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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토종견 진돗개와 비슷하게 생긴 일본의 아키타견입니다. 일본의 시바견과도 닮았지만 시바견보다 더 큰 대형견에 속합니다. 

 

아키타는 일본 혼슈 지방 아키타현의 번주가 무사들에게 무예의 전통을 가르치기 위해 이 개를 투견으로 사용하며 알려졌다고 합니다. 아키타현은 일본에서 6번째로 큰 '현'이며 도쿄에서 북쪽으로 450km 떨어져 있습니다.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주요 산업인 농업이 발달하여 품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지요. 아키타는 도호쿠 지방에서도 쌀 생산량 1위를 자랑하며 좋은 쌀과 깨끗한 물로 만든 사케도 일본 전국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아키타견/나무위키

 

 

16세기 '아키타 마타기'라고 불리는 사냥을 위해 길러진 토착견이 기원입니다. 본래 무사의 투지를 높이기 위해 '투견'으로 하사되었다고 전합니다. 주로 아키타현 북부의 오다테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 '오다테이누(오다테견)'라고도 불립니다.  

 

 

 

아키타현으로 유배간 어떤 귀족에 의해 지방견이었던 이 개가 더 커지고 사냥능력이 향상되도록 개량되었다고도 합니다. 한때 일본 왕실의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사육되었고, 거의 멸종 될 정도로 특권층에서만 기르다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일반인에게 퍼졌습니다. 1927년 아키타 클럽이 조직되어 혈통보전에 힘썼고, 1931년 일본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에 반입되어 인기를 끌면서 일본개로는 처음으로 미국애견협회(AKC)의 공인을 받았습니다.

 

 

 

귀엽고 충성스러운 아키타/STAY AKITA

 

 

 

 

아키타의 원산지는 일본입니다.

몸높이 수컷64-70cm/암컷 58-64cm이고 일반적으로 수컷이 암컷보다 몸집이 크고 뼈가 튼튼한 대형견입니다. 높은 체고에 곧게 뻗은 다리, 근육질이면서 균형 잡힌 체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체중:수컷 45kg/암컷:38kg 내외의 대형견입니다. 

 

 

 

 투견이었던 선조의 피를 받았습니다. 지금의 아키타는 전혀 물지도 않고 쓸데없이 짖지도 않는 영리하고 훈련 능력도 높은 견종입니다. 훈련하기는 비교적 쉽고, 계속 묶어 두면 스트레스로 인해 난폭해져서 사람을 물기도 하므로, 충분한 운동과 주인의 관심이 필요하답니다.

 

 

견주와 가족에게는 충실할 수 있어도 낯선 사람과 다른 개에게는 거친 모습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어린 강아지 시절부터 제대로 된 사회화 교육은 필수입니다. 특히 물어뜯거나 짖는 버릇은 예기치 못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아키타현/123RF

 

 

아키타견의 인기는'충견 하치코'라는 유명한 이야기에서부터 비롯됩니다. 1920년 도쿄제국대학의 우에노 히데사부로라는 교수가 '하치코'라는 이름의 아키타견을 키웠다고 합니다. 하치코는 교수가 갑자기 사망한 후에도 여전히 매일 시부야역에 가서 주인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이 미담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요. 지금은 세겨적으로도 유명한 '하치코'상이 시부야역에 세워져 있답니다. 이 이야기는 할리우드 영화 '하치 이야기'로 각색되어 전 세계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답니다. 아키타견의 충성스러운 이미지도 사람들 가슴속에 깊이 남아있지요. 

 

 

 

Haciko Square-Shibuya/Japan Travel

 

 

https://www.youtube.com/watch?v=Y6U7mAnPtw4

 

 

 

 

아키타는 힘이 세고 민첩하며 골격이 튼튼한편입니다. 꼬리는 힘차게 말려 올라가 있고, 귀는 바짝 서 있으며 코는 오뚝하고 검은 눈 때문에 날쌔고 사나워 보이기도 합니다. 아키타의 성격은 두려움이 없고 사냥에 능숙하며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합니다. 사람에게 호의적이며 기억력이 좋고, 협동심이 좋은 반면 애교가 없고 노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2OoGacMNsLM

 

 

 

 

사냥개의 본성이 나타나기 전에 어려서부터 엄격하게 훈련시키면 성견이 된 뒤에 훈련효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루 30-40분 운동을 해야 하며, 물을 많이 주면 몸매가 풀어져서 좋지 않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호의적인 반면 다른 동물들에게는 공격적인 성향이 있다고 합니다. 가족에게는 자애로운 면모를 보이지만, 공격적으로 변할 수 있으니 어릴 때부터 서열을 확실히 하고 훈련시켜야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yKoRoK7q_w

 

 

 

사냥견으로서 충성스런 명성을 갖고 있고, 항상 위엄 있는 모습과 차분하고 신중을 기하는 성질의 아키타는 장점입니다. 사람이나, 그 밖의 모든 침입자로부터 영토를 지키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어려서 사회화 교육 잘 시키십시오.

 

 

 

아키타견/WINTER PLAY

 

 

 

아키타의  털색은 다양합니다. 황색 외에도 붉은색, 후추색, 흰색, 브린들(얼룩무늬)이 있습니다. 흰색을 제외한 다른 색깔의 개에게도 안쪽에는 흰색털이 있어야 합니다.  아키타는 털 빠짐이 많은 견종이라 실내보다는 실외에서 키우는 걸 추천합니다. 추운 지역에서 살아온 아키타 견은 추위에는 강하지만 더위에 약해서 여름에는 실내온도를 25도-28도 , 습도는 50-60%를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풍성하고 빽빽한 이중모를 가지고 있어 매일 빗질을 해주는 것이 피부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봄과 가을에는 털갈이 시기이므로 이 기간에는 털 관리에 신경을 써 주세요.

 

 

 

아키타 견은 일반 반려견 분양숍에서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브리더를 통해서 분양을 받는 것이 제일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형견에서 자주 발생하는 고관절 형성부전외에 포도막염, 안검내반증 등의 질병에도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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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200년 가까이 완전히 잊혔졌던 화가입니다. 그러다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들과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 당시 시대상황,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림으로 그리는 장르화에 주목하면서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재조명받기 시작합니다.  페르메이르를 빼놓고 17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을 얘기할 수 없지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더 많이 알려져 있고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Johannes Vermeer,1632-1675)의 시간을 따라가 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0BlJIV_29U

 

 

 

 

페르메르만큼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려운 거장도 드뭅니다. 제대로 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죠. 출생 신고서나 상속 관련 기록들 딱딱한 공문서가 전부입니다.1632년 네덜란드 중서부의 도시 델프트의 서민 가정 출신입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막바지에 치달았을 때 태어났죠.

 

 

유럽이 종교개혁 이후 신. 구교와의 종교를 내세운 힘겨루기로  어수선했습니다. 대부분의 북유럽지역이 개신교를 받아들였고 네덜란드 역시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투쟁을 벌여왔습니다. 1648(16살) 네덜란드가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합니다. 중개무역을 통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던 상권이 북유럽의 네덜란드로 부가 이동하기 시작하고요.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 문화적으로 상당히 성공한 시기인  '황금시대'가 시작됩니다.

 

 

1653년 21살 때 델프트의 화가 길드에 가입하면서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같은해 '운명의 여인'카타리나 포르네스와 만나 결혼하고요.  돈 많은  가톨릭 집안의 딸과 가진 게 하나도 없는 개신교 집안 아들이 만나 살림을 시작합니다. 이 결혼을 반대했던 장모님도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위 페르메르를 아낍니다. 후에 장모님이 든든한 후원자로 나서지요. 장모집 2층 작은 방 하나를 화실로 꾸며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갑니다. 

 

 

 

페르메르와 카타리나는 결혼 후 22년동안 아이를 15명이나 낳았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평균적인 가정에서 아이를 3-4명 낳았던 걸 생각해 보면 정말 엄청난 다산이지요. 페르메르는 아내와 아이들을 정말로 사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페르메르가 남긴 작품은 35점 안팎입니다. 동시대에 살았던 렘브란트의 작품에 비하면 너무 적지요. 살아남은 11명의 자녀를 부양하느라 그림도 그리지만 수입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부업으로 여관도 운영하고 그 여관 벽에 그림도 걸어 미술상 역할도 하면서 생계유지에 허덕입니다. 작품 수가 적은 이유도 본업, 부업, 그리고 육아까지 겸했던  충분하지 못한  작업시간도 한몫했을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등 다른 화가들이 신화나 종교를 소재로 자주 그림을 그렸던 것과 대조적으로 그의 작품 주제 대부분은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베르메르는 실제 생활과 자기 작품을 철저히 분리했습니다. 베르메르의 집은 항상 엉망이었고 엄청나게 시끄러웠습니다. 애가 열 명이 넘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가 죽은 뒤 집을 찾아온 빚쟁이들은 "요람, 침대, 의자가 집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베르메르의 그림에 나오는 집들은 모두 완벽하게 정리돼 있고, 조용합니다. 그림을 사 갈 만한 부유한 고객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서일 테지요. 아니면 어지러운 마음을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 안에서 승화한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성 프라세디스 Saint Praxedic>,1655/wikipedia

 

 

 

 

페르메이르가 이탈리아 화가의 그림을 따라 그린 작품입니다. 20-30대의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스승이 누구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고요. 추측만 할 뿐이죠. 원래는 작품에 십자가를 더해 변화를 꾀했는데, 엑스레이 연구에 의하면 완성 후에 덧그렸을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이는 그림의 종교적 이미지 효과를 더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인물에 보다 강렬한 물리적 존재감을 부여하기 위해 원작보다 훨씬 고밀도로 색채를 강조했고요. 배경인 하늘에는 울트라 마린 물감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돈은 없지만 작품에 들어가는 재료는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파란색과 노란색이 자주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파란색은 청금석을 갈아 만든 울트라 마린이라는 안료를 사용합니다. 울트라 마린(바다를 건너왔다)이 안료는 엄청나게 구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청금석은 수입물품으로 아프가니스탄 이 있는 중동 지역에서 들어온 물건이라 금보다 더 비쌌다고 해요. 그래서 페르메이르는 이 안료를 구하기 위해 가족들에게 빚을 지게 할 정도로 말이죠.

 

 

2014년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서 약 620만 파운드(약 125억 원)에 낙찰된 바 있습니다. 이 작품은 폴란드의 유명 컬렉터인 바바라 피아세카 존슨 소장품으로 1969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중산층 가정의 일상생활 모습을 주로 다룬 페르메이르 작품으로는 상당히 드문 종교화입니다. 그의 알려진 작품들 가운데 가장 초기작에 해당하고요. 화가가 1653년 결혼과 동시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작품은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미 안료, 색채 등에 이해도가 높았음을 보여줍니다.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 /한국경제

 

 

 

베르메르의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입니다. 왼쪽으로 열린 창문이 보입니다. 열린 창문에  반투명으로 반사된 소녀의 얼굴이 보이고요. 이 정도면 페르메이르의 관찰력에 엄지 척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창을 통해 들어온 아늑한 빛이 소녀의 이마, 머리, 둥근 어깨를 거쳐 편지를 읽고 있는 손에 잠시 머무르는 것 같습니다. 황록색 커튼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 들고요. 벽에 큐피드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애편지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림 원본 위에 누군가 덧칠한 부분이 발견되었고 전문가들의 의견수렴을 통해  2017년 독일 드레스덴 복원팀에 의해 세상에 빛을 본 큐피드의 모습입니다. 직물이 놓인 곳, 벽 쪽은 다소 어둡게 처리했습니다. 소녀가 서있는 곳은 빛을 통해 환한 모습으로 표현해 놓았고요. 충분히 넓지 않은 공간을 빛의 레이어를 두며 깊이감을 더 했습니다. 

 

 

 

 

 

 

<The Milkmaid>,1657-1658/wikipedia

 

 

페르메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일인데도 고요함과 숭고함이 느껴집니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어디선가 쪼르륵 우유 따르는 소리가 들려올 듯하고요. 일상적인 순간을 어찌 그리 잘 잡아냈는지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마치 중요한 아침 의식을 치르듯 흘러나오는 우유의 흰 빛과 따르는 손등에 떨어진 빛이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집중한 하녀의 얼굴과 옷의 색채 표현은 물론이고 왼쪽 벽은 회색으로, 오른쪽 벽은 흰색으로 칠한 명암 표현도 절묘합니다. 오른쪽 벽에 드문드문 뚫린 못자국 보이시나요. 바닥에 있는 데울 때 썼을 법한 작은 이동식 난로도 보이고요. 

 

 

 

 

엄청나게 비쌌던 청금석 갈아 만든 블루색을 하녀의 앞치마에 아낌없이 썼습니다. 1672년 프랑스가 네덜란드 공화국을 침략해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이면서 (프랑스-네덜란드전쟁) 심각한 경기 침체가 네덜란드를 강타한 뒤였습니다. 제일 먼저 미술 시장이 얼어붙어 그림을 팔 길이 막혔을 때도 페르메르는 고집합니다. 당시 유명화가들조차 붓을 꺾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며 힘들었을 때도 말이죠. 전형적인 장인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재료만큼은 아끼지 않았습니다. 

 

 

 

 

<델프트 풍경>,1660-1661/ARTPAGE

 

 

아침의 햇빛이 비치는 강변 풍경이 마치 사진처럼 묘사돼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페르메르가 세례 받았던 교회 건물도 보입니다. 그림과 달리 당시 이곳은 아침부터 들락거리는 배와 상인들로 매우 붐비고 시끄러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림에는 전혀 이런 사실이 드러나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베르메르는 고요를 사랑하고 갈망했었나 봅니다.

 

 

프랑스 위대한 문학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 그림을 매우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 그림을 본 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봤다"라고 전했습니다. 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인물은 그림 속 이 부분을 보며 숨을 거둡니다. 어두운 건물들 가운데 햇빛을 받아 홀로 빛나는 작은 노란색 벽면을 묘사한 부분 말입니다. 오른쪽 부분에 있으니 한 번 찾아보세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Meisje met de parel>,1665/나무위키

 

 

 

북부의 모나리자로 불립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버금가는 신비로움으로 인해 문학, 미술, 영화 등 여러 분야에 끝없는 영감을 제공하는 작품이고요. 페르메이르의 대표작 중 한 점입니다. 소설, 영화, 끊임없는 과학적 연구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많은 이들이 이 그림에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실존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 매혹적인 눈망울과 오묘한 표정 등 신비로움과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어찌나 호기심을 유발하는지, 이 작품을 주제로 여러 소설이 쓰였을 정도입니다. 미국 유명 배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되었고요. 영국의 인기 낙서화가 뱅크시도 이 작품을 모티브로 벽화를 그렸습니다.

 

 

 

 

작품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과학적 분석도 꾸준히 이뤄져 왔습니다. 특히, 최근의 한 연구는 엑스레이, 디지털 현미경, 물감 표본 분석 같은 다양한 기술을 동원, 안료의 성분과 생산지는 물론, 세월에 의해 지워진 부분들까지 모두 밝혀냈습니다. 심지어 화가가 어떤 순서로 그림을 그렸는지 알아내는 정도에 이르렀고요. 흥미로운 사실은 원래 바탕이 검은색이 아니라 녹색 커튼이었다는 점과 속눈썹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일부 미술사학자들이 손눈썹이 없는 점을 들어 실제 인물이 아니라 이상적인 인물을 그린 것이라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터번을 두른 이 소녀가 누구인지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파란색의  터번을 두른 소녀의 복장은  당시 네덜란드의 옷이 아닙니다. 터번은 아랍 쪽과 터키에서 자주 입던 옷이죠. 이를 통해 그 당시 네덜란드가 중계무역으로 많이 번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장르화의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당시 옷차림으로 변화하는  생활양식을 읽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가  43세에 죽었을 때  그의 스타일과 천재성을 상징하는 색채와 빛의 특정 효과, 안료의 정확한 혼합과 탁월한 배경 처리 기술은 그 누구에게도 전수되지 못해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회화의 기술 ,알레고리  The Art of Painting>,1666-1668/wikipedia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의 특징을 잘 소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바로 카메라로 찍은 듯한 완벽한 거리 감과 빛, 그리고 구도입니다. 사실 그는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기술을 통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일종의 원시적인 카메라로, 당시에는 혁신적인 첨단 장치였습니다. 이렇게 구도를 잡은 다음에도 그림을 굉장히 많이 고쳤습니다. 엑스레이 분석에 따르면 페르메르는 등장인물의 위치와 실내 인테리어 등을 자주 큰 폭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덕분에 페르메르의 그림에서는 원근법과 명암, 구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나무위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알레고리 작품입니다. 알레고리란 그림에 나오는 이미지에 하나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모델은 머리에 월계수 화관을 쓰고, 왼손에는 트럼펫을 , 오른쪽에는 책을 든 채 눈을 아래로 깔고 있습니다.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이 눈길을 끌고요. 월계관은 승리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 트럼펫은 명성을 뜻합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은 헤르도투스 또는 투키디데스의 책으로 , 역사를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모델은 화가의 승리를 가져다줄 '역사의 여신'즉 클리오(Clio)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물론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많습니다.) 가난에 굴하지 않고 베르메르는 믿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가 기어이 자신을 승리자로 만들어 영예롭게 할 것임을 말입니다. <2023년 암스테르담 페르메르 전시회>에 엄청난 인원이 몰리며 표가 매진된 사례를 보면 페르메르가 그린 월계수의 의미처럼 승리를 한 듯도 싶습니다. 

 

 

 

 중앙 오른쪽에 등을 돌린 채 작업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페르메이르 자신이죠. 당시의 최신 유행에 따라 상의는 절개된 의상을 걸쳤습니다. 하의는 붉은색 내의를 받쳐 입었고요. 화가 주변에는 유화물감이나 팔레트 등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도구가 없습니다. 이는 그림이 화가의 상상 속 장면을 그렸다는 걸 알려주는 장치입니다. 사실 베르메르는 이렇게 비싼 옷을 입고 좋은 작업실에서 일할만큼 돈이 많지 않았습니다. 작품 분위기는 고요하지만, 자식을 10명 넘게 뒀던 페르메르의 집에는 아기 울음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거든요. 15명의 아이중 11자녀가 살아남았어요. 그 녀석들 먹여 살리느라 아버지 페르메르는 스트레스가 가득입니다. 그래도 그림 속 페르메이르는 자신을 멋을 좀 아는 신사로 연출해 놓았습니다. 

 

 

 

 

 

 

왼쪽에 늘어진 커튼, 그 아래쪽 의자 등에 어두운 색깔을 자연스럽게 모델로 이끄는 르푸수아(repoussoir) 기법을 썼습니다. 커튼으로 살짝 가려진 탁자 위에는 석고 마스크, 옷감 한 무더기, 책 하나, 가죽 조각들이 놓여 있습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적절히 활용하여 각각의 질감을 확실히 살리고 있습니다. 화가와 모델은 아주 선명한 반면에 이 사물들은 흐릿합니다. 어둠-창가 쪽으로부터 오는 빛-벽면의 어두움 이렇게 레이어를 주며 공간의 깊이감을 더합니다. 공간이 좁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바닥에는  대리석 타일이 깔려 있고, 줄무늬 천장이 그림 위쪽을 살짝 가로지르는 가운데, 황금색으로 빛나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습니다. 샹들리에는 아마도 화가의 고매한 예술 정신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상징성을 띠고 있는 작품입니다. 한 미술평론가는 "자연주의적 기법, 밝게 빛나는 공간, 복잡하지만 완벽하게 짜인 구성이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흠 없이 통합되어 있다"라고 격찬합니다. 처음에는 작업실을 방문하는 고객들한테 보여줄 작품으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화가가 가장 사랑했던 작품이 되었으며. 페르메이르는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이 작품을 평생 팔지 않았습니다. 

 

 

 

히틀러가 다른 그림들보다 유독 이 그림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독일 국민 예술전의 도록으로 이 작품을 사용했죠.  결국 패망에 가까워 지자 히틀러는 자신이 뺏은 미술품 500만 점을 여러 장소에 나눠 숨기라고 지시합니다. 그것을 모뉴먼츠 맨이라는 특수부대가 찾아서 돌아옵니다. 이를 통해 페르메이르는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A Young Woman Seated at the Virginals>,1670-1672/wikipedia

 

 

푸른 벨벳 의자에 앉은 젊은 여인이 버지널이라는 당대 유행하던 건반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하얀 공단 드레스 위에 노란 숄을 두른 그녀는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고요. 머리에는 빨강과 하얀색 리본 장식을 둘렀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당대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인물과 악기는 어김없이 왼쪽 벽을 향해 배치돼 있고요. 손바닥만 한 작은 작업실에서 그리다 보니 구성이 한정되어 보입니다. 제한된 구성이기는 해도 섬세하게 통일된 빛으로 인해 주변 장식 하나 없이도 공간과 깊이에 대한 분위기와 깊은 인상을 창조해 냈습니다.

 

 

 

 

이 작품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을 1904년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이아몬드 광산 재벌로 20세기 최고 컬렉터 중 한 사람인 알프레드 베이트가 자신의 소장품 책자를 발간하는 작업을 했지요. 그는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 미술관에 기증하기도 했는데, '버지널 앞에 앉은 젊은 여인'은 자신이 개인 소장했던 작품입니다. 그가 타계하면서 이 작품은 동생에게 넘겨졌고, 이후 동생이 자신의 아들에게 유산으로 남겼죠. 이 아들이 1960년 런던 화상에게 판매 의뢰한 것을 브뤼셀의 한 화상이 구매, 40년 넘게 소장했습니다. 화상이 2002년에 죽으면서 그의 유가족에 의해 경매에 나오게 된 작품입니다.

 

 

발견 이래 오랫동안 모작으로 여겨졌던 작품이기도 하고요. 안료 성분 분석 등 급격히 발전한 과학적 연구에 힘입어 진품으로 판명되는 행운을 얻은 작품입니다.  2004년 경매에서 소품임에도 불구하고 350억 원이라는 높은 가격에 낙찰됩니다.

 

 

 

 

<천문학자>,/ARTSBEE

 

 

 

책생 위에 놓인 물건은 지구본이 아니라 별자리를 표시한 천구본입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천구본을 거쳐 천문학자의 얼굴을 비추고 있습니다. 지식의 빛이 천구본을 통해 천문학자의 통찰로 들어오는 순간을 표현한 작품이지요. 앞에 놓인 직물천을 통해 보는 이들과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관람객 사이의 거리 다시 그림과 그림 안의 인물과의 거리 이런 식으로 말이죠. 사적인 공간을 더 강조하면서 깊이감을 준 연출법입니다.  왼쪽 창문을 통해 실내를 비쳐주는 감싸 안은 빛이 천구본의 둥근 부분, 책, 학자의 얼굴, 손등으로 부드럽게 떨어집니다. 뭔가를 찾아낸 듯 몰입하는 모습이 사뭇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  The allegory of faith>, 1670/그림닷컴

 

 

 

 

페르메르가 말년에 그린  <믿음의 알레고리>라는 작품입니다. 이전의 주제가 주로 중산층의 실내 모습을  그렸다면  말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완전히 다른 형태 그림입니다.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오른쪽에 않아 있는 여인입니다. 여인은 믿음을 의인화한 모습으로 믿음을 상징하는 흰색과 진리를 뜻하는 푸른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믿음의 증거 자세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있고요. 또한 그녀는 인간 세상의 욕망을 상징하는 지구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진리가 지상의 모든 세속적 욕망을 없애고, 진리가 재배할 것을 나타냅니다. 여인의 발 앞에는 인간의 원죄를 상징하는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나뒹굴고  있습니다. 악(뱀)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과 승리를 말합니다. 바로 뱀을 내리친 돌은 교회의 초석인 그리스도를 상징하고요. 악을 물리치고 세워질 하느님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이룩된 하느님의 세계는 여인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고 있는 천장 유리구 속에 담겨 있습니다. 작고 투명한 유리구는 세상 모든 것을을 비추고 담을 수 있기 때문이죠. 페르메르가 1675년 갑작스럽게 사망하기까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재정적으로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세속적인 가치와 신앙 사이에서 묵상을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 

 

 

 

프랑스와의 전쟁 동안
그는 자기 작품을 판매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지 못해 슬펐고요.
그는 좌절감에 빠져
갑자기 하루 이틀 만에
건강을 잃고 죽어버렸습니다.
빚 좀 깎아 주세요.

 

 

 

 

작품이 시장에 많이 나와서 활발하게 거래되어야 명성이 쌓이는데, 그리기만 하면 사던 사람이 바로 구입해 가는 바람에 인지도가 쌓일 틈이 없었습니다. 당시 경제 위기로 네덜란드를 떠나거나 파산하는 화가들이 많았습니다. 당장 미술시장부터 얼어붙으니까요.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니 선택지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생활고, 스트레스,  격무에 시달렸습니다. 네덜란드 황금 시기에 태어 난 43살의 천재 화가는 가장의 임무에 충실하려다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렸습니다. 그의 아내도 오래 살 지 못했고요. 남은 11명의 아이들은 어떻게 자랐는지 , 본인들이 페르메르라는 화가의 아이들로 잘 커 갔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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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대저택에서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잔잔한 일상에 묻혀 사는 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화가들은 귀족들의 사치와 풍요로움을 화폭에 담아내는데 주력했습니다.

 

 

당시 왕이 살 던 베르사이유궁전은 파리에서 한 참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왕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귀족들이나 관리들은 궁전까지 왕복을 하려니 힘이 들고요. 그래서 파리를 포기하고 왕이 거쳐하는 베르사유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왕의 궁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름답고 우아하게 실내장식을 하고픈 안 주인들의 염원에 따라 여성스럽고 섬세하고 우아하고 장식적인 양식의 로코코 (Rococo) 미술이  유행을 하게 됩니다. 

 

 

샤르댕은  18세기 로코코 양식이 유행하던 시절 소재 면에서 다른 화가들과 엄격히 다른 세계를 추구했습니다. 귀족들의 호사스러움에 휩쓸려 다녔던 당대의 화가들과 달리 그는 시민계급을 대표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평범함을 모티브로 합니다. 가령 평소 사용하던 사물들 냄비, 주전자 등의 소박한 주방도구와 생선, 달걀 등 음식 재료를 늘어놓고 정물화를 그리는 식으로 말이죠. 

 

 

샤르댕이 활동하던 시절 막강한 권위를 가진 프랑스 아카데미는 그림의 주제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규칙을 정했습니다.  그림에도 서열이 있었다는 말이죠. 역사화, 초상화, 장르화(,풍속화,풍경화), 정물화 등으로 말입니다.

 

역사화는 신, 성자, 영웅의 서사등을 펼쳐 보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특별함과 도덕적 위대함을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죠. 이런 역사화를 잘 그리려면 실기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종교사, 고전, 신화 등과 관련된 지적 소양도 동시에 갖춰야 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역사화는 최상급 대우를 받았죠.

 

 

초상화는  왕과 귀족의 위세를 주로 기록했습니다. 인간의 형상을 묘사했기 때문에 상위 등급을 받습니다. 반면 세속적 주제인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풍속화와 인간의 지배를 받는 자연이 주제인 풍경화는 하위 등급으로 분류됐습니다. 장르화라고 불립니다. 

 

일상의 사물, 과일, 꽃 등 움직이지 않는 (죽은)대상이 주제인 정물화는 최하위 등급이었고요.

 

당시 모든 화가가 역사화가로 성공하는 꿈을 꿨습니다. 역사화가로 명성을 얻으면 작품 주문이 많이 들어오고 그림도 비싸게 팔 수 있었거든요. 화가들에게 역사화는 출세의 지름길인 동시에 경쟁이 치열한 곳이었습니다.

 

샤르댕은 다른 화가들과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움직이는 것을 그리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기질에도 맞지 않았고요. '화가는 모든 것을 자기 머릿속에서 찾아 구상을 해야 한다.'라는 역사화의 대의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이젤 앞에 놓아두고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정물화를 그리는 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갑니다. 돈벌이와 정 반대의 노선을 걸어간 거죠.

 

 

 

Saint-Germain-des-Pres/O'Bon Paris

 

 

 

 

 

https://www.youtube.com/watch?v=Y9sD-S2tNro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1699-1779)은 가구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지구인 생 제르멩 데 프레 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정규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단아 였습니다. 18세기 프랑스 화단은 에로틱한 누드화, 정원의 밀회, 귀족들의 침실 등 유혹적인 장면을 표현한 그림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던 시절입니다. 그렇다고 프랑스 화단에서 왕따였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는 당시 제 3계급(1급: 왕, 귀족/ 2급:성직자)으로 치부당했던 검소한 생활을 하 던 시민들의 모습을 자신의 화폭 위에 재현해 냅니다. 로코코의 화려함보다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려 진 풍속화와 정물화로 말입니다. 

 

 

 

 

 

<The Ray>,1725-26/wikipedia

 

 

 

그것은 인간의 표현과
묘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그것의 놀라운 얼굴 묘사는
정확히
똑같은 그 생선의 살, 피부, 피이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비평가 ,드니 디드로(Dennis Diderot)

 

 

 

 

< The Ray(La Raie),1725-26>

 

이 작품의 중심에 내장이 제거된 가오리 (홍어(skate)로도 알려짐)가 매달려 있습니다. 그 상처와 반투명 살은 내부 구조를 드러내고요. 흰색 표면과 배를 갈라 드러난 연분홍색의 내장이 생선 장수 눈에는 '고놈, 참 실하다.'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식가라면 막걸리 한 사발에 홍어 삼합을 떠 올릴지도 모르고요. 제 눈에 벽에 저 자세로 걸려 있으니, 눈과 입처럼 보이면서 핼러윈 파티에 뒤집어쓴 유령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이 그림 앞에 선 다른 이들도 가오리의 멍한 유령 같은 눈빛이  경악스러웠나 봅니다. 굴 몇 개와 생선 두 마리도 보입니다. 비린 생선 냄새를 맡고 용케 찾아들어 온 고양이 녀석이 귀와 꼬리를 바짝 세우는 걸 보니 '너 , 오늘 딱걸렸어.'하는 앙칼진 표정입니다.  왼쪽에서 쏟아지는 빛 덕분에 부엌에 있는 모두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작품은 실제 오브제들을 이와 같은 구도로 배열해 놓고 그린 것이 아닙니다. 샤르댕이 구도를 먼저 스케치한 후 그 구도에 맞는 사물들을 상상하여 배열한 후 그린 '구성 연습을 위한 거짓 정물'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한 특징입니다.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의 리셉션을 위해 제작된 작품입니다. 그의 후기 작품 <찬장,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The Buffet,1728)>과 함께 제시된 작품 이지요.  <The Ray>로 인해 샤르댕이 '동물과 과일에 재능이 있는 화가'로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첫 걸작으로 간주하는 작품이고요. 이 작품으로 인해 25살의 샤르댕은 프랑스 최고로 권위 있었던 예술 기관으로부터 정식으로 아카데미 회원자격이 주어집니다. 정물화라는 가장 인정받지 못한 분야에서 종종 단순한 '기술'로 무시받 던 분야에서 공식적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죠. 

 

 

 

 

 

각각의 구성 요소들이 주는 실제와 흡사한 현실감은 이후 화가들에게 있어 하나의 전형적인 '정물'의 규칙처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샤르댕이 그 림 속 가오리를 그리는 사실적인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죠. 흩어진 굴 껍데기를 가볍게 밟으면서 등을 아치형으로 구부리고 털을 곤두세운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왼쪽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물고기 모양의 생명 없는 수척함이 뚜렷이 부각되고요. 생사를 막론하고 집결된 대상들은 모두 왼쪽에 모여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주방 기구들이 모여 있고요.

 

 

 

이 작품은 아카데미가 소장하고 있다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루부르 박물관에 소장되게 됩니다. 미술계에 세잔, 마티스, 마네 등에게 영향을 줍니다. 마티스는 샤르댕에게 '사물의 감정을 그릴 줄 아는 화가'라며 치켜세우기도 합니다.  이 그림을 보고 간 문학계에 드니 디드로, 마르셀 프루스트 등에 영향을 끼칩니다.

 

 

 

17세기의 이름없는 네덜란드 화가들처럼  샤르댕 또한 반사광선의 처리를 연구하였습니다. 따뜻하고 밝은 색의 바탕칠과 인물의 머리 부분을 두드러지게 하는 기술적 방법을 베르메르의 그림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림물감을 충분히 이용하여 연속해서 칠하고 그 위에 불투명한 색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스컴블(scumble) 효과를 주는 등 매우 깊이 있는 색조를 만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또한 정취가 부족한 네덜란드 회화의 사실주의에  세부적인 유사함과는 구별되는 프랑스적 특징인 간결함과 직접성을 더하기도 하지요. 

 

 

 

 

 

 

<Lady Sealing a Letter>,1732/Canvas Replicas

 

 

샤르댕은 1731년 마르게리트 생타르와 혼인합니다. 2년 뒤 최초의 인물화인 <편지를 봉하고 있는 부인>을 발표했고요. 그때부터 샤르댕은 정물화나 <식사전의 기도>와 같은 가정생활을 다룬 실내화와 <팽이를 들고 있는 아이>와 같이 일이나 놀이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 남녀를 다룬 반인물화를 번갈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같은 주제를 자주 되풀이 해서 그렸습니다. 같은 유형의 작품들을 여러 점 남겼고요. 1735년 그의 아내가 죽은 뒤 작성된 재산목록은 그들이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무렵에는 이미 샤르댕이 화가로서 유명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Woman Drawing Water from an Urn>,1733/Meister Drucke

 

 

 

구리 물통이 인상적입니다. 오늘날 똑같은 모양새로 여름철에 자주 사용하는  가벼운 플라스틱 재질의 물통 생각이 났습니다. 물이나 청량 음료 등을  만들어 다수의 모임에 들고 가기도 하거든요. 덕분에 18세기 프랑스 어느 중산층 가정의  세간살이를 엿볼 수 있어 좋습니다. 어느 시대나 가사노동과 육아로 고단했을 여성들의 삶을 생각하게 되고요. 

 

 

 

<The Washerwoman>,1733/Artvee

 

 

 

<빨래하는 여인>과 같은 장면들은 샤르댕이 나중에 장르화인 풍속화로 전향하면서 그려진 작품입니다. 샤르댕은 정물화 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수익성 차원에서 좀 더 윗단계인 장르화에 도전합니다. 그리고 있 던 정물 속에 움직임이 있는 사람을 그려 넣어 소재를 확대하기 시작합니다.그 당시에는 성공한 화가들에게 필수적인 기술로 여겨졌습니다. 이 그림들은 난이도와 정교함 때문에 더 놓이 평가되었죠.

 

 

 

빨래를 널기 시작하는 뒷 모습의 여인이 보입니다. 약간 산만해진 순간에 옆으로 눈을 돌린, 한 여성의 발그레한 볼도 인상적이고요. 빨래로 가득 찬 큰 통에 손을 담근 채 무엇이 그녀의 시선을 잡았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한참 호기심 많을 나이의 아이를 흥미로운 놀잇거리 하나 들려 서로의 시간을 한 공간에 묶어 놓습니다. 놀거리가 마땅찮으니 거품놀이면 어떻습니까? 하루종일 엄마 옆에 붙어 있을 수 있는걸요. 준비된 낮은 의자에 걸터앉아 진지하게 거품놀이를 시작해 봅니다.   단순한 이 놀이가 뭐라고 대롱 끝에 불어지는 풍선 모양의 거품은 빛을 받아 온갖 색으로 물들기도 하고 가볍게 떠 하늘로 오르기도 하며 꿈이라도 실어 볼까 싶으면 이내 터트려져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녀석도 은근 이 공간의 터줏대감인가 봅니다. 배경처럼 한 자리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죠. 당시 쥐들이 많아 가정집에서 많이 키웠던 모양입니다. 살아있는 조연 역할 톡톡히 하는 것 같습니다. 

 

 

 

 

 

<Soap Bubbles>,1733-1734/wikipedia

 

 

 

 

샤르댕의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바니타스 정물화만큼 상징과 알레고리를 내세워 지나치게 의미를 전달하려  애쓰거나 교훈을 주고자 설교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있는 사물과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해 자연스럽게 보여줄 뿐이죠.

 

 

 

비눗방울 놀이를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소년이 두터운 벽돌 난간에 기대어 긴 대롱으로 비누 거품을 불고 있습니다. 오른 팔꿈치 옆에는 비눗물이 든 작은 유리컵이 놓여 있고요. 소년의 머리는 가지런히 묶여 뒤로 넘겨져 있습니다. 대롱을 쥔 오른손과 이마에는 밝은 빛이 부서져 어둡게 칠해진 벽돌 난간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림의 오른편에는 모자를 쓴 작은 꼬마가 비누 거품이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까치발을 하고 있나 봅니다. 오히려 비누방울 놀이는 이 아이에게 더 어울릴 것 같은 데 말입니다. 갈색을 띤 재킷의 옷주름, 하얀 셔츠의 색조는 조화롭고 풍요롭게 채색되어 있습니다. 그림 속 인물과 정물들은 의도된 균형감으로 잘 배치되어 정교한 구성미를 느끼게 하고요.

 

 

 

구성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순수함, 덧없음, 그리고 찰나의 젊음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샤르댕은 이 작품에서 인물을 사각형 모양의 돌로 만든 창문에  배치하였습니다. 창문 난간 밖을 향해 걸친 팔과 머리는 큰 삼각형을 이루고 있고요. 키 작은 어린 소년의 모자에서 또 다른 작은 삼각형이 반복됩니다. 구성의 초점은 전체 캔버스에 덮여있는 따뜻한 갈색 색조의 바탕 위에 방금 만들어진 동그란 형태의 투명하게 반짝이는 비누 거품으로 수렴됩니다.

 

 

 

이 작품은 샤르댕이 서른 중반에 그린 작품입니다. 갓 결혼하여 딸 마그리트-아그네스와 아들 장-페에르가 태어난 후였죠. 겨우 걸음마를 떼며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아버지가 된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며 붓질을 했을까요? 이 작품 속 인물은 그림을 그릴 당시의 실제 모델이라기 보다 작가의 내면세계에 그 자신과 아들의 초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들 장-피에르는 자라서 아버지에 이어 화가가 됩니다. 그는 당시 화가 지망생들이 동경하던 아카데미의 로마상을 획득하고 이탈리아 유학까지 떠났으나, 결국 베니스의 운하에서 익사한 채 발견되지요. 샤르댕이 죽기 7년 전에 벌어진 일입니다. 죽음과 삶의 허무를 엄숙하고 절제된 필치로 그려내던 화가의  아들은 베니스의 밝은 햇빛 아래 그림 속 반짝이는 비누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The Governess>,1738/ArtUK

 

 

배드민턴 라켓과 셔틀곡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가정 교사인 듯한 그녀는 밖에 나갈 때 쓸 모자를 털려다 아이에게 한 소리 하나 봅니다. " 학교 가야 하는 데 , 너 언제까지 저런 것들 가지고 놀거니? "뭐 이런 식의 훈계를 듣는 모양입니다. 불만스럽지만 다소곳이 눈을 깔고 듣고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옆에 놓인 반짇고리가 한 깔끔 , 한 성질 하실 것 같아요. 

 

 

 

 

샤르댕은  단순한 색채와 부드러운 조명으로 고요한 집안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그의 작은 화면 속에 두 개로 갈라진 상반된 세계들이 존재합니다. 열린 문 너머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바깥세상과 가정교사가 굳겐하게 지키고 있는 가정의 질서, 장난감들이 주는 쾌락의 세계와 맞은편에 놓인 반짇고리가 상징하는 성실한 노동의 가치, 그리고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아이와 교양을 갖춘 중산층 출신의 가정교사가 그들입니다. 샤르댕은 위대한 업적만을 그리던 이전의 미술에서 도외시했던 것들, 즉 가정과 여성, 중산층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어린아이들을 온전한 사회의 일꾼으로 만들어 내보내는 것이 바로 이들이었으니까요. 양육과 훈육을 책임진 '가정의 여성'이 '어머니'가 아니라 점이 특이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까지 상류층 자녀의 양육은 유모와 가정교사의 몫이었습니다. 과거의 많은 위인들이 모두 '아줌마'들 손에서 자란 셈이죠. 

 

 

 

 

<The Little Schoolmistress>,1735-36/Art.U.K

 

 

 

 

놀고 싶은데 볼그레한 볼을 가진 포동한 아이가 고사리 손으로 무엇인가 가리키고 있습니다. 문제는 가리키는 글자가 도대체 생각이 나지 않네요. '어제 그렇게 ~가르쳐 줬는데 그것도 몰라 '하는 불호령이 깐깐한 그녀에게서 떨어질 것 같습니다. 웅얼거리는 아이가 그녀 역시 답답한 모양이고요. 전체적인 분위기가 화기애애하지 않은 걸 보면 말이죠. 머리에 쓴 장식이 참 독특합니다. 

 

 

 

샤르댕은 가벼운 붓터치와 우아한 색채로 정물화와 장르화를 많이 제작했습니다. 샤르댕 그림의 원류는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시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시대 네덜란드 회화는 독특한 시각적 명확성을 지니고 있었죠. 크기가 작고 불필요한 내용이 없었거든요.이 작품 역시 십 대로 추정되는 한 소녀가 아이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많은 샤르댕의 그림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엄숙한 침묵입니다. 배경이 되고 있는 장식이 없는 평범한 실내는 프랑스의 중산계급 시민의 검소한 가정생활을 보여줍니다. 어떤 배경도 두 주인공 사이의 관계에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샤르댕의 작품들의 단순함은  18세기 동시대 화가 프랑수아 부셰가 전형적으로 묘사한 로코코 양식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살롱에서 샤르댕의 장르화 그림이 점점 인기가 많아지는 걸 막을 수 없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과 왕족들의 수집품들에 들어가는 것 또한 막지 못했고요. 그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의 작품들 중 많은 작품이 판화로 복제되었습니다. 

 

 

 

 

 

<Girl with a Racquet>,1737/wikipedia

 

 

 

 

 

샤르뎅의 일상을 담은 작품 중에  <셔틀콕을 들고 있는 소녀>입니다. 이 작품은 살롱전에 출품하여 엄청난 영광을 안겨주었습니다. 뺨에 홍조를 띤 소녀가 배드민턴 라켓과 셔틀콕을 쥐고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모습입니다. 부드럽게 퍼져 있는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쓰고 있는 레이스 모자와 밤색의 드레스 위에 입은 하얀 앞치마는 소녀가 하녀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한 소녀의 푸른색의 드레스 리본에는 가위와 바늘쌈이 매달려 있어 배드민턴 라켓과 셔틀콕은 운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부드럽게 퍼져 있는 드레스와 나무 의자, 라켓과 소녀는 단순한 녹색의 배경과 대비되면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가위와 셔틀콕 등 세부 묘사가 뛰어난 작품입니다.

 

 

 

<Boy with a Spinning-Top>,1738/wikipedia

 

 

 

<시장으로부터의 귀가(The Return from the Market)>,1739/wikipedia

 

 

 

이 그림은 1739년 살롱전에 전시된 것으로 특히, 구성이 돋보입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구리 물통 때문에 소녀가 그림 앞으로 더 바짝 다가와 있는 듯 느껴집니다. 생각에 잠긴 소녀는 단조로운 현실의 일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듯 넋이 나간 표정을 을 짓고 있습니다.

 

시장 봐서 부엌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입니다. 살짝 바랜 푸른색 앞치마 차림의 그녀는 한 손에 고깃 덩어리 다른 한 손에 커다란 빵을 들고 탁자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문을 열고 또 다른 손님을 맞는 어린 가정부에게 쏠려 있고요. 빵, 포도주병, 접시, 도기그릇, 왼쪽의 구리 물통들까지 샤르댕이 부엌 정물화를 통해 자주 그리던 것들입니다. 정물화에 대한 샤르댕의 자신감이 잘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특히 빵과 포도주병 그리고 바닥의 그릇은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로 그림의 균형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샤르댕이 치밀한 계산하에 물건을 배치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소한 풍경에 아름다움을 불어넣는 샤르댕의 장르화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판화로도 제작돼 많은 사람들에게 팔렸습니다. 

 

 

 

 

<Saying Grace(La Benedicite)>,1740/wikipedia

 

 

프랑스 중산층 어느 가정집에서나 벌어지고 있을 법한 장면입니다. 식탁보의 청결함이 만져질 듯 합니다. 식기의 부딪힘이 들릴 듯하고요. 기도를 마치고 식탁에 앉은  큰 아이는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 음식을 식기 전에  빨리 먹고 싶습니다. 엄마의 시선은 어린 동생에게 가 있고요. 북을 가지고 놀랐 던 아이는  더 놀고 싶은 데 '얼른 기도 안 하고 뭐 하니?' 하는 엄마의 시선이 따갑습니다. 엄마는 가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마 감사기도를 할 때까지 동시에 다른 일을 하면서 시선을 뗄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저 음식이 식기 전에 얼른 기도를 마쳐야 할 텐데 말입니다. 샤르댕의 그림은 이렇듯 무겁지 않은 주제로 관람자가 더 편안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합니다. 

 

 

 

18세기 특유의 가족의 부드러움을 가미시킨 그의 작품은 교훈적인 무거움이나 과도한 감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가라앉은 색 구성과 조용한 조명에 의해 더 강조됩니다. 샤르댕은 그의 그림들의 다양한 요소들의 배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구성은 세밀하고, 세 인물의 삼각형 구조에서 만들어진 안정성 또한 그 장면의 고요함을 더합니다. 

 

 

그는<Saying Grace>의 여러 버전을 그렸는데 그중 세 작품은 1740, 1746년, 1761년에 살롱에 전시되었습니다. 1740년 완성된 원본은 왕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 그림은 루이 15세 사망 후 10년간 잊혔고요. 그러다 1845년 재발견됩니다. 1869년 성공한 의사이자 예술품 애호가였던 루이 라 카즈(Louis La Caze)의 위대한 기증품을 통해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게 됩니다. 1761년 살롱에 전시되었던 수평 구성 버전은 현재 분실된 상태입니다.

 

 

 

 

 

 

<The Hard-working Mother>,1740/wikipedia

 

 

 

<Basket of Wild Strawberries(Le Panier de fraises des bois)>,1761/wikipedia

 

 

 

 

 

그는 이 부차적인 장르를 최고,
가장 놀라운 예술 상태로 끌어 올렸다.
아주 흔한 물체를
간단히 다루어
렌더링의 마력을 통해
아름답게 변모시키는
재료 그림의 증진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론가 에드몽(Edmond)와 쥘 드 콩쿠르(Jules de Goncourt) 형제-

 

 

 

 

 

 

 

 

 

 

 

소복하게 쌓아 올린 과일 바구니를 잡채로 대체해 놓으면 얼마나 먹임 직스러울까를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음식을 저렇게 쌓아 놓으면 먹음직스럽거든요. 보기도 좋고요.

 

 

<산딸기 바구니>는 그의 후기 정물화 시대의 모범입니다. 화가는 일상적이고 가정적인 물건들의 단순함에 여전히 집중합니다. 이제는 기하학적인 구성에 좀 더 정교한 눈으로 접근하고요. 부드러운 딸기 피라미드는 배경의 부드럽게 완화시킨 갈색과 대조적으로 빛, 짙은 빨강, 그리고 드문드문 섞인 녹색을 잡아내며 캔버스 중앙에 번쩍입니다. 한쌍의 카네이션의 밝은 흰색은 딸기의 붉은색을 훨씬 더 극명하게  드러내고요. 이러한 색깔의 파열 덕분에  그림이 활기차졌습니다.

 

 

 

샤르댕의 후기 정물화의 물체들은 우연히 배열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카운터의 수평은 유리잔의 물, 고리버들 바구니의 가장자리, 그리고 오른쪽의 작은 과일 그룹에 의해 형성되는 두 번째 평행 평면에 의해 강화됩니다. 중앙을 약간 벗어난 카네이션을 테이블 가장자리에 의도적으로 위태로운 위치에 배치했네요. 시각적으로 물리적으로 살짝 혼란을 일으 킵니다. 또한 딸기의 삼각구도는 유리잔이나 복숭아로 형성된 더 큰 피라미드의 정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것의 배가된 기하학적 구도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0년의 연습 끝에, 샤르댕은 형식적인 요소들로 자유롭게 연출할 수 있을 만큼 정물화의 장르를 완벽하게 마스터했습니다. 유리잔의 번쩍거리는 물과 활짝 핀 꽃의 부드러운 꽃잎들이 그의 전문성을 더욱 입증하는 놀라운 자연주의로 표현됩니다. 

 

 

 

<self-portrait with Spectacles>,1771/Drouot.com

 

 

 

파스텔 화랑으로 가서
그가 70대에 그린 샤르댕의 자화상을 보시오.
그의 코 끝에
미끄러져 내린 두 개의 새 렌즈 사이에
끼어 있는 대형 안경 위에
둔감한 눈동자를 가진 그의 피곤한 눈이 있다.
눈은 마치 많이 보고, 많이 웃고, 많이 사랑한 것처럼 보이고,
부드럽고 자랑스러운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응, 나는 늙었어!
나이가 들면서
둔탁해진 흐릿한 달콤함 뒤에는 아직도 빛이 난다.
-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bst)-





샤르댕의 인생 후반기에 그린 자화상들 중 하나입니다. 날카로운 갈색 눈을 가지고 우리를 향해 한 마디 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외모의 솔직한 묘사가 눈에 들어오고요. 그의 코에 섬세하게 자리 잡은 안경, 화려하고 기하학적 무늬의 스카프, 복잡하게 얽힌 파란색과 흰색 모자!!! 패션니스타가 따로 없네요.  고집스럽지만 당당한 노 화가의 모습이 근사합니다. 

 

 

 

 샤르댕의 시력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그가 항상 일했던 납 성분이 함유된 유화 물감으로 인해 악화되어 갑니다.  경력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는   파스텔로 눈을 돌립니다. 파스텔은 그에게 최대한 다양한 색상과 질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1771년 살롱에 다른 여러 작품들과 함께 전시된 이 파스텔 작품의 등장은 그의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후기 파스텔 초상화들은 놀라울 정도로 친밀하고 작품 속 모델들의 심리적인 깊이를 전달합니다. 그의 얼굴에 있는 음색의 병렬 배치로 인해 그는 조각적이고 거의 실물처럼 보입니다. 샤르댕은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예술계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다음 세기가 되어서야 프랑스 예술계의 대열에 오를 수 있었고요.  

 

 

 

 

 

말년에는 파스텔 초상화를 그렸고, 1775년 살롱에 파스텔로 그린 2점의 자화상과 아내의 초상화 루브르 박물관)를 출품했습니다. 샤르댕은 자기 작품의 복제 판화로 생전에 명성을 누렸고요.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 샤르댕의 작품은 견고한 추상성을 가진 구도 때문에 높이 평가받기 시작합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하나의 사조를 형성하기도 했고요. 그는 정물화에서는 적어도 세잔의 출현 이전에 최고의  가장 위대한 순수화가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입체주의에서부터 추상표현주의까지 많은 현대의 예술운동은 그에게서 영감을 얻기 때문이죠.

 

 

 

 

약 200여 점 정도의 작품만을 남긴 샤르댕은 꽤 오랜 시간 동안 꼼꼼히 제작하던 작업방식 탓인지 다작의 화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에는 아카데미 회원으로 오십여 년 간 활동하며, 만 여든의 나이로 루브르 근처에서 세상을 떠난 화가가 그린 삶의 흔적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샤르댕의 작품에는 18세기 미술이 가진 많은 것이 없었습니다. 도덕적 교훈주의, 관능적인 유혹, 로코코의 낭만적인 환상, 내러티브와 이념, 상징과 알레고리, 그리고 화려한 기교를 과시하는 스택터클이 없었습니다. 서민과 중산층의 묵묵한 일상을 조용하고 소박하게 담은 화가였죠. 또 순진하다는 느낌이 들정도로 소박하고 진지하게 눈에 보이는 것에 충실한 화가였습니다. 화면을 구조적으로 단순화시키고 대상으로서의 사물과 정경 그 자체가 전하는 순수하고 단단한 진실을 담고자 애썼던 화가입니다. 그런 덕분에 화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의 그림은 그의 시대를 벗어나 계몽주의를 너머 근대의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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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에너지 넘칩니다. 스탠다드 슈나우저의 모든 재미, 에너지, 그리고 풍성한 수염을 가지고 있고요. 미니어처 슈나우저의 덥수룩한 턱수염, 긴 눈썹, 접힌 귀는 사교성, 적응력, 지능과 함께 이 품종의 대표적인 특징들입니다.

 

 

원래 이름은 '미니어처 와이어 헤어드 핀셔'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탄생지는 이름에서 풍기듯이 독일이고요. 기묘한 눈썹과 덥수룩한 턱수염 때문에 어린 미니어처 슈나우저라도 노신사 같은 모습입니다. 실크 조끼와 회중시계만 있으면 말입니다.

 

 

white miniature schnauzer/wikipedia

 

 

 

 

크기에 따라

 

미니어처 슈나우저(체고:30-35cm, 체중:4-6kg)

스탠다드 슈나우저(체고 : 42-50cm, 체중 :16kg 내외)

자이언트 슈나우저(체고: 60-71cm, 체중: 32kg 내외)

 

크게 3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미니어처 슈나우저는 긴 콧수염, 사각턱, 턱수염이 조상인 스탠더드 슈나우저와 닮았습니다. 모든 슈나우저 품종은 턱수염이 덥수룩한 주둥이가 가장 특징입니다. 그래서 주둥이를 뜻하는 독일어 '슈나우제'에서 품종명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유럽의 독일 지도/Freepik

 

 

스탠다드 슈나우저는 14세기 독일에서 탄생했습니다.  원래 농장에서 쥐와 같은 유해 동물을 잡기 위해 길러졌습니다. 미니어처 슈나우저는 푸들, 아펜핀셔, 미니어처 핀셔 또는 폭스테리어 및 스코티시 테리어와의 교배를 통해 탄생했습니다. 이 견종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미니어처 슈나우저 품종이 1888년 독일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899년 도그쇼에서 독립된 품종으로 선보였고요. 이후로 현대 가족이 좋아하는 품종으로 진화했습니다.

 

 

 

슈나우저는 독일의 오랜역사를 가진 품종이기도 합니다. 14세기 미쉐린버그에서는 사냥꾼과 그의 발 및에 웅크리고 있는 슈나우저의 동상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1620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유명한 "Night-Watchman"동상은 작품에 나타난 최초의 슈나우저 중 하나입니다. 

 

 

미니어처 슈나우저/펫페

 

 

대부분 활발한 성격입니다. 머리도 다른 개들에 비해 상당히 좋은 편이고요. 지능지수 12위를 기록할 정도로 우수한 지능 지수를 갖추고 있습니다. (AKC:미국 애견 협회) 탄탄한 몸을 가진 테리어답게 활동량이 많습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죠. 장난치기도 좋아하고요.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경비견으로서의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슈나우저는 이름처럼 주둥이로 물어뜯는 버릇이 심한 편입니다. 이 버릇만 조심하면 다른 견종들보다 훨씬 키우기 쉬운 편입니다. 집안에 물어뜯을 만한 것을 사전에 정리하고 대신 장난감이나 개껌을 주어 물어뜯고 싶은 욕구를 해소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안의 작은 물건들이 모두 뜯겨 있는 불상사가 벌어질 것이니 조심하십시오.

 

 

https://www.youtube.com/watch?v=f4E1vsCRPVM

 

 

 

 

농장에서  작은 동물을 잡던 습성이 있어 낯선 방문객이나 작은 동물을 보고 사납게 짖어 다소 시끄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을 지키기에는 안성 맞춤이죠. 작은 동물을 쉽게 잘 무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있는 가정은 부적합합니다. 쥐를 잡던 개라 햄스터나 작은 반려동물을 함께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1ARNR28ws8

 

 

 

 

V자 모양의 앞으로 접힌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덥수룩한 턱수염과 진한 눈 주위의 눈썹을 가지고 있고요. 흰색, 검은색, 블랙 앤 실버 또는 희끗희끗한 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중모로 뻣뻣한 겉털과 부드러운 속털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 생기 넘치는 칼 모양의 꼬리를 가지고 있고요. 며칠에 한 번씩 빗질을 하고, 5-8주 마다 미용사를 방문하여 다듬으면 미니어처 슈나우저의 뻣뻣한 겉털과 부드러운 속털의 두꺼운 이중모를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털이 잘 빠지지 않는 편이라 실내생활에 적합하지만 산책을 좋아하므로 자주 산책을 시켜주어야 합니다. 집안에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미용은 등을 짧게 밀고 얼굴과 가슴에 난 털은 조금 길러주는 것이 좋습니다. 턱수염과 구레나룻, 눈썹 등은 깎지 마시고요. 다리와 발바닥도 마찬가지입니다. 털이 슈나우저 감각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죠. 털이 긴 부분은 뭉치지 않도록 항상 빗질을 해주시는 것 잊지 마시고요. 산책 후에 털에 붙은 이물질을 제거해 주어야 털이 엉키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출처:애니멀 러브

 

시각 장애견, 노견을 위한 엔젤링/제라미펫

 

 

 

 

 

더위와 추위에 약합니다. 겨울에는 옷을 입혀서 보온에 신경써 주셔야 합니다. 유전적으로 진행성 망막 위축증(Reitnal Atrophy)이라는 치명적인 유전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막 혈관들이 감소되어 빛을 흡수하고 반사, 감지 역할을 하는 망막이 위축되고 변성되어 서서히 시력을 소실하는 병입니다. 원인은 유전적 변성이며 미니어처 슈나우저에게 가장 잘 나타납니다.푸들, 닥스훈트, 시베리안 허스키, 코카스파니엘, 레트리버 등 강아지들과 고양이에게서도 나타나는 질병입니다.

 

 

 

 

항산화제와 같은 약을 통해 진행을 늦출 수는 있으나 실명이 불가피하다고 합니다. 발병은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8살 때 일어날 수 있으며 진행도는 반려동물에 따라 다릅니다. 발병 이후에는 녹내장, 백내장, 등 안 질환을 동반할 수 있으므로 케어가 필요합니다. 안과 전문 수의사님께 검사를 받아보세요. 또 다른 안 질환이 동반될 수 있기 때문에 강한 햇빛을 피하게 하시고 시력 관련 항산화 보조제를 먹이면 좋다고 합니다.

 

 

 

시각 말고도  후각과 청각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서서히 생활에 적응해 갈 겁니다. 빠른 적응을 위해 보호자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1.집안 구조 변경은 삼가 주세요.

2. 반려동물을 만질 때 놀라지 않도록 머리 위로 던지지 마시고 먼저 이름을 부르고 코밑으로 손을 가져가 냄새를 맡게 한 후 천천히 다가가세요.

3. 활동성이 많을 경우 넥 카라나 시각장애견을 위한 보조 기구 에인절링을 이용해 부딪침을 방지해 주세요.

4. 날카로운 곳이나 자주 부딪히는 곳에는 모서리 보호대와 같은 것을 붙여주세요.

5. 산책 시 줄을 매시고 다른 강아지와의 접촉을 삼가 주세요.

6. 안구 질환에 대해 꾸준한 관리를 해주시고 강한 자외선은 피해 주세요. 

 

 

 장애가 있더라도 반려인의 지속적인 보살핌으로 행복한 일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hqEL4cP5yc

 

 

 

 

 

 

미니어처 슈나우저의 작은 크기는 규칙적인 운동만 한다면 도시견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이 견종은 가족 친화적인 품종으로 보호자만 함께 있으면 거의 모든 곳에서 살 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훌륭한 반려견으로 키울 수 있으니 도전해 보세요. 선천적으로 영리한 품종이니 교육이나 훈련을 받았을 때 성과가 아주 빠르게 나타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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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니는 1800년대 프랑스의 북서부 브리타니 지방에 있는 소작농들의 사냥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사냥은 일반 소작농에게도 보편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프랑스, 브리타니지도/123RF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개는 프렌치 스페니얼(French Spaniel)이었습니다. 사냥꾼과 브리더들이 이 스파니엘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죠. 좀 더 짧은 모질과 강력한 후각을 지닌 다목적 사냥개를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욕구에 의해 1800년대 중반 프렌치 스파니엘과 잉글리시 세터를 교차 교배시켜 만든 품종이 바로 브리타니라고 합니다.

 

 

Brittany/American Kennel Club

 

 

 

원산지:프랑스

수명 : 10-14년 

크기:소형견 

체고/체중

              숫: 48-50cm/15kg

              암 47-49cm/13kg

 

모발은 풍부하며 약간 웨이브형이나 곱슬은 아닙니다. 다른 스파니엘 견종과 같이 비단결 같지 않고요. 색은 다크 오렌지와 백색, 리버와 백색으로 반점은 벨톤 모양(백색을 바탕으로 하는 혼합의 색)입니다. 털의 길이는 보통이며 조밀하고 귀와 가슴 배 다리의 위쪽에 깃털이 나 있습니다. 

 

 

 

<Brittany Dog>/American kennel Club

 

 

개량을 통해 얻어진 강아지들 중에 소수는 꼬리가 없거나 뭉툭한 짧은 꼬리를 가지고 태어났어요. 이런 형태의 번식이 계속 되면서 오늘날 브리트니의 외형이 갖춰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개량을 통해 얻어진 견종들이다 보니 강력한 후각을 지니고 있어서 도요새 사냥에 제격이었습니다. 육지와 물을 가리지 않고 사냥감을 회수해오는 우수한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죠. 이로 인해 프랑스 상류층뿐만 아니라 밀렵꾼들에게도 브리타니는 탐나는 품종이었습니다. 특히 조류 사 냥 중에 가장 작고 우수한 품종으로 평가되어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24m0lLbFHM

 

 

 

 

 

Brittany Dog/Pinterest

 

 

1907년 프랑스켄넬클럽에 등록됩니다. 1925년 미국(멕시코)으로 건너 온 브리타니는 그 해 미국켄넬클럽에 인증이 되었고요. 처음에 사냥꾼들 사이에 꼬리가 없는 브리타니의 포인팅(조류의 위치 확인) 능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브리타니의 훌륭한 기질은 곧 인정받게 됩니다. 포인팅 품종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품종이 되고요.

 

 

원래 인간의 사냥을 돕는 조렵견(수렵을 돕는 개)으로 육성되었고 그 특징을 살려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구조견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소방관이 재난 현장에 훈련 받은 브리타니를 데려가 풀어놓으면 녀석이 실종자의 흔적을 찾아내 짖어대는 방식의 조력 활동인 것이죠.

 

 

 

9.11 사태  때 브리타니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세기의 참사 앞에서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 옆에는 늘 브리타니가 있었습니다. 실종자를 찾아내는 것은 녀석들의 기본 임무였죠. 구조 활동에 너무나 지쳐 잠시 쉬고 있는 소방관을 발견하면 잽싸게 달려가 부비부비 하며 힘을 주기까지 했다고 해요. 이 사실은 당시 미디어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알려져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튼튼한 체력뿐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까요.

 

 

타고난 사회성으로 사람이나 다른 개에게 친절한 것이 장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상 속에서는 단점으로 타나나기도 하죠. 조렵견 구조견으로서의 습성은 일반인의 기준으로 볼 때 별 것 아닌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쉽습니다. 격렬하게 짖거나 공격적 행동을 보여 이웃을 놀라게 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될 경우 분쟁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브리타니와 함께 사는 사람은 개가 늘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도록 신경 써야 합니다. 개를 키우다 보면 별 것 아닌 일에 사람이 먼저 호들갑을 떨기 바쁘거든요. 브리타니가 무언가를 보고 마구 짖어대도 격하게 말리거나 함께 흥분하지 말고 잔잔하게 대응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sVoxOACapQ

 

 

 

 

명랑하고 쾌활합니다.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활동적인 성격이고요. 브리타니는 사냥감을 쫓고 회수해오는 능력이 뛰어나며 사냥감의 위치도 잘 알려줍니다.  주인옆에 바싹 붙어서 다니는 경향이 있어 훈련시키기 쉽고 다루기 쉽기 때문에 사랑스럽고 주인에게 복종 잘하는 온화한 견종입니다.  유순하고 순종적이라 심한 훈련을 필요치 않고요. 초보 사냥꾼에게는 브리타니가 가장 적합한 사냥견이 될 수 있습니다.

 

 

키와 몸길이가 같은 정사각형의 체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리가 길고 골격이 가볍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달리기 쉽고 놀랄만한 민첩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꼬리가 없거나, 10cm 정도의 길이만 유지됩니다. 털은 스파니엘 보다 훨씬 적고, 곧거나 또는 곱실거리는 형태의 모발을 가지고 있어요. 지나치게 두춤한 털은 덤불이나 우거진 숲에서는 사냥 시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아요. 들판에서 장시간 뛰어놀 수 있는 체력과 열정을 지닌 품종이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v7vXW98mBc

 

 

 

운동량이  많기 때문에 아파트나 빌라 등의 공동주택에서 키우는 것 보다는 , 마당이 있는 주택이나 한적한 교외에서 키우는 것이 바람직해요. 성격이 좋기 때문에, 운동량만 충족시켜 줄 수 있으면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에서 키울 수 있는 견종입니다. 산책은 하루에 적오도 두 번 이상, 총 1시간 이상시켜주는 것이 좋습니다.

 

 

산책할 때에는 목줄을 꼭 해줘야 합니다. 사냥본능이 있기 때문에 산책 중에 작은 동물이나 새 등의 동물을 사냥감으로 인식해서, 달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훈련을 시킬 때, 꾸지람이나 체벌을 하면 오히려 성격이 소심해질 수 있기 때문에, 훈련을 할 때에는 간식이나 칭찬 등의 긍정적인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브리타니 스파니엘은 식탐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량을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비만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보호자가 충분하게 운동을 시켜 주시고, 성견이 되면 사료 급여량도 조절해 줘야 합니다. 비교적 건강한 견종이기 때문에 잔병치레는 적은 편입니다.

 

 

하지만 심장 판막증이나 심장마비 등의 심장관련 질환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간질이나 관절염에도 잘 걸린다고 합니다. 결막염이나 백내장 등의 안구질환에도 취약하기 때문에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934년 미국켄넬클럽에 '브리타니 스파니엘'로 공식 등록이 되었고 이후 1982년 사냥 스타일이 스파니엘 보다 세터에 가깝다고 인정하여 명칭에서 '스파니엘'을 뺀 '브리타니'로 품종 명칭을 변경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브리타니 스파니엘로 불리고 있습니다.

 

실컷 놀게 배려해 주세요. 대부분의 상황에 무심하게 대처하시고요. 환경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훈련소에 정기적으로 보내 실컷 뛰놀고 다른 개들과 어울리게 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모든 개들에게 해당하는 일이지만, 눈가, 귓구멍 관리 정기적으로 해주시고요. 관찰과 정기적인 검진이 최선이자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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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한 말입니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현장에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다시 한번 언급해 유명해진 말이기도 하지요. 영국 풍경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의 작품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올려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윌리엄 터너와 함께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 화가들 가운데 가장 뚜렷한 흔적을 남긴 화가 입니다. 그는 특히 영국의 전원을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인 풍경화라는 그릇에 담아낸 것으로 유명하지요. 지금이야 그의 작품들이 높은 평가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52세의 늦은  나이로 왕립미술원 정회원이 되기까지컨스터블은 영국 기성 화단에서 중요 인물로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동시대에 활동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4.23-1851.2.19)에 비해 각광받지 못했지요. 오늘날 컨스터블은 터너와 더불어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를 대표하는 두 거장으로 일컬어집니다. 똑같이 낭만주의 풍경화가로 분류되지만  터너와 조금 다른면이 있습니다. 윌리엄  터너가 자신의 마음에 비친 풍경을 드라마틱하게 과장하거나 비틀어서 표현했다면, 컨스터블은 작품 속에 자기의 내적 감정을 담으면서도 풍경화가 토대로 삼고 있는 자연주의 (사실주의)에 보다 충실한 느낌입니다. 자연에 대한 평온하고 시적인 성찰이 담긴 그의 그림은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적 통찰에 비교되기도 하고요. '위대한 자연주의자'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영국 서퍽주/wikipedia

 

 

 

 

영국 토박이입니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문 토박이들은 그 지역의 특징과 풍물에 대해서 잘 알고 이해 하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들은 외지인들이 잘 찾아내기 힘든 그 지역만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잘 알고 있고요.  또, 그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컨스터블이 바로 그런 화가입니다. 

 

 

존 컨스터블은 영국 남동부지역인 서퍽(Suffolk)의 이스트 버골트(East Bergholt) 출신입니다.  플랫포드 제분소(Flatford Mill)와 에섹스(Essex)에 데덤 제분소(Dedham Mill)를 소유한 부유한 옥수수 상인 골딩(Golding)과 앤 니 와츠(Ann nee Watts)의 둘째 아들이고요.  그가 태어난 영국 남동부 지역은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특징입니다. 1년 365일 동안 같은 날씨를 찾기 힘들다고 해요. 덕분에  다양한 날씨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그의 가족들은 컨스터블이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기를 희망했습니다. 컨스터블은 7년 동안 아버지를 도와 옥수수 사업에서 종사했습니다. 그의 나이23세가 되던 해인 1799년,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니다 싶었나 봐요.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그는  왕립 아카데미 부설학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실물 그리기를 공부했습니다. 고전 작품에 익숙해져 갔고, 훈련을 마친 후  그레이트 말로 사관학교(Great Malow Military School)의 미술 교사 자리를 제안받지만 거절합니다. 안정이 보장된 자리 대신 전문 풍경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Boat-Building near Flatford mill,1815/wikipedia

 

 

 

 

부유한 제분업자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저급한 '화가로 실패한 인생을 살까봐 반대를 했습니다. 여느 아버지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업을 물려받는 대신, 아버지 소유의 방앗간, 옥수수 농장, 선박 건조장 풍경을 담아냈습니다. 당시 그림은 기록적인 역할도 담당하기 때문에 그의 그림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19세기 영국 작은 마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터너와는 달리 방앗간, 댐, 버드나무, 오래된 썩은 판자, 끈적끈적한 기둥, 벽돌 세공에서 물이 새는 소리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거친 자연과 폐허에서 낭만을 찾던 유행에서 동떨어졌어도 주눅 들지 않았고요.이런 유행을 허세라고 여겼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서른아홉 살 이전에는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명성과 재정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어도 컨스터블에겐 사랑하는 영국의 풍경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의 작품 <플랫포드 밀 근처에서의 배 만들기 (Boat-building near Flatford Mill),1815>입니다. 컨스터블은 보통 야외에서 스케치를 한 다음 그 스케치를 토대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후대의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전적으로 야외에서 작업이 시작되고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처음부터 완성까지 야외에서 그려진 그림이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영향을 받은 , 인상파로 치면 '외광파'에 속하는 수련 연작의 '모네'처럼말이죠.

 

 

첫인상은 오늘날 자동차 정비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수리하기 쉽도록 근처 강둑에 설치를 해놓았네요. 배의 보이지 않는 아랫부분을 보아야 하니 땅을 최대한 깊이 파 놓은 것 같습니다. 뭔가를 손질하느라 골몰한 남성이 앉아 있습니다. 사람의 사이즈가 작아 보이는 걸 보면 배의 크기가 무척 큰 가 봅니다. 주변에 널브러진 연장들 , 불에 올려놓은 커다란 팟에 연기가 나는 걸 보니 맛있는 점심이 끓고 있나 봅니다. 근처 다른 일로 바쁜 남성 한 분도 보이네요. 오른쪽으로 자세히 보니 아빠 따라온 듯한 여자아이도 보이고 웅크린 모습의 보터콜리처럼 보이는 개도 보이네요. 

 

 

 

 

 

 

 

 

 

 

 

오늘날의 큰 악습은 진실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하려는 시도인 예술적 기교이다.

-존 컨스터블-

 

 

 

 

 

 

당시 풍경화를 그리던 화가들 대부분이 장엄하고 웅장한 풍경을 찾아서 광범한 지역을 여행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그런 유행과  달리 컨스터블은 한 번도 영국 밖으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 컨스터블에게 그러한 풍경은 별로 호소력을 갖지 못했고요.  오히려 그의 고향인 서퍽의 스투어 계곡(Stour Valley)의 평온하고 정감 있는 풍경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영국의 곡창지대라고 불리는 이곳은 1년 내내 같은 날씨를 찾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날씨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빛이나 바람이 시시각각 변하는 효과와 이슬 맺힌 아침 풍경 등의 풍부한 소재들을 관찰하기에 용이했고요. 이런 주변환경으로 인해 컨스터블이 풍경화를 계속 그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 일 것 같습니다. 

 

 

그는 고향 서퍽 지방의 풍경을 집중적으로 화폭에 옮기면서, 야외에서 유화물감으로 스케치를 하거나, 광선과 대기의 효과를 보다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 다양한 색채들을 실험했습니다. 덕분에 객관적이고 정확한 관찰을 할 수 있었고 가능한 자신이 본 진실하고 객관적인 풍경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시골의 전경과 그곳 사람들을 생생하게 담아내면서도 그림 속에 담긴 농경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동정하거나 의미짓지 않고 그저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구름>,1822/Google Arts & Culture

 

 

 

 

나는 스투어 강 둑에 놓여 있는 모든 것들을
나의 조심성 없었던 소년 시절과 결부짓는다.
그 장면들은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찰한 자연을 세밀한 드로잉과 수채화로 연습하던 그가 평생을 이토록 영국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낸 이유는 고향에 대한 큰 애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토박이답게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몸에 깊이 스며든 농촌을 아름답게 표현하며 세상에 알리려 합니다. 항상  집 근처 야외에서 작업을 한 것에서 고향에 대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구름과 대기와 빛에 변화하는 자연을 직접 탐구하며 소박한 시골 정경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 존 컨스터블은 풍경화 장르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유럽 전역의 미술에 영향을 끼쳐서 풍경화의 혁명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정작 영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요. 

 

 

이 구름 그림은 '밝음'과 '어둠'의 불연속적인 변화를 포착한 작품입니다. 흰색이 점점 변해 회색이 되고, 그 위로 깊은 푸른빛 음영이 덧씌워집니다. 컨스터블은 1821년에서 1822년 사이 직접 야외로 나가 하늘의 구름이 보여주는 변화무쌍하고 미묘한 변화를 그린 수백 점의 유화 스케치를 제작했습니다. 컨스터블은 나중에 이 작업을 '하늘 관찰하기(Skying)'라고 이름 붙이지요. 그림 뒷면에 계절적인 차이. 그림을 그린 시각, 바람의 방향, 그 밖의 날씨 조건 등 을 메모해 놓았는데, 기상 현상에 대한 그의 과학적인 관심의 소산이었습니다. 그가 지금 태어났다면 기상관측하는 아나운서 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그 무엇도 컨스터블에게 자연보다 더 인상적일 수는 없었으며, 그의 구름 연구 (Cloud Studies)는 자연이 가장 단순한 형태를 가지고 우리에게 얼마나 크고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썼습니다.  컨스터블은 그림이란 감정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맥락에서 컨스터블의 구름 연구는 이런 생각이 확실히 드러난 그림이지요. 풍경을 그릴 때 그는 정서적이고 시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관찰도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컨스터블의 아내 마리아 빅넬(Maria Bicknell, Mrs John Constable),1816/wikipedia

 

 

 

<Golding Constable's Flower Garden>/ArtHistory Reference

 

 

컨스터블의 아내 마리아 빅넬입니다. 아름답지요. 컨스터블은 1809년 그녀가 12살이었을 때 처음 만났던 마리아 빅넬(Maria Bicknell)에게 청혼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할아버지는 컨스터블 가문이 사회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해서,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합니다. 마리아에게 상속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말이죠. 한정된 수입으로 아내와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던 이 커플은 비밀 서신을 계속 주고받습니다.

 

 

 

1816년 컨스터블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있게 됩니다. 컨스터블의 아버지 존 시니어(John Senior)는 자녀들을 위한 재산을 남겼습니다. 세 자매와 형, 둘째 컨스터블 , 그리고 막내가 그들입니다. 형은 토지 관리인으로 막내 동생 아브람(Abram)은 가족 전체의 이익을 위해 계속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컨스터블이 부유해진 것은 아니지만, 결혼에 필요한 재정적 안정을 가져오게 됩니다.

 

 

드디어 이 커플은 런던 필즈(Fields)의 세인트 마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둘러본 뒤 도싯주의 오스밍턴(Osmington)에 있는 피셔 주교를 찾아가 그의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을 보냈고요. 존 피셔(John Fisher) 주교는 Essex 지역 제분소가 있던 랭함교회 목사(Langham Church)로 있을 때 첫 인연이 있었던 분이시죠. 컨스터블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한 명이기도 하고요. 이 여행에서 잉글랜드 남서부 해안 도시 브라이튼(Brighton)과 웨이머스(Weymouth)의 바다를 스케치하게 됩니다. 이 여행은 컨스터블이 더 자유로운 붓놀림을 채택하고, 특히 하늘과 바다에 대한 표현에 보다 큰 감정적 강렬함을 선보이는 실험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The Cottage in a Corngield>1817/Art UK

 

 

 

https://smarthistory.org/john-constable-view-on-the-stour-near-dedham/

 

» John Constable, View on the Stour near Dedham

John Constable, View on the Stour near Dedham, 1822, oil on canvas, 51 x 74″ (The Huntington Library, Art Collections, and Botanical Gardens, San Marino, CA) Smarthistory images for teaching and learning: [flickr_tags user_id=”82032880@N00″ tags=”s

smarthistory.org

 

 

 

 

<흰색 말>,1918-1819/ARTLECTURE

 

 

 

 

 

1819년 아카데미 전시회부터 컨스터블은 야심 찬 시도를 선보입니다. 그림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늘려 캔버스의 가로길이가 6피트(182.88cm)나 되는 대형 연작 제작에 착수한 거죠. 이른바 6피트 캔버스(six-footers) 그림들로 스투어 강(River Stour) 주변의 풍경과 농민들의 일상을 그려냅니다.

 

 

 

당시로서 6피트라는 사이즈는 아주 드문 사이즈였습니다. 이런 큰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40세가 다 되었을 즈음이고요. 이 시기는 그의 작품 활동에 큰 전환점이 됩니다. 일단 크게 그려진 그림이니 눈에 확 들어오겠지요. 실제로 자신의 작품이 왕립 아카데미에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조금 더 눈에 띄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그 자신의 풍경화가 좀 더 고전적인 회화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방법으로 그림의 크기를 키웠고요. 나폴레옹 시대 신고전주의 그림들이 모두 큼직했거든요.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을 상상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시리즈로 제작된 6피트 사이즈의 그림들은 모두 스트르 강 인근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로 작업한 대형 캔버스 작품이 바로 <스투어 가의 풍경>이라는 제목이 붙기도 했던 <흰색 말>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존 컨스터블이 화가가 된 이래에 가장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 호평에 힘을 입어 로열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하고요. 이 작품 덕에  컨스터블의 오랜 소원이 이루어졌네요.

 

 

 

 

슈트를 강 남쪽 둑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좌측 아래에 있는 배에는 백마가 타고 있는 걸로 보아 말을 실어 나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 같습니다. 겁 많은 말을 옮기려니 힘이 좀 들겠습니다. 오른쪽 좀 떨어진 곳에 강물을 마시고 있는 소들이 보입니다.  수문과 초막을 비롯해 뒤쪽으로는 마을의 모습이 보이고요. 하늘 전반에 뭉게뭉게 떠있는 짙은 구름들과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의 표현이 생생합니다. 자연을 관찰하고 발견해서 얻은 색조를 기준으로 색을 사용했습니다. 물빛의 반짝거림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순수한 흰색으로 하이라이트를 올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고요.

 

 

 

 

화가들에게는 보통 평생 한 작품
또는 둘, 어쩌면 세 작품 정도 특별히
애착을 갖게 되는 작품이 있게 마련인데
내 경우에는 이 그림이 그렇다네

- 존 피셔에게 보내는 편지 중-

 

 

 

 

 

 

 

<흰색 말>은 존 컨스터블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을 존 피셔(주교님 조카)라는 친구가 구매하게 되는데 이 사람은 컨스터블의 초창기 활동에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입니다. 전해지는 설에 의하면 컨스터블이 이 작품으로 얻게 되었던 호평들과 작품을 팔아서 생긴 100기니 덕분에   화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후에  그림을 사갔던 존 피셔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자 그를 돕기 위해 다시 그림을 사 갔다고 합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이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나는 작업을 할 때, 6피트의 캔버스
앞에 서지 않은 나를 상상할 수 없네
-존 컨스터블-

 

 

 

 

 

 

<스트랫퍼드의 종이공장,1820/브릿지 경제

 

 

 

이 당시 풍경화는 신화 속 이야기나 역사적인 사건을 담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존 컨스터블이 영향을 받았던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의 <성 우르술라의 출항>도 종교적 테마를 담고 있습니다. 성인들의 일생을 담은 13세기 책 <황금전설> 속 일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거든요. 컨스터블은 이런 대가들의 작품을 공부하다가, 그림을 보고 그리는 것은'간접적 진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죠. 그러면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풍경으로 눈을 돌립니다. 신화 속, 책 속 저 먼 곳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땅 영국의 자연을 그리기 시작한 거죠.

 

 

컨스터블의 작품 <스티랫퍼드의 종이공장>은 그가 태어난 지역 공장의 풍경을 소박하게 담고 있습니다. 컨스터블은 자신이 나고 자란 서포크 지역을 소재로 많은 풍경화를 그렸죠. 그런데 그가 작업을 했던 무렵은 프랑스에서 바르비종 예술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세월을 낚고 있는 듯한 할아버지의 여유 있는 낚시질, 뭔가 입질을 했는지 골똘한 두 아이의 모습, 나룻배에 여인을 태우려는 듯한 모습 등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자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모습입니다. 

 

 

 

 

 

 

 

<건초수레(The Hay Wain)>,1821/wikipedia

 

 

 

 

 

컨스터블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건초수레'입니다. 영국 BBC방송에서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1위 풍경이라고 해요. 그것도 해마다  상위권 순위를 놓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산업혁명이 일찍 시작되어 영국의 농촌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렸어요. 이제 가고 싶어도 돌아갈 그림 속 풍경을 가진 영국 농촌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이유인 것 같아요. 

 

 

로열 아카데미 전시 당시 원래 제목이 '풍경, 정오(Noon)였어요. 영국의 여름 시골 풍경을 그린 이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는 조용하고 충만함입니다.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주변의 배경에 완전히 녹아들어 일체감을 주고요. 개인적으로 구름의 움직임을 참 잘 잡아낸 그림 같아요.

 

 

 

배경은 영국의 서포크 지방 스투어 강변의 한 평범한 농가 마을 데덤입니다. 그가 나서 자란 곳이죠. 무성하게 우거진 초록빛 배경에 대기와 빛이 변화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원경에서는 농부들이 목초지에서 건초를 베어내고 있습니다. 전경 얕은 물가를 지나가는 마차가 바로 목초지로 향하는 길이고요. 마차 위 소년은 스패니얼 종으로 보이는 강아지를 부르고 있고요. 조각배를 탄 낚시꾼이 일어서서 습지를 낚싯대로  드리우고 있네요. 왼쪽 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지붕과 굴뚝, 그리고 마차 마구의 붉은색이 초록과 보색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컨스터블이 활동하 던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입니다. 경제적으로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였지만 사회전체적으로 보수적이었죠. 그래서 라파엘 이전 시대로 , 즉 200년 뒤로 후퇴하는 그림스타일이 유행을 하게 되었어요. 라파엘 전파라고 합니다. 이런 그림들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역사도, 신화도 아닌 시골 풍경이 당시 영국인들의 눈에는 촌스럽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컨스터블은 영국에서 평생 단 20점의 그림만을 팔라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오히려 프랑스에서 단 몇 년 만에 20점도 넘는 그림을 팔았는데도 말이죠.

 

 

<건초 수레>는 후일 영국계 프랑스인 딜러가 구매해 1824년 파리 살롱에 전시했습니다. 당시로선 이례적인 크기 (130*185cm)의 풍경화였죠. 영국 왕립 아카데미 전시에서 첫선을 보였으나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는 영국의 시골 풍경이라 생각했던 거죠. 

 

 

 

 샤를 10세 프랑스 국왕이 주는 금메달을 수상하며 그림의 값어치가 상승하게 됩니다.

한 비평가는  이 작품을 보고 "이슬이 바닥에 구르는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농촌의 이런 사실적인 세부 묘사와 색채 처리는 밀레의 바르비종파에 영향을 줍니다. 또한 붓질의 자유스러움, 표현의 생동감, 특히 자연에 나가 직접 유화로 스케치하는 방법은 프랑스의 젊은 미술학도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광선과 바람의 효과, 이슬이 맺힌 아침 풍경 등 과학적 관찰에 의한 자연의 신선함을 현장에서 포착하려는 태도로 인해 그는 인상주의의 직접적인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터너와 함께 그의 풍경화는 보불전쟁(1870-1871년 프로이세-프랑스 간 전쟁)을 피해 영국에 머무르던 모네, 피사로, 시슬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프랑스 인상주의의 탄생을 도왔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이때부터 세계 미술사의 주도권을 완전히 쥐게 됩니다. 19세기 초 영국의 풍경화는 프랑스보다 훨씬 발전한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죠.

 

 

 

 

 

 

 

 

 

 

 

나는 풍경 위에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그 일반적인 효과뿐 아니라
특정한 어떤 날, 어떤 시간, 그리고 햇빛, 어둠 등을 기록한다.
또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
영원불변하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부터 포착되는
짧은 일순간을 표현하고자 한다.
-<명화의 재발견>-





헤이들리 성(Hedleigh Castle,1829/wikipedia



 

 

 

1828년 3월 장인어른이 돌아가셨고, 막대한 재산을 아내가 물려받아 재정적인 걱정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 일은 알 수가 없죠. 같은 해 11월 컨스터블의 아내 마리아 빅넬이 41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합니다. 당시 아내는 7번째 아이의 출산으로 쇠약해진 상태였고 , 일곱 명의 자녀를  고스란히 남기고 사망합니다. 컨스터블은 아내의 사망 이후 그 큰 슬픔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했고요. 이따금씩 간헐적으로 그는 우울증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의 마음 상태는 마치 헤이들리 캐슬 같은 그림 속의 폭풍이 곧 몰아칠 것 같은 하늘 같았고요. 그림 속  거친 붓터치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무지개가 있는 햄스테드 히스&nbsp; Hampsteas Heath with a Rainbow,1836/wikipedia

 

 

 

1830년대에 오면 컨스터블의 그림은 더욱더 표현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컨스터블은 진중한 자연주의 (사실주의)적 묘사를 목표로 하는 그림으로부터 벗어나 점차 빛과 대기의 움직임의 순간을 직접 포착하거나, 구름이 떼 지어 흘러가는 하늘, 녹음 짙은 숲, 강물이나 개울 등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컨스터블은 특히 이런 표현적 효과를 강하게 발휘할 수 있는 매체인 수채화를 이전보다 훨씬 더 자주 사용했습니다. 과장을 싫어하고 조용했던 그가 본 주변 풍경들입니다.

 

 

컨스터블이 죽기 1년 전 작품입니다. 가까이 어린 말  두 마리의 움직임, 하늘 위를 낮게 날고 있는 새들의 무리, 목을 축이러 내려온 소들 모두 일상을 살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비 온 뒤에 지상으로 내려앉은 무지개의 모습, 시시각각 변화하는 어디 하나 닮은 구석 없어 보이는 구름에 진심으었 던 집돌이 화가 컨스터블, 그가 그려낸  일상 속 풍경이 하늘 한 번 올려다볼 일 없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멈추고, 하늘 한 번 올라다 봐!'하고 넌지시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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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역사를 바꾼 커다란 사건 3가지를 손꼽자면 종교개혁. 프랑스 대혁명, 산업혁명 이렇게 꼽을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죽음 이후 유럽의 군주들은 빈 회의(1815)를 열고 나폴레옹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고자  머리를 맞대고 함께 했습니다. 혁명의 맛을 알아버린 시민들은 계몽주의로 무장한 채  더 이상 옛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요. 결국 나폴레옹 이전 시대로 건너갈 수 없게 됩니다. 

 

유럽지도의 중심에 해당하는 독일은 9개 나라와 국경선은 맞대고 있습니다. 유럽의 제후들 역시 독일이 통일이 되어 주변국들을 위협할 까 항상 노심초사했고요. 한쪽이 너무 커지면 힘이 균형이 깨지기 때문에 주변국들에 의해  독일은 다시 쪼개집니다. 35개의 공국과 4개의 대도시로 말입니다. 

 

19세기 초 정치, 사회적 상황으로 독일에 드리운 병적인 좌절감과 어두움은  엉뚱하게 예술과 문학에서 낭만주의 사조를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실연했다고 자살하는 지금생각하면 살짝 이상한 그런 이야기가 트렌드가 되어 인기를 모으게 되지요. 음악의 슈베르트는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라는 실연의 아픔을 독일 가곡들을 통해 전합니다. 다소 감정 과잉처럼 말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TW2pCG5kPI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123RF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는 1774년 독일 발트 해안의 항구도시인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에서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납니다. 루터파 신자인 아버지의 엄격한 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이 아버지 아돌프 고트리프 프리드리히(Adolf Gottlieb Friedrich)는 양초와 비누를 만드는 수공업자였습니다.

 

 

그는 7살 때 어머니가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납니다. 다음 해에는 누이 엘리자베스가 떠나고요. 13살 때 호수에서 얼음이 깨져 자신을 구하려던 동생 요한 크리스토퍼가 익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고요. 또 다른 누이 마리아가 발진 티푸스로 사망하는 고통을 겪지요. 죽음이 늘 그의  주변을 감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픈 경험들은  그를 평생 우울증, 대인기피증,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 내면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죽음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버리죠. 프리드리히는 가족들의 죽음을 통해 너무 일찍 그 비밀을 알아버리게 됩니다. 종교에 더 깊이 침잠하게 되고요. 자연스레   그의 작품 세계는 고독, 우울함, 경건함이 짙게 묻어나 있습니다. 프리드리히의  이렇게 복합적인  감정들은 마주하는  대자연을 범접할 수 없는 신의 모습처럼 표현하며 신비와 숭고함을 작품에 담게 됩니다. 

 

 

 

 

 

드레스덴/문화일보

 

 

 

그는 미술학교에서 소묘를 배웠고, 20살인 1794년 덴마크의  코펜하겐 왕립미술학교에서 유학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스타일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계발합니다. 자연의 신성함과 장엄함을 강조하고 자신의 감정과 상상력을 반영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 당시에 미술 전시회들로 유명했던 드레스덴은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프리드리히는 드레스덴의 시인들과 사상가들 그리고 화가인 필리프 오토 룽게로부터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의 회화가 인정을 받은 결정적 계기는 1810년 베를린의 아카데미 전시회에 출품된 <Monk by the Sea>(1809)과 < The Abbey in the Oakwood>(1808-10)을 빌헬름 황태자가 구입하면서부터입니다. 

 

 

 

<The Monk bh the Sea>1808-10/wikipedia

 

 

 

 

 

 

무한하고 균일한 공간 앞에서 
마치 
눈꺼풀이 잘려 나간 것 같은 느낌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1810년 베를린 아카데미의 전시에 이 작품이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결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형식의 풍경화에 대해 하인리히 폰 프라이스트의 묘사입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표현은 모래 해변과 검은 바다, 그리고 구름으로 가득 찬 어둑한 하늘이 이루는 수평선을 제외하고는 눈의 초점을 맞출 만한 곳이 없습니다. 불필요한 세부 묘사를 모두 생략해 버려 마치 동양화의 여백미처럼 무한한 공간감을 느끼게 됩니다. 덕분에 신비롭고 영적인 세계를 잘 표현했다는 평가죠. 



바다와 하늘이 이루는 두 개의 수평선을 가르는 단 하나의 수직선은 왜소하기 그지없는 수도승의 앞모습도 아닌 뒷모습입니다. 넓게 분포된 하늘은 네달란드식 풍경화의 영향이라고 해요. 지정학적으로 네덜란드는 지평선이 낮은 곳이라 큰 산이 없습니다. 보이는 곳이 다 하늘인 거죠. 캔버스 대부분을 차지한 하늘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수도승의 모습을 통해 대자연 앞에 점처럼 작은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수도승은 우리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어 우리도 그의 시선을 따라 허공이나 다름없는 풍경을 바라보게 됩니다.  처절한 고독과 공포감도 느껴지고요. 그런데 이 음침하고 메마른 바닷가는 사실 프리드리히가 자주 여름을 보내곤 했던 발트해의 뤼겐섬 풍경이라고 합니다. 사제 복장을 한 인물은 화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고요. 무한 앞에 방향을 잃은 인간의 혼돈과 절망,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는 내면적이고 우울했던 화가의 자화상인 거지요.




<The Abbey in the Oakwood>1809-10/wikipedia

 

 

 

 

Albert Boime 은 카스파르의 작품이 공포영화의 장면처럼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의 고딕풍에 등장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황혼 무렵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이 서 있는 숲 속 수도원 모습입니다. 주변이 너무 어두워 자세히 보아야 사람의 형체를 볼 수 있습니다.  발길 한 번 줄 것 같지 않은 이 폐허의 공간에서 고요한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끝나지 않는 겨울과 황폐와 절망을 읽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고비를 넘긴 겨울과 멀리 다가오고 있는 봄은 느낀다고 하고요. 개인적으로 후자였으면 합니다. 음산하게 뻗어 난 잔 가지들이 봄이 오면 잎사귀로 뒤덮여 무성할 테니까요.

 

 

그가 살던 시기는 유럽 전체에 걸쳐 물질주의가 점점 팽배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 대해 사람들의 염증이 점점 커짐에 따라서 정신적 영역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싹트고 있었고요.이상적인 세계에 관한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종종 우리를 둘러싼  자연적 세계(the natural World)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를 비롯해서 J.M.W.Turner(1775-1851), John Constable(1776-1837)같은 화가들은 "인간문명의 술수에 대항하기 위한 신의 신성한 피조물"로서 자연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The Cross on the Baltic>,1815/Wahoo Art

 

 

 

그의 작품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줍니다.  프리드리히와 동시대를 산 프랑스 조각가 다비드 당제를 <David d'Angers(1788-1856)>는 그를 가리켜 "풍경의 비극(the tragedy of landscape)"을 발견한 화가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년의 프리드리히는 작품이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위 작품은 전통적인 종교화의 상징들을 대체하려는 노력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보헤미아 지역을 여행하고 그린 그림이고요. 푸른 전나무나 담쟁이들은 그의 영적 감수성을 더 풍부하게 하는 소재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의 글에 따르면 산은 믿음, 나무는 희망, 석양의 빛은 그리스도 이전의 세계의 종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프리드리히는 풍경화가 종교적인 계시의 전달 수단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그의 생각이 잘 반영된 그림인 거죠. 이 작품의 주제는 그가 여러 번  사용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의 다른 풍경화들과 만찬가지로 북유럽의 강렬하고 시적인 풍경 묘사로 채워집니다. 그리고 세심하고 신중한 형식적인 양식으로 그려지고요. 그의 풍경화들은 직접 관찰하며 그린 것이지만, 자연을 충실히 담아 내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프리드리히의 이미지들이 세상에 대한 우울한 관조의 전형이 되었지만, 풍경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단지 개인적인 시각이 아닌, 그 시대의 풍조였습니다. 

 

 

 

 

 

낭만주의 화풍에 나타나는 자연의 개념은 문학 및 음악 뿐만 아니라 미술에서도 폭넓게 묘사되는 방랑자(wayfarer, or wanderer)의 모습을 등장시킵니다. 방랑자는 말 그대로 미지의 세계를 두루 여행하기 위해 집이 주는 안락과 안전을 포기한 사람이지요. 특히 독일문화에  많이 예시되고 있습니다. 이 테마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건의 중심 속에서는 결코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고, 그 사건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인간학적인 개념으로부터 나옵니다. 세계는  빈번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것에 맞설 수 없는 조화와 질서의 부재를 보여주지요.

 

 

낭만주의는 격렬하게 부는 태풍, 암울하고 산이 많은 풍경, 영원히 길을 잃을 것 같아 보이는 숲 등 자연을 가장 드라마틱한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이 풍경들은 극도로 음울하고 고독한 장소들이며, 절대자를 향한 저항할 수 없는 비이성적 탐구심에 이끌려 정처 없이 온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방랑하는 장소들입니다.

 

 

이 방랑자들은 루드비히 리히터(Ludwig Adrian Richter,1803-84)나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프리드리히는 정처 없는 이 방랑자의 오랜 방랑의 정수를 가장 성공적으로 포착해 낸 화가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wikipedia

 

 

 

화가는 자기 앞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본 것도 그려야 한다.
내면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면
앞에 있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는  19세기 독일 초기 낭만주의 화풍의 그림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그는 특히 중기 시대에 제작한 우의적 풍경화가로 유명합니다. 이 그림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때까지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사람의 뒷모습을 그린점입니다. 대자연에 압도되며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보는 이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거대하고 신비로운 자연 앞에 선 작은 인간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경건함마저 일으킵니다. 후세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입니다.

 

 

프리드리히는 세계와 관계 맺는 방법으로 여행을 자주 다녔다고 해요. 세속적인 성공을 뒤로 하고 독일 전역을 여행합니다. 자연의 원형을 잘 갖춘 바다나 험준한 산같은 곳으로 말입니다. 산 정상을 올라가 본 경험을 가진 분들은 충분히 느꼈을 겁니다.  자연의 광활함에 절로 경외감이 드는 광경을 말입니다. 자욱한 안개 바다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의 고독한 뒷모습이 보입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광활한 대자연에 홀로 마주 한  인간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개인적으로 작은 점 하나 같은 존재감 그래도 작아도 좋으니 그런 점 하나 찍고 가고 싶은 양가감정이 남성의 뒤태에서 읽히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그의 풍경화에서는 다른 풍경화에서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슬픔이나 외로움, 공포, 적막감 등이 느껴집니다. 거기에는 프리드리히의 불운했던 어린 시절의 영향도 한몫했고요.

 

 

 

 

<Chalk Cliffs on Ru''gen>, 1818/wikipedia

 

 

프리드리히 그림 중 모처럼 화사한 그림이 등장합니다. 독신생활을 하던 44살의 프리드리히는 1818년 아내 카롤리네 봄머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 그림은  신혼여행을 떠났을 때 작품이라고 해요. 세 사람 모두 여전히 뒷모습만 보이네요. 풍경이 고즈넉하고 아름답죠. 팔짱끼고 바다에 시선을 두는 이가 프리드리히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이런 곳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의 그림은 영국의 존 컨스터블이나 윌리엄 터너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그냥 감상하기만 하면 되는 기존의 풍경화가 아닙니다. 그의 그림은 편안하기보다는 뭔가 생각하게 만듭니다. 인생의 풍파와 어려움을 겪고 난 뒤 회한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하고요. 그로 인해 성숙한 인간의 고뇌와 번민도 함께 덤으로 오지요.  마치 칸트 같은 독일 철학자의 진지함이 화가인 그에게도 강하게 느껴집니다. 

 

 

 

<눈 속의 떨갈나무>/Pinterest

 

 

잔설이 남아있는 들판에 외롭게 서 있는 떡갈나무는 그가 가장 즐기던 소재 중 하나였습니다. 여기서 고목은 주로 기독교 이전의 이교적인 세계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화면 전면에 부러져 나 뒹구는 나무 가지들은 낡은 시대의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말해줍니다. 고목이 서서히 새로운 싹들이 움터 나오고 있고 잔뜩 찌푸렸던 날씨도 서서히 푸른 하늘을 드러내며 메시아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고요. 얼핏 단순한 풍경으로 읽혀지기 쉬운 그의 작품 세계는 마치 양파껍질처럼 한 커플씩 벗겨보는 재미를 독자들에게 줍니다. 

 

 

 

 

 

<창문 앞의 여인(Woman at a Window)>,1822/wikipedia

 

 

뒤태가 단아한 여인이 창밖을 보고 있습니다. 실내는 인테리어라고 할 만한 것이 딱히 없습니다. 어두운 단색의 직선의 모습이 오래되고 딱딱해 보이는 실내 풍경입니다. 오히혀 열린 창문 밖 세상이 훨씬 화사합니다. 적막하고 정갈한 방 안과 대조적으로 연녹색의  포플러 나무숲과 지나가는 배의 돛대가 보입니다. 비록 강과 범선은 보이지 않지만, 지나가는 저 돛대만 보아도  먼 곳으로 의 기나긴 여행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그의 부인 카롤린을 모델로 썼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의 얼굴과표정을 볼 수 없습니다. 이 고독한 관조에 그저 최대한 동참할 뿐이죠. 그녀도, 우리도 이쪽에 몸을 둔 채로 더 넓은 저 편의 무한한 공간을 상상해 보게 됩니다. 

 

 

 

<북극해(The Sea of Ice)>,1823-1824/wikipedia

 

 

1930년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그들은 카스파르의 작품을 북구 유럽적 특징을 구현한 작품으로 선전합니다. 카스파르의 작품을 국수주의적 특징을 구현한 작품으로 간주한 나치의 오해로 인해서 그의 작품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한동안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현대에 이르러 프리드리히의 대표작으로 손꼽힙니다. 발표 당시에는 독특한 구도와 절망감이 느껴지는 주제로 인해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죽을 때까지 팔리지 않았거든요. 인적이 끊긴 극지에서 두껍고 날카로운 빙해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범선의 조각들이 보입니다. 이 풍경은 낭만주의 자들에게 있어서 자연의 힘에 비해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미약하고 부질없는 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이 작품에서 삼각형이라는 구도를 반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화면 중앙의 압독적인 모습의 빙해는 그 날카로운 얼음판의 끝이 하늘로 치솟아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깊은 절망감을 안겨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차가운 색채는 북극의 배경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며 매혹적인 풍경을 보여 줍니다. 

 

 

 

 

<The Stages of Life>,1835/wikipedia

 

 

 

이 그림 속에 다섯 사람과 다섯 척의 배가 등장합니다. 그 다섯 사람은 인생의 각 시기를 말하고요. 다섯 척의 배는 인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스웨덴 국기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두 아이는 유년기를, 아이들 곁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는 청년기를, 중절모를 쓴 정장 차림의 남자는 중년기를,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뒷모습의 노인은 노년기를 나타냅니다. 한가운데 있는 십자가 모양의 배는 프리드리히의 신앙심을 암시하고요. 일상적인 바다 풍경을 숭고한 신의 경지로 승화시킨 작품입니다.

 

 

 

프리드리히는 1920년대의 표현주의 작가(Expressionists)들과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의 초현실주의 (Surrealists)및 실존주의 (Existentialists)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와서 1906년 베를린에서 그의 그림 32점과 조각들의 전시는 그동안 잊고 있던 그의 작품에 새로운 평가와 이해를 불러왔습니다.1970년대에 와서야 프리드리히는 진정으로 독일 낭만주의 화풍의 아이콘이자 국제적인 중요성을 가진 한 화가로 새로이 그의 명성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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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p it>이라는 표현에서 이름을 가져온 휘핏은 "빠르게 움직이다"라는 의미입니다. 

1930년대 아메리칸 켄넬클럽(AKC)은 하운드 그룹을 구분하며 총 32종으로 분류하였습니다. 테리어 그룹, 워킹 그룹, 스포팅 그룹, 하운드 그룹 등으로 말이죠.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비글, 닥스훈트, 바센지, 바셋 하운드, 아프간하운드, 그레이하운드, 이탈리안 그레이 하운드, 보르조이 등 하운드 견종에는 매력적인 친구들이 많습니다. 가장 오래된 사냥견으로 유명하고요. 시각, 후각, 종합 감각을 활용해 사냥을 하는 견종들이라 멀리서 윤곽만 보면 작은 말 한 마리가 달리는 모습처럼 우아하다는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휘핏, 그레이하운드, 이탈리안그레이하운드처럼 눈에 보이는 사냥감을 빠른 속도로 추적하는 시각 하운드는 뛰어난 운동 능력과 방향 전환에 강점이 있습니다. 바람의 저항을 적게 받기 위해 날렵하고 얇은 체형에 상대적으로 두꺼운 가슴을 자랑하는 친구들입니다. 평소에는 발고 상냥하며 점잖은 성향이지만, 사냥할 때는 맹렬한 기세로 사냥감을 향해 달려가는 매력견입니다. 매끈한 휘핏의 옆얼굴 좀 보세요. 우아한 모습이 사슴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휘핏(whippet)은  19세기 무렵, 영국의 탄광업자가 스냅 레이싱(snap racing:토끼 사냥경기)을 목적으로 베들링턴 테리어에 맨체스터 테리어와 그레이하운드를 교배시켜 만들어 냈다고 해요. 그 후 이탈리언 그레이하운드(Italian Greyhound)와의 교배를 통해 현재의 휘핏으로 완성하게 됩니다. 

 

 

휘핏이 이용되던 스냅 레이싱은 경기의 잔혹성 때문에 결국 영국 내에서 폐지하게 됩니다. 그 후 휘핏은 래그 레이싱(rag racing:중인이 흔드는 천 조각을 보며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경기)에서 래그 도그로 활약하게 됩니다. 레이싱 외에도 어질리티나 루어코어싱(루어뒤쫓기)등에도 뛰어난 감각이 있다고 해요. 여러 가지 다방면으로 자질이 많은 견종입니다. 단 고양이를 키우는 가정에서는 휘핏의 사냥본능 때문에 고양이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휘핏 /출처:크라우디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는 휘핏은 탁월한 시력을 이용해 사냥감을 쫓아가 잡아내는 사냥개를 뜻하는 시각형 하운드로도 분류됩니다.  이러한 시각하운드 견종은 크게 짖지 않아 실내 반려견으로 선호도가 높은 편입니다.

 

멋진 몸매와 날렵한 움직임으로 귀족 같은 매력을 뽐내는 휘핏은 길에서 마주쳐도 탄성을 자아낼 정도이며 엄청난 주력을 보여줄 것 같은 경주견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3BjJ7x_v2c

 

 

 

영국이 원산지로 달리는 모습이 채찍(whip)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휘핏은 달리기, 경주 등과 관련이 많습니다. 

 

과거 영국에서는 경주견, 사냥견으로 그레이하운드 견종이 인기가 많았는데 관리 비용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키우기 어려워 여러 종의 교배로 휘핏이 탄생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경주마/그레이하운드로 불리기도 함)

최고 속도 약 60km에 달할 정도로 휘핏은 단거리 경주견으로서는 그레이하운드를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gGvv0uDB8c

 

 

 

그레이하운드를 소형화시킨듯한 휘핏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매끈하고 날렵하며 우아한 매력까지 겸비하고 있습니다. 머리형과 주둥이는 긴 편이며, 귀는 뒤쪽으로 재껴진 채 접혀있어 예쁜 얼굴이 더욱 도드라져 보입니다. 휘핏의 크고 검은 눈은 가만히 보고 있자면 금방 말이라도 건넬 듯 깊이가 느껴지고요. 앞다리는 곧게 떱어 있으며, 꼬리는 가늘고 아래로 늘어진 모습입니다. 짧고 촘촘한 휘핏의 털은 검은색, 흰색, 황갈색, 파랑, 크림, 얼룩무늬 등 다양한 색과 다양한 패턴이 있습니다.

 

 

휘핏은 단 모종의 특징인 추위에 민감하기때문에 겨울철 산책이나 바깥 활동 시에는 외투를 착용시켜 주는 것이 좋습니다. 휘핏의 성향이 단아하고 지적이긴 하지만 하루 두 번 40분 이상의 충분한 운동은 필수입니다. 

 

 

벰벰, '이탈리아 그레이 하운드', '휘핏'전용으류개발 /뉴스펫

 

 

 

 

 

휘핏이 성견이 되면 약 8-12kg정도의 날렵한 체형의 중형견 크기로 성장하며 두꺼운 흉곽과 우아함을 보여줍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환경 적응력이 좋으며 활동량, 운동량이 많기 때문에 충분한 산책, 운동, 놀이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온순한 성향이라 아이들도 잘 돌보고 놀아주는 편입니다. 다른 개들과도 문제없이 어울리고요. 특히 같은 품종의 개에게는 더 친근하고 다정하다고 합니다.

 

 

휘핏은 영리하고 충성심 강해 경비견으로의 역할을 할 정도이며 지능이 높아 교육, 훈련이 쉬운 편에 속합니다.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훈련은 거칠고 강압적인 방법보다는 게임하듯 즐겁게 시켜주면 더 만족스러운 효과를 얻을 수 있겠죠. 

 

 

영국 중부 버밍엄에서 열린 2018 크러프츠 대회 최우수 챔피언을 차지한 휘핏 '티저'/한국일보

 

 

 

 사냥감을 쫓으려는 본능이 있어 산책 시 목줄, 가슴줄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경계심, 두려움, 긴장감이 많은 예민한 성격이기에 사회화 시기에 적절한 교육과 꾸준한 훈련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평균 수명 약 12-15년 정도이며 건강하고 튼튼한 편에 속하지만 유전적으로 안구 질환(백내장, 망막염 등) , 갑상선 기능 저하증, 심장 질환, 피부 질환, 구개열 등은 주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외에도 간질환, 췌장염, 뇌 질환 등에 주의하는 것이 좋고 예방 접종과 정기적인 건강 검진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휘핏은 노견이 되면 심장병이 발생할 확률이 높으며 식욕저하, 호흡곤란, 무기력증, 기침 등의 증상이 나타납니다. 단모종이며 피부가 얇아 피부 질환의 가능성이 높으며 백내장, 진행성 망막 위축증, 각막 이영양증 등의 안구 질환도 신경 쓰는 것이 좋습니다. 이외에도  휘핏의 체형, 골격은 과체중,비만일 경우 무리가 많이 가기 때문에 체중 관리가 중요하며 유전적으로 난청의 가능성이 있어 검사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4r0VuUFLEc

 

 

 

반려견을 분양받기전, 데리고 오는 반려견의 특징과 장점, 단점 등을 파악하고 신중하게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강아지 때 모습이 이뻐서 데려왔다가 성장하면서 달라지는 성격이나 털 빠짐 탓에 또는 케어하기 힘들어서 등등 당양한 이유로 유기견들이 발생하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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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글이 샤페이는 몸에 주름이 많아 개성이 넘치고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마니아층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견종입니다. '모래처럼 거칠한 피부'라는 뜻이라고 해요. 본래 중국에서 가축들을 보호하는 경비견이나 왕실의 경비견으로 이용이 되었고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나라에서는 인기지만 중국에선 많이 볼 수 없는 견종이라고 하네요.

 

 

샤 페이/아시아투데이

 

 

 

기원전 206년부터 기원후 220년 사이쯤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부분의 강아지 품종의 역사가 불확실하듯 샤페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티벳쪽에서 살던 큰 견종이 샤페이가 되었다는 설과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중국의 광둥 성 지역의 농부들이 만들었다는 두 가지 설들이 존재합니다.

 

 

샤페이는 야생동물로부터 가축을 지켰으며 식용견이나 투견 목적으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주름많은 강아지로 유명한 샤페이의 독특한 외모는 투견 시에 상대방에게 물려도 늘어진 주름특성상 공격에 대한 피해가 적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후 세금을 부과하며 멸종위기에 처했었지만 미국잡지에 샤페이가 소개되며 독특한 외모로 1978년 기네스북에 오르게 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진기한 강아지 품종으로 말이죠. 정식견종으로 등록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남을 수 있었답니다. 

 

 

 

샤페이(Shar Pei)/나무위키

 

 

체고:50-55cm

체중 16-21kg

 

모색은 화이트를 제외한 모든 색이 허용되는데 연한 노란색부터 크림색, 붉은 색, 검은색, 짙은 갈색, 초콜릿 색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샤페이 이름답게 털이 굉장히 짧고 거친 느낌이며 피부가 느슨한 편이라 주름이 많은 것이 특징이나 성견이 되면서 주름은 점차 줄어드는 편입니다. 

 

 

출처: 123RF

 

 

머리는 크고 둥근 모양을 갖추고 양쪽의 귀 간격은 넓고 평평한 모양으로 눈은 작고 아몬드 형태랍니다. 주름많은 강아지로써 샤페이의 가장 큰 특징이며 모질과 주름에 따라서 호스코트 샤페이, 브러시코트 샤페이, 베어코트 샤페이로 세 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차우차우와 같이 보라색 혓바닥을 갖고 있는 것도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얼굴이 크고 넙적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납단 오해를 받지만  굉장히 침착하며 얌전한 편입니다. 특히 보호자에게 있어서 애교가 많고 충성심이 강한 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의외로 겁도 많은 성격으로 작은 강아지도 무서워하는 샤페이들이 은근히 많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o4R_Vfc6VQ

 

 

 

 

샤페이 양육시 꼭 알아둘 점입니다.  샤페이는 독립심이 강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만큼 분리불안에 대한 걱정은 덜한 편이고요. 다만 혼자 사색을 즐기는 것을 좋아하기에 보호자분의 지나친 스킨십이나 애정은 오히려 부담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그로 인해 신경질을 낼 가능성도 있고요. 이러한 특징 때문에 샤페이는 낯선 대상에 대한 경계심이 사춘기 이후에 갑작스레 강해지게 될 수 있으니 이러한 문제행동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화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낯선 개들이나 사람들이 무조건 다가와서 불편하지 않도록 해주고 성향에 잘 맞는 친구들과 놀면서 긍정적인 인식을 쌓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키는 역할을 해왔던 만큼 외부소리에도 민감하지 않도록 다양한 소리들도 많이 들려주고 요.

 

 

 

샤페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털이 상당히 많이 빠지는 강아지 품종에 속한답니다. 털이 풍성한 베어코트를 비롯한 브러시코트나 호스코트 타입 또한 짧은 털들이 섬유에 박힐 정도로 직모에 두꺼운 모질을 갖고 있어요. 자주 빗질을 해주셔서 죽은 털을 제거해 주셔야 털 빠짐을 그나마 줄일 수 있습니다. 털은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두고 키우시는 것을 권합니다.   모질에 따라서 단모타입은 실리콘 빗으로 쓸어내듯 빗질을 해주시면 됩니다. 중단모 타입은 슬리커 빗을 이용해서 꼼꼼하게 빗질을 해주시고요.

 

 

산책교육 처음부터 잘 시켜주세요. 샤페이는 중형 강아지 품종으로써 꽤나 힘이 쎈 편입니다. 처음부터 산책습관을 잘 형성해 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줄 당김이 심하거나 과도하게 흥분하며 컨트롤이 어려워지는 등 문제점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차분하게 간식을 주면서 걷는 연습 위주로 산책을 시켜주시는 게 중요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UroCVZNsFs

 

 

 

 

샤페이는 주름많은 강아지다 보니 틈사이로 습기가 빠져나가지 않고 남아있으면서 피부병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부병 발생을 지속적으로 가려움을 느끼며 상당한 고통을 유발하게 되어 성격이 사나워질 수 있습니다. 목욕을 시켜주실 때에는 주름사이사이 꼼꼼하게 말려주시는 게 중요합니다. 습도가 높은 여름철에는 목욕하지 않더라도 습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바람으로 말려주며 관리를 해주셔야 합니다.

 

 

 

쭈글이 강아지 샤페이의 겉모습은 귀엽지만  피부병 외에도 눈꺼풀이 안으로  말려들어가며 눈을 찌르게 되는 안검내반증을 유발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답니다. 그로인해 각막염이나 결막염 등의 눈질병도 자주 발생하기에 심한 경우에는 상꺼풀 수술을 시켜주는 게 좋습니다. 

 

 

 

또 하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샤페이에게 치명적인 유전병이 있습니다. 샤페이의 20% 이상이 겪게 되는 샤페이 열병이 있는데요 이는 열이 나면서 발목 등의 관절이 부어오르며 이를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신부전이나 간부전 등으로 사망하게 되는 무서운 병이에요.

 

 

대다수의  단두종 강아지 품종들은 호흡이 어려운 편입니다. 날씨가 더워지게 되면 호흡이 빨라지고 필요한 산소를 제대로 호흡하지 못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샤페이는 입이 극단적으로 짧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짧은 편에 속하여 열에 취약하기에 더운 여름철 무리한 산책을 피하고 실내온도 조절도 필수로 해주셔야 합니다. 

 

 

 

샤페이는 대부분의 중국개들과 같이 고집이 강한 편에 속합니다. 일반 소형견들과는 다르게 덩치도 커서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에 대해서 굽히지 않아요. 으르렁 거리거나 공격성을 보이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 주의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생후 6개월 이전부터 보호자분이 리더십을 잘 갖추고 규칙을 정해 잘 따를 수 있도록 서열관계를 명확히 형성하고 길러주셔야 한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hVBCt2kC20

 

 

 

결코 초보 견주가 키우기에는 쉬운 견종이 아닙니다. 많은 준비와 훈련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입양을 계획하시는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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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는 여전히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입니다. 19세기 당시 티소는 주류가 아닌 데다 상업화가였기에 미술사적으로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거든요. 인상주의 시기에 굉장히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요. 전문가들은 그를 '모호한 근대성'이란 단어로 그의 작품들을 규정짓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아카데미 화가로 분류하기에는 그가 다루었던 소재들이 지극히 동시대적이었습니다. 인상주의 혹은 모던 화가로 분류하기에  그의  스타일은  너무나 고전 적었거든요. 전통적인 초상화나 역사화에나 어울릴법한 테크닉으로 그가 그린 대상은 일상적인 사람들의 취미생활, 신흥 브르주아들의 일상, 그리고 집안의 여인 초상 등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시 파리에서는 보들레르의 '모던한 삶의 화가'에 걸맞은 마네와 드가식의 스타일이 예술계의 대세로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파리의 급변하는 삶의 속도를 포착하기 위해서 말이죠. 현대적인 마네와 드가의 방식은 동료 예술가들의 지침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행 속에서 티소의 그림은 고루하고 보수적인 느낌을 주기 충분하죠. 그럼에도 그의 완벽한 회화적 테크닉만은 모두의 감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Seaside>/www.clevelandart.org

 

 

1863년 여성의 초상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면서 '스타화가'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센스 도 한 몫했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각종 장신구와 옷주름까지 섬세하고 스타일리시 하게 표현했거든요. 그래서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 중 한 명이었답니다. 작품 속 배경은 바닷가 근처 같아요.  얼굴, 손목 다 가렸지만 편안하고 우아한 모습이 참 매력적인 그림입니다. 리본과 프릴의 디테일이 살아있어  바람이 스치면 출렁이는 모습 또한 아름다울 것 같고요. 

 

 

<Young Ladies Looking at Japanest objects>,1869/wikipedia

 

 

엄마와 딸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여성 두 사람이 모형 배같은 물건을 신기한 듯 골똘히 바라보고 있어요. 바닥에 깔린 카펫을 제외하고 주변 환경은 동양적인 , 특히 일본의 느낌이 물씬  베어있고요. '이곳이 프랑스 파리 맞나?'싶습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집니다. 일본여성의 기모노, 게이샤문화, 우키요에 판화 등 마네, 모네, 휘슬러 등의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 선풍적인 유행이었지요. 주머니 사정 가벼웠 던 고흐도 우키요에 판화를 소유할 수 있었을 정도로 인기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을 그리고 싶어도 너무 멀다 보니 모델을 구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서양식 얼굴, 금발 머리 모델들에게 아쉬운 대로 기모노를 입혀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제임스 티소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요. 당시 파리에 외국 물건을 취급하던 상점 같습니다. 해외로 식민지를 넓히고 있을 때라 동양의 독특한 물건들이 많이 수입되고 전시되었죠. 우리가 수입 물품 상점에서 느끼던 감탄과 비슷한 느낌 아닐까 싶습니다. 

 

 

낭트/ 해시넷위키

 

 

제임스 티소는 1836년 10월 15일 프랑스 낭트 출생입니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공부를 마쳤고요. 티소는 1859년 살롱에서 전통주의 작풍의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요. 드가가 그를 그릴 정도로 꽤 친한 사이였지만 둘이 크게 싸운 후 드가가 요청한 인상파 전시회 참가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1871년 보불 전쟁이 끝나고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파리코뮌 정권이 들어 서자 바로 정부군의 역습으로 정권이 무너집니다. 3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합니다. 파리 코뮌의 지원자로 의심을 받은 제임스 티소 (James Tissot/1836-1902)는  체포를 피해 영국 런던행 배에 몸을 싣습니다. 파리와의 작별이었죠.

 

 

런던으로 이주한 티소는 화가로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빅토리아식 귀족사회에 안정적으로 흡수됩니다. 엄청난 초상화를 의뢰받았고, 실제로 친구였던 드가가 그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냈을 정도로 말입니다.  어린 시절 보았던 낭트의 항구의 풍경은 템즈강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이어집니다. 

 

 

강에 정박된 화물선들, 산업사회를 상징하는 뿌연 매연, 그 강가에서 뱃놀이를 하는 잘 차려입은 군인과 여인들, 변화하는 런던 사회와 그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전통이 프랑스에서 온 외국인의 눈에 그저 경이로울 뿐입니다. 아마 제임스 티소라는 화가의 이름은 낯이 설지만 어디서 본듯한  그림들이 보이실 겁니다. 티소의 작품은 우아한 몸짓과 옷차림으로 사교를 즐기는 사람들의 한가한 모습, 반복적인 주제들 안에서 이루어진 구도의 변주들, 그리고 유연한 공간 구성이 돋보입니다.

 

 

 

<선상 무도회 The Ball on Shipboard>,1874/wikipedia

 

 

<선상 무도회 The Ball on Shipboard/1874>

1874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선상 무도회' 작품입니다. 아랫 층에서 선상 무도회가 진행되는 동안 갑판 위의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죠. 화려한 야외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성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작품은 갑판 위 남녀의 모습을 담고 있어요. 신사는 적고 귀부인, 숙녀들만 잔뜩 갑판 위에 모여 있습니다. 아마도 갑판 아래에서 펼쳐지는 무도회에 참석했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아니면 댄스 파트너를 찾기 위해 갑판 위로 올라와 있는 듯 보입니다. 마땅한 남성 파트너가 잘 보이지 않아 그런지 몇몇 여인들은 벌써 선상 무도회가 싫증이 난 듯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두 숙녀 옆에 노신사가 난간에 기대어 있지만, 두 숙녀는 1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 남성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있나 봐요. 몸이 앞쪽으로 기울인 채 관심 있게 듣는 걸 보면 말입니다. 걸려 있는 만국기가 한창 뻗어 나가는 영국의 국력을 넌지시 얘기해 주는 것 같습니다. 

 

 

 

<쉿 Hush!>,1875/wikipedia

 

 

 

<쉿 Hush/1875>

이제 막 연주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도대체 분위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화면 가운데 연주자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고요함이 있는데 왼쪽은 소란스럽습니다. 이국적인 복장을 한 사람도 눈에 띄는 것을 보면 그래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 같습니다. 왼쪽의 여인은 연주자의 자세와 관계없이 아예 몸을 돌리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부채를 펼쳐든 모습도 퍽 인상적이고요. 계단까지 잘 차려진 젠틀맨과 부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면 권력이나 부가 막강한 사람 같습니다. 저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기도 불편할 듯합니다. 저런 스타일의 옷차림이 당시 유행이었나 봐요. 그나저나 연주는 언제 시작하나. 빈 좌석 고급 의자가 주인을 대신해 위엄을 드러내 보입니다. 

 

 

 

 

<템즈강 The Thames,1876/cybermusee.com

 

<템즈강 The Thames/1876>

템즈강은 그가 영국에서 사는 동안 즐겨 찾았던 그의 주제였습니다. 템즈강을 따라 가는 보트 여행입니다. 강 옆에 정박 중인 배에서는 거대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하늘은 온통 스모그로 덮여 있습니다. 강물도 회색입니다. 짐을 올리고 내리는 인부들의 고함소리도 배가 강물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고 있습니다.

 

 

 

'유럽의 할머니'로 불리우며 슬하의 9자녀를 유럽 각지에 시집 장가 보냈 던 빅토리아 여왕시대였습니다. 1770년 증기기관의 개량으로 역마차나 배 대신 철도로 물류를 대량 공급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산업혁명으로 남아도는 물류는 아시아로, 필요한 원료들은 아프리카에서 충당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죠. 1851년 빅토리아의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의 주도로 만국 박람회가 영국에서 열립니다. 영국 산업혁명의 결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거죠.  그림 속 파이프를 물고 여유로운 자세를 취한 남성의 모습에서 무역, 정치, 경제분야에 영국의 부유함과 당당함이 묻어 나옵니다. 

 

 

<휴일 Holyday>,1876/wikipedia

 

 

 

몇 년 전 깃발 여행으로 유럽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에 끼워 맞추다 보니 막상 영국에 도착했을 때 멍 때리는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림 속 장면처럼 돗자리 들고 점심이나 와인 혹은 책을 들고 공원 주변에 잠시 앉았다 오고 싶었거든요. 티소의 그림으로 대신해 봅니다.  <휴일 Holyday,1876> 템즈강 시리즈와 더불어 공원의 피크닉도 이 시기의 티소가 반복해서 그린 소재였습니다. 휴일 공원에서 한가로이 티타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물의 내면보다는 눈으로 보이는 시각적인 풍경에 더 주목하고 있었던 티소의 관심사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그의 그림에서 정치색이나 주제의식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그의 그림은 정확히 보들레르의 '덧없는 순간'을 표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제 눈에 이 장면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찰나의 행복을 즐기고 싶은 티소의 마음은 아니었을 까 싶은데 말이죠. 휴일의 느긋하고 나른한 느낌이 그림에 가득합니다.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공원에서 소풍을 즐기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모자 스타일도 참 다양합니다. 

 

 

 

영국에 도착한 티소는  자크 조셉 티소라는 프랑스 이름을 제임스 티소라는 영국식 이름으로 바꿉니다.영국 사람들 기호에 맞는 초상화를 그려 곧바로 인기를 얻고요. 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꾸게 만드는 이혼녀 캐틀린 뉴튼을 만나게 됩니다. 캐틀린은 집안의 결정에 따라 17세가 되던 해, 인도에 있는 군의관과 결혼을 하기 위해 인도로 가던 중, 배 안에서 만난 팰리서 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인도에 도착한 캐틀린은 뉴튼과 결혼식을 올리지만, 결혼식 직후 팰리서와의 관계에 대해 남편에게 고백해 버립니다. 남편에게 돌아온 답은 즉시 이혼이었고 그녀는 다시 영국행 배에 올라야 했습니다. 영국에 도착한 후 팰리서의 아이를 낳았고 그 무렵 티소를 만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10월 Ocotober>,1877/ Daum 카페/시향미술관

 

 

<10월 Ocotober/1877>치마를 살짝 걷고 숲으로 들어가는 여인 뒤로, 햇빛으로 가득한 노란 단풍잎들이 모두 조명이 되어 줍니다. 덕분에 여인의 얼굴 선이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옆구리에 책을 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무 밑에 앉아 편하게 책이라도 볼 요량인 것 같습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봐서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티소의 유일한 여인이었던 캐틀린 뉴튼 입니다. 티소의 그림 속의 가장 많은 모델이었고 신비스러운 매력을 가졌다는 여인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림 속 포즈는 그녀가 아니어도 근사하게 나오는 포즈라 한번쯤 시도해 보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그림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기록물로서의 역할입니다.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 그림만큼 좋은 기록 매체는 많지 않았지요. 중세의 풍속화를 통해서 우리가 당시 삶의 양태를 짐작할 수 있는 것도 그림 덕분입니다. 의상의 변천을 연구하는 복식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화가가 제임스 티소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의 의상은 복식사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Bustle/wikipedia

 

 

<The Ball>,1878/wikipedia

 

 

<무도회/1878>오르세 미술관 소장 

티소의 '무도회'는 파티에 참석하는 여자의 야망과 그것을 적당히 즐기고 있는 남자를 날카롭게 비평한 작품입니다. 야망을 가진 자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죠. 이 작품에서 노란 드레스에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시선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화면 가득한 화려한 노란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 주인공입니다. 젊은 여인은 백발의 노신사와 팔짱을 끼고 있습니다. 그녀의 드레스 밑자락은 화려한 레이스의 물결을 이루고 있고 검은 바탕에 있는 물고기는 레이스를 마치 거슬러 올라갈 것 같습니다. 그녀는 노란 부채를 들고 팔은 노신사에게 시선은 다른 사람에게 두고 있습니다. 티소 그림의 특징이 여인은 항상 시선이 밖을 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말이죠. 두 사람 뒤에는 무도회장과 거실 입구를 가르는 붉은색의 커튼이 쳐져 있고요. 커튼 앞에 있는 신사와 그 옆의 젊은 여인은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습니다. 무도회장의 남자들은 거의 노년의 신사들이고 무도회에 참석한 여인들은 한결같이 젊습니다. 이 작품에서 남자와 여자의 나이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노란 드레스의 여인은 그와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 캐틀린 뉴턴입니다. 그녀가 폐결핵으로 죽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6년동안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혼 경력이 있는 그녀와의 사랑은 당시 인기 화가였던 그에게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게 됩니다.  한 때 인기 있던 초상화가 티소가 행실 좋지 못한 유부녀와 함께 어울린다는 말은 그의 밥줄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말과 같았거든요. 당시 빅토리아 시대는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가정 생활을 중시했어요. 여왕 부부가 몸소 실천하며 그렇게 살았거든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티소가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다는 얘기죠. 실제로 여기저기 수군거림과 보이지 않는 질시 때문에 왕따가 된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소는 그녀가 죽은 후에도 그녀를 모델로 작품을 제작하는 뚝심을 보이지요.

 

 

 

 

<야망을 품은 여인 A Woman of Ambition,1885/wikipedia

 

 

  드레스 색상만 바꾼 <야망을 품은 여인 A Woman of Ambition/1885>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 역시 캐슬린을 모델로 했습니다.  한 눈에도 범상치 않은 화려한 의상의 여인이 남자의 팔을 끼고 입장하고 있습니다. 드레스와 그에 어울리는 부채 그리고 당당한 눈빛을 가진 여인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오른쪽 남자는 누군가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습니다. 턱을 괴고 쳐다보는 중년 남성의 시선도 곱지는 않네요. 그러나 여인은 주위의 수군거림에 전혀 신경 안 쓰는 표정입니다. 그 정도 비웃음에 머뭇거린다면 그것은 야심이 아니겠죠.

 

 

 

 

<정원벤치 The Garden Bench>,1882/세계일보

 

 

 

<정원 벤치 The Garden Bench/1882>

캐더린에 대한 티소의 사랑의 정도는 시간과 공간을 건너 뛰어 캐더린이 죽은 후에도 계속됩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어떤 여자와도 로맨틱한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정원의 벤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캐더린과 그녀의 아이들입니다. 넌지시 아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엄마 캐틀린의 눈길이 다정합니다.엄마 옆에 딱 달라 붙은 딸 아이의 모습도 사랑스럽습니다. 놀러 온 조카의 모습도 보이고요.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과 여인의 드레스 색상도  세련되고 우아합니다.

 

 

 

티소의 인물 묘사도 뛰어나지만 의상과 소품에 대한 묘사도 탁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티소는 동거에 들어 간 캐더린,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시간이 그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1882년 캐더린이 28세 그리고 티소가 46세 되던 해, 그녀는 폐결핵 말기를 비관하여 아편 과다 복용으로 자살하고 맙니다. 티소의 행복한 시간은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이 작품은 그녀가 죽은 후 티소의 기억을 빌어 그려진 그림이고 그가 가장 아꼈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죽음이후 10여 년간의 영국 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옵니다. 파리로 돌아온 티소는 3년 정도 파리의 생활을 화폭에 옮깁니다. 여러 사회 계층 여성들과 그 주변환경을 묘사한 초상화를 성공적으로 그려내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6vgmHxd1UZA

 

 

 

 

<L.L.의 초상>, /Artlecture Contemporary Art Platform

 

 

<L.L. 의 초상/오르세미술관>

1864년 티소는 살롱에서 아래의 초상화를 선보입니다.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동시대 신흥 부르주아 집안의 소녀. 흰색, 빨간색, 검은색이라는 파격적인 색상대비와 옷 장식, 화려한 벽지의 패턴과 의자의 디자인까지. 패션과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고개를 쭉 빼고 가까이 가 보고 싶은 그림일 겁니다. 이미 그는 20대 후반부터 섬세한 데생과  대조적인 색상의 사용, 벽지와 사물에서 볼 수 있는 치밀한 관찰과 완벽한 마무리라는 스타일을 완성했답니다. 당대 유행하던 복식과 취미, 집안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재현해 내 보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이런 질감에 대한 섬세한 표현의 시작은 모자가게와 직물상을 하던 부모에게서 자란 영향이었을 겁니다. 그의 이런 스타일은  부를 쌓기 시작한 부르주아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귀족들이 삶의 양식을 답습하고 싶은 새로운 지배계급의 취미에 재빠르게 대응하며 그를 성공가도에 올려놓습니다. 

 

 

 

캐틀린의 죽음 이후 티소는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신비주의 와 심령술에 잠시 빠진 적이 있습니다. 영매를 불러 죽은 그녀를 만나고 싶어서 말입니다. 이정도면 정말 사랑한 것 만나봐요. 보수적인 카톨릭 전통에서 자란 그는 자신의 신앙에 이 신비주의를 결합시키기 시작합니다.  1888년부터 티소는 종교적 계시를 경험하게 되고 죽을 때까지 성서에서 주제를 따온 작품들에 전념하며,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을 여러 번  방문하며 얻은 견문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넓혀갑니다. 이 기독교 관련 작품들은 프랑스어와 영어로 출간해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듭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긴 구약과 신약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수채화가 700점 남겨져 있습니다.

 

 

 

<<Baptism of Jesus>,1836-1902/Brooklyn Museum

 

 

<What our Savior saw from the Cross>,1886-1894/wikipedia

 

 

 

<우리 구세주가 십자가에서 내려다 본 것은  What our Savior saw from the Cross/1886-1894>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내려다 본 풍경입니다. 예수님 발아래로 성모 마리아와 막달레나 마리아가 있습니다. 신 포도주를 적셔 주었던 장대도 보입니다. 소리를 지르고 있는 유대의 제사장들도 있고 걱정스러운 듯이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흐의 박물관에 걸려 있던 장 레옹 제롬의 <골고다>, 루벤스의 <십자가의 책형>이 극적인 장면을 묘사해 보는 이들을 충격에 빠트리지요. 대부분의 화가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화면에 묘사했기 때문에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안쓰럽고 , 안타깝고, 그리고 무서운 느낌을 갖게 됩니다.  뼛속까지 죄인의 마음이 되지요. 그런데 티소의  이 작품은 시점이 달라서 인지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몇몇 여인을 제외하면 모두가 방관자의 자세로 올려다 보고 있습니다. 육신의 고통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일과 자신은 관계가 없다는 듯 올려다볼 뿐입니다.  이 상화은 마치 당연한 결과였다는 듯이 말이죠.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눈 빛에서 인간 예수는 죽어가면서도 고통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제임스 티소는 프랑스 화가이지만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너무 영국적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대중들로부터는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의 작품들은 고가로 팔렸습니다 . 한편으로는 미술사보다는 옷의 역사를 다루는 복식사에서 그의 작품을 더 많이 인용한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1960년대 이후 영화, 디자인, 패션사가 연구되면서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한 화가이고요. 상업적이라는 한계 때문에 여전히 주류 미술사 시각에서는 거장의 반열에 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인상파였던 르누아르가 도시 여성을 다루는 소박한 미와 비교될 정도로 인공적이고 마네킹 같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점원이든 귀부인이든 철저히 상품화된 여성성의 표상은 마치 여성들이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이 남성의 유혹인 것처럼 표현되어 불편한 면도 있고요. 하지만 그 덕분에 당시 여성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 누군가의 호기심을 충분히 채워줬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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