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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오렌지 컬러와 로고! 

아들과 뉴욕  여행길에서 밤거리를 거닐다 나도 모르게  멈추고 찰칵했다.

 

'역시 뭐가 달라도 달라.'

 

보면서 들었 던 생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_lBQ5cxWQPk

 

 

개인적으로 에르메스의 스카프 라인을 좋아한다. 특히  실크 소재로 사이즈가   가장 큰 것으로 말이다. 펼쳐놓고 보면 한 폭의 그림 같은 느낌이 고급스러움을 넘어 한 땀 한 땀 작가의 정성이 눈으로 먼저 읽힌다. 베이직한 옷이 대부분이라 포인트 주기 좋고, 흰색 셔츠 같은  정장차림에도 어울리고, 살짝 세미 케쥬얼로 무게 중심을 잡을 때 도 효과 만점이다.  케쥬얼 차림이라면 믹스 매치해 입어  감각을 뽐낼 수 도 있으니 두루두루 뽕 뽑는 아이템이라 가성비 갑이다. 아직  작품 같은 스카프를 자연스럽게 두를 자격은 안되고  이쯤 되면 하나 가져도 되겠다 싶을 때  내 분위기와 딱 떨어지는 것으로 고를 기회가 주어지 길 희망 해 볼 뿐이다.

 

 

 

 

 

www.hermes.com 1945년부터 사용되는 에르메스 심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Hermes)는 여행자, 목동 , 발명, 상업, 그리고 도둑과 거짓말쟁이의 교활함을 주관하는 신이며, 주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전령 역할을 한다. 뛰어난 정보꾼이고, 젊은 미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언변 좋은 꾀돌이, 또는 떠돌이들의 수호신 등등 여러모로 현대에도 인기가 많은 신이다.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특별한 날 공짜선물을 받고 싶어 한다. 특히 사랑하는 남편이나 연인이 명품 선물을 한다면 오렌지 칼라에 에르메스 심볼로고가 새겨진 이 브랜드를 NO. 1로 꿈꿔보지 않을까 싶다.  마치 돈과 힘을 소유한 백마 탄 왕자님이 자신에게 나타나 준 것 같은 착각을 주기  딱 좋은 브랜드로 이 로고 만큼 심쿵한 것이 있을 까싶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바꾼다.

-티에리 에르메스(Thierry Hermes)

 

 

 

에르메스는 지금도 최고의 사람들이 , 최상의 재료로, 최고의 방법을 동원해,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모인 팀으로 알려져 있다. 그야말로 명품  중의 명품이라 별칭을 지닌 '에르메스'다. 모든 브랜드에는 경쟁기업과 상품, 서비스의 차별화를 위해서 또 자사의 철학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심벌, 로고를 갖고 있다. 



창립초기인 1800년대 주요 운송, 이동수단인 말을 위해서 말과 관련된 마구 용품과 안장을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가방이나 지갑과 같은 제품들을 추가하게 되었고 마차 모양 로고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러한 역사에서 기원한다. 제품을 구매할 능력이 있다고 해도 제품을 구경하거나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한정적인 브랜드다. 그래서 더 구경하고 싶고, 구매하길 희망하는 패션 명품 브랜드이다. 

 

 

 

에르메스는  많은 명품브랜드들이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수합병되고 대기업으로 그룹화된 것과   다르게, 아직 가족 경영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에르메스 가문이 지분의 73.7%가량을 , 루이비통을 소유한 LVMH와  일반인들이 나머지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가죽제품을 비롯해 의류, 시계, 스카프, 향수 등 16개 제품군을 생산하지만 가죽제품이 전체 매출의 50%를 차지한다.  루이뷔통, 샤넬과 함께 3대 명품으로 불리지만 그중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도 가족경영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사륜마차는 '뒤끄'라는 이름의 고급마차로 에르메스와 고객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아한  디자인의 마차와 새롭게 단장한 말과 빛나는 마구, 말  앞에 서 있는 마부는 고객을 기다리는 에르메스를 형상화한 것이다. 에르메스가 오렌지색 심벌 로고 칼라를 채택한 배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해 염료가 부족했던 시기에 오렌지색이 천연가죽 색과 가장 흡사했고 또 저렴한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은 여러 가지 상징이 있는데 의리와 충절, 힘과 태양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이런 이미지가 고급스러운 제품이라는 프리미엄과 함께  오렌지 칼러의 시각적인 정체성과 더해져  세계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진출처: NYCulture Beat

 

 

 티에리 에르메스의 손자가 세계대전 중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그는 지퍼를 보고 들어와 프랑스에서 만들어지는 자사 가방에 최초로 지퍼를 사용하여 보급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에르메스의 백을 살펴보면 1935년 모나코의 왕비인 그레이스켈리가 임신한 자신의 배를 가방으로 가리는 모습이 라이프 잡지에 실리면서 유명해진 켈리백으로  고급스럽고 캐주얼한 느낌을 갖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0lE1Yy-Y18 

 

 

 

 

1984년도에 출시된 버킨백은 1970년 중반 패션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제인 버킨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제인 버킨이 비행기에서 가방을 올리려다 떨어트렸고 주머니가 없는 가방에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자 같은 비행기에 탔던 에르메스 회장이 이 모습을 보고 그녀를 위해 만들어 선물하게 된 것이 지금의 버킨백이라고 한다. 버킨백은 켈리 백과는 다르게 손잡이가 두 개로 사용하기 편리하며 밀봉력 또한 좋아 많이들 선호하는 에르메스의 대표 인기 제품이다. 백이 워낙 튼튼해 강아지나 잡다한 소품을 넣고 다녀도 끄떡없다고  한다. 몇 년 전  버킨백을 불태우는 장면이 방연 돼 나름 이름값을 톡톡히 치루기도 했던 백이다.

 

 

 

에르메스는 여러 세대에 걸쳐 계승된 탁월한 노하우를 지닌 기업이다. 동시에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고 세계 최상급의 소재를 끊임없이 연구하며 차별화되는 독특한 정체성을 구축한 기업이기도 하다. 사회적 가치의 창조와 책임감을 중요시하는  에르메스는 프랑스 여러 지방의 공방을 세우고 환경 보전에 힘쓰며 미래의 장인들을 양성하고 있다. 

 

 

 

 

디자인에서부터 축소 모형, 프로토타이프를 거쳐 최종 오브제로 탄생하기까지 에르메스의 장인들의 적극적인 작업을 통해 창의성이 자유롭게 표현됩니다. 눈여겨볼 점은 직원들의 경력과 배경에 있어서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룹 내 커리어의 유연성과 분위기로 누구든지 회사에서 제공되는 기회를 통해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고객과 접촉하고 매장에 활기를 불어넎는 직원들은 한 가족 경영 기업이 장인들과 함께 새로운 트렌드에 따라 변화하며 펼치는 유일무이한 대여정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메신저들이고요. 세계적인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면을 잃지 않아 더 매력적입니다. 창작과 구매를 연결하는 일련의 단계에서 진정성 있는 태도와 디테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직원들이 있어 가능한 일입니다.  장인들의 복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에르메스는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오브제를 창조"하는 것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는 기업입니다.

 

 

 

소박하지만 어느 물건 하나는 내가 애정을 갖고 귀히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현명한 선택과 소비가 이루어 지길 바라고  제품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구입할 때 의미가 더 해질 것 같습니다. 그 물건을 소유했다고 자신이 같은 레베의 명품이 될 수 없듯이 먼저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 되어 주는 태도를 지닌 내면이 꽉 찬 사람이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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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메라니안(Pomeranian)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애완견 15종 중 첫 번째로, 귀여운 외모로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견종이다. 포메라니안의 조상은 북극 지역에서 많은 일을 하던 개였다고 한다. 독일어로 "뾰족한 얼굴"이라는 뜻에서 울프스피츠 또는 스피츠종이라고 알려져 있다. 16세기  카운트 에버하르트주 자인이 개의 코와 주둥이 부분이 뾰족하다는 점을 참고해 이 말을 사용했었다. 이 품종은 발트해에 접한 폴란드 북부와 독일에 걸쳐 있는 포메라니아 지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협회에서 포메라니안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나무위키

 

 

작고 귀여운 외모와 복슬복슬한 털이 특징이며 털빠짐이 있다. 소형견으로 분류되는데 대형 스피츠종   독일 스피츠(German Spitz)에서 유래되었다. 자이언트 스피츠, 미텔스피츠, 클라인 스피츠 등의 품종으로 나뉘지만, 미국에서는 모두 통틀어 독일 스피츠라고 부른다. 

 

 

몸무게 :1.8-4kg

어깨높이: 14-18cm

 

포메라니안은 작지만 풍부하고 거친 질감으로 보이는 털과 높고 평평한 플룸드 테일이 솟아있다. 뒷덜미와 머리 아래 목 주위에 목도리 같이 둘러져 있는 보호 털이 있고, 이 털은 머리부터 엉덩이 부분까지 덮여 있다. 초기 품종의 털빛깔은 주로 흰색으로 가끔 갈색과 검은색도 있었으나,  현재는 흰색, 검정, 갈색, 빨강, 주황, 크림, 파란색, 흑담비색, 블랙앤탠, 브라운앤탠, 점무늬, 얼룩무늬 그리고 이러한 색을 섞은 혼합 등을 포함한 다양한 색 종류의 포메라니안이 있다.

 

 

포메라니안은 털이 이중으로 되어있다. 손질이 어렵지는 않지만, 털갈이와 복잡한 털 때문에 매일 털손질을 해 주는 것이 좋다. 바깥쪽의 털은 길고, 직모이며 별로 좋지 않은 감촉으로 되어 있는 데 반해 속털은 부드러우며 짧고 숱이 많다. 털의 끝은 잘 엉키는데, 특히 속털은 일 년에 두 번씩 털갈이가 일어나고, 털관리를 잘해주어야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2uut1oSRqBo 

 

 

 

 

 

두 명의 영국 왕실 가족이 포메라니안 품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767년 조지 3세의 왕비였던 샬럿 왕비는 두 마리의 포메라니안을 영국에 들여왔다. 두 마리 개의 이름은 포이베와 머큐리였는데, 토머스 게인즈버러는 두 마리의 개를 그림으로 남겼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무게 14-23kg이었다고 전한다.  지금보다 다소 큰 느낌이다. 풍성한 털, 큰 귀, 허리까지  말려있는 꼬리 등은  지금의 품종과 비슷하다.  샬럿 왕비의 손녀 빅토리아는 포메라니안을 유달리 좋아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이탈리아 피렌체 방문중 작은 코와 똑똑해 보이는 눈과 귀여운 모습에 반했다고 한다. 

 

 

 

 

토머스 게인즈버러가 1785년 그린 윌리엄 핼릿 부부의 초상화, 옛날에는 컷던 포메라니안의 모습, 위키피디아

 

 

 

 

네모 모양의 몸을 가진
이 개들은
눈에 잘 뜨는 길고 두꺼운 털을 갖고 있으며,
귀는 작고 여우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며
다리와 등은 짧고
꼬리는 등에 붙어 있고
새끼 고양이처럼 활발하다. 

 

 

 

 



당시 영국 왕실은 말과 개를 기르는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로얄 패밀리들의 개 유행은 귀족들이 더 많은 개들을 사도록 장려했다. 그러다 보니  사육업자들이 더 작은 개를 만드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빅토리아 여왕이 대중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거다. 번식을 위한 큰 개 사육장도 있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이 제일 좋아하던 개는 "윈저스 마르코"라는 이름의 다른 개보다 비교적 작은 레드 세이블 포메라니안으로 , 몸무게는 5.4kg이었다고 한다. 여왕의 일생 동안 포메라니안 품종의 크기는 50%까지 줄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포메라니안은 자신을 대형견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썰매견 특유의 용맹한 성격까지 가지고 있어 대형견에게 까지 자신의 작아진 모습은 생각하지 않은 채 적대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단다. 이밖에 빅토리아 여왕 이외에 조제핀 드 보아르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내, 조지 4세 등을 포함한 많은 왕족들이 포메라니안을 길렀다.  한 가지 더 , 1912년 타이타닉의 침몰 당시 살아남은 세 마리의 개 중 두 마리가 포메라니안이었다. 미스 마가렛 헤이즈가 기르던 "레이디"라는 포메라니안은 7호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했고, 다른 한 마리는 에리자베스 바렛 로스차일드가 기르던 것으로 6호 구명보트를 타고 함께 탈출했다.

 

 

 

 

 

포메라니안의 수명은 12년에서 15년이다. 적절한 운동과 좋은 습관을 길들인다면 내과적 질환에서는 비교적 건강한 개이다. 소형견이기 때문에 고관절이형성과 같은 질병은 흔치 않다. 털, 치아, 귀, 눈 등 위생 관리를 해주지 않는다면 건강 상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정기적인 관리를 통해 이러한 건강 문제는 쉽게 방지할 수 있다. 

 

 

청각 장애 발병이 일어나기 쉽다. 슬개골 탈구는 포메라니안 품종에서 흔한 질병이다.  슬개골 탈구는 외상 또는 선천적 기형을 통해 앓게 되는데, 무릎에 있는 슬개골이 안전하게 앉아 있어야 할 슬개골 홈이 얕게 되어 있을 경우에도 발생한다. 이 경우 옆쪽에서 "탈구"가 일어나 땅에 발을 못 딛게 된다.

 

 

기관허탈은 호흡 기관의 기관지 약화로 인해 발병한다. 증상은 거위와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며, 비슷한 소리의 울리는 기침, 운동에 과민 반응을 하고, 운동, 흥분, 더운 날씨가 계속되면 상태가 악화된 기침을 한다. 

 

 

 

흑피병이라는 피부병에 걸릴 수 있다.  암컷보다 수컷에게 더 많이 발병한다. 사춘기 시기에 발병하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연령대에서 발병할 수 있다. 잠복 고환은 수컷 포메라니안에게 자주 발생하는 또 다른 장애다. 고환의 한쪽 또는 양쪽 모두 음낭으로 내려가지 않았을 경우 잠복 고환이라 하는데 이 경우 수술을 통해 고환 적출을 한다. 

 

 

포메라니안의 성격은 썰매견 성격이 남아 있어 하루 종일 집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건드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자신의 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호기심이 많아 타 견종에게 관심이 많지만, 다른 개체에 대한 경계심과 공격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개나 고양이와는 잘 어울리지 못하여 사회성이 떨어지는 견종으로 분류된다. 성격이 독립적이고 앙칼져 보호자에게 의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다만 낯선 사람 앞 혹은 공간에서는 보호자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흥분을 잘하며 성질이 급하다. 고집도 세서 지능 순위 23위를 할 정도로 똑똑하지만 훈련에 쉽게 따라오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관심받는 걸 좋아해서 보호자가 다른 일을 하면 그 주변을 계속해서 맴돌거나 관심을 달라고 짖는 행동을 한다. 빠르고 민첩해서  잡기가 쉽지 않다.  뭔가 원하는 게 있거나 불만이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짖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형견 중의 소형견으로 불리는 포메라니안 견종의 핵심 가치는 소형화에 있기 때문에 작은 몸무게와 키는 포메라니안과 다른 견종을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일부 폼피츠가 포메라니안으로 사기분양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세상에 나쁜개는 없듯이 적절한 훈련으로 소형견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책임감 있는 견주들이 되시길 바래봅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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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오스트리아 반항아 화가

빈분리파(제체시온:Secession)

심벌리즘과 아르누보스타일의 대표적 작가

초상화와 누드그림,

장식패턴과 금색 사용(황금시대)

<키스>

스페인 독감

 

2. 생애

 

 

구스타프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빈 외곽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에른스트"는 보헤미아에서 비엔나로 이민을 온 금색 판화가였고요. 어머니 "안나"는 오페라 가수로 음악적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꿈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그의 가족은 비엔나 남서쪽에 있는 작은 교외 바움가르텐에서 7명의 아이들 중 둘째로 자랍니다. 이민자의 상황이 그러하듯 가난했으며 합스부르크제국 초기에 같은 처지의 소수 민족들이 일자리를 얻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더군다난 1873년 주식 시장 폭락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가난해진 상황이었지요.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집세가 더 싼 집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이사를 다녀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족 안의 슬픔도 많았습니다. 1874년 여동생 애나가 5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의 또 다른 여동생 클라라가 종교에 심취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지고요. 다행히 클림트와 두 형제 에른스트와 게오르크는 예술적 재능을 보이며 두각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미술과 음악적 재능을 가진 부모님의 유전을 받았으니 클림트 역시 눈에 띄는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14살 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한 후 장식 회화가로 교육을 받습니다.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정도로 예술가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발휘합니다. 졸업을 하고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동료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세우고, 이후 건축물 벽면의 회화 작품 등을 제작합니다. "예술가 회사"로 알려진 예술 집단을 결성했으며 이는 나중에 비엔나 분리파로 발전하게 됩니다. 전통적이고 사실적인 화풍으로 공예 운동과 상징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이후 초상화나 우의화 등 장식과 독립된 작품활동을 하면서 점점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Old Burgtheater in Vienna(1888-1889)>, The history of art.org

 

 

카메라가 무대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구경하러 온 관객들의 모습을 비춘 듯한 그림을 그려 대박을 칩니다. 지금 생각해도 기발한 아이디어 같습니다. 여성들의 옷차림 가까이 보면 오스트리아 빈의 유명인사들의 얼굴도 찾아 보면 어디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숨은 그림 찾듯이 말이죠.

 

 

 

그 기쁨도 잠시 , 매우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던 클림트가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예술적 동지였던 동생의 죽음으로  3년간 작품 활동을 쉽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다른 유럽 나라에 비해 보수적이었습니다. 미술도 아직 신고전주의 스타일이 유행할 정도로 말이죠. 이에 클림트는 진보적인 예술가들과 함께  '빈 분리파(1897)'라는 단체를 결성합니다. 그리고 전통예술을 추구하는 오스트리아 미술계에 반항적이고 새로운 예술 활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자유롭게 자신들의 예술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지요. 미술, 건축, 음악 등 복합 예술 공간이 필요했던 거지요. 그래서 만들 것이 '제체시온'입니다.

 

 

 

 

University of Vienna Ceiling Paintings(Medicine),1900-1907
철학<Philosophy(1899-1907)>

 

법학<Jurisprudence(1899-1907)>

 

금붕어<Goldfish,(1901-1902, 자신을 비난하는 빈대학 관계자들에게 조롱의 표시로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여자의 궁둥이가 무엇을 의미하시는 지 아시죠?

 

 

 

 구스타프 클림트는 동료인 마치와 함께 빈대학교 대강당의  천장 패널화를 의뢰받게 됩니다.  동료인 마치는 '신학'을 의뢰받고 그는   대학의 주요 학문인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그림들을 그리게 됩니다.  빈 대학에서는 의학, 철학, 법학을 주제로 학문과 이성의 위대함을 그려달라고 요청했지요. 그런데 나약한 인간의 모습은 물론이고 관능적이며 기괴하기까지 한 세 작품들을 내놓았으니 대학 관계자들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달라도 너무 달랐던 거죠. 마치 인간이 우주이치를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며 <철학>, 인간은 삶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의학>, 정의보다는 고통과 무질서가 더 가까이 있는 것 <법학>처럼 해석되는 그림들이었기 때문이지요. 졸지에 가족을 잃은 상실감으로 그림을 잠시 접었던 3년 동안 삶과 죽음, 인간의 운명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클림트의 철학이 당시 관계 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거지요. 

 

 

 

 

클림트의 학력을 문제 삼으며 비난하였고 특히 빈 대학교 교수진 87명은 <철학>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교육부 장관 리터 폴 하르텔 박사와 같이 클림트를 지지한 사람도 있었고요.  빈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던 <철학>은 훗날 제4회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클림트 예술의 가치를 입증받게 됩니다. 그러나 패널화는 끝내 대강당에 걸리지 못했고, 클림트는 이 그림들을 새로 교정하라는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국가로 부터 받았던 제작비는 전액 되돌려 주고 ' 학부 회화' 최종판을 자기 소유로 하지요. 훗날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이라 낙인찍혀 압류당했으며, 전쟁 중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부 회화 사건 이후 클림트는 더 이상 공공 작품을 의뢰받지 않았으며., 기하학적이고 지적인 추상 양식으로 변모해 갑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라베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하여 눈에 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Portrait of Adele Bloch-Bauer 1)

 

 

1890년대 클림트는 복잡한 패턴, 금박, 에로틱한 이미지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키스(1907-1908)>,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1세>가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장면을 묘사했으며, 때로는 노골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클림트의 유명 작품 중 하나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세>작품 입니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비싼 미술 작품이었습니다. 클림트가 자신의 후원자이기도 한 아델레에게 초상화를 그려서 선물한 것으로, 아델레가 사망한 후 남편이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가 나치에게 몰수당합니다. 남편은 사망할 때 조카에게  그림을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겼고요. 나치 때문에 부모를 잃고 미국으로 도피했었던 조카 마리아 알트만(Maria Altmann)은  전후 그 그림을 소장한 오스트리아 정부에게서 반환받기 위해 길고 고통스러운 소송을 걸지요. 결국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옆의 노이에 갤러리에 소장되게 됩니다. 영화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2015)>에 자세한 내용들이 담겨 있으니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The Kiss(1908)>작품은  너무 유명해 따로 그림을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그림인 지 벌써 아실 테니까요. 이 그림은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다양한 유럽 열강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절정에 달합니다.  이 작품이 예술계에서 중요한 이유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유럽에 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의 핵심 사례라는 점입니다.  이 운동은 장식 예술과 복잡한 디자인에 중점을 둔 것이 특징이지요. 당시 비교적 흔하지 않은 기법인 금박을 접목한 것으로 유명하고요. 금박의 사용은 작품에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을 더해주며 지속적인 시각적 효과에도 기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지속적인 인기와 문화적 영향으로 인해 의미가 있습니다.  수년에 걸쳐 널리 복제되고 모방되었으며 대중문화에서 사랑과 로맨스의 상징적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포스터, 인쇄물, 심지어 아이스크림 커버에도 실려있을 정도니까요. 

 

 

 

클림트는 그의 경력 동안 수백 점의 작품을 제작한 다작의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또한 비엔나 분리파를 예술계의 주요 세력으로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요. 그의 영향력은 이후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가  후원했던 학생 중에는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 같은 거장들도 있는데, 이들의 작품과 클림트의 작품을 비교해 보는 것도 색다른 느낌이 될 것 같습니다.

 

 

 

2023.08.23 - [지식&교양] - 50-32. 표현주의,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30

 

50-32. 표현주의,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30

1. 들어가기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는 이중천재 알마 말러(Alma Mahler) '빈 아틀리에'출신 제1차 세계대전 종군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교편생활 바로크적 풍경화 1938 런던 망명 초기 환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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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7 - [지식&교양] - 50-22. 표현주의 , 에곤 실레(Egon Schiele,26)

 

50-22. 표현주의 , 에곤 실레(Egon Schiele,26)

1. 들어가기 본능적 욕망(누드화) 28세 사망 스페인 독감 불안한 영혼의 아이콘 구스타프 클림트와 친구 성과 죽음 1980, 'Excess and Punishment' 독일 제작 영화 1980년 Arts Council of Great Britain(대영예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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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그림은 음악적이라고도 합니다. 클림트가 음악의 신이라 불리는 베토벤의 음악을 만나 '환희의 송가'를 그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림 <베토벤 프리즈> 작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건물 윗부분에 총세면으로 나뉘어 그려진  띠벽지 형태의 그림입니다. 이때부터  자신의 그림에  황금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자신만의 스타일로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인간들의 행복을 향한 염원을 드러낸 이 그림은 오직 예술만이 우리를 낙원으로 데려다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변하지 않은 황금색을 사용했다고 하네요. 

 

 

 

"빈 캔버스가 있는한 희망은 있다."

 

 

 

 

<부채를 든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이젤에 남아 있던 마지막 초상화라고 합니다. 예상 낙찰가격이 1,025억 원이라고 하니 마지막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엄청난 낙찰가와 함께 누군가의 수장고에서 고이 모셔지기도 하고 다음 주인에게 팔리기도 하며 클림트의 여인들은 세계 곳곳에 황금빛을 물들이고 있네요.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으로 여전히 우리들 마음을 홀리면서 말이죠.

 

 

 

3. 나가기

 

 

20세기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이 빠르게 기존 회화 경향을 대체하고 , 클림트 이후의 작가들은 더 이상 클림트와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됩니다.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으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했지만, 그의 스타일을 전승해 주는 이가 없어 고립된 작가의 느낌도 살짝 듭니다. 그렇지만 현대 미술의 다양한 양식들 속에서 클림트의 작품만큼 대중적으로 많이 인용되고 응용되는 작품도 없을 듯합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구글 아트 앤 컬쳐, 위키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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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

36세 요절

유대인

잔 에뷔테른

콘스탄틴 브랑쿠시

2. 생애

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시집 <산호림> 한성도서, 1938-

 

 

'사슴과 5월과 고독의 시인'으로 불리는 노천명의 대표적 작품이다. 현실에 타협하지 못하고 결혼도 않고 고독과 빈궁으로 일생을 마친 시인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가늘고 긴 얼굴, 가녀린 목, 아몬드 형태의 눈으로 인체를 그리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Clemente Modigliani, 1884,7,12-1920,1,24)의 작품을 보면 떠오르는 시다.

 

 

 

 

 

1884년 이탈리아 왕국 토스카나주 리보르노에 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해변에 위치한 이 지역은 르네상스가 태동하는데 큰 기여를 한 메디치 가문에 의해 이상적인 휴양도시로 계획된 곳이다. 그의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의 혈통을 어어받은 마르세유의 명문가 출신으로 높은 지성과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직접 시를 번역하거나 서평을 써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다행히 모딜리아니의 출생으로 인해 집이 망하는 걸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델리아니 출생 당시, 그의 아버지는 사업실패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집안 행정관이 그이 물건을 압수하기 위해 집에 들어갔을 때 모딜리아니의 어머니는 출산 중인 상황이었다. 유대법에 '임신한 여자나 갓 태어난 아기 엄마의 침대는  뺏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있어 값비싼 물건을 어머니 곁에 두어 재산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늑막염, 폐결핵, 폐렴등 병치레가 잦아 그는 정규교육을 받기 힘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인 아들을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이탈리아 최고의 미술선생인 풍경화가  굴리엘모 미켈리(Guglielmo Micheli)의 아틀리에에 데리고 가 미술공부를 시키게 된다. 하지만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진행되어 공부를 중단하고 이탈리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요양을 해야 했다.  이후 1902년  피렌체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조반니 파토리 (Giovanni Fattori)에게  회화를 배웠다. 당시 피렌체에는 상징주의 미학이 유행했고, 모딜리아니는 이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이듬해 베네치아로 가서 1905년까지 학업을 계속 이어간다.

 

 

 

 

22세 모딜리아니는 1906년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인 파리의 몽마르크르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인체소묘와 유화를 공부하는 한편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 앙리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폴 세잔(Paul Cezanne) 등에 영향을 받았다.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사는 몽마르트르 지역 작은 스튜디오에서 1년 동안 생활하며 말쑥했던 외모는 홈리스처럼 초라해졌고 생활이 어려워져 알코올과 마약에 손을 데게 된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고 하루에 100여 장의 그림을 그릴 정도로 엄청난 작업을 소화해 낸다.

 

 

 

 

<The Cellist>, 1909, 표현주의 스타일 초상화

 

 

세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비 정상적으로 길게 그려진 첼로 연주자의 팔은 훗날 모딜리아니의 회화 스타일의 특징 중 하나가 되는 '길쭉하게 그리는' 스타일의 시작을 암시한다. 그림의  모델인 첼로 연주자는 '팔귀에르'작업실을 가지고 있던 당시 그곳에 살았던 가난한 첼로 연주자라고 한다. 첼로와 혼연 일체가 된 첼리스트의 모습이 사뭇 인상적이다. 

 

 

 

 

<여자의 머리>, 1912, 석회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20세기 당시 예술계가 아방가르드로 변화하는 시기에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화풍을 정립하고 싶어 했다. 이에 반해 모딜리아니는 많은 예술가와 친분을 두텁게 쌓으며 영향을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카테고리에 소속되길 거부한다. 그는 어릴 때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독서량이 풍부한 화가 중 한 명인데 특히 니체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아  반항과 무질서를 통해 진정한 창조력을 발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 덕택으로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르누아르, 피카소 , 고갱 , 세잔, 마티스 등과 같은 예술사조에 한 획을 그은 화가들을 만났음에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특한 그만의 작품세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피카소 같은 화가에 가려  그의 그림은 고작 $2-4, 드로잉은 4센트에 팔리는 생계형 화가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유독 화가들 중 위조작품이 많은 화가가 모딜리아니이다.  생계유지를 위해 아무에게나 팔다 보니 그의 사후 어떤 작품이 진품인지  알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2023.05.28 - [지식&교양] - 50-1. 신인상주의, 폴 세잔(Paul Cezanne,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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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세잔의 정물화 그림을 처음 보았던 학창 시절 그의 그림이 참 만만해 보였다. 어쩐지 미술학원 같은 곳에서 아직 기본기가 덜 닦인 초보 학생이 실수하듯 그려 낸 느낌이 들어 '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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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여인상 기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iani),1913

 

 

 

1909년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로 이사하여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와 교류하며 조각에 매료됩니다. 친구이자 이웃인 브랑쿠시에게 영향을 받아 1909부터 1914년까지 약 5년 정도 조각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이국적인 환경에서 살아온 그의 배경 때문에 그가 아프리카를 포함한 부족미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생산하게 된다. 그는 1914년까지  30 여점에 이르는 특유의 길쭉한 석조 두상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여러 질환으로 인해 허약했던 그의 몸은 조각에서 나오는 돌먼지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조각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조각작품 역시 당시 예술계에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렇지만 조각 작업 이후에 오히려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명확해졌다.  모딜리아니가 조각작업을 함으로써 형태를 단순하하고, 가능한 한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물체의 정수를  보여주는 데 조각 활동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조각작업의 영향으로 그의 화풍은 단순하고 비정상적이지만 개성적인 작품이 탄생하게 됐다.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in a large hat>, 1918

 

 

 

<누워있는 누드>,1917-1918

 

 

 

 

시인 겸 화상인 폴란드 화상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권유를 받아들여 회화로 복구한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을 조망하는 순수한 형상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재료, 소재)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은 초상화와 누드화가 주를 이루었으며,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여성상은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했다. 

 

 

 

 

1917년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모딜리아니는 프랑스에서 활약한 우크라이나계 조각가 하나 오를 로프의 소개로 19살의 화가 지망생 잔 에 뷰테린(Jeanne Hebuterne)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잔은 로마 가톨릭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젊은 미술학도였지만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모딜리아니를 돌본다.  그의 작품은 동료 미술가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미술 시장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늘 변두리에 있었다. 같은 해 12월 모딜리아니는 베르트 베이유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통행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내건 두 장의 누드화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바로 철거되고 전시회도 일찍 문을 닫게 된다.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가 이렇게 어이없게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1918년 모딜리아니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열정과 헌신만은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 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잔의 초상이 주를 이루는데 단순미가 더욱 강조되는 가운데 전에 없던 서정미를 엿볼 수 있다. 모딜리아니는 잠시 남프랑스 니스에서 요양하면서 병세가 호전되었으며 , 이곳에서  딸 잔 모딜리아니(Jeanne Modigliani)가 태어난다. 1919, 5월 파리로 돌아와 다시 예술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하며 잔느 에뷔테른의 초상화 15점을 남긴다.

 

 

 

 

'이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파리 페르 라세즈 묘비명-

 

 

 

 

1920년 파리로 돌아왔지만 모딜리아니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핵 수막염'으로 의사조차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침대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의 나이 36세 , 결국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난다.  그의 사망 후  장례식 문제로 충돌하고 격분한 잔느는 다음날 부모의 아파트 5층에서 투신 자살하고 만다.  당시 8개월의 뱃속아이는 세상을 보지 못한 채 함께 세상을 떠나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고, 10년 뒤 잔의 가족들은 잔을 모딜리아니 곁에 묻어주게 된다. 

 

 

"꿈을 이루는 것은 의무다."

 

 

 

 

누구보다 성공한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가난과 질병으로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다행히 그녀의 첫째 아이 잔(Jeanne Modigliani,1918-1984)은  훗날 성장해 미술사가로서 그녀의 아버지의 작품을 토대로 한 <모딜리아니:인간과 미신>이라는 전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3. 나가기

 

모딜리아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이며, 예술사조에서 여러 대가들의 형식을 이을 수 있는 가교역할을 하는 중요한 화가임은 틀림없다. 그가 병마와 가난에 싸우며 불우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말이다.  얼마 전 그의 작품은 2018년 소더비 옥션에서 역대 최고가를 경신한 기록을 세우며 현대의 예술계에서도 가장 높은 작업적 평가를 받고 있다.  입체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사조가 유행하던 시절 어느 노선도 따르지 않았고 미술사에서 어느 쪽으로 분류될 수 없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완성했던 모딜리아니! 알코올과 마약, 가난과 병마에 시달려도 순수하고 깊은 감성을 끌어낸 그의 생전 누리지 못한 호사를 영감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주고 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구글 아트 앤 컬처. 위키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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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동네 정육점 아저씨는 커다란 등치의 저먼 셔퍼드를 항상 옆에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아저씨 등치도 만만치 않으신데 옆에 무섭게 생긴 저먼 셔퍼드까지 늘 동행을 하니  골목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괜스레 제가 알아서  길을 터주게 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한 인간과 한 마리 개가 풍기는 아우라에 기가 꺾여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지요. 색깔까지 까매 어린 마음에 꿈에 나올까 겁이날 정도였어요. 아저씨가 이사 갈 일은 없으실 테고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보이지 않는 힘에 멈칫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실제로 힘이 세신지는 모르겠으나 어린 시절 제가 본  아저씨는 '누가 감히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동네에서도 독특하신 분으로 오랫동안 제 기억 속에 저장되어 계십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견종이면서 동시에 리트리버와 함께 가장 많이 유기되는 견종이 저먼셰퍼드종입니다. 독일에서 개량된 목양견(Herding dog)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품종 중 하나이지요.  저먼 셰퍼드 외에도 벨지안 셰퍼드, 오스틀일리안 셰퍼드, 베르가마스코 셰퍼드, 코카시안 셰퍼드, 가라피 안 셰퍼드 등이 있습니다.

 

 

 

 

조바이든과 챔프(왼쪽), 메이저(오른쪽), 나무위키

 

 

미국의 역대 대통령 당선자들이 자신이 키우던 개를 데리고 백악관에 함께 입성하는 장면을 자주 보게 됩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 바이든 역시 대통령 당선과 함께 키우던 개 '챔프'(12y)와 '메이저'(2y)를  자택이 있던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백악관으로 데리고 갑니다.  두 살짜리 '메이저'는 백악관에 살게 된 첫 유기견이기도 했습니다. 영어 단어 메이저에는 '소령'이란 뜻이 있는데 2015년 세상을 떠난 장남 보가 델라웨어주 주방위군에 맡았던 직책이 소령이어 붙여졌다는 썰이 있습니다. '챔프'라는 이름에는 아버지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그리움이 묻어있습니다.  챔피언(Champion)의 줄임말로 바이든 대통령이 어린 시절 낙심할 때마다 아버지가 '일어나, 챔프'라고 격려했던 데서 따온 이름이라고 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트랜스젠더의 군복무 금지를 폐기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공개 행사 말미에 반려견들이 밖에서 컹컹 짖는 소리가 화면을 타고 중계돼 트위터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조 바이든 대통령의 반려견'커맨더'가 백악관 직원들을 무는 사고가 생겨 추가 훈련을 받거나 , '메이저'도 자주 직원들을 물어  백악관을 떠났다고 하네요. 

 

 

 

 

 

 

 

 

 

 

강아지 때는 전신이 까맣습니다. 자라면서 점점 색이 달라지지요. 성견이 되면 얼굴에 '마스크'라 불리는 부분 및 등의 '안장' 부분만 검은색이 남습니다. 나머지는 갈색이 되고요.  뒷다리가 비정상적으로 짧아진 셰퍼드는 쇼독(Show dog)입니다. 셰퍼드는 쇼독과 워킹독의 구분이 극명한 견종입니다.  쇼독(show dog)은 도그 쇼에 출전하는 개를 칭하는 용어로  품종이 있는 견종이 얼마나 순종의 모습에 가까운 지 평가하는 품평회로 각종 협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를 말합니다. 쇼독을 위한 브리딩이 이루어질수록 해당 견종은 쇠락할 확률이 높다고 전합니다. 예를 들면 양치기 개의 기민하고 영리한 성질이 전반적으로 사라지는 경향이 짙은 것처럼 말입니다.

 

 

 

Deutscher Schaferhund, 도이치 셰퍼훈트= 독일 양치기개

높이50-66cm

체중 23-43kg 대형견

털 색상에 따라 위장 패턴도 있다.

 

 

독일  기병대장인 막스 폰 스테파니츠가 처음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최초 등록 개체는 '호란트 폰 그라프라트'라는 이름의 수컷이고요. 이후 영국에서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알자시안(Alsatian)이라 불렸다가 알자스-로렌 지방에서 복무한 병사가 처음 영국에 데려온 것이 계기다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의 반독 감정 때문에 독일 관련 이름을 피하기 위해 불려졌습니다.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일반적으로 저먼 셰퍼드라고 다시 칭하게 됩니다.

 

 

 

 

 

 

 

 

 

저먼 셰퍼드  독은 당당하고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눈은 중간 정도의 크기로 아몬드 형이며 짙은 갈색이고 코는 검은색을 띠지요.  귀는 밑 부분 폭이 넓고 높은 위치에 붙어 있으며 쫑긋하게 서 있어요. 앞다리는 일직선이며 뒷다리 대퇴부의 폭이 넓고 힘이 셉니다. 몸의 길이가 키보다 길며 가슴이 두텁고 등이 일직선이고요. 털은 컽털이 단단하고 거칠며 옆으로 누워있습니다. 속털이 두텁고요. 털색은 검은색 혹은 회색 단색으로 된 것 또는 회색 바탕에 갈색이나 밟은 색이 혼합된 것들이 있습니다. 꼬리는 중간 정도의 길이로 털이 많고 낮은 위치에 붙어있습니다. 몸은 탄탄한 근육질이며 허리는 어깨 높이 보다 긴 편이고요. 앞다리는 짧지만 튼튼하며. 주둥이는 뾰족하고 눈이 크고 귀는 뾰족하게 똑바로 서있습니다. 후각과 청각이 예민하고 동작이 민첩하고요.

 

 

 

 

지인분이 키우시던 '갑돌이'라는 이름의 저먼 셰퍼드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영리하던지 가족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요. 특히 지인분이 깔끔한 사람이라 그 성향을 닮았는지 개를 보면 주인이 보일 정도로 참 많이 닮아 신기했습니다. 특히 저먼 셰퍼드의 경우 나이가 들면   뒷다리와 힙 부분이 굉장히 약해져 힘든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어느 날 데리고 다니 던 개가 보이지 않아 개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처음 정을 주고 키우 던 개라 정 떼기가 많이 힘들었다고 하시며 눈물을 보이시더라고요. 키우던 개 안락사를 시키고 오셨다고 하세요.  잘 걷지를 못해 뒷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기도 하고, 끙끙 앓는 모습에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이 정도면 안락사시켜주는 것이 동물에게 더 나은 선택이라 말씀하셨데요. 사람보다 먼저 가는 녀석들이라 생각은 하면서도 보내는 것은 맘처럼 쉽지 않지요. 그 뒤로 지인분은 더 이상 털 달린 개를 키우지 않기로 했다고 하시네요. 또 보낼 걸 생각하니 못 키우겠다고 하시면서 말이죠. 목줄에 걸었던 이름표만 가지고 계시는 것 같아요. 

 

 

 

 

영역에 대한 집착이 적은 목양견이 갖추어야 하는 특징이 전쟁에서도 써먹을 수 있다는 것에 높이 평가되어 독일군뿐만 아니라 적군이었던 영국군, 미군은 물론 소련군, 터키군까지 군견으로 써먹었을 정도로  인기가 높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머리가 좋고 강인하며 충성심 강하고 붙임성 있는 셰퍼드가 크게 활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셰퍼드가 지능, 체력 등 여러 면에서 좋은 특질을 지녔기 때문이지요. 개중에서 지능이 상당히 높은 편에다 체격과 신체능력까지 뛰어나서 군견뿐 아니라 목양견, 경찰견, 수색견, 구조견, 맹도견, 사역견, 애완견, 경비견 등으로 쓰이는 만 능견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SGbAG6V4V0 

 

 

 

저먼 셰퍼드의 지능을 알 수 있는 사례로 안내견 초창기에는 안내견으로 가장 많이 쓰이던 견종이었다고 합니다. 셰퍼드가 활동적이면서도 동시에 공격적이지 않게 하려면 주인이 강한 리더십을 항상 보여야 합니다. 개가 주인을 우습게 알면 공격적이 될 수 있거든요. 진돗개와 달리, 당시 주인에게 충성심을 바칠 뿐만 아니라 주인이 바뀌어도 똑같이 충성심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절개 없는 개라고 놀리기도 하지요. 또한  셰퍼드는 별명이 피스톨이라 불릴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납니다. 누구이든 현재 통제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충실하게 듣거든요. 특기로 늑대와 견줄만한 속보능력도 지니고 있습니다.

 

 

 

 

Belgian Malinois

 

 

 

문제는 인기견들이 그러하듯 저먼 셰퍼드 역시 근친교배로 유전병 등이 생기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앉은뱅이, 왜소증, hip dysplasia 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특히 테러와의 전쟁 이후 미군의 주 전장인 중동지역에서 뜨거운 햇빛을 오래 받은 경우 백내장이 발병해 실명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독일,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저먼 셰퍼드 대신 벨지언 말리노이즈를 경찰견이나 군견으로 대체 중이라고 합니다. 체구가 작은 말리노이즈가 중동의 더운 지역에 더 적합하다는 판단 때문이지요. 

 

 

 

최고의 개는 자기 자신에게  제일 맞는 견종이라 얘기할 수 있을 테지요. 사람마다 선호와 생활환경이 다 다르기에 여러 견종 중 본인에게 가장 알맞은 견종을 고르는 노력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잘 판단하시고 끝까지 책임져 주십시오. 

 

#사진 출처: 나무위키, 위키피디아

# 저먼 셰퍼드# 벨지언 말리노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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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는 이중천재

알마 말러(Alma Mahler)

'빈 아틀리에'출신

제1차 세계대전 종군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교편생활

바로크적 풍경화

1938 런던 망명

 

초기 환상화 <바람의 신부>

초상화<포렐 박사상>

편력시대 풍경화<몬타나>

풍자적인 작품 <테레모피레>

표현주의의 시인. 희곡작가

 

2. 생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미술은 미술가 개인의 창작물이기 앞서 미술가가 속해 있는 시대의 산물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독일의 표현주의 사조를 꺼내려면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나폴레옹 전쟁(1797-1815)'이란 이름으로 유럽을 휩쓸 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하나의 통일된 독일이 아닌 신성로마제국이란 이름하에 묶여있던 독일은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절망감을 뼈져리게 느껴야 했습니다. 이로인해 하나의 통일 된 국가를 원하는  민족의식이 싹트게 되었고요. 특히 독일의  문학, 미술, 그리고 음악 분야에서 낭만주의란 이름으로 가속도가 붙습니다. 이렇게 힘을 키운 독일이 1870년 드디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일 제국의 탄생을 선포하게 됩니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 전쟁의 여파로 전후의 삶이 많이 바뀌었지요. 당시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해외 식민지 사업에도 늦은 상태였습니다. 산업 혁명에도 말할 것 없이 뒤처졌지요.  그래서 독일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아래 산업화와 군사력 강화만이 자신의 나라가 살 길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당연히 이것을 모를 리 없는 다른 주변 유럽 국가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됩니다. 주변국가들과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이념적 갈등과 빈부의 격차는 일상 곳곳에 불안감이 짙게 스며들어 있었지요. 이런 긴장의 중심인  독일 땅에서 일어난 것이 표현주의 미술입니다.  개별적으로 오스트리아 출신 오스카 코코 슈카와 에곤 실레가 이 운동에 동참하지요.

 

 

 

 

2023.07.27 - [지식&교양] - 50-22. 표현주의, 에곤 실레(Egon Schiele,26)

 

50-22. 표현주의 , 에곤 실레(Egon Schiele,26)

1. 들어가기 본능적 욕망(누드화) 28세 사망 스페인 독감 불안한 영혼의 아이콘 구스타프 클림트와 친구 성과 죽음 1980, 'Excess and Punishment' 독일 제작 영화 1980년 Arts Council of Great Britain(대영예술진

sun-n5y2.tistory.com

 

 

 

정치적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시민사회가 만들어집니다.  경제적으로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산과 소비, 노동과 자본의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었고요.  대도시의 발달과 노동 환경의 변화는 수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예술측면에 주어진 과제들 또한 만만치 않았지요.  당시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급속한 변화와 정치적 갈등, 무력 충돌의 공포를 옴 몸으로 느끼고 있었지요. 게다가 프랑스에서 일어난 인상주의를 비롯해 큐비즘 등과 같은 현대 미술의 여러 혁신적 실험들을 수용해야 했고요. 그것만으로 부족해 자기화해야 한다는 예술적 과제도 또한 함께 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1886-1980)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한 화가입니다. 그는 세 살 때  아버지가 파산하여 행상을 하였고 다섯 살때 형이 죽는 등 가정사로 힘든 시기를 보냅니다. 18살 때 장학금을 받아 빈 미술공예학교에 진학을 합니다. 조교와 '빈 공방'의 일을 하며 미술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지요. 그곳에서 소묘나 석판화 등을 배웠지만 공예학교라 장식미술이 중심이었습니다. 코코슈카는 인체나 인물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그는 자신이 조교로 있는 야간부 학생들을 위해 모델을 불러 학교 방침과  다른 인체 스케치를 같이 공부하면서 독학으로 유화를 그리기도 합니다. 

 

 

 

코코슈카는 1908년 두 가지 사건을 겪으며  화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하나는 클림트 등 '빈 분리파'가 주도하는 '제1차 쿤스트쇼'에 참여하게 된 것이지요. 당시 빈 분리파는 자신들의 전시를 하며 신진작가와 응용미술 등에 문호를 개방합니다. 코코슈카의 재능을 알아본 스승 카를 오토 체슈카는 자신에게 주어진 전시장의 일부를 코코슈카에게 내줍니다. 여기에 코코슈카는 자신의 직접 쓴 희곡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의 삽화들, 자신이 쓰고 삽화를 그린 동화책, <피에타> 포스터 그리고 실내 장식을 위한 소품들을 전시하게 됩니다. 

 

 

 

Pieata, 1908, Poster created for the openair theater of the Kunstschau, depicting Murder, Hope of Women, Stubby Planner

 

 

 

코코슈카가 빈의 전람회에서 쓴 연극 홍보를 위한 <피에타>라는 포스터입니다.  어떠신가요? 그림의 첫 느낌이 , 여성의 강력한 힘이 느껴지시나요? 자극적인 작품이라  눈에 뜨이기는 했지만 그의 전시실은 '공포의 방'이라 불리며 참혹한 평가를 받습니다. 그의 전위적인 작품에 비평가들마저 등을 돌리고요.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빈 미술공예학교에 재학 당시 '빈 분리파'의 수장이었던 구스타프 클림트에 의해 발탁되어 촉망받는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로 부상합니다.  그는 1909년 그를 지지한 근대 건축의 선구자인  아돌프 로스(Adolf Loss,1870-1933)의  주선으로 독일 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한 헤르바르트 발덴(Herwarth Walden)을 만나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코코슈카는 발덴이 발행하는 표현주의 저널 <슈트름(Sturm, 폭풍)>의 그래픽 화가로도 잠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self-portrait of a 'Degenerate Artist, Oska  Kokoschka, Wikioo.org

 

 

그는 당시 아돌프 로스가 소개해 주는  빈의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코코슈카가 그려주는 초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코코슈카는 영혼까지 꿰뚫어 묘사하는 심리적 초상화에 매우 뛰어난 화가였기 때문이지요. 아름답고 우아한 초상화를 기대했 던 고객들이라면  엄청 실망했겠지요.  그런 면에서 오스카 코코슈카는 고객들이 원하는  외향에 치중하는 초상화를 그리기보다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내면을 중시하는 초상화 그리기를 더 선호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적인 묘사를 배제하고 통념적인 요소를 멀리한 채 왜곡된 형상을 구현하는 자신만의 표현양식을 구축해 낸 화가인 셈이지요. 예를 들면 불규칙하고 굴곡이 심한 선, 차갑고 어두운 색채, 그리고 강하고 거친 붓 터치가 그만의  독특한 표현주의 특징입니다.

 

 

 

작가로도 활약한 코코슈카는 인도주의 철학을 표현한 희곡을 몇 번 썼고, 특히 사회의 도덕적 위기와 정치적 불의 를 비판한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 (1907)라는 작품으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학생들을 가르치던 입장이라 코코슈카의 희곡이 사회적 물의를 빚자 학교로부터 해직을 당합니다.

 

 

 

 

이 시기 코코슈카 인생의 가장 유명한 여인 하나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밀 신들러(Emil Schindler)의 딸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에게서 미술수업을 받았고,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Alexander von Zenmlinsky)로부터 작곡을 배웠다고 합니다. 실제 그림도 그리고 가곡집을 내기도 했다고 하니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인재네요.

 

 

 

 

그때 나는 나와 알마의 이인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운명에 거슬러 나를 광란하게 만드는 것은
질투만은 아니었다.
나는 임박해 오는 비운의 숙명을 예감했다.
멜랑콜리가 우리의 엑스터시 위에,
도취와 사랑 위에
자신의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아폴로의 칠현금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코슈카의 자서전 <내 삶>중에서-





<바람의 신부(The Bride of the wind>, 1914, 오스카 코코슈카,스위스 바젤 미술관

 

 

 

 

천재화가 오스카 코코슈카가 사랑했던 여인 알마 말러(Alma Mahler)와의 사랑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당시 작곡가 겸  지휘자로 알려진 천재음악가 구스타프 말러가  그녀의 첫 번째 남편입니다. 20대의 그녀가 40대 노총각이었던 말러와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결혼생활은 말러가 51살에 사망하면서 끝이 납니다. 미망인이었던 그녀는   19세기말 20초 활동했 던  예술가들과의  숱한 염문설이 나기도 합니다. 바우하우스를 창설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도 했으며, 시인이며 소설가였 던 프란츠 베르펠과  세 번째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20대의 젊은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가 미망인이었던 30대의 알마 말러를 만난 것은 두 번째 남편과 재혼하기 전으로 보입니다. 떠오르는 신인 화가  대접을 받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급속도로  연인관계로 발전했지만  연상의 여인 알마 말러는 거칠고 불안한 성격의 젊은 화가 코코슈카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인기 많은 미망인을   연인으로 붙잡아 두기에  젊은 코코슈카의 불안감 또한 컷을 테지요. 그림을 통해 코코슈카가 느꼈을 불안감이 충분히 전달됩니다.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잠을 자고 있는 여인에 비해, 잠 못 이루고 불안해하는 한 남자의 시선에서 그 둘의 앞날이 보이는 듯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작품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녀는 오스카가 그린  ' 바람의 신부(Bridge of the Wind)'의 동일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시대의 예술가, 건축가, 시인, 작곡가 등  뭇남성들에게 뮤즈였으며 '비엔나의 아름다운 꽃'이라 불리울정도로 탁월한 미모와 재능의 소유자였습니다.

 

 

 

 

 

코코슈카의 일련의 작업 과정을 지켜본 표현주의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Georg Trakl, 1887-1914)이  <바람의 여인>이란 제목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독일어 여성 명사'Wkndsbraut'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돌풍을 뜻하기도 하고, 정령이나 정신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리고 야성적이고 격정적인 본성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시인트라클은  세 번째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시인 트라클 역시 4살 손아래 누이동생을 사랑했는데 근친상간의 죄의식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다 27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친구 시인이기도 합니다.  트라클은 코코슈카와 알마의 불완전하고 좌초된 사랑에서 자신과 누이동생과의 비극적 운명을 읽어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누이동생 그레테 역시 우울증에 시달리다 오빠의 사망 소식에 자살하고 맙니다.  <바람의 여인>이든 <바람의 신부>이든 자유로운 영혼을 붙잡기도 어렵고 소유하기는 더 어려웠을 한 예술가의 고민 끝에 나온 작품이 줄타기 사랑을 하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거친 붓 터치와 차고 어두운 색채로 화폭에 담아냅니다. 어두운 밤 거친 폭풍우가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여인은 지친 듯 남자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네요. 남자는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절대로 이 여인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여인의 한쪽 손을 힘주어 잡고 있습니다. 코코슈카의 불안한 마음과 애절한 사랑이 그대로 감지되는 듯합니다. 코코슈카는 일곱 살 연상이었던 알마와 완전한 결합을 원하며 2년 6개월 동안 4백 여통의 연서를 쓰며 구애를 하였지만 알마는 끝내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 않습니다.  알마를 불같이 사랑했던 코코슈카는 알마와 똑같은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 유명 디자이너 옷을 입히기도 하고 오페라 구경을 할 때도 좌석을 구해 데리고 다녔다고 하니 이 정도면 집착의 수준까지 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상해 보세요. 사람 같은 인형을 옆에 놓고 살았으니 집착이 지나쳐 오싹한 느낌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변분들이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다행히 더 이상 자신의 곁에 알마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녀의 대한 마음을 접습니다.

 

 

 

 

 

 

이 작품으로 코코슈카는 알마 말러에게 실연은 당했지만 국제적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절망에 빠졌던 코코슈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기병에 자원입대합니다. 실연당한 마음을 달래려 지원한 군대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해  몸과 마음이 부서진 채 요양을 해야 했지요. 부상에서 회복한 그는 드레스덴 아카데미 교수가 되어 후학을 지도하게 됩니다. 1931년 나치가 집권하게 되고 대부분의 표현주의 예술가 그룹처럼 코코슈카 역시  퇴폐적인 예술가로 찍혀 전시는 물론 작품 활동까지 제한당합니다. 독재정권의 탄압이 계속되자 그는 프라하로 이주했다가 영국으로 망명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 던 1941년  올다 팔코프스카라는 여인과  결혼합니다.  이 시기 코코스카는 주요 도시의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리거나 나치에 항거하는 정치적 이념이 담긴 포스트를 제작하며 작품 활동을 계속해 이어 나갑니다.

 

 

 

 

 

<The Red Egg>, 1940-1941, National Gallery in Prague, Arthive

 

 

 

 

90년이 넘는 세월을 살다 간 코코슈카는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며 전쟁과 정치에 대한 의식을 형성합니다. 말년까지 끊임없이 전쟁의 비인간적인 면과 잔학행위를 고발하는 우의화를 그리면서 말입니다.

 

 

 

 

 

3. 나가기

코코슈카는 처음에 클림트와 빈 분리파의 영향을 받은 장식적인 화풍으로 출발하지만  비극, 죽음, 성 등의 주제를 깊게 다루기 시작합니다. 후기로 갈수록  그는 내면의 시선까지 담아내는 것 같은 풍경화와 인물화도 그려냅니다. 강한 빛의 사용과 붓터치가 무척 인상적이지요. 사라질 듯 여러 색채를 사용한 코코슈카의 그림에서는 연인과의 사랑과 삶의 무상함, 전쟁에의 비판 등 다양한 주제의식이 드러납니다. 이제 오스트리아를 떠올릴 때  코코슈카, 클림트, 그리고 에곤 실레라는 만능 천재 예술가 3인방을  '표현주의'라는 이름으로 함께 기억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출처: 위키 피디아, 구글아트 앤 컬처, 위키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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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인생에서 두 가지의 크나큰 특권을 누렸다.
그건 바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와 오드리 헵번이다.




존 갈리아노(Janh Galliano),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리카르도 티시, 매튜 윌리엄스(Matthew Williams) 등의 디자이너들이 차례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역임한 곳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힌트가 되었을까요? 프랑스 최고의 미술대학으로 손꼽히며 순수 미술 분야에서 세계 최상위권 대학으로 평가받는 파리 보자르 대학 출신입니다. 키가 190cm, 미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외모도 귀공자스타일의 금수저 엄친아입니다.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는 1927년 프랑스 북서부 도시 보베(Beauvais)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술적이고 상류 부르주아적인 가풍 속에서 자란 지방시는 2세 때 아버지가 인플루엔자로 세상을 떠난 게 됩니다. 그 후 그는 어머니, 형 장 클로드, 외조부모와 함께 파리 북쪽의 보베에 정착하게 되지요. 당시 지방시의 외조부는 예술가로 시작해 직물 공장을 책임지던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도 남다른 패션 감각을 지닌 분이셨고  이런 영향으로 그는 8세 때 이미 어머니의 패션 잡지를 즐겨 보았다고 하네요. <보그> 등 잡지 속 드레스를 그리거나 만들어 인형에게 입히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그려진 그림 가위질 하며 오리기도 힘들던데 말이죠. 10세 때인 1937년 파리만국박람회 패션관에 방문한 뒤 고급 맞춤복에 매료됩니다. 가족들은 법학을 공부한 그가 고위 전문직 종사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공증인 사무실 대신 오트 쿠튀르(Haute curturie, 고급 의상점)을 선택합니다.






지방시가 처음 일한 곳은 디자이너 자크 파트(Jacques Fath)의 의상실입니다. 그 이전 남성복으로 유명한 크로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obal Balenciaga)를 찾아가지만 "감각은 마음에 들지만 경력이 없어서 일할 수 없다."며 거절을 당하지요. 이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자크 파트, 스키아 파렐리(Schiaparelli) 아래서 일하며 크리스천 디올(Christian Dior)과 피에르 발망(Pierre Balmain)을 만나 영향을 주고받게 되지요. 다양한 브랜드에서 경력을 쌓은 뒤 마침내 25세의 자신의 브랜드 GIVENCY를 설립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선망의 대상이던 발렌시아가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주변인들에게 조언하고, 가르쳐주기를 좋아하는 발렌시아가와  좋은 만남을 이어가게 됩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지방시는 발렌시아가를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다고 합니다.  얼마나 좋아했으면 미국에서의 만남 이후 GIVENCY 살롱을 발렌시아가의 살롱 맞은편으로 옮겼다고 하네요. 대단하죠! 발렌시아가 역시 지방시를 가족처럼 받아주었다고 합니다. 실력 출중한 잘 생긴 청년이 자신을 멘토처럼 여기고 저렇게 정성을 보이는데 이쁘지 않을 턱이 없지요. 고수가 고수를 알아보듯이 서로를 알아본 모양입니다. 발렌시아가 역시  자신의 스케치까지 지방시에게 공유할 정도로 말이죠. 그런 그들 사이에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었어요.  1968년 발렌시아가가 자신의 살롱 문을 닫을 때 단골 고객들에게 지방시의 고객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는 점이죠. 당시 디자이너들끼리 경쟁이 심하고 훨씬 폐쇄적이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지방시와 발렌시아가가 보여준 우정은 신선하고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당신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나를 꿈꾸게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6살의 이브 생 로랑이 지방시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입니다. 이 편지를 받고 지방시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자신이 젊은 시절 발렌시아가를 따르고 존경했던 그 마음을 지방시 역시 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방시가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ent)을 만나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며 발렌시아가에게 자신이 받았던 변함없는 유산을 그에게도 전달해 줍니다.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개인적으로 <로마의 휴일>을 통해 그녀를 만났습니다. 스페니쉬 계단에서 젤라토 먹던 그녀를 흉내 내려 엄청 난 인파들이 그곳을 방문하기도 했지요. 몇 년 전 큰 아이와 함께 그 장소를 방문해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 장면을 따라 해 보며 '지옥의 문' 앞에 손도 넣어보는 시늉을 해보기도 하면서 말이죠. 당시 섹시 심벌로 유명한 마릴런 먼로(Marilyn Monroe)와 엘리자벹스 테일러 등의 화려한 이미지의 스타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런  할리우드에 키 크고 마른 이미지의 스스럼없이 자전거를 타고  검소한 생활 습관을 보여주는 기존 배우와는 전혀 다른 오드리 헵번이 나타납니다. 유명세를 타기 전이라  오드리 헵번을 알아보는 디자이너들은 거의 없어서 의상 협찬받기가 어려운 사정이었지요. 지방시 역시 오드리 헵번을 당시 유명 배우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으로 착각하고 그녀가 찾아왔을 때 실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이 지난 시즌 드레스라도 보여주기를 요구하고 요모조모 옷 고르는 센스를 지켜보던 지방시는 생각을 달리하고 옷을 보여줬고 그중 하나를 오드리 헵번이 고르며 <사브리나>에 입고 나와 히트를 시키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오드리 헵번은 영화를 계약할 때마다 자신이 지방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이런 고집 덕분에 지방시는 최초의 영화 의상 협찬 브랜드로 역사에 남게 되었지요. 

 

 

 

 

 

Hubert de Givenchy

 

 

우아함의 비밀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

 

 

지방시는 당시 식사도 굶으며 코르셋을 차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 모래시계 같은 몸매를 과시하던 시대적 배경에 반기를 듭니다. 그는 몸이 옷 모양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옷이 몸의 개성을 따라야 한다는 철학 아래 디자인을 선보이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은 비비안 리가 흑인 하녀에게 코르셋을 잡아당기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보기만 해도 숨이 콱 막혀 그 시대에 안 태어 난 걸 다행으로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지방시는 그런 여성의 허리를 해방시켜 준 디자이너로 기억됩니다.

 

 

 

 

 

사랑받는 배우였지만 개인사는 평탄하지 못했던 오드리 헵번 곁에 항상 조언하고 응원을 해준 이가 지방시입니다.  두 번의 결혼, 아프리카 봉사, 그리고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당시 LA 병원에 있던 그녀를 영국 그녀의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전용기에 각종 의료 장비를 달고 의료진과 함께  특수 작전을 펼친 이도 지방시였고요.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순간에도 지방시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오열했고, 장례식 때는 그녀의 관을 직접 운구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우정이 어떤 빛깔이었든 남녀 간의 사랑 이상의 숭고함이 느껴집니다. 

 

 

 

 

그는 프랑스 문화의 위대한 후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프렌치 테이스트의 외교관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물과 장소에 매우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죠.

 

 

 

 

 그의 사망 이후 그의 컬렉션은 파리의 한 공연 예술 극장에서 경매에 붙여지는 데  1110억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판매액을 기록합니다. 사후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며 그는 프랑스 문화에 커다란 유산을  남깁니다.  위베르 드 지방시의 패션 철학은 여러 디자이너들의 손을 거치며 지금도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습니다. 재해석된 리본 디테일 드레스로, 짙은 스모키 화장과 레더 아이템들로, 도발적이고 섹슈얼한 표현으로, 미국 특유의 스트릿 문화와 지방시 고유의 우아함을 믹스매치한 방식으로, 과거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모습으로 지금도 여전히 진화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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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네덜란드출신

<Piet & Mondrian> : 영화감독 라스 크라우메(Lars Kraume)의 단편영화

대기만성   

더스테일(De Stijl, 양식) 그룹, 잡지창간

신조형주의 

차가운 추상(수직, 수평, 삼원색, 무채색)

제2의 전성기(New York)

재즈

 

2. 생애

 

 

 

자주 이용하던 은행이 합병을 하며 기존 카드대신 새로운 카드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기존의 회색톤으로 다소 밋밋하고 딱딱한 인상을 주던 평범한 카드였다. '새 카드라고 뭐 다르겠어.'라는 내 생각과 다르게 몬드리안의 작품이 손에 쥘 수 있는 카드사이즈로 변형이 되어 내게 들어왔다. 빨강,파랑, 노랑의 삼원색과 검정 선 그리고 흰색 배경이 은행 로고와 함께  박혀 있었다. 단지 카드디자인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익숙한  예술작품 하나가 새롭게 시작하는 은행의 신뢰도를 무한대로 올려놓는  순간이었다. 누구의 센스였을까? 아마 예술을 좀 아는 이의 기분 좋은 배려로 고객들의  은행 이용 횟수가 늘지 않았을 까싶다.

 

 

 

 

 

나는 최대한의 자각으로 일반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평평한 표면에 선과 색상 조합을 구성합니다.
나는 사물의 기초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것을 추상화하고 싶습니다.






 

<코스튬 내셔녈>,2011, 가을, 겨울 컬렉션

 

 

 

 

 

1966년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에 의해 몬드리안룩(Mondrian look)이 유행한 적이 있다. 패션은 돌고 돌아 2011년 <코스튬 내셔널>이 발표한 가을, 겨울 컬렉션에 몬드리안의 작품을 연상하게 하는 간결하고 세련된 룩이 새롭게 해석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몬드리안은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프랑스와  영국을 거쳐 미국 뉴욕으로 망명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68세의 몬드리안에게  뉴욕이란 도시는 보수적이고 경직된 유럽사회와 확연히 비교될 정도로 활기찬 젊음의 도시였다. 마치 그가 생전에 추구하던 유토피아를  가장 잘 표현한 도시 같았다. 게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에 걸쳐 미국에서 대중화된 재즈음악을 좋아해 고령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할렘에서 흑인들의 생생한 재즈연주를 즐겨 듣고 음반을 사 모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첫 시작은   차분한 칼러로 풍경을 묘사한 자연주의적인 스타일에서 시작한다. 1872년 네덜란드에서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면서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해 어려서부터 그림을 접할 기회가 비교적 쉬웠다. 19세기말, 네덜란드는 헤이그 파의 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의 삼촌인 헤이그파 화가 프리츠 몬드리안(Fritz Mondrian)의 영향을 받으면서 주제나 제목, 빛과 공간 처리와 같은 구체적 방법에 이르기까지 헤이그파적 경향을 띈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암스테르담 미술아카데미를 다니며 20대에 그린 초기 작품들은  차분한  색조의 풍경화와 정물화로 지극히 평범한 수준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경력을 시작했고 주변 가까이 보이는 들판, 풍차, 강물 등 자연의 모습을 반복해서 담으며 네덜란드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화풍을 시도했다.  

 

 

 

 

 

Mill in sunlight, 1908

 

 

 

 

 

1905년에서 1910년 사이 몬드리안은 다양한 스타일의 회화를 시도해 보고 화풍의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터치가 강한 점묘주의와 생생한 색감의 야수파에 영향을 받아 해 질 녘 풍경 속에 드러난 풍차는 마치 불길에 휩싸여 흘러내리는 것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당시 이 작품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중앙에 수직, 수평선을 교차시켜 형식상의 구조를 드러냈고 색채의 단순한 대조를 통해 긴장감을 증대시키려 한 몬드리안의 의도를 잘 표현한  구성 작품 중 하나다. 몬드리안이  풍경의 여러 요소 중에서 형태의 기본 틀을 단순화시키고 풍차, 나무, 들판,  꽃이 중심이 되기 시작한 것은  상징주의를 접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야수주의의 영향으로  화려한 원색의 색감을 과감히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나의 회화에서 최초의 요소는 색채였다.
나는 자연색채(natural color)를 버리고
순수 색채(pure color)를 택했다.
나는 자연 색채를 캔버스에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회화가 본질적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다.

 

 

 

 

1911년 암스테르담에서 첫 번째 '현대예술그룹'전시회가 열립니다. 이 전시에서 몬드리안은 조르주 브라크와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아 파리로 갈 결심을 하고 두 화가의 입체주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파리로 이주하고 자연의 영적 본질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물리적 영역을 결합시키고자 꽃, 나무, 인간의 형태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고요.

 

 

 

 

몬드리안은 파리에서 접한 입체주의에서 영감을 얻어  덜 빛나는 색채로 되돌아갑니다. 회색과 갈색 계열의 색조를 바탕으로 선 자체가 점점 더 중요해졌지요. 추상화 탐구를 계속 이어갔는데, 나무 묘사의 변형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러한 이미지  변형의 경험을 통해 몬드리안은 형상과 완전히 멀어질 수 있게 됩니다. 

 

 

 

 

 

Blossoming apple tree, Wikimedia Commons,1912, Kunstmuseum DenHaag, The Hague,The Netherlands, wikimedia commons

 

 

 

 

몬드리안은  네덜란드에서도 같은 이념을 공유한 전위 예술가들과 함께  그룹을 만들어 '더 스틸(De Stijl)' 저널을 출판하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의 필수 요소를 기반으로 삶의 모든 측면을 재구성하기 위해 전통을 파괴하려는 그룹의 야심에 공식적으로 동조합니다.

 

 

 

1920년대 초반 몬드리안은 이론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회화 표현 방식을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로 천명하고 검은색과 흰색의 직선 배열과 파랑, 빨강, 노랑의 3 원색으로 구성된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추상화를 예술가로서 추구했던 절대적 진실과 미에 접근하는 과정으로 보았지요. 그의  다양한 화풍은 이미지의 본질과 통일성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에 그 근원을 둡니다. 

 

 

 

Composition with red, yellow and blue, 1935-1942

 

 

 

 

몬드리안은 우주의 근원과 진실을 표현하고자  형태를 더 단순화하고 기하학적인 수평과 수직의 선만을 남깁니다. 그에게 수직선의 의미는  생기를 표현하는 것이고,  수평선은 평온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네요. 색상은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과 흰색의 배경 그리고 검은색 선만을 사용하여  정제된 자신만의 추상화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미술의 3대 기본 요소인 선, 면, 그리고 색만으로 말이지요. 1930년 이후 검은 수직선과 수평선이 화면 전체에 꽉 찬 작품을 제작했고 이후로는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해지자 검은 선이 많이 보이는 연작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계산이 아닌 자각으로 구성된 수평선과 수직선을 통해
강한 직관에 이끌려
조화와 리듬을 가져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Victory Boogie Woogie, 1942-1944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듯한 제목의 위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은 몬드리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수직선과 수평선, 그리고 색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회화 세계를 구축한 몬드리안은 다시 고향인 네덜란드나 오랜 시간 활동한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1944년 미국에서 폐렴으로 72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3. 나가기

 

몬드리안은 19세기말 풍경화가에서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중심에 서 있던 작가입니다. 더불어 20세기 미술뿐만 아니라 디자인, 건축, 패션, 대중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이기도 하고요. 초기 그림과 말년의 그림을 비교하면 전혀 새로운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전 생애의 작품들이 일관성 있게 구상에서 추상으로 진화했음을 알 수 있지요. 살아생전 사실주의 그림 팔아 근근이 먹고살던 그였지만 결코 한 단계에 머물지 않고 회화의 변화무쌍한 가능성을 실현시킨 독보적인 화가입니다. 20세기 현대 사회에서 가장 폭넓게 활용되고 실생활에 변화를 가져온 화가 이기도 하고요. 이제 네덜란드 하면 렘브란트, 고흐 말고 몬드리안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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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J'adore" 향수

뉴룩(New Look),1947

오트 쿠뒤르( 고급 맞춤 장식의복)

액세서리(스카프, 핸드백, 모자)

고 다이애나비

럭셔리 브랜드의 상징

레지오 도뇌르 훈장

 

 

2. 생애

 

개인적으로 디올이라는 명품 브랜드명보다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고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패션 소품으로 들고 있던 가방을 통해 시선을 사로잡은  브랜드다. 남다른 패션을 소화해 내 어딜 가나 환영을 받았던 그녀의 이미지와 떼려야
뗄 수 없으니 디올브랜드는  인플런서 덕을 톡톡히 본 브랜드라는 생각이 든다. 왕실과 브랜드를 매치시켰으니 말이다.

 

 

 

 

 

짧은 쇼컷, 클래식한 검정 이브닝 드에스에 심플한 검정 디올 가방이 어떻게 그녀 손에 들리게 되었을까? 오래전 파리에서 레이디 디올을 들고 있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목격됩니다. 세잔의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프랑스 영부인이 다이애나 비에게 이 상징적인 가방을 선물로 주었다고 하네요. 이후로  그녀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레이디 디올’ 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지요. 스트랩에서 떨어지는 메탈릭 장식은 크리스찬 디올이 사랑했던 럭키 참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가방의 시그니처이기도 한 퀼팅 패턴은 나폴레옹 3세의 의자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레이디 디올 백은 지금도 피렌체에 있는 디올 아틀리에에서  긴 세월 동안 더욱더 정교한 과정을 거치며 장인들의 손에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디올만의 우아함과  상징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말이죠.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Fashion fades, only style remains.)

 

 

 

 

 

 

패크리스티앙 디오르는 1905년 프랑스의 바닷가 마을 노르망디 그랑빌에서 태어났다. 알렉상드르 루이스 모리스 디오르(Alexandre Louis Maurice Dior)의 다섯 자녀 중 둘째로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는 항상 우아하고 세련되게 치장한 어머니의 모습을 여성의 이상으로 보았고 이후에도 그의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남자아이가 첫 번째 접하는 여성이 엄마이다 보니 남자아이만 둘 인 내 뒷 꼭지가 디올의 사례를 접하며 뜨끔하기도 한다. 좋은 롤모델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물음표가 여러 개 떠다니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가 만든 최초의 향수 '미스디오르'도 사실은 자신의 누이를 회상하며 만든 것이라 한다. 부모님이 바라던 대로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에콜 리브르 데 시앙스 폴리테크( the Ecole des Sciences Polotiques)에서  공부하고 외교관을 지망했지만 건축과 예술에 더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후 학교를 떠나 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으로  미술관 자크 봉장(Jacques Bonjean)을 열고 조르즈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장 콕도, 막스 자콥 등의 작품을 다루기 시작한다.

 

 

 

1930년 공황이 찾아와 집이 파산하고 이듬해 어머니와 형이 세상을 떠난다. 갤러리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친구 장 오젠느(Jean Ozenne)에게  패션 드로잉을 배우고 막스 케나(Max Kenna)에겐 색칠하는 법을 배워 생활의 방편으로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에 모자와 드레스의 크로키를 그려서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로버트 피제(Robert Piquet)의 양장점에서 디자이너로 일을 했다.  제 2차 세계대전에 종군하면서 한동안 디자인을 하지 않고, 제대 후 프로방스의 칼리앙(Callian)에서 농장을 운영하기도 한다. 전쟁 중 독일은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스 영화를 규제하였지만 시대극은 장려했기 때문에 디오르는 이러한 영화의 의상을 디자인하게 된다. 그 뒤로 루시앙 르롱(Lucien Lelong)의 쿠튀르에서 피에르 발맹와 함께 모델리스트로서 일을 하게 된다. 이후 독립해 섬유 회사 Marcel Noussac 의 지원을 받아 '메종 크리스티앙 디오르(La Maison Christian Dior)'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한 가지 유형의 스타일로 사람들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은 자신만의 아름다움과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You should never restrict people to one type of style.
Each person has their own beauty and personality.)

 

 

 

 

 1947년 첫 콜렉션에서 선보인 뉴 룩(New Look)으로 제1급 디자이너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매 시즌 튤립 라인, H 라인, A라인, 애로우 라인 등 새로운 디자인 라인을 선보이며 전 세계 패션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48년 지그재그 라인

1950년 버티칼 라인(시스 실루엣, Shearh sillhourtte)

1951년 오벌 라인(oval line)

1952년 스쁠라인(souple line)

1953년 툴립 라인(tulip line)

1954년 뮤게 라인( muguet line)

1954년 H라인

1955년 A라인

1956년 애로우 라인(arrow line)

1957년 리버티 라인(liberty line),

             스핀들 라인(spindle line), 디오르의 마지막 라인

 

 

많이 들어 본 패션용어들을 그의 아이디어를 통해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다. 

또한 상품의 범주을 확대시킨 글로벌 브랜드 크리스티앙 디오르 S.A. 설립을 통해 전후 패션 산업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도 한다.

 

 

 

 

 

 

1947년 2월 12일 자신의 첫 컬렉션을 열었고 이때 선보인 디자인이 '뉴룩'으로 불리면서 세간의 관심을 받아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New Look은 본래 라인 이름은 코롤라(corolla)지만 S/S 컬렉션에서 선보인 작품을 보고 하파스 바자(Harper's Bazaar)의 편집장 카멜 스노우(Carmel Snow)가 

 

"이것은 확실히 뉴룩이군요.

(Your dersses have such a new look.")

 

라 말한 이후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같은해 패션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리는 니먼마커스상(Neiman Marcus Award)을 수상, 세계 각지에 지사를 설립하고 사업을 확장했다. 니먼 마커스 패션 어워드(Neiman Marcus Fashion Award)은 세계 최고 명예로 인정받는 패션상 중의 하나이다. 1938년 니만(Neiman, C.M)과 마커스(Marcus, S.)가 제정한 최고의 디자이너에게 수여하는 상, 매년 국적을 불문하고 수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dior.com

 

 

 

 

뉴 룩은 여성미를 강조한 디자인이다. 디오르는 형태와 실루엣을 만드는 것에 정통했다. 그는 스스로

 

"I have designed flower women."

 

라고 언급하며 곡선미를 강조하고 관능적인 실루엣으로 여성의 몸에 재구성을 시도했다. 이러한 실루엣에 맞추기 위해 힙의 주름장시, 코르셋, 패티코트 등을 입었고 몸에 잘 맞도록 케임브릭(cambric)과 타 피타(taffeta)로 드레스를 만들었다.

동글고 완만한 어깨, 허리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게 퍼지는 풍성한 플레어 스커트, 가늘게 조인 허리로 전체적으로 8자를 이루는 여성스러움과 우아함을 극대화시킨 실루엣이다.  비교적 길이가 길고 드레스가 플레어가 많았기 때문에 삼각형을 이루는 피라미드 스타일이었고 소매도 여성스러운 라글란 소매 (raglan sleeve), 돌만 소매(dolman sleeve), 목부분도 윙 칼라(wing collar)등을 사용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다. 뉴룩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 사치스럽다는 게 단점으로 작용했다.디오르는 전후의 참담함과 우울함을 아름다웠던 과거와 안락함, 부드러운 과거로 복원하고자 했으며, 일상에서 벗어난 환상적인 신화에 입각해 화려함과 귀족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했다. 당시 전쟁이 계속되면서 궁핍한 생활에 시달린 유럽인들은 여성성을 강조하고 비싼 천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뉴룩을 지나친 사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옷감을 절약하는 형태로 밀리터리 룩이 유행했었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억눌려있던 여성미에 대한 욕망이 한 번에 분출되면서 뉴 룩은 패션계의 새 바람을 불러왔다. 전쟁의 영향을 받은 1940년대 패션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가 대성공을 이룬 셈이다.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디올은 이브닝드레스에 42마를, 주간용(daytime) 옷 한 벌에 20마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지탄을 받기도 했다.  특히 영국 왕실의 부정적 반응이 유명했다. 영국은 당시 의복 배급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 왕 조지 6세는 두 딸(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에게 뉴룩 착용을 아예 금지시켰다고 한다.

또한 미국에서는 짧은 치마를 선호하는 여성들이 ‘무릎 바로 밑 클럽(Little-Below-the Knee club)’을 결성해 디올의 스타일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뉴룩의 인기를 완전히 꺾지는 못했다고한다. 영국 왕실의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디올은 왕족만을 위한 비공개 패션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년대 전 세계적인 규모의 왕성한 활동을 하는 패션계를 이끄는 디자이너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된다.

 

 

 

 

 

 

레지오도뇌르 훈장, 위키피디아

1956년에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오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나폴레옹이 1802년에 제정한 훈장으로서 프랑스 훈장 중 가장 명예로운 것으로

한국어로 명예 군단 훈장으로 기억하면 될 것 같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루이 14세가 만든

생루이 훈장을 수정하여 만든 훈장으로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발전에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이다.

외국인 중에 독일의 문호 괴테도 끼어있다.

 

 

 

 

 

 

 

 

 

평범한 것을 평범하게 입는 것보다는
조금 더 특별한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Instead of choosing something ordinary to wear,
go for something a little more special.)



 

1957년 10월 23일, 이탈리아 투스카니(Tuscany)의 스파 몬테카티니(Montecatini)에서 5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타임>의 사망 기사에서는 카드 게임을 하던 중에 심장 마비로 죽은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파리에서 열린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장례식에 2,500명 이상의 인원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후 메종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여러 명의 수석 디자이너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1957-1960: 이브 생 로랑(Yves Henri Donat Mathieu Saint Laurent, 8,1,1936-6,1,2008)

1961-1989:  마크 보한(Marc Bohan)

1989-1996: 지안 프랑코 페레(Gianfranco Ferre)

1996-2011: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2012- 현재 : 라프 시몬스(Raf Simons)

 

 

3. 나가기

 

메종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생긴 지  100년째인 2005년,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생가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수집해 온 디오르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들과 보석, 패션, 사진, 회화 등 다양한 작품이 연대순으로 전시되었다고 한다.  디올의 창조적인 디자인과 미적 감각은 모던한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패션 산업에 혁명을 일으키기도 했다. 남성의 입장에서 그가 선보인 "신비로운 여성성"을 강조한 뉴룩으로 인기 몰이를 하고 그의 철학은 수석 디자이너들의 손끝에서 새롭게 탄생되고 있다. 그가 추구했던 신비로운 매력과 품격은 패션계의 거장으로서 존경과 찬사를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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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바느질하는 노동자

<No.5>, <No.22>

샤넬 보이백

영화 <Coco Before Chanel>,2009

나치 스파이 활동과 말년

 

2. 생애

 

 

파리의 올랑쥴리 미술관에 전시 중인 초상화가 하나 있다. 당시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이 그린 것으로 극작가 장콕도, 화가 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현할 정도로 사교계의 거물이 된 한 여인이 그 주인공이다.

바로 코코 샤넬(Coco Chanel)이다.

 

 

 

 

영화 <Coco Before Chanel>,2009

 

 

 

 

2009년에 개봉된 <Coco Before Chanel>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Coco Chanel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소녀 Gabrielle Chanel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고아원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재능을 발견한 Gabrielle은 노래와 춤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중 우연한 사건으로 부유한 상류층과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과 돈, 그리고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끊임없는 갈등과 시련을 겪으며, 그녀는 자신만의 패션 스타일을 발전시키며 Chanel 브랜드의 성공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흔히 접하는 샤넬의 이미지는 진주 목걸이와 고급스러움,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가 다소 냉소적인 그녀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예비 신부님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예물 목록에도 자주 등장하는 브랜드이고요. 요즘 재테크의 수단으로 많이 쓰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녀의 삶과 철학을 알고 물건을 사고 소유하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남서부의 오벨뉴 지방의 소뮈르에서 태어납니다. 12세에 모친이 사망하는 바람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바람둥이 아버지에게 버려져 보육원과 수도원을 전전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너무 일찍 '돈이 최고다.'라는 사회의 룰을 알아버리게 됩니다. 수도원을 도망쳐 친구와 함께 도시로 올라와 살기 시작하고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코코"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지요. 시골 마을인 물랑에서 바느질하는 노동자로 고아원을 나온 샤넬은 당시 그녀를 후원한 한 장교를 만나게 됩니다. 가수를 지망하면서 카바레에서 노래를 잠시 부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카바레(Cabaret: 무도장)하면 워낙 한국 미디어 매체를 통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어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시 카바레는 음악, 노래, 춤, 암송 또는 드라마를 특징으로 하는 연극 엔터테인먼트의 한 형태였다고 하네요. 공연장이 펍, 카지노, 호텔, 레스토랑 또는 공연 무대가 있는 나이트클럽 같은 장소로 보면 쉬울 것 같네요. 종종 식사하거나 술을 마시는 청중은 일반적으로 춤을 추지 않고 테이블에 안지만 사회자나 배우들에 의해 종종 성인 청중을 대상으로 지하적인 성격을 띤 쇼를 보여주었다고 해요. 미국에서 스트립쇼, 풍자극, 또는 피아니스트와 함께하는 솔로 보컬리스트뿐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장소가 당시 카바레 문화였나 봅니다.

 

 

 

 

에티엔 발상의 후원으로 마르젤브 거리 160번지에 모자가게를 개업합니다. 아이러니하게 첫 모자의 손님으로  발상의 여러 여자친구중 한 사람이  써서 큰 히트를 칩니다. 이후 발상과 헤어지고 난 후 그의 소개로 보이카펠을 만나 평생 연인으로 지냅니다. 그이 이름을 따서 만든 '샤넬 보이백'이 있고요. 샤넬의 개업자금은 카펠의 후원을 받았고 그녀가 만든 모자가 잘 팔리자 샤넬은 복장 사업을 시작합니다.  보이카펠은 큰 상선 운영을 하는 부잣집 도련님 그리고 다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이카펠이 다이애나 쿠퍼와의 정식결혼을 발표하자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차 사고로 그를 잃을 때까지 그와의 관계를 지속한 걸 보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인가 봅니다. 그를 잃고 미치도록 일에 몰두한 걸 보면 말이죠.

 

 

 

 

 

 

 

1913년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샤넬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인 1915년 <메종 드 꾸뛰르>를 오픈합니다. 컬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세기의 연인이 된 먼로의 향수, 한국경제

 

 

 

능력있고 매력적인 그녀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 공작, 영국왕이 되는 에드워드 8세까지 그녀를 곁에 두고 싶어 했으니 말입니다. 이후로 파블로비치 대공으로부터 에르네스트 조향사를 소개받은 것이 샤넬 인생의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상류층 여성은 장미나 바이올렛 등 한 가지 꽃향기가 나는 향수를 즐겨 사용했다고 합니다. 샤넬은 이런 인공적인 향기를 싫어해 전형적인 향수의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향수의 룰을 깨고 80개가 넘는 다양한 향류를 섞은 향수를 제조하는 데 성공합니다. 샤넬에게 여러 개의 향수 샘플을 가져와 테스트를 했는데 샤넬이 이 중 다섯 번째 샘플을 골랐다고 해서 넘버 5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넘버 5는 우아한 꽃 비누 향이 나는 향수로 이름이 나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여 대성공을 거둡니다.

 

 

 

상류층이 많이 다니는  프랑스 파리의 샤넬 매장에 넘버5 향수를 뿌리고, 그의 상류층 친구들에게 향수를 건네는 등 자연스럽게 향기를 접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씁니다. 대중보다 자신의 VIP 고객을 대상으로 영업을 고집합니다. 입소문을 타고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하면서 "잠자리에 들기 전 샤넬 넘버 5 향수 몇 방울만 몸에 걸친다"라고 말한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가수 마릴린 먼로의 언급으로 넘버 5는 향수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녀는  20세기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이기도 하고요. 케네디 대통령과의 불륜설도 있었고, 헐리우드 섹스 심볼(Sex Symbol)로 불리기도 했지요.  화려한 이미지의 페르소나를 지녔지만 동시에 불운한 자기파멸적 사생활로 동정을 함께 얻기도 합니다. 또한, 젊은 나이에 의문을 남기며 사망하면서 많은 뒷 이야기를 낳았고요. 금발의 미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고 앤디 워홀의 실크 스크린 작품으로 여러 개가 복제되어 전시되기도 했지요.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만난 샤넬은 공작의 보석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주얼리를 발표합니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하지요. 기업가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하고 양장 전문점도 오픈합니다.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해 노동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 충격으로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 사업을 접기로 해 15년간 패션계를 떠나게 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1940년에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패전국 프랑스에선 친독계열의 비시 괴뢰정부가 들어섭니다. 당시 프랑스인들 중에는 독일군에 대항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애인관계로 지내며 그의 비호아래 자신의 사업체를 지켜냅니다. 나치의 스파이 노릇도 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비판과 함께 고국을 탈출해 애인과 함께 수년간 스위스의 로잔에서 망명생활을 보내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치에 혼을 팔아넘긴 매국노'라는 혐오감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1954년 스위스 망명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방도므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릿츠 호텔에 거주하면서 패션계로의 복귀를 꾀합니다. 당시 샤넬에 대한 혐오감이 팽배해 있던  유럽에서 '매국노'라는 경멸과 나치독일에 대한 혐오감으로 10 연년 간 샤넬의 입지를 약해진 상태였지요. 하지만 미국에서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맞물려 그녀의 패션이 인기를 끌며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955년 샤넬은 울 소재의 새로운 샤넬 슈트를 발표했는데 미국에서 ' 과거 50여년간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 디자이너'라 하여 모드 오스카 상을 수여하기도 합니다. 거주하던 파리의 릿츠 호텔에서 컬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88세로 사망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유해는 조국 프랑스를 배신한 행위로 프랑스 고급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고 망명생활을 했던 스위스의 로잔에 매장됩니다. 개인적으로 한 인물의 평가는 입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돈이면 모두 해결돼.'라는 사회적 현실을 일찍 깨달아 버렸기에 오롯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누군가를 찾아 욕망의 사다리를 올랐던 그녀를 <위대한 유산>의 작가 피츠 제럴드라면 어떻게 표현했을 까요? 사랑하는 조국의 품에 묻히지 못하고 이방의 땅에 묻힌 그녀를 보며 씁쓸한 생각을 감출 수 없네요.

 

 

 

I hope you live a life that
you're proud of.
If you find that you are not,
I hope you have the strength to start over.
(나는 네가 자랑스러운 삶을 살길 바란다.
자기가 자랑스럽지 못하다면,
다시 시작할 힘이 있기를 바라는 거다.)

-피츠 제럴드(F.Scott Fitzgerald)의 명언 중-

 

3. 나가기

 

 

 

그녀는 20세기 초에 전통적인 패션 규범을 깨고 여성들에게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제공하는 스타일을 창조했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패션은 불편하고 구조적인 제약이 많았지만, 코코 샤넬은 캐주얼하고 유연한 디자인을 선보여 이를 극복했지요. 여성들에게 아름답고 실용적인 옷을 제공하여 영원한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또한 복잡한 장신구와 장식보다는 심플하고 세련된 악세사리를 강조해 실용적이면서도 우아한 스타일을 강조하지요. 그녀의 대표적인 브랜드 로고로 쓰인 "CC"의 이니셜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아이콘적인 심벌로 여겨지며, 그녀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패션을 단순히 옷 입는 것으로 볼 수 없게 하였고, 자신의 개성과 스타일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의 패션을 강조하여 여성들에게 자신감과 독립심을 심어주었고요. 그녀의 브랜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그녀의 감각이 여전히 살아 스며들고 있지요. 그녀의 울퉁불퉁한 인생사를 나무라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부디 그녀가 옷에 대해 가졌던 진심을 제대로 알고, 입고, 메고, 뿌리고 그리고 걸쳐야 진정한 "CC"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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