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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

36세 요절

유대인

잔 에뷔테른

콘스탄틴 브랑쿠시

2. 생애

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시집 <산호림> 한성도서, 1938-

 

 

'사슴과 5월과 고독의 시인'으로 불리는 노천명의 대표적 작품이다. 현실에 타협하지 못하고 결혼도 않고 고독과 빈궁으로 일생을 마친 시인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가늘고 긴 얼굴, 가녀린 목, 아몬드 형태의 눈으로 인체를 그리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Clemente Modigliani, 1884,7,12-1920,1,24)의 작품을 보면 떠오르는 시다.

 

 

 

 

 

1884년 이탈리아 왕국 토스카나주 리보르노에 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해변에 위치한 이 지역은 르네상스가 태동하는데 큰 기여를 한 메디치 가문에 의해 이상적인 휴양도시로 계획된 곳이다. 그의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의 혈통을 어어받은 마르세유의 명문가 출신으로 높은 지성과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직접 시를 번역하거나 서평을 써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다행히 모딜리아니의 출생으로 인해 집이 망하는 걸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델리아니 출생 당시, 그의 아버지는 사업실패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집안 행정관이 그이 물건을 압수하기 위해 집에 들어갔을 때 모딜리아니의 어머니는 출산 중인 상황이었다. 유대법에 '임신한 여자나 갓 태어난 아기 엄마의 침대는  뺏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있어 값비싼 물건을 어머니 곁에 두어 재산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늑막염, 폐결핵, 폐렴등 병치레가 잦아 그는 정규교육을 받기 힘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인 아들을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이탈리아 최고의 미술선생인 풍경화가  굴리엘모 미켈리(Guglielmo Micheli)의 아틀리에에 데리고 가 미술공부를 시키게 된다. 하지만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진행되어 공부를 중단하고 이탈리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요양을 해야 했다.  이후 1902년  피렌체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조반니 파토리 (Giovanni Fattori)에게  회화를 배웠다. 당시 피렌체에는 상징주의 미학이 유행했고, 모딜리아니는 이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이듬해 베네치아로 가서 1905년까지 학업을 계속 이어간다.

 

 

 

 

22세 모딜리아니는 1906년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인 파리의 몽마르크르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인체소묘와 유화를 공부하는 한편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 앙리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폴 세잔(Paul Cezanne) 등에 영향을 받았다.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사는 몽마르트르 지역 작은 스튜디오에서 1년 동안 생활하며 말쑥했던 외모는 홈리스처럼 초라해졌고 생활이 어려워져 알코올과 마약에 손을 데게 된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고 하루에 100여 장의 그림을 그릴 정도로 엄청난 작업을 소화해 낸다.

 

 

 

 

<The Cellist>, 1909, 표현주의 스타일 초상화

 

 

세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비 정상적으로 길게 그려진 첼로 연주자의 팔은 훗날 모딜리아니의 회화 스타일의 특징 중 하나가 되는 '길쭉하게 그리는' 스타일의 시작을 암시한다. 그림의  모델인 첼로 연주자는 '팔귀에르'작업실을 가지고 있던 당시 그곳에 살았던 가난한 첼로 연주자라고 한다. 첼로와 혼연 일체가 된 첼리스트의 모습이 사뭇 인상적이다. 

 

 

 

 

<여자의 머리>, 1912, 석회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20세기 당시 예술계가 아방가르드로 변화하는 시기에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화풍을 정립하고 싶어 했다. 이에 반해 모딜리아니는 많은 예술가와 친분을 두텁게 쌓으며 영향을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카테고리에 소속되길 거부한다. 그는 어릴 때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독서량이 풍부한 화가 중 한 명인데 특히 니체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아  반항과 무질서를 통해 진정한 창조력을 발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 덕택으로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르누아르, 피카소 , 고갱 , 세잔, 마티스 등과 같은 예술사조에 한 획을 그은 화가들을 만났음에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특한 그만의 작품세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피카소 같은 화가에 가려  그의 그림은 고작 $2-4, 드로잉은 4센트에 팔리는 생계형 화가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유독 화가들 중 위조작품이 많은 화가가 모딜리아니이다.  생계유지를 위해 아무에게나 팔다 보니 그의 사후 어떤 작품이 진품인지  알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2023.05.28 - [지식&교양] - 50-1. 신인상주의, 폴 세잔(Paul Cezanne,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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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세잔의 정물화 그림을 처음 보았던 학창 시절 그의 그림이 참 만만해 보였다. 어쩐지 미술학원 같은 곳에서 아직 기본기가 덜 닦인 초보 학생이 실수하듯 그려 낸 느낌이 들어 '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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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4 - [지식&교양] - 46. 인상주의 화가, 고갱(6)

 

46.인상주의 화가, 고갱(6)

안정적인 중산층이자 은행원이었던 챨스 스트릭랜드는 평소 주변사람에게 무심하고 말이 없고 재미없는 사내로 여겨졌다. 아내는 교양있지만 속물적인 구석이 있는 여자로 나타난다. 작중'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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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여인상 기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iani),1913

 

 

 

1909년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로 이사하여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와 교류하며 조각에 매료됩니다. 친구이자 이웃인 브랑쿠시에게 영향을 받아 1909부터 1914년까지 약 5년 정도 조각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이국적인 환경에서 살아온 그의 배경 때문에 그가 아프리카를 포함한 부족미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생산하게 된다. 그는 1914년까지  30 여점에 이르는 특유의 길쭉한 석조 두상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여러 질환으로 인해 허약했던 그의 몸은 조각에서 나오는 돌먼지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조각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조각작품 역시 당시 예술계에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렇지만 조각 작업 이후에 오히려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명확해졌다.  모딜리아니가 조각작업을 함으로써 형태를 단순하하고, 가능한 한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물체의 정수를  보여주는 데 조각 활동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조각작업의 영향으로 그의 화풍은 단순하고 비정상적이지만 개성적인 작품이 탄생하게 됐다.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in a large hat>, 1918

 

 

 

<누워있는 누드>,1917-1918

 

 

 

 

시인 겸 화상인 폴란드 화상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권유를 받아들여 회화로 복구한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을 조망하는 순수한 형상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재료, 소재)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은 초상화와 누드화가 주를 이루었으며,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여성상은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했다. 

 

 

 

 

1917년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모딜리아니는 프랑스에서 활약한 우크라이나계 조각가 하나 오를 로프의 소개로 19살의 화가 지망생 잔 에 뷰테린(Jeanne Hebuterne)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잔은 로마 가톨릭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젊은 미술학도였지만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모딜리아니를 돌본다.  그의 작품은 동료 미술가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미술 시장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늘 변두리에 있었다. 같은 해 12월 모딜리아니는 베르트 베이유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통행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내건 두 장의 누드화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바로 철거되고 전시회도 일찍 문을 닫게 된다.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가 이렇게 어이없게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1918년 모딜리아니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열정과 헌신만은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 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잔의 초상이 주를 이루는데 단순미가 더욱 강조되는 가운데 전에 없던 서정미를 엿볼 수 있다. 모딜리아니는 잠시 남프랑스 니스에서 요양하면서 병세가 호전되었으며 , 이곳에서  딸 잔 모딜리아니(Jeanne Modigliani)가 태어난다. 1919, 5월 파리로 돌아와 다시 예술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하며 잔느 에뷔테른의 초상화 15점을 남긴다.

 

 

 

 

'이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파리 페르 라세즈 묘비명-

 

 

 

 

1920년 파리로 돌아왔지만 모딜리아니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핵 수막염'으로 의사조차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침대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의 나이 36세 , 결국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난다.  그의 사망 후  장례식 문제로 충돌하고 격분한 잔느는 다음날 부모의 아파트 5층에서 투신 자살하고 만다.  당시 8개월의 뱃속아이는 세상을 보지 못한 채 함께 세상을 떠나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고, 10년 뒤 잔의 가족들은 잔을 모딜리아니 곁에 묻어주게 된다. 

 

 

"꿈을 이루는 것은 의무다."

 

 

 

 

누구보다 성공한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가난과 질병으로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다행히 그녀의 첫째 아이 잔(Jeanne Modigliani,1918-1984)은  훗날 성장해 미술사가로서 그녀의 아버지의 작품을 토대로 한 <모딜리아니:인간과 미신>이라는 전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3. 나가기

 

모딜리아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이며, 예술사조에서 여러 대가들의 형식을 이을 수 있는 가교역할을 하는 중요한 화가임은 틀림없다. 그가 병마와 가난에 싸우며 불우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말이다.  얼마 전 그의 작품은 2018년 소더비 옥션에서 역대 최고가를 경신한 기록을 세우며 현대의 예술계에서도 가장 높은 작업적 평가를 받고 있다.  입체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사조가 유행하던 시절 어느 노선도 따르지 않았고 미술사에서 어느 쪽으로 분류될 수 없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완성했던 모딜리아니! 알코올과 마약, 가난과 병마에 시달려도 순수하고 깊은 감성을 끌어낸 그의 생전 누리지 못한 호사를 영감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주고 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구글 아트 앤 컬처. 위키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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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동네 정육점 아저씨는 커다란 등치의 저먼 셔퍼드를 항상 옆에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아저씨 등치도 만만치 않으신데 옆에 무섭게 생긴 저먼 셔퍼드까지 늘 동행을 하니  골목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괜스레 제가 알아서  길을 터주게 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한 인간과 한 마리 개가 풍기는 아우라에 기가 꺾여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지요. 색깔까지 까매 어린 마음에 꿈에 나올까 겁이날 정도였어요. 아저씨가 이사 갈 일은 없으실 테고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보이지 않는 힘에 멈칫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실제로 힘이 세신지는 모르겠으나 어린 시절 제가 본  아저씨는 '누가 감히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동네에서도 독특하신 분으로 오랫동안 제 기억 속에 저장되어 계십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견종이면서 동시에 리트리버와 함께 가장 많이 유기되는 견종이 저먼셰퍼드종입니다. 독일에서 개량된 목양견(Herding dog)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품종 중 하나이지요.  저먼 셰퍼드 외에도 벨지안 셰퍼드, 오스틀일리안 셰퍼드, 베르가마스코 셰퍼드, 코카시안 셰퍼드, 가라피 안 셰퍼드 등이 있습니다.

 

 

 

 

조바이든과 챔프(왼쪽), 메이저(오른쪽), 나무위키

 

 

미국의 역대 대통령 당선자들이 자신이 키우던 개를 데리고 백악관에 함께 입성하는 장면을 자주 보게 됩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 바이든 역시 대통령 당선과 함께 키우던 개 '챔프'(12y)와 '메이저'(2y)를  자택이 있던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백악관으로 데리고 갑니다.  두 살짜리 '메이저'는 백악관에 살게 된 첫 유기견이기도 했습니다. 영어 단어 메이저에는 '소령'이란 뜻이 있는데 2015년 세상을 떠난 장남 보가 델라웨어주 주방위군에 맡았던 직책이 소령이어 붙여졌다는 썰이 있습니다. '챔프'라는 이름에는 아버지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그리움이 묻어있습니다.  챔피언(Champion)의 줄임말로 바이든 대통령이 어린 시절 낙심할 때마다 아버지가 '일어나, 챔프'라고 격려했던 데서 따온 이름이라고 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트랜스젠더의 군복무 금지를 폐기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공개 행사 말미에 반려견들이 밖에서 컹컹 짖는 소리가 화면을 타고 중계돼 트위터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조 바이든 대통령의 반려견'커맨더'가 백악관 직원들을 무는 사고가 생겨 추가 훈련을 받거나 , '메이저'도 자주 직원들을 물어  백악관을 떠났다고 하네요. 

 

 

 

 

 

 

 

 

 

 

강아지 때는 전신이 까맣습니다. 자라면서 점점 색이 달라지지요. 성견이 되면 얼굴에 '마스크'라 불리는 부분 및 등의 '안장' 부분만 검은색이 남습니다. 나머지는 갈색이 되고요.  뒷다리가 비정상적으로 짧아진 셰퍼드는 쇼독(Show dog)입니다. 셰퍼드는 쇼독과 워킹독의 구분이 극명한 견종입니다.  쇼독(show dog)은 도그 쇼에 출전하는 개를 칭하는 용어로  품종이 있는 견종이 얼마나 순종의 모습에 가까운 지 평가하는 품평회로 각종 협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를 말합니다. 쇼독을 위한 브리딩이 이루어질수록 해당 견종은 쇠락할 확률이 높다고 전합니다. 예를 들면 양치기 개의 기민하고 영리한 성질이 전반적으로 사라지는 경향이 짙은 것처럼 말입니다.

 

 

 

Deutscher Schaferhund, 도이치 셰퍼훈트= 독일 양치기개

높이50-66cm

체중 23-43kg 대형견

털 색상에 따라 위장 패턴도 있다.

 

 

독일  기병대장인 막스 폰 스테파니츠가 처음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최초 등록 개체는 '호란트 폰 그라프라트'라는 이름의 수컷이고요. 이후 영국에서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알자시안(Alsatian)이라 불렸다가 알자스-로렌 지방에서 복무한 병사가 처음 영국에 데려온 것이 계기다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의 반독 감정 때문에 독일 관련 이름을 피하기 위해 불려졌습니다.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일반적으로 저먼 셰퍼드라고 다시 칭하게 됩니다.

 

 

 

 

 

 

 

 

 

저먼 셰퍼드  독은 당당하고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눈은 중간 정도의 크기로 아몬드 형이며 짙은 갈색이고 코는 검은색을 띠지요.  귀는 밑 부분 폭이 넓고 높은 위치에 붙어 있으며 쫑긋하게 서 있어요. 앞다리는 일직선이며 뒷다리 대퇴부의 폭이 넓고 힘이 셉니다. 몸의 길이가 키보다 길며 가슴이 두텁고 등이 일직선이고요. 털은 컽털이 단단하고 거칠며 옆으로 누워있습니다. 속털이 두텁고요. 털색은 검은색 혹은 회색 단색으로 된 것 또는 회색 바탕에 갈색이나 밟은 색이 혼합된 것들이 있습니다. 꼬리는 중간 정도의 길이로 털이 많고 낮은 위치에 붙어있습니다. 몸은 탄탄한 근육질이며 허리는 어깨 높이 보다 긴 편이고요. 앞다리는 짧지만 튼튼하며. 주둥이는 뾰족하고 눈이 크고 귀는 뾰족하게 똑바로 서있습니다. 후각과 청각이 예민하고 동작이 민첩하고요.

 

 

 

 

지인분이 키우시던 '갑돌이'라는 이름의 저먼 셰퍼드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영리하던지 가족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요. 특히 지인분이 깔끔한 사람이라 그 성향을 닮았는지 개를 보면 주인이 보일 정도로 참 많이 닮아 신기했습니다. 특히 저먼 셰퍼드의 경우 나이가 들면   뒷다리와 힙 부분이 굉장히 약해져 힘든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어느 날 데리고 다니 던 개가 보이지 않아 개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처음 정을 주고 키우 던 개라 정 떼기가 많이 힘들었다고 하시며 눈물을 보이시더라고요. 키우던 개 안락사를 시키고 오셨다고 하세요.  잘 걷지를 못해 뒷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기도 하고, 끙끙 앓는 모습에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이 정도면 안락사시켜주는 것이 동물에게 더 나은 선택이라 말씀하셨데요. 사람보다 먼저 가는 녀석들이라 생각은 하면서도 보내는 것은 맘처럼 쉽지 않지요. 그 뒤로 지인분은 더 이상 털 달린 개를 키우지 않기로 했다고 하시네요. 또 보낼 걸 생각하니 못 키우겠다고 하시면서 말이죠. 목줄에 걸었던 이름표만 가지고 계시는 것 같아요. 

 

 

 

 

영역에 대한 집착이 적은 목양견이 갖추어야 하는 특징이 전쟁에서도 써먹을 수 있다는 것에 높이 평가되어 독일군뿐만 아니라 적군이었던 영국군, 미군은 물론 소련군, 터키군까지 군견으로 써먹었을 정도로  인기가 높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머리가 좋고 강인하며 충성심 강하고 붙임성 있는 셰퍼드가 크게 활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셰퍼드가 지능, 체력 등 여러 면에서 좋은 특질을 지녔기 때문이지요. 개중에서 지능이 상당히 높은 편에다 체격과 신체능력까지 뛰어나서 군견뿐 아니라 목양견, 경찰견, 수색견, 구조견, 맹도견, 사역견, 애완견, 경비견 등으로 쓰이는 만 능견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SGbAG6V4V0 

 

 

 

저먼 셰퍼드의 지능을 알 수 있는 사례로 안내견 초창기에는 안내견으로 가장 많이 쓰이던 견종이었다고 합니다. 셰퍼드가 활동적이면서도 동시에 공격적이지 않게 하려면 주인이 강한 리더십을 항상 보여야 합니다. 개가 주인을 우습게 알면 공격적이 될 수 있거든요. 진돗개와 달리, 당시 주인에게 충성심을 바칠 뿐만 아니라 주인이 바뀌어도 똑같이 충성심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절개 없는 개라고 놀리기도 하지요. 또한  셰퍼드는 별명이 피스톨이라 불릴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납니다. 누구이든 현재 통제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충실하게 듣거든요. 특기로 늑대와 견줄만한 속보능력도 지니고 있습니다.

 

 

 

 

Belgian Malinois

 

 

 

문제는 인기견들이 그러하듯 저먼 셰퍼드 역시 근친교배로 유전병 등이 생기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앉은뱅이, 왜소증, hip dysplasia 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특히 테러와의 전쟁 이후 미군의 주 전장인 중동지역에서 뜨거운 햇빛을 오래 받은 경우 백내장이 발병해 실명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독일,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저먼 셰퍼드 대신 벨지언 말리노이즈를 경찰견이나 군견으로 대체 중이라고 합니다. 체구가 작은 말리노이즈가 중동의 더운 지역에 더 적합하다는 판단 때문이지요. 

 

 

 

최고의 개는 자기 자신에게  제일 맞는 견종이라 얘기할 수 있을 테지요. 사람마다 선호와 생활환경이 다 다르기에 여러 견종 중 본인에게 가장 알맞은 견종을 고르는 노력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잘 판단하시고 끝까지 책임져 주십시오. 

 

#사진 출처: 나무위키, 위키피디아

# 저먼 셰퍼드# 벨지언 말리노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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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는 이중천재

알마 말러(Alma Mahler)

'빈 아틀리에'출신

제1차 세계대전 종군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교편생활

바로크적 풍경화

1938 런던 망명

 

초기 환상화 <바람의 신부>

초상화<포렐 박사상>

편력시대 풍경화<몬타나>

풍자적인 작품 <테레모피레>

표현주의의 시인. 희곡작가

 

2. 생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미술은 미술가 개인의 창작물이기 앞서 미술가가 속해 있는 시대의 산물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독일의 표현주의 사조를 꺼내려면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나폴레옹 전쟁(1797-1815)'이란 이름으로 유럽을 휩쓸 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하나의 통일된 독일이 아닌 신성로마제국이란 이름하에 묶여있던 독일은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절망감을 뼈져리게 느껴야 했습니다. 이로인해 하나의 통일 된 국가를 원하는  민족의식이 싹트게 되었고요. 특히 독일의  문학, 미술, 그리고 음악 분야에서 낭만주의란 이름으로 가속도가 붙습니다. 이렇게 힘을 키운 독일이 1870년 드디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일 제국의 탄생을 선포하게 됩니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 전쟁의 여파로 전후의 삶이 많이 바뀌었지요. 당시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해외 식민지 사업에도 늦은 상태였습니다. 산업 혁명에도 말할 것 없이 뒤처졌지요.  그래서 독일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아래 산업화와 군사력 강화만이 자신의 나라가 살 길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당연히 이것을 모를 리 없는 다른 주변 유럽 국가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됩니다. 주변국가들과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이념적 갈등과 빈부의 격차는 일상 곳곳에 불안감이 짙게 스며들어 있었지요. 이런 긴장의 중심인  독일 땅에서 일어난 것이 표현주의 미술입니다.  개별적으로 오스트리아 출신 오스카 코코 슈카와 에곤 실레가 이 운동에 동참하지요.

 

 

 

 

2023.07.27 - [지식&교양] - 50-22. 표현주의, 에곤 실레(Egon Schiele,26)

 

50-22. 표현주의 , 에곤 실레(Egon Schiele,26)

1. 들어가기 본능적 욕망(누드화) 28세 사망 스페인 독감 불안한 영혼의 아이콘 구스타프 클림트와 친구 성과 죽음 1980, 'Excess and Punishment' 독일 제작 영화 1980년 Arts Council of Great Britain(대영예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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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시민사회가 만들어집니다.  경제적으로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산과 소비, 노동과 자본의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었고요.  대도시의 발달과 노동 환경의 변화는 수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예술측면에 주어진 과제들 또한 만만치 않았지요.  당시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급속한 변화와 정치적 갈등, 무력 충돌의 공포를 옴 몸으로 느끼고 있었지요. 게다가 프랑스에서 일어난 인상주의를 비롯해 큐비즘 등과 같은 현대 미술의 여러 혁신적 실험들을 수용해야 했고요. 그것만으로 부족해 자기화해야 한다는 예술적 과제도 또한 함께 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1886-1980)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한 화가입니다. 그는 세 살 때  아버지가 파산하여 행상을 하였고 다섯 살때 형이 죽는 등 가정사로 힘든 시기를 보냅니다. 18살 때 장학금을 받아 빈 미술공예학교에 진학을 합니다. 조교와 '빈 공방'의 일을 하며 미술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지요. 그곳에서 소묘나 석판화 등을 배웠지만 공예학교라 장식미술이 중심이었습니다. 코코슈카는 인체나 인물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그는 자신이 조교로 있는 야간부 학생들을 위해 모델을 불러 학교 방침과  다른 인체 스케치를 같이 공부하면서 독학으로 유화를 그리기도 합니다. 

 

 

 

코코슈카는 1908년 두 가지 사건을 겪으며  화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하나는 클림트 등 '빈 분리파'가 주도하는 '제1차 쿤스트쇼'에 참여하게 된 것이지요. 당시 빈 분리파는 자신들의 전시를 하며 신진작가와 응용미술 등에 문호를 개방합니다. 코코슈카의 재능을 알아본 스승 카를 오토 체슈카는 자신에게 주어진 전시장의 일부를 코코슈카에게 내줍니다. 여기에 코코슈카는 자신의 직접 쓴 희곡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의 삽화들, 자신이 쓰고 삽화를 그린 동화책, <피에타> 포스터 그리고 실내 장식을 위한 소품들을 전시하게 됩니다. 

 

 

 

Pieata, 1908, Poster created for the openair theater of the Kunstschau, depicting Murder, Hope of Women, Stubby Planner

 

 

 

코코슈카가 빈의 전람회에서 쓴 연극 홍보를 위한 <피에타>라는 포스터입니다.  어떠신가요? 그림의 첫 느낌이 , 여성의 강력한 힘이 느껴지시나요? 자극적인 작품이라  눈에 뜨이기는 했지만 그의 전시실은 '공포의 방'이라 불리며 참혹한 평가를 받습니다. 그의 전위적인 작품에 비평가들마저 등을 돌리고요.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빈 미술공예학교에 재학 당시 '빈 분리파'의 수장이었던 구스타프 클림트에 의해 발탁되어 촉망받는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로 부상합니다.  그는 1909년 그를 지지한 근대 건축의 선구자인  아돌프 로스(Adolf Loss,1870-1933)의  주선으로 독일 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한 헤르바르트 발덴(Herwarth Walden)을 만나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코코슈카는 발덴이 발행하는 표현주의 저널 <슈트름(Sturm, 폭풍)>의 그래픽 화가로도 잠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self-portrait of a 'Degenerate Artist, Oska  Kokoschka, Wikioo.org

 

 

그는 당시 아돌프 로스가 소개해 주는  빈의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코코슈카가 그려주는 초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코코슈카는 영혼까지 꿰뚫어 묘사하는 심리적 초상화에 매우 뛰어난 화가였기 때문이지요. 아름답고 우아한 초상화를 기대했 던 고객들이라면  엄청 실망했겠지요.  그런 면에서 오스카 코코슈카는 고객들이 원하는  외향에 치중하는 초상화를 그리기보다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내면을 중시하는 초상화 그리기를 더 선호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적인 묘사를 배제하고 통념적인 요소를 멀리한 채 왜곡된 형상을 구현하는 자신만의 표현양식을 구축해 낸 화가인 셈이지요. 예를 들면 불규칙하고 굴곡이 심한 선, 차갑고 어두운 색채, 그리고 강하고 거친 붓 터치가 그만의  독특한 표현주의 특징입니다.

 

 

 

작가로도 활약한 코코슈카는 인도주의 철학을 표현한 희곡을 몇 번 썼고, 특히 사회의 도덕적 위기와 정치적 불의 를 비판한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 (1907)라는 작품으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학생들을 가르치던 입장이라 코코슈카의 희곡이 사회적 물의를 빚자 학교로부터 해직을 당합니다.

 

 

 

 

이 시기 코코슈카 인생의 가장 유명한 여인 하나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밀 신들러(Emil Schindler)의 딸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에게서 미술수업을 받았고,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Alexander von Zenmlinsky)로부터 작곡을 배웠다고 합니다. 실제 그림도 그리고 가곡집을 내기도 했다고 하니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인재네요.

 

 

 

 

그때 나는 나와 알마의 이인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운명에 거슬러 나를 광란하게 만드는 것은
질투만은 아니었다.
나는 임박해 오는 비운의 숙명을 예감했다.
멜랑콜리가 우리의 엑스터시 위에,
도취와 사랑 위에
자신의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아폴로의 칠현금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코슈카의 자서전 <내 삶>중에서-





<바람의 신부(The Bride of the wind>, 1914, 오스카 코코슈카,스위스 바젤 미술관

 

 

 

 

천재화가 오스카 코코슈카가 사랑했던 여인 알마 말러(Alma Mahler)와의 사랑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당시 작곡가 겸  지휘자로 알려진 천재음악가 구스타프 말러가  그녀의 첫 번째 남편입니다. 20대의 그녀가 40대 노총각이었던 말러와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결혼생활은 말러가 51살에 사망하면서 끝이 납니다. 미망인이었던 그녀는   19세기말 20초 활동했 던  예술가들과의  숱한 염문설이 나기도 합니다. 바우하우스를 창설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도 했으며, 시인이며 소설가였 던 프란츠 베르펠과  세 번째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20대의 젊은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가 미망인이었던 30대의 알마 말러를 만난 것은 두 번째 남편과 재혼하기 전으로 보입니다. 떠오르는 신인 화가  대접을 받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급속도로  연인관계로 발전했지만  연상의 여인 알마 말러는 거칠고 불안한 성격의 젊은 화가 코코슈카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인기 많은 미망인을   연인으로 붙잡아 두기에  젊은 코코슈카의 불안감 또한 컷을 테지요. 그림을 통해 코코슈카가 느꼈을 불안감이 충분히 전달됩니다.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잠을 자고 있는 여인에 비해, 잠 못 이루고 불안해하는 한 남자의 시선에서 그 둘의 앞날이 보이는 듯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작품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녀는 오스카가 그린  ' 바람의 신부(Bridge of the Wind)'의 동일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시대의 예술가, 건축가, 시인, 작곡가 등  뭇남성들에게 뮤즈였으며 '비엔나의 아름다운 꽃'이라 불리울정도로 탁월한 미모와 재능의 소유자였습니다.

 

 

 

 

 

코코슈카의 일련의 작업 과정을 지켜본 표현주의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Georg Trakl, 1887-1914)이  <바람의 여인>이란 제목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독일어 여성 명사'Wkndsbraut'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돌풍을 뜻하기도 하고, 정령이나 정신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리고 야성적이고 격정적인 본성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시인트라클은  세 번째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시인 트라클 역시 4살 손아래 누이동생을 사랑했는데 근친상간의 죄의식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다 27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친구 시인이기도 합니다.  트라클은 코코슈카와 알마의 불완전하고 좌초된 사랑에서 자신과 누이동생과의 비극적 운명을 읽어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누이동생 그레테 역시 우울증에 시달리다 오빠의 사망 소식에 자살하고 맙니다.  <바람의 여인>이든 <바람의 신부>이든 자유로운 영혼을 붙잡기도 어렵고 소유하기는 더 어려웠을 한 예술가의 고민 끝에 나온 작품이 줄타기 사랑을 하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거친 붓 터치와 차고 어두운 색채로 화폭에 담아냅니다. 어두운 밤 거친 폭풍우가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여인은 지친 듯 남자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네요. 남자는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절대로 이 여인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여인의 한쪽 손을 힘주어 잡고 있습니다. 코코슈카의 불안한 마음과 애절한 사랑이 그대로 감지되는 듯합니다. 코코슈카는 일곱 살 연상이었던 알마와 완전한 결합을 원하며 2년 6개월 동안 4백 여통의 연서를 쓰며 구애를 하였지만 알마는 끝내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 않습니다.  알마를 불같이 사랑했던 코코슈카는 알마와 똑같은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 유명 디자이너 옷을 입히기도 하고 오페라 구경을 할 때도 좌석을 구해 데리고 다녔다고 하니 이 정도면 집착의 수준까지 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상해 보세요. 사람 같은 인형을 옆에 놓고 살았으니 집착이 지나쳐 오싹한 느낌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변분들이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다행히 더 이상 자신의 곁에 알마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녀의 대한 마음을 접습니다.

 

 

 

 

 

 

이 작품으로 코코슈카는 알마 말러에게 실연은 당했지만 국제적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절망에 빠졌던 코코슈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기병에 자원입대합니다. 실연당한 마음을 달래려 지원한 군대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해  몸과 마음이 부서진 채 요양을 해야 했지요. 부상에서 회복한 그는 드레스덴 아카데미 교수가 되어 후학을 지도하게 됩니다. 1931년 나치가 집권하게 되고 대부분의 표현주의 예술가 그룹처럼 코코슈카 역시  퇴폐적인 예술가로 찍혀 전시는 물론 작품 활동까지 제한당합니다. 독재정권의 탄압이 계속되자 그는 프라하로 이주했다가 영국으로 망명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 던 1941년  올다 팔코프스카라는 여인과  결혼합니다.  이 시기 코코스카는 주요 도시의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리거나 나치에 항거하는 정치적 이념이 담긴 포스트를 제작하며 작품 활동을 계속해 이어 나갑니다.

 

 

 

 

 

<The Red Egg>, 1940-1941, National Gallery in Prague, Arthive

 

 

 

 

90년이 넘는 세월을 살다 간 코코슈카는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며 전쟁과 정치에 대한 의식을 형성합니다. 말년까지 끊임없이 전쟁의 비인간적인 면과 잔학행위를 고발하는 우의화를 그리면서 말입니다.

 

 

 

 

 

3. 나가기

코코슈카는 처음에 클림트와 빈 분리파의 영향을 받은 장식적인 화풍으로 출발하지만  비극, 죽음, 성 등의 주제를 깊게 다루기 시작합니다. 후기로 갈수록  그는 내면의 시선까지 담아내는 것 같은 풍경화와 인물화도 그려냅니다. 강한 빛의 사용과 붓터치가 무척 인상적이지요. 사라질 듯 여러 색채를 사용한 코코슈카의 그림에서는 연인과의 사랑과 삶의 무상함, 전쟁에의 비판 등 다양한 주제의식이 드러납니다. 이제 오스트리아를 떠올릴 때  코코슈카, 클림트, 그리고 에곤 실레라는 만능 천재 예술가 3인방을  '표현주의'라는 이름으로 함께 기억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출처: 위키 피디아, 구글아트 앤 컬처, 위키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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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인생에서 두 가지의 크나큰 특권을 누렸다.
그건 바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와 오드리 헵번이다.




존 갈리아노(Janh Galliano),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리카르도 티시, 매튜 윌리엄스(Matthew Williams) 등의 디자이너들이 차례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역임한 곳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힌트가 되었을까요? 프랑스 최고의 미술대학으로 손꼽히며 순수 미술 분야에서 세계 최상위권 대학으로 평가받는 파리 보자르 대학 출신입니다. 키가 190cm, 미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외모도 귀공자스타일의 금수저 엄친아입니다.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는 1927년 프랑스 북서부 도시 보베(Beauvais)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술적이고 상류 부르주아적인 가풍 속에서 자란 지방시는 2세 때 아버지가 인플루엔자로 세상을 떠난 게 됩니다. 그 후 그는 어머니, 형 장 클로드, 외조부모와 함께 파리 북쪽의 보베에 정착하게 되지요. 당시 지방시의 외조부는 예술가로 시작해 직물 공장을 책임지던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도 남다른 패션 감각을 지닌 분이셨고  이런 영향으로 그는 8세 때 이미 어머니의 패션 잡지를 즐겨 보았다고 하네요. <보그> 등 잡지 속 드레스를 그리거나 만들어 인형에게 입히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그려진 그림 가위질 하며 오리기도 힘들던데 말이죠. 10세 때인 1937년 파리만국박람회 패션관에 방문한 뒤 고급 맞춤복에 매료됩니다. 가족들은 법학을 공부한 그가 고위 전문직 종사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공증인 사무실 대신 오트 쿠튀르(Haute curturie, 고급 의상점)을 선택합니다.






지방시가 처음 일한 곳은 디자이너 자크 파트(Jacques Fath)의 의상실입니다. 그 이전 남성복으로 유명한 크로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obal Balenciaga)를 찾아가지만 "감각은 마음에 들지만 경력이 없어서 일할 수 없다."며 거절을 당하지요. 이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자크 파트, 스키아 파렐리(Schiaparelli) 아래서 일하며 크리스천 디올(Christian Dior)과 피에르 발망(Pierre Balmain)을 만나 영향을 주고받게 되지요. 다양한 브랜드에서 경력을 쌓은 뒤 마침내 25세의 자신의 브랜드 GIVENCY를 설립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선망의 대상이던 발렌시아가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주변인들에게 조언하고, 가르쳐주기를 좋아하는 발렌시아가와  좋은 만남을 이어가게 됩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지방시는 발렌시아가를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다고 합니다.  얼마나 좋아했으면 미국에서의 만남 이후 GIVENCY 살롱을 발렌시아가의 살롱 맞은편으로 옮겼다고 하네요. 대단하죠! 발렌시아가 역시 지방시를 가족처럼 받아주었다고 합니다. 실력 출중한 잘 생긴 청년이 자신을 멘토처럼 여기고 저렇게 정성을 보이는데 이쁘지 않을 턱이 없지요. 고수가 고수를 알아보듯이 서로를 알아본 모양입니다. 발렌시아가 역시  자신의 스케치까지 지방시에게 공유할 정도로 말이죠. 그런 그들 사이에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었어요.  1968년 발렌시아가가 자신의 살롱 문을 닫을 때 단골 고객들에게 지방시의 고객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는 점이죠. 당시 디자이너들끼리 경쟁이 심하고 훨씬 폐쇄적이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지방시와 발렌시아가가 보여준 우정은 신선하고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당신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나를 꿈꾸게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6살의 이브 생 로랑이 지방시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입니다. 이 편지를 받고 지방시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자신이 젊은 시절 발렌시아가를 따르고 존경했던 그 마음을 지방시 역시 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방시가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ent)을 만나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며 발렌시아가에게 자신이 받았던 변함없는 유산을 그에게도 전달해 줍니다.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개인적으로 <로마의 휴일>을 통해 그녀를 만났습니다. 스페니쉬 계단에서 젤라토 먹던 그녀를 흉내 내려 엄청 난 인파들이 그곳을 방문하기도 했지요. 몇 년 전 큰 아이와 함께 그 장소를 방문해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 장면을 따라 해 보며 '지옥의 문' 앞에 손도 넣어보는 시늉을 해보기도 하면서 말이죠. 당시 섹시 심벌로 유명한 마릴런 먼로(Marilyn Monroe)와 엘리자벹스 테일러 등의 화려한 이미지의 스타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런  할리우드에 키 크고 마른 이미지의 스스럼없이 자전거를 타고  검소한 생활 습관을 보여주는 기존 배우와는 전혀 다른 오드리 헵번이 나타납니다. 유명세를 타기 전이라  오드리 헵번을 알아보는 디자이너들은 거의 없어서 의상 협찬받기가 어려운 사정이었지요. 지방시 역시 오드리 헵번을 당시 유명 배우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으로 착각하고 그녀가 찾아왔을 때 실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이 지난 시즌 드레스라도 보여주기를 요구하고 요모조모 옷 고르는 센스를 지켜보던 지방시는 생각을 달리하고 옷을 보여줬고 그중 하나를 오드리 헵번이 고르며 <사브리나>에 입고 나와 히트를 시키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오드리 헵번은 영화를 계약할 때마다 자신이 지방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이런 고집 덕분에 지방시는 최초의 영화 의상 협찬 브랜드로 역사에 남게 되었지요. 

 

 

 

 

 

Hubert de Givenchy

 

 

우아함의 비밀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

 

 

지방시는 당시 식사도 굶으며 코르셋을 차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 모래시계 같은 몸매를 과시하던 시대적 배경에 반기를 듭니다. 그는 몸이 옷 모양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옷이 몸의 개성을 따라야 한다는 철학 아래 디자인을 선보이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은 비비안 리가 흑인 하녀에게 코르셋을 잡아당기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보기만 해도 숨이 콱 막혀 그 시대에 안 태어 난 걸 다행으로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지방시는 그런 여성의 허리를 해방시켜 준 디자이너로 기억됩니다.

 

 

 

 

 

사랑받는 배우였지만 개인사는 평탄하지 못했던 오드리 헵번 곁에 항상 조언하고 응원을 해준 이가 지방시입니다.  두 번의 결혼, 아프리카 봉사, 그리고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당시 LA 병원에 있던 그녀를 영국 그녀의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전용기에 각종 의료 장비를 달고 의료진과 함께  특수 작전을 펼친 이도 지방시였고요.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순간에도 지방시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오열했고, 장례식 때는 그녀의 관을 직접 운구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우정이 어떤 빛깔이었든 남녀 간의 사랑 이상의 숭고함이 느껴집니다. 

 

 

 

 

그는 프랑스 문화의 위대한 후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프렌치 테이스트의 외교관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물과 장소에 매우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죠.

 

 

 

 

 그의 사망 이후 그의 컬렉션은 파리의 한 공연 예술 극장에서 경매에 붙여지는 데  1110억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판매액을 기록합니다. 사후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며 그는 프랑스 문화에 커다란 유산을  남깁니다.  위베르 드 지방시의 패션 철학은 여러 디자이너들의 손을 거치며 지금도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습니다. 재해석된 리본 디테일 드레스로, 짙은 스모키 화장과 레더 아이템들로, 도발적이고 섹슈얼한 표현으로, 미국 특유의 스트릿 문화와 지방시 고유의 우아함을 믹스매치한 방식으로, 과거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모습으로 지금도 여전히 진화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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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네덜란드출신

<Piet & Mondrian> : 영화감독 라스 크라우메(Lars Kraume)의 단편영화

대기만성   

더스테일(De Stijl, 양식) 그룹, 잡지창간

신조형주의 

차가운 추상(수직, 수평, 삼원색, 무채색)

제2의 전성기(New York)

재즈

 

2. 생애

 

 

 

자주 이용하던 은행이 합병을 하며 기존 카드대신 새로운 카드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기존의 회색톤으로 다소 밋밋하고 딱딱한 인상을 주던 평범한 카드였다. '새 카드라고 뭐 다르겠어.'라는 내 생각과 다르게 몬드리안의 작품이 손에 쥘 수 있는 카드사이즈로 변형이 되어 내게 들어왔다. 빨강,파랑, 노랑의 삼원색과 검정 선 그리고 흰색 배경이 은행 로고와 함께  박혀 있었다. 단지 카드디자인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익숙한  예술작품 하나가 새롭게 시작하는 은행의 신뢰도를 무한대로 올려놓는  순간이었다. 누구의 센스였을까? 아마 예술을 좀 아는 이의 기분 좋은 배려로 고객들의  은행 이용 횟수가 늘지 않았을 까싶다.

 

 

 

 

 

나는 최대한의 자각으로 일반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평평한 표면에 선과 색상 조합을 구성합니다.
나는 사물의 기초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것을 추상화하고 싶습니다.






 

<코스튬 내셔녈>,2011, 가을, 겨울 컬렉션

 

 

 

 

 

1966년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에 의해 몬드리안룩(Mondrian look)이 유행한 적이 있다. 패션은 돌고 돌아 2011년 <코스튬 내셔널>이 발표한 가을, 겨울 컬렉션에 몬드리안의 작품을 연상하게 하는 간결하고 세련된 룩이 새롭게 해석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몬드리안은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프랑스와  영국을 거쳐 미국 뉴욕으로 망명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68세의 몬드리안에게  뉴욕이란 도시는 보수적이고 경직된 유럽사회와 확연히 비교될 정도로 활기찬 젊음의 도시였다. 마치 그가 생전에 추구하던 유토피아를  가장 잘 표현한 도시 같았다. 게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에 걸쳐 미국에서 대중화된 재즈음악을 좋아해 고령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할렘에서 흑인들의 생생한 재즈연주를 즐겨 듣고 음반을 사 모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첫 시작은   차분한 칼러로 풍경을 묘사한 자연주의적인 스타일에서 시작한다. 1872년 네덜란드에서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면서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해 어려서부터 그림을 접할 기회가 비교적 쉬웠다. 19세기말, 네덜란드는 헤이그 파의 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의 삼촌인 헤이그파 화가 프리츠 몬드리안(Fritz Mondrian)의 영향을 받으면서 주제나 제목, 빛과 공간 처리와 같은 구체적 방법에 이르기까지 헤이그파적 경향을 띈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암스테르담 미술아카데미를 다니며 20대에 그린 초기 작품들은  차분한  색조의 풍경화와 정물화로 지극히 평범한 수준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경력을 시작했고 주변 가까이 보이는 들판, 풍차, 강물 등 자연의 모습을 반복해서 담으며 네덜란드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화풍을 시도했다.  

 

 

 

 

 

Mill in sunlight, 1908

 

 

 

 

 

1905년에서 1910년 사이 몬드리안은 다양한 스타일의 회화를 시도해 보고 화풍의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터치가 강한 점묘주의와 생생한 색감의 야수파에 영향을 받아 해 질 녘 풍경 속에 드러난 풍차는 마치 불길에 휩싸여 흘러내리는 것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당시 이 작품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중앙에 수직, 수평선을 교차시켜 형식상의 구조를 드러냈고 색채의 단순한 대조를 통해 긴장감을 증대시키려 한 몬드리안의 의도를 잘 표현한  구성 작품 중 하나다. 몬드리안이  풍경의 여러 요소 중에서 형태의 기본 틀을 단순화시키고 풍차, 나무, 들판,  꽃이 중심이 되기 시작한 것은  상징주의를 접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야수주의의 영향으로  화려한 원색의 색감을 과감히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나의 회화에서 최초의 요소는 색채였다.
나는 자연색채(natural color)를 버리고
순수 색채(pure color)를 택했다.
나는 자연 색채를 캔버스에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회화가 본질적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다.

 

 

 

 

1911년 암스테르담에서 첫 번째 '현대예술그룹'전시회가 열립니다. 이 전시에서 몬드리안은 조르주 브라크와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아 파리로 갈 결심을 하고 두 화가의 입체주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파리로 이주하고 자연의 영적 본질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물리적 영역을 결합시키고자 꽃, 나무, 인간의 형태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고요.

 

 

 

 

몬드리안은 파리에서 접한 입체주의에서 영감을 얻어  덜 빛나는 색채로 되돌아갑니다. 회색과 갈색 계열의 색조를 바탕으로 선 자체가 점점 더 중요해졌지요. 추상화 탐구를 계속 이어갔는데, 나무 묘사의 변형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러한 이미지  변형의 경험을 통해 몬드리안은 형상과 완전히 멀어질 수 있게 됩니다. 

 

 

 

 

 

Blossoming apple tree, Wikimedia Commons,1912, Kunstmuseum DenHaag, The Hague,The Netherlands, wikimedia commons

 

 

 

 

몬드리안은  네덜란드에서도 같은 이념을 공유한 전위 예술가들과 함께  그룹을 만들어 '더 스틸(De Stijl)' 저널을 출판하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의 필수 요소를 기반으로 삶의 모든 측면을 재구성하기 위해 전통을 파괴하려는 그룹의 야심에 공식적으로 동조합니다.

 

 

 

1920년대 초반 몬드리안은 이론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회화 표현 방식을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로 천명하고 검은색과 흰색의 직선 배열과 파랑, 빨강, 노랑의 3 원색으로 구성된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추상화를 예술가로서 추구했던 절대적 진실과 미에 접근하는 과정으로 보았지요. 그의  다양한 화풍은 이미지의 본질과 통일성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에 그 근원을 둡니다. 

 

 

 

Composition with red, yellow and blue, 1935-1942

 

 

 

 

몬드리안은 우주의 근원과 진실을 표현하고자  형태를 더 단순화하고 기하학적인 수평과 수직의 선만을 남깁니다. 그에게 수직선의 의미는  생기를 표현하는 것이고,  수평선은 평온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네요. 색상은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과 흰색의 배경 그리고 검은색 선만을 사용하여  정제된 자신만의 추상화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미술의 3대 기본 요소인 선, 면, 그리고 색만으로 말이지요. 1930년 이후 검은 수직선과 수평선이 화면 전체에 꽉 찬 작품을 제작했고 이후로는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해지자 검은 선이 많이 보이는 연작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계산이 아닌 자각으로 구성된 수평선과 수직선을 통해
강한 직관에 이끌려
조화와 리듬을 가져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Victory Boogie Woogie, 1942-1944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듯한 제목의 위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은 몬드리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수직선과 수평선, 그리고 색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회화 세계를 구축한 몬드리안은 다시 고향인 네덜란드나 오랜 시간 활동한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1944년 미국에서 폐렴으로 72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3. 나가기

 

몬드리안은 19세기말 풍경화가에서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중심에 서 있던 작가입니다. 더불어 20세기 미술뿐만 아니라 디자인, 건축, 패션, 대중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이기도 하고요. 초기 그림과 말년의 그림을 비교하면 전혀 새로운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전 생애의 작품들이 일관성 있게 구상에서 추상으로 진화했음을 알 수 있지요. 살아생전 사실주의 그림 팔아 근근이 먹고살던 그였지만 결코 한 단계에 머물지 않고 회화의 변화무쌍한 가능성을 실현시킨 독보적인 화가입니다. 20세기 현대 사회에서 가장 폭넓게 활용되고 실생활에 변화를 가져온 화가 이기도 하고요. 이제 네덜란드 하면 렘브란트, 고흐 말고 몬드리안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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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J'adore" 향수

뉴룩(New Look),1947

오트 쿠뒤르( 고급 맞춤 장식의복)

액세서리(스카프, 핸드백, 모자)

고 다이애나비

럭셔리 브랜드의 상징

레지오 도뇌르 훈장

 

 

2. 생애

 

개인적으로 디올이라는 명품 브랜드명보다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고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패션 소품으로 들고 있던 가방을 통해 시선을 사로잡은  브랜드다. 남다른 패션을 소화해 내 어딜 가나 환영을 받았던 그녀의 이미지와 떼려야
뗄 수 없으니 디올브랜드는  인플런서 덕을 톡톡히 본 브랜드라는 생각이 든다. 왕실과 브랜드를 매치시켰으니 말이다.

 

 

 

 

 

짧은 쇼컷, 클래식한 검정 이브닝 드에스에 심플한 검정 디올 가방이 어떻게 그녀 손에 들리게 되었을까? 오래전 파리에서 레이디 디올을 들고 있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목격됩니다. 세잔의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프랑스 영부인이 다이애나 비에게 이 상징적인 가방을 선물로 주었다고 하네요. 이후로  그녀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레이디 디올’ 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지요. 스트랩에서 떨어지는 메탈릭 장식은 크리스찬 디올이 사랑했던 럭키 참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가방의 시그니처이기도 한 퀼팅 패턴은 나폴레옹 3세의 의자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레이디 디올 백은 지금도 피렌체에 있는 디올 아틀리에에서  긴 세월 동안 더욱더 정교한 과정을 거치며 장인들의 손에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디올만의 우아함과  상징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말이죠.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Fashion fades, only style remains.)

 

 

 

 

 

 

패크리스티앙 디오르는 1905년 프랑스의 바닷가 마을 노르망디 그랑빌에서 태어났다. 알렉상드르 루이스 모리스 디오르(Alexandre Louis Maurice Dior)의 다섯 자녀 중 둘째로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는 항상 우아하고 세련되게 치장한 어머니의 모습을 여성의 이상으로 보았고 이후에도 그의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남자아이가 첫 번째 접하는 여성이 엄마이다 보니 남자아이만 둘 인 내 뒷 꼭지가 디올의 사례를 접하며 뜨끔하기도 한다. 좋은 롤모델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물음표가 여러 개 떠다니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가 만든 최초의 향수 '미스디오르'도 사실은 자신의 누이를 회상하며 만든 것이라 한다. 부모님이 바라던 대로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에콜 리브르 데 시앙스 폴리테크( the Ecole des Sciences Polotiques)에서  공부하고 외교관을 지망했지만 건축과 예술에 더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후 학교를 떠나 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으로  미술관 자크 봉장(Jacques Bonjean)을 열고 조르즈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장 콕도, 막스 자콥 등의 작품을 다루기 시작한다.

 

 

 

1930년 공황이 찾아와 집이 파산하고 이듬해 어머니와 형이 세상을 떠난다. 갤러리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친구 장 오젠느(Jean Ozenne)에게  패션 드로잉을 배우고 막스 케나(Max Kenna)에겐 색칠하는 법을 배워 생활의 방편으로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에 모자와 드레스의 크로키를 그려서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로버트 피제(Robert Piquet)의 양장점에서 디자이너로 일을 했다.  제 2차 세계대전에 종군하면서 한동안 디자인을 하지 않고, 제대 후 프로방스의 칼리앙(Callian)에서 농장을 운영하기도 한다. 전쟁 중 독일은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스 영화를 규제하였지만 시대극은 장려했기 때문에 디오르는 이러한 영화의 의상을 디자인하게 된다. 그 뒤로 루시앙 르롱(Lucien Lelong)의 쿠튀르에서 피에르 발맹와 함께 모델리스트로서 일을 하게 된다. 이후 독립해 섬유 회사 Marcel Noussac 의 지원을 받아 '메종 크리스티앙 디오르(La Maison Christian Dior)'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한 가지 유형의 스타일로 사람들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은 자신만의 아름다움과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You should never restrict people to one type of style.
Each person has their own beauty and personality.)

 

 

 

 

 1947년 첫 콜렉션에서 선보인 뉴 룩(New Look)으로 제1급 디자이너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매 시즌 튤립 라인, H 라인, A라인, 애로우 라인 등 새로운 디자인 라인을 선보이며 전 세계 패션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48년 지그재그 라인

1950년 버티칼 라인(시스 실루엣, Shearh sillhourtte)

1951년 오벌 라인(oval line)

1952년 스쁠라인(souple line)

1953년 툴립 라인(tulip line)

1954년 뮤게 라인( muguet line)

1954년 H라인

1955년 A라인

1956년 애로우 라인(arrow line)

1957년 리버티 라인(liberty line),

             스핀들 라인(spindle line), 디오르의 마지막 라인

 

 

많이 들어 본 패션용어들을 그의 아이디어를 통해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다. 

또한 상품의 범주을 확대시킨 글로벌 브랜드 크리스티앙 디오르 S.A. 설립을 통해 전후 패션 산업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도 한다.

 

 

 

 

 

 

1947년 2월 12일 자신의 첫 컬렉션을 열었고 이때 선보인 디자인이 '뉴룩'으로 불리면서 세간의 관심을 받아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New Look은 본래 라인 이름은 코롤라(corolla)지만 S/S 컬렉션에서 선보인 작품을 보고 하파스 바자(Harper's Bazaar)의 편집장 카멜 스노우(Carmel Snow)가 

 

"이것은 확실히 뉴룩이군요.

(Your dersses have such a new look.")

 

라 말한 이후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같은해 패션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리는 니먼마커스상(Neiman Marcus Award)을 수상, 세계 각지에 지사를 설립하고 사업을 확장했다. 니먼 마커스 패션 어워드(Neiman Marcus Fashion Award)은 세계 최고 명예로 인정받는 패션상 중의 하나이다. 1938년 니만(Neiman, C.M)과 마커스(Marcus, S.)가 제정한 최고의 디자이너에게 수여하는 상, 매년 국적을 불문하고 수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dior.com

 

 

 

 

뉴 룩은 여성미를 강조한 디자인이다. 디오르는 형태와 실루엣을 만드는 것에 정통했다. 그는 스스로

 

"I have designed flower women."

 

라고 언급하며 곡선미를 강조하고 관능적인 실루엣으로 여성의 몸에 재구성을 시도했다. 이러한 실루엣에 맞추기 위해 힙의 주름장시, 코르셋, 패티코트 등을 입었고 몸에 잘 맞도록 케임브릭(cambric)과 타 피타(taffeta)로 드레스를 만들었다.

동글고 완만한 어깨, 허리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게 퍼지는 풍성한 플레어 스커트, 가늘게 조인 허리로 전체적으로 8자를 이루는 여성스러움과 우아함을 극대화시킨 실루엣이다.  비교적 길이가 길고 드레스가 플레어가 많았기 때문에 삼각형을 이루는 피라미드 스타일이었고 소매도 여성스러운 라글란 소매 (raglan sleeve), 돌만 소매(dolman sleeve), 목부분도 윙 칼라(wing collar)등을 사용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다. 뉴룩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 사치스럽다는 게 단점으로 작용했다.디오르는 전후의 참담함과 우울함을 아름다웠던 과거와 안락함, 부드러운 과거로 복원하고자 했으며, 일상에서 벗어난 환상적인 신화에 입각해 화려함과 귀족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했다. 당시 전쟁이 계속되면서 궁핍한 생활에 시달린 유럽인들은 여성성을 강조하고 비싼 천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뉴룩을 지나친 사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옷감을 절약하는 형태로 밀리터리 룩이 유행했었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억눌려있던 여성미에 대한 욕망이 한 번에 분출되면서 뉴 룩은 패션계의 새 바람을 불러왔다. 전쟁의 영향을 받은 1940년대 패션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가 대성공을 이룬 셈이다.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디올은 이브닝드레스에 42마를, 주간용(daytime) 옷 한 벌에 20마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지탄을 받기도 했다.  특히 영국 왕실의 부정적 반응이 유명했다. 영국은 당시 의복 배급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 왕 조지 6세는 두 딸(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에게 뉴룩 착용을 아예 금지시켰다고 한다.

또한 미국에서는 짧은 치마를 선호하는 여성들이 ‘무릎 바로 밑 클럽(Little-Below-the Knee club)’을 결성해 디올의 스타일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뉴룩의 인기를 완전히 꺾지는 못했다고한다. 영국 왕실의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디올은 왕족만을 위한 비공개 패션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년대 전 세계적인 규모의 왕성한 활동을 하는 패션계를 이끄는 디자이너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된다.

 

 

 

 

 

 

레지오도뇌르 훈장, 위키피디아

1956년에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오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나폴레옹이 1802년에 제정한 훈장으로서 프랑스 훈장 중 가장 명예로운 것으로

한국어로 명예 군단 훈장으로 기억하면 될 것 같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루이 14세가 만든

생루이 훈장을 수정하여 만든 훈장으로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발전에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이다.

외국인 중에 독일의 문호 괴테도 끼어있다.

 

 

 

 

 

 

 

 

 

평범한 것을 평범하게 입는 것보다는
조금 더 특별한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Instead of choosing something ordinary to wear,
go for something a little more special.)



 

1957년 10월 23일, 이탈리아 투스카니(Tuscany)의 스파 몬테카티니(Montecatini)에서 5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타임>의 사망 기사에서는 카드 게임을 하던 중에 심장 마비로 죽은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파리에서 열린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장례식에 2,500명 이상의 인원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후 메종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여러 명의 수석 디자이너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1957-1960: 이브 생 로랑(Yves Henri Donat Mathieu Saint Laurent, 8,1,1936-6,1,2008)

1961-1989:  마크 보한(Marc Bohan)

1989-1996: 지안 프랑코 페레(Gianfranco Ferre)

1996-2011: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2012- 현재 : 라프 시몬스(Raf Simons)

 

 

3. 나가기

 

메종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생긴 지  100년째인 2005년,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생가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수집해 온 디오르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들과 보석, 패션, 사진, 회화 등 다양한 작품이 연대순으로 전시되었다고 한다.  디올의 창조적인 디자인과 미적 감각은 모던한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패션 산업에 혁명을 일으키기도 했다. 남성의 입장에서 그가 선보인 "신비로운 여성성"을 강조한 뉴룩으로 인기 몰이를 하고 그의 철학은 수석 디자이너들의 손끝에서 새롭게 탄생되고 있다. 그가 추구했던 신비로운 매력과 품격은 패션계의 거장으로서 존경과 찬사를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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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바느질하는 노동자

<No.5>, <No.22>

샤넬 보이백

영화 <Coco Before Chanel>,2009

나치 스파이 활동과 말년

 

2. 생애

 

 

파리의 올랑쥴리 미술관에 전시 중인 초상화가 하나 있다. 당시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이 그린 것으로 극작가 장콕도, 화가 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현할 정도로 사교계의 거물이 된 한 여인이 그 주인공이다.

바로 코코 샤넬(Coco Chanel)이다.

 

 

 

 

영화 <Coco Before Chanel>,2009

 

 

 

 

2009년에 개봉된 <Coco Before Chanel>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Coco Chanel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소녀 Gabrielle Chanel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고아원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재능을 발견한 Gabrielle은 노래와 춤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중 우연한 사건으로 부유한 상류층과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과 돈, 그리고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끊임없는 갈등과 시련을 겪으며, 그녀는 자신만의 패션 스타일을 발전시키며 Chanel 브랜드의 성공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흔히 접하는 샤넬의 이미지는 진주 목걸이와 고급스러움,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가 다소 냉소적인 그녀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예비 신부님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예물 목록에도 자주 등장하는 브랜드이고요. 요즘 재테크의 수단으로 많이 쓰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녀의 삶과 철학을 알고 물건을 사고 소유하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남서부의 오벨뉴 지방의 소뮈르에서 태어납니다. 12세에 모친이 사망하는 바람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바람둥이 아버지에게 버려져 보육원과 수도원을 전전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너무 일찍 '돈이 최고다.'라는 사회의 룰을 알아버리게 됩니다. 수도원을 도망쳐 친구와 함께 도시로 올라와 살기 시작하고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코코"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지요. 시골 마을인 물랑에서 바느질하는 노동자로 고아원을 나온 샤넬은 당시 그녀를 후원한 한 장교를 만나게 됩니다. 가수를 지망하면서 카바레에서 노래를 잠시 부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카바레(Cabaret: 무도장)하면 워낙 한국 미디어 매체를 통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어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시 카바레는 음악, 노래, 춤, 암송 또는 드라마를 특징으로 하는 연극 엔터테인먼트의 한 형태였다고 하네요. 공연장이 펍, 카지노, 호텔, 레스토랑 또는 공연 무대가 있는 나이트클럽 같은 장소로 보면 쉬울 것 같네요. 종종 식사하거나 술을 마시는 청중은 일반적으로 춤을 추지 않고 테이블에 안지만 사회자나 배우들에 의해 종종 성인 청중을 대상으로 지하적인 성격을 띤 쇼를 보여주었다고 해요. 미국에서 스트립쇼, 풍자극, 또는 피아니스트와 함께하는 솔로 보컬리스트뿐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장소가 당시 카바레 문화였나 봅니다.

 

 

 

 

에티엔 발상의 후원으로 마르젤브 거리 160번지에 모자가게를 개업합니다. 아이러니하게 첫 모자의 손님으로  발상의 여러 여자친구중 한 사람이  써서 큰 히트를 칩니다. 이후 발상과 헤어지고 난 후 그의 소개로 보이카펠을 만나 평생 연인으로 지냅니다. 그이 이름을 따서 만든 '샤넬 보이백'이 있고요. 샤넬의 개업자금은 카펠의 후원을 받았고 그녀가 만든 모자가 잘 팔리자 샤넬은 복장 사업을 시작합니다.  보이카펠은 큰 상선 운영을 하는 부잣집 도련님 그리고 다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이카펠이 다이애나 쿠퍼와의 정식결혼을 발표하자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차 사고로 그를 잃을 때까지 그와의 관계를 지속한 걸 보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인가 봅니다. 그를 잃고 미치도록 일에 몰두한 걸 보면 말이죠.

 

 

 

 

 

 

 

1913년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샤넬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인 1915년 <메종 드 꾸뛰르>를 오픈합니다. 컬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세기의 연인이 된 먼로의 향수, 한국경제

 

 

 

능력있고 매력적인 그녀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 공작, 영국왕이 되는 에드워드 8세까지 그녀를 곁에 두고 싶어 했으니 말입니다. 이후로 파블로비치 대공으로부터 에르네스트 조향사를 소개받은 것이 샤넬 인생의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상류층 여성은 장미나 바이올렛 등 한 가지 꽃향기가 나는 향수를 즐겨 사용했다고 합니다. 샤넬은 이런 인공적인 향기를 싫어해 전형적인 향수의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향수의 룰을 깨고 80개가 넘는 다양한 향류를 섞은 향수를 제조하는 데 성공합니다. 샤넬에게 여러 개의 향수 샘플을 가져와 테스트를 했는데 샤넬이 이 중 다섯 번째 샘플을 골랐다고 해서 넘버 5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넘버 5는 우아한 꽃 비누 향이 나는 향수로 이름이 나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여 대성공을 거둡니다.

 

 

 

상류층이 많이 다니는  프랑스 파리의 샤넬 매장에 넘버5 향수를 뿌리고, 그의 상류층 친구들에게 향수를 건네는 등 자연스럽게 향기를 접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씁니다. 대중보다 자신의 VIP 고객을 대상으로 영업을 고집합니다. 입소문을 타고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하면서 "잠자리에 들기 전 샤넬 넘버 5 향수 몇 방울만 몸에 걸친다"라고 말한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가수 마릴린 먼로의 언급으로 넘버 5는 향수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녀는  20세기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이기도 하고요. 케네디 대통령과의 불륜설도 있었고, 헐리우드 섹스 심볼(Sex Symbol)로 불리기도 했지요.  화려한 이미지의 페르소나를 지녔지만 동시에 불운한 자기파멸적 사생활로 동정을 함께 얻기도 합니다. 또한, 젊은 나이에 의문을 남기며 사망하면서 많은 뒷 이야기를 낳았고요. 금발의 미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고 앤디 워홀의 실크 스크린 작품으로 여러 개가 복제되어 전시되기도 했지요.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만난 샤넬은 공작의 보석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주얼리를 발표합니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하지요. 기업가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하고 양장 전문점도 오픈합니다.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해 노동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 충격으로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 사업을 접기로 해 15년간 패션계를 떠나게 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1940년에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패전국 프랑스에선 친독계열의 비시 괴뢰정부가 들어섭니다. 당시 프랑스인들 중에는 독일군에 대항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애인관계로 지내며 그의 비호아래 자신의 사업체를 지켜냅니다. 나치의 스파이 노릇도 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비판과 함께 고국을 탈출해 애인과 함께 수년간 스위스의 로잔에서 망명생활을 보내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치에 혼을 팔아넘긴 매국노'라는 혐오감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1954년 스위스 망명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방도므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릿츠 호텔에 거주하면서 패션계로의 복귀를 꾀합니다. 당시 샤넬에 대한 혐오감이 팽배해 있던  유럽에서 '매국노'라는 경멸과 나치독일에 대한 혐오감으로 10 연년 간 샤넬의 입지를 약해진 상태였지요. 하지만 미국에서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맞물려 그녀의 패션이 인기를 끌며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955년 샤넬은 울 소재의 새로운 샤넬 슈트를 발표했는데 미국에서 ' 과거 50여년간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 디자이너'라 하여 모드 오스카 상을 수여하기도 합니다. 거주하던 파리의 릿츠 호텔에서 컬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88세로 사망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유해는 조국 프랑스를 배신한 행위로 프랑스 고급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고 망명생활을 했던 스위스의 로잔에 매장됩니다. 개인적으로 한 인물의 평가는 입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돈이면 모두 해결돼.'라는 사회적 현실을 일찍 깨달아 버렸기에 오롯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누군가를 찾아 욕망의 사다리를 올랐던 그녀를 <위대한 유산>의 작가 피츠 제럴드라면 어떻게 표현했을 까요? 사랑하는 조국의 품에 묻히지 못하고 이방의 땅에 묻힌 그녀를 보며 씁쓸한 생각을 감출 수 없네요.

 

 

 

I hope you live a life that
you're proud of.
If you find that you are not,
I hope you have the strength to start over.
(나는 네가 자랑스러운 삶을 살길 바란다.
자기가 자랑스럽지 못하다면,
다시 시작할 힘이 있기를 바라는 거다.)

-피츠 제럴드(F.Scott Fitzgerald)의 명언 중-

 

3. 나가기

 

 

 

그녀는 20세기 초에 전통적인 패션 규범을 깨고 여성들에게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제공하는 스타일을 창조했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패션은 불편하고 구조적인 제약이 많았지만, 코코 샤넬은 캐주얼하고 유연한 디자인을 선보여 이를 극복했지요. 여성들에게 아름답고 실용적인 옷을 제공하여 영원한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또한 복잡한 장신구와 장식보다는 심플하고 세련된 악세사리를 강조해 실용적이면서도 우아한 스타일을 강조하지요. 그녀의 대표적인 브랜드 로고로 쓰인 "CC"의 이니셜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아이콘적인 심벌로 여겨지며, 그녀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패션을 단순히 옷 입는 것으로 볼 수 없게 하였고, 자신의 개성과 스타일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의 패션을 강조하여 여성들에게 자신감과 독립심을 심어주었고요. 그녀의 브랜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그녀의 감각이 여전히 살아 스며들고 있지요. 그녀의 울퉁불퉁한 인생사를 나무라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부디 그녀가 옷에 대해 가졌던 진심을 제대로 알고, 입고, 메고, 뿌리고 그리고 걸쳐야 진정한 "CC"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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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공원 산책길에서 지인 부부를 만났다. 손주나 손녀를 태우고 오셨구나 싶어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데 유모차 안에 나이 먹은 치와와 한 마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물으니 나이가 들어 눈도 안 보여 자꾸 부딪히고 당뇨로 인슐린 주사까지 맞아 어쩔 수 없이 유모차에 태워 산책을 나왔다고 한다. 개를 키우고 있지 않았다면, '참, 요란스럽다. 유모차에 사람이 아닌 개를 태워 오다니!' 하며 맞땅치 않게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반려견으로 집안의 한몫을 차지하니 어쩌겠는가. 사람처럼 그들도 나이 들면 병치레도 심하고 끙끙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말이다.

 

 

 

치와와 ,위키피디아
블랙탄 장모치와와, Pinterest

 

 

 

치와와(Chihuahua)는 멕시코의 개 품종 중 하나이다. 멕시코 치와와주에서 유래하였다. 품종으로는 치와와, 장모치와와가 있다. 평균 몸무게는 2.7kg, 평균 키는 18cm로 반려견 중에서 가장 작은 품종이다. 털색은 붉은색, 검은색, 담황색, 얼룩무늬 등이며 털은 단모종과 장모종으로 구별되지만 단모종이 흔히 볼 수 있는 종이다. 귀는 쫑긋하며, 눈은 크고 돌출되어 있다. 장모종의 경우 최소한의 그루밍만 하면 되고 털을 깎는 미용은 해줄 필요 없다. 생각보다 털이 단모종보다 덜 빠진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흥분하거나 추운 경우 몸을 부르르 떤다. 당연히 단모종은 장모종보다 추위에 약하다.

 

 

 

 

치와와 주(Chihuahua), 멕시코

 

 

 

멕시코 북서부에 위치한 주로 주도가 치와와이다. 멕시코에서 면적이 가장 큰 주이며 서쪽으로 소노라주, 남서쪽으로 시날로아주, 남쪽으로 두랑고주, 동쪽으로 코아우일라주, 북쪽과 북동쪽으로 미국 뉴멕시코주, 텍사스주와 접해있는 곳이다. "치와와"란 명칭은 유래는 뚜렷하지 않으나 나우아틀어의 "건조한 모래 장소"라는 뜻의 '시쿠아와'(Xicuahua)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된다. 이 지역은 멕시코 혁명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곳으로, 판초 비야가 인솔하는 혁명군과 연방 정부군의 사이에 전쟁지이기도 하다.

 

 

 

판초 비야는  멕시코 혁명의 주역으로 농민군 지도자였다. 가난한 농장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누이를 강간한 농장주인을 살해하고 멕시코 북부의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그는 산적이 되어 그의 본명을 프란시스코 비야로 개명하고 훔친 재물을 판초 비야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동료들과 지역민들에게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세력이 커진 비야는 자신을 따르던 무장 세력을 이끌고 멕시코 혁명에 뛰어들게 된다. 전설적인 연승과 강력한 카리스마로 유명해진 그는 멕시코 북부지방인 치와와주에서 멕시코 시티에 이르는 멕시코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 멕시코 민중의 영웅'으로 우뚝 선다. 그러나 반대파의 손에 암살되고 만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다. 쾌활한 표정에 다부지며 재빠르게 움직인다. 기민하고 용감하고 호기심이 강한 테리어 기질이 있다. 한 사람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반려인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분리불안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키우던 엄마개 아빠개가 죽자 아들개 바람이가 보인 증상이기도 했다. 출근하는 가족들이 빠져나가면 기를 쓰고 따라오려 펜스를 피가 나도록 긁어댔다. 퇴근해 오면 방충망을 뚫고 방 안에 웅크리고 있어 놀라기도 했다.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산책을 시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결국 인간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입양뿐이어서 8주 된 털딸을 입양해 문제를 해결했다. 낯선 사람이나 동물에 대한 경계심이 있어 경비견으로 딱이다. 공격적인 개에게 맞서기도 하니 말이다. 밤중 산책하다 베란다 쪽으로 일부러 나와 끝까지 짖어 대는 카랑카랑  치와와 소리를 들으며 산책한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그 집은 피해서 다른 집 쪽으로 산책 방향을 돌려야 했다. 치와와는  실내외에서 모두 잘 적응하는 편이다. 대신 고집이 세고 물건을 가지고  도망치는 걸 좋아한다.

 

 

 

2023.07.16 - [지식&교양] - 50-16. 개 이야기(1)

 

50-16. 개 이야기(1)

1. 개의 진화사 라이카: 구 소련의 우주 탐사견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로 간 개 1954년 소련 태생 1957년 11월 스푸트니크 2호와 함께 발사되었지만 선내 장치의 고장으로 우주에서 생을 마감함

sun-n5y2.tistory.com

 

 

 

 

 

작은 턱 때문에 치아가 약하다. 생후 6개월까지는 두개골이 완전히 닫히지 않을 수 있다. 간혹 성견이 되어도 두개골이 완전히 닫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당뇨병(저혈당),수두증,비만, 눈병, 기관허탈, 슬개골탈구, 심장마비, 간종양, 췌장염에 잘 걸린다.

수두증(Hydrocephalus=뇌수종)이란 단어가 궁금해 찾아 보니  뇌 안에 비정상적으로 축적되는 질병을 말한다고 한다. 두개골 안의 두개내압을 증가시키고 나이가 어릴 경우 머리가 점진적으로 커질 수 있는데 경련, 정신적 장애를 야길할 수 있다. 

 

 

 

의료정보,왼쪽(정상), 오른쪽(수두증)

 

 

 

 

한눈에 봐도 사이즈가 커 보이는 것이 보인다. 뇌 가운데 검은 부분이 비정상적으로 크고 액체로 가득 차있다. 평소처럼 잘 걷지 못한 운동장애와 의식 장애가 발생하기도 한다. 과도한 침 흘림, 생기 없음, 구역질, 동공확장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며 난폭해지거나 반대로 잠만 자거나, 치매를 보이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며 경련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인간과 같은 증상을 앎고 있는 셈이다. 주의 깊게 관찰하시는 견주들 되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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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최초의 현대추상작품 작가
러시아 화가
30세 그림공부 시작
청기사파
바우하우스
제1의 저작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
제2 이론적 저작 <점•선•면>
원의 시대
바그너 오페라 ‘로엔 그린‘


 

2. 생애

 

 

 

개인적으로 추상화가 좋은 점은 각자의 느낌대로 보이는 대로 감상할 수 있어 좋다.  언뜻 보기 장난 삼아 누군가 휘갈겨 놓은 혹은 흩뿌려 놓은 색과 선의 휘두름 같다.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신나게 휘두르는 지휘봉이 지나간 자국 같기도 하니 말이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이름만으로 알 수 있듯이 모스크바 태생의 오데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화가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과 경제를 전공했고, 전문가로서 인정받아 대학교수가 되었던 특이한 이력의 화가다. 30살 때 그림 공부를 시작하여 모델 데생, 스케치, 해부학등을 차례로 배워 나간다. 늦깎이로 화가 인생을 출발한 고흐나 고갱 같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이  생각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뮌헨에 정착하여 사립학교와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10연 년간 청기사파의 창립회원이자 독일 표현주의 여류 화가였던 가브리엘레 뮌터와 동거하기도 했다. '청기사파(Der Blaue Reiter)'는  독일 뮌헨에서 발생한 화풍으로 , 말 그대로 푸른 기사라는 어원은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했던 두 요소인 푸른색과 말을 상징한다. 마르크에게 말을 비롯한 동물은 순수한 영혼을 대표했고 칸딘스키는 프른색을 현대의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색으로 보았다.

 

 

 

 

뮌헨 신미술가 협회에서 비롯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예술관의 차이로 개별적인 노선을 걷게 된다. 당시 신미술가협회의 의장이었던 칸딘스키는 새로운 기법에 대한 수용에 있어 회원들과 갈등을 빚은 뒤,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독자적인 화풍의 개발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푸른색에 대한 선호와 기사의 낭만적 상징이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피퍼 서점에서 <청기사> 잡지를 발간하기도 한다. 그들이 추구하고 싶었던 것은 색과 추상을 통해 내면적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화가로 바실리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 파울 클레, 가브리에 뮌터 등이 있다. 이들은 에른스트 키르히너 등이 결성한 다리파와 함께 유럽에서 표현주의의 정착에 기여한다. 그러나  청기사파는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함께  칸딘스키가 러시아로 압송되고 마르크가 살해당하면서 종말을 맞게 된다.

 

 

 

칸딘스키는 러시아 미술단체 '블라우브 다루그'와 '블라우브 군데스트' 등에 소속되며, 러시아 미술계에서 활발한 전시와 출판 활동을 펼치면서 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특히 그의 작품들은 신경미학적인 이론과 관련하여 철학적인 논의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

 

 

 

 

 

Bleu deciel.1940, WikiaArt.org

 

 

 

 

 

무엇이 보이는가? 개인적으로 사랑스러운 블루색 안에 자유롭게 노니는 생명체들이 보인다. 아이들의 꿈속 같은 이 그림은  아이 얼굴도 보이고, 문어, 뱀, 잠수함, 거북이 등 직감적으로 와닿는 닮은꼴 물체가 바닷속을 부유하는 느낌입니다.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초등생이 그렸다면 이런 비슷한 그림이 나오지 않을 까 싶다. 사회화를 거친 다 큰 어른이 아이스럽게 그리기 위해 또 어떤 마술이 필요한 걸까? 그런 의문이 먼저 들게 하는 그림 한 장이다.

 

 

 

 

<Bleu deciel> 작품의 이름은 프랑스어로 '푸른 하늘'이라는 뜻이다. 그림은 무척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형태와 색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목처럼 주로 파란색 계열의 색상으로  이루어져 있고,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같기도 하고 바닷속 부유하는 생명체 같기도 하다. 파란색 자체가 지닌 시원함과 하늘 그리고 바다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담고 있어 아이들과 상상하며 대화하면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질 것만 같다. 작품에 인물이나 복잡한 사물은 없고, 대부분 하늘과 바다로 이루어져 있어 단순하면서도 감상적인 느낌을 많이 받게 하는 그림입니다. 단순함을 통해 대상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작가의 특별한 시간이 느껴집니다.

 

 

 

 

 

 

Bauhaus,1919-1933

 

 

 

 

 

 

칸딘스키는 예술과 건축을 위한 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십 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쳤다.  원 이름은 슈타틀리헤스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 독일어)를 줄여서 사용한 단어로 독일어로 '건축의 집'을 의미한다.  1919-1933년까지 독일에서 설립, 운영된 학교로, 미술과 공예, 사진, 건축 등과 관련된 종합적인 내용을 교육하였다.  건축을 중심으로 각기 분산된 모든 미술 분야를 통합하는데 교육의 최종 목표였다고 한다. 이곳의 교수진 중의 하나로 참여한 바실리 칸딘스키는 공감각에 대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형태와 색채의 정확한 상응 개념을 인지시키는데 기여한다. 또한 그는 색채가 언어보다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시각언어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바우하우스는 현대식 건축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 데 1933년 나치스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기 전까지 14년간 운영되었다. 예술, 건축, 그래픽 디자인, 실내 디자인, 공업 디자인, 타이포 그래피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폐쇄 이후 바우하우스의 교육자들은 미국으로 대거 이주해 미국디자인 교육에 혁신을 일으킨다. 대표적으로 모홀리 나기가 설립한 뉴 바우하우스는 재정상의 문제로 결국 일리노이 공과대학에 합병이 되고, 독립적인 산업 디자인 기업처럼 가능했 던 독일의 울름조형대학은 가전업체 '브라운', 항공사 '루프트한자' 등과 연계해 성공적인 사례를 남기기도 한다.

 

 

 

 

바우하우스의 강의록을 기초로 하여 <점, 선, 면>이 출판이 되었다. 첫 번째 저작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하게 되기 쉬운 조형의 기본적인 사고에 직관과 상상의 비합리적인 내용을 기술한 독특한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칸딘스키는 청년들의 의혹을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확실한 판단력을 길러 주어,
끊임없는 비판과 자기비판을 환기시킨 인물이었다.

-막스 빌-

 

 

 

 

 

원 속의 원,1923, 위키피디아

 

 

 

어느 날 우연히 거꾸로 걸린 자신의 그림을 보면서 '순수한 초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거꾸로 된 그림 속의 비현실적인 형태와 색상이 예술적 의미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이후 그는 단순한 색과 선 형태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화에 집중하게 된다.

 

 

 

<원속의 원>은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와 선명한 색상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추상적인 요소들은 현실 세계의 구체적인 대상이나 자연적인 현상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 대신, 그의 감정, 감각, 정서 등의 내면세계를 묘사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작품의 주된 요소인 "원"은 칸딘스키가 추상 미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형태 중 하나이다. 원은 기하학적인 간단함과 조호로운 형태를 상징하면서도 무한성과 무한루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원들이 곡선적이고 유동적인 선들과 연결되어 작품이 동적인 느낌을 실어준다. 또한 그가 작품에 사용한 색상들은 감정과 느낌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독특한 목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빨간색은 열정과 에너지를 파란색은 신비롭고 정적인 느낌을 전달하고 노란색은 활기차고 밝은 느낌을 줍니다. 초록색과 핑크색과 같은 다른 색상들도 그 각각의 특성을 통해 작품에 다양한 의미를 더하고요.

 

 

 

 

 

Yellow-Red-Blue,1925,구글 아트앤 컬쳐

 

 

 

 

 

 

단순하지만 세련된 구성과 화려한 색채로 이루어져 있다.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에 대한 정수를 잘 나타내며,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 중 하나이다. 구성주의 예술의 대표적인 예로, 선명한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의 원형과 직선적인 형태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추상적인 느낌을 강조한다. 색채와 형태의 조합을 통해 인상적이고 독특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하며, 미적 감각과 정교한 기하학적 배치를 통해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개인적으로 그가 그어 놓은 선들은 솔직히 이해하기 난해하고 상상의 영역이지만 색깔이 주는 다양한 느낌은 맘껏 즐길 수 있어 좋은 것 같다.

 

 

 

 

 

 

 

칸딘스키는 이집트, 그리스, 터키로 여행하며 동양의 풍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아  여행에서 얻은 인상을 다채로운 형태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그는 원의 시대의 기하학적인 추상을 탈피하고 형식과 색채에 의한 서정적 내지는 환상이 넘치는 음악적 작품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특히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음악을 들으면서 색을 보는 공감각을 경험한다.  그 후 칸딘스키는 음악은 그림이 될 수도 있고, 그림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의 그림은 점차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화로 바뀌게 된다. '로엔그린'은 주인공인 로엔이 브룬힐트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의 배신과 로엔의 운명적인 결말로 사랑과 배신, 운명의 숙명적인 흐름이 담긴 비극적 이야기입니다. 영웅적인 음악과 사실적인 캐릭터 표현으로 유명하지요.

 

 

 

 

바그너의 음악에서 바이올린, 베이스, 관악기의 울림
나의 울림, 나의 마음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야성적이며 미친 것 같은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칸딘스키, '로엔그린'을 듣고 -


 

 

3. 나가기

 

 러시아 미술의 발전과 세계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친 표현주의 화가 칸딘스키는  자아의 내면 감정과 생각을 추상적인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려 노력했다. 특히 그는 분홍색, 노란색, 파란색 등을 포함한 대담하고 화려한 색상으로 자신의 내면 묘사를 충실히 해 낸 화가이다. 그림 속에 음악의 리듬이 실린 듯한 그의 그림을 보며 밋밋한 오늘의 일상에 그의 색채의 힘을 빌어  강렬한 감정을 표현해 보고 싶어 진다. 왠지 저 정도는 나도 해 볼 수 있지 않을 까! 만만하게 그림이란 걸 시도해 볼 수 있도록 새로운 안경을 씌워진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는 에티켓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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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미국에서 안락사를 가장 자주 당하는 견종이 바로 진돗개이다. 가출 확률도 가장 높은 수준의 개 또한 진돗개이다. 많은 사냥개 혈통의 개들이 그렇듯이 진돗개도 적절하게 산책과 운동을 할 공간이 부족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잠시 목줄을 착용시키면 몹시 사나워지기도 한다.

 

 

백구,위키피디아

 

 

견주인 둘째가 형이 대학을 가자 외로워 키우기 시작한 개가 진돗개였다. 고맙게도 먼 곳에서 직접 주인분이 토실한 8주 된 강아지를 안고 우리 가 사는 곳까지 방문을 해 난생처음 털 달린 짐승을 집에서 키우게 되었다. 첫인상은 토실한 아기곰이었다. 개 키우기가 처음이었던 우리 가족은 카펫에 수시로 오줌을 지려대는 이 녀석을 감당할 수 없어 한 달 만에 잔디밭으로 강제 쫓김을 당했다. 가족들의 염려와 달리 바깥 생활이 훨씬 편했던 지 밤중에 지나가던 야생 쥐를 잡아 우리를 놀라게도 하고, 산책을 시키는데 큰 집 개가 지키고 있는 집을 지나갈 때도 강아지 주제에 커다란 개들을 향해 기죽지 않고 짖어 대 또 한 번 놀라게 하기도 했다. 첫정이 무서운지라 일을 하다가도 보고 싶어 일 끝나기가 무섭게 신생아 키우는 엄마처럼 운전대 잡고 허겁지겁 달려가기 바빴다. 사실 털 날리고 뒤치다꺼리할 일 생각해 내가 제일 반대를 하고 나섰지만 키우면서 그런 고민은 별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 모성애가 절로 흘러나왔으니 말이다.

 

 

 

키우면서 느낀 진돗개 성격은 일단 깔끔했다.  밥 주는 장소에서 가장 멀다 생각한 곳에 오줌을 싸고 배변을 했다. 모든 개들이 이런 줄 알았더니 요즘 키우는 털딸 '레아(허스키+저먼 셰퍼드)'가 정해진 장소 없이 배변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비교가 되었다. 잠깐 쉬는 동안에도 입으로 자신의 발가락이나 털을 핥아 대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깔끔 그자체다. 고양이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깔끔함이 진돗개를 더 좋아하는 이유인 지 모르겠다.

 

 

 

 

그런데 물을 너무 싫어한다. 어릴 때부터 물을 경험하게 해주면 비 오는 날에도  목욕시킬 때도 수월할 줄 알았다. 그런데 경험상 그렇지 않았다. 산책을 하다 작은 물 웅덩이를 만나면 일단  멈추고 가질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견주가 안아서 반대편으로 옮겨 줄 때도 있었다. 이곳 특성상 겨울철에 비가 오면 집에 콕 틀어박혀 배변할  때 이외는 잘 나오려 들지 않는다. 한 번은 목욕을 시키고 물기가 덜 닦인 채 내보낸 적이 있었다. 자기 털에 남아 있는 물기가 싫었던 지 잔디 바닥에 온몸을 비벼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장면이었다. 

 

 

 

 

아주 영리하고 활동적인 개이기 때문에 자주 가족안의 인물이나 다른 개와 놀게 해줘야 한다. 진돗개들은 몇 번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명령을 외우고 주어진 과제를 잘 기억한다. 지나치게 영리한 진돗개의 경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았다. 개한테 흔히 쓰는 명령어나 속임수 같은 것을 너무 빨리 파악하고 터득해서 다루기 힘들 때도 있다. 개인적으로 밤시간이 되어 쪽문 쪽으로 가두려 하면 벌써 알고 저만치 도망가 이름을 불러도 쉽사리 가까이 오지 않으려 해 밤마다 남편이 애를 먹는 부분이다. 요즘은  다른 방법을 취하고 있지만 말이다. 대개 어린 진돗개의 경우 펜스나 벽을 오르려고 하고, 나무나 땅을 파헤쳐 애써 손질해 놓은 정원을 망치기 일쑤다.  집안에 둘 경우 

씹을 것이 필요해서  집안 살림살이를 물어뜯기도 하는데, 이 문제로 많은 진돗개가 종종 주인에게 버려져 애견보호소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어린 개들에게 씹을 것을 장난감으로 주는 편을 권한다.

 

 

 

2023.07.16 - [지식&교양] - 50-16. 개 이야기(1)

 

50-16. 개 이야기(1)

1. 개의 진화사 라이카: 구 소련의 우주 탐사견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로 간 개 1954년 소련 태생 1957년 11월 스푸트니크 2호와 함께 발사되었지만 선내 장치의 고장으로 우주에서 생을 마감함

sun-n5y2.tistory.com

 

 

 

 한국 진도 특산인 진돗개를 1962년부터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또한 2005년 케널클럽(KC)과 세계애견연맹(FCI)에 정식 품종으로 등록되어 관리되고 있다. 한 가지 더 좋은 소식은 2012년 4월, 진돗개의 총유전체가 모두 해독되었고, 이것은 개 품종으로 독일의 개 복서 이후 두 번째라고 한다.  2020,10월 발표된 사이언스 논문에 의하면 진돗개의 유전 정보 중 상당량이 뉴기니 고산개와 같은 계통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꼬리 부분만 빼면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늑대처럼 짖지 않고 길게 울부짖는 특성이 있는데, 늑대와 달리 그 음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  꼭 노래하는 것 처럼 들리기 때문에 '노래하는 개', '가수(singer)'등의 별명이 붙어있다.

 

 

 

WILD DOG FOUNDATION

 

 

 

개들 역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낯선 사람이 다가오게 되면 예민해져서 물려고 들때가 있다. 특히나 사냥개 성향의 진돗개의 경우 더 심하다. 묶어만 두지 말고 어릴 적부터 넓은 공간에서 풀어서 키우면서 사교성을 키우고 친근하게 행동하도록 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들은 진돗개의 외형과 그 영민함, 그리고 충성심과 투쟁근성에 반해서 키우기 시작하지만, 이들이 가정의 일원으로 집안에서 성장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적당한 공간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키울 예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숙지했으면 좋겠다. 주인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도록 길들여진 집 안의 애완견과 달리 진돗개들은 혼자서도 잘 노는 독립적인 존재이다. 특히 넓은 집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낯선 이 가 왔을 때 사람이 오고 있음을 짓어서 알리고,  주인의 주의를 환기시켜 준비시키게 한다. 다만 높은 공격성과 사나움 때문에 항상 경계를 늦추면 안 되는 견종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키우던 아빠 진돗개 '천둥이'가 산책 나온 이웃 손님의 애완견을 물어 응급실로 갔고 결국 병원에서 수술하는 상황까지 벌어져 푼돈 차원이 아닌 엄청난 액수를 물어줘야 해 보험회사 측에 넘긴 경험이 있다.  진돗개의 이런 공격성은 교배 기술이 부족했던 한국에서 자연적인 교배를 할 수밖에 없어 그 결과 자연진화되어 야생성이 강한 견종이 되었다고 한다.

 

 

 

 

진돗개는 중형견이며 스피츠 타입의 삼중털을 갖고 있다. 진도 토종견과 외부 개의 혼혈 특히 두개골상과 머리와 몸의 비율상에서 종종 나타나지만 암수의 형태상의 특징으로는 암컷이 수컷에 비해 좀 더 각이 기울어진 머리를 갖고 있다. 진돗개가 가진 마르고 기민한 외모는 똑똑하고 강하며 빠른 인상을 준다.  켄넬 클럽에서 발표한 진돗개의 외모를 보면, " 네모지게 반듯한 형태로 자란 진돗개는 알맞게 깊은 가슴을 갖고 있으나 지나치게 넗지 않다. 가슴의 가장 깊은 위치는 다리 관절에 닿는다. 가슴살은 발전해서 갈비뼈는  잘 튀어나와 있다. 등은 강하고 곧으며 허리는 근육으로 덮여 있고 마르고 여위어서 흉곽보다 가늘다. 다리는 구부러져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색깔은 황색(황구), 백색(백구), 회색(재구), 흑색(흑구), 그리고 얼룩(호구)가 있다.

발은 중형사이즈로 동그랗고 단단하며  거무스레하다. 발톱은 단단하고 대개 검은색이나 크림색, 회색으로 되어있다.

보폭은 일반적인 중형견의 수준이고 빠르게 이동할 경우 빠르며 가볍고 유연한 발자국을 보인다.

머리는 턱이 잘 발달되어있고 털은 볼에서 풍성하게 자라있으며 귀는 뾰족하게 세모 형태로 안에는 촘촘한 털이 잘 자라 있다. 어릴 때는 대개 5-6개월이 되기 전까지 귀가 누워있다. 눈은 아몬드 형태로 동그란 편이며 갈색이고 결코 푸른색 눈이 없다. 

 

 

 

 

진돗개는 현재 진도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 전국에서 유일하게 진도군 및 진도섬내에서만 키울 수 있다. 타 지역으로 진돗개를 반출할 경우 반드시 진도군청에서 발급한 진도군 공인 반출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진도군을 오가는 시외버스에서 진돗개를 수송할 경우 진도버스터미널에서 진도군청 공인 진돗개  반출허가증을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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