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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의 추억

 

               노태웅

 

돌돌 말린 멍석

텃마당에 깔아 놓고 

쑥향 번지는 

모깃불 피어오르면 

우물 속의 수박 한 덩이

나누어 먹던 그때는 

무수한 별들도 

우물 속에 잠겨 있었다

 

샘물로 등목하던 깊은 밤

작은 돌 손에 깔고

바닥에 엎드리면

등을 타고 흐르는

물 한 바가지에

한기가 돈다

그때가 그리운 것은 

등 밀어주는

정겨운 손길이 있어서일까?

초승달 내민 고개가 

구름 속에 숨어들 때

여인들의 수다 속에 

여름은 가고 있다.

 

 

 

서양 문화권에서도 일 년 중 가장 더운 때를 Dog days라고 칭하는데,

이는 북반구의 한 여름에 큰 개자리 시리우스성이 태양에 접근하기 때문에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리우스(Sirius)는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로 고대 그리스의 '빛남'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한차례 비가 휩쓸고 간 자리에 태양빛이 작렬하다. 보도블록 열기와 내리쬐는 태양 빛 그리고 사람들 사이 내뿜는 에너지까지 짜증이 밀려오는 시기다. 옛 조상들은 지혜를 발휘해  음식을 통해  극복하는 방법을 넌지시 알려준다.

한국에서도 삼계탕, 추어탕, 장어 등의 여름 보양식 소비량이 가장 많은 기간이 복날로  알려져 있다. 삼복 기간은 여름철 중에서도 가장 더운 때이기도 해서 초복은 대략 7,11-19일 사이로, 소서와 대서 중간이며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절기상 1년 중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가 지난 후 초복이 있고, 그 다음 중복 그리고 입추가 지나서 삼복이라 부른다.

복날은 10일 간격으로 나눠져있어 초복에서 말복까지는 총 20일이 걸립니다.

때로 해에 따라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 간격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올해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한다.

 

 

2023년

초복: 7월 11일

 중복: 7월 21일

말복: 8월 10일

 

개인적으로 초복, 중복을 더운 나라에서  살다 보니 그냥 넘어가  다가오는 말복이나 챙겨야 할 것 다.

 

 

 

 

 

 

삼복은 절기상 앞으로 일어나고자 하는 음기가 양기에 눌려 엎드려 있는 날을 뜻하는데  가을철 금의 기운이 대지로 내려오다가 여름철 더운 기운에 복종한다는 뜻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쉽게 생각하면 가을의 기운을 품은 날을 복날로 정해 더위를 극복하자는 거지요.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를 보면 '사기에 이르기를 진덕공 2년에 처음으로 삼복 제사를 지냈는데 성 사대문 안에서는 개를 잡아 충재를 방지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단순히 기운을 보양하기 위함이 아니라 해충을 물리치기 위한 주술행위의 일환으로 개를 잡았고 삼복일을 그날로 잡아 액운을 막은 것이죠. 애견 인구가 많아진 요즘 이 기록을 본다면 야만적이라며 한바탕 시위가 일 것 같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임금이 삼복날 높은 벼슬 아치 들에게 얼음을 하사하기도 하고, 서민들은 계곡물에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했다고 전합니다. 일반 농가에서 복날은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예측하는 날이기도 했는데 복날의 무더운 날씨가 벼를 빨리 자라게 만들어 복날에 벼가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는 소리도 있었다고 합니다. 

 

 

 

 

네이트뉴스

 

 

한국인들이 삼복을 나기 위해 즐겨찾는 음식을 알아볼까요?

 

 

월드투데이

 

 

 

그림의 왼쪽부터 삼계탕, 육개장, 콩국수, 그리고 장어구이입니다. 뭘 드시고 싶으신가요? 개인적으로 다 좋아하지만 얼큰한 육개장이 오늘따라 군침 흘리게 하네요.

 

 

1. 삼계탕

 

 

흔히 구할 수 있는 값싼 식재료가 닭이지요. 닭 한 마리에 찹쌀, 인삼, 대추, 마늘 등을 넣고 푹 고아서 먹게 되면 기력이 보충되지요. 닭고기에 있는 단백질이 면역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고 , 인삼 속에 사포닌 성분 또한 면역력을 높이고 피로감을 줄여준다고 합니다. 마늘의 알리신 성분이 비타민 B1성분의 흡수를 도와주어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 준답니다. 단, 삼계탕 국물에 나트륨 함유가 많아 비만 또는 고혈압 환자들은 칼로리가 높을 수 있어서 혈압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섭취해야 한다고 합니다.

 

 

2. 육개장

 

 

한국의 대표적인 술안주 겸 보양식 중 하나로 소고기와 각종 나물 그리고 고춧가루를 넣어서 얼큰하게 끓여낸 국물 칼칼한 음식이다. 삶아서 부드럽게 만든 후 가늘게 뜯어낸 소고기를 고춧가루와 함께 끓여낸 덕분에 쇠기름의 풍미와 청양고추의 향이 깊게 베어든 국물로 밥 말아 후루룩 먹으며 이열치열로 더위를 이길 수 있는 안성맞춤 음식입니다.

 

 

3. 장어구이

 

굵은 소금을 뿌린, 혹은 빨간 양념을 바른 장어구이도 대표적인 복날 음식이죠. 대표적 고단백식품인 장어는 단백질뿐 아니라, 비타민A 함량이 일반 생선보다 150배가량 높기 때문에 복날 몸보신으로 딱입니다. 깻잎에 마늘, 고추, 그리고 샐러드와 함께 싸 먹으면 질리지 않게 많이 먹을 수 있고요.

 

 

 

미트조인

 

 

4. 오리구이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한 오리고기는 예로부터 보양식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필수아미노산과 레시틴이란 성분이 풍부하게 함유돼 있기 때문이죠 . 아미노산은 근력 향상과 신체 능력을 강화시키며 피로해소에 도움을 줄 수 있고요. 삼계탕에 질리 신 분들 시도해 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오리고기는 다른 육류보다 비타민과 무기질 함량이 또한 높다고 해요.  모든 육류 중 오리고기는 필수 아미노산 함량은 물론 칼슘, 철, 인, 구리, 망간, 셀레늄 등의 각종 무기질 함량에서 1위를 차지한대요. 더군다나 비타민D, 비타민B5, 비오틴, 엽산 함량에서도 1위를 차지하고요. 이밖에 마그네슘 등 7개 성분 함량에서는 2위를 차지합니다. 이러한 이유 덕분인지 한방에서는 오리고기가 열을 내리고 허약한 체질을 보강하는 데 유용한 식재료라고 말합니다. 또 중금속, 암모니아 등 체내 독소 배출에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고요.



 

 

위키피디아

 

 

참외를 보면 과수원을 했 던 외갓집 생각이 나요. 참외서리가 많을 때라 밤중에 움막을 짓고 감시를 하기도 했지요. 고기만 먹으면 2% 부족하죠. 여름철 간식으로 이만한 효자 상품이 있을까 싶습니다. 이곳에서도 '성주참외'라는 이름으로 마켓에서 살 수 있어 감사한 부분이기도 하고요. 참외는 여름철 보약으로 불릴 만큼 비타민 B의 일종인 엽산이 풍부합니다. 참외의 씨가 붙어있는 하얀 부분은 특히 엽산이 많이 들어있어 참외를 1-2개만 먹어도 하루 권장량을 충분히 채울 만큼 풍부합니다. 또한 비타민 C도 풍부해 피로 해소에도 뛰어납니다.

 

 

몸도 마음도 지치는 여름날씨지만 보양식과 참외까지 잘 챙겨드시고 더위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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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절규>

노르웨이 표현주의 작가, 판화가

박복한 연애사( 밀로 탈로, 다그니 유엘, 툴라 라르센)

유화 약 1,100여 점

판화 약 18,000여 점

드로잉, 수채화 약 4,500점

조각 6점

92권 스케치북과 편지, 다량의 석판

 

2. 생애

 

 

 놀란 표정을 한 카톡  이모티콘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이죠. 바로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고 합니다. 어릴 적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 그리고 연속된 사랑의 실패를 겪고 그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존재의 근원에 도사리고 있는 고독, 질투, 불안 등을 소재로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우울하거나 신경증적인, 불안한 느낌이 나는 우중충한 작품이 많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임산부는 절대 <절규> 같은 그림은 보지 말라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뭉크 , <절규(The Scream)>,1893,위키피디아

 

 

'절규'라는 뜻 자체가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절하게 부르짖는 모습을 뜻하는 한자어 라지요. 이 긴 말 뜻을 표정하나로 해결한 사람이 뭉크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봅니다. 19세기 말쯤에 그려진 작품으로 공포스러우면서도 놀라는 표정과 흘러가는 듯한 배경은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인 경험이 있기에 더 크게 공감하고 자주 패러디 되는 것 같습니다. 마치 현대인들이 늘 접하는 긴장과 스트레스가 한방에 표현된 느낌이 드니 말입니다. 해골바가지 같은 얼굴이 뭉크가 박물관에 전시된 고통스러운 표정의 미라를 보고 영감을 얻어 그렸다는 설도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볼에 손을 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들려오는 비명을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는 동작일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뭉크는 끔찍한 공황발작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충격파처럼 인물의 얼굴을 원초적 두려움의 모습을 변형시키는 일련의 요동치는 선을 통해 절규를 묘사합니다. 더군다나 뒤에 걸어오는 두 명의 인물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져 있으니 이 효과가 더 강조 될 수밖에요. 

 

"어느 날 저녁, 나는 친구 2명과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내  아래에는 피오르드가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 ... 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다.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뭉크 일기 중)

 

<절규>는 연작품으로 총 4개가 있다. 첫 작품은 위 이미지인 원작이고 두 번째작품은 석판화 형태의 절규 1895), 세 번째 작품은 템페라 화법(1910)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뭉크는 군의관 아버지와 예술적 소양을 갖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고, 14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대신해 줬던 큰 누이마저 세상을 떠난다. 당시 아픈 누이 곁에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봐 준 이모가 슬퍼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도 만나 볼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비슷한 시기 어린 여동생은 정신병 진단을 받았고,  자신이 의사지만 결핵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보며 아내를 살릴 수 없음에 우울증을 앓다 점점 종교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된 아버지의 처지도 봐야 했다. 몸까지 허약해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 그가 찾은 유일한 탈출구가 그림이었다. 그림만이 외롭고 고립된 감정을 캔버스에 담아 풀어내고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형제 중 유일하게 결혼한 남동생마저 결혼 후 6달 후에 사망하게 되어  집안은  늘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더러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뭉크 본인도 곧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공포감에 불면의 밤을 보내는 것도 이쯤 되면 이해가 갈 일이다.

 

 

 

 

 

<흡혈귀>,뭉크,

 

 

 

 

 

 

 

뭉크의 연애사는 그의 그림들만큼 우중충하다. 평생 독신으로 산 그에게도 여러 여인이 거쳐갔다. 다만 제대로 된 관계라기보다 상처만 한 움큼 선사하고 간 연애사로 봄이 옳을 것 같다. 그의 첫사랑은 헤이베르그라는 크로아티아 사교계 유명인사였다. 그녀는 해군 장교의 아내였으며 신여성과도 같은 존재로 팜므파탈의 기질이 다분했다고 한다. 뭉크는 그녀를 사랑하며 중독과도 같은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되지만 인기 많은 그녀는 상처만 주고 떠나버린다. 뭉크의 평범하지 않은 성장환경이 사교계 퀸카를 상대하기에 풋내 나는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뭉크는 크게 상처를 입고 여자에 대한 혐오와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된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흡혈귀>이다. 여자들에 대해 남자의 피를 빨아먹는 뱀 파이러로 표현한 뭉크의 내면에 두려움이 깊게 자리 잡게 된다. 

 

 

 

 

 

<마돈나> 뭉크

 

 

 

 

이후 뭉크는 베를린에 살면서  스카니스와프 프시비세프스키(Stanislaw Przybyszewski)등의 예술가와 교류하게 된다. 문제는 그가 뭉크의  오랜 소꿉친구이자 연인이었던  다그니 유엘(Dagny Juel)을  빼앗고 결혼식을 올린다는 사실이다. 당시 그녀는 노르웨이 작가였고 엄청난 미인이었으며 음악적 지식이 풍부한 매력적인 캐릭터를 지닌 여성이었다고 한다. 서툴고 어설픈 뭉크에 비해 강한 매력으로 어필했던 모양이다. 이로 인해 뭉크는 '질투'와 '이별' 등의 그림을 통해 다그니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결국 헛수고가 되고 만다. 분노한 뭉크는 배신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마돈나>를 그리게 된다. 성스러운 성모마리아가 아니라 육감적으로 그려져 이 제목이 어울리나 싶기도 하다. 연인에게 이렇게 상처 주고 한 결혼이라면 잘 살아야 할 텐데 그녀 역시 34살 젊은 나이에 충에 맞고 사망한다. 바람이 난 남편 프시비셰프스키(작가)가 다그니와 다른 남자가 불륜을 하게 조장한 후에 그 불륜남에게 살인을 사주했다고 한다. 

 

 

 

 

 

 

<마라의 죽음>,뭉크, 1907

 

 

 

 

 

한동안 좌절에 빠졌던 뭉크는 그 후 툴라 라르센(Tulla Larsen)이란 여자와 다시 교제하게 된다.  자신을 떠나 상처를 주었던 여자들과 달리 툴라의 경우 뭉크보다 4살 더 연상인 그녀는 예술 방면에서 해박하고 성격도 적극적이어서 뭉크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게다가 엄청나게 부유한 집의 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이 너무 지나쳐 집착이 되고 결혼을 강요하기 이른다. 이런 그녀의 태도에 뭉크는 점점 툴라를 멀리하게 되고  툴라는 자살하겠다며 협박한다. 뭉크와 헤어지기 싫었던 그녀는 뭉크의 친구들과 짜고 계략을 꾸민다.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고 거짓으로 뭉크에게 말해 놀란 뭉크가 그녀의 별장으로 가게 되고 거짓말에 배신감을 느끼다 싸우게 되고 결국 툴라를 말렸는데, 하필 이때 총이 발사되어 뭉크의 왼쪽 세 번째 손가락이 관통당하는 사태가 생기고 만다. 불구가 된 손가락을 가리기 위해 뭉크는 가죽장갑을 끼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 일을 겪은 후 뭉크가 그린 그림이 <마라의 죽음>이다. 

 

 

이후 그림을 그려 번 돈으로 넓은 땅을 사서 그곳에서 풍경화나 자화상 등을 주로 그리며 20년을 살았다. 한 작품을 팔고 나면 같은 소재로 작품을 또 그리는 일을 반복해서 그려 다작을 남긴 작가다. <태양>이라는 작품은 뭉크의 그림스타일과 다르게 밝고 화사한 작품도 그린 바 있다.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안정감이 찾아오며 반영된 작품 아닐까 싶다.

 

 

 

3. 나가기

 

뭉크는 예민한 시기 한창 사랑을 받고 자라기에도 모자랄 나이에 불우한 가족사와 왜곡된 연애사로 죽음과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지닌 채 살아 간 화가이다. 죽은 지 몇 십 년 뒤에 누나의 죽음을 탁한 녹색과 검음색의 암울한 상황 묘사로 그려낸 걸 보면 평생 죽음이란 단어를 마음속 깊이 내재화하고 살았던 화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류머티즘, 천식, 그리고 불면증까지 평생 가족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던 화가의 작품을 통해 현재를 사는 우리는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내면의 상처를 다독여 본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구글 아트 앤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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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본능적 욕망(누드화)

28세  사망

스페인 독감

불안한 영혼의 아이콘

구스타프 클림트와 친구

성과 죽음

1980, 'Excess and Punishment' 독일 제작 영화

1980년 Arts Council of Great Britain(대영예술진흥회)에서 다큐영화 'Schile in Prison" 

1990 'Arrpgance(오만)'소설

 

2. 생애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6,12- 1918, 10,31)는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이다. 실레는 오스트리아 북동부에 있는 Tulln에서 1890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Adolf Schiele는 Austrian State Railway 회사의 Trlln 역 역장이었고, 어머니 Marie는 남부 보헤미아에 있는 Krumlov(kramau) 출생의 체코인이었다. 어린 시절 실레는 기차에 매료되어 그것을 그리는데 몇 시간씩 보내곤 해서, 아버지가 스케치북을 없애버려야 할 정도로 몰입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에곤 실레, 1912,위키피디아

 

 

 

 

 

살면서 자화상을 많이 남긴 화가이기도 하다. 미남형으로 어머니가 사준 전신거울을 자주 봤다고 한다.  심지어 궁핍했을 때도 차림새 만큼은 단정하고 깔끔했다고 전한다. 자화상 속 그의 독특한 표정이 호기심 같기도 하고 , 불만이 어린것 같기도 하고, 치기 어린 청춘의 모습 같기도 하고 , '나보다 잘 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봐.' 하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보통 자화상 속에 인물이 주가 되는 데 빨간 꽈리고추가 참 묘하게 어우러진다. 

 

 

그가 11살 때 인근 Krems 라는  도시로 이사하여 두 번째 학교에 들어갔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아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부끄럼이 많고, 말이 적고, 운동과 그림을 제외하고는 학교 생활을 잘하지 못했으나 말이다. 보통 그보다 어린 학생들 반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여동생 Gertrude에 대해 근친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한 번은 이 성향을 알고 있는 아버지가 그와 여동생이 잠긴 방에 같이 있는 것을 알고, 문을 부수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그들은 필름을 현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가 16세 때 허락 없이 12세의 여동생과 함께 기차로 Trieste까지 가서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도 했다. 실레는 15세 때 아버지는 매독으로 사망하고, 그는 철도회사 직원이며 어머니 쪽 삼촌인 Leopold Czihaczec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는 실레가 자신을 본받기를 바랐지만 공부에 흥미가 없는 것을 염려하다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는 수 없이 Karl Strauch라는 화가를 선생으로 붙여주었다. 

 

 

 

 

 

 실레는 클림트도 한때 다녔던 비엔나의 Kunstgewerbeschule(School of Arts and Crafts)에 들어갔다. 그해에 그는 몇 명의 교수들의 주장에 의해 더 전통적인 학교인 비엔나에 있는 Akademie der Bildenden Kuenste로 보내졌다. 여기서 그의 주된 선생은 Christian Griepenkerl이었는데 이 사람은 고집스런 견해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 여서, 혼란스럽고 실망한 실레는 3년 후그곳을 떠나게 된다. 

 

 

 

 

 

1907년 실레는 클림트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젊은 화가에게 친절하게 멘토 역할을 해주었다. 클림트는 젊은 실레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져 그림을 사주고, 자신의 그림과 교환하기도 하고, 모델을 주선해주기도 하였으며, 후원을 해줄만한 사람에게 소개하기도 한다. 

또 실레를 분리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미술 공예 workshop인 비엔나 워크샵에도 소개하였다. 실레는 아카데미에서 3년을 마친 뒤인 1909년에 아카데미를 떠나서, 아카데미에 만족하지 못한 학생들과 함께 New Art Group를 결성한다.

 

 

 

표현주의는 조형예술에서 생겨난 양식이며, 미술운동으로 20세기 초(1901-1925년)에 특히 독일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던 양식경향이다. 영혼의 표현을 나타내는데 주력한 표현주의는 사물의 외면을 묘사하는 인상주의 와는 대립되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말해 표현주의는 인상주의의 특징인 빛과 색채의 유희를 벗어나려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들인 세잔, 고갱 , 반고흐의 그림은 표현주의의 특징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화가들은 이미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사용하는 데 몇몇 매우 간결하고 원색에 국한하고자 노력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출처: 위키 피디아)



실레의 가장 초기작들은 클림트의 것들과 매우 유사하며, 아르누보의 영향도 보인다.

클림트는 1909년 비엔나 Kunstschau에 실레의 작품 몇 개를 출품하도록 초청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에드바르드 뭉크, 얀 투롭,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아카데미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실레는 인간의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sexyality)도 탐구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의 명료성이 잠시 혼란을 보이고 한다. 그 후, 실레는 수많은 단체전에 참여하게 되며 조금씩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포옹>,1917, 에곤 실레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연합뉴스

 

 

 

실레의 <포옹>과 구스타프 클림트의<키스>라는 작품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복잡하게 뒤틀린 왜곡된 신체 묘사로 어쩐지 불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엉킨 두 남녀의 모습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더 그런 건가 싶기도 하다. 깔고 있는 천의 구겨진 선이 살아 움직이며 불안을 더 조장하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의 불안한 내면을 저리 표현한 것인가! 

 

 

1910년 실레는 누드화를 연습하기 시작하며, 그후 몇 년이 안 되어서 메마르고 병적인 색을 띠고, 종종 강한 성적 의미를 지니는 도발적인 스타일을 나타내게 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 점차 그의 그림은 복잡해지고 주제를 가지게 되었다. 프라하와  수 차례의 분리주의 전시회등도 참여하게 된다.

 

 

 

빈 분리파는  1897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를 주축으로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미술과 삶의 상호 교류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적인 의미를 미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빈 분리파 혹은 비엔나 분리파라고 한다. ‘분리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secedo'를 어원으로 하는 이 명칭은 아카데미즘이나 관 주도의 전시회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과거의 전통에서 분리되어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목표로 했으며 그 목적은 미술과 삶의 상호 교류를 추구하고 인간의 내면을 미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빈 분리파는 1897년 4월 3일 초대 회장으로 클림트를 내세워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공예가인 콜로먼 모저(Koloman Moser), 건축가 오토 바그너(Otto Wagner),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기존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예술가협회 등의 기구 속에서는 작품 발표의 장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미술가들이 관영화된 전람회와는 별도로 자신들의 전람회를 기획하고 조직하기 위해서 창립한 새로운 예술가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실레는 17세인 Walburga(Wally) Neuzil을 만나서 비엔나에서 같이 살게되며, 그녀는 그의 가장 놀라운 작품 중 몇 개의 모델도 하게 된다. 그녀는 이전에 구스타프 클림트의 모델이었으며, 그의 연인 중 한 명이었다는 것 이외에는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실레와 Wally는  폐쇄공포적이라고 느낀 비엔나의 환경을 탈출하기를 원하며, 남부 보헤미아에 있는 작은 도시 Krumau로 간다. 그곳은 실레의 어머니의 출생지이며, 현재 실레 기념 박물관이 있다. Kramau에 연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생활양식, 특히 마을의 십 대 소녀들을 억지로 모델로 고용한 것을 몹시 좋지 않게 생각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두 사람은 영감을 주는 환경과 작업을 할 저렴한 스튜디오를 찾아 비엔나에서 35km 서쪽에 있는 Neulengbach(노이렝바흐)로 옮겨 갔다. 실레의 스튜디오는 노이렝바흐의 비행 청소년들이 모이는 아지트가 되었고, 실레의 생활 방식은 마을 주민들에게 심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결국 미성년의 어린 소녀를 유혹했다는 이유로 실레는 체포되었다. 경찰들이 실레를 체포하러 스튜디오에 왔을 때 그들이 포르노라고 생각하는 그림 수백 장을 몰수하였다. 실레는 재판을 받을 때까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재판에서 유혹과 유괴 혐의는 기각되지만, 어린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외설적인 그림을 전시했다는 점에서는 유죄로 인정되었다. 판사는 재판정에서 촛불에 그의 그림 한 점을 태우기도 했다고 한다. 이미 21일간 구속되어 있는 것을 고려하여 3일간의 투옥이 선고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실레는 감방에 갇여있는 어려움과 불편을 묘사하는 그림 12점을 그렸다. 그는  투옥된 후에 죽음과 부활 같은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물론 여성의 누드가 여전히 주된 주제이기는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에는 그의 그림은 더 커지고 세밀해졌다. 하지만 군복무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대부분의 작품은 경치나 군 장교 같은 사람들을 간단하게 그리는 정도였다.  이 기간동안 그는 모성과 가족의 주제를 실험하기 시작한다. 그의 부인 Edith는 이 시기 여성을 그린 대부분의 작품의 모델이지만, 전쟁 동안의 여건 때문에 많은 작품의 모델들은 남성이었다. 

 

 

 

 

 

실레는 비엔나의 교외 Hietzing, 101 Hietzinger Hauptstrasse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에서 길 건너편에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는  Edith 와 Adele Harms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중류층이었으며, 아버지는 자물쇠 장인인 개신교 신도였다. 실레는 사회적으로 더 받아들여 질 수 있는 Edith를 선택하지만 Wally와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Wally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는 그를 떠나서 다시는 보지 않았다. 이 버림받음으로 인해 그는 '죽음과 소녀'를 그리게 되는데. Wally의 초상은 이전의 그림에 바탕을 두고 있고, 자신은 새롭게 그렸다. 그해 2월 실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쓰기를 '나는 유리하게 결혼을 할 예정이다. Wally가 아니라.'라고 했다.  Edith의 집안에서 약간의 반대가 있긴 했지만 1915년 6월 17일, 실레의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결혼하게 된다.

 

 

 

 

 거의 1년 동안 징병을 피해다녔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실레의 생활과 작업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결혼 3일 후, 실레는 군 복무를 명령받았고, 프라하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실레는 동료들과 함께 전시장에서 살았으며, Edith는 그와 함께 가서 호텔에서 머물렀다. 실레의 상관은 그들이 가끔 만나는 것을 허용하였다. 군복무 중임에도 불구하고 실레는 베를린에서 전시를 했으며, 같은 해에 취리히, 프라하, 드레스덴 등에서 성공적인 전시를 하였다. 그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러시아 포로들을 호송하는 것이었다. 포로 러시아 장교와 그의 상관인 Karl Moser를 그렸는데, 이 상관은 사용하지 않는 상점을 스튜디오로 사용하도록 주기도 하였다. 

 

 

 

 

 

 

Krumau- Crescent of Houses(The Small City V),1915, The Israel Museum, Jerusalem

 

 

 

 

 

실레가 그린 풍경화다. 전체적으로 낡고 어둡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좁은 공간을 이용해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빨랫줄에 촘촘히 널려있는 나부끼는 빨랫감들, 창문 틈으로 얼굴을 디민 익명의 표정을 알 수 없는 그들, 진한 브라운 칼라 지붕들 , 그리고 날카롭고 불안해 보이는 선들이 실레 내면의 심리를 드러낸 것 같이 무겁게 다가온다.

 

 

 

실레는 비엔나로 돌아와 다시 작품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많은 작품을 내었으며, 작품들은 그의 재능을 원숙하게 잘 드러내 주었다. 그는 1918년 비엔나에서 열린 분리주의 49회 전시회에 초대되었으며 그의  작품 50개가 선정되어 중앙 홀에 전시되기도 했다. 또한 전시회의 포스터를 다자인 하는데, 최후의 만찬을 흉내낸 것으로 예수의 자리에 자신의 초상을 넣기도 했다. 다행히 전시회는 대성공이었으며, 그 결과 실레의 그림의 가격은 높아졌고, 많은 초상화 주문을 받게 된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일 것 같은 그의 인생도 예상치않은 복병을 만난다. 그해 가을 유럽에서 2천만 명의 환자를 발생시킨 스페인 독감이 비엔나에 퍼지기 시작한다. 코로나를 겪은 인류는 작은 바이러스의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안다.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 인간의 존엄성은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신세들임을 순식간에 먼지 같은 존재들로 사라질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특히 노약자, 어린이들 , 그리고 임신부들이 가장 취약한 사람들일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해 임신 6개월인 Edith는 스페인 독감으로 10,28일 사망하며, 실레도 3일 후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한국의 <날개>, <오감도>를 쓴 천재시인이며 건축학도였던 이상 시인이 떠오르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사흘동안 그는 Edith의 스케치 몇 점을 그리는데, 이것들이 그의 마지막 작품들이다. 

 

 

 

3. 나가기

 

어떠 사람들은 그의 작품은 괴상하고, 에로틱하며, 포르노적이고, 불안하며 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본다. 초기에 그는 클림트와 Kokoschka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 그의 초기 작품에는 그들을 흉내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날카롭게 그려진 각진 선과 색의 조합은 그가 전형적인 아름다움과 관습을 거부하고 추함과 과장된 감정을 예술에 솔직하게 도입했던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큰 봉우리인 것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막 유명해지기 시작하던 28살 생애, 짧은 기간, 예술적 경력은 불행히도 불과 10년에 불과했지만 그의 작업은 비엔날 표현주의운동의 토대를 마련했음을 인정해 주자. 그의 강렬한 선이 남긴 드로잉이 눈을 감아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자꾸 떠올를 것 같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구글 아트앤 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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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시 안경을 쓰고 있는 개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개도 안경이 필요하다고?'

인간들 눈에 근사하지만 정말 개에게 편할까?

 

 

인간의 시신경이 120여만개이지만 개는 17여만 개에 그쳐, 전체적으로 시각과 관련된 능력이 인간만큼 발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근시의 경향이 높아 멀리 있는  물체는  인간보다 잘 보지 못하고 노견은 더욱 그런 경향이 높다고 한다.

쉐퍼드, 로트와일러 등 독일종 개들이 동일 품종 대비 시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으로 60-70% 이상이 -0.5D이상의 굴절이상을 가지고 있고 맹도견 중에도 15%가량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두울 때 물체를 파악하는 능력은 인간보다 몇 배 더 발달되어 있다. 개의 야간시력은 인간의 5배 정도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야간시력이 좋은 이유는 원래 새벽이나 저녁에 주로 활동하던 야행성 동물이어서 색깔을 구분하는 원추세포 수는 적고 명암을 구분하는 간상세포가 인간의 눈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또 눈동자 자체가 크고 망막 뒷면에 반사막이 있어서 빛을 시세포 쪽으로 반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좌우를 보는 시야도 인간보다 훨씬 넓어 머리 좌우 뒤쪽 30도 정도도 개의 시야에 들어온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시력이 인간보다 떨어지지만, 후각이 극도로 발달하였다 보니 개가 보는 세상은 시각과 후각이 섞인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감각이 시각에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은 반면 개들은 후각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다. 길가던 남자들이 팔등신 미인을 보면 곁에 있는 애인을 놔두고 눈 돌아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런 이유로 모습이 달라져 알아보지 못하는 주인도 냄새를 맡고 바로 구분하는 게 가능할 정도다.

 

 

 

 

5주 동안 병원에 입원해&nbsp; 23kg 빠진 주인을 처음에 알아보지 못하다 나중에 냄새로 알아 본 개 윌로

 

 

 

 

사람은 약 500만개의 후각 세포를 가지고 있는데 개들은 2억 개에 서 30억 개의 후각세포를 가지고 있어 40배를 넘는다. 후각 능력은 사람보다 약 1000배 에서 1억 배 정도 뛰어나다고 하니 놀랍지 않은가. 

후상피 표면이 잘 발달하지 않은 견종들은 50배 정도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몇몇 특정 냄새들은 개보다 사람들이 더 잘 맡는다. 이는 인간 뿐만 아니라 각각의 동물들은 특히 더 잘 감지하는 냄새가 있어 그것  하나만큼은 개보다 더 잘 맡아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에게 후각이 그러하듯 인간에게는 시각이 인지감각에 있어서 절반 이상 중요성을 차지하지만 야간에 윤곽을 파악하는 건 개가 더 잘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의 경우 동물의 오줌이나 땀에 포함되어 있는 지방산 냄새를 더 잘 맡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타 개체의 체액을 통해 그 개체에 대한 정보를 인식하고 구분해 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들의 세계에서 인사는 서로의 냄새를 인식하는 것이며, 서로의 사타구니 근처로 머리를 향하거나 서로가 싼 오줌의 냄새를 맡는다. 개 산책을 시키다 보면 늘 다니는 가로등 밑에 멈춰서 여러 개들이 싸놓은 오줌 냄새를 킁킁거리는 장면을 수시로 보게 된다. 그 위에 본인의 오줌도 갈기고 영역 표시하는 그들의 본능이 비상시 집을 찾아올 때 긴요한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개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냄새를 맡게 해주는 것이 좋다. 

 

 

 

 

심지어 후각으로 주인의 암세포를 찾았다는 기사와 연구결과도 있다.

미국 플로리다의 의약 회사 바이오센트(BioSxentDX)의 2019년 연구가 가장 유명하다. 당시 연구를 위해 4마리의 비글이 건강한 사람과 폐암 말기 환자의 혈액 냄새를 구별하는 훈련을 받았다.

훈련 뒤 3마리의 비글은 96.7%의 정확도로 폐암 검체와 정상 검체를 골라냈다. 연구 책임자인 헤더 준키라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 연구로 조기에 암을 발견하는 두 가지 길이 열렸다. 하나는 개의 후각을 활용해 암을 검진하는 방법, 다른 하나는 개가 냄새 맡을 수 있는 화합물이 암세포에 반응하도록 시약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개는 이상한 소리를 듣거나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 혹은 휘파람 소리나 자신의 이름을 들었을 때 고개를 댜웃거리기도 하는데, 이는 소리의 근원지를 알아보려거나,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귀의 방향을 조절하는 행위로 특히나 주인의 말을, 비록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귀담아들으려고 자주 하는 일종의 공감표시이기도 하다. 이때 좋다고 귀엽다고 칭찬해주기라도 하면  신났다고 더더욱 주인님께 사랑받기 위해서 수시로 아무 때나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다고 한다.

너무 자주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머리를 바닥에 심하게 비비는 행동 등을 일상적으로 반복해서 보인다면 정말로 귀 등에 이상이 있어서 일 수 있으니 병원에 데려가봐야 한다.

개인적으로 키우고 있는 개가 가려워 잔디밭에 귀를 대고 문지르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아마 아이들이 목욕을 시키다 귀에 이물질이 들어간 모양이다. 양쪽 귀에 염증이 생겨 항생제와 귀에 넣는 약을 주기적으로 주면서 겨우 증상을 가라 안 힐 수 있었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짖는 경우는 대개 어린 청년기의 개가 겁먹은 상태일 때며 크게 짖을수록 많이 공포를 느낀다는 의미이다. 진짜로 공격할 마음이 있는 개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낮게 으르렁거리며 똑바로 상대를 응시하는 개다. 

또 상대방을 경계해서가 아니라 '더 놀아달라'는 의미로 짖기도 한다. 같이 놀아주다가 가려고 하는데 개가 목줄에 묶여있는 등으로 상대방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경우로, 이 경우는 약 1-2초 간격으로 짖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과 구분할 수 있으며 짖는 소리가 살짝 더 놓아지는 경우도 있다. 

 

 

 

 

 

개가 보여주는 충성심은 '특정인물'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라 무리생활을 하는 늑대처럼 '자신이 속한 무리에 대한 충실함'에 가깝다.

늑대의 세계에서 한 마리의 수컷 우두머리와 암컷 우두머리가 리더가 된다. 마찬가지로 개도 가정에서 아빠 엄마를 우두머리로 인식한다. 

반려견도 예외가 아니라서 구성원들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제일 만만해 보이는 사람 한 명을 깔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평범한 가정의 막내가 있으면 막내에게 기를 세워서 자신의 입지를 어느 정도 탄탄하게 하려고 한다. 이때 그냥 장난인 줄 알고 넘어가거나 아니면 천성적으로 온순한 사람이라서 넘어가주거나 아니면 진짜 몰라서 넘어가는 경우 그 개에게 평생 얕보인다. 

예를 들면 무엇인가 먹고 있을 때 다른 가족들 앞에서는 다 앞에 앉고 주기까지 기다리는 반면 막내한테는 다짜고짜 달려들어서 뺏어먹으려고 한다거나 아니면 얕보인 사람의 말을 절대 안 듣는다거나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새끼일 때부터 키우면 이 경향은 확 줄어들지만 어느 정도 성장한 개를 분양받는다면 며칠 내에 개가 서열쳬계를 관찰한 다음에 목표물을 정한다. 무리생활할  때의 생존전략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개들은 동료와 떨어지거 난 동료를 잃어버리면 늑대와 마찬가지로 하울링을 통해 동려를 찾으려는 시도를 본능적으로 한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울부짖으면 서열이 낮은 개들은 자동으로 따라 하기도 한다.

가끔 주인이 일부러 소리를 내서 애완견이 따라 하는 걸 찍은 동영상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빠개를 키울 때 밤중에 울리 던  경찰차 사이렌 소리에 반응해 하울링 하는 소리를 흥미롭게 지켜본 기억이 있다. 

 

 

 

 

 

2023.07.16 - [지식&교양] - 50-16. 개 이야기(1)

 

50-16. 개 이야기(1)

1. 개의 진화사 라이카: 구 소련의 우주 탐사견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로 간 개 1954년 소련 태생 1957년 11월 스푸트니크 2호와 함께 발사되었지만 선내 장치의 고장으로 우주에서 생을 마감함

sun-n5y2.tistory.com

 

 

 

 

 

늑대와 마찬가지로 개도 죽음 직전에는 무리를 이탈하려는 습성이 남아있다. 힘이 되고 상황이 받쳐주면 죽음이 가깝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이 원래 살던 무리라고 생각하는 가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고 그 때문에 가끔 죽기 전에 집을 나간다든가 가급적 주인이나 같은 가정의 구성원이 보지 않을 때 숨을 거두려고 시도할 것이다.  아빠개 '천둥이'가 죽기 며칠 전 보였던 행동도 이러했다. 자꾸 어두침침한 곳을 찾아 기어들어가거나 몸이 아픈 것 같아 집안에 들여놨을 때도 구석진 곳을 찾아 들어가 한참 있다 발견하곤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순전히 본능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가 아픈 내색을 안 하는 것도 인간들은 주변에 걱정을 끼치기 싫다고 생각하지만, 이 또한 본능적으로 자신의 무리에서 도태되면 죽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파도 무리와 어울릴 수 있으니 버리지 말아 달라'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겠다 싶으면 스스로 무리를 이탈하는 것이다. 

개의 경우 건강 문제가 생길 연령이 되면 세심히 관찰하고

반려견의 임종을 지켜주고 싶다면 눈을 떼지 말고, 문단속을 잘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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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오 ! 오늘 밤 자전거를 타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본 것!
나는  이 덧없는 것들을 적어야만 했습니다.
수채화와 연필로 빠르게 표기했습니다. 

대비되는 색상, 톤 및 색조를 비공식적으로 칠한 것입니다. 
이 모든 정보는 다음 날 스튜디오의 조용한 여가에서
사랑스러운 수채화를 만들기 위한 정보로 가득 차 있습니다.

 

 

2. 생애

 

 

 

 

앙리 에드몽 크로스(Henri-Edmond- Joseph Delacroix, 1856,5,20~ 1910,5,16)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긴 이름을 짧게, 다른 유명인과 겹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2번이나 바꾼 최종적 이름이 에드몽 크로스라고 해요. 그는 신인상주의의 대가로 가장 찬사를 받고 있으며 그 운동의 두 번째 단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입니다. 인상주의는 뭐고 신인상주의는 뭐가 다를까요?

신인상주의는 1886년 프랑스 미술 평론가 Felix Feneon 이 조르주 쇠라가 창시한 미술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용어를 말합니다.

쇠라의 가장 유명한 걸작인 < A Sunday Afternoon on the lsland of La Grande Jatte)는 파리에서 열린 Salon des Independants 전시회에 처음 등장 하면서 이 운동의 시작을 알립니다. 이 무렵 프랑스 근대의 절정기가 도래했고 많은 화가들이 새로운 화법을 모색할 시절이죠. 특히 신인상주의 추종자들은 풍경과 해변뿐만 아니라 현대 도시 풍경에 끌렸답니다. 선과 색상에 대한 과학 기반의 해석은 신인상파가 현대 미술을 특성화하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점묘법과 분할주의 기법은 신인상파 운동 초기에 지배적인 기법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맥락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2023.06.18 - [지식&교양] - 50-6. 신인상주의 ,폴 시냑(Paul Signac),16

2023.03.28 - [지식&교양] - 47. 신인상주의, 조르주 피에르 쇠라(7)

 

 

 

 

 

 

프랑스 북부 Nord 주 에 있는 코뮌인 Douai에서 태어났습니다. 철물업의 가족력을 가진 그의 부모는 프랑스 모험가 Alcide Delacroix와 영국인 Fanny Woollett인데 불행하게도 그에게 살아남은 형제자매가 하나도 없다고 하네요. 1865년 가족은 벨기에 국경과 가까운 프랑스 북부 도시인 릴 근처로 이사를 합니다.  Alcide의 사촌인 Auguste Soins 박사는 Henri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고 그의 예술적 성향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이듬해 화가 Caroulus-Druan 밑에서 그림을 그리던 소년의 첫 번째 그림에 자금을 지원해 주기도 했고요. 일 년 정도 그의 제자로 있다가 Francois Bonvin을 거쳐 Ecoles des Beaux-Arts에서 공부했고 1881년 파리로 이주한 후 두에의 동료 예술가 에밀 듀퐁-집시 밑에서 그림공부를 계속하게 됩니다.

 

 

 

 

크로스의 초기 작품인 초상화와 정물화는 사실주의의 어두운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유명한 낭만주의 화가 Eugene Delacroix와 구별하기 위해 그는 이름을 변경하여 자신의 출생 이름을 "Henri Cross"로 줄입니다. Salon des Artistes Francais 에서 첫 전시회를 여는 행운도 얻습니다. 이후 가족과 함께 알프마리팀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많은 풍경화도 그립니다.  지중해 여행 중에 Cross는 Paul Signac을 만났는데, 그는 이 만남을 통해 그의 그림 경향이 점차 바뀌게 됩니다. 당연히 폴 시냑과는 친한 친구이자 예술적 동지가 된 셈이지요.

 

 

 

 

 그는 공식 살롱의 관행에 불만을 품은 예술가들로 구성된 Societe des Artistes Independants 를 공동 창립하고 상금 없이 무자격 전시회를 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Georges Seutat , Albert Dubois-Pillet, Charles Angrand 등 신인상파 운동에 관련된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 친구가 됩니다. 신인상주의 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년 동안 그들의 스타일을 채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작품은 에드아르 마네와 같은 영향을 계속해서 나타냅니다. 그의 초기의 침울한 현실주의 작품에서 변화는 점진적이었지만, 그의 색상 팔레트는 인상파 특유의 더 밝은 색상으로 작업하면서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또한 야외에서 일했으며 클로드 모네와 카미유 피사로의 영향을 보여주는 순수한 풍경화도  그렸습니다. 게다가  또 다른 프랑스 예술가와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그는 다시 이름을 바꾸고 마침내 "Henri-Edmond Cross"로 재 탄생합니다. 누구와도  닮지 않고 유일무이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고자 하는 화가의 자존심도 엿보입니다.

 

 

 

 

 

 

 

마담 헥토르 프랑스,1891, 오르세 미술관

 

 

 

 

 

 

1891년 크로스는 신인상파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 기법을 사용한 그의 첫번째 대형 작품을 인디펜던트 전시회에 전시합니다. 그림은 크로스가 1888년에 만나 1893년에 결혼할 헥토르 프랑스 부인의 분열주의적 초상로 말이죠. 개인적으로  어둡지만 여인이 입고 있는 보라색 공단 느낌의 드레스가 인물을 더 고급지게 드러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보라색은 역시 로열 칼러인 것 같습니다.

 

 

 

 

크로스는  류머티즘을 오래 동안 앓다가 큰 맘먹고  1891년에  프랑스 남부로  이사합니다. 그의 작품은 여전히 파리에서 전시되었고요.

프랑스 남부에서 그의 첫 번째 거주지는 르 라방  근처의 카바송에 있었고 그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생클레어의 작은 마을에 정착하여 남은 여생을 보냅니다. 가끔 이탈리아 여행과 파리에서 열리는 연례 인디펜던트 전시회를 위해서만 잠시  다녀왔고요. 1892년 크로스의 친구인 폴 시냐크가 인근 생트로 페로 이사합니다. 예술가 마을이 이런식으로 형성이 되는 걸 테지요. 서로의 그림을 봐주고 토론을 하면서 실험적인 시도도 많이 해 보았을 테니까요. 주고받는 말속에 예술적 영감도 실리고 철학도  가미되어 진행하는 작품이 더 풍성해졌으리 생각합니다.

 

 

 

 

 

Henri Matisse, Andre Derain, Albert Marquet 등  의 예술가들이 참석한 Cross의 정원에서 모임을 자주 개최했다고 합니다.포도주 한 잔 손에 들고 그림 주변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을 그들을 상상해 보게 됩니다. 프랑스인처럼 토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습니다. 아직도 낡은 주택의 좁은 공간에서 사람만 바뀐 채 살고 있지만 동네 카페에 모여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하는 자부심 강한 그들의 일상이 예술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신 인상주의 운동에 대한 그의 친밀감은 정치적 철학을 포함하기 위해 회화 스타일을 넘어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시냐크, 피사로 및 기타 신인상파와 마찬가지로 그는 유토피아 사회에 대한 희망과 함께 무정부주의 원칙을 믿었습니다. 1896년 크로스는 석판화 <The Wanderer>를 제작 합니다. 이것은 그가 출판사와 함께 작업한 첫 번째 기록이었으며 이 작 품은 Jean Grave 의 아나키스트 저널인 Les Temps Nouveaux에 익명으로 실리게 됩니다. 크로스의 무정부주의 정서는 그의 주제 선택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는 무정부주의를 통해 존재할 수 있는 유토피아 세계를 보여주는 장면을 그립니다. 

 

 

 

 

 

아나키라는 용어는 그리스에서 유래하며 본질적으로 '지배자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키스트는 모든 형태의 정부나 강제적 권력, 모든 형태의 계급제와 지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아나키스트는 자본주의와 국가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종교 권력에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나키스트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 아나키 상태를 확립하거나 유도하려 하고 있다. 
아나키 상태란 어떤 억압적 제도도 없는 분권형 사회, 자발적 결합의  연합을 통해 조직된 사회다.



 

 

 

 

 

 

Peasant Woman Stretched out on the Grass, 1890, wikiart(출처)

 

 

 

 

 

어디서 많이 본듯한 자세 아닌가요?  배깔고 이리 둥글 저리 둥글 게으름 피우며 여유를 부리던 마룻바닥 생각이 나네요. 비록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지요. 잠깐 쉬면서 책을 보는 것 같습니다. 얼굴 표정은 볼 수 없으나 몰입하고 있는 모습이 가까이 다가가 인기척을 내도 모를 것 같습니다. 풀밭 향기 맡으며 한번 시도해 볼까 싶다 가고 벌레들 때문에 참겠습니다.

 

 

 

 

 

1890년대 초반부터 중반 까지의 크로스의 그림은 점묘 주의적 특징이 있으며, 조그마한 색 점이 촘촘하고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죠. 

그는 폭이 넓고 고르지 못한 붓놀림을 사용하고 붓놀림 사이에 노출된 여백으로 캔버스의 작은 영역을 남겨두는 대신 점차 기법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표면은 모자이크와 비슷했으며 그림은 야수파와 큐비즘의 선구자로 볼 수 있습니다. 점묘법 스타일에서는 미세한 페인트 얼룩이 색상을 조화롭게 혼합하는 데 사용됩니다. 대조적으로 "2세대 신인상주의"작가들은  색상을 분리하여 "대비를 통해 생생하고 반짝이는 시각 효과"를 얻는 것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크로스는 신인상파 화가들이 "특정 풍경이나 자연 장면의 색상을 조화시키는 것보다 순수한 색상의 조화를 만드는 데 훨씬 더 관심이 있었다"라고 언급합니다. Matisse와 다른 예술가들은 후기 경력인 Cross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러한 작품은 Fauvism의 원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San Giorgio Maggiore, Venice

 

 

 

 

정성 들여 찍은 점 하나하나가 모여 부두에 비친 멋진 풍광을 만들어 냅니다. 가까이 보면 그린이의 정성과 시간에 감동하고  멀리서 보면 밝고 환하게 어우러지는 색상에 한번 더 감동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1905년 파리의 갤러리에서 30점의 그림과 30점의 수채화로 구성된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매우 성공적이었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대부분의 작품이 팔리게 됩니다. 신인상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는 벨기에 상징주의 시인 에밀 베르하렌(Emile Verhaeren)은 전시회 카탈로그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풍경들은 순전히 아름다운 페이지일 뿐 아니라
서정적인 감정을 구현하는 모티프입니다. 

들의 풍부한 조화는 화가의 눈을 만족시키고,
그들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비전은 시인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풍부함은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가볍고 매력적입니다.

 

 

 

 

 

 

크로스는 점차 눈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더욱 심해지게 됩니다. 점 하나 하나를 찍어야 했으니 눈이 혹사해도 이만저만 혹사당한 것이 아니지요. 점묘법의 창시자 쇠라 역시 단명한 걸 보면 말입니다. 그는 또한  관절염까지 심해져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수년 동안 그를 괴롭힌 이러한 건강 문제로 인해 그의 작업 범위는 상대적으로 작아지기 시작합니다. 말년에 그는 생산적이고 매우 창의적이었으며 그의 작품은 중요한 개인전에서 선보이기도 하고 비평가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으며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둡니다.

 

 

 

 

1909년 크로스는 암으로 파리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1910년 5월 16일 54세 생일을 몇 일 앞두고 암으로 사망합니다. 

그의 무덤에는 그의 친구 Theo van Rysselberghe 가 디자인한 청동 메달이 걸려 있습니다. 그가 죽은 이듬해인 1911년 7월 크로스가 태어난 도시인 두에(Douai)는  그의 작품에 대한 회고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3. 나가기

 


뛰어난 색채 감각을 지닌 크로스는  Henri Matisse 와 다른 많은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향후 다가올 야수파( Fauvism)들에게 말이죠.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과 색채의 순간적인 효과를 좇아 자연을 묘사했던 것에 비해 과학적인 광학 이론에 근거하여 자연을 묘사하기 시작한 고독한 천재이자 정열적인 사색가, 크로스   덕분에 머리와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그림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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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가진 뛰어난 감각과 민첩한 속도, 높은 지능과 친화성은 오늘날에도 곳곳에서 활용된다. 높은 지능으로 인해 시각장애인의 앞길을 안내하는 안내견으로 훈련되기도 하며, 청각장애인 대신 전화를 받을 수도 있다. 단순히 수화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발신자가 "여보세요"라고 말하면 몇 가지의 음성 패턴을 인식하고 이에 응답하는 것이 가능하다. 조난된 사람을 구조할  때 조난자의 위치를 식별하는 데에도 구조견이 이용된다.

 

 

 

 

 

래브라도 리트리버 안내견의 모습

 

 

 

 

 

신호등이 떨어지면   안내견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는 이가 있다. 주인 한 번 보고 안내견 조끼를 입은 개의 모습을 보며 운동회 때 친구 발목과 내 발목을 묶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호흡을 맞춰 뛰던 생각이 났다. 둘이서 한 몸인 양 하나 둘, 하나 둘 호흡을 맞춰가며 리듬을 타고 마음을 다해 결승선까지 달려가던 그날의 기억이 주인의 보폭에  걸음 속도를 맞추는 안내견 모습과 사뭇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맹도견 또는 인도견이라고도 불린다. 안전하게 길 안내를 하거나 위험을 미리 알려 그들을 보호하도록 훈련되어 장애인을 보조하는 특수목적견, 장애인 보조견으로 정확한 명칭은 시각장애인 안내견이다.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819년 빈에 있는 한 맹아학교의 창립자가 펴낸 책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1916년 독일에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시각장애인이 증가함에 따라 몰덴부르크에 안내견 학교를 개설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 사업은 유럽 각국으로 번져서, 1923년에는 포츠담에 맹인 안내견 훈련소가 개설되고 1929년에는 M. 프랑크에 의해 미국 모리스타운에도 훈련소가 설립되었다.

 

 

 

 

 

한국의 경우 삼성의 사회공헌 자금으로 운영되는 삼성화재안내견학교가  분양한 맹인안내견이 대부분이며, 개인과 지방자치단체의 후원을 통해 운영되는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에서도 안내견을 분양한다.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는 시각장애인 안내견 외에도 청각도우미견, 지체도우미견 등을 함께 분양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혀를 내밀고 웃고 있는 녀석들 보기만 해도 상쾌지수 올라간다. 다가가 머리라도 쓰담쓰담해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안내견은 시각장애인들의 활동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지능이 높고, 인상이 좋아 타인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고, 체격과 체력이 뛰어나며, 공격성이 낮고, 사람에 대한 친화력이 좋은 완벽에 가까운 견종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걸 모두 만족시키는 종인 골든레트리버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대부분이지만, 의외로 초기에는 저먼 세퍼드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대세가 바뀐 이유는 셰퍼드가 리트리버보다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은 아니고, 레트리버가 셰퍼드보다 더 순한 외모이기 때문이다. 이는 안내견과 일반적인 반려견이 갖는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 때문이다. 

 

 

 

 

 

 

우선 안내견에게는 가슴줄에 조끼만 입히고 입마개는 씌우지 않는데, 안 써도 되는 게 아니라 아예 씌우면 안 된다. 정부에서 반려견 입마개 착용 의무화 정책을 검토할 때도 안내견은 항상 논외다. 그 이유는 주인이 위험한 장소로 향하고 있을 때 주인을 붙잡거나 타인이 주인에게 위해를 가하려 할 때 그를 막는 등 안내견이 사람을 힘으로 압도해야 하는 상황을 상정하여, 여차하면 말 그대로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늘어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견종이 선택된다. 

 

 

 

 

안내견들은 일반적인 개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해도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다 들어갈 수 있다. 말하자면 " 일반적인 반려견이 들어갈 수 없는 곳도 들어갈 수 있으면서,  입마개도 안 돼 있는 덩치 큰 개"인 셈이다. "입마개가 안 되어 있는 대형견"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타인에게 충분히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이므로, 외모라도 공포심을 최대한 덜 자극하는 대인 친화적이고 순하면서 호감형인 외모를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샤프하고 인상이 날카로운 셰퍼드보단 인상이 부드러운 레트리버종을 안내견으로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개의 외모가 어떻든 크게 개의치 않겠지만, 트라우마라든가 여러 이유로 작은 개만 봐도 벌벌떠는 사람도 흔하며 개를 딱히 싫어하진 않아도 동물 자체에 익숙하지 않아서 일단 중대형 견에 거북해지는 사람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로 순하고 호감형인 외모는 안내견에게 매우 중요한 자질이다.

 

 

 

 

 

 

세계 안내견의 약 90%는 리트리버종이며, 삼성화재안내견학교는 래브라도 리트리버종을 ,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는 스탠다드 푸들이나 골든리트리버와 스탠다드푸들의 교배종인 골든두들을 사용하고 있다. 골든두들, 즉 푸들과 골든 리트리버의 혼종견을 안내견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시각장애인이 알레르기를 가지는 경우에 대처하기 위해서이다. 직모는 털 빠짐이 심하지만 곱슬모는 털 빠짐이 심하지 않다. 그런데 직모와 곱슬모 중에서 곱슬 모가 우성 형질이기에 직모견과 곱슬 모견을 교배한 경우 자녀 세대의 개체는 곱슬모일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또한 푸들도 외모가 순한 인상이면서 스탠더드 푸들의 경우 그 체격이 리트리버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으로 크기 때문에 스탠다드 푸들과 골든 리트리버를 교배한 골든두들도 안내견으로 꽤 쓰인다. 스탠다드푸들 역시 인상이 순하고 지능도 좋고 덩치도 큰 편이지만 힘은 그다지 센 편이 아니라서 골든두들이 선호된다. 스탠다드푸들은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져 대형견 중에서는 체중이 덜 나가기 때문이다. 

안내견으로 많이 사용되는 리트리버종에서도 골든 리트리버보다는 래브라도 리트리버종이 더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털 관리의 용이함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래브라도 종이 더욱 훈련이 쉽고 적합하기 때문이다.

 

 

 

 

 

 

copyright, Kelly Expressions Ltd, Buffalo, New York

 

 

 

 

시각장애인 안내견으로 주로 조끼입고 다가오는 래브라도 리트리버종은 자주 본 적이 있지만 '골든두들 ' 이란 독특한 이름을 지닌 곱슬한 털이 인상적인 녀석들도 시각장애인 안내견인 사실은 처음 안 내용이기도 하다. 거리에서 이 녀석 비슷한 안내견이 지나가면 쓰다듬어 주고 견주에게 '좋은 날 ' 하며 상냥한 인사말이라도 건네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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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후기 인상주의 

자포니즘

나비파

나비주아브(Navi Zouave)

드레퓌스사건(1894-1908)

앵티미즘(intimisme,내면주의 경향)

 

 

 

 

2. 생애

 

 

 

 

에두아르 뷔야르(Edouard Vuillard ,1868-1940)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장식 예술가이며 판화가이다. 

1868년 11월 11일 손에루아르주 퀴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뷔야르의 아버지는 은퇴한 해군 보병 대장이었으며, 제대 후 세금 징수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어머니 마리 뷔야르보다 27살이 연상이었으며, 어머니의 직업은 드레스 재봉사였다고 한다. 그의 삼촌 역시 직물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고 그런 주변 환경 속에 익숙해서일까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옷의 무늬, 질감, 벽 문양등 장식적인 요소의 섬세한 그림이 유난히 돋보이는 화가다.

 

 

 

 

1877년 아버지가 은퇴한 후, 뷔야르의 가족은 파리에 정착했다. 어머니의 재봉 작업장이 있던 Rue Daunou로 이사한 후, 마리스타교육수사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성적이 좋아 뷔야르는 장학금을 받아 명문 리세 퐁텐(Lycee Fontaine)에 출석하였고, 수사학과 예술을 공부하면서 미켈란 젤로의 작품과 고전 조각을 드로잉하기 시작한다. 레세에서 뷔야르는 미래에 나비파가 되는 케르 자비에 루셀, 모리스 드니, 작가 페에르 베버, 그리고 미래의 배우이자 무대 감독이 되는 오렐리앵 뤼네포를 만나게 된다.

 

 

 

 

1891년부터 1900년까지 그는 나비파의 주요 일원이었으며,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순수한 색의 영역과 내부의 장면을 조합한 그림을 제작하였고, 주제는 색과 패턴에 혼합시켰다. 뷔야르는 또한 극장의 세트와 실내 장식을 위한 패널에 채색을 하거나 접시와 스테인드 글라스를 디자인하는 장식 예술가로도 활동했다. 당시 프랑스 사회의 근대화와  도시화는 건축이나 집의 외관뿐만 아니라 실내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던 시기였으며 당시는 아르누보로  대표되는 실내 디자인이 막부상하던 때였다. 

 

 

 

 

 

 

Public Gardens(Decorative Screen), 1894

 

 

 

 

병풍이라는 동양적인 재질에 서구의 낯선 풍경들 사람들이 공간을 채우니 이국적이고 근사하다. 당시의 옷차림이나 가족의 모습 등  문화를 엿볼수 있어 개인적으로 더 좋은 것 같다.

 

 

 

1889년 말에 뷔야르는 모리스 드니와 다른 리세 출신 친구들과 함께 반비밀주의이자 반신비주의 모임인 나비파를 만들고 자주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고갱에게 영향받아 폴 세뤼지에를 중심으로 1890년경 결성된 나비파의 특징은 상징주의적인 신비로운 화풍으로 전통적인 회화와는 다른 길을 걷고자 하는 단체였다.  대부분이 파리의 쥘리앙 아카데미 출신의 모리스 드니, 에두아르 뷔야르, 피에르 보나르는 문학과 연극, 그리고 바그너의 음악에 관심이 많은 지적이고 영적인 야심으로 가득한 젊은 화가들이었다. 이 모임이 추구한 방식은 사실적 표현보다는 기억과 상상에 기반한 회화이다.  나비(Navis)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하는 말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젊은 화가들이 새 시대의 사조를 여는 리더  역할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젊은 화가 폴 세뤼지에는 브르타뉴를 여행하면서 폴 고갱의 지도에 따라 색의 영역으로 구성된 추상에 가까운 항구 그림을 그려낸다. 이것은 최초의 나비파 작품인 <부적(The talisman)>이 되었고,  세뤼지에와 그의 친구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니, 폴 랑송은 예술을 그 토대로 환원시키는 데에 전념한 최초의 나비파 작가가 된다. 모리스 드니를 통해 뷔야르는 랑송의 스튜디오나 Passage Brady의 카페에서 만나던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모임의 존재는 이론적으로는 비밀이었고 회원들은 암호화된 별명을 사용하였다. 뷔야르의 별명은 그의 군 복무로 인하여 나비 주아브(Navi Zouave)가 되었다. 

 

 

 

 

2023.03.24 - [지식&교양] - 46.인상주의 화가, 고갱(6)  

 

 

 

 

 

나비파 일원중 뷔야르는 쥘리앙 아카데미에서 만난 피에르 보나르(1867-1947)와 만나게  되고  이후 둘은 예술적 유대감과 끈끈한 우정을 평생 이어간다. 1890년부터 10연 년 간 지속된 나비파 시기에 두 사람은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라 내밀한 일상의 '분위기'와 '느
낌'을 담는 그림을 추구한다.  19세기말 부르주아 가정의 단란하고 내밀한 생활을 즐겨 다룬 앵티미즘(intimisme, 내면주의) 경향을 대표한다. 일상의 모티브들을 따뜻하고 친밀하게 그렸던 그의 작품들에는 아이들과 가족들이 함께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앵티미즘은 인상파들의 풍경화와는 달리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나 가정적인 실내 장면에서 빛과 색을 찾아 따뜻하고 애정이 넘치는 그림을 그리는 경향으로 뷔야르와 보나르를 대표적으로 꼽고 있다. 일상 안에서 위대함을 본 작가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In Bed>, Musee d'Orsay,1891

 

 

 

 

이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그림 속 그나 그녀처럼 아무 생각 없이 옆자리에 눕고 싶어 진다.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을 앵티미즘 작가답게 풀어낸 보고 또 보아도 쏟아지는 잠이 마치 선물 같다.  평면적인 그림으로 큰 이야깃거리 없이 그저 소박한 일상의 공간을 담아낸 이 작품은  요즘작가가 그려놓은 것처럼 심플해서 더욱 매력적이다. 불면증 환자들이 보면 한방에 치유가 될 것 같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림책 같기도 하고 일러스트와 같은 느낌때문인것 같다. 과감하게 화려한 색을 화면 가득 펼쳐 보이던 뷔야르는  이 작품에서 만큼은 단출한 무채색과 몇 개의 선만으로 어느 일요일 오후의 늦잠  같은 달달한 휴식을 그려내고 있다.

 

 

 

 

 

 

 

 

 

 

 

 

 

 

에두아르 뷔야르의 가장 큰 관심은 여성 심리였는데 그 배경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는 재봉사로 일했기에 가게에는 항상 여성이 많이 드나들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뷔야르는 섬세하고 모호한 여성 심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여성들이 실내에서 대화하거나 뜨개질하는 장면을 많이 그렸는데 분위기는 경쾌하고 자유롭게 표현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에두아르 뷔야르이지만, 뮤즈였던 3명의 여성이 있다. 중요 후원자인 나탕숑의 아내이면서 사교계의 여왕인 미시아와 스위스 미술 화상의 아내 루시, 그리고 여배우 루시 벨린이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남녀 관계는 내 가치관으로는 불가사의 한 면이 많아 이쯤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평탄한 색면에 인물이 입은 옷과 커튼, 벽지들의  패턴 장식과 대담한 화면 구성이 두드러진다. 뭉개진 얼굴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장식적인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벽지나 직물의 패턴이 주인공처럼 여겨진다. 뷔야르는 모델에게 따로 포즈를 취하게 하고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구도를 뛰어난 관찰력으로 스케치를 하고, 나머지는 기억과 상상으로 분위기와 느낌을 표현했다. 그림 속 두 여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판타지 소설도 아닌데 벽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왼쪽 여인과 가운데 포스가 장난이 아닌 검정옷차림의 어머니처럼 보이는 이가 떡 버티고 계시다.

 

'어디 한번 올테면 와봐.'

 

하는 식으로 형님 포스 풍기신다. 왼쪽 여인은 벽 장식이 과감히 주인이 되어 여인을 그 패턴 안으로 빨아들이고 있는 작업 중 상황 같다. 궁둥이가 반쯤 걸쳐진 느낌이랄까? 뭉개진 얼굴과 두 손이 없었다면 패턴의 하나로 착각할 뻔했다.

 

 

 

 

 

 

나비 파는 언제나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술에 대한 공통된 생각과 이상을 공유했으나, 1900년 전람회 이후 각자의 길을 걸었다. 

프랑스 사회를 분열시킨 드레퓌스 사건(1894-1908)에 의해 나비파의 해체는 더욱 심화되었다. 드레퓌스는 유태인 프랑스 육군 장교로,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며, 면죄되기 전에 유배지로의 추방이 선고되었다.  나비파에서 뷔야르와 보나르는 드레퓌스를 지지한 반면, 드니와 세뤼지에는 프랑스 육군을 지지하였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던 드레퓌스 대위의 필체가 프랑스 정보요원이 파리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빼돌린 문서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외딴섬에 유배되면서 시작되었다. 증거, 범행동기, 범행 방법과 시기 등이 명확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기소되었으며 실질적으로는 유대인이라는 이유가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가족의 구명운동과 소수 지성인들의 노력으로 1897년 진범이 구속되었으나, 명백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신뢰 추락을 이유로 사건을 은폐하고 증거를 조작한 후 진범을 풀어주었다.  이런 사실에 격노한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1898년 1월에 신문에 게재하여 군부의 부도덕성을 대중에게 고발하며 진실을 알렸다. 이 글은 가히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대중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프랑스 사회는 본격적으로 드레퓌스 파 와 반드레퓌스 파로 나뉘어 내전 수준에 준할 정도로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정치적인 쟁점으로 비화되었고 국제사회도 이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우여곡절 끝에 1906년 재심을 통해 무고함이 입증되며 사건이 종결되었다.

 

 

 

 

 

2023.07.12 - [지식&교양] - 50-14. 나비파,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 23

2023.07.06 - [지식&교양] - 50-13. 나비파,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22)

 

 

 

 

 

1900년 나비파가 해체된 후 뷔야르의 스타일과 주제는 변화하였다. 나비파와 함께 할 때에 뷔야르는 아방가르드의 선봉에 있었다. 그는 점진적으로 1900년 이전에 그렸던 밀폐되고 붐비는 어두운 실내를 버리고 자연광이 비치는 야외를 더 많이 그리기 시작하였다. 뷔야르는 계속해서 실내를 그리긴 했으나, 실내는 더 밝고 깊어졌으며 색채는 더 다채로워졌고, 얼굴과 이목구비가 더 선명해졌다. 빛의 효과는 주제가 실내이든 파리의 공원과 거리이든 뷔야르 작품의 주요 구성 요소가 되었다.

 

 

 

 

그림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장식뿐이다.


 

 

 

 

 

 

 

 

1900년 이후 나비파가 해체되었을 때 그는 보다 사실적인 스타일을 채택하여 화려한 디테일과 생생한 색상으로 풍경과 실내를 그렸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저명한 인물의 초상화를 그 인물에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그려내기도 했다.

말년에 뷔야르는 점차 자연주의로 돌아가, 1908년 11월 Gallerie Bernheim- Jeune에서 개최한 개인전에서 다수의 풍경화를 발표하였다. 그는 반모더니즘 비평가로부터

"체계적인 변형에 대한 우아한 항의 "

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3. 나가기

 

 

 

에두아르 뷔야르의 작품은 초기작에 비해서 1920년대 이후를 거치며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바뀌어갔다. 나이가 들면 취향이 조금씩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섬세한 관찰력을 지닌 그는 매번 변화와의 징후를 감지하고 나비파 화풍을 거쳐서 화법과 양식을 바꾸고 끊임없이 평생 기술을 익히는데 주저하지 않은 화가이다. 인물 묘사부터 아르테코까지, 회화뿐  아니라 실내 장식 예술가였고 중년을 지나서 초상화, 풍경화까지 장르를 점점 확장하여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1940년 사망할 때까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호평을 얻었으며 동료 화가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그의 잔잔한 일생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일관성 있는 평을 받은 복 받은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구글 아트 앤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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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화가 충분히 진행된 오늘날 가정에서 일부 전통적 생활이 보전된 지역을 제외하고  많은 개들은 인간의 생산 활동에 기여하지 않는다. 개는 인간이 제공하는 식량, 거주지, 의료 서비스에 의존하여 살아가며, 개 자신의 번식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의 의지에 의해 번식된다.
 
 
 
 
 
 

 

 





 크기와 종을 불문하고 오늘날 사람에게 길러지는 개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먹이를 구하여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유년기를 가정에서 보낸 유기견의 경우 더욱 치명적이다. 상당수가 유기 후 인간에게 구조되지 않으면 며칠 만에 굶주림 등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투견이나 사냥견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중형견보다 생존능력이 떨어진다. 일반적으로 야생화되는 들개무리는 중형견 무리이며, 이들 또한 사람이 사는 곳과 가까운 야산을 배회하며 사람이 버린 먹이나 가축 절도에 의존하며 살아가야 한다.

예전에 <TV 동물농장>이라는 프로에 버려진 유기견들이 근처 산에 모여 있다가 밤만 되면 마을로 내려와 길고양이나 다른 생명체를 위협하는 일이 많아져 방송을 탄 적이 있었다. 그들도 살아야 하니 이해는 가면서도 방송 분량이 끝날 때까지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인간들의 편리에 의해 선택되고 필요 없으면 맘대로 버려지는 부속품 취급 당하는 반려견들의 모습이 버려진 곳에서 주인이 와주길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그들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어 더 짠하기도 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본격적인 사냥꾼인 늑대나 다른  야생 동물들과 살아갈 경우, 이미 유전적으로 개량이 되고 야생성이 거세된 오늘날의 개는 이들과 전투는 물론이고 먹이 경쟁조차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출처는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야생의 독수리를 닭들과 함께 닭 장에 넣어 길렀더니 모양은 맹수인 독수리지만 하는 짓은 닭들과 같아 본인이 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우연히 다른 독수리가 발견하여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처음엔 어설프게 시작하여 점차 창공을 근사하게 비행할 수 있었다는 우화로 기억한다.

또 야생에서는 인간 사회에서와 달리 활발한 활동으로 인한 에너지 소모가 높아 토끼 등의 작은 사냥감만으로는 생존이 어려우며 필연적으로 대형 초식, 잡식 동물을 사냥해야 하는데, 사냥 능력을 상실한 개보다 다른 야생 동물이 우위에 서는 경우가 많으므로 먹이 수급이 어렵워결국 생존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개의 유전적 특징 때문에, 개를 유기하는 문제는 동물을 야생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개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견주들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도 어디선가 선한 눈망울을 굴리며 생활고에 버리고 간 반려견들이 선채로 원망조차 못하고 망부석이 되어가고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기호가 다양해짐에 따라 개는 보다 온순한 성격과 작은 체격을 가진 동물로 개량되어 왔다. 
사람의 권리에 대한 의식도 발달하지 않았던 수천 년 동안 동물권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육자의 선택적인 영역이었으며, 생물학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도한 개량에 따른 유전적인 문제는 크게 연구되지 않았다. 인간은 사육 목적에 따라 견종을 사냥개와 애완용개로 나뉘어 개량했으며, 반복적인 교배를 통해 각각의 특징을 극단적으로 발현시킨 순종견들이 개발되었다. 대형견에서 소형견에 이르는 다양한 견종이 파생되었으며, 소형견들은 자연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전적으로 인간에게 의존하여 생존을 영위하는 동물로 변화했다.





 

 

 

 

 

 

 

 

 

 

인간에게 친근한 동물이기에 영화 등에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영화가 래시, 베토벤, 벤지, 하울링, 마음이, 리틀 포레스트 등이 있다. 그중에서 <베토벤> 이야기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베토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1992년 개봉한 작품이다.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2년 뒤 후속작도 개봉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특히 베토벤 역을 연기한 세인트버나드는 '크리스'라는 이름의 개로 연기가 압권이다. 줄거리는 평범한 애견 분양 숍에 어느 날 도둑들이 출모해 강아지들을 납치한다. 이들은 종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아이들을 철장에 넣고 훔쳐 달아나는데 개도둑들의 목적은 훔친 강아지들을 각종 불법적인 동물 실험의 실험체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이중에 섞여있던 영화의 주인공 버나드종 강아지는 다른 영리한 강아지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추위와 습기에 떨며 쓰레기통에서 하룻밤을 지낸 어린 강아지는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우연히 신문을 가지러 나온 죠지를 따라 뉴튼 집안에 몰래 들어간다. 이 집주인인 죠지는 개 혐오주의자로 절대 강아지를 키울 수 없다고 반대하지만, 죠지의 세 아이들 은 강아지를 키우겠다고 막무가내이다.  뉴튼 집안의 세 아이들과 엄마 그리고 개 혐오주의자인 아빠 사이의 일어나는 기분 좋은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는 가족영화이다. 어린 자녀를 두신 이웃님들 계시면 함께 보기를 권한다.

 

 

 

 

 

 

해외 일부 국가에서는 고양이 등 다른 몇몇 동물이나 개를 키울 경우 애완동물 보유세라는 세금을 걷는다. 예를 들면 반려견 등록 관리 비용, 분뇨나 소음으로 인한 공해, 개물림 사고 등으로 인해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며  이는 동물을 키우지 않는 다른 시민이 분담하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국가의 정부에서 시행 중이다. 미국, 영국, 아일랜드, 이탈리아, 중국 등 30여 개국은 지역별로 세금 유무가 좀 다르다. 독일에서는 'hundesteuer'라는 제도로 개를 의무적으로 등록하고 품종을 구분하여 세금을 부과한다. 주마다 세율이 다르며 사육두수가 늘어날 경우 누진세를 적용한다. 베를린의 경우 어린아이가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롤 온순하고 몸집이 작은 품종이 연간 120유로(한화 17만 원 상당)가 부과된다. 두 마리가 되면 각각 연간 1165유로(한화 160만 원 상당)로 1년에 320만 원이나 되는 세금을 납부하여야 한다. 견주들의 높은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 같아 좋은 제도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개들 세계에도 빈익빈 부익부 처지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 양가감정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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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의 진화사

 
 

 
 

라이카: 구 소련의 우주 탐사견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로 간 개
 1954년 소련 태생
1957년 11월 스푸트니크 2호와 함께 발사되었지만
선내 장치의 고장으로 우주에서 생을 마감함
 
장군이: 7개월동안 300km달려 고향집으로 돌아온
진돗개 백구 이야기의 주인공
 
파트라슈: 네로와 함께 곁에서 죽음을 맞이한 플란더스의 개
 

 




 

아들개 바람이

 
 




 
사람에게 이만한 친구가 있을 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문화권에서 개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손에 꼽을 정도로 많다. 어린시절 국어책에서 배운 '오수의 개'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술에 곯아 들판에 누워 잠든 주인곁에 있다가 들판에 불이 나자 냇가로 가서 자신의 털을 적셔 불을 꺼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고 주인을 구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감동적이던지! 미국에 살며 온갖 종류의 개들을 다양한 인종만큼이나 본다. 몸집 작은 치와와부터 큰 덩치의 저먼세퍼드, 허스키 등 주인과 똑 닮은 그들의 성향에 신기하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내 어릴적 동네 개들은 불쌍했다. 잘 먹여 키웠다가 한여름 보양철 마을 어르신들의 한 입감으로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당시 부족한 단백질을 서민들은 그렇게라도 보충해야 했으니 이해 못할일도 아니다. 학교 갔다 오면 주인잃은 목줄과 텅빈 개집을 보며 섫게 운 적도 많았다. 이집저집 어린 동심에 상처 준 집들 많을 줄 안다. 그런 부정적 기억에 비하면 요즘 개들은 신분상승한 신데렐라들 같다.온갖 치장에 주인 욕심까지 더해져 개로서 살기보다 주인의 소품용 장난감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으니 말이다.
 
 




 
이 녀석들은 언제부터 인간 곁에 머물며 이럴게 길들여 지기 시작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8천년 전 암각화에 13마리의 개를 거느린 사냥꾼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또 로마제국 시대 헬레나라는 이름의 개에게 묘비명이 있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 까지 하다. 나역시 두 마리의 개를 키우며 그들의 명민함에 혀를 내두른 적이 많다. 자세히 노는 모습을 관찰하다 보면 사람보다 나은 구석이 참 많았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하늘나라로 간 엄마개 생각이 난다. 아마 한여름 몹시 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번째 브리드로 4마리의 새끼를 얻었는데 그날따라 너무 더운 날씨였다. 일을 하면서도 걱정이 되었었다. 서둘러 집에 도착해 보니 믿기지 않는 광경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글쎄 눈도 못뜬 새끼들이 덥다고 칭얼대니 어미개가 새끼들 하나하나  입으로  물어 개 집 밖으로  꺼내 놓은 것이 아닌가! 사진이라도 찍어 둘것 그랬나 싶다. 촉촉하게 가슴 밑바닥부터 감동이 밀려왔다.


‘세상에
세상에나, 이런 일이!’


어미개의 영민함에 그날처럼 고마운 날이 없었다. 새끼 버리고 매정하게 제 인생 찾아가는 냉한 인간 어미도 있는데 말이다. 인간보다 백 재 천 배 낫다는 생각을 그날 엄마개가 보여 준 모성을 보며 진하게 느꼈었다. 










아빠 개 천둥이


 
 
 
 



 
개는 거주 지역의 경비, 수렵 보조, 목축 시의 다른 가축보호등 인간의 생산활동을 보조해주는 일꾼으로 활동해 왔었다.  그런 그들이 어느날 부터  인간으로부터 먹이를 제공받고 천적으로 부터 보호를 받으며 인간들 곁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뛰어난 후각과 청각, 민첩하고 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작년 간암으로 먼저 간 아빠개 진돗개 천둥이는 청각이 엄청 예민했다. 사냥개 종류라 지나가는 야생쥐, 느릿한 걸음 걸이의  스컹크, 깝죽대는 청설모, 응큼한 너구리 까지 잡기도 하고 때로 상처를 입기도 하며 가족들 사랑을 참 많이 받았던 아빠개였다. 그런데 이녀석이 7/4 미국의 독립기념일 터트리는 폭죽소리에 맥을 못춘다.
겁이나 집 안으로 들여 달라고 유리창을 박박 긁기도하고 개 집 위로 올라가 오줌마려운 녀석처럼 낑낑대기도 해 가족들에게 '천둥'이라는 이름값 못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었다.   천둥이 귀에 폭죽 소리는 아마 전쟁때 터지는 대포 소리만큼 크게 들리는것이 아닐까 싶다.인간에 대한 신뢰 또한 강하기 땨문에 다른 육식동물에 비해 적은 훈련으로 가축화가 가능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3만 년 전에 다다르면 이미 늑대가 아닌 개로소 인간에게 사육되고 있었다고도 전한다. 다른 가축과 비교해 인간과 함께 한 역사가 훨씬 깊은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어느 지역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인류 문화권에서 개를 길렀다는 기록은 많다.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가축화되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 역시 소, 말, 돼지, 닭은 기르지 않았으나 칠면조, 알파카와 함께 개를 길렀다고 한다. 개의 가축화가 굉장히 이르고 보편적이었음을 말해주는 사례다. 이곳 추수감사절에 먹는 주 메뉴인 칠면조를 실제로 보면  그 크기에 놀라고, 마켓에서 칠면조 가슴 부위만 따로 냉동해 파는데도 3-4인용 메뉴가 나올 정도로 그 무게감에 또 한번 놀라기도 한다. 
 그런 칠면조와 개가 함께 사육되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재미난 스토리 하나 쯤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동양에서는 십이지중의 하나로 친숙한 동물이었으며 무려 신석기 시대 이전부터 개를 길렀다고 한다. 중국의 역대 황실은 페키니즈 등 애견 문화가 발달해 있었고, 일반 백성들 역시 집집마다 개를 많이 길렀다. 충성심이 강해 유교 사상이 지배적인 나라에서는 고양이보다 다루기가 쉬워 많이 길렀다고 한다. 중국 고사에 보면 견마지로, 사준사구 등 충신의 비유로 인용되기도 한다.



犬馬之勞(개 견,말 마,갈 지,힘쓸 로)



임금이나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노력이나 윗사람에게 바치는 자기의 온갖 노력을 개와 말에 비유해 낮추어 하는 말로 자신의 수고로움을 겸손하게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하는 말이다.




사준사구(四駿四狗)



사구사준이라고도 불린다.
네 마리의 충성스런 준마와 충견을 뜻하며, 칭기즈 칸을 도와 몽골 제국을 건국한 8인의 건국공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준은 내정과 전략에서 활동한 인물이며, 사구는 전투에서 공훈을 발휘한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는 또 일찍부터 군견으로도 활용되었다. 고대 국가에서 개는 전쟁 시 군인과 함께 최전선에서 전투용으로 투입되었는데, 훈련을 통해 통제가 가능하며 체구가 작고  날렵해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시대 그레이트 피레니즈의 조상격 되는 피레네 산맥의 대형견을 전투에 사용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 후방 경계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다만 이슬람권에서는 무함마드에게 피해를 입힐 뻔한 에피소드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쿠란 자체에서는 개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슬람 국가에서도 개를 널리 기른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역 특성상 상당수의 아랍인들은 전통적으로 유목 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에 유목민에게 개는 필수적이다. 무하마드 역시 유목민 생활을 했으며,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던 그도 유목용 개들에게 애정을 주며 곁에서 키웠다는 일화가 있을정도다. 아랍 역사에는 유목용이 아닌, 가정에서 키우는 개들도 많았는데, 주로 아프간 하운드처럼 부유층이나 권력자들의 애완동물로 사육, 번식되는 개들이었다.


 
-                             -to be continue-
 
 


 #개 이야기(1)#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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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먹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을 으깨서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짜장면을 먹는
걸인의 동작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냅킨을
두르고 거위 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도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전기밥솥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못이 메었다.
이 비애사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김훈, <밥 1>,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2015-













제가 살고 있는 서든 캘리포니아(Southern California)의 여름은 앞마당 야자수이발 시키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부터 요란한 기계음 소리에 둘러보니 옆집 키 큰 야자수 이발을 시켜 주고 있네요.
대롱대롱 매달린 이의 안전이 걱정될 정도로 말이죠.
이곳은 비가 많이 오지 않아요. 바삭바삭 소리가 날 정도로 나뭇잎들이 말라 있어요. 집집마다 스프링 쿨러 같은 장치가 있어 아침•저녁 조절을 하며 잔디밭이나 식물에 시간 맞춰 물을 줍니다. 가뭄이 심하 던 몇 해전 정원사의 손길이 일주일마다 가야 하는 자연 잔디 대신 인공 잔디 까는 일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어요. 일 년 내내 초록색을 유지하고 잔 손질 갈 일이 없으니 집주인 입장에서 이만한 선택지도 없지요. 동네 산책을 하며 유난히 진초록인 집들을 하나둘씩 세어 보며 자연 잔디와 비교도 해 본 적이 있답니다. 개인적으로 보기는 쌈빡한 느낌인데 풀 향이 나지 않아 저는 별로 더라고요. 조금 누릇한 색도 군데군데 섞여 있지만 토끼풀도 나고 가끔 꼬랑지 동그랗고 몸집 작은 야생 토끼가 풀 뜯는 모습도 볼 수 있어 자연 잔디가 훨씬 좋더라 고요. 유지는 힘들 태지만요.








어제도 이곳은 달걀 푸라이 해 먹을 날씨였어요. 우리 집 강아지들 시원한 곳 찾아 길게 뻗어 낮잠을 청하지요. 밖으로 땀 배출이 어려우니 털 딸 ‘레아(1y)는 더워서 맥을 못 춥니다. 불그스름 혓바닥이 몇 인치 밖으로 삐져나오고 숨이 거칠어요. 털 딸 ’ 레아’는 시베리아처럼 추운 곳이 고향인 허스키 믹스거든요. 복슬복슬 털이 많으니 한 여름 털 코트 걸치고 산다 생각하면 쉬울 것 같네요.








궁금하시죠.
왜 저렇게 위험한 일을 시키는지 말이죠.






이곳은 산불이 자주 나는 지역입니다. 예방 차원에서 미리 제거를 하는 거지요. 더운 날씨에 자연 발생적으로 날 때도 있고, 운전자들의 부주의로 피우던 담배를 무심코 버리다 옮겨 붙는 경우도 있고, 노후된 전봇대 전선이 스파클을 일으켜 주변 나무에 옮겨 붙기도 하고요.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물 먹는 하마가 아닌 불 먹는 하마가 되어 주변 사물을 순식간에 집어삼켜버립니다. 바람 부는 날 집에서 식구들과 바비큐 해 먹다 불씨가 바람에 날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불상사가 생겨 법의 제재를 받아야 할 때도 았답니다. 몇 년 전에 난 산불로 아직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집주인들도 많고요. 보험회사와 실랑이하며 서류만 차곡차곡 쌓일 뿐 굼벵이 일 처리 속도에 짜증도 많이 나있을 겁니다. 데리고 살 던 말이나 다른 가축들도 놀라 날뛰다 방향을 잘못 잡아 불길 속으로 들어가 주검으로 발견되기도 하고요. 작은 불씨 하나의 힘은 대단합니다. 재산과 인명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재앙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예방만큼 좋은 해결책도 없는 거지요.








보통 위험한 3D직종의 종사자들은 이민자들입니다. 특히 히스패닉 이민자들이 대부분이지요. 딱히 가진 것 없고 몸 하나로 쉽게 식구들 먹여 살리는 일이 가능하니까요.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에 가면 인간은 누구나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배워야 하는 새내기 아니겠어요. 그나마 장비를 갖추고 저 높은 야자수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고수입니다.
그마저 갖추지 못한 왕초보는 줄을 잡아 주거나 밑에 떨어진 여자수 잎을 긁어모으는 일을 합니다. 미니멀한  팀을 꾸려 기동성 있게 협업을 하는 거지요.














짜잔~~
어때요!
깔끔해졌지요.
집 근처로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말이죠.
오늘 하루의 고된 노동으로 기분 좋게 먹을 것 싸들고 식구들 보러 갈 가장의 발걸음이 가벼울 것 같습니다. 우당탕 탕 하고 아빠를 기다릴 아이들 모습도 떠오르고, 주방 근처를 바삐 움직이며 돌아 올 남편과 아이들의 먹거리를 챙기고 있을 안주인의 모습도 그려집니다. 차린 것 많이 없어도 식탁에 모두 모여  맛있는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하루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야자수 머리 깎이기#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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