, 비슷한 소리의 울리는 기침, 운동에 과민 반응을 하고, 운동, 흥분, 더운 날씨가 계속되면 상태가 악화된 기침을 한다. 

 

 

 

흑피병이라는 피부병에 걸릴 수 있다.  암컷보다 수컷에게 더 많이 발병한다. 사춘기 시기에 발병하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연령대에서 발병할 수 있다. 잠복 고환은 수컷 포메라니안에게 자주 발생하는 또 다른 장애다. 고환의 한쪽 또는 양쪽 모두 음낭으로 내려가지 않았을 경우 잠복 고환이라 하는데 이 경우 수술을 통해 고환 적출을 한다. 

 

 

포메라니안의 성격은 썰매견 성격이 남아 있어 하루 종일 집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건드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자신의 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호기심이 많아 타 견종에게 관심이 많지만, 다른 개체에 대한 경계심과 공격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개나 고양이와는 잘 어울리지 못하여 사회성이 떨어지는 견종으로 분류된다. 성격이 독립적이고 앙칼져 보호자에게 의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다만 낯선 사람 앞 혹은 공간에서는 보호자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흥분을 잘하며 성질이 급하다. 고집도 세서 지능 순위 23위를 할 정도로 똑똑하지만 훈련에 쉽게 따라오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관심받는 걸 좋아해서 보호자가 다른 일을 하면 그 주변을 계속해서 맴돌거나 관심을 달라고 짖는 행동을 한다. 빠르고 민첩해서  잡기가 쉽지 않다.  뭔가 원하는 게 있거나 불만이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짖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형견 중의 소형견으로 불리는 포메라니안 견종의 핵심 가치는 소형화에 있기 때문에 작은 몸무게와 키는 포메라니안과 다른 견종을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일부 폼피츠가 포메라니안으로 사기분양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세상에 나쁜개는 없듯이 적절한 훈련으로 소형견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책임감 있는 견주들이 되시길 바래봅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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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오스트리아 반항아 화가

빈분리파(제체시온:Secession)

심벌리즘과 아르누보스타일의 대표적 작가

초상화와 누드그림,

장식패턴과 금색 사용(황금시대)

<키스>

스페인 독감

 

2. 생애

 

 

구스타프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빈 외곽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에른스트"는 보헤미아에서 비엔나로 이민을 온 금색 판화가였고요. 어머니 "안나"는 오페라 가수로 음악적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꿈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그의 가족은 비엔나 남서쪽에 있는 작은 교외 바움가르텐에서 7명의 아이들 중 둘째로 자랍니다. 이민자의 상황이 그러하듯 가난했으며 합스부르크제국 초기에 같은 처지의 소수 민족들이 일자리를 얻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더군다난 1873년 주식 시장 폭락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가난해진 상황이었지요.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집세가 더 싼 집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이사를 다녀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족 안의 슬픔도 많았습니다. 1874년 여동생 애나가 5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의 또 다른 여동생 클라라가 종교에 심취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지고요. 다행히 클림트와 두 형제 에른스트와 게오르크는 예술적 재능을 보이며 두각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미술과 음악적 재능을 가진 부모님의 유전을 받았으니 클림트 역시 눈에 띄는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14살 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한 후 장식 회화가로 교육을 받습니다.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정도로 예술가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발휘합니다. 졸업을 하고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동료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세우고, 이후 건축물 벽면의 회화 작품 등을 제작합니다. "예술가 회사"로 알려진 예술 집단을 결성했으며 이는 나중에 비엔나 분리파로 발전하게 됩니다. 전통적이고 사실적인 화풍으로 공예 운동과 상징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이후 초상화나 우의화 등 장식과 독립된 작품활동을 하면서 점점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Old Burgtheater in Vienna(1888-1889)>, The history of art.org

 

 

카메라가 무대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구경하러 온 관객들의 모습을 비춘 듯한 그림을 그려 대박을 칩니다. 지금 생각해도 기발한 아이디어 같습니다. 여성들의 옷차림 가까이 보면 오스트리아 빈의 유명인사들의 얼굴도 찾아 보면 어디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숨은 그림 찾듯이 말이죠.

 

 

 

그 기쁨도 잠시 , 매우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던 클림트가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예술적 동지였던 동생의 죽음으로  3년간 작품 활동을 쉽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다른 유럽 나라에 비해 보수적이었습니다. 미술도 아직 신고전주의 스타일이 유행할 정도로 말이죠. 이에 클림트는 진보적인 예술가들과 함께  '빈 분리파(1897)'라는 단체를 결성합니다. 그리고 전통예술을 추구하는 오스트리아 미술계에 반항적이고 새로운 예술 활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자유롭게 자신들의 예술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지요. 미술, 건축, 음악 등 복합 예술 공간이 필요했던 거지요. 그래서 만들 것이 '제체시온'입니다.

 

 

 

 

University of Vienna Ceiling Paintings(Medicine),1900-1907
철학<Philosophy(1899-1907)>

 

법학<Jurisprudence(1899-1907)>

 

금붕어<Goldfish,(1901-1902, 자신을 비난하는 빈대학 관계자들에게 조롱의 표시로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여자의 궁둥이가 무엇을 의미하시는 지 아시죠?

 

 

 

 구스타프 클림트는 동료인 마치와 함께 빈대학교 대강당의  천장 패널화를 의뢰받게 됩니다.  동료인 마치는 '신학'을 의뢰받고 그는   대학의 주요 학문인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그림들을 그리게 됩니다.  빈 대학에서는 의학, 철학, 법학을 주제로 학문과 이성의 위대함을 그려달라고 요청했지요. 그런데 나약한 인간의 모습은 물론이고 관능적이며 기괴하기까지 한 세 작품들을 내놓았으니 대학 관계자들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달라도 너무 달랐던 거죠. 마치 인간이 우주이치를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며 <철학>, 인간은 삶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의학>, 정의보다는 고통과 무질서가 더 가까이 있는 것 <법학>처럼 해석되는 그림들이었기 때문이지요. 졸지에 가족을 잃은 상실감으로 그림을 잠시 접었던 3년 동안 삶과 죽음, 인간의 운명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클림트의 철학이 당시 관계 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거지요. 

 

 

 

 

클림트의 학력을 문제 삼으며 비난하였고 특히 빈 대학교 교수진 87명은 <철학>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교육부 장관 리터 폴 하르텔 박사와 같이 클림트를 지지한 사람도 있었고요.  빈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던 <철학>은 훗날 제4회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클림트 예술의 가치를 입증받게 됩니다. 그러나 패널화는 끝내 대강당에 걸리지 못했고, 클림트는 이 그림들을 새로 교정하라는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국가로 부터 받았던 제작비는 전액 되돌려 주고 ' 학부 회화' 최종판을 자기 소유로 하지요. 훗날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이라 낙인찍혀 압류당했으며, 전쟁 중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부 회화 사건 이후 클림트는 더 이상 공공 작품을 의뢰받지 않았으며., 기하학적이고 지적인 추상 양식으로 변모해 갑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라베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하여 눈에 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Portrait of Adele Bloch-Bauer 1)

 

 

1890년대 클림트는 복잡한 패턴, 금박, 에로틱한 이미지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키스(1907-1908)>,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1세>가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장면을 묘사했으며, 때로는 노골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클림트의 유명 작품 중 하나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세>작품 입니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비싼 미술 작품이었습니다. 클림트가 자신의 후원자이기도 한 아델레에게 초상화를 그려서 선물한 것으로, 아델레가 사망한 후 남편이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가 나치에게 몰수당합니다. 남편은 사망할 때 조카에게  그림을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겼고요. 나치 때문에 부모를 잃고 미국으로 도피했었던 조카 마리아 알트만(Maria Altmann)은  전후 그 그림을 소장한 오스트리아 정부에게서 반환받기 위해 길고 고통스러운 소송을 걸지요. 결국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옆의 노이에 갤러리에 소장되게 됩니다. 영화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2015)>에 자세한 내용들이 담겨 있으니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The Kiss(1908)>작품은  너무 유명해 따로 그림을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그림인 지 벌써 아실 테니까요. 이 그림은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다양한 유럽 열강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절정에 달합니다.  이 작품이 예술계에서 중요한 이유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유럽에 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의 핵심 사례라는 점입니다.  이 운동은 장식 예술과 복잡한 디자인에 중점을 둔 것이 특징이지요. 당시 비교적 흔하지 않은 기법인 금박을 접목한 것으로 유명하고요. 금박의 사용은 작품에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을 더해주며 지속적인 시각적 효과에도 기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지속적인 인기와 문화적 영향으로 인해 의미가 있습니다.  수년에 걸쳐 널리 복제되고 모방되었으며 대중문화에서 사랑과 로맨스의 상징적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포스터, 인쇄물, 심지어 아이스크림 커버에도 실려있을 정도니까요. 

 

 

 

클림트는 그의 경력 동안 수백 점의 작품을 제작한 다작의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또한 비엔나 분리파를 예술계의 주요 세력으로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요. 그의 영향력은 이후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가  후원했던 학생 중에는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 같은 거장들도 있는데, 이들의 작품과 클림트의 작품을 비교해 보는 것도 색다른 느낌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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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그림은 음악적이라고도 합니다. 클림트가 음악의 신이라 불리는 베토벤의 음악을 만나 '환희의 송가'를 그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림 <베토벤 프리즈> 작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건물 윗부분에 총세면으로 나뉘어 그려진  띠벽지 형태의 그림입니다. 이때부터  자신의 그림에  황금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자신만의 스타일로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인간들의 행복을 향한 염원을 드러낸 이 그림은 오직 예술만이 우리를 낙원으로 데려다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변하지 않은 황금색을 사용했다고 하네요. 

 

 

 

"빈 캔버스가 있는한 희망은 있다."

 

 

 

 

<부채를 든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이젤에 남아 있던 마지막 초상화라고 합니다. 예상 낙찰가격이 1,025억 원이라고 하니 마지막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엄청난 낙찰가와 함께 누군가의 수장고에서 고이 모셔지기도 하고 다음 주인에게 팔리기도 하며 클림트의 여인들은 세계 곳곳에 황금빛을 물들이고 있네요.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으로 여전히 우리들 마음을 홀리면서 말이죠.

 

 

 

3. 나가기

 

 

20세기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이 빠르게 기존 회화 경향을 대체하고 , 클림트 이후의 작가들은 더 이상 클림트와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됩니다.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으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했지만, 그의 스타일을 전승해 주는 이가 없어 고립된 작가의 느낌도 살짝 듭니다. 그렇지만 현대 미술의 다양한 양식들 속에서 클림트의 작품만큼 대중적으로 많이 인용되고 응용되는 작품도 없을 듯합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구글 아트 앤 컬쳐, 위키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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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

36세 요절

유대인

잔 에뷔테른

콘스탄틴 브랑쿠시

2. 생애

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시집 <산호림> 한성도서, 1938-

 

 

'사슴과 5월과 고독의 시인'으로 불리는 노천명의 대표적 작품이다. 현실에 타협하지 못하고 결혼도 않고 고독과 빈궁으로 일생을 마친 시인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가늘고 긴 얼굴, 가녀린 목, 아몬드 형태의 눈으로 인체를 그리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Clemente Modigliani, 1884,7,12-1920,1,24)의 작품을 보면 떠오르는 시다.

 

 

 

 

 

1884년 이탈리아 왕국 토스카나주 리보르노에 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해변에 위치한 이 지역은 르네상스가 태동하는데 큰 기여를 한 메디치 가문에 의해 이상적인 휴양도시로 계획된 곳이다. 그의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의 혈통을 어어받은 마르세유의 명문가 출신으로 높은 지성과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직접 시를 번역하거나 서평을 써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다행히 모딜리아니의 출생으로 인해 집이 망하는 걸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델리아니 출생 당시, 그의 아버지는 사업실패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집안 행정관이 그이 물건을 압수하기 위해 집에 들어갔을 때 모딜리아니의 어머니는 출산 중인 상황이었다. 유대법에 '임신한 여자나 갓 태어난 아기 엄마의 침대는  뺏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있어 값비싼 물건을 어머니 곁에 두어 재산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늑막염, 폐결핵, 폐렴등 병치레가 잦아 그는 정규교육을 받기 힘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인 아들을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이탈리아 최고의 미술선생인 풍경화가  굴리엘모 미켈리(Guglielmo Micheli)의 아틀리에에 데리고 가 미술공부를 시키게 된다. 하지만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진행되어 공부를 중단하고 이탈리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요양을 해야 했다.  이후 1902년  피렌체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조반니 파토리 (Giovanni Fattori)에게  회화를 배웠다. 당시 피렌체에는 상징주의 미학이 유행했고, 모딜리아니는 이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이듬해 베네치아로 가서 1905년까지 학업을 계속 이어간다.

 

 

 

 

22세 모딜리아니는 1906년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인 파리의 몽마르크르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인체소묘와 유화를 공부하는 한편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 앙리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폴 세잔(Paul Cezanne) 등에 영향을 받았다.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사는 몽마르트르 지역 작은 스튜디오에서 1년 동안 생활하며 말쑥했던 외모는 홈리스처럼 초라해졌고 생활이 어려워져 알코올과 마약에 손을 데게 된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고 하루에 100여 장의 그림을 그릴 정도로 엄청난 작업을 소화해 낸다.

 

 

 

 

<The Cellist>, 1909, 표현주의 스타일 초상화

 

 

세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비 정상적으로 길게 그려진 첼로 연주자의 팔은 훗날 모딜리아니의 회화 스타일의 특징 중 하나가 되는 '길쭉하게 그리는' 스타일의 시작을 암시한다. 그림의  모델인 첼로 연주자는 '팔귀에르'작업실을 가지고 있던 당시 그곳에 살았던 가난한 첼로 연주자라고 한다. 첼로와 혼연 일체가 된 첼리스트의 모습이 사뭇 인상적이다. 

 

 

 

 

<여자의 머리>, 1912, 석회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20세기 당시 예술계가 아방가르드로 변화하는 시기에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화풍을 정립하고 싶어 했다. 이에 반해 모딜리아니는 많은 예술가와 친분을 두텁게 쌓으며 영향을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카테고리에 소속되길 거부한다. 그는 어릴 때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독서량이 풍부한 화가 중 한 명인데 특히 니체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아  반항과 무질서를 통해 진정한 창조력을 발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 덕택으로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르누아르, 피카소 , 고갱 , 세잔, 마티스 등과 같은 예술사조에 한 획을 그은 화가들을 만났음에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특한 그만의 작품세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피카소 같은 화가에 가려  그의 그림은 고작 $2-4, 드로잉은 4센트에 팔리는 생계형 화가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유독 화가들 중 위조작품이 많은 화가가 모딜리아니이다.  생계유지를 위해 아무에게나 팔다 보니 그의 사후 어떤 작품이 진품인지  알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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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여인상 기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iani),1913

 

 

 

1909년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로 이사하여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와 교류하며 조각에 매료됩니다. 친구이자 이웃인 브랑쿠시에게 영향을 받아 1909부터 1914년까지 약 5년 정도 조각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이국적인 환경에서 살아온 그의 배경 때문에 그가 아프리카를 포함한 부족미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생산하게 된다. 그는 1914년까지  30 여점에 이르는 특유의 길쭉한 석조 두상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여러 질환으로 인해 허약했던 그의 몸은 조각에서 나오는 돌먼지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조각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조각작품 역시 당시 예술계에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렇지만 조각 작업 이후에 오히려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명확해졌다.  모딜리아니가 조각작업을 함으로써 형태를 단순하하고, 가능한 한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물체의 정수를  보여주는 데 조각 활동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조각작업의 영향으로 그의 화풍은 단순하고 비정상적이지만 개성적인 작품이 탄생하게 됐다.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in a large hat>, 1918

 

 

 

<누워있는 누드>,1917-1918

 

 

 

 

시인 겸 화상인 폴란드 화상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권유를 받아들여 회화로 복구한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을 조망하는 순수한 형상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재료, 소재)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은 초상화와 누드화가 주를 이루었으며,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여성상은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했다. 

 

 

 

 

1917년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모딜리아니는 프랑스에서 활약한 우크라이나계 조각가 하나 오를 로프의 소개로 19살의 화가 지망생 잔 에 뷰테린(Jeanne Hebuterne)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잔은 로마 가톨릭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젊은 미술학도였지만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모딜리아니를 돌본다.  그의 작품은 동료 미술가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미술 시장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늘 변두리에 있었다. 같은 해 12월 모딜리아니는 베르트 베이유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통행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내건 두 장의 누드화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바로 철거되고 전시회도 일찍 문을 닫게 된다.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가 이렇게 어이없게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1918년 모딜리아니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열정과 헌신만은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 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잔의 초상이 주를 이루는데 단순미가 더욱 강조되는 가운데 전에 없던 서정미를 엿볼 수 있다. 모딜리아니는 잠시 남프랑스 니스에서 요양하면서 병세가 호전되었으며 , 이곳에서  딸 잔 모딜리아니(Jeanne Modigliani)가 태어난다. 1919, 5월 파리로 돌아와 다시 예술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하며 잔느 에뷔테른의 초상화 15점을 남긴다.

 

 

 

 

'이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파리 페르 라세즈 묘비명-

 

 

 

 

1920년 파리로 돌아왔지만 모딜리아니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핵 수막염'으로 의사조차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침대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의 나이 36세 , 결국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난다.  그의 사망 후  장례식 문제로 충돌하고 격분한 잔느는 다음날 부모의 아파트 5층에서 투신 자살하고 만다.  당시 8개월의 뱃속아이는 세상을 보지 못한 채 함께 세상을 떠나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고, 10년 뒤 잔의 가족들은 잔을 모딜리아니 곁에 묻어주게 된다. 

 

 

"꿈을 이루는 것은 의무다."

 

 

 

 

누구보다 성공한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가난과 질병으로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다행히 그녀의 첫째 아이 잔(Jeanne Modigliani,1918-1984)은  훗날 성장해 미술사가로서 그녀의 아버지의 작품을 토대로 한 <모딜리아니:인간과 미신>이라는 전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3. 나가기

 

모딜리아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이며, 예술사조에서 여러 대가들의 형식을 이을 수 있는 가교역할을 하는 중요한 화가임은 틀림없다. 그가 병마와 가난에 싸우며 불우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말이다.  얼마 전 그의 작품은 2018년 소더비 옥션에서 역대 최고가를 경신한 기록을 세우며 현대의 예술계에서도 가장 높은 작업적 평가를 받고 있다.  입체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사조가 유행하던 시절 어느 노선도 따르지 않았고 미술사에서 어느 쪽으로 분류될 수 없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완성했던 모딜리아니! 알코올과 마약, 가난과 병마에 시달려도 순수하고 깊은 감성을 끌어낸 그의 생전 누리지 못한 호사를 영감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주고 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구글 아트 앤 컬처. 위키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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